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김미진의 오후 3시 (김미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소설가이자 화가 김미진의 오후 3시. 소설과 그림, 삶의 기록이 함께 머무는 공간입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07 Jul 2026 09:18:03 +0900</lastBuildDate><image><title>김미진</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15891677826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김미진</description></image><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7. 관장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7947</link><pubDate>Tue, 07 Jul 2026 0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794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그림을 끝까지 지켜낸 알바생은 신음을 삼킨 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서윤도 화폭이 기우는 쪽으로 휘청였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림 양 끝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br>-괜찮아?<br>서윤이 묻자, 알바생이 ‘괜찮아요’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br>그때, 등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br>-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br>리온 갤러리의 대표, 최희숙 관장이었다. 하필 그 순간, 전시장을 지나던 참이었다.<br>-미친다 정말. 지금 이 작품이 얼마짜린지 알아?<br>쓰러진 사다리와 긴장한 직원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곧바로 서윤이 바치고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윤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관장은 손을 들어 그 말을 잘랐다.<br>-이 작품 훼손되면 누가 책임질 건데? 너야?<br>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이 절뚝이며 다가왔다.<br>-죄송합니다. 사다리가 갑자기 흔들려서…-많이 다쳤어요?<br>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알바생은 어깨를 으쓱하다가 어정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최 관장의 관심은 오로지 그림 상태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안경 너머 시선은 차가웠고, 말투는 그보다 더 냉랭했다.<br>-이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군. 쯧쯧, 칠칠맞지 못하게… 앞으로는 좀 더 조심들 하시지, 응?<br>직원들은 숨을 죽인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br>-서윤 씨, 잠깐 내 사무실로 올라와.<br>최 관장은 마지막 말만 툭 던지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알바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그림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훨씬 묵직하게 느껴졌다.  &nbsp;  1968년에 처음 문을 연 리온 갤러리는 인사동 거리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선도하며, 역사 깊은 화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정창섭, 최욱경&nbsp;같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뿐 아니라, 가끔은 샤갈, 마티스, 클림트, 라울 뒤피, 앤디 워홀 같은 외국 거장들의 작품도 특별 전시되었다. 또한, 장래성 있는 젊은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 제작과 프로모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br>관장실은 리온 갤러리의 지난 세월을 집대성한 기록과 자료로 가득한, 말하자면 작은 보물창고였다. 리온의 실질적 오너이자 관장인 최희숙은 60대 후반의 여성으로, 한국 화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출발은 지금은 철거된 소공동 반도호텔 지하 갤러리의 카운터였다. 막 여고를 졸업한 풋풋한 나이에 그곳에서 맺은 화가들과의 인연은, 시간이 흐르며 한국 화랑계를 대표하는 화상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br>3층 복도 끝, 리온 갤러리 관장실에 들어서면, 40평 남짓한 공간에 오래된 자료와 화집, 엽서, 도록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최희숙 관장은 데스크에 앉아 서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번뜩이는 표정에 서윤은 순간,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br>-작품 배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왜 그 작품을 이제야 옮기는 거지?<br>그녀는 안경테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br>-최 회장님 사모님께서 그 작품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겠다고 하셔서요.<br>서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br>-회장 사모님까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아,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우리가 정당하게 빌린 거잖아.-물론이죠. 그런데, 이번 전시회를 위한 협찬이라서…-답답할 노릇이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네? 그게 무슨…-‘공작 도시’ 시리즈는 함께 묶어서 전시해야, 그 후광을 살릴 수 있지. 안 그래?-네, 당연히… 이번 회고전 도록에도 차례대로 함께 실려 있다고 말씀드렸는데…-그 작품은 ‘공작 도시’ 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야.-일반에게 공개되는 것도 거의 처음이죠.-그런 작품을 뚝 떼서 따로 전시한다고? 맨 앞에만 전시하면 장땡인가?-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워낙에 고집이…-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그 작품은 원래 자리로 돌려놓도록 해.-아, 네에… 알겠습니다.<br>그녀는 옛 스승의 전시회를 끝까지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깨가 무거웠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관장이 알아서 하겠다는 말에, 서윤은 결국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7/pimg_63919002920962844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794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6. 공작 도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6198</link><pubDate>Mon, 06 Jul 2026 06: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619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월요일 오후, 인사동의 리온 갤러리는 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 불리던 손문기 화백의 회고전으로, 오프닝 행사는 이틀 뒤인 수요일 정오에 열릴 예정이었다. 내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관일이라서 오늘 안으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br>-부딪치지 않게 조심해.-네, 걱정하지 마세요.<br>서윤은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커다란 캔버스를 옮기고 있었다. 나무 액자까지 씌워진 100호짜리 그림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 수 있을 만큼 묵직했다. 다른 방해물들을 피해 가며, 두 사람은 그림 표면이 가능한 한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이동했다.&nbsp;그때 최승주 실장이 2층 사무실로 올라가려다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br>-나 선생. 전시 화보와 도록은 어떻게 된 거야?-수요일 아침에 인쇄소에서 직접 가져오기로 했어요.-초대장 발송은?-지난주에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그런데 오늘 중에 이걸 다 끝낼 수 있겠어?<br>그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며 던진 말이었다. 아직 설치를 마치지 못한 작품들이 벽을 따라 여럿 남아 있었다.<br>-거의 다 됐어요. 이제 작품에 레이블만 붙이면 됩니다.<br>서윤이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br>-나 선생, 분류 번호, 사이즈, 사용된 재료, 하나하나 꼼꼼히 잘 점검해. 저번처럼 뒤섞이는 일 없도록 조심하고. 다들 아셨죠?<br>최 실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자,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그는 관장 최희숙의 남동생이자, 갤러리 운영 전반에 막강한 권한을 쥔 인물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공기가 싸늘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번져갔다.&nbsp;리온 갤러리에 5년 넘게 몸담아온 서윤조차도 최 실장 앞에서는 업무에 필요한 말 외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nbsp;이곳에서 오래 일한다는 건, 능력보다도 침묵과 인내를 먼저 배웠다는 뜻이었다.<br>서윤은 리온 갤러리의 큐레이터였다. 전시 기획과 작가 섭외, 작품 리스트 정리, 도록 제작과 홍보 등 갤러리 실무의 중심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전시란 곧 균형의 예술이라고. 주제의 통일성과 시선의 흐름, 여백의 배치와 조명 각도 하나하나가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야 비로소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 조율은 캔버스 너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동료들 사이의 공기, 말의 온도, 침묵의 간격까지. 서윤은 전시를 준비하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가다듬고자 했다.<br>최 실장이 자리를 뜨자, 전시실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br>-다들 조금만 더 힘내요. 오늘 오버타임을 해도, 내일은 푹 쉴 수 있잖아요.<br>서윤이 ‘내일’이라는 단어에 살짝 방점을 찍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직원들을 둘러보았다.<br>-내일? 아, 내일!<br>직원 하나가 긴 숨을 내쉬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br>-자, 다시 힘 좀 써봐요.<br>서윤의 말에 알바생이 다시 캔버스를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액자가 휠 듯 출렁이며 캔버스 표면이 크게 흔들렸다.<br>-아아, 맙소사! 작품은 아기 다루듯 천천히.-아, 죄송합니다.<br>알바생이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했다.<br>이 전시는 서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손문기 화백에게서 직접 그림 지도를 받으며 미술의 기초를 다졌다. 방화동 공항시장 근처에 있던 손 화실은 스승의 거처이자 작업실이었고, 입시생과 취미생이 함께 모여 그림을 익히던 공간이기도 했다.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늘 가족 같은 친밀감이 흘렀다.<br>선생은 늘 제자들에게 따뜻하고 자상했다. 작고 구부정한 몸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묵직한 에너지가 배어 나왔다. 깊고 맑은 눈매와 걸걸한 숨소리, 말투와 웃음, 드로잉 도구를 다루던 손끝의 습관과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던 손놀림까지, 모든 것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선생은 가끔 화실 식구들과 야외 스케치를 다녀오곤 했다. 김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가져간 재료로 소박한 한 끼를 나누던 날들. 그가 남긴 그림일기와 예술과 삶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서윤을 만들어주었다. <br>리온 갤러리는 인사동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화랑이었다. 이곳에서의 전시는 곧 한국 미술계 한가운데에 작가의 이름을 새기는 일이기도 했다. 손 화백의 존재감은 이제 분명한 보폭으로 한국 화단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미술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미 세상을 떠난 스승의 회고전을 직접 준비하고 있는 지금, 서윤에게 이번 전시는 끝까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자 의무였다.<br>-그렇지, 그렇지. 조금만 더 왼쪽으로…-넵!<br>알바생의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점심 이후 그는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하고 있는 그를 보며, 서윤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br>지금 옮기고 있는 작품은 손 화백의 1980년대 대표작, ‘공작 도시’ 연작 중 하나였다. 마티에르의 질감을 밀도 높게 쌓아 올린 회색 화면 속엔, 무너진 철근과 도시 구조물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뒤엉켜 있었다. <br>서울을 배경으로 한 도시 풍경화에는 거대한 기계 도시의 혼란과 욕망이 거칠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하철 2호선 공사로 뒤엉켰던 도심, 해머 드릴의 쇳소리. 데모 진압대가 쏜 최루탄 가스와 시위대의 함성,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자동차들, 무질서하게 파편화된 거리의 모습. 그 속에 잠복한 디스토피아적 환영과 자본주의의 그늘을 손 화백은 누구보다 일찍, 누구보다 날카롭게 포착해 냈다.<br>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서윤은 여전히 회색 지대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선생의 그림 앞에서, 그 시대를 통과해 온 자신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알바생과 ‘공작 도시’를 들고 중앙 갤러리 입구로 향하던 그때, 사다리가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쏠리는 모습이 서윤의 시야에 들어왔다.<br>-앗, 조심해!<br>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다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다리가 쓰러지면서 이동 중이던 '공작 도시'를 그대로 덮칠 기세였다.그 순간, 알바생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등으로 사다리를 밀쳐내며, 한쪽 팔로는 그림을 감쌌다. 간발의 차로 더 큰 충격을 막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발등으로 그림 아래를 받쳐냈기 때문이었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6/pimg_63918915947507125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619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5. 혼자 살아남은 아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2793</link><pubDate>Sat, 04 Jul 2026 02: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279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도준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오대산 매표소 앞에 세워둔 4륜 구동 랜드로버로 돌아왔다. 십여 년 전에 한국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영사가 귀국하며 남기고 간 차였다. 겉보기엔 제법 낡고, 세월의 흔적도 역력했지만 달리는 데엔 아직 큰 문제가 없었다. 필요할 때마다 도준이 직접 손을 대어 엔진을 만지고 낡은 부품을 갈아 끼워온 덕이었다. 그렇다. 그는 그런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었다. 그의 특별한 재주 중 하나는, 뭐든지 잘 뜯어고친다는 점이었다.  &nbsp;  손재주는 어려서부터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속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한번 분해한 것은 기어이 다시 조립해 내는 묘한 집중력과 끈기를 보이곤 했다.물론 그 실험이 매번 성공한 건 아니다. 덕분에 집 안의 라디오며 시계가 수난을 겪는 일도 잦았다.<br>부엌 창가에 놓인 라디오가 이유 없이 먹통이 되기라도 하면, 그는 어머니의 꾸중을 피해 달아나거나 동네 전파사의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양팔에 토시를 낀 수리공 아저씨가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작은 부품을 갈아 끼우고 납땜질을 하는 동안, 어린 도준은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했다.<br>외아들이었던 도준은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자랐다. 호기심 많고 늘 뛰어다니기 바쁜 아이였지만, 두 분은 언제나 곁에서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다정했던 나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직 부모의 품이 간절하던 어린 시절, 도준은 양친을 잃고 덩그러니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br>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2월, 열세 살 도준은 잠시 강원도 고모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 장사를 하던 양친은 구정 대목 탓인지 간간이 전화만 할 뿐 좀처럼 데리러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도준은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br>-여기 너무 심심해. 빨리 좀 데리러 와. 안 그러면 나 혼자 서울 갈 거야.<br>어린 아들이 떼를 쓰듯 투정을 부리자, 부모는 그날 가게 문을 닫고 밤길을 달려 마침내 고모 집에 도착했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도준은 망설임 없이 짐가방을 챙겨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들 일가족이 탄 소형 세단은 비포장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밤의 정적을 깨웠다.<br>-준아, 편하게 눈 좀 감고 자렴.<br>엄마의 잔잔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를 포근히 감돌았다. 도준은 두 분의 웃음 섞인 대화를 들으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br>강원도의 구불거리는 산길, 새벽 한 시 무렵.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결에 요란한 클랙슨이 들린 것도 같았다. 아버지가 몰던 세단은 마주 오던 트럭을 피하려다 미끄러졌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 차가운 계곡 아래로 추락했다.<br>어두운 혼돈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전복된 상태였다. 앞좌석에 탄 부모님은 피투성이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도준은 거꾸로 매달린 채, 차 안에서 필사적으로 ‘엄마’ ‘아빠’를 부르며 몸부림쳤다.<br>처음엔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지만,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그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고, 그 끔찍한 순간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 멈춰 서 있었다. 죽음은 너무도 잔혹한 얼굴로 다가왔고, 그날의 공포는 어린 소년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졌다.<br>119 구조대가 도착한 건, 여명의 빛이 산자락을 타고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br>-다 제 잘못이에요. 데리러 오라고 떼만 쓰지 않았더라면…<br>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br>그의 일가친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까이 왕래하는 혈육이라곤 고모네 일가족이 전부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모마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도준은 고모부를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아갔다. 고모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지만, 고종사촌들과는 나이 차이가 커 함께 어울릴 일이 거의 없었다. 도준은 일찍이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무게에 서서히 익숙해지며 자신만의 삶을 배워나갔다.<br>부모님이 남긴 얼마간의 재산 덕분에 당장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대학을 마칠 무렵엔 은행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반과 등산 장비에 가진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결과였다.<br>부모님이 여전히 살아계셨다면, 매일 산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들을 두고 무엇이라 했을까. 어머니라면 끊임없이 잔소리를 쏟아냈을 테고, 아버지는 중간에서 방패막이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외아들에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들이 아닌가.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움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며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br>오대산 등산로 입구에는 산행을 준비하는 등산객 서너 명이 모여 있었다. 매표소를 온종일 지키는 나이 든 직원이 도준을 보자 창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br>-오늘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는 거요?<br> -네, 그러믄요.<br>도준은 뒤를 돌아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br>-날씨도 추운데 기운이 펄펄 솟는구려. 지극정성일세. 대체 무슨 일 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날마다 산을 뛰어다니는 거요?<br> -운동 삼아 그러는 거죠. 그럼, 또 뵙겠습니다.-조심해서 가요.  &nbsp;  매표소 직원은 손을 흔들고는 다시 창구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nbsp;  도준은 랜드로버 운전석에 올라 엔진이 예열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차창 너머 보이는 나무들의 헐벗은 가지 사이로 촉촉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머지않아 연한 초록 새싹이 돋아나고, 풍성한 녹음이 능선을 따라 번져갈 것이다. 그는 땀이 밴 목덜미를 수건으로 한 번 훑어낸 뒤, 횡계에 있는 고모부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4/pimg_63918729143274580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279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4. 나는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0988</link><pubDate>Fri, 03 Jul 2026 01: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098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마침내 오대산 정상에 선 도준은,&nbsp;겹겹이 이어진 능선들을 바라보았다.&nbsp;초봄의 골짜기마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nbsp;그 위로 맑고 싱그러운 공기가 가득 퍼져 나갔다.&nbsp;주변은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nbsp;자연이 드리운 정적 속에서, 그는 잠시 또 다른 세계의 입구에 서 있는 듯한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배낭을 내려놓고 몸을 풀며,&nbsp;스포츠 음료를 한 모금씩 음미하듯 마셨다.&nbsp;차가운 이온수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nbsp;전신의 세포가 마치 스펀지처럼 그것을 빨아들였다.<br>오늘따라 유독 민혁과의 추억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함께 자주 오대산을 오르던 시절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민혁의 생일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운 옛 친구는 로체 남벽이라는 인생의 미결 과제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겨진 자가 친구가 가졌던 그 꿈의 무게까지 이어받아야 한다.<br>도준은 정상 정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른 순간마저도 등반에 있어 하나의 과정이라 여겼다. 어떤 루트를 택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오르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는 등반 중 마주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분석하고, 거기서 최선의 해답을 도출하는 데 탁월했다. 특히 로체 남벽은 오랜 시간 그의 연구 목록에서 단연 최우선이었다.<br>도준은 이번에도 로체 남벽 8,350미터까지 최초로 오른 예르지 쿠쿠치카와 로베르트 파블로프스키의 기술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가볍고 빠른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전통적 히말라얀 방식과 달리, 등반 루트와 속도, 시기까지 모든 판단을 스스로 내려야 하는 고독한 방식이다. 그만큼 더 큰 결단력과 강한 내면의 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경량 장비 하나로 신속하게 고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은 순수한 등반의 성취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고소에서의 급격한 기후 변화에도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동료의 도움도, 세르파도, 고정 로프도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믿고 나아가야 하기에 위험도는 극단적으로 높고, 체력 소모 또한 혹독하다.<br>로체 남벽은 베이스캠프를 떠나는 순간부터 3,300미터에 이르는 가파른 설벽이 기다린다.&nbsp;발 디딜 틈조차 없어, 앞발로 포인트를 찍으며 첫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수직 암벽에서는 수시로 눈사태와 스노우 샤워를 견뎌야 하며, 몸을 한 치씩 끌어올릴 때마다&nbsp;폐를 짓누르는 공포와 맞서야 한다.&nbsp;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하지만 등반은 정상에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산을 끝까지 내려오기 위해서는 체력 안배가 생사의 갈림길이 되며, 올라갈 때 60을 쓰고, 내려올 때 40을 남겨두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도준은 그 모든 과정을,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은 완전한 자유 등반으로 오르겠다고 결심했다.<br>눈사태와 암석 낙하를 피하려면 밤과 이른 새벽, 얼어붙은 눈을 딛고 오르는 것이 유리했다. 낮 동안 폭포처럼 무너지는 눈사태를 피해 충분히 휴식하고, 한밤중 상단부를 공략해 정상을 찍는 전략이었다. 단시간 내 홀로 정상에 닿고 돌아오기 위해선 폭발적 근력과 순발력, 초인적 집중과 의지, 무릎 꿇지 않는 투지와 끈질긴 정신력이 필요했다. 로체 남벽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벽이자, 대자연의 너그러움 없이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 길은 어떤 이에게도 가볍게 열리지 않았다.<br>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nbsp;서른다섯,&nbsp;그의 나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nbsp;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nbsp;공기 희박한 허공에 매달려 직벽과 맞서 싸우며 끝까지 버텨내려면 단 한 번의 실수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도준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br>두려움은 어쩌면 신이 마지막까지 인간에게 남겨준 생존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맞서온 감정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게와 깊이가 달랐다. 이건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침묵의 경고. 정말 이 벼랑 끝에 다시 매달리겠다는 건가. 나는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스스로를 죽음에 내맡기려 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내가 하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br>-아, 아니야. <br>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잡념을 털어내자. 민혁의 이름조차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로체뿐. 저 위에서 나를 위협하는 것은 육체의 한계가 아니라, 마음 깊숙이 자리한 불안이다. 그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나는 꺾이지 않으리라. 이미 올라가기로 결심한 이상 그저 묵묵히 오를 뿐이다. 말도, 후회도, 돌아볼 이유도 없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의지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는 투지가 아닌,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냉정한 결단이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6/pimg_63918903469760777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7098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3.눈보라에 묻혀버린 마지막 절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9275</link><pubDate>Thu, 02 Jul 2026 06: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927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히말라야 원시의 설산에서, 서로를 향한 믿음보다 강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도준과 민혁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큰 위기가 닥쳐왔다. 고도계의 바늘은 7,80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상 능선 너머로 불길한 회색 구름이 몰려들었고, 거세진 바람은 등줄기를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눈보라는 마침내 폭주하듯, 분노에 찬 짐승처럼 포효하며 사면을 휘몰아쳤다.<br><br>-날씨도 안 좋은데, 잠깐 쉬었다 갈까?<br>-그래. 바람이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자.<br><br>그것은 일 보 후퇴, 진정한 의미의 '전진을 위한 후퇴'였다. 로체 남벽 초등에 대한 집념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이 악마의 벽을 넘겠다는 결심뿐이었다. 두 친구는 깎아지른 암능 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발판이 될 만한 자리를 찾아 바닥을 다진 뒤, 눈이 얼어 단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그 위에 작은 텐트를 세웠다. <br><br>둘은 그 은신처에서 험한 날씨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풍은 쓰나미처럼 밀려와 산허리를 할퀴었고, 계곡 어딘가에선 쪼개지듯 묵직한 천둥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눈 폭풍은 사방에서 격노한 야수처럼 울부짖었고, 거센 눈발은 캠프지를 요란한 빗소리처럼 두드려댔다. 텐트는 금방이라도 찢겨 날아갈 듯 거칠게 펄럭였으며, 유닛마다 연결된 자일은 텐트 기둥을 따라 격렬하게 흔들렸다. 침낭 속에서 체온을 나누며 몸을 웅크린 두 사람은, 차갑고 딱딱한 빵을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고독과 결연함이 응고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br><br>-정상이 코앞인데, 늙은 마녀가 심통을 부리네.<br>-우리가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산이 우릴 간보는 것 같지 않아?<br><br>유령의 집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추위에 떨던 민혁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섬찟했다. 폭풍 속에서 텐트가 숨을 고르듯 요동쳤고, 들이쉬는 숨마다 날 선 공기가 목구멍을 긁으며 폐 속 깊숙이 얼음처럼 박혔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한 악천후라 해도, 그들은 반드시 견뎌내리라는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br><br>-포기할 수 없어. 우리는 끝까지 버텨야 해.<br>-지금 뜨끈한 밀크티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어.<br>-브랜디 탄 에스프레소라면, 내 목숨이랑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br>-따뜻한 아랫목에서, 계란에 파 송송 썰어 넣고, 고춧가루 뿌린 라면 한 그릇 먹으며 야동 한 편만 볼 수 있다면, 다시는 이런 빌어먹을 산엔 오지 않겠어. 내 두 다리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br>-아냐, 나는 야동 대신 짜장면.<br>-어허! 아니지. 짬뽕이지.<br><br>노호하는 바람 속에서 두 친구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지만, 서로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견딜 수 있었다. 어둠과 추락의 위협, 차가운 죽음의 기척이 사방에서 밀려왔지만, 그들의 우정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서로를 따스하게 감쌌다.<br><br>산 능선은 이미 어두워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멀리 바룬체(7,152m)와 아마다블람(6,814m)의 정상만이 빨간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금세 주위가 침침해지더니, 어느새 새카맣게 파묻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가슴속 깊이 파고들며 숨을 옥죄었다.<br><br>-젠장, 대체 왜 이런 데 올라온 거지?<br>-우리 둘 다 돌았으니까.<br>-맛이 간 거지. 제대로.<br>-정신 똑바로 차려. 바람에 휩쓸리기 십상이야.<br>-여기서 날아가면, 뼈도 못 추릴걸.<br><br>둘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 같았다. 결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밤이었다.<br><br>일출 전의 몇 시간은 언제나처럼 지독히 춥고, 지루했다. 멀리 산봉우리 위로 어슴푸레 붉은 아침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며, 날씨가 조금씩 풀릴 조짐을 보였다. 살을 에는 바람도 점차 잠잠해졌다. 첫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어올 무렵, 그들은 다시 빙탑에 매달렸다. 얼음 표면은 단단히 얼어 있었고, 아이젠은 그 속에 깊숙이 박혔다. 오른손에는 아이스 픽켈, 왼손에는 아이스바일을 쥐고, 발톱으로 얼음을 찍으며 한 발씩 신중하게 올랐다.<br><br>프론트 포인팅으로 얼음벽에 매달린 채, 중간 확보물로 쓸 피톤을 얼음 속 깊숙이 박아가며, 숨결과 땀방울을 빙벽에 새기듯, 조심스레 전진했다. 발 아래 끝도 모를 협곡에서는 저승사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천 길 낭떠러지 밑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기다렸다. 한 발짝만 실패해도, 그곳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br><br>늑골 모양을 한 얼음층과 녹은 눈이 바위 표면을 살짝 덮은 베르글라 지대를 지나, 홈통처럼 생긴 로체 쿠로와르까지 꼬박 12시간을 올랐다. 마침내 정상 설원을 눈앞에 둔 순간, 그때부터 눈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골짜기 위에 끼어 있던 안개가 점차 번지며 하늘을 뒤덮었다.<br><br>로체봉은 죽음을 부르듯 몸을 뒤척였고,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사나운 돌풍에 휘말리며 숨을 쉬기조차 곤란할 정도였다. 더 이상 올라가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한순간, 자연의 위엄과 잔혹함이 얽히며, 생과 사의 경계가 흐릿해졌다.<br><br>-안 되겠다. 일단 후퇴하자.-젠장! 내가 앞장설게!  &nbsp;  민혁이 절규하듯 소리치며 먼저 몸을 돌렸다.&nbsp;시바 신은 끝내 그들을 거부한 채, 응징하듯 모든 희망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뼈저린 절망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던 그들은, 미친 듯이 아이스 픽켈을 찍으며 목숨을 건 하강을 시작했다. 거센 풍압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옷을 갈기갈기 찢을 듯했다. 발아래 눈은 붕괴하듯 미끄러져 내리고, 시야는 점점 더 뒤틀려갔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고, 내면 깊숙이 솟구치는 공포가 어둠의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br>시야 확보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제트기류가 휘몰아치는 절벽 위로,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낙석 하나가 도준과 민혁의 몸을 잇고 있던 자일에 날카로운 도끼날처럼 내리꽂혔다. 순간, 자일이 터져나가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내며 위로 튕겨 올랐다. 도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아이스 피켈을 얼음과 바위틈 깊숙이 쑤셔 박았다. 그러나 한발 앞서 내려가고 있던 민혁은 몸을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짐 무게를 줄이려던 선택이 결국 화근이었다.<br><br>-아아악!<br><br>민혁의 비명이 절벽을 타고 메아리치며 하늘로 흩어졌다. 시간은 블랙홀에 빨려드는 듯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채, 세상은 한순간 정적에 잠겼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와 함께, 생의 탯줄이 끊어지는 듯한 끔찍한 절망이 덮쳐왔다. 눈앞에서 민혁의 몸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조금 놀란 듯,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민혁의 모습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br><br>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 속으로, 그의 모습은 아스라이 흐릿한 그림자처럼 사라져 갔다.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사라져가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낭떠러지를 향해, 울부짖는 목소리가 한없이 번져갔다. 이제 남은 흔적이라곤, 하늘에서 날아드는 눈보라에 묻혀버린 마지막 절규뿐이었다. <br><br>요즘도 한밤중에 문득 눈을 뜨면, 민혁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로체봉 깊은 골짜기, 바위틈 어둠 속에서 여전히 그를 부르고 있을 친구의 얼굴이. 도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들의 등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br><br>-기다려라, 친구.<br><br>이제 민혁의 목숨값을 되갚아야 할 시간이다. 도준은 눈을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결의가 온몸을 뜨겁게 채웠다. 이번에는 반드시, 정상에 설 것이다. 한때 자일 파트너로서 나눴던 깊은 우정, 민혁의 죽음을 더는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2/pimg_63918570593841272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927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2. 사람들의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7353</link><pubDate>Wed, 01 Jul 2026 0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735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도준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깎아지른 오대산 절벽을 기어올랐다. 손바닥은 흡반처럼 바위에 착착 들러붙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가운 바위의 미세한 틈을 정확히 짚어냈다. 등에는 로체에 오를 때 짊어질 무게와 비슷한 배낭을 멘 채였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무게와 고도에서의 무게는 질적으로 달랐다. 표고차가 커질수록 중력의 압박은 천근만근으로 증폭되기 마련이었다.<br>앞으로의 트레이닝 동안 그는 배낭 무게를 조금씩 늘려갈 작정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 과정이 고통 속에서도 분명 성장의 발판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년 5월의 로체 남벽 등정을 준비하며, 그는 체력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무거운 장비와 모래주머니를 두른 채 산등선을 서너 시간씩 내달리는 건 기본이었다.<br>한 손 턱걸이, 팔굽혀펴기, 거꾸로 매달리기, 들어올리기, 수영 같은 훈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히말라야에서 혼자 버티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8천 미터급 고지에서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모든 근육을 더욱 정밀하게 단련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br>몸이 고달플수록 마음은 더욱 굳건해졌고, 정신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투명해졌다. 인간의 한계를 매일 갱신하는 훈련은 더 이상 고행이 아닌, 오히려 해방의 순간이 되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로체 남벽을 향해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도준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 운명은 필연처럼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존재를 이끌어갔다.<br>로체의 크레바스 같은 빙벽 낭떠러지에서 친구 민혁을 잃은 후, 벌써 8년이 흘렀다. 그날의 비명처럼 터져나간 자일, 그리고 눈보라에 파묻힌 계곡의 침묵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 풀리지 않은 한으로 남았다. 영영 아물지 않을 그 상처에는 상실의 고통이 피처럼 고여 있었고, 도준은 자신이 민혁 대신 살고 있다는 죄의식을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br>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었다. <br>‘그때 내가 먼저 내려갔더라면...’ <br>한순간의 우연이 결국 생과 사의 향방을 엇갈리게 했다.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그 찰나의 순간. 이제 남은 건, 민혁 대신 숨을 쉬고 있다는 살아남은 자의 뼈아픈 자각과 아직 말라붙지 않은 상흔뿐이었다.<br>도준과 민혁은 고등학교 시절, 우이동에서 출발해 북한산 백운대 능선을 오르던 첫 동계 등반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둘은 말없이 통하는 동질감을 느꼈고,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깊은 교감이 형성되었다. 산을 향한 순수한 열정은 곧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졌고, 청소년기의 그들의 관계는 바위처럼 단단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br>민혁은 작은 체구에서 비롯된 놀라운 끈기와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산을 대하는 감각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듯 정확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길을 여는 대담함이 있었다. 다만, 긴 호흡으로 먼 걸음을 내딛는 일에는 다소 서툴렀다. 도준과 민혁은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지녔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며 상호 보완적인 자일 파트너가 되었다. 험난한 고비마다 함께 견뎌낸 세월은 그들의 동지애를 더욱 굳게 다져주었다.  &nbsp;  대학교 1학년, 여름비가 조용히 내리던 오후였다. 도준과 민혁은 모리스 에르조그의 『최초의 8000미터』를 처음 펼쳐 들었다. 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인류 최초로 안나푸르나에 오른 기록이 담긴 책이었다.<br>원정대의 리더였던 에르조그는, 손가락과 발가락 대부분을 잃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정상에서 느낀 황홀한 기쁨을 생생히 전했다.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인간 정신의 불꽃이, 페이지마다 깊게 새겨져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산악인들의 성서처럼 전해져 온 이 책의 첫머리에는 그의 목소리처럼 짧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한 문장이 있었다.  &nbsp;  There are other Annapurnas in the lives of men.<br>사람들의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  &nbsp;  책장을 넘기며, 도준과 민혁은 오직 무산소 등반만이 주는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구상에는 모두 14개의 8000미터급 봉우리가 있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은 로체 남벽이었다. 수많은 산악인의 우상이던 라인홀트 메스너조차 끝내 오르지 못한, 악명 높은 벽. 성난 짐승처럼 거칠고 잔혹한 그곳이, 오히려 더욱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다.<br>그로부터 9년 후인 1989년, 폴란드의 전설적 등반가 예르지 쿠쿠치카가 로체 남벽 8,350미터 지점에서 추락해 생을 마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 산악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아무도 넘지 못한 벽이 있다는 사실이 모두의 흥미를 자극했다. 도준과 민혁 역시 이 사건에 깊은 자극을 받은 터라, 마침내 로체 남벽을 향한 현실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br>-우리도 가자. 언제까지 꿈만 꿀 거야?-메스너는 중간에 포기했고, 쿠쿠치카는 꼭대기에서 밧줄이 끊어졌지. 우리가 할 수 있을까?-불가능하진 않아. 둘 다 알파인 스타일로 도전했잖아. 관건은 속도야. 최대한 빨리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쿠쿠치카가 8,350미터까지 갈 수 있었던 건,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그들은 실패했지만, 우린 다를지도 몰라.-우리가 해낸다면 세계 최초야. 메스너도 우리 이름 보면 놀라겠지?-신문에 우리 얼굴 나오면, 메스너도 씁쓸하겠지. 근데 어쩌겠어. 우리가 미래인 걸.<br>그해 가을, 마침내 네팔 땅을 밟은 두 청년의 눈빛은 결연한 의지로 불타올랐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한 결단의 순간, 이제는 그 무엇도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운명처럼 다가온 도전 앞에서, 그들의 결심은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굳건했다.<br>루클라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뒤, 남체와 탕보체, 추쿵을 지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그들은 중앙 루트를 개척하며 8,511미터 정상까지 단숨에 오르겠다는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로체샬을 7,100미터까지 오르며 고소 적응을 마친 뒤, 라마제를 올린 다음 드디어 본격적인 등반 길에 나섰다. 6,400미터, 아슬아슬한 마의 구간을 간신히 넘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위협적으로 치솟은 급사면을 따라 쉼 없이 올라갔다. 하늘은 내내 맑았고, 이대로라면 곧 정상을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었다.<br>-조금만 더 힘내.-네 걱정이나 해.<br>두 친구는 서로를 다그치듯 격려하며, 한 번 떨어지면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몸을 위로 밀어 올렸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1/pimg_63918542360776605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735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1.고독과 친숙한 인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3589</link><pubDate>Tue, 30 Jun 2026 0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358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nbsp;<br>작년 4월, K2 등정을 마치고 스카르두와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카트만두로 돌아온 도준은 곧장 네팔 관광청으로 향했다. 로체 남벽 등반 허가증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그곳, 친구 민혁이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곳. 가혹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남벽. 다시 그 벽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은 더 이상 한때의 목표가 아니라 필연적인 선택이었다.<br>K2에서도 그는 최소한의 장비만 지닌 채 알파인 스타일로 단독 등반을 감행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홀로 서는 것, 혹독한 고독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꿈꾸던 등반의 방식이었다. 그 길은 민혁과 함께 시작한 길이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둘은 알파인 스타일로 로체봉을 오르겠다는 꿈을 나누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민혁은 없다. 그저 그의 흔적이 남아 눈 덮인 산맥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을 뿐이다. <br>-민혁아. 이제 내가, 우리의 꿈을 이어갈 거야.<br>해발 8천 미터가 넘는 고지까지 산소마스크도 없이 홀로 버티겠다는 결심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번 도전은 더 이상 그저 한 번의 등반이 아니었다. 친구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 <br>혼자서 로체 남벽을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불러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6400미터 지점, 클라이머에게 최악의 난관으로 여겨지는 그곳. 가파른 설빙이 널브러져 있어 안전하게 비박할 곳조차 찾기 어려웠고, 자일에 몸을 의지한 채 절벽에 매달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방심해도 돌풍에 휘말리거나, 확보 지점이 무너지며 깊은 크레바스로 추락할 수 있었다.<br>-크레바스의 끝은 지구 반대편까지 뚫려 있다고 하더라.<br>언젠가 민혁이 농담처럼 남긴 말이 떠올랐다. 도준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왜 또다시 고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가. 무엇을 위한 증명인가. 나만의 고집일까, 아니면 치기 어린 아집일까.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것은 단 하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보고 싶은 열망뿐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br>매킨리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한 선배가 무심한 듯 충고했다.<br>-앞으로 길어야 몇 년이나 더 현역으로 뛰겠냐. 체력에도 한계가 있어. 산에서 죽을 생각 아니면, 이제 슬슬 먹고살 궁리 좀 해야지.<br>도준은 그 조언을 묵묵히 들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다짐뿐이었다. 신은 인간의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한계란 결국 인간 스스로가 그어놓은 선일 뿐이다. 그는 나이 들어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월과 함께 조금씩 닳아가는 것이 나이 아닌가.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무덤에 비석 하나 세우고 이름을 새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그런 부질없는 명예와 이기심에 더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br>잠시 머물다 떠나는 생의 종착역에서, 남이 정해준 꿈을 좇는 삶은 끝내고 싶었다.&nbsp;그는 이제 자신의 꿈을 향해 걸었다. 도준이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제법 알려진 등산가였지만, 삶의 본질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방랑자에 가까웠다. 1987년, 독일의 한 회사에서 제작한 특수 차량으로 3년에 걸쳐 세계를 일주했다. 적도에서 극지까지, 산간 오지마을에서 대도시까지 정해진 경로 없이 여행하며, 배터리 성능을 실험하면서 다양한 사진을 찍고 그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br>그 여정의 기록들은 한 시사 잡지에 연재되었고, 한동안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에도 실렸다. 그렇게 떠도는 동안 그는 깨달았다. 너무 멀리, 너무 길게 내다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멀리서 보면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 비로소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했다.<br>그렇게 바람처럼 떠돌며 어느새 서른다섯이 되었다. 여전히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는 여성들이 드물지 않았다. 강인하고 야성적인 외모와, 어딘가 여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우울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매력 같았다. 방탕한 생활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마음에 맞는 여성과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와도 오래 만나지는 못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자신이 추구하는 삶에 균열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과,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br>서른한 살 때, 그는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상대는 조용하고 성실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한동안 깊은 관계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정을 쌓았지만, 결국 결혼은 취소되었다. 험한 산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피한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고, 언제 그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 무게를 그녀에게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그 마음을 이해했고 두 사람은 담담히,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안고 헤어졌다.<br>산은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제약했지만, 동시에 기대 이상의 것을 안겨주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일본 북알프스를 처음 올랐을 때부터 산은 그의 또 다른 인생이 되었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산을 오르는 것은 남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산을 내려서며 다시 오를 결심을 하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삶처럼, 오르내림의 반복 그 자체가 그의 존재였다. 더 큰 의미나 목적은 필요하지 않았다.<br>살아오는 동안 늘 옳은 선택만 한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아도 크게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 몇 년 전, 에베레스트를 함께 오른 오스트리아 출신 등산가는 이렇게 말했다.<br>-일주일 내내 일하며 일정한 수입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산에서 영웅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보다 더 큰 극기와 용기를 요구하지요.<br>어쩌면 그 말은 자기 변명일지 모른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인내와 극기, 그리고 용기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위도나 고도와 무관하다. 높은 산에서든 지표면에서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br>하지만 도준에게 회색빛 일상은 고통이었다. 생계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본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고독 속에서 공포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다. 그렇다. 도준은 고독과 친숙한 인간이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30/pimg_63918380189351954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358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10. 악마의 벽에 운명을 걸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1332</link><pubDate>Mon, 29 Jun 2026 01: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1332</guid><description><![CDATA[글. 그림 김미진  &nbsp;  까마귀 한 마리가 멀리서 울었다. 리듬감 있게 내딛는 발소리가 산길 위로 퍼졌다. 발목을 감싼 얇은 덧신이 낙엽을 헤치며 바스락거렸고,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은 햇살 속으로 번지듯 사라졌다. 산속 깊은 계곡은 숨을 죽인 채 잠잠했다. 그 고요의 한가운데, 한 남자의 심장 박동이 울려 퍼졌다.<br>쿵-&nbsp;쿵-<br>봄기운이 천천히 산등성을 타고 오르던 그날 오후, 도준은 오대산 능선을 따라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쳤지만, 강인하게 다져진 그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피어올랐다. 꽤 오랜 시간, 그는 같은 호흡으로 보폭을 이어갔다. 두 발이 일정하게 땅을 내딛는 순간마다&nbsp;머릿속이 맑아지며 온갖 잡념이 사라졌다.<br>이런 의식의 공백은 그에게 익숙했다. 오직 달리는 일에만 몰두한 채, 세상의 시름에서 풀려난 무중력의 고요를 사랑했다. 등산로 끝자락을 지나자, 가파른 암벽길이 길게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화강암 절벽 앞에서도, 그의 몸짓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급경사의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지만, 익숙한 동작으로 거침없이 뛰어넘었다. 오대산의 거친 산길을 매일 달리며 체력을 단련해 온 그에게, 이 험준한 경사로조차 철저히 계산된 훈련 과정의 일부였다. <br>검은 바탕에 푸른 띠가 들어간 등산복, 얇은 폴리에스터 장갑, 길게 묶은 꽁지머리. 20킬로그램짜리 배낭에, 발목엔 모래주머니까지 찬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경사를 타고 올랐다. 두 발은 땅을 박차고, 호흡과 시선, 균형 감각이 정교하게 맞물렸다. 움직임은 빠르되 한 치의 무리도 없었다. 그는 야생의 본능과 생존의 가쁜 숨을 내쉬며, 자연의 심연 속을 달리는 한 줄기 맥박 같았다.<br>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등줄기를 스쳤다. 그것은 그의 몸을 식히는 동시에, 주변의 공기 흐름에 몸을 맡기게 했다. 도준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발걸음과 호흡만을 따라갔다. 나무와 돌, 떨어진 잎 하나까지도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감각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때로 그는 스스로를 시험하듯, 한층 더 가파른 바위를 올랐다. 손끝과 발끝에 집중을 모으고, 중력을 거슬러 몸을 밀어 올리는 순간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시선과 속삭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산, 그리고 한 줄기 길뿐이었다.<br>계곡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가 달리는 길 위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그가 남긴 발자국처럼 땅에 새겨졌다가 곧 사라졌다. 도준의 내면에도 비슷한 밀도의 그늘이 깊이 자리 잡았다. 지난 기억과 앞으로 맞이할 고통, 그리고 끝내 닿을 수밖에 없는 고요한 결말까지.<br>그는 속으로 단 한 가지를 되뇌었다.&nbsp;<br>‘달려라. 멈추지 마라.’&nbsp;<br>모든 판단과 감정이 그의 몸을 지배했지만, 달리는 행위 자체가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자연의 리듬 속에서 느낀 온도와 바람, 땅의 질감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증거였다.&nbsp;<br>도준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암벽과 계곡, 바람과 햇살, 그리고 심장 박동과 호흡이 하나로 맞물리며, 한 인간이 자연과 마주한 순간의 총체적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오대산은 그의 몸과 함께 숨 쉬고 있었고, 도준 자신도 그 흐름 속에서 삶의 맥박을 단단히 새기고 있었다.<br>해발 8,511미터.<br>로체.


<br>피의 계곡처럼 벌어진 기억 너머에, 깎아지를 듯한 쿠로와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100년간의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치열한 난코스로 여겨지는 로체 남벽을 완등한 이는 아직 없다. 오직 슬로베니아 출신의 저명한 산악인, 토모 체센만이 1990년 봄, 무산소 단독으로 초등정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br>그는 4월 22일 오후 5시에 출발해, 25일 오전 7시에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고 알려졌다. 단 62시간 만에 등정을 마쳤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발표는 곧 거센 의혹과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처음 그는 등반 중 촬영한 사진이 없다고 밝혔으나, 이후 프랑스 등산 전문지에 제출한 사진들로 다시 논란이 일었다.<br>그 자료들이 사실은 다른 등반가가 촬영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그의 이름은 신화의 정상에서 허위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경외의 정점에 서 있던 그는 한순간, 조롱과 의심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가 로체 정상에서 찍었다고 공개한 사진 속 풍경들조차, 실제 정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br>도준도 한때 그 악마의 벽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달라붙은 적이 있었다. 토모 체센의 등반 주장이 아직 논란에 휩싸이기 일 년 전인 1989년 10월, 그는 절친 민혁과 함께 메스너조차 21세기에나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던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단 5일 만에 8,200미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목숨을 거는 위기마다 서로의 눈빛 하나로 결정을 내렸고, 등반로는 마치 기적처럼 열렸다. 벼랑 끝에서 손을 내밀고, 눈사태 속에서도 로프 하나에 서로를 지탱하며 수많은 고비를 넘었다. <br>로체봉 정상에 거의 도달했던 그날,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하늘이 찢기듯 열리며 눈보라가 몰아쳤고, 모든 것이 눈앞에서 뒤엉키는 바람에 그들은 정상 직하의 설원 낭떠러지에서 아이스 피켈을 필사적으로 찍으며 온몸을 내던지듯 하산을 시작했다. 그때, 떨어지는 낙석에 그는 자신의 분신 같았던 친구 민혁을 잃었다. 민혁은 로체의 크레바스처럼 깊은 계곡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br>해발 8천 미터를 넘나드는 고봉 위에서 인간의 운명은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곳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과연 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로체 남벽을 오를 수 있는 것인가. 때때로 그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작은 가능성과 희망을 향해 좁은 보폭이나마 한발씩 내디뎠다. 시바 신이 미소를 지을지, 아니면 분노의 화살을 쏘아댈지,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9/pimg_63918292306763928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6133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 녹음기의 빨간 불빛은 깜빡이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7546</link><pubDate>Sat, 27 Jun 2026 00: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7546</guid><description><![CDATA[글. 그림 김미진<br>인호는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문과 설명되지 않는 거리감이 남아 있었다. 말투와 표정, 시선에 이르기까지, 어딘가 어긋난 감정의 온도 차가 그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다.<br>기자 생활 십수 년. 익명 뒤에 숨어 정보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 말보다 눈물이 먼저였던 고발자들,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마치 진실인 듯 내보였던 그들. 그런 이들을 상대해 온 세월은 인호에게 사람을 가려내는 직감을 남겼지만, 동시에 모든 이야기를 의심하게 만드는 나쁜 습관도 함께 남겼다.<br>그럼에도 그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떠올렸다. 도준과 SY 사건의 핵심에 놓인 두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단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인호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숨을 삼켰다. <br>‘전혀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군.’<br>그 순간,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앞에서 무엇인가가 막 실체를 드러내려는 듯했다.  &nbsp;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꺼낸 봉투 안에는 도준이 어떤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포즈와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깊이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br>사진 속 여인의 얼굴은 맑고 따뜻했다. 가늘게 실눈을 뜬 눈매와 수줍은 미소가 투명한 봄 햇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감쌌다. 단번에 시선을 압도하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는 얼굴이었다. 침묵이 고여 있는 사진의 안쪽에서, 그녀는 말없이도 분명한 어떤 것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br>-이 여자분이 그 SY라는 말씀이신가요?-네, 그래요.<br>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연, 이 사진들만으로 이 여자가 &lt;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gt;의 수취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호는 섣불리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지금은 그녀의 말을 먼저 들어보는 편이 나아 보였다.<br>-참, 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편지는 가지고 오셨죠?-아, 그게 좀...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을 주셔서. 사실은...-그럼, 안 가지고 나오셨다는 말씀인가요?<br>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짧고 단호하게 물었다. 인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원정대는 아직 네팔에 머물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무사히 하산한 뒤, 현재 카트만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서바이벌 키트와 함께 로체 정상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 도준과 각별한 사이였던 문형근이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한성일보에 실린 편지 전문은 그가 하산 중에 팩스로 전송한 것이었다.<br>-다음 주쯤, 한국원정대가 귀국할 예정입니다. 이 여자분이 SY라는 게 확실하다면, 그때 원본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 복사본밖에 없습니다.<br>인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슬며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도준이 남긴 편지를 복사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심과 당혹감이 어렴풋이 스쳤다.<br>-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솔직히 장담은 못 드립니다.-그럼, 제가 왜 여기에 나온 거죠?-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명예라뇨...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죠?-이분이 수취인이 맞는지, 그것부터 판명하는 게 우선입니다. 정말로 SY가 확실하다면,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잘 모르겠네요.-SY 본명은 뭔가요?-오늘은 날씨가 좋았어요.-네?-산에 높이 올라갔다가, 굴러떨어지기 딱 좋은 날이죠.-그게, 무슨...?-등산 안 좋아하세요? 아, 안 좋아하시는구나.-허허, 말씀을 돌리시는군요.-흠.-죄송합니다.-...-저기...-...-저는 그러니까...-저랑...&nbsp;친자매나 다름없는 친구예요.-네? 이분이... 이 여자분이요? <br>인호가 사진 속 여인을 가리켰다.<br>-SY...&nbsp;서윤이에요. 나, 서, 윤 <br>그녀는 다시 침묵했다.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br>인호는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어떤 말이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를 바라며,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의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의 녹음기는 조용히 작동하며&nbsp;빨간 불빛을 깜빡였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7/pimg_63918117863775925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754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 그 감정의 속살 같은 것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5464</link><pubDate>Thu, 25 Jun 2026 22: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546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저녁 6시경, 초판 신문이 배포되자 인호는 신문사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약속 장소를 남산 자락의 한 호텔 라운지로 정한 데에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산’이라는 공간이 무의식중에 도준의 이미지를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nbsp;  호텔로 들어서자 라운지 창가 쪽에서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자른 머리와 매끄럽게 재단된 회색빛 바지 정장 차림. 서른 초중반쯤으로 보였지만, 인상은 또래보다 한층 성숙했다. 단정하고 절제된 옷차림과 말간 피부, 침착한 눈빛이 묘하게 어우러져 특종 분야의 전문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양손을 단정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첫인상과는 다른 어딘가 애잔한 기색이 느껴졌다.<br>-제 이름은 제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br>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br>-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nbsp;  인호도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친 뒤, 신문사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녀는 커피를, 인호는 버번위스키를 주문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테이블 위로 잔잔한 재즈가 낮게 깔렸다.<br>그녀의 눈빛은 꿰뚫는 듯 예리하면서도 정제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쏘아보는 건 아니었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그 시선에는 묘한 압박이 있었다. 인호는 그 눈빛이 어쩐지 불편했으나, 말이 끊겨 어색해지는 순간을 피하려 주문한 게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이름 외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br>잠시 뒤, 웨이터가 커피와 위스키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인호는 숨을 고른 뒤,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br>-신문 기사에 나온 SY를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진 속 여자분이 정말 SY라는 걸 제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br>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두어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손끝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입가엔 말간 김이 스치듯 흩어졌다.<br>-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분 앞에서 꺼내는 게 쉽지 않네요. 하지만 제 친구를 위해서 용기를 내야겠죠. <br>그녀는 커피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소 엉뚱하면서도 도발적인 의문을 꺼내놓았다.<br>-저기...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이라는 게, 결국 뭘까요?-그게 무슨?<br>인호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쾌했다기보다, 질문 자체가 너무 느닷없고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에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 그 어색하고도 진부한 이름, ‘사랑’.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눠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인호는 등받이에 기댄 허리가 굳어오는 걸 느꼈다.&nbsp;  &nbsp;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nbsp;오히려 이 만남의 본질이 바로 그 단어 안에 있다는 듯,&nbsp;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인호를 똑바로 응시했다.&nbsp;그것은 친구&nbsp;SY를 위한 용기이자,&nbsp;어쩌면 그녀 자신을 향한 고백이기도 했다.<br>-그 감정의 속살 같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br>인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br>-지금 그게, 꼭 필요한 질문인가요? <br>그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다소 냉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br>-전 질문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질문은, 제가 해야죠.-네, 그렇죠. 물론이에요. <br>제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의 반응이 무례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현실이 때로는 남녀 사이의 애정보다 더 단단하고 귀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세상이 부여한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br>-도준 씨와 제 친구가 그랬어요. <br>제이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br>-그 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죠.<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5/pimg_63918023051967044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546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 그 편지의 수신인은 오직 한 사람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2227</link><pubDate>Wed, 24 Jun 2026 1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222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한국 등반사는 1950년대 북한산 개척 등반에서 시작되어, 1960~70년대 본격적인 산악 문화의 활성기를 거쳐 고산 원정으로 발전해 왔다. 1977년,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 8,000미터급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며 세계 산악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술적 등반과 스포츠 클라이밍이 확산되었고, 한국 등반의 기반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 흐름 속에서 도준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br>그는 히말라야 14좌 중 9개를 등정한 산악인이며, 최근 그의 서바이벌 키트가 로체봉 정상에서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로체 남벽을 단독 등정한 인물로 보도되었다. 비록 생환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누구도 넘지 못한 남벽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 소식은 세계 등반사에 중대한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도준의 업적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전설로 남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산에서 시작되어, 결국 산에서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br>지상에서 살다 간 한 인간의 인생은 장편 대하소설처럼 구구절절 기록될 수도, 혹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축약될 수도 있다. 인호는 그 삶을 글로 남겨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도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한성일보에 실릴 특집기사를 위해 여러 증언과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나 기록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번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우태길이었다. 그는 당시 네팔의 한 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귀국을 기다리던 그와 어렵사리 전화 연결이 닿은 뒤, 간략하나마 도준의 삶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br>도준과 함께 등반했던 동료들로부터도 단편적인 일화들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한 인물을 둘러싼 기록과 기억의 조각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준의 고모부 자택에서는 그의 유품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등반 일지 몇 권이 발견되었다. 사고 직후, 가장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던 고모부 식구들에게 전달된 것들이었다. <br>그러나 진짜 난관은 ‘SY’ 이니셜로만 남겨진 여인을 찾는 일이었다. 그녀는 도준의 기록 어디에도, 누구의 증언 속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일에 싸인 채, 철저히 지워진 이름, 실체 없는 존재로 남았다. 도준의 오랜 선배 문형근은 그때 카트만두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SY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당혹스러워했다.<br>-기자님, 이렇게 국제전화까지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도준 곁에 여자가 있었다니, 저로선 금시초문입니다.-전혀 여자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셨나요?-아직 젊고 생긴 것도 멀쩡한데, 여자가 아예 없었겠어요? 하지만 누구를 진지하게 사귀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그럼, 로체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요?-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훈에게는 산이 인생의 전부였죠. 주말이면 늘 산으로 사라지는 연습벌레였으니, 그런 녀석을 감당할 여자가 과연 있었을까 싶네요. 혹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다 해도, 오래가진 못했을 겁니다.-여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거죠?-허허.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생전에 연애를 했건, 아니건, 이제 와서 그걸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br>사람이 죽고 나면 흔적은 쉽게 잊히고, 미담은 지나치게 포장되기 마련이다. 문형근은 후배의 명성에 더는 손상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의 질문에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br>인호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편집국 안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번잡함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찌뿌듯하게 흐린 광화문 거리가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뒤엉킨 심경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말없이 그 회색 풍경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nbsp;  누구에게나,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세월의 풍화 속에 각인된, 인생의 또 다른 자화상처럼. 도준이 로체에서 실종되기 직전까지 마음속 깊이 품었던 ‘SY’,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지막이 조금은 따뜻했으리라 믿고 싶었다.<br>이후, 한성일보는 도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다각적인 면모를 취재한 결과, 걸출한 산악인 도준의 생애와 학창 시절, 성격과 등반 스타일, 가족과 지인들에게서 들은 일화들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SY’ 그 여인의 존재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았고, 기사는 조심스러운 여운을 남긴 채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은 그 퍼즐 하나가 인호의 마음 한편에 묘한 허기를 남겼다.<br>-김 기자, 빨리 기사 넘겨.-잠깐만요,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br>한성일보 편집국은 오늘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준 특집기사가 마지막으로 나간 지도 어느새 사흘째였다. 편집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인호는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았다.<br>수화기 너머,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가 자신이 ‘SY’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비슷한 제보 전화를 몇 차례 받아왔기에 인호는 담담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그녀는 도준과 SY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여러 장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br>-그 사진들을 제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물론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조건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그 서바이벌 키트에서 나온 편지요. 그걸 저에게 주세요.<br>인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br>-그 편지를 주시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그런데... 도준 씨와는 어떤 관계예요?-저는 그 편지에 나오는 여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 편지를, 제 주인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죠. <br>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 편지가 로체봉 정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 편지는 산에서 내려왔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진짜 주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br>-그 편지의 수신인은 바로 제 친구예요.<br>인호는 수화기를 든 채 상체를 길게 뻗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br>‘분명히 무언가 있군.’ <br>지금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준에 관한 진정한 완결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기사화할 수 없는 이야기라 해도, 도준과 SY에 얽힌 미스터리는 더 이상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까지 갖고 있다는 제보자를 직접 만나 본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었다.<br>-좋습니다. 우리 한번 만나 보죠.<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5/pimg_63917992518399622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222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 이중 어법이라, 흥미롭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0180</link><pubDate>Tue, 23 Jun 2026 03: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0180</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 <br>한성일보의 1면을 장식한 굵은 활자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2년 전 로체 남벽에서 사라진 도준이, 마침내 죽음 너머에서 말을 걸어온 순간이었다. 다른 일간지들도 앞다투어 이 사연을 특종으로 다뤘지만, 도준이 로체봉 정상에 남긴 편지의 전문을 공개한 곳은 한성일보뿐이었다.<br>그날, 문화부 기자 김인호는 출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신문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째 줄곧 입고 다니던 트렌치코트는 후줄근했고,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전날 밤, 한성 문예지 수상 작가인 시인 모 씨와 함께 신촌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신 터라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에 잠긴 듯 뿌옇게 흐려 있었다.<br>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긴 복도를 지나 편집국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들썩이는 실내 분위기에 그의 눈빛이 잠시 굳어졌다.<br>-왜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야....<br>편집국은 본사 건물 3층 전체를 통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천장 아래 허공에는 부서별 팻말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인호는 가급적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문화부에 있는 자신의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br>지각을 하루 걸러 한 번씩 밥 먹듯이 하는 부하 직원을 좋아할 상관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직속 상사인 권 부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중에 면전에서 크게 꾸지람을 듣게 되겠지만, 우선은 한시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알고 싶었으나, 옆자리에 앉은 선임 기자 역시 통화 중이어서 그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br>그때, 편집국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문화부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인물이라, 인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꼿꼿하게 바로 세웠다.<br>-김인호 기자.-아, 예.<br>인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br>-이번에 제대로 한 방 날렸던데. 축하해.-네?-그 기사 말이야. 오늘 1면 탑으로 뽑았잖아. 하하하.<br>편집국장의 큰 웃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인호는 회사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나 자긍심보다, 전에 없이 펼쳐진 이런 상황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져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br>그날 오전 내내 편집국 전화벨이 멈추지 않았던 건, 도준에 대한 관심이 아직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해외 독립영화제 수상 감독, 발표가 지지부진하던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 출판 편집자, 방송국 간부들까지 줄을 이었다. 기사에 감동했다는 일반 독자들의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인호 기자를 찾았다. 도준 특집 기사를 쓴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br>편집국장은 다른 경쟁지들을 제쳤다는 승리감에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반면 인호는 숙취로 인한 후유증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참기 힘들 만큼 하품이 자꾸 새어 나왔다.<br>-이번에 로체에 올라간 등반대장이 네 친구라며?-네. 등반대장 우태길이 남체에서 팩스를 보냈어요.-하여튼 대단해. 우리가 크게 한 건 했어. 위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더라고.<br>편집국장은 인호의 팔뚝을 한 번 꾹 잡아본 뒤, 흡족한 표정을 남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조용해진 전화기는 이내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홍 기자가 눈을 찡긋하며 양손 엄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br>-와, 신난다. 브라보!-뭘, 그런 걸 가지고... 촌스럽게.<br>인호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문화부장이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를 불렀다. 인호의 미간이 순간 움찔했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지각이었다. 기사 반응이 좋으니 큰 날벼락은 없겠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br>-왜요.<br>그는 부장 앞 접대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입안이 껄끄럽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부장은 신문 지면을 손끝으로 툭 가리켰다.  <br>-여기, 편지에 나오는 ‘SY’라는 사람.  <br>인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이, 거기 있었나?’ 기억의 지면을 되감듯 머릿속에서 활자를 더듬었다.  <br>-부인이나 여자친구라면 굳이 이니셜로 남기진 않았겠지.<br>부장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br>-도준은 결혼 안 했어요. 자식도 없고...-그럼 혹시 불륜 관계 아니었을까? 연상녀라든지, 유부녀라든지.-네? 그게 무슨...-편지 말투, 좀 닭살 돋지 않아? 너무 감상적이잖아. 어이, 손 기자, 이리 좀 와봐.<br>손 기자는 결혼 15년 차를 맞은 문화부의 유일한 기혼 여성이자, 부서 순환 대상에서 제외된 연륜 깊은 전문 기자였다. 그녀는 재킷 뒷자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다가와 지면을 힐끗 내려다봤다.<br>-왜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여기 도준. 왜 편지에 존댓말을 썼을까?<br>손 기자는 피식 웃었다.<br>-저도 여행 가서 남편한테 엽서 쓸 땐 그래요. 평소엔 반말인데, 그럴 땐 존댓말 써요.-왜?-말실수 줄이려고도 하고... 단정하고 품위 있어 보이잖아요.<br>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br>-둘만 아는 언어 문법 같은 거죠. 겉으론 존댓말인데, 속에는 훨씬 진한 감정이 들어 있어요. 일종의 이중 어법이랄까요. 그 미묘한 거리감이 오히려 더 끈끈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br>손 기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인호를 다시 바라봤다.&nbsp;뭔가 꼼수를 떠올릴 때마다 짓던, 그 불편하고도 느끼한 표정이었다.<br>-이중 어법이라... 흥미롭군.-네? 아, 아...-후속 기사 써야지.&nbsp;뭐하고 있어?<br>부장은 휴먼 다큐 형식으로 서너 차례 연재도 가능하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br>인호는 손에 쥐고 있던 크리넥스를 눈가에 갖다 대고 문질렀다. 자신이 쓴 기사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기자로서 분명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떠들썩한 반응은 여전히 낯설고,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적어 내려간 단어와 문장들, 그 행간의 의미들이 누군가의 오랜 침묵을 건드린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3/pimg_731589167516231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5018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5. 네 겹으로 접힌 종이에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5876</link><pubDate>Sat, 20 Jun 2026 22: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587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베이스캠프 주변에는 거센 돌풍이 몰아치고, 굵은 눈발이 사방으로 매섭게 흩날렸다. 며칠 전 라마제 때 매달아 둔 초르파의 오색 천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람 속에서 허공을 휘저었지만, 식당 텐트 안은 분주한 움직임과 떠들썩한 목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nbsp;  중앙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진 길쭉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스무 명쯤 되는 대원들이 그 주위에 둘러앉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몇몇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한 차림의 도시 직장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같이 게릴라 전투에 나선 산적을 닮았다. 한낮의 맹렬한 햇볕을 피할 길 없는 히말라야 고산에서, 그들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리고 얼굴은 검붉게 타 있었다.  &nbsp;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사내들은 음식을 푹푹 떠 입에 넣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었다. 식탁 위는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잔칫날처럼 풍성함이 느껴졌다. 하얀 쌀밥과 닭볶음탕, 김치와 조미김, 몇 가지 네팔식 반찬과 렌틸콩 수프가 전부였지만, 등줄기까지 텅 빈 듯 허기진 대원들에게는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정성스러운 한 끼였다. 해발 5,200미터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서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금세 꺼지고, 계속해서 뭔가 속이 허전했다. 조리팀은 식탁 중앙의 큰 접시와 냄비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말없이 음식을 다시 채워 올리며 그런 대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nbsp;  오늘 화제의 중심은 단연코 한국 원정대가 로체봉 정상에서 거둔 쾌거였다.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등정의 순간을 자축하듯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이성호는 치료 중인 우태길 대장을 대신해 위태로웠던 순간들의 조마조마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대원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체’라는 단어만으로도 모두의 얼굴에 긍지와 자부심이 깃든 미소가 번졌다.   &nbsp;  그러는 동안 바깥 날씨는 점점 험악해졌고, 얼기설기 엮어 세운 식당 텐트는 모진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처럼 요동쳤다. 그 출렁이는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이 세계의 경계를 헤집으며 낮게 으르렁대는 경고의 울림처럼 들려왔다.<br>-오늘 조금만 늦게 내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나 말이야.&nbsp;<br>대원들은 순간 말을 멈추고, 투명한 비닐창 너머로 매섭게 휘몰아치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텐트 천은 거세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고, 몇몇은 혹시 쓰러질까 두 손으로 기둥을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nbsp;  식사가 끝난 후, 문형근과 청송은 다리가 흔들거리는 간이 식탁 앞에 앉아 주방장이 특별히 준비한 야크 버터 티를 마셨다. 청송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통은 본체와 뚜껑이 단단히 맞물린 채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품은 듯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br>-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요.-그래, 조심해서 한번 꺼내봐라.<br>청송은 알루미늄 통의 상단과 하단을 고무줄로 감은 후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껏 비틀었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주무르며 밖으로 뛰어나간 그는 담당 주치의에게서 수술용 고무장갑을 얻어왔다. 또 다른 시도와 몇 번의 좌절 끝에, 조그만 캡슐의 뚜껑이 마침내 딸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위에 있던 대원들 모두 입맛을 다시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br>-뭔데 로체 정상에 묻어뒀을까? -신상정보, 그런 거겠지. <br>키트 안을 살피던 청송의 입에서 갑작스레 흥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br>-있어요. 뭐가 있어요. 종이 같아요. <br>문형근이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br>-종이라고? 이리 줘봐라. <br>청송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바이벌 키트를 통째로 문형근에게 건넸다. 내 손으로 직접 꺼내서 도준의 숨결을 제일 먼저 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까마득한 후배 처지에 대선배의 지시를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br>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작게 또르르 말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른 손바닥 한 개 반쯤 되는 불투명한 습자지였고, 네 겹으로 접힌 종이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여 쓴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그 글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nbsp;사랑하는 SY.<br>이틀 전부터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더니 결국 이곳에 갇히고 말았소. 이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서 계속 텐트 안에서 버티고 있소.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은 흐려져 가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씩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연료가 넉넉지 않아도 하루에 열 잔 넘게 차를 마셔야 하오. 탈수가 오면 모든 게 끝장이요. 날씨가 개이길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체력을 아끼고 있소. 고독이란 녀석은 말없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나는 그 무서운 적과 끝없이 싸우고 있소. 오늘 아침에도 스치듯 아주 잠깐, 이 산에서 내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나는 이 공포의 벽을 넘어설 것이오. 늘 그래왔듯, 그 어딘가에 길이 있을 거라 믿는다오.<br>언젠가 당신은 ‘왜 나였어요?’라고 물었소. 그땐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소. 이유 같은 건 없었소. 처음 만난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 설명이 불가한 힘, 방향성, 혹은 숙명 같은 것. 그저, 당신에게 가기 위한 오랜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전에도 말했듯, 당신을 만나 나는 새롭게 태어났소. 그 외엔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소. 사랑이란, 그 사람의 꿈을 막지 않는 거라 했던 당신의 그 말이 내겐 참으로 뼈아프게 남았소. 혹시 지금도 내가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소? 그 생각을 하면, 이 고도에서도 견디기 힘들다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br>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이 조그만 텐트 안이 환해진다오. 낮에도 밤에도 당신의 이름이 내 마음속을 조용히 맴돌고 있소.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늘 함께 있소.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는 하나였소. 지금도 당신은 내 곁에서, 함께 이 남벽을 오르고 있소. 약속한 대로, 이 편지를 정상에 남겨두려 하오. 만약, 올라갈 수 있다면. <br>삶이란 결국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오. 나는 오래전에 이 산을 선택했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소. 죽음을 마주하는 등반과, 영원을 꿈꾸는 사랑... 그 둘 모두 내게 주어진 거스를 수 없는 특별한 운명이었소. 당신을, 나의 유일한 사랑, 영원히 사랑하오. 이곳의 라리그라스 향기를 실어 보내오. 부디 내게 행운을 빌어주오. LOVE, 도준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2/pimg_731589167516118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587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4. 오래된 유산을 전하듯</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2965</link><pubDate>Fri, 19 Jun 2026 01: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296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늦은 오후, 베이스캠프 주변에 걸린 크고 작은 오색 깃발들이 차가운 그림자 속에 나부꼈다. 두꺼운 털모자를 눌러쓴 늙은 셰르파가 식당 앞에서, 마니차를 닮은 낡은 놋쇠 그릇을 천천히 두드렸다.<br>덩, 덩, 덩......<br>그 소리는 회색빛 고원과 오래된 사원의 저녁 종처럼, 허기와 고독에 잠긴 이들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날의 일과에 지친 대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늙은 셰르파는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 인사하며 그들의 무탈한 밤과 내일의 건승을 조용히 축원했다. 고산 지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베이스캠프의 한 끼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기도이자 의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br>희망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 대로 무사하기를......<br>문형근은 식당 텐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생애 첫 해외 원정에 오른 어린 대원, 청송이었다. 보송보송한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가 섞여 있었고, 목소리에는 밝으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br>-대선배님, 그것 저도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br>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형근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청송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거의 큰아버지뻘로 보였다.<br>-도준 선생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에요.<br>스물두세 살쯤 되었을까. 청송의 얼굴에는 아침 햇살 같은 순수함과 원시 자연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어른거렸다. 그 젊음의 눈부심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여뻐 보였다.<br>문형근은 오랫동안 전문 산악인들과 동행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벌써 아홉 해째, 그는 카트만두에 터를 잡고 여행자 숙소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었다. 히말라야에 반해 드나들다 보니 어느덧 고향처럼 정든 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산의 위험을 온몸으로 감당할 만큼 몸도 나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을 오르며 얻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 그의 한계를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br>이번에 바쁜 숙소 일을 잠시 접어둔 채 한국 원정대를 따라 베이스캠프까지 오른 것은, 아마도 젊은 시절, 오직 산을 사랑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격렬하고 벅찬 감각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말라야에 도전했던 수많은 선후배들처럼, 그도 한때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으로 산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이 머물다 간 옛 자리를 조용히 다음 세대에게 내어줄 때가 되었다.<br>-이거, 도준의 것 말이냐? 그래, 만져보아라.<br>문형근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를, 오래된 유산을 전하듯 조심스레 청송에게 건넸다. 히말라야를 꿈꾸는 이 젊은 산악인 역시 언젠가 저 설벽 어딘가를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전설 속 주인공이 된 도준의 유품은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깊고도 분명한 실체였다. 부재의 기록을 품은 작은 캡슐 하나가, 저 먼 신들의 영역을 향한 오래된 동경을 다시 불러왔다. 청송은 그 상실의 흔적을 두 손에 받쳐 든 채 한동안 말없이, 감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br>-그렇게 좋으냐?<br>문형근이 물었다.<br>-그럼요. 믿어지지 않아요.<br>청송의 대답은 맑고 또렷했다. 어릴 적부터 도준은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짤막한 기사에도 가슴이 뛰었고, ‘히말라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출렁였다. 청송이 산을 향한 열망을 키우고 대학 진학 후 본격적인 등반길에 나선 것도, 모두 그 존재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한때 무지개처럼 아득히 아른거리던 환영이, 이제는 손에 쥔 유품 하나로 명료하게 되살아나, 짙은 감동으로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다.<br>그때 문형근의 두 눈은 청송이라는 한 청년의 영혼을 관통해, 저 너머 오래전 푸른 느티나무 같았던 도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br>-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br>그날도 도준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nbsp;말보다 눈이 먼저 말을 거는 청년이었다.&nbsp;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nbsp;상실의 흔적은 강기슭 어딘가로 스며든다.&nbsp;언젠가 다시 피어오를 전설을 기다리며,&nbsp;그는 청송을 향해 가만히 미소 지었다.<br>‘이 젊은이도 언젠가 저 설산의 능선을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람처럼 가볍고, 무한히 자유롭기를.’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19/pimg_731589167515794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296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3. 도준의 실종과 서바이벌 키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1127</link><pubDate>Thu, 18 Jun 2026 01: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112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베이스캠프에는 한국에서 함께 떠나온 원정대가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 멀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br>-저기요! 저기 와요!<br>본부 텐트 앞에서 망을 보던 대원 하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몇몇 발 빠른 대원들이 달려 나가, 정상 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두 남자를 조심스레 맞아들였다. <br>원정대 대장 우태길은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휘청거렸다.&nbsp;탈수로 갈라진 입술과 까맣게 변해가는 손가락 마디는 그의 위태로운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nbsp;동상이 심한 오른손은 미세한 자극에도 극심한 통증을 불러왔다. 절단을 피하려면 혈관을 확장하는 응급 주사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성호 역시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강인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nbsp;험난한 하산을 무사히 마친 자부심과 동료들과 다시 만난 안도감이 그의 마음 깊숙이 차올랐다.<br>-이성호, 축하해. 우리 원정대 대표로 로체를 등정한 기분이 어때?-형님이 저 대신 올라가셨어야 했는데요.-무슨 소리야. 네가 잘 서포트해줬으니까, 대장도 마음 든든했을 거야.-고마워요. 그런데, 도준 형... 지난번 단독 등정, 정말 성공하신 거 같아요. 로체 남벽을, 그것도 산소통 없이 혼자서요.-그게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br>이성호는 품속에서 알루미늄 캡슐을 꺼냈다.<br>-정상에서 이 서바이벌 키트를 발견했어요. 준이 형 것 같아요. 2년 전에 여기서 실종된, 도준 선배님이요. <br><br>그 순간, 주위는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도준’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 앞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캠프 내에서 최연장자인 문형근이 앞으로 나와 은색 캡슐을 건네받았다.&nbsp;이번 정상 공격에 대한 우려와 책임감이 그의 얼굴에 짙게 어려 있었다.&nbsp;그는 오랜 세월 도준과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터라, 누구보다도 그의 고유한 습관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알루미늄 통에 감긴 파란 테이프를 확인한 순간, 문형근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nbsp;뚜껑 위 ‘DJ’라는 이니셜은 도준과의 기억을 되살리며 가슴 한복판을 스치듯 아릿한 슬픔을 남겼다.&nbsp;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밀려드는 감정의 물결을 다독였다.<br>-이거 준이 형 것 맞지요? <br>이성호가 재촉하듯 물었다.<br>-분명하군. 이건 도준 거야.<br>문형근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br>-파노라마 사진 찍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뭔가 발에 걸리는 거예요. 주변을 좀 파봤죠. 태길이 형이 한눈에 알아봤어요. 이거야말로 도준 선배님이 혼자 로체 남벽을 돌파한 증거물이잖아요.-너희가 그걸 찾으러 거기까지 간 거구나. 고맙구나, 정말.<br>문형근은 착잡한 심정으로 로체봉을 올려다보았다. 능선 위 험악한 삼각 직벽과 눈 덮인 흰 봉우리가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슬픔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아직도 저 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도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히말라야에 바쳐진 성스러운 청춘은 여전히 동면하듯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br>‘그동안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외롭고 안타까웠을까.’ <br>도준의 등반 실력과 재능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 의문을 제기했다. 2년 전 봄 이미 혼자 정상에 올랐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기에 세상을 등진 채 어딘가에서 홀로 살아 있을 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이라는 존재가 도준을 선택한 것처럼, 그는 태생부터가 거기에 속한 사람이었다.<br>그런 그의 고독한 성취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정확한 등정 기록도, 사진 증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의 로체 남벽 등정 성공을 단언할 수 없었다. 도준은 결국 그 산에서 실종되었고, 한때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사라졌다. 그의 단독 등정 여부는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고, 그를 사랑한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점차 바람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br>문형근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되뇌었다.<br>‘도준, 자네가 로체 남벽을 올라간 증거가 지금 내 손안에 있어.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룬 거야. 이제는 편히 눈을 감게나.’ <br>로체봉 정상에서 도준의 서바이벌 키트를 찾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이토록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어쩌면 신의 계시였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도준이 남긴 그 흔적은 우연한 기적이자, 설명할 수 없는 신비였다. <br>저 높은 설산을 바라보는 문형근의 눈가가 떨렸다.&nbsp;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자 지나온 시간의 아쉬운 잔상들이 떠올랐다.&nbsp;그는 손바닥으로 먹먹한 가슴께를 눌러 가며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리운 추억들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산에 대한 거창한 꿈을 방패막이 삼아 너무 오랫동안 비관적인 감상주의자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3/pimg_731589167516231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4112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2. 두 남자의 하산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9281</link><pubDate>Wed, 17 Jun 2026 01: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9281</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nbsp;  저 높은 수직의 공간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갈망. 히말라야, 고도의 한계 끝자락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과 운명을 초월하는 고독한 투쟁이 필요하다. 어딘가로 오르는 길이 허락되었다면, 다시 내려가는 길 또한 존재할 것이다.<br>두 남자의 하산길은 오름의 여정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험난한 구간을 피해 훨씬 먼 길을 우회해야 했다. 얼음빛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그들은 하늘 가까운 빙벽을 마주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쉬지 않고 이어진 가파른 하강 속에서, 어디까지 내려온 걸까. 길이 조금씩 수월해지자 등반의 긴장감은 풀리고, 몸속 깊이 스며든 피로가 젖은 눈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날씨는 다행히 맑고 하늘도 푸르렀지만, 매섭게 휘몰아치는 냉기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br>우태길은 오른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얼어붙은 손가락은 신경을 찌르는 고통을 안겼다. 산소통의 무게를 잊으려 그는 이를 악물고 온몸을 밀어붙였다. 이성호는 선배의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불안은 끝없이 밀려왔다. 베이스캠프까지 이어진 길은 심신을 소진시키는 마지막 시련이자, 생과 사의 경계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계속되는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였다.<br>다음날 새벽, 그들은 캠프2를 거쳐 아이스폴을 통과했다. 해발 7,200미터.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이 지점까지 내려왔지만, 두 사람의 다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체력 고갈과 산소 부족은 하산길의 눈밭을 더욱 미끄럽고 위태롭게 만들었다.<br>우태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소통 밸브를 돌려 공급량을 높였다.<br>-조금만 더 견디자. 조금만.<br>그의 숨결은 거칠게 이어졌다.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성호의 발걸음도 점점 느려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기울어지면서 서너 번 휘청거렸다. 그래도 젊은 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 존경하는 선배를 돕고자 한 걸음씩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겨우 움직였다.<br>7,000미터 고지를 지날 때, 그들은 또 한 차례 지옥 같은 구간에 접어들었다. 하산의 피로가 묵직한 돌덩이처럼 온몸을 짓눌렀다. 하체의 힘이 거의 빠져나간 상태에서 눈 덮인 바위와 미끄러운 경사면을 넘는 매 순간이 공포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성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발을 디딜 때마다 균형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더욱 낮췄다. 그의 눈에는 생존에 대한 간절한 의지와 삶에 대한 뜨거운 애착이 서렸고,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우태길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br>이틀 후, 우태길은 탈수와 동상으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한 손으로 자일을 붙잡은 채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 끝내 주저앉았다. 이성호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어깨를 힘껏 부축했다. 바로 그때, 아래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베이스캠프의 깃발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br>-선배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버텨요.-그래. 그렇구나.<br>두 사람의 눈빛에는 마침내 끝이 보인다는 안도감이 번져갔다. 그들은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쥐어짜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2/pimg_731589167516119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9281</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 1.수직의 극점에서 발견한 침묵의 언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7105</link><pubDate>Mon, 15 Jun 2026 23: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710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2000년 5월 17일 오후 2시경.&nbsp;한국 원정대원 이성호는 그토록 멀고 고된 길을 걸어, 하늘과 맞닿은 수직의 극점, 로체봉 정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숨소리는 거칠었고, 몸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그는 얼어붙은 눈과 빙하 위를 지나 묵직한 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정점에 아이스 피켈을 깊숙이 박고, 태극기를 펼쳤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깃발 하나. 그는 가슴이 타는 듯한 환희에 몸을 맡겼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 속, 온몸이 떨리던 전율의 순간이었다.<br>-올라왔어. 드디어.<br>그의 얼굴에는 오랜 여정의 피로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고글 너머로 붉게 부푼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고, 입술에는 따개비처럼 굳은 물집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방한모의 족제비 털은 얼어 터진 뺨을 거칠게 스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천계, 까마득히 높아만 보이던 로체봉 정상에 지금 그는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조차 실감은 희미했다. 여기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넘어선 또 다른 변방 지대. 숨이 막히도록 희박한 공기 속, 신들의 자치 구역이었다.<br>천천히 몸을 돌리자 끝없는 지평선이 완벽한 원형을 그리며 눈앞에 펼쳐졌다. 이성호는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발 아래, 층층이 쌓인 설빙 절벽이 아득히 뻗어 있었고, 그 너머로 날카롭게 치솟은 눕체의 첨봉이 손에 닿을 듯 다가왔다. 에베레스트는 희뿌연 설연을 휘날리며 하늘 끝을 향해 솟구치고, 남쪽 어둠 너머에는 암벽에 가려진 마칼루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발밑 깊고 깊은 낭떠러지에서는 구름이 고요히 흐르고, 돌풍에 휘말린 눈발은 황량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해발 8,511미터. 로체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아득한 비현실의 경지, 무한한 꿈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듯했다.<br>-결국 우리가 해냈어!<br>조금 늦게 정상에 오른 등반대장 우태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br>-로체야! 우리가 왔다! 드디어 올라왔다!<br>두 사람은 어깨를 힘껏 끌어안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야호, 야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정상의 설원 위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지독한 사투로 점철된 지난 7일간의 여정은 이 순간, 아득한 꿈처럼 가볍고 현실감이 없었다. 무슨 말로 이 감각의 온도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쁨과 숭고함을 초월한 순백의 감정,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초현실적 떨림이었다. <br>이곳, 산소마저 극도로 척박한 고지에서는 인간의 감정 또한 무중력 속을 부유하며 그 경계조차 아스라이 흩어져갔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고도가 존재하듯, 죽음의 계곡을 넘어 도달한 히말라야의 정상에서 인간의 감정은 점차 실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이 순간을 억지로 붙들려 하지 않고, 온몸으로, 온 감각으로, 정상에 선 감동을 고요히 흡수하는 것뿐이었다.<br>-베이스캠프에 무전을 쳐야겠군.  <br>우태길이 무전기를 추켜들고 발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성호는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세계의 지붕이 첩첩이 뻗어나간 장엄한 풍경을 응시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설산들은 묵묵히 침묵한 채, 인간 존재를 미세한 점처럼 삼켜버릴 듯 압도적이었다. 그는 북쪽에 우뚝 솟은 에베레스트를 배경 삼아, 웅장하게 솟은 설산의 봉우리들을 한 컷에 담았다. 이어 동쪽과 남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며 셔터를 눌렀다. 서쪽을 향해 마지막 인증 샷을 찍으려는데 아이젠 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리며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상체가 앞으로 기우뚱한 순간, 눈 속을 가르며 은빛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줄 한 가닥이 튀어나왔다.  <br>-태길이 형! 여기 뭔가 있어요. 목걸이 같은데... 줄이 끊어졌어요.  -주위를 잘 살펴봐. 뭐가 더 있을지 모르니까.  <br>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배터리는 충분했지만, 우태길은 정체 모를 불안에 사로잡혔다. <br>-베이스캠프와 교신이 끊긴 것 같아.  -큰일이군요. 날씨가 변하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하는데...  -목걸이는 찾았어?  -잠시만요.  <br>이성호는 장갑 낀 손으로 눈을 헤집었다. 차가운 알갱이 사이로 스치는 감촉이 문득 낯설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손끝에 닿은 건 작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지름 1센티미터, 길이 3센티미터 남짓한 은색 목걸이 통이었다.  <br>-어? 이건... 서바이벌 키트네요?  <br>초강력 알루미늄 소재의 서바이벌 키트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신원 확인 및 생존 정보를 담기 위해 제작된, 방수 캡슐 형태의 물건이다. 고산 등반자같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일종의 블랙박스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마련한 가장 원초적인 수단인 셈이다.<br>해발 8천 미터, 그 정상의 끝자락에서 발견된 이 조그마한 증언의 실체는 누군가의 마지막 침묵의 언어일 수도 있었다. 히말라야 고봉의 무심한 눈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표면에 붙은 얼음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는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DJ’라는 이니셜, 파란색 테이프, 그리고 로체봉 정상에 남겨졌다는 사실. 모든 퍼즐이 수수께끼처럼 떠올랐다가, 한꺼번에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br>-이건... 도준, 그 자식 거야.  <br>우태길이 눈가를 떨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br>-뭐라고요? 준이 형이요?<br>이성호가 놀라 되묻자, 우태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br>-그래. 이 파란색 테이프, 뚜껑에 새긴 'DJ'... 이게 확실한 증거야. 그 녀석은 모든 장비에 파란색 테이프를 감아두곤 했지. 자일에도 말이야.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어.-그렇다면, 도준 형이... 정말 2년 전에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는 건가요?-알파인 스타일로, 오로지 혼자서.-그게... 정말 가능했다고요?-그럼. 도준이니까. 허허.<br>우태길은 한숨처럼 짧게 웃었다. <br>오늘 두 사람이 오른 길은 노멀 루트였다. 에베레스트 쪽 베이스캠프에서 이어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코스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도준이 향했던 곳은 전혀 달랐다. 로체 남벽. 세계 최강의 등반가들조차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아직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벽이었다.<br>-도준 형의 실종을 두고 말들이 많았잖아요. 로체 정상에 올랐을 거다, 아니다...-그 지옥 같은 로체 남벽을 혼자 해치운 거지.-완벽하게 초등 업적을 이루려면, 정상까지 갔다가 무사히 내려와야 하는 거잖아요.-로체 남벽을 끝까지 올라온 자는 아직 아무도 없었어. 도준이 내려오지는 못했을지라도, 올라온 건 확실하잖아. 이 서바이벌 키트가 증명하는 거지. 무산소 최초 단독 등정이야. 결국, 도준이 혼자 해낸 거야.<br>그는 알루미늄 통을 손에 꼭 움켜쥔 채, 끝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설산들의 침묵과 그 차가운 광활함 속에서,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의 실종 이후 견뎌야 했던 참담한 시간들이 아른거렸다. 공기 속의 희박함마저 감정을 천천히 갉아먹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남은 것은 단 하나, 서늘하게 맑은 진실의 감각뿐이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22/pimg_7315891675161636.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710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0.장편소설_연재를 시작하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4681</link><pubDate>Sun, 14 Jun 2026 20: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4681</guid><description><![CDATA[「길 위의 두 사람」글·그림 김미진<br>안녕하세요.2011년 알라딘 서재에 장편소설 《랭보의 바람구두를 신다》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이곳에서 새로운 장편소설 《달의 몰락》을 연재하려 합니다.《달의 몰락》은 결혼을 앞둔 여자와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히말라야 로체 남벽 등정을 준비하는 남자의 재회를 그린 장편소설입니다.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남자와 현실의 삶을 선택한 여자는 다시 만나면서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과 욕망, 상처를 마주하게 됩니다.이 작품은 사랑의 완성이나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본의 중력과 죽음의 충동, 삶의 의무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충돌하는 순간, 인간이 감행하는 단 한 번의 흔들림과 그 의미를 탐색합니다.다음 회부터 본격적인 연재가 시작됩니다.      &nbsp;  작가 소개김미진1995년 『세계문학』에 장편소설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을 발표하며 등단했다.장편소설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 《그 여름 정거장》, 《자전거를 타는 여자》, 《우리는 호텔 캘리포니아로 간다》, 《랭보의 바람구두를 신다》, 소설집 《그녀는 안개와 함께 왔다》를 출간했다.여행 에세이 《로마에서 길을 잃다》, 《히말라야, 눈부신 자유가 있는 곳》,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등을 펴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617/pimg_7315891675156224.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3468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