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7
미셸 배들리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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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학과 행동


"행동경제학은 우리의 결정이 비용·편익의 합리적 계산과 더불어 사회적·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사람이 (선택의 금전적 비용과 편익을 쉽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일종의 계산기이며 주위 사람들이 뭘하는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경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개개인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과 이를 떠받치는 제도의 실패 때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전통 경제학자들은 제약에서 합리성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으나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이 초합리적 존재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 의사 결정의 한계에 주목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은 대체로는 합리성이 변화 가능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에 좌우된다고 인정한다. 좋은 정보를 접할 수 없을 때, 서둘러야 할 때, 인지 제약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경험할 때─이럴 때 우리는 시간과 정보가 충분한 완벽한 세상에서라면 내리지 않았을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12-6)


2 동기와 유인


"외적 동기는 우리 개개인의 바깥에 있는 유인과 동기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우리로 하여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도록 세상과 주위 사람들이 부추기는 경우다. 그러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흔하고 강력한 외적 유인은 돈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외적 유인으로는 신체적 위협이 있다. 하지만 외적 동기는 비금전적 유인─이를테면 인정과 성공 같은 사회적 보상─에서 올 수도 있다. 임금 인상, 좋은 시험 성적, 상장과 부상, 남들의 인정 등은 모두 외적 보상이다. 내적 동기는 우리의 내적 목표와 태도가 미치는 영향을 일컫는다. 내적 반응은 이따금 우리가 노력하도록 독려한다. 우리는 외적 보상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 직업적 자부심이든 의무감이든 대의에 대한 충성심이든 수수께끼를 푸는 즐거움이든 신체 활동의 쾌감이든, 우리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내적으로 동기가 부여되면 외적 유인은 없어도 된다."(26-7)


"유인과 동기는 내적(intrinsic)인지 외적(extrinsic)인지를 불문하고 우리의 직장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대다수 직장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내적 영향과 외적 영향의 상호 작용이다. 외적 유인과 동기의 사례로는 우리가 받는 임금과 고용되었을 때 얻는 사회적 인정─특히, (의료계나 교육계처럼) 가치를 인정받는 직업일 경우─이 있다. 일에는 내적 동기도 작용하는데, 이를테면 우리는 도전을 즐기거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만족을 느끼거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임금 인상이 노동자에게 노동자에게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금전적 혜택 때문만이 아니다. 좋은 대우가 직원의 신뢰와 충성에 미치는 영향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보상과 유인 때문이기도 하다."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는 금전 교환이 전부가 아니다. 충성, 신뢰, 보답 등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유인과 동인도 작용한다. 조지 애컬로프 연구진은 이를 일종의 '선물 교환(gift exchange)'이라 일컫는다."(35-7)


3 사회적 삶


"행동경제학에서 신뢰와 보답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공평한 결과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으며 남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면, 신뢰하고 보답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이 핵심 요소는 공정에 대한 선호를 남들과의 비교와 짝짓는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보다 훨씬 잘나거나 못난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불공평한 결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 선호를 '불평등 회피(inequity aversion)'라고 부른다." "공정함의 선호는 자원봉사나 기부 같은 이타주의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베풀면 즐겁고 이따금 마음이 따스해지기 때문이다. 몇몇 실험에 따르면 이것이 언제나 순수한 이타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임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일 때도 있다."(44-5)


"사회적 본성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군중을 모방하고 따르려는 경향이다. 딴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말이 된다. 군중을 따르는 것은 합리적인 사회적 학습 장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충동적으로 군중을 따를 때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무심코─아마도 우리에게서 진화한 군집 본능을 따라─그렇게 한다." "군집 행동을 설명하는 한 가지 해석은 모든 결정을 백지 상태에서 내려야 할 때의 시간과 인지적 노력을 절약하게 해주는 빠른 의사 결정 도구─행동경제학자들이 어림짐작(heuristic, 휴리스틱)이라고 부르는 것─라는 것이다." "어림짐작의 문제는, 빠르고 편리하고 종종 충분히 훌륭하게 작동하기는 하지만 체계적인 행동 편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과 친구를 모방하는 것은 귀중한 사회적 정보를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군집 행동은 여러 어림짐작 중 하나에 불과하다."(54-6, 63)


4 빠른 판단


"정보에 짓눌리면 빨리 결정하기가 힘들다. 이때 우리는 정보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가 걸렸다고 말한다. 선택에 짓눌렸을 때에도 빠르고 정확하게 결정하기가 힘든데, 이것을 선택 과부하(choice overload)라 한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선택이 좋은 것이며 선택지가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들어맞는 제품과 서비스를 더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우리의 복리가 커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해서 결과가 나아지지는 않는 듯하다." "현대에는 선택 과부하의 문제가 유난히 심각하며 정보 과부하도 이를 부채질한다. 선택 과부하를 맞닥뜨리면 소비자는 빨리 결정을 내린다. 이를테면 제시된 모든 선택지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첫째 항목을 선택한다. 선택이 너무 복잡하면, 특히 눈에 보이고 즉각적인 이익이 없는 '지루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69-70)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특히, 서두를 때─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접근하고 끄집어내고 회상하기 쉬운 정보를 이용한다. 이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종종 현재 상태을 기준점으로 삼아 기존 상황에서 멀어지는 변화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과 친숙함 편향(familiarity bias)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변화에 저항하기도 하고, 사건을 현재 상황과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판단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판단은 결정이 우리를 현재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지게 할 것인가를 바탕으로 삼는다. 새 일자리를 찾거나 집을 팔 때 적정 임금이나 적정 주택 가격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지금 벌고 있는 금액, 이 집을 샀을 때 지불한 가격, 이웃이 자기집을 팔면서 받은 가격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문제는 이 판단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힘과 거의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73, 84)


5 위험이 따르는 선택


"기대 효용 이론가들은 사람들이 결정에 관련되고 가용한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활용한다고 가정한다. 또한 우리가 비교적 복잡한 수학 도구를 이용하여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의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는 사람들이 위험이 따르는 상황에서 선택할 때 종종 변덕을 부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명한 행동 역설 중 하나가 바로 알레 역설(Allais Paradox)이다. 알레 역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위험이 따르는 결과들에 대해 안정적이고 꾸준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결과가 확실한 선택지를 위험이 따르는 일련의 선택지와 함께 제시하면 사람들은 확실한 결과를 선호한다(어떤 전망들을 제시하느냐에 따라서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지만).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이 효과를 확실성 효과(certainty effect)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운을 시험하고 내기를 거는 것을 좋아하지만, 확실한 결과를 제시받으면 더 높은 보상을 위해 추가적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94-5, 99)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손실을 피하려 할 때는 위험을 더 감수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도박할 때는 위험을 덜 감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손실에 직면했을 때 위험 감수를 선호하는 현상이 이익의 맥락에서 위험 회피를 선호하는 현상의 거울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영 효과(reflection effect)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고립 효과(isolation effect)라는 셋째 효과도 발견했다. 이것은 제시된 대안 중에서 중요한 요소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모든 관련 정보를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보 조각들을 떼어내 판단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통찰을 종합한 '전망 이론 가치 함수'로 우리의 주관적 가치 인식을 표현한다." "일정한 양의 손실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손상시키는 정도는 같은 양의 이득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증가시키는 정도보다 훨씬 크다. 100파운드를 얻는 기쁨보다는 100파운드를 읽는 속상함이 훨씬 큰 법이다."(104, 107, 114-6)


6 시간


"표준 경제학에서는 어떤 사람이 오늘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미래의 같은 기간에 대해서도 같은 조바심을 나타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시간 일관성(time consistency)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에서 얻은 증거를 토대로 표준 경제학적 접근법에서 가정하는 시간 선호의 일관성이 사람(또는 그밖의 동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인내심이 '불비례적으로(disproportionately)' 약하지만, 미래를 계획할 때는 더 인내심을 발휘한다. 이것이 시간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이다. 즉, 지연된 결과에 대한 선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시간 선호는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편향(present bias)을 겪는데─나중의 큰 보상보다 당장의 작은 보상을 불비례적으로 선호한다─이것은 내재된 시간 비일관성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인내심을 발휘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한다."(123-5)


"우리가 먼 미래를 계획할 때 더 인내심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콧 릭과 조지 로웬스타인은 이것을 편익 대 비용의 상대적 실질성(tangibility)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오늘의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다. 유혹을 거부하는 데는 실질적인 단기적 비용이 들며, 이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다이어트, 운동, 금연 등 예는 수없이 많다. 초콜릿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즉각적인 실질적 쾌락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할 때처럼 당장 번거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 미래의 목표는 멀고 덜 실질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오늘 자제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누구나 한 가지씩 미루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헬스장에 가는 일을 미룬다. 진득한 자아는 미래에 운동 부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성급한 자아는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소파에 앉아 초콜릿칩을 먹는 것을 선호한다. 이로 인한 순(純)효과는 어느 자아가 지배적인지에 달렸다."(127-9)


7 성격, 기분, 감정


"성격은 많은 경제적·재무적 의사 결정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의사 결정을 하려면 곰곰이 따져봐야 할 때가 많은데, 성격 특질은 인지 능력을 결정하며 인지를 통해 선택을 좌우한다. 이로 인해 학업 성취, 직무 성과, 사회적 기술이 결정되기에 그 결과는 종종 일생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성격 특질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믿음직한 동료를 대체로 선호한다. 파티에서는 유머 감각이 있는지 여부가 관심사일 것이다. 성격 특질에 맞는 직업도 다르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찾아가고 싶은 의사는 공감 능력이 있고 인지 능력이 뛰어나서 증상과 진단을 쉽고 정확하게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레스토랑에 갈 때 우리가 원하는 주방장은 기발하고 엉뚱한 사람이다. 심지어 주방장이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울수록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거라 맏기도 한다.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의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151-2)


"섬(insula)은 통증, 굶주림, 목마름, 분노, 혐오 같은 부정적 정서 상태를 처리한다. 변연계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뇌 속 깊숙한 곳에 들어 있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섬은 충동적이고 자동적인 의사 결정 유형에 관여한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섬은 컴퓨터의 부당한 제안보다는 사람의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심하게 활성화되었으며, 제안이 부당할수록 섬 반응이 커졌다. 참가자들의 섬 활성화에는 예측력도 있었다. 섬이 많이 활성화되는 참가자들은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는 비율이 훨씬 컸다. 산피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부당한 제안에 반응하는 기전이 악취에 반응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대우는 분노와 더불어 '도덕적' 유형의 혐오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전전두피질은 나중에 수용된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이것은 부당한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며 이를 거부하려는 정서적 충동을 극복하려면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68)


8 거시경제에서의 행동


"기존 거시경제학은 모든 노동자와 모든 기업이 같고 결정도 똑같은 방식으로 내린다고 가정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완벽히 합리적이기에, 어떤 사람들이 거시경제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묘사하는 일도 비교적 수월하다. 표준 거시경제학 이론에서 묘사하는 것은 한 개인─대표적 행위자(representative agent)─으로, 그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많은 표준 경제학 이론에서 대표적 행위자는 모든 기업이나 모든 노동자의 행동을 대표한다. 대표적 행위자의 행동을 곱하면 거시경제 모형이 된다." "하지만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대표적 행위자라는 수단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 있게 종합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성격과 감정의 차이, 행위자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이야말로 행동경제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는 대표적 행위자가 단 한 명도 없다.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그 대신 총체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184-5)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금융과 금융 불안정에 미치는 영향에도 주목한다. 역사에 기록된 투기적 거품들은 냉철한 합리적 행위자가 자산 매입의 상대적 비용과 편익을 평가할 때 신중한 수학적 계산을 한다는 표준 경제학의 시각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먼 민스키는 이러한 금융 불안정을 설명하기 위해 신용 순환 이론을 발전시켰다. 케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취약한 금융 체계와 이 취약성이 거시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민스키의 분석에서는 정서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스키는 공포와 공황의 순환이 경기순환을 추동하고 금융 체계의 취약함이 극단적 변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기순환은 처음에 투기적 도취와 기업가의 지나친 낙관주의라는 물결에 휩쓸린다. 은행은 대출을 지나치게 늘리고 기업은 차입을 지나치게 늘린다. 결국 이 호황에 탄탄한 토대가 없음을 누군가 깨닫고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고, 야단스럽게 불황 국면이 찾아온다."(186-8)


9 경제적 행동과 공공 정책


"전통적으로 조세와 보조금은 정부와 정책 입안자가 시장의 기능을 개선하려고 이용하는 주된 정책 수단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례로 흡연이 있다. 흡연이 공중 보건 체계를 압박하여 납세자에게 비용을 발생시키면 담배에 과세하는 것이 유익하다. 흡연의 유인을 줄일 뿐 아니라 정부가 보건 체계에 투여할 세입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특정 지역에서 산업이 쇠퇴하고 있다면 보조금을 이용하여 그 지역의 경제 활동을 증진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인위적 시장 시스템은 '시장 부재(missing market)'를 대체한다. 오염은 단순한 사례다. 기업이 기업이 공기나 물을 오염시킬 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기업은 공짜 오염 허가를 얻은 셈이 된다. 오염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에 대해 누구에게도 보상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에 오염에 대한 시장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로널드 코스의 통찰에 근거한 해결책은 인위적 시장(배출권 거래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99-200)


"행동공공정책은 시장 실패에 주목하기보다는 행동 변화(behaviour change)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을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의사 결정으로 유도하여 사람들이 일상적인 결정과 선택을 내리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넛지』의 저자들인 세일러와 선스타인은 정책 입안자들이 효과적인 정책 수단을 설계하려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을 좌우하는 어림짐작과 편향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 구조를 재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통찰을 바탕으로 두 사람은 이른바 우리의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를 규명하면서, 넛지를 일종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라고 표현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에게 단순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 점화와 넛지를 설계하여 사람들의 결정을 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 '좋은' 결정이 강화되고 '나쁜' 결정이 억제되도록 자주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이 모든 전략은 행동공공정책 입안자의 도구로 쓰인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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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주공아파트 - 단지 신화의 시작 케이 모던 1
박철수 지음 / 마티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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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조국 근대화를 지향한 국가 재건'과 '현대적인 집단 공동생활 양식을 위한 생활혁명'은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단지화 전략을 통해 생산되는 〈아파트 단지는 일반 시가지 주택지보다 공급하는 주택 수도 많고 환경 수준도 높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개발 방식〉이었다. 정부와 주택공사 관리자들은 이 효율성에 대단히 만족했을 것이다. 단지 내 도로, 공원, 놀이터 등은 단지 입주자들에게 맡겨버리고 정부는 단지 바깥의 간선도로 등 최소한의 기반시설만 준비하면 끝이었다. 마포주공아파트는 '단지화 전략을 통해 입주자들의 관리, 안전, 생활편의 등 도시의 공공기능을 사적 비용과 수단을 통해 조달하도록 함으로써 개발 비용을 사회에 부담하는 행위'의 출발점이다. 한국 아파트단지의 전범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주택 공급은 정확히 이 방식으로 반복된다. 1인당 국민소득과 국가예산이 수십 배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단지 내 모든 것을 입주자에게 부담시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16-7)


1 전사(前史): 프롤로그


"5·16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밀어붙인 대표적 국가 프로젝트가 마포주공아파트다. 〈군부는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스스로 혁명이라 부른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 2년 뒤 약속한 정권 이양을 번복하고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할 필요가 절실했다. (···)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6개월가량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군부가 완성한 프로젝트는 국립원호원, 새나라자동차 공장, 워커힐 호텔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일반 시민의 눈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군인들은 빵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민감하게 포착했고 『사상계』의 근대화론과 경합시켜 그것을 정치적 수사로 전유했다. 이런 맥락에서 공장이나 호텔과 달리 시민들의 일상과 직접 관계하는 주거 프로젝트였던 마포주공아파트 1단계 준공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27-9)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인 1962~1966년 사이 주택투자는 국민총생산의 1.7퍼센트에 불과했고(선진국의 경우 6~8퍼센트), 전체 투자 중 공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8.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토건국가로 불릴 만큼 건설산업 비중이 커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1962년의 산업별 투자계획만 보더라도, 계획 기간 중 2차 산업으로 분류된 건설업은 정부(공공)와 민간의 투자 비중이 각각 36.6퍼센트와 63.4퍼센트였고, 3차 산업으로 분류된 주택 부문에서는 정부와 민간이 각각 16.9퍼센트와 83.1퍼센트를 차지했다. 경제개발 정책 초기부터 주택 공급은 정부의 1차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간 중심으로 건설산업을 육성해 주택을 공급한다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이었다. 공공주택 보급은 처음부터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융자를 지원해 민간 주도로 주택을 공급하고자 했다. 이는 국민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집을 마련하라는 신호였기에 이후 투기 자본이 쉽게 유입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37-9)


2 근대 산업시설의 태동지: 도화동 연와공장


"'도화동 연와공장'으로 불린 벽돌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이었다. 다음 해인 1908년 서대문에 '경성감옥'이 조성됐는데, 일제의 조선 강탈 이후 그 시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화상태에 이르자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마포구 공덕리 105번지에 새로운 '경성감옥'을 만들고 가까운 곳에 있던 도화동 벽돌공장을 공덕리 경성감옥의 노역장으로 삼았다." "각종 교정시설은 법무부 관할이다. 일제강점기 형무소 노역장은 해방 이후 미군정청 사법부를 거쳐 대한민국 법무부로 이양됐다. 마포주공아파트가 들어서게 될 넓은 부지와 시설 일체는 해방 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법무부 관할 자산이 됐다. 1957년까지 벽돌 공장이 운영되었으나 생산을 중단한 뒤에는 거의 버려진 채소밭이 되어 있었다. 마포교도소가 안양교도소로 통합, 이전되면서 별다른 용도 없이 법무부 관할 국유자산으로 남아 있던 것을 주택영단이 마포아파트 건설 부지로 매입하기에 이른다."(51-3)


# 대한주택영단 : 대한주택공사의 전신


"'도화정 6-1'의 소유자는 남산정 3정목에 거처를 둔 송종헌으로, 정미칠적(丁未七敵), 경술국적(庚戌國敵) 등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 친일 인사 송병준의 아들이다. 일진회를 이끌며 일제의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송병준은 일제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5등작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자작을 받았고 중추원 고문을 맡았는데, 1920년 백작으로 승작했다. 그의 사후 송종헌은 아버지의 백작 작위를 승계했다. 대정 9년인 1921년 8월 21일에 송종헌 소유의 '도화정 6-1'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산정 3정목 31번지에 주소를 둔 그의 아버지 송병준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 송병준 소유가 된 도화정 6-1은 다시 몇 차례 사인 간의 소유권 이전이 있었고, 1933년 11월 25일에 국유지가 되었다. 이후 특별한 변동이 없다가 1971년 11월 19일 대한주택공사로 소유권이 변경되었다. 1972년 5월 26일에는 면적이 1만 4,121평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마포주공아파트 단지의 면적 1만 4,141평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58)


3 국가 프로젝트의 이데올로기


"발전국가와 건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난다. 1960년대 한국에서 미래를 현재로 호출하는 건축의 이데올로기와 발전국가의 계획은 유례없이 공명했다. 장동운의 시범아파트는 국가 주도 발전 전략을 추진하던 신생 독립국이자 후발 국가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단지의 규모와 이를 채울 주거동의 높이'가 '시범'의 가늠자였다. 10층짜리 주거동 11개가 울타리를 두른 듯한 부지에 빽빽하게 들어찬 아파트단지의 모습이 실제 공급할 물량보다 더 중요했다. 아파트의 점유율이 0.77퍼센트에 불과했던 1970년에서 10년쯤 더 거슬러 올라간 1961년에 중앙집중식 난방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고 내리는 장면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미래 풍경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당대에 불가능해 보였던 예외, '각종 첨단 설비와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매체였다. 이는 〈근대문명의 혜택〉이었고, 체제 홍보와 대북선전의 장치였다."(69-71)


"대한주택영단 주택문제연구소 단지연구실장을 역임한 박병주는 1967년 발표한 글에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임대아파트가 사라져도 괜찮은지 탄식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마포아파트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장점으로 '공영임대아파트'라는 사실을 꼽았다. '공영주택 건설 비용에 정부의 정책 자금이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대단위 주택지에서 (공공이) 먼저 몇 곳을 골라 집을 지은 뒤 이를 모범적 선례로 삼도록 민간을 지도하는 의미'가 '시범'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포아파트 건립을 추진한 이들에게 임대냐 분양이냐는 부차적 문제였고, 이 결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규모, 이 규모가 선사하는 새로운 도시 경관, 즉 발전과 등치되길 원한 혁명의 이미지였다."(83)


4 마포아파트의 이데올로기


"도시를 수평으로 끊임없이 확장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단독주택 보급 정책은 교통난과 공원 침탈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에, 대안은 '도시의 입체화'라는 생각이 1960년대 서구와 일본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단순히 고층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도시로의 전환을 꾀했다." "대한주택공사 기술이사 홍사천은 고층화에도 난점은 있다면서 〈무작정으로 고층화된다면 미국의 도시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소규모 단지계획을 지양하고 대단지로 구성하듯이 도심부의 한 큰 구역을 서로 연관 있는 한 단위로 고층화시키는 '슈퍼블록 시스템'인데, 명동이면 명동 한 구역을 종합적으로 계획해 나가는 것인데, 앞날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슈퍼블록에 의한 입체도시 구현, 그리고 대규모 단지화 전략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이 슈퍼블록 중심의 입체적인 개발 계획은 이후 본격화되는 도심 재개발의 기본 방침으로 자리 잡는다."(101-6)


"또 홍사천은 다른 글에서 주거지의 이상은 지구 전체를 계획하는 것이라면서, 〈지구마다 중앙에 초등학교가 있고, 점포가 있고, 통행인과 자동차도로가 분리되어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두 즐거운 '커뮤니티' 생활을 함으로써 주택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대지의 활용이나 수용 인구 면에서 마포아파트가 월등히 효율적인 계획이라는 주장이자 결론인 동시에 향후 대단지 개발 및 재개발로 아파트를 공급하는 정책을 예견하는 주장이었다." "건축가 강명구는 자신이 마포아파트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정부의 강력한 정책 반영으로 주택공사의 영단을 얻어 꿈에만 그리던 고층주택의 실현에 이르게 된 것'이며, 앞으로도 '한층 강력한 주택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층 강력한 주택 정책'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마포아파트 설계와 건설에 참여한 경험은 기술 관료와 건축가 들의 욕망을 더 크게 부풀렸다."(106-7)


5 총력 설계 체제가 만든 3가지 주거동


"최종 채택된 Y자형 주거동은 1962년 8월 31일부터 11월 28일까지 공사가 진행됐으며, 一자형 주거동은 1964년 11월 7일 착공해 1965년 5월 12일 준공했다." "각종 준공보고서를 통해 1964년 11월 7일 착공해 1965년 5월 12일 모두 준공한 것으로 확인한 一자형 주거동은 최초 설계 과정에서 채택한 편복도형 진입 방식과는 달리 모두 계단실형으로 변경됐다. 1차 준공한 Y자형 주거동 6동을 전제조건으로 둔 상태에서 주출입구 좌우에 1동씩을 배치하고 부출입구 왼편에 1동, 그리고 Y자형 주거동 뒤쪽 여유공간을 이용해 다시 1동을 추가로 배치함으로써 10개 주거동으로 이루어진 마포아파트의 전체가 완성됐다. 처음부터 분양을 염두에 두었던 一자형 주거동은 1964년 3월 공고를 시작으로 분양에 나섰으며, 임대아파트로 구상했던 Y자형 주거동은 애초엔 임대를 했다가 1967년 8월부터 분양 전환 절차에 돌입하며 입주자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198-9)


6 USOM의 반대와 설계변경


"10층 주거동 11개로 구성한 마포주공아파트 최초 설계는 1961년 9월 마무리됐다. 최초 구상한 10층 높이의 아파트 주거동이 6층으로 변경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를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대한주택공사는 미국의 반대와 함께 당시의 전력 사정과 기름 부족, 열악한 상수도 현황 등을 꼽았다. 당시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USOM(미국경제협조처)은 아파트보다 난민구호주택을 더 많이 지을 것을 강력하게 원했고, 언론에서도 전기와 유류 사정을 들어 중앙난방과 엘리베이터 설치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했다. 서울시도 마실 물이 귀한 판에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며 반대에 가세했다. 여기에 덧붙여 상습 침수지였던 부지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10층이나 되는 육중한 건물이 들어서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었다. 6층으로 변경되면서 중앙난방도 개별 연탄보일러로 바뀌었다. 이 반대 의견 가운데 군사 정부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미국이다."(216-9)


"1961년 11월 15일 USOM은 대한주택영단과 Y자형 주거동 6개로 이루어진 1단계 임대아파트에 대해 설계협의를 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협의 결과를 11월 22일에 문서로 만들어 회람했다." "USOM의 검토 의견은 점잖은 외교적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설계 자체가 모든 면에서 미흡하다고 평가하며 통합적 대안 마련이 우선이라면서 대한주택영단의 마포아파트 프로젝트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런 사업에 미국이 구체적인 지원을 하거나 힘을 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이상을 무리해서 실현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반면, 민정이양 약속 기한을 얼마 앞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인들에게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해야 하는 사업이 마포아파트였다. 다가올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와 제6대 국회의원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혁명의 가시화를 위해 도화동 연와공장은 마포아파트단지로 변모해야만 했다."(219, 229-31)


7 임대에서 분양으로, 한국 주택 공급의 운명


"마포주공아파트가 다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국고 손실 논란까지 일며 대한주택공사가 시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은 것은 임대아파트 450세대를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1967년 4월이다. 대한주택공사의 계획은 1967년 8월부터 11월 30일까지 Y자형 주거동 450호 모두를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주된 이유는 대한주택공사의 자금난이었다." "임대로 입주했으나 갑자기 분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입주자들에게 대단히 큰 경제적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마포아파트분양대책투쟁위원회'가 제출한 진정서에 담긴 '진정 취지' 3가지는 곧 임차인들의 현실적 요구였다. '임대아파트의 분양 전환에 있어 ①분양가 산정은 「공영주택법」을 따라야 하며, ②현재의 융자금은 당연하게도 증액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③분양가에서 융자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도 한꺼번에 낼 형편이 못 되니 이를 여러 차례 나눠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246-7)


"결국 대한주택공사는 관할 부처인 건설부와 협의를 거쳐 공사의 책임 아래 융자금 증액과 입주금 분납 등을 조정하라는 방침을 받아냈다." "이렇게 마련한 대책을 의결한 것은 1967년 11월 18일 개최한 제63차 이사회였다. 이사회 안건은 「마포아파트 분양 방안」 단 한 건이었다. 이사회가 해당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함으로써 마포아파트 Y자형 임대용 아파트 450호에 대한 분양 전환 논란은 일단락됐다. 마포아파트분양대책투쟁위원회 입장에서는 「공영주택법」과 「공영주택법시행령」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되면서 불거진 갈등은 결국 정부가 공급하는 주택의 법적 규정과 성격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지난 세기 한국에서 공공이 저소득층을 위한 공동주택을 공급하고 관리한 시기는 무척 짧았다. 주택은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은 굳어졌고, 이후 임대아파트는 분양 아파트단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소득층의 남루한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254, 258)


8 마포주공아파트의 전방위 파급 효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제1차와 제2차의 주택 부문 정책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자본을 충당하는 방법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지만 여전히 빈곤했고 미국의 원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조와 차관에 의존하던 자본 동원 방식은 변화가 불가피했다. 민간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 여러 제도와 정책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다." "1967년 3월 30일에는 「한국주택금고법」이 제정, 시행된다. 한국주택은행이 출현하는 배경이 된 이 법률의 취지는 민간 자본과 주택기금 회전 자금 등으로 주택 정책 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증대시켜 서민주택 금융으로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주택 공급과 주택지 개발을 위한 자금 융자와 관리, 주택채권과 주택복권의 발행, 주택예금과 주택부금 관리 등이 「한국주택금고법」에 의해 이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률의 전면 개정을 통해 한국주택금고는 한국주택은행으로 재탄생했다. 1969년의 일이었다."(265-7)


"1966년 8월 3일 법률 제1922호로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도시계획법」에서 분리되며 새롭게 제정됐다. 「토지구획정리사업법」 제정은 민간의 택지 수요를 충족시키고, 대도시의 경우에는 도심 재정비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곡 30만 지구, 개봉 60만 지구(1~2지구 포함), 대구 수성 주거단지와 서울 한남동 주택단지 등은 1967년 5월 「토지구획정리사업법시행령」 제정 이후 대한주택공사가 시행 주체가 되어 개발된 대표적인 대규모 주택지구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진행된 영동1지구와 그 뒤를 이은 영동2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오늘날 강남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된다. 1973년부터 영동-잠실지구를 대상으로 대규모 주택 건설이 추진된 것도 모두 토지구획정리사업 덕에 가능했으며, 서울 동쪽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조성사업인 잠실대단위아파트지구는 대한주택공사가 꼽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의 대표적 사례였다."(290-2)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토지 소유자들의 소유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획정리를 추진하고, 사업이 완료된 뒤에 원래의 토지 소유 비율에 따라 구획 정리된 토지를 돌려주는(換地) 방식이다. 따라서 원래의 토지 소유자가 여럿이면 사업이 마무리된 뒤에도 대지가 여러 개의 소규모 필지로 나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잠실지구 개발에서는 아예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을 일부 개정해 체비지만으로도 대규모 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잠실지구에 대단위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80년 12월 31일 제정된 「택지개발촉진법」 시행 전까지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택지를 정형으로 개발하거나 대단위 주택지를 조성해 대규모 단지식 아파트를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법적 수단이었다. 공장터였던 곳에서 처음 시도된 단지식 아파트의 모델이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마련된 대형 택지와 결합하면서 한국의 보편적 대단위 아파트단지 만들기의 템플릿이 되었다."(292-4)


# 체비지(替費地) : 부정형의 농지나 대지를 반듯하게 만드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드는 직간접의 비용을 땅으로 부담하는 것. 부정형의 농지 100평을 반듯하게 한 뒤 75평의 농지를 되돌려받았다면 체비지는 25평이다.


9 마포에서 잠실까지: K-Housing Model 완성


"한강아파트지구와 반포를 거쳐 자족적인 단지라는 이상과 근린주구론은 잠실에서 거의 온전한 형태로 구현된다. 잠실아파트지구는 단지화 전략의 최종 목적지였다. 각 아파트단지는 도시계획도로로 둘러싸여 완벽한 공간적 완결을 추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주택건설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자 '주택 건설의 새로운 장을 이룩한 대역사'라 자평한 잠실주공아파트단지는 심각한 쟁점을 던진 문제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단지화 전략의 사회적 결과인 '단지의 폐쇄성' 때문이다. 잠실지구 아파트단지 이후 가구(街區, 블록 혹은 단지)를 계획 단위로 하는 생활권계획은 강고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이미 이런 생각이 사업시행자들의 마음속에 각인됐던 탓인지 1975년 2월 6일 기공식 현장 무대에 크게 써 붙인 글귀는 흥미롭게도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단지아파트였다. 각 블록은 공공 공간과의 접점을 잃은 채 폐쇄적 공간이 되어 인접 가로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공 공간은 황폐화 경향을 보였다."(320, 325)


# 근린주구론(近隣住區論)

1. 규모 : (인구밀도를 고려하여) 초등학교 1개가 들어갈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2. 경계 : 단지 외곽은 자동차 통행이 자유로운 간선도로와 면해야 한다.

3. 오픈 스페이스 : 이웃주민들과 친분을 나눌 수 있는 휴게공간을 가진다.

4. 부대시설 : 주민공동시설은 가급적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하며, 도보거리에 위치해야 한다.

5. 상가 : 근린주구와 이어지는 외부에 충분한 규모로 조성해야 한다.

6. 내부가로망 : 내부 도로는 외곽의 자동자 전용도로와 연결되어야 하며, 내부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통과 교통은 금지한다.


"또 다른 문제는 15층의 탑상형과 판상형 주거동만으로 조성한 잠실5단지가 이후 고층아파트단지의 전범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재개발이 완성된 지 오래인 1~4단지의 현재 모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모든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단지의 울타리 안에 충분히 갖춤으로써 단지화 전략은 완벽에 가깝게 실현되었다. 마포주공아파트 초기안의 10층 Y자형과 一자형은 각각 15층 탑상형과 판상형 아파트로 잠실에서 재현된다. 시범아파트로 시작한 여정은 15년여 만에 한국형 아파트단지의 전형으로 완성된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20세기 한국이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산물이자 매개체이자 상징이며, 한국 현대성의 한 척도이자 전형이라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K-하우징 모델〉로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초 국가 프로젝트로서 '아파트 주택의 성패를 가릴 모형'으로 등장한 마포주공아파트는 이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325, 3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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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생각법 - 생각의 지름길을 찾아내는 기술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 북라이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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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항상 지름길을 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시간이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빠른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문제를 헤치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정신적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개발한 첫 번째 전략은 '어림짐작'이다. 이 전략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뇌로 들어오는 정보의 일부를 무시해 문제를 덜 복잡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문제는 이 방식이 대체로 잘못된 판단이나 편향된 결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적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바나savanna 같은 좁은 지역 내에서 살았던 아주 오래전에는 이런 전략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 반경이 급격히 확장되면서 국지적 지식을 넘어서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림짐작은 더 이상 좋은 전략이 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어림짐작을 넘어선 더 나은 지름길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도구들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13-4)


제1장 패턴의 지름길


"온라인상에는 매초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쌓이고 있다. 만약 이 데이터들에서 일정 패턴만 찾을 수 있다면 메모리 용량을 많이 차지하는 일 없이 이 정보들을 압축하는 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MP3나 이미지 파일 형식 중 하나인 JPEG 같은 기술에 이러한 핵심 개념이 숨어 있다. 흑백 픽셀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이런 종류의 사진에는 반드시 어딘가에 흰색 픽셀이 넓은 영역에 존재한다. 이 영역의 모든 픽셀을 일일이 흰색으로 저장하는 대신 그만큼의 메모리를 실제 이미지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면 정보 저장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지름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흰색 픽셀이 존재하는 영역의 경계면에 대한 위치 정보만 저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면 안쪽은 흰색으로 채우라는 명령을 함께 저장하면 된다. 어떤 영역을 흰색으로 채우라는 명령어 코드가 차지하는 메모리 용량은 일반적으로 그 영역에 존재하는 각각의 픽셀을 흰색으로 일일이 저장하는 것보다 훨씬 적게 소요된다."(57-8)


"일단 어떤 이미지에서 특정 패턴을 발견한다면 그 이미지를 다시 만들어내는 코드를 작성할 수 있다. 수학에서는 이 코드를 '알고리즘'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미지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알고리즘의 크기는 이미지에 들어 있는 무작위성을 측정해내는 강력한 척도가 된다. 체스판의 패턴은 매우 질서 정연하다. 따라서 체스판 이미지를 되살리는 데 필요한 알고리즘의 크기는 매우 작을 것이다. 하지만 동전을 던져서 만든 흰색과 검은색으로 구성된 격자무늬 이미지를 재현하는 알고리즘의 경우, 총 36개의 칸을 하나하나 기억하기 위해 만든 알고리즘과 비교해도 결코 코드의 길이가 짧지 않다." "인간에서 기계에 이르기까지 기억하는 과정에는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수학적인 면을 이용한다. 기억하기 위해 패턴을 발견하고 그 패턴을 연결하고 결합해 저장하고자 하는 데이터에 일정한 논리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 기억을 잘하기 위한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60-1)


제2장 계산의 지름길


"수 세기 동안 수학자들은 허수에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2의 제곱근은 비록 소수점 자리가 무한히 계속되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숫자를 줄자의 어느 지점에서는 볼 수 있다고 느낀다. 이 숫자의 크기가 1.4에서 1.5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너스 1의 제곱근은 어디에 있을까? 줄자에서는 볼 수 없는 값이다." "오늘날 허수의 세계는 이 마법 거울 속의 지름길이 없었다면 이해하지 못할 개념들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 역할을 한다. 양자물리학은 극히 작은 입자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이 학문의 세계는 허수를 이용해야만 설명 가능하다. 또한 전자기학에서 교류는 마이너스 1의 제곱근을 이용할 때 가장 쉽게 다룰 수 있다." "날아오는 비행기를 추적하려면 속도가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항공기에서 반사되는 전파를 사용하여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와 관련된 계산은 매우 까다롭고 시간도 매우 많이 걸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허수다."(101, 104-6)


"어떤 수를 나타내기 위해 10진법처럼 10의 거듭제곱을 쓰지 않고 다른 숫자의 거듭제곱을 사용할 수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60의 배수로 자릿값 체계를 표현했다. 그들은 0에서 59까지의 기호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60진법으로 숫자를 표현했다. 마야인들은 0에서 19까지의 기호를 썼고, 20의 거듭제곱을 사용한 20진법 체계를 만들었다."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스위치가 켜지거나 꺼지는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 따라서 컴퓨터는 두 가지 기호만 사용하는 숫자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때 꺼졌을 때는 0, 켜졌을 때는 1로 지정한다. 이 두 개의 기호만 사용해도 컴퓨터는 여전히 모든 숫자를 나타낼 수 있다. 10진법 체계에서는 각 자리수가 10의 거듭제곱에 해당하지만, 2진법 체계에서는 각 자릿수가 2의 거듭제곱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화나 그림, 음악, 책 등을 디지털화한다. 따라서 2진법 체계는 주변 세계를 0과 1로 이루어진 숫자 배열로 바꾸었다고 해도 무방하다."(107-9)


제3장 언어의 지름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글을 썼다. 〈언어를 이해하고, 언어를 표현한 문자를 읽는 법을 배우지 않고는 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 우주의 언어는 수학이며 사용된 문자는 삼각형, 원 그리고 다른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이런 것들 없이는 수학적 단어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 어두운 미로 속을 헤매야 한다.〉 갈릴레오는 '물체가 어떻게 땅으로 떨어지는가' 즉, 물체가 땅에 떨어지거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방식에 어떤 규칙이 있는가를 궁금해했다." "갈릴레오가 일정 시간 동안 공이 이동한 총 거리를 조사하자 어떤 패턴이 드러났다. 바로 총 이동 거리가 항상 어떤 수의 거듭제곱이 된다는 사실이다." "즉 t초 후 공이 이동한 총 거리는 t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공식이었다. 이 실험을 통해 중력의 기본 법칙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공식의 발견으로 궁극적으로는 대포에서 발사된 공이 어디쯤 착륙할지, 또 행성들이 어떤 궤적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129-31)


"도형을 숫자로 바꾸는 아이디어는 3차원 우주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탐험하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었던 세계로 통하는 통로를 제공하기도 한다." "4차원 공간에서 정육면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다룬 글은 4차원에 존재하는 지름길을 이용하면 우주선이 우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여행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우주에 벽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왜 유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해결된다. 심지어 3차원에서는 풀 수 없는 매듭도 4차원에서는 풀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지름길은 단순히 우주여행 이상의 일들도 가능하게 만든다. 데이터를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매핑하면 데이터에 숨은 구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데이터를 평면상의 그래프로 나타낸다는 것은 실제로는 더 높은 차원의 공간에 그려져야 하는 어떤 실체의 2차원적 그림자를 본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더 높은 차원에서 그리면 2차원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데이터의 보다 정교한 상세 특징이 잘 드러날 수 있다."(138-9)


"4차원으로 가려면 우선 2차원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사각형을 데카르트의 좌표계를 통해 설명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정사각형은 네 개의 꼭짓점이 좌표상에 점 (0,0) (1,0), (0,1), (1,1)에 위치해 있는 모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마찬가지로 정육면체를 3차원에서의 좌표계로 설명하려면 세 번째 좌표가 필요하게 된다. 정육면체의 여덟 개의 꼭짓점은 좌표상에 (0,0,0), (1,0,0), (0,1,0), (0,0,1), (1,1,0), (1,0,1), (0,1,1), (1,1,1,) 자리에 표시된다." "3차원과 마찬가지로, 4차원 공간에서 어떤 물체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네 번째 좌표를 추가하기만 하면 된다." "4차원 정육면체는 열여섯 개의 꼭짓점이 좌표상에 점 (0,0,0,0)에서 시작하여 (1,0,0,0), (0,1,0,0)··· 그리고 가장 먼 점인 (1,1,1,1)에 위치한 형태가 된다. 여기에서는 모양을 묘사하기 위해 숫자를 코드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5차원, 6차원 또는 그 이상의 차원에서도 하이퍼 정육면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139-40)


제4장 기하학의 지름길


"고대 그리스인들은 밤하늘을 측정할 때도 수학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도구는 망원경이나 정교한 줄자가 아니라 '삼각법'이었다." "삼각법의 창시자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히파르코스는 지구와 달, 태양 사이의 실제 거리를 알아내는 영리한 방법을 발견했다. 그가 이용한 것은 일식과 월식 현상이었다. 특히 기원전 190년 3월 14일에 일어난 일식을 이용했다. 에라토스테네스와 마찬가지로 히파르코스는 지구의 두 지점에서 이루어진 관측 값을 이용했다. 이날 헬레스폰투스에서는 태양이 모두 가려지는 개기일식이 관측되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달이 태양의 5분의 4 정도만 가리는 부분일식이 관측되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경우와 동일하게 히파르코스는 지구에서 측정할 수 있는 값인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두 도시 사이의 거리와 일식 현상을 통해 측정한 각도를 써서 달이 지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삼각법으로 계산할 수 있었다."(169-71)


"많은 사람이 이용하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지름길을 '필요 경로'desire paths라고 부른다." "상업 영역에서도 이런 종류의 지름길을 이용한다. 즉 대중에게 스스로 데이터를 생성하게 하고 기업들은 이 정보를 가공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페이스북, 아마존, 구글 같은 기업들은 대중이 자주 밟고 다니는 디지털 필요 경로를 사람들이 생성한 디지털 데이터로 확인한 다음 그중 잘 다져진 지름길만 골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회사들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트위터의 해시태크 아이디어도 기업 내부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다. 트위터 사용자들이 스스로 트윗을 분류하기 위해 사용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해시태크는 2007년 8월 트위터 사용자로서 처음 그 방법을 제안한 크리스 메시나라는 사람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곧 트위터 직원들은 사용자들이 스스로 낸 지름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2009년 트위터의 공식 기능으로 만들었다."(180-3)


제5장 다이어그램의 지름길


"콜롬비아대학교 전염병학교수 이안 립킨은 수년 동안 유행병 대응책에 관해 정부측에 조언해왔다. 하지만 미 정부에 전염병의 잠재적 위험성을 설명했던 그의 첫 시도는 냉냉한 침묵만이 반응으로 돌아왔다. 아마 70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심층 보고서를 아무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립킨은 다시 매우 압축된 버전의 보고서를 준비해 제출했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결국 전달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립킨은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영화의 이름은 〈컨테이젼〉이었다. 맷 데이먼과 귀네스 펠트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바이러스가 많은 사람을 사망케 하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본 미 정부는 깜짝 놀라 전염병 방지에 필요한 대책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려는 기업들의 경우, 인스타그램 같은 시각 지향적 소셜미디어 앱을 핵심 플랫폼으로 점점 더 많이 선택하고 있다."(206, 202)


"1933년에 나온 해리 벡의 지하철 지도는 지하철역의 지리적 위치는 완전히 무시하고, 단지 철도 네트워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었는가에 집중했다. 당시 런던 시민들이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철 회사가 많은 적자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적자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 런던 사람들이 지하철 노선도를 읽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발견됐다. 당시 지하철 회사에서 제작한 노선도는 지하철역의 위치를 지리적으로 정확히 표시하려고 노력한 지도였다. 그렇다보니 정작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어려운, 비좁게 뒤엉켜 있는 지하철 노선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벡은 지리적 정확성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기존 노선도의 선을 밀거나 당겨서 펴고, 노선끼리는 깨끗한 각도로 교차하게 만들고, 정거장 간격은 일정하게 서로 벌려 놓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런던의 지하철 노선도는 런던을 대표하는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215-6)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죽기 직전인 1543년에 출간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405페이지에 걸쳐 단어, 숫자, 방정식을 사용해 태양이 중심이 되는 자신의 지동설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인 생각, 즉 태양계의 중심에 지구가 아닌 태양이 있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잘 포착해낸 것은 책의 첫머리에 그린 단순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서 보이는 동심원은 행성들의 정확한 궤도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의 궤도가 완전한 원을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원 사이의 거리가 동일한 그림으로 행성들이 태양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혹은 서로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그림은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다'라는 단순하면서도 충격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직 우주에서 지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인식과 관점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218-9)


제6장 미적분의 지름길


"뉴턴은 전염병이 창궐하자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떠나 그의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뉴턴은 정원에 앉아 사과가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동안 통과하는 모든 지점에서 보여주게 될 속도를 계산하는 과제에 도전 중이었다. 속도는 주행 거리를 그 거리만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속도가 일정한 경우에는 계산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중력이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사과가 떨어지는 속도가 매 순간 계속 변한다는 것이었다. 뉴턴이 어떤 값을 측정하더라도 그것은 측정 시간 동안 사과가 나타내는 속도의 '평균'일 뿐이었다. 매 순간 사과의 속도를 계산하려면 측정 간격을 점점 더 잘게 쪼개야만 했다. 찰나의 순간 속도를 정확하게 구하려면 무한히 작은 시간 간격으로 나누어야 한다. 즉 궁극적으로는 0에 해당하는 시간으로 거리를 나누어야 순간 속도를 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0으로 나눌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뉴턴의 미적분학이었다."(246-7)


"뉴턴이 자신을 둘러싸고 변화하는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미적분이 필요했던 반면, 라이프니츠는 더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방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여 최종적으로 미적분학에 도달했다. 논리와 언어에 매료되었던 라이프니츠는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을 포착한다는 아이디어에 끌렸다. 그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매우 합리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믿음이었다. 말하자면 만약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호하지 않은 수학적 언어로 변환할 수 있다면 인간 세상의 모든 갈등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편적 언어를 갖는 그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움직이고 있는 사물을 포착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데카르트가 좌표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기하학을 숫자로 바꾼 것처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은 움직이는 세게에서 찰나의 순간을 명백하게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제공했다."(253-4)


제7장 데이터의 지름길


"영국 유전학자이자 통계전문가 프랜시스 골턴 경이 생각해낸 영리한 지름길은 많은 수의 평범한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골턴의 우생학은 비도덕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이론으로 오늘날 비판받고 있지만 집단지성 이론은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사람들이 제출한 추정값을 모아 통계적으로 분석한 후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비록 추정값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등 많은 사람의 답안이 정답에서 한참 멀었지만, 모든 값의 산술 평균을 취하자 그 결과가 실제 수치에 놀라울 정도로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골턴은 사람들이 제출한 모든 추측값의 중간값median을 추산했고 결과적으로 이 값은 매우 정확했다. 소위 집단지성을 이용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집단지성을 잘 이용하려면 가능한 한 정답에 대한 참가자의 견해를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길로 끌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297-9)


"집단지성이 어떤 질문에는 정답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하고, 다른 어떤 질문에서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는 데 중요한 고려사항은 군중이 모두 독립적으로 대답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집단에 순응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잠재적으로 타인과 다른 독립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파괴한다. 소셜미디어는 군중이 제각각 독립적인 의견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성이 현명한 군중을 만드는 데 있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몇 가지 증거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한 연구팀이 실시한 흥미로운 실험에서는 결과를 집계하기 전에 군중의 구성원들 사이에 약간의 토론을 허용할 경우 완전히 독립적인 군중이 제시한 답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연구의 요점은 어떤 실마리도 잡지 못한 사람들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어떤 문제를 내더라도 집단 내에 몇 명은 있다는 것이다."9301-3)


"올바른 결정을 하는 데 있어 큰 차이를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국민이 예산 결정에 참여한다는 아이디어는 1989년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처음 연구되었다.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 아이슬란드 정부는 예산 수립 과정에 국민을 직접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참여자를 신청받는 방식을 취해서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나섰기 때문이다. 이렇게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이미 내재된 일정한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실험을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실시했을 때에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대신 무작위로 사람들을 선정함으로써 참가자들은 훨씬 더 다양한 의견을 갖게 되었고, 참여형 예산 편성이라는 이상적 아이디어를 훨씬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303-4)


제8장 확률의 지름길


"미래의 사건을 따질 때 확률 이론은 꽤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주사위 두 개를 던질 때 가능한 시나리오 중 두 주사위의 숫자를 합하면 7이 되는 경우는 6분의 1이다. 이 확률은 나나 당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주사위를 던지고 나서 나온 결과를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두 개의 주사위 값을 더한 결과는 7이거나 7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그 사이에 옵션은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당신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여전히 이 사건에서도 확률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주사위를 던진 당신에게는 정보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보는 확률은 나와는 다르다. 내가 보는 확률에는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갑자기 확률이란 것이 절대적인 값에서 우리가 가진 정보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값이 되었다."(348)


"의학 분야에서도 확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지름길이 우리를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 유방암이나 전립선암 검사를 받을 때 암 발견의 정확도가 90퍼센트에 달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상태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면 대부분의 사람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종류의 암에 걸릴 확률은 100분이 1이라는 추가 정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검사를 받은 100명 중 한 명은 아마 진짜 암에 걸린 사람일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검사 결과도 대체로 양성 반응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암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암에 걸린 것으로 검사 결과가 나오는 이른바 거짓 양성 반응이다. 90퍼센트의 검사 정확도가 의미하는 것은 검사를 받는 나머지 99명 중 사실은 건강한 열 명이 잘못된 검사 결과를 통보받게 된다는 뜻이다. 즉 당신이 양성인 것으로 검사 결과를 통보 받았을 때 실제로 암에 걸렸을 확률은 11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351-2)


제9장 네트워크의 지름길


"우리는 당면한 작업을 단순화하고 인지적 부하를 완화하기 위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무시하거나 근사적으로 처리하도록 진화했다. 이를 '휴리스틱 전략'이라고 한다. 인지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이 결정을 내릴 때 정신적 지름길로 사용하는 세 가지 핵심 전략을 확인했다. 먼저 사람들은 결정을 내릴 때 서로 다른 사건 사이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패턴을 이용한다. 이런 패턴을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내가 수학 문제를 풀 때 문제에 접근하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지름길이다. 두 번째 전략은 '앵커링'anchoring과 '조정'adjustment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이해했거나 알고 있는 초기 정보(앵커링)를 다른 상황들에까지 확장시켜(조정) 판단하는 과정이다. 마지막 전략은 '가용성'availability에 대한 경험적 판단이다. 보다 일반적인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국지적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374-5)


"분명히 마지막 두 가지 전략은 편견을 만들기 쉽다. 일반적으로는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좋은 앵커링이나 대표적인 국지적 지식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8세기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일요일 오후 오락거리는 일곱 개의 다리를 단 한 번만 지나되 모두 건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항상 건널 수 없는 다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수 세기에 걸쳐 만들어온 수학적 지름길들은 과제가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실패할 수 있는 경험적 지름길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인간의 휴리스틱은 환경의 변화가 적은 좁은 사바나 지역에서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보편적인 진리를 이해하는 일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은 휴리스틱의 핵심은 오일러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했던 것처럼 다리의 특징, 관련 거리, 도시의 형태 등의 요소가 문제 해결에 무관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 오로지 땅 덩어리가 연결되는 방식만이 유의미함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368, 375)


# 오일러는 하나의 점에 연결된 선의 개수가 한 개이거나 두 개(시작점과 도착점)인 경우에만 그 방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제10장 불가능의 지름길


"모든 문제에 지름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름길을 찾는 예술인 수학은 어떤 문제의 경우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쓰인다. 수학자들이 문제를 푸는 데 지름길이 없다고 믿는 고전 문제 중에 '세일즈맨 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여러 도시의 연결망에서 최단 경로를 찾는 것이 과제다. 이 문제에 붙여진 이름은 1832년에 나온 세일즈맨 출장을 위한 책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책자에 이 문제가 언급되어 있는데 독일과 스위스를 경유하는 것 등 몇 가지 예시가 함께 담겨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확인해보는 것 외에 더 똑똑한 지름길은 지금까지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수학자들을 괴롭혀왔고 이제 대부분이 그러한 지름길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을 하는 과제가 21세기 초에 가장 난해한 미해결 수학 문제로 구성된 7대 밀레니엄 난제 중 하나가 되었다."(400-1)


"나는 이런 문제들을 '건초 더미 속 바늘 찾기' 문제라고 부른다. 건초 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기 위해 들이는 초기의 노력은 바늘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순하고 지루한 탐색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기간일 뿐이다. 하지만 일단 바늘이 손에 닿기만 하면 금방 그것이 바늘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금고 열기와 같다.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모든 조합을 하나씩 시도해보아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맞는 조합을 찾는 순간, 금고문은 바로 열린다.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 문제 혹은 다른 기술적 이름으로는 NP 문제'라고 부르는 이런 문제들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만약 출장 세일즈맨 문제에서 주어진 어떤 지도에서 가장 짧은 경로를 찾는 빠른 다항식 시간 알고리즘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다른 유사한 문제에도 동일한 알고리즘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적어도 지름길을 발견하기 위한 지름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416-7)


도착하기


"지름길을 찾고 싶은 동기가 처음에는 힘든 일을 하며 시간을 쓰는 것이 싫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작 지름길을 찾으려면 애초에 피하고 싶었던 것 이상의 고됨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역설이 등장한다. 아직도 내가 왜 지름길을 찾는 더 어려운 일을 즐기는지는 그 과정에 들이는 노력을 나타낸 곡선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더하는 일에 내가 들이는 노력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꾸준하게 일정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과정에 들어가는 모든 노력은 더할 경우 선형으로 서서히 상승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지름길을 찾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을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훨씬 더 예측하기 어려운 곡선이 된다. 이 그래프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지름길을 발견하기 직전에는 정점을 치고 올라갔다가 지름길을 구하고 나면 갑자기 급강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노력의 그래프는 절대 최소 기준값을 넘지 않는다. 이미 지름길이 효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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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지배당할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크리스 블리클리 지음, 홍석윤 옮김, 황기현 감수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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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알고리즘의 원리


"알고리즘은 명령문들로 쓰여지며, 이 명령들은 대개 하나씩 처리되고 수행된다. 때로는 이전 단계로 되돌아가 거기서부터 다시 명령을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단계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되돌아가면서 몇 그룹의 단계를 되풀이하는 방식은 많은 알고리즘에서 사용되는 강력한 기능이다." "알고리즘을 표시할 때 각 단계는 대개 명확성을 위해 한 줄씩 끊어서 적는다. 그리고 들여쓰기로 서로 관련이 있는 단계들을 구분한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에는 의사결정 단계가 포함돼 있는데, 이때 알고리즘을 수행하는 운영자는 두 가지 가능한 행동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수행할 것인지는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조건이란 참true 또는 거짓false 중 하나를 나타내는 문구다. 가장 일반적인 의사결정 구조인 'if-then-else'에는 하나의 조건과 두 가지 가능한 행동이 결합되어 있다. 조건이 만약if 참이면 'then' 다음에 나오는 행동(들)이 수행되고, 조건이 거짓이면 'else' 다음에 나오는 단계(들)가 수행된다."(9-10)


1 고대 알고리즘


"'YBC 7289'라는 이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은 바빌로니아 수학이 얼마나 놀라운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기원전 1600년부터 1800년경에 이미 그들은 마주 보는 모서리를 2개의 대각선으로 연결한 정사각형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사각형의 변의 길이는 30단위로 표시되어 있고, 대각선의 길이는 2의 제곱근의 30배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값들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피타고라스 정리를 가리킨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르면, 직삼각형에서 사변(가장 긴 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 길이의 제곱의 합과 같다. 그런데 이 점토판은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1,000년 전에 새겨졌다. 그래서 이 발견은 수학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발견이기도 하다." "또한, YBC 7289 점토판에는 2의 제곱근이 (10진법으로 환산했을 때) 1.41421296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데, 오늘날 우리는 2의 제곱근이 (소수점 아홉 번째 자리까지) 1.414213562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30-1)


"바빌로니아 알고리즘에 명시적인 의사결정 단계(if-then-other)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사실 바빌로니아인들은 'If-then' 규칙을 비수학적인 지식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기원전 1754년에 제정된 것으로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시민들이 지켜야 할 282개의 법을 기록한 책인데, 모든 법에 죄의 내용과 그에 따른 처벌이 언급되어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그의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 /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 사람의 눈도 상하게 해야 한다.〉 'If-then' 구조는 의학 지식과 미신 행위를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기원전 650년경 니네베에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언이 발견되었다. 〈도시가 언덕에 세워지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다 / 자신도 모르게 도마뱀을 밟아 죽이면, 적에게 승리할 것이다.〉 비록 의사결정 단계는 없었지만,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다양한 문제를 해결했다."(33-4)


2 끝없이 팽창하는 원들


"원의 기본 특성은 중심에서 둘레까지의 거리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 거리를 반지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름, 즉 원의 너비는 반지름의 2배다. 원주는 원의 둘레 길이다. 원이 클수록 원주와 지름도 커진다. 원주와 지름의 관계는 측정을 통해 알 수 있다. 원의 지름을 잰 다음, 그 길이를 원주와 비교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원주의 길이가 지름의 3배가 조금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측정을 반복해보면, 원의 크기가 어떻든 그 비율이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름에 대한 원주의 정확한 비율로 π라는 문자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인이 아니라 웨일스인 수학자 윌리엄 존스로, 1707년에 쓰기 시작했다. π의 정확한 값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일의 수학자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1728~1777)는 π가 무리수라는 것을 증명했는데, 이는 계산에 무한히 많은 숫자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아무리 계산해도 같은 패턴만 반복될 뿐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구한 최선의 값이 어림수 π다."(46-7)


"π의 근사치를 계산하기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알고리즘은 다음 세 가지 통찰력을 기반으로 한다. 첫째, 정다각형은 원에 근접한 도형이다. 둘째, 다각형의 변은 직선이므로 그 둘레를 계산하기 쉽다. 셋째, 정다각형의 변이 많을수록 원에 가까워진다." "아르키메데스는 알고리즘을 통해 이 값을 개선했다. 알고리즘을 반복할 때마다 다각형의 면 수를 2배씩 늘린 것이다." "아르키메데스 알고리즘의 장점은 계속 다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 실행에서 나온 출력을 다음 반복 때 입력으로 공급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12각형은 변이 24개인 24각형으로, 다시 48각형으로, 96각형으로 바뀔 수 있다. 알고리즘이 반복될 때마다 내부 다각형과 외부 다각형은 각각 원에 근접하면서 더 정확한 π값을 도출한다. 아르키메데스는 96각형에서 계산을 종료하고 223/71과 22/7이라는 π값의 추정치를 구했는데, 전자는 네 자릿수까지 정확하다. 후자는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단순해서 더 인기가 있다."(48-50)


3 컴퓨터의 꿈


"앨런 튜링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연구를 계속하면서 주목할 만한 과학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아이디어를 주장했다. 알고리즘을 공식적으로 정의하고, 범용 컴퓨터가 처리해야 하는 기능을 정의했으며,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어떤 함수는 게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디지털 컴퓨터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 또, 튜링은 오늘날 '튜링 머신'이라고 불리는 가상의 컴퓨터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 컴퓨터는 무한 종이 테이프, 테이프 헤드, 메모리 그리고 기계 작동을 제어하는 일련의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 머신에서는 모든 명령이 전제 조건과 세 가지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제 조건이 충족되면 작업이 수행된다. 전제 조건은 기계의 현재 상태(메모리값)와 현재 테이프 헤드 아래에 있는 기호에 따라 달라진다. 상태와 기호가 전제 조건에서 지정한 값과 일치하면 전제 조건과 관련된 작업이 수행된다."(76-7)


"튜링은 그가 상상한 기계가 어떤 알고리즘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고 보았다. 지금도 인정되고 있는 이 생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알고리즘과 범용 컴퓨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알고리즘은 튜링 머신이 기능을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일련의 단계를 말한다. 범용 컴퓨터는 튜링 머신이 실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동등한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모든 기계를 말한다. 범용 컴퓨터의 기본 특징은 그것이 '튜링 완전Turiong complete'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범용 컴퓨터가 튜링 머신의 방식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물론 종이 테이프 기호는 다른 물리적 기호(전자 전압 수치 등)로 대체되었지만 말이다." "튜링 머신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데이터를 검사하고, 다음에 어떤 작업을 수행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단순한 자동 계산기 이상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기능이다. 이 기능은 컴퓨터에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78-9)


4 일기예보


"스타니스와프 울람은 혼자서 하는 카드 게임인 캔필드 솔리테어를 즐겼다. 캔필드 솔리테어는 52장의 카드를 사용하는데, 카드는 1장씩 돌려지고 게임 규칙과 게임자의 결정에 따라 카드 더미들로 이동된다." "울람은 자신이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승패 여부는 카드가 나뉘는 순서에 달려 있었다. 카드의 순서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셈이다. 그 가능성을 계산하는 한 가지 방법은 가능한 모든 카드 순서를 나열한 후 이길 확률을 백분율로 계산하는 것이었다." "울람은 이 문제를 보다 단순하게 풀 수 없을까 고민했다. 만약 게임을 10번만 했다면? 10번 중 이길 확률을 계산할 수 있다면, 진정한 승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0게임 내내 행운이 올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확률을 왜곡시킬 것이다. 그러나 100게임을 한다면? 100게임 연속 행운이 올 가능성은 적다. 울람은 어느 정도 이상의 게임 결과의 평균을 내면 실제 이길 확률에 대한 합리적인 추정치를 얻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103-4)


"1,000게임을 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울람은 컴퓨터로 그 정도로 많은 게임을 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컴퓨터가 무작위로 카드를 돌리고, 자신이 실제로 하는 것처럼 게임을 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반복해 게임 횟수가 충분해지면, 이길 확률은 가능한 모든 게임을 한 것만큼 신뢰할 수 있는 추정치가 될 것이다." "울람은 이 알고리즘을 단순히 카드 게임에서 이길 확률을 구하는 일 이상의 문제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성자 확산 문제에서 중성자 궤적과 차폐 원자 위치는 난수로 나타낼 수 있다. 각 궤적과 차폐 구성에 대한 침투 거리도 계산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많은 수의 무작위 시험을 하고 그 평균을 내면, 실제 중성자 침투 거리의 추정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험 결과는 겸손하고 절제된 표현을 빌리더라도 〈썩 괜찮았다.〉 로스앨러모스의 동료들은 이 새로운 알고리즘에 '몬테카를로 방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05-7)


"1961년, 에드워드 로렌즈는 작은 컴퓨터로 날씨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그런데 늘 일상적인 결과가 나오던 실험에서 그날 따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컴퓨터와 프로그램은 모두 문제가 없었다. 로렌즈는 이런 불일치가 시뮬레이션 초기에 입력한 숫자의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실행에서 로렌즈는 대기 상태를 여섯 자리 숫자로 입력했지만, 두 번째 실행에서는 세 자리 숫자만 입력했다. 여섯 자리 숫자와 가장 가까운 세 자리 근삿값의 차이는 매우 작았다. 그는 입력시 차이가 작으면 출력에서도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작은 차이가 계산을 거듭하면서 크게 벌어졌고, 결국 출력 시점에서 큰 불일치로 나타난 것이다." "이 우연한 발견에서 새로운 과학이 출현했다. 로렌즈의 카오스 이론은 실세계의 많은 물리 체계가 초기 조건에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초기 조건에 작은 차이만 있어도, 결괏값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111-2)


"기존의 기상예보 시뮬레이션은 현재 기상 상태를 측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칸별, 시간 단계별로 날씨의 변화를 계산한다. 여기에서 에드워드 엡스타인의 통찰력이 발휘됐다. 울람의 몬테카를로 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엡스타인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시뮬레시션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각 시뮬레이션은 무작위로 교란된 초기 조건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초기 조건은 관찰된 대기 상태에 작은 변화나 교란을 가함으로써 생성된다. 측정의 한계를 감안했을 때, 예측자들은 어느 칸의 현재 기상 상태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시도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이 끝난 후에는 각 시뮬레이션 결과의 평균을 내서 단일화된 최종 예측을 얻는다. 이때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고려하면 중간값이 가장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다. 이를 몬테카를로 앙상블 방법이라고 부른다(이 알고리즘의 단점은 너무 많은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12-3)


5 인공지능의 등장


"크리스토퍼 스트레이치의 알고리즘은 숫자를 사용해 체커 게임판에 있는 말들의 위치를 기록한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되면 말을 둘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수手를 검사한다(평균 10가지)." "알고리즘은 가능한 모든 다음 수에 대한 상대방의 잠재적 반응을 평가한다. 이런 예측 기능은 향후 3회차의 수까지 내다볼 수 있고, 예측 결과는 나뭇가지 모양(트리)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게임판에 있는 모든 말의 위치는 트리의 교점(또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그 위치에서 가능한 모든 수에서 다음 위치로 이어지는 분기점이 생성된다. 앞 수를 더 많이 내다볼수록, 트리의 층이 많아진다. 알고리즘은 예측의 맨 끝에 있는 각 교점의 상황별로 게임자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말의 수를 계산한다. 그 후 예측의 맨 끝 교점에서 가장 큰 수數(가장 유리한 手)로 이어지는 수를 트리의 뿌리(현재 위치)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스트레이치의 시도는 컴퓨터가 계산만 하는 기계라는 통념을 깨트렸고, 여기서 인공지능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122-4)


"아서 새뮤얼의 알고리즘은 영리한 평가 알고리즘scoring algorithm을 사용했다. 그래서 스트레이치의 알고리즘보다 말이 이동할 자리를 판단하는 데 훨씬 더 치밀했다. 또한 다양한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기능별로 포인트가 제공되었는데, 그 기능들은 게임판 위치의 강점이나 약점을 나타냈다. 두 게임자가 보유하고 있는 말 개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기능도 있었고, 킹 말이 몇 개인지도 알 수 있었다. 또 각 말이 놓인 위치의 상대성(중요도)도 평가할 수 있고, 게임판의 중앙을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제어하는 등의 전략적 요소를 인식하는 중요한 기능도 있었다. 프로그램은 이런 모든 기능에 점수를 매겼으며, 특정 기능에는 가중치를 곱한 점수가 주어졌다. 결괏값은 모두 합산되어 특정 위치에 대한 전체 점수로 제시되었다. 가중치가 크다는 것은 하나의 기능이 총 점수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낮은 가중치를 가진 여러 기능이 합쳐져 전체 점수와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137)


"하지만 각 가중치에 대한 최상의 값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새뮤얼은 최적의 가중치를 결정하기 위해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설계했다. 알고리즘이 가중치를 추정한다. 그러면 컴퓨터가 자기 자신을 상대로 수많은 게임을 한다." "어느 한쪽이 이기면 승부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기능의 가중치 점수가 조금씩 커진다. 반대로 패배의 원인을 제공한 기능의 가중치 점수는 줄어든다. 이 과정을 통해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행동이 강화된다." "가중치를 수동으로 선택하지 않고 이 알고리즘을 사용할 때의 장점은 두 가지다. 컴퓨터는 게임을 할 때마다 그 게임이 가중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것과,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게임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점들 덕분에 컴퓨터는 아주 많은 양의 정보를 학습 과정에 이용할 수 있다." "가중치 숫자 몇 개를 변경하는 것은 아주 쉬운 작업이어서 알고리즘이 혼자서 수행할 수 있다. 이런 창의적인 개념이 학습의 자동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138-9)


6 모래에서 바늘 찾기


"영업사원 문제는 1800년대의 문헌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베를린이 영업 사원의 거점 도시고, 그가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뮌헨을 방문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가장 짧은 이동 거리를 찾는 제일 간단한 방법은 모든 이동 거리를 일일이 탐색하는 것이다. 이런 완전 또는 무차별 억지 탐색은 이동 가능한 모든 경로를 계산해 그중 가장 짧은 거리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무차별적 탐색은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만약 거쳐야 할 도시가 100개라면 어떨까? 완전히 연결된 100개의 도시를 여행하는 경로의 수는 99!인데, 대략 9×10,155다(9에 0이 155개나 이어지는 숫자다)." "탐색 속도를 크게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절충을 인정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가능한 최단 경로를 찾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절충과 근사 알고리즘을 항상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최단 경로를 찾아야 하니 말이다."(147, 151-2)


"에츠허르 데이크스트라는 무차별 억지 탐색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1952년에 세계에서 가장 흔히 발생하는 조합 최적화 문제를 해결하는 빠른 알고리즘을 고안해냈다." "데이크스트라의 알고리즘은 보드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고리즘은 지도를 가로질러 토큰을 이동시키면서 이동 경로와 출발지에서부터의 누적 거리를 각 도시에 주석으로 달아놓는다." "어느 도시에 붙은 주석이 이 계산값보다 작으면 그 주석은 변경하지 않고, 계산값이 주석보다 작으면 그 주석을 계산값으로 교체한다. 이때 새로 계산된 거리와 그 경로도 기록된다." "직접 연결된 모든 도시에 대해 이 단계가 완료되면, 토큰은 주석을 기준으로 아직 방문하지 않은 가장 가까운 거리의 도시로 이동한다. 토큰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최단 경로 찾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언제나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나서야 할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160-3, 166)


"존 홀랜드는 인공 진화가 조합 최적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집단 내 개체처럼 가능한 솔루션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전 현상에 착안해 모든 솔루션을 일련의 문자로 표현할 것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영업 사원 문제를 풀 때 모든 도시의 첫 알파벳을 따 여행을 BFHM으로 표시하는 식이다. 그는 이 순서가 살아 있는 유기체의 염색체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홀랜드의 유전자 알고리즘은 이 같은 인공 염색체 풀에서 작동한다. 선택은 모든 인공 염색체를 평가하고 그중 최악의 염색체를 폐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유전은 문자 순서를 혼합하는 것으로 다음 세대의 염색체를 만드는 방식을 모방한다. 돌연변이는 몇몇 염색체의 문자를 무작위로 바꿈으로써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을 복제한다. 그리고 전체 집단 내에서 쓸 만한 솔루션이 발견될 때까지, 다음 세대의 염색체를 생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계속적인 선택을 통해 보다 나은 솔루션을 찾는 것이다."(176)


7 인터넷


"아르파넷은 패킷 교환packet-switching 방식을 채택한 최초의 네트워크 중 하나였다. 이 기술은 폴 배런과 도널드 데이비스가 발명했다." "패킷 교환은 〈어떻게 하면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송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했다. 전자 신호를 전달하는 케이블로 9대의 컴퓨터가 물리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인프라 비용을 줄이기 위해 모든 컴퓨터는 몇몇 다른 컴퓨터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직접 연결된 컴퓨터들은 실제로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이웃'이라고 부른다. 컴퓨터가 이웃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간단하다. 메시지는 일련의 전자 파동으로 부호화되어 케이블을 통해 받는 컴퓨터로 전송된다. 반면 네트워크 반대편에 있는 컴퓨터로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좀 복잡하다. 그 중간에 있는 컴퓨터가 메시지를 중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트워크 전체에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네트워크상의 컴퓨터들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186-7)


"패킷 교환에서는 단일 메시지가 여러 개의 세그먼트로 분할되고, 각 세그먼트는 하나의 패킷에 배치된다. 패킷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독립적으로 전송되고, 모든 패킷이 목적지에 수신되면 세그먼트들이 합쳐져 원본 메시지가 다시 조립된다. 네트워크는 계속 바운드하면서 발신지에서 목적지로 패킷을 전송한다. 즉, 바운드할 때마다 패킷이 두 컴퓨터 사이에서 한 차례 연결되면서 전송되는 것이다. 이때 패킷은 1번당 하나의 링크만을 차단하기 때문에, 다른 메시지의 패킷들도 한 링크에 차례대로 삽입될 수 있다. 회로 교환 방식처럼 종단 간 연결선 전체를 점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패킷 교환 데이터 네트워크는 도로망과 유사하다. 패킷들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자동차들과 같다. 자동차들은 전체 경로를 미리 점유하지 않고, 도로가 비어 있을 때 그냥 끼어들기만 하면 된다. 또, 이 자동차들은 목적지로 가는 다른 길들을 택할 수도 있다. 각각의 차는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이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갈 뿐이다."(188-9)


"패킷 교환은 분산 알고리즘의 한 사례다. 패킷 교환 시스템의 필수 구성 요소는 경로 표를 덧붙이기 위해 사용되는 알고리즘이다. 모든 컴퓨터는 경로 표뿐만 아니라 지연 표도 기록한다. 지연 표에는 네트워크의 모든 컴퓨터 ID와 컴퓨터별로 해당 시점부터 패킷을 전송하는 데 걸릴 예상 시간이 기록된다. 모든 컴퓨터는 모든 이웃에게 주기적으로 지연 표를 보내는데, 수신 컴퓨터는 이웃의 지연 표를 받으면 그 표에 자신의 다른 이웃에게 패킷을 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더한다. 이런 식으로 업데이트된 표에는 모든 컴퓨터의 ID 목록과 이웃을 통해 패킷을 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담기고, 컴퓨터는 이 시간을 경로 표에 적혀 있는 시간과 비교한다. 새 경로가 더 빠르면, 시간이 업데이트된다." "패킷 교환 네트워크의 이점 중 하나는 웬만해서는 고장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점은 패킷 전송 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패킷 교환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190-2)


"기존 암호화 알고리즘은 대칭 키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암호화와 암호 해독에 같은 키가 사용된다는 의미다. 대칭 암호화의 단점은 항상 키에 대한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키 배포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공개 키 암호화는 암호화와 해독에 각기 다른 두 가지 비대칭 키를 사용한다. 이때, 두 키가 쌍을 이루려면 두 가지 요구사항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두 키는 암호화와 해독이라는 서로의 쌍으로서 성공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즉, 한 키로 암호화를 하면, 다른 키로 해독을 하고 원래 메시지를 복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암호화 키 쪽에서 해독 키를 알 수 없어야 한다. 암호화 키 쪽에서 해독 키를 알 수 없다면, 암호화 키를 공개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독 키만 비밀로 유지하면 되니 말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공개 암호화 키를 사용해 개인 키 홀더로 비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해독 키를 가진 수신자만 메시지를 해독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212-3)


"암호화 키에서 암호 해독 키를 알아낼 수 없게 하려면 그 비대칭 키를 생성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출력으로부터 입력을 쉽게 추론할 수 없는 연산인 일방 함수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 출력이 공개 암호화 키의 기초가 될 수 있고, 입력은 개인 해독 키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계산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일방 함수가 구현된 RSA 알고리즘은 인터넷상에서의 암호화의 초석으로 불리고 있다." "오늘날 공개 키 암호는 월드 와이드 웹의 보안소켓계층SLL에 내장되어 있다. 웹사이트 주소 앞에 'https:'가 있으면 컴퓨터가 SLL을 사용하고 있고, RSA 알고리즘이 원격 서버와 통신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집계에 따르면, 웹사이트 트래픽의 70퍼센트가 SLL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은 최신 슈퍼컴퓨터에 의해 암호문이 뚫리는 것을 막기 위해 키의 길이를 더 늘려야만 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키는 2,048비트(617자리) 이상이다."(214-5, 219)


8 구글 검색


"1995년 7월 16일 탄생한 amazon.com의 신입 사원이었던 그레그 린덴은 아마존이 더 많은 책을 팔 수 있도록 제품 추천 시스템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린덴의 알고리즘은 간단한 직관을 기반으로 한다. 짝을 이루는 제품들이 대개 함께 구매되는 경향이 있다면, 한 제품을 이미 갖고 있는 고객이 나머지 하나도 구매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 물건은 원래 쌍으로 구매해야 하는 제품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고객들이 대개 두 물건을 모두 구입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같은 저자나 같은 장르의 책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은 주에서 주관하는 시험 문제집일 수도 있다. 린덴의 알고리즘은 개인이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구매한 모든 내역을 기록한다. 구매자가 결제를 할 때, 알고리즘은 고객은 고유 ID와 구매한 책 제목을 모두 기록에 남긴다. 그리고 나중에 그 고객이 다시 찾아오면 그 고객이 이전에 구입한 목록을 다시 불러내, 그 목록과 새로 나온 책들을 쌍으로 구성한다."(231-2)


"래리 페이지는 웹 검색 문제에 꽂혀 있었다. 당시의 웹사이트 디렉토리는 편리하지 않았다. 먼저 범주를 찾고, 주제, 하부 주제를 알파벳순에 따라 드릴다운하는 작업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는 그보다는 직접 조회 방식queries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찾고 있는 것을 직접 입력하면, 가장 관련성이 높은 링크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학술 연구 논문은 일반적으로 다른 출판물에서 참조 및 인용된 횟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 페이지는 인터넷의 하이퍼링크가 이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이퍼링크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링크 페이지가 어떤 면에서 중요하거나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링크 페이지에 연결되는 링크 수를 세는 것이 해당 페이지의 중요도를 평가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래리 페이지는 웹 페이지의 중요도에 순위를 매기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 알고리즘에 페이지랭크PageRank라는 이름을 붙였다."(237-8)


# 드릴다운drill down : 더 많은 정보를 찾기 위해 관련 텍스트나 아이콘 등을 클릭하여 마치 뚫고 들어가듯이 검색하는 것


"페이지랭크는 무작위로 링크를 선택하는 웹 사용자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특정 페이지에 도착할 확률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어느 페이지에 대한 링크 수가 많아지면, 사용자가 그 페이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링크 페이지에 대한 하이퍼링크가 많아진다는 것 또한 사용자가 해당 페이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깔때기 효과'는 그 체인에 있는 다른 링크들에도 적용된다." "페이지랭크 점수를 계산하는 알고리즘은 반복적이다. 맨 처음 페이지랭크 점수는 어느 특정 페이지에 직접 수신되는 링크 수를 수신 링크의 평균값으로 나눈 숫자다. 다음에는 수신 페이지의 페이지랭크 점수 가중치의 합에 댐핑 합을 더한 숫자로 재계산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세트의 페이지랭크가 생성되고, 이 값을 사용해 페이지랭크 점수가 다시 계산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페이지랭크는 점점 안정된 값에 근접하고, 페이지랭크 점수가 변하지 않으면 반복은 중단된다."(239-40)


9 페이스북과 친구들


"초기에는 페이스북에서 새로운 게시물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 사용자의 프로필 페이지에 가서 업데이트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프로필 페이지를 확인하는 일은 시간 낭비였다. 게다가 특별히 볼 만한 새로운 게시물도 많지 않았다. 저커버그는 등록한 친구들이 최근 게시물을 올렸는지 요약해주는 페이지가 있다면, 사용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페이스북 뉴스피드News Feed 알고리즘이 탄생했다." "2006년 9월 5일, 페이스북은 뉴스피드를 본격적으로 반영했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만장일치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스토커 같다고 생각했다. 페이스북에는 뉴스피드를 반대하는 그룹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학생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바로 그 기능을 사용해 뉴스피드 반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저커버그에게는 그것이 뉴스피드가 효과가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사용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페이스북에서 보내고 있었다."(251-2)


"뉴스피드 알고리즘은 구글의 페이지랭크 알고리즘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페이스북에서의 모든 행동은 '에지edge'라고 부른다." "선호도는 에지에 대한 사용자의 연결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다. 즉, 사용자가 그 에지를 만든 사람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나타낸다. 페이스북상의 '친구'는 친구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가깝게 여겨진다. 겹치는 친구가 많을수록 호감도도 커진다. 사용자들 간의 상호 작용 수도 선호도 점수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두 사용자가 서로의 게시물에 자주 댓글을 다는 경우, 서로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다. 반대로 사용자들이 상호 작용을 멈춘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선호도는 낮아진다. 가중치는 에지의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 생성에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에지는 더 높은 가중치 값을 갖는다. 댓글은 단순한 '좋아요'보다 가중치가 더 높다.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에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지랭크 점수가 감소한다. 이 규칙에 따라 알고리즘은 최신 게시물을 우선시한다."(252-3)


"넷플릭스는 공개경쟁 방식으로 새로운 알고리즘을 얻는다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 넷플릭스의 추천 알고리즘인 시네매치보다 10퍼센트 더 정확하게 추천을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공모하며 100만 달러의 상금을 건 것이다. 넷플릭스는 경쟁에 불을 붙이기 위해 약 50만 명의 고객이 1만 8,000여 편의 영화에 대해 평점을 매긴 1억 개에 달하는 훈련용 데이터 세트를 제공했다. 모든 데이터는 영화 제목, 사용자(고객) 이름, 별점(별 1~5개), 평가 기록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며칠 후, 넷플릭스는 280만 개의 한정qualifying 데이터 세트를 추가로 배포했다. 별점을 숨겼다는 점을 제외하면, 첫 번째 데이터 세트와 비슷했다." "공모의 목표는 한정 데이터 세트에서 삭제된 평점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추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넷플릭스는 공모 참가자들이 제출한 추정치와 실제 평점을 비교했다. 공모 참가자의 추정치는 예측 오차, 즉 공모 참가자의 예측치와 실제 평점의 평균 차이를 측정해 평가되었다."(255-6)


"대부분의 공모 시스템에서 예측의 세부 사항은 수치값에 의해 제어되었고, 이 수치값, 즉 매개변수들은 예측 결과가 개선되도록 조정되었다. 예를 들어, 가중치 매개변수는 각 요소의 상대적 중요도를 조정하기 위해 수정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요소들이 식별되면, 정확한 평점 예측은 최적의 매개변숫값을 찾을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최적의 매개변숫값을 결정하기 위해 공모 참여자들은 머신러닝 기법을 사용했다. 먼저 검증을 위해 훈련용 데이터의 일부를 따로 떼어놓은 다음, 매개변숫값을 추측한다. 그다음, 검증 데이터 세트의 평점 예측값을 구하기 위해 예측 알고리즘을 실행하고, 이 추정치에 대한 예측 오차를 측정한다. 그리고 예측 오차를 줄이기 위해 매개변수를 살짝 조정한다. 이 예측, 평가, 매개변수 조정 단계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매개변숫값과 예측 오차 사이의 관계를 모니터링한다. 이를 바탕으로 매개변수는 계속 조정되고, 오차가 더 줄어들지 않으면 훈련이 종료되어 매개변수값이 확정된다."(259-60)


10 미국의 유명 퀴즈 쇼


"왓슨은 2011년 2월, 〈제퍼디 쇼!〉에서 우승한 IBM의 인공지능 컴퓨터이다. 왓슨의 소프트웨어는 수백 개의 협력 알고리즘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우선, 구문 분석 알고리즘이 사회자가 제시하는 단서를 구성 문법 요소로 분석해, 단서에 있는 모든 단어가 어법의 어느 부분에 속하는지 판단한다. 이 작업은 사전의 모든 단어를 찾아봄으로써 이루어진다." "단어 간의 명확한 관계를 찾은 다음, 왓슨은 그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연관성을 찾아낸다. 백과사전에서 원래 용어의 의미를 찾고 유의어를 검색한다. 이 과정에서 단서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은 통찰력을 얻는다." "관계가 추출되면 왓슨은 단서의 요소들을 식별하는데, 이때 구문 분석 결과물에 적용된 if-then-else 규칙을 사용한다. 여기서 단서의 초점, 답안 유형, 질문 분류라는 세 가지 주요 요소가 식별된다. 단서의 초점은 게임 참가자들의 답을 유도하는 항목이다. 답안 유형은 단서의 초점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고, 질문 분류는 단서가 속해 있는 카테고리다."(275-6)


"단서 분석이 완료되면 왓슨은 데이터베이스에서 답을 검색한다. 이때, 수없이 많은 검색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메모리뱅크에 저장된 정형 및 비정형 데이터에 접속한다. 정형 데이터는 잘 정리된 표에 보관된 정보를 일컫는다. 이런 데이터는 흥밋거리 정보 조회에 매우 유용하다." "비정형 데이터는 어떤 형식에 의해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정보를 지칭하는 용어다. 이 데이터에는 신문 기사나 책 같은 텍스트 문서 형태의 정보들이 담겨 있다. 그 양은 엄청나게 많지만, 컴퓨터가 해석하기에는 어렵다." "왓슨은 자신이 정확한 결과를 도출했기를 바라면서 이러한 일련의 검색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왓슨은 검색 결과로 도출된 여러 정답 후보가 단서의 요건을 얼마나 잘 충족하는지 계산해 평가한다. 답과 단서의 모든 측면을 비교해서 점수를 매기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답을 최상의 솔루션으로 선택한다. 그 점수를 일정한 임계값과 비교해 점수가 임계값을 넘으면, 질문(퀴즈의 정답)으로 바꿔 벨을 누른다."(277-8)


11 인간의 뇌를 흉내 내다


"패턴 인식 시스템의 개발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첫 번째 단계는 이미지를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숫자 배열로 변환하는 것이다. 디지털카메라의 렌즈가 전자 센서 그리드에 빛을 비추면, 각 센서가 조도를 0~1 범위의 숫자로 변환한다. 회색 톤 이미지의 경우, 0에는 검은색, 1에는 흰색, 회색 음영에는 중간값이 부여된다. 모든 숫자는 이미지상의 점 또는 픽셀(그림 요소)에 해당된다. 숫자 배열은 이미지의 디지털 근사치다." "진짜 어려움은 실제 이미지의 가변성에서 발생한다. 각각의 상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작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또, 새로운 규칙은 이전의 모든 규칙과 상호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규칙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알고리즘 개발은 중단되고 만다. 그러자, 컴퓨터과학자들은 수백만 개의 규칙을 만드는 대신 다른 접근 방법을 선택했다. 그들의 논점은 간단했다. 세계 최고의 패턴 인식 엔진이 인간의 뇌라면, 그냥 인간의 뇌를 복제하면 되지 않겠는가?"(282-3)


"세계 최초의 인공신경망ANN은 1954년 벨몬트 팔리와 웨슬리 클라크에 의해 구축되었다. 두 사람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점화하는 뉴런의 시뮬레이션을 구성했다. 그들은 숫자를 사용해 뉴런의 상태를 표시하고 입력과 출력의 민감도를 추적했다. 뉴런 네트워크는 간단한 2진수의 이미지를 인식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 "ANN 설계의 난제 가운데, 첫 번째는 적합한 위상수학topology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네트워크에 있는 뉴런들이 어떻게 배열되느냐의 문제다. 위상수학은 층의 수, 각 층의 뉴런 양, 뉴런의 상호 연결 등을 결정하는데, 어느 위상수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네트워크가 처리할 수 있는 작업의 복잡성에 영향을 준다. 일반적으로 보다 복잡한 패턴 인식 작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뉴런과 층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네트워크 매개변수 값을 결정하는 것이다. 매개변수는 네트워크의 동작을 제어하기 때문에, 네트워크가 입력을 올바르게 분류하려면 매개변숫값이 정확해야 한다."(288, 293-4)


# 위상수학topology : 공간 속 물체가 가진 점, 선, 면 등의 특성을 토대로 위치와 형상을 탐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


"딥러닝 열풍은 음성 인식, 이미지 인식, 차세대 자연어 처리라는 세 가지 파동을 일으켰다. 2012년, 구글의 제프리 힌턴 팀은 정지 이미지에서 실제 사물을 인식하도록 설계된 심층신경망에 대해 보고했다. 그들이 적용한 사물은 고양이, 개, 사람, 자동차, 식물 등과 같은 일상 사물들이었다. 문제는 사물 인식이 단순히 숫자를 인식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이었다. 숫자는 선으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모양, 색상, 촉감, 윤곽을 전체적으로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렉스 크리제프스키의 이름을 따서 알렉스넷AlexNet이라고 명명된 이 네트워크에는 65만 개의 뉴런과 6,000만 개의 매개변수가 포함되어 있다." "연구 팀은 훈련 중에 몇 개의 뉴런을 임의로 선택해 점화를 막는 기술도 도입했다. 이 기술을 '드롭 아웃'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네트워크가 의사결정 부하를 더 많은 뉴런에 강제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이는 입력 변화에 대해 네트워크를 보다 견고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310-1)


12 인간을 넘어서는 지능


"2016년, 이세돌과 대국을 벌인 알파고는 총 3개의 신경망을 사용한다. 첫 번째 ANN은 가치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트리 검색의 끝에 있는 위치에 점수를 매겨 특정 위치에서 이길 확률을 추정한다. 두 번째 ANN은 정책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모든 위치에 대해 얼마나 유망한지에 따라 점수를 매겨 트리 검색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어떤 위치가 앞으로의 승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면 높은 정책 점수가 주어진다." "세 번째 ANN은 SL(통제학습)-가치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점수를 매기도록 훈련되었다. 앞 두 가지 네트워크가 실제로 이길 가능성을 제1목표로 여긴다면, SL-가치 네트워크는 컴퓨터가 인간이 결정할 가능성이 가장 큰 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알파고는 먼저 SL-가치 네트워크를 통제 학습 방식을 사용해 훈련하고, SL-가치 네트워크를 개선해 정책 네트워크를 만든 후에, 다시 정책 네트워크를 사용해 가치 네트워크의 기능을 개선했다."(324-5)


"이후 딥마인드는 알파고 제로라는 새로운 신경망 프로그램에 관한 논문을 『네이처』에 게재했다. 알파고 제로는 축소된 트리 검색과 하나의 신경망만을 사용했다. 이 단일 쌍두 네트워크가 이전 버전인 알파고의 정책 네트워크와 가치 네트워크를 대채한 것이다. 알파고 제로는 오직 강화 학습에만 기반을 둔 새롭고 효율적인 훈련 절차를 사용했다. 인간이 두는 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도 필요 없었다. 알파고 제로가 바둑 두는 법을 처음부터 스스로 터득하는 데에는 불과 4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40일 동안 알파고 제로는 2,900만 회의 게임을 소화했다. 한 수를 두는 데 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세돌과 커제를 꺾은 이전 버전 알파고와 벌인 대결에서도 100 대 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알파고 제로의 소프트웨어에 내장된 알고리즘은 다른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기능을 통해 ANN은 새로운 작업을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331-2)


13 다음 단계는?


"비트코인은 RSA 공개 키 암호화에 의존해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하고 트랜잭션 인증을 제공한다. RSA 알고리즘의 보안성은 큰 숫자의 소인수분해를 빠르게 수행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없다는 가정에 달려 있다. 즉, 특정 큰 수를 생성하기 위해 어떤 소수 2개가 곱해졌는지 빠르게 판단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21의 소인수는 3과 7이지만, 21이 작은 숫자라 빠르게 답을 계산할 수 있을 뿐이다. 큰 소수의 소인수분해는 슈퍼컴퓨터로도 수십 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 비트코인과 인터넷 보안의 전반적 구조는 이 한 가지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만일 소인수분해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개발된다면, 비트코인과 인터넷상의 거의 모든 비밀 메시지는 갑자기 공격에 취약해질 것이다. 1994년에 바로 그런 알고리즘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의 조짐이 처음 나타났다. 다행인 점은, 그런 기적 같은 알고리즘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유형의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바로 양자컴퓨터이다."(346)


"양자컴퓨터는 아원자 또는 양자 입자의 특성을 사용해 정보를 나타낸다. 하위 입자의 다양한 물리적 특성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양자 세계에서는 입자들이 동시에 여러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중첩의 원리principle of superposition에 잘 요약되어 있다." "데이터 표시에 이런 특성을 활용하면 하나의 전자가 0과 1을 동시에 표시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의 기본 정보 단위인 양자 비트, 즉 '큐비트'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큐비트가 추가되면 양자컴퓨터는 기하급수적으로 강력해진다. 하나의 큐비트는 0과 1이라는 두 값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큐비트 2개를 사용하면 00, 01, 10, 11의 값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고, 10개의 큐비트 시스템은 0부터 1,023까지의 모든 10진수값을 동시에 캡처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가 하나의 연산을 수행하면, 그 연산이 동시에 모든 상태에 적용된다." "바로 이런 효과 때문에 양자컴퓨터가 계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빨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3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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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지배 사회 - 정치·경제·문화를 움직이는 이기적 유전자, 그에 반항하는 인간
최정균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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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타적 동기의 발로에는 의식이 관여하므로 이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이기적 동기와 달리 우리의 뇌리에 남는다. 그리고 마음 이론을 통해 우리는 타인들의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에 대해 분명히 이타적인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단 좋게 보이는 행동에 대해 순수한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인데, 이는 그만큼 본인의 마음속에 있는 이타성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이 낭만주의적 환상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매우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자연적, 생물학적 개체로서 우리 인간이 지닌 본연의 이기성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만으로 인간의 문화와 그 안에서 인간이 체득하고 드러내는 이타적인 모습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고, 모든 것이 유전자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인 유전자로 인해 발생하는 이기적인 행위까지 부정하거나 간과할 수는 없다."(14-5)


1장 가정: 사랑이라는 자기 기만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유전학에 대한 지식이 없던 당시에는 그 이론만으로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행위를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1964년에 발표된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 이론은 이 문제를 유전학과 수학으로 풀어낸 것이었다. '포괄 적합도'란 개체 자신의 적합도뿐 아니라 그 개체가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들의 적합도를 그 유전학적 근친도만큼의 비율로 포함해 합한 것을 말한다. 즉, 자기 자신을 1이라고 할 때 자식이나 형제들의 경우 각각 2분의 1로 계산한 적합도의 총합이 포괄 적합도이며, 모든 개체는 이렇게 계산되는 양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다. 전설적인 진화생물학자 존 홀데인이 〈형제 1명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지만 2명 이상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고, 사촌이면 8명 이상이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를 수학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26-7)


"그런데 해밀턴의 이론을 조금 더 주의해 살펴보면, 엄밀하게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유성생식은 유전학적으로 다른 남녀가 만나 이루어지므로,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도는 0.5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모-자식 갈등은 자식이 태어나기 전부터 표출된다. 임신 중의 태아는 산모로부터 최대한의 영양분을 받으려고 한다. 태아도 당연히 포도당을 필요로 하는데, 이때 태아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포도당을 빼앗아 오기 위해 어머니의 인슐리 작용을 방해하는 물질을 분비한다. 흥미롭게도, 인슐린과 닮은 형태의 'IGF2'라고 불리는 이 단백질은 '유전체 각인'이라는 기작에 의해 오직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에서만 만들어진다." "산모는 이에 대항해 인슐린을 더 많이 분비해 자신의 세포들로 포도당을 유입시키려고 하고, 태아는 IGF2와 같은 물질을 더 분비해 어머니의 인슐린을 방해하려는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바로 임신성 당뇨다."(29-30)


"우리 몸을 구성하는 체세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온 유전자를 한 쌍씩 가지고 있지만, 정자나 난자와 같은 생식세포를 만들 때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수정이 이루어졌을 때 한 쌍이라는 정상적인 개수를 유지할 수 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난다." "이것이 엄청난 진화적 이점인 이유는 이를 통해 여러 상황 속에서 하나의 후손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MHC는 우리 몸에 침투한 병원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항원들과 결합해 그것들을 면역세포들에게 제시함으로써,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람은 저마다 다른 MHC 변이를 가지고 있다. 그 변이의 형태에 따라 보다 잘 결합할 수 있는 항원의 종류, 즉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병원균의 종류가 다른 것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MHC라는 유전자의 변이에 따라 짝짓기 상대나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겠지만, 이는 MHC가 페로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35-7)


# MHC : 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한편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된 실험에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이 발견되었는데, 상대의 MHC로부터 근친도를 판별할 때 자신이 가진 MHC 가운데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변이를 기준으로 알아낸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자신과 살고 있는 어머니가 일반적으로 자신을 실제로 낳아준 생물학적 어머니일 테니, 어머니의 그 익숙한 체취가 감지되면 상대가 근친임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의 경우에는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자신의 유전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이 적다. 유전학적으로 더 우수한 수컷의 아기를 낳아 양육에 더 헌신적인 수컷으로 하여금 키우도록 하는 것은 사람을 비롯한 많은 동물 암컷들이 가지고 있는 번식 전략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아버지의 경우에는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의 체취에 대한 후각적 기준 대신 유전학적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MHC 유전자를 기준으로 상대가 근친관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아주 냉정하고 교묘한 진화적 계산이다."(38)


"유전자는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나 페로몬과 같은 화학물질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짝짓기를 하도록 충동할 뿐 아니라, 심지어 유전적 조성에 따라 상대를 선별적으로 선택하게끔 유도한다. 다시 말해, 진화적 관점에서 결혼이란 자기 유전자의 50퍼센트를 후손에게 남기고 최대한 잘 살아남게 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상대와 맺는, 욕망에 이끌린 거래다. 자연선택의 관심 대상은 유전자의 성공적인 번식이지 개체의 행복한 삶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짝짓기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비극은 유전자적 관점에서 한쪽에게 이익이 되는 전략이 다른 한쪽의 이익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자식이 생존하는 데 부모 중 어느 한쪽의 기여가 필수적이라면, 아비와 어미 중 누가 먼저 양육의 책임을 저버리고 더 많은 자손을 만들고자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설지를 두고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많은 종의 경우에는 수컷이 아예 떠나버리거나 최소한의 투자로 여러 살림을 꾸린다."(40-1)


"그러나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떠안은 만큼 암컷은 '권리'라는 무기로 대항할 수 있다. 자연 세계에서 암컷에게 주어진 권리는 바로 짝짓기 선택권이다. 수컷은 때때로 생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경쟁적으로 암컷에게 절박한 구애를 한다. 이때 어느 수컷을 선택할 것인지는 암컷의 몫이다. 번식에 대한 권한을 가진 암컷이 수동적인 경우는 거의 없고, 암컷의 선호도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번식 활동은 암컷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암컷은 유전학적으로 더 우수한 수컷의 아기를 낳아 양육에 보다 헌신적인 수컷을 속이고 그 수컷이 키우도록 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에게는 함께 살고 있는 자식들이 자신의 친자식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에 따른 진화적인 본능은 현대인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평균적으로 친조부모에 비해 외조부모가 손주들에게 더 많은 돈을 쓰는데, 특히 외할머니가 그러했다."(41-3)


"어쨌거나 유성생식은 다수의 다양한 자손을 낳아 번식 가능성을 높이기에 적합한 짝짓기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아이들의 생존 가능성이 극적으로 높아지고 극소수의 아이만 낳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유성생식은 득보다는 실이 많은, 여러 종류의 갈등과 불행을 초래하는 나쁜 번식 방법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포괄 적합도를 최대화하고자 하는 부모들의 양육 본능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원시시대와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부모들이 다른 집 아이들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한두 명의 자녀에게 무제한적인 투자를 하도록 만든다. 결국 부모의 양육 본능이란 유전자가 자신의 번식 성공을 위해 부모라는 아바타를 조종하는 강력한 동력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문명화된 인간 집단에서 성행하는 유전자들은 부모의 사랑이라는 얼굴을 한 채로 자녀들에게 교육이라는 군비경쟁의 채찍질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45)


2장 사회: 혐오로 가장된 두려움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능력 중 하나는 위험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때는 복잡하고 정교한 이성적 판단이 아닌 단순한 감정적 대응이 훨씬 유리하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여기서 생겨난 정서적 기제가 혐오라고 본다." "문제는 다른 인간을 대상으로 안전 최우선의 전략으로서 혐오 기제가 사용될 때 그 상대에게 전가되는 비용이 때로는 너무나 크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근거 없이 과잉 발휘되는 과정에서 선량한 상대의 인격 내지는 생명까지도 무차별적으로 해칠 수 있는 것이다. 혐오는 광범위한 감정으로서 오염이나 불결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고, 물건이나 동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취급한다. 즉, 사람을 향한 혐오와 물체나 동물에 대한 혐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반응이 일어날 때 사람 간의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뇌 영역은 마치 우리가 물건을 대하고 있다는 듯이 비활성화 상태로 남아 있다."(57, 60-1)


"혐오는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부류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모든 것을 분류해서 받아들이려는 사고 체계 때문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차별적 태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으로는 '암묵적 연합검사'가 있다. 이 검사에서는 좋아하는 대상과 긍정적인 단어가 연합되고 싫어하는 대상과 부정적인 단어가 연합되는 정도가 자판을 누르는 반응속도에 의해 측정된다. 안종차별과 관련된 암묵적 연합검사 결과를 보면, 평소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의식적으로 가지지 않던 참가자들조차 아프리카인과 부정적인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결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이 실험은 타 인종에 대한 노출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 인종에 대한 경험이 많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런 편견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험에 임하더라도 결과에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61-2)


"이렇게 인종에 대한 차별이 엄연히 인간의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사회과학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사회적 개념일 뿐이라는 믿음이 마치 정설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시발점이자 이를 직접 뒷받침하는 거의 유일한 연구 결과가 1972년 리처드 르윈틴이 발표한 논문인데, 그 내용인즉슨 7개의 인종에 대해 17개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한 결과 인종 내에서의 차이가 85퍼센트를 설명하며 인종 간의 차이는 1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으로 지적된 바와 같이, 인종 간의 차이는 개개의 독립적인 변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 변이가 이루는 연관 관계의 구조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 이 논리는 DNA 분석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실제 관측 데이터로도 입증되었다." "세계적인 유전학자 데이비드 라이크의 말처럼, 비록 선한 의도라고 할지라도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과학적 발견이 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될 근거만 제공해 줄 뿐이다."(62-3)


"이와 유사한 예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페미니스트이자 저명한 인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는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에서 인류 역사에 모계사회가 지배적인 시기가 있었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믿음이 인류학과 고고학의 증거들로 뒷받침되지 않는 환상일 뿐이라고 냉정하게 폭로한다. 여성 우월적인 모계사회는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도 생물학은 여전히 여성의 편이 아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신경과학》에서 발표된 연구에서는, 임신 중에 사회적 인지를 담당하는 뇌 부위의 크기가 줄어드는데 이러한 뇌 구조의 변화가 출산 2년 뒤까지도 지속된다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뇌세포 연결망의 가지치기를 거치며 어머니의 뇌가 아이의 양육에만 특화되도록 바뀌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결국 생물학적 진화는 직업인으로서의 현대 여성들의 능력을 신체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인지 기능과 사회성의 측면에서 훼손시킴으로써 차등적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63-4)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의 감정을 주관하는 뇌 기관이다. 인간의 뇌에 자리 잡은 편도체는 피와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에서 생존 투쟁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편도체가 만들어 내는 혐오라는 감정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물체를 모두 동일한 생물학적 과정으로 처리한다. 이러한 비인격적 혐오가 고정관념과 편견을 통해 사회적 낙인으로 확장되고, 특히 다른 인종이나 집단에 대한 공격성으로 발휘될 때, 독일 나치나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것과 같은 전쟁과 야만적인 학살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공격성에 대응해 살아남기 위해 편도체와 교감신경을 활성화해야 했으므로, 이것은 다시금 혐오를 강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편도체에서 보낸 자극에 우리 몸의 모든 부위가 신경학적으로 서로 교감하며 함께 반응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어진 교감신경이지만, 한 인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생리학적인 교감이 다른 인간과의 정서적인 교감을 가로막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69)


3장 경제: 자본주의 세상의 번식 경쟁


"'신고전파' 경제학의 심각한 오류는 경제학적 경쟁이 아닌 생물학적 경쟁이라는 변수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한계효용 이론에서는 생산자 혹은 공급자 간에 이루어지는 완전경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생물학적 개체들은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다. 이들의 기본적인 속성은 생산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원의 소비에 있다. 간혹 식물을 생산자로 비유하기도 하지만, 식물은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 외에는 어떠한 부가적인 가치도 만들어 내지 않으므로 경제학적 생산자로 볼 수 없다. 단지 동물에게 강제로 소비당하는 것뿐이다. 또한 한계효용 이론에서는 소비자가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결정 단위로서 자신의 한계효용이 0에 이르면 소비를 멈추는 합리적이고도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소비자들은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무한한 번식 욕구와 경쟁 심리를 지닌 비합리적인 사회적 개체들이다."(82-3)


"로버트 프랭크는 『경쟁의 종말The Darwin Economy』에서 〈지금부터 100년 뒤에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대다수가 찰스 다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신고전학파의 자유시장 신봉자들은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도용해 각 개인이 자신의 이득을 자유롭게 추구할 때 사회 전체에도 최선의 결과가 주어지는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적 체계에서는 생물학적 소비자들의 '한계limit가 없는 한계marginal 효용'으로 인해 종 전체가 다 함께 몰락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프레드 허쉬가 정의한 지위재positional goods, 즉 (주로 생존이라는 목적을 갖는 물질재material goods와는 달리)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얻게 되는, 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사회적 지위가 더 중요한 재화가 바로 이 같은 값비싼 과시의 군비경쟁의 대상이라고 프랭크 교수는 지적한다."(90-1)


"생존이란 번식 시점까지 살아 있느냐 살아 있지 못하느냐, 즉 0과 1의 이분 체계인 반면, 번식은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좋은 다다익선 체계이며 주변의 경쟁자들에 비해 수치적으로 더 많이 낳는지가 중요한 비교우위 체계다." "이와 같이 번식을 위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자원 획득 경쟁으로 이어진다. 생태학에서는 생물들 간에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을 크게 간섭 경쟁과 착취 경쟁으로 분류한다. 간섭 경쟁이란 다른 개체들이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거나 서식지 내의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며 자원을 '독점'하는 경우다. 많은 조류들이 자신의 둥지 주변을 물리적으로 방어해 다른 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것이 간섭 경쟁의 대표적인 예다. 반면 착취 경쟁은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작용은 없지만 일부 개체들이 제한된 자원을 '선점'함으로써 다른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간접적으로 빼앗을 때 일어난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자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착취 경쟁은 자연 곳곳에서 일어난다."(84, 93)


"'값비싼 신호'란 생존에 불리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광고하는 과시 행동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없었으나 현대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값비싼 신호 중 하나는 학력이다. 학력은 특히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얻고자 하는 대표적인 지위재 중 하나다. 그래도 고등교육만큼은 사회에서 실질적인 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 않을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스위스 패러독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스위스의 대학 진학률이 다른 잘사는 나라들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는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장하준 교수는 이것이 고등교육의 주된 목표가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의 전수보다는 고용 시장에서 피교육자들의 순위를 매기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고등교육을 받고 높은 연봉을 받는 고급 인력들이 그만큼의 가치의 생산보다는 착취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101-2)


"생물학적 개체들이 만들어 내는 경제학의 세계는 신고전학파의 이론과는 상반되거나(한계효용의 비체감), 아예 설명되지 않는다(가치 착취 현상). 그럼에도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1870년대 이후로 주류 경제학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 그것이 수학을 도입하며 자연과학의 엄밀함을 흉내냄으로써 얻은 권위에 기인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세상을 보면, 경제 현상이 자연과학의 원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문제는 생물학적 경제 주체들이 따르는 자연의 원리가 앨프리드 마셜의 수학이 아니라 윌리엄 해밀턴의 수학이라는 점이다. 마셜의 수학은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우리를 균형으로 이끈다고 주장했으나, 해밀턴의 수학을  따르는 경제는 우리를 극단적인 불균형으로 이끈다. 배불러 터지는 극소수와 불만족스러운 대다수로 양분화된 지금이 세상이 도래한 것은, 자유시장 신봉자들이 주장하듯이 경제가 온갖 제도로 인해 자연적으로 돌아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적으로 잘 돌아가서다."(112-3)


4장 정치: 자연스러운 보수, 부자연스러운 진보


"2011년 연구에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이용해 90명의 뇌 구조를 살펴본 결과, 진보적 성향이 강할수록 전측대상피질의 회색질 부피가 큰 반면 보수적 성향이 강할수록 편도체의 회색질 부피가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2013년 연구에서는 위험이 동반된 의사결정 과제를 수행하는 82명의 뇌를 기능성 MRI로 검사한 결과 보수 성향의 참가자들이 편도체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포와 혐오는 기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편도체는 이 두 반응을 모두 주관한다." "2018년 연구에서는 총 93명의 뇌 MRI 분석을 통해 편도체의 크기가 클수록,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현 상태status quo를 합리화하는, 즉 기성 체제가 정당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사회운동이나 시위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실험 참가자가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불리한 위치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일관적으로 나타났다."(121-2)


"최근 뇌신경과학에서는 확장된 편도체가 주목을 받고 있다. '확장된 편도체'란 편도체의 중심핵에서 분계선조침대핵까지 이어진 여러 뇌 부위를 통틀어 일컫는데, 이 부위는 특히 정상적인 불안과 공포만이 아니라 병적인 반응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그동안의 많은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며 세로토닌이 보수적 성향의 기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한 바 있다. 즉, 세로토닌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규범을 따르고 위험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이론적이고 복잡한 것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을 선호하며, 질서와 권위를 중시하고 종교적 성향이 강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러 동물실험 결과, 세로토닌은 특히 사회적 위계질서와 높은 연관성을 보였다. 반대로 피셔는 진보 성향을 만들어 내는 신경전달물질로는 도파민을 지목했다. 도파민은 보상 회로를 주관하는 신경전달물질로서, 도파민의 분비가 높을 때 동물들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행동을 보인다."(124-5)


"교감신경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작동하므로, 교감신경이 민감한 사람은 스트레스는 받을지언정 위험한 환경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다." "세로토닌 활성이 실제로 번식에서 유리했다면 세로토닌을 강화하는 변이가 집단유전학 분석에서 양의 방향의 선택압을 보여야 한다. 실제로 신경전달물질 유전자들을 집단유전학으로 분석한 결과, 세로토닌 전달체인 5-HTT가 여러 연구에서 일관성 있게 양의 선택을 받은 대표적인 유전자 중 하나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높은 세로토닌 활성이 진화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집단유전학으로 입증된 것이다." "한편 도파민 수용체에 있는 7R 변이는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최근에 발생했는데,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성향의 장점과 위험성의 공존으로 인해 균형 선택을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정치 성향과 유전자 변이 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니, 실제로 도파민 수용체의 7R 변이를 지닐 경우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127-8)


# 균형 선택balancing selection : 어떤 유전자 변이가 유리한 상황에서는 점점 많아지다가 상황이 바뀌면 반대로 줄어들기도 하면서 특정한 빈도를 유지하는 양상을 가리킨다.


"문명과 문화가 생물학적 진화에 미치는 영향은 현대 유전학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저개발 국가와 선진국 사이에서 잘 드러난다. 즉, 진화적 적합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생애 번식 성공률이 저개발 국가들에서는 주로 전염병이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어린아이들의 사망률에 의해 좌우되는 데 반해, 선진국에서는 자녀를 얼마나 낳는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즉 전염병이나 영양 결핍에 취약해서 사라졌어야 할 다른 변이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성향의 변인들은 문명의 발달 덕분에 자연선택에 역행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이 더 진보하고 생존과 번식에 대한 진화적 압력에서 인간이 더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게 이기적 유전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이 때로는 자연적인 본성의 윤리적 부당함에 대해 깨닫고, 그 깨달음은 사회에 전파하고, 그것을 사회 안에서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점이다."(143-4)


5장 의학: 아프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이유


"유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기적'이다. 첫째는 개체들 간의 문제로서, 유전자가 자신을 실어 나르는 개체로 하여금 다른 개체들을 따돌리고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겪는 인간들의 경쟁과 갈등으로 인한 비극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개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로서, 유전자가 개체의 행복과 안녕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번식에만 유리하게끔 작동한다는 점이다. 질병과 노화 그리고 죽음, 즉 인간의 육체가 겪는 모든 생물학적 고통이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변이들이 목적 없이 우연히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기성은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며, 다만 우연히 생겨난 이기적인 변이들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유전자는 왜 이기적인가'라기보다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변이들이 왜 생겨났는가'라고 볼 수 있다."(149-50)


"이에 대한 답으로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들을 참고할 수 있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자연 세계에는 일부 DNA 복구 유전자가 고장 난 탓에 많은 변이를 발생시키며 번식해 가는 개체군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생명에 적대적이며 요동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특히 상당한 이점을 가진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병원균들이 항생제와 같은 의약품에 대한 내성을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35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생명체는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족한 자원을 DNA 교정과 복구에 크게 투자하면서 자신과 유전학적으로 동일한 자손을 만들며 천천히 번식하는 개체군은 끝까지 대를 이어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대로, 에너지와 자원을 DNA 복제와 세포 분열, 즉 번식에 집중함으로써 유전학적으로 저마다 다른 다양한 자손을 빠른 속도로 만들어 낸 전략은 성공했을 것이다."(154-5)


"이와 같이 집단이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의 소멸과 다른 변이의 탄생을 맞바꾸는 유전자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변이들이 많이 생겨나야 혹독하고도 변동하는 환경에서 집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유전자가 스스로 선택한 이타적인 결정이 아니라, 환경의 압력에 의해 강제된 유전자들의 희생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돌연변이는 유전자의 의도에 반해 무작위적으로 발생하고, 또한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치된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3장에서 언급한 집단선택설, 즉 집단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변이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유리하다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은 생태계 유지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다양성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생물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연이 얼마나 생명체에게 적대적인 환경인지를 말해주는 방증이다."(155-6)


"영국 뉴캐슬대학교 톰 커크우드 교수가 《네이처》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자연 세계에서는 추위, 굶주림, 감염, 포식자와 같은 환경적 위험 요소로 인해 기대 수명이 워낙 낮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수명을 유지하기 위한 불필요한 메커니즘은 진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최근 《네이처 생태학과 진화》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정자 형성 과정에서 생기는 돌연변이를 복구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즉, 자연적인 기대 수명을 벗어나면 더 이상 DNA 복구 기능이 활발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나이에 따라 감소되는 DNA 복구 기능의 문제가 체세포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노화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일회용 체세포' 이론에 따르면, 제한된 자원과 에너지는 그나마 생식세포의 유지에 사용되고, 번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일회용일 뿐인 체소포들은 더더욱 관리를 받지 못한다." "체세포에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노화를 통해 죽음을 초래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로가 바로 암이다."(162-3)


"면역학적 측면에서 일어나는 노화 역시 자연환경의 문제로 귀결된다. 노화에 관한 면역학적 이론에 따르면, 면역체계가 점차 자기 자신과 외래 물질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어감에 따라 개체 자신의 정상적인 세포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는데, 이것이 노화의 원인 중 하나다. 즉 병원균과 싸우기 위해 활성화된 면역세포들이 피아 식별 능력을 잃고 그 부작용으로 자신의 숙주세포들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가면역질환의 발단이다." "면역계의 노화 문제는 또 있다. 우리 몸에는 흉선 혹은 가슴샘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면역세포의 하나인 T세포가 양성되는 곳이다." "어린 시절 활발하게 작동하던 가슴샘 조직은 나이가 들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기능도 위축된다. 따라서 가슴샘이 기능하지 않으면 추가적인 T 세포 양성 업이 사실상 그때까지 훈련된 T 세포들만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령자들은 감염 질환에 훨씬 취약해진다."(167-9)


6장 종교: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다


"사회진화론은 '자연주의적 오류'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용어를 만든 조지 에드워드 무어는 자연적 속성과 윤리적 속성이 별개라는 차원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를 정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통 그가 정의한 것과는 약간 다른 의미, 즉 어떤 사실로부터 부당하게 당위를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쓰인다. 데이비드 흄이 그런 오류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렇다/존재한다is 또는 그렇지 않다/존재하지 않는다is not 등의 사실 명제로부터 그래야 한다/마땅하다ought 또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땅하지 않다ought not 등의 가치 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종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한 가지 예가 된다. 리처드 르윈틴이 취한 방식, 즉 인종차별에 대한 대응으로써 아예 인종을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사실 명제), 우리도 인종을 구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가치 명제)'는 논리에 기대는 것이다."(208-9)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사실과 당위를 구별하고 자연주의적 오류를 극복해야 함을 명확하게 인지한 대표적인 이가 바로 토머스 헉슬리다. 그는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들과의 격한 논쟁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윈의 이론을 널리 알리고 발전시키고자 하면서도, 자연에는 도덕적 목적이 없으며 도덕은 철저히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헉슬리는 제도적으로 사회를 개선하고 올바른 윤리를 확립해야 함을 설파했고, 실제로도 정치 제도의 개선, 과학 교육의 발전 등을 위해 사회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자연이 그러하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자연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아가 '자연이 그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연은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다. 즉, 자연에는 인종 간의 차이와 그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인종에 따른 차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209)


"경제학적 공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소위 '초대교회'라고 불리는, 초창기 기독교가 추구한 경제 공동체의 모습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사도행전」 2:44-45)〉"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고린도전서」 12:21-23)〉 생물학적 개체들이 모인 집단이 마치 하나의 유기적인 몸, 즉 개체처럼 움직인다면 이들은 집단으로서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몸의 일부, 즉 몇몇 약한 개체가 손상되거나 실패하면 몸 전체, 즉 집단의 적합도는 약화되고, 반대로 취약한 개체들을 돌보면 집단의 적합도는 향상된다. 상당히 생물학적인 비유다."(224-5)


"바울의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이방인 포교라는 목적 뿐만 아니라 인종, 신분, 성별의 차이를 포용하는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2장에서 인종, 신분, 성별 따위를 넘어서는 사랑의 정반대 개념, 즉 혐오의 진화적 기원이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고린도전서」 13장과 함께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일서 4장에는 이와 관련한 상당히 심오한 묘사가 담겨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물론 그 맥락은 다르겠지만, 인간의 진화와 심리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 없이 기록된 성서에서 사랑의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미움이나 증오가 아닌 두려움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성서는 특별히 사회적 낙인의 대상을 상징하는 과부, 고아, 나그네에 대한 보호와 배려를 이곳저곳에서 강조한다."(226-7)


"결국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성서는 자연을 신으로 섬기던 인간들을 불러내 예수를 모범으로 삼아 스스로 신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여전히 종교적인 신을 만들어 내거나 추종하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사이비 교주를 따르고 숭배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이런 자들 가운데에서 〈나는 신이다〉라고 선언하며 그들을 지배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다. 성서가 말하는 '신성'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인간으로서 예수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신성을 발휘하려면,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성을 벗겨내고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번식욕과 혐오를 넘어서는 사랑, 차별과 배제가 아닌 포용과 연대, 착취와 탈취가 아닌 가치의 창조와 나눔을 추구해야 한다. 자연의 속박에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이들을 해방시키고, 우리의 후손에게 더 공정하고 진보된 세상을 물려주며, 인류가 오래도록 생존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238)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의 창조주 따위는 없다. 그런데 성서에서 '종교적 도금'을 벗겨내고 나면, 우리는 그곳에서 진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바로 창조주다. 아담으로 대표되는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따르려는 신적 인간이 그들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선언은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이들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건 가상의 인물이건,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정신을 따라 자연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는 창조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창조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바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끝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진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이 자연 속에 우연히 던져진 우리 인간이 이 무의미한 우주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238-9)


나가며


"이 책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 인간을 여러 형태로 속박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자연이라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내고 싸워야 할 자연이라는 적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유전자가 심어놓은 본성 역시 자연의 일부다. 어쩌면 과학의 힘으로 외부의 자연과 싸우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자신과 벌이는 내적 갈등과 도덕적 투쟁이 훨씬 힘든 작업일 수 있다." "물론 각 개인의 계몽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개인의 실천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 국가, 국제사회의 구성원들의 합의와 그에 기반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고는 많은 경우 충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잘 확립된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효과적인 계몽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겠지만 그 투쟁은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인식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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