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의 기원 - 조선, 제도와 빈곤 경북대학교 학술총서 11
김희호 지음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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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의 제도는 신분제인 노비제와 고공제, 조세제도, 농업경영방식과 지주제, 화폐제도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생산성과 임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는 아직 소득의 개념이 생겨나기 전이어서 소득과 빈곤의 수준을 대용할 수 있는 거시적 지표로서 생산성과 임금 등 생계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임금은 노동 생산성의 지표로서 조선 후기 생산성 하락의 원인을 찾아보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18-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 임금과 생계비를 비교하고, 이 시기 조선 백성의 빈곤 수준을 가늠해 본 것이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생산성과 임금의 하락을 가져온 제도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선행 연구와 다른 시각을 보일 수 있다. 이 책의 연구 방법과 결과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기존 사학계의 연구 결과들을 무시할 의도는 없다. 이 책은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침탈에 대한 원인을 제도적 측면에서 찾아보고, 반성과 성찰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6-9)


제1부 신분제와 임금, 생계비


1장 고공제와 실질임금


"조선 후기 고공의 경제적 성격은 임금 등 대가를 받고 일하는 임금 노동자였다. 1680년 처음 제정된 고공법은 조선이 고공(雇工)이라는 신분을 새로 규정하여, 고공 문제를 신분제의 틀 안에서 관리하는 제도이다. 고공법은 신분제 틀 안에서 계약기간과 임금 등을 법으로 정하여 그 기간 동안 고공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하였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에 대한 기준은 고용계약 기간이 1년 이상 장기적이고, 고용계약을 위반하여 도망하는 경우 사적, 공적 형벌을 통해 노동을 강제하는 규정이 있는지 여부이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은 적합한 직업이나 작업장에서 숙련도와 생산성이 더 나은 노동자의 재배치를 통한 경제 효율성을 제한하였다. 또한, 고용계약 기간의 장기화로 임금을 초기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였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으로 노동의 체계적 분업이 불가능했으며 생산성도 점차 하락하였다. 이 장에서는 18-19세기 농업생산성과 임금의 하락 원인을 신분제에 의한 노동 이동성 제약에서 찾고자 한다."(16)


# 고공 : 형법상 노비보다 1등급 정도 상위 신분이며,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사회적 신분으로 양반, 중서인, 양인, 천민 등 누구나 고공이 될 수 있었다. 


"1731년 노비제가 종천제에서 종모종양제로 변하면서 노비인구는 줄어들었고, 노비의 도망은 급증하였다. 18세기 이앙법의 확산으로 농업생산에서 3-9월 사이에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일시적 노동력이 더욱 필요해졌지만, 노비는 농한기인 10-2월까지 일하지 못하고 쉬는 날이 더 많았다. 지주들은 농업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노비보다 농사철에만 집중적으로 고용이 가능한 고공을 선호하였다. 처음 우리나라 고문헌에 나타난 고공은 의식주와 임금을 받고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1-2년 주인집에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일시적 노동자였다. 고공계약은 고공과 지주가 서로 대등한 노동관계를 전제로 계약기간과 임금을 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으며 노동하는 자를 천하게 대하는 예속적 노동관계가 일반적이었다. 고공은 경제적으로 대등한 노동관계이지만, 예속적 관계를 강조하던 신분제 사회의 규범과 맞지 않았던 이질적 계층이었다."(19-20)


# 종천제 :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도 노비가 되는 제도, 종모종양제 : 부친의 신분 여부와 관계없이 오직 모친의 신분을 따라서 그 소생이 신분 노비가 되는 제도


# 고공제의 변화 양상

1. 고공법(1680) : 묵시적으로 1-3년 계약 기간, 고공기간의 장기화로 노동 이동성 제약이 높아 고공의 도망 급증, 고공기간과 임금 규정 미비로 분쟁 심화

2. 고공정제(1783) : 5년 이상의 장기 계약으로 노동 이동성 제약 증가, 노비만 고공 신분으로 등재

3. 화고제(1833) : 일일 단기계약 규정(단기고공 일반화), 노동 이동성 제약 소멸, 임금 노동시장 활성화


"18-19세기 토지생산성이 하락하는 추세에서 양반지주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노비제보다는 보상인센티브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1680년 고공법에서 장기고공은 단순노동을 사용하는 농업생산에 투입되었는데, 단순노동의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방식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강제노동방식에서는 노동생산성이 한계에 도달하면 고공이 더 이상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 하는 파레토 안정상태(pareto-stable)에 도달한다. 강제노동방식에서 지주가 고공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면 고공의 태업과 도망으로 오히려 생산성이 하락한다. 이에 따라 주인의 노동관리비용(monitoring cost)은 증가하였다. 장기고공의 생산성 하락으로 지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노동보다는 보상인센티브 방식을 채택하였다. 보상인센티브에서 지주들은 장기고공보다는 이동이 자유로운 일시적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일일 노동계약제(labor contract)를 택하였다."(41-2)


2장 노비제와 생산성


"1731년 노비제가 종천법에서 종모종양법(이햐 종양제)으로 전환되면서 노비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성리학의 국가지배철학으로 사회에서 신분노비에 대한 도덕적 회의가 파급되었다. 국가는 노비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노비를 직접 호적대장에 기록하여 관리하여, 국가 조세와 군역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노비는 자기성장 노력으로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저항과 시도를 하였으며, 가장 온건한 저항수단이 도망이었다. 노비의 도망이 늘면서 양반지주의 감시비용이 증가했고, 노비 대신 임금노동자인 고공의 사용이 늘어났다. 도망갈 수 없어서 남아 있던 노비는 태업과 파업을 통해서 주인의 강제노동에 저항하였다. 결국, 18-19세기 노비제에서 노비의 생산성을 크게 하락하였으며, 감시비용은 반대로 증가하였다." "이 장에서는 18-19세기 조선의 생산성 하락 원인을 제도적 원인, 즉 신분제인 노비제의 변화에서 찾고자 한다."(45-6)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전쟁피해로 국가재정이 악화되고, 양민 감소로 재정수입도 줄어들었다. 이후 여러 차례 양천(良賤)이 호환되다가 영조 7년(1731)에 종양법(從良法)이 제정되었다. 종양법은 부친의 신분에 관계없이 모친의 신분이 노비이면 그 소생이 노비가 되는 것이다. 종양법은 노비제도가 와해되는 1894년까지 유효하였으며, 노비인구를 급격하게 감소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는 정부의 도덕적 자산으로서 왕권(영조)의 정치기반을 강화하고 양반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노비제의 전환으로 노비의 국가에 대한 신공 축소, 사노비의 신공 수취 금지, 공노비 추쇄 금지, 사노비의 속량기회 증가, 노비에 대한 체형 금지, 죄인 자손에 대한 노비 연좌제 폐지, 채무노비 금지 등 정책이 발표되었다. 18세기 정조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도감을 없앴고, 서얼 차별과 노비제 폐지를 진행하였다. 순조는 1801년 공노비를 폐지했으며, 고종이 1894년 사노비마저 해방시켜 노비제를 완전히 철폐하였다."(50-1)


"18-19세기 조선에서 흥미로운 노동형태는 유민과 빈농층 가운데 일부가 자기 자신이나 자녀를 스스로 매매(=自賣)함으로써 노비신분으로 전락하는 자매노비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빈번하게 나타나는 자매노비는 일반노비에 비해 그 매매 숫자가 적고 나이도 어리며, 또한 아주 헐값에 거래되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는 전체 노비매매에서 자매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는 18세기 말 이후 신분제의 해체와 정부의 부세 수탈 강화, 부의 양극화로 인해 유민과 빈농층이 증가한 사실과 관련이 깊다." "노비매매서류에서도 자매노비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자매노비의 목적이 18세기 가사노동으로 시작되었다가, 19세기 중후반 노비가 사라지면서 생산노동력을 대신한 까닭으로 보인다. 자매노비의 생사노동력 역할은 자매노비의 남성 비율이 높아지고, 장년층이 많다는 점 이외에 자매노비의 가격이 급격히 높아져서 일반노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71-2)


"18-19세기의 중요한 점은 실질매매가격으로 추정한 노비의 생산성은 1801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하락하다가, 공노비 폐지 이후 다시 증가하는 U자 모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노비도망이 증가하면서 노비생산성도 하락하였지만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노비생산성도 점차 회복하였음을 알려준다. 18-19세기 노비제는 노비이동성을 극단적으로 제약하였으며, 노비도망도 증가하였다. 노비의 감시비용과 낮은 생산성은 노비의 실질가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노비의 도망과 생산성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보이지만, 노비생산성은 실제 임금노동자인 단기고공의 생산성보다 크게 낮았다." "실질노비가격은 일고의 실질임금보다도 32% 정도 낮았으며, 실질노비가격과 실질임금의 차이는 1801년 공노비가 폐지되는 시기 전후에 가장 컸다. 단기고공의 실질임금은 변동성을 보이고 있지만, 실질노비가격에 비해 높아서 노비도망과 노동 이동성 제약이 노비 생산성을 얼마나 하락시켰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75-8)


3장 생산성과 임금의 비교


"단기고공인 일고는 토지가 없는 무산자였으며, 가족을 중심으로 소농경영을 하였고, 병작지를 임차하여 지대를 지불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년 고리대에 의존하여 봄 춘궁기에 식량을 빌려서 가을 수확기에 고리대를 갚았다. 소작농과 고공은 농업경제에서 자기 토지가 거의 없고, 생계수준이 낮아서 고리대 이자가 높은 경우 항상 도망갈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단기고공이나 소작농에게 식량이 부족한 춘궁기인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기인 가을에 현금이나 곡식으로 되돌려 받는 신용 수단인 환곡과 고리대는 신용위험을 고려해서 35-50%로 매우 높았다. 이 시기 유럽의 이자율은 10-15%였다. 경상도 대구 달성우씨가의 추수기에서 나타난 연간 고리대 이자율은 1731년 노비제가 종양제로 전환된 이후 50%로 높았으나,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35%로 하락하였다. 1801년 이후 노동 이동성 개선과 일고의 사용 확대는 실질임금의 인상뿐 아니라 신용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하였으며 고리대 이자도 하락하였다."(79-80)


"양반지주는 토지생산성이 떨어지면 이앙법과 퇴비의 사용, 수리시설 개선 등 새로운 농업기술을 도입하거나, 토지 면적당 노동력 투입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농업기술은 일정 기간 고정적이어서, 지주들은 토지 면적당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노동 집약도를 높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였다. 실제 18-19세기 경상도 칠곡과 예천에서 양반지주의 토지에서 일고와 작인의 일인당 토지 경작면적이 줄어들었다." "18-19세기 지주제에서 지대가 감소하고 지대 수취율이 하락하자 양반지주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노비제의 한계보다는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임금 고용계약제를 택하게 된다. 1883년 화고제 이후 단기고공인 일고가 확대되었으며, 고공의 도망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일고들은 지주들에게 경제적, 신분적 예속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노동력보다 자유롭고 생산성이 높았다. 농업경영방식에 관계없이 계절적으로 농번기에 일고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82-7)


제2부 조세제도와 지가, 토지분해


4장 토지소유계층의 변동과 지가


"1590-1900년 동안 전라도·경상도 양반가의 전답매매명문(田畓賣買明文)을 살펴보면 양반층의 논과 밭에 대한 순 매입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민의 토지매도는 18세기 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조세의 토지세화, 정액화와 더불어 지방관이 추가적인 잡세를 상민의 토지세로 떠넘기면서 토지를 보유한 상민층의 부담이 가혹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토지세의 부담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상민층이 토지를 팔고 다른 양반지주의 토지에서 소작을 하거나 다른 도시지역으로 이동하여 임금노동을 하는 것이다. 상민층의 토지매도는 조세의 토지세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 18세기 말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데 반해 토지매입은 1651-1690년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상민층이 보유하고 있는 순 토지규모가 감소하였다. 시기별로 상민층의 토지해체 과정은 양반층의 토지집중 과정과 정반대의 행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양반층의 토지집중이 상민층의 토지분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8-12)


"1700년을 기준으로 전라도·경상도 지역 모두에서 지가 상승은 양반층의 토지소유규모 증가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양반층의 토지 실질가치는 1700년 기준 양적인 토지소유규모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서 양반의 토지집중이 단순 토지소유규모의 집중뿐 아니라 실질자본의 집중을 나타내고 있다. 양반의 토지집중과 상민의 토지분해는 훨씬 더 심각한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다. 1691-1700년의 양반층의 토지자산의 실질가치가 토지규모보다 더 크게 상승하여 실질 토지자본의 축적이 18세기 초반에 이미 시작되었다." "양반층의 토지소유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토지는 분해되었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가정하고 있는 토지의 하향분해현상이 계층별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양반층의 토지소유규모 증가는 주로 상민층의 토지매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토지의 하향분해보다는 토지의 양극화 현상이 일반적이었다."(119-21)


5장 조세의 토지세화와 상민층의 토지분해


"전세는 전통적인 전결(토지)에 부과되는 조세이다. 1444년에 공법(貢法)을 시행하여 토지비옥도와 거리에 따라 1결당 4-20두씩 차등하여 결세를 거두었다. 하지만 지방관청에서 흉년에도 불구하고 1결당 10두의 과중한 전세를 부과해서 백성의 원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1635년 인조는 영정법을 발표하고, 기후조건에 관계없이 전세를 지역에 따라 1결당 4두(특정 지역은 6두)로 고정하였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토지에 대한 세금이 높아지고 토지보유비용이 크게 증가하면서 상민층이 토지를 매도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상민층과 그 가호에게 부담했던 조세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조세수입원도 불확실해졌다. 이에 조선정부는 이전에 상민의 호 또는 사람에 부과했던 세금을 조세수입이 확실하고 고정적인 토지에 부과하면서 조세를 토지세로 전환하였다. 양반 지주의 토지세와 잡세는 자주 소농과 작인에게 떠넘겨졌으며, 소농은 자기 토지세 증가와 더불어 지주의 토지세까지 부담하였다."(123)


"1760년(영조 36) 비총제는 그해 토지세 징수에 대해 조세대상 토지의 실결(實結)을 통해 지역별 총액을 확정하는 방법이다. 징수근거가 되는 경작지의 실결과 재해지의 재결(災結)을 결정하는 연분(年分)에 올해와 비슷한 작황을 보이는 과거 생산을 비교해서 그 작황을 조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토지세 징수액은 지난해와 유사하게 결정되었는데, 이는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호조에서 각 도의 농사형편을 참고하여 이와 상당한 이전 해의 수세총액과 비교하여 그해의 각 도 감면세를 정하는 비총법(比摠法)을 채택하였다. 전세의 납기는 조선 전기의 규정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전세의 정액화를 가져왔다. 지방관은 조세징수액을 높이기 위해서 조세를 감액하기보다는 증액하거나, 고정적인 정액세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흉년으로 토지 수확량이 크게 감소한 경우에도 토지세는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조세의 정액화는 상민층에게 추가적인 준조세의 역할을 하였다."(125)


"18세기 말 조선의 사회제도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민층의 토지에 부과되는 토지세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대동법 이후 전세뿐 아니라, 공납과 대동미, 군역 등 모든 조세가 전결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조세의 토지세화로 인해 상민층의 토지매도는 급증하였다. 이외에 특별세와 전세부가세 등을 지방관이 임의로 과세하였으나 이 또한 주로 양반보다는 상민층에 전가되었다. 결국, 18세기 말 조세의 토지세화는 상민층의 토지보유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상민층의 대규모 토지분해와 노비도망으로 세수재원이 부족해지면서 안정적인 재원마련을 위해 중앙정부는 조세재원이 불확실한 공납과 대동법에 의한 가호별 조세, 군역과 부역 등 사람별로 부과되던 조세도 모두 전결을 대상으로 토지세로 전환했다." "18세기 말 토지세 증가와 지방관의 민고와 환곡, 고리대도 상민층의 토지보유비용을 증가시켰다. 고리대와 환곡을 사용했던 농민들은 토지세와 더불어 추가적인 생계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다."(141)


제3부 지주제와 이윤, 고리대 이자


6장 농업경영방식과 생산이윤


"소농의 생산이윤을 추정하기 위한 자료는 18-19세기 소농의 구체적 사례를 전하고 있는 박문수와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의 문헌을 사용하였다. 이들 문헌에서 소작료는 50% 수준이었으며 소작소농은 농업생산에 필요한 비용과 결세를 부담하였다. 먼저, 15%의 전세(田稅)와 군역·환곡의 부세, 생산 종자비용은 10%였다. 또한 소농이 노동주체로서 계속 일을 하고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생계소비량이 필요한데, 조선 후기 진휼곡 자료를 활용하여 이 시기 최저 생계비는 수확량의 10-15% 정도로 추정하였다. 식량이 부족하고 빈곤했던 소작농들은 생계를 위해 봄에 고리대를 빌려서 가을에 갚았는데 연리 50%였다. 특히 소작농들에게 고리대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이자에 대한 현물대납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봄 춘궁기 때 소작농에게 생계를 위한 돈을 빌려주고 가을 수확기에는 원금과 이자를 곡물로 갚게 하여 단순 이자율에서 화폐가치의 하락분까지 그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추가적인 생산비용이 되었다."(150-1)


"토지세인 결세(結稅)는 처음에 지주가 부담했지만, 18세기 후반 이후 점차 소작인에게 전가되었다. 토지생산량 역시 감소하면서 지주는 소작농에게 결세뿐 아니라 종자비용도 부담시켰고 소작농은 기존에 비해 수확량의 10-20%의 추가 부담이 발생하였다. 김건태(2004)는 18세기 후반 소작인의 수입은 두락당 생산량의 감소, 1인당 경지면적의 축소, 지주제 관행의 변화 등으로 인해 18세기 초반에 비해 대략 40% 감소하였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조세의 정액화로 인해 토지세인 결세가 실제 생산량보다는 과거 생산량을 기준으로 징수되었다는 점이다. 실제 생산량이 예년에 비해 줄어드는 경우 조세 부담이 실제보다 커지므로 그 생산량의 차이는 준조세로서 소농의 생산비용을 상승시켰다." "한번 채무를 지게 되면 소농의 생산이윤이 -11%로 감소되어 적자에서 벗어날 확률이 줄어들었다. 소농은 기후조건과 상관없이 농업생산으로 지속적 흑자를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152-5)


7장 병작제와 임금노동, 고리대 이자


"노비처럼 강제노동을 사용하는 지주는 직영지 경영방식을 선호하며,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지주는 병작제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농업생산방식과 노동양식은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 이는 조선 후기 소농경영방식이 자본주의 형성의 내재적 조건이라는 기존 연구 결과에 의문을 제시한다." "중요한 점은 소농경영 자체가 생산력 강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카무라 사토루가 지적했듯이 생산력 강화 과정에서 소농경영을 하는 농촌의 잉여 노동력을 도시가 흡수하여 자본주의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농경영의 특성을 잘못 전달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소농은 거의 적자경영이었으며, 토지가 분해되고 있었다. 농촌의 잉여노동력의 존재는 생산력 강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며 단지 자본의 축적과 확산에 필요한 조건일 뿐이다." "소농경영방식이 조선 후기에 최적생산방식이었다면 소농경영이 고공노동을 이용한 병작경영을 대체하여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못했다."(168-9)


# 병작제 : 경작인이 독립 소경영을 하고 지주는 농업경영에서 분리된 채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지대만을 수취하는 형태


"단기고공인 일고는 토지가 없는 무산자였으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주체였다. 이들은 스스로 가족을 중심으로 소농경영을 하였고, 지주의 병작지를 임차하여 지대를 지불했다. 이들은 매년 고리대에 의존하여 봄 춘궁기에 식량을 빌려서 가을 수확기에 고리대를 갚았다." "신용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농업경제인 조선에서 이자율은 농업생산을 통해 최저 생계비를 유지할 삶의 수준을 담보로 신용위험을 고려하여 높게 책정(35-50%)되었다. 18-19세기 고리대는 조선 후기 노비와 고공의 도망이 빈번해지면서 사회적 믿음과 사회적 신용자본이 붕괴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용과 금융의 기능이 축적되지 못하고 시장발전을 저해하였다."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사회적 신용과 사회적 자본이 점차 형성되면서 고리대는 20-35%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1801년 이후 노동 이동성 개선과 일고의 사용 확대는 실질임금의 인상뿐 아니라 신용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하였다."(170-1)


제4부 화폐제도와 물가


8장 화폐제도와 물가, 교역조건


"조선은 1625년부터 적극적인 동전의 유통정책을 시도하였으며, 동전의 주전(鑄錢)에 대한 논의도 지속되었다. 명목화폐인 동전을 만들려는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603년(선조 36) 6월에 영의정 이덕형은 〈우리나라는 화폐로서 단지 미·포를 사용하기 때문에 농사는 병들고 국가는 가난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동전을 유통시킴으로써 응급한 국가 경비에 충당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자고 하면서 동전 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623년에 인조는 경기도에만 시행하던 대동법을 강원도에도 시행하였고, 1625년(인조 3) 10월 조선정부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는 문제를 거론하였다." "최명길과 김육은 동전유통을 개성으로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김육은 효종의 신임을 토대로, 자신이 추진하여 성과를 거둔 대동법에 의한 공납의 일부를 돈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여, 대동법과 행전법(行錢法)을 결부하고자 하였다."(188-9)


"17세기 초부터 의욕적으로 추진된 조선의 화폐정책은 1656년 중단되었다가 1678년 상평통보가 주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7세기 초 동전 유통정책이 계속 실패했지만, 동전 사용의 유용성을 점차 백성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시장거래에서 면포와 은화가 교환수단으로서 한계를 가지면서 명목화폐로서 동전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초기 상평통보의 유통은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만 통용되었지만 동전주전의 확대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동전유통량은 18세기 초에 500만 냥을 넘었으며, 이는 당시 조선의 쌀 생산량의 80%에 가까운 130만 석 정도를 살 수 있었다. 18세기 초 국내 동광 개발이 부진하여 동전원료를 일본의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일본 동의 수입량도 급감하여 동 원료 공급난이 심각하였다. 동 수입 제약은 이 당시 전황[錢荒, 동전 부족]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었다. 1731년(영조 7) 전황이 극심하고 동전가치가 품귀해지자 33년 만에 조선은 동전을 다시 주조하였다."(191-2)


"동전유통으로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조선 사회의 성리학적 가치체계와 농업 중심의 생산양식, 신분제의 사회질서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즉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농업·광업·수공업의 생산력 증진, 상민과 소농의 토지이탈, 고리대의 성행과 농촌사회의 분화, 사회적 부의 불공평한 재분배, 사회경제적 윤리로서 성리학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전 유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화폐 가치관이 나타났다. 이익은 동전의 기능과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국토가 좁아서 재화 운반에 큰 어려움이 없고 농민이 스스로 밭을 갈고, 길쌈하는 자급자족적 농업에서 동전유통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조선은 1727년 대동포, 군포, 노비신포를 종래 동전과 면포로 반씩 거두는 것을 모두 면포로 거두게 하였다. 또한 부상대고와 관청, 군영에서 동전의 퇴장을 금지하였다. 동전가치가 귀해지면서 부상대고들은 동전을 퇴장시켜서 고리대업을 통해 높은 이익을 취했다."(198-9)


# 부상대고富商大賈 : 많은 밑천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를 하는 상인


9장 화폐의 품위저하와 디플레이션


"13-16세기 유럽 국가들은 국왕의 법에 따라 금화와 은화 등 법정주화의 제작을 독점적으로 관리했으며 주화의 무게와 형태, 금과 은의 함유량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왕실의 재정수입을 확충하기 위해 주화의 무게와 함유량을 줄여서 주전비용을 절감하거나, 주전이익을 높이는 주화의 품위저하(debasement)를 시도하였다." "유럽에서 주화의 품위저하로 구 주화와 신 주화가 금과 은의 무게단위로 유통되었다면, 화폐량의 변화가 없어야 하는데 실제 대규모 화폐량이 증가하였다. 이는 품위저하의 퍼즐이라고 한다. Rolnick et al.(1996)은 주화의 품위저하 퍼즐을 가져온 원인으로서 구 동전과 신 동전이 무게단위가 아닌 동일한 액면 가치(by-tale)로 유통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구 동전과 신 동전이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유통되는 경우 구 동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구 동전의 구매력을 보전하기 위해 새로운 동전으로 전환하며 이때 화폐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214-5)


"Velde et al.(1999), Sargent and Smith(1997)는 구 주화와 신 주화가 동일한 액면 가치로 동시에 유통되는(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우는 사람들이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두 주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구 동전의 품위저하 퍼즐은 구 주화와 신 주화가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유통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론적으로 동전의 무게와 품질을 하락시키면 동일한 동전 원료를 사용해서 더욱 많은 동전을 주전할 수 있으므로 화폐량은 일반적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조선에서 동전 품위저하는 화폐량을 증가시키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초기 화폐경제의 특성인 전황과 동전의 가치 안정화 정책에 있다. 전황과 동전의 가치 안정화 정책은 구 동전과 신 동전이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유통되는 경제환경을 제공하였지만, 동의 수입제약, 높은 주전비용과 동전을 천시하는 성리학 지배이념으로 상평통보는 간헐적으로 주전되었으며, 전황은 지속되었다."(216)


# 조선의 주전이익률은 재료비와 연료비, 공임, 운반비 등을 고려하면 거의 0에 가까워 동전주전에 대한 적극적인 인센티브조차 없었다.


"조선 후기 전황비율은 1678-1750년 0.5-3.6% 수준에 불과하였지만, 점차 화폐공급이 증가하면서 1750-1820년 30-40%, 1820-1865년 60-80%로 증가했다." "동전이 세금으로 납부되고 다시 시장으로 환류하지 못하고 정부와 상인에 의해 퇴장되는 비중도 거의 80%에 달하고 있다. 동전의 마모와 손실률이 25% 정도라고 가정하면 동전퇴장으로 화폐유통속도는 1과 유사했거나 그보다 작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 후기 미곡과 면포 등 상품화폐의 사용비중도 크기 때문에 화폐유통속도는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황의 경제적 원인은 시장거래량이 확대되는 데 반해 동전주전이 제약되는 것 때문이지만 동전의 퇴장 등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전황으로 화폐가 귀해지면서 지주나 상인층들이 부의 축적 수단으로 화폐를 퇴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다시 전황을 가속화시켰다. 이같은 전황과 디플레이션은 상민과 소농을 분해했으며, 신분제를 해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239-40)


제5부 식민지 화폐개혁과 인플레이션, 경제궁핍


10장 식민지 화폐개혁과 인플레이션, 환율


"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재정비하고 경복궁을 재건축하는 데 소요되는 거액의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악화인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1866년(고종 3) 11월부터 6개월 동안 1,600만 냥을 주조하였다. 당백전은 이전에 사용되던 상평통보에 비해 소재가치는 5-6배이지만, 액면 가치는 100배가 되는 고액전이었다. 당백전의 발행으로 거액을 일시적으로 왕실재정에 충당할 수 있었지만, 당백전은 실질가치가 액면 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악화(惡貨)였다." "국내 화폐시장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으로 무역결제통화로서 일본 은화를 비롯한 중국 마제은(馬蹄銀), 멕시코 은화, 러시아 루블 은화 등 여러 종류의 외국 화폐가 유입되었다. 외국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문제는 상평통보와 외국화폐의 상대적 가치, 즉 상평통보의 환율(한전비가)을 일정하게 정하지 못해서 환율도 급변했다. 조선화폐의 남발과 외국 화폐가치에 대한 혼란으로 물가 급등과 많은 사회적 문제가 나타났다."(247-8)


"1865-1910년은 근대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시기이며, 일본 주도 화폐개혁은 조선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식민화가 되기 전에 이미 화폐적으로 식민화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일본화폐의 유통이 합법화되면서 조선에서 일본화폐의 유통비중이 30%를 넘어섰고, 시장과 경제를 화폐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화폐개혁은 식민지 화폐의 단위를 변경시키거나,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거나, 또는 옛날 화폐를 환수하는 화폐정책을 말한다. 1876-1910년 사이 식민지 화폐개혁은 모두 일곱 차례로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 일본이 주도한 세 차례 화폐개혁은 1891년 신식화폐조례, 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 1904년 화폐조례칙령, 즉 화폐정리사업이다. 1894년과 1904년의 화폐개혁은 각각 일본이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했던 시기였다. 일본주도 식민지 화폐개혁은 일본 불환지폐의 유통을 확대해서 청일·러일 전쟁 경비를 조선에서 조달하는 불순한 목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246-7)


# 일본 주도의 식민지 화폐개혁

1. 신식화폐조례(1891) : 일본화폐의 유통을 법적으로 허용하기 위한 조치로서, 빈번한 화폐개혁은 조선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려 조선상인과 백성들에게 손실을 안겨주었고, 반대로 화폐개혁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상인들은 가치가 오른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무역과 유통에서 큰 이익을 보았다.

2. 신식화폐발행장정(1894) : 모든 당오전과 평양전을 일문전으로 통합하고, 백동화를 대규모로 발행하였다. 또한 금 태환이 안 되는 일본 지폐의 유통을 합법화하여 청일전쟁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여기에 화폐위조에 대한 처벌규정을 제거하여 일본인들에 의한 대규모 백동화 위조와 밀수를 조장했다.

3. 화폐조례칙령1호(1901) : 명목적으로는 금 본위제도와 중앙은행의 도입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전환하려는 것이었다. 화폐단위를 푼, 전, 냥에서 원 단위로 통일했다. 또한 일본의 금 본위제도 실시로 인해 부족한 금을 조선에서 대규모로 반출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4. 화폐정리사업(1904) : 일본 제일은행권을 법정화폐로 지정하고, 조선의 화폐발행권을 박탈했다. 이에 따라 백동화를 조세로 수취하는 조선정부와 백동화를 기반으로 어음을 발행하던 조선 객주와 상인은 커다란 손실을 입었고,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미곡을 구매한 일본상인들은 많은 무역차익을 얻었다.


"19세기 말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화폐를 유통시켰고, 한전비가는 일본상인들에게 유리하게 점차 하락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확대와 금 본위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부의 원천으로서 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일본의 조선 금 수입액 비중은 1904년 일본 전체 금 수입액의 41%에 달했다. 일본이 조선 금을 매입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쉬운 방법은 일본화폐의 사용과 한전비가 하락이었다. 동일한 일본화폐를 사용해서 이전보다 싸게 조선 금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금 분석소의 설치, 금광 개발 등 정책적으로 조선의 금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 조선에서 한전비가의 하락과 별도로 조선 금을 국제시세보다 30% 이상 싸게 구입하는 가격수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국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위해 일본은 자국 또는 식민지에 획일적인 경제제도의 개혁을 강요하였으며, 일본 주도 식민지 화폐개혁은 국가 자본축적을 위한 필수적인 화폐침략이었다."(267)


"무역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탈이윤은 공정한 무역과정에서 등가 교역조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상이윤을 초과하는 이윤을 말한다. 이때, 정상이윤은 같은 시기 정상 이자율인 8-10% 수준을 말한다." "일본상인의 유통과 무역이윤의 크기를 직접 추정해 보면, 일본주도 화폐개혁이 조선에 가져온 경제적 수탈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일본상인의 미곡 무역이윤율은 무역운송비(15%)를 제외하면 8.4%로서 정상이윤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상인의 유통이윤은 거간과 객주의 중간 수수료율 18.14%와 한전비가 하락률 -9.3%를 고려하더라도 연평균 33.15%로서 상당히 수탈적이었다. 같은 시기 조선의 대일 교역조건은 1880년 기준 50-60%에 그쳐 악화되었으며, 대일 무역은 부등가 교환이었다. 이러한 일본상인의 무역과 유통 초과이윤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은 인플레이션과 한전비가 하락 등 식민지 화폐개혁으로 인한 화폐적 요인이었다."(286-7)


"이러한 일본의 무역수탈과 식민지 화폐개혁에 반대하는 의견들은 무역의 상호이익원리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일본상인들이 미곡과 금 무역에서 유통이윤이 발생했지만,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통해 상호이익과 교역조건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즉, 교역조건의 개선효과는 조선의 미곡 생산가격은 아주 낮았지만,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이전보다 미곡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게 되며, 수출가격의 개선효과로 인해 경제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국가의 교역조건은 등가조건으로 교환될 때 100을 기준으로, 교역조건이 100 이상으로 개선되면 이익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미곡의 교역조건은 1880년 대비 50-60%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점차 개선되었지만 1905년 이후에서야 100에 근접하고 있다. 즉, 초기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미곡무역에서 불리한 부등가교환이 발생하였으며, 조선의 교역조건은 개선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294-5)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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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없는 개발 -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2016 개정증보판
허수열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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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 문제의 제기


"'(식민지) 개발론' 연구 역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나 수탈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이른바 '수탈론'과는 달리 개발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개발론'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공업화에 성공하여 '중진국' 내지 선진 자본주의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생긴 것이다. 즉 한국의 성공적 공업화의 '역사적 배경' 혹은 공업화의 '경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생긴 것이었다. 일제시대에 조선사회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초석이 놓여졌고, 그것이 해방 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성장사학에서 이러한 개발적 입장이 가장 확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한국사의 입장에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러한 개발이 조선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없다. 이 책은 민족문제야말로 식민지 조선경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개발론'과 생각을 달리 한다."(23-6)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기간 동안 조선은 급속한 개발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고, 조선인들의 경제적 처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전망도 없었으며,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에 의한 민족차별이 구조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민족별 소득 불평등은 다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악화할 것이고, 이것은 소득 분배관계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즉 민족별 경제적 격차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고, 식민지체제가 존속하는 한 확대재생산 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극단적이고 구조적인 민족별 경제적 불평등은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사이에 발생하게 되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이 개발의 유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바로 그 의미에서 일제시대의 개발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개발 없는 개발(development without development)'이었다."(28, 34)


제2장 농업개발


"1910년대 조선의 농업은 구한말 시대에 도달했던 농업상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의 조선의 농업을 검토해보면, 조선왕조 말기의 농업상태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이 시기가 왕조 붕괴기로 국가적 차원에서는 농업개발을 위한 노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지면적, 관개시설, 품종개량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국가가 공권력을 회복하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게 된다면, 조선의 농업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이루어진 조선의 농업발달이나 해방 후 한국의 농업발달이 그것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제시대에도 1920년대의 산미증식(갱신)계획에 의한 관개시설의 확충과 1920년대 후반 이후의 비료투입의 증가 및 1930년대의 다수확품종의 도입 등에 의해 미곡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56)


"일제 시대의 농업개발은 상당한 정도의 농업생산량 증산을 이루었다. 미곡의 경우에는 52.3%, 밭작물의 경우에는 31.2%가 각각 증산된 것으로 계산되었다. 이러한 증산은 경지면적 혹은 재배면적의 확대, 우량품종의 보급, 관개시설의 확충, 비료투입의 증대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시대 식민지적 농업개발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일제시대 농업개발의 또 하나의 측면은 식민화의 과정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의 중심축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농업개발 과정에서 보다 비옥한 토지를 점점 더 많이 집적해갔다. 일본인 수중으로 토지가 점점 더 많이 집적·집중됨으로써, 조선에서 생산된 농산물 중에서 일본인이 차지하게 되는 몫도 크게 늘어났다. 농업개발 과정이 진행되면서 민족별로 농업소득의 분배상태는 더욱 불평등해져 갔기 때문에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조선 농민들의 경제적 처지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79-80)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은 1910~15년간 및 1928~35년간에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가했지만, 1916~28년간 및 1935~42년간에는 변화가 매우 완만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중 1910~15년간의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의 급증은 동양척식(주)의 회사소유지의 확대에 의한 바가 크다." "1928~35년간의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의 1910~15년간의 급증과는 원인을 달리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는 대공황의 시기였다." "요컨대 1920년대 말 이후의 공황 과정에서 농가의 경제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현금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고 차입금 상환압박이 컸던 일부 지주들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방매함으로써 이 시기에는 대규모로 토지소유권 이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적 곤란 때문에 토지를 염가로 방매할 때 자금력이 좋은 일부 일본인들이 그 토지를 대량으로, 또 염가로 사들임으로써 1928~35년 간에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이 급증했던 것이다."(85-90)


"191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걸쳐 소작농 호수가 급증하고 자소작농 호수가 급감하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자작농 호수는 50만 호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자소작농 호수는 100만 호 정도에서 70만 호 정도로 크게 줄어들고, 반면 소작농 호수는 100만 호 정도에서 150만 호 정도로 크게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격심하였다. 그리하여 농민분해가 일단락되는 1930년대 초가 되면 자소작농 호수는 소작농 호수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1915~32년간의 불과 17년 만에 자소작농 호수는 31% 감소하고 소작농 호수는 64% 증가해, 전체 농가의 53%가 소작농이 되어버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격렬한 농민 분해가 있었던 것이다. 산미증식(갱신)계획으로 대표되는 일제시대의 농업개발 정책은 농업생산의 증가와 동시에 수많은 조선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궁박 상태에 놓이게 만든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06-7)


"1942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조선에서 일본인 농가 호수와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0.17% 및 0.19%로 극소수였다. 이 극소수의 일본인들이 조선 전체 논 면적의 16.9%와 조선 전체 밭 면적의 4.6%를 소유함으로써, 민족별로 극심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농업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산수단인 경지의 극단적인 불평등한 소유관계, 그리고 소작제도라는 생산관계에 의한 농업경영, 이 두 가지가 바로 식민지적 농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남한의 미곡 생산량 혹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본격적으로 증가하는 시기는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70년대 후반기 사이의 20여 년간이었다. 농업혁명이라고 할 만한 놀라운 성장이 공업의 본격적 발전에 선행하면서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70년대가 되면 숙명처럼 여겨지던 '보릿고개'가 사라지게 된다. 일제시대의 미곡 생산량의 일시적인 증가는 마치 찻잔 속의 폭풍과 같은 것이었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126-8)


제3장 공업개발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직후 채택한 산업정책은 조선을 순수 농업지대로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회사령(1911~20년)으로 조선에서 근대적 대공업이 발흥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나, 해외 유학과 고등기술교육을 규제함으로써 조선인의 기술발전을 억압하려 한 것에서 병탄초기의 정책의도가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1916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기가 도래하면서 조선의 공업발전을 억제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규제는 한결 느슨해지는 한편, 기업설립 활동을 활발해졌다. 그 결과 회사령은 공식적으로는 1920년에 철폐되지만 1916년경부터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그 후 1920년대 말까지는 조선총독부가 공업발달을 저지하는 정책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뚜렷이 공업개발을 중시하는 산업정책을 세웠던 것도 아니다. 이 시기의 산업정책은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부문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의 조선의 공업은 주로 영세중소자본의 속출을 특징으로 하게 된다."(132-3)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조선의 대표적인 재벌로 성장하는 일본질소비료(日窒)의 조선 진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곧이어 일질 이외의 일본대자본의 조선 진출도 상당히 활발해진다. 미쓰이(三井) 계통의 남북면업(南北綿業)·군시제사(郡是製絲)·동양제사·소야전시멘트, 미쓰비시(三菱) 계통의 조선중공업, 니치멘(日本棉花) 계통의 조선면화·전남도시제사, 카네보(鍾紡) 계통의 종연방적(鍾淵紡績), 카타쿠라(片倉) 계통의 편창제사, 동척(東拓) 계통의 조선연탄, 아사노(淺野) 계통의 천야시멘트스레트 등의 14개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때 진출한 대자본의 대부분이 1930년대에도 조선공업발달을 주도해가는 자본계통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일본대자본의 조선진출은 1930년대에 들어 한층 가속화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이 보다 적극적인 공업 육성정책(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으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133-4)


"일제시대 산업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단순히 제2차 산업이 발달한 것만이 아니고 제2차 산업 내부에서는 경공업을 제치고 중화학공업이 더욱 급속히 발전함으로써 공업구조가 한층 고도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940년에 조선이 도달한 중화학공업의 비중 51.6%는 전간기에 선진 주요 공업국이 도달했던 수준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 높은 수준이었다." "1930년대에 조선의 공업구도가 급속도로 중화학공업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조선의 자원, 특히 전력 자원에 대한 재인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질소비료(주)는 부전강에 댐을 건설하여 20만kW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거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이용하는 유안공장을 함경남도 흥남에 설립했다. 전기를 이용해서 공중 질소를 고정하고,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와 산소를 얻고, 질소와 수소를 합성하여 암모니아를 얻어 유안을 생산하는 암모니아합성법(전해법)에서 전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이자 동시에 공업 원료이기도 했다."(153-6)


"일제 말 조선에 투하된 공업회사자본은 모두 일본인 회사자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에 대한 동양경제신보사의 추계에 의하면 조선인 공업회사 자산은 5%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95%는 일본인 공업회사의 것이었다. 1942~45년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인 공업회사 자산의 비율은 더 증가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기간의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염두에 둔다면 그 비율은 더욱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당시의 조선의 공업회사 자산은 거의 대부분 일본인 공업회사 자산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해방 당시 조선의 5,300개 일본인 회사 중에서 0.4%에 해당하는 23개의 일본인 대공업회사의 자산이 조선 전체 일본인 회사 자산의 43.1%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조선전력과 일본질소비료, 압록강수력발전, 일본제철 등의 4개의 회사 자산만으로도 조선 전체 일본인 회사 자산의 1/4을 조금 넘는 25.6%나 되고 있다."(177, 180)


"일본인 근대적 대공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 공장수의 1%도 되지 않는 62개의 공장에서 전체 공장생산액의 29%를 생산하고 있었다. 둘째, 이들 업종은 대체로 독과점적인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노동자 1인당 생산액이 다른 업종에 비해 월등한, 자본집약적 생산기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넷째, 공장당 노동자수가 평균 422명으로 그 밖의 공장의 35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 "토착공업과는 판이한 이런 특징들 때문에, 생산과정은 대체로 자기완결적이었고, 따라서 일부 원료조달 부문(예컨대 정어리 기름 등)과 일부 제품 가공업(예컨대 시멘트 벽돌이나 기와 등)을 제외하면 조선 내의 다른 자본, 특히 조선인 자본과는 거의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었다. 1930년대에는 바로 이들 업종의 생산액이 비약적으로 증대함으로써 조선의 공업생산액이 급증하고 공업구조가 고도화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들 일본인 대공업과 조선인 공업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관계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188-90)


"조선에서 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이지만, 그 전조는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군수공업 육성은커녕 공업 육성의 의도조차 뚜렷하지 않던 시기였다. 즉 조선의 공업화는 군수공업이라는 동기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업화를 군수공업화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잘못된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의 공업화는 군수공업화이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모든 자원이 전쟁이라는 목적에 합치하도록 통제된다는 가장 큰 특징이 있고, 따라서 군수공업육성이 가장 중요한 산업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 이전의 공업화에서 군수공업 육성이라는 계기를 강조하는 것이 무리이듯이, 중일전쟁 이후의 공업화에서 군수공업육성이라는 계기를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군수공업화를 논외로 하고는 공업화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종래의 군수공업화 강조론은 타당하다."(205-6)


"1943년 10월에 공포된 '군수회사법'에 따라, 조선에서는 제1차 및 제2차 두 번에 걸쳐 100개 회사가 군수회사로 지정되었는데, 그 중 조선인 회사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과 백낙승의 일본무연탄제철 둘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 회사였다." "회사수는 100개사로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 군수회사로 지정된 회사의 자산이 일본인 회사 자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9%나 되고 있다." "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가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236-7)


제4장 근대교육과 기술의 발전


"조선의 근대적 교육은 갑오개혁(1894) 이후 사범학교, 중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농상공학교, 소학교 등의 관공립학교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5년경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나타난 애국계몽운동에 의해 근대적 교육은  또 한번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근대교육운동은 민족교육의 맥락에서 이루어졌고, '자주독립', '문명개화', '내수외학', '아는 것이 힘이다' 등의 슬로건 아래 추진되었다. 각지에 학회, 교육회 등이 조직되는 한편, 학교건설·운영운동, 민중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 이에 따라 병탄 직전인 1910년 3월에는 2,146개소의 보통학교에 10만 명을 상회하는 조선인 학생들이 제적하게 된다. 이 숫자는 해방 당시의 조선인 학생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이지만, 5년 남짓한 사이에 근대교육기관의 수가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은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근대교육을 확대해나갈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41-2)


"그러나 일제 말기의 민족별 학력구조를 살펴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한다. 1944년 5월의 인구조사 결과보고를 보면, 일본인의 73%는 소학교 초등과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불취학자는 27% 정도 되지만, 불취학자 16만 명 중에서 14만 명은 11세 이하이기 때문에 실제 불취학자의 비율은 2.9%에 불과하다. 여기에 소학교 초등과 중퇴자 1.3%를 더해도 4.2%에 불과하다." "반면 조선인의 경우에는 학력 수준이 매우 낮다. 불취학률이 86%에 달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11세 이하를 제외하더라도 불취학률은 54%에 이른다. 한편 일본인의 경우와는 달리 소학교 초등과 졸업 이후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에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거의 중단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전체 조선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6%에 불과했지만, 소학교 고등과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수는 조선인보다 많았다. 중학교, 전문학교 및 대학교 졸업자수는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250-1)


"1930년대 후반 조선인 기능자 양성은 급박한 전시체제로 어쩔 수 없이 종래의 방침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질적으로 그렇게 높은 수준에 있지 않았다. 1946년 11월, 남한에는 약 9천 명의 숙련노무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학력은, 소학졸이 거의 7할에 육박하고 중학졸 이상은 3할 남짓하기 때문에, 결코 높다고 하기 어렵다. 한편 이 숙련노무자수를 1943년의 조선인 기능자수 40만 명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격차가 있다. 1943년의 경우는 남북한을 합한 숫자인 반면 1946년은 남한만의 숫자이고, 해방직후의 산업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양자간의 이 엄청난 격차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결국 1943년의 기능자 속에는 1946년의 숙련노동자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기능수준의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일제 말기 조선인 노동자의 질적 성장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한계를 갖는 성장이었다."(263-4)


제5장 불평등과 차별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이 감소경향을 가지면서 또 상당히 불안정하게 변해간 반면에 일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적어도 1940년까지는 1.1석을 오르내리는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불안정과 일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안정이 무역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키무라 미츠히코는 미곡, 보리 및 대두의 소비에서 얻어지는 조선의 1인당 일일 섭취 칼로리를 계산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칼로리 섭취량은 1918년이 정점이고 그 뒤로 계속 감소하여 1936년에 최저점에 도달한다. 그 뒤 다시 약간 증가하지만, 1918년의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키무라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에 1인당 곡물소비량은 결코 증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는 아직 엥겔계수가 매우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1인당 곡물소비량의 동향은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거나 혹은 1인당 소득이 증가했다는 주장을 하기 어렵게 해준다."(275-7)


"현재의 한국과 같이 독립된  경우에 있어서는 국내총생산이든 국민총생산(GDP)이든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같은 식민지경제의 경우에는 국내총생산에 대한 추계로부터는 조선인의 경제상태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차명수의 추계에서처럼 1912~37년간의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4.1%로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조선인들의 소득, 소비, 투자 등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끄집어낼 수 없다. 기껏해야 1인당 소비라든가 1인당 투자와 같은 평균적인 개념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민족별로 소득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한다면, 이런 평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키무라의 계산과 같이 만약 일본인들의 평균 소득이 조선인의 10배라고 가정한다면, 1940년의 경우 조선에 거주하던 70만 명의 일본인들의 소비능력은 조선인 700만 명의 소비능력과 비슷할 것이다. 결국 평균적 개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279-80)


"일제시대의 조선인 노동자 중 일부 숙련노동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불숙련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생존수준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임금수준이 일제 말기까지 변함 없이 지속되었다. 전체 노동자수의 15% 정도 되는 숙련노동자만 생존수준 이상의 임금을 받았던 것으로 된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도시하층민, 노동자 등의 생활수준을 검토해보았을 때 그들 대중의 경제적 처지가 생존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제시대에 조선경제가 고도성장했고 또 공업화를 통해 공업제품의 조선 내 소비가 급증했다는 거시적 제지표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1인당 소비에 개선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조선인 경제에서는 아직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근대적 경제성장이란 인구증가가 계속되는 조건 하에서 1인당 생산량이 지속적 성장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291-3)


"학력에 의한 차별은 오늘날의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광범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당시의 일본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만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이 학력에 의한 차별의 본질은 학력주의로 위장된 민족차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내의 인구 중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지만,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 내에서는 초대 총독 이래 조선인에게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으려는 방침이 관철됨으로써 고등교육기관의 확충이 지지부진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학하는 학교의 경우에는 민족별 쿼터제를 도입하여 조선인의 입학기회를 원천적으로 제한했다." "따라서 굳이 민족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선 내의 여러 직장에서 학력을 기준으로 직원이나 사원을 모집하게 되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309)


제6장 연속과 단절─개발의 유산


"해방 당시 조선에는 일본의 해외자산 총액 218.8억 달러의 24%에 해당하는 52.5억 달러가 소재하고 있었고, 그중 남한에는 총액의 10.5%에 해당하는 22.8억 달러가 소재하고 있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남한지역에 남겨졌던 일본인 자산은 만주나 '기타 중국(북, 중, 남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지역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다." "일본인 기업자산의 북한지역 편중은 공업자산에서 한층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공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양분하여 비교해보았을 때, 경공업부문에서는 남한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중화학공업부문에서는 북한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해방과 그것에 수반된 남북분단을 전제로 한다면, 해방 후의 한국경제를 일제시대와 연속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단절적인 측면이 더 강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의 하나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경제가 다시 가난한 농업국으로 바뀐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318-21)


"남한지역에 남겨진 물적 유산도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방 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첫째, 해방 후 남한은 식민지적 분업구조의 붕괴에 따라 생산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 결과 해방 직후에는 약간 남아 있던 비축 원자재가 소진되어가면서 원료부족으로 휴업상태에 빠지거나, 심각한 조업단축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둘째, 전시체제 기간 동안 생산시설은 각종 통제에 의해 군수산업과 관련 있는 산업부문이 여러 가지 정책적 보호와 지원에 의해 비대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 물적 유산은 군수산업부문에서 평화산업부문으로의 구조전환을 통해 비로소 남한 경제의 부흥이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이들 물적 유산 중에는 일제 말기에 부품확보가 어려워 조악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거나 이미 노후화되어 해방 시점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결합되어 해방 직후에는 많은 생산시설이 그냥 녹슬어가게 되었다."(322-5)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해방 직후 남한에 남겨졌던 물적 유산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다시 그 50.5%가 파괴되었다." "일본인 물적유산의 한국전쟁 이후의 잔존가치는 조선전체 일본인 부동산자산의 4.9%, 조선전체 일본인 공업부문 부동산자산의 10.6%, 남한에 남겨진 공업부문 부동산자산의 39%에 각각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의 공업화과정에서 형성된 일본인 공업자산과 한국전쟁 이후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자산의 크기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는 한국전쟁 이후 본격화되어, 1960년까지 약 30억 달러가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1960년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일제시대의 물적 유산은 미국의 대한 원조액의 약 1/7 정도에 불과한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요컨대 물적 유산이라는 측면에서만 한정하여 평가한다면, 해방 후 남한지역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자산이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국의 공업화에서 한 역할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327-9, 334)


종 장 개발 없는 개발


"이 책은 실증이 가능한 것만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종 제도적 개혁 같은 것은 논의하지 않았다. 물론 일제시대에 도입된 각종 근대적 제도들이 해방 후 한국사회의 형성에 적지 않게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많은 부정적 측면을 수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 수량화하여 다루기 어려운 것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남북분단과 민족갈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일제시대에 활약했던 많은 조선인 기업가들은 정부와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해방 후의 잣대로 평가하면 친일파 혹은 예속자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철도가 깔리고 도로가 뚫리고, 전화와 전기가 들어오고, 많은 공장과 저수지가 생겼으며 또 학교가 들어서고 도시가 발전한 것만 보고 일제시대를 문명화의 시대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시대는 더 없는 야만의 시대였던 것이다."(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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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쓴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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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평화


"독립운동의 1세대가 전통 학문을 익혀 구시대 안목에서 망국의 변을 극복하려고 했다면, 2세대는 어려서 전통 학문을 익혔으나 청년 시절 격변기를 맞아 신문명을 수용하면서 구시대와 신시대 간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1세대의 독립운동이 전통적 의식과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2세대는 근대적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어간 주체들이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신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 국외 한인사회 등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2세대였다. 3세대는 어려서부터 신학문과 신사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독립운동에 접목해 그 폭과 깊이를 더했다. 3세대는 3·1운동에서 만세운동의 전위를 담당했으며, 1920년대 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다. 이들은 1920년대 이후 2세대와 함께 독립운동의 근간을 이루었다. 4세대는 1940년대 전시체제를 강요받던 상황에서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항일투쟁을 벌였던 학생들을 비롯해, 광복군 등 1940년대 국외 독립군에서 활동한 젊은이들이었다."(15)


"그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은 '일제 침략에 맞서 나라를 되찾는 것'에 초점을 맞춰 투쟁사로서의 관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독립전쟁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것만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퇴치하는 평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자유를 파괴한 일제의 퇴치를 위해 독립운동이 무엇을 했는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마주치게 된다." "한용운은 「조선 독립의 서」에서 인류가 추구할 최고의 가치로 '자유와 평화'를 설정하고, 이는 인류의 권리이자 의무라 정의했다." "윤봉길 의사도 자신의 의거를 단지 〈한국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멸망하는 날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전개한 것〉이라고 표명한 바 있었다. 한국의 독립은 일본과 한국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의 종말과 함께 달성할 수 있는 일로 인식한 것이다. 즉 한국의 독립운동은 반인류적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수호한 평화운동이었고 인도주의운동이었다."(24-5)


1강 일제강점기 통치의 성격과 특징


"1910년대 일제의 통치 정책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물론 한말에도 토지사유권이 확립되어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불충분했을 뿐 아니라, 토지에 농민층의 여러 권리가 딸려 있었다. 그런데 이를 모두 무시한 채 토지사유권에서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농민의 권리를 모두 배제했다. 이로써 일제는 토지 점유를 용이하게 하는 한편, 러일전쟁 이후 많은 토지를 집적하고 있던 일제 자본의 토지 점유를 합법화했다. 일제는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하고 있던 농민들의 관습상의 경작권·개간권·도지권·입회권 등은 철저히 부정하고 오로지 지주의 사유권만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많은 농민의 토지는 국유지로 강제 편입되거나 지주의 소유지로 바뀌었다. 결국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지주제의 발전과 농민층의 분화·몰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34-5)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된다. 이는 1918년 8월 일본 내에서 일어난 '쌀 소동'을 잠재워 식량과 쌀값 문제를 안정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자신들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수리시설 확충을 통한 토지개량사업과 품종개량 및 비료 사용을 통한 농사개량사업을 병행했다. 일제는 많은 자본을 토지개량사업에 투입했지만, 저리 자금의 융통, 수리조합의 설립 등이 대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농민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산미증산계획은 계획 자체의 부진에도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의 평균 생산량과 반출량을 1930년부터 1932년까지의 평균치와 비교하면, 생산량은 1472만 석에서 1713만 석으로 241만 석이 증가했지만, 반출량은 295만 석에서 725만 석으로 430만 석이나 증가했다. 이는 생산량 증가분보다 더 많이 반출한 것으로, 수탈 성격이 강했다."(40)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한국인의 반대와 저항을 억누르면서 한국을 인적·물적 자원의 병참기지로 만들어 전쟁에 동원하는 국가총동원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 때문에 지하자원의 개발과 군수공업 건설 등 전 부문에 걸친 생산력 확충과 증산이 강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전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고 전쟁 비용을 확보하고자 한국인들에게 저축을 강요했다. 이렇게 회수된 자본들은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일본 독점자본에 배분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의 희생을 강요하고자 일제는 철저히 일본인화를 꾀하는 민족말살정책, 즉 '황민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관제 운동이 실시되었다. 1938년 〈거국일치〉, 〈견인지구〉, 〈진충보국〉, 〈내선일체〉라는 4대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이를 확대·개편하여 1940년대부터 실시된 '국민총력운동'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황민화 정책은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하면서 절정에 달했다."(47-9)


# 일제의 식민 통치의 변화

1. 1910년대 : 헌병경찰통치(무단통치), 토지조사사업, '회사령'(1910년, 허가제)

2. 1920년대 : 민족분열통치, 고등경찰통치(문화통치), 산미증식계획, '회사령' 폐지(1920년), 일본 자본가 진출

3. 1930년대 : 민족말살정책, 병참기지화 정책, 국가총동원령


2강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1910년대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원류는 1905년 이후 국내외에서 추진된 국권회복운동(의병운동·구국계몽운동)이었다." "의병운동은 존왕주의적 충군애국 의리에 토대를 두었고,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 회복이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고, 의병운동은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통한 전통적 전제군주제 국가를 재건하려는 '복벽주의'라 할 수 있다. 구국계몽운동은 서구적인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교육과 실업의 진흥을 통한 자강이 국권 회복의 방법이라는 인식하에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리로 국권 실추의 원인을 민족 내부에서 찾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략으로 민족의 내부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에 중점을 두었다. … 구국계몽운동에서 추구한 미래의 국가상은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입헌군주제였다. 다만 당시는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과 황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권을 부정하는 공화주의 이념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못했다."(52-4)


"3·1운동이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에 미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전 민족 제 계층이 참여한 거족적인 3·1운동에 청년·학생층과 농민층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에서 민중의 등장은 공화주의 이념 정착을 가능하게 했고 1920년대 이후 '민중'의 존재와 역할이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둘째, 3·1운동은 국제 사조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의 증가, 문화통치하에서의 제한된 자유 등은 서구신사상의 폭발적 수용을 가능하게 했다. 급진적 자유주의·무정부주의·사회주의 등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신국가 건설 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만세시위라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운동 방법은 군사적 무력에 의한 독립전쟁 이외에 새로운 운동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에 의해 폭력투쟁의 방법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만세시위 방법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56)


"1920년대 중반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중국의 국공합작, 국내의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이 나타났다. 이는 방법론상 독립운동 조직을 정당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과 궤를 같이했다." "민족유일당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운동 진영은 경쟁 관계에 있던 공산당 조직에 필적하며 중국의 국민당과 같은 정당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족주의 운동 세력은 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한국국민재건파·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통합한국독립당 등 파벌에 따라 이합집산 했지만, 정당을 결성해 활동했다." "민족주의의 우익적 경향을 대표한 한국국민당은 물론이고, 좌익적 경향을 띠었던 민족혁명당도 삼균주의를 기본적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초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전선체 역할을 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건국강령'에서 삼균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채택했다."(61-3)


# 삼균주의 : 조소앙이 체계화한 이론으로, 수직적으로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균등을, 수평적으로는 정치·경제·교육상의 균등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의회주의에 토대를 둔 민주공화국 건설을, 사회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시를 통해 균등 사회의 건설을 지향했다.


"3·1운동 이후 유입된 무정부주의 사상은 유교적 의려 정신이나 민족주의적 의분과 친연성을 갖고 있었다. 무정부주의가 한국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1923년 의열단 명의로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이다. 신채호가 작성한 이 선언문은 먼저 자치론·참정권론 등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국내 문화운동가들의 실력양성론의 타협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외 독립운동 진영의 외교독립론과 준비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민족혁명은 '민중의 폭력적 수단'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만이 방법이라 역설했다. 「조선혁명선언」에는 독립운동이 단순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사회구조도 변혁하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타도 대상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 외에 특권 계급, 경제적 약탈 제도, 사회적 불평등, 노예적 문화사상 등을 거론하면 독립운동이 곧 신사회 건설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64-5)


"1925년 조선노동당이 결성되면서 조직화한 사회주의운동 진영은 정치적 독립과 사회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민족해방'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1930년대 전반에는 노농 소비에트 건설론이 제기되었으며, 토지혁명 과정에서 빈농 우위 원칙이 견지되면서 노동계급의 주도권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좌편향적 노선에 반대하면서 여전히 민족협동전선론적 입장을 견지하던 집단도 있었다. 여운형·배성룡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좌편향적 노선을 따르지 않고 민족적 현실에 적합한 운동 노선을 정립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이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전후로 국외 사회주의운동계는 사회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 발전적으로 변모했던 민족주의 세력의 국가건설론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에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서로 연합하는 현상이 나타났다."(67-70)


3강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1910년대는 비밀결사 투쟁의 시기였다. 잔여 의병 활동과는 별도로 망국 후 유림과 의병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을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3·1운동기에는 만세시위를 방략으로 하는 비밀결사가 등장했다. 비밀결사는 시위를 조직화·대중화하고 격렬한 항쟁을 주도하는 데 앞장섰다." "연해주에서는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한흥동 건설에 나섰다. 이는 독립전쟁에 대비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전쟁론을 실현시키기 위한 독립군 기지 개척운동이었다. 특히 한인 이주 50주년을 기념해 1914년 10월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는 무장투쟁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1917년 12월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 14인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멸설과 순종의 주권포기설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주장하며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 이미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정부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된 사실은 임시정부의 탄생과 향후 1920년대 민주공화 정체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다."(73-5)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여럿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직된 것은 3·1운동으로 고조된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논의해 마침내 상하이로 통합 정부를 수립한 것도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의 결과였다." "1920년대 독립운동계는 좌우합작과 민족전선 통합에 노력하고 결실을 이루어냈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수립은 부분적이나마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향후 민족유일당 결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통합 임시정부 체제는 1921년 1월 이동휘가 떠나고, 1923년 1월 시작된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면 짧은 기간으로 끝나고 말았다. 향후 독립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면서 임시정부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망라해 창당된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옹호를 선언한 것은 소중한 성과였다."(77-8)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공해 꼭두각시로 만주국을 수립하고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친일 만주국 수립은 우리의 독립운동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결국 만주 독립군은 망국 후 20여 년간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가 된 곳을 떠나 중국 관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던 김구는 1931년 12월 임시정부의 특무 조직으로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황민화와 민족말살정책에 대응해 강렬한 국학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1930년대 전반기에 문화와 학계가 정비·발전되고, 1934년 조선학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은 주목된다. 국학민족주의는 국어학·국문학·역사학이 핵심을 이루며, 문화운동 형태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문화운동은 일제의 민족 말살에 대항해 민족 보전을 추구한 독립운동이었다."(80-2)


"1940년대 전반기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중국 관내의 임시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 세 그룹이 지역 기반과 이념을 달리하며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며 비로소 정부 조직으로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의 연합은 독립운동계에 좌우 연합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1942년 화베이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었다. 이 동맹은 화북조선청년연합이 조선의용대의 화베이 진출을 계기로 발전적으로 개편한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투쟁 단체이다. 조선의용군은 이 동맹의 당군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아 항전했으며, 후에 중국공산혁명전쟁과 6·25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여운형이 국내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해 이끌고 있던 비밀결사였다. 조선건국동맹은 8·15와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했다."(83-4)


4강 한말 국권회복운동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의병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일제의 대토벌작전에도 살아남은 의병 부대는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거나 국내에서 소규모 게릴라 전투를 이어갔다. 이들을 전환기 의병이라 한다. 1910년 전후 함경도·강원도 등지의 의병진은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북간도와 서간도,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로 이동했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유인석·홍범도·이진룡 등이다. 이들은 그곳에서 활동 중인 이범윤·안중근 등과 연합했다."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로는, 1907년 4월경 안창호 등이 주도해 평양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대표적이다." "신민회는 점차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훗날을 기약하자는 온건파와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만주에 광복군을 조직해 일본과 결전하자는 급진파로 갈라졌다.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13년 5월 흥사단을 조직했고, 이동휘 등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마련해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95, 99-100)


5강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


"광복회는 1915년 7월(음) 풍기광복단·독립의군부·조선국권회복단 등 계몽운동과 의병전쟁 계열의 단체와 인물들이 연합해 조직되었다." "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 강령을 천명하고 군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활동 거점 설치,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특히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결성 초기에는 일제가 거둬들인 세금을 탈취하기 위해 우편 마차를 공격하기도 했고, 일본인 소유의 중석광을 공격해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구 부호 서우순을 상대로 한 '대구권총사건'이 실패하는 등 자금 모금은 원활하지 못했다. 광복회는 친일 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경북 칠곡 부호 장승원과 충청도의 친일 면장 박용화, 전라도의 서도현을 처단했다. 광복회는 1918년 1월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체포를 면한 회원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 주비단과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119-20)


6강 3·1운동


"1883년 공식적으로 국기의 지위를 획득한 태극기는 각종 행사에 등장하면서 조선·대한제국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10년 국망으로 국기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태극기가 1919년 3·1운동을 통해 애국·애족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국권 상실의 현실을 각인하고 독립의 사명을 일깨우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후 3·1운동 기념식 등 각종 기념식에 태극기가 등장했고 임시정부의 모든 행사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도 태극기가 등장했다." "「애국가」는 조선·대한제국에서 국가(國歌)로서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한 바 없었다. 애국가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갈 무렵, 애국창가운동의 일환으로 민간에서 널리 불리던 노래로,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했다. 3·1운동의 확산과 함깨 「애국가」도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민의례에서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기 시작했다."(144-5)


7강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


"1910년대 일제의 농업정책은 토지조사사업, 농사단체 조직, 품종 교체 등 주로 수탈에 적합한 식민지 농업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1920년대는 수탈 농정이 한층 강화된 시기였다. 일제는 육지면장려계획, 산미증식계획, 산잠백만석증수계획을 통해 이른바 삼백(三白)의 증산에 본격 착수했다. 산미증식계획이 일본 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면, 면화·양잠 정책은 일제의 외화 획득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1920년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한층 강력한 농업 지배기구가 필요했고, 그 결과 조직된 것이 '농회'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1920년 들어 노동운동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고, 1924년 4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이 탄생했다. 이 단체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은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의식 성장에 바탕을 둔 것이다."(154-5, 159)


"사회주의사상의 확산은 계몽적 수준에 머물던 청년운동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사회주의사상은 식민 통치의 부당성과 모순을 사회과학적인 기준에서 깊게 성찰하도록 함으로써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혁신적 주장을 하도록 이끌었다." "1924년 4월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청총)은 민족문제에 대해 과거와 같은 타협적 민족운동을 배척하고 '혁명적 운동'과 협동한다는 방침을 제시해, 민족운동 세력과 손잡고 대중선전운동을 전개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2월 9일 조직된 조선학생회 역시 교양적이고 계몽적인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러한 문화운동 노선 역시 사회주의사상이 수용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학 과정에서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를 요구하며, 그것을 대신할 민족교육 이념으로 '조선인 본위 교육'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민족의 해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학생들의 단결투쟁은 독립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162-3, 166, 169)


8강 1930~1940년대 국내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일제의 탄압에 의해 사실상 해체된 조선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에서 제시한 '12월 테제' 지침에 따라 당을 재건해야만 했다. '12월 테제'는 종래 공산당이 부르주아 및 지식계급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심각한 파벌 투쟁과 연속적인 대량 검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종래의 분파 투쟁을 근절하고 노동자·농민(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기초로 당을 재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그룹들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하면서도 반일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지 못했다. 즉 재건그룹들은 계급 대 계급 전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민족개량주의와 민족주의, 친일 요소와 반일 요소의 옥석을 가리지 않고 '비혁명적'이라 판단되는 세력은 모두 민족개량주의로 매도하고 '적'으로 선포했다. 박헌영이나 이재유그룹 역시 난징의 조선민족혁명당에 대해 노농 대중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했다."(184-5, 188)


"일제 말기 파쇼적 총동원체제가 조선인 전체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 강화로 치닫자, 반파쇼 저항운동이 소극적 거부에서 적극적 반대 투쟁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학생이나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이 가장 큰 탄압을 받았지만, 학병이나 징병·징용 등 강제 동원에 대항하는 비밀결사들이 계속 생겨났다. 저항운동의 주체나 형태도 다양해져 노동자·농민의 '국민징용령' 반대와 농민동맹운동, 신사참배 거부와 조선어학회사건 등 종교·문화 운동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944년 8월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은 일제 말기 국내의 최대 항일 단체였다. 일본에서 미군기의 도쿄 공습을 목격한 여운형은 미국·영국의 전쟁 준비로 일제가 급격히 패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1년간 조선민족해방연맹을 통한 준비 작업 끝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동맹은 민족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구성원을 규합해 중앙조직을 구성하고, 각 도별 지방조직을 꾸려나갔다."(193, 196)


9강 한국 독립운동과 민족통일전선운동


"1923년 1월,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상해임시정부의 지역적·인적 한계를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출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민족주의진영은 서북파와 기호파 등 지역에 따라 나뉘었고, 북경파는 반임정 자세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진영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에 호의적인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반임정 입장을 견지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분열했다. 창립 당시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 임시정부 고수파의 고집 역시 회의의 성공을 막는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1923년 6월에 종료된 국민대표회의는 목표로 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과 최고 기관 수립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회의를 거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이 모색되었다.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데 '정부'의 형식에 대한 고민이 제기되고,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당'을 수립하자는 대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204)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에서 여러 갈래로 나뉜 독립운동을 통일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일당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은 독립운동 추진 주체로 정당을 상정했다. '정당으로써 국가를 통치한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이 목표였다. 좌우파가 연합해 정부가 아니라 정당을 조직하되, 민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8년에 접어들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통일전선 결성 원칙에서 좌우가 의견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파가 중앙집권적 독립당 결성을 추진했다면, 좌파는 노농 대중의 입장에 기초한 전투적 협동전선 혹은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주창했다." "민족유일당 결성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임시정부를 운영할 조직으로 정당이 결성되었다는 성과를 남겼다. 종래 임시정부가 정부의 형태만 있을 뿐 참여 정당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향후 운영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었다."(207-10)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결성에 참여한 단체는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이었다. 의열단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점을 고려하면, 새롭게 창당한 민족혁명당은 좌우합작의 민족통일전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고수파를 포용하지 못했고, 좌우의 사상적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이 잔존해 있었다." "결성 직후 분열된 민족혁명당은 1941년 12월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사회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요인으로는 이념의 공유가 있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개인이나 특정 계급에 의한 독재를 배격하는 민주공화국 건설, 정치적·경제적·교육적으로 균등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균등사회 실천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민족혁명당의 지향과 공유하는 바가 많았다. 1940년대 진행된 임시정부 중심의 좌우합작은 이런 공유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것이었다."(210-4)


10강 국내외 여성 독립운동


# 여성 독립운동가들

1. 윤희순 : 초기 을미의병 당시부터 후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

2. 안경신 : 투탄(投彈)·자살(刺殺)·사살(射殺) 등의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총영에 가담해 활동함

3. 남자현 : 1920년대 중반 사이토 총독 암살을 계획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1933년 주만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죽이려다 체포되어 순국함

4. 정정화 :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해 1946년 귀국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삶을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헌신함

5. 박차정 :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교양 교육을 담당했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역임함

6. 오광심 :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 소속으로 한중 연합 항일전에 참가했고,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지복영·조순옥·신순호·민영주 등과 함께 광복군으로 복무함


11강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만주 지역은 한국 독립운동의 인재 공급처이자 독립전쟁의 최전선이었다. 20세기 전후 의병 세력들이 역량을 펼치던 곳이며, 민족 교육기관을 설치해 이주 한인들에게 근대 교육과 민족 교육을 동시에 실시하던 지역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북간도와 서간도를 중심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각종 무관학교 성격의 민족 교육기관을 설치해 인재 배양의 요람으로 각광받았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과 다음 해 성립된 만주국은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만주국의 경찰과 군대에 맞서 쌍성보·경박호·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1934년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접고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공백이 생기자 사회주의 세력은 표면적으로 유격전을 내세워 저항했다.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까지 산악을 중심으로 이주 한인과의 연결을 도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265)


12강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1918년 8월 말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칼미코프의 백군에 맞서 하바롭스크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소비에트 적군은 처참히 패했고, 한인사회당 적위군도 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9월 4일 하바롭스크는 백군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그러나 1922년 10월 25일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면서 5년간에 걸친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공로를 세웠고, 또 그만큼 많은 한인들이 희생되었다. 내전에서 보여준 한인들의 공로와 희생은 이후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7년 하반기부터 연해주 전 지역의 모든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라는 명령이 모스크바로부터 내려왔다. 원동(극동) 지역에 일본 정보원이 침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1937년 9월 초순부터 두 달 여 사이에 약 17만 2000명의 한인들이 연해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떠났다."(282-7)


13강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역량을 통일하고자 다시 임시정부로 결집했다. 먼저 1940년 5월 광복진선의 3당은 해체를 선언하고 한국독립당을 출범시켜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삼았다. 이어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 뒤 아나키스트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941년 1월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조선의용대도 1942년 7월 광복군의 제1지대로 편입했다. 재편된 한국광복군의 사령은 지청천, 새로 증설된 부사령직에는 김원봉이 선임되었다. 정치 세력도 임시정부로 집결했다. 1942년 10월에 열린 제34차 의정원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인사들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임시의정원은 좌우연합정부 구성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1044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공포하고 부주석제를 신설했다. 주석에는 한국독립당의 김구, 부주석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선출되었다."(308-9)


"한편, 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과 결별한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 세력은 1938년경 중국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했다. 1941년 국민당 지역에서 항전하던 조선의용대원들은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화베이 지역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대장정에 참가한 무정 등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혁명을 조선해방이 관건으로 인식했다. 1941년 1월 팔로군 전방 사령부의 소재지 산시성 진둥난 타이항산에서 항일 단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해 활동했는데, 그 지도자가 무정이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 조선의용대원 및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 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고, 조선의용대 출신의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삼았다. 그 뒤 김두봉은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조선의용군을 결성하고, 무정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선의용군이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을 펼치면서 화베이 지역은 한인 공산주의자 세력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309-10)


14강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 27년간의 역사는 침체와 고난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해 간 굴절의 역사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긴 시간동안 한민족을 대표하며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 '임시정부'라는 정부 형태는 1917년 '2월혁명' 뒤의 러시아나 폴란드의 임시정부처럼 단기간에 정식 정부를 수립하고 임무를 마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27년이라는 유례없이 긴 시간 동안 존속했으니 그동안에 영고성쇠가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임시정부에 대해서 '발생 가치'와 '역할 가치'로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는 선학의 주장은 건국절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날 경철할 만한 선견지명으로 여겨진다. 임시정부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정부로 수립된 그 자체는 '발생 가치'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하게 독립운동의 구심점 구실을 다했는가'라는 '역할 가치'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313-4)


"1919년 4월 임시정부는 3·1운동에서 나타난 독립에 대한 전 민족의 열망과 의지가 결집해 수립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라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임시정부는 모두 여섯 차례의 헌법을 통해 1919년 대통령중심제, 1925년 내각책임제, 1927년 관리정부 형태, 1940년과 1944년의 절충식정부 형태 등 권력구조의 형식이 변천했다. 이렇듯 여러 정부 형태를 경험한 것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다만 해방이 광복으로 이어지지 못해 임시정부가 새 조국 건설과 직접 연결되지 못했고,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환국할 수 없어 외지적 종결의 역사를 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1948년에 수립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치를 천명함으로써 역사적 명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참조해 제정됨으로써 임시정부가 지향하던 이념을 수용했다."(330-1)


15강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에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으로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을 해산하고 활동을 금지했다.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 산하 수청지방총회는 1912년, 만주지방총회는 1914년 이후 활동이 봉쇄되었다. 시베리아지방총회는 1917년까지 활동했다." "하와이지방총회는 1915년과 1918년 두 차례에 걸친 파쟁을 겪으며 하와이 한인 사회가 분열되었다. 당시 하와이지방총회는 박용만을 중심으로 활발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1915년 이후 이승만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박용만 계열은 갈리히연합회를 조직하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후일 대조선독립단으로 개편)로 양분되었다. 그 결과 미주 한인 사회는 안창호·이승만·박용만 계열로 삼분되었고, 10여 년간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기능했던 국민회는 이후 북미·멕시코·쿠바 한인 사회로 범위가 축소되었다."(339-40)


"재미 한인 사회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00만 달러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이로 인해 미주 한인 사회는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나 보고(寶庫)로 평가받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국민회는 특파원 파견과 지방회 조직을 이용해 '애국금'이라 불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설치 직후부터 재미 한인 사회의 재정 장악을 시도했다. '애국금' 수합 업무는 국민회에서 주관했는데, 구미위원부가 독자적으로 '공채표'를 발행해 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로 국민회와 구미위원부 간에 마찰이 일자, 임시정부는 재정 증대를 기대하여 1920년 3월 국민회의 애국금 수합 업무를 폐지하고 구미위원부에 자금 모집을 위임했다. 이 결정으로 국민회는 외교에 이어 재정권마저 구미위원부에 빼앗겨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는 모집 재정의 18% 정도만 임시정부로 송금하고 나머지는 구미위원부 유지에 사용했다."(343-4)


16강 일본·동남아 지역의 독립운동


# 일본 내의 의열단 활동

1. 양근환 : 1921년 참정권 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에 온 친일파 민원식을 처단했다.

2. 박열 : 1923년 일본 황태자 결혼식 때 투탄 의거를 준비하다가 검거되었다. 일제가 관동대지진의 와중에 그 책임을 재일 한국인에게 돌리기 위해 이를 대역(大逆)사건으로 꾸며냈다.

3. 김지섭 :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 학살에 항의하는 뜻으로 일본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 투탄 의거했으나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4. 이봉창 :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왕 마차 일행을 향해 투탄했으나, 위력이 적어 실패하고 말았다.


# 동남아시아 내의 독립 활동

1. 홍콩 : 박은식이 독립운동의 소식을 알릴 《향강잡지》를 발행함(1913년)

2. 싱가포르 : 홍명희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고무농장을 운영함(1914년)

3. 타이완 : 신채호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된 위폐를 교환하다가 체포됨(1928년)

4. 필리핀 : 여운형이 '반제국주의 연대'를 연설한 뒤 일본 영사의 항의로 억류됨(1929년), 안창호가 한인을 대규모로 이주시켜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려고 시도함(1929년)

5. 인도네시아 : '고려독립청년당' 3명이 일본군 12명을 사살한 뒤 자결함(1944년)


17강 보론: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추계한 조선의 실질농업생산액은 1911~1918년간에는 34.6%나 증가한 반면, 1918~1926년간에는 2.0%로 거의 변화가 없다. 1911~1918년간은 토지조사사업 기간으로 일제가 조선의 토지 자원에 대한 조사에 주력하던 기간인 반면, 1918~1926년간은 1920년부터 시작되는 산미증식계획 기간이 포함된다. 토지조사사업 기간의 실질농업생산액 증가율이 본격적인 농업개발 기간을 포함하는 1918~1926년간의 증가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농업생산에 투입되는 경지면적은 간척과 개간에 의해 증가할 수 있는데, 두 통계 모두 1911~1918년간보다는 1918~1926년간에 훨씬 더 많이 증가했다. 관개면적의 경우에도 그렇다. 동물질·식물질·광물질 등의 각종 비료 소비량도 1918~1926년 사이에 월등히 많이 투입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농업 지원 자금 역시 다르지 않다." "1918~1926년에 비해 1911~1918년의 증가율이 더 높았던 유일한 요인은 우량품종 보급률이다."(379-80)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의 농업통계에 대해 의문을 갖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었는데, 그 기간에 경지면적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이루어졌다. 토지조사사업 이전의 경지면적은 실제보다 상당히 과소평가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정확한 실측에 의해 바로잡히면서 조선총독부의 경지면적 통계는 1918년까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기간 동안에는 간척이나 개간에 의한 경지면적 증가는 미미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의 경지면적 증가는 모두 부정확한 측량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이고, 실제 경지면적이 그렇게 많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다. 이렇게 경지면적에 대한 통계가 불완전했는데, 재배된 작물의 생산량 통계가 정확할 수 있겠는가?"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실질농업생산이 급증했다는 기간은 조선총독부가 그 부정확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수정했던 기간(~1917년까지의 통계치)과 정확히 일치한다."(383)


"식민지근대화론(주익종의 주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1인당 GDP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1인당 소비도 크게 증가했고, 생활수준도 매우 빠르게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1912~1932년 중에 실질 소비지출의 연간 증가율은 3.28%였고, 1인당 실질소비지출은 같은 기간 중 1.68배로 증가했으며, 그 연간 증가율은 1.94%였다고 한다." "육소영은 1910~2013년간의 식품수급표를 사용해 1일 1인당 칼로리·단백질·지방·무기질·비타민 등의 섭취량을 계산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1918~1952년간에는 감소 추세였고, 1953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1990년대 이후가 되면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다."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평균 신장(키)도 증가했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연구를 내놓고 있지만, 영양 섭취량이 감소했다면 신장이 증가했다는 주장은 더는 성립하기 어렵다."(391-2)


"식민지 조선 경제에서는 민족별로 생산수단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했고, 이에 따라 소득분배 역시 민족별로 불평등했다. 이 소득분배의 민족별 불평등은 다시 민족별 생산수단의 격차를 확대하고, 다시 민족별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한층 더 악회시키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이것이 식민지적 경제구조이고, 이것은 식민지 체제가 지속되는 한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공업 발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대자본에 의한 근대 기업이 비지적(飛地的)으로 설립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공업은 더욱 이중구조화되었다. 그 성격은 일본과 조선, 그리고 조선 내에서는 남한과 북한, 민족별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현저한 격차로 나타났다." "이러한 식민지적 경제구조하에서 조선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점차 배제되어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전환되어 갔는데, 민족 차별과 학력 차별로 인한 식민지적 고용 구조로 인해 임금노동자 중에서도 최저변을 형성했다."(398)


"일제강점기 조선의 개발과 근대화를 강조하는 주장들은 일반적으로 조선 전체의 변화에 주목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일본으로부터 선진적인 기술과 대량의 자본이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광공업·농림수산업·금융업과 상업 등 각종 산업이 발달했으며, 철도·도로·항만·통신 등의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되었고, 도시가 발달했으며, 인구가 증가했고, 소득이 증가하는 등 변화가 생겼다. 일제강점기의 통계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일제강점기가 갖는 시대적 특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시대이다. 많아야 전체 인구의 3%도 되지 않는 일본인들이 조선 내 생산수단의 주요 부분을 장악했고, 후기로 갈수록 생산수단은 일본인들에게로 더욱더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 시기였다. 일제강점기가 어떤 시대였는지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면 바로 이 민족문제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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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 근대의 절정,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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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적, 악당들의 반자본주의 유토피아


"근대 초기의 해적은 국가로부터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받아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는 민간업자들이었다. 공식 해군만으로는 광대한 바다를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적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민간업자에게 맡긴 것이다. 16세기부터 등장한 이런 부류의 해적을 특히 '사략선privateer 업자'라 부른다."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와 교역 거점 들을 선점한 에스파냐·포르투갈과 그 뒤를 쫓는 잉글랜드·프랑스·네덜란드 사이에 무자비한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카리브해는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 지역이었다. 아메리카의 은을 수송하는 '보물선'이 오가고, 플랜테이션의 발달로 큰 부를 쌓은 이 지역에 잉글랜드인, 네덜란드인 혹은 그 외의 다국적·다인종의 폭력 집단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이때의 해적 집단을 버커니어buccaneer라고 불렀다. 다음 단계로 가면 해적의 성격도 변질되어 세계의 바다를 오가며 아무 상선이나 무차별적인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 해적으로 변모한다."(20-2)


"해적들은 기존 사회의 법 밖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이루고 새로운 신념에 근거해서 살아갔다. 그들이 지키려 한 주요 가치는 '평등주의'였으며, 특이한 방식의 '민주주의'를 지켜나갔다. 바솔로뮤 로버츠의 해적 선원들이 작성한 해적 규약에 따르면 중요한 사안은 선장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라 모든 승무원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해적들은 그들 나름대로 '도덕경제moral economy'를 좇았고 이를 '민주적'으로 실천했다. 수익은 정해진 규약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분배 원칙은, 말하자면 그들이 합의한 노동가치설이다. 약탈한 물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자는 무인도에 버리거나 사형에 처했다. 도둑이 도둑질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고나할까. 또한 그들 스스로 보상 제도도 마련했다. 신체 부위별로 상해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졌고, 과부의 몫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44-5)


2 표트르 대제, 새로운 러시아를 건설하다


"표트르는 국가 구조 전반을 개혁하고자 했다. 개혁의 모델은 이전에 방문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두 나라는 신을 두려워하고 부지런히 실업에 힘쓰며, 특히 항해와 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도시 문명, 해외 개척, 기술 발전이 강점인 나라였다. 반면 표트르는 허세와 과시를 싫어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717년에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본 베르사유였다. 우선, 표트르는 정치 조직을 일신했다. 전국을 구베르니야로 불리는 주로 나누었는데, 그 수는 처음에 여덟 개였다가 열한 개로 늘었다. 그리고 표트르 자신이 해외 전쟁에 참여할 때 국정을 맡을 원로원을 창설했다. 원로원과 주 사이를 연결하는 조직이 콜레기야Collegia라는 기관이었다. 과거에는 형식상 차르가 전권을 행사했지만 정책 결정과 집행은 종교 의례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궁정 의식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표트르의 과감한 국정 개혁으로 전문 관료제가 도입되었고, 러시아는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로 발전해나갔다."(86)


"그동안 막강한 지위와 특권을 누려온 세습 귀족인 보야르 가문은 무너져갔다. 새 귀족은 '봉사 귀족'으로 변모했다. 국가에 대한 봉사가 귀족 신분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제 귀족은 놀고먹는 게 아니라 약 16세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처지도 갈수록 어려워졌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 징병과 조세 부담의 몫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또 지주 귀족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귀족이 자기 소유 농민을 가족 단위로 팔고 살 수 있도록 한 칙령도 반포되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에 대한 귀족의 지배가 강화되고, 그 귀족들을 국가에 복속시켜나갔던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종교 기관의 수도 감축했다. 표트르가 볼 때 수사는 '게으른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그냥 놀지 말고 아픈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독려했다. 러시아 교회의 수장 자리인 총대주교직을 비워둔 채 새로운 관료조직인 페트르부르크 종교회의가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86-8)


3 마리 앙투아네트, 구체제의 마지막 왕비인가 최초의 근대적 왕비인가


"18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 정세는 급변했다. 수백 년간 적대관계였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으로 변모하는 극적인 '외교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로이센이 더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양국은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프랑스 왕태자와 오스트리아 황녀의 결혼을 추진했다. 프랑스 왕비의 후보자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와 앙투아네트의 결혼은 차근차근 추진되었다. 1769년 앙투아네트 초상화가 프랑스 궁정으로 보내졌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와 왕실 의례 등을 미리 가르치기 위해 베르몽 신부를 파견했다. 예비신부를 만나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모두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1년 동안 '집중 훈련'을 통해 프랑스어 실력은 많이 나아졌다. 베르몽은 그녀를 관찰한 비밀 보고서를 프랑스 궁정에 보냈는데, 핵심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마담 앙투안은 쾌활하며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99-102)


"결혼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정치적 결정이었다. (루이 16세 처형 이후) 그녀의 사형을 주장한 사람은 급진좌파 의원인 자크 에베르였다. 프랑스 함대가 적에게 패배하자 에베르는 혁명의 분위기를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나는 앙투아네트의 머리를 약속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그녀의 죽음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구나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강경파 의원 장 폴 마라가 코르데라는 여성에게 살해당한 이후 혁명의 분위기는 여성 혐오로 돌아섰다. 과거 잔인했던 여성 지배자의 악행들을 거론하며 이를 앙투아네트와 비교했다. 1793년 10월 14일 앙투아네트는 혁명재판소에 출두했다." "재판에서 전반적으로 얻어내려 한 것은 '카페 루이의 나약한 성격을 지배한 앙투아네트의 사악한 주도권'이라는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외국 세력과 은밀히 내통하며 프랑스의 안정을 교란하려 했는지를 따졌다." "마침내 10월 16일 12시 15분, '인민의 면도날' 단두대에서 처형된 왕비의 머리가 군중에게 공개되었다."(131-3)


4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불꽃인가 어둠의 심연인가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각 구區 대표들이 시 청사에 모여 '봉기 코뮌'을 결성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피크 구 의회에 참석해 코뮌의 대표로 지명되었다." "민중 세력이 본격적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예전에(1791년 5월 10일) 로베스피에르는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 허용해야 한다고 연설한 바 있지만, 왕당파 신문들은 폐간했다. 전시중이라 예외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범법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민중재판소 설치를 강행했다." "9월 2일, 베르됭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애국적 흥분 상태에 휩싸인 군중은 감옥으로 달려가 사제, 수녀, 귀족 혹은 반혁명과는 별 관련 없는 좀도둑, 창녀 등을 끌어내서 즉결 처형했다(9월학살). 물론 로베스피에르가 이 일을 지시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그 같은 논조의 연설을 했고, 과격한 현상에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 전반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냉혹한 정치 지도자로 변모해갔다."(158-60)


"상퀼로트는 물 만난 고기처럼 힘을 행사했다. 1793년 9월, 상퀼로트는 다시 한 번 국민공회에 난입하여 의원들을 압박했다. 당시 국민공회 의장이었던 로베스피에르는 시위대의 의견을 청취했다. 시위대는 혁명재판소 재조직, 반혁명 혐의자 체포, 혁명군 창설, 혁명위원회 정화, 식량공급 안정 정책 시행 등을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것을 받아들여 법제화하기로 했다. 폭력이 합법화된 것이다." "며칠 동안 공포정치 법령들이 제정되었다. 9월 17일, 반혁명 혐의자 단속에 관한 법이 가결되었다. 혁명 정부는 '혐의자'를 폭넓게 해석해 혁명에 반대하는 혐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체포할 수 있었다. 10월에는 〈프랑스 임시 정부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이라 선언하고 공안위원회에 전시 비상조치권을 부여했다. 상퀼로트는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여 지방으로 가서 군대와 도시민을 위한 보급품을 징발하고 반혁명분자들을 척결했다. 혁명은 끝 모르게 과격해졌다."(165-6)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에 대한 책임을 모두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부의 수뇌가 아니라 위원회의 일원일 뿐이었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더 잔인하고 냉혹했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후 공포정치를 계속하려 했지만, 분위기가 급변했다. 사람들이 끔찍한 공포정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테르미도르의 반동'(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 끝에 처형된 사건) 이후 의원들은 말을 바꾸었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지지자들만 테러리스트였다고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로베스피에르가 폭력의 아이콘이 되었고, 홀로 악당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혁명은 이후 혼란의 단계로 접어든다. 왕당파가 백색테러를 자행하기도 했고, 급진적인 당파가 무장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탈취하여 혁명 독재를 이루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혁명이 불러일으킨 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일거에 상황을 정리하고 주도권을 잡은 것은 군대였다."(175)


5 모차르트, 혁명을 예감한 천재 예술가


"평생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들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런 분석을 한 바 있다. 1784년 12월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9번(K.459)은 전적으로 청중의 취향에 맞춘 작품으로, 기교가 넘치고 허세가 가득한 곡이다. 그런데 두 달이 채 안 되어 모차르트는 그런 식으로 아부하는 곡이 싫다는 듯 전혀 다른 양식의 피아노 협주곡 20번(K.466)을 작곡했다. 당시에는 이 곡이 〈지나치게 앞서나갔고, 빈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요구를 했으며,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청중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작품들을 계속 작곡함으로써 사랑을 다시 얻으려 했다.〉 그래서 나온 곡들이 피아노 협주곡 22~23번(K.482, 488)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분석이다. 이처럼 모차르트는 '자신을 위한 창조'를 주장했다가 다시 물러서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은 자기 예술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194-5)


"18세기,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다. 억압과 굴종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는 계몽주의 흐름에 모차르트는 공감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고 혁명을 예감했다. 그 배경에는 빈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영향이 컸다. 예컨대 빈 대학교수 요제프 폰 존넨펠스는 사법개혁을 주도하고 고문 폐지 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모차르트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공화국, 인권, 관용, 해방, 교육 등 여러 개념을 접했다. 그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세상 변화의 큰 흐름을 감지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 내용은 다소 어설펐지만 예민한 감수성으로 예리하게 표현했다. 이런 점들은 오페라 작품들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첫 번째 문제작이 〈피가로의 결혼〉이다. 피에르 보마르세 원작의 희곡은 루소, 볼테르와 함께 프랑스 혁명을 예비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당대 유럽 사회의 봉건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작 〈돈 조반니〉에서 하인 레포렐로가 처음 하는 말은 〈더는 굴종의 삶을 살지 않겠다〉이다."(204-5)


6 볼리바르, 남아메리카의 해방자인가 독재자인가


"남아메리카는 다인종 사회로 심각한 인종 문제를 안고 있었다. 크리오요가 지배 엘리트층을 구성하고, 피지배 계층으로 혼혈인과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으려는 주 계층은 크리오요였으며, 혼혈인이나 흑인 노예들은 독립 문제의 당사자도 못 되었다. 식민 모국과 거래해야만 하는 강제 규정과 과도한 세금 등으로 피해를 보는 계층은 식민지 지배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닌술라레스(본국에서 온 에스파냐인)' 장교들은 현지의 크리오요를 경멸하고 억압했다. 사실 페닌술라레스들 중에는 고위 관료와 성직자도 있었지만 모험가나 군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본국에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남아메리카에 와서는 보상 심리로 거들먹거리곤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독립운동의 주체는 식민지 엘리트 계층인 크리오요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의 지평을 확대해갔고, 점차 거대한 피지배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232-3)


"더 이상 인종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볼리바르는 1815~1816년 이후 혼혈인들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혼혈인들 역시 볼리바르 편에 서서 기회를 얻으려 했다. 더 나아가 흑인 노예들에게도 해방을 약속했는데, 다만 군에 입대하면 해방시켜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여기에 활로 무장한 인디언 병사들까지 합류하면서 다양한 인종의 병사들로 구성된 '해방군Ejercito libertador'을 조직했다. 하지만 그가 흑인 노예들에게 약속한 해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들로서는 재산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이 조치에 거세게 반대했고, 흑인 노예들로서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크리오요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아메리카에서의 노예 해방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 즉 지역 경제에서 노예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노예 노동이 중요한 지역일수록 노예제가 더 오래 지속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854년에야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다."(233-4)


"1821년 벌어진 카라보보 전투는 남아메리카 해방의 마지막 문턱이었다. 애국파를 이끌고 전투에서 승리한 볼리바르는 정식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쟁취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자신이 제안한 정치 구상, 곧 '그란 콜롬비아'의 헌법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헌법은 이상적이지만은 않았다. 남아메리카 전역을 하나로 통합해 볼리바르가 종신 대통령을 맡고, 게다가 그 후임도 볼리바르가 지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물론 모든 것을 볼리바르 개인의 욕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좋게 해석하면 그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거대한 꿈과 미래를 갖고 있었다. 민족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모두가 연합하여 더 큰 힘을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처럼 강력한 정치체를 만들어야 유럽 혹은 북아메리카 세력과 맞설 수 있고, 지방 카우디요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아메리카의 실상은 이 같은 이상주의가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했다. 각 지방마다 원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241-2)


# 카우디요caudillo : 지방에 할거하는 무장 토호土豪 세력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스스로를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 생각하는 카우디요들이 사방에 넘쳐났다. 독립전쟁의 영웅인 산탄데르와 파에스도 서로 갈등을 빚었다. 지역주의가 득세하면서 그란 콜롬비아는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산적한 사회 문제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828년 볼리바르는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 발밑에 거대한 화산이 있다. 도대체 누가 억압받는 아래층을 누를 수 있단 말인가. 노예들은 멍에를 벗어버리려 할 테고, 각각의 인종 집단도 자신들이 지배자가 되려 한다.〉" "산탄데르는 '파렴치한 베네수엘라인'들을 비난하며 끝내 독립을 선언했고, 누에바그라나다는 지금의 콜롬비아가 되었다. 상 페루 역시 페루로 돌아가려 했다. '그란 콜롬비아'라는 볼리바르의 야심 찬 구상은 산산조각 났고, 그 틈을 이용해 반대 세력이 치고 나왔다." "볼리바르는 탄식했다. 〈우리가 얻은 것은 독립뿐이다. 그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대가로 치렀다.〉"(247-8)


7 와트와 아크라이트, 산업혁명의 영웅들


"증기기관이 발전해온 역사를 보다 보면, 마치 이것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 되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증기기관이 나오고 나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여전히 수력과 풍력이 동력원으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특히 물레방아가 증기기관보다 더 성능이 우수했다. 증기기관이 물레방아를 완전히 뛰어넘은 시점은 19세기 중반이다." "발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확산과 전파다. 증기기관의 효율성이 개선되었다는 것은 연료로 사용하는 석탄의 양이 줄었음을 의미한다. 초기 증기기관이 주로 탄광에서 사용된 이유는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드는 데 엄청난 석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석탄이 많이 나는 영국에서만 유용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영국만큼 석탄 매장량이 풍부하지 않은 탓에 이 발명품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점차 증기기관이 개선되어 적은 양의 석탄으로도 충분한 동력을 얻게 되자 전 유럽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268-9)


"면공업은 크게 두 과정으로 나뉜다. 면화에서 실을 잣는 것과 이 실로 천을 짜는 과정이다(실을 잣는 과정을 방적 혹은 정방이라 하고, 천을 짜는 과정을 직조 혹은 방직이라 한다)." "방적과 직조의 기계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물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실과 직물의 값이 떨어진다. 그리고 품질이 개선된다. 사실 18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여전히 인도산 면직물의 품질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같은 중량의 섬유로 실을 만들 때 여러 번 섬유를 꼬면 더 튼튼한 실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실의 강도를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기계의 발명으로 가늘고 튼튼한 실을 생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물의 품질도 좋아졌다. 뮬 방적기가 발명되면서 고급 직물의 직조가 가능해졌다." "18세기 후반 약 50년 동안 면공업은 가격을 기준으로 볼 때 1,000배나 성장했다. 영국의 면 수출업자들은 곧 세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273, 289-90)


8 나폴레옹, 시대를 파괴하고 모순 속에 살다간 황제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어수선해진 프랑스를 바로잡기 위해 평화와 질서를 주장했지만 통치 스타일은 독재였다.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전문가들을 불러서 의견을 청취했는데, 상대편이 지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일단 결정을 내린 후에는 거침없이 집행했다. 그의 지시를 게을리하거나 실수하는 경우 불같이 화를 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집무실에서 그는 마치 링 위의 권투선수처럼 장관들에게 소리치며 구석으로 몰아붙였다(비유가 아니라 실제 그렇게 했다). 하도 소리를 크게 질러서 비서들은 귀가 멀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경찰 조직을 강화하고, 많은 스파이를 동원해 국민을 감시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가톨릭 사제들이 강론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를 칭찬한다는 말을 듣자 그런 행위를 금지했다. '승리에 대해 거론하게 내버려두면 실패에 대해서도 거론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307-8)


"독재는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선전과 여론몰이도 잘 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언론을 감시하고, 연극의 결말을 바꾸게 하는가 하면, 자신이 익명으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체제를 미화하고 선전하기 위한 예술품도 대량으로 제작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메디치나 루이 14세처럼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지배자로 여겼다. 심지어 자신을 태양신 아폴론이나 이집트 신 혹은 신에게 보호받는 파라오 같은 상징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비드, 제리코, 그로, 제라르 같은 화가들은 대작을 제작하는 데 나폴레옹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건축 부문에서 큰 성과를 냈다. 오스테를리츠 다리, 퐁데자르 다리, 예나교 등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건설하고, 파리 곳곳에 분수를 설치하고, 거리 장식들을 세련되게 개선했다. 그의 시대에 건축된 공간들은 장대한 균형미를 특징으로 한다. 콩코르드 광장이 대표적 예다. 오늘날 아름다운 파리의 명성은 나폴레옹의 공로가 매우 크다."(308-10)


"나폴레옹은 정말 군사의 천재였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해왔고, 후대의 장군들도 그러한 나폴레옹을 흠모했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사실 단순했다. 가능한 한 최대의 전력을 집중해 적의 중심을 깨트려 저항 의지를 꺽어놓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영토 정복 같은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한 가지만 본다. 적의 몸통! 그것을 깨면 부차적인 문제는 저절로 정리된다.〉 이런 전술의 실상은 무엇일까? 엄청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렀다. 예컨대 1813년 6~9월 에스파냐와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 15만 명이 사망했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피해에 버금간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군사 천재로 칭송받고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들은 악당 취급을 받는다. 나폴레옹은 천재라기보다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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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 근대의 빛과 그림자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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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카트린 드 메디시스, 프랑스 흑역사의 주인공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았던 카트린은 신교도들에게 정치적 관용을 허락하는 내용의 생 제르맹 칙령을 반포했다(1562). '소위 새로운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여, 공개된 장소가 아닌 실내에서 예배를 보는 것은 허락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칙령을 공식화하려면 파리 고등법원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 기관을 가톨릭 세력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접한 가톨릭 측의 공분을 샀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푸아시 콜로키움이 개최되고 몇 달 후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가톨릭 측에 의한 신교도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기즈 가문의 지도자인 프랑수아 공의 군사가 샹파뉴의 바시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수십 명의 신교도를 발견하고 살해한 것이다. 그전에 신교도들이 기즈 공을 비난했던 게 화근이었다. '바시 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대개 첫 번째 종교전쟁으로 본다."(32-3)


# 1572년 8월 24일, 〈생 바르텔레미 학살〉 발생


"1589년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는 법률상으로 국왕이 되었지만 국민 대다수가 그를 완강히 거부한 탓에 파리 입성을 호시탐탐 노리며 근교를 배회했다." "그가 선택한 최후의 결정타는 자신의 개종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인 데 반해 신교도 왕이라는 게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국왕은 승리를 거두고 일단 평화를 되찾았다. 이제 신교도들은 어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수습한 것이 1598년 반포된 낭트 칙령이다. 이 칙령은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되 신교도들은 예배의 자유를 누리며, 그들의 신변을 보장하기 위해 왕국 내 일부 신교도시들을 안전지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신·구교 모두 이 칙령에 대해 불만이 컸지만, 그렇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앙리 4세는 카트린의 정책을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왕이 된 후 선정을 펼쳐 프랑스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왕이 된 앙리 4세도 결국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했다."(53-4)


2장 침묵공 빌렘, 네덜란드 독립의 영웅


"정치적인 면에서 네덜란드는 아직 중세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든지 찬성하지만 나라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넘어 전국 단위로 사고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바야흐로 근대국가로 발전해 나아가려던 이 시기에 진정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지지하는 '전국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바로 빌렘이었다." "그가 설파한 것은 국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평화였다. 즉, '가톨릭' 강요에 저항해 '신교'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가톨릭만 강요하는 '편협성'에 저항해 '관용'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 마르가레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만일 평화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펠리페 2세에게는 빌렘과 같은 사고의 유연성이 없었다. 신교에 대한 용인은 비겁한 짓이며, 이단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73-4)


"1581년 전국의회는 '철회령'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각 주의 위원회가 주권을 가지며 주의 통치자는 주에서 부여한 권한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그것을 네덜란드 연맹에 대한 충성 서약으로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신민이 자기들까리 협의하여 국왕에게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의 지배자가 아니니 우리의 충성을 철회하노라'고 선언한다는 것은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문건의 주요 내용들은 나중에 미국 독립선언의 본보기가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중 세력이 오라녀 가문을 열렬히 찾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파냐는 오라녀 공 빌렘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그를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1584년에 발타자르 제라르라는 프랑슈-콩테 출신의 가톨릭 광신도가 빌렘을 암살했다. 빌렘은 세계 최초로 총으로 암살된 정치인이 되었으니, 말하자면 암살도 점차 근대화되고 있었다."(89-90)


3장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주의 실체를 파고든 불굴의 과학자


"1604년 10월 15일,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현대의 용어로 말하면 초신성이 발견된 것이다. 사실 1572년에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같은 현상을 확인했었다. 이 현상은 고전적인 우주 모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체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물질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천체는 어디서 보더라도 시차視差, parallax(관측 위치에 따른 물체의 위치나 방향의 차이)가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현상이 달과 같은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머나먼 우주에서 일어났다는 의미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의 낙하운동만이 아니라 우주의 현상에 대해서도 막연한 추론이 아닌 실제 관찰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광활하고 먼 우주 공간을 맨눈으로 본들 얼마나 관찰하겠는가. 바로 이때 등장한 결정적 도구가 망원경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처음으로 우주의 속살을 들여다본 인간이 되었다."(104-5)


"갈릴레오는 1625~1630년에 걸쳐 쓴 《밀물과 썰물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만큼이나 그럴듯하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1633년에 열린 종교재판에서 이단 판정을 받은 그는 일곱 명의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지동설이라는 이단의 주장을 편 것을 철회한다는 참회의 말을 했다." "갈릴레오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으나 감옥 대신 그의 친구이자 시에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의 집에서 머물도록 허락해주었다. 대주교는 그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가끔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1633년 12월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판시했다. 말하자면 가택연금으로 최종 결정난 것이다." "갈릴레오는 생의 마지막 시기까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라고 주장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과학과 종교는 표면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나 사실은 같은 진리의 두 측면이라는 게 그가 줄곧 견지한 태도였다."(126, 129)


4장 독일의 악마들, 마녀사냥 이야기


"악마론에 정통했던 프리드리히 푀르너는 역사 연구에 매진한 후 매우 특이한 결론을 내렸다. 사악한 마법을 옹호하고 또 마녀 색출을 방해하는 중요한 세력이 신교도라는 것이다. 루터파와 칼뱅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방에서 악마의 추종자들이 날뛰고 있으며, 갈수록 그 위험이 더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마녀사냥을 가톨릭과 신교 간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의 적을 깨부수면 곧 그보다 더 사악한 적이 등장하여 지금의 정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금이 신과 악마 사이에 마지막 대결이 펼쳐지는 최후 단계다. 그러니 시 당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맡긴 사명에 따라 세상을 파괴하는 암흑의 세력들을 척결하는 데에 주저 없이 나서야 한다. 마녀는 말세에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인류의 구원을 저해하는 악마의 편이며, 더 이상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이같은 주장은 가공할 고문과 처형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최고의 가치와 맞물려 정당화되었다."(155-6)


"마녀사냥이 종식된 결정적 계기는 사법개혁이었다. 마녀재판도 엄연히 사법재판의 한 종류다. 그러니 더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재판 제도가 자리 잡으면 마녀재판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비판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프리드리히 슈페는 고문을 비판하는 책 《범죄의 담보》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힘의 흐름을 이어받아 결정적으로 마녀재판을 끝장낸 동력은 근대 국가의 발전에서 나왔다. 예컨대 파리 고등법원은 지방법원에서 마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의 항소심에서 형을 감면하거나 아예 무죄판결을 내렸다. 무지몽매하거나 광기에 찬 지방 권력자가 저급한 수준의 사법 제도를 악용해 극단적 힘을 행사하려 할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전국 단위의 사법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훨씬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해가는 중앙의 사법 제도가 지방의 사법 제도를 통제하면서 마녀사냥의 광기도 수드러들었다."(165-7)


5장 루이 14세, 세상을 암울하게 만든 태양왕


"(마자랭 혹은 콜베르 같은) '재정가financier'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사적인 방식으로 조달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귀족, 성직자 등 지방 유지들에게서 거액을 모아 국가에 융통해주었다. 중앙정부로서는 세금을 거두는 게 워낙 힘든 상황에서 당장 거액을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그 대신 재정가들은 국가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리를 부여받아 빌려준 돈보다 더 큰 액수의 돈을 거둠으로써 고수익을 얻었다. 국가재정 체계를 이용한 짭짤한 돈벌이였다.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관료제가 정착된 듯했지만, 실제로는 사당私黨 혹은 파벌 싸움에 좌우되었다." "권력자는 자신의 부하들을 지켜주고 부하들은 권력자에게 충성을 바친다. 국사國事의 중요한 부분이 이런 사적 관계망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절대주의 국가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국왕이 나라 전체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고 지방의 신민들이 철저히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협력과 균형을 특징으로 지녔다."(181)


"루이 1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1664년부터 일부 지방에서 귀족 조사 사업을 시작했고, 곧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자신이 진짜 귀족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귀족의 서열과 작위를 체계화했다. 왕실 직계가족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그다음은 방계가족, 그다음은 공작 등의 순으로 서열화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국왕의 인증을 받아야 진짜 귀족이고, 국왕의 재정에 기꺼이 돈을 대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으며, 국왕이 거주하는 궁정에 줄을 대면 고위직을 얻게 된다. 모두 국왕을 흠모하고 국왕의 은총을 갈구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태양왕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어갔다. 누구나 태양왕이 거처하는 베르사유궁으로 가서 한 자리 잡고 한 줄기 햇빛을 쬐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국왕은 지상 최고의 권력자처럼 행세하고, 입궐을 허락받은 귀족은 그런 국왕을 마치 신처럼 떠받는 척했다. 베르사유궁은 절대주의를 표현하는 종합 예술 무대였다."(186-7)


"점차 통치에 자신감이 붙은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7일,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내용의 퐁텐블로 칙령을 공포했다. 남아 있던 신교 교회를 파괴하고, 신교 예배를 금지했다. 목사들에게는 15일 내에 국외로 떠나라고 명령했고, 이를 위반하면 갤리선에 태워 노를 젓게 했다. 목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변호사 자격증을 주는 유인책도 썼다. 신교도들이 재산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도 금지했다. 해외로 가되 재산은 남겨놓고 떠나라는 것이다. 이런 극심한 압박을 견디다 못해 랑그도크, 푸아투, 베아른 등지에서 신교도들이 가톨릭으로 집단 개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85만 명 정도(당시 프랑스 인구 2,200만 명 중 3.8퍼센트)였던 신교도들 중 많은 수가 신교 국가로 이주했다. 특히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로 많이 갔고, 그다음으로는 스위스와 브란덴부르크 등지로 이주해갔다. 이것이 프랑스 경제를 결정적으로 망친 요인이라고 하면 지나친 속단이겠으나,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분명하다."(198-9)


6장 레오폴트 1세와 카를로스 2세,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지도를 바꾸다


"1683년 오스만군은 베오그라드를 거쳐 빈을 침공했다. 남부 오스트리아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가공할 대군이 밀려오는 것을 본 레오폴트 황제는 멀리 파사우로 몸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황제가 몸을 피한 건 잘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주도하여 주변 국가들이 참전을 결정했다. 폴란드의 소비에스키가 2만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왔고, 그 밖에 작센, 바이에른, 바덴 등도 참여했다. 훗날 신성동맹이라 불리는 연합군 전원이 말을 타고 돌진한 역사상 최대의 기병 공격으로 오스만군이 무너졌다." "결정적 패배를 겪은 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지역은 유럽과 오스만 제국이 군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격렬하게 싸우는 격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몇 차례에 걸쳐 유럽에 패배한 걸 보면, 군사적으로 정점을 지나 쇠락기로 접어들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중동부 유럽은 점차 합스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229-32)


"1700년 11월 1일,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에스파냐에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이제 합스부르크 세력은 유럽 전체를 제국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중세적 꿈을 영원히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지역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서쪽의 유럽 중심부로 확대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남동쪽으로 세를 키워갔다.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와 슬라보니아를 차지하고, 베네치아는 달마티아와 펠로폰네소스를, 폴란드는 포돌리아를 회복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얻은 땅이 합쳐지면서 신성로마제국의 규모는 두 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핵심 지역은 이제 서쪽의 콘스탄츠 호수에서 동쪽의 군사 변경 지역까지 거의 5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적 다양성이 커졌다. 루터파 작센인, 유대인, 칼뱅파 헝가리인, 정교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이 신성로마제국 안에 공존했고, 또 보스니아와 트라키아에 학살에서 살아남은 상당수의 무슬림이 남았다."(246) 


7장 베르니니, 영원의 도시 로마를 조각한 예술가


"1623년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여, 베르니니에게 교황청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무를 맡겼다. 베르니니는 1629년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성당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종교개혁으로 신·구교 간 갈등이 극심하자, 가톨릭 측은 자체의 개혁('가톨릭 종교개혁' 혹은 예전 용어를 빌리면 '반동 종교개혁')을 통해 스스로 교리와 조직을 정비했고, 17세기에 이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였다. 바로크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단(신교)'이 패배하고 가톨릭이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이를 장대하게 확인하는 예술이다. 여기에서 신교와 가톨릭 예배 장소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난다. 신교의 경우 원칙적으로 기도와 설교의 공간이어서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하다. 반면에 가톨릭은 천상의 세계를 재현해보이려는 듯 지극히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17세기 로마는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였고, 그 선두에 베르니니가 있었다."(259-61)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북유럽을 호령했다. 그의 치세에 스웨덴은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다섯 살 때 부왕이 전사하여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어서, 여장부 스타일인 크리스티나는 14세부터 각료회의에 참석하더니, 18세에 섭정을 끝내고 정식으로 즉위했다. 정치와 외교를 직접 관장하는 한편 외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 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중 한 명이 데카르트다. 그러던 그녀가 27세에 갑자기 양위를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비밀이 하나 있으니 그녀가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유럽 최강의 신교 국가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의 양위는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가톨릭 신앙의 승리로 해석했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온 크리스티나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중에는 스카를라티와 코렐리 같은 음악인들도 있지만, 이들보다 더 사랑은 받은 이는 베르니니였다."(277-9)


8장 존 로, 탐욕과 부패의 거품을 일으키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했다.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은 참담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프랑스 재정은 문자 그대로 파산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보자는 심경으로 존 로를 불러들였다." "그의 사업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그가 늘 견지해온 생각대로 토지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금고 안에 보관한 귀금속의 가치만큼 화폐를 발행하면 너무 제한적이다. 화폐량을 늘리려면 다른 재원이 필요한데,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토지다. 다만 예전 주장과 다른 점은 국내 토지가 아니라 해외 토지를 개발하여 담보로 삼자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것은 앙투안 크로자라는 사람이 설립했다가 현재는 지지부진한 루이지애나 회사였다. 1717년 9월 5일, 존 로는 북미 지역의 토지 개발에 관한 특권과 캐나다 비버 가죽 거래의 특권을 가진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일명 '서양회사Compagnie d'Occident'라고 했는데 세간에서는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라고 불렀다."(297-9)


"두 번째는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여 회사의 자본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존 로의 혁신적이면서 동시에 사기성 높은 아이디어가 빛나기 시작한다. 한 주에 500리브르인 주식 20만 주를 발행하여 1억 리브르의 자본금을 모으되, 투자자들은 현찰이 아니라 정부 채권으로만 이 주식을 구입할 수 있도록 규정했고,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액면가의 4퍼센트 이익을 보장했다. 당시 국채는 액면가의 약 30퍼센트로 거래되고 있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액면가 100만 원이던 국채가 '똥값'이 되어 실제 시세는 30만 원밖에 안 되는데, 이것으로 새로 설립하는 회사 주식을 사면 100만 원 제값을 다 쳐주고, 게다가 매년 4만 원의 이익까지 보장한다! 사람들은 귀가 솔깃했다. 울화통 터지는 국채를 하루빨리 처분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국채 소유자들이 대거 주식으로 갈아탔고, 그 결과 루이 15세 정부가 갚아야 할 부채의  20퍼센트가 정리되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299-300)


"존 로는 거침없이 사업 규모를 확대해갔다. (동인도와 서인도 지역 회사를 합병한) 소위 '인도회사'는 1719년 6월에 두 번째 주식 발행을 했다. 한 주당 500리브르의 주 5만 주를 10퍼센트 프리미엄을 붙여 모집했다. 이번에는 1차 모집 때와 달리 채권이 아니라 금이나 은행권으로만 투자할 수 있었고, 게다가 매우 특이한 투자 방식을 규정했다. 미시시피 회사 주식 100단위를 산 사람이 새 회사 25단위의 주식 매입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 회사의 4주를 가지면 '딸' 회사의 한 주를 살 수 있다. 욕심에 눈먼 투자자들은 기꺼이 '어머니'와 '딸'에 투자했다." "더구나 주식 매입 대금을 20개월에 걸쳐 분할하여 지불할 수 있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소액만 가지고 주식 매매에 뛰어든 사람도 많았다. 주가가 오르자 투자자들은 큰 수익을 올렸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 함부르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사람들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버블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어갔다."(305-6)


"마침내 버블이 터졌다. 주식을 팔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주식 가치와 화폐 가치가 동시에 급락했다. 1720년 7월에 왕립은행에서 은행권을 정화로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파리에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비비엔 거리에 위치한 은행 앞에 1만 5,000명이 운집하여 시위를 벌이다가 10여 명이 압사하는 일도 있었다. 11월에 지폐 유통이 중단되었고,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특히 단기 투기 수익을 노리고 '단타 매매'를 하느라 회사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사람들은 주식을 몰수당했다." "존 로 체제의 실패는 많은 투자자의 돈을 날린 단기간의 피해로 끝난 게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주식이니 은행이니 하는 것에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오랫동은 금융 제도의 발달을 지연시킴으로써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은행과 주식 제도 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가. 사회·경제 전체가 신용을 잃었으니 경제성장에 이보다 더 큰 악재는 없었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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