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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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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아빠 허리까지 오던 시절, 산수유 나무를 심었다.
아파트와 도시에서 나고 자라 나무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없이 그저 ‘식목일 행사’의 명목으로 심었던 나와 가족의 첫 나무였다.
그 후 약 17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 20대 중반이 되었고 다시는 그 나무를 볼 수도, 돌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나무는 당시 살던 서울의 한 아파트 아래 화단에 심었었다. 처음엔 별다른 감흥 없이 심게 된 나무였는데도 나중에는 그 아래에서 사진도 찍고, 이름도 붙여주고 하며 막 태어난 동생 대하듯 애정을 듬뿍 주게 되었다.
그렇게 그 곳에서 7살을 보내고, 10살을 보내고, 13살을 보내고, 그 곳을 떠났다.
지금은 그 나무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다. 아빠,엄마와 함께 건 우리의 이름과 우리 식구가 된 나무의 이름을 적었던 플라스틱 판으로 된 목걸이는 여전히 그 곳에 있을지, 어디론가 사라졌을지 알 수가 없다.
그 나무를 떠날 때 나는 아무런 작별인사도 할 수가 없었다. 6년을 다녔던 학교와, 교목이었던 느티나무에게도 인사를 하지 못했고, 등하굣길을 지켜주던 그 수많은 나무와 꽃들에게도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별로 좋지 않은 문제로 그 곳으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떠난 뒤, 아빠가 돌아 가셨고, 혼돈의 사춘기를 보냈고, 여러 애인을 사귀었고,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무슨 무슨 나무 이름이 들어간 동요를 흥얼거리던 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나무들은 점점 내 안중에서 사라졌다.
길가에 늘어 서 있는 벚나무들을 봐도, 은행나무들을 봐도 허공 보듯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무미건조한 하나의 호모사피엔스가 되어버렸다.

이 책을 처음 펼치고 ‘뿌리’장을 읽는 초반까지는 책의 느린 템포에 좀이 쑤셔 그야말로 꾸역꾸역 읽고 있었다.
두꺼운 분량에 갈 길은 먼데 한 바닥 읽는 것도 버거운 지경이라 읽으면서도 이 곳이 도서관인지 지구인지 나무 뿌리인지 흙인지 숲인지 달나라인지 도무지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중간에 내릴 수 없는 기차에 탄 듯 약간은 멍한 상태로 글을 읽어내던 중, 딱히 어떤 대목에서 부터라고 말하기 힘들만큼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터 이 책에 빠져버렸다.
뭐에 홀린 듯 ‘꼭 끝을 봐야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뭔가를 자각하게 되었고,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내 삶에서 멀어진 줄만 알았던 나무가 사실은 가장 가까운 곳에 늘 있었다.
20 몇 년째 내 손에 거의 항상 들려있던 책도, 공책도, 색연필도 전부 나무라는 걸.
때로는 연인과 웃으며, 때로는 큰 상실감에 울먹이며 걷고 지나쳤던 그 모든 곳곳에 나무가 있었다는 걸. 초등학생도 다 아는 그 당연한 사실들을 이제서야 새롭게 자각한 것이다.
곳곳의 감동을 매마르고 무지한 나는 늘 그냥 지나쳤고, 책을 펼치자마자부터 시작된 누군가의 ‘나무 이야기’에 아무 감정도, 공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나무를 느끼고 바라보는 감동과 즐거움에서 자각이 시작되었다.
책의 인물들은 제각각의 사연과 삶을 통해 나무를 자신만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고, 느꼈고 나 역시 일인칭으로서 그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경이롭게도 책을 덮었을 때는 더이상 나무와 숲과 열매들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나와 너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시작할 때 그저 누군가의 현재와 과거였던 이야기는 인류 전체의 탄생과 끝없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들 곁에는 언제나 나무가 있었다. 수많은 지금이 지나갈 때 그 옆엔 항상 나무가 있었다. 우리들이 탄생했을 때도 있었고, 전쟁이 났을 때도, 끔찍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도, 전기가 발명되었을 때도, 컴퓨터가 생기고 스마트폰이 생겼을 때도 나무가 있었다.
우리 인류는 나무 없이 결코 이렇게 발전하며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해야만 한다.
나무는 인간의 도구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이다. 어린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나무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느끼고 고마움을 느낀다.
동심과 나무는 같은 세계다. 때로는 동심으로 돌아가 나무를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이 책의 인물들은 나무를 택했다. 우리가 나무에게 아낌없이 받은 것들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나무들을 기억해본다. 처음 이름을 지어줬던 산수유 나무, 학교 교목이었던 느티나무, 그림 교실에서 그렸던 뒷 산 밤나무, 한 때 살던 곳 앞에 잔뜩 서있던 벚나무, 제주도에 살던 시절 자주 보았던 귤나무, 어느 시골 마을에 놀러갔다 본 사과나무, 가을이면 마음을 설레게 했던 단풍나무... ... .
나무와 그 나무들에 두고 왔던 내 삶을 돌아보며 이 책의 여운을 마무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의 나무들이 죽고 있다. 누군가들은 나무를 심고, 누군가들은 나무를 죽이고 훼손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책이 꼭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다시 나무에게 돌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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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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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분량은 짧아서 한시간 내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첫 문장부터 흥미진진했고 가독성도 좋아서 술술 잘 읽혔다.
추리소설이겠지 하고 읽었는데, 결론적으로 추리소설이 아닌 우울한 휴머니즘 소설이었다.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닌, 너무 아름답던 언니 해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동생 다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성형 중독에 빠지고, 언니가 죽었을 때 입고 있었던 옷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하고, 명랑하고 순수했던 과거의 표정과 눈빛을 잃었다.
고3의 ‘다 큰 처녀’인 나이에도 속옷하나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던 해언을 다언은 엄마처럼 챙겨왔었다.
책에서 말하길, 해언은 브래지어만 안하는 게 아니라 팬티도 안입고 학교도 다니고 밖에도 돌아다녔다고 한다.
사실 이 대목을 보고 당장은 뭐 이런 여자애가 다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타고난 예쁜 외모와 달리 어딘가 넋을 놓고 사는 듯 하기도 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백치미를 가진 여자로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던 아빠가 일찍 죽고난 뒤, 너무 어리고 순수한 나이에 ‘아빠의 죽음’ 이라는 심오한 문제를 견뎌내다 그때 알게 모르게 생긴 내상이 그녀를 약간 어긋난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듯 해언은 주위 모든 사람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이기적이고 완벽한 미모를 가졌지만, 차가운 성격과 묘한 정신상태로 언제나 동생 다언을 걱정시켰다.
전혀 상반된 이미지의 자매는 학교 내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
다언은 해언과는 전혀 다른 외모와 성격이었지만 공부를 잘했고, 시를 좋아했고, 성격이 참 예뻤던 아이였다. 그녀를 원래 알던 사람의 눈에는 그 사건 이후 완벽하게 자신을 잃어버린 다언의 모습이 안쓰러울 수 밖에 없다.

아까 이 책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휴머니즘 소설이라고 했다.
살해, 복수, 레몬, 공포 같은 키워드가 표지에 떡하니 있으니 당연히 보통의 추리소설이라 예상하고 속은 것도 내 탓은 아니다.
범인이 누구일까? 그래서 그 범인이 왜 그랬나?에 대한 것들에 대한 긴박한 전개는 없다. 그것들은 이 책의 바깥에 있고, 그냥 독자인 내가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일반적인 추리소설 읽듯이 그래서 범인이 누구래? 왜 그랬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책은 지독하게 재미없는 책이다.
이 책에는 ‘공평하지 못한 삶’과 ‘삶의 몽환’만이 담겨있다.
‘질투’라는 무서운 감정까지도 흐릿하고 몽환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읽는내내 작가가 어지간히 우울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책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이런 묘한 아이러니가 이 책의 여운이고, 매력이다.
예상을 빗나간 책이었음에도 문학적 즐거움은 확실하게 있었다. 스토리, 전개, 인물 구성, 문장들, 상징, 색체, 감정 표현 모두 좋았다.
소설을 읽고나서 그 소설을 음악화, 시각화, 추상화 해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 소설로 그려지는 색체들의 조화가 마음에 든다. 검정색, 옅은 레몬빛, 텁텁하게 붉은색, 잿빛들... ... .
독특한 우울감. 우리나라에서 딱 잘 먹힐만한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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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소녀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2
오카모토 기도 외 지음, 신주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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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끌려 그냥 충동적으로 골랐다.
알고보니 장편소설이 아닌 작가 3명의 추리 단편집인데, 이 책의 메인인 ‘단발머리 소녀’ 한 편만 읽고 그냥 접었다.
뒤에 다른 단편들이 의외로 재밌을 수도 있겠지만 별로 기대도 안되고😂😢
일단 메인으로 실린 ‘단발머리 소녀’가 집중도 잘 안되고 별 재미가 없으니... 그냥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단편은 정말 체질에 잘 안맞나보다. 왠만큼 재밌지 안고선 책을 끝까지 못읽겠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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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룸
김의경 지음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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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검색창에 ‘광명’이라고 입력하면 기다렸다는 듯 ‘광명 이케아’가 상위 연관검색어로 랭크된다.
70년대에 일본에 들어왔다 망한 ‘이케아’가 2000년대 이후 크게 성공하며 한국에까지 사업 확장을 시도했고, 당연한 결과로 한국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아마 우리나라 역시 과거였다면 이케아가 이정도로 인기를 끌진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는 꼭 혼수가 아니더라도 가구만큼은 비싸고 좋은 걸 사서 한 평생 사용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내 집 마련 자체가 하늘의 뜬 구름 잡는 격인 요즘은 “고가의 가구로 50년 사느니 이케아로 5년에 한 번씩 바꿔 가며 살고 싶은데”(p.92) 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가치관 역시 현시대 들어 급격히 냉소적으로 바뀌어 ‘나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식으로 변해버렸고, 이런 개개인의 사상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이케아와 다이소가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케아 광명점의 큰 화재성은 단순히 가구 브랜드 하나가 새로 들어온 것이 아닌, 이 시대 젊은 층들의 냉소적인 사고관과 생활방식이 공식적으로 공표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최근 발표된 국내 단편집에 적잖은 실망을 거듭해서 의식적으로 ‘당분간 국내 소설은 읽지 말아야지’하며 피해오고 있었다. 특히 단편집은 더더욱.
그 와중에 우연히 도서관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작가가 처음 보는 국내 작가임에도 누가 먼저 골라갈까봐 조바심을 내며 잽싸게 뽑아 들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버린 것은 오로지 ‘왠지 모를 끌림’이라는 이유 하나 였다.
내 육감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라, 이 책 역시 첫 끌림에 보답이라도 하듯 꽤 괜찮은 여운을 선사해줬다.
단편집임에도 공통된 소재로 각각의 이야기들이 펼쳐져 단편집 특유의 ‘갑자기 시작된 엉뚱함’이 없어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같은 장소가 다른 이야기에서 계속 등장해 흥미로웠다.
첫 이야기인 ‘물건들’에 다이소가 중요한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모든 이야기들에 이케아 혹은 이케아 가구가 등장해 같은 공간에 서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각 단편의 인물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은 없지만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보듯 자연스레 연결되는 느낌이 상당히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이케아 또는 다이소의 값싼 쇼핑을 즐기는 현시대 사람들의 불안과 행복, 가치관을 담백하면서도 세련되게 표현한 작가의 통찰력이 마음에 들었고, 금방 술술 읽히면서도 소소한 감동이 전해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숨은 보석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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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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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현대 상황들의 종합적인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다. 사실상 배경이 일본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한국에서도 크게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다.
허례허식과 허세,사치에 길들여진 젊은층들, 남성과 여성의 수직 구조, 극심한 빈부격차, 인간관계의 삭막함, 가족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개개인의 문제들과, 그 너머의 부동산의 오류와 모순, 매스컴의 문제같은 사회,경제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이 소설 자체는 98년에 완성된 거의 20년전의 소설이고 8,90년대를 중심으로 그 이전의 이야기까지 담아내고 있지만 ‘옛날 이야기’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만큼 지금 시대에서도 일치되고 연결되는 부분들이 많고 그래서 더 등골이 오싹하고 섬뜩했다.
초반엔 전지적 기자(작가)시점의 인터뷰 형태 서술이 조금 낯설고 딱딱했는데, 결론적으론 이 서술방식 때문에 스토리의 묘미가 더 살아났다.
‘전해들은 지식’, ‘입력된 정보’가 ‘실제 체험’으로서 이 책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이 서술구조 자체로서 설명된다.
하나의 큰 사건에 연결된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삶. 현대인들이 아무리 개인주의 삶을 지향한다고 해도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한 나라에 소속된 시민인 이상, 인간끼리 더불어 살지 않고선 절대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랜덤으로 정해진 가족이라는 그 불공평한 관계 역시도 쉽게 떼어내기 힘든 하나의 ‘사회’이자 ‘관계’이다.
양 극에 있을 것만 같은 서로 아무런 관련 없는 인물들과 장소들이 서로를 빨아당겨 한 사건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서 완벽한 개인의 삶은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외면해도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시스템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결코 이기적인 태도로만 세상을 살아가면 안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만 되는 암묵적인 의무다.

세상은 불공평 투성이다. 착한 사람이 죽는 것도 불공평하고, 못된 사람이 오래 사는 것도 불공평하고,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불공평하다. 못된 사람이 돈 많은 것도 불공평하고, 착한 사람이 가난한 것도 불공평 하다. 이 외에도 우리의 삶 곳곳에 수많은 불공평이 자리잡고 있다.
유난히 온갖 불공평을 다 짊어지고 태어나 평생 그 짐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한 불공평 속에서도 나름대로 견디고 극복해내는 사람도 있다.
이 소설에서는 각기 다른 연령층들과 그들 각자의 불공평들을 그려내고,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풀어나간다.
각자의 ‘불공평’과 ‘분노’가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방법과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 사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그 뿌리는 같다.
하나의 커다란 나무 아래 존재하는 수십 개, 수만 개의 뿌리처럼 인간들은 각자 존재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비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이 사회의 법과 질서, 관념에는 오류가 많다.
살인자를 무서워하고 비난하는 것은 사회지만, 결국 그 살인자를 만드는 것 역시 이 사회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살인사건의 실상은, 사회 제도와 관념의 어긋남에 있다.
누군가들이 살해 당한 와중에도 매스컴의 냄비처럼 여기서 들끓었다 식으면 다른 곳으로 참 쉽게 이동해 버리는 인간들의 모습은 사회 속 인간관계의 어긋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씁쓸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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