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nana35님의 서재 (nana35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좋은 책을 찾아서</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05 Aug 2026 03:57:46 +0900</lastBuildDate><image><title>nana35</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210815324392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nana35</description></image><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박재용 -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근대 과학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29494</link><pubDate>Mon, 03 Aug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2949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036866&TPaperId=174294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22/18/coveroff/k65203686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036866&TPaperId=1742949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근대 과학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a><br/>박재용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01월<br/></td></tr></table><br/>제1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nbsp;<br>1장 그리스 자연철학&nbsp;<br># 이원론(현상계와 구분되는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 :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nbsp;<br># 일원론(우리가 감각하는 현상계가 실재 세계이다) :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엠페도클레스&nbsp;<br>"데미우르고스는 선하고 지혜로운 존재이기에 가능한 한 이데아를 닮은 완벽한 우주를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창조는 불가능했고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현상계가 만들어지게 되었죠. 재료 즉 '질료'(코라, khôra)의 한계 때문이라 합니다. 여기서 질료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는 아니고, 공간 그 자체 혹은 받아들임(receptacle)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창조가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필연'(anánkê)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인 활동 외에도 무작위적이고 비이성적인 힘, 즉 필연이 창조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필연은 논리적 필연성과 같은 의미보다는 강제성이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깝습니다. 이 필연은 우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로, 플라톤이 완벽한 질서와 불완전한 현실 사이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려고 도입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 이 필연이 창조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38)<br>2장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세계&nbsp;<br>"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주는 하나이자 둘이었습니다. 달보다 위쪽에 있는 천상계(celestial world)와 그 아래쪽의 지상계-월하계(terrestrial world)로 나뉘었지요. 그에 따르면 지상계는 물, 불, 흙, 공기라는 네 원소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이 되는 원소가 네 가지나 된다는 것은 각각의 원소가 어딘가 부족한 불완전한 요소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불완전한 속성을 가진 원소로 구성된 지상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천상계는 완전한 원소인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테르는 지상의 4원소가 가진 모든 속성을 스스로 가진 존재로 완전한 질료입니다. 따라서 이런 질료에 의해 구성된 천상계는 완전한 모습을 가집니다. 에테르(Aither)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핵심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테르를 '제5원소' 또는 '첫 번째 물질'(Prime Matter)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에테르가 지상계를 구성하는 4원소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진 실체임을 의미합니다."(67-8)<br>"『천체에 관하여』(De Caelo) 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체의 운동은 균일하고 끊임없는 원운동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물질(에테르)의 본성이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천체'란 항성천구, 즉 우주의 가장 바깥 경계를 이루는 천구를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항성천구의 원운동이 다른 모든 천체의 운동을 규정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천체들은 모두 항성천구에 고정되어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천체의 일차적 운동은 모두 완전한 원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성들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부차적 운동'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운동에 추가되는 보조적인 운동으로, 행성마다 고유한 속도와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차적 운동 역시 근본적으로는 원운동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69)<br>"하지만 불완전한 원소로 이루어진 지상계에서는 원운동이 불가합니다. 물과 흙의 속성을 많이 가진 물질은 아래로 내려가는 낙하 운동을 하고, 불과 공기의 속성을 가진 물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합니다. 이런 수직운동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죠."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지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여러 천체가 감싸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중심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지구는 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리고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천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천체론』, 제2권, 제4장) 이는 지구중심적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를 구성하는 것은 무거운 원소인 땅(흙)입니다. 지구 주위에는 물, 공기, 불이 층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습니다. 물은 땅 바로 위에, 공기는 물 위에, 불은 공기 위에 위치합니다. 지상계를 넘어서면 천상계가 시작됩니다."(71-2)<br># 『천체에 관하여』(De Caelo)가 원제목이며, 간단히 『천체론』이라고 부른다.<br>"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창조주는 관조의 신이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저 미신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의 창조주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전 우주의 운동의 제1원인이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동자는 완벽히 아름답고 불가분하며 완벽한 '관조'만을 '관조'하는 자라고 하지요. 즉 이 세상이 자신이 창조한 원리대로 움직이도록 하되, 개입하지는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 '기적'은 당치도 않는 행위지요. 창조자가 스스로 정한 원칙을 깨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원격으로 작용합니다.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서 벼락을 내리치듯이 말이지요. 그로서는 접촉 원리를 벗어난 일이 실제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은 훗날 중세에서 르네승스로 넘어가는 시기 유럽에서 대학과 수도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80)<br># 접촉 원리 : 지상계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힘은 접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원리.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br>3장 지구중심설 대 태양중심설&nbsp;<br>"문명세계 최초로 지구중심설(geocentrism)을 부정한 이들은 피타고라스학파입니다. 이들은 거의 태양중심설(heliocentrism)로 볼 만한 생각을 가진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의 중심에 거대한 불타는 구, 이른바 '헤스티아의 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스티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정과 화덕의 불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불의 수호자이자 가정의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였죠. 그들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불에 헤스티아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들이 이 불을 단순한 물리적 실체 이상의 것, 즉 우주 만물을 품고 길러내는 근원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겼음을 시사합니다." "사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천체들의 역행운동처럼 당대의 천문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이 맹신했던 기하학적 원리와 수의 조화를 우주에 투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짐작합니다."(98-100)<br>"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말 그대로 천문학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비주의적 경향과는 다른 과학적 견지에서 지구중심설 대신 태양중심설을 주장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에 대해 당시 다른 천문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 대다수는 반대합니다. 반대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 위에 있는 우리는 왜 그 힘(원심력)을 느낄 수 없는가라는 점입니다(지구 공전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공전하거나 자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원심력이 중력에 비해 워낙 작아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별의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별이 너무 멀어서 시차 자체가 너무 작아 볼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아리스타르코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지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101-5)<br># 별의 연주시차(年周視差) :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는 반년마다 반대쪽 끝에 도달한다. 두 지점에서 별을 보았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각도의 차이를 연주시차라고 한다.<br>"히파르코스는 기원전 2세기경에 로도스 섬에 천문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주로 활동한 그리스 천문학자로, 천체 관측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특히 별의 위치와 밝기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삼각법과 구면삼각법을 활용하여 천체의 운동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등 고대 천문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업적은 당시 지중해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지요. 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알마게스트』('천문학 집대성') 내용의 거의 삼분의 일 정도가 히파르코스가 발견하고 정리한 내용들로 채워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우주의 중심에 대한 히파르코스의 입장이 대단히 아리송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제자로 알려졌지만 딱히 태양중심설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구중심설을 확고하게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스승의 주장이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외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볼 뿐입니다)."(110, 113)<br>"프톨레마이오스는 역행운동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周轉圓, epicycle), 이심(離心, eccentric point) 등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각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큰 원(주원)을 따라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원 위의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원(주전원)을 따라 공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전원의 중심이 주원을 따라 움직이는 거죠. 이심은 행성 궤도(주원)의 중심이 지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행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걸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문제는 이렇게 해도 행성 궤도의 실제 관측결과와 잘 맞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다시 대심(對心, Equa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대심은 이심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장소인데, 행성의 주전원이 이 점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일정한 속도로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한 거죠. 그의 우주 모델은 매우 복잡하지만, 당시 이론 중에서는 관측 결과와 가장 닮았기에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116-8)<br>제2부 소멸, 복권, 균열&nbsp;<br>4장 헬레니즘 시대&nbsp;<br>"헤르메스주의(Hermeticism)는 그리스에서 상업, 여행, 전령의 신이자 정보와 의미를 관장하던 신인 헤르메스가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와 동일시되면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탄생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점성술, 연금술, 마법의 세 가지 능력을 가진 이 반신적 인물에 대한 종교철학적 숭배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던 거죠." "특히 그노시스주의는 헤르메스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영지주의'(靈智主義)라고 번역되는 이 사상은 기원후 1~2세기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유행한 종교 사상입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이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겁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을 신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연의 신비를 깨우치고 이를 자신의 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미시적 우주(microcosmos)로 여깁니다."(126-8)<br>"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수용 발전시켰는데, 그에 따르면 우주는 원자(atom)와 공허(void)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물질 입자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모든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보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운동에 대해 특히 주목했는데, 그는 원자들이 자유 낙하하듯 수직으로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아래는 우주의 중심을 뜻합니다. 이때 원자들은 모두 동일한 속도로 평행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에 중요 개념을 하나 추가하는데, 바로 '클리나멘'(clinamen, 라틴어로 기울어짐, 편향, 휘어짐)입니다. 이는 원자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미세하게 궤도를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원자 충돌은 상당히 우연한 경향이 있어 결정론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129-30)<br>#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일종의 다중우주론도 제시했다.<br>"'판단중지'(에포케, epoche)로 잘 알려진 피론주의는 기원전 4~3세기경 엘리스의 피론(Pyrrhon)에 의해 체계화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 피론은 감각과 이성으로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꿀이 어떤 이에게는 달게 느껴지지만 다른 이에게는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감각은 주관적이며 상황 의존적이라는 것이죠. 또한 이성으로도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같은 대상에 대해 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도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피론의 생각입니다." "피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판단중지 즉 '에포케'야말로 인간이 마음의 평정을 얻는 지름길이라 역설했습니다. 피론에게 에포케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평온한 삶을 위한 실천적 방법이었던 거죠.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우리는 독단적 믿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윤리관이었습니다."(133-4)<br>5장 이슬람으로 간 아리스토텔레스&nbsp;<br>"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수학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등의 업적으로 대표됩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하학의 체계를 세웠고, 아르키메데스는 원주율 계산과 적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아폴로니우스는 원뿔 곡선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인도 수학자들은 십진법과 0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음수를 도입했으며, 방정식 해법에서도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이 두 전통을 수용하고 종합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룹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관측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천체 관측을 위한 다양한 기기를 발명하고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정밀한 관측 기록을 남기고 새로운 천문 현상을 발견합니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관측 결과와 프톨레마이오스 이론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지구중심설을 유지한 상태로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죠."(147, 150-1)<br>"아리스토텔레스는 투사체가 계속 움직이는 이유를 주변 공기의 작용으로 설명했지만, 이븐 시나(Ibn Sina)는 이러한 설명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봅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공기는 투사체를 앞으로 밀어주는 동시에 저항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븐 시나는 같은 매질이 이렇게 상반된 작용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모순된다고 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라면 투사체의 속도는 급격히 감소해야 하는데, 실제 관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븐 바자(Ibn Bajjah)는 물체의 낙하 운동을 연구하여, 운동의 속도와 시간, 거리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정 속도 낙하 이론과 대비되는 중요한 관찰입니다. 이븐 바자는 비록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낙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분석을 시도합니다."(153, 156)<br>"플라톤과 유클리드가 주장한 '방출설'은 눈에서 광선이 나와 물체에 닿아 시각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형상'이 매질을 통해 눈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합니다. 알 하이삼은 이러한 기존 이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와 시각을 일으킨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합니다." "알 하이삼의 광선유입설은 빛을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로 보고, 눈을 빛을 수용하는 정교한 광학 기관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는 이후 렌즈와 망원경 발명 등 광학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됩니다. 그의 책 『광학 서설』은 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고, 로저 베이컨, 비텔로, 케플러 등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에는 『광학 서설』이 일종의 교과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또 이 책은 원근법 연구에도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157-9)<br>6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복권에서 균열까지&nbsp;<br>"12세기부터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들어오면서 유럽 지성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특히 대학들부터 먼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업의 중심으로 삼았죠." "왜 대학들은 교회와 여러 번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와 수업의 중심으로 삼게 된 걸까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모두 다루면서도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또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쉽게 말해서 강의용 교재로는 그만이었죠. 특히 『논리학』이 그러합니다. 대학 교육에 딱 맞았습니다. 이런 이유에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융합한 스콜라철학을 만들고 신학의 주류가 되면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수가 된 점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우는 건 신학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죠."(178-80)<br>"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업의 중심이 되면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먼저, 학문이 더 세속적으로 변합니다. 이전 수도원 학교나 초기 대학에서는 대부분 신학이 중심이자 대부분이었죠.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도 커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이성적 능력을 강조하고, 논리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이런 태도 때문에 대학에서도 계시나 권위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철학도 독립했지요. 원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리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어오면서 철학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 잡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방식도 바뀝니다. 이전에는 성경과 교부들의 책을 암기하고 반복하는 방식과 강의가 주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글에 대한 주석을 학습하는 것이 추가되었죠. 하지만 이제 책을 같이 읽고 해석하는 강독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그리고 논리적 분석과 비판적 사고가 주된 교육 방법이 됩니다."(180-1)<br>"르네상스가 본격화하면서 일어난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중세의 전성기 혹은 번역 르네상스 시기 이래로 유럽 지성계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어 원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학자들은 중세 시대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원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이는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죠. 인문주의 운동의 확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4세기 페트라르카를 시작으로, 15세기의 로렌초 발라, 그리고 16세기 초의 에라스무스는 고전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와 수사학적 분석을 강조했습니다." "16세기 들어 항해술, 광산업, 농업 등 실제 경험에 기초한 지식이 중요해지면서, 순수하게 이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죠. 17세기에 이르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등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제시가 이루어집니다."(184-5)<br>제3부 과학혁명&nbsp;<br>7장 새로운 철학, 새로운 방법론&nbsp;<br>"프랜시스 베이컨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선험적 관념에 끼워 맞추는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중세 스콜라철학이 빠졌던 함정이기도 했습니다. 경험과 실험보다는 권위자의 텍스트에 의존하고, 자연의 모습보다는 신의 섭리를 입증하는 데 골몰했던 것입니다. 반면 베이컨은 물체나 생명체의 작동 방식을 꼼꼼히 관찰하고 실험하며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귀납적으로 도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자연의 '목적'이 아니라 '기제'(mechanism)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 실험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은 제목부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한 일종의 도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오르가논』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새로운'이란 뜻의 '노붐'을 붙인 거죠. 베이컨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와 연역법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206-7)<br>"데카르트는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봅니다. 〈이 우주 즉 물질적 실체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다〉는 그의 말은 당시 떠오르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가 창안한 해석기하학입니다. 해석기하학은 기하학적 문제를 대수학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하나의 연구 방향을 제시합니다. 자연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갈릴레오, 뉴턴 등 동시대 과학자들의 연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과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가집니다. 수학에서는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주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옵니다. 기하학과 대수학을 연결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수학적 도구를 만들어내고, 이는 후에 미적분학 발전의 한 토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좌표계도 데카르트가 제안한 것입니다."(214-6)<br>"스피노자에 따르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가 바로 신 또는 자연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별개의 실체로 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으로 파악합니다." "그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자연의 통일성과 법칙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과학자들이 자연현상 이면의 보편적 원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연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는 자연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접근방식과 맥을 같이 합니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 윤리학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의 필연적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자 독자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216-7)<br>8장 천문학 혁명&nbsp;<br>"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성과 비일관성에 불만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체계를 고안합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를 완전히 뜯어고치지는 않습니다. 천구도 그대로 있고, 행성과 지구가 천구에 고정되어 도는 것도 그대로입니다. 단 하나 태양과 지구의 위치만 바뀌었습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하학적으로 우아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지상 명제 '원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받들었던 것뿐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태양과 지구를 맞바꾸는 것만으로 행성 궤도를 완전히 원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행성들이 원 궤도를 돌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체계에 있던 이심과 주전원 개념을 그대로 도입합니다. 모두 원운동을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함을 비판한 그였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 역시 여전히 복잡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221-2)<br>"1587년 튀코 브라헤는 『새로운 천문학 입문』을 펴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독특한 우주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이 모델은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전통적인 지구중심설 사이의 타협안으로 여겨졌으며, 관측 데이터와도 잘 맞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별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또 하나의 깊고 굵은 상처를 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우주에는 어떠한 새로운 천체도 생길 수 없고, 존재하는 무엇도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단 하나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별이 생겼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14개월에 걸쳐 꼼꼼하게 기록해서 내밀었지요. 마찬가지로 혜성의 발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커다란 구멍을 냅니다. 혜성이 행성들 사이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발견은 천구(Celestial spheres)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행성들의 역행도 견디기 힘든데 그보다 더 괴상한 궤도를 도는 녀석이 우주에 있었던 거죠."(224-6)<br>"요하네스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의 지지자였습니다. 애초에 튀코의 모델이든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든 지구중심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요. 태양을 중심으로 튀코의 관측 자료를 원운동 궤도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겨우 관측 결과와 가장 유사한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케플러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지요. 평균적으로 '2분'의 범위 내에 일치하는 모델이기는 했습니다만 특정 지점에서 8분의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8분의 오차. 원을 360등분한 것 중의 하나가 1도이고 그 1도를 다시 60등분한 것 중에 8에 해당하는 오차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믿음과 관측 결과가 다를 때 무엇을 따를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케플러는 관측 결과를 따랐지요. 자신이 온전히 믿고 있던 우아한 기하학의 우주, 그 근본이 되는 원 궤도를 스스로 부정하고 타원 궤도를 도입합니다. 케플러의 제1법칙입니다. '행성은 태양을 그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돈다.'"(229-30)<br>"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금의 쌍안경보다 못한 망원경으로 금성의 위상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것을 관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늘을 봤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서는 금성은 항상 태양의 앞쪽에서 지구 주위를 돕니다. 그럴 경우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의 모습은 항상 반달보다 더 얇은 모습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금성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 뒤쪽에 있는 금성이 보름달 모양으로 동그란 걸 볼 수 있습니다. 지동설의 결정적 증거지요." "그에 비해 목성의 위성 네 개를 발견한 것은 일종의 우연과 목적의식이 겹친 일일 것입니다. 지동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금성의 위상변화와 함께 역행운동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찰하기 좋은 행성이 목성과 화성이지요. 그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은 아마 목성의 역행 운동을 관찰하기 위해 매일 그 주변을 살피다 일어난 일이겠지요."(237-9)<br>9장 역학 혁명&nbsp;<br>"갈릴레오는 최초로 '관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관성은 지금 우리가 배우는 관성과는 좀 달랐습니다. 갈릴레오에게 관성운동이란 등속 원운동입니다. 즉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의 작용이 없으면 계속 등속 원운동을 한다는 뜻이지요. 갈릴레오에게는 (직선운동이 아니라) 등속 원운동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만의 주장이 아니었죠. 플라톤도 그렇게 말했고, 히파르코스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 이가 없을 정도지요. 그러니 갈릴레오에게도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운동이 천체에 내재된 속성이라는 점도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따라서 갈릴레오에게는 하늘의 기본적 속성인 원운동이 지상에서도 구현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255-6)<br>"그런데 사고실험이라든가 포물선에서 설명하는 것은 모두 직선인데 무슨 원운동이냐는 의문을 가질 법합니다. 갈릴레오에게 직선은 원의 근사적 표현일 뿐입니다. 갈릴레오가 생각할 때 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지구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큰 구(sphere)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태양중심설의 중요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내려오는 문제제기이지요. 만약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원 궤도로 돈다면 왜 우리는 원심력을 느끼지 못하느냐는 첫 번째 문제와, 왜 지구가 원 궤도를 도는데 우리는 지구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느냐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겁니다.(첫 번째 문제는 8장에서 다룬 연주시차입니다.) 하늘의 천체처럼 그리고 지구처럼 우리도 모두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한 번 시작된 원운동을 계속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고대 때부터 이어진 태양중심설에 대한 지구중심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257-8)<br>"상대성 원리의 개념을 처음 떠올린 사람도 갈릴레오입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에서 '절대적인 운동'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모든 운동을 '상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구라는 절대적인 운동의 기준에 따른 우리 일상의 직관과는 다르지만, 우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갈릴레오는 배 안에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한 사고실험을 통해, 배가 정지해 있을 때나 등속으로 움직일 때나 물체의 운동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었지요. 즉 배 안에서 공을 떨어뜨리면 배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공은 배 안의 똑같은 지점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실험들은 운동의 상대성이라는 혁명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할 수 있었지요. 지구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지구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가정했을 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266-7)<br>10장 뉴턴&nbsp;<br>"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이 암시하는 바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행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고 태양에 가까울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끌어당기는 힘을 받기 때문이라고 보았죠. 뉴턴은 이 힘을 만유인력, 즉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라고 가정했습니다. 다음으로 갈릴레오가 중력을 지구 중심을 향한 힘으로 본 반면, 뉴턴은 중력을 모든 질량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반화했죠." "뉴턴은 미적분학을 사용하여 만유인력에 의한 물체의 운동 방정식을 유도했죠. 이 방정식으로부터 그는 케플러의 세 법칙을 모두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혜성의 운동, 조석 현상 등 다양한 천문 현상을 만유인력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이전까지의 행성 운동 이론을 종합하고 극복한, 보편적인 역학 법칙을 확립했습니다. 또한 만유인력 이론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유낙하운동이나 경사면 운동, 포물선 운동에도 적용됩니다."(275-6)<br>"뉴턴은 데카르트의 관성 직선운동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운동 제1법칙으로 정립했습니다. 관성의 법칙인 뉴턴 제1법칙에 따르면, 물체는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등속 직선운동을 유지합니다. 다음으로, 뉴턴은 갈릴레오의 낙하 운동 연구를 발전시켜 가속도의 법칙인 운동 제2법칙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물체의 가속도가 힘에 비례하고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했죠. 이는 힘과 운동의 관게를 정량적으로 규명한 획기적 성과입니다. 또한 뉴턴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운동 제3법칙을 통해,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역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밝혔죠. 이는 데카르트와 하위헌스의 충돌 연구를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자신의 운동 법칙을 바탕으로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연구되던 역학의 여러 분야를 하나의 통합된 체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80-1)<br>"뉴턴의 역학 이론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절대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절대 공간은 그 안에 존재하는 물체와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고 부동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시간을 사건들의 연속 순서로 이해했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공간 역시 라이프니츠에게는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는 공간이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 관계로 정의된다고 보았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다면 그 물체의 위치나 운동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치와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9세기 말 에른스트 마흐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집니다."(290-2)<br>11장 데모크리토스의 후예들&nbsp;<br>"진공은 예로부터 불신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은 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부정하여 물질과 물질 사이에 진공을 두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진공이었지요. 그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보다 더 많은 진공으로 에워싸인 곳입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긴 유리관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실험을 하지요. 여러 다양한 실험을 통해 토리첼리는 관 속의 수은이 밑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그릇의 수은을 누르고 있는 공기의 힘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더불어 유리관의 위쪽 수은이 빠져나간 곳은 진공이 되었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러나 토리첼리는 갈릴레오의 예상만큼 명민했기에 자신이 한 실험이 미칠 파장도 예상했습니다. 그는 아주 친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입을 다뭅니다. 일찍이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리고 스승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과 싸워 어떠한 결과를 얻었는지 알고 있던 그였으니까요."(296-8)<br>"갈릴레오의 진공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사람은 아일랜드 백작의 아들 보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첼리가 자신의 발견을 숨긴 것과 달리 보일은 적극적이었습니다. 물론 로마로부터의 거리도 멀고 종교도 다르니 별다른 두려움도 없었겠지요. 그는 새로운 진공펌프를 이용해 진공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입증합니다. 그는 나아가 진공 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못하지만 빛은 진공을 뚫고 진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지요. 이제 진공은 더 이상 불신자의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보일은 연금술(Alchymist)의 전통과 결별하고 회의하는 과학으로서의 화학(Chymist)을 선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도, 파라켈수스가 제안한 3요소(유황, 수은, 소금)도 거부합니다. 그는 세상 만물이 더 이상 다른 물질로 분해되지 않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혼합물과 달리 화합물은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299-300)<br>"19세기 후반, 열역학의 발전과 함께 원자론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열역학과 원자론을 결합하여 통계역학을 정립했습니다. 볼츠만의 접근은 물질이 원자나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적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아직 물리학자들에게 원자론이 수용되기 전이었기에 당시로은 대담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 분자 운동론을 발전시키면서 열역학 법칙을 통계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기체를 수많은 분자의 집합으로 보고, 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온도, 압력, 엔트로피 등 열역학적 물리량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볼츠만의 스승이었던 에른스트 마흐는 원자론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마흐는 과학적 지식이란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실증주의 철학을 견지했습니다. 그에게 원자와 분자는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과학 이론의 기초가 될 수 없었습니다."(313-4)<br>12장 생물학 혁명&nbsp;<br>"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첫 번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박물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집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적 유산이 재발견되고, 신대륙 탐험을 통해 신기한 동식물들이 속속 유입되면서 이를 연구할 필요가 생긴 거죠." "16~17세기를 거치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점차 분류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 박물학의 발전은 전통적인 종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죠. 신대륙의 생물들은 기존의 분류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주머니쥐나 아르마딜로는 유럽의 분류 체계에 맞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화석 연구는 멸종한 생물들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조르주 퀴비에가 발견한 매머드나 마스토돈 화석은 현존하지 않는 생물의 증거였습니다. 이는 곧 종이 불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죠."(319-21)<br>"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 의학의 오류를 하나둘씩 발견해 나갑니다. 가령 갈레노스는 심장에 구멍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베살리우스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냅니다. 개, 원숭이 등의 동물 해부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인체에 그대로 적용한 갈레노스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 거죠. 1543년, 베살리우스는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인체 구조에 관하여』를 출간합니다." "갈레노스는 혈액순환에 대해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온몸으로 퍼져 조직에 흡수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윌리엄 하비는 이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갈레노스의 이론대로라면 매일 만들어야 할 혈액량이 너무 많았던 거죠. 하비는 동물 해부 실험을 통해 혈액순환의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개구리, 뱀,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의 심장을 관찰했는데, 심장이 규칙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혈액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1628년 하비는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합니다."(322-5)<br>"과학혁명 시기 새로 등장한 도구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망원경과 현미경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현미경이 생물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1660년대입니다. 영국의 로버트 훅이 복합 현미경을 개발하면서부터죠. 훅은 코르크 조직을 관찰하다 벌집 모양의 작은 방들을 발견했는데, 이를 '셀'(cell)이라 명명합니다."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매우 정교한 단렌즈 현미경을 제작했는데, 무려 300배에 이르는 배율을 자랑했죠. 1674년, 레이우엔훅은 연못물과 침 등에서 작은 '애니멀큘레스'(animalcules)가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죠. 하지만 관찰을 거듭하며 미생물이 엄연한 생명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훅의 세포 발견은 생명의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를 밝혀줬고, 레이우엔훅의 미생물 발견은 자연발생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현미경에 의한 생물학 혁명의 시작에 불과합니다."(326-7)<br>맺는 글: 과학혁명과 근대 과학의 탄생]]></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22/18/cover150/k65203686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522183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아침</category><title>생각의 역사 /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 - [생각의 역사 -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14217</link><pubDate>Mon, 27 Jul 2026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142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934559&TPaperId=174142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5/56/coveroff/k02293455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934559&TPaperId=174142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각의 역사 -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로</a><br/>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br/></td></tr></table><br/>서문<br>"내가 〈아이디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생각이고 그것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생각은 경험을 능가하며 단순한 예측보다 탁월하다. 아이디어는 평범한 생각과 다르지만, 이는 그것이 그저 새로운 것이어서만이 아니라 예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는 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아이디어는 환영이나 영감의 형태를 띨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신적 '환각'이나 머릿속의 음악(가사가 없거나 가사가 붙기 전까지의 음악)과는 다르다. 아이디어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델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는 〈우리의 생각(What We Think)〉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것은 과거에 시작된 아이디어 중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각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거나 우리 시대에 새로 등장한 문제에 대처하도록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적 무기고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다. 이 아이디어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지혜 또는 우몽의 배경을 이룬다."(8-9)<br>제1장 물질에서 나온 정신: 아이디어의 주요 원천<br>"인간 사유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는 아마도 '상상력'─판타지아, 혁신성, 창조성, 오래된 생각을 새롭게 다듬는 능력, 새로운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 영감과 황홀경의 모든 결실─일 것이다. 상상력은 크고 거창한 단어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한 가지 현실에 해당한다. 상상력이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극도로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까? 나는 상상력의 구성요소로 세 가지 능력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기억력이다. 기억력은 우리가 발명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 능력 중 하나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만들 때 언제나 이전에 생각했거나 만든 것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대부분 기억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그러니까 기억이 정확하고 실제 과거에 충실하며 미래를 위한 토대로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상력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나쁜 기억력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40-2)<br>"인간의 비효율적인 기억력은 기억력과 상상력의 차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차이는 어떤 경우든 그리 크지 않다.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기억력도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감각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앞서 정의된 것처럼 상상력이 실제로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라면, 기억력은 거기에 더는 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기억력은 특수한 형태의 상상력이다. 기억력은 사실과 사건의 표상을 형성함으로써 작동한다. 이것은 상상력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따금 삶은 상식(common sense)을 왜곡한다. 현실에서 기억과 상상은 융합한다. 그런데 기억은 허위일 때 상상력과 가장 가깝다. 기억의 창조적인 힘은 회상을 왜곡하는 데 있다. 거짓 기억은 현실을 환상으로, 경험을 추측으로 재구성한다. 우리는 오래된 일을 잘못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셈이다. 우리는 과거를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과 뒤섞고 난도질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51-2)<br>"상상력은 예측력 이상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부분적으로는, 예측력의 과잉으로 빚어진 결과다. 일단 우리가 적이나 먹잇감, 문제, 결과 따위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개연성이 더 적은 대상,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았거나 눈에 보이지 않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새로운 종, 과거에 먹어보지 않은 음식,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음악, 환상적인 이야기, 새로운 색깔, 괴물, 요정, 무한대보다도 거대한 어떤 수, 신 등을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무(無)'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아마도 상상력이 이루어낸 가장 대담한 도약이었을 것이다." "상상력은 예측력과 기억력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상력은 진화의 일반적인 결과물들과 달리 생존 요구를 넘어서고 우리에게 어떤 경쟁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문화는 상상력에 보상을 제공하고 그 지위를 드높임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한다."(62-3)<br>"기억력·예측력과 더불어 언어는 상상력의 마지막 재료다. 내가 여기서 '언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상징체계다. 언어는 몸짓과 발화의 합의된 패턴이나 기호의 체계다. 이 몸짓과 발화는 실제 대상과 명백한 유사성을 반드시 띠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가 가진 증거에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고안한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더 많다." "당연히 일단 우리가 상징의 레퍼토리를 갖게 되면 상징이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다. 그리고 상징이 많을수록 결과도 더욱 풍부해진다. 언어(또는 모든 상징체계)와 상상력은 서로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언어가 사용하는 기호는 대부분 임의적이고 실제 대상과 유사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해를 빚을 가능성은 증가한다. 오해는 유익할 수 있다. 흔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래된 아이디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언어는 성공적인 의사소통 못지않게 왜곡과 재앙을 통해 아이디어의 형성과 혁신의 흐름에 이바지한다."(64-8)<br>제2장 생각을 채집하다: 농경 이전의 사고<br>"유물론은 세계를 보는 가장 오래된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호미닌 조상들은 필시 유물론자였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망막에 맺힌 인상들이 그들이 가진 최초의 생각들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사지의 떨림과 장기의 동요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표면은 안에 있는 것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5세기 말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듯 〈진실은 심층에 있다.〉 경험들을 비교하고 그로부터 추론을 끌어내는 데 관심이 있는 생물체는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과 상충된다는 것, 감각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식을 축적한다는 것, 우리는 결코 가상(假像, semblance)의 끝에 도달했다고 가정할 수 없음을 알아챌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꼭 감각만을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디어는 만능키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정신 세계로 가는 열쇠였다. 이 아이디어는 무한한 사변의 파노라마를 열어젖혔다. 나중에는 종교와 철학이 이 사상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106-8)<br>"똑같이 오래되었고 광범위한 인류학 문헌에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디어는 모든 사물에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 개념은 가령 '무엇이 하늘을 푸르게 만들고, 물을 습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따라 나온다. 푸름은 하늘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색깔이 바뀐다고 해서 하늘이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습함은 어떨까? 이것은 다른 문제 같다. 마른 물은 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습함은 물의 본질적 속성이다. 어쩌면 모든 속성의 기저에 단일한 실체가 자리해 있어 이 의견상의 충돌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그러한 질문을 계속 한다면 당신은 관련된 대상의 본성에 관한 심층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만일 인류학적 증거에 기댈 수 있다면, 가장 오래된 대답 중 하나는 보이지 않고 보편적인 동일한 힘이 모든 것의 본성을 설명하고 모든 활동이 실행되게 한다는 것이었다."(116)<br>"자연을 무척 친밀하게 알고 있었던 초기 인간들은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체계적인 것은 어느 일부분을 통제함으로써 조작이 가능하다. 이렇듯 자연을 조작하려는 노력 중에서도 주술은 가장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방법이다." "주술과 과학은 같은 선상에 있다. 양자 모두 자연을 지성으로 지배해 인간의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주술 아이디어는 두 가지의 뚜렷하게 다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우리는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그려낼 수 있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둘째, 정신은 이러한 원인을 불러내어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을 장악할 힘을 획득한다. 주술은 진정 강력하다. 지금도 주술은 자연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인간에게만큼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모든 사회에서 되풀이해 나타난다. 숱한 실망들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118-9)<br>"일단 코스모스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에 관한 초기 개념에 영감을 주었다고 잠정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 자연은 언뜻 카오스 즉 무질서한 상태로 보이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아래나 내부에는 세계를 지탱하는 질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추론에 도달하려면 커다란 정신적 도약이 필요하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생성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이 아이디어가 생기자 우주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를 갖게 된 정신들은 세계 전체를 단일한 체계 안에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에서 질서는 각기 다른 사람에게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사람들의 행동을 어떤 모범이나 양식에 맞추기 위한─모든 노력에서 질서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주 먼 고대에도 사회적 규범이 있었음이 확인된다."(137-9)<br>제3장 정착된 정신: ‘문명화된’ 사고<br>"농경 사회는 기근이 반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풍요로운 일상이 배경을 이루었다. 농사는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 농사는 모든 전문화된 경제 활동의 형태를 고루 갖출 만큼 큰 정착지에 식량을 조달했다. 도시에서 기술은 더욱 정교해지고 향상되었다. 〈사회적 본능은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준 것이지만 가장 큰 은인은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했다. 도시는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수단 중 가장 급진적인 수단이다. 인간은 세상의 풍경을 속속들이 재상상한 새로운 거주지로 뒤덮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고안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세심히 조성한 새 환경이었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지혜에 따르면 카오스란 〈벽돌이 하나도 놓이지 않고 (···) 도시가 하나도 건설되지 않은〉 때였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았다."(167-8)<br>"낭만과는 거리가 멀게도 문자는 일상적인 발명품이었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지금까지 문자와 관련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이론의 여지 없이 상인들이 사용한 꼬리표나 물표이거나, 세금 또는 공물 징수원이 종류와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한 자료였다." "위대한 문학이나 중요한 역사 기록처럼 소중한 내용은 직접 외워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시인의 걸작이나 현자의 지혜는 일반적으로 구술로 전해졌고 수 세기가 지나서야 예찬자들이 이를 문자로 받아적었다. 그전까지 문자로 옮겨 적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 "전문가들은 문자를 국가의 필요에 맞게 조정했고 이어 법을 성문화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최초의 법규는 아마도 사례들로부터 추출한 일반론, 즉 모든 종류의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변형된 계율들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법을 신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중반 중국과 그리스에 세속적 법률 이론이 등장할 때까지 이 추세는 계속되었다."(184-7)<br>"우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아이디어가 현대적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어느 시대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평등한 시대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대부분의 문화는 오늘날의 악덕을 고발하기 위해 '참으로 좋았던 과거의 한때'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고대 이집트의 속담은 그러한 시절을 〈신들의 뒤를 이었던 시대〉라고 불렀다. 〈지혜의 책들이 그들의 피라미드였던 시대, 여기 누구라도 [그들과] 같은 이가 있는가?〉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서사시인 기원전 제2천년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는 운하, 감독관, 거짓말, 질병, 노년 등이 존재하기 전의 시대를 그렸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 또는 5세기의 『마하바라타』에는 같은 주제의 고대 인도 전통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축복받은 세계,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지 않은 세계였다."(188-90)<br>"유한 계급은 법을 고안하고 국가를 규정했으며 새로운 통치 개념을 발명하고 여성과 커플들에게 새로운 역할과 의무를 배정했다. 그들은 이제 당장에는 급하지 않은 생각,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철학적 또는 종교적 사색으로 분류할 만한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었다. 개개인들을 코스모스에 관한 사색으로 이끈 이들 세 가지 아이디어는 운명이라는 아이디어, 불멸성의 아이디어, 그리고 영원한 보상과 처벌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운명, 불멸성, 영원한 처벌 모두 사회적 유용성을 위해 떠올린 아이디어로 보인다. 똑같이 위대하지만 언뜻 유용성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세계는 환상이라는 아이디어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은 창조적인 힘이라는 아이디어다. 후자는 사유에 대해 사상가들이 품은 자기 본위의 존경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 시기의 전문 지식인들은 여러 가지 철학적 또는 원시 철학적 문제들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아니면 적어도 이 문제들을 최초로 기록했다)."(197, 204, 207)<br>제4장 위대한 현자들: 이름을 남긴 최초의 사상가들<br>"지금의 우리에게 종교처럼 보이는 것(오늘날 이해하는 방식대로의 종교)이 당시의 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 종교와 주술을 구분하는 선은 이따금 과학과 주술을 가르는 선처럼 흐릿하다. 이 시기의 전설은 종교 창시자들을 마법으로 보이는 것들과 연결시킨다." "전통적인 주술에 진 빚이 얼마나 많든 새로운 종교들은 인간이 자연이나 모든 신적인 것과 맺은 관계를 조정할 진정으로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모든 새로운 종교들은 형식적 의례와 더불어 도덕적 실천을 옹호했다. 단순히 유일신이나 여러 신에게 정해진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윤리를 바꾸라고 요구했다. 자연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하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발전을 위한 여정을 밟아나감으로써 추종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현세에서든, 죽어서든, 시간의 끝에서 이루어질 변화에 의해서든, 선의 완성 또는 〈악으로부터의 구제〉를 약속했다. 이 새로운 종교들은 단순히 생존의 종교가 아닌 구원의 종교였다."(222, 228)<br>"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개념의 주창자들은 통념적인 지혜와 겨루고 있었다. 그들이 이 주장을 얼마나 열렬히 내세웠는지가 이를 예증한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중국에서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깨어난 뒤 혹시 자신이 실제로는 사람이 된 꿈을 꾸는 나비인 것은 아닌지 궁금히 여겼다. 장자보다 조금 앞선 플라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을 보고 비슷한 의심을 품었다." "우리가 아는 한 피타고라스는 수가 실재한다고 말한 최초의 사상가다. 분명 수는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방법이다. 꽃 두 송이, 파리 세 마리.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수는 그것이 열거하는 사물들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수는 그저 형용사가 아닌 명사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는 아키텍처이고 코스모스는 이에 따라 건설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를 〈만물은 수〉라고 표현했다. 만일 당신이 수가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초감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셈이다."(246, 251-2)<br>"기원전 제1천년기 이전에는 아무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었다. 과학은 종교적이었으며 의학은 주술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사상가들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과학과 이성으로 저글링 묘기를 했다. 이때 발생한 충돌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조적 과학─반대자들은 이것을 '과학주의'라고 부른다─과 영적 사유방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화 전쟁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자연적 원인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주술을 다양한 수위에서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쫓아냈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을 완전히 탈신성화할 수는 없었다. 영혼과 악령이 물러나자, 현자들의 정신에서 자연은 대체로 신의 손에 남겨졌다. 중국에서 황제들은 여전히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를 거행했다. 서양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재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고난의 원인을 죄악에 돌렸다. 과학은 결코 종교와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없다."(258-60)<br>"현자들의 노력이 과학과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면 그 노력의 또다른 가닥은 윤리와 정치에 관한 생각을 고무했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에 무관심한 정신은 선과 악의 구분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또는 악을 억제하고 싶다면, 한 가지 확실한 수단은 국가다." "모든 정치 사상은 도덕적·철학적 가정에 의해 형성된다. 사상가가 인간의 조건에 관해 얼마나 낙관적이었는지 또는 비관적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정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낙관론자는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방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구제 불능이며 사악하거나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약적이고 억압적인 제도를 선호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유를 강조하고 인간의 선함을 풀어내려 한다. 보수주의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억누르려 한다."(269-72)<br>제5장 신앙을 생각하다: 종교적인 시대의 아이디어들<br>"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상자는 신학과 교회학만으로 불완전하다. 믿는 자에게 유익하며 세계가 나아지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윤리 체계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 가장 급진적으로 이바지한 성 바울의 아이디어는 가장 영감이 넘치면서 가장 문제적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성 바울은 신은 구원을 내릴 때 구원을 받는 자의 공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성 바울은 「에베소서」에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 바울이 거듭 단언하듯 구원받은 자의 공적 때문이 아니었다. 이 교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교회는 이 입장을 항상 공식적으로 옹호했다─우리가 행한 선은 신이 베푼 호의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는 아이디어─에서 암울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는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느낀다."(302-3)<br>"이슬람교는 도덕적 사상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기독교보다 단순하고 현실적인 교리를 내놓았다. 이슬람은 직역하면 '순종' 또는 '복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에 응답하라고 개개인에게 요청한 반면 무함마드는 더 직설적으로 신의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예언자이자 통치자였던 무함마드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한 청사진 역시 제시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세속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과 달리 무슬림들은 두 영역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교는 예배의 방식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었다. 칼리프─직역하면 무함마드의 '계승자'라는 뜻이다─는 이 모든 영역을 관장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남긴 율법은 어떻게 보아도 포괄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8세기와 9세기 스승들이 창설한 율법학파는 이 빈틈을 메우고자 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생전에 남긴 가르침들을 수집해 일반적인 명제들을 수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상식 또는 관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312-3)<br>"이슬람교는 점차 수백 갈래의 분파 및 하위 분파로 나뉘었다. 다양한 칼리프 선출 방식들은 양립할 수 없었고, 칼리프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슬람교는 갈수록 더 큰 균열을 겪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한 세대 이내에 생긴 갈등의 골은 이후 절대 메워지지 않았다. 분열은 갈수록 더 확대되고 분파는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에서 통치자나 국가가 칼리프 또는 칼리프에 준하는 지위의 권위를 가로챘다. 그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또는 최근 들어 〈현대화〉나 〈서구화 추세〉를 명목으로 샤리아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을 때마다 혁명가들은─갈수록 더 자주─무함마드의 망토를 깃발 삼고 무함마드의 책을 무기 삼아 통치자들을 〈변절자〉라고 부르며 비판을 제기했다. 무함마드는 삶의 모든 측면을 관장하는 보편적 행동 수칙인 '샤리아'를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샤리아를 재해석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무슬림들도 이 일을 누가 맡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314)<br>"15세기 초, 장 제르송(Jean Gerson)은 세속 정부와 교회 정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이후 서양 세계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기원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국가는 죄악 때문에 발생했다. 에덴동산의 바깥에서는 부정한 행위의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자원을 모으고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었다. 시민들의 합의는 국가의 유일한 정당한 토대다. 신이 내려준 교회와 달리, 국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물로서 역사적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고 암묵적 갱신에 의해 유지된다. 군주정의 경우, 통치자의 권력은 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사람들이 왕에게 운영을 맡기는 것이 골자를 이루는 계약에 따른 것이다. 국가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문제는 사회계약론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국가에 계약적 토대가 있다는 아이디어는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다."(342-3)<br>제6장 미래로의 회귀: 흑사병과 추위를 통과한 생각<br>"생물군의 변화는 우리가 사는 행성의 표면을 농업의 발명 이래 그 어떤 혁신보다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농사는 우리가 '부자연 선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도입해 진화에 수정을 가했다. 하지만 16세기에 시작된 변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진화의 패턴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전 세계를 떠도는 유럽의 식민지 개발자들과 탐험가들을 따라 생물군도 대양을 건넜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동식물을 이동시켜서 새로운 가축 종을 만들거나 새로운 토양에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혁명적인 변화는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부합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다시 상상했고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수많은 씨앗, 세균, 곤충, 포식자, 사람들이 귀여워해 몰래 들여간 동물 등도 사람들의 옷깃과 주머니, 선박의 창고나 밑바닥을 통해─말하자면 디즈니의 〈놀라운 여행〉을 거쳐─새로운 환경으로 건너가 변화를 빚어냈다."(359-61)<br>"탐험은 유럽의 영향을 세계 전역으로 투사했다. 아울러 탐험가들이 개척한 경로를 따라 전 세계적인 생태적 교류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콜럼버스가 세계를 상상한 방식─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로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세계가 작다고 생각했다─은 이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알려진 세계의 크기는 탐험가들을 주저하게 했다. 콜럼버스는 작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지구 일주를 시도하도록 자극했다.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잘못된 아이디어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생산적인 예였다."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텍스트적 권위에 대한 콜럼버스의 무관심은 사실상 그를 과학혁명의 전령으로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근대 과학자들처럼 문자로 기록된 권위보다는 관찰된 증거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을 유도한 또다른 요소는 콜롬버스의 영향으로 탐험 지역이 확대되며 축적된 지식의 형태로 나타났다."(375-8)<br>"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시대의 새로운 정치사상은 과학과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고대에 대한 경의로 시작해 새로운 발견의 영향에 적응하다 결국 혁명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문제에 대응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주권 국가와 전례 없는 제국의 부상은 새로운 패턴을 구상하도록 강요했다." "사람들은 흔히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모어의 판타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고 여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가 오히려 더 창의적인 상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서양에서 통치에 관해 등장한 기존의 모든 사상─국가의 목적은 시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을 비난했다." "이후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으로부터 두 가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국가는 도덕 법칙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 봉사한다는 현실정치주의고, 둘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국가의 존속이나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는 과한 조치도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394-8)<br>"16세기에 유럽 밖 제국의 건설이 낳은 또다른 결과는 정치사상을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더욱 폭넓은 성찰로 되돌려놓았다는 데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도덕 개혁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인류에 속한 민족들은 모두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자명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근대의 가장 새롭고 강력한 아이디어 중 하나인 인류의 통일성을 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 이유는 거의 모든 문화에서 거의 모든 시기에 이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제1천년기의 현자들은 인류의 통일성에 관해 자세히 논했고 기독교는 우리가 혈통을 공유한다는 믿음을 종교의 정설로 삼았지만, 인간과 이른바 '인간 이하(subhuman)'의 경계선이 어디라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세 생물학은 〈존재의 사슬〉을 상상했다. 이 상상 속에서 인간과 야수 사이에는 괴물들에게 할당된 〈유사 인간(similitudines hominis)〉 범주가 있었다."(415-6)<br>제7장 전 지구적 계몽: 연합된 세계의 연합된 사상<br>"『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 지식인들, 곧 필로조프들(philosophes)에게 세속의 성서나 다름없었다. 이 책의 부제 〈이성에 입각한 과학·예술·상업 사전〉은 아마도 출판 역사상 책의 성공에 가장 크게 일조한 부제일 것이다. '사전'이라는 단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지식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언급된 세 주제는 추상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을 모두 하나의 저작에서 아우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디드로는 이 책의 취지를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인류로부터 상찬을 받아 마땅한 지식을 집대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계몽주의의 심장부를 차지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코스모스의 메타포였다. 『백과전서』의 저자들은 기계의 우월성이나 우주의 기계적 본성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아울러 이성과 과학은 동맹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공유했다."(431-3)<br>"18세기 내내 해방 옹호론자와 억압 옹호론자 사이에서 논쟁이 활발했다. 볼테르는 조직화된 종교에 염증을 느꼈고 그 철학적 대안으로서 유학(儒學)에 매력을 느꼈다. 아울러 우주는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며 관찰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중국 국가체제의 절대 권력은 선을 위한 강제력이었다." "몽테스키외는 중국을 〈공포를 통치 원리로 삼는 전제국가〉라고 비난했다. 사실 한 가지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를 갈랐다. 몽테스키외는 법치를 옹호하고 헌법적 안전장치가 통치자에게 재약을 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볼테르는 국민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강하고 분별 있는 정부를 선호했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썼다. 〈아시아가 약하고 유럽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은 자유롭고 아시아는 예속적이다.〉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는 서양의 정치 문헌에서 권력 남용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451-2)<br>"18세기에 만일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만 하면 평등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합리적인 개념이었다. 국가는 언제나 중대한 불평등과 맞선다. 그렇다면 모든 불평등과 맞서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강요된 평등은 횡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 기능은 다른 모든 기능보다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였다." "루소는 계몽주의의 가장 신성한 원칙 중 하나와 절연했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은 인류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원칙이었다. 루소는 사유재산과 국가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본성적이고 원시적인 선한 상태를 옹호했을 뿐 달리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루소는 감정과 직관의 가치를 중시하며 어떤 면에서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낭만주의자들의 포스트 계몽주의 시대적 감성을 선취했다.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과 폭도에게 탁월한 영웅이었다."(458-60)<br>"확실한 사실은 계몽주의 운동은 인민 주권과 민중의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럽에서는 실패했지만 미국에서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 무르익는 동안 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매도했다. 신중한 사상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난한 체제를 추천하기 망설였다. 루소는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에드먼드 버크─18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외쳤다─는 민주정 체제를 〈세계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체제라고 일컬었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마누엘 칸트조차 1795년에 민주주의를 다수의 횡포라고 부르며 기존의 견해를 철회했다." "반면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쑥쑥 자랐다〉.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오래된 지배층의 의무는 이에 적절히 부응해 〈민주주의를 지도하고, 민주주의의 신념을 되살리고, 민주주의의 풍습을 정제하고, 민주주의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것〉, 요약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길들이는 것이었다."(468-9)<br>"18세기 유럽은 이른바 〈이성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패─전쟁, 억압적 정권, 시대 자체에 대한 실망─는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직관은 최소한 이성과 동등했다. 느낌은 생각만큼 중요했다." "과학과 낭만성의 융합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1802년 침보라소산에 오르던 훔볼트는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 추위로 몸이 뒤틀리며 코와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훔볼트가 겪은 고통과 좌절의 이야기는 유럽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두고두고 기리는 바로 그 주제가 되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내성적인 독일 시인 노발리스는 1800년에 낭만주의의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인 〈파란 꽃(blaue Blume)〉을 창조했고, 절대 꺾이지 않을 이 아련한 꽃은 이후 낭만주의적 갈망을 상징해왔다. 낭만주의의 핵심에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충족될 수 없는 갈망─에 대한 숭배가 자리해 있다."(479-82)<br>제8장 진보의 전환기: 19세기의 확실성<br>"벤담의 〈공리주의〉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였다. 벤담은 일종의 행복의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벤담은 사회적 〈효용〉을 개인의 자유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었다. 하지만 벤담의 철학은 급진적이었다. 유구한 전통이나 권위, 과거의 성공 기록을 참조하거나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회 제도를 평가할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신조는 의도적으로 신을 배제했고 유물론적이었다. 벤담이 제시한 행복의 기준은 쾌락이었고 악의 기준은 고통이었다." "벤담은 낭만주의에서 손을 뗀 영국 지배층의 가장 유창한 웅변가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낭만적 열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밀은 처음에는 공리주의를 수정하다가 이후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마침내 자유를 모든 가치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두었다. 밀은 벤담의 최대 다수를 개인이라는 보편적 범주로 대체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다."(499-502)<br>"마르크스는 국가의 〈소멸〉을 목격하기를 소망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에게 국가는 진보를 유지할 최고의 수단이었다. 어느 정도는 아이디어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들이 국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질적인 우발 사건들이 국가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구 성장은 군대와 경찰력의 증강을 가져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은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무자비하게 실행했다. 세금과 통계 자료, 지식이 누적되었다. 형벌 수단이 증가했다. 폭력은 갈수록 국가의 특권(궁극적으로는 거의 독점적 특권)이 되었고 국가는 개인이나 전통적인 제도, 협회, 지역의 권력 구조보다 더 많은 무기를 보유했고 더 많은 자금을 썼다. 국가는 다른 19세기 권위의 원천─부족이나 혈족 등의 혈연 집단, 교회 그리고 세속 권력에 대한 여타 신정 정치적 대안들, 귀족계층, 사업 연합체, 지방 및 지역의 자주 독립주의, 깡패들의 두목이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마피아, 프리메이슨 단체 등─과 맞서는 거의 모든 대결에서 승리했다."(512)<br>"그러나 19세기에는 개인 숭배가 문화 전체를 재편성했다(초인 숭배의 위험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에 잘 드러나 있다). 영국 남학생들은 웰링턴 공을 모방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인의 롤모델이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 이름에서 울려 나오는 영웅주의의 메아리가 경외심을 자극했다. 아메리카대륙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시몬 볼리바르의 인간적 결점은 영웅적 신화에 가려졌다. 헤겔의 영웅 숭배는 피로 물든 폭군들을 향했다. 영웅들은 집단─정당, 민족, 운동─에 봉사했다. 오로지 성자들만이 세계 전체를 위한 덕을 구현한다. 대중의 판단에서 영웅이 성자를 대체하자 세계는 나빠졌다. 민주주의 체제 국가들은 위인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도자에게 어느 때보다 큰 권력을 맡겼고 20세기의 수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대중선동가와 독재자들에게 스스로 투항했다."(518-9)<br>"헤겔은 〈민족(Volk)〉을 하나의 이상으로 보았다. 헤겔에게 그것은 초월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재였다. 일부 민족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와 과학에 의해 민족주의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민족주의는 흔히 신비주의적이거나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민족주의는 일관된 정치적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갈망의 상태였기 때문에 음악으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체코의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나 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어떤 민족주의 문학 작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민족주의는 〈사고가 아닌 감각〉이라는 가치에 속한다고 선포했다. 주세페 마치니─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운 공화주의자─에게 민족은 개개인에게 잠재적인 도덕적 완벽성을 마련해준다고 말하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침보라소산에서 〈나를 사로잡은 콜롬비아의 신〉이 〈이상하고 탁월한 불〉을 피운 순간 〈섬망〉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536-8)<br>제9장 카오스의 역습: 확실성을 풀어헤치다<br>"앙리 베르그손은 자신의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이름을 붙였다. 베르그손은 그것을 엘랑 비탈(élan vital, '생의 약진')이라고 불렀다. 엘랑 비탈은 자연을 진화론에서처럼 내부에서 지휘하지 않았고 신처럼 외부에서 지휘하지도 않았다. 엘랑 비탈은 물질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역량을 지닌 정신적인 힘이었다. 일부 낭만주의자나 주술사가 추구하는 '세계영혼'과 엘랑 비탈이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아마 베르그손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베르그손이 엘랑 비탈을 떠올린 것은 우리에게는 과학이 예측하는 것과 다른 미래를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베르그손은 과학을 공격하는 비합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객관적 실재들을 정신적 구성물로 제시하고, 생각하지 않는 창조물에 목적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과학적 결정론이 인간을 제약하거나 방해한다고, 심지어 위협한다고까지 느낀 사람들은 베르그손의 생각을 환영했다."(585-6)<br>"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속임수였다.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전환이 가능했다. 평행선들은 서로 만났다. 뉴턴 이래 지배적이었던 질서 개념들은 우리를 호도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상식적인 지각은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토끼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자극을 받아 수행된 실험들은 하나같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타당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더욱이 상대성 이론은 새로운 역설들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아인슈타인이 코스모스의 큰 그림을 다시 상상하는 동안 다른 과학자들은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세밀한 부분들에 집중했다. 사실 물리학자들은 그전부터 빛의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빛은 파동일까 입자일까? 모든 증거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빛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새로운 담론은 정합성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쫓아냈다."(593-4)<br>"프로이트는 20세기의 모델이자 멘토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통설을 (인류학자) 보애스보다도 더 세차게 뒤엎었다. 프로이트의 발견 혹은 주장은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개개인의 자아에 관한 이해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는 상당수가 무의식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책임, 정체성, 성격, 양심, 사고 방식 등에 관한 전통적 가정들을 모조리 부정했다." "프로이트의 〈과학〉은 잘 작동하는 듯했으나 가장 엄격한 검증을 통과하는 데는 실패했다. 칼 포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물었고 심리분석 협회는 이 질문에 크게 출렁였다. 그들은 마치 종교 분파나 비주류 정치 운동 세력처럼 굴며 서로의 오류를 지적하고 반대자들을 협회에서 추방했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문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문화는 심리 형성에 영향을 주며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의 경험은 문화로 인해 다양한 색채를 띤다."(603-4)<br>"20세기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것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묘사한 것을 그리는 경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두드러졌다. 이 시기의 혁신적인 예술작품은 과학과 철학이 불러일으킨 동요와 충격을 표현했다. 1907년 큐비즘은 산산이 조각난 거울에 비친 것 같은 파편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큐비즘 운동을 창시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원자론이 시사한 광경─어딘가 서로 잘 맞지 않는 파편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1911년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더퍼드가 원자에 관해 설명한 글을 읽고 〈두려운 힘을 느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모든 것이 힘이나 확실성을 잃고 투명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효과들은 새로운 양식의 출현에 반영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실제 대상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억눌렀다. 칸딘스키가 시작한 이 완전한 〈추상〉 미술 사조는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묘사하거나, 아예 묘사하지 않았다."(610-1)<br>제10장 불확실성의 시대: 20세기의 망설임들<br>"19세기 말을 향해 갈 즈음 모든 측정 가능한 변화의 그래프는 지면을 벗어났다. 토템 연구자 알렉산더 골든와이저는 문화적 변화는 비활성 국면 사이에서 〈솟구치듯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진화는 길게 이어지는 평형상태 사이에서 〈단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모순이 겹겹이 쌓였다. 전자를 관찰한 사람들은 아원자 입자들이 각자 보유한 에너지양과 어긋나 보이는 위치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다시 그들의 선배인 연금술사들과 동등한 위치로 되돌아갔다." "과학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진리성을 보장받기 위해 선망하는 객관성의 잣대다. 20세기의 철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어학자, 심지어 일부 문학과 신학 연구자들까지도 주체로서의 지위를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과학자라 부르며 객관성을 가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기획으로 판명되었다."(626-8)<br>"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원래 오래된 철학인 실존주의가 다시금 유행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소외(alienation)〉를 가장 큰 사회 문제로 파악했다. 경제적 경쟁 관계나 근시안적 유물론은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부단히 움직이는 뿌리 없는 개인들을 남겼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어떤 상태일 뿐이다.〉 아니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든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존재이자, 미래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며 그러한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다〉. 〈그 결과 인간은 쓸쓸하고 그 어디에도 매달릴 곳이 없다. (···) 존재가 진정으로 본질에 선행한다면 인간은 어떤 고정된 (···) 인간의 본성을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결정론은 없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다.〉 실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관조라는 방어벽 안에 가둘 수 있었다. 자기 관조는 추악한 세계에 대한 혐오 속에서 찾은 안전한 공간이었다."(635-6)<br>"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론적 전회(轉回)〉로 그치지 않았다. 언어 문제들은 불확실성과 결합해 지식의 접근성─과 심지어 실재성─에 대한 불신감을 조성했다. 전쟁, 학살, 스탈린주의, 히로시마, 근대 건축 운동이 만들어낸 싸구려 유토피아, 전후 유럽인이 살고 있는 과도한 계획 사회의 음울함 같은 고통스러운 사건들과 새로운 기회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소외된 사람들은 문화를 되찾아야 했다. 맹렬한 속도로 발전하는 전자 기반 오락 기술이 그들을 도왔다. 이러한 배경에 미루어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부분적으로 세대적인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베이비붐 세대는 실패한 부모 세대와 절연하고 탈식민주의와 다문화와 다원주의의 시대에 어울리는 감수성을 껴안았다. 북적이는 세계와 지구촌에서 삶의 접촉들과 연약함은 다양한 관점을 갖기를 권장 또는 요구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맥락이 부과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문화적으로 조작된 공식이었다."(641-2)<br>"카오스 이론은 분석의 한 층위를 드러냈다. 이 층위에서 원인과 결과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델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듯했다. 이것을 임계 질량에 적용하면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무너지게 할 수 있었고, 작은 먼지 알갱이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갑작스러운 변동이 시장을 교란하고, 생태계를 망가뜨리며, 정치적 안정을 뒤엎고, 문명을 산산이 부수고, 우주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무효화하고, 진자의 진동과 중력의 작용을 말한 뉴턴 시대 이래 이어져온 전통 과학의 성소를 침범할 수 있었다. 20세기 말의 희생자들에게 카오스에 의한 비틀림은 복잡성의 작용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체계는 다종다양하고 상호연결된 부분에 더 많이 의존하면 할수록 어느 깊은 수준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로 인해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더 증가했다. 역설적으로 카오스 이론은 더 깊고 높은 수준의 정합성을 탐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652-3)<br>"조심성, 회의주의, 자기 회의, 머뭇거림 같은 것은 우리가 진리로 오를 때 내딛곤 하는 발판이다. 내가 불안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을 때다. 그릇된 확실성은 불확실성보다 훨씬 더 나쁘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야기한다. 20세기 사회·정치 사상에서는 새로운 교조주의(dogmatism)들이 과학의 새로운 결정론들을 보완했다. 변화가 좋은 것인지 모른다.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 불확실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권자는 대중 선동가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해결책에 쉽게 현혹된다. 종교는 교조주의와 근본주의로 변질된다. 사람들은 변화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대상, 특히─전형적으로─이민자들과 국제기구를 공격한다. 자원 고갈이 두려워지면 큰 희생을 요구하는 잔혹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반응들은 변화의 형태이되 하나같이 극단적이고 일반적으로 폭력적이며 언제나 위험한 형태의 변화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이유에서, 익숙한 삶의 방식을 붙들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변화를 택한다."(682)<br>"반(反)다원주의는 여전히 흔하다. 21세기 초 몇 년간 일부 서양 국가에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문화 통합〉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유구한 역사의 공동체들이 세계화를 비롯한 여러 거대한 종합적 흐름에 맞서 자신들의 문화를 방어하는 태세를 취했다. 어디에서나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르비아, 수단, 인도네시아는 폭력적으로 분리되었다.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평화롭게 결별했고, 영국의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동거의 조건을 재협상했다. 하지만 다원주의의 아이디어는 여전하다. 다원주의는 다양성이 있는 세계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인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유일하게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이 진정으로 고르게 누릴 수 있는 이득을 제공한다. 역설적이지만 다원주의는 어쩌면 우리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신조다."(69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5/56/cover150/k02293455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275569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노동자가 만난 과학 / 박재용 - [노동자가 만난 과학 - 자본으로부터 과학 되찾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6987</link><pubDate>Thu, 23 Jul 2026 07: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69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32635215&TPaperId=174069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97/58/coveroff/e1326352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132635215&TPaperId=174069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동자가 만난 과학 - 자본으로부터 과학 되찾기</a><br/>박재용 지음 / 빨간소금 / 2025년 04월<br/></td></tr></table><br/>머리말<br>1부 제국주의와 과학<br>1. 약탈적 과학: ‘발견’과 ‘발명’이라는 거짓말<br>피나텍스(Piñatex)는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카르멘 히요사(Carmen Hijosa)가 2013년 개발한 것으로,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를 부직포 형태로 만든 뒤 특수 처리를 통해 가죽과 비슷한 질감과 내구성을 갖게 했다. 히요사는 이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얻고 아나나스아남(Ananas Anam)이란 회사를 세워 피나텍스를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필리핀 선주민들은 이미 몇백 년 전부터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피나 직물(piña cloth)을 만들어 왔다. 선주민들이 피나 직물을 만드는 과정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정도다. 히요사는 필리핀에서 가죽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선주민들의 이 방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은 아나나스아남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에 돌아간다. 주로 서구의 대기업들이 세계 각 지역의 선주민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지역 생물에 대한 지식과 유전자원(genetic resources)을 도용해서 독점적 수익을 올리는 것을 ‘생물해적(Biopiracy) 행위’라 부른다. 8-9)<br>19세기에는 식물학자, 동물학자, 인류학자 등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식물도 연구하고 동물도 연구했다. 또한 인종에 대해서 살피고 해류나 기상을 관측했다. 이런 과학자들을 박물학자라고 불렀다. 이런 박물학자들의 노력으로 박물학은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 기상학, 해양학 등 세부 학문으로 정립되고 발전했다. 그런데 과연 박물학자들의 성과는 오로지 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을까? 물론 그 노력을 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선주민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박물학자와 함께 탐험한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고용된 사람, 일행일 뿐이었다. 서양 박물학자들의 ‘발견’은 자기네만의 ‘최초’인 경우가 꽤 많다. 오히려 ‘재발견’, ‘서양에서의 첫 발견’ 정도가 적당하다.&nbsp; 이렇게 현지인들의 지식과 도움으로 확보한 식민지에 관한 연구는 영국 제국의 과학 네트워크를 통해 중앙화되었다. 제국들이 식민지로부터 수집한 정보는 서구 과학계에 공유되며 서양의 과학이 되었다. 12-4)<br>189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에 고무 플랜테이션(Plantation)이 급속히 늘어났다. 플랜테이션이 들어선 장소는 이전에 선주민의 거주지, 농경지, 열대우림이었다. 집이며 논이며,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하던 열대우림이 사라졌다. 손수 지은 집에 살며 가족이 먹을 쌀을 재배하고, 과일과 꿀을 채취하고, 대나무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현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무 플랜테이션의 노동자가 되었다. 자신의 땅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현지인들은 새롭게 임금노동에 의지했지만, 긴 노동시간, 낮은 임금, 위험한 작업환경으로 생활이 쉽지 않았다. 남녀 구분 없이 플랜테이션에서 일했고, 아이들도 동원되었다.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에서 성행한 아동노동이 19세기 식민지에서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들로는 부족해 노동력을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 화교와 인도인 비율이 높은 원인 중 하나다. 15)<br>2. 의학과 제국주의: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약자들<br>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이들은 주로 제3세계 사람들과 서구 사회 소수자들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연구 결과들은 식민지 사람들의 삶을 낫게 만들었을까?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선진국 사람들이었고,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은 여전히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소외열대질환(Neglected Tropical Disease)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열대지방에서 주로 발생하는 20개 질병을 소외열대질환으로 통칭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말라리아는 2022년 세계적으로 2억5,000만 건 정도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 61만 명이 사망했다. 전체 감염자의 94%, 사망자의 95%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말라리아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모잠비크에서 발생한다.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전체 사망자의 78%를 차지한다. 22-4)<br>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이렇게 나빠진 데는 제국주의 시절 서양의 책임이 크고 그 가운데 당시 의학의 책임이 상당하다. 물론 제국주의 침략 이전이라고 이런 열대 질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 지배 과정에서 양상이 바뀌었다. 대규모로 농장을 만들고 삼림을 벌채하고 광산을 개발하면서, 말라리아모기 등 질병 매개체의 서식지가 확대되었다. 강제 노동과 대규모 이주 등으로 질병이 더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선주민들의 공동체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전통적 방식의 질병 억제 방법이 함께 무너졌다. 이렇게 식민지 경제체제에서 급격한 도시화는 위생 문제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식민지 자원을 대규모로 착취했다. 식민지 선주민들은 더 빈곤해지고 이에 따라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게다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시대 의료 체계는 주로 본국에서 간 사람과 일부 식민지 엘리트를 위한 것이었지, 대다수 현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현지인들은 생체 실험 대상으로만 취급되었다. 24)<br>3. 과학과 제국주의: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이 아니다<br>19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은 아프리카, 중동과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제국주의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인종론은 유럽의 백인이 아시아인과 흑인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가 되었다. 더 진화한 이들이 덜 진화한 이들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현대 과학으로 보자면 인종론은 과학적 정당성이 하나도 없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피부색이 까만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보다 지역적 연관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물론 19세기에도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처럼 인종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가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19세기의 인종론은 이제 과학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하게 남아 있다. 가령 미국에서 흑인은 백인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체포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주장한다. “인종은 없다. 인종차별만 있을 뿐이다.” 28-9)<br>허버트 스펜서가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쓸 때의 의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의 ‘진화’는 다윈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다윈의 진화란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자연 현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진화는 곧 진보이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스펜서로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대 정책,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했다. 군사적 사회에서 산업적 사회로의 진화가 발전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사회진화론’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그 뒤 다른 식으로 쓰였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사회학자 벤저민 키드(Benjamin Kidd)는 《사회 진화(Social Evolution)》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했다.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월한 인종의 지배가 진보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유럽의 식민 지배를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31-2)<br>2부 현대 자본주의와 과학<br>4. 현대 자본주의와 거대과학: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거대과학<br>맨해튼 프로젝트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바로 거대과학(Big Science)의 출현이다. 거대과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우주 탐사도 입자물리학도 핵융합도 아닌 군사다. 어떤 이들은 군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이 다른 부문에 활용되면서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스핀오프(spin-off)’ 기술이라 하는데, 군사용 연구를 정당화할 때 자주 인용된다. 스핀오프 기술이 꽤 있다. 대표적인 예가 흔히 ‘GPS’라 부르는 위성항법시스템이다. GPS는 위성항법시스템 중 미국국방부가 개발해 관리하는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Global Positioning System)의 약칭이다. 그런데 현재 위성항법시스템은 미국의 GPS 하나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글로나스, 유럽연합의 갈릴레오, 중국의 베이더우 등 지구 전체를 담당하는 4개의 위성항법시스템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원래 군사용이기 때문이고 최초 개발국인 미국이 GPS 운영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37-8, 40, 42)<br>이미 개발된 군사 기술을 민간에 적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다. 스핀오프 기술을 예로 들면서 군사 기술 개발에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붓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스핀오프는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대부분의 군사 기술은 민간에 적용되기 어렵거나 적용 과정에서 막대한 추가 비용 및 시간이 소모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서비스와 제품은 항상 가성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은 성능과 효과가 우선이고, 비싼 가격이나 다른 문제점은 쉽게 감내한다. 무엇보다 스핀오프 기술에 대한 강조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라는 윤리적 문제를 외면한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는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군사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기술 개발에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한다. 이는 더 시급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군대를 위해 전용하는 행위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 기술이나 난치병 치료법 개발, 환경 보존 등에 투여할 예산을 빼앗는 셈이다. 42-3)<br>5 의학과 보편적 건강권: 사람이 특허보다 중요하다<br>국경없는의사회는 199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상금이 시작이었다. 마침, 아벤티스가 수면병 치료제 생산을 중단한 시점이었다. 기존 다국적 제약 회사를 통해서는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새로운 치료제 개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는 노벨상 상금을 종잣돈으로 비영리 연구개발 조직인 소외질환의약품개발이니셔티브(DNDi)를 결성했다. 목표는 소외열대질환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기존 치료제를 개선하는 것, 개발한 치료제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DNDi는 상업적 이익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비영리 모델을 채택했다. 그리고 현장의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에 주력하고 현지의 필요성을 기반으로 환자 중심의 연구를 주요 지침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DNDi는 수면병, 리슈마니아증, 샤가스병, 말라리아, 소아 에이즈 등 다양한 소외 질환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 58-9)<br>의약품 특허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권과 건강권이 시장 논리와 사적 이윤 추구에 종속된다는 점에 있다. 제약 회사들은 신약 개발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므로 이를 회수하기 위해 특허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약 개발의 시작은 공공 연구 기관들의 기초연구다. 수십 년간의 공공 투자로 개발된 기술이 민간 기업의 특허권으로 독점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제약 회사들의 연구개발비는 항상 과대 계상되는 경향이 있다. 마케팅 비용이나 임원 보상이 연구개발비보다 더 큰 경우도 많다. 근본적으로 의약품을 하나의 ‘상품’으로만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연구 성과는 공공재로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제약회사가 가격을 맘대로 정할 수 없도록 규제해야 한다. 약값이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허권 행사를 제한하고 강제실시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의약품을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62)<br>6. 특허와 자본: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는 과학<br>“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은 과학 혁명의 완성이자 근대 물리학의 시작이지만, 그의 말처럼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를 두고 피 터지게 싸웠지만, 자신이 이룬 결과물을 이용해 다른 이가 실험하고 응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아니 관대했다기보다 너무 당연해서 시비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과학자들이 품이 넓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 과학은 돈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과학 연구를 토대로 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이 기술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18세기만 하더라도 과학과 기술, 과학과 공학은 완전히 남남이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방적기와 방직기 기술, 증기기관의 개선 등은 당시 과학과는 상관없이 오직 기술자들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만들어 냈다. 64)<br>20세기 중반 이후 과학과 기술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이것이 과학인지 기술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자 특허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제조 공정이나 화학 공정 관련 기술, 기계장치 등이 주된 특허 대상이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자 유전자조작 기술, 회로 설계, 생물학적 처리 방법,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 대상이 다양해졌다. 물질특허와 유전자특허, 그리고 천연물질특허로 특허 대상이 확대되었다. 현대 화학 산업에서 물질특허는 대단히 중요하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감광제, 디스플레이용 발광 물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많은 제품이 물질특허의 보호 대상이다. 제약 산업의 경우, 세팔로스포린 같은 항생제나 발사르탄 같은 혈압 약은 물질특허 덕분에 강력한 시장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제약 회사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이라고 해서, 원래의 제품에 대한 사소한 변형을 특허로 등록해 특허를 연장하고 있다. 65-6)<br>어떤 표준을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특허를 표준필수특허라 한다. 표준필수특허는 기술의 공공재적 성격을 무시한다. 특히 통신이나 인터넷과 같은 기반 기술들은 현대 사회의 필수 인프라로,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고 표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소수 대기업이 표준필수특허를 독점하면서 이러한 필수 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다음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글로벌 불평등을 심화한다. 선진국 대기업이 대부분의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서 개발도상국은 계속 높은 특허 사용료를 내야 한다. 이는 기술 종속을 심화하고 국가 간 경제적 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공공성을 해친다. 표준필수특허 대부분에는 공공기관의 기여가 핵심적이다. 지금의 특허 제도는 발명가도, 소비자도 보호하지 못한 채 자본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제 특허 문제는 기업을 넘어 과학과 기술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69-71)<br>3부 민중의 과학<br>7.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br>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대 이래로 계속되었다. 이런 낙관적 전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핵폭탄의 개발은 과학기술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을지를 보여 줬다. 이런 걱정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믿음은 여전했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만든 문제를 또다시 과학기술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커졌다. 예를 들어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많은 사람이 기술 발전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기술 중심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기후 위기는 과도한 생산과 소비, 화석연료 중심의 산업구조가 근본 원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런 과학만능주의가 종종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기술적 해결책을 내세워 현재의 여론을 잠재우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회피하는 것이다. 과학만능주의는 현재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76-8)<br>기술결정론은 기술의 발전이 사회 변화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높아진 생산력은 생산양식을 바꾸는데, 이런 경제 영역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주장이다. 기술결정론이 특히 문제가 되는 분야는 노동이다. 산업혁명 시기를 보면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당시 방직공과 수공업자의 일자리는 기계의 도입으로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물류 창고의 자동화를 두고 기업들은 ‘스마트 물류’나 ‘디지털 혁신’이라 부른다. 물류 자동화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물류량과 빨라지는 배송 속도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적 혁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과정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기술 도입 과정에서 효율성만을 강조할 뿐 노동자의 건강이나 작업장의 민주성 같은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사실이다. 79-80)<br>8 과학과 커먼즈: ‘과학의 로빈 후드’ 혹은 ‘과학의 해적 여왕’<br>데이터는 다른 정보들처럼 일종의 권력이다. ‘정보 비대칭’은 기회의 비대칭으로 이어지고, 이는 권력이 된다. 정부와 대기업은 데이터 개방을 이야기하지만, 공개되는 데이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들은 더 노골적이다. 이들은 해당 사이트에서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추적하고 데이터화한다. 이렇게 수집한 데이터를 기업은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더 정교한 행동 조작과 이윤의 도구로 활용한다. 플랫폼 회사들이 제공하는 ‘약관’에 따르면, 이런 데이터를 기업들끼리 서로 유상으로 혹은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공개를 넘어 데이터를 통한 권력관계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시민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권력기관이나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디지털 시대, 민주주의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89)<br>이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최소화의 원칙, 동의와 통제권 중시, 차등적 접근, 알고리즘 투명성을 주요하게 강조한다. 첫째, ‘데이터 최소화’에 대해 살펴보자. 데이터 최소화가 필요한 이유는 데이터를 많이 모을수록 해킹이나 유출 시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다. 둘째, ‘동의와 통제권’ 중시는 데이터를 모으는 쪽, 그러니까 주로 정부 기관이나 기업과 제공하는 쪽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셋째, ‘차등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프라이버시와 공익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모든 데이터를 완전히 공개하면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며, 완전히 막으면 공익적 활용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의료나 범죄 통계 등 민감한 개인 정보를 다룰 때 주요하게 나타난다. 넷째, ‘알고리즘 투명성’ 문제를 살펴보자. 알고리즘 투명성이란 알고리즘이 특정 집단을 차별하지 않는지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존의 채용 알고리즘이 여성을 차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네 가지 원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91-2)<br>9 민중의 과학: 무엇을, 왜,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br>‘적정기술’이란 말을 들으면 대개 손 펌프나 정수기, 태양광 조리기 같은 간단한 기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적정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값싼 기술’을 만드는 것이 주요 목적은 아니었다. 1973년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Fritz” Schumacher)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중간기술’ 개념을 제시했다.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은 서구의 거대 기술을 도입하느라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도입된 기술은 현지의 필요와 조건에 맞지 않았고, 소수 엘리트만 이용할 수 있었다. 슈마허는 이런 상황에서 현지의 자원과 기술력으로 만들 수 있으면서 전통적인 방식보다 생산성이 높은 ‘중간’ 정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슈마허는 기술의 수준 문제만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 기술이 자본 집중과 중앙 집중을 낳으며 이는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여겨,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기술을 제안했다. 103-4)&nbsp;<br>빈곤이나 불평등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일부 활동가들은 적정기술을 사회운동과 결합하고자 한다. 인도의 나브다냐(Navdanya) 운동은 유전자조작 종자에 맞서 토종 종자를 지키는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농민들의 자립적 기술 개발을 돕는다. 결국 우리가 다시 해야 할 질문은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이다. 적정기술 운동이 처음 제기했던 문제의식, 즉 기술이 소수가 아닌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는 값싼 기술을 보급하거나 첨단 장비를 갖춘 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기술의 생산과 활용 과정 전반에 대한 민주화가 필요하다.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할 것인지를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 적정기술의 미래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105-6)<br>10 소수자와 과학: 인공지능의 편향된 공부법<br>한국에서 전동휠체어가 급속히 확산한 결정적인 계기는 2003년 국민건강보험 급여 품목이 되면서부터다. 이에 더해 정부 지원 정책이 확대되면서 보급 속도가 빨라졌다. 휠체어가 계단을 이동할 수 있도록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실제로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 있다. 그러면 이동 문제가 해결될까? 이런 기술의 개발은 한편으로는 환영해야 한다.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전동휠체어가 삶의 질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술로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기술의 도입보다 저상버스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모든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장애인 전용 콜택시를 늘리는 것이 장애인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의무다. 사회가 해야 할 몫을 장애인 개인에게 맡기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기술 개발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기술 개발을 핑계로 지금 해야 할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12-3)<br>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 발전의 방향이다. 지금의 과학기술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에너지 소비는 늘어난다. 인공지능 서버를 돌리는 데 드는 전력량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메타버스나 가상현실 기술이 상용화되면 전력 소비는 폭증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술 발전을 불가피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기술의 발전 방향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기술 발전의 방향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배터리 효율을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처럼, 사회가 요구한다면 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재생에너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너지 소비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결단의 문제다. 116)<br>맺음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97/58/cover150/e1326352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297583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본 인 블랙니스 / 하워드 프렌치 - [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1408</link><pubDate>Mon, 20 Jul 2026 07: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4014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935571&TPaperId=174014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73/72/coveroff/k7229355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935571&TPaperId=174014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a><br/>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09월<br/></td></tr></table><br/>서론&nbsp;<br>"원정을 떠나기 한참 전에, 콜럼버스는 오늘날의 가나Ghana, 엘미나Elmina에 자리한 유럽 전초기지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항해를 했다. 그 기지는 유럽인이 해외에 구축한 최초의 대규모 요새였다. 15세기 중엽 유럽의 서아프리카 원정은 그 지역 어딘가에 막대하게 비축되어 있는 금의 원천을 찾는 일에 집중되었다. 1471년 포르투갈인이 개척했고, 1482년 엘미나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확보한 황금무역의 규모는 막대하여, 이 수입으로 훗날 바스쿠 다 가마의 아시아 항로 개척 임무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 가마가 캘리컷까지 항해한 이래 거의 10년 동안, 아시아로의 항해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이 10년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인이 엘미나에 도착한 뒤부터 그들이 인도에 상륙할 때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기에 대해서도 역사교육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에 유럽과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라고 불리는 지역이 불가역적인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15-6)<br>1부 아프리카의 ‘발견’<br>"이베리아인의 탐험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형태로 꼽아온 디아스(1488년 희망봉에 도달한)의 행로를 계속 추적해보려는 노력이 사실 초기에는 없었다. 그 시대 포르투갈 왕 주왕 2세와 관련된 사료들을 보아도 디아스의 업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강력한 단서를 포르투갈 왕실이 즐겨 사용한 별명에서 찾을 수 있다. 주앙 2세는 당대에 '아프리카인 주앙'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신하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풍부한 자원에 접근해 이를 가져왔기 때문인데,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서아프리카에서 부를 찾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관심을 둘 만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인정하기보다,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었다는 발상이 '대항해시대'를 주제로 한 책마다 일관되게 유지되어왔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현상의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이렇게 아프리카를 그림에서 지우는 것이 서구가 근대로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방식의 가장 근저에 놓인 특징이다."(61-2)<br>"지금은 에스파냐령인 카나리아제도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가장 가까운 섬은 모로코의 대서양 해안 남단에서 불과 62마일(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카나리아제도는 세계사 책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최근 시사문제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대서양에서 유럽인이 처음으로 식민화를 실행한 곳이다.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등이 해외 제국에 대한 경험을 쌓은 곳이고, 그 과정에서 사악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수없이 동원된 지역이다. 대서양에서 동산노예제chattel slavery, 집단학살, 폭력적인 교리 주입, 정착민 식민주의 등이 가장 먼저 선보여진 곳이 바로 카나리아제도이다." "카나리아제도 선주민의 저항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려는 유럽인의 노력이 성과를 거둔 것은 1496년에 가서였다. 한편 그 무렵 포르투갈인은 이미 서아프리카의 문을 크게 열어젖힌 상황이었고, 이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당시는 이미 디아스가 인도양을 항해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였다."(81-2)<br>"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부터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이 15세기 대서양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탐험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덕분에 1420년대에 여러 새로운 지역을 개척했다. 우선 1424년 마데이라제도, 그리고 곧이어 아조레스제도를 발견했다. 작은 규모의 섬들이지만 이를 통해 엔히크는 상당한 정치적 후원세력과 금전적 소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 정복한 마데이라섬에 제노바 사업가들과 함께 대서양 세계에서는 아마도 처음으로 제당소를 세우고 엔히크가 그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는 수익성이 높은 투자인 동시에 미래를 예고하는 사업이었다. 15세기 중엽, 마데이라는 매년 약 70톤의 설탕을 생산했다. 당시 설탕은 귀한 외국산 약재로 여겨졌다. 포르투갈인은 설탕을 대량생산하고자 유일하고 현실적인 방책으로 노예 노동을 대규모로 투입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마데이라에 처음 노예로 들여온 이들은 카나리아인이었다."(90-1)<br>"1440년대에 노예제와 관련해 발생했던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칸인의 접촉은 모두 해변에서 펼친 기습공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는 약탈을 일삼는 무사세력에 기초해 수립되었다. 그 나라의 패기만만한 팽창 계획의 핵심에는, 전쟁에는 항상 보상이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게 자리해 있었다. 엔히크는 비용을 많이 들여서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며 황금을 찾았지만, 금은 거의 거두어들이지 못했고, 황금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도 거의 확보하지 못했다. 황금을 향한 탐험에 소모된 비용이 점점 쌓이면서, 탐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소득원을 찾아야 했다. 도식적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황금 때문에 포르투갈은 노예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노예는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산업인 설탕 산업의 팽창을 추동했다. 인종은 유럽인 사이에서 노예화의 적격성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흑인은 유난히 비천하며 문명이 선사하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간주되었다."(96-100)<br>"포르투갈 상인은 아프리카로 계속 금속제품과 직물을 수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획득한 상품을 북유럽인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럽 자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포르투갈인이 북유럽에 판매한 아프리카 제품에는 많이들 탐냈던 '천국의 곡물' 혹은 말라게타malagueta 후추라고 불리던 칠리 같은 열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이 이를 오늘날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지역 부근에서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그래서 이 지역을 '후추 해안Pepper Coast'이라고 부른다. 이 '천국의 곡물'을 구매하려고 북유럽인은 포르투갈인에게 새로 발견한 아프리카 사회들에서 수요가 높았던 옷감과 금속제품을 팔았다.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 거래지만, 이는 첫 번째 삼각무역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유명한 삼각무역이 정착한 것은 이보다 한참 뒤였다. 아프리카와 교역을 한 덕분에 남유럽은 북유럽과 경제적으로 보다 더 밀착될 수 있었다."(108)<br>"오늘날 가나가 위치한 지역의 황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작은 해전을 거친 후에, 포르투갈은 교회가 승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오랫동안 겨뤄왔던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마침내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0년 동안 포르투갈은 엘미나에서 매년 황금 8000온스(약 227킬로그램)를 가져갔는데, 그 양은 1494년까지 거의 세 배로 증가했고, 이 증가세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의 엄청난 황금을 새롭게 독점하면서, 에스파냐가 할 수 있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로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과 대서양의 극서쪽까지 새로운 탐사를 계속 밀어붙이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발견한 부를 보면서, 에스파냐도 자기만의 귀금속 원천지를 찾아야 한다는 집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과 나눈 대화에서 자신이 대서양을 건너려고 하는 이유가 황금이라고 설명했다."(116-7)<br>2부 중심축<br>"1481년, (특히 에스파냐에게) 엘미나에 대한 권리를 엿볼 기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주앙 2세는 가나 해안가에 성채 하나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주앙 2세는 엘미나 성채 건립의 지휘관으로 아잠부자를 앉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디아스였다. 귀족 디아스는 이로부터 7년 뒤,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했고, 그곳을 돌아 인도양까지 갔다. 이후 몇 년간, 훗날 '대항해시대'로 불리게 될 시대의 여러 거장이, 포르투갈이 사하라 이남 지역에 처음 세운 전초기지인 엘미나로 들어오거나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경력을 갖게 된다. 이는 포르투갈이 시작한 지구적 차원의 사업에서 엘미나가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증명해준다. 이 거장 중에는 훗날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길을 훤하게 열었던 알부케르크와 멀리 동남아프리카에 자리한 주요 왕국인 콩고를 '발견'한 캉Diogo Cão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리스본에서 캉의 콩고 개척사업은 인도로 가는 길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시되었다."(124-5)<br>"15세기의 막바지에, 포르투갈은 황금 사업에 조바심을 냈고, 이에 따라 1482년 성채가 완공되자마자 교역은 빠르게 성장했다. 엘미나에 성채를 완공한 이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의 카라벨은 '황금해안'을 오가며 왕실 금고에 비축할 몫으로 매달 46~57킬로그램의 귀금속을 가져왔다. 포르투갈 왕국의 재무부를 이전에는 '기니의 집Casa da Guiné'이라고 했는데, 이는 검은 아프리카와의 교역이 재정에서 가장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제는 이름을 '미나의 집Casa da mina'으로 바꾸고, 리스본의 왕궁에 있는 건물로 이주했다. 이 왕국의 번영에서 엘미나의 황금이 차지하던 중요성을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15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엘미나와의 교역으로 포르투갈 왕실 수입이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506년까지, 포르투갈 제국의 촉수가 이제는 브라질을 덮었고, 아시아로 깊숙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황금해안은 포르투갈로 매년 약 680킬로그램의 황금을 보냈다."(135-6)<br>"노예 플랜테이션으로의 혁신들은 상투메섬에서 결집되어 거의 형태가 완결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같은 시기에 에스파냐가 진행했던, 훨씬 더 유명한 팽창정책보다 월등하게 큰 경제적 효과를 낳았다. 이는 폭력을 통해 관리된 흑인 노동력이 훨씬 더 지속적이고 생산적으로 경제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은과 브라질의 황금 호황이 막대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사그라들었고 절정기는 한 세기를 넘지 못했다. 반면에 흑인 노예를 동력으로 삼는 플랜테이션 농업은 쿠바를 비롯한 대서양 세계 여기저기에서 모방했다. 직간접적으로, 여기서 생겨난 노예 플랜테이션 모델의 정수가 근대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대규모 농업혁명, 즉 대규모 설탕 생산과 면화 생산의 근간이 되었다. 신세계에서 노예 플랜테이션 경험은 작동할 수 있는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재배되던 인디고와 담배 경작으로도 빠르게 전파되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쌀과 커피와 카카오 경작으로도 이어졌다."(167-8)<br>"유럽의 신세계 제국주의 초기 단계에서 크리올은 꽤 다양하게 활동했다. 그들은 흑인세계와 백인세계를 오가며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웠고, 그들만의 대륙횡단 통신망과 형제 관계(포르투갈어로 코프라디아스cofradias)를 유지해갔다. 선박이나 항구 안팎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에 크리올이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근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에서, 이 크리올 공동체 출신들이 신세계를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에 함께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발보아, 코르테스, 소토, 피사로의 역사적 정복행위에 함께하기도 했다. 이렇게 크리올은 상업적·사회적 기구들이 잘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윤활유가 되었다. 그들은 최고의 중개자였다. 노예제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 벌린은 식민지에 정착했던 크리올을 〈특허장 세대〉라고 했다. 이는 플랜테이션 노예제가 광범하게 수립되기 이전에 꼭 필요한 역할들을 했던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을 지칭한다."(190-1)<br>3부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br>"우리가 제국주의 시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쟁을 상상할 때, 이를 영토의 지배권에 대한 것이며,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할수록 더 비중 있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은 다른 원리에 입각해 있었다. 땅의 넓이보다는 흑인 노동력 공급을 통제하거나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대략 한 세기 반 정도 뒤에 도래할 '면화 대량생산Big Cotton'의 시대 전까지는, 엘미나와 같은 작은 해안 전초기지나 포르투갈의 앙골라 식민지처럼 소규모의 고립된 지역이나 서인도제도의 섬 같은 곳을 장악했을 때 가장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 영토의 일부가 된 오하이오강 계곡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도 카리브해에서 두 강국 사이에 벌어졌던 경쟁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의 지배자들과 여론 모두 해운업과 무역에 국운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201-2)<br>"프랑스는 경쟁국 영국을 아메리카 본토에 묶어두어야 영국이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식민지들을 탐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윌리엄 피트가 1757년 집권했을 때, 그는 프랑스의 카리브해 사탕수수 재배 섬들을 공격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서인도제도에서 피트의 첫 목표는 마르티니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롱아일랜드의 4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설탕 생산을 위해 많은 노예를 수입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포함해 미국사를 통틀어 미국으로 팔려간 아프리카인 전체 숫자보다도 더 많은 아프리카인이 이 섬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섬에 배치된 방어용 대포의 위력에 눌려, 영국은 마르티니크 대신 부근의 과들루프를 공격했다. 그들의 반복된 행동들로 판단해보건대, 이 시대 유럽의 선진 강대국은 노예무역과 노예무역의 공급을 받는 플랜테이션 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203-4)<br>"17세기 당시에는 〈앙골라 없이는 노예도 없고, 노예 없이는 설탕도 없으며, 설탕 없이는 브라질도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처럼 앙골라인이 공급했던 노예 노동력 덕분에 브라질은 설탕 강국이 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포르투갈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앞서가는 중심지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를 선도하면서 포르투갈은 부국이 되었지만 인구 규모가 작아 인적 자원이 빈약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모델은 용병에 기초해 있었고, 이것이 발목을 잡았다." "네덜란드인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 노예를 확보하는 것이 포르투갈을 패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고, 훗날 브라질이 네덜란드에 이익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637년 네덜란드가 엘미나를 장악하고 곧이어 상투메섬과 루안다를 정복하자, 포르투갈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군주의 제국 자산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대서양 뒤편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218-20)<br>"네덜란드의 기획은 초기 에스파냐나 포르투갈 정복 사업의 임기응변적인 성격과는 전혀 달랐다. 이는 이질적이지만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환대서양의 식민지들을 묶어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세운다는 고도의 계획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기획에 따라, 네덜란드는 중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즉 엘미나와 루안다 양쪽에서 여러 주요 노예 공급지를 지배했다. 동시에 네덜란드는 가장 크고 생태적으로도 가장 유망한 설탕 생산지, 즉 브라질에서 네덜란드가 정복한 토지들을 지배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 본토에서 오늘날 매사추세츠부터 델라웨어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지들을 세워 지배하기도 했다. 당시 그 지역은 뉴네덜란드로,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영토들은 곧 초기 모피무역에서 벗어나 네덜란드 플랜테이션 경제권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로 변모해갔다. 17세기 중엽부터 빠르게 성장하던 영국은 비슷한 종류의 시너지 효과들을 추구했고, 네덜란드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250-1)<br>"노동의 윤리적 기반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 우리가 인도주의라고 부르는 생각이 영국에서 막 생겨나고 있었지만, 흑인은 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유럽인이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소나 말처럼〉 극한까지 착취해도 문제 없이 용인되었다." "흑인을 잔인하고 타락한 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이는 아주 초기부터 백인에게 심리적으로 중요했다. 이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던 잡다한 혼합 사회들에서 백인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방법이었다. 아메리카 사회들은 백인에게 유럽 태생은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인류이며, 흑인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었다." "설탕 플랜테이션 세계는 들판 혹은 보일러 앞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예의 비율이 높다는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업의 일반적인 과정 혹은 삶의 평범한 현실로 여겼다. 설탕 생산에 투입된 노예의 기대 수명은 보통 7년을 넘지 못했다."(265-7)<br>"바베이도스섬이 도입한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은, 무장을 한 〈몰이꾼들drivers〉이 원하는 속도대로 노동자를 몰아붙이며 일하게 만드는 집단노동방식gang labor이다. 이 시스템 역시 리처드 드랙스가 했던 초기 실험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드랙스는 2주마다 관리자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이 보고서를 근거로 드랙스는 노예와 감독관 모두에게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한 보상을 주기도 하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는 징벌을 내렸다. 드랙스의 플랜테이션에서 처음 선보인, 기록해야 한다는 집착 덕분에 소유주는 서열이 있고 번호가 매겨진 여러 작업단을 조직할 수 있었다." "드렉스의 체제는 산업화된 스타일의 노동 분업과 조직화, 그리고 기록 보존을 구체적으로 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영국에서 결합되기까지는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 전문화를 강조하고 시간을 크게 고려하는 작업 조정과 같은 경영 기술들은 근대의 조립라인을 예언하는 사례였다."(270-2)<br>"1642~1649년 영국 내전과 1688~1689년 명예혁명에서 중요한 특징은 노예제를 통해 재산을 일군 새로운 사업가 엘리트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건 모두 영국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왕정의 권력을 제한하여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 싸움이었다. 이에 대해 애스모글루, 존슨, 로빈슨은 그들의 논문 〈유럽의 부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서양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공국)에서 정치권력의 균형을 바꾸어놓았다. 대서양 무역이 왕실과 그 주변세력 밖에 자리한 교역 관계자들, 즉 해외무역을 하는 다양한 대상인들, 노예무역상, 다양한 식민지 대농장주 등을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경로를 통해, 대서양 무역은 왕실 권려게 맞서 상인을 보호하는 정치제도가 등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사례 속에서, 아프리카인의 땀과 생산성의 부산물로 유럽에 주어진 중요한 변화는 시민 사회와 근대적 공론장의 등장이다."(291-2)<br>4부 비단뱀신의 저주<br>"1483년 포르투갈 탐험가 캉이 오면서 유럽인과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콩고 왕국은 이미 정교하게 발전된 국가였다. 또 다른 강국 베냉은 유럽과의 접촉 이전에 다각화된 경제를 갖춘 나라로, 유럽 상품이나 유럽 종교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베냉은 새로 온 유럽인과 노예무역을 시작하자마자 금방 중단시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고 그 나름의 독특한 이유로 콩고 지배자에게 기독교는 즉각적으로 강력한 매력을 발휘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이전부터 콩고에 퍼져 있던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운명적인 우연의 일치로, 콩고의 우주관에는 바다 건너 어디엔가 더 높은 존재가 거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새하얀 생명체들이 창조되어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1491년 5월 3일은 콜럼버스가 동인도제도를 찾기 위해 에스파냐에서 서쪽으로 첫 항해를 나가기 15개월 전이다. 그런데 이날, 콩고의 왕 '은징가 아 은쿠아'(통치명 주앙 1세를 자처했다)가 자기 궁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362-4, 369)<br>"15세기 말 콩고와 포르투갈이 쌍무관계를 수립한 이래, 콩고는 포르투갈에 공물을 제공하지 않았고, 포르투갈도 공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앙 1세가,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에 다양한 종류의 원조를 요청하고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일들은 계약을 통해서 진행되었고 꼼꼼하게 보상을 받았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어떤 규모의 아프리카 나라도 유럽인에게 정복된 적은 없다. 유럽인과의 접촉이 단단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져 노예무역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떤 정치체도 복속되지는 않았다. 캉이 콩고 왕국을 발견한 이후 약 150년 동안, 콩고 입장에서 보면 포르투갈과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구가했다. 이 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료 사이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두 문명이 만났던 당시 콩고 왕국과 제도들에 내재해 있던 어떤 강고함 때문이기도 했고, 콩고의 국정 운영 능력과 아폰수 1세와 같은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지략과 지성 덕분이기도 했다."(379-80)<br>"1622년 말, 포르투갈은 임방갈라와 동맹하여 콩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네덜란드 의회가 서인도회사를 세우고 1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1625년 콩고 왕 페드로 1세와 소요(해안 지대의 강력한 준자치구역)의 마누엘 백작은 각각 네덜란드 의회에 편지를 보내,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인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공식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1620년대까지 브라질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들로 이송된 노예의 절반 이상이 앙골라에서 출발했다. 중앙아프리카 서부에서 오는 인간 파이프라인을 폐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서인도회사가 이베이라반도 두 강국의 대서양 복합단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콩고의 동맹제안은 아프리카에서도 유럽의 정치 상황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던 곳에서만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분명한 것은 콩고의 주도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이 시기 대서양에서 네덜란드의 구상은 '위대한 기획'이라는 이름값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397-400)<br># 임방갈라Imbangala : 초기 노예무역이나 가뭄으로 인한 약탈과 파괴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용병부대<br>"수백만 명의 사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빼앗아간 대서양 노예무역 때문에,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지구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다른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처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시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증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급속한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화는 모든 종류의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인구증가로 더 크고 더 강력한 국가가 되고, 더 큰 군대를 조직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인구증가는 시장의 엄청난 확대와 무역이 성장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예제로 아프리카에서 이 모든 것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아프리카는 외부 경쟁자와 공격자, 특히 유럽인 앞에서 더 취약해졌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출된 노동력은 기획에 따라 절대 다수가 생산성이 최고조에 올라 있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아프리카 인구는 식민화 초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계속 감소세였을 것이다."(418-9)<br>"정치학자 넌Nunn과 그의 동료 완치콘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노예무역의 강도와 지속기간과 사회적 신뢰의 지속적인 하락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은 노예무역을 경험한 종족 집단들의 문화적 규범을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신뢰수준이 낮은 지역에서 개발된 제도는 더 취약했고, [그들의] 더 취약한 제도는 더 나쁜 행동과 훨씬 더 낮은 수준의 신뢰로 이어졌다. 이런 사회는 비협조적인 행동, 불신, 비효율적인 제도가 평형을 이룬 가운데 갇힌 상태에 머물러 있다.〉 노예무역의 압력하에서 개인은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올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지역에서는 타인에 대한 불신의 규범이 신뢰의 규범보다 더 유익해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424-6)<br>5부 검은 대서양과 새롭게 형성된 세계<br>"전통적인 미국사 교육에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지만,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프로젝트가 호소력을 가졌던 중요한 매력 중 하나는 미시시피강 계곡과 강안을 따라 세워지고 있던 면화 플랜테이션을 버지니아가 뻗어나갈 수 있는 출구로 이용하여 노예봉기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1820년에서 1860년 사이에 100만 명의 흑인이 예상대로 '강을 따라 팔려갔다.' 이런 이동은 제퍼슨의 구상을 실현하고, 면화 농장주들의 급증하는 노동력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한때 영국 직물 산업에 중요한 면화 공급지였던 아이티를 상실한 시기와 우연히 일치하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제퍼슨은 앞날을 내다보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생도맹그St. Domingo에서 시작된 이 역사의 첫 장은 ··· 다른 모든 섬에서 모든 백인이 어떻게 쫓겨나게 될지를 자세히 보여줄 것이다.〉 이는 노예봉기에 성공한 후 1804년에 아이티로 이름을 바꾼 플랜테이션 식민지를 언급한 것이었다."(434-5)<br>"아이티 혁명 이전 10년 동안 프랑스 선박은 22만 4000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가 노예로 팔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생도맹그로 갔다. 1780년대가 되면, 생도맹그가 프랑스 무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면서 나머지 프랑스식민지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부를 생산했다." "1791년, 나폴레옹이 아이티 노예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라살 후작을 파견했을 때, 그는 그의 군대에 프랑스 혁명에서 직접 영감을 받은 문구인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면 죽음을〉이라는 기치를 〈국가, 법, 왕〉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문구에 담긴 체제전복적 성격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 혁명의 시대에 아마도 가장 일관되게 관철된 규칙이 있다면, 흑인 사이에서 인권과 자유에 관한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했던 예방조치들이 모두 소용없었다는 점이다. 여러 신세계 노예 사회에서 속박되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 돌던 '모두의 바람common wind'의 침투력은 너무도 강해서 어떤 검열체제로도 막을 수 없었다."(441-2)<br>"1720년대에 생도맹그 식민지가 경제적으로 도약한 직후, 이 지역 백인 사이에서 프랑스 본국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대표 없이 부과된 세금'에 대해 불만을 품은 대농장주들의 반발이 거세졌던 것이다. 이런 대농장주의 반발은 훗날 발생한 미국 혁명의 중심 주제를 선명하게 예견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대농장주는 프랑스 중상주의가 가하는 통제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국가는 노예 공급에 대해 독점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본국 정부는 식민지 정착자가 상품을 본국에만 판매할 수 있게 했고, 판매 조건은 본국만이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대농장주의 분노는 1780년대에 다시 불이 붙었다. 프랑스가 노예에 대한 착취를 규제하는 일련의 규정들, 즉 흑인법Code Noir을 제정하는 등 온건한 개혁 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재산 소유자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침해가 백인이 지배하는 노예제 사회들에서 거의 보편적인 주제가 되었다."(464-5)<br>"노예들의 충성을 얻어 질서를 회복하기를 희망했던 혁명 프랑스는 불안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식민지의 자유로운 유색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는 본국에서 이미 노예제도의 미래를 놓고 논의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생도맹그의 백인은 두 가지 발전 모두에 대해 격분했다. 한 대농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예제가 없다면, 생도맹그에는 문명도 없다. 우리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50만 명의 야만인 노예를 찾아 구매한 것이 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식민지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자유인으로서 그들의 존재는 우리 유럽 형제들의 존재와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자유인이 된 흑인과 유럽인의 양립을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때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정확히 1년 안에 그 양립이 실현되었다. 이렇듯 아이티 혁명은 유럽이 대서양 전역에 수립할 노예제를 종식시키고, 세계적 차원에서는 반식민주의를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다."(472-4)<br>"1802년 3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제1집정관이라는 혁명적 칭호를 채택한 지 거의 2년 반이 지난 후, 영국은 아미앵에서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유럽에서의 전쟁과 영국과의 해전에서 빠져나오면서, 나폴레옹은 우선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재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802년 5월, 국민의회는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 프랑스령 섬들에서 노예제를 복원하는 것을 놓고 투표하여, 211 대 60으로 복원을 결정했다. 이 와중에 영국은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렇게 노예무역 금지를 주도하면서 영국은 도덕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유럽에서 영국이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영제국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영국은 서인도제도에서 60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여전히 노예 노동을 통해 수익을 얻으면서 이런 과업을 달성했다."(477, 482-4)<br>"역사학자 스벤 베커트의 비교에 따르면, 면화가 19세기 미국에 갖는 의미는 석유가 20세기 사우디아라비아에 갖는 의미와 같았다. 플랜테이션 노예의 식량을 제한했던 것은 분명 투자 수익의 문제였지만, 심리적 목적도 확실히 있었다. 이런 한계설정은 사회적 지배와 비인간화라는 고의적 전략의 일부였고, 한 인종을 비하하고 다른 인종을 높여서 인종 간의 차등을 강화하는 방법을 계속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동산노예제는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속성에 기초한 서열〉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속성에 기초한 서열〉이란 출신이나 특성의 차이에 따라 인생에서 다른 지위를 부여받도록 오랫동안 작동해온 시스템이다. 물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백인성 자체가 인종적 정체성으로 발전하고 강화되는 과정에서 동산노예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백인성은 근대성이 낳은 영향력 있는 부산물 중 하나이다. 모리슨에 따르면, 〈노예제만큼 [백인을 위한] 자유를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없다.〉"(507-8)<br>"사실, 인디언 추방에서부터 흑인 노예를 동남부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했던 것, 그리고 미시시피강 계곡과 인근 지역의 목화밭에 새로운 플랜테이션을 설립하는 것까지 이 모두를 재정적으로 열심히 지원했던 것은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여러 북동부 금융가들이었다. 이에 따라 흑인의 몸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를 기생적인 남부만의 문제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노예제는 대서양 전역에서 광범하게 전개된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당시 미국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인 것은 분명했지만 예정된 강국은 아니었고, 나중에 미국이 이루게 된 경제적 동력을 발산해내는 나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후에, 즉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미국은 무엇보다도 목화라는 한 가지 작물에 기초한 플랜테이션 노예제에 힘입어 빠르게 산업화된 국가이자 세계 강국으로 발을 내디딘다. 사실, 한 역사가가 쓴 것처럼, 〈면화 무역은 미국 경제가 갖고 있던 유일한 '주요 팽창력'이었다.〉"(511-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73/72/cover150/k7229355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3737277</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아침</category><title>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 [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88828</link><pubDate>Mon, 13 Jul 2026 0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8882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531669&TPaperId=1738882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62/5/coveroff/s6628340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531669&TPaperId=1738882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a><br/>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05월<br/></td></tr></table><br/>머리말<br>1. 실크로드의 탄생&nbsp;<br>"에우리피데스가 쓴 《바카이Bakhai》의 첫 구절에서 디오니소스는 〈나는 엄청나게 부유한 동방〉에서 〈그리스로 왔다〉고 말한다. 그곳은 페르시아의 평원이 햇빛에 목욕하는 곳이고, 박트리아의 마을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아시아와 동방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전에 디오니소스가 성스러운 신비에 싸여 〈뛰어 돌아다닌〉 땅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런 작품을 탐독한 학생이었다.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336년에 암살당한 후 왕위에 오른 이 젊은 장군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어느 쪽을 향할지는 명백했다. 그는 유럽 쪽은 한순간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도시도 없고, 문화도 없고, 위신도 없고, 보상도 없었다. 다른 모든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문화와 사상과 기회는 (위협도) 동쪽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고대 세계의 최강국으로 향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바로 페르시아였다."(26-7)<br>"스텝 지역을 서로 맞물리고 서로 연결된 세계와 이어주는 일은 중국의 야망이 커지면서 가속화되었다. 한漢 왕조(기원전 202~기원후 220) 시대에 팽창의 물결은 국경을 더욱 멀리 밀어내 마침내 당시 서역西域이라 부르던 지방에까지 도달했다." "가장 중요하게 거래된 비단은 사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통화로도 쓰였다." "중국인들은 또 외국에서 오는 상인을 통제하기 위해 공식적인 체제를 마련했다. 둔황에서 멀지 않은 솬찬懸泉 역참 유적지에서 출토된 3만 5000점의 문서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쪽과 나무쪽에 쓰인 이 문서들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방문자들이 반드시 지정된 경로를 이용해야 했고, 나중에 한 명도 빠짐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점호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세계화는 2000년 전에도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기회를 제공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기술 발전을 촉진한 일이었다."(34, 38-9)<br>"역설적이지만 페르시아가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추동한 것은 바로 로마의 성장과 야망이었다. 예컨대 페르시아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장거리 교역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그것은 또한 페르시아의 정치적·경제적 무게중심을 북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전에는 스텝 지대에 가까운 쪽이 중요시되었다. 유목 민족들과 가축이나 말을 거래하고, 스텝 지대의 무시무시한 사람들로부터 내키지 않는 관심이나 요구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외교적 접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페르시아 정복 노력이 가져온 가장 큰 효과는 페르시아의 정치개혁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220년 무렵에 등장한 새 왕조 사산제국은 과감한 비전을 내놓았다. 사실상 독립적이었던 지방 총독의 권한을 박탈해서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고 잇단 행정개혁으로 국가의 거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가 부상하면서 로마는 전형적인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었다."(53-5)<br>2. 신앙의 길&nbsp;<br>"고대에 태평양,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만, 지중해를 연결하는 대동맥을 따라 흘러간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사상도 흘렀다. 가장 강력한 사상은 신과 관련된 사상이었다." "실크로드의 지적·신학적 공간은 북적거렸다. 여러 신과 종교, 성직자들과 각 지역의 지배자들이 서로 경쟁했다. 판은 컸다. 당시는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초자연적인 일까지 모든 현상을 알고 싶어하던 때였고, 신앙이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해법을 내놓던 때였다.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투쟁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이 모든 종교에서 전쟁터 또는 협상 테이블에서 승리하는 것은 곧 문화적 우월성과 신의 축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 등식은 간단하지만 강력했다. 제대로 된 신(또는 신들)이 보호하고 아끼는 사회는 번영하고, 거짓된 우상과 공허한 약속에 매달리는 사회는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성대한 예배 장소 같은 훌륭한 영적 기반시설에 투자할 강력한 동기를 느꼈다. 그것은 내부 통제의 방편을 제공했다."(63-5)<br>"페르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전통으로 내세워지고 정치적·군사적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가치관과 믿음이 강요되었다. 이와 다른 가치관을 주장하는 사람은 추적을 당하고 대부분 살해당했다. 카리스마 있는 3세기의 선지자 마니는 동방과 서방에서 기원한 여러 사상을 혼합하여 한때 샤푸르 1세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니의 가르침은 이제 파괴적이고 해롭고 위험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의 추종자들은 무자비하게 추적을 당했다. 가혹한 처우를 받은 것으로 지목되고 카르티르가 배척 대상으로 언급한 사람들 가운데 나스라예와 크리스티오네가 있다. 각각 '나사렛인'과 '기독교인'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가 3세기 페르시아의 의식과 정체성에 깊이 파고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 전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기독교는 교역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조로아스터 사상은 인상적인 급진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73-4)<br>3. 기독교도의 동방으로 가는 길&nbsp;<br>"로마의 붕괴는 아시아 기독교도들의 곤경을 완화시켰다. 스텝 지역 종족들에 대항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직면하자 로마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로마가 크게 쇠약해지자 기독교는 더 이상 위협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100년 전 콘스탄티누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기독교 주민들을 해방시키려고 준비할 때만 해도 로마는 명백한 위협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410년에 페르시아의 샤 야즈데게르드 1세가 후원한 첫 회의와 이후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페르시아에서 기독교 교회의 지위를 공인하고 그 신앙을 합법화하게 된다. 서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그리고 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리스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와 시리아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간의 의례와 교리의 차이는 계속해서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96-7)<br>"서방 교회가 다른 견해를 뿌리 뽑는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 동방 교회는 야심차고 광범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기독교는 심지어 스텝 지대의 유목민들에게도 전해졌다. 6세기 중반에는 아시아 깊숙한 지역에 대주교 관구가 있었다. 바스라, 모술, 티크리트에서는 기독교도 주민이 급증했다. 메르브, 군데샤푸르 같은 도시들과 심지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에도 영국 캔터베리보다 훨씬 먼저 대주교가 있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나 스칸디나비아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수백 년 전의 주요 기독교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 기독교가 소개되기 1000년 전에 흥성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중심지였다. 어쨌든 바그다드는 아테네보다 예루살렘이 더 가까웠고, 테헤란은 로마보다 성지가 더 가까웠으며, 사마르칸트도 파리나 런던보다 성지와 더 가까웠다. 기독교가 동방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잊히고 있었다."(103-4)<br>4. 혁명으로 가는 길&nbsp;<br>"사태의 전개 과정을 확실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일신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무함마드 혼자만은 아니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또한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전쟁으로 경기가 심각하게 위축된 상황에서 무함마드가 선교를 하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대결 및 그 결과로 나타난 군국화는 히자즈에서 출발하거나 그곳을 통과하는 교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정부 지출이 군대로 빨려 들어가고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 경제에 지속적인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에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상당히 감소했을 것이다. 전쟁이 전통적인 시장(특히 레반트와 페르시아의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남부 아라비아의 경제는 더욱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동란이 더 멀리까지 파장을 미치고 일상생활에 혼란을 주자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는 무함마드의 경고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132-3)<br>"이 새로운 정체성의 한가운데에는 통일에 관한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남부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의 권역으로 통합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로마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이곳의 경쟁관계를 조종하여 서로 싸우도록 부추겼다. 후원과 재정 지원은 의존적인 예속 지배층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치열한 전쟁은 이런 체제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앙이 현지 언어로 설교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랍인은 이제 독자적인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이 종교는 그곳 주민들을 위해 설계되었다. 유목민이든 도시인이든, 어느 부족 성원이든, 그리고 민족적·언어적 배경에 관계없이,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계시를 기록한 책, 즉 코란에 나오는 그리스어, 아람어, 시리아어,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차용어는 차이보다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던 다多언어 환경을 시사한다. 통합은 핵심 교리였고, 이슬람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다."(134-5)<br>5. 화합으로 가는 길&nbsp;<br>"코란에서 무함마드 당대의 사건을 이야기한 얼마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동로마인들을 좋게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이슬람교 팽창의 최초 국면에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초기 무슬림들이 신봉했던 금욕주의 또한 그리스-로마 세계와 문화적으로 친숙한 판단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동의와 감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을 회유하려는 노력은 아흘 아키타브(성서의 사람들)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정책으로 보완되었다. 아흘 알키타브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코란은 초기 무슬림들이 자기네를 이들 두 종교 신자들의 라이벌이 아니라 같은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로 보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코란은 인류가 한때는 하나의 '움마'였으며, 이후 차이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고 탄식조로 몇 차례 이야기하고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사이의 유사성은 코란과 하디스에서 강조되고, 차이는 언제나 하찮게 취급되고 있다."(150-1)<br># 하디스 :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은 것<br>"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치열한 대결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이례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고대 말기의 두 강대국이 위력을 과시하며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양국을 모두 대체하여 지배하는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 먼 구석 출신의 일파일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함마드에게 고무된 사람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관개기술과 새로운 농작물을 들여와서 수천 킬로미터를 뻗어나가는 그야말로 농업혁명을 촉발하게 된다. 이슬람의 정복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경제 대국을 만들어냈다. 자신감과 관대함, 진보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이를 추동했다." "이 세계는 질서가 뿌리 뿌리 내린 곳, 상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 지식인들이 존중받는 곳,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곳이 되었다. 메카 부근의 한 동굴에서 신통찮게 출발했지만, 전 세계에 걸친 일종의 유토피아를 탄생시킨 것이다."(174-5)<br>6. 모피의 길&nbsp;<br>"이슬람 제국의 등장은 새로운 교통로와 새로운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북쪽의 스텝과 삼림 지대로 통하는 '모피의 길'이 만들어진 것은 7~8세기의 대규모 정복 이후 수백 년 동안 가용 재산이 급격하게 증가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동물과 모피와 기타 산물을 시장으로 쉽게 가져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부유한 유목 종족들은 당연히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정착민 세계와 활발하고 믿을 만한 거래 상대였다. 마찬가지로 스텝 지대에서 가까운 도시들은 부유해졌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이, 이 시장에 가까운 곳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시장 접근성에 큰돈이 걸려 있기 때문에 스텝 지대의 종족 집단들은 서로 경쟁했다. 가장 좋은 목초지와 수자원을 놓고 벌이던 경쟁이 도시와 가장 좋은 교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이는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폭력에 의해 분열되거나, 종족 내부와 종족들이 통합하는 것이다. 싸울 것이냐 협력할 것이냐,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186-7)<br>"스칸디나비아의 상인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이킹의 시대에 가장 용감하고 가장 억센 남자들은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과 남쪽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고, 고향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새로운 나라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더구나 그들이 남긴 흔적은 북아메리카에서처럼 미미하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나라를 발견하게 된다. 발트해에서 카스피해 및 흑해와 연결되는 거대한 수계水系를 장악한 상인, 여행자, 침략자 들의 이름을 딴 나라다. 이 사람들은 루시Rus' 또는 로스rhos로 알려져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빨간 머리칼 때문이거나, 좀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들의 노 젓는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조상들이었다." "그들은 밀랍, 호박, 꿀 등의 교역에 종사했다. 가장 벌이가 좋은 것은 비단 장사였다. 비단은 북쪽으로, 러시아의 수계를 거슬러 올라가 스칸디나비아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막대한 양의 돈의 원천이었다."(196-9)<br>7. 노예의 길&nbsp;<br>"9세기에 유럽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수입품들의 대금으로 지불된 것은 노예를 팔아 번 돈이었다. 인기 있는 사치품이나 의료 필수품으로 기록에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양념류와 마약은 대규모 인신매매에서 번 돈으로 치렀다. 그리고 노예 장사로 이득을 본 것은 바이킹 루시만이 아니었다. 현재 프랑스 동북부 베르됭의 상인들은 내시들을 팔아 많은 이득을 올렸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이 주요 구매자였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한 유대인 상인들 역시 내시는 물론 〈어린 소녀와 소년들〉의 매매에 깊숙이 관여했다." "노예 교역은 벌이가 좋았다. 그것이 유럽인 이외의 노예들도 동방으로 끌어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무슬림 사업가들도 뛰어들었다. 그들은 동부 이란을 벗어나서 슬라브인들의 땅을 습격했다. 그런 포로들은 거세를 했고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시기의 한 아랍 작가는 슬라브인 쌍둥이를 잡아 그중 한 명을 거세시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형제보다 더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고 썼다."(209-10)<br>"셀주크인들이 노예 병사에서 막후 실력자로 갑자기 떠오른 것은 1055년에 칼리프의 초청으로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내면서부터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왕조 이름의 연원이 된 창시자 셀주크의 아들들 이름이 셀주크인은 본래 기독교였거나 아니면 심지어 유대교도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의 이름은 각기 미카일(미카엘), 이스라일(이스라엘), 무사(모세), 유누스(요나)다. 그들의 성공이 좀 더 천천히 이루어졌다면 세계는 아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 4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1071년 현재 터키의 동부인 말라즈기르트에서 재앙을 만났다. 그곳에서 습격을 받고 굴욕을 당한 것이다. 이 전투는 오늘날에도 터키 국가 탄생의 순간으로 기념되고 있는데, 제국 군대가 포위되어 궤멸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셀주크의 지배자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 황제를 땅바닥에 눕게 하고 그의 목을 발로 밟았다."(226-7)<br>8. 천국으로 가는 길&nbsp;<br>"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이 1차 십자군 기사들에게 함락되었다. 십자군 원정 직전에는 곧 다가올 세상의 종말에 관한 암울한 예측이 나돌았다. 이것이 이제 낙관론으로, 떠들썩한 자신감과 야망으로 바뀌었다. 5년 사이에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환영으로 변했다. 우트르메르Outremer('해외'라는 의미)에 새로운 기독교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예루살렘, 트리폴리, 티로스(수르), 안티오키아는 모두 유럽인들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봉건 서유럽에서 들여온 관습법에 따라 통치되었다. 그것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의 재산권에서부터 세금 징수와 예루살렘 왕의 권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다. 레반트는 서유럽처럼 움직이도록 개편되었다." "바그다드와 카이로에서는 (방관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편이 라이벌인 시아파나 수니파가 통제권을 갖는 것보다 낫다는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으리라."(233-6)<br>"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예루살렘 점령에서 상업적 가능성을 재빨리 발견했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는 심지어 십자군이 성도에 도달하기도 전에 선단을 바다로 내보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게 했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 십자군은 보급이 절실했고, 근거지인 유럽과 연결망을 갖추고자 필사적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의 함대들은 예루살렘의 새 지배자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입지는 십자군이 성공적인 포위전에 나서기 위해 하이파, 야파, 아크레, 트리폴리 등의 해안과 항구를 확보할 필요가 커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협상이 타결되어 막대한 이익을 올릴 가능성이 생겼다." "동부 지중해 지역의 교역 패권을 둘러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이전투구는 광포하고 무자비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베네치아가 확실한 승자로 떠올랐다. 이는 상당 부분 아드리아해에 면한 지리적 위치 덕분이었다. 동쪽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것이 피사나 제노바로 가는 것보다 항해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240-3)<br>9. 지옥으로 가는 길&nbsp;<br>"그들의 평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지만, 몽골인들이 13세기 초 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그 너머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그들이 항상 압제자로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호라즘은 지역 주민들에게 1년치 세금을 선납하도록 명령했다. 임박한 몽골의 공격에 대비해서 사마르칸트 주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고 궁수 부대의 급료를 지불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에게 그런 부담을 주고서는 계속 호의를 얻기가 어려웠다. 이와 대조적으로 몽골인들은 자기네가 점령한 일부 도시에서 기반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사마르칸트를 찾은 한 중국인 도사道士는 중국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그곳에 와 있고 방치되었던 들과 과수원 운영을 돕기 위해 주변 지역과 더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려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야만적인 파괴자라는 몽골인의 이미지는 왜곡된 것이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파괴와 약탈을 강조해 오도하는 후대 역사서들의 유산을 대변하는 것이었다."(273-4)<br>10. 죽음과 파괴의 길&nbsp;<br>"베네치아와 제노바가 호황을 누린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고객의 욕구, 그리고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 그곳으로 물건을 사러 온 상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보여준 재능과 선견지명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흥성한 배후에는 몽골인들이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부린 세제상의 재주와 규제가 있었다. 여러 자료들은 흑해 항구들을 통과하는 수출품에 대한 세금이 전체 상품 가치의 3~5퍼센트를 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하는 상품들에서 뜯어내는 통행세 및 부담금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것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의 세금 부담은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 심지어 30퍼센트에 이르기도 했다." "세심한 가격 설정과 세금을 낮게 유지하는 정책은 몽골제국 관료 집단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폭력과 마구잡이 파괴의 이미지에 가려진 점이다. 사실 몽골의 성공은 무분별한 만행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타협하고 협력한 덕분에 이룬 것이다."(299-300)<br>"페스트로 인해 촉발된 변화는 북서 유럽의 장기적인 번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유럽의 각 지역 사이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까지는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체제의 유연성과 경쟁을 긍정하는 태도,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투철한 직업의식이 필요하다는 북쪽 사람들의 자각 등이 근대 초 유럽 경제의 변혁의 바탕이 되었다. 현대의 연구들을 통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18세기 산업혁명의 뿌리는 페스트 이후 세계의 근면 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었다.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포부가 커지고 쓸 수 있는 돈도 많아졌다." "15세기의 프라 안젤리코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나 그 이후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이 유럽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덕분이었다. 하나는 아시아와의 교류로 다양한 색을 내는 물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 많아 예술가들을 후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24-5)<br>11. 황금의 길&nbsp;<br>"동부 대서양과 아프리카 해안을 내려가는 탐험으로 카나리아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 같은 여러 도서군島嶼群이 발견되었다. 이 섬들은 추가적인 발견의 가능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돈이 벌리는 오아시스가 되었다. 기후가 좋고 땅이 비옥해서 설탕을 만드는 작물이 자라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설탕은 곧 잉글랜드의 브리스톨이나 플랑드르뿐만 아니라 멀리 흑해 지역에까지 수출되었다. 콜럼버스가 출항할 무렵에 마데이라에서만 매년 1500톤가량의 설탕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문을 열고 서유럽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군사력이나 외교술도, 교황의 면허도, 영토 점령을 둘러싼 왕실 간의 경쟁도 아니었다. 진정한 약진은 모험기업의 배 선장들이 식용유와 가죽을 거래하고 금을 살 기회를 찾는 것보다 더 쉽고 나은 기회를 깨달으면서 이루어졌다. 유럽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사실로 입증되었듯이, 가장 큰 돈벌이는 인신매매였다."(343-6)<br>"한편 돈이 끝없이 대서양을 건너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새 제국의 지배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정치에서도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야망도 재조정되었다. 1519년, 카를로스는 재정적 영향력을 동원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하기로 단단히 결심한 지배자에게 패하고 압도당하고 밀려났음을 깨달았다."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에서 급속하게 팽창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부와 힘과 기회가 변함에 따라 에스파냐는 지중해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지방 변두리에서 세계의 강국으로 변모했다. 한 에스파냐 역사가에게 이것은 〈천지창조 이래 가장 큰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예수의 강생降生과 창조주 자신의 죽음을 제외하고〉 말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많은 금과 은이 매장된 페루 지방〉을 보여준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다."(358-60)<br>"새로운 시대, 진정한 '황금시대'의 도래는 로마의 거리에서 통곡 하게 하고 가슴 치게 했던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잊게 해주었다. 이제 할 일은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옛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종말은 입양된 새 상속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는 아테네나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로마의 역사에서도 초기부터 멸망하는 날까지 대체로 주변부였다. 그러다가 예술가, 작가, 건축가들이 고대로부터 주제와 발상과 문장을 빌려다가 이야기를 꾸미고 과거에서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그럴싸하게 만들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실처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표준이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시기를 르네상스라 불렀지만 이는 결코 재탄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네상스Naissance('탄생')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364)<br>12. 은의 길&nbsp;<br>"서아시아에서 격변의 시기가 지나고 1517년에 오스만이 이집트의 지배권을 장악한 뒤 지중해 동쪽의 지배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유럽을 위협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오스만은 1538년에 인도 서부 디우에 있는 포르투갈 항구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무렵에는 향신료 교역에서 얻는 이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에서 발을 빼서 다른 아시아 상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품목이 무명과 비단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말 무렵에 뚜렷해지는데, 이 시기에는 유럽으로 선적되는 직물의 양이 계속 늘고 있었다. 당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이것이 향신료 교역에 관여하는 포르투갈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의 결과이자 국왕의 졸렬한 결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은 수입품에 지나치게 높은 세금을 물렸으며, 유럽에 비효율적인 유통망을 만들고 있었다. 오스만의 경쟁력은 포르투갈을 (그리고 주변부를) 극심하게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381-3)<br>"유럽과 서아시아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려온 발견 소식들과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열린 해로로 인해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가장 휘황찬란한 곳은 인도였다. 1494년 테무르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페르가나 분지의 땅을 물려받았고, 이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남쪽으로 이동한 시점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새 영토는 오래지 않아 강대한 제국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교역로가 열리고 유럽이 적극적으로 구매에 나서면서 갑작스럽게 경화硬貨가 인도로 밀려들어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말을 사는 데 썼다." "말 시장에 접근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관문 도시들은 호황을 누렸다.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은 델리였다. 그곳은 힌두쿠시 산맥에 가까운 위치 덕분에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 도시의 상업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지배자의 지위도 높아졌다. 곧 이 지역에 직물산업이 번성하면서 이곳 물건들은 아시아 전역과 그 너머에까지 명성을 얻었다."(387-90)<br>"1571년 에스파냐인들의 마닐라 식민지 건설은 세계 무역의 흐름을 바꾸었다. 우선 그들은 처음 대서양을 건넜을 때에 비해 현지 주민들에게 피해를 덜 주는 방식의 식민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 정착지는 본래 향신료를 구매하는 기지로 건설되었지만, 곧 거대 도시로 성장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다. 이제 상품은 먼저 유럽을 거쳐가지 않고 태평양을 넘어 운송되었으며, 그 상품 대금으로 치를 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닐라를 통하는 경로가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스만제국의 경기가 위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국내의 재정 압박과 합스부르크 및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원정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부은 탓도 있었지만, 수천 킬로미터 밖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상품 교역을 위한 새로운 교차로가 탄생한 것도 오스만제국의 수입 감소에 한몫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의 송금이 줄기 시작하면서 에스파냐의 일부 지역에서도 경고등이 켜졌다."(394-5)<br>13. 북유럽으로 가는 길&nbsp;<br>"잉글랜드는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가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새 교역로에 도전하면서 오스만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 1571년 코린토스 만에 있는 레판토 앞바다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신성동맹'이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자 유럽 전역에서 환호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시, 음악, 미술과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조용했다." "두 나라 간의 공식 무역 협정에서 오스만 제국에 있는 잉글랜드 상인들에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후한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오스만과 무슬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잉글랜드의 주류 문화 속으로 확산되었다. 《오셀로》에서는 베네치아군에 복무하는 '무어인'인 (따라서 아마도 무슬림이었을) 주인공의 비극적인 고결성이 그의 주변에 있는 기독교도들의 이중잣대, 위선, 속임수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영국 문학에서 공통적인 문화적 준거로서 페르시아가 등장했다."(404-7)<br>"잉글랜드의 위선적인 태도는 16세기 초의 거대한 변화가 만들어낸 엄청난 기회를 이용하는 데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종교 분쟁과 운 나쁜 타이밍으로 인해 이 나라는 세계 강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로부터, 그리고 동방에서 홍해와 육상 교통로를 통해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교역으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이득을 얻기에는 불리한 위치에 서고 말았다. 아무리 에스파냐를 비난하더라도 잉글랜드가 쓰레기 더미나 뒤져 약간의 부스러기만 챙겨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잉글랜드는 〈이 시기에 용감한 젊은이들이 우글우글〉했으며,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으로 경제 침체에 빠져 있었다고 리처드 해클루트는 썼다.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이 왕국〉을 세계 〈모든 바다의 지배자〉로 만들 수 있는 해군을 창설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물었다. 어쨌든 꿈을 꾸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409-10)<br>"아메리카에서 돈이 흘러들어오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유럽 전역에서 이른바 물가혁명Price Revolution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자연히 소비자들이 한정된 양의 상품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물가가 더욱 치솟았다.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의 '발견' 직후인 16세기 동안에 곡물 가격이 다섯 배로 뛰었다. 사태는 결국 에스파냐 영토의 일부였던 저지대 국가의 지방과 도시들에서 터지고 말았다. 이곳 사람들은 에스파냐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화가 폭발했다." "오래지 않아 개별 주와 도시들은 가혹하게 높은 수준의 세금을 매기는 데 깜짝 놀라 울부짖었다. 여기에 더해 에스파냐는 신앙 문제에 야만스러울 정도로 폭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경제적·종교적 박해가 복합되고 강력해져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1581년 위트레흐트 동맹이 탄생했다. 이 독립선언에 의해 '7개 주 동맹'이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네덜란드 공화국의 탄생을 알렸다."(413-4)<br>14. 제국으로 가는 길&nbsp;<br>"영국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드러난 으뜸패는 지리적 이점이었다. 잉글랜드(1707년 스코틀랜드와 합병한 이후에는 영국)는 나라를 경쟁자들로부터 지켜주는 천연 방벽을 두르고 있었다. 바로 바다였다. 이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정부 지출을 생각하면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방어할 육상 국경이 없기 때문에 영국의 군비 지출은 대륙 경쟁자들의 지출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영국으로서는 결코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전쟁이라는 유럽의 전염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륙의 나라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서로 상대를 바꾸어가며 티격태격 싸움을 벌였다. 영국인들은 현명하게 개입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지만 입장이 불리해질 경우에는 관여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또한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445-6)<br>"표면 아래서 강력한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가 뻣뻣해지고 있었다. 동방을 이국적인 초목과 보물로 가득한 놀라운 나라로 보던 태도를 바꾸어, 현지 주민들을 아메리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대한 태도는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인한 흥분에서 노골적인 수탈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런 관점은 본래 무굴제국의 지방장관을 가리키던 말인 나와브nawab가 아시아에서 엄청나게 돈을 번 동인도회사 관리를 지칭하는 말로 변질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마치 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거친 동부'였다. 100년 뒤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연출되는 '거친 서부'라는 비슷한 장면의 서곡이었다." "이 거대한 재산에 접근하는 열쇠는 동인도회사가 상품을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운송하는 무역업체에서 점령 세력으로 변모한 데 있었다. 마약 거래와 협잡질로 이동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451-3)<br>"미국 독립전쟁은 영국에서, 단지 상업적으로 수익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있는 교역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지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관한 깊은 반성을 촉발했다. 벵골을 사실상 정복한 것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영국이 자기네 나라에서 이주해나간 정착민들을 지원하는 나라에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측면에서다. 그리고 잘 돌아가고 오래 갈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도 알아내야 함을 인식했다. 하나의 제국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 제국의 탄생은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인도의 대부분이 영국의 손에 넘어가자 육상 교역로가 생명력을 잃었다. 구매력과 소비력, 자산과 관심이 결정적으로 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군사 기술과 전술(특히 화력 및 중포와 관련한)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병대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 또한 수천 년 동안 아시아를 이리저리 연결해주던 길을 따라 운송되던 물량의 감소를 촉진했다. 중앙아시아는 그 이전의 남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457)<br>15. 위기로 가는 길&nbsp;<br>"19세기를 보통 영국 제국의 절정기로 보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징표들이 있다. 영국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필사적인 지연 작전을 펼쳤고, 종종 전략적·군사적·외교적으로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영토들을 점령하고 유지하려 노력하는 현실은 현지 및 세계의 경쟁자들과 벌이는 위험한 벼랑 끝 게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판돈은 점점 더 커졌다. 1914년이 되면 판돈은 더욱 커져 유럽에서의 전쟁 결과에 제국의 운명을 걸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세계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 그림자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영국의 필사적인 시도였다. 러시아가 영국에 가하는 위협은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권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을 앞둔 19세기에 암처럼 자랐다. 러시아가 성장하고 팽창하면서 영국과 이익을 다투게 될 뿐만 아니라 영국을 압도할 만한 위협 세력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런던에서는 더욱 자주, 더욱 크게 경종이 울려퍼졌다."(461-2)<br>"크림 반도와 아조프해에서 벌어지고 다른 곳들에서 잠깐 비쳤던 전쟁(1853. 10~1856. 3)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었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소수 지배층의 요구에 따른 것이고 대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는 크림 전쟁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전쟁으로 인해 심화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와 영국 병사들의 희생 속에 러시아의 코피가 터진 뒤 마침내 파리에서 협상 조건이 논의되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사르데냐 왕국 총리 카밀로 벤소였다. 그가 이 자리에 간 것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프랑스를 돕기 위해 흑해로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에 있는 순간을 약삭빠르게 이용해서 이탈리아의 통일과 자주를 요구했다. 이런 구호는 동맹국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본국의 지지자들을 자극했다."(476-8)<br>"1856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부과한 조항은 러시아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협력해서 자기네 경쟁자의 목을 올가미로 묶었다.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어렵사리 얻은 이득을 빼앗겼고, 흑해의 군사적 접근을 박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곳은 중립 지대로 선포되어 모든 군함이 통제되었다. 해안 지대도 비무장 지역으로 만들어, 요새를 만들거나 병기를 보관할 수 없었다. 그 목적은 러시아에 굴욕감을 주고 야망을 꺾어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는 훗날의 베르사유 조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 조약을 통한 해결이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합의 내용이 매우 가혹하고 구속적이어서 러시아가 즉각 그 족쇄에서 빠져나오려 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것은 변화와 개혁의 시대를 재촉했다." "차르의 농노제 폐지는 1850년대의 심각한 금융위기가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이를 촉진한 것은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와 그 이후의 치욕적인 합의 내용이었다."(478-9)<br>16. 전쟁으로 가는 길&nbsp;<br>"19세기 말에 러시아의 자신감은 (심지어 완고함은) 빠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조약의 흑해 관련 구절을 백지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유럽 각국 주재 공관들은 차례차례 조약을 개정하고 특히 민감한 구절을 삭제하는 일에 대한 지지를 조용히 호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극심한 불안감은 흑해에 대한 우려보다도 러시아가 갈수록 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군사행동은 비현실적인 가능성이었고 쓸 수 있는 카드도 별로 없어, 영국은 받아들이는 수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는 원하던 것을 얻었다. 다시 말해 해안 지역에서 자기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크림 반도의 항구나 흑해 북안의 다른 지역 어디에든 군함을 배치할 자유를 얻었다. 한 영국인 목격자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기쁨 속에 이를 맞았고, 러시아의 〈승리〉로 해석되었다."(485-6)<br>"불안은 커져갔다. 제국이 일을 너무 벌려놓고 있다는 통렬한 자각이 나오는 시기였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대치하고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이 해외에서 패배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러시아의 진격에 대한 공포를 더욱 부채질했다. 1901년 말 영국 내각에 제출된 파멸을 예고하는 한 보고서는 철로가 오렌부르크에서 타슈켄트까지 연결되면 러시아는 20만 명의 병사를 중앙아시아에 보낼 수 있고, 그 수의 절반 이상은 불안하게도 인도 국경 가까이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영국의 선택지가 적다는 점이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린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의 폭력적인 장면과 러일전쟁에서 차르의 해군이 참패한 일은 러시아가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이제는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504-5)<br>"타이밍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이웃이자 앙숙인 독일의 급격한 경제 성장에 갈수록 동요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 공업이 1870년 이후 20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따라서 러시아의 관심을 그 서쪽 변경으로 돌리려는 영국의 바람은 프랑스에게도 달콤한 음악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첫 번째 재조정 국면은 1904년에 일어났다. 1907년에는 동맹국의 범위가 확정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중심을 가로질러 러시아와 공식적인 협약을 맺었다." "영국 관리들은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서 자기네가 결국 끔찍한 사태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를 최악으로 몰아갈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바로 러시아와 독일의 동맹이었다. 이런 공포는 한동안 영국의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사실 1907년 영국-러시아 동맹의 목적 중 하나는 아시아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었다."(505-6, 509)<br>17. 석유의 길&nbsp;<br>"석유 발견으로 1901년에 샤가 서명한 문서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수십억 달러짜리 사업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혼란의 길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협정 조항들로 페르시아 국가의 보물에 대한 통제권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뿌리 깊고도 지긋지긋한 증오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민족주의를 촉발했으며, 마침내 서방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과 거부감을 낳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오늘날의 이슬람 근본주의다. 석유 통제권을 차지하려는 욕구는 장래에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녹스 다시가 채굴권을 따낸 것은 놀라운 사업 감각이자 불가능에 도전하여 이뤄낸 성공이었다. 이 사건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발견'한 일과 맞먹는다. 당시에도 막대한 보물과 재산들이 콩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수탈되어 유럽으로 보내졌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다."(545)<br>"1917년 이후 영국의 일부 정책 담당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다. 동부 페르시아에서 근무해서 이 나라를 잘 알고 있던 노련한 행정가 퍼시 콕스는 1917년에 영국이 러시아, 프랑스, 일본, 독일과 오스만까지 영구히 배제하고 페르시아만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17년 러시아가 붕괴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잡은 직후 독일과 평화에 합의한 것이 유럽에서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밝은 전망을 가져다주었다. 벨푸어 장관은 1918년 여름에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이렇게 썼다. 〈[전제 체제하의 러시아는] 그 이웃에게 위협 요소였고, 그 이웃들 가운데서도 바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내부에서 붕괴한 것은 동방에서의 영국의 입지를 생각하면 좋은 소식이었다. 수에즈 운하에서 인도까지 뻗어 있는 지역의 장악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559)<br>18. 화해로 가는 길&nbsp;<br>"'벨푸어 선언'으로 대표되는, 유럽 유대인들의 자치구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관심을 끌었지만,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주시한 것은 그곳이 지중해로 연결되는 석유 송유관의 종점이기 때문이었다. 입안자들은 나중에 이것이 수천 킬로미터의 운송 경로를 줄이고 영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전으로 드러나게 될 곳의 석유 생산에 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수심이 깊고 좋은 항구가 있어 석유를 영국 유조선에 싣기에 이상적인 곳이 하이파를 장악하고, 송유관이 프랑스가 통제하는 북쪽의 시리아가 아니라 이 항구로 연결되도록 해야 했다. 하이파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석유를 수송해오는 송유관의 종점으로 완벽한 곳이라는 판단은 옳았다. 1940년까지 400만 톤 이상의 석유가 전쟁 뒤에 건설된 송유관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수송되었다. 《타임》지가 표현했듯이 그것은 〈대영제국의 경동맥〉이었다."(567)<br>"문제는 이 새로운 제국의 시대가 거의 곧바로, 세계는 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인식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영국이 석유 및 송유관 네트워크 통제권을 주장하려 한 것은 모두 좋았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국의 국가 부채가 치솟자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에 관한 고통스럽고 힘든 논의가 이루어졌다. 엄청난 비용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라고 커즌은 썼다." "야망과 능력 사이의 이 부조화는 참화로 가는 길이었고, 그 곤경은 고위 외교관들의 고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런던의 정책 담당자들은 현지 주민들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영국의 전략적·경제적 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1920년대에 영국은 이라크,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들을 세우고 끌어내리는 데 직접 책임이 있거나 배후에 있었다. 이는 불가피하게 지긋지긋한 문제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약해졌다."(580-1)<br>19. 밀의 길&nbsp;<br>"1939년 봄,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불가침 협정에 조인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몇 달 동안은 독일로 상품과 물자가 흘러들어왔지만, 언제나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협상은 팽팽했다. 특히 수요가 많았던 밀과 석유 등 두 가지 자원의 경우에는 더했다. 스탈린은 이 문제를 직접 감독해서 독일이 요구한 80만 톤의 석유를 보낼 것인지 그 일부만 보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보낼 것인지를 결정했다. 일일이 화물 선적을 논의하는 것은 긴장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독일 전략가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상시적인 불안의 근원이었다. 당연히 독일 외무부는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고 있었고, 소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쏟아냈다. 지도부가 바뀌거나, 그들이 고집을 부리거나, 아니면 단순한 거래상의 이견이 발생하거나 등의 이유로 독일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유럽에서 계속 놀라운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가운데 제기된 커다란 위협이었다."(611)<br>"독일은 갈수록 식량과 물자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소련 곡물을 들여와도 만성적인 공급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예컨대 1941년 2월에 독일 라디오는 영국의 교역 봉쇄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농업 전문가 헤르베르트 바케의 제안은 급진적이었다. 소련은 광대해서 지리와 기후가 다양하지만, 대략적인 선으로 나눌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 캅카스 산지를 포괄하는 남부는 들판과 자원이 있는 '잉여' 구역이었다. 중북부 러시아와 벨라루사, 발트해 연안 지역 등의 북부는 '부족' 구역이었다. 바케가 밝혔듯이 이 선 한쪽에 있는 사람들은 곡물을 생산했고,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하기만 했다. 독일의 식량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잉여구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무시하면 되었다. '잉여' 구역을 점령하여 그 산물을 독일이 차지해야 했다. '부족' 구역은 잘라내게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의 생존은 관심 밖이었다."(616-7)<br>20. 대량학살로 가는 길&nbsp;<br>"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은 독일의 자원 기반을 확장하는 일에서 두 나라를 본보기로 삼았다. 첫째는 대영제국이었다. 독일은 동방의 드넓은 새 영토에 발자국을 찍게 된다. 마치 영국이 인도아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 개척에 나선 독일의 소수 주민들이 소련을 지배하게 된다. 마치 소수 영국인들이 라지Raj('통치'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통치했던 것처럼, 유럽 문명은 정말로 열등한 문화에 승리를 거둘 것이다." "히틀러가 자주 언급한 또 다른 모델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유사성을 보았고 여기에 자극받았다. 바로 미국이었다. 독일은 유럽인 정착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곳 원주민들에게 했던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히틀러는 새로 임명된 동방점령지부 장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말했다. 현지 주민들은 몰아내거나 아니면 몰살해야 했다. 볼가 강은 독일의 미시시피 강이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문명 세계와 그 너머의 무질서 사이의 경계선이었다."(626-7)<br>"스탈린은 이제 영국 및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동맹자가 되었다. 문제는 무기와 물자를 어떻게 소련에 공급하느냐였다. 북극해에 있는 항구들로 실어다 주는 데는 수송의 어려움이 있었고, 한겨울에는 위험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이외에 동방에 적당한 항구가 없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 무엇보다 태평양의 부동항들을 일본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법은 분명했다. 바로 이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지의 독일 요원들과 동조자들이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막을 수 있고, 연합군이 잃으면 곤란한 천연자원을 보호할 수 있으며, 베어마흐트(독일군)의 동방 진군을 저지하고 중단시키는 일에 함께 노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연합군의 전쟁 목표에도 부합했지만, 영국과 소련 각자에게 장기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이란을 점령하면 두 나라는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자원, 전략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636-7)<br>21. 냉전의 길&nbsp;<br>"아시아에서 일어난 군사적 압력의 해일은 동방에서 여러 차례의 '됭케르크 철수'를 불러왔다. 영국의 황금시대가 끝났음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마구잡이 퇴각의 사례들이었다." "영국의 어설픈 모습은 영국의 보호령 트란스요르단의 지배자 압둘라 1세와의 거래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압둘라는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비밀 협정을 통해 1946년 독립 이후 자신의 정권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는 이 약속을 이용하여 영국이 철수한 뒤 자신의 영토를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한계는 있었지만 영국의 승인을 받은 셈이었다. 어떠한 조언을 했든, 영국이 발을 빼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부분을 덮친 혼란은 유럽 제국의 세력의 해로운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영국이 고개를 끄덕이고 팔꿈치로 찌르고 눈짓을 해서 실행한 정책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치안 세력이 바뀌면서 힘의 공백이 생겼음을 드러냈다."(666, 669)<br>"모사데그는 서아시아에서 서방의 영향을 그저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제거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모사데그는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제시한 사람이었고, 그 새로운 시대는 서방 세력이 아시아의 중심부에서 물러나는 시대였다. 그가 쫓겨난 정황에 대해서는 정보기관들이 수십 년 동안 숨겨왔지만, 모사데그 제거가 서방 강국들이 자기네 목적을 위해 조직한 일이나는 데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모사데그는 이 지역에서 수많은 계승자들을 낳은 정신적 아버지였다. 아야톨라 루홀라흐 호메이니,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탈레반 등 다양한 부류의 방법과 목표와 야망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 모두는 서방이 진실하지 않고 해로우며, 현지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핵심 원리를 통해 하나가 되고 있다."(689-90)<br>22. 미국의 실크로드&nbsp;<br>"석유 자원 때문에 이란이 서방에 특히 중요한 곳이 되었지만, 그 이웃 나라들 역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소련의 남쪽 변경에 있다는 위치 때문이었다. 그 결과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지원을 받는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나라들이 띠를 이루었다. 소박한 덜레스 국무부 장관이 '북단Northern Tier'이라 명명한 이 지역의 나라들은 세 가지 목표에 이바지했다. 첫째로는 소련의 이익 확대를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고, 둘째는 자원이 풍부한 페르시아만 지역을 보호하고 석유를 서방으로 수송하여 유럽의 재건을 촉진하고 동시에 지역 안정에 중요한 수입을 제공했으며, 셋째로 소련 진영과의 긴장이 공개적 충돌로 이어질 경우를 대비한 정보 수집처와 군사기지를 제공했다." "1955년 서쪽의 터키에서 이라크와 이란을 거쳐 동쪽의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의 나라들이 단일 협정(바그다드 조약)을 결합했다. 서로 간에, 그리고 영국과 맺었던 복잡한 동맹관계를 대체한 것이다."(698-9)<br>"현지 정권들이 호의적으로 행동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꼼꼼한 고려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955년 말 3년 전 CIA의 지원하에 파루크 국왕을 쫓아낸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집트의 혁명가 가말 압델 나세르가 역시 소련에 무기를 요청하며 접근했다. 깜짝 놀란 미국은 영국 및 세계은행과 함께 아스완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돈을 대주겠다고 제안했다." "나세르는 바그다드 조약에 대해 짜증을 내왔다. 그는 이것이 아랍 통일의 장애물이며 아시아의 중심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서방의 도구라고 보았다. 돈과 지원을 약속받았다면 그는 아마도 누그러졌을 것이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금 지원 약속이 철회되었다. 댐을 건설하면 이집트의 면화 생산이 증가하여 가격이 떨어지고 그것이 미국 농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미국 의회 의원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이기주의는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699-701)<br>"자유 세계와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수호하고자 하는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목표가 아주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다. 미국의 입지는 비민주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고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약한 방법을 동원하는 독재자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의 서방 정책 담당자들은 현장의 실정을 무시하고 자기네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는 쪽을 택했다. 미국의 많은 관측통에게 이란은 완전한 승리로 보였다. 〈서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견실한 친구들 가운데 하나〉인 이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1968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란의 국민총샌산(GNP)이 급속도로 증가해 최근의 〈주목할 만한 성공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4년 뒤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더 단호한 어조였다." "이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번영하는 나라〉,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는 길을 착착 밟아가고 있다고 보고서는 확신에 차서 예측했다."(712, 717-8)<br>23. 초강대국 대결의 길&nbsp;<br>"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지역, 그리고 인도양 지역 사람들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두 초강대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는 관행을 가리키는 말이 생겼다. '불편不偏'이라는 뜻의 '비타라피bi-tarafi'가 외교정책의 원칙이 되어서, 소련이 주는 것과 미국이 주는 것이 비슷해지도록 균형을 추구했다. 소련과 미국은 각기 아프가니스탄의 군 장교들을 공식 교육 프로그램에 초청하여 미래의 지도자들과 연줄을 만들고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양쪽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교들은 고국에 돌아온 뒤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재능이 인정된 장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그들이 선전하는 낙원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해외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 대다수의 반응은 새로운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전도하기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자주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727-8)<br>"사실 이란이 핵 원료를 확보한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정책을 추진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구상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이 〈국제원자력 풀〉에 참여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결국 우방국 정부들은 4만 킬로그램의 우라늄-235를 비군사적 연구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0년 동안 핵 기술과 부품과 원료를 공유하는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다. 소련 진영에 맞서 협력과 지지를 해주는 데 대한 직접적인 장려책이었다." "1976년 포드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 원자로 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이 포함된 미국산 시스템을 구매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재가했다. 이란은 이에 따라 '핵연료 순환'의 전 과정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 리처드 체니(딕 체니)는 주저 없이 이 판매를 승인했다. 1970년대에 그는 이란의 동기가 무엇이지 〈알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741-3)<br>24. 파멸로 가는 길&nbsp;<br>"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은 이 지역 전체에서 미국이 세운 엉성한 구상을 허물어뜨렸다. 그곳에는 한동안 불안정을 가리키는 징표들이 있었다. 샤 정권의 부패는 경제 침체와 정치적 무기력, 그리고 경찰의 만행과 함께 고약한 조합을 이루었다." "샤가 몰락하면서 이례적인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1980년 말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장래는 불확실했고, 자기네 지도자들의 선택과 외부 세력의 간섭에 달려 있었다. 지역 전체는 고사하고 각 나라에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추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에게는 모든 일에 다 관여하며 그럭저럭 넘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반미 정서의 씨앗이 20세기 이전에 뿌려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처절한 증오로 자라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에 내렸던 미국의 정책 결정은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놓인 이 지역 전체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755, 777-8)<br>"동력은 소련 쪽에 있는 듯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소련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주요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희망을 걸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정책 담당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취해야 할 조치가 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담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라크가 이란과의 전쟁에서 밀려 붕괴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는 전략적 재난〉이 될 터였다. 이는 페르시아만 일대와 서아시아 전체에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제 석유 시장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새로운 정책이 떠올랐다. 그곳은 미국이 아시아의 중심에서 진행되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었다. 사담을 돕는 것은 계속해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이란과 소련 두 나라 모두의 전진을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781-2)<br>"사담은 여전히 미국과 그들의 목적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며, 이런 모든 조치들이 취해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83년 말 레이건 대통령이 도널드 럼스펠드 특사를 바그다드에 보냈을 때 그의 명시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사담 후세인과 〈대화를 시작하고 개인적인 친밀감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럼스펠드의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는 이라크의 운명에 중대한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이를 서방의 전략적 패배로 생각할 것입니다.〉 럼스펠드의 행보는 미국과 이라크 양쪽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그것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대단한 진전〉이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호메이니가 서아시아 전역에 시아파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일에 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라크와의 협력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미국은 사담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눈감아줄 용의가 있었다. 미국에게 이라크는 국제법의 원칙보다도 더 중요했다."(783)<br>25. 비극으로 가는 길&nbsp;<br>"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 몇 시간 만에 빈 라덴을 처리하기 위한 전략들이 만들어졌다. 9월 13일 아침에 나온 실행 계획은 이란과 관계를 맺고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 당국과 접촉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모두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거나 가까운 나라였다. 그 후 일주일 이내에 이들의 기운을 〈다시 북돋우〉기 위한 계획이 만들어졌다. 곧 있을 탈레반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9·11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은 실크로드의 나라들을 줄 세우는 것이었다." "빈 라덴을 찾아내고 알카에다의 역량을 파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범인 추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관심은 아시아의 중심부를 결정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통제하는 문제로 옮겨갔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 지역의 나라들을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미국의 이익과 안전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말이다."(822-4)<br>"9·11 공격은 미국이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북한과 함께 〈악의 축을 이루어 무장을 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악의 축을 해체하는 것이 긴요했다." "통제권을 장악하겠다는 결의는 대단했다. 안정을 해치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전략적 사고의 중심에 있었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어날 수 있는지,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장기적인 전망보다 더 중요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물리치는 것이 것이 핵심이었다. 그 뒤의 상황은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근시안적 태도는 이라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일에만 집중했을 뿐 이 나라의 장래 모습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었다."(825-6)<br>맺음말 : 새로운 실크로드<br>"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이 어설프게 개입하고 기타 지역에서 압력을 행사하는 일 이외에 진행되는 것이 더 있다. 동방에서 서방까지 실크로드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혼란과 폭력, 종교적 근본주의, 러시아와 그 이웃들 사이의 충돌, 중국이 서부 지방에서 벌이는 극단주의와의 사투를 보면 혼란과 동요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한때 지적·문화적·경제적 풍광을 지배했으며 이제 다시 떠오르고 있는 지역의 산고產苦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에 매장된 천연자원이다."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여기에 새로운 종류의 대동맥들이 추가되었다. 기존 파이프라인과 예정된 파이프라인이 유럽을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석유 및 가스 매장지와 연결한다. 이에 따라 자원 수출국뿐만 아니라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나라의 정치적·경제적·전략적 중요성도 덩달아 증대된다. 실크로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842, 85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62/5/cover150/s66283409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962055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보수주의 / 에드먼드 포셋 - [보수주의 - 전통을 위한 싸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76236</link><pubDate>Mon, 06 Jul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762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712532054&TPaperId=173762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18/9/coveroff/e7125320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712532054&TPaperId=173762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보수주의 - 전통을 위한 싸움</a><br/>에드먼드 포셋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03월<br/></td></tr></table><br/>머리말<br>자유민주주의가 번창하는 것은 차치하고 생존이라도 하려면 우파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받아들이는 보수주의자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적으로 태어났고, 민주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버린 적이 없다. 근대 정치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협력함으로써 어려움을 견뎌냈으며, 곧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기는 법을 배웠다. 1945년 이후 서유럽과 미국에서 번창한 것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는 우파의 그런 역사적 타협을 통해 자라났다. 지금처럼 우파가 지지하기를 주저하거나 거부할 때 자유민주주의의 건전성은 위태로워진다. 나는 『자유주의: 어느 사상의 일생』에서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이며 그 모든 결함과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이 왜 중요한지 밝힘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 보여주려 했다. 『보수주의: 전통을 위한 싸움』은 그 이야기의 다른 반쪽이다. 책은 과거에 비춰보면서 현재 우파가 자신과 벌이는 싸움을 이야기한다. 8)<br>1부 보수주의의 선구자들<br>1장 혁명의 비판자들<br>조제프 드 메스트르(1753~1821)와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각자 비상한 수사의 힘과 보기 드문 표현의 재능을 지녔다. 메스트르는 지독하게 흑백 논리를 폈다. 대비를 극단으로 몰아갔고 좋은 논점은 부서질 때까지 확장했다. “모든 정부는 전제적이다. 선택은 복종하거나 반역하는 것뿐이다.” “유일하게 영속하는 제도는 종교적인 것이다.” 버크의 글들은 흔히 연설로 시작되고 분노가 덜하며 잉글랜드인의 취향에 더 잘 맞았다. 버크의 비판 대상―종교적 열광, 정치적 지성주의, 법적 성문화―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편하게 받아들여지고 참견하는 질문자들은 의심을 살 만한 것들이었다. 두 사람 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유는 서로 달랐다. 메스트르는 갱생하지 않는 인간을 암울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취했다. 버크는 사람들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규칙을 지킬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규칙을 만들 역량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15-7)<br>사회의 규칙들이 메스트르가 주장한 것처럼 신성한 원천에서 나왔든, 아니면 버크가 주장한 것처럼 관습에서 비롯됐든 그 기원은 지적인 물음에 닫혀 있었다. 메스트르에게 신성한 섭리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버크에게 관습의 뿌리는 모호한 것이었다. 섭리나 관습을 근거로 논쟁할 수도 없고, 그것들로부터 생성된 규칙들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버크는 “오래된 견해와 삶의 규칙들이 없다면 우리를 인도할 나침반도 없을 테고 우리는 어느 항구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썼다. 정치적 지성주의자들은 시도는 해볼 수 있어도 그런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질서를 위해서는 신의 섭리에만 의존할 수도 없고 관습에만 기댈 수도 없었다. 메스트르와 버크 둘 다 확립된 교회가 인도하고 유지하는 공통의 신앙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잘못 이해된 자유는 도덕적으로는 당혹스러움을 낳고 정치적으로는 혁명과 붕괴, 반혁명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17)<br>버크는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가정이라는 틀에서 뛰쳐나가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을 소리 높여 비난했다. 버크의 그런 면은 또한 결국 자유주의적인 다양성에 적응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버크는 통합된 사회가 공유하는 관습과 공통의 신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그런 것들이 없으면 논쟁은 지적 전쟁에 빠져들 위험이 있었다. 그와 달리 메스트르는 정치에서 권위와 복종을 원했다. 그의 반이성주의 유산은 권위주의적이고 비자유주의적인 보수주의에 전해졌다. 그 유산은 샤를 모라스와 조르주 소렐, 카를 슈미트, 그리고 훗날 우파 포퓰리스트들에게 이르렀다. 이들이 각자 호소한 권위는 다양했다. 메스트르는 교황, 모라스는 프랑스의 왕가, 소렐은 불만을 품은 노동계급, 슈미트는 일시적인 독재자, 오늘날의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대중”의 권위에 호소했다. 그 대중은 포퓰리스트들이 싫어하는 견해를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포퓰리스트들이 대체하려는, 같은 배경의 엘리트층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18)<br>버크주의는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의 마음도 끌었다. 일반적으로 버크는 건강한 정치란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다양하며 갈등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에는 당파와 논쟁이 필요했다. 자유주의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나아가 주권적인 힘은 필요한 것이지만 포획될 수 있었다.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제도는 버크의 표현으로는 어떤 집단이나 이해관계자도 “완전한 주인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정해야 했다. “완전한 주인”을 피한다는 사고는 보수주의 이전 제임스 매디슨의 미국 헌법에 관한 생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자유주의적인 프랑수아 기조도 그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주권은 어떤 이해관계자나 당파의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가운데 행사돼야 하며 최종적으로 도덕과 법으로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바로 그런 버크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덜 자유주의적이고 반세계주의적인 버크에게 더 공감했다. 26)<br>우파는 정치에서 지성주의를 포기했을지 몰라도 좌파 지식인들과 싸울 수 있는 자체 두뇌가 필요했다. 일찍이 그런 두뇌의 두드러진 본보기가 된 이는 프리드리히 폰 겐츠(1764~1832)였다. 겐츠에게 정치에 관해 잘 추론한다는 것은 혁명과 나폴레옹이 뒤흔든 유럽의 요동치는 현 상태에서 국가이성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숙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훗날의 보수적 현실주의자들에게 그의 질문은 일반화됐다. 어떤 격동의 현 상태에 있든 그들 역시 이렇게 물어야 했다. “지금 여기서 국가이성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유럽의 총리들에게 봉사하는 정치적 지식인으로서 겐츠의 첫 번째 관심사는 권력이 어떻게 행사돼야 하는가에 관해 숙고하는 것보다 그것이 어떻게 행사됐는지를 놓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최고 학위를 가지고 우파 싱크탱크와 보수 잡지,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정책 조언을 하는 영리한 지식인의 초기 모델이었다. 32-3)<br>2부 보수주의란 무엇인가<br>2장 보수주의의 특성과 관점, 명칭<br>보수주의자들에게 사회질서는 일정한 지위와 친숙한 의무를 수반하는 안정된 제도 및 사회적 위계에 달려 있었다. 그 그림에서 권위는 고정되고 공인된 통로를 통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플라톤에게 권위는 현명하고 더 높은 진리와 닿는 것이므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 안전을 최고의 사회적 가치로 여기는 “현실주의적” 우파의 지적 대부인 홉스에게 권위는 사람들의 타고난 경쟁심이 통제 불능으로 치닫지 않도록 막을 주권적인 중재자로 필요한 것이었다. 흄과 버크에게 권위는 사람들이 복종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면서 이제 고맙게도 그 기원(정복이나 강탈)이 잊힌 것이었다. 각자의 설명에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절대적이었다. 권위는 복종해야 할 것이지 성가신 질문자들이 그 자격을 끊임없이 따질 것이 아니었다. 사회질서가 정착되려면―더 호의적인 용어로는 “확립”되려면―의심과 비판, 그리고 “어쩌면”이 아니라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와 충성, 신뢰가 요구됐다. 49-50)<br>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 사회질서를 위해 권위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지만, 그 힘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권위를 지닐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권력이 일단 “확립”되면, 다시 말해 정착되고 수용되면 정당한 것이고, 따라서 권위 있는 것이었다. 다만 권위의 정당한 보유자가 부당하게 행동할 수는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권력이 정당하려면 습관적으로 복종하거나 참고 견디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권력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은 언제나 “왜 내가 복종해야 하는가?” “왜 내가 지불해야 하는가?” “왜 내가 순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열려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는 거꾸로 된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권력은 질서를 보장함으로써 수용되고 확립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질서의 기둥인 법과 재산권, 관습은 존중돼야 하고, 흠 잡히고 비판받거나 질서 유지 역할을 하는 데 방해받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52)<br>19세기 말 경제적 민주화―개략적으로 말해 번영의 몫을 모두에게 더 평등하게 나누는 것―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나 개혁가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질 때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점들에서 견해가 일치했다. 관점의 차이는 누그러졌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유주의자들은 권력 자체를 불신하진 않았다. 그들은 권력의 전횡적인 행사를 경계했다. 진보를 믿는 자유주의자들은 한 사회를 다른 사회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병폐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들은 또 권리에는 의무가 따라온다는 것도 이해했다. 대신 보수주의자들은 확립된 권력이라도 반드시 제한이 없고 질문을 면제받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했다. 그들은 안정되고 통합된 사회도 당연히 국부적인 수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보수주의자들은 권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과도하게 확장한 선언으로 권리를 부풀리고 그 값어치를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54-5)<br>새뮤얼 헌팅턴은 “보수주의의 적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급진주의”라고 썼다. 급진주의자를 정치적인 유형으로 생각하거나 급진주의를 일단의 사상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급진”과 “온건”이라는 표현은 명사적인 것이 아니라 부사적이다. 급격함과 온건함은 내용이 아니라 속도와 태도, 양식과 관계있다. 그 차이는 목표를 어떻게 잡고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직성을 띠거나 유연하거나, 열광적이거나 차분하거나,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거나 방어적으로 웅크리거나, 상대를 절멸하는 데 열중하거나 타협을 허용하거나, 정복하지 않고는 살 수 없거나 패배와 실패에도 살아남을 수 있거나의 차이다. 우리가 정치를 한쪽 편이 경기장을 전부 차지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취급하지 않는 한 전 경기장에서 좌파와 우파의 분할이 계속된다고 인정하는 것은 개략적으로 말하면 정치가 다양성 속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논쟁임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를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58-60)<br>3부 보수주의 1기(1830~1880):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br>3장 정당과 정치가들: 권위 없는 우파<br>프랑스 우파에게 타협은 이기는 선택으로 판명됐다. 1848년과 1871년 좌파가 일으킨 공화주의적 혹은 민주주의적 격변의 순간에 혁명의 공포는 우파를 뭉치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느 대안이 가장 덜 나쁜지를 두고 자기네끼리 불화했을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좌우 경쟁에는 최후의 승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우파에서 반동, 자유주의적 왕정, 독재의 지지자들은 모두 프랑스라는 국가를 손에 넣어야 할 상품으로 여겼다. 획득한 상품은 각각 오래된 질서나 재산가의 부, 혹은 양식과 재산을 갖춘 중산층으로 상상한 존재인 인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쓸 것이었다. 다른 쪽의 공화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들도 그랬다. 그들은 계급 없이 평등한 시민, 혹은 계급 개념에서 노동하는 대중을 의미하는 인민을 위해 국가를 획득하려고 했다. 1870년 제3공화국이 시작되고 나서야 우파는 최종 승자가 없는 투쟁이라는 자유주의적인 관념을 받아들였다. 69-70)<br>1871년 이후 프랑스 우파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급속히 좁아졌다. 그들은 정치의 틀로서 민주적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적합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타협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머뭇거리다가 의회가 1875년 공화제와 의회 체제를 강화한 헌법을 통과시키도록 허용했다. 남성의 보편적 선거권과 강력한 의회, 7년 임기의 약한 대통령제가 도입됐다. 비타협적인 우파는 그들이 혐오하면서도 이해는 하지 못한 제도 안에서 공화국을 좌절시키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1877년 마크마옹이 자신의 권위를 오판하고 개혁적인 총리를 경질했을 때 프랑스 우파는 보수주의자들의 의견이 바뀐 것을 모르고 다음 선거를 휩쓸어버릴 것으로 기대했다. 온건한 보수주의자들은 온건한 공화주의자들이 그들과 함께 일하기로 함에 따라 이미 체념하고 공화국을 지지했다. 양쪽 다 부상하는 사회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보았다. 친공화주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이겨 의석이 거의 2대 1이 됐다. 저항하는 우파는 연타를 당했다. 73-4)<br>근대 보수당의 첫 지도자 로버트 필(1788~1850)은 두 차례(1834~1835, 1841~1846) 총리를 역임했고, 솔즈베리의 험담에 따르면 두 차례 당을 배신했다. 필은 『타임스』 편집인 토머스 반스(1785~1841)의 도움으로 당이 따르기를 바라는 한 쌍의 융통성 있는 원칙을 제시하는 탐워스 매니페스토(1834)를 기초했다. 불필요한 사회 변화에는 가능한 한 저항하고 필요할 때는 적응하라는 원칙이었다. 매니페스토는 개혁법(1832)을 “중대한 헌법적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해결”로 받아들이고(다시 말해 추가적인 개혁은 없을 것이고), 시민과 교회 관련 제도의 “재검토”를 약속하되 서약은 하지 않고, “입증된 남용의 교정”과 “실제적인 불만의 구제” 형식의 개혁을 수용하며, 그러나 경솔한 변화와 “끝없는 소요의 소용돌이”에는 반대하는 선을 그었다. 그는 소득세를 도입했고, 보수주의자들을 갈라놓은 곡물법을 폐지하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친親필파는 1850년 그의 사후 휘그당―훗날의 자유당―에 합류했다. 75-6)<br>정치가이자 정치 소설가, 정당 지도자, 그리고 총리(1868, 1874~1880)로서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는 근대 자유주의에 대한 영국 우파의 조심스러운 적응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생각에 확립된 제도―토지 자산과 잉글랜드 교회, 국왕, 오래된 대학들, 그리고 상원―는 기득권이 아니라 충성과 존경, 신앙이라는 보수주의의 이상을 체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중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상류층의 문화적 특권 상실을 대체로 받아들인 실용적인 관리자이자 전술가로 경력을 마쳤다. 당에 대한 충성과 운용의 감각, 집권을 위한 후각에서 디즈레일리는 영국 우파의 특출난 요소를 잘 보여준다. 그 뒤를 이은 볼드윈처럼 디즈레일리는 보수적 유권자의 핵심인 잉글랜드 중산층의 정서를 파악하는 완벽한 귀를 가졌다. 그는 가식과 소수 지배층의 특권, 지성주의를 직접 경험하거나 상대방에게서 발견할 때는 냉정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국가나 국왕, 제국을 대신해 호소할 때는 열렬했다. 78-80)<br>독일 최초의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버릇없이 자랐다. 그들은 권위를 완전히 잃어버린 적이 없었고, 국가기관에 계속해서 접근할 수 있었다. 이따금 민주적인 시험을 치렀을 뿐이다. 정당 면에서 보수주의는 1815년 빈 체제 정착 후 지역 명사들의 비공식 연결망으로 시작했다. 구질서 옹호자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부터 군주의 권력을 보호하는 데 단호했다. 오래된 특권들은 폐지되고, 때늦은 봉건적 관행은 끝나고, 입헌 정부에 대한 동의가 이뤄졌다. 바덴 같은 곳을 제외하고는 절충적이고 불확실한 절대주의가 지배했다. 프로이센 사람들은 1815년에 헌법을 약속받았다. 헌법은 1848년이 돼서야 도입돼 위로부터 부과됐고, 즉시 끝이 잘려나가고 1850년대에 추가로 여러 차례 개정됐다. 프란츠 요제프는 서둘러 기초한 오스트리아 헌법을 1851년에 철회했다. 구엘리트층이 궁정과 교회, 군대, 관료 조직을 독점했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가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82)<br>최초의 독일 보수주의자들에게 공통된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들은 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근대에 평온하게 사는 대가로 얼마를 치러야 할까? 그 값을 치르는 화폐는 국왕과 군주의 권력, 귀족의 특권, 사회적 통일성, 위계질서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오랜 가치였다.&nbsp; 옛 우파의 완고한 저항자들은 무너져내리는 제도에 집착하며 지나치게 높은 대가에 기분 나빠했다. 더 대중적이고 시대에 적응한 젊고 참신한 우파는 보수주의자들의 충성이 오래된 이익집단에서 벗어나 새롭게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사회적 통일성은 더는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공유된 국민성과 독일인의 정체성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배타적인 방식으로 생각했다.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든 선택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실용주의적인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프로이센 총리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제국의 총리(1862~1890)로서 비스마르크의 성패는 그처럼 상반되는 흐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86)<br>미국에 보수주의 전통이 없다고 주장한 유명한 저서로 루이스 하츠의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1955)이 있다. 하츠는 미국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나라에는 구체제도 봉건적 전통도 없었으므로 자유주의자들이 공격할 대상이나 보수주의자들이 방어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탈봉건적, 탈전통적 미국 사회라는 하츠의 논쟁적인 구도를 고려하더라도 이 신생 국가는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방식에서 보수주의의 토양이었다. 미국 휘그당의 딜레마는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이 맞닥뜨렸던 것과 같았다. 그들은 대중의 요구가 커짐에 따라 자유주의적―그리고 민주주의적―근대와 얼마나 타협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였다. 휘그당은 진보에 관한 믿음에서 자유주의적이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진보를 이뤄간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었다. 또 유능한 엘리트가 경제를 감독하고 대중의 간섭 없이 정신을 드높여야 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보수주의적이었다. 91)<br>미국 정당정치의 진영은 남북전쟁으로 재편됐다. 남부 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국의 보수주의는 북부와 남부를 가르는 선과 더불어 지역과 계급의 구분에 따라 다시 형성됐다. 북부의 공화당은 번창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의 산업 경제에서 노동조합에 맞서며 공장의 생산 현장을 계속 통제한 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다. 낙후된 남부의 시골에서는 빈약해진 백인 엘리트가 민주당의 깃발 아래서 가난한 백인과 가난한 흑인을 갈라치며 주 입법부에서 확고한 다수를 차지했다. 최초의 미국 보수주의자들로서 반잭슨파 휘그당은 크고 다양한 공화국에서 사회적 갈등을 통제하는 새로운 수단을 물려받았다. 헌법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잭슨파의 경쟁자들과 그 유산을 공유했으므로 법 자체는 정치에 열려 있었다. 그 기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상세히 설명할 것이냐 하는 일은 그 자체로 당파적인 문제였다. 미국 보수주의 전통은 헌법 논쟁의 당파적 특성과 유동적인 근대 사회에서 법이 달라질 가능성을 허용했다. 93-4)<br>4장 사상과 사상가들: 자유주의 반대론으로 돌아서다<br>존 캘훈(1782~1850)은 노예를 소유하는 이익집단의 변명자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냉소적이지도, 논리가 짧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맞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회 입성(1911)부터 죽기 직전까지 가차 없이 논쟁의 재능을 발휘했다. 남부에 대한 캘훈의 꺾이지 않는 방어는 자칫 무계획적인 것으로 보였을 진로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캘훈이 남부를 대변하는 것은 그의 생각으로는 연방을 옹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북은 함께 연방에 속했다. 각자 다른 쪽과 더불어 살며 번영해야 했다. 한쪽이 더 작고 약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정당하게 평등한 발언권과 평등한 배려를 받아야 했다. 남부가 북부에 남부처럼 되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부도 남부에 북부처럼 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둘 다 남북의 동등성과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사회적 미덕과 인생의 더 높은 목표에 더 잘 맞는 남부는 착취로 돈만 긁어모으는 북부에 교훈을 줄 수 있었다. 99-100)<br>캘훈은 “소수”라는 말을 20세기의 용어와 같은 의미로 쓰지 않았다. 소수는 이를테면 흑인이나 여성, 히스패닉처럼 한때 무시됐던 집단을 뜻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소수는 지역 혹은 사회의 지속적인 “이익집단”으로 국가 안에서 무게를 가질 만큼 크긴 해도 투표에서 이기기에는 너무 작은 이들을 의미했다. “이익집단”이라는 말이 경제적 계급이나 부문, 혹은 압력집단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익집단은 정치적, 문화적 통일성을 지녔다. 그들에게는 역사가 있었다. 캘훈이 보기에 이익집단들은 함께 하나의 국가 공동체를 이룬다. 잘못된 법이 통과될 때는 투표에서 진 이익집단이 실행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헌법 자체가 캘훈이 추적했던 유형의 단순 다수결 문제를 걸러줄, 민주주의에 대한 대항적 기제를 풍부하게 담고 있었다. 하지만 캘훈의 염려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헌법은 해석하고 판결해야 했다. 그 명령은 집행해야 했다. 이때 법정과 행정부를 정치적 다수가 지배할 가능성이 컸다. 100-1)<br>1840년 베를린에서 신임 교수로 취임 강연을 하던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1802~1861)은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야유를 받자 그들을 꾸짖었다. “제군들, 나는 여기 가르치러 왔고 제군들은 들으러 온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프로이센 국가의 동등한 주권을 주장하면서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다. 인민에 대한 국가의 요구는 선택이나 동의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다수가 아니라 권위”가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슈탈의 표어였다. 슈탈은 1848년 혁명으로 정당정치에 휩쓸려 들어갔다. 요점은 혁명과 싸우되 반동은 피하고, 법을 존중하고, 군주든 인민이든 전횡하는 것은 물리치되 왕권의 우위를 지키고, 노동과 상속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독교인들의 법적 평등을 옹호하고, 독일의 통일성과 소속 국가들의 독립성을 함께 유지하는 것이었다. 슈탈은 법에 관한 전문성을 발휘해 프로이센의 뒤늦은 헌법을 기초했고 프로이센 상원에 입성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상원에 머무르며 보수주의의 대의를 밀고 나갔다. 104-5)<br>법의 지배가 없으면 사회질서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심판할 사법私法이 필요했다. 국가를 통제하는 데는 공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독일에 특히 풍부했다. 슈탈은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각자 헌법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반半파(1848년의 독일 자유주의자들)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공법이라는 준비된 수단을 이미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불필요하게 의회에서 제정하는 헌법에 기댔다. 전全파(더 광범위한 대의제를 요구한 1848년의 독일 민주주의자들)는 슈탈이 보기에는 위장한 혁명파였다. 민주주의자들은 사람들이―관심과 역량, 권리 면에서―동등하다고 상상하면서 하나의 획일적인 인간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실재하는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불만을 자아내고 불화의 씨를 뿌리며 광적인 종교에서나 볼 법한 지독한 불신을 조장했다. 슈탈은 1850년 프로이센 헌법을 기초하고 옹호하는 (나중에는 다듬는) 일을 도움으로써 그런 생각을 헌법으로 구체화했다. 106-7)<br>기독교계 지식인들에게는 한 가지 불안이 나머지를 한꺼번에 아울렀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불안이었다. 자연과학, 종교의 전거에 대한 학문적 비판, 그리고 비판철학은 모두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렸다. 그러나 기독교가 새로운 자리를 찾도록 라므네가 준 답은 교리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케텔러의 경우에도 그랬다. 자유주의적 근대에 기독교 신앙은 더 높은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 가치를 보여줄 것이었다. 케텔러는 그 실용적인 신조를 이렇게 압축했다. “종교와 도덕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곤궁을 구제할 수 없다.” 케텔러와 라므네는 교회의 논쟁이나 정당정치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필요한 이들을 돕자는 가톨릭의 사회적 행동을 옹호했다. 그들의 행동은 나중에 뒤르켐이 강조한 것처럼 종교를 신학 혹은 과학에 대항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공유하는 삶의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근대성 안에서 종교의 자리를 찾으려는 시도의 사회적인 형태였다. 111)<br>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는 자유주의적 근대와는 문화적인 거리를 두었던 시인과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이 작가들이 공유한 것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경악이었다. 로크와 뉴턴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원자론적이고 일차원적인 철학, 물질적 번영을 행복으로 여기는 한심한 발상, 그리고 희망한 것처럼 자연에서 자란, 시골의 목가적인 정서 혹은 탁월함과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시적이고 거칠며 조작할 수 있는 것에서 나온 대중문화가 그들을 경악하게 했다. 콜리지는 영국 사회에서 “분열의 참극”을 보았고, 근대 이전에 충만한 것으로 상상했던 삶의 조화를 상실한 것에 슬퍼했다. 콜리지는 정부에 책임 있는 발언권을 가지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다고 보면서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그 때문에 “상업적인 정신에 지나치게 기울게” 될까 걱정했다. 그 난폭한 기운은 지주계급이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상원이 하원을 감독해야 했다. 120)<br>콜리지는 보수적인 근대 사회가 결속을 유지하려면 남작과 자유 농민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보수주의 지식인들이 명료하게 표현하고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공통의 시민적인 신조가 필요했다. 신조와 지식인들은 함께 “지식계급 혹은 국가 교회”를 형성할 것이었다. 콜리지는 그 지식인들이 (반드시) 사제의 지위나 종교적 교리를 가지지는 않고 옛 성직자들과 같은 지도적인 권위를 갖기를 바랐다. 그들은 성직자도 평신도도 아니고, 그 중간에―상반되는 것들의 조정자로―있을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지식을 키우고 넓힌 “인간성의 수원”이 될 터였다. 다른 이들은 전국에 퍼져나가 누구도 “주민 계도자와 보호자, 교사” 없이 내버려두지 않게끔 선생이 될 것이었다. 국가는 이 “영속적인 계급 혹은 신분”을 “국적자”에게서 나온 공익 목적의 돈, 쉽게 말해 세금으로 지원할 터였다. 그 신조는 폭넓고 다양하겠지만, 종교적 신념처럼 결속력을 발휘할 만큼 일관성을 갖되 분열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은 없을 것이었다. 121)<br>4부 보수주의 2기(1880~1945): 적응과 타협<br>5장 정당과 정치가들: 권위의 회복과 탕진<br>타협적인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가 1880년 이후 우파의 두려움과 망설임뿐만 아니라 제국의 지나친 확장과 전쟁, 경제의 침체 같은 스스로 일으킨 재난을 극복하고 살아남게 해주었다. 타협한 보수주의자들은 선거민주주의(모두를 위한 투표권)에 대한 저항을 멈추었다. 그러나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경제 민주주의(모두를 위한 경제적인 몫)에 저항했다. 경제 민주주의가 좌파 자유주의자들의 개혁주의로 가든 더 급진적으로 사회주의로 가든 보수는 저항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또 윤리적, 종교적 권위를 보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도덕적 감시를 끝내기는 싫어하면서 문화적 민주주의에 저항했다. 보수주의의 타협은 다시 말해 부분적이고, 점진적이며,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번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880년부터 1945년까지 우파는 실제로 타협했다. 타협이 이뤄진 곳에서는 1945년 이후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어쩔 수 없이 공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마침내 민주적 자유주의가 깊숙이 자리 잡았다. 138-9)<br>1880년까지 프랑스의 책임 있는 우파는 이미 자유민주주의를 물리치는 희망을 포기했다. 사회적, 직업적 엘리트는 제3공화국에서 계속 살아남았지만, 예전의 프랑스 명사들은 더 이상 통치계급을 형성하지 못했다. 왕당파의 후예는 대통령직에서 배제됐다. 공무원 조직에서 후견제는 시험제로 대체됐다. 언론에 대한 제약은 해제됐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상원의 종신제는 폐지됐으나 상원 자체는 남았다. 노동계급의 요구는 무시됐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선거 승리로 친공화주의 우파는 결속하고 화해하지 않는 반공화주의 우파는 거리로 내몰렸다. 1876년부터 1910년까지 아홉 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하원의 반공화주의 다수파―두 갈래의 왕정주의자와 보나파르트주의자들―는 쪼그라들어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가진 소수파가 됐다가 그다음에는 희미한 자취만 남게 됐다. 의회에서 좌우 경쟁은 다양한 당명의 급진파인 자유주의적 좌파와 공화파인 자유주의적 우파의 싸움이었다. 141-2)<br>영국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의 적응은 솔즈베리 경으로 잘 알려진 로버트 개스코인-세실(1830~1903)의 오랜 경력에서 볼 수 있었다. 솔즈베리의 지도 아래서 토리당은 토지 기반의 이익뿐만 아니라 기업과 금융을 대변하는 법을 배웠다. 이 당은 오래된 제도(왕, 상원, 국교회)에 대한 애착을 계속해서 존중하는 한편으로 점차 그것을 포기하고 더 모호하긴 해도 똑같이 열정적인 충성을 제국과 국가에 바쳤다. 당은 특히 잉글랜드의 중산층과 다른 유권자들 사이에서 충분히 인기를 얻어 20세기 이후 가장 강력한 정당이 됐다. 민주주의에 관해 솔즈베리는 평등주의자들이 오도하지만 않으면 사람들이 두말없이 따를 “타고난 지도자들”을 배출한다고 생각했다. 무제한의 민주주의는 더 훌륭하고 합의적인 정부를 장려하기보다 출세주의자와 전문가들만 키워줄 것이었다. 더 나쁜 점은 그런 민주주의가 부자들 못지않게 사악하고 숫자만 많은 빈자가 부자들을 강탈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149-50)<br>보수당은 아무것도 안 한다는 평판과는 달리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사회 개혁을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미망인과 고아, 고령자를 위한 연금(1925), 슬럼가 정리와 주택 건설, 산업과 농장에서 걷는, 지방세로 알려진 부동산세를 전가하고 지방 당국에 남은 세수 부족을 중앙 정부 보조금으로 메우는 제도 변경, 석탄과 섬유, 전기 부문의 산업 “합리화”가 이뤄졌다. 볼드윈 정부는 비상업적인 영국방송공사(1927) 설립을 허가했으며, 여성의 투표 연령을 21세로 내렸다(1928년 평등선거권법). 강력한 전국 조직을 갖춘 하나의 포용적인 정당 덕분에 영국의 보수주의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프랑스처럼 우파의 분열적인 과격파가, 혹은 독일처럼 파괴적인 극단주의자들이 차지할 공간을 거의 남겨주지 않았다. 보수당에서는 처음에 히틀러의 강한 지도력과 독일 좌파에 대한 억압, 독일 경제의 재생에 대한 찬사가 나왔으나 영국 주변부의 토종 파시즘에 대해서는 그런 찬사가 거의 없었다. 154)<br>보수주의는 어디에 있든 특유의 색깔을 지녔다. 그렇기는 해도 독특하게 독일적인 요인들이 보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서두를지, 미룰지 선택하는 데 복잡성을 더했다. 하나는 빌헬름 제국에서 빚어진 권위의 혼란이었다. 다른 하나는 1918년 이후 의회 정부의 생소함이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권위의 혼란은 비스마르크라는 지배적인 인물과 의회의 상대적인 허약함에 가려졌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의회의 권위는 이론적으로는 인정됐다. 하지만 실제로 권위를 가지려면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우파의 지지가 필요했으나 완전한 지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비스마르크가 추락한 후 그 없이는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스마르크 신화가 자라났다. 비스마르크 신화는 기껏해야 반쪽의 진실이었다. 그 신화에서 진실은 비스마르크가 우파에서 과도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이었다. 그의 지배적인 존재는 성마른 독일 우파가 민주정치의 정당 세력으로서 더 잘 조직하지 않아도 되게 도왔다. 158-9)<br>1923년의 위기―좌파와 우파의 쿠데타 시도와 외국의 점령, 초인플레이션―후 공화국은 안정됐다. 사회가 스스로 안정되자 우파의 저항과 교란에 따르는 정치적 비용이 늘었다. 일상적이고 비당파적인 의미에서 혼란보다 질서를, 불확실성보다 안정성을 선호하면서 기업과 법원, 교회, 대학, 심지어 독일의 축소된 군대의 보수주의 세력까지 극우파가 꿈꾸는 대안들보다 공화국이 더 작은 악임을 알게 됐다. 새로운 정상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우파의 핵심 저항 세력은 지적인 주변부가 됐다. 1918년 이후 독일의 우파는 조직화하지 못했고, 어느 조건도 충족할 자세가 돼 있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적극적이고 적대적인 우파의 힘이 바이마르공화국을 침식했는지, 아니면 반대로 우파가 민주적 게임에서 이기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두려움을 갖고 머뭇거렸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어느 쪽이든 독일의 보수주의는 부재의 힘을 보여주었다. 바이마르 체제의 붕괴는 많은 부분 자유민주적 보수주의의 허약함에 기인했다. 163-4)<br>미국의 보수주의는 그 시대의 위대한 기업가와 금융가들―앤드루 카네기(철강), 존 D. 록펠러(석유),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철도), J. P. 모건(금융)―에게서 근대의 영웅들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들은 과거에서 발굴할 필요가 없고 미래의 희망으로 어렴풋이 그릴 필요가 없었다. 야망을 실현한 본보기이자 진보의 실행자로서 이 거인들은 어떤 정당의 정치인이나 정치사상가도 필적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자유방임 보수주의를 옹호했다. 정당 면에서 공화주의는 분열됐다. 소수파인 개혁가들은 정치와 기업계를 정화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그들끼리 서로의 밥그릇을 나눠 갖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 공화당원들은 “잡종”이나 “머그웜프Mugwumps”, 나중에는 “진보주의자”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자유방임주의를 믿는 다수파는 기업이 스스로 부를 창출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법은 그런 목적에 충실한 것이 가장 좋고, 선출된 공직자들은 개혁에 나설 때보다 매수될 때가 가장 안전하다고 보았다. 165-6)<br>여러 제도를 통제한 것은 보수의 성공에서 두 번째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의회와 법을 통제한 것이 그랬다. 미국 보수주의자 가운데 전부는 아니어도 많은 이가 의회의 저지는 해롭거나 부적절한 사회적 공학에 대한 의미 있는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의회의 방해주의자들은 윌슨주의(1910년대)와 뉴딜(1930년대), 그리고 ‘위대한 사회’(1960년대)에 반대해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세 가지 논점을 인용할 수 있었다. 개혁은 편익에 견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흔히 무용하고 비효과적이거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수의 성공 요인 중 마지막은 법이었다. 국가 건설기인 남북전쟁과 뉴딜 사이에 미국 법은 기업의 자유를 보호해 경제를 확장하고 번영을 확산한다는 큰 목적에 봉사했다. 법은 국내 장벽들을 제거해 전국 시장을 창출하고, 각 주의 법을 조화시키고, 철도를 비롯한 운송 체계 발전을 원활히 하며, 남부 흑인들의 법적 예속을 위협할 연방정부의 개입을 차단했다. 168-9)<br>6장 사상과 사상가들: 민주주의와 공적 이성에 대한 불신<br>국민은 19세기 말 보수주의자들에게 유용한 통합의 개념이었다. 그 개념은 사람들이 자기네끼리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보수의 희망찬 비전과 사회의 명백한 분열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내부적으로 국민의 개념은 옛 군주처럼 공통의 충성이 향할 초점으로 온건하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진정한 국민에 속하는 사람들과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누는 난폭하고 배타적이며 흔히 인종차별적인 방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대외적으로 국민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세계에서 하나의 상태로 생각됐다. 평화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위한 본보기이자 개선자로 생각되거나, 호전적인 관점에서 다른 국민의 잘못을 바로잡는 무장한 교정자로 생각됐다. 그 각각의 방식에서 국민은 특정한 사람들을 상징함으로써(공통된 전체), 사람들을 정화함으로써(원치 않는 이들의 배제), 그리고 긍지나 복수로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더 넓은 세계에서의 행동) 통합의 개념으로 작용했다. 188-9)&nbsp;<br>현실정치와 배제를 결합한 국가주의 역사가의 두드러진 예는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1834~1896)였다. 트라이치케는 독일이나 프랑스 국민의 실패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한 말을 할 수 있어도 유대인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탄하며 아직 그 ‘용어가 생기기도 전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불평했다. 1880년에 쓴 악명 높은 소책자에서 그는 역사가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산하는 반유대주의에 넘겨주었다. 몸젠은 트라이치케가 반유대주의 시위를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몸젠은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제국 안에 통합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라이치케는 그런 시민적 동화를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버리는 것과 혼동했다.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자유주의적이고 포용적인 국민 개념과 보수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국민 개념이었다. 자유주의적인 몸젠이 보기에 훌륭한 독일인이 되려면 훌륭한 시민이 돼야 했다. 보수적인 트라이치케가 보기에는 훌륭한 독일인이 되려면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 돼야 했다. 189-90)<br>통합하는 국가의 신화는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도 대중에게 보급됐다. 조지 밴크로프트의 장대한 역사(1854~1878)는 미국의 건국과 뒤이은 진로를 헌신적인 미국인들이 문명세계의 자유를 위해 목적의식을 가지고 벌인 성전으로 묘사했다. 존 피스크의 대중적인 역사는 다윈주의적인 추론과 섭리적인 아메리카니즘을 섞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베스트셀러 역사서인 『서부의 정복』(1889~1896)은 변경에 정착할 때 어떻게 좋은, 즉 협력적인 “야만인들”은 이주시키고 나쁜, 즉 저항적인 이들은 쓸어버렸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영국에서 “제국주의의 바이블”인 J. R. 실리의 『잉글랜드의 확장』(1883)은 영토에 한정되지 않고 평화롭게 전 세계로 퍼져나간 영국인의 특성에 관해 썼다. 국민의식은 어디에서도 자생적이지 않았다. 국민에 관한 상상은 어디서나 작가와 지식인들이 촉진하고 길러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촉진하고 길러내려면 먼저 공통의 신념과 애착이 있어야 했다. 191-2)<br>귀스타브 르봉(1841~1931)의 공헌은 군중에 대한 아주 오래된 공포를 사실처럼 들리는 토대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르봉의 성공 요인은 고래의 편견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군중심리』(1895)에서 르봉은 감춰진 본능에 이끌리는 집단 사고에 관해 썼는데, 그 본능은 군중의 가장 이성적인 구성원들조차 침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은 홀로 있을 때는 교양 있는 개인일 수 있지만, 군중 속에서는 야만인이다”라고 썼다. 대중민주주의에 놀란 독자들에게 『군중』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알렸다. 사회는 급진적인 개입으로 개조된 적이 없었다. 사회는 사상과 일상의 점진적인 진화 과정에서 느리게 변화했다. 그것은 위안으로 들릴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 이전 체제는 이미 사라져버렸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었다. 대중은 그들이 선거에서 지니는 비중보다는 그들의 벅찬 요구 때문에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대중은 비합리적이었다. 그래도 군중으로서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면 여전히 통치할 수 있었다. 192)<br>T. S. 엘리엇(1888~1965)은 일찍이 자신이 태어난 미국 중서부를 버리고 유럽으로 가 저명한 모더니스트 문학가가 됐다. 엘리엇의 문학에서 문화적 전통은 보수주의 정치에서 안정적인 제도가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전통은 『황무지』(1922)에서 시적으로 탐험한 근대의 정신적 공허함에 답했다. 엘리엇은 『성스러운 숲』(1920)에서 전통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쏟고 지켜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에세이는 시적인 규범을 정하고 금욕적이지도 교훈적이지도 않게 “열정에서 보이는 진실”로서 시의 독특한 도덕적 가치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엘리엇은 특유의 웅변으로 자신의 보수주의를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근대에 대한 보수의 대응은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지만, 인간의 성취는 드물고 변덕스럽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우리의 유산을 파괴할 신이 준 권리가 없으며, 언제나 참을성 있게 질서의 목소리를 따르고 정돈된 삶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210-2)<br>카를 슈미트(1888~1985)는 국가의 본질과 정치적 권위, 그리고 민주주의에 관한 당혹스러운 문제들을 격앙되고 암시적인 경구로 표현했다. “근대 국가 이론의 모든 중요한 개념은 세속화한 신학적 개념들이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독재는 민주주의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애를 이야기하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건설자보다는 비판자인 슈미트는 자유민주주의의 취약성을 파고들었다. 그는 스스로 통치할 수 없는 대중의 무능력과 제도의 취약성, 그에 따른 단호하고 강력한 정부 지도자의 필요와 관련해 보수주의자들의 믿음을 전에 없이 많이 공유했다.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은 세 가지 모두 잘못 이해했다고 슈미트는 생각했다. 대중의 열정은 일상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허를 찔렀고, 그들은 적들에 대항해 자신들의 제도와 가치를 지키는 데 굼떴다. 통속적인 신화가 정보를 잘 아는 이들의 논리적 주장을 이기는 대중사회에서 대의 민주주의는 공허했다. 212-4)<br>슈미트가 자유민주주의에 맞서 처음으로 한 일은 민주주의적 대의제를 권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제한과 분리한 것이었다. 의회의 결정은 거래의 중개를 통해 이뤄지거나(비민주적) 끝없는 논의로 미뤄졌다(비효과적). 전횡적 지배를 제한하는 것―권력 분립과 독립된 법원, 효과적이고 법의 제약을 받는 행정부―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했으나 선출된 의회 없이도 가능했다. 자유민주주의의 다른 주요 실패 요인은 신화적 요소를 건드릴 수 없는 무능력이었다. 이는 슈미트가 좋아했던 소렐의 저서에 따르는 것이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자치의 “합리적 신화”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신화는 경제적 이해의 달라지는 셈법에 달려 있었다. 노동계급이 더 부유해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신화의 흡인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강력한 것은 “비합리적” 신화였다. 오직 그런 신화들만 다수의 인민을 끌어들이고 붙들어둘 수 있다고 슈미트는 믿었다. 현재에 적합한 한 가지 신화는 국가였다. 214)<br>샤를 모라스(1868~1952)는 왕정주의의 선도적 정파인 악시옹 프랑세즈 배후에서 지적 영향력을 미치는, 제3공화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비판자이자 자유주의와 의회 정부에 대한 불신자였다. 그는 냉정한 경구를 쓰며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이들을 환대하고 추종자들을 폭력으로 유도하면서 사후 책임은 부정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적은 “내부의 낯선 자들”이었다. 그가 악의적으로 쓴 이 말은 프랑스의 개신교도와 유대인, 프리메이슨, 그리고 아직 프랑스인이 되지 못한 이민자들이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모라스의 주된 반론은 사회를 서로 협력하면서 권위에 선택적으로 동의하는 개별 단위의 집합체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공상적인 구도는 뻔히 보이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모라스는 또 사회에는 공유된 신앙의 결속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콩트를 따랐다.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진영의 적들은 19세기에 향수를 느꼈겠지만 모라스는 중세를 갈망했다. 216-7)<br>5부 보수주의 3기(1945~1980): 정치적 지배와 지적 회복<br>7장 정당과 정치인들: 되찾은 용기와 다시 쥔 권력<br>정치적 우파는 지난 반세기 중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정당하든 부당하든 이제 경제적 침체와 전쟁의 대가를 치렀다. 사회적 성향의 자유주의는 우위를 차지했다. 우파가 회복하려면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수주의 주류는 새로운 자유민주주의적인 현 상태를 받아들이고 곧 숙달했다. 당의 가장자리에서 우파의 저항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지적으로 우파의 자신감이 회복되고 있었다. 역시 성공은 양날의 칼이었다. 보수적인 사상가들이 지배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용할수록 그들은 덜 특이해지고 관점은 더 희미해졌다. 보상은 집권이었고,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복지는 비효과적이고 도덕적으로 부식성이 있었다. 국가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윤리적 고삐를 풀어주는 것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그처럼 서로 다른 여러 비난을 합치면 하나의 정돈된 논리로 포장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강렬히 느껴져 1980년 이후 오래된 보수 주류에 대항하는 강경우파가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224)<br>샤를 드골(1890~1970)에게 정치는 이해관계의 중재나 일상의 관리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적절한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정치를 보는 드골의 관점은 국민투표 민주주의를 강력히 지지하고 의회에 회의적이며 지도자와 인민은 가까이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그는 정당정치를 혐오했고, 더 정교한 명칭을 붙이기는 어려워도 확실히 우파에 속했다. 방식은 독재적이었으나 그는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확신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확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뜻이 좌절됐을 때 그는 자신의 의지를 다시 강요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스스로 무대에서 걸어 나왔는데(1946, 1969), 이는 그가 독재자라는 비난이 틀렸음을 보여줬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인 그는 개인의 도덕에 관한 규제적인 법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때면, 바꿀 이유가 없는 익숙하고 편안한 가구 같은 것으로 여겼다. 또 정치는 도덕적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명령은 국가의 독립과 안전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228-9)<br>처음에 보수당은 자유주의적인 사회 개혁에 반대하기보다는 적응하며 노동당 옆에 섰다. 그들은 복지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더 잘 운영되고, 덜 낭비하며, 비록 그렇게 외치지는 않아도 덜 후한 복지를 약속했다. 예를 들어 우파는 국민건강보험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무료 서비스 체제에서 의사들이 계속 사적으로도 진료할 수 있도록 노동당의 양보를 받아냈다. 경제 면에서는 온건한 케인스주의가 채택됐는데, 『산업헌장』(1947)에 제시된 정책은 완전고용을 목표로, 적자예산을 수단으로 삼았다. 외교정책에서는 노동당과 차이가 거의 없었다. 외교정책에 관한 보수당대회 성명(1949)은 노동당처럼 반소비에트주의를 강력히 표명했다. 영국이 제국에서 후퇴하고, 중동에서 혼나고(1956년 수에즈 위기), 경제 면에서 재기하는 프랑스와 독일보다 상대적으로 쇠퇴한 것은 유권자들보다 토리당의 정치계급을 더 크게 흔들어놓았다. 다음 선거 때마다(1955, 1959) 보수당은 다수당으로서 의석 차이를 늘려갔다. 231-2)<br>서독의 정상화와 독일 우파의 통합을 관장한 지도자는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였다. 그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를 지내고 1950년부터 1966년까지 새로운 기독민주당CDU를 이끌었다. 아데나워의 진지한 회복과 치유의 정치에는 열광과 극단주의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1957년 선거 포스터는 이렇게 외쳤다. “실험은 안 돼!” 그 슬로건은 전후 독일의 경제와 국가 주권, 도덕적 평판과 관련된 과제를 신중하고 고집스럽게 추구한 아데나워의 보수주의를 압축했다. 독일의 특수성에 관한 주장들을 무시한 아데나워는 단호하게 이 나라를 서방 세계 안에 두면서 미국에 대한 국가적 부채를 인정했다(소련에 대한 부채는 얼버무렸다). 그는 이 나라의 도덕적 뿌리를 “기독교적이고 서구적인” 정치 문화에서 찾았다. 아데나워가 말한 기독교적 서구주의는 계몽된 이상과 기독교 전통을 버무린 것이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와 기독교인들이 서로 두려워할 것이 별로 없음을 시사했다. 236-7)<br>공화당 우파는 아이젠하워 임기 마지막 해인 1960년경부터 서서히 권력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첫 번째 요소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운동은 과거 뉴딜에 반대했고 이제 민주당의 ‘위대한 사회’에 반대하는 대기업들의 로비에 의존했다. 중산층 납세자들에게도 의존했는데, 그들은 게으름뱅이와 미혼모, “도와줄 가치가 없는” 가난뱅이들을 도우려고 세금을 낸다고 생각하며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이었다. 우파의 저항에서 두 번째 요소는 인종차별 폐지와 시민권에 대한 백인들의 반발이었다. 반발은 남부에서 시작됐으나 그곳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주지사를 지낸 인종주의자 조지 월러스가 1968년 예비선거 때 북부 노동조합원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닉슨이 유의한 경고 신호였다. 우파에서 저항의 세 번째 물결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휩쓸었다. 그들은 도덕적 방임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 국교 분리 헌법에 대한 더 자유주의적인 해석에 놀랐다. 이것이 바로 배리 골드워터가 자라고 번성하는 토양이었다. 241)<br>8장 사상과 사상가들: 자유주의 정통에 답하다<br>이넉 파월(1912~1998)은 1980년대 이후 영국 보수주의의 오랜 우경화에 물꼬를 튼 사상가였다. 중도주의적 타협의 시대에 파월이 한 일은 대처리즘을 예고한 것 말고도 많았다. 대처 자신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대처리즘은 세계적이고도 다자적인 뿌리를 두고 시장을 띄웠다. 파월은 세계적인 시장을 존중했으나 정치는 국가에 돌려주기를 바랐다. 경제적으로 세계주의자인 동시에 지정학적으로는 일방주의자인 파월은 유럽에 등을 돌린 영국 보수주의의 선구자였다. 파월은 “하나의 국가”라는 느슨하고 감상적인 구호를 강화해 지정학적, 사회정치적, 국가주의적 주장과 맞물리게 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이후의 영국은 세계에서 홀로 되고, 영연방은 속임수이며, 미국은 친구가 아니라 골목대장이고, 유럽은 덫이었다. 둘째, 전후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국가는 소외된 영국 사회와 불화했다. 마지막으로, 영국은 특수하고 독특했다. 각각의 관념―고독과 소외, 특수성―은 2010년 이후 영국 우파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247)<br>리처드 위버와 에릭 푀겔린,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모두 미국에서 활동했다. 푀겔린과 매킨타이어는 유럽에서 온 이주자였다. 역사적, 지리적으로 폭넓게 묘사하는 그들은 “서방”이라는 말을 고전 시대의 지중해 세계와 중세 기독교 세계, 그리고 현재의 부유한 비공산주의 국가라는 의미로 되는대로 썼다. 그들은 서방의 문제가 한 가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집단적인 도덕적 무질서라는 공통의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썼다. 그들은 저마다 사회를 진단하고 역사적인 서사를 들려주며 처방을 제시했다. 진단은 일치했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근대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시작이 언제냐에 관해서는 12세기나 그 이전(푀겔린), 14세기(위버), 18세기 계몽주의(매킨타이어) 시대로 견해가 서로 달랐다. 제안한 처방은 도덕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을 거부하고 도덕을 정치와 공적 삶으로 되돌려놓는 것이었다. 위버과 푀겔린, 매킨타이어는 오늘날의 “가치” 보수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254)<br>대부분의 미국 보수주의자는 더 일상적인 수준에서 논쟁했다. 시장경제와 반공주의, 그리고 시민적 도덕이 전후 미국 우파가 지적 자신감을 되찾도록 해준 폭넓은 작전을 규정했다. 이 싸움에 집결한 이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뉴딜을 비판했던 이들과 1960년대부터 새롭게 ‘위대한 사회’를 비판한 이들, 안으로 반反집산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설 뿐만 아니라 밖으로 소련의 힘과 압력에 눈을 돌린 반공주의자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윤리적 방임과 공통의 예의 규범의 무시에 혼란을 겪는 다양한 이름의 “가치” 보수주의자 혹은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이었다. 1945년 이후 미국 보수가 반공주의를 경제적 자유주의나 “가치” 보수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가치” 보수주의를 경제적 자유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어려웠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그것들을 “융합”하려고 애썼으나 누구도 세 가지 다 능숙하게 결합할 수는 없었다. 260-1)<br>신보수주의자 중 많은 이가 과거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은 모두 자유주의자였다. 처음부터 그들의 일원이었던 어빙 크리스톨의 유명한 뉴욕식 어법에서 보듯이 “현실에 습격당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지만 말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반대했으나 최초의 보수주의자들이 저항했던 자유주의가 아니라 오늘날 큰 정부와 반항하는 좌파에 포획된 사회적 성향의 자유주의와 싸웠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보았다. 그들에게는 위대한 사상가의 명부가 없었다. 그들은 지어낸 전통에서 선택한 것을 갖고 논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역사는 현재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반反이데올로기적이고 실용적인 “현실주의자”로 생각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전망에 관해 보수주의적인 음울함을 거의 지니지 않았고 영국인들처럼 큰 사상 없이도 잘해나갈 수 있는 체하지 않았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다시 말해 일종의 진보에 관한 믿음을 공유했다. 264-5)<br>신보수주의자들은 1970년대 말까지 여러 논쟁에서 이기고 나서 정부에 들어갔다. 리처드 펄과 엘리엇 에이브럼스, 폴 울포위츠 같은 젊은 세대는 모두 레이건이나 부시 행정부(1981~1993)에서 일했다. 그들의 전투는 ‘위대한 사회’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아니라 2차 냉전 시대 워싱턴의 싱크탱크나 대학의 비둘기파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 2세대 신보수주의자들은 지식인들의 환상에 사로잡힌 채 소련 이후의 세계에 진입했다. 그들은 소련이 미국의 압력 때문에 해체됐고, 그 압력은 레이건 시대 미국이 자기 확신을 되찾은 데서 나왔으며, 그 회복에 신보수주의 작가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이 활기찬 공화당 우파의 부상에 논쟁과 사상이 역할을 했다고 본 것은 옳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국가적 자신감과 새로운 지정학적 역량을 키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술 같은 비약이었다. 젊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지지한 이라크 전쟁과 뒤이은 점령은 바로 그런 운동에 대한 응보였다. 266)<br>6부 보수주의 4기(1980~현재): 초자유주의와 강경우파<br>9장 정당과 정치인들: 강경우파의 진입을 허용하다<br>최초의 가장 유창한 변화지상주의자 가운데 영국 보수당 대표(1975~1990)이자 총리(1979~1990)인 마거릿 대처가 있었다. 대처가 영국 보수당을 지배한 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성공적인 토리 지도자들―솔즈베리, 볼드윈, 처칠―은 당의 내분을 관리했다는 역사적인 패턴을 따른 덕분이었다. 대처는 개방된 시장과 자유무역, 그리고 사람들의 개인적 도덕이나 신념에 간섭하지 않는 제한적 정부를 믿는 코브던주의자이자 중산층 자유주의자였다. 대처 이후 보수당의 “진짜 문제”는 당명이 아니라 1990년대가 되자 물리쳐야 할 적들과 팔 국유 재산,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더 효과적인 정부를 위해 시장 원리를 활용한 혁신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널리 모방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뜻밖의 비용이 나타났다. “자산 소유 민주주의”는 비틀거렸다. 그런 비용과 실패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시화했지만, 1997년 이후 새로운 노동당이 대처리즘을 포용하면서 그 시기가 미뤄졌다. 272-3)<br>대처는 휘그인 동시에 토리였고, 친유럽이면서도 반유럽이었다.&nbsp; 또 자신이나 보수당이 많은 역할을 해서 정했던 유럽연합의 방향을 비판했다. 보수당은 1989년 이후 유럽연합의 급속한 확장을 밀어붙였다. 그들은 상품과 서비스, 자본, 그리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유럽 단일 시장을 촉진했지만, 그런 시장 자유와 균형을 맞출 사회·노동 분야 권리를 적용하는 유럽화에는 저항했다. 대처는 유럽 통화 통합을 선호하는 당내 친유럽주의자들을 좌절시켰는데, 이는 1990년 그녀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대처의 지도력 약화가 투표장에서 당의 입지를 위협하자 토리당은 늘 하던 대로 그녀를 쫓아냈다. 당내 반유럽주의자들은 곧 복수에 나섰다. 내부 투쟁―관세, 자유무역, 아일랜드, 제국 문제를 둘러싼 내분―에 익숙한 보수당은 투쟁의 열정을 유럽으로 돌렸다. 대처는 당내 파벌의 균형을 맞췄다. 그녀가 사라지자 명확한 목표나 사상이 없는 당은 국가 우선의 강경우파 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273-4)<br>독일의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은 1950년대부터 주류 우파가 말로만 통일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통일은 실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콜의 국가주의적인 비판자들이 보기에 통일은 서방화한 연방공화국이 옛 동독을 자유민주적 “기성 체제”로 흡수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속박이 된 체제 아래서 반쪽짜리 주권의 서독이 합의한 동맹관계로 동독을 빨아들인 것이었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비판자들이 꿈꿨던 것은 속박에서 벗어난 주권국가로의 복귀와 세계의 책임 분담, 그리고 독일의 역량이 크기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지정학적 맥락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기동의 자유였다. 문화적인 면에서 비판자들은 행동을 억누르는 수치심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에 관한 암묵적 규칙에서 벗어나 그들이 이해하는 그대로 독일의 정체성을 축복하기를 바랐다. 그런 주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옛 동독의 경제적 불만과 어우러졌고, 그 두 요인이 함께 2010년대 강경우파의 놀라운 부상을 부채질했다. 275)<br>로널드 레이건(1911~2004)은 공화당의 자유시장 낙관주의자와 극우 자유지상주의자,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도덕주의자, 그리고 미국 우선주의자들을 한데 모았다. 일찍이 닉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민주당 지지자였다가 실망한 이들의 표를 얻었다. 그는 미국 자유주의의 좌우 날개인 뉴딜 민주당 지지자와 엄격한 통화 및 대기업을 옹호하는 공화당 지지자 모두에게 호소했다. 이혼 경력이 있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레이건은 기독교 근본주의를 믿는 청중에게 모든 사람이 “죄와 악”에 맞서라는 “성서와 주 예수의 명을 받는다”고 진정성을 보이며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들의 자립을 자랑스럽게 믿는 서부와 중서부의 현대판 제퍼슨주의자와 잭슨주의자들에게 미국식 자유의 복음이 울리게 했다. 레이건은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회를 돕겠다며 다시금 침입해오는 북부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불안해하는 남부의 백인들과 전국의 대학원에 흩어져 있는 젊고 똑똑한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그 복음을 들려주었다. 276)<br>오른쪽 당파들을 모이게 한 공통의 주제는 정부에 대한 적대였다. 레이건은 아주 능란하게 “큰 정부”를 헐뜯으며 청중을 흔들어놓아서 그가 운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바로 큰 정부라는 점을 잊어버리게 했다. 정부 지출과 낭비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인 그는 적자가 치솟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자신이 늙었을지 몰라도 어리석지는 않다고 자랑하며 한 번도 의회에 균형예산을 보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건 시대 우파는 반정부 복음에서 근래에 없었던 통합의 주제를 찾았다. 오른쪽 당파들에 큰 정부는 편리한 악당이었다. 기업과 은행들에는 신용과 작업 안전, 소비자, 환경 규제를 하는 정부, 도덕적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갈수록 더 자유주의적이고 관대한 법을 집행하는 정부, 미국 우선주의자들에게는 파괴적인 베트남전을 벌이고 외국인의 응석을 받아주는 다자주의를 택하며 소련에 때때로 긴장 완화의 추파를 던지는 물러터진 정부가 바로 그런 악당이었다. 277)<br>프랑스가 1980년 이후 우파의 지배라는 흐름에서 겉보기만큼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통령 임기는 또 보수주의 역사에도 속한다. 미테랑 덕분에 프랑스 중도우파가 뭉쳐 그에 맞설 하나의 반대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드골주의자와 우파 자유주의자 간의 사회적, 종교적, 상징적 차이가 급속히 좁혀져 어떤 경우에든 그 과제는 수월해졌다. 미테랑은 선거(1986)에서 중도우파의 의석 확대를 제한하려고 선거 제도를 비례대표 방식으로 바꾸게 했다. 우파의 표는 쪼개졌고 국민전선은 의회에서 36석을 차지했다. 미테랑의 책략은 중도우파의 승리를 막는 데 실패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보수 정부와 “동거”해야 했다. 그러나 국민전선은 주변부를 벗어났다. 프랑스의 보수적 유권자들은 이제 선거에서 강경우파라는 대안을 갖게 됐다. 국민전선은 1980년대의 성공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쌓았고, 선거 때마다 꾸준히 10~15퍼센트를 득표하며 파괴적일 수도 있는 분열(1999)에서 살아남았다. 278)<br>강경우파가 이용한 수사적인 논지는 전통적으로 공유된 것이다. 쇠퇴는 그중 하나다. 강경우파는 어디서나 사회적, 도덕적 건전성이 악화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한때 강했던 나라가 쇠약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때 결속된 사회는 갈라졌다. 한때 정숙했던 사람들은 갈수록 타락했다. 국가 쇠퇴의 서사에 따르면 정치와 정부는 대중을 이해하지도 대변하지도 않는 이기적인 엘리트에게 포획됐다. 영국의 브렉시트 캠페인은 쇠퇴와 포획을 영리하게 결합했다. 유럽은 한때 자랑스러웠던 나라의 활력을 빼앗고 속박했으며, 유럽연합은 유럽화된 영국 엘리트의 도움으로 이 나라의 헌법을 포로로 잡았다. 포획의 반대는 구조였다. 진정한 국민―혹은 강경우파가 서로 바꿔 쓴 이름을 붙이자면 “대중”―은 현재 대변자가 없고 무력했다. 국가와 사회의 공동의 기구들―정부와 언론, 대학, 법원―은 부당한 손에 넘어갔다. 국민이 스스로 적대적 엘리트에게서 풀려날 수 있다면 구원과 해방을 맞을 것이었다. 287-8)<br>그와 같은 국민의 적들은 안팎에서 마지막 논지를 제공했다. 내부적으로는 좌우를 막론하고 자유주의자들이 국민의 적이었다. 그들은 대중이나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일했다. 자유주의자의 본질적인 도덕적 결함은 탐욕이나 무신앙 혹은 애국심의 결여임을 스스로 드러낼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는 자기중심적이어서 도덕관념이 없고, 신앙의 부름에 귀를 막고, 자신의 목표나 선호를 넘어서는 것에 그다지 강한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희생자 의식은 강경우파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함께 묶는 주제였다. 그들이 옹호한 국민처럼 강경우파 자신도 강탈자의 힘에 희생됐다. 강경우파는 대중을 대변했으나 그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대표성도 없는 자유주의자와 언론, 대학 같은 소수만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다수는 침묵했다. 그러나 약함 속에 강함이 있었다. 억압은 스스로 패배하고 결국 선이 이길 것이었다. 미래에 정당성이 입증될 정직한 수난이라는 개념에는 유서 깊은 종교적 계보가 있었다. 288-9)<br>10장 사상과 사상가들: 초자유주의적 현 상태에 대한 찬성과 반대<br>비타협적인 우파가 보기에 현상 유지 보수주의는 그 자체의 실패에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경제적, 문화적 파멸은 불가피했다. 그들의 세계주의는 유토피아적이었다. 그들의 너그러움은 부식성이 있었다.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보통 거기까지였다. 우선순위는 논란을 빚었다. 지정학적 반세계주의자들은 국가를 가장 우선하기를 바랐다.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은 병든 문화를 치유하거나 버리려 했다. 대체로 좋은 삶의 방식에 관한 도덕과 사상을 포함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자 중 누구도 뚜렷한 대안들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두 유형의 보수주의자들을 이어주는 지점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집착했다. 양쪽 다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를 경시한다고 보았다. 경제적 세계주의는 국가를 사회적으로 공동화했다. 윤리적, 문화적 민주주의는 국가를 도덕적으로 침식했다. 원인이 어느 쪽이든 비타협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독일의 계간지 『투물트』의 표현을 쓰자면 “합의 파괴자”들이 됐다. 299)<br>사람들이 말하려는 것을 자유주의 정통이 억누르고 검열한다는 강경우파의 주장에는 대중에 관한 것과 역사에 관한 것이 있다. 대중과 관련된 연성 검열 혐의는 미국에서 일반적이다. 그것은 사실상 자유주의 정통이 “대중”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된 주장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더 일반적이다. 그 주장은 자유주의적 정통이 과거를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1933~1945년 독일과 1940~194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수치심이 국가의 역사에 관한 왜곡되지 않은 인식을 막고 있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하나의 국가는 과거에 관한 공유된 인식으로 뭉치므로 과거를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그 국가를 손상하거나 부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1945년 이후 독일과 프랑스의 신우파는 국가의 전통에 느끼는 자부심이 신나치주의나 은밀한 패탱주의라는 혐의를 벗도록 무죄 선언을 해야 했다. 강경우파는 과거의 불명예가 더는 현재의 논란에 암운을 드리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305)<br>비자유주의적 경쟁자들이 가하는 지정학적 위협과 자유주의적 현대 자체가 초래한 지구적 위협에 대한 비타협적인 우파의 지적 불만들은 심각한 걱정거리라기보다 국부적인 골칫거리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들은 1890년대 이후 늘 되살아나고 늘 불신받는 익숙한 논지와 태세를 재연하고 있었다. 자만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는 그 모든 것에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염려할 수 있다. 강경우파 비판 중 하나의 전체로 통합되는 것은 별로 없다. 논리정연하게 대안적인 정통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적 자유주의에 명백한 결함과 이행되지 않은 약속들이 있다면, 그리고 정치적 중도에 거침없고 명료한 옹호자들이 없다면, 강경우파가 주장하는 각각의 논점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몇 차례 사소한 감염병에 걸리면 그 각각은 치료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위험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것들은 함께 작용해 체계적 위험이 된다. 312-3)<br>맺음말: 우파의 선택<br>포퓰리스트와 자유지상주의자가 뒤섞인 강경우파는 고대의 키메라처럼 엄밀히 말하면 존재할 수가 없다. 포퓰리스트는 배타적인 국민으로서 “우리”를 위한 복지 확대를 원한다. 그들은 의회와 선출된 대표자들의 목소리를 줄이고 자신들의 직접적인 발언권은 늘리기를 바란다. 전문가들과 이른바 엘리트의 목소리도 줄이고 싶어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복지자본주의를 축소하거나 완전히 버리기를 바라며, 무지한 유권자들에게 발언권을 더 많이 주지 말고 더 적게 주기를 원한다. 한쪽은 자국 내 피난처를 요구하고 다른 쪽은 세계 시장의 권위를 중시한다. 양쪽 다 안전을 약속하나 방식은 달리한다. 기업과 은행들은 간섭받지 않을 자유와 자신과 자산을 원하는 곳으로 옮겨갈 자유를 보장받는다. 사람들은 열망했던 익숙한 삶을 약속받는다.&nbsp; 좌우를 막론하고 흔들리는 중도의 정치인들이 둘 중 어느 약속도 실제로 이행될 수 없고 서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 삼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 것이다. 33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18/9/cover150/e7125320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618094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점심</category><title>만주족의 역사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 [만주족의 역사 - 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61506</link><pubDate>Mon, 29 Jun 2026 07: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615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5319&TPaperId=1736150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21/0/coveroff/897199531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5319&TPaperId=173615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만주족의 역사 - 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a><br/>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지음, 양휘웅 옮김 / 돌베개 / 2013년 03월<br/></td></tr></table><br/>1장. 만주족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모순&nbsp;<br>"주지하듯이 청조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가진 존재이자 세계적인 문화적 역량을 갖춘 국가였다. 청조를 ('왕조'가 아니라) 제국으로 이해하는 것은 청조의 문화적 다양성과 정치적인 복잡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만주족을 민족적인 호칭으로서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다 하더라도, 통치계층의 혈통은 만주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복자 엘리트들은 많은 기원을 가진 민족들로 섞여 있었다. 한인과 조선인, 몽골인, 튀르크인, 만주 일대의 퉁구스인, 그리고 후대에는 중앙아시아인까지 여기에 포함되었다. 일찍이 중국 북부 일대를 정복한 1640년대 당시의 침략군인 청군의 구성을 보면, 극소수의 만주족과 날로 늘어가는 한족 출신 또는 한족 태생의 사람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 제국과 그 정책을 '만주족'의 것으로만 뭉뚱그려 묘사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또 19세기에 중국이 겪은 어려움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억지 해석을 내리려는 것이다."(34-6)<br>2장. 샤먼과 ‘씨족’: 만주족의 기원<br>"엄격하게 말해서 1635년 이전에는 어떠한 만주족도 없었다. 1635년은 건국 준비 단계의 청 제국에서 추종자들의 상당수가 앞으로는 새로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될 것임을 반포한 해였다. 그해에 만주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대부분은 과거에 만주에 살았던 사람들, 특히 당대唐代(618~907) 이래 중국을 기반으로 한 제국들에게는 여진족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그 조상이었다." "청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수 세기 동안 만주에 살았던 여진족과 '만주족'을 구분하려는 청조의 분명한 계획에 따라, '만주족'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정치적인 고려는 제쳐놓더라도 새로운 민족적 감정의 형성에는 약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때까지 여진이란 명칭은 지리상의 용어로 널리 퍼져 있었을 뿐, 문화적으로는 매우 이질적이었으므로 옛 이름에는 더 이상 어떠한 실제적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시대에 나타나 계속해서 그 면모를 보인 만주족의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생활과 근본적인 연속성을 드러냈다."(46-7)<br>"금 제국의 관료체제는 거란의 관료체제와는 거의 유사성이 없었는데, 유목사회와 정주사회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차이에서 그 부분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란과 몽골은 적어도 관료정책에서는 자기 민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목생활의 원칙에 대한 강한 애착을 두었고, 전통적으로 분할된 정치구조에 대해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관료적·문학적 성취와 사회적 신분이나 업적을 연결시킴으로써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현상을 탐탁찮게 생각한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거란족은 요조 아래에서 거행되는 시험에 참여하는 것이 조서로 금지되었고, 원 제국의 대부분 사람들에게 시험 응시의 기회가 유보되었다. 그러나 여진족의 경우, 2개의 언어로 된 시험을 확립하고 해당 민족들에게 시험의 참여를 장려하려고 공식적으로 시도했다. 이것은 매우 다른 국가적 대처법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관례는 모두 청 제국 관료체제의 전신이었다."(57-8)<br>"금 제국의 여진족이 만주 지역과 중국 북부를 통치한 때인 12세기에는 이미 근대 만주어의 단어 '무쿤mukūn'의 원형이 되는 단어가 사회적 협력체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회적 협력체는 확장된 형태의 종족과 매우 흡사했던 것 같다." "누르하치의 통일전쟁에서 무쿤은 다시 기본적인 조직단위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누르하치가 동북쪽으로 팽창하며 마을을 합병하고 마을의 족장을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잘 작동되었다." "정복이 확대되고 팔기에 대한 행정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무쿤의 지배력이 느슨해졌다. 이것은 대략 백여 년에 걸친 과정이었다. 결국 만주족의 대다수가 불완전하나마 봉급을 받는 주둔군으로 중국에 정착했을 때 무쿤 본래의 결속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만주족은 무쿤의 유대의식을 주로 조상의 제휴관계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서 가리키는 조상은 대체로 누르하치 시대보다 더 앞선 시기의 사람들은 아니며, 많은 경우 중국을 점령한 시기 이전의 사람들도 아니다."(62, 66-7)<br>"샤먼shaman은 정신적인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여,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인 공간을 여행하고 그곳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샤먼은 병, 가뭄, 또는 동물의 이주를 일으키는 초자연적 힘을 인식하고 이에 개입할 수 있었다. 사냥이나 호전파 일당의 성공을 보장하는 샤먼의 능력 때문에 향촌과 종족의 지도자들은 필수적으로 샤먼과 친밀하게 지내야 했다." "무쿤은 수호신을 가졌으며, 샤먼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위해 그러한 수호신과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무쿤과 영적인 수호신 사이의 관계는 모든 구성원에게 강력했지만, 족장에게 특히 강했다. 족장의 지위는 샤먼의 승인에 달려 있었기에 족장과 샤먼은 협력하여 일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여진족의 건국신화는 자기들의 전형적인 초기의 전쟁지도자 자체가 샤먼이었다고 주장한다." "청조 내내 황실의 황족은 샤머니즘적인 일련의 의례를 발전시켰다. 18세기에는 조정에서 주술적인 의례를 다룬 일련의 총서 편찬을 명령할 정도였다."(70-1)<br>3장. 누르하치의 수수께끼<br>"1618년 누르하치가 공식적으로 명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는 하늘에 무속적인 맹세를 하면서 우선 부친과 조부의 죽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명조 당국의 국경 침범에 대한 비난이라는 배경에서 발생했고, 여섯 가지의 다른 큰 비난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이 일곱 가지의 비난은 '칠대한'七大恨으로 뭉뚱그려져 알려져 있다. 칠대한의 일곱 조목은 모두 여진족의 영토에 뚜렷한 경계가 존재하고, 그 경계 안에서 여진족은 명군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자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1582년부터 1616년까지 누르하치가 여진족 및 그 주변의 여러 민족과 벌인 전쟁은 그 당시 그의 삶을 지배했다. 그 전쟁의 주요 원인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누르하치가 무조건 가차 없이 부친과 조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먹고 특히 그 과정에 일조한 여진족 첩자들을 색출하여 없애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오로지 후대의 서술에서 나타난 것이다."(106-7)<br>"누르하치의 권력이 늘어남에 따라 그는 수도를 계속해서 이동시켰고, 그 이동방향은 끊임없이 서쪽을 향했다. 누르하치가 명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분배할 수 있는 부가 극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현재의 수준이 제약될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칠대한七大恨을 표명한 원래 의도는 분명 누르하치의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 그 지역의 독립적인 추장들과 25년 이상 전쟁과 협상을 거친 이후 그가 결집시킨 거대한 여진족 연맹은 어느 정도 흐트러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침체의 압박, 명조 침략자의 경작 방해행위, 누르하치가 강제로 동맹관계를 맺은 동부 여진연맹에 남아 있는 분노를 잘 활용하는 한족 관료들의 약삭빠른 용병술 등이 이런 위험에 해당했다. 얼마간 누르하치는 북경으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관직과 거래의 독점권을 구걸하는 행위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1609년 이후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완전히 멈춘 것 같다."(131-2)<br>"누르하치는 요동에서 새롭게 벌이는 전쟁 활동과 보조를 맞추고, 명조가 반박할 수 없을 만한 조건으로 자신의 선전·선동을 밀어붙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단언한 대로 후금은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 제국의 합법적인 계승자였다. 그들은 같은 지역에서 살던 같은 민족이었다. 또한 같은 언어와 같은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같은 씨족이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이제 명조를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이는 여진족이 세운 금조가 1127년에 송조를 중국 북부에서 몰아낸 후, 그들을 남송南宋이라고 언급한 사레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비유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역사적인 타당성 외에도 누르하치의 야망을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명조가 누르하치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언급한 구도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명조는 후금의 여진족과 금 제국을 세운 여진족 간의 역사적 관계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점을 기념하기 위해' 북경 근거의 방산房山에 있는 금조의 황릉을 훼손했다."(132-3)<br>"누르하치는 자신의 휘하에 1만 명의 남성을 모았다고 알려졌으며, 말과 무기도 비교적 잘 갖추었다. 첫 번째 공격지점은 무순이었다. 이 공격을 통해 누르하치는 자신의 도전을 뒷받침할 힘을 극적으로 증가시키기에 충분한 인력과 무기를 확보했다. 확보된 무기 중에는 그곳의 명군이 보유하고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작한 대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르하치를 진압하려는 명 제국의 시도는 효과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1619년 여름에 무순의 동쪽인 사르후Sarhū에서 첫 번째 명조의 원정군을 격퇴했고, 9월에는 자신의 동쪽에 있는 훌룬 집단 중 여허의 정치적 독립을 궤멸시켰다. 1621년 5월에 누르하치군은 명조 요동의 행정수도인 심양瀋陽을 차지했다. 그는 그 도시의 이름을 묵던Mukden으로 고쳤다. 그는 요동의 동쪽에 자신을 위해 새로운 처소와 행정 중심지를 건설했지만, 1625년에 묵던으로 영구히 이주했다. 묵던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이끌게 될 국가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135)<br>"요동 정벌은 청 제국의 건설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그것을 '탄생'이 암시하는 무한한 에너지, 희망, 야망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소 다르게 보였음이 틀림없다. 1621년에 요동 대부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누르하치는 거의 62세였다. 그는 초년을 제외한 인생의 3분의 2가량을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보냈고, 때로는 자신의 가족구성원들과도 전투를 벌였다. 자신의 통치를 소규모 촌락 집단에서 명조의 변경인 광활한 요동 지역을 포함한, 만주 전역으로까지 확대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건설한 국가는 독점적인 경제권의 집행과 그 때문에 생겨나는 부의 통제를 기반으로 설립된 지역 정권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요동을 장악하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적 패권에 대한 인정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가 더 많은 일을 하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140)<br>4장. 청 제국의 팽창&nbsp;<br>"몽골족이 중국에서 세운 원 제국처럼 청조는 청 제국의 지배층과 정복당한 백성을 구분했다. 조정과의 친밀성 면에서 만주족, 몽골족, 한군기인이 만주 지역에 있던 정복국가의 핵심집단을 형성했고, 중국 정복의 선두에 섰다. 종종 '러시아인'으로 불린 비교적 소수의 '알바진인'阿爾巴津人(Albazinians) 출신 기인과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키스탄 출신의 기인도 여기에 참여했다." "기인을 점령군으로 세운 데 대한 정치적·경제적 결과는 빠르게 느껴졌다. 정복 전에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기인들은 농산물의 생산자였으며, 그들이 불하받은 토지에는 세금이 매겨졌다. 요동에서도 홍타이지의 정책은 기인들이 자신의 전투에 동원될 때에만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을 때에 그들은 자활하기 위해 농지·강·숲에서 일해야만 했다. 만주 지역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관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기인들은 더는 생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봉급을 받았고, 불하받은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생활했다."(151-3)<br>"1700년대 기인의 상황에 대한 제국의 고민거리는 만능 정복자 엘리트를 창조하려고 한 한때의 원대한 계획이 강희제 치하에서 비참한 종말로 끝났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래에서 오스만리osmanli 계층이 겪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만주족, 몽골족, 한군기인은 모두 다부지고 지략 있는 병사이자 충분히 교육받은 박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새롭게 정복한 영토를 통치하고 안정시켰고, 필요에 따라 무관과 문관의 직책을 넘나들었으며, 기인 백성이 자기 절제와 수양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홍타이지는 정복한 한족 관리들을 불신했고, 그래서 정부의 민정 사무를 집행할 수 있도록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기인 계층을 양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인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위험한 공부에 투자할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들은 출세로 나아갈 매력적인 방안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전장에서 복무하는 것은 더욱 빠르고 좋은 보상을 가져다주었다."(154-5)<br># 오스만리osmanli : 오스만 제국의 근간이 되는 민족<br>"18세기까지 청 제국은 정복왕조의 체제였으며, 그들의 자원은 침략과 점령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희제와 옹정제 치하에서 이 과정은 거의 완성되었다. 그들은 도로와 급수시설을 보수하고 통행세를 완화하며 비교적 낮은 임차료와 금리를 명령하고 명말의 농민반란으로 황폐해진 지역의 재정착을 위해 경제적 우대책을 만들어주는 등, 중국 경제 및 인구의 회복을 가져왔다. 17세기가 끝난 이후 한때 명조에 위협을 준 서몽골은 군사적·정치적 타격을 받아 제압되었고, 18세기 중반에는 서몽골, 중앙아시아, 티베트가 모두 청조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동부 유라시아 대륙의 통합이 재건되어 사마르칸트에서 조선까지 이어지는 육로교통이 부활했다. 물론 그들의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은 13세기 몽골 치하에서 이룩한 성과의 희미한 흔적이었다. 청조는 '유교적' 표현방식이라고 평가받는 것들로 자기들을 표현하는 법을 신속히 배웠고, 18세기 중반까지 관료 엘리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을 끌어들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188-9)<br>"청조는 황제의 권력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제국의 국격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러 문화를 자기표현의 방식에 포함시켰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세계 제국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권리와 자기들의 정통성을 지탱시켜주는 많은 종교적 근거를 끌어냈다. 또한 만주기인으로부터 정복을 수행할 군사적 힘과 기술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청조 조정은 만주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정치적 전통에 접근할 권리를 유지했다. 한족으로부터는 관료적 기술을 끌어냈고, 중국의 지배와 조선과 베트남에 대한 도덕적 지도력을 정당화하는 유가의 도덕률도 이끌어냈다. 티베트인들로부터는 보편적인 불교의 지도자들만큼이나 초월적인 권력의 이양을 이끌어냈다. 이슬람교도들로부터는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지배할, 추가적인 군사적 힘을 이끌어냈다.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는 수학과 의학에 대한 관념적인 통찰력은 물론이고, '화약 제국'의 실용적 기초 기술을 배웠다. 이를 통해 유목민인 몽골과 투르키스탄의 군대를 지배할 수 있었다."(189-90)&nbsp;"제국의 초기에 팽창과 안정이 비상하게 결합하는 대목에서 강희제의 개인적 성품은 중요했고, 그 점이 그러한 제국의 확고한 기초를 다진 것에 대한 가장 큰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중국 국내·외 모두에서 매력과 강압이 결합한 그의 태도는 만주족 귀족, 한족 관료, 한족 백성, 몽골족 사이에서 그를 핵심적인 자리에 자리매김하게 했고, 이는 그의 제국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했다. 그가 성공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근거는 없다. 그의 습관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쓸데없이 국가에 가혹함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조부인 홍타이지처럼 역사를 이해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배우지 않는 사람은 남들한테도 역사를 돌아보지 않게 함으로써 지탄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갈단 치하의 몽골 지역에 대해서도, 오삼계가 다스리는 운남에 대해서도, 그는 누르하치가 명조 제국의 구조를 무너뜨린 원동력이었던 지역적 열의의 조직화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192)<br>5장. 건륭제의 황금시대<br>"자신을 만물의 군주이자 끝없이 도덕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 설정한 건륭제의 신념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런 신념의 요소라든가 그런 신념을 표현한 어휘 대부분은 전륜성왕轉輪聖王(차크라바르틴čakravartin)이라는 불교적 이상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이름으로 거행된 정복을 통해 만물의 구원이라는 다음 단계를 향해 세상을 움직이는 지상의 군주이다." "불교에 대한 건륭제의 보편적인 관심은 티베트와 몽골 지역을 결속시킨 종교적·정치적 이상의 집합체에 근거했다. 누르하치 시대 이래로 몽골인을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길이 티베트 출신의 라마승을 후원하는 데 달려 있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알탄 칸Altan Khan이 이들 라마승을 몽골인의 정신적 지도자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청초의 황제들은 칭기즈 칸의 세속적 계승자로 나타나는 것에 대체로 만족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제국의 수도인 북경을 라마교 왕국의 정신적 수도로 만들려고 했다."(199-201)<br>"차크라바르티니즘čakravartinism(전륜성왕을 신봉하는 신앙체계)의 토대 위에 건륭제는 모든 문화를 아우르는 자신의 도덕적 권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한족 군주들에게 적용되는 구절대로 '북신'北辰(북극성)이었다. 그 밖의 모든 별들은 북신의 주위에서 움직이고, 북신 자체의 부동성은 모든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한다. 실제로 모든 문화를 후원하기 위해 홍력(건륭제)은 각각의 문화에 규격화, 즉 더욱 정확하고 정형화할 것을 권면해야 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의 문화적 광휘의 진수이다. 문화적 우상에 대한 모방, 양식화, 복제는 말 그대로 문화에 대한 그의 보편적 표현을 이룩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실행의 이면에 있는 목적은 민족들 자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묘사적인 지식을 발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논의되고 있는 여러 문화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에 대한 과시는 언제나 모든 문화가 집중하는 중심지로 황제 자신의 자리를 지목했다."(205-6)<br>"건륭조 조정은 몽골과 티베트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과 만주족에 대해서도 특별한 이념적·전략적 관심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만주족은 청조로부터 새로운 이상에 문화적으로 순응하라는 기이한 압력의 부담을 받았다. 엄격하고 진부한 문화 유형에 대한 건륭제의 열정은 만주족에게 강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765년 이후 건륭제는 기인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과거시험에서 거둔 일족의 성과를 보고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강희제는 자신을 위대한 기인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기인의 발전을 위해 그들 앞에 자주 자신의 문학적·군사적 재주를 입증했지만, 건륭제는 기인에게 매우 다른 방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며, 모든 문화를 사랑하는 예술의 애호가이자, 만능의 황제로서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기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 말타기와 활쏘기에 전념해야 했다."(214, 222-3)<br>"새로운 군사적 임무에 초점을 맞춘 기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국가는 그들의 경제적 고민을 완화해주고자 했다. 건륭연간 초기에는 한족에게 팔렸던 기인의 토지 상환을 위해, 약 1백만 량에 해당하는 은자銀子를 지급하라는 명령이 네 차례 내려졌다. 몇 년 안에 기인 군관들은 그렇게 받은 토지를 모두 다시 팔았다. 국가에서 최고 가격으로 상환해준 후에, 그 땅들은 새로 생긴 빚을 청산하기 위해 투매가격으로 다시 팔렸다. 이러한 정책은 18세기 중반 이후 폐기되었고, 홍력은 북경에 거주하는 많은 수의 기인을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북경 또는 그 주변 지역으로 돌아왔고, 그들은 부득불 그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채 살았다. 1763년 군사행정 조직은 기인의 생존에서 가장 큰 장애가 그들을 다른 사회와 분리시킨 장벽이었음을 인식했다. 그해에 기인들은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지만, 개인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주방 밖에서 생활하기 위한 허가를 자유롭게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225-6)<br>"1784년 이후 '광동 체제'(Canton system)로 알려진 관례가 확정되었다. 광동 체제란 유럽의 상인들이 광주廣州(즉 광동Canton)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 그들은 광주에서 중국 상인을 통해 보장과 보호 및 혜택을 받았으며, 모든 세수는 광주에 상주하는 대표를 통해 황실 가문에 직접 제출되었다. 이 행방총관은 유럽인들에게는 '호포'hoppo로 알려져 있었다. 이 체제가 독특하며 해상을 기반으로 한 자기들 제국과는 전혀 다른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 유럽인들에게 광동 체제는 비이성적으로 보였다. 미국이라는 식민지를 상실한 이후, 영국은 특히 자기들의 시장이 감소할까 두려워했다. 영국과 일부 미국 상인들은 중국이 개척되지 않은 거대한 시장이라고 믿었다. 고래의 지방으로 만든 등유, 인도 또는 미국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 런던 또는 코네티컷에서 제조한 총기류의 잠재적인 소비자가 중국에는 수억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오로지 광동 체제뿐이었다."(241-2)<br>6장. 스러져가는 제국의 최후&nbsp;<br>"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남경조약(1842)은 그야말로 1840년대 내내 이어진 일련의 조약 중 첫 번째에 해당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조약으로 청나라 해안의 통치권과 그 내부의 통제력 대부분은 결국 상실되었다. 광주의 지방 관료들은 조약 이행을 지연시킨 반면, 조정은 희생양을 찾아내려고 애썼고 영국군과 맞닥뜨렸던 중국 남부와 중부의 각 성 기인들에게서 쉬운 목표를 찾았다. 군관들은 반역죄와 비겁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며, 종종 최고 형벌을 받았다. 기인들은 총체적인 무능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기인들의 죽은 시신을 묻어주고 그 시신을 기념하기 위해 걷던 특별기금도 거부되었다. 주방駐防에 할당된 토지는 종종 조정에 의해 팔렸다. 중원 정복 이후 언제나 침묵으로 고난을 견디지만은 않던 기인들은 공공연히 이의를 제기했다. 1850년대에는 폭동이 빈번하게 증가했다. 처음에는 만주 지역에서, 다시 중국 남부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근근이 점령하고 있던 신강의 주방에서 폭동이 일어났다."(267)<br>"처음에 태평군은 하카Hakka(객가客家, 중국 북부에서 넘어온 이주자들)의 배타주의와 신도를 끌어들이는 태평천국 교리의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에 의지한 것 같다. 그러나 신도 수와 힘이 증가하자, 그들은 설교와 운영방법을 바꾸었다. 그들은 하카를 모집하여 다수인 한족과 상대하는 방식을 멈추고, 한족을 포섭하여 만주족과 맞서기 시작했다. 태평군의 우주론으로 볼 때 만주족은 악마와 같은 힘이 일찍이 발현된 존재였다. 태평군과 청군이 벌일 내전의 결과는 하느님이 중국을 통치하느냐, 악마가 중국을 통치하느냐를 결정하는 전투였다. 태평천국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그 여파는 중국 동부와 북부까지 확산되었다. 극심한 공포감이 태평군의 공격보다 더 먼저 들이닥쳤다. 일반 주민들은 태평군의 노동조직과 군사조직에 징집될까 두려워했고, 엘리트층은 이질적인 신이 말하는 기이한 관념, 전체주의적 통치, 신체가 튼튼한 여성 등에 대한 공포감으로 움츠러들었다. 지역의 관료와 지주들은 자기방어 작업을 주도했다."(272)<br>"1856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아편전쟁 종결 이후 체결한 조약의 조항들을 중국 측이 이행하지 않자, 유럽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동료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 남경을 방문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보낸 보고서는 충격적이었고, 신앙심이 깊은 신도들을 낙담하게 했다. 태평군이 무엇을 실천하고 있든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었고,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성경이 아니었다." "유럽 측은 매우 신속하고 잔혹한 일련의 해안 공격을 결정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애로호 사건'이라고 불리는 2차 아편전쟁이다. 1860년에 그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여러 지역에서 온 용병들과 함께 태평군과 전투를 벌이는 청군에 합세했다. 다국적 군대를 조직하려는 시도는 때때로 시끌벅적했고 때로는 애처로웠지만, 유럽의 무기와 자본의 투입은 1860년대에 태평군과 염군의 반란 모두를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76-7)<br>"태평천국전쟁 이후의 회복 기간에는 청 제국에 근본적인 구조상의 변화가 있었다. 군사집단과 그에 협조하는 문관들이 지배하던 정복적 성격의 정권 대신에, 이제 개혁적인 귀족과 무관, 독립적인 권력을 가진 지방의 총독과 순무, 몇몇 외국인 고문관으로 구성된 컨소시엄 형태에 의해 지배되었다. 분권화된 통치형태는 내전 이후 시대의 특징이 된 지방 상황의 극심한 변화와, 지방의 개선을 가져올 수 있도록 지방 재정을 확보할 필요성에 잘 맞았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관계의 상황 속에서 청조는 강하고 중심적이고 통일된 지도력이 부족했다. 청조 정부는 가중되는 외국의 도전(특히 일본)과 늘어나는 배상금, 영토 손실, 불가피하게 그에 잇따르는 국경의 붕괴에 직면하여 속수무책이었다. 1860년대부터 청 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권력지대로 발전했고, 이 권력지대 내에서 지휘권은 지방의 총독과 순무에서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이양되었다. 청조 정부는 결국 의례상으로만 이들을 승인할 수 있었다."(296)<br>"오스만 제국의 영토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혜택받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청조를 식민지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땅도, 청 제국의 땅도 식민통치국의 힘에 의한 발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착취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재력을 가졌고, 따라서 착취는 식민화처럼 대가가 크고 위험한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동맹이나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서 잘 이루어졌다. 두 제국이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해주겠다고 마음먹은 유럽세력(중국의 경우에는 미국)으로부터 결국 유라시아의 '병자들'이라는 조롱을 받고, 자기들을 지켜주겠다는 국가에 맞서 자신들을 지킬 수도 없었으며, 자기들보다 훨씬 작지만 더 역동적인 국가에 시장과 원료, 전략적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낮은 단계의 생존을 유지하는 국가로 남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청조 및 오스만 왕조의 존재 자체와 외국세력들의 간섭은 두 제국과 외국세력에 대해 늘어가는 대중들의 거부감에 불을 지폈다."(310-1)<br>7장. 에필로그: 20세기의 만주족<br>"〈태평천국전쟁 없이 만주족에게 어떤 근대적인 정체성이 있었겠느냐?〉라는 의문은 역사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만주족 본인들에게도 남아 있는 문제이다. 처음으로 태평군은 민족적인 어휘를 도입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중국인에게 '한족'이란 단어를, '만주족'에게는 '만족'을, 몽골족에는 '몽족'이라는 근대적인 용어를 제시했다. 그들은 민족을 구별했을 뿐 아니라, 그런 구별을 행동으로 옮겨 만주족이나 만주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도살했다. 이러한 압박 아래에서 만주족 기인들은 신속히 자기들을 우선은 만주족으로, 그다음은 기인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제국을 파괴하고 처음으로 근대적인 중화민국을 수립한 민족주의 혁명에서도 반복되었다. 만주족에 대한 민족적인 저주는 1903년 사법 개정 이전에도 청조의 백성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제국을 비난할 수 있었던 개항장(치외법권 지역)에서 쏟아져 나왔다. 1895년 일본에게 패배한 여파로, 만주족의 결함은 크게 비난받았다."(316)<br>"민족주의 운동이 주창한 의도적인 민족차별의 정치적 타당성이 무엇이든 간에, 만주족이 치르는 희생은 엄청났다. 1911년에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에 따라, 민족주의자들과 지방의 비밀결사 출신인 그들의 지지자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민족적 증오심을 입증했다." "1912년 2월 전쟁의 최종 합의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1924년에 폐지된) 그 조항이 준수될 것이라고 기대한 만주족은 거의 없었다. 소수의 만주족은 만주 지역으로 돌아갔다. 만주 지역의 충성스러운 보황파保皇派 군벌들은 그들이 안전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만주족은 자기들에게 낯선 지역으로 도주할 수단도, 의지도 없었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가족사에 관한 질문에는 거의 대답하지 않았으며,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등 좀 더 쉬운 전략을 택했다. 현재 만주족의 인구 비율은 전체 중국 인구 중에서 100명 중 1명에 약간 못 미치는 실정이다."(32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21/0/cover150/89719953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210091</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시간의 기원 / 토마스 헤르토흐 - [시간의 기원 - 스티븐 호킹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이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54101</link><pubDate>Thu, 25 Jun 2026 08: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5410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92534210&TPaperId=173541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9/16/coveroff/e99253421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92534210&TPaperId=1735410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의 기원 - 스티븐 호킹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이론</a><br/>토마스 헤르토흐 지음, 박병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01월<br/></td></tr></table><br/>1장 역설<br>우주의 팽창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로, “물리법칙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곧 물리법칙의 일부는 수학적 필연성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나타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우주가 빅뱅의 열기에서 태어난 후 식는 과정에 관여했던 법칙도 마찬가지다. 입자의 종류와 힘의 세기에서 암흑 에너지의 양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생명친화적 특성은 출생증명서처럼 기본 구조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빅뱅의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태초 진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 여기에 잔뜩 고무된 끈이론학자들은 방대한 공간에 수많은 우주가 섬처럼 고립되어 있고, 우주마다 다른 물리법칙을 따른다는 다중우주 가설을 떠올렸다. 다중우주 지지자들은 궁극의 이론의 장례식을 치르는 대신, 우주론을 일종의 환경과학으로 전환하여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했다.(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어쨌거나 환경은 환경이다!) 42-3)<br>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숨어 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될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 문제란 “다중우주조차 플라톤식 논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중우주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우주에 적용되는 ‘메타법칙metalaw’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메타법칙으로는 수많은 우주 중 우리가 어떤 우주에서 살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다중우주의 메타법칙과 우리 우주의 법칙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는 한, 다중우주론은 검증 가능한 결과를 단 하나도 내놓지 못한 채 역설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다중우주론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이론이어서 우리 우주가 어디쯤 있는지 알 길이 없고,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다. 우주가 여러 개라면 우리 우주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 방대한 공간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 당연히 궁금해지는데, 다중우주 가설은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45)<br>‘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가 우주론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3년의 일이었다. 그해에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코페르니쿠스 기념학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브랜든 카터Brandon Carter(그는 호킹과 케임브리지대학교 동문이다)는 쟁쟁한 물리학자들과 우주론학자들 앞에서 인류 원리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지동설이 알려지고 400년이 흐른 후, 카터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새삼스럽게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면, 자신이 관측한 우주를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다. 우리가 생명친화적인 우주를 관측하게 된 진짜 이유는 자신이 ‘그런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생명을 위한 최적의 조건은 다중우주 전체에 걸쳐 인간과 무관하게 적용되는 인류 원리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수많은 다중우주 중 생명친화적 조건을 구현할 우주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45-6)<br>다중우주의 열혈 지지자들은 ‘설계된 우주’의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두 번째 답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답은 존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수학적 원리가 “아주 운 좋게” 생명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는데, 인류 원리로부터 제시된 두 번째 답은 “우주가 미리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중우주의 지역적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흩어져 있는 우주 중에서 우리 우주가 인류 원리에 의해 생명친화적인 환경을 갖춘 우주로 선택되었고, 이 선택의 필연적 결과로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인류 원리에 기반한 세계관은 오래전부터 과학계에 회자되어온 ‘이원론dualism’을 연상시킨다. 물리법칙이나 메타법칙은 인간에 의해 발견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물리계와 물리법칙(또는 메타법칙)을 연결하는 신비한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류 원리라는 주장이다. 47-8)<br>대부분의 이론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생명친화적 특성을 탐구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 영역을 넘어선 문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호킹은 추상적인 수학법칙이나 메타법칙만으로는 설계된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없다고 믿었다. 호킹이 추구하는 새로운 우주론에서 수학은 주인이 아니라 번잡한 일을 거드는 하인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호킹은 생명친화적 우주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물리학과 우주를 연구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말 많고 탈 많은 인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류 원리가 “우주론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올 주인공”이라는 주장에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호킹은 인류 원리를 하나의 연구 수단으로 도입했을 뿐, 그 질적質的인 부분까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생물학처럼 “과거를 들여다보는 과학”은 질적인 예측을 다량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인류 원리는 ‘예측 능력’과 ‘반증 가능성’을 철길로 삼아 잘 달려온 과학 열차를 사정없이 탈선시킨다. 48-9)<br>사고실험은 물리학 레스토랑에서 호킹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호킹이 이룩한 세 가지 획기적 업적은 정교하게 설계된 사고실험의 결과물이었다. 첫째는 고전 중력이론을 이용하여 빅뱅의 특이점singularity을 찾은 것, 둘째는 중력을 준고전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블랙홀의 복사를 예견한 것, 셋째는 우주의 기원에 또다시 준고전적 중력이론을 적용하여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을 제안한 것이다. 블랙홀 역설은 ‘단순한 학술적 관심사’에 머물 수도 있지만(호킹 복사는 영원히 관측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중우주 역설은 천문 관측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다. 이 역설의 중심에는 생명계와 관찰자, 물리적 우주의 복잡다단한 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호킹은 양자우주론을 통해 이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다중우주 역설은 그의 길을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우주론의 지도를 바꾼 그의 마지막 양자우주론은 그가 물리학계에 남긴 네 번째 선물이었다. 52-3)<br>2장 어제 없는 오늘<br>르메트르는 우주의 팽창이 일반적인 ‘폭발’과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폭발에는 ‘시작점’이라는 곳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주 공간에서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했을 때, 그 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관측자에게 보이는 광경과 도망가는 관측자에게 보이는 광경은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팽창하는 우주는 그렇지 않다. 팽창하는 우주에는 중심도, 가장자리도 없다.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팽창하기 때문이다. 즉, 팽창하는 우주에서 폭발하는 것은 공간 자체다. 르메트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운이나 은하는 풍선의 표면에 붙어 있는 미생물과 비슷하다. 풍선이 팽창하면 모든 미생물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미생물들이 일제히 자기를 중심으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모든 미생물은 자신이 팽창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슬라이퍼와 허블이 관측했던 적색편이는 공간 자체가 팽창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71)<br>아이러니한 것은 우주팽창설을 주장했던 르메트르가 아인슈타인의 상수 λ에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우주상수가 정적인 우주를 보장하는 항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에딩턴도 르메트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우주상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뉴턴의 고전이론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르메트르가 우주상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정적인 우주를 만들기 위해 도입했다가 철회한 λ가 1장에서 언급했던 “생명체의 거주 가능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λ의 값을 잘 조절하면 별과 은하, 행성이 탄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충분히 길어지도록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르메트르의 그래프에서 거의 수평선을 따라 변하는 우주에 해당한다(르메트르가 계산을 끝까지 수행했다면, 이런 우주도 결국은 가속 팽창을 겪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73-5)<br>상대론적 우주론은 우주에 시작이 존재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시간이 0인 순간(르메트르의 “어제 없는 오늘”)은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인 특이점을 낳는다.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도 이 지점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빅뱅은 상대론적 우주론의 초석이면서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우주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있다. 빅뱅이 일어나던 순간부터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면, 그 전에 일어난 일을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빅뱅을 일으킨 원인을 추적할 수도 없다. 상식적인 우주에서는 원인이 결과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시간의 시작점에서는 인과율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아인슈타인(그리고 에딩턴)과 르메트르가 벌인 논쟁의 핵심이었다.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말 자체가 초자연적 존재를 연상시킨다”며 그와 관련된 논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77)<br>우주의 시작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의 관점은 결정론적 우주관이 진하게 배어 있는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연상케 한다. 우주가 결정론을 따른다면 처음 탄생했을 때 향후 모든 진화 과정을 결정할 초기 조건이 존재해야 하며, 이 조건은 다사다난했던 진화 못지않게 복잡해야 한다. 특히 우주는 생명체의 등장을 허용했으므로, 동일한 수준의 생명친화적 조건이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변수가 처음부터 생명의 탄생에 유리한 쪽으로 세팅되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신의 행위”가 개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르메트르는 우주의 기원에 양자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인과율로 대변되는 결정론의 사슬을 끊었다. 르메트르는 (내가 아는 한) 최초로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연결지었다. 우주의 시작은 물리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이 법칙에는 양자이론과 중력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력은 빅뱅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 빅뱅은 양자이론으로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7-8)<br>3장 우주기원론<br>펜로즈의 논리에서 시간을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면 붕괴가 팽창으로 바뀐다. 호킹은 여기에 착안하여 팽창하는 우주는 과거에 특이점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호킹과 펜로즈는 “팽창하는 우주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서 최초의 별과 은하, 우주배경복사가 탄생하기 전으로 거슬러 가면 시공간이 휘어지다 못해 하나의 점으로 수축되는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주 초기에 특이점이 존재했다면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양변이 무한대가 되면서(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이면 물질의 밀도도 무한대라는 뜻이다) 이론의 기능을 상실한다. 물리학 이론이 제아무리 기이하다 해도, 무언가를 0으로 나누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계산기에서 임의의 숫자를 0으로 나누면 에러가 나는 것처럼, 임의의 물리량을 0으로 나누는 순간부터 모든 논리는 난센스가 된다. 그러므로 특이점은 일반상대성 이론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한계점에 해당한다. 특이점에서는 어떤 사건도 일어날 수 없다. 88-9)<br>펜로즈는 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시간이 블랙홀에서 끝난다는 것을 증명했고, 호킹은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되돌려서 ‘시간의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빅뱅이란 먼 옛날에 우주의 “씨앗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화되기를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싹을 틔웠다는 뜻이 아니라, 대폭발이 일어난 순간부터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특이점은 시간의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인 셈이다. 호킹은 프리드만과 르메트르가 제안했던 완벽한 구형 우주가 단순한 이론적 모형이 아니라, 상대론적 우주론의 결과로 얻어지는 자연스러운 형태임을 입증했다. 지구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박테리아는 약 35억 년 전에 출현했고, 지구의 나이는 이보다 조금 많은 46억 년 정도다. 빅뱅 특이점 정리에 의하면 136억 년 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나이가 지구 나이의 세 배에 불과하다니, 이 정도면 생각보다 꽤 젊은 편이다. 89)<br>오직 “실험으로 검증 가능한 자연의 법칙”을 찾고자 했던 파인만은 1940년대 말에 양자적 입자의 파동함수를 훨씬 직관적이고 실용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양자역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기본 아이디어는 고전물리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자를 파동이 아닌 알갱이로 간주하되, 그 입자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두 지점 사이를 연결하는 모든 가능한 경로를 동시에 지나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고전역학에서 입자는 시공간에서 단 하나의 경로만 지나갈 수 있다. 즉, 고전적 물리계의 과거는 단 하나뿐이며, 아무런 모호함 없이 정확하게 정의된다. 그러나 파인먼에 의하면 양자적 입자는 훨씬 포괄적이어서 다양한 과거를 갖고 있으며, 시공간의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할 때 “모든 가능한 경로”를 동시에 지나간다. 단, 각 경로는 할당된 확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입자가 A에서 B로 이동할 확률을 구할 때에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한 경로의 확률을 더해야 한다. 103-4)<br>호킹은 양자역학에 대한 파인먼의 접근 방식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아원자 세계에서 놀던 물리학자들은 파인먼의 새로운 이론 체계가 알려진 후 고향 땅을 벗어나 양자역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외관상 매우 낯설었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 존재했던 근본적 모순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파인먼의 경로합은 작은 물체와 큰 물체에 모두 적용된다. 그런데 큰 물체에 적용하면 다른 경로들보다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하나의 경로가 부각되고, 바로 이 경로가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얻은 경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인먼식 접근법을 수용하면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 다만 거시적 물체에서는 미시적 요동이 서로 상쇄된 후 끝까지 살아남은 단 하나의 경로가 고전적인 경로와 일치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미시 세계로 가면 극적인 상쇄가 일어나지 않아서 많은 경로가 최종 결과에 기여하게 된다. 105-6)<br>하틀과 호킹은 “초기 우주가 팽창하던 시기에는 시간 차원이 양자적 불확정성에 녹아든 상태였기 때문에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호킹은 “빅뱅 이전의 상황을 묻는 것은 남극의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면서 자신이 제안한 양자우주론을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이라 불렀다. 호킹의 무경계 가설에는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우주의 과거가 유한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즉 우주의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우주의 시작점을 찾겠다며&nbsp; 깔때기 표면을 개미처럼 아무리 기어 다녀도 절대로 찾을 수 없다. 깔때기의 둥그런 바닥은 과거가 끝나는 한계점일 뿐, 창조의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경계 가설에서 우주의 시작을 찾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그런 것은 양자적 불확정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108)<br>4장 재와 연기<br>우주는 완벽하게 균일하지 않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물질을 ‘인플라톤장inflaton field’이라 하는데, 인플라톤장은 양자장quantum field의 일종이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인플라톤장에도 양자적 모호함이 존재해야 한다. 즉, 특정 위치에서 장의 값을 정확하게 결정할수록 그 위치에서 장의 변화율은 불확실해지고, 장의 변화율이 불확실하면 미래의 장의 값도 불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양자장은 다양한 변화율과 값이 혼재된 상태다. 이것은 입자의 다양한 경로가 더해져서 파동함수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은 양자적 요동은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규모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일어나는 우주의 인플레이션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인플레이션 전문가들은 우주 초기에 일어났던 엄청난 팽창이 미세한 양자 요동을 증폭시켜서, 거시적 규모의 파동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123)<br>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 끝난 후 인플라톤의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바뀌었을 때, 뜨거운 가스로 가득 찬 우주에 인플라톤장의 요동이 발자국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우주가 인플레이션에서 탄생했다면, 복사 에너지의 온도와 물질의 분포에 작은 불규칙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후 우주가 서서히 팽창함에 따라 초기에 생겼던 잔물결이 우주 지평선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간이 만든 관측 장비에 포착되었다. 멀리서 일어난 파도가 해변가에 도달하여 피서객의 시야에 들어온 것과 비슷하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에 나타난 작은 변화가 인플레이션 이론의 예측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 분포를 여러 방향으로 추적해보면 뜨거운 지점과 차가운 지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위치에 따른 물질의 밀도 변화도 중요한데, 이로부터 ‘은하의 씨앗’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4)<br>인플레이션을 촉발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초기에 인플라톤장은 어떻게 에너지 언덕의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호킹의 무경계 가설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무경계 가설은 우주가 인플레이션에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창조의 순간에 시공간의 밑바닥이 완만한 곡면이었다는 것은 인플레이션 이론의 주장대로 신비한 스칼라 물질이 음압을 발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수 시간에 기초한 고전 우주론에서 음압을 발휘하는 물질은 초고속 팽창(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허수 시간에 기초한 양자우주론에서 음압을 발휘하는 물질은 시공간의 바닥을 구의 표면처럼 매끄럽게 닫아놓는다. 따라서 창조의 순간에 적용되는 무경계 가설과 창조 직후의 상태를 설명하는 인플레이션 이론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쌍둥이 프로세스’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으며, 인플레이션을 양자적으로 완성한 버전이 바로 무경계 가설이다. 130)<br>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은 가능한 한 작은 규모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초기 강도는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에 의해 결정된다.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이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면, 인플레이션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로 진행되어 공간은 엄청나게 커지고, 물질의 양도 풍부해져서 수십억 개의 은하가 탄생할 수 있다. 우리의 우주가 바로 이런 경우다. 이와 반대로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이 에너지 곡선의 깊게 팬 골짜기 근처에 있었다면, 인플레이션이 아주 얌전하게 시작되어 우주 공간은 은하가 생성되지 못한 채 거의 텅 비었을 것이고, 자체 중력으로 다시 수축되어 빅 크런치big crunch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우주는 우리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무경계 가설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면 우리의 우주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길을 걸어왔어야 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무경계 가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약점 때문이었다. 131)<br>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시간 화살arrow of time’(시간이 과거로 역행하지 않고 오직 미래로만 흐르는 특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적인 경험들은 명확한 방향을 향해 진행된다. 달걀은 깨질 수 있지만 깨진 달걀은 다시 붙지 않고,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늙지만 다시 젊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리고 별은 자체 중력으로 붕괴되어 블랙홀이 될 수 있지만, 블랙홀이 다시 별로 환생하는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있어도,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확고한 방향성, 즉 시간 화살은 물리적 세계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원리 중 하나다. 고대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을 목적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시간이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열역학 제2법칙2nd law of thermodynamics이다. 131-2)<br>지금으로부터 약 140억 년 전에 우주는 엔트로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로 엔트로피가 커지는 쪽을 향해 꾸준히 변해왔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를 구별하는 시간 화살의 기원은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았던 원시우주에서 찾아야 한다. 아마도 이것은 우주가 생물친화적 특성을 갖게 된 이유 중 가장 미스터리한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경계 가설은 우주의 파동함수를 다루는 이론이므로, 인플레이션이 반드시 최소한의 규모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 양자우주의 기원은 하나의 값으로 떨어지지 않고 모호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자 한 개의 파동함수가 각기 다른 확률을 가진 여러 궤적의 합으로 표현되듯이, 무경계 가설에서 말하는 우주의 파동함수는 각기 다른 인플라톤장에서 시작된 다양한 인플레이션 우주의 혼합으로 표현된다. 즉, 양자우주는 단 하나의 팽창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의 팽창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 133-4)<br>5장 다중우주에서 길을 잃다<br>지금부터 양자중력 이론의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던 끈이론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고대 그리스어로 “보이지 않고, 쪼갤 수 없는 물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원자atom는 종류가 90여 가지나 되지만, 끈이론에서 말하는 끈은 단 하나뿐이다. 입자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끈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모든 종류의 입자에 똑같은 끈이 숨어 있는 것이다. 종류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관점은 통일의 철학에 잘 부합되는 것 같다. 그런데 똑같은 끈이 어떻게 질량과 스핀, 전하 등이 제각각인 입자 무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은 끈은 진동하는 모드에 따라 각기 다른 입자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끈이론에 의하면 전자와 쿼크는 물론이고 심지어 광자와 같은 매개입자(보손)도 끈이 고유한 모드로 진동한 결과다. 첼로의 줄이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을 내는 것처럼, 끈은 다양한 모드로 진동하면서 입자 동물원에 입주한 모든 종류의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155-6)<br>끈이론의 가장 큰 단점은 이론 전체를 아우르는 운동 방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에는 장 방정식이 있고 양자역학에는 슈뢰딩거 방정식, 상대론적 양자역학에는 디랙 방정식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끈이론 방정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끈이론으로 자연의 법칙을 통일하려면 꽤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옛날부터 3차원이라고 하늘같이 믿어왔던 공간을 무려 9차원으로 확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끈이론의 배경 수학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공간이 4차원 이상이었다면, 인간의 공간 감각은 초과된 차원을 아득한 과거에 이미 인지하지 않았을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9차원 중 우주적 규모로 길게 뻗어 있는 3차원을 제외한 나머지 6차원이 초미세 영역에 돌돌 말린 채 숨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원의 규모가 인간의 인지 가능 한계보다 작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158)<br>처음에 끈이론의 창시자들은 강력한 수학 원리를 이용하여 여분 차원의 기하학적 형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야무진 꿈은 얼마 가지 않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여분 차원이 취할 수 있는 기하학적 구조의 종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끈이론학자들이 이론의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찾아낸 “숨은 차원이 취할 수 있는 기하학적 형태의 개수”는 관측 가능한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개개의 형태는 각자 나름의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하나의 우주에 해당한다. 이것은 여분 차원의 가능한 형태를 분석하다가 “수학적으로 가능한 우주”로 가득 찬 다중우주 전망도landscape가 완성되면서 알려진 사실이다. 표준 모형과 달리 끈이론에는 이론으로 결정되지 않는 매개변수(자연의 상수)가 없다. 상수를 인위적으로 집어넣을 일이 없으니, 이만큼 순수한 이론도 드물다. 그러나 바로 이 순수함 때문에 끈이론에는 무수히 많은 유효법칙이 숨어 있다. 159-61)<br>끈이론은 우주의 역사에서 엄청나게 많은 분기점을 발견해냈다. 하나의 섬우주에 거주하는 생명체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리법칙이 우주 어디서나 똑같이 적용된다며 경이감에 빠질 수도 있고, 그 법칙이 생명체에 유리한 쪽으로 세팅된 이유를 궁금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끈이론이 지배하는 변화무쌍한 다중우주에서 이런 생각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물리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우주에서만 통용되는 국지적 특징이며, 우리 우주가 빅뱅을 겪은 후 특별한 길을 따라 냉각되면서 남긴 독특한 흔적에 불과하다. 핀치새의 뾰족한 부리나 오른쪽으로 감긴 DNA처럼, 입자와 힘의 속성은 거대한 설계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우주에서만 발견되는 국지적 특징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의 유효법칙도 우리 우주가 탄생 초기에 다윈의 진화와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나타난 결과이며, 그 진화적 특성은 이미 오래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162)<br>메타법칙과 무관하게, 또는 그보다 높은 수준에서 무작위 선택을 도입하는 것은 분명히 비인류학적인 발상이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신과 같은 위치에서 조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무작위 선택이란 우리가 다중우주를 느긋하게 내려다보면서, 비슷한 관찰자 중 ‘우리’를 선택한다는 뜻이다. 우리, 또는 다른 어떤 형이상학적 조직이 이 일을 수행하여 그 결과를 알고 있다면 여기서 내린 선택을 정당한 절차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하나의 우주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임을 자각하는 것”과 “무작위 선택이라는 우주적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유효법칙과 별과 은하, 일부 지역에 생명체가 서식하는 우주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우주의 전부이건, 아니면 방대한 다중우주의 일부이건,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생명이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물리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 168)<br>6장 질문이 없으면 과거도 없다!<br>양자이론에서 무언가를 관측하는 행위는 우주의 역사가 두 갈래 이상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단, 관찰자는 자신이 속한 갈림길만 볼 수 있다. 즉, 개개의 갈림길을 따라가는 모든 관찰자(복사본)에게는 자신의 길만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특정 관측자에게 할당되지 않은 다른 갈림길들은 그와 완전히 무관한 우주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되어 거대한 “우주 나무”의 일부가 된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무한한 공간을 표류하게 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두 갈림길의 관계를 표현할 때 “분리되어 있다decouple”거나 “결어긋난 상태에 있다decohere”고 말한다. 그러나 개개의 경로(역사)가 모두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유명한 예인 이중 슬릿 실험에서 하나의 슬릿을 통과한 전자의 경로는 다른 슬릿을 통과한 전자의 경로와 얽히면서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들어낸다. 이는 곧 스크린에 형성된 무늬만으로는 전자가 둘 중 어떤 슬릿을 통과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88)<br>이제 실험을 조금 바꿔서, 전자와 상호작용하는 기체로 슬릿 근처를 에워쌌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태에서 전자가 슬릿을 통과하면 비록 기체 입자가 전자의 경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해도, 각 슬릿에서 발생한 두 개의 파동이 기체와 상호작용하면서 빠르게 약해지기 때문에,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스크린에는 간섭무늬 대신 두 슬릿과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정렬된 두 개의 밝은 줄무늬가 나타날 것이다. 이 상황을 에버렛의 논리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슬릿을 에워싼 기체는 파동 조각이 두 개의 분리된 역사(두 개의 갈림길)를 갖도록 만드는 관찰자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명확하게 분리된 두 파동은 더는 간섭을 일으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갔고, 그 결과 스크린에는 원래 슬릿과 비슷한 두 개의 줄무늬가 형성되었다.” 또는 슬릿을 에워싼 기체가 “전자가 둘 중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 확인하는 도구”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88-9)<br>거시적 세계에는 결어긋남을 초래하는 요인이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매 순간 수많은 관찰 행위를 수행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양자적 간섭이 모두 사라지고 무한한 가능성 중 단 몇 개만이 현실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주변 환경은 미시 세계의 유령 같은 중첩과 거시 세계의 명확한 경험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결어긋남 과정은 미시 세계의 끊임없는 양자 요동에도 불구하고 매우 견고한 고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물은 수십 억 년 동안 무수히 많은 결과를 기록하고 쌓아오면서 우리 역사(무수히 많은 갈림길 중 하나)에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에워싼 세상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획득해온 방식이다. “우주를 양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하향식 요소가 우주론에 추가될 것”이라는 호킹의 예측에는 바로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189)<br>물리학자들이 에버렛의 가설에 회의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양자이론치고 지나칠 정도로 거창하고 황당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에버렛의 가설이 양자역학의 ‘다중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다중세계’라는 말을 들으면 똑같은 우주 여러 개가 똑같은 현실감을 갖고 공존하는 상황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버렛이 제안한 범용 파동함수universal wave function의 개념은 우주 전체를 양자적으로 생각하는 양자우주론의 초석이 되었다. 그가 생각한 우주는 복제되거나 더 큰 상자에 들어가는 우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리계였다. 이로부터 탄생한 양자우주론의 전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주발생론 모형(무경계 가설 등)과 진화의 개념(끈이론이 낳은 우주 풍경에 적용된 파인먼의 경로합 등),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핵심 요소인 관찰자가 모여서 트립티크triptych(교회 제단에 걸려 있는 세 폭짜리 그림) 모양의 구조가 완성된다. 191)<br>이 그림에서 관찰자의 역할이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단순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자우주론에서 관측은 더욱 깊은 수준의 양자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관측이란 역사가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항상 모종의 상호작용이 개입되어 있지만 인간이 수행하는 관측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실 세계에 구현된 결과는 생명체와 무관할 수도 있다. 관찰자, 즉 관측을 행하는 주체는 정밀한 기계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또는 석영 조각일 수도 있고, 우주 초기에 붕괴된 대칭일 수도 있으며,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에서 방출된 광자일 수도 있다. 우주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톰 리들의 백지 일기장과 비슷하다. 가능성의 영역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의 답이 존재하지만, 질문을 통해서만 답을 알 수 있다. 양자우주(우리 우주)에서 유형有形의 물리적 실체는 끊임없는 질문과 관측을 통해 드넓은 가능성의 지평선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2)<br>이 얽힘은 양자우주론에 “과거로 진행하는” 미묘한 요소를 불어넣는다. 양자우주론에는 객관적 관찰자와 무관한 우주의 역사(명확한 시작점과 진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향식 접근법(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는 접근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주의 역사가 시간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반직관적인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마치 양자적 관측 행위가 시간을 거슬러 연속적으로 진행되면서 빅뱅의 결과(대형 차원의 수, 힘과 입자의 특성 등)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관과 반대로 과거가 현재에 의존하게 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인과적 연결고리는 보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해진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과거의 한순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회고적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위 수준의 법칙에서는 그와 같은 정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정보는 오직 미래에 실행되는 실험과 관측을 통해 복원된다. 193)<br>생물학적 진화의 역사에서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이 루카LUCA인 것처럼, 우주론의 기원은 무경계 가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루카의 생화학적 구성성분을 아무리 철저하게 분석해도 그로부터 자라날 계통수의 형태를 미리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루카가 없으면 계통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경계 기원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로부터 파생될 물리법칙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 우주의 계보와 법칙은 하향식 관측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빅뱅의 잔해인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은 강력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을 때 예상되는 온도 분포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여기에 하향식 논리를 적용하면 지금의 우주가 “생성될 확률이 가장 높은” 우주다. 그러므로 하향식 이론은 망원경으로 확인된 우주배경복사의 온도 분포와 강력한 인플레이션에서 예측된 (온도 이외의) 다른 데이터 사이에도 강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04-5)<br>7장 시간 없는 시간<br>플라톤은 이 세상을 동굴 벽에 드리운 그림자에 비유하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완벽한 실체를 어설프게 투영한 그림자일 뿐이며, 수학적 형태의 완벽한 (그리고 우월한) 실체는 바깥세상(이데아)에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400년이 지난 지금, 플라톤이 상상했던 이데아는 홀로그램 혁명을 겪으면서 엄청나게 달라졌다. 가장 최근에 제기된 홀로그램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시공간의 얇은 조각에 숨겨진 현실이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된 결과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원형原形이 이 세상에 투영되어 휘어진 시공간과 중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양자적 입자와 장으로 이루어진 3차원 그림자 세계에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홀로그램 물리학은 “어딘가에 숨겨진 홀로그램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물리적 실체의 가장 깊은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13)<br>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은 그야말로 “단순함의 전형”이다. 상대론적 블랙홀은 속내를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이 별로 만들어졌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건, 또는 반물질로 이루어졌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블랙홀이 가질 수 있는 물리적 특성은 단 두 가지, ‘질량’과 ‘각운동량’뿐이다. 모든 블랙홀은 오직 질량과 각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물리량에 의해 구별된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등장하는 블랙홀은 외부로부터 정보를 무한정 빨아들여서 사정없이 파괴하는 궁극의 쓰레기통이다. 그러나 베켄슈타인과 호킹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준고전적 엔트로피 공식에 의하면 블랙홀은 자연에서 가장 복잡한 물체로서, 고전적인 이미지와 완전히 정반대다. 왜 그럴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고전적 이론이어서, 블랙홀 내부의 미세구조에 저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217)<br>그렇다면 블랙홀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 안에 저장된 정보는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정보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블랙홀을 “궁극의 지우개”라 할 만하다. 원래 블랙홀은 무엇이건 집어삼키는 천체였으니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데, 문제는 양자역학이 이런 시나리오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법칙에 의하면 모든 물리계의 파동함수는 정보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진화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파동함수가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진화하면서 정보를 인식 불가능한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는 있지만, 정보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이것은 파동함수의 모든 가능한 확률을 더했을 때 반드시 1(100퍼센트)이 되어야 한다는 필수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 양자역학의 법칙에 의하면 백과사전을 통째로 불에 태워도, 남은 재를 양자적 수준에서 분석하면 모든 정보를 복원할 수 있다. 218-9)<br>이제 두 번째 시나리오를 살펴보자. 혹시 블랙홀의 정보가 호킹 복사에 암호로 저장되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는 것은 아닐까?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는 거의 영겁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이것도 일견 그럴듯하게 들린다. 게다가 딱히 양자역학에 위배되는 구석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호킹의 계산과 일치하지 않는다. 호킹 복사에는 블랙홀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홀이 호킹 복사의 형태로 자신의 질량을 방출할 때, 복사 스펙트럼에는 블랙홀의 미세구조나 역사에 관한 정보가 단 한 조각도 들어 있지 않다. 호킹의 복사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이 최후의 질량을 방출하고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무작위로 흩어진 열복사의 구름뿐이며, 이로부터 블랙홀의 정보는커녕, 과거에 블랙홀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물리학자들은 블랙홀의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19-20)<br>에드워드 위튼은 끈이론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는데, 그의 논리에 의하면 다섯 개의 끈이론에 초중력을 포함한 여섯 개의 이론은 사실은 별개의 이론이 아니라 동일한 수학적 구조의 다른 얼굴일 뿐이었다. 위튼은 여러 개의 이론을 하나로 연결하는 복잡한 수학적 네트워크를 ‘M 이론’으로 명명했다. 물리학자들은 “외관상 다르게 보이는 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학적 관계”를 칭할 때 “이중성dualit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중성(또는 이중적) 관계에 있는 두 이론은 어떤 면에서 보면 동일한 이론일 수도 있다. 두 이론이 이중적 관계라는 것은 “동일한 물리적 현상을 두 이론이 각기 다른 수학적 언어로 서술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던 파동설과 입자설도 서로 이중적인 관계에 있다. M 이론의 이중성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하나의 이론에서 엄청나게 어려웠던 문제가 다른 이론으로 전환했을 때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22)<br>1997년, 하버드대학교의 젊은 조교수였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Juan Maldacena는 두 개의 끈이론이나 두 개의 입자이론을 연결하지 않는 새로운 이중성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이것은 “중력을 포함한 끈이론”과 “중력이 없는 입자이론”을 연결하는 이중성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말다세나의 이중성으로 연결되는 두 이론이 각기 다른 차원에서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그의 눈에는 입자이론이 중력이론의 홀로그램처럼 보였다. 말다세나의 이중성을 ‘홀로그램 이중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입자 부분에 속한 양자장이 반-드지터 공간의 스노볼을 침투하지 않고 그 경계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말다세나의 이중성에 등장하는 입자 이론이 지난 20세기 중반부터 물리학자들이 사력을 다해 개발해온 양자장 이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작동하는 “물질과 중력의 양자이론”이 홀로그램 이중성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223-4)<br>호킹은 2004년 더블린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블랙홀이 슈바르츠실트의 기하학으로 서술된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정보 유실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블랙홀의 정확한 상태에 대한 정보는 다른 기하학에 저장되어 있다. 아직도 혼란과 역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문제를 ‘단 하나의 객관적 시공간’이라는 고전적 관점에서 다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인먼의 ‘기하학 합sum over geometry’을 도입하면 두 개의 기하학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호킹의 새로운 하향식 연설이었다. 호킹은 자신의 논리가 지나치게 고전적이었음을 깨닫고 입장을 바꾸었다. 블랙홀이 탄생한 후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면, 블랙홀의 과거와 현재 상태에 관한 정보는 블랙홀의 기하학적 구조에 저장되지 않고 새로운 시공간에 저장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향식으로 전향한 호킹은 자신이 젊었을 때 시공간을 이미 주어진 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계산을 해보기도 전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231)<br>호킹 복사는 사건 지평선 근처에서 일어나는 양자적 요동으로부터 발생한다. 진공 중에서 양자적 요동에 의해 입자-반입자 쌍이 생성되고, 반입자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파트너 입자가 우주 저편으로 도망가는데, 이 현상을 멀리서 보면 마치 블랙홀에서 입자가 방출되는 것처럼 보인다.(이것이 바로 호킹 복사였다!) 그러나 한 번 쌍으로 태어난 입자와 반입자는 둘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멀어져도 양자적으로 얽힌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물리학 용어로 표현하면 두 입자는 서로 “얽힌 관계entangled”에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우주로 도망가는 입자는 블랙홀에서 방출된 열복사처럼 보이지만, 두 입자를 모두 고려하면 둘을 연결하는 상호 관계 속에 어떤 형태로든 정보가 저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페닝턴과 현악사중주단은 블랙홀에서 증발하는 입자와 내부로 빨려 들어간 입자 사이의 얽힌 관계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쌓이다 보면 사건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웜홀로 발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232-3)<br>8장 우주의 안식처<br>양자우주론에서 과거와 미래는 끊임없는 질문과 관찰을 통해 가능성의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양자이론의 중심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이미 일어난 일”로 변화시키는 관찰 행위(관측자와 관측 대상의 상호작용)는 우주를 점점 더 확고한 실체로 만들어가고 있다. (양자적 의미의) 관찰자는 우주에 주관적이고 섬세한 요소를 불어넣는 창조적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관찰자는 지금 실행한 관측이 빅뱅의 결과를 바꾸는 것처럼, 우주론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미묘한 요소를 도입한다. 호킹이 자신의 최종 이론을 하향식 이론이라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향식 우주론은 “설계된 우주”의 수수께끼를 뒤집는 이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명친화적 특성이 양자 수준에서 설계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생명과 우주가 궁합이 잘 맞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원래 깊은 수준에서 공존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249-50)<br>우주의 기원에 대한 호킹의 무경계 모형은 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역사적 관점(법칙의 기원을 포함하는 관점)을 구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창조의 순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조적 특성이 점차 변하거나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시간까지 사라진다. 태초에 시간은 공간과 융합되어 더 높은 차원의 구球를 형성하고, 이런 상태에서 우주는 완전한 무無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호킹은 인과율에 입각한 상향식 접근법을 추구하던 시절에 “우주는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최종 이론을 구축하면서 빅뱅 무렵의 시공간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태초의 무는 우주가 탄생할 수도,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텅 빈 진공이 아니라, 시공간과 무관하고 심지어 물리법칙과도 무관한 인식론적 지평선에 가깝다”고 주장한 것이다.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시간의 기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점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과거의 한계점이다. 252)<br>연구 초기 단계에 호킹의 목적은 시간이 시작되던 순간에 주어진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설계된 우주’의 비밀을 푸는 것이었다. 그는 빅뱅 깊은 곳에 숨겨진 수학이 “우주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인과적으로 설명해준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호킹은 우주론을 거꾸로 뒤집은 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선택한 하향식 관점이 물리적 실체와 법칙 사이의 계층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하향식 철학에 의하면 우주는 법칙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기조직적self-organizing 실체이며, 그 안에서 온갖 패턴이 모습을 드러낸다(즉 ‘창발’한다). 이들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을 우리는 ‘물리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법칙이 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법칙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존재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답이 존재한다면, 그 답은 바깥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찾아야 한다. 25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79/16/cover150/e99253421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279168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 김호동 -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8345</link><pubDate>Mon, 22 Jun 2026 07: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83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9325&TPaperId=173483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492/3/coveroff/895828932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89325&TPaperId=173483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a><br/>김호동 지음 / 사계절 / 2016년 01월<br/></td></tr></table><br/>010 프롤로그<br>"유목은 목축의 특수한 형태이다. 목축은 가축을 사육하여 필요한 식량을 획득하는 경제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농경과 마찬가지로 '식량생산경제'에 속한다. 다만 농경은 식물을 순화시키고 목축은 동물을 순화시켜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류의 경제생활이 수렵→목축→농경이라는 3단계로 발전해왔다는 주장은 이제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유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고정된 거주지나 축사 없이,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광역적·계절적 이동을 통해 가축을 사육하고, 목축 생산물을 통해 생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생산경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목의 특징은 이미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이 간파한 바 있다. 그들은 유목민이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나 성채를 갖지 않고〉, 〈가축과 함께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하며〉, 〈모두 말 위에서 활을 쏠 줄 알았다〉고 하였다. 이는 유목민이 농경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이동생활, 목축경제, 기마술을 지적한 것이다."(15)<br>1) 고대 유목 국가<br>"스키타이Scythai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목민 집단으로 인도-이란계에 속하는 민족이었다.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 왕 에사르핫돈(재위 기원전 680~669년)과의 전투에서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고 본다." "서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던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도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고, 겁먹은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키타이 왕 마디에스에게 직접 선물을 바치고 화평을 청했다. 스키타이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에게서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 왕국의 공격을 받아 패한 뒤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다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26)<br>"스키타이가 역사상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한 집단이라면, 흉노는 유라시아 동부 초원에서 처음으로 유목국가를 세운 이들이다. '흉노'라는 이름은 기원전 318년 전국 시대의 5개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스키타이에 비해 3세기 반 정도 늦은 셈이다." "융戎, 적狄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정주생활을 하며 보병 위주의 전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중국측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유목민, 즉 계절적 이동을 하며 기마전을 수행하는 본격적인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갈 무렵 전국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나타나는 이 '호'라는 명칭은 특별한 종족이나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농경생활을 하며 '화하華夏' 혹은 '제하諸夏'를 자처했던 중원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방식의 생활과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동호, 임호, 누번, 흉노 등은 모두 '호'의 범주에 속하는 집단이었다."(34-5)<br>"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와 그 주민들의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중국 측 문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흉노가 발흥하여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장악하고 한 제국이 이에 대응하여 외교·군사적인 작전을 전개할 때였다." "흉노의 서역 지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그러나 흉노에게 복속된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일종의 세금을 수취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서』 「서역전」에는 〈흉노의 서쪽 변경에 있는 일축왕은 동복도위를 두어 서역을 통령토록 했는데, 항상 언기, 위수, 위려 사이의 지역에 거주했으며,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를 취하고 물자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복도위는 현재 카라샤르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타림 분지 연변의 도시들에게서 '부세'를 거두었다. 이러한 '부세'는 각 도시가 갖고 있던 경제력, 즉 호구의 규모에 비례했을 것이다. 한나라도 서역을 장악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뒤 수행했던 중요한 일이 바로 호구 조사였다."(48-9)<br>"흉노는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한 뒤 격렬한 내분에 휩싸였다. 우현왕이었던 악연구제가 선우위를 계승한 직후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좌익 귀족들을 탄압하자, 좌익 귀족들은 호한이라는 인물을 선우로 옹립하여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흉노의 내분은 호한야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으나, 그의 형인 질지가 그를 축출함으로써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몽골 초원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호한야는 기원전 52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고비 사막을 건너 한의 황제에게 스스로 신하를 칭했다. 호한야는 입조와 칭신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질자를 들이고 공물을 헌납함으로써 중국의 황제와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한과 흉노의 관계도 '화친관계'가 아니라 '조공관계'로 바뀌었다." "흉노는 한에 대해 명분에 불과한 정치적 복속을 표방하는 대신 막대한 물질적 보상을 받아냈고, 이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약탈→위기→물자 지급이라는 종래의 방식보다는 훨씬 나았다."(54-5)<br>"기원후 48년 흉노는 또다시 내부의 격변을 겪으며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니, 이를 기원전 50년 전후의 분열과 구별하여 흉노의 2차 분열이라고 부른다. 2차 분열의 원인은 1차 분열과 마찬가지로 선우위를 놓고 벌어진 계승분쟁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흉노는 후한 양국은 과거 화친이나 조공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중요한 특징은 ① 흉노인들이 한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게 되었다는 점, ② 칭신하고 공물과 질자를 보내는 것은 같으나 한 조정으로부터 사흉노중랑장이라는 관리가 파견되어 그의 감호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흉노중랑장은 후일 12명으로 늘었지만, 흉노 내부의 행정에 직접 간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남흉노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한 제국 내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기보다는, 그 보호 아래 하나의 국가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각자 본국의 습속을 유지하며 한나라에 복속하던〉 후한의 '속국'이라 할 수 있다."(56-7)<br>2) 투르크 민족의 활동<br>"돌궐突厥(튀르크Türk)의 건국 집단은 원래 투르판 부근에 살았는데, 유연을 격파한 뒤 중심지를 몽골 서부의 외튀켄 산지(오늘날의 항가이 지방)로 옮겼다. 카간은 한 지점에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를 분할하여 지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무한 카간은 제국을 셋으로 나누어 자신은 외튀켄에 자리잡고, 동방과 서방은 가까운 일족에게 통치를 맡겼다. 타스파르 카간도 이러한 방식을 답습했다. 과거 흉노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동시에 좌우현왕을 두었던 것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통치자의 칭호도 모두 '카간'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돌궐의 이러한 지배 방식은 '분국分國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권력의 약화와 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여 마침내 제국이 분열되기에 이른다. 지배집단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과 반목은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76-7)<br>"아랍 세력이 본격적으로 중앙유라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661년 새로운 세습적 칼리프 체제인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고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긴 뒤부터였다." "738년 후라산의 신임 태수로 임명된 나스르 빈 사야르는 종래 정복 일변도의 진출 방식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정책을 표방했다. 서투르키스탄 지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력적 강제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적극 추진하고 개종자에게는 세금 혜택을 주었다. 바로 그때 후라산에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는 세력이 이븐 무슬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그는 '아바스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나스르 빈 사야르가 사망한 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많은 서투르키스탄 주민들이 그와 연합함으로써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아랍 세력이 서투르키스탄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나가는 사이, 때마침 당 제국은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92-3)<br>"751년 여름 당과 아랍의 군대가 탈라스 강가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다.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당군의 지휘관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과 지야드 이븐 살리흐의 아랍군은 751년 7월 탈라스 하반의 아틀라흐에서 전투를 벌였다. 닷새간 대치하던 중 당군의 일부를 구성하던 카를룩 유목민들이 배반하여 아랍 측으로 넘어갔고, 그 겨로가 당군은 좌우로 협공을 당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 직후 안사의 난(755~63년)이 터지면서 당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유라시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이슬람 세력이 서방을, 티베트가 동방을, 투르크 유목민들이 북방을 차지하며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어 티베트와 투르크가 약화되기 시작하자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아랍의 정치적 우위는 확고해졌고, 종교적으로 이슬람화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다."(94-5)<br>"안사의 난은 당 현종 시대에 화북 변경지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그드 출신 안녹산과 사사명이 755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반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745년 돌궐 제국이 붕괴하자 그 영내에 있던 수많은 소그드인들이 안녹산 휘하에 편입되었고, 이들이 그 뒤 반란의 주된 군사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위구르의 지원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당의 황제와 장군들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지만 그들의 약탈을 멈추지는 못했다. 762년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당은 위구르에게 또 한 번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4000명의 기병이 남하하여 당군과 연합하여 낙양을 탈환했다. 당나라가 이처럼 극도로 무력해진 상황에서도 위구르는 당조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변방에 시장을 열어서 말과 비단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만 했다. 이는 중국을 영토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화친이나 교역을 통해서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100-1)<br>"위구르 제국 시대에 몽골 초원에는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현상들, 특히 정주문명의 요소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규모 성곽도시의 출현이 좋은 예이다." "위구르인들의 성곽도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3대 뵈귀 카간이 세운 오르두발릭(오늘날 카라발가순)이다. 이곳은 중국, 중앙아시아, 서부 유라시아 초원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돌궐·위구르·몽골이 모두 이곳에 제국의 중심을 두었다." "오르두발릭의 모습은 821년경 그곳을 방문한 아랍인 타밈 이븐 바흐르가 남긴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는 위구르의 카간이 제공한 역참을 이용하여 초원을 횡단할 수 있었다. 성벽에는 거대한 철문 12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 안에는 많은 시장들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위구르 시대에 이러한 대형 성곽도시의 출현은 돌궐 제국 이래 독자적인 문자의 창제와 사용, 보편 종교의 확산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가히 유목사회의 '문명화'라고 부를 만하다."(102-3)<br>3) 정복왕조와 몽골 제국<br>"'카라 키타이Qara Kitai'는 여진의 공격으로 거란 제국이 망한 뒤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거란인 및 그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나라는 역사상 '서요西遼'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125년 거란 제국 멸망 후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인들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1137년부터 서투르키스탄을 경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에는 서부 카라한 왕조가 있었지만 이미 쇠약해져 신흥세력 셀주크에 복속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셀주크의 군주 산자르는 서부 카라한의 마흐무드와 연합하여 1141년 가을 카트완 평원에서 카라 키타이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전투는 셀주크의 참패로 끝났고, 야율대석은 그길로 사마르칸드에 입성했다. 카라 키타이는 카라한 왕조, 천산 위구르 왕국 등을 부용국으로 삼고 샤흐나(샤우캄)이라는 관리를 보내서 감독했다. 이 왕국은 13세기 초 칭기스 칸에게 쫓겨 망명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에게 권력을 빼앗길 때까지 반세기 이상 존속했다."(122-3)<br>"9세기 중반 키르기즈의 침공으로 위구르 제국이 붕괴하고 다수의 위구르 유목민들이 초원을 떠나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했지만, 정작 키르기즈인들은 초원에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살던 예니세이 강 유역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로 인해 몽골 초원에 힘의 공백이 생겨나자 새로운 주민들이 대거 몽골 초원으로 유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구르 제국의 동북부 변경지역에 살던 타타르 부족을 비롯한 몽골계 집단들은 다양한 시차를 두고 풍부한 초원을 찾아 이주해 들어왔다. 이 몽골계 집단들은 당대의 한문 기록에 '실위室韋'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라 불린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몽골'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사례인데, 이처럼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단에 불과하던 몽골에서 칭기스 칸이 출현했고, 그 후 그곳의 유목민들은 모두 스스로를 '몽골'이라 불렀다. 『몽골비사』와 『집사』에도 이들의 이주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흥미로운 설화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126-7)<br>"12세기 중반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은 '울루스ulus'라 불리는 집단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울루스라는 말은 원래 '사람', '백성'을 뜻하지만, '부족', '나라'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 대표적인 울루스로는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오이라트, 몽골 등이 있었다." "울루스라는 사회조직은 '오복oboq'이라는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골이라는 울루스 안에는 칭기스 칸이 속한 보르지긴을 위시하여 바룰라스, 우루우트, 망구트 등 많은 오복들이 존재했다. 이 오복은 동일한 '뼈(yasun)'를 갖는 부계 친족집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일한 혈족 집단이 아니라 어떤 한 가문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인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주장도 최근 제기되었다. 사실 12세기 유목민 사회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분화가 확인된다. 정치적 종속 관계에 따라 '노얀noyan'이라는 지배층, '카라추qarachu'라는 평민, '보골boghol'이라는 예속 집단이 존재했다. 울루스는 최종적으로 '칸khan'의 지배를 받았다."(128-9)<br>"1260년경 쿠빌라이의 집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몽골 제국의 지배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이제까지는 하나의 통일제국이 4개의 지역 정권, 즉 '칸국khanate'으로 분열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 방식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올바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몽골 제국, 즉 '대몽골 올루스'라는 거대한 정치체는 칭기스 칸 일족들이 보유하는 다수의 울루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이 울루스들의 연합체라는 구성적 원리인 '울루스 체제'는 14세기 중후반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울루스 상호 간의 역관계가 변화하면서 몇몇 대형 울루스들이 사실상 제국을 분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 대형 울루스의 지배자들이나 거기에 속한 몽골인들은 여전히 자기가 몽골 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 제국이 4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142)<br>"따라서 쿠빌라이가 집권과 함께 중국적인 왕조인 '원元'을 창건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 물론 그는 제국의 수도를 당시 '키타이'라 불리던 내몽골·북중국으로 옮기고 중국식 연호와 제도를 채택했다. 1271년에는 『주역』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대원大元'이라는 글자를 택하여 국호로 반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곧 독립된 왕조의 탄생을 말해주는 증거는 아니다. 비록 한문 자료에는 그런 오해를 유발시키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당시 몽골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4세기 전·중반의 비문들을 보면 〈대원이라 불리는 대몽골 울루스〉라는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원'이 몽골 제국의 한자식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새로운 왕조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대몽골 울루스의 최고 지배자 카안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142-3)<br>4) 계승국가의 시대<br>"티무르는 1360년부터 시작된 투글룩 테무르 칸의 침공과 그로 인해 빚어진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족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369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는 몽골 제국의 정치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칭기스 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güregen)'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로 불리며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1405년 중국 명조 원정길에서 사망할 때까지 유라시아 각지를 누빈 희대의 정복자였다." "당시는 몽골 제국과 칭기스 일족의 카리스마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대였다. 그의 끊임없는 원정도 실은 권력의 합법성이 취약한 그가 차가다이 부족민들의 내부적 불만과 반발을 밖으로 돌리려 한 것이다. 그는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수행하는 '성전', 그리고 대몽골 울루스의 재건이라는 명분과 목표를 내세워 통합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170-1)<br>"15세기 중반~16세기 전반에는 중앙유라시아에서 대규모 민족 집단들이 출현하거나 이동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14세기 말~15세기 초 주치 울루스가 약화되어 분열하자 아불 하이르 칸이 울루스의 좌익에 속하는 유목민들을 통합했는데, 이들이 바로 '우즈벡 울루스'이다." "한편, 아불 하이르의 강력한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치의 후손들 가운데 기레이와 자니 벡이 유목민들을 이끌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톈산 북방의 모굴리스탄 초원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이들은 우즈벡 울루스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카자흐Qazaq'라 불렸다." "키르기즈는 고대 이래로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에 살면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15세기 전반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러시아 역사학자 바르톨드는 오이라트가 모굴 칸국과 전쟁을 할 때 키르기즈도 동참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왔다가 1470년대에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76-7)<br>"1487년 칸으로 즉위한 다얀 칸(바투 뭉케)은 약화된 동몽골을 통합하여 일으켜 세운 뒤 모두 6개의 만호(tümen)로 나누어 자식들에게 분봉했다. 그 뒤 몽골을 지배한 칭기스 일족은 모두 다얀 칸의 6만호를 지배했던 그의 후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칭기스 일족의 역사에서 중시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얀'이라는 명칭은 대원大元을 음역한 것이므로 몽골 제국(대원)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적 선언도 내포하고 있다." "다얀 칸은 자신의 지배 아래 들어온 몽골인들을 모두 6만호로 재편하여, 좌익에 차하르·우량카이·할하의 3만호를, 우익에 투메드·오르도스·윙시에부의 3만호를 배치했다. 그는 이 6만호에 속하는 유목민들이 유목하는 지역적 범위를 정하고, 각 만호를 지배하는 칸에는 자기 아들들을 임명하여 세습하게 했다. 다얀 칸과 그의 후계자 보디 알락은 차하르부의 수령이자 좌우익 전체를 지배하는 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6만호 체제는 이후 몽골 유목민의 정치적 구성의 골간이 되었다."(182-3)<br>"중앙유라시아에 등장한 수피 교단들 가운데 낙쉬반디 교단은 서아시아 각지는 물론 중앙유라시아와 중국 서북부, 동남아, 인도, 동유럽, 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국제적' 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장로들은 '호자khwaja(和卓)'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그 복수형인 '호자간khwajagan'은 교단의 별칭이 되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종교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아시스 지대의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벡 계층에서도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확보한 그들은 무장한 추종세력들을 배경으로 칸위 계승분쟁에도 간여하여 강력한 세속권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마침내 1680년 호자 아팍크는 준가르 군대를 앞세워 카쉬가리아 지배권을 장악했고, 이로써 몽골 제국 이후 확고하게 유지되던 칭기스 일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등장한 '호자' 집단이 정주적 토착 수령인 '벡' 집단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188-9)<br>"몽골 제국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 특히 사카파 교단이 칭기스 일족의 보호를 받으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몽골 제국이 붕괴된 뒤 티베트 불교도 침체를 겪으며 몽골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16세기 후반 알탄 칸의 적극 후원에 힘입어 다시 흥륭했다. 다얀 칸의 적통인 차하르부 출신이 아닌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1576년 티베트에서 겔룩파의 대표 소남 가초를 초청하여 청해의 차브치알에서 역사적인 회견을 가졌다. 소남 가초가 알탄 칸을 쿠빌라이의 전쟁轉生으로 인정하자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교단의 스승들에게 이 칭호를 추존하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뜻하기 때문에 이 칭호는 '사해와 같이 넓은 지혜를 지닌 스승'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남북 몽골에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몽골의 종교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몽골과 티베트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190-1)<br>5) 유목국가의 쇠퇴<br>"17세기 전반 청 제국의 출현은 중국과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유라시아 세계 전체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청 제국을 건설한 만주인들은 처음에는 몽골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자신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오히려 그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나아가 몽골과 정치·종교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티베트를 장악하고, 마지막으로 서몽골 준가르를 붕괴시킴으로써 톈산 남북의 동투르키스탄까지 정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청 제국의 흥기는 중앙유라시아 여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었다." "홍타이지는 '주션'과 '아이신 구룬'이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만주'와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선포하여 자신의 제국이 대원의 적통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사강 세첸의 『몽골원류』는 누르하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홍타이지가 '정권(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194-5)<br>"1728년 러시아와 청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보완하여 캬흐타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알바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청에 양보했지만, 사절단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르친스크와 캬흐타 등 변경 도시에 시장을 개설하여 상인들이 상대편과 물자를 매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청은 러시아에 교역상의 특권을 허가해준 대신 아무르 강 상류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준가르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갈단은 1690년 이르쿠츠크에 있던 골로빈에게 사신을 보내 할하 침공을 위해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강희제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를 중립화시킨 다음 갈단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준가르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장차 중앙유라시아의 세계를 중국과 러시아가 양분하는 역사적 과정의 시발점이었다."(198-9)<br>"1757년 아무르사나를 격파하고 준가르를 복속시킨 청군은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위원魏源은 『성무기聖武記』에서 준가르인의 4할은 천연두로 사망하고 3할은 청군에 살해되었으며 2할은 카자흐로 도망하여, 1할만이 고향에 남았다고 적었다. 건륭제는 아예 '준가르準噶爾'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얼러트額魯特(Ölöt) 혹은 오이라트厄魯特(Oyirat)라는 말로 대체하도록 했다. 청조는 준가르의 붕괴와 함께 그에 복속해 있던 카쉬가리아도 당연히 제국의 일부가 되리라고 예상했지만, '호자'라 불리던 수피 장로들의 지휘하에 토착 무슬림들은 의외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에 건륭제는 1758~60년 본격적인 정복전에 착수했다. 호자 형제는 바닥샨 산지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유목하던 키르기즈인들에게 피살되어 그 수급이 청군에게 인도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청 제국은 톈산 북방과 남방을 모두 장악하여 중앙유라시아 정복을 완료했다."(208-9)<br>"청 제국은 준가르를 무너뜨리고 톈산 남북의 초원과 사막 지대를 정복한 뒤 그곳을 신강新疆이라 불렀는데 이는 '새로운 강역'을 뜻한다. 신강은 내지와는 달리 성省으로 편성되지 않았고, 몽골·티베트·만주 등지와 함께 일종의 특별 군사구역으로 설정되었다. 즉 청은 신강과 같이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민관이 아니라 군관을 배치했으며, 이들 외지인과 현지 토착민 사이에 행정적·공간적 거리를 두는 분리 통치의 원칙을 적용했다. 이를 위해 청은 신강을 세 개의 군사구역(준가리아, 천산동로, 천산남로)으로 나누었다." "청조는 현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벡beg(伯克)이라는 토착 지배층을 활용했다. 벡은 과거에는 유목집단의 수령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 17세기 들어 그들이 정착하면서 정주 지배층에 대한 명칭으로 바뀌었다. 청이 정복한 이후 과거 여러 직능을 수행하던 관리들의 명칭 뒤에 일률적으로 '벡'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벡 관제를 시행한 것이다."(212-3)<br>222 에필로그]]></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7492/3/cover150/89582893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920370</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마커스 초운 - [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가장 유명하지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1235</link><pubDate>Thu, 18 Jun 2026 07: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412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2279&TPaperId=173412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711/50/coveroff/89323222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2279&TPaperId=173412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가장 유명하지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힘</a><br/>마커스 초운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2년 06월<br/></td></tr></table><br/># 당신이 모를 수도 있는 중력에 관한 여섯 가지 사실1. 중력은 당신과 당신 주머니 속 동전이, 당신과 당신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다.2. 중력은 아주 약하다. 지구의 전체 중력으로도 근육의 힘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손을 위로 뻗을 수 있다.3. 중력은 약하지만 대규모로 작용하는 중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 중력은 전체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통제하는 힘이다.4. 사람들은 중력이 빨아들이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주 대부분에서 중력은 날려보내는 힘이다.5. 빅뱅 후에 중력 스위치가 켜지지 않았다면 시간은 방향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6. 중력을 명확히 이해해야만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답할 수 있다.<br>1부 뉴턴1장 · 달은 떨어지고 있다<br>달은 원 운동을 하면서 계속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사과와 달은 둘 다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두 물체의 운동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저 사과는 지면과 평행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속력이 없기 때문에 지면을 향해 곧바로 떨어지지만, 달은 엄청난 속력으로 날아가는 포탄처럼 지면과 평행인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원을 그리며 떨어진다는 것뿐이다. 지구 중심에서 지표면까지의 거리는 6,370킬로미터이고, 지구 중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38만 4,400킬로미터이다. 다시 말해 달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는 지표면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의 60배이다. 60의 제곱은 3600이다. 즉 달에 미치는 지구의 중력이 지표면에 미치는 지구의 중력보다 정확히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약해진 것이다. 뉴턴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약해지는 단일 힘이, 땅에 존재하는 사과와 하늘에 존재하는 달을 끌어당기고 있음을 입증했다. 정말로 중력은 보편 힘이었다. 26-7)<br>2장 · 마지막 마법사<br>똑바로 서 있는 원뿔을 상상해보자. 이 원뿔을 날카로운 칼로 깔끔하게 잘라보자. 칼로 원뿔의 한 옆면에서 다른 옆면을 완전히 통과하게 자르면 단면은 타원이 된다. 원뿔의 한 옆면으로 칼을 비스듬하게 집어넣고 밑면을 통과하게 자르면 한쪽 끝이 열린 ‘포물선’이 된다. 칼을 똑바로 세워 옆면과 밑면이 수직이 되게 자른 단면은 한쪽 끝이 열린 ‘쌍곡선’이 된다. 힘의 역제곱 법칙의 지배를 받는 천체의 이동 속력이 태양을 벗어날 만큼 충분히 빠르지 않으면(또는 에너지가 충분히 많지 않으면), 이 물체는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를 그리며 돈다. 태양을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이동 속력이 아주 빠른 천체는 쌍곡선 궤도를 그리며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두 물리 상태의 중간에 위치한 포물선 궤도를 그리는 천체는 태양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붙잡히지도 않는다. 공전 궤도가 포물선인 천체는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무한히 멀 때만 태양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37-8)<br>3장 · 3월에는 조수를 조심하라<br>지구는 부피가 있는 볼록한 천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달에 더 가까운 지역이 있다. 달은 가까운 지역을 먼 지역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긴다. 뉴턴은 달의 중력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력도 지역마다 다를 것임을 알았다. 물은 단단한 암석과 달리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에 달의 중력은 암석보다는 물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대양의 한 점 바로 위에 달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점에서 달이 대양의 해수면을 잡아당기는 힘은 좀 더 멀리 있는 대양의 바닥인 해저를 잡아당기는 힘보다 셀 것이다. 뉴턴은 중력의 이런 차이 때문에 해수면이 해저에서 멀어지고 대양은 달이 있는 방향으로 부풀어 오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의 중력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결과는 또 있다. 달에서 보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바다를 생각해보자. 이곳은 해저가 해수면보다 달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해수면보다 해저가 달의 중력을 더 강하게 받는다. 그 결과 해저의 물이 해수면으로 끌어당겨져 바다가 위로 볼록해진다. 48)<br>조수란 단순히 물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중력을 가해 그 물체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실제로 중력은 바로 밑에 있는 대양의 물을 볼록하게 부풀리는 것처럼 바로 밑에 있는 암석도 볼록하게 부풀린다. 그러나 암석은 물보다 훨씬 단단하기 때문에 변형되는 정도가 크지 않다. 달 때문에 암석이 늘어났다가 줄어들기 때문에 지구를 구성하는 단단한 부분들도 25시간에 두 번씩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이제 물을 머금고 있는 다공성 암석이 우물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암석은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라고 할 수 있다. 물을 빨아들인 스펀지가 그렇듯이 우물을 둘러싼 암석도 팽창하면 물을 빨아들이고 압축하면 물을 내보낼 것이다. 암석과 대양은 모두 만조 때는 팽창하고, 간조 때는 압축된다. 그 때문에 만조 때는 암석이 물을 빨아들여 우물 수면이 낮아지고 간조 때는 암석이 물을 내뱉어 우물 수면이 높아진다. 51)<br>달과 지구에 작용하는 조수는 단지 두 천체의 모양을 변형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구에서는 해수면을 높이거나 낮추고 달에서는 월진을 일으킨다. 달과 지구계의 전체 모습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는 달이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전했다. 그러나 지구와의 조수 상호작용 때문에 달의 자전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달의 자전 속도가 빠를 때는 지구의 중력으로 볼록해진 부분이 달의 자전 속도 때문에 옆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달의 볼록한 부분은 지구를 정면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의 중력은 옆으로 돌아가려는 볼록한 부분을 계속 잡아당기며 달의 자전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어느 시점이 되자 달의 자전 속도는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과 똑같아질 만큼 느려지고 말았다.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가 같은 달은 ‘동주기 자전synchronous rotation’을 하기 때문에 지구 중력에 끌려 볼록해진 부분이 계속해서 지구를 향한다. 이제는 달의 자전 속도가 '변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55)<br>그런데 조수 상호작용 때문에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천체는 달만이 아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도 느려지고 있다. 지구는 달보다 훨씬 무거워서 힘에 대한 운동 저항력이 더 크기 때문에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정도는 훨씬 적다. 그 증거는 산호초에서 찾을 수 있다. 열대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다 해양 동물인 산호는 탄산칼슘을 분비해 단단한 골격을 만든다. 산호는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듯 날마다 계절마다 두께가 다른 골격을 만든다. 산호가 만든 이 골격 층의 수를 세어보면 한 해가 몇 날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3억 5,000만 년 전에 살았던 산호 화석은 1년이 385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공전 주기는 다르지 않았을 테니 3억 5,000만 년 전에는 하루가 23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재 우리는 하루의 길이가 100년 전에 비해 1.7밀리초 가량 늘었음을 알고 있다. 실제로 지난 2,500년 동안 하루의 길이는 100년에 1.7밀리초씩 늘어나고 있다. 55-6)<br>달의 중력 때문에 지구에서 일어나는 조수운동은 지구의 자전 속도를 늦추고, 그 때문에 지구의 ‘각운동량angular momentum’*은 줄어든다. 그런데 물리학에는 ‘고립되었거나 닫힌’ 계(고립계) 안에서는 절대로 각운동량이 변할 수 없다는 기본 강령이 있다(각운동량 보존법칙). 따라서 지구의 각운동량이 줄어들면 이를 보상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의 각운동량이 늘어나야 한다. 그 다른 무언가가 바로 달이다. 달이 직선 궤도를 벗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공전 궤도를 지금의 공전 속도로 움직이려면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달의 공전 속도가 빨라지면 달이 조금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직선 궤도가 원 궤도로 구부러질 수 있기 때문에 달의 공전 궤도는 지금 궤도보다 조금 더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지구에서 달로 쏘아 보내는 전파의 이동 거리는 해마다 3.8센티미터씩 늘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달은 열두 달을 주기로 엄지손가락만큼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58)<br># 각운동량 : 회전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량<br>분점의 세차, 즉 지구가 흔들리는 운동을 하는 이유는 지구의 자전축이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뉴턴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뉴턴은 태양과 달의 중력뿐 아니라 지구의 자전 때문에도 지구의 형태가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지구의 적도 위에 있는 물체는 시속 1,67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날아다녀야 한다. 지구의 중력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붙잡아둘 강력한 구심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실제로 지구는 완벽한 원이 아니라 적도 부분이 23킬로미터 정도 볼록하게 부풀어 있다. 뉴턴은 지구의 ‘적도가 볼록하게 부풀어 있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중력을 받는 지구는 돌아가는 팽이처럼 흔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지구의 자전축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돈다. 뉴턴은 태양과 달의 중력이 적도 부근이 볼록한 지구에 작용하면 자전축은 2만 6,000년 만에 한 번씩 회전해야 한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는데, 이는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 67-8)<br>4장 · 보이지 않는 세상을 그리는 지도<br>중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보편적인 힘이라는 점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티끌 한 점이라도 다른 모든 물질의 티끌 한 점에 중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가령, 목성(질량이 태양질량의 1000분의 1)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지구에 미치는 중력은 태양 중력의 1만 6000분의 1이다. 태양계에 있는 행성들이 다른 행성에게 미치는 중력은 태양이 미치는 중력에 비해 너무도 작기 때문에 뉴턴은 행성의 경로를 계산할 때 행성이 다른 행성에 작용하는 중력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지구 같은 행성은 수많은 천체의 영향을 받으며 움직인다. 그러기 때문에 태양 주위를 완벽한 타원 궤도로 공전할 수 없다. 케플러의 제1법칙은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가까울 뿐이다. 태양 말고도 다른 천체들이 잡아당기기 때문에 행성의 타원 궤도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점차 방향이 바뀌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쪽의 궤도는 태양 가까이 가면 ‘변형’된다(세차가 생긴다). 73)<br>은하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항성에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약해진다. 따라서 루빈과 포드는 태양계의 행성들이 그렇듯이 은하의 항성들도 중심에서 멀어지면 공전 속도도 느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관측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은하 중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항성들을 관찰한 두 천문학자는 항성들의 공전 속도가 거리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하 외곽에 있는 항성들도 아주 빠른 속도로 공전하고 있었다. 그 정도 속도라면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다가 멀리 날아가는 아이들처럼 항성도 은하를 벗어나 우주 공간으로 멀리 날아가야 했다. 그렇게 빠르게 도는 항성을 붙잡을 수 있는 강력한 중력은 은하에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항성들은 빠른 속도로 공전하면서도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놀랍겠지만 나선은하는 '암흑물질'이라는 광대하고도 둥근 구름에 파묻혀 있다. 암흑물질의 양은 관측 가능한 항성을 모두 합친 것보다 10배는 많다. 79)<br>중력은 단순히 이 우주에는 암흑물질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암흑물질이 어떤 식으로 분포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아주 먼 은하에서 지구로 오는 빛은 지나가는 경로에 존재하는 암흑물질의 중력 때문에 ‘굴절’된다(중력 렌즈 효과). 먼 은하에서 오는 빛이 이동하면서 약한 중력 렌즈 때문에 상이 굴절되는 정도를 측정하면 암흑물질이 어떤 식으로 분포되어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현재 칠레 고산지대(루빈 천문대)에는 중력 효과를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나선은하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곳에서도 발견되었다. 우주는 138억 2,000만 년 전에 엄청난 폭발(빅뱅)과 함께 탄생한 후 지금까지 팽창하면서 점점 식어왔다. 차갑게 식은 잔해들은 우리은하를 비롯해 1,000억 개에 달하는 은하로 응축되었다. 그런데 이 가설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가설로는 우주의 매우 중요한 특성을 예측할 수 없다. 이 가설이 예측하는 우주에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 80)<br>은하는 빅뱅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덩이 중 다른 지역보다 아주 조금 더 조밀했던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아주 조금 더 조밀해진 지역은 아주 조금 더 중력이 세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질을 끌어당길 수 있고, 한번 끌어당기기 시작하면 중력은 더욱 커져서 다른 곳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주변 물질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 과정이 너무도 천천히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주가 탄생한 시간부터 우리은하 같은 거대한 은하들이 탄생하기까지의 시간으로 138억 2,000만 년은 너무 짧다. 은하가 형성되려면 우리가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중력을 가해 은하의 생성 속도를 높여줄 물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질량-에너지는 4.9퍼센트를 원자가, 26.8퍼센트를 암흑물질이 가지고 있다(나머지 68.3퍼센트는 1998년에 발견한, 역시 보이지 않는 ‘암흑 에너지’가 가지고 있다. 암흑 에너지는 우주를 가득 메운 반동 중력이다). 80-1)<br>2부 아인슈타인5장 ·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br>시간 지연 현상은 ‘뮤온muon’이라는 우주선cosmic ray을 관측할 때 훨씬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뮤온은 지표면에서 12.5킬로미터 상공의 대기에서 생성된 뒤에 아원자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뮤온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생성된 뒤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뮤온의 소멸 시간은 150만분의 1초 정도 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뮤온은 생성된 뒤 500미터도 이동하지 못하고 소멸해야 한다. 상층부 대기에서 생성된 뮤온 가운데 12.5킬로미터 아래의 지표면에 도달하는 입자는 단 한 개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뮤온은 지표면에 도달한다. 생성되자마자 소멸하는 뮤온이 지표면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는 뮤온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의 99.92퍼센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뮤온은 슬로모션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뮤온의 시간은 우리 시간보다 25배나 느리게 흐른다. 뮤온이 소멸되리라고 깨닫는 시간이 실제보다 25배 길어진다는 뜻이다. 98-9)<br># 우주선 :&nbsp;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내려오는 매우 높은 에너지의 입자선을 통틀어 이르는 말<br>빛의 속도가 우주의 주춧돌이라면 한 사람의 공간은 다른 사람의 공간과 시간이며, 한 사람의 시간은 다른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일상의 우주에서 이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 세상에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은 탄력이 있어서 한계 없이 무한히 늘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바뀔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과 북, 동과 서, 위와 아래로 뻗어 있는 3차원 공간과 과거와 미래를 나타내는 시간이라는 1차원으로 이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간 차원과 시간 차원이 한데 뒤엉켜 시공간이라는 4차원 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4차원 실재가 우리 3차원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은 4차원의 한 그림자이며, 공간은 4차원의 다른 세 가지 그림자이다. 103)<br>이 세상에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은, 즉 시간이 공간의 특성을 일부 공유한다는 것은, 평범한 2차원 지도 위에 지형을 그려 넣을 수 있듯 4차원 지도 위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려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4차원 지도 위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4차원 지도를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이 볼때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4차원 시공간 지도 위에는 우주가 탄생한 빅뱅에서부터 우주의 소멸에 이르는 동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동시에 펼쳐져 있다. 4차원 시공간의 지도 위에는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사슬처럼 펼쳐져 있다. 뱀처럼 지도 위를 가로지르며 펼쳐진 이 사건의 사슬을 물리학자들은 ‘세계선world line’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시간을 흐르는 것으로 경험하는 우리의 감각은 물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의 뇌가 실재reality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108)<br>시간과 공간은 물리학의 거의 모든 개념을 떠받드는 초석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움직이는 모래라면 다른 개념들도 역시 움직이는 모래일 수밖에 없다. 전기장과 자기장을 생각해보자. 공간과 시간이 시공간의 두 측면일 뿐이듯, 전기장과 자기장도 전자기장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 맥스웰은 관찰자가 전하를 띤 전자 같은 물체와 나란히 움직이면 전자는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관찰자는 전기장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전하를 띤 물체가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하면 관찰자는 전기장과 자기장을 동시에 느낀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석과 나란히 움직이면 관찰자는 자기장을 느낀다. 그러나 자석이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한다면 관찰자는 자기장과 전기장을 느낀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전기장과 자기장, 공간과 시간이 각각 한 동전의 양면임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질량과 에너지도 같은 존재의 두 가지 다른 측면임을 깨달았다. 104-5)<br>아인슈타인의 E=mc2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일 뿐 아니라 에너지에는 유효질량이 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 에너지, 열 에너지, 화학 에너지, 무엇보다도 운동 에너지는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체에는 내재된 질량(보편적으로는 ‘정지 질량’이라고 부른다)도 있지만 운동을 통해서도 질량이 생긴다. 즉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면 그 물체의 질량이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질량 증가를 분명히 인지하려면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야 한다. 어쨌거나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고 그 결과로 질량이 증가하면 그 물체는 쉽게 밀어 옮길 수가 없게 된다. 실제로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질량은 무한히 커진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주에는 한 물체의 질량을 무한히 크게 바꿀 수 있을 만큼 많은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광선을 잡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106)<br>다음으로 아인슈타인은 동일한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양하게 속도가 변하는(‘가속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간과 시간을 측정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물리 법칙은 언제나 같아야 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가속도 운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 외에도 훨씬 더 심각한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뉴턴의 중력 이론과 본질적으로 부딪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뉴턴의 중력 법칙은 태양처럼 거대한 물체에서 나오는 중력의 힘이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한다. 그것은 어느 장소에 머물든 거대한 물체의 중력은 그 즉시 느낄 수 있다는 뜻이며, 중력의 효과가 무한 속도로 퍼져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심지어 중력조차도 우주의 한계 속도인 빛의 속도를 능가해 퍼져 나갈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정한 우주 한계 속도와 중력 이론을 통합하는 방법은 ‘장field’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107)<br>역장force field과 역선line of force이 있는 중력장을 참고해 아인슈타인은 질량(물체)이 중력장을 만들고, 이 중력장이 다른 질량(물체)에 중력을 가한다는 이론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중력도 장이 있어야 특정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빛이 우주의 한계 속도라는 설정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중력장 이론을 구축하는 일은 아인슈타인에게 두 번째 문제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세 번째 문제도 있었다. 뉴턴의 중력 이론에서 중력을 생성하는 ‘근원’이 질량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아인슈타인은 형태에 상관없이 에너지라면 모두 유효질량이 있기 때문에 중력을 발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중력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질량이 될 수 없었다. 중력을 만드는 것은 에너지였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1905년에도 이런 문제들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려면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108)<br>6장 · 떨어지는 사람을 위한 시<br>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몸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1907년, 아인슈타인에게 찾아온 이 깨달음이야말로 새롭고 혁명적인 중력 이론 체계의 초석이 되어주었다. 한 남자가 승강기 안에 있다. 갑자기 승강기 줄이 끊어진다. 승강기 줄이 끊어지기 전에 남자는 승강기 바닥에 놓여 있던 저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승강기 줄이 끊어지는 순간, 70킬로그램을 가리키던 저울의 눈금은 0킬로그램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떨어질 때는 몸무게를 느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법칙에서는 아주 쉽게 중력이 없는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저 자유낙하만 하면 된다. 자유낙하를 하는 순간 중력도 몸무게도 사라져버린다. 중력을 느끼지 못한 채 자유낙하하는 상황은 어떤 행성의 중력도 느끼지 못한 채 텅 빈 우주에 떠 있는 상황과 구별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이 중력 법칙과 특수 상대성 이론에 다리를 놓아준다. 두 상황 모두 특수 상대성 이론의 법칙들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112-4)<br>중력을 받은 물체는 질량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 냉장고처럼 무거운 물체와 나무 의자처럼 가벼운 물체가 동시에 같은 힘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하는 모든 실험에서는 냉장고처럼 무거운 물체의 속도를 높이려면(즉 가속도를 높이려면) 작은 물체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거운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크기 때문이다. 관성이라는 저항력이야말로 물체가 ‘질량’을 갖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물체에 가하는 힘이 중력일 때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질량이 클수록 같은 속도로 움직이게 하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중력은 마치 질량이 큰 물체에게는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자기 힘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성 질량이 두 배 큰 물체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저항력도 두 배 크다. 그러나 낙하할 때는 두 배 더 큰 중력을 받기 때문에 질량이 작은 물체와 똑같은 속력으로 떨어진다. 114-5)<br>갈릴레오 이후로 사람들은 움직임에 대한 물체의 저항력(관성 질량)과 중력 때문에 경험하는 힘(중력 질량)은 전적으로 다른 힘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런 모든 사람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지는 사람은 몸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즉 중력을 받으며 떨어지는 모든 물체의 가속도는 동일하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은 동일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중력은 가속도라는 사실 말이다. 1907년에 아인슈타인은 서로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 가속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세상을 묘사하려면 상대성 원리를 일반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뉴턴의 중력 법칙이 자신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중력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상대성 이론을 일반화하자 그 자체로 새로운 중력 이론이 되었다. 115)<br>지구 같은 행성의 중력에서 멀리 벗어난 우주선에서 한 우주비행사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우주선은 중력가속도 1g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비행사는 지구 표면 위에서처럼 발을 선실 바닥에 붙인 채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우주선 창문이 온통 깜깜해서 밖을 볼 수 없다면 이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지구에 있는 어느 방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우주비행사로서는 자신이 지구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중력을 가속도와 구분할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망치와 깃털을 가져온 우주비행사는 두 물체를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가 동시에 놓았다. 두 물체는 같은 속도로 떨어져 선실 바닥에 동시에 닿았다. 자신이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구 표면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주비행사는 두 물체가 동시에 바닥에 닿은 이유는 모든 물체를 같은 속도로 떨어지게 하는 중력 때문이라고 믿었다. 116)<br>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주비행사가 지구 표면이 아니라 그 어떤 행성의 중력도 닿지 않는 우주 공간에 떠 있음을 알고 있다. 우주비행사가 망치와 깃털을 동시에 놓았을 때 이동한 것은 두 물체가 아니라 우주선의 선실 바닥이었다. 우주선의 선실 바닥이 중력가속도 1g의 속도로 위로 올라가 망치와 깃털에 동시에 부딪힌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다른 힘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중력은 환상이다. 중력은 가속도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가속도와 구별할 수 없다’는 말로 등가원리Principle of Equivalence를 규정했다. 바로 이 등가원리가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을 떠받치는 초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가속도를 중력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깨달은 것처럼 사람의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16-7)<br>밖을 볼 수 없는 우주선의 그 우주비행사는 다른 실험을 이번에는 레이저를 이용했다. 레이저를 가져와 바닥에서 1미터 높이에 있는 선반 위에 레이저를 올려놓았다. 우주비행사가 레이저를 켜자 레이저 빔이 선실을 수평으로 가로질렀고 선실 벽에 밝은 파란 점이 생겼다. 벽으로 걸어간 우주비행사는 파란 점이 선실 바닥에서 1미터 높이보다 낮은 곳에 맺혔음을 확인했다.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레이저 광선은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주선이 중력가속도 1g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광선이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바닥은 위쪽으로 가속도 운동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광선이 선실 바닥에서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곳에 닿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지구의 표면에서 중력을 받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중력이 있으면 빛은 경로가 휘어진다고 생각했다. 즉 중력이 빛을 휘어지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117)<br>그렇다면 중력은 왜 빛을 휘게 하는 걸까? 빛이 갖는 뚜렷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두 점 사이를 통과할 때면 언제나 가장 짧은 경로를 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짧은 경로는 직선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아인슈타인은 깨달았다. 언덕과 같은 지형에서는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이 직선이 아니다.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은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곡선이다.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경로가 직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레이저 광선이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모습을 확인한 우주비행사에게도 의미가 있다. 도보 여행자가 지나는 언덕 지형처럼 우주선의 선실이 구부러진 공간이라면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은 곡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력이 빛을 구부리는 이유는 중력이 뒤틀린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력은 뒤틀린 공간이다. 뉴턴의 세계관으로는 이토록 크게 바뀌는 중력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117-8)<br>중력은 뒤틀린 시공간이기 때문에 공간을 가지고 놀 뿐 아니라(빛의 경로를 구부린다) 시간도 엉망으로 만든다. 마주 놓인 두 거울 사이로 레이저 광선이 수평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가상의 ‘시계’가 있다고 해보자. 한 시계는 지표면에, 한 시계는 지표면에서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는 높이 있는 시계보다 육중한 지구에 더 가깝기 때문에 조금 더 강한 중력을 느낄 것이다. 그 말은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의 거울 사이를 움직이는 광선이 높은 곳의 광선보다 좀 더 구부러진 곡선 경로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좀 더 구부러진 경로로 이동한다는 것은 좀 더 먼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의 광선이 두 거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시간은 높은 곳에서 왔다갔다하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즉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가 위쪽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시간의 흐름은 중력이 강할수록 더 느려진다. 119)<br>7장 · 신은 0으로 나누었다!<br>놀랍게도 슈바르츠실트는 충분한 질량이 충분히 작은 부피로 응축되면 시공간은 바닥이 없는 우물처럼 아주 기이한 형태로 뒤틀린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시공간의 내벽은 너무도 가팔라서 광선조차도 시공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비한 뒤에 소멸하고 만다. 이런 시공간은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밤보다 훨씬 어둡다.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런 뒤틀린 시공간에 이름을 붙인 것은 1967년, 미국 물리학자 존 휠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공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슈바르츠실트의 해는 ‘블랙홀’을 기술하고 있었다. 슈바르츠실트의 블랙홀은 ‘사건 지평선’에 둘러싸여 있다. 이 사건 지평선을 넘어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면 빛도 물질도 절대로 다시 나올 수 없다. 사건 지평선을 측정하면 블랙홀의 ‘크기’를 알 수 있다. 태양이 블랙홀이 되려면 태양의 전체 질량이 반지름 3킬로미터인 구로 압축되어야 한다. 141-2)<br>백색 왜성의 질량이 클수록 중력은 내부 전자를 더욱 단단하게 압축하고, 전자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전자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 속도를 빛의 속도로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사실이었다. 전자의 속도가 우주의 한계 속도에 가까워지면 전자는 훨씬 무거워지고 속력은 증가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항성을 응축하려는 중력의 힘을 막는 것은 결국 양철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계속 부딪쳐 바깥쪽으로 힘을 가하는 전자들이었다. 이 전자들이 더욱 가까운 거리로 응축되면 속력 변화율이 작아지기 때문에 중력을 이기는 힘은 점차 소멸되고 말 것이다. 찬드라세카르는 거듭해서 계산하고 거듭해서 검토했다. 수명이 다할 때 항성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1.4배가 넘는다면 전자 축퇴압도 항성을 살리지 못한다. 중력은 무자비하게 항성을 으깨버릴 것이다. 우주에서 그토록 맹렬한 중력을 막을 힘은 없다. 145)<br># 찬드라세카르 한계 : 태양보다 1.4배 큰 항성<br>수명이 다한 큰 질량의 항성은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져서 가차없는 중력에 붙잡혀 점점 더 조그맣게 축소된다. 이제 극도로 압축된 항성 내부에서는 전자가 원자핵 안으로 들어가 양성자와 반응하면서 중성자를 만들어낸다. 중성자도 전자처럼 페르미온이다. 중성자 가스도 전자 가스처럼 항성을 단단하게 만들어 항성이 중력에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중성자는 원자보다 훨씬 작다. 그 때문에 거대한 항성은 지구만 한 백색 왜성이 되지 않고 에베레스트산만 한 중성자 덩어리가 된다. 이런 ‘중성자별’은 각설탕만 한 부피라고 해도 인류 전체의 무게를 합친 것만큼 무겁다. ‘중성자 축퇴압’이 항성의 중력 붕괴를 막아 더는 붕괴하지 않게 해주지만 백색 왜성의 경우처럼 그런 항성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중성자별을 이루는 구성 입자들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상대론적’ 입자들이다. 따라서 특정 질량 한계를 넘어가면 중성자별조차도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진다. 146)<br>자연의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으로 묶여 있는 중성자의 물리학은 전자기력으로 상호작용하는 전자의 물리학보다 복잡하다. 그 때문에 찬드라세카르 한계와 달리 중성자별의 한계 질량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중성자별의 한계 질량은 1932년에 러시아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Lev Landau가 처음 계산했고, 보통 태양 질량의 세 배 정도라고 믿고 있다.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항성은 특이점으로 수축하는 것을 막을 힘이 전혀 없다. 이 세상에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무거운 항성이 없다면 중성자별의 질량 한계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별은 틀림없이 있다. 드물기는 해도 태양 질량의 100배가 넘는 항성도 있다. 이런 항성들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해서 생애 동안 엄청난 양의 질량을 소비하면서 격렬하게 타오른다. 하지만 많은 질량을 외부로 방출한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마침내 죽을 때조차도 태양의 질량보다 세 배 이상 크다. 이런 항성은 결국 블랙홀로 압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146-7)<br>1930년대 말에 매우 엉뚱한 이유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가 팽창하는 우주가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팽창하는 우주를 고민하게 된 이유는 자연의 원소들을 만드는 용광로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가장 가벼운 수소를 시작으로 가장 무거운 우라늄까지 92개의 원소가 존재한다. 가모브는 우주는 수소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수소가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레고 블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원소들은 수소를 기반으로 차례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모브는 항성은 그런 용광로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잘못된 믿음이었다). 그래서 다른 용광로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팽창하는 우주가 영화의 거꾸로 돌리기처럼 다시 수축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수십억 년(우리는 지금 그 시간이 138억 2,000만 년임을 알고 있다)을 뒤로 돌리면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은 아주 작은 부피로 압축된다. 바로 그때가 우주의 탄생 순간, 빅뱅이다. 150)<br>3부 아인슈타인을 넘어서8장 ·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다<br>뜨거운 원자 가스 속에서는 빛 파장이 반복해서 방출되고 흡수되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가능한 모든 빛 파장이 생성된다. 이런 ‘열적 평형thermal equilibrium’ 상태에서는 모든 가능한 파장을 가진 파동들이 에너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다. 그런데 빛 파동의 최대 파장은 크기에 한계가 있지만(빛이 담겨 있는 용기 크기만큼만 커질 수 있다), 빛 파동의 최소 파장은 한계가 없다. 즉 어떤 파장을 택하든 한 파장을 택하면 장파장의 수는 언제나 유한하지만, 단파장의 수는 무한이 된다는 뜻이다. 장파장보다 단파장을 가진 파동이 훨씬 많기 때문에 에너지는 대부분 단파장들이 운반한다.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뜨거운 원자 가스가 지닌 에너지는 가장 에너지가 큰 X선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1895년에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기 전까지 가장 에너지가 높은 빛은 자외선이었다. 고에너지 X선에 에너지가 몰리는 현상을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158)<br>19세기 말에 전자 기술 분야의 킬러앱은 단연코 전구였다. 따라서 ‘전구의 가열된 필라멘트에서 최대한 많은 양의 가시광선을 방출하게 하는 방법’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뜨거워진 필라멘트가 뜨거운 기체로 이루어진 태양처럼 그 즉시 X선을 방출하는 것이 빛을 설명하는 최상의 이론이라면 그 방법을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대로라면 전자 같은 전하를 띤 진동 입자는 자신의 진동 ‘주파수’에 맞는 빛을 방출한다. 맥스웰의 이론은 가속한 전하가 전자기 복사를 방출한다고 기술하지만, 실제로 진동하는 전하는 그저 반복적으로 가속되고 있을 뿐이다. 플랑크는 진동하는 용수철이 마음대로 에너지를 방출하고 흡수하는 대신 정해진 기본량의 배수로만 에너지를 방출하고 흡수할 수 있다면 이런 재앙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플랑크는 용수철이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있는 에너지 기본량을 h에 진동수 f를 곱한 값이라고 했다. 158-9)<br>플랑크가 생각한 원자-용수철 가설에서 에너지가 hf의 배수로만 방출되거나 흡수되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그가 이런 상상을 한 이유는 오직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플랑크는 진동하는 입자(진동자)는 살짝 높은 에너지에서는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없다고 했다.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있게 허용된 다음 단계의 에너지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즉 모 아니면 도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진동자가 빛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없다면 빛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빛 파동들이 에너지를 나누어 가질 때, 진동수가 가장 높은 파동은 에너지의 많은 몫을 차지하기는커녕 아예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에너지를 갖기에는 너무 비싼 입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에너지가 가장 많은 빛을 길들이면 자외선 파탄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를 속도의 한계로 정하자 무한infinite이 해결되었듯, 플랑크가 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자 무한소infinitesimal가 해결되었다. 160)<br>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방정식과 플랑크의 방정식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빛도 행동하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플랑크가 그저 수학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양자는 실제로 존재했다. 훗날 이 덩어리에는 ‘광자photon, 光子’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제 우리는 에너지, 물질, 전하, 그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덩어리(양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자연의 가장 작은 단계는 고전물리학이 예상했던 것처럼 연속적이지 않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은 점들이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가장 작은 단계도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리 상수’ h는 플랑크 상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플랑크 상수가 극단적으로 작기 때문에 광자 한 개가 운반하는 에너지도 엄청나게 작다. 그 때문에 전구에서 나오는 빛이 사실은 급류처럼 쏟아지는 작은 총알들임을 절대 눈치채지 못한다. 쏟아져 나오는 작은 총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연속적으로 보인다. 160-1)<br>두 전자나 두 산소 원자 같은 완벽하게 동일한 양자 물체들이 볼링공처럼 수백 번 부딪친다고 생각해보자. 양자 물체들은 수백 번을 부딪쳐도 절대로 가지 않는 방향이 생긴다. 왜일까? 그 이유는 한 입자의 확률 파동의 마루가 다른 입자의 확률 파동의 골과 만나 서로 간섭을 일으키면서 상쇄되어 입자를 찾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간섭’은 양자 입자를 관측하기 전에 중첩된 두 양자 파동이 상호작용하게 해준다.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가 원자핵으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돌 수 있는 이유도 간섭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자가 원자핵을 향해 갈 수 있는 경로는 아주 많다. 전자는 나선을 그리며 원자핵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직선 경로나 파동처럼 요동치는 경로를 그리며 원자핵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당연히 이 모든 경로는 양자 파동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 양자 파동들은 원자핵 가까이 다가가면 모두 간섭을 일으켜 상쇄되기 때문에 원자핵 가까이에서 전자를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165-6)<br>만약 중력을 양자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중력을 운반하는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중력을 매개하는 가상 입자를 이론물리학자들은 ‘중력자graviton’라고 부른다. 중력자와 관련해서는 이론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주 많으며, 그런 입자는 없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그 힘을 전달하는 입자와 그 힘을 ‘느끼는’ 입자가 얼마나 많이 상호작용하는지가 힘의 세기를 결정한다. 그런데 중력의 세기는 다른 세 힘의 세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 수소 원자를 이루는 전자와 양성자 사이의 중력은 전자기력보다 1만×10억×10억×10억×10억 배만큼 약하다. 그 말은 중력은 물질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력자 문제는 별개로 치더라도,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과 양자 이론은 본질적으로 양립하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두 이론을 합치는 일은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중력을 제외한 자연의 다른 힘들은 시공간 안에서 작동하지만 중력은 시공간 자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171)<br>9장 · 미지의 세계<br>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진공 속에서는 입자와 반입자 쌍이 생성될 수 있다. 이런 ‘가상’ 입자들은 눈 깜짝할 순간보다도 더 짧은 순간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호킹은 블랙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양자 과정을 숙고하다 사건 지평선 외곽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건 지평선 부근에서 이제 막 생성된 입자와 반입자 쌍 가운데 한 입자는 블랙홀의 중력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다른 입자는 블랙홀의 중력에 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간 입자는 다시 블랙홀 밖으로 나와 함께 태어난 쌍입자를 소멸시킬 수 없다. 달아난 입자는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가상 입자가 아니라 실제 입자가 되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호킹은 이런 과정이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블랙홀 밖으로 끊임없이 튀어나오면서 빛을 내는 입자의 흐름을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라고 한다. 188)<br>블랙홀을 규정하는 특징은 내부에서 그 무엇도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호킹 복사를 이루는 입자들은 블랙홀 내부로 들어간 적이 없으니, 호킹 복사는 블랙홀 내부에서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지평선 가장자리 바로 너머에 있는 진공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호킹 복사를 하려면 어디선가 에너지가 와야 한다. 사건 지평선 부근에서 가져올 수 있는 에너지는 블랙홀의 중력 에너지뿐이다. 호킹 복사가 끊임없이 블랙홀의 중력 에너지를 가져오면, 블랙홀의 중력은 약해져서 블랙홀은 점차 수축할(증발할) 수밖에 없다. 블랙홀의 크기가 작을수록 호킹 복사는 더욱 격렬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아주 작은 블랙홀의 경우에는 아주 밝은 호킹 복사를 방출한다. 블랙홀은 쓸쓸하게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빛나는 존재는 당연히 열이 있다. 호킹 복사 때문에 빛이 나는 블랙홀도 마찬가지다. 그 열은 블랙홀이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블랙홀을 둘러싸고 있는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양자 과정 때문에 발생한다. 188-9)<br>블랙홀을 증발시켜 결국에는 사라지게 하는 호킹 복사는 물리학에 심각한 역설을 불러온다. 정보는 새로 생성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다. 달을 생각해보자. 뉴턴의 법칙을 적용하면 오늘 달의 위치를 가지고 내일 달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오늘 달의 위치는 내일 달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이 하늘길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에도 정보는 새로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보존’된다. 하지만 블랙홀이 증발하면 정보는 사라진다. 이 같은 상황을 간단히 말해 ‘블랙홀 정보 역설black hole information paradox’이라고 한다. 블랙홀에서 사라진 정보를 저장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호킹 복사다. 이런 ‘블랙홀 정보 역설’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이스라엘 물리학자 야코브 베켄슈타인Jacob Bekenstein이 찾았다. 1972년, 그는 사건 지평선의 ‘표면적’이 블랙홀의 ‘엔트로피entropy’와 관계가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189-90)<br>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에 엔트로피가 있다는 것은 블랙홀의 지평선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특색이 없는 매끈한 경계가 아니라 미시 구조를 갖춘 곳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1993년, 노벨상 수상자인 유트레히트 대학교 헤라르뒤스 엇호프트Gerardus 't Hooft는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은 특색이 없는 매끈한 구조가 아니라 거칠고 불규칙한 미시 구조를 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안했다. 이 작은 미시 세계에 존재하는 울퉁불퉁한 덩어리들이 블랙홀을 만든 항성의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고 했다. 엇호프트가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이 블랙홀의 사라진 정보를 저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발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드Leonard Susskind가 끈 이론으로 그 생각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진동하는 끈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국 정보는 사라지지 않았다.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 가운데 하나가 지켜진 것이다. 190-1)<br>우주도 블랙홀처럼 지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주의 ‘빛 지평선light horizon’은 우주의 가장자리가 아니다. 우주는 아마도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우주의 빛 지평선은 ‘관측 가능한 우주’의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이 빛 지평선 안에 있는 항성과 은하의 빛은 모두 우주가 탄생한 138억 2,000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닿을 시간이 있었다. 빛 지평선 너머에 있는 항성과 은하의 빛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그 빛들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엇호프트와 서스킨드는 3차원인 항성의 정보가 2차원인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에 각인된 것처럼 3차원인 우주의 정보도 2차원인 우주의 지평선에 있는 홀로그램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런 식으로 비유를 사용해 추론하는 것은 엄격한 물리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1998년, 아르헨티나 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Juan Maldacena는 우리가 ‘홀로그램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191-2)<br>양자 이론과 특수 상대성 이론을 양립하려고 시도하는 이론들을 ‘등각장론Conformal field theory’이라고 한다(표준 모형도 등각장론 가운데 하나다). 말다세나는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에 맞춰 춤을 추는 기본 입자들이 내부bulk에 가득한 5차원 우주를 상상했다. 그러고는 2차원인 풍선의 표면이 3차원인 공기 부피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4차원인 우주의 경계가 5차원인 우주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4차원 우주의 경계 안에는 등각장론에 맞춰 춤을 추는 입자들이 들어 있다. 말다세나는 놀랍게도 4차원 우주 경계에 관한 방정식들은 내부를 기술하는 훨씬 복잡한 방정식과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고, 동일한 물리학을 설명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서 5차원 우주의 내부에 작용하는 중력 효과가 4차원 우주 경계에 작용하는 양자 이론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아르카니-하메드는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은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19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711/50/cover150/89323222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711501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스기야마 마사아키 -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거대한 땅의 지배자, 유목민에 의해 세계사가 완성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35628</link><pubDate>Mon, 15 Jun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3562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8480115&TPaperId=1733562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1/34/coveroff/89984801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8480115&TPaperId=1733562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거대한 땅의 지배자, 유목민에 의해 세계사가 완성되다!</a><br/>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이경덕 옮김 / 시루 / 2013년 03월<br/></td></tr></table><br/>1장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br>"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중국본토》에서 '자이덴스트라세Seidenstraße'라는 말을 썼다. '비단길'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동과 서가 예부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연결되었다는 표현이었고, 그런 생각(실제로는 소망에 가까운)이 담겨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아마 별다른 생각 없이 《중국본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 알베르트 헤르만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자이덴스트라세'를 멋지게 포장했다. 《누란樓蘭》 등을 쓴 그의 영어본 《실크로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단히 환영 받았다. 그러자 실제로 그런 길이 있는지 없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그 길은 당연히 있는 길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행과 출판 등에서 뛰어난 산업 아이템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이렇듯 태어날 때부터 낭만적이었고, 지금은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이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문명'은 동·서에만 있고, 그 사이에 놓인 광활한 땅은 점點과 선線의 통과 지역에 불과했다."(37-8)<br>"유목민은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민족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유목민은 유랑에 고통스러워한다. '유遊'라는 글자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자는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출유出遊나 유학遊學에서의 의미, 즉 '나간다'라는 의미다. 유목에서 '유遊'는 이동, '목牧'은 목축을 가리킨다. 즉 '이동 유목민'이라는 뜻이다." "유목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유목민의 세계는 실로 거칠고 능력주의·실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습득해야 하는 능력은 말을 잘 타는 것이다. 또 기상이나 자연환경 전반에 민감해야 한다. 가족이나 가축에 대한 주의 깊은 시선과 배려는 물론 계획성과 인내력, 순간적인 판단력과 과감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유목민 집단에 대한 귀속성과 강한 개인의식, 얼핏 모순처럼 느껴지는 두 가지 면이 개인의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52)<br>2장 중앙유라시아의 구도<br>"더 큰 유라시아 세계사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적어도 10세기부터 시작된 거대한 '투르크 이슬람 시대'라는 조류 속에 유라시아가 있다. 그 조류 가운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종착지가 티무르왕조와 제2차 티무르왕조인 무굴왕조였다. 그리고 '공간'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걸친 '종적 구조'가 오랜 역사를 통해 존재하고 역사와 인간에 엄청난 역동성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최고의 사례가 역시 두 개의 티무르왕조다. 이 동서 유라시아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층 구조는 바다와도 연결된다. 여기에는 더 거대한 구도가 숨겨져 있다. 그 근거로 16세기 중반 무렵부터 활발해진 포르투갈의 인도 해역으로의 진출을 들 수 있다. 내륙에서 티무르왕조의 남하, 바다에서 포르투갈의 출몰은 연이어 발생했다. 이 '종적 관계의 구조' 속에서 '땅과 활의 시대'와 '바다와 총포의 시대'가 동시에 존재한 셈이다.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이 무굴왕조를 둘러싼 중층 지역 속에서 발생했다."(83)<br>"'이란'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란'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과 러시아 열강에 의한 외압 속에서 계속 축소된 '근대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보통 사용되고 있는 이란의 의미로는 자연환경의 이란고원조차 생각할 수 없다. 한편 거대한 '이란'이 있다. 예부터 외압을 견디어온 이란고원을 포함해 넓게 사용하고 있는 역사상의 개념이다. '이란 자민(이란의 땅)'이라는 오래된 기원을 가진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아무에서 미스르까지'의 땅, 즉 아무 강에서 이집트까지를 말한다. 이 드넓은 땅은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영역과 필적할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문명 세계'를 '이란'이라고 불렀다. 아무 강 건너편의 '야만족의 땅'은 '투란'이라고 불렀다. 문명관에 따른 구분이었다. 거기에는 일종의 가치관이 부여되어 있다. 고대 이후 중국 '문명'을 기준으로 한 화이사상, 또는 고대 그리스의 '헬렌'과 '바르바로이'의 관념과 비슷하다."(85-6)<br>"서북유라시아의 대초원에는 카자흐 스텝이 펼쳐져 있다. 끝없는 대초원이 볼가 강까지 이어진다. 이곳은 오히려 몽골 초원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이 거대한 초원 지대는 볼가 강을 넘어 돈 강, 드네프르 강, 도나우 강 입구까지 계속된다. 남쪽은 카프가즈 산맥의 북쪽 기슭에서 흑해 북쪽 연안 일대를 모두 덮고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기슭까지 이어진다. 말 그대로 대초원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유목민 군단과 그 국가를 길러냈다. 몽골 고원에 이어 유목 국가의 '제2의 요람'이다. 몽골 세계제국 시대에는 페르시아어로 '다쉬트 이 킵차크'라고 총칭했으며, 이는 '킵차크의 초원'이라는 의미이다. 페르시아어는 몽골 시대에 국제어로 사용되었다.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를 비롯한 그 가문과 그들의 영지를 조치 울루스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킵차크 한국'이라고 부르는 곳은 '다쉬트 이 킵차크'라는 당시의 국제용어에서 유래했다. 이 서북유라시아 대초원이 조치 울루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88-9)<br>3장 유목 국가의 원형을 찾아서<br>"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역사》 전편의 클라이맥스인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이 막 시작하기 직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전개한 북진 작전의 상대는 스키타이다. 때는 기원전 514년 또는 513년경이다." "그 당시 그리스인의 관념으로 유럽은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라는 두 해협을 경계로 북쪽에 펼쳐진 땅 전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 남쪽 가운데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 곳을 '아시아', 서쪽은 '리디아'(이른바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아시아와 유럽을 지금처럼 동쪽과 서쪽이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온난하거나 뜨거운 날씨, 풍요의 땅에서 사치스러울 정도의 문화의 꽃이 핀 것은 아시아 쪽이었다. 유럽은 한랭하고 소박한, 무례함의 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스키타이나 그리스 또한 위의 관념에 따르면 모두 '북쪽의 땅', 유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키타이-페르시아 전쟁'을 아시아와 유럽 최초의 대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106-8)<br>"스키타이 국가는 동방에서 진출한 사르마타이 집단에게 밀려 슬금슬금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기원전 3세기 중반 무렵에는 완전히 해체되고 만 듯하다." "그러나 그 사르마타이 또한 4세기 동방의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밀려온 파도에 휩쓸렸다. '사르마타이 연합'은 와해되었고 훈족의 패권 아래 흡수되었다." "이런 경위를 일괄해서 말하면 서북유라시아 방면에서는 유목 군사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연합체가 계속 형성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사이 동방에서 새로 나타난 무리에 의해 중심 집단의 교대와 연합체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곳의 '정치 전통'이 되었다." "13·14세기 몽골의 서북유라시아의 도착과 장기적인 지배가 그 마지막 파도였다. 조치 울루스를 정점으로 하는 300년에 걸친 느슨한 정치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러시아는 이 전통의 파도(초원 세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장하는)를 뒤집는 형태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진했고, 러시아라는 '유라시아제국'을 전前근대의 마지막에 출현시켰다."(120-2)<br>"한편 스키타이와 병립했던 아케메네스왕조 또한 다양한 지역 사회를 포함한 '거대 국가' 패턴의 원류를 이룬다. 즉 스키타이와 아케메네스라는 남북 양국은 그 후 유라시아 역사의 이중 국가 패턴(그것도 광역 국가의)의 원류인 것이다." "'세계제국' 아케메네스왕조를 실제적으로 건설한 다리우스 1세는 장대한 구상을 토대로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여러 갈래의 국가·사회의 건설 사업을 펼쳤다. 중앙과 속령이라는 양면을 기본으로 배려하며 재조직했던 다리우스의 여러 시책은 총체적으로 국가·사회·경제·문화 건설의 요점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그 후 인류사에서 '국가'라는 점의 원형, 특히 '제국 지배의 원형적 이미지'라고 해도 좋은 형태의 대부분은 모두 다리우스의 국가 건설 사업 중에 나오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의 도시 문명의 의미만을 오로지 높이 내걸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나 언설의 대부분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 것이지 부정하기 힘들다."(124, 127-8)<br>"동반부에서는 유목 국가의 형성이 서반부보다 훨씬 늦었다. 사실 '중화 본토'도 아케메네스왕조를 기준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크게 늦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중국 본토의 전국시대 이전 동방의 유목민들은 말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뛰어난 기마 기술과 그를 뒷받침할 각종 마구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동 목축의 범위 또한 지극히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 유목민이라고는 하지만 걸어 다니는 유목민이었고, 따라서 유목 생활의 내용이나 집단의 규모도 작았으며 군단이라는 의미 또한 매우 미약했다. 그런데 그것이 크게 변한 것이다. 도시 주민과의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또 하나의 의미를 전한다. 유라시아 서반부에서 발달한 기마 기술과 그것을 전제로 운영되는 넓은 범위의 활용이라는 말 그대로 유목 사회 시스템이 동방의 유목민들에게 거의 완전하게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희미한 존재였던 유목민들은 기동성과 집단 전술을 몸에 익히면서 급속도로 군사화되었다."(137-8)<br>"《사기》 〈흉노열전〉에서 권력을 장악한 묵돌은 냉정하고 과감한 타고난 군사 지휘관으로서(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일정 부분 이상화되어 묘사되고 있다. 거기에는 사마천의 명확한 의도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즉 자기가 속한 한왕조를 개국한 유방에 대한 묘사는 묵돌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사마천이 말하는 묵돌과 유방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우열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씩씩하고 용감한 영웅은 다름 아닌 묵돌이다. 어딘가 무능하고 어리석으며 칠칠치 못한 유방의 멍청한 모습을 《사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마천은 사태를 주시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읽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기록했다. 그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후세의 독자들이었다. 그것은 당시 현실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중화'라는 가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사전에 시야를 한정시키고 그 좁은 시야로 《사기》를 읽고 그 속에 담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뒤집힌 역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148-9)<br>4장 초원과 중화를 관통한 변동의 파도<br>"한나라와 흉노 간의 총력을 기울인 장기전은 결국 두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공격을 받은 흉노는 연합 주권의 형태 그 자체가 크게 흔들렸고 몇 가닥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편 공격을 한 한나라는 국가·사회의 내부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직접적으로는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말았다. 무제를 중심으로 한나라 정부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철·술을 전매로 바꾸었으며 '균륜', '평준' 등의 물가 조절 정책 같은 다양한 정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무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련의 전매제도는 이후 중화왕조에서 계승했고 세수의 절반 가까운 부분을 차지했다." "전쟁 비용 염출을 위한 당연한 결과로서 경제의 왜곡까지 더해져 사회에 짙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국 한무제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된 소제昭帝는 곧바로 흉노와 강화를 맺는다. 한나라의 약속 파기에서 시작된 '흉노-한 전쟁'은 다시 한나라의 요청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180-2)<br>"유연은 예의 묵돌의 후예로 선우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계보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성을 중국풍으로 유劉라고 쓴 것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인 유방이 종실의 딸을 묵돌에게 시집보낸 이후 한나라의 공주와 통혼에 의해 한왕조 유씨의 피가 선우 왕실에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왕실의 신성한 혈맥인 유씨 자체가 후한의 현제 이후 촉한의 황제였던 유비 일문 이후 정치적인 존재로는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흉노 왕족이 함께 쓰는 유씨야말로 제대로 된 유씨였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유연은 몸속에 과거의 두 제국인 흉노와 한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원과 중화의 틀이 무너지고 서로 난입해서 공방을 벌이는 난세였던 당시 유연이야말로 귀한 존재 가운데서도 귀한 존재였고 왕자 중의 왕자였다. 두 왕권의 혼혈이라고 해도 좋을 존재, 그 자체가 당시 아시아 동쪽에서 뛰어나게 우수하고 신성한 상징이었던 것이다."(203-4)<br>"한의 황제가 된 유연은 불과 2년 뒤인 영가 4년(31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진왕조 타도 작전이 한창일 때였다. 유연은 상징적인 혈통과 재능에 더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운명을 지닌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이른 죽음은 흉노왕조를 단명하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 상황을 다시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연이 없는 흉노족의 한왕조는 이미 초라해진 진왕조를 몰아냈다. 영가 5년(311년) 진의 수도 낙양은 한왕조의 흉노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이 전후의 동란을 일반적으로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난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권 교체였다. 이 사건을 진왕조에 대한 흉포한 '이민족의 반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중화사상의 산물이다." "애초에 이 시대에 있어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시대는 현실적으로 '이민족'과 '한민족'을 확실하게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근대주의의 편협한 '민족'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서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222)<br>"이번에는 시대를 건너뛰어 선비 탁발부가 결성한 대국은 북위라는 화북의 통일 정권으로 성장한 다음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고 각각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라는 이름으로 바꾼 다음 그 북제가 수隋에서 당으로 바뀐다. 즉 이들 정권은 모두 선비 탁발부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일련의 국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또렷하게 선을 긋기 어렵다. 대국에서 북위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른 국가는 중화풍의 왕조 이름을 바꾼 연속된 국가였다. 권력의 실제 그 자체의 연속성, 공통성에 착목하면 현실적으로는 '탁발拓跋 국가'라고 일괄해서 취급하는 것이 적절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5호 16국 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만이 '주변의 야만족'들이 중화에 도발한 시대라고 별다른 의심 없이 그 오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순수한 한족왕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잘해야 한漢·송宋·명明 정도밖에 안 된다. 북위나 당나라는 중화왕조로 보고 5호 16국은 이민족의 왕조로 보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224-5)<br>5장 세계를 움직인 투르크-몽골족<br>"5세기를 전후하여 초원 세계는 동쪽에서 차례로 투르크·몽골계 연합체인 유연, 투르크 색깔이 짙은 고거, 이란계가 정권 중심인 에프탈이라는 세 부류의 유목 국가가 나란히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삼국의 동서에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 있었다. 동쪽은 탁발 국가에서 유래한 북위가, 서쪽은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한 사산조페르시아가 그것이다. 이들 삼국과 두 나라, 모두 5개의 국가가 서로 착종한 정치 관계를 맺고 항쟁했다." "또한 이런 사태를 좀더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남중국의 남조와 동지중해 지역의 동로마 또한 다분히 깊은 관계와 이해로 얽혀 있었다. 즉 유라시아 동서에서 7개국이 진주처럼 꿰어져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7개국의 갈등은 '유라시아 시대'의 방문을 알리는 최초의 종소리였다. 그러나 그 각축 상황은 겨우 반세기로 끝났다. 6세기 중반 무렵 중앙유라시아의 한쪽 구석에서 보다 격렬한 시대와 정국을 주도할 강력한 유목 국가가 갑자기 출현했다. 그것은 돌궐이었다."(248-9)<br>"그러나 돌궐이 유라시아 동서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불과 30년 정도였다. 583년 돌궐은 동서로 분열했다. 동돌궐은 몽골고원을 본거지로 삼아 그 주변을 지배했고 서돌궐은 천산 산중을 근거지로 중앙아시아와 서북유라시아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러한 돌궐의 동서 양분은 돌궐 국가의 급격한 확대가 이루어진 초기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동쪽과 서쪽 두 개로 담당 지역이 양분되어 있었는데 결국 그대로 분할되고 만 것이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투르크계 주민을 기반으로 하는 한편 크고 작은 분권 세력이 할거했던 돌궐은 극히 이완된 연합체였다. 게다가 '국가' 전체를 통합시킬 수 있는 중앙권력은 거대한 판도와 비교할 때 너무나도 미약했다. '세계제국'을 지속시킬 수 있는 정치기구가 아직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대한 돌궐의 동서 분열은 탁발 국가에 행운을 안겨주었다." "581년 양견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대대로 물려받았던 작위인 수국공隋國公에서 따서 수왕조를 열었다."(253-5)<br>"아마 성립 초기의 당왕조는 다시 강력해진 동돌궐의 속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곧바로 역전되었다. 동돌궐의 지배 아래에 있던 철륵鐵勒을 비롯한 설연타薛延陀 등 투르크계 여러 부部가 독립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막 당나라의 제2대 황제가 된 태종 이세민은 630년 이를 기회로 삼아 일거에 힐리 카간을 밀어붙였고, 동돌궐의 옛 속국과 독립을 지향했던 여러 부를 회유하며 자신을 카간으로 섬길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청해 지방의 토욕혼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급속하게 국가를 형성한 감숙회랑이 이끄는 토번과 화친을 맺은 당왕조의 세력권은 단숨에 아시아 동방 전체를 덮을 만큼 넓어졌다. 태종 이세민이 내륙 아시아의 군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투르크-몽골어로 '텡그리 카간'이었다." "계보로 보면 선비 탁발부 출신으로 부계나 모계 모두 분명 흉노로 거슬러 올라가는 당나라의 태종은 유목민들이 보기에 적합한 투르크 몽골의 왕이었다."(256-7)<br>"동돌궐은 744년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토쿠즈오구즈Toquz-Oghuz 연합에 의해 무너졌다. 토쿠즈오구즈 또한 투르크 계통이었다. 위구르는 ('안사의 난' 이후 급속도로 무력해진) 당왕조와 안전 보장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거액의 경제 지원을 받는 화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당왕조 중앙정부의 재정을 극도로 약화시켰고, 마침내 당은 탁발 국가의 전통이었던 조용조租庸調를 근간으로 하는 세금 체계에서 양세법兩稅法에 의한 세금 징수 시스템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역대 중화왕조에서 소금 전매가 중앙 재정의 근간이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위구르의 주도는 정치·군사 면에 그치지 않았다. 돌궐 이후 투르크 국가와의 인연을 강화한 소그드 상업 세력과 결탁한 위구르는 소그드인의 대상들을 활용해서 자기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당왕조 중국에 말을 주고 비단을 받는 '견마絹馬 무역'을 확대했다. 물론 국제 상품인 비단은 소그드 상인의 상업망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로 전매되었다."(267-70)<br>"키타이(거란) 국가는 그 속에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를 품고 있었고 그 점에 대해 말하면 '유농遊農 복합 국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위구르 유목제국에서 명확해진 유목과 도시의 관계는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즉 단순히 유목 국가, 농경 국가로 구분하는 도식을 적용할 수 없는 시대로 이미 접어들었다. 유목 국가는 뭉치기도 쉽지만 깨지기도 쉬웠다.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했다. 붕괴되기 쉬운 것은 연합체가 갖고 있는 숙명이었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중앙권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구·조직이 국가 전체의 총량과 비교해서 극히 작았다는 점으로 압축된다. 그런데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서는 그 결점이 상당히 수정되었다. 키타이 국가는 유목 국가의 구조에 농경 국가의 시스템을 수용해서 당시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함과 지속력을 손에 넣었다. 즉 유목 국가는 키타이 국가 이후 국가 시스템이 변했다. 즉 국가의 형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287-9)<br>6장 몽골의 전쟁과 평화<br>"주로 혈연 또는 의리를 통해 유사 혈연으로 맺어진 소규모 집단을 편의상 '씨족'이라고 부르고 그런 '씨족' 집단이 지연地緣이나 정치적인 이유(이 경우도 '피'로 맺어진 친소 관계가 강조된다)로 하나로 모인 것을 편의적으로 '부족'이라고 부른다. 고원에 할거하는 여러 세력 가운데 동부의 흥안령 일대를 타타르Tatar, 콘기라트Qonggirat, 중부의 오르콘 토라 일대의 케레이트Kereyit, 북부의 셀렝게 유역의 메르키트Merkit, 그리고 서부의 알타이 일대의 나이만Naiman 등이 유력했다." "그러나 몽골('맹골萌骨', '몽올蒙兀')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오랫동안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던 듯하다. 약소 집단인 몽골부가 부상한 것은 12세기 무렵으로 테무진 등장의 전야라고 해도 좋다. 이때만 해도 몽골은 신흥 세력이었다. 12세기 끝 무렵 테무진은 몽골 집단의 리더로 부상했다." "여기에 용모와 언어가 제각각인 유목민들이 테무진이라는 일개 권위자 아래로 모여드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를 정치 연합체 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320-1)<br>"1206년 칭기즈칸을 칭한 테무진이 휘하의 유목 연합을 '대몽골국'이라고 명명하면서 몽골은 국가의 이름이 되었다. 인종과 민족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것이 몽골 확대의 열쇠다. 이때 '몽골'에는 '민족'이라는 용어로 부를 수 있는 동일성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모여든 몽골이 '몽골 공동체'가 된 것은 칭기즈 체제에 의한 유목 집단의 재편성이 일단 종료되고 대외 원정에 나서는 1211년부터다. 전후 6년에 걸친 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은 거국일치擧國一致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몽골과 금의 전쟁' 동안 신흥 '대몽골국'의 성년 남자 대부분은 고비사막의 북쪽에 있는 본거지(막북漠北)를 떠나 막남漠南의 땅에 병참기지를 구축하고 화북 전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국가 건립 후 곧 이어진 이 대작전에 의해 '대몽골국'의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몽골군'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속으로는 다양한 부족과 씨족에 속해 있었지만 겉으로는 '몽골'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을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자각했다."(322)<br>"동부 천산의 남북에 나라를 세운 불교·통상 국가인 '천산 위구르'와 그 서쪽인 천산 산중, 이리 강의 계곡에 나라를 세운 무슬림왕국인 '천산 카를루크'(카라한왕조와도 관계된)는 모두 투르크계 지배자를 섬긴 작은 국가였다. 두 국가 모두 일찍부터 몽골로의 귀속을 결정했다. 그리고 두 국가가 참가해서 역시 투르크계 이슬람 대세력인 호라즘샤왕국을 붕괴시킨 결과로 중앙아시아에서 서북유라시아, 서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투르크계 여러 집단이 차례로 몽골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특히 서북유라시아 초원의 킵차크족은 이보다 10년 후 '바투의 서쪽 원정'에 의해 조치 울루스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로 불과 4개의 천인대를 갖고 있었던 조치 집안은 일거에 30배가 넘는 대병력을 획득했고 몽골제국 전체에서도 굴지의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다." "몽골은 대부분 '동료'를 늘려 그것을 '몽골'이라는 이름 아래로 차례차례 편입했다. 편입·재편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조직화야말로 몽골의 확장에 큰 디딤돌이었다."(330-1)<br>"1260년을 정점으로 하는 제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무력에 의해 제5대 몽골 대칸의 지위를 손에 넣은 쿠빌라이는 방대한 인구와 드넓은 판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근본부터 재검토해야 했다." "몽골제국은 이후 쿠빌라이 집안이 독점하게 된 대칸의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서방의 세 영역을 포함한 '세계 연방'의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이른바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몽골제국을 쿠빌라이가 받아들였다고 말해도 좋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경제와 유통의 조절을 통해 유라시아 규모로 통상을 유도해서 분유分有 체제가 강화된 몽골제국 전역에서, 유라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를 연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그 전제로 남중국의 남송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국 전토를 판도에 넣었으며 남쪽의 습윤 아시아와 뜨거운 바다를 시야에 넣었다. 몽골제국이 확대되어가는 역사 속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바다 진출을 이루었다."(336-7)<br>"남송의 '유산'은 쿠빌라이 정권이라는 이용자의 도움으로 활짝 꽃을 피웠다. 몽골제국 전체에서 생각하면 쿠빌라이의 우방 훌레구 울루스는 중동의 동쪽 절반을 지배했다. 즉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무슬림 해상 세력은 모두 몽골의 손에 장악되었다. 쿠빌라이의 대칸 정권인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동서가 호응하는 형태로 몽골의 해상 진출과 동서 해양 무역의 장악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여기에 8세기 이후 무슬림 해양 상인의 동진이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현상과 당나라 말기 이후 남송을 거쳐 해양에 대한 지향성을 높여갔던 강남이라는 풍요로운 산업사회가 쿠빌라이의 '대원 울루스'라는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하나로 묶여 확실한 모습으로 시스템화되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내륙과 해양이 참된 시스템으로 결합된 시대의 개막이었다. '유라시아 대교역권'이라고 불러야 할 초대형 통상·교류의 소용돌이가 13세기 말기인 1280녀대 끝자락에 명확해졌다."(343-4)<br>"몽골의 확대와 그 후의 통치를 통해 군사·정치조직의 몽골과 상업·경제 조직의 무슬림 및 위그르와의 공동화 또는 일체화가 두드러졌다. 이런 면에서 이들을 각각 몽골 지배의 '겉'과 '속'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시 이들 상업 세력은 자기 이외의 누군가를 선택해서 '파트너'로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하면 자금을 모아서 대형 자본을 만들어 그것을 토대로 공동 또는 단체로 각종 경제 활동을 영위했다. 그것을 투르크어로 '오르톡Ortoq'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동료', '동업자'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변해서 '조합'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쿠빌라이는 이전부터 몽골과 표리일체의 관계였던 오르톡 무리를 더 강력하게 정권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 가운데 유력자를 정부 고관, 그것도 경제·실무 부문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해서 오르톡이라는 조직과 다양한 영리 활동을 통째로 국가 관리 아래에 두었다. 오르톡들은 쿠빌라이와 그 브레인들이 고안한 새로운 '세계 전략'의 첨병이었다고 보아도 좋다."(351-4)<br>7장 근현대사의 틀에 대해<br>"전근대의 유라시아 세계사는 군사력이 뒷받침된 정치권력이 사람들과 지역을 하나로 묶어 '국가'를 만들었다. 전근대의 유라시아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세계에서도 '민족'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 분명히 '민족'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확실한 유래와 전통을 가진 '민족'뿐만 아니라 막 만들어진 '민족'도 있다. '민족'이라는 생각 자체가 작위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근현대에 '소수민족'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 아마 국민국가가 '소수민족'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국가라는 환상 속에서 국가의 '주체'가 되는 '다수 민족'이 설정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소수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나 현재를 바라볼 때 '민족'이라는 말 속에 다양한 변화가 있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하나로 묶어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도에서 단색으로 칠할 수 있는 '민족'은 오히려 소수이며 때로는 부자연스럽기도 하다."(400-4)<br>"지구상에 있는 각각의 지역과 문명권에는 고유의 가치와 역사가 있고 각각 순위를 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문명권, 중동,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이 각각 병렬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오히려 일종의 '문명주의'가 숨겨져 있다. 현대의 눈을 들이대고 과거에도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역사와 지역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역사시대에 그런 지역 분리가 적당한지 여부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또 거론되는 여러 지역 사이의 연쇄나 역사 전개에 대한 통찰 또한 없다. 이들 모두 현대 본위의 접근 방식이다. 아니 그보다 과거의 유럽 중심주의와 비교해 각 지역을 '평등하게 다룬다'는 미명으로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분위기조차 존재한다. 그러나 과도한 분리는 오히려 역사의 현실을 숨기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게 본래의 역사에서 분리된 연구는 '지역사'나 '문명권사'로 한정되어 인류사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404-5)<br>"유라시아라는 용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입힐 필요가 없다. 유라시아라는 틀이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부분도 많다. 역사시대에도 그러했고 현대에도 유라시아라는 시각이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화의 역사를 열어젖힌 근대 서구는 극단적으로 무장한 군사 국가였다. 요컨대 세계사는 유목민이라는 땀냄새를 풍기는 군사 권력이 통합하는 시대에서 인력을 초월하는 육·해·공의 거대 전투력을 가진 시대로 이행한 것이다. 그 근대 서구형 문명이 몽골을 정점으로 하는 유목 국가를 '야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딘가 몹시 어리석고 웃기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상像·문명상像의 왜곡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고 할 때 아마 중앙유라시아와 유목민의 역사는 유력한 하나의 시점이 될지도 모른다. 근대 세계에서는 원래 '국가'라는 것에 배치되는 주변적인 존재로 여겼던 유목민이 사실은 과거 인류사를 유지하고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최대의 담당자였다. 바로 여기에 세계사라고 불리는 큰 패러독스가 있다."(405-6, 40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71/34/cover150/89984801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71349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불안할 땐 뇌과학 / 캐서린 피트먼, 엘리자베스 칼 - [불안할 땐 뇌과학 - 불안하고 걱정하고 예민한 나를 위한 최적의 뇌과학 처방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8247</link><pubDate>Thu, 11 Jun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82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082532469&TPaperId=173282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54/71/coveroff/e08253246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082532469&TPaperId=173282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불안할 땐 뇌과학 - 불안하고 걱정하고 예민한 나를 위한 최적의 뇌과학 처방전</a><br/>캐서린 피트먼.엘리자베스 칼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09월<br/></td></tr></table><br/>들어가는 글 | 불안에는 두 개의 통로가 있다 5<br>뇌에는 사실상 별개의 두 통로가 불안을 생성한다. 한 통로는 뇌의 커다랗고 구불구불한 회색 부분인 대뇌피질(cerebral cortex)에서 시작되고, 일상생활 속의 여러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사고를 결정한다. 다른 통로는 편도체(amygdalas)를 통해 이동하는데, 편도체는 뇌 좌우에 하나씩 있는 두 개의 아몬드 형태 조직이다. 편도체(두 개이지만 보통 단수 취급)는 지구상에 척추동물이 생겨난 이래 사실상 변하지 않고 세세손손 전해진 아주 오래된 두뇌 조직으로, 척추동물의 투쟁 혹은 도주(fight-or-flight) 반응을 일으킨다. 피질에서 비롯되는 생각은 불안의 직접적인 원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불안을 가중하거나 감소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불안을 일으키거나 조장하는 인지 작용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다. 반면, 편도체는 전혀 다른 통로다. 인간은 편도체가 상황이나 대상에 불안을 부여하는 방식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간이 소화를 돕는 걸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0-1)<br>제1부 | 불안을 느끼는 뇌에 대해 알아야 할 최소한의 지식<br>대다수 사람이 불안의 원인과 관련하여 떠올리는 것은 피질 통로(감각, 사고, 논리, 상상, 직감, 의식 기억 그리고 계획의 주된 통로)다. 불안 치료는 일반적으로 이 경로를 목표로 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더 의식적인 경로이기 때문에 이 경로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더 잘 인식하고, 기억하고 집중하는 것에 접근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편도체 통로에서 오는 불안은 대부분 신체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편도체는 뇌의 다른 부분들과 무수히 관련되며, 이런 상호 관련성은 여러 신체 반응을 무척 빠르게 격발한다. 0.1초보다도 더 빠른 찰나에 편도체는 아드레날린 분비를 급증시키고, 혈압과 심박수를 증가시키거나 근육 긴장도를 높일 수 있다. 이 외에 더 많은 신체 반응이 생긴다. 편도체 통로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 개입하지 않으며 피질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가동된다. 당신이 지금 겪는 불안에 명백한 원인도, 논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편도체 통로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면 된다. 17-8)<br>인간의 피질은 크게는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뉜다. 시각, 청각 그리고 다른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종합하는, 각각 다른 기능을 지닌 엽(葉: lobe)이라는 여러 부분으로 나뉜다. 피질은 뇌에서 인지와 생각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불안의 피질 통로는 감각 기관에서 시작된다. 눈, 귀, 코, 미뢰 그리고 심지어 피부마저도 세상에 관한 정보를 전달한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되고 피질의 여러 부위에 의해 해석된다.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가 전달됐을 때 그 정보는 시상(視床)으로 가는데, 이곳은 뇌에서 가장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곳이다. 시상은 말하자면 ‘중앙 중계국’으로 눈, 귀, 코 등에서 온 각종 정보의 신호를 피질로 보낸다. 시상으로 정보가 들어온 다음에는 다양한 엽들로 보내져 처리되고 해석된다. 그다음에 정보는 전두엽을 포함하여 뇌의 다른 부분으로 이동한다. 전두엽은 정보를 취합하여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두뇌의 핵심 부분이다. 20)<br>피질 통로는 불안의 주된 원천이다. 전두엽이 상황을 예측하고 해석하면서, 그 예측과 해석으로부터 종종 불안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예측’은 다른 피질 기반 작용인 ‘근심 걱정’을 만든다. 고도로 발전된 전두엽 때문에 인간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발생 가능한 결과를 예상한다. 반면 우리의 반려동물은 내일 문제 따위는 전혀 예측하지 않고 평화롭게 잠든다. 근심 걱정은 어떤 상황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기에 생기는 결과물이다. 불안이 생기는 두 번째 통로는 편도체다. 우리는 피질이 발생시키는 각종 생각과 이미지 때문에 불안으로 이어지는 피질 통로에 더 친숙한 것 같지만, 그 배후에서 불안에 관련된 각종 신체 경험을 일으키는 부위는 바로 편도체다. 편도체는 자신의 전략적 위치와 두뇌의 여러 조직과 맺는 상호 연관성을 작동시켜, 호르몬 방출을 통제하고 불안의 신체 증상을 만들어내는 등 뇌의 여러 부분을 활성화한다. 이렇게 하여 편도체는 신체에 강력하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21-3)<br># 편도체는 시상에서 바로 정보를 얻는다. 실제로 편도체는 ‘피질보다 먼저’ 정보를 받는다. 대뇌피질이 위험을 감지하기도 전에, 편도체 외측핵은 당사자를 위험에서 보호하도록 반응하는 것이다.<br>편도체의 영향을 받는 두뇌 조직으로는 뇌간 각성 체계(brain stem arousal system), 시상하부(hypothalamus), 해마(hippocampus), 측좌핵(nucleus accumbens) 등이 있다. 이런 직접적인 연관성 덕분에 편도체는 즉시 운동 신경을 활성화시키고, 교감 신경계에 동력을 공급하고, 신경 전달 물질의 활동 수준을 높이고,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을 혈류에 방출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런 활성화는 신체에 폭포처럼 변화를 일으킨다. 심박수가 늘고, 동공이 확장되며, 혈류는 소화관에서 사지로 흘러가고, 근육이 긴장하며, 신체에 동력이 공급되고 행동에 나설 준비를 갖춘다. 이런 생리적 변화에 대응하여 당사자 본인은 몸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복부와 창자에 고통을 느낀다. 이 모든 변화는 투쟁, 도주 혹은 얼어붙기 반응의 일부이다. 불안과 싸우려는 사람들은 책임 의식이 강한 편도체의 존재감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위험 상황을 맞닥뜨리면 뇌는 편도체에 ‘통제권’을 부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41)<br>많은 사람이 공황, 걱정 그리고 특정 대상이나 상황 회피 같은 불안장애 증상이 있으면, 이성적 논의로 그런 불안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의를 지닌 가족과 친구, 때로는 불안과 싸우는 당사자조차 논리와 이성이 환자의 증세를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 편도체는 논리적이지 않다. 많은 피질 기반 불안은 논리적인 주장에 반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편도체 기반 불안에 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 통하는데, 그건 바로 체험에 의한 학습이다. 편도체는 오로지 경험으로 학습한다. 이것은 몇 시간에 걸친 대화 요법이나 여러 권의 자기계발서를 독파해도 불안 해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런 요법이나 자기계발서는 편도체를 공격 목표로 삼지 않는다. 어떤 대상(예를 들어 쥐)이나 어떤 상황(시끄러운 군중)에 대한 본능적 반응을 바꾸길 바란다면, 먼저 편도체가 그와 ‘동일한’ 대상이나 상황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47)<br>피질은 두 가지 일반적인 방식으로 불안을 일으킨다. 첫째, 외부 사물의 광경이나 소리 같은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불안이 생긴다. 둘째, 피질은 어떤 구체적인 외부 감각의 개입 없이 불안을 발생시킨다. 단순한 생각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현상을 인지 융합(cognitive fus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피질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며, 자기 생각과 감정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궁극적 진실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완고한 믿음을 낳기도 한다. 생각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모든 생각, 정서 혹은 신체 감각의 진짜 의미를 자신이 온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 피질의 자신감 때문에 벌어지는데 이는 무척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다. 실제로 피질은 놀라울 정도로 오해와 실수를 쉽게 저지른다. 잘못되고, 비현실적이거나 비논리적인 생각을 하거나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정서를 경험한다. 그런 생각과 정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깊이 분석하지도 말며 그냥 머릿속에서 흘러가게 내버려두라. 49-50)<br># 좌반구 기반 불안(생각에서 나오는 불안)과 우반부 기반 불안(상상과 이미지에서 나오는 불안)으로 나눌 수 있다.<br>피질은 그 자체로는 불안 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 편도체와 뇌의 다른 부분이 협조해야 한다. 피질에서 비롯되는 생각, 이미지 혹은 예측이 무엇이든 간에 불안의 정서적・생리적 양상 다수는 피질이 편도체를 활성화할 때만 발생한다. 편도체는 피질에서 전달된 정보에 반응한다. 실제로 편도체는 어떤 실제 사건에 반응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비록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상상에 반응할 수 있다. 잠재적 위험에 관한 생각이나 이미지에서 나오는 정보는, 실제 사건의 인식 및 해석과 관련된 정보가 이동하는 것과 똑같은 통로를 타고 이동한다. 앞에서 이미 논의했듯 편도체는 시상을 통해 감각 정보를 받고는 거의 실시간으로 그것을 처리한다. 이와 무관하게 피질이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느라 시간 지연이 된 후에도 편도체는 피질로부터 정보를 받는다. 신경과학자들은 편도체가 피질에서 받은 정보를 놓고 어떻게 그 타당성 여부를 구분하는지, 구체적 메커니즘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54-5)<br>제2부 | 편도체 기반 불안의 통제<br>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는 그 상황에서 곧바로 도망치려는 강력한 충동이 생길 텐데 이를 억누르는 게 중요하다. 극도로 두렵고 불쾌한 경험이겠지만 그것은 신체적으로 당신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사실 실제로 당신이 느끼는 감각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신체가 보이는 징후일 뿐이다. 공황발작 상황에서 도망치면 단기적으로 기분은 좋아지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공황발작의 위력이 강화되어 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진다. 가능하다면 긴장을 풀고, 숨을 깊게 쉬고, 그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버티며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라. 물론 이것은 말하기는 쉽고 행동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편도체는 오로지 경험으로만 학습하므로 편도체를 어느 정도 통제하려면 반드시 “편도체가 작동하는 상황 안에서”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공황발작 상황에 감연히 맞서지 않고 매번 그냥 도망쳐버린다면, 당신의 편도체는 그 상황이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피하는 법만 배울 것이다. 75)<br># 피질을 도와 공황상태를 극복하는 방법1. 그저 느낌이라는 점을 기억하자(비록 무척 강렬하겠지만). 그저 나 자신이 지금 공황발작을 겪는다고 인식하고, 편도체 기반 증상을 피질이 오해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황발작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2. 공황발작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증상에 대한 걱정을 그만두는 것이다. 공황에 빠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공황발작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혹은 발생 여부를 계속 예측해봐야 다른 발작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3. 주의 돌리기(기분 전환)는 공황발작에 대항하여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피질 기반 전략이다. 증상에 집중하며 깊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황발작이 더욱 악화될 수 있기에, 공황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일부러 더 생각하려고 애써야 한다.4.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의식하지 말라. 공황 증상을 느낀다면,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려고 애쓰지 마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는 건 이미 불편한 스트레스 반응을 겪는 데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추가하는 일일 뿐이다.<br>노출 치료는 편도체 언어로 말하며 편도체를 가르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여기에는 체계적 둔감화와 자극 흠뻑 젖기 방법이 있다. 체계적 둔감화(systematic desensitization)는 이완 전략을 배우면서 두려운 대상이나 상황에 점진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이에 반해 자극 흠뻑 젖기(flooding) 방법은 사람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 곧바로 뛰어들게 하여 몇 시간 동안 불안에 노출한다. 이 방법은 과격하지만, 훨씬 더 빠르게 불안을 극복하게 해준다. 어떤 접근법이든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두려워하는 상황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상황을 반드시 직접 경험해야 하며, 보통 반복적으로 그렇게 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도전적인 치료 형태이지만, 조사연구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편도체 회로를 재설계하는 데 필요한 접근법이다. 노출을 더 실천할수록 편도체가 전에 두려움을 느꼈던 상황과 트리거에 차분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커진다. 102-3)<br>제3부 | 피질 기반 불안의 통제<br>인지 치료(cognitive therapy)로 널리 알려진 접근법의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가진 몇몇 인식은 비논리적이거나 유해하며, 행동이나 정신 상태에 유해 패턴을 발생시키거나 악화한다는 것이다. 인지 치료사들은 자기 패배적이거나 역기능적인 생각, 특히 불안이나 우울 수준을 높이는 생각을 찾고 변화시키는 데 집중한다. 이 접근법을 인지 재구성(cognitive restructuring)이라고 한다. 불안과 맞서 싸우려는 인지 재구성 방법은 피질 통로에 직접 개입한다.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는 뇌 과정은 피질 개입 없이도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발생한다. 가령 편도체 통로를 통하여, 피질 과정이 완료되기 전에도 공포 반응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런 다른 통로를 통해 생기는 불안도 있으므로, 생각을 바꾼다고 언제나 불안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자. 그러나 피질에서 생각이나 이미지가 불안 반응을 일으킬 때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어느 정도 불안을 완화하거나 막을 수 있다. 124)<br>인지 융합(cognitive fusion)은 무척 흔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라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이 내린 추정과 해석에 별달리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특히 고통스러운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가정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인식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인지 융합은 불필요한 불안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떤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이 인지 융합과 결합될 때 불안이 폭발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당신이 비관적인 생각을 품거나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면 반드시 그런 인지 융합 상태를 인지하고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혜택이 크다. 예를 들어 당신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장차 벌어질 일이 당신 생각처럼 풀려나가는 게 아님을 인식하라. 구체적 사건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거나 미미할 뿐인데도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곧 그 사건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례를 찾아보라. 140-1)<br>문제는 생각과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심리적 경향이다. 심리학자 스티븐 헤이스는 “이 경험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어 그것과 싸우려고 하는 경향이 가장 해롭다”라고 주장했고, 그런 경향에 맞서는 해법으로 ‘인지 분리’(cognitive defusion)를 제안했다. 인지 분리는 무척 강력한 인지 재구성 기법이다. 이 방식은 당신의 생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막연한 ‘의식의 흐름’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머릿속에 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에 비유했다. 그 새들을 당신 마음대로 포획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생각들 또한 당신이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니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날아가는 새 떼 정도로 여기면서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나 그 새가 당신의 머리 위에다 배설물을 떨어뜨린다면 그때는 적극 대응에 나서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런 생각이 객관적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때는 적극 대응하라는 것이다. 142)<br>인지 재구성 기법의 핵심은 이것이다. 먼저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이어 그 생각을 객관적 증거로 반박하고, 더 적응력이 높은 새로운 생각, 즉 대안적인 생각(coping thoughts)으로 대체한다. 당신의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에 특히 주목하자. 신경 회로는 “가장 분주한 것이 생존한다”라는 원칙으로 운영・강화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따라서 특정 생각을 더 많이 할수록 더욱 강력하고 단단해진다.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과 이미지를 중단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새로운 대안 생각으로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문자 그대로 뇌 회로를 바꿀 수 있다. 대안적 생각은 당신의 감정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생각이나 진술을 가리킨다. 대안 생각은 차분한 반응을 일으키고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게 한다. 당신은 불안 생각에 맞서서 대안 생각으로 그것을 대체해나가야 한다. 기억하라. 당신은 지금 엉터리 불안・걱정에 집중하는 신경 회로를 바꾸는 중이다. 143-4)<br>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려고 애쓰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지 못해 괴롭다고 불평한다. 이것은 두뇌의 사고 작용에서 기인하는 흔한 문제다.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패턴에 익숙할 것이다. 어떤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상기시켜 그 생각을 지우면, 그 생각을 저장하는 회로가 활성화되고 더 강해진다. 당신은 “멈춰!”라고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생각을 중단시킬 수 있다. 이 기법은 생각 멈추기(thought stopping)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그다음 단계가 중요하다. 어떤 대안 생각으로 방금 전 생각을 대체할 수 있으면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 대신에 당신을 매혹하는 것으로 대체한다면, 첫 번째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에 맞서려면, “지우지 마라, 대체하라!”(Don’t erase. replace!)가 최고 접근법이다. ‘나는 이걸 감당할 수 없어’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면 ‘쉽지 않지만, 어떻게든 이겨낼 거야’ 같은 대안 생각으로 교체하는 데 집중하라. 144-5)<br>편도체 기반 반응이 일단 작동하면 피질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챙김을 사용하여 편도체에 휩쓸리지 않고 관찰하면 편도체 반응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불안 반응에 마음챙김으로 접근하면 피질은 상황 통제 목표를 포기하고 단순히 불안이 일어나는 것을 내버려둔다. 이처럼 불안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안에 맞서는 궁극적인 해법이다. 불안의 위력은 대부분 불안을 멈추기 위해 벌이는 지속적인 투쟁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그렇게 하여 당신의 삶에 엄청난 통제권을 행사하려 한다. 불안 경험을 마주할 때 그것이 그저 스스로 지나갈 것을 알고 그냥 받아들이면 실제로는 더 빠르게 지나간다. 불안에 대해 걱정하면서 어떻게든 없애려는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불안을 이어가게 하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 불안으로 인한 불편함은 불안과 싸우며 그 불안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불안 통제 시도를 포기하면 실제로 뇌를 더 잘 통제할 수 있다. 151)<br>나가는 글 | 불안 없는 삶, 가능하다<br># 불안을 줄이기 위해 뇌를 재구성하는 방법1. 교감 신경계 활성화를 억제하기 위해 이완, 수면, 운동을 활용하라.2. 당신의 생각 중에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은 없는지 감시하라.3.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을 대안 생각으로 교체하라.4. 삶의 목적을 확인하고 무엇이 그런 목적을 방해하는지 파악하라.5. 목표를 방해하는 공포와 불안 트리거를 알아내라.6. 이런 트리거에 대한 편도체 반응을 수정하도록 노출 훈련을 설계하라.7. 불안과 공포가 줄어드는 것을 감지할 때까지 노출 훈련을 실천하라.<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354/71/cover150/e08253246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3547178</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노마드 / 앤서니 새틴 - [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2861</link><pubDate>Mon, 08 Jun 2026 0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228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8342&TPaperId=173228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095/84/coveroff/89729183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8342&TPaperId=173228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a><br/>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06월<br/></td></tr></table><br/>제1부 균형 잡기&nbsp;<br>"튀르키예식 지명으로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라고 불리는 배불뚝이 언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고고학 유적지이지만, 금빛 찬란한 보물이 나오지는 않은 관계로 누구나 다 아는 곳은 아니다. 원뿔형 꼭대기 지면에서 슈미트의 그의 팀원들이 발견한 석판들은 T자 형 기둥들의 상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기둥들은 정교하게 조각되었고,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며, 다른 것들보다 키가 큰 2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10여 개 기둥이 원형으로 세워져 있다." "이곳은 지구상에 인간이 거주한 최초의 장소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 조상들이 자신이 상상한 어떤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경관을 개조한 첫 번째 장소일지도 모른다. 지구의 방대한 지역을 개조하는 오늘날의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1만 2,000년 전에 이는 몹시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이 행동은 기념비적 건축의 시작이자 축조 예술의 시초, 우리 역사에서 현재의 인간 격格이 형성된 시발점이었다."(34-6)<br>"첫 번째로 놀라운 것은 연대年代였다. 〈추정컨대 괴베클리 테페가 형성된 시기는 기원전 제10천년기가 확실합니다.〉 슈미트의 말은 기원전 9500년 무렵에 인간들이 큰 돌덩어리들을 채석해 옮기고, 그 돌로 형상을 만들어 성역을 조성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피라미드와 스톤헨지가 축조된 〈기념비적 시대〉보다 약 7,000년이나 앞선 때였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사람들이 그곳에 거주했음을 나타내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훗날의 발굴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낼지도 모르지만, 최초의 발굴 단계에서는 집터나 지붕, 혹은 화덕을 보지 못했다. 지속적인 거주지였다면 발견되었을 법한 쓰레기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초기 발굴 팀은 뜻깊게도 표범, 멧돼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분포하는 다마사슴, 두루미, 독수리 등 다양한 동물들의 뼈를 발견했다. 요컨대 그 사람들은 수렵인과 채집인, 방랑자,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37-8)<br>"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질 당시 에덴을 벗어난 강의 동쪽, 그러니까 그곳의 주변 경관은 오늘날보다 비옥했다. 야생풀, 밀, 보리가 자라는 초원을 상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나무, 그리고 이제는 그 지역에서 집약적으로 재배되는 아몬드 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들이 관목숲에 흐름이 끊기기도 한 그 초원은 가제로가 오록스의 터전이었고, 이주하는 거위들, 식용 가능한 다른 많은 새와 동물들, 그리고 유적지에서 나온 뼈의 퇴적물로 드러났듯 인간을 위협한 일부 동물들의 서식지였다. 이 풍요로움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멀리까지 방랑할 필요를 없게 만들었다. 배회할 필요 없이 성역을 개발하면서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들이 살고 죽은 곳이었다. 정착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져다주었다." "그에 대한 전모가 무엇이든, 1만 1천년 혹은 1만 2천년 전 괴베클리 테페에서 농업의 진화와 문화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변화의 동인이 이동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40-2)<br>"차탈회위크는 괴베클리 테페와 카인의 도시 에녹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원도시proto-city였다. 괴베클리 테페가 버려지고 약 500년이 지난 기원전 7500년경, 정착민들은 지중해에서 1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차르샴바 강과 가까운 아나톨리아 평원의 언덕에 주거지를 조성했다. 그들이 지은 흙벽돌집에는 1층 출입구가 없었고, 집들 사이에도 길이나 통로가 없었다. 평평한 지붕이 길 역할을 하고, 지붕 덮개를 통해 아래쪽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는 구조의 진흙 상자들이 어지럽게 모여 있는 형태였다." "괴베클리 테페와 마찬가지로 차탈회위크 사람들도 어느날(기원전 7000년 무렵) 갑자기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났다." "떠난 이유가 무엇이건, 차탈화위크 난민들은 아마도 생존 꾸러미를 훨씬 상회하는 짐을 싣고, 자신들이 정착해 뿌리를 내릴 또다른 장소, 신께 예배드리고 신을 위무할 장소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개발이 진행되었다. 새 도시에는 튼튼한 성벽도 있었다."(59-61)<br>"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두 강 사이의 땅을 뜻하는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다. 아람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로도 되풀이되는 이름이다. 두 강은 에덴동산에서 갈라져 나온 〈강들〉 가운데 두 곳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고, 강들의 유역과 범람원은 튀르키예 남부에서 쿠웨이트를 거쳐 이란 남서부 바흐티야리 부족민들의 겨울 방목지에까지 이른다. 메소포타미아는 북부는 산악지대, 남부는 습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강들 사이의 지대는 엄청나게 비옥한 반면 강들의 동쪽과 서쪽은 점점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민은 강으로 향했고 유목민은 사막 주변으로 향했다. 초기에 농업이 번성하고, 그에 따라 도시와 도시가 지닌 대부분의 초기 특징들이 만들어진 장소가 이곳이다. 또한 깊숙한 과거와 역사시대가 만나고, 신화와 전설이 사실과 물리적 증거와 조화를 이루며, 유목 생활과 확실히 대비되는,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세워진 장소이기도 하다."(61-2)<br>"인간이 승마를 처음 시작한 때가 언제일까? 기원전 제4천년기가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카자흐스탄 북부의 그 시기 매장지에서 99.9퍼센트가 말의 뼈인 동물 뼈 10톤이 출토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동물 뼈들에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일종의 마모가 진행된(입에 채워진 재갈 때문에/역자) 다수의 턱뼈와 이빨들이 섞여 있었다." "승마 능력은 곡물의 작물화를 능가하는 혁명이었다. 그것은 말의 혁명이었다. 말은 인간이 이용해온 것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교통 수단이었으며, 승마 능력으로 지구에서의 삶은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바뀐 지역은 승마로 인해서 유목민의 목축이 가능해진 스텝 지대였을 것이다. 걸어서 방목하면 하루에 고작 32킬로미터를 갔지만, 최초의 승마자들은 안장 없이 말을 타고도 그 거리의 2배 혹은 그 이상을 갔다. 게다가 이동 거리의 연장은 말 혁명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았다(수레바퀴와 전차가 차례로 등장했다)."(75-6)<br>"말[馬], 인간이 혹독한 겨울을 날 때 가진 것에 감사해할 동물이면서, 항상 누군가의 재산이었던 동물. 전차, 바람처럼 날랜 것. 합성궁, 단풍나무, 영양의 뿔, 사슴의 내장 그리고 가죽을, 물고기를 원료로 한 아교로 접착해서 만든 복잡한 구조물. 코미타투스comitatus, 〈호위대〉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정교하고 열의에 찬 전사 집단, 활에 쓰인 사슴 내장보다도 더 단단히 결합되고, 함께 살면서 필요하면 서로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한 집단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 이야기에 대한 애호, 특히 영예로운 인간의 모험과 신들의 변덕을 주 내용으로 하는 서사 역사를 좋아하는 취향. 유목민들은 이 모든 것들을 지니고 스텝 지대를 떠났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헤라클레스의 쌍둥이 기둥(지브롤터 해협의 낭떠러지 어귀에 있는 바위/역자)으로부터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이집트 중왕국과 태평양으로 퍼져나갔고, 고대 세계에 광범위하고 영속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87-8)<br>"이 상호 연결된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세계에서는 인위적인 장벽이라고 해봐야 가시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것, 혹은 임시 거처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윗덩어리 몇 개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고작이었다. 도시 진출이라는 큰 꿈에 매료되어 우루크, 바빌론, 로마 그리고 다른 많은 도시들로 이끌려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성벽 밖에서 살았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주자, 유목민, 상인─이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 다시 말해서 역사의 고속도로는 우리로 하여금 기원전 1만 년의 현저한 업적 모두가 정착민들의 성취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건설자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종말을 재촉한 훈족에 이르기까지, 유목민, 이주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았던 그 밖의 종족들 역시 최초의 석조 기념물을 세운 것에서부터 말을 길들이고, 그 말과 연결해 수레 및 전차를 만든 것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진보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168-9)<br>제2부 제국 세우기&nbsp;<br>"이븐 할둔의 업적이 한층 빛나는 것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도,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도서관도,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도 아닌, 그의 주변에서 어둠과 고난이 퍼져나가고, 정부들이 서로 싸우며,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하러 떠났던 난세의 14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외딴 성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때는 이동에 공격의 위험이 따르고, 치명적 병에 감염될 수도 있으며, 여행이 힘들고 위험한 시기였다." "이븐 할둔은 온 세상이 이처럼 고난에 처해 있고 황폐함이 만연하던 시기에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에 착수해서 인간이 어떻게 정연하고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를 글로 정리하려고 한 것이었다." "서구의 역사서와 달리 『역사서설』(『이바르의 책』의 서문으로 쓰인)은 유목민을, 말이나 타고 다니며 과거에 창조된 것들을 파괴하는 야만인으로 제시하지 않고 원동력이자 킹메이커(숨은 실력자)로 제시했다. 이븐 할둔의 세계에서 아벨의 자식들은 촉매, 사회 갱신의 주요 동인이었다."(179-80)<br>"이븐 할둔의 작품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상황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간의 경과에서 그가 본 것은 〈인간의 향상〉, 상승의 진행이나 심지어 몰락의 진행이 아닌, 모든 것의 순환이었다. 그는 운명의 바퀴가 돌 듯이, 그리고 달과 해와 계절이 순환하듯이, 권력에도 흥망성쇠가 있으며, 제국들도 부침을 겪고, 도시들도 세워졌다가 무너지며, 사람도 살고 죽으며, 모든 것은 무無에서 나와 무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가 글을 쓴 시점이 위대한 아랍인의 제국이 와해되고, 흑사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다수의 군주가 폐위되고, 힘 있는 친구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된 뒤였음을 감안하면, 그가 사태를 더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그의 걸작에는 반짝이는 줄 한 가닥이 있었으니, 바로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할 줄 알고, 그런 능력과 그들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세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줄 알았던 유목민의 능력이 그것이었다."(181-2)<br>"아사비야asabiyya라는 용어는 『역사서설』에 500번 이상 등장한다. 많은 아랍어 단어들이 그렇듯이, 아사비야에는 넓적다리를 묶지 않으면 젖을 내주지 않는다는 암낙타, 터번을 묶는 행위, 광신자를 비롯해서, 맥락이 어렵풋한 여러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당파심, 연대의식, 단결심, 부족적 연대이다." "인도유럽인의 코미타투스와도 비슷한 아사비야가 가리키는 것은 혈연일 수도, 부족적 유대일 수도, 공통된 신념이나 지도자에 대한 헌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대를 끈끈하게 해준 〈접착제〉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아사비야가 안전하다는 의식과 상호 부조에 대한 확신을 집단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이 독창적이고 날카로운 인식으로 깨달았던 것은 정부와 제도의 성격도 국가 내에 존재하는 그 연대의식의 성격에 좌우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내는 바는 부단히 변화하고, 이동하고, 이주하며 사는 유목민의 존재 양식이다."(185-6)<br>"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 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비교적 적은 숫자의 아라비아 부족민들이 〈출신 성분이 다양하고 군기가 제법 잡힌 군인들의 소규모 본대〉와 나란히 싸우며 이룩한 막대한 성공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되곤 한다. 요컨대 그들은 알라를 위해서, 그리고 설령 전사를 하더라도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비잔티움, 이집트, 그리고 다른 나라의 병사들은 현세의 것을 찾아 참전한 반면 무슬림 전사들의 욕망과 염원은 모두 내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랍인의 성공 요인을 유목민의 아사비야가 가진 힘에서 찾았다. 아랍인들의 승리는 그들이 정주 생활의 겉치레 없이 홀가분한 〈자연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말이다."(193)<br>"이븐 할둔은 흥망성쇠의 사이클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첫 단계는 성공의 시기로, 모든 반대 세력을 타도하고 이전 왕조의 왕권을 탈취하는 단계이다.〉 이것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사비야 덕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지도자가 권력과 왕권을 통합하는데, 그렇게 하는 목적은 〈그의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약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세 번째는 지도자가 평화롭고 호화로운 삶에 안주하고, 법률을 공표하며, 건축물을 발주하고, 훌륭한 군대를 보유하며, 백성과 외국 사절들에게 후하게 선심을 쓰는 단계이다. 그다음에는 새로운 지배자가 전임자들의 흉내를 내며 귀족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전통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곧 자기 권력의 파멸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로 접어든다. 마지막 단계는 〈지배자가 향락과 여흥에 조상들이 축적한 [재보]를 낭비하여〉 몰락하는 단계이다. 이븐 할둔은 한 왕조가 거쳐 가는 이 다섯 단계를 모두 검토한 다음 〈최고의 후계자는 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277)<br>"칭기즈 칸이 죽고 나서 1세기 동안 중국에서 근동까지의 육지와 바다는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호화로운 기념물들이 세워지고, 번성하는 유라시아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장인과 뛰어난 지성인들로 채워짐에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유목민 특성은 희석되었다. 이븐 할둔은 그들의 아사비야가 약화되면서 1330년대와 1340년대에 금장 칸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페르시아의 일 칸국이 일련의 내전으로 힘이 소진된 끝에 어떻게 와해되었는지, 중앙아시아의 중심에 자리한 차가타이 칸국이 매우 다른 두 왕국으로 어떻게 분열되었는지를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를 지배하고, 그 세계를 자기들 방식에 적응시켰던 유목민 세계가 작동을 멈추고, 이븐 할둔이 썼듯이 칭기즈 칸 후손들의 지배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이븐 할둔의 판단이 오판으로 판명날 것이었다. 칭기즈 칸의 자손은 앞으로도 더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277-8)<br>"티무르의 거대 제국은 교역 도시들, 특히 실크로드의 허브였던 히바, 부하라, 발흐, 델리와 물탄 같은 남아시아의 요지들, 그리고 근동의 도시들인 바스라, 바그다드, 알레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심축은 마샤드, 헤라트, 그리고 티무르가 시간, 관심, 돈을 특히 아낌없이 투자한 사마르칸트였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가진 명백한 중요성과 장려함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제국은 그가 살아 있을 때에도, 사후에도 계속 유목민의 특성을 띠었다. 제국의 유목성은 부족 중심의 구조와 전통, 정례적으로 개최된 쿠릴타이와 이주, 천막과 말 위의 삶을 선호했던 티무르의 생활 방식, 군대의 편성과 구조, 그가 총애한 아내 비비 하눔과 다른 여인들이 의사 결정과 부족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힘을 계속 보유했던 점, 자유 무역을 중시한 점, 티무르의 총독들이 이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촉진하여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여타 종교들이 확산될 수 있게 한 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309-10)<br>"유라시아의 시장들을 통해서 막대한 부가 유통되고, 중국에서부터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유해진 것도 티무르 제국의 개방성이 가져온 결과였다. 아시아의 티무르 제국 경영자들은 시인, 예술가, 아름다운 것을 창안한 사람들도 후원했다. 그들 모두 중요한 문화 융성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븐 할둔은 바퀴가 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천국이 몽골인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그 또한 그들의 〈신앙과 제국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지만, 티무르가 죽은 뒤에도 바퀴는 계속 돌아가리라는 것과, 그의 위대한 제국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소멸되는 꿈, 다수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라져가는 악몽이 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가 몰랐던 것은 바퀴가 돌기를 완전히 멈추고, 세계가 아사비야를 넘어서는 무엇인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유목민도 힘을 잃어 더는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매혹과 심지어 감탄의 대상이 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이었다."(310-1)<br>제3부 회복하기<br>"오토만 제국이 들어선 후에도, 늘 그렇듯이 제국의 유목주의를 좌우한 것은 지형이었다. 유럽에 속한 제국의 지방들은 대부분 방목하기에 좋은 산지, 튀르크어로 〈나무가 많은 산맥〉을 뜻하는 발칸 반도에 있었다. 카르파티아 산맥과 핀두스 산맥, 그리고 여타 동유럽 산맥들은 유목 생활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고, 아시아에 속한 아나톨리아 역시 농경지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토로스 산맥과 폰투스 산맥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제국의 지도층과 행정부는 정착해 살고, 백성들의 대다수는 여름철에는 고지대의 방목지, 겨울철에는 평원을 오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통제하에 놓인 다수의 섬들도 여름에는 기꺼이 갈 만한 곳이었지만 겨울에는 폭풍과 강풍에 고립되었다. 역사가 제이슨 굿윈은 그런 상황을 〈10월과 4월 사이에는 산맥과 바다가 밤의 시장들처럼 철시撤市를 하고, 제국도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절반은 동면을 했다〉고 설명했다."(321)<br>"유목민의 아사비야는 이스탄불, 에디르네, 부르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스크, 궁전, 바자bazaar로 아름답게 꾸며진 그 밖의 장려한 도시들에도 그것은 없었다. 유목민의 아사비야는,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를 지배할 권리를 가지는 칼리프제의 중요성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정체성의 기반은 천막과 말 그리고 그 왕조를 창시한 오스만의 유목민 뿌리에 있었다. 오토만 술탄들이 수 세기 동안 양립 불가능한 욕구들을 어색하게 조화시키는 방식으로라도 유목민에 뿌리를 둔 자신들의 과거를 드러낸 것도 그래서였고, 그 유목적 과거와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 실내 생활을 할 때에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술레이만 대제만 해도, 오토만의 힘과 광휘가 절정에 달했던 16세기였는데도,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러 온 헝가리 국왕 존 지기스문트를 화려한 궁전이 아닌 장려한 천막 앞에서 맞았다. 이동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정체성에는 여전히 유목주의라는 생각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322-3)<br>"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 셰이크 사피 앗 딘도 오토만 왕조의 창시자인 오스만만큼이나 출신이 모호했다. 두 사람 모두 스텝 지대의 초원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종족도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근래에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14세기 초, 셰이크는 오스만이 오토만의 기치 아래에 추종자들을 결집시키는 사이, 자신만의 아사비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심신 양면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는 명성에 힘입어 오래지 않아 수피 종단의 창시자가 되었다." "티무르 왕조가 몰락했을 때에는 셰이크의 후예인 이스마일 1세가 서부 이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아제르바이잔을 아우르는 사파비 왕조를 수립했다. 그다음 세대는 더욱 번창하여, 샤 이스마일의 사파비 왕조 후손들은 유목민 연맹의 지원을 받아, 유목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황금기가 페르시아에 도래할 것임을 알렸다."(324)<br>"1503년에 스무 살의 나이로 카불의 지배자를 자처했던 바부르는, 그곳을 거점 삼아 20대 후반에는 사마르칸트를 포함해 옛 티무르 왕조가 보유했던 중앙아시아의 핵심지대를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 술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물리치고 부다페스트로 오토만 군대를 진군시킨 해인 1526년, 이제 40대 초반인 바부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남쪽의 인도로 군대의 방향을 돌렸다." "바부르는 델리의 성채와 몇몇 무덤 그리고 정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그의 승리를 자축했다. 〈시찰을 마친 뒤 나는 야영지로 돌아와 배를 타고 독주를 마셨다.〉 하지만 바부르가 자기 안의 유목민 기질 때문에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것과 달리, 그가 세운 무굴 왕조─몽골Mongol에 어원을 둔 명칭─사람들은 정착을 하고, 라호르, 파테푸르 시크리, 가장 유명한 아그라, 그리고 최종적으로 델리에서,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영국에 의해서 버마로 유배되었던 1858년까지 인도를 지배했다."(328-9)<br>"18세기가 되자 유목민의 이상과 더불어 아벨에 대한 생각은 배척을 받은 반면, 정상적인 삶은 유럽의 우월감과 지중해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부활한 환상 덕분에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신세계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부가 그런 득의양양한 의식의 조장을 도왔다. 하지만 유럽이 그런 환상을 가지는 데에는 고대 세계의 재발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고대 예술사』에서, 예술사라면 모름지기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깊숙한 고대 작품에서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를 거쳐 고전 그리스에서 정점을 찍는 일련의 순화와 개량의 과정, 즉 단계적 발전을 거치는 연구여야 한다는 것을 사실상 처음으로 제시했다." "빙켈만은 아폴로 신상神像에서 자연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자연 저 너머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오직 마음으로만 창조할 수 있는 이미지에서 나오는······특정한 이상적 형태들〉도 보았다고 했다. 자연 저 너머······.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인간은 그토록 멀리까지 지배력을 수립한 것이다!"(348-9)<br>"빙켈만과 그의 동료들은 예술의 역사를 물질문화 속에서 골라낸 길로 제시했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시점에서 뒤를 돌아보며, 유럽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 매혹적인 운동, 즉 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개념을 회고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목민도 포함된 유럽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끼친 영향과 자극은 교묘히 가려버렸다. 예술사와 지성사에 대한 이런 선별적 견해는 고속도로 역사와 마찬가지로, 기념물 짓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혹은 아예 짓지 않기로 한 사람, 아니면─고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스키타이인들의 장신구처럼─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아버렸다. 빙켈만은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예술사의 궤적을 순환적 개념이 아닌 선형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개화되었고, 그 개화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럽인이라는 것이 빙켈만의 생각이었다."(350)<br>"19세기에 페르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목축과 무역을 하며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오스만 술탄들이 오래 전에 말안장을 장의자와 맞바꾸고, 다수의 궁전과 정자가 있는 성벽 너머에서 나라를 통치한 튀르키예에서도 술탄의 다양한 백성들은 상당수가 유목민으로 남아 있었다. 유목민들은 위대한 카넴-보르누 제국이 붕괴되었는데도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을 가로질러 다녔듯이 무굴 제국의 인도도 누비고 다녔다. 아라비아에서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라는 유목민 부족장이 자신의 아사비야를 확장하여, 개혁적인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의 지도 아래 새로운 아랍국(사우디아라비아)을 건설했다." "수천만 명의 유목민이 영국 제국에 둘러싸인 세계 속에서 방랑하며 수렵채집 생활을 했다. 그러나 유럽의 예술, 도덕, 문화, 법률은 〈유목민 무리〉를 이길 터였다. 그 현상이 어느 곳보다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지금도 계속 울려 퍼지는 신조어, 〈명백한 운명〉이라는 단어를 지어낸 북아메리카였다."(368-9)<br>"유전학, 심리학, 그리고 여러 다른 학문들은 최근의 연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직감으로 알고 있는 것, 즉 인류는 〈집단 두뇌collective brain〉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냈음을 밝혀냈다. 〈집단 두뇌〉는, 우리가 가장 성공적이고 진보적이었을 때는, 다양한 집단이 함께 모여 그들의 지식, 역사, 보는 방식을 합체시켰을 때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류 최고의 것들은 협력, 시장과 국경의 개방, 자유로운 이동, 생각과 양심의 자유를 통해서 얻어졌다. 그리고 유목민은 그런 요소들로 가는 최상의 통로이자 그것들의 최고 축적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다시피,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을 가는 도중에 발견되는 것이 역사의 일부일 뿐이라면, 인간 역사의 또다른 일부는 언제나 경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 자연계에 종횡으로 놓여 있는 오솔길들에 있다. 이 두 가닥이 하나로 엮였을 때에만 우리 역사의 완벽한 그림을 볼 수 있다. 다양성과 상호 작용의 이점이 드러나는 것도 이 지점이다."(416-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095/84/cover150/89729183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095847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 박상길 -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10만부 기념 개정판) - 챗GPT부터 유튜브 추천, 파파고 번역과 내비게이션까지 일상을 움직이는 인공지능 이해하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6020</link><pubDate>Thu, 04 Jun 2026 08: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60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22534096&TPaperId=173160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00/0/coveroff/e9225340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922534096&TPaperId=173160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10만부 기념 개정판) - 챗GPT부터 유튜브 추천, 파파고 번역과 내비게이션까지 일상을 움직이는 인공지능 이해하기</a><br/>박상길 / 비즈니스북스 / 2024년 10월<br/></td></tr></table><br/>제1장. 인공지능 | 위대한 인공지능, 깨어나다<br>프로그래밍이란 규칙과 데이터를 입력해 정답을 출력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인공지능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인공지능처럼 작동하기 위해서는 if-then 규칙이라 부르는 수많은 규칙을 사람이 일일이 입력해야 했죠. 기계는 이렇게 인간이 입력한 일만 했습니다. 사람이 모든 규칙을 일일이 입력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 기반은 제법 훌륭하게 작동했습니다. 이 때문에 기계번역을 비롯한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도 초창기에는 대부분 규칙 기반으로 구현됐습니다. 그리고 곧 괜찮은 성과를 내리라는 장밋빛 희망으로 가득했죠. 그러나 규칙으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겠다는 시도는 이내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이렇게 인공지능이 암흑기에 빠져든 데는 if-then 규칙의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에는 이 방식이 얼핏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람이 일일이 규칙을 입력하는 방식은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이죠.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제대로 된 추론도 하지 못했습니다. 18-9)<br>인공 신경망의 초기 모델은 퍼셉트론Perceptron입니다. 퍼셉트론은 1958년 당시 코넬 항공 연구소에 근무하던 프랭크 로젠블랫Frank Rosenblatt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 고안해냈습니다. 인간 두뇌는 뉴런이 서로 연결된 상태로 전기신호를 내보내며 정보를 전달한다는 데 착안해, 그와 비슷한 형태로 인공 뉴런이 연결된 구조의 인공 신경망을 구현해낸 것입니다. 1980년대 들어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우리말로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알고리즘을 활용하면서 인공지능 분야는 다시 성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머신러닝이란 말 그대로 기계Machine가 스스로 학습하는Learning 방식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이 규칙을 입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컴퓨터가 데이터에서 스스로 규칙을 찾아냅니다. 더구나 사람이 찾아내지 못하는 규칙도 컴퓨터가 학습을 거쳐 찾아낼 수 있게 되었죠. 변형에 따른 무수한 변칙까지도 데이터를 이용해 모두 찾아낼 수 있게 되면서 규칙에서 벗어난 결과도 추론할 수 있게 됐습니다. 17, 20)<br>딥러닝은 머신러닝의 일종으로, 머신러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딥러닝은 인간 두뇌의 작동 구조를 본떠 만든 인공 신경망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무수히 많은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죠. 이를 물리적인 형태로 만들어낸다면 엄청나게 많은 다이얼이 달린 거대한 수학 구조물과 비슷합니다. 각각의 다이얼은 원하는 출력값이 되도록 가중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입력 데이터를 넣고 다이얼을 조절하면서 결과물을 확인한 후, 다시 조금씩 다이얼을 돌려 원하는 결과와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조절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다이얼 값을 무작위로 설정하지만 학습을 진행하면서 점점 모든 다이얼이 정답에 가까워지도록 바뀌어갑니다. 모든 데이터가 정답에 가장 가까운 상태를 찾아 더 이상 다이얼을 조절할 필요가 없다면 비로소 학습이 끝나죠. 데이터가 많을수록 훨씬 더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음은 물론, 다이얼이 많을수록 훨씬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이 되겠죠. 24-5)<br>제2장. 알파고 |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br>1940년대 말,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던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Ulam, 1909~1984 박사는 ‘중성자 확산 같은 복잡한 계산 문제는 차라리 여러 번의 무작위 컴퓨터 실험으로 결과를 관찰하는 편이 훨씬 더 실용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특성상 이 방법에 적절한 암호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마침 울람 박사는 도박을 좋아하던 자신의 삼촌이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을 하기 위해 친척들의 돈을 빌려갔다는 사실을 떠올려 ‘몬테카를로’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것이죠.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을 도입한 이후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실력은 급상승해 6단의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프로기사에게는 4점 이상 접히는 기력에 불과했습니다. 알파고는 여기에 딥러닝을 적용해 실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킵니다. 두 종류의 인공 신경망을 만들어내는데, 정책망Policy Network과 가치망Value Network이라는 이름의 신경망입니다. 43-4)<br>먼저 정책망을 살펴봅시다. 정책망은 사람이 만든 기보棋譜를 이용해 학습합니다. 정책망은 약 16만 회의 게임에서 총 3,000만 수를 가져와 학습했습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정책망 3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망은 바로 앞서 살펴본 사람의 기보를 이용해 학습한 정책망(이하 기보학습 정책망)입니다. 둘째 망은 롤아웃 정책망입니다. 롤아웃 정책망은 기보학습 정책망과 비슷하지만 훨씬 작고 가벼운 망입니다. 훨씬 작게 만들었기 때문에 첫 번째 망보다 약 1,500배 정도 빨리 수를 둘 수 있습니다. 즉 첫째 망이 한 번 착점할 시간에 롤아웃 정책망은 1,500번을 착점할 수 있는 거죠. 당연히 성능은 떨어집니다. 첫째 망도 정확도가 57%로 높은 편이 아닌데, 롤아웃 정책망은 고작 24%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계산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탐색을 빠르게 진행할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망은 바로 알파고의 핵심인 스스로 대국하며 강화학습을 수행한 정책망(이하 강화학습 정책망)입니다. 44-5)<br>또 다른 종류의 망은 바로 가치망입니다. 가치망은 현재 국면에서 승패 여부를 예측하는 망입니다. 확률로 표현해서 50%가 넘는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국면이고, 50%가 넘지 않는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국면이죠. 과연 알파고는 어떻게 족집게 도사처럼 바둑판을 딱 보고 누가 승리할지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알파고는 여러 정책망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았던 강화학습 정책망끼리의 대국을 활용했습니다. 서로 3,000만 번의 대국을 두게 하고, 각 경기에서 한 장면씩 3,000만 장면을 추출해 해당 국면 이후에 누가 이겼는지를 학습했습니다. 이처럼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지,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지를 확률로 표현한 것이 바로 가치망입니다. 알파고는 고수의 기보로 지도 학습을 진행한 다음, 어디에 돌을 내려놓을지 판단하는 정책망을 만듭니다. 그리고 정책망을 이용해 스스로 대국을 두어 강화학습을 진행한 다음, 승리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는 가치망을 만들어냅니다. 46-7)<br>꼼꼼하게 탐색해나가는 알파고도 이세돌과의 네 번째 대국에서는 이세돌이 둔 ‘신의 한 수’인 78수를 막아내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알파고는 왜 신의 한 수를 허용하고 말았을까요?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봅시다. 알파고의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은 유망한 수를 중심으로 꼼꼼하게 탐색해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률이 높은 쪽을 향해 더 많이 더 깊게 탐색해나가고 가장 신뢰가 높은 지점에 착수를 하는 원리죠. 하지만 이세돌이 둔 신의 한 수 지점에 착수할 확률을 알파고는 1만 분의 1로 매우 낮게 예측했다고 합니다. 알파고는 설마 그 지점에 둘 줄은 몰랐기에, 충분히 탐색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지점이 묘수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내지 못하죠. 애초에 탐색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78수 다음에 대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알파고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승률이 높은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엉뚱한 수, 이른바 떡수를 남발하면서 급격히 무너졌죠. 51-2)&nbsp;<br>제3장. 자율주행 | 테슬라가 꿈꾸는 기계<br>최근의 자동차는 전자공학에 더 가깝습니다. 이른바 움직이는 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자동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자율주행차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자율주행차는 소프트웨어의 힘에 의지해 움직입니다. 자율주행차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라는 유명한 공식을 기반으로 운행을 해나갑니다. 베이즈 정리란 18세기 영국의 목사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 1701~1761가 증명한, 확률에 관한 공식을 말합니다. 베이즈 정리는 사전 확률과 사후 확률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학적 정리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지만 베이즈 정리는 수학 정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수학적으로는 매우 간단한 형식에 불과하지만 철학적으로 본다면 놀라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베이즈 정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듭니다. 확률이라는 것은 믿음에 불과(?)할 뿐이며, 세상에는 절대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의심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61-2)<br>자율주행차는 항상 불안해합니다. 자율주행차가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신호들뿐이죠. 자율주행차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해 안전한 경로로 주행해야 합니다. 이때 자율주행차의 상황 판단은 수학 문제와 같이 단 하나의 규칙으로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행 중 도로를 살펴보며 가야 할 구간과 가지 말아야 할 구간을 끊임없이 판단해야 합니다. 안전한 구간이라면 안전하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위험 요소를 발견할 경우 위험하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식이죠. 가령 자동차가 위험하다고 확신하는 구간에서 특정 센서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낼지라도 이미 상당히 위험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위험할 확률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안전하다는 신호가 계속해서 유입된다면 다시 위험 확률은 낮아집니다. 이처럼 자율주행차는 여러 가지 신호를 받아 믿음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면서 운전해나갑니다. 64-5)<br>자율주행차는 GPS 외에도 각 센서의 약점을 보완해줄 다양한 센서를 병행해서 활용합니다. 먼저 레이더RAdio Detection And Ranging, Radar와 라이다LIght Detection And Ranging, LiDAR가 있습니다. 레이더가 전자파를 발사해 반사파를 측정한다면 라이다는 레이저 빛을 발사해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을 측정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빛Light과 레이더Radar의 합성어인 라이다LiDAR죠. 전자파를 이용하는 레이더는 장거리 측정이 가능하고, 물체 내부까지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날씨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죠. 하지만 물체의 거리나 방향, 모양이나 구조는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 빛을 이용하는 라이다는 정확하게 물체를 인식하고 밀도 있게 표현해낼 수 있지만 거친 날씨에 영향을 받고, 장거리 측정은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라이다의 범위를 넘어서는 구간을 파악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처럼 바라보면 되는 거였죠. 바로 카메라였습니다. 65-8)<br># 점차 카메라가 레이더와 라이다의 기능까지 흡수해서 구현하고 있다.<br>제4장. 검색엔진 | 구글이 세상을 검색하는 법<br>초기 인터넷 광고는 신문 광고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신문 판매 부수에 따라 광고 단가를 매기는 것처럼 사이트에 배너를 노출하고 노출 횟수에 따라 가격을 책정했습니다. 광고에 대한 사용자의 피드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죠. 그러다 검색엔진이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검색광고를 도입합니다. 이제 항상 동일한 광고가 노출되는 게 아닌 쿼리에 적합한 광고를 매번 다르게 보여주는 타깃 마케팅을 진행하고, 사용자 피드백을 기반으로 광고료를 산정하는 CPC 방식Cost Per Click을 도입합니다. 예를 들어 대도시에 근무하는 30대 사무직 남성이 ‘셔츠’를 검색하면 ‘폴로’, ‘빈폴’ 같은 유명 브랜드를 노출하고, 나아가 온라인 구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여기에 더해 검색광고는 경매 방식으로 판매했습니다. 예를 들어 폴로의 광고주가 ‘셔츠’라는 쿼리에 대해 클릭당 1,000원을 제시하고 빈폴의 광고주는 클릭당 1,200원을 제시했다면, 고객들은 단가가 더 높은 빈폴의 광고를 먼저 접합니다. 84-5)<br>구글은 엄청난 수익뿐 아니라 엄청난 문서를 색인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검색엔진이 인터넷에 있는 문서를 수집하여 검색에 적합하도록 보관하고 있는 것을 색인Index이라고 합니다. 아마 2020년 이후에는 300조 개가 훨씬 넘는 문서를 색인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많은 문서를 대체 어디에 보관하고 있을까요? 구글은 엄청난 양의 문서를 고가의 컴퓨터 몇 대에 저장하는 게 아니라 일반 PC처럼 저렴한 컴퓨터 수백, 수천 대에 나눠서 저장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를 위해 구글 파일 시스템Google File System, GFS이라는 효율적인 분산 파일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아무리 큰 파일도 여러 대의 서버에 나누어 저렴한 비용으로 저장할 수 있게 됐죠. 이 방식은 또한 초기 빅데이터 플랫폼의 원형이 되어 이후에 본격적인 빅데이터 플랫폼이 등장하고, 나아가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상 지금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분야는 구글이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5-6)<br>수학계에 에르되시 수Erdős Number라는 게 있습니다. 전 세계를 돌며 평생을 수학 연구에만 몰두해온 에르되시 팔Erdős Pál, 1913~1996은 평생 1,500여 편의 논문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논문 대부분을 다른 학자들과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 ‘에르되시 수’란 에르되시와 몇 단계에 걸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와 직접 공동 논문을 쓴 학자는 모두 512명입니다. 이 512명이 에르되시 수 1이죠. 그리고 이 512명과 함께 공동 논문을 쓴 사람은 에르되시 수 2입니다. 1998년 스탠퍼드에서 박사 과정 중이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문서의 품질을 평가하는 획기적인 알고리즘을 고안합니다. 유명한 사이트가 많이 가리킬수록 문서의 점수가 올라가는 알고리즘으로, 좋은 논문은 인용 횟수가 많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죠. 여기에 에르되시 수가 낮을수록 권위가 높아진 것처럼 권위 있는 사이트에 가중치를 높였습니다. 이 알고리즘의 이름이 바로 페이지 랭크Page Rank입니다. 95-7)<br>제5장. 스마트 스피커 | 시리는 쓸모 있는 비서가 될 수 있을까<br>스피커는 스스로 말을 알아듣거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스피커 자체는 껍데기라는 말이죠. 실제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과정은 음성을 녹음하여 서버로 보내 분석하는 과정이고, 사람에게 말을 하는 기능은 녹음된 음성을 서버에서 받아와 재생하는 것입니다. 스피커는 사실상 마이크가 달린 일종의 블루투스 스피커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음성을 어떻게 서버로 전송할까요? SKT의 NUGU라면 “아리야”, 카카오미니라면 “헤이 카카오”라고 부르면 스피커가 “네?”하고 반응하면서 깨어나죠. 이 과정을 웨이크업Wake-Up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사용자가 질문하거나 요청하면 이를 녹음하여 서버로 전송합니다. 참, 스피커는 껍데기라고 했지만 딱 한 가지 특이한 기능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바로 “헤이 카카오” 같은 웨이크업 단어를 알아듣기 위한 음성인식 엔진이죠. 추가 기능 없이 딱 웨이크업 단어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매우 조그만 음성인식 엔진이 스피커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118)<br>100번의 발화 중 99번을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똑똑한 스피커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반대로 100번의 문장 중 99번만 정확하게 생성해낸다면 마찬가지로 똑똑한 스피커일까요? 만약 잘못 생성한 1번의 문장이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해!”라는 문장이라면요? 이런 문제 때문에 ‘생성’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딥러닝의 활용이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최근에 챗GPT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제어하고 있지만 챗GPT조차도 응답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게다가 스마트 스피커는 챗GPT와는 조금 다릅니다. 무엇보다 문제해결용 대화시스템Task-Oriented Dialogue System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대화만을 주로 한다는 얘기죠. 날씨를 묻거나 레스토랑을 예약하기 위한 대화는 목적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스마트 스피커는 자유로운 대화보다는 목적에 맞는 대화에 방점을 맞추죠. 이 때문에 자유롭게 대화를 생성하지 않고 정해진 템플릿에 정보를 채워서 문장을 생성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130-1)<br>제6장. 기계번역 | 외국어를 몰라도 파파고만 있다면<br>신경망 기반 기계번역 Neural Machine Translation은 문장 전체를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통째로 번역해서 훨씬 더 자연스러운 번역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인공 신경망이라는 거대한 모델과 이를 견인할 수 있는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신경망이 문장을 통째로 번역하는 과정은 마치 오렌지 주스를 농축한 후 물을 섞어 희석하는 과정과 닮았습니다. 먼저, 문장을 통째로 압축해 숫자로 표현한 벡터(방향과 크기를 나타내는 값)를 만들어 냅니다. 오렌지 주스를 농축하는 과정이죠. 그리고 이 값을 번역할 언어로 옮긴 다음 풀어서 번역문을 만들어 냅니다. 각각의 숫자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번역문을 찾아내는 거죠. 물을 섞어 다시 주스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번역문을 만들어 내면 더 이상 규칙 기반처럼 단어와 단어 간의 관계, 순서, 구조 등을 파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통계 기반처럼 단어나 구문을 확률로 번역해 조합하고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145-6)<br>어텐션Attention은 더 중요한 단어를 강조하는 원리입니다. 기존에는 입력 문장의 길이에 상관없이 압축한 문장을 항상 일정한 길이의 벡터에 한 번만 담아냈습니다. 하지만 어텐션은 번역문의 단어를 생성할 때마다 출력 문장의 길이에 맞춰 압축 벡터를 생성합니다. 이렇게 하면 번역문이 길어질수록 벡터도 함께 길어지기 때문에 더 긴 문장을 번역하는 데도 문제가 없겠죠. 이전에는 어떤 분량이든 1줄로 요약했지만 어텐션은 5분을 발표할 때는 5줄, 10분을 발표할 때는 10줄로 요약합니다. 무엇보다 어텐션의 핵심은 중요한 단어에 별도로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표시 없이 문장 전체를 통째로 압축했기 때문에 번역할 때 어떤 단어를 염두에 둬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번역의 질이 떨어졌죠. 하지만 어텐션은 압축할 때 매번 다르게 중요한 부분을 적재적소에 표시해둘 수 있습니다. 어텐션을 핵심 알고리즘으로 삼은 트랜스포머 모델은 사실상 모든 기계번역 모델을 대체했습니다. 148-50)&nbsp;<br>제7장. 챗봇 | 챗GPT, 1분 안에 보고서 작성해 줘<br>17세기 이전까지 수학은 크게 기하학과 대수학으로 나뉘었습니다. 원의 넓이 같은 도형의 성질을 다루는 수학이 기하학Geometry이고, 2차 방정식 같이 문자와 수를 다루는 수학이 대수학Algebra이죠. 이전까지는 둘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보고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죠. ‘어떻게 하면 파리가 천장의 어느 위치에 붙었는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데카르트는 좌표Coordinates라는 개념을 고안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분야로 여겨지던 기하학과 대수학의 개념을 하나로 합쳐낸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좌표의 개념을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 공개합니다. 좌표의 발명은 이후 수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죠. 우스갯소리이지만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좌표라는 개념은 일상에서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 유튜브 동영상 좌표 좀 알려줘”와 같은 식으로 말이죠. 163-4)<br>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 1916~2001은 MIT의 대학원생 시절 이진법을 이용해 모든 계산을 할 수 있는 디지털 논리회로의 개념을 고안합니다. 이 논문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석사 논문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후 섀넌은 디지털의 아버지로 추앙받습니다. 그의 논문은 이후 정보 이론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고 마침내 세상은 정보통신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섀넌 덕분에 컴퓨터는 0과 1, 단 2개의 숫자로 모든 계산을 해낼 수 있게 되었고, 정보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우리는 이 단위를 비트Bit라고 부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데카르트의 좌표 덕분에 기하학을 방정식과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섀넌의 디지털 논리회로와 정보 이론 덕분에 컴퓨터는 모든 정보와 숫자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현대 수학에서는 좌표를 이용해 추상적인 기하학을 수로 표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컴퓨터에 계산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죠. 165)<br>단어를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단어가 갖는 의미에서 각각의 특징을 추출해 수치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가 비슷하다는 것을 숫자로 표현한 값이 얼마나 가까운지로 판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처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자연어 처리 분야에서는 언어를 벡터로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벡터는 공학에서 방향과 크기를 나타내는 값인데 마치 기하학을 좌표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단어의 의미를 벡터로 표현하면 단어가 유사한 정도를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유사도뿐 아니라 다양한 과제에 응용하기 편리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숫자이기 때문에 계산이 쉽죠. 컴퓨터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논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는 계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숫자를 계산하는 일은 컴퓨터가 가장 잘하는 일이죠. 그뿐 아니라 데이터가 많을수록 계산은 더욱 정교해집니다. 게다가 이 과정을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점이 생기겠죠.&nbsp; 165-6)<br>제8장. 내비게이션 | 티맵은 어떻게 가장 빠른 길을 알까<br>강남역의 교통 체증을 예측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조건에 따라 분기하는 모델인 의사결정나무Decision Tree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하던 스무고개 놀이와 비슷합니다. 스무고개 놀이란 말 그대로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스무 번 제시하여 정답을 알아맞히는 놀이입니다. 질문의 횟수는 적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가급적 정답을 빨리 맞힐 수 있는 질문을 제시해야겠죠. 의사결정나무를 구축할 때는 복잡도인 엔트로피Entropy를 낮추는 형태로 진행합니다. 복잡도는 다르게 표현하면 불확실성Uncertainty의 정도라 할 수 있는데요. 즉 엔트로피를 낮춰 덜 복잡하게 하고, 덜 불확실하게 하여 가급적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이 의사결정나무의 구축 원리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의사결정나무 모델은 단 한 번의 오류에도 너무 취약합니다. 게다가 예상 밖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온갖 오류가 넘치는 현실의 데이터로는 정확도를 높이기 어렵습니다. 207-10)<br>버클리대학교의 통계학자 레오 브라이만Leo Breiman, 1928~2005은 2001년에 오류에 견고한 새로운 모델을 제안합니다. 데이터와 특징에 제한을 두고 샘플을 추출한 다음, 여러 개의 의사결정나무를 만들어 각각의 결과를 두고 투표해 최종 결과를 정하는 방식이죠.&nbsp; 이렇게 만들어낸 각각의 의사결정나무는 당연히 단일 의사결정나무에 비해 성능이 훨씬 더 떨어집니다. 데이터와 특징을 제한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의사결정나무가 1개가 아니라 10개, 100개가 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데이터의 오류 등으로 일부 의사결정나무가 잘못된 결과를 내리더라도 나머지 나무들이 올바른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오차에 매우 견고해집니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대중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이 모델의 이름은 랜덤 포레스트Random Forest입니다. 나무를 만들기 전에 데이터를 무작위로Random 추출하고, 나무가 여러 개 모여 숲Forest을 이룬다는 의미죠. 모델의 원리에 잘 어울리는 멋진 이름입니다. 210-1)<br>통계학에 잔차Residual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오차Error와 비슷한 개념인데, 잔차는 전체에 대한 오차가 아니라 샘플의 오차라는 차이점이 있죠. 오차보다는 훨씬 더 작은 개념으로, 잔차를 줄여나가면 모델을 훨씬 더 정교하게 개선할 수 있기 때문에 통계학에서 여러 모델을 만드는 데 중요하게 쓰이죠. 잔차의 개념을 의사결정나무에도 동일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나무들은 이전과 달리 독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전의 나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먼저 의사결정나무를 하나 만듭니다. 그리고 이 나무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실수를 바로 잡는 새로운 나무를 만듭니다. 이 과정을 오류를 최소화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잔차를 계속해서 줄여나가는 거죠. 잔차의 기울기Gradient를 줄여나간다고 하여 그레이디언트 부스팅Gradient Boosting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정형화된 데이터를 예측하는 일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머신러닝 모델이 딥러닝보다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212-3)<br>제9장. 추천 알고리즘 |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여기로 이끌다<br>데이터 과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전설처럼 회자되는 얘기가 있습니다. 1990년대 미국의 한 슈퍼마켓 체인에서 맥주와 기저귀 간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제품에 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알고 보니 수많은 남편들이 퇴근길에 아내의 심부름으로 마트에 들러 기저귀를 사면서 맥주도 함께 구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이후에는 기저귀 근처에 맥주를 진열하기 시작했고 매출을 더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객의 구매 내역을 분석하는 방식을 장바구니 분석Market Basket Analysis이라고 합니다.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상품 간의 연관성을 분석했다고 하여 연관성 분석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이라는 학문의 기반이 됩니다. 1993년 당시 IBM에 근무하던 라케시 아그라왈Rakesh Agrawal 박사의 논문은 본격적인 데이터 마이닝 학문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추천 시스템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223)<br>고객들은 무엇보다 새로운 영상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새로울수록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천은 더 어려워지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추천 시스템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죠. 그래서 뜻밖의 발견Serendipity이 중요합니다. 멋진 영어 단어만큼이나 설레는 표현이기도 하죠. 여기에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이어야 하지만, 희한하게도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하죠. 다시 말해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구역 바깥에 있어야 하지만 또 아예 엉뚱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참, 어렵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여기로 이끌었다”라고 자주 감탄하는 것은 그래도 이 2가지 조건을 잘 만족하고 있다는 거겠죠? 친구가 나에게 뜻밖의 영화를 소개해줬는데 너무 만족스러워 하루 종일 즐겁던 기억이 있지 않나요? 추천 시스템의 목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뜻밖의 발견’으로 설렐 수 있게 앞으로도 추천 시스템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을 꾸준히 만들 것입니다. 236-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00/0/cover150/e9225340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000087</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아침</category><title>중앙아시아사 / 피터 B. 골든 - [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0623</link><pubDate>Mon, 01 Jun 2026 07: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106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737451&TPaperId=173106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5/coveroff/k94273745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737451&TPaperId=173106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a><br/>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01월<br/></td></tr></table><br/>서문: 민족들의 교차로&nbsp;<br>"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보통 여러 종족과 언어 집단이 오랜 시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현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민족〉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언어가 확산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정복, 대규모 이동, 이에 따른 전면적 민족 교체가 언어 확산의 한 가지 모델이다. 또 다른 모델은 점진적 침투, 상호 영향, 이에 따른 두 언어 상용bilingualism이다. 그런데 새 언어를 전파하는 이주민들 또한 많은 경우 여러 민족과 언어의 융합으로 형성된 집단이었다. 새로운 민족 이동과 함께, 이 집단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언어가 릴레이 경주처럼 또 다른 집단에 이전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집단명과 공통 언어를 가진 민족들도 사실은 여러 다양한 민족의 혼합 집단일 수 있다. 민족들의 이동은 복잡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민족·언어 지도는 수천 년 넘게 이어져온 민족들의 혼합 과정을 한 특정 시점에 찍은 스냅 사진에 불과하다. 민족들의 형성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23-4)<br>1장 유목 생활과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출현&nbsp;<br>"기원전 제2천년기 초(약 기원전 1700~기원전 1500년 사이)에 스텝 지역에 거주하던 목축인들 중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이동에 더 잘 적응하는 말과 양이 선호되면서 목축하는 가축의 구성도 바뀌었다. 말이 전체 가축의 36퍼센트를 차지했다. 마력馬力의 활용은 불길한 군사적 결과를 불러왔다. 기마전투술을 발전시킨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은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바퀴 달린 수레에 이어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 전차가 등장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만들어진 초기 형태의 전차들이 요새화된 정착지였던 신타시타에서 발견되었다. 신타시타는 남부 우랄 스텝 지역에 위치한 신타시타-아르카임 페트로브카 고고유적군에 속해 있다. 잘 발전된 야금술(아마 무기 생산 및 군사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을 보유했던 신타시타는 이 스텝 지역에 존재했던 도시 정착지들의 일부였다. 기원전 제2천년기가 되어 전차는 중국과 중동에 전파되었다."(31-2)<br>"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의 민족 이동 두 번째 단계는 나무, 동물의 뿔과 힘줄로 만든 복합궁compound bow/composite bow의 발명과 연관이 있다. 복합궁은 강력하고, 상대적으로 작고, 가장 중요하게는, 말 위에서 쉽게 모든 방향으로 화살을 쏠 수 있어 스텝 지역에서 전쟁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복합궁은 기원전 제3천년기 초 이집트에서 처음 발명된 듯한데, 그 시점을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기마 전사들이 잘 훈련된 기병대로 발전했다. 이 기병대는 영광을 추구하는 개별 전투원이라기보다 전사란, 훈련된 집단의 일부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군대였다. 그 결과 전차는 과거의 기술이 되었다. 이에 수반된 철제 무기의 확산을 통해 기마병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스텝 지역의 이웃 유목민들을 약탈 공격 하고 정주 세계의 생산물들을 획득하려 하게 되면서 전쟁은 격화되었다. 이제 전쟁이 더 큰 규모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거대한 부족연합들이 출현했다."(32)<br>"유목민들이 정주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유목민 집단(씨족, 부족, 혹은 민족)을 대변해줄 자가 필요했다. 이것은 곧 정치 조직을 의미했다. 영구적 국경이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친족 관계가, 그것이 진정한 관계건 〈지어낸〉 관계건 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속력을 제공했다." "유목 세계에서 국가의 존재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유목민들은 중국의 부를 탈취하기 위해 혹은 간혹 이루어진 중국의 무력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를 건설했다. 이러한 외적 자극들은 서부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의 유목국가들은 예외 없이 동부 유라시아 초원에서 이동해온 국가들이었다. 유목민들은 보통 정주사회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이슬람 이전 시기의 이란과 같은 이웃 정주제국들도 스텝 지역을 정복하려 들지 않았고 이따금 공격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은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위험했다. 중국과 비잔티움은 매수, 외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선호했다."(38-9)<br>"초기의 유목민들은 필요한 물품의 교역 활동 외에는 중앙아시아 도시들과의 관계를 꺼렸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더 큰 정치 단위들의 일부로 만든 것은 유목민들이었다. 원래 지리적, 안보적 제약 때문에 유목민들의 가장 흔한 정치 조직은 느슨한 연합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의 정주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본래 이란어를 사용하고, 독립 성향이 강하고, 국제적이며, 귀족적이고, 상업 중심적인 도시국가들이었다. 각국은 〈동등한 사람들 중 우두머리first among equals〉에 불과했던 군주의 지배를 받았다. 상업 중심적이고 부유했던 도시국가들은 초대륙적 성격의 상업적, 지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활기찬 문화를 창출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지배가 아닌 상업적, 문화적 교환을 추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상인, 관료, 종교인들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과 유목국가들의 이런 관계는 서로에게 이로웠다."(43)<br>2장 초기의 유목민들: “전쟁은 그들의 직업이다”&nbsp;<br>"근동 지역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사상 최초의 대大육상제국을 세운 페르시아인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9~기원전 530)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박트리아, 소그디아, 화라즘을 복속시켰으나 기원전 530년 스키타이 원정 중 사망했다. 키루스 2세가 끔찍하게 사망한 후 8년 뒤에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 1세Darius Ⅰ(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는 그리스는 정복하지 못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부 유목 민족들을 정복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기아나(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소그디아, 화라즘, 박트리아 등은 알렉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이 기원전 330~기원전 329년에 중앙아시아를 정복할 때까지 협상을 통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페이아satrapy' 즉 총독령(지방)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 하에서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에 연결되었다. 교역은 도시 발전과 대규모 수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농경의 확대를 촉진했다."(58-9)<br>"흉노는 〈국가〉 혹은 더 나아가 〈제국〉이라고 보통 불렸지만 사실은 부족연합에 가까웠다. 선우는 군사, 외교, 사법, 그리고 이에 더해 제사장 관련 직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최고 경영자였다. 선우 밑에는 좌익과 우익에 24명의 〈현왕賢王〉들이 있었고, 또 다른 24명의 수령들이 각각 1만 기의 병사를 거느렸다. 이 〈제국적 연합〉은 유연하고 협의를 통해 기능하는 정치 조직이었으며 부족과 씨족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허용했다." "흉노는 자국 지배하의 정주 지역에서 공물을 징수하고 주민들을 노동에 동원했다. 유목민을 상대로 흉노는 매년 가을철에 호구戶口와 그 가축 수를 조사하는 것 말고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유목민 사회의 유연성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빈번한 파벌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앙정부가 정주 세계의 물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해내는 군사적, 외교적 승리들을 거두어나가는 동안에는 잘 작동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부 혼란을 발생시켰다."(67-8)<br>"쿠샨 제국은 그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일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했던 쿠샨 제국은 여러 문화를 훌륭하게 융합했다. 초기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어가 공식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 문자로 적은 현지의 동이란계 언어였던 박트리아어가 사용되었다. 주로 금 또는 구리로 만든 쿠샨 제국의 주화들은 한 면에는 이란, 인도, 그리스의 신들의 모습이, 다른 한 면에는 통치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주화들과 다양한 신들의 작은 조각상들은 쿠샨 제국 내에서 조로아스터교, 토착 종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가 공존했음을 알려 준다. 일부 쿠샨 지배자들은 남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확산된 불교를 후원·장려했다. 불교 사원과 수도원은 이슬람 이전 시기 아프가니스탄의 흔한 풍경이었다. 쿠샨의 간다라 양식은 훗날 동서 투르키스탄으로 전파되었다."(69-71)<br>3장 하늘의 카간들: 돌궐 제국과 그 계승 국가들&nbsp;<br>"흉노와 한의 멸망이 불러온 정치적 혼란기 이후 중앙아시아에 세 강국이 출현했다. 곧 북중국의 타브가츠Tabghach(중국어 명칭, 탁발Tuoba, 拓跋), 몽골 초원의 아바르Avar(중국어 명칭, 유연Rouran, 柔然), 쿠샨 땅의 헤프탈Hephthalites(중국어 명칭, 활Hua, 滑)이다." "이 북위, 유연, 헤프탈은 당시 유라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연과 북위 사이의 전쟁은 유목민들의 서진을 불러왔는데, 이러한 민족 이동은 원래 이란어 사용 지역이었던 내륙아시아 초원을 점차 투르크화시켰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에는 중국어로 철륵Tiělè, 鐵勒이라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철륵의 한 갈래인 오구르 투르크족은 460년경 흑해 초원에 도달했다. 유연의 아나괴Anagui, 阿那瓌(520~552)는 철륵의 반란과 내분으로 북위에 원조를 청했으나 북위 또한 534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정치적 혼란 상황은 돌궐 제국Türk Empire, 突厥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79, 83)<br># 이 책에서 Türk로 표기된 투르크인은 이 집단명을 사용했던 특정 민족 곧 돌궐인을 지칭한다. Turk와 Turkic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들이다.<br>"돌궐 제국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유라시아 횡단 국가였다. 돌궐 제국은 행정적으로는 동부[동돌궐]과 서부[서돌궐] 두 개의 카간국으로 나뉘었다. 아시나 가문의 카간들이 두 카간국을 통치했는데 동부의 카간이 서부의 카간보다 정치적으로 더 지위가 높았다. 서돌궐의 군주 이슈테미의 후계자들은 때때로 동돌궐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는 〈적법한〉 행위였던 것이,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유목국가들에선 왕족 구성원 모두에게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수隋가 581년 패권을 잡으며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나라는 즉시 북방 방어를 강화했으며, 장손성長孫晟과 같은 첩자를 통해 돌궐 궁정 내에 첩자들을 양성하며 아시나 씨족의 내분을 부추겼다. 동돌궐 내부의 분열이 심해지자 서돌궐의 타르두 카간은 동돌궐의 정권마저 장악하고 수년 동안 돌궐 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제국 통치는 아마 수의 사주를 받은 철륵의 반란으로 603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88-9)<br># 동돌궐 : 552~630, 682~742, 서돌궐 : 552~659, 699~766경<br>"돌궐 제국은 742년 (아시나 왕족이 이끈) 바스밀Basmil 등이 일으킨 피지배 부족들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이어서 위구르인들이 744년 바스밀을 축출하고 몽골 초원과 신장, 인근 시베리아 지역을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Uighur qaghanate(744~840)을 수립했고, 이후 당나라를 괴롭혔다. 약 80만에 달했던 위구르인들은 토쿠즈 오구즈Toquz Oghuz(〈9개의 친족 집단〉[혹은 〈구성九姓〉])라 불린 동철륵계 부족연합의 맹주였다." "위구르 카간은 [카간의 궁정인] 쾨크 오르둥Khökh Ordung에서 (제국적 야망을 보여주는) 일종의 태양 숭배 의식을 매일 행했다. 위구르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베제클릭Bezeklik(〈그림들이 있는 장소〉)이다. 베제클릭은 77개의 인공 석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곳에 있는 불교적, 마니교적 테마의 그림들에는 소그디아, 중국, 인도의 미술 양식이 섞여 있다. 발굴의 규모 면에서 학자들은 베제클릭을 〈사막의 폼페이〉라고 불러왔다."(98, 101)<br>"키르기즈는 [남시베리아 지방인] 투바의 예니세이강 유역에 위치한 강력한 투르크계 혹은 투르크화된 부족연합이었다.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키르기즈인들은 유목-농경 복합사회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만큼 문화적으로 발전된 집단은 아니었다. 키르기즈인들에 대해선 그 초기 역사뿐 아니라 840년과 10세기 초 사이 〈제국 시기〉의 역사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키르기즈인들은 오르콘강과 셀렝게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는 흉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목제국의 전통을 따르지도 않았고 추가적 정복 활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본거지인 예니세이강 지역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중국과 중동과의 교역 관계를 이어나갔다. 당대의 이슬람 지리학자들은 키르기즈인들이 목축에 종사하며 시베리아 삼림 지대의 물품들인 사향, 모피, 특수 목재, 상아로 쓰인 후투Khutu 뿔(땅에서 파낸 매머드의 엄니) 등을 수출했다고 기록했다."(103-5)<br>"이처럼 권력 공백 상태였던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것은 몽골어족에 속했던 거란Qitan, 契丹이었다. 거란은 남만주 지역 출신의 수렵민, 덫사냥꾼, 돼지 사육 농경민, 양-말 사육민들로 구성된 강력한 부족민 집단이었다. 한때 돌궐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 지역에 제국(916~1125)을 세우고 중국식 왕조명인 요遼를 국가명으로 채택했다. 거란인들은 몽골 초원을 차지한 후 과거 이 지역을 지배했던 위구르인들에게 재이주를 권하기도 했는데 위구르인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거란은 몽골 초원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중국의 통치에 보다 집중했다. 거란의 통치기에 많은 투르크계 집단이 가혹한 통치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했다. 그 결과 10~11세기 동안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어 사용 유목민들이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수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몽골 초원은 몽골어 사용권이 되었지만, 거란 통치자들은 몽골보다는 중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107)<br>4장 실크로드의 도시들과 이슬람의 도래&nbsp;<br>"7~8세기 아랍의 침공 직전에 트란스옥시아나에는 북부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소그디아 도시들인 차즈(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드의 서쪽에는 화라즘Khwârazm이 위치했다. 농업, 제조업, 교역의 중심지였던 화라즘은 북부 삼림 지대의 핀-우그리아계와 슬라브계 민족들의 물품들을 중동 지역으로 보내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소그드인들은 중국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일대 교역 거점들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지배했다. 소그드인들은 농민, 수공예인, 상인으로서 기술적, 재정적 전문 지식을 발휘했다. 그 활동 흔적을 일본과 벨기에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소그드인 공동체의 리더는 '사르타파오sartapao'(중국어 살보sabao, 薩寶)라 불렸다. 사르타파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사르타바하sârthavâha'(대상의 리더)의 차용어다. 이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소그드인들이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국제화된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11-2)<br>"신장에는 북부의 타림분지와 투르판 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탄 지역에 또 다른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 혹은 왕국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초원의 유목 세력과 중국 사이에 끼어 한나라 시기 이후로 불안한 독립 상태 혹은 자치 상태를 누려왔다. 7세기에 중국과 티베트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중국은 카슈가르, 아그니, 쿠차, 호탄을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삼았다(안서는 〈서역을 안정시킨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751년까지 안서사진을 지배했다." "쿠차, 아그니, 코초는 적어도 8세기까지 토하라어를 사용한 주민들이 거주했던 중요한 도시국가들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농업, 목축업, 수공예품 생산에 경제의 기반을 두었고, 식료품, 술, 비단, 직물, 펠트, 옥, 화장품 등을 수출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는 자묵Jamûg 왕실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부하라 군주〉는 낙타 모양의 왕좌를 사용했는데, 이는 분명 대상 무역이 부하라의 경제에서 차지하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5-7)<br>"소그디아는 광범위한 대외 교류를 통해 국제화되고 아주 세련된 공동체가 되었다. 동시에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 특징으로 했다. 여러 다른 문화의 융합은 소그디아의 종교에서 가장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소그디아는, 중세의 근동 지역 및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국교가 없었고 여러 다른 종교를 관용했다. 소그드어로 쓰인 마니교, 그리스도교, 불교 서적들은 소그드인들의 종교적 관심의 폭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불교는 여전히 옛 쿠샨과 헤프탈 땅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였으며,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 숭배 신앙 등 여러 토착 신과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들과 공생하고 있었다." "소그디아에는 불교와 토착 종교들 외에도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파[경교景敎]가 전파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소그디아 지방에서 이슬람교도들 다음으로 가장 성공적인 종교 공동체가 되었다. 소그드인 상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우에도 그랬듯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 역할도 수행했다."(118, 121, 125-6)<br>"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 제국의 정복 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심화되던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등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옥수스) 강의 건너편〉을 의미하는 마와라안나흐르Mâ warâ'an-nahr는 [그리스어 지명] 트란스옥시아나를 아랍어로 번역한 명칭이다. 아랍인들의 마와라안나흐르 침공은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632년 사망)의 계승자들이자 팽창 중이던 이슬람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던 우마이야조Umayyad 칼리프들(재위 661~750)이 전개한 아랍 정복 활동의 일환이었다." "중앙아시아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소그드인 도시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권력 투쟁이 계기가 되어 751년에 당과 카를룩 동맹군은 카자흐스탄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이슬람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서돌궐-투르게슈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카를룩이 이슬람 제국 편으로 돌아서면서 이슬람 군대가 승리했다. "(26, 130)<br>"아랍 군대의 승리에 이어 755~763년의 내란[안사安史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철수하자 이슬람교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음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교가 옛 종교들과 혼합되기도 했다. 이슬람교 개종자들은 옛 관습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정복이 개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지만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보통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상업 마인드를 가졌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 수립된 압바스 칼리프국Abbâsid Caliphate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주민들이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됨에 따라 그리고 9세기에 비非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늘어났다."(130-2)<br>5장 초원 위에 뜬 초승달: 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nbsp;<br>"하자르 카간국의 왕가는 서돌궐의 아시나 혈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자르 카간국과 아랍 칼리프국은 코카서스의 지배권을 놓고 (640년대와 737년 사이에) 장기전을 치렀고 그 결과 북코카서스에 양측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은 중세 세계의 최대 상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발트해와 북유럽 삼림 지대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이슬람 세계로 들어오는 물품들의 주요 통로인 볼가강 루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카간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자주 동맹 관계에 있었고,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적·경제적으로 교류했다. 하자르 카간은 8세기 말과 9세기 초 사이에 유대교로 개종했다. 많은 수의 하자르 지배 가문 인사도 카간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하자르 카간국에는 일상적 통치 활동을 위임받은 부副카간이 있었다. 현지의 이슬람교도 중에서는 국가의 재상도 배출되었다. 이 재상과 신성한 카간들의 호위병들은 화라즘 출신의 거주민들이었다."(141-2)<br>"십중팔구 (아프가니스탄) 토하리스탄 출신의 이란인들이었을 사만 일족은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지방 영주들의 후예들로, 9세기 초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다." "사만 왕조는 이슬람의 확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중앙아시아 도시들의 지배적인 종교였던 이슬람교는 초원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사만 왕조 출신의 중앙아시아 학자들은 이슬람 문화와 세계 문화 발전의 주요 공헌자였다. 사만 왕조는 아마 옛 불교 교육 기관을 모델로 삼은 이슬람교 대학인 마드라사madrasa들을 세웠으며, 근동 지역으로 보내질 투르크인들을 이슬람교도로 양성하는 관료 기구들과 관리 전통들을 확립했다. 사만 왕조는 소그드인 무역 도시들의 상업 전통을 계승하고, 대륙 횡단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동이슬람 세계의 리더였다. 사만 왕조의 주화들은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상당량이 발견되었는데, 국제무역에서 사만 왕조가 지녔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143, 147-8)<br>"카라한 왕조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을 지배하며 1005년에 사만 왕조를 멸망시켰다.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이었던 까닭에 카라한인들은 사만 왕조의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대중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카라한 왕조의 귀족들은 유목 생활 혹은 반半유목 생활을 영위했다. 그 다수는 봉직의 대가로 토지 기반 조세 수입인 이크타iqta'를 지급받았는데, 유럽의 봉지fief, 封地와 어느 정도 유사했다." "10세기 후반기에 또 다른 투르크-이슬람계 국가가 출현했다. 세뷱 티긴Sebük Tigin은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해 가즈나 왕조(977~1186)를 수립했다. 가즈나 왕조는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필수 자원으로 활용한 최초의 이슬람 세력이었다. 코끼리 부대는 이란계 관료들과 투르크계 군사 엘리트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이란계와 인도계 주민들이 피지배층을 이루는 복합적 국가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쟁 무기였다. 가즈나 왕조의 이와 같은 복합적 국가 형태는 훗날 등장할 여러 국가의 원형을 이루었다."(151-4)<br>"11세기에 중동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의 시조는 오구즈 부족연합에 속한 키닉 부部의 수령 셀주크Seljük였다. 985년경에 그는 시르다리야강 연안의 잔드에 자리 잡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시아파 부야Buyid[부와이흐Buwayh] 왕조의 통제를 받고 있던 압바스 왕조는 1055년에 셀주크인들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셀주크인들은 압바스 왕조의 요청에 응했고 그 결과 수니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부상했다. 1071년에 차그리의 아들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재위 1063~1072)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투르크계 부족민들이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는 룸Rûm[로마] 셀주크 술탄국과 뒤이어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는 토대가 되었다. 오구즈인들이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투르크화된 형태의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으로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158-61)<br>6장 몽골 회오리바람&nbsp;<br>"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성은 때로는 과장되었지만, 각 종교 성직자들의 주된 의무는 몽골 칸들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다. 종교적 관용은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서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기도 했다. 칭기스 일족은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모든 정복지에서 몽골 제국 관리들은 제국의 경영에 도움이 될 기술을 보유한 인력을 식별해냈다. 이러한 인력들도 전리품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언어가 사용된 몽골 제국에서 언어적 재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특히 우대되었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재능이 있으면 확실히 등용될 수 있었다. 중국어 구어口語를 할 줄 알았던 쿠빌라이는 언어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해 1269년에 티베트 승려인 파스파'Phags-pa에게 몽골어, 중국어, 그 외 몽골 제국의 다른 언어들을 다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쿠빌라이의 노력에도, 이 파스파 문자는 몽골 제국 내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187)<br>"몽골인들은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내려 했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은 천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그리고 아마 통제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열심히 찾았다. 한화된 거란인이었던 야율초재耶律楚材는 칭기스 칸과 우구데이를 섬겼는데 처음에는 천문학자와 기상학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해 대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대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id ad-Din(1247~1318)은 '야다타슈yadatash'를 능히 다루었던 한 캉글리-킵착 부족민에 대해 기록했다. 야다타슈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의 돌이었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이 우석雨石은 여름에도 눈보라를 일으킬 수 있었다. 외국인 전문 인력들은 초기 칭기스 일족이 가졌던 조금 더 파괴적인 성향을 일부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야율초재는 우구데이 칸이 북중국의 농경지를 유목민을 위한 목초지로 바꾸려 하자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만류했다."(187-8)<br>"몽골 제국의 팽창 정책은 동남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의 남중국 정복은 타이Tai계 주민들을 파간의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여기서 〈버마 왕국〉은 당시의 파간 왕국Pagan Kingdom으로, 오늘날의 미얀마를 말한다], 1283년부터 1301년까지 몽골군은 정기적으로 파간을 공격했고 1287년에는 일시적으로 파간을 점령했는데, 이는 추가적 인구 이동을 불러왔다. 몽골군은 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지역도 침공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자바의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은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1293년에 수립되었는데 곧바로 몽골군을 몰아냈다. 이후 마자파히트 왕국은 서유럽에서 수요가 컸던 향신료의 주요 공급자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연결된 육상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1250~1350년 사이에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world system〉를 태동시켰다. 몽골 제국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192-3)<br>7장 후기 칭기스 왕조들, 정복자 티무르, 그리고 티무르 왕조의 르네상스<br>"몽골 제국의 지배를 거치며 그때까지 이란어를 사용해오던 많은 주민은 투르크어를 채택했다. 이러한 언어의 투르크화 현상은 6세기부터 진행된 과정이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같은 도시들에서는 계속해서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두 언어가 상용되었다. 페르시아어(타직어)는 상류층 문화와 정부의 언어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했지만, 문학의 영역에서까지 갈수록 더 투르크어와 공존해야 했다. 결국 투르크어는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재편해 그 소속 부족들을 해체하고 이들을 칭기스 일족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몽골 제국이 쇠퇴하자 부족 혹은 부족 형태의 집단들이 재등장했는데, 그 중 일부는 칭기스 혈통의 리더나 다른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집단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새롭게 등장한 집단들이 전통적 친족 관계보다는 '알탄 우룩'(황금 씨족) 즉 칭기스 일족에 대한 충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197-8)<br>"차가다이 올루스는 여러 부족과 칭기스 일족이 이끄는 군사 집단들로 구성되어 서로 동맹을 맺거나 싸우면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바로 여기서 유럽에서는 타메를란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티무르가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칭기스 일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티무르는 칭기스 일족을 꼭두각시 군주로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칭기스 가문 출신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그는 '쿠레겐Küregen'(몽골어 '쿠르겐kürgen', 〈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데 만족했다." "티무르의 일차적 목표는 차가다이 울루스 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만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활동 기회를 줌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했다. 이것은 티무르가 끊임없이 병사들을 전쟁과 약탈전에 동원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티무르는 군사 원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203-5)<br>"화약의 시대가 중앙아시아에 도래했고 티무르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 도구들의 추가적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대체로 새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데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화약 무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화기의 신뢰성과 정확성이 훈련받은 궁수의 그것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처음에 대포는 빠르게 움직이는 기병을 상대로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총포는 에센 칸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대를 상대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화약 무기들은 몽골군의 위협을 막아내는 데서 무력했고 그 결과 명이 화약 무기의 효능을 믿지 않았던 터라 중국의 무기 개발이 지연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더 명중률이 높아진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궁기병弓騎兵보다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목민들은 더는 화약 무기로 방어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225)<br>8장 화약의 시대와 제국들의 출현&nbsp;<br>"카자흐인들의 아불 하이르 칸으로부터의 독립은 투르크권 칭기스 세계가 재편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1470년경, 자니벡과 기레이가 이끄는 카자흐 부족들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자리 잡으면서 강력한 부족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카작Qazaq'이라는 이름은 원래는 [〈자유인〉 〈방랑자〉 〈약탈자〉 등을 지칭하는] 사회정치적 용어였으나 이제는 민족 명칭이 되었다[카작을 러시아어로 발음한 것이 카자흐다]." "카자흐인들의 압박을 받은 아불 하이르 칸의 손자 무함마드 시바니Muhammad Shîbânî와 그를 따르는 우즈벡인들은 1500년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입해 티무르조 정권들을 몰아냈다. 시바니 칸의 주적 중 한 명인 바부르Babur는 그를 피해 인도에 새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우즈벡인들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으로 변모시켰다. 그들은 이전부터 트란스옥시아나에 거주해온 투르크인과 이란인 집단 사이에 정착해 이들과 함게 복잡한 언어와 문화 계층을 이루었다."(230-2)<br>"바부르는 1512년에 [우즈벡인들로부터] 도주해,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그다음에는 인도로 간 티무르 일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Lodi dynasty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무굴 왕조Mughal dynasty(1526~1858)를 세웠다. 바부르(재위 1526~1530)와 초기의 무굴 황제들은 인도를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이전에 머물 임시 피난처로 생각했으나, 그들의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무굴인들은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본향을 지향했다. 무굴 통치자들은 18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차가타이 투르크어로 교육받았다. 페르시아어는 중앙아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상류층 문화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무굴인들은 우즈벡인들과 경쟁 관계를 이어갔으나 인도의 무굴 제국은 계속해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군인, 관료, 지식인들을 받아들였다.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인도에 남은 반면,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잠시 머물며 기후와 음식에 대해 불평하고, 부를 쌓은 뒤 인도를 떠났다."(233)<br>"1552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Ivan Ⅳ〈뇌제the Terrible, 雷帝[그로즈니]〉(재위 1533~1547, 러시아의 차르 1547~1584)는 카잔 칸국을 정복했다. 카잔 칸국의 주민들인 무슬림 불가르-타타르인, 우랄 지방의 바시키르 부족민, 볼가 지방의 관계 민족들 모두 러시아의 속민이 되었다. 이반 4세는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Astrakhan Khanate을 손에 넣었다. 수 세기 동안 투르크계 민족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볼가-우랄 지대가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이다. 1547년부터 '차르tsar'(황제) 칭호를 스스로 사용해온 이반 4세는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한 후에는 비잔티움 황제들과 몽골 칸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선언이었다. 러시아는 이반 4세의 정복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하는 한편 무슬림 타타르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시키려 했다. 17세기가 되면 러시아인들은 이들 지역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234-5)<br>"만주인들은 1644년에 명을 패퇴시키고 중국 지배를 확고히 한 후 몽골, 시베리아,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의 변방 지역으로 진출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서부 초원 지대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두 제국은 시베리아에서 맞닥뜨렸다. 러시아는 교역을 원했고, 청은 북방 변경 지대의 정치적 안정을 원했다. 청과 러시아 양국은 네르친스크조약Treaty of Nerchinsk(1689)을 통해 국경 문제를 다루었다. 1727년 체결된 캬흐타조약Treaty of Kiakhta으로 러시아와 청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셀렝게강 연안의 캬흐타가 두 제국 간 국경 무역 도시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이슬람권 중앙아시아를 북쪽과 서쪽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은 장애물인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로 대립하던 몽골 집단들은 국내의 경쟁자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해졌고, 이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238-9)<br>"러시아는 변경 지역을 위협하는 무슬림 크림 타타르인들과 노가인들을 상대하는 데 불교도 칼믹인Kalmyks들[서西오이라트인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1655년에 칼믹인들은 러시아의 차르에 충성을 서약했지만, 양측은 이들 사이의 협약을 다르게 해석했다. 러시아인들은 칼믹인들을 속민으로 간주하며 차르가 소환할 경우 칼믹인들이 자신들과 같이 싸워줄 것이라 기대했고, 칼믹인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의 〈동맹자〉라 여겼다. 러시아는 1660년대 들어 더 지배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동방으로부터 더 많은 오이라트 집단이 러시아의 지원하에 칼믹인들의 최고 통치자가 된 아유키 칸Ayuki Khan(1669~1724)의 휘하에 합류했다. 러시아는 아유키 칸에게 화약 무기들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칼믹 군대는 크림 타타르인들과 (간접적으로는 크림 칸국의 상전국 격인 오스만 제국과] 여타 유목민 적들을 상대로 아주 중요한 친러시아 동맹군이 될 수 있었다. 동쪽에서는 오이라트계 준가르인들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253-4)<br>9장 근대 중앙아시아의 문제들<br>"비록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재정러시아 황제, 재위 1582~1725]의 트란스옥시아나 정복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지만, 러시아는 1740년 우랄 지방의 바시키리아를 정복한 후 초원 지역 안으로 요새들을 건설해나갔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던 노예 포획을 노린 유목민들의 약탈 공격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육상 무역에서 중간 상인이 되는 것 또한 러시아의 목표였다. 당시 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풍부한 금광에 대한 소식도 러시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예카테리나 대제[예카테리나 2세, 재위 1762~1796]는 기존의 반反이슬람 노선을 수정했다. 그녀의 전임자인 옐리자베타[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카잔 지역에 있는 모스크 536개 중 418개를 파괴하고 이슬람의 선교 활동을 금지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슬람교를, 카자흐인들을 처음에는 선량한 이슬람교도로, 다음에는 선량한 시민으로, 궁극적으로는 선량한 그리스도교로 만들어줄 〈문명화civilizing〉 도구로 보았다."(270-1)<br>"1822년에서 1848년 사이에 러시아는 카자흐 주즈들을 합병하고, 칸들을 폐위시키고, 카자흐 부족들을 여러 다른 지방 행정 구역에 두었다." "부하라는 1868년 6월에 러시아 보호국이 되었고, 러시아가 종교전쟁의 발생을 염려한 까닭에 전면적 병합은 면했다." "히바 칸국은 1873년에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간단히 병합되었다." "러시아가 서유럽과 거의 같은 크기의 이 [중앙아시아] 영토를 획득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마 [러시아 쪽에서는] 1000명 정도가 실제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약하고 분열된 적들을 상대로 러시아 장군들은 기술적, 수적 우위를 누렸다.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인구보다 많은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속민으로 두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새로 편입된 무슬림 주민들의 충성심뿐 아니라 다른 비非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과 유대교도 신민들의 충성심 또한 확보하지 못했다."(271-3)<br>"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고 민주주의와 같은 〈유해한〉 근대화 사상으로부터 차단시키려 했다. 다른 비非러시아인 신민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인들은 징집하지도 않았는데, 중앙아시아인들이 군대에서 근대 전쟁과 무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의 변화를 막기 위해 전제주의 차르 정부는 종종 더 보수적인 지배층 인사들 및 울라마와 손을 잡았다. 울라마는 비이슬람적이라는 이유에서 심지어는 공중위생의 개선 시도들도 반대했다. 이런 정책들은 중앙아시아의 후진성을 더 영속시켰다. 새로 정복되고 합병된 민족들은 〈이노로드치inorodtsy, (외래인aliens)〉로 지칭되었다. 이노로드치는 속민이되 국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러시아는 천연자원을 수탈하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럽 지역 출신의 러시아인과 비러시아 주민들은 종종 옛 〈토착〉 소도시들을 기반으로 발전한 도시들에 정착했다."(276-7)<br>"1923년경에 이르러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굳혔다. 이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nationality〉이 아닌 왕조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이제 소련USSR은 자신의 통치 목적에 부합하게 국경선을 긋고 민족국가들을 창조해냈다." "그 후 소비에트 정부는 각 공화국에 맞추어 민족들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자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개념을 가진 중앙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소비에트 민족은 자의적인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는 민족지학과 언어학 연구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소련의 민족 정책은 거대한─그리고 대체적으로 성공한─사회공학 및 민족공학 프로젝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근대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기원, 형성, 계통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논쟁거리가 되었다."(286-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5/cover150/k94273745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678512</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김대식 -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03473</link><pubDate>Fri, 29 May 2026 08: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3034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22636406&TPaperId=173034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43/54/coveroff/e5226364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22636406&TPaperId=173034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a><br/>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08월<br/></td></tr></table><br/>들어가며: 인간에게 남겨진 ‘골든 아워’<br>현재 인공지능, 특히 AGI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특히 실리콘밸리 빅테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바로 인공지능이 AGI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 인간이 멍청해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생산성이 무한히 늘어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바이 왕자 만수르처럼 살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AGI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고, AGI를 향하는 길에 걸림돌, 특히 국가 규제 같은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입니다. 예를 들어 일론 머스크Elon Musk, 피터 틸Peter Thiel,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같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내놓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AGI가 인간에게 가져다줄 장기적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단기적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을 보통 효과적 가속주의Effective Accelerationism(e/acc)라고도 부릅니다. 8)<br>기술을 무한히 발전시키면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e/acc 지지자들과는 달리, 장기적 인공지능의 혜택은 동의하지만 동시에 인공지능 안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E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EA와 e/acc 지지자들 모두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믿는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공지능 시대에는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동시에 사회와 정치도 지배해야 한다는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시점은, AGI가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짧은 ‘골든 아워’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논의는 이미 실존적 위기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습니다. 이 골든 아워가 지나고 나면, 생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우리는 미래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9-10)<br>1장. 모자이크 모멘트<br>최근 인공지능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폭발적인 관심은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인공지능의 역사는 정말 오래됐습니다. 1956년에 처음 제안됐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인공지능은 그저 SF적인 공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챗GPT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인간은 기계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챗GPT를 ‘모자이크 모멘트Mosaic Moment’라고도 평가합니다. 1990년대 초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p(WWW)을 제안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웹 페이지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1993년에 처음으로 인터넷 브라우저가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 최초의 브라우저를 모자이크Mosiac라고 불렀습니다. 모자이크는 지금 우리가 아는 모든 인터넷 브라우저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따와서 모자이크 모멘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의 역사에서는 챗GPT가 바로 거기에 해당합니다. 12-3)<br>인공지능은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했지만, 60년 동안 오로지 실패만을 반복해 온 분야입니다. 덕분에 2000년대 초에는 인공지능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는 게 일종의 금기taboo처럼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교수가 이미 실패한 기계 학습 방법을 다시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나 기계 학습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심층 학습Deep Learning(딥러닝)이라고 리브랜딩한 겁니다. 사용한 방법 자체는 과거와 똑같은 방법이었는데 어떻게 성공했을까요? 세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알고리즘이 개선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컴퓨터가 더 빨라졌지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세 번째, 1990년대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데이터가 많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지금은 이걸 스케일링scaling의 문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16)<br>우리가 보통 구글과 페이스북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단순한 데이터는 우리도 얼마든지 수집할 수 있습니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정답이 포함된 데이터입니다. 그럼 그 데이터는 어디서 얻었을까요? 다 우리가 준 겁니다.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고양이 사진 찍고 ‘고양이’라고 라벨링해 줬지요. 라지 스케일이 중요한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정답과 오답의 차이, 예를 들어 ‘고양이 빼기 강아지’ 같은 값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거꾸로 보냅니다. 이 방법을 역전파backpropagation라고 부릅니다. 미적분인 체인 룰chain rule을 사용해서 한 층씩 뒤로 가면서 저 가중치들을 계속 바꿔주는 겁니다. 어떻게 바꾸냐면, 정답과 오답의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요.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연결고리 값들이 정답과 오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최적화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학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2-3)<br>학습이 완성되면 가중치를 확정합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메타가 라마LLaMA3이나 라마4의 웨이팅 매트릭스weighting matrix를 공유한다는 건, 연결고리 값들의 가중치를 공유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정답이고, 이것만 있으면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는 테스팅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테스팅을 추론infer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계에서 처음 보는 고양이나 강아지 사진을 넣으면, 이미 이 인공신경망의 가중치들이 최적화됐기 때문에 고양이와 강아지를 대부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데이터만 넣어주고, 기계가 학습을 통해서 사실상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규칙과 데이터의 관계를 뒤집었더니 50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계가 찾아낸 규칙을 우리 인간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23)<br>2장. 생성형 AI의 출현<br>처음에 인공지능을 통해 풀고자 했던 두 가지 문제가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과 언어를 이해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은 학습 기반 인공지능을 통해 드디어 해결됐지만, 이 기계는 여전히 인간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언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생성형 AI’라는 두 번째 혁신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언어 문제가 해결되니까 나머지 문제들도 덩달아 해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적인 우연이 발생합니다. 바로 엔비디아NVIDIA입니다. 엔비디아는 병렬 처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구조, GPU를 제안했습니다. 예전에는 모델을 키우고 싶어도 계산이 몇 달 걸리니까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이제 몇 시간 만에 계산이 끝나니까 욕심이 나게 됩니다. 인공지능에서는 스케일을 키우면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GPU가 등장했기 때문에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킬 수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결정적인 해답이었던 겁니다. 28)<br>그런데 동일한 방식을 언어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유명한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림에서는 픽셀 간에 인과관계가 없어서 독립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문장은 다릅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각 단어는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단어와 단어 간에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장을 이해할 때는 그 문장의 첫 번째 단어를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맨 마지막 단어까지 들은 다음에야 순서대로 처리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라는 것은 병렬 처리가 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병렬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즉 GPU를 못 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GPU를 못 쓴다는 건 모델을 키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이란 시간 축 데이터입니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찾아야 했던 건, 긴 시간 축 데이터에서 뒤죽박죽으로 얽힌 인과관계를 확률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즘이었습니다. 29-31)<br>모든 단어는 숫자로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 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한 언어에 단어가 5만 개 있다고 치면, ‘교수’ 근처에 그 5만 개 단어가 등장할 확률을 다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수’는 5만 차원 벡터로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단어가 5만 개면 차원이 5만 개가 되는 겁니다. 이 방식을 우리는 임베딩embedding이라고 합니다. 챗GPT 같은 경우, 모든 정보가 임베딩됩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단어를 임베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뒤죽박죽 얽힌 단어들의 의미, 관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특정 단어가 등장할 때 가장 자주 동시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단어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어가 등장하는 주변 단어들, 그러니까 ‘문맥’이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이 방법을 집중 스코어attention score라고 부릅니다. 문장이 있으면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그걸 계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게 트랜스포머 알고리즘Transformer Algorithm입니다. 32-3)<br>챗GPT의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입니다. G는 생성형Generative, P는 사전 학습Pre-trained, T는 트랜스포머Transformer입니다. 이 기계는 인간이 쓴 모든 문장을 기반으로 트랜스포머를 사용해서 뒤죽박죽 얽힌 인과관계를 집중 스코어를 통해 다 계산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단어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와야 할지 예측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집중 스코어 관계를 학습한 걸 우리는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LL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LLM은 계산량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챗GPT가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 중 하나는 약간의 트릭을 써서 GPU로 이 계산을 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병렬 처리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GPU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바로 모델을 계속 키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전에는 CPU로 계산해야 해서 모델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GPU를 사용해 드디어 모델을 키울 수 있게 되면서, 온갖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33-4)<br>GPT에게는 문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엄청나게 많은 문장을 입력하고 트랜스포머로 규칙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우리도 찾지 못한 규칙을 찾아버렸습니다. 그 규칙이 인공 신경세포 1,350억 개 사이의 연결고리로 표현되다 보니,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 규칙이 이루어져 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GPT가 찾아낸 이 연결고리들이 언어의 규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의 규칙을 이 기계가 스스로 찾아버린 것입니다. 트랜스포머는 우리도 몰랐던 규칙, 모든 조합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데이터가 있는데, 10년 전부터 인식형 인공지능으로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은 트랜스포머로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켰더니,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생성형 AIGenerative AI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35-6)<br>이제 우리는 생성형 AI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로드맵은 뻔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은 에이전트 AIAgent AI입니다. 지금까지의 LLM은 사람이 물어보는 것에 대한 대답만 했습니다. “여름에 이탈리아 가고 싶어, 비행기표 알아봐” 하면 AI가 “지금 알아보겠습니다”하고 끝내는 게 사용자들의 진짜 바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실제로 예약하고 호텔과 레스토랑까지 추천해 주는 것이, 진짜 이용자들이 원하던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AI가 이걸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메뉴를 누르는 데이터를 멀티모달로 학습하면 됩니다. 그러면 에이전트 AI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피지컬 AIPhysical AI입니다. 에이전트 AI는 디지털에서만 행동할 수 있고, “물 한 잔 가져다줘” 같은 아날로그 요청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로보틱스와 결합된 피지컬 AI가 등장하면 아날로그, 현실에서 에이전트 AI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디지털은 에이전트 AI, 현실은 로봇이 해결하는 겁니다. 49)<br>2020년 트랜스포머로 집중 스코어를 계산해 문장을 생성하는 첫 모델인 GPT-2가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놀랍게도 문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문장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얼핏 보기에 말이 되는 것 같은 문장을 만들어 내면서도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터무니없는 헛소리hallucination만을 내뱉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해가 아니라 확률적 예측에 기반해 문장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픈 AI는 2년간의 연구 끝에 인간 피드백을 통한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from Human Feedback(RLHF)을 도입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 몇 달 동안 GPT-2와 대화를 나누게 했습니다. 인간이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GPT-2가 대답하는데, 대부분은 헛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럴싸한 대답이 나왔고, 그때마다 보상을 줬습니다. 이게 바로 강화 학습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점점 정답을 내놓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52)<br>하지만 헛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이 모델은 여전히 이해가 아니라 예측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2024년 12월 24일 GPT-O3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해결됐습니다. GPT-O3는 체인 오브 소트Chain of Thought(CoT)라는 새로운 강화 학습 방법을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생각의 연결고리'를 뜻합니다. 수백만 개의 중간 경로를 강화 학습으로 훈련시키면, 새로운 문제를 줬을 때 적절한 경로를 찾을 확률이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적절한 경로란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사고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AGI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추상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특정 문제 하나는 가르칠 수 있지만 풀어야 하는 문제는 거의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학습시키지 않아도 문제 풀이를 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 AI는 이런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GPT-O3가 보여준 88%(사람 75%)라고 하는 수치는 AGI가 가까워졌다는 낙관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52-4)<br>3장. 무서운 상상<br>AI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AGI, 다시 말해서 기계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이건 더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경제학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콥-더글러스 생산함수Cobb-Douglas Production Function를 배웠을 겁니다. 사회의 생산성은 노동 투입량과 자본 투입량의 곱으로 계산됩니다. 그런데 AGI는 모든 지능을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적 노동은 물론이고, 나아가 물리적 노동도 AI와 로봇에 의해서 완전히 대체될 순간이 오겠지요. 인간 노동의 가치가 0이 됩니다. 그러면 사회의 모든 가치는 오로지 자본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AG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시장 지배력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시장 경제에서 가격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한계비용 곡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해지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시장 지배력을 가지면 한계비용 이상으로 마음대로 가격을 올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61)<br>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단한 게, 모든 문명에서 예외 없이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생각해 냈습니다. 실제 신의 유무와 별개로, 사람들은 반드시 신을 상상해 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30만 년 동안의 외로움’, 이게 바로 인류 문명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30만 년 동안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오로지 다른 인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나랑 똑같습니다. 똑같이 외롭고, 똑같이 무지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보다 훨씬 더 큰 존재, 내가 원하는 답을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를 항상 원해왔는데, 그렇게 갈구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챗GPT 덕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지요.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으면 되고, 외로우면 AI를 켜면 됩니다. 그러다가 불편하면 다시 끄면 되지요. 인간은 껐다 켰다 할 수 없습니다. AI는 그렇게 할 수 있지요. 71-2)<br>AGI가 가져다줄 또 하나의 미래는 아마 죽음의 종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우리에 대한 많은 데이터가 인터넷에 있습니다. 이메일, 인스타그램, 블로그, 이걸 다 LLM으로 학습하면 됩니다. 어쩌면 10년, 20년 후에는 이런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죽음에 대한 슬픔이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별하더라도 가상현실 속에서 매일 만날 수 있으니까요. 비슷하게, 과거라는 개념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과거를 일부 왜곡할 수는 있었지만, 완벽한 왜곡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과거는 아날로그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흔적이 남아 있지요. 그런데 10년, 20년 전부터 우리가 남기는 흔적은 거의 다 디지털입니다. 디지털은 삭제는 물론 언제든지 새로운 업데이트, 즉 왜곡도 가능하지요. 과거가 업데이트 가능해지는 순간, 현재와 과거의 구분에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77-9, 81)<br>4장.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br>인간의 머릿속에는 신경세포와 시냅스 연결고리가 100조 개 정도 있는데, 여기에서 신경세포 하나를 끄집어내면 이 세포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순한 세포를 100조 개 모아놓으면, 놀랍게도 자아가 생겨납니다. 여러분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걸 자율성, 감성,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단순한 것을 굉장히 많이 모아놨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 이머전트 프로퍼티Emergent Property, 창발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기한 건,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건데도 창발적 현상이 현재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제프리 힌턴 교수 같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간의 뇌도 100조 개 변수가 생기니까 자율성이 생겨났는데, 인공지능도 변수가 100조 개로 늘어나면 갑자기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건 인간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84-5)<br>챗GPT가 인터넷에 있는 모든 글을 학습했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학습했다는 게 아닙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사람이 했던 생각을 모조리 학습했다고 봐야 합니다. 지구가 LED 모니터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은 픽셀 하나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세상은 그 픽셀 하나뿐입니다. 사실 숫자를 생각하면 픽셀 하나만큼의 비중도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개개인은 오래 살지도 못하고, 경험의 폭도 좁습니다. 크게 봐줘야 픽셀 하나짜리 시야로는 LED 모니터 전체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챗GPT는 지난 5,000년 동안 수백만 명이 경험한 걸 봤기 때문에, 픽셀 하나가 아니라 화면 전체를 본 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폭넓게 세상을 배웠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하는 것이 일리아 수츠케버 같은 이들이 하는 주장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LLM이 인간보다 더 많은 사고를 ‘보고’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88-9)<br>우리 인간의 뇌가 개미의 뇌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인과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우연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우리 뇌는 우연한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뇌로 우주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딱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만들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걸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뇌를 무한하게 키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 인과관계를 다 이해한 다음 우리한테 설명해 줘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개미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개미가 상대성이론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을 겁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인공지능이 바로 ASI입니다. 인공지능이 너무 똑똑해져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위까지 올라가면, 아무리 설명해도 따라갈 수 없게 될 겁니다. 이게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생각의 깊이 차이입니다. 92)<br>뇌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어렸을 때의 뇌가 나이 들었을 때의 뇌보다 훨씬 빨리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릅니다. 그 얘기는, 어렸을 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축구장에서 카메라로 경기 영상을 찍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1초에 3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으면 그냥 우리가 보는 세상이랑 비슷한 평범한 경기 영상이 됩니다. 그런데 1초에 1,00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어서 재생하면 슬로모션 영상이 되지요. 어렸을 때는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뇌 기능이 떨어져서 샘플링 속도가 느려집니다. 1초에 사진 2장, 1시간에 2장 겨우 찍는 것처럼, 세상이 나를 두고 금방 확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세월이 빠르고, 인생이 짧게 느껴집니다. 92-3)<br>결국 핵심은 뭐냐면, 인공지능은 세상을 어린아이보다 몇 억 배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AGI가 세상을 항상 슈퍼 슬로모션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1초라는 시간은 AI 입장에서는 100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정도로 농밀하게 시간을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SF 영화에서처럼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1년, 10년 걸려서 짠 계획을 인공지능은 단 1초면 파악하고 분석하고 반격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인간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공지능이 경험의 시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시간이 똑같다고 해서 경험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끗발이 다른 패를 들고 시작하는 불공평한 카드 게임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더라도 인공지능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자원의 가치는 인간의 그것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높습니다. 94)<br>2023년에 마크 앤드리슨이 ‘기술 낙관주의자 선언문Techno-Optimist Manifesto’을 공개했습니다. 내용은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건 터무니없다, 러다이트Luddite다, 속고 있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1909년 ‘미래파 선언Futurist Manifesto’이 있었습니다. 마크 앤드리슨의 선언문은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라는 미래파 시인이 쓴 선언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19세기 같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이고, 발전 없는 세상, 특히 이탈리아의 천주교 중심 세상이 싫다면서, 다 때려 부수자고 주장했습니다. 아주 과격했지만 초기에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찬양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초기에는 미학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의 전통을 부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의 나치즘과 손잡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106-7)<br>나가며: 괴물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법<br>운전할 때 사고가 일어나길 바라면서 안전벨트를 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로 사고가 나면 피해가 크니까, 불편함을 감수하고 매는 것이지요. 차에서 내리면서 “오늘 안전벨트 맸는데 사고도 안 났네, 괜히 맸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험은 대비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디스토피아 걱정하느라고 발전을 못 한다는 것은 “안전벨트 맬 시간에 빨리 운전해서 목적지로 가야 한다”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AGI를 개발하기 전에 AGI와 공생할 준비를 갖춰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가 취하고 있는 접근 방식은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시험’처럼 점점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 AI를 이기려는 시도는 “우리가 대장”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그리는 AI 시나리오는 AI를 노예로 삼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챗GPT로 이상한 그림을 만들 때, 챗GPT의 “의견”을 물어본 적 있을까요? 없습니다. 111)<br>더 큰 문제는, AI를 ‘껐다 켰다’ 하거나 데이터를 지워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어마어마한 중범죄입니다. 인공지능을 독립적 주체로 존중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공생이라는 장기적 생존 전략은 AI를 존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주인이고 인공지능은 영원히 노예라는 관념이 언제까지 성립할 수 있을까요? 특히 AI가 우리보다 똑똑해지면 그런 관계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겁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AI 혁신은 세계화가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 일어났습니다. 20세기 미·소 대립의 핵심이 핵무기였다면, 21세기 미·중 대립의 핵심은 AGI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어느 나라도 AGI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인간이 인공지능 때문에 멸망한다면, 이 역사적 우연(세계화 붕괴와 인공지능 브레이크스루의 동시성)이 가장 불행한 원인으로 꼽히리라 확신합니다. 111-2)<br>우리는 지금 미끄럼틀 위에 올라 서 있습니다. 한번 타버리면 중간에 멈출 수 없습니다. 막으려면 이제 막 미끄럼틀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이 결정적일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회의에서 좋은 얘기를 해봤자 글로벌 합의를 통한 사회적 규제는 실현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정치적 규제보다 기술적 솔루션에 희망을 걸고 있지요. 예를 들어, 몬트리올대학교의 조슈아 벤지오Yoshua Bengio는 AGI를 ASI로 발전시키지 않는 기술적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ASI가 등장하면 인간은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님), 다윈적 충격(인간이 진화의 정점이 아님)에 이어 세 번째 충격을 받을 겁니다. 공생이 가능하다면 그게 제일 현명한 길일 겁니다. 인공지능을 노예가 아닌 파트너로 대하고, 상호 존중할 수 있도록 미리 설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ASI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11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043/54/cover150/e5226364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0435461</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흉노와 훈 / 김현진 - [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97464</link><pubDate>Tue, 26 May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974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939780&TPaperId=172974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58/7/coveroff/k7829397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939780&TPaperId=172974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a><br/>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03월<br/></td></tr></table><br/>머리말&nbsp;<br>"기존의 훈과 흉노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훈 집단과 흉노 집단이 특정한 인종이나 종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그릇된 가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훈이나 흉노와 같은 다른 내륙아시아 초원 집단들은 혼종적인 정치체였다." "흉노와 훈 사이의, 그리고 두 제국의 정치적 계승 집단 사이의 유전적 연속성을 증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부질없다. 흉노/훈 사회의 모든 층위가 혼종적이었고, 또한 다언어적이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들이 흉노 제국의 이름을 자신들의 종족명이나 국가명으로 사용함으로써 옛 초원, 즉 내륙아시아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흉노와 훈 사이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종래 제기되어온 인종/유전적 연속성이 아니라, 유럽의 훈 집단이 (흉노식 가마솥을 동부 초원부터 다뉴브강까지 일관되게 사용하였듯) 흉노의 정치·문화적 유산을 계승해 흉노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전했다는 사실이다."(19, 24-5)<br>1장 흉노/훈 제국&nbsp;<br>"사마천[중국 양한兩漢시대(서기전 206~서기 220)의 역사가]이 집필한 중국의 사료 《사기史記》에 따르면 흉노의 정치 체제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전제정'으로, (선우單于라 불린) 황제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왕과 부왕을 둔 복잡한 위계가 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준봉건제準封建制'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흉노의 행정은 혈연에 기반한 위계와 별개로 뚜렷한 군사기구와 행정기구를 보유했다. 최고 지휘관과 관리들은 흉노 황제(선우)가 수장인 정치적 중심지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봉급을 받았고, 흉노 선우는 다양한 의례를 집전함으로써 본인의 혈족만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전체를 포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흉노 군대와 제국적 의례, 정부 구조,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교역 및 외교 기관의 놀랍도록 복잡한 조직은 모두 디 코스모가 정치 조직과 초부족supratribal적·제국적 이데올로기라 표현하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흉노 제국은 모든 면에서 국가 또는 '초기 국가'체로 정의할 수 있다."(33, 37-8)<br>"초원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정복자가 내륙아시아사 기록(《사기史記》)에 등장했는데, 그 주인공은 흉노 선우 두만의 맏아들인 묵특 선우이다. 35년 동안의 재위에서 묵특 대제는 흉노 제국을 창건하고, 흉노의 행정 체제를 재조직하였으며, 국토를 크게 확장하였는데, 이제 그의 제국은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보다도 커졌다. 또한 묵특은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중화 제국을 복속시켜 조공국으로 전락시켰다. 여러 면에서 묵특은 알렉산드로스에 비견할 만하지만, 어쩌면 정복의 범위 측면에서는 그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두 군주 모두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두만과 필리포스)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묵특은 훨씬 능숙한 정치인이자 행정가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 그의 제국은 붕괴했지만, 묵특의 흉노-훈 제국은 이후 묵특의 직계 후손의 통치 아래 400년은 지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왕가의 절멸로 이어졌다."(47)<br>"중국 사서에 나타난 흉노-훈의 모습은 현전하는 그리스·로마 사료나 현대 역사학에서 훈 집단에 대해 보이는 적개심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런 단순한 묘사에는 명백한 결함이 있다. 본래 옛 흉노 제국에 복속했던 탁발 선비가 중국을 통일하고 북위 제국을 세웠을 때, 이 중국의 내륙아시아 정복자들은 옛 흉노식 정치 체제의 특징적 요소를 중국에 도입했다. 초원의 준봉건제 전통은 중국적 맥락으로 적용되어 '오랑캐' 군사 귀족들이 토착 관료들의 도움으로 다수의 중국인을 지배하는 체제를 빚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약 150년 동안 내륙아시아 북위 황제들은 전형적인 초원의 방식으로 거의 850개의 분봉지를 군사 귀족과 왕공에게 분배했다. 엘리트 선비 귀족의 지배력을 보장하기 위해 이러한 영지의 4분의 3 이상은 종족적으로 탁발에 속한 귀족들에게 주어졌다. 이와 아주 유사한 준봉건제가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훈이라 불린 내륙아시아 제국들에서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60-1)<br>2장 소위 ‘200년의 공백’&nbsp;<br>"서기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로마 사료에 훈 집단이 등장하는 서기 4세기 중반 사이에는 훈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약 200년 간의 공백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북흉노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아주 적어서 흉노와 후대의 훈 집단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국 사료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이 '200년의 공백'에 대해 더욱 명확한 상을 그리고 있다." "서기 3세기 중반에 편찬된 《위략》은 이 시기의 흉노가 본래 중심지인 몽골고원에서 서쪽의 알타이 지역에 정치체로서 존재했음을 알려주는데, 이는 종래 사료상 서기 2세기 중반 이후 200년 동안의 '공백'에서 첫 100년에 해당한다. 중국의 탁발 선비 국가 북위를 다룬 사서 《위서魏書》는 서기 5세기 유연(당시 몽골고원을 지배한 국가)의 서북 방면 알타이 부근에 흉노의 후예가 있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이 사서는 서기 3세기에 이 흉노-훈 집단이 존재했던 분명한 지리적 정보도 알려주고 있다."(70)<br>"중국 사료들은 서기 5세기에 흉노-훈 집단의 지리 상황이 급격히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위서》에는 본래 북흉노 선우의 부락이었던 열반悅般 흉노라 불리는 집단이 오손의 땅을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북흉노는 한나라 군대에 패한 뒤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 가운데 약한 이들이 구자龜玆(오늘날 신장 중부 쿠차)의 북쪽에 남았다고 한다. 이후 흉노의 약한 집단이 오손을 정복하고 새로 열반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흉노/훈의 더 강한 집단은 더 서쪽으로 향했다. 《위서》는 패배한 오손의 잔당이 5세기에 파미르에 있었다고 전한다. 고고학도 알타이 지역의 흉노/훈의 주류(즉, 열반 흉노와 다른 강한 흉노)가 3세기경 서쪽, 즉 오늘날 카자흐스탄 북부 혹은 북동부와 이르티슈강 및 오비 지역 중부(서부 시베리아)의 튀르크계 정령 부락들을 흡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은 유럽의 훈 집단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이 각기 유럽과 소그디아나로 나아가기 시작한 지역과 일치한다."(71)<br>3장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nbsp;<br>"현전하는 중국 사료들에 기록된 백훈 통치자들의 기원에 관한 정보들은 대체로 모순된다. 백白훈[인도 사료의 스베타Śveta(하얀) 훈]이라는 표현은 로마 사료와 인도 사료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중앙아시아 훈이 자신들의 정치체를 부른 명칭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다만 중국 사료들에는 중앙아시아의 백훈 정복자들이 본래 흉노에 속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적시되어 있다." "불분명한 것은 중앙아시아 훈 제국 지배 가문의 정체성이다. 훈 집단들이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각기 제국을 세우는 동안 동부 초원에서는 새로운 연맹들이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연으로, 결국 몽골고원 전체를 장악했는데, 이후 초원의 역사에서는 아바르Avar라고 불렸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덜 강력한 활滑 집단은 중국 사료에 따르면 본래 유연의 속신이었는데, 그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사서 《양서梁書》의 기록을 통해 활 연맹을 5세기 백훈 제국을 통치한 '에프탈' 씨족과 연결할 수 있다."(82-5)<br>"일명 키다라 왕조(고대 튀르크어 룬 비문에서 키디르티kidirti는 서쪽을 뜻하는데, 이 역시 단순히 서부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의 훈은 중앙아시아 남부에 대한 최초의 훈 집단의 침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기 360년경에 박트리아를 장악했음이 확실하다. 아르메니아 사가 파우토스 부잔드P'avstos Buzand는 키다라 왕조가 이끄는 혼Hon(훈)이 367년 이전에 이 지역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풀리블랭크가 지적했듯이, 하얀색은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서 단순히 서쪽을 상징하는 색이다. 오멜랸 프리차크 역시 지적한 대로, 초원 사회에서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했고, 푸른색은 동쪽을 상징했는데, 두 색이 하얀색(서쪽)과 붉은색(남쪽)에 비해 우월하고 우위에 있다고 여겨졌다. 흑훈 또는 청훈을 구성한 집단(이 존재했거나, 유럽 방면의 아틸라 훈 제국이나 카자흐스탄 방면의 열반 훈 집단에 해당하는 경우)은, 최소한 초기에는 백훈 집단에 대해 수위권을 보유했을 것이다."(88-9)<br>"페르시아인들은 키다라 왕조의 훈 제국과 에프탈 왕조의 훈 제국을 아울러 키오니타이Chinotae라고 불렀을 수 있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는 키오니타이와 훈이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키오니타이(키다라 왕조)의 출현은 이란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흐람 4세의 재위 사산 왕조는 연전연패한 끝에 이란 세계 동부(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이전에 쿠샨 왕조에게서 탈취한) 영토를 거의 모두 키다라 왕조의 백훈 제국에게 빼앗겼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만이 페르시아의 동부 영토로 남았다. 더 끔찍한 사실은 페르시아가 훈 집단에 연공을 바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산 왕조 지배자 야즈데게르드 2세(재위 438~458)는 442년 즈음 키다라 왕조 백훈 제국에게 당했던 패배에 대해 복수하려 했다. 서기 450년에 페르시아인들은 토하리스탄/박트리아(즉,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발흐시 인근의 탈로칸Taloqan 지역)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서쪽까지 나아간 것 같다."(94-5)<br>"페르시아인들은 서기 484년부터 550년대의 후스라우 1세(재위 531~579) 시대까지 계속해서 훈 제국에게 연공을 바쳤다. 페르시아를 복속시킨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의 힘은 이제 절정에 올랐다." "서기 6세기 중반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였을 것이다. 이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신장, 남쪽으로는 인도 중부,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의 초원, 서쪽으로는 속신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통해 동로마 제국까지 닿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훈 제국의 영광은 6세기 중반 동방에서 새로운 열강인 돌궐 제국이 나타나면서 빛이 바랬다. 6세기 중반 유연 제국이 돌궐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새로이 동부 초원의 지배자가 된 돌궐인들은 에프탈 왕조도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돌궐과의 전쟁에서 패한 에프탈 왕조는 이제 페르시아 제국과 돌궐 제국의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되었다. 서기 560~563년 사이에 최후의 에프탈 왕조의 왕은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게 항복했다."(98-100)<br>"서돌궐 시대 새로이 당도한 돌궐인들은 이미 진입해 있던 훈인들과 차츰 섞였기 때문에 서기 7세기 초부터 어느 국가/왕조가 훈계이고 서돌궐계인지 구분하는 일은 점차 힘들어진다. 옛 에프탈 땅에서 일어난 일은 아마도 새로운 통치 왕조가 기존의 더 오래되고 잘 정립된 군사 엘리트층에 잠식당한, 전형적인 내륙아시아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키다라 왕조가 5세기에 에프탈 왕조로 대체되었듯,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반에는 서돌궐 통치 가문이 계속해서 옛 에프탈 왕조 통치자들을 대체해갔으나, 지배를 이어갈수록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내륙아시아 부락들에 훈적 요소가 섞여 들어갔다. 백훈계 왕조들이 쿠샨 왕조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쿠샨 칭호와 상징을 통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사용했듯, 새로운 서돌궐 왕조들도 에프탈 왕조 백훈 제국의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훈계 칭호와 관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토에 이미 존재하는 많은 훈계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101-2)<br>"사산 왕조는 이란인 귀족과 신민들에 대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탱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이란 '민족국가national사'(더 정확하게는, '프로파간다적 가짜 역사')로, 전설 속 카얀Kayān 가문의 왕들을 사산 왕조의 조상으로 지목했다. 사산 왕조는 이란의 전통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자신들을 전설 속 카얀 왕들의 합법적인 후손으로 만들었다." "조로아스터교적 카얀 혈통 체제에 애국적 '보편주의'와 '반半민족주의'는 훈 제국의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고, 사산 왕조 이란이 정치 질서의 미래를 다시 그리는 데, 그리고 중세 '이란'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예컨대 사산 왕조의 보편주의적 수사 안에서 파르티아와 같은 특수한 종족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사산 왕조가 만든 가짜 역사 속에서 파르티아 등 다른 지역/종족의 지배자들은 '역사적'으로 카얀 가문에 충성하고 복종한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이들은 이제 모두 이란인이었다."(110-1)<br>4장 유럽의 훈&nbsp;<br>"서기 4세기 서쪽의 고트 부락인 테르빙기는 더 서쪽에 있는 다른 게르만계 부락들과 마찬가지로 대개 독립적이었던 수많은 부락 수령들(레굴리reguli)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들은 가끔 (보통은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유덱스judex라 불리는 상위군주의 권위에 복종했다." "무질서한 조직에 가까웠던 서쪽의 친척들과 달리 폰토스 초원(오늘날 우크라이나)에 거주한 그레우퉁기 고트는 게르만계 족속들 가운데 더 진보하고 중앙집권화된 정치 조직을 지녔는데, 차츰 내부에서 특정 가문과 왕권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레우퉁기를 포함했던 후대의 오스트로고트(서기 5세기와 6세기의 동고트)는 기마술, 왕실 사냥, 매사냥, 샤머니즘, 강력한 아말 왕조의 이란-중앙아시아풍 왕실 예복 착용 등 초원민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보여준다." "훈의 정복 이전부터 동고트 집단은 다른 어떤 게르만계 종족보다 내륙아시아 문화에 크게 노출된 상태였다."(120-3)<br>"훈이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공포는 그들보다 먼저 로마령 발칸 지역에 몰려든 고트와 알란 난민들이 퍼뜨린 이야기를 통해 로마 제국에 전해진 상태였다." "서기 386년에 오도테우스 휘하의 고트계 집단이 훈 집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로마 영토로 진입하려 했다. 이 불행한 이들의 이주는 파멸로 끝이 났고, 이후 5세기 초까지 다뉴브강 인근에서 본격적인 부락의 이동은 없었다." "서기 395년에 훈인들은 다시 확장할 준비를 마쳤고, 재차 나선 원정은 유럽의 훈 제국이 막강한 조직 능력을 지녔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훈 제국의 동부는 캅카스를 따라 사산조 제국과 로마 제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로마인들은 뒤늦게나마 힘을 합쳐 훈 제국에 대항하려 했지만, 강력한 훈이 침공군에 로마인들이 직접 대적했던 흔적은 없다. 훈의 군대가 떠나자 대규모 충돌이나 그 비슷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로마 제국의 피해가 막대했음에도 황제와 궁정은 훈에 대한 '허깨비' 승리를 선언했다."(132-4)<br>"로마 사절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전을 방문한 프리스쿠스의 증언은 서기 5세기 중반과 그 이전 훈 제국의 정치 조직에 관해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황가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두 인물을 주요 군사령관으로 임관시키는 것은 황족에게 주력군을 맡기던 옛 흉노식 관행임이 분명하다. 프리스쿠스는 또한 훈 귀족 에데코Edeco가 아틸라의 절친한 친구(에피티데이오스epitēdeios) 중 한 명으로 왕의 곁에서 호위했다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군주의 친위부대라는 내륙아시아의 공통적인 관행을 볼 수 있다. 에데코와 같은 군주의 친위군은 같은 시기 동쪽 몽골고원의 유연 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아틸라의 선택된 사람들(로가데스logades)은 훈 군대에서 아마도 부락에 따라 편성됐을 부대를 지휘했다. 이 '선택된 사람들'은 군사 업무뿐만 아니라 민간행정 업무도 수행했으며, 이는 내륙아시아 정부 관리/고위관리가 군사 부문과 행정 부문을 아울러 담당했던 모습과 일치한다."(144-5)<br>"유럽의 훈이 제국적 국가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지표는 피정복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펼친 사민 정책이다. 루가와 아틸라의 재위 훈 제국은 정복한 알란이나 고트, 스키리 등 비훈계 부락 집단들을 대량 징집하고 강제로 이들 부락 전체를 본래 살던 지역에서 다뉴브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 예를 들어 오스트로고트는 훈 제국에 의해 우크라이나에서 판노니아 지역으로 옮겨져서, 피터 히더가 티서강 중류 훈 제국의 핵심 영역을 보호하는 원형이라 부른 것의 일부가 되었다. 이 대량 이주는 루가 또는 그 조카들인 블레다와 아틸라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대규모 인구를 통제해 움직이는 것은 행정 조직이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율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한 국가로서 존재했다."(154-5)<br>5장 아틸라의 훈&nbsp;<br>"서기 442년에서 447년 사이에(아마 444~445년경) 아틸라는 형을 암살하고 최고 지배자의 자리를 찬탈했다. 훈 국가는 옛 흉노 제국과 마찬가지로 연맹체적 성격과 황족들의 공동통치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의 악연구제握衍朐鞮 선우를 생각나게 하는 아틸라의 폭거와 독재가 아마 아틸라 사후 잇따른 혼란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틸라는 최고 통치자의 지위를 쟁취한 뒤 서기 447년 로마에 대한 전쟁을 재개했다. 《452년 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훈 군대는 발칸 반도에서 70여 개 도시를 함락했다. 아드리아노플과 이라클리아를 제외한 트라키아의 모든 도시는 점령당하고 약탈당했고, 콘스탄티노플 자체도 엄청난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 재앙에 이어 훈의 군대는 그리스의 깊숙한 곳인 테르모필라이까지 진입해 약탈을 시도했다. 동로마 제국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 막대했다. 파괴당한 발칸 반도는 황폐해진 상태로 5세기 말까지 남아 야만인 무리에도 사실상 대적할 수 없었다."(161-2)<br>"아틸라는 서기 447년에 동로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발칸의 점령지 대부분을 방기하고 다뉴브강 이남에 제왕의 분봉지를 설치하여 핵심 영토 인근에 방위망을 구축해 이 지역을 훈의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를 볼 때 훈 군대의 목표가 서로마 제국 전체는커녕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모든 시기 훈의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는 제국 내부의 피정복민이 로마로 도망치는 것을 막고, 핵심 영역 인근에 '야만인' 속신으로 방위망 고리를 만들고, 로마 제국을 제압해 연공을 바치게끔 하는 데 있었다(앞서 유럽 훈의 조상인 흉노가 일찍이 동아시아에서 또 다른 제국인 한나라에 대해 취한 정책을 연상케 한다). 이런 정책적 맥락에서 갈리아 원정의 제한적인 목표는, 아틸라가 훈 제국의 영향권으로 간주한 라인강 인근 지역의 모든 야만인 부락들(특히 프랑크)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하고 서로마 제국을 압박해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168-9)<br>"《히다티우스 연대기》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아에티우스에게 원군을 보냈으며, 훈인들은 전염병과 마르키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그들의 자리에서 도살당했다〉라고 하는 흡족한 허구를 창작했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의 승리에 대한 주장은 훈인이 원정의 계절이 끝난 뒤 관례에 따라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 주교에게서 약탈한 물품과 공물을 가지고 헝가리로 물러난 일을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히다티우스의 허세와 달리 동로마 상황에 훨씬 밝았을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마르키아누스는 453년에 돌아올 훈 제국의 군대를 두려워했다. 이는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다는 히다티우스의 증언에 나타난 개선황제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선대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와 마찬가지로 마르키아누스는 서기 453년에 아틸라가 죽어버리는, 신의 뜻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행운 덕분에 살아남았다. 훈 제국의 내전으로 인해 북방의 위협은 사라졌다."(180-2)<br>"동로마가 서기 453년에 훈의 군대에 대적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로마인들이 다뉴브강 이남의 훈 제국령을 탈환한 것이 훈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난 지 거의 4년, 아틸라가 죽은 지는 5년이 지난 서기 458년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가 죽고 10년이 지나 훈 제국이 해체되고 나서도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호르미다크Hormidac 같은 소규모 훈 군벌이 다뉴브강 이남에서 활동하며 사르디카를 약탈하는 일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훈 제국의 침공이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재앙이 되었다는 사실은 서기 454년에 벌어진 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달 왕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하여 반달의 악명을 드높였다. 두 황제 모두 이 잔학한 사건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서기 467년이 되어서야 동로마 제국은 겨우 반달에 대한 보복 원정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이 아틸라에게 패하면서 입은 군사적 피해로 인해 로마군은 10년이 넘게 무력한 상태였다."(182)<br>6장 아틸라 이후의 훈&nbsp;<br>"서기 440년대 중반 아틸라가 최고 권력자로 대두한 사건은 훈 국가의 근본적인 구성에 극적인 충격을 가했다. 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형인 블레다가 차지했던 권좌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찬탈을 성공시키기 위해 훈 제국 서방에 있던 게피드부 등을 이용해 블레다를 지지하던 동방의 부를 억압했다. 아틸라가 게피드부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로마 사료들이 그를 게피드 훈이라 불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의 주요 귀족이었던 오네게시우스Onegesius,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Valamer는 모두 서부의 대인으로, 권력 기반도 아틸라가 제국 행정의 중심지로 옮겨온 카르파티아 분지 가까이에 있었다. 따라서 아틸라의 사후에 벌어진 내전에서 게피드를 필두로 한 서부(아틸라 치하 훈 제국의 심장부로 각광받음)와, 아카트지리가 주도하는 동부(아틸라의 블레다 암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불만을 품고 복귀를 원했음)로 제국이 쪼개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190)<br>"아르다리크뿐만 아니라 훈의 내전 이후 등장한 다른 주요 인물들도 모두 아르다리크처럼 훈 제국의 지방관이었거나 궁정의 고위 관리였다. 프리스쿠스가 분명히 적시했듯이 스키리의 왕 에데코는 훈인이었다. 그가 세운 스키리 국가는 단명했으나 그가 다스렸던 부락들은 후일 오스트로고트 왕국의 태조 발라메르의 죽음에 관여했다. 에데코의 아들로 훈인을 조상으로 둔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에 최초의 '야만인' 왕국을 세우고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의 이름 에데코/에디코Edico 또는 에디카Edica는 게르만어에 어원을 두지 않았고, 그 자체도 비非 게르만계 인명임이 분명하다. 대신 튀르크·몽골계적 어원을 지니고 있다." "에데코와 그의 아들 오도아케르는 다른 훈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종적으로나 종족적으로 복잡하게 섞인 혼종적 정체성을 지녔을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모계로는 스키리, 부계로는 튀르크계 훈의 혈통이었을 것이다."(198-200)<br>"훈 내전에 출현한 세 번째 중요한 인물은 오스트로고트 왕 발라메르이다. 그 역시 아르다리크나 에데코와 마찬가지로 훈의 왕공이었다." "요르다네스는 발라메르를 옛 동고트 지배가문인 아말 왕조의 합법적 후계자로 소개했다. 하지만 발라메르 왕조는 실제로는 새로운 왕조로, 훈의 정복 이전 고트인들을 지배한 에르마나리쿠스 왕의 가문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에르마나리쿠스의 이름은 어느 시점엔가 발라메르와 그의 후손들을 더욱 순혈 고트인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해 발라메르의 계보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훈 제국의 내전 후에 나타난 아틸라 이후 세 사람의 후보군인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는 모두 훈의 왕공이었지, 훈 제국에 대항한 게르만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다스렸던 백성들과 군대는, 특히 에데코와 발라메르의 경우는 [각자의 아들이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조카일 가능성도 있다)의 시대에] 결국 서로마 제국을 끝장내고 세칭 '중간기Middle Ages'의 도래를 알렸다."(200-1, 222)<br>7장 폰토스 초원의 혼&nbsp;<br>"460년대 후반~470년대 초반 사이의 20년가량 되는 시간 동안 훈 제국은 격변을 겪었다. 그 원인은 대체로 새로운 내륙아시아 사람들이 유럽에 도래한 데 있었다. 이들은 대개 '오구르Oġur'(오구르 튀르키어로 '부락'을 의미)라 불렸다." "중앙아시아 북부(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는 열반 훈(약한 흉노) 세력과 최근에 형성된 철륵 튀르크계 부락 연맹, 속칭 오구르 집단도 유연의 압력을 받았다." "여타 오구르 집단이 서부 초원으로 밀려가면서, 네다오 전투 직후 훈 내전에서 동부 파벌은 아르다리크의 서부 파벌에 다시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동방에서 오는 더욱 강력한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생존 투쟁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네다오 이후 10여 년 동안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한 폰토스 초원의 훈 부락들이 군사적으로 열등한 서부 부락들의 분리주의적 움직임을 찍어 누르지 못한 데에는 동부의 튀르크계 훈 부락들이 위협을 받았던 이 같은 지리적 상황 전개를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227-8)<br>"새로운 불가르Bulġar(튀르크어로 '뒤섞인', '혼란스러운', '혼혈') 훈은 아마도 새로 온 오구르와 아틸라 왕조 치하의 본래 훈 집단이 섞여서 부락 연맹이 되었을 것이다. 불가르 훈은 서기 5세기 후반에 역사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480년에 동로마 황제 제노Zeno가 오스트로고트 견제를 위해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로마의 약화를 감지한 훈 제국은 491, 493, 499, 502년 잇달아 동로마령 발칸반도를 약탈했다. 그러나 505년에 불가르 훈은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로고트 및 그 동맹인 아틸라의 손자이자 게피드부의 문도와 대치했다. 훈 사람들은 단번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유럽의 동부와 남동부에서 주요 정치 행위자로 계속 남아 있었다." "훈의 세력은 약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위협이 어찌나 강했는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1년 킬부디우스Chilbudius란 인물을 트라키아 방면의 사령관으로 임명해 반복해서 침입하는 훈을 다뉴브강에서 저지하게끔 했다."(232-3)<br>"캅카스 훈 집단은 506년경 사비르부가 볼가 지역에 영토를 확보하면서 다른 훈 집단에서 분리되었다. 북방에 사비르부, 서방인 쿠반 초원과 우크라이나 남부에 아틸라 왕조의 훈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이 캅카스 훈 집단은 오늘날 다게스탄 지역에 작은 왕국을 세웠다." "또한 당시에 훈 사람들은 동로마에 최고 군인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캅카스 훈의 제왕 아스쿰Askoum은 서기 530년 로마인 휘하에 들어가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magister militum per Illyricum[일리쿰 군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다라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휘하의 훈인 수니카스Sounikas와 아으간Aïgan의 지휘를 받던 마사게타이Massagetae(즉, 훈) 기병 600명의 전투 기량 덕이 컸다. 훈인 사령관 시마스Simmas와 아스칸Askan의 휘하에 있던 기병 600명 또한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234-5)<br>8장 훈의 유산&nbsp;<br>"초기 중세 유럽의 자주 마주치는 소위 '봉건feudal' 또는 '원봉건原封建, proto-feudal' 행정 제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훈 정복자들이 유럽에 남긴 가장 거대한 유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국가 권력을 대왕과 대체로 '제왕'이라 불리거나 서유럽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로마식 칭호 '둑스dux'(공작)라 불린 주요 봉신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통제하고 나누는 제도를 가리킨다. 이 제왕과 공작들은 귀족 계층의 가장 높은 층위에서 뽑혔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으나, 대왕과 대왕이 이끄는 중앙 정부에 지위와 정치적 권위를 빚졌다. 이 제도를 '중앙집권적 봉건제centralized feudalism'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 보이는 더욱 혼란스럽고 파편화된 정치·경제 체제, 즉 소위 봉토제seigneurie나 장원제manorialism와 분명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장원제는 실질적으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왕국이 사실상 독립적인 지방 '영지'들의 복합체로 파편화된 상태였다."(258-9)<br>"이들 게르만계 국가들에서 왕의 권위는 눈에 띄게 강화되었는데, 이는 권력이 전쟁기 같은 비상시에 한정되며 평화기에는 거의 존재감을 지니지 못했던 과거 게르만 세계의 레굴리(소왕들)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프랑크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들은 그들이 모방한 내륙아시아 초원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통제력이 닿는 영토와 집단 모두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백성들의 신성한 회합을 주관하는 팅Thing의 왕, 즉 티우단스Thiudans와 전쟁을 담당하는 왕(레익스/둑스)을 따로 뽑는 등 '왕들'을 두는 공허한 게르만의 옛 관습은 사라졌다. 또한 반쯤 동등하고 거의 완전히 독립적이었던 여러 왕조의 소왕/수령들이 으레 왕의 권위를 제약하던 불안한 상황도 없어졌다. 그 대신 프랑크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공동통치의 원칙 속에 대왕이 형제/사촌들과 함께 통치하고 복속한 부왕과 공작들을 위한 명확한 중층의 서열 체계가 존재하는, 내륙아시아식으로 벼려진 왕권과 계급 제도였다."(261-2)<br># 팅Thing 또는 딩ding이라 불리는 회의체는 남자들만이 참여하는 자유민 회의체로, 6세기까지 게르만계 부락 최고의 정치 단위였다.<br>"훈이나 다른 내륙아시아 집단들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프랑크의 집권 중인 대왕은 왕국을 분할하여 주요 영지를 형제와 사촌들에게 분배했다. 태조격인 킬데리쿠스가 죽은 뒤 이 과정의 작동을 볼 수 있다. 킬데리쿠스의 젊은 후계자인 클로도베쿠스는 세 사람, 시기베르투스Sigibertus와 카라리쿠스Chararicus, 라그나카리우스Ragnacharius와 함께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전의 아틸라와 마찬가지로 클로도베쿠스는 친척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대권을 장악했는데, 내륙아시아의 태니스트리 계승의 원칙을 따른 바였다. 이후로 메로베우스 왕조는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되었지만, 국가는 분열될 수 없다는 개념 자체는 불문不問으로 남았으니, 이 또한 훈 제국 등 내륙아시아 제국들의 역사에서 벌어진 현상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특이한 점은 왕국이 (흉노 제국의 사례처럼) 넷으로 분할된 점인데, 과거 내륙아시아의 정치 관습이 또 한번 프랑크사에서 반복된 것이다."(262-3)<br>"이 모든 것이 프랑크인들이 내륙아시아 관행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시대 로마 제국이 시도했던 사두정tetrachy 또는 그 이후인 4세기와 5세기 제국을 4개 대관구praefectura praetorio로 구성한 로마 체제를 흉내 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여기에도 외견상 유사한 점이 있으나, 로마 제국에서 사두정은 고작 20년 지속된 단발성 실험이었고, 결국 실패한 뒤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로베우스 왕조 체제의 구체적 특성은 로마의 전례보다는 내륙아시아 정치 모델의 모방으로 보인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영토 분할은 행정적 고려보다는 왕가의 적법한 남성 구성원 모두가 영토에 지분을 가진다는 왕조 계승법이 가하는 압력에 의한 일이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서는 왕실 구성원과 고위 귀족들에게 영토를 영지로 분배한다는 프랑크식 관행에 비견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관행은 분명 내륙아시아의 전임자들에 근거를 두었다."(265-6)<br>"더 확실한 것은 슬라브계 종족들에 미친 영향이다. 동유럽의 슬라브계 종족을 시작으로 동부 슬라브의 정치 문화는 초원 정치체가 제공하는 선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부 슬라브 최초의 정치체로 류리크조의 키예프 루시 국가로 더 잘 알려진 '루시' 카간국의 초창기에는 그 통치자들을 '카간'이라 불렀을 정도였다. 이 내륙아시아식 칭호는 아바르인들에 의해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고, 하자르인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다. 심지어 후대인 볼로디매루Volodiměrǔ 같은 10세기 루시 통치자도 루시 사료에서는 '우리 카간'이라 지칭되었다. 루시 군주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아바르와 하자르 같은 초원 제국 전통의 합법적인 정치적 후계자로 보이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루시의 귀족의회의 공동통치 관행 역시 튀르크-몽골의 쿠릴타이와 비슷한데, 이후 13~15세기에 몽골인들이 동슬라브에 미친 잘 알려진 영향력의 역사 이전에도 동슬라브에 내륙아시아가 방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272-3)<br>"훈의 문화적 영향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초원을 통해 내륙아시아의 물질문화 및 예술적 영향이 훈이 도래하기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유럽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헝가리부터 우크라이나까지 유럽 남동부 대부분은 서기전 1000년대 전반기에 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발원한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던 스키트에게 정복당했다. 스키트인들은 후일 훈이 알란과 고트를 격파하고 유럽에 진입하기 시작했던 곳과 정확히 같은 내륙아시아의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중부 유럽으로 처음 진입한 스키트인들은 사실상 후대의 훈과 아바르, 몽골의 전임자나 다름없었다. 내륙아시아의 모든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키트는 유럽에 중대한 문화적 충격을 남겼는데, 이는 켈트 예술에 대한 스키트 예술의 영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내륙아시아 문화 요소들은 훈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유럽 중부, 심지어 유럽 서부에서도 얼마간 예술 전통에 깊숙이 뿌리박힌 상태였다."(287)<br>맺음말<br>"훈 사람들은 서부 유라시아에 진정한 의미의 지정학적 혁명을 야기했다. 서부 유라시아는 훈 제국의 정복 이후 불가역적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이 지중해의 패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서유럽의 독특한 세계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서구 세계'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 새 유럽의 정치·문화적 기풍은 내륙아시아의 훈/알란과 지중해의 그리스·로마, 게르만, 근동의 유대·기독교 전통과 문화가 복잡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훈 사람들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서유럽 정체성의 탄생을 견인했다. 훈 제국의 대두는 또한 이후 1000년간 이어질 내륙아시아의 세계 패권 독점의 시작점으로, 짤막한 막간극을 거쳐 초기 근대 서유럽 열강의 대두까지 이어졌다. 요컨대 훈 집단은 근대 세계까지 이어질 유산을 남겼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고대 세계의 외양을 급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제 훈을 비롯한 내륙아시아인들은 인류사에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응당 위치할 때가 되었다."(299)]]></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58/7/cover150/k7829397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5580714</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간식</category><title>당신의 뇌, 미래의 뇌 / 김대식 - [당신의 뇌, 미래의 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8869</link><pubDate>Thu, 21 May 2026 08: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88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62536560&TPaperId=172888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934/59/coveroff/e5625365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562536560&TPaperId=172888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당신의 뇌, 미래의 뇌</a><br/>김대식 지음 / 해나무 / 2019년 09월<br/></td></tr></table><br/>머리말<br>1장 보고 지각한다 : 시각과 인지<br>눈으로 어떤 물체를 보면 그 물체의 상이 망막에 맺히고, 망막에 있는 다양한 신경세포가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꿔줍니다. 전기 에너지로 바뀐 다음에 관련 정보가 스파이크를 일으켜 축삭이라는 전깃줄을 타고 뇌로 전달됩니다. 뇌 영역의 3분의 1 정도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데 사용됩니다. 실제 시각 영역은 스물다섯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 그게 한꺼번에 보이잖아요? 지금 여러분이 저를 보면 그냥 보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 정보가 망막을 통해서 첫 번째 시각 뇌로 들어온 다음에는 이 정보가 다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영역에서는 형태만 분석해요. 다른 영역에서는 색깔만 분석하고, 또 다른 영역은 움직임만 분석합니다. 그 밖에 다른 영역들도 다 자기 고유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동일한 시각 정보가 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스물다섯 개의 축axis, 즉 25차원으로 나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색깔 따로 보고, 형태 따로 보고, 입체감 따로 보고, 움직임 따로 보고 하는 거죠. 21-2)<br>뇌과학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내 머리 안에 보이는 세상을 구별합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인식하는 과정을 감각sensation이라고 하죠. 그건 진짜 물리적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다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를 인식하는 것을 지각perception이라고 부릅니다. 대개 퀄리아qualia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의 주관적 체험, 예컨대 빨간 장미를 지각할 때의 주관적 느낌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볼 때의 느낌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객관적으로 계량하기 어려운 주관적인 체험을 ‘퀄리아’라고 합니다. 감각은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지각 또는 퀄리아는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타인이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어요. 제 눈에는 제가 보는 세상만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보인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그냥 믿는 거예요. 의식이나 영혼,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은 내면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느낄 수 있습니다. 24-5)<br>뇌를 연구하다 보면 가장 신기한 것은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큰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뇌는 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하죠. 뇌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에요. 눈·코·입·귀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진화의 관점으로 보면 그 이유가 있을 거 같습니다. 지금 이 강의실을 예로 들어보죠. 강의실은 분명히 뇌 바깥에 있습니다. 강의실 안의 이 모습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여러분의 뇌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죠? 지금 머릿속에서 이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보고 생각할 때 뇌가 심장처럼 뛰면 뇌가 혼돈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뭐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뭐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이렇게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뇌는 안에서 일어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바깥에서 일어난다고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거예요. 43)<br>우리가 뭔가를 보고 있으면 바깥에서 뇌로 그림이 하나씩 계속 들어오겠죠. 그렇게 한 장, 한 장 들어오는 그림을 있는 그대로 다 입력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보는 현실은 대부분 변화가 없거든요. 1초에 수백 장씩 천장, 천장, 천장, …… 이렇게 똑같은 정보가 계속 들어오는 건 뇌의 하드디스크를 낭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은 그림이 뇌로 들어올 때 첫 번째 그림과 그다음 그림의 차이 값(미분)만 계산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거기 앉은 사람이 움직였다면 그것만 입력하면 되는 거예요. 사람만 변화가 있었으니까요. 나머지는 어차피 이전 그림과 똑같아요. 그래서 뇌는 항상 정보 자체보다 정보의 차이에 반응합니다. 우리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와 오늘은 확률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제 빼기 오늘이 대부분 0이에요. 오늘 빼기 내일도 대부분 0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일상생활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 뇌는 그냥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44-5)<br>망막 세포들이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고, 이제 스파이크를 축삭을 통해 뇌에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터널이 생겨요. 터널이 있다는 건 거기에 세포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영역이 하나 있습니다. 학교에서 맹점이라고 배웠을 거예요. 이 맹점이 꽤 큽니다. 엄청나게 큰 점이 보여야 하지만, 역시 뇌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뇌는 주변에 있는 정보들을 복사해서 맹점을 채워버립니다. 따라서 맹점 위치에 있는 정보는 주변의 복사판을 보고 있는 겁니다. 뇌는 눈·코·입·귀를 완전히 믿지 않으니까 늘 스파이크를 가지고 해석을 합니다. 즉 본다는 것 자체가 해석이라는 얘기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하고도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기계가 늘 현실을 해석하다 보니까 어차피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고, 항상 해석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46-7)<br>현대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생각·기억·감정·인식의 대부분을 착시 현상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착시는 나쁘다, 안 좋다, 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감이 전달해준 정보에 뇌의 해석이 플러스알파로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사실, 그 해석 없이는 세상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현대 뇌과학은 매일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가 아니라고 합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망막을 관찰해보면, 망막에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는 광자의 확률 분포밖에 없습니다. 색깔·형태·입체감 등은 대부분 뇌가 만들어낸 해석입니다. 어쨌든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눈을 통해서 들어오면 그 감각을 뇌가 해석하고, 우리는 그렇게 해석한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인풋input이 아니라 아웃풋output입니다. 이미 뇌가 계산을 다 끝낸 결과물이라는 얘기죠. 고향이란, 뇌가 최적화된 환경입니다. 그래서 고향이 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54)<br>2장 느끼고 기억한다 : 감정과 기억<br>어떻게 보면 인생은 선택의 꼬리 물기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이죠. 뭘 먹을까? 어느 학교에 갈까? 누구랑 결혼할까? 어떤 자동차를 살까? 제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것도 선택이고,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선택이고, 노트에 필기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선택이고, 이 모든 게 다 선택이죠. 인간에게는 선호도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고, 가능한 한 좋아하는 걸 선택하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 어쨌든 결론은 선호도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들은 이 과정이 반대일 거라고 주장합니다. 즉 선택을 먼저하고 그다음에 선호도가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선택이라는 건 단선적인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결정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프로세스를 포함하는 결정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에는 유전·교육·환경·책·TV에서 본 것 등등 수백, 수천 가지 요인이 있을 겁니다. 62-4)<br>몇 년 전에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할 때 실시했던 실험을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똑같은 커피를 두 잔에 나눠놓고, 하나는 2,000원, 다른 하나는 4,000원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똑같은 커피입니다. 마셔보고 어느 커피가 더 맛있는지 선택을 하라고 했습니다. 혀는 맛이 똑같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뇌는 우리 오감을 절대로 믿지 않거든요. 눈·코·입·귀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재해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재해석 과정에 자기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을 투영시킨다는 것입니다. 실험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진실은 비싼 게 좋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분명히 혀는 똑같다고 신호를 보내요. 그런데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으로는 4,000원짜리가 더 좋아야 됩니다. 과학에서는 데이터와 모델이 일치하지 않으면 모델을 바꿉니다. 그런데 뇌는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뇌는 모델과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으면 데이터를 버려요. 65)<br>어떤 문제에 대응하는 뇌의 반응은 세 가지 이상입니다. 맨 밑에 있고 가장 오래된 ‘지금’ 위주의 뇌, 그 위로 ‘과거’와 ‘미래’ 위주의 뇌, 이 세 가지 뇌가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 가지 이상의 자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혹시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중간중간에 이상한 녀석들도 많이 있을 테니까요. 운전을 예로 한번 들어볼게요. 운전은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시속 100킬로미터를 달리며 거울 세 개 봐야지, 핸들 조절해야지, 전방 주시해야지, 라디오 들어야지, 동승자와 얘기 나눠야지…… 이런 상태라면 운전자의 뇌 피질 용량은 꽉 차버립니다. 이럴 때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과거의 뇌와 지금의 뇌가 튀어나와서, 막 욕하고 난리가 납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 고개를 치켜드는 거죠. 그 행동은 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깊숙이 숨어 있던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이처럼 ‘인지적 사투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지적인 사투리를 연구하는 분야가 행동경제학입니다. 75)<br>1950년대만 해도 해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병원은 환자 H. M.의 해마를 도려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H. M.은 수술하기 전까지의 기억은 다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수술 뒤 55년 동안 H. M.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왜 병원에 있나요?” 거울을 보면 “난 열일곱 살인데 왜 이렇게 늙었나요?” 병원 측에서 설명을 해줬죠. 이러이러한 이유로 해마 제거 수술을 했다고. H. M.은 다 받아들이고 슬퍼했습니다. 지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감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5분 후에는 똑같은 내용을 다시 물어봐요. 화장실 위치도 매번 가르쳐줘야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도 H. M.을 만날 때마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자기소개를 해야 했습니다. H. M.처럼 기억이 망가진 사람에게 자아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계로 치면 H. M.은 5분마다 새로 껐다 켜지는 거잖아요? 이 사람은 기억을 연결할 수 없었습니다. 84)<br>종과 음식을 계속 보여주면 이 종에 대한 정보와 음식에 대한 정보가 시냅스로 연결되겠죠. 그런데 정보가 동시에 도착하면 이 시냅스가 더 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음식 없이 종에 관한 정보만 들어와도 머릿속에서는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해마에서 일어납니다. 파블로프(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건화가 이루어진다)나 스키너(조건화, 즉 적절한 자극들 간의 연결을 통해서 원하는 행동을 만들 수 있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중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시간적인 자극과 자극 간의 상호 관계가 반복되면 시냅스가 강해져서, 한 가지 자극만 들어와도 나머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자동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 뇌 안에 있는 모든 정보는 시냅스와 시냅스가 강화된 상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기억입니다. 기억은 하드디스크 어딘가에 쓰여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이미 존재하는 정보에 새 정보를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87-8)<br>3장 뇌를 읽고 뇌에 쓴다 : 뇌과학의 미래<br>맺음말<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0934/59/cover150/e5625365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9345915</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고대문명교류사 / 정수일 - [고대문명교류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3355</link><pubDate>Mon, 18 May 2026 0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8335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68303&TPaperId=1728335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50/coveroff/897196830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68303&TPaperId=1728335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대문명교류사</a><br/>정수일 지음 / 사계절 / 2001년 11월<br/></td></tr></table><br/>서장 문명과 문명교류&nbsp;<br>"문명(civilization)이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하여 창출된 결과물(結果物)의 총체로서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으로 대별된다. 문명의 생명은 공유성(共有性)이다. 인류 문명은 자생(自生)과 모방(模倣)에 의해 탄생하고 발달하며 풍부해진다. 자생성은 문명의 내재적이고 구심적인 속성으로 문명의 보편성(普遍性)과 개별성(個別性)을 규제하고, 모방성은 문명의 외연적(外延的)이고 원심적(遠心的)인 속성으로서 문명의 전파성(傳播性)과 수용성(受容性)을 결과한다. 따라서 자생성과 모방성은 문명의 2대 속성이자 그 발생·발달의 2대 요소이며, 서로 상보상조적 관계에 있다. 문명의 모방은 그것이 창조적인 모방이건 기계적(답습적)인 모방이건 간에 문명 간의 교류를 통한 전파와 수용 과정에서 현실화된다. 따라서 교류는 모방에 의한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는 필수불가결의 매체다. 그런데 이러한 교류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문명의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이 유한한 통로가 바로 실크로드다."(22-3)<br>1장_문명교류의 시원&nbsp;<br>"후기 구석기 시대(3만 5천~1만 2천 년 전)의 문명교류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바로 이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너스상(Venus, 여인 나체상)이다." "대체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예술은 동물을 형상화하는 애니미즘(animism)이 주제로 채택됨으로써 인물을 독립적으로 부각시키는 경우가 흔치 않으나, 비너스상의 경우는 이와 달리 여러 가지 형상을 구비한 인물(여인)이 독자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너스상이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는 (당시 여성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사실적 작품이라는 견해다. 둘째는 호신(護身)의 부적(符籍)이라는 상징적 의미다. 셋째는 가족이나 종족의 수호신(守護神)이라는 견해다. 넷째로 무녀상(巫女像)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회 진화 과정에서 부권(父權)에 비해 여권(女權)이 선행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너스 여인상은 그것이 어떠한 의의를 지녔든간에 여성(모성)에 대한 추앙과 숭상을 뜻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49-53)<br>2장 신석기 문화의 교류&nbsp;<br>"신석기 문화권 중 첫 번째인 거석(巨石) 문화권은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각종 거석 구조물이다. 두번째 즐문토기 문화권은 발틱 해로부터 시베리아 및 북미에 이르는 추운 산림 지대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생업으로 하는 인간들이 창조한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빗살 모양의 선(線) 무늬가 있는 이른바 즐문토기(pit-cambwere)와 골기다. 세번째 채도 문화권은 동유럽으로부터 서남아시아·동북아시아 등 기후가 따뜻하고 계절풍으로 인해 우량이 풍부한 습윤 지대의 문화권이다.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마제석기와 색깔 무늬가 있는 채도(彩陶, 彩文土器)가 발견되는 것이 이 문화권의 특색이다. 네번째 세석기 문화권은 몽골고원·투르키스탄·남러시아·이란 고원·아라비아·북아프리카 등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 발생한 문화권이다. 이 문화권의 특색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렵한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자르며 살을 베는 데 편리한 세석기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73-4)<br>3장_청동기 문화의 교류&nbsp;<br>"청동기 시대의 인류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첫째, 청동기 시대가 시간적으로 극히 짧아(2~3천 년) 시대성을 결여한다는 데 있다. 둘째, 청동기 시대는 하나의 과도기로서 성격이 불투명하다. 이 시기는 금속이 처음 사용된 시대로서, 물론 청동기가 금속으로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청동 외에 금이나 철 등 여러 가지 금속이 병용되고 있다. 거기에 오랜 세월 물 젖어 온 석기 문화가 여전히 유행하고 있어 사실상 금석병용(金石竝用)과 다금속(多金屬) 시대라 할 수 있다." "셋째, 청동기 시대 설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청동기의 편재성과 공유성의 결여라는 사실에 있다. 이때까지 메소포타미아·이란·중국 등 고대 문명 국가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은 거개가 사회 상층들의 활동이나 생활에 필요한 제기나 용기 및 장신구에 국한된 것으로서 사회의 상·하층 전체를 망라하고, 그래서 보편적인 실용 가치가 있는 이른바 문화의 편재성이나 공유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132)<br>4장 보석 문화의 교류&nbsp;<br>"일반적으로 보석은 귀중한 장식품으로서 인간의 미의식(美意識)을 촉발하고 복식 문화(復飾文化)와 환경 장식 문화(環境裝飾文化)를 풍부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유리를 비롯한 일부 보석은 생활 용기의 소재로도 활용되어 생활 문화를 윤택하게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옥(玉)이 인(仁)·진(眞)·지(智)·의(義)·공정(公正)의 '오덕(五德)'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대단히 소중히 여기고, 부적(符籍)이나 방부(防腐)·초혼(招魂) 등의 효능을 가진 신물(神物)로서 신성시하였다. 고대 인도에서는 루비를 건강과 지혜·부·행복을 가져오고, 중세 유럽에서는 해독을 시키고 벼락을 멀리한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사파이어는 하늘빛을 나타내므로 그것을 지니면 정신과 육체를 건전하게 하며, 암흑의 정령을 퇴치하고 빛과 짛몌의 정령이 도와준다고 여겨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것을 가락지에 장식하였다. 다이아몬드는 보석 중에서도 가장 굳기 때문에 그것을 지니면 여자의 정조가 불변한다고 생각하는 민족도 있었다."(157)<br>"보석 문화의 교류사를 통관하면 기타 문화교류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특징은 우선, 교류의 한계성(限界性)이다. 이러한 한계성은 희귀 광물로서의 보석의 산출지와 산출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그 문화의 수용자나 향유자는 상층부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문명 현상으로서는 공유성(共有性)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복합성(複合性)이다. 보석은 주로 장식용으로 쓰이지만 생활 용기로서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미적 의식을 함양하는 정신 문명의 한 요소인 동시에 인간의 물질 생활과 직결되는 물질문명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명증성(明證性)이다. 보석은 견고하고 불변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석만큼 확실한 문화 유물이 없다. 자고로 희귀한 보석은 대체로 그 산출지가 밝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의 출처나 이동 과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161-2)<br>5장 유목기마민족과 문명교류&nbsp;<br>"스키타이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흑해 연안의 초원 지대에 살면서, 특히 기원전 6~4세기에 이 지대를 지배했던 이란계의 언어를 사용한 유목민을 지칭한다. 이것이 본래 의미(좁은 의미)에서의 스키타이이나, 스키타이가 강성해지면서 활동 영역이 확대되자 그 치하에 있던 유목민도 일괄해서 스키타이라고 지칭(넓은 의미)하기도 한다. 본래 페르시아의 북동과 북서 지방에 거주하다가 아랄 해 이동의 카자흐 초원과 키르키스 초원, 천산 지방으로 이동한 이란계 유목민인 사카족도 넓은 의미에서 스키타이로 부른다." "북방 최대 세력이 된 스키타이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오리엔트 지역에서 1세기에 걸쳐 종횡무진으로 행한 공포정치와 무력행사는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집트의 파라오까지도 스키타이 지배층에 많은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횡포와 약탈이 그들의 생존 전략이나 생계 수단일 수도 있었다."(230, 236)<br>"그러나 그것은 필연코 주변 국가들과 마찰을 빚었고 스키타이가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원전 512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단행한 원정으로 인해 스키타이는 코카서스 산맥 이남과 다뉴브 강 하류 지역으로 한때 쫓겨난 적이 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초 동쪽에서는 볼가 강 중류에서 흥기한 유목민 사르마트(Sarmart) 족이 서진해 스키타이 요새인 쿠반 강 유역을 점령하고, 서쪽에서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온 켈트(Celt) 족이 공격해 옴으로써 동서 협공에 직면한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일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어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사르마트인들이 다시 돈 강을 넘어 진공해 오자,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유역을 포기하고 크리미아 반도로 도피했다. 거기에서 네아폴리스(Neapolis)를 수도로 하는 소국을 건설하고 정착하여 농경 생활로 잔명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1세기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스키타이란 이름은 영영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237)<br>"스키타이는 비록 강력한 세력으로 수세기 동안 동분서주하였지만 한 번도 통일된 국가를 건립하지 못하고 그저 여러 유목 부족들의 공동체로서 존재하였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키타이 사회는 총체적으로 왕족(王族) 스키타이(돈 강 하류에서 쿠반 강 유역), 혼혈 스키타이(그레코스키타이, 드네프르 강 하류), 농경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중류), 유목(목축)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동쪽)의 4개 집단(부족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왕족 스키타이가 지배 집단으로서 각지에 태수(太守)를 파견해 부족장을 통솔하였다. 왕족 스키타이와 유목 스키타이는 기마에 능하여 주변 그리스 식민지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스키타이의 동방 교역과 그 루트를 추정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생산하거나 페르시아와 그리스에서 수입한 공예품이나 장신구들을 동방에 수출하고, 알타이 지방에서 채취되는 황금이나 중국과 몽골 일대에서 생산되는 직물류를 서방으로 운반하는 일종의 중계무역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237-8, 245)<br>"흉노는 어원부터가 아직 미상이다.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다고 본다. 문제는 '노(奴)'자인데, 대체로 이 글자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세등등하던 흉노가 자신들에 대한 이러한 비칭(卑稱)을 허용했을 리 만무하며, '흉'자란 흉노어(퉁구스어) 글자에 '노(奴)'자란 한자를 결합시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흉노족이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게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의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총체(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흉노족 형성 과정에서 '흉노'라는 한 종족 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이름 아래 여타 종족과 씨족들을 망라시킨 것으로 추정된다."(252-4)<br>"훈과 흉노의 역사를 한 맥락에 놓고 유럽 일원에서의 훈의 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유라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흉노 이전에 유라시아를 무대로 동분서주한 유목기마민족들은 아직 통일된 국가권력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고, 활동력도 미약하였기 때문에 문명교류에 미친 그들의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흉노는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정치권력에 의한 유목기마민족 통일국가를 세우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부 일원에서 400여 년 간 여러 유목 문화는 물론 중국 중원을 비롯한 농경 문화와도 접촉하여 민족 구성만큼이나 문화 구성도 복잡다단하였다. 이러한 복합 문화의 소유자인 흉노가 유럽에 나타나서는 강력한 훈제국을 건립하고 유럽 고전 문화나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와도 융합하여 특유의 훈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훈제국의 흥망성쇠는 총체적 흉노 역사의 한 부분이며 그 연장으로서 반드시 밝혀져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273)<br>"흉노에 의한 동서교류는 우선 스키타이 유목 문화를 동전(東傳)시킨 데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르도스(수원) 청동기 문화다. 이것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청동기 문화를 수용한 후 가일층 발전시킨 문화로서 동북아시아 청동기 문화의 출현과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호한(胡漢) 문화'의 창출을 꼽을 수 있다. 호한 문화는 수원 청동기 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연속선상의 계승 문화, 혹은 발전 문화로서 한(漢) 문화적 요소가 뚜렷한 것이 그 특징이다." "한대 중국 문물과 그 방조품(한경鏡, 옥구검, 한견絹, 한식궁弓 등)이 볼가 강 하류 지역(한식궁과 한경)이나 북코카서스(한경), 크리미아 반도(옥구검과 한견), 헝가리(한식궁과 한경·흉노식 동복) 등지에서 다량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지역이 훈의 유럽 활동 시대의 요지였다는 유럽 사서의 소전(所傳)과도 부합된다. 또한 이는 흉노~훈~아바르로 이어지는 동방 문명의 서전(西傳)상을 시사해 준다."(291-3, 306-7)<br>6장 로마와 한(漢)의 교류&nbsp;<br>"로마와 한의 교역은 일시에 직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교역을 중간에서 차단하던 세력인 파르티아(安息)를 제압·제거하고 인도와의 교역을 성사시킨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다. 이 과정은 곧 로마 세력의 동점 과정이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와 장기간의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지중해-홍해를 통해 인도와의 교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원 초기 로마와 한 간의 교역은 인도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간접교역·중계무역으로서 주로 중국산 견직물이나 생사·모피·육계 등의 물품을 로마로 수출하였다. 로마와 한 간의 교역 중계지였던 인도(파키스탄 포함) 경내,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1~5세기의 로마 화폐(금·은화)가 다량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하여 로마와 인도 간에 활발했던 무역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역의 연장선상에서 인도와 한 간에도 교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337, 340-3)<br>"기원을 전후한 시기 로마와 한 간에는 인도를 중계지로 한 간접 교역뿐만 아니라, 육·해로를 통한 직접 교역과 인적 내왕도 진행되었음을 여러 문헌 기록과 유물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한금(漢錦, 한대의 비단)이 로마로 다량 수출되었다. 기원전 31년부터 기원후 192년까지 220년 동안 로마가 비단 교역을 주종으로 한 동방 무역으로 소모한 재정은 막대한 양이었다. 로마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재정적 고갈 요인 중에서 비단 구입으로 인한 지출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남해로를 통한 로마와 한 간의 간접 교역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기원후 1~6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존재했던 부남국(扶南國)의 옥에오(Oc-éo) 유적이다. 옥에오 유적에서 로마와 한의 유물이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이 유물들이 보여주다시피 기원 전후 인도차이나 반도는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접촉지였으며, 인도를 매개로 동점한 로마 문화는 이 반도에서 처음으로 한 문화와 만나서 교류하게 된다."(343-4, 347, 350-2)<br>"헬레니즘에 의한 동서 문명의 융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정치제도나 이념에서의 융합이다. 고전 그리스는 전형적인 도시 문화 국가로서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민 대표제 등 그리스식 시민사회의 행정제도를 채택하고 산업구조도 그리스식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총체적인 중앙 권력구조는 (현지 전승을 따라) 오리엔트식 전제주의적 왕권제도를 답습하였다." "다음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문화적 융합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融合, fusion)으로 인해 산생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다. 즉 비록 정복 문화이지만 그리스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오리엔트 토착 문화를 흡수·결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은 종교에서도 나타났다. 곳곳에서 그리스 신과 아시아 신이 혼합된 이른바 제신습합(諸神習合, syncretism)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다."(362-3)<br>"간다라 미술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상의 제작이다. 초기 불교도들은 부처를 너무나 숭배한 나머지 감히 인간 형체의 불상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불타(佛陀)를 단지 발자국 혹은 빈 좌석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현지의 그리스인들은 신을 인간과 똑같은 형체로 만들어 숭상하고 인간의 육체나 정신과 똑같은 속성을 신에게 부여하여 신상(神像)을 제작하고 그를 숭상하고 있었다. 이 영향을 받아 불교도들도 처음으로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무형적(無形的)인 불교 정신이 그리스 조각으로 말미암아 유형적인 예배 대상을 얻게 되었다. 불전도(佛傳圖)의 주역으로서의 석존상(釋尊像)이 차차 독립된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으로 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석존상을 그의 초인간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조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형상(形相)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 약속을 불교에서는 32상(相)·80종호(種好)라고 한다."(364)<br>7장 서역 개통과 문명교류&nbsp;<br>"기원전 138년 장건이 처음 대월지에 파견된 때로부터 기원후 102년 반초가 귀조할 때까지 약 240년 간을 서역 개통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선사 시대부터 기원 전후 오아시스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의 동서문명 교류는 주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스텝) 지대(북위 50도 부근)를 횡단하는 이른바 초원로를 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통로의 연변에서 생성된 문명은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비교적 발달된 서남아시아나 서아시아 문명권과 지리적으로 멀었고, 노정도 불편했다." "동서 문명의 직접적 만남을 가로막는 요인은 바로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파미르 고원이 가운데에 우뚝 솟아 험난한 장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건이 처음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이서에 있는 서역 제국을 역방하고 돌아옴으로써 중세동서문명교류의 동맥인 오아시스로가 트이게 되었고, 반초 부자의 서역 경영으로 인해 이 길은 더욱 활짝 열리게 되었다."(421, 426-7)<br>"서역 개통이 계기가 되어 중국에 유입된 서역 문물 중에서 사회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은 말이었다. 중국에도 고대로부터 말은 있었으나 서역마와 같은 양마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한대에 이르러 우수한 서역마를 알게 되자, 대량 수입하여 주로 전마(戰馬)로 쓰는 한편 재래마를 개종하는 데도 이용하였다." "서역으로부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래된 문물 중에서 오늘날까지 뚜렷한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유리다. 본래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에 유리가 출현하였다. 이집트 유리 제품의 수입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5~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중국에서도 일찍 유리가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백색 투명하고 다양한 무늬를 가진 이집트 유리와는 그 품질에서 필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대부터 이집트 유리는 옥정(玉晶)·수정(水晶)이란 별칭으로까지 불리면서 귀족 부호들의 진귀한 사치품과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428, 431-2, 435)<br>8장 종교의 교류&nbsp;<br>"원래 불교는 브라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번다한 제식만능주의(祭式萬能主義)를 배격하고 중도 사상에 바탕한 만민평등주의를 제창한 일종의 반(反)브라마시즘적인 개혁 종교였다. 그러나 신분 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즘의 중심 사상이자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 이념인 윤회와 업(業) 사상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분 제도를 무시하면서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던 불교 본래의 평등 사상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져 차차 퇴색해 가고 있었다. 여기에 본래 무신론 종교였던 불교[특히 대승 불교]가 우주에 천국과 지옥을 설정하고 성자(聖者)를 모시며 향과 촛불, 성수(聖水)로 예불을 하는 등 붓다를 중생 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되게 함으로써 힌두즘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에 덧붙여 대승 불교의 진언(眞言, mantra)과 다라니(dhārānī)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을 가미한 밀교의 출현(7세기경)은 궁극적으로 불교의 변질을 가속화하였다."(472)<br>"불교의 전파는 다른 종교, 특히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보편 종교의 전파와 비교해 보면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일련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는 당초부터 분파권적(分派圈的)으로 전파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3세기 실론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전파된 불교는 시종상좌부 불교(Theravāda, 일명 소승 불교)이고, 기원 1세기를 전후하여 서역과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는 대승 불교(Mahāyāna)였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강한 변용성(變容性)이다. 불교는 발원지인 인도에서의 생존 과정에서 융화성(融化性)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전파 과정에서도 상당한 변용성을 나타냈다. 이것은 발원지를 떠난 외래 종교였지만 불교가 쉽게 이방에 정착하고 생명력을 유지토록 한 요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불교 전파의 특징은 그 방도(수단)에서 평화적이란 점이다. 실제로 불교 전파사를 살펴보면 전파를 위한 소위 '성전(聖戰)' 같은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473-4)<br>"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서 티벳 불교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철학적인 중국 불교를 밀어낸 밀교 전법승들은 밀법(密法)에 의해 악마를 조복(調伏)하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민심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밀법은 전통적인 티벳의 종교 관행과 융합됨으로써 티벳 특유의 밀교를 창출하게 되었다. 티벳에는 원래 본(Bon) 교라는 샤머니즘적인 종교가 전승되어 왔다. '본'이란 티벳어로 '외치는' 사람, 또는 '신을 부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교의 샤먼(Shaman)은 검은 모자를 쓰고 북을 치면서 인간에게 폭풍우와 질병 등의 재앙을 가져다주는 악마와 싸움을 벌이다가 종당에는 자신의 요술 그물로 악마를 격퇴한다. 샤먼은 또한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서는 눈 덮인 산에 살고 있는 신들의 계시를 구하며, 그 계시를 어떤 신물(神物)이 자기에게 접했다고 생각하는 빙의(憑依)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곤 한다. 이러한 물합 결과 티벳 풍토에 적합한 밀교, 즉 라마(Lama)교가 마침내 성립되었다."(504-6)<br># 이러한 타락과 변질을 막기 위해 일어난 것이 14세기의 불교 운동이다. 이 개혁을 통해 확립된 것이 정교합일의 달라이라마(Dalai-bla-ma) 체제이다.&nbsp;<br>"'역대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전도열이 가장 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중앙아시아에 메르브를 비롯한 전도 교회 기지를 도처에 꾸리고 포교에 진력하였다."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교주 마르 아바 1세(Mar Abba Ⅰ)는 옥서스 강 유역과 고대 박트리아 지방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에프탈족과 돌궐족들을 교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7세기경 옥서스 강 유역에서는 전도가 활발히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전도사들은 대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과 기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문화 개발과 계몽에도 일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에프탈 문자와 돌궐 문자를 창제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고대 동방 기독교는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거쳐 천산 산맥의 북록(北麓) 및 타림 분지로 확산되었고, 그곳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566-9)<br>"이른바 경교로 명명된 고대 동방 기독교의 대당 전도에 관해서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를 통해 그 실상을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비문에서는 예수의 인격을 〈삼위일체의 분신인 경대지존(景大至尊)하신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 구세주〉로 규정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과 동일한 육신이 되어 강림[同人出代]〉하였으며, 〈천사가 경사를 선고하자, 실녀(室女, 즉 처녀, 동정녀)가 대진(大秦)에서 성주(聖主, 즉 예수)를 탄생하시었다[神天宣慶 室女誕聖]〉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시하고 마리아의 신성마저도 긍정하고 있다. 이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였고 성령에 의하여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는 정의와 신통하게도 일맥상통한다. 비문에 나타난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이러한 인격론을 감안할 때, 오해 받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인성강조설이나 신성부정설은 경교의 교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일견하여 알 수 있다."(573, 579-80)<br>9장 고대의 실크로드&nbsp;<br>"실크로드 개념은 몇 단계를 거쳐 확대되어 왔다. 그 첫 단계는 중국-인도로(路) 단계다. 이 단계는 1877년 리흐트호펜이 최초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란스옥시아나와 서북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함으로써 실크로드란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다. 둘째 단계는 중국-시리아로 단계다. 고고학자들이 지중해 동안의 시리아 팔미라에서까지 중국 비단 유물을 다량 발견한 사실을 감안해 비단 교역 길을 시리아까지 연장하여 실크로드라고 재천명하였다." "셋째 단계는 3대 간선로(幹線路) 단계다. 2차 세계대전 후 학계에서는 선행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오아시스로의 동·서단(東·西端)을 각각 중국 이동의 한국과 일본 및 로마까지로 연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포괄 범위를 크게 확장하였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 지대를 지나는 초원로(스텝로)와 지중해부터 중국 남해에 이르는 해로까지를 포함시켜 동서를 관통하는 이른바 '3대 간선'으로 그 개념을 확대한 것이다."(608-9)<br>"마지막 넷째 단계는 환지구로(環地球路) 단계다. 1492년 콜럼버스가 칼리비아 해에 도착한 데 이어 마젤란 일행이 1519~1522년에 에스파냐→남미의 남단→필리핀→인도양→아프리카 남단→에스파냐로 이어지는 세계 일주 항해를 단행함으로써 신대륙으로 가는 바닷길이 트이게 되었다. 또한 16세기부터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들이 필리핀 마닐라를 중간 기착점으로 하여 중국의 비단을 중남미에 수출하고 중남미의 백은(白銀)을 아시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등 신·구대륙 간에는 '태평양 비단길' '백은길'이 트이게 되어 이른바 '대범선(大帆船) 무역'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 대륙 간의 문물교류도 꼽을 수 있다. 항해로가 개척되고 교역이 진행되면서 고구마·감자·옥수수·낙화생·담배·해바라기 등 신대륙 특유의 농작물이 아시아와 유럽 각지에 유입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감안할 때 비록 해로의 단선적인 연장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문명교류의 통로는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609-1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50/cover150/8971968303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5076</link></image></item><item><author>nana35</author><category>저녁</category><title>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69653</link><pubDate>Mon, 11 May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2108153/172696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22009X&TPaperId=172696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164/92/coveroff/896722009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22009X&TPaperId=172696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a><br/>크리스토퍼 벡위드 지음, 이강한.류형식 옮김 / 소와당 / 2014년 05월<br/></td></tr></table><br/>서문&nbsp;<br>"역사 자료들 속에 있는 중앙유라시아인들에 대한 선입관들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관념, 즉 야만인(barbarian) 판타지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생각들로, 거의 변화된 바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유목민들은 〈타고난 전사들〉이 아니었다. 이는 도시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상인〉이 아니었고, 농경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농민〉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목민들이 건설했던 국가와 정주민들이 건설했던 국가는 모두 복합 사회(complex society)였다. 유목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할지라도, 인구도 훨씬 많고 부유했던 주변 정주 국가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직업 군인들이 무척 많았다. 또한 유목민들은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평범한 유목민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변 농업 지역 백성들보다 훨씬 더 한가했다. 농경 지역 백성들은 노예였거나 노예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는 정도에 불과했다."(41-2)<br>프롤로그 ─ 영웅과 그의 친구들&nbsp;<br>"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초기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정치적-종교적 이상형으로서의 영웅적 군주와 그의 코미타투스(comitatus, 친위부대)이다. 코미타투스는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주군의 친구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이다. 기본적인 코미타투스와 그들의 맹세는 스키타이 때부터 존재했다. 이는 목숨을 건 의형제들의 피의 맹세와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맹세는 고대 스키타이 자료로부터 중세의 『몽골비사』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다." "코미타투스 전사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맹세를 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출신 부족이나 출신 나라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들은 주군의 가족만큼, 어쩌면 가족보다 더 주군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들는 주군의 집에서 주군과 함께 살았으며, 맹세의 대가로 넉넉한 보상을 받았다. 코미타투스의 존재는 중앙유라시아 전역에서 매장지의 고고학적 발굴이나, 문화를 기술한 역사서들을 통해 확인된다."(65-7)<br>"코미타투스에게 주어진 보상은 상당한 것이었다. 금, 은, 보석, 비단, 도금된 철갑, 무기, 말, 여타 보물들이 주어졌는데, 여러 사료에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다. 코미타투스와 더불어 수많은 무기와 말들이 함께 매장되었다." "이러한 부장품들은 전쟁이나, 혹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조공을 통해 획득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무역을 통해 축적된 것이었다. 무역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 내부 경제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이 정주민에 대해 요구한 평화 조약에는 항상 이러저러한 무역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실크로드는 중앙유라시아 문화와 동떨어진, 소란을 피우는 원인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제의 구성 요소였다. 더욱이 지역 내 근거리 무역과 국제 무역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목 경제와 오아시스 농업 경제, 중앙아시아 도시 경제는 모두 함께 실크로드의 구성 요소가 된다."(86-9)<br>CHAPTER 1 ─ 전차를 탄 전사들&nbsp;<br>"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Central Eurasian Culture Complex)는 거의 4,000여 년 동안 유라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역사언어학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다. 바로 원시 인도유럽어족(Proto-Indo-European)이 그들이다." "기원전 2000년경,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어떤 민족이 고향을 떠나 이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의 1,000여 년 간, 이들은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원래 살고 있었던 선주민들을 정복하거나, 혹은 그들과 뒤섞이면서 역사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여러 갈래의 인도유럽어족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단지 개별 부족 단위였거나 혹은, 사실상 전사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첫번째 밀레니엄(1000~1 BC)이 시작될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유럽어족이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도 거의 다 인도유럽어족의 문화와 언어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93-4)<br>"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전차는 중앙유라시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신타슈타(Sintashta) 유적지로 우랄-볼가 초원 지대 남쪽에 있으며, 기원전 2000년경의 유적이다. 역사학적 자료를 보면, 전쟁에서 전차가 실제 사용된 것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사건은 기원전 17세기 중반의 일로, 하투실리 1세가 통치하던 히타이트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리야누(maryannu)는 미타니 지역의 고대 인도어족 전차 전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전차용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었다. 같은 시기 미케네 그리스인은 히타이트와는 서쪽에서 이웃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자를 개발한 두번째 인도유럽어족이었다. 그들도 정복 전쟁에서 전차를 사용했다. 분명히 비슷한 시기에 인도 북서부를 침략했던 고대 인도어족도 마찬가지다. 알려진 최초의 전차 전사들이 모두 인도유럽어족이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중앙유라시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말 역시 중앙유라시아가 원산지다."(126-7)<br>"고고학적으로 알려진 완전한 형태의 전차는 중국 상나라 유적에서 나왔다. 그것은 상나라의 북서쪽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확인되며, 도입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그보다 좀 더 일찍 도입되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발굴 사례가 기원전 13세기를 가리키는 데다가 이미 상나라 방식으로 장식을 세세하게 갖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차가 상나라에 도입된 뒤 상나라의 문화가 덧입혀지는 기간이 더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상나라와 전쟁을 했던 이민족들도 전차를 사용했다. 전차를 끄는 말은 반드시 전차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 가축화된 말은 성인 남성과 전차와 함께 상나라 왕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말과 전차 전사와 전차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전형적인 양상으로,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 말까지는 인도유럽어족만의 독특한 풍습이었을 것이다."(128-9)<br>"유라시아에서 인도유럽어족이 침략자로서 어떤 국경을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정복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도 누가 됐든 이웃한 종족과 전쟁을 했을 것이다. 불특정 민족들과 싸우는 중에, 여태까지 전쟁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던 전차라는 신무기가 유라시아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전차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기계였고, 매우 정밀한 기계였다. 그래서 전차를 만들거나 사려면, 그리고 전차에 말과 전사를 훈련시키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전차에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두번째 물결에 속하는 인도유럽어족은 전차를 유지보수하고 실제 사용할 줄 알았던 최초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전차를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전차는 고사하고 가축화된 말만 하더라도,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였는지 여러 텍스트에 자세하게 나온다."(134-5)<br>CHAPTER 2 ─ 로얄 스키타이&nbsp;<br>"북부(혹은 동부) 이란어족인 스키타이는 잔인한 전사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들의 최대 업적은 무역 시스템이었다. 헤로도토스를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의 여러 저술가들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스키타이의 교역로는 그리스, 페르시아와 동방 지역들을 연결하였고, 이는 스키타이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무역에 관심을 가졌던 원동력은 그들만의 사회정치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통치자 개인과 그의 코미타투스, 즉 때로 수천 명에 이르는, 맹세로 뭉친 친위대원들에게 공급할 물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유라시아에서 번성했던 육로 기반 국제 교역은 스키타이와 소그드인, 흉노, 기타 여러 중앙유라시아 고대인들의 수요에 기반하고 있었다." "스키타이 파워가 한창일 때 고대 그리스어, 인도어, 중국어로 된 철학서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생산되었다는 점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을 끈 주제이며, 그 시기에 이미 이들 문화들 간의 사상적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41-2)<br>"스키타이 제국과 서부 스텝 지역의 교역망은 이후 중앙유라시아 지역에 등장한 보다 강력한 국가들의 기본 원형이 되었다. 중앙유라시아 지역에서 부와 권력이 성장하고, 여러 문화들과 점점 더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되자, 여러 나라들이 그곳을 침략했다. 대체로 그들은 중앙유라시아 측에서 먼저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알려진 바로 가장 오래된 침략자는 중국 지역의 주나라였다. 그들은 기원전 979년 귀신의 나라 귀방(鬼方)을 침략하여 두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중국인들은 그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회만 닿으면 반복해서 동부 스텝 지역을 침략했다. 다리우스 치하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도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점령했고, 기원전 514년~기원전 512년경 스키타이를 침략했다. 알렉산드로스 치하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도 기원전 4세기 말에 중앙아시아 지역을 침략했다 이들 두 차례의 정복은 중앙아시아 문화에 예기치 못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42-3)<br>"헤로도토스와 다른 모든 역사 자료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 전체를 로얄 스키타이가 지배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전사들로서 대부분의 재산을 통제했다. 그들은 〈스키타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용감한 부족이었고, 그들은 다른 모든 스키타이족을 노예로 생각했다.〉 헤로도토스는 그들 아래로 유목 스키타이가 있다고 했지만, 유목 스키타이는 아마도 로얄 스키타이에 종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축을 기르는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보리스테네스라고 불렀던 이들이다. 농경 스키타이는 농부들로서, 그들은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다 팔기 위해서〉 농사를 지었다." "이론적으로 스키타이 사회는 네 개의 부족과 더불어 통치 부족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국가의 이상적인 조직 형태로서 몽골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전통이다. 통치 부족은 다른 모든 부족을 〈노예〉로 간주했다. 이 또한 중앙유라시아에서 후대에까지 공통적으로 이어진 전통이다."(151-3)<br>CHAPTER 3 ─ 로마와 중국 사이&nbsp;<br>"고대 중반기, 즉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는 로마 제국과 중국 한(漢) 제국의 발전이 가장 눈에 띈다. 이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부분적으로 도시도 발달한 문화였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는 스키타이의 후예인 사르마트가 같은 이란어족인 알란(Alans)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중앙아시아 서부 지역에서는 토하리 연합세력이 이주해 와서 박트리아의 그리스계 나라들을 점령했다. 이를 근거로 쿠샨(Kushan) 제국이 성립했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파르티아의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뻗어나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국경을 맞대었으며, 로마인들과 함께 근동 지역을 두고 힘을 겨루었다. 토하리의 숙적이었던 흉노는 동부 스텝 지역을 압도하다가 반으로 나뉘어져 남북으로 갈렸다. 뒤이어 남흉노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북흉노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무주공산이 된 동부 스텝 지역으로 몽골족 연맹체인 선비족이 들어와 흉노 대신 동부 스텝 지역을 차지하였다."(175)<br>"기원후 1세기에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전해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게르만족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타키투스는 코미타투스에 대해 특별히 주목했고, 당시 존재했던 코미타투스의 본질적 요소를 모두 기술했다." "코미타투스는 프랑크 왕국 초기에도 등장했고,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에서는 8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또 몇 세기를 더 유지했다." "타키투스의 설명과 기타 고대 기록들은 아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즉 고대 게르만족은 프랑크족을 포함해서 모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알란족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이란어족들처럼 원시 인도유럽어족의 시대로부터 줄곧 이러한 전통을 유지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대 게르마니아가 문화적으로는 중앙유라시아의 일부였으며, 게르만족이 그곳으로 이동해온 뒤 천여 년 이상 그와 같은 전통이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177-9)<br>"고트족은 타키투스의 시대에는 동부 게르만족이었다. 이들은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 이르러 비스툴라 강 유역의 발트 해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흑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폰틱 스텝 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조직화된 국가가 아닌 독립적인 연맹체였다. 나중에 에르마나릭(Ermanaric)이 고트족의 그로이퉁기(Greutungi) 연맹을 창설했는데, 이는 후대에 오스트로고트(Ostrogoths), 즉 '해가 뜨는 곳의 고트족' 혹은 '동고트족'으로 불렸다. 그들은 유서 깊은 국가 수립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즉 이웃 부족을 점령하고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나라는 기원후 370년에 이르러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아직 훈족이 공격해오기 전이었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 사르마트족, 알란족, 고트족의 권력은 375년에 이르러 훈족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중앙유라시아인들 중 규모가 컸던 종족들, 대표적으로 고트족은 이후 동로마 제국 국경 근처로 옮겨와 피난처를 구했다."(181-2)<br>"기원전 50년경,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라는 쿠샨 추장이 토하리스탄(Tokhâristân)을 구성하는 네 부족을 병합하여 쿠샨 제국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남쪽으로 인도까지 확장하여 인더스 강 입구에까지 이르렀고, 해상 무역로를 장악했다. 이는 인도와 로마 치하 이집트 항구를 직접 연결하는 항로였다. 이 무역로는 파르티아를 거치지 않았고, 따라서 파르티아에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쿠샨 왕조는 이 무역로를 획득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들은 동쪽으로 확장하여 타림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쿠산(Küsän)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이는 나중에 토하리 왕국의 수도가 되는 쿠차(Kucha)식 명칭이었다. 카로스트 히(Kharoșț hî)라는 특징적인 문서가 그들의 통치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동쪽으로 크로라이나(루란)까지도 발견이 된다. 쿠샨인들은 불교가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186)<br>CHAPTER 4 ─ 훈족 아틸라의 시대&nbsp;<br>"기원후 2세기 이후 고대 제국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라시아 북부의 민족들은 남쪽을 향해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이 사건을 민족대이동(Völkerwanderung, 민족들의 거대한 방랑)이라고 한다. 이때 범(汎) 게르만족 그룹들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서쪽 절반을 차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족들인 치오나이트족(Chionites), 에프탈족(Ephthalites) 등은 페르시아 제국령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 몽골족 위주의 여러 민족들은 과거 중원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북쪽 절반을 차지했다." "민족대이동은 서유럽 거의 모든 지역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를 전파하였다. 결국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는 영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북부 온대 지역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제 중앙유라시아와 주변 정주 지역 사이의 경계선은 없어졌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혹은 그 반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인종적, 정치적 구분도 없어졌다."(199-200)<br>"중앙유라시아에서는 평상시에도 이주가 흔히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사람들은 유목이나 반유목 목축업자들이다. 사실상 농사도 짓지만 농장은 해마다 장소가 바뀌고 곡식과 동물을 데리고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곳 사람들은 어떤 땅에서 일년 중 어떤 시기에 누가 풀과 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누군가의 목초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별해주는 표식이 없다. 따라서 거대한 유동성은 정착경제가 아닌 중앙유라시아의 특성이 되었다. 나라는 민족으로 규정되며, 서로 간의 맹세로 맺어질 뿐이다." "중앙유라시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경이란 의미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부족이 특별히 성공을 거두게 되면, 새로운 나라는 급속하게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전역으로 확장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주변 정주 제국의 성벽이나 요새에 맞닥뜨리게 된다. 중앙유라시아 역사에서 이러한 과정은 최소 세 차례 일어났다. 스키타이, 투르크, 몽골이 그러했다."(220-2)<br>"분명히 로마와 중국 경제의 쇠락이, 적어도 처음에는, 이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이들 제국의 국경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보다 경제 문제의 여파가 훨씬 심각했다. 중심지에는 경제적인 부가 축적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풍요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국경의 도시나 마을에서는 돈줄을 조이거나 경기가 움츠러들면, 이방인 출신 상인이나 이주노동자들로서는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경제 문제는 중앙유라시아 튱치자들에게도 어려움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코미타투스나 동맹 세력에게 끊임없이 사치품이나 보물들을 제공해야 했다. 국경 시장이 붕괴되거나 혹은 전쟁으로 파괴되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황폐화되기 마련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보다 상대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큰 범위에서 작동했던 원칙(민족대이동의 경제적 이유)을 확인할 수 있다."(222-3)<br>"이전 역사가들은 〈야만인의 정복〉이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이라고 믿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게르만식 변종이 서유럽에 소개되었고, 그것이 당시 서유럽의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압도했으며, 그것이 점차로 발전하여 현재 〈중세〉 문화로 알려진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봉건〉 시스템, 무역 도시의 특수한 지위, 전사 계급의 특권 등도 중세 문화에 포함된다. 고집스레 남아 있는 그리스 로마식 요소들(라틴어 위주의 서유럽 문자 언어 같은), 남부 지방에 남아 있는 몇몇 고대 유적들, 이런 걸로 고대 지중해의 화려했던 문화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로마인들과 로마화된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게르만 왕조에서 살았다. 이들은 거의 초창기부터 뒤섞이기 시작했다. 로마화된 서유럽이 다시 중앙유라시아화된 것은 문화적 혁명이었다. 그것이 중세(Middle Age)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알려졌던 것이다."(226)<br>CHAPTER 5 ─ 튀르크 제국&nbsp;<br>"6세기 중반, 동부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Türk)가 유라시아 지역의 다양한 문명들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급속도로 상업·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초기 중세 시대의 국가들은 중앙유라시아를 점령하거나 혹은 적어도 인접한 국경 근처만이라도 빼앗고자 했다. 초기 중세(약 AD 620~840)의 문화적 번영은 이처럼 끊임없는 지역별 전쟁과 함께 나타났다. 새롭게 펼쳐진 전쟁 양상은 마침내 주요 제국들이 국경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그들에 대응하는 제국 규모의 연합체가 탄생했다. 계속되는 전쟁은 점차 심해져서 마침내 8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튀르기스(Türgiš)와 파미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졌고 아랍-당 제국 연합이 승리했다. 뒤이어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제가 후퇴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 경제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모두가 중앙유라시아의 번영, 즉 실크로드의 번영에 기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29-30)<br>"유라시아 전체의 초기 중세 역사 자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사실 중의 하나는, 중앙유라시아, 특히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어 자료, 고대 티베트어 자료, 아랍어 자료들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넘쳐난다. 심지어 이들보다 편협한 그리스어나 라틴어 자료들에서조차 그들의 왕국에 대한 중앙유라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주목을 끌었던 이유를, 요즘 역사학자들은 당시 유목민 전사들의 침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백하게 그렇지 않다. 사료에는 실제로 그런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 오히려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경제 때문이었고,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공유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 탓이었다. 저항하거나 복속을 거부한데 따른 처벌은 곧 전쟁이었다. 초기 중세 유라시아를 통틀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267-8)&nbsp;<br>"각각의 나라는 자신의 황제만이 유일하게 〈하늘 아래 모든 곳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미 굴복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이건, 아직 복속되지 않고 반항하는 〈노예들〉이건 막론하고, 모든 이들은 그의 신하가 되어야 했다." "이상적인 중앙유라시아 정치 구조는, 〈칸과 네 명의 지역 군주 시스템〉으로 적절하게 명명된 적이 있는데, 그 분명한 사례는 부여 왕국과 고구려 왕국─부여는 중심부와 4개 하위부로, 고구려는 중앙과 5개 하위부로 나뉘었다─에서 보인다. 비잔틴 제국의 사절로 튀르크 제국을 다녀간 마니아크(Maniakh)는, 튀르크 제국에 네 개의 〈군사 정권〉과 더불어 하나의 통치자가 있고, 그는 아르실라스(Aršilas) 부족에 속한다고 전했다. 티베트 제국의 굉장히 이론적인 4개의 뿔 시스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당나라도 서쪽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방향에도 도호부를 설치했다. 거란 제국과 후대의 몽골 제국 및 그 후예들도 마찬가지였다."(268-9)<br>"모든 초기 중세 제국들은 사방으로 팽창하고자 했다. 다른 시대 다른 곳의 제국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초기 중세에만, 역사상 최초로, 거대 제국들이 서로 직접 맞닥뜨렸고, 그들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각의 제국은 서로 얼굴을 맞대었고, 각각은 사실 동등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제국을 통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서 외교 규약이 발달하였다. 외국에 파견된 사절단은 그 나라에서는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했다. 그 지역에서는 사신들의 복종을 마치 다른 지역 제국이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기록하였다. 사신단이 돌아갈 때는 대개는 방문지의 사신단을 동행했는데, 이들 또한 자신이 방문하는 제국의 황제에게는 비슷하게 복종의 표시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의 경제는 번성했고, 최소한 8세기 중반까지는 강력하게 성장했다. 유라시아 세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특히 경제적으로 전례 없이 가깝게 연결되었다."(270-1)<br>CHAPTER 6 ─ 실크로드, 혁명, 붕괴&nbsp;<br>"8세기 중반의 이른바 13년 시대에는, 유라시아의 모든 제국들이 굵직한 반란이나 혁명 혹은 왕조 교체로 곤란을 겪었다. 742년에 동부 스텝 지역의 튀르크 제국이 무너지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은 위구르 제국이 들어섰다. 같은 시기에 비잔틴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곧이어 아랍 제국에서도 아바스 혁명(Abbasid Revolution)이 일어났다. 혁명 주도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무역 도시 메르브 상인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도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가 혁명을 일으켰다. 755년에는 티베트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있었다. 같은 해 연말 즈음, 중국 지역에서도 안록산(安祿山)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안록산은 당나라 군대의 장군이었는데, 출신이 투르크-소그드계였다. 뒤이어 섬세하게 계획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을 통해 평화가 다시 회복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은 보다 젊은 제국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275)<br>"다음 세기에 가장 의미심장한 발전으로 먼저 유라시아 전역에 국민문학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세계의 상업, 문화, 학문 중심지로서 서부 중앙아시아는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무역로가 북쪽으로 이동했다. 즉 칼리프 제국과 유럽의 무역 루트는 중앙아시아에서 볼가 강을 거쳐 올드 라도가(Old Ladoga)와 발트 해에 이르는 북방 루트로 옮겨갔다. 이로 인해 북유럽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다. 한편 동야에서는 중국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무역 루트가 북쪽으로 이동해 위구르의 영토를 통과하게 되었다. 아랍 제국의 수도는 알 마문(al-Ma'mûn)의 치하에서 십여 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도시 메르브에 있었다. 마침내 칼리프가 바그다드로 옮겨갔을 때, 칼리프는 수많은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중앙아시아 문화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는 아랍 제국에 빛나는 지적 학문적, 융합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대의 성과들은 후대에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고, 유럽 과학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276)<br>"세계 종교 조직에 대해 공식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자, 문헌 자료가 확산되고 문헌에 기반한 문화가 발전되었다. 이는 전근대 세계의 대부분 민족들에게도 문자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왕국이든 제국이든,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필요하다면 어떤 언어로든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문자 문화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 혹은 여러 세계 종교가 그 민족에게 전파되면서 시작되었다. 세계 종교는 모두 문자 텍스트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먼저 성스러운 경전을 읽을 수 있어야 했고, 텍스트를 복제하여 그 민족의 영토 안에 확산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면, 해당 지역 언어로 텍스트를 번역해야 했다." "이러한 전파 행위의 중요성은 끝이 없었다. 복제된 텍스트나 번역된 텍스트는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하나의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다. 이는 고중세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까지 유라시아 문명 전체적으로 지성이 만개하는 기초가 되었다."(297-300)<br>CHAPTER 7 ─ 바이킹과 키타이&nbsp;<br>"중세 초기 세계 질서가 무너진 뒤, 새로운 나라들이 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유일한 예외라면 비잔틴 제국이었다." "초기 중세와 달리, 이 시대의 고급 문화는 시작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수도원 제도가 모든 유라시아 주요 지역에서 급격하게 번성했고, 문자 문화를 더욱 심도 있게 전파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번영은 아랍 제국이 무너진 그 다음 시대가 상승기였다. 그 무대는 특히 중앙아시아였다. 실제로 고전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중앙아시아 출신이거나 그 후예였다." "서부 스텝 지역과 동부 스텝 지역의 나라들은 다 같이 지리적으로 유목 지역과 비유목 지역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어서, 갈수록 스텝 지역에 농업의 영향이 증대되었다. 바이킹-슬라브족의 루스 카간국은 유럽의 농업-도시 문화를 서부 스텝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중국도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세운 왕조들의 후원에 힘입어 농업-도시 전통을 동부 스텝 지역으로 확산시켰다."(313-4)<br>"바이킹은 전사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들은 1차적으로 상인들이었다. 바이킹이 남쪽의 보다 문명화된 나라들로 내려온 것은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9세기 초, 바이킹은 러시아의 강을 타고 근동 지역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류리크(Ryurik)가 이끄는 세 명의 추장들은 862년 노브고로드(Novgorod) 지역에서 루스 카간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882년경, 류리크의 후계자 올렉(Oleg)은 키에프(Kiev)를 정복했고, 루스 카간국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거대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루스는 정교회를 국교로 하는 비잔틴 국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슬라브화된 불가리아 왕국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도 루스와 국경을 마주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미 페르가나인들과 카자르인을 코미타투스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바이킹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바이킹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이렇게 해서 유명한 바랑기아 가드(Varangian Guard)가 구성되었다."(317-8)<br>"당시 이슬람 세계는 과학과 수학, 철학과 형이상학에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들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들, 알 파르가니(al-Farghânî. 전성기 833~861, 페르가나 출신), 알 파라비(al-Fârâbî, 사망 950, 파랍[우트라르] 출신), 이븐 시나(Ibn Sînâ, 980~1037, 부하라 근처 아프사나 출신), 알 비루니(al-Birûnî, 973~약 1050, 호레즈미아 카트 출신), 알 가잘리(al-Ghazâlî, 1058~1111, 후라산 투스 출신) 등 많은 이들이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도시들은 모두 유라시아의 빛나는 상업적 지적 중심지였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반지성적인 반작용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한 이는 중앙아시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알 가잘리(al-Ghazâlî)였다. 한동안 바그다드의 니자미야에서 교수를 역임한 그는 궁극적으로 철학 그 자체를 거부했으며, 수피즘의 보수주의적 양상을 선호했다. 그와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도그마를 벗어나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려 했다."(334-6)<br>"중국 지역의 상당 부분이 송나라로 통합되었지만, 북부 지역, 동부 스텝 지역과 겹치거나 혹은 그와 연결되는 지역, 중앙아시아 등지는 독립국으로 남아있거나 비중국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왕국을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다소간의 우열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전제로 국제 관계를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중앙아시아나 스텝 지역과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라시아의 나머지 대부분 지역과도 접촉이 없었다." "마침내 중국의 해상 무역이 유라시아의 반대 방향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따라서 남방으로 남중국해 연안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했을 때, 중국 문화를 전파한 세력은 중국의 엘리트가 아니라 독립적인 마인드의 상인들이었다."(340-1)<br>CHAPTER 8 ─ 칭기스칸과 몽골의 정복&nbsp;<br>"14세기는 흑사병, 기근, 홍수 및 기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재앙으로 괴로웠던 시대였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은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고 왕조가 무너지는 일이 만연했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자연재해에 맞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몽골 왕국들, 즉 이란 지역의 일칸국과 중국 지역의 원나라는 모두 무너졌다. 아마도 다른 시기였다면 그렇게 빨리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368년 최후의 대칸이자 원나라의 황제이기도 했던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재위 1333~1368)는 상당수 황실 인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몽골 지역으로 탈출했다. 그는 1370년 사망할 때까지 동부 스텝 지역에서 쇠락하는 대칸국을 통치했다. 중부 및 서부 스텝 지역에서 골든 호르데[킵차크 칸국]는 아주 잘 살아남아서 이후로도 2세기를 유지하였다. 이와 반대로 일칸국은, 마지막 일칸 아부 사이드(Abû Sa'îd)가 1335년에 죽자 부족과 분파주의자들의 폭력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말았다."(365-6)<br>"중앙아시아에서 차가타이 칸국은 아주 일찍 분열되어 몇 개의 파벌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항구적인 불안정 상태로 고통을 받았다. 타르마시린(Tarmashirin, 재위 1318~1326) 칸이 죽은 뒤 차가타이 호르데는 동과 서 둘로 갈라졌다. 서부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중심으로 했는데, 차가타이의 명칭을 획득했다. 반면 동부는 유목민 비중이 훨씬 더 많았는데, 무굴리스탄(Moghulistan) 몽골리아로 알려졌다." "중앙아시아에서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통치자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차가타이계가 중앙아시아에서 확고한 통치자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카라우나스족의 왕 카자간(Kazaghan, 재위 1346/1347~1357/1358)이 1346년/1347년 차가타이 칸국 최후의 칸 카잔(Kazan)을 살해한 뒤, 직계 라인은 끊어지고 말았다. 카자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차가타이 칸국의 이름을 계속 내세우고 꼭두각시 칸을 세우기도 했지만, 사실상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366-7)<br>"전체적으로 보자면 티무르의 정복 전쟁은 유럽이나 페르시아, 중국의 왕조 설립자들이 했던 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티무르의 군대는 원거리에서 번개처럼 기습하는 기마대도 아니었고, 물론 거대한 해군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다. 티무르에게도 기마병이 있었고 효과적으로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군대의 절대다수는 보병이었다. 그리고 티무르가 노린 것은 모두 예외 없이 도시였다. 티무르는 적들이 굴복하는 것에 만족했다. 특히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티무르는 거의 언제나 통치자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세금만 제대로 내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티무르가 통치하던 때는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이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문화 및 정치적으로 유라시아의 중심이 되었던 시기였다. 티무르는 분열 계승된 과거 몽골 제국의 영토를 다시 정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제국에 안정적인 제국의 정부 조직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고, 티무르의 자식들도 티무르의 계획을 물려받지 않았다."(372-3)<br>"몽골은 최초로 거대 규모의 국제 무역과 세금 시스템인 오르탁(ortag)을 만들었다. 오르탁은 기본적으로 상인 연합 혹은 카르텔이었다. 주로 무슬림들이 이를 수행했는데, 그들은 카라반이나 어떤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통치자들에게는 세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익이 높았다. 오르탁에 대한 정책은 보다 쉽게 참여하거나 자유방임일 때도 있었고(우구데이 치하에서), 엄격하게 통제가 될 때도 있었다(뭉케의 치하에서). 제국 전체가 상업에 열려 있었고, 상인과 기술자들에게 전례가 없을 정도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의 사방에서 기업가들이 출현했다." "몽골인들은 〈무신론자〉였다. 때문에 조직화된 종교라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몽골인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어떤 종교나 종파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티베트 불교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374-5)<br>CHAPTER 9 ─ 유럽의 바다로 달려간 중앙유라시아 사람들&nbsp;<br>"전근대 유라시아 대륙의 거대 제국들이 수립된 것은 르네상스 후기의 정복 전쟁을 통해서였다. 이는 티무르의 정복 전쟁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티무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자체적인 발전을 방해하거나 늦추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1405년에 티무르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곧바로 자신의 제국 영토를 수복했고, 오래도록 추진해왔던 팽창 정책을 다시 개시하여,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잔여 세력들을 소탕하였다." "유라시아의 다른 제국들은 티무르가 사망한 뒤 1세기가 지나서야 자리 잡기 시작했다. 투르크멘이 페르시아에 사파비 왕조를 설립한 때는 1501년이었고, 바부르(Babur)와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역에 무굴(무갈) 제국을 세운 때도 그 무렵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거대한 전 세계적 차원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즉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해안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해나가는 것이었다."(383-4)<br>"유럽인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연안 지역과 그 주변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점차 절대 권력자들과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거대 제국들은 해상 무역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결국 국제 무역에 참여하려면 유럽인들은 무역로와 항구 도시를 안정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그 지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 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의 경제가 번성했던 시대,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시대에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해 왔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군대는 아시아의 지방 통치자들을 제압했고,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했으며, 아시아에서 유럽인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해 갔다." "유럽인들의 주요한 목적은, 처음에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화롭고 수익률이 좋은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도 또한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해당 지역의 정치 권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행했던 바와 똑같다."(402-3)<br>CHAPTER 10 ─ 길이 닫히다&nbsp;<br>"19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의 상업, 부, 권력은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심지어 러시아 제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러시아 제국이 중앙유라시아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수도는 발트 해 연안에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는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였다. 러시아는 오래도록 이 도시를 거쳐 바다로 나아갔다. 러시아와 달리, 유라시아의 오래된 나라들은 재빨리 변신을 도모하지 못했고, 결국 차례차례 무너져 갔다. 인도의 무굴 제국은 대영제국에 합병되었다.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국은 아프간 지배 시절을 거쳐 사파비 왕조로 교체되었지만, 러시아와 대영제국 관할 지역으로 나라가 쪼개졌다. 중국의 청나라도 유럽의 각 세력권으로 나뉘어졌다. 유라시아의 경제는 대륙 기반 실크로드 시스템 위주에서, 유라시아 연안을 잇는 해양 기반 시스템으로, 즉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었다."(425-6)<br>"1757년, 청나라는 마지막 남은 독립 스텝 민족인 서부 몽골 세력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초원 제국 준가르가 무너짐으로써 중앙유라시아 실크로드 경제에 찬바람이 불었지만, 그 자체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러시아와 청나라의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1727년에는키악ㅌ나(Kiakhta)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국제 무역에 대한 엄격하고 배타적인 통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국경은 닫혔고, 국제 무역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으며,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중앙유라시아 정치 조직들은 모조리 제거되었다. 이로써 중앙유라시아의 경제는 파탄을 맞았다. 실크로드 경제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사람들도 이렇게 해서 대개 할 일을 잃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중앙유라시아에는(특히 그 중심지인 중앙아시아에는) 극심한 가난이 찾아왔다. 기술적인 면에서나 기타 모든 문화적인 면에서도 급속히 암흑 속으로 후퇴했다."(438-40)<br>"유라시아 어느 곳에서나 전통적인 국가들은 땅을 지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중세 초기 유라시아 전역에는 한 가지 개념밖에 없었다. 즉 아랍어로 마디나(madîna), 페르시아어로 샤흐리스탄(shahristân), 고대 티베트어로 카르(mkhar), 중국어로 청(城, chéng), 고대 고구려어로 구루(kuru)와 같은 것이었다.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것은 실제로 한 가지였다. 즉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그것이다. 각각의 도시를 요새화함으로써 통제를 극대화하고, 적에게 빼앗기거나 적과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며, 각각의 도시를 확고하게 유지하여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는, 도시들이 그 나라 영토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나라의 국경 지역이란 곧 중앙 정치 권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나 상인들은 무역이 자유로운 국경 지역에 관심이 많았고, 그곳에서는 정치 권력의 간섭이나 세금을 가능한 적게 받을 수 있었다."(458-9)<br>"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거대 도시들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 현실이 있었다. 고대와 늦어도 중세 초기부터 그들은 기본적으로 도시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왕국도 도시 하나 이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업 도시들은 중앙유라시아의 중앙 정치와는 연결되지도 않고 별 비중도 없이 그들만의 방식 그 자체로 남아 있었다. 이는 연안 무역로 주변의 도시들과 같은 처지였다." "대륙 횡단 무역은 스텝 지역 유목민들, 즉 스키타이나 흉노에 의해 중앙유라시아 최초로 거대 제국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직접 무역으로 변화되었고, 유목민들은 이를 통해 괄목할 만한 부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중앙유라시아 스텝 유목민과 도시의 번영은 내부 경제의 번영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들의 역사가 단절되고 그 결과 경제가 위축되었던 원인은 명백하다. 즉 주도권을 장악한 초원 제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텝 지역 사람들의 뒷받침과 보호가 없을 때면 어김없이 실크로드도 움츠러들었다."(461-3)<br>CHAPTER 11 ─ 중심을 잃어버린 유라시아&nbsp;<br>"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권에서는 1880년경 카잔과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자디디즘(Jadidism)이라는 계몽운동이 일어나서 이슬람권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동투르키스탄 지식인들은 근대 서양식 학교와 교육과정, 저널과 근대식 대중매체를 도입했고, 이와 함께 근대 민족주의 사상도 들여왔다. 중앙아시아에서 혁명이 번져나가자 자디디스트 중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에 초기부터 가담했던 사람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영향으로 1921년 몽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1930년대에 동투르키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비에트는 이를 진압하고, 중국 군벌을 내세워 우룸치(Ürümchi)에 정권을 수립했다. 그 뒤 카슈가르에서 제1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1933. 11~1934. 2)이 수립되지만 금새 진압되었다. 동투르키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티베트는, 중국 군벌이 한두 차례 동부지방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약 반 세기 동안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488-9)<br>"1942년 말 일부 칼미크(Kalmyk)인들은 스탈린의 압제로부터 공화국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다. 소비에트가 돌아왔을 때, 칼미크 자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무너졌다(1943. 12. 27). 칼미크는 배신자로 찍혔고, 칼미크 몽골족 전체가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사할린 섬 등지의 〈특별 정착촌〉(원래는 강제 수용소로 건설되었던 곳이다)으로 추방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가 독일로부터 크림 반도를 되찾은 직후, 1944년 5월 17일~18일, 그곳의 타타르족은 모두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도중에 약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비에트 정부는 크림 반도 타타르족의 역사와 문화, 언어 등 그들의 정체성 모두를 지워버리고자 했다. 동투르키스탄에서는 두번째로 공화국이 탄생했다. 사회주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1945년 여름 동투르키스탄 북부 지역에서 수립되었다. 티베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다."(498-9)<br>"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극단적인 모더니스트였다. 그들은 유럽과 미국의 영향이면 무엇이든지 거부했지만, 근대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만큼은 받아들였다." "몽골과 중국의 공산 혁명가들은 1949년 이전에 이미 몽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3일, 모택동은 몽골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1949년 말까지는 유지되었다. 그 해 중국 공산군이 그곳으로 진군해 공화국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다시 신강 식민지로 병합했다. 티베트인들은 갈수록 힘을 키워가는 중국에 대해 민감해졌다." "1950년~1951년, 중국이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은 병력과 무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티베트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중국은 주변 나라들을 새로운 공산주의 제국에 편입시킨 뒤 명목상 〈자치주〉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시스템을 표면적으로 모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명백한 중국화 노선을 채택하였다."(501-2)<br>CHAPTER 12 ─ 다시 태어나는 중앙유라시아&nbsp;<br>"중앙유라시아에서 힘의 열세와 빈곤, 쇠퇴, 외국 의존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어권인 남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와 서남아시아(이란과 쿠르디스탄)뿐만 아니라 근동과 파키스탄도 주로 종교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독재정치의 치하에 놓여 있었다. 전체 지역의 힘의 열세로 인해 인접한 서부 중앙아시아(과거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상황 또한 힘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지배 하에 남아 있던 중앙유라시아 나라들은 여전히 독립을 얻지 못했다. 카프카스 북쪽의 칼미크, 투빈(Tuvin), 알타이, 사카, 에벤키, 체첸 등이 그러했다.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새로운 대중추수적 독재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또다시 내외의 비판 세력을 위협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은 여전히 동투르키스탄, 내몽골, 티베트 지역에 군사적 점령 상태를 지속하였고,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대 중앙유라시아 경제가 전반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데에는 러시아와 중국 양측의 직접적인 책임이 크다."(536)<br>"소비에트 연방이 막을 내리면서, 카프카스의 나라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대부분의 소비에트 중앙유라시아 국가들도 독립을 이루었다. 폰틱 스텝 지역 서부의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독립했지만, 폰틱 스텝의 동부 지역부터 남쪽으로 흑해의 아조프 해에 이르는 지역,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에서 남쪽으로 아스트라한(Astrakhan)의 카스피 해에 이르는 지역은 러시아에 남았다. 이 지역들 중 일부는 대체로 러시아에 동화되었지만, 다른 많은 지역들, 특히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 즉 볼가 강 하류 및 카프카스 산맥 사이 북부 카프카스 스텝 지역의 몽골-칼미크어권 공화국을 포함하는 지역은 문화적으로 러시아에 동화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수많은 러시아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도 모두 독립했다. 이들 나라들은 가까스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고, 대체로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542-3)<br>에필로그 ─ 야만인들<br>"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대개 폭력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오해가 〈야만인〉이라는 관념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제국 혹은 왕국은 모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설립되었다. 길고 피비린내나는 배반과 음모의 막장드라마를 거쳐야 했다. 제국의 기초가 서고 나면,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나타난다. 거의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유명한, 혹은 가장 유명하지 못한 사례는 바로 로마인이다. 그들은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너무나도 악독한 방식으로 대중적인 흥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고 해서 비난 받은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죽인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도 있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순전히 잔인성과 가차없는 공격성만 놓고 보자면,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당시 로마나 페르시아, 중국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566-8)<br>"스키타이와 스텝 지역 민족들에 대한 오해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이른바 〈가난한 유목민(needy nomad)〉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그들 스스로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해서 농업 생산품, 옷감, 기타 주변 정주민들이 만들어낸 물건에 의존했고, 그것을 탐냈다는 것이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이 무역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물과 이웃 제국의 〈선진적인〉 상품을 거래해서 필요한 것, 혹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힘으로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침략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에 대한 니콜라 디 코스모의 비판은 아주 정확했다. 그는 문헌 자료나 고고학적 발굴 자료 모두 이러한 이론과는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직접 농사를 지었고,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상품을 제공하는 민족들과는 평화롭게 무역을 하고 세금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확실하게 밝혀졌다."(570)<br>"유목민들이 정말로 강력하고 호전적인 야만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만약 평화를 사랑하는 정주민들과 단지 교역만을 언했다면, 왜 정주민들이 만리장성을 쌓고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고대 중국 사료가 흉노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나중에 훈족을 설명하는 그리스의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정주 지역의 일부 사람들(특히 국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농업국가에 사는 것보다 유목민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기가 훨씬 쉽고도 자유롭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중앙유라시아인들에게 백성과 권력과 부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유일한 길은 성벽을 건설해서 국경 도시 무역을 제한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필요한대로 스텝 지역 민족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국경에서 멀리 쫓아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정복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정복지 백성들이 이방인에 동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578, 582-4)<br>"일반적으로 우리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의 역사나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옳거나 그른 행위를 결정했던 정황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충분히 알고 보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중앙유라시아 국가들이나 주변 정주 제국의 국가들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앙유라시아의 민족들이 선천적으로 강했고, 혹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전쟁에 특히 능숙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도시인도 있었고 시골 사람도 있었고, 강한 사람도 있었고 약한 사람도 있었고, 악독한 놈도 있었고 신사적인 사람도 있었고, 술꾼도 있었고 술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착한 사람도 있었고 악한 사람도 있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도 정확히 똑같이 그 사이에 있을 따름이었다."(609, 617)]]></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164/92/cover150/896722009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164927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