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 이재운 역사소설
이재운 지음 / 시그널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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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johnpotter04/221757974087

장영실의 인생을 소설로 만들다


 조선의 대표 과학기술자 장영실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소설로 각색했다. 세조 때 제작을 시작한 <경국대전>이 세종 때 등장하거나, 현대 용어인 '과학(科學)'이 사용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장영실의 아버지가 '중국인'이라고만 기록했지만, 저자는 고려 문신 장성휘가 장영실의 아버지라는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을 그대로 가져왔다. 저자는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작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증 오류가 많이 보여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이건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장영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는 점이 원인이다. 실제 사실과 다르게 사건을 꾸미고, 고증은 포기했어도 재미는 살려낸 영화 <천문>과 달리,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인물의 대화를 첨부한 정도다. 소설의 묘미인 '갈등, 대립, 해소' 같은 장치가 전혀 없다.


자주 조선의 상징, 세종과 장영실


 조선하면 극단적 사대주의를 연상하지만, 조선 초기 사대주의는 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대주의는 조선 중기 사림(士林)이 집권할 때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해서 임진왜란 때 절정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 사대주의는 실리적 목적이 강했다. 조선 초기에는 "발전된 문물을 본받자!" 정도로 고려처럼 외왕내제(外王內帝)의 성격이 강했다. 외왕내제는 당시 동아시아 질서의 핵심이었다. 초강대국인 중국에 제후국을 표방하지만, 국내에서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던 시절이다. 현재 UN이나 NATO에 가입해 미국의 질서에 따르지만, 각 나라가 독자적 주권을 누리는 것과 같다. 조선도 외왕내제를 채택한 국가였다. 태조, 세종같이 황제만 사용하는 종(宗)·조(祖) 묘호(廟號)가 증거다. 독자적인 글자인 한글을 개발하는 등 조선은 시작부터 자주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의 전성기와 자주성은 시대를 같이 한다. 중국의 문화가 아닌 우리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찾던 시기가 전성기라 불리는 세종과 정조 때였다. 전성기는 군사력, 재력 같은 외적 요인이 성장하는 게 표면에 드러나는 시기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전성기는 '자주성'이라는 내적 요인이 필수적으로 자리 잡아야 가능하다는 점을 모른 채, 군사력과 영토 같은 외양만 기억한다. 북한의 영향으로 '자주'와 '주체'가 부정적 어휘로 받아들이지만, 실제는 국가 발전의 핵심 요소다. 타인에 의존하면 그나마 가진 것도 털리는 게 인간관계고 국가관계다. 소중한 건 스스로 지켜야 한다. 발전은 스스로 하는 거다. 그들의 장점을 배우되, 그들에게 의존해선 안 된다. 겉으로 고개를 숙일지언정, 자주성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자주성을 잃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지난 역사가 고스란히 보여줬다.


 오늘날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서서히 자주성을 잃고 있다. 약소국의 한계라는 핑계로 서서히 우리 고유의 풍습을 미국과 중국 같은 강대국의 풍습이 대체하고 있다. 단오절 같은 민속 행사는 살려내지 못하고, 할로윈 같은 미국의 풍습은 본국 못지않게 화려하다. 우리나라의 이익이 아닌 미국과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공식 석상에 등장한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표어를 내걸면서 역사를 망각하는 현대 사회가 마냥 좋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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