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막골 그 집 앞>수채,소품,2013

 

지난 토요일에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야외 스케치를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화구를 챙겨들고 나선 바깥나들이에 마음이 잔뜩 설레였는데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사방에서 이젤들이 퍽퍽 나자빠지곤 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전선주를 감는 커다란 둥근 바퀴같은 곳을 찾아 테이블로 사용했기 때문에 별 탈은 없었지만 겨울 산행 복장으로 단단히 무장했는데도 바지단 아래로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에 결국에는 화구 가방에 있던 비상용 보자기를 꺼내서 다리와 발목 주변을 친친 감고는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4월은 바람난 여편네의 치맛바람처럼 변덕스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대지 가득 내려앉은 촉촉한 봄기운에 겨우내 삭막했던 풍경들이 조금씩 씻겨져 내리는 듯 했습니다.

 

성동리 동막골은 아직껏 예스러운 풍취가 남아 있는 조용한 농촌 마을입니다. 초가지붕을 얻은 고택들과 버섯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농토와 밭이랑들, 고향의 향수를 떠올리는 그런 마을에서의 하루가 몹시 즐거웠습니다.

 

일요일에는 볼일이 있어 잠시 전주에 다녀왔는데 지나는 길목마다 매화나무들이 어찌나 화사하게 아름답던지 운전하는 내내 맘껏 호사를 누렸습니다. 전주비빔밥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상춘객들로 붐미는 가게 안에서 의미 있는 한 줄 명구를 발견했습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

 

생전에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 남긴 말씀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의 역사와 신화 또한 빛바랜 사진처럼 가슴 한쪽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겠지요.  계절은 소리 없이 자꾸만 흘러갑니다. 햇살에 바랜 봄꽃이든 월광에 물든 봄꽃이든 모두들 한아름 가슴에 안고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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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작품 모사, 나무와 추락하는 천사가 등장하는 부분>2001 유채

 

 70년대만 해도 민둥산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나라 풍경이었다. 오죽했으면 식목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해 나무 심기를 권장했겠는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거다. 우리 담임선생은 멋쟁이 총각 선생님이었는데(아침 조회 시간마다 재미 있는 얘기들을 한가지씩 들려주었는데 그 스토리들 대부분이 톨스토이 단편 소설집에 실려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날은 거두절미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나라의 산과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대머리처럼 헐벗은 산들을 보면 정말로 마음이 아프단다. 가까운 나라 일본만 해도 산에 나무가 어찌나 빽빽한지 바로 집 뒤에 있는 동산조차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산들은 죄다 벌거숭이잖니. 그런데 아직도 산에 가서 나무를 꺾어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창피할 노릇이지. 너희들은 나무를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함부로 베거나 꺾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왠지 야코가 죽던 당시의 일이다. 선생님은 한동안 일본 숲의 우거진 모습이며 그것을 보살피는 시민 정신, 일본 민가에 출몰하는 야생동물이며 뱀에 관한 얘기를 해주더니 지난 주말에 식목일을 맞아 밖에 나가서 나무를 심은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우리는 멀뚱거리는 눈으로 교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손을 드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없어? 단 한 명도? 어허, 이거 참! 그럼, 화단에 꽃씨라도 뿌린 사람 있으면 어디 손 좀 들어 보거라."

 

이번에도 아이들은 묵묵부답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식목일에 나무 심은 사람 있으면 교장 선생님이 표창장을 준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반장을 불렀다.

 

“너 지금 교무 주임한테 가서 우리 반에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말씀드려라.”

 

선생님의 명을 받은 반장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달려 나갔다. 그해 식목일을 맞아 어느 반의 누가 표창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과 후에 학급 대표들을 모아 놓고 학교 안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했던 것만큼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후 40년쯤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에는 다행히도 우리나라 어딜 가나 울창한 나무숲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이 그동안 많이 개발되고 발전했지만 그런 자연 경관이야말로 우리 앞에 펼쳐진 가장 큰 긍정적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림<샤갈을 추억하며..모사>30호 유채

 

지난 식목일에는 라디오에서 나무 심기에 관한 사연이 연거푸 소개되었다. 지금도 초등학교에서 나무 심기 행사 같은 것을 계속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사랑에 대한 열의만큼은 여전히 줄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그날 식목일을 맞아 모처럼만에 화분 몇 개를 분갈이 했다. 내 집에는 화분들이 꽤 많은 편이다. 어린 묘목 사다가 공 들여 키운 것도 있고, 직접 뿌리를 내려서 화분에 심은 것도 있고, 어지간히 성장한 것을 사다가 계속 물만 주고 키운 것도 있다.

 

젊었을 때는 화분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아 키우는 화분마다 말라 죽기 일쑤였다. 어느 영화에서 보니 결혼을 하고 싶으면 먼저 애완견을 키워보고, 애완견을 키우고 싶으며 우선 화초부터 키워보라고 한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첫 번째 관문조차 통과하지 못한 셈이다. 화분 하나로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인생의 각박함이라니! 근처에 화분을 잘 키우는 지인이 살고 있어 더욱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뭔가 달라졌다. 식물들이 날 잘 봐주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내 몸에서 나오는 기의 흐름이 좋아진 건지 아무튼 우리들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꿨다. 키우는 족족 내 손끝에서 죽어버리던 식물의 암흑기가 흘러가고 이제는 녹색의 풍요로운 성수기, 평화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내 손만 닿아도 무럭무럭 커버리는 화초들, 그 무성한 우거짐..내 마음이 편해졌다거나 집안의 채광 환경이 좋아졌다거나 내 몸에서 흐르는 기의 흐름이 좋아졌다는 식만으로는 결코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그건 사랑일 거다.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먹고 자란다. 사람도 강아지도 식물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랑이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화분 중독에는 약도 없다. 일단 화분에 빠지면 어딜 가나 화초들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하나 둘 늘어난 화분들로 어느새 집안에 가득했다. 저번에는 이사를 하는데 부동산 아저씨가 웬 집에 화분이 그렇게 많아요, 온실 차려도 되겠네, 하는 바람에 괜히 내 얼굴이 벌게졌다. 뭐든 적당한 게 좋은데 수위 조절이 쉽지 않으니 그게 문제다. 그렇다고 애써 키운 화분들을 포기할 수도 없고, 실내 공기정화에 좋잖아, 하면서 그냥저냥 함께 지내는 중이다. 요즘에는 화분 쇼핑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집안에 늘어놓을 장소도 더 이상 없고, 시각적 관점에서도 인테리어와 더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초록빛 자연은 사람 마음을 순하고 맑고 곧게 만든다. 영혼의 청정효과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자연을 경외하고 초록의 화분 이파리를 좋아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언젠가 할리우드 여배우가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집 안에서 화분을 키우지 않아요, 절대로. 작은 꽃 화분조차도 싫어요. 그게 얼마나 더러운데. 이상한 벌레들도 살고...으으윽”

 

과장된 제스처로 온몸을 떨기까지 하는 그녀. 식물에 대한 피치 못할 트라우마가 있는 건지, 아니면 미생물에 대한 알레르기 증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나(아마도 변덕스러운 결벽 증세겠지만), 지금도 종종 화분에 물을 주다 말고 그 여배우의 말을 떠올리는 걸 보면 집 화분들의 실체, 결코 화원에 전시된 화분처럼 깨끗하지도 잎사귀가 항상 반짝거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더러운데...이상한 벌레도 살고...”

 

그렇게 예쁜 입으로 왜 그런 흉측한 말을 해서 내 어깨까지 움츠러들게 만들었는지...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고난의 역사를 지니게 마련이다. 내가 10년 넘게 키우고 있는 벤자민 화분은 몇 년 전에 진드기 피해를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꾸준히 약을 쳐주었는데도 여전히 끈끈한 기운이 남아 내 속을 썩인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화초 단계를 넘어 나무 상태로 진화한 터라 이삼 년에 한 번씩 대대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주어야만 그나마 모양새를 보존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내 집식구로 살아온 그 벤자민은 아마도 남성이 아닐까 싶다. 식물명에서 풍기는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거꾸로 사는 벤자민'도 있지 않은가. 아니 뭐, 브레드 피트까지 바라지는 않지만...그런데 그 놈을 장갑을 끼고서 전지가위로 우악스럽게 잘라낼 때의 느낌이라니..누군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마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내 신체의 일부분이 절단되는 것처럼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거친 가위질에 무참하게 잘려나간 나뭇가지에서는 연녹색의 투명한 진액이 흐른다. 집안에만 갇혀서 사는 식물 특유의 초록빛깔 슬픈 눈물 같은, 약간 비릿하면서도 눅진한 비극의 체취 같은... 벤자민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매번 당부하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제발 살살 좀 커다오.

천장까지 닿지만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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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언덕의 추억> 

 

먼 훗날 우연히 만난 그대가

반감다 악수하며 웃으리라.

하늘은 높아가고

푸르고 푸른 허공에

성당의 종소리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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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몽마르트르 언덕의 추억>

 

모처럼 비구상 작품을 손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새롭습니다. 이 작품은 15년쯤 전 파리 여행 직후에 그린 칼라 드로잉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수채화와 파스텔을 사용했던 것인데 그것을 유화로, 그것도 비슷한 분위기로 다시 제작하는 일이 결코 녹녹치 않았습니다. 수차례의 좌절, 무작정 묵혀만 두었던 인내의 시간이 아주 길었다고 할 수 있지요. 때론 그림도 김치처럼 발효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 무엇인가가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겨우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김연아 선수가 인터뷰에서 아사다 마오와의 인연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 여기서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정말 '징'합니다.'했던 기억이 납니다. '징'하다는 그 표현...이 그림이야말로 제게는 그런 '징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한 발 전진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고맙고 마냥 소중할 따름입니다.

 

요즘에는 시간 날 때마다 노트 패드로 이북을 읽고 있습니다. 종이 책에 비해 몰입도가 상당합니다. 이러다 정말로 종이책이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소설가잖아!’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소설...그 또한 무엇인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주기를 고대합니다. 모두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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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석촌리 들판2> oil on canvas 65×53cm 2013

 

과거 어느 곳으로 꼭 한 번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날 밤 그 다리 앞을 선택하겠다. 최근에 본 어느 영화에 나오는 설정이다. 딱 한 번만 되돌아 갈 수 있는 과거의 시점. 그곳에 가서 다각도의 관점으로 다시 그 현실을 경험하고 조망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그 현실이란 차가 쌩쌩 달리는 다리 위에 위태롭게 한 줄로 서 있던 오리 일가족에 대한 목격담이다. 어쩌면 나는 가해자일수도 있다. 제발 아니기를...

 

김포에는 곳곳에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한국처럼 산과 들판과 강물과 마을이 인접해 있는 장소에 살다보니 그저 앞이 툭 터진 공간만 봐도 왠지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한동안 추억에 잠기게 된다. 그 옛날 청춘의 한때를 상기시키는 플로리다의 드넓은 평원 같은 곳. 그 막막한 오후의 텅 빈 한기...그것은 오로지 자연이라는 공간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다. 청춘의 아득했던 감수성을 환기시키고 현실 속 그 무엇인가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던 느낌들을 나는 종종 이곳 김포에서 느끼곤 한다.

 

이 순간 찜질방 얘기를 또 꺼낸다는 게 조금 멋쩍긴 하지만 김포에서도 꽤나 근사한 들판이 바로 그 찜질방 앞에 펼쳐져 있다. 찜질방 건물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 곳 하나 막힘 없는 지평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늦은 오후 탈의실 창밖으로 내다 본 노을 진 풍경은 어딘가 에릭 사티의 한 박자 쉬어가는 듯한 피아노 선율을 닮아 있었고,고즈넉하면서도 다채롭게 변해가는 계절의 스펙트럼 또한 일상에 지친 영혼을 조심스럽게 한번씩 꾸욱 눌러주고는 했다.

  

사건이 있던 그날은 온종일 비가 내렸다. 낮 동안 작업을 하다가 찜질방에 들러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주위가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와이퍼는 계속 작동 중이었고 자동차 타이어는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조용히 내달렸다. 논두렁과 산책로가 인접해 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빠져나오면 최근에 새로 생긴 4차선 도로가 나타난다. 진입로 앞 다리 앞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앞 유리창에서 딸깍거리는 와이퍼 소리, 추억의 그림자처럼 깔리던 라디오 음악소리, 저 먼 어딘가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빗소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우물 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듯 차안 공기는 조금쯤 무겁고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도로 앞 진입로는 지평선보다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형상이라 수평선의 광활함이 실제보다 훨씬 나즈막하면서도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날은 그런 들판 따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주위는 어두웠고 빗물을 계속 추적거리고 있었으며 나는 저 앞에서 깜빡이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신호등이 바꿔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으며 도로 위로 들어섰다. 내 삶에 존재하는 지극히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수평선을 지나 수직의 공간, 현실 속 내 자리를 향해 달려나가던 바로 그때였다. 오른쪽 눈 가장자리 아래로 뭔가 빨려들 듯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약간 번들거리는 시커먼 노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노란색 점점의 물체들.

 

그건 분명코 오리였다. 그것도 대여섯 마리쯤 되는 오리 떼였다. 맨 앞에 있던 어미 오리는 새끼 오리들보다 몸집이 컸고, 뒤에 일렬로 서 있던 오리들은 오종종한 체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차선 쪽으로 다가와 있었고, 내 자동차 우측 앞바퀴가 지나가는 바로 거기에 오리들의 우두머리인 어미가 서 있었다.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밟았던가? 확실하지 않다. 오리 떼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어미 오리가 서 있던 지점을 통과한 후였다. 뒤에는 다른 자동차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뺑소니치듯 그 자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냥 밟고 지나온 것은 아닐까. 정직하게 말하지만 타이어 바퀴가 덜컹하거는 느낌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거기 있던 오리들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이 그때 벌어진 것이다. 

 

생각하보니 그 오리들 형상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이제껏 공원이나 강가에서 본 오리들은 대개 흰색 아니면 거무튀튀한 색이었다. 그런데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얼핏 들어난 그 오리들은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장난감 오리 같았다. 엄마들이 어린애들을 목욕시킬 때 욕조에 함께 띄워 놓곤 하는 바로 그 노란색 오리들이라고나 할까. 어미 뒤에 쪼르르 서 있던 새끼 오리들도 인위적 설정 같았다.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비까지 추적거리는 밤길에 플라스틱 인형 오리들을 그것도 차들만 간간히 지나다니는 길가에 일렬로 주욱 늘어놓았단 말인가.

 

“무식한 애미 같으니라고! 겁도 없이 무슨 배짱으로 이 밤에 새끼들을 끌고 나왔단 말이야. 그러게 애들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니깐.”

 

나는 코웃음까지 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심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1년하고도 6개월이 흘렀지만 찜질방에 다녀올 때마다 여전히 그날 밤 장면들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아무리 해도 실타래를 풀 수 없는 일. 검은색 주머니 속에 파묻힌 영원한 비밀. 그날 밤 그 오리 떼들이 내게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나는 결코 그들의 생사를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미래도, 과거도...그러나 꼭 한번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 속 그 다리 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들은 모두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그 어미 오리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미력하나마 더듬이를 곤두세운 채 새끼 오리들을 잘 이끌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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