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웃음이 터졌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니들은 결혼하지 마.˝ 같아서.






내일 결혼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밝고 발랄한 말투였다.
내일 이혼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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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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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었던 책을 이제야 꺼내 읽는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냥 읽어 치우면 안 될 것 같아 읽기를 미루다가 면 재질로 된 옷처럼 편안한 느낌이 드는 책 표지를 쓰다듬어가며 읽는다. 표지 그림이 파이윰 초상인데 그 오래 전 얼굴이 현대인과 다름없다는 것에, 2세기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표현이 섬세해 놀란다. 아이다와 사비에르를 보고 그린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그림이 편지 주인공과 잘 어울린다. 


편지글 이어서 자꾸 딴생각-회상-에 빠졌다, 다시 읽다 가만히 등을 기대고 시간을 거슬러 가본다. 책 곳곳에 내가 모르는 단어들, 시대 상황, 사정 등등이 나와 그 뜻을 찾아가며 읽는 맛도 재미지다.('재미있다' 를 전라도 식으로 표현하는 말. 재미지다는 말이 재미있다 보다 더 재미난 느낌이다.)

 

남편이 막 병장을 달 무렵에 보낸 메일을 받고 그 답메일로 군대 주소를 묻고는 처음 편지를 보냈다. 그때만 해도 어린 시절 "국군아저씨께" 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다섯 달 동안 편지 50여 통을 보냈으니 군대에 소문이 짜했다 -'짜하다'가 표준어일 줄이야. '퍼진 소문이 왁자하다' 라는 뜻이다.- 고 한다. 남편이 말년휴가 나온 뒤 서로 얼굴을 처음 봤는데 남편이 복귀한 뒤에도 편지가 날아드니까 같이 있던 소대원들이, '아니 그 사람 왜 그러느냐고. 병장님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연을 안 끊을 수가 있냐' 고 했단다. 내가 꽃미남 밝힘증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감당이 안 돼 잘생긴 사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우리 남편이 못 생겼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는다. 인상 좋다는 소리를 듣지^^. 


편지는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빛이 난다. 어쩌면 감옥과 비슷한 군대에서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기쁨이었을 거다. 일상이 아닌 비일상에서 편지라는 매개가 얼마나 사람을 설레게 하고 기다리는 가슴을 쥐락펴락하게 하는지. 읽다가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 온다. 가슴이 뛰어 편지를 품에 안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리움 가득 담은 한 글자, 느낌표 하나, 그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뿐인데 황홀해지는 기억. 우리가 나눈 편지는 수줍고도 과감하며 넋이 나갈 듯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며칠 전 열흘 만에 서울에서 돌아와 뭘 물어보려고 전화걸었더니 "마침 네가 와서 기분 좋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 하는 말에 딴청을 피웠지만 그 순간 찌르르한 느낌이 온 몸으로 퍼진다. 여전히 마냥 좋은 우리는 따라쟁이가 되어 서로를 흉내내며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헷갈리는 말들을 하며 배시시 웃는다. 


남자가 쓰는 여자 시점 편지가 참으로 로맨틱하다. 박주연 같은 여성 작사가가 쓴 남자 시점 노랫말도 그렇고 이성을 주인공으로 글을 실감나게 쓰는 것을 보면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게 된다. 여성성을 마음껏(마치 내가 쓴 편지라도 읽은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편지를 쓸 때마다 첫 글귀에 상대방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것마저) 뿜어내는 글을 보면서 작가가 여자 속에 들어와 본 적이 있는 건 아닐까? 한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획일화(?)를 연인끼리 사랑을 주고 받는 연애편지로 빗대어 그리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작가는 작가구나. 가끔 요즘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태도를 취하며 산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비슷한 옷차림과 비슷한 꿈을 꾸고. 점점 물질 만을 바라며 기준이 한 가지가 되어 풍족하게 살며 고생하기 싫어하고 어딘가 뒤처지는 것 같으면 같이 안 놀고(?) 싶어하고 자기 부류가 아니길 바라기까지 하는 듯하다. 


내 친족이지만 갑자기 잘나가게(?) 된 사람이 벤츠를 몰면서 하는 말이, "야, 비켜~! 잘 안 나가면 좀 빠지라고." 농담이라 얼버무렸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농담으로 라도 그런 소리 말라고 했지만 내가 선비질(?)하는 걸로 보였을 거고 지가 못 나가니 저런다 생각했을 것이다. 상도 따위 없는 자기 남편이 얼마나 여러 사람에게 못할 짓 해가며 돈을 버는지 알면 충격을 받으려나. 아니면 '그게 뭐 어때서? 그럴 수 있지' 하고 오히려 두둔할 지 모른다. 자본주의 끝에 가 있는 지금 이 세계는 부(富)가 곧 선(善)이므로. 


아이다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관찰하고는 짧은 편지 안에 자신이 보고 느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언자 같은 말투였다가, 상상을 자극하기도 하고 곁에 있는 듯 속삭이기도 하면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매불망 아이다 편지를 기다렸을 사비에르 심정이 되어 아이다를 한시바삐 만나 보고 싶어진다. 편지 곳곳에 쏙쏙 박혀있는 글에 잠시 머물러 본다. 아이다가 건네는 말이 시처럼 고요해 그 문장을 소리 내 읽어보며 음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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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06-02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이 좋아서 읽어보고 싶어 지네요

samadhi(眞我) 2022-06-02 15:51   좋아요 0 | URL
재미있다 라기 보다 느낌이 좋더라구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깜깜한 어둠 속, 뚫고 들어갈 수도 없는 막막한 벽을 마주하고 서로 그저 그리워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지치지 않고 그날이 오기를 기다릴 수 있을까. 끊임없이 앞날을 긍정하며 서로에게 쉼터가 되어줄 수 있을까.

이제 곧 우리는, 그가 말했어요. 함께든 아니면 혼자서든, 여러 곳에 가겠죠.
그게 어디든 베라는 이미 거기 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매번 그녀는 우리가 알아보기 전에 그곳을 떠나겠죠. 우리가 아무리 일찍 도착한다 해도 말이에요!
이싸의 말을 듣고, 나는 울었어요. 몇 시간을 계속 울었죠.
언젠가 들었던 속담 하나가 결혼식 서약보다도 더 큰 인상을 남겼어요. 어느 지역 속담인지는 몰라요. 강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봐서 아마 (이 부분은 잉크가 번져 단어를 알아볼 수 없다.) 지역이겠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꽃 한 송이를 꺾어 주세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으면, 그냥 무덤 앞에서 기다려 주세요‘ 라는 속담.
그게 오늘 밤 당신에게 해야만 하는 말이에요. 미 카나딤··… 당신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여기서 이 편지를 마치고 머지않아 새벽이 찾아오겠죠.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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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가 그렇게 오래된 채소였다니. 오이향을 싫어해 오이를 먹지 않는 내 조카(내 서재 프로필 사진에 있는 녀석)가 들으면 ˝우웩~˝ 하겠다. 김밥에 들어가면 아삭아삭하고 비빔면에 채 썰어 넣으면 상콤하고 산에 오를 때 목마름을 덜어주는, 함께 먹으면 다른 채소들 영양분을 다 앗아가 버린다는 힘센 오이가.


교장선생님이 이런 말을
인용해 주었다. "우리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 중에 사랑스러운 것은햇빛과 밤하늘에 빛나는 밝은 별, 보름달, 여름 과일-잘 익은 오이, 배, 사과-이다." 누군가 어제, 겨우 이천오백 년 전에 적어 둔 말이라고교장 선생님은 말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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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찰리 맥커시 지음,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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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힘주어 말한 성공이라는 단어가 듣기에 거슬려 한 귀로 흘려듣곤 했다. 그래서 성공(?)하지 못했나 보다. 중학교 때 전교 1등 하던 친구와 단짝이었는데 어느 날 점심 도시락을 같이 먹는데 김치 꽁다리 부분을 자기 엄마가 먹지 못하게 하셨다는 거다. 성공 못 한다고. 난  그 말을 여태 기억하는지. 김치를 썰 때마다 꽁다리를 잘라내며 그 말을 기억해 내고는 일부러 우걱우걱 씹어먹고 싶은 거다. 그저 맛없어서 안 먹을 뿐인데.


대학 때 선배네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학교가 집과 떨어져 자취하는 선배였는데 주말이라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간 거였다. 선배 어머니가 채소가게를 하셨는데 술 안주로 배추 뿌리를 주셨다. 난생처음 배추 뿌리를 먹어봤는데 달달하고 아삭한 것이 날고구마 맛과 비슷했다. 배추 뿌리를 먹으면서도 그 친구 엄마가 하셨다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왜 그리도 성공에 열을 올리는가. 한류가 열풍이고 한국을 경험한 외국인들이 꽤나 살기 좋다는 나라인 데도 다들 조금씩 또는 많이 불행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들보다 뭔가 뒤쳐지는 듯하면 자신이 모자란 것 같고 잘난 부모를 만난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며 신세한탄을 한다. 무리와 "다른" 사람을 보면 왠지 꺼려하고. 여기 이 멋진 두더지는 성공이 뭐냐는 말에 냉큼 "사랑" 이라고 대답한다. 뭘 좀 아는 녀석이네. 두더지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어깨가 으쓱하다. 여기 이 대답까지 읽고 이 글을 끄적였는데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다른 사람과 내가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헛되고 부질없다는 생각.


"우리가 건사해야 할 아름다움이 아주 많아." 

이 문장에서 건사하다 라는 말이 걸린다. 쉬운 문장을 어렵고 거리가 멀게-작가와 독자 사이- 번역한 것을 보면 신경이 쓰인다. 우리가 "지킬", 아니면 "(보)살필"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신에게 친절한 게 최고로 친절한 거야." 이말은 요가철학과 이어진다. '아힘사(ahimsa)'는 산스크리트어로 '비폭력'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비폭력은 외부에 대한 폭력보다는 내부,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하지 않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 이 책을 가볍고 편하게 읽으면서 골똘히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림에 가끔은 색을 입혔지만 선 만으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 한 행동과 말을 너끈히 표현해낸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도 즐거워 글이 없어도 그림으로만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그네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올 거야.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정함, 은은함, 편안함, 따뜻함 보다 더 좋은 건 없더라. 어릴 땐 뭔가 특별한 존재로 사랑받고 싶어 불편하게도 무리해 자신을 혹사하곤 했다. 지나고 보니 그게 다 뜬구름이고 구름처럼 포동포동, 바람처럼 살랑살랑, 하늘처럼 푸근푸근하면 그저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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