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nana35님의 서재 (nana35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좋은 책을 찾아서</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08 Oct 2026 23:03:38 +0900</lastBuildDate><image><title>nana35</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210815324392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nana35</description></image><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민태기 -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60205</link><pubDate>Thu, 08 Oct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602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92532664&TPaperId=175602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86/9/coveroff/e1925326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92532664&TPaperId=175602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a><br/>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08월<br/></td></tr></table><br/>프롤로그<br>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br>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3일 만에 혁명이 실패하자 서재필은 망명하고, 첫 번째 아내는 자살했다.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고, 집안 전체가 멸문당한다. 서재필은 고작 스무 살이었다. 갑신정변의 동지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기대와 달리 일본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다시 박영효, 서광범과 태평양을 건너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서재필은 어느 미국인 자선사업가의 도움으로 1886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습력이 뛰어났던 서재필은 모든 학생을 대표해 졸업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후원하던 독지가는 서재필이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해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과학을 택했다. 그리고 의대에 진학했다. 1890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안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12)<br>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최초의 순 한글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을 채용한 덕분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간에 맞춰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만든다.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모임은 7월 2일 독립협회로 발전한다. 고종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국고를 지원했다. 여기에 고종의 측근뿐 아니라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친러파, 친일파 등 정파를 초월한 다수의 관료가 참여했다. 어쩌면 몰락하는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석 달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기에 대한 의례를 시작했던 서재필은 독립문에 태극기를 새겼다. 《독립신문》은 태극기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제호에도 태극기를 인쇄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자주 독립국으로서 ‘제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897년 10월, 여론에 호응한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이때만 해도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았던 두 세력은, 곧 민주주의 도입을 둘러싸고 대립한다. 14)<br>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고 청중의 동의를 구하는 토론 수업을 시켰다. 여기에 자극받은 학생들이 토론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협성회’의 시작이다. 협성회는 이승만, 주시경, 오긍선 등 배재학당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으며, 토론회를 기반으로 대중 계몽 활동에 나섰다. 이렇게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큰 영향을 준 서재필은 그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오긍선 역시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아 서재필의 뒤를 이었고, 나중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의 서양 의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선도하는 대중 토론회가 인기를 끌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에서는 안창호가 명연설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러한 활동은 점차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외교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15)<br>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br>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안창호가 하와이를 지나가고 두 달 뒤인 1902년 12월, 대한제국의 정식 여권을 소지한 최초의 이민자들이 민영환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에서 하와이로 출발했다. 민영환은 이들의 여권과 비자 처리 업무를 맡았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뜬 그는 날로 격해지는 열강들의 침략을 외교 관계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 하와이 이주 사업 역시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하지만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같은 해, 일본의 요구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도 금지되었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여기서 다했다. 하와이 이민을 주선했던 민영환은 자결하고, 이민자들이 돌아갈 조국은 없어졌다. 20-1)<br>한편, 3·1운동의 폭풍이 지난 1919년 여름, 파리의 프랑스 정보 당국은 하노이에 긴급 전보를 보내 한 젊은 남자의 신원 확인을 요청한다. 이 젊은이는 ‘응우옌 아이 쿠옥(Nguyễn Ái Quốc)’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응우옌(Nguyễn)은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성으로 한자로는 ‘완(阮)’이고, ‘아이 쿠옥(Ái Quốc)’은 한자 ‘애국(愛國)’을 베트남어로 표시한 것이다. 이때까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운동가였던 그는 난데없이 파리강화회의장에 들어가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했다. 당황한 프랑스 정보 당국은 이 사람의 배후를 캐기 시작했는데, 밝혀진 내용은 이렇다. 1911년 베트남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한 그는 미국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랑스 정보 당국이 기록한 단체의 이름은 ‘Korean National Association’.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안창호, 이승만 등이 결성한,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이민자들이 꼬박꼬박 기금을 모으던 바로 그 ‘대한인국민회’다. 24)<br>#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나중에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br>1918년 상하이 망명 중이던 여운형 역시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김규식을 대표단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이와 동시에 여운형은 전국적인 봉기를 조직해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는데, 이것이 3·1운동의 시작이다. 파견된 김규식은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서 백방으로 뛰던 도중 프랑스 측으로부터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 한다는 답변을 듣고, 긴급히 여운형 측에 알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25)<br>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br>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제국주의의 실체가 드러나자 외교론이나 애국계몽론의 입지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는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이 설득력을 얻으며, 한인사회당이 임시정부의 다수파가 된다. 임시정부는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세력을 재편하여 동로, 북로, 서로의 3대 군관구를 설정했다. 그해 6월 홍범도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다. 이동휘는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추가 파견하여 이미 활동 중인 박진순에게 합류시키고,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 약속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신용이 없던 신생 소비에트의 지폐가 아니라 환전이 가능한 제정러시아의 금화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이르쿠츠크파가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자 계열(김구 등)에 이 돈의 존재를 폭로한다. 이를 임시정부의 공금으로 생각한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으로 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띠었다. 1921년 1월, 이동휘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해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된다. 29-30)<br>한편, 1920년 독립군의 맹활약에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하며, 만주 한인 민간인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15 이에 세력이 위축된 여러 독립군 조직은 1921년 초 연해주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자유시)에 집결하여(4,500명) 단일한 독립군 조직인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했다. 사실 이 집결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의 산물이었고, 상해파의 지도를 받는 다수의 독립군 조직을 이르쿠츠크파가 연해주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접수하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의 접수를 시도했다. 1921년 6월 28일 볼셰비키와 진압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대한독립군단을 무력으로 제압하는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당시 김구는 좌파 지도자들이 횡령했다고 의심하고, 1922년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상하이 대로변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지도 체제가 무너지며, 조국을 되찾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좌우 분열이 시작되었다. 30)<br>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초기 사회주의자 김철수는 김구에 복수하려는 세력을 끝까지 말렸고,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려공산당 자금 사건 이후 새로운 좌파 지도자로 등장한 박헌영 등의 스탈린주의자들과 대립했다. 1990년대 러시아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김구가 지목한 인물들의 공금횡령은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제적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편, 이동휘와 동행을 마친 이극로는 황진남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남아 1922년부터 베를린대학(Universität zu Berlin)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이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만들어 스스로 강의했다. 2019년, 이극로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이 강좌를 1923년 독일 교육 당국이 정식 강좌로 허가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 조선어는 독일어로 ‘Koreanische Sprache(한국어라는 뜻)’라고 표기되어 있다. 31-2)<br>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br>과학이 조선의 살길이라는 것은 명백했고,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과학을 배우자’라는 구호로 이어졌다. 1922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디어 상대성이론의 본격적인 소개가 시작된다. 저자는 ‘公民(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이라는 필명은 화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말한다. 우선,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부터 강조한다. 세계를 뒤바꾼 유대인 ‘괴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로스차일드, 레닌, 마르크스를 차례로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역시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과학이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은, 비록 부분적으로 잘못된 서술이 있긴 하지만, 100년 전 신문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는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 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총 5부로 나누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36-7)<br>나경석은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회사와 제약 사업 등에 종사했으나 실패하고, 유학 친구 신익희와 축구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신익희와 함께 비밀 조직을 만들다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신익희는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여기서 손정도, 여운형, 황진남과 함께 임시의정원 활동을 했다. 이 무렵 과학 연구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시작은 1924년 김용관이 조선일보에 발명학회 설립을 제안하면서부터다. 대한제국이 이공계 교육을 위해 설립한 상공학교(1899년)에 뿌리를 둔 경성공업전습소(1907년)가 1915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20 이 학교 졸업생들은 최초의 과학도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를 만들고, 1920년 10월 20일 《공우(工友)》라는 잡지를 창간해 과학 계몽에 앞장섰다. 이 창간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37-8)<br>1933년 6월, 발명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한다.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훗날 명성 황후 묘소를 옮기면서 비워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세워지며 실현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홍릉에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1920년대 대학 야구 스타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 위원장이었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있던 석학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의 노력으로 연구소가 본궤도에 이르자 이곳에 과학원 설립이 추가로 추진된다. 1970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은 고등과학교육기관 설립 자문단을 파견한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 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38-40)<br>1922년 도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br>100년 전, 나라 잃은 민족의 부활 수단으로 인식되며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상대성이론은 1922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조선 전체에 아인슈타인 붐으로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간다는 사실은 6월부터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기 전이었다.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이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이 더욱 떠들썩해졌다. 아인슈타인의 세세한 일정을 보도하던 《동아일보》는 11월로 예정된 그의 도착에 맞춰 특집 기사를 기획한다. 필자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황진남. 함흥 출신의 하와이 이주민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서 현순, 여운형, 신익희와 함께 활동했던 그 황진남이다. 임시정부의 분열 때문에 이극로와 마찬가지로 독일 유학을 택했던 그는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다. 43)<br>1923년 조선 전역 상대성이론 강연회<br>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 다음 해인 1923년, 도쿄 유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조선 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기획한다. 그들의 리더로는 한위건과 이여성이 있었고, 여기에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재학 중이던 최윤식이 합류했다. 1919년의 3·1운동이 시작되던 첫날, 시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경성의전 학생으로 시위를 주동했던 한위건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923년 여름 학우회 순회강연을 이끌게 된 것이다. 순회강연단의 또 다른 리더 이여성은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본명은 이명건(李命鍵)이다. 그의 조부는 금부도사였고 부친은 현감을 지낸 만석꾼이었다. 그는 집에서 토지 문서를 훔쳐 중국으로 떠나며 어린 시절 항일운동으로 의형제를 맺었던 김원봉, 김두전과 함께 호를 짓는데, 김원봉은 약산(若山, 산과 같이), 김두전은 약수(若水, 물과 같이) 그리고 이명건은 여성(如星, 별과 같이)으로 불리게 된다. 49)<br>상대성이론 열풍은 문인 이광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소설 〈무정〉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외쳤던 그는 1927년 6월 《동광》에 &lt;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원리, 시간 공간 및 만유인력 등 관념의 근본적 개조&gt;라는 장문의 논설을 싣는다. 《동광》은 안창호가 주도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기관지 성격으로 1926년에 시작된 잡지다. 이제는 상대성이론을 단지 어렵다고만 할 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이해하는 수준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이광수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에 이광수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문체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에테르의 존재가 부정된 마이컬슨의 실험으로 시작해 빛의 상대속도가 어떻게 새로운 중력이론으로 연결되는지 상대성이론을 비교적 정확하게 해설했다. 이처럼 당시 아인슈타인은 일반인에게 알려질 정도로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 되었고, 1928년 8월 22일 《중외일보》는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라는 사설을 싣기도 한다. 이 흐름은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54)<br>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br>1923년 9월 1일, 도쿄는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다.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난에 이어 끔찍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이 시기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폭등한다. 1923년 10월 한 달에만 300배가 올라, 11월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으로 나치가 급부상했다. 1924년 6월 26일 《신한민보》에 미주 한인들이 베를린 유학생 대표에게 송금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데, 수령자는 이극로였다. 이렇게 미주 한인들과 인연을 맺은 이극로는 몇 해 뒤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미주 순회 한글 강연에서 ‘언어는 민족의 생명’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나라는 언어에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말과 글의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극로는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lt;말모이&gt;(2019년)다. 61-2)<br>1926년 서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야구 스타 최규남<br>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어린 시절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규남은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한영서원(韓英書院, 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진행되던 1899년 초, 윤치호는 ‘산업 학교(industrial school)’를 설립하기 위해 재산 일부를 남감리교회 재단에 기부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가 이를 종잣돈으로 1906년 개성에 세운 학교가 ‘한영서원’이다. 설립 목적에 맞게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조선에 아인슈타인 붐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고교 야구 선수 최규남은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당시 연희전문 수물과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학과 물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1932년, 최규남은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모교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1934년 무렵 양자역학 강의를 시작한다. 서양에서조차 낯설던 양자역학을 조선에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65-7)<br>1931년 교토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br>1932년 1월 8일, 이태규가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얼마 뒤 일본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다. 다이쇼 천황에 이어 즉위한 쇼와 천황 히로히토에게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며 온건 의회주의자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군부가 행동에 나섰다. 1월 28일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밀어붙이지만 곧이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점령군 수뇌부가 붕괴한다. 밀리면 안 된다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5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수상을 사살하고, 일본의 정당정치가 무너진다. 이로부터 일본은 제동이 걸리지 않는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경제공황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먹고사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는 독일 바이마르 체제를,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심지어 조선의 지식인 사회까지 급격히 우경화시키고 있었다. 아마 심훈의 《상록수》(1935년)는 이런 지식인 사회의 변절과 비관에 반전을 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71)<br>이상의 시 〈삼차각 설계도: 선에관한각서 1〉(1931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요하게나를전자(電子)의양자(陽子)로하라〉 여기서 양자는 ‘量子(quantum)’가 아니라 ‘陽子’로 표기되어 있어, 양성자(陽性子, proton)를 의미한다. 이 시를 쓸 무렵 원자는 전자와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시가 발표되고 한 해 뒤인 1932년에는 중성자도 발견된다. 문제는 양성자와 중성자만으로 이루어진 원자핵이 어떻게 안정적일 수 있는가였다. 이를 설명하려면 이들을 붙잡고 있는 힘을 가진 새로운 입자가 필요했고, 유카와 히데키는 이 입자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예측하고 ‘중간자’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실험으로 발견되어 노벨상을 받았다. 1907년생인 유카와 히데키는 1910년생 시인 이상과 동년배였다. 이미 100년 전,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그렇기에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며 시대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으로 시대를 극복하려던 지식인들은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73)<br>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br>1930년대 말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면서 일제가 과학 교육까지 제약하기 시작했다. 발명학회가 1934년 ‘과학데이’를 이끌고, 다시 그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김용관은 산학협동 기반의 ‘이화학 연구소’ 설립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의 대성공으로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지만 과학데이의 성공은 당국의 탄압을 불러왔고, 명망가들의 지원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과학데이’ 운동이 독립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옥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 또한 발명학회가 일본발명학회의 지부로 흡수되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위축되고 친일화되었다. 양자역학 연구를 이어가던 도상록은 1941년 만주국(滿洲國) ‘신징(新京)공업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도 록일랑(都 祿一郞, 미야코 로쿠이치로)’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러 편의 양자역학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84-5)<br>1937년 교토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br>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種)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은 동종 교배를 통해 태어난 개체들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분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油菜)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1937년 4월 이태규 박사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종의 합성〉으로 스타가 된 우장춘 박사가 다키이 연구 농장 초대 농장장이 되어 교토로 갔다. 리승기까지 합류해 교토에서 세 사람이 모인 것도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88)<br>듀퐁의 나일론이 1938년부터 상업적으로 사용되자, 실크가 나일론으로 대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당시 세계 최대 실크 생산국이었던 일본은 다급해졌다.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된 리승기는 합성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39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나일론의 대항마로 여겨진 이 섬유로 리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순식간에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듀퐁은 나일론 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미국이 원유 공급을 끊자 리승기 교수의 비날론 연구는 더욱 군사화되었다. 석유에서 합성하는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석유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나일론이 들어온 것은 1953년 코오롱이 시작인데, 코오롱은 ‘코리아’와 ‘나일론’의 합성어다.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89-91)<br>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br>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 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마저 두고 보지 않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에서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적극 지원을 독려한다.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춘원 이광수의 총애를 받았던 윤석중은 자신의 호를 한자 이름인 석중(石重)에서 딴 석동(石童), 즉 ‘돌아이’라고 지었다.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기도 한 그는 1969년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자, 어린이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앞으로〉라는 동요를 작사했다. 비록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로는 우주 개발이 먼 일이었지만, 자라나는 세대만큼은 우주에 대한 꿈을 키우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94-5)<br>초기 대종교는 무장 독립 세력이 집결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여기에 대종교인이던 김좌진, 홍범도 두 장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 이후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궤멸하자 이들은 다른 부분에서 활약한다. 바로 한글 운동이다. 이를 이끈 주시경이 대종교인이었고, 그들은 ‘조선어학회’로 뭉쳤으며 한글 교육을 독립 투쟁의 중심으로 보았다.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 서가에서 발견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 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 책은 한글 창제에서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인간의 발성 구조와 연관되는지, 초성-중성-종성이라는 논리적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한 귀한 자료다. 97)<br>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br>와세다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신격호는 1944년 공작기계의 필수품인 ‘절삭유(cutting oil)’ 공장을 차렸으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은 불타버린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절삭유 원료인 피마자기름으로 비누와 포마드 오일을 개발해 크게 성공한다. 이 돈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려 화학제품군을 확장했다. 이때 그의 눈길을 끈 제품이 있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가져온 신기한 물건인 껌이었다. 그는 세계 최대의 껌 회사인 미국의 리글리(Wrigley)가 원래 비누 회사였다가 품목을 전환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리고 공정 개발에 착수한다.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출신들을 영입해 이 연구에 투입했다. 당시 여러 일본 회사가 껌 개발에 나섰지만, 화학공학 출신으로 각종 화학제품 생산 경험이 풍부한 신격호가 단연 선두에 섰다. 1948년, 껌이 성공하자 신격호는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 이름을 ‘롯데’로 바꾸었다. ‘롯데(Lotte)’는 신격호가 좋아하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샤를로테(Charlotte)에서 따왔다. 106)<br>최형섭(1920년생)과 신격호(1921년생)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1940년대 초, 문선명(1920년생)도 이곳에서 유학했다. 그의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당시 와세다대학 건축과에는 통영 나전칠기 장인의 아들 엄덕문(1919년생)도 있었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건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대극장과 인민문화궁전과 같은 대형 공연장에 놀란다. 박정희 정부는 급히 이에 필적할 공연장 건축에 나섰다. 나전칠기 집안에서 자란 엄덕문은 누구보다 전통 양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광화문 거리의 랜드마크가 이렇게 탄생했다. 2022년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 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엄덕문의 원래 아이디어였던 광장도 결국 실현되었다. 엄덕문은 문선명과 평생 친구였다. 해방 전 가시마 건설에서 같이 일했던 그는 한때 통일교의 핵심 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격호의 소공동 롯데 호텔과 백화점도 그의 작품이다. 106-7)<br>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br>1946년, 삼팔선으로 남북이 갈리며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고,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세울지 곳곳에서 좌우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여운형은 어떻게든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에 나섰지만, 한쪽으로만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그는 양쪽 모두의 공격을 받았다. 여운형과 함께 활동하던 황진남도 마찬가지였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작은 6월 초, 도상록 교수에 대한 전격적인 파면 조처였다. 당시 경성대학은 자치위원회로 돌아가고 있었고, 도상록은 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건준을 인정하지 않던 미 군정은 자치위원회 역시 인정하지 않았고, 도상록이 자치위원회를 통해 대학 자금을 사용한 것을 공금 횡령으로 몰아간 것이다.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식민 지배 스타일의 강압적인 지배 구조가 이어지자 학계가 반발한다. 파면된 도상록은 월북해서 7월 3일 김일성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김일성종합대학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110)<br>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은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안(국대안)’을 발표한다. 국대안의 요지는 경성대학과 경성의전,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관립 전문학교 9개를 합쳐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사실상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이것이 서울대학교의 시작이다. 도상록의 해임을 둘러싼 논란이 가시기 전에 이루어진 이 조치로 9월, 이공학부 교수 38명이 집단 사표를 내고 대부분 월북했다. 고향이 평안도 선천인 최윤식은 9월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곧 남쪽으로 내려와 이들 세 교수의 빈자리를 맡는다. 10월 개교한 서울대학교에서 이태규는 문리대 학장이 되고, 리승기는 공대 학장으로 수습에 나섰다. 수학과 교수들이 월북해버린 상태에서 최윤식이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를 맡았고, 교토제국대학 3인방 중 한 명인 박철재가 물리학과 초대 주임교수로 합류한다. 110)<br>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br>이념 대립으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여운형은 겨레를 통합시킬 유일한 방법이 스포츠라고 믿었다. 보스턴 마라톤 직후인 1947년 6월 15일 시작되는 IOC 총회에 여운형은 미시간대학 출신 전경무를 파견한다. 그런데 5월 29일 서울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후지산에 추락해 전경무가 사망했다. 여운형은 미국에 있던 이원순에게 급히 연락해 IOC 총회에 대신 참가시킨다. 전경무가 사망 당시 휴대했던 서류들이 이원순에게 보내졌다. 여운형은 필사적이었다.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 끝에 마침내 IOC는 6월 20일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KOC)를 승인하고, 여운형이 초대 KOC 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여운형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정식으로 정부를 구성하기도 전에 국제기구 가입부터 이뤄낸 것이다. 전국이 들썩이고 모두가 환호했다. KOC 초대 위원장 여운형은 7월 19일, 올림픽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테러범의 총탄을 맞았다. 이후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는다. 117-8)<br>1948년 올림픽에 손기정은 선수단장으로 기수를 맡았고, 역도 선수 김성집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나중에 손기정은 이렇게 회상했다. 1945년 봄, 건국동맹을 꾸리던 여운형은 손기정에게 당시 일본군 중좌인 채병덕과 비밀리에 접촉하도록 지시했다. 여운형은 채병덕에게 유사 시 건준에 무기를 공급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비록 채병덕은 친일 일본군 장교였지만, 윤치호와도 친분을 유지했던 여운형은 이처럼 유연한 사고와 광폭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여운형이 암살되기 직전인 1947년 7월 1일, 이승만 견제를 위해 미 군정이 초청한 서재필이 한국에 도착했다. 서재필의 두 번째 귀향이었다. 이미 83세의 노령이던 그는 자신이 가르치고 발탁했던 후배 이승만과 대립하게 된다. 서재필에게 당시의 남북 대결 구도는 자기 인생 전체가 물거품이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분단은 막아보려던 그는 이승만 계열의 집중포화를 맞게 되고, 1948년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자 결국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119)<br>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br>1950년 3월 8일, 우장춘이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일찍이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던 우장춘은 종전 후 회사에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여러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무려 5년간 무직으로 지내다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한국에서 귀국 추진 위원회는 일본에 남은 우장춘 가족의 생계를 위해 100만 엔을 보냈다.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우 박사는 이 돈을 가족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 기구를 구입하는 데 다 써버렸다. 당황한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그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나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 지 석 달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사의 연구소가 있던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부산에서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난리가 벌어졌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홀린 듯이 종자 개발에만 집중했다. 124-5)<br>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br>1938년, 이극로는 눈병으로 고생하다 조선어학회 건물 옆에 조선 최초로 생긴 안과 전문 병원 공 안과에 가서 치료받는다. 이때 이극로의 한글을 향한 열정에 감동한 의사 공병우는 한글 기계화에 인생을 걸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던 공병우는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부산으로 피난 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해군 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손원일 제독 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 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UN, 북한, 중국이었기에 협정문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세 가지 언어로 작성했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한글 타자기가 없었다. 때문에 UN군은 북한을 위해 한국군의 공병우 타자기로 한국어 정전협정문을 인쇄한 것이다. 131)<br>1954년 오랜 공을 들인 진도에서 드디어 채소 종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한국인의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무와 배추 등이었다.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계속된 연구가 결실을 보았다. 가장 큰 성과는 김장용 배추가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우장춘은 조선의 전통 배추, 중국에서 전래한 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배추가 모두 김치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육종 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 품종을 만들려고 했다. 이에 더해 고추 종자까지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의 조상 ‘원예 1호’의 탄생이다. 우장춘은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로 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종자를 꿈꾸고 있었다. 1959년 8월 7일, 농림부 장관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수상자였다. 병상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 숨을 거뒀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 132-3)<br>일본을 무너뜨린 원자력 기술은 신생 독립국인 한국의 과학계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분야였다. 이에 이태규, 리승기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3인방으로 불리던 박철재 박사가 새롭게 출범하는 원자력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그 뒤를 이어 최형섭의 아버지 최지환의 친구였던 김법린이 2대 소장이 되었다. 김법린의 추천으로 1962년 원자력 연구소장이 된 최형섭은 탁월한 연구 행정 능력을 보이며 과학계의 신망을 얻게 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최형섭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대통령을 설득하고, 정부를 움직이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명성 황후의 묘소가 있던 홍릉에 KIST를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어 과학 행정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과학재단(현 연구재단)을 만들고,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했다. 대한민국의 1960~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끈 과학 발전은 거의 모두 그의 리더십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공로로, 최형섭은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133)<br>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br>1957년 군론(group theory) 연구를 시작한 이임학은 1960년 새로운 유한단순군(finite simple group)을 발견한다. 프랑스 수학자 갈루아(Évariste Galois)로부터 시작된 군론 연구는 20세기 현대 수학의 주요한 흐름이었다. 1950년대 새로운 단순군의 발견이 초미의 관심사였기에, 이임학이 발견한 ‘Ree군’은 세계 수학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임학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쪽으로 데려왔으나, 함흥에 남겨진 친척 생각이 간절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Paul Erdös)가 편지 왕래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건네진 북한 친지들의 편지가 빌미가 되어 남쪽의 가족은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많은 후학이 이임학의 국적과 명예 회복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80년대 이임학이 함흥을 직접 방문하자, 국적회복은 더욱 요원해졌다.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행사로 한국에 왔지만, 국적회복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임학은 캐나다 시민으로 2005년 사망했다. 138-9)<br>에필로그<br>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현실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나는 ‘단절’의 레볼루션(revolution)보다 ‘연결’이라는 의미가 담긴 에볼루션(evolution)을 선호한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인간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만들어냈지만, 강한 자신감은 이념을 만들었고, 결국 끔찍한 제1·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아마 우리 근대 과학사 역시 정치적, 이념적 분열이 만들어낸 단절의 역사였을 것이고, 그렇게 망각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비극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린,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록이다. 오염된 이념으로 과거를 재단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 그 흔적 자체를,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걸러지지 않은 날것으로 과거를 살펴야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래는 기억하고 기록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14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86/9/cover150/e1925326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3860933</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다시 조선으로 / 이연식 - [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56756</link><pubDate>Tue, 06 Oct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567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965892&TPaperId=175567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91/38/coveroff/89769658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965892&TPaperId=175567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a><br/>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24년 10월<br/></td></tr></table><br/>프롤로그<br>1장 해방 조선의 민낯<br>"해방 후 남한에서는 일본인 유곽 및 요정 업주들이 이른 시기에 돌아간 덕분에 조선인 업자들이 이권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만주 귀환자와 초기 월남민, 그리고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일본·동남아·태평양 등지의 귀환자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규모 공창과 요정을 거머쥔 조선인 업자들에게 영업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더없이 고마운 '먹잇감'이었다." "여기에 살길이 막막한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그리고 월남한 여성들이 이들 공창의 값싸고 풍부한 무한 공급원으로 부상하자 관련 업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해방 후에도 이렇게 고급 요정과 유곽이 전국적으로 늘어가자 여성계에서는 창기들의 발목을 잡고 있던 무리한 몸값(전차금)을 말소하고 여성의 공공연한 인신매매를 금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5월 법령 제70호를 공포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곳을 나와도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었으므로 변형된 형태의 공창과 사창으로 다시 흡수되기 일쑤였다."(24-5)<br>"해외 귀환자들은 초기 정착 단계부터 적절한 구호가 이루어지지 않자 기존의 빈민 집단에 더하여 해방 공간의 새로운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이들은 모국 사회로부터 강한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대규모 재해가 발생하거나 역병이라도 돌면 이들은 영락없이 애꿎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가뜩이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해외 각지에서 도착한 귀환선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역병이 도는 바람에 총 1만 181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그 역병의 시발점이 단지 '귀환선'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전에 돌아온 사람들마저 '병균 덩어리' 취급을 감수해야만 했다. 기존 주민들은 이들이 해외나 타지에서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운으로 여길 만큼 귀환선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따위에는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사람들이 해외에서 들어올수록 삶이 더욱 팍팍해져만 갔다는 부정적 경험만이 쌓여갈 뿐이었다."(32)<br>"1947년 7월 무장한 경찰대가 예고도 없이 마포구 대흥동의 제2 전재민 수용소로 들이닥쳤다. 규정 체류 기한을 넘긴 자들에게 퇴소를 명령했으나 귀환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수용소장이 급기야 경찰을 부른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자들과 이들을 끌어내려는 자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한 임산부가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러자 수용소의 귀환자들이 경찰들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6월 14일 제2수용소의 명도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바로 숭문상업학교의 이사장 방응모였다. 방응모는 잡지 『조광』의 발행인이자 조선일보 9대 사장을 지냈으나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는 친형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삼았다. 방재윤의 아들들이 바로 최근까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이처럼 숭문상업학교 교사 이전 과정에는 조선일보의 인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일보 입사 시험은 으레 이 학교에서 치르곤 했다."(41, 45)<br>"열악한 모국의 정착 환경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결실을 거둔 사례도 있었다. 귀환자와 월남민의 전재민 노점 시장으로 시작한 낙원시장의 성공 사례가 대표적이다. 탑골공원 뒤에 자리 잡은 이 시장 터는 과거 총독부가 방공용 소개지로 지정했기 때문에 해방 초기만 해도 상권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유입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곳이 전재민 시장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초기 월남민들이 모여들면서 번성하였다. 이곳의 노점상도 처음에는 하루 벌이로 연명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48년 상인 조합을 결성하였고, 1949년에는 조합원이 약 4,500명 규모로 증가하자 출자를 통해 인사동 고려청년회관에서 낙원시장주식회사 창립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주민들 사이에 〈해외 귀환자와 월남민은 하나같이 드세고, 억세다.〉라는 이미지가 각인되기도 했는데, 이들이 어떻게든 서울에 정착하려면 그토록 모질게 버텨내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52-3)<br>"1946년 12월 말 장충단 수용소에는 약 2,400명이 있었다. 그런데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에서 직원을 파견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약 1,700명이 영양실조와 동상을 안고 있었고, 겨울로 접어든 뒤로는 매일 평균 7~8명이 죽어 나갔다. 이런 사태를 이미 예견하고 있던 남한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는 시내에 산재한 13개 대형 '적산 요정'이라도 시급히 개방해 이들의 동사를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12월 23일까지 반드시 이들을 입주하게 하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개방을 연기했다." "전재 동포들은 구 일본인 소유 건물을 두세 채씩이나 차지해 졸부가 된 사람들로 인해 낮에는 미군이 버린 잔반을 뒤지며 구걸하고, 밤에는 한강 다리 아래에 움집을 파거나 거리를 전전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만성화되어 해방 후 약 3~4년 동안 겨울마다 되풀이된 귀환자와 월남민의 아사 및 동사 관련 보도는 시간, 장소, 인물만 바꿔도 또 다른 완벽한 기사가 될 정도였다."(54-6)<br>2장 해방 후에도 이어진 지독한 인연<br>"'전재민'들은 시기별로 각기 다른 남하 동기와 집단 구성을 보였다. 1945년 말까지는 과거 총독부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북선개척北鮮開拓'을 위해 동원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본디 남한 출신의 귀향민(Returnee)과 생활난으로 남하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46년에는 만주에서 유입된 사람은 줄어든 반면, 북한 통치 체제에 불만을 품은 반체제 집단의 유입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고학력의 지주, 대상인, 의사, 법률가, 교사, 종교인, 친일파, 구 식민 관료 출신자들이 많았고, 남하 후에는 나름의 공동생활체를 꾸리기도 했다." "북한은 1946년도만 해도 자발적인 집단 남하를 '사회 정화' 차원에서 반겼다. 그러나 1947년 7월부터 남북 및 미소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생활난'을 이유로 한 월남민 증가는 곧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반증하는 구실로 악용될 수도 있고,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인적자원이 누수된다는 판단에 따라 38도선을 굳게 잠그기 시작했다."(73-4)<br>"해방 후 귀향민·월남민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 본토와 만주 방면의 귀환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이 가운데 만주 귀환자들은 해방 후 급격히 고조된 중국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현지에서 일군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거나 국공내전으로 불안해진 거류 환경 때문에 돌아온 사람이 많았다. 특히 1946년 가을 무렵부터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진출하면서 피해가 급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한정서와 이데올로기적 중상에 노출된 채 방치된 조선인에게 귀환은 곧 생환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한편 부산항 등을 중심으로 한 해안 루트는 주로 일본과 태평양 방면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개 식민지배 말기에 징용 등의 '강제 동원'으로 인해 해외에 단기간 거류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 직전부터 밀항을 시도할 만큼 모국 귀환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불과 두세 달 사이에 대거 유입되었다."(74-7)<br>"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 1945년 9월 초순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일본인들의 동향은 '뱅크런'과 '집단 패닉'이란 키워드로 집약할 수 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은행으로 달려가 예금부터 찾고 가재도구까지 급하게 팔아치운 뒤 모두들 먼저 돌아가겠다며 밀선을 섭외할 수 있는 부산항 일대로 몰려갔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들 무렵 『경성일보인세화회회보』 창간호가 나왔다. 발간사는 〈우리들의 친구 조선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우리도 협력하자〉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 사회가 조선인들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새삼 느끼게 된 '긴장감'을 반영한다. 동시에 '공생'을 모토로 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기에 세화회에서는 잔류 쪽에 무게를 두면서 영주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도 하였다. 수강 신청자가 몰려 대박을 터뜨린 'YMCA 조선어 강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113-4)<br>"1945년 10월에는 군정 당국의 일본인 공식 송환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잔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제는 '재산 처리'가 최대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이제는 한가하게 조선어를 공부하거나 아이들 교육 문제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미군의 간섭과 단속이 더 강화되기 전에 밀선이라도 구해서 조선에서 어렵게 일군 돈과 재산을 최대한 안전하게 반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시기 회보에 〈부모는 사유재산이나 저금통장보다도 아이들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라거나 〈일본 밀항을 중지하라〉 등의 기사가 등장했겠는가. 이것은 그만큼 일본인 집단 안에서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재산이라도 챙겨 가자〉라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듯 세화회 소식지도 10월 중순부터는 일본인 사유재산 처리에 관한 내용들을 늘어갔다. 즉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경성의 일본인들은 비로소 조선을 '이국' 내지 '타자'로서 인식하게 된 것이다."(115-6)<br>"한편 남한에서는 총독부와 일본 군대 등 식민 기구가 관리하던 국공유 재산은 물론이고 개인과 법인의 민간인 재산을 '귀속재산(적산)'이라고 불렀다. 해방 후 그 처리를 둘러싸고 이것은 '조선'에서 '조선인'의 고혈을 짜낸 결과이니 해방 후 신국가 출범을 앞두고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공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 재산을 임차하거나 구매하기를 원하는 개인이나 법인에게 불하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양분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한일 양 지역의 미군 점령 통치 아래서 발생한 만큼 남한의 주한 미군정과 일본의 연합국총사령부가 일찍이 정리했어야만 할 문제였다. 하지만 점령군은 이 문제를 단독으로 처리할 권한이 없었고, 최종적으로 미국 정부는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 한일 양국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발을 뺐다. 그 결과 이것이 불씨가 되어 해방 후 양국이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각기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주장함으로써 한일조약 체결이 지연되는 주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117)<br>3장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 적산가옥과 고급 요정<br>"송환을 앞둔 일본인들이 생산 시설을 파괴하고 원료나 재고품 등의 물자를 빼돌리거나 폐기한 배경에는 우선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개한 '자주관리운동'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아울러 이러한 행위는 조선에 자본과 기술을 투자한 일본인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패전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이해 그나마 영업 손실을 줄여보고자 한 '자본 철수' 및 '물품 회수'라는 측면이 공존했다." "이처럼 현금 확보를 위한 자산 처분과 물품의 방매는 기계 등 생산 시설의 파괴와 원료 및 제품의 망실로 이어졌으므로, 해방 후 적산 기업(귀속 기업)은 만성적인 자금난과 원료난에 직면했다." "당시 남한 사회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건국 방해 행위로 받아들였다. 왜냐면 이러한 생산시설 등은 해방 후 신국가 건설 과정에서 적산(귀속재산)으로 엄격히 관리해 반드시 공익적 차원에서 재활용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자산인데, 이렇게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재산 밀반출을 위해 의도적 파괴를 일삼았기 때문이다."(129-31)<br>"그렇다면 이러한 사태는 단지 일본인 송환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을까. 결코 아니다.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법령 제10호를 발표해 일본인은 당국의 허가 없이는 자신이 등록된 정회町會로부터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의 이동을 금지했지만, 그저 말로만 그칠 뿐 이를 어겨도 단속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다."(131-3)<br>"이때를 틈타 송환 국면에서 돌아가는 일본인과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명의를 도용해 건물의 소유권이나 점유권(사용권)을 독차지한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대개 구 일본인 부동산의 매매를 비롯해 식량 등 생필품의 사재기, 반출입 금지 품목의 밀수 등을 통해서 갑자기 떼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도량하게 된 주된 원인은 미군정의 일본인 사유재산 매매 허가와 그 뒤를 감당할 수 없었던 허술한 관재 행정에 있었다. 미군정이 비록 법령 제33호를 통해 뒤늦게나마 기존의 매매 거래를 무효화했다고는 하지만, 두세 달 사이에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부정 거래를 적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미군정 관재 당국은 뒤늦게나마 구 일본인 부동산을 조사해 각 물건별로 임대차계약 체결을 통한 공정 관리를 표방했으나 해당 물건의 수효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그 상자는 열어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한 조선학술원 백남운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생각보다 너무 컸다."(139-40)<br>"1946년 11월 20일, 서울 돈의동 명월관에서 김린이金麟伊라는 자칭 사업가가 최선이라는 기생 등 4~5명을 거느린 가운데 20여 명의 '신사 숙녀'와 함께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다가, 취기가 오르자 모종의 경로로 들여온 포르노를 틀어놓고 향락의 끝을 맛보았다는, 일명 명월관의 도색영화 상영 사건이 터졌다." "4~5명이 모여 고급 요정에서 즐기면 대략 6~7천 원이 들었는데, 명월관에서는 20여 명이나 어울렀으니 김린이에게 부과된 벌금 5천 원은 한차례 술값보다도 훨씬 적은 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급 요정은 군정 관료, 해방의 혼란을 틈타 돈을 번 신흥 자산가, 그리고 정치 브로커 등 건국을 방해하는 '매국노들의 소굴'로서 깊이 각인되었다. 이것은 근대 이래 에로(エロ, erotic), 구로(グロ, grotesque), 넌센스(ナンセンス, nonsense)가 고급 요정과 포르노를 매개로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현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어찌 이보다 더 '선정적이고, 기괴하며, 지각없는 처사'가 있겠는가."(145, 151-2)<br>"당시 사건을 취재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문제안의 회고는 결국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들이 미군에게 향응을 제공하고자 돈 많은 사장이나 장사치에게 '물주' 노릇을 시켰다는 이야기이다. 미군을 접대한 대가는 어떤 중요한 정보나 이권이었을 터이니, 그 떡고물을 조선인 관료와 물주 노릇을 한 자들이 적당히 나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부동산 등의 자산을 법망의 빈틈을 이용해 손에 넣었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광역에 걸친 밀수와 암거래를 통해 번 돈으로, 이들은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와 미군을 상대로 고급 요정에서 '물주' 노릇을 해가며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내밀한 정보를 캐고자 했다. 또 만일에 발각될 경우에 대비해 경찰 및 사법계 요로에 후원금을 상납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방식으로 후사를 도모했다. 요정은 이렇게도 도색영화와 주지육림, 그리고 명기들의 춤사위를 맛보며 이들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고마운 공간이었으니, 어찌 추레한 전재민에게 내줄 수 있었겠는가."(162, 167)<br>4장 해방 조선에서 출세를 하려면<br>"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해방과 건국이란 시공간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한의 '양극화'가 사회 전면으로 파급된 시기였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조적인 사회현상이 부유층 자제의 '유괴'와 극빈 가정 유아의 '밀장密葬'이다. 즉 부잣집 아이는 부모의 금품을 노리는 유괴범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반면에 가난한 집 아이는 병들거나 굶어 죽어도 부모가 장사 치를 돈조차 없어 매장은 고사하고 허름한 거적 등으로 말아 인적이 뜸한 외진 곳에 버려지는 일이 적잖았다. 이것은 일견 정반대의 상황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결국 '고르지 못한' 공동체 안에서는 그 구성원이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결코 편안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매우 거칠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1949년 11월 종로 2가 동양루 사장 아들의 유괴 및 살해는 어린이 유괴 사건의 서막을 알렸다. 이 교동국민학교 유괴 사건으로 뒤숭숭하던 차에 1950년 1월 24일에 다시 청파동 여야 유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190-2)<br>"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건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병원으로 달려온 피해 어린이의 큰아버지, 즉 김형민 전 서울시장이었다. 피해 어린이가 전 서울시장의 조카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뒤이어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대목은 바로 김형민이 조카딸을 병원에서 퇴원시켜 데려다준 그 '집의 위치'이다. 왜냐면 당시 피해 어린이가 살고 있던 '청파동1가 58번지' 일대는 김형민의 시장 재임기는 물론이고 퇴임 후까지도 끊임없이 재기된 이른바 '대규모 적산 가옥 스캔들'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유괴 사건 직전해에 불거진 1949년 당시 '적산 가옥 부정 처리'사건은 언론이 주목한 초대형 사건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뒤로 관련 소식이 끊겼다. 그것은 이 사건의 사후 처리와 관련해 매우 '강력한 윗선'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내용이 현재 제헌의회 국회 속기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194-6)<br>"1949년 12월 제헌의회 법사위원회에서는 건국 후 국가기관의 주요 조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법무부에서 제출한 '검찰청법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제5회 57차 회의의 핵심 의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일원화)', 그리고 검찰 산하 중앙수사국의 설치 및 '사법경찰관(현 검찰조사관)'의 감독권 행사 문제였다. 국회 법사위원장 백관수의 주재로 열린 법안 검독회(검토회)에서 법무부장관 권승렬은 〈현재 검찰(검사)은 187명에 불과하지만 경찰은 무려 5만 명이나 된다. 현재는 내무부 산하의 경찰총장이 사실상 수사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은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검사들이 중앙수사국 사법경찰관을 통해 수사 과정 일체를 지휘하고 기소까지 완결할 수 있는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무부장관은 그 근거로 1948년 7월의 서울시장 김형민에 대한 경찰의 허술한 '수사 기록'을 제시했다."(196-7)<br>"당시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미군 통역관' 시절에 적산 가옥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이 막대한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장사' 덕분이었다." "당시 석유(가솔린)는 연합국총사령부가 관할하는 모든 지역에서 매우 엄격하게 통제받는 일등 관리 품목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형민이 단순히 배급망의 말단 기구나 대리점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이 품목의 배급과 유통을 총괄하는 '지배인(manager)'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 자리를 얻기까지는 미군정 관재 담당 관리와 상당한 교감이 오갔을 것이다. 즉 이것은 통역관으로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권이었던 셈이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후암동의 서울시장 공관으로 이사하면서, 해방 후 함께 석유 사업을 하다가 상공부에 공직자로 들어간 동생들('친척들')에게 청파동의 구 일본인 가옥 10채를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선우종원 당시 검사가 집중적으로 캐고자 한 혐의도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208-12)<br>"일본인들은 용산 지역을 사대문 안과 달리 순전히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개발한 지역이라고 인식했다. 철도 부지 및 군용지 수용 과정을 보면 일단 사유지의 경우 논밭과 대지, 가옥, 분묘 등을 합해 '89만 7,534원'을 보상가로 추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평당 채 2전이 되지 않는 돈만 지불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 보상비의 1/60에 불과했다. 조선인들은 당연히 강력히 반발했지만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보상도 하지 않은 채 갈월동, 남영동, 후암동 일대의 조선인 주민을 용산중고등학교 뒤편의 산기슭 너머, 즉 108계단 위 해방촌, 보광동, 이태원 쪽으로 밀어냈다." "결국 김형민이 사들인 청파동의 10채나 되는 가옥은 해방촌과 이태원 쪽으로 밀려난 조선인 원주인 땅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 해방 후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재산이 미군정이 잠시 자유 매매 거래를 허가한 그 짧은 사이에 돈 있고 발 빠른 사람들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225, 228)<br>5장 비정하기만 했던 나의 조국, 조선<br>"해방 공간의 상층부는 미군정 관재 행정 중앙부처(재무부/상공국)─대행기구(각 시도 귀속재산관리처 혹은 조흥은행 등)─정계·경찰·사법─자본가(기성사업가·신흥투자가·밀수업자·유통업자·알선업자 등)로 이어지는 정·관·재계의 다층적인 카르텔 구조를 띠고 있었다. 해방 공간의 다양한 카르텔은 내부에 균열이 발생할 때 비로소 공동정범共同正犯의 큰 그림이 밝혀지곤 했다. 그 내막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대략 1947년도부터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때였다. 막대한 '눈먼 돈'을 굴릴 수 있는 자리, 즉 이제 곧 수립될 새 정부의 최고위 관직이나 '알짜배기'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이 과열되거나, 분배 결과에 누군가 불만을 품었거나, 비밀 엄수의 묵계를 깨뜨린 배신자가 나올 때 비로소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귀속재산 처리를 둘러싼 뇌물 수수 사건 보도가 매일 같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으레 '의혹'이 제기되면 곧 '기정 사실'로 믿기 시작했다."(243-6)<br>"고급 요정이나 유곽 외에도 빌딩과 같은 덩치 큰 귀속재산의 경우는 미군정기에 시작된 잡음이 심지어는 박정희 정권기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3년에 삼성 계열의 신세계가 인수한 남대문의 동화백화점(구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현재 신세계백화점)이다. 해방 후 이 건물의 초대 사장(정식 불하 이전의 관리인, 영업권자)은 김계조였다. 그는 총독부 고위 관료와 친일 정부 수립을 모의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한 공작의 일환으로 국제문화사 댄스홀을 설치했다는 의혹을 산 '김계조 사건'의 장본인(배구자의 남편)이었다. 그가 이 사건으로 수감이 되자 '관리인'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래서 차기 사장(관리인)으로 이두철이란 자가 나타난 윤상균, 지희철과 함께 이곳을 공동 인수했다가, 1948년 1월 두 사람을 밀어내고 사업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백화점에 입주한 업주들의 가게 보증금을 일방적으로 올려 원성을 샀고, 종업원 월급을 상습적으로 체불해 종업원 노조의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247)<br>"그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도와준 고마운 인물이 '친일 고문 경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노덕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다. 그래서 노덕술이 정부 수립 후 1948년 말부터 반민특위에 의해 지명수배되어 은신하는 과정에서 이두철은 그를 자택에 숨겨주기도 했다. 노덕술이 효창동, 번지수로는 '청파 2가'에 있는 이두철 집 안방의 병풍 뒤에서 체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집 또한 1930년대 중후반 청파동과 갈월동 일대의 문화주택단지 분양이 붐을 이룬 시기에 들어선, 도로변의 구 일본인 소유 가옥이었다. 앞서 4장에서 등장한 김형민 시장이 미군정 통역관 시절에 사들인 10채의 집들과도 지척에 있었다. 이처럼 구 친일 자본가(박흥식)와 구 친일 고문경찰((노덕술), 미군 통역관 출신의 관료(김형민), 그리고 신흥 투기꾼(이두철) 등의 카르텔은 구 일본인 재산을 매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해방 공간의 고난도 퍼즐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인 셈이다."(247-8)<br>"1945~1946년 동절기를 지나면서 해방 직후 반짝했던 사회적 환영 분위기가 사라지고, 귀환자들의 지속적인 유입과 방치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그 결과 1946년 초봄의 해빙기를 기점으로 귀환자들의 만주 재이주, 일본 재밀항에 관한 보도가 늘어갔고, 기사의 제목도 점차 자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만큼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건만 열악한 정착 환경과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오만정'을 떼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동북 삼성의 만주 당국은 해방 후 조선인들이 전란이나 박해를 피해 빠져나간 뒤에 텅 빈 한촌이 되어버린 농지를 다시 일궈야만 했기 때문에 이들의 재유입을 환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한의 물가고와 이기지 못해 일본 밀항을 시도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보도한 단발 기사는 흔하다. 그러나 「빙설氷雪 같은 동포애」라는 기사는 남한 사회의 미흡한 구호와 사회적 냉대가 이들을 현해탄으로 내몰고 있다며 경제 외적인 요인을 적시했다. 즉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까지도 다친 것이다."(269-73)<br>"일본과 남한은 각기 연합국총사령부와 미군정의 점령 체제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정부와 의회가 있었고 간접 통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귀환 문제와 관련해 일본 측의 입장을 맥아더사령관에게 전달하거나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는 아직 정부도 수립되지 않았고 과도입법의원은 구호 정책도 입안하지 못했다. 게다가 미군정은 연합국총사령부의 하위 기관이었으므로 남한 현실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독립적으로 취할 수도 없었다. 즉 해외 귀환자나 월남민은 250만 명이나 되었지만 남한은 이들을 구호할 법적인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한 무정부 사회(혹은 이중 권력 국가체)였다." "이후에도 일본은 귀환자 구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논의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귀환자도 의회에 진출하여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이루어 요구 사항을 제도적으로 관철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에 한국은 귀환자의 정착을 위한 미군정의 제도적 노력도 부족했고, 귀환자들의 정치 세력화에도 한계가 있었다."(283-5)<br>에필로그&nbsp;<br>"1959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9만 3,349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에 올랐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해방 후 재일동포는 취직은 물론이고 자녀 교육, 영세자영업자에 대한 특별금융 지원, 공공주택 입주에 이르기까지 민족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울러 조선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학교를 불법으로 규정해 해방 후에도 노골적인 '동화와 배제'를 강요했다. 건강, 그리고 '꿈'을 잃게 되면 우리네 삶도 맥이 빠지는 법이 아니던가. 일본에서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던 이들이 북송선에 올랐다. 바로 그 빈틈을 공략한 것이 한국전쟁으로 인구가 줄어 전후 복구 인력이 필요했던 북한이었다. 특히 남한으로 유출된 '(월남민)인재'가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한반도 밖에 있는 '동포 사회'에 눈을 돌렸다. 그 결과 대략 1950년대 중반부터 북한 당국은 일본의 '민족학교'나 '명문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김일성(조총련) 장학금'까지 지원하며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환상을 퍼뜨렸다."(290-2)<br>"일본 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엣가시'같은 재일동포를(1959년 당시 60만 7,533명 규모) 남한이든 북한이든 자발적으로 데려가 준다면 그야말로 감사할 일이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점령 통치 아래서 연합국총사령부의 송환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조선 등 식민지에 있던 일본인은 패전 국민이라며 징벌적 차원에서 '일괄 송환'했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거주지 선택권'을 허용한 것이 내내 마뜩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동포는 식민 통치와 관련해 '과거사'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의 치부를 드러냈고, 정치적으로도 일본공산당이나 사회당과 함께 반정부 운동에 앞장섰다. 게다가 복지 재정도 갉아먹었다. 1955년 현재 재일동포의 생활보호 비율은 일본 평균의 10배였다. 물론 이들의 가난은 과거 식민 통치 이래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을 복지 재정이나 갉아먹는 '기생충' 취급을 하며 어떻게든 추방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292)<br>"한편 이승만 정권은 절대다수가 남한 출신인 이들 재일동포가 차별 속에서 기본적인 인권과 생활권마저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지닌 '60만 동포'를 오로지 '반공'이란 잣대로 모두 '빨갱이'로 몰아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심지어 남한, 북한, 일본의 '동상이몽' 속에서 국제적십자사는 이것을 '거주지 선택권'을 존중한 '귀국'이라며 교묘히 '인도주의'로 포장하며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결국 북송은 해방 이전 한일 간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배태된 제국 내 지역 간 이민족의 이주민 문제가, 해방 후 귀환 국면에서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동포를 추방하려던 일본 정부의 배제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전쟁 후 재일동포를 단지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이념 및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전취해야 할 수단〉으로만 인식한 남한과 북한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재외동포관이 맞물려 빚어진 '인재'이자 '참사'가 곧 북송이었다."(29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91/38/cover150/89769658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913829</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테크노퓨달리즘 / 야니스 바루파키스 - [테크노퓨달리즘 - 클라우드와 알고리즘을 앞세운 새로운 지배 계급의 탄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48365</link><pubDate>Thu, 01 Oct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4836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302534578&TPaperId=175483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776/58/coveroff/e30253457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302534578&TPaperId=1754836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테크노퓨달리즘 - 클라우드와 알고리즘을 앞세운 새로운 지배 계급의 탄생</a><br/>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 노정태 옮김, 이주희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09월<br/></td></tr></table><br/>서문<br>자본주의의 매개체인 ‘시장market’은 디지털 거래 플랫폼으로 대체되었다. 디지털 거래 플랫폼은 마치 시장처럼 보이지만 차라리 (봉건시대의) 영지fiefdom라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자본주의의 엔진인 이윤은 봉건시대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을 지대rent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특히 플랫폼과 클라우드에 더욱 폭넓게 접속하려면 내야 하는 어떤 유형의 지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클라우드 지대cloud rent’라 부른다. 그 결과 전통적인 자본의 소유자들은 오늘날 진정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의 임금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뽑아내지만 예전과 달리 지배자가 아니다. 전통적인 자본가는 클라우드 자본을 소유한 ‘신흥 봉건 영주owners of cloud capital’라는 새로운 계급의 가신이 되었다. 그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 대부분은 새로운 지배 계급의 권력과 부에 무임금 노동으로 봉사하며, 기회가 주어질 때 간간이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이전 계급인 ‘농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13)<br>1장. 헤시오도스의 탄식<br>모든 혁명적 기술이 그렇듯 철은 역사의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어떤 방향인가?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철은 우리의 쟁기뿐 아니라 영혼까지 단단하게 만들었다. 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은 망치에 맞으며 불에 달궈졌다. 우리는 새로운 욕망을 품고 대장간의 물통에 들어가는 쇳조각처럼 새된 소리를 낸다. 부와 재산이 늘어가는 만큼 미덕은 시험대에 오르고 가치는 파괴된다. 제우스는 언젠가 기술로 인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류를 신의 손으로 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헤시오도스에게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인류가 기술의 노예가 되고, 기술을 동원해 서로를 옥죄는 대신, 기술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훔쳐낸 작열하는 불꽃은 기술의 힘을 의미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우리가 세상을 불태우지 않고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불을 훔쳤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19-20)<br>아버지는 두 분야에 대한 헌신적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용광로, 야금술, 기술 전반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해서도 헌신적이었다. 나는 《공산당 선언》의 그 유명한 첫 줄을 읽으면서,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결코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신분적인 것, 모든 정체적(停滯的)인 것은 증발되고, 모든 신성한 것은 모독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상호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는 기술 옹호론과 기술 공포론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빛이 두 개의 모순된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듯이 자연의 모든 것에는 서로 대립하는 양면이 깃들어 있다. 강화된 철과 증기기관, 서로 연결된 컴퓨터 역시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있고 노예로 만들 수도 있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지배적인 힘이 될지를 결정할 힘은 우리,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손에 있다. 그러니 정치가 중요한 것이다. 21-2)<br>2장. 자본주의의 몰락<br>1960년대 미국 광고업계를 다룬 미국 드라마 &lt;매드맨Mad Men&gt;을 보는 시청자들은 드레이퍼가 저러고 사는데 왜 회사가 월급을 주고 있는지 의구심에 사로잡힙니다. 드레이퍼는 엄청난 양의 버번 위스키를 마셔대고, 끝없이 쉬고 쉬고 또 쉬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수평으로 누워 보내다가, 암호같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나 하기 일쑤인 사람이죠. 하지만 저러다가 자기 인생 자기가 망치겠다, 내지는 곧 잘리겠구나 싶을 때, 드레이퍼는 흔해 빠진 초콜릿, 뻔한 철강 제품, 2류 레스토랑 체인점처럼 그 수많은 것들을 다시 상상해서 마법처럼 활기를 불어넣어요. 갑자기 제품들은 감정을 자극하는 무언가,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드레이퍼가 보여주는 이러한 두 가지 면모를 보고 있으면 전후 자본주의가 어떻게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상상하게 됩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어요. 반짝거리는 새로운 산업적 기반 위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주의attention’를 사고파는 시장을 찾아낸 거죠. 34-5)<br>전쟁은 비즈니스와 정부를 깊숙한 곳에서부터 뒤엉켜놓았어요. 그런데 물자와 기술을 무한정으로 요구하던 전쟁이 끝나버린 지금, 거대 복합 기업conglomerate의 성장을 지속하는 일도 어려운 주제가 되었어요. 갤브레이스는 이 복합체를 일컬어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라 불렀습니다.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본인들의 일자리를 지키고 뭔가 일하는 것처럼 바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어요. 즉, 전쟁이 끝났는데도 거대 기업 체제가 축소되는 것을 막는 것을 넘어 그 크기를 키우고자 했다는 거죠. 여기서 돈 드레이퍼가 등장하는 거예요. 돈 드레이퍼의 특기가 뭐였는지 기억하세요? 테크노스트럭처가 우리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 우리의 주의와 관심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지닌 무한대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죠. 물건을 만들어내는 제조력이라면 이미 완전히 테크노스트럭처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드레이퍼의 도움을 받아 그 제품들을 필요하다고 느끼는 욕망을 찾아낼 수 있었죠. 38-9)<br>테크노스트럭처는 대중의 욕망과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지만 사실 그건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비재를 아무리 구입한다 해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죠. 우리의 소망이 충족되지 않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꿈, 우리의 좌절된 욕망 등이 다른 이에 의해 대량생산된 것임을 깨닫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잖아요. 우리의 대량생산된 갈망이 충족될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더욱 줄어듭니다. 테크노스트럭처가 우리의 정념을 휘저어놓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갈수록,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상품이 주어질 때 느끼는 공허함은 커지죠. 젊은 반항아들은 그들의 욕망을 비롯해 모든 것을 계획하는 테크노스트럭처의 대담함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불만은 그들만 느끼고 있던 게 아니었어요. 1950년대와 60년대는 자본주의가 자발적인 질서의 자연적 체계라고 믿는 자본주의의 독실한 신자들에게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어느 곳에 눈을 두건 세상 모든 곳이 중앙의 계획으로 돌아가고 있었죠. 49)<br>한마디로 서구는 닉슨 쇼크와 같은 파국을 맞이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자본주의적인 젊은이들과 자유시장의 광신도들이 모두 죽어가는 구체제를 끌어내리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결국 글로벌 플랜을 허물어뜨린 건 히피 좌파도 자유지상주의 우파도 아니었어요. 테크노스트럭처의 뜻에 따라 잘 움직여온 요소들의 작동이 글로벌 플랜을 망가뜨렸습니다.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서 있던 자리에, 볼커 같은 이들은 열과 성을 다해,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적자, 부채, 도박에 토대를 둔 가장 불안정한 체제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들의 손에 의해 브레턴우즈 체제는 질서정연하게 해체되었고 곧 새로운 국제 체제가 완성됐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제화나 금융화라고 하는 그것 말이에요. 저는 그것을 ‘자본주의의 글로벌 미노타우로스 단계’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어쩌면 그런 작명은 모든 것을 그리스 고전과 빗대어 말하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50)<br>3장. 클라우드 자본<br>돈 드레이퍼는 우리가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실 원치도 않는 걸 우리에게 팔고자 애써온 사람입니다. 돈은 기성품처럼 찍어낸 욕망을 우리 안에 심어놓을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건 일방통행에 지나지 않았어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혹은 시내와 고속도로에 세워진 커다란 간판을 통해서, 돈은 우리의 무의식에 갈망을 이식했을 겁니다. 그냥 그런 거였죠. 하지만 돈의 집에 알렉사가 설치된다면 그건 늘 양방향으로 작동할 거예요. 알렉사의 부드러운 목소리 뒤로 우리의 영혼과 클라우드 시스템 사이에 정보가 끊임없이 오가죠.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자면, 알렉사는 우리를 가장 변증법적인 무한 운동으로 포획하는 셈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알렉사를 들여놓은 우리는 그 물건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훈련시키죠. 그렇게 시작하지만 머잖아 AI 어시스턴트는 우리가 가늠할 수도 규제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되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게 될 겁니다. 61-2)<br>일단 우리가 알렉사의 알고리즘을 훈련시키고, 우리의 버릇과 욕망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고 나면, 알렉사는 우리를 훈련시키기 시작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일단 우리의 변덕에 맞춰 좀 더 섬세하게 선별되어 사용자의 취향에 맞는 비디오, 글, 음악 같은 걸 제공하면서, 조금씩 옆구리를 찔러 나가는 거죠. 일단 그런 식으로 우리를 길들이고 나면, 우리는 AI의 인도에 점점 더 순응하게 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알렉사는 우리가 AI를 더 잘 훈련시키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죠. 그 다음 단계는 더욱 무섭습니다. 우리의 취향에 맞출 수 있는 능력을 뽐내고 나면, AI는 우리를 이끄는 차원으로 나가거든요. 우리의 변덕과 입맛에 맞춰 섬세하게 조율된 이미지, 텍스트, 비디오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머잖아 AI는 우리가 AI를 훈련시키게 할 거고, 우리는 AI를 훈련시키고, 그렇게 훈련하고 훈련되는 무한반복이 벌어질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알고리즘으로 짜여진, 클라우드에 기반한, 명령하는 자본의 본질입니다. 62)<br>클라우드 자본이 전례 없이 강력한 명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건 클라우드 자본의 특수한 본질을 파악하는 핵심 요소가 되지 못해요. 클라우드 자본의 특수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그리고 명령의 힘을 부리는 방식에서 나옵니다. 지금까지 자본의 재생산은 어떤 노동시장을 통해 이루어져 왔죠. 물론 공장, 사무실, 창고 등등도 있었지만요. 팔았을 때 이윤을 낳는 물건을 만드는 건 임금노동자들이었어요. 노동자들은 기계의 도움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고, 임금을 받으며 남는 이윤으로는 더 많은 기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자본이 축적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이었어요. 반면 클라우드 자본은 임금노동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거의 모든 인류에게 클라우드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라고 명령할 수 있거든요. 그것도 공짜로 말이에요! 우리는 노동자들이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가는 동안, 우리 모두는 ‘클라우드 농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71-2)<br>“아마존 닷컴에 접속하는 순간 자본주의와는 작별하는 겁니다. 거기서 수많은 구매와 판매가 이루어지지만, 여러분이 접속해 있는 그곳은 시장이라고 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이곳은 마을 시장이 아니에요. 극도로 자본주의적인 디지털 시장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요. 제아무리 추잡한 시장이라 해도 그곳은 사람들이 만나고 상호 교류를 하면서,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아마존은 심지어 독점 시장보다 더 나쁜 형태라 할 수 있어요. 독점 시장에서도 구매자들은 서로 이야기할 수 있고, 집단을 결성할 수 있으며, 어쩌면 독점자에게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높이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소비자 운동을 조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프의 영토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그곳을 다스리는 규칙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불편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그 원리원칙이 아니거든요. 모든 사람들은 제프가 기준을 정하고 그의 선택에 따라 조절하는 알고리즘에 따라야만 합니다. 76-7)<br>4장. 클라우드 영주의 등장과 이윤의 종언<br>중앙은행의 돈 찍어내기 노다지는 서구의 은행들이 융단폭격을 당한 직후인 200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인들과 중앙은행들은 당시 은행이 부도나서 사람들의 예금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죠. 2009년 4월 G7의 중앙은행장들은 각국 대통령과 총리를 대동한 채 런던에서 정상급 회동을 가졌고, 은행을 물에 다시 띄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했죠. 상식적인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몰상식한 결정도 있었어요. 부도 위기인 은행을 구하면서 은행을 그 지경으로 몰아가는데 책임을 져야 할, 범죄자라 해도 무방한 은행가들까지 구제해준 것입니다. 더 나쁜 건 은행가들을 위한 이런 사회주의적 조치가 시행되는 가운데, 노동자와 중산층에게는 가혹한 긴축 조치가 가해졌다는 거였어요. 이런 이중 잣대는 한 세대 내내 지속될 정치 불신을 낳을 수밖에 없거니와, 경제 그 자체만 놓고 봐도 치명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한 사회의 전체 소득이 낮아지는 추세를 부추기게 되죠. 86)<br>2008년 금융위기와 뒤따른 긴축정책은 마치 권투의 원투펀치처럼 투자를 쓰러뜨렸어요. 그러니 금융가들에게 갓 찍어낸 돈을 안겨준들 투자가 살아날 리 만무했죠. 긴축정책으로 고객들의 소득이 증발해버린 시점에 자본가가 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고요. 은행이 우리에게 마음껏 쓰라고 공짜로, 그러니까 금리 없이 돈을 빌려줬다는 가정을 하는 거죠. 당연히 그 공짜 돈을 받아들었지만 생산 라인을 늘리는 데 그 돈을 쓰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결론에 금세 도달하고 맙니다. 그럼 이 공짜 현금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어요? 부동산이나 예술품을 구입하거나, 그보다 좀 더 좋은 게 바로 자신의 기업 주식을 매수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내 회사의 주가가 올라가서 기분 좋을 뿐더러, 특히 그 회사의 CEO라면 본인의 입지도 튼튼해지고 주가와 연동된 보너스도 올라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말해 새로운 투자 없이 그저 이미 권력을 가진 이들의 손에 더 많은 권력이 쥐어졌을 뿐입니다.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86-7)<br>이윤은 여전히 모든 자본가들이 꿈꾸는 야망의 목표였고, 모든 중간 공급자가 노리는 바였으며, 보다 안락한 삶을 떨치고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끌어내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 파이를 키우는 힘, 축적을 통해 부 자체를 늘려주는 자본 축적의 원동력은 이윤과 갈라서고 말았죠. 제프 베이조스나 일론 머스크처럼 대담무쌍하며 재능 넘치는 기업가들이 엄청나게 비싸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클라우드 자본을 쌓아올린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죠. 게다가 기존 사업가들은 사업을 확장하고자 할 때 은행에서 돈을 빌려오거나, 사업의 지분 중 상당량을 남에게 팔거나, 새로운 자본을 끌어들이기에 마땅할 정도로 큰 이윤을 창출해야 했어요. 하지만 클라우드 영주들은 이런 요소에 구애받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2010년에서 2021년 사이, 제프 베이조스와 일론 머스크 두 사람의 서류상 자산, 즉 그들이 지닌 주식 가격의 총합은 100억 달러 이하에서 2백조 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었던 거죠. 92)<br>저는 자본주의를 진지하게 위협하는 요소는 조직화된 노동의 힘뿐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시대에 벌어진 역사적 전환을 완전히 간과했어요. 인터넷 공유지의 사유화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중앙은행을 통해 쏟아져 나온 공적자금과 맞물려 새로우면서도 엄청난 힘을 가진 유형의 자본을 낳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놓친 거죠. 이 모든 역사적 변환은 그 누구도 기획한 바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요. 클라우드 영주가 되는 미래를 상상했던 자본가는 없었습니다. 중앙은행 역시 클라우드 영주들의 자금줄 노릇을 하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었죠. 클라우드 자본이 민주주의에 끼칠 수 있는 해악을 바라보았던 정치인도 없었고요. 이것은 자본주의가 왕부터 사제, 심지어 농민들까지 그 누구의 뜻과도 상관없이 출현했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클라우드 영주들의 등장은 대다수의 시야 밖에서, 등 뒤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역사적 주체들마저 놓칠 수밖에 없었죠. 97-8)<br>5장. 테크노퓨달리즘의 본질<br>아이팟ipod은 단지 훌륭한 휴대전화가 아니에요. 애플이 새로운 보물창고, 클라우드 지대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적인 발상을 했어요. ‘서드파티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애플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애플 스토어를 통해 판매할 수 있게 한다는 급진적 아이디어를 실현한 것이죠. 이렇게 애플은 무임금 노동자, 가신 자본가의 집단을 창출해냈습니다. 아이폰은 다른 어떤 스마트도 제공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즐거움과 기능을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자유이용권이 되었죠. 서드파티 개발자들은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했고, 애플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하지만 애플 스토어에 등록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죠. 오히려 애플에 돈을 내야 했습니다. 비용이 얼마냐고요? 전체 매출의 30%를 애플에, 말하자면 ‘바닥세’로 내야 하는 거였죠. 이렇게 최초의 클라우드 장원인 애플 스토어app store가 탄생했고, 그 비옥한 토지 위에 가신 자본가 계급이 성장했습니다. 107)<br>충분히 많은 서드파티 개발자를 확보하여 그들이 앱을 만들도록 하는 일, 그 과업에 성공한 거대 기업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구글이었죠. 이미 클라우드 자본에서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구글은 애플과는 다른 전략을 취했습니다. 아이폰과 경쟁할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대신 운영체계인 안드로이드를 만들었고, 소니, 블랙베리, 노키아 등 경쟁사조차 원한다면 무료로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허락했어요. 서드파티 개발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개발자들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겠어요? 그 결과 세계 스마트폰 업계는 두 클라우드 영주 기업, 애플과 구글의 독점 체제가 되고 말았어요. 그들이 벌어들이는 부의 큰 부분은 서드파티 개발자들의 무임금 노동에서 나왔습니다. 개발자들은 앱이 팔리는 만큼 정해진 몫을 떼어 바쳐야 했죠. 애플과 구글이 이렇게 버는 돈은 이윤이 아닙니다. 지상의 농지에서 영주가 얻는 지대의 디지털 버전일 뿐인, 클라우드 지대죠. 107-8)<br>클라우드 영주들은 우리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관심을 더 가져가는 게 진짜 목적이거든요. 이렇게 우리의 주의를 붙잡아놓고, 그 힘을 지렛대로 삼아서 그들은 가신 자본가들에게 클라우드 지대를 받죠. 그뿐 아니라 클라우드 영주들은 더 저렴한, 보다 나은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시장의 압력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죠. 틱톡이 다른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서 사용자와 그들의 관심을 훔쳐갈 수 있었던 건 틱톡이 낮은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서가 아니었어요. 틱톡이 질적으로 더 우수한 ‘친구’나 끈끈한 관계망을 제공한 덕분은 더욱 아니었고요. 틱톡은 전혀 다른 온라인 경험을 제공하여 클라우드 농노들이 이주한 거죠. 디즈니플러스는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영화나 드라마를 더 낮은 가격에, 더 좋은 화질로 제공하는 사이트가 아니잖아요. 단지 넷플릭스에 없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죠. 우리는 장원간의 경쟁을 시장 경제의 경쟁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111-2)<br>지대에 대한 이윤의 반란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그 거대한 전환을 예언하는 현상이었죠. 사회 경제 체제의 변화를 주는 원동력이 지대에서 이윤으로 변화한 것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시장 봉건주의 같은 용어 대신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건 그래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대가 아닌 이윤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 경제 체제로 접어들었잖아요. 그 근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묘사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되죠. 오늘날의 전환을 하이퍼 자본주의나 지대 과잉 자본주의 같은 식으로 본다면 그건 같은 오류를 범하는 일일 겁니다. 변화하는 세상의 본질, 핵심 원리를 놓치는 거죠. 지대가 사회 변화의 핵심 동력의 자리를 되찾았다는 점에서, 저는 테크노퓨달리즘보다 더 나은 이름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어요. 제대로 정의를 내리고 이름을 붙인 덕분에 우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체제 전환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112)<br>6장. 테크노퓨달리즘의 전 지구적 여파: 새로운 냉전<br>함부르크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위르겐은 광저우에 사는 시우가 제공하는 원자재를 이용해 선박용 프로펠러를 만들어요. 그 프로펠러는 상하이 인근에서 조선소를 운영하는 아이에게 판매되죠. 시우에게 원자재값을 송금하기 위해 위르겐은 본인이 거래하는 독일 은행의 웹사이트에 접속해요. 서류에 필요한 항목을 기입하고 엔터를 누르죠. 위르겐이 거래하는 독일 은행은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에 거래된 숫자를 보내고, 분데스방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에 정보를 넘기죠. 이제 유럽중앙은행은 위르겐의 유로화를 달러로 환전한 후 미국이 통제하는 국제 금융망을 통해 중국인민은행으로 보냅니다. 중국인민은행은 그렇게 들어온 돈을 위안화로 바꿔서 시우가 거래하는 은행으로 보내고요. 최종적으로 시우의 거래은행은 시우의 계좌에 돈을 넣어줘요. 이렇게 덜컹거리고 정신없이 복잡하며 비효율적인 거래 시스템이야말로, 각각의 단계에 개입하는 시중은행들이 얻는 지대의 근원입니다. 133-4)<br>만약 위르겐, 시우, 아이가 중국인민은행이 제공하는 새로운 디지털 지갑을 사용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위르겐은 스마트폰을 들고 디지털 위안 앱을 켜서, 일정량의 디지털 위안을 시우에게 보내겠죠. 거래는 즉각 이루어지고 중간 수수료 같은 건 없어요. 거래 끝! 디지털 위안화는 위르겐이 거래하는 독일 은행, 분데스방크, 유럽중앙은행, 결정적으로 미국의 입김에 전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국제 송금 시스템 등, 그 모든 중간 거래인들이 설 자리를 없애 버리죠. 2022년 이전까지 중국의 클라우드 금융과 디지털 위안화는 마치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신작로 같은 모습이었어요. 비록 울퉁불퉁하지만 여전히 달러로 만든 초고속도로가 존재하고 그걸 사용하면 될 판에, 세계적인 엄청난 부호들이 중국인민은행의 감시를 받는 위안화 도로를 통해 돈을 움직일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키예프, 카르키프, 마리우풀에서 포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후로는 중국의 돈길을 따라갈 좋은 이유가 생겼습니다. 134)<br>자본주의 시대를 통틀어 그랬습니다. 지대수익 추구자들이 자본가의 이윤에서 많은 몫을 빼먹을 때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는 없었죠. 자본주의 자체의 역동성이 무뎌지고, 버블이 발생하고 곧 터져버리죠. 약자를 수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국가는 채무에 중독됩니다. 테크노퓨달리즘의 출현은 이런 위기 발생 과정을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요.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Adam Tooze가 그리스어 단어 두 개를 붙여 만든 신조어를 빌자면, ‘중층위기poly-crisis’ 상태를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억 명의 클라우드 농노들의 노동은 극소수의 클라우드 영주를 위한 권력과 클라우드 지대를 추출해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돈은 그 자체가 소득이 아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의 소득이 되어 선순환하는 일 따위도 결코 벌어지지 않아요. 저는 이 현상을 글로벌 가치 기반의 위축the shrinking of the global value base이라고 묘사하고 싶습니다. 142)<br>기술의 발전은 클라우드 자본의 힘을 점점 더 키워줄 거예요. 대규모, 가변적, 진보한 3D 프린트 기술 및 AI로 강화된 산업 로봇과 결합한다면 클라우드 자본은 전통적인 자본으로 이루어진,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기업 복합체들을 모든 면에서 능가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워싱턴은 중국을 상대로 경제 전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 물리적 자본의 탈세계화가 촉발됐죠. 이는 전통 자본의 상대적 쇠퇴를 더욱 가속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거대한 클라우드 장원은 희토류, 리튬,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데이터까지, 그 모든 원자재를 두고 전 세계에서 더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미래가 평화에 해로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거기에다 태평양 양쪽에서 한 줌도 안 되는 클라우드 영주들이 움켜쥐는 권력의 강도와 속성을 떠올려 보자고요.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말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점점 더 붙잡을 수 없는 파랑새가 되어갑니다. 143-4)<br>7장. 테크노퓨달리즘에서 벗어나기<br>‘사람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는 권리’는 오늘날 이 사회에서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죠.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누가 질식시켰냐는 겁니다. 갈색 군복을 입은 파시스트도 스탈린주의 수호대도 범인이 아니에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새로운 유형의 자본이 출현해 자본주의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자유주의적인 행동을 하라고 부추기기 시작한 순간 위기에 몰렸습니다. 뭐라고 부추겼을까요? ‘너 자신이 되어라!(아울러, 그걸 성공적으로 해내라!)’ 클라우드 자본은 지금까지 수많은 행태 조작을 시도하고 결과를 개선해가며 돈을 벌어왔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목표를 초과달성해낸 최고의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는 언제나 정신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쳐왔어요. 자유주의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그나마 시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었죠. 테크노퓨달리즘이 그 울타리마저 없애버렸고, 사정은 끝도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어요. 149)<br>클라우드 자본으로 인해 그다지 소유적이지 않았던 개인은 소유된 무언가로 전락했어요.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를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격하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군요.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의 관심사에 끼어들면서 우리의 주의 집중력을 위축시켰습니다. 이건 우리의 의지력이 약해진 게 아니에요. 우리의 ‘집중력이 도둑맞은’ 거죠.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테크노퓨달리즘의 알고리즘은 가부장제, 편견, 기존의 억압을 강화하는 성향이 있다보니, 소녀들, 정신이상자들, 한계에 몰린 사람들, 그리고 물론 당연하게도 가난한 이들까지, 이 모든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체성과 집중의 문제에서 불만과 불안을 곧잘 느끼게 되는데, 그에 대한 테크노퓨달리즘의 감정적 보상이 바로 편협한 태도일 거예요. 댓글 관리자를 두거나 혐오 표현을 규제한다 해도 이러한 경향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건 클라우드 자본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문제니까요. 149-50)<br>진정 자유로운 개인의 이념을 되살리려면, 첫째,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한물갔다는 신화를 반드시 폐기해야 합니다. 둘째, 테크노퓨달리즘의 세계 속에서 좌파와 우파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재검토, 재설정해야만 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마르크스주의는 위협적인 진실을 확신에 찬 어조로 제시했어요. 분노에 가득 찬 우파는 상대주의로 빠졌고 사회민주주의가 그 기회를 잡았죠. 1991년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패배를 당한 후 자유주의적 진리가 복귀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종언을 맞이했어요. 2008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의 워털루 전투와도 같았고 테크노퓨달리즘이 부상하게 되었죠. 이제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대안우파들은 클라우드 영주들이 허락해준 한 줌의 권력을 놓고 서로 싸우는 중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테크노퓨달리즘적 조건을 이루는 진실을 알아내고, 확신을 품는 것에 달려 있어요. 그것이 밝은 미래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155)<br>점점 더 클라우드 자본이 지배력을 넓혀나가는 세상 속에서, 테크노퓨달리즘을 무너뜨리고 민중을 민주주의의 중심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한 가닥 가능성이라도 쥐고 싶다면, 우리는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와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를 규합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클라우드 농노들, 더 나아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가신 자본가의 일부까지 규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이들 모두를 포섭한 이 거대한 연합이어야 해요. 테크노퓨달리즘은 민중의 조직화에 맞서 새로운 거대 장벽을 세우죠. 하지만 테크노퓨달리즘은 그것을 뒤엎기 위해 연대하는 꿈을 감히 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큰 힘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 새로운 거대 장벽이란 클라우드 농노와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들 사이에 벌어져 있는 물리적 거리와 그로 인한 고립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 클라우드 자본이 그 잠재적 반란군에게 부여하는 막대한 힘이 숨어 있어요. 우리에게는 클라우드틀 통해 연대하고, 조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172)<br>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태를 일컬어 ‘소외’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노동으로 생산해내는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갖지 못하고, 우리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일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가는지 말할 수조차 없는 상태를 이르는 표현이었죠. 테크노퓨달리즘 하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근무 시간동안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로 살아가고, 나머지 시간은 클라우드 농노로 살아가니까요. 그나마 먹고살 만한 자영업자들은 모두 클라우드 가신이 되어버렸고, 고군분투하는 자영업자들은 클라우드 농노가 되고 말았죠. 클라우드 자본은 민영화와 사모펀드가 알려준 자산 벗겨먹기 사업 모델을 우리의 두뇌까지 확장하고 있어요. 우리의 정신을 각자의 것으로 지키려면, 우리는 클라우드 자본의 집단 소유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그것을 행태 조작 수단에서 인간적 협력과 해방의 수단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니까요. 176)]]></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776/58/cover150/e30253457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7765831</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 / 랜달 발머 - [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 - 낙태와 동성애 이면에 감춰진 인종차별이라는 불편한 진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40737</link><pubDate>Mon, 28 Sep 2026 07: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407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032922&TPaperId=175407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7/52/coveroff/k1220329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032922&TPaperId=175407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 - 낙태와 동성애 이면에 감춰진 인종차별이라는 불편한 진실</a><br/>랜달 발머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5년 10월<br/></td></tr></table><br/>서문<br>1부 종교적 우파 이전의 복음주의&nbsp;<br>"제2차 대각성에 이은 19세기 초의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학교, 평화 십자군, 노예제도 폐지, 금주, 교도소 개혁, 여성의 권리 같은 사회개혁에 매진했다. 그들의 노력에 생기를 불어넣은 요소는 그들이 경건의 규범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땅 위에─좀 더 특별하게는 이곳 미국에─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신학자들은 이를 '후천년설'이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요한계시록 책에 예언된 평화와 의의 천 년이 지난 '후'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본다. 그 교리의 추론으로서 신자들은 사회를 개혁하고 예수의 〈재림〉을 위한 길을 닦아야 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집요한 사회개혁 촉구에 분노한 남부는 결국 연방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자체가 후천년설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끔찍한 사상자 수는 말할 것도 없고, 게티즈버그와 앤티텀과 머내서스의 전쟁터들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완벽성에 관한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를 재조사하도록 자극했다."(43-4)<br>"복음주의 사회 개혁가들은 19세기 말에 시작하여 20세기가 한창 진행될 때까지 계속된 묵시주의(apocalypticism)라는 과속방지턱을 만났다. 복음주의자들 중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국 형제단(이후 플리머스 형제단으로 알려졌다)의 구성원인 넬슨 다비의 아이디어를 전용하기 시작했다. 다비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예수는 천 년 '후'가 아니라 천 년 '전'에 이 땅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에라도 재림을 기대할 수 있는데, 재림 때 그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남겨진〉 자들은 신적 심판을 맞이할 것이다. 다비의 해석 체계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세대들(ages 또는 dispensations)로 나눴기 때문에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불렸다. 다비의 전천년설(예수가 천년왕국 '전'에 돌아오실 것이다)의 결과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병폐들을 해결할 책임에서 벗어났다."(45-6)<br>"1925년 7월에 테네시주 동부는 뜨거웠는데, 데이튼의 레아 카운티 법원 청사 2층보다 뜨거운 곳은 없었다. 존 토머스 스콥스가 테네시주의 버틀러 법(Butler Act)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풋볼 코치이자 시간제 과학 교사였던 스콥스는 그 법의 합헌성을 시험하기 위해 그 지역 시민 운동가들에게 고용되었다." "상징적인 면에서 스콥스 재판은 전환점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를 한층 더 거부했다. 이미 예수가 어느 때에라도 재림하셔서 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교리인 전천년설을 수용한 복음주의자들은 회중, 교파, 성경 캠프, 성경 연구소, 대학, 신학교, 선교 단체, 출판사들이 맞물린 네트워크인 복음주의 하위문화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는 그것 자체가 부패했으며 타인을 부패시키지만, 복음주의 하위문화는 안전한 공간으로서 점점 세속화되는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도피처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51, 54-5)<br>"단기적으로는, 20세기 중엽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대체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특히 조직적인 방식으로는 확실히 참여하지 않았다. 전투적인 밥 슐러, 빌리 제임스 하기스, 칼 매킨타이어 등 목소리를 낸 소수의 복음주의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는 그들의 전천년설 신앙과 미국 사회의 부패에 관한 확신에 근거해서 유권자 명부에 등록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정치는 사탄의 영역이며, 더욱이 이 덧없는 세상은 심판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나 복음주의 하위문화의 구축은 또 다른 장기적은 효과를 낳았다. 복음주의자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종종 아무것도 없던 데서 시작하여 수십 년 뒤에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런 기관들, 특히 학교와 복음주의 단체와 언론 기관은 복음주의자들이 1970년대에 공적 영역에 재진입할 토대를 제공했다."(56-7)<br>2부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의 부상<br>"종교적 우파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가장 영속력이 있는 신화는 그들의 기원 신화다. 제리 폴웰과 패트 로버트슨 및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자주 표명되는 이 내러티브에 따르면,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73년 1월 22일 미국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 판결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무사안일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이 기원 신화가 폴웰과 다른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연체동물 같은 탈정치적 무감각에서 벗어나 낙태 합법화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싸움에 나서게 했다. 혹자는 자신을 노예제도라는 해악을 근절하려고 했던 남북전쟁 전의 복음주의 선배들과 연결시키려고 〈신 폐지론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 보면 낙태가 종교적 우파 부상의 기폭제였다는 주장이 무너진다. 복음주의자들은 1970년대 말까지 낙태를 〈가톨릭의 문제〉라고 여겼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대부분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낙태를 중요한 문제로 보기를 거부했다."(71-3)<br>"종교적 우파의 진정한 기폭제는 법원의 결정이었지만 그것은 '그린 대 코널리'(Green v. Connally) 소송에서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법원의 하급심이 내린 결정이었다. 1971년 6월 30일 그 법원은 인종 분리나 인종 차별에 관여한 어떤 조직도 정의상 자선 기관이 아니며, 따라서 면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 특히 북부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편애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은 적어도 조직적으로는 정치적 영역 밖에 머물렀다. 폴 웨이리치는 자기가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자기들이 엄청난 유권자 집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자기가 보수적인 대의하에 그들을 규합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정치적 힘이 달성되면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에게 이 위대한 나라를 재창조할 기회가 것이다.〉 웨이리치는 그런 제휴의 정치적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믿었다."(83, 86-7)<br>"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수십 년 동안 자기들의 교육 기관이 연방의 돈을 받지 않기 때문에(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점은 제외하고) 정부가 자기들에게 학교를 어떻게 운영하라고 지시할 수 없다고 자랑해왔다. 그러나 그런 궤변은 세금 면제가 공적 부조의 한 형태라는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다. 교회들과 비영리 기관들은 (임금에 대한 사회보장세를 제외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데, 이는 납세하는 시민들이 공원과 경찰의 보호와 국방 등 모든 공적 서비스 공급에 필요한 예산의 차액을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이리치와 종교적 우파의 기타 창시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논거를 인종 분리 방어로부터 종교 자유 방어로 세심하게 이동시키는 한편, 종교 기관들이 세금 면제를 포기하기만 하면 어떤 인종 정책이든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실제로 종교적 우파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상식적인 이해는 보수적인 인종 분리를 방어하기 위해 복음주의자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90-2)<br>"웨이리치와 폴웰 및 신생 종교적 우파의 지도자들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낙태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기 위해 영입이 불가능해 보였던 지지자를 확보했다. 그 인물은 바로 기독교적 가치의 쇠퇴와 그가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부른 것의 전진을 경고하고 있던 신학자 프란시스 A. 쉐퍼였다. 쉐퍼는 낙태 합법화가 유아 살해와 안락사로 이어질 것이라며 열심히 경종을 울렸다. 웨이리치의 간계와 쉐퍼의 비탄 사이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서서히 낙태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80년 무렵에는 지미 카터가 조지아 주지사로서 및 대통령으로서 낙태 사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가 낙태를 불법화하는 헌법 개정을 거부하자 그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겨졌다. 그해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1967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시절에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낙태법에 서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서 말이다."(109-12)<br>3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br>"1980년 11월 로널드 레이건이 선출된 뒤 종교적 우파는 열심히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통합했다. 1980년 공화당 강령은 〈카터 행정부의 국세청장에 의해 시작된 독립적인 학교들에 대한 위헌적인 규제상의 보복을 중단〉하기로 서약했으며, 종교적 우파는 복음주의 학교들을 국세청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레이건은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빌링스를 교육부의 여러 지역 교육국 중 한 곳의 국장으로 임명했다. 빌링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인종 분리 정책을 취하는 학교들의 면세를 폐지하려는 국세청의 시도를 막았다. 낙태와 관련해서는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C. 에버레트 쿠프를 공중위생국장으로 임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레이건은 이에 동의했다. 레이건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많은 일반 대중 복음주의자가 낙태 반대 운동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혹자는 공공연하게 자기가 한 가지 이슈만 보고 투표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123-4)<br>"레이건의 1966년 주지사 선거운동(과 이후의 다른 선거운동들)은 〈법과 질서〉라는 표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는데 이 어구에는 〈국가의 권리〉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적인 함의가 있으며, 그 어구는 일반적으로 흑인들을 그들의 자리에 묶어두려는 암호 언어로 여겨진다. 로버트 L. 코트가 말한 바와 같이 〈레이건은 인종 차별을 언급할 때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레이건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 "1980년 8월 3일, 레이건은 16년 전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단원들이 보안관과 공무해서 시민권 운동가 세 명을 납치·폭행·살해한 곳인 미시시피주 필라델피아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00명의 백인 앞에서─그들 중 많은 사람이 남부 연합의 기를 흔들며 〈우리는 레이건을 원한다〉라고 외쳐댔다─조지 C. 월리스와 수없이 많은 다른 분리주의자의 반항적인 슬로건인 〈나는 국가의 권리를 믿습니다〉를 소환했다."(129-31)<br>"종교적 우파는 결코 성경적 가치들을 진척시키기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행동주의는 인종 분리의 영속화에 뿌리를 둔 운동인데, 그 운동이 1970년대 말에 시작된 보수적 운동이 극우 변두리와 제휴하여 복음주의 자체의 가장 좋은 전통들과 일치하지 않는 돌연변이 형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했던 선조들의 개혁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 대신, 명백히 복음주의 전통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 복음주의 사회개혁의 오래되고 고귀한 전통을 잘 알지 못하거나 경멸하는 사람과 동맹을 맺었다. 이 묘사는 정치적 우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이 자기들의 전통을 잘 알지 못했다면 그들은 가치 있는 선배들의 모범을 통해 인도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들이 지지한 정치인들과 정책들에 비춰볼 때, 종교적 우파 지도자들이 그 전통을 경멸했을 가능성이 좀 더 높다."(143-4)<br>"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일단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에 내장된 인종차별주의를 인정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의제의 다른 측면들, 즉 종교적 우파와 공화당 극우파의 융합을 통해 과도하게 좌우된 의제를 재조사할 수도 있으리라고 희망한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외인을 환영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새롭게 읽거나 19세기의 복음주의 사회개혁을 이해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이 이민과 공공교육에 관한 견해, 교도소 개혁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태도, 부자 감세에 대한 지지를 재고할지도 모른다. 결국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들 중 가장 작은 자〉를 돌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에너지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한 가지 이슈를 토대로 투표하는 행태를 재고하고 정치적 이슈들을 좀 더 넓고 종합적으로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재고는 또한 유색 인종 복음주의자들과의 화해를 위한 문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회개는 영혼에 유익하다."(153-4)]]></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7/52/cover150/k12203292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175273</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베티나 슈탕네트 -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28637</link><pubDate>Mon, 21 Sep 2026 09: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5286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037781&TPaperId=175286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873/48/coveroff/k20203778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037781&TPaperId=175286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a><br/>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02월<br/></td></tr></table><br/>서론<br>"자신이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한 아이히만의 진술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옛 신문을 읽어보니 아이히만의 말도, 연구서들의 서술도 뭔가 사실과는 다른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사실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대부분의 나치보다 더 많은 별칭─칼리굴라, 유대인의 차르, 민족 학살의 관리자, 이단 대심문관, 유대인 학살 기술자, 최종해결사, 관료, 대량학살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별칭은 모두 1939년부터 1960년 사이에 아이히만을 일컫던 것이었다. 그것은 은밀하지 않았다. 신문이나 유인물, 책에 다 나와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언제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면 누구나 그것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정확히 한목소리로 정반대 사실을 주장한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옛 동료와 전후 잔존 나치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다로 자신들이 아는 바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만들고자 했다."(24-5)<br>"이제껏 논의에서 빠진 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론이다. 장 자크 루소의 통찰에 따르면, 월권과 그로 인한 불의에서는 늘 두 가지 인물 유형이 존재한다. 즉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적 영향력을 살펴보면, 그 두 부류 인간의 기괴한 협력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악명 높은 '유대인 담당관' 시절의 아이히만처럼 우리가 그 협력 과정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히만의 역사를 그의 범죄 연대기나 행위의 발전사로 서술하지 않고 그의 영향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누가 언제 아이히만을 알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언제 어떤 생각을 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에 그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얼마나 많은 자기 연출이 아이히만 현상에 깔려 있는가? 그의 역할극은 그의 학살 이력과 우리의 역사상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26-7)<br>1장 “제 이름은 상징이 됐죠”<br>"나치스 첩보기관인 보안국 대원 시절 아이히만은 유대인 행사를 찾아다니며 유대인들과 교류했다. 유대인들은 아이히만을 호기심 많고 성격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아이히만은 (상관이 두 번이나 말렸는데도) 선생을 찾아 히브리어를 배우려 했고 자기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 문헌 연구에 열중했으며 6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과 유대인 신문을 탐독했다. 아이히만은 국제관계를 살폈고 심지어 한 유대인으로부터는 팔레스타인을 방문해달라고 초대받기도 했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그것을 〈3년 동안의 학습〉이라고 불렀다. 그런 방식의 삶에 속아 아이히만을 정치적으로는 다소 천박하지만 학문에는 관심이 많은 문예 애호가로 오인하기 쉽다. 특히 카페에서 잡담하고 글을 쓰며 발표하거나 동료들과 전문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해 꼼꼼히 일하면서 반유대주의 선전 작업을 수행하고 게슈타포와 함께 체포하며 조사한 일들이 사료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러기 쉽다."(48)<br>"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니었다. 상징과 이상의 활용은 나치즘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의 명성은 피해자들이 그를 알게 됨으로써 높아져갔다. 〈언론을 통해 아이히만이란 이름은 상징이〉 되었다. 〈어쨌든 유대인이란 말은 아이히만이란 이름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의 권력관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것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권력관의 작동 방식은 지도부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다. 아이히만과 동료들도 권력을 행사하는 데 총통식의 지도자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자기 연출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유대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간판 인물이 필요했고 〈아이히만〉은 바로 거기에 딱 맞았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자신이 상징 인물이 된 것을 우연으로 치장하려고 했다. 아이히만의 역할을 다룬 책이나 논문들도 더러 그런 견해를 따른다."(79-80)<br>"아이히만이 이민과 재정 확보 문제를 놓고 아직 유대인과 협상하고 국제 단체의 협력을 필요로 했을 때는 협박이 유용했다. 하지만 목표가 이민이 아니라 살해라면 더 이상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협상용 대화를 하는 데 꽤 도움이 되었던 위협 이미지가 살해 의도를 감추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이제는 협박하기보다는 안정시키고 달래고 분위기를 바꾸며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대량 이송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이송 주체들은 이송 대상, 즉 우선 다른 곳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살해될 그 사람들로부터 우선은 아주 조금이나마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열차에 올라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측 협상 파트너들을 양보와 협력으로 이끄는 데 항상 성공했다. 그 이유는 주로 유대인 협상가들이 아이히만과 〈협상〉하면 결국에는 더 나쁜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88-9)<br>"그의 부하들이 아이히만을 〈그에 걸맞는 존경〉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아이히만은 자신의 지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영민한 관찰자인 구스타프 그륀트겐스는 그 기제를 간명히 설명했다. 〈왕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권력자를 무대에서 보여주려 한다고 해서 무조건 왕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배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하 역을 잘하는 배우들이 왕을 향한 그들의 행동을 통해 무대의 그림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권력자 혼자만이 아니라 집단적 역동성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집단적 역동성이 비로소 권력자를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그 현상을 알아본 사람은 효과를 높이기 위해 희생자들의 무력한 행동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이히만의 부하들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자질을 갖췄고 아이히만도 자기 역할에 잘 맞는 사람이었다. 한층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이히만이 권력자들 사이에서 더 센 권력을 가진 것처럼 연출했다는 사실이다."(102-3)<br>"나치 시기 막바지에 아이히만은 앞서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 인해 도리어 위험해지는 일을 겪었다. 별로 유명하지 않던 사람이라면 전후 자기 명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전후에 아이히만을 잊거나 빠뜨릴 가능성은 전무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그의 이름은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유대인 정책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그런 명성으로 인해 자기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아이히만은 완벽한 투사 대상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항상 다른 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제 누구든 아이히만 뒤에 숨기가 편했다." "크루메이는 진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끔찍한 사건을 밝혀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쿠르트 베커는 편을 바꿈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에 공개적으로 거리를 둘 기회라면 뭐든 찾아 나섰으며 그런 연유로 아이히만의 역할이 특별했음을 부각시켰다. 이는 전후 자신을 방어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112, 116-7)<br>"그 잔악한 허풍쟁이는 자신이 총통 사후에 살아남기 위해 실제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베를린의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오래전부터 새 이름이 적힌 새 신분증들을 안전한 장소에 마련해두었다. 게다가 그는 디터 비슬리체니와 빌헬름 회틀에게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고 거짓말했으며 도주 계획에 대해서도 가짜 정보를 흘렸다. 두 사람은 그 거짓말을 여기저기 퍼뜨렸다. 아이히만은 정말로 그렇게 조심해야 했다. 그의 부하들은 오래전부터 아이히만을 희생시켜 자신들은 피해를 보지 않은 채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상관이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시절 그를 당으로 인도한 오랜 절친 에른스트 칼텐부르너마저 체포되기 전에 그 달갑잖은 아이히만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마지막에는 아이히만의 오랜 부관들이 그에게 자신들을 떠나라고 요청했다. 〈수배 중인 전범〉과 가까이 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124)<br>"지하에서 활동하는 모임이 있고 1945년 이후 친위대 대원이라면 누구나 자동으로 그 회원이 될 수 있으며 그 조직이 흔들림 없이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공포와 희망의 판타지가 낳은 결과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데올로기에 투철한 추종자들은 이데올로기 발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강화 요인인 국가가 무너졌다고 해서 이데올로기를 버리거나 동료들과의 결속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옛 친위대 대원들로 구성된 대규모 지하조직이 따로 존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하에서, 특히 비합법적 상황에서 협력은 추천과 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새로운 고향에서 아이히만의 멋진 출발을 약속해주는 것도 다름 아닌 옛 이름의 명성이었다. 친구들은 바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를 도우려 했다. 아이히만에게 리카르도 클레멘트는 처음부터 그저 신분증상의 이름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로 도항하면서 그는 자유민이 아니라 이름도 되찾는다."(176, 181)<br>2장 막간극<br>"아르헨티나는 일시적으로나마 아이히만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우선 은신처를 영리하게 잘 골라서 상당 기간 발각될 위험이 없었다. 게다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어둠 속에서 장기간 지낼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권력을 한창 과시할 때 그를 만난 동료와 피해자들은 그를 민첩하고 오만하며 야심 많은 인물로 기억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지하에서 사는 데 만족할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지배 인종의 일원으로 인간의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작은 장소에서 무명의 존재로 사는 데 만족할 수 있을까?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기괴한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일을 정말로 중단할 수 있을까? 아이히만 추적이 초기에 엉뚱한 길로 빠졌지만 추적자들은 바로 그런 의문을 계속 갖고 있었다. 1945년 이후 아이히만 스스로도 그 질문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1961년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자문했을 때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익명으로 살아야 했기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195-6)<br>3장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br>"오늘날 우리가 1950년대 초 사람들이 나치 범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으며 무엇을 알고자 했는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상 그들은 당시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재건과 갱신의 와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 절멸에 대해 그래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는 신문 보도, 다시 말해 전범 재판 보도를 통한 것이었다. 전쟁에 패한 국가에서 열리는 그 재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승자 재판' '선전-증언' '흑색선전' '집단 책임' '복수 심판' 등의 용어가 퍼졌고 '6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도록 하려면 증거나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1953년에는 설명과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대응은 불신과 억압이었다. 심지어 공범들조차 〈사실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안도했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255-6)<br>"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한 인물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과거사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아이히만은 그들이 정해놓은 진실, 즉 상황은 뉘른베르크에서 나온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고 '유대인들이' 그런 규모의 대량학살을 지어냈다고만 말해야 했다. 아이히만의 진술은 독일인들에게 죄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어야 했다." "당시 정말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있다. 여러 문헌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뒤집는 그런 억지 주장에서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들이 내세우는 진실을 보증할 주요 증인으로 여겨졌다. 1950년대에 그 편집증적인 구원 희망은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것은 아이히만 체포 직후에 우파 언론의 반응에서만 분명히 확인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의 증언이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스라엘에 경고하는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렸다."(257-9)<br>"1955년, 독일에서든 망명지에서든 나치 몽상가들은 그해 몇 번이나 나쁜 소식을 접했다. 오스트리아는 국가 조약을 체결했다. 서독에서는 점령이 끝났고, 연방군이 창설되었다.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할슈타인 원칙으로 외국에서 독일의 이익을 단독으로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나치 신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것은 모든 대독일주의 이익의 거부 그리고 전승국, 특히 경멸 대상국인 미국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1955년 중반 쾰른에는 이스라엘 대사관의 전신인 이스라엘 공관이 생겼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의 독일 애국 동지들은 여전히 대사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제국으로서의 의지〉나 〈영원한 독일인의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독일로 돌아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은 전보다 더 희박해졌다. 향후 수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독일에 잔존한 소수의 용감한 동지에게 일종의 초월적인 인종 승리에 대해 희망을 품도록 하는 것뿐이었다."(307-8)<br># 할슈타인 원칙 : 대동독 강경책으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서독은 그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한 원칙<br>"부에노스아이레스인들은 유대인 학살에 관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를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황을 아주 잘 알았기에 공적 영향이 매우 클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세계관 투쟁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 증인, 즉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되었다. 힘러의 참모장 경력자나 수용소 '의사' 경력의 요제프 멩겔레같이 소심한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히만은 그런 기대에 조응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 대화는 자신에게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먼저, 뒤러 서클을 통해 아이히만은 혼자서는 확보할 수 없었던 신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 책을 구입하는 것은 너무 비쌌다. 게다가 언론 매체 경험이 풍부한 동료들을 통해 아이히만은 급히 다시 갈구했던 것, 즉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편하고 뿌듯하게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319)<br>4장 이른바 사선 인터뷰<br>"아르헨티나에서, 말을 하려는 아이히만의 욕구는 그의 경계심보다 언제나 더 컸다. 이미 봤듯이, 그는 믿을 만하다고 여긴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교 모임이나 퇴근 후 술집에서의 우연한 담소는 에버하르트 프리치와 빌럼 사선이 계획하고 있던 것, 즉 역사서와 시사 문제들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실행 계획을 세우고 그 프로젝트에 누가 더 참여할 수 있을지 고려하는─금전적인 이유로─진지한 협의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훗날 빌럼 사선, 에버하르트 프리치, 아돌프 아이히만 모두 각자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이 시점에 서로 계약을 맺어, 그 책의 판매 수익을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유혈의 꿈〉이었단 할지라도, 그들 모두에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재빨리 한밑천을 챙기는 꿈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에는 언제나 〈용병〉의 삶 같은 면이 있었다."(324-5)<br>"아이히만은 사람들 앞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대량학살 집행자로써 쓴 역사를 넘어) 후세에 뭔가를 남겨주고 싶어했는데, 이러한 점은 단지 망명에 따른 반작용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가지 상황이 그의 의욕을 더욱 북돋웠다. 첫째, 1955년에 유대인 절멸에 대한 첫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그 책들을 수많은 신문 기사와 마찬가지로 〈적의 문헌〉이자 도발로 여겼다. 둘째, 제3제국 몰락 이후 이념적 투사들에게는 글쓰기와 선전이라는 단 하나의 무기밖에 남지 않았다. 셋째, 그는 펜을 들고 실제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때 처음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이용가능한 출판사를 갖고 있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점인데, 그들은 아이히만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관심 있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바로 빌럼 사선과 에버하르트 프리치였다. 그의 시각에서는 극우 출판계에서 『길』이 맡고 있는 역할이 굉장해 보였을 것이다."(339)<br>"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글을 쓴다. 역사 연구를 방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글들이 확인시켜주는 신뢰할 만한 것은 단 한 가지로, 글이라는 것에는 그것이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사고 작용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자기소개와 역사 왜곡을 해석하면서 드러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은 그의 생각 그 자체다." "아이히만은 이 책을 이용해 독일에서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자기 삶도 되찾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초 서독의 형사 소추 실태를 살펴본다면 아이히만의 계획이 전혀 가망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형은 한 건도 없었고, 대체로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기소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로 끝났다. 아이히만은 아무 문제 없이 독일에서 계속 잘 살고 있는 수많은 옛 동료를 알고 있었다. 전범들은 낮은 형량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주요 나치 범죄자들에게도 공소시효가 만료될 것이었다."(343-4)<br>"아이히만의 〈내면적 도덕〉의 척도가 되는 것은 어떤 정의 관념이나 보편적 도덕 범주가 아니었고, 심지어 자기 성찰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평결이 잘못된 정치적 입장─〈조국의 윤리〉에서 벗어난, 결과적으로 독일 민족의 관점에서 벗어난 척도─에 기초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처음 읽으면 보편적 정의의 소환이나 모든 사람이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는 호소처럼 들리는 것이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평등권〉임이 드러난다. 아이히만은 자신도 인간이니 자신에게도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이 적용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요구는 어떤 민족사회주의적 도그마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사람이, 무엇보다 독일 민족이 어떻게든 스스로를 변호하는 데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서 그 도그마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349)<br>"아이히만은 〈이 총력전에서의 승리 아니면 독일 민족의 몰락〉임을 여전히 믿고 있었다. 승리가 선행되지 않은 〈평화 추구〉란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적〉 또한 유죄 인정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보편적 요소는 〈유죄〉이지 〈정의〉가 아니다. 전시의 모든 행동이 유죄로 분류되니 유죄임은 마찬가지다.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의 실제 가해자들은 집단 범죄 이론을 늘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이 광범위한 유죄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해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공범이었다고 설득하게 해주었다. 보편적 유죄 주장은 또한 아이히만의 회피 구실이 되었다. 우선, 다른 모든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과 똑같이 유죄라고 인정해야 했고, 그래야만 그도 유죄를 인정할 것이다. 모두가 유죄라면 아무도 유죄가 아닌 셈이며, 자백에 대해 법적인 결과가, 혹은 사실상 도덕적인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회피의 곡예는 비난에 의한 정당화라고 불릴 만하다. 이것이 규칙을 만드는 지배자 민족이었다."(350-1)<br>"아이히만의 말에 따르면 1944년 말에 한 통계학자가 힘러와 히틀러를 위해 어떤 수치들을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그 수치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두 차례 '총통 보고서' 초안을 수정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훗날 그는 코르헤어 보고서로 악명 높았던 이 문서와의 관련성을 줄곧 부정했다. 하지만 진짜 거짓말은 세부에 숨어 있다. 이 통계 수치들은 사실 1943년 3월에 잡힌 것인데, 그는 이 통계학자의 보고서 날짜를 1944년 말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런 식으로 날짜를 바꾸는 데 능숙했고, 자신을 좀 더 좋은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이런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만약 누군가 그의 숫자 놀음을 눈치채면 그는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혼동할 수도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지했다. 1943년 초의 수치를 최종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아이히만은 2년에 가까운 시간과 100만 명 이상의 살인을 지워버린 셈이다. 그것도, 앞선 수치가 애당초 맞는 것이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358-9)<br>"아이히만은 자칭 〈제3제국〉의 지도자가 선언한 것처럼 정연명령이 사실상 〈자기 본질에 따라 살고 자기 인종의 가치를 수호하라〉라는 의미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칸트의 가르침도 다른 어떤 철학도 인종생물학적 투쟁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에게 칸트는 절멸 정책을 시행하려 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인 〈이른바〉 도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칸트의 사상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아이히만의 일관된 민족사회주의적 태도의 증거이지만, 또한 절대적 권력에 대한 한결같은 욕망의 증거이기도 하다. 근본주의적 사상의 힘은 상급자가 내린 명령의 힘보다 훨씬 크다. 아이히만이 전체주의 체제에 그토록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가 이미 전체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하고 하고 싶어했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일을 했다는 존중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싶어했다."(382-3)<br>"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은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는 자기변호를 위해 상상 가능한 온갖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문서들을 생산했고, 언론을 위한 대중적인 글들도 썼다. 사람들이 그를 교수대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마지막 문장들을 쓰고 있었다. 아이히만을 글을 쓴 변명자로 보는 것은 분명 옳지만, 이 홍수 같은 말을 읽는 사람은 다른 동기를 간과할 수 없다. 아이히만은 논쟁 놀이, 말의 힘, 그리고 자신의 조작 능력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글에는 영향을 미치려는 욕구, 즉 독자를 제 뜻대로 이끌어 자신의 사고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는 욕구가 항상 나타나 있다. 문명사회의 모든 규칙에서 벗어난 아이히만의 제안, 의견, 계획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시기가 한때 있었다. 반유대인 정책이 절멸이라는 아이디어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의 생각은 반유대인 정책의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 글로 쓰인 말의 힘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히만이었다."(398-9)<br>"1957년 가을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전후의 나치들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서독 선거에서 과반 득표로 승리한 것이다. 독일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극우 운동은 이 선거의 승리를 막고 전후의 독일 정치에 전환점을 가져오는 것을 꿈꿨다. 그것은 1950년대에도 이미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진 꿈이었다. 이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 길을 따라 다시금 독일의 상석으로 돌아간다는 전망 또한 좌절되었다. 아데나워가 깨달았듯이, 독일 국민은 더 이상 실험을 갈망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고,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할 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세상은 꽤나 달라져 있었다. 1957년에 이 나라는 앞선 10년간 페론 통치하에 누렸던 활기찬 호황기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 〈운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고, 과거에 갇혀 있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의 가능성에 보조를 맞추기 시작해야 했다."(524-5)<br>5장 안전하다는 착각<br>"뒤러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아이히만과 사선이 계획했던 출판도 무산되었고,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독일-아르헨티나 커뮤니티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치 위계에서 하위에 속했던 〈덜 위태로운〉 망명자 다수는 자신이 자란 곳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껴 유럽으로 돌아갔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의 공소시효와 기타 회생법은 사형죄나 전쟁 범죄를 (또는 적어도 누군가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 아니라면 돌아와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에버하르트 프리치조차 1958년 3월 초 출판사를 포함해 모든 것을 싹 정리하고 잘츠부르크 근처의 집으로 이사했다. 아르헨티나의 독일 민족주의 공동체는 중요한 준거를 잃었고, 사선은 직장을 잃었다." "사선은 여전히 아이히만을 가끔 만났지만, 이제 더 흥미로운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땅에 남겨진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541-3)<br>"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을 만난 적이 있거나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가 재판을 받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생각을 알고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아이히만이 한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치 네트워크, 탈출 및 원조 조직, 통신 경로에 대해 알고 있기에 사람들의 삶은 매우 불편해질 수 있었고, 아이히만이 독일 당국에 그것들에 대해 발설할 경우 미칠 여파는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재판 회부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망명자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옛 나치가 서로의 개인사를 무해한 것처럼 보이도록 다듬어 새로운 경력을 만들었다. 아이히만이 등장하면 그의 옛 동료들이 세심하게 쌓아 올린 외관은 무너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당시 위기에 처한 것은 그들의 깨끗한 경력, 높은 지위, 높은 급여였다."(545-7)<br>"1960년 5월 23일, 아이히만의 재등장 소식이 빠르게 퍼졌고, 흥분된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이히만 납치는 1945년 5월 패배 이후의 그 어떤 사건보다 친위대 사람들과 기타 대량학살 가해자들의 삶을 더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것은 그들 서로 간의 상호작용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편안한 망명생활과 옛 동료들 간의 자연스러운 신뢰는 갑자기 끝났다. 유대인 절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새로 알게 된 사실로 인해 향수의 감정을 떨쳐버리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갑자기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은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주의를 환기한) 내가 옳았음을 안다.〉 동요된 요제프 멩겔레는 일기에 이렇게 썼고, 1960년 10월에 더 멀리 브라질로 이주했다. 전쟁이 끝난 지 15년 후, 해외 거주자들은 자신들이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갑자기 상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전략을 짤 시간이 조금밖에 없었다."(591, 599)<br>"이스라엘에서의 최종 진술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대리인으로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햇다. 그 스스로가 세상 어떤 처벌도 충분치 않을 정도의 죄를 진 만큼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상적인 대리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 민족은 아이히만 혼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독일 청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공개적으로 목매달겠다는 그의 제안은 기괴했지만, 그 재판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카타르시스를, 집단적 죄에 대한 집단적 반성을 바라고 있었고, 심지어 아이히만은 자신의 왜곡된 순교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 비애와 장렬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가해자, 협력자, 자발적 동조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희생양을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가족에게 보낸 작별 편지에서 〈역사가 평가를 만들어내도록 맡겨두자〉라고 썼다."(604-5)<br>6장 역할 변경<br>"아이히만이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대적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그는 유포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들 중 어떤 것이 자기변호에 가장 유용할지를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생산해낸, 유죄를 뒷받침하는 글들 없이, 신중한 관료의 이미지를 내놓았다. 이 역할을 통해 그는 자신을 교수대에서 구해주리라고 기대한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점적 지식과 자신의 무죄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통찰력을 내세울 여지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 유명한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자 절멸 프로젝트의 부처 간 조정자, 상관들과 함께 난롯가에서 코냑을 마시며 그 일의 실행을 축하했던 남자가, 스스로는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회의록 작성자로 변신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책략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관찰력 있는 심문관은 이 피의자가 전략적 계책을 부릴 때 특히 활기를 띤다는 것을 알아챘다."(610-1)<br>"권력을 갖고 있던 시절에 아이히만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는 희생자들의 희망을 가지고 기만적인 게임을 벌여, 저항도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옛 동지들의 존경과 도움을 얻기 위해서, 민족사회주의가 절멸의 명령과는 별개일 수 있다는 그들의 기대를 확인해주었다. 이스라엘에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본능〉이라고 여기는 것, 즉 이해하고 앎을 얻으려는 유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든, 아니면 그가 악의 이론을 사실로 확인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든 간에, 그는 거울처럼 사람들의 두려움과 기대를 반영했다. 그 모든 거울 이미지 뒤에는 아이히만의 권력의지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려는 그의 욕망이 근면함으로 위장된 채 놓여 있었다. 단 한 가지가 줄곧 아이히만을 부주의하게 만들고 따라서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의 익명성〉을 떨쳐내야 했던 그의 확연한 인정 욕구였다."(616)<br>7장 막후극]]></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873/48/cover150/k2020377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873487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나치 마인드 / 로런스 리스 - [나치 마인드 - 역사가 주는 12가지 경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99601</link><pubDate>Mon, 07 Sep 2026 07: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9960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031125&TPaperId=174996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57/14/coveroff/k86203112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031125&TPaperId=1749960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치 마인드 - 역사가 주는 12가지 경고</a><br/>로런스 리스 지음, 조행복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09월<br/></td></tr></table><br/>들어가며&nbsp;<br>1. 음모론 퍼뜨리기&nbsp;<br>"1차대전이 나치의 정신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의 정신에도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그 전쟁으로 엄청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8년의 최종적인 굴욕은 꼭 4년 전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많은 독일인이 기대에 부풀어 즐거워했던 만큼 더욱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타난 음모론자들은 그 초기의 도취가 없었다면 그만큼의 힘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심리학자인 캐런 더글러스 교수는 대다수 음모론자가 〈비난할 자를 찾아〉 나서면서 〈막후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있다〉는 관념이 그들의 〈무기력함과 환멸감〉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집단을 보호하거나 그 가치를 드높이는 방법으로 다른 집단에 관한 음모론을 믿는다. 특히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들은 다른 집단에 관한 음모론을 더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군인이라고 생각했다."(25, 37)<br>"독일군 병사들은 비록 패배했음에도 집으로 돌아왔을 때 굴욕을 당한 군대의 일원이라는 취급을 받지 않았다. 새로운 총리 에베르트가 왜 독일군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거짓을 설파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혁명이 터질 위험성이 있었고, 진실의 왜곡이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방침은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더 큰 해로운 거짓말에 부채질을 했다. 전선의 군대가 독일 내부의 후방에 있는 적들에 의해 〈등에 칼을 맞았다〉는 거짓말이다. 이것이 이듬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인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용한 음모론이다. 그는 그 전쟁의 재앙 같은 경과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비난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군대는 정성을 들여 힌덴부르크를 '타넨베르크의 영웅'으로, 1914년 동부전선에서 그가 지휘해 거둔 승리의 영웅으로 선전했다. 그 이후의 패배들은 이 초기의 승리와 나란히 언급되지 않았다."948-9)<br>2.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기&nbsp;<br>"폴크스게마인샤프트Volksgemeinschaft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국민의(또는 민족의) 공동체'가 되겠지만, 이는 그 낱말의 복잡한 의미를 크게 무시한다. 폴크Volk라는 낱말은 단지 '국민'이 아니라 서로 공유한 일련의 민족적·문화적 신념 전체를 암시한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모든 독일인이 특정한 성격의 공동체로 결집해야 하며 그 공동체는 개개인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나치는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종족적 순수함에 집중함으로써 그 관념에 더 강렬하고 종족주의적인 방식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 관념이 사람들을 '그들과 우리'라는 범주로 나누는 나치 분류법의 심오한 표현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종족의 관점에서 '순수한' 독일인으로 판정한 사람만이 폴크스게마인샤프트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개인이 이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피'가 곧 운명이라는 것이 나치의 견해였다."(76-7)<br>"1923년 5월 독일 북부에서 술 취한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훗날 악명을 떨치는 나치 마르틴 보어만과 루돌프 회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각별히 뜻깊은 범죄다. 마르틴 보어만은 2차대전 중에 히틀러의 유력한 조언자였으며, 루돌프 회스는 1940년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설립에 힘을 보태고 그 사령관으로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량학살 현장을 감독했다." "그들이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는 문명국의 법률 제도에서는 공격 행위가 되겠지만, 회스와 보어만은 이것이 부패한 체제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들의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법'만 인정했으며 그로써 용서를 받았다고 느꼈다. 중요한 것은 회스가 폭력에 길들여졌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자주 빠지기도 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자는 누구든 재앙을 떠안으리라!〉 이는 뿌리 깊은 '그들과 우리'라는 사고방식이었다. 바로 히틀러가 장려한 사고방식이다."(94-5, 98-9)<br>3. 영웅으로서 인도하기&nbsp;<br>"1924년 봄 뮌헨의 법정에서 히틀러는 마침내 오랫동안 되고 싶었던 영웅의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원형이 되는 중이었다. 지도력의 심리학에 관한 전문가인 알렉스 해슬람은 지도력이 〈위대한 나〉에 관한 문제라는 것은 흔한 오해라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지도력은 언제나 오직 '우리'에 관한 문제다.〉 해슬람은 개인적 자질의 점검 목록을 갖고 있다고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이끌어야 할 집단의 열망을 이해하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진력해야만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바로 이 점을 이해했기에 재판 중에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의 파괴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공유한 목적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전쟁 중에 '보통의 병사'였다는 사실 덕분에 전통적인 지도층에 배반당했다고 느끼는 수백만 명의 평범한 독일인 중 한 사람으로 처신할 수 있었다. '우리'라는 속성을 이보다 더 잘 증명해주는 것이 있는가?"(116-7, 119)<br>"나치의 주요 인사인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가 보여준 확신에 찬 미래상을 이렇게 인식했다. 히틀러는 〈학자가 하듯이 찬성과 반대를 동등하게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청중에게 다른 것이 옳다고 생각할 자유를 절대로 주지 말아야 한다. (···) 위대한 대중 지도자는 위대한 종교 창시자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자명한 진리를 전달해야 한다.〉 만일 히틀러가 지지자들의 요청에 응해 정책 사안에 대한 토론과 당 강령의 수정을 준비했다면, 이는 단지 그가 다른 이들의 말을 기꺼이 들을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약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는 합의정치인consensus politician의 정반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동료들이 그의 비전을 실현하려 애쓰는 과정에서는 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 바로 이러한 조합 덕분에 그는 매우 효율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그가 '위대한 나'가 아니라 '우리 중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는 인식이 유지되었다."(136-7)<br>4. 청년 타락시키기&nbsp;<br>"1930년대 초에 나치당에 가입하려는 '유혹'을 유달리 강하게 느낀 사람들은 20대 청년이었다. 나치당의 유사다윈주의 성격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확실히 매력이 있었다. 그들 거의 전부가 너무 어려서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아동기에 그림자를 드리운 전쟁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관념도 역시 매력적이었다. 많은 대학교가 여러 해 동안 민족주의 운동의 보루였고, 전후 협정에서 독일 영토를 상실해 뼈저리게 느낀 고통은 여전했다. 그들 다수가 훗날 나치의 대의를 위해 싸우게 된다." "베른부르크 지역의 사회주의 신문은 이런 사실에 한탄했다. 〈이 젊은이들은 대체로 풍파를 겪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없게 된 가정의 출신으로 (···) 이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에, 정치적 무지(학교와 부모는 이 점에서 철저히 무능했다) 탓에 정치적 승부사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나치는 이 청년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약속은 구체적이지 않을수록 더욱 강력하다.〉"(149-51)<br>5. 엘리트층과 공모하기&nbsp;<br>"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힌덴부르크와 그 주변의 엘리트들에게 집단적 사고group think의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심리적 현상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비록 모든 부정적 합의와 잠재적 대안들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의 올바른 해법에 도달했다고 확신할 때 발생한다. 이들의 오만함은 민족주의자 정치인이요 부유한 언론 거물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잘 보여주었다. 그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 불가피하게 자신처럼 노련한 정치인들에 의해 억눌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우리는 그를 가둬놓고 있다.〉 비극이었다. 최악의 경기 침체가 곧 끝나리라는 신호들이 있었기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1932년 여름 로잔 회담에서 독일 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배상금 지불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거의 90퍼센트가 삭감되었다]. 독일이 경제 회복의 길에 접어드는 데 나치 총리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203-4)<br>6. 인권 공격하기&nbsp;<br>"서른 두 살의 직업 경찰 하인리히 뮐러는 공산주의를 몹시 싫어했지만 나치를 지지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경력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결국 그는 게슈타포Gestapo(국가비밀경찰)의 수장이 되었다. 1937년 지구당의 칭찬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뮐러는 1933년 이전에 좌파 단체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뮐러가 우파를 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면 분명히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이러했다. 〈야심이 크고 추진력이 강한 그는 누가 지배자가 되든지 주어진 체제에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근원적인 심리적 특성을 드러낸 사람이 하인리히 뮐러만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독일인이 과거의 충성을 신속하게 내던지고 새로운 질서에 순응했다. 1933년 초에 100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나치당에 가입했다. 이 모든 사람이 갑자기 일종의 집단적인 개심의 순간을 경험해 히틀러의 주장이 타당함을 깨달았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상당수는 그저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229)<br>"이제 법치의 외양은 사라졌다. 그러나 훨씬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긴 칼의 밤' 숙청 이후 독일 안에서 히틀러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나치가 언론을 통제했기에 그 살인은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히틀러의 영웅적 노력으로 꾸며질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신문에서 읽은 내용은 이러했다. 히틀러는 극심한 무질서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만 사용했다. 게다가 히틀러는 국민의 더 큰 이익을 위해 과거의 지지자들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든 매체에서 똑같은 말만 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였다. 독일의 모든 라디오 방송과 신문이 한결같이 정부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전했기 때문에, 수백만 국민은 히틀러의 범죄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잘했다고 칭찬했다. 법치의 파괴. 자유 언론의 말살. 경찰과 군대의 매수. 히틀러는 독재자가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다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입증했다."(244)<br>7. 믿음 이용하기&nbsp;<br>"여호와의 증인은 나치의 표적이 된 집단들 중에서도 독특했다.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면 즉각 석방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신도가 그러한 길을 걷는 대신 무서운 박해를 감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친위대와 여호와의 증인 사이의 관계가 모욕적인 억압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친위대는 여호와의 증인이 지닌 뜨거운 믿음이 부러웠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절대적인 헌신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 루돌프 회스만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힘러와 다하우 수용소 사령관 테오도어 아이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친위대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그들의 여호와에게 보여준 것처럼 열광적이고 흔들림 없이 민족사회주의의 이상과 아돌프 히틀러를 신뢰해야 한다. 모든 친위대원이 그 신념을 열광적으로 추구할 때에만,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이는 친위대 지도부가 자신들이 믿음 위에 세워진 조직을 이끌고 있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발언이었다."(258-60)<br>"많은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출발점은 독일 민족이 희생자라는 인식이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그 직후 고초를 겪은 것은 내부에 있는 적의 배반과 다른 민족들의 기만적인 행태가 초래한 결과였다. 마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동안 독일은 동쪽의 슬라브족 인구가 증가한 탓에 종족적으로 소멸할 위험에 처했다. 이는 볼셰비즘을 장악한 유대인이 획책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이 잘못을 바로잡는 역사적 과업을 떠맡은 자들은 근본적인 원인에 조금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나치가 스스로를 혁신적인 사상가로, 세상의 현실이 아무리 잔인하더라도 그 현실에 당당히 맞설 준비가 된 유일한 사람들로 여겼다는 사실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나치 지식인들은 대부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둘러 임무를 완수하려 한 행동가였다."(265-6)<br>8. 적 평가하기&nbsp;<br>"히틀러는 종종 극적인 양자택일을 제시했다. 승리하지 않으면 파멸한다. 이는 그의 정치 이력 초기부터 지속된 사고방식이었다. 고상한 정치사상가들이 이러한 접근법을 조롱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는 엄청나게 효과적이었다. 고대 이래로 〈가장 무시무시한 대재앙〉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더 목숨이 중요한 때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조지 오웰이 지체 없이 간파한 진실이었다. 〈히틀러는 그 개성이 지닌 매력이 없었다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순교자요 희생자, 바위에 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 승산이 거의 없음에도 자신을 희생하며 홀로 싸우는 영웅이다. 그는 쥐 한 마리를 죽이더라도 그것이 마치 용인 듯이 보이게 하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사회주의는, 심지어 자본주의도 마지못해 사람들에게 '좋은 시절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히틀러는 '투쟁과 위험, 죽음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로 하나의 민족 전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299)<br>"1938년 여름에 개최된 에비앙 회의는 초청받은 나라들이 저마다 '난민' 문제에 공감을 표명하는 공론장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제안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국제사회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했다. 〈도움은 주지 않고 도덕만 얘기한다.〉 에비앙 회의가 보여준 위선은 히틀러가 투사하려 한 세계관, 즉 독일이 주장만 앞세우고 실천하지는 않는 나라들의 희생양이라는 세계관에 잘 들어맞았다." "〈그들은 원주민의 의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잔인한 폭력으로 여러 대륙을 정복했다. 그러나 독일이 식민지를 되찾겠다고 하자, 그들은 불쌍한 원주민의 운명이 경악스럽다는 듯이 그들을 절대로 그러한 운명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히틀러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커다란 위선을 포착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일 공간이 충분한데도 여전히 그들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독일인들이 더 편안히 살아갈 공간을 확보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21-3)<br>9. 저항 분쇄하기&nbsp;<br>"1939년 11월, 서른여섯 살의 목수 게오르크 엘저는 대담하게도 아돌프 히틀러는 폭탄으로 날려버리려 했다. 엘저는 히틀러가 11월 8일 맥줏집 폭동 기념일에 뮌헨의 맥줏집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연설하기로 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폭탄을 만들어 목공품에 숨겨 연단 가까운 곳에 두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맥줏집에 잠복해 있으면서 영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새 폭발 장치를 숨겨둘 것을 만들었다. 폭탄은 계획대로 11월 8일 오후 9시 30분 직전에 폭발해 여덟 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피해를 모면했다. 날씨가 나빠서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면서 연설 시간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보안국과 현지 경찰의 보고서는 히틀러 암살 시도에 엄청난 분노가 터져 나왔다고 강조했다. 〈거의 전 국민이 이 극악무도한 행위에 몸서리쳤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거듭했다. '신은 분명히 퓌러 편이고, 그가 다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다.'〉"(350, 356)<br>"1939년 11월로 예정된 서유럽 침공 계획은 1914년의 실패한 군사 행동의 반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장군들은 서유럽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 창의적인 접근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아르덴 숲을 지나 전진할 때 연합군이 이를 탐지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도박'이었다. 만일 공습에 취약한 그 숲에서 발각된다면 전쟁에서 패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럼에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였던 히틀러는 새로운 계획에 열광했다. 도박은 적중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고, 반대했던 장군들은 틀렸음이 입증되었다. 독일군 장군들은 다음번에 히틀러를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이제 히틀러에 대한 저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졌다. 7월 6일 베를린의 개선 열병식은 그때까지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무아지경의 흥분 상태에 빠진 군중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이제 누가 그에게 반대할 수 있겠나?"(369-71)<br>10. 종족주의 강화하기&nbsp;<br>"1939년 9월 1일 독일군 전차가 국경 너머 폴란드로 진격한 순간부터 종족주의적 대결이었지만, 그 종족주의는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격상되었다. 히틀러의 장군들이 이 〈절멸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들 다수는 소련 주민들에 대한 종족주의적 편견을 공유했다." "이 전쟁에서 적을 비인간화하는 나치의 행태는 거의 초월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 침공에 참여한 모든 독일군 병사는 사전에 새로운 적에게서 최악을 예상하라는 말을 들었다. 다시 말해 적은 종족적으로 열등할 뿐만 아니라(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전쟁 규칙 따위는 무시하고 싸우는 자들이었다. 이는 많은 침공군 병사의 마음속에 엄청난 두려움과 공격성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쟁은 인간과의 싸움보다 짐승과의 싸움에 더 가까웠다. 뱀을 신뢰할 수 없듯이 러시아인도 신뢰할 수 없었다. 우리의 뇌는 친구는 개인으로 보고 적은 집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인들'은 하나의 들짐승 무리로 인식되었다."(376-8)<br>"밀그램의 연구에서 발견되는 다른 깨달음이 있다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공정한 세상' 가설이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이 권위자로부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필요하니 걱정 말고 하라는 말을 들으면 쉽게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치 학살자들과 관련하여 볼 때, 분명코 권위자의 역할이 집단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하이드리히와 힘러는 이 점을 잘 알았고, 학살 부대의 활동에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체로 각각의 학살자 집단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애초부터 살인을 즐긴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다. 학살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살인은 사실상 가능하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다. 총을 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음을 깨달은 자들이 있었다. 대다수가 중간 집단에 속하는 이 3분할을 학살자의 심리에서 거듭 보게 될 것이다."(385-6)<br>11. 멀리서 죽이기&nbsp;<br>"1941년 8월 말, 카를 프리치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인 소련군 포로들에게 수용소에서 의복 소득과 이 퇴치에 사용한 치클론B라는 치명적인 살충제를 사용한다는 중대한 발상을 내놓았다. 그 두 가지를 결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해충 박멸에 쓰이는 화학약품으로 적을 죽이는 것만큼 그들의 '타자성', 즉 '그들'의 속성을 더 잘 중명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나치는 그와 같은 동물의 비유를 좋아했다. 그 전해에 제작된, 역사상 최악의 선전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영원한 유대인〉에서는 쥐 떼의 장면과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이미지가 교차했다. 그 영화를 감독한 프리츠 히플러는 이렇게 말했다. 〈괴벨스가 쥐가 나오는 장면을 요구했다. 쥐가 유대인의 상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사령관 루돌프 회스는 〈총살로써 절멸을 수행한다는 생각에 언제나 몸서리쳤다.〉〈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안도했다.〉〈우리는 그 모든 유혈극을 피할 수 있었다.〉"(413-5)<br>"그해 가을의 처음 몇 주 동안은 나치에게 몹시 즐거운 낙관적인 시간이었다. 10월 3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이 적[소련군]은 이미 무너졌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나치당 언론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사적인 의미에서 소련은 끝났다.〉 이튿날 독일의 신문들은 머리기사로 〈동쪽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다." "괴벨스가 디트리히의 선전의 오류에 그토록 격분한 것은 바로 독일 국민이 '미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트리히는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괴벨스는 국민에게 나중에 이행하지 못할 구체적인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진실을 전하되 가장 단순한 사람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군데군데 고쳐 보여주어야 한다. 반대로 뻔한 거짓말은 언젠가 돌아와 역효과를 낼 뿐이다.〉"(420-2)<br>12. 두려움 키우기&nbsp;<br>"독일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와 같은 패배는 없었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재앙 이후, 나치 지도부가 해결해야 할 난제는 분명했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국민의 충성을 유지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태세를 갖출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믿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진심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여태껏 겪지 못한 가장 어려운 심리적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믿음이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역경에 맞서 굳건하게 버티라고 설득해야 했다." "괴벨스는 독일인들에게 계속 싸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열쇠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이런 메시지를 설파하는 데 몰두한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대들 개인에게도 이익이다. 왜냐하면 동쪽의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 강간, 살해, 복수의 의도를 품은 채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항복은 이 야만인들의 도착을 더욱 앞당길 뿐이다. 바로 그가 좋아하는, 감정을 건드리는 노골적인 메시지였다."(453, 456)<br>"괴벨스는 연합국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기 며칠 전에 선전 회의를 열어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기 때문에 독일은 적에 맞서 '잔학행위 선전atrocity propaganda'[적이 저질렀다는 실제와 가공의 잔학한 범죄에 관해 정보를 퍼뜨리는 전략]을 조직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선언했다." "독일 국민의 심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최선의 방법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라는 믿음에 따라, 괴벨스는 기운을 북돋는 다른 화제들로써 공포심을 조장하는 '잔학행위 선전'의 효과를 더욱 높여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괴벨스는 1943년 2월 18일 '총력전' 연설에서 한편으로는 자기희생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반면 2주 후에는 독일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을 들인 판타지 오락 영화 한 편을 공개했다. 〈뮌히하우젠Münchhausen〉은 가공의 독일 남작이 펼친 모험을 보여주는 컬러 장편영화였다. 마술사, 열기구를 타고 가는 달 여행, 사치스러운 연회, 하렘의 욕장에서 젖가슴을 드러내고 목욕하는 젊은 여인들이 나온다."(458-9)<br>맺으며<br>"나치였던 자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상대화하려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령관 루돌프 회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것과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독일 도시의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비유다. 특히 독일 도시들에 대한 폭격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멈추었지만, 나치의 민간인 학살은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계속되었을 것이다. 물론 유대인 여자와 아이를 절멸하라는 나치의 지침은 있었던 반면, 독일의 여자와 아이를 몰살하라는 연합국의 지침은 없었다. 그러나 연합국이 나치와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생각은 많은 독일인에게 매력적이었다. 나치였던 자들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함부르크에 살던 작가 마틸데 볼프묀케베르크는 친구들과 함께 〈온힘을 다해〉 나치 정권의 〈몰락〉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은 연합국의 위선도 비난했다. 그녀의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 똑같은 죄인이다.〉"(508-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57/14/cover150/k8620311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57143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늑대의 시간 / 하랄트 얘너 - [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82333</link><pubDate>Mon, 31 Aug 2026 07: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8233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938874&TPaperId=174823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278/84/coveroff/k10293887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938874&TPaperId=1748233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a><br/>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01월<br/></td></tr></table><br/>들어가는 말: 불행 사이로 비치는 행복 7&nbsp;<br>"1945년 여름, 독일 땅의 7500만여 명의 무리를 하나의 인간 사회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대신 '공백기' 혹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다. 다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무리에만 신경을 쓰는 분위기는 1950년대 깊숙이 들어서도 이 나라의 자화상을 이루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만의 보호 공간인 가족 속으로 숨어들었다. 1950년대 후반부에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설립된 '게마인진Gemeinsinn' 시민운동가들이 다수의 비정치적인 독일인을 비난하는 말로 사용했던 그 유명한 '오네미헬 씨'의 모습에도 그 늑대는 계속 살아 있었다. 예전에 대동단결했던 민족 동지들이 이제 자기만 아는 늑대로 타락해버린 것이다." "이 책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강제로 끌려갔거나, 도망쳤거나,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뒤섞여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이전의 민족 동지들이 어떻게 다시 서서히 시민이 되어갔는지를 다룰 것이다."(8-9)<br># Ohnemichel. 'Ohne'(Without)와 'mich'(me)를 합성한 말로서 '나 없이 하라는 뜻'인데, 'mich'에다 'el'을 붙인 미헬은 일반적인 독일인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나와 내 가족만 신경 쓰고 살겠다는 독일인을 의미한다.&nbsp;<br>"이 책의 중점은 잔해 청소와 사랑, 도둑질, 쇼핑 같은 일상의 문명적 측면에서 차츰 정신생활과 미적 디자인 같은 문화적 측면으로 넘어간다. 전쟁 이후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예술을 사랑하고, 섬세한 감각을 즐기고, 끊임없이 진지한 토론에 빠졌다. 좋았던 옛 시절로 미화되던 19세기와 함께 끝나버린 사교 형식을 다시 이어가기라도 하는 듯했다. 오늘날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반면에 당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그늘 속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잘 모른다.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수백만 명을 살해한 나라가 어떻게 도덕과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것을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그들의 자식들이 스스로 찾도록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언론의 해석권도 호황을 누렸다. 모두가 '의미에 대한 갈증'을 이야기했다. '실존의 폐허 더미' 위에서 철학을 하는 것은 정신의 약탈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감자를 훔치듯 의미를 훔쳤다."(14-5)<br>1. 제로 시간?<br>"후대에 침울한 통곡의 대가로 기억될 26세의 극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계속 살아가는 것의 짐을 자기 세대의 절박한 선언으로 바꾸고자 했다. 한 장 반짜리 텍스트 〈이별 없는 세대〉에서 그는 말 그대로 과거가 사살되어버린 세대의 새 출발을 격정적인 단호함으로 노래했다. '이별 없는 세대'는 제로 시간의 선언이었다. 〈우리는 귀향 없는 세대다. 귀향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착 세대다. 어쩌면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완벽하게 도착한 세대일지 모른다. (···)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지만, 모든 도착이 우리 것임을 알고 있다.〉 '이별 없는 세대'는 돌아볼 용기가 없는, 남겨진 자들의 시적 선언이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다수 독일인의 충격적인 태도가 여기서 원칙으로 대두한다. 경험한 것이 적힌 칠판은 지워지고, 새로운 글과 '새로운 신'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바로 '새로운 별'에의 도착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과정이다."(29-30)<br>2. 폐허 속에서<br>"폐허 영화가 인기를 끈 이유는 단순했다. 파괴된 도시의 파노라마가 이색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끔찍한 모습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아무리 봐도 폐허에 질리지 않았다. 자기 내면의 거울로 느낀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전쟁 이전 세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던 것이 이제야 마침내 눈앞에 똑똑히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그들은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러한 완전한 몰락 속에 숨겨진 내적 연관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 폐허가 세상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많은 사람을 엄습했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폐허 속으로 들어가 '경고 사진'을 찍었다. 황량한 잿더미를 보여주는 사진마다 한결같이 붙은 제목이었다. 물론 그들은 폐허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사로잡은 공포를 묘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산산조각 나고 검게 그을린 드레스덴처럼 끔찍한 광경조차 이 재앙에서 눈앞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끄집어내려는 사진작가들의 야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55-6)<br>3. 대이동<br>"피난민 행렬에는 무척 대조적인 두 그룹이 있었다. (외국인) 강제 징용자와 동쪽의 실향민이었다. 해방된 징용자들에 대한 군정의 태도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해방 직후에는 온정주의적 시선이 지배했다. 그래서 강제 징용자들은 잔학한 나치의 희생자로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폭넓은 지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연합군은 징용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풍족하게 배급할 것을 각 상점에 지시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동요와 증오를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물건은 달리고 배급량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의 수용소 노예 생활은 많은 징용자에게 심각한 행동장애를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의 불만을 난동으로 풀었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까지 공격적이고 폭도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면 여러 사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보살펴줄 수 없었던 연합군 군인들에게 말이다. 그들의 이런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급기야 연합군 병사들도 존중과 이해심을 잃을 때가 많았다."(82-3)<br>"수용소의 긴장 상황은 연합군 군정이 최대한 많은 징용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려던 1946년 여름부터 반대 방향에서 밀려든 새로운 사람들로 더욱 꼬였다. 동유럽, 특히 폴란드에서 10만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이 독일로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은 이미 그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충분히 겪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재차 끔찍한 학대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번 가해자는 폴란드인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폴란드 징용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반대 방향에서도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이 독일 땅으로 들어오면서 방금 비워진 수용소 공간을 채웠다. 이들 유대인의 탈출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와 유대인 이주 단체 '브리하Brichach(탈출)'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단체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이주를 원하는 유대인 징용자들의 유입을 최대한 장려함으로써 미국이 영국에 압력을 가해 팔레스타인 정착 금지 조치를 해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87-9)<br>"1960년대에 독일연방공화국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외쳤던 '통합의 기적'은 사실 내용 면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독일인이 고향을 잃고 떠나온 동쪽의 동포들을 외국인 징용자만큼이나 야멸차게 대했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독일인들의 그런 이기적인 행동이 적어도 인종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끄집어내며 스스로를 위안할지 모른다. 아무튼, 동쪽의 실향민들은 금발이건 파란 눈이건 상관없이 하찮은 '집시 떼거지'로 멸시받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헝가리나 루마니아 이웃들에게서 특별한 취향을 물려받았는데, 일례로 파프리키와 마늘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 이는 서독 주민들에게 상당한 혐오감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늘 공통의 민족적 뿌리를 입에 올리며 통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당시 당국이 '전입자'라고 부른 새로운 이주민들은 거부의 벽에 부딪혔다. 결국 '통합의 기적'은 경찰의 개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106-8)<br>"인종주의는 죽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창끝이 내부로 향했다. 당시에는 하나의 독일 민족이 아닌 '독일 부족들'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었다. 그러니까 오버바이에른 사람이건 프랑켄 사람이건, 아니면 팔츠나 튀링겐 사람이건 여러 부족의 피가 섞이는 것은 지역적으로 뿌리내린 민족 집단의 고유성을 해치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독일제국의 붕괴 이후 민족 공동체의 이념은 빛을 잃었지만, 독일인들의 오만함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나치의 선전 구호였던 하나의 단일 민족은 부인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정체성의 결정적 특징으로 갑자기 지역을 부각시켰다. 많은 사람이 독일의 내부 이주를 일종의 다문화적 공격으로 보았다. 그와 함께 부족주의가 성행했고, 사람들은 부족의 일원으로서 풍습, 관습, 종교 제의, 방언을 통해 다른 지역민들과 자신을 구분했다. 특히 보헤미아계 독일인이나 바나트 슈바벤인, 슐레지엔인, 포메른인, 베사라비아 독일인 같은 온갖 '폴란드 잡것들'과는 더더욱 거리를 두었다."(110-1)<br>4. 댄스 열풍<br>"우리는 전후 시대를 지극히 어두운 시기로 상상한다. 시대의 이미지, 특히 후대의 잔상은 주로 찡그린 얼굴과 절망적인 표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 시대의 곤궁과 불안은 결코 낯설지 않다. 하지만 야간 폭격의 공포와 점령 초기의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이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폐허 더미에서 느끼는 일상의 상실조차 이런 에너지를 가로막지 못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재앙에서 벗어났다는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미래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집중도를 더 높였다. 많은 사람이 순간을 위해 살았다. 순간이 아름다우면 마지막까지 만끽하고 싶어 했다. 이는 끓어오르는 삶의 기쁨으로 분출되었고, 때로는 거의 광적으로까지 비치는 향락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삶의 위협은 여전히 곳곳에 존재했기에 사람들은 삶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했다. 그야말로 댄스 열풍이 불었고, 가능한 곳이며 어디서건 정신없이 놀았으며, 남이야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미친 듯이 웃어댔다."(139-40)<br>"카니발은 전후 독일인들의 야누스적 측면을 드러내는 인기 있는 메타포였다. 항복 사회는 서서히 쾌락주의 사회로 넘어갔다." "전후 시기의 파티는 가라앉고 있는 배가 아니라 이미 가라앉은 배 위에서의 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에 스스로 깜짝 놀랐고, 그 기분에 취해 이상한 바보 같은 짓에 발작적으로 덤벼들었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프린츠는 많은 독일인을 사로잡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들뜬 분위기를 보면서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뒤에 여는 추모의 연회를 떠올렸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들판을 깨끗이 휩쓸고 지나가자〉 궁핍과 불행이 대지에 만연했지만, 〈시신을 땅에 묻고 공동묘지에서 돌아오는 조문객들이 식당에 마련된 커다란 추모의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분위기가 퍼지곤 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명랑함, '살아 있는 자의 달콤한 습관'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았다는 기쁨의 감정이〉."(165-6)<br>5. 파괴된 도시의 사랑<br>"전쟁 기간에 여자들은 남자 없이도 대도시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아버지 없는 가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자기들만의 은밀한 공동체로 바뀌어갔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싸우지 않고는 얻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역할에 더는 적합해 보이지 않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욕설과 분노 같은 정말 최악의 수단으로 자신들의 옛 자리를 고수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들의 주도하에 경제적 형편이 더 나아질수록 자신들이 집에서 잉여 인간이라는 느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반면에 가족이 궁핍에 시달릴 경우 귀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족의 부양에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수치심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여자들의 역할과 분투를 애써 깎아내린 것이다."(174-7)<br>"아무리 위험한 시대여도 사랑의 요구는 별로 줄지 않았다. 마르그레트 보베리가 일기에 썼던 〈죽음과의 지속적인 밀착〉으로 인한 〈삶의 기쁨〉의 무한한 상승은 성적인 측면으로 표출되었다. 많은 여성이 이제야 드디어 다시 뭔가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전후 첫 몇 개월을 지배했던 새 출발의 설레는 분위기, 그리고 불안과 외로움이 만들어낸 야릇한 흥분은 기괴한 특성을 띤 성적 굶주림으로 이어졌다." "전후 여자들의 성적 활동은 당대에 회자되던 여성 과잉으로 날개를 달았다. 아름다운 여자는 많았지만 남자는 희박했다. 살아남은 남자들도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목발을 짚거나, 가래 끓는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피를 토했다. 여성의 존엄에 상처를 낸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랑의 문제만이 아니라 생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 시장의 전망이 곧 다시 악화되자 생업 활동은 모든 여성에게 지상 최대의 행복으로 비치지는 않았다. 여성 과잉은 취업 전선에서 여성들 간에 반목의 싹이 되었다."(193, 199-202)<br>"어디서건 풀어헤친 자세로 앉아 있거나 편안하게 구는 미국식 생활 방식은 누군가에겐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누군가에겐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적국에서도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행동하는 남자들 속에서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사적 친밀감과 편안한 남성성을 인지했다. 즉 부담 없는 남성상이었다." "이런 아가씨들은 곧 '베로니카 당케쇤Veronika Dankeschön'이라 불렸다. 성병Venereal Disease의 약자 VD를 변형한 말장난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독일 여자들과 미군은 전력을 다해 관계를 맺었다." "젊은 독일 여성들이 미군을 찾은 데는 문화적 또는 하위 문화적 동기도 숨어 있었다. 즉, 고루한 독일적 삶의 방식과 비좁고 숨 막히는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욕망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다수 독일 역사가들은 당시 여성들에게 낯선 것에 대한 욕망이 존재했고, 바로 그 속에 미군들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오랫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222-4)<br>6. 약탈, 배급, 암거래: 시장경제를 위한 수업<br>"약탈의 순간에는 미친 듯한 탐욕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어디에 쓸지 알 수 없는 물건도 일단 맹목적으로 확보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렇게 기를 쓰고 모은 물건들을 그냥 길에 버리기도 했다." "새로운 시장들은 연합국의 지시로 예전의 행정 관료와 직원들을 다시 일터로 불러들였다. 종전 상황의 혼란 속에서 명맥만 남은 공공 업무를 정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심사는 나중에야 이루어졌는데, 이 심사로 나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과 소련 점령 지구에서 자주 해고되었다. 반면에 프랑스와 영국 점령 지구에서는 탈나치화가 좀 더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점령 지구 내의 관료들은 개인적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집권 세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독일 관료주의의 전통적 이상을 따라, 나치 정권에 충성했던 것과 같은 태도로 연합국 행정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239-42)<br>"거의 종전 직후부터 배급표가 다시 발급되었기에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앞으로도 계속 공정하게 관리할 국가기관도 분명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배급표는 〈살아갈 권리 증명서〉로서 그 소유자에게 전면적인 패배 이후에도 생존권을 문서 형태로 쥐고 있다는 일종의 확신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급표가 거기에 명시된 양 만큼의 식료품과 지방, 설탕을 실제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약속된 1550칼로리는 곧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최악의 궁핍 시기인 전후 첫 3년 동안에는 고작 800칼로리만 배급될 때도 있었다." "연합군의 지시로 강제 노역과 강제 수용에서 해방된 외국인들에게 식량 배급 면에서 특혜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시기와 분노를 느끼는 독일인이 많았다. 사실 그 사람들이 독일인들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제공받은 것은 수년 동안 영양실조에 빠져 있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정당한 의학적 조치였다. 그럼에도 많은 독일인이 그에 대해 분개했다."(246-50)<br>"세상 사람들의 눈에 '독일인들'은 전쟁 범죄와 제노사이드를 통해 가해자로 낙인찍힌 지 오래였다. 그들은 문명과 작별했고,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국제 사회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망명 독일인들만 그런 국가의 일원임을 스스로 거부했다. 국내에서는 정권을 수치스러워했던 나치 반대자들조차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분명히 알지는 못했다. 다수 독일인은 유대인 수백만 명에 대한 학살과 독일 국방군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무척 특별한 방식으로 질서와 품격을 갖춘 나라라는 감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핍의 시기에 범죄가 사회적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경악했다. 집단적 인식이 이보다 더 왜곡될 수는 없어 보인다. 국외에서는 전후의 시스템 붕괴를 독일을 재사회화할 기회로 바라본 반면에 독일인들은 이제야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두려워한 문명의 몰락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265)<br>7. 경제 기적과 부도덕에 대한 염려<br>"서독을 무기한 먹여 살릴 뜻이 없었던 미국은 경기를 부양할 방법을 찾았고, 그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사람들에게 별 인기가 없는 라이히스마르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할 여유가 없다'는 말은 전후에 자주 나돈 말 가운데 하나였다. 앞서가는 건 항상 암시장이었다. 독일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 물물교환과 좀도둑질, 불법 거래에 매달렸다. 오직 주거권과 식량 배급표만 얻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자리를 얻은 다음에는 더 중요한 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 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신권 화폐의 필요성을 일깨움으로써 암거래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일뿐이었다. 실제로 화폐 개혁이 이루어지자 정규 직업에 종사하려는 사람과 불법 거래 대신 정상적으로 거래하려는 상인의 수는 빠르게 증가했다." "식량 배급 제도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곧 찾아온 물가 상승의 파고로 힘들어했지만, '상품 세계'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을 안겨주었다."(291-2)<br>"자동차 공장 도시 볼프스부르크는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의 조합이었다. 석방되었지만 오갈 데 없는 군인들, 전쟁을 경험한 뒤로 어떤 형태의 안락함도 견디지 못하는 고향을 잃은 젊은이들, 그리고 더는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이전의 강제 노역자들로 이루어진 외롭고 좌초된 남자들의 수용소였다." "1948년 니더작센 지방 선거에서 볼프스부르크는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극우 정당인 독일우파당DRP이 2만 4000표 가운데 1만 5000표를 얻어 시의회에서 원내 1당이 된 것이다. '볼프스부르크의 충격'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참담한 결과가 나온 지 몇 개월 뒤 선거 결과는 무효화되고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은 재투표를 해야 했다." "이유는 빠르게 밝혀졌다. 너무 많은 남자, 너무 많은 피난민, 너무 많은 실향민, 너무 많은 퇴역 군인, 너무 많은 젊은이 때문이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영속 가능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 도시엔 그런 믿음을 담보해줄 것이 전혀 없었다."(309-12)<br>"공장은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에겐 전부였고, 공장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규모 감원 조치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중하위급 소수 핵심 직원들은 나치 시대와 독일노동전선의 이념에 아직도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반면에 과학 기술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기술자들은 온 마음으로 자신들과 공장이 하나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금속 노조가 볼프스부르크에 파고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볼프스부르크는 이른바 '공장 사회'의 이상이 되었다. 어떤 공장도 그 악명 높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을 듯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와 민간 자본이 서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밀착해서 움직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1960년 폭스바겐법VW-Gesetz에 따라 공장은 민영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나더작센주와 연방공화국은 각각 20퍼센트의 지분을 소유했다. 그런 까닭에 폭스바겐이 '독일'이라는 주식회사의 준 국유 기업이라는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313, 316-7)<br>8. 재교육자들<br>"연합국들이 합의한 탈나치화와 재교육 정책은 처벌과 신뢰 구축 사이의 균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내에 남은 진짜 나치 반대자들의 도움을 받아 나치 잔당을 배제하고 단순 부역자는 순화 교육을 시키자는 것이다. 승자의 선의에 대한 기본 신뢰 없이는 지속적인 평화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일에서 소련은 이론적으로 비교적 쉬웠다. 소련의 역사 인식에서 독일인들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의 객관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소련은 파시즘을 노동자 계급에 대한 극악한 독재로 해석하면서 신속한 용서로 나아가는 이데올로기적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독일 국민이 파시즘에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보았을 뿐, 많은 미국인이 의심하는 것처럼 독일인들 속에 근본적인 악이 존재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현실에서 소련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독일 국민에게 훨씬 더 큰 공포를 안겨주었지만, 그들은 첫날부터 독일인들에게 화해의 비전을 제시했다."(349-50)<br>"미국에서 독일의 고급 문화를 이해하고 예찬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소수의 독문한 전공자나 이민자밖에 없었다. 대다수 미국인은 독일의 문화 전통에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배웠다는 독일 교수들이 왜 하필 최악의 나치에 동조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재건되는 언론에 독일의 전직 언론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에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스 하베는 연합군이 독일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야 옥석을 가려낼 수 있고, 그래야 탈나치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베는 1945년 10월 17일, 그가 책임 편집을 맡고 미군정의 정보관리부에 의해 출간된 전국지 《노이에차이퉁》을 탄생시켰다. 신문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독일 지식인들의 의견 발표장이기도 했다." "이런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미 당국은 의심의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하베는 곧 사상적으로 별 믿음이 안 가고, 독일인 동족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간 헛똑똑이로 여겨졌다."(354-5, 358)<br>"종전 이후 모든 독일인이 당연히 연합군의 의심을 받았다. 그건 전쟁의 논리였다. 반면에 나치 공동체의 논리도 있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조국이 싫어서 도망친 자들에게 어떻게 그럴 자격이 있겠는가? 따라서 돌아온 망명객들이 국내 독일인들을 심판대에 세우거나 교육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월권행위로 여겨졌다. 하베는 가까운 독일인 그룹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 몰라도 안전한 편집국만 벗어나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혐오감을 느꼈다. 독일인들은 망명에서 돌아온 자들의 오만함에 맞서 단단한 밀집대형을 갖추었다. 그건 결코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쁜 의도를 가진 나치 잔당들의 단순한 불평불만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제는 숨어 투덜거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후의 서쪽 지구에서는 토론 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면서 서방 연합군의 비호를 받던 망명객들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장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360-1)<br>9. 예술 냉전과 민주주의 설계<br>"전후 독일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미술이었다. 첫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예술적 양식 문제는 정치적 노선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림에서 '뭔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지 하는 문제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정치 진영과 국가들까지 갈라놓았다. 그림 위의 한 밝은 점은 그냥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가, 아니면 그림 외부의 어떤 실제적인 것을 암시해야 하는가 하는 추상미술의 결정적 쟁점은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이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예술이 냉전의 전쟁터가 되면서 추상미술은 서방의 창조적 횃불이 되었고, 사실주의는 사회주의의 미학적 계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관객을 위해 많은 신문에 동시대의 예술 경향에 대한 설명이 잇따라 실렸다. 거부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사회에는 현대미술에 대한 거부감 외에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팽배했다."(392-3, 396)<br>"동쪽과 서쪽의 독일인들이 점점 더 멀어질수록 추상미술은 서독에서 주도권을 잡기가 한결 쉬워졌다. 동독의 구상미술 원칙이 분명해질수록 추상미술 역시 정치 체제의 미학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서독의 대표적 예술 양식으로 올라서는 것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말이다. 자유의 예술로 이해되는 추상미술은 신앙고백과 같은 카리스마를 얻었고, 이 카리스마는 정치와 분명히 선을 그을 때 더욱 설득력 있게 발산되었다. 추상미술은 존재의 유희적 축제를 묘사했고, 커다란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분출된 순수 생명 에너지를 구현했다. 또한 물감은 주걱으로 퍼서 바르거나, 방울방울 떨어뜨리거나, 표면에 두꺼운 덧칠을 함으로써 재료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가치의 구현이기도 했다. 미국 정보 요원 도널드 제임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추상미술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제보다 훨씬 더 양식화되고 경직되고 편협한 것으로 비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그들은 추상미술을 힘껏 장려했다."(406-7)<br>10. 억압의 소리<br>"인간은 억압을 소리 없는 과정으로 상상하기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당시엔 전후의 정적, 무기와 언어의 침묵에 대한 글이 많이 나왔다. 심지어 전후 독일인들은 옛 시절을 회고할 때 스스로를 그동안 겪은 일을 일단 말없이 견뎌내야 했던 위대한 침묵자로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말을 삼가는 분위기는 여기저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말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현실은 그 반대였다. 특히 많은 독일인이 자기 문제에서는 그야말로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독일인들의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은 언론과 소책자, 논문에 넘쳐난다. 이 대목에서 말 그대로 억압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글의 저자들은 진정한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고통에만 빠져 허우적거렸다. 어떤 이는 당시에 이미 패자의 신분으로 세계정신의 꼭대기에 오르기라도 한 듯 자신들의 극심한 치욕을 정신 영역의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바꾸었다."(430-1)<br>"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이 악마든 광기든 자본이든, 혹은 그들 자신의 탐욕이든 독일인 다수는 이제 그 문제를 잊자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비판의 대오를 해산했다. '나는 내 문제만으로도 벅차.' '이제부터는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할 거야.' 독일인들이 서로에게서 확인한 것은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였다. 이런 태도는 그전의 민족 공동체가 요구한 '대동단결'에 대한 역사적 대답이었다. 이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불신과 피로감이 넘치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축소된 결속이 만연했으며, 그 속에 자신들의 엄청난 모순을 숨겼다. 사람들은 암시장에서의 일상적인 속임수에서, 그리고 거처와 빵, 석탄을 얻으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이미 자신들의 진면목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이런 싸움에서는 당원이든 나치 반대자든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 속에서도 웬만큼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지, 혹은 아무리 절실한 생존경쟁 속에서도 어느 정도 금도는 지켰는지가 도덕적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443)<br>"대다수 독일인이 스스로를 히틀러의 희생자로 여기는 이런 집단적 자기 합리화는 학살당한 수백만 명에 대한 견디기 힘든 모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서독의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어쩌면 불가피한 전제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써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심리적 토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히틀러의 희생자라는 확신은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고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존재로 느끼지 않으면서 몰락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 있는 선행 조건이었다." "스스로 기만당하고 착취당했다는 확신과 함께 나치의 이념적 불씨는 외견상 완전히 꺼져버렸고, 독일인들은 마치 자신과의 혹독한 정신적 대결을 통해 내적 탈나치화의 기적을 이루어내기라도 한 듯 아무런 가책 없이 온 마음으로 민주주의에 집중할 수 잇었다. 자기들끼리 다정한 말로 다독인 이 희생자 논리 덕분에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와 대면해야 할 심리적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451-2)<br>맺음말: 삶은 계속된다 460<br>"전후 독일 사회가 진실과 마주하는 면에서 아무리 무능했다고 비난하더라도 그들의 억압 능력 덕분에 후손들이 막대한 이익을 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억압은 항상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다. '과거 청산'은 훗날 후손들이 떠맡았다. 그들은 과거 청산을 부모 세대에 대한 역사적 승리로 여겼다. 가장 거친 국면에서는 마치 내전처럼 보이기도 했던 부모와의 싸움에서 말이다. 1968년의 세계적인 저항 물결이 서독에서만큼 부모 세대에 대한 가차 없는 개인적 청산과 결합된 곳은 없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거의 광적으로 지탄받은 것은 1945년 이후 독일인들이 스스로에게 가했던 억압의 후유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에서 이어진 실제적인 결과는 별로 없었다. '68세대'조차 부모 세대의 나치 연루 혐의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자본주의를 독재의 전 단계로 낙인찍고 그들이 겪은 사회적 탄압을 파시스트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파시즘 이론을 만들어냈다."(460-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278/84/cover150/k10293887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278840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점심</category><title>달러 종말의 허구 / 곽수종 - [달러 종말의 허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75088</link><pubDate>Thu, 27 Aug 2026 14: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750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042636851&TPaperId=174750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7/77/coveroff/e04263685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042636851&TPaperId=174750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달러 종말의 허구</a><br/>곽수종 지음 / 메이트북스 / 2025년 10월<br/></td></tr></table><br/>| 들어가는 말 | 달러가 흔들릴 때 문명도 전환점에 선다<br>문명의 전환, 혹은 대변화의 시작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첫째, 총·균·쇠의 강도가 거세진다. 총은 전쟁, 균은 질병의 파괴력, 쇠는 산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석기에서 청동기·철기로의 전환, 풍력에서 석탄·석유로 이어진 내연기관의 발명 등이 그 사례다. 둘째, 강대국은 스스로 무너진다. 여당의 실수를 먹고사는 야당처럼, 강한 세력이 자충수를 두어 몰락한다. 내부 균열이 심각해지면 천재지변이나 인접 강국의 침략으로 붕괴된다. 셋째, 경제에서 버블 붕괴는 대공황을 낳지만, 정치에서 패권 붕괴는 질서를 무너뜨리고 권력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권력이 없으면 질서도 유지될 수 없다. 영국 파운드의 몰락이나 달러의 부상은 필연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달러의 몰락도 필연은 아니다. 기축통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달러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미국 스스로 자초한 재앙일 것이다. 경제 패권의 붕괴는 재건이 가능하지만, 정치 패권의 붕괴는 국가의 쇠멸을 뜻한다. 8)<br>◆ CHAPTER 1 트럼프의 오독: 달러 패권이 불안하다<br>대다수 공화당 사업가들과 달리, 트럼프는 세계를 착취 대상이 아니라 미국을 이용하는 ‘호구(the patsies)’로 바라본다. 1987년, 트럼프는 &lt;뉴욕타임스&gt;와 두 개 신문에 전면광고를 실었다. ‘미국 국민에게(To the American People)’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에서 그는 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국가들에 군사비를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는 결국 “우리 위대한 나라가 더 이상 조롱 당하게 놔두지 맙시다(Let’s not let our great country be laughed at anymore)”라는 문장으로 끝맺었다. 트럼프의 정치적 메시지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 시기는 ‘골디락스(Goldilocks) 경제’라 불리며 풍요와 낙관이 공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까지 미국에서는 국가 방위 예산은 패권국으로서 당연히 부담해야 할 대가이고, 무역은 그 보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이러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4)<br>억만장자 기업가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저서 『세계질서의 변화』에서 제국 쇠락 초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정서를 경고한다. “제조업 부활”을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은 정작 청정에너지와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다. ‘산업과 상업이 떠난 자리에 자본만 남는다’는 사실은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징후임을 그는 모르는 듯하다. 미국은 이제 관세나 무역 압박만으로는 중국의 국가 주도 전략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중국은 전략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첨단 산업에서의 지배를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집중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중국도 부동산 침체와 고령화 같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의 예측과 달리, 중국은 매번 돌파구를 마련하며 국가 주도 체제를 유지해왔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관세 집착은 오히려 중국 중심 세계의 부상을 앞당길 뿐이다. 17-8)<br>냉전 이후 미국의 대중 외교 접근은 미국 지도자들이 더 이상 전략적 외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0년대에는 더 이상 경쟁할 강대국이 없었고, 구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이전의 그 어떤 강대국도 상상할 수 없었던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워싱턴은 경쟁국의 행동을 조율하는 대신, 그들을 자유주의 사회로 바꾸려는 더 야심찬 목표를 추구했다. 오늘날 강대국 간 경쟁은 다시 돌아왔고, 체제 간 전쟁도 현실적인 가능성이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간명하다. 전략적 외교로 회귀해야 한다. 아르키다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을 암시하지도, 굴복을 암시하지도 않는 어조(a tone not too suggestive of war, nor again too suggestive of submission)”로 적들과 교섭해야 하며, 그로부터 확보한 시간을 이용해 동맹과 국내 자원을 전쟁을 위한 더 나은 상태로 준비시켜야 한다. 당연히 그 목적은 전쟁을 피하는 데 있다. 31-2)<br>◆ CHAPTER 2 달러의 매력과 균열: 기축통화의 힘과 한계<br>달러의 진정한 특수성은 ‘거래 지배력’에 있다. 국제 차입·대출의 명시 통화가 달러이고, 무역 청구서도 달러로 작성된다. 미국 내 유통 화폐 가치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100달러 지폐 중 약 3분의 2가 해외 보유라는 사실은 ‘대마불사’에 가까운 저변 수요를 보여준다.&nbsp;왜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과 국가경제가 미 달러화를 사용할까?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는 미 달러화의 역할이 영어의 국제 공통어 역할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많은 이가 쓰기 때문에 더 쓰게 되는 네트워크 외부성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통화의 특별한 역할은 주로 민간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강제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관세 위협으로 달러 사용을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과대망상을 넘어 정책 오류다. 오히려 상시적 처벌 관세는 달러의 명성과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외교적 영향력은 ‘대체로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국가’라는 평판에서 나온다. 그 평판이 흔들리면 달러의 네트워크 기반도 약화된다. 58)<br>달러화는 사실상 공짜 돈이자 일종의 무이자 대출(making an interest-free loan to us)이다. 미국 달러화를 사용한다고 해서 사용료를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얼마나 많은 달러가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50조 달러 이상을 해외에서 보유중이라면 이는 곧 무이자 대출 규모와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해외가 미국에 달러로 대출을 해줄 때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입하든 미국 내 자산에 투자하든 달러로 거래된다는 이유만으로 전통적으로 낮은 이자율이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전 세계가 미국 금융 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에 미국의 차입 비용과 이자율은 약 0.5~1% 낮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미국 주택 매입자의 대출 금리가 타국보다 낮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달러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 더 많은 차입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시장금리에 따라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이 0.5~1%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차이이자 특혜다. 61)<br>“전 세계가 달러를 광범위하게 사용함으로써, 미국이 수입하는 것은 싸지고 수출하는 것은 비싸진다”는 주장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구조적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적자를 지적할 때 즐겨 쓰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투자 자산시장과 소비재 시장을 혼동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미국에서 더 저렴한 것은 달러 강세 때문이 아니라, 미국 시장이 더 완전경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산업 기반과 제조업 일자리를 잃은 것은 금융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달러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자국 통화를 낮게 유지해 미국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값싼 수입품으로 미국 시장을 잠식했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요약하자면, 달러의 지배적 위치가 미국 제조업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경우가 많다.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간단히 말해 설득력이 부족하다. 63)<br>지금 달러를 지탱하는 것은 연준(Fed), 즉 미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급격히 높이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실제로는 평균 2%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 소비자 물가가 2% 수준에서 안정되면, 세계 각국의 통화정책도 이에 연동되어 안정적으로 운용된다는 경험이 지난 30년간 축적되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수단이 미국 재무성 채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티븐 미누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듯 보이는 ‘100년 만기 0% 국채 매입’ 구상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미국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미국과 거래하는 모든 국가경제가 함께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인류 문명사에서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설립은 매우 중요한 발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다. 조 바이든도, 오바마도 모두 금리를 낮추길 원했다. 투자를 늘리고, 주택을 구입하고, 은행 대출을 쉽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얘기는 결국 트럼프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68)<br>미국은, 더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 시스템을 점점 더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무기화하고 있다. 속되게 표현하면 “빚은 못 갚으니 채권자가 알아서 해라, 미국은 책임이 없다”는 태도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강력한 카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좋은 상태”에 있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형편없다”고 고백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 모순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중간점은, ‘달러는 아직 강하지만 미국 경제는 불확실하다’는 해석일 것이다. 달러가 강하다는 것은 여전히 세계경제가 달러 지배력의 우산 아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독점적 지위가 오히려 미국의 악화된 경제와 불확실한 달러의 미래를 드러내는 역설이 되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빌리면, “달러는 약해야 하지만 동시에 기축통화로 절대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가 동시에 약하고 강하길 원한다. 69-70)<br>가능한 시나리오는 둘이다. ‘디폴트’는 아니다. 하나는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채무자에게 유리하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려면 트럼프가 부채의 실질가치를 낮출 정도로 통화 확대를 지지하는 인물을 연준 의장에 임명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현실화하려면 트럼프가 쓸 수 있는 또 다른 카드가 있다. 부채를 민간에 떠넘기는 ‘금융 억압’이다. 이런 조치에는 장단점이 있다. 금리가 급등하면 정부 이자비용이 폭증하고 달러 가치가 급락한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은 앞으로 부채에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한다. 여전히 ‘주요 통화 1위’ 지위는 유지하더라도, 달러에 대한 도전이 잦아지면 국가 안보에도 영향을 준다. 제재 수단의 효능이 약해지고, 정보 수집 능력에도 타격이 간다.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오지 않는다. 인플레이션 위기는 점진적이고, 달러의 위상 하락도 느린 불꽃처럼 진행된다. 달러 위상이 떨어지는 국면에서 팬데믹이나 또 다른 위기가 닥치면, 그때서야 사람들은 변화를 실감할 것이다. 73-4)<br>◆ CHAPTER 3 달러 패권의 흔들림: 종말인가, 전환인가<br>21세기 독재자들은 대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는다. 과거 카스트로나 피노체트가 야당을 폭력으로 억압했다면, 오늘날 독재자들은 공공기관을 정치 무기로 바꾸고 법 집행·세무·규제 기관을 동원해 반대자를 압박한다. 이를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라고 한다. 형식상 정당이 선거에 참여하지만, 집권자의 조직적 권력 남용으로 야당에게 불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체제다. 헝가리, 인도, 세르비아, 터키 등이 이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차베스 집권기에도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권위주의로 넘어섰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간단한 기준은 ‘정부에 반대하는 비용’이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데 앞장선 시민들이 ‘정부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현실적 두려움 때문에 한 번 더 주저해야 하는 순간, 그 국가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라 부르기 어렵다.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경쟁적 권위주의’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96-7)<br>문제는 ‘이 체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을 공격하며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결국 미국 경제의 모든 열쇠를 쥐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가족들이 무차별적으로 뛰어든 암호화폐 사업과 해외 순방에서의 이해상충적 사업 추진은 ‘미국판 마르코스’를 연상케 한다. 이는 미국 경제와 달러 패권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글로벌 패권 몰락의 전조가 될 수 있다.더 큰 문제는 미국 사회가 이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미온적인 대응만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인·CEO·로펌 파트너·언론 편집장·대학 총장 등은 민주주의 수호를 원하면서도, 정부 위협 앞에 회유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3년만 버티자”는 자기보호 전략에 몰두하며, 주주·예산·규제·소송 위험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작은 굴복은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유화정책(appeasement)’의 치명적 논리다. 권력은 단순히 힘으로만 강화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타협할 때 강화된다. 99-100)<br>채권시장은 경제 전망과 정책 환경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보통 장기 금리가 높은 이유는 중장기 성장 가능성을 가정하기 때문이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와 미국 채권 매도세가 겹치면서, 가격은 떨어지고 그 역수인 금리는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채권의 ‘안전자산’ 지위가 흔들리면, 글로벌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게 된다. 미 연준이 트럼프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 번에 1%p 금리를 내린다 해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투자자는 없을 수 있다. 재정적자가 GDP 대비 120%를 넘어서면서, 채권 이자율 급등이 다시 이자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모기지 금리 상승으로 연결되어 기업과 가계에 큰 부담을 준다. 이를 두고 미국 자산 수요 감소와 매우 높은 적자를 고착시키는 재정 절차의 경직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경직성이 자산시장을 불안하게 만든다. 커져가는 부채 부담은 채권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하며, 미국의 부채 유지 비용을 끝없이 상승시킨다. 105, 108)<br>신흥국 투자자들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수익률 상승 → 이자 비용 증가 → 부채 확대 → 통화 완화 정책 의존’이라는 전형적인 금리 악순환 때문이다. 이는 결국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그리고 채권 수익률 상승이 반복되는 ‘신흥시장 함정’이다. 지금 미국(그리고 일본 역시)은 그 함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도 2025년 9월 기준 장기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다. 30년물은 3.23%로 사상 최고치, 20년물은 2.69%로 25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의 장기 금리 상승은 경제 회복 기대라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GDP 대비 부채 규모 260%라는 현실 속에서 장기 금리가 더 오르면 일본은행이 감당해야 할 이자 부담이 급증한다. 이 때문에 미·일 국채 수익률 격차가 축소되면 일본 투자자들은 자금을 미국에서 빼내 본국으로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미국 채권 가격 하락 → 금리 재상승 → 또다시 악순환’이 이어져 일본 경제에도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109)<br>미국의 부채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여전히 강하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행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달러 약세를 반길 수도 있다. 부통령 J.D. 밴스는 외국인의 미국 증권 대량 보유가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여 제조업에 피해를 줬다고 주장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 스티븐 마이런도 해외 보유 미 국채에 세금을 부과하는 아이디어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국의 경상·무역적자는 상대국의 대미 흑자가 미 국채 매수로 ‘재활용’되는 구조다. 따라서 달러 표시 국채 매입을 막으면, 흑자국의 대미 흑자를 축소하거나 아예 실현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전 세계 중앙은행가들을 이 정도로 자극한 단일 문서는 드물다. 일부는 미 재무부의 제재 역량을 경계하고, 다른 이들은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기’ 차원의 분산을 택했다. 달러의 전 세계 외환보유 비중은 2001년 73%에서 현재 58%로 하락했다. 이러한 다변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115-6)<br>◆ CHAPTER 4 금과 암호화폐: 달러를 대체할 수 있을까<br>1991년 구 소련의 몰락 이후,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극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만, 군사적 우위의 지속과 경제적 패권의 약화가 미국의 절제(자제) 능력을 시험할 것이다. 그 시험은 네 가지 주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동맹을 압박해 단기적 이익을 챙기려는 유혹이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여러 면에서 워싱턴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려는 충동은 늘 존재한다. 워싱턴이 이득을 얻기 위해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미국이 과도한 이익 추구로 권력을 남용하면 리더십과 질서의 정당성이 훼손된다. 둘째, 중국 같은 국가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때 미국은 과잉 반응할 유혹을 받을 것이다. 과거 떠오른 강대국(독일·일본·소련)은 대체로 경제보다 군사력이 앞섰다. 반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더 클 것이다. 이는 국제질서에는 비교적 안정적 파급을 줄 수 있지만, 중국이 경제적 방식의 도전을 시도한다는 뜻이며, 신중한 관리가 필요하다. 142)<br>셋째, 미국은 핵심 이익이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안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항상 겪는다. 냉전기 미국의 베트남,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이 그 예다. 오늘 미국에는 동등한 경쟁자가 부재하지만, 이 유혹은 여전하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핵심 이익이 걸린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군사 태도를 피해야 한다. 예컨대 베이징의 A2/AD(접근거부/지역거부) 역량 강화로 중국 인근에서의 미 군사작전 비용·위험이 커졌다. 워싱턴의 대응은 전략목표의 재정의에 달려 있다. 1990년대와 같은 완전한 군사적 자유를 되찾으려 들면 충돌 위험이 커진다. 어떤 접근이든, 미국의 글로벌 이익에서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 영토 그 자체가 아니라, 전략·전술이 더 넓은 질서에 미치는 파급이다. 중국의 전략은 분명하다. 굳이 무력을 동원해 미국을 쓰러뜨릴 필요는 없다. 스포츠에서도 ‘상대 실수 유도’가 가장 효율적 전략일 수 있다. 중국은 현 상태를 정면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미국도 중국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할 때다. 142-3)<br>미국 달러 가치가 만약 급락해 기축통화 지위가 실질적으로 약화된다면, 금은 국제 부채 결제의 보조 단위이자 가치 저장 수단으로 존재감을 더 키울 수 있다. 중앙은행들이 법정통화와의 직접 태환을 부활시키지는 않더라도, 외환보유고의 통화 구성을 다변화하면서 금 비중을 높이는 흐름은 패러다임 전환기에 대비한 방어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법정통화 기반 준비자산이 인플레이션으로 실질가치가 줄어들 때, 금은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의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화폐 신뢰가 흔들릴 때 소비와 교환이 앞당겨지며 물가 급등을 자극해 위기를 심화시키는 자기강화 메커니즘이 관찰되지만, 이것이 항상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들이 금 매입을 확대하고 보유 금을 역내 반입하는 사례는, 제재·지정학·제도 신뢰 리스크에 대한 포트폴리오 헤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더해 완전한 ‘탈달러’는 대체 결제 인프라·유동성·법제 등에서 높은 진입장벽을 마주한다. 148)<br>그렇다면 암호화폐는 달러를 대체하는 기축통화로 기능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 다만 보조적 기능을 일부 수행할 여지는 있다. 게다가 비트코인의 가격 불안정성은 일상적 화폐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한다. 또한 비트코인이 완전한 익명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콜로니얼 파이프라인 랜섬웨어 사건에서 해커 조직 다크사이드가 받은 비트코인의 일부를 추적·회수한 사례는, 비트코인 거래가 완전히 추적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결국 비트코인은 본래의 목표에는 실패한 채 투기성 자산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는 아이러니하다. 비트코인은 내재적 가치가 없고, 어떤 실물 자산에도 연동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지자들끼리 한정판 굿즈를 사고파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지자들은 금처럼 희소성에 의미를 부여하며, 발행 한도가 2,100만 개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이는 명품의 ‘한정판(limited edition)’과 같은 성격이다. 152-4)<br>전략적 비트코인 비축이란 미국이 대량의 비트코인을 매입해 보유하는 것이다. 비트코인 정책연구소(BPI)는 미국이 비트코인을 채택하면 달러 패권을 약화시키려는 중국과 러시아보다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국가는 금에 집중하고 있지만, 미국은 디지털 금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의 장점은 공급량이 한정되어 있어 인플레이션 압력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 발행량은 2,100만 개로 제한되어 있으며, 이미 약 1,990만 개가 채굴된 상태다. 이론상 수요가 유지된다면 장기적으로 가격 상승이 가능하다. 그러나 가격이 급등하면 인플레이션이나 독점적 가격 착취로 이어질 수 있으며, 무차별적인 시장 교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만약 미국이 이를 달러 대체 수단이나 최소한 달러 방어 수단으로 삼는다면, 가장 큰 위험은 변동성 그 자체다. 화폐의 변동성은 금리·환율로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하지만, 기초적 펀더멘털이 부재한 비트코인은 공급과 투자자 심리에 따라 가격이 움직인다. 157)<br>스테이블 코인의 주요 위험 요인들을 요약하면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금리 위험(Interest Rate Risk)으로, 채권 가격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인다. 스테이블코인이 매일 채권을 사고판다면, 단기 금리 변동에도 일부 평가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유동성 위험(Liquidity Risk)이 잠재한다. 스테이블코인이 하루 단위로 대량 국채를 거래할 경우, 유동성 부족 시 원하는 가격에 매도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재투자 위험(Reinvestment Risk)이 존재한다. 만기 채권이 재투자될 때, 금리가 이전보다 낮으면 예상 수익률이 감소한다. 넷째, 신용 및 제도적 위험(Credit / Regulatory Risk)이다. 미국 국채는 사실상 무디스, S&amp;P AAA 등급으로 초우량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시나리오(예: 정부 채무 상환 지연, 미국 디폴트 가능성)는 이론상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운영 및 시스템 위험이 존재한다. 매일 채권을 사고파는 구조에서는 거래 시스템 오류, 가격 산정 오류, 스마트 계약 오류 등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164)]]></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7/77/cover150/e04263685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17777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팔레스타인 1936 / 오렌 케슬러 - [팔레스타인 1936 - 오늘의 중동분쟁을 만든 결정적 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68281</link><pubDate>Mon, 24 Aug 2026 0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6828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930719&TPaperId=1746828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80/48/coveroff/k81293071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930719&TPaperId=1746828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팔레스타인 1936 - 오늘의 중동분쟁을 만든 결정적 순간</a><br/>오렌 케슬러 지음, 정영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05월<br/></td></tr></table><br/>들어가는 글:역사에서 사라진 팔레스타인 대봉기 11&nbsp;<br>"이 책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약 10년 전, 3년에 걸쳐 진행되며 이후 이어질 유대-아랍 관계의 틀을 만들어낸 팔레스타인의 첫 아랍인 봉기를 다룬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진행된 이 '대봉기Great Revolt'라는 혹독한 시련을 통해 하나로 빚어졌다. 경쟁관계에 있던 가문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빈곤층은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봉기는 결국 내부를 향하며 약해졌다. 내분과 보복은 아랍인 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실용주의자는 극단주의자에 의해 밀려났고, 첫 번째 대규모 난민 행렬이 팔레스타인을 빠져나갔다. 영국군의 진압으로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다쳤다." "시온주의 종식을 목표로 시작된 대봉기는 오히려 아랍 팔레스타인을 망가뜨렸고, 아랍인은 10년 후 실제 진행된 유대 국가 건설에 맞설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러나 대봉기는 팔레스타인인이 승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순간이었고, 많은 사람이 아직 그 순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12-3)<br>"한편 대봉기는 유대인에게 아랍인과는 아주 다른 유산을 남겼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대봉기를 계기로 아랍인이 유대 국가 건설 사업을 묵인해줄 거라는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주권국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무력에 기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봉기를 계기로 수천 명의 유대인이 당대 최고의 군사 강국 영국에게 훈련을 받고 무기를 지급받았다. 어설펐던 경비대는 특수부대와 장교단까지 갖춘 유대인 군대의 씨앗으로 거듭났다. 유럽의 파시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사태에 직면한 가운데 소극적 방어는 민족적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유대인의 테러 공격이 처음 등장한 것도 대봉기 시대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랍과 유대, 두 민족주의를 말하는 책이자 그 둘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거대한 폭발을 다룬 책이다. 이 변화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이 되기까지의 연대기에서 핵심 역할을 했지만 많은 경우 간과되어 왔다."(13-4)<br>1장 평온한 사막의 지배자들 21<br>"러시아 태생의 바이츠만은 영국에서 화학자로 활동했다. 그의 아세톤 생산 공정은 연합군의 폭발물 산업에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역할이 있었다. 바로 세계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1919년 1월, 바이츠만은 아랍 봉기의 영웅 파이살을 만나기 위해 그의 사막 주둔지로 갔다. 여기서 둘은 T. E. 로렌스의 중재로 협정을 맺었다. 파이살은 협정에서 유대인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는 밸푸어 선언을 사실상 지지하고 추후 레반트 나머지 지역에 건설될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별도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파이살과 바이츠만은 공동 성명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적 연대감과 오랜 유대감을 염두에 둘 때, 각자의 자연적인 열망을 달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의 발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파이살은 다가오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더 넓은 독립에 대한 아랍의 꿈을 실현시켜줄 것을 협정의 조건으로 걸었다."(33, 35-6)<br>"유대인은 빠르게 움직였다. 1920년 네비 무사Nebi Musa(선지자 모세) 축제 때 유대인을 겨냥해 일어난 폭동 이후 노동계 시온주의자들은 정착촌을 지키기 위해 무장단체 하가나(Haganah, '방어'라는 의미)를 창설했다. 공식적으로는 불법 단체였지만, 활동을 방어에만 국한한다는 조건으로 영국은 이를 눈감아줬다. 영국은 여전히 파이살을 도왔다. 영국의 중동 지역 관료들은 1921년 카이로에 모여 짧은 기간 시리아를 통치했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한편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느슨하게 연결된 '트랜스요르단'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설립해 파이살의 형 압둘라는 에미르Emir로 앉혔다. 시온주의자, 그중에서도 특히 자보틴스키의 강경파 추종자들은 유대인 몫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보고 영국에 분노했다. 식민장관 윈스턴 처칠은 이라크와 요르단 동쪽을 아랍인에게 보장함으로써 유대 민족 고향 건설에 대한 아랍인의 분노가 잦아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는 통하지 않았다."(41-2)<br>"당시 자보틴스키는 이미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상가였다. 그는 《하레츠Haaretz》 등의 매체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원하기만 했다면 그는 아마 러시아 문학계의 거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학이 아닌 시온주의, 그중에서도 자기방어와 자기결정권이 하나님의 뜻이나 노동자의 형제애라는 개념보다 우선하는 강경한 시온주의에 투신했다. 반면 하지 아민은 평범한 신학적 소양만을 갖춘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자였다. 새뮤얼 고등판무관의 사면이 아니었다면 하지 아민은 아마 역사에 별다른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 아민을 귀환시킨 새뮤얼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그의 형의 자리, 즉 대大무프티 자리를 하지 아민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렇게 종신직 대무프티 자리에 오른 하지 아민은 팔레스타인 무슬림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이는 밸푸어 선언에 이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은 영국의 또 다른 결정이었다."(44-5)<br>"1929년 8월 15일은 유대인이 히브리 달력에서 1년 가운데 가장 애통한 날로 꼽는 아브월 9일의 하루 전날이었다. 유대교 안식일이었던 다음 날 아침,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을 겨냥한 전례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어지는 며칠간, 폭동은 텔아비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 지역, 제즈릴 계곡, 갈릴리 등 팔레스타인의 20여 개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번졌다. 끔찍했던 엿새 동안 133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아랍인 사망자의 수도 비슷했지만, 대부분 영국군에 의해 죽은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사망은 일곱 명으로 추정됐다. 300명이 넘는 유대인과 200명이 넘는 아랍인이 부상을 당했다. 폭동은 전 세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뉴욕 타임스》는 첫 네 면을 거의 이 사건에 할애했다. 메디슨스퀘어가든에 2만 5000명의 군중이 모여든 가운데 집회 사회자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담화를 낭독했다. 후버 대통령은 시온주의 계획에 대해 미국 국민이 지닌 〈심심한 동정과 공감〉을 강조했다."(57-9)<br>"히틀러 취임 두 달째인 1933년 3월 31일, 대무프티 하지 아민은 독일 총영사와 만났다. 하지 아민과의 면담 후 총영사는 베를린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오늘 대무프티가 팔레스타인 안팎의 무슬림이 독일의 새 정권을 환영한다는 점과 파시스트적이고 반민주적인 국가 권력이 다른 땅으로도 전파되기를 희망한다는 점을 밝힘.〉" "몇 주 후 총영사는 대무프티를 비롯한 아랍 인사들과 네비 무사의 사막 사원에서 다시 만났다. 아랍 인사들은 새로운 독일을 환영하고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조치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밝혔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단 하나,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막기 위해 독일 정부가 최선을 다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히틀러의 부상이야말로 팔레스타인 이주 유대인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시온주의자 사이에도 한 가지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유럽이 더 이상 세계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65-6)<br>2장 피로 물든 야파 83<br>"이 시기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민족 국가 건설 계획은 치명적인 위협을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1933년 3만 명 규모의 유대인 이민을 허가했고, 그 숫자는 1934년에 4만 2000명, 1935년에는 기록적 규모인 6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불법적인 경로로 입국하는 유대인 수만 명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40만 명에 가까웠다. 4년 만에 두 배 증가한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3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었다. 텔아비브 인구 또한 같은 기간 세 배 증가했다." "중동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32년 영국은 (자국의 군사적 특권은 유지한 채) 파이살을 국왕으로 세워 이라크의 독립을 승인했다. 1936년 초에는 시리아인들이 50일에 걸친 총파업 끝에 프랑스 철수를 논의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이집트 또한 영국과 비슷한 협상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팔레스타인에서만 아랍인의 독립 열망이 그저 좌절된 것으로 모자라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었다."(88, 93)<br>"야파에서 유혈사태가 있기 이틀 전(1936. 4. 17),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벤구리온을 만났다. 벤구리온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갑작스럽게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력에 대해 열정적인 웅변을 쏟아냈다. 안토니우스는 유대인 〈공동체〉의 이름으로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이스라엘 땅)'을 제안했다.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가 될 것이고, 인구 대다수는 유대인으로 구성될 것이다. 에레츠 이스라엘의 영토는 남북으로는 가자에서 하이파까지, 동쪽으로는 제즈릴 계곡까지가 될 것이다. 그 옆으로는 헤브론산맥에서 네블루스까지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아랍 국가가 자리 잡는다. 안토니우스의 제안은 성지 팔레스타인을 반으로 쪼개는 것과 다름 없는, 그야말로 전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시리아 연방으로의 편입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양보였고, 《성경》 속 〈이스라엘 땅〉의 일부만을 수락하는 것 또한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109-11)<br>"야파 유혈사태 이후 아랍인들의 단합에 대한 압박은 점점 강해졌다. 아랍고등위원회가 주도한 파업이 길어질수록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를 분리하고 더 멀리했다. 벤구리온은 여기서 기회를 감지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값싼 아랍인 노동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인 유대인 농업과 산업을 성장시켜 자급자족을 실현할 기회였다. 이미 몇 년째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설파해온 벤구리온은 야파 항구의 아랍 인부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영국 정부에 텔아비브 북쪽 끝에 경쟁 항구 건설을 허가해달라고 청원했다. 영국 정부는 몇 주 망설인 끝에 한 가지 조건을 달아 허가했다. 새로운 항구 건설을 위한 자금은 유대인이 직접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항구 건설은 유대인에게 이중의 승리였다. 우선 신항구 건설로 팔레스타인이 자랑하는 최대 수출품 감귤류를 유럽으로 원활하게 수출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새로운 항구가 지닌 상징성이었다. 이제 유대인도 외부 세계로 통하는 자신들만의 관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114-5)<br>"여름이 되면서 대무프티도 폭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6월부터 대무프티의 본부는 전사들을 격려하고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인에 협조한 아랍인 또한 점점 더 많이 죽어나갔다." "한편 영제국은 신경 쓸 곳이 너무 많아 극도로 정신없는 상태였다. 3월에는 히틀러가 또다시 베르사유조약을 위반하고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에 접한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5월에는 무솔리니가 아디스아바바 입성으로 에티오피아 점령을 완성하며 수에즈운하에 대한 영국의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궁지에 몰린 위임통치령 정부는 그때까지 거부해왔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유대인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훈련시켜 스스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노트림(notrim, 파수꾼)'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임시경찰대를 창설했다. 노트림의 실제 운영은 유대인기구가 맡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하가나가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영국에 의해 유대인 무장 경관이 탄생했다."(122-4)<br>3장 두 국가 해법론 137<br>"1936년 여름, 윌리엄 필은 총 여섯 명으로 구성된 왕립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총 6주 동안 조사를 진행한 후 필 위원장은 위임통치령 개시 이후 유대인이 원하는 민족적 고향의 성격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일종의 문화적 중심지를 원했다면, 이제는 수백만 명의 피난처를 원하고 있었다. 부위원장인 럼볼드는 필의 말에 동의하며 미국의 이민 제한과 히틀러의 부상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가운데 대의 정부에 대한 아랍인의 요구가 〈실로 매우 강하다〉고 언급했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위원은 팔레스타인의 두 민족이 각자 지닌 열망은 양립이 불가능하며,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위원회는 현재 위임통치령의 범위 안에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한 후 이를 근거로 위원회에 제출된 제안 가운데 가장 과감한 제안을 추천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위원회는 이 제안을 〈깔끔한 분할clean cut〉이라고 불렀다."(164-5)<br>"보고서가 제안한 분할 방식은 원칙적으로 유대인 소유 토지가 집중된 지역은 유대인에게, 나머지 지역은 아랍인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7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계획에 따르면 20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갈릴리의 경우 아랍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위원회는 인구 성장과 〈개척〉을 고려해 유대 국가 쪽으로 배분했다. 사페드, 티베리아스 등의 도시가 지닌 종교적·역사적 의미가 그 이유였다. 물론 인국가 혼합된 도시는 임시적으로 영국의 관리 구역으로 남기기로 했다. 관개전문가 해리스의 제안대로 가장 성스러운 두 도시, 즉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야파 북쪽 바다까지 이어지는 통로와 함께 영국 관리 지역으로 남기기로 했다. 또한 유대 국가와 영국은 아랍 국가에 정기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 경제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가게 되면서 감소할 세수를 보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렇게 분할안이 제시됐다."(179-80)<br>"벤구리온은 셰르토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필 위원회 보고서〉를 읽은 첫 소감을 이렇게 썼다. 〈저는 이 계획의 실현이 완전한 구원의 시작을 위한 결정적인 단계이자 '이스라엘 땅' 전체를 점진적으로 정복하기 위한 독보적인 지렛대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고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던 벤구리온의 눈에 처음에 놓쳤던 중요한 내용이 들어왔다. 마지막에 짧게 언급된 인구 이동에 관한 것이었다. 벤구리온은 그 가능성에 열광했다. 인구 이동이 영토 확장보다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인구 이동은 우리가 주권국이었을 때도, 제1성전 시대와 제2성전 시대에도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가능케 해줄 수 있다. 바로 유대 국가로 분류된 계곡 지역에서 아랍인을 이동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분할안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이 마지못해 수락한 것으로 보여야 했다. 그런 연유로 벤구리온은 외부적으로는 영제국에 환멸을 느낀다며 분할안이나 영국의 계속된 통치나 위태롭기는 매한가지라고 한탄했다."(181-5)<br>"벤구리온은 대부분의 아랍 인사가 탐탁지는 않을지언정 분할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수프 한나와 무사, 시리아의 주요 민족주의 단체인 민족진영 등 일부는 벤구리온의 예상대로 분할안을 수용했다. 분할이 진행될 시 정치적·재정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트랜스요르단의 에미르 압둘라는 영국에 지지 입장을 알렸다." "그 모든 지지자가 몇 주 만에 갑자기 돌아섰다. 에미르 압둘라는 애초에 분할을 지지한 적이 없다며 황급히 대무프티와 관계 회복을 꾀했다. 라게브는 분할안이 유대인의 극단적인 요구까지도 정당화했다고 비판하며, 작은 팔레스타인 땅을 세 개로 나누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갑작스러운 반전이었다. 압둘라도 라게브도 아랍 팔레스타인에서 대무프티가 가장 막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대무프티는 보고서가 발표되자 재빨리 분할안 거부 입장을 밝히고 분할을 지지하는 이물에게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었다."(185-6)<br>"1937년 8월 취리히에서 제20차 시온주의자총회가 개최됐다. 헤르츨이 바젤에서 제1차 총회를 개최한 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해였다. 바이츠만은 분할 원칙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후 2주 동안 50여 명의 연사가 분할안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의견을 냈다. 반대하는 연사의 비중이 절반을 조금 넘었다. 벤구리온이 이끄는 노동계 내에서도 대표단의 3분의 1이 반대했다. 보고서가 제안하는 유대 국가라는 것이 너무 급조된 데다 협상의 여지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분할안에는 예루살렘도 빠져 있었고 혼합인구 도시의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영국이 분할을 끝까지 실행에 옮길지 여부도 믿을 수 없었다." "바이츠만과 벤구리온은 타협책을 내놓았다. 총회 차원에서는 필 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말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고서가 제안한 분할선은 거부하되 가장 큰 대가인 유대 국가는 챙기기로 하고, 시온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국과 협상을 계속할 권한을 주기로 했다."(188-90)<br>4장 검은 일요일 193<br>"1936년 8월 28일, 유대민족기금의 토지 구매 담당자는 최근 시장에 나온 매물에 대해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 주요 인사 세 명이 소유 중〉이라고 수첩에 기록하고는 무사와 나머지 공동소유자 두 명의 이름을 적었다. 무사는 무솔리니와 비밀 거래를 하며 온건파 아랍인으로서 지녔던 신망을 스스로 깎아먹었다. 그는 이제 영국과 유대인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온건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자 그대로 시온주의자에게 땅을 내주는 치명적이지만 너무나도 흔한 죄를 저지름으로써 아랍민족주의자로서의 진실성을 훼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사실 상류층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서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유력 가문 중에 유대인에게 땅을 팔지 않은 가문은 없었다. 아랍고등위원회의 구성원 여덟 명 가운데 적어도 절반이 토지를 직접 거래하거나 중개했다. 그 사이 시온주의자들은 이미 제즈릴 계곡과 갈릴리 지역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진행 중이었다."(197-8)<br>"1937년 여름, 루이스 옐런드 앤드루스는 갈릴리의 지구판무관으로 승진했다. 사실상의 주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런 앤드루스가 살해당한 다음 날 식민장관 고어에게서 전보가 도착했다. 영국 대표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대봉기 때 영국군과 경찰에서 20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정부 고위 관료가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랍고등위원회 구성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5개월 후 야파 항구에 도착한 하지 아민은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시리아로 향했다. 시리아의 프랑스 위임통치 당국이 레바논 해안에서 대무프티를 체포했다. 대무프티는 나름 정치적 망명자였고 다른 아랍 국가에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프랑스는 경찰의 보호를 받는다는 조건하에 대무프티의 체류를 허가하고 베이루트 북쪽 마을의 한 저택으로 그를 이동시켰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도부는 망명 상태가 되었고, 수십 년 동안 돌아가지 못했다."(205-7)<br>"사회주의자에서 수정시온주의자로 변모한 그린베르크가 1937년에 발표한 히브리어 시집 《성토聲討와 신앙의 서》는 영국과 〈아랍-아말렉 족속〉을 비판했다. 그러나 가장 강렬한 비난이 향한 곳은 하블라가, 즉 자제만을 끈질기게 고집하는 벤구리온의 좌파 시온주의 지도부였다. 그는 〈5696년(서기 1936년의 히브리력 표기)의 시신을 앞에 두고 자제만을 설교하는, 다윗의 왕좌를 위해 아라비아의 동맹을 구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그린베르크만이 아니었다. 6년 전 시온주의 지도부에 불만을 품은 하가나 단원들이 일부 수정주의 청년들과 민족군사기구, 즉 이르군 즈바이 레우미Irgun Zvai Leumi를 결성한 바 있었다. 이르군은 주로 자보틴스키에 대한 이념적 충성심으로 모인 느슨한 조직이었지만, 그 표식에는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의 지도 위로 소총을 굳게 든 팔이 그려져 있고, '락 카흐(Rak Kach, 오직 이를 통해서만)'라는 히브리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211-2)<br>"조지 렌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 속에 오스만에서 벌어진 그리스인 학살을 폭로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아나톨리아 지역 기독교인 수십만 명이 이주할 수 있게 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아나톨리아의 비극을 기억하는 렌델에게 필 위원회의 인구 이동 제안은 특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러한 대량 이주가 '깔끔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렌델의 호소는 마흔 살에 처음으로 입각한 외무장관 이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렌델의 의견서는 곧 이든 장관의 의견서가 됐다." "〈필 위원회 보고서〉는 후속 대표단 파견을 권고한 바 있었다. 그렇게 기술위원회가 임명됐다. 이든의 주장으로 영국은 이들의 임명을 알리는 성명에서 〈국왕 폐하의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도 분할안을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영국이 분할안을 폐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자 바이츠만은 1937년의 마지막 날 식민부에 서한을 보내고 분할안을 〈정중히 장사 지낼〉 준비를 시작했다."(225, 229-32)<br>5장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233<br>"1938년 첫 주, 벤구리온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토지 매입을 가속화해야 했지만, 단순히 사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땅을 한 번에 정복해야 합니다. 정복 없이는 땅을 사들여도 가치가 없습니다.〉 정복은 유대인을 보내 정착시킨다는 의미였다. 목표는 레바논 국경 근처의 바위투성이 봉우리였다. 이 지역은 농업적인 잠재력이 거의 없고 다른 유대인 정착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착촌으로 가는 도로를 닦던 인부들이 총격을 받았다. 거의 2년에 걸친 아랍 봉기로 숱한 공격을 경험한 유대인에게는 크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브레너는 그 공격 이후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어디선가 두 무리의 유대인 경찰 부대가 나타나더니 국경 도로를 건너 산비탈을 뛰어올라가 공격자들의 양쪽 측면으로 돌진한 것이다. 이 노트림들도 겉보기에는 다른 유대인 경찰들과 비슷했지만, 사실 이들은 '야전분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창설된 하가나의 불법 조직이었다."(252, 255-6)<br>"1936년 이전까지 하가나는 이슈브 공동체에서 가장 덜 발전한 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초기에는 이민, 고용, 정착, 농업 등이 중요한 이슈였고, 시온주의자의 자금과 관심도 당연히 그에 관련한 활동에 집중됐다. 게다가 위임통치령 정부는 유대인을 훈련시키거나 그들에게 총기를 주는 것을 꺼려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분쟁에서 자칫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봉기가 장기화되면서 영국이 계산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치안 유지에 실패했지만, 유럽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본국의 병력과 자금을 더 동원할 수는 없었다. 시온주의 지도부가 고수해온 하블라가(havlagah, 자제) 정책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동안의 자제 정책을 지켜본 영국 정부가 유대인 수만 명에게 합법적인 무기를 쥐여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설 초기 지역 야간 경비대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하가나는 점차 통합성과 기동성을 갖춘 전국 규모의 유대인 준군사조직으로 변모해갔다."(256-7)<br>"1938년 6월 29일, 팔레스타인 최초로 처형된 유대인 벤요세프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 유대인은 충격에 빠졌다. 다음 날 팔레스타인의 이르군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분파는 영국인에 대한 보복 작전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분파는 이번 사건으로 마침내 하블라가 정책의 무용성이 드러났다며 아랍인을 상대로 무제한 전쟁을 시작할 시간이 왔다고 주장했다. 이날 호응을 얻은 것은 두 번째 주장이었다. 자보틴스키는 새로운 국면에 대비해 작전을 준비해둔 참이었다. 벤요세프의 사형 집행 몇 시간 전, 자보틴스키는 하이파에서 이르군 단원으로 활동 중인 조카에게 전보를 보냈다. 〈최종 결정 시 대거 투입할 것.〉 전보의 서명은 〈멘델슨〉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이르군 단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보틴스키와 달리 보복에 아무런 내적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자보틴스키는 오히려 그의 갈등을 감지한 단원들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멋대로 행동할 것을 두려워했다."(270-1)<br># 수정시온주의 청년 조직 '베타르' 소속이던 벤요세프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아랍인들의 유월절 매복 공격에 대한 복수로 민간인 공격에 나섰다가 체포되었다.&nbsp;<br>"새롭게 펼쳐진 국면에 비하면 1년 전의 검은 일요일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1938년 7월 전국에서 사망한 유대인 숫자는 60명이었다. 아랍 대봉기 시작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달이었다. 그러나 이달 사망한 아랍인의 숫자는 100명이 넘었다. 봉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에게 살해된 아랍인의 수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많아진 것이다. 1936년부터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생겨난 틈은 이제 메울 수 없는 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슈브(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유대인의 소행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폭력에 반대한 벤구리온 역시 벤요세프의 사형에 반대했었다.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없었고, 벤요세프가 순교의 상징이 되면 다른 유대인 청년들이 〈광기 어린〉 행동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에 또 다른 벤요세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땅에는 지금 나치 정당이 있습니다.〉 벤구리온이 말했다."(273-6)<br>6장 유대의 로렌스 283<br>"한편 제네바 호수 인근 에비앙에서는 독일제국에서 박해받는 소수민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0여 개국 대표단이 모였다. 프랑스는 이민자 인구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라틴아메리카 4개국은 난민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하며, 특히 〈상인이나 지식인〉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영제국 또한 더 이상 수용 불가라고 말했다." "벤구리온은 다른 국가들이 유대인 대량 수용을 결정해 유대인 문제 해법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선택지가 아예 제외될 경우 시온주의 운동에 닥칠 수 있는 〈피해와 위험과 재앙〉에 대해 내부적으로 경고해온 바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불행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에비앙회의를 통해 유대인을 독일제국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히틀러는 회의의 실패를 바라보면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유대인을 수용하겠다는 국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강제 이주는 불가능했다. 이는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였다."(289-90)<br>"대무프티가 레바논의 저택에서 내린 지시는 다마스쿠스에서 망명 중인 측근과 팔레스타인 현지의 반군 지도자들에게 모두 구두로 전달됐다. 그의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낮은 수준의 폭력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약하게 끓는 냄비가 요리사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유대인과 영국인 그리고 민족에 방해가 되는 아랍인을 상대로 작전의 강도를 높일 것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는 팔레스타인에만 유대인 문제의 부담을 (전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문명 세계 전체의 의무에 대한 파렴치한 회피이며 도덕적으로도 부당한 행동〉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민족의 박해를 완화하기 위해 또 다른 민족을 박해하는 것은 그 어떤 도덕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랍의 각성》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을 쫓아내거나 멸종시키지 않는 한 제2의 민족을 위한 자리는 만들어질 수 없다.〉"(292, 297-9)<br>"오드 윈게이트는 이슈브 외부 인물로서는 그 누구보다 유대인 군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으며, 추후 나타나게 될 강경파 기독교 시온주의 현상의 독보적인 전조가 됐다. 근본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 아랍주의자이자 시온주의자였던 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알려진 T. E. 로렌스의 먼 사촌이었다. 윈게이트는 로렌스를 일종의 사기꾼으로 여겼지만, 나중에 '유대의 로렌스'라는 (본인은 혐오했던) 별명을 얻게 됐다." "윈게이트의 세상을 형성한 기반은 전적으로 《성경》이었다. 윈게이트는 《성경》 속 인물 가운데 기드온을 이상으로 삼았다. 《구약성경》의 〈사사기〉에는 전사이자 선지자인 기드온이 이스르엘 계곡(제즈릴 계곡)의 하롯샘(에인 하로드)에서 용사들을 모아 〈미디안〉 군대, 즉 〈동방〉의 압제적인 〈이스마엘 족속〉에 맞서는 내용이 등장한다. 기드온은 용사들을 세 무리로 나눠 밤에 적진으로 쳐들어갔고, 용사들이 부는 뿔나팔 소리에 놀란 적들은 혼비백산해 흩어졌다."(299, 303, 307)<br>"필 위원회가 처음 분할을 권고하고 벌써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후임인 우드헤드 위원회를 '리필(Re-Peel, 다시, 필)'이라 부르며 비꼬았다." "〈우드헤드 위원회 보고서〉는 1938년 11월 9일에 공개됐다. 리필Re-Peel은 말 그대로 리필(Repeal, 폐지)을 권고했고, 아랍인들은 안도했다. 팔레스타인 땅이 온전히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과 어느 부분도 유대인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보고서 발표일에 나치 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이 독일제국 전역의 유대인 재산을 때려 부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 나치는 이 포그롬을 대중의 우발적 폭발로 규정하고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즉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심각성을 축소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땅 밖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했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대량 이민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330, 334-7)<br>7장 불타는 땅 339<br>"1939년 2월 7일에 런던 원탁회의가 시작되고 일주일 후, 맬컴 맥도널드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준비한 폭탄을 터뜨렸다. 이민 제한을 통해 유대인 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아랍인의 두려움을 달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제안에 따르면 10년 후에는 아랍인의 동의 없이 이민은 불가능하고 토지 매매도 제한된다. 언젠가는 각자가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되겠지만, 우선은 아랍 국가도 유대 국가도 아닌 양측이 동수의 대표성을 가지는 국가를 설립하자는 제안이었다. 바이츠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안타깝게도 아랍인들 또한 맬컴 맥도널드의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자말은 영국의 침공 전까지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수 세기 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다며 아랍 독립국 하에서의 삶이 유럽에서의 삶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수의 아랍 민족이 침입자인 유대인과 같은 수준으로 강등되는 굴욕을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356)<br>"1939년 5월 17일, 체임벌린 내각은 〈팔레스타인 정책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승인했다. 이 성명서는 런던 원탁회의에서 맬컴 맥도널드가 제안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 성명서는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로 만드는 것은 영국 정부의 정책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대신 영국은 10년 이내에 영국의 전략적 이익 보호를 위한 조약 체결과 함께 명시적으로 아랍 국가도 유대 국가도 아닌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설립하기로 약속했다." "이민은 향후 5년간 총수치 7만 5000명으로 제한하고, 이후 추가는 모든 당사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이루어지게 했다. 마지막으로 맬컴 맥도널드가 런던에서 제안했던 내용에서 달라진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원래는 상호 거부권이었던 것이 아랍인의 단독 거부권으로 바뀐 것이다." "유대인 기구는 백서가 〈완전한 배신〉이며 〈아랍 테러리즘에 대한 항복〉이자 유대인이 가장 절실히 도움을 구하는 시기에 날아온 〈잔인한 타격〉이라고 평했다."(376-8)<br>"주류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백서에 완전하고 단호한 거부를 선언했다. 이르군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정책과 기존 지도자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백서가 발표되고 한 달가량은 거의 매일 민간인을 겨냥한 공격이 발생했다." "예루살렘의 렉스 극장에서 폭탄 두 개가 터져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아랍인이었고, 나머지는 이르군의 표현에 따르면 〈아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던〉 유대인이었다. 예루살렘의 러시아인 거주 지구에서 폭탄 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된 젊은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라헬이며 성은 오헤베트 아미(Ohevet-Ami, 내 민족을 사랑하는)라고 얘기했다." "이미 여러 차례 사건이 있었던 하이파의 채소 시장에서도 폭탄이 터졌다. 당나귀에 실려 있던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아크레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사망자 20여 명 가운데 절반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봉기가 이어진 3년 동안 이르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아랍인은 최소 250명이었으며, 부상자 또한 수백 명이었다."(384-5)<br>"영국 정부는 대무프티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랍 세계가 민주주의 진영과 이해를 같이한다는 선언을 발표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유수프 한나는 일부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보인 독일제국에 대한 예상 밖의 열렬한 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랍인은 자신들이 유대인 때문에 영국에 탄압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히틀러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대영제국에 저항했다. 아랍인 스스로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히틀러가 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이 대중의 심리다. (···) 아랍인은 현재 약한 자신들이 강대국 영국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기고 있다. (···) 히틀러에 대한 아랍인의 사랑은 바로 이런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벤구리온은 영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의 태양이 저물고 바다 건너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더불어 〈지금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루스벨트 대통령〉이라고 말했다."(388-9)<br>마치는 글: 끝나지 않은 봉기 392<br>"하지 아민의 제2차 세계대전 중 행보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장을 하고 레바논을 탈출한 하지 아민은 이라크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친추축親樞軸 쿠데타를 지원한 그는 다시 영국의 추적을 피해 도망쳤다(총리가 된 처칠은 하지 아민의 암살을 승인했다). 하지 아민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거쳐 마침내 제3제국 나치 독일로 향했다. 하지 아민은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하지 아민은 유대인 난민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다. 1943년 여름에는 헝가리에 〈유대인의 위협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폴란드 같은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치가 이미 유대인 3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회고록에는 이 사실을 힘러가 이야기 해주었다고 무심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무엇보다 아랍 세계와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선전가이자 모집책으로 나치에게 유용했다."(396-7)<br>"제2차 세계대전 후 지쳐버린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갔다. 휴전 이전부터 우려했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봉기가 유대인 봉기로 대체된 것이다. 봉기 초기에는 주로 이르군과 그 분파인 이스라엘 자유전사[Freedom Fighters of Isreal, 레히(Lehi)라는 히브리어 약자로 더 잘 알려짐]가 공격을 이끌었으나, 평화 이후에는 하가나도 합류했다." "1947년 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팔레스타인은 이번에도 대무프티의 주장으로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9월, 조사를 마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는 10년 전 필 위원회의 핵심적인 권고와 정신은 그대로 반영하되 영토나 다른 세부적인 부분은 수정해 새로운 분할안을 내놓았다. 11월 29일, 국제연합총회에서 분할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다음 날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했다. 위임통치 종료를 몇 시간 앞둔 5월 14일 오후,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401-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80/48/cover150/k8129307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8804888</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점심</category><title>달러 이후의 질서 / 케네스 로고프 - [달러 이후의 질서 - 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61037</link><pubDate>Thu, 20 Aug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610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82636052&TPaperId=174610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42/21/coveroff/e5826360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82636052&TPaperId=174610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달러 이후의 질서 - 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a><br/>케네스 로고프 지음, 노승영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br/></td></tr></table><br/>들어가는 글<br>1장. 지배적 통화의 탄생<br>세계통화를 발행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반면에 세계통화 지위를 잃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터져나오는 사회적 요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공장과 기반시설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 식민 지배 권력을 계속 휘두르려는 욕망 등으로 인해(GDP의 240퍼센트를 넘어선 전후戰後 채무는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이 잇따라 재정 문제를 겪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은 1956년, 1967년, 1976년 세 차례나 구제금융을 받으려고 국제통화기금IMF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으며 이것 말고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여러 구제책에 기대야 했다. 파운드가 세계통화로 군림하던 영광의 시절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달러가 이런 운명을 맞으려면 여러 번의 불운을 겪어야 할 것이다. 지배적 달러는 이제 중장년에 접어들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건강하다. 그럼에도 앞에 놓인 도전(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다)을 마주하려면 우선 세계에서 어떻게 달러가 패권을 쥐게 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21)<br>1부. 달러 패권에 맞선 과거의 도전자들<br>오늘날 유로는 국제 교역과 금융에서 확실히 달러의 가장 중요한 대안이다. 하지만 비EU 나라들 사이의 교역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로는 세계통화가 아니다. 유로존 정부 부채 시장은 발칸화되어 있다. 투자자들은 독일의 부채와 이탈리아의 부채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며 이는 당연하다. 강력한 재정 당국이 없다는 것은 유로화가 가진 또 다른 주요 한계의 뿌리다. 이를테면 범유로화 예금 보험 제도는 아직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은행 연합이 온전히 발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이다. 자본시장 연합이나 더 온전하게 통합된 은행 시스템이 없고 유럽 정부 부채가 파편화된 상황은 달러와의 경쟁에서 유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주요 걸림돌이다. 이런 탓에 최근 수십 년간 유럽의 성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유럽이 역동성을 잃은 요인은 높은 세율과 방만한 복지 등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격차 중에서 70퍼센트 이상은 낮은 생산성 때문이므로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50-3)<br>유로화는 부정할 수 없는 강점을 보유했으며 이 강점은 향후 수십 년 안에 전면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독립은 유럽연합의 기초가 되는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반해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13년 의회 입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렇기에 만일 의회가 원한다면 연방준비제도는 폐쇄되어 몇 주 안에 미국 재무부에 재흡수될 수 있다. ECB는 헌법적 지위를 누리며 주요 임무는 유로존 전역에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방법이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점이 좁아서 창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지 않다. 반면에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을 유지한다는 연준의 이중 의무는 해석의 여지가 크며 관례적으로 연준은 이를 낮은 인플레이션과 완전고용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둘지와 관련하여 정치적 압력을 훨씬 많이 받는다. ECB가 공동 책임으로 운영되는 것도 안정성의 한 요인이다. 53)<br>2부. 중국: 현재의 도전자<br>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마는 근거는 여럿 있다. 아마도 가장 주된 근거는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가 부유해짐에 따라 (정부 형태와 무관하게) 포퓰리즘적 재분배 압박이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탈선시킨다는 것이다. 전형적 사례를 보자면 성장이 느려지고 정부가 성장을 지탱할 방법을 찾을 때는 대외 차입을 비롯한 금융 탈규제가 강력한 단기적 해결책일 수 있다. 신생 정부의 제도가 허약하면 급증한 차입은 생산성이 낮은 투자로 흘러들기 쉬운데, 결국에 가서는 투자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차입이 단기적 해결책으로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만, 성장이 불가피하게 다시 느려져 누적된 부채를 지탱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금융 압박과 자금 부족은 여러 해 동안 쌓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폭발하기도 한다. 대외 차입이 많았다면 외국 채권자들이 도피하고 그와 더불어 환율이 폭락하고 달러 부채를 자국 화폐 소득으로 상환하는 금융 부담이 치솟는다. 그 결과는 지독한 금융위기다. 87-8)<br>3부. 나머지 모두의 문제: 달러와 함께 살아가기<br>고정환율제는 퇴출되었다. 1997~1998년 부채 위기 이후 아시아 각국은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IMF에 보고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달러 환율을 흘끗 보기만 해도 대부분의 경우 변동폭이 크지 않거나 변동 속도가 빠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대부분의 아시아 경제국은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폭넓게 개입하면서도 자신들이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했다고 IMF에 보고했으며, 이에 따라 IMF는 공식 환율 분류 문서에서 이 환율제들이 유연하다고 기록했다. 요약하자면 많은 신흥시장, 특히 아시아 신흥시장들은 워싱턴 합의를 거부했다기보다는 핵심 요건을 채택하되 나름의 개선점을 첨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아시아의 정책 입안자들은 자본 통제와 금융시장 규제가 나름대로 유용하기는 하지만 거시경제 정책의 심각한 비일관성을 만회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금을 비축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일부 통제를(특히 자본 유입과 관련하여) 도입했다. 131, 135-6)<br>2000년대 초 나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는 아시아가 달러 보유고를 꾸준히 늘리는 바람에 세계경제의 골치 아픈 불균형이 악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이체 방크의 세 이코노미스트(마이클 둘리, 데이비드 폴커츠-랜도, 피터 가버는 셋 다 학자 출신이다)는 아시아가 전후戰後 유럽과 같은 발전 전략을 따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성장을 북돋우려면 저평가된 환율을 유지해야 하므로 개입과 자본 통제를 혼합하여 구사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국제 통화 체제가 (미국, 유럽, 일본을 주로 아우른)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와 비슷한 브레턴우즈 II 체제로 진화했다고 묘사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은 위기로 비화할 위험하고 불공정한 체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시아 경제(와 이를 모방한 몇몇 나라)가 매우 합리적인 발전 전략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의 공공·민간 채무자들은 불평할 게 아니라 이 체제 덕분에 미국인들이 막대한 해외 자금을 유난히 낮은 금리로 빌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136)<br>환율 저평가 이야기에는 중국 당국이 자국 경제의 초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빠졌다. 그것은 중국 농촌에서 도시와 제조업 중심부로 해마다 꾸준히 이주하는 수백만 명의 인구다. 서구 경제가 맞닥뜨린 진짜 문제는 도시의 생산 중심지에서 일할 기회를 찾아 해마다 밀려드는 중국 빈농의 물결이었다. 외환시장 개입은 중국 통화의 이른바 저평가에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그 영향은 부차적이었을 것이다. 삼인조 논문의 두 번째 주장은 아시아에서 흘러드는 값싼 자금이 미국에 순수하게 이로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 은행 규제 담당자들이 금융위기가 신흥시장에만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이른바 자본 유입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금융 규제에 허점이 있는 나라에 외국 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 빈틈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의 명목상 대외 차입이 그 자체로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분명하다. 137)<br>4부. 대안 통화<br>유발 노아 하라리는 화폐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무언가를 화폐로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이 미크로네시아 얍 섬의 거석이든 중세 일본의 쌀이든 실제로 화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정부가 발행하는 국가 통화는 어떤 대체물이나 사적 통화도 넘볼 수 없는 근본적 이점이 있다. 정부는 모든 피고용인과 공급업자들에게 자신의 통화로 급여를 지불할 수 있으며 정부 통화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정부는 자신의 통화로 표시된 부채를 발행할 수 있다. 미국 달러가 ‘법정통화’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부채가 미국 달러로 상환될 경우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다양한 활동에서 자신의 통화가 법적 회계 단위로 쓰이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점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정부 통화는 넘볼 수 없는 우위를 누린다. 이걸로 모자란다면 은행 예금의 정부 통화 표시를 의무화하는 등의 제약을 추가할 수도 있다. 151)<br>규제에 반대하는 격렬한 로비 시도를 제외하면 적어도 울타리를 둘러쳐 암호화폐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암호화폐를 운용할 때 ‘거래소’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래소를 규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온 체인’(블록체인 위에서) 암호화폐 거래가 너무 어렵고 너무 많은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소를 잘못 입력했다가 전 재산을 영영 잃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거래소는 블록체인 용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실은 은행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블록체인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100달러 지폐와 비슷하고, 거래소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은행에 넣어둔 돈과 비슷하다. 거래소는 은행과 꽤 비슷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거래소는 정부가 최종 대부자로서 뒤를 받쳐주지 않으며 암호화폐 업계가 기존 은행 수준으로 규제받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가망은 없다. 다시 말해 정부는 최종 레버를 쥐었다. 152-3)<br>골수 암호화폐 신봉자들은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코드가 법이다”라거나 “암호화폐는 검열에 저항력이 있다”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이 논리의 문제는 설령 정부가 암호화폐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암호화폐의 이용을 번거롭고 값비싸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암호화폐가 정부 통화에 맞서 경쟁력을 가지는 데 필요한 네트워크 효과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블록체인 기술이 다른 측면에서 금융에 혁명적 영향을 미칠 뚜렷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통화 독점은 금융위기에 대처하고 공공부채 위기를 피하는 데 필수적이다. 비트코인 본위제의 문제들 중 상당수는 금 본위제와 동일할 것이다. 간헐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위기가 일어나면 그 규모가 훨씬 커질 우려가 있다. 게다가 경기 역행적 케인스 통화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으면 경기 순환이 훨씬 극심해질 수 있다. 153-5)<br>화폐에 대한 유발 노아 하라리의 설명이 비트코인 전도사들에게 더없는 희망을 선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암호화폐가 투기를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은 암호화폐의 킬러 앱(시장에 등장하자마자 다른 경쟁 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장악하는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옮긴이)을 무시하는 처사다. 점점 커져가는 지하경제 말이다. 역사적으로 현금은 은밀한 거래에서 선호되는 수단이었다. 비트코인이 합법적 과세 거래에서는 정당한 쓰임새가 거의 없을지 몰라도 지하경제에서 거래를 촉진하는 데 널리 쓰인다면, 이것을 순전히 투기적인 자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규제 당국이 서투르고 법 집행이 무르다고 항의할 수는 있지만 비트코인의 본원적 가치가 0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를 기준틀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폭넓은 불법 활동에 쓰이며 랜섬웨어 공격과 다크웹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통화다. 157-9)<br>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과 같은 매력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부류다.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널리 쓰이는 두 가지 코인인 테더와 USD 코인USDC이 단연 가장 중요하다. 둘 다 가치가 1달러에 고정되어 있다. 세 가지 핵심 문제가 있다. 첫째, 스테이블코인 공급자의 뒤에 최종 대부자가 없을 경우 스테이블코인이 재무부 채권 같은 안전한 달러 표시 증권으로 충분히 보증되지 않으면 인출 사태를 겪을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고정환율제에서 일어나는 인출 사태와 매우 비슷하다. 둘째, 보유 증권에 대한 이자를 정부 소유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공급자가 수취한다. 셋째,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히 보급되고 편리해지면 은행의 중개자 역할을 박탈할 우려가 있다. 은행이 대부하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필수 요소를 공급하던 통상적 예금자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갈아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걸림돌과 부작용도 많다. 물론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정부만이 가능하다. 162-3)<br>유럽중앙은행, 영국은행, 캐나다은행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 중 상당수는 독자적인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즉 ‘CBDC’의 개발을 꽤 많이 진척시켰다. 주도적 CBDC를 내놓으려는 경주에서 달러의 유리한 출발선과 미국의 전반적 기술 우위를 감안컨대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연방준비제도가 (소매) CBDC의 잠재적 ‘이익과 위험’을 공식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때는 2022년 초다. 미국의 굼뜬 행동은 납득할 만하다. 현재의 통화 체제에서 달러가 왕좌에 있는데 뭐하러 평지풍파를 일으키겠는가? 디지털 통화의 발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달러의 위상을 깎아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를테면 디지털 통화는 다른 통화에 대해 고도로 유동적인 시장을 창출하여 달러의 네트워크 우위를 감소시킬 수도 있고, 미국 규제 당국의 권한 밖에 있는 국제 지불의 대안적 ‘레일rail’(거래가 처리되는 매체인 디지털 전송·처리 시스템―옮긴이)을 도입할 수도 있다. 164-5)<br>모든 우려(사이버 위험, 시스템 장애, 중개자 역할 박탈, 과도한 정부 권력)는 왜 새로운 금융 기술을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하는지, 왜 미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에서 먼저 실험하는 것이 이상적인지 잘 보여준다. 연준은 문제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생기길 바랄 것이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사실상 모든 거래 신기술에서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늑장을 부렸다. 신용카드에 칩을 넣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외국 중앙은행의 CBDC(세계 수준의 금융 시스템을 갖춘 영국을 포함)와 경쟁해야 한다는 우려가 커지자 백악관과 연방준비제도는 자신들이 이 문제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언젠가 디지털 달러를 도입할지도 모른다는 위협만으로도 외국 중앙은행들은 자체 CBDC 도입 계획을 포기할 것이다. 체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위협이 실행보다 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외국 중앙은행들이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거나 (중국처럼) 자국 통화를 달러와 맞먹게 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67-8)<br>5부. 지배적 통화에 따르는 혜택과 부담<br>권력의 순수한 희열을 제외하면 달러 패권은 미국에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매우 구체적인 유익 한 가지는 외국인들이 놀랍도록 다량의 미국 부채를 기꺼이 보유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국 정부는 지불해야 하는 금리를 낮출 수 있다. 달러 부채가 웃돈이 붙어 팔리는(더 낮은 금리를 지불한다는 뜻) 이유 중 하나는 단연코 미국의 금융시장이 가장 깊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미국 재무부 부채를 별도의 거래 비용 없이 빠르게 팔기는 식은 죽 먹기다. 즉 미국 부채는 유동성이 매우 크다. 또한 적어도 약속된 만큼의 달러를 상환받는다는(즉 깜짝 인플레이션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미국 부채는 매우 안전하다. 미국 정부 부채, 특히 재무부 단기 부채의 수요를 떠받치는 요인 중에서 덜 분명하지만 극도로 중요한 것은 전 세계 금융거래에서 담보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다. 재무부 채권은 담보물로 쓰여 화폐와 거의 비슷하기에 (경제학 용어로) ‘보유편익’을 누린다. 172)<br>수년간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차입하는 엄청난 속도로 보건대 어떻게 미국이 공식 통계에서 보는 것보다 더 깊이 부채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는가다. 특히 흥미로운 시기는 1998~2010년이다. 이때 미국 순 대외 채무의 증가 속도는 미국의 차입 규모에 비하면 달팽이걸음이었다. 이를테면 2010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는 수입의 45퍼센트에 육박했지만 대외 채무는 17퍼센트밖에 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공교롭게도 대미 외국인 투자는 오랫동안 채권, 특히 단기 채권에 치우쳐 있었다(채권 대 위험자산 비율이 약 60대 40). 하지만 미국의 대외 투자는 정반대로, 주식과 대외 직접 투자가 약 60퍼센트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균적으로 미국인들이 대체로 높은 수익을 거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이 채권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니 말이다. 대외 직접 투자는 훨씬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형태의 투자다. 179-80)<br>외국 자산에 대한 투자자로서 미국인은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만한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이민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자, 특히 1, 2세대 이민자는 여전히 모국에 강한 연대감을 느끼며 모국의 제도를 잘 안다. 그 덕에 미국 투자 자금을 모국에 끌어들이는 데 커다란 비교 우위를 누린다. 최근 나머지 세계가 쌓은 부가 더욱 집중되고 외국 가정이 자녀를 미국 대학에 보내어 미국과 연결을 맺으면서 외국인 직접 투자 채널은 양방향 도로에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로 인해 많고 다양한 이민자 인구가 미국에 선사하는 투자 이점이 일부 상쇄되었다. 위험을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좋게든 나쁘게든 미국 체제의 전체 구조는 위험 감수에 보상하며(파산법이 너그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훨씬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미국인은 다른 큰 나라의 국민보다 훨씬 부유하며 부자는 더 큰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184)<br>지배적 세계통화를 발행함으로써 미국은 정보에 특권적으로 접근하고 강력한 금융 제재를 부과하는 등의 비정형적 편익에 더해 뚜렷한 양적 편익을 얻는다. 그렇다면 지배적 통화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도 따를까? 달러는 이제 금으로 태환되지 않는다. 미국 재무부 부채에는 이제 금약관(장래의 화폐 변동으로 인한 채권자의 손해를 막기 위하여, 채무자가 빚을 금이나 금화로 갚거나 금화 가치로 환산하여 갚도록 규정한 금전 채권의 약정―옮긴이)이 없다. 달러를 금으로 보증한다는 약속이 사라진 지금 지배적 통화 지위에 따르는 심각한 단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단점 중 하나는 매우 명확하고 순전히 경제적인 단점으로, 미국이 침체기에 글로벌 포트폴리오에 일으키는 막대한 손실과 관계있다. 미국이 막대한 손실을 일으키는 한 가지 이유는 세계의 은행가이자 비교적 위험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이유는 달러가 글로벌 침체기에 절상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92)<br>군사력이 통화 패권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논란의 여지는 크지 않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은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을 때 자국 통화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누렸다. 군사력과 통화 패권은 아무리 못해도 상보적이다. 달러 패권은 군비 조달을 용이하게 하며 특히 갑작스러운 군비 증강에 요긴하다.2 더 미묘한 논점은 미국의 군사력이 국제 금융시장과 국제 금융 기구의 규칙을 확립하고 정책을 설정하는 데에 추가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지정학적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는 지배적 통화의 역할을 지속하기 힘들다. 유럽은 미국의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지만 여러 중대 사안에 대해 영향력과 능력이 미비하다. 세계 금융 시스템은 규칙에 좌우되는데, 이 장 앞부분에서 설명했듯 경제·군사 강국인 나라는 규칙을 제정할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위험할 정도로 어수룩하다. 193, 196)<br>이 장 첫머리에서 언급했듯 경제학자들은 달러 지배의 또 다른, 전혀 별개의 비용에도 주목했다. 그것은 전 세계가 심각한 침체와 (정도는 덜하더라도) 불황에 빠졌을 때 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소가 있다. 하나는 위기가 터졌을 때 달러가 절상되곤 한다는 사실과 관계있다. 그럴 땐 자금이 대부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것은 미국이 저위험 채무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 시장이 유난히 깊기에 동결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러가 등귀하면 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미국 자산의 외국환 시장 가치가 증가하고 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외국 자산의 달러 시장 가치가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을 ‘보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덕분에 달러 표시 채권에 대한 투자는 위기에 대비한 더 나은 헤지가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것은 미국 재무부 채권의 금리가 유난히 낮은 이자를 지급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196)<br>6부. 달러 패권의 정점<br>달러의 패권과 안정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은 내부에 있다. 통화를 보증하는 귀금속이 없는 순수한 법정통화의 세상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합리적 수준으로) 안정시키겠다는 연방준비제도의 약속에 대한 신뢰야말로 세계경제가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 거시경제 석기시대(말하자면 1970년대)로 돌아갈 것인가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가장 중요한 보루다.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이 금과옥조라는 생각은 어수룩하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라는 정치적 압력이 너무 거세면, 특히 재정 정책이 명백히 지속 불가능하면 연준이 끝끝내 저항할 수는 없다. 대통령은 연준 이사진의 임명을 좌우하며 의회는 연준의 예산을 좌우하고 이론상 연준을 눈 깜박할 사이에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복귀시킬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 그랬듯 이따금 연준이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굴복하면 기대 인플레이션이 점차 상승하고 불안정이 뒤따를 것이다. 200)<br>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실물경제가 여러모로 왜곡되며 금융 시스템에 혼란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높고 안정된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 30년 가까이 득세한 초저인플레이션 시기는 달러가 꽤 안정된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인플레이션 시대는 더 많은 사람, 기업, 국가가 달러를 신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달러 이용자와 쓰임새의 저변을 구축했으며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를 보강하고 강화했다. 연준이 다시 한번 인플레이션 앞에서 갈팡질팡하면 네트워크 효과가 (하룻밤 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점차 깎여나갈 것이다. 달러는 다른 통화(이를테면 유로화, 스위스 프랑, 어쩌면 일본 엔화)로 대체될 것이다. 위안화를 국제화하려는 중국의 시도에도 틀림없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안정된 달러 본위제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미국의 금융 부문은 쪼그라들 것이다. 설령 미국 달러가 선두를 유지하더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경쟁자들이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203-4)<br>그렇다면 중앙은행 독립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매우 뚜렷해진 지금 왜 걱정거리가 남았을까? 한 가지 문제는 저인플레이션 시대에 너무 많은 사람이 안정된 인플레이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앙은행이 목적을 바꿔 다른 문제(이를테면 지구온난화)를 다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오랜 제로 금리 시대(중앙은행들은 단기 금리를 0이나 심지어 그보다 약간 아래로 끌어내렸다)에 통상적 금리 정책이 마비되면서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다시는 중대한 우려 사항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중앙은행이 독립성과 발권력을 가지고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진보 진영에서는 연준이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물론!) 환경을 치유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대견한 목표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이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주도적 역할을 할 전문성, 정책 수단, 민주적 책임성을 갖췄는가다. 204-5)<br>현재 미국이 노골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더 쉬운 길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미국 시장성 부채의 양은 나머지 모든 선진국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미국 부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데도 총 연간 이자 지불금으로 따진 부채 상환 비용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때로는 부채 규모가 증가하는데도 이자 지불금이 감소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주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질금리가 급전직하한 덕분이었다. 물가조정 10년물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익률은 2012년부터 2021년 말까지 평균 0에 가까웠다. 단기 부채에 대한 실질금리는 뚜렷한 마이너스였다. 재무부 채권에 대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채권 보유자들이 ‘안전한’ 부채를 보유하는 특권의 대가를 미국 정부에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이자를 받더라도 해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남은 원금과 이자의 구매력이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채권 보유자들은 순손실을 입는다. 212-4)<br>어떤 사람들은 2024년 부채가 GDP의 250퍼센트를 넘어선 일본을 예로 들어 부채가 높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 미국 정부는 쓸 수 있는 패가 많으며 지배적 통화 발행국으로서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차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채무불이행(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인플레이션(미국 부채의 대부분이 단기 부채이고 10퍼센트만이 물가에 연동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고서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금융억압(기본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직간접 부채 보유를 강제하는 것) 등 기본적 수단은 동일하다. 이 중에서 훈훈하거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더 까다로운 환경을 맞닥뜨린 탓에 앞으로 10년 안에 또 다른 인플레이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매우 높은 부채는 설령 인플레이션 압박에 일조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223)<br>미국 부채의 상당 부분을 외국이 보유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달러에 매우 유리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부채를 국내에 보유하는 경우보다 훨씬 취약해진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 부채를 보유한 외국인들이 느닷없이 확신을 잃었을 때 발생할 위험 때문에 현대판 ‘트리핀 딜레마’(기축통화 발행국이 기축통화의 국제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하면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는 상충 관계―옮긴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트리핀 딜레마와의 유사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미국 정부가 외국인을 붙잡아둘 능력이 자국민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국민을 상대로 미국은 금융억압을 실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규제를 확대하여 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로 부채를 떠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금융억압은 자국민에게만 부과할 수 있는 일종의 세금이다. 금융억압은 외국인 보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돈을 빼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226-7)<br>행운과 실력은 미국 달러의 전후戰後 궤적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등식의 ‘행운’ 부분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러시아가 1960년대 중반 경제를 자유화했다면, 일본이 1980년대 중반 우격다짐에 밀려 통화 절하로 불안정을 자초하지 않았다면, 프랑스가 2001년 그리스를 유로화에 포함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2010년대 온전한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면 달러는 여전히 꼭대기에 있었겠지만 오늘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안적 현실들 중 어느 것에서든 미국 금리는 더 높았을 것이고 달러의 과도한 특권은 더 적었을 것이다. 달러 패권이 맞닥뜨린 최대 위험은 내부에 있다. 어느 당이 집권하든 마찬가지다. 집권당이 너무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게 문제다. 지난 수십 년간 달러 패권이 승승장구하면서 미국 정치인(과 많은 경제학자)들은 초저금리가 미래에도 거의 틀림없이 정상적 규범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의 위안거리는 고전적인 ‘이번엔 다르다’ 사고방식이다. 231)<br>역사에서 보듯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시기를 풍미한 초저금리는 훨씬 오랜 추세로부터의 일시적 일탈로 보아야 한다. 빠르게 증가하는 부채가 방치되고 대규모 적자를 해소할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면 미국과 전 세계는 평균 실질금리와 인플레이션이 더 높아지고 부채 위기와 금융위기가 더 자주 발생하는 세계 금융 변동성의 시대를 오랫동안 겪을 것이다. 딕 체니 전前 미국 부통령의 ‘적자는 문제가 아니다’ 가설은 금리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던 시기에는 좋은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리가 (불황을 제외하고) 정상화되는 지금은 글러먹은 생각이다. 지난 70년에 걸친 세계 통화 체제의 발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단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고삐 풀린 미국 부채 정책이 높은 실질금리와 지정학적 불안정을 계속 맞닥뜨린다면, 정치적 압력 때문에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을 일관성 있게 길들이지 못한다면 달러는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23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42/21/cover150/e5826360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42218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점심</category><title>갈릴레오의 딸 / 데이바 소벨 - [갈릴레오의 딸 - 위대한 과학자를 완성시킨 비밀의 기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57061</link><pubDate>Tue, 18 Aug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570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5238X&TPaperId=174570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170/73/coveroff/890115238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5238X&TPaperId=174570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갈릴레오의 딸 - 위대한 과학자를 완성시킨 비밀의 기록</a><br/>데이바 소벨 지음, 홍현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br/></td></tr></table><br/>제1부 피렌체로<br>"1610년 1월 초에 갈릴레오는 그 무엇보다 대단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이른바 궤도를 그리며 목성 주위를 도는, '창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네 개의 행성'이었다. 코시모 1세는 1569년 대공의 직위에 오르기 전인 1537년 공작이 되었을 때, 메디치 가를 위한 고전적인 신화를 창출해냈다. 코시모cosimo는 그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자신을 지구에 사는 우주cosmos의 화신으로 형상화시켰다. 이 같은 고등 전술로 그는 오랫동안 불편한 연합 관계를 맺어온 다른 유력한 지배층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이 메디치 가의 숙명임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설파할 수 있었다. 왕가의 사실상 우두머리인 코시모 1세는 자신을 로마 주신主神의 이름을 딴 주피터 행성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하고 다스리는 시뇨리아 궁을 이 올림피아의 주제를 강조한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 채웠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베네치아에 바쳤고, 이제 피렌체에는 목성의 위성들을 헌정할 작정이었다."(60)<br>"갈릴레오의 이전 동료였던 피사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유명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부동의 우주'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의 근거인 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갈릴레오는 이 같은 주장의 우수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 자신의 발견을 알리기로 했다." "로마로 건너간 갈릴레오는 교부 클라비우스가 주임 수학자로 재직 중이던 예수회의 중앙 교육 기관인 콜레조 로마노의 인정을 받았고 그로 인해 큰 힘을 얻었다. 교회 측이 천문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는 클라비우스와 그의 훌륭한 동료들은 그 망원경을 독자적으로 입수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이제 갈릴레오가 관찰한 내용 모두를 인증해주는 단체 역할을 했다. 이 예수회 소속 학자들은 우주는 불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을 고수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증거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방문해달라는 흔치 않은 초대로 갈릴레오의 영광을 높여주기까지 했다."(70-2)<br>"『물에 뜨는 물체 혹은 물속에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논쟁』은 물에 뜨거나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태양의 완전함을 손상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물에 뜨는 물체』를 유럽의 학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일종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해 학문적인 전통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갈릴레오의 이 같은 행동은 동료 철학자들의 분노를 사고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그와 토론을 벌여 패한 피렌체 아카데미의 루도비코 델레 콜롬베 같은 이들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콜롬베는 갈릴레오의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응해 '반갈릴레오'를 선언했다. 반대로 갈릴레오의 지지자들은 '갈릴레오주의자'를 표방했으며 콜롬베의 이름을 조롱하며 그의 얄팍한 철학을 더욱 신랄하게 공격했다. 콜롬베가 이탈리아어로 '비둘기'를 뜻하므로 이들 갈릴레오를 비판하는 무리를 '비둘기 연맹'이라고 불렀다."(80-1)<br>"1613년 봄 로마에서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은 당시 진행 중인 연속물의 일환으로, 벨저가 쓴 상대적으로 짧은 네 통의 편지와 갈릴레오가 쓴 매우 긴 세 통의 답장을 『태양의 흑점과 그 현상에 관한 역사와 증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벨저는 한 달도 더 걸린, 태양을 뒤쫓으며 만든 뛰어난 조판으로 책을 아름답게 장식해주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갈릴레오와 그의 공공연한 적들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책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새로운 적이 생겨났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가 몇 해 전 다른 나라에서 조용히 사망함에 따라 갈릴레오가 태양중심설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비난받기 시작했다. 『물에 뜨는 물체』를 공격한 '비둘기 연맹'은 갈릴레오에 반대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지지했지만 『태양의 흑점에 관한 편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제 성경이라는 한층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하고 나섰다."(95-6)<br>"교황은 신학 분야의 고문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을 불러들였다.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재판 때 종교재판관을 지낸, 뛰어난 지성을 지닌 예수회 수사였다. '이단자의 심판관'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에게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생각하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벨라르미노는 약 15년에 걸쳐 여러 사교 모임에서 갈릴레오와 만나 아는 사이였다. 1611년에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피렌체에서 직접 천문학을 공부한 인물로서 갈릴레오의 업적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치하한 바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설이 아닌 현실로 대하는 고집이었다. 어쨌든 증거가 없었다. 나아가 추기경은 갈릴레오가 사람들에게 천문학을 가르치는 데 그쳐야지,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19-20)<br>"1616년 3월 5일, 금서위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공표했다. 즉 그의 주장이 '성서에 위배되는 거짓'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교령에는 관계자들의 이름과 이들에게 가하는 조치가 명시되었다. 문제 되는 내용이 수정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일시적으로 금하며 '이러한 주장이 가톨릭교의 진리에 대해 편견을 유포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성경에 부합시키려는 시도를 한 책만이 이 혹독한 처분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교령에도 언급되지 않고 어떤 개인적인 견책도 받지 않은 갈릴레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그가 지지한 학설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것을 가설로 다루는 것과 언젠가는 그 교령이 효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은 자유였다. 그는 변함없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이탈리아 과학의 거장이었다. 그는 3월 11일에는 파울루스 교황과 한 시간 가까이 개인적인 면담을 하기도 했다."(125-6)<br>제2부 벨로스구아르도에서<br>"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갈릴레오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때는 1611년이다. 이때 그는 갈릴레오에 대해 말하길 장수하여 남들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할 위대한 능력을 지닌 고귀하고도 독실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후 몇 년간 이 추기경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라, 1620년에 「위험한 추종」이라는 시를 보내 갈릴레오를 새롭고도 경이로운 천체 현상의 발견자로 칭했을 뿐 아니라 그가 발견한 태양의 흑점에 대해 '강한 자의 마음속에 깃든 두려움'이라는 은유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찬사 가득한 시상이 담긴 편지를 맺으며 추기경 자신을 '당신의 형제'라고 칭함으로써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그런 그가 162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학문을 사랑했던 우르바누스는 교황청에 지식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비르지니오 체사리니 몬시뇨르를 교황의 의전관으로 임명했는데, 체사리니는 새 교황을 환호로 맞이하는 시를 썼으며 갈릴레오의 강의를 들은 후 수학 연구에 헌신해온 인물이었다."(154, 162)<br>"갈릴레오가 유럽 전역의 서신 왕래자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듯이,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과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1620년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수정해야 한다는 명령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 교령은 이탈리아의 체면을 구겨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르바누스를 위축시킨 소문도 나돌았는데 내용인즉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독일인들이 이 교령 때문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교령이 발령되고 8년이 지났지만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천문학적인 계산과 예측의 도구로 활용되는 데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태양중심설은 입증되지 않은 단순한 견해로 남아 있었고, 우르바누스는 차후에도 이것이 입증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는 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참작하고자 한다면, 이 학설이 가설이라고 전제하는 데 변함없이 교황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202-3)<br>"갈릴레오는 1629년 가을 내내 『린체이 회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의 완성을 위해 매달렸고, 마침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책을 끝마쳤다. 그는 『대화』의 끝에서 『시금관』에서의 매미 철학 즉, 신과 자연은 인간이 관찰하는 자연 현상을 창출한 무한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교황 우르바누스를 만족시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 심오함을 간단히 표현함으로써 충실한 아리스토텔레스파의 학자들을 좌절시켰다." "갈릴레오는 『대화』의 최종 원고를 검열관에게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발간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물은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친 것들로, 그것은 이탈리아의 출판업자들이 이 규범에 가장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종교재판소의 검사성성이 있는 로마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금관』도 공식적인 절차를 무난히 통과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대화』의 실질적인 내용이 검열관들의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250-5)<br>제3부 로마에서<br>"『대화』는 이내 우르바누스 교황의 분노를 샀다. 그는 전쟁을 벌이느라 돈을 너무 많이 쏟아 부어 빚이 두 배로 불어나고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스페인의 음모가 두려워 편집증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최악의 시기에 갈릴레오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1632년 3월 8일 스페인 주재 바티칸 대사인 가스파레 보르자 추기경은 30년 전쟁에서 독일의 신교도에 대항해 필립 4세 왕을 지켜내지 못한 교황의 실책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1632년 여름 갈릴레오의 책이 로마로 들어왔지만 우르바누스는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익명의 고문관들이 교황 대신 이 책에 대한 판단을 내렸는데, 그것은 지독한 모함이었다. 로마에 있는 갈릴레오의 수많은 적들은 『대화』를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찬양으로 보았다. 게다가 이미 유럽이라는 가톨릭교의 제일선에서 가톨릭의 열기가 쇠약해져가는 것을 소리 높여 추궁한 교황은 새로 발간된 이 무례한 내용의 책을 벌하지 않고 넘어갈 도리가 없었다."(314-6)<br>제4부 로마의 메디치 빌라, 토스카나 대사관<br>"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백과사전에조차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이 두 차례 열렸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재판은 단 한 차례뿐이었다. 이는 1616년 갈릴레오와 벨라르미노 추기경과의 만남을 첫 번째 재판으로, 갈릴레오가 종교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은, 다소 오래 지속되었던 1633년의 심문을 두 번째 재판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단 한 번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천 번은 열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종교의 억압이자, 권위에 대한 개인주의의 수호, 혁신 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충돌, 오래된 신념에 대한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견의 도전, 그리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 대한 투쟁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교회법이나 관습법의 전 시대를 통틀어 그 의미와 파급 효과가 더 큰 재판, 억측과 유감을 더 많이 남긴 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1633년 봄에 단 한 번 열렸으나, 적어도 증거의 절반과 대부분의 증언은 1616년의 논쟁과 관련된 것이다."(323-4)<br>"갈릴레오가 토스카나 대사관에서 두 달을 기다린 후인 1633년 4월 12일 화요일, 종교재판소 검사성성의 수석대표가 마침내 심문을 받으러 오라고 그를 소환했다." "〈저는 그 책에서 지구가 돌며 태양은 고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펴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취약하고 설득력 없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갈릴레오의 마지막 증언은 그의 곤란한 상황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이처럼 말을 얼버무린 데 대해 그를 비난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날의 심문이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으며 자신을 방어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을 수도 있다. 니콜리니 대사가 그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종교재판관들이 바라는 태도를 꾸며 보이라고 경고한 터였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자신이 무고하며 진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재판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쓴 편지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338, 351-2)<br>"한편 로마로 돌아온 우르바누스 교황은 갈릴레오의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검사성성의 종교재판관들이 친갈릴레오파와 반갈릴레오파로 분열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그 책으로 인해 무지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갈릴레오의 감상적인 변명에서 부정직함을 감지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레오가 직접적인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6월 16일, 추기경인 종교재판관들과의 회의를 주재했다. 교황은 1615년 이 철학자에 대한 최초의 비난에서부터 이 책의 출간, 그리고 최근의 변명과 선처를 호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의 사건을 요약한 정식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대화』를 쓴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문이라는 방법까지 동원해 갈릴레오의 '의도'를 심문하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이 책은 어떻든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금지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갈릴레오는 감금되거나 참회를 해야 할 판이었다."(365, 374)<br>"6월 22일, 갈릴레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판결이 공식 발표되었다. 며칠 후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검사성성의 지하 감옥에서 로마의 토스카나 대사관으로 바꿈으로써, 그에 대한 판결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우르바누스는 사면을 해달라는 청원은 거절했지만, 갈릴레오로 하여금 마침내 로마를 떠나도록 해주었다." "갈릴레오에 대한 굴욕적인 판결문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파도바에서 볼로냐, 밀라노에서 만토바, 피렌체에서 나폴리와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의 플랑드르와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요란스럽게 고시되고, 종교재판관들에 의해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철학 교수와 수학 교수들은 갈릴레오에 대한 재편 결과에 경각심을 느꼈다." "이 사건들로 인해 1633년 여름에는 금지된 『대화』를 중심으로 암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사실 『대화』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 중 그것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책의 가치가 높아감에 따라 새로운 귀의자들도 생겨났다."(384-6)<br>제5부 시에나에서<br>"시에나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는 두 명의 교황과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낸 뛰어난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갈릴레오의 오랜 찬미자였다. 재판이 끝난 후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보호를 자청했다. 니콜리니 대사는 4월에 검사성성의 심문을 받고 돌아온 갈릴레오를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고 묘사했다. 이후로 몇 주가 더 지나고 충격까지 받은 그가 7월에 시에나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겠는가? 그는 부당한 판결로 고통 받은 나머지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거처에서는 흐느껴 우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시켜 과학적인 연구를 계속해나갈 수 있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사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굴욕을 딛고 일어나, 다른 책(『두 개의 새로운 과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피콜로미니의 열성적인 호의에 힘입은 바 크다."(393–5)<br>"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에 교수로 재직할 때 운동에 관한 기초 논문에 처음 착수했으나 책을 펴내지는 않았다. 그런 후 파도바에서 20년간 살면서 이 책을 쓰기 위한 새로운 실험 원리를 세웠는데, 즉 가르치는 의무를 다하고 작은 집에서 군사용 컴퍼스 제조 사업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진자 운동을 측정해 그 주기의 수학적 법칙을 이끌어냈으며, 경사면에 청동 공을 수도 없이 굴려 자유낙하 시의 가속률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사물이 '왜' 움직이는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파 학자의 모든 담론을 일축하고 고통스러운 관찰과 측정을 통해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생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전 세대의 철학자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던져지거나 발사된 탄환 등이 공중을 지나는 경로는, 그의 선배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어느 정도 곡선을 이루는 선'이 아니라 매번 정확히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410-2)<br>"갈릴레오는 후에 '지금까지 펴낸 책보다 『두 개의 새로운 과학』이 낫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내 모든 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결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저항과 운동에 관해 자신이 밝혀낸 사실이 자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온갖 천문학적인 발견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수한 망원경을 만들어 그것으로 하늘을 처음 관찰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위대한 천재성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비율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니콜리니 대사는 갈릴레오가 시에나에서 교황과 검사성성에 복종하는 모범적인 죄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보고했다. 우르바누스는 이 같은 견해를 시에나의 성직자들이 보낸 비난과 비교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를 이단자임을 고백한 죄인이기보다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었다."(443-5)<br>제6부 아르체트리에서<br>"경사면에 공을 굴리는 실험은 갈릴레오가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서 여러 원리와 함께 소개한, 낙하의 진실에 대한 지루하지만 성공적인 전주곡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법칙을 몇 개의 문자와 상징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대수 분석 방법에 따르지 않고, 기하학적인 비율로 표현했다." "〈총탄이 가장 멀리까지 나가는 경우는, 양각을 45도로 했을 때 또는 포수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4분원의 여섯 번째 점인 지점을 통과할 때라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서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아는 것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네.〉"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과학의 현실적인 적용과 그 가치에 대한 갈릴레오의 이 같은 강조는 당대의 대다수 철학자들과는 동떨어진 행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파의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질과 자연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갈릴레오는 시간, 거리, 가속 같은 측정 가능한 실체를 추구했다."(456-8)<br>"마침내 우르바누스는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아르체트리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판결을 약화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한 것이었다. 시에나의 환경이 고급 살롱의 분위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후로 갈릴레오의 사회적 접촉을 제한할 것과 가르치는 행위 일체를 영원히 금할 것을 검사성성에 권고했다." "그럼에도 1634년 8월, 갈릴레오는 동료 수학자들과 다시 활발한 서신 왕래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에는 미완의 원고인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다시 매달렸다." "네덜란드는 신교를 믿는 국가였으므로 네덜란드인 출판업자 엘체비르는 로마 종교재판소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르체트리에서 여전히 불안에 휩싸여 있던 갈릴레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이 책의 출판 사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프랑스 대사인 프랑수아 드 노아유에게 바친 헌정사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원고가 어떻게 외국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지 놀랍다며 짐짓 꾸며냈다."(463-4, 472, 478)<br>"1638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저자인 갈릴레오는 책이 출판된 지 수주일이 지난 뒤에 단 한권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책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책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이제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637년 7월 그의 오른쪽 눈이 처음 시력을 잃게 되자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닷새째 날을 추가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은 이듬해 겨울에 시력을 잃었다. 오직 한쪽 눈만으로 하늘을 관찰하고 이전에 써놓은 글과 그림을 정독했던 이 황혼기에, 그는 별들의 지름과 천체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최상의 방법에 관해 짧은 마지막 논문을 썼다." "〈나의 놀라운 관찰과 명징한 증명으로, 지난 모든 세기의 현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지했던 한계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더 커진 이 우주가, 이제 내게는 너무도 작게 줄어들어 내 몸의 조그마한 틀만큼이나 작아져버렸다네.〉 갈릴레오는 엘리아 디오다티에게 이렇게 토로했다."(481-3)<br>"이렇듯 쇠약해진 갈릴레오는 1638년 10월, 함께 살 가장 완벽한 반려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피렌체 출신의 16세 젊은이 빈첸초 비비아니였다. 비비아니의 학문적 탁월함은 페르디난도 대공의 눈에 띄었고, 대공은 그에게 갈릴레오의 조수로 갈 것을 명했다." "1654년 비비아니가 쓰기 시작한 갈릴레오의 전기에는, 연로한 스승이 자유롭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젊은 제자는 온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두 사람이 단둘이 누린 시간을 초월한 즐거운 한때가 묘사되어 있다. 갈릴레오의 일생에서 아주 중대한 몇몇 순간을 추적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고 거의 신화적인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 인물은 다름 아닌 비비아니였다. 그는 갈릴레오가 의학을 공부했던 학생 시절, 피사 대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흔들리는 전등불을 바라보다 진자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라든지, 밑에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있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포탄을 굴려 떨어뜨린 장면 등을 생생하게 살려냈다."(484-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170/73/cover150/890115238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70739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지금, 비스마르크 / 에버하르트 콜브 - [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47890</link><pubDate>Thu, 13 Aug 2026 07: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4789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22730582&TPaperId=174478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788/53/coveroff/k82273058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22730582&TPaperId=1744789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a><br/>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03월<br/></td></tr></table><br/>프롤로그_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주도하다<br>1815년 이후 35개의 제후국과 네 곳의 자유도시 중 단 몇 곳만 헌법과 의회를 갖추었는데, ‘독일연방’은 이들의 느슨한 결합이었다. 독일연방은 19세기 말쯤 5천5백만 명의 인구와 계층을 아우르는 평등한 선거권(남성의 선거권)을 통해 선출된 제국 의회로 국가와 사회의 제도를 정비했으며, 완전한 정당 체제를 자랑하는 독일제국이 됐다. 제국 수도 베를린은 1815년 2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프로이센의 수도였으나, (1815년 4월 1일 태생인) 비스마르크가 사망한 1898년에는 약 2백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였다. 5천 명 이상 규모의 행정구역에 사는 인구가 1815년에는 불과 10퍼센트였으나, 19세기 말에는 50퍼센트를 웃도는 수준으로 늘어났다. 농업국가 독일은 19세기를 거치며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돋움했다. 1900년쯤에 이르자 독일은 철강과 제련 산업에서 대영제국의 규모를 능가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산업’인 화학과 전기공업에서 선두를 달렸다. 10)<br>I. 알트마르크 융커의 젊은 시절(1815~1847)<br>1845년 아버지가 74세를 일기로 운명한 뒤, 비스마르크는 작센 지방의회의 보궐선거에서 기사 작위 의원으로 선출됐다. 또 예리초프Jerichow군의 군수직도 노려볼 만한 영향력을 쌓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비스마르크는 지역 차원을 넘어서는 활동 범위, 곧 영주재판권(Patrimonialgerichtsbarkeit)을 새롭게 꾸미느라 벌어진 정치 대결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영주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강변하고, 정부가 권한을 넓혀 간섭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했다. 이 협상에서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보수적인 영주들, 특히 마그데부르크의 고등법원 원장 에른스트 루트비히 폰 게를라흐Ernst Ludwig von Gerlach(1795~1877)와 밀접하게 협력했다. 게를라흐는 아돌프 폰 타덴과 사돈 간이었으며, 프로이센 보수파의 선봉으로 활약하던 인물이다. 이런 활동으로 비스마르크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미래 전망을 높게 평가했던 게 분명하다. 21)<br>1846년 비스마르크와 요하나 폰 푸트카머는 인생을 함께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경건주의에 충실한 요하나의 부모는 비스마르크를 사위로 맞는 걸 전혀 반기지 않았다. 1847년 1월 초 그는 과감하게 포메른의 외진 구석인 라인펠트Reinfeld의 요하나 집으로 찾아갔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약혼은 완벽히 성사됐다. 비스마르크는 요하나에게서 자신이 필요로 한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평생 충실했으며 솜씨 좋게 집안을 꾸리면서 자녀를 사려 깊게 돌보았고, 무엇보다도 남편의 세계관에 자신을 무조건 맞추었으며, 어떤 결정을 하든 충직하게 따랐다. 남편의 친구는 그녀의 친구였으며, 남편의 적은 자신의 적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비스마르크는 자신에게 맞는 삶을 탐색하느라 매우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약혼을 비롯해 1847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그는 안정된 토대 위에서 자신의 뜻을 안팎으로 활발히 펼치며 그동안 굶주린 야망을 달랠 기회를 잡았다. 22-3)<br>II. 영주에서 정치가로(1847~1851)<br>1847년 여론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사건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소집하겠다고 선포한 ‘통합신분제의회’였다. 모든 지방 토호들을 대상으로 소집된 이 회의에는 대략 6백여 명의 남자들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4월 11일 왕이 ‘통합의회’를 개회했다. 폰 브라우히티슈Von Brauchitsch 가문의 대표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참가 자격을 포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스마르크는 5월 초 의회에 참가할 기회를 잡았다. 의회에 입성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5월 17일, 32세의 최연소 의원은 첫 데뷔무대에서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비스마르크는 마치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한 그림을 그려내는 표현력에 재치와 신랄한 촌철살인을 담아내는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을 줄 알았다. 심지어 그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도 연설만큼은 귀담아들었다. 보수 진영에 재능 있는 연설가의 씨가 적었던 덕에 젊은 의원은 계속 연설을 쏟아내고 인맥을 확장하며 빠른 속도로 ‘정파’의 지도급 인사로 발돋움했다. 26-7)<br>1850년 5월 오스트리아는 제후 펠릭스 슈바르첸베르크Felix Schwarzenberg(1800~1852)의 지휘 아래 혁명 시위를 진압하고 유럽 내 정치적 입지를 다시 강화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시도했는데, 합스부르크 왕조를 배제하고 독일연방을 이룩하고자 하는 프로이센의 시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런 일촉즉발 상황에서 슈바르첸베르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확신했다. 러시아 차르에게 프로이센 중심의 연합 정책은 일정 부분 ‘혁명’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센 선제후국’ 문제로 군사적 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프로이센 정부가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라인펠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환호했다. 11월 29일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오토 폰 만토이펠은 프로이센을 각각 대표해 올뮈츠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내용은 프로이센이 연합을 포기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34-5)<br>프로이센 여론은 ‘올뮈츠 협약’을 굴욕에 가까운 정치적 패배, 일종의 ‘수치’로 받아들였다. 정부는 의회에서 협약 체결을 합리화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했다. 1850년 12월 3일에 열린 하원 회의는 말 그대로 비스마르크의 독무대가 됐다. 이 무대가 그의 출세를 결정지었다고 하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융커의 순전한 이해관계만을 대변하지 않으며, 국가이성에 방향을 맞춰 진정한 국인國人이 무엇인지 헤아릴 줄 아는 언어를 구사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이미 저 교조적인 보수, 게를라흐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인 보수의 원칙 위주 정치로부터 확연히 거리를 둔 자세이다. 1851년 봄에 프랑크푸르트로 프로이센의 의회 대표를 다시 파견하는 일이 시급해지자, 비스마르크의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 4월 말 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수한 에움길을 거쳐 그동안 36세가 된 남자는 자신이 대학생 시절 꿈꿔온 목표를 이루었다. 그는 외교관이, 그것도 정상급 외교관이 됐다. 35-6)<br>III.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외교관(1851~1862)<br>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로 파견됐을 당시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프랑크푸르트로 보내진 까닭은 그가 ‘혁명’의 확실한 적대자라는 면모를 보였고, 올뮈츠 협약이 맺어질 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협력을 이끌 대변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왕과 궁정당은 정확히 이런 이유로 비스마르크를 선택했다. 오스트리아가 보수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연대감을 보이며, 1848년 이전처럼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의회를 이끌어 가리라는 비스마르크의 예상은 빠르게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속내는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유형의 오스트리아 패권 정치”의 대표자인 제후 슈바르첸베르크의 주도 아래 합스부르크 왕조는 1848~1849년 혁명으로 겪은 위기를 보란 듯 이겨내고 유럽 중부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스트리아의 이런 헤게모니 정책의 관점에서 독일연방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40-1)<br>비스마르크는 연방의회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실하게 흔들며, 독일연방 내에서 프로이센의 동등한 위치를 인정받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권위에 몇 차례 흠집을 낼 수는 있었다.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은 세 가지다. 오스트리아 쪽이 희망한 연방의 통일된 언론 관련 법안, 빈이 베를린에 목줄을 걸려 했던 이 법안은 끝없는 논쟁 끝에 결국 오스트리아에게 아무 실익이 없는 형식적인 수준으로 의회를 통과했다. 1848년에 창설된 독일 함대의 해체를 둘러싼 갈등이 오랜 줄다리기 끝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독일의 교역 정책에서 누가 선도적 위치를 점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다. 오스트리아의 관세동맹 가입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1853년에 고작 12년의 기한을 가지는 교역 계약만 체결됐다. 1854년 관세동맹이 소독일 중심으로 하노버까지 확장된 것은 경제와 교역, 정치 분야에서 프로이센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누른 매우 중요한 승리이다. 43)<br>1854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독일연방이 서유럽 강대국들과 연합하는 노선이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안간힘을 썼다. 프로이센 대표 비스마르크는 불굴의 집요함과 섬세한 수완으로 1855년 1월 과반수로 오스트리아가 상정한 안건을 부결시켰다. 연방의회는 러시아를 상대로 군대를 동원해달라는 오스트리아의 요구 대신, 러시아든 서유럽 강대국이든 연방을 위협할 시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815년 이후 그리고 혁명의 해인 1848~1849년을 넘어서도 건재했던 유럽 강대국들의 조화는 이 전쟁으로 혼란에 빠졌다. 세 마리의 검은 독수리(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가 구축했던 동맹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프랑스와 영국을 신뢰할 만한 동맹으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단절은 그동안의 모든 권력 구도를 뒤흔들어 유동적으로 만들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첨예한 대립은 유럽 권력 구도에서 프로이센에게 더 좋은 기회를 잡도록 해주었다. 44-5)<br>프로이센 정부는 1857~1858년에 위중한 변화에 직면했다. 이 변화는 비스마르크의 향후 경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57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불치의 뇌졸중에 걸려 국가를 통치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1858년 10월 초 왕세자 빌헬름은 정부 결정과 의회 동의를 얻어 섭정으로 권좌에 오름으로써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즉각 새 내각을 구성했다. 빌헬름은 정부가 시대의 정당한 요구와 필요를 ‘세심하게 개선하는 손길’로 돌볼 것이라고 하면서, 프로이센이 독일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자세’를 추구하는 정책을 펴고, 군대를 쇄신하는 재편성을 실행하겠다고 선포했다. 새로운 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비스마르크는 영향력을 잃었다. 1859년 1월 베를린에서 그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오스트리아 대표는 이 사실을 알고 비스마르크 앞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859년 2월 말 비스마르크는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퇴임사를 했다. 48-9)<br>1862년 5월에 열린 의회선거에서&nbsp; 자유주의자들은 비록 다양한 그림자가 드리우기는 했지만, 압도적이며 빛나는 승리를 자축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체 353석 가운데 292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왕 빌헬름이 최우선 과제로 꼽았던 군대 개혁이 위기에 처했다. 2월에 전쟁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이 발의한 입법안은 군대 예산 증가, 육군 강화, 효율적인 3년 복무기간, 사실상 폐지를 목표로 한 향토방위군 편제 개혁을 목표로 제시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복무 기간과 향토방위군 편제 개혁에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왕은 군대 개혁안의 핵심 쟁점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군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헌법 갈등으로 비화했다. 비스마르크는 9월 22일 바벨스베르크 공원에서 이뤄진 장시간 대화 끝에 의회의 저항을 무릅쓰고 군대 개혁을 실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결심으로 비스마르크는 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왕은 이날 바로 그를 수상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53-5)<br>IV. 위대한 프로이센과 제국 창설자(1862~1871)<br>비스마르크가 임명된 9월 23일 의회는 308 대 11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군대 개혁을 위해 정부가 요구한 예산안을 거부했다. 비스마르크의 첫 번째 공식 입장 표명으로, 내각은 9월 29일 1863년도 예산안을 철회했다. 그다음 비스마르크는 의회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기념비적인 인상을 남겼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힘을 주목합니다. (···) 프로이센은 힘을 모아 이미 몇 차례 놓친 유리한 순간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빈조약에 따른 프로이센 국경은 건강한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과 표 대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말과 표 대결은 1848년과 1849년의 위중한 실수였습니다. 우리의 결단은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에 붙는 ‘철과 피(철혈재상)’는 폭풍과도 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자유주의의 신문들은 국내 정치의 갈등을 향한 시선을 외교 무대로 돌려 무력 통치를 꾀하는 수작이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58-9)<br>한편 이미 오래전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둘러싸고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위기가 1863년 말에 확 불꽃을 일으키며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로 연방의 정세가 새롭게 바뀌며 판도를 결정할 카드 패를 다시 섞었다. 11월에 덴마크 제국 의회는 슐레스비히 공국(덴마크 왕이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다스리던 공국)을 덴마크 국가로 합병한다고 결정했다. 비스마르크와 오스트리아는 합심해 이 요구를 거부했다. 비스마르크는 덴마크와 프로이센의 갈등에 유럽 강대국들이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그런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같은 이유로 비스마르크와 보조를 맞춘 것이 분명하다. 오스트리아 내각은 철저히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해관계와 국가이성에 맞춰, 1863년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프로이센과 보조를 맞추기로 결정했다. 이는 중소 공국들의 입장을 깨끗이 무시한 처사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으로 독일연방 정치에서 비스마르크의 입지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65)<br>1866년 4월 말 오스트리아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는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다. 빈 내각은 엘베강 지역 공국들의 운명을 결정할 책임은 독일연방이 져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사실상 ‘가슈타인 협약’의 폐기 선언이었으며, 이미 “일종의 선전포고”였다고 로타르 갈은 썼다. 이후 몇 주 동안 시도된 마지막 대화, 양강 노선을 유지해 평화를 유지하자는 물밑 대화(‘미션 가블렌츠Mission Gablenz’)를 프로이센이 추진했지만, 오스트리아가 이를 거부했다. 5월에 빈은 나폴레옹 3세의 회의 제안(프로이센은 이미 수용한 제안)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6월 12일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와 비밀 협약을 맺어 오스트리아가 승리하더라도 베네토는 포기하는 반면, 오스트리아가 독일 내의 영토를 차지해 프로이센에 손해를 입히더라도 프랑스는 중립성을 지키며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더 나아가 프로이센이 차지한 라인강 서쪽 지역을 프랑스가 간섭하기 좋은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합의도 이루어졌다. 70)<br># 가슈타인 협약(1865년 8월 14일 조인) : 독일 공국들의 지배권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공동으로 가지는 형태를 지속하되, 임시적인 소유권 분할에 합의한 협약. 이로써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했다.<br>앞선 전투의 승리에 이어, 7월 3일 쾨니히그라츠의 전투는 몰트케의 천재적인 전술과 오스트리아 전장총보다 우월한 성능의 프로이센 격침발사총 덕분에 프로이센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괴멸 수준으로 패배했다. 그러자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는 나폴레옹 3세에게 중재역을 맡겨 즉각 휴전 협상을 제안했다. 비스마르크가 중시하는 두 가지 핵심은 독일 북부에서 프로이센의 권력 위상을 다지는 것,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독일연방에서 빠지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게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에게 독일연방의 해체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카이저의 동의는 “오스트리아 황제 국가가 참여하지 않는 새로운 독일의 탄생”에 기여한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소독일 중심의 통일을 인정하고, 프로이센이 마인강 북부에 새롭게 다질 국가에 일절 간섭하지 않으며, 프로이센에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의 소유권을 양도하기로 약속했다. 71-2)<br>하노버, 헤센 공국, 나사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그리고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 등을 전면 합병함으로써 프로이센 국토는 예전보다 상당히 커졌다. 세 곳의 정통 선제후選帝侯 가문들이 영토를 잃게 된 것은 빌헬름 1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왕조의 연대’를 공격하는 행위라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과 긴밀히 맞물리는 영토, 예전 면적보다 5분의 1이 늘어난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런 염려는 불식해도 좋았다. 이로써 독일의 주도권 다툼은 끝났다. 1866년이 유럽 중부 역사를 결정한 해라는 말은 조금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는 라인강 서쪽 지역을 넘길 것과,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단독으로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시간을 끄는 노련한 전술로 일단 결정을 유예해가며, 프랑스의 지나친 요구를 함께 막자고 설득하면서 8월에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바덴과 보호 및 방어동맹을 맺었다. 72-3)<br>독일 민족운동이 1866~1867년의 성취를 일종의 과도기로 보았으며,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독일통일을 완성해야 한다고 요구한 반면, 비스마르크는 주도면밀한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연방의 내적 구조를 튼튼히 다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을 상대로 신중한 유화정책을 펼쳤다. 일단은 보호와 방어동맹 그리고 관세동맹을 맺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 동맹이야말로 마인강을 이어주는 두 개의 든든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로타르 갈은 비스마르크가 중시한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양쪽의 결속, 구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군대 제도와 상업과 관세정책, 위기 시 자동적으로 기능할 동맹이 전역에 걸쳐 동일한 효과를 갖도록 법제화에 신경 썼다.” 이런 방식으로 차근차근 다진 조직은 갈수록 촘촘해졌다. 결국 독일의 모든 왕조와 정부는 자국 이익과 국력 제고라는 목적으로 북독일 연맹에 가입했다. 77)<br>1870년 7월 숨 가쁘게 달아오른 위기의 출발점을 제공한 인물은 호엔촐레른 왕조 적통으로 스페인 왕의 후보에 오른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Leopold von Hohenzollern(1835~1905)이다. 스페인은 1868년 9월에 국민 대다수가 지지한 군부 쿠데타를 겪었다. 군부는 복고적 성향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여왕 이사벨 2세Isabel Ⅱ가 스페인을 떠나도록 강제했다. 이후 왕을 옹립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빗나가자 스페인 정부 수반인 육군 원수 후안 프림Juan Prim은 1870년 2월 호엔촐레른 왕조의 왕자 레오폴트에게 스페인 왕관을 제안했다. 비스마르크는 호엔촐레른 왕조에게 왕위를 받아들이라고 단호하게 충고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압력으로 7월 12일 레오폴트의 왕 후보 지명은 철회됐다. 이로써 프랑스는 호엔촐레른 출신의 스페인 왕을 막으려는 목적을 이루었으며, 어느 쪽으로 보나 당당한 외교적 성공을 맛보았다. 그러나 파리의 실권자들과 이들에게 자극받은 여론은 이 성공으로 만족해하지 않았다. 79-80)<br>후보 지명 철회 선언 이후 프로이센은 이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래서 파리 내각은 이 선언이 발표되고 난 뒤 프로이센 왕이 사안에 개입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프로이센 왕에게 호엔촐레른 왕자를 다시 후보로 내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구속력 있는 확약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고 요양을 위해 바트엠스Bad Ems에 머물던 빌헬름을 찾아갔다. 프랑스 정부는 스스로 모든 퇴로를 끊어버렸다. 요구한 성명이 거부당한다면 파리 정부는 유럽 강대국들 눈에 패배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파리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불 보듯 환한 일이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각료들은 군 동원령과 선전포고를 통해서만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7월 14일의 동원령 결의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그다음 7월 19일 베를린에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전달됐을 때, 이미 양측은 전선으로 군대를 속속 집결시켰다. 80-1)<br>1871년 1월 28일의 휴전협정은 즉각 프랑스 국민의회를 선출해 이 기관을 프랑스 국가의 합법적 대표로 삼는다는 조항을 포함했다. 2월 5일에 선출된 국민의회는 아돌프 티에르를 ‘행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티에르와 파브르가 비스마르크와의 협상을 통해 끌어낸 ‘베르사유 잠정 평화조약’은 2월 26일에 양측이 서명을 했으며, 3월 1일에 국민의회의 비준을 받았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 외에도 영토를 할양해야만 했다. 알자스 로렌의 일부 지역은 독일제국의 땅으로 합병됐다.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남독일 국가들의 정부가 북독일연방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한 타협안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11월 협약들Novemberverträge’로 북독일연방 헌법은 가벼운 수정을 거쳐 독일제국의 헌법이 됐다. 드디어 소독일 민족국가가 탄생했다. 바이에른과의 협약에 서명한 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부하 관료들을 돌아보며 감동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독일통일을 해냈소, 그리고 카이저 옹립도.” 82-4)<br>V.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1871~1890)<br>1871년 이후 평화 수호는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였다. 1871년 이후 유럽 평화는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 욕구로, 다른 한편으로는 발칸반도에서 서로 충돌하는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해관계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의 복수 의지와 관련 모든 유럽의 정치가를 비롯해 프랑스의 정치가 역시 명확히 간파했던 사실은, 프랑스가 홀로 독일제국을 누르려는 시도를 감행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도전은 다른 강대국들과의 연합으로만 가능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래서 다른 강대국들과 연합해 프랑스를 고립시키려는 정책에 집중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정책은 프랑스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지 않고 공화국으로 남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러시아나 합스부르크 왕조 같은 강대국을 등에 업지 못하도록 독일제국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의 동맹을 맺으려 분주히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1873년 ‘삼제동맹’으로 결실을 맺었다. 91-2)<br>1875년 여름부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속속 봉기에 합류했다. 이 저항운동을 오스만제국이 잔인하게 짓밟자 러시아는 1877년 4월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와 튀르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구상을 아들 헤르베르트에게 받아쓰게 했다. ‘키싱겐 구술(Kissinger Diktat)’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기록에서 비스마르크는 가능한 경우들 가운데 ‘최악’이라 여기는 것을 “코슈마르 드 코알리숑cauchemar des coalitions”, 곧 독일을 겨눈 유럽 강대국들의 “결탁이라는 악몽”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외교정책의 원칙을 정리했다. 자신이 그리는 그림은 “그 어떤 영토의 확보가 아니라 전체적인 정치 상황,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강대국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정치 상황이며, 혹시라도 강대국들이 우리를 겨누고 결탁하는 일만큼은 막을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93-4)<br>국제 갈등 상황이 산스테파노 평화조약으로 예봉이 꺾이고, 핵심 쟁점을 둘러싼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회의 덕분이다. 1878년 6월 13일에서 7월 13일까지 제국 수상 관저에서 열린 이 회의는 비스마르크가 의장을 맡았으며, 유럽의 모든 강대국 정상이 참석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으로 얻은 영토 일부를 포기했다(불가리아 남부 지역 행정 자치구인 동東루멜리아). 그러나 1856년 루마니아에게 잃었던 베사라비아 및 소아시아 지역은 자국 영토로 편입됐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와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으며, 불가리아는 자율권을 가지기는 하지만 튀르크에 조세를 바쳐야 하는 공국이 됐다. 그리스는 이피로스와 테살리아의 일부를 얻었으며, 영국은 키프로스섬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유할 권리를 각각 차지했다. 독일과 프랑스를 제외하고 유럽의 모든 강대국은 이 전쟁의 결과와 베를린 회의로부터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94)<br>1870년대의 독일 근대화에 정부와 의회 다수파가 상당히 기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문화투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창설공황(Gründerkrach, Panic of 1873)’이라고 역사에 기록된 경제 위기로 그늘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은 경제가 활황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런 번영에는 프랑스가 전쟁배상금으로 지불한 50억 금프랑(환산하면 약 42억 마르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 부흥으로 활력을 얻은 주식회사의 설립은 거리낌 없는 주식 투기의 위장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1873년 5월에 시작된 주가 폭락은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휩쓸었으며 가을에는 독일을 강타했다. 많은 유대인 금융 종사자가 주식시장에서 활동한 탓에, 주식시장 붕괴가 빚은 심리적 충격은 “독일에서 근대 반유대인주의가 탄생한 순간”의 배경이 됐다. 호황의 갑작스러운 끝은 성장 둔화의 시기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몇몇 단기적인 회복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890년대까지 지속됐다. 97-8)<br>국내 정치의 또 다른 주요 문제는 좌파자유주의자인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1821~1902)가 ‘문화투쟁’이라는 개념으로 집약해 표현한 것이다. 한쪽에는 비스마르크 정부와 자유주의가, 그 반대편에는 가톨릭교회와 이를 대변하는 정당인 중앙당(Zentrum)이 서로 문화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싸움이 ‘문화투쟁’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동기가 다발로 묶여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주목해야 하는 동기는 비스마르크가 애초부터 종파 정당의 결성을 매우 꺼렸다는 점이다. 가톨릭을 전면에 내세운 정당은 그 의회 활동의 출발점과 목표점을 로마 교황청의 이해관계로 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그랬다. 두 번째로 살펴야 하는 동기는 폴란드와 관련한 것이다. 예전부터 비스마르크를 항상 사로잡았던 근심은 프로이센의 동쪽 국경이 폴란드 민족운동으로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비스마르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화투쟁의 뿌리는 폴란드 문제에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98-100)<br>1878~1879년에는 국내 정치의 극적인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면서 정치와 의회의 세력 관계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자유주의자들은 더는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장악하는 기둥 노릇을 하지 못했으며, 보수가 다시금 힘을 얻었고, 중앙당과의 협력이 가능해졌다. 1878년 초여름에는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겨눈 두 번의 암살 시도가 벌어졌다. 첫 번째인 5월 11일에 카이저는 몸 성히 살아남았지만, 6월 2일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중상을 입었다. 오래전부터 사회민주주의가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보았던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사회민주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1878년 10월 제국 의회는 “사회민주주의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행위를 방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다분히 자의적인 법 조항은 권력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실행할 행동 공간을 활짝 열어두었다. 사회민주주의에게 합법적으로 허락된 유일한 활동은 제국 의회와 지방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102-4)<br>사회복지 법안의 입법이야말로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이다. 그가 이 법안을 책임지고 주도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한 양면 전략이라고 보는 평가가 우세하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다. 노동자를 생활의 기본적인 위험 요소로부터 보호해줌으로써 노동자 계층이 왕조 국가에 호감을 느끼도록 유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신 연구는 사회주의 법과 사회보장 정치의 시작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확인했다. 사회민주주의와는 별개로 사회보장 정치는 비스마르크가 그 중요성을 의식하고 추진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포괄적인 노동자 보호법의 제정에 반대하기는 했지만(특히 일요일 노동 금지법을 반대했다),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폐해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노동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치를 정부 대책으로 개선해줄 필연성을 깨달았다. 105-6)<br>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을 위한 세 가지 법안, 산업재해와 노년 연금과 상해보상의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통 크게 양보를 해야만 했다. 의회의 다수 의원이 세금으로 사회보장의 재원을 마련하려는 수상의 의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노년 연금과 상해보상의 경우에만 (조촐한) 국가보조금을 지급하는 안을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 성과를 총평해보자면, 몇몇 성공에도 “그 자신과 독일을 위해 설정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는 오토 플란체의 진단은 정확하다. 그가 특히 간절히 원했던 재정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중앙당은 문화투쟁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사회주의 법을 각각 이겨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 의회의 힘을 제한하지도 못했고, 정부를 위한 안정적인 다수 확보도 실패했다. 1879년 관세 문제에서는 대기업과 농업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이 계획한 다른 분야들의 주요 쟁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성과를 끌어내지 못했다. 106-7)<br>발칸반도에서 무르익어가는 대결 분위기는 비스마르크를 혹독한 시험대 위에 세웠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서로 이해충돌을 빚으면서 저마다 독일의 지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노골적인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자 진력했다. 결국 이런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만큼은 막지 못했다. 차르는 삼제동맹이 사망했다고 선포했다. 1887년에 만료되는 삼제동맹을 다시금 연장하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어떤 경우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연결된 끈은 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1887년 6월 러시아와 비밀리에 ‘재보장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프랑스가 도발해 독일을 공격할 경우 중립을 지키며, 독일제국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차르 제국을 도발해 공격할 때 중립을 견지한다는 의무를 이행하기로 했다. 이 조약이 제국의 다른 동맹들과 합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숱한 논란이 빚어졌다. 109-110)<br>1888년 3월 9일 제국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의 사망을 공표하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예정된 권좌 교체를 바라보는 비스마르크의 속내는 착잡하기만 했다. 1887년 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불치병을 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스마르크는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왕세자 빌헬름이 “성미가 급해 입을 다물어야 할 때 다물 줄 모르며, 아첨에 귀가 얇아 짐작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가운데 독일을 전쟁에 빠뜨릴 수 있다”고 걱정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장례를 치르고 몇 시간 뒤, 비스마르크는 젊은 카이저를 예방하면서 이제 전혀 다른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실감해야만 했다. 젊은 카이저는 무엇보다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원했다. 국가는 자신이 통치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늙은이’를 떨쳐버리고 싶었다. 이로써 국가라는 배의 조종간을 손수 잡아 온 비스마르크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하기만 한 시한폭탄이었다. 112-3)<br>갈등은 1890년 3월 15일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카이저는 이른 아침 통보도 없이 외교부에 나타나 비스마르크를 격렬하게 힐난했다. 어째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그토록 우호적으로 꾸미는지 카이저는 따져 물었다. 당시 빌헬름 2세는 러시아가 곧 오스트리아를 선제공격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여러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던 와중에 이제는 외교정책을 두고 심각한 분열이 빚어졌다. 젊은 카이저 주변을 맴도는 비공식 참모들, 이를테면 참모총장 백작 발더제, 카이저의 친구 백작 오일렌부르크, 추밀원 고문관 홀슈타인, 카이저의 삼촌 대공 프리드리히 폰 바덴은 하나 같이 비스마르크에게 등을 돌린 정적들이자 러시아에 반감을 품었다. 이들의 말에 홀린 카이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1890년 6월로 기한이 끝나는 재보장조약의 연장, 러시아 쪽이 원하는 연장을 해줘서는 안 된다고 흥분했다(비스마르크가 실각한 뒤 이들은 실제로 연장을 막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외교정책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115)<br>VI. 권좌에서 물러난 후(1890~1898)<br>비스마르크가 1893년 8월 말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병이 심해졌을 때, 카이저의 측근들은 빌헬름 2세에게 서둘러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직언했다. 1894년 1월에 극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궁을 방문해달라는 카이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석 주 뒤 빌헬름 2세는 답방을 위해 프리드리히스루를 찾았다. 두 번의 만남에서 카이저는 정치 이야기는 한사코 피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여론에 비치는 모습만 중요했다. 다시 말해 이 ‘화해’는 순전히 형식적인 겉보기 연출일 뿐이었다. 빌헬름 2세는 실각한 수상을 계속해서 불신했으며, 비스마르크는 이 젊은 카이저를 경멸하는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유서에 정한 비문은 이렇다. “제후 폰 비스마르크, 1815년 4월 1일 생, 1898년 7월 30일 졸. 독일 카이저 빌헬름 1세의 충직한 신하.” 분명 죽은 비스마르크는 이 비문으로 빌헬름 2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겼으리라. 124-6)<br>에필로그_논쟁의 대상 비스마르크<br>보수주의와 민족자유주의 진영의 엘리트들은 비스마르크를 이상적 정치인으로 추켜세웠으며, 폭넓은 계층이 민족 영웅으로 섬겼다.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의 숭배는 그가 죽고 난 뒤 엄청나게 확장되면서, “결국 역사적 실제 인물 비스마르크의 면모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이런 신격화가 몰고 온 치명적 오류는 “섬세한 신경에 유연하며 항상 중도를 유념했던 외교관”이 목이 긴 전투화를 신은 호전적인 ‘철혈재상’이라는 이미지에 묻혀버리면서, 과격한 민족주의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가 생시에 한사코 멀리했던 민족주의가 사후에 비스마르크를 집어삼킨 셈이다. 무수히 많은 재향군인회, 함대 출신 해군 협회, 무장 촉구 단체 등은 앞다투어 죽은 자 비스마르크를 독점적으로 차지했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며, 범독일 민족주의 연맹은 그 제국주의적 야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스마르크를 내세웠다. 이런 신격화는 이미 1914년 이전에 치명적 파괴력을 자랑했다. 131)<br>1918년 이후 정치 우파는 비스마르크를 거리낌 없이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의 수단으로 편취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책임자들은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유산을 이처럼 국수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왜곡하고 변조하는 일에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다. 좌파자유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가톨릭 성향의 정치가 대다수도 비스마르크의 인격과 업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전래적 입장을 고수했을 뿐이다. 이런 경향을 막으려 진력한 사람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다. 슈트레제만은 로카르노 조약(1925)과 베를린 조약(1926)에서 자신의 ‘국가적 현실정치’를 아주 선명하게 담아내면서 드러내놓고 비스마르크라는 모범에 의존했다. 하지만 정치 현장은 고루한 민족주의의 비스마르크 신화에 장악당했으며, 이런 상황은 ‘제3제국’의 시기를 넘어서까지 지속됐다. 반민주적인 비스마르크 신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차츰 청소됐다. 13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6788/53/cover150/k82273058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788531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경도 이야기 / 데이바 소벨 - [경도 이야기 - 인류 최초로 바다의 시공간을 밝혀낸 도전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42260</link><pubDate>Mon, 10 Aug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422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52398&TPaperId=174422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170/78/coveroff/89011523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52398&TPaperId=174422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경도 이야기 - 인류 최초로 바다의 시공간을 밝혀낸 도전의 역사</a><br/>데이바 소벨 지음, 김진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br/></td></tr></table><br/>1. 상상의 선&nbsp;<br>"프톨레마이오스는 적도를 위도가 0도인 선으로 잡았다.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자연 속에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적도를 알아냈던 조상들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적도에서는 태양과 달과 행성들이 머리 위로 수직에 가깝게 지나간다. 역시 유명한 위도선인 북회귀선과 남회귀선도 태양의 위치에 따라 정해졌다. 연중 태양이 움직이는 범위에서 각각 북쪽과 남쪽의 한계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초자오선, 즉 경도가 0도인 선은 프톨레마이오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북서쪽의 포처니트 제도(지금의 카나리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지나가는 경도선을 선택했다. 그 이후에 지도를 만든 사람들은 본초자오선을 아조레스 제도나 케이프베르데 제도,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페테르스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 등지로 옮기다가 결국 런던으로 낙착을 보았다. 본초자오선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바로 그것이 위도와 경도의 본질적 차이점이다."(19)<br>2. 위험한 바다&nbsp;<br>"용기와 탐욕을 겸비하고 바다로 나갔던 15~17세기의 선장들은 모항으로부터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추측 항법을 사용했다. 선장은 바다 위에 측정기를 던져놓고 이 임시 이정표로부터 얼마나 빨리 멀어지는지를 관찰했다. 이 조잡한 속도계의 측정값을 항해일지에 기록하고, 별이나 나침반으로 확인한 진행 방향과 모래시계나 회중시계로 잰 특정 거리의 통과 시간 따위를 함께 적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목적지를 놓치는 일도 흔했다. 추측 항법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인 고통이 전부는 아니었다. 경도를 모른다는 이유로 세계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적 재앙을 감수해야 했다. 대양을 오가는 배들은 안전한 항해가 보장되는 소수의 비좁은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위도만 가지고 항행해야 했으므로 몇몇 항로에 포경선, 상선, 전함, 해적선 등이 한꺼번에 몰려 붐비다가 서로 싸워 차례로 희생 당했다."(29-30)<br># 측정기 : 줄이 풀리는 정도에 따라 배의 속도 및 항주 거리를 재는 장치<br>3. 우주의 시계 속에서 표류하다&nbsp;<br>"일찍이 1514년에 이미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베르너가 달의 운행을 이용하여 배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을 착안했다. 달이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 거리는 대략 달의 지름과 비슷하다. 달은 밤마다 이렇게 장중한 걸음걸이로 붙박이별 사이를 산책한다. 낮에는 (매달 보름 동안은 낮에도 달이 떠 있으므로) 태양 쪽으로 다가가거나 멀어진다. 베르너는 천문학자들이 달의 운행 경로 주위에 흩어진 항성들의 위치를 천체도에 표시하고 달이 각각의 항성을 스쳐 지나가는 시각을─앞으로 몇 년에 걸쳐 매달 달이 뜨는 밤마다─예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낮 동안에 이동하는 해와 달의 상대적 위치도 예측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월거 이용법'의 주된 문제점은 그 모든 과정을 좌우하는 항성들의 위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어느 날 밤이나 낮에 달이 어디쯤 있을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천문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달의 운행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아직 상세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39)<br>4. 병속의 시간&nbsp;<br>"시계 예찬론자들은 좋은 시계만 있으면 경도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때는 뱃사람들이 물통이나 소고기처럼 모항의 시간을 배에 싣고 출항할 수 있을 터였다. 1530년부터 플랑드르의 천문학자 젬마 프리시우스는 기계적인 시계가 바다에서 경도를 찾는 한 방법이라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프리시우스가 내세운 두 가지 조건─즉 지극히 정확한 출항 시각에 시계를 맞춰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항해 중에 시계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때문에 당시로서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16세기 초의 시계로는 어림없었다. 정확하지도 않았거니와 바다에서의 혹심한 온도 변화를 견뎌낼 재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부족하나마 상당한 발전을 보인 것은 영국의 항해가 토머스 블런드빌이 대양 항해에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정확한 시계를 이용해보자고 제안했던 1622년에 이르러서였다.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장차 시계가 더욱 완벽해졌을 때의 가능성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51-2)<br>5. 교감의 가루약&nbsp;<br>"17세기 말엽,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엉뚱한 주장 가운데서도 가장 기상천외한 이론은 '교감의 가루약'이라는 엉터리 치료제를 근거로 삼았다. 딕비의 가루약을 경도 문제에 써먹는다는 발상은 비록 황당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먼저 상처 입은 개를 출항하는 배에 태운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물에 남겨 날마다 정오에 그 개의 붕대를 교감의 가루약 용액에 집어넣게 한다. 그러면 개는 어쩔 수 없이 깽깽거리며 울부짖기 마련이고, 선장은 그 소리를 듣고 시간을 가늠한다. 개의 울부짖음은 곧 태양이 런던 자오선 상공에 도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때 선장은 그 시각과 배가 있는 지점의 현지 시각을 비교하여 경도를 산출하면 된다. 물론 이 가루약이 수천수만 해리나 떨어진 바다 위까지 효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러면서도─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몇 달이 지나도록 이 소중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 것이 희망 사항이었다."(57-8)<br>6. 경도상&nbsp;<br>"1714년 7월 9일 앤 여왕 치하에서 발포된 경도법에는 거액의 상금이 책정되었다. 경도법이 발효되기 전에도 경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은 흔해빠질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1714년 이후 해결책의 잠재적 가치가 급격히 커지자 해결책의 숫자도 급증했다. 머지않아 경도 심사국은 소문을 듣고 상금을 타기 위해 몰려드는 무수한 사기꾼이나 선의의 참가자들에게 포위되다시피 했다." "경도법이 등장한 후 '경도를 찾는다'는 말은 곧 불가능한 도전을 뜻하게 되었다. 걸핏하면 경도가 화젯거리─그리고 웃음거리─가 되었고, 결국 그 시대의 문학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자면 『걸리버 여행기』에서 닥터 레뮤얼 걸리버는 불멸의 스트럴드브러그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라는 말을 듣고 여러 혜성들이 돌아오거나 거센 강이 얕은 시냇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경도가 발견되고 영구기관과 만병통치약 등 위대한 발명품이 속속 완성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떠올렸다."(72)<br># 스트럴드브러그 : 늙기만 하고 죽지 않는 희귀한 존재<br>7. 톱니바퀴 만들기&nbsp;<br>8. 바다로 간 메뚜기&nbsp;<br>"'경도 사나이' 존 해리슨이 동생 제임스 해리슨과 함께 1735년에 제작한 첫 해상 시계 H-1은 모든 면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 이 시계가 등장했을 때 세상은 이미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H-1은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었지만 워낙 뛰어난 탓에 사람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1737년 6월 30일에는 경도 심사국 의원들이 사상 처음으로─심사국 창립 후 23년 만에─회의를 열었는데, 바로 해리슨의 굉장한 기계 때문이었다." "심사 자리에는 해리슨의 탁월한 작품이 있었고, 더욱이 그곳에 모인 전문인 및 정치가들도 해리슨이 국왕과 조국을 위해 이룩한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H-1이─경도법에 명시된 2만 파운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인도 제도로 가는 시험을 요구할 권리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해리슨은 지나친 완벽주의자였다. H-1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의견을 꺼낸 사람은 당사자인 해리슨뿐이었다."(95, 99-100)<br>9. 하늘의 시곗바늘&nbsp;<br>"해리슨이 차례차례 해상 시계를 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과학자들도 마침내 하늘의 시계를 이용하는 데 필요한 이론과 기구와 정보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해들리 사분의' 덕분에 두 천체의 고도와 그 사이의 거리를 직접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배가 심하게 흔들리더라도 관측자의 시야에 들어온 두 천체의 상대적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해들리 사분의에는 어둠이나 안개 때문에 진짜 수평선이 안 보이게 되었을 때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수평선이 덤으로 붙어 있었다. 이 사분의는 곧 망원경을 부착하고 측정각을 넓혀 더욱 정확하게 만든 육분의sextant라는 기구로 발전했다. 그렇게 개량한 부분 때문에 이 기구만 있으면 낮 동안에 끊임없이 달라지는 달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어두워진 뒤에는 달과 별 사이의 거리를 각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상세한 성도星圖와 믿을 만한 기구를 갖춘 유능한 항해가라면, 이제 갑판 위에 서서 얼마든지 월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106-9)<br>10. 다이아몬드 시계&nbsp;<br>"1753년 워십풀 시계조합의 존 제프리스는 해리슨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회중시계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해리슨이 요구한 설계대로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제프리가 만든 이 시계에도 작은 이중 금속띠가 들어가 날이 덥든 춥든 정확한 시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계는 대단히 정확했다. 해리슨 자신도 이 시계에 마음을 빼앗겨 더 작은 해상 시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리슨이 1759년에 완성한 H-4는─이 시계로 결국 경도상을 받았다─앞서 만들어진 H-1, H-2, H-3보다 오히려 제프리스 시계를 더 많이 닮았다. 큼직한 황동 시계의 혈통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면서도 H-4는 마치 모자에서 끄집어낸 토끼처럼 놀라운 물건이었다. 지름이 5인치나 되므로 회중시계라고 하기에는 큰 편이지만 해상 시계로서는 아주 꼬맹이었으며 무게도 겨우 3파운드였다. 해리슨도 이 시계를 사랑했다.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듯 이 시계는 그야말로 우아함과 정밀성의 진수였다."(122-3)<br>11. 물과 불의 시련&nbsp;<br>"영웅을 찬양하는 이야기에는 야유할 악당도 필요한 법이다. 이 책에서 네빌 매스켈린 목사가 그런 사람인데, 역사는 그를 '뱃사람들의 천문학자'로 기억한다.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선택했다가 곧 신봉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방법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해리슨의 시계는 경도에 얽힌 복잡한 문제들을 그 안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사용자는 수학이나 천문학에 통달할 필요도 없고 시계를 작동시키는 데 경험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다. 과학자나 천측 항법가들의 눈에는 이 해상 시계에 불길한 무엇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뭔가 재빠르고 붙잡을 수 없는 것. 더 옛날이었다면 해리슨은 이런 마술 상자를 해결책으로 내놓았다는 이유로 꼼짝없이 마법사로 몰렸을 것이다. 해리슨이 이런 입장에 놓인 까닭은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적들이 강력히 불신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공적을 세우고도 기대했던 찬사는커녕 수많은 시련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116-7, 128)<br>12. 두 개의 초상화&nbsp;<br>"1764년 여름에 힘겨웠던 두 번째 시험이 끝난 후, 경도 심사국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몇 달을 그냥 보냈다. 위원들은 수학자들이 H-4의 시간 기록을 계산한 후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포츠머스 및 바베이도스의 경도값과 비교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심사 자료에는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야 했다. 이윽고 최종적인 보고를 들은 위원들은 위의 시계가 충분히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했음을 만장일치로 인정했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도 해리슨은 작은 승리밖에 얻지 못했다." "1765년 1월에 신임 왕실 천문학자의 이름이 발표되었는데, 다름 아닌 영원한 숙적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심사국 회의에서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찬양하는 기나긴 원고를 낭독했다. 이 사건은 월거 이용법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해리슨의 크로노미터는 비록 신속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반면, 하늘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었다."(146-8)<br>13. 제임스 쿡 선장의 두 번째 항해&nbsp;<br>14. 천재성의 대량 생산&nbsp;<br>"켄들과 머지는 살아생전에 각기 해상 시계 세 개를 제작했고, 해리슨도 고작 다섯 개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시계공 존 아널드는 품질 좋은 해상 시계를 무려 수백 개나 완성시켰다." "존 아널드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토머스 언쇼였다. 그는 해리슨의 복잡성과 아널드의 생산성을 응축시켜 완벽에 가까운 크로노미터를 만들어냈다. 윤활유가 필요 없는 계시 장치를 고안하여 마침내 해리슨의 위대한 아이디어 하나를 소형화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아널드와 언쇼 이외에도 점점 더 많은 제작자들이 나타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판매했으며 군함이나 상선은 물론이고 놀잇배에서도 크노로미터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1737년 전 세계에 하나뿐이던 해상 시계가가 1815년에는 5000여 개로 늘어났다." "해리슨이 제시한 경도 해결책의 실용성이 확실히 입증되자 한때 치열했던 경쟁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크로노미터는 곧 당연히 항해에 갖춰야 하는 필수품으로 여겨졌다."(172, 175, 179-80)<br>15. 자오선의 뜨락에서<br>"런던 중심부로부터 7마일 떨어진 그리니치 천문대 자리에 본초자오선을 설정한 사람은 제5대 왕실 천문학자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경도를 찾는 방법 중에서 시계 이용법이 월거 이용법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 후에는 그리니치의 중요성이 다소 줄어들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뱃사람들은 크로노미터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도 이따금씩 월거 측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항해력』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놓은 후, 출발 지점이나 목표 지점이 어디이든 간에 자연히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경도를 계산했다." "(매스켈린의 온갖 훼방에 시달리면서도) 존 해리슨은 자신의 해상 시계들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의 바다에 도전했다. 그리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제4의 차원─즉 시간─을 이용하여 삼차원적 공간인 지구의 각 지점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세계 각지의 위치를 알아냄으로써 별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그 엄청난 비밀을 회중시계 속에 가둬놓았다."(182-3, 191)]]></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170/78/cover150/89011523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707859</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비스마르크 / 김장수 - [비스마르크 - 살림지식총서 36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36824</link><pubDate>Fri, 07 Aug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3682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895221115&TPaperId=174368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4/42/coveroff/e8952211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895221115&TPaperId=1743682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스마르크 - 살림지식총서 361</a><br/>김장수 지음 / 살림 / 2013년 08월<br/></td></tr></table><br/>청년기의 활동<br>1847년 5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Ⅳ)는,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재원으로서 공채를 발행하기 위해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Der Vereinigte Landtag)를 개원한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에 따른 선거가 각 지방에서 실시되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브라우휘트쉬(Brauchitsch)라는 의원이 지병으로 의원 활동을 포기함에 따라 그는 1847년 5월 8일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실제적 대의회였던 통합지방의회는 온건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므로 왕권 및 귀족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우익 세력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의회에 진출한 비스마르크는 보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의 그러한 성향은 5월 17일 통합지방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그는 일부 의원들이 제기한 헌법 제정의 필요성을 반박했고 그것은 지방의회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9)<br>3월혁명 전후의 활동<br>오토(Otto) 대제 이후 약 천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에게 패배함으로써 멸망했다. 이후 제국의 영토는 나폴레옹의 보호국이 된 라인연방(Rheinbundstaaten), 호헨촐레른(Hohenzollern) 가의 프로이센, 그리고 합스부르크(Habsburg) 가의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등장한 독일 연방은, 35개의 대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Freistadt)로 구성된 엉성한 정치 체제였다. 그런 와중에 라인연방에서 시작된 독일의 산업 발전은 국내의 상공 시민들을 고무시켰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산업 발전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통합 시장의 형성 요구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프로이센의 경제인들은 1819년 북부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관세동맹(zollverein)을 체결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전 독일국가가 참여한 관세동맹이 1844년에 결성됨으로써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적 통일이 이룩될 수 있었다.10)<br>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성 파울 교회(St. Paul- kirche)에서 국민의회가 개최되었다. 국민의회의 최대 과제는 독일 연방을 하나의 통합 국가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별 영방 국가들을 그대로 둔 채 강력한 중앙 권력을 창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의회의 이러한 무력함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문제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두 공국은 오랫동안 덴마크 국왕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중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혁명을 계기로 이 지방의 독일계 주민이 덴마크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국민의회의 요청으로 파견된 프로이센군이 사태를 진압했으나,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휴전 조약을 체결했고 국민의회는 이 조약을 추후 비준했다. 이로써 두 공국의 독일계 주민은 국민의회로부터 배반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대다수 독일인 역시 그러한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2-3)<br>1851년 5월 15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 자신이 후에 인정했듯이 대사직은 한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이 당시 오스트리아 정치가들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국가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고 비스마르크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858년 3월 비스마르크는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후계자였던 빌헬름 왕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정리한 문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서 그는 베를린 정부가 빈 정부를 의식하지 말고 자기중심적인 정책, 즉 독자적인 정책을 펼쳐야만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면에는 프로이센의 국익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빈 정부는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비스마르크를 해임시키려 했고, 그러한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15-6)<br>1859년 1월 23일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었다. 3월 말 임지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펼쳤고 거기서 자신의 관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러시아 공사로서의 임기를 끝낸 비스마르크는 1862년 1월 22일부터 프랑스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근무했다. 그 기간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나폴레옹 3세(Napoleon Ⅲ)의 보나파르트 정책(Bonapartism)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그는 외교적 업적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나파르트 정책의 운영 과정을 세밀히 관찰해 그것을 향후 자신의 정책에도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나파르트 정책의 핵심 구도는 1860년대 초 군제 개혁(heeresreform) 과정에서 야기된 의회와의 충돌 및 1870년대 의회 내 반대 세력과의 대립이라는 내정 문제를 외교적 업적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 등에서 확인된다. 16-7)<br>현실정치가로서의 행보<br>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빌헬름 1세(Wilhelm Ⅰ)는, 섭정 지위에 있을 때 전쟁장관(kriegminister)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던 론(Roon)과 몰트케(Moltke)로 하여금 프로이센군을 증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병력 증강안에 대해 자유주의자들 역시 원칙적으로 견해를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비역 및 후비역 축소가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의 전통을 계승하고 군제 개혁가 등의 이상이었던 '무장화된 시민', 즉 시민과 군대가 결속되었던 전통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러한 우려에 대해 빌헬름 1세는 엄격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제 군제 개혁은 단순한 군사적ㆍ기술적 범위를 넘어 '시민의 군대인가, 국왕의 군대인가'라는 제도 이념적인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게 되었다. 빌헬름 1세는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18-9)<br>국왕과 의회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임시 수상(interimistische ernennung zum preussischen ministerpräsidenten)으로 임명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독일권이 주목하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권력이다. (중략) 오늘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것이 1848년과 1849년의 잘못이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와 철(blut und eisen)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라는 것을 언급했던 것이다. 하원의 반대로 차기 연도 예산이 확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점이론(Lückentheorie)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후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br>빈 정부가 독일 통합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비스마르크는 군사력 강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외교적인 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865년 10월 나폴레옹 3세를 비밀리에 만나 형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의 중립을 약속받았고, 1866년 4월 8일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3개월간의 한시적 군사 동맹 체제를 체결하여 오스트리아가 패배할 경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 합병도 인정한다는 약속을 했다. 물론 러시아와의 친선 관계는 그가 1859년부터 약 3년간 페테르부르크에서 대사로 근무할 때 이미 구축된 상태였다. 1866년 6월 21일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을 홀슈타인으로 출격시켜 형제 전쟁을 일으켰다.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은 프로이센의 후장총과 몰트케가 이용한 철도라는 획기적 이동 수단 때문에 패배했다. 이후로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되었다. 21-2)<br>독일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일권은 마인(Main) 강을 경계로 남북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6년 10월부터 마인 강 이북의 영방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연방 조직을 형성했다. 그것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 쿠어헤센, 그리고 나사우 등을 포함한 총 22개 영방으로 구성된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을 발족시켰다. 북독일 연방은 단순한 국가 연맹이었던 독일 연방과는 달리 중앙 권력을 갖춘 연방 국가의 성격을 가졌다. 마인 강 이남 지역에서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 특히 바이에른, 바덴(Baden),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 그리고 헤센－다름슈타트(Hessen -Darmstadt) 등과 비밀 공수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3세의 야심에 대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1867년에 개편된 관세동맹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에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내용적으로 보다 확대된 북독일 연방 및 프로이센이 군림하는 전 독일적 연방 국가의 원형이 창출되었다. 22-3)<br>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 통합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현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Schutzund Trutzbündnis)에 따라 이들 국가들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중립도 약속받았다. 또한 그는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안된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1871년 1월 29일 파리를 함락시켰다. 같은 해 5월 1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엘자스-로트링겐의 할양 및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23-4)<br>내정에 대한 관심<br>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탄생한 독일제국은 4왕국, 18공국, 3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2제국령(엘자스-로트링겐)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방 체제는 이전의 독일 연방처럼 여러 국가의 집합체도 아니면서 완전한 중앙집권 국가라고도 볼 수 없는 모호한 정치 체제였다. 왜냐하면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이 이전의 칭호 및 지위를 유지하면서 상원에 해당되는 연방의회(Bundesrat)에서도 압도적 의석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제국헌법에 의하면, 연방의회는 각국의 대표와 황제가 지명하는 60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입법권과 군사 및 외교상의 대권 등을 가져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러나 의원들 중 17명은 황제가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연방의회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황제권에 예속되었다. 이 당시 독일제국의 재상은 프로이센 수상도 겸임했다. 또한 그는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행정적 책임을 졌기 때문에 황제와 더불어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25-6)<br>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의 협력으로 군사예산 문제를 해결했지만 제국 창건 이후부터 급격히 성장한 반대파의 세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만 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부각된 것은 가톨릭계의 중앙당(Zentrumspartei)으로, 그 구성원들은 비스마르크의 통일 작업에 불신을 제기해 온 인물들이었다. 1870년 12월 라이헨스페르거(Reichensperger)의 주도로 창당된 이 당의 강령은, 국가로부터 교회의 제 권리를 지키고 각 영방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연방 체제의 도입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창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부 독일 국가들의 정치가들이 이 당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 및 가톨릭 주민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비스마르크는 로마교회에 굴복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Ⅳ)의 행보를 인용하여 '카노사(canossa)에는 결코 가지 않겠다'고 장담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양보 정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6-7)<br>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은 주가의 대폭락과 수많은 기업의 도산 및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국민자유당의 지원하에 자유주의적 제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독일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장기간의 공황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이제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을 대신하여 보수당과 중앙당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 견지한 경제 정책의 근간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즉,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부담금 역시 증액시켰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자신과 국민자유당 사이의 균열을 가져왔지만 보수당과 중앙당과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점차 제국의 새로운 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사회주의 추종 세력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27-8)<br>비스마르크는 1878년 10월 21일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Gesetz gegen die gemeingefährlichen Bestrebungen der Sozialdemokratie)을 통과시켜 사회민주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그러한 활동은 형법적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당원들은 경찰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은 2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890년까지 갱신ㆍ유지되었다. 1881년 11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사회 입법의 취지를 담은 황제 교서를 낭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호 및 부양 정책도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약 10년간 베를린 정부는 광범위한 사회복지 제도를 도입하는 데 적극성을 보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양분되었는데, 사회민주주의 탄압법 및 노동자 보호 입법에 반대했던 좌파와 달리, 우파 정치가들로 구성된 국민자유당은 사회 입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28-9)<br>실용적 외교 정책<br>1870년대 초부터 향후 약 20년 동안 비스마르크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Ära von Bismarck)'라고도 한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외교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현실정치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 통합 이후에는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신생국가 독일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43) 그러면서 비스마르크가 항상 고려했던 것이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복수전(revanchekrieg)이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독일을 공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동맹국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경우 프랑스의 복수전은 실현될 수 없다는 확신하에 프랑스의 고립화를 독일 외교 정책의 가장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이후부터 그는 프랑스의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러시아를 프랑스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30)<br>1873년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결성했던 삼제동맹은 붕괴될 위험이 컸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에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는 1887년 이 동맹 체제로부터 탈퇴했다. 여기서 비스마르크가 우려해 온 러시아와 프랑스의 접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막기 위해 1887년 6월 18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j Ⅱ)와 '재보장조약(Rückversicherungsvertrag)'을 체결했는데, 거기에는 독일과 러시아 중 어느 한 국가가 제삼국과 전쟁을 할 경우 다른 국가는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보장조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상호 방위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독일의 우방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알 수 없게끔 비밀 조약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가 수상직에서 물러나면서 그의 복잡하고 위험한 동맹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33-4)<br>실각의 과정<br>빌헬름 1세의 치세 말기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에 첫 번째 논쟁이 펼쳐졌다. 논쟁의 시발점은 유태인 및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슈퇴커(Stoeker)가 1878년 기독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을 창당한 것에서 찾아진다. 슈퇴커는 창당 이후부터 자신의 정당을 통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을 폄하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은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배척당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사회적 안정과 평화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의 갈등을 유발시킨 주된 요인은 바로 이러한 슈퇴커의 조직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빌헬름이 공식적으로 동조했다는 것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그가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신민 간의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슈퇴커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에 왕자가 동조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다. 35-6)<br>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갈등은 사회 정책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889년 5월부터 루르(Ruhr) 지방과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에서 15만 명에 달하는 광부들이 파업을 전개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고용주들을 옹호한 반면, 황제는 순진하게도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당시 황제는 자신이 "가난한 계층의 황제(roi des gueux)"가 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비스마르크는 인기에 영합하는 빌헬름 2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서도 양인은 견해를 달리했다. 빌헬름 2세는 탄압 위주의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려고 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의회에서 기존의 탄압법을 큰 수정 없이 그대로 연장시키려고 했다. 1890년 1월 25일 야당과 보수주의자들은 제국의회에서 비스마르크가 상정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의 연장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 대한 황제의 관점을 명확히 파악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38)<br>빌헬름 2세는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의 사직청원을 수용했다. 외양상 황제는 아쉬운 마음으로 비스마르크를 떠나보냈고, 악화된 건강 상태와 그에 따른 그의 청원이 해임의 주된 이유인 것처럼 행동했다. 1890년 3월 29일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의 레어테르(Lehrter) 역에서 프리드리히스루로 떠났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의 해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는데, 그의 해임으로 인해 유럽의 평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 정책에서 힘의 행보를 항상 올바르게 판단했고,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인지했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 그는 이러한 통찰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종종 부각되었던 중용 유지가 국내 정치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못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국내의 정치 세력을 외교 정책에서의 힘의 게임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국내 정치적인 상황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41-2)<br>은퇴 이후의 활동<br>빌헬름 2세는 「제국신문」에 정부 및 의회가 만장일치로 정한 비스마르크의 추도 기간 및 자신의 추도문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황제 시기에 이룩했던 업적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을 경우 무력과 피를 통해 그것들을 제거하겠다는 언급도 했다. 그런데 황제의 이러한 발언이 비스마르크를 잘못 이해하는 데 크게 일조한 것 같다. 또한 비스마르크를 칭송하는 문구들로 장식된 조형물들이 독일 전역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치가들 역시 빌헬름 2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은 그들이 펼쳤던 정책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들은 무력이란 방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아가디르(Agadir)로 군함 '판터(Panther)'를 출항시킨 것 자체가 바로 '비스마르크식 정치'라 생각했던 것이다. 47-8)]]></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4/42/cover150/e8952211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84425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박재용 -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근대 과학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29494</link><pubDate>Mon, 03 Aug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2949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036866&TPaperId=174294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22/18/coveroff/k65203686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036866&TPaperId=1742949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근대 과학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a><br/>박재용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01월<br/></td></tr></table><br/>제1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nbsp;<br>1장 그리스 자연철학&nbsp;<br># 이원론(현상계와 구분되는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 :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nbsp;<br># 일원론(우리가 감각하는 현상계가 실재 세계이다) :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엠페도클레스&nbsp;<br>"데미우르고스는 선하고 지혜로운 존재이기에 가능한 한 이데아를 닮은 완벽한 우주를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창조는 불가능했고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현상계가 만들어지게 되었죠. 재료 즉 '질료'(코라, khôra)의 한계 때문이라 합니다. 여기서 질료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는 아니고, 공간 그 자체 혹은 받아들임(receptacle)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창조가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필연'(anánkê)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인 활동 외에도 무작위적이고 비이성적인 힘, 즉 필연이 창조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필연은 논리적 필연성과 같은 의미보다는 강제성이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깝습니다. 이 필연은 우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로, 플라톤이 완벽한 질서와 불완전한 현실 사이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려고 도입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 이 필연이 창조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38)<br>2장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세계&nbsp;<br>"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주는 하나이자 둘이었습니다. 달보다 위쪽에 있는 천상계(celestial world)와 그 아래쪽의 지상계-월하계(terrestrial world)로 나뉘었지요. 그에 따르면 지상계는 물, 불, 흙, 공기라는 네 원소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이 되는 원소가 네 가지나 된다는 것은 각각의 원소가 어딘가 부족한 불완전한 요소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불완전한 속성을 가진 원소로 구성된 지상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천상계는 완전한 원소인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테르는 지상의 4원소가 가진 모든 속성을 스스로 가진 존재로 완전한 질료입니다. 따라서 이런 질료에 의해 구성된 천상계는 완전한 모습을 가집니다. 에테르(Aither)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핵심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테르를 '제5원소' 또는 '첫 번째 물질'(Prime Matter)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에테르가 지상계를 구성하는 4원소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진 실체임을 의미합니다."(67-8)<br>"『천체에 관하여』(De Caelo) 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체의 운동은 균일하고 끊임없는 원운동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물질(에테르)의 본성이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천체'란 항성천구, 즉 우주의 가장 바깥 경계를 이루는 천구를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항성천구의 원운동이 다른 모든 천체의 운동을 규정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천체들은 모두 항성천구에 고정되어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천체의 일차적 운동은 모두 완전한 원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성들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부차적 운동'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운동에 추가되는 보조적인 운동으로, 행성마다 고유한 속도와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차적 운동 역시 근본적으로는 원운동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69)<br>"하지만 불완전한 원소로 이루어진 지상계에서는 원운동이 불가합니다. 물과 흙의 속성을 많이 가진 물질은 아래로 내려가는 낙하 운동을 하고, 불과 공기의 속성을 가진 물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합니다. 이런 수직운동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죠."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지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여러 천체가 감싸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중심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지구는 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리고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천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천체론』, 제2권, 제4장) 이는 지구중심적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를 구성하는 것은 무거운 원소인 땅(흙)입니다. 지구 주위에는 물, 공기, 불이 층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습니다. 물은 땅 바로 위에, 공기는 물 위에, 불은 공기 위에 위치합니다. 지상계를 넘어서면 천상계가 시작됩니다."(71-2)<br># 『천체에 관하여』(De Caelo)가 원제목이며, 간단히 『천체론』이라고 부른다.<br>"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창조주는 관조의 신이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저 미신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의 창조주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전 우주의 운동의 제1원인이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동자는 완벽히 아름답고 불가분하며 완벽한 '관조'만을 '관조'하는 자라고 하지요. 즉 이 세상이 자신이 창조한 원리대로 움직이도록 하되, 개입하지는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 '기적'은 당치도 않는 행위지요. 창조자가 스스로 정한 원칙을 깨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원격으로 작용합니다.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서 벼락을 내리치듯이 말이지요. 그로서는 접촉 원리를 벗어난 일이 실제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은 훗날 중세에서 르네승스로 넘어가는 시기 유럽에서 대학과 수도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80)<br># 접촉 원리 : 지상계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힘은 접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원리.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br>3장 지구중심설 대 태양중심설&nbsp;<br>"문명세계 최초로 지구중심설(geocentrism)을 부정한 이들은 피타고라스학파입니다. 이들은 거의 태양중심설(heliocentrism)로 볼 만한 생각을 가진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의 중심에 거대한 불타는 구, 이른바 '헤스티아의 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스티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정과 화덕의 불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불의 수호자이자 가정의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였죠. 그들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불에 헤스티아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들이 이 불을 단순한 물리적 실체 이상의 것, 즉 우주 만물을 품고 길러내는 근원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겼음을 시사합니다." "사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천체들의 역행운동처럼 당대의 천문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이 맹신했던 기하학적 원리와 수의 조화를 우주에 투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짐작합니다."(98-100)<br>"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말 그대로 천문학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비주의적 경향과는 다른 과학적 견지에서 지구중심설 대신 태양중심설을 주장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에 대해 당시 다른 천문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 대다수는 반대합니다. 반대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 위에 있는 우리는 왜 그 힘(원심력)을 느낄 수 없는가라는 점입니다(지구 공전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공전하거나 자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원심력이 중력에 비해 워낙 작아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별의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별이 너무 멀어서 시차 자체가 너무 작아 볼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아리스타르코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지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101-5)<br># 별의 연주시차(年周視差) :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는 반년마다 반대쪽 끝에 도달한다. 두 지점에서 별을 보았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각도의 차이를 연주시차라고 한다.<br>"히파르코스는 기원전 2세기경에 로도스 섬에 천문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주로 활동한 그리스 천문학자로, 천체 관측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특히 별의 위치와 밝기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삼각법과 구면삼각법을 활용하여 천체의 운동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등 고대 천문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업적은 당시 지중해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지요. 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알마게스트』('천문학 집대성') 내용의 거의 삼분의 일 정도가 히파르코스가 발견하고 정리한 내용들로 채워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우주의 중심에 대한 히파르코스의 입장이 대단히 아리송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제자로 알려졌지만 딱히 태양중심설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구중심설을 확고하게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스승의 주장이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외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볼 뿐입니다)."(110, 113)<br>"프톨레마이오스는 역행운동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周轉圓, epicycle), 이심(離心, eccentric point) 등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각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큰 원(주원)을 따라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원 위의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원(주전원)을 따라 공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전원의 중심이 주원을 따라 움직이는 거죠. 이심은 행성 궤도(주원)의 중심이 지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행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걸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문제는 이렇게 해도 행성 궤도의 실제 관측결과와 잘 맞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다시 대심(對心, Equa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대심은 이심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장소인데, 행성의 주전원이 이 점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일정한 속도로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한 거죠. 그의 우주 모델은 매우 복잡하지만, 당시 이론 중에서는 관측 결과와 가장 닮았기에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116-8)<br>제2부 소멸, 복권, 균열&nbsp;<br>4장 헬레니즘 시대&nbsp;<br>"헤르메스주의(Hermeticism)는 그리스에서 상업, 여행, 전령의 신이자 정보와 의미를 관장하던 신인 헤르메스가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와 동일시되면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탄생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점성술, 연금술, 마법의 세 가지 능력을 가진 이 반신적 인물에 대한 종교철학적 숭배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던 거죠." "특히 그노시스주의는 헤르메스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영지주의'(靈智主義)라고 번역되는 이 사상은 기원후 1~2세기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유행한 종교 사상입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이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겁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을 신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연의 신비를 깨우치고 이를 자신의 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미시적 우주(microcosmos)로 여깁니다."(126-8)<br>"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수용 발전시켰는데, 그에 따르면 우주는 원자(atom)와 공허(void)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물질 입자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모든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보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운동에 대해 특히 주목했는데, 그는 원자들이 자유 낙하하듯 수직으로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아래는 우주의 중심을 뜻합니다. 이때 원자들은 모두 동일한 속도로 평행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에 중요 개념을 하나 추가하는데, 바로 '클리나멘'(clinamen, 라틴어로 기울어짐, 편향, 휘어짐)입니다. 이는 원자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미세하게 궤도를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원자 충돌은 상당히 우연한 경향이 있어 결정론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129-30)<br>#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일종의 다중우주론도 제시했다.<br>"'판단중지'(에포케, epoche)로 잘 알려진 피론주의는 기원전 4~3세기경 엘리스의 피론(Pyrrhon)에 의해 체계화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 피론은 감각과 이성으로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꿀이 어떤 이에게는 달게 느껴지지만 다른 이에게는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감각은 주관적이며 상황 의존적이라는 것이죠. 또한 이성으로도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같은 대상에 대해 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도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피론의 생각입니다." "피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판단중지 즉 '에포케'야말로 인간이 마음의 평정을 얻는 지름길이라 역설했습니다. 피론에게 에포케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평온한 삶을 위한 실천적 방법이었던 거죠.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우리는 독단적 믿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윤리관이었습니다."(133-4)<br>5장 이슬람으로 간 아리스토텔레스&nbsp;<br>"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수학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등의 업적으로 대표됩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하학의 체계를 세웠고, 아르키메데스는 원주율 계산과 적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아폴로니우스는 원뿔 곡선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인도 수학자들은 십진법과 0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음수를 도입했으며, 방정식 해법에서도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이 두 전통을 수용하고 종합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룹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관측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천체 관측을 위한 다양한 기기를 발명하고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정밀한 관측 기록을 남기고 새로운 천문 현상을 발견합니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관측 결과와 프톨레마이오스 이론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지구중심설을 유지한 상태로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죠."(147, 150-1)<br>"아리스토텔레스는 투사체가 계속 움직이는 이유를 주변 공기의 작용으로 설명했지만, 이븐 시나(Ibn Sina)는 이러한 설명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봅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공기는 투사체를 앞으로 밀어주는 동시에 저항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븐 시나는 같은 매질이 이렇게 상반된 작용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모순된다고 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라면 투사체의 속도는 급격히 감소해야 하는데, 실제 관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븐 바자(Ibn Bajjah)는 물체의 낙하 운동을 연구하여, 운동의 속도와 시간, 거리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정 속도 낙하 이론과 대비되는 중요한 관찰입니다. 이븐 바자는 비록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낙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분석을 시도합니다."(153, 156)<br>"플라톤과 유클리드가 주장한 '방출설'은 눈에서 광선이 나와 물체에 닿아 시각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형상'이 매질을 통해 눈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합니다. 알 하이삼은 이러한 기존 이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와 시각을 일으킨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합니다." "알 하이삼의 광선유입설은 빛을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로 보고, 눈을 빛을 수용하는 정교한 광학 기관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는 이후 렌즈와 망원경 발명 등 광학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됩니다. 그의 책 『광학 서설』은 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고, 로저 베이컨, 비텔로, 케플러 등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에는 『광학 서설』이 일종의 교과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또 이 책은 원근법 연구에도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157-9)<br>6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복권에서 균열까지&nbsp;<br>"12세기부터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들어오면서 유럽 지성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특히 대학들부터 먼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업의 중심으로 삼았죠." "왜 대학들은 교회와 여러 번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와 수업의 중심으로 삼게 된 걸까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모두 다루면서도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또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쉽게 말해서 강의용 교재로는 그만이었죠. 특히 『논리학』이 그러합니다. 대학 교육에 딱 맞았습니다. 이런 이유에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융합한 스콜라철학을 만들고 신학의 주류가 되면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수가 된 점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우는 건 신학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죠."(178-80)<br>"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업의 중심이 되면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먼저, 학문이 더 세속적으로 변합니다. 이전 수도원 학교나 초기 대학에서는 대부분 신학이 중심이자 대부분이었죠.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도 커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이성적 능력을 강조하고, 논리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이런 태도 때문에 대학에서도 계시나 권위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철학도 독립했지요. 원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리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어오면서 철학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 잡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방식도 바뀝니다. 이전에는 성경과 교부들의 책을 암기하고 반복하는 방식과 강의가 주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글에 대한 주석을 학습하는 것이 추가되었죠. 하지만 이제 책을 같이 읽고 해석하는 강독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그리고 논리적 분석과 비판적 사고가 주된 교육 방법이 됩니다."(180-1)<br>"르네상스가 본격화하면서 일어난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중세의 전성기 혹은 번역 르네상스 시기 이래로 유럽 지성계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어 원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학자들은 중세 시대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원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이는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죠. 인문주의 운동의 확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4세기 페트라르카를 시작으로, 15세기의 로렌초 발라, 그리고 16세기 초의 에라스무스는 고전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와 수사학적 분석을 강조했습니다." "16세기 들어 항해술, 광산업, 농업 등 실제 경험에 기초한 지식이 중요해지면서, 순수하게 이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죠. 17세기에 이르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등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제시가 이루어집니다."(184-5)<br>제3부 과학혁명&nbsp;<br>7장 새로운 철학, 새로운 방법론&nbsp;<br>"프랜시스 베이컨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선험적 관념에 끼워 맞추는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중세 스콜라철학이 빠졌던 함정이기도 했습니다. 경험과 실험보다는 권위자의 텍스트에 의존하고, 자연의 모습보다는 신의 섭리를 입증하는 데 골몰했던 것입니다. 반면 베이컨은 물체나 생명체의 작동 방식을 꼼꼼히 관찰하고 실험하며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귀납적으로 도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자연의 '목적'이 아니라 '기제'(mechanism)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 실험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은 제목부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한 일종의 도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오르가논』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새로운'이란 뜻의 '노붐'을 붙인 거죠. 베이컨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와 연역법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206-7)<br>"데카르트는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봅니다. 〈이 우주 즉 물질적 실체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다〉는 그의 말은 당시 떠오르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가 창안한 해석기하학입니다. 해석기하학은 기하학적 문제를 대수학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하나의 연구 방향을 제시합니다. 자연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갈릴레오, 뉴턴 등 동시대 과학자들의 연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과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가집니다. 수학에서는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주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옵니다. 기하학과 대수학을 연결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수학적 도구를 만들어내고, 이는 후에 미적분학 발전의 한 토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좌표계도 데카르트가 제안한 것입니다."(214-6)<br>"스피노자에 따르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가 바로 신 또는 자연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별개의 실체로 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으로 파악합니다." "그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자연의 통일성과 법칙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과학자들이 자연현상 이면의 보편적 원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연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는 자연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접근방식과 맥을 같이 합니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 윤리학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의 필연적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자 독자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216-7)<br>8장 천문학 혁명&nbsp;<br>"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성과 비일관성에 불만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체계를 고안합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를 완전히 뜯어고치지는 않습니다. 천구도 그대로 있고, 행성과 지구가 천구에 고정되어 도는 것도 그대로입니다. 단 하나 태양과 지구의 위치만 바뀌었습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하학적으로 우아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지상 명제 '원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받들었던 것뿐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태양과 지구를 맞바꾸는 것만으로 행성 궤도를 완전히 원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행성들이 원 궤도를 돌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체계에 있던 이심과 주전원 개념을 그대로 도입합니다. 모두 원운동을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함을 비판한 그였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 역시 여전히 복잡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221-2)<br>"1587년 튀코 브라헤는 『새로운 천문학 입문』을 펴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독특한 우주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이 모델은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전통적인 지구중심설 사이의 타협안으로 여겨졌으며, 관측 데이터와도 잘 맞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별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또 하나의 깊고 굵은 상처를 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우주에는 어떠한 새로운 천체도 생길 수 없고, 존재하는 무엇도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단 하나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별이 생겼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14개월에 걸쳐 꼼꼼하게 기록해서 내밀었지요. 마찬가지로 혜성의 발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커다란 구멍을 냅니다. 혜성이 행성들 사이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발견은 천구(Celestial spheres)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행성들의 역행도 견디기 힘든데 그보다 더 괴상한 궤도를 도는 녀석이 우주에 있었던 거죠."(224-6)<br>"요하네스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의 지지자였습니다. 애초에 튀코의 모델이든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든 지구중심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요. 태양을 중심으로 튀코의 관측 자료를 원운동 궤도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겨우 관측 결과와 가장 유사한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케플러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지요. 평균적으로 '2분'의 범위 내에 일치하는 모델이기는 했습니다만 특정 지점에서 8분의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8분의 오차. 원을 360등분한 것 중의 하나가 1도이고 그 1도를 다시 60등분한 것 중에 8에 해당하는 오차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믿음과 관측 결과가 다를 때 무엇을 따를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케플러는 관측 결과를 따랐지요. 자신이 온전히 믿고 있던 우아한 기하학의 우주, 그 근본이 되는 원 궤도를 스스로 부정하고 타원 궤도를 도입합니다. 케플러의 제1법칙입니다. '행성은 태양을 그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돈다.'"(229-30)<br>"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금의 쌍안경보다 못한 망원경으로 금성의 위상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것을 관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늘을 봤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서는 금성은 항상 태양의 앞쪽에서 지구 주위를 돕니다. 그럴 경우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의 모습은 항상 반달보다 더 얇은 모습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금성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 뒤쪽에 있는 금성이 보름달 모양으로 동그란 걸 볼 수 있습니다. 지동설의 결정적 증거지요." "그에 비해 목성의 위성 네 개를 발견한 것은 일종의 우연과 목적의식이 겹친 일일 것입니다. 지동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금성의 위상변화와 함께 역행운동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찰하기 좋은 행성이 목성과 화성이지요. 그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은 아마 목성의 역행 운동을 관찰하기 위해 매일 그 주변을 살피다 일어난 일이겠지요."(237-9)<br>9장 역학 혁명&nbsp;<br>"갈릴레오는 최초로 '관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관성은 지금 우리가 배우는 관성과는 좀 달랐습니다. 갈릴레오에게 관성운동이란 등속 원운동입니다. 즉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의 작용이 없으면 계속 등속 원운동을 한다는 뜻이지요. 갈릴레오에게는 (직선운동이 아니라) 등속 원운동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만의 주장이 아니었죠. 플라톤도 그렇게 말했고, 히파르코스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 이가 없을 정도지요. 그러니 갈릴레오에게도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운동이 천체에 내재된 속성이라는 점도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따라서 갈릴레오에게는 하늘의 기본적 속성인 원운동이 지상에서도 구현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255-6)<br>"그런데 사고실험이라든가 포물선에서 설명하는 것은 모두 직선인데 무슨 원운동이냐는 의문을 가질 법합니다. 갈릴레오에게 직선은 원의 근사적 표현일 뿐입니다. 갈릴레오가 생각할 때 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지구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큰 구(sphere)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태양중심설의 중요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내려오는 문제제기이지요. 만약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원 궤도로 돈다면 왜 우리는 원심력을 느끼지 못하느냐는 첫 번째 문제와, 왜 지구가 원 궤도를 도는데 우리는 지구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느냐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겁니다.(첫 번째 문제는 8장에서 다룬 연주시차입니다.) 하늘의 천체처럼 그리고 지구처럼 우리도 모두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한 번 시작된 원운동을 계속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고대 때부터 이어진 태양중심설에 대한 지구중심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257-8)<br>"상대성 원리의 개념을 처음 떠올린 사람도 갈릴레오입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에서 '절대적인 운동'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모든 운동을 '상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구라는 절대적인 운동의 기준에 따른 우리 일상의 직관과는 다르지만, 우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갈릴레오는 배 안에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한 사고실험을 통해, 배가 정지해 있을 때나 등속으로 움직일 때나 물체의 운동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었지요. 즉 배 안에서 공을 떨어뜨리면 배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공은 배 안의 똑같은 지점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실험들은 운동의 상대성이라는 혁명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할 수 있었지요. 지구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지구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가정했을 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266-7)<br>10장 뉴턴&nbsp;<br>"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이 암시하는 바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행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고 태양에 가까울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끌어당기는 힘을 받기 때문이라고 보았죠. 뉴턴은 이 힘을 만유인력, 즉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라고 가정했습니다. 다음으로 갈릴레오가 중력을 지구 중심을 향한 힘으로 본 반면, 뉴턴은 중력을 모든 질량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반화했죠." "뉴턴은 미적분학을 사용하여 만유인력에 의한 물체의 운동 방정식을 유도했죠. 이 방정식으로부터 그는 케플러의 세 법칙을 모두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혜성의 운동, 조석 현상 등 다양한 천문 현상을 만유인력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이전까지의 행성 운동 이론을 종합하고 극복한, 보편적인 역학 법칙을 확립했습니다. 또한 만유인력 이론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유낙하운동이나 경사면 운동, 포물선 운동에도 적용됩니다."(275-6)<br>"뉴턴은 데카르트의 관성 직선운동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운동 제1법칙으로 정립했습니다. 관성의 법칙인 뉴턴 제1법칙에 따르면, 물체는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등속 직선운동을 유지합니다. 다음으로, 뉴턴은 갈릴레오의 낙하 운동 연구를 발전시켜 가속도의 법칙인 운동 제2법칙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물체의 가속도가 힘에 비례하고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했죠. 이는 힘과 운동의 관게를 정량적으로 규명한 획기적 성과입니다. 또한 뉴턴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운동 제3법칙을 통해,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역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밝혔죠. 이는 데카르트와 하위헌스의 충돌 연구를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자신의 운동 법칙을 바탕으로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연구되던 역학의 여러 분야를 하나의 통합된 체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80-1)<br>"뉴턴의 역학 이론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절대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절대 공간은 그 안에 존재하는 물체와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고 부동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시간을 사건들의 연속 순서로 이해했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공간 역시 라이프니츠에게는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는 공간이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 관계로 정의된다고 보았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다면 그 물체의 위치나 운동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치와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9세기 말 에른스트 마흐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집니다."(290-2)<br>11장 데모크리토스의 후예들&nbsp;<br>"진공은 예로부터 불신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은 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부정하여 물질과 물질 사이에 진공을 두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진공이었지요. 그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보다 더 많은 진공으로 에워싸인 곳입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긴 유리관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실험을 하지요. 여러 다양한 실험을 통해 토리첼리는 관 속의 수은이 밑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그릇의 수은을 누르고 있는 공기의 힘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더불어 유리관의 위쪽 수은이 빠져나간 곳은 진공이 되었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러나 토리첼리는 갈릴레오의 예상만큼 명민했기에 자신이 한 실험이 미칠 파장도 예상했습니다. 그는 아주 친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입을 다뭅니다. 일찍이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리고 스승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과 싸워 어떠한 결과를 얻었는지 알고 있던 그였으니까요."(296-8)<br>"갈릴레오의 진공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사람은 아일랜드 백작의 아들 보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첼리가 자신의 발견을 숨긴 것과 달리 보일은 적극적이었습니다. 물론 로마로부터의 거리도 멀고 종교도 다르니 별다른 두려움도 없었겠지요. 그는 새로운 진공펌프를 이용해 진공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입증합니다. 그는 나아가 진공 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못하지만 빛은 진공을 뚫고 진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지요. 이제 진공은 더 이상 불신자의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보일은 연금술(Alchymist)의 전통과 결별하고 회의하는 과학으로서의 화학(Chymist)을 선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도, 파라켈수스가 제안한 3요소(유황, 수은, 소금)도 거부합니다. 그는 세상 만물이 더 이상 다른 물질로 분해되지 않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혼합물과 달리 화합물은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299-300)<br>"19세기 후반, 열역학의 발전과 함께 원자론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열역학과 원자론을 결합하여 통계역학을 정립했습니다. 볼츠만의 접근은 물질이 원자나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적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아직 물리학자들에게 원자론이 수용되기 전이었기에 당시로은 대담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 분자 운동론을 발전시키면서 열역학 법칙을 통계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기체를 수많은 분자의 집합으로 보고, 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온도, 압력, 엔트로피 등 열역학적 물리량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볼츠만의 스승이었던 에른스트 마흐는 원자론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마흐는 과학적 지식이란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실증주의 철학을 견지했습니다. 그에게 원자와 분자는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과학 이론의 기초가 될 수 없었습니다."(313-4)<br>12장 생물학 혁명&nbsp;<br>"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첫 번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박물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집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적 유산이 재발견되고, 신대륙 탐험을 통해 신기한 동식물들이 속속 유입되면서 이를 연구할 필요가 생긴 거죠." "16~17세기를 거치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점차 분류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 박물학의 발전은 전통적인 종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죠. 신대륙의 생물들은 기존의 분류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주머니쥐나 아르마딜로는 유럽의 분류 체계에 맞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화석 연구는 멸종한 생물들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조르주 퀴비에가 발견한 매머드나 마스토돈 화석은 현존하지 않는 생물의 증거였습니다. 이는 곧 종이 불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죠."(319-21)<br>"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 의학의 오류를 하나둘씩 발견해 나갑니다. 가령 갈레노스는 심장에 구멍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베살리우스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냅니다. 개, 원숭이 등의 동물 해부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인체에 그대로 적용한 갈레노스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 거죠. 1543년, 베살리우스는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인체 구조에 관하여』를 출간합니다." "갈레노스는 혈액순환에 대해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온몸으로 퍼져 조직에 흡수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윌리엄 하비는 이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갈레노스의 이론대로라면 매일 만들어야 할 혈액량이 너무 많았던 거죠. 하비는 동물 해부 실험을 통해 혈액순환의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개구리, 뱀,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의 심장을 관찰했는데, 심장이 규칙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혈액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1628년 하비는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합니다."(322-5)<br>"과학혁명 시기 새로 등장한 도구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망원경과 현미경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현미경이 생물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1660년대입니다. 영국의 로버트 훅이 복합 현미경을 개발하면서부터죠. 훅은 코르크 조직을 관찰하다 벌집 모양의 작은 방들을 발견했는데, 이를 '셀'(cell)이라 명명합니다."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매우 정교한 단렌즈 현미경을 제작했는데, 무려 300배에 이르는 배율을 자랑했죠. 1674년, 레이우엔훅은 연못물과 침 등에서 작은 '애니멀큘레스'(animalcules)가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죠. 하지만 관찰을 거듭하며 미생물이 엄연한 생명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훅의 세포 발견은 생명의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를 밝혀줬고, 레이우엔훅의 미생물 발견은 자연발생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현미경에 의한 생물학 혁명의 시작에 불과합니다."(326-7)<br>맺는 글: 과학혁명과 근대 과학의 탄생]]></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22/18/cover150/k65203686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522183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아침</category><title>생각의 역사 /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 - [생각의 역사 -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14217</link><pubDate>Mon, 27 Jul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142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934559&TPaperId=174142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5/56/coveroff/k02293455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934559&TPaperId=174142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각의 역사 -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로</a><br/>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br/></td></tr></table><br/>서문<br>"내가 〈아이디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생각이고 그것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생각은 경험을 능가하며 단순한 예측보다 탁월하다. 아이디어는 평범한 생각과 다르지만, 이는 그것이 그저 새로운 것이어서만이 아니라 예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는 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아이디어는 환영이나 영감의 형태를 띨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신적 '환각'이나 머릿속의 음악(가사가 없거나 가사가 붙기 전까지의 음악)과는 다르다. 아이디어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델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는 〈우리의 생각(What We Think)〉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것은 과거에 시작된 아이디어 중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각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거나 우리 시대에 새로 등장한 문제에 대처하도록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적 무기고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다. 이 아이디어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지혜 또는 우몽의 배경을 이룬다."(8-9)<br>제1장 물질에서 나온 정신: 아이디어의 주요 원천<br>"인간 사유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는 아마도 '상상력'─판타지아, 혁신성, 창조성, 오래된 생각을 새롭게 다듬는 능력, 새로운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 영감과 황홀경의 모든 결실─일 것이다. 상상력은 크고 거창한 단어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한 가지 현실에 해당한다. 상상력이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극도로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까? 나는 상상력의 구성요소로 세 가지 능력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기억력이다. 기억력은 우리가 발명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 능력 중 하나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만들 때 언제나 이전에 생각했거나 만든 것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대부분 기억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그러니까 기억이 정확하고 실제 과거에 충실하며 미래를 위한 토대로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상력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나쁜 기억력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40-2)<br>"인간의 비효율적인 기억력은 기억력과 상상력의 차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차이는 어떤 경우든 그리 크지 않다.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기억력도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감각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앞서 정의된 것처럼 상상력이 실제로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라면, 기억력은 거기에 더는 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기억력은 특수한 형태의 상상력이다. 기억력은 사실과 사건의 표상을 형성함으로써 작동한다. 이것은 상상력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따금 삶은 상식(common sense)을 왜곡한다. 현실에서 기억과 상상은 융합한다. 그런데 기억은 허위일 때 상상력과 가장 가깝다. 기억의 창조적인 힘은 회상을 왜곡하는 데 있다. 거짓 기억은 현실을 환상으로, 경험을 추측으로 재구성한다. 우리는 오래된 일을 잘못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셈이다. 우리는 과거를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과 뒤섞고 난도질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51-2)<br>"상상력은 예측력 이상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부분적으로는, 예측력의 과잉으로 빚어진 결과다. 일단 우리가 적이나 먹잇감, 문제, 결과 따위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개연성이 더 적은 대상,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았거나 눈에 보이지 않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새로운 종, 과거에 먹어보지 않은 음식,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음악, 환상적인 이야기, 새로운 색깔, 괴물, 요정, 무한대보다도 거대한 어떤 수, 신 등을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무(無)'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아마도 상상력이 이루어낸 가장 대담한 도약이었을 것이다." "상상력은 예측력과 기억력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상력은 진화의 일반적인 결과물들과 달리 생존 요구를 넘어서고 우리에게 어떤 경쟁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문화는 상상력에 보상을 제공하고 그 지위를 드높임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한다."(62-3)<br>"기억력·예측력과 더불어 언어는 상상력의 마지막 재료다. 내가 여기서 '언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상징체계다. 언어는 몸짓과 발화의 합의된 패턴이나 기호의 체계다. 이 몸짓과 발화는 실제 대상과 명백한 유사성을 반드시 띠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가 가진 증거에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고안한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더 많다." "당연히 일단 우리가 상징의 레퍼토리를 갖게 되면 상징이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다. 그리고 상징이 많을수록 결과도 더욱 풍부해진다. 언어(또는 모든 상징체계)와 상상력은 서로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언어가 사용하는 기호는 대부분 임의적이고 실제 대상과 유사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해를 빚을 가능성은 증가한다. 오해는 유익할 수 있다. 흔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래된 아이디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언어는 성공적인 의사소통 못지않게 왜곡과 재앙을 통해 아이디어의 형성과 혁신의 흐름에 이바지한다."(64-8)<br>제2장 생각을 채집하다: 농경 이전의 사고<br>"유물론은 세계를 보는 가장 오래된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호미닌 조상들은 필시 유물론자였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망막에 맺힌 인상들이 그들이 가진 최초의 생각들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사지의 떨림과 장기의 동요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표면은 안에 있는 것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5세기 말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듯 〈진실은 심층에 있다.〉 경험들을 비교하고 그로부터 추론을 끌어내는 데 관심이 있는 생물체는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과 상충된다는 것, 감각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식을 축적한다는 것, 우리는 결코 가상(假像, semblance)의 끝에 도달했다고 가정할 수 없음을 알아챌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꼭 감각만을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디어는 만능키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정신 세계로 가는 열쇠였다. 이 아이디어는 무한한 사변의 파노라마를 열어젖혔다. 나중에는 종교와 철학이 이 사상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106-8)<br>"똑같이 오래되었고 광범위한 인류학 문헌에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디어는 모든 사물에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 개념은 가령 '무엇이 하늘을 푸르게 만들고, 물을 습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따라 나온다. 푸름은 하늘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색깔이 바뀐다고 해서 하늘이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습함은 어떨까? 이것은 다른 문제 같다. 마른 물은 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습함은 물의 본질적 속성이다. 어쩌면 모든 속성의 기저에 단일한 실체가 자리해 있어 이 의견상의 충돌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그러한 질문을 계속 한다면 당신은 관련된 대상의 본성에 관한 심층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만일 인류학적 증거에 기댈 수 있다면, 가장 오래된 대답 중 하나는 보이지 않고 보편적인 동일한 힘이 모든 것의 본성을 설명하고 모든 활동이 실행되게 한다는 것이었다."(116)<br>"자연을 무척 친밀하게 알고 있었던 초기 인간들은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체계적인 것은 어느 일부분을 통제함으로써 조작이 가능하다. 이렇듯 자연을 조작하려는 노력 중에서도 주술은 가장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방법이다." "주술과 과학은 같은 선상에 있다. 양자 모두 자연을 지성으로 지배해 인간의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주술 아이디어는 두 가지의 뚜렷하게 다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우리는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그려낼 수 있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둘째, 정신은 이러한 원인을 불러내어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을 장악할 힘을 획득한다. 주술은 진정 강력하다. 지금도 주술은 자연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인간에게만큼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모든 사회에서 되풀이해 나타난다. 숱한 실망들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118-9)<br>"일단 코스모스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에 관한 초기 개념에 영감을 주었다고 잠정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 자연은 언뜻 카오스 즉 무질서한 상태로 보이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아래나 내부에는 세계를 지탱하는 질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추론에 도달하려면 커다란 정신적 도약이 필요하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생성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이 아이디어가 생기자 우주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를 갖게 된 정신들은 세계 전체를 단일한 체계 안에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에서 질서는 각기 다른 사람에게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사람들의 행동을 어떤 모범이나 양식에 맞추기 위한─모든 노력에서 질서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주 먼 고대에도 사회적 규범이 있었음이 확인된다."(137-9)<br>제3장 정착된 정신: ‘문명화된’ 사고<br>"농경 사회는 기근이 반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풍요로운 일상이 배경을 이루었다. 농사는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 농사는 모든 전문화된 경제 활동의 형태를 고루 갖출 만큼 큰 정착지에 식량을 조달했다. 도시에서 기술은 더욱 정교해지고 향상되었다. 〈사회적 본능은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준 것이지만 가장 큰 은인은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했다. 도시는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수단 중 가장 급진적인 수단이다. 인간은 세상의 풍경을 속속들이 재상상한 새로운 거주지로 뒤덮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고안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세심히 조성한 새 환경이었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지혜에 따르면 카오스란 〈벽돌이 하나도 놓이지 않고 (···) 도시가 하나도 건설되지 않은〉 때였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았다."(167-8)<br>"낭만과는 거리가 멀게도 문자는 일상적인 발명품이었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지금까지 문자와 관련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이론의 여지 없이 상인들이 사용한 꼬리표나 물표이거나, 세금 또는 공물 징수원이 종류와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한 자료였다." "위대한 문학이나 중요한 역사 기록처럼 소중한 내용은 직접 외워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시인의 걸작이나 현자의 지혜는 일반적으로 구술로 전해졌고 수 세기가 지나서야 예찬자들이 이를 문자로 받아적었다. 그전까지 문자로 옮겨 적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 "전문가들은 문자를 국가의 필요에 맞게 조정했고 이어 법을 성문화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최초의 법규는 아마도 사례들로부터 추출한 일반론, 즉 모든 종류의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변형된 계율들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법을 신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중반 중국과 그리스에 세속적 법률 이론이 등장할 때까지 이 추세는 계속되었다."(184-7)<br>"우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아이디어가 현대적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어느 시대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평등한 시대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대부분의 문화는 오늘날의 악덕을 고발하기 위해 '참으로 좋았던 과거의 한때'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고대 이집트의 속담은 그러한 시절을 〈신들의 뒤를 이었던 시대〉라고 불렀다. 〈지혜의 책들이 그들의 피라미드였던 시대, 여기 누구라도 [그들과] 같은 이가 있는가?〉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서사시인 기원전 제2천년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는 운하, 감독관, 거짓말, 질병, 노년 등이 존재하기 전의 시대를 그렸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 또는 5세기의 『마하바라타』에는 같은 주제의 고대 인도 전통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축복받은 세계,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지 않은 세계였다."(188-90)<br>"유한 계급은 법을 고안하고 국가를 규정했으며 새로운 통치 개념을 발명하고 여성과 커플들에게 새로운 역할과 의무를 배정했다. 그들은 이제 당장에는 급하지 않은 생각,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철학적 또는 종교적 사색으로 분류할 만한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었다. 개개인들을 코스모스에 관한 사색으로 이끈 이들 세 가지 아이디어는 운명이라는 아이디어, 불멸성의 아이디어, 그리고 영원한 보상과 처벌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운명, 불멸성, 영원한 처벌 모두 사회적 유용성을 위해 떠올린 아이디어로 보인다. 똑같이 위대하지만 언뜻 유용성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세계는 환상이라는 아이디어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은 창조적인 힘이라는 아이디어다. 후자는 사유에 대해 사상가들이 품은 자기 본위의 존경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 시기의 전문 지식인들은 여러 가지 철학적 또는 원시 철학적 문제들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아니면 적어도 이 문제들을 최초로 기록했다)."(197, 204, 207)<br>제4장 위대한 현자들: 이름을 남긴 최초의 사상가들<br>"지금의 우리에게 종교처럼 보이는 것(오늘날 이해하는 방식대로의 종교)이 당시의 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 종교와 주술을 구분하는 선은 이따금 과학과 주술을 가르는 선처럼 흐릿하다. 이 시기의 전설은 종교 창시자들을 마법으로 보이는 것들과 연결시킨다." "전통적인 주술에 진 빚이 얼마나 많든 새로운 종교들은 인간이 자연이나 모든 신적인 것과 맺은 관계를 조정할 진정으로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모든 새로운 종교들은 형식적 의례와 더불어 도덕적 실천을 옹호했다. 단순히 유일신이나 여러 신에게 정해진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윤리를 바꾸라고 요구했다. 자연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하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발전을 위한 여정을 밟아나감으로써 추종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현세에서든, 죽어서든, 시간의 끝에서 이루어질 변화에 의해서든, 선의 완성 또는 〈악으로부터의 구제〉를 약속했다. 이 새로운 종교들은 단순히 생존의 종교가 아닌 구원의 종교였다."(222, 228)<br>"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개념의 주창자들은 통념적인 지혜와 겨루고 있었다. 그들이 이 주장을 얼마나 열렬히 내세웠는지가 이를 예증한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중국에서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깨어난 뒤 혹시 자신이 실제로는 사람이 된 꿈을 꾸는 나비인 것은 아닌지 궁금히 여겼다. 장자보다 조금 앞선 플라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을 보고 비슷한 의심을 품었다." "우리가 아는 한 피타고라스는 수가 실재한다고 말한 최초의 사상가다. 분명 수는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방법이다. 꽃 두 송이, 파리 세 마리.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수는 그것이 열거하는 사물들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수는 그저 형용사가 아닌 명사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는 아키텍처이고 코스모스는 이에 따라 건설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를 〈만물은 수〉라고 표현했다. 만일 당신이 수가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초감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셈이다."(246, 251-2)<br>"기원전 제1천년기 이전에는 아무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었다. 과학은 종교적이었으며 의학은 주술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사상가들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과학과 이성으로 저글링 묘기를 했다. 이때 발생한 충돌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조적 과학─반대자들은 이것을 '과학주의'라고 부른다─과 영적 사유방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화 전쟁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자연적 원인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주술을 다양한 수위에서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쫓아냈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을 완전히 탈신성화할 수는 없었다. 영혼과 악령이 물러나자, 현자들의 정신에서 자연은 대체로 신의 손에 남겨졌다. 중국에서 황제들은 여전히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를 거행했다. 서양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재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고난의 원인을 죄악에 돌렸다. 과학은 결코 종교와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없다."(258-60)<br>"현자들의 노력이 과학과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면 그 노력의 또다른 가닥은 윤리와 정치에 관한 생각을 고무했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에 무관심한 정신은 선과 악의 구분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또는 악을 억제하고 싶다면, 한 가지 확실한 수단은 국가다." "모든 정치 사상은 도덕적·철학적 가정에 의해 형성된다. 사상가가 인간의 조건에 관해 얼마나 낙관적이었는지 또는 비관적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정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낙관론자는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방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구제 불능이며 사악하거나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약적이고 억압적인 제도를 선호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유를 강조하고 인간의 선함을 풀어내려 한다. 보수주의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억누르려 한다."(269-72)<br>제5장 신앙을 생각하다: 종교적인 시대의 아이디어들<br>"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상자는 신학과 교회학만으로 불완전하다. 믿는 자에게 유익하며 세계가 나아지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윤리 체계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 가장 급진적으로 이바지한 성 바울의 아이디어는 가장 영감이 넘치면서 가장 문제적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성 바울은 신은 구원을 내릴 때 구원을 받는 자의 공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성 바울은 「에베소서」에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 바울이 거듭 단언하듯 구원받은 자의 공적 때문이 아니었다. 이 교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교회는 이 입장을 항상 공식적으로 옹호했다─우리가 행한 선은 신이 베푼 호의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는 아이디어─에서 암울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는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느낀다."(302-3)<br>"이슬람교는 도덕적 사상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기독교보다 단순하고 현실적인 교리를 내놓았다. 이슬람은 직역하면 '순종' 또는 '복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에 응답하라고 개개인에게 요청한 반면 무함마드는 더 직설적으로 신의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예언자이자 통치자였던 무함마드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한 청사진 역시 제시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세속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과 달리 무슬림들은 두 영역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교는 예배의 방식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었다. 칼리프─직역하면 무함마드의 '계승자'라는 뜻이다─는 이 모든 영역을 관장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남긴 율법은 어떻게 보아도 포괄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8세기와 9세기 스승들이 창설한 율법학파는 이 빈틈을 메우고자 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생전에 남긴 가르침들을 수집해 일반적인 명제들을 수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상식 또는 관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312-3)<br>"이슬람교는 점차 수백 갈래의 분파 및 하위 분파로 나뉘었다. 다양한 칼리프 선출 방식들은 양립할 수 없었고, 칼리프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슬람교는 갈수록 더 큰 균열을 겪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한 세대 이내에 생긴 갈등의 골은 이후 절대 메워지지 않았다. 분열은 갈수록 더 확대되고 분파는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에서 통치자나 국가가 칼리프 또는 칼리프에 준하는 지위의 권위를 가로챘다. 그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또는 최근 들어 〈현대화〉나 〈서구화 추세〉를 명목으로 샤리아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을 때마다 혁명가들은─갈수록 더 자주─무함마드의 망토를 깃발 삼고 무함마드의 책을 무기 삼아 통치자들을 〈변절자〉라고 부르며 비판을 제기했다. 무함마드는 삶의 모든 측면을 관장하는 보편적 행동 수칙인 '샤리아'를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샤리아를 재해석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무슬림들도 이 일을 누가 맡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314)<br>"15세기 초, 장 제르송(Jean Gerson)은 세속 정부와 교회 정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이후 서양 세계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기원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국가는 죄악 때문에 발생했다. 에덴동산의 바깥에서는 부정한 행위의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자원을 모으고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었다. 시민들의 합의는 국가의 유일한 정당한 토대다. 신이 내려준 교회와 달리, 국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물로서 역사적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고 암묵적 갱신에 의해 유지된다. 군주정의 경우, 통치자의 권력은 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사람들이 왕에게 운영을 맡기는 것이 골자를 이루는 계약에 따른 것이다. 국가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문제는 사회계약론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국가에 계약적 토대가 있다는 아이디어는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다."(342-3)<br>제6장 미래로의 회귀: 흑사병과 추위를 통과한 생각<br>"생물군의 변화는 우리가 사는 행성의 표면을 농업의 발명 이래 그 어떤 혁신보다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농사는 우리가 '부자연 선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도입해 진화에 수정을 가했다. 하지만 16세기에 시작된 변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진화의 패턴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전 세계를 떠도는 유럽의 식민지 개발자들과 탐험가들을 따라 생물군도 대양을 건넜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동식물을 이동시켜서 새로운 가축 종을 만들거나 새로운 토양에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혁명적인 변화는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부합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다시 상상했고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수많은 씨앗, 세균, 곤충, 포식자, 사람들이 귀여워해 몰래 들여간 동물 등도 사람들의 옷깃과 주머니, 선박의 창고나 밑바닥을 통해─말하자면 디즈니의 〈놀라운 여행〉을 거쳐─새로운 환경으로 건너가 변화를 빚어냈다."(359-61)<br>"탐험은 유럽의 영향을 세계 전역으로 투사했다. 아울러 탐험가들이 개척한 경로를 따라 전 세계적인 생태적 교류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콜럼버스가 세계를 상상한 방식─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로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세계가 작다고 생각했다─은 이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알려진 세계의 크기는 탐험가들을 주저하게 했다. 콜럼버스는 작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지구 일주를 시도하도록 자극했다.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잘못된 아이디어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생산적인 예였다."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텍스트적 권위에 대한 콜럼버스의 무관심은 사실상 그를 과학혁명의 전령으로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근대 과학자들처럼 문자로 기록된 권위보다는 관찰된 증거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을 유도한 또다른 요소는 콜롬버스의 영향으로 탐험 지역이 확대되며 축적된 지식의 형태로 나타났다."(375-8)<br>"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시대의 새로운 정치사상은 과학과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고대에 대한 경의로 시작해 새로운 발견의 영향에 적응하다 결국 혁명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문제에 대응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주권 국가와 전례 없는 제국의 부상은 새로운 패턴을 구상하도록 강요했다." "사람들은 흔히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모어의 판타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고 여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가 오히려 더 창의적인 상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서양에서 통치에 관해 등장한 기존의 모든 사상─국가의 목적은 시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을 비난했다." "이후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으로부터 두 가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국가는 도덕 법칙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 봉사한다는 현실정치주의고, 둘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국가의 존속이나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는 과한 조치도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394-8)<br>"16세기에 유럽 밖 제국의 건설이 낳은 또다른 결과는 정치사상을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더욱 폭넓은 성찰로 되돌려놓았다는 데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도덕 개혁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인류에 속한 민족들은 모두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자명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근대의 가장 새롭고 강력한 아이디어 중 하나인 인류의 통일성을 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 이유는 거의 모든 문화에서 거의 모든 시기에 이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제1천년기의 현자들은 인류의 통일성에 관해 자세히 논했고 기독교는 우리가 혈통을 공유한다는 믿음을 종교의 정설로 삼았지만, 인간과 이른바 '인간 이하(subhuman)'의 경계선이 어디라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세 생물학은 〈존재의 사슬〉을 상상했다. 이 상상 속에서 인간과 야수 사이에는 괴물들에게 할당된 〈유사 인간(similitudines hominis)〉 범주가 있었다."(415-6)<br>제7장 전 지구적 계몽: 연합된 세계의 연합된 사상<br>"『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 지식인들, 곧 필로조프들(philosophes)에게 세속의 성서나 다름없었다. 이 책의 부제 〈이성에 입각한 과학·예술·상업 사전〉은 아마도 출판 역사상 책의 성공에 가장 크게 일조한 부제일 것이다. '사전'이라는 단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지식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언급된 세 주제는 추상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을 모두 하나의 저작에서 아우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디드로는 이 책의 취지를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인류로부터 상찬을 받아 마땅한 지식을 집대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계몽주의의 심장부를 차지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코스모스의 메타포였다. 『백과전서』의 저자들은 기계의 우월성이나 우주의 기계적 본성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아울러 이성과 과학은 동맹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공유했다."(431-3)<br>"18세기 내내 해방 옹호론자와 억압 옹호론자 사이에서 논쟁이 활발했다. 볼테르는 조직화된 종교에 염증을 느꼈고 그 철학적 대안으로서 유학(儒學)에 매력을 느꼈다. 아울러 우주는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며 관찰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중국 국가체제의 절대 권력은 선을 위한 강제력이었다." "몽테스키외는 중국을 〈공포를 통치 원리로 삼는 전제국가〉라고 비난했다. 사실 한 가지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를 갈랐다. 몽테스키외는 법치를 옹호하고 헌법적 안전장치가 통치자에게 재약을 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볼테르는 국민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강하고 분별 있는 정부를 선호했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썼다. 〈아시아가 약하고 유럽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은 자유롭고 아시아는 예속적이다.〉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는 서양의 정치 문헌에서 권력 남용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451-2)<br>"18세기에 만일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만 하면 평등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합리적인 개념이었다. 국가는 언제나 중대한 불평등과 맞선다. 그렇다면 모든 불평등과 맞서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강요된 평등은 횡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 기능은 다른 모든 기능보다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였다." "루소는 계몽주의의 가장 신성한 원칙 중 하나와 절연했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은 인류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원칙이었다. 루소는 사유재산과 국가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본성적이고 원시적인 선한 상태를 옹호했을 뿐 달리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루소는 감정과 직관의 가치를 중시하며 어떤 면에서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낭만주의자들의 포스트 계몽주의 시대적 감성을 선취했다.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과 폭도에게 탁월한 영웅이었다."(458-60)<br>"확실한 사실은 계몽주의 운동은 인민 주권과 민중의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럽에서는 실패했지만 미국에서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 무르익는 동안 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매도했다. 신중한 사상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난한 체제를 추천하기 망설였다. 루소는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에드먼드 버크─18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외쳤다─는 민주정 체제를 〈세계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체제라고 일컬었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마누엘 칸트조차 1795년에 민주주의를 다수의 횡포라고 부르며 기존의 견해를 철회했다." "반면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쑥쑥 자랐다〉.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오래된 지배층의 의무는 이에 적절히 부응해 〈민주주의를 지도하고, 민주주의의 신념을 되살리고, 민주주의의 풍습을 정제하고, 민주주의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것〉, 요약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길들이는 것이었다."(468-9)<br>"18세기 유럽은 이른바 〈이성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패─전쟁, 억압적 정권, 시대 자체에 대한 실망─는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직관은 최소한 이성과 동등했다. 느낌은 생각만큼 중요했다." "과학과 낭만성의 융합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1802년 침보라소산에 오르던 훔볼트는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 추위로 몸이 뒤틀리며 코와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훔볼트가 겪은 고통과 좌절의 이야기는 유럽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두고두고 기리는 바로 그 주제가 되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내성적인 독일 시인 노발리스는 1800년에 낭만주의의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인 〈파란 꽃(blaue Blume)〉을 창조했고, 절대 꺾이지 않을 이 아련한 꽃은 이후 낭만주의적 갈망을 상징해왔다. 낭만주의의 핵심에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충족될 수 없는 갈망─에 대한 숭배가 자리해 있다."(479-82)<br>제8장 진보의 전환기: 19세기의 확실성<br>"벤담의 〈공리주의〉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였다. 벤담은 일종의 행복의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벤담은 사회적 〈효용〉을 개인의 자유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었다. 하지만 벤담의 철학은 급진적이었다. 유구한 전통이나 권위, 과거의 성공 기록을 참조하거나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회 제도를 평가할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신조는 의도적으로 신을 배제했고 유물론적이었다. 벤담이 제시한 행복의 기준은 쾌락이었고 악의 기준은 고통이었다." "벤담은 낭만주의에서 손을 뗀 영국 지배층의 가장 유창한 웅변가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낭만적 열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밀은 처음에는 공리주의를 수정하다가 이후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마침내 자유를 모든 가치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두었다. 밀은 벤담의 최대 다수를 개인이라는 보편적 범주로 대체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다."(499-502)<br>"마르크스는 국가의 〈소멸〉을 목격하기를 소망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에게 국가는 진보를 유지할 최고의 수단이었다. 어느 정도는 아이디어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들이 국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질적인 우발 사건들이 국가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구 성장은 군대와 경찰력의 증강을 가져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은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무자비하게 실행했다. 세금과 통계 자료, 지식이 누적되었다. 형벌 수단이 증가했다. 폭력은 갈수록 국가의 특권(궁극적으로는 거의 독점적 특권)이 되었고 국가는 개인이나 전통적인 제도, 협회, 지역의 권력 구조보다 더 많은 무기를 보유했고 더 많은 자금을 썼다. 국가는 다른 19세기 권위의 원천─부족이나 혈족 등의 혈연 집단, 교회 그리고 세속 권력에 대한 여타 신정 정치적 대안들, 귀족계층, 사업 연합체, 지방 및 지역의 자주 독립주의, 깡패들의 두목이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마피아, 프리메이슨 단체 등─과 맞서는 거의 모든 대결에서 승리했다."(512)<br>"그러나 19세기에는 개인 숭배가 문화 전체를 재편성했다(초인 숭배의 위험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에 잘 드러나 있다). 영국 남학생들은 웰링턴 공을 모방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인의 롤모델이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 이름에서 울려 나오는 영웅주의의 메아리가 경외심을 자극했다. 아메리카대륙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시몬 볼리바르의 인간적 결점은 영웅적 신화에 가려졌다. 헤겔의 영웅 숭배는 피로 물든 폭군들을 향했다. 영웅들은 집단─정당, 민족, 운동─에 봉사했다. 오로지 성자들만이 세계 전체를 위한 덕을 구현한다. 대중의 판단에서 영웅이 성자를 대체하자 세계는 나빠졌다. 민주주의 체제 국가들은 위인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도자에게 어느 때보다 큰 권력을 맡겼고 20세기의 수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대중선동가와 독재자들에게 스스로 투항했다."(518-9)<br>"헤겔은 〈민족(Volk)〉을 하나의 이상으로 보았다. 헤겔에게 그것은 초월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재였다. 일부 민족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와 과학에 의해 민족주의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민족주의는 흔히 신비주의적이거나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민족주의는 일관된 정치적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갈망의 상태였기 때문에 음악으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체코의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나 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어떤 민족주의 문학 작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민족주의는 〈사고가 아닌 감각〉이라는 가치에 속한다고 선포했다. 주세페 마치니─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운 공화주의자─에게 민족은 개개인에게 잠재적인 도덕적 완벽성을 마련해준다고 말하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침보라소산에서 〈나를 사로잡은 콜롬비아의 신〉이 〈이상하고 탁월한 불〉을 피운 순간 〈섬망〉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536-8)<br>제9장 카오스의 역습: 확실성을 풀어헤치다<br>"앙리 베르그손은 자신의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이름을 붙였다. 베르그손은 그것을 엘랑 비탈(élan vital, '생의 약진')이라고 불렀다. 엘랑 비탈은 자연을 진화론에서처럼 내부에서 지휘하지 않았고 신처럼 외부에서 지휘하지도 않았다. 엘랑 비탈은 물질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역량을 지닌 정신적인 힘이었다. 일부 낭만주의자나 주술사가 추구하는 '세계영혼'과 엘랑 비탈이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아마 베르그손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베르그손이 엘랑 비탈을 떠올린 것은 우리에게는 과학이 예측하는 것과 다른 미래를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베르그손은 과학을 공격하는 비합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객관적 실재들을 정신적 구성물로 제시하고, 생각하지 않는 창조물에 목적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과학적 결정론이 인간을 제약하거나 방해한다고, 심지어 위협한다고까지 느낀 사람들은 베르그손의 생각을 환영했다."(585-6)<br>"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속임수였다.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전환이 가능했다. 평행선들은 서로 만났다. 뉴턴 이래 지배적이었던 질서 개념들은 우리를 호도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상식적인 지각은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토끼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자극을 받아 수행된 실험들은 하나같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타당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더욱이 상대성 이론은 새로운 역설들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아인슈타인이 코스모스의 큰 그림을 다시 상상하는 동안 다른 과학자들은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세밀한 부분들에 집중했다. 사실 물리학자들은 그전부터 빛의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빛은 파동일까 입자일까? 모든 증거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빛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새로운 담론은 정합성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쫓아냈다."(593-4)<br>"프로이트는 20세기의 모델이자 멘토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통설을 (인류학자) 보애스보다도 더 세차게 뒤엎었다. 프로이트의 발견 혹은 주장은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개개인의 자아에 관한 이해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는 상당수가 무의식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책임, 정체성, 성격, 양심, 사고 방식 등에 관한 전통적 가정들을 모조리 부정했다." "프로이트의 〈과학〉은 잘 작동하는 듯했으나 가장 엄격한 검증을 통과하는 데는 실패했다. 칼 포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물었고 심리분석 협회는 이 질문에 크게 출렁였다. 그들은 마치 종교 분파나 비주류 정치 운동 세력처럼 굴며 서로의 오류를 지적하고 반대자들을 협회에서 추방했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문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문화는 심리 형성에 영향을 주며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의 경험은 문화로 인해 다양한 색채를 띤다."(603-4)<br>"20세기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것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묘사한 것을 그리는 경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두드러졌다. 이 시기의 혁신적인 예술작품은 과학과 철학이 불러일으킨 동요와 충격을 표현했다. 1907년 큐비즘은 산산이 조각난 거울에 비친 것 같은 파편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큐비즘 운동을 창시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원자론이 시사한 광경─어딘가 서로 잘 맞지 않는 파편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1911년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더퍼드가 원자에 관해 설명한 글을 읽고 〈두려운 힘을 느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모든 것이 힘이나 확실성을 잃고 투명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효과들은 새로운 양식의 출현에 반영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실제 대상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억눌렀다. 칸딘스키가 시작한 이 완전한 〈추상〉 미술 사조는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묘사하거나, 아예 묘사하지 않았다."(610-1)<br>제10장 불확실성의 시대: 20세기의 망설임들<br>"19세기 말을 향해 갈 즈음 모든 측정 가능한 변화의 그래프는 지면을 벗어났다. 토템 연구자 알렉산더 골든와이저는 문화적 변화는 비활성 국면 사이에서 〈솟구치듯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진화는 길게 이어지는 평형상태 사이에서 〈단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모순이 겹겹이 쌓였다. 전자를 관찰한 사람들은 아원자 입자들이 각자 보유한 에너지양과 어긋나 보이는 위치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다시 그들의 선배인 연금술사들과 동등한 위치로 되돌아갔다." "과학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진리성을 보장받기 위해 선망하는 객관성의 잣대다. 20세기의 철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어학자, 심지어 일부 문학과 신학 연구자들까지도 주체로서의 지위를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과학자라 부르며 객관성을 가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기획으로 판명되었다."(626-8)<br>"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원래 오래된 철학인 실존주의가 다시금 유행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소외(alienation)〉를 가장 큰 사회 문제로 파악했다. 경제적 경쟁 관계나 근시안적 유물론은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부단히 움직이는 뿌리 없는 개인들을 남겼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어떤 상태일 뿐이다.〉 아니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든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존재이자, 미래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며 그러한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다〉. 〈그 결과 인간은 쓸쓸하고 그 어디에도 매달릴 곳이 없다. (···) 존재가 진정으로 본질에 선행한다면 인간은 어떤 고정된 (···) 인간의 본성을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결정론은 없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다.〉 실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관조라는 방어벽 안에 가둘 수 있었다. 자기 관조는 추악한 세계에 대한 혐오 속에서 찾은 안전한 공간이었다."(635-6)<br>"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론적 전회(轉回)〉로 그치지 않았다. 언어 문제들은 불확실성과 결합해 지식의 접근성─과 심지어 실재성─에 대한 불신감을 조성했다. 전쟁, 학살, 스탈린주의, 히로시마, 근대 건축 운동이 만들어낸 싸구려 유토피아, 전후 유럽인이 살고 있는 과도한 계획 사회의 음울함 같은 고통스러운 사건들과 새로운 기회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소외된 사람들은 문화를 되찾아야 했다. 맹렬한 속도로 발전하는 전자 기반 오락 기술이 그들을 도왔다. 이러한 배경에 미루어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부분적으로 세대적인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베이비붐 세대는 실패한 부모 세대와 절연하고 탈식민주의와 다문화와 다원주의의 시대에 어울리는 감수성을 껴안았다. 북적이는 세계와 지구촌에서 삶의 접촉들과 연약함은 다양한 관점을 갖기를 권장 또는 요구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맥락이 부과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문화적으로 조작된 공식이었다."(641-2)<br>"카오스 이론은 분석의 한 층위를 드러냈다. 이 층위에서 원인과 결과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델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듯했다. 이것을 임계 질량에 적용하면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무너지게 할 수 있었고, 작은 먼지 알갱이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갑작스러운 변동이 시장을 교란하고, 생태계를 망가뜨리며, 정치적 안정을 뒤엎고, 문명을 산산이 부수고, 우주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무효화하고, 진자의 진동과 중력의 작용을 말한 뉴턴 시대 이래 이어져온 전통 과학의 성소를 침범할 수 있었다. 20세기 말의 희생자들에게 카오스에 의한 비틀림은 복잡성의 작용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체계는 다종다양하고 상호연결된 부분에 더 많이 의존하면 할수록 어느 깊은 수준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로 인해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더 증가했다. 역설적으로 카오스 이론은 더 깊고 높은 수준의 정합성을 탐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652-3)<br>"조심성, 회의주의, 자기 회의, 머뭇거림 같은 것은 우리가 진리로 오를 때 내딛곤 하는 발판이다. 내가 불안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을 때다. 그릇된 확실성은 불확실성보다 훨씬 더 나쁘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야기한다. 20세기 사회·정치 사상에서는 새로운 교조주의(dogmatism)들이 과학의 새로운 결정론들을 보완했다. 변화가 좋은 것인지 모른다.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 불확실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권자는 대중 선동가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해결책에 쉽게 현혹된다. 종교는 교조주의와 근본주의로 변질된다. 사람들은 변화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대상, 특히─전형적으로─이민자들과 국제기구를 공격한다. 자원 고갈이 두려워지면 큰 희생을 요구하는 잔혹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반응들은 변화의 형태이되 하나같이 극단적이고 일반적으로 폭력적이며 언제나 위험한 형태의 변화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이유에서, 익숙한 삶의 방식을 붙들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변화를 택한다."(682)<br>"반(反)다원주의는 여전히 흔하다. 21세기 초 몇 년간 일부 서양 국가에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문화 통합〉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유구한 역사의 공동체들이 세계화를 비롯한 여러 거대한 종합적 흐름에 맞서 자신들의 문화를 방어하는 태세를 취했다. 어디에서나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르비아, 수단, 인도네시아는 폭력적으로 분리되었다.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평화롭게 결별했고, 영국의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동거의 조건을 재협상했다. 하지만 다원주의의 아이디어는 여전하다. 다원주의는 다양성이 있는 세계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인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유일하게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이 진정으로 고르게 누릴 수 있는 이득을 제공한다. 역설적이지만 다원주의는 어쩌면 우리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신조다."(69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5/56/cover150/k02293455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275569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노동자가 만난 과학 / 박재용 - [노동자가 만난 과학 - 자본으로부터 과학 되찾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6987</link><pubDate>Thu, 23 Jul 2026 07: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69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32635215&TPaperId=174069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97/58/coveroff/e1326352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32635215&TPaperId=174069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동자가 만난 과학 - 자본으로부터 과학 되찾기</a><br/>박재용 지음 / 빨간소금 / 2025년 04월<br/></td></tr></table><br/>머리말<br>1부 제국주의와 과학<br>1. 약탈적 과학: ‘발견’과 ‘발명’이라는 거짓말<br>피나텍스(Piñatex)는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카르멘 히요사(Carmen Hijosa)가 2013년 개발한 것으로,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를 부직포 형태로 만든 뒤 특수 처리를 통해 가죽과 비슷한 질감과 내구성을 갖게 했다. 히요사는 이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얻고 아나나스아남(Ananas Anam)이란 회사를 세워 피나텍스를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필리핀 선주민들은 이미 몇백 년 전부터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피나 직물(piña cloth)을 만들어 왔다. 선주민들이 피나 직물을 만드는 과정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정도다. 히요사는 필리핀에서 가죽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선주민들의 이 방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은 아나나스아남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에 돌아간다. 주로 서구의 대기업들이 세계 각 지역의 선주민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지역 생물에 대한 지식과 유전자원(genetic resources)을 도용해서 독점적 수익을 올리는 것을 ‘생물해적(Biopiracy) 행위’라 부른다. 8-9)<br>19세기에는 식물학자, 동물학자, 인류학자 등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식물도 연구하고 동물도 연구했다. 또한 인종에 대해서 살피고 해류나 기상을 관측했다. 이런 과학자들을 박물학자라고 불렀다. 이런 박물학자들의 노력으로 박물학은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 기상학, 해양학 등 세부 학문으로 정립되고 발전했다. 그런데 과연 박물학자들의 성과는 오로지 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을까? 물론 그 노력을 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선주민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박물학자와 함께 탐험한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고용된 사람, 일행일 뿐이었다. 서양 박물학자들의 ‘발견’은 자기네만의 ‘최초’인 경우가 꽤 많다. 오히려 ‘재발견’, ‘서양에서의 첫 발견’ 정도가 적당하다.&nbsp; 이렇게 현지인들의 지식과 도움으로 확보한 식민지에 관한 연구는 영국 제국의 과학 네트워크를 통해 중앙화되었다. 제국들이 식민지로부터 수집한 정보는 서구 과학계에 공유되며 서양의 과학이 되었다. 12-4)<br>189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에 고무 플랜테이션(Plantation)이 급속히 늘어났다. 플랜테이션이 들어선 장소는 이전에 선주민의 거주지, 농경지, 열대우림이었다. 집이며 논이며,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하던 열대우림이 사라졌다. 손수 지은 집에 살며 가족이 먹을 쌀을 재배하고, 과일과 꿀을 채취하고, 대나무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현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무 플랜테이션의 노동자가 되었다. 자신의 땅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현지인들은 새롭게 임금노동에 의지했지만, 긴 노동시간, 낮은 임금, 위험한 작업환경으로 생활이 쉽지 않았다. 남녀 구분 없이 플랜테이션에서 일했고, 아이들도 동원되었다.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에서 성행한 아동노동이 19세기 식민지에서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들로는 부족해 노동력을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 화교와 인도인 비율이 높은 원인 중 하나다. 15)<br>2. 의학과 제국주의: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약자들<br>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이들은 주로 제3세계 사람들과 서구 사회 소수자들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연구 결과들은 식민지 사람들의 삶을 낫게 만들었을까?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선진국 사람들이었고,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은 여전히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소외열대질환(Neglected Tropical Disease)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열대지방에서 주로 발생하는 20개 질병을 소외열대질환으로 통칭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말라리아는 2022년 세계적으로 2억5,000만 건 정도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 61만 명이 사망했다. 전체 감염자의 94%, 사망자의 95%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말라리아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모잠비크에서 발생한다.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전체 사망자의 78%를 차지한다. 22-4)<br>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이렇게 나빠진 데는 제국주의 시절 서양의 책임이 크고 그 가운데 당시 의학의 책임이 상당하다. 물론 제국주의 침략 이전이라고 이런 열대 질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 지배 과정에서 양상이 바뀌었다. 대규모로 농장을 만들고 삼림을 벌채하고 광산을 개발하면서, 말라리아모기 등 질병 매개체의 서식지가 확대되었다. 강제 노동과 대규모 이주 등으로 질병이 더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선주민들의 공동체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전통적 방식의 질병 억제 방법이 함께 무너졌다. 이렇게 식민지 경제체제에서 급격한 도시화는 위생 문제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식민지 자원을 대규모로 착취했다. 식민지 선주민들은 더 빈곤해지고 이에 따라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게다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시대 의료 체계는 주로 본국에서 간 사람과 일부 식민지 엘리트를 위한 것이었지, 대다수 현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현지인들은 생체 실험 대상으로만 취급되었다. 24)<br>3. 과학과 제국주의: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이 아니다<br>19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은 아프리카, 중동과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제국주의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인종론은 유럽의 백인이 아시아인과 흑인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가 되었다. 더 진화한 이들이 덜 진화한 이들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현대 과학으로 보자면 인종론은 과학적 정당성이 하나도 없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피부색이 까만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보다 지역적 연관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물론 19세기에도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처럼 인종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가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19세기의 인종론은 이제 과학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하게 남아 있다. 가령 미국에서 흑인은 백인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체포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주장한다. “인종은 없다. 인종차별만 있을 뿐이다.” 28-9)<br>허버트 스펜서가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쓸 때의 의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의 ‘진화’는 다윈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다윈의 진화란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자연 현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진화는 곧 진보이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스펜서로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대 정책,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했다. 군사적 사회에서 산업적 사회로의 진화가 발전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사회진화론’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그 뒤 다른 식으로 쓰였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사회학자 벤저민 키드(Benjamin Kidd)는 《사회 진화(Social Evolution)》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했다.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월한 인종의 지배가 진보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유럽의 식민 지배를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31-2)<br>2부 현대 자본주의와 과학<br>4. 현대 자본주의와 거대과학: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거대과학<br>맨해튼 프로젝트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바로 거대과학(Big Science)의 출현이다. 거대과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우주 탐사도 입자물리학도 핵융합도 아닌 군사다. 어떤 이들은 군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이 다른 부문에 활용되면서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스핀오프(spin-off)’ 기술이라 하는데, 군사용 연구를 정당화할 때 자주 인용된다. 스핀오프 기술이 꽤 있다. 대표적인 예가 흔히 ‘GPS’라 부르는 위성항법시스템이다. GPS는 위성항법시스템 중 미국국방부가 개발해 관리하는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Global Positioning System)의 약칭이다. 그런데 현재 위성항법시스템은 미국의 GPS 하나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글로나스, 유럽연합의 갈릴레오, 중국의 베이더우 등 지구 전체를 담당하는 4개의 위성항법시스템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원래 군사용이기 때문이고 최초 개발국인 미국이 GPS 운영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37-8, 40, 42)<br>이미 개발된 군사 기술을 민간에 적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다. 스핀오프 기술을 예로 들면서 군사 기술 개발에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붓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스핀오프는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대부분의 군사 기술은 민간에 적용되기 어렵거나 적용 과정에서 막대한 추가 비용 및 시간이 소모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서비스와 제품은 항상 가성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은 성능과 효과가 우선이고, 비싼 가격이나 다른 문제점은 쉽게 감내한다. 무엇보다 스핀오프 기술에 대한 강조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라는 윤리적 문제를 외면한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는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군사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기술 개발에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한다. 이는 더 시급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군대를 위해 전용하는 행위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 기술이나 난치병 치료법 개발, 환경 보존 등에 투여할 예산을 빼앗는 셈이다. 42-3)<br>5 의학과 보편적 건강권: 사람이 특허보다 중요하다<br>국경없는의사회는 199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상금이 시작이었다. 마침, 아벤티스가 수면병 치료제 생산을 중단한 시점이었다. 기존 다국적 제약 회사를 통해서는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새로운 치료제 개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는 노벨상 상금을 종잣돈으로 비영리 연구개발 조직인 소외질환의약품개발이니셔티브(DNDi)를 결성했다. 목표는 소외열대질환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기존 치료제를 개선하는 것, 개발한 치료제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DNDi는 상업적 이익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비영리 모델을 채택했다. 그리고 현장의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에 주력하고 현지의 필요성을 기반으로 환자 중심의 연구를 주요 지침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DNDi는 수면병, 리슈마니아증, 샤가스병, 말라리아, 소아 에이즈 등 다양한 소외 질환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 58-9)<br>의약품 특허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권과 건강권이 시장 논리와 사적 이윤 추구에 종속된다는 점에 있다. 제약 회사들은 신약 개발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므로 이를 회수하기 위해 특허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약 개발의 시작은 공공 연구 기관들의 기초연구다. 수십 년간의 공공 투자로 개발된 기술이 민간 기업의 특허권으로 독점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제약 회사들의 연구개발비는 항상 과대 계상되는 경향이 있다. 마케팅 비용이나 임원 보상이 연구개발비보다 더 큰 경우도 많다. 근본적으로 의약품을 하나의 ‘상품’으로만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연구 성과는 공공재로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제약회사가 가격을 맘대로 정할 수 없도록 규제해야 한다. 약값이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허권 행사를 제한하고 강제실시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의약품을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62)<br>6. 특허와 자본: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는 과학<br>“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은 과학 혁명의 완성이자 근대 물리학의 시작이지만, 그의 말처럼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를 두고 피 터지게 싸웠지만, 자신이 이룬 결과물을 이용해 다른 이가 실험하고 응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아니 관대했다기보다 너무 당연해서 시비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과학자들이 품이 넓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 과학은 돈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과학 연구를 토대로 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이 기술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18세기만 하더라도 과학과 기술, 과학과 공학은 완전히 남남이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방적기와 방직기 기술, 증기기관의 개선 등은 당시 과학과는 상관없이 오직 기술자들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만들어 냈다. 64)<br>20세기 중반 이후 과학과 기술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이것이 과학인지 기술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자 특허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제조 공정이나 화학 공정 관련 기술, 기계장치 등이 주된 특허 대상이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자 유전자조작 기술, 회로 설계, 생물학적 처리 방법,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 대상이 다양해졌다. 물질특허와 유전자특허, 그리고 천연물질특허로 특허 대상이 확대되었다. 현대 화학 산업에서 물질특허는 대단히 중요하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감광제, 디스플레이용 발광 물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많은 제품이 물질특허의 보호 대상이다. 제약 산업의 경우, 세팔로스포린 같은 항생제나 발사르탄 같은 혈압 약은 물질특허 덕분에 강력한 시장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제약 회사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이라고 해서, 원래의 제품에 대한 사소한 변형을 특허로 등록해 특허를 연장하고 있다. 65-6)<br>어떤 표준을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특허를 표준필수특허라 한다. 표준필수특허는 기술의 공공재적 성격을 무시한다. 특히 통신이나 인터넷과 같은 기반 기술들은 현대 사회의 필수 인프라로,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고 표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소수 대기업이 표준필수특허를 독점하면서 이러한 필수 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다음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글로벌 불평등을 심화한다. 선진국 대기업이 대부분의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서 개발도상국은 계속 높은 특허 사용료를 내야 한다. 이는 기술 종속을 심화하고 국가 간 경제적 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공공성을 해친다. 표준필수특허 대부분에는 공공기관의 기여가 핵심적이다. 지금의 특허 제도는 발명가도, 소비자도 보호하지 못한 채 자본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제 특허 문제는 기업을 넘어 과학과 기술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69-71)<br>3부 민중의 과학<br>7.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br>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대 이래로 계속되었다. 이런 낙관적 전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핵폭탄의 개발은 과학기술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을지를 보여 줬다. 이런 걱정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믿음은 여전했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만든 문제를 또다시 과학기술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커졌다. 예를 들어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많은 사람이 기술 발전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기술 중심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기후 위기는 과도한 생산과 소비, 화석연료 중심의 산업구조가 근본 원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런 과학만능주의가 종종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기술적 해결책을 내세워 현재의 여론을 잠재우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회피하는 것이다. 과학만능주의는 현재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76-8)<br>기술결정론은 기술의 발전이 사회 변화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높아진 생산력은 생산양식을 바꾸는데, 이런 경제 영역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주장이다. 기술결정론이 특히 문제가 되는 분야는 노동이다. 산업혁명 시기를 보면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당시 방직공과 수공업자의 일자리는 기계의 도입으로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물류 창고의 자동화를 두고 기업들은 ‘스마트 물류’나 ‘디지털 혁신’이라 부른다. 물류 자동화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물류량과 빨라지는 배송 속도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적 혁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과정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기술 도입 과정에서 효율성만을 강조할 뿐 노동자의 건강이나 작업장의 민주성 같은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사실이다. 79-80)<br>8 과학과 커먼즈: ‘과학의 로빈 후드’ 혹은 ‘과학의 해적 여왕’<br>데이터는 다른 정보들처럼 일종의 권력이다. ‘정보 비대칭’은 기회의 비대칭으로 이어지고, 이는 권력이 된다. 정부와 대기업은 데이터 개방을 이야기하지만, 공개되는 데이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들은 더 노골적이다. 이들은 해당 사이트에서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추적하고 데이터화한다. 이렇게 수집한 데이터를 기업은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더 정교한 행동 조작과 이윤의 도구로 활용한다. 플랫폼 회사들이 제공하는 ‘약관’에 따르면, 이런 데이터를 기업들끼리 서로 유상으로 혹은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공개를 넘어 데이터를 통한 권력관계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시민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권력기관이나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디지털 시대, 민주주의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89)<br>이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최소화의 원칙, 동의와 통제권 중시, 차등적 접근, 알고리즘 투명성을 주요하게 강조한다. 첫째, ‘데이터 최소화’에 대해 살펴보자. 데이터 최소화가 필요한 이유는 데이터를 많이 모을수록 해킹이나 유출 시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다. 둘째, ‘동의와 통제권’ 중시는 데이터를 모으는 쪽, 그러니까 주로 정부 기관이나 기업과 제공하는 쪽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셋째, ‘차등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프라이버시와 공익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모든 데이터를 완전히 공개하면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며, 완전히 막으면 공익적 활용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의료나 범죄 통계 등 민감한 개인 정보를 다룰 때 주요하게 나타난다. 넷째, ‘알고리즘 투명성’ 문제를 살펴보자. 알고리즘 투명성이란 알고리즘이 특정 집단을 차별하지 않는지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존의 채용 알고리즘이 여성을 차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네 가지 원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91-2)<br>9 민중의 과학: 무엇을, 왜,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br>‘적정기술’이란 말을 들으면 대개 손 펌프나 정수기, 태양광 조리기 같은 간단한 기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적정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값싼 기술’을 만드는 것이 주요 목적은 아니었다. 1973년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Fritz” Schumacher)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중간기술’ 개념을 제시했다.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은 서구의 거대 기술을 도입하느라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도입된 기술은 현지의 필요와 조건에 맞지 않았고, 소수 엘리트만 이용할 수 있었다. 슈마허는 이런 상황에서 현지의 자원과 기술력으로 만들 수 있으면서 전통적인 방식보다 생산성이 높은 ‘중간’ 정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슈마허는 기술의 수준 문제만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 기술이 자본 집중과 중앙 집중을 낳으며 이는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여겨,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기술을 제안했다. 103-4)&nbsp;<br>빈곤이나 불평등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일부 활동가들은 적정기술을 사회운동과 결합하고자 한다. 인도의 나브다냐(Navdanya) 운동은 유전자조작 종자에 맞서 토종 종자를 지키는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농민들의 자립적 기술 개발을 돕는다. 결국 우리가 다시 해야 할 질문은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이다. 적정기술 운동이 처음 제기했던 문제의식, 즉 기술이 소수가 아닌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는 값싼 기술을 보급하거나 첨단 장비를 갖춘 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기술의 생산과 활용 과정 전반에 대한 민주화가 필요하다.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할 것인지를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 적정기술의 미래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105-6)<br>10 소수자와 과학: 인공지능의 편향된 공부법<br>한국에서 전동휠체어가 급속히 확산한 결정적인 계기는 2003년 국민건강보험 급여 품목이 되면서부터다. 이에 더해 정부 지원 정책이 확대되면서 보급 속도가 빨라졌다. 휠체어가 계단을 이동할 수 있도록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실제로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 있다. 그러면 이동 문제가 해결될까? 이런 기술의 개발은 한편으로는 환영해야 한다.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전동휠체어가 삶의 질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술로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기술의 도입보다 저상버스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모든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장애인 전용 콜택시를 늘리는 것이 장애인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의무다. 사회가 해야 할 몫을 장애인 개인에게 맡기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기술 개발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기술 개발을 핑계로 지금 해야 할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12-3)<br>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 발전의 방향이다. 지금의 과학기술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에너지 소비는 늘어난다. 인공지능 서버를 돌리는 데 드는 전력량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메타버스나 가상현실 기술이 상용화되면 전력 소비는 폭증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술 발전을 불가피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기술의 발전 방향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기술 발전의 방향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배터리 효율을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처럼, 사회가 요구한다면 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재생에너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너지 소비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결단의 문제다. 116)<br>맺음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97/58/cover150/e1326352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297583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본 인 블랙니스 / 하워드 프렌치 - [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1408</link><pubDate>Mon, 20 Jul 2026 07: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14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935571&TPaperId=174014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73/72/coveroff/k7229355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935571&TPaperId=174014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a><br/>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09월<br/></td></tr></table><br/>서론&nbsp;<br>"원정을 떠나기 한참 전에, 콜럼버스는 오늘날의 가나Ghana, 엘미나Elmina에 자리한 유럽 전초기지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항해를 했다. 그 기지는 유럽인이 해외에 구축한 최초의 대규모 요새였다. 15세기 중엽 유럽의 서아프리카 원정은 그 지역 어딘가에 막대하게 비축되어 있는 금의 원천을 찾는 일에 집중되었다. 1471년 포르투갈인이 개척했고, 1482년 엘미나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확보한 황금무역의 규모는 막대하여, 이 수입으로 훗날 바스쿠 다 가마의 아시아 항로 개척 임무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 가마가 캘리컷까지 항해한 이래 거의 10년 동안, 아시아로의 항해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이 10년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인이 엘미나에 도착한 뒤부터 그들이 인도에 상륙할 때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기에 대해서도 역사교육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에 유럽과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라고 불리는 지역이 불가역적인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15-6)<br>1부 아프리카의 ‘발견’<br>"이베리아인의 탐험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형태로 꼽아온 디아스(1488년 희망봉에 도달한)의 행로를 계속 추적해보려는 노력이 사실 초기에는 없었다. 그 시대 포르투갈 왕 주왕 2세와 관련된 사료들을 보아도 디아스의 업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강력한 단서를 포르투갈 왕실이 즐겨 사용한 별명에서 찾을 수 있다. 주앙 2세는 당대에 '아프리카인 주앙'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신하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풍부한 자원에 접근해 이를 가져왔기 때문인데,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서아프리카에서 부를 찾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관심을 둘 만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인정하기보다,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었다는 발상이 '대항해시대'를 주제로 한 책마다 일관되게 유지되어왔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현상의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이렇게 아프리카를 그림에서 지우는 것이 서구가 근대로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방식의 가장 근저에 놓인 특징이다."(61-2)<br>"지금은 에스파냐령인 카나리아제도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가장 가까운 섬은 모로코의 대서양 해안 남단에서 불과 62마일(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카나리아제도는 세계사 책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최근 시사문제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대서양에서 유럽인이 처음으로 식민화를 실행한 곳이다.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등이 해외 제국에 대한 경험을 쌓은 곳이고, 그 과정에서 사악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수없이 동원된 지역이다. 대서양에서 동산노예제chattel slavery, 집단학살, 폭력적인 교리 주입, 정착민 식민주의 등이 가장 먼저 선보여진 곳이 바로 카나리아제도이다." "카나리아제도 선주민의 저항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려는 유럽인의 노력이 성과를 거둔 것은 1496년에 가서였다. 한편 그 무렵 포르투갈인은 이미 서아프리카의 문을 크게 열어젖힌 상황이었고, 이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당시는 이미 디아스가 인도양을 항해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였다."(81-2)<br>"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부터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이 15세기 대서양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탐험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덕분에 1420년대에 여러 새로운 지역을 개척했다. 우선 1424년 마데이라제도, 그리고 곧이어 아조레스제도를 발견했다. 작은 규모의 섬들이지만 이를 통해 엔히크는 상당한 정치적 후원세력과 금전적 소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 정복한 마데이라섬에 제노바 사업가들과 함께 대서양 세계에서는 아마도 처음으로 제당소를 세우고 엔히크가 그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는 수익성이 높은 투자인 동시에 미래를 예고하는 사업이었다. 15세기 중엽, 마데이라는 매년 약 70톤의 설탕을 생산했다. 당시 설탕은 귀한 외국산 약재로 여겨졌다. 포르투갈인은 설탕을 대량생산하고자 유일하고 현실적인 방책으로 노예 노동을 대규모로 투입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마데이라에 처음 노예로 들여온 이들은 카나리아인이었다."(90-1)<br>"1440년대에 노예제와 관련해 발생했던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칸인의 접촉은 모두 해변에서 펼친 기습공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는 약탈을 일삼는 무사세력에 기초해 수립되었다. 그 나라의 패기만만한 팽창 계획의 핵심에는, 전쟁에는 항상 보상이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게 자리해 있었다. 엔히크는 비용을 많이 들여서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며 황금을 찾았지만, 금은 거의 거두어들이지 못했고, 황금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도 거의 확보하지 못했다. 황금을 향한 탐험에 소모된 비용이 점점 쌓이면서, 탐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소득원을 찾아야 했다. 도식적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황금 때문에 포르투갈은 노예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노예는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산업인 설탕 산업의 팽창을 추동했다. 인종은 유럽인 사이에서 노예화의 적격성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흑인은 유난히 비천하며 문명이 선사하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간주되었다."(96-100)<br>"포르투갈 상인은 아프리카로 계속 금속제품과 직물을 수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획득한 상품을 북유럽인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럽 자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포르투갈인이 북유럽에 판매한 아프리카 제품에는 많이들 탐냈던 '천국의 곡물' 혹은 말라게타malagueta 후추라고 불리던 칠리 같은 열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이 이를 오늘날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지역 부근에서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그래서 이 지역을 '후추 해안Pepper Coast'이라고 부른다. 이 '천국의 곡물'을 구매하려고 북유럽인은 포르투갈인에게 새로 발견한 아프리카 사회들에서 수요가 높았던 옷감과 금속제품을 팔았다.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 거래지만, 이는 첫 번째 삼각무역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유명한 삼각무역이 정착한 것은 이보다 한참 뒤였다. 아프리카와 교역을 한 덕분에 남유럽은 북유럽과 경제적으로 보다 더 밀착될 수 있었다."(108)<br>"오늘날 가나가 위치한 지역의 황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작은 해전을 거친 후에, 포르투갈은 교회가 승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오랫동안 겨뤄왔던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마침내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0년 동안 포르투갈은 엘미나에서 매년 황금 8000온스(약 227킬로그램)를 가져갔는데, 그 양은 1494년까지 거의 세 배로 증가했고, 이 증가세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의 엄청난 황금을 새롭게 독점하면서, 에스파냐가 할 수 있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로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과 대서양의 극서쪽까지 새로운 탐사를 계속 밀어붙이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발견한 부를 보면서, 에스파냐도 자기만의 귀금속 원천지를 찾아야 한다는 집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과 나눈 대화에서 자신이 대서양을 건너려고 하는 이유가 황금이라고 설명했다."(116-7)<br>2부 중심축<br>"1481년, (특히 에스파냐에게) 엘미나에 대한 권리를 엿볼 기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주앙 2세는 가나 해안가에 성채 하나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주앙 2세는 엘미나 성채 건립의 지휘관으로 아잠부자를 앉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디아스였다. 귀족 디아스는 이로부터 7년 뒤,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했고, 그곳을 돌아 인도양까지 갔다. 이후 몇 년간, 훗날 '대항해시대'로 불리게 될 시대의 여러 거장이, 포르투갈이 사하라 이남 지역에 처음 세운 전초기지인 엘미나로 들어오거나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경력을 갖게 된다. 이는 포르투갈이 시작한 지구적 차원의 사업에서 엘미나가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증명해준다. 이 거장 중에는 훗날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길을 훤하게 열었던 알부케르크와 멀리 동남아프리카에 자리한 주요 왕국인 콩고를 '발견'한 캉Diogo Cão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리스본에서 캉의 콩고 개척사업은 인도로 가는 길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시되었다."(124-5)<br>"15세기의 막바지에, 포르투갈은 황금 사업에 조바심을 냈고, 이에 따라 1482년 성채가 완공되자마자 교역은 빠르게 성장했다. 엘미나에 성채를 완공한 이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의 카라벨은 '황금해안'을 오가며 왕실 금고에 비축할 몫으로 매달 46~57킬로그램의 귀금속을 가져왔다. 포르투갈 왕국의 재무부를 이전에는 '기니의 집Casa da Guiné'이라고 했는데, 이는 검은 아프리카와의 교역이 재정에서 가장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제는 이름을 '미나의 집Casa da mina'으로 바꾸고, 리스본의 왕궁에 있는 건물로 이주했다. 이 왕국의 번영에서 엘미나의 황금이 차지하던 중요성을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15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엘미나와의 교역으로 포르투갈 왕실 수입이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506년까지, 포르투갈 제국의 촉수가 이제는 브라질을 덮었고, 아시아로 깊숙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황금해안은 포르투갈로 매년 약 680킬로그램의 황금을 보냈다."(135-6)<br>"노예 플랜테이션으로의 혁신들은 상투메섬에서 결집되어 거의 형태가 완결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같은 시기에 에스파냐가 진행했던, 훨씬 더 유명한 팽창정책보다 월등하게 큰 경제적 효과를 낳았다. 이는 폭력을 통해 관리된 흑인 노동력이 훨씬 더 지속적이고 생산적으로 경제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은과 브라질의 황금 호황이 막대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사그라들었고 절정기는 한 세기를 넘지 못했다. 반면에 흑인 노예를 동력으로 삼는 플랜테이션 농업은 쿠바를 비롯한 대서양 세계 여기저기에서 모방했다. 직간접적으로, 여기서 생겨난 노예 플랜테이션 모델의 정수가 근대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대규모 농업혁명, 즉 대규모 설탕 생산과 면화 생산의 근간이 되었다. 신세계에서 노예 플랜테이션 경험은 작동할 수 있는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재배되던 인디고와 담배 경작으로도 빠르게 전파되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쌀과 커피와 카카오 경작으로도 이어졌다."(167-8)<br>"유럽의 신세계 제국주의 초기 단계에서 크리올은 꽤 다양하게 활동했다. 그들은 흑인세계와 백인세계를 오가며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웠고, 그들만의 대륙횡단 통신망과 형제 관계(포르투갈어로 코프라디아스cofradias)를 유지해갔다. 선박이나 항구 안팎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에 크리올이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근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에서, 이 크리올 공동체 출신들이 신세계를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에 함께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발보아, 코르테스, 소토, 피사로의 역사적 정복행위에 함께하기도 했다. 이렇게 크리올은 상업적·사회적 기구들이 잘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윤활유가 되었다. 그들은 최고의 중개자였다. 노예제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 벌린은 식민지에 정착했던 크리올을 〈특허장 세대〉라고 했다. 이는 플랜테이션 노예제가 광범하게 수립되기 이전에 꼭 필요한 역할들을 했던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을 지칭한다."(190-1)<br>3부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br>"우리가 제국주의 시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쟁을 상상할 때, 이를 영토의 지배권에 대한 것이며,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할수록 더 비중 있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은 다른 원리에 입각해 있었다. 땅의 넓이보다는 흑인 노동력 공급을 통제하거나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대략 한 세기 반 정도 뒤에 도래할 '면화 대량생산Big Cotton'의 시대 전까지는, 엘미나와 같은 작은 해안 전초기지나 포르투갈의 앙골라 식민지처럼 소규모의 고립된 지역이나 서인도제도의 섬 같은 곳을 장악했을 때 가장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 영토의 일부가 된 오하이오강 계곡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도 카리브해에서 두 강국 사이에 벌어졌던 경쟁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의 지배자들과 여론 모두 해운업과 무역에 국운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201-2)<br>"프랑스는 경쟁국 영국을 아메리카 본토에 묶어두어야 영국이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식민지들을 탐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윌리엄 피트가 1757년 집권했을 때, 그는 프랑스의 카리브해 사탕수수 재배 섬들을 공격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서인도제도에서 피트의 첫 목표는 마르티니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롱아일랜드의 4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설탕 생산을 위해 많은 노예를 수입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포함해 미국사를 통틀어 미국으로 팔려간 아프리카인 전체 숫자보다도 더 많은 아프리카인이 이 섬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섬에 배치된 방어용 대포의 위력에 눌려, 영국은 마르티니크 대신 부근의 과들루프를 공격했다. 그들의 반복된 행동들로 판단해보건대, 이 시대 유럽의 선진 강대국은 노예무역과 노예무역의 공급을 받는 플랜테이션 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203-4)<br>"17세기 당시에는 〈앙골라 없이는 노예도 없고, 노예 없이는 설탕도 없으며, 설탕 없이는 브라질도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처럼 앙골라인이 공급했던 노예 노동력 덕분에 브라질은 설탕 강국이 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포르투갈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앞서가는 중심지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를 선도하면서 포르투갈은 부국이 되었지만 인구 규모가 작아 인적 자원이 빈약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모델은 용병에 기초해 있었고, 이것이 발목을 잡았다." "네덜란드인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 노예를 확보하는 것이 포르투갈을 패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고, 훗날 브라질이 네덜란드에 이익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637년 네덜란드가 엘미나를 장악하고 곧이어 상투메섬과 루안다를 정복하자, 포르투갈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군주의 제국 자산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대서양 뒤편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218-20)<br>"네덜란드의 기획은 초기 에스파냐나 포르투갈 정복 사업의 임기응변적인 성격과는 전혀 달랐다. 이는 이질적이지만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환대서양의 식민지들을 묶어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세운다는 고도의 계획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기획에 따라, 네덜란드는 중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즉 엘미나와 루안다 양쪽에서 여러 주요 노예 공급지를 지배했다. 동시에 네덜란드는 가장 크고 생태적으로도 가장 유망한 설탕 생산지, 즉 브라질에서 네덜란드가 정복한 토지들을 지배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 본토에서 오늘날 매사추세츠부터 델라웨어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지들을 세워 지배하기도 했다. 당시 그 지역은 뉴네덜란드로,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영토들은 곧 초기 모피무역에서 벗어나 네덜란드 플랜테이션 경제권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로 변모해갔다. 17세기 중엽부터 빠르게 성장하던 영국은 비슷한 종류의 시너지 효과들을 추구했고, 네덜란드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250-1)<br>"노동의 윤리적 기반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 우리가 인도주의라고 부르는 생각이 영국에서 막 생겨나고 있었지만, 흑인은 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유럽인이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소나 말처럼〉 극한까지 착취해도 문제 없이 용인되었다." "흑인을 잔인하고 타락한 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이는 아주 초기부터 백인에게 심리적으로 중요했다. 이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던 잡다한 혼합 사회들에서 백인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방법이었다. 아메리카 사회들은 백인에게 유럽 태생은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인류이며, 흑인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었다." "설탕 플랜테이션 세계는 들판 혹은 보일러 앞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예의 비율이 높다는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업의 일반적인 과정 혹은 삶의 평범한 현실로 여겼다. 설탕 생산에 투입된 노예의 기대 수명은 보통 7년을 넘지 못했다."(265-7)<br>"바베이도스섬이 도입한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은, 무장을 한 〈몰이꾼들drivers〉이 원하는 속도대로 노동자를 몰아붙이며 일하게 만드는 집단노동방식gang labor이다. 이 시스템 역시 리처드 드랙스가 했던 초기 실험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드랙스는 2주마다 관리자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이 보고서를 근거로 드랙스는 노예와 감독관 모두에게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한 보상을 주기도 하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는 징벌을 내렸다. 드랙스의 플랜테이션에서 처음 선보인, 기록해야 한다는 집착 덕분에 소유주는 서열이 있고 번호가 매겨진 여러 작업단을 조직할 수 있었다." "드렉스의 체제는 산업화된 스타일의 노동 분업과 조직화, 그리고 기록 보존을 구체적으로 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영국에서 결합되기까지는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 전문화를 강조하고 시간을 크게 고려하는 작업 조정과 같은 경영 기술들은 근대의 조립라인을 예언하는 사례였다."(270-2)<br>"1642~1649년 영국 내전과 1688~1689년 명예혁명에서 중요한 특징은 노예제를 통해 재산을 일군 새로운 사업가 엘리트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건 모두 영국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왕정의 권력을 제한하여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 싸움이었다. 이에 대해 애스모글루, 존슨, 로빈슨은 그들의 논문 〈유럽의 부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서양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공국)에서 정치권력의 균형을 바꾸어놓았다. 대서양 무역이 왕실과 그 주변세력 밖에 자리한 교역 관계자들, 즉 해외무역을 하는 다양한 대상인들, 노예무역상, 다양한 식민지 대농장주 등을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경로를 통해, 대서양 무역은 왕실 권려게 맞서 상인을 보호하는 정치제도가 등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사례 속에서, 아프리카인의 땀과 생산성의 부산물로 유럽에 주어진 중요한 변화는 시민 사회와 근대적 공론장의 등장이다."(291-2)<br>4부 비단뱀신의 저주<br>"1483년 포르투갈 탐험가 캉이 오면서 유럽인과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콩고 왕국은 이미 정교하게 발전된 국가였다. 또 다른 강국 베냉은 유럽과의 접촉 이전에 다각화된 경제를 갖춘 나라로, 유럽 상품이나 유럽 종교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베냉은 새로 온 유럽인과 노예무역을 시작하자마자 금방 중단시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고 그 나름의 독특한 이유로 콩고 지배자에게 기독교는 즉각적으로 강력한 매력을 발휘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이전부터 콩고에 퍼져 있던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운명적인 우연의 일치로, 콩고의 우주관에는 바다 건너 어디엔가 더 높은 존재가 거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새하얀 생명체들이 창조되어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1491년 5월 3일은 콜럼버스가 동인도제도를 찾기 위해 에스파냐에서 서쪽으로 첫 항해를 나가기 15개월 전이다. 그런데 이날, 콩고의 왕 '은징가 아 은쿠아'(통치명 주앙 1세를 자처했다)가 자기 궁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362-4, 369)<br>"15세기 말 콩고와 포르투갈이 쌍무관계를 수립한 이래, 콩고는 포르투갈에 공물을 제공하지 않았고, 포르투갈도 공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앙 1세가,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에 다양한 종류의 원조를 요청하고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일들은 계약을 통해서 진행되었고 꼼꼼하게 보상을 받았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어떤 규모의 아프리카 나라도 유럽인에게 정복된 적은 없다. 유럽인과의 접촉이 단단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져 노예무역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떤 정치체도 복속되지는 않았다. 캉이 콩고 왕국을 발견한 이후 약 150년 동안, 콩고 입장에서 보면 포르투갈과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구가했다. 이 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료 사이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두 문명이 만났던 당시 콩고 왕국과 제도들에 내재해 있던 어떤 강고함 때문이기도 했고, 콩고의 국정 운영 능력과 아폰수 1세와 같은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지략과 지성 덕분이기도 했다."(379-80)<br>"1622년 말, 포르투갈은 임방갈라와 동맹하여 콩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네덜란드 의회가 서인도회사를 세우고 1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1625년 콩고 왕 페드로 1세와 소요(해안 지대의 강력한 준자치구역)의 마누엘 백작은 각각 네덜란드 의회에 편지를 보내,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인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공식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1620년대까지 브라질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들로 이송된 노예의 절반 이상이 앙골라에서 출발했다. 중앙아프리카 서부에서 오는 인간 파이프라인을 폐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서인도회사가 이베이라반도 두 강국의 대서양 복합단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콩고의 동맹제안은 아프리카에서도 유럽의 정치 상황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던 곳에서만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분명한 것은 콩고의 주도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이 시기 대서양에서 네덜란드의 구상은 '위대한 기획'이라는 이름값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397-400)<br># 임방갈라Imbangala : 초기 노예무역이나 가뭄으로 인한 약탈과 파괴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용병부대<br>"수백만 명의 사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빼앗아간 대서양 노예무역 때문에,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지구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다른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처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시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증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급속한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화는 모든 종류의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인구증가로 더 크고 더 강력한 국가가 되고, 더 큰 군대를 조직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인구증가는 시장의 엄청난 확대와 무역이 성장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예제로 아프리카에서 이 모든 것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아프리카는 외부 경쟁자와 공격자, 특히 유럽인 앞에서 더 취약해졌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출된 노동력은 기획에 따라 절대 다수가 생산성이 최고조에 올라 있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아프리카 인구는 식민화 초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계속 감소세였을 것이다."(418-9)<br>"정치학자 넌Nunn과 그의 동료 완치콘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노예무역의 강도와 지속기간과 사회적 신뢰의 지속적인 하락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은 노예무역을 경험한 종족 집단들의 문화적 규범을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신뢰수준이 낮은 지역에서 개발된 제도는 더 취약했고, [그들의] 더 취약한 제도는 더 나쁜 행동과 훨씬 더 낮은 수준의 신뢰로 이어졌다. 이런 사회는 비협조적인 행동, 불신, 비효율적인 제도가 평형을 이룬 가운데 갇힌 상태에 머물러 있다.〉 노예무역의 압력하에서 개인은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올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지역에서는 타인에 대한 불신의 규범이 신뢰의 규범보다 더 유익해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424-6)<br>5부 검은 대서양과 새롭게 형성된 세계<br>"전통적인 미국사 교육에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지만,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프로젝트가 호소력을 가졌던 중요한 매력 중 하나는 미시시피강 계곡과 강안을 따라 세워지고 있던 면화 플랜테이션을 버지니아가 뻗어나갈 수 있는 출구로 이용하여 노예봉기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1820년에서 1860년 사이에 100만 명의 흑인이 예상대로 '강을 따라 팔려갔다.' 이런 이동은 제퍼슨의 구상을 실현하고, 면화 농장주들의 급증하는 노동력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한때 영국 직물 산업에 중요한 면화 공급지였던 아이티를 상실한 시기와 우연히 일치하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제퍼슨은 앞날을 내다보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생도맹그St. Domingo에서 시작된 이 역사의 첫 장은 ··· 다른 모든 섬에서 모든 백인이 어떻게 쫓겨나게 될지를 자세히 보여줄 것이다.〉 이는 노예봉기에 성공한 후 1804년에 아이티로 이름을 바꾼 플랜테이션 식민지를 언급한 것이었다."(434-5)<br>"아이티 혁명 이전 10년 동안 프랑스 선박은 22만 4000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가 노예로 팔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생도맹그로 갔다. 1780년대가 되면, 생도맹그가 프랑스 무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면서 나머지 프랑스식민지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부를 생산했다." "1791년, 나폴레옹이 아이티 노예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라살 후작을 파견했을 때, 그는 그의 군대에 프랑스 혁명에서 직접 영감을 받은 문구인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면 죽음을〉이라는 기치를 〈국가, 법, 왕〉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문구에 담긴 체제전복적 성격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 혁명의 시대에 아마도 가장 일관되게 관철된 규칙이 있다면, 흑인 사이에서 인권과 자유에 관한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했던 예방조치들이 모두 소용없었다는 점이다. 여러 신세계 노예 사회에서 속박되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 돌던 '모두의 바람common wind'의 침투력은 너무도 강해서 어떤 검열체제로도 막을 수 없었다."(441-2)<br>"1720년대에 생도맹그 식민지가 경제적으로 도약한 직후, 이 지역 백인 사이에서 프랑스 본국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대표 없이 부과된 세금'에 대해 불만을 품은 대농장주들의 반발이 거세졌던 것이다. 이런 대농장주의 반발은 훗날 발생한 미국 혁명의 중심 주제를 선명하게 예견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대농장주는 프랑스 중상주의가 가하는 통제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국가는 노예 공급에 대해 독점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본국 정부는 식민지 정착자가 상품을 본국에만 판매할 수 있게 했고, 판매 조건은 본국만이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대농장주의 분노는 1780년대에 다시 불이 붙었다. 프랑스가 노예에 대한 착취를 규제하는 일련의 규정들, 즉 흑인법Code Noir을 제정하는 등 온건한 개혁 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재산 소유자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침해가 백인이 지배하는 노예제 사회들에서 거의 보편적인 주제가 되었다."(464-5)<br>"노예들의 충성을 얻어 질서를 회복하기를 희망했던 혁명 프랑스는 불안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식민지의 자유로운 유색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는 본국에서 이미 노예제도의 미래를 놓고 논의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생도맹그의 백인은 두 가지 발전 모두에 대해 격분했다. 한 대농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예제가 없다면, 생도맹그에는 문명도 없다. 우리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50만 명의 야만인 노예를 찾아 구매한 것이 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식민지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자유인으로서 그들의 존재는 우리 유럽 형제들의 존재와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자유인이 된 흑인과 유럽인의 양립을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때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정확히 1년 안에 그 양립이 실현되었다. 이렇듯 아이티 혁명은 유럽이 대서양 전역에 수립할 노예제를 종식시키고, 세계적 차원에서는 반식민주의를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다."(472-4)<br>"1802년 3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제1집정관이라는 혁명적 칭호를 채택한 지 거의 2년 반이 지난 후, 영국은 아미앵에서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유럽에서의 전쟁과 영국과의 해전에서 빠져나오면서, 나폴레옹은 우선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재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802년 5월, 국민의회는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 프랑스령 섬들에서 노예제를 복원하는 것을 놓고 투표하여, 211 대 60으로 복원을 결정했다. 이 와중에 영국은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렇게 노예무역 금지를 주도하면서 영국은 도덕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유럽에서 영국이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영제국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영국은 서인도제도에서 60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여전히 노예 노동을 통해 수익을 얻으면서 이런 과업을 달성했다."(477, 482-4)<br>"역사학자 스벤 베커트의 비교에 따르면, 면화가 19세기 미국에 갖는 의미는 석유가 20세기 사우디아라비아에 갖는 의미와 같았다. 플랜테이션 노예의 식량을 제한했던 것은 분명 투자 수익의 문제였지만, 심리적 목적도 확실히 있었다. 이런 한계설정은 사회적 지배와 비인간화라는 고의적 전략의 일부였고, 한 인종을 비하하고 다른 인종을 높여서 인종 간의 차등을 강화하는 방법을 계속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동산노예제는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속성에 기초한 서열〉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속성에 기초한 서열〉이란 출신이나 특성의 차이에 따라 인생에서 다른 지위를 부여받도록 오랫동안 작동해온 시스템이다. 물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백인성 자체가 인종적 정체성으로 발전하고 강화되는 과정에서 동산노예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백인성은 근대성이 낳은 영향력 있는 부산물 중 하나이다. 모리슨에 따르면, 〈노예제만큼 [백인을 위한] 자유를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없다.〉"(507-8)<br>"사실, 인디언 추방에서부터 흑인 노예를 동남부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했던 것, 그리고 미시시피강 계곡과 인근 지역의 목화밭에 새로운 플랜테이션을 설립하는 것까지 이 모두를 재정적으로 열심히 지원했던 것은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여러 북동부 금융가들이었다. 이에 따라 흑인의 몸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를 기생적인 남부만의 문제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노예제는 대서양 전역에서 광범하게 전개된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당시 미국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인 것은 분명했지만 예정된 강국은 아니었고, 나중에 미국이 이루게 된 경제적 동력을 발산해내는 나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후에, 즉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미국은 무엇보다도 목화라는 한 가지 작물에 기초한 플랜테이션 노예제에 힘입어 빠르게 산업화된 국가이자 세계 강국으로 발을 내디딘다. 사실, 한 역사가가 쓴 것처럼, 〈면화 무역은 미국 경제가 갖고 있던 유일한 '주요 팽창력'이었다.〉"(511-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73/72/cover150/k7229355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3737277</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아침</category><title>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 [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88828</link><pubDate>Mon, 13 Jul 2026 0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8882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531669&TPaperId=1738882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62/5/coveroff/s6628340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531669&TPaperId=1738882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a><br/>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05월<br/></td></tr></table><br/>머리말<br>1. 실크로드의 탄생&nbsp;<br>"에우리피데스가 쓴 《바카이Bakhai》의 첫 구절에서 디오니소스는 〈나는 엄청나게 부유한 동방〉에서 〈그리스로 왔다〉고 말한다. 그곳은 페르시아의 평원이 햇빛에 목욕하는 곳이고, 박트리아의 마을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아시아와 동방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전에 디오니소스가 성스러운 신비에 싸여 〈뛰어 돌아다닌〉 땅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런 작품을 탐독한 학생이었다.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336년에 암살당한 후 왕위에 오른 이 젊은 장군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어느 쪽을 향할지는 명백했다. 그는 유럽 쪽은 한순간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도시도 없고, 문화도 없고, 위신도 없고, 보상도 없었다. 다른 모든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문화와 사상과 기회는 (위협도) 동쪽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고대 세계의 최강국으로 향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바로 페르시아였다."(26-7)<br>"스텝 지역을 서로 맞물리고 서로 연결된 세계와 이어주는 일은 중국의 야망이 커지면서 가속화되었다. 한漢 왕조(기원전 202~기원후 220) 시대에 팽창의 물결은 국경을 더욱 멀리 밀어내 마침내 당시 서역西域이라 부르던 지방에까지 도달했다." "가장 중요하게 거래된 비단은 사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통화로도 쓰였다." "중국인들은 또 외국에서 오는 상인을 통제하기 위해 공식적인 체제를 마련했다. 둔황에서 멀지 않은 솬찬懸泉 역참 유적지에서 출토된 3만 5000점의 문서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쪽과 나무쪽에 쓰인 이 문서들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방문자들이 반드시 지정된 경로를 이용해야 했고, 나중에 한 명도 빠짐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점호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세계화는 2000년 전에도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기회를 제공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기술 발전을 촉진한 일이었다."(34, 38-9)<br>"역설적이지만 페르시아가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추동한 것은 바로 로마의 성장과 야망이었다. 예컨대 페르시아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장거리 교역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그것은 또한 페르시아의 정치적·경제적 무게중심을 북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전에는 스텝 지대에 가까운 쪽이 중요시되었다. 유목 민족들과 가축이나 말을 거래하고, 스텝 지대의 무시무시한 사람들로부터 내키지 않는 관심이나 요구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외교적 접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페르시아 정복 노력이 가져온 가장 큰 효과는 페르시아의 정치개혁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220년 무렵에 등장한 새 왕조 사산제국은 과감한 비전을 내놓았다. 사실상 독립적이었던 지방 총독의 권한을 박탈해서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고 잇단 행정개혁으로 국가의 거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가 부상하면서 로마는 전형적인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었다."(53-5)<br>2. 신앙의 길&nbsp;<br>"고대에 태평양,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만, 지중해를 연결하는 대동맥을 따라 흘러간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사상도 흘렀다. 가장 강력한 사상은 신과 관련된 사상이었다." "실크로드의 지적·신학적 공간은 북적거렸다. 여러 신과 종교, 성직자들과 각 지역의 지배자들이 서로 경쟁했다. 판은 컸다. 당시는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초자연적인 일까지 모든 현상을 알고 싶어하던 때였고, 신앙이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해법을 내놓던 때였다.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투쟁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이 모든 종교에서 전쟁터 또는 협상 테이블에서 승리하는 것은 곧 문화적 우월성과 신의 축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 등식은 간단하지만 강력했다. 제대로 된 신(또는 신들)이 보호하고 아끼는 사회는 번영하고, 거짓된 우상과 공허한 약속에 매달리는 사회는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성대한 예배 장소 같은 훌륭한 영적 기반시설에 투자할 강력한 동기를 느꼈다. 그것은 내부 통제의 방편을 제공했다."(63-5)<br>"페르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전통으로 내세워지고 정치적·군사적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가치관과 믿음이 강요되었다. 이와 다른 가치관을 주장하는 사람은 추적을 당하고 대부분 살해당했다. 카리스마 있는 3세기의 선지자 마니는 동방과 서방에서 기원한 여러 사상을 혼합하여 한때 샤푸르 1세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니의 가르침은 이제 파괴적이고 해롭고 위험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의 추종자들은 무자비하게 추적을 당했다. 가혹한 처우를 받은 것으로 지목되고 카르티르가 배척 대상으로 언급한 사람들 가운데 나스라예와 크리스티오네가 있다. 각각 '나사렛인'과 '기독교인'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가 3세기 페르시아의 의식과 정체성에 깊이 파고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 전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기독교는 교역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조로아스터 사상은 인상적인 급진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73-4)<br>3. 기독교도의 동방으로 가는 길&nbsp;<br>"로마의 붕괴는 아시아 기독교도들의 곤경을 완화시켰다. 스텝 지역 종족들에 대항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직면하자 로마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로마가 크게 쇠약해지자 기독교는 더 이상 위협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100년 전 콘스탄티누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기독교 주민들을 해방시키려고 준비할 때만 해도 로마는 명백한 위협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410년에 페르시아의 샤 야즈데게르드 1세가 후원한 첫 회의와 이후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페르시아에서 기독교 교회의 지위를 공인하고 그 신앙을 합법화하게 된다. 서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그리고 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리스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와 시리아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간의 의례와 교리의 차이는 계속해서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96-7)<br>"서방 교회가 다른 견해를 뿌리 뽑는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 동방 교회는 야심차고 광범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기독교는 심지어 스텝 지대의 유목민들에게도 전해졌다. 6세기 중반에는 아시아 깊숙한 지역에 대주교 관구가 있었다. 바스라, 모술, 티크리트에서는 기독교도 주민이 급증했다. 메르브, 군데샤푸르 같은 도시들과 심지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에도 영국 캔터베리보다 훨씬 먼저 대주교가 있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나 스칸디나비아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수백 년 전의 주요 기독교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 기독교가 소개되기 1000년 전에 흥성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중심지였다. 어쨌든 바그다드는 아테네보다 예루살렘이 더 가까웠고, 테헤란은 로마보다 성지가 더 가까웠으며, 사마르칸트도 파리나 런던보다 성지와 더 가까웠다. 기독교가 동방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잊히고 있었다."(103-4)<br>4. 혁명으로 가는 길&nbsp;<br>"사태의 전개 과정을 확실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일신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무함마드 혼자만은 아니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또한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전쟁으로 경기가 심각하게 위축된 상황에서 무함마드가 선교를 하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대결 및 그 결과로 나타난 군국화는 히자즈에서 출발하거나 그곳을 통과하는 교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정부 지출이 군대로 빨려 들어가고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 경제에 지속적인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에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상당히 감소했을 것이다. 전쟁이 전통적인 시장(특히 레반트와 페르시아의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남부 아라비아의 경제는 더욱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동란이 더 멀리까지 파장을 미치고 일상생활에 혼란을 주자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는 무함마드의 경고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132-3)<br>"이 새로운 정체성의 한가운데에는 통일에 관한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남부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의 권역으로 통합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로마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이곳의 경쟁관계를 조종하여 서로 싸우도록 부추겼다. 후원과 재정 지원은 의존적인 예속 지배층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치열한 전쟁은 이런 체제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앙이 현지 언어로 설교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랍인은 이제 독자적인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이 종교는 그곳 주민들을 위해 설계되었다. 유목민이든 도시인이든, 어느 부족 성원이든, 그리고 민족적·언어적 배경에 관계없이,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계시를 기록한 책, 즉 코란에 나오는 그리스어, 아람어, 시리아어,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차용어는 차이보다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던 다多언어 환경을 시사한다. 통합은 핵심 교리였고, 이슬람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다."(134-5)<br>5. 화합으로 가는 길&nbsp;<br>"코란에서 무함마드 당대의 사건을 이야기한 얼마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동로마인들을 좋게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이슬람교 팽창의 최초 국면에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초기 무슬림들이 신봉했던 금욕주의 또한 그리스-로마 세계와 문화적으로 친숙한 판단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동의와 감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을 회유하려는 노력은 아흘 아키타브(성서의 사람들)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정책으로 보완되었다. 아흘 알키타브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코란은 초기 무슬림들이 자기네를 이들 두 종교 신자들의 라이벌이 아니라 같은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로 보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코란은 인류가 한때는 하나의 '움마'였으며, 이후 차이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고 탄식조로 몇 차례 이야기하고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사이의 유사성은 코란과 하디스에서 강조되고, 차이는 언제나 하찮게 취급되고 있다."(150-1)<br># 하디스 :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은 것<br>"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치열한 대결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이례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고대 말기의 두 강대국이 위력을 과시하며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양국을 모두 대체하여 지배하는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 먼 구석 출신의 일파일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함마드에게 고무된 사람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관개기술과 새로운 농작물을 들여와서 수천 킬로미터를 뻗어나가는 그야말로 농업혁명을 촉발하게 된다. 이슬람의 정복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경제 대국을 만들어냈다. 자신감과 관대함, 진보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이를 추동했다." "이 세계는 질서가 뿌리 뿌리 내린 곳, 상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 지식인들이 존중받는 곳,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곳이 되었다. 메카 부근의 한 동굴에서 신통찮게 출발했지만, 전 세계에 걸친 일종의 유토피아를 탄생시킨 것이다."(174-5)<br>6. 모피의 길&nbsp;<br>"이슬람 제국의 등장은 새로운 교통로와 새로운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북쪽의 스텝과 삼림 지대로 통하는 '모피의 길'이 만들어진 것은 7~8세기의 대규모 정복 이후 수백 년 동안 가용 재산이 급격하게 증가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동물과 모피와 기타 산물을 시장으로 쉽게 가져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부유한 유목 종족들은 당연히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정착민 세계와 활발하고 믿을 만한 거래 상대였다. 마찬가지로 스텝 지대에서 가까운 도시들은 부유해졌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이, 이 시장에 가까운 곳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시장 접근성에 큰돈이 걸려 있기 때문에 스텝 지대의 종족 집단들은 서로 경쟁했다. 가장 좋은 목초지와 수자원을 놓고 벌이던 경쟁이 도시와 가장 좋은 교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이는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폭력에 의해 분열되거나, 종족 내부와 종족들이 통합하는 것이다. 싸울 것이냐 협력할 것이냐,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186-7)<br>"스칸디나비아의 상인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이킹의 시대에 가장 용감하고 가장 억센 남자들은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과 남쪽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고, 고향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새로운 나라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더구나 그들이 남긴 흔적은 북아메리카에서처럼 미미하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나라를 발견하게 된다. 발트해에서 카스피해 및 흑해와 연결되는 거대한 수계水系를 장악한 상인, 여행자, 침략자 들의 이름을 딴 나라다. 이 사람들은 루시Rus' 또는 로스rhos로 알려져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빨간 머리칼 때문이거나, 좀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들의 노 젓는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조상들이었다." "그들은 밀랍, 호박, 꿀 등의 교역에 종사했다. 가장 벌이가 좋은 것은 비단 장사였다. 비단은 북쪽으로, 러시아의 수계를 거슬러 올라가 스칸디나비아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막대한 양의 돈의 원천이었다."(196-9)<br>7. 노예의 길&nbsp;<br>"9세기에 유럽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수입품들의 대금으로 지불된 것은 노예를 팔아 번 돈이었다. 인기 있는 사치품이나 의료 필수품으로 기록에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양념류와 마약은 대규모 인신매매에서 번 돈으로 치렀다. 그리고 노예 장사로 이득을 본 것은 바이킹 루시만이 아니었다. 현재 프랑스 동북부 베르됭의 상인들은 내시들을 팔아 많은 이득을 올렸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이 주요 구매자였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한 유대인 상인들 역시 내시는 물론 〈어린 소녀와 소년들〉의 매매에 깊숙이 관여했다." "노예 교역은 벌이가 좋았다. 그것이 유럽인 이외의 노예들도 동방으로 끌어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무슬림 사업가들도 뛰어들었다. 그들은 동부 이란을 벗어나서 슬라브인들의 땅을 습격했다. 그런 포로들은 거세를 했고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시기의 한 아랍 작가는 슬라브인 쌍둥이를 잡아 그중 한 명을 거세시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형제보다 더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고 썼다."(209-10)<br>"셀주크인들이 노예 병사에서 막후 실력자로 갑자기 떠오른 것은 1055년에 칼리프의 초청으로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내면서부터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왕조 이름의 연원이 된 창시자 셀주크의 아들들 이름이 셀주크인은 본래 기독교였거나 아니면 심지어 유대교도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의 이름은 각기 미카일(미카엘), 이스라일(이스라엘), 무사(모세), 유누스(요나)다. 그들의 성공이 좀 더 천천히 이루어졌다면 세계는 아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 4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1071년 현재 터키의 동부인 말라즈기르트에서 재앙을 만났다. 그곳에서 습격을 받고 굴욕을 당한 것이다. 이 전투는 오늘날에도 터키 국가 탄생의 순간으로 기념되고 있는데, 제국 군대가 포위되어 궤멸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셀주크의 지배자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 황제를 땅바닥에 눕게 하고 그의 목을 발로 밟았다."(226-7)<br>8. 천국으로 가는 길&nbsp;<br>"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이 1차 십자군 기사들에게 함락되었다. 십자군 원정 직전에는 곧 다가올 세상의 종말에 관한 암울한 예측이 나돌았다. 이것이 이제 낙관론으로, 떠들썩한 자신감과 야망으로 바뀌었다. 5년 사이에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환영으로 변했다. 우트르메르Outremer('해외'라는 의미)에 새로운 기독교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예루살렘, 트리폴리, 티로스(수르), 안티오키아는 모두 유럽인들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봉건 서유럽에서 들여온 관습법에 따라 통치되었다. 그것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의 재산권에서부터 세금 징수와 예루살렘 왕의 권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다. 레반트는 서유럽처럼 움직이도록 개편되었다." "바그다드와 카이로에서는 (방관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편이 라이벌인 시아파나 수니파가 통제권을 갖는 것보다 낫다는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으리라."(233-6)<br>"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예루살렘 점령에서 상업적 가능성을 재빨리 발견했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는 심지어 십자군이 성도에 도달하기도 전에 선단을 바다로 내보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게 했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 십자군은 보급이 절실했고, 근거지인 유럽과 연결망을 갖추고자 필사적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의 함대들은 예루살렘의 새 지배자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입지는 십자군이 성공적인 포위전에 나서기 위해 하이파, 야파, 아크레, 트리폴리 등의 해안과 항구를 확보할 필요가 커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협상이 타결되어 막대한 이익을 올릴 가능성이 생겼다." "동부 지중해 지역의 교역 패권을 둘러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이전투구는 광포하고 무자비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베네치아가 확실한 승자로 떠올랐다. 이는 상당 부분 아드리아해에 면한 지리적 위치 덕분이었다. 동쪽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것이 피사나 제노바로 가는 것보다 항해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240-3)<br>9. 지옥으로 가는 길&nbsp;<br>"그들의 평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지만, 몽골인들이 13세기 초 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그 너머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그들이 항상 압제자로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호라즘은 지역 주민들에게 1년치 세금을 선납하도록 명령했다. 임박한 몽골의 공격에 대비해서 사마르칸트 주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고 궁수 부대의 급료를 지불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에게 그런 부담을 주고서는 계속 호의를 얻기가 어려웠다. 이와 대조적으로 몽골인들은 자기네가 점령한 일부 도시에서 기반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사마르칸트를 찾은 한 중국인 도사道士는 중국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그곳에 와 있고 방치되었던 들과 과수원 운영을 돕기 위해 주변 지역과 더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려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야만적인 파괴자라는 몽골인의 이미지는 왜곡된 것이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파괴와 약탈을 강조해 오도하는 후대 역사서들의 유산을 대변하는 것이었다."(273-4)<br>10. 죽음과 파괴의 길&nbsp;<br>"베네치아와 제노바가 호황을 누린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고객의 욕구, 그리고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 그곳으로 물건을 사러 온 상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보여준 재능과 선견지명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흥성한 배후에는 몽골인들이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부린 세제상의 재주와 규제가 있었다. 여러 자료들은 흑해 항구들을 통과하는 수출품에 대한 세금이 전체 상품 가치의 3~5퍼센트를 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하는 상품들에서 뜯어내는 통행세 및 부담금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것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의 세금 부담은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 심지어 30퍼센트에 이르기도 했다." "세심한 가격 설정과 세금을 낮게 유지하는 정책은 몽골제국 관료 집단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폭력과 마구잡이 파괴의 이미지에 가려진 점이다. 사실 몽골의 성공은 무분별한 만행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타협하고 협력한 덕분에 이룬 것이다."(299-300)<br>"페스트로 인해 촉발된 변화는 북서 유럽의 장기적인 번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유럽의 각 지역 사이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까지는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체제의 유연성과 경쟁을 긍정하는 태도,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투철한 직업의식이 필요하다는 북쪽 사람들의 자각 등이 근대 초 유럽 경제의 변혁의 바탕이 되었다. 현대의 연구들을 통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18세기 산업혁명의 뿌리는 페스트 이후 세계의 근면 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었다.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포부가 커지고 쓸 수 있는 돈도 많아졌다." "15세기의 프라 안젤리코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나 그 이후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이 유럽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덕분이었다. 하나는 아시아와의 교류로 다양한 색을 내는 물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 많아 예술가들을 후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24-5)<br>11. 황금의 길&nbsp;<br>"동부 대서양과 아프리카 해안을 내려가는 탐험으로 카나리아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 같은 여러 도서군島嶼群이 발견되었다. 이 섬들은 추가적인 발견의 가능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돈이 벌리는 오아시스가 되었다. 기후가 좋고 땅이 비옥해서 설탕을 만드는 작물이 자라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설탕은 곧 잉글랜드의 브리스톨이나 플랑드르뿐만 아니라 멀리 흑해 지역에까지 수출되었다. 콜럼버스가 출항할 무렵에 마데이라에서만 매년 1500톤가량의 설탕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문을 열고 서유럽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군사력이나 외교술도, 교황의 면허도, 영토 점령을 둘러싼 왕실 간의 경쟁도 아니었다. 진정한 약진은 모험기업의 배 선장들이 식용유와 가죽을 거래하고 금을 살 기회를 찾는 것보다 더 쉽고 나은 기회를 깨달으면서 이루어졌다. 유럽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사실로 입증되었듯이, 가장 큰 돈벌이는 인신매매였다."(343-6)<br>"한편 돈이 끝없이 대서양을 건너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새 제국의 지배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정치에서도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야망도 재조정되었다. 1519년, 카를로스는 재정적 영향력을 동원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하기로 단단히 결심한 지배자에게 패하고 압도당하고 밀려났음을 깨달았다."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에서 급속하게 팽창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부와 힘과 기회가 변함에 따라 에스파냐는 지중해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지방 변두리에서 세계의 강국으로 변모했다. 한 에스파냐 역사가에게 이것은 〈천지창조 이래 가장 큰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예수의 강생降生과 창조주 자신의 죽음을 제외하고〉 말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많은 금과 은이 매장된 페루 지방〉을 보여준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다."(358-60)<br>"새로운 시대, 진정한 '황금시대'의 도래는 로마의 거리에서 통곡 하게 하고 가슴 치게 했던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잊게 해주었다. 이제 할 일은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옛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종말은 입양된 새 상속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는 아테네나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로마의 역사에서도 초기부터 멸망하는 날까지 대체로 주변부였다. 그러다가 예술가, 작가, 건축가들이 고대로부터 주제와 발상과 문장을 빌려다가 이야기를 꾸미고 과거에서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그럴싸하게 만들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실처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표준이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시기를 르네상스라 불렀지만 이는 결코 재탄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네상스Naissance('탄생')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364)<br>12. 은의 길&nbsp;<br>"서아시아에서 격변의 시기가 지나고 1517년에 오스만이 이집트의 지배권을 장악한 뒤 지중해 동쪽의 지배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유럽을 위협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오스만은 1538년에 인도 서부 디우에 있는 포르투갈 항구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무렵에는 향신료 교역에서 얻는 이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에서 발을 빼서 다른 아시아 상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품목이 무명과 비단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말 무렵에 뚜렷해지는데, 이 시기에는 유럽으로 선적되는 직물의 양이 계속 늘고 있었다. 당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이것이 향신료 교역에 관여하는 포르투갈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의 결과이자 국왕의 졸렬한 결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은 수입품에 지나치게 높은 세금을 물렸으며, 유럽에 비효율적인 유통망을 만들고 있었다. 오스만의 경쟁력은 포르투갈을 (그리고 주변부를) 극심하게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381-3)<br>"유럽과 서아시아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려온 발견 소식들과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열린 해로로 인해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가장 휘황찬란한 곳은 인도였다. 1494년 테무르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페르가나 분지의 땅을 물려받았고, 이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남쪽으로 이동한 시점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새 영토는 오래지 않아 강대한 제국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교역로가 열리고 유럽이 적극적으로 구매에 나서면서 갑작스럽게 경화硬貨가 인도로 밀려들어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말을 사는 데 썼다." "말 시장에 접근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관문 도시들은 호황을 누렸다.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은 델리였다. 그곳은 힌두쿠시 산맥에 가까운 위치 덕분에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 도시의 상업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지배자의 지위도 높아졌다. 곧 이 지역에 직물산업이 번성하면서 이곳 물건들은 아시아 전역과 그 너머에까지 명성을 얻었다."(387-90)<br>"1571년 에스파냐인들의 마닐라 식민지 건설은 세계 무역의 흐름을 바꾸었다. 우선 그들은 처음 대서양을 건넜을 때에 비해 현지 주민들에게 피해를 덜 주는 방식의 식민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 정착지는 본래 향신료를 구매하는 기지로 건설되었지만, 곧 거대 도시로 성장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다. 이제 상품은 먼저 유럽을 거쳐가지 않고 태평양을 넘어 운송되었으며, 그 상품 대금으로 치를 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닐라를 통하는 경로가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스만제국의 경기가 위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국내의 재정 압박과 합스부르크 및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원정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부은 탓도 있었지만, 수천 킬로미터 밖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상품 교역을 위한 새로운 교차로가 탄생한 것도 오스만제국의 수입 감소에 한몫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의 송금이 줄기 시작하면서 에스파냐의 일부 지역에서도 경고등이 켜졌다."(394-5)<br>13. 북유럽으로 가는 길&nbsp;<br>"잉글랜드는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가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새 교역로에 도전하면서 오스만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 1571년 코린토스 만에 있는 레판토 앞바다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신성동맹'이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자 유럽 전역에서 환호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시, 음악, 미술과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조용했다." "두 나라 간의 공식 무역 협정에서 오스만 제국에 있는 잉글랜드 상인들에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후한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오스만과 무슬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잉글랜드의 주류 문화 속으로 확산되었다. 《오셀로》에서는 베네치아군에 복무하는 '무어인'인 (따라서 아마도 무슬림이었을) 주인공의 비극적인 고결성이 그의 주변에 있는 기독교도들의 이중잣대, 위선, 속임수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영국 문학에서 공통적인 문화적 준거로서 페르시아가 등장했다."(404-7)<br>"잉글랜드의 위선적인 태도는 16세기 초의 거대한 변화가 만들어낸 엄청난 기회를 이용하는 데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종교 분쟁과 운 나쁜 타이밍으로 인해 이 나라는 세계 강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로부터, 그리고 동방에서 홍해와 육상 교통로를 통해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교역으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이득을 얻기에는 불리한 위치에 서고 말았다. 아무리 에스파냐를 비난하더라도 잉글랜드가 쓰레기 더미나 뒤져 약간의 부스러기만 챙겨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잉글랜드는 〈이 시기에 용감한 젊은이들이 우글우글〉했으며,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으로 경제 침체에 빠져 있었다고 리처드 해클루트는 썼다.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이 왕국〉을 세계 〈모든 바다의 지배자〉로 만들 수 있는 해군을 창설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물었다. 어쨌든 꿈을 꾸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409-10)<br>"아메리카에서 돈이 흘러들어오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유럽 전역에서 이른바 물가혁명Price Revolution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자연히 소비자들이 한정된 양의 상품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물가가 더욱 치솟았다.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의 '발견' 직후인 16세기 동안에 곡물 가격이 다섯 배로 뛰었다. 사태는 결국 에스파냐 영토의 일부였던 저지대 국가의 지방과 도시들에서 터지고 말았다. 이곳 사람들은 에스파냐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화가 폭발했다." "오래지 않아 개별 주와 도시들은 가혹하게 높은 수준의 세금을 매기는 데 깜짝 놀라 울부짖었다. 여기에 더해 에스파냐는 신앙 문제에 야만스러울 정도로 폭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경제적·종교적 박해가 복합되고 강력해져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1581년 위트레흐트 동맹이 탄생했다. 이 독립선언에 의해 '7개 주 동맹'이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네덜란드 공화국의 탄생을 알렸다."(413-4)<br>14. 제국으로 가는 길&nbsp;<br>"영국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드러난 으뜸패는 지리적 이점이었다. 잉글랜드(1707년 스코틀랜드와 합병한 이후에는 영국)는 나라를 경쟁자들로부터 지켜주는 천연 방벽을 두르고 있었다. 바로 바다였다. 이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정부 지출을 생각하면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방어할 육상 국경이 없기 때문에 영국의 군비 지출은 대륙 경쟁자들의 지출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영국으로서는 결코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전쟁이라는 유럽의 전염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륙의 나라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서로 상대를 바꾸어가며 티격태격 싸움을 벌였다. 영국인들은 현명하게 개입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지만 입장이 불리해질 경우에는 관여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또한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445-6)<br>"표면 아래서 강력한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가 뻣뻣해지고 있었다. 동방을 이국적인 초목과 보물로 가득한 놀라운 나라로 보던 태도를 바꾸어, 현지 주민들을 아메리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대한 태도는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인한 흥분에서 노골적인 수탈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런 관점은 본래 무굴제국의 지방장관을 가리키던 말인 나와브nawab가 아시아에서 엄청나게 돈을 번 동인도회사 관리를 지칭하는 말로 변질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마치 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거친 동부'였다. 100년 뒤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연출되는 '거친 서부'라는 비슷한 장면의 서곡이었다." "이 거대한 재산에 접근하는 열쇠는 동인도회사가 상품을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운송하는 무역업체에서 점령 세력으로 변모한 데 있었다. 마약 거래와 협잡질로 이동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451-3)<br>"미국 독립전쟁은 영국에서, 단지 상업적으로 수익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있는 교역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지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관한 깊은 반성을 촉발했다. 벵골을 사실상 정복한 것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영국이 자기네 나라에서 이주해나간 정착민들을 지원하는 나라에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측면에서다. 그리고 잘 돌아가고 오래 갈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도 알아내야 함을 인식했다. 하나의 제국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 제국의 탄생은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인도의 대부분이 영국의 손에 넘어가자 육상 교역로가 생명력을 잃었다. 구매력과 소비력, 자산과 관심이 결정적으로 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군사 기술과 전술(특히 화력 및 중포와 관련한)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병대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 또한 수천 년 동안 아시아를 이리저리 연결해주던 길을 따라 운송되던 물량의 감소를 촉진했다. 중앙아시아는 그 이전의 남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457)<br>15. 위기로 가는 길&nbsp;<br>"19세기를 보통 영국 제국의 절정기로 보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징표들이 있다. 영국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필사적인 지연 작전을 펼쳤고, 종종 전략적·군사적·외교적으로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영토들을 점령하고 유지하려 노력하는 현실은 현지 및 세계의 경쟁자들과 벌이는 위험한 벼랑 끝 게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판돈은 점점 더 커졌다. 1914년이 되면 판돈은 더욱 커져 유럽에서의 전쟁 결과에 제국의 운명을 걸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세계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 그림자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영국의 필사적인 시도였다. 러시아가 영국에 가하는 위협은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권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을 앞둔 19세기에 암처럼 자랐다. 러시아가 성장하고 팽창하면서 영국과 이익을 다투게 될 뿐만 아니라 영국을 압도할 만한 위협 세력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런던에서는 더욱 자주, 더욱 크게 경종이 울려퍼졌다."(461-2)<br>"크림 반도와 아조프해에서 벌어지고 다른 곳들에서 잠깐 비쳤던 전쟁(1853. 10~1856. 3)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었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소수 지배층의 요구에 따른 것이고 대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는 크림 전쟁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전쟁으로 인해 심화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와 영국 병사들의 희생 속에 러시아의 코피가 터진 뒤 마침내 파리에서 협상 조건이 논의되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사르데냐 왕국 총리 카밀로 벤소였다. 그가 이 자리에 간 것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프랑스를 돕기 위해 흑해로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에 있는 순간을 약삭빠르게 이용해서 이탈리아의 통일과 자주를 요구했다. 이런 구호는 동맹국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본국의 지지자들을 자극했다."(476-8)<br>"1856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부과한 조항은 러시아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협력해서 자기네 경쟁자의 목을 올가미로 묶었다.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어렵사리 얻은 이득을 빼앗겼고, 흑해의 군사적 접근을 박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곳은 중립 지대로 선포되어 모든 군함이 통제되었다. 해안 지대도 비무장 지역으로 만들어, 요새를 만들거나 병기를 보관할 수 없었다. 그 목적은 러시아에 굴욕감을 주고 야망을 꺾어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는 훗날의 베르사유 조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 조약을 통한 해결이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합의 내용이 매우 가혹하고 구속적이어서 러시아가 즉각 그 족쇄에서 빠져나오려 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것은 변화와 개혁의 시대를 재촉했다." "차르의 농노제 폐지는 1850년대의 심각한 금융위기가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이를 촉진한 것은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와 그 이후의 치욕적인 합의 내용이었다."(478-9)<br>16. 전쟁으로 가는 길&nbsp;<br>"19세기 말에 러시아의 자신감은 (심지어 완고함은) 빠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조약의 흑해 관련 구절을 백지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유럽 각국 주재 공관들은 차례차례 조약을 개정하고 특히 민감한 구절을 삭제하는 일에 대한 지지를 조용히 호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극심한 불안감은 흑해에 대한 우려보다도 러시아가 갈수록 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군사행동은 비현실적인 가능성이었고 쓸 수 있는 카드도 별로 없어, 영국은 받아들이는 수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는 원하던 것을 얻었다. 다시 말해 해안 지역에서 자기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크림 반도의 항구나 흑해 북안의 다른 지역 어디에든 군함을 배치할 자유를 얻었다. 한 영국인 목격자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기쁨 속에 이를 맞았고, 러시아의 〈승리〉로 해석되었다."(485-6)<br>"불안은 커져갔다. 제국이 일을 너무 벌려놓고 있다는 통렬한 자각이 나오는 시기였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대치하고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이 해외에서 패배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러시아의 진격에 대한 공포를 더욱 부채질했다. 1901년 말 영국 내각에 제출된 파멸을 예고하는 한 보고서는 철로가 오렌부르크에서 타슈켄트까지 연결되면 러시아는 20만 명의 병사를 중앙아시아에 보낼 수 있고, 그 수의 절반 이상은 불안하게도 인도 국경 가까이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영국의 선택지가 적다는 점이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린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의 폭력적인 장면과 러일전쟁에서 차르의 해군이 참패한 일은 러시아가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이제는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504-5)<br>"타이밍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이웃이자 앙숙인 독일의 급격한 경제 성장에 갈수록 동요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 공업이 1870년 이후 20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따라서 러시아의 관심을 그 서쪽 변경으로 돌리려는 영국의 바람은 프랑스에게도 달콤한 음악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첫 번째 재조정 국면은 1904년에 일어났다. 1907년에는 동맹국의 범위가 확정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중심을 가로질러 러시아와 공식적인 협약을 맺었다." "영국 관리들은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서 자기네가 결국 끔찍한 사태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를 최악으로 몰아갈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바로 러시아와 독일의 동맹이었다. 이런 공포는 한동안 영국의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사실 1907년 영국-러시아 동맹의 목적 중 하나는 아시아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었다."(505-6, 509)<br>17. 석유의 길&nbsp;<br>"석유 발견으로 1901년에 샤가 서명한 문서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수십억 달러짜리 사업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혼란의 길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협정 조항들로 페르시아 국가의 보물에 대한 통제권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뿌리 깊고도 지긋지긋한 증오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민족주의를 촉발했으며, 마침내 서방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과 거부감을 낳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오늘날의 이슬람 근본주의다. 석유 통제권을 차지하려는 욕구는 장래에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녹스 다시가 채굴권을 따낸 것은 놀라운 사업 감각이자 불가능에 도전하여 이뤄낸 성공이었다. 이 사건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발견'한 일과 맞먹는다. 당시에도 막대한 보물과 재산들이 콩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수탈되어 유럽으로 보내졌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다."(545)<br>"1917년 이후 영국의 일부 정책 담당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다. 동부 페르시아에서 근무해서 이 나라를 잘 알고 있던 노련한 행정가 퍼시 콕스는 1917년에 영국이 러시아, 프랑스, 일본, 독일과 오스만까지 영구히 배제하고 페르시아만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17년 러시아가 붕괴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잡은 직후 독일과 평화에 합의한 것이 유럽에서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밝은 전망을 가져다주었다. 벨푸어 장관은 1918년 여름에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이렇게 썼다. 〈[전제 체제하의 러시아는] 그 이웃에게 위협 요소였고, 그 이웃들 가운데서도 바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내부에서 붕괴한 것은 동방에서의 영국의 입지를 생각하면 좋은 소식이었다. 수에즈 운하에서 인도까지 뻗어 있는 지역의 장악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559)<br>18. 화해로 가는 길&nbsp;<br>"'벨푸어 선언'으로 대표되는, 유럽 유대인들의 자치구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관심을 끌었지만,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주시한 것은 그곳이 지중해로 연결되는 석유 송유관의 종점이기 때문이었다. 입안자들은 나중에 이것이 수천 킬로미터의 운송 경로를 줄이고 영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전으로 드러나게 될 곳의 석유 생산에 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수심이 깊고 좋은 항구가 있어 석유를 영국 유조선에 싣기에 이상적인 곳이 하이파를 장악하고, 송유관이 프랑스가 통제하는 북쪽의 시리아가 아니라 이 항구로 연결되도록 해야 했다. 하이파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석유를 수송해오는 송유관의 종점으로 완벽한 곳이라는 판단은 옳았다. 1940년까지 400만 톤 이상의 석유가 전쟁 뒤에 건설된 송유관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수송되었다. 《타임》지가 표현했듯이 그것은 〈대영제국의 경동맥〉이었다."(567)<br>"문제는 이 새로운 제국의 시대가 거의 곧바로, 세계는 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인식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영국이 석유 및 송유관 네트워크 통제권을 주장하려 한 것은 모두 좋았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국의 국가 부채가 치솟자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에 관한 고통스럽고 힘든 논의가 이루어졌다. 엄청난 비용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라고 커즌은 썼다." "야망과 능력 사이의 이 부조화는 참화로 가는 길이었고, 그 곤경은 고위 외교관들의 고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런던의 정책 담당자들은 현지 주민들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영국의 전략적·경제적 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1920년대에 영국은 이라크,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들을 세우고 끌어내리는 데 직접 책임이 있거나 배후에 있었다. 이는 불가피하게 지긋지긋한 문제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약해졌다."(580-1)<br>19. 밀의 길&nbsp;<br>"1939년 봄,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불가침 협정에 조인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몇 달 동안은 독일로 상품과 물자가 흘러들어왔지만, 언제나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협상은 팽팽했다. 특히 수요가 많았던 밀과 석유 등 두 가지 자원의 경우에는 더했다. 스탈린은 이 문제를 직접 감독해서 독일이 요구한 80만 톤의 석유를 보낼 것인지 그 일부만 보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보낼 것인지를 결정했다. 일일이 화물 선적을 논의하는 것은 긴장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독일 전략가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상시적인 불안의 근원이었다. 당연히 독일 외무부는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고 있었고, 소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쏟아냈다. 지도부가 바뀌거나, 그들이 고집을 부리거나, 아니면 단순한 거래상의 이견이 발생하거나 등의 이유로 독일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유럽에서 계속 놀라운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가운데 제기된 커다란 위협이었다."(611)<br>"독일은 갈수록 식량과 물자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소련 곡물을 들여와도 만성적인 공급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예컨대 1941년 2월에 독일 라디오는 영국의 교역 봉쇄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농업 전문가 헤르베르트 바케의 제안은 급진적이었다. 소련은 광대해서 지리와 기후가 다양하지만, 대략적인 선으로 나눌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 캅카스 산지를 포괄하는 남부는 들판과 자원이 있는 '잉여' 구역이었다. 중북부 러시아와 벨라루사, 발트해 연안 지역 등의 북부는 '부족' 구역이었다. 바케가 밝혔듯이 이 선 한쪽에 있는 사람들은 곡물을 생산했고,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하기만 했다. 독일의 식량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잉여구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무시하면 되었다. '잉여' 구역을 점령하여 그 산물을 독일이 차지해야 했다. '부족' 구역은 잘라내게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의 생존은 관심 밖이었다."(616-7)<br>20. 대량학살로 가는 길&nbsp;<br>"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은 독일의 자원 기반을 확장하는 일에서 두 나라를 본보기로 삼았다. 첫째는 대영제국이었다. 독일은 동방의 드넓은 새 영토에 발자국을 찍게 된다. 마치 영국이 인도아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 개척에 나선 독일의 소수 주민들이 소련을 지배하게 된다. 마치 소수 영국인들이 라지Raj('통치'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통치했던 것처럼, 유럽 문명은 정말로 열등한 문화에 승리를 거둘 것이다." "히틀러가 자주 언급한 또 다른 모델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유사성을 보았고 여기에 자극받았다. 바로 미국이었다. 독일은 유럽인 정착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곳 원주민들에게 했던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히틀러는 새로 임명된 동방점령지부 장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말했다. 현지 주민들은 몰아내거나 아니면 몰살해야 했다. 볼가 강은 독일의 미시시피 강이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문명 세계와 그 너머의 무질서 사이의 경계선이었다."(626-7)<br>"스탈린은 이제 영국 및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동맹자가 되었다. 문제는 무기와 물자를 어떻게 소련에 공급하느냐였다. 북극해에 있는 항구들로 실어다 주는 데는 수송의 어려움이 있었고, 한겨울에는 위험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이외에 동방에 적당한 항구가 없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 무엇보다 태평양의 부동항들을 일본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법은 분명했다. 바로 이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지의 독일 요원들과 동조자들이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막을 수 있고, 연합군이 잃으면 곤란한 천연자원을 보호할 수 있으며, 베어마흐트(독일군)의 동방 진군을 저지하고 중단시키는 일에 함께 노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연합군의 전쟁 목표에도 부합했지만, 영국과 소련 각자에게 장기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이란을 점령하면 두 나라는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자원, 전략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636-7)<br>21. 냉전의 길&nbsp;<br>"아시아에서 일어난 군사적 압력의 해일은 동방에서 여러 차례의 '됭케르크 철수'를 불러왔다. 영국의 황금시대가 끝났음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마구잡이 퇴각의 사례들이었다." "영국의 어설픈 모습은 영국의 보호령 트란스요르단의 지배자 압둘라 1세와의 거래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압둘라는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비밀 협정을 통해 1946년 독립 이후 자신의 정권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는 이 약속을 이용하여 영국이 철수한 뒤 자신의 영토를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한계는 있었지만 영국의 승인을 받은 셈이었다. 어떠한 조언을 했든, 영국이 발을 빼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부분을 덮친 혼란은 유럽 제국의 세력의 해로운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영국이 고개를 끄덕이고 팔꿈치로 찌르고 눈짓을 해서 실행한 정책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치안 세력이 바뀌면서 힘의 공백이 생겼음을 드러냈다."(666, 669)<br>"모사데그는 서아시아에서 서방의 영향을 그저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제거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모사데그는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제시한 사람이었고, 그 새로운 시대는 서방 세력이 아시아의 중심부에서 물러나는 시대였다. 그가 쫓겨난 정황에 대해서는 정보기관들이 수십 년 동안 숨겨왔지만, 모사데그 제거가 서방 강국들이 자기네 목적을 위해 조직한 일이나는 데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모사데그는 이 지역에서 수많은 계승자들을 낳은 정신적 아버지였다. 아야톨라 루홀라흐 호메이니,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탈레반 등 다양한 부류의 방법과 목표와 야망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 모두는 서방이 진실하지 않고 해로우며, 현지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핵심 원리를 통해 하나가 되고 있다."(689-90)<br>22. 미국의 실크로드&nbsp;<br>"석유 자원 때문에 이란이 서방에 특히 중요한 곳이 되었지만, 그 이웃 나라들 역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소련의 남쪽 변경에 있다는 위치 때문이었다. 그 결과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지원을 받는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나라들이 띠를 이루었다. 소박한 덜레스 국무부 장관이 '북단Northern Tier'이라 명명한 이 지역의 나라들은 세 가지 목표에 이바지했다. 첫째로는 소련의 이익 확대를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고, 둘째는 자원이 풍부한 페르시아만 지역을 보호하고 석유를 서방으로 수송하여 유럽의 재건을 촉진하고 동시에 지역 안정에 중요한 수입을 제공했으며, 셋째로 소련 진영과의 긴장이 공개적 충돌로 이어질 경우를 대비한 정보 수집처와 군사기지를 제공했다." "1955년 서쪽의 터키에서 이라크와 이란을 거쳐 동쪽의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의 나라들이 단일 협정(바그다드 조약)을 결합했다. 서로 간에, 그리고 영국과 맺었던 복잡한 동맹관계를 대체한 것이다."(698-9)<br>"현지 정권들이 호의적으로 행동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꼼꼼한 고려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955년 말 3년 전 CIA의 지원하에 파루크 국왕을 쫓아낸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집트의 혁명가 가말 압델 나세르가 역시 소련에 무기를 요청하며 접근했다. 깜짝 놀란 미국은 영국 및 세계은행과 함께 아스완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돈을 대주겠다고 제안했다." "나세르는 바그다드 조약에 대해 짜증을 내왔다. 그는 이것이 아랍 통일의 장애물이며 아시아의 중심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서방의 도구라고 보았다. 돈과 지원을 약속받았다면 그는 아마도 누그러졌을 것이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금 지원 약속이 철회되었다. 댐을 건설하면 이집트의 면화 생산이 증가하여 가격이 떨어지고 그것이 미국 농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미국 의회 의원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이기주의는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699-701)<br>"자유 세계와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수호하고자 하는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목표가 아주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다. 미국의 입지는 비민주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고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약한 방법을 동원하는 독재자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의 서방 정책 담당자들은 현장의 실정을 무시하고 자기네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는 쪽을 택했다. 미국의 많은 관측통에게 이란은 완전한 승리로 보였다. 〈서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견실한 친구들 가운데 하나〉인 이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1968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란의 국민총샌산(GNP)이 급속도로 증가해 최근의 〈주목할 만한 성공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4년 뒤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더 단호한 어조였다." "이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번영하는 나라〉,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는 길을 착착 밟아가고 있다고 보고서는 확신에 차서 예측했다."(712, 717-8)<br>23. 초강대국 대결의 길&nbsp;<br>"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지역, 그리고 인도양 지역 사람들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두 초강대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는 관행을 가리키는 말이 생겼다. '불편不偏'이라는 뜻의 '비타라피bi-tarafi'가 외교정책의 원칙이 되어서, 소련이 주는 것과 미국이 주는 것이 비슷해지도록 균형을 추구했다. 소련과 미국은 각기 아프가니스탄의 군 장교들을 공식 교육 프로그램에 초청하여 미래의 지도자들과 연줄을 만들고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양쪽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교들은 고국에 돌아온 뒤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재능이 인정된 장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그들이 선전하는 낙원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해외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 대다수의 반응은 새로운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전도하기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자주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727-8)<br>"사실 이란이 핵 원료를 확보한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정책을 추진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구상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이 〈국제원자력 풀〉에 참여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결국 우방국 정부들은 4만 킬로그램의 우라늄-235를 비군사적 연구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0년 동안 핵 기술과 부품과 원료를 공유하는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다. 소련 진영에 맞서 협력과 지지를 해주는 데 대한 직접적인 장려책이었다." "1976년 포드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 원자로 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이 포함된 미국산 시스템을 구매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재가했다. 이란은 이에 따라 '핵연료 순환'의 전 과정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 리처드 체니(딕 체니)는 주저 없이 이 판매를 승인했다. 1970년대에 그는 이란의 동기가 무엇이지 〈알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741-3)<br>24. 파멸로 가는 길&nbsp;<br>"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은 이 지역 전체에서 미국이 세운 엉성한 구상을 허물어뜨렸다. 그곳에는 한동안 불안정을 가리키는 징표들이 있었다. 샤 정권의 부패는 경제 침체와 정치적 무기력, 그리고 경찰의 만행과 함께 고약한 조합을 이루었다." "샤가 몰락하면서 이례적인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1980년 말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장래는 불확실했고, 자기네 지도자들의 선택과 외부 세력의 간섭에 달려 있었다. 지역 전체는 고사하고 각 나라에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추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에게는 모든 일에 다 관여하며 그럭저럭 넘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반미 정서의 씨앗이 20세기 이전에 뿌려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처절한 증오로 자라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에 내렸던 미국의 정책 결정은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놓인 이 지역 전체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755, 777-8)<br>"동력은 소련 쪽에 있는 듯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소련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주요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희망을 걸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정책 담당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취해야 할 조치가 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담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라크가 이란과의 전쟁에서 밀려 붕괴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는 전략적 재난〉이 될 터였다. 이는 페르시아만 일대와 서아시아 전체에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제 석유 시장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새로운 정책이 떠올랐다. 그곳은 미국이 아시아의 중심에서 진행되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었다. 사담을 돕는 것은 계속해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이란과 소련 두 나라 모두의 전진을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781-2)<br>"사담은 여전히 미국과 그들의 목적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며, 이런 모든 조치들이 취해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83년 말 레이건 대통령이 도널드 럼스펠드 특사를 바그다드에 보냈을 때 그의 명시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사담 후세인과 〈대화를 시작하고 개인적인 친밀감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럼스펠드의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는 이라크의 운명에 중대한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이를 서방의 전략적 패배로 생각할 것입니다.〉 럼스펠드의 행보는 미국과 이라크 양쪽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그것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대단한 진전〉이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호메이니가 서아시아 전역에 시아파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일에 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라크와의 협력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미국은 사담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눈감아줄 용의가 있었다. 미국에게 이라크는 국제법의 원칙보다도 더 중요했다."(783)<br>25. 비극으로 가는 길&nbsp;<br>"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 몇 시간 만에 빈 라덴을 처리하기 위한 전략들이 만들어졌다. 9월 13일 아침에 나온 실행 계획은 이란과 관계를 맺고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 당국과 접촉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모두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거나 가까운 나라였다. 그 후 일주일 이내에 이들의 기운을 〈다시 북돋우〉기 위한 계획이 만들어졌다. 곧 있을 탈레반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9·11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은 실크로드의 나라들을 줄 세우는 것이었다." "빈 라덴을 찾아내고 알카에다의 역량을 파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범인 추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관심은 아시아의 중심부를 결정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통제하는 문제로 옮겨갔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 지역의 나라들을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미국의 이익과 안전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말이다."(822-4)<br>"9·11 공격은 미국이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북한과 함께 〈악의 축을 이루어 무장을 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악의 축을 해체하는 것이 긴요했다." "통제권을 장악하겠다는 결의는 대단했다. 안정을 해치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전략적 사고의 중심에 있었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어날 수 있는지,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장기적인 전망보다 더 중요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물리치는 것이 것이 핵심이었다. 그 뒤의 상황은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근시안적 태도는 이라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일에만 집중했을 뿐 이 나라의 장래 모습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었다."(825-6)<br>맺음말 : 새로운 실크로드<br>"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이 어설프게 개입하고 기타 지역에서 압력을 행사하는 일 이외에 진행되는 것이 더 있다. 동방에서 서방까지 실크로드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혼란과 폭력, 종교적 근본주의, 러시아와 그 이웃들 사이의 충돌, 중국이 서부 지방에서 벌이는 극단주의와의 사투를 보면 혼란과 동요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한때 지적·문화적·경제적 풍광을 지배했으며 이제 다시 떠오르고 있는 지역의 산고產苦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에 매장된 천연자원이다."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여기에 새로운 종류의 대동맥들이 추가되었다. 기존 파이프라인과 예정된 파이프라인이 유럽을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석유 및 가스 매장지와 연결한다. 이에 따라 자원 수출국뿐만 아니라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나라의 정치적·경제적·전략적 중요성도 덩달아 증대된다. 실크로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842, 85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62/5/cover150/s66283409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962055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