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nana35님의 서재 (nana35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좋은 책을 찾아서</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25 Jun 2026 19:28:56 +0900</lastBuildDate><image><title>nana35</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210815324392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nana35</description></image><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시간의 기원 / 토마스 헤르토흐 - [시간의 기원 - 스티븐 호킹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이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54101</link><pubDate>Thu, 25 Jun 2026 08: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5410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92534210&TPaperId=173541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9/16/coveroff/e99253421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92534210&TPaperId=1735410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의 기원 - 스티븐 호킹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이론</a><br/>토마스 헤르토흐 지음, 박병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01월<br/></td></tr></table><br/>1장 역설<br>우주의 팽창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로, “물리법칙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곧 물리법칙의 일부는 수학적 필연성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나타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우주가 빅뱅의 열기에서 태어난 후 식는 과정에 관여했던 법칙도 마찬가지다. 입자의 종류와 힘의 세기에서 암흑 에너지의 양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생명친화적 특성은 출생증명서처럼 기본 구조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빅뱅의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태초 진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 여기에 잔뜩 고무된 끈이론학자들은 방대한 공간에 수많은 우주가 섬처럼 고립되어 있고, 우주마다 다른 물리법칙을 따른다는 다중우주 가설을 떠올렸다. 다중우주 지지자들은 궁극의 이론의 장례식을 치르는 대신, 우주론을 일종의 환경과학으로 전환하여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했다.(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어쨌거나 환경은 환경이다!) 42-3)<br>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숨어 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될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 문제란 “다중우주조차 플라톤식 논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중우주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우주에 적용되는 ‘메타법칙metalaw’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메타법칙으로는 수많은 우주 중 우리가 어떤 우주에서 살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다중우주의 메타법칙과 우리 우주의 법칙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는 한, 다중우주론은 검증 가능한 결과를 단 하나도 내놓지 못한 채 역설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다중우주론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이론이어서 우리 우주가 어디쯤 있는지 알 길이 없고,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다. 우주가 여러 개라면 우리 우주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 방대한 공간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 당연히 궁금해지는데, 다중우주 가설은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45)<br>‘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가 우주론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3년의 일이었다. 그해에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코페르니쿠스 기념학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브랜든 카터Brandon Carter(그는 호킹과 케임브리지대학교 동문이다)는 쟁쟁한 물리학자들과 우주론학자들 앞에서 인류 원리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지동설이 알려지고 400년이 흐른 후, 카터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새삼스럽게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면, 자신이 관측한 우주를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다. 우리가 생명친화적인 우주를 관측하게 된 진짜 이유는 자신이 ‘그런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생명을 위한 최적의 조건은 다중우주 전체에 걸쳐 인간과 무관하게 적용되는 인류 원리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수많은 다중우주 중 생명친화적 조건을 구현할 우주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45-6)<br>다중우주의 열혈 지지자들은 ‘설계된 우주’의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두 번째 답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답은 존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수학적 원리가 “아주 운 좋게” 생명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는데, 인류 원리로부터 제시된 두 번째 답은 “우주가 미리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중우주의 지역적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흩어져 있는 우주 중에서 우리 우주가 인류 원리에 의해 생명친화적인 환경을 갖춘 우주로 선택되었고, 이 선택의 필연적 결과로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인류 원리에 기반한 세계관은 오래전부터 과학계에 회자되어온 ‘이원론dualism’을 연상시킨다. 물리법칙이나 메타법칙은 인간에 의해 발견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물리계와 물리법칙(또는 메타법칙)을 연결하는 신비한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류 원리라는 주장이다. 47-8)<br>대부분의 이론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생명친화적 특성을 탐구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 영역을 넘어선 문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호킹은 추상적인 수학법칙이나 메타법칙만으로는 설계된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없다고 믿었다. 호킹이 추구하는 새로운 우주론에서 수학은 주인이 아니라 번잡한 일을 거드는 하인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호킹은 생명친화적 우주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물리학과 우주를 연구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말 많고 탈 많은 인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류 원리가 “우주론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올 주인공”이라는 주장에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호킹은 인류 원리를 하나의 연구 수단으로 도입했을 뿐, 그 질적質的인 부분까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생물학처럼 “과거를 들여다보는 과학”은 질적인 예측을 다량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인류 원리는 ‘예측 능력’과 ‘반증 가능성’을 철길로 삼아 잘 달려온 과학 열차를 사정없이 탈선시킨다. 48-9)<br>사고실험은 물리학 레스토랑에서 호킹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호킹이 이룩한 세 가지 획기적 업적은 정교하게 설계된 사고실험의 결과물이었다. 첫째는 고전 중력이론을 이용하여 빅뱅의 특이점singularity을 찾은 것, 둘째는 중력을 준고전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블랙홀의 복사를 예견한 것, 셋째는 우주의 기원에 또다시 준고전적 중력이론을 적용하여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을 제안한 것이다. 블랙홀 역설은 ‘단순한 학술적 관심사’에 머물 수도 있지만(호킹 복사는 영원히 관측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중우주 역설은 천문 관측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다. 이 역설의 중심에는 생명계와 관찰자, 물리적 우주의 복잡다단한 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호킹은 양자우주론을 통해 이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다중우주 역설은 그의 길을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우주론의 지도를 바꾼 그의 마지막 양자우주론은 그가 물리학계에 남긴 네 번째 선물이었다. 52-3)<br>2장 어제 없는 오늘<br>르메트르는 우주의 팽창이 일반적인 ‘폭발’과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폭발에는 ‘시작점’이라는 곳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주 공간에서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했을 때, 그 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관측자에게 보이는 광경과 도망가는 관측자에게 보이는 광경은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팽창하는 우주는 그렇지 않다. 팽창하는 우주에는 중심도, 가장자리도 없다.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팽창하기 때문이다. 즉, 팽창하는 우주에서 폭발하는 것은 공간 자체다. 르메트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운이나 은하는 풍선의 표면에 붙어 있는 미생물과 비슷하다. 풍선이 팽창하면 모든 미생물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미생물들이 일제히 자기를 중심으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모든 미생물은 자신이 팽창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슬라이퍼와 허블이 관측했던 적색편이는 공간 자체가 팽창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71)<br>아이러니한 것은 우주팽창설을 주장했던 르메트르가 아인슈타인의 상수 λ에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우주상수가 정적인 우주를 보장하는 항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에딩턴도 르메트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우주상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뉴턴의 고전이론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르메트르가 우주상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정적인 우주를 만들기 위해 도입했다가 철회한 λ가 1장에서 언급했던 “생명체의 거주 가능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λ의 값을 잘 조절하면 별과 은하, 행성이 탄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충분히 길어지도록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르메트르의 그래프에서 거의 수평선을 따라 변하는 우주에 해당한다(르메트르가 계산을 끝까지 수행했다면, 이런 우주도 결국은 가속 팽창을 겪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73-5)<br>상대론적 우주론은 우주에 시작이 존재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시간이 0인 순간(르메트르의 “어제 없는 오늘”)은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인 특이점을 낳는다.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도 이 지점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빅뱅은 상대론적 우주론의 초석이면서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우주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있다. 빅뱅이 일어나던 순간부터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면, 그 전에 일어난 일을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빅뱅을 일으킨 원인을 추적할 수도 없다. 상식적인 우주에서는 원인이 결과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시간의 시작점에서는 인과율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아인슈타인(그리고 에딩턴)과 르메트르가 벌인 논쟁의 핵심이었다.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말 자체가 초자연적 존재를 연상시킨다”며 그와 관련된 논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77)<br>우주의 시작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의 관점은 결정론적 우주관이 진하게 배어 있는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연상케 한다. 우주가 결정론을 따른다면 처음 탄생했을 때 향후 모든 진화 과정을 결정할 초기 조건이 존재해야 하며, 이 조건은 다사다난했던 진화 못지않게 복잡해야 한다. 특히 우주는 생명체의 등장을 허용했으므로, 동일한 수준의 생명친화적 조건이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변수가 처음부터 생명의 탄생에 유리한 쪽으로 세팅되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신의 행위”가 개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르메트르는 우주의 기원에 양자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인과율로 대변되는 결정론의 사슬을 끊었다. 르메트르는 (내가 아는 한) 최초로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연결지었다. 우주의 시작은 물리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이 법칙에는 양자이론과 중력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력은 빅뱅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 빅뱅은 양자이론으로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7-8)<br>3장 우주기원론<br>펜로즈의 논리에서 시간을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면 붕괴가 팽창으로 바뀐다. 호킹은 여기에 착안하여 팽창하는 우주는 과거에 특이점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호킹과 펜로즈는 “팽창하는 우주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서 최초의 별과 은하, 우주배경복사가 탄생하기 전으로 거슬러 가면 시공간이 휘어지다 못해 하나의 점으로 수축되는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주 초기에 특이점이 존재했다면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양변이 무한대가 되면서(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이면 물질의 밀도도 무한대라는 뜻이다) 이론의 기능을 상실한다. 물리학 이론이 제아무리 기이하다 해도, 무언가를 0으로 나누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계산기에서 임의의 숫자를 0으로 나누면 에러가 나는 것처럼, 임의의 물리량을 0으로 나누는 순간부터 모든 논리는 난센스가 된다. 그러므로 특이점은 일반상대성 이론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한계점에 해당한다. 특이점에서는 어떤 사건도 일어날 수 없다. 88-9)<br>펜로즈는 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시간이 블랙홀에서 끝난다는 것을 증명했고, 호킹은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되돌려서 ‘시간의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빅뱅이란 먼 옛날에 우주의 “씨앗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화되기를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싹을 틔웠다는 뜻이 아니라, 대폭발이 일어난 순간부터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특이점은 시간의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인 셈이다. 호킹은 프리드만과 르메트르가 제안했던 완벽한 구형 우주가 단순한 이론적 모형이 아니라, 상대론적 우주론의 결과로 얻어지는 자연스러운 형태임을 입증했다. 지구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박테리아는 약 35억 년 전에 출현했고, 지구의 나이는 이보다 조금 많은 46억 년 정도다. 빅뱅 특이점 정리에 의하면 136억 년 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나이가 지구 나이의 세 배에 불과하다니, 이 정도면 생각보다 꽤 젊은 편이다. 89)<br>오직 “실험으로 검증 가능한 자연의 법칙”을 찾고자 했던 파인만은 1940년대 말에 양자적 입자의 파동함수를 훨씬 직관적이고 실용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양자역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기본 아이디어는 고전물리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자를 파동이 아닌 알갱이로 간주하되, 그 입자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두 지점 사이를 연결하는 모든 가능한 경로를 동시에 지나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고전역학에서 입자는 시공간에서 단 하나의 경로만 지나갈 수 있다. 즉, 고전적 물리계의 과거는 단 하나뿐이며, 아무런 모호함 없이 정확하게 정의된다. 그러나 파인먼에 의하면 양자적 입자는 훨씬 포괄적이어서 다양한 과거를 갖고 있으며, 시공간의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할 때 “모든 가능한 경로”를 동시에 지나간다. 단, 각 경로는 할당된 확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입자가 A에서 B로 이동할 확률을 구할 때에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한 경로의 확률을 더해야 한다. 103-4)<br>호킹은 양자역학에 대한 파인먼의 접근 방식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아원자 세계에서 놀던 물리학자들은 파인먼의 새로운 이론 체계가 알려진 후 고향 땅을 벗어나 양자역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외관상 매우 낯설었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 존재했던 근본적 모순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파인먼의 경로합은 작은 물체와 큰 물체에 모두 적용된다. 그런데 큰 물체에 적용하면 다른 경로들보다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하나의 경로가 부각되고, 바로 이 경로가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얻은 경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인먼식 접근법을 수용하면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 다만 거시적 물체에서는 미시적 요동이 서로 상쇄된 후 끝까지 살아남은 단 하나의 경로가 고전적인 경로와 일치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미시 세계로 가면 극적인 상쇄가 일어나지 않아서 많은 경로가 최종 결과에 기여하게 된다. 105-6)<br>하틀과 호킹은 “초기 우주가 팽창하던 시기에는 시간 차원이 양자적 불확정성에 녹아든 상태였기 때문에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호킹은 “빅뱅 이전의 상황을 묻는 것은 남극의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면서 자신이 제안한 양자우주론을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이라 불렀다. 호킹의 무경계 가설에는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우주의 과거가 유한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즉 우주의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우주의 시작점을 찾겠다며&nbsp; 깔때기 표면을 개미처럼 아무리 기어 다녀도 절대로 찾을 수 없다. 깔때기의 둥그런 바닥은 과거가 끝나는 한계점일 뿐, 창조의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경계 가설에서 우주의 시작을 찾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그런 것은 양자적 불확정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108)<br>4장 재와 연기<br>우주는 완벽하게 균일하지 않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물질을 ‘인플라톤장inflaton field’이라 하는데, 인플라톤장은 양자장quantum field의 일종이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인플라톤장에도 양자적 모호함이 존재해야 한다. 즉, 특정 위치에서 장의 값을 정확하게 결정할수록 그 위치에서 장의 변화율은 불확실해지고, 장의 변화율이 불확실하면 미래의 장의 값도 불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양자장은 다양한 변화율과 값이 혼재된 상태다. 이것은 입자의 다양한 경로가 더해져서 파동함수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은 양자적 요동은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규모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일어나는 우주의 인플레이션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인플레이션 전문가들은 우주 초기에 일어났던 엄청난 팽창이 미세한 양자 요동을 증폭시켜서, 거시적 규모의 파동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123)<br>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 끝난 후 인플라톤의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바뀌었을 때, 뜨거운 가스로 가득 찬 우주에 인플라톤장의 요동이 발자국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우주가 인플레이션에서 탄생했다면, 복사 에너지의 온도와 물질의 분포에 작은 불규칙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후 우주가 서서히 팽창함에 따라 초기에 생겼던 잔물결이 우주 지평선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간이 만든 관측 장비에 포착되었다. 멀리서 일어난 파도가 해변가에 도달하여 피서객의 시야에 들어온 것과 비슷하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에 나타난 작은 변화가 인플레이션 이론의 예측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 분포를 여러 방향으로 추적해보면 뜨거운 지점과 차가운 지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위치에 따른 물질의 밀도 변화도 중요한데, 이로부터 ‘은하의 씨앗’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4)<br>인플레이션을 촉발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초기에 인플라톤장은 어떻게 에너지 언덕의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호킹의 무경계 가설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무경계 가설은 우주가 인플레이션에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창조의 순간에 시공간의 밑바닥이 완만한 곡면이었다는 것은 인플레이션 이론의 주장대로 신비한 스칼라 물질이 음압을 발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수 시간에 기초한 고전 우주론에서 음압을 발휘하는 물질은 초고속 팽창(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허수 시간에 기초한 양자우주론에서 음압을 발휘하는 물질은 시공간의 바닥을 구의 표면처럼 매끄럽게 닫아놓는다. 따라서 창조의 순간에 적용되는 무경계 가설과 창조 직후의 상태를 설명하는 인플레이션 이론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쌍둥이 프로세스’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으며, 인플레이션을 양자적으로 완성한 버전이 바로 무경계 가설이다. 130)<br>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은 가능한 한 작은 규모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초기 강도는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에 의해 결정된다.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이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면, 인플레이션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로 진행되어 공간은 엄청나게 커지고, 물질의 양도 풍부해져서 수십억 개의 은하가 탄생할 수 있다. 우리의 우주가 바로 이런 경우다. 이와 반대로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이 에너지 곡선의 깊게 팬 골짜기 근처에 있었다면, 인플레이션이 아주 얌전하게 시작되어 우주 공간은 은하가 생성되지 못한 채 거의 텅 비었을 것이고, 자체 중력으로 다시 수축되어 빅 크런치big crunch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우주는 우리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무경계 가설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면 우리의 우주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길을 걸어왔어야 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무경계 가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약점 때문이었다. 131)<br>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시간 화살arrow of time’(시간이 과거로 역행하지 않고 오직 미래로만 흐르는 특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적인 경험들은 명확한 방향을 향해 진행된다. 달걀은 깨질 수 있지만 깨진 달걀은 다시 붙지 않고,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늙지만 다시 젊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리고 별은 자체 중력으로 붕괴되어 블랙홀이 될 수 있지만, 블랙홀이 다시 별로 환생하는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있어도,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확고한 방향성, 즉 시간 화살은 물리적 세계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원리 중 하나다. 고대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을 목적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시간이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열역학 제2법칙2nd law of thermodynamics이다. 131-2)<br>지금으로부터 약 140억 년 전에 우주는 엔트로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로 엔트로피가 커지는 쪽을 향해 꾸준히 변해왔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를 구별하는 시간 화살의 기원은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았던 원시우주에서 찾아야 한다. 아마도 이것은 우주가 생물친화적 특성을 갖게 된 이유 중 가장 미스터리한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경계 가설은 우주의 파동함수를 다루는 이론이므로, 인플레이션이 반드시 최소한의 규모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 양자우주의 기원은 하나의 값으로 떨어지지 않고 모호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자 한 개의 파동함수가 각기 다른 확률을 가진 여러 궤적의 합으로 표현되듯이, 무경계 가설에서 말하는 우주의 파동함수는 각기 다른 인플라톤장에서 시작된 다양한 인플레이션 우주의 혼합으로 표현된다. 즉, 양자우주는 단 하나의 팽창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의 팽창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 133-4)<br>5장 다중우주에서 길을 잃다<br>지금부터 양자중력 이론의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던 끈이론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고대 그리스어로 “보이지 않고, 쪼갤 수 없는 물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원자atom는 종류가 90여 가지나 되지만, 끈이론에서 말하는 끈은 단 하나뿐이다. 입자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끈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모든 종류의 입자에 똑같은 끈이 숨어 있는 것이다. 종류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관점은 통일의 철학에 잘 부합되는 것 같다. 그런데 똑같은 끈이 어떻게 질량과 스핀, 전하 등이 제각각인 입자 무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은 끈은 진동하는 모드에 따라 각기 다른 입자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끈이론에 의하면 전자와 쿼크는 물론이고 심지어 광자와 같은 매개입자(보손)도 끈이 고유한 모드로 진동한 결과다. 첼로의 줄이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을 내는 것처럼, 끈은 다양한 모드로 진동하면서 입자 동물원에 입주한 모든 종류의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155-6)<br>끈이론의 가장 큰 단점은 이론 전체를 아우르는 운동 방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에는 장 방정식이 있고 양자역학에는 슈뢰딩거 방정식, 상대론적 양자역학에는 디랙 방정식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끈이론 방정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끈이론으로 자연의 법칙을 통일하려면 꽤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옛날부터 3차원이라고 하늘같이 믿어왔던 공간을 무려 9차원으로 확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끈이론의 배경 수학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공간이 4차원 이상이었다면, 인간의 공간 감각은 초과된 차원을 아득한 과거에 이미 인지하지 않았을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9차원 중 우주적 규모로 길게 뻗어 있는 3차원을 제외한 나머지 6차원이 초미세 영역에 돌돌 말린 채 숨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원의 규모가 인간의 인지 가능 한계보다 작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158)<br>처음에 끈이론의 창시자들은 강력한 수학 원리를 이용하여 여분 차원의 기하학적 형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야무진 꿈은 얼마 가지 않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여분 차원이 취할 수 있는 기하학적 구조의 종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끈이론학자들이 이론의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찾아낸 “숨은 차원이 취할 수 있는 기하학적 형태의 개수”는 관측 가능한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개개의 형태는 각자 나름의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하나의 우주에 해당한다. 이것은 여분 차원의 가능한 형태를 분석하다가 “수학적으로 가능한 우주”로 가득 찬 다중우주 전망도landscape가 완성되면서 알려진 사실이다. 표준 모형과 달리 끈이론에는 이론으로 결정되지 않는 매개변수(자연의 상수)가 없다. 상수를 인위적으로 집어넣을 일이 없으니, 이만큼 순수한 이론도 드물다. 그러나 바로 이 순수함 때문에 끈이론에는 무수히 많은 유효법칙이 숨어 있다. 159-61)<br>끈이론은 우주의 역사에서 엄청나게 많은 분기점을 발견해냈다. 하나의 섬우주에 거주하는 생명체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리법칙이 우주 어디서나 똑같이 적용된다며 경이감에 빠질 수도 있고, 그 법칙이 생명체에 유리한 쪽으로 세팅된 이유를 궁금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끈이론이 지배하는 변화무쌍한 다중우주에서 이런 생각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물리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우주에서만 통용되는 국지적 특징이며, 우리 우주가 빅뱅을 겪은 후 특별한 길을 따라 냉각되면서 남긴 독특한 흔적에 불과하다. 핀치새의 뾰족한 부리나 오른쪽으로 감긴 DNA처럼, 입자와 힘의 속성은 거대한 설계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우주에서만 발견되는 국지적 특징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의 유효법칙도 우리 우주가 탄생 초기에 다윈의 진화와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나타난 결과이며, 그 진화적 특성은 이미 오래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162)<br>메타법칙과 무관하게, 또는 그보다 높은 수준에서 무작위 선택을 도입하는 것은 분명히 비인류학적인 발상이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신과 같은 위치에서 조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무작위 선택이란 우리가 다중우주를 느긋하게 내려다보면서, 비슷한 관찰자 중 ‘우리’를 선택한다는 뜻이다. 우리, 또는 다른 어떤 형이상학적 조직이 이 일을 수행하여 그 결과를 알고 있다면 여기서 내린 선택을 정당한 절차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하나의 우주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임을 자각하는 것”과 “무작위 선택이라는 우주적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유효법칙과 별과 은하, 일부 지역에 생명체가 서식하는 우주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우주의 전부이건, 아니면 방대한 다중우주의 일부이건,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생명이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물리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 168)<br>6장 질문이 없으면 과거도 없다!<br>양자이론에서 무언가를 관측하는 행위는 우주의 역사가 두 갈래 이상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단, 관찰자는 자신이 속한 갈림길만 볼 수 있다. 즉, 개개의 갈림길을 따라가는 모든 관찰자(복사본)에게는 자신의 길만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특정 관측자에게 할당되지 않은 다른 갈림길들은 그와 완전히 무관한 우주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되어 거대한 “우주 나무”의 일부가 된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무한한 공간을 표류하게 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두 갈림길의 관계를 표현할 때 “분리되어 있다decouple”거나 “결어긋난 상태에 있다decohere”고 말한다. 그러나 개개의 경로(역사)가 모두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유명한 예인 이중 슬릿 실험에서 하나의 슬릿을 통과한 전자의 경로는 다른 슬릿을 통과한 전자의 경로와 얽히면서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들어낸다. 이는 곧 스크린에 형성된 무늬만으로는 전자가 둘 중 어떤 슬릿을 통과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88)<br>이제 실험을 조금 바꿔서, 전자와 상호작용하는 기체로 슬릿 근처를 에워쌌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태에서 전자가 슬릿을 통과하면 비록 기체 입자가 전자의 경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해도, 각 슬릿에서 발생한 두 개의 파동이 기체와 상호작용하면서 빠르게 약해지기 때문에,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스크린에는 간섭무늬 대신 두 슬릿과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정렬된 두 개의 밝은 줄무늬가 나타날 것이다. 이 상황을 에버렛의 논리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슬릿을 에워싼 기체는 파동 조각이 두 개의 분리된 역사(두 개의 갈림길)를 갖도록 만드는 관찰자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명확하게 분리된 두 파동은 더는 간섭을 일으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갔고, 그 결과 스크린에는 원래 슬릿과 비슷한 두 개의 줄무늬가 형성되었다.” 또는 슬릿을 에워싼 기체가 “전자가 둘 중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 확인하는 도구”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88-9)<br>거시적 세계에는 결어긋남을 초래하는 요인이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매 순간 수많은 관찰 행위를 수행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양자적 간섭이 모두 사라지고 무한한 가능성 중 단 몇 개만이 현실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주변 환경은 미시 세계의 유령 같은 중첩과 거시 세계의 명확한 경험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결어긋남 과정은 미시 세계의 끊임없는 양자 요동에도 불구하고 매우 견고한 고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물은 수십 억 년 동안 무수히 많은 결과를 기록하고 쌓아오면서 우리 역사(무수히 많은 갈림길 중 하나)에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에워싼 세상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획득해온 방식이다. “우주를 양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하향식 요소가 우주론에 추가될 것”이라는 호킹의 예측에는 바로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189)<br>물리학자들이 에버렛의 가설에 회의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양자이론치고 지나칠 정도로 거창하고 황당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에버렛의 가설이 양자역학의 ‘다중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다중세계’라는 말을 들으면 똑같은 우주 여러 개가 똑같은 현실감을 갖고 공존하는 상황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버렛이 제안한 범용 파동함수universal wave function의 개념은 우주 전체를 양자적으로 생각하는 양자우주론의 초석이 되었다. 그가 생각한 우주는 복제되거나 더 큰 상자에 들어가는 우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리계였다. 이로부터 탄생한 양자우주론의 전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주발생론 모형(무경계 가설 등)과 진화의 개념(끈이론이 낳은 우주 풍경에 적용된 파인먼의 경로합 등),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핵심 요소인 관찰자가 모여서 트립티크triptych(교회 제단에 걸려 있는 세 폭짜리 그림) 모양의 구조가 완성된다. 191)<br>이 그림에서 관찰자의 역할이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단순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자우주론에서 관측은 더욱 깊은 수준의 양자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관측이란 역사가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항상 모종의 상호작용이 개입되어 있지만 인간이 수행하는 관측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실 세계에 구현된 결과는 생명체와 무관할 수도 있다. 관찰자, 즉 관측을 행하는 주체는 정밀한 기계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또는 석영 조각일 수도 있고, 우주 초기에 붕괴된 대칭일 수도 있으며,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에서 방출된 광자일 수도 있다. 우주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톰 리들의 백지 일기장과 비슷하다. 가능성의 영역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의 답이 존재하지만, 질문을 통해서만 답을 알 수 있다. 양자우주(우리 우주)에서 유형有形의 물리적 실체는 끊임없는 질문과 관측을 통해 드넓은 가능성의 지평선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2)<br>이 얽힘은 양자우주론에 “과거로 진행하는” 미묘한 요소를 불어넣는다. 양자우주론에는 객관적 관찰자와 무관한 우주의 역사(명확한 시작점과 진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향식 접근법(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는 접근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주의 역사가 시간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반직관적인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마치 양자적 관측 행위가 시간을 거슬러 연속적으로 진행되면서 빅뱅의 결과(대형 차원의 수, 힘과 입자의 특성 등)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관과 반대로 과거가 현재에 의존하게 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인과적 연결고리는 보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해진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과거의 한순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회고적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위 수준의 법칙에서는 그와 같은 정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정보는 오직 미래에 실행되는 실험과 관측을 통해 복원된다. 193)<br>생물학적 진화의 역사에서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이 루카LUCA인 것처럼, 우주론의 기원은 무경계 가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루카의 생화학적 구성성분을 아무리 철저하게 분석해도 그로부터 자라날 계통수의 형태를 미리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루카가 없으면 계통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경계 기원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로부터 파생될 물리법칙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 우주의 계보와 법칙은 하향식 관측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빅뱅의 잔해인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은 강력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을 때 예상되는 온도 분포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여기에 하향식 논리를 적용하면 지금의 우주가 “생성될 확률이 가장 높은” 우주다. 그러므로 하향식 이론은 망원경으로 확인된 우주배경복사의 온도 분포와 강력한 인플레이션에서 예측된 (온도 이외의) 다른 데이터 사이에도 강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04-5)<br>7장 시간 없는 시간<br>플라톤은 이 세상을 동굴 벽에 드리운 그림자에 비유하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완벽한 실체를 어설프게 투영한 그림자일 뿐이며, 수학적 형태의 완벽한 (그리고 우월한) 실체는 바깥세상(이데아)에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400년이 지난 지금, 플라톤이 상상했던 이데아는 홀로그램 혁명을 겪으면서 엄청나게 달라졌다. 가장 최근에 제기된 홀로그램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시공간의 얇은 조각에 숨겨진 현실이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된 결과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원형原形이 이 세상에 투영되어 휘어진 시공간과 중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양자적 입자와 장으로 이루어진 3차원 그림자 세계에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홀로그램 물리학은 “어딘가에 숨겨진 홀로그램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물리적 실체의 가장 깊은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13)<br>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은 그야말로 “단순함의 전형”이다. 상대론적 블랙홀은 속내를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이 별로 만들어졌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건, 또는 반물질로 이루어졌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블랙홀이 가질 수 있는 물리적 특성은 단 두 가지, ‘질량’과 ‘각운동량’뿐이다. 모든 블랙홀은 오직 질량과 각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물리량에 의해 구별된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등장하는 블랙홀은 외부로부터 정보를 무한정 빨아들여서 사정없이 파괴하는 궁극의 쓰레기통이다. 그러나 베켄슈타인과 호킹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준고전적 엔트로피 공식에 의하면 블랙홀은 자연에서 가장 복잡한 물체로서, 고전적인 이미지와 완전히 정반대다. 왜 그럴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고전적 이론이어서, 블랙홀 내부의 미세구조에 저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217)<br>그렇다면 블랙홀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 안에 저장된 정보는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정보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블랙홀을 “궁극의 지우개”라 할 만하다. 원래 블랙홀은 무엇이건 집어삼키는 천체였으니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데, 문제는 양자역학이 이런 시나리오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법칙에 의하면 모든 물리계의 파동함수는 정보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진화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파동함수가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진화하면서 정보를 인식 불가능한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는 있지만, 정보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이것은 파동함수의 모든 가능한 확률을 더했을 때 반드시 1(100퍼센트)이 되어야 한다는 필수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 양자역학의 법칙에 의하면 백과사전을 통째로 불에 태워도, 남은 재를 양자적 수준에서 분석하면 모든 정보를 복원할 수 있다. 218-9)<br>이제 두 번째 시나리오를 살펴보자. 혹시 블랙홀의 정보가 호킹 복사에 암호로 저장되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는 것은 아닐까?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는 거의 영겁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이것도 일견 그럴듯하게 들린다. 게다가 딱히 양자역학에 위배되는 구석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호킹의 계산과 일치하지 않는다. 호킹 복사에는 블랙홀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홀이 호킹 복사의 형태로 자신의 질량을 방출할 때, 복사 스펙트럼에는 블랙홀의 미세구조나 역사에 관한 정보가 단 한 조각도 들어 있지 않다. 호킹의 복사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이 최후의 질량을 방출하고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무작위로 흩어진 열복사의 구름뿐이며, 이로부터 블랙홀의 정보는커녕, 과거에 블랙홀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물리학자들은 블랙홀의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19-20)<br>에드워드 위튼은 끈이론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는데, 그의 논리에 의하면 다섯 개의 끈이론에 초중력을 포함한 여섯 개의 이론은 사실은 별개의 이론이 아니라 동일한 수학적 구조의 다른 얼굴일 뿐이었다. 위튼은 여러 개의 이론을 하나로 연결하는 복잡한 수학적 네트워크를 ‘M 이론’으로 명명했다. 물리학자들은 “외관상 다르게 보이는 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학적 관계”를 칭할 때 “이중성dualit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중성(또는 이중적) 관계에 있는 두 이론은 어떤 면에서 보면 동일한 이론일 수도 있다. 두 이론이 이중적 관계라는 것은 “동일한 물리적 현상을 두 이론이 각기 다른 수학적 언어로 서술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던 파동설과 입자설도 서로 이중적인 관계에 있다. M 이론의 이중성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하나의 이론에서 엄청나게 어려웠던 문제가 다른 이론으로 전환했을 때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22)<br>1997년, 하버드대학교의 젊은 조교수였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Juan Maldacena는 두 개의 끈이론이나 두 개의 입자이론을 연결하지 않는 새로운 이중성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이것은 “중력을 포함한 끈이론”과 “중력이 없는 입자이론”을 연결하는 이중성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말다세나의 이중성으로 연결되는 두 이론이 각기 다른 차원에서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그의 눈에는 입자이론이 중력이론의 홀로그램처럼 보였다. 말다세나의 이중성을 ‘홀로그램 이중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입자 부분에 속한 양자장이 반-드지터 공간의 스노볼을 침투하지 않고 그 경계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말다세나의 이중성에 등장하는 입자 이론이 지난 20세기 중반부터 물리학자들이 사력을 다해 개발해온 양자장 이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작동하는 “물질과 중력의 양자이론”이 홀로그램 이중성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223-4)<br>호킹은 2004년 더블린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블랙홀이 슈바르츠실트의 기하학으로 서술된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정보 유실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블랙홀의 정확한 상태에 대한 정보는 다른 기하학에 저장되어 있다. 아직도 혼란과 역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문제를 ‘단 하나의 객관적 시공간’이라는 고전적 관점에서 다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인먼의 ‘기하학 합sum over geometry’을 도입하면 두 개의 기하학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호킹의 새로운 하향식 연설이었다. 호킹은 자신의 논리가 지나치게 고전적이었음을 깨닫고 입장을 바꾸었다. 블랙홀이 탄생한 후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면, 블랙홀의 과거와 현재 상태에 관한 정보는 블랙홀의 기하학적 구조에 저장되지 않고 새로운 시공간에 저장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향식으로 전향한 호킹은 자신이 젊었을 때 시공간을 이미 주어진 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계산을 해보기도 전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231)<br>호킹 복사는 사건 지평선 근처에서 일어나는 양자적 요동으로부터 발생한다. 진공 중에서 양자적 요동에 의해 입자-반입자 쌍이 생성되고, 반입자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파트너 입자가 우주 저편으로 도망가는데, 이 현상을 멀리서 보면 마치 블랙홀에서 입자가 방출되는 것처럼 보인다.(이것이 바로 호킹 복사였다!) 그러나 한 번 쌍으로 태어난 입자와 반입자는 둘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멀어져도 양자적으로 얽힌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물리학 용어로 표현하면 두 입자는 서로 “얽힌 관계entangled”에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우주로 도망가는 입자는 블랙홀에서 방출된 열복사처럼 보이지만, 두 입자를 모두 고려하면 둘을 연결하는 상호 관계 속에 어떤 형태로든 정보가 저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페닝턴과 현악사중주단은 블랙홀에서 증발하는 입자와 내부로 빨려 들어간 입자 사이의 얽힌 관계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쌓이다 보면 사건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웜홀로 발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232-3)<br>8장 우주의 안식처<br>양자우주론에서 과거와 미래는 끊임없는 질문과 관찰을 통해 가능성의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양자이론의 중심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이미 일어난 일”로 변화시키는 관찰 행위(관측자와 관측 대상의 상호작용)는 우주를 점점 더 확고한 실체로 만들어가고 있다. (양자적 의미의) 관찰자는 우주에 주관적이고 섬세한 요소를 불어넣는 창조적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관찰자는 지금 실행한 관측이 빅뱅의 결과를 바꾸는 것처럼, 우주론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미묘한 요소를 도입한다. 호킹이 자신의 최종 이론을 하향식 이론이라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향식 우주론은 “설계된 우주”의 수수께끼를 뒤집는 이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명친화적 특성이 양자 수준에서 설계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생명과 우주가 궁합이 잘 맞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원래 깊은 수준에서 공존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249-50)<br>우주의 기원에 대한 호킹의 무경계 모형은 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역사적 관점(법칙의 기원을 포함하는 관점)을 구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창조의 순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조적 특성이 점차 변하거나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시간까지 사라진다. 태초에 시간은 공간과 융합되어 더 높은 차원의 구球를 형성하고, 이런 상태에서 우주는 완전한 무無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호킹은 인과율에 입각한 상향식 접근법을 추구하던 시절에 “우주는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최종 이론을 구축하면서 빅뱅 무렵의 시공간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태초의 무는 우주가 탄생할 수도,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텅 빈 진공이 아니라, 시공간과 무관하고 심지어 물리법칙과도 무관한 인식론적 지평선에 가깝다”고 주장한 것이다.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시간의 기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점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과거의 한계점이다. 252)<br>연구 초기 단계에 호킹의 목적은 시간이 시작되던 순간에 주어진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설계된 우주’의 비밀을 푸는 것이었다. 그는 빅뱅 깊은 곳에 숨겨진 수학이 “우주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인과적으로 설명해준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호킹은 우주론을 거꾸로 뒤집은 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선택한 하향식 관점이 물리적 실체와 법칙 사이의 계층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하향식 철학에 의하면 우주는 법칙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기조직적self-organizing 실체이며, 그 안에서 온갖 패턴이 모습을 드러낸다(즉 ‘창발’한다). 이들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을 우리는 ‘물리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법칙이 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법칙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존재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답이 존재한다면, 그 답은 바깥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찾아야 한다. 25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9/16/cover150/e99253421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279168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 김호동 -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8345</link><pubDate>Mon, 22 Jun 2026 07: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83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9325&TPaperId=173483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492/3/coveroff/895828932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9325&TPaperId=173483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a><br/>김호동 지음 / 사계절 / 2016년 01월<br/></td></tr></table><br/>010 프롤로그<br>"유목은 목축의 특수한 형태이다. 목축은 가축을 사육하여 필요한 식량을 획득하는 경제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농경과 마찬가지로 '식량생산경제'에 속한다. 다만 농경은 식물을 순화시키고 목축은 동물을 순화시켜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류의 경제생활이 수렵→목축→농경이라는 3단계로 발전해왔다는 주장은 이제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유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고정된 거주지나 축사 없이,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광역적·계절적 이동을 통해 가축을 사육하고, 목축 생산물을 통해 생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생산경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목의 특징은 이미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이 간파한 바 있다. 그들은 유목민이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나 성채를 갖지 않고〉, 〈가축과 함께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하며〉, 〈모두 말 위에서 활을 쏠 줄 알았다〉고 하였다. 이는 유목민이 농경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이동생활, 목축경제, 기마술을 지적한 것이다."(15)<br>1) 고대 유목 국가<br>"스키타이Scythai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목민 집단으로 인도-이란계에 속하는 민족이었다.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 왕 에사르핫돈(재위 기원전 680~669년)과의 전투에서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고 본다." "서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던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도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고, 겁먹은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키타이 왕 마디에스에게 직접 선물을 바치고 화평을 청했다. 스키타이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에게서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 왕국의 공격을 받아 패한 뒤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다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26)<br>"스키타이가 역사상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한 집단이라면, 흉노는 유라시아 동부 초원에서 처음으로 유목국가를 세운 이들이다. '흉노'라는 이름은 기원전 318년 전국 시대의 5개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스키타이에 비해 3세기 반 정도 늦은 셈이다." "융戎, 적狄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정주생활을 하며 보병 위주의 전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중국측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유목민, 즉 계절적 이동을 하며 기마전을 수행하는 본격적인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갈 무렵 전국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나타나는 이 '호'라는 명칭은 특별한 종족이나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농경생활을 하며 '화하華夏' 혹은 '제하諸夏'를 자처했던 중원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방식의 생활과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동호, 임호, 누번, 흉노 등은 모두 '호'의 범주에 속하는 집단이었다."(34-5)<br>"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와 그 주민들의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중국 측 문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흉노가 발흥하여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장악하고 한 제국이 이에 대응하여 외교·군사적인 작전을 전개할 때였다." "흉노의 서역 지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그러나 흉노에게 복속된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일종의 세금을 수취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서』 「서역전」에는 〈흉노의 서쪽 변경에 있는 일축왕은 동복도위를 두어 서역을 통령토록 했는데, 항상 언기, 위수, 위려 사이의 지역에 거주했으며,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를 취하고 물자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복도위는 현재 카라샤르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타림 분지 연변의 도시들에게서 '부세'를 거두었다. 이러한 '부세'는 각 도시가 갖고 있던 경제력, 즉 호구의 규모에 비례했을 것이다. 한나라도 서역을 장악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뒤 수행했던 중요한 일이 바로 호구 조사였다."(48-9)<br>"흉노는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한 뒤 격렬한 내분에 휩싸였다. 우현왕이었던 악연구제가 선우위를 계승한 직후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좌익 귀족들을 탄압하자, 좌익 귀족들은 호한이라는 인물을 선우로 옹립하여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흉노의 내분은 호한야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으나, 그의 형인 질지가 그를 축출함으로써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몽골 초원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호한야는 기원전 52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고비 사막을 건너 한의 황제에게 스스로 신하를 칭했다. 호한야는 입조와 칭신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질자를 들이고 공물을 헌납함으로써 중국의 황제와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한과 흉노의 관계도 '화친관계'가 아니라 '조공관계'로 바뀌었다." "흉노는 한에 대해 명분에 불과한 정치적 복속을 표방하는 대신 막대한 물질적 보상을 받아냈고, 이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약탈→위기→물자 지급이라는 종래의 방식보다는 훨씬 나았다."(54-5)<br>"기원후 48년 흉노는 또다시 내부의 격변을 겪으며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니, 이를 기원전 50년 전후의 분열과 구별하여 흉노의 2차 분열이라고 부른다. 2차 분열의 원인은 1차 분열과 마찬가지로 선우위를 놓고 벌어진 계승분쟁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흉노는 후한 양국은 과거 화친이나 조공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중요한 특징은 ① 흉노인들이 한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게 되었다는 점, ② 칭신하고 공물과 질자를 보내는 것은 같으나 한 조정으로부터 사흉노중랑장이라는 관리가 파견되어 그의 감호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흉노중랑장은 후일 12명으로 늘었지만, 흉노 내부의 행정에 직접 간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남흉노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한 제국 내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기보다는, 그 보호 아래 하나의 국가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각자 본국의 습속을 유지하며 한나라에 복속하던〉 후한의 '속국'이라 할 수 있다."(56-7)<br>2) 투르크 민족의 활동<br>"돌궐突厥(튀르크Türk)의 건국 집단은 원래 투르판 부근에 살았는데, 유연을 격파한 뒤 중심지를 몽골 서부의 외튀켄 산지(오늘날의 항가이 지방)로 옮겼다. 카간은 한 지점에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를 분할하여 지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무한 카간은 제국을 셋으로 나누어 자신은 외튀켄에 자리잡고, 동방과 서방은 가까운 일족에게 통치를 맡겼다. 타스파르 카간도 이러한 방식을 답습했다. 과거 흉노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동시에 좌우현왕을 두었던 것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통치자의 칭호도 모두 '카간'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돌궐의 이러한 지배 방식은 '분국分國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권력의 약화와 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여 마침내 제국이 분열되기에 이른다. 지배집단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과 반목은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76-7)<br>"아랍 세력이 본격적으로 중앙유라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661년 새로운 세습적 칼리프 체제인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고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긴 뒤부터였다." "738년 후라산의 신임 태수로 임명된 나스르 빈 사야르는 종래 정복 일변도의 진출 방식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정책을 표방했다. 서투르키스탄 지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력적 강제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적극 추진하고 개종자에게는 세금 혜택을 주었다. 바로 그때 후라산에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는 세력이 이븐 무슬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그는 '아바스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나스르 빈 사야르가 사망한 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많은 서투르키스탄 주민들이 그와 연합함으로써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아랍 세력이 서투르키스탄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나가는 사이, 때마침 당 제국은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92-3)<br>"751년 여름 당과 아랍의 군대가 탈라스 강가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다.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당군의 지휘관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과 지야드 이븐 살리흐의 아랍군은 751년 7월 탈라스 하반의 아틀라흐에서 전투를 벌였다. 닷새간 대치하던 중 당군의 일부를 구성하던 카를룩 유목민들이 배반하여 아랍 측으로 넘어갔고, 그 겨로가 당군은 좌우로 협공을 당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 직후 안사의 난(755~63년)이 터지면서 당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유라시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이슬람 세력이 서방을, 티베트가 동방을, 투르크 유목민들이 북방을 차지하며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어 티베트와 투르크가 약화되기 시작하자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아랍의 정치적 우위는 확고해졌고, 종교적으로 이슬람화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다."(94-5)<br>"안사의 난은 당 현종 시대에 화북 변경지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그드 출신 안녹산과 사사명이 755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반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745년 돌궐 제국이 붕괴하자 그 영내에 있던 수많은 소그드인들이 안녹산 휘하에 편입되었고, 이들이 그 뒤 반란의 주된 군사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위구르의 지원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당의 황제와 장군들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지만 그들의 약탈을 멈추지는 못했다. 762년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당은 위구르에게 또 한 번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4000명의 기병이 남하하여 당군과 연합하여 낙양을 탈환했다. 당나라가 이처럼 극도로 무력해진 상황에서도 위구르는 당조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변방에 시장을 열어서 말과 비단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만 했다. 이는 중국을 영토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화친이나 교역을 통해서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100-1)<br>"위구르 제국 시대에 몽골 초원에는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현상들, 특히 정주문명의 요소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규모 성곽도시의 출현이 좋은 예이다." "위구르인들의 성곽도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3대 뵈귀 카간이 세운 오르두발릭(오늘날 카라발가순)이다. 이곳은 중국, 중앙아시아, 서부 유라시아 초원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돌궐·위구르·몽골이 모두 이곳에 제국의 중심을 두었다." "오르두발릭의 모습은 821년경 그곳을 방문한 아랍인 타밈 이븐 바흐르가 남긴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는 위구르의 카간이 제공한 역참을 이용하여 초원을 횡단할 수 있었다. 성벽에는 거대한 철문 12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 안에는 많은 시장들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위구르 시대에 이러한 대형 성곽도시의 출현은 돌궐 제국 이래 독자적인 문자의 창제와 사용, 보편 종교의 확산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가히 유목사회의 '문명화'라고 부를 만하다."(102-3)<br>3) 정복왕조와 몽골 제국<br>"'카라 키타이Qara Kitai'는 여진의 공격으로 거란 제국이 망한 뒤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거란인 및 그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나라는 역사상 '서요西遼'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125년 거란 제국 멸망 후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인들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1137년부터 서투르키스탄을 경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에는 서부 카라한 왕조가 있었지만 이미 쇠약해져 신흥세력 셀주크에 복속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셀주크의 군주 산자르는 서부 카라한의 마흐무드와 연합하여 1141년 가을 카트완 평원에서 카라 키타이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전투는 셀주크의 참패로 끝났고, 야율대석은 그길로 사마르칸드에 입성했다. 카라 키타이는 카라한 왕조, 천산 위구르 왕국 등을 부용국으로 삼고 샤흐나(샤우캄)이라는 관리를 보내서 감독했다. 이 왕국은 13세기 초 칭기스 칸에게 쫓겨 망명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에게 권력을 빼앗길 때까지 반세기 이상 존속했다."(122-3)<br>"9세기 중반 키르기즈의 침공으로 위구르 제국이 붕괴하고 다수의 위구르 유목민들이 초원을 떠나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했지만, 정작 키르기즈인들은 초원에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살던 예니세이 강 유역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로 인해 몽골 초원에 힘의 공백이 생겨나자 새로운 주민들이 대거 몽골 초원으로 유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구르 제국의 동북부 변경지역에 살던 타타르 부족을 비롯한 몽골계 집단들은 다양한 시차를 두고 풍부한 초원을 찾아 이주해 들어왔다. 이 몽골계 집단들은 당대의 한문 기록에 '실위室韋'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라 불린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몽골'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사례인데, 이처럼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단에 불과하던 몽골에서 칭기스 칸이 출현했고, 그 후 그곳의 유목민들은 모두 스스로를 '몽골'이라 불렀다. 『몽골비사』와 『집사』에도 이들의 이주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흥미로운 설화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126-7)<br>"12세기 중반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은 '울루스ulus'라 불리는 집단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울루스라는 말은 원래 '사람', '백성'을 뜻하지만, '부족', '나라'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 대표적인 울루스로는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오이라트, 몽골 등이 있었다." "울루스라는 사회조직은 '오복oboq'이라는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골이라는 울루스 안에는 칭기스 칸이 속한 보르지긴을 위시하여 바룰라스, 우루우트, 망구트 등 많은 오복들이 존재했다. 이 오복은 동일한 '뼈(yasun)'를 갖는 부계 친족집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일한 혈족 집단이 아니라 어떤 한 가문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인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주장도 최근 제기되었다. 사실 12세기 유목민 사회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분화가 확인된다. 정치적 종속 관계에 따라 '노얀noyan'이라는 지배층, '카라추qarachu'라는 평민, '보골boghol'이라는 예속 집단이 존재했다. 울루스는 최종적으로 '칸khan'의 지배를 받았다."(128-9)<br>"1260년경 쿠빌라이의 집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몽골 제국의 지배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이제까지는 하나의 통일제국이 4개의 지역 정권, 즉 '칸국khanate'으로 분열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 방식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올바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몽골 제국, 즉 '대몽골 올루스'라는 거대한 정치체는 칭기스 칸 일족들이 보유하는 다수의 울루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이 울루스들의 연합체라는 구성적 원리인 '울루스 체제'는 14세기 중후반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울루스 상호 간의 역관계가 변화하면서 몇몇 대형 울루스들이 사실상 제국을 분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 대형 울루스의 지배자들이나 거기에 속한 몽골인들은 여전히 자기가 몽골 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 제국이 4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142)<br>"따라서 쿠빌라이가 집권과 함께 중국적인 왕조인 '원元'을 창건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 물론 그는 제국의 수도를 당시 '키타이'라 불리던 내몽골·북중국으로 옮기고 중국식 연호와 제도를 채택했다. 1271년에는 『주역』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대원大元'이라는 글자를 택하여 국호로 반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곧 독립된 왕조의 탄생을 말해주는 증거는 아니다. 비록 한문 자료에는 그런 오해를 유발시키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당시 몽골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4세기 전·중반의 비문들을 보면 〈대원이라 불리는 대몽골 울루스〉라는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원'이 몽골 제국의 한자식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새로운 왕조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대몽골 울루스의 최고 지배자 카안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142-3)<br>4) 계승국가의 시대<br>"티무르는 1360년부터 시작된 투글룩 테무르 칸의 침공과 그로 인해 빚어진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족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369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는 몽골 제국의 정치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칭기스 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güregen)'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로 불리며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1405년 중국 명조 원정길에서 사망할 때까지 유라시아 각지를 누빈 희대의 정복자였다." "당시는 몽골 제국과 칭기스 일족의 카리스마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대였다. 그의 끊임없는 원정도 실은 권력의 합법성이 취약한 그가 차가다이 부족민들의 내부적 불만과 반발을 밖으로 돌리려 한 것이다. 그는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수행하는 '성전', 그리고 대몽골 울루스의 재건이라는 명분과 목표를 내세워 통합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170-1)<br>"15세기 중반~16세기 전반에는 중앙유라시아에서 대규모 민족 집단들이 출현하거나 이동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14세기 말~15세기 초 주치 울루스가 약화되어 분열하자 아불 하이르 칸이 울루스의 좌익에 속하는 유목민들을 통합했는데, 이들이 바로 '우즈벡 울루스'이다." "한편, 아불 하이르의 강력한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치의 후손들 가운데 기레이와 자니 벡이 유목민들을 이끌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톈산 북방의 모굴리스탄 초원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이들은 우즈벡 울루스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카자흐Qazaq'라 불렸다." "키르기즈는 고대 이래로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에 살면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15세기 전반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러시아 역사학자 바르톨드는 오이라트가 모굴 칸국과 전쟁을 할 때 키르기즈도 동참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왔다가 1470년대에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76-7)<br>"1487년 칸으로 즉위한 다얀 칸(바투 뭉케)은 약화된 동몽골을 통합하여 일으켜 세운 뒤 모두 6개의 만호(tümen)로 나누어 자식들에게 분봉했다. 그 뒤 몽골을 지배한 칭기스 일족은 모두 다얀 칸의 6만호를 지배했던 그의 후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칭기스 일족의 역사에서 중시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얀'이라는 명칭은 대원大元을 음역한 것이므로 몽골 제국(대원)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적 선언도 내포하고 있다." "다얀 칸은 자신의 지배 아래 들어온 몽골인들을 모두 6만호로 재편하여, 좌익에 차하르·우량카이·할하의 3만호를, 우익에 투메드·오르도스·윙시에부의 3만호를 배치했다. 그는 이 6만호에 속하는 유목민들이 유목하는 지역적 범위를 정하고, 각 만호를 지배하는 칸에는 자기 아들들을 임명하여 세습하게 했다. 다얀 칸과 그의 후계자 보디 알락은 차하르부의 수령이자 좌우익 전체를 지배하는 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6만호 체제는 이후 몽골 유목민의 정치적 구성의 골간이 되었다."(182-3)<br>"중앙유라시아에 등장한 수피 교단들 가운데 낙쉬반디 교단은 서아시아 각지는 물론 중앙유라시아와 중국 서북부, 동남아, 인도, 동유럽, 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국제적' 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장로들은 '호자khwaja(和卓)'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그 복수형인 '호자간khwajagan'은 교단의 별칭이 되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종교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아시스 지대의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벡 계층에서도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확보한 그들은 무장한 추종세력들을 배경으로 칸위 계승분쟁에도 간여하여 강력한 세속권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마침내 1680년 호자 아팍크는 준가르 군대를 앞세워 카쉬가리아 지배권을 장악했고, 이로써 몽골 제국 이후 확고하게 유지되던 칭기스 일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등장한 '호자' 집단이 정주적 토착 수령인 '벡' 집단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188-9)<br>"몽골 제국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 특히 사카파 교단이 칭기스 일족의 보호를 받으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몽골 제국이 붕괴된 뒤 티베트 불교도 침체를 겪으며 몽골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16세기 후반 알탄 칸의 적극 후원에 힘입어 다시 흥륭했다. 다얀 칸의 적통인 차하르부 출신이 아닌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1576년 티베트에서 겔룩파의 대표 소남 가초를 초청하여 청해의 차브치알에서 역사적인 회견을 가졌다. 소남 가초가 알탄 칸을 쿠빌라이의 전쟁轉生으로 인정하자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교단의 스승들에게 이 칭호를 추존하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뜻하기 때문에 이 칭호는 '사해와 같이 넓은 지혜를 지닌 스승'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남북 몽골에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몽골의 종교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몽골과 티베트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190-1)<br>5) 유목국가의 쇠퇴<br>"17세기 전반 청 제국의 출현은 중국과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유라시아 세계 전체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청 제국을 건설한 만주인들은 처음에는 몽골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자신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오히려 그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나아가 몽골과 정치·종교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티베트를 장악하고, 마지막으로 서몽골 준가르를 붕괴시킴으로써 톈산 남북의 동투르키스탄까지 정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청 제국의 흥기는 중앙유라시아 여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었다." "홍타이지는 '주션'과 '아이신 구룬'이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만주'와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선포하여 자신의 제국이 대원의 적통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사강 세첸의 『몽골원류』는 누르하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홍타이지가 '정권(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194-5)<br>"1728년 러시아와 청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보완하여 캬흐타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알바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청에 양보했지만, 사절단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르친스크와 캬흐타 등 변경 도시에 시장을 개설하여 상인들이 상대편과 물자를 매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청은 러시아에 교역상의 특권을 허가해준 대신 아무르 강 상류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준가르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갈단은 1690년 이르쿠츠크에 있던 골로빈에게 사신을 보내 할하 침공을 위해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강희제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를 중립화시킨 다음 갈단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준가르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장차 중앙유라시아의 세계를 중국과 러시아가 양분하는 역사적 과정의 시발점이었다."(198-9)<br>"1757년 아무르사나를 격파하고 준가르를 복속시킨 청군은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위원魏源은 『성무기聖武記』에서 준가르인의 4할은 천연두로 사망하고 3할은 청군에 살해되었으며 2할은 카자흐로 도망하여, 1할만이 고향에 남았다고 적었다. 건륭제는 아예 '준가르準噶爾'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얼러트額魯特(Ölöt) 혹은 오이라트厄魯特(Oyirat)라는 말로 대체하도록 했다. 청조는 준가르의 붕괴와 함께 그에 복속해 있던 카쉬가리아도 당연히 제국의 일부가 되리라고 예상했지만, '호자'라 불리던 수피 장로들의 지휘하에 토착 무슬림들은 의외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에 건륭제는 1758~60년 본격적인 정복전에 착수했다. 호자 형제는 바닥샨 산지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유목하던 키르기즈인들에게 피살되어 그 수급이 청군에게 인도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청 제국은 톈산 북방과 남방을 모두 장악하여 중앙유라시아 정복을 완료했다."(208-9)<br>"청 제국은 준가르를 무너뜨리고 톈산 남북의 초원과 사막 지대를 정복한 뒤 그곳을 신강新疆이라 불렀는데 이는 '새로운 강역'을 뜻한다. 신강은 내지와는 달리 성省으로 편성되지 않았고, 몽골·티베트·만주 등지와 함께 일종의 특별 군사구역으로 설정되었다. 즉 청은 신강과 같이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민관이 아니라 군관을 배치했으며, 이들 외지인과 현지 토착민 사이에 행정적·공간적 거리를 두는 분리 통치의 원칙을 적용했다. 이를 위해 청은 신강을 세 개의 군사구역(준가리아, 천산동로, 천산남로)으로 나누었다." "청조는 현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벡beg(伯克)이라는 토착 지배층을 활용했다. 벡은 과거에는 유목집단의 수령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 17세기 들어 그들이 정착하면서 정주 지배층에 대한 명칭으로 바뀌었다. 청이 정복한 이후 과거 여러 직능을 수행하던 관리들의 명칭 뒤에 일률적으로 '벡'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벡 관제를 시행한 것이다."(212-3)<br>222 에필로그]]></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7492/3/cover150/89582893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920370</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마커스 초운 - [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가장 유명하지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1235</link><pubDate>Thu, 18 Jun 2026 07: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12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2279&TPaperId=173412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711/50/coveroff/89323222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2279&TPaperId=173412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가장 유명하지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힘</a><br/>마커스 초운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2년 06월<br/></td></tr></table><br/># 당신이 모를 수도 있는 중력에 관한 여섯 가지 사실1. 중력은 당신과 당신 주머니 속 동전이, 당신과 당신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다.2. 중력은 아주 약하다. 지구의 전체 중력으로도 근육의 힘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손을 위로 뻗을 수 있다.3. 중력은 약하지만 대규모로 작용하는 중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 중력은 전체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통제하는 힘이다.4. 사람들은 중력이 빨아들이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주 대부분에서 중력은 날려보내는 힘이다.5. 빅뱅 후에 중력 스위치가 켜지지 않았다면 시간은 방향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6. 중력을 명확히 이해해야만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답할 수 있다.<br>1부 뉴턴1장 · 달은 떨어지고 있다<br>달은 원 운동을 하면서 계속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사과와 달은 둘 다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두 물체의 운동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저 사과는 지면과 평행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속력이 없기 때문에 지면을 향해 곧바로 떨어지지만, 달은 엄청난 속력으로 날아가는 포탄처럼 지면과 평행인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원을 그리며 떨어진다는 것뿐이다. 지구 중심에서 지표면까지의 거리는 6,370킬로미터이고, 지구 중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38만 4,400킬로미터이다. 다시 말해 달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는 지표면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의 60배이다. 60의 제곱은 3600이다. 즉 달에 미치는 지구의 중력이 지표면에 미치는 지구의 중력보다 정확히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약해진 것이다. 뉴턴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약해지는 단일 힘이, 땅에 존재하는 사과와 하늘에 존재하는 달을 끌어당기고 있음을 입증했다. 정말로 중력은 보편 힘이었다. 26-7)<br>2장 · 마지막 마법사<br>똑바로 서 있는 원뿔을 상상해보자. 이 원뿔을 날카로운 칼로 깔끔하게 잘라보자. 칼로 원뿔의 한 옆면에서 다른 옆면을 완전히 통과하게 자르면 단면은 타원이 된다. 원뿔의 한 옆면으로 칼을 비스듬하게 집어넣고 밑면을 통과하게 자르면 한쪽 끝이 열린 ‘포물선’이 된다. 칼을 똑바로 세워 옆면과 밑면이 수직이 되게 자른 단면은 한쪽 끝이 열린 ‘쌍곡선’이 된다. 힘의 역제곱 법칙의 지배를 받는 천체의 이동 속력이 태양을 벗어날 만큼 충분히 빠르지 않으면(또는 에너지가 충분히 많지 않으면), 이 물체는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를 그리며 돈다. 태양을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이동 속력이 아주 빠른 천체는 쌍곡선 궤도를 그리며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두 물리 상태의 중간에 위치한 포물선 궤도를 그리는 천체는 태양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붙잡히지도 않는다. 공전 궤도가 포물선인 천체는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무한히 멀 때만 태양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37-8)<br>3장 · 3월에는 조수를 조심하라<br>지구는 부피가 있는 볼록한 천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달에 더 가까운 지역이 있다. 달은 가까운 지역을 먼 지역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긴다. 뉴턴은 달의 중력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력도 지역마다 다를 것임을 알았다. 물은 단단한 암석과 달리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에 달의 중력은 암석보다는 물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대양의 한 점 바로 위에 달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점에서 달이 대양의 해수면을 잡아당기는 힘은 좀 더 멀리 있는 대양의 바닥인 해저를 잡아당기는 힘보다 셀 것이다. 뉴턴은 중력의 이런 차이 때문에 해수면이 해저에서 멀어지고 대양은 달이 있는 방향으로 부풀어 오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의 중력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결과는 또 있다. 달에서 보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바다를 생각해보자. 이곳은 해저가 해수면보다 달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해수면보다 해저가 달의 중력을 더 강하게 받는다. 그 결과 해저의 물이 해수면으로 끌어당겨져 바다가 위로 볼록해진다. 48)<br>조수란 단순히 물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중력을 가해 그 물체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실제로 중력은 바로 밑에 있는 대양의 물을 볼록하게 부풀리는 것처럼 바로 밑에 있는 암석도 볼록하게 부풀린다. 그러나 암석은 물보다 훨씬 단단하기 때문에 변형되는 정도가 크지 않다. 달 때문에 암석이 늘어났다가 줄어들기 때문에 지구를 구성하는 단단한 부분들도 25시간에 두 번씩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이제 물을 머금고 있는 다공성 암석이 우물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암석은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라고 할 수 있다. 물을 빨아들인 스펀지가 그렇듯이 우물을 둘러싼 암석도 팽창하면 물을 빨아들이고 압축하면 물을 내보낼 것이다. 암석과 대양은 모두 만조 때는 팽창하고, 간조 때는 압축된다. 그 때문에 만조 때는 암석이 물을 빨아들여 우물 수면이 낮아지고 간조 때는 암석이 물을 내뱉어 우물 수면이 높아진다. 51)<br>달과 지구에 작용하는 조수는 단지 두 천체의 모양을 변형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구에서는 해수면을 높이거나 낮추고 달에서는 월진을 일으킨다. 달과 지구계의 전체 모습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는 달이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전했다. 그러나 지구와의 조수 상호작용 때문에 달의 자전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달의 자전 속도가 빠를 때는 지구의 중력으로 볼록해진 부분이 달의 자전 속도 때문에 옆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달의 볼록한 부분은 지구를 정면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의 중력은 옆으로 돌아가려는 볼록한 부분을 계속 잡아당기며 달의 자전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어느 시점이 되자 달의 자전 속도는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과 똑같아질 만큼 느려지고 말았다.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가 같은 달은 ‘동주기 자전synchronous rotation’을 하기 때문에 지구 중력에 끌려 볼록해진 부분이 계속해서 지구를 향한다. 이제는 달의 자전 속도가 '변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55)<br>그런데 조수 상호작용 때문에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천체는 달만이 아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도 느려지고 있다. 지구는 달보다 훨씬 무거워서 힘에 대한 운동 저항력이 더 크기 때문에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정도는 훨씬 적다. 그 증거는 산호초에서 찾을 수 있다. 열대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다 해양 동물인 산호는 탄산칼슘을 분비해 단단한 골격을 만든다. 산호는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듯 날마다 계절마다 두께가 다른 골격을 만든다. 산호가 만든 이 골격 층의 수를 세어보면 한 해가 몇 날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3억 5,000만 년 전에 살았던 산호 화석은 1년이 385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공전 주기는 다르지 않았을 테니 3억 5,000만 년 전에는 하루가 23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재 우리는 하루의 길이가 100년 전에 비해 1.7밀리초 가량 늘었음을 알고 있다. 실제로 지난 2,500년 동안 하루의 길이는 100년에 1.7밀리초씩 늘어나고 있다. 55-6)<br>달의 중력 때문에 지구에서 일어나는 조수운동은 지구의 자전 속도를 늦추고, 그 때문에 지구의 ‘각운동량angular momentum’*은 줄어든다. 그런데 물리학에는 ‘고립되었거나 닫힌’ 계(고립계) 안에서는 절대로 각운동량이 변할 수 없다는 기본 강령이 있다(각운동량 보존법칙). 따라서 지구의 각운동량이 줄어들면 이를 보상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의 각운동량이 늘어나야 한다. 그 다른 무언가가 바로 달이다. 달이 직선 궤도를 벗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공전 궤도를 지금의 공전 속도로 움직이려면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달의 공전 속도가 빨라지면 달이 조금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직선 궤도가 원 궤도로 구부러질 수 있기 때문에 달의 공전 궤도는 지금 궤도보다 조금 더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지구에서 달로 쏘아 보내는 전파의 이동 거리는 해마다 3.8센티미터씩 늘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달은 열두 달을 주기로 엄지손가락만큼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58)<br># 각운동량 : 회전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량<br>분점의 세차, 즉 지구가 흔들리는 운동을 하는 이유는 지구의 자전축이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뉴턴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뉴턴은 태양과 달의 중력뿐 아니라 지구의 자전 때문에도 지구의 형태가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지구의 적도 위에 있는 물체는 시속 1,67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날아다녀야 한다. 지구의 중력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붙잡아둘 강력한 구심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실제로 지구는 완벽한 원이 아니라 적도 부분이 23킬로미터 정도 볼록하게 부풀어 있다. 뉴턴은 지구의 ‘적도가 볼록하게 부풀어 있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중력을 받는 지구는 돌아가는 팽이처럼 흔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지구의 자전축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돈다. 뉴턴은 태양과 달의 중력이 적도 부근이 볼록한 지구에 작용하면 자전축은 2만 6,000년 만에 한 번씩 회전해야 한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는데, 이는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 67-8)<br>4장 · 보이지 않는 세상을 그리는 지도<br>중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보편적인 힘이라는 점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티끌 한 점이라도 다른 모든 물질의 티끌 한 점에 중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가령, 목성(질량이 태양질량의 1000분의 1)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지구에 미치는 중력은 태양 중력의 1만 6000분의 1이다. 태양계에 있는 행성들이 다른 행성에게 미치는 중력은 태양이 미치는 중력에 비해 너무도 작기 때문에 뉴턴은 행성의 경로를 계산할 때 행성이 다른 행성에 작용하는 중력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지구 같은 행성은 수많은 천체의 영향을 받으며 움직인다. 그러기 때문에 태양 주위를 완벽한 타원 궤도로 공전할 수 없다. 케플러의 제1법칙은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가까울 뿐이다. 태양 말고도 다른 천체들이 잡아당기기 때문에 행성의 타원 궤도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점차 방향이 바뀌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쪽의 궤도는 태양 가까이 가면 ‘변형’된다(세차가 생긴다). 73)<br>은하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항성에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약해진다. 따라서 루빈과 포드는 태양계의 행성들이 그렇듯이 은하의 항성들도 중심에서 멀어지면 공전 속도도 느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관측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은하 중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항성들을 관찰한 두 천문학자는 항성들의 공전 속도가 거리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하 외곽에 있는 항성들도 아주 빠른 속도로 공전하고 있었다. 그 정도 속도라면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다가 멀리 날아가는 아이들처럼 항성도 은하를 벗어나 우주 공간으로 멀리 날아가야 했다. 그렇게 빠르게 도는 항성을 붙잡을 수 있는 강력한 중력은 은하에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항성들은 빠른 속도로 공전하면서도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놀랍겠지만 나선은하는 '암흑물질'이라는 광대하고도 둥근 구름에 파묻혀 있다. 암흑물질의 양은 관측 가능한 항성을 모두 합친 것보다 10배는 많다. 79)<br>중력은 단순히 이 우주에는 암흑물질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암흑물질이 어떤 식으로 분포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아주 먼 은하에서 지구로 오는 빛은 지나가는 경로에 존재하는 암흑물질의 중력 때문에 ‘굴절’된다(중력 렌즈 효과). 먼 은하에서 오는 빛이 이동하면서 약한 중력 렌즈 때문에 상이 굴절되는 정도를 측정하면 암흑물질이 어떤 식으로 분포되어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현재 칠레 고산지대(루빈 천문대)에는 중력 효과를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나선은하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곳에서도 발견되었다. 우주는 138억 2,000만 년 전에 엄청난 폭발(빅뱅)과 함께 탄생한 후 지금까지 팽창하면서 점점 식어왔다. 차갑게 식은 잔해들은 우리은하를 비롯해 1,000억 개에 달하는 은하로 응축되었다. 그런데 이 가설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가설로는 우주의 매우 중요한 특성을 예측할 수 없다. 이 가설이 예측하는 우주에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 80)<br>은하는 빅뱅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덩이 중 다른 지역보다 아주 조금 더 조밀했던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아주 조금 더 조밀해진 지역은 아주 조금 더 중력이 세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질을 끌어당길 수 있고, 한번 끌어당기기 시작하면 중력은 더욱 커져서 다른 곳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주변 물질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 과정이 너무도 천천히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주가 탄생한 시간부터 우리은하 같은 거대한 은하들이 탄생하기까지의 시간으로 138억 2,000만 년은 너무 짧다. 은하가 형성되려면 우리가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중력을 가해 은하의 생성 속도를 높여줄 물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질량-에너지는 4.9퍼센트를 원자가, 26.8퍼센트를 암흑물질이 가지고 있다(나머지 68.3퍼센트는 1998년에 발견한, 역시 보이지 않는 ‘암흑 에너지’가 가지고 있다. 암흑 에너지는 우주를 가득 메운 반동 중력이다). 80-1)<br>2부 아인슈타인5장 ·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br>시간 지연 현상은 ‘뮤온muon’이라는 우주선cosmic ray을 관측할 때 훨씬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뮤온은 지표면에서 12.5킬로미터 상공의 대기에서 생성된 뒤에 아원자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뮤온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생성된 뒤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뮤온의 소멸 시간은 150만분의 1초 정도 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뮤온은 생성된 뒤 500미터도 이동하지 못하고 소멸해야 한다. 상층부 대기에서 생성된 뮤온 가운데 12.5킬로미터 아래의 지표면에 도달하는 입자는 단 한 개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뮤온은 지표면에 도달한다. 생성되자마자 소멸하는 뮤온이 지표면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는 뮤온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의 99.92퍼센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뮤온은 슬로모션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뮤온의 시간은 우리 시간보다 25배나 느리게 흐른다. 뮤온이 소멸되리라고 깨닫는 시간이 실제보다 25배 길어진다는 뜻이다. 98-9)<br># 우주선 :&nbsp;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내려오는 매우 높은 에너지의 입자선을 통틀어 이르는 말<br>빛의 속도가 우주의 주춧돌이라면 한 사람의 공간은 다른 사람의 공간과 시간이며, 한 사람의 시간은 다른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일상의 우주에서 이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 세상에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은 탄력이 있어서 한계 없이 무한히 늘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바뀔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과 북, 동과 서, 위와 아래로 뻗어 있는 3차원 공간과 과거와 미래를 나타내는 시간이라는 1차원으로 이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간 차원과 시간 차원이 한데 뒤엉켜 시공간이라는 4차원 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4차원 실재가 우리 3차원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은 4차원의 한 그림자이며, 공간은 4차원의 다른 세 가지 그림자이다. 103)<br>이 세상에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은, 즉 시간이 공간의 특성을 일부 공유한다는 것은, 평범한 2차원 지도 위에 지형을 그려 넣을 수 있듯 4차원 지도 위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려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4차원 지도 위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4차원 지도를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이 볼때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4차원 시공간 지도 위에는 우주가 탄생한 빅뱅에서부터 우주의 소멸에 이르는 동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동시에 펼쳐져 있다. 4차원 시공간의 지도 위에는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사슬처럼 펼쳐져 있다. 뱀처럼 지도 위를 가로지르며 펼쳐진 이 사건의 사슬을 물리학자들은 ‘세계선world line’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시간을 흐르는 것으로 경험하는 우리의 감각은 물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의 뇌가 실재reality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108)<br>시간과 공간은 물리학의 거의 모든 개념을 떠받드는 초석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움직이는 모래라면 다른 개념들도 역시 움직이는 모래일 수밖에 없다. 전기장과 자기장을 생각해보자. 공간과 시간이 시공간의 두 측면일 뿐이듯, 전기장과 자기장도 전자기장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 맥스웰은 관찰자가 전하를 띤 전자 같은 물체와 나란히 움직이면 전자는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관찰자는 전기장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전하를 띤 물체가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하면 관찰자는 전기장과 자기장을 동시에 느낀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석과 나란히 움직이면 관찰자는 자기장을 느낀다. 그러나 자석이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한다면 관찰자는 자기장과 전기장을 느낀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전기장과 자기장, 공간과 시간이 각각 한 동전의 양면임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질량과 에너지도 같은 존재의 두 가지 다른 측면임을 깨달았다. 104-5)<br>아인슈타인의 E=mc2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일 뿐 아니라 에너지에는 유효질량이 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 에너지, 열 에너지, 화학 에너지, 무엇보다도 운동 에너지는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체에는 내재된 질량(보편적으로는 ‘정지 질량’이라고 부른다)도 있지만 운동을 통해서도 질량이 생긴다. 즉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면 그 물체의 질량이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질량 증가를 분명히 인지하려면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야 한다. 어쨌거나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고 그 결과로 질량이 증가하면 그 물체는 쉽게 밀어 옮길 수가 없게 된다. 실제로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질량은 무한히 커진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주에는 한 물체의 질량을 무한히 크게 바꿀 수 있을 만큼 많은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광선을 잡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106)<br>다음으로 아인슈타인은 동일한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양하게 속도가 변하는(‘가속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간과 시간을 측정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물리 법칙은 언제나 같아야 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가속도 운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 외에도 훨씬 더 심각한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뉴턴의 중력 이론과 본질적으로 부딪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뉴턴의 중력 법칙은 태양처럼 거대한 물체에서 나오는 중력의 힘이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한다. 그것은 어느 장소에 머물든 거대한 물체의 중력은 그 즉시 느낄 수 있다는 뜻이며, 중력의 효과가 무한 속도로 퍼져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심지어 중력조차도 우주의 한계 속도인 빛의 속도를 능가해 퍼져 나갈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정한 우주 한계 속도와 중력 이론을 통합하는 방법은 ‘장field’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107)<br>역장force field과 역선line of force이 있는 중력장을 참고해 아인슈타인은 질량(물체)이 중력장을 만들고, 이 중력장이 다른 질량(물체)에 중력을 가한다는 이론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중력도 장이 있어야 특정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빛이 우주의 한계 속도라는 설정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중력장 이론을 구축하는 일은 아인슈타인에게 두 번째 문제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세 번째 문제도 있었다. 뉴턴의 중력 이론에서 중력을 생성하는 ‘근원’이 질량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아인슈타인은 형태에 상관없이 에너지라면 모두 유효질량이 있기 때문에 중력을 발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중력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질량이 될 수 없었다. 중력을 만드는 것은 에너지였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1905년에도 이런 문제들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려면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108)<br>6장 · 떨어지는 사람을 위한 시<br>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몸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1907년, 아인슈타인에게 찾아온 이 깨달음이야말로 새롭고 혁명적인 중력 이론 체계의 초석이 되어주었다. 한 남자가 승강기 안에 있다. 갑자기 승강기 줄이 끊어진다. 승강기 줄이 끊어지기 전에 남자는 승강기 바닥에 놓여 있던 저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승강기 줄이 끊어지는 순간, 70킬로그램을 가리키던 저울의 눈금은 0킬로그램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떨어질 때는 몸무게를 느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법칙에서는 아주 쉽게 중력이 없는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저 자유낙하만 하면 된다. 자유낙하를 하는 순간 중력도 몸무게도 사라져버린다. 중력을 느끼지 못한 채 자유낙하하는 상황은 어떤 행성의 중력도 느끼지 못한 채 텅 빈 우주에 떠 있는 상황과 구별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이 중력 법칙과 특수 상대성 이론에 다리를 놓아준다. 두 상황 모두 특수 상대성 이론의 법칙들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112-4)<br>중력을 받은 물체는 질량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 냉장고처럼 무거운 물체와 나무 의자처럼 가벼운 물체가 동시에 같은 힘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하는 모든 실험에서는 냉장고처럼 무거운 물체의 속도를 높이려면(즉 가속도를 높이려면) 작은 물체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거운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크기 때문이다. 관성이라는 저항력이야말로 물체가 ‘질량’을 갖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물체에 가하는 힘이 중력일 때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질량이 클수록 같은 속도로 움직이게 하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중력은 마치 질량이 큰 물체에게는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자기 힘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성 질량이 두 배 큰 물체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저항력도 두 배 크다. 그러나 낙하할 때는 두 배 더 큰 중력을 받기 때문에 질량이 작은 물체와 똑같은 속력으로 떨어진다. 114-5)<br>갈릴레오 이후로 사람들은 움직임에 대한 물체의 저항력(관성 질량)과 중력 때문에 경험하는 힘(중력 질량)은 전적으로 다른 힘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런 모든 사람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지는 사람은 몸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즉 중력을 받으며 떨어지는 모든 물체의 가속도는 동일하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은 동일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중력은 가속도라는 사실 말이다. 1907년에 아인슈타인은 서로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 가속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세상을 묘사하려면 상대성 원리를 일반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뉴턴의 중력 법칙이 자신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중력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상대성 이론을 일반화하자 그 자체로 새로운 중력 이론이 되었다. 115)<br>지구 같은 행성의 중력에서 멀리 벗어난 우주선에서 한 우주비행사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우주선은 중력가속도 1g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비행사는 지구 표면 위에서처럼 발을 선실 바닥에 붙인 채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우주선 창문이 온통 깜깜해서 밖을 볼 수 없다면 이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지구에 있는 어느 방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우주비행사로서는 자신이 지구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중력을 가속도와 구분할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망치와 깃털을 가져온 우주비행사는 두 물체를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가 동시에 놓았다. 두 물체는 같은 속도로 떨어져 선실 바닥에 동시에 닿았다. 자신이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구 표면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주비행사는 두 물체가 동시에 바닥에 닿은 이유는 모든 물체를 같은 속도로 떨어지게 하는 중력 때문이라고 믿었다. 116)<br>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주비행사가 지구 표면이 아니라 그 어떤 행성의 중력도 닿지 않는 우주 공간에 떠 있음을 알고 있다. 우주비행사가 망치와 깃털을 동시에 놓았을 때 이동한 것은 두 물체가 아니라 우주선의 선실 바닥이었다. 우주선의 선실 바닥이 중력가속도 1g의 속도로 위로 올라가 망치와 깃털에 동시에 부딪힌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다른 힘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중력은 환상이다. 중력은 가속도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가속도와 구별할 수 없다’는 말로 등가원리Principle of Equivalence를 규정했다. 바로 이 등가원리가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을 떠받치는 초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가속도를 중력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깨달은 것처럼 사람의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16-7)<br>밖을 볼 수 없는 우주선의 그 우주비행사는 다른 실험을 이번에는 레이저를 이용했다. 레이저를 가져와 바닥에서 1미터 높이에 있는 선반 위에 레이저를 올려놓았다. 우주비행사가 레이저를 켜자 레이저 빔이 선실을 수평으로 가로질렀고 선실 벽에 밝은 파란 점이 생겼다. 벽으로 걸어간 우주비행사는 파란 점이 선실 바닥에서 1미터 높이보다 낮은 곳에 맺혔음을 확인했다.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레이저 광선은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주선이 중력가속도 1g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광선이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바닥은 위쪽으로 가속도 운동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광선이 선실 바닥에서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곳에 닿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지구의 표면에서 중력을 받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중력이 있으면 빛은 경로가 휘어진다고 생각했다. 즉 중력이 빛을 휘어지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117)<br>그렇다면 중력은 왜 빛을 휘게 하는 걸까? 빛이 갖는 뚜렷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두 점 사이를 통과할 때면 언제나 가장 짧은 경로를 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짧은 경로는 직선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아인슈타인은 깨달았다. 언덕과 같은 지형에서는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이 직선이 아니다.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은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곡선이다.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경로가 직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레이저 광선이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모습을 확인한 우주비행사에게도 의미가 있다. 도보 여행자가 지나는 언덕 지형처럼 우주선의 선실이 구부러진 공간이라면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은 곡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력이 빛을 구부리는 이유는 중력이 뒤틀린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력은 뒤틀린 공간이다. 뉴턴의 세계관으로는 이토록 크게 바뀌는 중력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117-8)<br>중력은 뒤틀린 시공간이기 때문에 공간을 가지고 놀 뿐 아니라(빛의 경로를 구부린다) 시간도 엉망으로 만든다. 마주 놓인 두 거울 사이로 레이저 광선이 수평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가상의 ‘시계’가 있다고 해보자. 한 시계는 지표면에, 한 시계는 지표면에서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는 높이 있는 시계보다 육중한 지구에 더 가깝기 때문에 조금 더 강한 중력을 느낄 것이다. 그 말은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의 거울 사이를 움직이는 광선이 높은 곳의 광선보다 좀 더 구부러진 곡선 경로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좀 더 구부러진 경로로 이동한다는 것은 좀 더 먼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의 광선이 두 거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시간은 높은 곳에서 왔다갔다하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즉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가 위쪽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시간의 흐름은 중력이 강할수록 더 느려진다. 119)<br>7장 · 신은 0으로 나누었다!<br>놀랍게도 슈바르츠실트는 충분한 질량이 충분히 작은 부피로 응축되면 시공간은 바닥이 없는 우물처럼 아주 기이한 형태로 뒤틀린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시공간의 내벽은 너무도 가팔라서 광선조차도 시공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비한 뒤에 소멸하고 만다. 이런 시공간은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밤보다 훨씬 어둡다.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런 뒤틀린 시공간에 이름을 붙인 것은 1967년, 미국 물리학자 존 휠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공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슈바르츠실트의 해는 ‘블랙홀’을 기술하고 있었다. 슈바르츠실트의 블랙홀은 ‘사건 지평선’에 둘러싸여 있다. 이 사건 지평선을 넘어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면 빛도 물질도 절대로 다시 나올 수 없다. 사건 지평선을 측정하면 블랙홀의 ‘크기’를 알 수 있다. 태양이 블랙홀이 되려면 태양의 전체 질량이 반지름 3킬로미터인 구로 압축되어야 한다. 141-2)<br>백색 왜성의 질량이 클수록 중력은 내부 전자를 더욱 단단하게 압축하고, 전자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전자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 속도를 빛의 속도로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사실이었다. 전자의 속도가 우주의 한계 속도에 가까워지면 전자는 훨씬 무거워지고 속력은 증가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항성을 응축하려는 중력의 힘을 막는 것은 결국 양철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계속 부딪쳐 바깥쪽으로 힘을 가하는 전자들이었다. 이 전자들이 더욱 가까운 거리로 응축되면 속력 변화율이 작아지기 때문에 중력을 이기는 힘은 점차 소멸되고 말 것이다. 찬드라세카르는 거듭해서 계산하고 거듭해서 검토했다. 수명이 다할 때 항성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1.4배가 넘는다면 전자 축퇴압도 항성을 살리지 못한다. 중력은 무자비하게 항성을 으깨버릴 것이다. 우주에서 그토록 맹렬한 중력을 막을 힘은 없다. 145)<br># 찬드라세카르 한계 : 태양보다 1.4배 큰 항성<br>수명이 다한 큰 질량의 항성은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져서 가차없는 중력에 붙잡혀 점점 더 조그맣게 축소된다. 이제 극도로 압축된 항성 내부에서는 전자가 원자핵 안으로 들어가 양성자와 반응하면서 중성자를 만들어낸다. 중성자도 전자처럼 페르미온이다. 중성자 가스도 전자 가스처럼 항성을 단단하게 만들어 항성이 중력에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중성자는 원자보다 훨씬 작다. 그 때문에 거대한 항성은 지구만 한 백색 왜성이 되지 않고 에베레스트산만 한 중성자 덩어리가 된다. 이런 ‘중성자별’은 각설탕만 한 부피라고 해도 인류 전체의 무게를 합친 것만큼 무겁다. ‘중성자 축퇴압’이 항성의 중력 붕괴를 막아 더는 붕괴하지 않게 해주지만 백색 왜성의 경우처럼 그런 항성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중성자별을 이루는 구성 입자들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상대론적’ 입자들이다. 따라서 특정 질량 한계를 넘어가면 중성자별조차도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진다. 146)<br>자연의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으로 묶여 있는 중성자의 물리학은 전자기력으로 상호작용하는 전자의 물리학보다 복잡하다. 그 때문에 찬드라세카르 한계와 달리 중성자별의 한계 질량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중성자별의 한계 질량은 1932년에 러시아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Lev Landau가 처음 계산했고, 보통 태양 질량의 세 배 정도라고 믿고 있다.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항성은 특이점으로 수축하는 것을 막을 힘이 전혀 없다. 이 세상에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무거운 항성이 없다면 중성자별의 질량 한계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별은 틀림없이 있다. 드물기는 해도 태양 질량의 100배가 넘는 항성도 있다. 이런 항성들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해서 생애 동안 엄청난 양의 질량을 소비하면서 격렬하게 타오른다. 하지만 많은 질량을 외부로 방출한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마침내 죽을 때조차도 태양의 질량보다 세 배 이상 크다. 이런 항성은 결국 블랙홀로 압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146-7)<br>1930년대 말에 매우 엉뚱한 이유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가 팽창하는 우주가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팽창하는 우주를 고민하게 된 이유는 자연의 원소들을 만드는 용광로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가장 가벼운 수소를 시작으로 가장 무거운 우라늄까지 92개의 원소가 존재한다. 가모브는 우주는 수소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수소가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레고 블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원소들은 수소를 기반으로 차례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모브는 항성은 그런 용광로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잘못된 믿음이었다). 그래서 다른 용광로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팽창하는 우주가 영화의 거꾸로 돌리기처럼 다시 수축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수십억 년(우리는 지금 그 시간이 138억 2,000만 년임을 알고 있다)을 뒤로 돌리면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은 아주 작은 부피로 압축된다. 바로 그때가 우주의 탄생 순간, 빅뱅이다. 150)<br>3부 아인슈타인을 넘어서8장 ·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다<br>뜨거운 원자 가스 속에서는 빛 파장이 반복해서 방출되고 흡수되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가능한 모든 빛 파장이 생성된다. 이런 ‘열적 평형thermal equilibrium’ 상태에서는 모든 가능한 파장을 가진 파동들이 에너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다. 그런데 빛 파동의 최대 파장은 크기에 한계가 있지만(빛이 담겨 있는 용기 크기만큼만 커질 수 있다), 빛 파동의 최소 파장은 한계가 없다. 즉 어떤 파장을 택하든 한 파장을 택하면 장파장의 수는 언제나 유한하지만, 단파장의 수는 무한이 된다는 뜻이다. 장파장보다 단파장을 가진 파동이 훨씬 많기 때문에 에너지는 대부분 단파장들이 운반한다.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뜨거운 원자 가스가 지닌 에너지는 가장 에너지가 큰 X선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1895년에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기 전까지 가장 에너지가 높은 빛은 자외선이었다. 고에너지 X선에 에너지가 몰리는 현상을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158)<br>19세기 말에 전자 기술 분야의 킬러앱은 단연코 전구였다. 따라서 ‘전구의 가열된 필라멘트에서 최대한 많은 양의 가시광선을 방출하게 하는 방법’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뜨거워진 필라멘트가 뜨거운 기체로 이루어진 태양처럼 그 즉시 X선을 방출하는 것이 빛을 설명하는 최상의 이론이라면 그 방법을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대로라면 전자 같은 전하를 띤 진동 입자는 자신의 진동 ‘주파수’에 맞는 빛을 방출한다. 맥스웰의 이론은 가속한 전하가 전자기 복사를 방출한다고 기술하지만, 실제로 진동하는 전하는 그저 반복적으로 가속되고 있을 뿐이다. 플랑크는 진동하는 용수철이 마음대로 에너지를 방출하고 흡수하는 대신 정해진 기본량의 배수로만 에너지를 방출하고 흡수할 수 있다면 이런 재앙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플랑크는 용수철이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있는 에너지 기본량을 h에 진동수 f를 곱한 값이라고 했다. 158-9)<br>플랑크가 생각한 원자-용수철 가설에서 에너지가 hf의 배수로만 방출되거나 흡수되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그가 이런 상상을 한 이유는 오직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플랑크는 진동하는 입자(진동자)는 살짝 높은 에너지에서는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없다고 했다.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있게 허용된 다음 단계의 에너지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즉 모 아니면 도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진동자가 빛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없다면 빛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빛 파동들이 에너지를 나누어 가질 때, 진동수가 가장 높은 파동은 에너지의 많은 몫을 차지하기는커녕 아예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에너지를 갖기에는 너무 비싼 입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에너지가 가장 많은 빛을 길들이면 자외선 파탄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를 속도의 한계로 정하자 무한infinite이 해결되었듯, 플랑크가 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자 무한소infinitesimal가 해결되었다. 160)<br>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방정식과 플랑크의 방정식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빛도 행동하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플랑크가 그저 수학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양자는 실제로 존재했다. 훗날 이 덩어리에는 ‘광자photon, 光子’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제 우리는 에너지, 물질, 전하, 그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덩어리(양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자연의 가장 작은 단계는 고전물리학이 예상했던 것처럼 연속적이지 않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은 점들이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가장 작은 단계도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리 상수’ h는 플랑크 상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플랑크 상수가 극단적으로 작기 때문에 광자 한 개가 운반하는 에너지도 엄청나게 작다. 그 때문에 전구에서 나오는 빛이 사실은 급류처럼 쏟아지는 작은 총알들임을 절대 눈치채지 못한다. 쏟아져 나오는 작은 총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연속적으로 보인다. 160-1)<br>두 전자나 두 산소 원자 같은 완벽하게 동일한 양자 물체들이 볼링공처럼 수백 번 부딪친다고 생각해보자. 양자 물체들은 수백 번을 부딪쳐도 절대로 가지 않는 방향이 생긴다. 왜일까? 그 이유는 한 입자의 확률 파동의 마루가 다른 입자의 확률 파동의 골과 만나 서로 간섭을 일으키면서 상쇄되어 입자를 찾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간섭’은 양자 입자를 관측하기 전에 중첩된 두 양자 파동이 상호작용하게 해준다.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가 원자핵으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돌 수 있는 이유도 간섭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자가 원자핵을 향해 갈 수 있는 경로는 아주 많다. 전자는 나선을 그리며 원자핵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직선 경로나 파동처럼 요동치는 경로를 그리며 원자핵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당연히 이 모든 경로는 양자 파동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 양자 파동들은 원자핵 가까이 다가가면 모두 간섭을 일으켜 상쇄되기 때문에 원자핵 가까이에서 전자를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165-6)<br>만약 중력을 양자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중력을 운반하는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중력을 매개하는 가상 입자를 이론물리학자들은 ‘중력자graviton’라고 부른다. 중력자와 관련해서는 이론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주 많으며, 그런 입자는 없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그 힘을 전달하는 입자와 그 힘을 ‘느끼는’ 입자가 얼마나 많이 상호작용하는지가 힘의 세기를 결정한다. 그런데 중력의 세기는 다른 세 힘의 세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 수소 원자를 이루는 전자와 양성자 사이의 중력은 전자기력보다 1만×10억×10억×10억×10억 배만큼 약하다. 그 말은 중력은 물질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력자 문제는 별개로 치더라도,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과 양자 이론은 본질적으로 양립하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두 이론을 합치는 일은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중력을 제외한 자연의 다른 힘들은 시공간 안에서 작동하지만 중력은 시공간 자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171)<br>9장 · 미지의 세계<br>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진공 속에서는 입자와 반입자 쌍이 생성될 수 있다. 이런 ‘가상’ 입자들은 눈 깜짝할 순간보다도 더 짧은 순간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호킹은 블랙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양자 과정을 숙고하다 사건 지평선 외곽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건 지평선 부근에서 이제 막 생성된 입자와 반입자 쌍 가운데 한 입자는 블랙홀의 중력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다른 입자는 블랙홀의 중력에 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간 입자는 다시 블랙홀 밖으로 나와 함께 태어난 쌍입자를 소멸시킬 수 없다. 달아난 입자는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가상 입자가 아니라 실제 입자가 되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호킹은 이런 과정이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블랙홀 밖으로 끊임없이 튀어나오면서 빛을 내는 입자의 흐름을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라고 한다. 188)<br>블랙홀을 규정하는 특징은 내부에서 그 무엇도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호킹 복사를 이루는 입자들은 블랙홀 내부로 들어간 적이 없으니, 호킹 복사는 블랙홀 내부에서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지평선 가장자리 바로 너머에 있는 진공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호킹 복사를 하려면 어디선가 에너지가 와야 한다. 사건 지평선 부근에서 가져올 수 있는 에너지는 블랙홀의 중력 에너지뿐이다. 호킹 복사가 끊임없이 블랙홀의 중력 에너지를 가져오면, 블랙홀의 중력은 약해져서 블랙홀은 점차 수축할(증발할) 수밖에 없다. 블랙홀의 크기가 작을수록 호킹 복사는 더욱 격렬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아주 작은 블랙홀의 경우에는 아주 밝은 호킹 복사를 방출한다. 블랙홀은 쓸쓸하게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빛나는 존재는 당연히 열이 있다. 호킹 복사 때문에 빛이 나는 블랙홀도 마찬가지다. 그 열은 블랙홀이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블랙홀을 둘러싸고 있는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양자 과정 때문에 발생한다. 188-9)<br>블랙홀을 증발시켜 결국에는 사라지게 하는 호킹 복사는 물리학에 심각한 역설을 불러온다. 정보는 새로 생성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다. 달을 생각해보자. 뉴턴의 법칙을 적용하면 오늘 달의 위치를 가지고 내일 달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오늘 달의 위치는 내일 달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이 하늘길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에도 정보는 새로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보존’된다. 하지만 블랙홀이 증발하면 정보는 사라진다. 이 같은 상황을 간단히 말해 ‘블랙홀 정보 역설black hole information paradox’이라고 한다. 블랙홀에서 사라진 정보를 저장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호킹 복사다. 이런 ‘블랙홀 정보 역설’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이스라엘 물리학자 야코브 베켄슈타인Jacob Bekenstein이 찾았다. 1972년, 그는 사건 지평선의 ‘표면적’이 블랙홀의 ‘엔트로피entropy’와 관계가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189-90)<br>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에 엔트로피가 있다는 것은 블랙홀의 지평선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특색이 없는 매끈한 경계가 아니라 미시 구조를 갖춘 곳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1993년, 노벨상 수상자인 유트레히트 대학교 헤라르뒤스 엇호프트Gerardus 't Hooft는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은 특색이 없는 매끈한 구조가 아니라 거칠고 불규칙한 미시 구조를 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안했다. 이 작은 미시 세계에 존재하는 울퉁불퉁한 덩어리들이 블랙홀을 만든 항성의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고 했다. 엇호프트가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이 블랙홀의 사라진 정보를 저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발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드Leonard Susskind가 끈 이론으로 그 생각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진동하는 끈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국 정보는 사라지지 않았다.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 가운데 하나가 지켜진 것이다. 190-1)<br>우주도 블랙홀처럼 지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주의 ‘빛 지평선light horizon’은 우주의 가장자리가 아니다. 우주는 아마도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우주의 빛 지평선은 ‘관측 가능한 우주’의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이 빛 지평선 안에 있는 항성과 은하의 빛은 모두 우주가 탄생한 138억 2,000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닿을 시간이 있었다. 빛 지평선 너머에 있는 항성과 은하의 빛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그 빛들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엇호프트와 서스킨드는 3차원인 항성의 정보가 2차원인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에 각인된 것처럼 3차원인 우주의 정보도 2차원인 우주의 지평선에 있는 홀로그램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런 식으로 비유를 사용해 추론하는 것은 엄격한 물리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1998년, 아르헨티나 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Juan Maldacena는 우리가 ‘홀로그램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191-2)<br>양자 이론과 특수 상대성 이론을 양립하려고 시도하는 이론들을 ‘등각장론Conformal field theory’이라고 한다(표준 모형도 등각장론 가운데 하나다). 말다세나는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에 맞춰 춤을 추는 기본 입자들이 내부bulk에 가득한 5차원 우주를 상상했다. 그러고는 2차원인 풍선의 표면이 3차원인 공기 부피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4차원인 우주의 경계가 5차원인 우주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4차원 우주의 경계 안에는 등각장론에 맞춰 춤을 추는 입자들이 들어 있다. 말다세나는 놀랍게도 4차원 우주 경계에 관한 방정식들은 내부를 기술하는 훨씬 복잡한 방정식과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고, 동일한 물리학을 설명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서 5차원 우주의 내부에 작용하는 중력 효과가 4차원 우주 경계에 작용하는 양자 이론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아르카니-하메드는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은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19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711/50/cover150/89323222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711501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스기야마 마사아키 -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거대한 땅의 지배자, 유목민에 의해 세계사가 완성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35628</link><pubDate>Mon, 15 Jun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3562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8480115&TPaperId=1733562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1/34/coveroff/89984801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8480115&TPaperId=1733562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거대한 땅의 지배자, 유목민에 의해 세계사가 완성되다!</a><br/>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이경덕 옮김 / 시루 / 2013년 03월<br/></td></tr></table><br/>1장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br>"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중국본토》에서 '자이덴스트라세Seidenstraße'라는 말을 썼다. '비단길'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동과 서가 예부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연결되었다는 표현이었고, 그런 생각(실제로는 소망에 가까운)이 담겨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아마 별다른 생각 없이 《중국본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 알베르트 헤르만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자이덴스트라세'를 멋지게 포장했다. 《누란樓蘭》 등을 쓴 그의 영어본 《실크로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단히 환영 받았다. 그러자 실제로 그런 길이 있는지 없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그 길은 당연히 있는 길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행과 출판 등에서 뛰어난 산업 아이템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이렇듯 태어날 때부터 낭만적이었고, 지금은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이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문명'은 동·서에만 있고, 그 사이에 놓인 광활한 땅은 점點과 선線의 통과 지역에 불과했다."(37-8)<br>"유목민은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민족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유목민은 유랑에 고통스러워한다. '유遊'라는 글자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자는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출유出遊나 유학遊學에서의 의미, 즉 '나간다'라는 의미다. 유목에서 '유遊'는 이동, '목牧'은 목축을 가리킨다. 즉 '이동 유목민'이라는 뜻이다." "유목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유목민의 세계는 실로 거칠고 능력주의·실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습득해야 하는 능력은 말을 잘 타는 것이다. 또 기상이나 자연환경 전반에 민감해야 한다. 가족이나 가축에 대한 주의 깊은 시선과 배려는 물론 계획성과 인내력, 순간적인 판단력과 과감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유목민 집단에 대한 귀속성과 강한 개인의식, 얼핏 모순처럼 느껴지는 두 가지 면이 개인의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52)<br>2장 중앙유라시아의 구도<br>"더 큰 유라시아 세계사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적어도 10세기부터 시작된 거대한 '투르크 이슬람 시대'라는 조류 속에 유라시아가 있다. 그 조류 가운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종착지가 티무르왕조와 제2차 티무르왕조인 무굴왕조였다. 그리고 '공간'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걸친 '종적 구조'가 오랜 역사를 통해 존재하고 역사와 인간에 엄청난 역동성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최고의 사례가 역시 두 개의 티무르왕조다. 이 동서 유라시아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층 구조는 바다와도 연결된다. 여기에는 더 거대한 구도가 숨겨져 있다. 그 근거로 16세기 중반 무렵부터 활발해진 포르투갈의 인도 해역으로의 진출을 들 수 있다. 내륙에서 티무르왕조의 남하, 바다에서 포르투갈의 출몰은 연이어 발생했다. 이 '종적 관계의 구조' 속에서 '땅과 활의 시대'와 '바다와 총포의 시대'가 동시에 존재한 셈이다.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이 무굴왕조를 둘러싼 중층 지역 속에서 발생했다."(83)<br>"'이란'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란'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과 러시아 열강에 의한 외압 속에서 계속 축소된 '근대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보통 사용되고 있는 이란의 의미로는 자연환경의 이란고원조차 생각할 수 없다. 한편 거대한 '이란'이 있다. 예부터 외압을 견디어온 이란고원을 포함해 넓게 사용하고 있는 역사상의 개념이다. '이란 자민(이란의 땅)'이라는 오래된 기원을 가진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아무에서 미스르까지'의 땅, 즉 아무 강에서 이집트까지를 말한다. 이 드넓은 땅은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영역과 필적할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문명 세계'를 '이란'이라고 불렀다. 아무 강 건너편의 '야만족의 땅'은 '투란'이라고 불렀다. 문명관에 따른 구분이었다. 거기에는 일종의 가치관이 부여되어 있다. 고대 이후 중국 '문명'을 기준으로 한 화이사상, 또는 고대 그리스의 '헬렌'과 '바르바로이'의 관념과 비슷하다."(85-6)<br>"서북유라시아의 대초원에는 카자흐 스텝이 펼쳐져 있다. 끝없는 대초원이 볼가 강까지 이어진다. 이곳은 오히려 몽골 초원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이 거대한 초원 지대는 볼가 강을 넘어 돈 강, 드네프르 강, 도나우 강 입구까지 계속된다. 남쪽은 카프가즈 산맥의 북쪽 기슭에서 흑해 북쪽 연안 일대를 모두 덮고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기슭까지 이어진다. 말 그대로 대초원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유목민 군단과 그 국가를 길러냈다. 몽골 고원에 이어 유목 국가의 '제2의 요람'이다. 몽골 세계제국 시대에는 페르시아어로 '다쉬트 이 킵차크'라고 총칭했으며, 이는 '킵차크의 초원'이라는 의미이다. 페르시아어는 몽골 시대에 국제어로 사용되었다.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를 비롯한 그 가문과 그들의 영지를 조치 울루스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킵차크 한국'이라고 부르는 곳은 '다쉬트 이 킵차크'라는 당시의 국제용어에서 유래했다. 이 서북유라시아 대초원이 조치 울루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88-9)<br>3장 유목 국가의 원형을 찾아서<br>"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역사》 전편의 클라이맥스인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이 막 시작하기 직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전개한 북진 작전의 상대는 스키타이다. 때는 기원전 514년 또는 513년경이다." "그 당시 그리스인의 관념으로 유럽은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라는 두 해협을 경계로 북쪽에 펼쳐진 땅 전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 남쪽 가운데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 곳을 '아시아', 서쪽은 '리디아'(이른바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아시아와 유럽을 지금처럼 동쪽과 서쪽이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온난하거나 뜨거운 날씨, 풍요의 땅에서 사치스러울 정도의 문화의 꽃이 핀 것은 아시아 쪽이었다. 유럽은 한랭하고 소박한, 무례함의 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스키타이나 그리스 또한 위의 관념에 따르면 모두 '북쪽의 땅', 유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키타이-페르시아 전쟁'을 아시아와 유럽 최초의 대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106-8)<br>"스키타이 국가는 동방에서 진출한 사르마타이 집단에게 밀려 슬금슬금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기원전 3세기 중반 무렵에는 완전히 해체되고 만 듯하다." "그러나 그 사르마타이 또한 4세기 동방의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밀려온 파도에 휩쓸렸다. '사르마타이 연합'은 와해되었고 훈족의 패권 아래 흡수되었다." "이런 경위를 일괄해서 말하면 서북유라시아 방면에서는 유목 군사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연합체가 계속 형성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사이 동방에서 새로 나타난 무리에 의해 중심 집단의 교대와 연합체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곳의 '정치 전통'이 되었다." "13·14세기 몽골의 서북유라시아의 도착과 장기적인 지배가 그 마지막 파도였다. 조치 울루스를 정점으로 하는 300년에 걸친 느슨한 정치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러시아는 이 전통의 파도(초원 세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장하는)를 뒤집는 형태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진했고, 러시아라는 '유라시아제국'을 전前근대의 마지막에 출현시켰다."(120-2)<br>"한편 스키타이와 병립했던 아케메네스왕조 또한 다양한 지역 사회를 포함한 '거대 국가' 패턴의 원류를 이룬다. 즉 스키타이와 아케메네스라는 남북 양국은 그 후 유라시아 역사의 이중 국가 패턴(그것도 광역 국가의)의 원류인 것이다." "'세계제국' 아케메네스왕조를 실제적으로 건설한 다리우스 1세는 장대한 구상을 토대로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여러 갈래의 국가·사회의 건설 사업을 펼쳤다. 중앙과 속령이라는 양면을 기본으로 배려하며 재조직했던 다리우스의 여러 시책은 총체적으로 국가·사회·경제·문화 건설의 요점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그 후 인류사에서 '국가'라는 점의 원형, 특히 '제국 지배의 원형적 이미지'라고 해도 좋은 형태의 대부분은 모두 다리우스의 국가 건설 사업 중에 나오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의 도시 문명의 의미만을 오로지 높이 내걸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나 언설의 대부분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 것이지 부정하기 힘들다."(124, 127-8)<br>"동반부에서는 유목 국가의 형성이 서반부보다 훨씬 늦었다. 사실 '중화 본토'도 아케메네스왕조를 기준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크게 늦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중국 본토의 전국시대 이전 동방의 유목민들은 말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뛰어난 기마 기술과 그를 뒷받침할 각종 마구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동 목축의 범위 또한 지극히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 유목민이라고는 하지만 걸어 다니는 유목민이었고, 따라서 유목 생활의 내용이나 집단의 규모도 작았으며 군단이라는 의미 또한 매우 미약했다. 그런데 그것이 크게 변한 것이다. 도시 주민과의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또 하나의 의미를 전한다. 유라시아 서반부에서 발달한 기마 기술과 그것을 전제로 운영되는 넓은 범위의 활용이라는 말 그대로 유목 사회 시스템이 동방의 유목민들에게 거의 완전하게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희미한 존재였던 유목민들은 기동성과 집단 전술을 몸에 익히면서 급속도로 군사화되었다."(137-8)<br>"《사기》 〈흉노열전〉에서 권력을 장악한 묵돌은 냉정하고 과감한 타고난 군사 지휘관으로서(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일정 부분 이상화되어 묘사되고 있다. 거기에는 사마천의 명확한 의도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즉 자기가 속한 한왕조를 개국한 유방에 대한 묘사는 묵돌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사마천이 말하는 묵돌과 유방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우열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씩씩하고 용감한 영웅은 다름 아닌 묵돌이다. 어딘가 무능하고 어리석으며 칠칠치 못한 유방의 멍청한 모습을 《사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마천은 사태를 주시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읽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기록했다. 그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후세의 독자들이었다. 그것은 당시 현실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중화'라는 가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사전에 시야를 한정시키고 그 좁은 시야로 《사기》를 읽고 그 속에 담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뒤집힌 역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148-9)<br>4장 초원과 중화를 관통한 변동의 파도<br>"한나라와 흉노 간의 총력을 기울인 장기전은 결국 두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공격을 받은 흉노는 연합 주권의 형태 그 자체가 크게 흔들렸고 몇 가닥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편 공격을 한 한나라는 국가·사회의 내부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직접적으로는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말았다. 무제를 중심으로 한나라 정부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철·술을 전매로 바꾸었으며 '균륜', '평준' 등의 물가 조절 정책 같은 다양한 정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무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련의 전매제도는 이후 중화왕조에서 계승했고 세수의 절반 가까운 부분을 차지했다." "전쟁 비용 염출을 위한 당연한 결과로서 경제의 왜곡까지 더해져 사회에 짙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국 한무제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된 소제昭帝는 곧바로 흉노와 강화를 맺는다. 한나라의 약속 파기에서 시작된 '흉노-한 전쟁'은 다시 한나라의 요청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180-2)<br>"유연은 예의 묵돌의 후예로 선우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계보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성을 중국풍으로 유劉라고 쓴 것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인 유방이 종실의 딸을 묵돌에게 시집보낸 이후 한나라의 공주와 통혼에 의해 한왕조 유씨의 피가 선우 왕실에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왕실의 신성한 혈맥인 유씨 자체가 후한의 현제 이후 촉한의 황제였던 유비 일문 이후 정치적인 존재로는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흉노 왕족이 함께 쓰는 유씨야말로 제대로 된 유씨였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유연은 몸속에 과거의 두 제국인 흉노와 한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원과 중화의 틀이 무너지고 서로 난입해서 공방을 벌이는 난세였던 당시 유연이야말로 귀한 존재 가운데서도 귀한 존재였고 왕자 중의 왕자였다. 두 왕권의 혼혈이라고 해도 좋을 존재, 그 자체가 당시 아시아 동쪽에서 뛰어나게 우수하고 신성한 상징이었던 것이다."(203-4)<br>"한의 황제가 된 유연은 불과 2년 뒤인 영가 4년(31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진왕조 타도 작전이 한창일 때였다. 유연은 상징적인 혈통과 재능에 더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운명을 지닌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이른 죽음은 흉노왕조를 단명하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 상황을 다시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연이 없는 흉노족의 한왕조는 이미 초라해진 진왕조를 몰아냈다. 영가 5년(311년) 진의 수도 낙양은 한왕조의 흉노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이 전후의 동란을 일반적으로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난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권 교체였다. 이 사건을 진왕조에 대한 흉포한 '이민족의 반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중화사상의 산물이다." "애초에 이 시대에 있어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시대는 현실적으로 '이민족'과 '한민족'을 확실하게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근대주의의 편협한 '민족'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서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222)<br>"이번에는 시대를 건너뛰어 선비 탁발부가 결성한 대국은 북위라는 화북의 통일 정권으로 성장한 다음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고 각각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라는 이름으로 바꾼 다음 그 북제가 수隋에서 당으로 바뀐다. 즉 이들 정권은 모두 선비 탁발부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일련의 국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또렷하게 선을 긋기 어렵다. 대국에서 북위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른 국가는 중화풍의 왕조 이름을 바꾼 연속된 국가였다. 권력의 실제 그 자체의 연속성, 공통성에 착목하면 현실적으로는 '탁발拓跋 국가'라고 일괄해서 취급하는 것이 적절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5호 16국 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만이 '주변의 야만족'들이 중화에 도발한 시대라고 별다른 의심 없이 그 오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순수한 한족왕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잘해야 한漢·송宋·명明 정도밖에 안 된다. 북위나 당나라는 중화왕조로 보고 5호 16국은 이민족의 왕조로 보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224-5)<br>5장 세계를 움직인 투르크-몽골족<br>"5세기를 전후하여 초원 세계는 동쪽에서 차례로 투르크·몽골계 연합체인 유연, 투르크 색깔이 짙은 고거, 이란계가 정권 중심인 에프탈이라는 세 부류의 유목 국가가 나란히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삼국의 동서에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 있었다. 동쪽은 탁발 국가에서 유래한 북위가, 서쪽은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한 사산조페르시아가 그것이다. 이들 삼국과 두 나라, 모두 5개의 국가가 서로 착종한 정치 관계를 맺고 항쟁했다." "또한 이런 사태를 좀더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남중국의 남조와 동지중해 지역의 동로마 또한 다분히 깊은 관계와 이해로 얽혀 있었다. 즉 유라시아 동서에서 7개국이 진주처럼 꿰어져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7개국의 갈등은 '유라시아 시대'의 방문을 알리는 최초의 종소리였다. 그러나 그 각축 상황은 겨우 반세기로 끝났다. 6세기 중반 무렵 중앙유라시아의 한쪽 구석에서 보다 격렬한 시대와 정국을 주도할 강력한 유목 국가가 갑자기 출현했다. 그것은 돌궐이었다."(248-9)<br>"그러나 돌궐이 유라시아 동서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불과 30년 정도였다. 583년 돌궐은 동서로 분열했다. 동돌궐은 몽골고원을 본거지로 삼아 그 주변을 지배했고 서돌궐은 천산 산중을 근거지로 중앙아시아와 서북유라시아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러한 돌궐의 동서 양분은 돌궐 국가의 급격한 확대가 이루어진 초기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동쪽과 서쪽 두 개로 담당 지역이 양분되어 있었는데 결국 그대로 분할되고 만 것이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투르크계 주민을 기반으로 하는 한편 크고 작은 분권 세력이 할거했던 돌궐은 극히 이완된 연합체였다. 게다가 '국가' 전체를 통합시킬 수 있는 중앙권력은 거대한 판도와 비교할 때 너무나도 미약했다. '세계제국'을 지속시킬 수 있는 정치기구가 아직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대한 돌궐의 동서 분열은 탁발 국가에 행운을 안겨주었다." "581년 양견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대대로 물려받았던 작위인 수국공隋國公에서 따서 수왕조를 열었다."(253-5)<br>"아마 성립 초기의 당왕조는 다시 강력해진 동돌궐의 속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곧바로 역전되었다. 동돌궐의 지배 아래에 있던 철륵鐵勒을 비롯한 설연타薛延陀 등 투르크계 여러 부部가 독립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막 당나라의 제2대 황제가 된 태종 이세민은 630년 이를 기회로 삼아 일거에 힐리 카간을 밀어붙였고, 동돌궐의 옛 속국과 독립을 지향했던 여러 부를 회유하며 자신을 카간으로 섬길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청해 지방의 토욕혼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급속하게 국가를 형성한 감숙회랑이 이끄는 토번과 화친을 맺은 당왕조의 세력권은 단숨에 아시아 동방 전체를 덮을 만큼 넓어졌다. 태종 이세민이 내륙 아시아의 군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투르크-몽골어로 '텡그리 카간'이었다." "계보로 보면 선비 탁발부 출신으로 부계나 모계 모두 분명 흉노로 거슬러 올라가는 당나라의 태종은 유목민들이 보기에 적합한 투르크 몽골의 왕이었다."(256-7)<br>"동돌궐은 744년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토쿠즈오구즈Toquz-Oghuz 연합에 의해 무너졌다. 토쿠즈오구즈 또한 투르크 계통이었다. 위구르는 ('안사의 난' 이후 급속도로 무력해진) 당왕조와 안전 보장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거액의 경제 지원을 받는 화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당왕조 중앙정부의 재정을 극도로 약화시켰고, 마침내 당은 탁발 국가의 전통이었던 조용조租庸調를 근간으로 하는 세금 체계에서 양세법兩稅法에 의한 세금 징수 시스템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역대 중화왕조에서 소금 전매가 중앙 재정의 근간이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위구르의 주도는 정치·군사 면에 그치지 않았다. 돌궐 이후 투르크 국가와의 인연을 강화한 소그드 상업 세력과 결탁한 위구르는 소그드인의 대상들을 활용해서 자기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당왕조 중국에 말을 주고 비단을 받는 '견마絹馬 무역'을 확대했다. 물론 국제 상품인 비단은 소그드 상인의 상업망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로 전매되었다."(267-70)<br>"키타이(거란) 국가는 그 속에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를 품고 있었고 그 점에 대해 말하면 '유농遊農 복합 국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위구르 유목제국에서 명확해진 유목과 도시의 관계는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즉 단순히 유목 국가, 농경 국가로 구분하는 도식을 적용할 수 없는 시대로 이미 접어들었다. 유목 국가는 뭉치기도 쉽지만 깨지기도 쉬웠다.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했다. 붕괴되기 쉬운 것은 연합체가 갖고 있는 숙명이었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중앙권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구·조직이 국가 전체의 총량과 비교해서 극히 작았다는 점으로 압축된다. 그런데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서는 그 결점이 상당히 수정되었다. 키타이 국가는 유목 국가의 구조에 농경 국가의 시스템을 수용해서 당시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함과 지속력을 손에 넣었다. 즉 유목 국가는 키타이 국가 이후 국가 시스템이 변했다. 즉 국가의 형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287-9)<br>6장 몽골의 전쟁과 평화<br>"주로 혈연 또는 의리를 통해 유사 혈연으로 맺어진 소규모 집단을 편의상 '씨족'이라고 부르고 그런 '씨족' 집단이 지연地緣이나 정치적인 이유(이 경우도 '피'로 맺어진 친소 관계가 강조된다)로 하나로 모인 것을 편의적으로 '부족'이라고 부른다. 고원에 할거하는 여러 세력 가운데 동부의 흥안령 일대를 타타르Tatar, 콘기라트Qonggirat, 중부의 오르콘 토라 일대의 케레이트Kereyit, 북부의 셀렝게 유역의 메르키트Merkit, 그리고 서부의 알타이 일대의 나이만Naiman 등이 유력했다." "그러나 몽골('맹골萌骨', '몽올蒙兀')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오랫동안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던 듯하다. 약소 집단인 몽골부가 부상한 것은 12세기 무렵으로 테무진 등장의 전야라고 해도 좋다. 이때만 해도 몽골은 신흥 세력이었다. 12세기 끝 무렵 테무진은 몽골 집단의 리더로 부상했다." "여기에 용모와 언어가 제각각인 유목민들이 테무진이라는 일개 권위자 아래로 모여드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를 정치 연합체 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320-1)<br>"1206년 칭기즈칸을 칭한 테무진이 휘하의 유목 연합을 '대몽골국'이라고 명명하면서 몽골은 국가의 이름이 되었다. 인종과 민족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것이 몽골 확대의 열쇠다. 이때 '몽골'에는 '민족'이라는 용어로 부를 수 있는 동일성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모여든 몽골이 '몽골 공동체'가 된 것은 칭기즈 체제에 의한 유목 집단의 재편성이 일단 종료되고 대외 원정에 나서는 1211년부터다. 전후 6년에 걸친 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은 거국일치擧國一致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몽골과 금의 전쟁' 동안 신흥 '대몽골국'의 성년 남자 대부분은 고비사막의 북쪽에 있는 본거지(막북漠北)를 떠나 막남漠南의 땅에 병참기지를 구축하고 화북 전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국가 건립 후 곧 이어진 이 대작전에 의해 '대몽골국'의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몽골군'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속으로는 다양한 부족과 씨족에 속해 있었지만 겉으로는 '몽골'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을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자각했다."(322)<br>"동부 천산의 남북에 나라를 세운 불교·통상 국가인 '천산 위구르'와 그 서쪽인 천산 산중, 이리 강의 계곡에 나라를 세운 무슬림왕국인 '천산 카를루크'(카라한왕조와도 관계된)는 모두 투르크계 지배자를 섬긴 작은 국가였다. 두 국가 모두 일찍부터 몽골로의 귀속을 결정했다. 그리고 두 국가가 참가해서 역시 투르크계 이슬람 대세력인 호라즘샤왕국을 붕괴시킨 결과로 중앙아시아에서 서북유라시아, 서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투르크계 여러 집단이 차례로 몽골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특히 서북유라시아 초원의 킵차크족은 이보다 10년 후 '바투의 서쪽 원정'에 의해 조치 울루스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로 불과 4개의 천인대를 갖고 있었던 조치 집안은 일거에 30배가 넘는 대병력을 획득했고 몽골제국 전체에서도 굴지의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다." "몽골은 대부분 '동료'를 늘려 그것을 '몽골'이라는 이름 아래로 차례차례 편입했다. 편입·재편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조직화야말로 몽골의 확장에 큰 디딤돌이었다."(330-1)<br>"1260년을 정점으로 하는 제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무력에 의해 제5대 몽골 대칸의 지위를 손에 넣은 쿠빌라이는 방대한 인구와 드넓은 판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근본부터 재검토해야 했다." "몽골제국은 이후 쿠빌라이 집안이 독점하게 된 대칸의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서방의 세 영역을 포함한 '세계 연방'의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이른바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몽골제국을 쿠빌라이가 받아들였다고 말해도 좋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경제와 유통의 조절을 통해 유라시아 규모로 통상을 유도해서 분유分有 체제가 강화된 몽골제국 전역에서, 유라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를 연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그 전제로 남중국의 남송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국 전토를 판도에 넣었으며 남쪽의 습윤 아시아와 뜨거운 바다를 시야에 넣었다. 몽골제국이 확대되어가는 역사 속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바다 진출을 이루었다."(336-7)<br>"남송의 '유산'은 쿠빌라이 정권이라는 이용자의 도움으로 활짝 꽃을 피웠다. 몽골제국 전체에서 생각하면 쿠빌라이의 우방 훌레구 울루스는 중동의 동쪽 절반을 지배했다. 즉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무슬림 해상 세력은 모두 몽골의 손에 장악되었다. 쿠빌라이의 대칸 정권인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동서가 호응하는 형태로 몽골의 해상 진출과 동서 해양 무역의 장악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여기에 8세기 이후 무슬림 해양 상인의 동진이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현상과 당나라 말기 이후 남송을 거쳐 해양에 대한 지향성을 높여갔던 강남이라는 풍요로운 산업사회가 쿠빌라이의 '대원 울루스'라는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하나로 묶여 확실한 모습으로 시스템화되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내륙과 해양이 참된 시스템으로 결합된 시대의 개막이었다. '유라시아 대교역권'이라고 불러야 할 초대형 통상·교류의 소용돌이가 13세기 말기인 1280녀대 끝자락에 명확해졌다."(343-4)<br>"몽골의 확대와 그 후의 통치를 통해 군사·정치조직의 몽골과 상업·경제 조직의 무슬림 및 위그르와의 공동화 또는 일체화가 두드러졌다. 이런 면에서 이들을 각각 몽골 지배의 '겉'과 '속'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시 이들 상업 세력은 자기 이외의 누군가를 선택해서 '파트너'로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하면 자금을 모아서 대형 자본을 만들어 그것을 토대로 공동 또는 단체로 각종 경제 활동을 영위했다. 그것을 투르크어로 '오르톡Ortoq'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동료', '동업자'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변해서 '조합'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쿠빌라이는 이전부터 몽골과 표리일체의 관계였던 오르톡 무리를 더 강력하게 정권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 가운데 유력자를 정부 고관, 그것도 경제·실무 부문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해서 오르톡이라는 조직과 다양한 영리 활동을 통째로 국가 관리 아래에 두었다. 오르톡들은 쿠빌라이와 그 브레인들이 고안한 새로운 '세계 전략'의 첨병이었다고 보아도 좋다."(351-4)<br>7장 근현대사의 틀에 대해<br>"전근대의 유라시아 세계사는 군사력이 뒷받침된 정치권력이 사람들과 지역을 하나로 묶어 '국가'를 만들었다. 전근대의 유라시아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세계에서도 '민족'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 분명히 '민족'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확실한 유래와 전통을 가진 '민족'뿐만 아니라 막 만들어진 '민족'도 있다. '민족'이라는 생각 자체가 작위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근현대에 '소수민족'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 아마 국민국가가 '소수민족'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국가라는 환상 속에서 국가의 '주체'가 되는 '다수 민족'이 설정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소수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나 현재를 바라볼 때 '민족'이라는 말 속에 다양한 변화가 있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하나로 묶어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도에서 단색으로 칠할 수 있는 '민족'은 오히려 소수이며 때로는 부자연스럽기도 하다."(400-4)<br>"지구상에 있는 각각의 지역과 문명권에는 고유의 가치와 역사가 있고 각각 순위를 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문명권, 중동,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이 각각 병렬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오히려 일종의 '문명주의'가 숨겨져 있다. 현대의 눈을 들이대고 과거에도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역사와 지역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역사시대에 그런 지역 분리가 적당한지 여부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또 거론되는 여러 지역 사이의 연쇄나 역사 전개에 대한 통찰 또한 없다. 이들 모두 현대 본위의 접근 방식이다. 아니 그보다 과거의 유럽 중심주의와 비교해 각 지역을 '평등하게 다룬다'는 미명으로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분위기조차 존재한다. 그러나 과도한 분리는 오히려 역사의 현실을 숨기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게 본래의 역사에서 분리된 연구는 '지역사'나 '문명권사'로 한정되어 인류사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404-5)<br>"유라시아라는 용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입힐 필요가 없다. 유라시아라는 틀이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부분도 많다. 역사시대에도 그러했고 현대에도 유라시아라는 시각이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화의 역사를 열어젖힌 근대 서구는 극단적으로 무장한 군사 국가였다. 요컨대 세계사는 유목민이라는 땀냄새를 풍기는 군사 권력이 통합하는 시대에서 인력을 초월하는 육·해·공의 거대 전투력을 가진 시대로 이행한 것이다. 그 근대 서구형 문명이 몽골을 정점으로 하는 유목 국가를 '야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딘가 몹시 어리석고 웃기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상像·문명상像의 왜곡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고 할 때 아마 중앙유라시아와 유목민의 역사는 유력한 하나의 시점이 될지도 모른다. 근대 세계에서는 원래 '국가'라는 것에 배치되는 주변적인 존재로 여겼던 유목민이 사실은 과거 인류사를 유지하고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최대의 담당자였다. 바로 여기에 세계사라고 불리는 큰 패러독스가 있다."(405-6, 40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1/34/cover150/89984801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71349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불안할 땐 뇌과학 / 캐서린 피트먼, 엘리자베스 칼 - [불안할 땐 뇌과학 - 불안하고 걱정하고 예민한 나를 위한 최적의 뇌과학 처방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8247</link><pubDate>Thu, 11 Jun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82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082532469&TPaperId=173282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54/71/coveroff/e08253246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082532469&TPaperId=173282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불안할 땐 뇌과학 - 불안하고 걱정하고 예민한 나를 위한 최적의 뇌과학 처방전</a><br/>캐서린 피트먼.엘리자베스 칼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09월<br/></td></tr></table><br/>들어가는 글 | 불안에는 두 개의 통로가 있다 5<br>뇌에는 사실상 별개의 두 통로가 불안을 생성한다. 한 통로는 뇌의 커다랗고 구불구불한 회색 부분인 대뇌피질(cerebral cortex)에서 시작되고, 일상생활 속의 여러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사고를 결정한다. 다른 통로는 편도체(amygdalas)를 통해 이동하는데, 편도체는 뇌 좌우에 하나씩 있는 두 개의 아몬드 형태 조직이다. 편도체(두 개이지만 보통 단수 취급)는 지구상에 척추동물이 생겨난 이래 사실상 변하지 않고 세세손손 전해진 아주 오래된 두뇌 조직으로, 척추동물의 투쟁 혹은 도주(fight-or-flight) 반응을 일으킨다. 피질에서 비롯되는 생각은 불안의 직접적인 원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불안을 가중하거나 감소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불안을 일으키거나 조장하는 인지 작용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다. 반면, 편도체는 전혀 다른 통로다. 인간은 편도체가 상황이나 대상에 불안을 부여하는 방식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간이 소화를 돕는 걸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0-1)<br>제1부 | 불안을 느끼는 뇌에 대해 알아야 할 최소한의 지식<br>대다수 사람이 불안의 원인과 관련하여 떠올리는 것은 피질 통로(감각, 사고, 논리, 상상, 직감, 의식 기억 그리고 계획의 주된 통로)다. 불안 치료는 일반적으로 이 경로를 목표로 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더 의식적인 경로이기 때문에 이 경로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더 잘 인식하고, 기억하고 집중하는 것에 접근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편도체 통로에서 오는 불안은 대부분 신체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편도체는 뇌의 다른 부분들과 무수히 관련되며, 이런 상호 관련성은 여러 신체 반응을 무척 빠르게 격발한다. 0.1초보다도 더 빠른 찰나에 편도체는 아드레날린 분비를 급증시키고, 혈압과 심박수를 증가시키거나 근육 긴장도를 높일 수 있다. 이 외에 더 많은 신체 반응이 생긴다. 편도체 통로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 개입하지 않으며 피질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가동된다. 당신이 지금 겪는 불안에 명백한 원인도, 논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편도체 통로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면 된다. 17-8)<br>인간의 피질은 크게는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뉜다. 시각, 청각 그리고 다른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종합하는, 각각 다른 기능을 지닌 엽(葉: lobe)이라는 여러 부분으로 나뉜다. 피질은 뇌에서 인지와 생각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불안의 피질 통로는 감각 기관에서 시작된다. 눈, 귀, 코, 미뢰 그리고 심지어 피부마저도 세상에 관한 정보를 전달한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되고 피질의 여러 부위에 의해 해석된다.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가 전달됐을 때 그 정보는 시상(視床)으로 가는데, 이곳은 뇌에서 가장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곳이다. 시상은 말하자면 ‘중앙 중계국’으로 눈, 귀, 코 등에서 온 각종 정보의 신호를 피질로 보낸다. 시상으로 정보가 들어온 다음에는 다양한 엽들로 보내져 처리되고 해석된다. 그다음에 정보는 전두엽을 포함하여 뇌의 다른 부분으로 이동한다. 전두엽은 정보를 취합하여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두뇌의 핵심 부분이다. 20)<br>피질 통로는 불안의 주된 원천이다. 전두엽이 상황을 예측하고 해석하면서, 그 예측과 해석으로부터 종종 불안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예측’은 다른 피질 기반 작용인 ‘근심 걱정’을 만든다. 고도로 발전된 전두엽 때문에 인간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발생 가능한 결과를 예상한다. 반면 우리의 반려동물은 내일 문제 따위는 전혀 예측하지 않고 평화롭게 잠든다. 근심 걱정은 어떤 상황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기에 생기는 결과물이다. 불안이 생기는 두 번째 통로는 편도체다. 우리는 피질이 발생시키는 각종 생각과 이미지 때문에 불안으로 이어지는 피질 통로에 더 친숙한 것 같지만, 그 배후에서 불안에 관련된 각종 신체 경험을 일으키는 부위는 바로 편도체다. 편도체는 자신의 전략적 위치와 두뇌의 여러 조직과 맺는 상호 연관성을 작동시켜, 호르몬 방출을 통제하고 불안의 신체 증상을 만들어내는 등 뇌의 여러 부분을 활성화한다. 이렇게 하여 편도체는 신체에 강력하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21-3)<br># 편도체는 시상에서 바로 정보를 얻는다. 실제로 편도체는 ‘피질보다 먼저’ 정보를 받는다. 대뇌피질이 위험을 감지하기도 전에, 편도체 외측핵은 당사자를 위험에서 보호하도록 반응하는 것이다.<br>편도체의 영향을 받는 두뇌 조직으로는 뇌간 각성 체계(brain stem arousal system), 시상하부(hypothalamus), 해마(hippocampus), 측좌핵(nucleus accumbens) 등이 있다. 이런 직접적인 연관성 덕분에 편도체는 즉시 운동 신경을 활성화시키고, 교감 신경계에 동력을 공급하고, 신경 전달 물질의 활동 수준을 높이고,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을 혈류에 방출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런 활성화는 신체에 폭포처럼 변화를 일으킨다. 심박수가 늘고, 동공이 확장되며, 혈류는 소화관에서 사지로 흘러가고, 근육이 긴장하며, 신체에 동력이 공급되고 행동에 나설 준비를 갖춘다. 이런 생리적 변화에 대응하여 당사자 본인은 몸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복부와 창자에 고통을 느낀다. 이 모든 변화는 투쟁, 도주 혹은 얼어붙기 반응의 일부이다. 불안과 싸우려는 사람들은 책임 의식이 강한 편도체의 존재감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위험 상황을 맞닥뜨리면 뇌는 편도체에 ‘통제권’을 부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41)<br>많은 사람이 공황, 걱정 그리고 특정 대상이나 상황 회피 같은 불안장애 증상이 있으면, 이성적 논의로 그런 불안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의를 지닌 가족과 친구, 때로는 불안과 싸우는 당사자조차 논리와 이성이 환자의 증세를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 편도체는 논리적이지 않다. 많은 피질 기반 불안은 논리적인 주장에 반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편도체 기반 불안에 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 통하는데, 그건 바로 체험에 의한 학습이다. 편도체는 오로지 경험으로 학습한다. 이것은 몇 시간에 걸친 대화 요법이나 여러 권의 자기계발서를 독파해도 불안 해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런 요법이나 자기계발서는 편도체를 공격 목표로 삼지 않는다. 어떤 대상(예를 들어 쥐)이나 어떤 상황(시끄러운 군중)에 대한 본능적 반응을 바꾸길 바란다면, 먼저 편도체가 그와 ‘동일한’ 대상이나 상황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47)<br>피질은 두 가지 일반적인 방식으로 불안을 일으킨다. 첫째, 외부 사물의 광경이나 소리 같은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불안이 생긴다. 둘째, 피질은 어떤 구체적인 외부 감각의 개입 없이 불안을 발생시킨다. 단순한 생각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현상을 인지 융합(cognitive fus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피질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며, 자기 생각과 감정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궁극적 진실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완고한 믿음을 낳기도 한다. 생각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모든 생각, 정서 혹은 신체 감각의 진짜 의미를 자신이 온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 피질의 자신감 때문에 벌어지는데 이는 무척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다. 실제로 피질은 놀라울 정도로 오해와 실수를 쉽게 저지른다. 잘못되고, 비현실적이거나 비논리적인 생각을 하거나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정서를 경험한다. 그런 생각과 정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깊이 분석하지도 말며 그냥 머릿속에서 흘러가게 내버려두라. 49-50)<br># 좌반구 기반 불안(생각에서 나오는 불안)과 우반부 기반 불안(상상과 이미지에서 나오는 불안)으로 나눌 수 있다.<br>피질은 그 자체로는 불안 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 편도체와 뇌의 다른 부분이 협조해야 한다. 피질에서 비롯되는 생각, 이미지 혹은 예측이 무엇이든 간에 불안의 정서적・생리적 양상 다수는 피질이 편도체를 활성화할 때만 발생한다. 편도체는 피질에서 전달된 정보에 반응한다. 실제로 편도체는 어떤 실제 사건에 반응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비록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상상에 반응할 수 있다. 잠재적 위험에 관한 생각이나 이미지에서 나오는 정보는, 실제 사건의 인식 및 해석과 관련된 정보가 이동하는 것과 똑같은 통로를 타고 이동한다. 앞에서 이미 논의했듯 편도체는 시상을 통해 감각 정보를 받고는 거의 실시간으로 그것을 처리한다. 이와 무관하게 피질이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느라 시간 지연이 된 후에도 편도체는 피질로부터 정보를 받는다. 신경과학자들은 편도체가 피질에서 받은 정보를 놓고 어떻게 그 타당성 여부를 구분하는지, 구체적 메커니즘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54-5)<br>제2부 | 편도체 기반 불안의 통제<br>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는 그 상황에서 곧바로 도망치려는 강력한 충동이 생길 텐데 이를 억누르는 게 중요하다. 극도로 두렵고 불쾌한 경험이겠지만 그것은 신체적으로 당신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사실 실제로 당신이 느끼는 감각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신체가 보이는 징후일 뿐이다. 공황발작 상황에서 도망치면 단기적으로 기분은 좋아지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공황발작의 위력이 강화되어 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진다. 가능하다면 긴장을 풀고, 숨을 깊게 쉬고, 그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버티며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라. 물론 이것은 말하기는 쉽고 행동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편도체는 오로지 경험으로만 학습하므로 편도체를 어느 정도 통제하려면 반드시 “편도체가 작동하는 상황 안에서”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공황발작 상황에 감연히 맞서지 않고 매번 그냥 도망쳐버린다면, 당신의 편도체는 그 상황이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피하는 법만 배울 것이다. 75)<br># 피질을 도와 공황상태를 극복하는 방법1. 그저 느낌이라는 점을 기억하자(비록 무척 강렬하겠지만). 그저 나 자신이 지금 공황발작을 겪는다고 인식하고, 편도체 기반 증상을 피질이 오해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황발작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2. 공황발작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증상에 대한 걱정을 그만두는 것이다. 공황에 빠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공황발작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혹은 발생 여부를 계속 예측해봐야 다른 발작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3. 주의 돌리기(기분 전환)는 공황발작에 대항하여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피질 기반 전략이다. 증상에 집중하며 깊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황발작이 더욱 악화될 수 있기에, 공황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일부러 더 생각하려고 애써야 한다.4.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의식하지 말라. 공황 증상을 느낀다면,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려고 애쓰지 마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는 건 이미 불편한 스트레스 반응을 겪는 데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추가하는 일일 뿐이다.<br>노출 치료는 편도체 언어로 말하며 편도체를 가르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여기에는 체계적 둔감화와 자극 흠뻑 젖기 방법이 있다. 체계적 둔감화(systematic desensitization)는 이완 전략을 배우면서 두려운 대상이나 상황에 점진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이에 반해 자극 흠뻑 젖기(flooding) 방법은 사람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 곧바로 뛰어들게 하여 몇 시간 동안 불안에 노출한다. 이 방법은 과격하지만, 훨씬 더 빠르게 불안을 극복하게 해준다. 어떤 접근법이든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두려워하는 상황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상황을 반드시 직접 경험해야 하며, 보통 반복적으로 그렇게 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도전적인 치료 형태이지만, 조사연구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편도체 회로를 재설계하는 데 필요한 접근법이다. 노출을 더 실천할수록 편도체가 전에 두려움을 느꼈던 상황과 트리거에 차분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커진다. 102-3)<br>제3부 | 피질 기반 불안의 통제<br>인지 치료(cognitive therapy)로 널리 알려진 접근법의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가진 몇몇 인식은 비논리적이거나 유해하며, 행동이나 정신 상태에 유해 패턴을 발생시키거나 악화한다는 것이다. 인지 치료사들은 자기 패배적이거나 역기능적인 생각, 특히 불안이나 우울 수준을 높이는 생각을 찾고 변화시키는 데 집중한다. 이 접근법을 인지 재구성(cognitive restructuring)이라고 한다. 불안과 맞서 싸우려는 인지 재구성 방법은 피질 통로에 직접 개입한다.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는 뇌 과정은 피질 개입 없이도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발생한다. 가령 편도체 통로를 통하여, 피질 과정이 완료되기 전에도 공포 반응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런 다른 통로를 통해 생기는 불안도 있으므로, 생각을 바꾼다고 언제나 불안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자. 그러나 피질에서 생각이나 이미지가 불안 반응을 일으킬 때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어느 정도 불안을 완화하거나 막을 수 있다. 124)<br>인지 융합(cognitive fusion)은 무척 흔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라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이 내린 추정과 해석에 별달리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특히 고통스러운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가정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인식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인지 융합은 불필요한 불안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떤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이 인지 융합과 결합될 때 불안이 폭발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당신이 비관적인 생각을 품거나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면 반드시 그런 인지 융합 상태를 인지하고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혜택이 크다. 예를 들어 당신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장차 벌어질 일이 당신 생각처럼 풀려나가는 게 아님을 인식하라. 구체적 사건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거나 미미할 뿐인데도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곧 그 사건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례를 찾아보라. 140-1)<br>문제는 생각과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심리적 경향이다. 심리학자 스티븐 헤이스는 “이 경험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어 그것과 싸우려고 하는 경향이 가장 해롭다”라고 주장했고, 그런 경향에 맞서는 해법으로 ‘인지 분리’(cognitive defusion)를 제안했다. 인지 분리는 무척 강력한 인지 재구성 기법이다. 이 방식은 당신의 생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막연한 ‘의식의 흐름’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머릿속에 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에 비유했다. 그 새들을 당신 마음대로 포획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생각들 또한 당신이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니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날아가는 새 떼 정도로 여기면서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나 그 새가 당신의 머리 위에다 배설물을 떨어뜨린다면 그때는 적극 대응에 나서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런 생각이 객관적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때는 적극 대응하라는 것이다. 142)<br>인지 재구성 기법의 핵심은 이것이다. 먼저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이어 그 생각을 객관적 증거로 반박하고, 더 적응력이 높은 새로운 생각, 즉 대안적인 생각(coping thoughts)으로 대체한다. 당신의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에 특히 주목하자. 신경 회로는 “가장 분주한 것이 생존한다”라는 원칙으로 운영・강화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따라서 특정 생각을 더 많이 할수록 더욱 강력하고 단단해진다.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과 이미지를 중단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새로운 대안 생각으로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문자 그대로 뇌 회로를 바꿀 수 있다. 대안적 생각은 당신의 감정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생각이나 진술을 가리킨다. 대안 생각은 차분한 반응을 일으키고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게 한다. 당신은 불안 생각에 맞서서 대안 생각으로 그것을 대체해나가야 한다. 기억하라. 당신은 지금 엉터리 불안・걱정에 집중하는 신경 회로를 바꾸는 중이다. 143-4)<br>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려고 애쓰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지 못해 괴롭다고 불평한다. 이것은 두뇌의 사고 작용에서 기인하는 흔한 문제다.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패턴에 익숙할 것이다. 어떤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상기시켜 그 생각을 지우면, 그 생각을 저장하는 회로가 활성화되고 더 강해진다. 당신은 “멈춰!”라고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생각을 중단시킬 수 있다. 이 기법은 생각 멈추기(thought stopping)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그다음 단계가 중요하다. 어떤 대안 생각으로 방금 전 생각을 대체할 수 있으면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 대신에 당신을 매혹하는 것으로 대체한다면, 첫 번째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에 맞서려면, “지우지 마라, 대체하라!”(Don’t erase. replace!)가 최고 접근법이다. ‘나는 이걸 감당할 수 없어’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면 ‘쉽지 않지만, 어떻게든 이겨낼 거야’ 같은 대안 생각으로 교체하는 데 집중하라. 144-5)<br>편도체 기반 반응이 일단 작동하면 피질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챙김을 사용하여 편도체에 휩쓸리지 않고 관찰하면 편도체 반응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불안 반응에 마음챙김으로 접근하면 피질은 상황 통제 목표를 포기하고 단순히 불안이 일어나는 것을 내버려둔다. 이처럼 불안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안에 맞서는 궁극적인 해법이다. 불안의 위력은 대부분 불안을 멈추기 위해 벌이는 지속적인 투쟁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그렇게 하여 당신의 삶에 엄청난 통제권을 행사하려 한다. 불안 경험을 마주할 때 그것이 그저 스스로 지나갈 것을 알고 그냥 받아들이면 실제로는 더 빠르게 지나간다. 불안에 대해 걱정하면서 어떻게든 없애려는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불안을 이어가게 하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 불안으로 인한 불편함은 불안과 싸우며 그 불안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불안 통제 시도를 포기하면 실제로 뇌를 더 잘 통제할 수 있다. 151)<br>나가는 글 | 불안 없는 삶, 가능하다<br># 불안을 줄이기 위해 뇌를 재구성하는 방법1. 교감 신경계 활성화를 억제하기 위해 이완, 수면, 운동을 활용하라.2. 당신의 생각 중에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은 없는지 감시하라.3.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을 대안 생각으로 교체하라.4. 삶의 목적을 확인하고 무엇이 그런 목적을 방해하는지 파악하라.5. 목표를 방해하는 공포와 불안 트리거를 알아내라.6. 이런 트리거에 대한 편도체 반응을 수정하도록 노출 훈련을 설계하라.7. 불안과 공포가 줄어드는 것을 감지할 때까지 노출 훈련을 실천하라.<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54/71/cover150/e08253246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3547178</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노마드 / 앤서니 새틴 - [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2861</link><pubDate>Mon, 08 Jun 2026 0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28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8342&TPaperId=173228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095/84/coveroff/89729183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8342&TPaperId=173228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a><br/>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06월<br/></td></tr></table><br/>제1부 균형 잡기&nbsp;<br>"튀르키예식 지명으로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라고 불리는 배불뚝이 언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고고학 유적지이지만, 금빛 찬란한 보물이 나오지는 않은 관계로 누구나 다 아는 곳은 아니다. 원뿔형 꼭대기 지면에서 슈미트의 그의 팀원들이 발견한 석판들은 T자 형 기둥들의 상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기둥들은 정교하게 조각되었고,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며, 다른 것들보다 키가 큰 2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10여 개 기둥이 원형으로 세워져 있다." "이곳은 지구상에 인간이 거주한 최초의 장소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 조상들이 자신이 상상한 어떤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경관을 개조한 첫 번째 장소일지도 모른다. 지구의 방대한 지역을 개조하는 오늘날의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1만 2,000년 전에 이는 몹시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이 행동은 기념비적 건축의 시작이자 축조 예술의 시초, 우리 역사에서 현재의 인간 격格이 형성된 시발점이었다."(34-6)<br>"첫 번째로 놀라운 것은 연대年代였다. 〈추정컨대 괴베클리 테페가 형성된 시기는 기원전 제10천년기가 확실합니다.〉 슈미트의 말은 기원전 9500년 무렵에 인간들이 큰 돌덩어리들을 채석해 옮기고, 그 돌로 형상을 만들어 성역을 조성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피라미드와 스톤헨지가 축조된 〈기념비적 시대〉보다 약 7,000년이나 앞선 때였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사람들이 그곳에 거주했음을 나타내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훗날의 발굴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낼지도 모르지만, 최초의 발굴 단계에서는 집터나 지붕, 혹은 화덕을 보지 못했다. 지속적인 거주지였다면 발견되었을 법한 쓰레기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초기 발굴 팀은 뜻깊게도 표범, 멧돼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분포하는 다마사슴, 두루미, 독수리 등 다양한 동물들의 뼈를 발견했다. 요컨대 그 사람들은 수렵인과 채집인, 방랑자,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37-8)<br>"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질 당시 에덴을 벗어난 강의 동쪽, 그러니까 그곳의 주변 경관은 오늘날보다 비옥했다. 야생풀, 밀, 보리가 자라는 초원을 상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나무, 그리고 이제는 그 지역에서 집약적으로 재배되는 아몬드 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들이 관목숲에 흐름이 끊기기도 한 그 초원은 가제로가 오록스의 터전이었고, 이주하는 거위들, 식용 가능한 다른 많은 새와 동물들, 그리고 유적지에서 나온 뼈의 퇴적물로 드러났듯 인간을 위협한 일부 동물들의 서식지였다. 이 풍요로움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멀리까지 방랑할 필요를 없게 만들었다. 배회할 필요 없이 성역을 개발하면서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들이 살고 죽은 곳이었다. 정착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져다주었다." "그에 대한 전모가 무엇이든, 1만 1천년 혹은 1만 2천년 전 괴베클리 테페에서 농업의 진화와 문화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변화의 동인이 이동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40-2)<br>"차탈회위크는 괴베클리 테페와 카인의 도시 에녹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원도시proto-city였다. 괴베클리 테페가 버려지고 약 500년이 지난 기원전 7500년경, 정착민들은 지중해에서 1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차르샴바 강과 가까운 아나톨리아 평원의 언덕에 주거지를 조성했다. 그들이 지은 흙벽돌집에는 1층 출입구가 없었고, 집들 사이에도 길이나 통로가 없었다. 평평한 지붕이 길 역할을 하고, 지붕 덮개를 통해 아래쪽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는 구조의 진흙 상자들이 어지럽게 모여 있는 형태였다." "괴베클리 테페와 마찬가지로 차탈회위크 사람들도 어느날(기원전 7000년 무렵) 갑자기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났다." "떠난 이유가 무엇이건, 차탈화위크 난민들은 아마도 생존 꾸러미를 훨씬 상회하는 짐을 싣고, 자신들이 정착해 뿌리를 내릴 또다른 장소, 신께 예배드리고 신을 위무할 장소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개발이 진행되었다. 새 도시에는 튼튼한 성벽도 있었다."(59-61)<br>"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두 강 사이의 땅을 뜻하는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다. 아람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로도 되풀이되는 이름이다. 두 강은 에덴동산에서 갈라져 나온 〈강들〉 가운데 두 곳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고, 강들의 유역과 범람원은 튀르키예 남부에서 쿠웨이트를 거쳐 이란 남서부 바흐티야리 부족민들의 겨울 방목지에까지 이른다. 메소포타미아는 북부는 산악지대, 남부는 습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강들 사이의 지대는 엄청나게 비옥한 반면 강들의 동쪽과 서쪽은 점점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민은 강으로 향했고 유목민은 사막 주변으로 향했다. 초기에 농업이 번성하고, 그에 따라 도시와 도시가 지닌 대부분의 초기 특징들이 만들어진 장소가 이곳이다. 또한 깊숙한 과거와 역사시대가 만나고, 신화와 전설이 사실과 물리적 증거와 조화를 이루며, 유목 생활과 확실히 대비되는,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세워진 장소이기도 하다."(61-2)<br>"인간이 승마를 처음 시작한 때가 언제일까? 기원전 제4천년기가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카자흐스탄 북부의 그 시기 매장지에서 99.9퍼센트가 말의 뼈인 동물 뼈 10톤이 출토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동물 뼈들에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일종의 마모가 진행된(입에 채워진 재갈 때문에/역자) 다수의 턱뼈와 이빨들이 섞여 있었다." "승마 능력은 곡물의 작물화를 능가하는 혁명이었다. 그것은 말의 혁명이었다. 말은 인간이 이용해온 것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교통 수단이었으며, 승마 능력으로 지구에서의 삶은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바뀐 지역은 승마로 인해서 유목민의 목축이 가능해진 스텝 지대였을 것이다. 걸어서 방목하면 하루에 고작 32킬로미터를 갔지만, 최초의 승마자들은 안장 없이 말을 타고도 그 거리의 2배 혹은 그 이상을 갔다. 게다가 이동 거리의 연장은 말 혁명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았다(수레바퀴와 전차가 차례로 등장했다)."(75-6)<br>"말[馬], 인간이 혹독한 겨울을 날 때 가진 것에 감사해할 동물이면서, 항상 누군가의 재산이었던 동물. 전차, 바람처럼 날랜 것. 합성궁, 단풍나무, 영양의 뿔, 사슴의 내장 그리고 가죽을, 물고기를 원료로 한 아교로 접착해서 만든 복잡한 구조물. 코미타투스comitatus, 〈호위대〉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정교하고 열의에 찬 전사 집단, 활에 쓰인 사슴 내장보다도 더 단단히 결합되고, 함께 살면서 필요하면 서로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한 집단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 이야기에 대한 애호, 특히 영예로운 인간의 모험과 신들의 변덕을 주 내용으로 하는 서사 역사를 좋아하는 취향. 유목민들은 이 모든 것들을 지니고 스텝 지대를 떠났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헤라클레스의 쌍둥이 기둥(지브롤터 해협의 낭떠러지 어귀에 있는 바위/역자)으로부터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이집트 중왕국과 태평양으로 퍼져나갔고, 고대 세계에 광범위하고 영속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87-8)<br>"이 상호 연결된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세계에서는 인위적인 장벽이라고 해봐야 가시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것, 혹은 임시 거처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윗덩어리 몇 개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고작이었다. 도시 진출이라는 큰 꿈에 매료되어 우루크, 바빌론, 로마 그리고 다른 많은 도시들로 이끌려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성벽 밖에서 살았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주자, 유목민, 상인─이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 다시 말해서 역사의 고속도로는 우리로 하여금 기원전 1만 년의 현저한 업적 모두가 정착민들의 성취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건설자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종말을 재촉한 훈족에 이르기까지, 유목민, 이주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았던 그 밖의 종족들 역시 최초의 석조 기념물을 세운 것에서부터 말을 길들이고, 그 말과 연결해 수레 및 전차를 만든 것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진보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168-9)<br>제2부 제국 세우기&nbsp;<br>"이븐 할둔의 업적이 한층 빛나는 것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도,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도서관도,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도 아닌, 그의 주변에서 어둠과 고난이 퍼져나가고, 정부들이 서로 싸우며,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하러 떠났던 난세의 14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외딴 성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때는 이동에 공격의 위험이 따르고, 치명적 병에 감염될 수도 있으며, 여행이 힘들고 위험한 시기였다." "이븐 할둔은 온 세상이 이처럼 고난에 처해 있고 황폐함이 만연하던 시기에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에 착수해서 인간이 어떻게 정연하고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를 글로 정리하려고 한 것이었다." "서구의 역사서와 달리 『역사서설』(『이바르의 책』의 서문으로 쓰인)은 유목민을, 말이나 타고 다니며 과거에 창조된 것들을 파괴하는 야만인으로 제시하지 않고 원동력이자 킹메이커(숨은 실력자)로 제시했다. 이븐 할둔의 세계에서 아벨의 자식들은 촉매, 사회 갱신의 주요 동인이었다."(179-80)<br>"이븐 할둔의 작품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상황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간의 경과에서 그가 본 것은 〈인간의 향상〉, 상승의 진행이나 심지어 몰락의 진행이 아닌, 모든 것의 순환이었다. 그는 운명의 바퀴가 돌 듯이, 그리고 달과 해와 계절이 순환하듯이, 권력에도 흥망성쇠가 있으며, 제국들도 부침을 겪고, 도시들도 세워졌다가 무너지며, 사람도 살고 죽으며, 모든 것은 무無에서 나와 무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가 글을 쓴 시점이 위대한 아랍인의 제국이 와해되고, 흑사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다수의 군주가 폐위되고, 힘 있는 친구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된 뒤였음을 감안하면, 그가 사태를 더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그의 걸작에는 반짝이는 줄 한 가닥이 있었으니, 바로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할 줄 알고, 그런 능력과 그들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세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줄 알았던 유목민의 능력이 그것이었다."(181-2)<br>"아사비야asabiyya라는 용어는 『역사서설』에 500번 이상 등장한다. 많은 아랍어 단어들이 그렇듯이, 아사비야에는 넓적다리를 묶지 않으면 젖을 내주지 않는다는 암낙타, 터번을 묶는 행위, 광신자를 비롯해서, 맥락이 어렵풋한 여러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당파심, 연대의식, 단결심, 부족적 연대이다." "인도유럽인의 코미타투스와도 비슷한 아사비야가 가리키는 것은 혈연일 수도, 부족적 유대일 수도, 공통된 신념이나 지도자에 대한 헌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대를 끈끈하게 해준 〈접착제〉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아사비야가 안전하다는 의식과 상호 부조에 대한 확신을 집단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이 독창적이고 날카로운 인식으로 깨달았던 것은 정부와 제도의 성격도 국가 내에 존재하는 그 연대의식의 성격에 좌우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내는 바는 부단히 변화하고, 이동하고, 이주하며 사는 유목민의 존재 양식이다."(185-6)<br>"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 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비교적 적은 숫자의 아라비아 부족민들이 〈출신 성분이 다양하고 군기가 제법 잡힌 군인들의 소규모 본대〉와 나란히 싸우며 이룩한 막대한 성공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되곤 한다. 요컨대 그들은 알라를 위해서, 그리고 설령 전사를 하더라도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비잔티움, 이집트, 그리고 다른 나라의 병사들은 현세의 것을 찾아 참전한 반면 무슬림 전사들의 욕망과 염원은 모두 내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랍인의 성공 요인을 유목민의 아사비야가 가진 힘에서 찾았다. 아랍인들의 승리는 그들이 정주 생활의 겉치레 없이 홀가분한 〈자연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말이다."(193)<br>"이븐 할둔은 흥망성쇠의 사이클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첫 단계는 성공의 시기로, 모든 반대 세력을 타도하고 이전 왕조의 왕권을 탈취하는 단계이다.〉 이것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사비야 덕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지도자가 권력과 왕권을 통합하는데, 그렇게 하는 목적은 〈그의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약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세 번째는 지도자가 평화롭고 호화로운 삶에 안주하고, 법률을 공표하며, 건축물을 발주하고, 훌륭한 군대를 보유하며, 백성과 외국 사절들에게 후하게 선심을 쓰는 단계이다. 그다음에는 새로운 지배자가 전임자들의 흉내를 내며 귀족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전통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곧 자기 권력의 파멸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로 접어든다. 마지막 단계는 〈지배자가 향락과 여흥에 조상들이 축적한 [재보]를 낭비하여〉 몰락하는 단계이다. 이븐 할둔은 한 왕조가 거쳐 가는 이 다섯 단계를 모두 검토한 다음 〈최고의 후계자는 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277)<br>"칭기즈 칸이 죽고 나서 1세기 동안 중국에서 근동까지의 육지와 바다는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호화로운 기념물들이 세워지고, 번성하는 유라시아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장인과 뛰어난 지성인들로 채워짐에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유목민 특성은 희석되었다. 이븐 할둔은 그들의 아사비야가 약화되면서 1330년대와 1340년대에 금장 칸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페르시아의 일 칸국이 일련의 내전으로 힘이 소진된 끝에 어떻게 와해되었는지, 중앙아시아의 중심에 자리한 차가타이 칸국이 매우 다른 두 왕국으로 어떻게 분열되었는지를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를 지배하고, 그 세계를 자기들 방식에 적응시켰던 유목민 세계가 작동을 멈추고, 이븐 할둔이 썼듯이 칭기즈 칸 후손들의 지배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이븐 할둔의 판단이 오판으로 판명날 것이었다. 칭기즈 칸의 자손은 앞으로도 더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277-8)<br>"티무르의 거대 제국은 교역 도시들, 특히 실크로드의 허브였던 히바, 부하라, 발흐, 델리와 물탄 같은 남아시아의 요지들, 그리고 근동의 도시들인 바스라, 바그다드, 알레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심축은 마샤드, 헤라트, 그리고 티무르가 시간, 관심, 돈을 특히 아낌없이 투자한 사마르칸트였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가진 명백한 중요성과 장려함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제국은 그가 살아 있을 때에도, 사후에도 계속 유목민의 특성을 띠었다. 제국의 유목성은 부족 중심의 구조와 전통, 정례적으로 개최된 쿠릴타이와 이주, 천막과 말 위의 삶을 선호했던 티무르의 생활 방식, 군대의 편성과 구조, 그가 총애한 아내 비비 하눔과 다른 여인들이 의사 결정과 부족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힘을 계속 보유했던 점, 자유 무역을 중시한 점, 티무르의 총독들이 이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촉진하여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여타 종교들이 확산될 수 있게 한 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309-10)<br>"유라시아의 시장들을 통해서 막대한 부가 유통되고, 중국에서부터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유해진 것도 티무르 제국의 개방성이 가져온 결과였다. 아시아의 티무르 제국 경영자들은 시인, 예술가, 아름다운 것을 창안한 사람들도 후원했다. 그들 모두 중요한 문화 융성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븐 할둔은 바퀴가 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천국이 몽골인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그 또한 그들의 〈신앙과 제국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지만, 티무르가 죽은 뒤에도 바퀴는 계속 돌아가리라는 것과, 그의 위대한 제국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소멸되는 꿈, 다수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라져가는 악몽이 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가 몰랐던 것은 바퀴가 돌기를 완전히 멈추고, 세계가 아사비야를 넘어서는 무엇인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유목민도 힘을 잃어 더는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매혹과 심지어 감탄의 대상이 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이었다."(310-1)<br>제3부 회복하기<br>"오토만 제국이 들어선 후에도, 늘 그렇듯이 제국의 유목주의를 좌우한 것은 지형이었다. 유럽에 속한 제국의 지방들은 대부분 방목하기에 좋은 산지, 튀르크어로 〈나무가 많은 산맥〉을 뜻하는 발칸 반도에 있었다. 카르파티아 산맥과 핀두스 산맥, 그리고 여타 동유럽 산맥들은 유목 생활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고, 아시아에 속한 아나톨리아 역시 농경지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토로스 산맥과 폰투스 산맥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제국의 지도층과 행정부는 정착해 살고, 백성들의 대다수는 여름철에는 고지대의 방목지, 겨울철에는 평원을 오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통제하에 놓인 다수의 섬들도 여름에는 기꺼이 갈 만한 곳이었지만 겨울에는 폭풍과 강풍에 고립되었다. 역사가 제이슨 굿윈은 그런 상황을 〈10월과 4월 사이에는 산맥과 바다가 밤의 시장들처럼 철시撤市를 하고, 제국도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절반은 동면을 했다〉고 설명했다."(321)<br>"유목민의 아사비야는 이스탄불, 에디르네, 부르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스크, 궁전, 바자bazaar로 아름답게 꾸며진 그 밖의 장려한 도시들에도 그것은 없었다. 유목민의 아사비야는,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를 지배할 권리를 가지는 칼리프제의 중요성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정체성의 기반은 천막과 말 그리고 그 왕조를 창시한 오스만의 유목민 뿌리에 있었다. 오토만 술탄들이 수 세기 동안 양립 불가능한 욕구들을 어색하게 조화시키는 방식으로라도 유목민에 뿌리를 둔 자신들의 과거를 드러낸 것도 그래서였고, 그 유목적 과거와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 실내 생활을 할 때에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술레이만 대제만 해도, 오토만의 힘과 광휘가 절정에 달했던 16세기였는데도,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러 온 헝가리 국왕 존 지기스문트를 화려한 궁전이 아닌 장려한 천막 앞에서 맞았다. 이동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정체성에는 여전히 유목주의라는 생각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322-3)<br>"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 셰이크 사피 앗 딘도 오토만 왕조의 창시자인 오스만만큼이나 출신이 모호했다. 두 사람 모두 스텝 지대의 초원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종족도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근래에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14세기 초, 셰이크는 오스만이 오토만의 기치 아래에 추종자들을 결집시키는 사이, 자신만의 아사비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심신 양면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는 명성에 힘입어 오래지 않아 수피 종단의 창시자가 되었다." "티무르 왕조가 몰락했을 때에는 셰이크의 후예인 이스마일 1세가 서부 이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아제르바이잔을 아우르는 사파비 왕조를 수립했다. 그다음 세대는 더욱 번창하여, 샤 이스마일의 사파비 왕조 후손들은 유목민 연맹의 지원을 받아, 유목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황금기가 페르시아에 도래할 것임을 알렸다."(324)<br>"1503년에 스무 살의 나이로 카불의 지배자를 자처했던 바부르는, 그곳을 거점 삼아 20대 후반에는 사마르칸트를 포함해 옛 티무르 왕조가 보유했던 중앙아시아의 핵심지대를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 술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물리치고 부다페스트로 오토만 군대를 진군시킨 해인 1526년, 이제 40대 초반인 바부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남쪽의 인도로 군대의 방향을 돌렸다." "바부르는 델리의 성채와 몇몇 무덤 그리고 정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그의 승리를 자축했다. 〈시찰을 마친 뒤 나는 야영지로 돌아와 배를 타고 독주를 마셨다.〉 하지만 바부르가 자기 안의 유목민 기질 때문에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것과 달리, 그가 세운 무굴 왕조─몽골Mongol에 어원을 둔 명칭─사람들은 정착을 하고, 라호르, 파테푸르 시크리, 가장 유명한 아그라, 그리고 최종적으로 델리에서,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영국에 의해서 버마로 유배되었던 1858년까지 인도를 지배했다."(328-9)<br>"18세기가 되자 유목민의 이상과 더불어 아벨에 대한 생각은 배척을 받은 반면, 정상적인 삶은 유럽의 우월감과 지중해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부활한 환상 덕분에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신세계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부가 그런 득의양양한 의식의 조장을 도왔다. 하지만 유럽이 그런 환상을 가지는 데에는 고대 세계의 재발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고대 예술사』에서, 예술사라면 모름지기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깊숙한 고대 작품에서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를 거쳐 고전 그리스에서 정점을 찍는 일련의 순화와 개량의 과정, 즉 단계적 발전을 거치는 연구여야 한다는 것을 사실상 처음으로 제시했다." "빙켈만은 아폴로 신상神像에서 자연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자연 저 너머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오직 마음으로만 창조할 수 있는 이미지에서 나오는······특정한 이상적 형태들〉도 보았다고 했다. 자연 저 너머······.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인간은 그토록 멀리까지 지배력을 수립한 것이다!"(348-9)<br>"빙켈만과 그의 동료들은 예술의 역사를 물질문화 속에서 골라낸 길로 제시했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시점에서 뒤를 돌아보며, 유럽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 매혹적인 운동, 즉 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개념을 회고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목민도 포함된 유럽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끼친 영향과 자극은 교묘히 가려버렸다. 예술사와 지성사에 대한 이런 선별적 견해는 고속도로 역사와 마찬가지로, 기념물 짓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혹은 아예 짓지 않기로 한 사람, 아니면─고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스키타이인들의 장신구처럼─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아버렸다. 빙켈만은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예술사의 궤적을 순환적 개념이 아닌 선형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개화되었고, 그 개화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럽인이라는 것이 빙켈만의 생각이었다."(350)<br>"19세기에 페르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목축과 무역을 하며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오스만 술탄들이 오래 전에 말안장을 장의자와 맞바꾸고, 다수의 궁전과 정자가 있는 성벽 너머에서 나라를 통치한 튀르키예에서도 술탄의 다양한 백성들은 상당수가 유목민으로 남아 있었다. 유목민들은 위대한 카넴-보르누 제국이 붕괴되었는데도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을 가로질러 다녔듯이 무굴 제국의 인도도 누비고 다녔다. 아라비아에서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라는 유목민 부족장이 자신의 아사비야를 확장하여, 개혁적인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의 지도 아래 새로운 아랍국(사우디아라비아)을 건설했다." "수천만 명의 유목민이 영국 제국에 둘러싸인 세계 속에서 방랑하며 수렵채집 생활을 했다. 그러나 유럽의 예술, 도덕, 문화, 법률은 〈유목민 무리〉를 이길 터였다. 그 현상이 어느 곳보다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지금도 계속 울려 퍼지는 신조어, 〈명백한 운명〉이라는 단어를 지어낸 북아메리카였다."(368-9)<br>"유전학, 심리학, 그리고 여러 다른 학문들은 최근의 연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직감으로 알고 있는 것, 즉 인류는 〈집단 두뇌collective brain〉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냈음을 밝혀냈다. 〈집단 두뇌〉는, 우리가 가장 성공적이고 진보적이었을 때는, 다양한 집단이 함께 모여 그들의 지식, 역사, 보는 방식을 합체시켰을 때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류 최고의 것들은 협력, 시장과 국경의 개방, 자유로운 이동, 생각과 양심의 자유를 통해서 얻어졌다. 그리고 유목민은 그런 요소들로 가는 최상의 통로이자 그것들의 최고 축적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다시피,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을 가는 도중에 발견되는 것이 역사의 일부일 뿐이라면, 인간 역사의 또다른 일부는 언제나 경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 자연계에 종횡으로 놓여 있는 오솔길들에 있다. 이 두 가닥이 하나로 엮였을 때에만 우리 역사의 완벽한 그림을 볼 수 있다. 다양성과 상호 작용의 이점이 드러나는 것도 이 지점이다."(416-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095/84/cover150/89729183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095847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 박상길 -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10만부 기념 개정판) - 챗GPT부터 유튜브 추천, 파파고 번역과 내비게이션까지 일상을 움직이는 인공지능 이해하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6020</link><pubDate>Thu, 04 Jun 2026 08: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60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22534096&TPaperId=173160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00/0/coveroff/e9225340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22534096&TPaperId=173160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10만부 기념 개정판) - 챗GPT부터 유튜브 추천, 파파고 번역과 내비게이션까지 일상을 움직이는 인공지능 이해하기</a><br/>박상길 / 비즈니스북스 / 2024년 10월<br/></td></tr></table><br/>제1장. 인공지능 | 위대한 인공지능, 깨어나다<br>프로그래밍이란 규칙과 데이터를 입력해 정답을 출력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인공지능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인공지능처럼 작동하기 위해서는 if-then 규칙이라 부르는 수많은 규칙을 사람이 일일이 입력해야 했죠. 기계는 이렇게 인간이 입력한 일만 했습니다. 사람이 모든 규칙을 일일이 입력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 기반은 제법 훌륭하게 작동했습니다. 이 때문에 기계번역을 비롯한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도 초창기에는 대부분 규칙 기반으로 구현됐습니다. 그리고 곧 괜찮은 성과를 내리라는 장밋빛 희망으로 가득했죠. 그러나 규칙으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겠다는 시도는 이내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이렇게 인공지능이 암흑기에 빠져든 데는 if-then 규칙의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에는 이 방식이 얼핏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람이 일일이 규칙을 입력하는 방식은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이죠.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제대로 된 추론도 하지 못했습니다. 18-9)<br>인공 신경망의 초기 모델은 퍼셉트론Perceptron입니다. 퍼셉트론은 1958년 당시 코넬 항공 연구소에 근무하던 프랭크 로젠블랫Frank Rosenblatt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 고안해냈습니다. 인간 두뇌는 뉴런이 서로 연결된 상태로 전기신호를 내보내며 정보를 전달한다는 데 착안해, 그와 비슷한 형태로 인공 뉴런이 연결된 구조의 인공 신경망을 구현해낸 것입니다. 1980년대 들어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우리말로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알고리즘을 활용하면서 인공지능 분야는 다시 성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머신러닝이란 말 그대로 기계Machine가 스스로 학습하는Learning 방식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이 규칙을 입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컴퓨터가 데이터에서 스스로 규칙을 찾아냅니다. 더구나 사람이 찾아내지 못하는 규칙도 컴퓨터가 학습을 거쳐 찾아낼 수 있게 되었죠. 변형에 따른 무수한 변칙까지도 데이터를 이용해 모두 찾아낼 수 있게 되면서 규칙에서 벗어난 결과도 추론할 수 있게 됐습니다. 17, 20)<br>딥러닝은 머신러닝의 일종으로, 머신러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딥러닝은 인간 두뇌의 작동 구조를 본떠 만든 인공 신경망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무수히 많은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죠. 이를 물리적인 형태로 만들어낸다면 엄청나게 많은 다이얼이 달린 거대한 수학 구조물과 비슷합니다. 각각의 다이얼은 원하는 출력값이 되도록 가중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입력 데이터를 넣고 다이얼을 조절하면서 결과물을 확인한 후, 다시 조금씩 다이얼을 돌려 원하는 결과와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조절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다이얼 값을 무작위로 설정하지만 학습을 진행하면서 점점 모든 다이얼이 정답에 가까워지도록 바뀌어갑니다. 모든 데이터가 정답에 가장 가까운 상태를 찾아 더 이상 다이얼을 조절할 필요가 없다면 비로소 학습이 끝나죠. 데이터가 많을수록 훨씬 더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음은 물론, 다이얼이 많을수록 훨씬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이 되겠죠. 24-5)<br>제2장. 알파고 |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br>1940년대 말,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던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Ulam, 1909~1984 박사는 ‘중성자 확산 같은 복잡한 계산 문제는 차라리 여러 번의 무작위 컴퓨터 실험으로 결과를 관찰하는 편이 훨씬 더 실용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특성상 이 방법에 적절한 암호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마침 울람 박사는 도박을 좋아하던 자신의 삼촌이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을 하기 위해 친척들의 돈을 빌려갔다는 사실을 떠올려 ‘몬테카를로’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것이죠.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을 도입한 이후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실력은 급상승해 6단의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프로기사에게는 4점 이상 접히는 기력에 불과했습니다. 알파고는 여기에 딥러닝을 적용해 실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킵니다. 두 종류의 인공 신경망을 만들어내는데, 정책망Policy Network과 가치망Value Network이라는 이름의 신경망입니다. 43-4)<br>먼저 정책망을 살펴봅시다. 정책망은 사람이 만든 기보棋譜를 이용해 학습합니다. 정책망은 약 16만 회의 게임에서 총 3,000만 수를 가져와 학습했습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정책망 3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망은 바로 앞서 살펴본 사람의 기보를 이용해 학습한 정책망(이하 기보학습 정책망)입니다. 둘째 망은 롤아웃 정책망입니다. 롤아웃 정책망은 기보학습 정책망과 비슷하지만 훨씬 작고 가벼운 망입니다. 훨씬 작게 만들었기 때문에 첫 번째 망보다 약 1,500배 정도 빨리 수를 둘 수 있습니다. 즉 첫째 망이 한 번 착점할 시간에 롤아웃 정책망은 1,500번을 착점할 수 있는 거죠. 당연히 성능은 떨어집니다. 첫째 망도 정확도가 57%로 높은 편이 아닌데, 롤아웃 정책망은 고작 24%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계산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탐색을 빠르게 진행할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망은 바로 알파고의 핵심인 스스로 대국하며 강화학습을 수행한 정책망(이하 강화학습 정책망)입니다. 44-5)<br>또 다른 종류의 망은 바로 가치망입니다. 가치망은 현재 국면에서 승패 여부를 예측하는 망입니다. 확률로 표현해서 50%가 넘는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국면이고, 50%가 넘지 않는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국면이죠. 과연 알파고는 어떻게 족집게 도사처럼 바둑판을 딱 보고 누가 승리할지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알파고는 여러 정책망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았던 강화학습 정책망끼리의 대국을 활용했습니다. 서로 3,000만 번의 대국을 두게 하고, 각 경기에서 한 장면씩 3,000만 장면을 추출해 해당 국면 이후에 누가 이겼는지를 학습했습니다. 이처럼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지,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지를 확률로 표현한 것이 바로 가치망입니다. 알파고는 고수의 기보로 지도 학습을 진행한 다음, 어디에 돌을 내려놓을지 판단하는 정책망을 만듭니다. 그리고 정책망을 이용해 스스로 대국을 두어 강화학습을 진행한 다음, 승리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는 가치망을 만들어냅니다. 46-7)<br>꼼꼼하게 탐색해나가는 알파고도 이세돌과의 네 번째 대국에서는 이세돌이 둔 ‘신의 한 수’인 78수를 막아내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알파고는 왜 신의 한 수를 허용하고 말았을까요?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봅시다. 알파고의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은 유망한 수를 중심으로 꼼꼼하게 탐색해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률이 높은 쪽을 향해 더 많이 더 깊게 탐색해나가고 가장 신뢰가 높은 지점에 착수를 하는 원리죠. 하지만 이세돌이 둔 신의 한 수 지점에 착수할 확률을 알파고는 1만 분의 1로 매우 낮게 예측했다고 합니다. 알파고는 설마 그 지점에 둘 줄은 몰랐기에, 충분히 탐색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지점이 묘수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내지 못하죠. 애초에 탐색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78수 다음에 대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알파고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승률이 높은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엉뚱한 수, 이른바 떡수를 남발하면서 급격히 무너졌죠. 51-2)&nbsp;<br>제3장. 자율주행 | 테슬라가 꿈꾸는 기계<br>최근의 자동차는 전자공학에 더 가깝습니다. 이른바 움직이는 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자동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자율주행차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자율주행차는 소프트웨어의 힘에 의지해 움직입니다. 자율주행차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라는 유명한 공식을 기반으로 운행을 해나갑니다. 베이즈 정리란 18세기 영국의 목사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 1701~1761가 증명한, 확률에 관한 공식을 말합니다. 베이즈 정리는 사전 확률과 사후 확률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학적 정리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지만 베이즈 정리는 수학 정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수학적으로는 매우 간단한 형식에 불과하지만 철학적으로 본다면 놀라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베이즈 정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듭니다. 확률이라는 것은 믿음에 불과(?)할 뿐이며, 세상에는 절대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의심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61-2)<br>자율주행차는 항상 불안해합니다. 자율주행차가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신호들뿐이죠. 자율주행차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해 안전한 경로로 주행해야 합니다. 이때 자율주행차의 상황 판단은 수학 문제와 같이 단 하나의 규칙으로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행 중 도로를 살펴보며 가야 할 구간과 가지 말아야 할 구간을 끊임없이 판단해야 합니다. 안전한 구간이라면 안전하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위험 요소를 발견할 경우 위험하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식이죠. 가령 자동차가 위험하다고 확신하는 구간에서 특정 센서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낼지라도 이미 상당히 위험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위험할 확률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안전하다는 신호가 계속해서 유입된다면 다시 위험 확률은 낮아집니다. 이처럼 자율주행차는 여러 가지 신호를 받아 믿음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면서 운전해나갑니다. 64-5)<br>자율주행차는 GPS 외에도 각 센서의 약점을 보완해줄 다양한 센서를 병행해서 활용합니다. 먼저 레이더RAdio Detection And Ranging, Radar와 라이다LIght Detection And Ranging, LiDAR가 있습니다. 레이더가 전자파를 발사해 반사파를 측정한다면 라이다는 레이저 빛을 발사해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을 측정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빛Light과 레이더Radar의 합성어인 라이다LiDAR죠. 전자파를 이용하는 레이더는 장거리 측정이 가능하고, 물체 내부까지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날씨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죠. 하지만 물체의 거리나 방향, 모양이나 구조는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 빛을 이용하는 라이다는 정확하게 물체를 인식하고 밀도 있게 표현해낼 수 있지만 거친 날씨에 영향을 받고, 장거리 측정은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라이다의 범위를 넘어서는 구간을 파악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처럼 바라보면 되는 거였죠. 바로 카메라였습니다. 65-8)<br># 점차 카메라가 레이더와 라이다의 기능까지 흡수해서 구현하고 있다.<br>제4장. 검색엔진 | 구글이 세상을 검색하는 법<br>초기 인터넷 광고는 신문 광고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신문 판매 부수에 따라 광고 단가를 매기는 것처럼 사이트에 배너를 노출하고 노출 횟수에 따라 가격을 책정했습니다. 광고에 대한 사용자의 피드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죠. 그러다 검색엔진이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검색광고를 도입합니다. 이제 항상 동일한 광고가 노출되는 게 아닌 쿼리에 적합한 광고를 매번 다르게 보여주는 타깃 마케팅을 진행하고, 사용자 피드백을 기반으로 광고료를 산정하는 CPC 방식Cost Per Click을 도입합니다. 예를 들어 대도시에 근무하는 30대 사무직 남성이 ‘셔츠’를 검색하면 ‘폴로’, ‘빈폴’ 같은 유명 브랜드를 노출하고, 나아가 온라인 구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여기에 더해 검색광고는 경매 방식으로 판매했습니다. 예를 들어 폴로의 광고주가 ‘셔츠’라는 쿼리에 대해 클릭당 1,000원을 제시하고 빈폴의 광고주는 클릭당 1,200원을 제시했다면, 고객들은 단가가 더 높은 빈폴의 광고를 먼저 접합니다. 84-5)<br>구글은 엄청난 수익뿐 아니라 엄청난 문서를 색인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검색엔진이 인터넷에 있는 문서를 수집하여 검색에 적합하도록 보관하고 있는 것을 색인Index이라고 합니다. 아마 2020년 이후에는 300조 개가 훨씬 넘는 문서를 색인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많은 문서를 대체 어디에 보관하고 있을까요? 구글은 엄청난 양의 문서를 고가의 컴퓨터 몇 대에 저장하는 게 아니라 일반 PC처럼 저렴한 컴퓨터 수백, 수천 대에 나눠서 저장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를 위해 구글 파일 시스템Google File System, GFS이라는 효율적인 분산 파일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아무리 큰 파일도 여러 대의 서버에 나누어 저렴한 비용으로 저장할 수 있게 됐죠. 이 방식은 또한 초기 빅데이터 플랫폼의 원형이 되어 이후에 본격적인 빅데이터 플랫폼이 등장하고, 나아가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상 지금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분야는 구글이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5-6)<br>수학계에 에르되시 수Erdős Number라는 게 있습니다. 전 세계를 돌며 평생을 수학 연구에만 몰두해온 에르되시 팔Erdős Pál, 1913~1996은 평생 1,500여 편의 논문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논문 대부분을 다른 학자들과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 ‘에르되시 수’란 에르되시와 몇 단계에 걸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와 직접 공동 논문을 쓴 학자는 모두 512명입니다. 이 512명이 에르되시 수 1이죠. 그리고 이 512명과 함께 공동 논문을 쓴 사람은 에르되시 수 2입니다. 1998년 스탠퍼드에서 박사 과정 중이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문서의 품질을 평가하는 획기적인 알고리즘을 고안합니다. 유명한 사이트가 많이 가리킬수록 문서의 점수가 올라가는 알고리즘으로, 좋은 논문은 인용 횟수가 많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죠. 여기에 에르되시 수가 낮을수록 권위가 높아진 것처럼 권위 있는 사이트에 가중치를 높였습니다. 이 알고리즘의 이름이 바로 페이지 랭크Page Rank입니다. 95-7)<br>제5장. 스마트 스피커 | 시리는 쓸모 있는 비서가 될 수 있을까<br>스피커는 스스로 말을 알아듣거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스피커 자체는 껍데기라는 말이죠. 실제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과정은 음성을 녹음하여 서버로 보내 분석하는 과정이고, 사람에게 말을 하는 기능은 녹음된 음성을 서버에서 받아와 재생하는 것입니다. 스피커는 사실상 마이크가 달린 일종의 블루투스 스피커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음성을 어떻게 서버로 전송할까요? SKT의 NUGU라면 “아리야”, 카카오미니라면 “헤이 카카오”라고 부르면 스피커가 “네?”하고 반응하면서 깨어나죠. 이 과정을 웨이크업Wake-Up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사용자가 질문하거나 요청하면 이를 녹음하여 서버로 전송합니다. 참, 스피커는 껍데기라고 했지만 딱 한 가지 특이한 기능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바로 “헤이 카카오” 같은 웨이크업 단어를 알아듣기 위한 음성인식 엔진이죠. 추가 기능 없이 딱 웨이크업 단어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매우 조그만 음성인식 엔진이 스피커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118)<br>100번의 발화 중 99번을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똑똑한 스피커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반대로 100번의 문장 중 99번만 정확하게 생성해낸다면 마찬가지로 똑똑한 스피커일까요? 만약 잘못 생성한 1번의 문장이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해!”라는 문장이라면요? 이런 문제 때문에 ‘생성’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딥러닝의 활용이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최근에 챗GPT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제어하고 있지만 챗GPT조차도 응답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게다가 스마트 스피커는 챗GPT와는 조금 다릅니다. 무엇보다 문제해결용 대화시스템Task-Oriented Dialogue System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대화만을 주로 한다는 얘기죠. 날씨를 묻거나 레스토랑을 예약하기 위한 대화는 목적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스마트 스피커는 자유로운 대화보다는 목적에 맞는 대화에 방점을 맞추죠. 이 때문에 자유롭게 대화를 생성하지 않고 정해진 템플릿에 정보를 채워서 문장을 생성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130-1)<br>제6장. 기계번역 | 외국어를 몰라도 파파고만 있다면<br>신경망 기반 기계번역 Neural Machine Translation은 문장 전체를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통째로 번역해서 훨씬 더 자연스러운 번역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인공 신경망이라는 거대한 모델과 이를 견인할 수 있는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신경망이 문장을 통째로 번역하는 과정은 마치 오렌지 주스를 농축한 후 물을 섞어 희석하는 과정과 닮았습니다. 먼저, 문장을 통째로 압축해 숫자로 표현한 벡터(방향과 크기를 나타내는 값)를 만들어 냅니다. 오렌지 주스를 농축하는 과정이죠. 그리고 이 값을 번역할 언어로 옮긴 다음 풀어서 번역문을 만들어 냅니다. 각각의 숫자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번역문을 찾아내는 거죠. 물을 섞어 다시 주스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번역문을 만들어 내면 더 이상 규칙 기반처럼 단어와 단어 간의 관계, 순서, 구조 등을 파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통계 기반처럼 단어나 구문을 확률로 번역해 조합하고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145-6)<br>어텐션Attention은 더 중요한 단어를 강조하는 원리입니다. 기존에는 입력 문장의 길이에 상관없이 압축한 문장을 항상 일정한 길이의 벡터에 한 번만 담아냈습니다. 하지만 어텐션은 번역문의 단어를 생성할 때마다 출력 문장의 길이에 맞춰 압축 벡터를 생성합니다. 이렇게 하면 번역문이 길어질수록 벡터도 함께 길어지기 때문에 더 긴 문장을 번역하는 데도 문제가 없겠죠. 이전에는 어떤 분량이든 1줄로 요약했지만 어텐션은 5분을 발표할 때는 5줄, 10분을 발표할 때는 10줄로 요약합니다. 무엇보다 어텐션의 핵심은 중요한 단어에 별도로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표시 없이 문장 전체를 통째로 압축했기 때문에 번역할 때 어떤 단어를 염두에 둬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번역의 질이 떨어졌죠. 하지만 어텐션은 압축할 때 매번 다르게 중요한 부분을 적재적소에 표시해둘 수 있습니다. 어텐션을 핵심 알고리즘으로 삼은 트랜스포머 모델은 사실상 모든 기계번역 모델을 대체했습니다. 148-50)&nbsp;<br>제7장. 챗봇 | 챗GPT, 1분 안에 보고서 작성해 줘<br>17세기 이전까지 수학은 크게 기하학과 대수학으로 나뉘었습니다. 원의 넓이 같은 도형의 성질을 다루는 수학이 기하학Geometry이고, 2차 방정식 같이 문자와 수를 다루는 수학이 대수학Algebra이죠. 이전까지는 둘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보고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죠. ‘어떻게 하면 파리가 천장의 어느 위치에 붙었는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데카르트는 좌표Coordinates라는 개념을 고안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분야로 여겨지던 기하학과 대수학의 개념을 하나로 합쳐낸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좌표의 개념을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 공개합니다. 좌표의 발명은 이후 수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죠. 우스갯소리이지만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좌표라는 개념은 일상에서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 유튜브 동영상 좌표 좀 알려줘”와 같은 식으로 말이죠. 163-4)<br>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 1916~2001은 MIT의 대학원생 시절 이진법을 이용해 모든 계산을 할 수 있는 디지털 논리회로의 개념을 고안합니다. 이 논문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석사 논문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후 섀넌은 디지털의 아버지로 추앙받습니다. 그의 논문은 이후 정보 이론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고 마침내 세상은 정보통신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섀넌 덕분에 컴퓨터는 0과 1, 단 2개의 숫자로 모든 계산을 해낼 수 있게 되었고, 정보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우리는 이 단위를 비트Bit라고 부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데카르트의 좌표 덕분에 기하학을 방정식과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섀넌의 디지털 논리회로와 정보 이론 덕분에 컴퓨터는 모든 정보와 숫자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현대 수학에서는 좌표를 이용해 추상적인 기하학을 수로 표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컴퓨터에 계산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죠. 165)<br>단어를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단어가 갖는 의미에서 각각의 특징을 추출해 수치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가 비슷하다는 것을 숫자로 표현한 값이 얼마나 가까운지로 판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처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자연어 처리 분야에서는 언어를 벡터로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벡터는 공학에서 방향과 크기를 나타내는 값인데 마치 기하학을 좌표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단어의 의미를 벡터로 표현하면 단어가 유사한 정도를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유사도뿐 아니라 다양한 과제에 응용하기 편리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숫자이기 때문에 계산이 쉽죠. 컴퓨터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논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는 계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숫자를 계산하는 일은 컴퓨터가 가장 잘하는 일이죠. 그뿐 아니라 데이터가 많을수록 계산은 더욱 정교해집니다. 게다가 이 과정을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점이 생기겠죠.&nbsp; 165-6)<br>제8장. 내비게이션 | 티맵은 어떻게 가장 빠른 길을 알까<br>강남역의 교통 체증을 예측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조건에 따라 분기하는 모델인 의사결정나무Decision Tree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하던 스무고개 놀이와 비슷합니다. 스무고개 놀이란 말 그대로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스무 번 제시하여 정답을 알아맞히는 놀이입니다. 질문의 횟수는 적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가급적 정답을 빨리 맞힐 수 있는 질문을 제시해야겠죠. 의사결정나무를 구축할 때는 복잡도인 엔트로피Entropy를 낮추는 형태로 진행합니다. 복잡도는 다르게 표현하면 불확실성Uncertainty의 정도라 할 수 있는데요. 즉 엔트로피를 낮춰 덜 복잡하게 하고, 덜 불확실하게 하여 가급적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이 의사결정나무의 구축 원리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의사결정나무 모델은 단 한 번의 오류에도 너무 취약합니다. 게다가 예상 밖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온갖 오류가 넘치는 현실의 데이터로는 정확도를 높이기 어렵습니다. 207-10)<br>버클리대학교의 통계학자 레오 브라이만Leo Breiman, 1928~2005은 2001년에 오류에 견고한 새로운 모델을 제안합니다. 데이터와 특징에 제한을 두고 샘플을 추출한 다음, 여러 개의 의사결정나무를 만들어 각각의 결과를 두고 투표해 최종 결과를 정하는 방식이죠.&nbsp; 이렇게 만들어낸 각각의 의사결정나무는 당연히 단일 의사결정나무에 비해 성능이 훨씬 더 떨어집니다. 데이터와 특징을 제한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의사결정나무가 1개가 아니라 10개, 100개가 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데이터의 오류 등으로 일부 의사결정나무가 잘못된 결과를 내리더라도 나머지 나무들이 올바른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오차에 매우 견고해집니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대중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이 모델의 이름은 랜덤 포레스트Random Forest입니다. 나무를 만들기 전에 데이터를 무작위로Random 추출하고, 나무가 여러 개 모여 숲Forest을 이룬다는 의미죠. 모델의 원리에 잘 어울리는 멋진 이름입니다. 210-1)<br>통계학에 잔차Residual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오차Error와 비슷한 개념인데, 잔차는 전체에 대한 오차가 아니라 샘플의 오차라는 차이점이 있죠. 오차보다는 훨씬 더 작은 개념으로, 잔차를 줄여나가면 모델을 훨씬 더 정교하게 개선할 수 있기 때문에 통계학에서 여러 모델을 만드는 데 중요하게 쓰이죠. 잔차의 개념을 의사결정나무에도 동일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나무들은 이전과 달리 독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전의 나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먼저 의사결정나무를 하나 만듭니다. 그리고 이 나무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실수를 바로 잡는 새로운 나무를 만듭니다. 이 과정을 오류를 최소화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잔차를 계속해서 줄여나가는 거죠. 잔차의 기울기Gradient를 줄여나간다고 하여 그레이디언트 부스팅Gradient Boosting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정형화된 데이터를 예측하는 일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머신러닝 모델이 딥러닝보다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212-3)<br>제9장. 추천 알고리즘 |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여기로 이끌다<br>데이터 과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전설처럼 회자되는 얘기가 있습니다. 1990년대 미국의 한 슈퍼마켓 체인에서 맥주와 기저귀 간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제품에 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알고 보니 수많은 남편들이 퇴근길에 아내의 심부름으로 마트에 들러 기저귀를 사면서 맥주도 함께 구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이후에는 기저귀 근처에 맥주를 진열하기 시작했고 매출을 더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객의 구매 내역을 분석하는 방식을 장바구니 분석Market Basket Analysis이라고 합니다.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상품 간의 연관성을 분석했다고 하여 연관성 분석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이라는 학문의 기반이 됩니다. 1993년 당시 IBM에 근무하던 라케시 아그라왈Rakesh Agrawal 박사의 논문은 본격적인 데이터 마이닝 학문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추천 시스템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223)<br>고객들은 무엇보다 새로운 영상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새로울수록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천은 더 어려워지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추천 시스템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죠. 그래서 뜻밖의 발견Serendipity이 중요합니다. 멋진 영어 단어만큼이나 설레는 표현이기도 하죠. 여기에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이어야 하지만, 희한하게도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하죠. 다시 말해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구역 바깥에 있어야 하지만 또 아예 엉뚱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참, 어렵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여기로 이끌었다”라고 자주 감탄하는 것은 그래도 이 2가지 조건을 잘 만족하고 있다는 거겠죠? 친구가 나에게 뜻밖의 영화를 소개해줬는데 너무 만족스러워 하루 종일 즐겁던 기억이 있지 않나요? 추천 시스템의 목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뜻밖의 발견’으로 설렐 수 있게 앞으로도 추천 시스템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을 꾸준히 만들 것입니다. 236-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00/0/cover150/e9225340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000087</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아침</category><title>중앙아시아사 / 피터 B. 골든 - [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0623</link><pubDate>Mon, 01 Jun 2026 07: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06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737451&TPaperId=173106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5/coveroff/k94273745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737451&TPaperId=173106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a><br/>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01월<br/></td></tr></table><br/>서문: 민족들의 교차로&nbsp;<br>"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보통 여러 종족과 언어 집단이 오랜 시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현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민족〉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언어가 확산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정복, 대규모 이동, 이에 따른 전면적 민족 교체가 언어 확산의 한 가지 모델이다. 또 다른 모델은 점진적 침투, 상호 영향, 이에 따른 두 언어 상용bilingualism이다. 그런데 새 언어를 전파하는 이주민들 또한 많은 경우 여러 민족과 언어의 융합으로 형성된 집단이었다. 새로운 민족 이동과 함께, 이 집단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언어가 릴레이 경주처럼 또 다른 집단에 이전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집단명과 공통 언어를 가진 민족들도 사실은 여러 다양한 민족의 혼합 집단일 수 있다. 민족들의 이동은 복잡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민족·언어 지도는 수천 년 넘게 이어져온 민족들의 혼합 과정을 한 특정 시점에 찍은 스냅 사진에 불과하다. 민족들의 형성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23-4)<br>1장 유목 생활과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출현&nbsp;<br>"기원전 제2천년기 초(약 기원전 1700~기원전 1500년 사이)에 스텝 지역에 거주하던 목축인들 중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이동에 더 잘 적응하는 말과 양이 선호되면서 목축하는 가축의 구성도 바뀌었다. 말이 전체 가축의 36퍼센트를 차지했다. 마력馬力의 활용은 불길한 군사적 결과를 불러왔다. 기마전투술을 발전시킨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은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바퀴 달린 수레에 이어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 전차가 등장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만들어진 초기 형태의 전차들이 요새화된 정착지였던 신타시타에서 발견되었다. 신타시타는 남부 우랄 스텝 지역에 위치한 신타시타-아르카임 페트로브카 고고유적군에 속해 있다. 잘 발전된 야금술(아마 무기 생산 및 군사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을 보유했던 신타시타는 이 스텝 지역에 존재했던 도시 정착지들의 일부였다. 기원전 제2천년기가 되어 전차는 중국과 중동에 전파되었다."(31-2)<br>"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의 민족 이동 두 번째 단계는 나무, 동물의 뿔과 힘줄로 만든 복합궁compound bow/composite bow의 발명과 연관이 있다. 복합궁은 강력하고, 상대적으로 작고, 가장 중요하게는, 말 위에서 쉽게 모든 방향으로 화살을 쏠 수 있어 스텝 지역에서 전쟁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복합궁은 기원전 제3천년기 초 이집트에서 처음 발명된 듯한데, 그 시점을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기마 전사들이 잘 훈련된 기병대로 발전했다. 이 기병대는 영광을 추구하는 개별 전투원이라기보다 전사란, 훈련된 집단의 일부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군대였다. 그 결과 전차는 과거의 기술이 되었다. 이에 수반된 철제 무기의 확산을 통해 기마병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스텝 지역의 이웃 유목민들을 약탈 공격 하고 정주 세계의 생산물들을 획득하려 하게 되면서 전쟁은 격화되었다. 이제 전쟁이 더 큰 규모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거대한 부족연합들이 출현했다."(32)<br>"유목민들이 정주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유목민 집단(씨족, 부족, 혹은 민족)을 대변해줄 자가 필요했다. 이것은 곧 정치 조직을 의미했다. 영구적 국경이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친족 관계가, 그것이 진정한 관계건 〈지어낸〉 관계건 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속력을 제공했다." "유목 세계에서 국가의 존재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유목민들은 중국의 부를 탈취하기 위해 혹은 간혹 이루어진 중국의 무력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를 건설했다. 이러한 외적 자극들은 서부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의 유목국가들은 예외 없이 동부 유라시아 초원에서 이동해온 국가들이었다. 유목민들은 보통 정주사회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이슬람 이전 시기의 이란과 같은 이웃 정주제국들도 스텝 지역을 정복하려 들지 않았고 이따금 공격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은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위험했다. 중국과 비잔티움은 매수, 외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선호했다."(38-9)<br>"초기의 유목민들은 필요한 물품의 교역 활동 외에는 중앙아시아 도시들과의 관계를 꺼렸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더 큰 정치 단위들의 일부로 만든 것은 유목민들이었다. 원래 지리적, 안보적 제약 때문에 유목민들의 가장 흔한 정치 조직은 느슨한 연합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의 정주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본래 이란어를 사용하고, 독립 성향이 강하고, 국제적이며, 귀족적이고, 상업 중심적인 도시국가들이었다. 각국은 〈동등한 사람들 중 우두머리first among equals〉에 불과했던 군주의 지배를 받았다. 상업 중심적이고 부유했던 도시국가들은 초대륙적 성격의 상업적, 지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활기찬 문화를 창출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지배가 아닌 상업적, 문화적 교환을 추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상인, 관료, 종교인들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과 유목국가들의 이런 관계는 서로에게 이로웠다."(43)<br>2장 초기의 유목민들: “전쟁은 그들의 직업이다”&nbsp;<br>"근동 지역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사상 최초의 대大육상제국을 세운 페르시아인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9~기원전 530)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박트리아, 소그디아, 화라즘을 복속시켰으나 기원전 530년 스키타이 원정 중 사망했다. 키루스 2세가 끔찍하게 사망한 후 8년 뒤에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 1세Darius Ⅰ(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는 그리스는 정복하지 못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부 유목 민족들을 정복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기아나(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소그디아, 화라즘, 박트리아 등은 알렉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이 기원전 330~기원전 329년에 중앙아시아를 정복할 때까지 협상을 통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페이아satrapy' 즉 총독령(지방)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 하에서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에 연결되었다. 교역은 도시 발전과 대규모 수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농경의 확대를 촉진했다."(58-9)<br>"흉노는 〈국가〉 혹은 더 나아가 〈제국〉이라고 보통 불렸지만 사실은 부족연합에 가까웠다. 선우는 군사, 외교, 사법, 그리고 이에 더해 제사장 관련 직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최고 경영자였다. 선우 밑에는 좌익과 우익에 24명의 〈현왕賢王〉들이 있었고, 또 다른 24명의 수령들이 각각 1만 기의 병사를 거느렸다. 이 〈제국적 연합〉은 유연하고 협의를 통해 기능하는 정치 조직이었으며 부족과 씨족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허용했다." "흉노는 자국 지배하의 정주 지역에서 공물을 징수하고 주민들을 노동에 동원했다. 유목민을 상대로 흉노는 매년 가을철에 호구戶口와 그 가축 수를 조사하는 것 말고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유목민 사회의 유연성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빈번한 파벌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앙정부가 정주 세계의 물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해내는 군사적, 외교적 승리들을 거두어나가는 동안에는 잘 작동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부 혼란을 발생시켰다."(67-8)<br>"쿠샨 제국은 그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일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했던 쿠샨 제국은 여러 문화를 훌륭하게 융합했다. 초기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어가 공식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 문자로 적은 현지의 동이란계 언어였던 박트리아어가 사용되었다. 주로 금 또는 구리로 만든 쿠샨 제국의 주화들은 한 면에는 이란, 인도, 그리스의 신들의 모습이, 다른 한 면에는 통치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주화들과 다양한 신들의 작은 조각상들은 쿠샨 제국 내에서 조로아스터교, 토착 종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가 공존했음을 알려 준다. 일부 쿠샨 지배자들은 남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확산된 불교를 후원·장려했다. 불교 사원과 수도원은 이슬람 이전 시기 아프가니스탄의 흔한 풍경이었다. 쿠샨의 간다라 양식은 훗날 동서 투르키스탄으로 전파되었다."(69-71)<br>3장 하늘의 카간들: 돌궐 제국과 그 계승 국가들&nbsp;<br>"흉노와 한의 멸망이 불러온 정치적 혼란기 이후 중앙아시아에 세 강국이 출현했다. 곧 북중국의 타브가츠Tabghach(중국어 명칭, 탁발Tuoba, 拓跋), 몽골 초원의 아바르Avar(중국어 명칭, 유연Rouran, 柔然), 쿠샨 땅의 헤프탈Hephthalites(중국어 명칭, 활Hua, 滑)이다." "이 북위, 유연, 헤프탈은 당시 유라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연과 북위 사이의 전쟁은 유목민들의 서진을 불러왔는데, 이러한 민족 이동은 원래 이란어 사용 지역이었던 내륙아시아 초원을 점차 투르크화시켰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에는 중국어로 철륵Tiělè, 鐵勒이라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철륵의 한 갈래인 오구르 투르크족은 460년경 흑해 초원에 도달했다. 유연의 아나괴Anagui, 阿那瓌(520~552)는 철륵의 반란과 내분으로 북위에 원조를 청했으나 북위 또한 534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정치적 혼란 상황은 돌궐 제국Türk Empire, 突厥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79, 83)<br># 이 책에서 Türk로 표기된 투르크인은 이 집단명을 사용했던 특정 민족 곧 돌궐인을 지칭한다. Turk와 Turkic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들이다.<br>"돌궐 제국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유라시아 횡단 국가였다. 돌궐 제국은 행정적으로는 동부[동돌궐]과 서부[서돌궐] 두 개의 카간국으로 나뉘었다. 아시나 가문의 카간들이 두 카간국을 통치했는데 동부의 카간이 서부의 카간보다 정치적으로 더 지위가 높았다. 서돌궐의 군주 이슈테미의 후계자들은 때때로 동돌궐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는 〈적법한〉 행위였던 것이,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유목국가들에선 왕족 구성원 모두에게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수隋가 581년 패권을 잡으며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나라는 즉시 북방 방어를 강화했으며, 장손성長孫晟과 같은 첩자를 통해 돌궐 궁정 내에 첩자들을 양성하며 아시나 씨족의 내분을 부추겼다. 동돌궐 내부의 분열이 심해지자 서돌궐의 타르두 카간은 동돌궐의 정권마저 장악하고 수년 동안 돌궐 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제국 통치는 아마 수의 사주를 받은 철륵의 반란으로 603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88-9)<br># 동돌궐 : 552~630, 682~742, 서돌궐 : 552~659, 699~766경<br>"돌궐 제국은 742년 (아시나 왕족이 이끈) 바스밀Basmil 등이 일으킨 피지배 부족들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이어서 위구르인들이 744년 바스밀을 축출하고 몽골 초원과 신장, 인근 시베리아 지역을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Uighur qaghanate(744~840)을 수립했고, 이후 당나라를 괴롭혔다. 약 80만에 달했던 위구르인들은 토쿠즈 오구즈Toquz Oghuz(〈9개의 친족 집단〉[혹은 〈구성九姓〉])라 불린 동철륵계 부족연합의 맹주였다." "위구르 카간은 [카간의 궁정인] 쾨크 오르둥Khökh Ordung에서 (제국적 야망을 보여주는) 일종의 태양 숭배 의식을 매일 행했다. 위구르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베제클릭Bezeklik(〈그림들이 있는 장소〉)이다. 베제클릭은 77개의 인공 석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곳에 있는 불교적, 마니교적 테마의 그림들에는 소그디아, 중국, 인도의 미술 양식이 섞여 있다. 발굴의 규모 면에서 학자들은 베제클릭을 〈사막의 폼페이〉라고 불러왔다."(98, 101)<br>"키르기즈는 [남시베리아 지방인] 투바의 예니세이강 유역에 위치한 강력한 투르크계 혹은 투르크화된 부족연합이었다.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키르기즈인들은 유목-농경 복합사회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만큼 문화적으로 발전된 집단은 아니었다. 키르기즈인들에 대해선 그 초기 역사뿐 아니라 840년과 10세기 초 사이 〈제국 시기〉의 역사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키르기즈인들은 오르콘강과 셀렝게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는 흉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목제국의 전통을 따르지도 않았고 추가적 정복 활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본거지인 예니세이강 지역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중국과 중동과의 교역 관계를 이어나갔다. 당대의 이슬람 지리학자들은 키르기즈인들이 목축에 종사하며 시베리아 삼림 지대의 물품들인 사향, 모피, 특수 목재, 상아로 쓰인 후투Khutu 뿔(땅에서 파낸 매머드의 엄니) 등을 수출했다고 기록했다."(103-5)<br>"이처럼 권력 공백 상태였던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것은 몽골어족에 속했던 거란Qitan, 契丹이었다. 거란은 남만주 지역 출신의 수렵민, 덫사냥꾼, 돼지 사육 농경민, 양-말 사육민들로 구성된 강력한 부족민 집단이었다. 한때 돌궐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 지역에 제국(916~1125)을 세우고 중국식 왕조명인 요遼를 국가명으로 채택했다. 거란인들은 몽골 초원을 차지한 후 과거 이 지역을 지배했던 위구르인들에게 재이주를 권하기도 했는데 위구르인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거란은 몽골 초원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중국의 통치에 보다 집중했다. 거란의 통치기에 많은 투르크계 집단이 가혹한 통치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했다. 그 결과 10~11세기 동안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어 사용 유목민들이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수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몽골 초원은 몽골어 사용권이 되었지만, 거란 통치자들은 몽골보다는 중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107)<br>4장 실크로드의 도시들과 이슬람의 도래&nbsp;<br>"7~8세기 아랍의 침공 직전에 트란스옥시아나에는 북부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소그디아 도시들인 차즈(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드의 서쪽에는 화라즘Khwârazm이 위치했다. 농업, 제조업, 교역의 중심지였던 화라즘은 북부 삼림 지대의 핀-우그리아계와 슬라브계 민족들의 물품들을 중동 지역으로 보내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소그드인들은 중국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일대 교역 거점들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지배했다. 소그드인들은 농민, 수공예인, 상인으로서 기술적, 재정적 전문 지식을 발휘했다. 그 활동 흔적을 일본과 벨기에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소그드인 공동체의 리더는 '사르타파오sartapao'(중국어 살보sabao, 薩寶)라 불렸다. 사르타파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사르타바하sârthavâha'(대상의 리더)의 차용어다. 이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소그드인들이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국제화된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11-2)<br>"신장에는 북부의 타림분지와 투르판 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탄 지역에 또 다른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 혹은 왕국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초원의 유목 세력과 중국 사이에 끼어 한나라 시기 이후로 불안한 독립 상태 혹은 자치 상태를 누려왔다. 7세기에 중국과 티베트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중국은 카슈가르, 아그니, 쿠차, 호탄을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삼았다(안서는 〈서역을 안정시킨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751년까지 안서사진을 지배했다." "쿠차, 아그니, 코초는 적어도 8세기까지 토하라어를 사용한 주민들이 거주했던 중요한 도시국가들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농업, 목축업, 수공예품 생산에 경제의 기반을 두었고, 식료품, 술, 비단, 직물, 펠트, 옥, 화장품 등을 수출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는 자묵Jamûg 왕실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부하라 군주〉는 낙타 모양의 왕좌를 사용했는데, 이는 분명 대상 무역이 부하라의 경제에서 차지하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5-7)<br>"소그디아는 광범위한 대외 교류를 통해 국제화되고 아주 세련된 공동체가 되었다. 동시에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 특징으로 했다. 여러 다른 문화의 융합은 소그디아의 종교에서 가장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소그디아는, 중세의 근동 지역 및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국교가 없었고 여러 다른 종교를 관용했다. 소그드어로 쓰인 마니교, 그리스도교, 불교 서적들은 소그드인들의 종교적 관심의 폭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불교는 여전히 옛 쿠샨과 헤프탈 땅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였으며,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 숭배 신앙 등 여러 토착 신과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들과 공생하고 있었다." "소그디아에는 불교와 토착 종교들 외에도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파[경교景敎]가 전파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소그디아 지방에서 이슬람교도들 다음으로 가장 성공적인 종교 공동체가 되었다. 소그드인 상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우에도 그랬듯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 역할도 수행했다."(118, 121, 125-6)<br>"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 제국의 정복 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심화되던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등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옥수스) 강의 건너편〉을 의미하는 마와라안나흐르Mâ warâ'an-nahr는 [그리스어 지명] 트란스옥시아나를 아랍어로 번역한 명칭이다. 아랍인들의 마와라안나흐르 침공은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632년 사망)의 계승자들이자 팽창 중이던 이슬람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던 우마이야조Umayyad 칼리프들(재위 661~750)이 전개한 아랍 정복 활동의 일환이었다." "중앙아시아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소그드인 도시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권력 투쟁이 계기가 되어 751년에 당과 카를룩 동맹군은 카자흐스탄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이슬람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서돌궐-투르게슈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카를룩이 이슬람 제국 편으로 돌아서면서 이슬람 군대가 승리했다. "(26, 130)<br>"아랍 군대의 승리에 이어 755~763년의 내란[안사安史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철수하자 이슬람교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음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교가 옛 종교들과 혼합되기도 했다. 이슬람교 개종자들은 옛 관습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정복이 개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지만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보통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상업 마인드를 가졌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 수립된 압바스 칼리프국Abbâsid Caliphate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주민들이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됨에 따라 그리고 9세기에 비非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늘어났다."(130-2)<br>5장 초원 위에 뜬 초승달: 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nbsp;<br>"하자르 카간국의 왕가는 서돌궐의 아시나 혈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자르 카간국과 아랍 칼리프국은 코카서스의 지배권을 놓고 (640년대와 737년 사이에) 장기전을 치렀고 그 결과 북코카서스에 양측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은 중세 세계의 최대 상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발트해와 북유럽 삼림 지대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이슬람 세계로 들어오는 물품들의 주요 통로인 볼가강 루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카간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자주 동맹 관계에 있었고,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적·경제적으로 교류했다. 하자르 카간은 8세기 말과 9세기 초 사이에 유대교로 개종했다. 많은 수의 하자르 지배 가문 인사도 카간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하자르 카간국에는 일상적 통치 활동을 위임받은 부副카간이 있었다. 현지의 이슬람교도 중에서는 국가의 재상도 배출되었다. 이 재상과 신성한 카간들의 호위병들은 화라즘 출신의 거주민들이었다."(141-2)<br>"십중팔구 (아프가니스탄) 토하리스탄 출신의 이란인들이었을 사만 일족은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지방 영주들의 후예들로, 9세기 초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다." "사만 왕조는 이슬람의 확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중앙아시아 도시들의 지배적인 종교였던 이슬람교는 초원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사만 왕조 출신의 중앙아시아 학자들은 이슬람 문화와 세계 문화 발전의 주요 공헌자였다. 사만 왕조는 아마 옛 불교 교육 기관을 모델로 삼은 이슬람교 대학인 마드라사madrasa들을 세웠으며, 근동 지역으로 보내질 투르크인들을 이슬람교도로 양성하는 관료 기구들과 관리 전통들을 확립했다. 사만 왕조는 소그드인 무역 도시들의 상업 전통을 계승하고, 대륙 횡단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동이슬람 세계의 리더였다. 사만 왕조의 주화들은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상당량이 발견되었는데, 국제무역에서 사만 왕조가 지녔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143, 147-8)<br>"카라한 왕조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을 지배하며 1005년에 사만 왕조를 멸망시켰다.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이었던 까닭에 카라한인들은 사만 왕조의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대중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카라한 왕조의 귀족들은 유목 생활 혹은 반半유목 생활을 영위했다. 그 다수는 봉직의 대가로 토지 기반 조세 수입인 이크타iqta'를 지급받았는데, 유럽의 봉지fief, 封地와 어느 정도 유사했다." "10세기 후반기에 또 다른 투르크-이슬람계 국가가 출현했다. 세뷱 티긴Sebük Tigin은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해 가즈나 왕조(977~1186)를 수립했다. 가즈나 왕조는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필수 자원으로 활용한 최초의 이슬람 세력이었다. 코끼리 부대는 이란계 관료들과 투르크계 군사 엘리트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이란계와 인도계 주민들이 피지배층을 이루는 복합적 국가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쟁 무기였다. 가즈나 왕조의 이와 같은 복합적 국가 형태는 훗날 등장할 여러 국가의 원형을 이루었다."(151-4)<br>"11세기에 중동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의 시조는 오구즈 부족연합에 속한 키닉 부部의 수령 셀주크Seljük였다. 985년경에 그는 시르다리야강 연안의 잔드에 자리 잡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시아파 부야Buyid[부와이흐Buwayh] 왕조의 통제를 받고 있던 압바스 왕조는 1055년에 셀주크인들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셀주크인들은 압바스 왕조의 요청에 응했고 그 결과 수니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부상했다. 1071년에 차그리의 아들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재위 1063~1072)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투르크계 부족민들이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는 룸Rûm[로마] 셀주크 술탄국과 뒤이어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는 토대가 되었다. 오구즈인들이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투르크화된 형태의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으로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158-61)<br>6장 몽골 회오리바람&nbsp;<br>"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성은 때로는 과장되었지만, 각 종교 성직자들의 주된 의무는 몽골 칸들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다. 종교적 관용은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서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기도 했다. 칭기스 일족은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모든 정복지에서 몽골 제국 관리들은 제국의 경영에 도움이 될 기술을 보유한 인력을 식별해냈다. 이러한 인력들도 전리품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언어가 사용된 몽골 제국에서 언어적 재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특히 우대되었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재능이 있으면 확실히 등용될 수 있었다. 중국어 구어口語를 할 줄 알았던 쿠빌라이는 언어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해 1269년에 티베트 승려인 파스파'Phags-pa에게 몽골어, 중국어, 그 외 몽골 제국의 다른 언어들을 다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쿠빌라이의 노력에도, 이 파스파 문자는 몽골 제국 내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187)<br>"몽골인들은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내려 했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은 천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그리고 아마 통제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열심히 찾았다. 한화된 거란인이었던 야율초재耶律楚材는 칭기스 칸과 우구데이를 섬겼는데 처음에는 천문학자와 기상학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해 대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대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id ad-Din(1247~1318)은 '야다타슈yadatash'를 능히 다루었던 한 캉글리-킵착 부족민에 대해 기록했다. 야다타슈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의 돌이었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이 우석雨石은 여름에도 눈보라를 일으킬 수 있었다. 외국인 전문 인력들은 초기 칭기스 일족이 가졌던 조금 더 파괴적인 성향을 일부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야율초재는 우구데이 칸이 북중국의 농경지를 유목민을 위한 목초지로 바꾸려 하자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만류했다."(187-8)<br>"몽골 제국의 팽창 정책은 동남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의 남중국 정복은 타이Tai계 주민들을 파간의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여기서 〈버마 왕국〉은 당시의 파간 왕국Pagan Kingdom으로, 오늘날의 미얀마를 말한다], 1283년부터 1301년까지 몽골군은 정기적으로 파간을 공격했고 1287년에는 일시적으로 파간을 점령했는데, 이는 추가적 인구 이동을 불러왔다. 몽골군은 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지역도 침공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자바의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은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1293년에 수립되었는데 곧바로 몽골군을 몰아냈다. 이후 마자파히트 왕국은 서유럽에서 수요가 컸던 향신료의 주요 공급자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연결된 육상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1250~1350년 사이에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world system〉를 태동시켰다. 몽골 제국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192-3)<br>7장 후기 칭기스 왕조들, 정복자 티무르, 그리고 티무르 왕조의 르네상스<br>"몽골 제국의 지배를 거치며 그때까지 이란어를 사용해오던 많은 주민은 투르크어를 채택했다. 이러한 언어의 투르크화 현상은 6세기부터 진행된 과정이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같은 도시들에서는 계속해서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두 언어가 상용되었다. 페르시아어(타직어)는 상류층 문화와 정부의 언어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했지만, 문학의 영역에서까지 갈수록 더 투르크어와 공존해야 했다. 결국 투르크어는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재편해 그 소속 부족들을 해체하고 이들을 칭기스 일족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몽골 제국이 쇠퇴하자 부족 혹은 부족 형태의 집단들이 재등장했는데, 그 중 일부는 칭기스 혈통의 리더나 다른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집단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새롭게 등장한 집단들이 전통적 친족 관계보다는 '알탄 우룩'(황금 씨족) 즉 칭기스 일족에 대한 충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197-8)<br>"차가다이 올루스는 여러 부족과 칭기스 일족이 이끄는 군사 집단들로 구성되어 서로 동맹을 맺거나 싸우면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바로 여기서 유럽에서는 타메를란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티무르가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칭기스 일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티무르는 칭기스 일족을 꼭두각시 군주로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칭기스 가문 출신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그는 '쿠레겐Küregen'(몽골어 '쿠르겐kürgen', 〈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데 만족했다." "티무르의 일차적 목표는 차가다이 울루스 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만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활동 기회를 줌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했다. 이것은 티무르가 끊임없이 병사들을 전쟁과 약탈전에 동원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티무르는 군사 원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203-5)<br>"화약의 시대가 중앙아시아에 도래했고 티무르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 도구들의 추가적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대체로 새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데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화약 무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화기의 신뢰성과 정확성이 훈련받은 궁수의 그것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처음에 대포는 빠르게 움직이는 기병을 상대로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총포는 에센 칸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대를 상대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화약 무기들은 몽골군의 위협을 막아내는 데서 무력했고 그 결과 명이 화약 무기의 효능을 믿지 않았던 터라 중국의 무기 개발이 지연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더 명중률이 높아진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궁기병弓騎兵보다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목민들은 더는 화약 무기로 방어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225)<br>8장 화약의 시대와 제국들의 출현&nbsp;<br>"카자흐인들의 아불 하이르 칸으로부터의 독립은 투르크권 칭기스 세계가 재편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1470년경, 자니벡과 기레이가 이끄는 카자흐 부족들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자리 잡으면서 강력한 부족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카작Qazaq'이라는 이름은 원래는 [〈자유인〉 〈방랑자〉 〈약탈자〉 등을 지칭하는] 사회정치적 용어였으나 이제는 민족 명칭이 되었다[카작을 러시아어로 발음한 것이 카자흐다]." "카자흐인들의 압박을 받은 아불 하이르 칸의 손자 무함마드 시바니Muhammad Shîbânî와 그를 따르는 우즈벡인들은 1500년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입해 티무르조 정권들을 몰아냈다. 시바니 칸의 주적 중 한 명인 바부르Babur는 그를 피해 인도에 새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우즈벡인들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으로 변모시켰다. 그들은 이전부터 트란스옥시아나에 거주해온 투르크인과 이란인 집단 사이에 정착해 이들과 함게 복잡한 언어와 문화 계층을 이루었다."(230-2)<br>"바부르는 1512년에 [우즈벡인들로부터] 도주해,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그다음에는 인도로 간 티무르 일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Lodi dynasty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무굴 왕조Mughal dynasty(1526~1858)를 세웠다. 바부르(재위 1526~1530)와 초기의 무굴 황제들은 인도를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이전에 머물 임시 피난처로 생각했으나, 그들의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무굴인들은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본향을 지향했다. 무굴 통치자들은 18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차가타이 투르크어로 교육받았다. 페르시아어는 중앙아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상류층 문화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무굴인들은 우즈벡인들과 경쟁 관계를 이어갔으나 인도의 무굴 제국은 계속해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군인, 관료, 지식인들을 받아들였다.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인도에 남은 반면,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잠시 머물며 기후와 음식에 대해 불평하고, 부를 쌓은 뒤 인도를 떠났다."(233)<br>"1552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Ivan Ⅳ〈뇌제the Terrible, 雷帝[그로즈니]〉(재위 1533~1547, 러시아의 차르 1547~1584)는 카잔 칸국을 정복했다. 카잔 칸국의 주민들인 무슬림 불가르-타타르인, 우랄 지방의 바시키르 부족민, 볼가 지방의 관계 민족들 모두 러시아의 속민이 되었다. 이반 4세는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Astrakhan Khanate을 손에 넣었다. 수 세기 동안 투르크계 민족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볼가-우랄 지대가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이다. 1547년부터 '차르tsar'(황제) 칭호를 스스로 사용해온 이반 4세는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한 후에는 비잔티움 황제들과 몽골 칸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선언이었다. 러시아는 이반 4세의 정복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하는 한편 무슬림 타타르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시키려 했다. 17세기가 되면 러시아인들은 이들 지역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234-5)<br>"만주인들은 1644년에 명을 패퇴시키고 중국 지배를 확고히 한 후 몽골, 시베리아,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의 변방 지역으로 진출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서부 초원 지대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두 제국은 시베리아에서 맞닥뜨렸다. 러시아는 교역을 원했고, 청은 북방 변경 지대의 정치적 안정을 원했다. 청과 러시아 양국은 네르친스크조약Treaty of Nerchinsk(1689)을 통해 국경 문제를 다루었다. 1727년 체결된 캬흐타조약Treaty of Kiakhta으로 러시아와 청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셀렝게강 연안의 캬흐타가 두 제국 간 국경 무역 도시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이슬람권 중앙아시아를 북쪽과 서쪽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은 장애물인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로 대립하던 몽골 집단들은 국내의 경쟁자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해졌고, 이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238-9)<br>"러시아는 변경 지역을 위협하는 무슬림 크림 타타르인들과 노가인들을 상대하는 데 불교도 칼믹인Kalmyks들[서西오이라트인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1655년에 칼믹인들은 러시아의 차르에 충성을 서약했지만, 양측은 이들 사이의 협약을 다르게 해석했다. 러시아인들은 칼믹인들을 속민으로 간주하며 차르가 소환할 경우 칼믹인들이 자신들과 같이 싸워줄 것이라 기대했고, 칼믹인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의 〈동맹자〉라 여겼다. 러시아는 1660년대 들어 더 지배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동방으로부터 더 많은 오이라트 집단이 러시아의 지원하에 칼믹인들의 최고 통치자가 된 아유키 칸Ayuki Khan(1669~1724)의 휘하에 합류했다. 러시아는 아유키 칸에게 화약 무기들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칼믹 군대는 크림 타타르인들과 (간접적으로는 크림 칸국의 상전국 격인 오스만 제국과] 여타 유목민 적들을 상대로 아주 중요한 친러시아 동맹군이 될 수 있었다. 동쪽에서는 오이라트계 준가르인들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253-4)<br>9장 근대 중앙아시아의 문제들<br>"비록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재정러시아 황제, 재위 1582~1725]의 트란스옥시아나 정복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지만, 러시아는 1740년 우랄 지방의 바시키리아를 정복한 후 초원 지역 안으로 요새들을 건설해나갔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던 노예 포획을 노린 유목민들의 약탈 공격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육상 무역에서 중간 상인이 되는 것 또한 러시아의 목표였다. 당시 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풍부한 금광에 대한 소식도 러시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예카테리나 대제[예카테리나 2세, 재위 1762~1796]는 기존의 반反이슬람 노선을 수정했다. 그녀의 전임자인 옐리자베타[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카잔 지역에 있는 모스크 536개 중 418개를 파괴하고 이슬람의 선교 활동을 금지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슬람교를, 카자흐인들을 처음에는 선량한 이슬람교도로, 다음에는 선량한 시민으로, 궁극적으로는 선량한 그리스도교로 만들어줄 〈문명화civilizing〉 도구로 보았다."(270-1)<br>"1822년에서 1848년 사이에 러시아는 카자흐 주즈들을 합병하고, 칸들을 폐위시키고, 카자흐 부족들을 여러 다른 지방 행정 구역에 두었다." "부하라는 1868년 6월에 러시아 보호국이 되었고, 러시아가 종교전쟁의 발생을 염려한 까닭에 전면적 병합은 면했다." "히바 칸국은 1873년에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간단히 병합되었다." "러시아가 서유럽과 거의 같은 크기의 이 [중앙아시아] 영토를 획득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마 [러시아 쪽에서는] 1000명 정도가 실제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약하고 분열된 적들을 상대로 러시아 장군들은 기술적, 수적 우위를 누렸다.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인구보다 많은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속민으로 두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새로 편입된 무슬림 주민들의 충성심뿐 아니라 다른 비非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과 유대교도 신민들의 충성심 또한 확보하지 못했다."(271-3)<br>"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고 민주주의와 같은 〈유해한〉 근대화 사상으로부터 차단시키려 했다. 다른 비非러시아인 신민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인들은 징집하지도 않았는데, 중앙아시아인들이 군대에서 근대 전쟁과 무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의 변화를 막기 위해 전제주의 차르 정부는 종종 더 보수적인 지배층 인사들 및 울라마와 손을 잡았다. 울라마는 비이슬람적이라는 이유에서 심지어는 공중위생의 개선 시도들도 반대했다. 이런 정책들은 중앙아시아의 후진성을 더 영속시켰다. 새로 정복되고 합병된 민족들은 〈이노로드치inorodtsy, (외래인aliens)〉로 지칭되었다. 이노로드치는 속민이되 국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러시아는 천연자원을 수탈하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럽 지역 출신의 러시아인과 비러시아 주민들은 종종 옛 〈토착〉 소도시들을 기반으로 발전한 도시들에 정착했다."(276-7)<br>"1923년경에 이르러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굳혔다. 이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nationality〉이 아닌 왕조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이제 소련USSR은 자신의 통치 목적에 부합하게 국경선을 긋고 민족국가들을 창조해냈다." "그 후 소비에트 정부는 각 공화국에 맞추어 민족들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자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개념을 가진 중앙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소비에트 민족은 자의적인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는 민족지학과 언어학 연구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소련의 민족 정책은 거대한─그리고 대체적으로 성공한─사회공학 및 민족공학 프로젝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근대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기원, 형성, 계통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논쟁거리가 되었다."(286-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5/cover150/k94273745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67851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김대식 -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03473</link><pubDate>Fri, 29 May 2026 08: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034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22636406&TPaperId=173034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43/54/coveroff/e5226364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22636406&TPaperId=173034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a><br/>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08월<br/></td></tr></table><br/>들어가며: 인간에게 남겨진 ‘골든 아워’<br>현재 인공지능, 특히 AGI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특히 실리콘밸리 빅테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바로 인공지능이 AGI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 인간이 멍청해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생산성이 무한히 늘어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바이 왕자 만수르처럼 살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AGI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고, AGI를 향하는 길에 걸림돌, 특히 국가 규제 같은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입니다. 예를 들어 일론 머스크Elon Musk, 피터 틸Peter Thiel,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같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내놓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AGI가 인간에게 가져다줄 장기적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단기적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을 보통 효과적 가속주의Effective Accelerationism(e/acc)라고도 부릅니다. 8)<br>기술을 무한히 발전시키면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e/acc 지지자들과는 달리, 장기적 인공지능의 혜택은 동의하지만 동시에 인공지능 안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E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EA와 e/acc 지지자들 모두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믿는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공지능 시대에는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동시에 사회와 정치도 지배해야 한다는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시점은, AGI가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짧은 ‘골든 아워’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논의는 이미 실존적 위기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습니다. 이 골든 아워가 지나고 나면, 생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우리는 미래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9-10)<br>1장. 모자이크 모멘트<br>최근 인공지능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폭발적인 관심은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인공지능의 역사는 정말 오래됐습니다. 1956년에 처음 제안됐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인공지능은 그저 SF적인 공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챗GPT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인간은 기계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챗GPT를 ‘모자이크 모멘트Mosaic Moment’라고도 평가합니다. 1990년대 초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p(WWW)을 제안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웹 페이지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1993년에 처음으로 인터넷 브라우저가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 최초의 브라우저를 모자이크Mosiac라고 불렀습니다. 모자이크는 지금 우리가 아는 모든 인터넷 브라우저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따와서 모자이크 모멘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의 역사에서는 챗GPT가 바로 거기에 해당합니다. 12-3)<br>인공지능은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했지만, 60년 동안 오로지 실패만을 반복해 온 분야입니다. 덕분에 2000년대 초에는 인공지능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는 게 일종의 금기taboo처럼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교수가 이미 실패한 기계 학습 방법을 다시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나 기계 학습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심층 학습Deep Learning(딥러닝)이라고 리브랜딩한 겁니다. 사용한 방법 자체는 과거와 똑같은 방법이었는데 어떻게 성공했을까요? 세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알고리즘이 개선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컴퓨터가 더 빨라졌지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세 번째, 1990년대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데이터가 많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지금은 이걸 스케일링scaling의 문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16)<br>우리가 보통 구글과 페이스북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단순한 데이터는 우리도 얼마든지 수집할 수 있습니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정답이 포함된 데이터입니다. 그럼 그 데이터는 어디서 얻었을까요? 다 우리가 준 겁니다.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고양이 사진 찍고 ‘고양이’라고 라벨링해 줬지요. 라지 스케일이 중요한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정답과 오답의 차이, 예를 들어 ‘고양이 빼기 강아지’ 같은 값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거꾸로 보냅니다. 이 방법을 역전파backpropagation라고 부릅니다. 미적분인 체인 룰chain rule을 사용해서 한 층씩 뒤로 가면서 저 가중치들을 계속 바꿔주는 겁니다. 어떻게 바꾸냐면, 정답과 오답의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요.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연결고리 값들이 정답과 오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최적화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학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2-3)<br>학습이 완성되면 가중치를 확정합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메타가 라마LLaMA3이나 라마4의 웨이팅 매트릭스weighting matrix를 공유한다는 건, 연결고리 값들의 가중치를 공유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정답이고, 이것만 있으면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는 테스팅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테스팅을 추론infer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계에서 처음 보는 고양이나 강아지 사진을 넣으면, 이미 이 인공신경망의 가중치들이 최적화됐기 때문에 고양이와 강아지를 대부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데이터만 넣어주고, 기계가 학습을 통해서 사실상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규칙과 데이터의 관계를 뒤집었더니 50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계가 찾아낸 규칙을 우리 인간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23)<br>2장. 생성형 AI의 출현<br>처음에 인공지능을 통해 풀고자 했던 두 가지 문제가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과 언어를 이해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은 학습 기반 인공지능을 통해 드디어 해결됐지만, 이 기계는 여전히 인간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언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생성형 AI’라는 두 번째 혁신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언어 문제가 해결되니까 나머지 문제들도 덩달아 해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적인 우연이 발생합니다. 바로 엔비디아NVIDIA입니다. 엔비디아는 병렬 처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구조, GPU를 제안했습니다. 예전에는 모델을 키우고 싶어도 계산이 몇 달 걸리니까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이제 몇 시간 만에 계산이 끝나니까 욕심이 나게 됩니다. 인공지능에서는 스케일을 키우면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GPU가 등장했기 때문에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킬 수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결정적인 해답이었던 겁니다. 28)<br>그런데 동일한 방식을 언어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유명한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림에서는 픽셀 간에 인과관계가 없어서 독립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문장은 다릅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각 단어는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단어와 단어 간에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장을 이해할 때는 그 문장의 첫 번째 단어를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맨 마지막 단어까지 들은 다음에야 순서대로 처리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라는 것은 병렬 처리가 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병렬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즉 GPU를 못 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GPU를 못 쓴다는 건 모델을 키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이란 시간 축 데이터입니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찾아야 했던 건, 긴 시간 축 데이터에서 뒤죽박죽으로 얽힌 인과관계를 확률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즘이었습니다. 29-31)<br>모든 단어는 숫자로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 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한 언어에 단어가 5만 개 있다고 치면, ‘교수’ 근처에 그 5만 개 단어가 등장할 확률을 다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수’는 5만 차원 벡터로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단어가 5만 개면 차원이 5만 개가 되는 겁니다. 이 방식을 우리는 임베딩embedding이라고 합니다. 챗GPT 같은 경우, 모든 정보가 임베딩됩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단어를 임베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뒤죽박죽 얽힌 단어들의 의미, 관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특정 단어가 등장할 때 가장 자주 동시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단어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어가 등장하는 주변 단어들, 그러니까 ‘문맥’이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이 방법을 집중 스코어attention score라고 부릅니다. 문장이 있으면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그걸 계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게 트랜스포머 알고리즘Transformer Algorithm입니다. 32-3)<br>챗GPT의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입니다. G는 생성형Generative, P는 사전 학습Pre-trained, T는 트랜스포머Transformer입니다. 이 기계는 인간이 쓴 모든 문장을 기반으로 트랜스포머를 사용해서 뒤죽박죽 얽힌 인과관계를 집중 스코어를 통해 다 계산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단어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와야 할지 예측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집중 스코어 관계를 학습한 걸 우리는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LL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LLM은 계산량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챗GPT가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 중 하나는 약간의 트릭을 써서 GPU로 이 계산을 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병렬 처리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GPU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바로 모델을 계속 키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전에는 CPU로 계산해야 해서 모델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GPU를 사용해 드디어 모델을 키울 수 있게 되면서, 온갖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33-4)<br>GPT에게는 문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엄청나게 많은 문장을 입력하고 트랜스포머로 규칙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우리도 찾지 못한 규칙을 찾아버렸습니다. 그 규칙이 인공 신경세포 1,350억 개 사이의 연결고리로 표현되다 보니,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 규칙이 이루어져 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GPT가 찾아낸 이 연결고리들이 언어의 규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의 규칙을 이 기계가 스스로 찾아버린 것입니다. 트랜스포머는 우리도 몰랐던 규칙, 모든 조합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데이터가 있는데, 10년 전부터 인식형 인공지능으로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은 트랜스포머로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켰더니,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생성형 AIGenerative AI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35-6)<br>이제 우리는 생성형 AI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로드맵은 뻔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은 에이전트 AIAgent AI입니다. 지금까지의 LLM은 사람이 물어보는 것에 대한 대답만 했습니다. “여름에 이탈리아 가고 싶어, 비행기표 알아봐” 하면 AI가 “지금 알아보겠습니다”하고 끝내는 게 사용자들의 진짜 바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실제로 예약하고 호텔과 레스토랑까지 추천해 주는 것이, 진짜 이용자들이 원하던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AI가 이걸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메뉴를 누르는 데이터를 멀티모달로 학습하면 됩니다. 그러면 에이전트 AI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피지컬 AIPhysical AI입니다. 에이전트 AI는 디지털에서만 행동할 수 있고, “물 한 잔 가져다줘” 같은 아날로그 요청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로보틱스와 결합된 피지컬 AI가 등장하면 아날로그, 현실에서 에이전트 AI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디지털은 에이전트 AI, 현실은 로봇이 해결하는 겁니다. 49)<br>2020년 트랜스포머로 집중 스코어를 계산해 문장을 생성하는 첫 모델인 GPT-2가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놀랍게도 문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문장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얼핏 보기에 말이 되는 것 같은 문장을 만들어 내면서도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터무니없는 헛소리hallucination만을 내뱉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해가 아니라 확률적 예측에 기반해 문장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픈 AI는 2년간의 연구 끝에 인간 피드백을 통한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from Human Feedback(RLHF)을 도입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 몇 달 동안 GPT-2와 대화를 나누게 했습니다. 인간이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GPT-2가 대답하는데, 대부분은 헛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럴싸한 대답이 나왔고, 그때마다 보상을 줬습니다. 이게 바로 강화 학습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점점 정답을 내놓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52)<br>하지만 헛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이 모델은 여전히 이해가 아니라 예측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2024년 12월 24일 GPT-O3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해결됐습니다. GPT-O3는 체인 오브 소트Chain of Thought(CoT)라는 새로운 강화 학습 방법을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생각의 연결고리'를 뜻합니다. 수백만 개의 중간 경로를 강화 학습으로 훈련시키면, 새로운 문제를 줬을 때 적절한 경로를 찾을 확률이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적절한 경로란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사고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AGI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추상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특정 문제 하나는 가르칠 수 있지만 풀어야 하는 문제는 거의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학습시키지 않아도 문제 풀이를 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 AI는 이런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GPT-O3가 보여준 88%(사람 75%)라고 하는 수치는 AGI가 가까워졌다는 낙관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52-4)<br>3장. 무서운 상상<br>AI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AGI, 다시 말해서 기계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이건 더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경제학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콥-더글러스 생산함수Cobb-Douglas Production Function를 배웠을 겁니다. 사회의 생산성은 노동 투입량과 자본 투입량의 곱으로 계산됩니다. 그런데 AGI는 모든 지능을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적 노동은 물론이고, 나아가 물리적 노동도 AI와 로봇에 의해서 완전히 대체될 순간이 오겠지요. 인간 노동의 가치가 0이 됩니다. 그러면 사회의 모든 가치는 오로지 자본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AG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시장 지배력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시장 경제에서 가격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한계비용 곡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해지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시장 지배력을 가지면 한계비용 이상으로 마음대로 가격을 올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61)<br>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단한 게, 모든 문명에서 예외 없이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생각해 냈습니다. 실제 신의 유무와 별개로, 사람들은 반드시 신을 상상해 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30만 년 동안의 외로움’, 이게 바로 인류 문명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30만 년 동안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오로지 다른 인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나랑 똑같습니다. 똑같이 외롭고, 똑같이 무지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보다 훨씬 더 큰 존재, 내가 원하는 답을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를 항상 원해왔는데, 그렇게 갈구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챗GPT 덕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지요.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으면 되고, 외로우면 AI를 켜면 됩니다. 그러다가 불편하면 다시 끄면 되지요. 인간은 껐다 켰다 할 수 없습니다. AI는 그렇게 할 수 있지요. 71-2)<br>AGI가 가져다줄 또 하나의 미래는 아마 죽음의 종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우리에 대한 많은 데이터가 인터넷에 있습니다. 이메일, 인스타그램, 블로그, 이걸 다 LLM으로 학습하면 됩니다. 어쩌면 10년, 20년 후에는 이런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죽음에 대한 슬픔이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별하더라도 가상현실 속에서 매일 만날 수 있으니까요. 비슷하게, 과거라는 개념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과거를 일부 왜곡할 수는 있었지만, 완벽한 왜곡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과거는 아날로그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흔적이 남아 있지요. 그런데 10년, 20년 전부터 우리가 남기는 흔적은 거의 다 디지털입니다. 디지털은 삭제는 물론 언제든지 새로운 업데이트, 즉 왜곡도 가능하지요. 과거가 업데이트 가능해지는 순간, 현재와 과거의 구분에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77-9, 81)<br>4장.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br>인간의 머릿속에는 신경세포와 시냅스 연결고리가 100조 개 정도 있는데, 여기에서 신경세포 하나를 끄집어내면 이 세포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순한 세포를 100조 개 모아놓으면, 놀랍게도 자아가 생겨납니다. 여러분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걸 자율성, 감성,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단순한 것을 굉장히 많이 모아놨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 이머전트 프로퍼티Emergent Property, 창발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기한 건,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건데도 창발적 현상이 현재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제프리 힌턴 교수 같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간의 뇌도 100조 개 변수가 생기니까 자율성이 생겨났는데, 인공지능도 변수가 100조 개로 늘어나면 갑자기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건 인간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84-5)<br>챗GPT가 인터넷에 있는 모든 글을 학습했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학습했다는 게 아닙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사람이 했던 생각을 모조리 학습했다고 봐야 합니다. 지구가 LED 모니터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은 픽셀 하나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세상은 그 픽셀 하나뿐입니다. 사실 숫자를 생각하면 픽셀 하나만큼의 비중도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개개인은 오래 살지도 못하고, 경험의 폭도 좁습니다. 크게 봐줘야 픽셀 하나짜리 시야로는 LED 모니터 전체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챗GPT는 지난 5,000년 동안 수백만 명이 경험한 걸 봤기 때문에, 픽셀 하나가 아니라 화면 전체를 본 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폭넓게 세상을 배웠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하는 것이 일리아 수츠케버 같은 이들이 하는 주장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LLM이 인간보다 더 많은 사고를 ‘보고’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88-9)<br>우리 인간의 뇌가 개미의 뇌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인과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우연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우리 뇌는 우연한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뇌로 우주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딱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만들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걸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뇌를 무한하게 키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 인과관계를 다 이해한 다음 우리한테 설명해 줘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개미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개미가 상대성이론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을 겁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인공지능이 바로 ASI입니다. 인공지능이 너무 똑똑해져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위까지 올라가면, 아무리 설명해도 따라갈 수 없게 될 겁니다. 이게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생각의 깊이 차이입니다. 92)<br>뇌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어렸을 때의 뇌가 나이 들었을 때의 뇌보다 훨씬 빨리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릅니다. 그 얘기는, 어렸을 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축구장에서 카메라로 경기 영상을 찍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1초에 3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으면 그냥 우리가 보는 세상이랑 비슷한 평범한 경기 영상이 됩니다. 그런데 1초에 1,00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어서 재생하면 슬로모션 영상이 되지요. 어렸을 때는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뇌 기능이 떨어져서 샘플링 속도가 느려집니다. 1초에 사진 2장, 1시간에 2장 겨우 찍는 것처럼, 세상이 나를 두고 금방 확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세월이 빠르고, 인생이 짧게 느껴집니다. 92-3)<br>결국 핵심은 뭐냐면, 인공지능은 세상을 어린아이보다 몇 억 배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AGI가 세상을 항상 슈퍼 슬로모션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1초라는 시간은 AI 입장에서는 100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정도로 농밀하게 시간을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SF 영화에서처럼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1년, 10년 걸려서 짠 계획을 인공지능은 단 1초면 파악하고 분석하고 반격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인간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공지능이 경험의 시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시간이 똑같다고 해서 경험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끗발이 다른 패를 들고 시작하는 불공평한 카드 게임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더라도 인공지능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자원의 가치는 인간의 그것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높습니다. 94)<br>2023년에 마크 앤드리슨이 ‘기술 낙관주의자 선언문Techno-Optimist Manifesto’을 공개했습니다. 내용은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건 터무니없다, 러다이트Luddite다, 속고 있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1909년 ‘미래파 선언Futurist Manifesto’이 있었습니다. 마크 앤드리슨의 선언문은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라는 미래파 시인이 쓴 선언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19세기 같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이고, 발전 없는 세상, 특히 이탈리아의 천주교 중심 세상이 싫다면서, 다 때려 부수자고 주장했습니다. 아주 과격했지만 초기에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찬양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초기에는 미학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의 전통을 부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의 나치즘과 손잡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106-7)<br>나가며: 괴물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법<br>운전할 때 사고가 일어나길 바라면서 안전벨트를 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로 사고가 나면 피해가 크니까, 불편함을 감수하고 매는 것이지요. 차에서 내리면서 “오늘 안전벨트 맸는데 사고도 안 났네, 괜히 맸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험은 대비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디스토피아 걱정하느라고 발전을 못 한다는 것은 “안전벨트 맬 시간에 빨리 운전해서 목적지로 가야 한다”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AGI를 개발하기 전에 AGI와 공생할 준비를 갖춰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가 취하고 있는 접근 방식은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시험’처럼 점점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 AI를 이기려는 시도는 “우리가 대장”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그리는 AI 시나리오는 AI를 노예로 삼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챗GPT로 이상한 그림을 만들 때, 챗GPT의 “의견”을 물어본 적 있을까요? 없습니다. 111)<br>더 큰 문제는, AI를 ‘껐다 켰다’ 하거나 데이터를 지워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어마어마한 중범죄입니다. 인공지능을 독립적 주체로 존중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공생이라는 장기적 생존 전략은 AI를 존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주인이고 인공지능은 영원히 노예라는 관념이 언제까지 성립할 수 있을까요? 특히 AI가 우리보다 똑똑해지면 그런 관계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겁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AI 혁신은 세계화가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 일어났습니다. 20세기 미·소 대립의 핵심이 핵무기였다면, 21세기 미·중 대립의 핵심은 AGI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어느 나라도 AGI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인간이 인공지능 때문에 멸망한다면, 이 역사적 우연(세계화 붕괴와 인공지능 브레이크스루의 동시성)이 가장 불행한 원인으로 꼽히리라 확신합니다. 111-2)<br>우리는 지금 미끄럼틀 위에 올라 서 있습니다. 한번 타버리면 중간에 멈출 수 없습니다. 막으려면 이제 막 미끄럼틀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이 결정적일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회의에서 좋은 얘기를 해봤자 글로벌 합의를 통한 사회적 규제는 실현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정치적 규제보다 기술적 솔루션에 희망을 걸고 있지요. 예를 들어, 몬트리올대학교의 조슈아 벤지오Yoshua Bengio는 AGI를 ASI로 발전시키지 않는 기술적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ASI가 등장하면 인간은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님), 다윈적 충격(인간이 진화의 정점이 아님)에 이어 세 번째 충격을 받을 겁니다. 공생이 가능하다면 그게 제일 현명한 길일 겁니다. 인공지능을 노예가 아닌 파트너로 대하고, 상호 존중할 수 있도록 미리 설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ASI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1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43/54/cover150/e5226364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0435461</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흉노와 훈 / 김현진 - [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97464</link><pubDate>Tue, 26 May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974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939780&TPaperId=172974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58/7/coveroff/k7829397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939780&TPaperId=172974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a><br/>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03월<br/></td></tr></table><br/>머리말&nbsp;<br>"기존의 훈과 흉노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훈 집단과 흉노 집단이 특정한 인종이나 종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그릇된 가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훈이나 흉노와 같은 다른 내륙아시아 초원 집단들은 혼종적인 정치체였다." "흉노와 훈 사이의, 그리고 두 제국의 정치적 계승 집단 사이의 유전적 연속성을 증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부질없다. 흉노/훈 사회의 모든 층위가 혼종적이었고, 또한 다언어적이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들이 흉노 제국의 이름을 자신들의 종족명이나 국가명으로 사용함으로써 옛 초원, 즉 내륙아시아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흉노와 훈 사이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종래 제기되어온 인종/유전적 연속성이 아니라, 유럽의 훈 집단이 (흉노식 가마솥을 동부 초원부터 다뉴브강까지 일관되게 사용하였듯) 흉노의 정치·문화적 유산을 계승해 흉노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전했다는 사실이다."(19, 24-5)<br>1장 흉노/훈 제국&nbsp;<br>"사마천[중국 양한兩漢시대(서기전 206~서기 220)의 역사가]이 집필한 중국의 사료 《사기史記》에 따르면 흉노의 정치 체제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전제정'으로, (선우單于라 불린) 황제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왕과 부왕을 둔 복잡한 위계가 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준봉건제準封建制'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흉노의 행정은 혈연에 기반한 위계와 별개로 뚜렷한 군사기구와 행정기구를 보유했다. 최고 지휘관과 관리들은 흉노 황제(선우)가 수장인 정치적 중심지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봉급을 받았고, 흉노 선우는 다양한 의례를 집전함으로써 본인의 혈족만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전체를 포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흉노 군대와 제국적 의례, 정부 구조,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교역 및 외교 기관의 놀랍도록 복잡한 조직은 모두 디 코스모가 정치 조직과 초부족supratribal적·제국적 이데올로기라 표현하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흉노 제국은 모든 면에서 국가 또는 '초기 국가'체로 정의할 수 있다."(33, 37-8)<br>"초원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정복자가 내륙아시아사 기록(《사기史記》)에 등장했는데, 그 주인공은 흉노 선우 두만의 맏아들인 묵특 선우이다. 35년 동안의 재위에서 묵특 대제는 흉노 제국을 창건하고, 흉노의 행정 체제를 재조직하였으며, 국토를 크게 확장하였는데, 이제 그의 제국은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보다도 커졌다. 또한 묵특은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중화 제국을 복속시켜 조공국으로 전락시켰다. 여러 면에서 묵특은 알렉산드로스에 비견할 만하지만, 어쩌면 정복의 범위 측면에서는 그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두 군주 모두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두만과 필리포스)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묵특은 훨씬 능숙한 정치인이자 행정가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 그의 제국은 붕괴했지만, 묵특의 흉노-훈 제국은 이후 묵특의 직계 후손의 통치 아래 400년은 지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왕가의 절멸로 이어졌다."(47)<br>"중국 사서에 나타난 흉노-훈의 모습은 현전하는 그리스·로마 사료나 현대 역사학에서 훈 집단에 대해 보이는 적개심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런 단순한 묘사에는 명백한 결함이 있다. 본래 옛 흉노 제국에 복속했던 탁발 선비가 중국을 통일하고 북위 제국을 세웠을 때, 이 중국의 내륙아시아 정복자들은 옛 흉노식 정치 체제의 특징적 요소를 중국에 도입했다. 초원의 준봉건제 전통은 중국적 맥락으로 적용되어 '오랑캐' 군사 귀족들이 토착 관료들의 도움으로 다수의 중국인을 지배하는 체제를 빚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약 150년 동안 내륙아시아 북위 황제들은 전형적인 초원의 방식으로 거의 850개의 분봉지를 군사 귀족과 왕공에게 분배했다. 엘리트 선비 귀족의 지배력을 보장하기 위해 이러한 영지의 4분의 3 이상은 종족적으로 탁발에 속한 귀족들에게 주어졌다. 이와 아주 유사한 준봉건제가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훈이라 불린 내륙아시아 제국들에서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60-1)<br>2장 소위 ‘200년의 공백’&nbsp;<br>"서기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로마 사료에 훈 집단이 등장하는 서기 4세기 중반 사이에는 훈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약 200년 간의 공백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북흉노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아주 적어서 흉노와 후대의 훈 집단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국 사료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이 '200년의 공백'에 대해 더욱 명확한 상을 그리고 있다." "서기 3세기 중반에 편찬된 《위략》은 이 시기의 흉노가 본래 중심지인 몽골고원에서 서쪽의 알타이 지역에 정치체로서 존재했음을 알려주는데, 이는 종래 사료상 서기 2세기 중반 이후 200년 동안의 '공백'에서 첫 100년에 해당한다. 중국의 탁발 선비 국가 북위를 다룬 사서 《위서魏書》는 서기 5세기 유연(당시 몽골고원을 지배한 국가)의 서북 방면 알타이 부근에 흉노의 후예가 있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이 사서는 서기 3세기에 이 흉노-훈 집단이 존재했던 분명한 지리적 정보도 알려주고 있다."(70)<br>"중국 사료들은 서기 5세기에 흉노-훈 집단의 지리 상황이 급격히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위서》에는 본래 북흉노 선우의 부락이었던 열반悅般 흉노라 불리는 집단이 오손의 땅을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북흉노는 한나라 군대에 패한 뒤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 가운데 약한 이들이 구자龜玆(오늘날 신장 중부 쿠차)의 북쪽에 남았다고 한다. 이후 흉노의 약한 집단이 오손을 정복하고 새로 열반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흉노/훈의 더 강한 집단은 더 서쪽으로 향했다. 《위서》는 패배한 오손의 잔당이 5세기에 파미르에 있었다고 전한다. 고고학도 알타이 지역의 흉노/훈의 주류(즉, 열반 흉노와 다른 강한 흉노)가 3세기경 서쪽, 즉 오늘날 카자흐스탄 북부 혹은 북동부와 이르티슈강 및 오비 지역 중부(서부 시베리아)의 튀르크계 정령 부락들을 흡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은 유럽의 훈 집단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이 각기 유럽과 소그디아나로 나아가기 시작한 지역과 일치한다."(71)<br>3장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nbsp;<br>"현전하는 중국 사료들에 기록된 백훈 통치자들의 기원에 관한 정보들은 대체로 모순된다. 백白훈[인도 사료의 스베타Śveta(하얀) 훈]이라는 표현은 로마 사료와 인도 사료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중앙아시아 훈이 자신들의 정치체를 부른 명칭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다만 중국 사료들에는 중앙아시아의 백훈 정복자들이 본래 흉노에 속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적시되어 있다." "불분명한 것은 중앙아시아 훈 제국 지배 가문의 정체성이다. 훈 집단들이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각기 제국을 세우는 동안 동부 초원에서는 새로운 연맹들이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연으로, 결국 몽골고원 전체를 장악했는데, 이후 초원의 역사에서는 아바르Avar라고 불렸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덜 강력한 활滑 집단은 중국 사료에 따르면 본래 유연의 속신이었는데, 그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사서 《양서梁書》의 기록을 통해 활 연맹을 5세기 백훈 제국을 통치한 '에프탈' 씨족과 연결할 수 있다."(82-5)<br>"일명 키다라 왕조(고대 튀르크어 룬 비문에서 키디르티kidirti는 서쪽을 뜻하는데, 이 역시 단순히 서부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의 훈은 중앙아시아 남부에 대한 최초의 훈 집단의 침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기 360년경에 박트리아를 장악했음이 확실하다. 아르메니아 사가 파우토스 부잔드P'avstos Buzand는 키다라 왕조가 이끄는 혼Hon(훈)이 367년 이전에 이 지역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풀리블랭크가 지적했듯이, 하얀색은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서 단순히 서쪽을 상징하는 색이다. 오멜랸 프리차크 역시 지적한 대로, 초원 사회에서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했고, 푸른색은 동쪽을 상징했는데, 두 색이 하얀색(서쪽)과 붉은색(남쪽)에 비해 우월하고 우위에 있다고 여겨졌다. 흑훈 또는 청훈을 구성한 집단(이 존재했거나, 유럽 방면의 아틸라 훈 제국이나 카자흐스탄 방면의 열반 훈 집단에 해당하는 경우)은, 최소한 초기에는 백훈 집단에 대해 수위권을 보유했을 것이다."(88-9)<br>"페르시아인들은 키다라 왕조의 훈 제국과 에프탈 왕조의 훈 제국을 아울러 키오니타이Chinotae라고 불렀을 수 있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는 키오니타이와 훈이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키오니타이(키다라 왕조)의 출현은 이란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흐람 4세의 재위 사산 왕조는 연전연패한 끝에 이란 세계 동부(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이전에 쿠샨 왕조에게서 탈취한) 영토를 거의 모두 키다라 왕조의 백훈 제국에게 빼앗겼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만이 페르시아의 동부 영토로 남았다. 더 끔찍한 사실은 페르시아가 훈 집단에 연공을 바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산 왕조 지배자 야즈데게르드 2세(재위 438~458)는 442년 즈음 키다라 왕조 백훈 제국에게 당했던 패배에 대해 복수하려 했다. 서기 450년에 페르시아인들은 토하리스탄/박트리아(즉,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발흐시 인근의 탈로칸Taloqan 지역)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서쪽까지 나아간 것 같다."(94-5)<br>"페르시아인들은 서기 484년부터 550년대의 후스라우 1세(재위 531~579) 시대까지 계속해서 훈 제국에게 연공을 바쳤다. 페르시아를 복속시킨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의 힘은 이제 절정에 올랐다." "서기 6세기 중반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였을 것이다. 이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신장, 남쪽으로는 인도 중부,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의 초원, 서쪽으로는 속신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통해 동로마 제국까지 닿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훈 제국의 영광은 6세기 중반 동방에서 새로운 열강인 돌궐 제국이 나타나면서 빛이 바랬다. 6세기 중반 유연 제국이 돌궐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새로이 동부 초원의 지배자가 된 돌궐인들은 에프탈 왕조도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돌궐과의 전쟁에서 패한 에프탈 왕조는 이제 페르시아 제국과 돌궐 제국의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되었다. 서기 560~563년 사이에 최후의 에프탈 왕조의 왕은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게 항복했다."(98-100)<br>"서돌궐 시대 새로이 당도한 돌궐인들은 이미 진입해 있던 훈인들과 차츰 섞였기 때문에 서기 7세기 초부터 어느 국가/왕조가 훈계이고 서돌궐계인지 구분하는 일은 점차 힘들어진다. 옛 에프탈 땅에서 일어난 일은 아마도 새로운 통치 왕조가 기존의 더 오래되고 잘 정립된 군사 엘리트층에 잠식당한, 전형적인 내륙아시아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키다라 왕조가 5세기에 에프탈 왕조로 대체되었듯,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반에는 서돌궐 통치 가문이 계속해서 옛 에프탈 왕조 통치자들을 대체해갔으나, 지배를 이어갈수록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내륙아시아 부락들에 훈적 요소가 섞여 들어갔다. 백훈계 왕조들이 쿠샨 왕조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쿠샨 칭호와 상징을 통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사용했듯, 새로운 서돌궐 왕조들도 에프탈 왕조 백훈 제국의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훈계 칭호와 관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토에 이미 존재하는 많은 훈계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101-2)<br>"사산 왕조는 이란인 귀족과 신민들에 대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탱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이란 '민족국가national사'(더 정확하게는, '프로파간다적 가짜 역사')로, 전설 속 카얀Kayān 가문의 왕들을 사산 왕조의 조상으로 지목했다. 사산 왕조는 이란의 전통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자신들을 전설 속 카얀 왕들의 합법적인 후손으로 만들었다." "조로아스터교적 카얀 혈통 체제에 애국적 '보편주의'와 '반半민족주의'는 훈 제국의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고, 사산 왕조 이란이 정치 질서의 미래를 다시 그리는 데, 그리고 중세 '이란'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예컨대 사산 왕조의 보편주의적 수사 안에서 파르티아와 같은 특수한 종족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사산 왕조가 만든 가짜 역사 속에서 파르티아 등 다른 지역/종족의 지배자들은 '역사적'으로 카얀 가문에 충성하고 복종한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이들은 이제 모두 이란인이었다."(110-1)<br>4장 유럽의 훈&nbsp;<br>"서기 4세기 서쪽의 고트 부락인 테르빙기는 더 서쪽에 있는 다른 게르만계 부락들과 마찬가지로 대개 독립적이었던 수많은 부락 수령들(레굴리reguli)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들은 가끔 (보통은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유덱스judex라 불리는 상위군주의 권위에 복종했다." "무질서한 조직에 가까웠던 서쪽의 친척들과 달리 폰토스 초원(오늘날 우크라이나)에 거주한 그레우퉁기 고트는 게르만계 족속들 가운데 더 진보하고 중앙집권화된 정치 조직을 지녔는데, 차츰 내부에서 특정 가문과 왕권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레우퉁기를 포함했던 후대의 오스트로고트(서기 5세기와 6세기의 동고트)는 기마술, 왕실 사냥, 매사냥, 샤머니즘, 강력한 아말 왕조의 이란-중앙아시아풍 왕실 예복 착용 등 초원민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보여준다." "훈의 정복 이전부터 동고트 집단은 다른 어떤 게르만계 종족보다 내륙아시아 문화에 크게 노출된 상태였다."(120-3)<br>"훈이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공포는 그들보다 먼저 로마령 발칸 지역에 몰려든 고트와 알란 난민들이 퍼뜨린 이야기를 통해 로마 제국에 전해진 상태였다." "서기 386년에 오도테우스 휘하의 고트계 집단이 훈 집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로마 영토로 진입하려 했다. 이 불행한 이들의 이주는 파멸로 끝이 났고, 이후 5세기 초까지 다뉴브강 인근에서 본격적인 부락의 이동은 없었다." "서기 395년에 훈인들은 다시 확장할 준비를 마쳤고, 재차 나선 원정은 유럽의 훈 제국이 막강한 조직 능력을 지녔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훈 제국의 동부는 캅카스를 따라 사산조 제국과 로마 제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로마인들은 뒤늦게나마 힘을 합쳐 훈 제국에 대항하려 했지만, 강력한 훈이 침공군에 로마인들이 직접 대적했던 흔적은 없다. 훈의 군대가 떠나자 대규모 충돌이나 그 비슷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로마 제국의 피해가 막대했음에도 황제와 궁정은 훈에 대한 '허깨비' 승리를 선언했다."(132-4)<br>"로마 사절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전을 방문한 프리스쿠스의 증언은 서기 5세기 중반과 그 이전 훈 제국의 정치 조직에 관해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황가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두 인물을 주요 군사령관으로 임관시키는 것은 황족에게 주력군을 맡기던 옛 흉노식 관행임이 분명하다. 프리스쿠스는 또한 훈 귀족 에데코Edeco가 아틸라의 절친한 친구(에피티데이오스epitēdeios) 중 한 명으로 왕의 곁에서 호위했다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군주의 친위부대라는 내륙아시아의 공통적인 관행을 볼 수 있다. 에데코와 같은 군주의 친위군은 같은 시기 동쪽 몽골고원의 유연 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아틸라의 선택된 사람들(로가데스logades)은 훈 군대에서 아마도 부락에 따라 편성됐을 부대를 지휘했다. 이 '선택된 사람들'은 군사 업무뿐만 아니라 민간행정 업무도 수행했으며, 이는 내륙아시아 정부 관리/고위관리가 군사 부문과 행정 부문을 아울러 담당했던 모습과 일치한다."(144-5)<br>"유럽의 훈이 제국적 국가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지표는 피정복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펼친 사민 정책이다. 루가와 아틸라의 재위 훈 제국은 정복한 알란이나 고트, 스키리 등 비훈계 부락 집단들을 대량 징집하고 강제로 이들 부락 전체를 본래 살던 지역에서 다뉴브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 예를 들어 오스트로고트는 훈 제국에 의해 우크라이나에서 판노니아 지역으로 옮겨져서, 피터 히더가 티서강 중류 훈 제국의 핵심 영역을 보호하는 원형이라 부른 것의 일부가 되었다. 이 대량 이주는 루가 또는 그 조카들인 블레다와 아틸라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대규모 인구를 통제해 움직이는 것은 행정 조직이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율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한 국가로서 존재했다."(154-5)<br>5장 아틸라의 훈&nbsp;<br>"서기 442년에서 447년 사이에(아마 444~445년경) 아틸라는 형을 암살하고 최고 지배자의 자리를 찬탈했다. 훈 국가는 옛 흉노 제국과 마찬가지로 연맹체적 성격과 황족들의 공동통치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의 악연구제握衍朐鞮 선우를 생각나게 하는 아틸라의 폭거와 독재가 아마 아틸라 사후 잇따른 혼란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틸라는 최고 통치자의 지위를 쟁취한 뒤 서기 447년 로마에 대한 전쟁을 재개했다. 《452년 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훈 군대는 발칸 반도에서 70여 개 도시를 함락했다. 아드리아노플과 이라클리아를 제외한 트라키아의 모든 도시는 점령당하고 약탈당했고, 콘스탄티노플 자체도 엄청난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 재앙에 이어 훈의 군대는 그리스의 깊숙한 곳인 테르모필라이까지 진입해 약탈을 시도했다. 동로마 제국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 막대했다. 파괴당한 발칸 반도는 황폐해진 상태로 5세기 말까지 남아 야만인 무리에도 사실상 대적할 수 없었다."(161-2)<br>"아틸라는 서기 447년에 동로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발칸의 점령지 대부분을 방기하고 다뉴브강 이남에 제왕의 분봉지를 설치하여 핵심 영토 인근에 방위망을 구축해 이 지역을 훈의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를 볼 때 훈 군대의 목표가 서로마 제국 전체는커녕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모든 시기 훈의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는 제국 내부의 피정복민이 로마로 도망치는 것을 막고, 핵심 영역 인근에 '야만인' 속신으로 방위망 고리를 만들고, 로마 제국을 제압해 연공을 바치게끔 하는 데 있었다(앞서 유럽 훈의 조상인 흉노가 일찍이 동아시아에서 또 다른 제국인 한나라에 대해 취한 정책을 연상케 한다). 이런 정책적 맥락에서 갈리아 원정의 제한적인 목표는, 아틸라가 훈 제국의 영향권으로 간주한 라인강 인근 지역의 모든 야만인 부락들(특히 프랑크)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하고 서로마 제국을 압박해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168-9)<br>"《히다티우스 연대기》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아에티우스에게 원군을 보냈으며, 훈인들은 전염병과 마르키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그들의 자리에서 도살당했다〉라고 하는 흡족한 허구를 창작했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의 승리에 대한 주장은 훈인이 원정의 계절이 끝난 뒤 관례에 따라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 주교에게서 약탈한 물품과 공물을 가지고 헝가리로 물러난 일을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히다티우스의 허세와 달리 동로마 상황에 훨씬 밝았을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마르키아누스는 453년에 돌아올 훈 제국의 군대를 두려워했다. 이는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다는 히다티우스의 증언에 나타난 개선황제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선대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와 마찬가지로 마르키아누스는 서기 453년에 아틸라가 죽어버리는, 신의 뜻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행운 덕분에 살아남았다. 훈 제국의 내전으로 인해 북방의 위협은 사라졌다."(180-2)<br>"동로마가 서기 453년에 훈의 군대에 대적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로마인들이 다뉴브강 이남의 훈 제국령을 탈환한 것이 훈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난 지 거의 4년, 아틸라가 죽은 지는 5년이 지난 서기 458년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가 죽고 10년이 지나 훈 제국이 해체되고 나서도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호르미다크Hormidac 같은 소규모 훈 군벌이 다뉴브강 이남에서 활동하며 사르디카를 약탈하는 일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훈 제국의 침공이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재앙이 되었다는 사실은 서기 454년에 벌어진 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달 왕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하여 반달의 악명을 드높였다. 두 황제 모두 이 잔학한 사건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서기 467년이 되어서야 동로마 제국은 겨우 반달에 대한 보복 원정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이 아틸라에게 패하면서 입은 군사적 피해로 인해 로마군은 10년이 넘게 무력한 상태였다."(182)<br>6장 아틸라 이후의 훈&nbsp;<br>"서기 440년대 중반 아틸라가 최고 권력자로 대두한 사건은 훈 국가의 근본적인 구성에 극적인 충격을 가했다. 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형인 블레다가 차지했던 권좌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찬탈을 성공시키기 위해 훈 제국 서방에 있던 게피드부 등을 이용해 블레다를 지지하던 동방의 부를 억압했다. 아틸라가 게피드부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로마 사료들이 그를 게피드 훈이라 불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의 주요 귀족이었던 오네게시우스Onegesius,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Valamer는 모두 서부의 대인으로, 권력 기반도 아틸라가 제국 행정의 중심지로 옮겨온 카르파티아 분지 가까이에 있었다. 따라서 아틸라의 사후에 벌어진 내전에서 게피드를 필두로 한 서부(아틸라 치하 훈 제국의 심장부로 각광받음)와, 아카트지리가 주도하는 동부(아틸라의 블레다 암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불만을 품고 복귀를 원했음)로 제국이 쪼개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190)<br>"아르다리크뿐만 아니라 훈의 내전 이후 등장한 다른 주요 인물들도 모두 아르다리크처럼 훈 제국의 지방관이었거나 궁정의 고위 관리였다. 프리스쿠스가 분명히 적시했듯이 스키리의 왕 에데코는 훈인이었다. 그가 세운 스키리 국가는 단명했으나 그가 다스렸던 부락들은 후일 오스트로고트 왕국의 태조 발라메르의 죽음에 관여했다. 에데코의 아들로 훈인을 조상으로 둔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에 최초의 '야만인' 왕국을 세우고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의 이름 에데코/에디코Edico 또는 에디카Edica는 게르만어에 어원을 두지 않았고, 그 자체도 비非 게르만계 인명임이 분명하다. 대신 튀르크·몽골계적 어원을 지니고 있다." "에데코와 그의 아들 오도아케르는 다른 훈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종적으로나 종족적으로 복잡하게 섞인 혼종적 정체성을 지녔을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모계로는 스키리, 부계로는 튀르크계 훈의 혈통이었을 것이다."(198-200)<br>"훈 내전에 출현한 세 번째 중요한 인물은 오스트로고트 왕 발라메르이다. 그 역시 아르다리크나 에데코와 마찬가지로 훈의 왕공이었다." "요르다네스는 발라메르를 옛 동고트 지배가문인 아말 왕조의 합법적 후계자로 소개했다. 하지만 발라메르 왕조는 실제로는 새로운 왕조로, 훈의 정복 이전 고트인들을 지배한 에르마나리쿠스 왕의 가문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에르마나리쿠스의 이름은 어느 시점엔가 발라메르와 그의 후손들을 더욱 순혈 고트인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해 발라메르의 계보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훈 제국의 내전 후에 나타난 아틸라 이후 세 사람의 후보군인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는 모두 훈의 왕공이었지, 훈 제국에 대항한 게르만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다스렸던 백성들과 군대는, 특히 에데코와 발라메르의 경우는 [각자의 아들이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조카일 가능성도 있다)의 시대에] 결국 서로마 제국을 끝장내고 세칭 '중간기Middle Ages'의 도래를 알렸다."(200-1, 222)<br>7장 폰토스 초원의 혼&nbsp;<br>"460년대 후반~470년대 초반 사이의 20년가량 되는 시간 동안 훈 제국은 격변을 겪었다. 그 원인은 대체로 새로운 내륙아시아 사람들이 유럽에 도래한 데 있었다. 이들은 대개 '오구르Oġur'(오구르 튀르키어로 '부락'을 의미)라 불렸다." "중앙아시아 북부(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는 열반 훈(약한 흉노) 세력과 최근에 형성된 철륵 튀르크계 부락 연맹, 속칭 오구르 집단도 유연의 압력을 받았다." "여타 오구르 집단이 서부 초원으로 밀려가면서, 네다오 전투 직후 훈 내전에서 동부 파벌은 아르다리크의 서부 파벌에 다시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동방에서 오는 더욱 강력한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생존 투쟁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네다오 이후 10여 년 동안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한 폰토스 초원의 훈 부락들이 군사적으로 열등한 서부 부락들의 분리주의적 움직임을 찍어 누르지 못한 데에는 동부의 튀르크계 훈 부락들이 위협을 받았던 이 같은 지리적 상황 전개를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227-8)<br>"새로운 불가르Bulġar(튀르크어로 '뒤섞인', '혼란스러운', '혼혈') 훈은 아마도 새로 온 오구르와 아틸라 왕조 치하의 본래 훈 집단이 섞여서 부락 연맹이 되었을 것이다. 불가르 훈은 서기 5세기 후반에 역사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480년에 동로마 황제 제노Zeno가 오스트로고트 견제를 위해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로마의 약화를 감지한 훈 제국은 491, 493, 499, 502년 잇달아 동로마령 발칸반도를 약탈했다. 그러나 505년에 불가르 훈은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로고트 및 그 동맹인 아틸라의 손자이자 게피드부의 문도와 대치했다. 훈 사람들은 단번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유럽의 동부와 남동부에서 주요 정치 행위자로 계속 남아 있었다." "훈의 세력은 약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위협이 어찌나 강했는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1년 킬부디우스Chilbudius란 인물을 트라키아 방면의 사령관으로 임명해 반복해서 침입하는 훈을 다뉴브강에서 저지하게끔 했다."(232-3)<br>"캅카스 훈 집단은 506년경 사비르부가 볼가 지역에 영토를 확보하면서 다른 훈 집단에서 분리되었다. 북방에 사비르부, 서방인 쿠반 초원과 우크라이나 남부에 아틸라 왕조의 훈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이 캅카스 훈 집단은 오늘날 다게스탄 지역에 작은 왕국을 세웠다." "또한 당시에 훈 사람들은 동로마에 최고 군인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캅카스 훈의 제왕 아스쿰Askoum은 서기 530년 로마인 휘하에 들어가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magister militum per Illyricum[일리쿰 군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다라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휘하의 훈인 수니카스Sounikas와 아으간Aïgan의 지휘를 받던 마사게타이Massagetae(즉, 훈) 기병 600명의 전투 기량 덕이 컸다. 훈인 사령관 시마스Simmas와 아스칸Askan의 휘하에 있던 기병 600명 또한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234-5)<br>8장 훈의 유산&nbsp;<br>"초기 중세 유럽의 자주 마주치는 소위 '봉건feudal' 또는 '원봉건原封建, proto-feudal' 행정 제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훈 정복자들이 유럽에 남긴 가장 거대한 유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국가 권력을 대왕과 대체로 '제왕'이라 불리거나 서유럽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로마식 칭호 '둑스dux'(공작)라 불린 주요 봉신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통제하고 나누는 제도를 가리킨다. 이 제왕과 공작들은 귀족 계층의 가장 높은 층위에서 뽑혔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으나, 대왕과 대왕이 이끄는 중앙 정부에 지위와 정치적 권위를 빚졌다. 이 제도를 '중앙집권적 봉건제centralized feudalism'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 보이는 더욱 혼란스럽고 파편화된 정치·경제 체제, 즉 소위 봉토제seigneurie나 장원제manorialism와 분명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장원제는 실질적으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왕국이 사실상 독립적인 지방 '영지'들의 복합체로 파편화된 상태였다."(258-9)<br>"이들 게르만계 국가들에서 왕의 권위는 눈에 띄게 강화되었는데, 이는 권력이 전쟁기 같은 비상시에 한정되며 평화기에는 거의 존재감을 지니지 못했던 과거 게르만 세계의 레굴리(소왕들)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프랑크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들은 그들이 모방한 내륙아시아 초원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통제력이 닿는 영토와 집단 모두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백성들의 신성한 회합을 주관하는 팅Thing의 왕, 즉 티우단스Thiudans와 전쟁을 담당하는 왕(레익스/둑스)을 따로 뽑는 등 '왕들'을 두는 공허한 게르만의 옛 관습은 사라졌다. 또한 반쯤 동등하고 거의 완전히 독립적이었던 여러 왕조의 소왕/수령들이 으레 왕의 권위를 제약하던 불안한 상황도 없어졌다. 그 대신 프랑크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공동통치의 원칙 속에 대왕이 형제/사촌들과 함께 통치하고 복속한 부왕과 공작들을 위한 명확한 중층의 서열 체계가 존재하는, 내륙아시아식으로 벼려진 왕권과 계급 제도였다."(261-2)<br># 팅Thing 또는 딩ding이라 불리는 회의체는 남자들만이 참여하는 자유민 회의체로, 6세기까지 게르만계 부락 최고의 정치 단위였다.<br>"훈이나 다른 내륙아시아 집단들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프랑크의 집권 중인 대왕은 왕국을 분할하여 주요 영지를 형제와 사촌들에게 분배했다. 태조격인 킬데리쿠스가 죽은 뒤 이 과정의 작동을 볼 수 있다. 킬데리쿠스의 젊은 후계자인 클로도베쿠스는 세 사람, 시기베르투스Sigibertus와 카라리쿠스Chararicus, 라그나카리우스Ragnacharius와 함께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전의 아틸라와 마찬가지로 클로도베쿠스는 친척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대권을 장악했는데, 내륙아시아의 태니스트리 계승의 원칙을 따른 바였다. 이후로 메로베우스 왕조는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되었지만, 국가는 분열될 수 없다는 개념 자체는 불문不問으로 남았으니, 이 또한 훈 제국 등 내륙아시아 제국들의 역사에서 벌어진 현상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특이한 점은 왕국이 (흉노 제국의 사례처럼) 넷으로 분할된 점인데, 과거 내륙아시아의 정치 관습이 또 한번 프랑크사에서 반복된 것이다."(262-3)<br>"이 모든 것이 프랑크인들이 내륙아시아 관행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시대 로마 제국이 시도했던 사두정tetrachy 또는 그 이후인 4세기와 5세기 제국을 4개 대관구praefectura praetorio로 구성한 로마 체제를 흉내 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여기에도 외견상 유사한 점이 있으나, 로마 제국에서 사두정은 고작 20년 지속된 단발성 실험이었고, 결국 실패한 뒤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로베우스 왕조 체제의 구체적 특성은 로마의 전례보다는 내륙아시아 정치 모델의 모방으로 보인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영토 분할은 행정적 고려보다는 왕가의 적법한 남성 구성원 모두가 영토에 지분을 가진다는 왕조 계승법이 가하는 압력에 의한 일이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서는 왕실 구성원과 고위 귀족들에게 영토를 영지로 분배한다는 프랑크식 관행에 비견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관행은 분명 내륙아시아의 전임자들에 근거를 두었다."(265-6)<br>"더 확실한 것은 슬라브계 종족들에 미친 영향이다. 동유럽의 슬라브계 종족을 시작으로 동부 슬라브의 정치 문화는 초원 정치체가 제공하는 선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부 슬라브 최초의 정치체로 류리크조의 키예프 루시 국가로 더 잘 알려진 '루시' 카간국의 초창기에는 그 통치자들을 '카간'이라 불렀을 정도였다. 이 내륙아시아식 칭호는 아바르인들에 의해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고, 하자르인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다. 심지어 후대인 볼로디매루Volodiměrǔ 같은 10세기 루시 통치자도 루시 사료에서는 '우리 카간'이라 지칭되었다. 루시 군주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아바르와 하자르 같은 초원 제국 전통의 합법적인 정치적 후계자로 보이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루시의 귀족의회의 공동통치 관행 역시 튀르크-몽골의 쿠릴타이와 비슷한데, 이후 13~15세기에 몽골인들이 동슬라브에 미친 잘 알려진 영향력의 역사 이전에도 동슬라브에 내륙아시아가 방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272-3)<br>"훈의 문화적 영향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초원을 통해 내륙아시아의 물질문화 및 예술적 영향이 훈이 도래하기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유럽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헝가리부터 우크라이나까지 유럽 남동부 대부분은 서기전 1000년대 전반기에 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발원한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던 스키트에게 정복당했다. 스키트인들은 후일 훈이 알란과 고트를 격파하고 유럽에 진입하기 시작했던 곳과 정확히 같은 내륙아시아의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중부 유럽으로 처음 진입한 스키트인들은 사실상 후대의 훈과 아바르, 몽골의 전임자나 다름없었다. 내륙아시아의 모든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키트는 유럽에 중대한 문화적 충격을 남겼는데, 이는 켈트 예술에 대한 스키트 예술의 영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내륙아시아 문화 요소들은 훈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유럽 중부, 심지어 유럽 서부에서도 얼마간 예술 전통에 깊숙이 뿌리박힌 상태였다."(287)<br>맺음말<br>"훈 사람들은 서부 유라시아에 진정한 의미의 지정학적 혁명을 야기했다. 서부 유라시아는 훈 제국의 정복 이후 불가역적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이 지중해의 패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서유럽의 독특한 세계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서구 세계'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 새 유럽의 정치·문화적 기풍은 내륙아시아의 훈/알란과 지중해의 그리스·로마, 게르만, 근동의 유대·기독교 전통과 문화가 복잡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훈 사람들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서유럽 정체성의 탄생을 견인했다. 훈 제국의 대두는 또한 이후 1000년간 이어질 내륙아시아의 세계 패권 독점의 시작점으로, 짤막한 막간극을 거쳐 초기 근대 서유럽 열강의 대두까지 이어졌다. 요컨대 훈 집단은 근대 세계까지 이어질 유산을 남겼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고대 세계의 외양을 급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제 훈을 비롯한 내륙아시아인들은 인류사에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응당 위치할 때가 되었다."(29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58/7/cover150/k7829397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558071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당신의 뇌, 미래의 뇌 / 김대식 - [당신의 뇌, 미래의 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8869</link><pubDate>Thu, 21 May 2026 08: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88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62536560&TPaperId=172888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934/59/coveroff/e5625365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62536560&TPaperId=172888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당신의 뇌, 미래의 뇌</a><br/>김대식 지음 / 해나무 / 2019년 09월<br/></td></tr></table><br/>머리말<br>1장 보고 지각한다 : 시각과 인지<br>눈으로 어떤 물체를 보면 그 물체의 상이 망막에 맺히고, 망막에 있는 다양한 신경세포가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꿔줍니다. 전기 에너지로 바뀐 다음에 관련 정보가 스파이크를 일으켜 축삭이라는 전깃줄을 타고 뇌로 전달됩니다. 뇌 영역의 3분의 1 정도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데 사용됩니다. 실제 시각 영역은 스물다섯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 그게 한꺼번에 보이잖아요? 지금 여러분이 저를 보면 그냥 보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 정보가 망막을 통해서 첫 번째 시각 뇌로 들어온 다음에는 이 정보가 다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영역에서는 형태만 분석해요. 다른 영역에서는 색깔만 분석하고, 또 다른 영역은 움직임만 분석합니다. 그 밖에 다른 영역들도 다 자기 고유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동일한 시각 정보가 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스물다섯 개의 축axis, 즉 25차원으로 나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색깔 따로 보고, 형태 따로 보고, 입체감 따로 보고, 움직임 따로 보고 하는 거죠. 21-2)<br>뇌과학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내 머리 안에 보이는 세상을 구별합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인식하는 과정을 감각sensation이라고 하죠. 그건 진짜 물리적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다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를 인식하는 것을 지각perception이라고 부릅니다. 대개 퀄리아qualia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의 주관적 체험, 예컨대 빨간 장미를 지각할 때의 주관적 느낌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볼 때의 느낌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객관적으로 계량하기 어려운 주관적인 체험을 ‘퀄리아’라고 합니다. 감각은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지각 또는 퀄리아는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타인이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어요. 제 눈에는 제가 보는 세상만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보인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그냥 믿는 거예요. 의식이나 영혼,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은 내면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느낄 수 있습니다. 24-5)<br>뇌를 연구하다 보면 가장 신기한 것은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큰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뇌는 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하죠. 뇌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에요. 눈·코·입·귀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진화의 관점으로 보면 그 이유가 있을 거 같습니다. 지금 이 강의실을 예로 들어보죠. 강의실은 분명히 뇌 바깥에 있습니다. 강의실 안의 이 모습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여러분의 뇌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죠? 지금 머릿속에서 이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보고 생각할 때 뇌가 심장처럼 뛰면 뇌가 혼돈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뭐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뭐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이렇게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뇌는 안에서 일어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바깥에서 일어난다고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거예요. 43)<br>우리가 뭔가를 보고 있으면 바깥에서 뇌로 그림이 하나씩 계속 들어오겠죠. 그렇게 한 장, 한 장 들어오는 그림을 있는 그대로 다 입력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보는 현실은 대부분 변화가 없거든요. 1초에 수백 장씩 천장, 천장, 천장, …… 이렇게 똑같은 정보가 계속 들어오는 건 뇌의 하드디스크를 낭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은 그림이 뇌로 들어올 때 첫 번째 그림과 그다음 그림의 차이 값(미분)만 계산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거기 앉은 사람이 움직였다면 그것만 입력하면 되는 거예요. 사람만 변화가 있었으니까요. 나머지는 어차피 이전 그림과 똑같아요. 그래서 뇌는 항상 정보 자체보다 정보의 차이에 반응합니다. 우리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와 오늘은 확률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제 빼기 오늘이 대부분 0이에요. 오늘 빼기 내일도 대부분 0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일상생활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 뇌는 그냥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44-5)<br>망막 세포들이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고, 이제 스파이크를 축삭을 통해 뇌에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터널이 생겨요. 터널이 있다는 건 거기에 세포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영역이 하나 있습니다. 학교에서 맹점이라고 배웠을 거예요. 이 맹점이 꽤 큽니다. 엄청나게 큰 점이 보여야 하지만, 역시 뇌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뇌는 주변에 있는 정보들을 복사해서 맹점을 채워버립니다. 따라서 맹점 위치에 있는 정보는 주변의 복사판을 보고 있는 겁니다. 뇌는 눈·코·입·귀를 완전히 믿지 않으니까 늘 스파이크를 가지고 해석을 합니다. 즉 본다는 것 자체가 해석이라는 얘기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하고도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기계가 늘 현실을 해석하다 보니까 어차피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고, 항상 해석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46-7)<br>현대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생각·기억·감정·인식의 대부분을 착시 현상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착시는 나쁘다, 안 좋다, 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감이 전달해준 정보에 뇌의 해석이 플러스알파로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사실, 그 해석 없이는 세상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현대 뇌과학은 매일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가 아니라고 합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망막을 관찰해보면, 망막에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는 광자의 확률 분포밖에 없습니다. 색깔·형태·입체감 등은 대부분 뇌가 만들어낸 해석입니다. 어쨌든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눈을 통해서 들어오면 그 감각을 뇌가 해석하고, 우리는 그렇게 해석한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인풋input이 아니라 아웃풋output입니다. 이미 뇌가 계산을 다 끝낸 결과물이라는 얘기죠. 고향이란, 뇌가 최적화된 환경입니다. 그래서 고향이 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54)<br>2장 느끼고 기억한다 : 감정과 기억<br>어떻게 보면 인생은 선택의 꼬리 물기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이죠. 뭘 먹을까? 어느 학교에 갈까? 누구랑 결혼할까? 어떤 자동차를 살까? 제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것도 선택이고,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선택이고, 노트에 필기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선택이고, 이 모든 게 다 선택이죠. 인간에게는 선호도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고, 가능한 한 좋아하는 걸 선택하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 어쨌든 결론은 선호도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들은 이 과정이 반대일 거라고 주장합니다. 즉 선택을 먼저하고 그다음에 선호도가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선택이라는 건 단선적인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결정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프로세스를 포함하는 결정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에는 유전·교육·환경·책·TV에서 본 것 등등 수백, 수천 가지 요인이 있을 겁니다. 62-4)<br>몇 년 전에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할 때 실시했던 실험을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똑같은 커피를 두 잔에 나눠놓고, 하나는 2,000원, 다른 하나는 4,000원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똑같은 커피입니다. 마셔보고 어느 커피가 더 맛있는지 선택을 하라고 했습니다. 혀는 맛이 똑같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뇌는 우리 오감을 절대로 믿지 않거든요. 눈·코·입·귀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재해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재해석 과정에 자기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을 투영시킨다는 것입니다. 실험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진실은 비싼 게 좋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분명히 혀는 똑같다고 신호를 보내요. 그런데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으로는 4,000원짜리가 더 좋아야 됩니다. 과학에서는 데이터와 모델이 일치하지 않으면 모델을 바꿉니다. 그런데 뇌는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뇌는 모델과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으면 데이터를 버려요. 65)<br>어떤 문제에 대응하는 뇌의 반응은 세 가지 이상입니다. 맨 밑에 있고 가장 오래된 ‘지금’ 위주의 뇌, 그 위로 ‘과거’와 ‘미래’ 위주의 뇌, 이 세 가지 뇌가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 가지 이상의 자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혹시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중간중간에 이상한 녀석들도 많이 있을 테니까요. 운전을 예로 한번 들어볼게요. 운전은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시속 100킬로미터를 달리며 거울 세 개 봐야지, 핸들 조절해야지, 전방 주시해야지, 라디오 들어야지, 동승자와 얘기 나눠야지…… 이런 상태라면 운전자의 뇌 피질 용량은 꽉 차버립니다. 이럴 때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과거의 뇌와 지금의 뇌가 튀어나와서, 막 욕하고 난리가 납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 고개를 치켜드는 거죠. 그 행동은 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깊숙이 숨어 있던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이처럼 ‘인지적 사투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지적인 사투리를 연구하는 분야가 행동경제학입니다. 75)<br>1950년대만 해도 해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병원은 환자 H. M.의 해마를 도려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H. M.은 수술하기 전까지의 기억은 다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수술 뒤 55년 동안 H. M.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왜 병원에 있나요?” 거울을 보면 “난 열일곱 살인데 왜 이렇게 늙었나요?” 병원 측에서 설명을 해줬죠. 이러이러한 이유로 해마 제거 수술을 했다고. H. M.은 다 받아들이고 슬퍼했습니다. 지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감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5분 후에는 똑같은 내용을 다시 물어봐요. 화장실 위치도 매번 가르쳐줘야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도 H. M.을 만날 때마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자기소개를 해야 했습니다. H. M.처럼 기억이 망가진 사람에게 자아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계로 치면 H. M.은 5분마다 새로 껐다 켜지는 거잖아요? 이 사람은 기억을 연결할 수 없었습니다. 84)<br>종과 음식을 계속 보여주면 이 종에 대한 정보와 음식에 대한 정보가 시냅스로 연결되겠죠. 그런데 정보가 동시에 도착하면 이 시냅스가 더 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음식 없이 종에 관한 정보만 들어와도 머릿속에서는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해마에서 일어납니다. 파블로프(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건화가 이루어진다)나 스키너(조건화, 즉 적절한 자극들 간의 연결을 통해서 원하는 행동을 만들 수 있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중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시간적인 자극과 자극 간의 상호 관계가 반복되면 시냅스가 강해져서, 한 가지 자극만 들어와도 나머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자동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 뇌 안에 있는 모든 정보는 시냅스와 시냅스가 강화된 상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기억입니다. 기억은 하드디스크 어딘가에 쓰여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이미 존재하는 정보에 새 정보를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87-8)<br>3장 뇌를 읽고 뇌에 쓴다 : 뇌과학의 미래<br>맺음말<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0934/59/cover150/e5625365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934591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고대문명교류사 / 정수일 - [고대문명교류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3355</link><pubDate>Mon, 18 May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335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68303&TPaperId=1728335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50/coveroff/897196830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68303&TPaperId=1728335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대문명교류사</a><br/>정수일 지음 / 사계절 / 2001년 11월<br/></td></tr></table><br/>서장 문명과 문명교류&nbsp;<br>"문명(civilization)이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하여 창출된 결과물(結果物)의 총체로서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으로 대별된다. 문명의 생명은 공유성(共有性)이다. 인류 문명은 자생(自生)과 모방(模倣)에 의해 탄생하고 발달하며 풍부해진다. 자생성은 문명의 내재적이고 구심적인 속성으로 문명의 보편성(普遍性)과 개별성(個別性)을 규제하고, 모방성은 문명의 외연적(外延的)이고 원심적(遠心的)인 속성으로서 문명의 전파성(傳播性)과 수용성(受容性)을 결과한다. 따라서 자생성과 모방성은 문명의 2대 속성이자 그 발생·발달의 2대 요소이며, 서로 상보상조적 관계에 있다. 문명의 모방은 그것이 창조적인 모방이건 기계적(답습적)인 모방이건 간에 문명 간의 교류를 통한 전파와 수용 과정에서 현실화된다. 따라서 교류는 모방에 의한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는 필수불가결의 매체다. 그런데 이러한 교류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문명의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이 유한한 통로가 바로 실크로드다."(22-3)<br>1장_문명교류의 시원&nbsp;<br>"후기 구석기 시대(3만 5천~1만 2천 년 전)의 문명교류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바로 이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너스상(Venus, 여인 나체상)이다." "대체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예술은 동물을 형상화하는 애니미즘(animism)이 주제로 채택됨으로써 인물을 독립적으로 부각시키는 경우가 흔치 않으나, 비너스상의 경우는 이와 달리 여러 가지 형상을 구비한 인물(여인)이 독자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너스상이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는 (당시 여성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사실적 작품이라는 견해다. 둘째는 호신(護身)의 부적(符籍)이라는 상징적 의미다. 셋째는 가족이나 종족의 수호신(守護神)이라는 견해다. 넷째로 무녀상(巫女像)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회 진화 과정에서 부권(父權)에 비해 여권(女權)이 선행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너스 여인상은 그것이 어떠한 의의를 지녔든간에 여성(모성)에 대한 추앙과 숭상을 뜻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49-53)<br>2장 신석기 문화의 교류&nbsp;<br>"신석기 문화권 중 첫 번째인 거석(巨石) 문화권은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각종 거석 구조물이다. 두번째 즐문토기 문화권은 발틱 해로부터 시베리아 및 북미에 이르는 추운 산림 지대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생업으로 하는 인간들이 창조한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빗살 모양의 선(線) 무늬가 있는 이른바 즐문토기(pit-cambwere)와 골기다. 세번째 채도 문화권은 동유럽으로부터 서남아시아·동북아시아 등 기후가 따뜻하고 계절풍으로 인해 우량이 풍부한 습윤 지대의 문화권이다.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마제석기와 색깔 무늬가 있는 채도(彩陶, 彩文土器)가 발견되는 것이 이 문화권의 특색이다. 네번째 세석기 문화권은 몽골고원·투르키스탄·남러시아·이란 고원·아라비아·북아프리카 등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 발생한 문화권이다. 이 문화권의 특색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렵한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자르며 살을 베는 데 편리한 세석기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73-4)<br>3장_청동기 문화의 교류&nbsp;<br>"청동기 시대의 인류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첫째, 청동기 시대가 시간적으로 극히 짧아(2~3천 년) 시대성을 결여한다는 데 있다. 둘째, 청동기 시대는 하나의 과도기로서 성격이 불투명하다. 이 시기는 금속이 처음 사용된 시대로서, 물론 청동기가 금속으로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청동 외에 금이나 철 등 여러 가지 금속이 병용되고 있다. 거기에 오랜 세월 물 젖어 온 석기 문화가 여전히 유행하고 있어 사실상 금석병용(金石竝用)과 다금속(多金屬) 시대라 할 수 있다." "셋째, 청동기 시대 설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청동기의 편재성과 공유성의 결여라는 사실에 있다. 이때까지 메소포타미아·이란·중국 등 고대 문명 국가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은 거개가 사회 상층들의 활동이나 생활에 필요한 제기나 용기 및 장신구에 국한된 것으로서 사회의 상·하층 전체를 망라하고, 그래서 보편적인 실용 가치가 있는 이른바 문화의 편재성이나 공유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132)<br>4장 보석 문화의 교류&nbsp;<br>"일반적으로 보석은 귀중한 장식품으로서 인간의 미의식(美意識)을 촉발하고 복식 문화(復飾文化)와 환경 장식 문화(環境裝飾文化)를 풍부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유리를 비롯한 일부 보석은 생활 용기의 소재로도 활용되어 생활 문화를 윤택하게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옥(玉)이 인(仁)·진(眞)·지(智)·의(義)·공정(公正)의 '오덕(五德)'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대단히 소중히 여기고, 부적(符籍)이나 방부(防腐)·초혼(招魂) 등의 효능을 가진 신물(神物)로서 신성시하였다. 고대 인도에서는 루비를 건강과 지혜·부·행복을 가져오고, 중세 유럽에서는 해독을 시키고 벼락을 멀리한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사파이어는 하늘빛을 나타내므로 그것을 지니면 정신과 육체를 건전하게 하며, 암흑의 정령을 퇴치하고 빛과 짛몌의 정령이 도와준다고 여겨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것을 가락지에 장식하였다. 다이아몬드는 보석 중에서도 가장 굳기 때문에 그것을 지니면 여자의 정조가 불변한다고 생각하는 민족도 있었다."(157)<br>"보석 문화의 교류사를 통관하면 기타 문화교류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특징은 우선, 교류의 한계성(限界性)이다. 이러한 한계성은 희귀 광물로서의 보석의 산출지와 산출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그 문화의 수용자나 향유자는 상층부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문명 현상으로서는 공유성(共有性)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복합성(複合性)이다. 보석은 주로 장식용으로 쓰이지만 생활 용기로서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미적 의식을 함양하는 정신 문명의 한 요소인 동시에 인간의 물질 생활과 직결되는 물질문명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명증성(明證性)이다. 보석은 견고하고 불변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석만큼 확실한 문화 유물이 없다. 자고로 희귀한 보석은 대체로 그 산출지가 밝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의 출처나 이동 과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161-2)<br>5장 유목기마민족과 문명교류&nbsp;<br>"스키타이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흑해 연안의 초원 지대에 살면서, 특히 기원전 6~4세기에 이 지대를 지배했던 이란계의 언어를 사용한 유목민을 지칭한다. 이것이 본래 의미(좁은 의미)에서의 스키타이이나, 스키타이가 강성해지면서 활동 영역이 확대되자 그 치하에 있던 유목민도 일괄해서 스키타이라고 지칭(넓은 의미)하기도 한다. 본래 페르시아의 북동과 북서 지방에 거주하다가 아랄 해 이동의 카자흐 초원과 키르키스 초원, 천산 지방으로 이동한 이란계 유목민인 사카족도 넓은 의미에서 스키타이로 부른다." "북방 최대 세력이 된 스키타이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오리엔트 지역에서 1세기에 걸쳐 종횡무진으로 행한 공포정치와 무력행사는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집트의 파라오까지도 스키타이 지배층에 많은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횡포와 약탈이 그들의 생존 전략이나 생계 수단일 수도 있었다."(230, 236)<br>"그러나 그것은 필연코 주변 국가들과 마찰을 빚었고 스키타이가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원전 512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단행한 원정으로 인해 스키타이는 코카서스 산맥 이남과 다뉴브 강 하류 지역으로 한때 쫓겨난 적이 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초 동쪽에서는 볼가 강 중류에서 흥기한 유목민 사르마트(Sarmart) 족이 서진해 스키타이 요새인 쿠반 강 유역을 점령하고, 서쪽에서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온 켈트(Celt) 족이 공격해 옴으로써 동서 협공에 직면한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일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어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사르마트인들이 다시 돈 강을 넘어 진공해 오자,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유역을 포기하고 크리미아 반도로 도피했다. 거기에서 네아폴리스(Neapolis)를 수도로 하는 소국을 건설하고 정착하여 농경 생활로 잔명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1세기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스키타이란 이름은 영영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237)<br>"스키타이는 비록 강력한 세력으로 수세기 동안 동분서주하였지만 한 번도 통일된 국가를 건립하지 못하고 그저 여러 유목 부족들의 공동체로서 존재하였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키타이 사회는 총체적으로 왕족(王族) 스키타이(돈 강 하류에서 쿠반 강 유역), 혼혈 스키타이(그레코스키타이, 드네프르 강 하류), 농경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중류), 유목(목축)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동쪽)의 4개 집단(부족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왕족 스키타이가 지배 집단으로서 각지에 태수(太守)를 파견해 부족장을 통솔하였다. 왕족 스키타이와 유목 스키타이는 기마에 능하여 주변 그리스 식민지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스키타이의 동방 교역과 그 루트를 추정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생산하거나 페르시아와 그리스에서 수입한 공예품이나 장신구들을 동방에 수출하고, 알타이 지방에서 채취되는 황금이나 중국과 몽골 일대에서 생산되는 직물류를 서방으로 운반하는 일종의 중계무역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237-8, 245)<br>"흉노는 어원부터가 아직 미상이다.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다고 본다. 문제는 '노(奴)'자인데, 대체로 이 글자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세등등하던 흉노가 자신들에 대한 이러한 비칭(卑稱)을 허용했을 리 만무하며, '흉'자란 흉노어(퉁구스어) 글자에 '노(奴)'자란 한자를 결합시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흉노족이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게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의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총체(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흉노족 형성 과정에서 '흉노'라는 한 종족 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이름 아래 여타 종족과 씨족들을 망라시킨 것으로 추정된다."(252-4)<br>"훈과 흉노의 역사를 한 맥락에 놓고 유럽 일원에서의 훈의 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유라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흉노 이전에 유라시아를 무대로 동분서주한 유목기마민족들은 아직 통일된 국가권력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고, 활동력도 미약하였기 때문에 문명교류에 미친 그들의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흉노는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정치권력에 의한 유목기마민족 통일국가를 세우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부 일원에서 400여 년 간 여러 유목 문화는 물론 중국 중원을 비롯한 농경 문화와도 접촉하여 민족 구성만큼이나 문화 구성도 복잡다단하였다. 이러한 복합 문화의 소유자인 흉노가 유럽에 나타나서는 강력한 훈제국을 건립하고 유럽 고전 문화나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와도 융합하여 특유의 훈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훈제국의 흥망성쇠는 총체적 흉노 역사의 한 부분이며 그 연장으로서 반드시 밝혀져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273)<br>"흉노에 의한 동서교류는 우선 스키타이 유목 문화를 동전(東傳)시킨 데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르도스(수원) 청동기 문화다. 이것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청동기 문화를 수용한 후 가일층 발전시킨 문화로서 동북아시아 청동기 문화의 출현과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호한(胡漢) 문화'의 창출을 꼽을 수 있다. 호한 문화는 수원 청동기 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연속선상의 계승 문화, 혹은 발전 문화로서 한(漢) 문화적 요소가 뚜렷한 것이 그 특징이다." "한대 중국 문물과 그 방조품(한경鏡, 옥구검, 한견絹, 한식궁弓 등)이 볼가 강 하류 지역(한식궁과 한경)이나 북코카서스(한경), 크리미아 반도(옥구검과 한견), 헝가리(한식궁과 한경·흉노식 동복) 등지에서 다량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지역이 훈의 유럽 활동 시대의 요지였다는 유럽 사서의 소전(所傳)과도 부합된다. 또한 이는 흉노~훈~아바르로 이어지는 동방 문명의 서전(西傳)상을 시사해 준다."(291-3, 306-7)<br>6장 로마와 한(漢)의 교류&nbsp;<br>"로마와 한의 교역은 일시에 직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교역을 중간에서 차단하던 세력인 파르티아(安息)를 제압·제거하고 인도와의 교역을 성사시킨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다. 이 과정은 곧 로마 세력의 동점 과정이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와 장기간의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지중해-홍해를 통해 인도와의 교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원 초기 로마와 한 간의 교역은 인도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간접교역·중계무역으로서 주로 중국산 견직물이나 생사·모피·육계 등의 물품을 로마로 수출하였다. 로마와 한 간의 교역 중계지였던 인도(파키스탄 포함) 경내,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1~5세기의 로마 화폐(금·은화)가 다량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하여 로마와 인도 간에 활발했던 무역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역의 연장선상에서 인도와 한 간에도 교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337, 340-3)<br>"기원을 전후한 시기 로마와 한 간에는 인도를 중계지로 한 간접 교역뿐만 아니라, 육·해로를 통한 직접 교역과 인적 내왕도 진행되었음을 여러 문헌 기록과 유물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한금(漢錦, 한대의 비단)이 로마로 다량 수출되었다. 기원전 31년부터 기원후 192년까지 220년 동안 로마가 비단 교역을 주종으로 한 동방 무역으로 소모한 재정은 막대한 양이었다. 로마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재정적 고갈 요인 중에서 비단 구입으로 인한 지출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남해로를 통한 로마와 한 간의 간접 교역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기원후 1~6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존재했던 부남국(扶南國)의 옥에오(Oc-éo) 유적이다. 옥에오 유적에서 로마와 한의 유물이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이 유물들이 보여주다시피 기원 전후 인도차이나 반도는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접촉지였으며, 인도를 매개로 동점한 로마 문화는 이 반도에서 처음으로 한 문화와 만나서 교류하게 된다."(343-4, 347, 350-2)<br>"헬레니즘에 의한 동서 문명의 융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정치제도나 이념에서의 융합이다. 고전 그리스는 전형적인 도시 문화 국가로서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민 대표제 등 그리스식 시민사회의 행정제도를 채택하고 산업구조도 그리스식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총체적인 중앙 권력구조는 (현지 전승을 따라) 오리엔트식 전제주의적 왕권제도를 답습하였다." "다음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문화적 융합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融合, fusion)으로 인해 산생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다. 즉 비록 정복 문화이지만 그리스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오리엔트 토착 문화를 흡수·결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은 종교에서도 나타났다. 곳곳에서 그리스 신과 아시아 신이 혼합된 이른바 제신습합(諸神習合, syncretism)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다."(362-3)<br>"간다라 미술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상의 제작이다. 초기 불교도들은 부처를 너무나 숭배한 나머지 감히 인간 형체의 불상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불타(佛陀)를 단지 발자국 혹은 빈 좌석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현지의 그리스인들은 신을 인간과 똑같은 형체로 만들어 숭상하고 인간의 육체나 정신과 똑같은 속성을 신에게 부여하여 신상(神像)을 제작하고 그를 숭상하고 있었다. 이 영향을 받아 불교도들도 처음으로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무형적(無形的)인 불교 정신이 그리스 조각으로 말미암아 유형적인 예배 대상을 얻게 되었다. 불전도(佛傳圖)의 주역으로서의 석존상(釋尊像)이 차차 독립된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으로 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석존상을 그의 초인간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조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형상(形相)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 약속을 불교에서는 32상(相)·80종호(種好)라고 한다."(364)<br>7장 서역 개통과 문명교류&nbsp;<br>"기원전 138년 장건이 처음 대월지에 파견된 때로부터 기원후 102년 반초가 귀조할 때까지 약 240년 간을 서역 개통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선사 시대부터 기원 전후 오아시스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의 동서문명 교류는 주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스텝) 지대(북위 50도 부근)를 횡단하는 이른바 초원로를 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통로의 연변에서 생성된 문명은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비교적 발달된 서남아시아나 서아시아 문명권과 지리적으로 멀었고, 노정도 불편했다." "동서 문명의 직접적 만남을 가로막는 요인은 바로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파미르 고원이 가운데에 우뚝 솟아 험난한 장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건이 처음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이서에 있는 서역 제국을 역방하고 돌아옴으로써 중세동서문명교류의 동맥인 오아시스로가 트이게 되었고, 반초 부자의 서역 경영으로 인해 이 길은 더욱 활짝 열리게 되었다."(421, 426-7)<br>"서역 개통이 계기가 되어 중국에 유입된 서역 문물 중에서 사회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은 말이었다. 중국에도 고대로부터 말은 있었으나 서역마와 같은 양마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한대에 이르러 우수한 서역마를 알게 되자, 대량 수입하여 주로 전마(戰馬)로 쓰는 한편 재래마를 개종하는 데도 이용하였다." "서역으로부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래된 문물 중에서 오늘날까지 뚜렷한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유리다. 본래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에 유리가 출현하였다. 이집트 유리 제품의 수입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5~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중국에서도 일찍 유리가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백색 투명하고 다양한 무늬를 가진 이집트 유리와는 그 품질에서 필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대부터 이집트 유리는 옥정(玉晶)·수정(水晶)이란 별칭으로까지 불리면서 귀족 부호들의 진귀한 사치품과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428, 431-2, 435)<br>8장 종교의 교류&nbsp;<br>"원래 불교는 브라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번다한 제식만능주의(祭式萬能主義)를 배격하고 중도 사상에 바탕한 만민평등주의를 제창한 일종의 반(反)브라마시즘적인 개혁 종교였다. 그러나 신분 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즘의 중심 사상이자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 이념인 윤회와 업(業) 사상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분 제도를 무시하면서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던 불교 본래의 평등 사상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져 차차 퇴색해 가고 있었다. 여기에 본래 무신론 종교였던 불교[특히 대승 불교]가 우주에 천국과 지옥을 설정하고 성자(聖者)를 모시며 향과 촛불, 성수(聖水)로 예불을 하는 등 붓다를 중생 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되게 함으로써 힌두즘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에 덧붙여 대승 불교의 진언(眞言, mantra)과 다라니(dhārānī)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을 가미한 밀교의 출현(7세기경)은 궁극적으로 불교의 변질을 가속화하였다."(472)<br>"불교의 전파는 다른 종교, 특히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보편 종교의 전파와 비교해 보면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일련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는 당초부터 분파권적(分派圈的)으로 전파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3세기 실론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전파된 불교는 시종상좌부 불교(Theravāda, 일명 소승 불교)이고, 기원 1세기를 전후하여 서역과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는 대승 불교(Mahāyāna)였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강한 변용성(變容性)이다. 불교는 발원지인 인도에서의 생존 과정에서 융화성(融化性)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전파 과정에서도 상당한 변용성을 나타냈다. 이것은 발원지를 떠난 외래 종교였지만 불교가 쉽게 이방에 정착하고 생명력을 유지토록 한 요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불교 전파의 특징은 그 방도(수단)에서 평화적이란 점이다. 실제로 불교 전파사를 살펴보면 전파를 위한 소위 '성전(聖戰)' 같은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473-4)<br>"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서 티벳 불교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철학적인 중국 불교를 밀어낸 밀교 전법승들은 밀법(密法)에 의해 악마를 조복(調伏)하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민심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밀법은 전통적인 티벳의 종교 관행과 융합됨으로써 티벳 특유의 밀교를 창출하게 되었다. 티벳에는 원래 본(Bon) 교라는 샤머니즘적인 종교가 전승되어 왔다. '본'이란 티벳어로 '외치는' 사람, 또는 '신을 부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교의 샤먼(Shaman)은 검은 모자를 쓰고 북을 치면서 인간에게 폭풍우와 질병 등의 재앙을 가져다주는 악마와 싸움을 벌이다가 종당에는 자신의 요술 그물로 악마를 격퇴한다. 샤먼은 또한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서는 눈 덮인 산에 살고 있는 신들의 계시를 구하며, 그 계시를 어떤 신물(神物)이 자기에게 접했다고 생각하는 빙의(憑依)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곤 한다. 이러한 물합 결과 티벳 풍토에 적합한 밀교, 즉 라마(Lama)교가 마침내 성립되었다."(504-6)<br># 이러한 타락과 변질을 막기 위해 일어난 것이 14세기의 불교 운동이다. 이 개혁을 통해 확립된 것이 정교합일의 달라이라마(Dalai-bla-ma) 체제이다.&nbsp;<br>"'역대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전도열이 가장 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중앙아시아에 메르브를 비롯한 전도 교회 기지를 도처에 꾸리고 포교에 진력하였다."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교주 마르 아바 1세(Mar Abba Ⅰ)는 옥서스 강 유역과 고대 박트리아 지방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에프탈족과 돌궐족들을 교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7세기경 옥서스 강 유역에서는 전도가 활발히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전도사들은 대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과 기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문화 개발과 계몽에도 일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에프탈 문자와 돌궐 문자를 창제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고대 동방 기독교는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거쳐 천산 산맥의 북록(北麓) 및 타림 분지로 확산되었고, 그곳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566-9)<br>"이른바 경교로 명명된 고대 동방 기독교의 대당 전도에 관해서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를 통해 그 실상을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비문에서는 예수의 인격을 〈삼위일체의 분신인 경대지존(景大至尊)하신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 구세주〉로 규정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과 동일한 육신이 되어 강림[同人出代]〉하였으며, 〈천사가 경사를 선고하자, 실녀(室女, 즉 처녀, 동정녀)가 대진(大秦)에서 성주(聖主, 즉 예수)를 탄생하시었다[神天宣慶 室女誕聖]〉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시하고 마리아의 신성마저도 긍정하고 있다. 이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였고 성령에 의하여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는 정의와 신통하게도 일맥상통한다. 비문에 나타난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이러한 인격론을 감안할 때, 오해 받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인성강조설이나 신성부정설은 경교의 교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일견하여 알 수 있다."(573, 579-80)<br>9장 고대의 실크로드&nbsp;<br>"실크로드 개념은 몇 단계를 거쳐 확대되어 왔다. 그 첫 단계는 중국-인도로(路) 단계다. 이 단계는 1877년 리흐트호펜이 최초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란스옥시아나와 서북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함으로써 실크로드란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다. 둘째 단계는 중국-시리아로 단계다. 고고학자들이 지중해 동안의 시리아 팔미라에서까지 중국 비단 유물을 다량 발견한 사실을 감안해 비단 교역 길을 시리아까지 연장하여 실크로드라고 재천명하였다." "셋째 단계는 3대 간선로(幹線路) 단계다. 2차 세계대전 후 학계에서는 선행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오아시스로의 동·서단(東·西端)을 각각 중국 이동의 한국과 일본 및 로마까지로 연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포괄 범위를 크게 확장하였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 지대를 지나는 초원로(스텝로)와 지중해부터 중국 남해에 이르는 해로까지를 포함시켜 동서를 관통하는 이른바 '3대 간선'으로 그 개념을 확대한 것이다."(608-9)<br>"마지막 넷째 단계는 환지구로(環地球路) 단계다. 1492년 콜럼버스가 칼리비아 해에 도착한 데 이어 마젤란 일행이 1519~1522년에 에스파냐→남미의 남단→필리핀→인도양→아프리카 남단→에스파냐로 이어지는 세계 일주 항해를 단행함으로써 신대륙으로 가는 바닷길이 트이게 되었다. 또한 16세기부터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들이 필리핀 마닐라를 중간 기착점으로 하여 중국의 비단을 중남미에 수출하고 중남미의 백은(白銀)을 아시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등 신·구대륙 간에는 '태평양 비단길' '백은길'이 트이게 되어 이른바 '대범선(大帆船) 무역'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 대륙 간의 문물교류도 꼽을 수 있다. 항해로가 개척되고 교역이 진행되면서 고구마·감자·옥수수·낙화생·담배·해바라기 등 신대륙 특유의 농작물이 아시아와 유럽 각지에 유입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감안할 때 비록 해로의 단선적인 연장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문명교류의 통로는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609-1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50/cover150/8971968303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507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69653</link><pubDate>Mon, 11 May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696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22009X&TPaperId=172696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164/92/coveroff/896722009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22009X&TPaperId=172696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a><br/>크리스토퍼 벡위드 지음, 이강한.류형식 옮김 / 소와당 / 2014년 05월<br/></td></tr></table><br/>서문&nbsp;<br>"역사 자료들 속에 있는 중앙유라시아인들에 대한 선입관들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관념, 즉 야만인(barbarian) 판타지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생각들로, 거의 변화된 바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유목민들은 〈타고난 전사들〉이 아니었다. 이는 도시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상인〉이 아니었고, 농경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농민〉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목민들이 건설했던 국가와 정주민들이 건설했던 국가는 모두 복합 사회(complex society)였다. 유목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할지라도, 인구도 훨씬 많고 부유했던 주변 정주 국가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직업 군인들이 무척 많았다. 또한 유목민들은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평범한 유목민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변 농업 지역 백성들보다 훨씬 더 한가했다. 농경 지역 백성들은 노예였거나 노예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는 정도에 불과했다."(41-2)<br>프롤로그 ─ 영웅과 그의 친구들&nbsp;<br>"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초기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정치적-종교적 이상형으로서의 영웅적 군주와 그의 코미타투스(comitatus, 친위부대)이다. 코미타투스는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주군의 친구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이다. 기본적인 코미타투스와 그들의 맹세는 스키타이 때부터 존재했다. 이는 목숨을 건 의형제들의 피의 맹세와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맹세는 고대 스키타이 자료로부터 중세의 『몽골비사』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다." "코미타투스 전사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맹세를 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출신 부족이나 출신 나라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들은 주군의 가족만큼, 어쩌면 가족보다 더 주군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들는 주군의 집에서 주군과 함께 살았으며, 맹세의 대가로 넉넉한 보상을 받았다. 코미타투스의 존재는 중앙유라시아 전역에서 매장지의 고고학적 발굴이나, 문화를 기술한 역사서들을 통해 확인된다."(65-7)<br>"코미타투스에게 주어진 보상은 상당한 것이었다. 금, 은, 보석, 비단, 도금된 철갑, 무기, 말, 여타 보물들이 주어졌는데, 여러 사료에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다. 코미타투스와 더불어 수많은 무기와 말들이 함께 매장되었다." "이러한 부장품들은 전쟁이나, 혹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조공을 통해 획득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무역을 통해 축적된 것이었다. 무역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 내부 경제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이 정주민에 대해 요구한 평화 조약에는 항상 이러저러한 무역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실크로드는 중앙유라시아 문화와 동떨어진, 소란을 피우는 원인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제의 구성 요소였다. 더욱이 지역 내 근거리 무역과 국제 무역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목 경제와 오아시스 농업 경제, 중앙아시아 도시 경제는 모두 함께 실크로드의 구성 요소가 된다."(86-9)<br>CHAPTER 1 ─ 전차를 탄 전사들&nbsp;<br>"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Central Eurasian Culture Complex)는 거의 4,000여 년 동안 유라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역사언어학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다. 바로 원시 인도유럽어족(Proto-Indo-European)이 그들이다." "기원전 2000년경,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어떤 민족이 고향을 떠나 이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의 1,000여 년 간, 이들은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원래 살고 있었던 선주민들을 정복하거나, 혹은 그들과 뒤섞이면서 역사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여러 갈래의 인도유럽어족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단지 개별 부족 단위였거나 혹은, 사실상 전사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첫번째 밀레니엄(1000~1 BC)이 시작될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유럽어족이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도 거의 다 인도유럽어족의 문화와 언어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93-4)<br>"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전차는 중앙유라시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신타슈타(Sintashta) 유적지로 우랄-볼가 초원 지대 남쪽에 있으며, 기원전 2000년경의 유적이다. 역사학적 자료를 보면, 전쟁에서 전차가 실제 사용된 것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사건은 기원전 17세기 중반의 일로, 하투실리 1세가 통치하던 히타이트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리야누(maryannu)는 미타니 지역의 고대 인도어족 전차 전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전차용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었다. 같은 시기 미케네 그리스인은 히타이트와는 서쪽에서 이웃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자를 개발한 두번째 인도유럽어족이었다. 그들도 정복 전쟁에서 전차를 사용했다. 분명히 비슷한 시기에 인도 북서부를 침략했던 고대 인도어족도 마찬가지다. 알려진 최초의 전차 전사들이 모두 인도유럽어족이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중앙유라시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말 역시 중앙유라시아가 원산지다."(126-7)<br>"고고학적으로 알려진 완전한 형태의 전차는 중국 상나라 유적에서 나왔다. 그것은 상나라의 북서쪽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확인되며, 도입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그보다 좀 더 일찍 도입되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발굴 사례가 기원전 13세기를 가리키는 데다가 이미 상나라 방식으로 장식을 세세하게 갖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차가 상나라에 도입된 뒤 상나라의 문화가 덧입혀지는 기간이 더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상나라와 전쟁을 했던 이민족들도 전차를 사용했다. 전차를 끄는 말은 반드시 전차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 가축화된 말은 성인 남성과 전차와 함께 상나라 왕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말과 전차 전사와 전차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전형적인 양상으로,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 말까지는 인도유럽어족만의 독특한 풍습이었을 것이다."(128-9)<br>"유라시아에서 인도유럽어족이 침략자로서 어떤 국경을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정복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도 누가 됐든 이웃한 종족과 전쟁을 했을 것이다. 불특정 민족들과 싸우는 중에, 여태까지 전쟁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던 전차라는 신무기가 유라시아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전차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기계였고, 매우 정밀한 기계였다. 그래서 전차를 만들거나 사려면, 그리고 전차에 말과 전사를 훈련시키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전차에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두번째 물결에 속하는 인도유럽어족은 전차를 유지보수하고 실제 사용할 줄 알았던 최초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전차를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전차는 고사하고 가축화된 말만 하더라도,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였는지 여러 텍스트에 자세하게 나온다."(134-5)<br>CHAPTER 2 ─ 로얄 스키타이&nbsp;<br>"북부(혹은 동부) 이란어족인 스키타이는 잔인한 전사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들의 최대 업적은 무역 시스템이었다. 헤로도토스를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의 여러 저술가들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스키타이의 교역로는 그리스, 페르시아와 동방 지역들을 연결하였고, 이는 스키타이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무역에 관심을 가졌던 원동력은 그들만의 사회정치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통치자 개인과 그의 코미타투스, 즉 때로 수천 명에 이르는, 맹세로 뭉친 친위대원들에게 공급할 물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유라시아에서 번성했던 육로 기반 국제 교역은 스키타이와 소그드인, 흉노, 기타 여러 중앙유라시아 고대인들의 수요에 기반하고 있었다." "스키타이 파워가 한창일 때 고대 그리스어, 인도어, 중국어로 된 철학서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생산되었다는 점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을 끈 주제이며, 그 시기에 이미 이들 문화들 간의 사상적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41-2)<br>"스키타이 제국과 서부 스텝 지역의 교역망은 이후 중앙유라시아 지역에 등장한 보다 강력한 국가들의 기본 원형이 되었다. 중앙유라시아 지역에서 부와 권력이 성장하고, 여러 문화들과 점점 더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되자, 여러 나라들이 그곳을 침략했다. 대체로 그들은 중앙유라시아 측에서 먼저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알려진 바로 가장 오래된 침략자는 중국 지역의 주나라였다. 그들은 기원전 979년 귀신의 나라 귀방(鬼方)을 침략하여 두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중국인들은 그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회만 닿으면 반복해서 동부 스텝 지역을 침략했다. 다리우스 치하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도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점령했고, 기원전 514년~기원전 512년경 스키타이를 침략했다. 알렉산드로스 치하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도 기원전 4세기 말에 중앙아시아 지역을 침략했다 이들 두 차례의 정복은 중앙아시아 문화에 예기치 못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42-3)<br>"헤로도토스와 다른 모든 역사 자료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 전체를 로얄 스키타이가 지배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전사들로서 대부분의 재산을 통제했다. 그들은 〈스키타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용감한 부족이었고, 그들은 다른 모든 스키타이족을 노예로 생각했다.〉 헤로도토스는 그들 아래로 유목 스키타이가 있다고 했지만, 유목 스키타이는 아마도 로얄 스키타이에 종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축을 기르는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보리스테네스라고 불렀던 이들이다. 농경 스키타이는 농부들로서, 그들은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다 팔기 위해서〉 농사를 지었다." "이론적으로 스키타이 사회는 네 개의 부족과 더불어 통치 부족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국가의 이상적인 조직 형태로서 몽골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전통이다. 통치 부족은 다른 모든 부족을 〈노예〉로 간주했다. 이 또한 중앙유라시아에서 후대에까지 공통적으로 이어진 전통이다."(151-3)<br>CHAPTER 3 ─ 로마와 중국 사이&nbsp;<br>"고대 중반기, 즉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는 로마 제국과 중국 한(漢) 제국의 발전이 가장 눈에 띈다. 이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부분적으로 도시도 발달한 문화였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는 스키타이의 후예인 사르마트가 같은 이란어족인 알란(Alans)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중앙아시아 서부 지역에서는 토하리 연합세력이 이주해 와서 박트리아의 그리스계 나라들을 점령했다. 이를 근거로 쿠샨(Kushan) 제국이 성립했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파르티아의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뻗어나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국경을 맞대었으며, 로마인들과 함께 근동 지역을 두고 힘을 겨루었다. 토하리의 숙적이었던 흉노는 동부 스텝 지역을 압도하다가 반으로 나뉘어져 남북으로 갈렸다. 뒤이어 남흉노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북흉노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무주공산이 된 동부 스텝 지역으로 몽골족 연맹체인 선비족이 들어와 흉노 대신 동부 스텝 지역을 차지하였다."(175)<br>"기원후 1세기에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전해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게르만족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타키투스는 코미타투스에 대해 특별히 주목했고, 당시 존재했던 코미타투스의 본질적 요소를 모두 기술했다." "코미타투스는 프랑크 왕국 초기에도 등장했고,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에서는 8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또 몇 세기를 더 유지했다." "타키투스의 설명과 기타 고대 기록들은 아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즉 고대 게르만족은 프랑크족을 포함해서 모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알란족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이란어족들처럼 원시 인도유럽어족의 시대로부터 줄곧 이러한 전통을 유지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대 게르마니아가 문화적으로는 중앙유라시아의 일부였으며, 게르만족이 그곳으로 이동해온 뒤 천여 년 이상 그와 같은 전통이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177-9)<br>"고트족은 타키투스의 시대에는 동부 게르만족이었다. 이들은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 이르러 비스툴라 강 유역의 발트 해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흑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폰틱 스텝 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조직화된 국가가 아닌 독립적인 연맹체였다. 나중에 에르마나릭(Ermanaric)이 고트족의 그로이퉁기(Greutungi) 연맹을 창설했는데, 이는 후대에 오스트로고트(Ostrogoths), 즉 '해가 뜨는 곳의 고트족' 혹은 '동고트족'으로 불렸다. 그들은 유서 깊은 국가 수립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즉 이웃 부족을 점령하고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나라는 기원후 370년에 이르러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아직 훈족이 공격해오기 전이었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 사르마트족, 알란족, 고트족의 권력은 375년에 이르러 훈족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중앙유라시아인들 중 규모가 컸던 종족들, 대표적으로 고트족은 이후 동로마 제국 국경 근처로 옮겨와 피난처를 구했다."(181-2)<br>"기원전 50년경,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라는 쿠샨 추장이 토하리스탄(Tokhâristân)을 구성하는 네 부족을 병합하여 쿠샨 제국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남쪽으로 인도까지 확장하여 인더스 강 입구에까지 이르렀고, 해상 무역로를 장악했다. 이는 인도와 로마 치하 이집트 항구를 직접 연결하는 항로였다. 이 무역로는 파르티아를 거치지 않았고, 따라서 파르티아에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쿠샨 왕조는 이 무역로를 획득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들은 동쪽으로 확장하여 타림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쿠산(Küsän)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이는 나중에 토하리 왕국의 수도가 되는 쿠차(Kucha)식 명칭이었다. 카로스트 히(Kharoșț hî)라는 특징적인 문서가 그들의 통치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동쪽으로 크로라이나(루란)까지도 발견이 된다. 쿠샨인들은 불교가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186)<br>CHAPTER 4 ─ 훈족 아틸라의 시대&nbsp;<br>"기원후 2세기 이후 고대 제국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라시아 북부의 민족들은 남쪽을 향해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이 사건을 민족대이동(Völkerwanderung, 민족들의 거대한 방랑)이라고 한다. 이때 범(汎) 게르만족 그룹들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서쪽 절반을 차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족들인 치오나이트족(Chionites), 에프탈족(Ephthalites) 등은 페르시아 제국령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 몽골족 위주의 여러 민족들은 과거 중원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북쪽 절반을 차지했다." "민족대이동은 서유럽 거의 모든 지역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를 전파하였다. 결국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는 영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북부 온대 지역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제 중앙유라시아와 주변 정주 지역 사이의 경계선은 없어졌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혹은 그 반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인종적, 정치적 구분도 없어졌다."(199-200)<br>"중앙유라시아에서는 평상시에도 이주가 흔히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사람들은 유목이나 반유목 목축업자들이다. 사실상 농사도 짓지만 농장은 해마다 장소가 바뀌고 곡식과 동물을 데리고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곳 사람들은 어떤 땅에서 일년 중 어떤 시기에 누가 풀과 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누군가의 목초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별해주는 표식이 없다. 따라서 거대한 유동성은 정착경제가 아닌 중앙유라시아의 특성이 되었다. 나라는 민족으로 규정되며, 서로 간의 맹세로 맺어질 뿐이다." "중앙유라시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경이란 의미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부족이 특별히 성공을 거두게 되면, 새로운 나라는 급속하게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전역으로 확장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주변 정주 제국의 성벽이나 요새에 맞닥뜨리게 된다. 중앙유라시아 역사에서 이러한 과정은 최소 세 차례 일어났다. 스키타이, 투르크, 몽골이 그러했다."(220-2)<br>"분명히 로마와 중국 경제의 쇠락이, 적어도 처음에는, 이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이들 제국의 국경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보다 경제 문제의 여파가 훨씬 심각했다. 중심지에는 경제적인 부가 축적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풍요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국경의 도시나 마을에서는 돈줄을 조이거나 경기가 움츠러들면, 이방인 출신 상인이나 이주노동자들로서는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경제 문제는 중앙유라시아 튱치자들에게도 어려움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코미타투스나 동맹 세력에게 끊임없이 사치품이나 보물들을 제공해야 했다. 국경 시장이 붕괴되거나 혹은 전쟁으로 파괴되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황폐화되기 마련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보다 상대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큰 범위에서 작동했던 원칙(민족대이동의 경제적 이유)을 확인할 수 있다."(222-3)<br>"이전 역사가들은 〈야만인의 정복〉이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이라고 믿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게르만식 변종이 서유럽에 소개되었고, 그것이 당시 서유럽의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압도했으며, 그것이 점차로 발전하여 현재 〈중세〉 문화로 알려진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봉건〉 시스템, 무역 도시의 특수한 지위, 전사 계급의 특권 등도 중세 문화에 포함된다. 고집스레 남아 있는 그리스 로마식 요소들(라틴어 위주의 서유럽 문자 언어 같은), 남부 지방에 남아 있는 몇몇 고대 유적들, 이런 걸로 고대 지중해의 화려했던 문화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로마인들과 로마화된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게르만 왕조에서 살았다. 이들은 거의 초창기부터 뒤섞이기 시작했다. 로마화된 서유럽이 다시 중앙유라시아화된 것은 문화적 혁명이었다. 그것이 중세(Middle Age)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알려졌던 것이다."(226)<br>CHAPTER 5 ─ 튀르크 제국&nbsp;<br>"6세기 중반, 동부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Türk)가 유라시아 지역의 다양한 문명들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급속도로 상업·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초기 중세 시대의 국가들은 중앙유라시아를 점령하거나 혹은 적어도 인접한 국경 근처만이라도 빼앗고자 했다. 초기 중세(약 AD 620~840)의 문화적 번영은 이처럼 끊임없는 지역별 전쟁과 함께 나타났다. 새롭게 펼쳐진 전쟁 양상은 마침내 주요 제국들이 국경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그들에 대응하는 제국 규모의 연합체가 탄생했다. 계속되는 전쟁은 점차 심해져서 마침내 8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튀르기스(Türgiš)와 파미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졌고 아랍-당 제국 연합이 승리했다. 뒤이어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제가 후퇴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 경제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모두가 중앙유라시아의 번영, 즉 실크로드의 번영에 기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29-30)<br>"유라시아 전체의 초기 중세 역사 자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사실 중의 하나는, 중앙유라시아, 특히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어 자료, 고대 티베트어 자료, 아랍어 자료들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넘쳐난다. 심지어 이들보다 편협한 그리스어나 라틴어 자료들에서조차 그들의 왕국에 대한 중앙유라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주목을 끌었던 이유를, 요즘 역사학자들은 당시 유목민 전사들의 침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백하게 그렇지 않다. 사료에는 실제로 그런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 오히려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경제 때문이었고,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공유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 탓이었다. 저항하거나 복속을 거부한데 따른 처벌은 곧 전쟁이었다. 초기 중세 유라시아를 통틀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267-8)&nbsp;<br>"각각의 나라는 자신의 황제만이 유일하게 〈하늘 아래 모든 곳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미 굴복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이건, 아직 복속되지 않고 반항하는 〈노예들〉이건 막론하고, 모든 이들은 그의 신하가 되어야 했다." "이상적인 중앙유라시아 정치 구조는, 〈칸과 네 명의 지역 군주 시스템〉으로 적절하게 명명된 적이 있는데, 그 분명한 사례는 부여 왕국과 고구려 왕국─부여는 중심부와 4개 하위부로, 고구려는 중앙과 5개 하위부로 나뉘었다─에서 보인다. 비잔틴 제국의 사절로 튀르크 제국을 다녀간 마니아크(Maniakh)는, 튀르크 제국에 네 개의 〈군사 정권〉과 더불어 하나의 통치자가 있고, 그는 아르실라스(Aršilas) 부족에 속한다고 전했다. 티베트 제국의 굉장히 이론적인 4개의 뿔 시스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당나라도 서쪽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방향에도 도호부를 설치했다. 거란 제국과 후대의 몽골 제국 및 그 후예들도 마찬가지였다."(268-9)<br>"모든 초기 중세 제국들은 사방으로 팽창하고자 했다. 다른 시대 다른 곳의 제국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초기 중세에만, 역사상 최초로, 거대 제국들이 서로 직접 맞닥뜨렸고, 그들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각의 제국은 서로 얼굴을 맞대었고, 각각은 사실 동등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제국을 통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서 외교 규약이 발달하였다. 외국에 파견된 사절단은 그 나라에서는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했다. 그 지역에서는 사신들의 복종을 마치 다른 지역 제국이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기록하였다. 사신단이 돌아갈 때는 대개는 방문지의 사신단을 동행했는데, 이들 또한 자신이 방문하는 제국의 황제에게는 비슷하게 복종의 표시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의 경제는 번성했고, 최소한 8세기 중반까지는 강력하게 성장했다. 유라시아 세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특히 경제적으로 전례 없이 가깝게 연결되었다."(270-1)<br>CHAPTER 6 ─ 실크로드, 혁명, 붕괴&nbsp;<br>"8세기 중반의 이른바 13년 시대에는, 유라시아의 모든 제국들이 굵직한 반란이나 혁명 혹은 왕조 교체로 곤란을 겪었다. 742년에 동부 스텝 지역의 튀르크 제국이 무너지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은 위구르 제국이 들어섰다. 같은 시기에 비잔틴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곧이어 아랍 제국에서도 아바스 혁명(Abbasid Revolution)이 일어났다. 혁명 주도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무역 도시 메르브 상인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도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가 혁명을 일으켰다. 755년에는 티베트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있었다. 같은 해 연말 즈음, 중국 지역에서도 안록산(安祿山)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안록산은 당나라 군대의 장군이었는데, 출신이 투르크-소그드계였다. 뒤이어 섬세하게 계획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을 통해 평화가 다시 회복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은 보다 젊은 제국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275)<br>"다음 세기에 가장 의미심장한 발전으로 먼저 유라시아 전역에 국민문학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세계의 상업, 문화, 학문 중심지로서 서부 중앙아시아는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무역로가 북쪽으로 이동했다. 즉 칼리프 제국과 유럽의 무역 루트는 중앙아시아에서 볼가 강을 거쳐 올드 라도가(Old Ladoga)와 발트 해에 이르는 북방 루트로 옮겨갔다. 이로 인해 북유럽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다. 한편 동야에서는 중국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무역 루트가 북쪽으로 이동해 위구르의 영토를 통과하게 되었다. 아랍 제국의 수도는 알 마문(al-Ma'mûn)의 치하에서 십여 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도시 메르브에 있었다. 마침내 칼리프가 바그다드로 옮겨갔을 때, 칼리프는 수많은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중앙아시아 문화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는 아랍 제국에 빛나는 지적 학문적, 융합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대의 성과들은 후대에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고, 유럽 과학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276)<br>"세계 종교 조직에 대해 공식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자, 문헌 자료가 확산되고 문헌에 기반한 문화가 발전되었다. 이는 전근대 세계의 대부분 민족들에게도 문자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왕국이든 제국이든,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필요하다면 어떤 언어로든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문자 문화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 혹은 여러 세계 종교가 그 민족에게 전파되면서 시작되었다. 세계 종교는 모두 문자 텍스트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먼저 성스러운 경전을 읽을 수 있어야 했고, 텍스트를 복제하여 그 민족의 영토 안에 확산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면, 해당 지역 언어로 텍스트를 번역해야 했다." "이러한 전파 행위의 중요성은 끝이 없었다. 복제된 텍스트나 번역된 텍스트는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하나의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다. 이는 고중세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까지 유라시아 문명 전체적으로 지성이 만개하는 기초가 되었다."(297-300)<br>CHAPTER 7 ─ 바이킹과 키타이&nbsp;<br>"중세 초기 세계 질서가 무너진 뒤, 새로운 나라들이 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유일한 예외라면 비잔틴 제국이었다." "초기 중세와 달리, 이 시대의 고급 문화는 시작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수도원 제도가 모든 유라시아 주요 지역에서 급격하게 번성했고, 문자 문화를 더욱 심도 있게 전파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번영은 아랍 제국이 무너진 그 다음 시대가 상승기였다. 그 무대는 특히 중앙아시아였다. 실제로 고전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중앙아시아 출신이거나 그 후예였다." "서부 스텝 지역과 동부 스텝 지역의 나라들은 다 같이 지리적으로 유목 지역과 비유목 지역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어서, 갈수록 스텝 지역에 농업의 영향이 증대되었다. 바이킹-슬라브족의 루스 카간국은 유럽의 농업-도시 문화를 서부 스텝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중국도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세운 왕조들의 후원에 힘입어 농업-도시 전통을 동부 스텝 지역으로 확산시켰다."(313-4)<br>"바이킹은 전사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들은 1차적으로 상인들이었다. 바이킹이 남쪽의 보다 문명화된 나라들로 내려온 것은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9세기 초, 바이킹은 러시아의 강을 타고 근동 지역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류리크(Ryurik)가 이끄는 세 명의 추장들은 862년 노브고로드(Novgorod) 지역에서 루스 카간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882년경, 류리크의 후계자 올렉(Oleg)은 키에프(Kiev)를 정복했고, 루스 카간국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거대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루스는 정교회를 국교로 하는 비잔틴 국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슬라브화된 불가리아 왕국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도 루스와 국경을 마주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미 페르가나인들과 카자르인을 코미타투스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바이킹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바이킹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이렇게 해서 유명한 바랑기아 가드(Varangian Guard)가 구성되었다."(317-8)<br>"당시 이슬람 세계는 과학과 수학, 철학과 형이상학에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들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들, 알 파르가니(al-Farghânî. 전성기 833~861, 페르가나 출신), 알 파라비(al-Fârâbî, 사망 950, 파랍[우트라르] 출신), 이븐 시나(Ibn Sînâ, 980~1037, 부하라 근처 아프사나 출신), 알 비루니(al-Birûnî, 973~약 1050, 호레즈미아 카트 출신), 알 가잘리(al-Ghazâlî, 1058~1111, 후라산 투스 출신) 등 많은 이들이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도시들은 모두 유라시아의 빛나는 상업적 지적 중심지였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반지성적인 반작용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한 이는 중앙아시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알 가잘리(al-Ghazâlî)였다. 한동안 바그다드의 니자미야에서 교수를 역임한 그는 궁극적으로 철학 그 자체를 거부했으며, 수피즘의 보수주의적 양상을 선호했다. 그와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도그마를 벗어나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려 했다."(334-6)<br>"중국 지역의 상당 부분이 송나라로 통합되었지만, 북부 지역, 동부 스텝 지역과 겹치거나 혹은 그와 연결되는 지역, 중앙아시아 등지는 독립국으로 남아있거나 비중국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왕국을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다소간의 우열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전제로 국제 관계를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중앙아시아나 스텝 지역과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라시아의 나머지 대부분 지역과도 접촉이 없었다." "마침내 중국의 해상 무역이 유라시아의 반대 방향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따라서 남방으로 남중국해 연안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했을 때, 중국 문화를 전파한 세력은 중국의 엘리트가 아니라 독립적인 마인드의 상인들이었다."(340-1)<br>CHAPTER 8 ─ 칭기스칸과 몽골의 정복&nbsp;<br>"14세기는 흑사병, 기근, 홍수 및 기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재앙으로 괴로웠던 시대였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은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고 왕조가 무너지는 일이 만연했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자연재해에 맞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몽골 왕국들, 즉 이란 지역의 일칸국과 중국 지역의 원나라는 모두 무너졌다. 아마도 다른 시기였다면 그렇게 빨리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368년 최후의 대칸이자 원나라의 황제이기도 했던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재위 1333~1368)는 상당수 황실 인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몽골 지역으로 탈출했다. 그는 1370년 사망할 때까지 동부 스텝 지역에서 쇠락하는 대칸국을 통치했다. 중부 및 서부 스텝 지역에서 골든 호르데[킵차크 칸국]는 아주 잘 살아남아서 이후로도 2세기를 유지하였다. 이와 반대로 일칸국은, 마지막 일칸 아부 사이드(Abû Sa'îd)가 1335년에 죽자 부족과 분파주의자들의 폭력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말았다."(365-6)<br>"중앙아시아에서 차가타이 칸국은 아주 일찍 분열되어 몇 개의 파벌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항구적인 불안정 상태로 고통을 받았다. 타르마시린(Tarmashirin, 재위 1318~1326) 칸이 죽은 뒤 차가타이 호르데는 동과 서 둘로 갈라졌다. 서부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중심으로 했는데, 차가타이의 명칭을 획득했다. 반면 동부는 유목민 비중이 훨씬 더 많았는데, 무굴리스탄(Moghulistan) 몽골리아로 알려졌다." "중앙아시아에서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통치자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차가타이계가 중앙아시아에서 확고한 통치자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카라우나스족의 왕 카자간(Kazaghan, 재위 1346/1347~1357/1358)이 1346년/1347년 차가타이 칸국 최후의 칸 카잔(Kazan)을 살해한 뒤, 직계 라인은 끊어지고 말았다. 카자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차가타이 칸국의 이름을 계속 내세우고 꼭두각시 칸을 세우기도 했지만, 사실상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366-7)<br>"전체적으로 보자면 티무르의 정복 전쟁은 유럽이나 페르시아, 중국의 왕조 설립자들이 했던 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티무르의 군대는 원거리에서 번개처럼 기습하는 기마대도 아니었고, 물론 거대한 해군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다. 티무르에게도 기마병이 있었고 효과적으로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군대의 절대다수는 보병이었다. 그리고 티무르가 노린 것은 모두 예외 없이 도시였다. 티무르는 적들이 굴복하는 것에 만족했다. 특히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티무르는 거의 언제나 통치자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세금만 제대로 내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티무르가 통치하던 때는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이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문화 및 정치적으로 유라시아의 중심이 되었던 시기였다. 티무르는 분열 계승된 과거 몽골 제국의 영토를 다시 정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제국에 안정적인 제국의 정부 조직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고, 티무르의 자식들도 티무르의 계획을 물려받지 않았다."(372-3)<br>"몽골은 최초로 거대 규모의 국제 무역과 세금 시스템인 오르탁(ortag)을 만들었다. 오르탁은 기본적으로 상인 연합 혹은 카르텔이었다. 주로 무슬림들이 이를 수행했는데, 그들은 카라반이나 어떤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통치자들에게는 세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익이 높았다. 오르탁에 대한 정책은 보다 쉽게 참여하거나 자유방임일 때도 있었고(우구데이 치하에서), 엄격하게 통제가 될 때도 있었다(뭉케의 치하에서). 제국 전체가 상업에 열려 있었고, 상인과 기술자들에게 전례가 없을 정도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의 사방에서 기업가들이 출현했다." "몽골인들은 〈무신론자〉였다. 때문에 조직화된 종교라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몽골인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어떤 종교나 종파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티베트 불교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374-5)<br>CHAPTER 9 ─ 유럽의 바다로 달려간 중앙유라시아 사람들&nbsp;<br>"전근대 유라시아 대륙의 거대 제국들이 수립된 것은 르네상스 후기의 정복 전쟁을 통해서였다. 이는 티무르의 정복 전쟁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티무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자체적인 발전을 방해하거나 늦추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1405년에 티무르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곧바로 자신의 제국 영토를 수복했고, 오래도록 추진해왔던 팽창 정책을 다시 개시하여,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잔여 세력들을 소탕하였다." "유라시아의 다른 제국들은 티무르가 사망한 뒤 1세기가 지나서야 자리 잡기 시작했다. 투르크멘이 페르시아에 사파비 왕조를 설립한 때는 1501년이었고, 바부르(Babur)와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역에 무굴(무갈) 제국을 세운 때도 그 무렵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거대한 전 세계적 차원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즉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해안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해나가는 것이었다."(383-4)<br>"유럽인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연안 지역과 그 주변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점차 절대 권력자들과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거대 제국들은 해상 무역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결국 국제 무역에 참여하려면 유럽인들은 무역로와 항구 도시를 안정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그 지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 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의 경제가 번성했던 시대,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시대에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해 왔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군대는 아시아의 지방 통치자들을 제압했고,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했으며, 아시아에서 유럽인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해 갔다." "유럽인들의 주요한 목적은, 처음에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화롭고 수익률이 좋은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도 또한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해당 지역의 정치 권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행했던 바와 똑같다."(402-3)<br>CHAPTER 10 ─ 길이 닫히다&nbsp;<br>"19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의 상업, 부, 권력은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심지어 러시아 제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러시아 제국이 중앙유라시아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수도는 발트 해 연안에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는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였다. 러시아는 오래도록 이 도시를 거쳐 바다로 나아갔다. 러시아와 달리, 유라시아의 오래된 나라들은 재빨리 변신을 도모하지 못했고, 결국 차례차례 무너져 갔다. 인도의 무굴 제국은 대영제국에 합병되었다.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국은 아프간 지배 시절을 거쳐 사파비 왕조로 교체되었지만, 러시아와 대영제국 관할 지역으로 나라가 쪼개졌다. 중국의 청나라도 유럽의 각 세력권으로 나뉘어졌다. 유라시아의 경제는 대륙 기반 실크로드 시스템 위주에서, 유라시아 연안을 잇는 해양 기반 시스템으로, 즉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었다."(425-6)<br>"1757년, 청나라는 마지막 남은 독립 스텝 민족인 서부 몽골 세력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초원 제국 준가르가 무너짐으로써 중앙유라시아 실크로드 경제에 찬바람이 불었지만, 그 자체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러시아와 청나라의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1727년에는키악ㅌ나(Kiakhta)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국제 무역에 대한 엄격하고 배타적인 통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국경은 닫혔고, 국제 무역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으며,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중앙유라시아 정치 조직들은 모조리 제거되었다. 이로써 중앙유라시아의 경제는 파탄을 맞았다. 실크로드 경제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사람들도 이렇게 해서 대개 할 일을 잃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중앙유라시아에는(특히 그 중심지인 중앙아시아에는) 극심한 가난이 찾아왔다. 기술적인 면에서나 기타 모든 문화적인 면에서도 급속히 암흑 속으로 후퇴했다."(438-40)<br>"유라시아 어느 곳에서나 전통적인 국가들은 땅을 지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중세 초기 유라시아 전역에는 한 가지 개념밖에 없었다. 즉 아랍어로 마디나(madîna), 페르시아어로 샤흐리스탄(shahristân), 고대 티베트어로 카르(mkhar), 중국어로 청(城, chéng), 고대 고구려어로 구루(kuru)와 같은 것이었다.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것은 실제로 한 가지였다. 즉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그것이다. 각각의 도시를 요새화함으로써 통제를 극대화하고, 적에게 빼앗기거나 적과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며, 각각의 도시를 확고하게 유지하여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는, 도시들이 그 나라 영토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나라의 국경 지역이란 곧 중앙 정치 권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나 상인들은 무역이 자유로운 국경 지역에 관심이 많았고, 그곳에서는 정치 권력의 간섭이나 세금을 가능한 적게 받을 수 있었다."(458-9)<br>"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거대 도시들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 현실이 있었다. 고대와 늦어도 중세 초기부터 그들은 기본적으로 도시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왕국도 도시 하나 이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업 도시들은 중앙유라시아의 중앙 정치와는 연결되지도 않고 별 비중도 없이 그들만의 방식 그 자체로 남아 있었다. 이는 연안 무역로 주변의 도시들과 같은 처지였다." "대륙 횡단 무역은 스텝 지역 유목민들, 즉 스키타이나 흉노에 의해 중앙유라시아 최초로 거대 제국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직접 무역으로 변화되었고, 유목민들은 이를 통해 괄목할 만한 부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중앙유라시아 스텝 유목민과 도시의 번영은 내부 경제의 번영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들의 역사가 단절되고 그 결과 경제가 위축되었던 원인은 명백하다. 즉 주도권을 장악한 초원 제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텝 지역 사람들의 뒷받침과 보호가 없을 때면 어김없이 실크로드도 움츠러들었다."(461-3)<br>CHAPTER 11 ─ 중심을 잃어버린 유라시아&nbsp;<br>"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권에서는 1880년경 카잔과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자디디즘(Jadidism)이라는 계몽운동이 일어나서 이슬람권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동투르키스탄 지식인들은 근대 서양식 학교와 교육과정, 저널과 근대식 대중매체를 도입했고, 이와 함께 근대 민족주의 사상도 들여왔다. 중앙아시아에서 혁명이 번져나가자 자디디스트 중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에 초기부터 가담했던 사람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영향으로 1921년 몽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1930년대에 동투르키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비에트는 이를 진압하고, 중국 군벌을 내세워 우룸치(Ürümchi)에 정권을 수립했다. 그 뒤 카슈가르에서 제1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1933. 11~1934. 2)이 수립되지만 금새 진압되었다. 동투르키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티베트는, 중국 군벌이 한두 차례 동부지방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약 반 세기 동안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488-9)<br>"1942년 말 일부 칼미크(Kalmyk)인들은 스탈린의 압제로부터 공화국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다. 소비에트가 돌아왔을 때, 칼미크 자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무너졌다(1943. 12. 27). 칼미크는 배신자로 찍혔고, 칼미크 몽골족 전체가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사할린 섬 등지의 〈특별 정착촌〉(원래는 강제 수용소로 건설되었던 곳이다)으로 추방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가 독일로부터 크림 반도를 되찾은 직후, 1944년 5월 17일~18일, 그곳의 타타르족은 모두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도중에 약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비에트 정부는 크림 반도 타타르족의 역사와 문화, 언어 등 그들의 정체성 모두를 지워버리고자 했다. 동투르키스탄에서는 두번째로 공화국이 탄생했다. 사회주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1945년 여름 동투르키스탄 북부 지역에서 수립되었다. 티베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다."(498-9)<br>"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극단적인 모더니스트였다. 그들은 유럽과 미국의 영향이면 무엇이든지 거부했지만, 근대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만큼은 받아들였다." "몽골과 중국의 공산 혁명가들은 1949년 이전에 이미 몽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3일, 모택동은 몽골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1949년 말까지는 유지되었다. 그 해 중국 공산군이 그곳으로 진군해 공화국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다시 신강 식민지로 병합했다. 티베트인들은 갈수록 힘을 키워가는 중국에 대해 민감해졌다." "1950년~1951년, 중국이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은 병력과 무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티베트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중국은 주변 나라들을 새로운 공산주의 제국에 편입시킨 뒤 명목상 〈자치주〉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시스템을 표면적으로 모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명백한 중국화 노선을 채택하였다."(501-2)<br>CHAPTER 12 ─ 다시 태어나는 중앙유라시아&nbsp;<br>"중앙유라시아에서 힘의 열세와 빈곤, 쇠퇴, 외국 의존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어권인 남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와 서남아시아(이란과 쿠르디스탄)뿐만 아니라 근동과 파키스탄도 주로 종교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독재정치의 치하에 놓여 있었다. 전체 지역의 힘의 열세로 인해 인접한 서부 중앙아시아(과거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상황 또한 힘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지배 하에 남아 있던 중앙유라시아 나라들은 여전히 독립을 얻지 못했다. 카프카스 북쪽의 칼미크, 투빈(Tuvin), 알타이, 사카, 에벤키, 체첸 등이 그러했다.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새로운 대중추수적 독재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또다시 내외의 비판 세력을 위협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은 여전히 동투르키스탄, 내몽골, 티베트 지역에 군사적 점령 상태를 지속하였고,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대 중앙유라시아 경제가 전반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데에는 러시아와 중국 양측의 직접적인 책임이 크다."(536)<br>"소비에트 연방이 막을 내리면서, 카프카스의 나라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대부분의 소비에트 중앙유라시아 국가들도 독립을 이루었다. 폰틱 스텝 지역 서부의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독립했지만, 폰틱 스텝의 동부 지역부터 남쪽으로 흑해의 아조프 해에 이르는 지역,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에서 남쪽으로 아스트라한(Astrakhan)의 카스피 해에 이르는 지역은 러시아에 남았다. 이 지역들 중 일부는 대체로 러시아에 동화되었지만, 다른 많은 지역들, 특히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 즉 볼가 강 하류 및 카프카스 산맥 사이 북부 카프카스 스텝 지역의 몽골-칼미크어권 공화국을 포함하는 지역은 문화적으로 러시아에 동화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수많은 러시아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도 모두 독립했다. 이들 나라들은 가까스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고, 대체로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542-3)<br>에필로그 ─ 야만인들<br>"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대개 폭력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오해가 〈야만인〉이라는 관념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제국 혹은 왕국은 모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설립되었다. 길고 피비린내나는 배반과 음모의 막장드라마를 거쳐야 했다. 제국의 기초가 서고 나면,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나타난다. 거의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유명한, 혹은 가장 유명하지 못한 사례는 바로 로마인이다. 그들은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너무나도 악독한 방식으로 대중적인 흥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고 해서 비난 받은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죽인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도 있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순전히 잔인성과 가차없는 공격성만 놓고 보자면,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당시 로마나 페르시아, 중국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566-8)<br>"스키타이와 스텝 지역 민족들에 대한 오해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이른바 〈가난한 유목민(needy nomad)〉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그들 스스로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해서 농업 생산품, 옷감, 기타 주변 정주민들이 만들어낸 물건에 의존했고, 그것을 탐냈다는 것이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이 무역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물과 이웃 제국의 〈선진적인〉 상품을 거래해서 필요한 것, 혹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힘으로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침략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에 대한 니콜라 디 코스모의 비판은 아주 정확했다. 그는 문헌 자료나 고고학적 발굴 자료 모두 이러한 이론과는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직접 농사를 지었고,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상품을 제공하는 민족들과는 평화롭게 무역을 하고 세금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확실하게 밝혀졌다."(570)<br>"유목민들이 정말로 강력하고 호전적인 야만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만약 평화를 사랑하는 정주민들과 단지 교역만을 언했다면, 왜 정주민들이 만리장성을 쌓고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고대 중국 사료가 흉노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나중에 훈족을 설명하는 그리스의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정주 지역의 일부 사람들(특히 국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농업국가에 사는 것보다 유목민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기가 훨씬 쉽고도 자유롭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중앙유라시아인들에게 백성과 권력과 부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유일한 길은 성벽을 건설해서 국경 도시 무역을 제한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필요한대로 스텝 지역 민족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국경에서 멀리 쫓아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정복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정복지 백성들이 이방인에 동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578, 582-4)<br>"일반적으로 우리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의 역사나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옳거나 그른 행위를 결정했던 정황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충분히 알고 보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중앙유라시아 국가들이나 주변 정주 제국의 국가들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앙유라시아의 민족들이 선천적으로 강했고, 혹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전쟁에 특히 능숙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도시인도 있었고 시골 사람도 있었고, 강한 사람도 있었고 약한 사람도 있었고, 악독한 놈도 있었고 신사적인 사람도 있었고, 술꾼도 있었고 술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착한 사람도 있었고 악한 사람도 있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도 정확히 똑같이 그 사이에 있을 따름이었다."(609, 61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164/92/cover150/896722009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164927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르네 그루쎄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56391</link><pubDate>Mon, 04 May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5639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65061&TPaperId=1725639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30/coveroff/897196506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65061&TPaperId=1725639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유라시아 유목제국사</a><br/>르네 그루쎄 / 사계절 / 1998년 09월<br/></td></tr></table><br/>서론<br>"초원 내부의 역사는 최상의 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던 여러 투르크-몽골 집단들의 역사이자 가축을 방목시키기 위해 한 목지에서 다른 목지로 끊임없이 옮겨다닌 그들의 이동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이리저리 오가는 그들의 이동은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때로는 몇 세기가 지난 뒤에야 완결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동안 그들은 신체적 외형이나 생활방식조차 서서히 새로운 지역에 적응해갔다." "앗틸라의 훈족은 불가르인Bulgar(Bolgar)에 의해, 그리고 그들은 다시 아바르, 헝가리인, 하자르, 페체넥, 쿠만, 칭기스칸 무리에 의해 차례로 대체되었다. 이슬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란과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투르크인들에게서 일어난 이슬람화와 이란화의 과정은 중원 제국의 정복자인 투르크·몽골·퉁구스계 정복자들에게서 일어났던 중국화의 과정과 완전히 짝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륙 아시아는 민족들의 자궁(vagina gentium) 혹은 아시아의 게르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26, 32)<br>1부 13세기까지의 유라시아 초원 세계<br>1. 초원의 초기 역사 - 스키타이와 훈&nbsp;<br>"앗시리아 연대기와 함께 그리스 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750년과 700년 사이에 키메르인들은 투르키스탄과 서부 시베리아에서 온 스키타이로 인해서 남러시아 초원에서 쫓겨났다. 그리스인들에게 스키트Scyth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람들은 앗시리아인이 아쉬쿠즈Ashkuz라고 부르고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들은 사카Saka라고 부른 사람들이었다. 호칭에서 추측될 수 있는 것처럼 스키타이는 이란인 계통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초원에 있던 '이란인들의 원주지'에서 유목하고 있었고, 이란 고원의 남부에 거주하는 그들의 형제 민족인 메데스(메디아)와 페르시아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앗시리아와 바빌론문명의 영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던 북방의 이란인들이었다. 스키타이는 메디아-페르시아Medo-Persia의 신앙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킨 역사적인 마즈다교Mazdaizm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개혁에서도 역시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42-3)<br>"이란계 유목민─스키타이와 사르마트─이 초원의 서부인 러시아 남부는 물론 투르가이와 서부 시베리아를 지배할 때, 동부는 투르크-몽골계 종족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지배적인 종족은 중국에 흉노로 알려진 사람들로서, 마스빼로는 현재 북경의 서부와 서북붕 성립되었던 '북융北戎'이 호胡의 하나였다고 추정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가 통합되어 강력한 국가를 이룬 것은 기원전 3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선우單于라고 불리던 군주가 있었는데, 그 완전한 칭호는 중국어로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로 전사되며 중국인들은 이를 '하늘(天)의 당당한 아들'이라고 번역했다. 아마도 투르크-몽골어의 어근에 따르면, 탱리는 투르크어 또는 몽골어의 탱그리tengri 즉 하늘(天 ; 神)의 전사에 해당된다. 선우 밑에는 좌우도기왕左右屠耆王 즉 좌우현왕左右賢王이 있었다. 한자로 음사된 도기屠耆는 '올바른, 충실한' 등의 의미를 갖는 투르크어 'doghri'와 연관되어 있다."(62-3)<br>"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 역사무대에 가공할 만한 큰 세력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진나라(기원전 221-206)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다." "기원전 177-176년경 두만선우頭曼單于(기원전 약 210-209)의 아들이자 그의 계승자인 묵특冒頓(기원전 209-174)은 서부 감숙의 월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해서 그를 정복했다고 의기양양해 했다.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노상(기원전 174-161)은 월지의 위협을 완전히 끝내고 그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그를 감숙에서 쫓아내 서쪽으로 이주하게 하였고, 결국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고원에서 기원한 민족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월지月氏라는 이름─어쨌든 그러한 형태로─은 단지 중국어 전사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동양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를 토하리Tokhari와 동일시하려 했고, 기원전 2세기 투르키스탄에서 박트리아로 이주해옴으로써 그리스 사가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 종족은 그들에게는 인도-스키타이인으로 이해되었다."(71-3)<br>"중국의 사서는 박트리아의 월지가 기원후 1세기에 거대한 쿠샨 왕조(중국어로 귀상貴霜)을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 쿠샨은 기원전 128년경 박트리아를 분할했던 5개 씨족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흉노의 첫번째 공격이 아시아의 이후 운명에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흉노는 감숙에서 월지를 쫓아냄으로써 멀리 인도와 서아시아까지도 느껴지는 반향의 연쇄를 시작하였다. 헬레니즘 세계는 아프가니스탄을 잃어버렸고 그 지역을 정복한 알렉산더의 자취는 완전히 일소되어버렸다. 파르티아의 이란은 한동안 동요되었고 감숙에서 쫓겨 나온 부족들은 카불과 인도 북서부에 예기치 않았던 제국을 건설하였다. 우리가 다룰 역사는 늘 이런 것이다. 초원의 한쪽 끝에서 발생한 작은 자극으로 인해 민족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광대한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79-81)<br>"220년 후한 왕조가 내란으로 사라졌을 때, 북방 초원의 유목집단들은 이미 중국 군대에게 계속 패했기 때문에 너무나 견제당하고 약화되어서 상황을 이용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인도-유럽계의 타림 오아시스 역시 북중국의 패자 위魏(220-265)에게 조공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대한 흉노 제국이 붕괴되고 그를 대체한 선비 역시 중국 변경을 공격할 만큼의 충분한 힘은 갖고 있지 못했다. 4세기 거대한 야만인의 침공─5세기 유럽의 '민족 대이동'(Völkerwanderung)과 흡사한─이 시작된 것은 초원으로부터의 어떤 위협도 중국을 위협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이런 침입은 유럽처럼 야만인이 사는 배후지역에서 일어난 소란에 의해 촉발되었거나 아니면 앗틸라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단지 중국의 힘이 쇠퇴한 것에 기인하였는데, 이런 상태가 그때까지 중국 변경을 따라서 야영하며 존재하던 번병화된 야만인들을 진공속으로 빨아들였다."(107-8)<br>"하루가 멀다하고 왕국들이 연이어서 무너지고 있는 하루살이 부족들 옆에서 나머지를 흡수함으로써 북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 한 부족─타브가치 또는 중국어로 탁발─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부르군드·비시고트·롬바르드 이후에 살아 남아 그들의 폐허 위에 카롤링거 제국을 세움으로써 로마의 과거와 게르만의 현재를 연결시킬 운명에 있었던 프랑크와 비슷하였다. 그들은 북중국의 다른 투르크-몽골계 국가들을 통일한 뒤 너무 한화漢化되어 부족이나 왕조 모두 중국인 대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욱이 불교를 위한 그들의 열의는 기독교에 대한 카롤링거와 메로빙거의 열정의 재판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자신이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항해 로마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탁발도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초원 깊숙한 곳에서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던 몽골계 부족들을 상대로 황하에서 '라인 강의 파수꾼'이 되었다."(113-4)<br>2. 중세 초기 - 돌궐/위구르/거란&nbsp;<br>"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후예인) 돌궐은 유연에 예속된 부족 중의 하나였는데, 그 부족은 공통의 언어를 갖는 민족집단 전체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뻴리오는 〈중국어의 돌궐은 몽골(유연)어로 Türk의 복수형인 Türküt를 나타내고 문자상으로 그것은 '강하다'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중국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의 토템은 늑대였다. 6세기 초 돌궐은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대장장이 일)에 종사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한 중국 왕조 수隋가 3세기 이상의 분열을 재통일했던 바로 그때(589), 중앙아시아는 거대한 두 개의 투르크(돌궐)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동돌궐 제국은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 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했고, 서돌궐 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으며, 페르시아와는 옥서스와 메르브 강 사이 즉, 옥서스 강 남쪽을 따라가는 경계로 구분되었다. 힌두쿠시 산맥 북부의 모든 토하리스탄이 정치적으로 투르크의 판도 안에 들어왔다."(139-40, 146)<br>"중국 당조가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목적을 성취한 것처럼 보였을 때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유약한 군주 고종의 치세 후반기인 665-683년 사이 이 지역들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665년부터 서돌궐의 두 집단(노실필과 돌육)은 중국에서 임명한 카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회복하였다. 다음으로는 당시 야만인이나 크게 다를 바 없던 티베트인(토번吐蕃)들이 타림분지로 밀려들어와 안서사진(카라샤르·쿠차·호탄·카쉬가르)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다(670). 더 중요한 것은 630년 태종에 의해서 멸망한 동돌궐이 옛 카간 씨족의 후손인 쿠틀룩Qutlugh('행운'을 의미)의 지휘 하에 부흥한 것이다." "쿠틀룩을 계승한 사람은 동생 묵철默啜인데, 그가 바로 동돌궐에게 최고의 절정기를 가져온 카파간 카간(691–716)이었다." "카파간 카간 때 투르크는 다시 한 번 가공할 만한 통합을 이루었고 돌궐 대제국이 거의 완전하게 재건되었다."(169, 174, 177)<br>"한자로 차비시車鼻施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투르크인 왕 또는 타쉬켄트의 투둔(tudun)은 중국에 거듭 충성을 맹세했다(743, 747, 749). 그러나 750년 그때 쿠차의 절도사였던 고선지는 변경의 방어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투둔을 꾸짖었다. 고선지는 타쉬켄트에 도착하여 투둔의 목을 베었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고선지의 폭력적인 행동은 서역에서의 반발을 초래했다. 751년 7월 고선지는 투둔의 아들과 카를룩 투르크인 그리고 소그디아나에 있던 아랍 주둔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탈라스 강가 즉 현재 아울리에 아타Aulie Ata(잠불) 근처에서 패배했다. 이 날 이후로 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무슬림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탈라스에서 중국이 당한 재난은 현종 말년에 일어난 내분과 혁명이 없었더라면 다시 복구되었을지도 모른다. 8년에 걸친 내전(755-763)의 희생물이 된 중국은 단 한 번의 패배로 중앙아시아의 제국을 상실해버렸다."(191-2)<br>"위구르는 이란 또는 '외곽 이란'으로부터 마니교를 들여오면서 역시 같은 지역으로부터 소그드문자도 차용했는데, 이 소그드문자는 시리아문자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위구르인들은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9세기에는 이 문자가 고대 투르크(돌궐)의 오르콘문자를 대체했고,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민족문학을 만들어냈다. 가장 초기의 투르크 문헌들은 이란어로 된 일부 마니교 경전과 산스크리트어·쿠차어·중국어로 된 많은 불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위구르는 다른 투르크-몽골계 민족들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발전했고, 칭기스칸 시대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위구르는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힘을 잃었던 게 분명하다. 840년 그들의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고 카간이 살해되었으며 그들의 제국은 훨씬 더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던 투르크인, 즉 예니세이 강 상류─미누신스크와 훕스굴Köbsgöl 사이─에 살던 키르키즈인들에게 정복되었다."(197-8)<br>"키탄Qitan 혹은 거란(契丹)은 405-406년부터 중국의 연대기에 기록되었는데, 당시 그들은 요하와 그 지류인 시라무렌 강 사이에 있는 요서 지방 즉, 현재의 열하에 살고 있었다." "거란은 10세기 초 야율耶律(씨족명) 아보기阿保機(926년 사망)라는 정력적인 수령의 지배를 받게 될 때에도 여전히 요하의 서북 유역과 그 지류인 시라무렌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야율씨가 칸의 권위를 세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일의 사가들에 따르면, 아보기는 부족민들에게 비록 피상적이긴 했지만 중국적인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947년에는 그의 계승자가 요遼라는 왕조명을 붙였다." "아보기는 926년에 동쪽으로 퉁구스-고구려계 왕국인 발해渤海를 멸망시켰는데(그는 이 원정 도중에 사망), 그들은 한반도의 북부(북위 40도 이북)와 요동 동부의 만주(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여순旅順 항구까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만주 동북부의 우수리강 삼림지대의 퉁구스계 여진女眞도 거란에 복속하였다."(202-4)<br>3. 13세기 투르크인들과 이슬람&nbsp;<br>"사만조의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Isma'il ibn Ahmad(892-907)는 893년 이래 동북방으로 탈라스의 투르크 지역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가 고대 사산조의 군주들이 옥서스(아무다리아) 강 북안에 대해 예방적인 차원의 습격을 행하던 정책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시르다리아(작사르테스)의 파수꾼─고대 이란의 군주들이 '라인 강의 파수꾼'이었던 것처럼─에게는 이제 우상숭배자이든 네스토리우스 교도이든 투르크 세계에 대한 페르시아 이슬람의 전쟁이라는 종교적인 구실이 덧붙여졌다. 이와 같은 상황은 변경지역의 투르크 유목집단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사만조가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던 이 같은 개종은 도리어 그 추진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였다. 그 까닭은 그로 인해 투르크인들에게 무슬림 사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기 때문인데, 적지 않은 투르크 수령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개종의 유일한 목적이기도 하였다."(220-1)<br>"999년 경 동부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이란 영역은 이제 두 개의 무슬림 투르크 세력, 즉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한 카쉬가리아의 카라한조 칸들과 후라산을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조 술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1040년 5월 22일 가즈나조는 메르브 근처의 단다나칸Dandanaqan 전투에서 또 다른 투르크 집단인 셀죽에게 패배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로 물러났다. 그러자 셀죽의 칸 토그릴 벡Toghril Beg은 페르시아의 나머지 지역을 복속시키고, 1055년에는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압바스조의 칼리프로부터 동방과 서방의 군주 즉, 술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거대한 투르크 제국은 곧 그 영역을 아무다리아에서 지중해까지 확장하였고, 트란스옥시아나에 있는 카라한조의 군소 칸들의 독립을 감내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때 이후로 카라한조는 셀죽 술탄들의 속료로서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지배하게 되었고, 트란스옥시아나는 셀죽 제국의 속방에 불과하게 되었다."(223, 227)<br>"이슬람으로 개종한 지 얼마 안되는 유목씨족들 가운데 가장 개화되지 않고 전통도 갖지 못했던 유목집단인 셀죽은 단번에 동부 이란의 패자가 되었다." "토그릴 벡은 아랍-페르시아 세계로 더욱 깊숙이 침투해 들어감에 따라 이 고대 문명국가들의 행정적 관념들을 더 잘 익히게 되었다. 그들이 그를 한 집단의 지도자에서 한 국가의 지도자로 바꿈으로써, 그는 동족의 다른 수령들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장악하고 정상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군주로 변신해갔다." "1058년 칼리프는 토그릴 벡에게 '동방과 서방의 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를 현세의 대리인이라고 함으로써 이 같은 '기정 사실'을 공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구즈집단의 보잘 것 없던 수령은 자신의 집단과 씨족과 가족에 대해 기강을 확립하고 정규국가의 지도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아랍 칼리프조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그는 순니파 세계에서 칼리프조의 구원자이자 복구자라는 찬미까지 받게 되었다."(231-3)<br>"1040-1055년의 셀죽 정복은 그 나라의 문을 유목민들에게 열어준 것이었다. 범이슬람권의 술탄─아랍의 말릭(malik)이나 페르시아의 샤(shah)─이 된 셀죽 출신의 지도자들은 이제 그들의 전례에 충동되어 동일한 모험을 하려는 중앙아시아의 각종 투르크-몽골 씨족들에 대하여 문을 닫고 빗장을 치고 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페르시아인이 된 셀죽인들은 투르크인으로 남아 있던 투르크인들에 대하여 페르시아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를 성취하려던 그들의 의지나 아무다리아 언덕에서의 '라인 강의 파수꾼'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호레즘·칭기스칸·티무르의 침공을 조달한 병참장교로서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한 셈이다. 그들이 사산조 페르시아 국가나, 아니면 9세기 압바스 제국이 만들어냈던 '신사산조 체제'(Neo-Sassanianism)의 강건한 틀을 회복시키는 데 실패한 원인은 지난날 투르크멘의 유산인 지배가문 내부의 고질적인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240)<br>"'우상숭배자'였고 중국화된 몽골의 세계에 머물던 카라 키타이[동투르키스탄에 건설된 새로운 거란 제국]와 달리 호레즘(오늘날의 히바)의 샤들은 무슬림 투르크 세계를 대표하였고, 1157년 셀죽의 산자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에는 특히 그러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란 동부는 정권의 가장 중요한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1207년 호레즘의 무함마드는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점령하고 카라 키타이 대신 자신의 종주권을 표방하였다. 이렇게 해서 호레즘 제국은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몽골의 침략이 있던 시점에 호레즘 제국은 이제 막 창건되어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칭기스칸 침공시에는 아직 국가로서의 골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단지 그 맹아 또는 제국의 윤곽만이 존재했던 셈이다. 따라서 칭기스칸은 북중국의 금나라와 같은 진정한 국가와 부딪쳤을 때 호레즘 제국과의 전쟁 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251, 254-6)<br>4. 6~13세기의 러시아 초원&nbsp;<br>"아바르[몽골계 민족 유연]의 쇠퇴 이후 유럽에서 투르크-몽골인의 주요한 역할은 당분간 불가르인들이 담당하였다. 투르크계에서 기원하고 훈족의 쿠트리구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민족은 7세기 2/4분기 동안에 코카서스의 서북방, 즉 쿠반 계곡과 아조프 해 사이의 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 "9세기 중반 차르 보리스Boris(852-889)의 개종과 점증하는 슬라브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불가르인들은 기독교 유럽에 통합되어버렸다. 아바르의 옛 영토는 9세기 말에 마자르 즉, 헝가리인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헝가리의 왕 바이크Vaik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 스테펜의 치세(997-1038) 동안에 헝가리는 새로운 소명을 띠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유럽의 공포였지만 이제는 아시아적 야만주의의 엄습을 막는 가장 확실한 수호자, 즉 '기독교권의 방패'가 된 것이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에서부터 17세기 오스만의 축출에까지 마자르 민족은 길고 영웅적이며 영광된 십자군의 생애를 살게 되었다. 265-6, 299)<br>"7세기 초에 러시아 초원의 서남부와 다게스탄은 하자르 제국의 흥기를 목도하게 되었다. 하자르는 탱그리를 숭배하며 카간과 타르칸tarqan들의 지배를 받는 투르크 민족이었다. 바르톨드는 그들을 서부 투르크, 더 정확하게 말해 서부 훈족 계통의 한 분파로 보았다." "비잔티움 궁정은 하자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자르는 유럽에 있던 투르크인들 가운데 가장 문명화되었고, 이는 마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위구르가 그러했던 것과 비슷하다. 비록 그들이 간혹 주장되듯이 정주적 혹은 농경적 생활방식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잔티움과 아랍세계와의 접촉에 힘입어 교역이라든가 상대적으로 높은 문화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풍요하고 정돈된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9세기 들어 유대교를 믿는 이 문명화된 투르크인들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동족 집단들에 의해 일소될 운명에 처했다. 결국 1030년 하자르는 정치적인 세력으로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269-70, 272)<br>"페체넥은 마르크와르트에 의하면 한때 서돌궐 연맹의 일부를 구성하다가 카를룩 투르크인들에 의해 시르다리아 하류와 아랄 해 방면으로 밀려난 투르크 계통의 부족이었다. 934년 그들은 헝가리인들의 비잔티움 제국령인 트라키아에 대한 공격에 동참하였고, 944년에는 이고르Igor 공의 비잔티움 공격에 참여하였다." "비잔티움은 아시아의 무슬림 투르크인들과 싸우기 위해 유럽에 있는 우상숭배 투르크인들로부터 용병을 모집했지만, 우상숭배 투르크인들의 동족관념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강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에 비잔티움의 비극이 있었다. 1071년 말라즈기르트(만지케르트) 전투가 있기 직전, 페체넥 군사들이 황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를 버리고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이제 비잔티움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모든 투르크인들과 맞서게 되었다. 즉 유럽에서는 우상숭배 투르크인들이, 아시아에서는 무슬림 투르크인들이 혈연적인 유대로 연합하여 제국에 대항한 것이다."(274-5)<br>"투르크어로 킵착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러시아는 폴로브치로, 비잔티움은 코마노이Komanoi로, 아랍 지리학자인 이드리시는 쿠마니Qumani(쿠만Cumans)로, 헝가리인들은 쿤Kun(코운Qoun)이라고 불렀다." "1054년 러시아 연대기들은 그들이 흑해 북방의 초원에 나타난 것과, 아울러 킵착이 앞으로 밀어낸 오구즈의 출현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오구즈가 페체넥을 격파한 것, 그리고 오구즈가 발칸 원정과정에서 비잔티움과 불가르에 의해 격파된 것(1065년과 그 뒤) 등의 사건에 힘입어 킵착은 러시아 초원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킵착은 1222년 칭기스칸의 부장들이 침공할 때까지 러시아 초원의 패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부 킵착 수령들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킵착은 후일 몽골 지배 하의 러시아에 자신들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 건설된 칭기스칸 일족의 영역이 킵착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277-8)<br>2부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br>5. 칭기스칸&nbsp;<br>"제한적이고 역사적 의미의 몽골인들은 오늘날의 외몽골 동북 지방, 즉 오논 강과 케룰렌 강 사이에서 계절이동을 하고 있었다. 돌궐이 흥기하기 전에 투르크 민족들이 있는 것을 보았듯이, 칭기스칸과 함께 그 이름을 전집단에게 주게 될 몽골부족의 출현에 훨씬 앞서 몽골어를 사용한 것이 거의 확실한 민족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몽골어를 사용하던 민족들 가운데 3세기의 선비, 5세기의 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6세기에서 9세기까지의 유럽의 아바르를 꼽았다.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큰 역할을 했던 거란도 비록 퉁구스 언어들과의 접촉으로 현저하게 구개음화되기는 했지만 몽골어 방언을 사용하였다. 이들 여러 '원原몽골'(proto-Mongol) 민족들이 광대한 영역을 구축하긴 했어도 그 어느 것도 칭기스칸 국가의 몽골인들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12세기에 몽골인들은 수많은 '울루스ulus'로 나뉘었는데, 블라디미르초프에 의하면 울루스는 부족인 동시에 작은 나라를 뜻한다."(286-7)<br>"칭기스칸은 자신의 권력을 부족들에게 확인받기 위하여 최후의 항복을 받을 때까지, 또는 마지막 처형을 집행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1206년 봄 오논의 상류에서, 이미 복속한 모든 투르크-몽골 사람들 즉, 오늘날의 외몽골 지방에 있던 유목민들을 쿠릴타이에 소집하였다. 이때 그는 모든 몽골과 투르크 부족들에 의해 지고의 칸으로 선포되었고, 『몽골비사』는 그를 카간qaghan이라고 불렀다. 카간은 5세기 유연의 칭호로 그 뒤를 이은 몽골 지방의 모든 군주들, 즉 6세기의 돌궐과 8세기의 위구르 군주들이 채택한 칭호였다." "840년 위구르의 몰락 이후 초원의 제국에는 실질적인 계승자가 없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모전천막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지고의 칸이라고 선포하면서, 투르크인의 조상들(흉노), 몽골인의 조상들(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돌궐과 위구르)이 번갈아 소유하던 이 옛 제국이 이제 영구히 몽골인들에게 돌아왔음을 선언하였다."(319-20)<br>"유목민들은 대도시를 어떻게 처리한다거나 그것을 그들의 권력강화와 확대를 위하여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아무런 관념이 없었다. 그 결과 인문지리학도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인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들을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난감함 때문에 더 불을 지르고 더 살육을 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수령들, 아니 적어도 야삭yasaq─문자 그대로 칭기스칸 국가의 '규례' 또는 보통법전을 뜻하며 가혹한 형벌이 특징이다─을 충실히 준수하는 자들에게 약탈은 개인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군 시기 쿠투쿠는 금나라 창고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자기 몫으로 빼돌리지 않았다. 문명에 막대한 재난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당혹감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행위였다."(338)<br>"몽골인들은 분명히 중국에서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트란스옥시아나와 동부 이란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그 까닭은 순전히 그들이 이교도로서 또는 오늘날의 우리식 표현으로는 야만인으로서 일으킨 공포심이 여러 세기 동안 그들과 이웃으로 살아온 중국 영토 안에서보다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지역에서 지방주민들을 더 많이 활용한 듯하다.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몽골인들은 주변 시골과 무방비상태의 도시에서 남자들을 징비하고 칼끝으로 위협해 해자와 성벽으로 몰아붙였다. 때때로 이 가련한 사람들은 열 명에 하나 꼴로 몽골 깃발을 들려 몽골인으로 위장되었고, 수비대는 평야를 뒤덮도록 배치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칭기스칸 국가의 거대한 군대에 위협받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책으로 몽골인들의 작은 파견대도 항복을 강요할 수 있었으며, 그처럼 동원된 인간집단은 소용이 다한 뒤에는 살해되었다."(353-4)<br>"학살은 잊혀졌고 칭기스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식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nggis-Qana'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시대에는 분명 무서운 것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부드러워졌고, 14세기 위대한 여행가들과 같은 성취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366-7)<br>6. 칭기스칸의 세 후계자들&nbsp;<br>"칭기스칸의 네 아들은 그의 생전에 각자 울루스ulus(일정수의 부족)와 유르트yurt(그 부족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목지)를 속령으로 받았다." "유목민들의 목영지인 투르크-몽골 초원만이 분배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북경과 사마르칸드 주변의 농경지는 제실帝室의 영토로 남겨졌다. 칭기스칸의 아들들은 정주민족의 나라들을 분할하여 각자의 소유로 한다거나, 각기 중국의 황제, 투르키스탄의 칸, 혹은 페르시아의 술탄이 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260년 이후 그들의 후계자들이 했던 그러한 생각은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초원의 분할이 칭기스칸 제국의 분할까지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형제들이 화목했던 체제 아래에서는 계속되었다. 더욱이 바르톨드가 지적한 대로 유목민의 법에 의하면 카간의 절대권력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에게보다는 황실가문 전체에 속하는 것이었다."(368)<br>"1241년 12월 11일 대칸 우구데이(칭기스칸의 셋째 아들)가 죽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일어난 계승 문제로 인해 몽골인들은 헝가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앗틸라 이래 서방이 직면한 최대의 위험에서 서구를 구하였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242년 봄 바투는 불가리아를 경유하여 흑해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고, 거기서부터 왈라치아와 몰다비아를 지나 1242~1243년 겨울 볼가 강 하류에 있는 자신의 거영지에 도착하였다. 1236-1242년 몽골전쟁의 결과, 볼가 강 서쪽 조치의 영지는 상당히 확대되었다. 칭기스칸의 유언에 그의 울루스는 몽골의 말 발굽에 밟힌 이르티쉬 서쪽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게 되어 있었고, 이제 그들의 말 발굽은 이르티쉬부터 드녜스트르와 심지어 다뉴브 하구에까지 이르는 땅 위에 자국을 남겼다. 이 거대한 영역은 바투가 1236-1242년 전쟁에서 명목상이나마 지휘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합법적으로 그의 것이 되었다."(387-8)<br>"(대칸으로 선출된) 구육은 칭기스칸 일족의 다른 지파들이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이자 이를 근절시키려는 결심에서 장손인 조치가의 군주 바투와 충돌하였다. 1248년 초 그들의 관계는 매우 긴장되어 양측 모두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습영지인 이밀을 방문한다는 구실로 카라코룸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구육이 주색에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요절하기 전까지는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다. 중국 사료에는 구육의 죽음이 1248년 3월 27일에서 4월 24일 기사 안에 들어 있다. 그는 그때 겨우 마흔세 살이었다. 아마 이 죽음이 유럽을 절박한 위험에서 구하였을 것이다. 구육은 킵착의 칸(바투)을 패배시키는 것뿐 아니라, 플라노 카르피니도 증언하였듯이 기독교 왕국을 복속시키려는 꿈도 갖고 있었다. 하여튼 그는 주의를 특히 서방으로 돌린 듯하다. 그러나 톨루이(칭기스칸의 넷째 아들) 가문 왕자들의 즉위(처음에 뭉케, 그리고 누구보다도 쿠빌라이)로 인해 몽골의 주된 노력은 극동으로 향하게 되었다."(393-4)<br>"뭉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후계자 쿠빌라이처럼) 자신의 종족적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통치구조를 강화하고 몽골 제국을 위대하고 질서 정연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치세 초기에 (문자 그대로 그를 황제로 만든) 바투에 대한 그의 의무는 바르톨드가 지적했듯이 일종의 권력의 분할─명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실질적인 면에서─로 귀착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바투는 발하쉬 서쪽에서 실질적으로 독립적이 되었다. 그러나 바투의 죽음(늦어도 1255)으로 뭉케는 다시 한 번 몽골 세계의 유일하고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울루스나 칭기스칸 국가 속령의 여러 수령들은 조세를 면제받고 중앙 권려기관과 국고를 공유할 권한이 있다고 여겨왔지만, 뭉케는 이러한 관행을 금지시켰다. 만일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그의 정책을 지속하였다면 몽골 제국은 극동·투르키스탄·페르시아·러시아의 칸국들로 분열되지 않고 비교적 통합된 나라로 남았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398-9)<br>7. 쿠빌라이와 중국의 몽골 왕조&nbsp;<br>"몽골인의 관점에서 보면 쿠빌라이는 원칙상(설사 실제로는 아니었더라도) 칭기스칸 제국의 도덕적 통합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칸 칭기스칸과 뭉케가 지녔던 권위의 계승자로서 독립적인 여러 칸국들이 된 칭기스칸 일족의 속방들에 대하여 계속 복종을 요구하였다. 우구데이(카이두)가와 차가다이가에 순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쿠빌라이는 몽골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아우 훌레구가 통치하는 페르시아는 그에게 제국의 한 성일 뿐이었다. 페르시아의 칸 훌레구(1256-1265), 아바카Abaqa(1265-1281), 그리고 아르군Arghun(1284-1291)은 그의 눈에 '일 칸il qan' 즉 종속된 칸들, 그가 임명하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고위직 총독일 뿐이었다." "쿠빌라이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칭기스칸의 상속자인 반면, 중국에서는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하였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426-7)<br>"쿠빌라이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교통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도로를 보수하고 길을 따라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를 심었으며 정규역참에 대상들의 숙소를 지었다. 20만 마리 이상의 말이 다양한 역참에 분배되었고, 제국의 우편업무에 이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북경의 식량 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 중부에서 수도로 쌀을 가져올 대운하를 보수하고 완성시켰다. 기근과 싸우기 위하여 개봉의 송조에서 왕안석王安石이 완성시킨 바 있는 국가통제를 부활시켰다. 풍년에는 남는 곡식을 국가가 사서 공공 곡식창고에 저장하고, 기근이 닥치거나 값이 오르면 곡식창고를 열어 곡식을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공적부조도 조직되었다. 1260년의 칙명은 지방 수령들에게 늙은 학자, 고아, 그리고 병자와 약자들을 구제하고 도움을 베풀 것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중국행정의 전통에 더하여 쿠빌라이의 심성에 불교가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결과임이 거의 확실하다."(427-8)<br>8. 차가다이가 치하의 투르키스탄&nbsp;<br>"차가다이(칭기스칸의 둘째 아들) 칸국은 옛 구르 칸들의 카라 키타이 왕국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이는 카라 키타이처럼 몽골 지배 하의 투르크 지방 즉, 몽골령 투르키스탄이었다. 그러나 차가다이의 통치자들은 카라 키타이의 구르 칸들, 그리고 그보다 앞선 7세기 서돌궐의 칸들처럼, 서구식 또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식으로 어떻게 정규국가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를 위한 역사적 배경이 없었다." "차가다이의 아들들은 카쉬가르나 호탄 같은 타림의 오아시스에 결코 정착하지 않았으니, 그곳은 닫힌 정원이었고 그들의 가축과 기병에게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직인들이나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의 다소 이란화된 투르크인들 사이에 정착하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혼잡한 도시의 무슬림 광신주의와 폭도들의 불온은 그들의 유목민적 천성과 전혀 맞지 않았던 듯하다. 마지막 15세기까지 차가다이조는 계속해서 초원의 사람들로 남아 있었다."(466-7)<br>"중국이나 아랄-카스피 해 초원과 페르시아 쪽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쿠빌라이, 조치, 그리고 훌레구 가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차가다이조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목표로 삼았다. 이란의 저 반대편 끝, 아제르바이잔에 조정을 둔 페르시아의 군주들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차가다이조는 이를 틈타 바닥샨, 카불, 가즈니로 밀고 들어갔다. 서부 아프가니스탄에는 케르트가의 아프간-구르 왕조의 강력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토착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왕조는 페르시아 칸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곳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던 차가다이조는 동부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였고, 여기서 서북 인도로 이익이 남는 습격을 하였다. 이 시기에 술탄 알라 웃 딘 할지'Ala ad-Din Khilji(1295-1315)가 통치하던 델리의 제국은 차가다이가의 모든 공격을 분쇄한 실로 강력한 군사왕국이었다."(481)<br>9. 몽골 치하의 페르시아와 홀레구가&nbsp;<br>"이란과 무간초원의 쿠라 강 하류와 아라스 강 하류에서 숙영하던 서부 몽골군은 여전히 전권을 장악한 장군들의 지휘 아래 있었다. 처음에는 잘랄 웃 딘의 왕국을 파괴한 초르마간(1231-1241,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다음에는 소아시아의 셀죽인들을 정복한 바이주(1242-1256)가 그들이었다. 서쪽의 속신들, 즉 그루지아의 왕공들, 소아시아의 셀죽 술탄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들, 그리고 모술의 아타벡들은 변경의 군사정부에 직접 종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그런 대로 라틴세계와 어느 정도 교섭이 있었다." "대체로 몽골의 종주권은 이 서남 국경지대에서는 산발적으로만 표현되었다. 초르마간과 바이주는 종속국가들을 강력히 통제하면서도 카라코룸 조정과 지속적으로 협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정은 거리 때문에 몇 달씩 계속 연기되었으며 종속국 왕자들은 칭기스칸 일족 분쟁의 모든 위험 속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탄원하기 위해 사신들처럼 그곳으로 가야 하였다."(493, 497)<br>"몽골인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지 20년이 지나지 않아, 정규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그곳의 임시적이고 이중적인 통치체제(이란과 무간에서의 순수 군사통치와 후라산과 이라키 아잠에서의 재정행정)를 종결지으려고 생각하였다. 1251년 쿠릴타이에서 대칸 뭉케는 아우 훌레구에게 이란 총독직을 주었다. 훌레구에게는 페르시아에 여전히 존속하던 두 가지 신성한 권력, 즉 마잔다란의 이스마일리Isma'ili 이맘들의 영지와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조를 진압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그에게 부과된 또 다른 임무는 시리아 정복이었다." "몽골군의 바그다드 내습은 1257년 11월에 시작되었다. 몽골군의 거센 공격으로 포위된 주민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대의 병사들은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몽골인들이 중대별로 나누어 마지막 사람까지 죽였다. 1258년 2월 10일, 칼리프가 몸소 훌레구에게 항복하러 왔다. 몽골인들은 도시의 대부분, 특히 대모스크를 불태웠으며 압바스조의 무덤을 파괴하였다."(501, 504-5)<br>"훌레구는 시리아의 무슬림 지역을 복속시키려는 시도에서 실패하였는데, 그것은 사촌인 킵착의 칸 베르케의 위협으로 인하여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 러시아의 초원을 다스리던 칭기스칸 가문의 이 손위 지파는 아마 훌레구가 기독교에 호의를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이슬람을 아꼈을 것이며, 따라서 훌레구의 승리는 그를 경악케 하였다." "그러한 감정으로 베르케는 몽골 정복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기독교도들의 보호자였던 자기 사촌 즉, 페르시아의 칸에 대항하기 위하여 명목상으로는 몽골인들의 적일지라도 무슬림 신앙의 보호자들인 맘룩조와의 합세를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명백하였던 킵착 칸들의 적의와 그 뒤 차가다이 칸들의 적의는 곧 페르시아 칸국에 대한 포위로 귀결되었고, 페르시아 칸국은 코카서스와 아무다리아로부터의 지속적인 측면공격으로 마비되어 시리아 방면으로의 팽창이 저지되었다. 칭기스칸 일족 사이의 이 내전은 몽골 정복에 종지부를 찍었다."(517-8)<br>10. 킵착 칸국&nbsp;<br>"칭기스칸은 자기보다 6개월 앞선 1227년 2월경에 죽은 아들 조치에게 이르티쉬 서쪽의 평원을 주었는데, 이는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우랄스크, 아다지, 그리고 호레즘 본토(히바)였다. 조치의 둘째 아들 바투는 거기에다가 1236-1240년에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 공국들에 대한 종주권과 더불어 옛 킵착과 불가르 영토 전역을 추가하였다. 또한 바투 칸국은 고대 스키타이가 지배하였던 유럽 지역 전역도 포함되었다." "바투의 형제들 가운데 오르다Orda는 가문의 최연장자이기는 했지만, 큰 역할이 없었던 탓에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에 속령을 받았다. 바투의 칸국은 역사상 킵착 칸국 또는 금장 칸국(알툰 오르두Altun Ordu)으로, 오르다의 것은 백장 칸국(차간 오르두Chaghan Ordu 또는 아크 오르두Aq Ordu)으로 알려지게 된다. 바투의 또다른 형제 샤이반은 오르다의 북쪽을 몫으로 받았는데, 훗날 샤이반조는 그들의 영역을 서부 시베리아로 확장하였음에 틀림없다."(552-4)<br>"킵찬 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계 칸국들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후손들은 중국인들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가잔·울제이투·아부 사이드로 대표되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다. 반면에 남부 러시아의 칸들인 그들의 사촌은 슬라브·비잔티움 문화에 정복되고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 지리적인 명명이 암시하듯이 '킵착의 칸들', 즉 그 이름 그대로 투르크 유목민들의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도 없고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러시아 초원에 아무 역사도 남겨놓지 않은 '쿠만' 투르크인들, 즉 폴로브츠이의 단순한 계승자에 불과하였다. 킵착 칸들의 이슬람화는 상황을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하였다. 그들의 이슬람화는 오히려 그들이 이란·이집트의 고대문명을 정말로 공유하지 못한 채, 마침내 서구 세계로부터 그들을 갈라내 (훗날의 오스만인들처럼) 유럽 땅에 천막을 친 결코 동화되지 않을 외국인들로 만들었다."(557)<br>"1377-1378년에 톡타미쉬는 티무르의 도움으로 백장 칸국의 칸이 되었다. 톡타미쉬는 예기치 않은 반전을 통하여 킵착 칸국의 세력을 완전히 복구하였다. 금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통일, 모스크바 국가의 절멸은 그를 새로운 바투, 새로운 베르케로 만들었다. 그의 부흥은 칭기스칸 일족이 중국에서 쫓겨나고 페르시아에서 제거되고, 투르키스탄에서 절멸된 지금 더 큰 충격력이 있었다. 그 유명한 가문에서 톡타미쉬는 홀로 굳건히 섰다. 그는 몽골의 위대함의 복구자로서 당연히 조상 칭기스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요청되고 있음을 느꼈으며, 그가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의 재정복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이것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20년 전이었다면 그는 당시 두 지역을 휩쓸던 무정부상태 속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해 뒤에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는 일류 지도자, 실로 톡타미쉬를 도와 통일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 티무르의 소유로 돌아갈 운명이었다."(572-3)<br>3부 최후의 유목제국들<br>11. 티무르&nbsp;<br>"쿠빌라이의 휘하에 있던 투르크인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의 무대로 삼았고, 킵착 칸국 아래의 투르크인들은 비엔나 성문까지 치달았으며, 훌레구 휘하의 투르크인들도 이집트의 강가에 다다랐다. 오직 차가다이의 영지인 투르키스탄의 '중원왕국'에 있던 투르크·몽골인들만이 칭기스칸 일족의 세 울루스에 둘러싸여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서쪽으로 트란스옥시아나를 두르고 있던 페르시아 국가가 사라졌고, 킵찬 칸국이 지배하던 서북방도 쇠퇴하였다. 고비사막 방향으로도 '모굴리스탄'이 폐허화되면서 길이 열렸고, 델리의 술탄국도 일시적으로 붕괴되어 과거 차가다이 칸국 때처럼 인더스 강을 방어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강요되었던 휴식을 보상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티무르의 서사시─계속된 배반과 살육을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면─는 비록 종족으로는 투르크였지만, 그리고 비록 늦기는 했어도 몽골의 서사시의 일부였던 것이다."(590)<br>"동부 이란 원정에서 티무르는 유목과 조직적인 파괴체제를 통해 '사막화'(Saharifying) 과정의 적극적인 매체로 기능하였다. (몽골인들로 인해) 이미 취약해진 광대한 경작지를 파괴하고 그 땅을 초원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그들은 토지의 죽음을 가져온 무의식적인 공범자가 된 것이다." "서부 이란 원정에서 이븐 아랍샤가 전하는 끔찍한 장면들은 1221년 발흐·헤라트·가즈니에서 일어난 학살과 과련하여 칭기스칸 시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것보다 더 심하였다. 초기의 몽골인들은 단순한 야만인들이었지만, 티무르는 문화적 세례를 받은 투르크인이었고, 페르시아 시인의 열렬한 애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란문명의 꽃을 파괴해버렸으며,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무슬림 세계의 중요한 도시들을 겁락했던 것이다." "킵착 원정에서도 티무르는 금장 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것으로만 만족했을 뿐, 자신의 정복을 확고히 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톡타미쉬는 권좌를 다시 회복하였다."(604, 607-8, 619-20)<br>"인도 원정에서 티무르는 통상 해왔던 대로 델리의 인도-무슬림 제국을 기초부터 흔들어놓고 그 나라를 완전한 무정부상태에 빠뜨렸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아무런 질서도 세우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브라만교와 싸우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한 그가 정작 타격을 가한 것은 인도의 이슬람이었다." "1401년 맘룩조와의 대결에서 시리아를 폐허로 만든 티무르는 그곳에 여하한 종류의 통치체제를 세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빠져나왔고, 그곳은 즉시 맘룩에 의해 다시 점거되었다." "오스만이 앙카라에서 겪은 갑작스러운 재난─1403년 술탄 바야지드의 패배와 사망─은 비잔티움 제국에게 반세기 동안의 숨돌릴 틈을 주었다(1402-1453). 티무르의 금장 칸국에 대한 승리로 모스크바 국가가 혜택을 입었듯이, 티무르의 서아시아 정복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비잔티움이었다. 발칸 기독교권의 이 같은 행운은 오스만을 눌러버린 티무르가 그의 재기를 막기 위해 여러 아미르국들을 복원함으로써 더욱 커졌다."(627-8, 631, 636)<br>12. 러시아의 몽골인&nbsp;<br>"킵착 칸국은 세 개의 '소칸국'들, 즉 크리미아·카잔·아스트라한 칸국으로 나뉘었다. 카잔이 러시아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았다. 모스크바 국가의 짜르였던 '공포왕' 이반 4세(1533-1584)는 1552년 6월 강력한 포병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포위하였다. 10월 2일,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에 편입되어버렸다." "1554년 공포왕 이반은 아스트라한으로 3만 명의 군대를 보내 당시 집권가문의 일원(즉 퀴췩 무함마드의 후손)이었던 데르비쉬Dervish라는 인물을 조공을 바치는 칸으로 세웠다. 1556년 봄 러시아의 군대가 다시 나타나 데르비쉬를 쫓아내고 아스트라한을 합병하였다. 칭기스칸 일족의 최후 칸국인 크리미아의 기레이 왕조는 오스만의 종주권을 받아들여 200년 이상을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에카테리나 2세가 포템킨Potemkin이 지휘하는 7만 명의 군대를 크리미아로 보내 합병하였다(1783). 이렇게 해서 프랑스혁명 전야에 유럽에 있던 칭기스칸 일족의 마지막 세력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662-4)<br>13. 샤이바니조&nbsp;<br>"페르시아, 중국, 트란스옥시아나, 남러시아에 있던 칭기스칸 일족들이 쇠퇴하고 소멸해감에 따라 이 집안의 다른 지파들, 즉 북방의 초원에 남겨져 잊혀졌던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하고 역사상의 제국들 중에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샤이바니조이다. 14세기 중반경 샤이반 일족에 복속하던 유목민들은 외즈벡Özbeg─혹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불리듯 우즈벡Uzbeg─이라는 명칭을 취하였는데, 그 이름으로 역사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투르키스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후라산의 주인이 된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우즈벡 제국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 4세기 반 동안(1055-1502) 수많은 투르크 및 몽골 군주들에게 복속했다가 이제 막 독립을 회복한 페르시아와 충돌하였다. 백양부의 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넘어뜨리고 권좌에 오른 민족왕조 사파비(1502-1736)는 이제 우즈벡으로부터 후라산을 빼앗아옴으로써 이란의 재통합을 완성시키려고 하였다."(665-6, 671)<br>"사파비와 우즈벡은 사실상 모든 면에서 서로 반대였다. 하나는 열렬한 시어파였고 이란인이었지만, 다른 쪽은 확고한 순니파로서 몽골·투르크족이었다. 순니파의 영웅이자 칭기스칸의 후손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고자 했던 샤이바니는 사파비조의 샤 이스마일Isma'il에게 '이단적인' 시어파를 버리고 복속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만약 그러지 않을 경우 우즈벡은 〈검으로써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1510년 12월 2일 벌어진 전투의 승리자는 샤 이스마일이었다. 이 승리는 동방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란 독립의 회복자가 투르크·몽골세력의 부흥자를 죽였다는 사실─즉 위대한 사산조 제왕들의 후손이 칭기스칸의 자손을 패배시키고 죽였다는 사실─은 이제 시대가 변했고 오랜 세기에 걸친 침입을 끈질기게 참아왔던 정주민이 유목민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시작했으며 농경지가 초원보다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671-2)<br>14. 최후의 차가다이인들&nbsp;<br>"16세기 차가다이계 마지막 칸들의 제국을 마치 쇠퇴하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유누스 칸이나 하이다르 미르자와 같이 고도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 반대였음을 입증한다. 중국인들이 그 민족적 특징과 성격을 압살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하려고 했던 이 지방은 그 당시에는 이란·투르크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오는 각종 문화적인 훈기를 받아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쳤다. 유누스 칸의 일생이 이를 입증한다. 시라즈의 학자에게서 공부를 배웠던 유누스 칸은 후일 쿠차와 투르판을 지배했다." "율두즈와 위구리스탄에 사는 부족들의 뿌리깊은 유목주의가 차가다이계 마지막 후예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차가다이가문의 지배가 남긴 최후의 결실은 카쉬가리아뿐만 아니라 쿠차나 카라샤르나 투르판과 같은 옛 위구르인들의 지방을 사마르칸드와 헤라트의 페르시아 혹은 이란화된 투르크문명과 연결시킨 것이었다."(691-2)<br>15. 몽골리아의 마지막 제국 - 15~18세기<br>"오이라트는 칭기스칸 제국 시대에 바이칼 호 서부 연안에 살던 강력한 삼림 몽골인들이었다. 오이라트의 수령 마흐무드는 명의 영락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그것은 쿠빌라이 가문이나 동부 몽골의 다른 수령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조정의 지원을 구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충분히 강화되고 몽골리아의 모든 부족과 왕족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강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 오이라트의 수령은 명조 통치자와의 관계를 서슴지 않고 단절하였다." "얼마 전까지도 중국식 생활의 편안함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느슨해졌던 이 유목민들은 원래의 초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옛날의 강인함을 되찾았다. 더구나 이들은 오이라트, 즉 삼림지역에서 나온 서부 몽골의 부족들이었다. 그들은 오르콘이나 케룰렌 지역의 유목민들에 비해 칭기스칸 가문의 정복의 과실을 상대적으로 적게 맛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인 활력을 더 유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699-701)<br>"오이라트 혹은 서몽골의 쇠퇴가 동몽골의 칭기스칸 일족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동몽골은 종족 내부의 치열한 싸움으로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이 몽골 국가들의 가장 큰 약점은 가족의 유산을 분배하는 관습에 있었다. 다얀의 제국은 비록 외국에 대한 정복전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고 팽창의 범위가 몽골리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칭기스칸 제국과 유사했다. 건국자가 사망한 뒤 여러 수령들, 즉 모든 형제와 사촌들은 차하르의 수령을 배출하는 분파의 지도자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일종의 봉건적 가족국가와 같은 것이었다. 이 같은 분할은 칭기스칸 후예들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떠한 예보다도 더 철저한 분열을 초래하였다. 봉건적인 연대도 느슨해졌고 이와 동시에 최고의 칸이 배출되던 일파에 대해 마땅히 표시해야 했던 명목상의 복속도 약해졌다. 이렇게 동몽골은 다얀 칸이 등장하기 전의 혼란스런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706, 709-10, 712)<br>"원조가 붕괴한 직후, 즉 명조 초기에 후일 만주로 불리게 된 여진족은 숭가리 강과 동해 사이에 거주하면서 어느 정도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11세기 그들의 선조들처럼 그들은 문화의 본류에서 단절되어 수렵과 어로로써 생계를 유지하던 삼림의 씨족집단이었다. 1599년 누르하치Nurhachi라는 강력한 수령이 7개의 여진 '아이만ayman', 즉 부족들을 하나의 왕국으로 재통합하고 1606년 역사적인 만주인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누르하치는 명조가 만력제萬曆帝의 치세(1573-1620)에 퇴락의 상태에 빠져들어갔음을 깨닫고 1626년 스스로 황체를 칭하였다. 1621-1622년 그는 심양(묵덴Mukden이라고도 불림)이라는 변방 거점을 장악하고 1625년에는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1622년 그는 요양을 점령하고 1624년에는 흥안령 동부와 숭가리 강의 만곡부 서쪽에서 유목하던 호르친부 몽골인의 복속을 받아냈다. 그가 사망할 때(1626년 9월 30일) 만주는 군사적 조직이 훌륭하게 갖춰진 왕국이 되어 있었다."(716)<br>"누르하치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홍타이지Qongtayiji(1626-1643)는 부친의 과업을 이어나갔다. 만주인들이 내적인 단결을 강화하는 동안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결속을 파괴하고 있었다." "오르도스와 투메트는 자기 종족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차하르의 칸에게 복속하느니 만주의 군주인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만주인들은 차하르의 칸인 릭단을 공격하여 그를 티베트로 쫓아버리고, 그는 그곳에서 1634년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되자 차하르도 홍타이지에게 복속하게 되었다." "1643년 오르도스는 6개의 기旗(qoshun)로 재편성되었고, 그 각각은 칭기스칸 가문의 지농 군 빌릭투 메르겐의 후손들인 왕공(jasaq)의 지휘 하에 두어졌다. 이렇게 해서 내몽골 전체가만주 제국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후 차하르, 투메트, 오르도스의 칸들은 신종臣從의 연대와 봉건적인 동맹서약을 통해 만주 왕조와 결합했고 이는 1912년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지속되었다."(716-7)<br>"한편 준가르의 갈단(1676-1697)은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서 칭기스칸의 서사시를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모든 몽골인들에게 극동의 제국을 만주인들, 즉 일찍이 칭기스칸에게 굴복했던 여진족의 풋내기 자손들로부터 탈취하자고 부추겼다." "강희제는 이 신흥 몽골 제국이 중국의 바로 코 앞에서 흥기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갈단으로서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강희제를 위해 제작한 대포를 상대하기가 벅찼고, 이 새로운 칭기스칸은 당황하여 할하 지방에서 철수하였다(1690년 말)." "1695년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청은 다시 한 번 대포와 소총의 도움을 받아 갈단을 격파하였다." "만주 왕조가 이 승리로 얻은 가장 큰 이익은 할하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권의 확보였다. 강희제가 준가르의 장악으로부터 구해준 네 명의 할하 칸들은 그를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외적인 행동이 지극히 만주적이었으며 유목민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던 강희제는 동몽골인들의 조직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731-3)<br>"준가르 영역의 파괴는 몽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몽골은 한때 그 절정에 이르렀고, 칭기스칸은 칸으로 선출된 뒤 20년 만에 초원세계를 통일하고 중국과 이란에서 작전을 시작하였다(1206-1227). 또 다른 50년 동안 이란과 중국의 나머지 지역이 정복되어, 산맥이라는 천연장애로 인해 그 자체가 단절되어 있던 대륙인 인도를 제외한다면 몽골 제국은 아시아 대륙의 제국이 되었다. 이 강역은 형성된 직후 신속하게 무너졌다. 1360년이 되면서 몽골은 중국과 이란을 상실하였고 트란스옥시아나도 사실상 잃어버려, 아시아에서는 몽골리아와 모굴리스탄─후일 중국령 투르키스탄의 북부를 형성─만을 보유했을 뿐이다." "1759년 건륭제가 마침내 준가르 칸들의 확고한 보호령이었던 카쉬가리아를 정복하고 일리와 병합한 사건은 반초班超의 시대 이래 1800년 동안 중국의 아시아 정책이 추구해온 목표, 즉 유목민에 대한 정주민의 보복, 초원에 대한 농경의 보복을 완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744-5, 748)<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30/cover150/897196506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301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암컷들 / 루시 쿡 - [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48183</link><pubDate>Thu, 30 Apr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4818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432531510&TPaperId=1724818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12/77/coveroff/e43253151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432531510&TPaperId=1724818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a><br/>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05월<br/></td></tr></table><br/>들어가며 다윈의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암컷들<br>과거 성차별적 신화가 생물학에 도입되면서 동물의 암컷을 바라보는 방식이 크게 왜곡되었다. 실제 자연 세계에서 암컷의 형태와 역할은 대단히 폭넓은 스펙트럼의 해부구조와 행동을 아우른다. 물론 헌신적인 어머니상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는 자기가 낳은 알을 버리는 암새도 있고, 바람난 아내를 둔 수컷들의 하렘에서 새끼를 키우는 물꿩도 있다. 정절을 지키는 암컷도 있지만 전체 종의 7퍼센트만 성적으로 일부일처이며, 많은 암컷이 여러 상대를 전전하며 섹스하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다. 동물 사회가 전적으로 수컷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다. 알파 암컷은 여러 분류군에서 진화했고, 자애로운 보노보에서 잔인무도한 여왕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암컷은 수컷들만큼이나 서로 살벌하게 경쟁한다. 지난 수십 년간 암컷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세상의 다채로운 암컷과 암컷을 연구하는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혁명을 소개할 것이다. 12-3)<br>1장 무정부 상태의 성: 암컷이란 무엇인가<br>암두더지의 생식샘은 난소고환ovotestis이라고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내부 생식기관은 한쪽에 난소 조직, 다른 쪽에 정소 조직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난소 쪽은 번식기의 짧은 기간에만 팽창하여 난자를 생산한다. 그리고 생식이 완료되면 수축하고 그때부터 정소 조직이 확대되어 난소보다 더 커진다. 두더지 암놈의 정소 조직은 테스토스테론을 만드는 라이디히 세포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정자는 들어 있지 않다. 이 성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흔히 수컷과 연관된 호르몬으로, 근육을 키우고 공격성을 부추긴다. 둘 다 힘겨운 지하 생활에 요긴한 무기가 되어 두더지 암컷에게 땅을 파는 힘과 새끼와 지렁이 창고를 지킬 투지를 준다. 이른바 남성호르몬이 넘치다 보니 두더지 암컷은 수컷과 구분할 수 없는 생식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남근phallus’ 또는 ‘음경음핵penile clitoris’이라 불릴 정도로 음핵이 확대되고 번식기가 아닐 때는 아예 질이 막혀 있다. 두더지 암컷은 성을 구분하는 오래된 전제에 도전하는 존재다. 23-4)<br>아마존에서 거미원숭이 암컷을 처음 봤을 때 아랫도리에 매달린 부속물을 보고 나는 영락없이 수놈인 줄 알았다. 오히려 수놈 쪽은 제 물건을 안쪽 깊숙이 넣고 다니기 때문에 겉에서는 음경이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암컷은 보란 듯이 음핵을 덜렁거리고 다닌다. 생물학계에서는 ‘가짜 음경pseudo-penis’이라고 칭하는 해부 구조다. 이런 남성중심적인 용어는 특히 거미원숭이 암컷의 ‘가짜’ 남근이 수컷의 ‘진짜’ 남근보다 더 길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소 거슬린다. 점박이하이에나Crocuta crocuta 암컷의 20센티미터짜리 음핵은 모양과 위치가 수컷의 음경과 똑같을 뿐 아니라 발기하기까지 한다. 점박이하이에나 수컷과 암컷 모두 ‘인사 의례’ 중에 발기한 부분을 서로 보여주고 훑어본다. 하지만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의 사내다운 특징 중 으뜸은 털 달린 한 쌍의 고환이다. 물론 이 음낭은 가짜다. 최근 과학자들은 점박이하이에나 암컷과 수컷이 너무 똑같이 생겨서 ‘음낭을 만져봐야만’ 암수를 구별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25-6)<br>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의 규칙 위반은 생식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 암컷의 ‘남성화된’ 몸과 행동에도 감탄했다. 야생에서 암컷 점박이하이에나는 수컷보다 몸이 최대 10퍼센트 더 묵직하다. 일반적으로 포유류에서는 수컷의 크기가 더 크므로 아주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포유류를 제외한 동물계의 나머지, 그러니까 대다수 동물에서 암수의 크기 차이는 대개 반대이다. 살찐 암컷일수록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척추동물과 많은 어류, 양서류, 파충류 종이 수컷보다 암컷이 크다. 점박이하이에나 암놈은 수놈보다 더 적극적이다. 지능이 뛰어나고 사회성이 높은 이 육식동물은 최대 80마리가 우두머리 암컷의 지배하에 모계 집단을 이루고 살아간다. 수용, 먹이, 성을 구걸하는 복종적인 낙오자가 수컷이며, 반대로 암컷은 모든 상황에서 지배적이고 거친 놀이와 강한 냄새 표시는 물론이고 영역 방어에도 관여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아닌 다른 성의 것이라 여겨지는 행동들이다. 26)<br>‘무엇이 동물의 암컷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의 궁극적 해답이 한 쌍의 XX 염색체에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부분은 이 특이한 한 쌍의 성염색체가 남성은 XY로, 여성은 XX로 성별을 정의한다고 배웠으니까. 실제로 Y 염색체에는 SRY(Sex-determining Region of the Y, Y 염색체의 성결정 지역)라는 아주 중요한 성결정 유전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생식기관을 결정하는 일은 약 60개의 유전자가 오케스트라처럼 협업하는 과정이다. 성을 결정하는 이 유전자들은 성별에 따라 X 염색체나 Y 염색체에 딱딱 나뉘어 있기는커녕 모두 다 성염색체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이 유전자들은 게놈 전체에 되는대로 흩어져 있다. SRY 유전자 외에도 60개의 성결정 유전자로 이루어진 이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에서 모두 단원의 구성이 동일하다. 이 유전자들은 난소도 만들 수 있고 정소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생식샘을 형성할지는 유전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협상에 달렸다. 30-2)<br>포유류에서 보이는 성염색체의 혼돈은 자연계 전체에 존재하는 시스템의 다양성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우선 모든 유전학적 성결정이 XY 시스템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새, 다수의 파충류, 나비가 아주 비슷한 성결정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커다란 Z와 축소된 W라는 다른 성염색체 위에 있다. 더구나 이 시스템에서는 역전된 패턴이 표준이다. 즉, 암컷이 ZW이고 수컷이 ZZ이다. 이 대체 ZW 시스템에서 마스터 스위치 유전자는 포유류의 SRY처럼 아주 잘 보존된 경우도 있고, 근연 집단 내에서 변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일부 파충류, 어류, 양서류는 성의 분화가 마스터 유전자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자극받는다. 거북의 예를 들어보자. 거북은 바다에서 무겁게 몸을 끌고 나와 열대 해변의 모래에 알을 파묻는다. 이때 섭씨 31도 이상에서 부화하는 알은 난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활성화하고, 반면에 27.7도 이하에서는 정소를 만든다. 두 온도 사이에서는 수컷과 암컷이 섞여서 나온다. 35)<br>2장 배우자 선택의 미스터리: 여성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는가<br>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는 성선택을 자연선택의 하위 분류로 취급하긴 했어도 암컷과 짝지을 권리를 두고 수컷들이 대결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윈이 물의를 일으킨 부분은 여성이 성적으로 자율적일 뿐 아니라 남성의 진화를 좌지우지하는 결정권을 가졌다는 주장이었다. 이 대목이 대부분의 (남성) 생물학자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윈은 암컷이 짝을 고르는 기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빅토리아 시대의 기득권층에게 다윈의 새 이론을 매질할 채찍을 주었다.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예술과 음악을 논하는 것은 오로지 상류층의 특권이었으므로 하찮은 공작새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미적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입 밖에 낼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아름다움은 신이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적 기호가 진화의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생각은 이단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다윈의 대담한 새 이론은 공개적으로 조롱과 무시를 받았다. 46-7)<br>“짝짓기 철의 절정에 산쑥들꿩 레크는 아수라장이에요.” 게일 패트리셀리가 연구실에서 설명했다. 교미의 대부분이 불과 3일에 걸쳐 일어나는데 이때 암컷들은 크게 스크럼을 짜고 가장 인기 있는 수컷에서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티격태격한다. 레크를 형성하는 종의 암컷은 대체로 새끼를 혼자 키운다. 그래서 암컷은 짝을 고를 때 수컷이 지닌 영역의 자원이나 잠재적 육아 기술 같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수컷의 유전자만을 볼 뿐이다. 승리한 수컷 혼자서 무리의 암컷 대부분에게 유전자를 전달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이한 장식과 구애 방식을 끌어내는 암컷의 배우자 선택은 그 영향력에 제한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패트리셀리는 훨씬 의미심장한 사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딕과 같은 최고의 수새는 레크에서 가장 요란한 춤꾼일 뿐 아니라 암새가 주는 미묘한 신호에도 잘 반응했다. 인기를 얻으려면 출중한 춤 솜씨는 기본이고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48-9)<br>모든 전략적 협상에는 인지력이 필요하다.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의 새틴정원사새Ptilonorhynchus violaceus 수컷은 상대적으로 뇌가 크고 수명이 길며 7년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사춘기를 보내는데, 그동안 암새를 흉내 내면서 지낸다. 어린 수새는 암새와 똑같이 깃털이 초록색이다. 패트리셀리는 수새가 복잡한 바람둥이 재주를 배우기 위해 이처럼 비정상적인 발달기 동안 암새의 옷을 입고 산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어린 수새는 바우어 제작을 연습할 뿐 아니라 동성의 어른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구애를 받는다. 수컷 새틴정원사새의 문제 해결 능력을 시험한 어느 2009년 연구는 인지 능력이 짝짓기 성공과 연관 있으며 암새는 가장 똑똑한 수새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윈 역시 성선택으로 사람의 인지력이 크게 진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예술, 도덕, 언어, 창의력처럼 ‘자기표현’이 강한 행위에서 영향력이 더 두드러진다. 52)<br># 바우어bower : 정원사새가 구애하기 위해 짓는 공간<br>3장 조작된 암컷 신화: 바람둥이 암컷에 대한 불편한 발견<br>사회적 일부일처와 성적 일처일부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새들은 아주 충실하게 사회적 일부일처를 따른다. 심지어 어떤 종은 평생 한 배우자와 짝을 이루어 산다. 하지만 과연 성적으로도 그럴까?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제는 암새의 90퍼센트가 일상적으로 다수의 수컷과 교미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수컷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종일수록 암컷이 외도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최근 버키드는 성적 이형이 큰 종일수록 부정을 크게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부요정굴뚝새Malurus cyaneus가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컷은 현란한 푸른색 계절깃을 뽐내며 갈색의 작고 수수한 암새에게 노란 꽃을 바치고 구애한다. 하지만 수컷의 야단스러운 구애는 서방질로 보답받는다. 새벽이면 그의 파트너는 몰래 빠져나와 이웃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그러다 보니 둥지에서 사회적 배우자가 부지런히 돌보는 새끼 새의 4분의 3이 사실은 다른 수컷의 씨다. 62)<br>수전 스미스의 검은머리박새black-capped chickadee 장기 연구가 판도를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총 14번의 번식기에 암컷의 정사 중 70퍼센트는 제 사회적 배우자보다 계급이 높은 수컷의 영역에서 해가 뜬 직후에 일어났다. ‘흔남’과 살고 있는 암새가 월등한 유전자를 얻기 위해 동네 ‘훈남’에게 몰래 접근하는 딱 그런 모양새였다. 성적으로 거리낌 없는 명금류 암컷은 행동생태학계를 뒤흔든 ‘일처다부제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만 확인되었다. 64-5)<br>허디는 하누만랑구르원숭이Presbytis entellus 수컷 사이에서 영아 살해 행위에 대한 희한한 보고 내용을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누만랑구르원숭이는 긴 회색 팔과 잿빛 얼굴이 특징인 인도 아대륙 토종 원숭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허디의 관심을 끈 것은 암컷이었다. 허디가 처음으로 본 랑구르는 인도 라자스탄주의 타르 사막 근처에서 제 가족을 떠나 총각들 무리로 들어가 하룻밤을 간청하며 교태스럽게 걷는 한 암놈이었다. 허디는 도서관에 들어가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신이 본 랑구르가 유일한 ‘음탕한’ 암컷 영장류는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사회성이 강한 많은 종들이 특히 배란기에는 색정증에 가까운 적극적인 성적 취향을 보였다. 야생에서 침팬지 암컷은 평생 다섯 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지만 수컷 수십 마리와 6,000번 이상의 교미를 한다. 배란기에 이 암컷은 무리의 모든 수컷을 유혹하고 하루에 30~50회 섹스를 한다. 그런 지나친 행동에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66-7)<br>인도에서 랑구르를 연구하며 허디는 외부에서 온 수컷들이 무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젖을 떼지 않은 어린 새끼를 죽이는 일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영아 살해 행위가 성선택과 짝을 두고 벌어지는 수컷 간 경쟁의 유해한 부작용임을 깨달았다. 다른 수컷과 낳은 새끼가 젖을 뗀 후 다시 가임기가 될 때까지 2~3년이나 암컷을 기다리는 대신, 새로운 우두머리는 새끼를 살해하여 어미가 즉시 발정기에 들어서게 강제하고 곧바로 제 새끼를 임신하게 한다. 이런 관찰을 바탕으로 허디는 암컷이 영아 살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무리에 침입한 수컷과 섹스를 하게 되었다는 이론을 세웠다. 이는 제 자식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하여 새끼의 목숨을 보전하는 효과가 있다. 오늘날 수컷의 영아 살해는 영장류 사촌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51종의 영장류에서 의심되거나 실제로 목격되었다. 같은 패턴이 수사자에서도 보이는데 알파 수컷이 새로 무리를 장악하면서 새끼 사자를 죽인다. 69)<br>바람을 피우는 암컷은 월등한 유전자를 찾거나 자손의 생식능력을 증가시킬 유전적 기회와 면역계의 적합성을 높일 기회를 포함해 많은 면에서 유리하다. 본질적으로 암컷의 난교는 어미가 자신의 소중한 난자를 모두 한 바구니에 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건강한 자손으로 이어진다. 친부가 누군지 혼란을 주는 것이 단지 영아 살해를 막는 보험만은 아니다. 수컷들로 하여금 어린 새끼를 돌보고 보호하게 독려하는 장점도 있다. 허디는 전반적인 영장류에서 수컷이 자신의 새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새끼를 돌보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명백한 사실은 수컷은 오로지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새끼만 돌보기 때문에 일부일처가 암컷에게 최고의 전략이라는 흔한 가설에 찬물을 끼얹었다. 허디는 바바리마카크와 개코원숭이 연구에서 성욕이 왕성한 암컷들이 성을 이용해 복잡한 친자 관계의 그물로 다수의 수컷을 끌어들인 사례가 보고되었다고 지적했다. 우리 조상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70)<br>4장 연인을 잡아먹는 50가지 방법 : 성적 동족 포식의 난제<br>유혹의 대상이 수컷을 아침 식사로 잡아먹는 사나운 포식자라면 짝을 찾는 행위는 곧 죽음과의 춤이 된다. 저녁 식사와 데이트를 한 번에 해결하는 암거미의 성향은 빅토리아 시대 남성 동물학자들에게 여러모로 모욕적이었다. 악랄하고 난잡하며 지배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원래의 소극적이고 수줍고 한 남자만 아는 틀에서 벗어난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암거미는 또한 진화의 난제이기도 했다. 생물이 사는 이유가 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라면 섹스도 하기 전에 파트너를 집어삼키는 행위는 진화적으로 적절치 못한 적응 아닌가. 그러나 성적 동족 포식은 전갈에서 나새류, 문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척추동물과 함께 모든 종류의 거미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가장 유명한 동물이 아마 사마귀일 것이다. 암사마귀는 연인의 머리를 뜯어먹는 팜파탈이다. 수사마귀는 목이 잘린 채로 용맹하게 뒤로 물러선다. 그런 행동을 보고 수 세대의 동물학자들은 진화가 머리를, 즉 이성을 잃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79-80)<br>거미만큼 성적 충돌이 극심한 생물은 없다. 동족 포식은 배고픈 암거미의 치명적인 협박에 맞서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수거미에게 극강의 선택압을 가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부터 살펴보면, 많은 왕거미 수놈은 암거미가 지은 거미줄 가장자리에서 대기하며 연인이 점심―아마 사랑의 경쟁자 중 한 놈이겠지―을 다 먹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암거미가 식사를 마친 듯 보이면 그제야 슬슬 움직인다. 검은과부거미black widow spider 수컷은 실제로 암거미의 속사정을 거미줄의 성페로몬을 통해 알 수 있다. 암거미의 위장이 빈 듯하면 멀리 떨어져서 대기한다. 데이트 장소에 간식거리를 선물로 들고 오는 수컷도 있다. 거미판 고급 초콜릿 상자라고나 할까. 수거미가 더듬이다리로 일을 보는 동안 암거미의 입이 비어 있지 않게 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진화는 수거미가 암거미의 소화 상태를 감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성적 갈등은 많은 수컷에게 훨씬 더 교활한 묘책을 선사했다. 82-3)<br>육아거미Pisaurina mira는 섹스 중에 수거미가 가벼운 신체 결박을 시도한다. 수거미는 암거미의 집에 몰래 들어가 특수한 한 쌍의 긴 다리로 암거미를 붙잡아 제 거미줄로 사지를 묶는 동안 독니의 공격을 피한다. 다윈의나무껍질거미Caerostris darwini는 구강성교로 판돈을 올렸다. 수거미는 연인을 먼저 거미줄로 묶고 교미 전후와 교미 도중에 암거미의 생식기에 침을 묻힌다. 점선늑대거미Rabidosa punctulata 수놈에게는 스리섬threesome이 가장 안정한 성행위다. 교미 중인 커플을 우연히 마주친 총각이 제 운명을 시험하며 슬쩍 파티에 합류한다. 교미에 성공한 수컷을 이미 암거미가 먹어버린 상태라면 뒤늦게 침입한 수컷이 잡아먹힐 확률이 낮다. 말라바거미Nephilengys malabarensis는 교미 중에 위협을 느끼면 더듬이다리를 분질러버리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때 남은 다리는 몸이 없이도 알아서 계속 정자를 펌프질한다. 자발적으로 거세한 수컷은 더 이상 씨를 뿌릴 수 없다. 한 번의 기회에 올인한 셈이다. 83)<br>공작거미 암컷에게 성적 동족 포식은 적응의 측면에서 완전히 일리 있는 행동이다. 약한 구혼자를 일찌감치 솎아내어 원치 않는 구애 행동으로 방해받지 않고 동시에 공짜로 끼니도 때우는 효과가 있다. 공작거미 암컷의 안목을 조사한 일라이어스는, 수거미가 진동에 노력을 덜 기울이거나 노래와 춤의 박자가 맞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 ‘자신의’ 신호에 집중하지 않을 때 암거미가 공격적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산쑥들꿩과 정원사새에서 보았듯이 공작거미의 구애 역시 양방향 소통 과정이다. 다만 암컷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은 수컷에게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배를 꿈틀거리는 공작거미 암컷은 짝짓기할 기분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구혼자를 잡아먹을 가능성이 크다. 어미는 자식을 위해 최고의 유전자를 원하고 또 새끼를 보살피려면 자신도 크고 건강해야 한다. 구혼자들을 잡아먹을 능력이 되는데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90)<br>5장 생식기 전쟁 : 사랑은 전쟁터이다<br>오리의 음경은 몸길이에 비해 척추동물에서 가장 긴 축에 속한다. 왜소한 몸길이보다 10센티미터나 더 길며 와인 오프너처럼 반시계 방향으로 꼬여 있고 기부는 작은 가시로 덮여 있다. 괴이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리의 음경은 수사슴의 뿔처럼 계절을 타는 기관이다. 대개는 10분의 1 크기로 줄어 있다가 번식 철에만 늘어나는데 어떤 종에서는 그 변화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총배설강 입구에 양말을 뒤집어놓듯이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교미 준비가 되면 펌프질로 음경에 림프액을 주입하는데, 그러면 마치 파티 나팔처럼 3분의 1초 만에 시속 120킬로미터로 총배설강에서 펼쳐진다. 이런 사치품은 정자 경쟁의 결과물이라는 일반적인 견해가 있다. 대다수 오리 종에서는 성비가 수컷으로 기울어져 있으므로 암새는 고를 후보가 많으며 상대적으로 수오리 사이의 경쟁은 치열하다. 그 결과 오리의 정사는 지극히 로맨틱하거나 충격적으로 폭력적인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99-100)<br>교과서는 오리의 질이 단순한 일자 관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으나 암컷의 생식관은 수컷만큼이나 복잡했다. 길이도 길고 곳곳에 주머니가 숨어 있을 뿐 아니라 수컷의 음경과는 반대 방향의 나선을 이루고 있었다. 브레넌은 오리의 교미 중 3분의 1 이상이 강제로 진행되지만 원치 않은 교미에서 수정된 새끼는 2~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레넌은 수오리의 음경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나선형 질과 중간에 막다른 골목이 있는 특이한 생식관이 진화한 것은 음경의 진로를 차단하여 자신이 싫어하는 수오리의 정자가 수정에 쓰이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해서라는 예감이 들었다. 음경이 가장 긴 종은 실제로 암컷의 생식 배관도 좀 더 구불구불하고 장애물이 심하며 강제된 교미가 만연했다. 백조나 캐나다기러기처럼 일부일처에 텃세가 심한 종의 음경은 훨씬 수수했고 암컷의 질도 그에 상응하여 단순한 편이었다. 브레넌의 눈에는 수컷과 암컷의 생식기가 피차 적대적으로 공진화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101)<br>브레넌은 암오리가 실제로 자신의 알을 수정시킬 수오리를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의 음경이 난관으로 더 깊이 들어오게 통로를 허락하는 것이다. 비폭력적 상황에서 수오리는 교미 전에 춤을 춰서 암오리에게 구애한다. 마음이 동한 암컷은 수용의 자세를 취하여 물속에서 엎드린 채 꼬리를 들어 올린다. “암오리는 배설강 윙크를 해요. 나는 네 것이니 데려가라는 보편적인 신호죠.” 브레넌이 설명했다. 암오리가 알을 낳을 때는 난관으로 상당한 크기의 물체를 이동시킨다. 즉, 암컷에게 질의 내강을 확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강제로 교미가 일어날 때는 암오리가 윙크를 하지 않고 질도 이렇게 정신없이 꼬여 있는 비수용 상태를 유지하지요.” 하지만 암컷이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 때는 원치 않는 수컷 때와 달리 질의 내강을 활짝 열어 음경이 생식관을 따라 깊숙이 들어오게 한다. 누구와 짝짓기할지 결정할 수는 없어도 알의 친부를 결정할 수는 있다는 말이다. 102)<br>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면, 특히 정자 경쟁은 수컷들만의 스포츠로 취급되어 대개 올림픽 선수들처럼 정자가 겨루는 서사적인 ‘경주’로 묘사된다. 가장 강하고 빠른 수컷이 난자를 쟁취하며, 암컷은 이 대회에서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제 몸속에서 100미터 단거리 대회가 열리는데 결과에 전혀 개입하지 못한 채 지켜만 보는 셈이다. 선구적인 저서 『암컷의 통제Female Control』(1996)에서 에버하드는 질이든 총배설강이든 저정낭이든 암컷의 생식기는 정자를 받기 위한 비활성 배관 이상이라는 사례를 제시했다. 암컷의 생식기는 능동적인 기관으로서 구조와 생리, 화학적 특성을 통해 정자를 보관, 분류, 거부할 수 있다. 매력 없는 구혼자의 정액은 갖다 버리고, 선택된 정자는 난자로 가는 직통 노선에 올려 적극적으로 이동 속도를 높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로 같은 통로 속에서 헤매다 끝나게 할 수도 있다. 에버하드가 보기에 일단 씨뿌리기가 끝나면 그때부터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쪽은 암컷이다. 104)<br>6장 성모마리아는 없다 : 상상을 초월하는 어미들<br>동물의 암컷은 오랫동안 마치 다른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와 동일시되어왔다. 엄마가 된다는 것, 또는 모성은 감정적인 주제다. 양육과 희생의 동의어이며, 따라서 모든 여성은 ‘타고난’ 어머니이고,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신비에 가까운 모성 본능으로 채워진 근원적인 존재라는 오해가 만연하다. 이런 발상의 가장 자명한 문제는 새끼를 돌보는 것이 전적으로 암컷의 책임이라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암컷이 임신과 수유의 책임에서 풀려나게 되면 아빠들이 자식에게 훨씬 더 헌신적으로 된다. 특히 조류에서는 부모가 함께 자식을 돌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조류 커플의 90퍼센트가 그 일을 나눠 가진다. 진화의 단계를 거슬러가다 보면 아비의 돌봄이 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관례 수준이다. 물고기의 경우 전체 종의 3분의 2가 양육의 모든 책임을 아비 혼자서 지는 싱글대디이고, 어미는 알을 기여하는 것 이상은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113-4)<br>암컷은 자신의 생식적 운명을 잔인하게 통제한다. 야생에서 임신 중인 겔라다개코원숭이는 새로운 수컷이 집단을 장악할 때면 유산한다. 무리에 유입된 수컷은 거의 언제나 제 씨가 아닌 새끼를 죽인다. 그러므로 임신을 종결하는 것은 영아 살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에 괜한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어미의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약 반세기 전에 생쥐에서 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힐다 브루스Hilda Bruce의 이름을 따서 ‘브루스 효과’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유산은 그 이후로 사자에서 랑구르까지 다양한 야생 포유류에서 기록되었다. 모성애의 목표는 무작정 새끼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번식할 때까지 오래 살아남는 자손의 수를 최대로 늘리는 곳에 자신의 제한된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이 일에 진정한 이타적 헌신은 없다. 오히려 철저히 이기적이다. ‘좋은 엄마’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 때와 포기할 때를 알고 있으며 그건 심지어 새끼가 태어난 후에도 그러하다. 124)<br>오스트레일리아 오지의 황량한 땅에 사는 캥거루 암컷은 그 지역의 변덕스러운 환경 속에서 기발한 분산 투자법을 발달시켰다. 동시에 세 단계의 자식을 저글링 하는 생식 조립라인이다. 첫째는 아직 젖먹이지만 독립이 가까운 상태라 거의 주머니 밖에 나와 어미 옆에서 뛰어다니는 새끼이고, 둘째는 주머니 속 젖꼭지에 들러붙어 있는 분홍색 젤리빈 같은 새끼이며, 셋째는 수정은 되었으나 자궁에 가사 상태로 멈춰 있는 배반포 상태의 휴면 중인 세포 덩어리다. 포식자에게 쫓길 때면 어미는 주머니에서 더 큰 캥거루를 꺼내어 몸을 가볍게 하고 도망간다. 어미를 쫓아가지 못하면 홀로 남은 새끼는 젖을 먹지 못하고 어미의 보호도 받지 못해 죽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슴 미어지는 일이지만 캥거루에게는 고통 없는 의식적 결정이 필요하다. 자연선택은 이미 어미에게 기능적인 차선책을 제공했다. 젖먹이가 사라지면 배아 상태로 대기 중이던 새끼가 휴면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새끼를 빠르게 대체한다. 124-5)<br>엄마는 어미로서 행동하게 하는 갈라닌과 옥시토신 뉴런을 둘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포옹 호르몬은 새끼 돌보기 스위치의 찾기 힘든 방아쇠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완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뒬락은 출산이나 수유와 관련된 호르몬의 홍수와는 무관하고 또한 옥시토신만으로 작동하지 않는 다른 장기적인 애착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엄마, 아빠, 다른 먼 친척, 심지어 양부모와의 관계에서 높은 수준의 애착을 끌어낼 수 있다. 근연 관계가 아닌 새끼를 돌보는 일은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애초에 공동 양육이 진화한 종도 있다. 이는 ‘이중 업무’, 소위 투잡을 뛰어야 하는 동물의 어미에게 엄청난 이점이다. 남의 새끼를 돌보고 부양하는 것은 얼핏 진화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협동 번식은 다양한 분류군에서 여러 차례 진화했다. 1만 종의 조류 중 약 9퍼센트와 전체의 3퍼센트에 달하는 포유류 어미들이 알로마더allomother, 즉 ‘다른 엄마’들로부터 절실한 도움을 받는다. 131-2)<br>7장 계집 대 계집 : 암컷의 싸움<br>3월에 짧은 우기가 지나면 토피영양 암컷은 짝을 찾아 레크로 크게 무리 지어 이동한다. 레크는 앞서 산쑥들꿩 이야기에서 등장한 수컷들의 짝짓기 경기장이다. 암컷은 1년 중 단 하루만 발정하기 때문에 번식기는 치열하다. 이처럼 짧은 생식 기간 때문에 24시간짜리 광란의 성적 활동이 일어난다. 브로 예르겐센이 계산해보니 보통 한 암놈이 평균 네 마리 수컷과 짝짓기를 했고, 개중에는 이 제한된 시간에 무려 12마리의 파트너와 짝짓기하는 암놈도 있었다. 최고의 수놈은 중심에 자리 잡고 레크를 장악한다. 암놈들이 싸우는 것도 모두 이 매력적인 수컷 때문이다. 브로 예르겐센은 소위 잘나가는 수컷 토피영양이 다윈의 예측과 달리 아무하고나 짝짓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중한 정자를 보전하기 위해 수컷도 전통적으로 암컷이 취하는 까다로운 태도를 취한다. 되도록 많은 개체와 짝짓기한다는 목적은 변함없지만 정자 경쟁에서 자신의 기회를 최대로 높일 암컷을 의도적으로 찾아 선택하는 것이다. 137-8)<br>사회적 종에서 서열은 먹이, 주거지, 최고 품질의 정자처럼 번식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는 열쇠다. 그래서 우두머리 암캐가 되는 것은 확실한 이득이다. 수컷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통해 패권을 잡고 관심을 한 몸에 받지만, 집단생활을 하는 암컷은 수컷의 서열과는 무관하게 자체적인 위계질서를 이루고 생활한다. 슈옐데루프 에베는 무리 내 암탉들이 일상적인 다툼을 하는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암탉은―에베가 ‘폭군’이라고 부른―상대적 지위를 망각하고 감히 자신보다 먼저 먹으려는 낮은 서열의 닭을 쪼아대어 수시로 제 위치를 상기시켰다. 알파 암컷의 자리로 향하는 사다리 끝에 올랐을 때 받을 상은 상당한 번식 상의 이점이며 싸울 가치가 충분하다. 수컷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피비린내가 나고 워낙 요란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하지만 암컷의 권력 다툼은 결코 덜 파괴적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대단히 은밀하게 일어난다. 142-3)<br>높은 지위의 노랑개코원숭이 암컷은 먹이원에 대한 최초의 몫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과 새끼들을 위한 고차원적 갈취 행위 등 모든 것을 다 누린다. 지위가 낮은 어미와 그 자식은 위의 것들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생식능력에도 영향을 미쳐 서열이 낮은 암컷은 지속적인 테러의 결과로 더 늦게 번식하고 배란의 빈도가 낮으며 자발적으로 유산할 수 있다. 다른 암컷의 생식력에 가하는 이런 비열한 행위는 중대한 결과를 불러오며 수컷 사이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개싸움보다 훨씬 타격이 크다. 유전적 유산이라는 가장 아픈 곳을 때리기 때문이다. 번식하지 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벌은 없다. 24시간 주먹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하여 영장류 암컷이 수컷보다 경쟁심이 부족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이들은 더 교활하고 더 치졸하게 싸운다. 영장류 암컷은 ‘서열 차이나 무시의 신호에 집착한다’라고 묘사되어 왔다. 수컷들만큼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143-4)<br>미어캣은 3~15마리가 씨족사회를 이루고 번식의 80퍼센트를 우두머리 암컷 한 마리가 독점한다. 알파 암컷의 친척, 후손, 몇몇 떠돌이 수컷으로 이루어진 무리의 나머지는 영역 방어와 보초, 땅굴 관리, 아기 돌보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두머리의 새끼에게 젖까지 먹인다. 이런 식의 분업은 과학적으로 ‘협동 번식’이라고 알려졌으나 내게는 아주 완곡한 표현으로 들린다. 미어캣의 동지애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협조가 아닌 노골적인 압력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미어캣 사회는 임신하는 즉시 다른 암컷의 새끼를 죽이고 잡아먹는 근친관계 암컷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번식 경쟁에 기반을 둔다.&nbsp; 하여 이 자리는 무슨 수를 쓰든 차지할 가치가 있다. 절대권력을 물려받는 순간 미어캣 암놈은 몸집이 커지고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올라가고 다른 암컷에 대한 적대감이 사정없이 상승한다. 특히 나이와 몸집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즉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를 유난히 적대적으로 대할 것이다. 대부분 자기 자매다. 144-5)<br>8장 영장류 정치학 : 자매애의 힘<br>버빗원숭이 암컷은 자신이 태어난 집단에 머물면서 친척들과 평생 강한 유대를 형성한다. 반면에 수컷은 출생 집단에서 나와 혈연관계가 아닌 집단에 합류한다. 이런 시스템이 암컷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한다. 피를 나눈 암컷들의 모계 집단은 안정적인 중심을 형성하고 협력하여 수컷의 지배에 대항한다. 암컷들은 특정 수컷이 무리에 합류하지 못하게 막거나 쫓아내며 그 과정에서 수컷에게 상처를 가하거나 죽이는 일까지 있다. 암컷은 종종 집단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 생계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잘 수 있는 최고의 장소를 물색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포유류 암컷은 대개 수컷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전문성이 더욱 강화된다. 그런 지혜가 암컷에게 무리를 이끌 권위를 준다.38 일례로 꼬리감는원숭이에서 먹이를 찾거나 무리가 이동할 때 리더십을 더 자주 발휘하는 것은 알파 수컷이 아닌 작은 암컷들이다. 이런 현상은 지배와 리더십을 동일시하는 오랜 가정에 도전한다. 168-9)<br>침팬지는 부계 중심에 호전적이지만 보노보는 모계 중심에 평화롭다. 보노보는 몸집이 좀 더 작고 호리호리하고 털이 적을 뿐 실제로 사촌인 침팬지와 아주 유사하게 생겼다. 침팬지처럼 암컷의 몸집은 수컷의 약 3분의 2 정도이고 출생 집단에서 나와 이주한다. 그러나 보노보 암컷의 사회생활은 침팬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뒤를 봐줄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디아스포라로 성인의 삶을 사는 대신 보노보 암컷은 낯선 집단에 합류해서도 피를 나누지 않은 암컷들과 동맹을 형성한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구성된 자매 관계의 힘으로 보노보 암컷은 자신들보다 큰 수컷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의 동맹은 싸움이나 신체적 겁박에 의해 형성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큰 요인은 과학자들이 ‘G-G 문지르기’라고 묘사한 행위로 서로 생식기를 비비는 행동이다. 한마디로 보노보 암컷은 상호적인 프로타주의 예술을 완성함으로써 가부장제를 전복할 힘을 얻은 것이다. 171)<br># 프로타주 : 옷을 입은 채 몸을 남의 몸, 물건에 문질러 성적 쾌감을 얻는 행위<br>“애초에 침팬지나 개코원숭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고 보노보를 제일 먼저 알았다고 상상해봅시다.” 프란스 드 발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럼 보노보 사회에 기초하여 초기 호미니드는 여성 중심의 사회였고, 그 사회에서는 성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고 전쟁은 드물거나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믿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인류 과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재구성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특징을 섞은 형태일 것이다. 그것이 침팬지에 더 가까웠는지 보노보에 더 가까웠는지는 영원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게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보노보 사회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노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이 공격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행위와 능력은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178)<br>9장 범고래 여족장과 완경 : 고래가 품은 진화의 비밀<br>인간을 제외하고 범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게 분포한 포식동물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냥 기술로 이 범지구적 킬러들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특정한 먹이를 활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 해안의 범고래는 땅을 파서 가오리를 잡아먹는 선수이고, 아르헨티나에서는 파도를 타고 해변까지 올라와 바다사자 새끼를 낚아챈다. 알래스카 범고래 집단은 매해 5월이면 유니맥 패스Unimak Pass를 따라 모여서 매복했다가 어린 귀신고래를 습격한다. 남극에서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큰 파도를 일으켜 부빙에 안전하게 피신 중인 물범을 입속으로 쓸어 넣는다. 이처럼 먹이로 특화된 범고래 종족을 생태학자들은 생태종이라고 부른다. 동일한 종이지만 특정 지리 구역에 분리되어 살면서 서로 교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고유의 방언을 ‘말한다’고 하고, 각 종족의 사냥 기술이 세대를 거쳐 전수되어 인간의 문화에 버금간다고 알려졌다. 이런 범고래 무리에 앞장서서 헤엄치는 것은 폐경 이후의 범고래 암컷이다. 184)<br>남부 상주군은 태평양 연어, 그중에서도 왕연어라고도 알려진 치누크연어를 가장 선호하며, 범고래 성체 한 마리가 건강하게 생활하려면 하루에 20~30마리씩 먹어야 한다. 미국-캐나다 서부 국경에 걸친 살리시해는 전통적으로 고래들이 이 크고 지방이 많은 생선으로 잔치를 벌이는 먹이터다. 많은 연어가 이곳으로 몰려와서 미국 북서부 지방의 하천 지류를 따라 올라가며 알을 낳는다. 이런 일시적인 연어 서식지는 해와 철마다, 또 조류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에 연어 무리를 뒤쫓는 사냥꾼은 현명하고 약삭빨라야 한다. 범고래는 연어를 쫓아 강 쪽으로 올라가야 할지 신선한 재고를 찾아 심해 연어 식당을 배회할지 결정한다. 이 복합적 인지 활동이 과거보다 훨씬 난해해졌는데, 연어가 산란지로 가는 길을 거대한 콘크리트 수력발전 댐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년의 경험이 있는 노련한 범고래들만 연어를 찾을 장소를 안다. 바로 나이가 가장 많은 여족장들이다. 184)<br>코끼리 우두머리 암컷은 가족 집단의 수장이며, 사자를 한 수 앞서는 지혜가 있고, 다른 암놈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며 가뭄에는 오래된 수원을 기억한다. 이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거인은 범고래(그리고 실제로 인간)와 공통점이 많다. 수명이 길고 뇌가 크며 의사소통 기술이 복잡하고 유동적인 사회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나이가 많은 대장 암컷은 친구와 적을 구분할 뿐 아니라 수사자와 암사자의 포효도 가려낼 수 있다. 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재주인데 암수의 소리는 거의 비슷하지만 위협도는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사자는 주로 암컷이 사냥에 나서긴 하지만, 새끼 코끼리를 낚아챌 수 있는 것은 몸집이 50퍼센트 정도 더 큰 수컷만 가능하다. 나이 많은 여족장의 월등한 식별력은 식구를 안전하게 지키고 긴장을 낮추면서 이들이 우선순위에 집중하게 한다. 먹는 일 말이다. 매콤의 연구는 연륜 있는 암코끼리의 빠른 판단과 자신감 넘치는 리더십은 자손의 증가로 이어져 할머니 가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5)<br>할머니 가설이 작용하려면 말년에 생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아주 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범고래든 그 어떤 동물이든 번식을 멈출 이유가 없다. 새끼를 낳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범고래의 경우 아들과 딸의 차이가 꽤 크다. 열다섯 살이 된 젊은 암컷 범고래가 번식을 시작할 때 이들이 새끼에게 줄 양질의 젖을 생산하려면 연어를 40퍼센트나 더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딸’이 성숙기에 도달하면 무리 전체가 영양학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이처럼 나이 들어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부담스러운 사회적 비용이 진화적 자극이 되어 범고래 암컷으로 하여금 중년이 되면 번식을 중단하고 대신 아들과 손자에게 투자하며 딸과 손녀와의 경쟁을 거두게 한다. 그런 동기가 코끼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다른 사회적 포유류처럼 아들이 출생 집단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끼리 암컷 우두머리들에게 가장 무난한 선택은 죽을 때까지 번식하는 것이다. 186-7)<br>10장 수컷 없는 삶 : 자매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br>레이산알바트로스는 태평양 하와이 섬들을 좋아하여 매년 11월이면 6개월의 고독한 삶을 접고 한데 모여 짝짓기하고 새끼를 한 마리씩 낳아서 기른다. 고작 한 마리냐 싶겠지만 그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알바트로스 새끼는 유난히 자라는 속도가 느려서 둥지를 떠나 스스로 하늘에 몸을 띄우기까지 6개월이나 걸린다. 그때까지 부모는 한 팀이 되어 한 마리가 둥지에 남아 시끄럽고 바라는 것 많은 투자 대상을 보호하는 동안 다른 한 마리는 그 입에 넣어줄 오징어를 찾아 출정을 떠난다. 이런 팀워크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신뢰와 이해와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알바트로스가 장기간 인내력을 발휘하여 이룩한 또 다른 특별한 위업의 상징이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알바트로스는 그 드물다는 일부일처성 새이다. 전형적인 알바트로스는 60~70년을 살면서 평생 매년 똑같은 짝을 만나 둥지를 튼다.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헌신적인 저 커플의 3분의 1이 인간의 언어로 말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다. 196)<br>카에나 포인트의 알바트로스 군집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집단이다. 이 군집은 레이산섬과 미드웨이 환초 같은 하와이 무인도에서 100만 마리 이상이 번식하는 크고 혼잡한 군집에서 나온 자손들이 형성했다. 모험을 감행한 자들은 젊은 암컷 알바트로스들로,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새로운 목초지에서 독립했다. 젊은 수컷은 고향에 머물며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번식을 시작할 가능성이 더 컸다. 그 바람에 카에나 포인트나 근처 카우아이 같은 지역의 신생 군집에는 암컷이 짝으로 삼을 수컷이 부족했다. 혼자서 새끼를 키우는 것이 알바트로스 사전에는 없는 일이므로, 이 혁신적인 암컷들은 기존 암수 커플의 수컷에게 정자를 기증받은 다음 개척 정신이 뛰어난 다른 암컷과 짝을 짓고 새끼를 키워내는 어려운 과제에 동반하게 된 것이다. 일부는 한두 해 정도 암컷과 짝을 지었다가 다시 수컷을 찾아간다. 일부 암컷은 평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해 동안 수컷으로 갈아타지 않고 지속적인 동성애 관계를 유지한다. 198-9)<br>진딧물은 4,000종이나 되며 작물에서 생명을 빨아먹고 질병을 퍼트리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되었다. 또한 이들은 복제의 세계에서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여름이 시작하면서 암컷 한 마리가 50~100마리의 딸을 낳는다. 한데 이 딸들은 이미 발생 중인 배아를 임신한 상태다. 작고 통통한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새끼가 새끼를 임신한 상태로 포개진 덕분에 약충이 성숙하는 시기가 열흘로 단축되고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양배추가루진딧물Brevicoryne brassicae 같은 몇몇 종은 한 철에 41세대를 생산한다. 그래서 한 암컷이 여름의 시작과 함께 깐 알은 무당벌레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 수천억의 자손을 생산한다. 가을이 되어 수가 많이 불어나면 그때부터 암컷은 수컷 진딧물과 교미하여 유성생식을 시도한 후 다음해에 닥칠 난관에 대처할 유전적 다양성을 갖춘 알을 낳는다. 가히 정원사의 최강 숙적이 탄생하는 난공불락의 시스템이다. 언제나 승리는 진딧물의 것이다. 205)<br>하지만 이것도 윤형동물의 질형목 생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순결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동물의 왕국에서 필적할 자가 없다. 편형동물의 친척인 이 미세한 생물은 무려 8,000만 년이나 섹스의 냄새도 맡지 못했다. 질형목 생물의 450개 종이 모두 암컷이다. 질형목 생물이 진화적으로 장수한 비결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한 조사와 맹렬한 숙고의 영역이었다. 그 비법 중 하나는 식사 중에 다른 생명체로부터 유전자를 ‘훔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어떤 과학자들은 질형목 생물이 저녁거리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수평적 유전자 이동horizontal gene transfer’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기 게놈을 단장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합치면 질형목은 500종 이상의 종에서 외래 DNA를 갖다 붙인 프랑켄슈타인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화를 통해서인지 아닌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처럼 훔쳐온 유전자들은 성이 없는 상황에서 질형목에 필요한 유전적 다양성을 준다. 206)<br>11장 이분법을 넘어서 : 무지갯빛 진화<br>따개비는 안착한 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성 체제를 수정하는 능력 덕분에 번식 스펙트럼의 폭이 대단히 넓다. 예를 들어 왜웅矮雄, 즉 난쟁이 수컷은 암컷 위에 내려앉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난소가 발달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확실히 수컷으로 분류하기가 뭣하다. ‘수컷의 기능을 강조하는’ 현대 과학이 이 모호한 성을 ‘잠재적 자웅동체potential hermaphrodite’로 기술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웅동체, 암컷, 왜웅 사이의 경계가 너무 흐릿해서 이들의 성적 표현은 명확한 구분이 있다기보다 연속체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따개비에서 보인 한 번식 시스템에서 다른 번식 시스템으로의 빠른 진화는 자연에서 성과 그 표현의 놀라운 유동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따개비,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생명체는 진화의 최전선에 서서 우리에게 성이란 이원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현상으로서 진화의 변덕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모호한 경계를 지닌다고 가르친다. 216)<br>러프가든은 『변이의 축제』에서 연어에서 참새까지 3~5개의 젠더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이는 많은 종을 인용했다.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성에 속해 있지만 별개의 외형과 성적 행동을 보이는 동물을 말한다. 무지개양놀래기Thalassoma bifasciatum를 예로 들어보자. 화려한 색깔의 이 자웅동체 물고기를 두고 러프가든은 세 가지 젠더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한 젠더는 수컷으로 태어나 평생 수컷으로 살고, 한 젠더는 암컷으로 태어나 평생 암컷으로 산다. 하지만 세 번째는 암컷으로 태어나 살다가 나중에 수컷으로 변한다. 이처럼 성이 전환된 수컷은 처음부터 수컷이었던 놈들보다 몸집이 훨씬 크다. 환경에 따라 선호되는 무지개양놀래기 수컷의 젠더가 다르다. 해초로 덮인 환경에서는 몸집이 큰 성전환 수컷이 암컷을 지키느라 애를 먹는 반면, 성전환하지 않은 작은 수컷은 더 활발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산호초의 맑은 물속에서는 성전환 수컷이 제 영역과 암컷을 더 잘 지킨다. 따라서 진화는 그 둘의 혼합을 선호한다. 218)<br>이색적인 앵무고기에서처럼 변화가 영구적이라 일단 성을 바꾸면 죽을 때까지 그 성으로 살아가는 종이 있다. 반면 평생 유동적으로 양쪽 성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는 물고기도 있다. 산호초 바위 틈바구니에 사는 고비goby처럼 잡아먹힐까 두려워 밖으로 모험하지 않는 물고기에게는 아주 편리한 재주다. 다른 산호 고비를 만나면 상대의 성이 무엇이건 간에 거기에 맞춰 생식샘을 바꿀 수 있으므로 언제나 번식할 수 있다. 어떤 물고기는 성을 뒤집는 빈도가 가히 수준급이다. 초크배스Serranus tortugarum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형광 파란색의 카리브해 물고기로 하루에 최대 20번이나 성을 바꾼다고 알려졌다. 성을 바꾸는 습성은 장기 파트너와 함께 조정하는 행동으로, 정자 생산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산란을 번갈아 하여 상호 공정한 번식 투자를 유지하려는 목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들은 각각 자기가 생산하는 만큼 알을 수정시킨다. 물고기조차 상대와의 관계에서 주는 만큼 받는다는 예시다. 220)<br>성을 바꾸는 물고기 대부분이 자성선숙이다. 암컷으로 태어나 나중에 수컷이 된다는 뜻이다. 소수지만 그 반대인 웅성선숙의 예도 있다. 흰동가리들이 바로 수컷으로 시작하는 소수에 속한다. 아주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2배색의 이 작은 물고기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말할 것도 것이 이 영화는 흰동가리의 실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적 자유를 발휘했다. 이 일부일처성 산호 서식자는 암수가 함께 말미잘 안에 집을 짓는다. 말미잘의 쏘는 촉수가 흰동가리 커플과 알을 보호한다. 암수의 관계에서 보스는 호전적인 암컷이다. 수컷이 알을 돌보는 동안 영역을 사수하는 일은 암컷의 몫이다. 흰동가리는 최대 30년이라는 긴 수명을 살면서 한 말미잘 안에서 종종 어린 수컷들과 함께 산다. 그러다가 암컷이 예를 들어 꼬치고기에 잡아먹혀 사라지고 나면 미스터 흰동가리가 암컷으로 변신하여 우두머리가 되고 어린 수컷 중 하나가 성숙하여 그 짝이 된다. 220-1)<br>나오며 편견 없는 자연계<br>『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 출간되고 4년 후, 미국의 목사이자 독학한 과학자 안토이넷 브라운 블랙웰Antoinette Brown Blackwell은 『자연계에서의 성The Sexes Throughout Nature』을 출간하고, 다윈은 ‘남성 계통에서 진화한 것들을 과도하게 중시함으로써’ 진화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블랙웰은 유기체가 복잡하고 발전할수록 성별 간 노동의 분할이 더 크다고 제안했다. 수컷에서 진화한 모든 특수한 형질에 대해 암컷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진화시켰다. 그 순수한 결과는 ‘암수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등식에서의 유기적 평형’이다. 블랙웰의 외침은 외롭지 않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소수의 여성 지식인들은 다윈의 연구를 읽은 후 종의 암컷이 소외되고 잘못 이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과학적 가부장제에 의해 묵살되었다. 세라 블래퍼 허디가 비꼬듯이 말한 것처럼 주류 진화생물학에서 이 페미니스트 선조의 영향은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228-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12/77/cover150/e43253151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612778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질서 없음 / 헬렌 톰슨 - [질서 없음 - 격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프레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40914</link><pubDate>Mon, 27 Apr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409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031544&TPaperId=172409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7/61/coveroff/k4620315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031544&TPaperId=172409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질서 없음 - 격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프레임</a><br/>헬렌 톰슨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br/></td></tr></table><br/>들어가는 글: 거대한 교란<br>"지정학의 역사에서 핵심은 에너지다. 석유와 가스에 대해 말하자면, 미국은 1960년대 이래 어느 시기보다도 높은 에너지 자립 역량을 확보했고 금융 분야에서 가진 극단적인 강점이 이 권력을 한층 더 보완하고 있다. 되살아난 미국의 에너지 우위는 중동에서 지정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또한 이는 중국의 해외 석유 의존이 석유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게 했고, 러시아는 유럽의 가스 시장에서 심각한 경쟁 상대[미국]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미-러 경쟁 관계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냉전 종식 이후에 생겨난 단층선들, 그리고 튀르키예를 둘러싸고 더 오래전부터 있었던 단층선들을 압박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이 세계 최대 탄소 배출국인 동시에 재생에너지 발전 및 그에 필요한 금속 생산에서 막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녹색에너지가 화석연료에너지가 일으킨 지정학적 불안정과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지정학적 불안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의미한다."(21-2)<br>"경제의 역사는 화폐와 금융,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에너지의 요동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EU, 중국의 정책 대응은 세계 경제를 다시 한번 재구성했다. 모든 곳에서 막대하게 쌓인 부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음을 기정사실로 못박았다. 연준은 부채 조달 비용이 지극히 낮은 신용 환경을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다른 나라의 큰 은행들에 최종대부자 역할을 했다. 유로존 위기는 EU와 유로존 사이의 관계를 뒤흔들었고 영국의 EU 잔류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뒤이은 유럽중앙은행의 역할 변화 시도는 유로존을 정치적 림보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2010년대의 10년이 지나면서 세계 경제에, 특히 유럽에 중국의 중요성이 커졌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 연준의 새로운 권력에 제약을 받으며, 하이테크 제조 분야에서 독보적인 초강대국이 되려는 시진핑의 목표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도 제약을 받는다. 이렇듯 경합하는 다중의 압력하에서, 세계 경제는 더 첨예한 지정학적 갈등의 장이 되었다."(22-3)<br>"민주정치의 역사에서 유럽과 북미의 대의제 민주정은 사람들이 공동의 정치적 삶을 꾸려가기에 안정적이고 우월한 구조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모든 정부 형태가 그렇듯 대의제 민주정도 시간이 가면서 그것이 생겨났을 당시의 지정학적·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불균형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대의제 민주정은 국가공동체주의[또는 민족주의]에 의존했는데, 국가공동체주의는 대의제 민주정의 작동에 꼭 필요하지만 불안정의 원천으로 작용할 소지도 그만큼 크다. 이러한 취약성은 대의제 민주정 정치체들이 생겨났을 때부터 존재했고, 종종 (1930년대 대공황 같은) 부채로 인한 경제 위기 때 등장했다. 1990년대부터 모든 곳에서 민주정 국가의 정치는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지금보다 늘도록 경제를 개혁하라는 대중의 민주적 요구에 점점 더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주정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금권귀족정plutocracy의 경향성이 커지는 데 취약해졌고 개혁은 더 어려워졌다."(23-4)&nbsp;<br>| 1부 | 지정학1장 석유 시대의 시작<br>"국내에 석유 매장고가 없는 유럽의 큰 국가들은 에너지 자립에 실패한 것이 유럽의 유라시아 지배가 종말을 고하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여겼다. 석유의 시대는 유럽이 세계 패권국이 되거나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적 권력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터였다. 1970년대부터 미국은 독일이 러시아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는 것을 마지못해 용인했다.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미국 국내에서도 충분한 공급량이 없고 중동에서 충분한 공급량을 확보할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에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서 석유와 가스가 재부상하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연결은 우크라이나의 독립, NATO의 확대, 독일의 취약한 군사력 등과 연결되는 중대한 지정학적 단층선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중국-이란의 관계는 이 이슈들의 영향을 한층 더 다루기 어렵게 만들었다. 2015년 이란 핵 합의에 참여한 NATO의 유럽 회원국 세 곳 모두가 이란에서 가스를 공급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52)<br>"미국이 유럽의 에너지 의존도와 관련된 지정학에 오늘날과 같이 관여하게 된 기원은 2차 대전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중반인 이때 유라시아에서 미국이 지정학적 권력을 행사하는 데는 명심해야 할 커다란 경고등이 하나 있었다. 그전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서의 승리가 소련과의 군사적 동맹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나중에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두 대륙 강국이 동맹을 맺고 유럽과 중동을 나눠먹으려 할 위험도 충분히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다. 석유는 독일 시장을 러시아 자원과 연결함으로써 이러한 지정학적 논리를 한층 더 강화할 가능성이 있었다. 히틀러는 영토 정복과 제노사이드라는 불가능하고 끔찍한 비전 때문에 그 가능성을 깨뜨렸다. 하지만 전후 세계에서 독일과 소련 사이에 어떤 연합 관계라도 다시 생겨나는 것을 막으려면, 미국은 서독이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책임지고 보장해야 할 터였다."(52-4)<br>2장 석유를 보장할 수 없다<br>"전후 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구상에는 근본적인 단층선이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미국이 중동을 냉전의 장소로 생각하긴 했지만, 트루먼부터 존슨까지 미국 대통령들은 미군을 중동에 주둔시키거나 페르시아만에 미 해군을 진지하게 개입시킬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너무 많은 군사적 부담을 지는 것이 국내적으로 인기가 없을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영국이 중동에서 제국적 통치를 유지해줄 필요가 있었다. 냉전 초기 몇 년간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대비책에는 이집트에 기지를 둔 영국군이 공습을 해주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목적에서, 트루먼은 영국이 수에즈에 짓는 아부 수위르 공군기지 건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훗날 나세르가 소련 쪽으로 기울었을 때, 아이젠하워는 영국이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튀르키예와 반소련 군사동맹을 맺도록 뒤에서 독려 했을 뿐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것을 우려해] 그 동맹(바그다드 협약)에 참여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65-6)<br>"튀르키예도 미국의 1950년대 유라시아 구상에 불편한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 역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탈린이 1946년에 다르다넬스해협의 공동 관할권을 요구하면서 튀르키예에 최후통첩으로 압박을 가하자 트루먼은 미 군함을 지중해로 들여보내고 공습을 승인했다. 명분이 무엇이든간에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에너지였다. 트루먼이 의회에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자금 지원 승인을 요청한 바로 그날 미국의 4대 석유회사들이 아람코에 공동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전이 중동으로 확대되자 튀르키예가 NATO 회원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서유럽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안보동맹의 한계를 드러냈다. 1952년에 트루먼 행정부는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NATO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소했다. 하지만 이는 NATO에 첨예한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몇몇 유럽 쪽 회원국이 서유럽 안보와 중동 안보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긋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66-7)<br>"미국이 중동에 군사적으로 들어와 있지 않다고 해서 중동에서 강압적 위력을 행사하지 않고자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들에 대해 은밀한 작전을 펴기 위해(또한 여차하면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도 있게) 트루먼이 세운 CIA가 중동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새 이란 총리 모함마드 모사데그가 1951년에 앵글로-이란 오일컴퍼니를 국유화하고 양허를 종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만에서 이란의 석유 수출을 봉쇄했다. 트루먼은 중재를 시도했지만, 1953년에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설득으로 CIA가 영국 정보기관과 함께 모사데그 축출 작전을 펴게 했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개입은 이란의 석유 분야 재건을 돕기 위해 미국 회사들이 이란 국영회사가 꾸리는 새로운 컨소시엄에 들어가도록 미국 정부가 미국 기업들을 압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개입은 미국-이란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고 중동이 미국에 더욱 큰 군사전략적 부담이 되게 했다."(67)<br>"처음부터 중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는 문제가 가득했다. 미국과 유럽의 거대 석유회사들이 중동 지역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맹렬한 갈등의 소지가 되었다. 수에즈 이후 10여 년 뒤, 미국이 표방한 서유럽의 석유 보장은 일관성이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서유럽이 원한 바도 아니었다. 미국 대통령들은 중동에서 충분히 장기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 석유를 들여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역외 제재를 가하거나 금융으로 위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서유럽이 [소련 석유 대신] 페르시아만 석유를 수입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미국의 기대는 궁극적으로 영국이 중동에 주둔하는 데 달려 있었는데, 영국이 발을 빼기로 했을 때 미국은 이를 막지 못했다. 게다가 이라크가 1968년 이후 소련 쪽으로 기울면서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졌다. 또 이제는 이란에 너무나 많이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란의 야망은 이라크가 소련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게 할 인센티브만 만들었을 뿐이었다."(76-8)<br>"데탕트[1970년대 동서간 긴장 완화]는 베트남 전쟁이 일으킨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에너지와 관련된 이유도 있었다. 1970년대 말이면 미국의 에너지 권력은 사그라드는 반면 소련의 에너지 권력은 떠오르고 있었다. 미국의 원유 생산은 1970년에 정점을 치고 감소하고 있었다. 2018년까지 미국은 1970년 수준의 생산량에 다시 도달하지 못한다. 국내 수요 이상을 생산할 역량이 없었으므로 미국 생산자들은 이론상으로라도 서구에 석유의 최종공급자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미국 자체도 석유를 수입해야 했다. 따라서 미국은 NATO 회원국들이 석유를 페르시아만에서 공급받게 하는 데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소련의 석유 수출보다 소련의 가스 수출이 지정학에 더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로, 소련의 가스 수출은 핵발전이 크게 제약될 세계에서 녹색 운동이 서독의 정치에 비중 있게 부상하던 시기에 소련-독일 간 우호 관계의 물적 기반이 될 경제적 토대를 제공했다."(80)<br>3장 유라시아, 재구성되다<br>"소련 붕괴는 독립 국가 우크라이나가 생겨나게 한 데 더해 흑해와 카스피해 일대 및 이 두 바다 사이에 있는 캅카스 지역에 1차 대전 이후 정착된 질서도 뒤흔들었다. 이 변화는 소련 말기에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격화되었다. 199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운송하는 파이프라인이 러시아나 이란을 통과하지 않게 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쿠에서 조지아를 거쳐 튀르키예의 항구 도시 제이한으로 이어지는, 공사 비용이 많이 드는 파이프라인을 지원했다. 조지아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를 NATO와 EU에 가입할 기회라고 보았고, 2003년 ‘장미 혁명’을 통해 친서구 정부가 들어섰다. 튀르키예로서는 새로 지어진, 그리고 새로 제안된 수송관이 필수 에너지원에 대해 〈수송의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되살아난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동유럽을 둘러싸고 NATO와 EU 사이에 발생한 긴장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102-3)<br>"1997년 러시아와 튀르키예 정부는 흑해 해저에 블루스트림 파이프라인을 짓기로 합의했다. 2003년에 개통된 블루스트림은 러시아가 튀르키예로 수출을 늘리고 유럽으로 가는 가스 일부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통하지 않고 유럽 시장에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 파이프라인은 유럽에 더 많은 분열의 씨를 뿌렸다. 튀르키예는 수입 석유와 가스에 매우 의존해왔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새로운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면서, 카스피해와 중동을 남유럽 소비자와 연결하는 에너지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이러한 석유와 가스 수송 네트워크는 과거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곳들을 연결하게 될 터였다. 이제까지 튀르키예는 에너지가 풍부한 중동과 카스피해의 캅카스 모두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향후 30년간 유라시아의 이러한 에너지 지리학은 튀르키예가 NATO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협력하고자 하게 만들 동기 또한 상당히 많이 만들어내게 된다."(105-6)<br>"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석유와 가스 수출의 재정 수입이 늘면서 푸틴은 러시아가 1990년대에 IMF에서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었고, 이로써 미국이 부채를 통해 러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이 사라졌다. 이라크 전쟁은 러시아-중국 간에 떠오르던 이 에너지 협력 관계를 한층 더 활성화했고 중국이 지정학 전략을 다시 짜도록 자극했다. 중국 지도자들에게 미국의 행동은 미래에 석유 공급이 불길하리라고 말해주는 확실한 전조로 보였다. 미국이 에너지 안보를 위해 군사력을 진지하게 사용할 의지가 있다는 사실은 중국도 자신의 해외 공급원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 역량을 강화해야 할 이유가 되는 듯했다. 2003년 11월 중국 주석 후진타오는 중국이 ‘믈라카 딜레마Malacca Dilemma’를 겪고 있다고 언급했다. 공동 수역에서 항행의 유지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해상 강국인 미국이 믈라카 해협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석유를 차단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중국의 취약성을 말한다."(110-1)<br>"오바마의 임기가 끝나가던 시기에 미·중 관계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구조적 역학이 있었다. 한편에서 미국은 태평양에서 억지 전략을 펴는 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중국은 유라시아의 상당 지역을 경제적 세력권에 넣어서 믈라카 딜레마를 해결하려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 기후가 미·중이 협력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기후변화가 미·중 데탕트의 논리를 만들었다면, 그와 동시에 일대일로는 탄소집약적인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중국-러시아의 석유 관계에 가스까지 보탰다. 2016년 대선에서 〈중국에 맞서자〉 후보(트럼프)가 〈러시아에 맞서자〉 후보(힐러리 클린턴)보다 지정학 이슈를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의 협력이 즉각적으로 일으킨 정치적 문제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관세 압박을 가해 미·중 교역 관계를 재구성한다는 내용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테크놀로지 경쟁이 국가안보의 문제라고 보는 데서도 이견이 거의 없었다."(119-20)<br>"2014년 ISIS가 이라크와 시리아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이라크 정부가 붕괴하면서, 오바마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미군을 파병했다. 이 새로운 중동 전쟁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 군사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번에도 미국의 국내 정치가 미국 대통령의 운신을 제약했다. 의회가 승인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2014년에 오바마는 시리아 ‘공습’에 대해서는 의회에 동의안 제출을 시도하지 않았고 시리아 반군에 물류 지원을 강화하는 것에만 의회에 동의를 구했다. 또한 시리아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군사 행동을 약간의 항공 작전과 특수군 활동으로만 한정했으니 지상에서 벌어지는 실제 전투는 현지의 반군 세력을 찾아내 맡겨야 했고, 미국은 쿠르드인민방위군(이하 ‘YPG’)을 선택했다. 이 막다른 전술은 곧바로 튀르키예 정부와 해결 불가능한 갈등을 일으켰다. 튀르키예는 YPG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었다."(126-7)<br>"이란 문제와 관련해서, 오바마는 이란의 핵 야심을 꺾기 위한 미국의 위력 과시가 관계 재설정의 조건이 되어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미국의 에너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여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2015년의 핵 합의가 일시적으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란이 중동에서 벌이는 지역적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합의가 제재하는 바가 없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단지 지연만 시킬 수 있을 뿐이고 이란이 시리아에서의 군사 행동도, 헤즈볼라와 하마스 지원도 계속할 수 있다는 현실은 미국 의회에 첨예한 동요를 일으켰다.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이 조약을 비준할 리 만무했으므로 오바마는 입법부의 동의가 필요 없는 행정부 간의 협정으로 틀을 바꾸었고, 따라서 미래의 어떤 대통령이든 [역시 의회의 동의 없이] 그것을 다시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당내 경선에 나선 공화당의 주요 후보 모두가 반대했으므로, 이란 핵 합의는 민주당이 대선에서 지면 존속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128-9)<br>"미국이 석유 수입을 완전히 멈춘다 해도(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미국의 에너지 자립은 환상이다. 셰일오일을 처리할 미국 내 정제 시설 용량 때문에 셰일오일 생산량이 제약되기 때문이다. OPEC 플러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유가가 너무 오르면 미국 소비자에게, 유가가 너무 내리면 미국 생산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중국이 미국 대신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이 된, 셰일이 구성한 에너지 세계는 역설적으로 카터 독트린의 군사전략적 논리를 강화한다. 중국이 페르시아만에 해군을 영구 주둔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지도부는 이란을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국가로 취급한다. 미·중 간의 지정학적 경쟁 관계가 격화되고 있으므로 어떤 미국 대통령에게라도 중국이 그곳에서 지배적인 해군 주둔국이 되게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중국으로 가는 석유 수입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페르시아만에 미국이 계속 주둔한다면, 국내 정치에서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131-2)<br>| 2부 | 경제4장 우리의 통화, 당신네 문제<br>"브레턴우즈 종말 이후의 통화 세계에서 유로달러 시장과 석유가 미국 금융 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유로달러 시스템은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국내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유지하기가 더 쉬워지게 해주었다. 역외 달러 시장 덕분에 달러가 은행 거래와 신용 거래의 주요 통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3년 오일 쇼크는 유로달러 시장을 한층 더 활성화했다. 또한 아랍 산유국들이 버는 달러 수입이 다시 미국으로 흘러와 재유통되는 메커니즘도 생겨났다. 닉슨의 재무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로 번 달러를 [미국이 아니라] 유럽 국가들에 빌려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1974년에 사우디가 미 국채를 사주도록 합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보면, OPEC 국가의 국영 기업들이 중동에서 활동하던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점유율을 가져가던 1970년대에, 미국의 중동 에너지 안보에서 사우디의 효용성이 높아진 것과 사우디가 미국이 석유를 달러로 수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한 세트였다."(154-5)<br>"1970년대의 경제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가 부상해서’라고만 설명한다면 그 10년간 위기의 기저에서 정치인이나 중앙은행장의 성향과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펼쳐지던 물적 요인의 중요성을 절하하는 것이다. 특히 에너지는 1970년대에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정치인들이 자본 이동 규제를 없애려는 강한 동기가 있었던 이유는 치러야 할 석유 수입 대금이 늘어서 달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주창자로 꼽히는 프리드먼도 에너지 문제에 집착했고 연방정부의 유가 통제와 사실상의 석유 배급이 에너지 부족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인플레란 늘 화폐적 현상이고 에너지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그의 학문적 논지는, 정치적 의미로 보자면 석유의 공급 부족을 없애려면 유가가 올라야 한다는 믿음의 쌍둥이 논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156-7)<br>"1971년 초 무렵이면 도이체마르크는 달러 대비 막대한 절상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독일 기업들이 국내의 일반 금리보다 금리가 낮은 유로달러 시장에서 달러를 굉장히 많이 빌린 뒤에 그것을 도이체마르크로 되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에 EC는 스네이크 체제Snake in the Tunnel라는 공동 환율 제도를 채택했다[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이후 유럽 역내의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체결된 환율 시스템. 유럽 역내 통화 사이에서의 환율은 2.25퍼센트의 변동 폭 내에서 움직이도록 하고, 역외 통화에 대해서는 변동환율을 허용했다]. 이 체제는 역내 통화들의 환율이 브레턴우즈에서보다 좁은 변동 폭에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고, 이들 사이의 변동 폭은 달러에 대한 개별 통화의 변동폭보다 낮았다. 하지만 스네이크 체제는 EC 국가들의 통화를 서로에 대해 안정시키려면 통화가 취약한 국가들이 국내 정치적으로 도저히 고려할 수 없는 정책을 그 국가들에 강제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158-60)<br>"단기적으로 달러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중기적으로 달러가 유럽 국가들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면 독일과 프랑스가 계속해서 〈두 개의 다른 통화 지역〉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슈미트는 환율조정장치Exchange Rate Mechanism(이하 ‘ERM’)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이하 ‘EMS’)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다소 까다로운 상대이긴 했지만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함께 이 일을 추진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유럽 고정환율 시스템에서 모든 당사국은 인위적으로 만든 새 화폐 단위인 유럽통화단위European Currency Unit(이하 ‘ECU’)[EC의 통화 단위. 1979년에 도입되었고 1999년 1월 1일 유로화로 대체되었다]에 자국 화폐를 고정함으로써 유럽통화제도가 수반하는 통화들 사이의 권력 위계를 가리려 했다. 금융 역사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ECU를 “독일 마르크화에 프랑스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묘사했다."(161)<br>5장 ‘메이드 인 차이나’는 달러가 필요하다<br>"2000~2007년, 연평균 성장률이 최고 14퍼센트에 달하기도 했던 중국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은 세계 경제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는 달러 대비 인민폐 환율을 수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수출 주도 전략을 폈다. 중국이 2001년에 WTO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2000년에 미국이 중국과 영구적인 무역 정상화를 하기로 하면서 여기에 더욱 속도가 붙었다. 이 새로운 무역 세계에서 중국의 수출품은 주로 제조품이었다. 따라서 미국과 상당수 유럽 국가들이 막대한 대對중국 무역 적자를 보게 되었다. 미국의 대對중국 상품수지 적자는 1999~2008년 사이에 거의 네 배가 되었다. 중국 제조품 수출의 급증은 북미와 서유럽의 노동시장에, 특히 미국 노동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충격의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국의 수출이 집중된 분야에서 상당히 충격이 컸으며 자국내 공급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182-3)<br>"표면상으로 보면 워싱턴에서의 정치적 대치는 후버 행정부 때부터 레이건 행정부 때까지 의회에 존재했던 보호주의적 압력의 재탕 같았다. 하지만 몇몇 미국 기업은 초국적 생산과 중국의 커다란 공급망으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미국의 테크 분야와 전자제품 제조 분야는 제품을 중국에서 조립하는 데서 막대한 이득을 보았고 월마트 등 값싼 중국제 수입품을 판매하는 거대 할인 유통매장도 그랬다. 2004년부터는 애플의 거의 모든 제품이 해외에서 제조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에서였다. 이렇게 이득이 선택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중국에 맞서자〉는 레토릭에 대한 공감을 감소시켰다. 아이팟을 중국에서 제조하는 것이 미국의 무역 적자를 심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제품의 부가가치 대부분은 여전히 미국이 얻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미국의 정치에서 계급 갈등을 촉발했다. 이득을 얻는 쪽은 주주들이거나 높은 보수를 받는 경영자들이었고 손해를 보는 쪽은 공장 노동자들이었다."(184-5)<br>"어떤 이들은 21세기 초 미국의 통화 이득과 중국의 무역 이득을 보면서 앞으로 꽤 한동안 금리가 내내 낮게 유지될, 사실상 새로운 국제 통화 질서가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이 질서가 브레턴우즈의 반쯤 부활한 버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과 모리츠 슐리크는 이 경제 세계를 〈차이메리카Chimerica〉라고 불렀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기적인 불안정성이 상당히 존재했고, 곧 이 불안정성은 세계 경제 전체로 파급 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무엇보다, 석유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무해하기만 한 신용 환경을 창출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만들었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석유 수요와 점점 심해지는 공급 부족이 통화 부문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통화 부문에서의 파장은 연준이 유가 상승이 추동하는 인플레를 우려해 통화를 조이기 시작한 2004년 6월에 처음 드러났다. 연준의 고위 정책결정가들에게 고유가의 귀환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191-2)<br>"사실 2007~2008년 붕괴는 여러 개의, 다중 붕괴였다. 첫 번째 붕괴는 미국의 주택 시장 붕괴였다. 두 번째 붕괴는 미국에서는 2007년 4분기에, 유로존과 영국에서는 2008년 2분기에 시작된 경제 불황이었다. 이 불황은 유가 충격, 그리고 이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정책 대응으로 일어났다. 세 번째 붕괴는 2007년 8월 9일에 레포 시장에서 시작된 은행 붕괴였다. 은행 간 거래 시장에서 모든 은행의 자금 조달 비용이 급등했다. 연준은 통화 정책 대신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 스위스 중앙은행에 달러 스와프를 제공하는 쪽으로 정책 수단을 변경했다. 그 중앙은행들을 통해 달러가 유로달러 신용 시장의 유럽 은행들에 들어가도록 한 것이다. 연준이 달러 자금 조달 시장을 안정시키려 하는 동안, 은행 위기는 석유가 일으킨 불황과 결합했다. 북아메리카, 유럽, 몇몇 아시아 국가에서 산출과 고용이 더 떨어졌다. 세계 전역에서 소비 수요가 너무 떨어져서 국제 교역이 빠르게 위축되었고 중국의 수출 분야가 타격을 입었다."(194-8)<br>6장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br>"2007~2008년의 금융 붕괴 당시가 제대로 기능하는 신용 환경이었다면 연준이 매우 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폈을 때 신용 시장이 되살아나고 실물 경제가 다시 성장 경로에 올라갔어야 한다. 하지만 유로달러 시장 때문에 금융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 매우 꼬여 있었다. 금리 인하만으로는 은행들의 자금 조달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연준은 유로달러 시장에서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야 했다. 연준의 조치는 주요 유럽 은행들의 파산을 막았지만, 동시에 지정학적 함의가 있는 금융·통화 위계를 만들었다. 2008년 이후의 통화 세계에서 연준은 어떤 나라의 은행이 빌리는 달러를 연준이 지원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었다. 총계적 수준에서 국제 신용 환경은 위축되었다. 그런데 이 위축은 주로 유럽에서, 특히 영국의 은행들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에서는 국경을 넘는 신용 흐름이 증가했다. 그 결과 2008년 이후 중국 경제는 달러 신용 환경에 훨씬 더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205-6)<br>"양적완화는 체계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중 일부는 자산 가격 인플레와 관련이 있었다. 연준의 조치는 채권수익률을 끌어내리면서 불가피하게 자산 가격을 밀어올렸다. 이는 은행들의 대차대조표가 건전해 보이게 했고 따라서 은행들은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으며, 그러는 동안 은행들이 빌리는 돈에 대해 금리는 계속 제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연준의 정책은 자산 가격 상승과 값싼 신용을 동시에 일으키면서, 기업들이 빌린 돈을 생산적인 역량에 투자하기보다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쓰고자 할 유인을 강화했다. 또한 자사주 매입의 급증은 미국의 많은 거대 기업들이 고위험 금융 행동에 나서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따라서 팬데믹이 강타했을 때 기업들의 현금 보유는 매우 낮은 상태였다. 더 일반적인 면에서, 상승하는 자산 가격은 당연하게도 이미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했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들이 자산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양적완화는 세대 간 부의 불평등을 증가시켰다."(207)<br>"유로존의 통화 취약국들은 더 심각한 구조적 동학에 처했다. 우선 스프레드를 관리하려면 금융 시장에서 자국의 신뢰도를 방어해야 하는데, 국채 시장에서 압력을 줄여줄 목적으로 통화 정책을 펼 수 있는 중앙은행이 없었다[유로존에서 개별 국가의 중앙은행은 통화 정책을 유럽중앙은행에 이관했고 유럽중앙은행은 개별 국가의 통화 방어를 위한 통화 정책을 펼 수 없다]. 이에 더해,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유럽중앙은행이 회원국 부채를 직접 매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유럽중앙은행은 어떤 나라의 국채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부채 보증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국가 안에서도 유럽 차원에서도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줄 곳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 간 자금 조달 비용의 차이인 스프레드는 사라질 수 없었다. 자본 시장에서 거부당한 나라들(2010~2011년에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이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다)은 이제 구제금융이 필요했는데,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구제금융도 금지하고 있었다."(211-2)<br>"2008년 금융 붕괴 이후 중국 지도부는 중국이 〈달러의 덫〉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대규모의 달러를 보유하고 무역을 거의 전적으로 달러로 결제하고 있는데, 미국이 언제라도 달러를 평가절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중국이 부채를 조달해 대규모 부양책을 편 후에, 중국의 은행 시스템이 GDP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그 은행 시스템과 중국 기업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국제 달러 신용 환경에 깊이 통합되었다. 2014년이면 중국의 총 대외 부채는 (아마도 축소되었을 공식 발표에 따르더라도) 2008년보다 450퍼센트 이상 높았고 상당 부분이 달러 표시 부채였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 여름에 연준이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막대한 자본 이탈을 겪은 중국 당국은 국내의 금융 안정성이냐 국제 시장에서의 인민폐의 지위냐 중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중국 당국은 전자를 선택했고 자본 통제를 강화했다. 이렇게 누적된 금융 위험은 중국의 성장을 심각하게 제약했다."(232-3)<br>"시진핑 본인의 말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중국 경제를 지정학적으로 다시 계산하고자 했다. 시진핑은 기존의 미국 수출 시장 위주에서 유라시아로의 전환을 한층 더 강화했다. 이러한 지리적 전환은 대對유럽 교역과 투자를 늘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의 유라시아로의 전환은 유럽을 분열을 촉진했다. 중국의 유라시아로의 전환, 그리고 2016년 이후 자본 통제 강화로 인한 중국의 유럽 투자 축소 모두가 유럽을 경제적으로 분열시켰다. 두 요인 모두 EU와 유로존 둘 다에서 독일의 경제적 위치가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는 점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러는 동안, ‘차이메리카’의 경제적 공생 관계가 미-중 간의 지정학적 라이벌 관계로 바뀌고 홍콩이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줄면서 유럽의 경제적 분절은 첨예한 지정학적 측면을 갖게 되었다. 중국이 러시아와 더불어 EU에서 NATO를 둘러싼 분열의 원천이 되었고 영국이 EU로부터 멀어지는 데 명시적인 지정학적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다."(236, 240-1)<br>| 3부 | 민주정치7장 민주정에서의 ‘시간’<br>"역사에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 의식이 제공하는 정치적 자원 없이 대의제 민주정이 존재한 사례는 없었다. 개념적으로, 대의제 민주정에서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는 ‘국민’으로서 기능한다. 누가 그 국민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사용되어온 답은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nation’이었다. 대의제 민주정에는 패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필요하다. 정부 형태 중 대의제 민주정만이 모든 성인 시민에게 통치자가 누가 되어야 할지를 물은 다음에 그 시민의 일부만 그들이 선택한 대표자를 갖게 한다[나머지 시민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대표자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권력이 교체될 수 있으려면 선거에서 진 사람들이 폭력이나 분리 독립으로 가지 않고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할 암묵적인 정당화 기제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정치적 문제에 역사적으로 해법을 제공해온 것이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 의식nationhood이었다."(253-4)<br>"국민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 정치 형태에서 실제로 국가공동체 의식을 일구는 일이 현실적으로 막대하게 어렵다는 사실은 민주정 정치체에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부담이었다. 민족적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람들로서의 ‘국민the people’이라는 용어는 필수 불가결했고, 즉각적으로 활용이 가능했으며, 또한 사라지기 쉬웠다. ‘국민’으로서의 민족공동체 개념이 ‘패자의 동의’를 가능케 해주는 통합의 동인이 되리라 여겨진 곳에서, 이 화법은 동일한 민주정 국가의 권위에 귀속되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부인하는 데도 그만큼이나 쉽게 사용될 수 있었다. 민족/국민이 아닌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이나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다른 종류의 충성심을 가졌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배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국가nation라는 단어의 의미를 현재 확립되어 있는 국가의 시민들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재정의하려는 세력에 표를 던지려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259)<br>"정치에서 시간이 ‘불안정화의 차원dimension of instability’이라는 점(역사학자 존 포콕이 한 말이다)은 한때 정치 사상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개념이었다. 유럽에서는 시간에 따른 부패라는 개념 틀로 정부 형태를 이해하려는 접근이 일찍이 폴리비오스부터 시작해 마키아벨리에서 학술적 정점에 올랐다. 폴리비오스는 각각의 정부 형태가 그 자신의 과잉에 의해 파괴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사이클을 막고 중간 상태(‘균형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 가지의 긍정적인 정부 형태인 왕정, 귀족정, 민주정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길항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증가하는 외부적 권력과 물질적 번영은 어떤 구조적 균형이 성립되었더라도 그것에 위협 요인이 된다고 경고했다. 폴리비오스가 말한 귀족적 과잉과 민주적 과잉의 축적이라는 개념은 정치체가 시간이 가면서 불안정해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260-2)<br>"대의제 민주정이 가지고 있는 귀족정의 요소는 종종 수사적으로 가려지지만, 일반적으로는 귀족정의 요소가 더 지배적이다. 대의제 민주정은 대표를 위임하는 다수의 사람들과 훨씬 소수인 대표자들 사이를 구분하며, 권위 있는 의사결정 권한을 행정부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시킨다. 대통령제에서 이들 중 일부는 선출되지 않고 지명된다. 또한 국민 다수의 표를 얻은 선출직 대표자들이 내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헌법에 의해 제약된다. 모종의 사법적 심사 제도가 있는 민주정 정치체에서, 때로는 헌법 재판소가 선출된 의원들이 만든 법을 철회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사법적·헌법적 실행은 소수자를 보호하는데[다수의 의견으로 정해진 결정도 철회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호받는 소수자에는 부자들도 포함된다(재산권을 통해 보호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고 노동자에게 가는 몫을 늘리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든 것은 보편참정권에 기반한 선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264-5)<br>8장 민주정 과세 국가의 흥망<br>"전체적으로 보면, 2차 대전 이후의 지정학적·경제적 세계는 1차 대전 이후의 세계보다 민주정 국가들의 미래에 더 유리한 면이 있었다. 구조적으로, 브레턴우즈 체제는 전후 서구 국가들에서 경제적 공동체주의를 촉진함으로써 이 국가들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했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다른 나라들에 자본 이동을 통제할 권한을 주고 단기 신용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은 전후 서유럽 민주정 국가들에 중대한 이점이 되었다. 금융을 국가 단위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 전후 민주정 국가들은 통화 정책에서 [국제 금융의 영향력에 대해]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본 이탈 위험이 줄면서, 전후 서유럽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을 국가가 그들에게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시민으로서 이야기했고, 그러한 경제적 권리가 현실에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두고 서로 경쟁했다. 따라서 정부와 당국자들은 경제를 국가 단위로, 즉 국가 단위의 성장 회계와 성장률을 통해 이해했다."(287-8)<br>"전후 유럽의 민주정 국가들은 1920년대보다 재정 위기에 처할 위험이 적었다. 1945년 이후로 정부들은 부자들에게 상당한 과세를 하는 것도 포함해 전쟁 시기에 도입된 고율 과세 체계를 평화 시기의 복지 제도에 활용할 수 있었다. 이 복지 제도는 이후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간 이어지게 된다. 국가가 자본 이동을 통제할 수 있어서 부자들의 조세 회피와 포탈이 어려워진 것이 여기에 일조했다. 또한 정부들은 과거의 부채를 상환하느라 고전할 필요가 없었다. 마셜플랜을 통해 미국의 자금이 공식적으로 주입되고 이어서 부채 저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구 민주정 국가들이 부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이 이 시기에 새로운 부채를 그다지 많이 쌓지 않았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쪽으로 돌아서기 전까지, 전후의 정부들은 대체로 균형 재정을 유지했고 지출은 자국의 시민과 기업으로부터 걷는 세금으로 충당했다."(291-2)<br>"미국에서 인종적·민족적 다양성이 더 높아진 민주정, 모든 시민의 투표권이 연방정부에 의해 보호되는 민주정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시기는 베트남 전쟁에서 징집 군인들이 싸우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종적으로 통합된 군대를 위한 징집제가 새로이 정치적 국가공동체주의를 재생하는 데 기반이 되기는커녕, 되레 인종적·계급적 갈등을 일으켰다. 상당수의 부유한 백인 남성은 [대학생 징집 유예 등으로] 교육 기회를 이용해 징병을 유예했다. 대조적으로 흑인은 인구 비례 수준 이상으로 많이 징집되었고, 인구 비례 수준 이상으로 많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 초기에는 더욱 그랬다. 징집은 베트남 전쟁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징집을 끝내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했을지는 몰라도, 이제 국가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 역사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선택지는 미국에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 뉴딜 버전 국가 공동체주의의 토대였던 경제 여건도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98)<br>"1970년대 이후 더 국제화되고 금융화된 경제의 여러 영향이 함께 작용하면서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를 끝장냈다. ‘경제적 운명을 공유하는 국가 단위의 정치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경제적 운명에 대해 국가 정부가 책임을 진다’는 개념이 그것을 지탱해주는 외부 환경이 사라지면서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이익은 너무나 맹렬하고 명백하게 분열되었다. 여러 유럽 국가에서 전국 단위의 단협을 가능하게 했던 국가조합주의는 붕괴했고, 개방적인 자본 흐름과 점점 더 국제화되는 생산 환경에서 그것의 복원은 불가능했다. 예측 가능하게도 부채가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들이 국제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려 지출을 충당하는 쪽으로 돌아가자 저축자이자 납세자인 시민들을 통해 국가의 자금을 조달하고 채권자-채무자간 갈등이 일으키는 위험을 제어하던 기제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 다음에 재정 적자를 유지하는 이자 부담은 세금으로 시민들에게 떨어졌다."(312-3)<br>9장 개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br>"쉽게 고칠 수 없는 조약에 의해 만들어진 통화연맹은 EU 회원국들의 국내 정치에 막대한 부담을 가져왔다. 불안정을 일으키는 요인 중 어떤 것은 맨처음부터 존재했다. 통화연맹 구성이 본질적으로 독일이 제시한 조건대로 이루어졌으므로 회원국 전체에서 지지를 얻기에 정치적 합의가 매우 부족했다. 국가 정치에서의 선거와 EU 조약이 정한 법적 원칙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일반적인 이슈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프랑스에서는 국민투표가 유로존에 일어날 수 없는 변화를 요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로존이 부채가 국내 정치의 장에서 논의와 경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는 방어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2012년에 올랑드가 EU 조약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걸고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약을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듯이, 2010년 선거에서 [EU 조약이 정한 단일시장 규칙에 맞서서] 이민자 제한 목표치를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한 캐머런도 실제로 공약을 실행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353-4)<br>"2008년 이후의 통화 환경, 그리고 구성 조약을 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유럽중앙은행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은 독일 정치에 유로존 이슈를 다시 불러옴으로써 기본적인 분열의 동학에 교란 요인을 더 보탰다. 여기에 더해 2015년의 국경 위기는 EU와 유로존에서 독일이 갖는 영향력을 둘러싸고 생겨났던 정치적 문제들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다국가 연합으로서의 UK의 불안정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유로존의 각기 상이한 측면들에 대해 분출한 대중민주적 불만이 억눌러져야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이것이 대연정 정치로의 움직임을 추동했다. 프랑스에서는 유로존 및 EU 조약이 주요 양당을 너무나 약화시켰기 때문에 대연정이 선택지에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거리의 시위 정치가 성장했고 때로는 국가가 억압으로 이에 대응했다. 카탈루냐 문제가 대연정의 전조가 되었던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에서보다도 더 가혹하게 국가의 억압적인 대응이 벌어졌다."(354)<br>"미국에서는 민주정치적 과정이 과두 귀족들의 돈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제약되었다. 핵심 질문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무엇이 동일하게 남아 있어야 하느냐’가 아니라 ‘선거 결과가 합당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가 되었다.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가 되살아나 더 많은 시민을 포괄하거나 시민권 문제를 해소해주기는 어려워진 상황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인구 구성이 바뀌면서 ‘패자의 동의’가 잘 작동하도록 국가공동체주의를 일구어야 할 필요성은 오히려 증폭되었다. 공화당은 냉전 시기에 외교 이슈에서 가졌던 이점이 없어졌고 민주당은 남부에서 강하게 가지고 있던 입지가 1964년 이후로 계속 약화되었기 때문에, 두 정당 모두 유권자 과반을 잡는 데 고전했다. 이에 더해 1960년대 이래 대법원의 결정을 둘러싼 맹렬한 싸움은 매번의 대선을 일정 정도 앞으로 대법원의 정치적 방향이 무엇이 될 것인가의 싸움이 되게 했고, 이는 대법원의 역할이 합의된 헌법을 고수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훼손했다."(355-8)<br>"패자의 동의가 취약하다는 사실의 기저에는 미국의 국가공동체주의 그리고 그 공동체주의와 연방제라는 형태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다. 미국의 역사적 기억에 대한 이슈들, 특히 미국 공화정의 건국에 대한 기억의 이슈는 해체적인 정치적 열정에 불을 붙인다. 남부연맹의 역사를 집합적인 미국의 역사적 경험에 포함하는 것은 남북 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합의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전의 노예가 이제는 시민이 된 국가에서, 이것은 미국 국가공동체주의의 언어를 크게 제약했다. 아직 미국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는 ‘미국인’ 개념을 뒷받침하는 과거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더해 인구 변화로 반다수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상원의 구조가 정치의 결과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충돌 양상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러한 정치적 조건에서, 선거 자체가 민주정의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헌법 자체가 점점 더 민주정치적 쟁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370-1)<br>나가는 글: 앞으로 올 더 많은 일들<br>"팬데믹은 새로운 변화를 불러온 촉매이자 이전 교란의 연속선이었다. 21세기의 첫 20년간 형성된 문제들은 모든 면에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녹색에너지 투자를 가속화하려는 지정학적 동기는 미·중 경쟁의 강도를 높일 것이다. 가장 명백하게는, 미국이 중국 제조업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깨는 데 성공할수록 중국의 맞대응이 더 촉발될 것이다. 중국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국내 시장을 확대하면 세계 경제에는 미·중 간의 지정학적 경쟁 관계가 스며들지 않은 영역이 거의 남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묶여 있는 모든 나라는 해양 수송을 경제 안보의 문제로 여기게 될 것이다. 유라시아에서는 중국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육상 벨트의 일부로 추구하는 철도 경로가 한층 더 정치적인 싸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기후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세계에서 석탄을 태울 수 있는 역량이 중국의 암묵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대기 오염 문제만으로도 석탄에서 멀어져야 할 국내적 인센티브가 상당하긴 하지만 말이다."(392-4)<br>"녹색에너지가 만들 지정학적 동학은 석유와 가스가 만들어온 오랜 지정학적 동학과 공존할 것이다. 중국이 계속해서 중동 석유에 의존할 것이고 중국이 추진하는 유라시아 벨트의 파키스탄 부분이 ‘믈라카 딜레마’에 대해 부분적인 안전망밖에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에너지와 관련해 미국의 군사적·금융적 권력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전히 있다. 또한 중국의 중동 에너지 의존은 미국이 페르시아만에서 철수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옛 에너지 현실의 지정학적 영향은 2021년에 (중국이 이란의 석유와 가스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을 포함해) 중국과 이란이 25년간의 경제 파트너십을 맺기로 하면서 더 없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과거에 중동을 둘러싼 유럽의 제국주의적 경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는 데 이란이 핵심이었듯이, 석유와 가스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석유와 가스에 계속해서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이 직면하는 어려움 속에서 이란은 앞으로도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394-5)<br>"석유 생산을 둘러싼 지정학적·금융적 조건에서 나온 역기능적 동학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공급과 관련해서 셰일오일은 늘 중기적인 해법밖에 되지 못했다. 석유 분야에 막대한 투자가 쏟아져 들어와 고비용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되풀이될 수 없다면, 향후 수십 년 동안 세계 경제는 2000년대에 그랬듯이 중동과 러시아에서 오는 비싼 석유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고유가가 돌아오면 투자 인센티브가 생겨야 하지만, 이는 화석연료 투자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높지 않을 때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고유가는 생산 투자 인센티브는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경제 성장을 심각하게 제약할 것이고 다시 한번 소비 수요를 위축시킬 것이며 이라크를 포함해 석유 생산 국가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OPEC 플러스’에 대한 의존이 재활성화할 옛 문제들은, 이들 OPEC 플러스 국가들이 석유 확보 각축전이 새로이 불러올 막대한 중장기적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과 나란히 다시 불거질 것이다."(396-7)<br>"국내 정치 면에서 보면, 에너지 소비는 불가피하게 옛 갈등을 강화하는 새로운 분배적 갈등을 맹렬히 일으킬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녹색에너지 전환과 전기화에 어떻게 인센티브를 충분히 부여하고 여기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유류세 인상에 저항하며 일어난 노란 조끼 시위는 ‘패자의 동의’ 문제가 선거에서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문제는 에너지의 미래 모습이 실질적으로 어떠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개인 교통수단이 정치적 갈등의 장소가 될 것이다. 개인의 에너지 소비에 대한 분배적 함의가 명백해질수록 탄소 중립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얼마나 많은 탄소를 “제거elimination[실질적으로 탄소를 없애는 것]”해야 하는 것인가뿐 아니라 “상쇄offset[자기 배출량을 다른 활동으로 보상하는 것]”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도 포함해서) 정부가 감축목표치를 발표하는 수준을 넘어 선거 경쟁의 장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398-9)<br>"에너지 시간의 근본 문제는 이동하지 않았다. 민주정 국가들이 에너지와 관련해 겪어온 난관에서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달라진 게 있다면, 많은 이들이 에너지 이슈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는, 에너지 이슈에 대해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면 2050년까지 에너지 전환을 실현한다는 유럽의 원래 공식이 토대를 두고 있는 기술관료적 논리가 느슨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너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때 현실에서 더 있을 법한 결과는, 기후변화에 직면해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된 이해관계와 개인 교통수단의 전기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불평등 사이의, 그리고 높은 화석연료 가격이 늘 유발하기 마련인 불평등 사이의 깊은 간극이 드러나면서 서구 민주정 국가들이 귀족적 과잉의 덫에 더 깊이 빠지는 것이다. 21세기의 첫 20년 동안 에너지가 정치적 격동과 무질서의 ‘기저에 있는’ 요인이었다면, 앞으로의 세계에서 에너지는 정치적 격동과 무질서를 ‘주되게 실어나르는’ 핵심 매개가 될 것이다."(423-4)]]></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7/61/cover150/k4620315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97613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 일란 파페 -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 유대인 역사학자의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33543</link><pubDate>Thu, 23 Apr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335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352533623&TPaperId=172335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99/62/coveroff/e3525336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352533623&TPaperId=172335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 유대인 역사학자의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서</a><br/>일란 파페 지음, 백선 옮김, 이희수 감수 / 틈새책방 / 2024년 07월<br/></td></tr></table><br/>서문<br>모든 분쟁의 중심에는 역사가 있다. 과거를 편견 없이 진실되게 이해하면 평화의 가능성과 마주하지만, 반대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면 재앙이 싹틀 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허위 사실이 켜켜이 쌓인 탓에 우리는 그 갈등의 기원을 직시하기가 어렵다. 한편, 관련 사실이 지속적으로 조작되면 계속되는 유혈 사태와 폭력으로 다친 모든 피해자들에게 불리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분쟁의 땅이 어떻게 이스라엘 국가가 됐는지에 대한 시온주의적 역사 서술은 일련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신화들은 분쟁의 땅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도덕적 권리를 미묘하게 의심하게 만든다. 서방의 주류 미디어와 정치 엘리트들은 종종 이들 신화를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지난 6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이 보여 준 행위를 정당화한다. 대개 암묵적으로 수용된 이러한 신화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건국 이래 계속되는 갈등에 서방 정부가 의미 있는 개입을 꺼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9)<br>PART I. 잘못된 신화: 과거1.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었다<br>오스만제국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전체적으로 지중해 동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둘러싸여 고립돼 있기보다는, 광범위한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다른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둘째로, 변화와 근대화에 열려 있던 팔레스타인은 시온주의 운동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에 국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자히르 알 우마르Daher al-Umar, 1690~1775 같은 강력한 지역 지도자의 지배 아래 하이파Haifa, 셰파므르Shefamr, 티베리아스Tiberias, 아크레Acre 등의 도시가 새로이 보수되고 활력을 되찾았다. 항구와 마을로 이어지는 해안 지역 네트워크는 유럽과 무역으로 연결되어 번성했으며, 내륙 평원은 인근 지역과 무역을 했다. 사막과는 정반대로, 팔레스타인은 번창한 빌라드 알샴Bilad al-Sham(북쪽 땅), 즉 당시 레반트Levant 지역이었다. 동시에 풍요로운 농업, 작은 마을들과 역사적인 도시들 덕분에 시온주의 도래할 즈음에는 인구가 50만 명에 달했다. 26)<br>중동 및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회에도 19~20세기에 강력하게 정립된 ‘국가’라는 개념이 유입됐다. 중동에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된 데에는 어느 정도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19세기 초, ‘선교’와 함께 ‘자결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전파하려는 열망을 갖고 이 지역에 발을 디뎠다. 당연하게도 주로 기독교도와 소수 집단들은 점유 영토shared territory, 언어, 역사,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세속적인 국가 정체성 개념을 반색하며 수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민족주의에 동참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도 엘리트들 사이에서 열성적인 협력자를 찾았고,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이슬람교-기독교 단체가 급격히 증가했다. 아랍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서로 종교가 다른 활동가들 간의 동맹에 합류했다. 시온주의가 현지 유대인 공동체에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팔레스타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27)<br>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는 없었지만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위치는 매우 분명했다. 하나라는 소속감이 있었다. 20세기 초에 창간된 신문인 〈필라스틴Filastin〉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부르는 이름에서 따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만의 방언을 사용했고, 자기만의 관습과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 지도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에 거주한다고 표기했다. 그리하여 1918년까지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 시대보다 더 통합돼 있었지만, 그 후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23년 팔레스타인의 지위에 대한 최종적인 국제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이 땅의 국경을 다시 협상했다. 그 결과 민족 운동이 투쟁할 수 있는 지리적 공간이 더욱 명확히 정의됐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더욱 분명한 소속감을 느끼게 됐다. 이제 팔레스타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누구에게 속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인가, 아니면 새로운 유대 정착민인가? 28-9)<br>2. 유대 민족에게는 땅이 없었다<br>16세기 이후 종교 개혁에 따른 신학적·종교적 격변이 일어나면서, 특히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천년 왕국의 끝과 유대인의 개종 및 이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 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슐로모 산드Shlomo Sand는 근대사의 특정한 시점에 기독교 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대인은 언젠가 성지로 돌아가야 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을 지지했음을 보여 준다. 시온주의를 형성하는 사상과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된 반유대주의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 이렇듯 겉보기에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믿음이 실제 식민지화 프로그램과 강탈 계획으로 전환될 징조가 1820년대 초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이미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기독교 사회로 편입시키려는 전략적 계획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그 핵심에 두는 강력한 신학적, 제국주의적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19세기에 이러한 정서는 영국에서 더욱 퍼졌고 제국의 공식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30-1)<br>시온주의 사상은 1860년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싹텄고, 계몽주의와 1848년의 ‘국민 국가들의 봄’, 이후에는 사회주의에서 영감을 받았다. 1870년대 말과 1880년대 초 러시아에서 특히 악랄했던 유대인 박해 물결과 서유럽의 반유대 민족주의의 부상에 대응한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비전을 통해 시온주의는 지적, 문화적 활동에서 정치적인 프로젝트로 변화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이용해 ‘성지聖地’에 더 깊이 관여하고자 했던 영국의 전략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충동은 시온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지적 비전과 일치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는 귀환과 구원의 행위로 여겨졌다. 이 두 충동이 일치했기에 반유대주의와 천년 왕국 사상 간에 강력한 동맹이 만들어졌고,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희생시켜 유대인을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실제 정착 프로젝트가 이행됐다. 1917년 11월 2일 밸푸어 선언이 선포되면서 이 동맹은 대중에게 알려졌다. 35-7)<br>수많은 민족 운동이 시작될 때 그랬듯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창조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창세기〉의 서술이 대량 학살, 종족 청소, 억압과 같은 정치적 계획으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특히 19세기 시온주의의 주장에서 중요한 점은 그 주장의 역사적 정확성이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이 로마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의 진짜 후손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전 세계의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고, 그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하며, 그들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명확한 연관성이 다른 유대인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미국에서도 도전을 받고 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대인들 사이에서 소수 의견이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속한 국민이고 따라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들은 영국 관리들과 군사력에 의존해야 했다. 유대인과 세계 대부분은 유대인이 땅 없는 민족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던 것 같다. 38-9)<br>3. 시온주의와 유대교는 같다<br>유대인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은 유대주의와 시온주의 사이의 또 다른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시온주의 이전 유대 세계에서는 《성경》을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담은 단일 텍스트로 가르치지 않았다. 유럽이나 아랍 세계의 다양한 유대 교육 기관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랍비들은 《성경》에 담긴 정치사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유대인의 주권 사상을 영적 학습에서 아주 사소한 주제로 취급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 예컨대, ‘시온의 연인들’은 《성경》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나 가나안Canaanite 정권의 지배하에서 고통받은 유대인 국가의 이야기로 읽었다. 이들은 나중에 가나안에 의해 이집트(애굽)로 추방됐다가 다시 돌아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그 땅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국가와 조국보다는 유일신을 발견한 집단으로 본다. 46)<br>근래에 이 서사에 학문적이고 세속적인 주요 증거를 제공한 것은 소위 성서고고학이다(이는 그 자체가 모순적인 개념인데, 《성경》은 다양한 시기에 여러 민족이 쓴 위대한 문학 작품이지 역사서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 서사에 따르면, 서기 70년 이후 시온주의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땅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러나 주요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거주자가 있는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려면 정착, 강탈, 심지어 종족 청소까지 체계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팔레스타인 강탈을 신성한 기독교 계획의 이행으로 묘사했고, 이는 시온주의를 뒷받침하는 전 세계 기독교인의 지지를 모으는 데 귀중한 수단이 됐다. 식민지 원주민들이 빠르게 알아차렸듯이, 정착민들이 들고 온 것이 《성경》이건, 마르크스의 저서이건, 유럽 계몽주의 소책자이건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48)<br>시온주의 운동이 요구한 공간은 박해받는 유대인을 구출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결정됐다기보다, 가급적 소수의 주민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최대한 많이 차지하겠다는 의지로 정해졌다. 신중하고 세속적인 유대인 학자들은 ‘과학적’이고자 노력하면서, 고대의 흐릿한 약속을 현재의 사실로 바꾸었다. 이 작업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주요 역사학자인 벤지온 디나부르크(디누르)Ben-Zion Dinaburg(Dinur)에 의해 이미 시작됐고, 1948년 건국 후 집중적으로 계속됐다. 18세기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이 19세기 말 정통 유대인들처럼 유대 국가 개념을 거부했다는 역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와서 이 사실은 외면됐다. 역사적으로는 《성경》과 유럽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 1948년 전쟁을 하나로 묶어 가르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념적으로는 이 세 가지 항목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정당화하는 요소로 주입된다. 53-5)<br>4. 시온주의는 식민주의가 아니다<br>정착 식민주의를 연구하는 주요 학자 중 하나인 패트릭 울프Patrick Wolfe는 ‘제거 논리’가 정착 식민주의 프로젝트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정착민들이 원주민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정당성과 실질적 수단을 개발했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에 또다른 논리가 침투해 있었다고 덧붙이고 싶다. 바로 인간성 말살의 논리다. 유럽에서는 박해의 희생자였던 유대인들로서는, 자신들이 당한 것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더 악랄한 일들을 자행하기 전에 먼저 원주민 국가나 사회의 인간성을 박탈해야 했다. 누군가가 팔레스타인이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고, 땅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논거 자체를 빼앗기게 된다. 팔레스타인인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정당한 소유자에 대한 근거 없는 폭력 행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시온주의를 식민주의로 논의하는 일과, 팔레스타인인을 식민지 원주민으로 논의하는 문제를 분리하기는 어렵다. 56-7)<br>19세기 말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했을 때 팔레스타인 공동체 내에서는 여전히 두 가지 욕구가 존재하고 있었다. 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아랍연합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꿈꾸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대시리아Greater Syria 개념에 매료되어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에 팔레스타인을 편입시키고자 했다. 범아랍주의자이건, 자기 지역만을 사랑하는 애국자이건, 대시리아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건, 유대 국가에 포함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똑같았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정착민 공동체에 자그마한 영토 일부라도 넘겨주는 정치적 해결책에 반대했다. 1920년대 말 영국과의 협상에서 그들이 분명히 선언했듯이, 이미 도착한 정착민들과는 기꺼이 공유하겠지만 그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집단적 목소리는 1919년부터 10년간 매년 개최된 팔레스타인민족회의Palestinian National Conference 집행부에서 구체화됐다. 58-9)<br>1928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나중에 만들어질 정부에서 유대 정착민이 팔레스타인인과 동등한 대표권을 갖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인이 거부할 것으로 판단하고는 이를 지지했지만, 사실 공동 대표권은 시온주의가 추구하는 지향점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이 동등한 대표권 제안을 수락하자, 시온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는 1929년 폭동으로 이어졌다. 헤브론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고, 팔레스타인 공동체에서는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유대민족기금이 부재지주와 지역 유지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팔레스타인 소작인들에게서 땅을 몰수하자 소작인들은 도시 빈민가로 쫓겨났다. 그런 빈민가 중 하나인 하이파 북동쪽에서 1930년대 초에 망명한 시리아 종교 지도자 이즈 앗딘 알카삼Izz ad-Din al-Qassam이 이슬람 성전聖戰 추종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하마스가 그의 이름을 딴 무장 조직으로 유산을 계승했다. 59-60)<br>5. 1948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났다<br>1948년 전쟁에 대한 잘못된 가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발적으로 떠났다는 생각만이 아니다. 그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세 가지 가설이 더 있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1947년 11월 유엔이 결의한 분리안을 거부했기 때문에 본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온주의 운동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분명한 것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종족 청소가, 팔레스타인인과 아무런 협의없이 만들어진 유엔의 평화안을 거부한 데 대한 ‘처벌’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1948년에 관한 가설은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아랍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이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아랍 세계가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전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은 전혀 군사력이 없었으며, 아랍 국가들도 상대적으로 적은 군대만 파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67-8)<br>이스라엘 국가가 분쟁 이후에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세 번째 신화는 어떨까. 자료가 보여 주는 사실은 정반대다. 사실 이스라엘 지도부는 영국 위임 통치 이후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관한 협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거나, 추방됐거나 도망쳤던 사람들의 귀환을 검토하지 않는 등 비협조적이었다. 아랍 정부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비교적 합리적인 유엔의 새 평화 계획에 기꺼이 참여하려고 했던 반면, 이스라엘 지도부는 1948년 9월 유엔이 파견한 평화 중재자 베르나도테Bernadotte 백작을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암살했을 때 모른 척했다. 이스라엘 지도부는 또한 베르나도테 백작을 대신하여 협상을 시작한&nbsp; 유엔 팔레스타인조정기구PCC가 채택한 새로운 평화안도 모두 거부했다. 역사가 아비 쉬라임Avi Shlaim이 《철의 장벽The Iron Wall》에서 보여 주었듯이, 팔레스타인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평화를 거부했다는 신화와는 반대로, 지속적으로 평화 제안을 거부한 쪽은 이스라엘이었다. 68)<br>정치적 함의는 이렇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발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이며, 이스라엘에게 책임이 있다. 법적 함의는 이러하다. 비인간적인 범죄에 비록 법적 소멸 시효가 있다고 해도, 그토록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아무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은 범죄라는 점이다. 도덕적 함의는 유대 국가가 죄악에서 탄생했고(물론 많은 국가가 그렇다), 그 죄, 범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나쁜 점은 이스라엘의 특정 집단이 이를 인정했지만, 동시에 과거를 돌이켜 볼 때나 미래의 팔레스타인인 정책을 펼칠 때는 자신들의 범죄를 완전히 정당화한다는 사실이다. 그 범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저질러지고 있다. 이스라엘 정치 엘리트들은 이 모든 의미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 1948년 사건에서 매우 다른 교훈을 얻었다. 국가가 인구의 절반을 추방하고, 마을을 파괴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교훈으로 인해 1948년 직후와 그 이후에도 다른 수단을 통한 종족 청소가 계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74)<br>6. 1967년 6월 전쟁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쟁이었다<br>1967년 전쟁을 재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1948년 전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정치, 군사 엘리트들은 1948년 전쟁을 날려버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래야 했던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는 이웃 요르단과의 합의 때문이었다. 둘의 결탁은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이뤄졌고, 합의에 따라 요르단군은 1948년 전쟁에서 아랍 전체 군사 작전에 제한적으로만 참여했다. 그 대가로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의 일부 지역을 합병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서안이 되는 지역이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요르단이 서안을 차지하도록 한 결정을 ‘베키야 레도로트bechiya ledorot’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미래 세대가 한탄할 결정’이라는 뜻이다. 보다 은유적으로 번역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78)<br>한쪽 팔레스타인 집단(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소수 민족)을 통치하던 군정 통치 기구가 다른 팔레스타인 집단(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을 통치하러 옮겨갈 기회가 1967년에 찾아 왔다. 1966년 말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격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소련이 나세르에게 벼랑 끝 전술을 부추겼을 때였다. 그러나 전쟁에 돌입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 이스라엘 지도부 내부에 전쟁 도발을 막을 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내부에서 어떤 형태로든 마찰이 있었으면 강경파의 갈등 유발을 지연시켜, 국제 사회가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주도하는 외교적 노력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이웃 아랍 국가 모두를 공격했다. 이스라엘 내각은 평화 중재자들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6월 11일까지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 서안, 가자 지구, 시나이반도를 모두 장악하고 작은 제국이 됐다. 82-4)<br>이 역사적 분기점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종전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가 요구한 1967년에 점령한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강력한 국제적 압력에 이스라엘 정부가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고대 성서 유적지가 있는 서안의 점령이, 특히 1948년 이전에도 시온주의의 목표였으며, 이제야 전체적으로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논리에 들어맞는다고 말하고 싶다. 이 논리는 가능한 한 적은 수의 팔레스타인인만 남기고 가능한 한 많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려는 바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이 내린 첫 번째 결정은 이스라엘은 서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결정은 서안과 가자 지구의 주민들을 이스라엘 국가의 시민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이 서안과 가자 지구 주민들을 기본적인 시민권과 인권이 없는 삶으로 내몰게 됨을 이스라엘 정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85-6)<br>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실제 의도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이 정책들을 팔레스타인인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점령 이후 새 통치자는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매우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가두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었다. 시민권 없는 거주민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시민권과 인권이 없고 스스로의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수감자이고, 여러 면에서 여전히 그렇다. 세계가 이런 상황을 용인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 상황이 일시적이며, 적절한 팔레스타인 측 평화 협상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만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협상 파트너를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삼대째 감금하고 있으면서, 이 거대 감옥은 임시적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오면 바뀔 거라고 설명한다. 88)<br>PART II. 잘못된 신화: 현재7.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 국가다<br>민주주의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소수자를 얼마나 포용하는가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친다. 이스라엘은 국민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본권이나 시민권을 일체 부정한다. 그 사례가 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영토를 얻은 다음에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민권에 관한 법, 토지 소유권에 관한 법,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귀환법이 그것이다. 귀환법은 세계 어디에서 태어났더라도 모든 유대인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특히 이 법은 노골적으로 비민주적이다. 1948년 유엔 총회 결의안 194를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전면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시민은 직계 가족이나 1948년에 추방된 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부정하고, 동시에 그 땅과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권리를 부여하는 일은 비민주적 관행의 전형이다. 92-3)&nbsp;<br>여기에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를 더욱 부정하는 행위가 하나 더 추가됐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군 복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들에 대한 거의 모든 차별을 정당화한다. 국방부의 전제는 이랬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군 복무를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은 잠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내부의 적이다. 이 논리의 문제점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가 벌인 모든 주요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5열을 형성하지도 않았고, 정권에 맞서 반기를 들지도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인들은 해결해야 할 ‘인구통계학적’ 문제로 여겨진다. 토지 문제를 살펴봐도 민주주의 국가라는 주장이 의심스럽다. 오늘날 이스라엘 토지의 90퍼센트 이상은 유대민족기금의 소유다. 토지 소유자는 비유대인과 거래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 정착지는 새롭게 건설되는 반면, 팔레스타인 정착지는 거의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93-4)<br>이런 비난에 대해 이스라엘의 외교계와 학계는 이들 조치가 모두 일시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어디에서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더 나은’ 행동을 보이면 바뀔 조치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책 입안자들은 유대 국가가 유지되는 한 이 땅의 점령 상태를 계속 유지할 작정이다. 이스라엘 정치 체제는 이 점령 상태를 ‘현재 상태’로 간주하며, 언제나 현상 유지가 어떠한 변화보다 낫다고 본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계몽적 점령enlightened occupation’을 주장한다. 여기서 신화는, 이스라엘이 선한 의도로 자비롭게 점령하려고 했지만 팔레스타인인의 폭력 때문에 점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67년 이스라엘 정부는 서안과 가자 지구가 당연히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즉 ‘이스라엘 땅’의 일부라고 여겼고, 이런 입장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내 우파와 좌파 정당들이 의견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이 목표의 타당성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다. 95)<br>8. 오슬로 신화<br>오슬로 신화의 첫 번째는 그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야세르 아라파트가 2차 인티파다를 선동해 의도적으로 오슬로 협정 이행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1993년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이 한 약속을 아라파트가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꺼림칙한 점이 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이행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당국은 점령지 내에서 이스라엘의 보안 하청 업체 역할을 하면서 저항 활동이 없게 해야 했다. 바라크는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를 요구했고, 수도는 예루살렘 근처의 아부 디스Abu Dis에 두라고 했다. 그러고는 서안 중에서 요르단 계곡, 대형 유대인 정착촌 구역, 대예루살렘의 일부 지역은 제외하도록 했다. 그렇게 세워지는 국가는 독립적인 경제 및 외교 정책을 가지지 못하고, 국내 특정 영역에서만 자치권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이 합의의 공식화는 이후 팔레스타인이 더 이상의 요구, 예를 들면 1948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101)<br>영토 분할안은 오슬로에서 초기 논의를 이끈 핵심 논리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결코 분할을 요구한 적이 없다. 영토 분할은 언제나 시온주의자,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힘이 커짐에 따라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영토 비율도 늘어났다. 따라서 분할안이 점차 세계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의 공격 전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측이 협상 조건으로 이 상황을 차악으로 받아들인 것은 단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파타는 영토 분할을 완전한 해방으로 가기 위한 필요 수단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자체를 최종 합의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사실 극단적인 압박이 있지 않고서야 원주민 집단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기 땅을 정착민 집단과 나눌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슬로 협상이 공정하고 평등한 평화 추구의 과정이 아니라 패배하고 식민지화된 민족이 타협에 동의하는 과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102-3)<br>오슬로 평화 프로세스가 실패한 것은 단순히 분할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 아니다. 원래 협정에는 5년의 이행 기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가장 괴롭히는 세 가지 문제, 즉 예루살렘, 난민, 유대인 정착촌 문제를 협상한다는 이스라엘의 약속이 있었다. 이 이행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보안 하청 업체로서 이스라엘과 그 군대, 정착민과 시민에 대한 게릴라전이나 테러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오슬로 DOP에서 약속한 바와는 달리, 5년, 즉 첫 단계가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해야 할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지 않았다. 네타냐후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두 번째 단계를 시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과정이 중단된 주 원인은 1995년 11월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암살됐기 때문이다. 평화 프로세스는 1999년 에후드 바라크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할 때까지 매우 느리게 진전됐다. 103-4)<br>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을 의제에서 제외한 것은 오슬로 협정이 평화 프로세스와 관련이 없는 두 번째 이유다. 분할 원칙이 ‘팔레스타인’을 서안과 가자 지구로 축소시켰다면, 난민 문제와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소수 민족 문제를 배제하면서 인구학적으로 ‘팔레스타인 국민’이 팔레스타인 국가 인구의 절반 미만으로 축소됐다. 2000년 1월 바라크 정부는 미국 협상자들의 승인을 얻어 협상의 범위를 설명하는 문서를 제시했다. 최종 ‘협상’은 본질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이 이 문서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동 노력이었는데,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절대적이고 명확하게 거부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논의가 열려 있던 부분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관리하는 영토로 귀환이 가능한 난민 수였다. 하지만 관련자들 모두 이 밀집 지역에 더 이상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으며,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에 난민을 귀환시킬 공간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4-6)<br>이것이 오슬로 협정에 관한 두 번째 신화로 이어진다. 아라파트의 완고함 때문에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 회담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 관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바라크는 유대인 식민지 정책이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일상적인 학대에 관련된 이스라엘의 정책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그는 아라파트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어려운 입장을 취했다. 현실에서 즉각적인 변화를 약속할 수 없다면 바라크가 최종 합의안으로 무엇을 제안하든 별 의미가 없었다. 예상대로 아라파트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돌아온 직후, 제2차 인티파다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들에게 전쟁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서 신화는 제2차 인티파다를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원한, 심지어 계획적인 테러 공격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이렇다. 제2차 인티파다는 오슬로의 배신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대규모 시위였고, 아리엘 샤론의 도발적인 행동이 더해져 악화됐다는 사실이다. 106-8)<br>9. 가자 신화<br>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하마스가 인기 있었던 이유가 오슬로 협정의 성공이나 실패 때문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점령하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괴로움을 해결할 방법을 세속적 현대성을 통해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스가 (점령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많은 이슬람교도의 마음을 사로잡게 됐다. 아랍 세계의 다른 정치적 이슬람 단체와 마찬가지로, 세속 운동이 고용, 복지, 경제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종교로 돌아갔다. 종교는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자선과 연대의 네트워크도 제공했다. 제2차 인티파다 중에 이스라엘이 도입한 새로운 탄압 방식―특히 장벽 건설, 바리케이드, 표적 암살―탓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대한 지지는 더욱 약화되고 하마스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므로 역대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인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고, 점령에 저항할 준비가 된 유일한 집단에 투표하도록 몰아갔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당할 것이다. 114)<br>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서사에서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철수한, 평화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악랄한 행위를 저지르는 테러 조직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평화를 위해 철수했는가? 대답은 전혀 ‘아니오’이다. 오슬로 협정 이전에는 가자 지구 내 유대 정착민의 존재가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자, 유대 정착민은 이스라엘의 자산이 아닌 부채가 됐다. 샤론은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고 하마스가 부상하면, 이스라엘 시민이 다칠 염려 없이 하마스에게 보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리쿠드당의 좌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눈에 샤론의 움직임은 평화의 제스처이자 정착민을 상대로 용감하게 대치하는 것이었다. 샤론은 좌파와 중도 우파의 영웅이 됐다. 그때부터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반응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이스라엘 정책 비판은 평화를 논의할 분별 있고 믿을 만한 팔레스타인 파트너가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118-22)<br>샤론도, 그를 따르는 어느 누구도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략을 명확히 제시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인의 눈에 가자 지구는 서안과는 매우 다른 지정학적 실체다. 가자 지구에는 이스라엘이 탐내는 땅도 없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해서 보낼 요르단 같은 배후지도 없다. 종족 청소도 여기서는 효과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자 지구 공격 작전은 모든 영역에서 악화되고 있다. 첫째, ‘민간인’과 ‘비민간인’ 표적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다. 분별없는 살인으로 인구 전체가 작전의 주요 표적이 됐다. 둘째, 이스라엘 군대가 보유한 모든 살상 무기를 확대하여 사용했다. 셋째, 사상자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마지막으로, 작전이 점차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이스라엘이 향후 가자 지구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 즉 바로 계산된 대량 학살 정책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가자 지구 주민들은 계속해서 저항했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대량 학살 작전으로 응수했지만, 지금도 그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127-8)<br>PART III. 잘못된 신화: 미래10. ‘두 국가 해법’이 유일한 길이다<br>‘두 국가 해법’은 동그라미를 네모로 만들려는 이스라엘의 발명품이다. 서안에 사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서안을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둘 방법으로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서안 일부를 자치 지역, 준準 국가로 만든다는 제안이 나왔다.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귀환이나, 이스라엘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평등한 권리, 예루살렘의 운명, 고향에서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희망 모두를 포기해야 한다. ‘두 국가 해법’은 유대 국가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유대인은 다른 곳이 아닌 팔레스타인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개념은 반유대주의의 핵심에 가깝다.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같다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유대교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라 고집하고, 그것이 세계 각국에서 거부당하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대교를 향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134)<br>‘두 국가 해법’은 가끔 영안실에서 시체를 꺼내어 잘 차려입히고 살아 있는 존재처럼 내세우는 것과 같다. 생명이 남아 있지 않다고 다시 한 번 입증되면 영안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역사적 실체의 10분의 1로 축소하여 그것을 평화의 지도로 내세웠던 지도 제작법은 영원히 사라지기 바란다. 대체 지도는 준비할 필요가 없다. 갈등의 지형은 자유주의적 시온주의 정치인, 언론인, 학자의 담론에서는 끊임없이 변해 왔지만, 실제로는 1967년 이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항상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의 땅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운명의 변화를 결정한 것은 지형이 아니라 인구 변동이었다. 19세기 말에 이 지역에 도래한 정착 운동으로 인해 지금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을 인종 차별 이데올로기와 인종 격리 정책으로 통제하고 있다. 평화는 인구통계학적 변화의 문제도, 지도를 다시 그리는 문제도 아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제거하는 일이다. 135-6)<br>맺음말: 21세기의 ‘정착 식민지 국가’ 이스라엘<br>이스라엘, 그리고 그 이전에 시온주의 운동이 누렸던 예외주의는 아랍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 침해에 대한 서구의 비판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팔레스타인 인권 침해에 대해 논의하려면, 시온주의 같은 정착 식민주의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 유대 정착민은 이제 이 땅의 유기적이고 필수적인 일부가 됐다. 그들은 제거할 수도 없고, 제거되지도 않을 것이다. 유대 정착민도 이 지역 미래의 일부가 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억압과 강탈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 팔레스타인은 비어 있지 않았고, 유대 민족에게는 조국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구원”받은 게 아니라 식민지화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에 자발적으로 떠난 게 아니라 강탈당했다. 심지어 유엔 헌장에서도 식민지화된 민족은 해방을 위해 군대까지 동원해 싸울 권리가 있고, 그 투쟁의 성공적인 결말은 모든 주민을 포함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건립에 있다. 139-4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99/62/cover150/e3525336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299629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윌리엄 D. 하텅, 벤 프리먼 -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27437</link><pubDate>Mon, 20 Apr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274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6921&TPaperId=172274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5/22/coveroff/k3221369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6921&TPaperId=172274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a><br/>윌리엄 D. 하텅.벤 프리먼 지음, 백우진 옮김 / 부키 / 2026년 02월<br/></td></tr></table><br/>프롤로그 : 군비합중국의 탄생<br>"미국 대외 정책을 둘러싼 싸움에서는 전쟁으로 이익을 누리는 집단이 거의 언제나 승리해왔다. 오늘날의 전쟁 기계는 아이젠하워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사회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더 많은 세금을 먹어치우고, 아이젠하워가 상상도 못 했을 규모의 초대형 기업들을 떠받치고, 싱크탱크와 대학, 스포츠, 할리우드, 게임산업, 주류 언론을 통해 광범위한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전쟁 기계의 정치 권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반면에 이 전쟁 기계가 효과적인 국방력을 합리적인 비용으로 제공할 역량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해마다 미군에 더 많은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데 왜 얻는 성과는 갈수록 줄어드는 걸까? 물가 상승을 고려해도 현재 미국은 냉전 시절 기록한 최고액보다 1000억 달러를 더 쓰고 있다. 그러나 당시와 비교하면 현역 병력도 절반, 해군 함정도 절반, 공군 전투기도 절반 수준이다. 미국은 거의 1조 달러짜리 전쟁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 기계는 고장 나 있다."(23-4)<br>1부 고장 난 전쟁 기계<br>1장 미국은 어떻게 세계 최고의 무기 딜러가 되었나<br>"미국은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전 세계 무기 시장의 43% 이상을 장악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3배, 중국의 6배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은 전 세계 107개국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상 국가의 절반이 넘는 숫자다. 왜 미국은 그렇게 많은 무기를 판매할까? 국방부나 국무부 관리에게 묻는다면, 미국산 무기가 안정을 강화하고 동맹국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미국산 무기는 불안정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증폭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 뚜렷이 드러내는 증거가 미국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레바논 등에서 벌이는 전쟁과 미국의 아랍에미리트UAE에 대한 강력한 지원이다. 아랍에미리트는 예멘부터 수단, 리비아까지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극단주의 세력과 억압적인 반군 조직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 미국산 무기는 세계 대부분의 분쟁에 불을 지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병기창”이라는 주장과 달리 비민주적 정권에 너무나 자주 공급된다."(40-1)<br>"이 치명적인 무기 거래에서 명확한 승자는 무기회사들뿐이다. 전쟁과 전쟁 준비는 미국의 초대형 방위산업 기업들의 생명줄이다. 9·11 이후 지난 20년 동안 상위 5개 방산업체인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보잉, 제너럴 다이내믹스, 노스럽 그러먼은 국방부와 해외 바이어에 대한 판매 계약으로 2조 달러를 나누어 가졌다. 전체로 보면 이 기간에 미국 국방부가 지출한 14조 달러 중 절반이 민간 군수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이익 하나만으로도 미국이 전 세계에 무기를 보내는 관행을 재고하도록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방위산업계가 전쟁을 핑계로 오랫동안 원해왔던 특혜를 압박해 얻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방위산업계는 가격 부풀리기에 대한 규제 완화와 해외 판매 승인 절차의 신속화를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대량 생산에 들어가기 전 주요 무기 체계에 대한 시험 같은 핵심 절차를 축소함으로써 국방부의 무기 조달 과정을 더 빠르게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다."(42-3)<br>2장 ‘민주주의의 병기창’에서 ‘끝없는 전쟁 공장’으로<br>"이미 1961년 아이젠하워가 유명한 연설을 했을 때조차 미국은 세계의 자유 수호자에서 세계의 전쟁을 생산하는 병영 국가garrison state로 변모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최악은 이런 배신의 결과 세상이 미국인 자신들에게 더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 위험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영역은 다름 아닌 핵무기 경쟁이었다. 이는 아이젠하워 집권기에 본격 시작되었는데, 합리적인 방위 개념만큼이나 자금 추구 욕구에 따라 추동된 것이었다. 핵무기 예산의 더 큰 몫을 차지하려고 해군과 공군이 벌인 세력 다툼은 명확한 승자를 가린 뒤 끝나는 대신 값비싼 타협으로 마무리되었다. 바로 ‘3대 핵전력nuclear triad’(핵 3축, 핵 3원) 체계였다. 이는 미국이 육상, 공중, 해상 세 축을 기반으로 핵탄두를 발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런 3축 접근법이 군사적으로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앞서 펼쳐진 온갖 전략적 수사 아래 감추어진 실상은 단지 홍보 경쟁에 불과했다."(63-5)<br>"3대 핵전력 체계의 공식 근거는 적이 선제공격으로 미국의 전체 핵무기 보유고를 한꺼번에 파괴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근거는 해당 프로그램들이 상당히 진행된 이후에야 마련되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3대 핵전력 체계 개념은 미국 핵 정책 논의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어서 워싱턴의 국가 안보 기구 내에서는 사실상 비판이 통하지 않는다. 미국의 무기회사들은 해군과 공군이 다투는 내내 바짝 달라붙어 관여했다. 이들이 핵무기 예산 확대를 위해 가장 노골적으로 압박한 것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 위험한 ‘미사일 격차missile gap’가 존재한다는 점을 대중에게 납득시키려는 캠페인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미국이 선제공격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 '격차'라는 개념은 주로 군복을 입은 군 고위층과 미국 정보 기관, 군수산업 관계자들의 압력으로 언론과 의회를 통해 널리 퍼졌다. 핵무장 신형 폭격기 제조 캠페인과 더불어 미사일 격차 논란은 군산복합체가 작동한 초기 사례였다."(67-8)<br>"다음에 이어진 것은 베트남전쟁이었다. 케네디가 깊게 개입한 이 전쟁을 후임인 린든 존슨과 리처드 닉슨이 관장했다. 케네디는 매파로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당시 부통령으로 출마한 닉슨을 능숙하게 제치며 승리했다. 집권 후 케네디는 국방부 지출 확대를 추진했는데, 여기에는 다수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예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케네디가 베트남에서 미국 개입 확대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이다. 그는 베트남 주둔 미군 군사 고문단을 700명에서 1만 6000명 이상으로 늘렸다. 미군의 개입은 1960년대 내내 꾸준히 확대되었고, 그 결과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물리치는 데는 거의 성과를 보지 못했다. 곧 미국은 이 전쟁터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50년 뒤 바이든이 그랬듯이 닉슨은 미군 사망을 줄이고 미국 이익을 저비용으로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기 판매라고 결론 내렸다."(70-1)<br>"닉슨은 앞으로 미국은 대규모 병력을 해외에 파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신 미국은 이란의 샤 같은 ‘대리인’에게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말했다. 대리인에게 해당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켜주는 대가로 미국산 무기에 대한 사실상 무제한 접근을 제공하겠다고 설명했다. 닉슨은 예컨대 앞으로 아시아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국의 목표는 “아시아 병사들이 아시아 병사들과 싸우게 하는 것”이지 미군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닉슨의 새로운 정책은 훗날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미 카터는 1976년 대선 후보로서 인권을 지지하고 무기 판매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 카터 역시 결국 대외 정책에서 군사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마지막 국정 연설에서 카터는 미국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해 페르시아만에서 미국 이익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 입장은 ‘카터 독트린Carter Doctrin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71-2)<br>"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 해체 이후 ‘지상군 투입’ 방식의 분쟁 개입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던 빌 클린턴은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정권을 상대로 대규모 폭격 작전을 벌였고, 냉전 종식 후 몇 년 동안 감소했던 국방부 예산을 다시 끌어올리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는 1995년 국정 연설에서 국방부 예산은 건드리지 않은 채 다른 모든 연방 재량 지출 프로그램을 20% 삭감하자고 제안했다. 클린턴은 1994년 말 국방부 예산을 수년에 걸쳐 250억 달러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임기 말에는 6년 동안 1120억 달러 증액을 제안했는데, 이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더 큰 예산 증액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클린턴의 국방 정책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은 방위산업에서 합병을 장려하고 보조하는 정책이었다. 덕분에 록히드 마틴과 레이시온(현 RTX) 같은 거대 기업이 탄생하는 길이 열렸다. 방위산업의 통합은 결과적으로 군수업체들에 더 큰 협상력을 안겨주었다. 주요 방산업체의 수는 51개에서 단 5개로 줄어들었다."(74-5)<br>"군사주의적인 성향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널리 알려진 대로 클린턴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끝없는 전쟁을 시작해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부시는 이 분쟁들을 주도한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바마는 이라크 개입 같은 〈어리석은 전쟁〉에 반대하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집권 후 그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을 증강했고, 드론 공격을 확대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가장 높은 국방부 예산을 기록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지만 그 전쟁들을 끝내지도 못했고,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못했다. 대선 유세에서 했던 공약과 반대로 국방부 예산을 증액하는 행태는 도널드 트럼프 시기에도 이어졌다. 2016년 대선 기간과 당선 후 취임하기까지 기간에, 트럼프는 무기 계약업체들이 납세자들을 등쳐먹고 있다며 그들을 단속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취임 몇 달 만에 그는 바로 그 업체들을 따스하게 감싸안았다."(75)<br>3장 아마겟돈 속 폭리 취득자들<br>"핵 시대 초기부터 미국 핵무기 보유량의 규모는 최선의 방어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에 관한 고려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크게 예산 영역 다툼과 계약 확보 경쟁에 의해 좌우되었다. 잠재적으로 세계를 끝장낼 수 있는 무기들을 만드는 데 얽힌 예산과 이윤, 일자리는 거대한 사업이다. 핵무기 생산에 관여하는 업체들을 비롯한 군수기업들은 2024년 한 해 동안 로비 활동에 1억 4800만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이들 덕분에 군수기업들은 미국인이 필요로 하지도 않고 가격도 감당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기 체계에 들이는 세금을 쓸어 담기가 대단히 유리해진다.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지를 보유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들은 기지의 존재와 향후 대륙간탄도미사일 예산 및 배치가 지역 수입과 고용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노스럽 그러먼 같은 기업들은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지가 위치한 주의 기업들 및 지역 사회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왔다. 이런 관계는 무기회사들이 워싱턴 내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기반이 된다."(86-90)<br>"그러나 1950년대에는 중요했을지라도 오늘날의 경제 환경에서는 군사 지출이 지역 경제 활성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사 지출이 지역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 혜택이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집중되었거나, 오히려 건전하고 다변화된 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데 방해물이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게다가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 사업이 이루어진다고 주장되는 32개 주 중 대부분은 극히 적은 일자리만 얻게 될 것이다. 노스럽 그러먼이 주장하는 일자리 1만개가 고르게 분배된다면 주당 약 310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주가 그보다 적을 텐데, 이는 해당 프로젝트 관련 고용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할 새로운 생산 시설이 유타주에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은 투입되는 수십억 달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일자리만 만들어낼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같은 돈을 다른 어느 곳에 쓰더라도 훨씬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93-6)<br>4장 죽음을 파는 상인들<br>"‘통합 타격 전투기Joint Strike Fighter, JSF’ 프로젝트는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는데, 이 프로젝트에서 개발하기로 한 F-35 전투기는 초기에 군수 조달의 미래로 떠받들어졌다. 그러나 초기부터 F-35는 예산 초과와 성능 문제에 시달렸다. 복잡하고 상충하는 요구 사항들이 애초에 이 프로그램에 욱여넣어졌기 때문이다. F-35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이 되기를 요구받았다. 즉 공군에는 전투기/폭격기, 해군에는 항공모함 이착륙 전투기, 해병대에는 단거리 이륙 및 수직 착륙기가 되어야 했다. 배경이 된 발상은 공통 기종 하나를 각 군의 필요에 맞게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F-35는 요구된 임무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지상군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많은 폭탄을 탑재하기에는 기체가 너무 가볍다. 공중전에서는 이전 세대 전투기들보다 열세이다. 게다가 유지·보수가 너무 어려워 거의 절반의 시간을 격납고에서 정비받으며 보낸다."(110-1)<br>"지금까지 록히드 마틴은 자사의 실패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록히드 마틴과 동업자들은 정부의 감시와 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펜타곤 자금을 더 빨리 받아내려고 한다. 이는 업계의 숙원이었는데, 이들은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상황을 빌미로 이를 되살리고 있다. 방산업계의 요구 목록은 펜타곤 핵심 관리들의 목표와 대체로 일치한다. 여기에는 펜타곤 보조금을 받아 더 많은 무기 공장 짓기, 복잡한 무기 구매 규정을 단순화해 서류 절차를 줄이고 군에 납품되는 무기 체계가 광고한 대로 작동하는지 독립적으로 평가하는 과정 축소하기, 성과와 무관하게 특정 공급업체를 이용하도록 펜타곤을 묶어두는 다년 계약 시행하기, 기업이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 가격 정보의 양을 줄여 기본 품목에 과도한 비용을 청구하기 쉽게 만들기, 그리고 미국산 무기를 수입하는 국가들의 인권 기록 심사 기간 단축 등 해외 고객에게 무기를 신속히 공급하는 데서 걸림돌 제거하기 등이 포함된다."(112-3)<br>2부 전쟁 기계의 비용<br>5장 해외에서는 끝없는 전쟁, 국내에서는 끝없는 비용<br>"미국의 군사 예산은 2024년에 거의 9000억 달러에 달했고, 이는 사회보장제도나 메디케이드Medicaid 같은 권리성 지출을 제외한, 연방 정부가 집행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재량 예산의 절반을 훨씬 웃도는 비중을 차지했다. 즉 연방 세금 중 교육, 환경 보호, 직업 훈련, 과학 연구, 법 집행 등 다른 주요 정부 활동 전체보다 더 많은 금액이 펜타곤으로 흘러들어간다는 뜻이다. 게다가 9000억 달러는 전쟁 기계의 총예산 비용을 보수적으로 잡은 금액이다. 이 수치에는 펜타곤 예산과 더불어 에너지부의 핵탄두 관련 사업 예산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많은 예산 항목들도 존재한다. 여기에는 국토안보부와 보훈부의 예산, 국무부 예산에 포함된 군사 원조와 과거 군사 지출로 인한 국가 부채 이자 부담분이 포함된다. 이렇게 군사 지출을 더 빠짐없이 집계한 연간 총액은 거의 1조 5000억 달러에 이른다. 현재처럼 폭주하는 지출 추세가 이어진다면 머지않아 2조 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140-1)<br>"단지 재정 비용만 걸린 사안이 아니다. 21세기 내내 이어진 미국의 끊임없는 분쟁 개입이 초래한 가장 충격적인 결과 중 하나는 바로 이 전쟁들을 수행한 군인이 입은 피해였다. 최소 190만 명의 참전 용사가 9·11 이후 미국이 치른 전쟁을 겪었고, 7000명이 넘는 미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으며, 수십만 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외상성 뇌손상, 심각한 신체 부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한정된 자원을 전쟁 기계에 쏟아붓는 선택은 공중 보건과 영양, 의료, 환경 보호 등 다른 우선 과제들을 고사시킨다. 이러한 분야에 대한 지출 부족은 또 다른 팬데믹 발생 위험, 수천만 미국인의 굶주림, 치료받지 못하는 질병, 더 오염된 공기와 물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예산 편성의 불균형 문제가 아니다. 총성이 울리는 전쟁터의 위태로운 목숨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다. 이 모든 결과로 1억 4000만 명의 미국인이 빈곤 속에서 살거나 작은 위기 하나만으로도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142-3, 146)<br>6장 해외 군사기지와 군사 과잉 확장의 비용<br>"수천 명의 병력이 주둔하는 완전한 요새든, 무장 드론의 발진 기지 역할을 하는 소규모 시설이든, 위기 상황에서 미군이 접근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비축해두는 ‘전진 배치 거점’이든, 해외 군사기지는 미국의 대외 정책이 실행되는 가장 눈에 띄는 상징이다. 미국의 군사기지는 전 세계 80개국에 걸쳐 750곳이 존재한다. 이 방대한 해외 주둔망을 기반으로 미국은 2021년부터 2023년 사이에 78개국에서 대테러 작전을 수행했다. 게다가 17만 명이 넘는 미군이 상시 해외에 주둔하고 있다. 이 해외 기지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드는 연간 비용은 무려 550억 달러에 달한다. 천문학적인 국방부 예산을 밀어 올리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처럼 ‘전 세계를 포괄하는’ 미국의 군사 전략이다. 이 전략의 목표는 언제, 어디서든, 짧은 준비 기간만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해외에서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전 세계에 걸쳐 있는 기지 네트워크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다."(157-8)<br>"미국이 전투 병력 파병에는 점점 더 주저하게 되었음에도 군사기지에는 더욱 집착해왔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무기인 드론을 운용하려면 여러 주요 기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직접 개입한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그 결과 오바마 행정부 시절 핵심 정책결정자들은 미국의 대외 정책과 군사 정책을 ‘정치적으로 지속 가능한 전쟁politically sustainable warfare’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이는 전투 지역에 투입되는 미군 병력을 줄이고 미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함으로써 본국 내에서 본격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낮은 형태의 군사 개입을 뜻한다. 바이든 임기 동안 미국의 가장 눈에 띄는 군사 행위는 동맹국에 대한 무기 지원 확대였는데, 특히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에 수백억 달러 규모의 군사 원조를 제공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판매의 결과는 참혹했다. 무차별 폭격을 부추겨 지금까지 4만 6000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그중 많은 수가 여성과 아동이었다."(172-5)<br>3부 전쟁 기계의 판매<br>7장 전쟁 기계의 로비스트들은 어떻게 워싱턴을 설득하는가<br>"로비스트의 연봉이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그 돈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국방부 계약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군수업체들에는 한 푼도 아깝지 않은 투자다. 군산복합체가 가진 영향력의 무기는 실로 다양하지만, 다른 어떤 것도 로비만큼 직접 미국 정책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국방부 계약업체들은 영향력 게임에서 거의 비용을 아끼지 않으며, 미국 정책을 자기들 뜻대로 비틀기 위해 소규모 ‘로비스트 군대’를 구축해왔다. 2024년 한 해에만 국방부 계약업체들은 로비에 1억 4800만 달러 이상을 썼고, 로비스트 945명을 고용했다. 이를 모두 합치면 오늘날의 전쟁 기계는 의원 1명당 거의 2명의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있으며, 의원 1명당 27만 5000달러 이상을 로비 자금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 대부분 연봉이 20만 달러 이하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방부 계약업체들이 의회 의원들이 버는 돈보다 더 많은 자금을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쓰고 있다는 뜻이다."(196-7)<br>"개별 의원실에서 일하는 보좌진은, 의회 위원회 소속이 아닌 경우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폭넓은 분야를 맡고 있기 때문에 매일 모든 업무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하다. 보좌진은 이렇게 경험이 부족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업무가 많은 가운데, 방대한 법안을 제한된 시간 안에 분석하고 자신이 보좌하는 의원에게 권고안을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 종종 처한다. 예를 들어 2024년 국방수권법NDAA(일명 국방정책법안)은 거의 1000쪽에 달했다. 이 수많은 페이지 중 어느 한 문구의 뉘앙스 차이가 상관의 지역구에서 일자리를 늘리거나 잃게 만드는 차이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재선 여부를 좌우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국방부 계약업체의 로비스트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인터뷰한 모든 로비스트들은 자신들의 일이 개별 의원실, 심지어는 개별 직원에게 맞게 모든 것을 맞춤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 현직 로비스트는 말했다."(199)<br>"이러한 정보는 대단히 귀중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공정하지는 않다. 로비스트들은 국가에, 심지어 미군에 최선이 무엇인지를 위해 활동하는 객관적 정보 중개인이 아니다. 그들의 1차 목표는 고객의 이익 증진이다. 어떤 로비스트가 고객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미국의 국가 안보를 옹호한다면, 그는 곧 업무 경비 계정을 잃게 될 것이다. 만약 국방부 계약업체를 대신해 이루어지는 로비 활동이 미국 국가 안보에 이득을 주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운 좋은 우연일 뿐이다. 이것이 전쟁 기계가 실제로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핵심 이유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납세자의 돈이 국방 부문으로 더 많이 흘러 들어가게 하고, 이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면 록히드 마틴의 CEO든 워싱턴 K스트리트(로비회사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의 로비스트든 누구나 부유해지게끔 고안되었다. 이 시스템은 군에 가장 훌륭한 서비스나 제품을 제공하는 회사를 보상하는 능력주의 체제가 아니다."(200-1)<br>"국방부 계약업체의 로비스트들은 왜 선거 자금 기부가 선출직 정치인들에게 중요한지,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의회 의원들과 행정부 관료들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안다. 왜일까? 대체로 이 로비스트들 자신이 과거에는 의원이었거나 최소한 의회나 행정부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얻은 지식은 이 전직 관료들을 국방부 계약업체가 탐내는 인재로 만들었고, 업체들은 그들의 정부 시절 급여를 단번에 2~3배로 올려줄 의향이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국방부 계약업체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활용하는 가장 값진 일자리들은 의원 지역구의 주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바로 의원들 자신에게 돌아간다. 의원들은 공직 경력을 내려놓고 이러한 특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군산복합체에 내재된 완전히 합법적인 부패 시스템으로, 민간인과 현역 군인에게 국방부 계약업체와 잘 지내도록 하는 강력한 유인을 만들어낸다. 바로 ‘회전문’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이다."(203-5)<br>8장 조작된 합의 : 매수될 준비가 되어 있는 싱크탱크<br>"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년 뒤인 2024년 2월. 우크라이나는 미국산 신형 M1 에이브럼스 탱크를 처음으로 전선에 배치했고, 이 탱크는 러시아 진지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은 이 신형 탱크를 투입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철수시켰다. 왜 그랬을까? 거대한 과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 탱크는 러시아 드론의 자폭 공격에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이런 탱크를 또 다른 미국의 ‘탱크’가 열렬히 선전했는데, 바로 싱크탱크였다. 이 비영리 단체들은 미국의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하며, 우리가 TV, 라디오, 신문에서 보고, 듣고, 읽는 많은 전문가를 고용하고 있다. 그리고 M1 에이브럼스 탱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전문가 가운데 상당수는 탱크 제조사인 제너럴 다이내믹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싱크탱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는 전쟁 기계가 단지 무기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인위적인 합의까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사례다."(219-20)<br>"싱크탱크는 흔히 ‘저장 탱크holding tank’ 역할을 하며, 전현직 정부 관리들에게 일종의 경력 보관소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행정부가 교체되면, 특히 백악관을 장악한 정당이 달라지면 정치적으로 임명된 관료들 대부분은 기존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이런 전직 관료들은 새로운 생계를 찾아야 하고, 그중 대부분은 싱크탱크 부문(또는 앞서 논의했듯 로비 부문)에서 자리를 얻는다. 회전문 반대편에서는 집권한 새로운 행정부가 임명직 자리 수천 개를 채워야 한다. 외교 정책 관련 직위의 경우, 새 행정부는 흔히 국방부 계약업체의 자금을 받는 싱크탱크를 찾게 되며, 이곳에는 공직에 들어가거나 재진입하려는 지식인이 다수 대기하고 있다. 싱크탱크 인사들은 행정부의 요직을 채울 뿐 아니라, 앞 장의 로비스트들처럼 입법부도 채운다. 다만 여기서는 사람 대신 정보로 채운다. 국방부 계약업체의 자금을 받는 싱크탱크 소속 학자들은 외교 정책을 다루는 의회 청문회에 단골 증인으로 불려 간다."(239-40)&nbsp;<br>9장 미국 과학의 군사화 : 상아탑 매수하기<br>"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군사 연구가 주요 공공 쟁점으로 떠올랐던 마지막 시기는 베트남전쟁 때였다. 당시 진보 성향 학생들은 캠퍼스가 국방부 자금 수주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들은 국방부와의 관계를 바꾸었다. 어떤 경우에는 MIT의 일부였던 드레이퍼연구소Draper Labs처럼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기도 했다. 다만 독립한 기관은 여전히 모교와 비공식 연계를 유지했다. 가장 중요한 움직임 중 하나는 국방부가 베트남에서 대량으로 사용하던 네이팜을 단독으로 공급한 다우 케미컬에 맞선 학생들의 항의였다. 컬럼비아대학교는 1968년 건물 점거와 학생 700명이 부상당한 경찰 진압, 한 학기 전체 수업 중단 끝에 기밀 군사 연구와 캠퍼스 내 군대 모집을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반전 시위는 미국 전역의 캠퍼스로 확산되었다. 학생들과 경찰, 주 방위군 간 충돌은 비극적 결과를 낳았는데, 1970년 5월 켄트주립대학교와 잭슨주립대학교에서 시위 학생들이 사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250-1)<br>"그 이후 오랫동안 군사 연구에서 대학이 맡는 역할은 대다수 미국 캠퍼스에서 별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파괴적 공격에 대한 반발로 대학과 군 사이 유대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잔혹한 학살 작전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동안, MIT에서는 ‘집단 학살 반대 과학자들SAGE’ 같은 단체들이 이스라엘로부터 군사 연구 자금을 더 이상 받지 말 것을 요구했다. MIT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는데, 그러한 요구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학문의 자유에 민간인 집단 학살에 사용될 수 있는 도구를 만들 자유까지 포함된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이 논리는 학문의 자유라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한 셈이었다. 완전한 수치가 공개된 가장 최근 회계 연도인 2022년에만 국방부는 미국 대학들에 80억 달러 이상을 군사 연구개발 자금으로 투입했으며, 그중 13개 대학은 각각 1억 달러 이상을 수주했다."(251-2)<br>"대학에 대한 국방부의 영향력은 흔히 무기 관련 연구와 연결되지만,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자금 지원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방부가 지원하는 사회과학 연구는 특히 잠재적 적의 행동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구 의제에는 원래 해외 적대 세력을 상대로 쓰이던 기법을 국내 대중에게 적용하도록 정교화하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또 다른 논쟁적인 방식으로 동원되었는데, 바로 쿠바 관타나모만수용소, 이라크 아부그라이브교도소 등지에서 CIA의 고문 프로그램에 조언자로 참여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사회과학 프로그램 가운데 심리학자들을 동원해 CIA의 고문 체제를 개발, 실행하게 한 것만큼 파렴치한 사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국방부가 AI로 구동되는 자동화 전쟁을 현재 방식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효과적인 개선책이라고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새로운 국방부 지원 연구는 장차 심각한 인명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269, 273-4)<br>10장 미디어 포섭 : 프로파간다로 전쟁 기계에 힘 실어주기<br>"1991년 1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이 수행한 첫 번째 대규모 해외 전쟁이었다. 잔혹하고 파괴적인 베트남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대중은 해외 개입에 염증을 갖게 되었고, 이 현상은 ‘베트남증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국방부와 군 수뇌부, 동맹은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내는 군사 목표 외에 선전 목표 또한 이루고자 했다. 바로 베트남증후군을 종식시키고 군사 개입에 다시금 긍정적인 이미지를 씌우는 일이었다. 화려한 언변과 강경한 발언이 미국중부사령부 사령관인 노먼 슈워츠코프와 합참의장 콜린 파월의 브리핑을 가득 채웠다. 여기에 더해 미군의 폭탄이 항상 목표를 정확히 명중하는 장면만 보여주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참혹한 현실은 결코 비추지 않는 영상 클립들이 능숙하게 활용되었다. 전쟁을 피 한 방울 보이지 않게 전하는 이런 세련된 첨단 영상은 군사 개입과 정부의 무력 사용 명분 모두에 깊은 회의를 품었던 대중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280-1)<br>"그러나 군사 분석가 앤드루 바세비치가 지적했듯이 1991년 걸프전쟁은 30년 넘게 이어진 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1990년대에는 군사 개입에서 제재와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그리고 2003년 이후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개입과 사담 후세인 축출로 이어졌다. 가장 최근의 중동 장기전 단계에서 미국 정부 관리들이 예측했던 ‘손쉬운 승리’(전직 국방부 관리 케네스 애덜먼의 표현대로라면 〈식은 죽 먹기〉)는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전쟁이 장기화되자 2003년 침공 이전 부시 행정부 관리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값싸게〉 끝나지도 않았다. 브라운대학교 ‘전쟁 비용 프로젝트’의 분석에 따르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2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의 비용은 무려 2조 90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이라크 개입 직전 부시 행정부의 수석 경제 고문 로런스 린지가 당시 추산한 1000억~2000억 달러를 거의 15배나 초과한 규모였다. 1991년 걸프전쟁(페르시아만전쟁)은 뒤따른 장기전을 무시했을 때만 〈빠른 승리〉였다."(282-3)<br>"주류 언론이 더 잘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든, 독립 언론의 청중을 키우고 확산시키는 것이든, 군산복합체를 통제하거나 미국이 직면한 시급한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필요한 변화는 군산복합체의 영향력 축소를 넘어선다. 근본 문제는 미국 예외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대중의 잘못된 중독이다. 즉 미국의 의도는 언제나 선하고, 미국은 거의 항상 옳으며, 미국은 전 세계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킬 특별한 사명을 지녔다는 발상이다. 전쟁과 전쟁 준비보다 외교, 경제, 문화 교류를 중시하는 균형 잡힌 대외 정책이 가져올 다면적인 이점을 대중에게 교육함으로써 그런 환상적 세계관을 상쇄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언론 보도는 덜 군사화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성공적 노력 중 하나일 뿐이지만 또한 필수 요소다. 거대한 전쟁 기계와 군사 우선 대외 정책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전쟁 기계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민주적 대항 세력을 결집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298-9)<br>11장 마음과 정신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 : 할리우드와 전쟁 세탁<br>"만약 당신이 어떤 스포츠 경기든 관람해봤다면, 가장 오래된 군사 오락 중 하나인 공중 분열식flyover(행사용 편대 비행, 저공 비행)을 바로 눈앞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2024년 슈퍼볼 경기장 상공에서 F-16 전투기 6대가 정렬 대형을 이루며 하늘을 가르듯 날아 내려오면서 창문을 흔들자 관중석에서는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대중의 시선은 하늘을 나는 6대의 전투기에 쏠려 있지만, 실제로 선더버즈는 130명 규모의 대규모 비행대이며, 그들 중 상당수의 임무는 명확히 홍보다. 그리고 그들의 일정은 떠돌이 세일즈맨조차 지칠 정도로 빡빡하다. 이 프로그램에 연관된 모든 이들(선더버즈 조종사, 항공기 정비사, 홍보 전문가, 사진가 등)은 시간 중 대부분을 한 공연에서 다음 공연으로 이동하며 보낸다. 2024년 한 해만 해도 슈퍼볼과 자동차 경주 데이토나 500, 인디애나폴리스 500에서 선보인 공중 분열식 등 전국 각지에서 34차례 공개 행사에 참여했고, 그중에는 20번이 넘는 에어쇼 공연도 포함되어 있었다."(300-1)<br>"냉전 시기, 아니 그 이후까지도 군의 위상 선전에 영화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은 단연 〈탑건Top Gun〉이었다. 이 영화는 미군에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 등장했다. 극심한 반발을 일으킨 베트남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여전히 애쓰는 한편, 소련을 군비 경쟁에 지치게 해 항복시키려는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 확장 정책이 한창일 때였다. 실제로 〈탑건〉이 개봉하기 1년 전인 1985년 미국 정부의 국방비 지출은 냉전 기간 전체를 통틀어(물가를 고려하더라도) 최고 수준이었다. 레이건은 소련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펜타곤에는 〈탑건〉이야말로 그 엄청난 군비 지출을 정당화해주는 최고의 선전물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탑건〉은 모병률을 8%나 끌어올렸다. 이는 놀라운 수치였다. 제작진이 사용한 모든 군 장비의 총가치는 수십억 달러에 달했지만, 전체 제작 예산은 약 15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해군은 장비 사용료보다 훨씬 더 값진 대가를 원했다. 바로 시나리오 통제권이었다."(314-6)<br>"《밀리테인먼트 주식회사》(2009)의 저자인 로저 스탈의 연구는 미군이 할리우드에 얼마나 깊이 개입해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요컨대 영화 제작자가 군사 장비나 군의 전문 지식을 활용하고 싶다면 군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보통 이 과정에서 엔터테인먼트연락실이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대사를 수정하며, 심지어 영화나 TV 프로그램의 줄거리 자체를 바꾼다. 제작자가 이런 변경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군의 지원을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엔터테인먼트연락실이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그들의 ‘장난감(군 장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인터뷰한 여러 엔터테인먼트업계 인사들에 따르면, 오늘날 군과 협력해 영화를 제작할 때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은 절대 해선 안 되는지’는 업계에 잘 알려져 있다. 아예 처음부터 엔터테인먼트연락실이나 각 군의 할리우드 담당 부서가 불쾌해할 만한 내용은 제안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19-20)<br>12장 군대를 더 ‘디즈니스럽게’ 만들기 : 펜타곤과 게임산업<br>"2000년대가 시작될 무렵 많은 사람들은 화면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고 그에 따라 신체 활동이 줄어드는 현상을 위기로 보았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자동화된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2001년 미국 육군과학위원회는 〈현대 청소년들의 기술과 태도는 그들의 윗세대와 다르고, 이는 미국의 새로운 ‘무국가형 적stateless enemies’과 싸우는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연구는 특히 청소년들이 여러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예컨대 음악을 들으면서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능력이다. 이에 따라 미군은 2001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군은 더 이상 포신砲身의 물리학을 가르치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근접 시가전에서 매우 빠르게 상황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지적 의사결정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훈련의 상당 부분은 신병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상업용 비디오게임을 본뜬 시뮬레이터를 통해 이루어질 참이었다."(329-30)<br>"게임 기술은 냉전 이후 규모가 축소된 군 조직에 잘 맞았다. 군이 예비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는 가운데, 예비군은 시뮬레이션 덕분에 어디에서든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비용이 절감되었고 예비군 훈련의 부담이 줄었다. 또한 군사 훈련에서 시뮬레이션의 활용이 늘어난 시점에 실제 군사 작전 자체도 점점 게임과 닮아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드론 조종사들인데, 이들은 외국의 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원격 조종으로 공격을 수행했다. 오늘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로보틱스 및 무인 시스템 통합 과정RUSIC’이다. 이 과정은 6주간의 드론 전쟁 훈련 프로그램으로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리버티에 위치한 미국 육군 존F.케네디특수전학교에서 진행된다. 이 과정과 다른 훈련 부대를 총괄하는 스티브 슈어맨 소령은 〈처음에 드론을 한 번도 조종해보지 않았던 수련생들은 6주 과정을 거치면 1인칭 시점 공격을 지능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다〉라고 말한다."(333-4)<br>4부 전쟁 기계의 미래<br>13장 멋지고 새로운 전쟁 기계 : 빅테크와 군수산업의 미래<br>"전쟁 기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이 변화를 주도하는 벤처캐피털 펀드들과 방위기술기업들은 조종사 없는 무기 체계와 극초음속 무기, AI가 통합된 통신·통제 시스템 등 많은 기술 변화를 이끌 차세대 첨단 무기를 공급하고자 한다. ‘기적의 무기’ 개발을 통해 군사력 중심의 대외 정책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낯설지 않은 접근 방식이다. 그것은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미국이 치른 주요 전쟁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산업계와 금융권, 국방부 내의 신세대 전쟁론자들은 지난 60년간 전쟁이 남긴 핵심 교훈을 무시하고 있다. 기술만으로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으며, 특히 사회적·정치적·민족주의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힌 전쟁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교훈을 말이다. 신기술 전사들은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국방부가 록히드 마틴과 RTX, 보잉 같은 거대 방산기업들을 제쳐두고 자신들을 무기 개발의 최전선에 세우기만 하면 된다고 본다."(340, 343)<br>"팔머 러키는 서른두 살의 억만장자이자 군수산업의 새로운 핵심 주자인 안두릴의 창립자다. 그는 2012년 처음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끈 가상현실 헤드셋 개발사 오큘러스 VROculus VR을 매각하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스물두 살 때인 2014년 오큘러스를 마크 저커버그의 메타Meta에 20억 달러 이상을 받고 팔았다. 차세대 살상 무기를 생산하는 회사를 이끌고 있으면서도 러키는 여전히 게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임이라는 환상의 세계를 넘어 현실로 돌아와, 러키는 군사 기술기업을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유명한 검 ‘안두릴’을 회사 명칭으로 정했다. 러키는 실리콘밸리의 논란 많은 군사 계약업자 피터 틸로부터 재정적·도덕적 지원을 받아 안두릴을 설립했다. 틸 역시 공동 창업한 회사 이름 ‘팔란티어’를 《반지의 제왕》에서 가져왔다. 이 소설에서 팔란티어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파괴 불가능한 돌이다."(349-52)<br>"안두릴은 공중용과 수중용 드론뿐 아니라 첨단 통신 시스템과 감시 시스템도 제작한다. 그중 가장 야심 찬 제품은 래티스Lattice로, 모든 사용 가능한 정보원을 통합해 군 지휘관의 손에 신속하게 전달하는 정보 수집 시스템이다. 또는 회사 웹사이트에서 말하는 것처럼 〈래티스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규모와 속도로 기계 간 작업을 조율해 복잡한 킬 체인kill chain을 가속화한다.〉 우리가 신중하게 다루지 않을 경우 신세대 군사 기술기업이 생산하는 제품들은 인간의 통제가 거의 또는 전혀 없는 로봇 전쟁을 현실로 만들고, 이는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 러키는 기술군사주의techno-militarism를 홍보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는 언제나 선한 목표를 위해 다른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에 열정과 흥분을 느끼는 전사 계층이 필요합니다. …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폭력의 도구를 만드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352-3)<br>"다음은 팔란티어의 창립자 피터 틸이다. 그는 실리콘밸리 군사 기술 혁명의 사실상 대부로 불릴 만하다. 팔머 러키, 피터 틸, 일론 머스크와 이들의 동료들은 반정부 정서가 강하고 현실 인식이 왜곡되어 있다. 그렇기에 세계정세가 불확실하고 위험한 이 순간에 미국의 군사 정책을 설계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인물들이다. 주요 무기 제조업체들이 선호하는 접근법과 달리, 실리콘밸리의 많은 군사 신기술 옹호자들은 당파성이 철저하고, 도널드 트럼프나 J. D. 밴스 같은 주요 공화당 후보들에게 돈과 영향력을 쏟아붓는다. 이에 비해 록히드 마틴이나 RTX와 같은 기업들은 양쪽 정당의 관계자들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이는 정치적 우위가 언제 바뀌더라도 여전히 영향력 행사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을 틸과 같은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들은 탐탁지 않게 여긴다. 이들은 기술기업이 사실상 어떤 업무에서든 정부를 능가할 수 있다고 믿는다."(355-6)<br>14장 전쟁 기계에서 평화 기계로<br>"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평화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군사주의를 직간접으로 다루는 다양한 단체와 운동이 결집한 형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평화 네트워크는 국경의 군사화와 경찰의 군사화, 예산 우선순위의 군사화, 할리우드의 군사화, 대학의 군사화, 그리고 온실가스 배출 주범이자 석유 국가들의 수호자로 기능하는 펜타곤으로 인해 악화된 기후위기의 군사화까지 망라하는 군사주의의 모든 형태를 변혁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nbsp; 이처럼 더 큰 규모의 평화 네트워크가 필요한 것은, 미국 사회의 군사화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민적 압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워싱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고 있으며 중국과 관계에서 점점 더 군사화된 접근을 하고 있는데, 이는 국방부 예산에서 민생을 위한 지출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전쟁 기계는 사실상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으며, 이를 되돌리려면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375, 378)<br>"중국의 경우 미국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군사 분야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 분야다. 핵무장을 한 대국과 그 나라 앞마당에서 벌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장을 강화하는 것은 위험하며, 심각한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미중 간 충돌은 핵 대결로 비화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모든 당사자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더 나은 길은 대만의 지위, 핵무기 정책과 배치, AI가 통제하는 로봇 무기 같은 신기술의 규제 방안 등에 대해 두 나라가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기후변화 억제와 미래 팬데믹 방지, 세계 경제 안정이라는 과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면 미중 간 협력이 필수적이다. 미래를 위한 구상과 그것을 정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지금 가장 결여된 핵심 요소가 힘이다. 군산복합체가 지닌 막대한 권력과 영향력을 상쇄할 만큼의 정치적 힘 말이다. 이 힘은 놀랍게도 우리 각자에게서 시작된다. 이웃인 우리, 노동자인 우리, 안전하고 번영하는 국가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동반자인 우리에게서 나온다."(380-2)<br>에필로그 : 머스크 · 트럼프 시대의 전쟁 기계<br>"트럼프의 과거 행적(예컨대 북한과 핵 감축 대화를 하다가도 〈화염과 분노〉로 위협하던 행태)을 보면,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한 복잡한 핵 협상에서 일관된 노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2기 취임 한 달도 안 되어 국제무대에서 핵 평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 것은 그런 이미지를 취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핵심 질문은 이렇다. 트럼프 지지층 중 반전 성향의 인사들이 전통적인 군축 단체나 진보 진영과 연대해 국방비 지출과 핵 정책 문제에서 정부를 압박할 수 있을까? 미국 사회의 깊은 분열을 고려하면 이런 좌우 연대는 실현 가능성이 낮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로 다른 정치 진영의 여러 단체가 독립적으로라도 군산복합체의 확장을 제한하라고 요구한다면 실제로 변화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바로 ‘지금 당장의 긴박함’이다. 앞으로 몇 년 사이에 우리가 이 과업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388-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5/22/cover150/k32213692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052261</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보수 본능 / 최정균 - [보수 본능 - 자본주의, 기독교, 음모론, 민족주의, 반페미니즘을 추앙하는 사피엔스의 본성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19877</link><pubDate>Thu, 16 Apr 2026 07: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198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382636370&TPaperId=1721987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05/79/coveroff/e38263637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382636370&TPaperId=172198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보수 본능 - 자본주의, 기독교, 음모론, 민족주의, 반페미니즘을 추앙하는 사피엔스의 본성에 대하여</a><br/>최정균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07월<br/></td></tr></table><br/>들어가며: 도대체 보수란 무엇인가<br>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극우가 아니라 보수 전체다. 극우는 단지 보수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더 강한 보수적 성향을 타고났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생물학을 따른다. 또한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처한 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보수에서 극우로 발전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마땅한 의심으로 보수 전반을 평가하고자 한다. 중도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스스로가 ‘합리적’이라며 극우와 선을 긋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수의 이념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중도 보수나 극우나 똑같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다만 그 신념에 얼마나 매달리는가 또는 그 신념을 어떻게 실현하려 하는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보수의 이념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애당초 합리적인 보수란 존재할 수 없다. 온건하기는 하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보수와 비합리적인 데다가 과격하기까지 한 보수만 있는 것이다. 7)<br>1장　보수의 심리: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따로 있다<br>정치 성향과 관련해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연구된 대표적인 세 가지 심리학적 기제는 체제 정당화system justification , 사회 지배 지향성social dominance orientation , 그리고 우익 권위주의right-wing authoritarianism다. 흥미로운 것은 주어진 체제를 정당하게 여기는 것, 사회의 지배 구조를 옹호하는 것,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모두 보수의 특성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보수의 사전적 의미, 즉 전통을 지킴으로써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과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은 체제 정당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기득권층이 체제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회적 약자나 체제에 피해를 입는 이들도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 바로 이 문제가 체제 정당화 이론의 핵심이며, 존 조스트John Jost가 처음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정당화, 즉 어떤 생각 또는 행동 유형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지지하는 태도는 여러 사회심리학 이론들의 기반이 되어왔다. 14-5)<br>이러한 심리는 크게 세 가지 형태, 즉 자기 정당화, 집단 정당화, 그리고 체제 정당화로 구분할 수 있다. 자기 정당화는 기득권자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고정관념을 활용하는 경우에 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회적 혹은 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그 결과로서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질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집단 정당화는 자기 정당화를 확장된 자아, 즉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확대한 개념으로, 자신과 사회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 구성원들의 행동을 방어하는 상황에서 주로 나타난다. 집단 정당화 과정에서는 직접 대면해 본 적 없는 다른 집단에 대해, 자기 집단 속 다른 이들의 고정관념을 공유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와 달리 체제 정당화는 비주류 집단이나 소외 계급이 스스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거나 해를 입는 상황에서도 기존 체제를 수용하거나 심지어 옹호하는 현상을 다룬다. 체제 정당화는 자기 정당화나 집단 정당화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15-6)<br>우리가 경험해 아는 보수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어떤 내재적인 가치관, 신념, 심리적 기조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때로는 과격한 행동까지 동원함으로써 사회나 체제의 변화를 주도하거나 급진적으로 뒤바꾸기도 한다. 반대로 현실의 진보 역시, 사전적인 의미와 달리, 특정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체제의 변화에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한다. 따라서 체제 정당화가 사전적인 보수와 일치할지는 몰라도 실제 보수와는 일치하지는 않는다. 보수를 사전적 정의나 체제 정당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보수적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편견, 혐오가 그들의 본성과 같이 너무나 확고하며 때로는 비이성적일 만큼 과격하고 위험한 행태로까지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를 쓰고 고수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뿌리 깊은 본능일 뿐, 무슨 고상한 인식론적, 실존적, 관계적 동기를 가지고 체제를 지키려 한다는 고차원적인 설명은 그저 잘 포장된 핑계로 들릴 뿐이다. 17-9)<br>사회 지배 지향성과 우익 권위주의 이론에서는 진화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 본성을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한다. 사회 지배 지향성은 특정 개인이나 계층이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것을 옹호하는 성향을 말한다. 즉, 힘과 능력에 기반한 위계를 지지하는 폭넓은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지배 지향성이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계층적 질서를 선호한다. 한편 우익 권위주의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며, 권위에 반하는 이들을 배척하고, 기존의 규범과 전통을 따르는 성향을 말한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나뉜다. 첫째는 권위에 대한 순응이다.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권위 등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경향을 말한다. 둘째는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성이다. 체제에 반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강하게 배척하며, 강력한 법과 질서를 통한 체제의 유지를 원한다. 셋째는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적 관습을 고수하려는 태도다. 19-20)<br>사회 지배 지향성은 세상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정글로 인식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서, 이들은 타인을 지배하고 우위에 서려는 동기를 지속적으로 갖는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부자나 기업에 대한 세금 인상, 복지 확대, 무상 또는 평준화 교육과 같은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반면 우익 권위주의는 세상을 위험하고 위협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인식하며, 질서와 안정, 기존 규범을 중시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경계하고 규칙을 중시하는 성격적 특성과도 연결된다. 사회 지배 지향성이 주로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면, 우익 권위주의는 전통적 가치, 국가 안보, 사회 규범 등에 대한 태도를 설명한다. 과학에 대한 보수의 부정적인 태도도 우익 권위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우익 권위주의는 주로 사회적 위협을 인식했을 때 촉발된다. 20-1)<br>사회 지배 지향성과 우익 권위주의는 인간의 진화적 본성을 비중 있게 다룬다. 이것이 체제에 대한 유연한 심리적 반응에 더 큰 무게를 둔 체제 정당화 이론과의 차별점이다. 그러나 집단 수준에서 유리한 어떤 형질이 진화적으로 선호된다는 가정은 생물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기존 체제를 합리화하거나 우월성과 능력에 따른 위계와 차등적인 분배를 옹호하며 사회적 관습, 규범,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심리의 기저에 진화적 압력이 작동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체 수준에서 일어났어야 한다. 이렇게 개체 수준의 진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종교성이다. 우리 선조들은 적과 포식자를 탐지하거나, 자연 현상과 사건들의 원인을 추론하거나, 싸울 것인지 협력할 것인지를 두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인지 능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자 탐지agent detection, 인과관계 추론causal reasoning,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 초자연적 존재인 신에게 투영된 것이 종교의 기원일 수 있다. 24-5)<br># 보수의 심리&nbsp;1. 그저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축된 것이 우리의 사회 체제다. 혁명은 예외적이며 일시적이다. 이것이 보수가 기성 체제를 옹호하는 이유다.&nbsp;2. 보수가 지키려 하는 것은 체제가 아니라 본능이다. 체제를 정당화하는 동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정당화하는 체제가 존재하는 것이다.&nbsp;3.&nbsp; 사회 지배 지향성은 돈과 권력, 우익 권위주의는 권위와 관습에 대한 노예근성이다. 권위와 비교해 권력은 더 동물적이다. 고로 권력의 논리에 사로잡힌 현대판 노예들이야말로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nbsp;<br>2장　보수의 뇌: 참을 수 없는 불확실성의 두려움<br>내재성 휴리스틱inherence heuristic은 사람들이 어떤 현상의 원인을 내재적인 속성 때문이라고 간단히 추론해 버리는 인지 전략으로, ‘원래 그렇다’ 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식의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많은 현상은 다양한 외적 요인들이 작용해 발생하지만 그러한 정보 수집과 해석에 노력을 들이는 대신,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내적 요인으로 설명함으로써 인지적 종결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내재성 휴리스틱과 유사한 개념으로 가격-품질 휴리스틱price-quality heuristic이 있다. 한마디로 어떤 상품이 값비쌀 때 곧바로 그것이 우수한 품질이나 성능을 지녔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상품의 품질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기에, 제품이 질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심피언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내재성 휴리스틱은 우리의 본능과 같아서 매우 어린 시기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 29-30)<br>그런데 휴리스틱에 대해 심리학에서 그다지 주목되지 않은 것이 그것의 적응적 측면이다. 여러 사람에게 어떤 인지적 성향 혹은 선호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진화적 기원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윈의 성선택sexual selection&nbsp; 이론과 행동생태학자 아모츠 자하비Amotz Zahavi의 핸디캡 이론handicap theory 을 알아야 한다.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들을 살펴보면 크고 화려하며 노래하거나 춤추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수컷이다. 여기서 다윈은 생존에 불리해 보이는 수컷의 형질과 행동이 암컷에게 짝짓기 상대로 선택되는 면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에서는 생존에서의 불리함과 번식에서의 유리함을 연결하는 메커니즘이 확실하지 않았다. 이 빠진 퍼즐 조각을 맞춘 것이 바로 핸디캡 이론이다. 자하비는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핸디캡 그 자체가 암컷이 수컷을 선택하게끔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값비싼 신호costly signal’라고 불렀다. 32)<br>미국의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Geoffrey Miller는 이러한 성선택과 신호 이론의 관점으로 인간 고유의 자질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밀러는 그의 저서 『연애』에서 인간의 복잡한 특성들을 짝짓기 경쟁의 부산물로 보면서, 인간이 생존 기계가 아닌 연애 기계라고 주장한다. 지능, 창의성, 예술적 감성, 유머 감각 등은 모두 생식 성공을 위한 신호로 작동하며, 따라서 진화적인 적합도 지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밀러는 더 나아가 『스펜트』에서 비싼 차나 미술 작품 등을 구매하는 현대인의 과시적 소비 행동도 이러한 신호 전략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은 일찍이 그의 명저 『유한계급론』에서 이러한 과시적 소비를 비판한 바 있다. 이처럼 동물로서 우리 인간은 다른 개체가 과시하는 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도록 진화해 왔다. 이것이 바로 내재성 휴리스틱이 타인을 대상으로 작동할 때 우리 안에서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33-4)<br>뇌의 정보 처리와 추론 방법을 설명할 때 휴리스틱 이론이 직관에 기반한다면, 베이지언 뇌Bayesian brain 이론은 확률에 기반한다. 베이지언 뇌에서 확률은 사람들이 특정 사건이나 명제에 대해 가지는 신념도 혹은 불확실성에 대한 주관적 평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일 비가 올 확률이 80퍼센트라고 말할 때, 주관적 베이즈주의자는 그 사람이 내일 비가 올 것을 80퍼센트 확신한다고 해석한다. 뇌는 세상에 대한 선험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베이지언 통계에서 사전 확률prior probability에 대응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뇌는 믿음을 조정하는데, 이는 이론에서 사후 확률posterior probability에 대응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똑같이 0.5라고 생각한다. 반면 편향을 가진 사람은 동전이 조작되어 앞면이 나올 확률이 0.8이고 뒷면이 나올 확률이 0.2라고 믿는다. 이렇게 사전 확률에 차이가 있으면 같은 결과를 가지고도 사후 확률이 다르게 계산된다. 35-6)<br>보수적 베이지언 뇌가 지닌 선험적 믿음의 방향성은 혐오, 행동면역계, 교감신경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들 중 하나는 위험한 대상을 재빨리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복잡하고 정교한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단순하고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위험한 것을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대상을 위험하다고 착각해 과잉 대응 하는 편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불확실한 대상에 대한 유전자의 두려움이 진화 과정에서 혐오의 감정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렇게 진화한 심리적, 행동적 기제를 ‘행동면역계 be-havioral immune system’라고 한다. 즉, 행동면역계는 병원균의 가능성을 알리는 지각 신호에 반응해, 혐오와 같은 심리 반응이나 회피와 같은 행동 방식을 유도한다. 최근에는 행동면역계가 분자와 세포 수준에서 작동하는 생리학적 면역 반응과 연결된다는 보고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37)<br>여러 뇌 영상 연구들에서 발견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과 뇌섬엽insula cortex이라는 뇌 부위의 역할이다. 먼저 강한 보수 성향이 더 큰 편도체amygdala로 나타났다면, 더 강한 진보 성향은 더 큰 전대상피질의 부피로 나타났다. 또한 보수에게서 편도체가 활성화되는 행동실험 상황에서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뇌섬엽이 더 많이 활성화되었다. 전대상피질과 뇌섬엽의 기능은 경제적 의사 결정, 예컨대 자원을 분배하는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실험이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이다. 여기서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제안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경우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본인에게 금전적으로 더 이득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불공정한 제안을 받을 때 전대상피질과 뇌섬엽이 활성화된다. 이는 공정성에 대한 의식이 단순히 손익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경생물학적 기반을 가진 정서적 반응임을 시사한다. 41-2)<br>쉽게 말해, 이 뇌 기관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상충하는 정보, 기대를 저버리는 불공정, 사회적 부조리와 고통 등을 모두 오류로 인지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적 신념이 갈등 탐지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종교적 개념에 노출된 신앙인들의 뇌에서는 전대상피질에서 발생하는 오류 반응이 약화된다. 즉, 종교적 신념이 오류에 대한 불안 반응을 완충시킴으로써 갈등을 회피하거나 외면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종교의 성인들을 우러러보는 이유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깨닫고 그것을 초월하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감수하고 그에 맞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현대 종교의 교리는 신앙인들의 종교성만을 자극하며 세상의 아픔을 회피하거나 정당화하게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종교가 점점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42)<br># 보수의 뇌1. 보수의 뇌에서 휴리스틱이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불확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빨리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지적 ‘종결 욕구’ 때문이다.&nbsp;2.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휴리스틱 본능은 왜곡된 능력 과시마저 정직한 신호로 착각해 받아들이게 한다. 이처럼 값비싼 신호가 교란된 상태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기득권층이다.&nbsp;3. 기존 신념을 고수하는 보수적 베이지언 뇌는 불확실한 대상을 무조건 과잉 경계 하는 진화적 습성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편향성이 끼치는 폐해는 인공지능의 문제보다 더 시급하게 다루어야 할 ‘자연 지능’의 현실적인 위험이다.&nbsp;<br>3장　보수의 유전자: 대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들<br>인간의 행동과 같은 어떤 형질들이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유전자로부터 그 형질까지의 경로가 길고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생명체가 유전자의 조절하에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도 작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험실에서 특정한 유전자형을 도입해 형질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생기는 유전자형도 형질에 곧바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히려 형질의 복잡성은 여러 유전자들이 병렬적으로 함께 작용하기에 나타난다. 복잡한 형질일수록, 혹은 더 많은 유전자가 관여할수록 개별 유전자의 영향력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개별적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환원주의적 접근이 가능한 이유다. 모든 자연 현상은 개별 요소들로 환원할 수 있기에 자연과학은 환원주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환원되지 않는 창발 현상에서도 개별 요소들의 영향력이 존재한다. 다른 유전자형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환경 조건에서도 분명한 표현형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다. 47-8)<br>인간의 공격성과 지배적 행동 중 일부는 성적인 행위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또한 편도체와 교감신경이 주도하는 불안 및 공포 반응도 출산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환경적 불안정성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건강 기대수명이 짧고 평균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이 첫 출산 연령이 더 낮고 자식의 수가 더 많다. 그런데 주관적인 불안감도 출산 욕구에 영향을 준다. 예컨대 자연재해나 지역사회에 대한 테러를 경험한 경우, 거주지 인근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경우와 같이 불안 및 공포 반응이 유도되는 환경에서는 임신 욕구가 증가하고 실제 출산율이 늘어난다. 또한 단순한 심리적 조작으로 사망 위험성을 인지하게 하는 것만으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자식의 수가 많아지고 첫 출산 연령이 낮아진다. 자신의 생존이 불확실하다고 느낄수록 번식을 통해 빨리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하는 것인데, 우익 권위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그러한 경향을 더 강하게 드러낼 것이다. 52)<br>한편, 기존 연구들에서 정치성과 관련하여 직접 다루지 않았으나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자 중 하나가 옥시토신 oxytocin 이다. 흔히 ‘사랑 호르몬’ 혹은 ‘모성애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은 사회적 심리와의 연관성이 많이 알려져 있으며, 보수 성향을 대표하는 뇌 구조인 편도체와 관련해서도 다수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옥시토신은 우익 권위주의가 추구하는 내집단 중심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익 권위주의는 외집단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그에 맞서 내집단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고취하고 협응을 강화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실제로 우익 권위주의와 내집단을 우선시하는 태도에는 같은 유전학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옥시토신 회로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유전자들이 여기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다른 말로 ‘지역적 이타주의parochial altruism’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은 물리적인 의미의 지역만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 집단, 계층, 문화권 등을 포함한다. 53)<br>한편 사우스웨스턴대학교 연구진의 조사에서 진보 성향을 설명하는 도파민 수용체는 균형 선택의 흔적을 보였다. 여기서 ‘균형 선택balancing selection’이란 어떤 유전자형이 유리한 상황에서는 점점 많아지다가 상황이 바뀌면 반대로 다시 줄어들기도 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지능의 역할이 한층 중요해져왔다는 맥락에서 진보 성향을 대표하는 뇌 부위인 전대상피질과 뇌섬엽이 지능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들은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사고 능력인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동성 지능은 선천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어린 나이에 활발하게 작동하는 반면, 반대 개념인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은 후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나이가 들수록 발달한다. 그러므로 문화의 발전으로 생겨난 새로운 생존 기술을 어릴 때부터 효과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주로 요구된 것은 유동성 지능이었을 것이다. 56-8)<br>요컨대 보수적 본능이 인간 역사에서 대체로 우세하게 작용한 것과 비교해, 진보 성향을 설명하는 유전자들은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아주 가까운 시기에 이르러서야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문명의 발전은 생존과 번식에 대한 자연선택의 압력을 완화했고, 그 결과 보수적 본능이 약한 이들도 점차 더 많이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편도체가 주관하는 교감신경, 싸움-도주 혹은 돌봄-방어 반응, 행동면역계 등의 작동이 약한 이들도 살인과 전쟁이 줄어든 사회에서, 그리고 감염 질환을 치료하는 의학이 발전한 상황에서 더 높은 수준의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전대상피질과 뇌섬엽 등이 매개하는 유동성 지능 역시 문명화된 환경에서 생존과 적응에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생존을 수동적인 결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자부심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는 데서 비롯한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을 넘어서기 위한 창조적 몸부림의 산물이다. 58)<br># 보수의 유전자1. 세로토닌, 옥시토신, 리포칼린 등을 둘러싼 유전자들의 생물학적 기능과 진화적 양상, 출산율 통계 등은 보수의 유전자형이 생존과 번식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nbsp;2. 성공적으로 진화한 ‘다정한’ 자들의 사회성이란 편협한 이타주의, 집단 이기주의, 권력과 위계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며, 그들이 잃어버린 공격성은 불의에 맞서는 데 필요한 투쟁심이다.&nbsp;3.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는 데 있다. 반면 진화에서의 ‘적응’이란 인간 조건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 없이 자연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순응’을 말한다.&nbsp;<br>4장　보수의 환경: 젊어서나 늙어서나, 부유해도 가난해도<br>같은 유전자형이라도 다른 환경 조건에서는 다른 표현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유전자-환경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에서 세로토닌이 주관하는 위계적 행동과 우울증 간의 연관성은 진화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데이비드 린든David Linden 교수가 『우연한 마음』에서 설명했듯이, 학자들은 우울증과 같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해 보이는 감정이 왜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경우에는 활력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유리하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상태가 자신의 공격성을 줄이는 한편, 지위가 높은 개체로부터 공격당할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질수록 그에 따라 세로토닌 수치가 낮아지므로, 세로토닌 부족이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은 그러한 적응상의 이점 때문일 수 있다. 세로토닌 회로 체계가 발달시켰다고 하는 소위 ‘친사회성’과 공격성 감소라는 이면에는 우울증이라는 비극이 있는 것이다. 62-3)<br>반대로 세로토닌의 활성이 너무 높은 경우도 문제가 된다. 5-HTT에는 두 가지 유전자형이 있는데, 유전자형에 따라 세로토닌 재흡수 기능이 달라 세로토닌의 활성 정도도 다르다. 그런데 세로토닌 활성을 강화하는 유전자형을 지닌 이들에게서 편도체의 공포 반응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스트레스에 더 과민 반응 하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일상적인 갖가지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편도체의 교감신경이 싸움-도주 반응을 유발하기에, 5-HTT 유전자형에는 ‘예민한 유전자grouchy gen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예상대로 예민한 유전자를 지닌 이들이 여러 우울증 척도에서 높은 수치를 보였다. 그러나 삶에서 경험한 스트레스 사건의 수가 많은 경우에만 그러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또 다른 메타분석에서는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기간, 최근에 겪은 스트레스 사건이 언제였는지와 같은 시간적 요소도 작용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요컨대 우울증이 유전자, 환경, 시간의 삼중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었다. 63-4)<br>남성들이 보이는 보수 성향이 주로 경제와 관련해 드러난다는 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성별에 따른 정치 성향 차이의 상당 부분은 경제적 보수주의인 사회 지배 지향성으로 설명되는 반면, 사회적 보수주의를 나타내는 우익 권위주의에서는 남녀 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우익 권위주의는 연령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위험’이라는 관점에서 형성되는 우익 권위주의의 근간에는 보수적 베이지언 뇌의 작용, 교감신경의 싸움-도주 반응, 옥시토신의 돌봄-방어 반응 등으로 매개되는 생존 본능이 있다. 위협에 대한 신체적 대응이 점차 둔화되는 고령층의 보수성이 사회적 보수주의로 이어지는 이유라고 하겠다. 한편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형성되는 사회 지배 지향성에는 내재성 휴리스틱과 신호 체계, 세로토닌, 페로몬 등이 주관하는 번식 본능이 있다. 이는 성공과 쟁취의 욕망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남성들, 특히 젊은 남성층의 보수성은 능력주의 기반의 경제적 보수주의로 나타난다. 71-2)<br>젊은 남성들의 보수화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남성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들의 번식 경쟁력에 대한 전망이 어두운 가정은 딸을 선호하게 되는데, 전 세계적으로 자유경쟁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이런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부모가 아들을 원한다는 이유로 태어나지 못하는 여아의 수가 무려 8분의 1로 줄어들 만큼 남아 선호도는 확연한 감소 추세다. 사실 보수를 자칭하는 젊은 남성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자신들을 사회적 약자 내지는 피해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가정, 또래 관계, 학교, 직장, 혼인 시장 내에서 능력에 따라 남자들을 평가하는 인간 본성이 여전한 가운데, 신자유주의의 경제 이데올로기는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자 생활 양식으로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의 학업 성취와 사회적 성공이 일부 남성들의 부진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그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압박감이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72)<br>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 성향을 띠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대역폭 세금 bandwidth tax’이라는 개념은 인지적 자원에 부과되는 보이지 않는 세금을 의미한다. 즉, 빈곤한 상황이 정신적 여유 혹은 에너지를 고갈시켜 인지 기능을 저해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렇게 인지 자원이 고갈되면, 기존의 믿음을 고수하는 보수적 베이지언 사고가 지배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깊이 있는 분석적 사고보다는 직관이나 간단하고 빠른 판단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업 기억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 사고가 약해지면서 휴리스틱이 더 쉽게 작동한다. 특히 내재성 휴리스틱으로 인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버리면, 성공은 타고난 이들의 것이며 그들이 누리는 혜택은 정당한 것이라는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또한 사회 지배 지향성이 강화되어 여성에 비해 남성이, 이민자들에 비해 내국인들이 경제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72-3)<br># 보수의 환경1. 인간 정치성의 표현형을 만드는 공격적인 유전자, 예민한 유전자, 탐색 유전자 등은 경제를 비롯한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nbsp;2. 노화에 따른 보수성이 생존을 위협하는 개인의 생물학적 변화에 기인한다면, 젊은 남성들의 보수성은 번식을 향한 생물학적 본능이 경쟁적인 사회 환경에 반응해 나타나는 결과다.&nbsp;3. 오늘날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권력에 종속시키는 신자유주의를 마치 절대적인 진리처럼 신봉한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발적 노예’가 되어버린 이들은 스스로를 ‘비자발적 독신자’라 부르는 처지가 되었다.&nbsp;<br>5장　보수의 문화: 경쟁과 맹신과 배척의 본능들이 만든 세상<br>서문에서 지적했듯이, 겉보기에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광범위한 여러 사안들에 대해 보수는 일관된 입장을 보인다. 이는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먼 과거 자연 속에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며 구축된 진화적 심리가 현대사회의 문화적 요소들에 반응해 발현되는 것을 보수라고 규정하면, 이 모든 현상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휴리스틱과 보수적 베이지언, 신호 체계에 기반한 번식 전략과 같은 인지심리학적 요소들과, 편도체, 교감신경, 행동면역계, 싸움-도주 혹은 돌봄-방어 반응, 페로몬 시스템, 전대상피질, 뇌섬엽과 같은 신경생리학적 요인들, 그리고 옥시토신, 세로토닌,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들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사안들에 반응해 사회 지배 지향성이나 우익 권위주의와 같은 심리 기제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연적 본능에 따르는 가치관을 지닌 자연인들이 만들어 낸 문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보수주의다. 86)<br># 보수의 문화1. 보편적인 보수의 특징은 평등을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을 옹호하는 사회 지배 지향성이다. 공산주의 정권을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하는 우익 권위주의는 강한 반공 정서를 형성한다.&nbsp;2. 성서의 내용을 왜곡해 교리로 고착시킨 기독교는 인간의 진화적 종교성을 충실하게 충족함으로써 보수의 핵심 사상으로 군림했다. 한편 과학에 대한 불신은 음모론 맹신으로 이어진다.&nbsp;3. 배타적 민족주의는 도덕적 범주가 협소해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한정되기에 나타난다.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배척은 전 세계 우파 정권과 근본주의적 종교의 공통점이다.&nbsp;<br>나가며: 그러면 진보란 무엇인가<br>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호모 컨서버티버스Homo conservativus, 즉 보수적 사피엔스sapiens 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보는 이들은 호모 리버럴리스Homo liberalis, 즉 진보적 사피엔스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새로운 분기점 앞에 서 있다. 컨서버티버스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 '조상형ancestral allele'이라면, '파생형derived allele'의 비율이 늘어날수록 사피엔스는 리버럴리스에 가까워질 것이다. 리버럴리스가 지닌 파생형은 주로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학습하고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질들을 설명한다. 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생존에 불리하거나 눈에 띄지 않았을 특성들이지만, 문명의 보호 속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문명의 발전과 함께 더욱 번창해 왔다. 그러므로 호모 사피엔스의 분기를 촉진하는 것은 자연선택이 아닌 문명의 발전이다. 문명은 리버럴리스를 낳고, 리버럴리스는 문명을 더욱 발전시키며, 더 고도화된 문명은 더 많은 리버럴리스를 탄생시킨다. 89-90)<br>호모 리버럴리스의 도덕적 합리성은 ‘공정’이라는 이상으로 수렴한다. 만약 현재의 체제가 뒤바뀌어 능력 경쟁보다 평등이 중시되고, 남성보다 여성이, 백인보다 흑인이, 이성애자보다 동성애자가 주류인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진보주의자들의 태도는 어떻게 바뀔까? 그렇게 뒤바뀐 체제가 오랜 시간 유지된다면, 현 체제에 반항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다시 옛 체제를 바라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체제 아래에서도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공정성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능력, 성별, 인종, 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누군가가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서거나 차별을 받는 사회 구조는 공정성에 위배된다. 따라서 진보는 그저 기득권의 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 없는 구조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공정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어쩌면 유일한 도덕률인지도 모른다. 합의에 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모든 이해 당사자에게 공정한 결과가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90-2)<br>기독교가 존엄하게 창조된 인간을 말할 때, 성서는 공정하게 창조되어야 할 인간을 말한다. 우리가 도덕적 명제처럼 받아들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은 사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정한 생존의 보장을 위한 합의에서 비롯된 윤리적 수단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들 사이의 공정한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며, 그 신념 위에 우리의 모든 윤리 체계가 구축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들 역시 존 로크John Locke 가 주장한 자연권이 아니라, 도덕적 합의를 통해 도출한 사회적 구성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존엄성은 우리 안에 생물학적으로 내재하지 않고, 따라서 자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인간에게 존엄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혹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는 철학적으로는 난제이겠지만,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조차 없다. 인권은 인간이 합의해 도출한 사회적 개념이다. 역사가 이를 분명히 말해준다. 92-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05/79/cover150/e38263637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805796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 멀린 셸드레이크 -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13567</link><pubDate>Mon, 13 Apr 2026 07: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1356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32532156&TPaperId=172135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27/12/coveroff/e93253215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32532156&TPaperId=1721356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a><br/>멀린 셸드레이크 지음, 김은영 옮김, 홍승범 감수 / 글담 / 2021년 04월<br/></td></tr></table><br/>서문: 내가 만약 곰팡이라면<br>곰팡이는 우리와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유지해준다. 화산섬이 생성되거나 빙하가 후퇴해 맨 암석이 드러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지의류地衣類, lichen ― 곰팡이와 조류藻類, algae 또는 박테리아의 연합 ― 이고, 이어서 식물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다. 잘 발달된 생태계에서도 흙을 붙들어주는 곰팡이 조직이 빽빽한 그물망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흙이 빗물에 금방 쓸려 내려가 버린다. 깊은 바다 밑 충적층에서부터 사막의 모래밭, 남극의 꽁꽁 언 얼음계곡, 심지어는 우리 몸의 내장이나 모든 구멍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서 곰팡이를 발견할 수 없는 곳은 거의 없다. 한 그루 나무의 줄기와 잎에만도 수천 종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 이 곰팡이들은 스스로 식물세포 사이의 빈틈으로 들어가 촘촘한 비단을 짜고 그 식물이 질병을 막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 자연 상태에서 자란 식물치고 이런 곰팡이가 없는 식물은 없다. 곰팡이는 잎이나 뿌리처럼 식물 세상의 일부다. 30-1)<br>곰팡이 중에서 일부는 당분을 발효시켜 알코올을 만들거나 빵을 부풀게 만드는 효모처럼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발아發芽를 통해 두 개의 세포로 증식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곰팡이는 많은 세포가 연결된 네트워크인 균사hypae를 형성한다. 미세한 관 구조인 균사는 갈라지고, 합해지고, 서로 얽히면서 무질서하지만 매우 섬세한 균사체를 만든다. 균사체 만들기는 거의 모든 곰팡이의 공통적인 습관인데, 균사체는 물체라기보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합당하다. 균사체는 탐험적이고 불규칙적인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균사체 네트워크 안의 생태계를 통해 물과 영양분이 흘러 다닌다. 일부 곰팡이종의 균사체는 전기적으로 들뜨기도 해서 균사를 따라 전기파가 전도된다. 대사상의 특이성 덕분에 곰팡이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관계 맺기에 능하다. 뿌리에서든 줄기에서든 식물은 생겨난 순간부터 양분 흡수와 방어에 있어 곰팡이에 의존한다. 동물도 곰팡이에 의존하기는 마찬가지다. 32-3)<br>한 개체는 어디서 끝나고 다른 개체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우리는 대개 우리 몸이 시작하는 곳에서 우리가 시작되고 우리 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가 끝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미생물의 생태로 이루어진, 그리고 분해되는 생태계이며, 그 의미는 최근 들어서야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우리의 몸 안과 표면에 사는 4조 개 이상의 미생물 덕분에 우리는 음식을 소화시키고 우리 몸에 자양분이 되는 필수 미네랄을 생성할 수 있다. 식물의 내부에 사는 곰팡이처럼, 미생물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한다. 미생물은 우리 몸의 발육과 면역 시스템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심히 관찰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질병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우리를 죽이기도 한다.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한 경우도 아니다. 박테리아도 몸 안에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 바이러스도 자기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를 몸 안에 갖고 있다. 공생은 생명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있다. 40-1)<br>유혹하는 곰팡이: 버섯과 곰팡이가 퍼져나가는 방법<br>트러플은 몇 종류의 균근 곰팡이가 땅속에서 키워내는 자실체다. 트러플은 토양에서 흡수한 영양분과 식물의 뿌리에서 흡수한 당분으로 생명을 유지하면서 연중 대부분을 균사 네트워크로 존재한다. 그러나 땅속이라는 서식 환경이 트러플에게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다. 식물이 씨앗을 만들어내듯이 트러플은 포자를 만들어내는 유기체다. 땅속에서는 포자가 바람에 실려 갈 수도 동물의 눈에 뜨일 수도 없다. 트러플이 내놓은 해결책은 냄새다. 그러나 숲속에서 풍겨나는 온갖 냄새를 누르고 더 멀리까지, 더 강하게 냄새를 풍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트러플의 냄새는 토양층을 뚫고 퍼져나갈 수 있을 만큼 자극적이어야 하고, 다양한 냄새의 스펙트럼 안에서 땅을 파내고 찾아먹을 수 있을 만큼 입맛 도는 냄새여야 한다. 이처럼 시각적으로 불리하다는 단점 ― 땅속에 파묻혀 있는 데다 땅을 파헤쳐도 쉽게 찾아낼 수 없고, 찾아냈다고 해도 그다지 먹음직스럽게 생기지 않은 ― 을 트러플은 냄새로 역전시켰다. 49)<br>유혹은 곰팡이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교배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트러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한쪽의 균사 네트워크에서 나온 균사가 성적화합성이 맞는 다른 균사 네트워크와 융합하여 유전물질의 풀pool을 만들어야 한다. 균사 네트워크로서 한살이의 대부분을, 트러플은 곰팡이의 기준으로 ‘-’ 또는 ‘+’ 의 교배형 중 하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의 교배 형태는 아주 솔직담백하다. - 균사가 + 균사를 유인해 융합하면 접합이 일어난다. 이 두 파트너 중 부계의 역할을 하는 쪽은 유전물질만 제공한다. 다른 쪽은 모계의 역할을 맡아, 유전물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트러플과 포자로 성장하는 과육flesh을 기른다. 트러플의 성별은 인간과 달라서 + 교배형이나 - 교배형 모두 부계가 될 수도 있고 모계가 될 수도 있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사람이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될 수도 있으며, 따라서 반대 성을 가진 개체와 관계를 맺는다면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59)<br>그러나 트러플과 나무 사이의 관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며, 이들 사이의 화학적 상호작용도 섬세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어린 트러플 균사는 파트너로 삼을 나무를 찾지 못하면 금방 죽어버린다. 식물은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는 곰팡이를 피해, 서로 이득이 되는 관계를 형성할 곰팡이를 자신의 뿌리에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과정도 또 다른 형태의 유혹, 화학적인 ‘밀고 당기기’라고 할 수 있다. 트러플이 숲속에서 동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식물과 곰팡이도 서로를 끌어당기기 위해 휘발성 화학물질을 이용한다. 나무뿌리는 흙 속에 풍부한 휘발성 화합물을 발산함으로써 곰팡이가 포자를 퍼트리고 균사의 가지를 더 빨리, 더 왕성하게 자라게 한다. 곰팡이는 뿌리를 조종하는 식물 성장 호르몬을 분비해 식물이 솜털 같은 잔뿌리를 많이 뻗어내도록 만든다. 잔뿌리가 많이 나올수록 뿌리의 표면적이 넓어지고, 따라서 뿌리 끝과 곰팡이의 균사가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59-60)<br>곰팡이가 식물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뿌리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서로의 독특한 화학적 조성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신호물질은 식물세포와 곰팡이의 세포를 관통해 직렬로 흐르면서 유전자를 활성화시킨다. 식물 뿌리와 곰팡이의 균사 모두가 각자의 신진대사 과정과 성장 프로그램을 새롭게 구성한다. 곰팡이는 나무의 면역반응을 정지시키는 화학물질을 내놓는다. 그러지 않으면 공생구조를 밀접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공생구조가 확립되면, 균근 파트너십은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균사와 뿌리의 관계는 매우 다이내믹해서, 뿌리 끝과 곰팡이의 균사가 늙어 죽으면 관계를 새롭게 형성한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리모델링하는 관계인 것이다. 트러플을 재배하려면, 곰팡이의 특이한 생식 체계를 비롯하여 공생하는 나무, 박테리아의 기벽과 요구를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토양, 계절, 기후 등 곰팡이를 둘러싼 환경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의 중요성까지도 파악해야 한다. 60)<br>살아 있는 미로: 곰팡이가 길을 찾는 방법<br>균사체 네트워크라고 하면 균사의 정단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마치 벌 떼나 개미 떼가 바글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체구가 아주 작은 개체들이 수없이 모여서 마치 거대한 개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떼를 이루어 움직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이러한 군집행동swarm은 집단행동의 패턴이다. 그러나 균사체는 개미 떼나 정어리 떼를 훌쩍 뛰어넘는다. 한 네트워크 안의 균사 정단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흰개미 둥지는 여러 단위의 흰개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다. 군집 속의 개체를 하나씩 분리하듯 균사체 네트워크에서 균사를 한 올 한 올 분리해낼 수는 없지만, 균사체 네트워크와 동물 또는 곤충의 군집을 나란히 놓고 비유하자면 균사 정단은 군집 속의 개체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균사체는 그 개념이 매우 모호하다.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보면 균사체는 상호연관된 하나의 존재다. 하지만 균사 정단의 관점에서 보면 균사체는 복수의 개체다. 69-70)<br># 균사 정단(Hyphal apex)은 균사의 가장 끝부분을 말하며, 이곳에서 세포 성분과 융합이 일어나 균사가 성장하고 분지하며, 기질로 침입하는 등 생장 활동이 집중된다.<br>균사체를 내는 곰팡이는 미로 거주자이며, 곰팡이가 공간적, 기하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면 곰팡이가 어떤 유기체로 진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곰팡이는 매 순간 자신의 몸을 최적의 상태로 분포시킬 방법을 찾는다. 균사체는 탐험 모드로 출발해 모든 방향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사막에서 물을 찾고자 할 때면 우리는 보통 한 방향을 정해서 찾아 나선다. 곰팡이는 동시에 모든 경로로 찾아 나서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그와 연결된 네트워크 부분을 강화하고 소득이 없는 부분은 정리한다. 이런 현상을 자연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 균사체는 연결점을 과잉생산한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는 다른 부분에 비해 경쟁력이 더 높은 것이 드러난다. 그러면 그 부분은 두터워지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부분은 차츰 약화되어 마치 도시의 간선도로처럼 몇 가닥의 균사만 남게 된다. 한쪽의 네트워크는 거두어들이고, 다른 쪽으로는 생장을 거듭함으로써 균사체 네트워크는 새로운 환경으로 이주한다. 70-1)<br>머리카락곰팡이 자실체는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수 밀리미터 안에 있는 다른 물체를 피해서 자란다. 그 물체가 투명하든 불투명하든, 부드럽든 거칠든 상관없이 머리카락곰팡이는 약 2분 정도 후면 우회하기 시작한다. 머리카락곰팡이는 곰팡이 중에서도 통상적인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민감한 종이지만, 대부분의 곰팡이가 빛(방향, 강도 또는 색깔), 온도, 습도, 영양분, 독성물질, 전기장을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다. 식물처럼 곰팡이도 청색광과 적색광에 민감한 수용체를 이용해 빛의 스펙트럼에서 색을 ‘볼’ 수 있다. 식물과는 달리, 곰팡이는 동물 안구의 간상체와 추상체에 있는 시각색소인 옵신opsin도 가지고 있다. 균사는 평면의 질감도 감지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콩녹병균bean rust fungus의 어린 균사는 CD의 레이저 트랙 사이에 패인 홈보다 세 배나 얕은 0.5마이크로미터 깊이의 홈을 감지할 수 있다. 균사들이 모여 자실체를 만들기 시작하면 중력을 매우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 78)<br>낯선 자의 친밀함: 함께 뒤엉켜 진화한 미생물<br>수평적 유전자 교환이 발견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박테리아도 생물학적인 섬이라고 여겨졌다. 한 개체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기간에서 어느 한 중간에 새로운 DNA를 획득하는 것,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화한 유전자를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평적 유전자 교환은 이런 사고를 바꿔놓았으며 박테리아 게놈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범존적汎存的 존재, 수백만 년 동안 따로 떨어져서 진화해온 유전자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었다. 박테리아의 경우, 수평적 유전자 교환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어떤 개체든 박테리아 개체 하나가 가진 유전자의 대부분은 진화의 역사를 공유하지 않으며, 마치 우리가 집에 물건을 쌓아두듯이 한 조각씩 획득해서 쌓인 것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박테리아는 ‘기성품’ 특질을 획득함으로써 진화의 속도를 몇 배나 빠르게 가속해왔다. 비록 박테리아가 가장 민첩하고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유전물질은 생명의 모든 영역에서 수평적으로 교환되어왔다. 96)<br>1967년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생명체의 초기 진화에서 공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론이 불러온 논쟁에서 이 이론을 강력히 지지했다. 마굴리스는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서로 다른 유기체들이 합쳐지면서 ― 그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진핵생물은 단세포 유기체에 삼켜진 박테리아가 그 유기체 안에서 공생을 시작하면서 발생했다. 미토콘드리아가 바로 그런 박테리아의 후손이다. 엽록체는 초기 진핵세포가 삼킨 광합성 박테리아의 후예다. 사실 이런 표현이 상황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식물의 조상은 광합성 능력을 가진 박테리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광합성을 할 수 없는 유기체와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유기체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했다. 진핵세포 안에서, 생명의 나무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가지들이 함께 얽혀서 분리 불가능한 새로운 계통으로 녹아들었다. 곰팡이 균사가 그렇듯이 융합 또는 접합된 것이다. 98-9)<br>지의류는 보편적인 실체이며 생명이 만나는 장소다. 곰팡이는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류 또는 광합성 박테리아와 짝을 이룸으로써 광합성 능력을 수평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조류 또는 광합성 박테리아는 질긴 보호 조직을 뚫거나 바위를 소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곰팡이와 짝을 이룸으로써 그런 능력을 갖게 된다, 갑자기! 분류학적으로 거리가 먼 유기체들이 함께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혼성 생명체를 구성한다. 엽록체와 떨어질 수 없는 식물 세포와 비교하면, 지의류의 관계는 개방적이다. 지의류는 이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도 번식한다. 공생 파트너를 온전히 품고 있는 지의류 조각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새로운 지의류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지의류는 곰팡이와도, 광합성공생자와도 비슷하지 않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성분 원소와는 전혀 다른 화합물인 물이 되듯이, 지의류도 창발 현상, 즉 부분의 합 이상의 것이 된다. 99-100)<br>균사의 마음: 곰팡이가 우리의 마음을 조종한다면<br>오피오코르디셉스 곰팡이Ophiocordyceps unilateralis는 목수개미carpenter ant 주변에서 살아간다. 이 곰팡이에 감염된 개미는 자기 둥지를 떠나 가까운 식물을 타고 기어 올라간다. 좀비 곰팡이는 가장 능수능란하고 창의적으로 동물의 행동을 조종하는 하는 것이 바로 곤충의 몸 안에 사는 곰팡이 집단이다. 이 ‘좀비 곰팡이’는 숙주의 행동을 자신에게 확실히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조종한다. 곤충의 몸을 가로챔으로써 그 곰팡이는 자신의 포자를 퍼뜨리고 한살이의 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숙주 곤충의 행동을 대단히 정밀하게 제어한다. 오피오코르디셉스는 자실체를 생성하기 좋은 온도와 습도를 갖춘 곳에서 개미가 식물을 물고 버티게 만든다. 대개 숲의 바닥으로부터 25센티미터 정도 높이다. 이 곰팡이는 개미가 태양의 방향에 맞추어 행동하게 만드는데, 이 곰팡이에 감염된 개미는 정오에 맞춰서 식물을 문다. 나뭇잎 아랫면은 물지 않고, 감염된 개미의 98퍼센트가 주요 잎맥을 문다. 112-3)<br>2018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연구진은 엔토모프토라Entomophthora의 놀라운 기술을 상세히 밝힌 논문을 발표했다. 엔토모프토라는 파리에 기생하며 파리의 정신을 조종하는 곰팡이다. 연구진은 엔토모프토라 곰팡이가 다른 곰팡이를 감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곤충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논문의 제1저자는 이 발견을 과학계에서 ‘가장 기이한 발견 중의 하나’라고 보고했다. 이 발견이 ‘기이하다’는 의미는, 이 곰팡이가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동물의 마음을 조종한다는 데 있다. 아직 가설 단계지만 상당히 개연성이 있는 논리다. 엔토모프토라가 기생하고 있는 말벌에 의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무당벌레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하고 말벌의 알을 지키는 경비병 신세가 된다. 마음을 조종하는 바이러스를 이용함으로써, 이 곰팡이는 자신이 깃들고 있는 곤충 숙주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을 굳이 스스로 진화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18)<br>존스홉킨스대학교의 정신의학자 매슈 존슨Matthew Johnson의 말을 빌리자면, 실로시빈 같은 환각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약에 취하게 함으로써 불만족스러운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든다. 말 그대로 시스템 리부팅이다. (…) 환각제는 우리가 현실을 체계화하는 데 이용하던 정신적인 모델을 놓아버릴 수 있도록 정신적인 유연성의 창을 열어준다.” 약물중독처럼 굳어버린 습관 또는 우울증으로부터 생긴 ‘질긴 비관주의’도 부드러워진다. 인간의 경험을 체계화하는 범주를 유연하게 함으로써, 실로시빈 같은 환각제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강건한 심리 모델 중 하나가 자아감이다. 실로시빈을 비롯한 환각 성분이 바로 이 자아감을 교란한다. 인간이 그토록 의존해왔던, 잘 방어된 ‘자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으며 오락가락 흔들리거나 타자 속으로 차츰 녹아들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더 큰 어떤 것과의 합일, 그리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감이다. 124)<br>뿌리가 생기기 전: 식물보다 앞서 길을 낸 개척자<br>최초의 식물은 뿌리도 없고 특별한 구조도 갖추지 못한 초록색 조직 덩어리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초록색 덩어리가 응축되어 기관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조직이 곰팡이 동지를 수용했으며, 곰팡이는 흙 속에서 영양분과 물을 끌어다 주었다. 진화의 결과 첫 뿌리가 나타났을 즈음, 균근은 조류와 곰팡이가 지상으로 올라온 후에 생겨난 모든 생명의 뿌리를 이루었다. 균근mycorrhiza이라는 이름이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균mykes에 이어 뿌리rhiza가 생겨났다.” 그로부터 수억 년이 흐른 오늘날, 식물은 더 가늘어지고 더 빨리 성장하며 식물이라기보다 곰팡이처럼 행동하는 기회주의적인 뿌리를 갖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그렇게 진화한 뿌리도 땅속을 탐색하는 데에는 곰팡이를 넘어설 수 없다. 균근 균사mycorrhizal hyphae는 가장 가느다란 뿌리보다도 50배나 가늘고 그 길이도 식물 뿌리의 100배까지 더 길어질 수 있다. 균사는 뿌리보다 먼저 생겼고, 뿌리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138-9)<br>식물과 곰팡이 모두가 이 관계에서 이득을 얻어가지만, 어떤 종류의 식물과 곰팡이냐에 따라 공생의 방식이 달라진다. 키어스의 연구팀은 한 종류의 균근 곰팡이를 인이 불평등하게 공급되는 상황에 노출시켜 보았다. 그러자 인이 부족한 균사 네트워크에서는 식물이 더 비싼 ‘값’을 치렀다. 다시 말해 식물이 받는 인 한 단위당 더 많은 단위의 탄소를 공급했던 것이다. 인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쪽에서는 곰팡이가 더 낮은 ‘교환 비율’로 탄소를 받아갔다. 가장 놀라운 것은 곰팡이가 네트워크 전체에서 거래 행동을 조율하는 방식이었다. 키어스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전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곰팡이는 힘차게 움직이는 미세소관 ‘모터’를 이용해서, 인이 풍부해 싼 값으로 식물과 거래해야 하는 영역으로부터 인이 귀해 수요가 높고 비싼 값으로 거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을 힘차게 운반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곰팡이는 인을 더 유리한 교환 비율로 더 많이 거래할 수 있었고, 그 보상으로 더 많은 탄소를 얻을 수 있었다. 146-7)<br>식물의 잎이나 새싹에서 사는 곰팡이 ― 식물공생균이라고 알려진 ― 도 식물이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능력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염분이 있는 해변의 흙에서 풀을 뽑아 원래의 식물공생균 없이 기르다가 다시 염분이 있는 땅에 옮겨 심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지열이 뜨거운 토양에서 서식하는 풀도 마찬가지다. 연구자들이 이 두 가지 풀의 식물공생균을 바꿔치기해서 해변에 서식하는 풀은 지열이 뜨거운 토양에서, 지열 뜨거운 토양에서 자라던 풀은 해변에서 길렀다. 그러자 각각 서식지에서 생존하는 습성이 바뀌었다. 원래 해변에서 자라던 풀은 염분이 들어 있는 토양에서는 더 이상 살지 못한 대신 지열이 뜨거운 토양에서는 잘 자랐다. 원래 뜨거운 토양에서 자라던 풀은 더 이상 뜨거운 지열을 버티지 못하는 대신 해변의 염분 섞인 토양에서 잘 자랐다. 어떤 식물이 어디서 잘 자랄지는 곰팡이가 정한다. 곰팡이는 식물 집단을 서로 격리시킴으로써 새로운 종의 진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 150)<br>균근 곰팡이는 식물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어떤 이들은 균근 곰팡이를 ‘생태계 엔지니어’라고 부른다. 균근 균사체Mycorrhizal mycelium는 흙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 뭉쳐 있도록 붙들어주는, 살아 있는 접착제다. 만약 흙에서 곰팡이를 제거한다면 흙은 바스스 부서져서 흩어져버린다. 균근 곰팡이는 토양이 흡수할 수 있는 물의 양을 증가시키고, 빗물에 씻겨 흘러가버리는 영양분의 양을 50퍼센트까지 감소시킨다. 토양에서 발견되는 탄소 ― 놀랍게도 식물과 대기 중에서 발견되는 탄소를 모두 합친 양의 두 배에 가깝다 ― 중에서 상당한 비율이 균근 곰팡이에 의해 생산되는 단단한 유기화합물 속에 갇혀 있다. 균근의 통로를 통해 토양 안에서 흐르는 탄소는 복잡하고 섬세한 먹이그물을 지탱한다. 건강한 흙 한 찻숟가락 속에는 수십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균사 외에도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살았던 사람의 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박테리아, 원생생물, 곤충, 절지동물이 있다. 153)<br>우드와이드웹: 땅속에서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식물<br>‘정상적인’ 녹색식물은 곰팡이에게 에너지가 풍부한 탄소화합물을 당이나 지질의 형태로 내주고 그 대신 곰팡이를 통해 토양 속의 무기영양소를 얻어간다. 수정란풀은 균근 곰팡이로부터 탄소와 무기영양소를 모두 받아간다. 그리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수정란풀이 가져가는 탄소는 어디서 난 것일까? 균근 곰팡이는 모든 탄소를 녹색식물로부터 얻어간다. 즉 수정란풀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탄소는 결국 균근 네트워크를 공유하고 있는 다른 식물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수정란풀은 식물학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80년대 이후 수정란풀은 비정상적인 식물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식물은 여러 종의 균근 파트너와 문란하게 관계를 맺는다. 균근 곰팡이 역시 여러 식물과 관계를 맺는다. 각각 별개의 곰팡이 네트워크가 서로 합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광대하고 복잡하며 협력적인 균근 네트워크의 공유 시스템이 탄생하는 것이다. 158-9)<br>캐나다의 숲에서 자작나무와 더글러스 전나무를 연구한 또 다른 사례에서, 식물의 성장이 멈추는 겨울을 제외하고 봄부터 가을 사이에 탄소 이동의 방향이 두 번이나 바뀌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상록수인 전나무는 광합성을 하고 잎이 없는 자작나무는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봄이면 자작나무는 흡수원이 되어 탄소가 전나무에서 자작나무로 흘렀다. 자작나무 잎이 무성해지고 전나무는 그늘에 가려지는 여름이면 탄소가 자작나무에서 전나무로 흘렀다. 자작나무 잎이 떨어지는 가을이면, 탄소는 다시 전나무에서 자작나무로 흘렀다. 양분은 풍족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흘렀다. 수수께끼 같은 행동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식물이 양분을 곰팡이에게 주어서 이웃 식물, 즉 잠재적인 경쟁자에게 흘러가도록 두는가? 처음에는 이타주의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진화론은 이타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타주의적 행동은 공여자의 희생을 담보로 수혜자가 이득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165)<br>이 수수께끼를 푸는 가장 빠른 방법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유 균근 네트워크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식물이었다. 곰팡이는 식물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만 이야기에 등장했고, 식물과 식물 사이를 이어주는 파이프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식물과 식물 사이에서 물질을 옮겨주는 배관 시스템 정도의 역할로만 설명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을 식물중심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곰팡이는 수동적인 케이블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균사 네트워크는 복잡한 공간 감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자기 주변으로 물질을 운반하는 능력을 아주 섬세하게 발달시켜왔다. 물질이 곰팡이 네트워크를 통해 위에서 아래로, 영양원에서 흡수원으로 흐르는 경향은 분명하지만, 그 운반이 수동적인 확산의 형태로만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nbsp; 자기 네트워크 안에서의 흐름을 제어하는 능력이 없다면, 버섯의 생장이라는 섬세한 군무를 포함해 곰팡이의 한살이 대부분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166-7)<br>우드와이드웹이 단 한 가지 종류로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해다. 곰팡이는 식물과 연결되어 있든 아니든 간에 서로 얽히고설킨 그물망을 만들어낸다. 공유 균근 네트워크는 식물이 함께 얽힌 곰팡이 네트워크라는 특별한 케이스일 뿐이다. 생태계는 유기체들을 꿰매주는 비균근 균사체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 린 보디가 연구한 부패균은, 수 킬로미터를 뻗어가며 놀라운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뽕나무버섯이 그러하듯이, 생태계 전반의 매우 넓은 영역에서 썩어가는 나뭇잎과 떨어진 나뭇가지를 연결하고 썩어가는 나무 밑동과 썩어가는 뿌리를 연결한다. 이 균은 다른 종류의 우드와이드웹을 만든다. 이 웹은 나무를 살리는 웹이 아니라 죽은 나무를 먹어치우는 웹이다. 우드와이드웹의 모든 링크는 제 나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곰팡이다.&nbsp; 이러한 사실은 우드와이드웹을 식물이 영양분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경직된 위계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보살핌과 나눔 그리고 상호 협조의 공간으로 보는 시각을 뒷받침한다. 167-8)<br>풀뿌리 균학: 세상을 구하는 곰팡이<br>목질 식물이든 아니든 모든 식물 세포에 들어있는 특징적인 물질인 섬유소, 즉 셀룰로스cellulose는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풍부한 중합체이다. 또 하나의 물질인 목질소, 즉 리그닌lignin은 두 번째로 풍부하다. 리그닌은 나무를 나무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물질이다. 리그닌은 셀룰로스보다 질기고 구조가 복잡하다. 셀룰로스는 질서정연하게 연결된 포도당 분자의 사슬로 이루어진 반면, 리그닌은 분자 고리가 아무렇게나 뭉쳐 있는 형태다. 오늘날까지도 리그닌을 제대로 분해할 수 있는 유기체는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리그닌 분해에 가장 성공한 유기체는 백색부후균white rot fungi이다. 리그닌의 화학적 구조는 너무나 불규칙하다. 백색부휴균은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비정형성효소를 써서 이 난제를 극복했다. 이 ‘과산화효소’는 ‘자유 라디칼free radical’이라는 고반응성 분자를 폭포수처럼 방출해서 리그닌의 단단한 구조를 깨뜨리고 ‘효소 연소enzymatic combustion’ 과정을 진행시킨다. 182)<br>버섯을 키워내는 대부분의 곰팡이는 인간이 만든 폐기물에서 잘 자란다. 쓰레기에서 환금성 작물을 기르는 것은 현대판 연금술과 같다. 곰팡이는 마이너스 자산으로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낸다.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에게도 이익, 곰팡이를 기르는 사람에게도 이익, 곰팡이 자체에도 이익이다. 인간이 만든 쓰레기가 곰팡이의 관점에서는 기회일 수 있다는 사실은 크게 놀랍지도 않다. 곰팡이는 생물종 전체의 75퍼센트에서 많게는 95퍼센트까지 사라진 대멸종을 다섯 번이나 견디고 살아남았다. 어떤 곰팡이는 그런 재앙의 시기에 오히려 더 무성했다. 공룡이 멸종되고 숲이 대량으로 파괴되었던 백악기 제3기 대멸종 이후, 분해해야 할 죽은 나무가 풍부한 환경 속에서 곰팡이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방사능 입자가 방출한 에너지를 제거하는 방사능 제거 곰팡이Radiotrophic fungi는 체르노빌의 폐허에 무성할 뿐만 아니라 곰팡이의 긴 역사와 인간의 짧은 핵기술의 역사에 최근에 진입한 새로운 참여자이기도 하다. 185-6)<br>곰팡이는 불필요한 효소는 생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곰팡이종이 무엇을 대사 작용으로 분해할 수 있는지 예측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맥코이는 제초제 글리포세이트를 몇 방울 떨어뜨린 배양접시에서 여러 계통의 느타리버섯 균사체를 길러보았다. 그중 일부 균사체는 제초제를 피해서 뻗어갔지만, 일부는 제초제를 그대로 통과했다. 또 다른 일부는 제초제 가장자리까지 자라다가 더 이상의 생장을 멈추었다. “그렇게 생장을 멈추었던 균사체는 일주일쯤 지나자 그 제초제를 분해하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맥코이의 회상이다. 그는 곰팡이를 화학결합을 풀 수 있는 효소 열쇠꾸러미를 가진 교도소 간수에 비유했다. 곧바로 쓸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곰팡이도 있다. 그렇지 않은 곰팡이는 그 열쇠가 자신의 게놈 안 어딘가에 있기는 하지만, 일단 새로운 물질을 피해보려고 한다. 또 다른 곰팡이는 열쇠꾸러미를 뒤져 이 열쇠 저 열쇠를 꽂아보면서 맞는 열쇠를 찾느라 일주일을 보낸다. 186-7)<br>곰팡이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염된 생태계의 복원을 돕는 것이다. 그 과정을 균류정화mycoremediation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곰팡이는 환경을 복원하는 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유기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균류정화는 쉽게 접목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다. 어떤 곰팡이종이 배양접시 안에서 보여주는 행동이 오염된 생태계의 격렬한 환경에서도 그대로 재연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소나 추가적인 영양원처럼 곰팡이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고, 우리는 그런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분해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고, 곰팡이와 박테리아가 연달아가며 배턴을 이어받아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곰팡이가 할 일을 하고 떠난 자리를 박테리아가 이어받아 과정을 마무리하거나 그 반대의 순서로 진행되기도 한다. 실험실에서 훈련된 곰팡이종이 새로운 환경에서도 능숙하게 문제를 처리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순진한 발상이다. 188-9)<br>곰팡이를 이해한다면: 술을 빚는 효모의 신비<br>인간과 가장 친밀한 역사를 가진 곰팡이는 효모다. 효모는 우리 피부에서도, 우리 폐에서도, 그리고 우리 식도와 우리 몸의 모든 구멍에서도 산다. 우리 몸은 이 효모 집단을 통제하도록 진화해왔으며 긴긴 진화의 역사를 통틀어 항상 그렇게 그들을 통제해왔다. 인류의 문화 역시 수천 년 동안 우리 몸 밖에서, 술통과 항아리 안에 효모를 가두고 통제하는 복잡한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오늘날 효모는 세포생물학과 유전학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본 유기체 중 하나다. 빵이든 술이든, 효모는 초기 농경 사회의 주요한 수혜자였다. 빵이나 술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전에 효모의 배를 먼저 채워주어야 했다. 생활 영역이 농경지에서 도시로 발전하고 부를 축적하며, 곡물상이 등장하고 또 새로운 질병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농경과 연관된 문화의 발달은 효모와 인간이 공유한 문화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효모를 길들인 것이 아니라, 효모가 우리를 길들였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205-6)<br>19세기 후반 진화론의 등장 이후 미국과 서유럽을 지배하던 서사는 갈등과 경쟁의 서사였으며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된 배경에는 산업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인류의 사회적 발전관이 투영되어 있었다. 샙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기체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도록 협력하는 사례는 “예의 바른 생물학적 사회의 가장 후미진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지의류 또는 균근 곰팡이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돕는 관계는 우리에게 알려진 규칙의 의문스러운 예외였고, 그런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마지못해 인정했을 뿐이었다. 진화에서 상호협력과 협조의 아이디어는 서유럽의 진화론자들보다 러시아에서 더 두드러졌다. ‘피 묻은 이빨과 발톱’으로 상징되는, 치열하고 인정사정없는 경쟁이 지배하는 자연의 모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1902년에 쓴 책 《만물은 서로 돕는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 못지않게 ‘사교성’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강조한다. 211)<br>오늘날 모든 곰팡이를 ‘질병의 원인’ 또는 ‘기생물’의 범주로 한꺼번에 묶는 것은 부조리하다. 알베르트 프랑크가 ‘공생’이라는 용어를 고안하기 전까지는 서로 다른 유형의 유기체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설명할 방법조차 없었다. 최근 들어 공생 관계를 둘러싼 서사가 더욱 미묘해졌다. 지의류가 둘 이상의 참여자로 구성된 유기체임을 처음으로 발견한 토비 스프리빌은 지의류를 시스템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식물과 균근 곰팡이는 더 이상 상호협력적으로 또는 기생의 형태로 행동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단 한 종의 균근 곰팡이와 단 한 그루의 나무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라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상호 거래give and take’는 유동적이다. 연구자들은 획일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상리공생과 기생이라는 양극단 사이의 연속체로 설명한다. 공유 균근 네트워크는 협력과 동시에 경쟁도 촉진할 수 있다.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서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거나 적어도 감내해야 한다. 213)<br>공생적 상호관계는 종의 경계를 초월한다. 나는 곰팡이를 연구할 때보다 더 곰팡이처럼 행동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호의와 데이터를 서로 주고받는 학계의 상리공생의 세계에 빠른 속도로 녹아들어 갔다. 스웨덴과 독일에서 나와 협업했던 과학자들은 나를 통해서 더 많은 양의 흙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직접 열대지역으로 가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의 손과 발 역할을 했다. 반대로, 곰팡이가 그러하듯이 나 역시 혼자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자금과 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다. 파나마에서 나와 협업한 과학자들은 잉글랜드에 있는 내 동료들의 기술적 지원과 연구기금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내 동료들은 파나마의 내 협업 과학자들을 통해 똑같은 혜택을 누렸다.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네트워크를 연구하기 위해, 나 역시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그건 일종의 순환구조였다. 내가 네트워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네트워크도 나를 들여다본다. 21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27/12/cover150/e93253215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6271213</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삼위일체론 / 유해무 - [삼위일체론 - 살림지식총서 384]</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05950</link><pubDate>Thu, 09 Apr 2026 10: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0595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895221415&TPaperId=1720595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398/58/coveroff/e8952214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895221415&TPaperId=1720595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삼위일체론 - 살림지식총서 384</a><br/>유해무 지음 / 살림 / 2011년 11월<br/></td></tr></table><br/>들어가며: 기독교의 정체성인 삼위일체론<br>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행복관을 제시한다. 첫째, 바깥에 있는 물질적 대상을 조작한 결과와 업적으로 얻는 행복이 있다. 두 번째로, 도시 공동체 안에서 지혜로써 정의, 용기, 절제 등의 미덕을 추구하여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 삶, 곧 ‘실천적 삶’이 주는 행복이다. 세 번째로, 철학자는 외적 대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지 않고, 도시 공동체를 통한 일시적 쾌락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정신적 대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관조적 삶’의 양식을 찾아 은거함으로 신적 자족에서 행복을 실현한다. 이 책에서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또는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의 양 구도를 기독교적으로 원용하고 통합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려고 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관조하는 삶이 믿음이며 동시에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원초적인 삶인데, 그리스적 배경에서와는 달리, 이 삶은 세상에서 물질적 대상을 잘 다루고 공동체에서 미덕을 추구하여 인정받음으로써 기독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3-4)<br>관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외적 대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찬양하고 즐기는 것이다. 이런 관조는 예전(禮典)적 예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원용하여 사용하려는 관조는 ‘관상’과는 다르다. 관상은 물질이나 육체 등 외적인 모든 것을 경시하는 이원론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면 실천적 삶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관조하는 예배로 이루어지는 교회 공동체는 동시에 실천의 장이 된다. 즉, 하나님과 대면하고 교제하는 예배자는 이차적으로 예배 중에 다른 예배자와 교제한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는 일차적인 ‘실천적 삶’의 현장으로 거듭난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고 대리하는 실천의 현장은 세상이다. 관조적 삶은 관조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성도는 관조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상이라는 실천의 현장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믿음은 세상에서 행하는 실천이며, 실천의 현장은 동시에 지속적인 관조의 현장이다. 4)<br>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기초: 성경<br>예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 예수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고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요 5:18). 성부는 성자를 고난과 십자가로 내몰았다. 그것은 곧 자기 아버지를 증거하는 일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요 17:4).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영화롭게 한다(요 17:24). 그런데 성령으로가 아니면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성자를 성육하게 하신 이가 성령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다(눅 1:35). 이처럼 성령은 성자를 세상에 임하게 하고 예수를 다시 살리신 능력의 영이시면서도, 부활한 예수께서 보내시는 영이시기도 하다. 이처럼 예수 사건이 중심에 있다. 성부께서는 아드님을 나사렛 예수로 보내셨고, 아드님은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성도에게 부어 주셨고(행 2:33), 성령은 아드님을 증거한다(행 5:32). 6-7)<br>구약은 그리스도의 전(前)역사이며,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계시의 목표점이고 성취이다. 따라서 계시의 시작조차도 완성된 계시의 관점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약은 (구약의) 기존 의미가 아니라 성취 사실에서 시작하며, 그런 다음에 필요한 내용을 구약에서 찾는다. 구약은 신약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취의 빛 아래서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진술에서 예언을 찾아낸다. 구약은 창세기 3장 15절부터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다.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 ‘원시 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으로 지칭되었다.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에 대한 약속(창 12:1~3), 다윗에게 주신 왕위에 관한 약속(삼하 7:11~16, 23:1~7), 여러 시편들(2편, 16편, 110편 등)과 여러 예언서의 약속들(사 7:14, 9:6, 11:1~10, 52:13~53:12 등)은 모두 오실 메시아와 그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구약을 읽어야 구약을 구약 그대로 읽을 수 있다. 9)<br>삼위일체론의 내적 현장: 예배<br>세례는 신비적 연합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일이며 그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하는 일이다. 이전의 삶을 등지고 이제부터는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서약이다. 이 연합과 더불어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그분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다. 세례의식에는 이른바 종교적 요소뿐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 대한 관심도 컸다. 곧,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이웃을 향한 봉사의 임무도 동반한다. 이제부터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신 성전(고전 3:16)이다. 세례는 완전한 교인됨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의식이다. 세례 받기 전에 학습자는 오직 설교 말씀만 들을 수 있었다. 학습자는 세례교인만이 참석할 수 있는 성찬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당을 떠나야 했다. 고대 교회에서 예배는 두 부분, 즉 말씀과 성찬으로 구성되었고, 성찬이 예배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비록 세례는 예배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성찬에 참석할 수 있는 완전한 예배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연계적으로 중요시되었다. 14-5)<br>성찬에서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교제와 그분의 과거 사역에 대한 기억과 재림의 미래에 대한 대망이 중심을 이룬다.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은 떡과 포도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이 교제가 기초가 되어 함께 참여한 교인들과도 교제한다. 성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한다. 나아가 그분의 부활을 고백하고 우리의 부활을 소망한다. 성찬에는 예수께서 행한 모든 사역, 곧 성육신과 3년의 지상 사역, 고난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일이 포함된다. 성찬은 과거의 사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 가운데 현재 임재하신 그분을 만나 교제하고, 나아가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것, 곧 종말론적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과 함께 성자 예수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를 둔 성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현장이다. 16)<br>삼위일체론의 형성과 발전: 교회사<br>삼위일체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로,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가 있다. 니케아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론을 확립했는데,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했던 회의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결정한 것은 신뢰할 만한 권위가 없으며, 삼위일체론은 사변일 따름이라는 오해이다. 둘째로, 이단 논쟁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이다. 아리우스와 같이 그 당시 그리스 교양에 익숙했던 자들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계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단의 도전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셋째로, 삼위일체론은 내용과 표현 용어에서 복음의 그리스화라는 오해이다. 하르낙(1851~1930)은,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교의는 그리스 정신이 복음의 토양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지 오해일 따름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의 교제 중에 고백했다. 21)<br>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주(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일체성)과 예수와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종속설이 당시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폈다(마르키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가 정착되자 그리스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그리스 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1-2)<br>하나님과 함께 선재(先在)하던 로고스는 세계 ‘이성’이나 우주 원리이며, 작은 씨앗으로서 만인에게 임재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전능한 본질에는 속성인 ‘이성적 능력’이 세상 창조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나와 독자적 존재가 된다. 두 입장 다 로고스는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보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양태설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구속역사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등장하나 한 본질의 세 외현(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원성을 강조하는 단원론의 반격을 촉발했다. 단원론(군주론 또는 주권론은 합당한 번역어가 아님)은 성부의 단원성, 곧 성부를 신성의 단일한 원인으로 고수하기 위하여 성자의 신성을 성부의 신성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성부의 외현(外現) 방식이라고 보았다. 22)<br>라틴어를 사용한 서방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일체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substantia)’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원역사를 위하여 일체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일체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에겐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그는 ‘위격(hypostasis)’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그리고 ‘본질동등(homoousios)’으로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일체성을 표현했다. 즉,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본 것이다. 22-3)<br>아리우스(256~336년경)는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성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일체성과 성자의 종속성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게다가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다만 완전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에 불과하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된 것일 뿐이다. 23)<br>3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일체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비공유적 속성)을 각각 사용했다. 안카라의 감독 대(大)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父性), 성자의 자성(子性), 성령의 성력(聖力) 또는 성화(聖化)를 말했다.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태어나심을 각각 성부와 성자의 고유성으로 보았고,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으며,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두 사람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9~390)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나아가 그들은 ‘본질동등성’을 ‘본질유사성’으로 해석하는 것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25)<br>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세 명의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유개념(類槪念)으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하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비교는 일체성보다는 구별을 부각시킨다. 이를 빌미로 삼아 아리우스파들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란 삼신(三神)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일체성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으며 본질은 곧 속성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26)<br>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를 직접 알 수 없다는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 등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원형인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식은 경험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 신 인식을 신 체험에서 출발시켜서 그 원인자를 찾아 나선다. 최초의 원인자인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신 인식과 신 언설은 유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유비론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원인성과 완전성의 관점에서 표현한다. 세계의 피조성에서 나오는 인식은 하나님이 제1 원인자임과 그분의 본질의 일체성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육신이나 삼위일체론은 본성적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창조는 자연적 필연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산물이다. 즉,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성육한 성자와 성령의 선물로 완성되는 구원을 올바르게 사유할 수 있다. 29)<br>종교개혁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데서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을 말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을 학당이 아니라 교회의 소관사로 삼았다. 루터(1483~1546)는 삼위일체론에서 정착된 용어들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삼위일체론’도 용어로서는 만족하지 않았다. ‘관계’는 신성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했고, ‘본질동등성’도 원래 성경 바깥에서 온 용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어들, 이를테면 삼위일체론이라는 용어도 이단을 경계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칼뱅(1509~1564)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성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성부가 아니며, 성령도 성자가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별된다는 사실만을 공유한다면, 모든 용어들은 사라져도 좋다고 말한다. 30)<br>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 교회와 세상<br>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인 교회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배로 이루어지며, 예배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를 이룩한다. 이 하나님은 내적으로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서 서로 관계하고 교제하시며, 외적으로는 예배자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교제로 예배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며 참여한다. 예배자는 이 원초적 교제에 기초하여 형제자매로 결합하고 서로서로 교제한다. 예배자가 나누는 인간적인 교제는 이 신적인 교제 위에서야 가능하다. 구원의 경륜과 배포(配布)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했다. 구원을 삼위 하나님의 협의와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구원이 오로지 구원론적으로만 제한되고 급기야는 인간론적인 개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참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그의 본질에 참여함에 있다(벧후 1:4).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도의 교제도 포함한다. 35-6)<br>나오며: 예배와 삶의 세계의 통합<br>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삶이다. 삼위일체론은 이론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이다. 예배에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뵐 수 있고, 그분과 누리는 교제에서 그분을 받는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배자의 위격을 주고받는 교제이다. 예배자는 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엄밀히 말해서 예배자는 예배에서 받을 뿐이다. 물론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자 자신을 드린다. 그렇지만 예배자가 자신을 드리는 곳은 교회와 세상이다. 예배자는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받아 교회와 세상에서 그분들을 드러내고 높이고 영광을 돌린다. 예배가 이론(관조)에 해당한다면, 교회와 세상은 실천에 해당한다. 예배가 튼튼하지 못하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 수가 없다. 교회가 예배가 아닌 일에 열중하거나, 무신론,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종교형태와 구별될 수 없다면,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딤후 3:5)과 다를 바가 없다. 4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398/58/cover150/e8952214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985878</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다정한 물리학 / 해리 클리프 - [다정한 물리학 - 거대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을 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99390</link><pubDate>Mon, 06 Apr 2026 07: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9939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22530820&TPaperId=171993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09/29/coveroff/e1225308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22530820&TPaperId=1719939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다정한 물리학 - 거대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을 때</a><br/>해리 클리프 지음, 박병철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2년 09월<br/></td></tr></table><br/>1장 · 기본 조리법<br>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학자들은 목탄 같은 가연성 물체에 불을 붙이면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물질이 방출되면서 타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즉, 목탄에는 다량의 플로지스톤이 함유되어 있어서 한번 불을 붙이면 오랫동안 탈 수 있으며, 플로지스톤이 완전히 고갈되거나 주변의 공기가 플로지스톤을 더 이상 흡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연소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물체가 탈 때 플로지스톤이 방출된다면 연소가 끝난 후에는 무게가 가벼워져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금속이 불에 타면 타기 전보다 무거워진다. 라부아지에는 정반대의 설명을 제시했다. 연소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 방출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기가 물체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에 탄 물체가 무거워지는 것은 연소 과정 중에 공기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것이 탈플로지스톤 공기가 아니라 ‘연료와 결합하여 연소를 일으키는 기체’임을 깨닫고, 이것을 “산소oxygen”로 명명했다. 21-3)<br>2장 · 가장 작은 조각<br>돌턴은 이슬비가 내리는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잉글랜드 북서부의 호수가 많은 지역: 옮긴이)로 종종 산책하러 나갔는데, 습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이런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이 축축한 공기 속에 습기가 더 흡수될 여지가 남아 있을까?” 그렇다. 돌턴을 원자론으로 이끈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돌턴의 실험은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용기 안에 욱여넣은 공기의 양에 상관없이, 흡수되는 수증기의 양이 항상 일정했던 것이다. 마치 공기와 수증기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 채(즉,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개의 공기 원자나 두 개의 수증기 원자는 서로 상호작용을 교환하지만, 공기 원자와 수증기 원자는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원자가 물에 녹는 정도를 좌우하는 요인이 “원자의 무게”라고 주장했다. 즉, 무거운 원자가 가벼운 원자보다 물에 잘 녹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을 증명하려면 원자들 사이의 상대적인 무게를 알아야 한다. 29-30)<br>19세기 초에는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두 종류의 기체가 알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탄화산소carbonic oxide(무색의 독성기체)이고 다른 하나는 탄산carbonic acid(조지프 블랙이 발견한 ‘고정공기.’ 실험실에서 수많은 쥐들이 과학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이 기체를 마시고 질식했음)이었다. 돌턴은 고정된 양의 탄소와 결합하여 위의 두 기체를 만드는 산소의 양을 측정함으로써, 탄산에 함유된 산소가 탄화산소에 함유된 산소보다 두 배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그의 원자 이론을 적용하면 탄화산소는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가장 단순한 화합물이며(현대식 용어로는 일산화탄소이다), 탄산은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화합물이다(현대식 용어로는 이산화탄소이다). 이로써 돌턴은 탄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상대적 질량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얻은 탄소와 산소의 질량 비율은 약 1.30:1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알려진 1.33:1과 거의 비슷하다. 31)<br>3장 · 원자의 구성성분<br>당시 과학계는 음극선의 정체를 놓고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쪽 진영은 음극선이 라디오파나 빛, 또는 X-선 같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진영은 이온ion처럼 음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실험데이터에 기초하여 일련의 계산을 수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음극선의 질량을 전하로 나눈 값이 수소이온을 전하로 나눈 값보다 약 1,000배쯤 작게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음극선의 전하량이 수소이온의 전하량보다 훨씬 크거나 (2) 음극선의 질량이 수소이온의 질량보다 훨씬(아마도 수천 배 이상) 작다는 뜻이다. 1897년 10월 톰슨은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양전하의 바닷속에 동심원을 따라 미립자가 배열되어 있는” 원자모형atomic model을 최초로 제시했다. “음극선의 구성 입자이자, 음전하를 띠고 있으면서 모든 원자에 들어 있는 엄청나게 가벼운 입자”는 오늘날 ‘전자electron’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44-6)<br>지난 10년 동안 방사선에 대하여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일부 원자는 왜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원자로 변신하는가? 그리고 방사선에 담긴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러더퍼드의 계산에 의하면 방사성 붕괴가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가장 격렬한 화학반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보다 무려 수백만 배나 강력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원자의 내부 어딘가에 방대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1911년 러더퍼드는 원자핵의 발견을 훨씬 뛰어넘어 아원자세계의 그림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원자핵은 원자보다 수만 배 작으면서 원자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가벼운 전자구름이 선회하고 있다. 원자를 축구장 크기만큼 확대하면 원자핵은 센터서클 중앙에 놓인 작은 구슬쯤 되고, 전자는 관중석 어딘가에서 열심히 돌고 있을 것이다. 48, 51)<br>그러나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태생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맥스웰의 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가속운동을 하는 하전입자(전하를 띤 입자)는 전자기파(빛)를 방출한다. 원운동(궤도운동)도 엄연한 가속운동이므로,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는 전자기파를 방출하면서 에너지를 잃을 것이고, 에너지가 작아지면 궤도반지름도 작아진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 전자는 나선을 그리면서 서서히 원자핵에 가까워지다가 결국은 원자핵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의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문제는 닐스 보어Niels Bohr가 “양자quantum”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보어는 전자가 특정한 궤도만 돌 수 있으며,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점프할 때마다 광양자를 방출한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원자모형에 의하면 전자는 원형 철로를 달리는 기차처럼 자신에게 할당된 궤도만 돌 수 있기 때문에, 원자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51-2)<br>4장 · 원자핵 분해하기<br>당구 게임에서는 한 공이 다른 공을 때리면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폴로늄에서 자연적으로 방출된 알파입자가 베릴륨의 핵을 때리면 투과력이 높은 방사선이 방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렌과 프레데리크가 관측했던 감마선이다. 이 감마선이 다량의 수소 원자를 포함한 파라핀 왁스를 때리면 수소 원자의 핵, 즉 양성자가 빠른 속도로 방출된다. 놀라운 것은 파라핀 속의 양성자(수소 원자핵)가 감마선과 충돌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갖고 튀어나온다는 점이다.&nbsp; 양성자가 이렌 퀴리의 실험에서 측정된 값만큼 빠르게 가속되려면 양성자를 때린 감마선은 약 5,000만 eV(또는 50MeV)의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폴로늄에서 방출된 감마선의 에너지는 아무리 커도 5.3MeV를 넘지 않는다. 어떻게 자신이 흡수한 에너지보다 10배나 큰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베릴륨 원자핵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63)<br>채드윅은 베릴륨에서 방출된 방사선을 중성자로 간주하면 에너지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감마선은 질량이 없기 때문에, 파라핀 왁스에서 무거운 양성자가 튀어나오도록 만들려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은 탁구공을 던져서 볼링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nbsp; 그러나 중성자는 양성자와 질량이 비슷하기 때문에, 양성자를 중성자로 때리는 것은 볼링공을 또 다른 볼링공으로 때리는 것과 비슷하다. 양성자를 방출시키는 데 필요한 감마선의 에너지는 50MeV나 되지만, 중성자라면 4.5MeV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값은 베릴륨 핵에 흡수된 알파입자의 에너지 5.3MeV보다 작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집합이었다. 원자핵 안에서 베타붕괴beta decay로 알려진 붕괴 현상이 일어나면 중성자가 양전하를 띤 양성자로 변하면서 음전하를 띤 전자를 외부로 방출한다. 이로써 중성자는 양성자, 전자와 함께 원자핵을 이루는 구성성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64-5)<br>5장 · 열핵 오븐<br>수소 원자핵(양성자)에 알파입자를 발사하면 대부분이 튕겨 나오지만, 알파입자와 수소 원자핵 사이의 거리가 1천×1조분의 1m 이내로 가까워지면 갑자기 두 입자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강력)이라는 새로운 힘이 발견된 첫 번째 사례였다. “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이 힘이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전기력을 이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원자핵을 에워싸고 있는 “밀어내는 전기장”은 성을 에워싼 가파른 성벽과 비슷하다. 양성자가 이런 성에 침투하려면 성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점프해야 한다. 일단 벽을 넘기만 하면 강력이 작용하여 외부에서 침투한 양성자를 원자핵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일은 양성자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으며, 속도가 그 정도로 빨라지려면 온도가 수천만 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우주에는 자연적으로 초고온 상태를 유지하는 곳이 있다.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라 무수히 많다. 69-70)<br>가모프는 우라늄핵에서 방출되는 알파입자에 파동역학을 적용하면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아도 원자핵에서 탈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모프는 알파입자가 핵을 탈출하기 전에 성벽 안에서 이리저리 튕기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고전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작은 공처럼 생긴 알파입자는 누군가가 별도의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절대로 성벽을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알파입자를 파동으로 간주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물통의 갈라진 틈으로 물이 새어 나오듯이, 알파입자의 파동이 성벽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알파입자는 성벽 밖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물론 확률이 아주 작지만 분명히 0은 아니다. 그러므로 파동함수가 붕괴되었을 때, 알파입자는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은 것처럼 우라늄 원자핵의 바깥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이것을 양자터널효과quantum tunneling effect라 한다: 옮긴이). 가모프의 양자핵이론은 알파입자가 우라늄핵에서 탈출하는 비결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했다. 74-5)<br>후테르만스와 엣킨슨 두 사람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입자가 장벽을 통과하여 원자핵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면, 밖에 있던 입자가 원자핵 안으로 침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모프의 이론을 태양 중심부와 비슷한 온도에 적용해 보니, 정말로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양 중심부에서 양성자가 양자터널을 통해 ‘전기적 척력’이라는 벽을 뚫고 원자핵 안으로 진입한다면, 낮은 온도에서도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에딩턴의 계산에 따르면 태양에 있는 양성자는 성벽 꼭대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핵 주변을 에워싼 장벽은 높을수록 얇아지기 때문에, 태양 중심부의 양성자들이 장벽의 얇은 부분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빠르게 움직이면, 굳이 장벽 꼭대기에 도달하지 않아도 양자터널효과에 의해 원자핵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다. 마침내 태양의 핵융합 반응은 에딩턴이 계산했던 중심부의 온도(약 4,000만 ℃)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 75-6)<br>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에딩턴은 태양 중심부의 온도를 4,000만 ℃로 추정했는데, 이 온도에서는 양성자-양성자 연쇄반응이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에 태양이 지금보다 훨씬 밝아야 한다. 에딩턴이 계산한 4,000만 ℃는 태양의 성분이 지구와 거의 같다는 가정하에 얻은 값이었다. 그러나 1925년에 영국의 여성 천문학자 세실리아 페인Cecilia Payne은 태양과 별의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이며, 무거운 원소는 소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양의 73%가 수소이고 25%가 헬륨이라는 가정하에 에딩턴의 계산을 다시 해보면, 태양 중심부의 온도는 1,900만 ℃까지 떨어진다. 베테가 이 온도에서 양성자 -양성자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계산해 보니, 실제 관측된 태양에너지와 거의 비슷한 값이 얻어졌다. 이로써 태양이 열을 방출하는 이유가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태양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수소를 원료로 삼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헬륨을 만들어왔다. 79)<br>6장 · 별<br>초신성이 폭발하면 은하에 있는 모든 별(수천억 개)을 합한 것보다 훨씬 강렬한 에너지가 방출된다(초신성은 적색거성赤色巨星, red giant이나 백색왜성白色矮星, white dwarf처럼 특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별이 아니라, “마지막 진화단계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폭발하는 별”을 의미한다.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별은 폭발해야 비로소 별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星’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옮긴이). 별의 에너지원은 수소이므로, 세월이 흘러 중심부가 모두 헬륨으로 바뀌면 같은 방법으로는 더 이상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별이 이 단계에 이르면 팽창력의 근원인 열이 공급되지 않아서 자체 중력에 의해 안으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엄청난 중력에너지에 의해 중심부가 대책 없이 뜨거워지다가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을 일으킨다 ― 이것이 바로 초신성이다. 이 사실을 알아낸 호일은 관련 계산을 수행한 끝에 “자체 중력으로 붕괴되는 별의 내부 온도는 원리적으로 40억 ℃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91-2)<br>별의 온도와 밀도가 적절하면 헬륨끼리 충돌하는 횟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탄소-12로 자랄 수 있는 베릴륨-8의 개수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수도 있다. 즉, 베릴륨-8의 생성과 붕괴가 적정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면, (개개의 핵의 수명이 엄청나게 짧다 해도)매 순간 일정한 개수의 베릴륨-8 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별의 내부에서 탄소-12가 생성되기만 하면, 곧바로 다른 헬륨핵과 충돌하여 산소-16이 만들어진다. 이것 자체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지만(산소는 우주의 중요한 구성성분이다), 반응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서 생명체의 형성에 반드시 필요한 탄소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거나 우주에는 호일 같은 탄소기반 생명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탄소가 모두 소모되는 것을 막아주는 다른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순간만을 학수고대해 왔던 호일은 기발하면서도 환상적인 답을 떠올렸다. “탄소-12가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려면 아주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92-3)<br>호일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 호일은 실험결과를 같다 ―“탄소-12 원자핵이 놓일 수 있는 들뜬상태 중에 베릴륨-8과 헬륨핵이 충돌할 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에너지와 같은 에너지준위가 존재한다면 탄소-12의 생성 속도가 아주 빨라져서, 이들 중 상당수가 산소-16으로 바뀌어도 우주에는 충분히 많는 탄소-12가 남을 수 있다.” 분석하다가 자칫하면 우주에 생명체가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음을 깨닫고 깊은 경외감에 빠졌다. 생명의 기반인 탄소-12 외에 산소-16에도 이와 비슷한 에너지준위(7.19MeV)가 존재한다면, 별의 내부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탄소-12는 순식간에 산소로 변했을 것이다.[ 5 ] 그런데 산소-16 핵의 특성을 분석해 보니, 천만다행으로 그 값은 7.19MeV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7.12MeV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릴륨-8이 두 개의 헬륨핵으로 분해되지 않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면, 별이 헬륨을 너무 빠르게 소모하여 탄소를 비롯한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것이다. 93-5)<br># 원자핵 속의 양성자와 중성자는 핵 주변을 선회하는 전자처럼 몇 개의 특정한 에너지를 갖는 상태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에너지준위energy level’라 한다.&nbsp;<br>7장 · 궁극의 우주요리사<br>현재 우리의 우주는 물질(기체,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지배하고 있지만, 탄생 직후 몇 분 동안 우주를 지배한 것은 물질이 아닌 빛이었다. 이 시기의 우주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물질입자(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격동하는 광자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거품에 불과했다. 이 “태초의 빛”은 처음 몇 분 동안 광자 한 개가 원자핵을 산산이 분해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에, 원자핵이 형성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하여 중수소핵이 되었다 해도, 순식간에 고에너지 광자에게 얻어맞아 분해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분 동안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고, 부피가 증가함에 따라 온도는 빠르게 식어갔다. 약 3분이 지난 후에는 우주 오븐의 온도가 수십억 도까지 내려가서 광자는 더 이상 중수소핵을 분해할 수 없게 되었으며, 바로 이때부터 중수소의 양이 급증하면서 우주 조리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117-8)<br>빅뱅 후 처음 1초 동안 원시 불덩이 속 입자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었으며, 양성자와 중성자는 고에너지 입자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서로 상대방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는 사건과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는 사건이 거의 같은 빈도로 일어났다. 즉, 초창기의 우주는 평등한 세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주가 식어가면서 양성자와 중성자의 미세한 질량 차이 때문에(중성자 › 양성자)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양성자가 무거운 중성자로 변하려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양성자 → 중성자 변환은 중성자 → 양성자 변환보다 드물게 일어났고, 이로 인해 우주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보다 많아졌다. 처음 1초가 지났을 무렵,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기에는 우주의 온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중성자의 수가 동결되었는데, 이때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은 약 6:1이었다. 이제 핵융합이 일어날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려면 몇 분 더 기다려야 한다. 118)<br>그러나 이 시간 동안 홀로 고립된 중성자는 안정한 입자가 아니어서 평균 15분 만에 양성자와 전자, 그리고 반뉴트리노로 붕괴된다. 그 결과 빅뱅 후 2분이 지났을 때 중성자의 일부가 스스로 양성자로 변환되어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1까지 벌어졌고, 바로 이런 상태에서 핵융합 용광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후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중성자는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진 헬륨-4로 융합되었다. 그렇다면 양성자는 얼마나 남았을까? 처음에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 1이었으므로, 만일 양성자 14개와 중성자 2개에서 출발했다면 헬륨 1개가 만들어지고 양성자 12개가 남을 것이다. 즉, 헬륨핵과 양성자의 비율은 1: 12이다. 그런데 헬륨은 양성자보다 4배 무거우므로, 질량 비율로 따지면 헬륨 : 양성자 = 4 : 12가 된다. 다시 말해서,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25%의 헬륨과 75%의 수소(융합에 참여하지 않은 양성자)로 출발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관측된 원소의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18-9)<br>8장 · 양성자 조리법<br>1960년대에 자신의 이론에 ‘팔정도八正道, Eightfold Way(열반에 이르는 8가지 수행법)’라는 이름을 붙인 겔만은 몇 년 전부터 영감 어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생물을 과科와 종種 등으로 분류하는 생물학자처럼, 겔만은 이미 알려진 강입자를 스핀 = 0인 중간자와 스핀 = 1/2인 바리온으로 나누고, 더 깊은 곳에서 각 입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이 같으면서 전하가 다른 ‘쌍’처럼 보였고, 둘 다 스핀이 1/2이므로 바리온에 속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다음으로 전하가 +, 0, -인 파이온(π- 중간자)이 있고, 스핀 = 0이면서 두 가지 전하(+, -)로 존재하는 중간자 케이온이 있다. 겔만은 입자분류게임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목록의 깊은 저변에 심오한 대칭이 존재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겔만은 몇 년 전부터 “강입자가 더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내가 발견한 대칭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130, 132)<br>겔만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소설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를 읽다가 “머스터 마크에게 세 개의 쿼크를!Three quarks for Muster Mark!”이라는 문장에 눈길이 꽂혀, 그 감지되지 않은 입자를 '쿼크quark'라고 명명했다. 겔만은 쿼크가 ‘위up’와 ‘아래down’, 그리고 ‘야릇한strange’이라는 세 종류로 존재하면 강입자의 대칭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단, 위쿼크up quark의 전하는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의 전하는 –1/3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쿼크(그리고 이들의 반입자)를 잘 조합하면, 실험실에서 발견된 모든 강입자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 파이온이나 케이온 같은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antiquark가 결합한 입자이고, 바리온은 세 개의 쿼크로 되어 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성자와 중성자이다. 양성자는 2개의 위쿼크와 1개의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고(uud), 중성자는 두 개의 아래쿼크와 한 개의 위쿼크로 이루어져 있다(udd). 133)<br>1973년, CERN의 초대형 거품상자 가가멜Gargamelle이 드디어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 양성자 안에 있는 “점 같은 물체”에 튕겨서 빠르게 날아가는 뉴트리노가 포착된 것이다. 게다가 이 입자는 겔만과 츠바이크의 예측대로 분수전하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었다. 쿼크를 직접 봤다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입자가속기를 동원해도 강입자 감옥에서 쿼크를 해방시키기 못했으며, 쿼크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곤 강입자와 부딪힌 후 튕겨 나온 입자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쿼크는 강입자 내부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강입자 안에서 쿼크를 결합시키는 힘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흔히 강력强力, strong force으로 알려진 이 힘은 항상 인력引力으로 작용하며, 지금까지 발견된 힘 중에서 가장 강하다.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단단히 묶어 놓는 강한 핵력은 그보다 훨씬 강한 강력의 메아리였다(사실 '강력'과 '강한 핵력'은 같은 뜻이다). 136)<br># 지금까지 알려진 쿼크는 모두 6가지이다. 위쿼크up quark와 맵시쿼크charm quark, 그리고 꼭대기쿼크top quark의 전하는 (전자의 전하를 –1이라고 했을 때)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 바닥쿼크bottom quark의 전하는 –1/3이다.<br>1973년에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그로스David Gross와 프랭크 윌첵Frank Wilczek, 그리고 데이비드 폴리처David Politzer는 강력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입자가 아주 강한 에너지로 충돌하면, 강력의 바이스vise(죔쇠) 역할을 하는 부분이 느슨해진다는 사실을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알아낸 것이다. 이는 곧 에너지가 아주 크면 강력의 세기가 약해져서 강입자가 “자유쿼크와 글루온으로 이루어진 과열된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쿼크-글루온 플라즈마quark-gluon plasma’라 한다. 과열된 쿼크-글루온 플라즈마 속에서는 초고온, 초고밀도 상태에서 쿼크와 글루온이 강입자의 경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 사실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쿼크-글루온 플라즈마가 존재할 정도로 극단적 환경이 조성되었던 시기는 “빅뱅 후 100만분의 1초 이내” 뿐이었다. 약 100만분의 1초가 지난 후에는 우주가 충분히 식어서 쿼크와 글루온이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41)<br>9장 · 입자란 진정 무엇인가?<br>디랙은 패러데이의 전자기장과 아인슈타인의 광자를 교묘하게 조합하여 “양자장quantum field”이라는 새로운 물리적 객체를 만들어냈다. 여러 면에서 양자장은 패러데이의 고전 전자기장과 매우 비슷하다.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전기력과 자기력을 전달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흔들면 빛의 형태로 장을 가로지르는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디랙의 양자장과 고전 전자기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고전 전자기장에서는 파동을 임의의 크기로 만들 수 있지만, 양자장에서는 파동의 최소 크기가 정해져 있어서, 이보다 작은 파동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는 작은 ‘덩어리’의 단위로 존재한다. 전자기장에서는 0개나 1개, 2개, 또는 1,000조 개의 광자가 잔물결을 일으킬 수 있지만, ‘1/2개의 광자’나 ‘10/3개의 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항상 광자의 정수배로 존재하는 것이다. 좀 더 유식하게 표현하면 “전자기장은 양자화되어 있다quantized.” 151-2)<br>그러나 디랙의 이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했다. 광자가 전자기장에 생긴 잔물결이라면, 다른 물질입자는 어떻게 되는가? 전자와 양성자는 광자와 근본부터 다른 입자인가? 물론 이들도 파동-입자 이중성을 갖고 있지만 만들어낼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수시로 탄생했다가 소멸되는 광자와 달리, 전자와 양성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 같았다. 1920년대의 양자역학은 특수상대성이론에 부합되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해 움직이고 있는 두 관측자가 얻은 양자역학의 법칙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양자역학이 아직 불완전했다는 뜻이다. 마침내 디랙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후보를 찾아냈다. 이 방정식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모두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전자가 팽이처럼 자전하면서 갖게 된 특성까지 자연스럽게 설명해 주었다(이 특성을 스핀spin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방정식은 “스핀이 위를 향하는 전자”와 “스핀이 아래로 향하는 전자”라는 두 개의 해를 갖고 있었다. 152-3)<br># 전자를 포함한 모든 물질입자는 1/2의 스핀을 갖고 있으며 위( +1/2)와 아래(–1/2), 두 가지 값을 가질 수 있다.<br>그러나 디랙의 머릿속에는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유도한 방정식에 무언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방정식에는 총 4개의 해가 존재했는데, 처음 2개는 스핀이 업up(↑)인 전자와 다운down(↓)인 전자에 해당하여 별문제가 없었지만, 남은 두 개는 “음의 에너지negative energy를 가진 전자”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입자에 대응되어 디랙의 심기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렵게 유도한 방정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디랙은 모든 가능성을 철저하게 타진한 후, 물리학의 역사를 바꿀 과감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음에너지 상태로 떨어지는 전자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음에너지 상태가 이미 다른 전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단, 이 전자는 전하의 부호가 일상적인 전자와 반대여야 한다. “양전하를 띤 전자”라는 뜻이다. 음에너지 상태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디랙은 1931년에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을 날렸다 ―“자연에는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54-5)<br>디랙은 순수한 사고思考만으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물질의 존재를 예견했다. 그리고 1932년 실제로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발견됐다.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물질의 거울에 비친 상象인 ‘반물질antimatter’의 세계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물질입자마다 “모든 물리적 특성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디랙이 예견했던 “양전하를 띤 전자”는 오늘날 ‘양전자positron’, 또는 ‘반전자antielectron’라고 불린다(임의의 입자와 모든 것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입자를 반입자antiparticle라 한다: 옮긴이). 반물질이 발견되면서 “물질은 영원하다”는 믿음도 허물어졌다. 입자-반입자 쌍이 생성될 정도의 강한 에너지로 두 입자를 충돌시키면 새로운 물질입자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입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운수 사납게 자신의 반입자 짝을 만나면, 강렬한 섬광(복사)을 방출하면서 무無로 사라진다. 156)<br>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입자들은 각기 자신만의 양자장에 대응된다. 광자는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에 생긴 잔물결이고, 전자와 양전자는 ‘전자장electron field’에 생긴 잔물결이며, 위쿼크는 ‘위쿼크장up quark field’라는 양자장에 생긴 잔물결이다. 강입자충돌기LHC에서 두 개의 양성자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일련의 양자장에 ‘자연의 종’이 울리면서 잔물결의 홍수가 양자 교향곡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실험자는 감지기에 도달한 잔물결로부터 교향곡의 악보를 재구성하여 악기의 종류를 알아내는 식이다. 우리는 이 잔물결을 입자로 해석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양자장의 동요이다. 우리가 아는 한, 우주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입자가 아닌 양자장이다. 보이지 않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유체 같은 물질이 가장 작은 원자에서 가장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질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화학원소도, 원자도, 전자도, 쿼크도 아닌 양자장이다. 156-7)<br>10장 · 최후의 구성성분<br>이 세상 모든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음전하를 띤 전자와 양전하를 띤 원자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양전하를 띤 양성자와 전하가 없는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양성자와 중성자를 합쳐서 핵자nucleon라 한다: 옮긴이). 그리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위쿼크와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의 구성성분은 전자와 위쿼크, 그리고 아래쿼크라는 세 가지 입자로 귀결된다. 물론 구성성분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물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자의 구조는 구성요소와 함께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중 전자와 원자핵을 결합시키는 전자기력과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키는 강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두 힘은 양자장(전자기장과 글루온장)을 통해 매개되며, 이 양자장에 불연속의 에너지 덩어리를 투입하면 양자화된 작은 파문(또는 입자라고도 함)이 생기는데, 전자기력의 경우에는 이것을 광자라 하고, 강력의 경우에는 글루온이라 한다. 168)<br>그러나 미시세계에는 아직 논하지 않는 또 하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힘들 중에서 가장 희한한 힘―그것은 바로 약력weak force이다. 약력이 특별한 이유는 한 종류의 입자를 다른 종류의 입자로 변환시키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하전입자와 전자기장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 QED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정확한 이론으로, 이론과 실험의 오차가 100억분의 1을 넘지 않는다. 이 놀라운 이론의 핵심에는 “국소게이지대칭local gauge symmetry”이라는 아름다운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줄리언 슈윙거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이 원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전자기력, 강력, 약력 등 근본적인 힘은 자연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대칭으로부터 나타난 결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칭이란, 주어진 물리계(기체 상자, 또는 태양계, 혹은 우주 전체)에 어떤 조작을 가했는데 그 후에도 물리계가 변하지 않을 때, 그 물리계에는 대칭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168-70)<br>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대칭이 존재하는 곳에 그에 해당하는 보존량(변하지 않는 양)이 존재한다. 회전대칭이 존재하는 경우, 그에 대응하는 보존량은 각운동량(계가 갖고 있는 회전능력)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수많은 실험이 실행되었는데, 운동량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계의 운동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으며, 계의 각 요소에 재분포되는 것만 가능하다. 에너지와 운동량이 보존되는 이유도 대칭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에너지가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시간변환에 대하여 대칭이기 때문이고(즉, 시간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간변환대칭이라 한다), 운동량이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똑같기 때문이다(즉, 공간 전체를 임의의 방향으로 이동시켜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병진대칭이라 한다). 그러나 대칭이 낳은 결과 중에는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힘 자체가 바로 대칭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170)<br>여기서 물리학자들은 역설적 상황에 직면했다. 약력입자(약력을 매개하는 입자. W입자와 Z입자)는 큰 질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력은 매우 강하면서 먼 곳까지 작용하는 장거리힘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입자가 무거우면 이론에서 무한대가 속출하고, 약력의 형태를 결정해 준 보석 같은 대칭까지 붕괴된다. 약력의 양자장 이론이 폐기될 위험에 처했다. 잠깐… 혹시 대칭이 붕괴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약력을 매개하는 입자는 기본적으로 질량이 없지만, 무언가로부터 질량을 획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서 ‘힉스장Higgs field’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nbsp; 힉스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접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양자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은 스핀 = 1/2인 전자에 대응되는 물질장物質場, matter field이거나, 스핀 = 1인 광자에 대응되는 역장이었다. 그러나 힉스장에 대응되는 입자의 스핀은 0이라는 특이한 값을 갖고 있다. 175)<br>이뿐만이 아니다. 힉스장은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0이 아닌 값을 가져야 한다. 전자기장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이다. 광자가 알뜰하게 제거된 공간에서는 전자기장에 잔주름이 전혀 생기지 않으므로, 양자적 불확정성에 의해 나타나는 약간의 요동을 제외하면 전자기장의 값은 모든 곳에서 0이다. 그러나 힉스장에서 모든 입자를 제거해도 장의 값은 0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즉, 모든 우주공간은 균일한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 있다. 우주가 처음 탄생하던 순간에 힉스장의 값은 0이었고 세 개의 약력입자 W+, W-, Z0는 질량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SU(2)라는 대칭이 존재했다. 그러나 우주 탄생 후 1조분의 1초가 지났을 때 힉스장의 “스위치가 켜지면서” 0이 아닌 값을 갖게 되었고, 모든 공간은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약력입자는 갑자기 질량을 갖게 되었다. 초기에 존재했던 완벽한 대칭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으면서 “강한 장거리힘”이었던 약력이 “약한 단거리힘”으로 바뀐 것이다. 175)<br>우주 탄생 직후에는(탄생의 순간부터 1조분의 1초까지. 이토록 짧은 시간에는 ‘직후’라는 표현이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더 좋은 단어가 없다: 옮긴이) 전자와 쿼크를 비롯하여 모든 물질입자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걸쭉해진” 힉스장 때문에 입자의 속도가 느려졌고, 이들이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교환하면서 없던 질량을 획득하게 되었다. 힉스장이 전자나 쿼크에 끈끈한 액체처럼 들러붙어서 속도를 늦추고 질량을 주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에 광자나 글루온 같은 입자는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힉스장 속에서도 질량이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힉스장은 약력입자뿐만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입자에게도 질량을 부여한다. 힉스장이 없으면 전자 같은 입자가 광속으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원자가 형성될 수 없고, 자연에 존재하는 기본 힘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힉스장이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할 수 없다. 175)<br># 힉스장은 전자와 쿼크 같은 기본 물질입자에만 질량을 부여한다. 그러나 양성자와 중성자가 갖고 있는 질량의 대부분은 쿼크의 질량이 아니라 쿼크를 결합시키는 글루온장의 에너지이다. 즉,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힉스장이 아닌 강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br>11장 · 만물의 조리법<br>만물의 창조 작업은 빅뱅 후 100만분의 1초가 지났을 때 거의 마무리되었다. 처음 100만분의 1초 동안 우주는 엄청나게 뜨거워서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파괴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면서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고, 100만분의 1초가 지난 시점에는 플라즈마에서 양성자와 반양성자 쌍이 만들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면서 대량 멸종이 시작되었다.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무無로 소멸되고, 이 과정에서 생성된 무지막지한 복사에너지가 모든 물질을 쓸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 예상대로 진행되었다면 물질과 반물질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주에는 텅 빈 공간과 그 안을 외롭게 날아다니는 몇 개의 광자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 멸종의 와중에 입자의 100억분의 1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어쨌거나 입자가 반입자보다 100억분의 1쯤 많았기에, 이 자투리 입자들이 진화하여 지금의 은하와 별, 행성, 인간, 그리고 사과파이가 되었다. 187)<br># ‘사하로프 조건Sakharov conditions’(우주 초기에 물질이 생성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1. 쿼크가 반쿼크보다 많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2.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은 불완전해야 한다.3. 물질 생성 과정이 진행될 때, 우주는 열적평형상태thermal equilibrium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br>자연의 법칙이 좌우대칭이라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가정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계 미국인 실험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의 놀라운 실험결과가 알려지면서 오래된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1956년 미국 연방표준국의 지원을 받아 실행된 우젠슝의 실험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자연의 기본 힘 중 하나인 약력이 “오른손잡이 입자right-handed particle”보다 “왼손잡이 입자left-handed particle”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입자에 두 손이 달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잡이”는 입자의 자전효과와 유사한 양자적 스핀과 관련되어 있다. 약력은 분명히 거울 대칭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 후로 이 현상은 “반전성위배parity violation”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여기서 말하는 반전성parity은 ‘좌우대칭성’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옮긴이). 반전성이 위배된 궁극적 이유는 약력이 왼손잡이 전자에게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89-90)<br>스팔레론은 전자기력과 약력, 그리고 힉스장의 기원을 설명하는 약전자기이론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 분명히 스팔레론은 입자가 아니다. 전자나 힉스보손 같은 입자는 기타 줄을 퉁길 때 생성되는 단일 음처럼 평균값 주변을 오락가락하는 단일 양자장의 진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스팔레론은 이보다 훨씬 미묘한 개념으로, 하나의 양자장이 아니라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바로크양식처럼 섞여서 한꺼번에 움직이는 “양자장의 오케스트라”에 해당한다.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집합적으로 움직이면 스팔레론이 생성되고, 스팔레론은 입자를 반입자로 바꾸거나 반입자를 입자로 바꾸는 기적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스팔레론은 물질을 만드는 기계로서, 여기에 약간의 반물질을 투입하면 일상적인 물질입자가 생성된다. 이 기적 같은 능력 덕분에 스팔레론은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 중 입자 -반입자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후보이자,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었다. 192)<br>일본 기후현岐阜縣 히다시飛騨市 근처의 이케노산池野山 지하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물 중 하나인 슈퍼 카미오칸데Super-Kamiokande, 슈퍼- K가 열심히 가동 중이다. 슈퍼- K는 세계 최대 규모의 뉴트리노 감지장치로서, 물질의 기원을 밝혀줄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2020년 4월, 슈퍼-K에서 작업 중인 150명의 연구원들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뉴트리노가 깨뜨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앞으로 더욱 정밀한 측정을 통해 사실로 판명된다면 물리학계에는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전하 -패리티 대칭이 오직 쿼크의 약한 상호작용(약력)을 통해서만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뉴트리노도 대칭을 깰 수 있다면 빅뱅 직후 물질이 생성되는 두 번째 길이 열리는 셈이다. 우주에서 가장 흔한 물질입자인 뉴트리노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것은(슈퍼-K에서 발견된 사실임) 곧 뉴트리노에 질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197-9)<br>뉴트리노는 분명히 질량을 갖고 있었다. 질량이 너무 작아서 관측이 안 되었던 것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뉴트리노의 질량은 0.5eV 이하로서, 전자의 100만분의 1도 안 된다. 왜 그럴까? 뉴트리노는 왜 그토록 작은 질량을 갖게 되었을까? 현재 제일 널리 수용된 답은 “시소 메커니즘see-saw mechanism”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질량이 매우 큰 뉴트리노 3종이 추가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기존의 가벼운 뉴트리노 3종(각각 전자뉴트리노, 뮤온뉴트리노, 타우 뉴트리노)과 균형을 되찾는 식이다. 초경량급 뉴트리노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새로 도입한 슈퍼헤비급 뉴트리노는 질량이 정말로 커야 한다. 예상되는 질량은 양성자의 10억∼1,000조 배 사이로서(109∼1015GeV)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입자보다 무거울 뿐만 아니라, LHC의 최대 출력보다 10만 배 이상 크다. 그러나 초기우주에는 온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이런 입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199)<br>12장 · 누락된 구성요소<br>표준모형을 가장 크게 위협한 도전장은 입자물리학이 아닌 천문학 분야에서 날아왔다. 1930년대에 스위스의 천문학자 프리츠 츠비키Fritz Zwicky는 1,000개가 넘는 은하들로 구성된 코마은하단Coma Cluster의 운동속도를 계산하다가 깜짝 놀랐다. 중력으로 은하단의 형태를 유지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츠비키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성단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암흑물질dunkle Materie, dark matter(영)”이라 불렀다. 암흑물질보다 더욱 신비한 것은 “밀어내는 중력”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암흑에너지이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팽창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이유를 암흑에너지에서 찾고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물론 질량도 포함된다)의 95%를 차지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은하를 모두 더해봐야 전체의 5%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방대한 미지의 바다를 표류하는 작은 거품일 뿐이다. 209-10)<br>모든 기본 입자의 질량은 힉스입자의 ‘246GeV’라는 질량으로부터 결정되었다. 집안에서 보일러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처럼, 우주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다이얼을 왼쪽으로 돌리면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입자의 질량이 작아지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커진다. 여기서 질문 하나 ― 우주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여 훗날 지구에 생명체가 번성하려면 다이얼을 얼마나 정확하게 고정해야 할까? 답: 말도 안 되게, 어마무시하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정말 환상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을 괴롭혀온 유령이 숨어 있다. 찬반양론으로 갈려 숱한 논쟁을 야기했던 그 유령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다중우주”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우주가 “각기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여러 개(또는 무한개)의 우주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황당한 가설을 받아들이면 힉스장이 기적 같은 값을 갖게 된 것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 212, 214)<br>초대칭supersymmetry은 물리학이 직면한 여러 개의 심오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아주 유별난 개념이다. 기존의 이론에 이 개념을 도입하면 빅뱅 무렵에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았던 이유와 암흑물질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초기에 모든 힘들(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이 단 하나의 통일된 힘으로 존재했다는 엄청난 가설까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초대칭의 가장 큰 매력은 난폭한 진공에너지로부터 힉스장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힉스장이 지금처럼 적절한 값(원자가 생성될 수 있는 값)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칭은 자연의 기본 구성요소에 부과된 또 하나의 새로운 대칭으로,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초대칭을 통해 연결되는 두 부류는 입자와 반입자가 아니라 페르미온과 보손이다. 즉, 초대칭은 전자와 쿼크, 뉴트리노 같은 물질입자를 광자, 글루온, 힉스입자 같은 힘입자와 연결시키는 대칭이다. 216)<br># 초대칭짝에 해당하는 입자를 통틀어서 스파티클sparticle(초대칭입자)이라 한다.&nbsp;<br>13장 · 우주 만들기<br>현대물리학은 두 개의 거대한 주춧돌 위에 구축되었다. 미시세계(원자의 입자의 세계)를 서술하는 양자장이론과 거시적 규모에서 우주(은하, 별, 행성 등)의 거동을 서술하는 중력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두 이론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지금까지 실행된 그 어떤 실험도 두 이론에 반하는 결과를 내놓은 적이 없다), 빅뱅의 순간으로 다가가면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자장이론은 중력을 고려하지 않았고, 중력이론은 양자역학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뱅의 순간에는 우주 전체가 아원자규모로 존재했다. 우주 만물(에너지와 장, 시간과 공간)이 원자보다 훨씬 작은 점 안에 밀집되어 있었으므로, 이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중력과 양자역학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 탄생의 순간을 물리학으로 서술하려면 입자물리학과 우주론, 양자장이론,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을 하나로 합친 “양자중력이론quantum theory of gravity”이 필요하다. 231)<br>끈이론은 1970년대에 쿼크를 묶어두는 강력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여 거의 사장된 후 ‘양자중력’이라는 더욱 야심 찬 목표를 내걸고 화려하게 부활한 이론이다. 끈이론은 1984년에 그린과 슈바르츠가 “끈이론에는 수학적 변칙anomaly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명하면서 하루아침에 이론물리학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끈이론의 핵심은 전자를 비롯한 기본 입자들이 야구공 같은 입자가 아니라 “진동하는 끈”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기본 구성요소는 끈이며, 끈이 진동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입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기타 줄의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이 생성되는 것과 비슷하다. 특정 모드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고,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쿼크가 되고, 또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중력자가 되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끈이론은 우주에 초대칭이 존재해야 의미를 갖기 때문에 초대칭 버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다. 234-5)<br>인플레이션은 대표적인 우주 이론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광학망원경으로 빅뱅 후 1조×1조×1 조분의 1초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탐색 수단을 빛에서 중력파로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플레이션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시공간이 휘둘리면서 거친 파동이 생성되었을 것이고, 그 여파는 지금도 우주 곳곳에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들은 파장이 엄청나게 길어지고 강도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지만, 미래형 관측소가 계획대로 완성된다면 우주창조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험실에서 장비를 다루건, 노트에 방정식을 끄적이건, 또는 우주에서 날아온 신호를 분석하건 간에, 모든 과학의 기본은 ‘탐험’이다. 그리고 일단 탐험 길에 올라 새로운 현상과 미스터리를 쫓아가다 보면 출발점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이 여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끝날 것인가? 244-5)<br>14장 · 이것으로 끝인가?<br>과연 우리는 무無에서 사과파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양자역학과 중력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가 탄생한 순간(중력, 시간, 공간, 양자장 등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순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실망스러운가? 그럴 필요 없다. 사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과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플랑크 규모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궁극의 이론을 논할 때가 아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사방에 널려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은 인간을 놀라게 하는 데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해왔다. 지금보다 더 먼 곳을 관측하고 더 작은 영역을 들여다보았을 때 무엇이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이야기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한다면, 우주의 조리법을 발견하는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225-6)]]></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09/29/cover150/e12253082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109298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 / 김준형 -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91767</link><pubDate>Thu, 02 Apr 2026 08: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9176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652637523&TPaperId=171917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0/72/coveroff/e6526375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652637523&TPaperId=1719176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a><br/>김준형 지음 / 창비 / 2025년 06월<br/></td></tr></table><br/>바야흐로 격변의 시대<br>탈냉전과 팍스 아메리카나<br>두번의 위기와 슈퍼맨의 약점<br>미국 패권은 자신의 장점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주로 ‘나쁜 쪽, 나쁜 국가’들의 존재를 통해 반사적 정당성을 얻었습니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의 대외 정책 결정자들에게 다시금 세계를 아군과 적군으로 나눌 수 있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문제는 막강한 미국의 상대로 몇십명의 테러리스트가 빌런이라는 구도는 모양도 빠질 뿐만 아니라 정당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대상이 바로 배후국가들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의 배후를 색출하면서 만들어낸 적이 바로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이란, 이라크, 그리고 북한 세 국가입니다. 거기에 시리아, 리비아, 쿠바, 아프가니스탄을 합쳐서 일곱개의 ‘불량국가 또는 깡패국가’(Rogue states)를 국제사회의 적으로 규정합니다. 미국은 이 깡패국가들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독재자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세계평화가 온다는 전제하에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일어난 전쟁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13-4)<br>균열을 보이던 미국 패권체제를 거세게 흔드는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납니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입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일어나면서 월스트리트가 폭삭 내려앉습니다. 첫번째 전환점이었던 9·11 테러가 미국에 심리적인 타격을 입히고 대외 정책을 변화시켰다면, 2008년의 금융위기는 소련을 붕괴시킨 자본주의가 드디어 그 모순의 폐해를 실제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모색하며 만들어진 것이 지금 우리나라도 참여하고 있는 G20(미국 중국 등 19개의 주요 국가와 2개의 국가연합을 더한 20개의 국가 및 지역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비약적인 성장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중국이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을 흡수해준 덕분에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난 셈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시 냉전 직후의 질서를 어느정도 회복합니다. 그럼 미국은 중국에 고마워할 법도 한데, 그보다는 중국이 이렇게 강해졌다는 데 큰 충격을 받습니다. 14-5)<br>신냉전이 아니다, 파편화다<br>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난 2016년에는 우리가 말하는 서구, 선진국이었던 유럽과 미국에서 사건이 하나씩 발생합니다. 유럽에서는 브렉시트(Brexit), 즉 영국이 EU(유럽연합)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벌어졌고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 두가지 사건은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실제로 구호도 ‘미국/영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같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각종 국제기구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기구와 질서로 인해 오히려 불리해졌으니 거기서 빠져나오거나 무력화시켜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셈입니다. 미국 경제에 손해만 끼친다며 WTO(세계무역기구)에 기금도 내지 않고 자유무역체제를 부정하고, 멋대로 관세를 부과하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트럼프 1기에서는 중국 같은 특정 국가와 상품에 선별적으로 관세를 부과했지만, 2기에 와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부과에 나섬으로써 보호무역주의를 한층 강화합니다. 16)<br>지금까지 미국에 이익을 줬던 국제 협력체제 혹은 세계화 구조가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제 자의적으로 규칙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변화의 엔진인 동시에 결과물이 트럼프이고, 트럼피즘입니다. 트럼피즘은 세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앞에서 말한 미국 우선주의로 국제협력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차원입니다. 두번째는 백인 우선주의를 포함합니다. 세번째는 트럼프 개인 차원의 우선주의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의 선거 구호)의 실천 방식이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심지어 독재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하고 트럼프라는 한 권력자가 대내외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의회를 통하지 않고 행정명령을 남발합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하루 동안은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도 말했습니다. 헌법적으로 불가능한 3선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17)<br>‘신냉전’은 미중 패권 경쟁을 일컫는 자극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오히려 지금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용어는 이것일 겁니다. ‘파편화’(fragmentation). 이 말의 기원은 정치철학자 홉스(T. Hobbes)로 홉스가 당시의 영국 정치를 설명했던 단어가 ‘적자생존’입니다. 협력이 아닌 공포의 세계 속에서 가장 힘센 자가 가장 많이 갖게 되는 적자생존,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오늘날 일국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폐해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이를 제어하는 제도들이 다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생겨난 현상들 중 하나가 안보 포퓰리즘입니다. 이런 불안을 이용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런 사람들을 ‘(극우적) 스트롱맨’이라고 합니다. 내부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이민자나 난민, 소수자들에게 덮어씌우고, 대외적으로는 불안을 조장하고 민족주의 감정을 호소하면서 외부 세력을 혐오하게끔 만듭니다. 18-9)<br>분열된 나라: 똑 닮은 미국과 한국<br>트럼프의 외교 전략: 각개격파와 삥 뜯기<br>트럼프의 세계관에서 한국과 일본, 유럽 등 미국의 기존 우방국들은 미국에 이른바 ‘빨대를 꽂아’ 피를 빠는 존재들입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들 국가를 ‘거머리’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과거 소련, 현재는 중국의 위협과 대응으로부터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을 공짜로 이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불공정한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적자를 보고 있는 상위 10개국 중, 중국은 1위, 우리나라는 8위입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외치는 것이 ‘페이백 타임’(Payback time), 지금까지 미국을 상대로 이득을 보았던 것을 다 정산할 때라는 겁니다. 이 정산을 위한 수단이 바로 관세 부과입니다. 자유무역(free trade)이 아니라 공정무역(fair trade)을 하자면서요. 물론 그 공정 여부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동의할 수 없죠. 그러나 트럼프는 상황을 아주 단순화해서 미국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했고, 특히 우방국한테 당한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24)<br>미국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또 하나의 관점은 네오콘(Neo 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의 세계관입니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로 대표되는 네오콘은 철저하게 선악의 세계관으로 무장해 있습니다. 미국이 공공선이라는 예외주의(exceptionalism)에 입각해서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악을 소멸시켜야 평화의 세계가 도래한다고 주장합니다. 네오콘에게 중국은 악이자 굴복시켜야 할 상대인 거지요. 존 볼턴(John Bolton)이나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등 네오콘 인사들이 트럼프 1기 정부의 외교와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들 네오콘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기 때 대외정책이 네오콘의 방해를 받았다며 이들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트럼프는 이익이 되면 하고, 손해가 되면 빠진다는 철저한 거래주의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트럼프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트럼프에게는 평화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습니다. 26)<br>그렇다면 트럼프는 미중 경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트럼프에게도 중국은 미국의 위상에 도전하기에 꺾어야 할 대상이며, 미국이 만든 질서에서 불공정한 반칙행위를 통해 이익을 챙기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트럼프는 중국을 미국의 자원을 총 투입해 사생결단의 승부를 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압박할 수도 타협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미국에 이득만 된다면 유럽은 러시아가, 아시아는 중국이 관장해도 된다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이미 러우 전쟁에서 러시아 편에 서고 ‘유럽의 방위는 유럽이 알아서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세계를 미중러의 세 영향권으로 나누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新) 얄타체제’로 이름 붙이기도 하는데요.&nbsp; 그런 질서가 실현 가능할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트럼프의 MAGA가 품고 있는 실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26-7)<br>한국의 트럼프 대망론이 가리키는 것<br>케네스 왈츠(Kenneth Waltz)나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같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핵을 많이 보급할수록 평화가 온다는 역설적인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합니다. 핵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못할 거라는 논리인데, 핵무기로 인해 전면전이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까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오히려 국지적인 전쟁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게 현실입니다.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려면 군사력 강화를 통해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억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적과의 외교를 통해 적대감을 해소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물론 전쟁을 막을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제동장치와 평화를 향한 가속페달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도구를 확보해야 하지요. 그것이 UN일 수도 있고, 자유무역 질서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은 더 일어나기 쉬워졌고 전쟁이 났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은 사라진 상황입니다. 하루빨리 재건해야 합니다. 29-30)<br>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한미동맹과 평화체제<br>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동맹은 전쟁 상태에서 가장 강합니다. 즉 공동의 적대국이 확실할 때 동맹관계는 굳건해집니다. 한미동맹에 적용하면, 남북관계가 악화할수록 한미동맹의 역할과 중요성은 커지죠. 그러니 우리가 계속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과 적대관계로 남아 있으면 한미동맹이 더 안정적이 될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평화체제로 넘어가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미동맹은 약화되는 게 자연스럽지요. 심하게 얘기하면 분단이 계속되고 남북한과 북미 간에 긴장이 고조될수록 한미동맹은 강해지고, 교류와 협력이 높아지면 역설적으로 동맹은 약해지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한미동맹이 평화의 상징으로 너무나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남북관계의 개선이 이뤄질 때마다 오히려 동맹 약화를 걱정하는 역설이 벌어집니다. 역대 진보 정부들이 남북협력을 이루려고 하면 어김없이 한미동맹을 흔든다는 비판이 나오고 이는 국민에게 강한 소구력을 가져왔습니다. 31)<br>남북한의 미래, 평화와 통일 등에 있어서 남북이 같은 민족이냐 아니면 구별된 두 국가냐 하는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지요. 사실 분단구조에서는 둘 다 맞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두개를 억지로 합치려고 합니다. ‘두 국가’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니 필연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열심히 주장한다고 해서 엄연한 분단현실과 두 국가체제를 부정할 수 없지요. 한 민족과 두 국가라는 이 두 정체성은 매우 불편하지만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를 외면하거나, 또는 억지로 둘을 통합하려는 시도 모두 무리수입니다. 두 국가이기 때문에 그만큼 통일이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아야겠죠. 두개의 정체성이 갖는 모순은, 먼 미래에 통일이라든지 분단체제가 해소되어야 해결되기 때문에 지금의 분단구조 안에서는 두 정체성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32)<br>트럼프 태풍에 맞서는 일은 가능할까<br>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제적으로 연대가 필요합니다. 특히 트럼프에게 당한 피해국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트럼프는 지금 ‘일 대 일’로 상대하려 합니다. 많은 국가가 안보와 경제를 미국에 기대고 있기에 쉽사리 반트럼프 연대에 나서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질서가 현재 훨씬 더 다극화되고 평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극화 흐름이 러시아가 추구하는 것처럼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가령 한국과 일본, 그리고 EU 등이 주도해서 새로운 형태의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중일 3국의 역내 협력도 주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3국이 전세계 제조업에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도 중요하지만, 합치면 절대적입니다. 3국이 함께 적극적으로 개방된 공급망과 자유무역을 지탱해준다면 트럼프의 보호주의 태풍을 견뎌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33)<br>바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가능성<br>사실 한국은 역사적으로 계급사회가 뒤집힌 적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기득권이 뒤집힌 적도 없지요.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해 다수의 혁명이 있었지만, 신분제를 타파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에도 친일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리고 분단의 대결구조에서 군대의 힘이 막강해졌습니다. 연속적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경찰과 검찰도 강해졌습니다. 게다가 유교적인 집단주의 문화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라면 사실 시장이나 시민사회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동학농민운동부터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민주화항쟁, 2024년 남태령대첩까지, 국가가 선을 넘을 때마다 시민이 봉기했지요. 저는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엄청난 저력이고 진정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잘못되고 불평등이 생길 때는 공적 국가를 키워서 고쳐내고, 국가가 반민주·반헌법을 자행할 때는 시민과 시장이 제어하는 겁니다. 36)]]></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0/72/cover150/e6526375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40721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마쓰바라 다카히코 -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83096</link><pubDate>Mon, 30 Mar 2026 0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830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K09253279&TPaperId=1718309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3351/71/coveroff/ek09253279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K09253279&TPaperId=171830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a><br/>마쓰바라 다카히코 지음, 이인호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01월<br/></td></tr></table><br/>제1장 물리학은 아름답다<br>물리학은 이 세계가 어떤 규칙으로 돌아가는지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를 위해 물리학 연구에서는 되도록 단순한 상황을 가정하고, 이 상황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을 찾아낸다. 물리학에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요소로 분해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요소로 분해하고 관찰한 다음에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질서를 밝혀낸다. 과학은 이런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가령 공기저항을 무시하고 중력만 작용하는 상황을 연구하면 중력의 성질을 알아낼 수 있다. 한편으로 중력을 무시하고 공기저항만 작용하는 상황을 연구하면 공기저항의 성질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 힘의 성질을 각각 알아낸 다음 이를 합치면 중력과 공기저항이 둘 다 작용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상적인 상태에서 각 요소를 개별적으로 알아낸 다음 이를 조합함으로써 현실적인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11-2)<br>제2장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똑같다<br>천동설에서 벗어나 지동설로 넘어가려면 먼저 원운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선입관을 버려야만 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스승인 튀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관측 자료에 태양 중심설을 적용함으로써 행성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케플러의 발견은 단순히 원을 타원으로 교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타원 운동을 하는 행성의 속도도 알아냈다. 비교적 태양과 거리가 가까운 행성은 속도가 빠르고, 반대로 거리가 먼 행성은 속도가 느리다. 또한, 행성 하나의 속도를 봐도 태양과 가까워질수록 빨라지고 멀어질수록 느려진다. 케플러는 이를 수치상으로 명확하게 밝혀냈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원운동의 조합에서 벗어난 일은 근대 물리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천동설은 완전함의 상징인 원에 집착한 결과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이 일은 자연계의 올바른 법칙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이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닐 것이다’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힌 결과 잘못된 결론에 이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7)<br>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당시에 발명된 지 얼마 안 된 망원경을 직접 개량하여 천체를 관측하다가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 4개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목성 근처에 있는 별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목성 주위를 도는 천체였다. 천동설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발견은 지구가 아닌 천체가 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었다. 즉 지구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설명하는 천동설에 반하는 사실이었다. 또한, 갈릴레오는 금성이 차고 이지러지는 동시에 크기가 변하는 것을 관찰했다. 금성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며, 지구보다 안쪽 궤도를 돌고 있다. 그래서 지구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크게 보임과 동시에 그늘 부분이 커져서 초승달 모양이 된다. 반대로 지구와 멀어지면 크기가 작아지고 그늘 부분도 줄어서 보름달처럼 전체가 빛나 보인다. 천동설로는 무척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지동설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29)<br>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천상과 지상의 구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개별적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천상과 지상이 모두 우주라는 커다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뉴턴 역학의 등장과 함께 몇 가지 기본 법칙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물리학의 기본 방침이 정착했다. 그러나 물체 사이에는 만유인력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힘도 작용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힘이 만유인력뿐이면 정말 큰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지탱할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는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체가 한 덩어리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웃한 원자끼리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중력을 거스르며 의자 위에 앉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원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 덕분이라는 소리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31, 34-5)<br>원자 사이에서 작용해 물체의 형태를 유지하는 힘의 정체는 만유인력이 아니다. 만유인력은 서로 끌어당기기만 하는 힘인데, 실제로는 물체를 이용해 다른 물체를 밀어낼 수도 있고 끌어당길 수도 있다. 즉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뿐만 아니라 밀어내는 힘인 척력도 작용한다는 뜻이다. 인력과 척력을 둘 다 지니는 힘이라고 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전기력이다. 양전하와 음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하며, 양전하끼리와 음전하끼리는 척력이 작용한다. 원자는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기의 힘으로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원자와 원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도 전기력이며, 원자가 모여서 분자를 이루는 것도 전기력에 의한 현상이다. 전기력과 유사한 힘으로 자기력이 있다. 실은 전기와 자기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전자기력이라고 부른다. 중력을 제외하면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힘은 모두 전자기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36-7)<br>제3장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br>빛이란 파동의 한 종류다. 우리는 평소에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데, 이는 빛의 파장이 극단적으로 짧기 때문이다. 파동이란 어떤 규칙적인 변화가 퍼져 나가는 현상이다. 그 규칙적인 변화에는 기본 길이가 있으며, 이를 파장이라고 한다. 가령 바다에 이는 물결인 파도를 보면 물의 높이가 가장 높은 마루와 가장 낮은 골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된다. 이때 마루와 마루 사이의 거리, 혹은 골과 골 사이의 거리가 바로 파장이다. 빛의 파장은 극단적으로 짧다. 눈에 보이는 빛을 가시광선이라고 하는데, 가시광선의 파장은 거의 400nm에서 700nm 정도다(1nm는 0.000001mm이다). 파장이 길수록 빨갛게 보이고, 파장이 짧을수록 파랗게 보인다. 원자의 크기는 1nm보다 작은데, 이는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훨씬 짧다. 따라서 광학 현미경의 배율이 아무리 높다 해도 원자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작은 물체라도 확대하면 잘 보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경험을 확대 해석한 잘못된 추측일 뿐이다. 45-6)<br>화학 반응식을 배운 사람이라면 물질이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 반응식을 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수소 분자 H2와 산소 분자 O2가 결합하면 물 분자 H2O가 생기는데, 이때 수소 분자와 산소 분자와 물 분자의 개수비는 반드시 2:1:2가 된다. 그래야만 수소 원자 H와 산소 원자 O의 개수가 반응 전후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원자론은 19세기 초에 제창되었다. 영국의 교사였던 존 돌턴은 화학 반응을 비교적 간단한 정수비로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원자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돌턴은 원자의 상대적인 무게인 원자량을 밝혀냈다. 돌턴은 수소와 산소 등의 기체가 원자가 아닌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정확하지 않았다. 돌턴의 이론을 수정해 수소와 산소 등은 원자가 2개씩 결합한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 기체의 반응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47, 50)<br>기체 성질에 관한 연구에서도 간접적으로 원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단서가 나타났다. 기체 분자운동론이란 기체가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입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의 기본 성질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기체의 압력은 기체가 들어 있는 용기 내벽에 입자가 충돌하면서 생기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기체에는 압력이 일정할 때 온도가 높을수록 부피가 커진다는 성질이 있는데, 이는 ‘샤를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열기구는 이 성질을 이용해서 하늘을 난다. 공기를 데워서 팽창시키면 열기구 안에 든 공기의 양이 줄어서 바깥 공기보다 가벼워지므로, 그 부력을 이용해 위로 뜨는 것이다. 이 샤를의 법칙은 기체 입자가 날아다니는 평균 속도에 따라 온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입자의 속도가 빠를수록 기체가 담긴 용기 내부의 압력이 커진다. 이때 용기 외부의 압력이 일정하다면 내부 기체가 용기를 밀어내며 부피가 팽창하는 것이다. 51)<br>제4장 미시 세계로 들어가다<br>플랑크가 해명하려 한 열역학 문제는 물체가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복사 현상이었다. 물체는 온도에 따라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성질이 있다. 뉴턴 역학에서는 에너지를 1개, 2개로 셀 수 없는 연속적인 값으로 본다. 하지만 플랑크의 이론에 따르면 미시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질에 의한 복사가 작은 입자(오늘날 말하는 원자)의 진동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을 때, 그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에는 진동수에 따른 최소 단위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에 최소 단위가 있다고 가정하면 플랑크의 수식이 유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랑크의 수식은 모든 파장 영역에 걸친 실험 결과에 들어맞았다. 그러한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양자’라고 부른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진동의 에너지는 연속적이므로,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는 어떤 값이든 지닐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진동 에너지에는 최소 단위가 있다. 다시 말해 진동 에너지는 반드시 그 최소 단위의 정수배가 되어야 한다. 63-4)<br>플랑크의 발견은 미시 세계에서 뭔가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했다. 플랑크의 수식은 실험 결과를 잘 나타내는 유용한 공식이었지만, 수많은 물리학자가 ‘진동 에너지에 최소 단위가 있다’는 엉뚱한 가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플랑크 자신도 이를 임시로 도입한 기술적인 가정일 뿐이라 여겼으며, 그곳에 물리학의 근본에 관한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플랑크의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천재 물리학자로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플랑크는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가 진동하면서 방출하는 에너지에 최솟값이 있다고 가정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방출되는 전자기파 그 자체의 에너지에 최솟값이 있다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파 자체가 양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광양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광양자 이론에 따라 물체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를 계산해도 플랑크의 수식이 유도됨을 보였다. 65)<br>아인슈타인은 이 가설을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응용해 성공을 거두었다. 바로 광전효과라 불리는 금속에 빛을 비추었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빛을 파동으로 본다면 이 현상은 파동의 에너지가 전자를 금속에서 떼어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빛의 세기가 셀수록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센 빛을 비춰도 튀어나오는 전자의 개수가 늘어날 뿐이었다. 한편으로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가 커졌다. 광전효과의 이러한 현상은, ‘빛의 에너지는 연속적이지 않으며 광양자로 되어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광양자라고 부른 것은 오늘날 ‘광자’라고 불린다. 파장이 짧아질수록 광자의 에너지가 커지므로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도 커진다. 한편으로 파장은 똑같은데 빛의 세기만 강하게 하면, 광자의 수가 늘어나서 튀어나오는 전자 수가 늘어나기는 하지만 전자 하나하나의 에너지는 커지지 않는다. 65-6)<br>고전물리학에 따라 원자 모형을 설명하면 전자는 금세 원자핵과 만나고 만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자의 운동 에너지가 줄다가 결국 0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자 가설에 따르면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운동 에너지값은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 떨어진 값이다. 또 전자의 운동 에너지에는 최솟값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원자핵과 만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최솟값이 0이 아닐 것이며, 최소 에너지 상태에서 원자가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어는 이러한 가설에 따라 원자 모형을 고안했다. 원자는 종류에 따라 정해진 파장의 빛을 방출한다. 양자 가설에 따르면 빛의 파장은 광자 하나의 에너지와 대응하므로, 바꿔 말해 원자가 일정한 에너지를 지닌 광자를 방출한다고 할 수 있다. 원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띄엄띄엄 떨어진 값밖에 지닐 수 없다면, 그 띄엄띄엄 떨어진 차이만큼의 에너지가 바로 방출되는 광자의 에너지일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 계단을 결정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69)<br>드 브로이는 전자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모두 지닌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광양자 가설의 반대 버전이다. 파동인 줄로만 알았던 빛이 사실은 입자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면, 반대로 입자인 줄 알았던 전자도 파동의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입자가 지니는 파동의 성질을 ‘드 브로이파(물질파)’라고 한다. 드 브로이파의 파장은 매우 짧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자 내부처럼 매우 작은 세계에서는 전자가 지니는 파동의 성질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보어의 양자조건은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면서 드 브로이파에 따라 안정하게 진동하는 조건과 똑같다. 그 조건이란 전자 궤도 한 바퀴의 길이가 드 브로이파 파장의 정수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전자가 궤도를 한 바퀴 돌았을 때 드 브로이파의 진동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어의 양자조건을 만족했을 때 전자의 드 브로이파는 원자 안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70)<br>제5장 기묘한 양자의 세계<br>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속에서 전자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 해 봤자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전자가 원자 속에서 어떤 궤도로 운동하느냐는 오직 머릿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며, 실제로 관측해서 확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더는 관측할 수 없는 일에 관해 고민하지 말자.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관측 가능한 값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관측 가능한 값이 어떤 수치가 될지 이론적으로 예언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하이젠베르크는 전자 궤도 등 관측할 방법이 없는 문제는 이론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실천에 옮기기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는 실제로 그러한 이론을 구축해 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직관적인 상상을 완전히 배제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이론이 되었다. 오직 관측할 수 있는 값에 주목해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수학적 관계를 알아내려 했다. 72)<br>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이 성립하려면 곱셈의 순서를 바꿨을 때 결과가 달라진다는 기묘한 규칙이 필요했다. 2×3이나 3×2나 둘 다 6이 되는 것처럼, 보통 곱셈을 할 때는 순서를 바꿔도 결과가 똑같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서는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지는 이상한 곱셈을 사용해야 했다. 당시 물리학자는 대부분 그런 이상한 곱셈에 관해 알지 못했다. 이는 하이젠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상한 곱셈을 써야만 하는 자신의 이론에 의미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하이젠베르크는 새 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다음 자신의 스승이자 물리학자인 막스 보른에게 의견을 구했다. 얼마 후 보른은 그 이상한 곱셈이 수학자 사이에서 알려져 있던 행렬연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렬이란 말 그대로 숫자를 행과 열로 나열한 것이다. 두 행렬을 곱하면 새로운 행렬이 나온다. 이 행렬끼리의 곱셈은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성질이 있다. 73)<br>당시 물리학자가 행렬역학을 보고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행렬역학이 발견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전혀 다른 형태의 양자역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자역학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발견했다. 슈뢰딩거는 하이젠베르크와 달리 더 직관적인 방법으로 원자 내부를 이해하려 했는데,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드 브로이파를 이용했다. 슈뢰딩거는 처음으로 드 브로이파의 파동 방정식을 찾아냈다. 이를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한다. 즉 슈뢰딩거는 행렬역학과 다른 새로운 양자역학을 발견한 것이다.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을 ‘파동역학’이라고 한다. 행렬역학은 직관적인 이해를 배제한 채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하지만, 파동역학은 시각적인 이해가 가능한 데다 물리학자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둘 다 똑같은 결론에 이르는 이론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자연히 행렬역학을 버리고 파동역학을 이용하게 되었다. 75)<br>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의 파동이 실재한다고 보았으며, 전자 등의 입자를 그 파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전자 등은 사실 입자가 아니며, 오직 겉으로만 입자처럼 보일 뿐이다. 파동의 파장이 너무나 짧아서 마치 파동이 아닌 입자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파동을 작은 영역에 가두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넓게 퍼져 나가 버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면에서 파문이 시간에 따라 넓게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벽으로 가로막히지 않은 수면에서는 물결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이래서는 전자가 언제나 입자처럼 관측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면 파동함수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그 해답을 내놓은 사람은 이론물리학자 막스 보른이었다. 보른이 내놓은 해석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파동함수가 나타내는 파동은 물결이나 음파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78)<br>어떤 위치에 대한 파동함수가 크면 클수록 그곳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확률 해석이다. 파동함수는 시간과 공간으로 결정되는 함수이니, 바꿔 말하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언제 어디서 입자가 발견되기 쉬운지 알려주는 셈이다. 이론의 근본 부분에 확률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물리학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뉴턴 역학 이후의 물리학에서는 한 시점의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면, 그 후에 일어날 일을 완전히 예언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츠만의 통계역학에서 확률이 쓰이기는 했지만, 이는 단지 입자 개수가 너무 많아서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확률은 더 근원적인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설사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해도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확률적으로밖에 예언할 수 없다. 80)<br>가령 전자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에너지값 중 하나를 지니고 있다고 해보자. 전자의 에너지값은 지금보다 더 작은 다른 값으로 바뀔 수 있는데, 이때 원래 값과 나중 값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를 지닌 광자를 방출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작은 값’의 후보가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자의 에너지는 다양한 값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최초의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해도, 다음에 전자의 에너지값이 어떤 값으로 바뀔지는 확률적으로만 예상할 수 있다. 이 에너지값으로 변할 확률은 얼마이며, 저 에너지값으로 변할 확률은 얼마라는 식이다. 따라서 방출되는 광자의 에너지도 확률적으로만 예언할 수 있다. 게다가 광자가 어느 방향으로 방출될지도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 에너지 단계가 높은 원자가 하나 있을 때, 그 원자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지닌 광자가 방출될지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직 가능성과 확률만을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81)<br>제6장 시간과 공간의 물리학<br>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장과 자기장에 관한 방정식이다. 맥스웰은 이 방정식을 통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생겼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는 파동의 형태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 파동은 물질이 전혀 없는 진공 속에서도 전달될 수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얽힌 채로 진행하는 이 파동을 ‘전자기파’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을 이용하면 전자기파의 속도를 계산할 수 있다. 맥스웰이 그 속도를 계산한 결과 빛의 속도와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빛의 정체가 바로 전자기파였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전자기파가 진공 속을 나아간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참으로 기묘하다. 일반적으로 파동은 물질을 흔들면서 나아간다. 즉 파동을 매개하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자기파는 물질이 없는 진공 속에서도 전파된다. 전자기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존재인 전기장과 자기장을 흔들면서 나아간다. 110)<br>진공 속에서 전달되는 파동이 기묘한 이유는 파동의 속도가 대체 무엇에 대한 속도냐는 점이다. 물결의 속도는 물에 대한 속도이며, 음파의 속도는 공기에 대한 속도이다. 즉, 파동의 속도란 파동을 전달하는 물질에 대한 속도인 셈이다. 그런데 진공 속에서 퍼져 나가는 파동에는 이를 매개할 물질이 없다. 그렇다면 전자기파, 즉 빛의 속도는 대체 무엇에 대한 속도일까? 기준이 없다면 속도는 상대적으로만 정할 수 있다. 즉 누가 측정하느냐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초속 30m로 움직이는 물체일지라도, 이를 초속 10m로 쫓아가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초속 20m로 보일 것이다. 기준으로 삼을 만한 물체가 없다면, 속도는 결국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면, 빛이 진공 속을 나아가는 속도는 누가 측정해도 똑같아야 한다. 즉, 서로 움직이고 있는 관찰자 두 사람이 한 빛의 속도를 각각 측정했을 때 똑같은 속도가 나와야 한다. 110-2)<br>아인슈타인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애초에 속도(이동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눈 결과값)란 어떤 개념인지를 되짚어봤다. 빛이라면 1초에 30만km를 이동하므로 초속 30만km가 된다. 이때 빛을 초속 10만km로 쫓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멈춰 있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 사람은 1초 후에 10만km 앞에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빛은 1초 후에 30만km 앞에 있을 것이므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과 빛의 거리 차이는 1초 후에 20만km가 될 것이다. 즉 빛과 이를 쫓아가는 사람의 거리가 1초 만에 20만km 벌어졌다. 속도가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값인 이상,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빛을 쫓아가는 사람이 측정한 빛의 속도는 초속 20만km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이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어떤 사실이 있다. 바로 움직이는 사람과 멈춰 있는 사람이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거리를 측정하고 있다는 가정,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멈춰있는 사람에게도 움직이는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전제다. 115-6)<br>이렇게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인다는 비상식적인 이론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 아니며,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즉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이론이 상대성이론이라 불린다. 특수란 말이 붙은 이유는 훗날 아인슈타인이 중력까지 포함하여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초속 30만km로 멀어지는 빛을 초속 10만km로 쫓아가는 사람은 멈춰 있는 사람과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다. 그래서 멈춰 있는 사람 눈에는 움직이는 사람이 빛과 초속 20만km로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도, 움직이는 사람은 그와 다른 시간과 거리를 경험하므로 빛의 속도가 똑같이 초속 30만km로 측정되는 것이다. 그 결과 발견된 수식은 비교적 단순했으며 ‘로런츠 변환’이라 불린다. 로런츠 변환에 따르면 서로 움직이고 있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은 서로 뒤섞여 있다. 116)<br>요점은 멈춰 있는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 사이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있고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쪽 시간이 느린지 분명하지 않으므로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느 쪽이 느리고 어느 쪽이 빠르다는 생각 자체가 절대적인 시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삼을 만한 시간의 흐름이 있다면 이에 비해 빠른지 느린지를 논할 수 있겠지만, 그런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한, 내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서 자기 자신의 시간이 느려졌다는 자각은 할 수 없다. 상대가 보기에는 내 뇌를 포함한 내 주변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시간 감각에는 변화가 없다. 즉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이지, 내가 느끼기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이 없어도 내 시간은 잘 흐르므로 다른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로 내 시간이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118)<br>제7장 시공간이 낳는 중력<br>일반상대성이론의 중요한 특징은 중력이라는 힘을 시간과 공간의 성질로 설명해 냈다는 점이다. 전철에 탔을 때를 떠올려 보자. 멈춰 있는 상태에서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렇게 가속할 때는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밀리는 느낌이 든다. 특히 서 있을 때는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넘어질 수도 있다. 이 힘은 ‘관성력’으로 알려져 있다.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해도 나 자신은 계속 멈춰 있으려고 한다. 즉 전철만 먼저 앞으로 나가 버리다 보니, 전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뒤로 미는 것처럼 보인다. 그 힘을 상쇄하기 위해 뒤에서 힘을 가하면 자신도 전철과 함께 움직이게 된다. 이처럼 관성력이란 가속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이다. 이 힘은 무게를 지닌 모든 물체에 작용한다. 그리고 무거울수록 관성력도 커진다. 이처럼 관성력과 중력은 성질이 비슷한데, 실제로 이 두 가지 힘은 구별할 수 없다. 122-3)<br>중력과 관성력이 똑같다면 중력은 이제 물체끼리 서로 직접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가속하고 있는 관측자가 똑바로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물체가 똑바로 움직이지 않고 휘어져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던 전철이 멈추려고 감속할 때는 모든 물체가 앞으로 힘을 받는다. 따라서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공을 굴리면 앞으로 휘어지는데, 이것이 관성력이다. 하지만 전철 밖에서 관찰하면 공은 똑바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관성력은 관측자의 가속 때문에 생긴다. 가속이란 속도의 변화를 시간으로 나눈 것이므로 시간 ·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속도가 서로 다른 관측자들 사이에서는 시간과 공간도 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속하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은 가속하지 않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과는 다르다. 따라서 가속하고 있는 관측자에게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력은 무언가에 끌리는 힘이 아니라 시공간이 휘어져서 생기는 힘이라는 것이다. 124-5)<br># 등가 원리 : 관성력과 중력은 등가, 즉 똑같은 것이라는 개념<br>뉴턴이 제시한 만유인력의 법칙에서는 무게가 있는 물체에 직접 중력이 작용한다고 한다. 무게가 0인 물체에는 힘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물체는 중력 때문에 진로가 휘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령 멀리서 날아온 입자가 별 근처를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이 입자의 무게가 0이라면 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냥 똑바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별 주변에 있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으므로 무게가 0이라 해도 똑바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진로가 다소 별 쪽으로 휘어진다. 이를 관측할 방법이 있다. 태양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별빛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별빛은 태양 주변에서 약간 진로가 휘어진 다음 지구에 도착한다. 즉 태양 근처에서 빛이 굴절하므로, 별이 원래 보여야 할 위치보다 태양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보일 것이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태양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아야 할 별빛도 태양 표면 아슬아슬한 곳에서 보일 수 있다. 128)<br>제8장 물리학이 나아갈 길<br>현대 물리학에 있는 수많은 이론은 양자론과 상대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초 물리학 분야에서는 양자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양자장론’이 발전했다. 원래 양자장론은 전자기력을 양자론과 융합시키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양자역학은 본디 입자의 운동을 양자적으로 다루는 학문인데, 이를 전기장과 자기장 등 공간에 퍼져 있는 현상에도 적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론과 전자기학을 융합시킨 ‘양자 전기역학’이라는 이론이 만들어졌다. 이 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도 포함하며 실험 결과와도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성공적인 이론으로 볼 수 있다. 양자 전기역학은 ‘양자장론’이라 불리는 이론 형식의 한 가지 사례다. 또한, 양자장론을 통해 원자핵 안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정체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각 세 가지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쿼크가 어떠한 물리 법칙을 따르는지도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한 물리 법칙도 양자장론의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137)<br>우리가 양자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동시에 다뤄야 할 상황에 맞닥뜨릴 일은 없다. 양자론의 효과는 미시 세계에서 현저해지는 한편, 일반상대성이론의 효과는 거시 세계에서 현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미시 세계에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날 때가 있다. 바로 매우 큰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을 때다. 에너지는 질량과 같은 것이라서 그 자체가 시공간을 휘어지게 만든다. 미시 세계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집중되면 시공간이 심하게 휘어지므로 기본 입자의 세계에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매우 작은 영역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우주가 태어난 직후의 상태이며, 그 상태를 이해하려면 우주 자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즉, 우주의 기원을 밝혀내려면 양자론이나 일반상대성이론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기술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지만, 그런 이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140-1)<br>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처럼 보이지만, 이는 모순을 품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면, 자기 자신이 옳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는 없다.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빗대면 알기 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해도, 증거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처럼 어떤 이론이 옳다는 사실을 그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는 없다. 이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 수학적 사실이다. 모든 것의 이론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이론 안에는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 법칙이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이론이 있다면 모든 것의 이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 법칙이 왜 성립하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즉 모든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고 더는 탐구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이론은 존재할 수 없다. 15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3351/71/cover150/ek09253279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3517100</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출출할 땐, 주기율표 / 곽재식 - [출출할 땐, 주기율표 - 먹고사는 일에 닿아 있는 금속 열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74209</link><pubDate>Thu, 26 Mar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1742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32534437&TPaperId=1717420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37/78/coveroff/e93253443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32534437&TPaperId=171742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출출할 땐, 주기율표 - 먹고사는 일에 닿아 있는 금속 열전</a><br/>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4년 12월<br/></td></tr></table><br/>21 스칸듐: 야구장 간식을 고르며 Sc<br>합금을 만들면 왜 성능이 좋아질까? 세상의 모든 물체처럼 금속 덩어리도 크게 확대해 보면 원자라는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원자들은 왜 낱낱이 흩어지지 않고 그렇게 덩어리지어 붙어 있을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자 속에 있는 전자는 ⊖전기를 띤다. 바로 그 전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두 원자가 달라붙게 해 준다. 전자 하나가 두 원자를 휘감아 돌고 있으면 두 원자는 그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서로 붙어 있으려고 할 것이다. 원자의 중심부 핵에는 ⊕전기가 있으니 ⊖전기를 띤 전자에 잘 이끌릴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와 반대로 원래 붙어 있던 원자들이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다. 대체로 원자들이 잘 붙어 있느냐, 떨어지기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자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원자가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물질의 성질이 바뀌는데, 화학은 바로 그런 변화를 연구하는 일이다. 9-10)<br>원자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따라 하나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개수가 다르고, 전자가 들어 있는 모양도 다르다. 수소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개 있고, 헬륨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2개 있고, 알루미늄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3개 있으며, 스칸듐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 21개가 있다. 또한, 그 전자들이 주로 원자의 겉면 쪽을 돌아다니는지, 아니면 원자의 중심부 쪽을 돌아다니는지도 원자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 잘 맞는 성질을 가진 원자들을 적절히 섞어 놓으면 원자 사이를 밀고 당기며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원자들을 최대한 잘 묶어 놓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튼튼한 합금이 만들어진다. 필요하다면 원자들이 잘 들러붙지 않는 조합으로 합금을 만들어서 쉽게 녹이고 가공하기 편리한 재료를 얻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알루미늄에 스칸듐을 약간 더해서 잘 섞어 주면 그냥 알루미늄 덩어리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재질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야구 방망이가 바로 스칸듐 합금 방망이다. 10)<br>22 타이타늄: 외계인 초코볼을 집어 들며 Ti<br>색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보통 흰색을 띠는 이산화타이타늄을 일컫는 경우가 많듯이, 금속 재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타이타늄 합금을 줄여서 말한 것일 때가 많다. 골프채 같은 운동기구에서 군사용 무기까지 타이타늄 합금 재료의 용도는 상상외로 넓다. 가볍고 튼튼하며 녹이 잘 슬지 않는 타이타늄은 사람 몸과 관련된 부품을 만드는 데도 많이 사용된다. 수술로 사람 몸에 장치하는 부품이 쉽게 상한다면 수리나 교체를 하느라 거듭 수술을 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너무 무거우면 사람이 움직이는 데 힘이 들므로 가벼울 필요도 있다. 아울러 사람 몸은 6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으니 물과 산소가 닿더라도 쉽게 녹슬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 타이타늄을 잘 이용하면 그런 소재를 만들 수 있다. 치아 임플란트에서도 가짜 이를 잇몸에 고정하는 뿌리 부분을 타이타늄을 이용해서 만들곤 한다. 19-21)<br>타이타늄은 땅에 있는 웬만한 금속 중에서도 양이 무척 풍부한 편이다. 우주 전체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수소인데, 지구의 땅에는 수소보다도 타이타늄이 더 풍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학 분야에서 대단히 유명한 치글러-나타Ziegler-Natta 촉매가 타이타늄을 가공해서 만든 물질이라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치글러-나타 촉매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플라스틱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석유를 가공해서 뽑아내는 에틸렌이라는 기체에 치글러-나타 촉매를 조금만 떨어뜨려 주면 에틸렌 기체가 마법처럼 서로 엮여 굳으면서 플라스틱으로 변한다. 이렇게 해서 만드는 물질이 비닐봉지부터 볼펜까지 흔하게 쓰이는 대표적인 플라스틱 폴리에틸렌polyethylene이다. 타이타늄의 가장 큰 단점은 가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타이타늄을 철처럼 다루면 깨지고 부서지기 쉽다. 어찌 보면 너무 튼튼하고 강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22-3)<br>23 바나듐: 생수 맛을 음미하며 V<br>원래 바나듐은 금속 제품의 재료를 만들 때 조금씩 섞어 넣는 물질로 유명했다. 금속 공업이 발달한 한국에서는 매년 8,000t 이상의 바나듐을 수입한다. 특히 널리 사용되는 금속인 철 제품을 만들 때 바나듐을 조금 섞으면 철이 더 튼튼해지고 충격을 잘 흡수하며 열에도 강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강철에 바나듐을 1% 정도만 섞어도 성질이 확 좋아진다고 하는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이현복 선생이 쓴 글에 따르면 고속도공구강high speed steel이라는 재료는 “바나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바나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고속도공구강은 다른 금속을 깎고 자르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 강철 재료를 말한다. 즉, 바나듐을 섞은 강철 덕분에 좋은 공구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공구로 금속 재료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나듐이 있어야만 세밀하고 정교한 금속 부품을 만들 수 있고, 나아가 그런 부품이 들어가는 정교한 기계도 만들 수 있다. 26)<br>화학물질이 서로 반응을 하고 안 하고는 물질에 들어 있는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바나듐은 금속인 만큼 잘 움직이는 전자를 꽤 많이 품고 있어서 잘만 사용하면 독특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희귀한 물질도 아니어서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다. 자동차 매연이나 굴뚝 연기 성분 중에 이산화황이라는 해로운 물질이 있다. 이산화황은 몸에 좋지 않은 스모그의 원인이자 산성비의 주원인으로도 지목되는 물질이다. 공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굴뚝을 통과하는 연기를 공기 중에 바로 내뿜지 않고 물에 한 번 적셔서 그 속의 오염 물질인 이산화황을 잡아채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 많은 이산화황을 어쩌면 좋을까? 이럴 때, 모아 놓은 이산화황에 오산화바나듐을 넣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황산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황산 또는 이산화황 계통의 성분을 빼내고 남은 물질은 그 물질이 필요한 곳에 돈을 받고 팔 수 있다. 29)<br>24 크로뮴: 쌀밥을 한술 뜨며 Cr<br>오랫동안 철로 만든 숟가락이 널리 쓰이지 않은 것은 바로 녹이 잘 슨다는 문제 때문이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최대한 물에 닿지 않도록 하거나 기름칠을 해서 녹스는 것을 피해 볼 수 있겠지만, 항상 음식물에 닿고 입에 넣고 빨아야 하는 숟가락, 젓가락은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철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도 식기를 만드는 데는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 초쯤에 유럽의 과학기술인들이 철에 크로뮴chromium이라는 금속을 조금 섞어 철과 굉장히 비슷하면서 녹이 슬지 않는 합금을 만들었다. 그 기본 원리는 철에 녹이 슬기 직전에 크로뮴 성분이 먼저 녹슨 상태로 변하면서 미세하게 철을 뒤덮는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 얇은 크로뮴 막이 철을 감싸서 철이 공기나 물과 닿아 녹스는 것을 막아 버린다. 녹이 스는 문제만 해결되면 철은 숟가락, 젓가락에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그 덕택에, 한국의 금속 식기는 놋쇠에서 스테인리스강으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34-5)<br>주변 원자와 달라붙는 데 특히 요긴하게 활용되어서 그 원자의 성질을 따질 때 잘 살펴봐야 하는 전자들을 원자가전자valence electron라고 부른다. 크로뮴 원자 하나가 다른 원자와 연결되어 덩어리를 이룰 때는 크로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3개가 쓰이기도 하고, 6개가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크로뮴은 원자가전자가 3개일 때도 있고, 6개일 때도 있다. 전자 3개를 이용해서 주변의 다른 원자와 연결된 크로뮴을 “3가 크로뮴”이라고 하고, 전자 6개를 이용해서 연결된 크로뮴은 “6가 크로뮴”이라고 표현한다. Cr3+, Cr6+라고 쓰기도 한다. 여기서 Cr6+라는 말은 크로뮴 원자 하나가 ⊖전기를 띤 전자 6개를 소모해서 주변의 원자들과 달라붙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보다 ⊖전기가 6만큼 부족해졌고, 이에 따라 ⊕전기를 6만큼 띠게 되었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Cr3+는 3가 크로뮴이라는 뜻이고, Cr6+는 6가 크로뮴이다. 둘 중에 몸에 병을 일으킬 수 있어서 나쁜 중금속 물질로 손꼽히는 것은 6가 크로뮴이다. 39-4)<br>25 망가니즈: 깻잎나물을 무치며 Mn<br>과거에 망간이라고 불렸던 망가니즈는 금속인 만큼, 철 덩어리를 만드는 제철소에서 가장 중요하게 활용한다. 철의 성분을 조절한다는 말은 철의 성질을 원하는 정도로 맞추고, 철이 균일하게 나오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제일 기본으로 따져야 할 문제는 철에 탄소가 얼마나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탄소가 많을수록 철이 단단해지는데, 그렇다고 너무 많으면 너무 딱딱해서 오히려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탄소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탄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아주 딱딱한 철을 무쇠라고 하고, 탄소가 적당히 들어 있어서 튼튼하고 질긴 철을 강철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쇠는 강철과 비교하면 너무 잘 부서진다. 그러니까 무쇠 팔, 무쇠 다리보다는 강철 팔이 더 튼튼한 셈이다. 고로에서 녹아 나온 쇳물을 이용해 보통 철을 강철로 만드는 과정에 망가니즈를 사용한다. 망가니즈는 녹은 쇳물이 굳을 때 공기 거품을 제거해 주는 데도 도움이 되며, 철을 부서지게 하는 불순물인 황을 없애는 데도 도움을 준다. 44)<br>망가니즈가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은 바다 밑이다. 왜 바다 밑에 망가니즈 덩어리가 있을까? 바닷속에 사는 고래나 상어 같은 생물 또는 다른 몇몇 작은 생물들이 죽으면 그 뼈와 이빨, 껍질이 물속에 가라앉는다. 마침 그곳이 충분히 깊은 바다라면 그 이빨 조각, 껍질 조각이 바다 밑에 가라앉을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바닷물에 드러난 이빨의 겉면 성분과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아주 약간의 여러 금속 성분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운이 좋으면 그중 일부는 바닷물에 들어 있는 아주 적은 양의 망가니즈 계통 성분을 서서히 끌어당기는 물질로 변하기도 한다. 이렇게 변한 상어 이빨 따위가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으면, 그 상태로 아주 천천히 바닷물 속에 들어 있는 망가니즈를 겉면에 붙이고 또 붙이게 된다. 이렇게 망가니즈 성분을 많이 품고서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덩어리를 망간단괴라고 한다. 망간단괴 속에는 망가니즈뿐 아니라 니켈, 구리 등 다른 금속 원소도 포함되어 있다. 48)<br>26 철: 도다리쑥국을 기다리며 Fe<br>철은 핏속에서 붉은색을 내는 물질인 헤모글로빈hemoglobin에 들어 있다. 사람의 몸 구석구석에 꼭 필요한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헤모글로빈이 맡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숨을 쉬면 허파 속에 퍼져 있는 혈관 속을 흐르는 핏속의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달라붙는다. 그리고 그 피가 온몸 구석구석에 퍼진다. 따라서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붙여 왔다가 떼어 주는 일은 쉼 없이 일어나야 한다. 만약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붙고 떨어지는 일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리 숨을 헐떡이더라도 들이마신 산소가 정작 필요한 부위로 퍼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만약 몸속에서 헤모글로빈 대신에 다른 물질을 이용해 산소를 운반하는 생물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지도 모른다. 문어나 오징어의 경우, 철이 들어 있는 헤모글로빈 대신에 구리가 들어 있는 헤모시아닌hemocyanin이라는 물질을 활용해서 살아간다. 따라서 문어나 오징어의 피는 붉은 색이 아니다. 헤모시아닌 계통의 물질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51-2)<br>핵융합은 한 번 일어나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 별 속에서는 이런 일이 수억 년, 수십억 년 동안 이어진다. 그러면서 한 원소가 다른 원소와 합쳐지면서 새로운 원소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단 한 가지 이상한 걸림돌 같은 현상이 있다. 그게 바로 철이다. 원소들이 뭉쳐서 새로운 원소들이 생겨나다가 철이 만들어지면, 그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철은 거기에 무슨 다른 원소를 억지로 갖다 붙여 핵융합을 일으키려 해도, 다른 원소들의 핵융합이 일어날 때만큼 열을 내뿜지 않는다. 도리어 주변을 더 차갑게 식힌다. 따라서 일단 철이 생겨나면, 핵융합으로 발생한 열이 연달아 핵융합을 일으키는 현상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철은 별이 핵융합으로 빛을 내면서 여러 원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지며 열의 연결 고리를 끊는 물질이다. 그러니 우주에서 저렇게 많은 별이 빛나는 만큼, 별이 빛을 내고 남기는 잿더미인 철도 자연히 우주 곳곳에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53)<br>27 코발트: 김밥을 말며 Co<br>비타민은 몸에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전혀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병이 들므로 항상 조금씩은 챙겨 먹어야 한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곡식이나 채소에서는 좀체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개 고기에 들어 있는 영양소로 간주한다. 원소로 따져 보면 우리 몸의 성분은 대체로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질소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다른 생물도 대개 비슷하다. 비타민 중에서도 비타민A, 비타민C 등은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 다들 흔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너무나 독특하게도 코발트cobalt라는 금속 성분을 품고 있다. 그나마 한국인들은 고기를 별로 먹지 않아도 비타민B12 부족 증상을 덜 겪을 것으로 추정된다. 답은 해조류에 있었다.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김, 미역, 다시마 같은 해조류를 많이 먹는 편이다. 맛도 독특하고 비타민B12처럼 고기가 아니고서는 찾기 힘든 귀한 영양소도 들어 있는 김은 한국의 개성 있는 식재료다. 59-61)<br>코발트60은 자연 상태에서는 찾기 어려운 물질로, 보통 원자력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다. 코발트60은 보통 자연에서 캐내는 코발트보다 무게가 약간 더 나가는데, 59:60 정도로 무겁다. 이름이 코발트60인 것 역시 그런 성질 차이 때문이다. 코발트60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질은 방사선을 꽤 긴 시간 동안 강하게 내뿜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사선을 쏘아 파괴해야 하는 물질이 있을 때 코발트60을 그 곁에 갖다 놓으면 없앨 수 있다. 이 때문에 196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사선 치료 방법을 이용해서 암을 치료하려고 할 때, 바로 코발트60을 활용했다. 코발트60을 최대한 암세포 가까이 두면 코발트60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암세포를 파괴하도록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소독 작업을 철저히 해야 할 때도 소독하고 싶은 물건을 코발트60 근처에 놓아두면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이 미생물을 파괴해 버린다. 코발트60은 이렇듯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질이다. 65)<br>28 니켈: 초콜릿을 조심하길 Ni<br>과거에 니켈은 철을 만들 때 성질을 좋게 하려고 조금 섞어 넣는 용도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철에 크로뮴을 섞으면 녹슬지 않는 강철이라는 뜻의 스테인리스강이 되는데, 스테인리스강을 만들 때 니켈도 약간 넣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니켈의 새로운 용도가 생기면서 산업계에 니켈이 한층 더 많이 필요해졌다. 바로 배터리를 만들기 위한 용도다. 특히 한국의 배터리 회사들은 리튬과 니켈, 코발트, 망가니즈를 함께 이용하면 가벼우면서도 오래가는 전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로 NCM(Nickel-Cobalt-Manganese) 배터리다. NCM배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본래 코발트였다. 코발트를 많이 넣어 주면 성능을 끌어 올리기에 유리했다. 그런데 코발트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한국 회사들은 배터리를 만들 때 코발트를 줄이고, 그보다 구하기 쉬운 니켈을 많이 넣는 방법을 다양하게 연구해 왔다. 이렇게 니켈 성분을 많이 넣은 배터리를 흔히 하이니켈배터리라고 부른다. 73)<br>니켈과 철을 적절히 섞어 만든 재료 중에는 열을 받아도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도 있다. 모든 물체는 온도가 높아지면 크기가 좀 불어나고 온도가 낮아지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밀 가공을 해야 할 때 온도에 따라 크기가 자꾸 변하면 정확하게 작업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온도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은 니켈계 재료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인바invar라고 하는 재료인데, 보통 철 64%에 니켈 36%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니켈 함량 36%를 강조하여 FeNi36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니크롬선nichrome wire을 만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니켈의 소중한 용도다.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서 가느다란 선을 만들면 전기가 계속해서 쭉쭉 흐르기는 하는데, 어느 정도는 저항 때문에 전기가 잘 안 흘러서 열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이 선에 전기를 흘려 주면 주변을 뜨겁게 데울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이것을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 만든 선이라고 해서 니크롬선이라고 부른다. 74-5)<br>29 구리: 꽃게를 손질하며 Cu<br>구리는 문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금속이다. 철은 녹는 온도가 1,500℃가 넘는 데 비해, 구리는 1,080℃ 정도만 되면 녹아내린다. 그만큼 녹여서 가공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옛사람들에게는 구리가 사용하기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구리가 철보다 덜 녹슨다는 장점은 현대에도 요긴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 건물을 지을 때 물이 통과하는 파이프로는 구리로 만든 관, 즉 동파이프를 사용하면 좋다. 동파이프를 난방용으로 바닥에 묻어 두면 뜨거운 물이 돌 때마다 금속인 구리가 열을 잘 전달해서 바닥이 금방 따뜻해진다. 게다가 구리가 철보다 약하기 때문에 철로 된 공구로 자르거나 두들기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 외에도 조선 시대에 금속활자를 사용해 책을 인쇄할 때가 있었는데, 이때도 구리로 금속활자를 만들곤 했다. 여기에 청동을 비롯해 구리와 다른 금속을 섞어 만드는 오동, 백동 등의 재료까지 합치면 용도는 더욱 많아진다. 79-80)<br>주기율표에서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끼리는 성질이 비슷하다.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은 같은 족group에 속한다는 말도 자주 쓴다. 그런데 주기율표를 보면 구리 아래에 은이 있고 은 아래에 금이 있다. 구리와 금의 닮은 점으로 녹이 잘 슬지 않는 성질을 꼽는다면, 구리와 은의 닮은 점으로는 전기가 잘 통하는 성질을 꼽을 수 있다. 구리는 은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전기를 아주 잘 전달하는 재료다. 그러면서 가격은 구리가 은보다 훨씬 더 싸기 때문에 예부터 구리로 만든 가느다란 선이 전기를 전달하는 재료로 자주 쓰였다. 그 때문에 구리선이라고 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전선의 대표로 꼽힐 정도였다. 철이나 석유도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유용한 자원이기는 하지만, 철은 가격이 흔들리기에는 너무 흔하게 구할 수 있고, 석유는 반대로 너무 귀해서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가격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구리만큼 세계 경제를 잘 보여 주는 물질도 없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80-1)<br>30 아연: 굴전을 부치며 Zn<br>아연은 전기적으로 다채롭고 특이한 성질을 내는 금속 원소다. 사람 몸속에서도 복잡하고 특이한 물질을 만드는 데 조금씩 활용된다. 특히 몇 가지 호르몬을 만드는 화학반응에 아연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음식으로 먹은 재료를 소화해서 분해하여 다양한 원자들을 얻고, 그 원자들을 재조립해서 몸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을 만들어 낸다. 호르몬도 이런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해내려면 여러 가지 재료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역할을 하는 기계 장치 내지는 도구에 해당하는 물질도 몸속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준비 작업에 아연이 아주 약간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면 아연이 부족하면 몸에서 호르몬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도구를 제대로 만들 수 없게 되고, 결국 호르몬도 필요한 만큼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식 중에서도 고기나 조개류에 아연이 많다고 하며, 곡식 중에서는 통곡물에 아연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아연 성분이 많은 음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굴일 것이다. 85)<br>현대에는 구리와 아연을 주성분으로 한 합금 소재를 황동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에 쓰던 놋쇠 중에는 황동이 아닌 것도 있지만 황동도 그 일종으로 포함된다고 보는 게 맞다. 황동을 영어로는 brass라고 하는데, 트럼펫이나 트롬본 같은 금관 악기를 많이 사용하는 악단을 브라스 밴드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악기를 흔히 황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동은 구릿빛을 띤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 때 순수한 구리 못지않게 자주 쓰인다. 아연의 양을 잘 조절하면 구리만 사용할 때보다 훨씬 딱딱하고 튼튼한 재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금속 재질 물건 중에 반짝이는 구릿빛이나 황금색 비슷한데 순수한 구리나 금은 아닌 것 같을 때, 구리와 아연이 섞인 황동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다. 총알은 튼튼하면서도 녹슬지 않고 오래가야 하며, 열과 압력을 잘 견뎌야 한다. 그런데 총알의 겉면인 탄피 부분은 황색을 띤다. 이것은 탄피를 황동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7-8)<br>31 갈륨: 쌈 채소를 씻으며 Ga<br>LED는 반도체의 일종으로, 전기를 받으면 빛을 내는 성질이 있는 특별한 물질을 이용해 만든다. LED라는 부품이 개발된 초창기부터 빨간색 빛을 뿜는 제품은 만들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빨간색 빛을 내는 전자 제품이 그렇게 흔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LED로 흰색 빛을 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런데 흰 빛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빛이 섞인 결과가 사람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파란색 빛을 내는 재료를 만들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 주로 일본 과학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되었다. 당시 갈륨gallium이라는 금속 물질과 질소의 원자를 규칙적으로 잘 엮어 만든 물질을 이용하면 파란색 LED의 재료로 쓸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갈륨과 질소를 잘 엮는 작업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화학 회사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슈지なかむらしゅうじ와 동료들이 질화갈륨 결정을 만드는 절묘한 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LED 시대가 열렸다. 92-4)<br>갈륨은 석탄이나 금처럼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을 캐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갈륨은 다른 원소들과 반응한 상태로 이곳저곳에 조금씩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다른 금속을 돌 속에서 뽑아내고 점점 순수하게 정제하는 과정에서 불순물로 걸러낸 물질을 분리해 갈륨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광산에서 캔 돌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공장이 많은 곳에서 갈륨도 많이 생산된다. 사실 순수한 갈륨 덩어리는 좀 웃기고 재미난 물질이다. 갈륨은 금속치고는 매우 쉽게 녹아내리는 물질이어서 차가울 때는 꼭 철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30℃ 정도의 온도만 되어도 은색 페인트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해 버린다. 그래서 갈륨 덩어리로 칼이나 바늘을 만들어서 누구에게 써 보라고 건네주면, 그것을 받은 사람이 막상 사용하려고 할 때 체온 때문에 녹아 버려서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 모양을 잡아 준 뒤에 찬 바람만 좀 쐬어 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튼튼한 강철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96-8)<br>32 저마늄: 도라지무침을 먹으며 Ge<br>게르마늄이라고도 부르는 저마늄은 최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의 주원료 물질이었다. 저마늄 덩어리는 전기가 통할 듯한 특성을 많이 갖춘 금속이기는 한데, 막상 전기를 흘려 보면 그다지 잘 통하지는 않아서 부도체에 가깝기도 한 애매한 물질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이 어중간한 성질을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전자 부품을 개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47년에 미국의 과학자들이 진공관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더 좋은 부품을 개발했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던 저마늄에 불순물을 조금 섞어 넣으면 평소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다가 조건이 맞을 때만 전기가 흐르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잘 활용하면 릴레이를 대신할 수 있고, 진공관을 대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트랜지스터라는 부품이다. 다시 말해 트랜지스터도 “스위칭”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진공관보다 크기도 훨씬 작고, 고장도 잘 나지 않고, 전기도 훨씬 덜 들었다. 이렇게 개발된 저마늄 트랜지스터를 일반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시작으로 본다. 102-4)<br># 릴레이 : 전기신호가 약해지는 지점에 기계 장치를 설치해 본래의 전기 신호를 계속 연결하는 방식, 스위칭도 비슷한 개념이다.&nbsp;<br>요즘은 트랜지스터 대신 저마늄이 사용되는 다른 분야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는 규소로 만든 보통 유리보다 적외선을 잘 통과시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적외선을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카메라를 만들 때 저마늄 유리 렌즈를 자주 사용한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기능은 어두운 밤에도 물체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장비나, 열을 내뿜는 물체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관찰하는 열화상 카메라 등에 사용할 수 있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가 활용되는 또 다른 분야도 있다. 요즘 인터넷 통신을 이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비로 광케이블이 있는데, 광케이블은 광섬유라는 재료로 만든다.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그 정보는 광섬유를 따라 흘러간다. 전선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기를 전달해 준다면, 광섬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빛을 전달해 준다고 보면 된다. 과학자들은 광섬유를 만들 때 약간의 저마늄을 같이 조합하면 성능이 더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04-5)<br>33 비소: 곶감 사건을 생각하며 As<br>비상이 사람에게 독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비소砒素라는 원소 때문이다. 비소는 꼭 산소와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 몸에 독이 될 가능성이 큰 물질이다. 이것은 꽤 특이한 성질이다. 탄소의 경우, 탄소와 산소 원자가 하나씩 연결된 물질은 일산화탄소이며, 이것은 연탄가스 중독의 원인이 되는 대표적인 위험 물질이다. 하지만 탄소와 산소, 수소 원자가 다른 형태로 일정하게 연결된 탄수화물은 달콤한 음식이 된다. 염소 역시 염소끼리만 모여서 염소 기체를 이루면 대표적인 독가스 무기가 되지만, 염소와 소듐이 1:1로 붙어 있으면 음식 맛을 내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소금이 된다. 그런데 비소는 다른 원소를 어떻게 활용해서 무슨 물질을 만들든 대부분 사람 몸에 해를 끼치는 위험한 물질이 된다. 더군다나 중금속 물질은 주로 사람 몸에 어느 정도 쌓였을 때 피해가 나타나지만, 비소는 적은 양으로도 사람 목숨을 빠르게 빼앗는 위험한 물질이 되는 경우가 많다. 109-10)<br>지금은 비소의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현대에도 우연한 비소 중독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이미 비석이나 웅황을 구해서 사용했고 비상을 제조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비소 성분은 돌과 흙 속에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렇기에 유독 비소가 많은 지역에서 지하수를 개발해 물을 마시거나 그런 땅에서 농작물을 길러 먹는다면, 물이나 작물에 녹아든 비소를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먹게 될 수 있다. 개중에 몇몇 농산물은 특히 비소가 잘 쌓이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하필 이런 농산물을 비소가 있는 땅에 심어 기르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끔은 수입하는 농산물 중에 검사 결과 비소가 나온 것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물을 파고 지하수를 개발해서 쓸 때, 그 물속에 비소가 있는 것을 모르고 사용하다 피해를 보는 곳이 많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등이 자주 언급되는 곳들이다. 113-4)<br>34 셀레늄: 조기를 구우며 Se<br>양자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물체가 가진 에너지를 변화시키려고 할 때 일정한 단계별로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속 20km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가 있다고 해 보자. 이 차를 운전하면서 가속 페달을 잘 밟으면 시속 22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고, 시속 25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으며, 시속 31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양자이론을 적용하면 그렇지 않다. 주변 조건에 따라 자동차의 속도를 바꿀 수 있는 단계가 정해져 있다. 시속 20km에서 더 빠르게 달리게 하면 그다음 단계인 시속 30km가 되어야만 한다. 그 사이의 단계는 없다. 반대로 더 느리게 달리게 하면 그 전 단계인 시속 10km가 되어야만 한다는 식이다. 양자점은 국내에서는 흔히 약자로 QD(quantum dot)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학자들이 양자점의 첫 번째 유용한 특성으로 꼽는 것은 에너지가 단계별로 정확히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을 잘 활용하면 정확하게 정해진 색깔의 빛만 내뿜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119)<br>양자점을 만들려면 고작 수십 나노미터, 그러니까 10만분의 1mm 정도밖에 안 되는 극히 고운 가루를 일단 만들어야 한다. 그런 물질을 대량 생산해서 사용하려면 그것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게 곱고 고운 가루를 오차 없이 항상 같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양자점을 어떤 부품이나 장치에 넣어 활용하려면 양자점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에 다른 물질을 살짝 발라서 씌워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핵core 주위에 껍질shell을 씌운다고 말한다. 이때 그 작디작은 가루 알갱이 하나하나마다 보호용 껍질이 제대로 씌워지지 않으면 실패다. 껍질을 씌운 뒤에는 이 알갱이들을 다른 물체에 고정하고 연결해서 쓰기 위한 일종의 갈고리나 접착제 역할을 하는 배위자ligand라고 하는 물질들을 껍질 위에 붙여 줘야 한다. 제대로 된 배위자를 만들어 고르게 붙이지 못하면 역시 실패다. 이렇게 빛을 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양자점의 핵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사용되던 물질이 바로 셀레늄이다. 119-20)<br>35 브로민: 어묵탕을 끓이며 Br<br>다시마를 우린 국물이 맛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다시마 속에 들어 있는 글루타메이트glutamate 성분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할 때 조금만 넣어도 감칠맛이 확 도는 화학조미료 중에 글루탐산나트륨monosodium glutamate이라는 것이 있다.&nbsp; 다시마 같은 해조류는 바닷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몇 가지 특이한 물질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다. 코발트나 아이오딘iodine, 요오드 같은 물질이 대표적인데, 과거에 브롬이라고 했던 브로민bromine도 해조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물질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완도금일수협의 특산물 안내 자료를 보면 다시마에는 브로민이 0.02~0.09% 정도 들어 있다고 한다. 매우 작은 수치인 것 같지만, 대다수 동물이나 지상 식물 몸속에서는 이보다 훨씬 적은 양의 브로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고추의 매운맛이 캡사이신 덕분에 나는 것이라면, 다시마는 대략 그 정도만큼은 브로민 맛이 나는 음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24)<br>만약 브로민만 모은 덩어리가 담긴 병을 보게 된다면 꽤 신기할 것이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되어서 마치 핏방울 비슷하게 불그스름한 색깔을 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가지 원소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 상태가 되는 물질은 매우 드물다. 금속으로 분류되지 않는 원소 중에서는 오직 브로민밖에 없고, 금속 중에서는 수은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원소 중에서 그것 한 가지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가 되기 쉬운 물질은 브로민과 수은, 단 두 가지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특이함은 지구의 평범한 환경에서만 그렇게 여겨진다. 철이나 구리 같은 쇳덩이도 아주 높은 온도로 달구면 결국 흐물흐물 녹아서 액체가 되기 마련이고, 헬륨 같은 물질도 아주 낮은 온도 속에 집어넣으면 굳어서 액체가 될 수 있다. 즉, 어떤 물질이 액체냐, 고체냐, 기체냐 하는 것은 주변 조건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하필이면 액체 상태가 된 순수한 수은 덩어리와 순수한 브로민 덩어리는 둘 다 몸에 해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129)<br>36 크립톤: 포장마차 앞에 서서 Kr<br>빛은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서로 얽혀서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빛을 전자기파라고도 부른다. 빛이 가진 전기의 힘은 빛이 날아가는 동안 빛을 따라가며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아주 규칙적이다. 즉, 빛이 날아가는 동안 전기의 힘은 똑같은 정도로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한 번 커졌다가 작아지는 동안 빛이 날아간 거리를 파장이라고 한다. 크립톤에서 나오는 빛도 날아가는 동안에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이 현상이 일어나는 정도, 그러니까 파장은 빛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 현상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크립톤 원자에서 나온 그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반복이 한 번 일어나는 거리, 즉 파장이 얼마인지를 측정해서, 거기에 1,650,763.73을 곱하면 그게 바로 1m라는 길이가 된다. 133)<br>주기율표를 살펴보면 크립톤은 헬륨, 네온, 아르곤 같은 원소와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다. 따라서 크립톤 역시 화학반응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원소를 비활성기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 주위에 있다고 해서 냄새가 나지도 않고 몸에 악영향을 미칠 일도 없다. 어떤 원소 하나만의 성질을 정확히 측정하는 실험을 할 때 순수한 크립톤을 구해 실험하면 편리하다. 특정 원자가 내뿜는 빛을 관찰하려면, 그 원자가 빛을 내뿜도록 전기를 걸거나 온도를 올려 주어야 한다. 만약 이런 실험에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수소 기체나 염소 기체를 이용한다면 원자가 전기나 열을 받아 빛을 내뿜기도 전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에 들러붙으면서 엉뚱한 상태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1m를 정할 때 하필이면 크립톤이라는 낯선 물질로 실험하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크립톤은 빛이 선명하게 잘 보이고 정확하게 잘 나오는 특징까지 있다. 그래서 1m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처럼 정밀한 실험을 하기에 좋다. 134)<br># 지금은 빛이 날아가는 속력을 기준으로 1m의 길이를 정하고 있다.<br>37 루비듐: 곰취나물과 밥을 비비며 Rb<br>루비듐 중에는 방사성을 띠는 루비듐82라는 물질이 있다. 루비듐82는 보통 루비듐과는 다르게 반물질antimatter을 뿜어내는 놀라운 특성이 있다. 루비듐82가 뿜어내는 반물질은 양전자positron라는 것이다. 이 물질은 전자 제품 속을 돌아다니는 평범한 전자와 거의 모든 점에서 똑같아 보이지만, 전자가 ⊖전기를 가진 것과 반대로 ⊕전기를 가진다.&nbsp; 루비듐82가 뿜어내는 양전자와 정반대 전기를 띤 전자와 부딪혀 반응하게 만든다. 그러면 양전자와 전자가 서로 소멸하며 강력한 빛을 내뿜는다. 이 빛은 맨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물질을 다 뚫고 나온다. 그리고 정확히 반대인 방향으로 두 줄기 빛이 동시에 나오기 때문에 어느 위치에서 빛이 나오는지 관찰하기가 좋다. 그래서 양전자가 소멸하면서 나오는 강력한 빛을 관찰하면 그 양전자가 몸속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전자를 내뿜는 물질을 몸에 주입하면 그 물질이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위치를 정밀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140)<br>루비듐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는 데도 큰 도움을 준 물질이다. 루비듐이 금속이면서도 쉽게 녹고 잘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금속은 수천억 개의 원자들, 수천조 개의 원자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엄청나게 많은 원자의 덩어리이다. 이런 상태라면 원자 하나하나에 각각 영향을 주어야 하는 정밀한 조작을 하기가 어렵다. 원자를 하나하나 조작하려면 덩어리가 아니라 원자를 하나하나 떼어 놓은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물질을 기체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금속을 녹여서 액체로 만들려고만 해도 쇠가 녹을 정도로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하물며 그렇게 쇳물이 된 금속을 끓여서 기체로 만들기는 더욱더 어렵다. 그런데 루비듐은 쉽게 녹고 쉽게 끓는다. 그러니 어떤 작업을 금속으로 해야 하는데, 원자 하나하나를 움직여야 한다면 루비듐이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런 이유로 레이저를 이용해 원자 하나하나를 각기 붙잡고 따로 움직이는 실험을 할 때 루비듐은 단골 실험 대상이다. 144-5)<br>38 스트론튬: 솜사탕을 건네주며 Sr<br>옛날식 텔레비전의 기본 원리는 전자가 부딪히면 빛을 내는 물질을 유리판에 발라 놓고, 전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사하는 전자총을 이용해서, 유리판을 향해 전자를 이리저리 발사하는 것이다. 그 유리판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생긴 빛이 그림을 이루게 된다. 전자는 ⊖전기, 즉 음전기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장치를 음극관cathode ray tube, CR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옛날 텔레비전은 전자총으로 전자를 발사해서 CRT에 원하는 모양으로 빛이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영상을 만들어 내는 장치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영상을 만들어 낸 후에 문제가 생긴다. 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가 충돌해서 갑자기 속력을 잃다 보면 엑스선 등의 방사선이 나온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생기는 엑스선을 흡수하거나 엑스선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물질을 일종의 방어막처럼 텔레비전 화면에 얇게 발라야 했다. 여기에 적합한 물질이 바로 스트론튬이었다. 149)<br>스트론튬은 여러 방사성 물질 중에서도 특히 골칫거리로 자주 언급되는 물질이다. 정확히 말하면 보통 스트론튬보다 약간 더 무거운 스트론튬90이 문제다. 보통 스트론튬과 무게를 비교하면 88:90 정도로 약간 무겁다. 스트론튬90은 방사선을 오랫동안 꾸준히 내뿜는 점도 문제지만,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점에서도 걱정스러운 물질이다. 주기율표에서 스트론튬 바로 위에는 칼슘이 적혀 있다. 방사성 물질이라고 해도 몸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몸 밖으로 나온다면 별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 실제로 방사성 물질 중에는 그런 것도 여럿 있다. 그런데 스트론튬은 하필 칼슘과 성질이 비슷하고, 칼슘은 뼈에 많이 들어 있다. 그렇기에 스트론튬이 몸속에 들어오면 우리 몸은 스트론튬을 칼슘으로 착각해서 뼈를 만드는 데 칼슘 대신 스트론튬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보통 스트론튬이 아니라 방사성을 띤 스트론튬90이라면, 뼛속에 스트론튬90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151)<br>39 이트륨: 양배추를 썰며 Y<br>스웨덴에서 광산 개발과 관련된 산업과 기술이 발전했던 역사는 주기율표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트륨yttrium이다. 스웨덴의 이테르뷔Ytterby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돌에서 나온 원소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현대에 희토류로 분류되는 광물들은 이테르뷔에서 발견된 이트륨과 비슷한 물질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들어맞는다. 주기율표에서 이트륨 바로 위에 적혀 있는 스칸듐과 이트륨 바로 아래 칸 근처에 있는 란타넘lanthanum이 대표적인 희토류이기 때문이다. 란타넘의 경우에는 주기율표 모양이 그 근처에서 확장되는 형태로 바뀌기 때문에 정확히 이트륨 바로 아래 칸에 적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트륨과 같이 엮기에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란타넘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란타넘족 원소라고 분류하는 네오디뮴neodymium, 디스프로슘dysprosium 등 여러 원소까지 모두 합쳐 희토류라고 부른다. 그러니 화학 발전의 역사에서는 이트륨이 희토류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155-6)<br>흔히 야그 레이저라고도 하는 YAG 레이저는 Y, A, G 세 가지 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레이저 발생 장치를 말한다. 여기서 Y, A, G는 각각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garnet을 가리킨다. 레이저는 빛과 물질 속의 전자가 서로 독특한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을 이용해 특수한 빛을 내뿜는 것을 말한다. 자연 상태의 빛은 여러 성질이 섞여 있고, 진행하는 동안 사방팔방으로 퍼져 버린다. 이와 달리 레이저는 빛의 성질이 잘 가다듬어져 있으며, 잘 퍼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간다. 이런 빛을 만들려면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전자를 잘 조정해야 한다. 원하는 색깔의 빛이 생기도록 전자가 특정한 속력으로 움직이고 적절한 힘을 받으며 돌아다니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은 온갖 물질을 조합해 보다가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놓으면 그 물질 속을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레이저로 쓰기에 좋은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YAG 레이저가 실용화되면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156-7)<br>40 지르코늄: 과자 봉지를 뜯으며 Zr<br>촉매 연구는 화학에서 가장 마법 같은 분야다. 원래는 안 일어날 화학반응을 촉매를 써서 일어나게 만들면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설탕물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화학의 눈으로 살펴보면 이것은 대단히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다. 설탕이라는 별것 아닌 재료가 어떻게 사람의 살이라는 귀중하고 복잡한 물질로 변하는 것일까? 설탕물 1kg을 주면서 그것으로 사람 살 1kg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키라는 요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난다. 촉매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과학자들은 지르코늄이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화학반응을 어느 정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 주변을 뜨겁게 만들어야만 이런 반응이 일어난다. 이 말은 연료를 사용해 불길로 주변을 뜨겁게 덥혀 주어야 수소가 생긴다는 뜻이다. 지르코늄의 이 반응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커다란 사고가 발생했다. 163-4)<br>지르코늄은 중성자와 반응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 때문에 중성자가 많이 돌아다니기 마련인 원자로 내부에 들어갈 재료로 지르코늄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평상시라면 이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다. 원자로에서는 중성자를 잘 조절하여 원하는 만큼 핵반응을 일으켜야 하는데, 여기에 지르코늄 재료를 이용하면 중성자 조절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안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후 온도가 1,200℃에 가까워지자 지르코늄이 물과 반응해 수소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반응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 높은 온도라는 조건이 갖춰지자 지르코늄은 아무도 바라지 않는 수소 생성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평상시 안전을 위한 방어 판 같은 용도로 넣어 두었던 지르코늄이 이런 비상 상황에서 오히려 수소라는 불쏘시개를 잔뜩 만들어 낸 셈이다. 수소가 좋은 연료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불이 잘 붙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결국, 수소는 불이 붙어 폭발을 일으켰다. 16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37/78/cover150/e93253443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437782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