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 이젤

 

 

 

 

 

 

                   물감은 소리를 머금고 감춘다

                   빛을 통과시키고 빛나듯

 

 

                   붓을 드는 순간 꽃은 떤다

                   물감에 배인 꽃의 입술

                   벗은 어깨가 흘러가는 곳으로

                   한사코 따라나서보지만

 

 

                   따라갈 수 없는 너머를 가리고 있는 붓은

                   문이거나 장막이다

 

 

                   성(城)의 운명은 무너지는 것

                   감열지처럼 지나간 흑백으로 남은

                   꽃이 제몸으로 예언한

                   물감에 점령되는 날이 온다

 

 

                   성벽을 성벽으로 감춘 그림

                   손수건처럼 잡아당기자

                   에펠탑을 이젤로 쓴

                   몽마르트 언덕이 어깨를 드러낸다

                   빛이 굳어 이젤이 된

 

 

                   사크레 쾨르 성당이 마리아처럼 서 있다  (P.88 )

 

 

 

 

 

 

                      발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 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P.60 )

 

 

 

                          -권기만 詩集, <발 달린 벌>-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

                         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들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

                         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

                         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

                         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

                         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P.48 )

 

 

 

 

 

 

 

                            연애 간(間)

 

 

 

 

 

                           점과 점이

                           마음

                           내어

                           선을 이루지만,

 

 

                           참새라도 앉으면

                           여리게 떨

                           리는,

                           저 전깃줄. (P.144 )

 

 

 

 

                            -이하석 詩集, <연애 間>-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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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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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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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0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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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08: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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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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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9-12 08:46   좋아요 0 | URL
와- 엄청 분위기 있어요. 스리토메인은 저렇게도 참 예쁘군요.

appletreeje 2015-09-12 10:31   좋아요 0 | URL
예~스리토메인 너무 예쁘구요~ 멋지고 우아한 리산셔스 암바와
다알리아, 스카비오사들의 클래식한 컬러에 살짝 포인트를 준 빨강 천일홍으로
이 번주 꽃은 참 회화적인 부케였어요~~
낮에는 꽃으로 밤에는 향초로~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늘 고맙습니다!

2015-09-14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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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4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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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작지 않은 마을 하나를 상대로 사기 치고 도망갔다는 수프 남자 이야기를. 하지만 그 떠돌이가 실은 오래전 그 마을에서 이 집 저 집 오래도록 돌아가며 노역을 해 주고 임금을 받지 못한 자였으며

변복하고 나타나 보복을 한 거라는 속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 그럼에도 그를 사기꾼으로 알던 너나 네 가족 모두, 따지고 보면 착각에 빠진 황제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소녀는 몰랐던, 그보다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진실을 이제와서 알려 주는 남자가 하나도 고맙지 않을뿐더러, 어찌어찌 살아남은 마을 이웃도 아닌 외부인인 듯한 남자가 왜 떠나지 않고 자기 옆을 맴도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설마 당신이 수프 남자냐고 묻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대로 우리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누구네 집에든 으례 생기는 억울한 일이 이번에는 우리 집에 왔을 뿐이라고 체념하면 되나요? 하지만 온

 

 

마을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경우가 또 좀 다르잖아요. 우리는 시신을 묻은 게 죄라고 치고 마을 사람들은, 소 말 닭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남자는 쇠스랑을 땅에 집고 몸을 일으킨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서로 목적은 다를테지만."

 그가 돌아서서 소녀에게 내미는 한 손은 거칠고 못이 박인 데다 피 냄새가 난다. 소녀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마도 너와 네 가족에겐 잘못이 없을 거다. 잘못이라면 하나, 뽑은 순무를 굳이 갖다 바치려던 것이지. 바란 것 달리 없다 하지만 실은 세금의 일부라도 어떻게 해 볼 요량으로 말이야. 어째서 우리는 좋은 것, 큰 것,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을 마땅히 황제에게 갖다 바치는 법이라고 인식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없어? 애당초 황제가 저 반도까지 뻗어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전쟁 따위 없었다면 다른 세상에서 그런 귀신들이 몰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근본적인 문제를 찾기보단 어차피 내야 할 세금 이걸로라도 때우자 싶었던 생각이 안일했을 뿐이고, 그 안일한 의도와 그걸 수용하는 자의 아량에 차이가 있었던 거겠지."

 그저 기진한 상대를 일으켜 주려는 뜻 외에 다른 의도는

 

 

없을테지만, 소녀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공을 튕겨보내듯 바라보기만 한다. 상실감으로 온몸에 금이 간 이에게 어디서부터 올이 풀렸는지를 충고하는 일은 부질없다.

 "그러고 앉아 있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시간은 꺾이지도 역류하지도 않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도모해야 할 것은 등뒤가 아닌 눈앞에 있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곳에는 각자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무언가란 대개 땅이거나 그 땅에서 난 작물, 그 땅에서 기르던 동물들, 또는 그 땅에 붙어살던 가족이라 한다.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일구어 씨를 뿌리고 거두면서도 남의 것임이 당연했던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을, 각자 다른 이유로 잃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보습을 갈고 있다 한다. 그들은 머지않아 맥박의 움직임에 귀 기울일 테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일어날 것이다. 이 마을에서 무사히 살아 나간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주로 어린이와 젊은이들인데- 세금 도둑들의 삶터에도 똑같이 불을 놓겠다는 결심으로 혼절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라 하며, 그는 몇몇 일행과 함께 마을에 아직 쓸 만한 식량이나 물건이 남은 게 있는지를 찾으러 왔다가 예상보다 심각한 마을의 상태를 보고 원래 목적을 접어 둔 채 곳곳에 굴러다

 

 

니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한다.

 소녀는 미소한 간지러움에서 시작하여 금방이라도 살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은 근육의 움직임을 느낀다. 분노인지 희망인지 모를 그것은, 동생을 버린 것을 자각한 뒤 처음으로 꿈틀거리는 감각이다. 소녀는 오래지 않아 내부에서 외부로 솟아오르는 파열음을 듣게 될 것이다. 비로소 소녀는 눈앞의 남자와 그의 손이 실제임을 믿는다. 팔을 뻗어 그것을 잡자 거칠고 난폭한 현실이 손안에 뿌듯하게 만져진다. 소녀는 그리로 다가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의 일행인 듯한 여러 사람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 가야 할 곳, 보습을 대기 위한 준비를 할 곳으로 빠르게 걷는 소녀의 찢어진 치맛자락 뒤에 한 조각의 뼈가 붙어 떨어질 듯 말 듯 달랑거리지만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P.120~123 ) /  [카이사르의 순무].

 

 

 

 

             -구병모 소설, <빨간구두당>-에서

 

 

 

       쫀득한 서사와 조용하지만 깊은 사유, 그리고 세련된 판타지소설을 읽는...지금 이 시  

       간들이 꽉차게 좋은, 9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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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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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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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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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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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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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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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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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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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화가

 

                        정희성

 

 

 

 

 

              가을 물살에 꽃 한 송이 띄워 보내느니

              사무쳐 그리는 이 있음을 그대 아시거든

              초승달 같은 눈짓으로 시늉이나 해주시게  (P.90 )

 

 

 

 

               -<고래 2015 >-에서

 

 

 

 

 

 

             고맙습니다~!!!^^
             손수 맞춤형으로 만드셔서 보내주신, 저 어여쁘고 아름다운

             술병과 술잔들~평생 행복하게 간직하고 잘 쓰겠습니다~*^^*

             글고, 지금 이 시간에도 행복한 시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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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9-03 01:49   좋아요 0 | URL
정갈하고 단아해보입니다~~

appletreeje 2015-09-03 02:36   좋아요 1 | URL
예~ 제가 사진을 못 찍어서 그렇지 훨씬 더 정갈하고 단아한 꽃들과
술병과 술잔들입니다~~
오늘 아침 미역국을 먹은 시간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아름다운 선물들
덕분에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지금 행복하자님께서도 오늘, 아니 이젠 어제~ 정말 행복하셨지욤~?^^
고맙습니다!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책읽는나무 2015-09-03 11:07   좋아요 0 | URL
생일이신가요??
미역국을 드셨다길래^^
9월다운 꽃과 선물인 것같습니다
단아하고 분위기있어요

appletreeje 2015-09-03 11:32   좋아요 1 | URL
어제가 생일이었어요~^^
예~ 단아하고 분위기 있고 참 좋아요~~
책 읽는 나무님~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책읽는나무 2015-09-03 16:27   좋아요 0 | URL
어머낫!!
생일 축하드려요
많이 늦었지만요^^

appletreeje 2015-09-03 22:2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당~~!!!!!!!^^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욤~~*^^*

2015-09-03 1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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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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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9-03 11:38   좋아요 0 | URL
아침에 미역국이라면 생일이신가요? (책읽는나무님 도플갱어ㅎㅎ)
앗, 어제가 생일이셨군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가을에 딱 맞는 귀한 선물 너무 근사하네요. 부럽습니다*^^*

appletreeje 2015-09-03 12:14   좋아요 1 | URL
어제였어요~~ㅋㅋ
축하해주셔서~~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예~ 정말 가을에 딱 맞는, 귀한 선물을 받아서 감사했어요~~
단발머리님께서도~ 오늘 하루,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 되세요~~*^^*

푸른희망 2015-09-03 15:17   좋아요 0 | URL
앗 생일이셨군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음.. 요샌 생일주간이라고 하니.. 이번 주 내내 행복하시길....

appletreeje 2015-09-03 16:02   좋아요 1 | URL
히히~~고맙습니다!!!~~
이번 주 내내~ 행복하겠습니다~~
푸른희망님! 좋은 푸른가을 오후 되세요~*^^*

2015-09-03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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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 16: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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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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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 2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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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4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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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4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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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 2015-09-04 16:27   좋아요 0 | URL
좋은 일은 나눈다고 하였으니, 저 역시 생일 축하 드려도 될까요?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매일매일이 생일처럼 행복하세요

appletreeje 2015-09-04 17:25   좋아요 2 | URL
아이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매일매일이 생일처럼 행복하겠습니다~
caesar님께서도~~즐거운 금요일, 행복한 주말 되세요~~*^^*
고맙습니다!

2015-09-04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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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5 0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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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5 1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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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5 2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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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을 사듯이 정기적으로 사과를 산다. 열흘에 한 번 쌀 4킬로그램을 사듯이, 사과를 2분의 1 상자 혹은 한 판을 산다. 배를 사러 갔다가, 자몽을 사러 갔다가, 키위를 사러 갔다가, "이 사과는 어디 사과예요? 얼마예요?" 하고 묻고 만다. 다른 과일들은 냉장고 속에 있음을 위주로 생각하는데, 사과는 없음으로 인지한다. '참, 사과가 떨어졌지.....' 이런 식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물 한 잔과 사과 반쪽을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잠이 덜 깬 육체에 사과의 차가움, 사과의 단단함, 사과의 달콤함을 투여한다. 그러면 육체는 매번 사과의 진지함에 놀라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받아들인다. 그렇군, 어쩔 수 없지,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과에 의해 깨어난 몸은 다시 모이고 작동하고 느끼기 시작한다.

 

 사과에 대한 최초의 강렬한 기억은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나보다 책을 많이 읽고, 당시 내 눈에는 데미안처럼 보인 반 친구가 어느날 아파서 결석했다. 서로를 의식하기만 하던 그 친구를 찾아갔던 것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용기의 표출이었다. 나는 병문안에 어울리지도 않게 무턱대고 사과를 사 가지고 갔다. 독감으로 친구는 혼자 누워 있었고 부모님은 장사를 하러 나가신 상태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가지고 간 사과로 차를 끓였다. 사과 향이 퍼지던 집 안, 주전자에서 끓던 물소리, 한참을 그 낯선 공간에 서 있던 느낌, 그런 것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친구와는 중학 시절 내내 특별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친구보다 사과가 더 특별했나 보다. 이후 나의 양식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과의 주기로 1년을 생각하는 버룻이 들었다. 늦여름 8월 하순, 아직은 더위가 한창일 때 조생종인 아오리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시장 귀퉁이에서 초록빛 아오리를 보면 해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바로 한 봉 사 와서 한 해의 첫 사과를 음미한다. 한 줄기 새벽 여명의 맛이다. 그렇게 몇 번 아오리를 사 들고 귀가하다 보면 얼마 안 가 그 초록빛을 밀어내며 붉은색 사과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바로 홍로나 홍옥, 양광, 시나노 스위트 들이다. 골목과 거리는 이 불타오르는 사과들로 채워진다. 9월에서 11월에 이르는 기간은 온갖 고혹적이고 맹렬한 사과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홍옥의 거의 악마적인 붉은색이나 시나노의 뇌를 얼얼하게 만드는 깊고 치명적인 단맛은 장렬하기만 하다. 또한 그들과 다른 매력으로 겨울에 먹는 찬 부사는 언제나 생의 염결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신맛과 단맛의 비율과 치밀도가 만들어내는 사과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에 매번 감동하느라 생활은 지루할 틈이 없다.

사과에 대한 시를 몇 번 썼지만, 아직도 사과에의 현혹을 보여주기는 미흡한 것들이다. 그중 <사과나무>라는 시가 있다.

 

 

            어제를 살해한 오늘의 태양처럼 빛나고 향기 나는 사과들

         사과는 사과나무를 불태운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이렇게 끝맺는 이 시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데, 어쩐지 오늘은 좀 슬프게만 여겨진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을 감추려 하지 않나 보다.  (P.20~22 )  / 이수명 [사과]

 

 

 

 

               -<당신의 사물들>에서-

 

 

 

 

 

 

 

 

 

 

 

 

                 사과처럼

 

 

 

 

 

 

             사과를 사랑하자

 

             사과처럼 사각사각 아이를 낳았다

 

             사과와 속삭이자 사과 냄새가 났다

 

             잠속에서도 사과 냄새는 휘발되지 않아

 

             누가 사과처럼 날 따 버린거야

 

             반복되는 태초의 연습

 

             이 넓은 지구에다 아이들을 툭툭 떨어뜨리는 사과의 엄마들

 

             어두워도 여긴 사과의 우주

 

             내일이 와도 사과는 날 놓아주지 않아

 

             뱀과 여전히 헤어지지 않아

 

             조그만 아이들이 새카만 사과씨를 품고 지구에서 자란다

 

             사과처럼 구르면서 사과의 발자국을 찍는다

 

             사과가 사람을 홀리던 그때의 사과처럼

 

             어린 사과에게 남은 태초가

 

             사과처럼 다가오고 있다  (P.52 )

 

 

 

 

 

 

                       사과보다 더 많아

 

 

 

 

 

               사과 저 편은 붉다

               노을이야

               사과나무는 하나인데

               사과는 너무 많아

               나무 안쪽으로 흐르고 있는 사과로부터 안 보이게 굴러

               간 사과들까지

               어쩌자고 시인은 시를 사과라 부르고

               그 많은 사과들 틈에 끼어 내장이 하얀 시를 쓰고 있나

               첫사랑은 새파랗게 지나갔고

               나무 왼뺨에 흩날리던 사과꽃은

               여름 내내 사과가 되었지만

               시인은

               깜깜한 가지 사이로

               우두커니 서서 시를 놓친다

 

 

               밤새 쓰다 만 노트 위에 툭툭 떨어진 사과

               사과 아래 그 아래

               공허한 문장들

 

 

               나무는 하나인데

               사과는 너무 많아

               사과보다 시가 더 많아

               사과처럼 떨어지는 재앙조차 갖지 못해  (P.60 )

 

 

 

 

                    -최문자 詩集, <파의 목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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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21 14:10   좋아요 0 | URL
사과.. 하면 신현림 님 <사과여행>이 있어요.
파란 사과를 좋아하는 신현림 시인.

새로운 과일도 즐겁게 먹으면 새로운 마음이 될 테지만
똑같은 과일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먹으면
언제나 새롭겠지요.

사과나무를 여러 그루 심으셔야겠습니다 ^^

appletreeje 2015-08-21 14:41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사과여행> 가지고 있었는데 친구가 빌려가서 안 주네요..^^
페이퍼,에 추가해야겠어요~
정말 신현림 시인은 `사과`를 사랑하시죠~~
사과밭 사진전도 여러 번 하셨구요~
예~어떤 과일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먹으면 언제나 새롭겠지요~

저희집에는 주차장에 꽃사과나무 한 그루가 살구나무랑 동무하고
있어요~ㅎㅎ
언젠가 넓은 땅에다 사과나무 여러 그루를 심고 싶네요!^^

2015-08-21 1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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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1 2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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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5-08-21 21:18   좋아요 0 | URL
읽는 동안 입 안에서 사과향이 퍼지는 느낌이에요. 어우 시어라~^^; 요즘은 이가 안 좋아서 잘 안 먹지만 어느 해에는 아오리를 하루에 두세개씩 아그작 아그작 먹었어요. 사과 씹을때 아삭아삭한 소리는 언제나 좋아요!ㅎㅎ

appletreeje 2015-08-21 21:3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오리는 아직 아무래도 좀 새콤하죠~?^^
좀 있다 아오리가 노랗게 뜨면(?) 과육이 부드러워지고 달아지지요~~
정말~ 사과 씹을때 아삭아삭한 소리는 언제나 좋아요~ㅎㅎ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해피북 2015-08-21 22:28   좋아요 0 | URL
저두 마트가면 과일중에 너댓개 담긴 한봉지의 사과를 사오곤해요 씨가 많아 번거러운 포도나 잘못사면 물탱이인 배나,
빛깔만 좋은 천도복숭아보다 제일 문안하고 언제나 사도 실패할 확률이 적은 사과가 참 좋더라구요 ㅋㅂㅋ, 사과는 저녁에 먹으면 독이라했는데 이 저녁 독을품은 사과라도 한입 베어물고 싶네요^~^

appletreeje 2015-08-21 23: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역쉬~ 해피북님께서는 제가 예상했던 것 처럼
어여쁘고 아름다운 백설공주님이셨군요~!!!^^
해피북 백설공주님~~포근하고, 행복한 밤 되세요~~*^^*

2015-08-22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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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07: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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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0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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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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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18: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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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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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8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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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8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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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9 1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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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9 2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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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0 2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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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0 2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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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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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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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알 것이다

         춤은 어디에서 오는가

         몸 안에서 오는가 밖에서 오는가

         대자연의 수많은 생명들이 내 안에 들어와

         몸을 이루며 영혼의 빛나는 줄기들을 키우듯이

         춤은 그렇게 온다

         저 우주 자연으로부터

         찰나의 불화살이 꽂히듯, 적시며 스며들고

         다가와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네

 

 

         손을 들어 가리키면 꽃이 피어나고

         눈을 내리 굽어보면 슬픔과 기쁨과

         사랑으로 젖어가는 춤

         내 안에, 내 밖에

         파릇파릇 다가오며 반짝이고 있어요

         새벽 강의 푸른 별빛 기억하고 있나요

         내밀어봐요 소중하고 싱싱하잖아요

         손잡아봐요

         당신의 눈빛 속에 출렁이고 있어요

         손짓하고 있어요  (P.82 )

 

 

 

 

 

 

 

              쳇 베이커를 듣는 밤 문을 두드렸던 베짱이

 

 

 

 

 

            문풍지 빠빠라빰 붕붕 옹알거린다

            쳇 베이커를 듣고 있는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울고 있는가

            밤이 깊었는데 문을 열다 우러른 하늘

            별밭에 누가 돌을 던지나

            자꾸 별똥별이 떨어졌는데

            아침 방문을 여니 문밖에 쓰러져 누운 베짱이 한 마리

            미안하다 듣지 못했다

            용서해라 추웠다 살피기 싫었다

            밤새 한여름을 노래하던 세기의 음악가가 생애를 마쳤다

            삶의 현장에서 내몰린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밤 노숙으로 뒤척이고 있을까

            쳇 베이커 누구의 방문을 두드리다 세상을 뛰어내렸는가

            베짱이의 죽음 앞에 쳇 베이커를 올린다

            마이 퍼니 발렌타인을 듣는다  (P.55 )

 

 

 

 

 

                        -박남준 詩集, ,<중독자>-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내 한 시절 뜨겁고 뜨거웠으니

               청춘의 송곳니는 어두운 지붕의

               언저리에 얹혀 있다, 창을 통해 보면

               비가 오려는가, 전깃줄이 흔들리고

               남은 생의 전언이 더 빨리 수신된다

               책상은 빈 맥주 깡통을 닮아서

               오늘 저녁의 일기는 어두워

               넘어질 확률 50%, 쥐 떼만 쿵쾅거리는

               책장을 열면 거기 생의 답이 있다고

               뾰족한 연필심 끝에서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새벽은

               거듭 말하지만, 송곳니처럼 뾰족한 생의 연필심은

               뭉툭해지고, 부러지고, 드러눕고

               이 어지러운 방에서 연필을 깎고 또 깎았으니

               수북하게 쌓인 목질은 나의 허구, 나의 신파

               그러나

               그 누구도 내 생을 열지 않으니  ( P.42 )

 

 

 

 

 

                         -박헌호 詩集, <내 가방 속 동물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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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07: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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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0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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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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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09: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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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19 10:06   좋아요 0 | URL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그대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루를
오늘도 즐겁게 여시기를 빌어요.
아름답게 잘 여셨을 테지요~

appletreeje 2015-08-19 14:00   좋아요 1 | URL
예~즐겁게 잘 열었습니다~
숲노래님께서도 좋은 하루 되세요~*^^*

2015-08-19 1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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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2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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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2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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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2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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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0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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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0 1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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