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는 초록의 냄새를 맡으며 도서관에서 독서하곤 했었는데, 올해는 갑갑한 공기 속에서 독서를 한다.
카뮈의 [페스트]에서는 페스트 시작부터 종말까지 대략 1년이 걸렸다. 코로나19는 언제 종말 선언을 할까.
가을보다는 오히려 봄,여름이 책을 읽기 참 좋은 계절인데 슬프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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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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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를 읽고나서 어쩐지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1. 1947년의 인간들은 2020년의 인간들과 거의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할 수밖에 없는(p.13)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각자 나름대로 사랑을 하며 살고있었다.

한시가 바쁘게 지나가는 노동의 시간들과 쾌락의 시간들은 한결같이 건강한 몸을 요구하고 있었고, 병을 앓는 사람은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다. 페스트 출현 이전에도 실질적이든 의미적이든 우리 사회에 언제나 병자는 있었고, 대부분이 건강했고 바빴던 이 시기에 그들은 그저 소외된 채 죽은 듯이 이 사회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타르‘는 예외적이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힘든 인물 중 하나지만, 가장 정체성이 분명한 인물이다.

어떤 범죄를 저지른 후 체포될 두려움에 떨다 결국 자살시도까지 하지만 이웃 ‘그랑‘의 도움으로 자살 직전에 살아나게 된 코타르는 페스트가 출현하자 오히려 이에 동화되고자 하며, 안정감을 찾는다.

모두들 두려움에 떨 때 비로소 안정감을 찾으며 페스트의 종말을 두려워하곤 한다.

그는 페스트 출현 전 평범했던 시대에 일종의 ‘병자‘ 였고, 다수의 정상적인 사람들 속에서 비정상적인 삶을 산 자신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하지만 페스트 출현 후에는 그 ‘정상적이었던 사람들‘이 ‘병자‘가 되고 다수의 사람들이 혼란에 빠짐으로서, 자신의 비정상이 페스트 시대에 자연스레 융화되어 새로운 종류의 안정감을 발견한다.

‘자신의 체포가 자연스레 뒤로 미뤄진‘ 것에 대한 표면적 안정감 속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즉, 코타르의 캐릭터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비주류 인간들을 대변하고 있다.

‘리외‘, ‘타루‘, ‘그랑‘, ‘랑베르‘ 의 캐릭터가 보편적인 독자의 공감과 존경을 끌어내는 반면 코타르는 조금 보편적이지 않은 독자까지 배려한 캐릭터이자 다른 인물들의 선(善)을 더욱 극적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알베르 카뮈는 의사 ‘리외‘에게 소설의 전체적인 서술자 역할까지 부여해줄 정도로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극을 이끌고자 하지만, ‘코타르‘나 ‘파늘루 신부‘, ‘처형 당하는 범죄자‘ 같은 조금은 독특한 인물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서 그만의 인류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2. (p.23) 리유는 언성을 높이지 않은 채, 자기로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으나, 그것은 자신이 몸담아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지쳐버렸으면서도 동류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있으며, 또 자기 딴에는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한 인간의 발언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의사 리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중 하나이다.

리외는 페스트 시대에 가장 최전방에서 활약한 의사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지만, 가장 영웅적인 인물이다.

그는 줄곧 ‘직업이 의사이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 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런 뉘앙스 속에는 사회의 시스템 속에 아주 익숙해진 나머지 ‘직업 의식‘을 떼어놓고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와 선한 본성과 겸손이 동시에 녹아있다.

사회 시스템의 희생양이자 동시에 영웅이며 그저 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한 그는 페스트 종말 후 친구 ‘타루‘와 외부 요양원에 있던 아내를 거의 동시에 잃었지만 그 순간에도 자신의 고통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이미 여러 달 전부터 계속 되어 왔던 것과 똑같은 아픔(p.380)이라고 표현한다.





3. 타루는 개인적으로 가장 정이 많이 가는 캐릭터였다.

소설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순수한 인물이라 그의 최후가 문학적인 장치로서 큰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는 외지인으로서 오랑의 호텔에 머무르는 중이었으나, 페스트로 인한 봉쇄로 계속 오랑에 머물게 되었고, 보건대에 참여하게 되며 리외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p.322) 나는 사람들이 멍청하게 살아 있는 그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느끼자 물결처럼 밀려오는 굉장한 본능을 억제할 수가 없어 거의 맹목적인 고집으로 그 남자 편을 들고 있었습니다.



(p.327)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인간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필연적으로 그러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행위나 원칙들을 선 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그러한 죽음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가는 어쨌든 모든 사람은 관중들의 평가에 의해 죽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악마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회에서 비주류인 사람들에게 다수가 손가락질 하고 괄시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죄는 잘못이지만, 대개 죄인을 바라보는 관중들은 그 죄에 대해서만 잘못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 (즉, 그 사람 인격 자체)를 부정하고자 한다.

죄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어떤 인류애는 죄인의 서사도 인정한다.

이는 「이방인」과 비슷한 맥락으로도 해석되며 작가의 독특한 박애주의적 면모를 나타낸다.

타루는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의 대변인이자, 「페스트」의 박애주의자이다.





4. 신문기자 ‘랑베르‘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추상적인 행복 보다는 실질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가장 감정이입하기 쉬운 캐릭터이다.



(p.215)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그가 가장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인물로 그려졌기에 그가 생각을 바꾸고 보건대에 자원 입대 했을때 대중적인 감동이 일었다.

작가는 비주류 사람들을 옹호하기도 했지만, 아주 평범하고 조금은 이기적인 ‘랑베르‘의 변화를 통해 보편적인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함께 담았다.



(p.149) 그것은 과연 그가 그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었다. 보통 새벽 4시까지 사람들은 아무일도 하지 않으며, 비록 배반의 밤이라 하더라도 그때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렇다, 그 시간에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리고 그것은 안도감을 준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끝없이 소유하고 싶다거나, 또는 한동안 헤어져있어야만 될 경우 다시 만나는 날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깨어나지 않을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빠뜨려 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하는 것이 안심 못하는 마음의 가당찮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외부에 두고 온 채 얼떨결에 오랑에 감금된 랑베르는 그녀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안심 못하는 마음의 가당찮은 욕망. 이렇게 상황적절한 문장이 또 있을까.







5. 시청 서기 ‘그랑‘은 매우 평범하지만 한편으론 어딘지 바보같은 구석이 많은 노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 시청의 서기로 일단 먼저 취직하면 곧 봉급이 높은 문서 기안직으로 승진 시켜주겠다는 말을 듣고 일하게 됐으나 결국 평생 서기 일만 하며 늙어버린 어처구니 없고 부조리한 일을 당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수긍하고, 현실에 자기자신을 그럭저럭 맞춰 살아간 인물이다.



(p.66) 언제나 확고한 자신을 갖기 어려운 ‘권리‘라는 말이라든가, 자기 몫을 요구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맡고 있는 보잘것없는 직책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당돌한 성격을 지니게 될지도 모르는 ‘약속‘이라는 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한편 ‘호의‘,‘청원‘,‘감사‘ 같은 용어들은 자기의 인격적인 자존심을 손상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적절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우리의 이 시민은 나이가 지긋이 들어서까지도 그의 보잘것없는 직책을 계속 수행했다.



그랑은 반항이라곤 전혀 못하는 인물이다. 부조리에 대해 반항이 아닌 수긍을 택하면 이런식이 되고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수긍하는 자‘는 곧 ‘착한사람‘인데, 대부분의 평범한 ‘착한사람‘의 인생은 그저 이렇게 흘러간다.

‘그랑‘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수긍하는 자‘들을 대변한다.

그는 그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줄 모른다.

과연 처음부터 이렇게 자신의 언어를 찾지 못했을지, 부조리에 수긍하고 자신을 사회에 끼워맞추며 살아가다보니 그 자신의 온전한 감정과 의견에 더불어 언어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닐지.







#. 소설 속에서도, 코로나 19가 나도는 이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전염병을 극복해나간다.

어떤 사상이, 어떤 방법이 결코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다.

p.329에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 페스트 환자니까요.

라는 구절이 나온다.

소설은 표면적으로 전염병이 도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그 속을 살아내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이 특수한 배경을 배제한 ‘사람들의 마음 속 페스트‘에 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전염병 없는 멀쩡한 사회일때도) 매일매일 어떤 크고 작은 사건들(페스트)을 겪어야만 한다.

그 속엔 희생자도 있을 것이고, 관전자도 있을 것이다.

희생자가 되는 것은 매우 암울하고 피곤한 일이겠지만, 희생자가 아닌 입장 역시 ①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것 ②사건에 대해 어떤 행동이나 입장을 반드시 취해야만 하는 것 때문에 매우 피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우연하게도 2020년의 우리나라가 비슷한 전염병 사태에 놓여있기에 사람들이 소설의 텍스트에 더 쉽게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닌 평범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페스트‘의 의미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페스트」의 가치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마음 속 페스트를 발견함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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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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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은 아니고, 한 편의 따뜻한 드라마.
엄청난 몰입감을 기대하고 펼쳤는데 예상보다 밋밋해서 아쉬웠다.
작가가 나이가 들면서 글이 확실히 착하고 유해져버렸다.
(ㅠㅠ)
책 마케팅이 좀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녹나무의 비밀을 파헤치는 스릴러에 엄청난 감동이 더해진 소설 처럼 예고했었는데, 막상 펼쳐보니 흥미진진한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었다.
감동은 있지만 엄청난 전율이 있는 감동이 아니라 잔잔하게 스며드는 감동이었다.
나쁘지 않은 스토리와 따뜻한 주제와 결말이었지만 긴박한 스릴러를 기대하고 읽어서 그런지 중간중간 계속 텐션이 떨어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흥미’에 초점을 두고 읽는 소설이라, 이렇게 흥미도가 조금이라도 낮아져버리면 그냥 밋밋한 느낌만 남아 버린다.
애초에 잔잔한 감동의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봤다면 이런 아쉬움은 안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계속 ‘뭔가가 더 나오겠지.’ ‘뭔가 한방이 있을거야.’ 기대를 하면서 읽다보니 결국 결말에서 아쉽다는 생각이 크게 남았다.
그냥 작가가 초기작들처럼 냉철하고 좀 차가운 글을 계속 썼으면 좋겠다.
그게 훨씬 어울리는 작가인데, 너무 착하고 따뜻해진 작가가 개인적으론 좀 아쉽다. 여러모로 깊이가 얕아진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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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 - 수상 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7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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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작가의 <저녁의 구애>, 이장욱 작가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 강화길 작가의 <호수— 다른사람> 3편이 제일 괜찮았다.
두 번씩 읽어야 이해가 더 잘되는 모호하고 어려운 작품들이긴 한데, 한 문장 한 문장 찬찬히 곱씹듯 읽어보니 묵직한 문학적 기쁨이 느껴졌다.
젊은 작가상이 어떤 작품을 선호하는지 알겠다.
명확하게 솜씨가 좋은 글에 높은 점수를 주는 듯하다.
‘뛰어난 글솜씨’를 자랑하는.
어두운 분위기에, 생각을 남기는, 어딘가 모호한 끝맺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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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산다는 것 - 융 심리학으로 보는 남성의 삶과 그림자
제임스 홀리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더퀘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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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제임스 홀리스‘라는 작가가 여러 철학가와 작가의 말을 분석하고 연구해 ‘남자‘라는 종족을 해부해놓은 책이다.
사실,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를 길고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했다 볼 수 도 있겠다.
어머니 콤플렉스, 성장과정에서 지켜본 아버지의 모습, 성 역할에 대한 부담감 같은 것들이 현시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잘 생각해보면, 여자들은 ‘여자다움‘을 강요받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고 운동하는 것에 반해 남자들은 ‘남자다움‘ 강요받는 것에 대해 크게 들고일어나지 않는 편이다.
남자들이 태초부터 짊어진 ‘가장으로서의 무게‘같은 책임감은 여자가 ‘여자다움‘ 강요받는 문제 보다 어쩌면 더 심각하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여자는 자기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볼 줄 알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 알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자기 내면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데 있어 소심한 태도를 보인다.
요새 흐름으로 보면, 여자들은 ‘여자니까 치마 입어!‘라는 말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적극적으로 기분 나빠하는 태도를 취하는 반면에
남자들은 ‘남자니까 형광등 갈아야지!‘라는 말에 그냥 별 불만 없이 당연히 ‘남자답게‘ 수긍하는 분위기다.
‘여성 해방 운동‘이 성행이라면 ‘남성 해방 운동‘도 같이 성행해야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에 비해 끝까지 그 ‘남자다움‘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한다.
아이러니컬하다.
이 책은 그 이유를 남자가 가진 어머니 콤플렉스에서 주로 찾고 있다.
아버지 결핍증에 대한 이야기도 중간중간 나오지만, 전반적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실 뭐 이건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든 남자든 부모의 역할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 까지의 성격과 삶을 결정하기 때문에
꼭 ‘남자‘에만 편중된 문제로 볼 필요 없이 ‘인간‘ 문제에 초점을 맞춰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책이 대략 280페이지 정도 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같은 말의 반복 같아서 조금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남자를 좀 깊이 있게 알고 싶은 여자들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가 읽어보면 더 도움이 될만한 책인듯.
결론적으로 ‘역시 남자는 애야...‘ ‘잘 보살펴 줘야지‘ 하는 모성본능이 깨어난 건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정서적으로 나약한 존재라는 게 더 정확하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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