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시간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어릴적 외갓집 마당가에 피어 있던 다알리아를 오래 들여다보던 시간이 내게는 있다. 그 시간들이 여름이면 내 혈관 속을 쿵쾅거리며 뛰어노는 것이다. (P.11 )
할머니 어디 가요?
-예배당 간다
근데 왜 울면서 가요?
-울려고 간다
왜 예배당에 가서 울어요?
-울 데가 없다
김환영의 동시 <울 곳>이다. 짧은 시 한 편으로 먹먹해진다. (P.12 )
꽃이 입이 없어서 말 못하는 줄 아나? 꽃은 향기로 말하지.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건 뭐지? 그건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는 뜻이지. 그런데 말을 들었는데도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뭐지? 그건 들키고 싶지 않아서야. 숨기고 싶은 게 많다는 뜻이지. (P.19 )
얘들아, 창가에 쌓이는 햇볕도 아깝다. 햇볕을 끌어 모아 어두운 그곳에 보내고 싶다. 얘들아, 어서 돌아와 이 못된 국가의 썪어빠지고 무능한 어른들을 꾸짖어라. 어서 일어서서 돌아와라. (P.20 )
밥상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밥상을 빼앗는 사람이 있다. 밥이 하늘이다. 밥을 퍼주는 사람은 하늘을 퍼주는 사람이지만 밥을 가로채는 사람은 하늘을 가로채는 사람이다. (P.47 )
내다버려야 할 책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내가 아직 책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 책읽기의 완성은 그 책을 버리는 것. (P.55 )
나는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햇빛이 미끄러져 내리는 나뭇잎의 나뭇잎 앞면보다는 뒷면의 흐릿한 그늘을 좋아하고 남들이 우러러보고 따르는 사람보다 나 혼자 가만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더 사랑한다. (P.53 )
달력에 아무 표시도 없는 좋은 날이 내게도 있다. 오늘이 아무것도 없이 하얗게 비어 있는 날이다. 이런 날은 복 받은 날이다. 내 몸을 아무도 저리 가라 하지 않고 이리 오라 하지 않는 날이다. 마음아, 너도 징징거리지 말고 좀 쉬어라. (P.62 )
예천을 다녀왔다. 회룡포 햇볕에 팔뚝을 잃었고, 우리밀칼국수를 먹었고, 흑응산을 걸었고, 구절초를 보았고, 따끈한 날달걀을 먹었고, 고구마를 캐보았다. 영주댐 건설로 망가지는 내성천을 보며 속으로 울었다. 고향은 왜 돌아온 탕자를 울게 만드는 곳인가. (P.116 )
분명히 어두운데 왜 어두운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어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과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124 )
어른이어서 미안하다. 책임지지 못해 미안하다. 어둡고 깊은 곳에 혼자 내버려둬서,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같이 살아 있지 못해서, 우리만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 (P.130 )
아이들아, 부끄러운 어른으로 그래도 말을 걸고 싶구나. 잠깐만 나와 볼래. 쉿,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몰래 가는 거야. 허락도 허가도 필요 없어, 망설일 필요도 없지. 우리 제주도로 가자. 내가 데려다 줄께. (P.131 )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최승자의 이 귀절을 처음 만났을 때는 20대 초반이었다. 수십 차례 가을이 올 때마다 이 도발적인 언어가 고요하게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기는, 개 같은 가을이다. (P.146 )
아침 일찍 일어나 해장국 천천히 떠먹듯이 전동균의 새 시집 <우리처럼 낯선>을 읽었다. 시인의 목소리가 겸손해서 촉촉한 물기에 젖어 있는 것 같다. 나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P.151 )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경우,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연애라고 하고, 가장 더러운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P.159 )
백석 시를 읽다가 함박꽃 만났다. 지금쯤 어느 산기슭에서 한창 피겠다.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데 북한에서는 나무에서 피는 난 같다고 해서 목란꽃이라 한다. 이 꽃이 북한의 국화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함박꽃 한번 못 보고 6월이 가나. (P.160 )
쓰르라미 소리가 내 귀를 썰고 있다. (P.161 )
이 가을볕 몇 트럭 택배로 보낼 테니 창고 넉넉한 분들 연락주시기를. (P.195 )
오늘 저녁 먹고 싶은 게 있다. 열무 생채에다 참비름 무침, 가지 무침 넣고 고추장과 청국장으로 싹싹 비벼서 입에 크게 떠 넣는 것. 고등어구이 한 마리 있으면 금상첨화. (P.234 )
사람은 떠나고 짐승만 남았다. (P.244 )
-안도현 雜文, <잡문>-에서
이런 날이 있다.
아침엔 주말이니까, 너무 멋지지만... 쪽수는 318쪽 판형
310*245mm 1115g의 후덜덜한 책을 오늘은 꼭 독파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로열보덴스텐 텀블로가 사은품으로 딸려
도착한 <안도현의 잡문>을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 몇 장
읽는 순간...갑자기 마음이 쿵 내려 앉으며 내내 읽어갔던.
이 책은, 시인이 몇 년 전부터 그 편리하다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컴퓨터를 통해 2012년 봄부터 시작한 트위터에다
쓴 글들이다. 트위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수많은 일이 지나
갔다고 나온다. 시인이 발 벗고 나서서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는
선거에서 패했고, 시인은 생전 처음 검찰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야 하 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시를 쓰지 않겠다고 작정했고, 그런 상황은 진행중이라 한다.
가끔 앞날을 예측하는 한 후배는 이것을 접으라고 권하기도 했다지만, 140자 안쪽으로 글을
써야 하는 트위터의 한계가 바로 트위터의 가능성이면서 자신에게 딱 맞는 형식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접지 않고 글을 쓴다 한다.
3년 동안 트위터에 올린 글 1만여 개중에 244꼭지를 고른게 이 책이다.
안도현 시인이 어릴 적에 쓰지 못한 일기를 새롭게 쓰는 기분으로, 시를 쓰지 않고 지내는 떫은
시간에 시를 쓰는 마음으로 쓴 글들을 추려 모은, 마치 하이쿠,같기도 한없이 짧고도 투명하
고 얼얼하기도 하고, 가을볕과 바람에 날리는 가을잠자리 같은 책을 읽으며 문득, '내 두개골
사이로 차갑고 높고 빛나는 가을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가을 어떤 날이다.
술 한 잔 하고 싶은...딱 그런 맘인데 딱히 마실 술도 없고 지금은 함께 마실 사람들도 없으므로
저녁때나, 바람을 찬찬히 읽듯 그렇게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