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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샘 2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ㅣ 황금의 샘 2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평점 :
4장 탄화수소 시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사용한 석유의 90%를 생산해야 했지만, 이것은 곧 미국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미국이 수출국으로 남아 있을 날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유정 상당수를 폐쇄하는 동안, 이 지역의 잠재성을 아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생산될 석유가 향후 시장에 미치게 될 영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전후 페르시아 만에서 값싼 석유가 유입되면 1930년대 초 텍사스 동부의 석유 분출만큼이나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동시에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내 석유의 고갈을 우려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쟁 전의 규제를 타파하고, 특히 사우디를 위시한 중동에서 최대한 생산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런 방식은 공급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유럽은 미국을 포함한 서반구가 아니라 중동에서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미국의 매장량은 미국 자체의 수요와 안보용으로 보전된다는 의미다."(22-3, 32)
# 미국(&영국) 석유회사들의 행보
1. 소칼, 텍사코, 뉴저지, 소코니로 구성된 100% 미국계(영국의 영향력을 우려한 이븐 사우드 국왕의 의사도 반영된) 회사들로 아람코 합병 완결(1948. 12) → 적선협정 폐지
2. 걸프사(쿠웨이트 석유회사의 지분 절반 소유)는 유럽을 위시한 동반구 지역의 판매망 확보를 위해 로열더치 쉘(사실상 미국의 석유 이권 파트너가 된)과 장기 구매 협정 체결
3. 이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석유 이권 확보를 함께 추진하는 소련에 맞서 미국과 영국 정부가 협력. 앵글로-이란과 뉴저지, 소코니 간에 장기 공급계약 체결(1947. 9)
"중동의 석유는 전후 황폐화된 유럽을 복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였다. 석탄 생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성도 저조했고 노동 인력마저 와해되었다." "가격 또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유가가 1948년 전후 최고치를 기록하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중동산 석유는 미국의 걸프 만 표준가격 이하로 인하되었다. 이는 20년 전 아크나캐리 성의 가격 회의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고, 전쟁 전 '현상유지' 체계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비록 그때까지는 유럽 경제가 석탄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에너지 수요 증가에 따라 석유의 중요성은 점점 증대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중동의 석유 생산량이 더욱 크게 느껴진 것이다. 1946년에는 유럽에 공급된 석유의 77%가 서반구에서 수입되었으나, 1951년에는 80%가 중동에서 수입될 것으로 에상되었다. 유럽의 수요와 중동 석유의 개발이 시기적으로 일치함으로써 강력하고도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졌다."(66-70)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에 걸쳐 석유회사의 산유국 정부는 결제 조건을 둘러싸고 수차례 교섭했고 그 결과 전후 석유 질서가 만들어졌다. 문제의 핵심은 자원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용어, 즉 '렌트Rent'(지대)를 배분하는 데 있었다. 교섭의 성격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그 동기는 동일했다. 석유회사와 석유회사에 세금을 부과하는 소비국 정부들만 이익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산유국에도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산유국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전부는 아니었다. 지배권도 똑같은 문제였다." "1950년 12월 30일, 아람코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새로운 협정에 조인했다. 핵심은 베네수엘라와 같은 '이익반분(50:50)'의 원칙이었다. 이후 걸프 석유는 쿠웨이트 석유의 동업자인 앵글로-이란의 회장 프레이저 경의 완강한 반대를 무마하고, 쿠웨이트에도 이익의 절반을 주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라크에서도 1952년 이익 반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란에서는 사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았다."(80, 106-7)
"1940년대 말, 이란은 경제 파탄으로 심한 빈곤과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 국민이 화합할 수 있는 대상은 외국인들, 특히 영국인에 대한 증오였다. 영국은 이란의 국토를 지배·착취하는 초자연적인 악마로 규정되었다. 이란 정치가들은 파벌에 관계없이 정적이나 반대자들을 비난할 때 영국의 첩자라고 매도했다. 집중적인 증오의 대상은 현대화 된 외국 세력 침투의 상징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였다." "1951년 4월 28일, 의회는 국유화법을 시행하라는 민중들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앵글로-이란의 최고 반대 세력인 모사데그를 새로운 수상으로 선출했다. 국유화 법안은 국왕의 서명을 받아 5월 1일부로 효력이 발생했다." "1951년 9월 25일, 모사데그는 아바단 섬에 남아 있는 영국인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아바단 철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년간 대영제국의 기반 쇠퇴 중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중동 지역 최초의 석유 이권이 최초로 무효화되었다."(112, 118-9, 131-2)
"1952년 말, 영국 정부는 이란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공동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미국에 타진했다. 방법은 쿠데타였다." "1953년 8월 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은 다시 왕위에 오르고, 모사데그는 체포되었다." "이란에서 운영될 컨소시엄 설립은 의미가 큰 전환점이었다. 외국인이 소유한 석유 이권이 교섭과 상호 합의에 의해 산유국으로 되돌려진 최초의 사례였다. 멕시코의 경우가 일방적인 국유화 조치였다면, 이란에서는 관게자 모두가 석유자원은 원칙적으로 이란 소유라는 것을 인정했다. 새로운 계약은 이란 국영 석유회사가 이란 내의 석유자원과 시설을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컨소시엄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이란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생산된 석유를 구입하는 일은 계약대로 컨소시엄이 맡았다." "한편 국왕은 석유 수입이 늘어나자 확고부동한 이란 국왕으로 자리 잡았고, 나아가 세계를 향한 야심을 가진 독선적인 군주로 변신했다."(138, 142, 152-5)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의 답은 석유다. 1956년 7월, 나세르의 운하 점거로, 석유 부족 사태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세브레에서 합의한 대로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고, 10월 30일 런던과 파리는 최후통첩을 내리고 운하 지대의 점거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날, 소련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부다페스트에서 철수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영국 공군이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했고, 이집트군은 황급히 시나이 반도를 거쳐 철수하기 시작했다. 수에즈 작전은 미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선거 캠페인 때문에 남부 지역을 순회하던 중 이 소식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했다. 이든이 그를 배신하고, 동맹국들은 그를 교묘하게 속인 것이다. 그들의 경솔한 행동이 소련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포함한 광범한 국제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이 코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로 들끓고 있는 중에 그런 행동을 취했다."(166, 174-5)
"나세르가 운하를 봉쇄할 경우 발생할 석유 공급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공동 계획을 수립하던 수개월 동안, 영국은 미국이 석유를 공급해줌으로써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든 긴급 석유 지원책을 단호히 거부했다. 석유는 워싱턴이 서유럽 동맹국을 단죄하고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무기였다." "수에즈 위기가 영국의 쇠퇴를 예고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영국은 더 이상 열강이 아니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 따른 상처와 국내의 분열이 재정을 악화시켰고 신뢰감과 정치적 의지력을 잃게 만들었다. 이든은 수에즈 위기에 제대로 대처했다고 믿었다. 수년 후 「런던 타임스」는 앤서니 이든에 대해 '그는 영국이 강대국이라고 믿은 마지막 수상이자, 영국이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님이 드러나는 위기에 대처한 최초의 수상이었다'라고 썼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묘비명인 동시에 대영제국의 묘비명이기도 했다."(175-6, 184-5)
"석유는 떠오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최고 관심사였다. 1950년대 초반 이래 중동에서는 '아랍 석유 전문가'의 모임이나 접촉이 수없이 시도되었다. 초창기 주요 의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제재였다.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석유 봉쇄부터 블랙리스트 공개, 협박 및 이권 몰수의 위협에 의한 국제 기업들에 대한 제재가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의제의 범위는 넓어졌다. 이집트는 석유 수출국이 아니었지만 나세르는 그 모임을 석유 정책 수립과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데 활용했다. 그는 주권 문제와 식민주의에 대한 투쟁을 무기로 여론을 결집했고 석유와 페르시아 만 연안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1957년 봄, 이집트에서 열린 아랍석유전문가회의에서 대표들은 국내 정제 능력의 증강과 지중해로 가는 아랍 유조선단 및 파이프라인의 설치를 제안했다. 또한 중동 석유 생산을 관리해 수입을 증가시키고, 해외 석유 기업들에 맞설 수 있는 아랍 '국제기구' 혹은 '국제 컨소시엄'의 창설을 논의했다."(205)
"소련이 가격 인하 및 구상 거래 등으로 서방에 대한 석유 판매에 박차를 가하며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한 결과, 석유의 과잉 공급 사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소련은 농산품과 산업용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달러와 다른 서방국의 화폐가 필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석유 수출품은 그들이 서방에 판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품목 중 하나였다. 단순한 경제적 조건만으로 소련의 석유 가격을 쉽게 제한할 수 없었다." "1959년처럼 기업들이 전체 공급 과잉과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격 인하라는 경쟁적 대응이었다. 그런데 무슨 가격이냐가 문제였다. 만약 시장가격만 인하한다면 석유업체들이 전체 손실을 흡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공시가격을 다시 인하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힘들었다. 처음 공시가격을 인하했던 1959년 2월, 아랍석유회의는 분기탱천했고 이에 따라 신사협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제 다시 그렇게 대응한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아무도 몰랐다."(221-2)
"1960년 8월 9일, 뉴저지는 수출국에 통고도 없이 중동산 원유의 공시가격을 배럴당 14센트까지, 약 7%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산유국의 반응은 '유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이 갑자기 자신들의 수입을 줄여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재정 상태와 국가 위신을 상당히 손상시키는 결정을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버렸다." "분노와 격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크는 정치적 기회를 포착했다. 압둘 카림 카셈 혁명정부는 이라크가 중동 내에서 나세르의 질서에 종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공시가격 인하는 나세르가 여러 아랍위원회 및 아랍리그를 지배함으로써 석유 정책을 좌지우지해온 영향력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라크는 이번 사태를 비아랍 국가인 이란과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석유 수출국만의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는 촉매제로 이용하고자 했다." "9월 14일, 마침내 국제 석유회사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바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설립되었다."(225-7)
"석유가 석탄을 압도한 이유 중 하나는 환경 문제였다. 런던은 석탄에 의한 환경오염, 특히 가정의 개방식 연소에 의해 발생한 '살인적 안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짙은 나머지, 집으로 가는 길조차 찾을 수 없었던 운전자들은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잔디밭으로 차를 몰기도 했다. 안개가 수그러질 때면 런던의 병원들은 급성 호흡기 질환에 걸린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가정 난방용으로 석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연 지역'이 지정되었고, 의회에서는 석유 사용을 고무하는 '청정 대기법'이 입법되었다. 하지만 석유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가격이었다. 석유 가격은 계속 하락했으나 석탄 가격은 꿈쩍하지 않았다. 1958년 후로는 산업용 연료로 석유를 사용하는 것이 석탄보다 저렴했다. 각 가정은 석유에서 전력으로, 그 후에는 천연가스로 연료를 바꾸었다. 석탄산업은 '생활의 불'이라는 콘셉트의 대대적 광고 전략으로 대응했지만, 석탄의 불씨는 식어가고 있었다."(260)
"1967년 6월 5일, 제3차 중동 전쟁인 '6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랍 국가들 간에는 석유를 무기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10년 이상이나 진행되어왔다. 이제 그 기회가 왔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인 6월 6일, 아랍국의 석유장관들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왔다.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리비아 및 알제리가 미국, 영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서독에 대해서도 수출 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엄청난 걱정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6일전쟁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967년 7월, '아랍의 석유 무기화'와 '적대국가에 대한 석유 공급'이 원활해졌다.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쪽은 금수조치를 내린 국가들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석유 수익을 포기했지만 아무 효과도 얻지 못했다." "석유 부족 위험은 다소 쉽게 해결되었지만, 미 국무부는 위기관리를 주제로 한 보고서에서 공급원 다양화와 수송 능력 확충을 지적했다."(294, 297-8)
5장 주도권 쟁탈전
"1960년대 영국은 경제 불황에 빠졌다. 전후 영국의 최대 과제는 '대영제국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였다." "페르시아 만에서 영국의 위상을 지켜주었던 것은 6,000여 명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 부대였다. 이를 유지하는 데는 연간 1,200만 파운드가 들었다. 영국의 석유회사들이 그 지역에 해놓은 엄청난 투자를 생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액수의 보험료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 힐리를 움직인 것은 경제적 필요성만이 아니었다. 중동의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중동에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영국은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설립을 지원했는데, 이는 작은 나라들 몇 개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그들에게 방위수단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 과업이 끝나자, 영국은 1971년 완전히 짐을 싸서 페르시아 만을 떠났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페르시아 만의 가장 근본적 변화이자, 1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안보 체계의 종식을 의미했다."(309-10)
"1969년 9월 1일,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한 후 마침내 석유산업에 손을 뻗쳤다." "리비아는 리비아 외에는 대안이 없는 옥시덴탈을 공략했다. 그들은 그 회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옥시덴탈은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넣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긴 협의 끝에 리비아인들은 로열티와 세금 20% 증액이란 성과를 얻어냈고, 옥시덴탈은 계속 리비아에 남아 사업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저하던 다른 회사들도 9월 말까지는 모두 승복했다. 그러나 공시가격의 30% 인상과 리비아가 챙기는 이윤이 50%에서 55%로 증액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 리비아의 계약은 산유국 정부와 석유회사 사이의 역학 관계를 결정적으로 역전시켜버렸다. 석유 수출국에는 리비아가 거둔 승리가 아주 고무적이었다. 석유의 실질적 가격 하락을 순식간에 반전시켰으며, 동시에 석유 수출국들이 주권과 주도권 장악을 위한 행동을 다시 추진하도록 자극한 것이다."(331-4)
# 산유국과 석유회사 간의 새로운 협의
1. 테헤란 협의(1971. 2. 14) : 산유국 정부의 최소 몫을 55%로 정하고, 석유 1배럴의 가격을 35센트 인상한다.
2. 트리폴리 협의(1971. 4. 2) : 석유 1배럴의 가격을 90센트 인상한다.
"곧이어 산유국들의 '소유권 참여' 문제가 불거졌다. 1972년 10월, 페르시아 만 국가들과 석유회사들 간에 '소유권 참여 협약'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현재 25%의 참여 비율에서 1983년까지 51%에 이르도록 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소유권 참여를 통해서든 전면적 국유화에 의해서든, 석유회사를 강력하게 통제하게 되면서 수출국들은 가격보다 더 큰 힘을 얻었다. 회사들은 새로운 공동전선을 구축할 능력이 없었다. 각 회사의 모국 정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미국에게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기보다 협조를 구하고, 그 나라들이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할 동기가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급진적 반역 세력의 제압을 지원해달라는 오만의 요청에 주의를 기울인 채 지역 경찰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비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고, 이는 상승하는 석유 가격과 페르시아 만의 새로운 안보 체계라는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342-4)
"1973년 10월 6일은 유태교 최고의 신성한 축제일인 속죄일이었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킬 무렵, 이집트군 제트기 222대가 일제히 발진했다. 공격 목표는 수에즈 운하 동안東岸과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이스라엘 군사령부와 군사기지였다. 수분 후 국경 전역에 걸쳐 3,000문이 넘는 야포가 불을 뿜었다. 같은 시각, 시리아군 전투기가 이스라엘 북부 국경 지대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대포 700문이 포문을 열어 포탄을 퍼부었다. 제4차 중동전쟁, 소위 '10월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 전쟁은 중동 전쟁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격전이었고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양 진영의 무기는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공급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중동만의 특성인 '석유'였다. 석유는 생산 삭감과 금소조치라는 형태로 무기화되었다." "당시 석유는 세계 산업 경제의 활력소가 되었고, 채굴되는 즉시 남김없이 송출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약간의 추가적인 수요 압박만 있어도 세계적인 위기가 닥칠 상황이었다."(348-9)
"10월 16일, 걸프 지역 국가(아랍 국가 5개와 이란)의 대표들은 쿠웨이트 시에서 만나, 비엔나의 야마니 숙소에서 끝내지 못한 논의를 이어갔다. 그들은 석유회사의 답변을 더 이상 기다릴 태세가 아니었다. 그들은 조치를 취했다. 공식가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된 5.11달러로 높여, 광분하고 있는 현물시장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했다. 하나는 가격 인상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가격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수출국이 석유회사와 협상하는 것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이제 수출국이 석유 가격을 결정했다. 석유회사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결정하고 수출국은 기껏해야 거부권을 가지던 체제에서 수출국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지니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완료된 것이다. 가격 결정 후, 야마니는 쿠웨이트 시에 있던 다른 대표단의 한 사람에게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품에 대한 주인이 되었다〉라고 말했다."(378)
"10월 19일, 닉슨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 발표는 사전에 몇몇 아랍 국가들에게 전해졌기에 그들은 별다른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어느 쪽도 우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끝낼 수 없으므로,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명분을 제공한다는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리비아는 미국으로 가는 모든 석유 공급선을 차단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 원조에 대한 보복으로 점진적 삭감안을 철회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전면적 공급 중단을 의미했다. 다른 아랍 국가들은 이미 했거나 하고 있는 일이었다. 정말로, 석유가 하나의 무기로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몇몇 아랍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경우 길거리의 폭도들에 의해 통치 기반이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지원이 공개됨으로써, 강경파 아랍 국가들이 미국에 행동을 취할 충분한 구실이 생긴 것이다."(383-4)
"1973년 12월 말, 테헤란에 모인 석유장관들은 격론을 벌인 끝에 이란 국왕의 (가격 인상) 입장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가격은 11.65달러가 될 것이고, 이 가격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공식가격은 1970년 1.85달러에서 1971년 2.18달러, 1973년 중순에 2.90달러, 1973년 10월에 5.12달러, 그리고 이제 11.65달러로 인상되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이래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친 인상으로 가격은 4배가 되었다." "아랍 산유국의 석유 금수조치가 촉발한 석유 가격의 급등과, 석유 가격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산유국들의 인식은 세계 경제의 구석구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석유 수출국들이 벌어들인 수입은 1972년에 230억 달러이던 것이 1977년에는 1,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서방 공업국들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가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들은 석유 공급의 안정성을 높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무기 판매에 적극 공세를 펼쳤다."(410, 425)
"1970년대 초, 닉슨과 키신저는 '백지수표' 정책을 통해 이란 국왕이 원하는 대로 미국산 무기를 마음껏 살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다. 핵무기가 아니라면 최신형 무기도 구매 대상에 포함되었다. 영국이 걸프에서 철수한 이후, 그 지역의 안전 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두 개의 지주支柱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지주에 해당했다. 미국 관리의 말대로라면, 두 국가 중 이란이 최대 지주였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 해외 무기 판매의 절반을 이란이 차지했다."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는 하나의 통일된 기조가 있었다. 이란은 중동에서 주요한 안보 역할을 하는 동맹국이므로 국왕의 명예와 영향력을 손상시키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닉스, 포드, 키신저는 전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국왕을 편애했다. 1973년 국왕이 미국에는 석유 금수를 하지 않았고, 이란이 지정학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란은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도 했다."(441-2)
"한편 열광과 도취, 오일 달러의 홍수, 석유 붐은 이란의 경제와 사회 체계를 파멸시키고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는 명백했다. 혼돈, 낭비, 인플레이션, 타락, 정치적·사회적 긴장의 심화, 그리고 이들로 인한 반체제 분위기의 확산이었다." "1976년 말, 국왕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를 직시했다. 이제 그는 돈이 구제책이 아니라 그의 제국이 안고 있는 많은 병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가격 온건 노선을 취했다. 1974년에서 1978년까지 OPEC은 소폭의 가격 인상을 두 차례 단행했다. 1973년 10.84달러에서 1975년 11.46달러로 올랐고, 1977년 말 12.7달러로 다시 올랐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므로 실질 가격은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978년의 석유 가격은 수출 금지 직후인 1974년에 비해 10% 하락했다. 석유는 더 이상 가격이 가격이 낮아질 수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만큼 치솟지도 않았다."(443-5)
"처음에 석유회사들은 공급 계약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쿠웨이트에 있던 그들의 과거 이권과 어느 정도 연계되었지만, 수출국과 수입국 정부의 다각화 정책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 고리는 약화되었다." "석유회사들은 이제 더 이상 지하 석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이권 소유자'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발견한 석유를 생산 출하하는 과정 중 일부의 권리를 받는 '생산 분배' 계약을 통해 단순한 '계약자'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계약은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와 칼텍스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석유 탐광, 생산, 판매에 대한 '기술 및 인력 제공'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를 반영해 관련 기술용어들은 영어에서 산유국 언어로 바뀌었다. 산유국의 주권은 각국의 국내 정치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인정되었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물은 사라졌고, 석유회사들은 단순히 고용된 인부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생산 분배 계약이 세계 도처에서 일반화되었다."(454-5)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OPEC은 1970년대에도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했다. 1973년에는 자유세계 석유 생산의 65%를 점유했고, 1978년에는 62%를 차지했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지만 OPEC의 결속력이 약해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 동기 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물가 상승 불안, 엄청나게 확대된 통화량, 투자가들의 열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적 석유 확보 사냥에 열광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 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던 곳들이다."(476-7)
"1970년대 중반, 이란은 석유 수입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일 달러는 터무니없는 현대화 계획에 남용되면서 낭비와 타락을 조성했고 경제 혼란과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불러왔다. 지방에서 도시로 인구 유입이 계속되어 농업 생산은 저하되고 식료품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물가 상승으로 국민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테헤란에 거주하는 중간 관리나 공무원은 월급의 70%를 주택 임차료로 지출해야 했다. 이란의 주요 기간시설들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개발이 지연된 철도는 마비 상태에 빠졌고, 도로는 교통 체증에 시달렸다. 국가 송전망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데다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테헤란 일부와 몇 개 도시는 정기적으로 단전되기도 했다. 단전은 산업 생산과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국민들의 분노와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이란 국민들은 국왕 체제와 성급한 현대화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힘을 얻은 주인공은 호메이니였다."(490)
# 1979년 1월 6일, 국왕의 해외 망명으로 팔레비 왕조 마감
"새로운 석유 파동의 1단계는 이란이 석유 수출을 중단한 1978년 12월 말 시작되어 1979년 가을에 끝났다. 이란의 생산 감소분은 다른 지역의 증산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세계 석유 수요를 일일 5,000만 배럴로 계산해도 부족분은 4~5%에 불과했다. 그런데 4~5%의 부족분이 어떻게 150%의 가격 상승을 초래했을까?" "이는 순전히 감정상의 문제(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였다. 의심, 불안, 혼란, 공포, 비관 등의 감정이 혼란기의 행동을 지배했다. 사태가 완료된 후, 과거의 수치들을 정리해 수급 균형을 분석해보니 그러한 감정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백한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세계 석유 체계 전체가 붕괴된 것처럼 인식되었다. 실제로 제어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 열정적 민족주의와 결부된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란 혁명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중 하나가 서구와 현대 세계에 대한 거부였음은 명백했다."(506-9)
# 2단계는 이란의 미대사관 점령 사태와 인질극(1979. 11. 4)이 야기한 석유 공급망 혼란 사태, 3단계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 9. 21) 발발에 따른 석유 수출 급감이다.
"이제 석유시장에서는 두 가지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생산자들끼리 가격을 서로 올리는 '추월' 경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요자들 간에 공급 확보를 위한 '쟁탈' 경쟁이었다. 공급을 중단당한 회사들, 즉 석유 구매자, 정제업자, 정부, 새로운 부류의 무역상, 메이저 회사들은 수출국들의 환심을 사려는 경쟁 속에서 서로를 해롭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도 새로운 공급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경쟁 심화로 가격만 상승할 뿐이었다." "서구 제국은 수요를 절감해 가격 상승을 막으려고 했지만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각국 정부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본 목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저가의 석유 확보였고, 다른 하나는 가격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공급 확보였다. 한때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가지 목표가 모순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각국 정부는 저가격 확보를 정책 방향으로 삼다가, 국내 수요가 증가하면 안정 공급으로 선회했다."(514-7)
"드디어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다. OPEC은 1977년 말까지 자유세계 석유의 3분의 2 이상을 생산해왔다. 1982년 처음으로 비OPEC 국가가 OPEC의 산유량을 따라잡았다. 실제로 일일 100만 배럴 이상 앞섰고 이런 추세는 계속 증가했다. 심지어는 소련까지 유가 상승을 이용해 국내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탈피하기 위해 서방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계속 증가시켰다. 새로 개발된 석유, 특히 북해산 석유가 현물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체 석유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OPEC은 그들의 가격 구조 붕괴와 그에 따르는 더 큰 경제적·정치적 손실, 즉 권력과 영향력의 감소를 우려해서 가격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가격을 지키려면 생산 수준을 감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요는 회복되지 않았고, 비OPEC 생산량은 계속 증가했고, 현물시장 가격은 또다시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생산량 쿼터에도 불구하고 OPEC은 여전히 과잉 생산 상태였으며, 게다가 가격은 높았다."(562-4)
"1985년 독일의 본에서 열린 경제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각국 정상의 최고 관심사는 선진국들 간의 통상에서 문제가 되는 보호무역주의, 달러화의 가치, 일본의 경제 도전에 대한 대응 등이었다. 한마디로 '서-서西-西' 문제였다. 석유와 에너지 문제, 남북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1960년대처럼 석유와 에너지는 더 이상 세계 경제 성장의 제약 요인이 되지 못했다. 전 세계의 석유 공급은 일일 1,000만 배럴 초과 상태로, 이는 자유세계 총소비의 20%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게다가 미국, 독일, 일본은 상당한 양의 전략 석유를 비축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볼 수 없었던 '안정 공급분'이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정상회담에서 석유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난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중동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지도자들은 에너지 문제를 정상회담의 주요 주제에 포함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603-4)
"1986년 12월, 제네바에서 회합을 가진 OPEC 회원국들은 마침내 '진땀' 나는 상황에서 해방되었다. 석유 수출국들은 몇 개 유종의 복합 가격에 근거해 설정된 '기준 가격' 18달러에 동의했다." "비록 시장으로부터 반복적이면서 때때로 강도 높은 압력이 있었지만, 상당한 조정을 통해 합의된 내용은 1987년부터 89년까지 놀라울 정도로 잘 지켜졌다. OPEC의 가격은 정확하게 18달러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15달러에서 18달러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가격은 불안정해서 때로는 다시 급락할 듯 보이기도 했으며, 몇 번에 걸쳐 쿼터량 준수가 파기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기로에 직면할 때마다 산유국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OPEC 회원국들은 '진땀'의 고통을 잊지 않았고, 그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낮은 수준으로 구성된 새로운 석유 가격은 4년 전 시작된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고 동시에 물가 수준을 낮춰주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오랜 위기는 확실히 종식되었다."(637-8)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경제 제재 조치로 인해 세계 석유시장에서 400만 배럴의 원유 부족 사태가 발생했는데, 1873년과 1879년 석유 위기 시에 발생했던 부족분과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석유 가격의 급등은 공급 감소 때문만이 아니라 분쟁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었다. 후세인이 사우디의 석유 공급 시설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던 1990년 9월 말, 석유의 선물거래 가격은 배럴당 40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는 위기 발생 이전 가격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석유 위기와는 달리, 미국은 석유시장을 규제하지 않았고 공급 상의 왜곡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유국에 대해 증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 12월경에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생산 감소분만큼 증산이 이루어져 석유시장의 수급은 다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경기 침체로 석유 소비가 감소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654-5)
에필로그
"1990년대를 통해 석유는 대형 전략적 이슈로서의 의미가 약화되었다. 공급은 넘쳐났고, 가격은 떨어졌다.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고,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서서히 부상했다. 그러나 1997~98년, 통화의 흐름과 부동산 투기로 확대된 아시아 경제는 과열로 이어지더니 태국에서 발화한 경제 위기로 폭발했다. 결국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 대부분에 치명적인 결과를 전염시켰다." "국내총생산의 붕괴는 석유 수요의 급락으로 이어졌다. 석유 저장 탱크는 석유를 추가로 더 보관할 곳이 없을 때까지 가득 채워졌다. 1986년처럼 다시 한 번 석유 가격은 배럴당 10달러를 향해 추락했고 일부는 더 낮은 가격으로 곤두박질쳤다. 석유 수출국들은 1986년과 같은 혼란 상태에 다시 한 번 내던져졌다. 석유 가격의 붕괴는 독립국이 된 지 겨우 7년째 되는 러시아를 채무 불이행과 파산 상태로 이끌었다. 또한 외국과의 관계에서 고통스러운 재평가 과정을 거치도록 몰아갔다."(669-70)
"신경제와 인터넷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석유를 다시 중요하게 만들었다. 2003년에서 2007년 사이의 기간은 매우 의미 깊은데, 한 세대에서 최대의 경제 성장이 목격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 인도, 중동 및 기타 신흥국의 높은 경제 성장과 괄목할 만한 소득 증가는 산업에 동력을 제공했고, 전기를 생산하고, 자동차와 트럭 등 급격하게 증가하는 운송수단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석유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급격한 석유 수요의 증가는 소비국들뿐 아니라 세계 석유산업 자체에도 놀라움을 선사했다. 앞서 수십 년간 석유 수요가 더디게 증가하자 석유산업은 새로운 석유와 가스 공급 시설에 대한 투자 수준을 상대적으로 낮추었다. 1990년대 후반과 21세기 초반 수 년 동안, 월스트리트는 석유산업에 대해 '제어되어야' 하고, 투자에는 매우 조심스럽거나 자제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석유산업은 늘어난 수요에 맞추어 새로운 생산 시설에 투자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674-5)
"효율성 문제는 석유와 기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중요하고도 공통적인 정책 목표다. 20세기를 이끈 산업사회는 현재 1970년대보다 두 배나 높은 에너지 효율을 자랑하고 있다. 미래 효율성 증대의 잠재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세계 경제의 성장, 소득 증가, 인구 증가 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많은 석유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다음 사반세기 동안에는 40% 혹은 그 이상의 석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기술혁신이 그 숫자를 감소시킬 수 있는데, 그 답은 연구 개발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정책과 기술 거래 시장에 달려 있다(기술 혁신이 에너지 사용량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기술로 인하여 2040년에는 2015년 대비 1백만 배 이상의 정보량을 처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이 높거나 낮거나 중간 어디쯤에 있거나에 관계없이, 석유는 앞으로도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