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지난 가을, 장암동 마을 풍경>유채 F15 2013

 

이번 작품은 지난 가을에 다녀왔던 장암동 풍경 입니다. 세상 외딴 곳에 와 있는 듯한 한적함..살랑살랑 부는 바람, 이리저리 옮겨다니던 햇살, 오래된 가옥과 부서져 가던 빈집들, 곳곳에 집터만 덩그마니 놓여 있던 마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 동네가 철거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올해도 야외 스케치를 하러 이 마을에 또 갈 것 같은데 그새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오늘은 창밖 풍경이 꾸물꾸물하니 봄을 재촉하는 비라도 내릴 모양입니다. 어서  빨리 따스한 계절이 찾아와 화구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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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석촌리 들판>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한기가 화실 안을 감돕니다. 아직까지는 외출할 때마다 꽁꽁 싸매야 할 만큼 추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 부드럽고 순한 기운이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새로 배달된 냉장고 때문에 괜히 마음만 어수선했습니다. 그동안 10년 넘게 사용해 온 냉장고는 모터가 완전히 고장 나서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냉장고처럼 커다란 가전제품은 단순한 사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냉장고가 돌아갈 때마다 숨을 고르는 소리도 들리고, 곁에서 늘 내 일상을 엿보며 함께 지냈던 존재니까요.

 

냉장고야 잘 가렴!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

 

새로 배달된 냉장고는 헌 냉장고에 비해 상당히 큰 사이즈입니다. 특별히 대용량을 주문한 것도 아닌데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냉장고의 사이즈가 그동안 많이 진화한 모양입니다. 텅 빈 냉장고는 하얀 동굴 같습니다. 환한 광채에 둘러싸인 고래 뱃속 같은 새 냉장고가 이제 내 위장과 인사를 나눕니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뭐든 열심히 먹어두는 게 좋아.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채워 놓도록!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그날그날 먹을거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만큼 시장에는 자주 가야 했겠지만

먹고 남아서 버릴 것도 별로 없었지요. 그런데 냉장고 사이즈가 점점 커지다 보니 쓸데없이 이것저것 사다가 무조건 쟁여 둘 때가 많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집어넣지 않은 빈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반성합니다.

 

제발 이상한 소스 같은 것은 사오지 말자. 대형 마트보다 동네 슈퍼를 좀 더 자주 아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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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양평의 들판>유채, P15,2013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볼 때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오른다. 그는 생의 절망 속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것은 우주 과학자들이 허블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학술적으로 고찰해 낸 행성이나 항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 별빛은 한 화가의 그림 속에서 삶의 구원이자 희망이었으며, 작은 위로와도 같은 속삭임이었다.

 

반 고흐가 생애 마지막 영감을 불태웠던 오베르를 찾은 건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 그 시골 읍네 같은 인상의 작고 소박한 마을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영상처럼 떠오른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적하고 아예 문을 닫은 가게들도 많았다. 파리에서부터 줄곧 기차를 함께 타고 온 탁은 영국에서 일어를 가르치는 일본인이다. 텅 빈 객차 안에서 어색하게 말문을 튼 낯선 여행자들은 고흐의 발자취를 찾아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금세 친구가 되었다.

 

오베르 기차역은 어느 시골의 작은 간이역 같았다.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 할 수 있는 박물관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어쩐지 모두가 떠나버리고 듯 느껴지는 고즈넉한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고흐가 그림으로 남겼던 장소들을 차례로 순례하기 시작했다.

 

평생 가난과 고독 속에서 고통 받았고, 단 한 점의 그림밖에는 팔지 못했던 불운의 화가 반 고흐. 그는 생애 마지막 기간이란 할 수 있는 10주 동안 오베르의 허름한 여인숙에 체류하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70여점의 유화와 드로잉과 판화 수십 점. 이 정도라면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미친 듯이 작업에만 몰두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파리에 가서 동생 테오를 만나고 돌아온 직후, 그림을 그리러 나간 들판에서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이틀 후, 사랑하는 테오의 가슴에 안겨 “슬픔은 끝이 없는 거란다”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반 고흐가 마지막 숨을 거둔 라부 여인숙 3층의 작고 초라한 방에는 이제 덩그마니 의자 하나만 놓여 있다. 천장은 비스듬히 기우러져 있고, 햇볕도 잘 들지 않은 이 방. 어깨를 오그라들게 만드는 냉기만이 시린 외로움처럼 떠도는 방안을 둘러보다 왠지 먹먹해진 가슴에 두 눈만 끔뻑이고 서 있는 나. 한 예술가의 상처받은 영혼과 그 불꽃같은 흔적들. 이제 그 쓰라린 고통조차 최고의 상품으로 둔갑해서 소더비즈 경매시장을 뜨겁게 달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한편의 개그 프로그램을 닮은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진다. 어느 학자는 고흐에 대한 열광 속에는 현대인의 집단적인 죄의식이 깔려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집단적인 죄의식! 위대한 예술가의 비극적인 운명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전율케 하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래서 ‘반 고흐 증후군’은 중독성이 강하다.

 

마을 공동묘지에는 ‘빈센트 반 고흐’라고 새겨진 사각형의 길쭉한 묘석이 누워 있다. 그 위를 수북이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열광을 불러 모으고, 죽어서도 영원한 존재로 살아 있는 한 예술가의 무덤치고 이건 너무 소박하고 왜소하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 수수하고 꾸밈없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고흐답다는 생각도 든다. 평생 가난을 업보처럼 걸머져야 했던 고흐가 아닌가. 살아생전 거의 한 작품도 팔지 못했고,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던 그의 무덤을 사후의 명성을 빌미로 새롭게 단장하고 위풍당당하고 꾸며 놓았다면 이 또한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남루한 차림의 빨간 머리 미치광이였으나, 붓과 색채와 활활 타오르는 예술혼으로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을 토해내는 인물......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가 꿈꾸었던 그 별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반 고흐라는 것을 어찌 부정하겠는가.

 

나의 기억은 다시 오베르 마을 쪽을 향해 걸어가다 돌로 만든 몽당연필처럼 생긴 작고 다부진 인상의 교회 앞에 다다른다. 반 고흐가 꿈틀거리는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린 그림 속의 교회보다 훨씬 단단하고 오래된 모습이다. 교회 앞 안내판에는 반 고흐의 그림 ‘오베르의 교회’가 새겨져 있다. 한때 목사가 되기를 그토록 열망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죽은 후 고흐는 거의 교회를 주제로 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순간 깨닫는다. 그가 오베르의 이 자그마한 성당을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적처럼 다시금 신의 존재가 떠오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죽음을 생각하기 전에 죽음이 앞서 다가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다시 마음이 아파진다. 오베르의 교회는 그 투박하고도 순정한 모습이 어딘가 고흐의 마음 빛깔을 담고 있다. 그것은 신의 집이면서 또한 그의 마음이다. 약간 납작 찌그러진 듯한 순결한 그 모습! 한 동네 아낙이 서둘러 교회 앞마당을 지나가고 있다.

 

고흐의 그림들은 출렁이는 물감의 파도와 사선으로 질주하는 구도와 짙푸른 하늘과 형형색색의 색 점들로 어지러울 지경이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정신분열증 증세에 시달리는 한 인간의 몸부림을 찾고자 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스스로 귀를 자르고, 들판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자신의 옆구리에 대고 총알을 발사한 반 고흐.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호기심에 귀를 쫑긋거린다.

 

“그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던 거야?”

 

왜 천재는 다 어딘가 이상하고 미친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로 정상인이 아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건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이미지가 아닐까. 천재라는 것, 그래서 그 머릿속이 궁금하고, 어딘가 나와는 달라야 할 것 같은 강박증. 그로인해 반 고흐라는 인물은 더욱 미친 사람처럼, 더욱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인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감히 단언하건데, 그의 그림은 그 무엇보다도 명징하고 또렷한 의식과 집중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적어도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어떤 생명의 신비가, 창조력으로 충만한 자유로운 몰입이 그와 그의 그림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제 그토록 맹목적으로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다 그로인해 파멸되는 인간은 이 지구상에 없다. 그래서 그 존재가 더 그립고 애절하고 안타까운 모양이다.

 

텅 빈 고독처럼 쓸쓸한 오베르의 교회당. 비둘기 대여섯 마리가 하늘에서 날아 온 성령처럼 날개를 저으며 부유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회랑의 맨 앞에는 성가대원들을 위한 나무 의자들이 정다운 친구들처럼 쪼르르 놓여 있다. 내내 여행길을 동행한 탁과 나는 거기에 나란히 앉아 천장의 둥근 지붕 안에서 푸드득거리는 새들을 바라본다.

 

“그쪽 친구 중에 고흐같이 예민하고 과격하고 고집 센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내가 탁에게 묻는다.

 

“몰라요. 당신은요?”

 

“나도 모르겠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새가 날아오른다. 이번엔 탁이 먼저 질문을 던진다.

 

“종교 있어요?”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뇨, 그쪽은요?”

 

탁도 고개를 흔든다. 우리 둘 다에게 신이 없다는 것, 신앙심이 없다는 것. 이런 것도 서로의 공통점이 될 수 있을까.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순결무구한 천상의 빛살에 스며든다. 그로인해 순해지고 맑게 정화된 느낌 속에서 우리는 입을 다문 채 오래오래 앉아 있다. 반 고흐는 이 교회에서 단 한번이라도 예배를 드린 적이 있을까.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저기 교회당 출입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아득한 신화의 뒤안길에서 환영의 그림처럼 새들이 날아오른다. 8월이었다. 오베르 성당문 밖에는 한 여름 태양이 뜨겁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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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s8049 2013-02-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는 일상의 모든 것을 기록했던 아주 성실한 삶을 살았던 화가이다.
누가 그를 미쳤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을 깨야 할 것이다.
왜냐면 후대들의 그려러니 짐작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오산이기 때문에..
매 순간 치열했고, 다가오지 않은 모두한 것에 열정을 품었던 그 시대나 현재나
보이지 않는 곳의 고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고흐의 기록을 따라 갈 자 누구이던가!
바쁜 와중에도 좋은 그림, 좋은 글로 인도 해 준 작가님,화가님
그녀를 우연히 알게 되어서 너무 행복해요.
축복의 삶이 예술과 함께 곷 피고, 스며드는 나날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김미진 2013-02-2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봄의 전령1-1> oil on canvas

 

*쪼잔한 김여사의 휴일

 

우리는 찜질방에 갔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그 사우나는 쾌적한 환경에 피트니스 룸까지 있어서 우리 부부가 휴일마다 즐겨 가는 곳이다. 찌뿌듯한 겨울 날씨는 사람들을 찜질방으로 불러들인다. 지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사이드 주차를 하려다가 운 좋게 한 자리 차지하고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0분 후에 홀에서 아니, 피트니스 룸에서 만나자.”

 

카운터 앞에서 표를 끊은 후 남편이 말했다. 번번이 늦게 나타나는 나를 기다리느니 먼저 가서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안 늦을 테니 걱정 마. 그럼 조금 있다 봐.”

 

나는 남편한테 가방을 받아들고는 손까지 흔들었다. 남자들은 목욕탕에 갈 때 거의 빈손이다. 내 남편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말하지만 그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안에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다. 샴푸, 때 타월, 트리트먼트, 목욕 소금, 화장품, 코끼리 한 마리, 등등..

 

목욕탕 안에도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하마한테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 분배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실내복과 수건을 챙긴 다음 내 옷장으로 가서 재빨리 옷을 벗고 그것이 구겨지지 않게 잘 겐 다음, 앞으로 내가 사용할 순서대로 옷장 안을 정리하고 목욕용품을 챙긴다. 그리고 체중계에 몸무게 달기, 간단한 샤워, 허브 탕에 들어가 몸 풀기, 머리 감기, 몸에 때 비누칠하기, 다시 헹구기, 목욕용품 챙기기. 몸에 수건질하기, 문 앞에서 다시 발 씻기, 탈의실로 나와 실내복 갖춰 입기. 머리에 수건질을 한 번 더 하고 얼굴에 로션 바르기... 이것이 내가 여탕에 들어서면서부터 초스피드로 해치운 일들이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30분을 초과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찜질복을 입고 피트니스 룸으로 향했다. 남편은 벌써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빼고 있었다. 당연하지. 물속에서 첨벙거리다만 나왔으니..

 

“왔어. 내가 매점에서 식혜 사왔지.”

 

남편이 거울 속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옆에 있는 창턱에는 식혜가 한 통 놓여 있었다. 동그란 플라스틱 통을 집어든 내 표정이 단박에 흐려졌다.

 

“뭐야? 얼음이 별로 없잖아. 주는 대로 그냥 받아왔지?”

 

“아냐. 얼음 좀 많이 달라고 했어.”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 직접 떠달라고 하지 않고서.”

 

“부탁했지. 그런데 똑같다면서 그냥 주잖아.”

 

“그렇다고 그냥 받아오면 어떡해? 나 얼음 좋아하는 것 알잖아.”

 

남편은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나는 단 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찜질방에서 먹는 식혜만큼은 누구한테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 덥고 갈증 날 때 얼음이 살짝 언 식혜를 조금씩 떠서 아삭아삭 씹어 먹는 그 맛이라니! 나에게 얼음이 다 녹아버린 식혜는 그저 밍밍한 설탕물, 칼로리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찜질방 식혜에 대해서 내가 까다롭게 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매점에서 일하는 아줌마다. 그녀는 못 말리는 외통수다. 늘 자기 방식대로 식혜를 한꺼번에 퍼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손님이 주문하면 차례로 꺼내주는 그녀. 외통수의 주장은 늘 이런 식이다.

 

“똑 같은 거예요. 통에서 막 푼 거나 냉장고에 있던 거나.”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식혜 통에서 막 퍼준 식혜는 식혜 국물 전체가 슬러시처럼 살짝 언 상태라 빨대 끝에 있는 부삽 같은 부분으로 한참을 떠먹어도 그 상태를 유지한다. 그에 반해서 냉장고에서 꺼내 준 식혜는 윗부분에만 얼음이 떠 있을 뿐 밀도도 엷고 금세 녹아버린다.

 

"손님이 주문한대로 주면 어디 덧나나. 그러면서 왜 음식물 반입은 안 된다는 거야. 잠깐 기다려봐. 내가 가서 더 받아 올 테니. ”

 

나는 식혜 통을 들고 매점으로 갔다. 남편이 두어 모금 마신 뒤였지만 아직까지 소비자 권익을 주장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면서.

 

 

 <봄의 전령1-2>oil on canvas 73×60cm 2019

 

남녀 공용 홀과 피트니스 룸 사이에 있는 매점에는 두 명의 여자가 일을 하고 있다. 한쪽은 매점의 터줏대감이자 붙박이 점원이라 할 수 있는 나이 든 여자, 다른 한쪽은 주말에만 가끔씩 나오는 젊은 아가씨다. 마침 손님도 없이 한가했다. 나이 든 점원이 바로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하는 외통수다. 외통수와 맞붙어서 좋은 건 없다. 나는 아가씨 점원과 눈을 마주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식혜 얼음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미소까지 띠며 공손하게 말했다.

 

“리필은 안 되는데요.”

 

“리필이 아니라... 식혜 얼음이 벌써 다 녹았잖아요. 통에서 좀 더 떠 주세요.”

 

“그건 안 되는데...”

 

아가씨 점원이 스낵 진열대 앞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외통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요.”

 

“그래도 더 드릴 수가 없어요.”

 

내가 하는 소리를 듣고 외통수가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는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여자다.

 

“왜 그러세요? 뭐가 필요해요.”

 

그녀가 다가오며 물었다. 나를 응시하는 표정에는 어딘가 초등학교 교감선생 같은 포스마저 느껴진다. 그녀는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이다. 화장도 완벽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내 몰골은 대략 난감이다. 후줄근한 실내복 차림에 욕탕에서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 내가 당황스러운 건 이런 외면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녀의 고압적인 자세, 상대방을 한 자락 깔고 보는 표정 때문이다. 나는 아직 대적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제발 버벅거리지 말아야 할텐데..

 

“아니...그게 아니라, 식혜 얼음 좀... 냉장고에 있는 걸 줬잖아요. 식혜 통에서 떠 줘야하는데...”

 

어쩐지 이런 말은 조리 있게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뜻은 통했다.

 

“똑같은 거예요. 주말에는 손님들이 밀려서 미리 떠 놓는 건데.”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손님은 오로지 나뿐이다. 냉장고 안에는 얼음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는 식혜가 20통쯤 들어 있다.

 

“그냥 주문할 때 떠 달라는 대로 통에서 떠 주면 안 되나요? 난 얼음이 많은 걸 좋아하는데.”

 

“글쎄, 새로 푸는 거나 냉장고에 있는 거나 똑같은 거라니까요.”

 

외통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식혜를 주문할 때마다 듣는 소리 아닌가. 맥이 빠진다. 왜 매번 같은 문제로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지. 더 이상 체면 구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한번 더 우겨 본다.

 

“벌써 다 녹았거든요. 난 얼음 때문에 식혜를 먹는 건데.”

 

궁상맞게 사정하고 있는 듯한 내 목소리. 삶의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럼 그냥 얼음만 좀 드려요.”

 

외통수가 생 얼음이 나오는 기계를 가리키며 물었다. 한발 물러서는 척, 그러면서 교묘하게 내 약을 올리려는 수작이다.  

 

“내가 말하는 얼음이 그게 아니잖아요."

 

"리필은 안돼요. 다시 시키세요."

 

"다시 시키라고요?"

 

"네, 다시 시키세요.”

 

머리 뚜껑이 달그락대기 시작했다. 나는 품 속에서 가상의 스팀 분사기를 꺼내 들었다. 지금 내가 생떼를 쓰는 걸까.(..맞다!) 무식한 여편네처럼 어거지를 부리는 걸까.(..진짜 그렇다니까!) 겨우 식혜 한 통이 아닌가. 이런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나는 스팀 분사기를 내려놓고 정말로 돌아서려고 했다. 뒷통수가 간지럽긴 하겠지만 별 수 없었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험한 일들 중에서 식혜 한 통쯤 그냥 포기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 순응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지원군들이 나타났다. 다른 손님들이 내 뒤에 늘어선 것이다. 순간 외통수가 하회탈 같은 억지웃음을 떠올리며 유들거리는 태도로 돌변했다.  

 

"아이 참, 알았어요. 진작 말씀 하시지..다 똑같은 건데.. 그럼 식혜 얼음만 조금 더 드리면 되는 거죠?”

 

초등학생을 어르는 듯한 저 말투, 꼬챙이라도 있으면 한번 찔러 주고 싶은 저 가식적인 표정! 아, 토하고 싶다! 나는 다시 피트니스 룸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여전히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얼음 더 줬어?”

 

“여기!”

 

나는 식혜 통을 창턱에 팽개치듯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남편은 아무런 죄도 없다. 날 위해 식혜를 사온 것 밖에는. 그렇지만 부아가 나서 그를 흘겨보았다. 거울 속에서 내 눈치를 살피던 남편이 시선을 피했다. 러닝머신이 돌기 시작했지만 운동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스팀 분사기를 발사할 걸. 손가락 하나만 까딱했으면 됐을 텐데. 아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찜질방 주인을 불러내 강력한 항의를 하리라. 그런데 뭐부터 따져야 하지.. 무슨 말부터..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생각들, 뜻 모를 소음들에 둘러싸인 채 러닝머신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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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 소녀>유채 10호 2013

 

온종일 작업을 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흘러갑니다. <잠자리 소녀>에 등장하는 잠자리는 벌써 오래전 설악산에 갔을 때 그린 드로잉의 일부입니다. 파일 한쪽에 끼어 있다가 거의 20년 만에 유화 작품의 일부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잠자리 소녀>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꽁트 비슷한 이야기가 뭐 없을까 한참 궁리하다가 글이 풀어지지 않아 그냥 그림만 올리기로 했습니다.

        

<스카치 한 잔> 유채 2013

 

낮에 잠시 우체국에 다녀왔는데 구름 낀 하늘이 우중충하니 마음까지 우울했습니다. <스카치 한 잔>은 하드 보드지에 유화로 그린 소품입니다. 유화는 수채화보다 무거운 매체인데다 오일을 써야 하기 때문에 종이에 그리기에는 약간 무리가 따릅니다. 물론 젯소 같은 걸 입힌 후  그 위에 그려도 되지만 여러모로 조심할 부분이 많습니다. 문방구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하드보드지는 같은 종이 재질이면서도 나름 유용한 재료입니다. 컵 받침에 작은 유리잔 하나를 그린 단순한 정물화지만 여기에는 저의 많은 생각들 고민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림은 해도 해도 정말 어려운 느낌입니다.   

   

<지난 여름-1> 유채 15호 2013

 

작년에 다녀온 덕포리 마을 풍경입니다. 수채화로 한 번 그린 적이 있는데 유화로 다시 작업했습니다. 붓의 움직임을 최대한 살렸고, 마지막으로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노란색 물감을 짠 후 손가락으로 찍어 문지르듯이 노란 꽃 한 송이를 앞쪽에 그려넣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꽃 한 송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 갑니다. 색깔이나 사이즈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요. 거기 그 자리에 어울리는가 하는 문제일 겁니다. 어느새 1월 말이라니..오늘 하루도 으싸으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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