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원서 읽기를 방해하는 머피의 법칙들  

 

 

 

 

  영어 원서 읽기를 하다 보면 별별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하철에서 원서를 꺼내 읽자 후다닥 일어서서 자리를 옮기던 아저씨.(제가 외국인이라고 오해하신 걸까요? 아니면, 원서에 폭탄이...?^^)
  역시 지하철에서 원서를 읽고 있는데 무례하게도 바싹 붙어 앉아 같이 읽던 아저씨!(이번엔 제가 자리를 옮겼죠. 원서를 이용한 치한?!^^)
  ‘별다방’에서 원서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다가와 총알 같은 속도로 마구 책에 대한 비평을 지껄인 뒤 사라지던 외국인.(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는!)

  뭐... 이런 ‘원서 읽기 관련 에피소드’만 모아 놓은 사이트 같은 거 없나 모르겠어요. ‘원서 읽기 괴담 시리즈’... 이런 거 누가 만들면 대히트를 칠텐데, 그죠?


  좌우간에... 다음의 내용은 제가 영어 원서 읽기를 하는 동안 경험한 ‘머피의 법칙’들입니다. 영어 원서 읽기를 하다 보면 힘든 순간들이 찾아오는데, 어쩌면 제 애환(?)을 들으면서 위로도 받으시고, 재치 있게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으실런지도 모르지요.

  저의 개인적 고통을 읽으면서 뭐... 너무 웃지 마시기 바랍니다.(ㅠㅠ)

 

1. 머피의 법칙 하나
-읽으면 읽을수록 영어 말문은 왜 막혀?

  영어 회화 실력을 늘이고자 원서 읽기를 시작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의 경험으론 영어 원서를 많이 읽는다고 해서 Speaking이나 Writing 실력, 즉, 영어 표현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 전공자들은 잘 아시겠지만, Reading은 지식을 ‘input’하는 활동이므로, 속에 담긴 정보가 ‘output’으로 활용되기 위해선 따로 고된 연습이 필요하답니다. 말하자면, Speaking을 위해서는 죽어라 말하기 연습을 해야 하고요, Writing을 위해서는 또 죽어라 작문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영어 원서를 많이 읽어서 ‘input’의 용량을 그득하게 만들어 놓으면 Speaking이나 Writing 연습을 할 때 아주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거든요. 하지만, 때로는 Reading의 지나친 문어체적 표현들이 생생한 표현을 방해하기도 한답니다. 일종의 부작용인데요, 혼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말을 잘 못하고 더듬거리는 경우랑 비슷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란 말이냐고요...? 뭐, 하는 수 없지요. 영어 원서는 원서대로 읽으면서 Speaking과 Writing 연습은 따로 해야 하는 거죠.

  이거, 정말 피곤한 일이어요. 해야 할 일이 끝도 없다는 느낌... 울고 싶지요. 결국엔 원서 읽기를 포기하고 싶게 만듭니다. 즉각적인 효과가 없는 것. 분명한 결과가 손에 잡히지 않는 것. ‘지금 묘목을 심으면 십 년 뒤에 사과를 먹는다구? 난, 못 기다려!’ 이런 생각들... 이런 생각들조차 어려운 길을 통과해 가는 과정입니다만, 참 힘드네요. 하루 24시간은 너무 짧은 거 같습니다.


 
2. 머피의 법칙 둘
-내가 꼭 필요할 때 사전은 부재 중?

  후후... 방마다 사전 하나씩 다 놔둬야 하나?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만... 살다 보면, 가방에서 전자 사전 꺼내는 30초 동작이 하기 싫을 때도 있잖아요.(ㅋㅋ) 솔직히 말해, ‘사전이 부재 중’인 게 아니라, ‘나의 게으름이 발동 중’인 거죠.^^
 

  이런 불행한 현상을 막는 최선의 방책은, 사전이 곁에 없어도 문제의 어휘를 꼭 집어 두는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저는 연한 색깔의 색연필, 연하늘색이나 연보라빛 종류의 색연필을 가방에 항상 넣어 가지고 다니지요. 문제의 어휘가 발견되면 살짝 밑줄을 치려고요. 원서이건 국내 도서건 감동적인 문장이 나오면 책에 밑줄을 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제겐 이 일이 귀찮은 일이 아니거든요.

  뭐... 가끔 색연필을 깜빡 해서 그 때마다 문구점을 찾다 보니... 집안에 굴러다니는 색연필이 왜 이리 많은가... 흠...^^


 
3. 머피의 법칙 셋
-내가 읽으면 왜 번역서가 안 나와?

  최근에는 이 ‘머피의 법칙’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어서 흐뭇합니다. 제가 읽은 책들이 당황스러울만큼 한꺼번에 마구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원서로 다 읽었으면서 번역서 출간에 왜 그리 관심을 가지냐고요? 그야, 제 가족과 친구들 때문이지요.(ㅠㅠ)

  영어 원서로 책을 읽으면 가장 난처한 부분 하나가 공감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일이 뭐, 읽었다고 뽐내려는 일은 아니지만, 가까운 벗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독서 후기를 나눌 수 있고 토론도 할 수 있다면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것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니...

  저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어서, 영어 원서를 읽는 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습니다. 서로 관심 분야의 책을 사줘가며 열심히 읽고 있지요. 하지만, 모든 친구에게 영어 원서 읽기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

  제가 원서로 기막힌 작품을 읽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감탄하면, 친구들이 읽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고... “야, 차라리 니가 번역을 해라.” “그럴까?” 뭐, 이러다 보면 세월이 그냥 마구 흐르는 거지요. 뭐, 이런 형태가 끝없이 반복된다고 할까요, 후후.

  기다림에 지친 벗들을 위해 번역이 보다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국내 번역 작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저, 쉬운 일 아니라는 거, 너무 잘 알아요.^^

 

4. 머피의 법칙 넷
-내가 읽으라면 왜 절대 안 읽는 거지?

  정답을 알고 있기는 합니다. 진실을 직면하기가 무서울 따름이지요.^^

  ‘내가 추천하는 책들은 대개 너무 지루하고 너무 암울하고 너무 비실용적인 것일까...?’(조마조마. 불안불안.)

  흠... 하지만, 위안 거리가 하나 있기는 해요. 저 자신조차도 누가 침 튀기며 책을 권하면 일단 멈칫 한다는 거죠. 아마도, 학창 시절 선생님들에게 이른바 ‘양서’들을 너무 강요당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이거 읽어 봐!’ 하면, 거부감부터 딱 치미는 심정. 어린 왕자, 갈매기 조나단, 노인과 바다, 죄와 벌, 으으으 셰익스피어. 초등학생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10대 위인들, 중학생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세계 명작들, 고등학생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한국 단편들, 기타 등등등.

  ‘추천’이 아니라 ‘우회적 억압’이고 ‘얄팍한 협박’이었죠. 
 

  하지만, 도시락 싸들고 따라 다니면서 정말 이 책만은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ㅠㅠ)  

 

    내가 읽으라면 절대 안 읽으니까 읽지 마라고 하면 읽을까?




5. 머피의 법칙 다섯
-‘책’ 친구가 생기면 ‘사람’ 친구는 사라져?

  독서는 외로운 사람의 일인지도 모릅니다.
  삶에 다치고 고단할 때 힘도 얻고 지혜도 얻고 때로는 도피처도 얻는 거지요.
  ‘사람’ 친구에게 지쳤을 때 ‘책’ 친구는 편안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 원서 독서는 외로운 사람을 더욱 외롭게 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한글 독서와 달리 원서 읽기는 몰입에 가까운 집중력을 요구하니까요. 주위를 돌아볼 틈을 안 주지요.

  때로... 영어로 책을 읽으면 연인의 투정을 참거나 친구의 시비를 받아줘야 합니다. ‘잘난 척’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잘난 척’을 하고 있다고 온 사방에 광고 내는 일, 그게 바로 영어로 책을 읽는 일이니까요. 불편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읽고 있는 원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원서를 읽는 사람이 지켜야 할 매너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영어 민주 공화국입니다.
  따라서, 영어 실력이 사회 계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슬픈 현실 때문에 영어로 책을 읽으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증오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지하철에서 영어로 책을 읽으면 주위 모두의 시선이 제가 들고 있는 책 한 권에 모아지기도 합니다. 김 훈 씨의 ‘칼의 노래’를 들고 있으면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을 시선이 영어 대중 스릴러 한 권에 꽂힙니다.

  가끔은 참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어라는 언어가 만들어낸 깊디깊은 편견의 참호 안에 나 홀로 숨죽이고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그 참호에서 허리를 펴고 정직하게 걸어 나가면 곧바로 적의 총알에 맞아 죽을 것 같습니다.
  그 적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참호의 어두운 공간 안에서 읽고 있는 이방의 책 한 권이 유일한 나의 친구일 때가 있습니다.

  영어로 책을 읽는 일은 분명 외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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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크만 2010-05-19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앨리슨 위어의 Henri VII: The king and His Court <엘레오노르 아키텐과 쌍벽을 이루는 어려운 문장이죠... 다 읽으려면 까마득~~> 를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하여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기억이 납니다. 반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분들의 시선에 제 책에 시선이 몰리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 앞 표지에 헨리 8세의 초상화가 너무 선명한 탓이겠죠? ^^

시혼 2010-05-19 07:02   좋아요 1 | URL
ㅎㅎ 이제 저는 좀 초연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요즘은 지하철에서 원서를 읽는 분들을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나이가 들수록 몰입의 힘이 강해진달까요...ㅎㅎ 외로움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호잇 2010-08-06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글을 재밌게 잘 쓰시는 듯 해요ㅋㅋㅋ
시혼님께서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읽어보라고 하고싶은 책을 저에게 알려주세요~!!
저는 읽을께요!!

시혼 2010-08-07 06:55   좋아요 1 | URL
호잇님, 반갑습니다!^^ 제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권하고픈 책들은 제 리뷰에 별표 5점을 받은 책들이랍니다. 하도 많아서 일일이 책을 거론하긴 힘들겠구요...ㅎㅎ 제 공간에서 앞으로 자주 뵙길 고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