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나무. 이화 마을>유채 2014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내 인생에도 그런 나무가 있는데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어딘가 깊숙이 숨겨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가능한 우아하고 멋진 치장이 필요할 듯도 싶었다.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때는 마구 나뭇가지를 쳐낸 적도 있고, 다른 데로 옮겨보려고 무진 애를 쓴 적도 있었다. 밝음과 그늘이 서로 공존하는 것처럼 나무가 항상 싫었던 것만은 아니다. 내가 힘들거나 지쳤때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했다. 물론 나무는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나무가 부담스러워 누군가 송두리째 뽑아가거나 땔감으로 베어다 쓰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세상에 미약한 온기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네게 부여된 임무는 충분히 마친 셈이야. 안 그래? 내가 빈정거리듯 툭 던진 말에 나무도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어떤 답변이나 특별한 반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침묵이야말로 나무의 유일한 표현 수단이자 방어 기제였다. 가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뒤채거나 머리카락을 휘날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연 변화에 순응하는 정도의 단순한 움직임일 뿐 별 다른 의미는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나무를 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 어딜 가나 나무들 천지였다. 더 잘생기고 우람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매료시켰다. 그렇게 많고 많은 나무들 중에서 내 나무의 존재 가치는 불쌍할 정도로 미약했다. 너도 참 끈질기구나. 제발 나를 포기해줘.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다른 데로 꺼지란 말이야! 정말로 화가 나서 하루는 극단적인 말까지 내뱉고야 말았다. 나무도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한번 움찔 떨더니 이내 잔 나뭇가지 몇 개를 투득 떨어트렸다.
나는 오랫동안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을 헤매 다니기 시작했다. 나무를 없앨 수 없다면 나무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뿐이었다. 나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듯싶었다. 나무에 대한 생각이나 사념들이 차차 줄어들더니 어느 시점부터인가 더 이상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무의 모습이 지우개로 진운 것처럼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지우개 부스러기를 후 불어버리고는 마른걸레질을 한 다음 그 위에 다른 것들을 잔뜩 올려놓았다.
세월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삶과 인생의 여러 각도에서 그런 악순환이 강박증 증세처럼 빠르게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나도 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어야 할 영양제며 건강 보조식품 같은 것들이 늘어났고,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는 염색을 해야만 마음이 놓일 정도로 새치가 희끗거리기 시작했다. 앉았다 일어설 때면 '끄응!'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그림<그녀,마을 지나가다>2014
하루는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옛날 그 나무가 있던 장소를 지나치게 되었다. 초여름 햇살이 부서지는 오후 녘이었다. 차장 밖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나무 잎사귀들이 꿈속인 듯 아련했다. 그리운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한순간 내 가슴이 애잔하게 젖어들었다. 반갑고 미안하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심정들이 휘몰아쳤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리를 건너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나무는 한눈에 나를 알아본 듯 했다. 내가 많이 늙고 거칠어진 모습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무의 따뜻한 시선 안에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오버랩되었다. 그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제는 ‘그저 바라본다’는 의미를 나도 조금은 깨닫고 있었다.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볼 뿐이지만 그 침묵 속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나무둥치에 기대고 앉아 침묵의 언어를 들었다. 그것은 애틋한 기다림의 언어였고, 용서와 깨달음과 포옹의 언어였다. 언어 이전의 언어로 나무가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봐.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니? 물소리는? 새소리는? 가끔은 햇볕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아. 그때마다 바삭바삭 과자가 맛있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넌 귀를 열고 듣기만 하는 거야. 가만히 온 마음으로, 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