신경의 형성 - 신경은 어떻게 신경이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프랜시스 영 지음, 강성윤.민경찬 옮김 / 비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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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9세기에는 성서의 '역사성'historicity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역사적 종교'라 선언하고 이에 걸맞게 신학을 하려 노력했지요. 그들은 '사실'에 집착했습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해석'과 별개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역사는 이야기의 한 형태고 모든 이야기는 선택 과정을 거쳐 형성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역사 기술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며, 해석을 통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달리 말해 과거의 어떤 사실들을 이야기의 형태로 전한다는 곧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의 고유한 관심사와 문제의식이 영향을 미치지요. 과거에 대해 논하는 활동은 순전히 개인이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이 활동은 공동체의 활동입니다. 역사는 사회의 구성물이며 보통 정체성의 형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역사 이야기든 최종 결정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18-9)


1 신경들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세계 주요 종교 중 신경Creeds과 교리를 중시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정통'orthodoxy, 즉 올바른 믿음이 있고 이것을 벗어나면 '이단'heresy으로 간주한다는 관념이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이론상 그리스도교는 동질적homogeneous이며, 그 동질성은 '정통 신앙'에 근거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일치운동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그리스도교 집단은 여전히 자신이 전하는 진리가 곧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집단이 이를 공유한다는 점은 부정하면서 말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지요.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종종 학자들이 말하듯 유대 신앙의 핵심은 '정통'이 아닌 '정행'orthopraxy, 즉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올바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따라 정통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공식화했지요."(27-9)


"정통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태도에서 유래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서 기록을 살펴보면 누구도 이후 등장한 교회의 주교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어떤 교리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누구도 논쟁자나 의심하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정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고 결정하기까지 일어난 교리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교리와 관련된 질문, 혹은 도전을 받을 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주교에게 받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하고 신경, 혹은 신경 형식의 요약문을 인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에 세례와 입교와 관련된 일정한 훈련 과정이 있었음을 알려 주지요."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까지 이 신경을 외워야 했습니다." "신경은 처음부터 '정통의 시금석'은 아니었고, 지역 교회들을 담당하는 주교가 새롭게 그리스도교인이 된 이들에게 가르친 신앙의 핵심 전승이었습니다."(29-32)


"이 신경들을 비교해 보면 여러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신경도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지요. 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연관이 있다고 암시하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은 쓰지 않으며 '하나 안에 셋'이라는 신론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경들은 교리 체계가 아닙니다. 다양한 신경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경들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중요합니다. 이 신경들을 통해 당시 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바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하나이더라도 이를 전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기교는 물론이고, 어떤 부분을 중시하고 어떤 소재를 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띨 수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신경의 근본적인 속성은 바뀌지 않습니다."(33)


# 초기 신앙 요약들의 특징

1. 2세기 후반, 3세기 초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쓴 신경은 삼위일체의 형태를 갖춘 확정된 신경이 아니었다.

2. 그 전부가 성서에서 유래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내용에는 성서에 바탕을 둔 정형화된 표현들을 곧잘 사용했다.

3. 그들은 이단이라고 불리던 '거짓 교사'와 논쟁할 때 이 신앙의 요약을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했다.

4. 그들은 성서 내용이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 이 신앙의 요약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간주했다.


2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신경의 첫 번째 조항에 명시된 교리, 진정한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특정 교리는 매우 고단한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가정, 즉 참된 신은 하느님 한 분이며 우리는 그분에게만 배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사나 악마, 여타 초자연적인 존재를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보면 혼돈에서 질서가 생길 때 하느님은 '무언가'를 가지고 창조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유대교 안에서 종말론 성향이 강한 집단들은 이 세계가 하느님의 적, 즉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도 사탄을 〈이 세상의 통치자〉(요한 12:31)로 묘사하지요.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유일한 분이시며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주권자라는 생각은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최초로 교회 안에서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영지주의와의 투쟁이지요."(58-9)


# 영지주의 집단들의 공통점

1. 창조신 데미우르고스the Demiurge와 궁극자인 '아버지'의 구별

2. 세계의 기원을 우주 이전의 '타락'으로 설명하고 물질 세계를 우연, 혹은 죄의 결과로 보는 관점

3. 영적 엘리트들은 물질세계에 갇힌 불꽃이며, 비밀 '지식'을 알게 되면 해방되어 신과 재결합할 수 있다는 가르침


"역설적으로 영지주의의 이러한 특징들은 실제로 이 운동이 유대-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어난 운동임을 암시합니다. 영지주의는 한 분이신 궁극적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유대 전통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유대 종말론적 관념에서 악마가 창조자 혹은 '이 세상의 신'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어떤 학자들은 메시아 왕국을 세우기 위해 로마에 맞서 일어난 반란이 실패하자 이에 대한 실망이 비관주의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그 결과 희망은 오로지 하늘에 있고 지상에는 절망뿐이라는 관점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때 예언은 의미를 잃고 구원은 이 지상에서 탈출하는 것이 되지요. 유대 묵시 문헌이 보여 주는 상징 언어와 영지주의 문헌들이 보여 주는 고도의 상징적이고 우의적인 언어 사이의 흥미로운 연관성은 이러한 설명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64-5)


# 유대 묵시 문헌과 영지주의 문헌의 연관성 : 공통 비유와 수비학數秘學, 천상으로의 여정 및 계시와 같은 유사한 내용 얼개,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의 대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에 있었던 실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성육신 역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수난은 아예 일어날 수 없게 되지요. 설령 '예수'가 실제로 있었다 해도 그는 부활 후 특정 제자들에게 영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는 초자연적 그리스도가 쓴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는 수난 전에 사라졌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키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가 마주했던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가현론docetism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부활은 당연히 몸의 부활이 아니게 됩니다. 육체 혹은 몸은 타락한 물질세계의 일부로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신자들은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찬은 지상의 물질들을 가지고 거행함으로써 물질세계와 피조물의 선함을 확언하기 때문입니다."(66-7)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일관성 있는 전체로 다루는 최초의 '조직신학'을 창조했습니다. 앞선 사상가들이 일궈 놓은 관념들과 성서를 활용해 그는 '총괄갱신 이론'theory of recapitulation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이야기했습니다. 참되며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세계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낙원에 피조물 중 으뜸인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이처럼 순진하던 아담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했고 그분에게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선한 피조 세계가 오염되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선하지만 말이지요.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인간이었고 아담이 한 일을 되풀이하되 그 과정을 뒤집었습니다. 아담이 실패했던 곳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시작되었고 결국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찬에서 나오는 빵과 포도주는 물질이지만 영적인 것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이레네우스는 말했습니다."(71-2)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는 플라톤주의 그리스도교인과 논쟁을 벌이며, 하느님이 자신으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셨다거나, 영원한 질료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견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은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테르툴리아누스는 다른 선택지들을 거부했을까요? 아마도 영지주의와의 투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주의에서 영원한 질료는 다루기 힘든 수단이고 영지주의자들에게 질료는 가장 커다란 적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존재하거나 심지어 하느님과 대비되는 제2의 원리가 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지요.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이러한 이원론은 한 분 하느님이 만물의 유일한 원리, 시작, 기원이라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점점 더 하느님의 유일성과 무한한 초월성을 강조했고 그만큼 하느님의 존재와 창조성을 제한하는 질료의 자리는 점점 더 사라져갔습니다."(84-5)


"4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류에게 당신의 형상과 신적 로고스인 자신의 생명과 이성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함으로써 로고스를 상실했고 그 결과 자신이 나왔던 무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성으로서 로고스의 상실은 무지를 뜻했고 생명으로서 로고스의 상실은 죽음을 뜻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고 몰락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필멸성Motality은 죄의 끔찍한 결과였습니다. 이 곤경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구원은 성육신을 통해 로고스를 인간 본성에 다시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육신은 재창조라 할 수 있습니다. 개별 인간들은 아담에 참여함으로써 필멸할 운명이었지만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로고스를 받은 새로운 인간인 '하느님의 아들'과 한 몸을 이룸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로 입양되어 불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88-9)


"그리하여 하느님이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다는 '부정의 길'이 등장했으며 창조에 대한 관상은 영성의 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부정의 길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시고, 온전히 표현할 수 없으며, 무형이시며, 불변하시고, 나뉘지 않으시며, 고난받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불가해하시고, 피조 세계의 일부가 아닌 전적 타자이시며, 만물 중 하나가 아니라 만물의 근원이심을 강조합니다. 이 방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자연 숭배에 가까운 이교들, 말하자면 대중 종교와 신화의 다신론, 우상 숭배, 엉성한 신인동형론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교 역사는 영지주의 성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영과 육체의 싸움은 계속되었지요. 하지만 영지주의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교리는 이 싸움 가운데 육이 영에게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교회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을 파문했습니다."(91-2)


3 한 분 하느님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스토아 학파는 합리적인 담화를 분석하면서 한 사람의 정신 안에 있는 로고스, 즉 이성과 입 밖으로 나오는 로고스, 즉 말을 구별했습니다." "이 영향 아래에서 유스티누스는 로고스, 즉 말씀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셧으며 그분 역시 참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로고스는 하느님의 독생자이자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쓰셨던 도구,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만물을 빚어내고 존재하는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그리고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혜였습니다. 예언자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참된 진리의 스승들에게 진리의 영감을 준 이도 바로 이 말씀이었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의 진리를 온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드러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로고스 신학Logos-theology은 예수가 어떻게 이교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자녀들과는 다른 하느님의 독특한 아들인지, 한 분 하느님과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별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99-101)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이유는 그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히브리 경전의 예언들에서 발전한 다양한 희망과 기대를 예수가 이루었다고 보았고 그에게 다양한 호칭을 붙였습니다. 이는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서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머지않아 히브리 경전을 들여다보면서 '증거들'을 수집하는 과정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강조하는 예언은 하느님의 종이 겪을 고통과 죽음을 암시하는 구절들에 비추어 수정되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이 모든 것을 물려받았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의 전체 경전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 기여했습니다." "로고스 신학은 이 모든 해석을 엮어 독특한 계시자의 선재와 신성을 설명하는 일관된 이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교리 형성 과정에 점점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지요."(102-3)


"하지만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는 로고스 신학의 접근 방식에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몇몇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영원의 차원에서 말씀과 성령을 갖고 계신 한 분 하느님이 창조와 섭리를 위해 말씀을 낳고 성령을 내쉬면서 삼위일체가 '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종종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arianism라고 불리지요('살림'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방식, 구체적으로는 그분이 섭리를 바탕으로 세계와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활동, 특히 성육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훗날 이는 부적절한 이야기임이 밝혀졌고 하느님은 영원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것이 교리로 확립되기까지는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더 세세히 규정했고 열린 탐구를 위한 여백은 점점 더 사라졌습니다."(104-5)


"완고한 유일신론을 내세우는 이들을 향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은 이들이 사실상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변화할 수 있으며 고난받을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다양한 양태mode로 나타난다고, 성육신하고 고난받고 죽은 이는 하느님 한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맞서 테르툴리아누스는 『프락세아스 논박』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초월자인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로고스를 통해서만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로고스는 초월자를 매개할 수 있는 파생물,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성부라면, 그리스도는 누구를 향해 기도했느냐고, 세계를 주관하는 그분이 없다면 어떻게 세계가 계속 운행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107-8)


"당대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도 어떻게 초월적이고 나뉠 수 없는 일자가 다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만물의 궁극적인 바탕인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답은 일자와 다자 사이에 일자의 일자성과 다자의 다중성을 지닌 중재자, 일자-다자One-Many라는 통합체가 있다는 것이지요. 암묵적으로 오리게네스는 보이지 않고, 명명할 수 없으며, 만질 수 없고, 불변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보면 살아남을 수 없는 유대 경전의 하느님과 플라톤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궁극의 일자를 동일시한 것 같습니다. 이 하느님은 초월적이지만 만물의 아버지이자 원천이며 동시에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영원히 자기 곁에 자신의 피조물, 다양한 지적 존재들, 이성을 지니고 있고 영적인 존재들logikoi, 천사들과 영혼들, 다자를 두셨습니다. 이때 한 분 하느님과 수많은 피조물을 잇는 존재가 바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단일성과 피조물의 다중성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114-5)


"유일신론자였던 아리우스는 한 분 하느님이 홀로 태어나지 않으시고, 홀로 영원하시며 시작도 없으시고 시간 이전에 독생자를 낳으시고 그를 통해 시간과 우주를 만드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독생자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른, 하느님의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아리우스는 고백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아들은 최초의 피조물이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고 말아지요. 물론 그는 '신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은 아니라고 아리우스는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세 위격, 세 존재, 즉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있으나 단자Monad는 오직 아버지뿐이며, 그분만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머지는 아버지에게서 파생되었으며 발생하지 않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리우스는 단자가 사벨리우스가 제안했듯 '아들-아버지'로 나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인, 아버지의 '일부'일 수도 없다고 생각했지요."(124-5)


"반反아리우스주의 글들을 저술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종속론이 동방 교회에서 선호하는 위계를 무너뜨림을 입증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주장에서 로고스는 더는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원리상 은총을 통해서가 아니면, 신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고스는 '본질상' 하느님과 하나가 아니기에 하느님의 내적 이성인 로고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됩니다. 이 창조된 로고스는 참된 하느님의 지혜가 아니며 그 지혜의 모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고 하느님을 진실로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채택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는 그 자체로 신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 교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전체 위계를 붕괴시킵니다. 이때 로고스는 하느님이거나 피조물일 뿐, 둘 다일 수는 없다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126-7)


4 성령과 거룩한 공교회


"아리우스 논쟁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상대가 구원을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말씀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은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이 두 투쟁을 통해 동방 교회가 사상을 가다듬는 동안 서방 교회는 상대적으로 방관했지요.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에는 이미 삼위일체론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서방 교회는 '단일성 안의 삼중성'Trinity-in-Unity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계를 중시하는 동방 교회로 인해 문제는 복잡해졌지요. 어떤 의미에서 로고스 신학은 성령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창조도, 계시도 하느님 말씀의 활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로고스 신학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성령의 역할도 말씀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셋은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며 초기 교회는 전례 시 신앙고백을 할 때 셋을 언급했습니다."(132)


"정경이 형성되면서, 대다수 교회는 정경에 담긴 영감 받은 말씀 외에는 어떠한 말씀도 추가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성령이 활동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는 사람만이 말씀을 올바로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세례 시 세례 받는 이에게 있던 거짓 영들은 쫓겨나고 성령이 임한다고 믿었습니다. 성령은 교회, 교회 구성원들, 성사, 사제, 선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들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했지요." "2세기 후반 '삼위'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였고 3세기 초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라틴어 '트리니타스', 즉 삼위일체로 번역했습니다. 이레네우스처럼 그는 말씀과 성령을 하느님에게서 나온 이성과 지혜로 여겼습니다. 즉 말씀과 성령은 하느님에게서 파생된 존재로 세계, 특히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활동합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에 중재자 역할을 부여하는 경향은 위계를 중시하는 동방 교회의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138-9)


"성령 반대파는 성서 본문을 둘러싼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성서 본문을 은유로 설명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그들을 은유론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성령 반대파는 성령이 하느님의 영이라면 그는 또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거나 '아버지의 손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자가 독생자이고 형제가 없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견해에 어긋나는 것이었지요. 이에 맞서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따라서 성령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성화聖化와 신화神化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우리의 신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지요. 아리우스파와 논쟁할 때처럼 이 주장은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논쟁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삼위 모두가 한 분 하느님이라는 단호한 진술로 나아갔습니다."(140-1)


"머지않아 교회는 성령도 성자, 성부와 동일본질이며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성부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출생했다'는 표현 대신 (요한 복음서 15장 27절에 근거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발현한다)'는 표현을 썼지요." "'동일본질'homoousios은 단일성을 뜻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람들은 당연히 '본질'(우시아)ousia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셋을 한 위격(히포스타시스)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동방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사벨리우스주의를 뜻했습니다. 동방에서 '위격'이라는 말은 개별적인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본질'과 '위격'이라는 말이 동방에서는 같은 말로 쓰인다는 데 있었습니다." "장님 디디무스는 '실체'substance에 해당되는 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한 본질에 세 위격'이라는 정식이 나왔지요."(142-3)


"카파도키아 교부들인 바실리우스와 그레고리우스는 삼위 하느님이 존재 방식에서 '태어나지 않으신 분', '태어나신 분', '말하시는 분'으로 구별되거나 '부성'父性, paternity, '아들됨'sonship, '성화하는 힘'sanctifying power이라는 관계로 구별된다고, 그러나 실체, 활동, 의지에서 하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은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자 성화자이며, 각 활동에서 하나이며, 한 위격 홀로 고유한 활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언제나 세 위격이자 한 신성으로 동시에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이레네우스, 트레툴리아누스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대조되는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언제나 삼위일체셨으며, '경륜'economy을 위해 비로소 삼위일체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진리의 원리이므로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삼위일체로서 드러나셨다면 그 계시는 그분의 영원한 실재와 일치해야 합니다."(144)


"테르툴리아누스 이래 서방 교회는 삼위일체를 가리킬 때 '세 위격 안에 한 분 하느님, 혹은 '세 위격 안에 한 실체'라는 표현을 썼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표현의 난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체' 대신 '본질'essence이라는 말을 더 선호했고, '위격'이라는 말은 대체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썼습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일종의 집단으로 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각자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하고 완전하지만 세 무한자, 세 영원자, 세 전능자, 세 완전자 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의 계획, 활동, 의지는 하나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을 유비로 드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인간 정신을 이루는 기억과 이해, 의지의 '내적' 삼위일체, 또는 정신 그 자체, 정신에 대한 앎, 그리고 정신에 대한 사랑의 삼위일체처럼 말이지요."(146-7)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인격)이면서 정신보다 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각 활동을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지각 활동에서 지각의 주체, 지각 대상, 그리고 지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구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이러한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기에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옵니다." "세 위격을 구별해 주는 '관계'는 다른 개체 간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위격들은 서로에게 내재하며 모든 유비는 이를 미약하게나마 감지하도록 돕는 흐릿한 거울과 같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아버지를 신성의 '원천'으로 보고 여기서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성령의 '기원'으로 보았습니다."(147-8)


5 성육신하는 하느님의 아들


"아타나시우스의 저술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약함, 혹은 무지를 암시하는 복음서 구절들을 바탕으로 로고스의 '피조성'creatureliness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 역시 로고스가 선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이고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며,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었지만 말이지요. 성육신과 관련해 그는 예수라는 '육체' 안에 있는 로고스가 참 '인격'person이라고 전제했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었다는 옛 생각을 활용하면 아리우스의 주장이 제기하는 몇몇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연약함은 로고스의 오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영혼이 없는 몸만을 취하〉셨다는 아리우스파의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만 인간으로 오시거나 혹은 인간을 입으신 척한 게 아니라 인간 전부를 취하셨습니다.〉"(172-4)


"영혼에 관한 문제는, 에우스타티우스 및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킨 사상에 대한 아폴리나리스의 반응으로 인해 더 뜨거운 논쟁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아폴리나리스는 저 사상을 아타나시우스의 반反아리우스파 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계시자가 '영감을 받은 인간'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느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는 그는 모든 정신은 '자기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격 안에 두 정신이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로고스와 인간의 영혼, 혹은 인간의 정신은 불가피하게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지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혹과 연약함에도 실패하지 않는 '불변하는 정신'이라고 아폴리나리스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맥락에서 〈인간이 셋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님께서 인간이시라면, 그분은 영spirit, 혼(영혼)soul, 몸 이렇게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지요. 물론 주님은 〈천상의 인간이고 살아있는 영〉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176)


"아폴리나리스는 중재meditation라는 오래된 관념을 둘 사이의 '중간'mean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말과 당나귀의 중간은 노새,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은 회색, 겨울과 여름의 중간은 봄이라는 식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간이 그리스도라 말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희석된 신성과 절단된 인성의 기이한 혼합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스는 이러한 표현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동정녀가 낳은 예수는 일종의 생물학적 별종이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혼합'을 강조한 것은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론의 핵심이 '영원한 육체를 입는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나리스는 육신이 하느님과 실제로 연합했고 따라서 〈그분의 육체는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일종의 복합 단일체, 혹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룬 독특한 중재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강한 반발을 낳았습니다."(178-9)


"아폴리나리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 중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약한 모습을 그의 '육체' 탓으로 돌렸다는 점에서 디오도루스는 아타나시우스와 유사한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테오도루스의 〈인간의 몸을 취한 (로고스)〉 정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도루스는 로고스가 성육신 경험의 직접적 주체라는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이 되었지요. 이들이 보기에 고난을 받고, 죽고, 부활한 이는 로고스가 아니라 〈다윗의 후손인 그분〉, 혹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었습니다. 로고스는 수난불가하며, 불멸하며, 불변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디오도루스는 로고스가 〈태어나지 않〉았고, 육신과 '혼합'되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로고스의 본성이 손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은 디오도루스가 〈성자가 둘인 것처럼〉 가르친다고 비난했습니다."(179-81)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는 하느님과 인간의 본성이 유사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영원과 우연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초월은 내재를 내포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무한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로고스 또한 무한자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이지요. 로고스는 어디에나 있지만, 인간에 대한 호의로 특별한 행동을 취해 특정 장소에 있게 되었다고 테오도루스는 말했습니다. 로고스가 은총으로 사도들이나 자신이 선택한 백성과 함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지요. 하느님-로고스는 특별한 호의, 혹은 당신의 뜻을 따라 성육신을 통해 인간을 취해 그와 연합했습니다. 하느님-로고스는 불변하기에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은유일 뿐이라고 테오도루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성육신은 (육체가 아닌) 인간성을 온전히 취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182-3)


"키릴루스는 모든 신경의 주제는 독생자인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성육신하셨고 인간으로 사셨으며 고난받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다고, 달리 말하면 로고스는 이성을 지닌 영혼으로 생명을 얻은 육체와 결합해 하나의 위격hypostasis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말했지요. 그리스도인은 수난불가한 로고스가 몸소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셨다는 신비를 확언해야 한다고 키릴루스는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로고스는 육체를 따라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녀가 로고스의 기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지요. 성서는 로고스가 한 사람의 인격과 자신을 합쳤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므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고 키릴루스는 생각했습니다. 로고스가 어떻게 육체와 결합할 수 있는지는 〈형언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지만〉, 신경에 따르면 로고스가 성육신의 전체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지요."(188-9)


"네스토리우스에 따르면 니케아 교부들은 신성이 수난 가능하다거나 하느님과 동등하게 영원한 분이 태어났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독생자〉라는 신경의 표현은 교부들이 한 분이신 주님이 분열되지 않도록 각 본성에 해당하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열거했음을 보여 준다고, 또한 그 본성들이 아들의 단일성으로 인해 혼동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지요." "신성의 측면에서는 수난이 불가피하고, 몸으로는 수난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수난불가능하기도 하고 수난가능하기도 하다고 네스토리우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의 '성전'이었습니다. 신성은 몸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몸과 결합했기에 출생, 고난 같은 것은 로고스가 아닌 인성에서 기인한다고 네스토리우스는 지적했습니다. 키릴루스는 이를 매우 불쾌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집트 주교 회의의 이름으로 '12개의 파문 조항'을 보내 네스토리우스에게 순종을 요구했지요."(189-90)


"451년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는 (안티오키아 학파가 혐오했던) '혼합'을 피하면서도,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중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분명하게 표현하려 했습니다." "칼케돈 신경은 단순한 역설이나 경계선 그 이상입니다. 이 신경은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일종의 화학 작용과 같다는 잘못된 견해를 거부하면서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신성은 피조 질서에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본성과도 같지 않으며, 단순히 두 피조물이 결합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성과 연합한다고 말이지요. 또한, 그리스도 사건은 그 자체로 신에 대한 관념, 그리고 신이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한 인간의 가정과 기대에 도전한다고 칼케돈 신경은 말합니다. 수난불가한 존재가 어떻게 고통을 겪을 수 있느냐는 논쟁 이면에는, 생명의 원리인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인간 삶의 한계를 경험하고 죽을 수 있는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은 진실로 고통받고 죽었다는 그들의 확신이 있었습니다."(200-4)


6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레네우스는 창조의 선함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은 이 물질세계에서 탈출해 신성이라는 불꽃의 파편들이 본래 속한 영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지요. 이에 맞서 이레네우스는 구원은 재창조re-creation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세상 마지막 날에 회복이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다른 세계' 관념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전 인격이 회복되는 몸의 부활을 뜻하지 플라톤주의자들이 가정했듯(당시 대다수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혼불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육체의 부활이라는 신경의 진술은 인간의 도덕적, 영적 차원과 더불어 육체적 차원도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함을 확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찬은 (이레네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피조 세계의 좋은 것을 감사를 담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기쁨의 희생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212-3)


"오리게네스의 저술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하느님의 단일성과 피조 세계의 다중성이 구세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중기 플라톤 철학의 고전적인 문제인 궁극적 일자와 다자 사이의 고리를 마련했습니다." "저는 오리게네스 사상의 핵심이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피조 세계가 연합해 만물이 다시 통합되고 본래 완전함을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리게네스 사상의 전체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이때 통합은 영적 통합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물질세계는 교정의 역할을 하는 중간 영역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부활을 '영화'spiritualization, 혹은 영혼불멸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고 육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양가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요.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여야 했고 피조물과 더불어 '선한 것들의 집합체'여야 했습니다."(217-9)


"그의 두 번째 책 『성육신에 관하여』를 읽다 보면 우리는 아타나시우스가 구원을 재창조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창조 당시 인간은 이성과 생명의 원리인 로고스를 받았기에 절대적인 것들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자신이 받은 것을 상실했고 그들이 창조되었던 무로 다시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불순종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자신의 경고를 철회하면 그분의 온전함이 깨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창조의 바탕인 그분의 선함과 사랑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로고스의 성육신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이성과 생명의 원리를 다시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성육신으로 인해 우상숭배와 무지, 죄와 죽음은 극복되었고 개별 인간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자녀가 될 수 있게 되었다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구원은 신화神化, 혹은 자녀됨이었습니다."(221-2)


"그리스도교는 (마니교로 대표되는) 궁극적 이원론을 거부했지만, 동시에 단순한 철학적 일원론도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안에 단일성-복합성이 있다고 보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 자체로 단순한 일원론을 거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두 가지 이유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가 이중적임을 인정했습니다. 첫째로 일원론만을 고수하면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할 여지가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창조주라면 하느님 외 다른 것들이 존재하도록 자유 가운데 선택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조 세계는 복잡한 물질적-영적 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본래 누렸던 완전함으로 회복할 것이라고, 창조주와 사랑의 연합을 이룰 것이라고 전통 그리스도교는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그리스도교 영성가가 아가서에 주목한 것,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긴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239-40)


"둘째로, 일원론만을 고수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속하게 되고 따라서 모든 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분명 완전하지 않고 인간은 도덕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함을 그리스도교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부 시대에 구원은 기본적으로 원原창조의 통일성과 완전함으로 회복하는 하느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치유와 재창조, 그리고 관계를 깨뜨린 것에 대한 속죄와 배상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고도의 이원론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완전함을 상실한 세상은 갈등을 초래하는 반란의 장, 하느님에게 반역하는 영적 세력의 지배를 받는 곳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구원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무언가를 처리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구원론에는 실용적인 이원론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는 기이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240-1)


결론과 성찰


"그리스도교에서는 철학보다 더 진리의 문제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철학자들은 진리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세련된 논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만들었습니다. 각 분파와 학파는 서로를 '이단'이라 불렀지만, 이때 이단은 선택을 뜻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분파와 학파를 선택해도 별 상관이 없는 분위기였지요.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저술들을 읽으면 진리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발견됩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가 철학 탐구의 완성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후 머지않아 그리스도교인들은 진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내비친 '이단'들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며 그들이 사물의 핵심에 자리한 통일성을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을 문제 삼았고 이단자들을 축출했지요. 하지만 (정통주의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단들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좀 더 명확하게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250-1)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 즉 신경들을 오늘날에도 믿음의 시금석으로 보아야 할까요?" "교리를 정립하려는 시도는 어떻게든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제한된 인간 정신, 언어와 개념이 결합해 나온 명제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포괄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면도 있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언제나 진리와 정체성을 두고 고민했으며 이는 개인이 홀로 자유롭게 생각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문화가 바뀌고 언어가 바뀜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는 해석과 재해석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신경 형태와 교리에 담긴 흐름을 거부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하느님의 로고스는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일어나는 순종뿐만 아니라 합리성, 신실함, 진리에 대한 갈망을 머금은 영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2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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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존 바턴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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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성서의 내용


2 책을 쓰다


"히브리 문화는 읽기와 쓰기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도구 하나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음소 문자입니다. 기원전 제1 천년기에 이르기까지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에서는 쐐기 문자 체계가 통용되었는데, 이는 쐐기 모양의 필기구를 이용하여 음절을 나타내는 기호를 점토판에 새기는 방식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처음으로 이 음절 문자 체계 대신 음소 문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는 물론 오늘날 서양의 알파벳의 조상으로, 각각의 기호는 하나의 자음을 나타냈습니다. 수백 가지 종류의 쐐기 문자는 22개의 음소 문자로 대체되어 읽기와 쓰기를 훨씬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비전문가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책은 이 음소 문자로 기록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문자의 세부 양식은 변화했을지언정 기본 22개 문자를 벗어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구약의 일부는 거의 기원전 10~11세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가장 최근 본문인 다니엘서는 기원전 2세기 중엽(160년경)에 나왔습니다."(42-3)


"신약성서는 좀 더 명백한 문자 문화의 산물입니다. 예수 시대 지중해 세계에는 도서관, 서점, 그리고 수많은 작가와 번역가가 있었습니다. 신약의 언어는 당대의 교양 있는 이들이 일상에서 사용한 그리스어입니다. 이 언어는 지중해 세계 전체의 공용어가 되었고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도 라틴어와 함께 쓰였지요. 당시 작가가 전문 서기관을 고용해 자신의 말을 속기로 받아쓰게 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바울의 대필자 혹은 비서인 데르디오(더디오)의 인사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서신이 진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곳곳에 직접 인사를 써넣었는데(타자기로 작성한 편지 말미에 서명하듯이), 이는 편지의 나머지 부분은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을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세계는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글의 세계, 책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성서를 이해하려면이 책이 고대 및 현대 작가들에 견줄 만한 숙련된 작가들의 창작물임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43-4)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의 많은 책은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일종의 스크랩북이나 선집인 것이지요. 책이 전하는 이야기에 담긴 몇 가지 충돌하는 지점들을 통해 우리는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창세기 4장 26절에서 우리는 아담의 손자 에노스의 시대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했음을, 즉 하느님을 특별한 히브리 이름인 '야훼'YHWH로 부르기 시작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의 생애를 그린 출애굽기 6장 2~3절에 따르면 하느님이 모세에게 동료 이스라엘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 이름을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등 구약성서 대다수 책은 여러 시기와 장소에서 만든 자료로 구성된 '복합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 창세기 저자는 없습니다. 다만 일정한 의도 아래 일련의 자료들을 결합한 편찬자가 있을 뿐이지요."(47-8)


"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는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입말을 통해 전해 내려온 자료였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글로 적힌 자료가 아니라 구전되는 기억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전통 문화는 중요한 내용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능력을 중시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복음서도 이러한 활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구전 자료가 기록 자료에 비해 확인하기 훨씬 어렵다는 것, 그리고 전달 과정에서 감지하기 힘든 수준의 변화를 어떻게 피했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가령, 처음에는 예수를 알았던 이들이, 나중에는 이 사람들을 알았던 이들이 매주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습니다. 그들은 진실하게 주님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입장이 이야기에 점차 스며들고, 공동체의 요구와 문제가 이야기에 담겼을 것입니다."(53-4)


"신약에 포함된 서신 혹은 편지들의 경우에는 (언제, 어떻게 저술되었는가의 문제보다는) 위명성pseudonymity의 문제가 있습니다." "대다수 비평가는 목회 서신, 즉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가 바울의 이름과 권위를 내세우지만, 실제 저자는 바울이 세운 교회 중 한 곳의 2세대 지도자일 것으로 봅니다." "진짜 바울의 편지들이 늦어도 기원후 60년경 이전에 만들어졌다면, '제2 바울 서신'은 상당히 나중에, 1세기 후반, 심지어 2세기에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서신들에서 바울은 교회의 설립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 형태와 질서를 부여하는 인물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주교들')은 바울에게서 자신들의 권위를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들에는 바울이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그들이 옹호해야만 했던 전승의 집합체, 2세기 저자들에게는 전형적으로 나타나지만 정작 바울에게서는 뚜렷하게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생각, '신앙'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담겨 있습니다."(56-9)


3 책을 모으다


"유대교인들은 모세오경을 여호수아, 판관기 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유대 신앙과 삶의 정수가 담긴, 독립적이고 완결된 저작으로 보았습니다. 기원전 5세기 에즈라 시대쯤부터 유대인들에게 오경 또는 '토라'(히브리어로 율법, 가르침, 안내 등을 뜻함)는 자신들의 정체성의 중심이었습니다. 권위와 거룩함에 있어 토라에 견줄 책은 아무것도 없었지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당연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짐작건대 이들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토라를 중심 문헌으로 간주했겠지요. 그러나 머지않아 다른 사고방식이 나타났습니다. 기원후 2세기경에 이르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더는 오경과 다른 경전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중심에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교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세 오경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82-3)


"신약 시대 유대교에서는 거룩한 책을 두 부류(가장 거룩한 토라와 나머지 책들)로 나누었습니다. 신약의 몇몇 구절은 성서를 세 가지로 분류하기도 했음을 암시합니다. 루가의 복음서 24장 44절에는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때 〈시편〉은 예언서들과 일부 다른 책들을 구별하기 위해 쓴 말, 율법과 예언서와 견주었을 때 낮은 위상을 지닌 책들을 가리키기 위해 쓴 말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유대교는 세 번째 범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언서'는 역사서 네 권(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기), 그리고 엄밀한 의미의 예언서 네 권(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짧은 열두 예언서)만을 가리켰고, 그 외에 오경에 속하지 않는 책은 모두 건조하게 성문서라고만 불렀습니다. 이 같은 구분은 주로 연대순에 기초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은 이와 전혀 달랐지요. 그들에게는 '경전'이라는 한 범주만이 존재했고, 그 안에서 주제나 형식에 따라 책을 배열했습니다."(86-7)


"네 복음서의 순서(그리스도교인들은 오래지 않아 경전을 코덱스로 만들기 시작했으므로 말 그대로 순서를 논할 수 있지요)는 그리스도교가 확립된 시대에 접어들고도 한동안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레네우스는 복음서를 여러 순서로 나열하는데,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가 아는 순서와 같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은 다양한 기준을 적용해 순서를 정했습니다.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서는 사도들이 쓴 것이라 하여 앞에 두고, 마르코와 루가의 복음서는 '아포스톨리키'apostolici, 즉 '사도들의 제자들'이 쓴 것이라 하여 뒤에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복음서 가운데 사도가 쓴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대 세계의 모든 이는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서를 사도들이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술 연대를 추정하여 나열한 경우도 있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최초의 역사가인데, 저술 연대를 근거로 네 복음서를 우리에게 익숙한 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92-3)


4 책에서 경전으로


"물론 성서를 이루는 책들이 처음에 단순한 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공적인 중요성을 갖도록 하기 구상된 책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직전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부족들에게 남긴 말임을 밝힙니다. 이는 처음부터 신명기가 특별한 권위를 지닌 책으로 의도되었음을 뜻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아가가 수준 높은 연애시 모음으로 탄생했고, 나중에야 유대교(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시에 등장하는 연인들을 하느님과 이스라엘(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와 교회)의 우의적 표상으로 간주해 경전으로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또 다른 예로, 잠언은 대부분 하느님이 아닌 어떤 인간 교사의 현명한 가르침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이를 성스러운 계시로 대하는 것은 본래 의도를 재해석한 것이지요." "바울의 서신들은 분명 자신이 편지를 쓴 교회라는 특정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논평과 지침입니다." "다른 한편 공관 복음과는 달리 요한의 복음서는 경전을 자처하는 듯합니다."(106-7)


"구약과 신약을 이루는 책들이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가 보유하고 있던 문헌의 전부라면 성서를 결정하면서 당시 이스라엘과 교회가 가진 세속 문헌과 종교 문헌 모두를 성서에 넣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교회는 종교 집단이므로 종교 문헌만을 지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문헌이 종교적인 주제만을 다루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는 차차 성서를 이루게 된 책들 말고도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는 성서를 이루는 문서들보다 훨씬 많은 문서를 보유했고, 이 중 상당수가 오늘날 발견되었습니다. 토마스의 복음서를 비롯한 이집트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속한 책들은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인정한 책들이며, 단순히 우연히 있게 된 책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이 책들은 모두 탁월함의 측면에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108-9)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복음서를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 보기는 했지만 구약과 같은 경전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거룩한 경전으로 여겼다면 마르키온은 루가의 복음서를 자유롭게 개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루가 역시 마르코의 복음서를 자유롭게 개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책이 아니라 메모, 혹은 초고를 기록하기 위해 코덱스를 활용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본질상 구전으로 선포되는 복음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대다수 신자는 복음서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원재료를 모아 놓은 문헌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자체로 완결된 문헌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경전을 종교의 필수 요소로 보는 세계에서 그러한 입장은 오래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책'들이 '경전'이 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136-7)


5 정경을 확정하다


# 정경화canonisation의 의미

1. 어떤 문헌이 거룩하거나 권위가 있다고 인정받는 과정

2. 성서의 '목록'을 확정함(경전은 추가될 수 있지만 정경은 더 이상 추가되지 않음)


"앞에서 언급한 세 단계, 즉 쓰기, 모으기, 경전으로 받아들이기가 겹친다는 이야기는 '정경화'의 과정인 네 번째 단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책이든 우선 기록되고, 수집되고,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뒤에야 제한된 목록의 일부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에서 '정경화'될 수 있습니다." "경전으로 받아들인 책들의 목록을 공식화한다는 의미에서 '정경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일이 매우 드물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혹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특정 저작을 이용하고 공경할 때 그 기준은 신자들이 언제나 그 책을 공경했다는 사실(혹은 그랬다는 믿음)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실제로 정경에 포함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던 대상은 모두 주변부에 속한 책들이었습니다. 성서에 속한 대부분의 책은 오래 전부터 신자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141-3)


"그리스도교 초기 구약 정경을 둘러싼 진짜 논쟁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들레헴에 정착해 많은 유대인의 조언을 받아 성서를 번역한 히에로니무스는 당시 유대인들이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 번역한 라틴어 성서, 즉 불가타The Vulgate는 짧은 히브리 성서 목록을 따라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70인역, 그리고 이를 번역한 옛 라틴어 성서는 언제나 부가된 책들을 포함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교사들이 빈번하게 경전으로 인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의 해답은 히에로니무스가 나머지 책들까지 번역하되 이것들을 히브리 경전의 '정경'과 대비되는 '외경'('아포크리파', 즉 '감추어진 것들') 또는 '교회의 책들'ecclesiastical books라 부름으로써 온전한 경전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149-50)


"그리스어 정경 전체를 인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종교 개혁 이전까지 서방 교회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추가된 책들은 계속해서 외경 혹은 제2 정경이라고 불렸지만, 이 책들을 분리하여 별도의 부분을 형성하지 않고 지혜서와 집회서는 잠언과 전도서 옆에, 토비트와 유딧은 에스델 옆에 놓는 등 같은 부류의 히브리 책들과 뒤섞은 덕분에 이것이 실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개혁자들은 히에로니무스의 입장으로 되돌아갔고, 그리스도교 교회의 구약에는 짧은 히브리 정경에 속한 책들만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어 정경으로부터 온 추가된 책들을 배제하는 데에서 그쳤고, 이런 이유로 개신교 구약 성서는 히브리 성서가 아닌 70인역의 순서를 따르되 일부만 제외한 모습입니다." "역설적으로, 초기의 권위 있는 성서를 복원하겠다는 개신교의 시도는 당시까지 그 어떤 그리스도교인도 알지 못했던  모습의 성서를 만들어 냈습니다."(151-2)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신약'의 어떤 책들이 정말로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인지, 사도가 쓴 것인지, 경전다운 것인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런저런 목록들을 제시했습니다." "에우세비우스는 세 가지 범주, 즉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책들('호모레구메나'), 지위에 관해서 논쟁이 있지만 교회 내에서 널리 읽히는 책들('안티레고메나'), 거짓이므로 배제할 책들('노타')를 제시했습니다. 「헤르마스의 목자」, 「바나바 서신」, 「사도들의 가르침」 등이 세 번째 범주에 속했으며, 이들은 초대 교회에서 널리 공경받았지만 에우세비우스 시대의 그 어떤 주류 교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논쟁이 있는 책들이라는 두 번째 범주입니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여기에는 야고보의 편지, 유다의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둘째·셋째 편지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의 나머지 책은 모두 첫 번째 범주(요한의 묵시록은 첫 번째 혹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합니다."(154-5)


"특정 책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교회가 규율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핵심 부분은 아주 일찍 받아들여져서, 나중에 이루어진 여러 판정은 명백한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정경화가 경전으로 인정받은 책들의 배타적 목록을 만드는 과정이었음을 입증하기에는 고대 교회의 증거들이 너무 빈약합니다. 신약의 책 중 대부분은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의심스러운 책들도 신자들이 교회의 명령에 따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합의는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성서의 모든 책이 같은 형식으로 인쇄되어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성서를 읽는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에우세비우스는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의 지위를 확신하지 못했고 이는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각 교단에서는 여전히 요한의 묵시록을 읽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하고 있습니다."(158-9)


# 기원후 367년 아타나시우스가 작성한 목록은 오늘날의 신약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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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탄생 - 청제국에서 시진핑까지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4
클라우스 뮐한 지음, 윤형진 옮김 / 너머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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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 책에서는 '현대 중국'이라는 용어가 규범적 틀이 아니라 순수하게 시간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중국의 사회적·경제적·문화적·정치적 발전에 대한 모든 깊이 있는 고찰에서 살펴봐야 하는, 거의 3세기에 걸친 기간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현대 중국은 절대적 범주로 이해되지 않고, 외국이나 외부의 청사진을 가지고 특정한 고유의 제도적 자원, 정치적 이해관계, 경제계획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제도들의 수립을 포함하여 진화하는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된다. 현대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하나의 보편적이거나 서구적인 모델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비록 현대성이라는 생각 자체가 전근대적이라고 간주되는 무엇인가의 변화를 전제로 하지만, 역사적 뿌리와 유산은 계속 의미가 있다." "현대는 시간과 장소 측면 모두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중국의 다양한 행위자가 부국강병을 위해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추구했던 목표로 이해된다."(19-20)


1부 청의 흥망


1 영광의 시대: 1644~1800


"자연의 힘과 장기간 싸워온 인간 야망(주로 경제적인)의 깊은 영향은 (청조 시대) 중국의 생태와 환경사를 그야말로 주조해 냈다. 1750년 무렵이 되자 원래의 동식물상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인공 세계와 자연 세계의 관계는 허약하고 섬세한 생태적 균형을 만들었다. 인간의 노동을 집약적으로 투입하고, 점점 더 비싸고 위험하게 유지해야 하는 복잡하고 섬세한 해법을 포함한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토양과 물의 공급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인구밀도, 내부 이주, 토지 점유 그리고 식량과 연료 수요 등의 증가로 압력이 지속되었다. 1750년 이후 경작 가능한 지역의 인구가 더 늘면서 수확 체감이 불가피해 보였다. 토질 악화, 토양 침식, 사막화에 직면하여 후기 중화제국은 홍수, 가뭄과 다른 재해의 형태로 나타나는 파멸인 체제 실패를 피하려면 더 열심히 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통합을 위해서는 국가가 댐, 관개시설, 재해 방지, 긴급 구호 등을 유지할 효율적인 행정 능력을 만들고 지킬 수 있어야 했다."(58-60)


"한족 사회는 종종 군사적으로 그들을 능가했던 스텝 지역에서 온 비한족들과 상호작용을 했다.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의 관념과 관행은 중국에서 통치의 성격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러한 혼합이 가능했던 것은 모든 모델이 군주제를 최선이자 유일하게 정당한 정부 형태로 여긴다는 점에서 일치했기 때문이다. 황제를 '천자'天子이자 절대적 지배자로 보는 중국의 관념은 북쪽의 스텝에서 온 지배자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이었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시경』에는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분명한 언급이 있다. 황제는 하늘의 명령(天命)을 기초로 '하늘 아래 모든 것(天下)'을 주재한다. 이것은 정복자들이 유용성을 발견한 또 다른 개념인데, 천명 없이는 정부가 정당하다고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배자가 천명을 잃었다면, 결과적으로 정복자들의 권력에 대한 주장이 정당하고 중국의 관념에 부합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63)


"비교적 작은 정부에 대한 중앙 국가의 집착 때문에 제국 후기 행정은 중앙의 계획을 실행하고 이를 지원하려면 지방의 비관료 공동체에 의지해야 했다. 이는 사회 자체에서 친족 조직과 상인·수공업 조합과 같은 조합과 집단의 형성을 동반했다." "이러한 조합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국가와 협력했다." "지방 엘리트들이 수행한 업무에는 교육의 감독, 공공강연과 '성유'聖諭의 낭독을 통한 이데올로기의 보급, 공동체 의례와 같이 국가가 후원하는 공동체 유대와 정치적 충성을 위한 의식의 지휘, 소송이나 무장 충돌을 피하려는 분쟁의 조정, 지방 단위 공공사업 기획의 관리 등을 포함했다. 지방 엘리트는 세금 징수원이나 지방 민병의 지도자 역할도 했다. 제국 후기에 성장한 지방 사회는 다양성, 번영, 정교함이 두드러졌다. 촌락 생활의 실용적 업무는 문자 해독과 산술 능력의 보급을 자극했는데, 둘 다 제국 후기에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72-3)


"제국은 고정적이고 정체된 토지세에 의존했기 때문에 국가의 세입 확대에 대한 만성적이고 심각한 제약에 직면해 있었다. 세입을 늘리는 것은 저항이나 반란을 유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이론적으로는 무제한적인 황제의 권력이 현실에서는 중국의 큰 규모, 제한된 세입, 긴 연락선, 작은 관료제, 지방 단체와 엘리트에 대한 의존 등으로 상당히 제약되었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황제는 의례의 정확성을 준수하고 일반적인 복지와 사회적 조화를 보증하며, 전임자와 선조들의 전례를 따라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몽골이나 만주와 같은 외래 통치자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제한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매우 정교한 구조가 그들이 정부 최상위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여 권력 회로의 핵심적 릴레이를 통제함으로써 넓은 영토를 지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학자가 표현한 것처럼 제국 행정의 핵심 목표는 '최대한의 효율보다는 시스템의 유지'였다."(75-6)


"청대 중국의 다양한 제도를 분석할 때는 광대한 대륙적 제국의 경제 구조가 발전과 성장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체적인 정치 체계, 통화, 국경, 세제 등을 갖춘 다수의 작은 국가로 구성된 이 시기의 유럽과 달리, 청대 중국은 성의 경계를 넘는 상품의 이동에 장애가 거의 없는 하나의 광대한 대륙 시장이었다. 또한 서양에 중국 제국이 민간 상업에 항상 적대적이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던 것과 달리 청조 국가는 경제성장을 촉지하는 데 늘 적극적이었다. 중국의 친상업적 태도는 명 말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상업 경제의 성장은 불가피한 현실로 보이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은을 통화로 사용하는 것, 역내 무역, 대외 무역, 상인 등에게 많은 반대가 제기되었지만 이는 점차 시장 경제의 '자연법'을 강조하는 학파에 우위를 내주었다. 이러한 사고는 시장 경제가 정부의 통제가 아닌 적절한 육성 아래에서 번영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88)


"청대의 중국 국가는 상업 행위에 대해 규제하거나 과세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 경제에 자유방임적 접근법을 택했다. 전통적인 수공업에서 노동 투입을 줄이면서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생산 과정의 지속적 개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통 공업에서 미미한 분업은 파편화를 불러왔다. 작업 공정의 매 단계는 비교적 독립적이었고, 생산 과정의 전체적인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으면서도 사실상 줄어들고 있는 재정자원을 추출하는 비교적 작은 행정부에서 통치하고 있었음에도, 또한 광범위한 기술적 진보 없이 인구압이 증가했음에도 청대 중국 경제는 늘어나는 거대한 인구에게 식량, 의류, 주거를 제공했는데, 이는 확실히 인상적인 성취였다. 대규모 재해나 도전 없이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위협이나 예상치 못한 수요에 직면한다면, 새로운 자원을 동원하는 제국 정부의 능력은 대체로 부족했을 것이다."(99-100)


"청대 초기의 중국과 계몽주의 시대 유럽 사이에는 종합적인 백과사전의 생산으로 지식의 활용이 가능해진 것, 원본 텍스트의 복원, 전통적 교리와 형이상학적 성찰을 극복하려는 열망, 실재 세계 문제에 대한 관심 증가, 전제주의에 대한 노골적 비판, 합리적 논증·사실과 정보를 경험적으로 치밀하게 수집하는 것에 대한 강조, 과학의 발전 등과 같은 측면이 유사성을 가리키고 있다. 계몽운동은 유럽에만 영향을 미친 예외적 전환점으로 유럽 역사에서 다소 독특한 순간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이 보여주듯이 계몽주의는 중국이 주요한 역할을 했던 지구적 동시성의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차이점도 볼 수 있다. 작은 나라에 살았고 이웃 국가로 옮겨서 쉽게 정부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유럽 사상가들과 달리, 중국 사상가들은 구석구석 미치는 청 제국의 감시와 압력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정부와 사회의 문제에 비판적 태도로 맞설 능력이 제한되었다."(108)


2 중화 세계의 재구성: 1800~1870


"중국 정부가 해안에서 해외무역업자들을 거부하고 유럽과의 무역을 막았다고 하는, 서양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관찰은 심각한 오해다. 해외무역이 제국 황실의 주요한 세입원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 해안의 여러 항구에서 과세되어 조정이 환영하는 상당한 수입을 가져왔다. 조정은 무역을 허용하려 했지만, 통제·관리되는 방식으로 하려고 했다. 해적 행위 혹은 더 정확하게는 밀수 때문에 해외무역에 대한 통제가 필요했다. 상품과 무역에 대한 세금이 여러 가지 긴급한 국내 수요와 외국의 위협에 대응할 중대한 세입을 제공했지만, 또한 상인들이 세금과 다른 수수료를 회피하게 해주는 광범위한 밀수 행위에 대한 유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밀수는 수익이 아주 좋은 사업이었다." "중국은 권위에 대한 이러한 도전에 맞서고자 밀수와 해적 행위를 근절하려는 광범위한 작전으로 맞섰고, (지정된 항구로) 무역을 제한하고 무역 장소를 감시하는 중국의 특권을 역설했다."(122-3)


"두 차례의 아편전쟁은 조공 체제를 조약 체제로 대체했다. 이러한 변화는 중요했고, 그 결과는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오랫 동안 식민지적 지배의 특수한 발현을 '반半식민지'라는 용어로 묘사해 왔는데, 이 용어는 외국의 권력과 지배받는 나라의 공식적인 정치적 주권이 공존함으로써 생긴 다양한 헤게모니 형태 속의 과도기적 국가를 의미했다. 중국은 완전히 외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완전히 독립적이거나 완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구적인 식민지 관행들은 지구적·국가적·지방적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르고 대립하는 힘들 사이의 일시적인 제도적 형식을 만들어내면서 토착적인 지방적 관행과 충돌했다. 이러한 동학의 결과는 불확실했고, 독립과 완전한 식민지화 중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반식민지화는 양면적 상태였고, 좀 더 포괄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외부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할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142-6)


"조약 체제의 결과로 해안과 주요 내륙 수로에 있는 점점 더 많은 중국 도시가 대외 무역과 외국인의 정착에 개방되었다. 이른바 조약항이라고 불린 이러한 도시들은 대부분 호황을 누리고 붐비는 도심지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오해 소지가 있을 정도로 조약항이라고 통칭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도시에 적용되는 아주 다양한 법적 형식이 있었다. 비교적 큰 영토에 대한 무제한적·무조건적 양도를 의미하는 고전적 식민지는 예외적이었다. 홍콩, 마카오, 타이완만이 외국 열강이 완전하게 지배하는 식민지였다. 조차지와 같은 식민지 지배의 모호한 유형이 더 일반저이었다. 외국 열강들은 항만 시설과 해군 기지를 유지하려고 인접한 작은 영토를 청 제국으로부터 제한된 기간 조차했다. 이러한 곳에서 서구 열강들은 제한된 주권을 행사했다." "보통 조차지들은 군사적·상업적 이해에 필요한 수송 기지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조차지는 보통 내륙의 자원에 가까웠고 중요한 국내·국제 교역로에 접근할 수 있었다."(146-7)


"외국 열강들은 중국의 주요 도시와 조약항에서 항구적으로 자리 잡으려고 이른바 도시의 조계를 설치했다. 조계는 정해진 기간 외국 정부에 조차되어 외국의 행정권 아래 있는 명확하게 규정된 거주 지역이었다. 외국 열강들은 중국에서 조계를 대략 20곳 운영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상하이의 공공조계였다. 서구 제국 열강들은 조약항 주위에서, 특정 지역 내에서 명확하게 규정된 경제적·문화적 그리고 종종 군사적 특권을 의미하는 '세력권'을 활용했다. '세력권' 안에서 중국 정부는 보통 중국 신민들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보유했지만, 특정한 외국 정부와 그 국민들에게는 특권적인 대우를 해주어야만 했다. 서로 다른 법적 구조에 기초한 조계, 조차지, 식민지, 세력권 사이에서 독특한 혼성 형식이 생겨났다." "이러한 혼성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이 조차지가 중국의 발전에서 이익을 얻는 기초가 되었고, 또한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나 여러 제약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중국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147-50)


"전체적으로 조약항의 새로운 중국 도시는 시간과 지리적 공간을 가로질러 복잡하게 연결되어서 기회로 가득 찬 곳이었지만 다루기 힘든 영역이기도 했다. 그곳의 폭력적이고 반항적인 지하세계는 통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조약항에서는 공식적 정부, 서양의 대리인, 사업 단체, 노동조직, 지하 비밀결사 등을 포함하는 복잡한 권력 체계가 생겨났다. 조약항에는 중국, 외국, 관료, 대중 등 여러 층위의 권위가 있으면서 어느 것도 지배적이지 않아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경계를 확장할 풍부한 기회가 있었다." "규모가 작았음에도 19세기 중국의 조약항과 무역은 느리지만 결국 중국 사회의 놀라운 변신을 가져온 변화의 과정을 시작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중국의 중앙정부가 개혁개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4개 해안 도시에서 대외 무역과 외국의 투자에 여러 특권을 부여한 1984년의 공식적 언급 속에서 이러한 중추적 역할은 분명하게 인정되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이전에 조약항이었다."(160-1)


"중국에서 국제무역이 팽창한 것은 조약항 체제의 가장 분명한 효과였다. 적당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국제무역은 중국 내부의 물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 국내 상품의 가격이 세계 시장 변동에 따라 움직였다." "몇십 년 동안의 제한받지 않는 무역으로 중국 경제의 크고 중요한 영역들에 영향을 주는 전례 없는 지구적 연결이 만들어졌다. 1880년대 후반 무렵에는 양쯔강 하류 지역에 거주하면서 쌀을 재배하고 사고팔거나 그러한 활동에 고용되었거나, 그러한 활동에 연관된 파트너와 거래하는 농민 수백만 명이 멀리 떨어진 쌀의 생산자, 소비자, 거래업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말로 향하면서 중국의 농부들은 세계 시장의 변동성에 영향을 주거나 받으면서 모르는 사이에 광범위한 국제적 상업 네트워크의 참여자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환율의 변화, 통화 가치의 변동, 운송이나 통관 요금 같이 국제적으로 형성되는 에너지와 거래의 비용 등에 훨씬 더 취약해졌음을 의미했다."(166-7)


"중국의 전통적 시장 네트워크의 붕괴는 해안 지역은 더 부유해지고 내륙 지역과 고립된 지역은 더 빈곤하고 낙후하게 되는 장기적 상황을 가져왔다." "이는 농촌 공동체에서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자발적 결사의 존재는 오랫동안 중국 농촌 사회의 특징이었다. 19세기에 사람들이 인구 과잉, 경제적 고난, 사회적 혼란, 사회 불안, 종족 간 불화로 악화된 집단적 폭력 등에 대응하면서 자발적 결사가 급속히 증가했다. 사회적 위협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후원 네트워크인 자발적 결사는 주로 생존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자발적 결사는 강탈, 착취, 지방 국가의 약탈적 추출 등에 대한 유일한 보호의 희망이었던 연대를 제공했다. 자발적 결사 중 일부는 종교적 종파로 생겨났고, 그 외에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조직이나 조합도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협력의 매개는 국가의 통제 바깥에 있었고, 향촌의 사회적·경제적 생활의 조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맡게 되었다."(169-72)


"태평천국 내전(1851-1864)은 약 14년에 걸쳐 중국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사람들이 이미 청의 능력과 힘에 품었던 의심이 더 커졌다. 그리고 조정이 이 승리를 위해 지불한 대가는 무거웠다. 중국인 장교들이 서구 열강의 도움을 받아서 이끌었으며 전투의 선봉에 있던 지방 민병들은 태평천국을 패배시킨 후 해산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이후 질서를 유지하려고 더 큰 역할을 맡았다. 정부는 심지어 그들에게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상품에 매기는 세금인 이금을 유지하도록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왕조가 결국 이때까지 가장 심각했던 통치에 대한 도전을 진압하고 중심부의 기본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변경에서 경쟁자들과 새로운 반란들을 방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중국 본토를 혼란에 빠뜨렸던 봉기들은 변방의 모방자들을 고무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더 많은 자치를 열망했던 변경 지대의 다양한 주민에게 목표를 추구할 독특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194)


3 청 말의 곤경: 1870~1900


"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태평천국이 진압된 이후 비교적 안정되고 대외 관계가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제도 개혁과 자강自强에 초점을 둔 정책이 선호되던 시기였다. 제국을 강화하고 그 활력을 회복하고자 군사 기술이나 공학과 같은 응용과학의 도입이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청조는 진지하게 시도했지만, 결국 더 효율적인 국가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야심찬 지적·정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19세기의 끝을 향하면서 새로운 군사적 충돌이 개혁 노력을 방해하며 온전한 집중을 요구했다. 새로운 무기와 기술을 비싸게 습득했음에도 조정으로서는 믿기지 않고 충격적이게도 청 군대는 정말로 모든 싸움에서 졌다. 1900년에 응징을 하기 위한 국제 원정군이 의화단 봉기를 진압하고 제국의 궁전을 점령하고자 베이징으로 행진하면서 황실이 시안으로 도망쳐 가도록 만들었을 때 중국은 현대사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했다."(203-4)


"중국의 노력은 야심찼지만, 근본적으로 정치 과정과 제도를 바꾸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실질적 제한이 있었다. 게다가 제국의 정치 체계를 정비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현대적 헌법이나 상법을 기초하려는 계획도 없었고, 통화 체계의 개혁도 없었다. 철도는 1890년대 말까지 본격적으로 건설되지 않았고 기선의 발전은 제한적이고 느렸다. 육군과 해군의 발전에 대한 집착은 자강운동 기간의 개혁이 단편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청 부흥의 가장 큰 제약은 국방 공업, 철도 건설 같은 다른 현대화 계획을 위한 충분한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의 부재였다. 민간 영역은 투자하기를 주저했고, 정부는 세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중국의 정부 세입 부족은 청 정부가 폭넓은 공업화의 달성과 경제 현대화를 진전하는 데 실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이것은 국내총생산의 10% 이상을 세입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었고 특히 도쿠가와 말기에 그 비율이 더욱 높아졌던 일본 정부와 두드러지게 대비되었다."(223-4)


"의화단 전쟁을 종결했던 신축조약辛丑條約은 연합군이 베이징에 진입하고 대략 1년 후인 1901년 9월 7일에 체결되었다." "중국 정부는 반기독교 결사를 만드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야만 했다. 반란에 군대를 파견한 국가들은 중국 북부에 영구적인 주둔권을 얻었다.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조항은 이자를 제외하고도 은 4억 5,000만 냥에 달하는 엄청난 배상금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액수는 청 정부의 연간 예산 2억 5,000만 냥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 금액은 군사 원정 비용, 재산 손실, 인명 손실에 대해 관련 국가들이 제기한 모든 요구의 총합이었다. 그러나 그 주장과 액수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어떤 절차도 없었다." "중국은 매년 2,000만 냥을 지불해야만 했는데, 이는 원리금 전체를 청산하는 데 39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고액의 연간 지급액 요구는 중국 예산에 대한 외국 열강들의 통제를 강화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중국 정부들의 예산을 저당잡혔으며 중요한 결과들을 가져왔다."(244-5)


19세기와 20세기의 중국 사상가들은 어떻게 전통적 가치와 문화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기술을 갱신할 것인지를 놓고 토론에 참여했다. 일부 사상가들이 단순히 서구의 총과 기계를 수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그들은 개혁 시도의 비효율성 때문에 점점 더 전통적인 체계 자체가 중국의 현대화와 중국이 직면한 외부의 도전에 대처하는 능력 모두를 저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19세기의 마지막 4분기에 중국이 천천히 여러 세력권으로 분할되는 동안 이러한 논의가 심화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외국 열강들이 조차지와 세력권을 두고 각축하면서 1900년 이후 '자강운동가'들의 회유적·실용적인 계획들은 불신을 받게 되었다." "청조 말기 중국 사상가들은 국가의 안정, 개인적 자기 수양, 경제적 성과 등에 대한 중국의 지속적 관심을 다루고자 사회진화론, 의회주의, 입헌주의, 민족주의 등의 새롭고 서구적인 사상으로 돌아섰다."(246-7)


"청일전쟁의 참담한 패배 이후, 중국의 군사적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점점 더 야심찬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새로운 지역 군대를 건립하는 것을 통해서였다. 이러한 신식 군대의 첫 두 사례는 중국 북부의 원세개와 후베이의 장지동이 후원하는 것이었다."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즈리성에서 원세개가 지휘하는 '무위군'이 만들어졌다. 원세개의 군대는 빠르게 팽창하여 수도 지역에 가깝게 주둔하는 북양군을 형성했고, 곧 중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장지동은 자신의 군대에 올바른 군사적 가치를 훈련받은 장교를 공급하려고 1896년 난징에 새로운 군사학교를 만들었다. 그가 원래 지위였던 호광 총독 자리로 복귀했을 때, 우창武昌에 또 다른 군사학교를 만들고 후베이·후난 두 성의 군대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장지동은 나중에 후베이 신군이라고 불리게 되는 7만~8만 명을 훈련했다." "1911년 후베이 신군은 공화 혁명을 시작하고 2,000년에 걸친 중화제국의 역사를 끝내게 된다."(254-5)


# 이때는 현대 중국의 정체성이 민족주의와 군사주의의 결합이라는 양태로 형성되는 시기이다.


# 19세기 중국의 쇠퇴 요인

1. 생태적 제약 : 전지구적 환경 변화로 인해 인구 성장 시기에 중국의 전근대 농업이 수확량 감소를 겪으면서 농촌의 빈곤이 확산되었다.

2. 제국주의 : 은이 순유출로 돌아서고 서구의 여러 상품들과 경쟁하게 되면서 농업 소득이 감소했고, 국내 경제가 불황으로 진입했다.

3. 조약항 확산 : 조약항에 외국 자본, 기술, 지식, 제도 등이 유입되면서 해안 지역과 내륙 지역의 격차가 커져 사회 안정성을 약화했다.

4. 정치제도 : 기존의 정치제도가 경제 하강, 지역 불균형, 농촌 빈곤, 사회 불안 등의 현안을 다루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데 실패했다.


2부 중국의 혁명들


4 제국 뒤엎기: 1900~1919


"1911년 혁명은 1928년까지 지속된 정치적 혼란기의 시작이었다. 쑨원을 단명한 초대 대총통으로 했던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은 곧바로 마찬가지로 단명한 위안스카이의 입헌군주정으로 이어졌다. 청조와 만주 지배자들이 제거되자 곧 공화 운동도, 다른 사회 집단도 정치적 공백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제국 체제는 무너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다른 제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은 상황을 더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유럽 열강들이 자원과 에너지를 유럽에 집중하느라 아시아에서 물러나자 일본은 거부할 수 없는 기회를 만났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지구적 저항의 물결은 1919년 5·4운동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중국의 장군들, 일본 군부, 공화주의자들 그리고 변화에 목마른 열정적 학생들이 모두 청 제국이 남긴 탐나는 유산과 잔여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다."(274-5)


"사상의 측면을 살펴보면, 1898년에는 캉유웨이(강유위)의 유교적 입헌군주제 사상이 혁명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20세기 첫 10년에는 대부분 진보적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캉유웨이를 희망이 없고 뒤처진 사람으로 여겼다. 가장 유명하고 널리 읽힌 입헌주의의 옹호자이자 자유주의의 신봉자인 량치차오(양계초)조차 도쿄에서 출판되는 영향력 있는 『민보』의 편집자 장빙린 같은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문화적·정치적 지도자들에게 추월당했다. 장빙린과 그의 많은 추종자는 제도 건설 과정에서 친서구적 편향으로 보이는 것들을 못마땅해했고 사회적 평등과 중국의 유토피아 전통에 뿌리를 둔 민주주의의 대안적 형식을 옹호했다. 장빙린과 1903년 상하이에서 출판된 통렬한 반만주 평론인 '혁명군'의 저자 저우롱은 철저한 반만주 이데올로기를 분명하게 표현한 최초의 중국인들이었다." "청 지배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은 아마도 이러한 급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수사의 출현에 기인했을 것이다."(286-7)


"쑨원이 청 제국 붕괴의 단초가 된 혁명(1911. 10. 11 우한 봉기, 1912. 1. 1. 중화민국 수립)을 일으키는 데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혁명이 일어난 후에야 그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쑨원은 그만이 수십 년 동안 혁명을 위해 싸웠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설계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해외로부터 실질적인 재정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에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 때문에 그 자신을 '혁명의 상징적 지도자'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쑨원이 관여하지 않았다면, 혁명 이후 어떤 일이 있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주요 행위자들은 쑨원의 동맹회 구성원들이 아니라 (청조의 주도로 진행된) 신정新政 개혁이 만들어낸, 그리고 지방 한족 엘리트들이 주도한 새로운 기구들이었다. 청조는 결국 자신의 군대 지휘관들이 청조를 방어하는 것을 거부했고 지방의 한족 엘리트들이 청조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에 전복되었다."(296)


# 제1차 세계대전이 중국에 미친 영향

1. 서구 열강(특히 독일)의 빈자리를 대체하려는 일본의 위협

2.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식민지 민족들의 정치적 공간 탄생

3. 통신·이동·교환 기술의 발전에 따른 반식민지 운동의 세계화

4. 대규모의 세계 여행자 집단이 상품·사상·문화의 이동을 촉진


"1915년에서 1925년 사이에 일어나고 1919년에 절정을 맞은 사회적·문화적 격변을 보통 신문화운동이라고 부른다." "신문화운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어왔다. 일부 학자들은 신문화운동을 '중국식 계몽'의 시작이자 서구식 현대성의 수용으로 느리게 전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문화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급진적이고 맹목적인 반전통주의의 첫 국면으로 읽었다. 패러다임의 명백한 전환을 보여준 5·4운동은 분명한 단절이자 중국의 전통에서 현대성으로 전환하는 데 대한 널리 퍼진 연속성 이론에 반대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5·4운동은 식민지 세계의 더 일반적 흐름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파괴되어야 할 것들이 많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세기 전환기의 유행어가 '파'破와 '파괴'破壞였는데, 이것은 천두슈의 주문이 되고 나중에는 마오의 주문이 되어 문제적 결과를 낳게 되는 개념이었다. 파괴의 목표는 전통적으로 중국적인 모든 것이었다."(316-7)


"중요한 것은 중국이 독립 국가로서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것이었다. 문학과 예술은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교육받은 행동주의적 청년들이 '신중국'을 만드는 데 헌신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양계초와 쑨원 모두에게 국가 건설은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사회제도를 고쳐서 중국 사회를 응집력 있는 '민족단체'로 바꾸는 것이었다. 1911년 혁명 이후 혼돈과 투쟁은 새로운 사회를 위해 계몽된 시민을 만들어낼 긴급한 필요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국가 재건, 신생활 운동, 농촌 재건, 토지 개혁 등이 포함된 수없이 많았던 20세기 중국의 사회 공학 프로젝트와 정치운동은 모두 서로 다른 정치 진영이 각자의 이상적 사회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담론에서 5·4 지도자들은 분명히 국민국가와 개인을 분리된 실체로 보기를 거부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양자가 유기적 결합을 이룰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글에서 개인을 무엇보다도 국가의 시민이자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 상상했다."(318-9)


5 민국 시대의 재건: 1920~1937


"1916년부터 국민당이 마침내 난징에서 새로운 국민정부를 수립한 1928년까지 수많은 지역 통치자가 부상했고 그들 중 거의 모두가 군사적 배경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독군'督軍이라고 불렀지만, 보통 군벌軍閥이라고 불렸다. 군벌은 중앙 국가로부터 성이나 지방의 지도자들에게 군사 지휘권이 이양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 자율적 군사 지도자들이었다. 개별 군벌의 통치 기간은 아주 짧기도 했다. 그들 중 소수만이 지속적인 통치 기간을 누렸다. 거의 끊임없이 군벌들 사이에 투쟁이 있었다." "군벌 통치가 가져온 압도적인 사회적 결과는 군대의 지속적인 부상이었다. 군벌 시기에 중국에서 민정 개념이 근본적으로 약화되었다. 군대는 가장 중요한 제도가 되었고, 지배와 통치의 문제보다 군사적 해결을 더 선호했다. 동시에 이렇게 파편화되고 지방별로 군사화된 사회가 중국 전체를 더 취약한 표적이 되게 했다. 이러한 정치 상황이 외부 개입의 심각한 가능성을 만들어냈다."(325, 330-1)


"1928년까지 장제스는 국민당 안팎의 주요한 도전자들을 물리쳤다. 그는 중국을 재통일했고 통일된 공화국이라는 관념을 강요했다." "이론상으로 국민당은 중국 사회가 민주주의를 실행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숙할 때까지 국가를 통제하고, 이른바 '훈정'訓政이라는 체제로 통치할 것이었다." "일당 독재라고는 하지만 국민당은 매우 다원적이어서 여러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파벌들은 모두 스스로를 국민혁명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넓은 틀에서 목표에 동의했지만, 정치적 신념과 이해에서 갈라졌다. 국민당원들 내에서 정치적 지향은 좌파에서부터 전통적이거나 보수적인 쪽까지 있었다." "장제스는 당과 정부의 관료제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대체로 그의 권위는 국민당 지지자들과 지역의 협력자들(군벌과 지방 엘리트들)의 불안정한 연합에 기초했다. 이러한 지지자들이 공유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장제스나 당 자체에 대한 부서지기 쉬운 충성심에 불과했다."(343-4)


"장제스는 당내에서 정치적 경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공산당 봉기의 도전을 받았으며, 완고한 군벌들과 싸우고, 1930년대 초의 일본 침략에 대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다. 호소력이 있는 지도적 정치사상을 제시하는 것이 그에게 긴요한 일이었다. 강력한 전망만이 공산주의의 매력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생활운동은 대개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과 비교되지만, 중국 자체의 대중운동과의 비교가 더욱 이해를 돕는다. 특히 1949년 이후 대중운동은 공산주의 정부가 목표를 가지고 주민들을 결집하고 정책을 실시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신생활운동이 전달하려 했던 어떤 메시지보다도 이 운동이 제공한 조직적 원형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목표를 빠르고 유연하게 실현하기 위해 정규적인 제도적 질서를 우회하는 전국적 정치운동이라는 아이디어는 1949년 이후 훨씬 더 큰 규모로 나타나게 된 중요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 혁신이었다."(356-8)


"마오쩌둥은 코민테른과 도시 인텔리겐치아가 추구하는 혁명 전략에 암시적 비판을 제기했다. 그는 농촌의 동원이 중국에서 혁명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다." "마오는 또한 농민운동의 과도한 폭력에 대해 반혁명과 지방 신사들의 권력을 극복하려면 피할 수 없고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촌락과 같은 기존의 역사적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공산당 조직의 활동가들은 스스로 작업, 방어, 교육, 사회생활이 구조 속으로 들어가야 했고, 점차 국가 전체로 확산될 수 있는 혁명의 은닉처를 만들어내야 했다. 마오는 농촌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농업 사회주의, 아나키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결합하는 전략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1927년 대부분 도시 당 조직이 국민당에 파괴된 이후 많은 공산당원이 마오의 이데올로기를 수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대체로 농민을 동원하는 마오의 전략이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이라는 점에 수긍하고 혁명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경로로 보게 되었다."(374-5)


"이른바 푸톈 사건에서 분출된 긴장에는 두 가지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토지 개혁이었다. 마오는 가족 규모에 기초한 토지 재분배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가족이 많은 가정이 더 많은 땅을 분배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방의 이해관계에 좀 더 개방적이었던 장시의 지방 지도자들은 (실제로 일하는 가족 구성원을 의미하는) 가족의 노동력에 기초한 덜 급진적인 토지 재분배 정책을 선호했다. 두 번째 논쟁은 장제스 국민당군의 예상되는 공격에 장시의 공산당 근거지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 전략 문제였다. 마오는 '적을 깊이 유인하는' 전략을 옹호했다. 적의 군대는 공격받기 전에 지역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인되어야 했다. 이는 홍군이 징강산에서 병력이 우세한 적으로부터 생존하게 해준 전략이었다. 그러나 장시의 지방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방법이 장기적으로는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그들 고향 지역을 파괴할 수 있음을 두려워했다. 결국 1930년 12월 푸톈에서 지방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되었다."(379-80)


"푸톈 사건은 고통과 공포의 시기에 일어났던 최초의 대규모 당내 유혈 숙청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내 반대를 다루고 규율과 복종을 강화하려는 폭력적 숙청이라는, 하나의 유형이 될 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 규율과 보안은 지도부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문제였다. 푸톈 사건 때까지 당 규율은 1929년 공산당의 성급 단위에 설립된 '숙청반혁명위원회'가 다루었다. 푸톈 사건의 결과로 숙청반혁명위원회가 1931년 3월 폐지되고 그 자리에 '국가정치보위국'이 만들어졌다." "정치보위국은 국민당의 정보활동을 적발할 요원들을 훈련하고, 반혁명 활동과 스파이 행위·방첩 문제를 수사할 뿐 아니라 스파이 행위, 투옥, 소비에트공화국이나 홍군의 적 또는 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것과 관련된 사건들의 해결 등을 맡았다. 이것은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제도적 혁신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당내의 수상한 적을 다루기 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스럽고 강력한 안보기구가 나타났다."(380-1)


6 전시의 중국: 1937~1948


"1937년,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개전 국면의 끝 무렵 국민정부는 이미 현대화된 부대, 공군, 군수 공장의 가장 좋은 부분 그리고 중국의 현대적 공업과 철도 대부분이 있으며 주요한 세원이있던 동부 해안 대부분을 상실했다. 1940년 말까지 중국의 노력은 일본의 공격력을 소진시켰다는 점에서만 성공적이었다. 중국에 대한 일본군의 침입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대략 1943년 말까지 3년간 지속된 전쟁의 두 번째 국면 동안 제한되고 지역적인 범위에서 충돌이 많았지만 전선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교착 상태에 있던 이 기간에 일본군은 그들이 얻은 것을 공고하게 하고 착취하려고 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사 행동은 모두 전선 뒤에서 게릴라 전쟁 형태로 주로 이루어졌다. 중국은 실용적 목적 때문에 적어도 몇 개의 다른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대부분 중국인은 일본인 정권이나 협력 정권의 통치를 받았다. 이 다양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서로 다른 제도는 서로 다른 경험과 실천을 낳았다."(404-5)


"2차 국공합작의 성립을 가져온 공산당과의 합의 때문에 국민정부는 공산당과 다른 정당이 충칭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용인해야만 했다." "공산당조차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당 출판물을 판매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정부의 헌정적·민주적 형식의 실현을 열망하는 폭넓은 운동의 출현을 자극했다. 그러나 1940년 이후, 많은 국민참정회의 참정원이 정부가 점점 더 연합전선의 원칙을 무시하고 검열과 억압을 강화하는 것을 비판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통 정치적 독재에 분개했는데, 많은 경우 이들은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정부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전시 충칭에서는 다당제의 가치와 중국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중국 역사에서 그 이전이나 이후에 정치적 반대파가 그렇게 자유롭게 관심사에 대해 발언하고, 정치 사안에 대한 참여를 공개적이고 강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적이 드물었다."(408-9)


"1936년 7월 16일 마오는 에드거 스노에게 말했다. 〈오늘날 기본적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입니다.〉 점점 더 불길해지는 일본의 위협은 중국 민족주의를 공산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결합하고, 당을 이전에 적대적이었던 사회 집단들에 접근하게 했다. 도시 중간 계급 구성원, 부농, 소지주가 일본에 대한 국가적 저항을 위해 협력을 호소하는 대상이 되었다. 농민뿐 아니라 중국 인민 대다수가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연합전선의 잠재적 구성원이었다. 달리 말하면,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조하지 않는 대신 '부르주아지' 중 '애국적'인 사람들에게 그들은 환영받을 것이고 그들의 재산과 지위가 존중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공산당의 정책이었던 토지의 몰수와 분배는 농촌의 지대, 이자, 세금의 인하라는 훨씬 더 온건하고 대중적인 정책으로 대체되었다." "공산당은 전시의 저항에서 자신들의 평등주의적이고, 참여적이며, 협력적인 성취를 선전했고, 중국의 도시 지역에서 많은 동조자를 끌어들였다."(414-5)


"통일전선 정책의 또 다른 효과는 선거의 물결이었다. 선거 운동은 대중 동원의 형태를 취하여 농촌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서 촌민들을 교육하고 정치적 참여를 확대했다. 그러나 촌 단위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조차 공산당은 반드시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도전받지 않도록 했다." "마오는 공산당에 더 통합된 공통 언어, 정당성, 목적을 제공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과거의 치열한 논쟁을 생각하며 당의 정치적 사고방식을 강화하고 통합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일관성 있는 수사를 갖춘 새로운 프로그램이 합의되자 마오는 1942년의 '정풍운동'整風運動을 이용하여 '올바른 생각'을 강요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공고하게 했다." "당이 활용했던 이전의 정치 전략과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적 생각은 강하게 부인되었다. 무엇보다도 정풍운동은 마오가 왕밍, 장원톈, 보구와 같이 소련 경험이 있고 모스크바의 후원을 받았던 내부 경쟁자를 비판하고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416-7)


"정풍운동은 마오 저작에 대한 정전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정풍운동은 마오 숭배를 만들어내고, 지식인들이나 당 활동가들의 독립적 사고나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운동 과정의 연설에서 마오는 획일성과 정통성을 강조했고, 이는 '사상개조'思想改造로 강화되었다. 분명하게 정의된 사상과 언어의 체계에 깊이 뿌리내린 '응집된 담론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했다. 활동가들의 느슨한 모임이었던 것이 공산당의 규범과 가치를 내면화하고 같은 행동 규약을 따르는, 생각이 비슷한 당원들의 엄격한 공동체로 변화해야 했다." "정풍운동은 부분적으로 지도력을 강화할 필요에 대응하는 것이었지만, 또한 옌안에서 있었던 당원의 변화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다. 옌안으로 온 교육받은 집단들이 다양성 있는 주민들을 형성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에 합류했다." "정풍은 성장하는 공산주의 운동에서 이데올로기적·조직적 훈련을 개선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417-8)


"(일본 점령 지역에서는) 처음부터 중국인 협력자들이 새로운 정권이 정부 구조를 만들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도왔다. 민족주의적인 중국의 역사학은 이러한 행동을 반역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과의 이러한 협력은 선택할 여지가 거의 없었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일본과 함께 일하려는 동기는 다양했다.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들의 지지는 만주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 엘리트들은 국민정부의 혁명적 수사를 결코 지지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안정을 유지하고 기존 질서를 보호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이것을 일본이 약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만주 지역의 자치를 열렬히 지지하는 만주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꿈을 이루기를 희망했다. 마지막으로, 동양의 영성에 열중하는 종교인들이 그들의 믿음에 도움이 될 동아시아의 새로운 종교-정치적 질서를 수립하는 데 기여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423-4)


"이 지역들에서는 저항보다는 협력이 중국의 점령 경험의 많은 부분을 특징지었다. 협력은 양측 모두에게 매력적이었다. 일본인들에게 점령 정권들을 수립하기로 한 결정은 중국인 주민들과 더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국가 제도들이 기능하게 되면 점령된 중국에서 질서와 생산성의 회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전력을 유지해 줄 것이었다. 지방의 촌민들은 파괴된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고 즐겁게 일하는'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도록 권고받았다. 일본은 중국에서의 전비 증가를 보고, 점령이 스스로 비용을 감당하도록 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인 주민들에게는 정상 상태와 안정성의 회복이 생존에 그야말로 결정적이었다. 전쟁은 끔찍한 파괴와 고통을 가져왔는데, 이는 일본군뿐 아니라 중국군의 행위에서도 왔다. 따라서 양측이 협력하는 것은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일본 점령 기간에 실용적 고려가 우세했다."(428)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한 장기적 영향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변화시킨 것이었다. 히틀러에 반대하는 연합에 합류함으로써 중국은 국제적인 인정과 지위를 얻었고, 이는 19세기 제국주의의 굴욕적 유산을 마침내 넘어설 기회를 제공했다. 1943년 1월 중국, 영국, 미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마지막 남은 유물들을 폐지하고, 치외법권을 취소하고, 상하이의 공공 조계와 프랑스 조계를 포함하는 모든 조계를 전후에 반환하여 중국이 통치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새로운 조약들을 맺었다. 이 조약들은 1901년 신축조약으로 생겼던 중국의 부채도 모두 취소했다." "그러나 더 많은 도움에 대한 장제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은 중국이 지고 있는 부담에 개의치 않고 현상에 매우 만족해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중국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간신히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물자와 지원을 보낼 것이었다. 실제로 중국이 일본에 승리하도록 돕는 것은 분명히 서구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434-5)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처음에 정부군은 공산당군보다 수가 3 대 1의 비율로 많았다. 마오와 공산당 지도자들은 능력 있는 군사 전략가라는 것을 입증했지만, 장제스와 그의 장군들이 행한 심각한 전략적·전술적 실수로 엄청나게 이득을 보았다. 그들은 엘리트와 중국 인민들의 국민당 정권에 대한 지지가 하락한 것으로도 도움을 받았다. 해안 지역에 대한 권력을 되찾았을 때, 국민당 지도자들은 일본 지배하에 머물렀던 기업인, 지식인, 시민 대표들을 밀어내며 그들을 협력자라고 비난했다. 국민당은 만주, 서남 중국, 신장과 같은 변경지역에서 중앙정부가 파견한 관료들을 지방 행정관보다 중시함으로써 지방 엘리트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당은 전쟁 전에는 국민정부를 옹호했던 지방 엘리트들로부터 지지를 잃었다. 군대와 정부의 부실과 부패 그리고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대중들의 남은 지지도 서서히 사라졌다."(444-5)


3부 중국 개조하기


7 사회주의 개조: 1949~1955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세 가지 중요하고도 부분적으로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중국은 훨씬 우세한 미군에 버틸 수 있는 떠오르는 국제적 세력으로 스스로 자리 잡았다. 중국이 스스로 영토 안전을 지키고 이웃의 동맹 공산주의 국가를 보호하는 데 보여준 결단력 때문에 동구권에서 중국의 위신과 영향력이 크게 높아졌다. 아마도 처음으로, 소련 지도부는 중국을 의존적인 위성국 이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둘째,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역할인, 비서구 국가의 보호자와 방어자로서 역할을 강화했다. 중국은 계속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베트민을 지원하고 나중에 북한과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부를 도울 것이었다. 이 역할을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반군들에게도 작용했다. 셋째, 전쟁은 공산당이 중국 사회의 총체적 개조에 중국 국민들을 동원하려면 필요했던 통치력을 강화했으며, 미국과 타이완의 관계 개선을 이끌어내는 계기로도 작용했다."(489-90)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함께 1950년 말 급진적인 운동이 시작되어 1952년까지 계속되었다. 마오가 한국전쟁에 중국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지 이틀 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혁명 활동의 진압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잠재적 반대자들, 특히 친미적이거나 친국민당적인 관점을 가진 지식인들을 완전한 통제 아래 두고 이들을 재교육하려고 설계된 일련의 도시 운동의 시작이었다. 한반도에서 미 제국주의와 싸운다는 결정과 내부 계급투쟁 선언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은 토지 개혁을 가속화하고 농촌 경제에서 더 많은 자원을 추출해야 한다는 훨씬 더 큰 압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경제 정책의 변경을 이끌었다." "국가가 농촌으로부터 자원 추출을 늘려야 할 필요가 1950년 말 토지개혁을 시작한 중요한 이유였다. 이것은 한국전쟁의 급진화가 중국 사회에 더 깊게 침투하도록 도왔음을 의미한다."(491-2)


"'반혁명 활동'이라는 용어는 '인민 민주 독재를 전복하거나 인민 민주 사업을 파괴할 목적으로 하는 각종 반혁명 범죄'라고 모호하게 규정되었다. 1951년 조례는 구체적인 범죄의 포괄적 목록을 포함했는데, 모두 안보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조례에 열거된 범죄 거의 전부(95%)에 적용할 수 있는 처벌은 최소한 유기 징역이었고 많은 범죄가 무기징역이나 사형이었다. 게다가 판결을 내리는 기관은 범죄를 처벌하는 데 추정의 원칙(즉, 명확하게 불법이라고 명시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유사한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범죄를 적용함으로써 처벌을 정하는 것)과 1949년 이전에 저지른 반혁명적 활동도 처벌할 수 있는 소급 원칙을 바탕으로 엄청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당은 이러한 전쟁, 공포, 의심이라는 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사회의 신뢰할 수 없거나 적대적이거나 '반혁명적인' 요소를 일소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반혁명 진압'(혹은 진반鎭反)을 위한 전국적 운동을 시작했다."(493-4)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지속된 이 운동의 주요 목적은 공산당의 권력 장악을 강화하고 지키는 것이었다." "대부분 '반혁명' 의심분자에게는 힘든 육체노동으로 '새로운 사람'(新人)으로 거듭날 회개와 개조의 기회가 주어졌다. 마오는 이러한 과정을 '쓰레기를 유용한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경우에는 마오가 말했듯이 '대중들의 깊은 증오를 받고 대중들에게 무거운 죄과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므로 폭력의 사용은 '대중의 큰 분노'(民憤極大者)와 '혈채'血債라는 말로 정당화되었다. '혈채'라는 표현은 마오의 연설과 글에서 자주 등장했다. '혈채' 개념은 공산주의의 적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를 당이 응징하고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마오는 또한 반혁명분자들이 중국에 여전히 있고, 따라서 미래에도 운동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주의 국가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며 폭력의 사용을 단념할 여유가 없었다."(494-5)


"인민법정은 대중 재판과 고발 집회와 같은 장치를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고발을 위한 '공소회'公訴會, 판결을 선고하는 '선판대회'宣判大會 그리고 대중 재판인 '공심'公審의 세 가지 독특한 형식이 널리 사용되었다. 각각의 형식은 인민 수만 명을 참여시킬 수 있었다. 이 형식들은 대중들을 가장 잘 동원하고, 부정적 사례로 교육하고, 공개적 처벌로 예방하는 것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고발 집회, 대중 재판, 대중 운동은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이 고무되어(發動群衆) 국가의 행위에 참여하도록 초대되었고, 그럼으로써 국가의 대중적 정당성을 집단적으로 재확인했다. 이 과정은 대중들이 긴밀하고 직접적으로 참여하도록 신중하게 연출되었으며, 중요한 증인들은 언제 어떻게 말할지 철저하게 연습했다. 조직자들은 특히 증언과 고통이 더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아주 나이가 많거나 아주 어리거나 여성인 증인들을 선호했다."(497)


# 진반 운동에 뒤이어 부패, 낭비, 관료주의에 대항하는 '삼반三反 운동', 뇌물, 탈세, 사기, 국가 재산 강탈, 국가 경제 기밀 누설에 대항하는 '오반五反 운동', 더욱 광범위하게 반혁명분자를 색출하는 '숙반肅反 운동'이 행해졌다.


"정치적 대중운동의 폭력과 침투성은 국민당의 잔여 지하 세력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 중국의 반대자들이 시도할 만한 어떠한 무장 반란, 공격, 파괴 행위라도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따라서 공산당의 운동은 그 주요 목표를 이루었고, 심지어 효율적인 기층 동원 체계를 만들고 사회적·정치적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다수 수립하기까지 했다. 공산당 정부는 권위를 상당히 안정시킬 수 있었고, 공업 노동력을 구분했던 '딴웨이', 시민의 '좋거나 나쁜' 정치적 기록을 남긴 '땅안'을 포함하여 마오 시기의 핵심적 제도들을 수립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좋은 인민들을 '홍오류'紅五類로, 나쁜 인민들을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불순분자, 우파의 약칭인) '지부반괴우'地富反壞右라는 줄임말로 표현되는 '흑오류'黑五類로 구분할 정도로 더욱 세밀해졌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시민들을 국가가 만들어낸, 서로 다른 자격을 가지는 범주들로 나눔으로써 사회를 구획하는 기능을 했다."(506-7)


8 대약진: 1955~1960


"많은 저자와 연구들이 마오쩌둥이나 공산당 통치하 사회를 언급하지만, 정부와 분리되어 구별된 채로 남아 있는 중국 사회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오해를 부를 소지가 있다. 현실은 중국 사회를 개조하려는 공산당 정부의 지속적이고 강압적인 시도가 중국의 사회 구조와 개인의 구성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는 점이다." "새로운 정권은 민국 시기 인구조사 기록을 기초로 하여 호구부戶口簿를 다시 만들었는데, 이 호구부에는 이름, 생년월일, 직업, 직장, 가족 배경, 개인의 지위, 교육 수준, 결혼 상태, 종교, 본적 등의 항목이 포함되었다. 이 항목 중 하나가 바뀔 때마다 호주戶主는 호구부 항목을 변경하고 그것을 지방 공안국에 보고해야 했다." "식량 배급 카드도 호주에게 주었고, 호주가 이것을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분배했다. 이러한 기층 제도를 '호구'戶口(후커우)라고 불렀다. 호구 제도는 자원을 배분하고 주민 중 선별된 집단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주요 기반이 되었다."(525-6)


"호구 등록은 정부에 대한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관리함으로써 혁명을 보호하는 도구로 시작되었다. 나아가 (도시든 농촌이든) 한 지역의 호구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그곳에서 거주할 수 없었다. 따라서 호구 제도는 정부가 국내 이주를 규제하고 통제하게 했는데, 농촌에서 도시 지역 이주나 소도시에서 대도시 이주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반대 방향의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다. 농촌 주민들이 도시에 들어와서 도시 거주자들을 위해 마련된 보조금으로 혜택을 보는 것을 방지하려면 그들이 도시에 진입할 권리를 제한해야 했다. 동시에 이미 도시에 있던 많은 난민과 이민들을 내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신속한 공업화에 국가적 우선순위가 있는 상황에서 긴급하게 착수해야 할 과제였다. 신속히 공업화를 하려면 도시 노동자들을 위해 비축한 도시의 제한된 식량 보조가 (농촌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필요가 있는) 비생산적인 난민들에게 낭비되지 않아야 했다."(526-7)


"1953년에서 1956년까지 당이 수립한 새로운 경제제도들이 기존 구조를 대체했다. 이러한 제도적 혁신은 일정한 정도 국가의 중앙 집중화를 확립하고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계획 기구는 비록 그 산업 자체가 비효율적으로 조직되었더라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산업으로 자원을 이전시키려는 강압적 활동을 했다. 이렇게 자원의 흐름을 돌리는 일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끌지만, 그러한 효과는 기술적 혁신보다는 농업 생산으로부터 추출한 노동과 자본을 재할당하고 재배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경제제도는 농업에서 징발한 자원을 중공업 투자에 돌린 착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착취적 제도는 경제적 인센티브가 부족하고 계획 관료들이 변화에 저항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기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1950년대 말에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러한 제약과 한계를 인식했을 때, 크게 도약한다는 생각이 더 매력적으로 여겨졌다."(543-4)


"1955년 3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이후 몇 주 안에 공산당은 농업을 집단화하고 공업과 상업을 사회주의화하고자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마오쩌둥은 완전히 사회주의적인 농업 체계를 가져올 촉매로 소규모 농촌 합작사의 잠재력을 믿게 되었다. 그는 농업에서의 조직적 변화가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오고, 따라서 중국은 농업의 기계화 이전에 집단화를 향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적 동기가 기술과 자원보다 더욱 결정적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에 '생산 관계'의 변화가 '생산 양식'의 변화보다 우선권을 얻었다. 토지 개혁의 혼란 이후 농촌의 상황이 아직 유동적이었는데, 마오는 '쇠가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하는'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마오는 중국이 더욱 빠른 발전의 길을 걷게 하기를 바라면서 사회주의 이행을 가속하는 캠페인을 요구했다. 1955년 말까지 거의 모든 호조조가 농업합작사로 전환되었다. 빈농과 중농의 대다수가 합작사에 소속되었다."(546-8)


"마오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1955년에서 1956년 사이에 집단화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마오는 다시 농민 노동력의 재조직과 합작화가 발전을 강화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중국 농촌이 기게와 발전된 장비를 가지지 못했고 가질 여유도 없으므로 집단화가 발전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이제 합작사는 집단 농장 혹은 '국영농장'으로 재조직되었고, 여기에서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으면서 경작하고 지방 간부들의 계산에 근거하여 곡물이나 현금을 지급받았다. 이러한 국영농장은 기여한 토지와 다른 자산의 양이 아니라 노동에 따라 보수를 받는 200~300가구로 구성되었다. 집단화에는 토지에 대한 모든 사적 소유권의 종식, 가족 농장의 종식 그리고 자원의 통합 등뿐만 아니라 모든 농민의 편입도 필요했다. 부농들의 토지, 가축, 도구들이 생산합작사에 합병되었다. 이러한 중대한 전개를 거쳐 중국 농촌에서 가족농업의 전통이 사라졌다."(548-9)


"마오쩌둥은 경제적 성과, 여러 가지 제한, 융통성 없고 기술관료적 의사결정 등의 측면에서 (소련식의) 중앙에서 계획하는 명령경제 체계의 모델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오는 이러한 체계가 공업과 농업의 역동적인 발전을 가져오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이 하향식의 계획보다는 주민의 동원에 기초해서 발전할 때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의 결과가, 대안적인 경로를 보여주며 중국을 영국과 같은 공업 국가를 추월하는 발전 상태로 이끌고자 계획된 대약진이었다. 유토피아적 이념이 자주 강조되긴 했지만 대약진은 중국의 식량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제도적 해결책을 찾는 것과 공업화의 가속화라고 하는, 그 자체로는 거의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두 가지 구체적 목표를 추구했다. 농민들이 국가에 더 많은 식량을 팔지 않으면 농민들이 더 많은 식량을 보유하거나 소비하게 될 뿐이기 때문에 지도부는 식량 공급 증대가 문제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564-5)


# 삼면홍기三面紅旗 운동 :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지도 이데올로기), 대약진(1958~1960, 구체적인 정책), 농촌 인민공사(실행 수단)


"대약진의 즉각적인 결과는 끔찍한 자산의 낭비와 소름 끼치는 생명의 파괴였지만, 매우 중요한 장기적 영향도 남겼다. 기층 수준에서 촌민들이 스스로 기근에서 살아남고 생존을 위해 싸우도록 방치되었다. 공산당은 빈곤을 없애고 굶주림을 막겠다는 사회주의 국가의 약속을 지키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원래도 확실하지 않았던 당의 정당성은 대약진의 실패로 극적인 약화를 겪었다. 기근이 끝난 후에도 당은 굶주린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가져갔던 국가의 결정에 뿌리를 둔 정당성 위기로부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근은 극적인 경제적 오판으로 이어진 맹목적인 열망과 비이성적인 낙관주의의 결과였다. 마오가 반드시 농민들을 굶주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았지만, 농촌과 도시, 농민과 노동자 중 어느 쪽을 지원해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마다 당과 국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것임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도시 지역에 분명한 우선순위를 두었다."(574-5)


9 모든 것을 타도하기: 1961~1976


"대약진의 실패로부터 짧은 휴식과 회복을 한 이후 중국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형태의 더 큰 대혼란에 빠졌다. 문화대혁명의 공인된 목표는 '일체를 타도(打倒一切)'하고 '전면 내전'全面內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당이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969년 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승리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1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실제로는 첫 번째 신호가 이미 1962년에 나타났지만) 1966년부터 1968년까지 2년 동안 지속되었고 대중운동, 공개적 반란, 홍위병 집회, 시가전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단계는 1968년 하반기부터 197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홍위병의 하방, 인민해방군 권력 증대 그리고 '계급 대오 정화' 운동 기간의 폭력적인 대규모 숙청 등이 두드러졌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세 번째 단계는 린뱌오의 망명 이후 정상화와 권력 강화가 시작되었다. 이 세 단계가 합쳐져서 문화대혁명의 10년을 형성했다."(576-7)


"1962년 9월의 8기 중앙위원회 10차 전체회의 이후 마오는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수정주의와 싸우고' '평화로운 변화'(和平演變)를 막는 수단으로 전국적인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비록 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이 운동은 문화대혁명의 전주곡이었다. 마오의 분석으로는 대약진이 부딪쳤던 문제들은 농촌에서의 부적절한 태도와 후진적 사고 때문에 인민들이 정책을 올바르게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정책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마오가 보기에 대약진은 느리게 실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내의 다른 지도자들과 강력한 분파가 방해하고 저항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유일한 길은 철저한 교육 운동과 함께 전반적인 정치적 전망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농촌 지역과 당내에서 집단화에 대한 저항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농업 합작사와 국가의 구매 정책에 대한 불만을 사회주의를 약화시키는 계급투쟁의 문제로 만들었다."(581-2)


"1964년 8월 초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공습이 중국 남쪽 국경에서 전쟁의 불안을 일으켰다. 소련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중국이 미국에 대항하여 전통적 전쟁을 빠르게 준비해야 할지, 아니면 마오의 관점으로는 중국 안보를 위해 더욱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중요한 중국 사회의 잠재적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내부적인 정치 투쟁을 미룰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베트남에서의 '통일된 행동'에 대한 소련의 요구에 대응하고 더욱 가까운 중소 관계를 재수립할 것을 지지했다. 이는 마오의 눈에 이들이 더욱 의심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동시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경제발전을 위해 조정 정책을 더욱 강화할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마오에게는 이런 조치들이 농촌 지역에서 혁명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중국이 베트남 전쟁과 소련과의 분쟁에서 등을 돌리면서 중국의 미래를 위한 마오의 마지막 투쟁이 시작되었다."(590-1)


"린뱌오 사건 이후 마오쩌둥과 남은 지도부들은 당에서 또한 사회 전반에서 군대 권력이 축소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인민해방군은 정치와 대중으로부터 사라졌다. 중국 인민들은 자신들만의 매우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는데,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던 많은 사람에게 린뱌오의 탈출과 죽음은 분명히 환멸이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린뱌오는 마오 숭배의 가장 유명하고 충성스러운 지지자였고, 수백만 명이 '수정주의자' 적들에 대한 싸움에서 린뱌오와 마오를 지지하는 복잡한 투쟁을 겪었다. 그들은 존경받은 교사들을 공격하고, 고문하고, 나이든 시민들을 학대하고, 늙은 혁명가들에게 창피를 주고, 심지어 격렬하고 대체로 폭력적인 대립 속에서 과거의 친구들을 고발하는 상황까지 갔다. 린뱌오의 쿠데타로 알려진 것의 모순된 세부 사항들과 뒤이은 탈출은 이 모든 것을 개인적 권력 투쟁으로 보게 만들었다. 수백만 명이 스스로 장기의 졸처럼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믿을 이유가 있었다."(612-3)


"비록 대약진보다는 자산과 인명 피해가 적었지만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 전체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단기적으로는 물론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정책에서의 좌충우돌로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후퇴했고, 상품과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정부 기관의 능력을 퇴보시켰다. 정치 체계의 모든 등급에 있는 관료들이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정책 변화가 이전의 정책에 따라 열성적으로 일한 사람들이 쉽게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는 관료적 소심함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인민 수천만 명의 삶을 혼란스럽게 했다. 계획경제, 교육 체계, 국방, 외교관계 등과 같은 당과 국가에서 수많은 에너지를 쏟아 건설했던 제도들이 중단되고, 붕괴되거나 완전히 폐지되었다. 당-국가 관료제는 약화되었고, 캠페인들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는 중국의 후진성, 광범위한 빈곤, 국제적 고립의 심화와 중국과 산업화된 세계 사이의 격차 확대였다."(616-7)


"문화대혁명은 장기적 유산도 남겼다. 첫째, 세대 격차가 만들어졌다. 젊은 성인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거리로 나가 불만을 해소하는 법을 배웠다. 둘째, 문화대혁명 기간에 테러 및 이와 동반된 상품의 결핍으로 사람들이 암시장과 개인적 관계에 다시 의지하게 되면서 공산당과 정부 내에서 부패가 확산되었다. 많은 농민이 국가의 할당량을 넘어서 생산한 것을 뭐든지 팔았던 암시장이 지하 경제를 구성했다. 셋째, 1970년대 초중반에 정치적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인 권력 투쟁이 일어남으로써 도시의 중국인 수백만 명이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 때 공산당 지도부와 체제 자체가 더 많은 신뢰의 상실을 겪었다. 넷째, 격렬한 분파 투쟁의 유산이 계속 중국 사회를 괴롭혔다. 문화대혁명의 라이벌 분파 구성원들이 같은 딴웨이에 있으면서 서로 권력을 약화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권력 투쟁이 만연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이 추구했던 목표들은 결국 달성하기 어려운 상태로 남았다."(617)


4부 떠오르는 중국


10 개혁과 개방: 1977~1989


"인종, 성, 계급에 따른 위계와 불평등은 적어도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비판받았고, 공산주의는 이러한 비판의 가장 강력한 표현의 하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세계 곳곳의 중요한 투쟁들은 더 이상 집단적 연대나 공산주의의 꿈에 기초하지 않았고, 공업화와 지구적 자본주의로 형성된 세계에 더 적합하다고 다수가 여기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기초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개인적 권리와 자유에 기초했으며, 집단적 통제와 정부 개입의 대부분 형식에 회의적이었다.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동등한 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수용은 공산주의 이념 안에서의 고양이 아니라 자유 시장 이념의 부활과 함께 이루어졌다." "1970년대 초반의 세계적 불황 이후,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자극하는 시장의 메커니즘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련의 뚜렷한 침체도 자유 시장 이념의 진전에 기여했다. 중앙의 계획과 정부가 설계하는 사회 질서라는 소비에트 모델은 더 이상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았다."(636-7)


"미국이 중국을 선호한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중국의 실용적 접근이 더욱 정통적이고 더 위협적인 자세를 보인 소련보다 나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국에 중국은 소련에 대응하는 전략적 파트너이면서 마오 죽음 이후에는 시간이 지난 후 자유 사회로 진화할 잠재력이 있는 사회주의의 유연한 변형의 선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에 대해 미국은 낮은 관세율과 같이 다른 나라에 하는 것보다 더욱 우호적인 정책들을 기꺼이 펼치려 했다. 이때부터 미국과의 관계는 중국의 외교 정책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중국은 서구 경제가 심각한 불황과 싸우던 1970년대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 경제는 성숙해 가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중국은 투자자와 기업가들에게 광대한 시장을 약속하면서, 홍콩을 통해 서구로부터 자본, 선진 기술 그리고 기업가정신이 흘러 들어갈 쉬운 방법을 제시했다. 따라서 1970년대 말은 중국이 외부 세게에 경제를 개방하기에 매우 적절한 시기였다."(639-40)


"개혁기가 시작될 때 덩과 다른 새 지도자들에게는 어떻게 인민들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를 강하게 할지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자유화와 시장 지향적 개혁을 마르크스나 마오쩌둥의 사상과 어떻게 조응시킬지에 대한 이론 비슷한 것도 없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당의 결정들 배후에 있는 더 큰 정치적 전망을 포착하기는 어려웠다. 1984년 여름, 덩은 매력적이지만 모호한 문구인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체계적인 이론적 틀은 1987년의 13차 당대회에 가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13차 당대회에서는 '하나의 중심과 두 개의 기본점' 정책을 결정하기도 했다. 하나의 중심점은 경제성장이었고 두 개의 기본점은 '개혁개방'과 덩샤오핑이 1978년에 내세웠던 '4가지 기본 원칙',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의 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었다. 이 기본 원칙들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648-9)


"1980년대가 흘러가면서 중국의 지적 기반은 다양하고 다원적으로 되었다. 1990년대에도 내용은 달라졌지만 이러한 조류가 계속되었다. 동시에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문화에 초점을 둔 엄청나게 야심찬 출판 기획('신계몽新啓蒙'이라고 불린 운동)을 추구했다." "자유주의는 1980년대 지적 담론에서 주류가 되었다. 문화혁명의 종결과 함께 중국의 정치적·지적 엘리트들은 계몽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 서구의 문화적·물질적·기술적 성취에 놀랐다.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이전의 신념은 산산이 부서졌고, 서구 문화와 사회의 자유주의적 측면에 대한 감탄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끌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 역동성, 즉 당 지도부의 분열이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이끈 진정으로 개혁적이었던 분파는 회의적이고 보수적인 강경파들과 대립했고, 놀라운 개방성의 짧은 시기를 가능하게 만든 최고 지도부의 부분적인 마비 상태를 가져왔다."(666-8)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중국의 대학과 학생들을 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변화, 새로운 자유 그리고 자유주의적 이론과 지식에 참여할 흥미로운 기회 등에 대한 기대가 당의 지배 그리고 높아가는 열망을 잠재우려는 노력과 반복해서 충돌했다. 1983년의 정신오염 반대 운동과 1987년의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 운동의 에너지는 대부분 당내의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적이고 위험하다고 여겨진 정치적 자유주의와 연결된 저술·사고를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운동들은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을 화나게 하고 이들을 급진주의로 몰아갔다." "1989년의 베이징 학생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정치적 변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 저항운동이었다. 학생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만연한 관료 부패 그리고 학문 분야의 경제적 전망 악화 등과 같이 새로 생겨난 사회 문제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기도 했다."(672-3)


"덩샤오핑과 총리 리펑은 국가와 당 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폭넓은 저항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저항을 수용할 수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베이징과 다른 도시들에서의 상황이 통제를 벗어나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치국원 차오스는 이 상황을 〈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내려올 수 없다〉라고 묘사했다. 그는 5월 21일 저녁 자오쯔양과 나눈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대는 진입이 막혔고, 계엄령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수백만 학생·주민·정부 조직의 간부들이 거리로 나오거나 톈안먼광장에 모였다. 이 상황에 계속된다면 수도가 마비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국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광장을 비우기로 결정했다. 6월 3일 군대는 베이징에 다시 한번 진입했다. 이번에는 정부로부터 확실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저항하는 시민과 학생들에게 발포했다. 6월 4일 새벽 군인들은 광장을 향해 베이징을 헤치며 나아갔고,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675-6)


"톈안먼광장의 사건들은 세계적 상황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1989년은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중국의 사례는 이 격동의 해 동안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다른 결과가 나왔음을 상기해 준다. 1989년 이후 동유럽에서 시장, 정치제도, 문화적 규범의 빈번한 실패는 서구 질서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반발이 급성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정치적 이슬람은 공산주의자 적들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서구에 대한 싸움으로 전환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은 점점 더 반서구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고, 터키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새로워진 형태의 권위주의가 생겨났다. 따라서 중국의 권위주의 갱신은 상당한 정도로 1989년 이후 위기와 동유럽의 문제들을 피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냉전의 종식이 유럽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지만, 중국 그리고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흐름은 갈라지고 예측되지 못했다."(678-9)


11 전면적 전진: 1990~2012


"적대적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정적이었던 톈안먼 학살에 대한 국제적 반응은 국내에서도 반향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지도부가 결속을 강화하도록 자극했다. 이것은 체제의 최고위층이 권위와 자원을 강화하고 다시 한번 국가 지향적이고 안정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신중하게 선택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부에 새로운 차원의 영향력과 에너지를 가져다주었다." "이제 경제발전이 분명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고 빠른 경제성장 없이는 정치적 안정이 달성될 수 없다는 합의가 있었다. 그 사이에 구세대 혁명 지도자들이 죽기 시작했다. 1997년 그중 가장 중요한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사망했다. 그 결과 장쩌민과 주룽지는 최고 지도부 내에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분열을 끝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내부적 일치로,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당내 투쟁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시기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것은 또한 지도부의 교체를 매우 순조롭고 평화롭게 했다."(681-2)


"톈안먼의 여파 속에서 중국은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과 서구의 비판에 대응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중국은 1991년 10월 인권 문제에 대한 백서를 만들고, 외국의 인권 사절들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베이징은 미국의 인권 문제를 공격하면서 미국이 타국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암시했다." "중국에 대한 제재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1991년 가을, 미국 행정부는 제재를 풀려고 했다. 1차 걸프전쟁의 종전과 이라크의 패배 이후 미국은 중동 개입을 강화했다. 동시에 동유럽과 소련의 상황이 민족주의의 부상과 종족 분쟁으로 악화된 것도 서구의 주목을 끌었다. 이 두 전략 지역에 집중하려고 미국이 중국과의 긴장을 완화하고 정상화된 관계로 돌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장쩌민 측에서는 미국과 관계가 더 확고해진다면 경제 개혁의 지속이 더 쉬워진다고 인식했다. 1990년대 후반 미중간 관계 개선은 1997년 장쩌민의 미국 방문과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마무리되었다."(694-5)


"경제성장에 유리한 국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여전히 중국 외교 정책에서 지배적 우선순위였다. 두 번째 목표는 영토를 온전하게 회복하고 지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타이완, 홍콩, 마카오와 재통일하려는 노력과 국내 정치 안정의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중국은 특히 티베트, 신장, 내몽골 자치구에서의 분리 운동에 대한 외부의 지원을 차단했고, 타이완에서 독립에 대한 지지를 방해하거나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중국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도 해양의 권리 주장을 내세울 용의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중국은 이웃들 사이에서 지지와 공감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면서 외부에서 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는 것을 단호히 막고자 했다." "중국 외교는 (아주 실용적인 이유로) 다자주의로 전환했다. 중국은 톈안먼 이후 국제적 고립을 끝내고 세계적 영향력을 증대하기를 원했다. 국제 사회에서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국제적 지위에도 관심이 있었다."(695-7)


"민족주의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에도 이미 강력한 추동력이었다.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에 이르기까지 초기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적인 사고와 수사를 채택했고 그러한 틀 안에서 중국공산당을 중국을 국가적 통합과 위대함으로 이끌 수 있는 정당으로 묘사했다. 1990년대에 사회주의의 흔적들이 중국 사회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평등, 사회 복지, 사회 안전 등과 같은 사회주의의 핵심적 약속들이 많은 중국인에게 찾기 힘든 것이 되면서 정치적 사고의 민족주의적 요소가 훨씬 더 강렬해졌고 공산당에 중요한 것이 되었다. 당과 정부는 새롭게 만들어진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할 새로운 전망이 필요했다. 정책과 발전의 교조적 지침으로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에 의지하는 것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고 설득력이 없었다.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당이 이미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나 마오의 신념에 따르는 대부분 개념과 해법을 뒤에 남겨두었다. 대략 1990년대 말부터 당은 국가적 위대함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시작했다."(698-9)


"당은 통제력 유지의 필요를 넘어서 점점 더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진술에서 정부는 더 이상 명확한 목표로서 공산주의의 달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고, 오히려 질서와 안정성의 유지와 '소강사회'小康社會를 이루고 국가의 '부흥'을 가능하게 하려는 수준 높은 성장과 번영의 성취를 옹호했다. 당이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정치체제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정부는 중국을 통치하기 위한 정당성이 대부분 실제로는 경제성장과 국가적 위대함의 성취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 중국인이 정부가 계속 권력을 가지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경제성장과 번영이라는 형태의 '산출 정당성'이 정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스스로 '혁명당'革命黨에서 중국의 국가적 부와 힘을 증진하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삼는 '집정당'執政黨으로 변모해야 했다."(700)


"애국주의 운동은 역사적 신화와 역사적 트라우마를 결합한 절충적 서사에 기초하여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충분히 성공했다. 당이 구축한 1990년대 이후 중국 민족주의는 역사적 굴욕과 민족적 자부심이라는 모순적 감정으로 형성되었다. 중국의 교과서들은 현대 중국의 역사를 규정하기 위해 '국치'國恥이 한 세기를 묘사하는 특징이 있었다." "이 서사는 굴욕의 쓰라린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은 강해지고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국치'와 그것을 초래한 약한 중국 정부들에 대한 서사는 공식적 수사에서 강력한 요소가 되었다. 그것은 전략적 현실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형성했고,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 국치의 수사가 제기하는 중국이 취약하다는 인식은 안전하고 방어가 가능해야 한다는 욕구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에서,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까지 어떤 경쟁자와도 겨루기에 충분한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욕구를 낳았다."(702-3)


"놀라운 것은 민족주의를 고취했던 지식인 엘리트 다수가 1980년대에 서구에서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서구의 자유주의적 사상의 옹호자였다는 점이다. 민족주의의 고조가 단순히 정부 선전의 산물은 아니었다." "소련 붕괴 후 국내 정치가 혼란스럽고 경제성과가 빈약했던 모습은 많은 중국인을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불안하게 했다. 중국에서 유사한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은 많은 지식인을 사로잡는 공포가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고통스러운 민주주의 전환 과정에 서구 국가들이 러시아에 효과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못한 점에 주목했다. 서구는 오히려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 약화를 이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식인들은 중국의 많은 문제를 의식했지만, 개인적으로는 1992년 이후 실질적 경제발전의 혜택을 입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은 중국, 즉 그들 자신에 대해 다룰 때 미국의 미디어에 나타나는 편향이 서구의 패권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태도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다."(706-7)


12 야망과 불안: 동시대 중국


"2012년 시진핑은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을 방문했다. 그는 교육기관의 중심 기능은 미래의 당 지도자들을 훈련하는 점 그리고 당은 고등교육에 대해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점 두 가지를 분명하게 했다. 당은 학생들과 토론을 피해야 하는 주제들의 목록인 '가르칠 수 없는 7가지'(七不講)를 선전했다. 이것은 교수들이 과거 공산당의 실패를 말하지 않아야 함을 의미했다. 다른 금지된 주제들 중에는 사법부와 행정부의 분리, 인권, 언론의 자유, 시민사회의 자유 등이 있었다. 교수들이 중국공산당이 중국 헌법의 '헌정 지배'를 받아야 하는지를 토론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2015년 중국은 국가의 '핵심 이익', 즉 정치체제의 유지와 의심받지 않는 공산당의 통치, 주권과 영토 통합성의 방어, 경제발전을 지키려는 포괄적 '국가안전법'을 제정했다. 이것은 중국이 협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의 범위가 이전 정부들에서보다 상당히 늘어났음을 보여준다."(730)


"농촌 이주 노동자라는 용어는 현지의 후커우 등록 없이 농촌에서 목적지로 이주한 노동 인구를 가리킨다. 이러한 일자리는 대부분 계절적이어서 농촌의 작업 일정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 "이들은 수많은 차별과 불이익을 받았다. 일하고 있는 도시나 더 부유한 농촌 지역에서 '외지인'이었던 이주 노동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공식적·비공식적 제약에 직면했다. 도시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녀를 현지 공립학교에서 교육하는 것, 보건·복지 혜택, 심지어 방을 빌리거나 구매할 법적 권리 등을 포함하는 많은 권리와 혜택을 얻을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착취와 도시로부터의 추방에도 취약했다. 국가는 계속 이주 노동자들을 '유동 인구'流動人口라고 부르면서 이등 시민으로 보았다. 또한 잠재적 갈등의 원천으로 경계했다. 이주 노동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원래 도시에 살던 사람들도 이주자들을 점점 더 범죄의 원천이나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게 되었다."(748-9)


"개혁은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도 크게 바꾸었다. 1990년대에 국유기업의 노동자 수천만 명이 평생 고용의 보장과 그에 수반되는 혜택을 잃었다. 게다가 기업이 민영화되었을 때 해고된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힘들게 일해서 얻으려 했던 연금과 같은 복지 혜택을 잃기도 했다. 일자리를 유지한 사람들은 고용주와의 계약서에 서명을 요구받았는데, 처음에는 기간이 최대 5년이었고 나중에는 보통 1년이었다. 평생 고용의 '철밥통'은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부서져 버렸다. 더 많은 노동자는 어떤 종류의 보장이나 복지도 없는 단기 계약으로 고용되었고, 과거에 국유기업 노동자들이 받던 것보다 낮은 임금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농촌 이주자들하고 경쟁해야 했다. 저숙련에 나이 든 도시 노동자들도 점점 더 늘어나는 농촌 이주자들과 마주쳐야 했고, 종종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부자와 빈자를 나누고, 사회 집단들과 민족들을 나누는 격차는 엄청나게 커졌다."(750-1)


"사회제도도 변화했다. 예를 들어 딴웨이, 심지어 후커우조차 마오 치하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복지와 사회 안전의 제공이라는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제도들이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농촌 경제와 도시의 딴웨이 체제에 내장된 일부 사회적 권리를 보존함으로써 이 제도들은 노동자들이 조립 라인에서 노출되곤 하는 최악의 착취를 완화했다. 예를 들어 국유기업 노동자들은 딴웨이를 통해 과거의 복지 주택을 보조금을 받아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택 개혁은 노동자들을 사유 재산 소유자로 만들어서 심지어 기업이 파산할 때도 경제적 안전망을 제공했다.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후커우 제도는 이주 노동자들을 이등 시민 지위로 만들어 세계적 자본에 이용되는 저임금 노동력으로 만들었지만, 농촌 호구로 등록된 이들에게 토지 이용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들이 국가에 대한 새로운 수준의 충성심을 만들어냈는데, 그 효과는 자주 간과된다."(751-3)


"개혁개방 정책은 점진적 제도 개혁으로 경직되고 국가 통제적 경제 체제에 점점 늘어나는 유연성과 개방성을 불어넣는 것을 기초로 했다. 개혁은 중국이 빈곤을 야기한 경제의 비효율적인 제도적 패턴에서 벗어나서 빠른 경제성장으로 가는 경로에 오르게 했다. 시간이 지나 중국의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국가 영역은 빛을 잃었다." "그러나 어려운 도전이 남아 있다. 중국의 성장은 2014년부터 둔화되기 시작해 '세계의 공장' 모델이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모델은 또한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비용을 치르게 만드는 엄청난 환경오염을 야기했다. 이 핵심적 문제 때문에 중국은 중공업과 저가, 저임금 제조업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전환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성장과 부의 창출로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계속 얻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정부에는 부담이 컸다. 다시 말해, 중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정성이 정책 결정을 이끌었다."(783-6)


"비록 중국의 정치체제가 그대로 있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중국의 시장 전환의 또 다른 지속적 특징은 정치적 자유화의 부재였다. 중국은 여전히 권위주의적 일당 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1978년 이후 당은 급진적 변화 및 유토피아적 목표와 거리를 두었다. 당은 어쩌면 이름 말고는 더 이상 공산주의적이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죽음으로 '실력자' 정치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2012년 시진핑 총서기를 '핵심 지도자'로 만들려는 혼란스러운 시도가 있었다. 정치적 분위기는 전보다 경직되고 아마도 더 불안정하게 되기 직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 정부가 명백히 현실에서 실질적인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적어도 정치체제를 개혁하려는 제도 건설의 노력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켰음을 보여준다." "국가 주도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정치적 결정에 대한 대중의 참여라고 하는 풀리지 않는 문제는 일련의 정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었다."(7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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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계급의 형성 -하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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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노동계급의 등장


13장 급진적인 웨스트민스터


"1802년 나뽈레옹은 종신통령이 되었고 1804년에는 세습 황제로서 제위를 수락하였다. 페인의 진정한 추종자라면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좀더 온건한 개혁파 사람들이 과거 로베스삐에르에 대해 당혹했던 것처럼 확고한 자꼬뱅은 이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리 그들이 비판적 초연함을 유지하려 했을지라도 잉글랜드 개혁파의 사기는 프랑스의 운명과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 나뽈레옹의 제1제국은 잉글랜드 공화주의에 다시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페인의 『인간의 권리』는 그것이 왕과 야만스런 제도, 세습적 신분차별을 공격할 때 가장 열정적이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나뽈레옹이 바띠깐과 화해하고 제위에 오르고 새로운 세습귀족을 등용한 것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혁명적 매력까지 앗아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이제 단지 상업적·제국적 경쟁자이자 스페인과 이딸리아 국민들에 대한 억압자의 모습으로 비쳤다."(28)


"1802년과 1806년 사이에 대중적인 애국적 감정의 부활은 분명히 있었다. '보니'(보나빠뜨르)가 만약 찬양되었다면 그것은 인민의 권리의 화신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전사'로서 찬양을 받은 것이었다. 영국은 애국적 싸구려 책과 전단, 인쇄물로 넘쳐났다. 노리치의 여인네들은 저항했고, 노섬벌런드 주민들은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수천의 랭커스터 직조공들은 지원병에 가담했다. 넬슨은 드레이크 이래 최대의 전쟁영웅으로 인기를 차지했다. 트러팰거 해전(1805)의 역전승은 수많은 발라드의 주제였고, 선술집과 마을 어디서나 화젯거리였다." "그렇다고 이때 역시 급진주의의 불꽃이 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사용된 용어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왕년의 자꼬뱅들은 정통주의자들이 나뽈레옹을 부르봉왕가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비난하던 만큼이나 열렬히 공화주의 명분을 배신했다고 나뽈레옹을 비난할 정도로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30)


"급진주의는 광범위하게 퍼진 민중적 불만으로 지탱되는 방어적 운동, 명확한 항의운동으로 남았다. 그것은 아직 공세적인 힘은 아니었다." "버뎃과 코크린 같은 사람들은 권력과 부의 쟁탈전, 그들 자신의 계급의 위선 그리고 신흥 부유층의 허세를 경멸했다. 그들은 자신의 좌절에서 아마도 때때로 '낡은 부패세력' 전체 구조를 뒤엎을 어떤 혁명적 돌발사태를 꿈꾼 것 같다. 우리가 코벳의 분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지 그를 화나게 만든 것들, 즉 일확천금의 납품업, 왕실 공작들의 지저분한 추문, 급상승하는 지대와 세금, 농촌노동자의 궁핍화, 언론출판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 '악덕퇴치 종교부흥 협회' 제보자들에 의한 민중오락의 파괴 등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수많은 이유로 불만은 고조되었다. 강제징집에 대한 적대감, 상이군인들의 불만, 창궐하는 군납회사들에 밀려난 장인들의 불만 그리고 트러팰거 해전 이후로는 겉보기에도 끝도 없고 목적도 없는 전쟁에 대해 점차 커가는 반대의 저류 등."(47-8)


14장 불의를 바로잡는 군단


"1803년 2월 사형집행인은 에드워드 마커스 데스파드의 머리를 런던 군중 앞에 쳐들었다. 그와 6명의 동료 희생자에게는 (왕의 시해음모와 관련된) 반역죄가 선고되었고, 그들 모두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데스파드 사건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투쟁을 런던 노동자들, 잉글랜드 북부의 전모공들 및 직조공들의 분노와 결합시킨 사건이었다. 그것은 1790년대의 옛 자꼬뱅주의의 마지막 불꽃으로서 데스파드와 더불어 치명적 패배를 겪은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정부의 소요 '예방' 정책과 민중의 자유를 제약하는 정책은 정당화되었다. 그것은 또한 자꼬뱅 강경파의 소그룹들간에 쿠데타 전략(혹은 환상)을 택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쿠데타 전략은 케이토우 스트리트 음모 사건(1820) 때까지 런던 내 소그룹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계속 남아 있었으며, 다른 한편 우편마차들의 운행중단으로 전면적 봉기의 확산을 위한 도화선을 심는다는 관념은 차티스트 운동 시대 때 되풀이될 것이었다."(51, 66)


"몇년 동안은 『모닝 포스트』지가 표현한 우려가 지나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1811년에 이르러서야 지하조직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는 폭력적인 공업투쟁의 형태 즉 러다이트 운동으로 나타났다. 러다이트의 공격은 특정한 공업적 목표에 국한되었다. 즉 역직기의 파괴(랭커셔), 전단기(shearing-frame)의 파괴(요크셔), 미들랜드 편직기 편물공업에서의 관행 붕괴에 대한 저항이 그것이다." "피트에서 씨드머스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한결같은 정책을 추구해나갔다. 불평분자들을 한데 몰아넣어 고립시키기 위해 친보나빠르뜨적인 음모라든가 (1815년 이후에는) 폭력이나 폭동의 의도를 갖고 있다는 혐의를 덮어씌우는 식이었다. 하원의 비밀위원회는 잇따라(1801, 1812, 1817) 폭동의 조직망에 대한 무시무시한, 그러나 증거가 없는 주장들을 내놓았다. 어떤 의미에서 정부는 음모자들이 필요했는데, 그 이유는 전국에 걸친 민중조직을 사전에 예방할 억압적 법률의 지속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68)


"자꼬뱅주의는 중간계급 대다수의 지지와 전국적인 중심을 잃었던 바로 그 시기에 노동계급 공동체에 고유한 것이 되었다." "데스파드가 처형된 후에 제조업 지역공동체들의 페인주의자 그룹들은 전국적인 연계를 상실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던 지역으로 되돌아갔고, 그들의 영향력은 그 지방의 문제들과 경험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커다란 소요가 있을 때만 그들은 극히 조심스럽게 우선 지역적인, 그리고는 전국적인 연락을 가졌다. 그들의 생각은 자기 공동체의 특수성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불만의 초점들은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것이 되어갔다. 보울턴이나 리즈에서는 정치적 토론이나 청원 혹은 반란보다 빵가격을 둘러싼 스트라이크나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 더 쉬웠던 것이다. 자꼬뱅들이나 페인주의자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요구는 그 이전보다 훨씬 널리 퍼져나갔다. 당국의 탄압도 평등한 잉글랜드 공화국이라는 꿈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85-6)


"공장들은 착취의 중심지였다. 무엇보다 공장들은 근면한 장인을 '종속적인 상태'로 전락시켰다. 공동체로서는 생활방식이 위협받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기계에 대한 전모공들의 저항을 특정한 숙련노동자 집단이 자신들의 생계를 지키려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기계들은 '공장체제의 침범'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기계파괴를 사형의 중죄로 규정하려는 법안에 대해서는 심지어 그 법이 자기들의 이익을 옹호해줄 터였던 양말업자들까지도 반대했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이 기간의 러다이트 운동을 기계에 대한 맹목적인 반대로 그리는 통상적인 상은 점점 더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새로운 기계에 의해서든 공장체제에 의해서든 혹은 무제한의 경쟁, 임금삭감, 경쟁자들보다 낮은 가격 매기기, 수공업기술의 기준 무너뜨리기 등 어떤 수단에 의해서든 직종의 관습들을 파괴할 수 있는 자본가들의 '자유'였다."(150-1)


"우리가 생산물 가격이 싸졌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공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신분 하락을 초래했던 2,30년 간의 과정을 어떤 중요한 뜻으로서 '진보적'이라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러다이트 운동을 '과도기적'인 투쟁의 순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결코 부활될 수 없는 옛 관습과 온정주의적 입법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선례를 확립하기 위해 옛 권리들을 부활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합법적인 최저임금, 여성 내지 어린이들의 '고한노동'(sweating)에 대한 통제, 중재, 기계로 일자리를 잃은 숙련노동자들에게 마스터가 일자리를 제공해줄 의무, 싸구려 모조품의 금지, 공개적으로 동직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모든 요구들은 과거지향적인 만큼이나 미래지향적이었다. 즉, 공업성장이 윤리적인 우선순위에 따라 규제되어야 하고 이윤추구는 인간적인 요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54-5)


"따라서 우리는 1811~13년을 하나의 분수령, 그 물줄기 하나는 튜더시대로 거슬러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0년간의 공장법 제정을 향해 흘러가는 그런 분수령으로 보아야 한다. 러다이트 운동가들은 최후의 길드조합원들의 면모를 가짐과 동시에 10시간 운동에 이르는 운동을 시작한 최초의 사람들의 면모도 갖고 있었다. 이 두 방향 모두에는 자유방임의 정치경제와 도덕에 대항하는 대안적 정치경제와 도덕이 있었다. 산업혁명의 결정적인 수십년간 노동자들은 역사상 인간적으로 가장 비열한 도그마의 하나인 '무책임하고 무제한적인 경쟁'의 공격을 받아 죽어갔다. 10시간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1847) 〈최초로 ··· 대낮에 중간계급의 정치경제가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에 패배한〉 증거를 본 사람이 바로 맑스였다. 로포울즈 소재의 윌리엄 카트라이트의 공장을 습격했던 사람들은 혼란스런 한밤중의 대결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런 대안적인 정치경제를 천명하고 있었다."(155)


"1812년의 한 해 동안에 전통적인 계급간의 대립이 러다이트 운동의 도가니 속으로 투입되었으며, 공장주와 스콰이어가 상호간에 격렬히 적대하게 되었다. 러다이트 운동가들이 제조업자를 차례차례로 협박하는 데 성공하게 되자, 로버슨 일가에 대한 경멸이 커져갔다. 그러자 윌리엄 카트라이트가 로포울즈에서 러다이트 운동가들에게 굴하지 않음으로써 군대 장교들과 토리파 스콰이어층의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북부에서 그는 몇주 동안 웰링턴 공과 나란히 거론되는 영웅이었다. 로포울즈에서의 총격적은 대공장주들과 당국 간의 깊은 정서적 화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중간계급 신화에서 카트라이트와 로버슨은 당대의 영웅일 뿐 아니라, '못된 짓을 꾸미는 자들', 먼데에서 와서 소요를 부추기는 알 수 없는 첩자 내지 선동자들에 대한 냉혹한 추적자였다." "그러나 민중의 전승에서는, 카트라이트와 로버슨은 단지 '블러드하운드'(bloodhound, 경찰견)일 뿐이었다."(168-70)


# 스콰이어squire : 원래 봉건시대에는 기사의 종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시골의 중·대지주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메이틀런드 장군은 러다이트 운동에는 〈현실적 토대가 없었다〉고 선언했다. 메이틀런드보다 속내를 잘 모르는 관찰자들은 '사악하고 교활한 사람들'로 구성된 어떤 숨어 있는 핵심집단, 다시 말해 전체를 몰래 꼬드기는 어떤 귀족이나 중간계급 지도자들이 없는 '혁명운동'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음모자들을 찾을 수 없었을 때 의견은 정반대의 극단으로 전환했다. 지도자들이 없었더라면 혁명운동은 전혀 일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전모공들, 양말제조공들, 직조공들이 자기 자신들의 힘으로 당국을 전복시키려 시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부추김을 증명할 증거도, 음모를 증명할 증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코벳은 1812년 하원 비밀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리고 이는 내각을 아주 곤혹스럽게 할 상황이다. 그들은 결코 '선동가들'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민중들 스스로의' 운동이다.〉"(216-7)


15장 민중선동가와 순교자들


"1812년과 1813년, 그리고 1815년에 있었던 카트라이트 소령의 복음전도 여행은 대단히 중요하다. 15년 동안 전국적으로 의회개혁가들의 수중에는 버뎃이나 웨스트민스터 위원회, 또는 코벳의 『평론』지가 제공하는 것 외에는 전국적인 지도력이나 전략이 없었다. 카트라이트나 코벳은 러다이트 운동의 폭동적 국면을 혐오스럽고 무익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모두 소요가 커지고 있는 북부와 미들랜즈를 새로워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노동계급'의 급진주의 운동을 이루어내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의도는 아니었다. 실로 그는 〈빈자들을 선동해 부자들의 재산을 침해하도록 하는 온갖 시도〉에 반대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했다. 개혁에 대한 압력은 '대체로 중간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이라고 카트라이트 소령은 생각하였다. 그는 폭동으로 나타나는 불만이 입헌적 형태로 전환되기를 원했으며, 끊임없이 의회에 청원하는 일을 전국적인 운동의 기반으로 삼기를 원하였다."(229)


"런던에서는 급진주의가 분열되자, 웨스트민스터 위원회가 장인과 중간계급 개혁가들 간의 동맹 쪽으로 진로를 택했다. 웨스트민스터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프랜시스 플레이스와 그의 동료 장인들 그리고 소마스터들(그들 중에는 알렉산더 갤러웨이처럼 대고용주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은 자꼬뱅적 신념, 즉 성인남자 투표권과 제한 없는 민중의 운동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 그들은 런던의 하층민을 경멸하였고 그들의 폭동적 요소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대중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술집세계와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플레이스 자신은 벤담과 제임즈 밀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귀족 정부의 비효율성과 불합리성을 경멸하고, 곡물법이나 여타 억압적 입법에 분개하는 점에서는 급진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던 반면, 민중의 정치 운동과 조직이라는 대범한 전략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몹시 적대적이었다."(234-5)


"민중적 급진주의와 차티스트 운동은 반세기 동안 셀월과 게일 조운즈 그리고 1790년대의 자꼬뱅 '호민관'들을 괴롭혔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도덕주의'파('moral' force) 개혁가와 '실력행사'파('physical' force) 개혁가들 간의 갈등은 때로는 너무도 원론적으로 표출되는 바람에 한편으로 왓슨 박사와 시슬우드 같은 단호한 음모가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플레이스와 뱀퍼드 같은 순수한 입헌주의자들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을 수 있을 정도다. 사실상 급진주의와 차티스트 운동은 모두 이 양극단 사이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1839년 이전의 개혁가들 중 진지하게 반란을 준비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폭정에 직면해 반란에 호소할 수 있는 인민의 최후의 권리를 전적으로 거부하려 한 사람들은 더더욱 없었다. '할 수 있다면 평화롭게, 불가피할 때는 실력으로'라는 차티스트의 슬로건은 1816~20년과 1830~32년의 급진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보여준다."(249-50)


"'운명의 날'이니 '심판의 날'이니 하는 말들은 군중에게서 매우 커다란 환호를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스타일에 따르는 폐단들을 아울러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그것은 또한 실질적인 허구가 더 많은 선술집 대중선동가의 급진주의를 배양했으며, 심지어는 〈연설을 업으로 삼은〉 그리고 〈거칠기 짝이 없고, 도를 넘은 그러한 허풍을 떠는 것으로써〉 서로 군중의 갈채를 얻으려 경쟁하는 직업적인 떠돌이 연설가들을 키웠다. 전국적인 지도자들─펜을 가진 코벳과 울러, 목소리를 가진 헌트─은 반역죄에 걸려들지 않게끔 말하는 데 능숙하였다." "결국 대중선동가는 나쁜 지도자이거나 무능한 지도자였다. 헌트는 원칙들도, 잘 짜여진 급진주의적 전략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단지 운동의 정서만을 목소리에 담았다.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환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만을 얘기하려고 애쓴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군중의 가장 불안정한 층의 포로였다."(252, 258)


"실질적인 면에서, 호주투표권과 성인남자 투표권 사이의 경계선은 여러 해 동안 중간계급 개혁운동과 노동계급 개혁운동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그리고 코벳이 후자에 가담한 것은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코벳이 공식적으로 지지한, 급진주의 운동의 대안적 진로는 연로한 카트라이트 소령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트라이트의 사상은 여러가지 면에서 여전히 위빌, 그리고 소젠틀먼 개혁가들로 구성된 주 협회들의 시대에 속해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낡은 활동방식, 즉 청원과 주 회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의회의 비밀위원회가 등장했다가는 사라지고, 인신보호법의 정지가 되풀이될지 모르지만 카트라이트 소령은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당국이 자신을 투옥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연설문을 출간하고, 옛날의 헌정상의 전례와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모범적인 앵글로-쌕슨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법에 조금이라도 저촉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9267)


"올리버는 급진주의자 유다의 원형이었으며, 그의 전설적인 역할은 19세기 역사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정보원들을 고용하는 일은 러다이트 운동 시대에 비교적 큰 공업중심지들의 치안관들에게는 사실상 하나의 관행이 되어 있었으며, 1790년대 이후로는 정부 재원 일부가 그러한 비밀업무의 목적을 위해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여론에 의하면 그러한 일은 잉글랜드의 법정신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형사사건에서조차도 '사전 예방적인' 경찰 행동의 개념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국내의' 정치적 신념의 문제로 확대되었을 때 그것은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사고방식 전체에 대한 모독이었다. 『리즈 머큐리』가 프락치로서의 올리버의 역할을 폭로하자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여론을 경악케 하였다. 1871년의 잉글랜드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상점주와 농촌 스콰이어, 반국교파 목사 및 전문직업인들이 있었던 것이다."(299-300)


"올리버 사건의 장기적인 영향은 혁명적인 개혁운동파에 반대하는 입헌주의적 개혁운동파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올리버의 '개입 없이' 일어난 봉기는 중간계급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정부 편으로 만들었으며, 올리버의 '개입으로' 일어난 봉기는 휘그파와 중간계급 개혁가들로 하여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게끔 하였다. 3년 동안 주요 정치적 대결은 시민의 자유에 대한 옹호와 언론의 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중간계급 자체가 아주 민감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온건한 개혁가들과 휘그당은 지체없이 올리버가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였다. 실제로 『리즈 머큐리』는 노동계급이 위험에 노출되었던 사실들로부터 교훈을 끌어냈는데, 그것은 요컨대 노동계급이 휘그당과 중간계급 개혁가들의 지도와 보호 아래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직 피털루(1819년 8월)의 충격만이 운동의 일부를 혁명적 행로로 되돌아가게 했다."(310)


"피털루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모든 신념과 사고방식─자유언론의 권리, '페어 플레이'에 대한 희망, 무방비상태의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금기─을 짓밟았다. 한동안 과격파 급진주의자들과 온건파들은 그들의 불화를 묻어두고, 많은 휘그당원들까지도 기꺼이 항의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몇달 동안 정치적 적대감이 심화되었다. 아무도 중립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바로 맨체스터에서는 '왕당파들'이 극도의 고립상태하에 놓이게 되었고, 감리교도들만이 (역겨운 선언을 하면서) 왕당파 편에 선, 추종하는 대중을 거느린 유일한 단체였다. 그러나 피털루에 충격을 받은 젠트리와 전문직업인들이 많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동시에 '그 이상의' 거대한 민중의 시위를 조장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피털루 사건 이후의 실질적인 운동은 '복수'의 외침에서 입헌주의적 형태의 항의로 되돌아갔으며, 대체로 노동계급이 주도하고 노동계급적 성격을 띤 운동이 되었다."(336)


16장 계급의식


"1820년대는 개인 및 집단이 산업혁명의 경험과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버린 민중적 급진주의의 경험을 이론화하고자 한 시대였다. 그리하여 낡은 부패세력과 개혁세력 간에 결정적인 싸움이 벌어졌던 1820년대 말이 되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곤경에 대한 노동대중의 의식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경험과 어렵게 얻은 산만한 교육의 도움을 받아 사회조직의 어떤 상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느슨하게 정의된 '근로계급들'과 개혁되지 않은 하원 간의 전반적 투쟁의 역사의 일부로 보는 법을 배웠다. 1830년 이후로는 통상적인 맑스주의적 의미에서 좀더 뚜렷하게 규정되는 계급의식이 성숙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계급의식에 의해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오래된 싸움과 새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365-6)


"문맹이라고 해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메이휴시대의 잉글랜드에서는 발라드 가수와 '재담꾼들'이 길바닥 위나 길모퉁이에서 벌이는 익살극과 풍자적 개작시 낭독이 여전히 성업중이었는데, 그들은 그같은 풍자적 독백이나 노래를 관중의 분위기에 맞추고, 그리고 시장의 상황에 맞게 급진주의적이거나 반(反)교황적으로 각색하였다. 문맹 노동자는 설교를 들어보려고 수마일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이 급진주의 연설가의 말을 듣기 위해서도 그렇게 걸어갈 수 있었다. 정치적 열기가 끓어오른 시기에는 문맹자들은 동료들에게 정기간행물의 기사를 큰소리로 읽어달라 하곤 했다. 한편 회간에서도 뉴스가 읽혔으며 정치적 회합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연설문들을 읽고 장황한 일련의 결의문들을 통과시켰다. 열성적인 급진주의자들은 좋아하는 책들을, 자신들의 힘으로는 읽지도 못하면서, 마치 부적처럼 갖고 있으려 했다."(367)


"전후 급진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지적 수준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정치적 자각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일찍이 1816년 1월에 반즐리에서는 직조공들이 급진주의적 신문이나 정기간행물들을 사기 위한 '월 1페니 클럽'(a penny-a month club)을 조직하였다. 햄프든 클럽과 정치동맹들은 '독서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비교적 큰 중심 도시들에서는 포터리즈의 핸리에 있는 것 같은 상설 신문열람실이나 독서실을 개설하였다. 이곳에서는 욕설을 하거나 상스러운 말을 쓰거나 술에 취하면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런던의 신문들이 '공개적으로 읽혔다'." "1819년 이후의 억압조처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급진파 서적판매인의 서점에 부설되어 있는) 그러한 신문열람실을 설치하는 전통은 1820년대 전 시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런던에서는 전후에 커피하우스 붐이 일었는데, 그것들 중 대다수가 이런 이중기능을 수행하였다."(374-5)


"1792년과 1836년 사이의 투쟁에서 장인들과 노동자들은 자유로운 언론과 사상에 대한 요구에다, 가능한 한 가장 값싼 형태로 이러한 사상의 산물들을 자유롭게 보급하려는 그들 자신의 요구를 덧붙였다." "이 당시에 계몽사상가와 개량주의자들은 이성과 지식의 보급에 대한 유일한 제약은 오직 방법의 부적합에서 오는 제약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 생각되는 유추들은 흔히 기계적인 것이었다. 아동 반장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학습효과를 증폭시키려고 한 랭커스터와 벨의 교육방법은 (벨에 의하면) '도덕세계의 증기기관'이라고 불렸다. 피콕이 브룸의 '실용지식 보급협회'를 '증기지식협회'라고 부른 것은 아주 정확한 비유였다. 리처트 칼라일은 〈팸플릿 구독은 인류에게 필요한 커다란 도덕적·정치적 변화를 반드시 일으킬 것이라〉고 철석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오웬은 메시아적 혹은 기계론적 낙관주의에 입각해 선전활동에 의한 '새로운 도덕세계'의 설립을 궁리하였다."(395)


"잉글랜드에서는 적어도 1820년대 후반에 이르면 페인-칼라일의 전통─세습적인 원칙과 미개한 미신 및 유습(遺習)에 대한 타협을 모르는 적의, 개개 시민의 권리에 대한 단호한 신념─은 어딘지 귀에 거슬리고 현실적이지 못한 감이 들게 되어 있었다. '귀족을 타도하라'는 외침은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른 잉글랜드에서의 실질적인 권력구조를 감안할 때, 그리고 귀족적 특권과 상업적·공업적 부 사이의 복잡한 상호침투를 감안할 때 호소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성직자'를 고용된 특권의 옹호자로, 또한 민중을 노예로 붙잡아두기 위해 마련된 무지의 사절(使節)로 묘사하는 합리주의적 풍자는 어딘지 핵심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한 풍자문들은 여우사냥을 즐기는 시골의 교구목사나 성직자 치안관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이미 브리튼적이며 전국적인 학교들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복음운동가와 비국교파 성직자들의 귀에는 그저 스쳐지나가버릴 뿐이었다."(437)


"이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때로 칼라일은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현실을 조작하려고 하였다. 그는 새로운 도발적 언사로 자신의 박해자들을 자극하였다." "그는 스승의 견해들을 하나의 교리로 만들었다. 그는 페인의 생각들 가운데 일부(개인의 권리에 대한 이론)을 취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했다. 그리고 그가 채택한 부분을 그는 그 극단, 즉 '최극단적인' 개인주의로까지 밀고 나갔다. 개개의 시민들은 권위에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마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라일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으며, 그리고 그는 그 결과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시민은 오직 그 자신의 이성을 따를 의무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그가 속한 당파(party)와 의논하거나 그들의 판단에 따를 필요조차도 없었다. 이성의 힘만이 그가 인정한 유일한 조직자였고, 신문만이 유일한 보급매체였다."(437-8)


"언론 및 출판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결과는 코벳의 민주주의적 어조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 이론의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자세는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로크적 이데올로기의 강점은 부르주아가 대재산가'였다'는 사실에 있었으며, 국가의 통제나 간섭을 끝내라는 요구는 (그들에게는) 해방의 요구였다. 그러나 모자제조인은 별로 재산이 없었으며 그 밑의 장인들은 더욱이나 그러하였다. 국가의 규제를 없애라는 요구는 그들보다 강대한 경쟁자에게 (혹은 '시장의 힘'에) 더 폭넓은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코벳 못지않게 칼라일도 한직보유자, 벼슬아치, 세금토탈자들에 관한 악마론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마스터들을 괴롭히는 커다란 폐단은 과세라고 생각되었음에 틀림없다. 정부는 가능한 한 작아야 하고 그리고 작은 정부란 값싼 정부어야 했다. 이것은 무정부주의에 가까웠다."(440-1)


"많은 젠트리들이 실업과 비참의 정도에 경악했지만, 그들은 또한 실업자들의 폭동적 기질을 우려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농업이 전시의 번영을 상실한 시기에 구빈세는 오히려 600만 파운드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빈자는 보기 흉하며, 죄의 원천이며, 나라의 무거운 짐이며, 위험물이었다. 정치평론의 칼럼들마다 빈민법 수정에 대한 논의로 가득 찼는데, 그것들은 모두 더욱 대폭적인 경비절감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뉴 래너크에 있는 그의 광대한 사유지가 상류사회의 관광일정에 유행처럼 추가되었던) 오웬씨는 더이상 훌륭할 수는 없어 보이는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빈자들을 '협동촌'(Village of Cooperation)에 넣기를 제안하였는데, 이 협동촌에서는─세금에서 최초의 자금이 주어진 후에는─그들 '자신의 힘으로 꾸려나갈' 것이며, 또한 '쓸모있고' '근면하며' '합리적이고' 자율적이며 절제하게 될 것이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들어했다."(462-3)


"이 계획에서는 맬서스의 냄새가 났고, 또한 채드윅류의 경제적인 구빈원 구제계획을 세우고 있던 (기이하게도 '노팅엄 개혁가들'이라고 불린) 치안관들의 냉혹한 실험의 냄새가 났다. 설령 오웬 자신은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기꺼이 인정하였듯이) 매우 진지했고 또 민중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크게 마음 아파했을지라도, 그의 계획은 만일 정부가 그것을 채택하였다면 분명 그런 식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코벳에게 협동촌들은 그가 혐오한 후원과 자선으로 이루어진 '위안제도'의 냄새를 풍겼을 뿐 아니라, 이것이 1817년 당국에 의해 채택'되었더라면' 오웬의 구상은 필시 구빈원제도 내에서의 '생산적 고용'의 확대를 가져왔을 것이라는─그의 직관은 아마도 옳았던 것 같다. … 한편, 급진주의자들의 취약점은 어떠한 건설적인 사회이론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었는데, 그 대신 그들은 모든 폐단은 과세와 한직에 기인하며, 이 모든 것은 선거법 개정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었다."(463-4)


"〈··· 노동계급은 그들이 '과감하게' 노력하기만 한다면 '다른' 계급의 도움을 전혀 구할 필요가 없으며, 자체적으로 ··· 풍부한 자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오웬의 논조가 아니다. 그러나 확실이 이것은 우리가 장인들의 '정치적' 급진주의를 추적하면서 거듭 마주쳤던 논조이다. 개인주의는 그들이 지닌 세계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은 또한 상호협동의 오랜 전통─공제조합, 동직클럽, 예배당, 독서클럽 혹은 사교클럽, 교신협회 혹은 정치동맹─을 계승하고 있었다. 오웬은 이윤동기는 잘못이며 불필요하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은 관습과 공정가격에 익숙한 수공업기술자들의 감각에 잘 들어맞았다. 오웬은 또한 코벳, 칼라일, 호지스킨이 주장한 자본가의 기능은 대체로 기생적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였다. 〈적절하게 수행된 육체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다〉라는 견해는 장인이나 수공업기술자 소마스터들이 납품업자나 중간업자에 대해 품고 있는 불만과 잘 맞아떨어졌다."(473)


"1830년대의 많은 잉글랜드인들은 산업자본주의의 구조물이 부분적으로만 구축되었을 뿐, 아직 지붕이 얹히지 않은 상태라고 느꼈던 것 같다. 오웬주의는 민중이 단결하고 굳게 결심만 한다면 수년 혹은 수개월 이내에 구축할 수 있는 전혀 색다른 구조물에 대한 상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열정을 사로잡은 거대하지만 덧없는 자극의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의 눈으로는 이러한 정신을 순진한 것 혹은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학문적 우월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빈자들은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그래서 지적인 교양에 그리스와 로마의 체육을 곁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먹고 살 수도 있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전망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오웬주의와 천년왕국적인 충동을 결집한 이전의 교리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오웬주의자들에게 천년왕국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었다."(490-1)


"오웬이 정치적 급진주의에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빈번하게 환상적인 길로 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두 문제─소유권과 계급 권력에 대한─중 어느 것도 정면으로 직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협동조합 운동은 박애주의자들과 노동계급 급진주의자들의 이같은 공존상태 안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1832년에 이르면 헤더링턴, 오브라이언, 제임즈 왓슨 같은 사람들은 강조점을 아주 달리했고, 오웬이 모든 정치적 수단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오웬주의는 그들에게는 언제나 커다란 건설적인 영향력이었다. 그들은 오웬주의를 통해서 자본주의를 개별적 사건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체제'(system)로 보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예전의 세계에 대한 코벳의 향수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계획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의 그 어느 것도 주어진 것이며 불가피한 '자연'법칙의 산물로 보이지 않았다."(495)


"노동대중의 새로운 계급의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직업과 지식수준이 매우 다양한 노동자들간에 이해관계의 일치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많은 제도적 형태로 구체화되었고 1830~34년의 전국조합운동에서 전례없는 규모로 표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계급들의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것으로서의 노동계급들 혹은 '생산계급들'의 이해관계의 일치에 대한 의식이 존재했으며, 그리고 이 의식 안에서 하나의 대안적 '체제'에 대한 요구가 성숙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의식을 최종적으로 규정지은 것은, 대체로 노동계급 세력에 대한 중간계급의 반응의 결과였다. 점증하는 중간계급 개혁운동의 꽁무니를 노동계급이 뒤따르다가, 나중에 가서야 독자적인 노동계급의 운동이 뒤를 잇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우리의 예상에 반해, 실제로는 이 과정이 그 반대였다는 것이 잉글랜드 발전과정의 독특한 특징이다."(496)


"프랑스혁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현상이 동시적인 진행을 하나의 본보기로 선보인 바 있는데 그것은 토지귀족과 상업귀족 측의 공포에 사로잡힌 반혁명적 반응, 산업부르주아지측의 후퇴와 (좋게 말해서) 현상태와의 타협, 그리고 전쟁을 치르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했던 자꼬뱅 핵심부가 주로 소마스터·장인·양말제조공 그리고 전모공과 그밖의 다른 노동자들로 구성될 정도로까지 민중의 개혁운동이 급속하게 급진화한 것이었다. 1795년 이후 25년간은 긴 반혁명의 시기로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급진주의 운동은 대체로 노동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진보적인 민주적 인민주의를 그 이론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승리는 공장주, 철물업 마스터, 제조업자 들의 환영을 여간해서는 받지 못하였다. 산업부르주아지들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하여 특히 억압적이고 반평등주의적인 잉글랜드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496-8)


"1831년 가을과 '5월의 날들'에 영국은 급속하게 과격화하여 빠리 꼬뮌 같은 혁명을 겪을 뻔하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빵의 반쪽이라도 받기를 촉구한) 코벳이 대변자였던 일부 급진주의 전통의 뿌리깊은 입헌주의에 기인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위협에 맞서 국가와 재산권 모두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킬 수 있는 타협점을 정확히 제공한 중간계급 급진주의자들의 수완에 기인했다." "플레이스는 〈민중 대다수는 선거법 개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거부될 경우에는 ··· 그들 스스로의 실력행사로 개정안이 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1832년에 토리당과 휘그당 양쪽 모두를 압박한 것은 이러한' 훨씬 더 많은 것'의 위협이었으며 그것이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사회에서 변치 않는 구조가 되어온바, 토지로 된 부와 산업적 부, 특권과 돈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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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상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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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계급이란 개념에는 역사적 관계란 개념이 뒤따른다. 관계라고 하면 으레 다 마찬가지지만, 역사적 관계란 것도 우리가 만일 그것을 어느 특정 순간에 죽은 것으로 고정시켜놓고서 그 구조를 해부하려 든다면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다. 제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 사회학적 이론의 틀을 가지고서도 계급의 순수한 표본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건 또는 함께 나누어가진 것이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계급적 경험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계급의식이란 이러한 경험들이 문화적 맥락에서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7)


제1부 자유의 나무


1장 제한 없는 회원수


"'우리 회원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이것은 런던교신협회(London Corresponding Society, 1792년 창립)의 정관 제1조이다. 이 조항이야말로 역사가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환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배타성을 고수하려는 그 어떤 발상, 정치활동을 특정한 세습적 엘리뜨집단 혹은 재산소유집단의 전유물인 양 생각하는 그 어떤 발상에도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이 정관 조항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런던교신협회가 정치적 권리와 재산권을 동일시하는 케케묵은 사고방식에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으며, 또한 '폭도'들이 그 자체의 목적 추구를 위해 스스로 조직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자파 세력을 강화하고 당국의 간담을 서늘케 할 목적을 띤 파당의 단속적(斷續的)인 행동으로 치닫는 시절이었던 '윌크스와 자유' 시절의 급진주의에도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무제한의' 방식으로 선전과 선동에 문을 활짝 연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뜻하는 것이었다."(30)


# 단속적(斷續的) :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2장 크리스천과 아폴리언(Apollyon, 마왕)


"양심의 자유는 허용받았지만 '심사법 및 단체법'(Test and Corporations Acts) 때문에 공적 생활에서는 여전히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던 반국교도들은 18세기 내내 여러 시민적·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교육받은 젊은 세대 목사들 다수가 자기네의 관대한 합리적 신학을 자부하고 있었다. 박해받은 분파 특유의 깔뱅주의적 독선은 버리고 그들은 아리우스파 및 쏘치누스파 '이단'을 거쳐 유니테리언주의로 기울어졌다." "'솔직담백함'을 좋아하고 '열광'을 불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던 유니테리언파의 합리적 기독교는 런던의 일부 직종인과 상점주들 그리고 대도시의 이 비슷한 집단들 사이에서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나 농촌의 빈민들에게 이야기가 먹히기에는 이 교리는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멀고 지나치게 세련되었으며 유복한 계급의 안락한 가치들과 지나치게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다. 이 교파의 어법 및 어조 자체가 장벽이 되고 있었다."(37-41)


# 쏘치누스파 :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인간의 원죄 등을 부정한 16세기 이딸리아의 신학자 쏘치니의 교의를 따르는 일파


"일부 사람들은 공화국시절 수평파의 패배에까지 소급해서 이 이유를 찾곤 한다. 성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오리라는 천년왕국적 희망이 박살나버리자 빈민들의 청교주의(Puritanism) 내에서도 현세적 열망과 영적 열망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그어지게 되었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 전인 1654년에 이미 총회파 침례교도(General Baptist) 총단은 (그들 중의 제5왕국설 신봉자들을 겨냥하여) 자기들이 보기에는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 전까지는 〈성자들 자신이 세상의 지배권과 통치권을 그들 수중에 두어야 한다고 기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천명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는 〈어느 곳에선가 세속 정부의 지배권을 얻기보다는 ··· 참을성있게 세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성자들의 몫이었다." "이같은 물러섬─청교주의의 적극적 활력과 반국교도의 자기보존적 후퇴의 공존─에 대한 이해는 18세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42-3)


"크리스천은 현실의 세상에서 아폴리언과 싸운다. 그러나 패배와 대중적 무관심의 시절에는 빈민들의 숙명론을 강화시키면서 은둔주의가 우세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빈민들'에게 가장 충실하고자 하던 바로 그 종파들이 1750년 경에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가장 냉담하였으며, 또 기질적으로도 복음전도에 가장 미온적이었다. 반국교주의는 두 가지 대립되는 경향 사이에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이 양자는 다 어떠한 민중적 호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하나는 합리적 인도주의와 세련된 설교를 중시하는 경향으로서 빈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지적이고 품위가 있었다. 또다른 편에 있는 것은 엄격한 선민들로서 그들은 교회 외부의 사람들과는 통혼을 해서도 안되었으며, 모든 교리위반자와 이단을 내쫓으면서 지옥에 떨어지기로 예정된 '타락한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전자의 깔뱅주의는 해체되고 있었고, 후자의 깔뱅주의는 돌처럼 경직되어가고 있었다〉고 알레비는 지적한 바 있다."(49)


"산업혁명이 진행된 전기간 동안 감리교는 권위주의적 경향과 민주주의적 경향 사이의 이같은 긴장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민주적 추진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 것은 분리해나온 종파들─신종파 및 (1806년 이후에는) 초기 감리교도들─사이에서였다. 더구나 홉스봄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감리교가 전파된 곳이면 어디서나 이 교파는 기성 국교회와 손을 끊음으로써 19세기 프랑스에서 반(反)성직주의(anti-clericalism)가 해냈던 기능과 유사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단 이 긴장이 폭발하면 때에 따라 세속 지도자들은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을 도덕적 정열로 휩싸이곤 하였다. 사탄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또한 어느 계급이 사탄의 편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한, 감리교는 일종의 도덕적 내전─즉 반국교파 예배당과 선술집 간의, 사악한 자와 속죄받은 자 간의, 멸망에 빠진 자와 구원받은 자 간의 내전─을 근로인민의 운명으로 못박아 설정하였다."(66)


3장 '사탄의 요새들'


"자칫하면 산업혁명기의 민중을 교회에 등록된, 즉 예배당에 다니는 선한 자와 방종한 악한 자로 그릇되게 구분하기 쉽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사실들은 흔히 쎈세이셔널한 형태로 제시되거나, 아니면 비난하기 위한 의도에서 정리되곤 하였다." "여러 수치들은 무산자들의 실제 범죄적 행동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니겠지만, 지속적인 일자리가 없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산계급인들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유산계급 남녀들은 빈민들의 질서를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치유책으로 제시된 것들은 제각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의 추진동기는 거의 다 똑같은 것이었다. 노동빈민들에게 줄 메시지는 단순한 것으로서, 기근의 해였던 1795년에 버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인내, 노동, 절제, 절약, 그리고 종교가 그들에게 권장되어야 한다. 그외의 모든 것은 순전히 사기일 뿐이다.〉"(79-82)


"유산계급들이 보인 그같은 성향은 술집들, 정기시(定期市)들, 일체의 대규모 집회 등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권력소유자들의 타고난 경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증거를 '날조'하는 이같은 전반적인 경향은 18세기 말에 세 가지 다른 방향에서 부추겨졌다. 첫째는, 신흥 제조업자(manufacturer) 계급의 공리주의적 태도를 들 수 있다. 공장도시들에 작업규율을 부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 계급은 수많은 전통적 오락 및 기분전환거리들에 대해 적대적이 되었다. 둘째는, 자책하는 죄인들의 끝없는 행렬을 만들어내면서 인쇄소에서 신앙고백식 전기(傳記)들을 쉴 새 없이 펴내고 있던 감리교도들의 압력 자체를 들 수 있다." "세번째 요인은 운동의 첫 세대 지도자들 및 그 역사의 기록자들 가운데 몇몇은 독학한 노동자들로서, 그들은 흥청망청식의 술집세계에 등을 돌리는 자기수련의 노력에 힘입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자신들의 계층 내에서 계몽과 질서, 절제를 뿌리내리기 위한 투쟁이었다."(83-4)


"도시의 공동체에서도, 농촌의 공동체에서도 소비자의식이 다른 형태의 정치적 혹은 산업적 적대관계의 형태들보다 우선하였다. 임금이 아니라 빵가격이 민중 불만의 가장 민감한 지표였다. 장인들, 자영 수공업기술자(craftsman)들, 혹은 콘월 지방의 주석광산 노동자들(이곳에서는 '자유로운' 광부의 전통이 19세기까지 그들의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같은 집단들은 자기네 임금이 관습에 의해 혹은 그들 자신의 교섭에 의해 조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식료품을 응당 자유로운 시장에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물자부족의 시기에도 여전히 물가가 관습에 의해 조절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같은 '폭동들'은 민중의 입장에서는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지도자들은 영웅으로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폭동은 관습가격 혹은 프랑스식 '민중 지정가격'(taxation populaire)과 유사한 민중가격으로 식료품을 팔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곤 했다."(91-4)


"1780년대에 들어서면, 우리는 배후조종을 받고 있던 폭도와 혁명적 군중의 혼합체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1780년대의 민중은 그들의 무절제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야말로 왕권에 대항하는 평형추라고 여기고 있던 자유지향적 휘그파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버크는 폭동진압을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것을 비난했으며, 그런가 하면 폭스는 자기는 〈상비군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폭도의 지배를 받는 게 훨씬 낫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그 어떤 휘그파 정객도 그처럼 위험한 사회세력과 결탁할 엄두를 내지 않았으며, 또한 그 어떤 씨티 원로도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또 개혁운동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직화된 여론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하였으며, 폭도를 풀어놓는 수법을 경멸하였다. '기동성'(mobility)이라는 말은 19세기 급진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자기네의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시위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붙인 표현이었다."(104)


4장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1780년의 고든 폭동 가담자들과 1791년 버밍엄의 (군중에 맞선) '교회와 국왕'파 폭동 가담자들은 '독립', 애국심, 잉글랜드인의 '생득권' 등에 대한 견해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그들의 '생득권'을 위협하는 낯선 분자들에 맞서서 '헌법'을 수호하고 있다고 느꼈다." "폭동 가담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free-born Englishman)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을 터이다. 애국심, 민족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맹신이나 박해까지도 모두 자유라는 수사(修辭)의 옷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는 '낡은 부패세력'조차도 영국식 자유를 찬미하고 있었다. 민족적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자유가 귀족문벌파, 선동정치가 그리고 급진주의자들 모두의 표어였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규탄한 것도, 페인이 프랑스혁명을 옹호한 것도 모두 자유의 이름으로였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개시되면서부터(1793)는 애국심과 자유가 모든 엉터리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112)


"보통의 잉글랜드인의 입장은 첫째,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기보다 반反절대주의적인 것이었다. 둘째, 스스로 확고한 권리는 거의 가지지 못했지만 법률에 의해 자의적 권력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개인주의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셋째,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명예혁명이 억압에 맞서는 저항으로서의 폭동권에 대한 입헌적 선례를 제공해주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로크가 보기에 통치의 주요 목적은 국내평화의 유지와 인신 및 재산의 안전보장에 있었다. 사리사욕이나 편견에 의해 희석될 때 그같은 이론은 곧 유산계급에게 재산권의 침범자들을 처벌하는 가장 피비린내나는 법전을 인가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인신적 혹은 재산적 권리들을 침범하고 법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그런 자의적(arbitrary) 권력을 인가해주지는 않았다. 피비린내나는 형법이 관대하고(liberal) 때로는 꼼꼼하기까지 한 행정 및 법률해석과 공존한다는 역설적 상황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4-5)


"1818년 의회 위원회는 경찰부 설치를 주장하는 벤담의 제안을 〈모든 집의 모든 하인으로 하여금 주인의 행동을 살피는 스파이가 되게 하고,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 하여금 각기 다른 계급들을 정탐하게끔 만들게 될 안〉이라고 판단하였다. 토리파는 지방교구의 특권적 권리 그리고 지방 치안판사의 권한 등이 억압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고, 회그파는 국왕 혹은 정부의 권한이 증대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버뎃이나 카트라이트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 혹은 가옥보유주들의 윤번제 경비근무라는 이념을 더 좋게 평가하였다. 그런가 하면 급진적 민중은 차티스트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경찰도 억압의 기구로 여겼다." "중앙권력의 그 어떤 권한 증가도 증오하는 이같은 태도 속에서 우리는 지방자치를 고수하려는 방어적 입장, 휘그적 이론, 그리고 민중적 저항의 기묘한 혼합을 보고 있다. 젠트리층과 일반민중 모두 지방적 권리와 관습들을 소중히 여겼다."(117-8)


"그러나 우리는 우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20년 동안 종래의 헌법상의 절차들에 새로운 차원이 '실제로' 부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이미 국왕과 상하 양원으로부터 독립된, 불특정한 권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은 또한 강령단체(platform)─다소 제한된 목표를 위해 선전활동을 벌이며 출판물, 대규모 집회, 청원 등을 이용하여 '장외에서' 여론을 불러일으키던 '재야' 압력집단─가 대두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윌버포스나 위빌로서는 자기들의 선동을 젠트리 혹은 자유토지보호자(freeholder)들에게 국한시키고자 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를 통해 선례들이 확립되었으며, 이 실제 사례들은 광범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헌법의 복잡한 장치에 새로운 톱니바퀴가 추가되었다. 어스킨과 위빌은 견제와 균형이라고 하는 잘 알려진 공학적 비유법을 사용하면서, 〈인민의 운동에서 시계의 작동과 같은 규칙성〉을 요구하였다."(121)


"프랑스혁명은 좀더 원대한 성격의 선례를 마련해주었다. 이성의 빛에 의해, 그리고 '빈약하고 진부하고 소름끼치는 관습, 법률법규의 방식들'을 그늘 속으로 던져넣은 근본 원칙들에 입각하여 작성된 새로운 헌법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입헌주의적 논거의 지반을 처음으로 대폭 제거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페인이 아니라 버크였다." "버크는 전통에 대한 숭상으로 헌법에 대한 숭상을 보완하였다." "버크에게 크나큰 우려를 안겨준 것은 부패한 귀족층의 도덕적 본성이라기보다 오히려 민중의, 곧 '돼지 같은 떼거리'의 본성이었다. 버크는 역사를 하나의 '자연의 과정', 곧 너무나 복잡하고 꾸물거림이 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혁신도 늘 예기치 못한 위험들로 가득 찰 수 밖에 없게 되는 그러한 과정으로 파악했다. 페인은 버크의 경고를 무시한 점에서는 잘못이었을지 몰라도 버크의 특수한 논지에 가로놓여 있는 계급적 이해관계의 관성을 폭로한 점에서는 옳았다."(127-8)


"페인의 『인간의 권리』는 잉글랜드 노동계급 운동의 원천을 이루는 저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의 논거와 어조를 좀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 책을 쓸 때 페인은 이미 15년 가까이나 되는 세월을 실험과 입헌주의적 우상파괴의 팔팔한 풍토 속에서 살아온, 국제적 명성을 지닌 미국인이었다. 그는 제2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잉글랜드의 관례와는 다른 사고방식 및 표현방식으로 씌어진 한 저작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입헌주의적 논거의 틀을 초두부터 거부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문서에 씌어진 죽은 자의 권위에 의해 이 권리들이 상속되지 못하고 통제되고 흥정거리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싸운다.〉 버크는 〈후손의 권리를 곰팡내나는 양피지 문서의 권위에 영원히 의탁할 것〉을 바랐던 반면, 페인은 각각의 세대마다 자신의 뭇 권리와 정부형태를 새로이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0)


"대의제 기관들에 대한, 이성의 힘에 대한, (페인의 말을 빌리자면) 일반민중 사이에 〈잠자는 상태로 누워 있는 지각(知覺)의 덩이〉에 대한, 그리고 〈인간은 정부에 의해 타락하지 않는 한 천성적으로 인간의 벗이며, 인간본성은 그 자체로서 사악한 것이 아니다〉라는 믿음에 대한 무한한 신뢰야말로 페인의 낙관주의를 지탱하는 전제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전통 및 교육기관들에 대한 독학한 사람 특유의 불신(〈그는 자기 자신의 서술은 송두리째 외우고 있었으며 그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것이 페인을 잘 아는 한 사람의 평이었다)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경험주의를 단도직입적으로 밀고 나아가고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복잡한 이론문제들을 회피해버리려고 하는 경향을 드러내면서, 비타협적이고 당돌하고 심지어 독단적이기까지 한 어조로 표현되고 있었다. 19세기 노동계급의 급진주의에서는 이같은 낙관주의의 강점과 약점이 모두 몇번씩이고 되풀이하여 나타났다."(136-7)


"페인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모든 세습적 영예와 특권들의 철폐를 바라고 있었으나, 경제적 평등 실현을 지지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시민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반면 경제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은 당연히 고용주 혹은 피고용자로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국가는 한쪽 편의 자본문제나 다른 쪽 편의 임금문제에 간여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권리』와 『국부론』은 서로를 보완하고 장려해주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또한 19세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주된 전통은 페인으로부터 그 특징을 취하고 있었다. 오웬파의 영향 및 차티스트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다른 전통들이 우세한 적도 몇번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한번씩 퇴조를 겪고 나서 보면 언제나, 저류에 흐르는 페인주의적 주장들은 손상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곤 하였다. 1880년대까지 노동계급의 급진주의는 대체로 이 테두리 내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137-8)


5장 자유의 나무를 심기


"1792년 초에만 하더라도 영국 수상 피트는 확신을 가지고 '15년간'의 평화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6개월이 더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영국이 중립을 유지하면서 프랑스에서의 소란한 사태로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1792년 5월의 포고령은 페인주의 선전의 확산에 대해 정부측이 최초의 심각한 우려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도 순전히 국내적인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세 가지 요인이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그 첫째는 9월학살 이후 프랑스혁명이 급속도로 과격해진 것이다. 두번째는 신생공화국의 팽창주의적 열기로 인해 영국의 이익과 유럽의 외교적 균형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된 일이다. 세번째로는 프랑스의 혁명적 열기와 국내의 성장하는 자꼬뱅운동이 합류할 위험스러운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개혁운동가 위빌은 〈인민 가운데 최하층계급들에게 폭력과 불의의 행위를 선동하는〉 경향이 있는 페인의 〈유해한 영향〉을 개탄하였다."(151-2, 156)


# 9월학살 : 1792년 9월 2~6일 파리에서 급진파가 왕당파를 비롯한 수감자들을 학살한 사건


"국내의 탄압은 물론이요, 나라 밖 사태들도 잉글랜드 자꼬뱅들의 활동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였다. 처음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던 대(對)프랑스전쟁이 민중들 사이에서 전통 깊은 반프랑스적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음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아주 상세하게 보도가 되곤 하였던 새로운 처형사건들(9월학살, 국왕과 마리 앙뚜아네뜨의 처형)도 하나하나가 다 이같은 감정을 부채질하였다. 1793년 9월에는 페인의 친구들인 지롱드파가 국민공회로부터 밀려나고 그 지도자들이 단두대로 보내졌으며, 이 해 마지막 주에는 페인 자신도 뤽쌍부르 궁에 유폐되었다. 이같은 경험들은 지나치게 열렬하고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으로 자기네 신념을 프랑스의 대의명분과 동일시하였던 지식인세대에 저 깊디깊은 환멸의 첫 단계를 초래하였다. 1792년에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지식인 개혁운동가들과 평민 개혁운동가들 사이의 통합은 결코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162-3)


"민중단체들은 그들에게 닥친 이 첫번째 폭풍우를 이겨냈다. 그러나 시련을 거치는 가운데 이들 단체는 강조점과 어조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페인의 이름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그의 공공연한 공화주의적 어조도 헌법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새로운 강조점에 밀려났다. (런던교신협회는 이를 1688년 협정의 맥락에서 규정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같은 수정은 이 테두리를 벗어나는 그 어떤 수사적 용어도 고발대상으로 삼겠다는 당국의 명백한 의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을 뿐이며 다른 면에서는 박해로 인해 협회들은 오히려 급진화되었다." "1793년에 단체들에 가입해 있던 개혁운동가들의 대다수는 이제 장인, 임금노동자, 소마스터 및 소직종인(small tradesman) 등이었다. 그리고 이제 두 개의 새로운 테마가 아주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경제적 불만 및 사회적 치유책이 그 한가지이고, 조직 몇 연설 형태에서 프랑스의 선례를 모방하는 것이 다른 한가지이다."(174)


"당국의 곤경은 입헌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생겨났다. 지방의 치안관이 즉결심판을 내리는 데 필요한 법은 충분히 있었지만, 중앙의 사법관리들은 중요한 사안의 기소에 관해서는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치안교란에 관한 법률은 내용이 모호했으며, 그래서 검찰총장은 대역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기소해야 할지 치안교란적인 중상모략 행위라는 비교적 가벼운 죄목으로 고발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에서 정부는 모호한 법률, 배심제도(대니얼 이튼을 두 번, 토머스 워커를 한 번 무죄방면하여 당국에 굴욕을 안겨주었다), 토머스 어스킨(그는 여러 차례의 재판에서 변론을 폈다) 같은 뛰어난 변호인들을 포함하는 비록 소수이지만 쟁쟁한 폭스파 야당세력, 입헌주의적 어법이 그야말로 체질적으로 배어 있어 개인적 자유가 침해받는다 하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튀어일어나 방어할 태세가 되어 있는 공공여론 등 일련의 장애에 부딪혔다."(175-6)


"잉글랜드 자꼬뱅들은 지금까지 인정되어온 것보다 수적으로 더 많고, 프랑스혁명을 만들어낸 '평민대중'과 더 비슷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프랑스) 자꼬뱅을 닮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열광적인 평등주의로 1793~94년 로베스삐에르의 혁명적 독재를 떠받쳐주었던 저 빠리'구'(區, section)의 쌍-뀔로뜨들과 더 비슷하다." "공화력 2년 빠리에서도 그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화공들은 항상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이 장인들은 페인의 교리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곧 그것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군주정, 귀족정, 국가 및 세금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열광의 시대에 이들 제화공들은 한편으로는 수천명의 소상점주, 인쇄공 및 서적판매상, 의료인, 교사, 판화공, 소마스터 및 반국교파 성직자들의 지지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짐꾼, 석탄운반부, (막)노동자, 육군병사와 수병들의 지지를 모아들인 저 운동의 단단한 핵심세력이었다."(221-2)


"1797년에 이르면 초강경파 자꼬뱅들 가운데 일부는 입헌주의 운동에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걸지 못하게 되었음이 명백하다. 이때부터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런던의 민주주의자들 중에는 쿠데타─아마도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을─외에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지 않는 (스펜스주의자 내지 공화파) 소수집단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진지했지만, 그들식의 음모결사는 당대의 일반적인 추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생경함을 띠고 있었으며, 추상적인 공화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오코일리의 처형, 아일랜드 반란의 진압, 그리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의 지도적 인물들의 체포 등과 아울러 비밀결사 음모는 더이상 '전국적' 존재기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이같은 지하조직이 존재했던 경우라 하더라도 이들 조직은 고립되어 시들어버리거나 아니면 그 자체의 공업적 상황에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45-6)


"혁명적 충동은 아주 초기에 질식당해버렸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결과는 쓰라림과 절망이었다. 지배계급의 반혁명적 공포는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곧 동직조합, 민중의 교육, 민중의 스포츠와 풍속, 민중의 출판물과 단체들, 그리고 민중의 정치적 권리 등에 대한 태도에서 표현되고 있다." "잉글랜드는 반혁명적 감정 및 규율의 밀물이 산업혁명의 밀물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였다는 점에서 유럽이 다른 나라들과 구분된다. 새로운 기술과 공업조직의 형태들이 발전할수록 정치적·사회적 권리들은 후퇴하였다. 조급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산업부르주아지와 막 형성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자연스러운' 동맹은 성립하자마자 깨져버렸다." "이 두 세력이 행동의 일치를 보인 것은 1792년의 몇달 동안 뿐이었다." "1790년대 잉글랜드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감리교 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졌던 유일한 동맹이 와해되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251-2)


제2부 아담에 대한 저주


6장 착취


"1790년대의 모든 급진적인 현상들은 1815년 이후에는 거의 열 배로 재생산되었다. 몇개 안되던 자꼬뱅 신문들은 20여 개의 초급진적이고 오웬주의적인 정기간행물들을 낳았다. 대니얼 이튼이 페인의 책을 출판한 죄로 구금당했다면, 리처드 칼라일과 그를 따르는 노동자들은 동일한 죄로 도합 200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교신협회가 20여 개의 도시에서 불안정하게 유지되었던 데 반해, 전쟁 이후 햄프든 클럽과 정치동맹들은 작은 공업 촌락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운동이 면직공업에서 큼직한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발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양자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면방직공장은 더욱 많은 상품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그 자체를 생산해낸, 산업혁명만이 아닌 사회혁명의 주역으로도 간주된다. 요컨대 어떤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무엇을 설명해주는 말이 된 것이다."(268-9)


"확실히 면직공업은 산업혁명의 선도공업이었고 면방직공장은 공장제도의 탁월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성장의 역학과 사회적·문화적 삶의 역학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아주 직접적으로 일치된다고 상정해서는 안된다. (1780년경의) 면방직공장의 '비약적인 발전' 이후의 반세기 동안에도 공장노동자는 면직공업에 종사하는 성인노동자 중에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830년대 초에 면수직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면직, 모직, 견직 방적공장과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남녀 노동자보다도 여전히 그 수가 더 많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1830년대에도, 성인남자 면방적공은 그 실체가 도무지 잡히지 않는 이른바 전형적인 '평균 노동자'(average working man)가 아니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면방직공장의 새로움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노동계급 공동체(working-class community)들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정치적·문화적 전통의 연속성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2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두드러진 사실은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이것은 첫째, 계급의식의 성장에서, 즉 이 다양한 모든 노동대중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하고 타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의식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둘째,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산업적 조직형태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1832년에 이르면 토대가 굳건하고 자기의식적인 노동계급의 제도들─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 및 종교 운동, 정치조직, 정기간행물들─노동계급의 지적 전통, 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패턴, 노동계급의 감정구조가 있었다." "노동계급의 형성은 공장제도의 자동생산물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변화하는 생산관계와 노동조건들은 원료에 작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그러니까 페인이 버리고 떠났으며 또 감리교도들이 그 틀을 만들어낸 바로 그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에게 작용하였다."(272-3)


"결국, 노동계급의 의식과 제도를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증기기관 못지않게 정치적 맥락이었다." "프랑스를 보고 놀라 전쟁의 애국적인 열정에 휩싸인 귀족과 제조업자들은 제휴하였다. 잉글랜드의 구체제는 국정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나날이 번성해가는 공업도시들을 잘못 통치해온 낡은 단체들을 온존시킴으로 해서 새롭게 수명을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 협력의 대가로 제조업자들은 중요한 양보를 얻어냈다. 그것들은 도제제도, 임금규제, 공업에서의 노동조건들을 다루어온 '온정주의'적인 법률들의 취소 내지 철폐였다. 귀족들은 민중의 자꼬뱅적 '음모'를 탄압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제조업자들은 임금상승을 위한 '음모'를 무산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새로운 것은 이러한 사태가 프랑스혁명과 함께, 점증하는 의식화와 더욱 광범위해진 욕구와 함께, (런던과 공업지구의) 인구증가와 함께, 그리고 더욱 지독하고 더욱 노골적인 형태의 경제적 착취 등과 함께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276-7)


7장 농업노동자들


"인클로우저를 지지하던 자들은 흔히 에이커당 생산성과 지대가치가 높아졌다는 말로 그들의 주장을 대신한다. 그러나 모든 마을에서 인클로우저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해서 겨우 먹고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를 파괴하였다. 자기의 권리에 대한 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영세농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인클로우저는 (그것에 대한 온갖 궤변적인 수식어들을 그대로 용인하는 경우) 재산 소유자들과 법률가들의 의회가 제정한 재산에 관한 공정한 규칙과 법에 따라 행해진 계급적 강탈행위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인클로우저는 자본주의적 재산관계 면에서는 '지극히 적절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촌락의 관습과 권리라는 전통적인 외피를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인클로우저의 사회적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재산 개념을 촌락에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부과한 데 있었다." "실로, 인클로우저는 농업적 생산수단에 대한 인간의 관습적인 관례들을 파괴한 수백년에 걸친 긴 과정의 정점이었다."(301-3)


"이렇게 지주와 농장주들의 부가 증가하고 있을 때, 노동자가 지독한 생계수준에서 허덕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대답을 이 시대 전체에 걸친 전반적인 반혁명적 분위기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임금을 낮추기 위해 전쟁을 희망한다'는 것은 1790년대 북부지방 일부 젠트리의 구호였다. 전쟁은 도시의 개혁가들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위빌이 대표하는 인도주의적인 젠트리의 쇠퇴도 가져왔다. 전반적인 인클로우저의 원인이 탐욕이라는 주장에 덧붙여 하나의 새로운 주장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주장이다. '지나간 시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긴 유산'인 공유지는 이제 무질서의 위험한 온상으로 간주되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데올로기가 덧붙여진 것이다. 젠틀먼이 영세농들을 공유지에서 제거하고, 그들의 노동자들을 예속상태로 떨어뜨리고, 부수적 소득을 깎아내리고, 소토지보유농을 쫓아내는 것이 공적인 성격을 지닌 정책사항이 되었다."(306-7)


"인클로우저─특히 전쟁기간 중의 남부와 동부 경작지에서의─는 전반적인 농촌인구의 감소를 초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은─물결치듯 마을에서 도시로, 그리고 주에서 주로─이주하였지만 전반적인 인구증가는 감소된 인구를 메우고도 남았다. 전쟁이 끝나 곡가가 하락하고 그래서 농장주들이 더이상 〈우리의 젊은이들을 육군이나 해군에 내보낼 수 없게 되자〉(이는 지방의 치안관 수중에 있던 편리한 징계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잉여인구' 문제를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1834년 신빈민법이 시행된 이후에, 여러 촌락에서 떠들어댄 이러한 '잉여'는 허위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촌락에서 노동의 대가는 대부분 구빈세로 충당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며칠 혹은 반나절만 고용되었다가 교구로 되돌려졌다. 우천시에는 노동자들이 '남아돌고' 추수 때는 '모자랐다'." "이 시스템은 자신의 임금이나 노동생활에 대해 노동자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통제력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313-4)


8장 장인과 그밖의 노동자들


"19세기 초, 숙련된 수공업기술자의 임금은 흔히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관습'이라는 관념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관습적인 임금규정은 농촌 수공업기술자들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된 신분으로부터 대도시에서 시행되던 복잡한 제도적 규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고려대상에 넣고 있었다." "농촌의 수공업기술자들은 대개 교육수준이 높고 다재다능하였으며, 그들이 (자신의 관습을 가지고) 도시에 가서 도시노동자들과 접촉했을 때 도시노동자들─직조공, 양말제조공 혹은 광부─보다는 자기들이 '훨씬 높다'고 느끼고 있었다." "수공업기술직이라는 관습적인 전통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공정'가격과 '정당한' 임금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유지되고 있었다.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범주들 즉 생계, 자존심, 일정한 수준의 솜씨에 대한 자부심, 기술의 등급에 따른 관습적인 보수 등은 초기의 동직조합 분규에 있어서 순전히 '경제적'인 요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구들이었다."(329-31)


"그런데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시기에 숙련기술을 지닌 장인을 가리킬 때 '귀족'(aristocracy)이라는 용어를 일찍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노동귀족'(labour aristocracy)이라는 현상은 흔히 1850년대와 1860년대에 활발했던 숙련공들의 노동조합주의에 수반되거나─심지어는 제국주의의 결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1800~1850년 시기에 노동귀족이라고 할 만한 신·구 엘리뜨 노동자가 있었다. 구엘리뜨는 자기 스스로를 마스터, 상점주, 전문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다'고 생각하던 장인 마스터(master-artisan)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부 공업에서 수공업기술자의 특권적 지위는 관습의 힘을 통해서, 혹은 결사와 도제직의 규제를 통해서, 혹은 수공업이 고도로 숙련되고 전문화된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사치품 제조 부문 같은─작업장과 공장생산에서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새로운 엘리뜨는 철강업, 금속기계작업, 제조공업에서의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등장했다."(332-3)


"장인과 (막)노동자 간의 구별─신분, 조직 그리고 금전적인 보수에 있어서─은 나볼레옹전쟁 기간보다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헨리 메이휴가 묘사한 1840년대와 1850년대의 런던에서도 엄청나게 심했다. 〈런던 서쪽 끝의 숙련된 직공들로부터 동부지구의 미숙련노동자들에게로 옮겨가보면, 도덕적 그리고 지적 변화가 너무도 커서 우리는 마치 새로운 땅에 들어온 것과 같은, 그리고 다른 종족 속에 끼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고 메이휴는 말했다. 남부지방에서 공제조합 회원 규모가 가장 크고, 동직조합 조직이 아주 지속적이고 안정되어 있으며, 교육 및 종교 운동이 번창하고, 오웬주의가 굳게 뿌리를 내린 것은 바로 장인들 사이에서였다." "그런데 자신의 수공업과 동직조합의 보호가 박탈될 경우, 장인은 메이휴시대의 런던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가난에 찌든 숙련직인들은 (부랑자들과는 전혀 다른 계급이었기에) 마지막 절망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구빈원으로 향했다."(337-8)


"우리가 낡은 기술이 쇠퇴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과정을 고찰할 때, 낡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이 거의 언제나 각기 다른 사람들의 차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19세기 전반의 제조업자들은 매번 기술혁신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러한 기술혁신은 성인남자 수공업기술자를 여자나 미성년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낡은 기술이 과거와 마찬가지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높은 기술을 요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었을 경우에도, 우리는 동일한 노동자들이 이전 기술에서 다음 기술로 혹은 가내생산에서 공장생산으로 이전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기계와 기술혁신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불안정성과 적대감은, 단지 편견과 (그당시 당국이 주장하는 대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장인들은 새로운 기계가 그들의 자식이나 다른 사람의 자식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에게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346-7)


"선대제 노동자와 장인 모두에 관련된 몇가지 일반적인 사항이 있다. 첫째, 직조공이나 〈싸구려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기계화 과정에 의해 대체된 재래식 직종 몰락의 본보기〉로서 설명해치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임금이 최저수준이었던 것은 공장노동자가 아니라, 그 전통과 방법이 18세기에 속했던 가내노동자들이었다〉라는 경멸조의 진술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 같은 진술들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산업혁명의 진정한 추진력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즉, 그들은 '낡은' 전(前)공업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고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의 진정한 면모는 증기기관, 공장노동자, 그리고 고기를 먹는 엔지니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780년~1830년 사이에 선대제 노동을 이용하는 공업에 고용된 사람의 수는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종종 '증기기관과 공장이 선대제 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킨 주범이었다.'"(362-3)


"농업노동자들이 토지를 갈망했다면, 장인들은 '독립'을 염원했다. 이러한 염원은 초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역사 도처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런던에서 소마스터가 되는 꿈(1790년대에 여전히 강했고, 버밍엄에서는 1830년대에도 여전히 강했던 꿈이다)은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자택' 혹은 '다락방' 마스터들이 겪은 경험─즉, 일주일 내내 기성품 도매상이나 기성품 제조업체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독립'─에 직면했을 때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것은 1820년대 말에 오웬주의에 대한 지지의 물결이 왜 갑자기 높아졌는가를 설명해준다. 동직조합의 전통들과 독립에 대한 갈망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 즉 '집단적' 독립이라는 사상 속에서 하나로 엮여졌다. 오웬주의적 실험이 대부분 실패했을 때에도 런던의 장인은 자신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런던에서 태어난 장인들은 공장의 작업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일개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364-5)


9장 직조공들


"직조공들의 처지를 악화시킨 원인을 역직기에만 돌린다면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직조공의 직위는 1813년에 이르면 이미 산산이 무너져내려가 있었는데, 이때 영국의 역직기는 총 2,400대로 추산되었고 손과 동력 간의 경쟁은 대체로 심리적인 것이었다." "기계의 발명과 직조업에 대한 자본 투자를 '지연시킨' 것은 오히려 수직기 노동이 남아 돌아가고 값쌌기 때문이다. 직조공들의 신분하락은 지체가 낮은 장인 직종 노동자들의 경우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의 처지는 그들의 임금이 낮아질 때마다 점점 더 무방비상태로 되어갔다. 직조공들은 이제 더 적은 돈을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더 오래 일해야 했고, 더 오래 일을 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이 실직되는 기회를 증가시켰다.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신봉자들조차도 아연실색하였다. 〈애덤 스미스 박사가 그와 같은 사태를 생각해보기나 했을까?〉라고 한 인도주의적인 고용주는 외쳤는데, 그의 고결한 사업방식은 그 자신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389)


"직조공들은 도시의 장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황금기'에 대한 기억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만큼 신분적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장인보다도 더 뿌리깊은 사회적 평등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호시절에 그들의 생활방식은 지역공동체에 의해 공유되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도 지역공동체 전체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위가 매우 낮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경제적·사회적 보호장벽을 쳐야 할 그들보다 낮은 미숙련공이나 일용노동자들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들의 저항─그 저항이 오웬의 언어로 표현되든 성경적인 언어로 표현되든 상관없이─은 각별한 도덕적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파당적인 이익에 호소하기보다는 기본권과 인간의 우애와 행동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들에 호소했다." "그들의 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즉 그들이 생산한 것을 마스터와 중간업자들에 의한 왜곡 없이 교환하는 독립적 소생산자의 공동체였다."(410-1)


"직조공들의 공장제 반대에는 그들의 지역공동체의 '가치체계'가 담겨 있다. 우리는 1830년대의 잉글랜드에서 서로 다른 전통과 규범과 기대를 가지고 서로 충돌하는 공장, 직조, 농촌의 공동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다원사회'(plural society)를 볼 수 있다. 1815년에서 1840년까지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앞의 둘(즉, 공장과 직조 공동체들)이 공통의 정치운동(급진주의, 1832년의 개혁, 오웬주의, 10시간 운동, 차티스트 운동)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이야기이다. 반면, 차티스트 운동의 마지막 단계는 부분적으로 이 양자가 불편한 공존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침내는 결렬되는 이야기이다. 수직공들이 장인들과 여러 전통을 공유하고 그들과 통혼하고, 자녀들을 일찍부터 공장에 보냈던 맨체스터나 리즈 같은 대도시에서는 양자간의 차이가 가장 적게 나타났다. 고지대에 있는 직조업 촌락의 지역공동체들은 훨씬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도회지 사람들'─온통 '쓰레기조각과 부글대는 것들'로 이루어진─을 경멸하였다."(428-9)


"입법부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경제적 힘들이 사회의 일부 사람들을 해쳐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낡은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아직도 온존되고 있는 자유의 신화이다. 역직기는 국가와 고용주 모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입증해주는 확고한 알리바이를 마련해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직조공들의 이야기를 또한 산업혁명기에 벌어진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직조공의 역사에서 우리는 노동조합이라는 자체 방어수단을 가지지 못한 일부 노동자들에게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가 행한 행동의 하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정부는 그들의 정치조직과 노동조합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일랜드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뻔뻔스러운 방법으로 자본의 자유라는 부정적 도그마를 직조공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러한 도그마의 유령은 오늘날까지도 떠돌아다닌다."(434)


"일부 경제사가들은 (아마도 인간의 진보를 경제성장과 동일시하는 숨겨진 '진보주의' 때문에) 산업혁명기의 기술혁신이 철도시대 이전까지는 (금속공업을 제외하고는) 성인 숙련노동을 일자리에서 쫓아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쫓겨난 노동은 이 시대 내내 넘쳐흐른, 순전히 인간의 근육만을 사용하는 고된 작업에 값싼 노동력을 무한정 공급하였다. 광산, 부두, 벽돌 쌓는 작업, 가스작업, 건축, 운하 및 철도 건설, 짐마차 운반과 인력 운반 등에서는 기계화가 거의 혹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외적인 것은 숙련을 요하는 직종들이고, 그래서 미숙련 육체노동이나 선대제 노동 공업들의 상태는 '특별히 불행했던 것'이기는커녕, 온갖 방법으로 임금을 깎아내리기 위해 고용주들과 입법자들과 이데올로그들이 고안해낸 한 체제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노동조건들이 급속이 악화되어가고 있을 때 직물업이 과잉공급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으로 확인시켜준다."(435)


10장 생활수준과 실제의 경험들


"산업혁명기 민중의 식생활에 관한 논의는 곡물, 육류, 감자, 맥주, 설탕 및 차 소비를 주로 문제삼는다. 이 모든 것들은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기록이다. 50년에 걸친 산업혁명기에, 국민생산 가운데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몫이 재산소유계급과 전문직업인 계급이 차지하는 몫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국부(national wealth)가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를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고, 또 그 자신의 노동산물임이 분명한 국부의 대부분이 역시 분명한 방식으로 고용주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 '평균' 노동자는 최저생계 수준에 아주 가까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그것은 생활수준의 저하와 다름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경제적 진보의 혜택' 가운데서 그가 차지한 몫은 고작 더 많은 감자, 그의 가족을 위한 몇 벌의 면직의류, 비누와 초, 약간의 차와 설탕, 그리고 『경제사평론』에 실린 그 엄청난 수의 논문들뿐이었다."(442)


"슬럼가, 악취가 풍기는 강물, 자연파괴, 형편없는 건축물 등은 모두가 높은 인구 압력 아래서 계획도 사전경험도 없는 가운데 급속히 그리고 무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모두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가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 〈흔히 빈곤의 원인은 탐욕이라기보다는 무지였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명백히 양자 모두가 원인이었다. 그런 주장은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한데, 즉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의사들과 위생개혁가들, 벤담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재산소유자들의 타성과 '값싼 정부'를 외치는 납세자들의 선동에 대항하여 개량을 위한 끈질긴 싸움을 계속하던 1830년대 혹은 184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하다. 이 시기에 이르면 노동자들은 사실상 악취가 나는 '별개의 지역들'(enclave, 다른 나라 땅으로 둘러싸인 영토)에 격리되어 있었고, 중간계급들은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편리할 만큼 그 지역과 멀리 떨어짐으로써 공업도시에 대한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냈다."(446)


"인구학자들은 인구폭발의 주요 원인으로 사망률 감소보다는 출생률 증가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이 가외수입을 얻거나 구호금을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많은 자식들을 가지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출생률의 증가는 지역공동체와 전통적인 가족생활 패턴의 파괴(스피넘랜드 제도와 공장은 조혼과 '무분별한' 결혼을 금지해온 터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주인집에서 먹고 자는 농장의 하인과 도제 수의 감소, 전쟁의 영향, 신도시로의 인구집중, 심지어는 다산형질의 유전학적인 선택 등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출생률의 증가를 생활수준 향상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무분별한' 자들이 가족수가 가장 많았다는 것은 19세기 초반의 관찰자들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테마였고, 한편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농민의 결혼패턴 전체가 바뀐 것은 대기근의 뼈저린 경험을 겪고나서부터였다."(449)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인도주의적인 대의명분을 어느정도 지지했던 수십명의 젠틀먼과 전문직업인들은, 1820년대에는 인구가 밀집된 제조업지역의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들이 사는 집의 대문에서 불과 100~200야드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폐들을 알지 못했다. 어린이노동을 하는 소녀들이 반벌거숭이 상태로 갱도에서 나왔을 때, 허더스필드 지역의 유지들은 참으로 놀랐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악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알려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가난이 스스로 들고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난을 지켜보면서도 어느 정도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를 잊어버린다.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부자들의 눈에 공장의 어린이들은 '바쁘고' '부지런하고' '유용했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정원과 과수원 밖에 머물러 있었고 또 값이 쌌다.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가책은 대개 종교적인 반성이 잠재울 수 있었다."(472-3)


11장 개조하는 힘을 지닌 십자가


"나뽈레옹전쟁 기간에 감리교 신도의 수는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 전쟁 기간은 또한 모든 비국교 교파 사이에서 (알레비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적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이 퇴조하는〉 시기였다. 전쟁 기간 중의 감리교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특히 놀랍다. 첫째, 새로운 공업 노동계급 사이에서 그 수가 가장 많이 늘었다. 둘째, 웨즐리 사망 후 몇년 사이에 목사들의 새로운 관료화가 강화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들의 복종심을 조작하는 것과 교회의 권위를 모욕할 수 있는 모든 일탈현상의 출현을 제재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여겼다. 이 점에서 그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수세기 동안 복종의 의무를 빈민들에게 설교해온 것은 국교회였다. 그러나 국교회는 빈민들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도들, 적어도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분명히' 빈민이었다. 감리교 지방설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누가 말했듯이) 〈나의 제니 방적기 뒤에서〉 연설문안을 궁리하던 미천한 사람들이었다."(484-5)


"감리교가 일요학교를 통해 최소한 어린이와 성인에게 기초교육을 실시했던 점을 상기하면 우리는 흔히 감리교의 죄악을 어느 정도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다 큰 채탄부 녀석들과 그들의 누이들이' 또 위틀, 보울러, 점보 및 화이트 모스에서 온 직조공과 노동자의 아이들이 다니는 1790년대 말 미들턴 학교의 행복한 정경을 그린 뱀퍼드의 그림을 때때로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정통 웨즐리파를 주도한) 제비즈 번팅이 용서할 수 없었던 초기 감리교도들의 느슨함을 보여주는 바로 '이러한' 정경이다. 그는 1808년 셰필드의 목사로 재직시 일요학교의 아동들이 '글쓰기'를 배우고 있는 것을 목도했을 때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안식일의 끔찍스런 악용'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부당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어린아이들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은 '영적인 선행'이지만, 글쓰기는 그로부터 '세속적 이익'이 생길 수도 있는 '세속적인 기교'였기 때문이다."(488-9)


"우리는 번팅과 그의 동료들에게서 그들이 어린이노동을 용인한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기형적 신체와 짝을 이루는 그들 자신의 기형적 감각을 보게 된다. 공업중심지(1804~15년의 맨체스터, 리버풀, 셰필드, 핼리팩스, 리즈)에서 그가 초기 목사직을 수행할 때의 수많은 통신문을 살펴보면 끊임없는 교파간의 사소한 분쟁과 도덕적인 속임수와 또 젊은 여성의 개인적 품행에 관한 시시콜콜한 신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중에도 번팅이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 하나 산업주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단 한번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젊은 감리교 지도자들은 태만으로 어린이노동이라는 범행에 공모하는 죄만 지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빈민들에게 복종이란 활성분(活性分)을 주입시킴으로써 빈민들을 내부에서부터 약화시켰다. 그리고서 그들은 기업가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업규율이라는 심리적 성분의 조성에 가장 적합한 요소들을 감리교 안에서 길러냈던 것이다."(489-90)


"감리교는 어떻게 해서 이렇듯 놀라운 활력을 가지고 이 이중의 직분─부르주아의 종교이자 프롤레타리아의 종교라는─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앤드류 유어 박사의 『매뉴팩처들의 철학』에서 하나의 완벽한 선례를 볼 수 있다." "공장제는 인간성의 개조를 요구한다. 장인이나 선대제 노동자의 '발작적인 노동행태'(working paroxysms)는 인간이 기계의 규율에 적응할 때까지 규격화(methodized)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규율을 지키는 미덕이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감독관이 되지 않는 한) 전혀 세속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을 때, 어떻게 그 미덕을 그들에게 주입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은 마땅히 그의 으뜸가는 행복을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에 기약해야 한다는 ···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중요한 교훈〉이 주입됨으로써만 가능하다. 노동은 반드시 〈초월적 존재의 사랑에 의해 ··· 우리의 의지와 애정 위에 고취된 ··· 하나의 순수한 '덕행'〉으로서 수행되어야만 한다."(498-9)


"〈그렇다면 인류는 이 개조하는 힘(transforming power)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이다. 죄를 범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그(십자가)의 희생이며, 죄에 끌리는 마음을 없애는 것은 그 동기이다. 십자가는 그와 같은 끔찍한 속죄가 아니고서는 비열한 죄가 씻기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죄를 극복한다. 십자가는 불복종의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순종을 고무하며, 순종하는 힘을 얻게 해주며, 순종을 실행 가능케 하며, 순종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든다. 십자가는 순종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순종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십자가는 순종을 부추기는 동기일 뿐만 아니라 순종의 기본틀(pattern)이다.〉" "웨즐리파는 은총의 보편성 교의를 설파했다. 적어도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죄와 은총의 기회는 평등하다. 그리고 지식의 종교이기보다 '마음'의 종교로서, 아무리 소박하고 아무리 교육받지 못한 자라도 은총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499-501)


"그러나 이 교리에는 좀더 복잡한 점들이 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구원은 신의 전권(prerogative)이었으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극도로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속죄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은총을 확신하고, 일단 감리교의 형제애 안에 철저하게 들어오면 노동하는 남자나 여자나 '교리를 어기는 것'(backsliding)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친 산업세계에서 그들이 아는 유일한 공동체 집단으로부터 축출당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부자는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특히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은총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육신의 욕망, 눈의 욕망, 그리고 자만심'의 유혹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은총을 입고 있을 가능성이 한결 많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소명'(직업) 때문이 아니라 '다시 죄를 지을'(backslide) 유혹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502-3)


"그러나 감리교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종교'라는 것이 웨즐리의 주장이었다. 감리교가 예전의 청교도 분파들과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그 '열광'과 감정적인 황홀경에 있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전(前)산업기의 저항적인 노동자나 장인의 성격구조가 공업노동자의 순종적인 성격구조로 난폭하게 재주조되는 영적 시련을 볼 수 있다. 실로 여기에 유어가 말한 '개조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성의 바로 원천에 침투하여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억압하려는 악마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억압'이란 잘못된 낱말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표출은 금지되었다기보다는,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지 않고 오직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징발되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궤짝 같은 예배당이 마치 인간의 영혼을 채가려는 커다란 덫처럼 공업지대에 서 있었다. 바로 그 교회 안에는 신앙을 버린 자, 고해, 사탄에 대한 공격, 길 잃은 양들로 이루어진 감동적인 드라마가 끊임없이 존재하였다."(503-7)


"감리교는 늘 교회 문을 열어둠으로써 산업혁명기에 뿌리뽑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라져가고 있던 예전의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대신할 만한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제공했다." "사실 이 시기의 많은 사람에게 감리교회의 교우라는 '티켓'은 주술적인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철  따라 이동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길 때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될 수 있었다. 이 종교공동체 내에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자체의 드라마, 자체의 지위와 비중의 등급, 자체의 화젯거리가 있었으며 많은 상부상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목사는 별로 없었지만 약간의 사회적 신분이동도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렇지 않으면 적대적이기만 한 이 세상에서도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필경 그들이 지닌 소박함, 정결함 또는 경건함 때문에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521-2)


12장 공동체


"18세기 잉글랜드의 도시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한층 더 (이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농촌적'이었던 반면, 농촌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요로웠다. 〈사람들이 늘 한곳에 그대로 있으면 어리석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코벳은 주장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신흥 공업도시들은 농촌을 밀어냈다기보다 농촌 '위에서' 성장하였다. 19세기 초에 가장 일반적인 공업배치 상황을 보면, 흩어져 있는 공업 촌락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상업과 제조업 중심지가 그 원의 중심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촌락들이 교외지대가 되어가고 농토들이 벽돌로 뒤덮여감에 따라 19세기 후기의 대규모 도시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랜 전통의 해체를 가져올 만큼 난폭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부 랭커셔, 포터리즈, 웨스트 라이딩과 블랙 컨트리의 고유한 관습과 미신과 방언들은 단절되지도 않았고 딴 곳으로 옮겨지지도 않았다."(558)


"지방색을 띤 이러한 전통들은 예전의 생활방식이 사라지는 데 대한 의식적인 저항이었고 또 그것은 빈번하게 정치적 급진주의와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예전 생활방식의 사라짐에서 중요했던 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공유지와 '놀이터'의 사라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즐겼던 여가의 상실이었으며 놀고 싶어하는 충동의 억압이었다. 번연이나 벡스터의 청교도적 가르침이 웨즐리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옥의 불을 피하듯이 모든 경박한 짓을 피하라. 그리고 욕하고 거짓 맹세 하는 것을 피하듯이 어리석은 짓을 피하라. 여자에 손대지 말라.〉 카드놀이, 색깔 있는 옷, 장신구, 연극─이 모든 것이 감리교의 금기사항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속한' 노래와 춤을 반대하는 소책자들이 씌어졌으며 경건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문학과 예술은 아주 수상쩍게 생각되었다. 끔찍스러운 '빅토리아 시대의' 안식일이 빅토리아 여왕이 출생하기도 전에 강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561-2)


"19세기 초의 노동계급의 공동체는 온정주의나 감리교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고도로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맨체스터나 뉴카슬에서는 자체 규율과 공동체적 목적을 강조하는 노동조합과 공제조합의 전통이 멀리 18세기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공제조합들은 중간계급 회원을 거의 두지 않았다. 공제조합 회원은 사무원이나 소직종인 이상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대부분이 장인들이었다. 모든 동료가 조합기금의 출자자였기 때문에 회원수가 안정되어 있었고 또 주의 깊고 열성적인 자치 참여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공제조합의 비밀주의 안에서, 그리고 상층계급의 탐색적인 눈초리 아래서도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불투명성 안에서 독자적인 노동계급 문화와 제도의 성장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를 본다. 이같은 기층문화로부터 아직은 그리 튼튼하지 못한 노동조합들이 성장한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양성된 것이다."(571-6) 


"1830년께면 대부분의 노동계급 구역에서 국교회의 부활뿐 아니라 감리교의 부활이 자유주의 사상가, 오웬주의자, 비종파 그리스도 교인들로부터 날카로운 반대를 받았다. 런던, 버밍엄, 남동부 랭커셔, 뉴카슬, 리즈 및 기타 도시들에서 칼라일이나 오웬의 이신론자들은 대단히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도들은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나 점점 더 직종인들과 특권적인 노동자집단을 대변하는 경향을 띠었고 윤리적으로 노동계급의 공동생활에서 떨어져나갔다. 부흥운동의 일부 옛 중심지는 '이교(異敎)'로 빠져들었다. 한때는 〈술 마시기 못지않게 기도 드리기로, 욕하기 못지않게 찬송가 부르기로 눈길을 끌었던〉 뉴카슬의 쌘드게이트에서 감리교도들은 1840년대에 이르자 가난한 이들 사이에 있던 추종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랭커셔의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 직공들과 마찬가지로 직조업 지역공동체들도 예배당에서 대거 이탈하여 오웬주의와 자유사상의 물결에 휩쓸렸다."(584)


"아일랜드 이민이 (노동시장에) 미친 영향은 양면적이며 또 흥미롭다. 역설적이게도 공업적 노동규율로 인해 어떤 틀에 박힌 것이 아닌 보충 노동력을 필요하게 만든 것은, 여러 압력들이 작용하여 잉글랜드 노동자의 성격구조를 바꾸어놓는 데 성공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한마디로 숙련 또는 반숙련 고용에서는 (근면, 금주, 사려 깊음, 계약 준수 같은) 에너지 지출의 조절이 필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산업사회 밑바닥에 있는 무거운 육체노동직은 순전한 육체적 에너지를 마구 써댈 것을 요구했고, 전(前)산업노동 리듬에 속하는 강도 높은 노동과 질탕한 휴식의 교대가 필요했는데 잉글랜드의 장인이나 직조공은 그의 약화된 육체적 힘과 청교도적 기질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해서 이같은 노동에는 적합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일랜드의 노동력이 산업혁명에 불가결했던 거은 오직 그것이 '값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농민층이 백스터와 웨즐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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