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1-1> oil on canvas
*쪼잔한 김여사의 휴일
우리는 찜질방에 갔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그 사우나는 쾌적한 환경에 피트니스 룸까지 있어서 우리 부부가 휴일마다 즐겨 가는 곳이다. 찌뿌듯한 겨울 날씨는 사람들을 찜질방으로 불러들인다. 지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사이드 주차를 하려다가 운 좋게 한 자리 차지하고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0분 후에 홀에서 아니, 피트니스 룸에서 만나자.”
카운터 앞에서 표를 끊은 후 남편이 말했다. 번번이 늦게 나타나는 나를 기다리느니 먼저 가서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안 늦을 테니 걱정 마. 그럼 조금 있다 봐.”
나는 남편한테 가방을 받아들고는 손까지 흔들었다. 남자들은 목욕탕에 갈 때 거의 빈손이다. 내 남편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말하지만 그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안에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다. 샴푸, 때 타월, 트리트먼트, 목욕 소금, 화장품, 코끼리 한 마리, 등등..
목욕탕 안에도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하마한테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 분배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실내복과 수건을 챙긴 다음 내 옷장으로 가서 재빨리 옷을 벗고 그것이 구겨지지 않게 잘 겐 다음, 앞으로 내가 사용할 순서대로 옷장 안을 정리하고 목욕용품을 챙긴다. 그리고 체중계에 몸무게 달기, 간단한 샤워, 허브 탕에 들어가 몸 풀기, 머리 감기, 몸에 때 비누칠하기, 다시 헹구기, 목욕용품 챙기기. 몸에 수건질하기, 문 앞에서 다시 발 씻기, 탈의실로 나와 실내복 갖춰 입기. 머리에 수건질을 한 번 더 하고 얼굴에 로션 바르기... 이것이 내가 여탕에 들어서면서부터 초스피드로 해치운 일들이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30분을 초과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찜질복을 입고 피트니스 룸으로 향했다. 남편은 벌써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빼고 있었다. 당연하지. 물속에서 첨벙거리다만 나왔으니..
“왔어. 내가 매점에서 식혜 사왔지.”
남편이 거울 속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옆에 있는 창턱에는 식혜가 한 통 놓여 있었다. 동그란 플라스틱 통을 집어든 내 표정이 단박에 흐려졌다.
“뭐야? 얼음이 별로 없잖아. 주는 대로 그냥 받아왔지?”
“아냐. 얼음 좀 많이 달라고 했어.”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 직접 떠달라고 하지 않고서.”
“부탁했지. 그런데 똑같다면서 그냥 주잖아.”
“그렇다고 그냥 받아오면 어떡해? 나 얼음 좋아하는 것 알잖아.”
남편은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나는 단 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찜질방에서 먹는 식혜만큼은 누구한테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 덥고 갈증 날 때 얼음이 살짝 언 식혜를 조금씩 떠서 아삭아삭 씹어 먹는 그 맛이라니! 나에게 얼음이 다 녹아버린 식혜는 그저 밍밍한 설탕물, 칼로리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찜질방 식혜에 대해서 내가 까다롭게 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매점에서 일하는 아줌마다. 그녀는 못 말리는 외통수다. 늘 자기 방식대로 식혜를 한꺼번에 퍼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손님이 주문하면 차례로 꺼내주는 그녀. 외통수의 주장은 늘 이런 식이다.
“똑 같은 거예요. 통에서 막 푼 거나 냉장고에 있던 거나.”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식혜 통에서 막 퍼준 식혜는 식혜 국물 전체가 슬러시처럼 살짝 언 상태라 빨대 끝에 있는 부삽 같은 부분으로 한참을 떠먹어도 그 상태를 유지한다. 그에 반해서 냉장고에서 꺼내 준 식혜는 윗부분에만 얼음이 떠 있을 뿐 밀도도 엷고 금세 녹아버린다.
"손님이 주문한대로 주면 어디 덧나나. 그러면서 왜 음식물 반입은 안 된다는 거야. 잠깐 기다려봐. 내가 가서 더 받아 올 테니. ”
나는 식혜 통을 들고 매점으로 갔다. 남편이 두어 모금 마신 뒤였지만 아직까지 소비자 권익을 주장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면서.

<봄의 전령1-2>oil on canvas 73×60cm 2019
남녀 공용 홀과 피트니스 룸 사이에 있는 매점에는 두 명의 여자가 일을 하고 있다. 한쪽은 매점의 터줏대감이자 붙박이 점원이라 할 수 있는 나이 든 여자, 다른 한쪽은 주말에만 가끔씩 나오는 젊은 아가씨다. 마침 손님도 없이 한가했다. 나이 든 점원이 바로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하는 외통수다. 외통수와 맞붙어서 좋은 건 없다. 나는 아가씨 점원과 눈을 마주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식혜 얼음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미소까지 띠며 공손하게 말했다.
“리필은 안 되는데요.”
“리필이 아니라... 식혜 얼음이 벌써 다 녹았잖아요. 통에서 좀 더 떠 주세요.”
“그건 안 되는데...”
아가씨 점원이 스낵 진열대 앞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외통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요.”
“그래도 더 드릴 수가 없어요.”
내가 하는 소리를 듣고 외통수가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는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여자다.
“왜 그러세요? 뭐가 필요해요.”
그녀가 다가오며 물었다. 나를 응시하는 표정에는 어딘가 초등학교 교감선생 같은 포스마저 느껴진다. 그녀는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이다. 화장도 완벽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내 몰골은 대략 난감이다. 후줄근한 실내복 차림에 욕탕에서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 내가 당황스러운 건 이런 외면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녀의 고압적인 자세, 상대방을 한 자락 깔고 보는 표정 때문이다. 나는 아직 대적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제발 버벅거리지 말아야 할텐데..
“아니...그게 아니라, 식혜 얼음 좀... 냉장고에 있는 걸 줬잖아요. 식혜 통에서 떠 줘야하는데...”
어쩐지 이런 말은 조리 있게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뜻은 통했다.
“똑같은 거예요. 주말에는 손님들이 밀려서 미리 떠 놓는 건데.”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손님은 오로지 나뿐이다. 냉장고 안에는 얼음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는 식혜가 20통쯤 들어 있다.
“그냥 주문할 때 떠 달라는 대로 통에서 떠 주면 안 되나요? 난 얼음이 많은 걸 좋아하는데.”
“글쎄, 새로 푸는 거나 냉장고에 있는 거나 똑같은 거라니까요.”
외통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식혜를 주문할 때마다 듣는 소리 아닌가. 맥이 빠진다. 왜 매번 같은 문제로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지. 더 이상 체면 구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한번 더 우겨 본다.
“벌써 다 녹았거든요. 난 얼음 때문에 식혜를 먹는 건데.”
궁상맞게 사정하고 있는 듯한 내 목소리. 삶의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럼 그냥 얼음만 좀 드려요.”
외통수가 생 얼음이 나오는 기계를 가리키며 물었다. 한발 물러서는 척, 그러면서 교묘하게 내 약을 올리려는 수작이다.
“내가 말하는 얼음이 그게 아니잖아요."
"리필은 안돼요. 다시 시키세요."
"다시 시키라고요?"
"네, 다시 시키세요.”
머리 뚜껑이 달그락대기 시작했다. 나는 품 속에서 가상의 스팀 분사기를 꺼내 들었다. 지금 내가 생떼를 쓰는 걸까.(..맞다!) 무식한 여편네처럼 어거지를 부리는 걸까.(..진짜 그렇다니까!) 겨우 식혜 한 통이 아닌가. 이런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나는 스팀 분사기를 내려놓고 정말로 돌아서려고 했다. 뒷통수가 간지럽긴 하겠지만 별 수 없었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험한 일들 중에서 식혜 한 통쯤 그냥 포기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 순응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지원군들이 나타났다. 다른 손님들이 내 뒤에 늘어선 것이다. 순간 외통수가 하회탈 같은 억지웃음을 떠올리며 유들거리는 태도로 돌변했다.
"아이 참, 알았어요. 진작 말씀 하시지..다 똑같은 건데.. 그럼 식혜 얼음만 조금 더 드리면 되는 거죠?”
초등학생을 어르는 듯한 저 말투, 꼬챙이라도 있으면 한번 찔러 주고 싶은 저 가식적인 표정! 아, 토하고 싶다! 나는 다시 피트니스 룸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여전히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얼음 더 줬어?”
“여기!”
나는 식혜 통을 창턱에 팽개치듯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남편은 아무런 죄도 없다. 날 위해 식혜를 사온 것 밖에는. 그렇지만 부아가 나서 그를 흘겨보았다. 거울 속에서 내 눈치를 살피던 남편이 시선을 피했다. 러닝머신이 돌기 시작했지만 운동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스팀 분사기를 발사할 걸. 손가락 하나만 까딱했으면 됐을 텐데. 아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찜질방 주인을 불러내 강력한 항의를 하리라. 그런데 뭐부터 따져야 하지.. 무슨 말부터..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생각들, 뜻 모를 소음들에 둘러싸인 채 러닝머신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