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김미진의 오후 3시 (김미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소설가이자 화가 김미진의 오후 3시. 소설과 그림, 삶의 기록이 함께 머무는 공간입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27 Jul 2026 19:52:34 +0900</lastBuildDate><image><title>김미진</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15891677826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김미진</description></image><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1.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3945</link><pubDate>Mon, 27 Jul 2026 0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394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차 안은 차체의 겉모습보다 훨씬 더 낡아, 오래된 유물처럼 빛이 바래져 있었다. 핸들은 손때가 겹겹이 스며든 가죽 위로 번들거렸고, 변속기 너머로는 세월이 남긴 자국이 부드럽게 패여 있었다. 이름 모를 시간이 묻어난 시트는, 옛이야기의 숨결인 듯 묘하게 따스함을 풍겼다. 자동차의 라디오는 침묵했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재즈의 잔향이 번져올 것만 같았다.&nbsp;<br>서윤은 이 차가 오래도록 품어온 정서의 무게를 어렴풋이 감지했다. 어쩌면 이 차는 시간이 머물렀다 간 자리이자, 사라진 기억의 흔적들을 감싸안은 쉼터일지도 몰랐다.<br>-자, 출발합니다.<br>도준이 웃으며 말했다.<br>-네.<br>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숨을 삼켰다. 밀폐된 공간에서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있다는 생각만으로 불안이 스며들었다. 차 안의 정적은 숨소리조차 울리는 듯 어색했고,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탔다는 사실이 자책처럼 가슴을 조여왔다.<br>강태일이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싸늘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경멸 어린 입술 위로 번지는 비웃음. 심지어 침이라도 내뱉을 듯한 그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br>도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운전대를 단단히 쥔 채 숲속 비포장길만 응시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여유롭고 안정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보는 그 모습은 얼마간 서윤을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br>‘나를 의식하지 않는 거야… 근데 내가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인가?’<br>서윤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 유치한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무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서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궁금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br>서윤의 마음이 조금 진정될 무렵, 차가 크게 덜컹거리는 지점을 지나자 오솔길은 점점 좁아졌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보리암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이, 숲 그림자 속에서 한 가닥 흐릿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br>-저기서 좌측으로 가시면 돼요.<br>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그맣게 말했다.<br>-알고 있습니다. 저 위에 있는 파란 지붕 집이죠?<br>도준이 가볍게 웃었다.<br>-네?<br>서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br>-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아, 그렇죠, 참!<br>서윤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br>도준이 핸들을 왼쪽으로 꺾자 엔진이 낮게 웅웅대더니, 랜드로버는 울창한 잡목 숲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른 실개천 같은 고랑을 지날 때는 차체가 더욱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도준이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받쳐 주었다. <br>서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잡이를 붙잡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도준의 손이 다시 운전대로 돌아가자, 낯설고 무방비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며 손끝까지 번졌다. 차 안의 정적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계속 침묵만 지키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했다.<br>-굉장히 오래된 차네요.<br>서윤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놀란 듯 돌아보았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br>-74년형이에요. 곧 폐차될 운명이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굴러가죠.<br>남자의 말투에는 담담함 속에 묘한 자부심이 묻어났다.<br>-대학교 때 이거랑 비슷한 차를 타고 다니던 교수님이 계셨어요.-그 교수님 차도 이렇게 고물이었나 보죠?-아니, 이 차가 고물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br>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br>-그냥 농담한 거예요.-아, 네…<br>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반사되어 속눈썹 아래에 투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br>그 모습을 바라본 순간, 도준의 눈에도 기억의 잔상이 스쳤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 마치 신호를 받은 듯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작은 기척에도 놀라 금세 상처받을 것 같은 예민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촉촉한 눈빛은 작은 몸짓에도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도준은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일부러 꾹 참았다. 성급한 말 한마디로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br>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만난 조그만 여자아이가 이렇게 성숙하게 자라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제 고무부 집 마당에서 홀로 서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끌림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감된 재회처럼, 가슴 한가운데 작은 등불이 켜졌다. 그 짧은 순간, 지난 세월이 한 점으로 응축되며, 오랜 인연의 끈이 불쑥 당겨지는 듯했다.<br>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접점 같았다. 험준한 봉우리와 절벽을 전전하며 살아온 도준의 세계와, 무르고 따스한 그녀의 세계가 초봄의 투명한 바람 속에서 잠시 포개졌다. 도준은 자신과 서윤이 이토록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왔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nbsp;  그는 매 순간 치열한 경험과 도전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왔고, 때로는 벼랑 끝에서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서윤은 그런 극단적인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부서질 듯 가냘프고 깨끗하며 순수한 분위기는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그녀만의 선명한 존재감이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br>흘러간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은 기억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불현듯, 서윤이라는 여인의 내면과 그녀가 지나온 계절들이 궁금했다. 마치 자신이 놓치고 살아온 어떤 빛의 조각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 보는 느낌이었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7/pimg_63920707598358355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394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0. 그냥이라니요. 이런 것도 인연인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8611</link><pubDate>Fri, 24 Jul 2026 05: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8611</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도준이 조심스럽게 차를 옆으로 붙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br>-자전거에 문제라도 생겼나요?<br>나지막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목소리에 서윤은 움찔했다. 그녀는 자전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옆을 돌아보았다.<br>-아, 안녕하세요.<br>평소와 다르게 입술 끝이 살짝 떨리고,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방금 땅바닥과 씨름이라도 한 듯한 자신의 모습이 민망했고, 이런 쑥스러운 순간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br>‘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br>인적 드문 외딴 숲길에서 생판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마주한 상황은 묘하게 꺼림칙했다. 전날에도 그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있던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그랬다. 울타리 하나 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야외 공간이지만, 이 깊은 숲 한가운데서 낯선 이와 다시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br>그녀는 은연중에 간절히 빌고 있었다.<br>‘어서 가세요.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세요. 제발.’<br>남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br>‘뭐야, 저 눈빛?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br>서윤은 바퀴가 터진 자전거를 억지로 끌며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지쳐 있었지만, 가능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균형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br>남자가 다시 차를 옆으로 붙였다.<br>-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아뇨.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앗!<br>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턱에 난 상처가 소금을 뿌린 듯 화끈거리며 몹시 따가웠다.<br>-잠깐만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요.<br>남자가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br>-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거예요?-괜찮아요.<br>남자의 호의를 밀어내듯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br>-괜찮긴요. 턱에 흙이 잔뜩 묻었어요. 우선 상처부터 좀 씻어내야겠네요.<br>그녀의 눈동자에는 경계하는 빛이 어른거렸다.<br>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로 가서 생수병과 휴대용 티슈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먼저 입안을 헹군 뒤, 그가 따라주는 물을 손바닥에 받아 턱 주변을 닦았다. 찬물이 상처를 스치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br>-많이 쓰라려요?<br>도준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br>-자전거 헬멧은 왜 안 쓰셨어요?<br>그의 목소리는 온화하지만 단호했다.<br>-여기 그런 데잖아요. 혼자 천천히 타는 건데… 굳이 그렇게 눈에 띄고 싶진 않아서요.<br>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거북하게 울렸다. 자기 귀에도 낯설게 들리는 음성에, 순간 입안 어딘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닐지 불안이 치밀었다.<br>-혼자일수록 더 조심하셔야죠. 자전거 사고도 자동차 사고 못지않게 위험하거든요.<br>그는 고개를 저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br>-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아니요. 괜찮아요. 정말로요.<br>서윤은 손을 내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거절의 제스처는 분명했지만, 눈빛에 미세한 망설임이 어렴풋이 비쳤다. 도준은 시선을 옮겨 펑크 난 자전거 바퀴를 가리켰다.<br>-이걸 혼자 끌고 갈 수 있겠어요?-뭐, 그냥…-이런 길에, 혼자서요?-아니, 그러니까…<br>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고, 도와달라 하기엔 자존심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br>-그냥 가라고 하시면,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br>도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차로 향하는 걸음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 발씩 멀어지면서도, 그 뒷모습에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여유가 묻어났다.<br>-잠깐, 저기요!<br>서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쫓아갔다.<br>-도, 도와주는 김에 좀… 끝까지 부탁드릴게요.<br>조금 숨이 찬 말투였지만,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도준은 천천히 돌아섰다. 눈빛은 조금 전보다 깊어져 있었고,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떠올랐다.<br>-흠, 이 정도면 인연이네요. 먼저 자전거부터 실을게요.-네? 어제는 운명이라더니, 오늘은 또 무슨 인연… 이에요?-어제요?-할아버지네 집 마당에서요.<br>도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br>-아, 제가 잠깐 착각했나 봐요.<br>서윤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br>-아니 뭐… 그냥…<br>말끝이 흐려지자, 도준이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br>-그냥이라니요. 이런 것도 인연인데.<br>서로의 눈빛이 잠깐 맞닿았다. 긴장과 웃음, 약간의 부끄러움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봄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숲길을 스치며,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을 흔들어 놓았다.<br>도준은 멋쩍게 웃으며 자전거 앞으로 다가갔다. 앞바퀴를 분리하는 그의 손놀림에는, 도구를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 특유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유아용 자전거라도 되는 양 가뿐히 들어 짐칸에 싣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br>-자, 타세요.<br>서윤은 문득 멈칫했다. 도움을 받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탄다는 건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br>어제 잠시 스쳤던 김 씨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의 불안이 되살아났다. 마음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본능적으로 어깨가 굳어졌다. 숲길 양옆을 살피며 되돌아설 길을 찾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남자, 그리고 고요한 숲만이 고립된 현실 속에 남아 있었다.<br>‘김 씨 할아버지 조카라잖아.’<br>그 순간, 우연히 찾아온 작은 일탈에 그녀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느꼈을까. 아니면 불안하기만 했던 걸까. 그 불안 너머에, 은근히 스며드는 설렘도 있었을까.<br>소리와 기척이 사라진 오후의 숲길에서, 서윤은 그의 부축에 살짝 기대어 차에 올랐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4/pimg_639204662984581917.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8611</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9.중력에서 풀려난 듯 허공에 매달린 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6926</link><pubDate>Thu, 23 Jul 2026 05: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692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서윤이 자전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뉴욕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뉴저지 포트 리의 작은 가게 위층 원룸에서 지내며, 혼잡한 버스 대신 자전거로 맨해튼까지 통학했다. 거의 1년 가까이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허드슨강의 바람을 맞으며 질주했던 그 경험은 몸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제는 횡계의 숲길 정도는 무리 없이 달릴 수 있게 되었다.<br>한동안 2차선 차도를 따라 달리던 서윤은 인가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길 위로 엷은 햇살이 부서졌다. 사람의 발길마저 드문 구불구불한 길 끝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펼쳐져 있었다.<br>서윤은 속도를 줄이고 페달을 수평으로 맞춘 뒤,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자전거가 울퉁불퉁한 지면 위를 내달릴 때마다 짧고 날카로운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앞바퀴는 자갈에 부딪힐 때마다 불규칙하게 튕겼지만, 서윤은 핸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았다. 경사가 가팔라지자 뒤꿈치에 힘을 주어 페달을 깊이 밟으며 속도를 조절했다.<br>-좋아, 이 정도는 문제없어. 근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br>오늘은 손문기 선생님 전시회 오프닝이 있는 날이었다. 손 화실 식구들이 리온 갤러리에 와서 자신을 찾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속상했다.  <br>-괜찮아. 전시회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br>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리며 핸들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길 한가운데 돌덩이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까만 암석의 날선 면이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지만, 앞바퀴가 돌무더기를 스치며 중심을 잃었다. 자전거는 미끄러지듯 흔들렸고, 한순간 휘청거리며 그대로 무너졌다.<br>-앗!<br>짧은 비명이 터진 순간, 그녀의 몸이 자전거와 함께 튕겨 올랐다. 중력에서 풀려난 듯 허공에 매달린 채, 손은 핸들에서 빠져나갔고, 두 발은 페달을 벗어나 공중에서 엇갈렸다. 곧이어 닥칠 충돌을 직감한 가슴이 차가운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자전거와 함께 럭비공처럼 날아가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br>얼굴부터 처박히는 충격과 함께 거친 흙이 입과 콧속 깊숙이 밀려들었고, 흙먼지와 뒤섞인 비명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두 다리는 자전거 바퀴에 꼬여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br>-으, 으으…<br>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얼굴 한쪽에 강펀치를 맞은 듯한 예리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입안에서는 마른 흙이 서걱거렸고, 귀에는 ‘찌잉’ 하는 이명이 울렸다. 머릿속은 쇠망치에 찍힌 듯 멍하고, 시야는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혼자 당한 일이니 그다지 창피할 일은 없었지만, 곧바로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갑자기 싸늘한 예감과 함께 울음이 치밀어 오를 듯했다.<br>-아냐. 괜찮을 거야. 정신 차리자.<br>땅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충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뼈마디 곳곳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욱신거렸고, 손끝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혀끝에 와닿은 흙의 거친 감촉이 메스꺼운 불쾌감을 더했다. 그녀는 힘겹게 엉킨 다리를 풀기 시작했다. 흙먼지를 퉤 뱉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더듬자 오른쪽 뺨 아래가 울퉁불퉁 부어 있었고, 턱 밑은 쓰라렸다. 팔뚝과 무릎에서는 화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고, 피부가 벗겨진 다리 상처에서도 붉은 열기가 느껴졌다. 손바닥에도 둔한 통증이 남아있었으나, 장갑 덕분에 깊은 상처는 피한 듯했다.<br>-많이 안 다쳤어. 부러진 데도 없잖아. <br>서윤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몸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는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앞바퀴가 터진 자전거는 만취한 취객처럼 무겁게 비틀거릴 뿐이었다. 멀쩡하게 잘 달리던 타이어를 찢은 범인은 바로 그 녹슨 못이었다. 오랜 세월 벌겋게 산화한 뾰족한 쇳조각 하나가, 하필 그 순간 누군가가 걸려들기를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br>제 기능을 잃어버린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이 들었다. 가뜩이나 험한 비포장도로에서 질질 끌리며 휘청대는 앞바퀴 때문에 몇 걸음 옮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겨우 비틀비틀 걷고 있던 그때, 갑자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br>-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br>그가 더듬거리며 내뱉었던 그 말을 서윤은 또렷이 기억했다. 처음 본 남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운명’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놀란 새가슴이 되어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하필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마주치다니.<br>-맙소사, 왜 이럴 때 나타난 거야.<br>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눈길을 돌렸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3/pimg_63920381052904620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692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8. 오래된 시간의 틈 사이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5043</link><pubDate>Wed, 22 Jul 2026 0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504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횡계 읍내는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거리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라 읍내를 뿌옇게 뒤덮었다. 그 위로 스며든 초봄 햇살이 풍경 전체를 엷은 장막처럼 감쌌다. 중앙로를 따라 트럭과 롤러가 쉴 새 없이 오가며 땅속까지 울릴 만큼 굉음을 토해냈다.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낮은 건물과 오래된 상가들 사이로 슈퍼마켓과 스키 숍, 공인중개사 사무소, 식당들의 간판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br>이 동네는 겨울 한 철이 성수기였다. 12월 삭풍이 불기 시작하면 용평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로 이 좁은 거리도 제법 북적거렸다. 스키장은 사월까지 문을 열었지만, 그해 삼월은 유난히 따뜻했다. 슬로프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도 일찌감치 뜸해졌다. 도로에는 외지인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사장 트럭들만 먼지를 풀풀 날리며 오갈 뿐이었다.<br>이튿날, 도준은 오대산 등반을 마친 뒤 횡계로 돌아왔다.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몸의 감각을 다듬고 근력 훈련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거의 다 보낸 것이다. 그의 몸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절어 있었고, 어깨에는 쇠뭉치를 올려놓은 듯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다리 근육은 은근히 잡아당기듯 뻐근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먼저 몸에 밴 냄새를 씻어내고 싶었다.<br>중앙로 근처 사우나탕에는 대낮부터 술기운을 씻어내려 온 남자들이 몇 명 눈에 띄었다. 간단히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도준은 젖은 머리를 털며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늘 단골로 다니던 납작식당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소박한 분위기의 함박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간판 아래 황태국밥과 황태 고추장구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인지, 가게 안은 손님 한 명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br>-어서 오세요. 저리로 앉으시죠.<br>부엌에서 나온 주인 남자가 창가 옆 빈자리를 가리켰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고, 좌식 테이블이 놓인 방으로 들어섰다. <br>흰색 모조지를 깔아놓은 밥상 앞에 앉으려던 순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무릎 주변을 마사지하듯 손으로 꾹꾹 누르며, 묵직한 다리를 천천히 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br>이 시큰거리는 관절통은 이미 몸에 밴 익숙한 통증이었다. 겨울마다 빠지지 않고 즐겨 왔던 모굴 스키의 흔적일 터였다. 좁고 울퉁불퉁한 슬로프를 내달리던 짜릿한 쾌감이, 그만큼 무릎 속 관절과 근육을 서서히 갉아낸 것이다.<br>재작년 함께 스키장에 왔던 정형외과 의사 친구가 그의 무릎 통증을 지켜보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br>-야, 신은 공평해. 슬로프 내려오면서 평생 쓸 무릎 다 썼잖아. 재밌게 놀았으면 아픈 것도 감수해야지. 버틸 때까지 버텨. 나중엔 인공 관절 넣어야 할지도 몰라.<br>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도준의 귀에는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부실한 무릎으로, 저 검푸른 마의 벽처럼 솟은 로체 남벽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첫 시도에서 이미 8,200미터까지 올랐으니, 이번엔 정상의 마지막 구간까지 닿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삶이란 결국 모든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형상이지 않은가. 그 끝을 보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도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불길한 생각을 조용히 밀어냈다.주인 남자가 다가와 물컵을 밥상에 내려놓았다.<br>-뭘 드시겠어요?-황태국밥 하나 주세요.-잠시만 기다리세요.<br>그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부엌에서 식당 아줌마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br>-이번 겨울엔 눈이 안 와서 다들 재미 못 봤잖아요.-장사 안돼 큰일에요. 이러다 문 닫는 건 아닌지.-부정적인 생각은 몸에 안 좋아요. 그럴수록 더 힘들어지지 않겠어요?<br>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도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br>‘그래, 부정적인 생각은 정신 건강에도 해롭고말고.’ <br>스키장도, 날씨도, 밥장사도 이들에게는 모두 소중한 삶의 일부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여유. 식당가 골목의 잔잔한 소음과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그는 잠시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았다.  &nbsp;  얼마 후 식당을 나온 그는 차를 골목 어귀에 세워둔 채 큰길가 슈퍼마켓으로 향했다.&nbsp;한 달 가까이 고모부 집에 머무는 동안, 슈퍼 주인과도 어느새 낯이 익었다.&nbsp;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른걸레로 당면 봉지를 하나하나 닦고 있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br>-어이구… 어서 오세요.-안녕하세요. 좀 어떠세요?-젠장, 사방 천지가 먼지투성이라 숨도 못 쉬겠어요.-공사 때문에 힘드시겠어요.-누가 아니라오. 좀 보시구려. 물건들이 죄다 이 모양이니, 이렇게 매일 닦아줘야 한다니까.-횡계가 좋아지면, 스키 손님도 늘고 좋잖아요.-그렇긴 하죠.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것도 있고. 그래야 세상만사 서로 퉁 치면서 살아가지.<br>가게 안은 시골 동네치고는 제법 큰 규모였다. 각종 음료수와 식료품은 물론, 크고 작은 광주리와 둥근 밥상 같은 생활용품까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공사판 먼지 속에서도 주인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매대마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도준은 생수와 캔맥주, 짭짤한 안줏거리 몇 가지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br>-오늘도 산 다녀오는 길이요?-네.-아이고, 부지런도 하시지. 그럼, 또 봅시다.-안녕히 계세요.<br>가게 문을 나서자, 공사판 먼지가 뿌연 연기처럼 퍼지며 시야를 가렸다. 도준은 두어 번 허공을 휘저은 뒤, 눈을 가늘게 뜬 채 맞은편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갔다.<br>그는 웬만한 전화번호는 거의 다 외우는 편이었다.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다 숫자에 집착하는 성격 탓이었다. 머릿속에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습관은 전문 산악인으로서 생사를 가르는 순간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 필요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산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그런 방식을 신체적 반응처럼 익힐 때까지 오래도록 반복해 왔다.<br>도준은 수화기를 집어 들며 청소 용역회사를 운영하는 최윤 선배의 사무실 번호를 떠올렸다. 동전을 넣고 숫자 버튼을 누르자, 곧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br>-어머, 사장님 조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잠깐 나가셨나 봐요.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저는 도준이라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그러시겠어요? 그럼 5분쯤 후에 다시 전화 부탁드릴게요.<br>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자전거를 탄 여자가 나타났다. 노란색 바람막이를 입은 여자는 전화 부스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MTB 자전거가 빠르게 전화 부스를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일렁이는 도로 위로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며,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준은 문을 밀치고 나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br>어제 고모부 집 마당에서 본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장면 위로 22년 전 기억 속 어린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인연의 시곗바늘이, 어느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br>‘또 만나는군, 꼬마 아가씨.’<br>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래된 시간의 틈 사이로, 무엇인가가 다시 깨어나는 순간처럼.<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3/pimg_639204387228124430.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504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7. 허공의 어둠을 더듬던 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3087</link><pubDate>Tue, 21 Jul 2026 01: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308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겁도 없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얕은 물살이 발목을 감싸며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소녀는 잠깐 멈춰 서는가 싶더니, 신발을 붙잡으려는 듯 다시 발을 내디뎠다.<br>-안돼! 위험해!<br>도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소녀는 어느새 물살이 빠른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물이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차올랐고, 소녀는 중심을 잃고 휘청대다가 그대로 물속에 휩쓸렸다.<br>-아악!<br>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계곡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갔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작은 몸짓이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악몽이 불쑥 되살아났다. <br>칠흑 같은 어둠, 도무지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밤. 차 안에 갇힌 채 앞좌석에서 들려오던 부모님의 희미한 신음.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숨 막히는 침묵. 그날, 그는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br>‘내가 구할 거야.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아.’ <br>도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br>-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갈게!<br>사납게 꿈틀거리는 계곡물이 허벅지를 휘감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이미 거센 물살에 휩쓸린 채 몸부림치다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도준은 미친 듯 팔을 휘저으며 급류를 헤집었다.<br>-꼬마야, 어딨니? 대답해! 조금만 버텨!<br>그것은 찰나였으나, 그의 의식 속에는 영원처럼 각인된 한순간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소녀의 몸을 물살은 쉬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거친 물결 속에서 간신히 손끝에 아이의 살결이 스치는 순간, 그는 단숨에 그 여린 몸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br>사건이 났던 그날 밤에는 부모님을 붙잡을 수 없었다. 전복된 차 안, 어둠의 간격은 너무 멀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 생은 이미 저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두 분의 신음은 끝내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생명의 온기를 놓치지 않았다.<br>마침내 얕은 물가에 닿은 그는 소녀를 널찍한 바위 위에 눕혔다. 소녀는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노란 원피스 밖으로 가냘픈 팔다리가 드러났고, 창백한 이마에는 젖은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었다. 작은 얼굴은 눈을 꼭 감은 채 잠든 인형처럼 고요했다. 도준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내려주고,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br>숨소리는 점점 옅어졌고, 호흡은 금방이라도 멎을 듯 위태로웠다.<br>그 순간, 보이스카우트 캠프에서 배운 구조법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지도 교사는 아이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br>“입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른다. 실시!”<br>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br>한 번, 두 번, 세 번.<br>도준은 단호한 손길로 여린 가슴을 꾹꾹 눌렀다. 이어 소녀의 차가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숨을 불어넣었다. 몇 초가 끝이 없는 시간처럼 아득했다. 그러다 문득 소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거친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냈다.<br>-괜찮아. 안심해. 괜찮아.<br>도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br>-기특해. 잘했어. 이제 다 괜찮아.<br>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의 티셔츠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힘에,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어둠 끝에서 처음 만난 따뜻한 체온에 기대듯, 소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도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작고 연약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br>‘이번엔 내가 구했어.’<br>뜨겁게 달궈진 바위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작은 용기가 단지 소녀만을 살려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br>그날 밤, 점점 식어 가던 두 분의 숨결. 어떻게든 붙잡으려 허공을 더듬던 어린 손. 자신을 옭아매던 어둠 속에서, 그는 분명 한 발짝 벗어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오래전부터 목말라하던 어떤 감각처럼 다가왔다. 잃어버린 온기. 끝내 닿지 못했던 손. 내내 갈망해 온 것들이었다.<br>‘내가 아이를 구한 게 아니라, 오늘은 나도 함께 살아난 거야.’<br>그런 생각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br>-서윤아! 서윤아! 어디 있니?<br>도준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br>-네 이름이 서윤이로구나. 만나서 반가웠다.<br>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바위 위에 남겨두고 소나무 그늘 속으로 물러났다. 그의 발자국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솔잎을 흔들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군가 소녀를 안아 들며 외쳤다.<br>-무사해서 다행이야, 서윤아.<br>고모부 내외와 친하게 지내던 윗집 아줌마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도준은 나무 그림자 속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br>-잘 가라, 꼬마 아가씨.<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1/pimg_63920192147660881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308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6. 죽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방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1229</link><pubDate>Mon, 20 Jul 2026 01: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122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1997년 가을, 도준이 남긴 등반일지 한 귀퉁이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nbsp;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횡계에 있는 고모부 댁 마당에서였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 여자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절어 엉망인 차림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선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br>살면서 여자로 인해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굳어졌다. 나는 늘 죽음의 바깥에서 살아온 자였다. 산의 벼랑 끝에서, 눈보라 속에서, 매번 ‘살아남은 이유’를 묻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처음으로 ‘살아 있어도 좋다’는 감정이 스쳤다. 생존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응답처럼.<br>그때 내가 횡계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땠을까. 여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물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인연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져도, 멀리 흩어져 있어도, 결국 다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으니까.<br>조금 전에, 우리의 인연을 설명할 만한 비유 하나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걸어온 모든 길을 실로 묶어 이어 놓는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긴 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 실의 길이를 늘여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조그마한 실타래의 일상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녀의 씨실과 나의 날실이 오래전에 한 번 엇갈린 적이 있었다.<br>내 기억 속의 어린 꼬마 아가씨는 이제 어여쁘고 성숙한 여자로 자라 있었다. 그녀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가 그녀를 구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했다. 그녀를 구했던 순간, 사실은 나 역시 그녀에게 구원받고 있었다는 것을.<br>인생에서 중요한 건 실의 길이나 두께가 아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 긴 여정은 결국 공허와 외로움 속을 떠도는 덧없는 여로일 뿐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죽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nbsp;  스물두 해 전 여름, 열세 살 도준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날, 그의 세계는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어린 그에게 횡계의 고모만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고모는 막내아들처럼 살뜰히 그를 보살피며 따스한 식사와 부드러운 말을 건넸지만, 도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이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가두는 장막이었다. 소년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길 위에 홀로 선 작은 그림자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nbsp;  여름방학이 다가오던 7월의 어느 날, 도준은 학교를 빼먹고 집 근처 용천 계곡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그보다 더 나은 장소는 없었다. 산이었다. 그곳에 가면 아직 아버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올랐던 푸른 능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닦아내며 건네던 시원한 물 한 모금,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끝없는 풍경. 아버지 몸에서 번져 오던 그 냄새와 땀의 열기, 단조롭지만 어딘가 따스했던 그 목소리. 그렇게 눈을 감으면, 손끝에 스며드는 듯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br>-도준, 너는 발이 빠르구나. 아버지를 곧 따라잡겠어.<br>너그러운 미소로 그를 격려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nbsp;그러나 이제 산은 더 이상 따뜻한 위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 한편에 보듬어 두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에 가까웠다. 산자락에 홀로 앉아 아픈 시간의 장면들을 더듬다 보면, 그 고통이 서서히 뻗어 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심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모든 순간을 삼켜버릴 듯했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잔인한 물결에 몸을 내맡겼다.<br>‘그래. 나를 가져가거라.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nbsp;  그해 한여름의 햇살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했다. 나무 그늘조차 뜨거운 기운을 피하지 못하고, 흐릿한 열기로 공기마저 일렁였다. 도준은 녹아내릴 듯한 무력감 속에 스스로를 방치한 채, 개울가 근처 널찍한 바위 위에 무심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의식의 저변을 가볍게 흔들었다.<br>-아, 여기 있다!<br>고개를 돌리자, 개울 건너편에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물가를 따라 가볍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면 가까이 날아오르는 나비를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햇빛에 반사된 개울물은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였고, 소녀는 물비늘 사이를 부유하는 초롱한 그림자 같았다. 도준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에 무기력하게 얹힌 자신의 손등. 아무런 의욕도 없이 축 늘어진 채, 거기 그대로 놓여 있었다.  &nbsp;  그 소녀는 자신과 너무도 먼 세계의 사람이었다. 환한 빛살 아래 자유롭게 뛰노는 저 작은 몸짓은,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보드랍고 따스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어린 날의 바람도, 체온도, 품에 안기던 기억조차 비껴간 삶. 소녀는 그에게 꿈의 풍경 같았다. 아니, 꿈조차 꿔보지 못한 세계의 조각이었다.  &nbsp;  그러나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br>-어, 내 신발!<br>도준은 그 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물가에 벗어놓은 소녀의 분홍신 한 짝이 개울물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nbsp;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1/pimg_63920191949817549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122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5. 그날, 한 사람이 걸어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6354</link><pubDate>Fri, 17 Jul 2026 02: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635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기억은 수많은 더듬이를 지닌 촉수처럼, 다른 차원과 이어진 은밀한 통로에 닿아 있는 듯하다. 훗날 그녀는 그해 봄날 오후의 풍경을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조금씩 아껴가며 되짚곤 했다.<br>당시엔 지루한 기다림과 이곳이 남의 집이라는 불편함 외에, 특별한 감정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장면도 의식 깊숙이 새겨졌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눈을 감기만 해도 마치 꿈속 장면처럼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nbsp;오래 접어 두었던 담요를 다시 펼치듯, 뽀얀 실밥 사이사이에 스며 있던 적막과 긴장이 손끝에 만져진다.<br>익숙한 냄새를 따라 기억의 문이 열리고, 그 감각은 서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nbsp;김 씨 할아버지가 사는 함석집 뜨락 한편에 서 있던 바싹 마른 감나무 한 그루. 빈집의 정적을 지키며 댓돌 위에 놓여 있던 검정 고무신. 텅 빈 축사 한쪽 흙벽에 걸린 그물 망태기. 반질거리던 낫과 쇠스랑, 그리고 곡괭이들. 깊은 샘에서 물을 퍼 올리던 무쇠 펌프와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안방 문고리에 비뚤게 걸린 자물통.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 오던, 이름 모를 새소리. 그런 것들이 여러 장의 오래된 스틸 사진처럼 하나씩 의식 위로 떠오른다.<br>그 장면들이 이토록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그날 마주친 한 사람 때문이다. 남자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와 낡은 사륜구동 랜드로버에서 내렸다. 잠시 멈춰 선 그는 열린 운전석 문에 오른손을 얹은 채, 오래전 말보루 담배 광고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모습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며 그녀의 머릿결이 흩날렸다. <br>남자는 차 문을 닫고,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역광 속에서 윤곽만 또렷해진 그의 모습은, 현실의 한 장면이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다시 조립되는 이미지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시공간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고, 그가 마침내 대문간을 지나 집 안에 고여 있던 적요를 가르며 가까워졌다. 아주 멀리서부터 걸어와 마침내 그녀 앞에 선 남자. 그가 바로 도준이다.<br>그녀는 주인이 없는 집 마당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먼 경계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뚜벅뚜벅,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는 걸음이었다. 그녀 앞에 멈춰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가슴께로 번져 왔다.<br>‘누군데, 나를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br>남자는 크고 다부진 체형에, 오랫동안 야외 생활을 해온 사람처럼 햇빛에 짙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무심하게 하나로 묶은 꽁지머리가 조금은 특이하게 보였다. 그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지만, 유독 그의 눈빛이 서윤의 마음을 파고드는 듯했다. 오래 쌓인 피로와 깊이 가라앉은 사념들이 겹쳐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친절도, 경계도 아닌,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여백이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여백이 그녀의 심장을 살짝 조여 왔다. 몸은 먼저 반응하듯 어깨가 움츠러졌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교차했다.<br>-저, 어떻게 오셨죠?<br>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김 씨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말했다.<br>-저는 저 위쪽 집에 살고 있어요.-아, 그러시군요.-아무도 안 계시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해요.-아, 괜찮습니다.<br>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는데, 그 안에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여운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번져 오는 그 묘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남자의 목에는 작은 통 모양의 은색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햇빛에 오래 노출된 피부와 세월 속에서 다져진 몸은, 그가 일상에 쉽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남자의 정체가 문득 궁금했다.<br>그는 자신이 김 씨 할아버지의 처조카라고 소개했다. 김 씨 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고 지금은 서울 큰형님 댁에서 요양 중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br>-이젠 많이 나아지셨어요.-어머나, 큰일 날 뻔했네요. 아, 참… 이거.<br>그녀는 손에 든 선물 가방을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바로 건네기엔 난처했고, 다시 들고 돌아가기에도 망설여졌다. 결국 가방을 마루 한쪽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br>-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보내신 거예요. 비타민인데, 전해주시겠어요?-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라고 전하면 될까요?-저는 김순내 할머니 손녀예요.&nbsp;저희 큰할머니와 할아버지 내외분은 오랫동안 각별하게 지내셨어요.-그럼 혹시… 저 위쪽에 있는, 막다른 길 끝 집 말씀하시는 건가요?-네, 거기 파란 지붕 집이요.<br>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스쳤다.<br>-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br>말끝을 흐리는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br>‘운명…?’<br>서윤의 내면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nbsp;<br>처음 만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운명’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낯설었고, 어딘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처럼 불길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nbsp;흥미는 순식간에 씻겨 나가고, 대신 날카로운 경계심이 온몸을 휘감았다.&nbsp;그의 시선과 말투,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 안에 고요히 가라앉은 적막까지, 모든 것이 문득 위험한 징후처럼 느껴졌다.<br>-저,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br>서윤은 한 걸음 물러선 뒤 몸을 돌렸다. 대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심장은 어쩐지 엇박자로 뛰는 듯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 잡아당기는 느낌에, 대문간에 이르러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남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7/pimg_63919849305571198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635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4. 빈집의 툇마루에 앉아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4469</link><pubDate>Thu, 16 Jul 2026 04: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446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봄 햇살이 은은하게 감도는 연청빛 하늘 아래, 텅 빈 시간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서윤은 작은 종이 가방을 손에 들고 별장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아버지가 김 씨 할아버지께 전해 달라며 챙겨주신 종합 비타민과 홍삼 캔디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출입문을 잠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br>‘아무 일 없으셔야 할 텐데…’<br>집 앞 돌층계를 내려선 서윤은 산등성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길 양옆에는 파릇한 새싹과 양치류가 돋아 있었고, 이끼 낀 자갈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 산길은 동네 사람들만 다니는 평범한 길이었지만, 산새들의 지저귐과 발밑을 스치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림이 새봄의 기운을 더욱 싱그럽게 했다.<br>잠시 오르막을 지나 시냇물을 건너 조금 더 내려서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담장에 붙은 대문은 빗장이 채워지지 않은 채, 조금 열려 있었다. 손으로 밀자 삐걱— 낮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며 문이 더 벌어졌다. 서윤은 흰색 종이 가방을 가볍게 매만진 뒤 대문턱을 넘었다.<br>-할아버지, 안에 계세요?  <br>툇마루 앞 댓돌 위에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곳간과 축사를 차례로 살핀 뒤, 내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방 문고리에 걸린 자물통 역시 채워져 있지 않은 걸 보니, 그리 멀리 나가신 것 같지는 않았다.<br>-아직 여기서 지내시나 보네.<br>집안 곳곳에 사람 사는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서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 망설이다가, 결국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br>나뭇결이 허옇게 드러난 툇마루에 앉아 침묵 속에 가라앉은 집안을 둘러보자니, 큰할머니가 머물던 그 낡은 기와집의 포근하고 정겨운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 집안 어딘가에서 장작불이 탁탁 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큰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숨을 고르며 집안을 살피시던 그분의 목소리, ‘서윤아!’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듯 고요한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br>오래전 시간의 창 너머, 뒤뜰 외양간에서는 코뚜레를 단 황소가 나지막이 음매 울고, 자기 집 울타리를 뛰쳐나온 돼지는 앞마당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푸드덕거리며 서까래를 향해 날아오르던 닭들, 부엌 아궁이에 묻어둔 고구마가 서서히 익어가던 구수한 냄새, 펌프질로 길어 올리던 찬물의 맑고 청량한 기운까지—모든 풍경이 큰할머니의 옛집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서윤은 아늑하고 풍성했던 유년의 뜨락을 거닐며,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추억의 온기를 느꼈다.<br>시간은 숨을 죽인 채 더디게 흘렀다. 늦은 오후 햇살이 투명한 적막 속으로 내려앉아, 마당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돗가 근처, 맨흙이 드러난 마른 땅 위에는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마 끝에서 꺾인 해그림자는 장독대를 향해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김 씨 할아버지는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환한 봄볕을 오래 쐰 탓인지,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br>-아무래도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게 낫겠어.<br>손바닥으로 하품을 가리며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신작로와 맞닿은 언덕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차 한 대가, 마침내 대문 밖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서윤은 선물 가방을 챙겨 들고, 잡풀이 드문드문 돋아난 마당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구형 랜드로버가 집 앞 공터에 천천히 멈춰 섰다. 험한 산길과 오프로드를 견뎌온 차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br>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찻길은 여기서 끝이 났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외길이었다. 왜 저 차는 여기까지 온 걸까. 길을 잘못 든 걸까, 아니면 김 씨 할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 걸까. 그녀는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랜드로버를 바라보았지만, 전면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으로 차 안은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br>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얼핏 보기에도 단단하게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그는 잠시 차 문에 손을 얹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눈빛은 마치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br>서윤은 불안과 호기심이 엇갈린 마음으로 남자의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이 외딴 길 끝자락까지 일부러 차를 몰고 왔다면, 그에게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상황 외에, 다른 가능성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혼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왠지 더 움츠러들게 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6/pimg_63919816684871251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446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3. 그건 너의 콤플렉스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2430</link><pubDate>Wed, 15 Jul 2026 02: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2430</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원목으로 만든 별장 출입문에는 묵직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현관 근처 작은 화분 아래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자, 맑은 햇살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집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이 한동안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꾸민 친환경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br>1층은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이어진 개방형 구조였고, 화이트와 블루 톤의 싱크대와 스토브, 나무 수납장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 오른쪽에는 욕실이 있었고, 왼편으로 돌출된 공간은 손님방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전통 가옥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손님방은 푸른 대리석의 차가운 질감과 레이스 커버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한낮 햇살 속에 고요한 정취를 더했다.<br>욕실 옆 계단을 따라 오르면, 아래층과 허리 높이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둔 복층형 오픈 침실이 나타난다. 목재 난간 너머로 거실이 내려다보이는 이 공간은, 정갈하게 놓인 가구 덕분에 포근하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울어진 천장 아래 불투명 채광창으로 은은한 햇살이 스며들어, 침대 위를 부드러운 빛으로 감쌌다. 이곳에서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아침 햇살 속에서 눈을 뜨는 바로 그때이다. 숲속에 내려앉은 고요한 빛은 하루의 시작을 부드럽게 물들이며, 마음 깊은 곳까지 아늑한 기운으로 스며든다. <br>서윤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장과 창틀을 점검했다. 지붕과 벽 어디에도 물이 배어든 자국이나 곰팡이 흔적은 없었다.&nbsp;손님방 옆 보일러실에는 새로 설치한 경동 보일러가 낯설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nbsp;부엌 싱크대 앞으로 돌아와 물을 틀자, 보일러가 조용히 작동했고 곧 온수가 흘러나왔다. 서윤은 실내 온도를 24도로 설정한 뒤, 방화동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br>-아가씨, 오늘 횡계 갔다면서요?<br>전화를 받은 올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살가웠지만, 일부러 과장된 듯한 말투가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br>-이제 막 도착했어요.-물 새는 데는 없죠? 보일러는 어때요?-네… 다 잘된 것 같아요.<br>서윤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 채, 약간 거리를 두었다.<br>올케가 부모님 댁 살림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건, 오빠가 거듭된 사업 실패로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잃은 무렵부터였다. 신용불량자가 된 오빠는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길어졌고, 젖먹이 조카에게는 올케의 손길이 절실했다. 제 앞가림이 급했던 올케는 월셋집을 방화2동 주민센터 근처로 옮긴 뒤, 가사 도우미처럼 시댁을 들락거리며 미안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생활비를 챙겨 갔다. 못난 자식을 둔 양친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흘리며, 부모님 집을 사실상 제 아르바이트 일터처럼 드나드는 형국이었다.<br>전화선 너머로 배경음처럼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올케는 라디오를 켜 둔 채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고, 엄마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집 근처 한의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나가셨다고 했다. 지금 집에는 올케만 남아 있었고, 그녀는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재료를 손질하는 중이었다.<br>-오늘 꼬리곰탕 끓이고 있거든요. 아가씨도 설비 가게 들렀다가 곧장 올라오실 거죠? 저녁 같이 먹어요.-저녁이요? 여기 오는 데만 다섯 시간 걸렸어요.<br>서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br>-누가 아니래요. 피곤하죠?-오늘 하루는 여기서 쉬고 갈까 봐요.-내일 출근은요?-당분간 휴가예요.-아, 다행이네요. 이런 일은 선호 아빠가 나서야 하는데… 휴가 첫날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래요.<br>올케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오빠 때문에 속상하다며 한참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오빠가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나간 뒤 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다는 말에, 서윤은 가슴 한복판에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nbsp;<br>식구들은 그녀의 결혼을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인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신우건설 장남 강태일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무렵, 오빠는 서윤을 불러 앉혀놓고 현실적인 차이에 대해 말했다.<br>-아버지는 퇴직 전에 너를 결혼 시키고 싶어 하셔. 하지만 우리 사정으로는 그쪽 집안 수준에 맞추는 건 불가능해. 그건 너도 잘 알잖아.<br>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집안 분위기가 서서히 서윤을 압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br>-아가씨, 신우건설에 오빠 취직자리 하나 부탁할 수 있을까요?-그래라. 강 서방에게 말이라도 한번 슬쩍 건네보렴.<br>엄마도 딸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거들었다.<br>모처럼 식구들끼리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서윤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신용불량자인 데다 종종 노름판까지 드나드는 친오빠의 취직 건이라니.&nbsp;아무리 결혼을 앞둔 사이라 해도, 집안의 위신까지 걸린 그런 부탁을 서윤은 차마 강태일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 말 없이 모른 척해왔는데, 또다시 오빠가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 하나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괜스레 미안했고,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br>-횡계 읍내까지 다시 나가려면 또 택시를 불러야 하잖아요. 에잇, 그냥 이참에 외제 차 하나 뽑아달라고 하세요. 시댁이 뭐, 으리으리하잖아요. 이미 그 집 며느리나 진배없는데,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고생할 이유 뭐 있어요. 그죠?<br>올케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가족 사이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가끔 의도적으로 무시하곤 했다. 외제 차라니. 이건 서윤의 입장을 너무도 쉽게 넘겨짚은 말이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여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br>올케는 말실수인 척 흘리듯 말을 꺼냈지만, 실은 ‘가족’이라는 방패를 두른 채 서윤의 반응을 떠보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어디까지 서윤의 약혼자 집안에 손을 내밀어도 되는지, 태일이 어느 선까지 이번 혼사를 배려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녀는 그 어색함을 덮으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br>-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요? 어디 편찮으신가?<br>김 씨 할아버지의 늙고 쇠약해진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별장 주변을 돌며 집 상태를 살펴주던 그가 홀로 지내시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다시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br>-제가 내려가서 한번 살펴볼게요.-혼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아유, 우리 아가씨는 어쩜 그렇게 순하고 착해빠졌을까…-지금… 칭찬하는 거예요?-맞아요. 칭찬이죠. 그리고 진심이기도 하고요. 호호호.<br>이번 지붕 공사와 보일러 교체를 맡았던 ‘대동종합설비’는 횡계 읍내에 있었다. 오늘 밤을 이곳에서 보내려면 먹을거리도 좀 마련해야 했다.<br>-택시 부르면 거기까지 들어오는 데도 한참 걸릴 텐데… 참, 자전거 탈 줄 알잖아요. 그죠?<br>올케는 다시 호호 웃더니 집 뒤편 창고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작년에 오빠가 사다 놓은 중고 산악자전거가 있었다. 횡계 로터리까지라면 그걸 타고 금방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br>전화를 끊은 그녀는 우선 짐을 풀고 잠시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텅 빈 고요함을 누리고 싶었다. 한동안 넓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에 닿아 있는지, 혹은 그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쯤 더 이곳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느슨해졌다. 이대로 휴가 기간 내내, 아무런 번뇌와 갈등도 없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br>‘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남들은 휴가를 받으면 외국으로 여행도 가는데…’<br>그녀는 짧은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 속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랩톱을 꺼내 전원을 연결하려던 순간, 집안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거슬렸다. 문이며 창문을 굳게 닫아두었건만, 손바닥 위에는 어느새 뿌연 먼지가 묻어났다. 그녀는 걸레를 빨아 테이블과 선반, 의자 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br>‘그런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br>그녀는 문득 손을 멈추고, 물기 잔뜩 머금은 시커먼 천 조각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쓸고 닦는 일에 매달리는 걸까. 먼지가 쌓였다고 꾸중할 사람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정리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이 깔끔하고 질서정연해야 마음이 놓였다. 옷장 속은 늘 가지런했고, 서랍 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갤러리에서 전시 업무를 맡으면서 이런 성향은 더욱 깊어진 듯했다.<br>‘당분간 정리 박사 노릇은 잊자.’‘그래. 오늘만은 눈감아 주자.’<br>그녀는 물걸레를 툭&nbsp;물통 속으로 던졌다.&nbsp;믹스커피가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뜨겁고 달곰한 맛은 묘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머그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창가에 서서 다시금 밖을 바라보았다.<br>건물 아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넓은 터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대추나무도 이제는 남은 기운마저 다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nbsp;아버지 말로는 김 씨 할아버지가 수시로 들러 마당의 낙엽을 쓸고, 나뭇가지를 다듬어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가는 대추나무를 보자, 혹시 김 씨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더욱 커졌다. <br>우선 김 씨 할아버지 댁부터 살펴볼 생각으로 외출 준비를 하던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닌 단짝, 제이였다.<br>-너희 올케가 너 횡계 갔다고 하더라. 지금 누구랑 있어?-나 혼자 왔어.-강태일이 데려다준 거 아냐?-오늘 나 쉬는 날인 줄 몰라. -왜?-여행 가자고 하잖아. 1박 2일. 그래서 오늘 출근한다고 했어.-같이 하룻밤 지내는 거 아직도 불편하다! 그런데 알아? 그건 너의 콤플렉스야.-무슨 소리야?-집안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을 그렇게 방어하는 거지.-여보세요. 제이 씨, 그건 내 콤플렉스 아니고, 너의 열등감이거든요.-그래서 난 네가 좋아. 남자랑 여행 가지 마. 앞으로도 쭉. 대신 나랑 가자.-너랑? 돌아버리겠네.<br>제이는 요즘 몹시 지쳐 있다며 하소연했다. 4년째 작은 출판사를 운영 중인 그녀는 신간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편집부 직원 하나가 장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운 탓에, 그 일까지 고스란히 떠맡게 되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제이에게 갑작스럽게 인쇄소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br>-조심해서 갔다 와. 밥 잘 챙기고.-너도 잘 지내. 특히 남자 조심하고.-피, 하여튼…<br>서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고는, 문득 생각이 나 평창동에 있는 명명희 선생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 끝에 선생의 양녀 김순자 씨와 연결되었다. 명명희 선생은 동문전 참석차 일본 오사카에 머무는 중이며, 전시 일정과 여행을 함께 소화하느라 다음 주에나 돌아오실 거라고 했다.&nbsp;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 안으로 개인전에 대해 상의하려던 계획은 일단 미뤄야 할 것 같았다.<br>-네,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br>전화선 너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메마른 신호음이 공허한 정적 속에서 길게 울렸다.  &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7/pimg_63919910406378317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243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2. 횡계 별장에 봄이 오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9885</link><pubDate>Mon, 13 Jul 2026 20: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988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다음 날, 서윤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횡계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읍내 중앙로의 공사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의 별장은 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더 들어간 산기슭에 있었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막다른 길 끝자락의 외딴집이었다.<br>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탄 그녀는 울퉁불퉁한 숲길을 따라 한동안 달린 끝에 별장 앞마당에 이르렀다. 집 뒤편은 곧장 수풀 우거진 산속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고,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도 거기까지였다. 뒷좌석에서 내리기 전, 서윤은 미터기 요금에 웃돈을 조금 얹어 건넸다. 빈 차로 되돌아가야 할 운전사를 향한 작은 배려였다.<br>-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손님이 가자면 어디든 가야죠.<br>차에서 내리려 하자, 택시 기사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br>-여긴 외진 곳이라 택시를 불러도 잘 안 들어올 겁니다. 혹시 필요하면 미리 연락 주세요. 사정되는 대로 제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br>택시에서 내린 서윤은 잠시 숨을 고르며, 비포장도로를 따라 차가 되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공기 속에 부옇게 흩날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앞마당의 고요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br>언덕과 능선을 따라 초봄의 푸른 기운이 스며든 한적한 오후였다. 청바지에 스웨이드 재킷을 걸친 그녀는 어깨에 랩톱이 든 배낭을 메고 있었다. 셔츠 깃을 반듯하게 여민 그녀의 얼굴에는 햇살에 데워진 듯한 혈색이 감돌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크게 기지개를 켜자, 숲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숨 깊은 곳까지 차올랐다. 신선한 공기 덕분인지 서울에서 이어온 긴 여정의 피로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씻긴 듯했다.<br>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하품을 하며, 언덕 위에 자리한 파란 지붕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본래는 낡은 농가였으나,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시간을 두고 개축해 지금과 같은 2층 건물이 되었다. 삼각형 지붕과 테라스를 갖춘 현재의 구조는 아버지가 스위스를 여행하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목조주택에서 영감을 얻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멋을 간직한 이 별장은, 아버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손수 다듬어 온 결과였다.<br>이 집에서 큰할머니는 암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사십 년을 홀로 지내셨다. 큰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하나뿐인 아들은 그 전쟁 통에 설사병을 앓다 목숨을 잃었다. <br>-그때 페니실린 한 방만 맞았어도 나았을 텐데….<br>살아생전 큰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내뱉곤 하던 그 말은, 지금도 서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br>횡계는 돌아가신 큰할아버지의 고향이었고, 전쟁 미망인이 된 그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몸을 기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그 아이마저 잃고 난 뒤,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두듯 스스로 벽을 쌓고 살아왔다. 질병과 전쟁, 가난이 뒤엉켜 있던 시절. 큰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상실의 시간이었다.<br>돌이켜보면 횡계는 서윤에게 전원의 소박한 삶을 처음 가르쳐준 거의 유일한 터전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배려로 큰할머니 곁에 양자처럼 머물게 되었고, 독립한 뒤에도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기억 속에는 유년 시절 횡계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낡고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br>동네 아이들은 서울에서 온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고, 서윤은 그 애들 틈에 섞여 낯선 경험들을 하나씩 익혀갔다. 부뚜막 불구덩이에 넣어둔 감자를 들여다보다 볏짚을 타고 번진 불꽃에 놀라 뒷걸음질 치던 일, 아이들을 따라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던 일, 겨울 어느 날 밭둑에서 쥐불놀이를 하다 동네 어른들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던 일들. 그 모든 기억은 오래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마음속 풍경화로 간직되었다. <br>그러나 초등학교 상급 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업에 쫓겨 횡계를 찾는 일은 차츰 뜸해졌다.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대학 입시 준비에 매달려 있던 그녀는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그 일은 이후로도 미처 갚지 못한 빚처럼 마음 한쪽에 줄곧 남아 있었다.<br>그동안 큰할머니의 옛집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을 다시 찾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장에 머문 건 2년 전 가을, 약혼자 태일이 차로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학술지 마감을 앞두고 한 달 가까이 머무르며 자료를 검토하고 논문을 정리하느라 거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집 밖의 풍경이나 계절의 빛깔이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nbsp;<br>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히 집수리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니, 적어도 일을 보는 동안만큼은 마음을 풀고 편히 머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br>-횡계에 오길 잘한 것 같아.<br>그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처럼 따스한 햇볕 아래 나온 탓인지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며 언덕 위 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 새순이 돋아난 나무들이 집 주변을 감싸며 싱그러운 기운을 더하고 있었다. 최근 공사를 끝낸 별장 지붕은 한결 든든해 보였다.<br>-이제 빗물이 새는 일은 없겠지….<br>서윤은 생수병을 손에 쥔 채 돌층계를 따라 천천히 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4/pimg_63919599021568687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988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1. 아버지의 부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6757</link><pubDate>Sun, 12 Jul 2026 01: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675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서울의 서쪽 끝, 방화동에는 '옥수탕'이라는 오래된 목욕탕이 있다. 옥수탕 골목 안쪽 2층 양옥집에서 서윤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늦은 밤, 목욕탕 간판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골목은 적막했다. 서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거실에서 야구 중계를 작은 소리로 틀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br>-왜 이렇게 늦었어?-갤러리 일이 좀 많았어요.-너무 열심히 살지 마.-아버지도 참…-내가 살아 보니, 인생이 너무 짧더라.-엄마는요?-방에서 주무시지. 너, 이리 좀 와 봐라.<br>아버지는 소파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눈가에는 시름이 더욱 깊어 보였다.&nbsp;누구에게나 한때 뜨거운 청춘과 자유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젊은 날, 아버지는 일본행 밀항선을 타다 붙잡힌 적이 있다고 했다.&nbsp;그러나 결혼 이후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중학교 교사로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단 한 번도 다른 길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nbsp;말년에 이른 아버지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세월의 흰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br>-내일 시간 좀 있니?-왜요?-갤러리 쉬는 날이잖아. 횡계에 좀 다녀올래?<br>강원도 횡계에는 아버지 소유의 작은 별장이 하나 있었다. 식구들이 가끔 내려가 머물던 그 집은 얼마 전부터 지붕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낡은 보일러도 함께 새것으로 교체했다고 했다.<br>-김 씨 할아버지 아니었으면 온 집안이 물바다 되고, 곰팡이 피고 난리가 났을 거야. 고맙게도 설비 업체도 그분이 소개해 줬는데, 어째 연락이 안 되네.-전화를 안 받으세요?-번호가 바뀐 건지, 통 받질 않으셔.<br>김 씨 할아버지는 근처에 혼자 사는 이웃 어르신으로, 틈틈이 별장에 들러 집 주변을 살펴주곤 했다. 젊은 시절, 밀짚모자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은 그는 산골 촌부에게서는 보기 힘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생전에 큰할머니와 그의 부인이 서로 오가며 반찬도 나누고 허물없이 지냈지만,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 씨 할아버지만 옛집에 남아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br>-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닐까요?-글쎄다. 서울에서 큰 아드님이 와서 모셔갔나?-지금 연세에 혼자 지내시는 건 무리잖아요.-그렇지. 때가 되면 자식들 곁이 편하지.-나, 시집가면... 아빠는 어쩌려고.-그런 말 마라. 늙어가는 딸을 언제까지 어깨에 이고 지고 살아야 한단 말이냐?-피이…-아무튼 내일 네가 가서 지붕이랑 보일러가 제대로 됐는지 살펴보고, 공사대금도 치르고 와야겠다.-오빠는 어디 갔어요? -철재? 한참 얼굴도 못 봤어. 또 무슨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지….<br> <br>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괜히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br> <br>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오늘 최 관장이 명명희 화백에 관해 당부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관장은 당장 내일부터 쉬라고 했지만, 휴가는 수요일부터였다. 화요일은 원래 직원들에게 주어진 정식 휴일이었다. 아무래도 짬을 내어 아버지 부탁을 먼저 들어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정도 횡계에 다녀온다고 해서 관장이 부탁한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br> -알았어요. 제가 내일 갔다 올게요.-미안해, 딸. 휴일인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뭘요. 잠깐 바람도 쐬고 좋죠. 봄이잖아요.-그렇지. 벌써 봄이네. 이러다 금세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그러겠지…<br>아버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nbsp;<br>횡계 별장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홀로 살던 집으로, 아버지는 그 집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간직해 왔다.&nbsp;<br>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란 아버지는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의 형수였던 큰할머니 댁으로 보내져,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분의 보살핌 속에서 지냈다. 긴 세월 외롭게 살아온 큰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연민을 품고 있던 아버지는 그 집을 별장처럼 고쳐 지금까지 손수 가꾸어 오셨다.<br>-아버지, 정말로 은퇴 후에 거기 가서 살 거예요?-그럼. 거긴 내 고향 같은 곳이지. 사람들도 연어처럼,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야.<br> -그 집에서 태어나신 건 아니잖아요.<br> -그래도, 난 이제 거기밖에 없어.<br> <br>아버지는 먼 기억의 뒤안길을 더듬듯 잠시 시선을 떨군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br> <br> 고향으로의 회귀.&nbsp;<br>그 말이 품은 서늘한 쓸쓸함이 어쩐지 서윤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br> <br>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며 욕실에서 이를 닦는 동안, 어두운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문득 떠올랐다. 돌아갈 곳을 향해 묵묵히 헤엄치는, 생의 마지막 온기. 그 모습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nbsp;  그날 밤, 어린 시절부터 되풀이되던 익숙하면서도 낯선 악몽이 다시 서윤을 찾아왔다.<br> <br> 사방은 짙은 어둠에 잠긴 물속이었다. 거센 물살과 뒤엉킨 해초가 시야를 가렸고, 귀청을 울리는 물소리만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두 팔을 아무리 휘저어도 붙잡을 것은 없었고, 발끝은 닿을 곳 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녀의 몸은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차갑고 억센 무언가가 발목을 움켜쥐었다. 끌어올리려는 것인지,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힘이었다.<br> <br> 서윤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다. 눈을 뜬 뒤에도 어둠 속 물살과 발목을 감싸던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의 잔물결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심연을 떠도는 외로운 물고기처럼.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3/pimg_63919571793144380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675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0. 인사동의 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3663</link><pubDate>Fri, 10 Jul 2026 01: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366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인사동 밤거리에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윤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뿌옇게 흐린 유리 벽 너머로, 수묵화처럼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아스라이 멀어져 간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br>방화동 손 화실을 다니던 어린 시절, 손문기 선생을 따라 드나들던 인사동 거리에서 그녀는 운 좋게 한국 화단의 원로 거장들을 먼발치에서 뵐 수 있었다. 이름으로만 듣고 작품으로만 알던 대가들을, 숨죽이며 지켜본 기억은 놀람과 설렘 그 자체였다. <br>사춘기 소녀에게 꿈과 낭만을 선사하던 예술가들의 거리.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이, 그녀가 매일 맞서는 현실과 책임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br>어느덧 29세가 된 그녀에게는 때때로 숨을 돌릴 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공중전화 부스는 그럴 때마다 잠시나마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은밀한 쉼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오늘 밤, 전화 수화기를 손에 쥔 서윤의 마음은 무거웠다. <br>강태일과 약혼한 지도 어느새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까다롭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늘 그녀를 대해왔다. 지금도 그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자 몸이 절로 굳어졌다. 그는 즉시 연락이 안 되면 괜한 짜증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고, 자신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태도 역시 용납하지 않았다. <br>서윤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화번호를 눌렀다.&nbsp;<br>전화벨이 세 번 울렸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쏘아보고 있을 태일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고 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br>-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바빴나 봐?-미안해요. 전시 준비하느라 자리에 없었어요.-아직 일 안 끝났어?-네, 뒷마무리가 남았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내일 쉬는 날이잖아. 1박 2일 여행 가자고. 오늘 밤 떠났다가 내일 오후에 돌아오면 돼.<br>그의 말투는 유독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서윤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의 뜻에 반하는 말을 꺼내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1박 2일의 여행이라니. 젊은 남녀에게 그것은 은연중에 하룻밤의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br>‘나를 너무 쉽게 여기는군.’<br>서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더 이상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가 점점 더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마음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br>-왜, 싫어? 우리 밤에 같이 있었던 것도 꽤 오래됐잖아.<br>강태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들떠 있었다. 그 안에 조급한 갈증이 묻어났다.<br>-아니, 그건 알지만…-뭐가 문제야? 내가 지금 당장 데리러 갈게.<br>잠시 망설이던 서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할 틈도 없이 둘러댄 말이었다.  &nbsp;  -아니요. 내일 출근해야 해서요.-출근해?<br>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br>-이번 전시를 수요일에 제대로 오픈하려면 정리할 게 아직 많아요.-너무하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잖아. 리온에서 사람을 너무 부려 먹는군.-제가 해야 할 일을 다 못 끝낸 거예요. 제 책임이니 끝까지 해야죠.-쳇, 그런데 거… 그 갤러리 언제까지 다닐 셈이야?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어? <br>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미래의 배우자를 향한 배려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것만 귀하게 여겼고, 타인이 지닌 가치나 바람쯤은 쉽게 흘려보냈다.<br>수화기를 귀에 댄 채,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인사동 거리를 밝히는 크고 작은 불빛들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흔들렸다. 소녀 시절, 예술가의 꿈을 처음 품게 했던 이 거리. 그 꿈을 지키기 위해 버텨온 시간과 노력만큼은 허망하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의 요구에 맞춰 움직이고, 약속을 조율하고, 성적 주체성을 내어준 채 여행에 나서고, 가족사마저 복잡한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br>결혼 후 펼쳐질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싶었다. 한 집안의 울타리에 갇혀 쉽게 소진될 인생이라면, 지금껏 애써 걸어온 이 길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서윤은, 곧 남편이 될 약혼자와의 잠자리가 꺼림칙하다는 말을 끝내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아직 너의 여자가 아니라고, 쉽게 허락할 내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 일도 그녀에겐 쉽지 않았다.<br>어쩌면 그녀는 앞으로 닥칠 일보다 방화동 식구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는지 몰랐다. 늙으신 아버지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병약한 어머니는 여전히 자주 자리에 눕곤 했다. 집안의 기둥이어야 할 오빠는 사업 실패 이후 신용불량자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집안 사정들을 떠올릴수록, 그녀는 도무지 자기 입장만을 앞세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br>-왜 대답이 없어?-아, 지금은 좀 그래요…<br>태일은 신경을 건드리는 말들을 이어갔지만, 서윤은 늘 그러하듯 감정을 숨긴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마침내 전화를 끊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0/pimg_63919244399944413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366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9. 성북동의 컬렉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1717</link><pubDate>Thu, 09 Jul 2026 00: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171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사무실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그 위에는 강태일의 이름과 함께 ‘회신 부탁’이라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서윤은 수화기를 집어 들려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nbsp;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우건설의 후계자인 강태일을 처음 만난 건, 서윤이 뉴욕대 미술사 프로그램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br>그 무렵 리온 갤러리에서는 아프리카 조각전이 한창이었다. 최희숙 관장이 직접 짐바브웨에서 선별해 온 쇼나 조각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열망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당시 한국 미술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서윤은 작품 목록을 손에 든 채 전시장을 찾은 컬렉터들을 일일이 응대하고 있었다.<br>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이나 야수파의 원시주의와 연결 지어 덧붙이는 그녀의 설명만으로도 관객들은 20세기 초 파리 아방가르드의 현장에 직접 서 있는 듯한 몰입과 감동을 표했다. 짐바브웨의 열악한 경제 사정과 환율 변동으로 인해 작품 가격이 예상보다 낮게 책정되었다는 것도 전시회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국의 원시성과 현대 미술적 맥락이 결합된 전시는 컬렉터들의 예술적 향수를 자극했고, 작품 구매 열의는 한층 고조되었다.<br>강태일도 그때 자기 누나 강수경과 함께 리온 갤러리를 찾았다.<br>-짐바브웨의 쇼나 조각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석조 예술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석영, 말라카이트, 록 마블, 호화석 등으로 다듬어진 이 조각들은 부드러운 표면 덕분에 섬세한 조형을 가능케 하며, 그 독특한 윤기까지 지니고 있습니다.<br>신입 큐레이터였던 서윤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태일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은 어딘지 모르게 끈적이는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며 준비한 말만 끝까지 전한 뒤 자리를 피했다.<br>쇼나 조각전이 끝난 얼마 후, 서윤은 관장의 요청으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성북동에 있는 강태일의 본가로 향했다. 조각상을 직접 배달하기 위해서였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언덕길 골목으로 차량이 들어서자, 주차장과 맞닿은 문을 지나 드넓은 정원이 펼쳐졌고, 집 울타리 안은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고요와 적막이 감돌았다.<br>-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렇게 꾸미고 살지? 집도 무슨 미술관 같잖아.-쉿, 조용히 해.<br>작품을 함께 나르던 남자 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잔디밭에 놓인 디딤돌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프렌치 도어 양식의 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 큰 거실에는 대동여지도 같은 고서화와 고가구, 오래된 골동품들이 품격 있게 놓여 있었다. 그날 배달된 쇼나 조각은 모두 여덟 점이었다.<br>-어서 와요. 그런데 아프리카 조각인지 뭔지, 전시장에서 봤을 때와는 좀 다른 것 같네. 안 그런가?<br>강태일의 누나 강수경은 서윤을 마치 자기 밑에 있는 여직원처럼 대하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런 누나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태일이 입꼬리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 서윤에게 느닷없이 데이트를 제안했다.<br>-우리 언제 같이 저녁 먹을래요? 그쪽에 흥미가 있어서…-미쳤니? 처음 보는 여자한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br>강수경은 눈을 부라리며 남동생을 나무랐다.<br>-처음 보긴? 그때 리온에서 만난 큐레이터, 나서윤 씨잖아.<br>인사동 첫 만남부터 몹시 눈에 거슬리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윤은 더욱 불쾌함을 느꼈다. 리온 갤러리의 일개 큐레이터라는 직함이 이런 자리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들이 속한 세상과 자신의 세계가 너무 다르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들 앞이라도 함부로 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br>-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br>조각품 자리 배치가 끝난 후, 서윤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br>-어, 잠깐만요. 제가 실례를 했다면 용서하세요.<br>태일은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짐짓 성의를 담은 표정으로 사과했다.<br>-괜찮습니다. 이제 갤러리로 돌아가야 해서요.-그렇군요.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면 좋겠네요.<br>서윤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일주일 뒤, 강태일이 서윤 앞에 다시 나타났고, 그 후 벌어진 여러 사건과 기막힌 사연들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br>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때 조각품을 배달하던 갤러리 여직원은 어느새 성북동 유력가 집안의 약혼녀가 되어 있었다. 강태일의 아버지 강문태는 신우건설의 창립자였고, 그의 맞아들인 태일은 스탠퍼드 MBA를 마치고 귀국한 뒤 전략기획실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수도권 재건축 사업을 기반으로 굳건한 실적을 쌓아온 이 중견 건설사는 업계에서도 ‘묵직한 실속형’ 회사로 평가받았다.<br>-성북동의 컬렉터라…. 이제 신분 상승 사다리에 올라타신 건가요?<br>언젠가 친구 제이가, 비아냥조로 서윤에게 던진 말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9/pimg_63919167303149426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171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8. 거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9866</link><pubDate>Wed, 08 Jul 2026 02: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9866</guid><description><![CDATA[<br>글·그림 김미진<br>최 관장은 회고전에 관해 몇 가지 문제점을 더 지적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목소리 톤을 낮췄다.<br>-명명희 선생님, 요즘은 어떠신가?-네? -벌써 연세가 일흔 중반이잖아. 어디 예전만 하시겠어.-아, 네에.-그래도 작업은 꾸준히 하시는 거지?-저기… 매일 작업실에 계시는 것 같아요.-흠… 그렇다니 다행이네.<br>명명희 화백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원로 화가로, 일제 강점기 시절 홀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선구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작가였다. 시중에 진품을 위조한 모조품들이 횡행할 정도로, 그녀의 작품 가치는 한층 더 치솟아 있었다. 서윤이 갤러리 리온에 입사한 뒤 처음 참여한 전시도 바로 명명희 화백의 개인전이었다. 그 전시를 계기로 서윤은 선생 측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레 신뢰를 쌓아왔다. <br>-내년 상반기 중에 명명희 선생의 미공개작들을 모아 개인전 기획했으면 좋겠는데. 어때?-아, 글쎄요… <br>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명명희 선생은 한동안 위작 사건에 휘말려 법적 송사를 치른 뒤로, 대외 활동은 물론 전시에서도 한발 물러난 채 지내왔다. 그 일 이후로는 외부인과의 만남마저 피하고 있었다.<br>-선생님 건강 더 나빠지기 전에, 특별전처럼 전시 한번 기획해 봐.-제가요?-이 일만 성사되면, 내가 힘 좀 써볼게.-네? 무슨…-너, 모교에서 미술사 강의하고 싶잖아. 거기 학장을 내가 잘 알아. 어때, 나쁘지 않은 거래지?<br>최 관장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인간관계란 보이지 않는 거래와 은밀한 욕망으로 촘촘히 엮인 그물 같은 것. 그런 셈법을 읽고 조율하는 데 있어&nbsp;그녀만큼 노련한 이도 드물었다.<br>서윤은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입시학원 강사 일을 병행하며 미술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리온에 입사한 뒤에는 문예진흥원 연구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년간 뉴욕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미술사를 공부하고 돌아왔다.<br>리온은 이름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화랑이었지만,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오누이 밑에서 직원들은 늘 소모품처럼 다뤄졌다. 오너의 잇속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이곳에서, 서윤의 큐레이터라는 직함은 허공에 잠시 걸어둔 명패처럼 공허했다. <br>언제 잘릴지 모를 현실을 떠올릴 때마다, 차라리 대학 강단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며 경력을 쌓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속내를 관장은 이미 빤히 꿰뚫고 있었다. 내년이면 어느새 서른. 리온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를 생각할 때, 관장의 눈 밖에 나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였다<br>-앞으로 일주일 동안 휴가 줄게. 당분간 갤러리에 나올 필요 없어.-네? 그게 무슨… 손문기 선생님 오프닝은 어쩌고요?-손 화백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거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어차피 돌아가신 분이잖아. 기자들 대접하고 홍보는 최 실장이 맡을 거고, 서윤 씨가 컬렉터들을 직접 상대할 것도 아니고, 그렇지?<br>그녀의 청소년기를 보듬어준 옛 스승을 기리는 회고전이었다. 오프닝 행사에는 예전 방화동 화실 식구들도 몇몇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br>-그동안 수고 많이 했잖아. 좀 쉬어야지. 그렇다고 마냥 무작정 쉬라는 건 아니고…-그럼…-이번 기회에 명명희 선생 작업실도 방문하고… 미공개 작품들이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하는 게 좋겠지? 선생 개인전 기획안도 한번 작성해 보고. 아, 참… 대전 시립 미술관에 좋은 전시회 있던데 거기 포함해서 몇 군데 둘러봤으면 해. 이번 기회에 우리 리온을 위해 서윤 씨 능력을 한 번 보여줘. 지금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그거야.<br>최 관장은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다. 우리라니. 그 ‘우리’ 속에 ‘나’는 존재하는 걸까.<br>-네… 알겠습니다.<br>서윤은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과연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창밖에는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아득한 밤의 소음이 번져왔다. 그건 먼 우주에서 실려 온 정체 모를 수신음 같았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8/pimg_63919140328366603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986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7. 관장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7947</link><pubDate>Tue, 07 Jul 2026 0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794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그림을 끝까지 지켜낸 알바생은 신음을 삼킨 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서윤도 화폭이 기우는 쪽으로 휘청였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림 양 끝을 꼭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br>-괜찮아?<br>서윤이 묻자, 알바생이 ‘괜찮아요’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br>그때, 등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br>-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br>리온 갤러리의 대표, 최희숙 관장이었다. 하필 그 순간,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관장이 1층 메인 전시실로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br>-미친다 정말. 지금 이 작품이 얼마짜린지 알아?<br>쓰러진 사다리와 긴장한 직원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곧바로 서윤이 바치고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윤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관장은 손을 들어 그 말을 잘랐다.<br>-이 작품 훼손되면 누가 책임질 건데? 너야?<br>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이 한쪽 다리를 절며 다가왔다.<br>-죄송합니다. 사다리가 갑자기 흔들려서…-많이 다쳤어요?<br>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알바생은 어깨를 으쓱하다가 어정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최 관장의 관심은 오로지 그림 상태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안경 너머 시선은 차가웠고, 말투는 그보다 더 냉랭했다.<br>-이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군. 쯧쯧, 칠칠맞지 못하게… 앞으로는 좀 더 조심들 하시지, 응?<br>직원들은 숨을 죽인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br>-서윤 씨, 잠깐 내 사무실로 올라와.<br>최 관장은 마지막 말만 툭 던지곤&nbsp;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알바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그림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훨씬 묵직하게 느껴졌다.  &nbsp;  1968년에 처음 문을 연 리온 갤러리는 인사동 거리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선도하며, 역사 깊은 화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정창섭, 최욱경&nbsp;같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뿐 아니라, 가끔은 샤갈, 마티스, 클림트, 라울 뒤피, 앤디 워홀 같은 외국 거장들의 작품도 특별 전시되었다. 또한, 장래성 있는 젊은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 제작과 프로모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br>관장실은 리온 갤러리의 지난 세월을 집대성한 기록과 자료로 가득한, 말하자면 작은 보물창고였다. 리온의 실질적 오너이자 관장인 최희숙은 60대 후반의 여성으로, 한국 화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출발은 지금은 철거된 소공동 반도호텔 지하 갤러리의 카운터였다. 막 여고를 졸업한 풋풋한 나이에 그곳에서 맺은 화가들과의 인연은, 시간이 흐르며 한국 화랑계를 대표하는 화상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br>3층 복도 끝, 리온 갤러리 관장실에 들어서면, 40평 남짓한 공간에 오래된 자료와 화집, 엽서, 도록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최희숙 관장은 데스크에 앉아 서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번뜩이는 표정에 서윤은 순간,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br>-작품 배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왜 그 작품을 이제야 옮기는 거지?<br>그녀는 안경테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br>-최 회장님 사모님께서 그 작품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겠다고 하셔서요.<br>서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br>-회장 사모님까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아,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우리가 정당하게 빌린 거잖아.-물론이죠. 그런데, 이번 전시회를 위한 협찬이라서…-답답할 노릇이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네? 그게 무슨…-‘공작 도시’ 시리즈는 함께 묶어서 전시해야, 그 후광을 살릴 수 있지. 안 그래?-네, 당연히… 이번 회고전 도록에도 차례대로 함께 실려 있다고 말씀드렸는데…-그 작품은 ‘공작 도시’ 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야.일반에게 공개되는 것도 거의 처음이잖아.&nbsp;그런 작품을 뚝 떼서 따로 전시한다고? 맨 앞에만 전시하면 장땡인가?-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워낙에 고집이…-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그 작품은 원래 자리로 돌려놓도록 해.-아, 네에… 알겠습니다.<br>그녀는 옛 스승의 전시회를 끝까지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깨가 무거웠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다.&nbsp;관장이 알아서 한다니, 더는 나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7/pimg_63919002920962844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794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6. 공작 도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6198</link><pubDate>Mon, 06 Jul 2026 06: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619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월요일 오후, 인사동의 리온 갤러리는 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 불리던 손문기 화백의 회고전으로, 오프닝 행사는 이틀 뒤인 수요일 정오에 열릴 예정이었다. 내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관일이라서 오늘 안으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br>-부딪치지 않게 조심해.-네, 걱정하지 마세요.<br>서윤은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커다란 캔버스를 옮기고 있었다. 나무 액자까지 씌워진 100호짜리 그림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 수 있을 만큼 묵직했다. 다른 방해물들을 피해 가며, 두 사람은 그림 표면이 가능한 한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이동했다.&nbsp;그때 최승주 실장이 2층 사무실로 올라가려다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br>-나 선생. 전시 화보와 도록은 어떻게 된 거야?-수요일 아침에 인쇄소에서 직접 가져오기로 했어요.-초대장 발송은?-지난주에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그런데 오늘 중에 이걸 다 끝낼 수 있겠어?<br>그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며 던진 말이었다. 아직 설치를 마치지 못한 작품들이 벽을 따라 여럿 남아 있었다.<br>-거의 다 됐어요. 이제 작품에 레이블만 붙이면 됩니다.<br>서윤이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br>-나 선생, 분류 번호, 사이즈, 사용된 재료, 하나하나 꼼꼼히 잘 점검해. 저번처럼 뒤섞이는 일 없도록 조심하고. 다들 아셨죠?<br>최 실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자,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그는 관장 최희숙의 남동생이자, 갤러리 운영 전반에 막강한 권한을 쥔 인물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공기가 싸늘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번져갔다.&nbsp;리온 갤러리에 5년 넘게 몸담아온 서윤조차도 최 실장 앞에서는 업무에 필요한 말 외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nbsp;이곳에서 오래 일한다는 건, 능력보다도 침묵과 인내를 먼저 배웠다는 뜻이었다.<br>서윤은 리온 갤러리의 큐레이터였다. 전시 기획과 작가 섭외, 작품 리스트 정리, 도록 제작과 홍보 등 갤러리 실무의 중심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전시란 곧 균형의 예술이라고. 주제의 통일성과 시선의 흐름, 여백의 배치와 조명 각도 하나하나가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야 비로소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 조율은 캔버스 너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동료들 사이의 공기, 말의 온도, 침묵의 간격까지. 서윤은 전시를 준비하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가다듬고자 했다.<br>최 실장이 자리를 뜨자, 전시실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br>-다들 조금만 더 힘내요. 오늘 오버타임을 해도, 내일은 푹 쉴 수 있잖아요.<br>서윤이 ‘내일’이라는 단어에 살짝 방점을 찍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직원들을 둘러보았다.<br>-내일? 아, 내일!<br>직원 하나가 긴 숨을 내쉬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br>-자, 다시 힘 좀 써봐요.<br>서윤의 말에 알바생이 다시 캔버스를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액자가 휠 듯 출렁이며 캔버스 표면이 크게 흔들렸다.<br>-아아, 맙소사! 작품은 아기 다루듯 천천히.-아, 죄송합니다.<br>알바생이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했다.<br>이 전시는 서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손문기 화백에게서 직접 그림 지도를 받으며 미술의 기초를 다졌다. 방화동 공항시장 근처에 있던 손 화실은 스승의 거처이자 작업실이었고, 입시생과 취미생이 함께 모여 그림을 익히던 공간이기도 했다.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늘 가족 같은 친밀감이 흘렀다.<br>선생은 늘 제자들에게 따뜻하고 자상했다. 작고 구부정한 몸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묵직한 에너지가 배어 나왔다. 깊고 맑은 눈매와 걸걸한 숨소리, 말투와 웃음, 드로잉 도구를 다루던 손끝의 습관과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던 손놀림까지, 모든 것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선생은 가끔 화실 식구들과 야외 스케치를 다녀오곤 했다. 김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가져간 재료로 소박한 한 끼를 나누던 날들. 그가 남긴 그림일기와 예술과 삶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서윤을 만들어주었다. <br>리온 갤러리는 인사동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화랑이었다. 이곳에서의 전시는 곧 한국 미술계 한가운데에 작가의 이름을 새기는 일이기도 했다. 손 화백의 존재감은 이제 분명한 보폭으로 한국 화단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미술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미 세상을 떠난 스승의 회고전을 직접 준비하고 있는 지금, 서윤에게 이번 전시는 끝까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자 의무였다.<br>-그렇지, 그렇지. 조금만 더 왼쪽으로…-넵!<br>알바생의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점심 이후 그는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하고 있는 그를 보며, 서윤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br>지금 옮기고 있는 작품은 손 화백의 1980년대 대표작, ‘공작 도시’ 연작 중 하나였다. 마티에르의 질감을 밀도 높게 쌓아 올린 회색 화면 속엔, 무너진 철근과 도시 구조물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뒤엉켜 있었다. <br>서울을 배경으로 한 도시 풍경화에는 거대한 기계 도시의 혼란과 욕망이 거칠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하철 2호선 공사로 뒤엉켰던 도심, 해머 드릴의 쇳소리. 데모 진압대가 쏜 최루탄 가스와 시위대의 함성,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자동차들, 무질서하게 파편화된 거리의 모습. 그 속에 잠복한 디스토피아적 환영과 자본주의의 그늘을 손 화백은 누구보다 일찍, 누구보다 날카롭게 포착해 냈다.<br>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서윤은 여전히 회색 지대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선생의 그림 앞에서, 그 시대를 통과해 온 자신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알바생과 ‘공작 도시’를 들고 중앙 갤러리 입구로 향하던 그때, 사다리가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쏠리는 모습이 서윤의 시야에 들어왔다.<br>-앗, 조심해!<br>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다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다리가 쓰러지면서 이동 중이던 '공작 도시'를 그대로 덮칠 기세였다.그 순간, 알바생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등으로 사다리를 밀쳐내며, 한쪽 팔로는 그림을 감쌌다. 간발의 차로 더 큰 충격을 막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발등으로 그림 아래를 받쳐냈기 때문이었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6/pimg_63918915947507125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619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5. 혼자 살아남은 아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2793</link><pubDate>Sat, 04 Jul 2026 02: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279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도준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오대산 매표소 앞에 세워둔 4륜 구동 랜드로버로 돌아왔다. 십여 년 전에 한국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영사가 귀국하며 남기고 간 차였다. 겉보기엔 제법 낡고, 세월의 흔적도 역력했지만 달리는 데엔 아직 큰 문제가 없었다. 필요할 때마다 도준이 직접 손을 대어 엔진을 만지고 낡은 부품을 갈아 끼워온 덕이었다. 그렇다. 그는 그런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었다. 그의 특별한 재주 중 하나는, 뭐든지 잘 뜯어고친다는 점이었다.  &nbsp;  손재주는 어려서부터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속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한번 분해한 것은 기어이 다시 조립해 내는 묘한 집중력과 끈기를 보이곤 했다.물론 그 실험이 매번 성공한 건 아니다. 덕분에 집 안의 라디오며 시계가 수난을 겪는 일도 잦았다.<br>부엌 창가에 놓인 라디오가 이유 없이 먹통이 되기라도 하면, 그는 어머니의 꾸중을 피해 달아나거나 동네 전파사의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양팔에 토시를 낀 수리공 아저씨가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작은 부품을 갈아 끼우고 납땜질을 하는 동안, 어린 도준은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했다.<br>외아들이었던 도준은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자랐다. 호기심 많고 늘 뛰어다니기 바쁜 아이였지만, 두 분은 언제나 곁에서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다정했던 나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직 부모의 품이 간절하던 어린 시절, 도준은 양친을 잃고 덩그러니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br>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2월, 열세 살 도준은 잠시 강원도 고모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 장사를 하던 양친은 구정 대목 탓인지 간간이 전화만 할 뿐 좀처럼 데리러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도준은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br>-여기 너무 심심해. 빨리 좀 데리러 와. 안 그러면 나 혼자 서울 갈 거야.<br>어린 아들이 떼를 쓰듯 투정을 부리자, 부모는 그날 가게 문을 닫고 밤길을 달려 마침내 고모 집에 도착했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도준은 망설임 없이 짐가방을 챙겨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들 일가족이 탄 소형 세단은 비포장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밤의 정적을 깨웠다.<br>-준아, 편하게 눈 좀 감고 자렴.<br>엄마의 잔잔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를 포근히 감돌았다. 도준은 두 분의 웃음 섞인 대화를 들으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br>강원도의 구불거리는 산길, 새벽 한 시 무렵.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결에 요란한 클랙슨이 들린 것도 같았다. 아버지가 몰던 세단은 마주 오던 트럭을 피하려다 미끄러졌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 차가운 계곡 아래로 추락했다.<br>어두운 혼돈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전복된 상태였다. 앞좌석에 탄 부모님은 피투성이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도준은 거꾸로 매달린 채, 차 안에서 필사적으로 ‘엄마’ ‘아빠’를 부르며 몸부림쳤다.<br>처음엔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지만,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그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고, 그 끔찍한 순간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 멈춰 서 있었다. 죽음은 너무도 잔혹한 얼굴로 다가왔고, 그날의 공포는 어린 소년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졌다.<br>119 구조대가 도착한 건, 여명의 빛이 산자락을 타고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br>-다 제 잘못이에요. 데리러 오라고 떼만 쓰지 않았더라면…<br>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br>그의 일가친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까이 왕래하는 혈육이라곤 고모네 일가족이 전부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모마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도준은 고모부를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아갔다. 고모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지만, 고종사촌들과는 나이 차이가 커 함께 어울릴 일이 거의 없었다. 도준은 일찍이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무게에 서서히 익숙해지며 자신만의 삶을 배워나갔다.<br>부모님이 남긴 얼마간의 재산 덕분에 당장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대학을 마칠 무렵엔 은행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반과 등산 장비에 가진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결과였다.<br>부모님이 여전히 살아계셨다면, 매일 산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들을 두고 무엇이라 했을까. 어머니라면 끊임없이 잔소리를 쏟아냈을 테고, 아버지는 중간에서 방패막이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외아들에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들이 아닌가.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움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며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br>오대산 등산로 입구에는 산행을 준비하는 등산객 서너 명이 모여 있었다. 매표소를 온종일 지키는 나이 든 직원이 도준을 보자 창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br>-오늘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는 거요?<br> -네, 그러믄요.<br>도준은 뒤를 돌아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br>-날씨도 추운데 기운이 펄펄 솟는구려. 지극정성일세. 대체 무슨 일 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날마다 산을 뛰어다니는 거요?<br> -운동 삼아 그러는 거죠. 그럼, 또 뵙겠습니다.-조심해서 가요.  &nbsp;  매표소 직원은 손을 흔들고는 다시 창구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nbsp;  도준은 랜드로버 운전석에 올라 엔진이 예열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차창 너머 보이는 나무들의 헐벗은 가지 사이로 촉촉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머지않아 연한 초록 새싹이 돋아나고, 풍성한 녹음이 능선을 따라 번져갈 것이다. 그는 땀이 밴 목덜미를 수건으로 한 번 훑어낸 뒤, 횡계에 있는 고모부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4/pimg_63918729143274580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279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4. 나는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0988</link><pubDate>Fri, 03 Jul 2026 01: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098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마침내 오대산 정상에 선 도준은,&nbsp;겹겹이 이어진 능선들을 바라보았다.&nbsp;초봄의 골짜기마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nbsp;그 위로 맑고 싱그러운 공기가 가득 퍼져 나갔다.&nbsp;주변은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nbsp;자연이 드리운 정적 속에서, 그는 잠시 또 다른 세계의 입구에 서 있는 듯한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배낭을 내려놓고 몸을 풀며,&nbsp;스포츠 음료를 한 모금씩 음미하듯 마셨다.&nbsp;차가운 이온수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nbsp;전신의 세포가 마치 스펀지처럼 그것을 빨아들였다.<br>오늘따라 유독 민혁과의 추억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함께 자주 오대산을 오르던 시절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민혁의 생일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운 옛 친구는 로체 남벽이라는 인생의 미결 과제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겨진 자가 친구가 가졌던 그 꿈의 무게까지 이어받아야 한다.<br>도준은 정상 정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른 순간마저도 등반에 있어 하나의 과정이라 여겼다. 어떤 루트를 택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오르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는 등반 중 마주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분석하고, 거기서 최선의 해답을 도출하는 데 탁월했다. 특히 로체 남벽은 오랜 시간 그의 연구 목록에서 단연 최우선이었다.<br>도준은 이번에도 로체 남벽 8,350미터까지 최초로 오른 예르지 쿠쿠치카와 로베르트 파블로프스키의 기술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가볍고 빠른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전통적 히말라얀 방식과 달리, 등반 루트와 속도, 시기까지 모든 판단을 스스로 내려야 하는 고독한 방식이다. 그만큼 더 큰 결단력과 강한 내면의 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경량 장비 하나로 신속하게 고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은 순수한 등반의 성취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고소에서의 급격한 기후 변화에도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동료의 도움도, 세르파도, 고정 로프도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믿고 나아가야 하기에 위험도는 극단적으로 높고, 체력 소모 또한 혹독하다.<br>로체 남벽은 베이스캠프를 떠나는 순간부터 3,300미터에 이르는 가파른 설벽이 기다린다.&nbsp;발 디딜 틈조차 없어, 앞발로 포인트를 찍으며 첫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수직 암벽에서는 수시로 눈사태와 스노우 샤워를 견뎌야 하며, 몸을 한 치씩 끌어올릴 때마다&nbsp;폐를 짓누르는 공포와 맞서야 한다.&nbsp;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하지만 등반은 정상에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산을 끝까지 내려오기 위해서는 체력 안배가 생사의 갈림길이 되며, 올라갈 때 60을 쓰고, 내려올 때 40을 남겨두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도준은 그 모든 과정을,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은 완전한 자유 등반으로 오르겠다고 결심했다.<br>눈사태와 암석 낙하를 피하려면 밤과 이른 새벽, 얼어붙은 눈을 딛고 오르는 것이 유리했다. 낮 동안 폭포처럼 무너지는 눈사태를 피해 충분히 휴식하고, 한밤중 상단부를 공략해 정상을 찍는 전략이었다. 단시간 내 홀로 정상에 닿고 돌아오기 위해선 폭발적 근력과 순발력, 초인적 집중과 의지, 무릎 꿇지 않는 투지와 끈질긴 정신력이 필요했다. 로체 남벽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벽이자, 대자연의 너그러움 없이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 길은 어떤 이에게도 가볍게 열리지 않았다.<br>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nbsp;서른다섯,&nbsp;그의 나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nbsp;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nbsp;공기 희박한 허공에 매달려 직벽과 맞서 싸우며 끝까지 버텨내려면 단 한 번의 실수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도준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br>두려움은 어쩌면 신이 마지막까지 인간에게 남겨준 생존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맞서온 감정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게와 깊이가 달랐다. 이건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침묵의 경고. 정말 이 벼랑 끝에 다시 매달리겠다는 건가. 나는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스스로를 죽음에 내맡기려 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내가 하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br>-아, 아니야. <br>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잡념을 털어내자. 민혁의 이름조차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로체뿐. 저 위에서 나를 위협하는 것은 육체의 한계가 아니라, 마음 깊숙이 자리한 불안이다. 그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나는 꺾이지 않으리라. 이미 올라가기로 결심한 이상 그저 묵묵히 오를 뿐이다. 말도, 후회도, 돌아볼 이유도 없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의지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는 투지가 아닌,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냉정한 결단이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6/pimg_63918903469760777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098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3.눈보라에 묻혀버린 마지막 절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9275</link><pubDate>Thu, 02 Jul 2026 06: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927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히말라야 원시의 설산에서, 서로를 향한 믿음보다 강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도준과 민혁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큰 위기가 닥쳐왔다. 고도계의 바늘은 7,80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상 능선 너머로 불길한 회색 구름이 몰려들었고, 거세진 바람은 등줄기를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눈보라는 마침내 폭주하듯, 분노에 찬 짐승처럼 포효하며 사면을 휘몰아쳤다.<br><br>-날씨도 안 좋은데, 잠깐 쉬었다 갈까?<br>-그래. 바람이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자.<br><br>그것은 일 보 후퇴, 진정한 의미의 '전진을 위한 후퇴'였다. 로체 남벽 초등에 대한 집념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이 악마의 벽을 넘겠다는 결심뿐이었다. 두 친구는 깎아지른 암능 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발판이 될 만한 자리를 찾아 바닥을 다진 뒤, 눈이 얼어 단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그 위에 작은 텐트를 세웠다. <br><br>둘은 그 은신처에서 험한 날씨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풍은 쓰나미처럼 밀려와 산허리를 할퀴었고, 계곡 어딘가에선 쪼개지듯 묵직한 천둥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눈 폭풍은 사방에서 격노한 야수처럼 울부짖었고, 거센 눈발은 캠프지를 요란한 빗소리처럼 두드려댔다. 텐트는 금방이라도 찢겨 날아갈 듯 거칠게 펄럭였으며, 유닛마다 연결된 자일은 텐트 기둥을 따라 격렬하게 흔들렸다. 침낭 속에서 체온을 나누며 몸을 웅크린 두 사람은, 차갑고 딱딱한 빵을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고독과 결연함이 응고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br><br>-정상이 코앞인데, 늙은 마녀가 심통을 부리네.<br>-우리가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산이 우릴 간보는 것 같지 않아?<br><br>유령의 집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추위에 떨던 민혁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섬찟했다. 폭풍 속에서 텐트가 숨을 고르듯 요동쳤고, 들이쉬는 숨마다 날 선 공기가 목구멍을 긁으며 폐 속 깊숙이 얼음처럼 박혔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한 악천후라 해도, 그들은 반드시 견뎌내리라는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br><br>-포기할 수 없어. 우리는 끝까지 버텨야 해.<br>-지금 뜨끈한 밀크티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어.<br>-브랜디 탄 에스프레소라면, 내 목숨이랑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br>-따뜻한 아랫목에서, 계란에 파 송송 썰어 넣고, 고춧가루 뿌린 라면 한 그릇 먹으며 야동 한 편만 볼 수 있다면, 다시는 이런 빌어먹을 산엔 오지 않겠어. 내 두 다리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br>-아냐, 나는 야동 대신 짜장면.<br>-어허! 아니지. 짬뽕이지.<br><br>노호하는 바람 속에서 두 친구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지만, 서로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견딜 수 있었다. 어둠과 추락의 위협, 차가운 죽음의 기척이 사방에서 밀려왔지만, 그들의 우정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서로를 따스하게 감쌌다.<br><br>산 능선은 이미 어두워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멀리 바룬체(7,152m)와 아마다블람(6,814m)의 정상만이 빨간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금세 주위가 침침해지더니, 어느새 새카맣게 파묻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가슴속 깊이 파고들며 숨을 옥죄었다.<br><br>-젠장, 대체 왜 이런 데 올라온 거지?<br>-우리 둘 다 돌았으니까.<br>-맛이 간 거지. 제대로.<br>-정신 똑바로 차려. 바람에 휩쓸리기 십상이야.<br>-여기서 날아가면, 뼈도 못 추릴걸.<br><br>둘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 같았다. 결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밤이었다.<br><br>일출 전의 몇 시간은 언제나처럼 지독히 춥고, 지루했다. 멀리 산봉우리 위로 어슴푸레 붉은 아침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며, 날씨가 조금씩 풀릴 조짐을 보였다. 살을 에는 바람도 점차 잠잠해졌다. 첫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어올 무렵, 그들은 다시 빙탑에 매달렸다. 얼음 표면은 단단히 얼어 있었고, 아이젠은 그 속에 깊숙이 박혔다. 오른손에는 아이스 픽켈, 왼손에는 아이스바일을 쥐고, 발톱으로 얼음을 찍으며 한 발씩 신중하게 올랐다.<br><br>프론트 포인팅으로 얼음벽에 매달린 채, 중간 확보물로 쓸 피톤을 얼음 속 깊숙이 박아가며, 숨결과 땀방울을 빙벽에 새기듯, 조심스레 전진했다. 발 아래 끝도 모를 협곡에서는 저승사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천 길 낭떠러지 밑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기다렸다. 한 발짝만 실패해도, 그곳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br><br>늑골 모양을 한 얼음층과 녹은 눈이 바위 표면을 살짝 덮은 베르글라 지대를 지나, 홈통처럼 생긴 로체 쿠로와르까지 꼬박 12시간을 올랐다. 마침내 정상 설원을 눈앞에 둔 순간, 그때부터 눈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골짜기 위에 끼어 있던 안개가 점차 번지며 하늘을 뒤덮었다.<br><br>로체봉은 죽음을 부르듯 몸을 뒤척였고,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사나운 돌풍에 휘말리며 숨을 쉬기조차 곤란할 정도였다. 더 이상 올라가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한순간, 자연의 위엄과 잔혹함이 얽히며, 생과 사의 경계가 흐릿해졌다.<br><br>-안 되겠다. 일단 후퇴하자.-젠장! 내가 앞장설게!  &nbsp;  민혁이 절규하듯 소리치며 먼저 몸을 돌렸다.&nbsp;시바 신은 끝내 그들을 거부한 채, 응징하듯 모든 희망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뼈저린 절망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던 그들은, 미친 듯이 아이스 픽켈을 찍으며 목숨을 건 하강을 시작했다. 거센 풍압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옷을 갈기갈기 찢을 듯했다. 발아래 눈은 붕괴하듯 미끄러져 내리고, 시야는 점점 더 뒤틀려갔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고, 내면 깊숙이 솟구치는 공포가 어둠의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br>시야 확보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제트기류가 휘몰아치는 절벽 위로,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낙석 하나가 도준과 민혁의 몸을 잇고 있던 자일에 날카로운 도끼날처럼 내리꽂혔다. 순간, 자일이 터져나가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내며 위로 튕겨 올랐다. 도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아이스 피켈을 얼음과 바위틈 깊숙이 쑤셔 박았다. 그러나 한발 앞서 내려가고 있던 민혁은 몸을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짐 무게를 줄이려던 선택이 결국 화근이었다.<br><br>-아아악!<br><br>민혁의 비명이 절벽을 타고 메아리치며 하늘로 흩어졌다. 시간은 블랙홀에 빨려드는 듯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채, 세상은 한순간 정적에 잠겼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와 함께, 생의 탯줄이 끊어지는 듯한 끔찍한 절망이 덮쳐왔다. 눈앞에서 민혁의 몸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조금 놀란 듯,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민혁의 모습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br><br>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 속으로, 그의 모습은 아스라이 흐릿한 그림자처럼 사라져 갔다.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사라져가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낭떠러지를 향해, 울부짖는 목소리가 한없이 번져갔다. 이제 남은 흔적이라곤, 하늘에서 날아드는 눈보라에 묻혀버린 마지막 절규뿐이었다. <br><br>요즘도 한밤중에 문득 눈을 뜨면, 민혁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로체봉 깊은 골짜기, 바위틈 어둠 속에서 여전히 그를 부르고 있을 친구의 얼굴이. 도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들의 등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br><br>-기다려라, 친구.<br><br>이제 민혁의 목숨값을 되갚아야 할 시간이다. 도준은 눈을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결의가 온몸을 뜨겁게 채웠다. 이번에는 반드시, 정상에 설 것이다. 한때 자일 파트너로서 나눴던 깊은 우정, 민혁의 죽음을 더는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2/pimg_63918570593841272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927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2. 사람들의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7353</link><pubDate>Wed, 01 Jul 2026 0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735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도준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깎아지른 오대산 절벽을 기어올랐다. 손바닥은 흡반처럼 바위에 착착 들러붙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가운 바위의 미세한 틈을 정확히 짚어냈다. 등에는 로체에 오를 때 짊어질 무게와 비슷한 배낭을 멘 채였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무게와 고도에서의 무게는 질적으로 달랐다. 표고차가 커질수록 중력의 압박은 천근만근으로 증폭되기 마련이었다.<br>앞으로의 트레이닝 동안 그는 배낭 무게를 조금씩 늘려갈 작정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 과정이 고통 속에서도 분명 성장의 발판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년 5월의 로체 남벽 등정을 준비하며, 그는 체력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무거운 장비와 모래주머니를 두른 채 산등선을 서너 시간씩 내달리는 건 기본이었다.<br>한 손 턱걸이, 팔굽혀펴기, 거꾸로 매달리기, 들어올리기, 수영 같은 훈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히말라야에서 혼자 버티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8천 미터급 고지에서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모든 근육을 더욱 정밀하게 단련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br>몸이 고달플수록 마음은 더욱 굳건해졌고, 정신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투명해졌다. 인간의 한계를 매일 갱신하는 훈련은 더 이상 고행이 아닌, 오히려 해방의 순간이 되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로체 남벽을 향해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도준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 운명은 필연처럼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존재를 이끌어갔다.<br>로체의 크레바스 같은 빙벽 낭떠러지에서 친구 민혁을 잃은 후, 벌써 8년이 흘렀다. 그날의 비명처럼 터져나간 자일, 그리고 눈보라에 파묻힌 계곡의 침묵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 풀리지 않은 한으로 남았다. 영영 아물지 않을 그 상처에는 상실의 고통이 피처럼 고여 있었고, 도준은 자신이 민혁 대신 살고 있다는 죄의식을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br>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었다. <br>‘그때 내가 먼저 내려갔더라면...’ <br>한순간의 우연이 결국 생과 사의 향방을 엇갈리게 했다.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그 찰나의 순간. 이제 남은 건, 민혁 대신 숨을 쉬고 있다는 살아남은 자의 뼈아픈 자각과 아직 말라붙지 않은 상흔뿐이었다.<br>도준과 민혁은 고등학교 시절, 우이동에서 출발해 북한산 백운대 능선을 오르던 첫 동계 등반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둘은 말없이 통하는 동질감을 느꼈고,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깊은 교감이 형성되었다. 산을 향한 순수한 열정은 곧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졌고, 청소년기의 그들의 관계는 바위처럼 단단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br>민혁은 작은 체구에서 비롯된 놀라운 끈기와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산을 대하는 감각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듯 정확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길을 여는 대담함이 있었다. 다만, 긴 호흡으로 먼 걸음을 내딛는 일에는 다소 서툴렀다. 도준과 민혁은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지녔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며 상호 보완적인 자일 파트너가 되었다. 험난한 고비마다 함께 견뎌낸 세월은 그들의 동지애를 더욱 굳게 다져주었다.  &nbsp;  대학교 1학년, 여름비가 조용히 내리던 오후였다. 도준과 민혁은 모리스 에르조그의 『최초의 8000미터』를 처음 펼쳐 들었다. 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인류 최초로 안나푸르나에 오른 기록이 담긴 책이었다.<br>원정대의 리더였던 에르조그는, 손가락과 발가락 대부분을 잃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정상에서 느낀 황홀한 기쁨을 생생히 전했다.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인간 정신의 불꽃이, 페이지마다 깊게 새겨져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산악인들의 성서처럼 전해져 온 이 책의 첫머리에는 그의 목소리처럼 짧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한 문장이 있었다.  &nbsp;  There are other Annapurnas in the lives of men.<br>사람들의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  &nbsp;  책장을 넘기며, 도준과 민혁은 오직 무산소 등반만이 주는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구상에는 모두 14개의 8000미터급 봉우리가 있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은 로체 남벽이었다. 수많은 산악인의 우상이던 라인홀트 메스너조차 끝내 오르지 못한, 악명 높은 벽. 성난 짐승처럼 거칠고 잔혹한 그곳이, 오히려 더욱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다.<br>그로부터 9년 후인 1989년, 폴란드의 전설적 등반가 예르지 쿠쿠치카가 로체 남벽 8,350미터 지점에서 추락해 생을 마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 산악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아무도 넘지 못한 벽이 있다는 사실이 모두의 흥미를 자극했다. 도준과 민혁 역시 이 사건에 깊은 자극을 받은 터라, 마침내 로체 남벽을 향한 현실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br>-우리도 가자. 언제까지 꿈만 꿀 거야?-메스너는 중간에 포기했고, 쿠쿠치카는 꼭대기에서 밧줄이 끊어졌지. 우리가 할 수 있을까?-불가능하진 않아. 둘 다 알파인 스타일로 도전했잖아. 관건은 속도야. 최대한 빨리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쿠쿠치카가 8,350미터까지 갈 수 있었던 건,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그들은 실패했지만, 우린 다를지도 몰라.-우리가 해낸다면 세계 최초야. 메스너도 우리 이름 보면 놀라겠지?-신문에 우리 얼굴 나오면, 메스너도 씁쓸하겠지. 근데 어쩌겠어. 우리가 미래인 걸.<br>그해 가을, 마침내 네팔 땅을 밟은 두 청년의 눈빛은 결연한 의지로 불타올랐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한 결단의 순간, 이제는 그 무엇도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운명처럼 다가온 도전 앞에서, 그들의 결심은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굳건했다.<br>루클라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뒤, 남체와 탕보체, 추쿵을 지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그들은 중앙 루트를 개척하며 8,511미터 정상까지 단숨에 오르겠다는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로체샬을 7,100미터까지 오르며 고소 적응을 마친 뒤, 라마제를 올린 다음 드디어 본격적인 등반 길에 나섰다. 6,400미터, 아슬아슬한 마의 구간을 간신히 넘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위협적으로 치솟은 급사면을 따라 쉼 없이 올라갔다. 하늘은 내내 맑았고, 이대로라면 곧 정상을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었다.<br>-조금만 더 힘내.-네 걱정이나 해.<br>두 친구는 서로를 다그치듯 격려하며, 한 번 떨어지면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몸을 위로 밀어 올렸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1/pimg_63918542360776605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735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1.고독과 친숙한 인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3589</link><pubDate>Tue, 30 Jun 2026 0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358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nbsp;<br>작년 4월, K2 등정을 마치고 스카르두와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카트만두로 돌아온 도준은 곧장 네팔 관광청으로 향했다. 로체 남벽 등반 허가증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그곳, 친구 민혁이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곳. 가혹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남벽. 다시 그 벽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은 더 이상 한때의 목표가 아니라 필연적인 선택이었다.<br>K2에서도 그는 최소한의 장비만 지닌 채 알파인 스타일로 단독 등반을 감행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홀로 서는 것, 혹독한 고독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꿈꾸던 등반의 방식이었다. 그 길은 민혁과 함께 시작한 길이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둘은 알파인 스타일로 로체봉을 오르겠다는 꿈을 나누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민혁은 없다. 그저 그의 흔적이 남아 눈 덮인 산맥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을 뿐이다. <br>-민혁아. 이제 내가, 우리의 꿈을 이어갈 거야.<br>해발 8천 미터가 넘는 고지까지 산소마스크도 없이 홀로 버티겠다는 결심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번 도전은 더 이상 그저 한 번의 등반이 아니었다. 친구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 <br>혼자서 로체 남벽을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불러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6400미터 지점, 클라이머에게 최악의 난관으로 여겨지는 그곳. 가파른 설빙이 널브러져 있어 안전하게 비박할 곳조차 찾기 어려웠고, 자일에 몸을 의지한 채 절벽에 매달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방심해도 돌풍에 휘말리거나, 확보 지점이 무너지며 깊은 크레바스로 추락할 수 있었다.<br>-크레바스의 끝은 지구 반대편까지 뚫려 있다고 하더라.<br>언젠가 민혁이 농담처럼 남긴 말이 떠올랐다. 도준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왜 또다시 고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가. 무엇을 위한 증명인가. 나만의 고집일까, 아니면 치기 어린 아집일까.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것은 단 하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보고 싶은 열망뿐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br>매킨리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한 선배가 무심한 듯 충고했다.<br>-앞으로 길어야 몇 년이나 더 현역으로 뛰겠냐. 체력에도 한계가 있어. 산에서 죽을 생각 아니면, 이제 슬슬 먹고살 궁리 좀 해야지.<br>도준은 그 조언을 묵묵히 들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다짐뿐이었다. 신은 인간의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한계란 결국 인간 스스로가 그어놓은 선일 뿐이다. 그는 나이 들어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월과 함께 조금씩 닳아가는 것이 나이 아닌가.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무덤에 비석 하나 세우고 이름을 새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그런 부질없는 명예와 이기심에 더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br>잠시 머물다 떠나는 생의 종착역에서, 남이 정해준 꿈을 좇는 삶은 끝내고 싶었다.&nbsp;그는 이제 자신의 꿈을 향해 걸었다. 도준이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제법 알려진 등산가였지만, 삶의 본질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방랑자에 가까웠다. 1987년, 독일의 한 회사에서 제작한 특수 차량으로 3년에 걸쳐 세계를 일주했다. 적도에서 극지까지, 산간 오지마을에서 대도시까지 정해진 경로 없이 여행하며, 배터리 성능을 실험하면서 다양한 사진을 찍고 그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br>그 여정의 기록들은 한 시사 잡지에 연재되었고, 한동안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에도 실렸다. 그렇게 떠도는 동안 그는 깨달았다. 너무 멀리, 너무 길게 내다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멀리서 보면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 비로소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했다.<br>그렇게 바람처럼 떠돌며 어느새 서른다섯이 되었다. 여전히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는 여성들이 드물지 않았다. 강인하고 야성적인 외모와, 어딘가 여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우울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매력 같았다. 방탕한 생활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마음에 맞는 여성과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와도 오래 만나지는 못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자신이 추구하는 삶에 균열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과,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br>서른한 살 때, 그는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상대는 조용하고 성실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한동안 깊은 관계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정을 쌓았지만, 결국 결혼은 취소되었다. 험한 산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피한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고, 언제 그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 무게를 그녀에게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그 마음을 이해했고 두 사람은 담담히,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안고 헤어졌다.<br>산은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제약했지만, 동시에 기대 이상의 것을 안겨주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일본 북알프스를 처음 올랐을 때부터 산은 그의 또 다른 인생이 되었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산을 오르는 것은 남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산을 내려서며 다시 오를 결심을 하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삶처럼, 오르내림의 반복 그 자체가 그의 존재였다. 더 큰 의미나 목적은 필요하지 않았다.<br>살아오는 동안 늘 옳은 선택만 한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아도 크게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 몇 년 전, 에베레스트를 함께 오른 오스트리아 출신 등산가는 이렇게 말했다.<br>-일주일 내내 일하며 일정한 수입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산에서 영웅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보다 더 큰 극기와 용기를 요구하지요.<br>어쩌면 그 말은 자기 변명일지 모른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인내와 극기, 그리고 용기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위도나 고도와 무관하다. 높은 산에서든 지표면에서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br>하지만 도준에게 회색빛 일상은 고통이었다. 생계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본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고독 속에서 공포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다. 그렇다. 도준은 고독과 친숙한 인간이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30/pimg_63918380189351954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358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0. 악마의 벽에 운명을 걸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1332</link><pubDate>Mon, 29 Jun 2026 01: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1332</guid><description><![CDATA[글. 그림 김미진  &nbsp;  까마귀 한 마리가 멀리서 울었다. 리듬감 있게 내딛는 발소리가 산길 위로 퍼졌다. 발목을 감싼 얇은 덧신이 낙엽을 헤치며 바스락거렸고,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은 햇살 속으로 번지듯 사라졌다. 산속 깊은 계곡은 숨을 죽인 채 잠잠했다. 그 고요의 한가운데, 한 남자의 심장 박동이 울려 퍼졌다.<br>쿵-&nbsp;쿵-<br>봄기운이 천천히 산등성을 타고 오르던 그날 오후, 도준은 오대산 능선을 따라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쳤지만, 강인하게 다져진 그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피어올랐다. 꽤 오랜 시간, 그는 같은 호흡으로 보폭을 이어갔다. 두 발이 일정하게 땅을 내딛는 순간마다&nbsp;머릿속이 맑아지며 온갖 잡념이 사라졌다.<br>이런 의식의 공백은 그에게 익숙했다. 오직 달리는 일에만 몰두한 채, 세상의 시름에서 풀려난 무중력의 고요를 사랑했다. 등산로 끝자락을 지나자, 가파른 암벽길이 길게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화강암 절벽 앞에서도, 그의 몸짓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급경사의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지만, 익숙한 동작으로 거침없이 뛰어넘었다. 오대산의 거친 산길을 매일 달리며 체력을 단련해 온 그에게, 이 험준한 경사로조차 철저히 계산된 훈련 과정의 일부였다. <br>검은 바탕에 푸른 띠가 들어간 등산복, 얇은 폴리에스터 장갑, 길게 묶은 꽁지머리. 20킬로그램짜리 배낭에, 발목엔 모래주머니까지 찬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경사를 타고 올랐다. 두 발은 땅을 박차고, 호흡과 시선, 균형 감각이 정교하게 맞물렸다. 움직임은 빠르되 한 치의 무리도 없었다. 그는 야생의 본능과 생존의 가쁜 숨을 내쉬며, 자연의 심연 속을 달리는 한 줄기 맥박 같았다.<br>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등줄기를 스쳤다. 그것은 그의 몸을 식히는 동시에, 주변의 공기 흐름에 몸을 맡기게 했다. 도준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발걸음과 호흡만을 따라갔다. 나무와 돌, 떨어진 잎 하나까지도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감각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때로 그는 스스로를 시험하듯, 한층 더 가파른 바위를 올랐다. 손끝과 발끝에 집중을 모으고, 중력을 거슬러 몸을 밀어 올리는 순간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시선과 속삭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산, 그리고 한 줄기 길뿐이었다.<br>계곡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가 달리는 길 위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그가 남긴 발자국처럼 땅에 새겨졌다가 곧 사라졌다. 도준의 내면에도 비슷한 밀도의 그늘이 깊이 자리 잡았다. 지난 기억과 앞으로 맞이할 고통, 그리고 끝내 닿을 수밖에 없는 고요한 결말까지.<br>그는 속으로 단 한 가지를 되뇌었다.&nbsp;<br>‘달려라. 멈추지 마라.’&nbsp;<br>모든 판단과 감정이 그의 몸을 지배했지만, 달리는 행위 자체가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자연의 리듬 속에서 느낀 온도와 바람, 땅의 질감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증거였다.&nbsp;<br>도준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암벽과 계곡, 바람과 햇살, 그리고 심장 박동과 호흡이 하나로 맞물리며, 한 인간이 자연과 마주한 순간의 총체적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오대산은 그의 몸과 함께 숨 쉬고 있었고, 도준 자신도 그 흐름 속에서 삶의 맥박을 단단히 새기고 있었다.<br>해발 8,511미터.<br>로체.


<br>피의 계곡처럼 벌어진 기억 너머에, 깎아지를 듯한 쿠로와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100년간의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치열한 난코스로 여겨지는 로체 남벽을 완등한 이는 아직 없다. 오직 슬로베니아 출신의 저명한 산악인, 토모 체센만이 1990년 봄, 무산소 단독으로 초등정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br>그는 4월 22일 오후 5시에 출발해, 25일 오전 7시에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고 알려졌다. 단 62시간 만에 등정을 마쳤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발표는 곧 거센 의혹과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처음 그는 등반 중 촬영한 사진이 없다고 밝혔으나, 이후 프랑스 등산 전문지에 제출한 사진들로 다시 논란이 일었다.<br>그 자료들이 사실은 다른 등반가가 촬영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그의 이름은 신화의 정상에서 허위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경외의 정점에 서 있던 그는 한순간, 조롱과 의심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가 로체 정상에서 찍었다고 공개한 사진 속 풍경들조차, 실제 정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br>도준도 한때 그 악마의 벽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달라붙은 적이 있었다. 토모 체센의 등반 주장이 아직 논란에 휩싸이기 일 년 전인 1989년 10월, 그는 절친 민혁과 함께 메스너조차 21세기에나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던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단 5일 만에 8,200미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목숨을 거는 위기마다 서로의 눈빛 하나로 결정을 내렸고, 등반로는 마치 기적처럼 열렸다. 벼랑 끝에서 손을 내밀고, 눈사태 속에서도 로프 하나에 서로를 지탱하며 수많은 고비를 넘었다. <br>로체봉 정상에 거의 도달했던 그날,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하늘이 찢기듯 열리며 눈보라가 몰아쳤고, 모든 것이 눈앞에서 뒤엉키는 바람에 그들은 정상 직하의 설원 낭떠러지에서 아이스 피켈을 필사적으로 찍으며 온몸을 내던지듯 하산을 시작했다. 그때, 떨어지는 낙석에 그는 자신의 분신 같았던 친구 민혁을 잃었다. 민혁은 로체의 크레바스처럼 깊은 계곡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br>해발 8천 미터를 넘나드는 고봉 위에서 인간의 운명은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곳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과연 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로체 남벽을 오를 수 있는 것인가. 때때로 그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작은 가능성과 희망을 향해 좁은 보폭이나마 한발씩 내디뎠다. 시바 신이 미소를 지을지, 아니면 분노의 화살을 쏘아댈지,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9/pimg_63918292306763928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133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 녹음기의 빨간 불빛은 깜빡이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7546</link><pubDate>Sat, 27 Jun 2026 00: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7546</guid><description><![CDATA[글. 그림 김미진<br>인호는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문과 설명되지 않는 거리감이 남아 있었다. 말투와 표정, 시선에 이르기까지, 어딘가 어긋난 감정의 온도 차가 그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다.<br>기자 생활 십수 년. 익명 뒤에 숨어 정보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 말보다 눈물이 먼저였던 고발자들,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마치 진실인 듯 내보였던 그들. 그런 이들을 상대해 온 세월은 인호에게 사람을 가려내는 직감을 남겼지만, 동시에 모든 이야기를 의심하게 만드는 나쁜 습관도 함께 남겼다.<br>그럼에도 그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떠올렸다. 도준과 SY 사건의 핵심에 놓인 두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단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인호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숨을 삼켰다. <br>‘전혀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군.’<br>그 순간,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앞에서 무엇인가가 막 실체를 드러내려는 듯했다.  &nbsp;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꺼낸 봉투 안에는 도준이 어떤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포즈와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깊이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br>사진 속 여인의 얼굴은 맑고 따뜻했다. 가늘게 실눈을 뜬 눈매와 수줍은 미소가 투명한 봄 햇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감쌌다. 단번에 시선을 압도하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는 얼굴이었다. 침묵이 고여 있는 사진의 안쪽에서, 그녀는 말없이도 분명한 어떤 것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br>-이 여자분이 그 SY라는 말씀이신가요?-네, 그래요.<br>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연, 이 사진들만으로 이 여자가 &lt;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gt;의 수취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호는 섣불리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지금은 그녀의 말을 먼저 들어보는 편이 나아 보였다.<br>-참, 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편지는 가지고 오셨죠?-아, 그게 좀...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을 주셔서. 사실은...-그럼, 안 가지고 나오셨다는 말씀인가요?<br>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짧고 단호하게 물었다. 인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원정대는 아직 네팔에 머물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무사히 하산한 뒤, 현재 카트만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서바이벌 키트와 함께 로체 정상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 도준과 각별한 사이였던 문형근이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한성일보에 실린 편지 전문은 그가 하산 중에 팩스로 전송한 것이었다.<br>-다음 주쯤, 한국원정대가 귀국할 예정입니다. 이 여자분이 SY라는 게 확실하다면, 그때 원본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 복사본밖에 없습니다.<br>인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슬며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도준이 남긴 편지를 복사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심과 당혹감이 어렴풋이 스쳤다.<br>-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솔직히 장담은 못 드립니다.-그럼, 제가 왜 여기에 나온 거죠?-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명예라뇨...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죠?-이분이 수취인이 맞는지, 그것부터 판명하는 게 우선입니다. 정말로 SY가 확실하다면,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잘 모르겠네요.-SY 본명은 뭔가요?-오늘은 날씨가 좋았어요.-네?-산에 높이 올라갔다가, 굴러떨어지기 딱 좋은 날이죠.-그게, 무슨...?-등산 안 좋아하세요? 아, 안 좋아하시는구나.-허허, 말씀을 돌리시는군요.-흠.-죄송합니다.-...-저기...-...-저는 그러니까...-저랑...&nbsp;친자매나 다름없는 친구예요.-네? 이분이... 이 여자분이요? <br>인호가 사진 속 여인을 가리켰다.<br>-SY...&nbsp;서윤이에요. 나, 서, 윤 <br>그녀는 다시 침묵했다.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br>인호는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어떤 말이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를 바라며,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의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의 녹음기는 조용히 작동하며&nbsp;빨간 불빛을 깜빡였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7/pimg_63918117863775925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754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 그 감정의 속살 같은 것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5464</link><pubDate>Thu, 25 Jun 2026 22: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546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저녁 6시경, 초판 신문이 배포되자 인호는 신문사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약속 장소를 남산 자락의 한 호텔 라운지로 정한 데에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산’이라는 공간이 무의식중에 도준의 이미지를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nbsp;  호텔로 들어서자 라운지 창가 쪽에서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자른 머리와 매끄럽게 재단된 회색빛 바지 정장 차림. 서른 초중반쯤으로 보였지만, 인상은 또래보다 한층 성숙했다. 단정하고 절제된 옷차림과 말간 피부, 침착한 눈빛이 묘하게 어우러져 특종 분야의 전문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양손을 단정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첫인상과는 다른 어딘가 애잔한 기색이 느껴졌다.<br>-제 이름은 제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br>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br>-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nbsp;  인호도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친 뒤, 신문사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녀는 커피를, 인호는 버번위스키를 주문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테이블 위로 잔잔한 재즈가 낮게 깔렸다.<br>그녀의 눈빛은 꿰뚫는 듯 예리하면서도 정제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쏘아보는 건 아니었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그 시선에는 묘한 압박이 있었다. 인호는 그 눈빛이 어쩐지 불편했으나, 말이 끊겨 어색해지는 순간을 피하려 주문한 게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이름 외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br>잠시 뒤, 웨이터가 커피와 위스키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인호는 숨을 고른 뒤,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br>-신문 기사에 나온 SY를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진 속 여자분이 정말 SY라는 걸 제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br>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두어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손끝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입가엔 말간 김이 스치듯 흩어졌다.<br>-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분 앞에서 꺼내는 게 쉽지 않네요. 하지만 제 친구를 위해서 용기를 내야겠죠. <br>그녀는 커피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소 엉뚱하면서도 도발적인 의문을 꺼내놓았다.<br>-저기...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이라는 게, 결국 뭘까요?-그게 무슨?<br>인호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쾌했다기보다, 질문 자체가 너무 느닷없고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에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 그 어색하고도 진부한 이름, ‘사랑’.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눠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인호는 등받이에 기댄 허리가 굳어오는 걸 느꼈다.&nbsp;  &nbsp;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nbsp;오히려 이 만남의 본질이 바로 그 단어 안에 있다는 듯,&nbsp;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인호를 똑바로 응시했다.&nbsp;그것은 친구&nbsp;SY를 위한 용기이자,&nbsp;어쩌면 그녀 자신을 향한 고백이기도 했다.<br>-그 감정의 속살 같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br>인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br>-지금 그게, 꼭 필요한 질문인가요? <br>그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다소 냉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br>-전 질문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질문은, 제가 해야죠.-네, 그렇죠. 물론이에요. <br>제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의 반응이 무례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현실이 때로는 남녀 사이의 애정보다 더 단단하고 귀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세상이 부여한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br>-도준 씨와 제 친구가 그랬어요. <br>제이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br>-그 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죠.<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5/pimg_63918023051967044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546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 그 편지의 수신인은 오직 한 사람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2227</link><pubDate>Wed, 24 Jun 2026 1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222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한국 등반사는 1950년대 북한산 개척 등반에서 시작되어, 1960~70년대 본격적인 산악 문화의 활성기를 거쳐 고산 원정으로 발전해 왔다. 1977년,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 8,000미터급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며 세계 산악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술적 등반과 스포츠 클라이밍이 확산되었고, 한국 등반의 기반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 흐름 속에서 도준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br>그는 히말라야 14좌 중 9개를 등정한 산악인이며, 최근 그의 서바이벌 키트가 로체봉 정상에서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로체 남벽을 단독 등정한 인물로 보도되었다. 비록 생환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누구도 넘지 못한 남벽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 소식은 세계 등반사에 중대한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도준의 업적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전설로 남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산에서 시작되어, 결국 산에서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br>지상에서 살다 간 한 인간의 인생은 장편 대하소설처럼 구구절절 기록될 수도, 혹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축약될 수도 있다. 인호는 그 삶을 글로 남겨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도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한성일보에 실릴 특집기사를 위해 여러 증언과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나 기록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번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우태길이었다. 그는 당시 네팔의 한 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귀국을 기다리던 그와 어렵사리 전화 연결이 닿은 뒤, 간략하나마 도준의 삶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br>도준과 함께 등반했던 동료들로부터도 단편적인 일화들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한 인물을 둘러싼 기록과 기억의 조각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준의 고모부 자택에서는 그의 유품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등반 일지 몇 권이 발견되었다. 사고 직후, 가장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던 고모부 식구들에게 전달된 것들이었다. <br>그러나 진짜 난관은 ‘SY’ 이니셜로만 남겨진 여인을 찾는 일이었다. 그녀는 도준의 기록 어디에도, 누구의 증언 속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일에 싸인 채, 철저히 지워진 이름, 실체 없는 존재로 남았다. 도준의 오랜 선배 문형근은 그때 카트만두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SY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당혹스러워했다.<br>-기자님, 이렇게 국제전화까지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도준 곁에 여자가 있었다니, 저로선 금시초문입니다.-전혀 여자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셨나요?-아직 젊고 생긴 것도 멀쩡한데, 여자가 아예 없었겠어요? 하지만 누구를 진지하게 사귀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그럼, 로체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요?-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훈에게는 산이 인생의 전부였죠. 주말이면 늘 산으로 사라지는 연습벌레였으니, 그런 녀석을 감당할 여자가 과연 있었을까 싶네요. 혹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다 해도, 오래가진 못했을 겁니다.-여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거죠?-허허.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생전에 연애를 했건, 아니건,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br>사람이 죽고 나면 흔적은 쉽게 잊히고, 미담은 지나치게 포장되기 마련이다. 문형근은 후배의 명성에 더는 손상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의 질문에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br>인호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편집국 안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번잡함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찌뿌듯하게 흐린 광화문 거리가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뒤엉킨 심경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말없이 그 회색 풍경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nbsp;  누구에게나,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세월의 풍화 속에 각인된, 인생의 또 다른 자화상처럼. 도준이 로체에서 실종되기 직전까지 마음속 깊이 품었던 ‘SY’,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지막이 조금은 따뜻했으리라 믿고 싶었다.<br>이후, 한성일보는 도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다각적인 면모를 취재한 결과, 걸출한 산악인 도준의 생애와 학창 시절, 성격과 등반 스타일, 가족과 지인들에게서 들은 일화들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SY’ 그 여인의 존재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았고, 기사는 조심스러운 여운을 남긴 채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은 그 퍼즐 하나가 인호의 마음 한편에 묘한 허기를 남겼다.<br>-김 기자, 빨리 기사 넘겨.-잠깐만요,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br>한성일보 편집국은 오늘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준 특집기사가 마지막으로 나간 지도 어느새 사흘째였다. 편집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인호는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았다.<br>수화기 너머,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가 자신이 ‘SY’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비슷한 제보 전화를 몇 차례 받아왔기에 인호는 담담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그녀는 도준과 SY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여러 장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br>-그 사진들을 제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물론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조건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그 서바이벌 키트에서 나온 편지요. 그걸 저에게 주세요.<br>인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br>-그 편지를 주시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그런데... 도준 씨와는 어떤 관계예요?-저는 그 편지에 나오는 여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 편지를,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죠. <br>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 편지가 로체봉 정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 편지는 산에서 내려왔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진짜 주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br>-그 편지의 수신인은 바로 제 친구예요.<br>인호는 수화기를 든 채 상체를 길게 뻗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br>‘분명히 무언가 있군.’ <br>지금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준에 관한 진정한 완결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기사화할 수 없는 이야기라 해도, 도준과 SY에 얽힌 미스터리는 더 이상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까지 갖고 있다는 제보자를 직접 만나 본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었다.<br>-좋습니다. 우리 한번 만나 보죠.<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5/pimg_63917992518399622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222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 이중 어법이라, 흥미롭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0180</link><pubDate>Tue, 23 Jun 2026 03: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0180</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 <br>한성일보의 1면을 장식한 굵은 활자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2년 전 로체 남벽에서 사라진 도준이, 마침내 죽음 너머에서 말을 걸어온 순간이었다. 다른 일간지들도 앞다투어 이 사연을 특종으로 다뤘지만, 도준이 로체봉 정상에 남긴 편지의 전문을 공개한 곳은 한성일보뿐이었다.<br>그날, 문화부 기자 김인호는 출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신문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째 줄곧 입고 다니던 트렌치코트는 후줄근했고,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전날 밤, 한성 문예지 수상 작가인 시인 모 씨와 함께 신촌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신 터라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에 잠긴 듯 뿌옇게 흐려 있었다.<br>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긴 복도를 지나 편집국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들썩이는 실내 분위기에 그의 눈빛이 잠시 굳어졌다.<br>-왜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야....<br>편집국은 본사 건물 3층 전체를 통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천장 아래 허공에는 부서별 팻말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인호는 가급적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문화부에 있는 자신의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br>지각을 하루 걸러 한 번씩 밥 먹듯이 하는 부하 직원을 좋아할 상관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직속 상사인 권 부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중에 면전에서 크게 꾸지람을 듣게 되겠지만, 우선은 한시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알고 싶었으나, 옆자리에 앉은 선임 기자 역시 통화 중이어서 그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br>그때, 편집국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문화부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인물이라, 인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꼿꼿하게 바로 세웠다.<br>-김인호 기자.-아, 예.<br>인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br>-이번에 제대로 한 방 날렸던데. 축하해.-네?-그 기사 말이야. 오늘 1면 탑으로 뽑았잖아. 하하하.<br>편집국장의 큰 웃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인호는 회사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나 자긍심보다, 전에 없이 펼쳐진 이런 상황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져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br>그날 오전 내내 편집국 전화벨이 멈추지 않았던 건, 도준에 대한 관심이 아직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해외 독립영화제 수상 감독, 발표가 지지부진하던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 출판 편집자, 방송국 간부들까지 줄을 이었다. 기사에 감동했다는 일반 독자들의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인호 기자를 찾았다. 도준 특집 기사를 쓴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br>편집국장은 다른 경쟁지들을 제쳤다는 승리감에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반면 인호는 숙취로 인한 후유증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참기 힘들 만큼 하품이 자꾸 새어 나왔다.<br>-이번에 로체에 올라간 등반대장이 네 친구라며?-네. 등반대장 우태길이 남체에서 팩스를 보냈어요.-하여튼 대단해. 우리가 크게 한 건 했어. 위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더라고.<br>편집국장은 인호의 팔뚝을 한 번 꾹 잡아본 뒤, 흡족한 표정을 남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조용해진 전화기는 이내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홍 기자가 눈을 찡긋하며 양손 엄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br>-와, 신난다. 브라보!-뭘, 그런 걸 가지고... 촌스럽게.<br>인호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문화부장이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를 불렀다. 인호의 미간이 순간 움찔했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지각이었다. 기사 반응이 좋으니 큰 날벼락은 없겠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br>-왜요.<br>그는 부장 앞 접대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입안이 껄끄럽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부장은 신문 지면을 손끝으로 툭 가리켰다.  <br>-여기, 편지에 나오는 ‘SY’라는 사람.  <br>인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이, 거기 있었나?’ 기억의 지면을 되감듯 머릿속에서 활자를 더듬었다.  <br>-부인이나 여자친구라면 굳이 이니셜로 남기진 않았겠지.<br>부장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br>-도준은 결혼 안 했어요. 자식도 없고...-그럼 혹시 불륜 관계 아니었을까? 연상녀라든지, 유부녀라든지.-네? 그게 무슨...-편지 말투, 좀 닭살 돋지 않아? 너무 감상적이잖아. 어이, 손 기자, 이리 좀 와봐.<br>손 기자는 결혼 15년 차를 맞은 문화부의 유일한 기혼 여성이자, 부서 순환 대상에서 제외된 연륜 깊은 전문 기자였다. 그녀는 재킷 뒷자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다가와 지면을 힐끗 내려다봤다.<br>-왜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여기 도준. 왜 편지에 존댓말을 썼을까?<br>손 기자는 피식 웃었다.<br>-저도 여행 가서 남편한테 엽서 쓸 땐 그래요. 평소엔 반말인데, 그럴 땐 존댓말 써요.-왜?-말실수 줄이려고도 하고... 단정하고 품위 있어 보이잖아요.<br>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br>-둘만 아는 언어 문법 같은 거죠. 겉으론 존댓말인데, 속에는 훨씬 진한 감정이 들어 있어요. 일종의 이중 어법이랄까요. 그 미묘한 거리감이 오히려 더 끈끈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br>손 기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인호를 다시 바라봤다.&nbsp;뭔가 꼼수를 떠올릴 때마다 짓던, 그 불편하고도 느끼한 표정이었다.<br>-이중 어법이라... 흥미롭군.-네? 아, 아...-후속 기사 써야지.&nbsp;뭐하고 있어?<br>부장은 휴먼 다큐 형식으로 서너 차례 연재도 가능하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br>인호는 손에 쥐고 있던 크리넥스를 눈가에 갖다 대고 문질렀다. 자신이 쓴 기사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기자로서 분명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떠들썩한 반응은 여전히 낯설고,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적어 내려간 단어와 문장들, 그 행간의 의미들이 누군가의 오랜 침묵을 건드린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3/pimg_731589167516231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018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5. 네 겹으로 접힌 종이에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5876</link><pubDate>Sat, 20 Jun 2026 22: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587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베이스캠프 주변에는 거센 돌풍이 몰아치고, 굵은 눈발이 사방으로 매섭게 흩날렸다. 며칠 전 라마제 때 매달아 둔 초르파의 오색 천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람 속에서 허공을 휘저었지만, 식당 텐트 안은 분주한 움직임과 떠들썩한 목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nbsp;  중앙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진 길쭉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스무 명쯤 되는 대원들이 그 주위에 둘러앉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몇몇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한 차림의 도시 직장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같이 게릴라 전투에 나선 산적을 닮았다. 한낮의 맹렬한 햇볕을 피할 길 없는 히말라야 고산에서, 그들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리고 얼굴은 검붉게 타 있었다.  &nbsp;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사내들은 음식을 푹푹 떠 입에 넣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었다. 식탁 위는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잔칫날처럼 풍성함이 느껴졌다. 하얀 쌀밥과 닭볶음탕, 김치와 조미김, 몇 가지 네팔식 반찬과 렌틸콩 수프가 전부였지만, 등줄기까지 텅 빈 듯 허기진 대원들에게는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정성스러운 한 끼였다. 해발 5,200미터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서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금세 꺼지고, 계속해서 뭔가 속이 허전했다. 조리팀은 식탁 중앙의 큰 접시와 냄비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말없이 음식을 다시 채워 올리며 그런 대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nbsp;  오늘 화제의 중심은 단연코 한국 원정대가 로체봉 정상에서 거둔 쾌거였다.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등정의 순간을 자축하듯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이성호는 치료 중인 우태길 대장을 대신해 위태로웠던 순간들의 조마조마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대원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체’라는 단어만으로도 모두의 얼굴에 긍지와 자부심이 깃든 미소가 번졌다.   &nbsp;  그러는 동안 바깥 날씨는 점점 험악해졌고, 얼기설기 엮어 세운 식당 텐트는 모진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처럼 요동쳤다. 그 출렁이는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이 세계의 경계를 헤집으며 낮게 으르렁대는 경고의 울림처럼 들려왔다.<br>-오늘 조금만 늦게 내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나 말이야.&nbsp;<br>대원들은 순간 말을 멈추고, 투명한 비닐창 너머로 매섭게 휘몰아치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텐트 천은 거세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고, 몇몇은 혹시 쓰러질까 두 손으로 기둥을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nbsp;  식사가 끝난 후, 문형근과 청송은 다리가 흔들거리는 간이 식탁 앞에 앉아 주방장이 특별히 준비한 야크 버터 티를 마셨다. 청송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통은 본체와 뚜껑이 단단히 맞물린 채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품은 듯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br>-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요.-그래, 조심해서 한번 꺼내봐라.<br>청송은 알루미늄 통의 상단과 하단을 고무줄로 감은 후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껏 비틀었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주무르며 밖으로 뛰어나간 그는 담당 주치의에게서 수술용 고무장갑을 얻어왔다. 또 다른 시도와 몇 번의 좌절 끝에, 조그만 캡슐의 뚜껑이 마침내 딸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위에 있던 대원들 모두 입맛을 다시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br>-뭔데 로체 정상에 묻어뒀을까? -신상정보, 그런 거겠지. <br>키트 안을 살피던 청송의 입에서 갑작스레 흥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br>-있어요. 뭐가 있어요. 종이 같아요. <br>문형근이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br>-종이라고? 이리 줘봐라. <br>청송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바이벌 키트를 통째로 문형근에게 건넸다. 내 손으로 직접 꺼내서 도준의 숨결을 제일 먼저 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까마득한 후배 처지에 대선배의 지시를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br>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작게 또르르 말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른 손바닥 한 개 반쯤 되는 불투명한 습자지였고, 네 겹으로 접힌 종이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여 쓴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그 글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nbsp;사랑하는 SY.<br>이틀 전부터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더니 결국 이곳에 갇히고 말았소. 이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서 계속 텐트 안에서 버티고 있소.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은 흐려져 가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씩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연료가 넉넉지 않아도 하루에 열 잔 넘게 차를 마셔야 하오. 탈수가 오면 모든 게 끝장이요. 날씨가 개이길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체력을 아끼고 있소. 고독이란 녀석은 말없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나는 그 무서운 적과 끝없이 싸우고 있소. 오늘 아침에도 스치듯 아주 잠깐, 이 산에서 내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나는 이 공포의 벽을 넘어설 것이오. 늘 그래왔듯, 그 어딘가에 길이 있을 거라 믿는다오.<br>언젠가 당신은 ‘왜 나였어요?’라고 물었소. 그땐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소. 이유 같은 건 없었소. 처음 만난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 설명이 불가한 힘, 방향성, 혹은 숙명 같은 것. 그저, 당신에게 가기 위한 오랜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전에도 말했듯, 당신을 만나 나는 새롭게 태어났소. 그 외엔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소. 사랑이란, 그 사람의 꿈을 막지 않는 거라 했던 당신의 그 말이 내겐 참으로 뼈아프게 남았소. 혹시 지금도 내가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소? 그 생각을 하면, 이 고도에서도 견디기 힘들다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br>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이 조그만 텐트 안이 환해진다오. 낮에도 밤에도 당신의 이름이 내 마음속을 조용히 맴돌고 있소.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늘 함께 있소.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는 하나였소. 지금도 당신은 내 곁에서, 함께 이 남벽을 오르고 있소. 약속한 대로, 이 편지를 정상에 남겨두려 하오. 만약, 올라갈 수 있다면. <br>삶이란 결국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오. 나는 오래전에 이 산을 선택했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소. 죽음을 마주하는 등반과, 영원을 꿈꾸는 사랑... 그 둘 모두 내게 주어진 거스를 수 없는 특별한 운명이었소. 당신을, 나의 유일한 사랑, 영원히 사랑하오. 이곳의 라리그라스 향기를 실어 보내오. 부디 내게 행운을 빌어주오. LOVE, 도준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2/pimg_731589167516118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587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4. 오래된 유산을 전하듯</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2965</link><pubDate>Fri, 19 Jun 2026 01: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296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늦은 오후, 베이스캠프 주변에 걸린 크고 작은 오색 깃발들이 차가운 그림자 속에 나부꼈다. 두꺼운 털모자를 눌러쓴 늙은 셰르파가 식당 앞에서, 마니차를 닮은 낡은 놋쇠 그릇을 천천히 두드렸다.<br>덩, 덩, 덩......<br>그 소리는 회색빛 고원과 오래된 사원의 저녁 종처럼, 허기와 고독에 잠긴 이들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날의 일과에 지친 대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늙은 셰르파는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 인사하며 그들의 무탈한 밤과 내일의 건승을 조용히 축원했다. 고산 지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베이스캠프의 한 끼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기도이자 의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br>희망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 대로 무사하기를......<br>문형근은 식당 텐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생애 첫 해외 원정에 오른 어린 대원, 청송이었다. 보송보송한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가 섞여 있었고, 목소리에는 밝으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br>-대선배님, 그것 저도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br>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형근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청송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거의 큰아버지뻘로 보였다.<br>-도준 선생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에요.<br>스물두세 살쯤 되었을까. 청송의 얼굴에는 아침 햇살 같은 순수함과 원시 자연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어른거렸다. 그 젊음의 눈부심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여뻐 보였다.<br>문형근은 오랫동안 전문 산악인들과 동행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벌써 아홉 해째, 그는 카트만두에 터를 잡고 여행자 숙소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었다. 히말라야에 반해 드나들다 보니 어느덧 고향처럼 정든 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산의 위험을 온몸으로 감당할 만큼 몸도 나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을 오르며 얻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 그의 한계를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br>이번에 바쁜 숙소 일을 잠시 접어둔 채 한국 원정대를 따라 베이스캠프까지 오른 것은, 아마도 젊은 시절, 오직 산을 사랑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격렬하고 벅찬 감각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말라야에 도전했던 수많은 선후배들처럼, 그도 한때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으로 산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이 머물다 간 옛 자리를 조용히 다음 세대에게 내어줄 때가 되었다.<br>-이거, 도준의 것 말이냐? 그래, 만져보아라.<br>문형근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를, 오래된 유산을 전하듯 조심스레 청송에게 건넸다. 히말라야를 꿈꾸는 이 젊은 산악인 역시 언젠가 저 설벽 어딘가를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전설 속 주인공이 된 도준의 유품은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깊고도 분명한 실체였다. 부재의 기록을 품은 작은 캡슐 하나가, 저 먼 신들의 영역을 향한 오래된 동경을 다시 불러왔다. 청송은 그 상실의 흔적을 두 손에 받쳐 든 채 한동안 말없이, 감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br>-그렇게 좋으냐?<br>문형근이 물었다.<br>-그럼요. 믿어지지 않아요.<br>청송의 대답은 맑고 또렷했다. 어릴 적부터 도준은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짤막한 기사에도 가슴이 뛰었고, ‘히말라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출렁였다. 청송이 산을 향한 열망을 키우고 대학 진학 후 본격적인 등반길에 나선 것도, 모두 그 존재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한때 무지개처럼 아득히 아른거리던 환영이, 이제는 손에 쥔 유품 하나로 명료하게 되살아나, 짙은 감동으로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다.<br>그때 문형근의 두 눈은 청송이라는 한 청년의 영혼을 관통해, 저 너머 오래전 푸른 느티나무 같았던 도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br>-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br>그날도 도준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nbsp;말보다 눈이 먼저 말을 거는 청년이었다.&nbsp;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nbsp;상실의 흔적은 강기슭 어딘가로 스며든다.&nbsp;언젠가 다시 피어오를 전설을 기다리며,&nbsp;그는 청송을 향해 가만히 미소 지었다.<br>‘이 젊은이도 언젠가 저 설산의 능선을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람처럼 가볍고, 무한히 자유롭기를.’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19/pimg_731589167515794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296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3. 도준의 실종과 서바이벌 키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1127</link><pubDate>Thu, 18 Jun 2026 01: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112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베이스캠프에는 한국에서 함께 떠나온 원정대가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 멀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br>-저기요! 저기 와요!<br>본부 텐트 앞에서 망을 보던 대원 하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몇몇 발 빠른 대원들이 달려 나가, 정상 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두 남자를 조심스레 맞아들였다. <br>원정대 대장 우태길은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휘청거렸다.&nbsp;탈수로 갈라진 입술과 까맣게 변해가는 손가락 마디는 그의 위태로운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nbsp;동상이 심한 오른손은 미세한 자극에도 극심한 통증을 불러왔다. 절단을 피하려면 혈관을 확장하는 응급 주사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성호 역시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강인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nbsp;험난한 하산을 무사히 마친 자부심과 동료들과 다시 만난 안도감이 그의 마음 깊숙이 차올랐다.<br>-이성호, 축하해. 우리 원정대 대표로 로체를 등정한 기분이 어때?-형님이 저 대신 올라가셨어야 했는데요.-무슨 소리야. 네가 잘 서포트해줬으니까, 대장도 마음 든든했을 거야.-고마워요. 그런데, 도준 형... 지난번 단독 등정, 정말 성공하신 거 같아요. 로체 남벽을, 그것도 산소통 없이 혼자서요.-그게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br>이성호는 품속에서 알루미늄 캡슐을 꺼냈다.<br>-정상에서 이 서바이벌 키트를 발견했어요. 준이 형 것 같아요. 2년 전에 여기서 실종된, 도준 선배님이요. <br><br>그 순간, 주위는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도준’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 앞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캠프 내에서 최연장자인 문형근이 앞으로 나와 은색 캡슐을 건네받았다.&nbsp;이번 정상 공격에 대한 우려와 책임감이 그의 얼굴에 짙게 어려 있었다.&nbsp;그는 오랜 세월 도준과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터라, 누구보다도 그의 고유한 습관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알루미늄 통에 감긴 파란 테이프를 확인한 순간, 문형근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nbsp;뚜껑 위 ‘DJ’라는 이니셜은 도준과의 기억을 되살리며 가슴 한복판을 스치듯 아릿한 슬픔을 남겼다.&nbsp;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밀려드는 감정의 물결을 다독였다.<br>-이거 준이 형 것 맞지요? <br>이성호가 재촉하듯 물었다.<br>-분명하군. 이건 도준 거야.<br>문형근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br>-파노라마 사진 찍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뭔가 발에 걸리는 거예요. 주변을 좀 파봤죠. 태길이 형이 한눈에 알아봤어요. 이거야말로 도준 선배님이 혼자 로체 남벽을 돌파한 증거물이잖아요.-너희가 그걸 찾으러 거기까지 간 거구나. 고맙구나, 정말.<br>문형근은 착잡한 심정으로 로체봉을 올려다보았다. 능선 위 험악한 삼각 직벽과 눈 덮인 흰 봉우리가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슬픔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아직도 저 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도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히말라야에 바쳐진 성스러운 청춘은 여전히 동면하듯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br>‘그동안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외롭고 안타까웠을까.’ <br>도준의 등반 실력과 재능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 의문을 제기했다. 2년 전 봄 이미 혼자 정상에 올랐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기에 세상을 등진 채 어딘가에서 홀로 살아 있을 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이라는 존재가 도준을 선택한 것처럼, 그는 태생부터가 거기에 속한 사람이었다.<br>그런 그의 고독한 성취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정확한 등정 기록도, 사진 증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의 로체 남벽 등정 성공을 단언할 수 없었다. 도준은 결국 그 산에서 실종되었고, 한때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사라졌다. 그의 단독 등정 여부는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고, 그를 사랑한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점차 바람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br>문형근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되뇌었다.<br>‘도준, 자네가 로체 남벽을 올라간 증거가 지금 내 손안에 있어.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룬 거야. 이제는 편히 눈을 감게나.’ <br>로체봉 정상에서 도준의 서바이벌 키트를 찾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이토록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어쩌면 신의 계시였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도준이 남긴 그 흔적은 우연한 기적이자, 설명할 수 없는 신비였다. <br>저 높은 설산을 바라보는 문형근의 눈가가 떨렸다.&nbsp;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자 지나온 시간의 아쉬운 잔상들이 떠올랐다.&nbsp;그는 손바닥으로 먹먹한 가슴께를 눌러 가며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리운 추억들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산에 대한 거창한 꿈을 방패막이 삼아 너무 오랫동안 비관적인 감상주의자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3/pimg_731589167516231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112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 두 남자의 하산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9281</link><pubDate>Wed, 17 Jun 2026 01: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9281</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nbsp;  저 높은 수직의 공간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갈망. 히말라야, 고도의 한계 끝자락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과 운명을 초월하는 고독한 투쟁이 필요하다. 어딘가로 오르는 길이 허락되었다면, 다시 내려가는 길 또한 존재할 것이다.<br>두 남자의 하산길은 오름의 여정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험난한 구간을 피해 훨씬 먼 길을 우회해야 했다. 얼음빛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그들은 하늘 가까운 빙벽을 마주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쉬지 않고 이어진 가파른 하강 속에서, 어디까지 내려온 걸까. 길이 조금씩 수월해지자 등반의 긴장감은 풀리고, 몸속 깊이 스며든 피로가 젖은 눈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날씨는 다행히 맑고 하늘도 푸르렀지만, 매섭게 휘몰아치는 냉기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br>우태길은 오른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얼어붙은 손가락은 신경을 찌르는 고통을 안겼다. 산소통의 무게를 잊으려 그는 이를 악물고 온몸을 밀어붙였다. 이성호는 선배의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불안은 끝없이 밀려왔다. 베이스캠프까지 이어진 길은 심신을 소진시키는 마지막 시련이자, 생과 사의 경계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계속되는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였다.<br>다음날 새벽, 그들은 캠프2를 거쳐 아이스폴을 통과했다. 해발 7,200미터.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이 지점까지 내려왔지만, 두 사람의 다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체력 고갈과 산소 부족은 하산길의 눈밭을 더욱 미끄럽고 위태롭게 만들었다.<br>우태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소통 밸브를 돌려 공급량을 높였다.<br>-조금만 더 견디자. 조금만.<br>그의 숨결은 거칠게 이어졌다.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성호의 발걸음도 점점 느려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기울어지면서 서너 번 휘청거렸다. 그래도 젊은 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 존경하는 선배를 돕고자 한 걸음씩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겨우 움직였다.<br>7,000미터 고지를 지날 때, 그들은 또 한 차례 지옥 같은 구간에 접어들었다. 하산의 피로가 묵직한 돌덩이처럼 온몸을 짓눌렀다. 하체의 힘이 거의 빠져나간 상태에서 눈 덮인 바위와 미끄러운 경사면을 넘는 매 순간이 공포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성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발을 디딜 때마다 균형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더욱 낮췄다. 그의 눈에는 생존에 대한 간절한 의지와 삶에 대한 뜨거운 애착이 서렸고,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우태길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br>이틀 후, 우태길은 탈수와 동상으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한 손으로 자일을 붙잡은 채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 끝내 주저앉았다. 이성호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어깨를 힘껏 부축했다. 바로 그때, 아래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베이스캠프의 깃발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br>-선배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버텨요.-그래. 그렇구나.<br>두 사람의 눈빛에는 마침내 끝이 보인다는 안도감이 번져갔다. 그들은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쥐어짜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2/pimg_731589167516119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928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