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해남의 여름>유채 2014

 

얼마 전 학생들과 함께 해남으로 문학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강진 청자 박물관에서는 직접 가마로 도자기를 구워내는 광경을 목격했는데 입구에서부터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화력이 대단했습니다. 가우디 출렁다리 아래서 마신 막걸리 한잔도 잊을 수 없고 두륜산 대흥사, 고산 윤선도 고택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침 이북으로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읽고 있었는데 어쩐지 소설 속 장소들을 순례하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20세기 초반 한국 문단의 모더니스트 선두 주자였던 김영랑 생가도 빠트릴 수 없는 유적지입니다. 오늘 올리는 작품은 고산 윤선도 고택이 있는 근처 마을 모습입니다. 녹음이 짙은 땅 끝 해남에서 만난 여름이 꿈 속 전경인 양 눈부시도록 푸르렀습니다.       

 

 그림<해남.그녀 지나가다>유채 2014

 

 그림 <덕포진, 그녀 지나가다> 유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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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나무. 이화 마을>유채 2014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내 인생에도 그런 나무가 있는데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어딘가 깊숙이 숨겨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가능한 우아하고 멋진 치장이 필요할 듯도 싶었다.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때는 마구 나뭇가지를 쳐낸 적도 있고, 다른 데로 옮겨보려고 무진 애를 쓴 적도 있었다. 밝음과 그늘이 서로 공존하는 것처럼 나무가 항상 싫었던 것만은 아니다. 내가 힘들거나 지쳤때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했다. 물론 나무는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나무가 부담스러워 누군가 송두리째 뽑아가거나 땔감으로 베어다 쓰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세상에 미약한 온기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네게 부여된 임무는 충분히 마친 셈이야. 안 그래? 내가 빈정거리듯 툭 던진 말에 나무도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어떤 답변이나 특별한 반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침묵이야말로 나무의 유일한 표현 수단이자 방어 기제였다. 가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뒤채거나 머리카락을 휘날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연 변화에 순응하는 정도의 단순한 움직임일 뿐 별 다른 의미는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나무를 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 어딜 가나 나무들 천지였다. 더 잘생기고 우람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매료시켰다. 그렇게 많고 많은 나무들 중에서 내 나무의 존재 가치는 불쌍할 정도로 미약했다. 너도 참 끈질기구나. 제발 나를 포기해줘.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다른 데로 꺼지란 말이야! 정말로 화가 나서 하루는 극단적인 말까지 내뱉고야 말았다. 나무도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한번 움찔 떨더니 이내 잔 나뭇가지 몇 개를 투득 떨어트렸다.

 

나는 오랫동안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을 헤매 다니기 시작했다. 나무를 없앨 수 없다면 나무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뿐이었다. 나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듯싶었다. 나무에 대한 생각이나 사념들이 차차 줄어들더니 어느 시점부터인가 더 이상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무의 모습이 지우개로 진운 것처럼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지우개 부스러기를 후 불어버리고는 마른걸레질을 한 다음 그 위에 다른 것들을 잔뜩 올려놓았다.

 

세월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삶과 인생의 여러 각도에서 그런 악순환이 강박증 증세처럼 빠르게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나도 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어야 할 영양제며 건강 보조식품 같은 것들이 늘어났고,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는 염색을 해야만 마음이 놓일 정도로 새치가 희끗거리기 시작했다. 앉았다 일어설 때면 '끄응!'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그림<그녀,마을 지나가다>2014

  

하루는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옛날 그 나무가 있던 장소를 지나치게 되었다. 초여름 햇살이 부서지는 오후 녘이었다. 차장 밖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나무 잎사귀들이 꿈속인 듯 아련했다. 그리운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한순간 내 가슴이 애잔하게 젖어들었다. 반갑고 미안하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심정들이 휘몰아쳤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리를 건너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나무는 한눈에 나를 알아본 듯 했다. 내가 많이 늙고 거칠어진 모습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무의 따뜻한 시선 안에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오버랩되었다. 그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제는 ‘그저 바라본다’는 의미를 나도 조금은 깨닫고 있었다.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볼 뿐이지만 그 침묵 속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나무둥치에 기대고 앉아  침묵의 언어를 들었다. 그것은 애틋한 기다림의 언어였고, 용서와 깨달음과 포옹의 언어였다. 언어 이전의 언어로 나무가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봐.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니? 물소리는? 새소리는? 가끔은 햇볕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아. 그때마다 바삭바삭 과자가 맛있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넌 귀를 열고 듣기만 하는 거야. 가만히 온 마음으로, 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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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파란 지붕이 있는 풍경, 화석정> 유채 2014                                                                                                                      

                                                                                                                                                                                                                                                                                     온종일 작업을 하다 집에 돌아와  가나 포르투갈 전을 시청했습니다. 보예  선수의 자책골, 중원에서 혼자 외로워 하는 호날두...두 팀 모두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독일과 미국에 밀린 모양입니다. 공 하나를 두고 전 세계가 전쟁을 치루고 있는 듯 합니다.  2002년에는  한국이 포루투갈과 맞붙어 싸웠지요. 스포츠에 별로 관심도 없던 사람이 관전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미치고 싶을 땐 미쳐라' 그런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 전사들의 게임이 시작합니다. 그동안 제발 잠들지 말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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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화석정의 6월>유채 2014

 

학교가 방학을 하자마자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습니다. 붓과 물감과 팔레트, 코끝에 어리는 이 향취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요. 실컷 떠돌다가 모처럼 집에 온 것처럼 마냥 행복합니다. 길 잃은 잠자리 한 마리가 창가 언저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올래? 그냥 갈 거야?

 

 그림<장암동에서>유채 2014

 

새로운 붓이란 물감이랑 캔버스도 잔뜩 주문했습니다. 올 여름 휴가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작업실 이젤 앞,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FM 음악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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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넛과 파이>oil on canvas 61×50cm 2014

 

살아간다는 것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전제로 한다. 주식은 끼니마다 '가능한' 제때 챙겨 먹어야 할 음식이지만 간식 역시 행복한 쉼표를  영유하기 위한 주요 먹거리다. 온종일 뭔가에 몰두하거나 몰두하기 싫어지는 일상 속에서 괜히 달달한 게 자꾸 당긴다 싶으면 그만큼 속이 허하고 뒤숭숭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어쩐지 입안도 깔깔하고 맘속도 텁텁한 이런 날 오후에는 향기 좋은 원두커피 한잔에 베이커리 온기 가득한 도넛 생각이 간절하다.

 

도넛은 소비자가 선호하는 맛에 대한 느낌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내가 좋아하는 도넛은 부드럽고 촉촉하면서도 쫄깃쫄깃한 ‘허니딮’이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노란 표면에 하얀 설탕가루를 살짝 입힌 모습이라니! 입안 가득 침샘을 자극하는 맛의 향연에 적막했던 오후 한때가 투명한 햇살처럼 반짝인다.

 

도넛 중간에 구멍을 뚫어놓은 건 밀가루 반죽을 튀길 때 기름 온도를 골고루 배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는 여배우 골디 혼이 메릴 스트립이 쏜 장총에 맞아 복부에 큰 구멍이 뚫리는 난감한 장면이 등장한다. 신비의 명약을 먹은 터라 생명 유지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자기 몸에 난 흉측한 구멍이 당황스럽다.

 

어, 내 드레스를 망쳐 놨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근데, 손이 들락거리잖아! 저쪽도 보여! 가뜩이나 큰 그녀의 눈이 더욱 커진다. 고개를 수그려 몸의 동공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이 키르코의 그림 속 풍경인 양 어딘가 기우뚱하니 낯설게 다가온다.

 

 

그림<꽃과 로션 병들>oil on canvas 61×50cm 2014-16

 

동그라미는 그 자체로 안도 되고 밖도 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긍정을 뜻하기도 하고 부재를 암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동그라미로 구성되어 있는 도넛, 그 전체는 또 하나의 동그라미를 형성한다. 한 개의 도넛은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며, 세상의 총집합은 도넛에 대한 각국의 취향과 맞물려 있다. 커피와 함께 동그라미 세상을 조금씩 음미하다 보면 금방 녹아들 듯옛 기억 한 자락이 혀끝에 감겨온다. 추억 하나의 도넛과 추억 하나의 동그라미가 그렇게 입안에서 골고루 잘 씹힌 후에 어둠 속 미로를 향해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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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2014-04-07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넛에 대한 글을 읽으며, 고 김지원 작가를 생각했습니다.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두었는데..
"나는 가끔 동그라미라는 생각을 한다. 이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 이고, 저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 인데, 살아가며 여러 경험을 하는 동안에 이해의 영역이 넓혀지면 그 동그라미는 커진다, 아니 안 커지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 김지원씨가 이상문학상을 받은 뒤 수상소감에 쓴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도넛 중에 가장 기본인 팥빵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동그라미의 의미는 생각지도 않은채 먹는 행위에 집착해 허겁지겁 쑤셔넣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승화된 현실을 지향하면서도 먹는 행위에 있어서 저는 너무 본능적 입니다.언제 저라는 사람은, 빵을 먹으면서 동그라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을 투영해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림이 주는 달달한 도넛의 풍요롭고 충만한 느낌은 저의 오후시간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4-08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