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김미진의 오후 3시 (김미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소설가이자 화가 김미진의 오후 3시. 소설과 그림, 삶의 기록이 함께 머무는 공간입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27 Oct 2026 20:43:05 +0900</lastBuildDate><image><title>김미진</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15891677826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김미진</description></image><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7. 이 남자는 곧 죽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95104</link><pubDate>Tue, 27 Oct 2026 01: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9510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정지된 세계의 일부처럼, 시간은 멈춘 듯 천천히 흘러갔다. 도준은 찌를 바라보며 떡밥을 꾹꾹 주무르다가, 가끔 물가로 다가가 낚싯대를 들었다 놓곤 했다.<br>-이 호수엔 늙은 붕어가 한 마리 있어요. 육십 년이 넘도록 살아남았다니, 거의 귀신 같은 녀석이죠. 한 번 물에 담갔던 찌도 단박에 알아챈다고 해요. 그래서 진짜 꾼들은 여기 올 때마다 찌며 떡밥을 새로 만들어 와요.-왜요?-낚시 가게에서 파는 걸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거든요. 그 특유의 냄새 때문이겠죠.-아, 그렇군요.-낚시꾼들이 여기서 잃어버린 낚싯대가 수도 없이 많아요. 어쩌다 그 녀석이 잡히는가 싶으면, 어느새 낚싯대를 물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죠.-호수 바닥 어딘가엔 낚싯대가 아주 많겠네요.-늙은 붕어가 그걸로 용궁을 지었을지도 모르죠. 하하.<br>도준의 웃음소리가 잔물결처럼 호수 표면에 번져갔다. 그는 낚싯대를 걷어들여 떡밥을 살펴보고는 다시 수면을 향해 낚싯줄을 던졌다. 물 위에서 찌가 잠시 뒤뚱거리더니, 금세 빨간 윗부분만 남기고 꼬르륵 가라앉았다. <br>그는 낚시 상자에서 주먹만 한 버너를 꺼냈다. 작은 냄비에 생수를 붓고 불을 붙이자, 파란 불꽃이 날름거리며 냄비 바닥을 핥았다. 차츰 자잘한 기포가 피어오르고 물이 데워지는 소리가 잔잔히 번져왔다. <br>-낚시터에서 자기가 먹을 것 이상으로 잡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져요. 어쩌면 우리가 하는 낚시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살해 본능이 문화적으로 변형된 형태 아닐까요?-살해 본능의 표현이라고요?<br>서윤은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br>-원시인들은 먹기 위해 사냥을 했죠. 몸집이 더 크고 사나운 동물과도 싸워야 했어요. 라스코 동굴벽화도 사냥을 위한 주술이었다는 해석이 있잖아요. 사냥을 나서기 전에, 많이 잡게 해달라는 뜻으로 그렸다는 거죠.-주술 기도를 위한 부적 같은 거였네요.-부적치고는 사이즈가 좀 크긴 했죠.-후후…-이제 더 이상 사냥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그 본능이 남아 있는 거 같아요. 아직도 전쟁을 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아, ‘라이프’ 잡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이 생각나네요. 한 남자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져 있었어요. 그는 몇 초 뒤 목숨을 잃었죠. 그 장면은 ‘이 남자는 곧 죽는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 속에 박제되어 박물관에 전시됐어요.-어머, 맙소사…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휴머니즘이라는 게… 그 안에 감춰진 다른 얼굴이 있는지도 모르죠.<br>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윤은 그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그것은 어떤 결론이라기보다, 오래 묵혀 둔 생각이 잠시 고개를 내민 것처럼 느껴졌다. 거칠거나 과장된 기색은 없었다. 다만 살아오며 스쳐 갔을 장면 하나가, 그의 이야기 너머로 무심히 비쳐 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이런 말들조차, 그가 무슨 의도가 있어서 꺼낸 것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br>캠핑 버너 위에서 냄비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도준은 캔커피 두 개를 뜨거운 물에 담가 데운 다음, 그중 하나를 수건으로 감싸 그녀에게 건넸다. 손안의 캔을 천천히 굴리자 따스한 온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다시금 낚싯줄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수면에 닿은 찌가 이내 균형을 찾아갔다. 파장을 일으키며 번져가던 둥근 원들이 서서히 희미해졌다.<br>-혼자 여행 다닐 땐, 주로 무슨 생각을 하세요?-산에 오를 땐 산만 생각해요. -참 이상한 분이네요. 겨우 잡은 물고기를 다시 놔주고, 내려올 산을 그렇게까지 힘들게 또 올라가고… 두렵진 않나요? 깊은 골짜기에서 길을 잃거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쳐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진짜 두려움은… 글쎄요. 두려움 그 자체를 마주 보는 일이 아닐까요. 실패하면 어쩌나,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이러다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생각들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늘 미래에 사로잡혀 있죠. 마치 지금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요.-그 누구도 자기 미래를 예측할 수 없잖아요. 안 그런가요?-맞아요. 산을 오르다 보면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가 있죠. 여행도 그렇고요. 멀리서 보면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한 발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닿아 있어요. 그 순간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게 전부예요.<br>그의 말에는 오랜 세월 몸으로 통과해 온 시간과, 그 속에서 한 걸음씩 버텨온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단단한 내공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허무도, 신비주의도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본질을 응시하는 투명한 통찰에 가까웠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27/pimg_63928662141721983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9510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6. 그날 오후, 낚싯줄을 드리운 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93040</link><pubDate>Mon, 26 Oct 2026 00: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93040</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br>가파른 언덕을 힘차게 올라가던 랜드로버가 잠시 멈춰 섰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드넓은 호수가 아스라이 펼쳐졌다. 녹색 수면 위로 산그림자가 은은하게 드리워졌고, 반짝이는 햇살에 잔물결이 일렁였다. 두 사람은 홀린 듯 경이로운 호숫가 풍경을 바라보았다.<br>-이런 곳에 호수가 있었다니, 정말 놀라워요.<br>서윤의 입에서 조용한 탄성이 흘러나왔다.<br>-저는 바닷가보다 여기가 더 좋습니다.-저도요. 파도를 보면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요.-여긴 괜찮은가요?-도준 씨가 곁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요.<br>도준이 차에서 내려 짐칸 문을 열었다. 낚시 도구와 다른 장비들을 꺼내는 손끝이 바빠졌다. 서윤도 옆으로 다가가 눈치껏 손을 보탰다. 낚싯대, 접이식 의자, 보온병, 다양한 낚시 도구들, 그리고 간식거리와 낚시용 미끼가 담긴 누런색 아이스박스. 그들의 손길이 닿은 물건 하나하나가 소박한 여정의 짐처럼 하나둘 쌓여갔다.<br>그는 바닥에 놓인 찌낚시 도구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br>-낚시를 하려면 자리를 잘 골라야 합니다. 물고기가 입질하는 자리가 따로 있거든요. 며칠 전에도 밤새 꿈쩍하지 않더니, 해 뜰 무렵에 두 마리를 연달아 낚았죠. 그것도 제법 큰 녀석들이었어요.<br>그는 오른팔을 번쩍 들어, 팔뚝만 한 붕어를 보여주듯 주먹을 쥔 채 팔꿈치를 가리켰다.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서윤의 머릿속에 커다란 은빛 붕어 한 마리가 떠올랐다. 낚싯대 끝에 매달린 채 꼬리를 푸드덕거리며, 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 햇빛에 번쩍이는 비늘의 광채까지 선명했다.<br>-그렇군요. 정말 기다린 보람이 있었겠네요.<br>서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은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굴참나무 가지가 늘어진 물가를 가리켰다.<br>-그때 저기서 잡았죠. 바로 저기요.<br>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준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br>-이거 참… 좋은 자리를 선점당했네요. 어쩔 수 없죠. 우린 저쪽으로 가요.<br>그는 턱짓으로 물가에 고정해 놓은 길쭉한 낚시 좌대를 가리켰다. 서윤은 그 위에서 낚시를 하자는 뜻인가 싶어 잠시 망설였다.<br>-저긴… 좀 무서울 것 같은데요.-걱정하지 말아요. 뒤쪽으로 떨어져 앉으면 괜찮아요.<br>도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발을 내디뎠다. 서윤은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두 사람은 잡목이 쓰러져 있는 가파른 둔덕을 서로 부축하며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바스락거리는 낙엽과 흙냄새. 하늘거리는 바람결이 피부를 스쳤다. 호숫가에 이르러 도준은 낚시 좌대에서 한참 물러난 위치에 접이식 의자 두 개를 펼쳤다. 서윤이 자리에 앉자, 도준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br>-무섭지 않아요? 의자를 좀 더 뒤로 뺄까요?-아뇨, 괜찮아요. 저 나무판 위에만 안 올라가면 아무 문제 없어요.-우린 여기 있으면 돼요. 시선을 멀리 두면 물결 때문에 어지럽지도 않을 거예요.-네, 그렇게 할게요.<br>도준은 잠시 바람의 흐름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br>-바람이 좀 차네요. 이걸 걸치세요.<br>그는 겉에 입고 있던 회색 폴로 셔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녀를 넉넉히 감싼 셔츠에는 그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한 남자의 냄새가 이렇게 따뜻하고 진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서윤은 그의 품에 안긴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과 물 냄새, 그리고 그의 체취가 뒤섞인 공간 속에서 조용한 설렘과 묘한 용기가 그녀 안에 서서히 피어났다.<br>도준은 능숙하고도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물가에 두 대의 낚싯대를 설치했다. 삼단 낚싯대를 길게 펼친 뒤, 찌를 꿰고 추와 바늘을 매달았다. 손목의 탄력을 이용해 낚싯대를 가볍게 휘두르자, 낚싯줄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수면을 향해 날아갔다. 곧 물 위로 작은 수포가 피어올랐고, 둥근 파문이 번져나갔다. 삼색 줄무늬 찌가 또렷이 중심을 잡았다.<br>낚싯대를 지지대에 걸쳐 놓은 도준은 서윤 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바람 한 줄기가 스쳐 가며,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에 가까운 평온이 내려앉았다. 서윤은 연녹색 빛을 머금은 수면을 바라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도준은 낚싯줄을 드리운 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차오른다고 했다. <br>-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순간엔 아무 생각도 못 해요. 놀이기구를 타고 떨어질 때처럼 몸이 붕 뜬 감각이 계속되죠. 그런 데 있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일상이 다 시시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점점 더 높은 곳, 더 위험한 길을 찾게 되는 건지도 몰라요. 마약 환자가 점점 강한 자극을 찾듯이요.<br>도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낚싯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br>-그래서 낚시가 필요한 거죠.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에요. 찌만 바라보며 그냥 있다가 보면, 마음속 감정이 가라앉아요.<br>서윤은 그의 말을 하나씩 따라가며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보았다. 수직의 절벽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지금처럼 고요한 물가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 그 두 개의 형상은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하나는 삶의 모든 것을 건 극한의 순간이고, 또 하나는 그 긴장을 비워내는 고요한 수행이었다. 둘 다 마음의 방향을 멈추고, 오로지 한 점에 몰입해야만 닿을 수 있는 자리. 무념무상의 틈에서 본질을 붙잡으려면, 그만큼 깊은 정신적 수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남자는, 그런 방식으로 자기만의 윤리와 생을 일관되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26/pimg_63928569638512878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9304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5. 우리가 갈 곳은 따로 있어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7727</link><pubDate>Fri, 23 Oct 2026 01: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772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랜드로버를 보자 서윤의 콧등이 시큰했다. 지난봄, 횡계 숲길에서 그와 헤어지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태일의 BMW가 그녀를 태운 채 도준의 랜드로버를 스쳐 지나갔던 그날 이후, 얼마나 많은 날들을 혼자 애태우며 견뎌왔던가. 오늘 다시 그의 차에 올라타려니 어색함 속에 잔잔한 위로가 밀려왔다.<br>세월의 흔적이 깃든 차 안, 기름 냄새가 낯설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주었다. 밀폐된 공간에 대한 저항감도 일지 않았다. 태일의 BMW가 강요하던 차가운 압박감과 달랐다.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가 품은 따스한 온기, 그 안에 몸을 기대는 순간 편안함이 스며들었다. <br>오랜 기억의 무게보다, 한순간 사고처럼 밀려온 친밀감이 더 강력했다. 3일간의 운명 같았던 만남. 단 한 번의 키스가 이른 봄날의 화양연화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그 떨림 하나로, 지난 시간 전체가 송두리째 뒤집혔다. 기억이 몸속에서 부서지고, 심장이 울렸다. 횡계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우연처럼 다가온 남자가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 곁에 앉아 있었다. 그를 눈앞에 두고도, 현실 속 꿈처럼 아득했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br>-서울에서도 자전거를 타나요?-가끔 한강 고수부지에서요.-헬멧은 꼭 쓰는 거죠?-또 넘어질까 봐요?-자전거 사고가 의외로 많아요. 다치면 큰일이잖아요.<br>서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이 빙그레 웃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br>그녀는 기어 레버를 움직이는 그의 크고 두툼한 손을 바라보았다. 횡계 별장에서 자신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당기던 바로 그 손이었다. 손끝의 감촉이 은밀한 환영처럼 살갗을 스치고, 숨결이 닿을 듯한 상상에 온몸이 조용히 전율했다. 그의 뜨거운 손길이 다시 다가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손끝이 닿는 순간, 혹은 그 손이 다가오는 그 짧은 틈.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br>-지금 어디에 가는 건가요?-화성이요. 석담리 근처 낚시터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요. 혹시 피곤하면 잠깐 눈 붙이셔도 됩니다.-아뇨, 괜찮아요. 전혀 피곤하지 않은걸요.<br>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과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도준이라는 남자가 불러일으킨 봄바람이었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그녀는 전혀 다른 여자가 된 듯했다. 현실과 단절된, 오직 그들만의 세상. 그녀는 모든 걱정을 잊고 싶었다. 단지 오늘, 이 하루만큼은. 그와 함께 존재하기 위해.<br>얼마 후, 서서울 요금소를 빠져나온 랜드로버는 안산 분기점에서 안중 방면으로 핸들을 틀었다. 서해안 도로를 따라 석담리에 가까워지자, 흑갈색 곰솔 군락지와 해수욕장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출렁이는 물결 위, 푸른빛 하늘가에 초승달 모양의 낮달이 나지막이 걸려 있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 한쪽에서는 낚시꾼들이 긴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묵묵히 바다를 응시했다. 가느다란 엿가락처럼 뻗어 오르는 해송 숲과 방풍림 사이로, 한가로이 주말을 즐기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눈에 들어왔다.<br>-여긴가요?-아뇨, 우리가 갈 곳은 따로 있어요.<br>랜드로버는 석담유원지를 지나며 속도를 올리더니, 어느새 경사가 급하고 인적이 드문 샛길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 스쳐 가던 바다가 점점 멀어지고, 주변은 온통 숲과 흙냄새, 바람의 숨결로 채워졌다.<br>-이제부터 좀 더 빨리 달릴 생각이에요. 이런 길은 천천히 가나 빠르게 가나 덜컹거리긴 마찬가지예요. 괜찮으시겠어요?-좋아요. 맘대로 하세요.<br>도준은 기어를 변속하며 핸들을 꺾었다. 엔진이 으르렁거리며 깊은 숲으로 달려들었다.<br>산길은 더욱 험해지고, 자갈이 튀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랜드로버는 굽이진 언덕길을 힘차게 올랐다. 그녀는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차체의 움직임에 따라 튀어 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보다 먼저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틀 안에서만 살아온 삶이 이 대지의 진동 속에서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br>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처음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고,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바람과 흙, 나무 냄새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창문을 끝까지 열자,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리듯 휘몰아쳤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날리도록 내버려두었다.<br>-무섭지 않아요?<br>도준이 외치듯 묻자, 그녀도 소리치듯 답했다.<br>-아뇨. 안 무서워요!<br>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성숙을 위해 껍질을 벗는 게처럼 버거웠던 인생의 꺼풀 하나를 벗어내고 있었다. 어떤 낯선 용기, 아니 본능 같은 것이 몸속에서 꿈틀대었다. 더는 어제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예감이, 기분 좋은 두려움처럼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24/pimg_63928403505944809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772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4. 저기, 그녀가 오고 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5666</link><pubDate>Thu, 22 Oct 2026 00: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566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도로 위, 차들은 한낮의 강물처럼 느릿하게 흘러갔다. 차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대시보드 위에 청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동을 걸자 라디오에서 익숙한 기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는 나지막이 음률을 따라 흥얼거리며 신사역 쪽으로 차를 몰았다. 브로드웨이 극장 건너편, 카페 아르테가 오늘의 약속 장소였다. 유리창 너머 사람들을 스치듯 훑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br>건물 뒤에 차를 세운 그는 꽃다발을 손에 쥔 채 카페 안으로 발을 옮겼다.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자, 미소년처럼 생긴 종업원이 다가왔다. 도준은 스파클링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스피커에서 카디건스의 ‘러브풀’이 끝나고, 새비지 가든의 ‘트룰리 매들리 딥리’가 흘러나왔다. 종업원이 가져온 레모네이드로 목을 축이려는 순간, 카페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서윤이 내렸다. 도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다시 앉았다. 손바닥으로 턱선을 가볍게 훑으며 마음을 다잡았다.<br>그녀는 운전사에게 몇 마디를 건넨 뒤 차 문을 닫고 카페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옷자락이 몸의 곡선을 따라 우아하게 일렁거렸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차림에 손에는 눈부시게 하얀 린넨 가디건을 들고 있었다.&nbsp;긴 머리는 하나로 느슨하게 땋아 내렸고, 어깨에는 커다란 왕골 숄더백이 무심히 걸려 있었다.<br>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br>-여기요!<br>도준이 손을 번쩍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어린 소녀의 무의식적인 행동 같았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그의 가슴이 사르르 떨렸다.<br>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의 감각이 하나씩 열렸다. 몸과 마음이 오로지 그 순간에 사로잡히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려졌다.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긴 자취를 남겼다. 그는 숨을 삼켰다. ‘저기, 그녀가 오고 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믿기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이었다.<br>-일찍 오셨어요?<br>그녀의 목소리가 감미로운 선율처럼 귓가를 맴돌았다.<br>-아뇨, 조금 전에요. 서윤 씨, 많이 보고 싶었어요.<br>도준은 말을 약간 더듬었다. 더 이상 로체 직벽만을 향해 돌진하던 천하무적의 원시인 같은 사내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 수줍게 서 있는 한 어린 소년. 22년 전 횡계로 되돌아간 듯,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br>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도준은 심장이 당기는 듯한 달콤한 통증을 느꼈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만큼 강렬한 충동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여자’라는 사실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br>그때, 종업원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nbsp;뚜벅뚜벅 울리는 발소리가 금기를 일깨우는 현실의 경고음처럼 그의 깊은 심연을 두드렸다.&nbsp;그녀는 풋,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의 뜨거운 열정을 읽고 있었다. 마음을 들켜버린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nbsp;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br>종업원이 물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br>-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얼음은 듬뿍 넣어 주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br>그녀는 도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을 살피더니 겸연쩍은 듯 손끝으로 가볍게 부채질을 했다. 도준은 문득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우선 날씨 이야기로 어색한 기운을 덜어보려는 걸까.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피커에서는 크랜베리스의 ‘링거’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장미를 살 걸 그랬나.’ 다시금 마음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그는 망설이듯 옆 의자에 두었던 꽃다발을 들어 조심스레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br>-어머나, 프리지어네요. 저한테 주는 거예요? 정말로 저한테요?<br>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도준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번졌다. 짧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br>종업원이 음료를 들고 오다가 홀 중앙에서 멈춰 섰다. 앞 테이블에 있던 여자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들 곁에는 투명한 빛의 막이 감돌기 마련이었다. 그 안에서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세상의 소음도 잠시 스러졌다. 도준과 서윤 사이로 스며든 공기는 미세한 전류처럼 파동을 일으켰다. 그들의 숨결 하나하나가 온화한 향기가 되어 홀 전체에 퍼져나갔다.<br>-당신에게는 장미보다 프리지어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고마워요. 저를 위해 꽃집에 다녀오신 거죠? 저는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는데…<br>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밝게 웃었다. 도준은 그 안에 스쳐 지나간 엷은 감정의 물결을 느꼈다. <br>-아니요. 오늘 이렇게 와 주셨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br>그녀는 말없이 꽃의 향기를 맡았다. 은은하게 번지는 꽃내음처럼 그녀의 미소가 살포시 피어났다. 햇살처럼 스며드는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눈부셨다.&nbsp;윤기 흐르는 머릿결, 가녀린 목과 얇은 옷감이 그려 내는 가슴과 허리의 유려한 곡선을 바라보며, 그녀의 몸이 지금, 한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생의 빛을 발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br>‘그녀의 약혼자는 어떤 사람일까.’ <br>그 질문이 떠오른 순간, 마음 한쪽이 쑤시듯 아려왔다. 어쩔 수 없는 질투, 패배 의식 같은 것이었으리라. 애써 시선을 거두려 했지만, 모든 빛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와 결국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나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녀는 내 앞에 있지 않은가. <br>한여름 해바라기처럼 목마른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종업원이 건넨 유리잔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컵에 든 얼음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찬 음료를 몇 번에 나눠 들이켰다.<br>-아직도 자다가 물에 빠지는 꿈을 꾸나요?<br>한참 만에 도준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br>-가끔요. 그건 왜요?-제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 가시죠.<br>도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발끝까지 길게 드리워졌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22/pimg_63928272796537524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566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3. 장미를 살 걸 그랬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3787</link><pubDate>Wed, 21 Oct 2026 02: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378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도심의 빌딩 숲 사이, 호수처럼 맑게 번진 하늘이 눈부셨다. 가로수 길 위에는 잘게 부서진 햇살이 반짝였고, 초여름 공기에는 가슬가슬한 서늘함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도준은 은행 앞 빈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운 뒤, 잠시 망설이다 길가의 꽃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br>가게 문을 여는 순간, 향긋한 꽃내음이 그를 감쌌다. 실내 곳곳에는 흐드러지게 핀 색색의 꽃들과 정성 들여 가꾼 화분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꽃집 출입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문턱을 넘으려다 멈춰 섰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화려한 조명과 색채의 향연 속에서, 그는 현실에서 한 발 비켜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br>카운터 뒤에는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진한 핑크색 방울철쭉을 포장하다 말고, 유치원 원장처럼 부드럽게 감겨오는 음색으로 말했다.<br>-어서 오세요. 무슨 꽃을 찾으시나요?-글쎄요. 먼저 좀 둘러볼게요.-네네. 그럼 구경하세요.<br>도준은 진열대 사이를 걸으며 꽃들을 살펴보았다.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 안에 선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손끝으로 꽃잎을 스치듯 어루만지자, 여리고도 보드라운 감촉에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조차 잠시 잊은 듯했다.<br>그가 살아온 세계는 거대한 바위와 얼음벽, 거친 바람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이 작은 꽃집은 섬세한 균형과 정제된 아름다움이 흐르는 곳, 전혀 다른 자연이었다. 철든 이후로 줄곧 산을 올랐고, 천년설이 흩날리는 히말라야에도 여러 차례 도전해 왔다. 그런 그가, 이 작은 공간에서 어쩐지 말문이 막힌 채 서 있었다.<br>꽃들은 향기롭고 찬란했지만, 누군가의 손길과 의도가 빚어낸 조형물이기도 했다. 이곳은 그가 경험해 온 자연과는 결이 다른 세계였고, 동시에 가공된 아름다움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에게는 낯선 질서였다. 만약 서윤이 아니었다면, 그는 평생 이런 곳에 들어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로 인해 펼쳐진 세계는 그에게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지각의 전이를 일으켰다.<br>도준이 선뜻 꽃을 고르지 못하자, 점원이 다가왔다.<br>-어떤 꽃을 드릴까요?-글쎄요… 좀…-혹시, 어느 분께 선물하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br>그 순간, 도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br>-아니, 뭐…<br>그는 말끝을 흐리며 귀 뒤를 긁적였다. 어느 분이라니. 그녀는 내게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직 그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존재로 영원히 남을지도 몰랐다. 도준이 눈을 끔뻑이며 대답을 망설였다. 점원이 빙긋 웃었다.<br>-혹시 여자분께 드릴 거면, 나이를 살짝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으음… 젊어요.-아, 젊은 여자분이시군요! 혹시… 여자 친구? <br>도준은 머리를 만지며 눈을 피했다.<br>-호호, 다들 처음엔 그렇게 쑥스러워하죠. 얼굴이 빨개졌네요.<br>점원이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br>-어… 어떤 꽃이 좋을까요?-글쎄요, 꽃은 다 예쁘죠. 여자분들은 남자분이 주는 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죠. 처음이라면 장미가 무난하지 않을까요?-아, 그런가요…-그렇죠. 장미죠.<br>잠시 후, 꽃집을 나선 도준의 손에는 프리지어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br>-장미를 살 걸 그랬나…<br>그녀에게 이 꽃이 괜한 짐이 되지는 않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분명, 손 닿지 않는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었다.<br>-괜찮아. 겨우 꽃 한 다발이잖아.<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24/pimg_63928406316189299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378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2. 스물두 해의 세월을 돌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1891</link><pubDate>Tue, 20 Oct 2026 02: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1891</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주말을 맞아 운동을 나온 사람들로 탈의실은 다소 북적였다. 격렬한 운동은 심신을 지치게 하면서도 근육마다 상쾌한 기운을 남겼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도준이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며 샤워장에서 나오자,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그는 올림픽 수영장의 관리 책임자이자 전직 국가대표 선수로, 도준과도 안면이 있었다.<br>-꼭 수영에 미친 사람 같아요. 누가 보면 국제시합이라도 앞둔 선수인 줄 알겠어요.-웬걸요. 이제 스퍼트도 다 죽었어요. 그래도 몸 좀 풀고 나니 가뿐하긴 하네요.-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감사합니다. 요즘 여기 분위기는 어때요?-뭐, 매일 똑같죠. 그런데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많이 바쁘세요?-글쎄요, 운동하고… 저도 늘 비슷해요.-혹시 여기서 수영 강좌 하나 맡아보실 생각 없으세요? 수강생들 반응이 아주 좋을 것 같아서요. 아까 보니까 벌써 응원하는 팬 분들이 생긴 것 같던데요.-그런 말씀 마세요. 수영 강좌 같은 건 저랑은 안 맞습니다. 능력도 없고요.<br>매니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br>-혹시 또 다른 등반 계획 있으신가 봐요? 그쵸?-아… 내년에요.-오, 그렇군요. 저도 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요.-아, 네에.-히말라야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요즘은 네팔에 트레킹하러 가는 사람들도 많다면서요?-네, 꽤 되죠. 등산 좋아하세요?-그럼요. 제 별명이 날다람쥐잖아요. 허허허.<br>매니저는 로커에 등을 기댄 채 한바탕 이야기를 풀어놓을 기세였다. 하지만 도준은 그다지 잡담을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말없이 옷을 챙겨 입으며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온통 머릿속은 서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늘은 그녀와 함께 낚시터에 가는 날. 약속을 하고, 손가락을 꼽으며 열흘이나 기다려 온 그 토요일이었다.<br>도준은 그녀를 향한 애틋한 감정에 떠밀리듯, 네팔에서 돌아온 즉시 리온 갤러리를 찾아갔다. 처음엔 어떤 부담도 주지 말고, 먼발치에서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오겠노라 작정했다.&nbsp;그러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 결심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폭발하는 듯했다. 눈가에 물기가 돌 만큼 반가운 마음이 샘솟았고, 끝내는 백기를 들 듯 먼저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야 말았다.<br>설렘과 기대에 부푼 마음, 그리운 이의 얼굴. 그녀는 언제나 그의 내면에 불을 밝히는 촛불이었고, 생명수처럼 거듭 그를 정화하며 숨 쉬게 하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물에 빠져 거의 의식을 잃은 일곱 살 소녀를 품에 안았던 그날도, 스물두 해의 세월을 돌아 고모부 집 앞마당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도, 그리고 지난 수요일, 종로 거리의 빗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조차도,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의 마음속에서 빛을 잃거나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nbsp;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그는 늘 손바닥에 땀이 배일 만큼 긴장했고, 시간은 언제나 꿈결처럼 흘러갔다.<br>그녀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날까.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가슴에 얹힌 체증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와의 인연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그때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마주했던 소년의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싶었다. 오래전에 돌려주지 못한 자그마한 분홍신 한 짝. 마침내 긴 기다림 끝에, 그것을 건넬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br>‘왜 이토록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 걸까.’<br>도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심히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21/pimg_63928151205534759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81891</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1.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9778</link><pubDate>Mon, 19 Oct 2026 00: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977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토요일 아침이었다. 안전 요원의 호각 소리가 맑고 날카롭게 수면 위를 갈랐다. 물안경을 쓴 아이들이 킥보드를 두 손으로 잡고 발차기를 하며 줄지어 나아갔다. 반대편에서는 꽃무늬 천수모를 맞춰 쓴 중장년 여성들이 아쿠아로빅 강습을 앞두고 샤워장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잠시 발장구를 치다가 이내 익숙한 동작으로 풍덩, 물속으로 들어갔다.<br>지하 2층에 자리한 이곳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실내 수영장이었다. 50미터 길이의 푸른 수면은 여덟 개의 레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날 오전, 자유 수영을 위한 두 레인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은 아쿠아로빅 강습을 위해 줄을 걷어낸 채 활짝 열린 상태였다.<br>도준은 오전 8시 무렵, 수영장이 포함된 복합 체육시설에 도착했다. 피트니스센터에서 한 시간 남짓 근력 운동과 유산소 트레이닝을 마친 그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숨을 가다듬듯 짧은 샤워를 마치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쿠아로빅 강습은 한창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br>마흔 명이 훌쩍 넘는 회원들이 물속에서 서로 간격을 둔 채,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체조를 이어갔다. 풀 가장자리에는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체격의 여성 강사가 서 있었다. 귀에 마이크를 걸고 쉴 새 없이 힘찬 구령을 외쳤다.<br>-하나둘셋, 둘둘셋! 하나둘셋, 둘둘셋!<br>강사의 걸걸한 음성이 출렁이는 수면 위를 가르며 울려 퍼졌고, 그 여운은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온 메아리처럼 물속에 잔물결을 일으켰다.<br>도준은 입수 준비를 마친 뒤 우측 두 번째 레인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몸을 적시며 심호흡을 한 뒤, 느긋하게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움직임이 돌변했다. 온몸을 수면에 던지듯 튕겨 나가며 연속된 돌핀킥으로 물을 밀어내자, 파장이 길게 뒤로 뻗어나갔다.<br>이미 풀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주저함 없이 흐름을 타며 날렵하게 앞사람을 추월했다. 빠른 스트로크가 계속 이어졌다. 수면 아래 그의 팔은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물을 끌어당겼다. 손바닥이 가슴 아래를 지나 허벅지 곁으로 빠져나가는 익숙한 동작. 한 번 리듬을 타자, 그의 몸은 물결과 나란히 움직이며 유려하게 나아갔다. 그 유영은 돌고래처럼, 지극히 본능적이고 매끄러웠다. 호흡 역시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br>물속에서 홀로 치르는 철인 3종 경기는 단순한 근력 싸움이 아니었다. 수면 위와 아래를 오가며 감각을 조율하고, 거센 물살에 맞서면서도 흐름 속으로 몸을 맡겨야 했다. 도준은 그 안에서 스스로를 시험하며 담금질하고 있었다. 50m 자유형 기록은 25초대. 남자 선수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속도였지만, 그는 결코 한 가지 방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유형에 접영과 배영을 섞어 가며, 몸의 움직임을 유기적인 패턴으로 엮어 갔다. 경쟁자가 없어도 상대는 늘 자기 자신이었다. 혼자만의 싸움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산에서 암벽을 오를 때처럼, 여기서는 물과 하나 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br>그가 물살을 가르며 날렵하게 레인을 왕복할 때마다, 시선을 빼앗긴 수강생들이 하나둘 박자를 놓치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의 강사 또한 구령을 붙이다 말고, 도준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br>어느새 서른 번째 왕복을 마친 그는 마지막 스트로크를 부드럽게 마무리하고, 가볍게 몸을 끌어올려 풀 밖으로 나왔다. 반짝이는 물방울이 몸의 윤곽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nbsp;물속에 있던 몇몇이 아쿠아로빅 동작을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br>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는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 위로 단단한 어깨선과 잘 발달한 근육이 물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실루엣은 탄력 있는 곡선을 그렸고, 힘과 균형이 어우러진 하나의 완벽한 형상이 되었다.<br>-저 정도면 국가대표급 아니겠어요?-현역으로 뛰기엔 나이가 좀 있어 보이잖아요.-아까부터 쉬지도 않고 계속 턴만 하던데요…-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br>아쿠아로빅 회원들은 아쉬운 눈길로 그의 뒷모습을 좇으며 수군거렸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19/pimg_639279670722599470.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977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90. 세계의 끝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4593</link><pubDate>Fri, 16 Oct 2026 01: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459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그날 오후, 서윤은 미로처럼 얽힌 뒷골목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차들이 오가는 인사동길을 중심으로 서북쪽에는 육백 년 역사를 품은 경복궁이, 동쪽에는 음악인들의 성지라 불리는 낙원상가와 고종의 잠저였던 운현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크고 작은 화랑과 식당가 사이로 골목들이 그물처럼 뻗어 있었고, 남쪽으로는 차량과 인파가 뒤섞인 왕복 8차선의 종로 거리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br>리온 갤러리 근방을 벗어나자마자, 서윤은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정해 내달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도준이 향한 곳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인사동길 남쪽 입구 부근을 서성였다. 이번에도 그를 놓친다면, 그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후회로 남을 것이다. 숨이 막힐 듯한 절박함이 온몸을 조여왔다. 갤러리에 남겨두고 온 복잡한 사연들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희미해졌다. 지금 그녀의 의식 한가운데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도준이었다.<br>처음엔 무작정 안국역을 향해 달렸다. 왜 그쪽이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도준이 지하철을 타러 갔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그녀를 이끌었다. 무심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그가 스쳐 간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사방 어디에도 그의 존재를 짐작할 만한 단서 하나 보이지 않았다.<br>-어디든 떠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녀석이죠.<br>병문안을 갔을 때 김 씨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문득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녀가 지금껏 상상 속에 그려본 도준의 모습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행자이자, 거침없는 모험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이었다. 가끔 고요한 물가에 앉아 강태공 낚시를 즐기고, 진한 커피 향을 좋아하며, 히말라야의 험준한 고산에도 몇 번이나 올랐다고 했다. 그런 특별한 이력과 개인적인 취향을 고려할 때, 분명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소보다는 한적한 풍경을 택했을 확률이 높았다. 경복궁, 아마 그쪽일까. 서윤은 곧장 방향을 틀었다.<br>그날은 마침 전통문화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인사동길에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다양한 복식 차림의 행위예술가들이 퍼포먼스를 펼치고, 귀청을 찢을 듯한 꽹과리 소리가 거리 전체에 울려 퍼졌다. 길목마다 빼곡히 들어선 구경꾼들 때문에 그녀의 발걸음은 자꾸 늦춰졌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공간 안에 있었으나, 그 사람들 속에는 없었다.&nbsp;화려한 몸짓과 북소리, 흥에 겨운 웃음소리가 겹겹이 쌓여도 그녀의 시야는 오직 한 사람만을 좇고 있었다. 도준. 그가 저 어디쯤, 상심한 얼굴로 점점 멀어지고 있으리라는 슬픈 예감… 희미하게 스며드는 그 감각 하나만을 움켜쥔 채, 그녀는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br>-어머, 리온 갤러리 큐레이터 님 아니세요?<br>누군가 갑작스레 서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람들 틈에 갇힌 그녀는 순간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환히 웃는 얼굴이 낯설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고 싶었다.<br>-바쁘신가 봐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저기요, 저기…<br>서윤은 얼떨결에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정작 어디를 향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br>-뭔가 급하신가 본데, 다음에 찾아뵐게요.-네, 네…<br>급히 몸을 빼내며, 그녀는 뒤늦게 그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매년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여는 지방 중학교 미술 교사. 화가 경력 한 줄을 보태기 위해 어렵사리 전시회를 이어가는 그가, 평일인 오늘 또 무슨 까닭으로 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지 아리송했다. 서윤은 현실의 벽, 그리고 그 위로 드리워진 수수께끼를 떨쳐내며 탐색 범위를 인사동길 남쪽, 종로 거리 방면으로 넓혀갔다.<br>걸음을 재촉하며 길 양옆을 살폈지만, 그건 한여름 백사장에서 귀걸이 한 짝을 찾아내려는 시도만큼이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준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저물어가는 별빛처럼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던 동그라미처럼, 도로변의 카페와 상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미 인사동 일대를 벗어나 멀리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마음을 잠식해 갔다.<br>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늦은 오후의 청명한 빛은 사라지고, 회색으로 흐려진 하늘 아래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소낙비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은 날씨의 변덕 속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급해지고, 주변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서윤은 낯선 나라 어딘가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립감을 느꼈다. 발밑의 포장도로에서 타고 올라오는 섬뜩한 이질감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다.<br>여기는 어디인가.<br>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br>그것은 파랑새인가, 아니면 현실 도피인가.<br>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억눌러왔던 감정과 함께 터져 나온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섰던 탓에 핸드백도, 지갑도, 전화를 걸 동전 한 푼조차 없었다. 다시 갤러리로 돌아가야 할까, 태일이 기다리는 현실 속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세계로… 이제 정말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어쩌면 그것이 처음부터 내 운명이었을지도 몰라.<br>비 내리는 거리 한가운데, 세계의 끝에서 절망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조용히 우산을 씌워주었다. 서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야가 일순 흐려지며 환영을 본 듯 아득해졌다.<br>-어린애처럼 왜 여기서 혼자 비를 맞고 있어요?<br>문득 들려온 귀에 익은 나지막한 그 음성은 오래된 기억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듯 그녀 마음 깊은 곳을 흔들어 깨웠다.<br>어느새 빗방울이 가려지고, 세상은 우산 아래 작은 원 안에서 숨을 고르는 듯했다.&nbsp;어깨가 듬직하게 넓고, 그녀보다 키가 한참이나 큰 남자. 그리고 그 따스한 목소리. 맙소사. 그렇게 말한 사람은 도준이었다.<br>-아니, 어떻게 여기…?<br>그녀가 놀란 숨을 토하듯 말했다. 다시는 마주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바로 그 순간, 그는 말없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어디서부터 따라온 것인지,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br>‘이제… 이제 놓치지 않을 거야.’<br>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 가까이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우산 안에서 서로의 온기가 비로소 맞닿았다. 세상이 잿빛으로 짙게 물들어도 그 순간만큼은 빗줄기조차 부드러운 가림막이 되어 주위를 감쌌다. 시간이 멈춘 듯, 둘만의 작은 비밀이 생겨났다. 침묵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처음으로 알았다. 다시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16/pimg_63927710015469548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459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9. 토마토수프와 ‘Almost Blue’</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2730</link><pubDate>Thu, 15 Oct 2026 00: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2730</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부엌에서는 토마토수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제이는 냄비에 월계수 잎 한 장을 더 넣고, 파슬리 통을 집어 들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br>-이런 밤엔 수프가 제격이지.<br>오늘도 늦도록 출판사에서 일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왔다. 연희동 언덕길의 방 세 칸짜리 빌라에는 그녀만의 무해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 앞치마까지 두르고 부엌에 선 것은 허공에 떠 있는 외딴섬처럼 적막한 집 안에 사람의 체온 같은 무언가를 불러들이고 싶어서였다. <br>혼자 살아가는 삶은 가끔 안쪽으로부터 서늘한 기척을 불러왔다. 그 빈틈을 가능한 한 보이지 않게 덮어 놓으려는 본능이 그녀를 냄비의 증기와 조리도구의 온기 속으로 이끌었다. 모두가 떠나고 조명만 남은 간이역 대합실처럼, 그저 밝기만 한 부엌은 하루치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는 그녀만의 작은 제단이었다.<br>FM 라디오에서는 마침 쳇 베이커의 ‘Almost Blu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뜻한 수프 냄새 위로 얹히는 피아노와 트럼펫의 섬세한 울림이 한밤의 애수와도 닮은, 아득한 몽환의 기운을 자아냈다. 제이는 낮게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바게트 마늘빵을 오븐 안으로 밀어 넣었다.   &nbsp;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실내 공기가 흔들리며 낯선 긴장감이 차올랐다.  &nbsp;  제이는 눈을 크게 뜨고 현관 중문을 바라보았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예고도 없이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는 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같은 건물에 사는 누군가가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빼달라며 급히 4층까지 올라온 건 아닐까.&nbsp;<br>그녀는 얼른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고, 거실로 나가 영상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다. 모니터에 비친 얼굴은 뜻밖에도 서윤이었다.   &nbsp;  어젯밤에는 기이한 남자 이야기로 남의 속을 시끄럽게 만들더니, 오늘은 또, 야심한 시각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에 생소한 빛이 스며 있었고, 그 밑에 감춰진 무언가가 제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안녕.’이라는 평범한 인사조차 왠지 모르게 신경을 건드릴 만큼 산만하게 느껴졌다.&nbsp;<br>제이가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서윤은 손을 모은 채 배시시 웃었다.<br>-뭐야? 사람 놀라게.-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안으로 좀 들어가도 될까요?<br>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던지는 말투와 몸에서 풍기는 익숙지 않은 기운이, 허공을 스치는 작은 날갯짓처럼 불안한 잔상을 남겼다. 문을 막아선 채 잠시 머뭇대던 제이는, 이내 한 발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서윤은 밤 소풍 나온 아이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br>-뭐야, 이 맛있는 냄새는?-토마토수프 끓였어. 근데 핸드백은 어디에 두고 온 거야?-무슨 일이 좀 있었어. 신경 쓰지 마.-미친… 저녁은 먹었어?-그냥… 조금.-마침, 잘됐네. 어서 앉아.<br>제이는 그녀에게 식탁 의자를 당겨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프와 갓 오븐에서 꺼낸 마늘빵을 나누기 시작했다.<br>-왜 이렇게 맛있어? 상큼하면서도 감칠맛이 나.-포동포동 살찌기 싫으면, 적당히 먹어두는 게 좋을 텐데.-오늘은 괜찮아. 뭐든 다 허용되는 날이야.<br>서윤이 연달아 수프를 떠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br>-어제도 갑자기 출판사 앞으로 찾아오더니,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나서 우리 집까지 왕림하셨을까.-그렇지? 나 좀 이상하지? 나도 내가 좀 이상해.-왜, 또 태일 씨가 뭐래? 반말은 정말 안 된다던?-아냐, 그게 아니야.-근데, 혹시 술 마셨니? 말하는 게 좀…<br>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를 킁킁거렸다. 서윤에게서 알코올 냄새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과 말투는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허공을 더듬는 듯했고, 그 모습에 제이는 명치 아래로 불편한 감각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br>‘이상하다… 애가 도대체 왜 그러지?’<br>제이는 이마를 긁적이며 속으로 되뇌었다.<br>서윤은 가상의 염탐꾼이라도 의식하듯 주변을 한 번 훑고는, 심각한 비밀을 털어놓을 때처럼 낮게 속삭였다.<br>-오늘, 그 사람이 나타났어. 저번에 횡계에서 만난 그 남자.-누구?-자전거 바퀴 수리해 준 그 사람 있잖아.<br>서윤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br>-아… 수레바퀴랑 상관없다고 했던 그 남자?-응. 오늘 나를 찾아왔어.-세상에… 갤러리로 직접 온 거야? <br> 서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줍은 미소에는 설렘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br>-정신 나갔네. 미쳤나 봐.-뭐가?-진짜 조심해야 해. 네 앞에 누가 나타났든,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얼른 날짜 잡고 시집이나 갈 생각해, 이년아.<br>제이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욕은 친한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선을 넘지 말라는 단호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br>-태일 씨 말이야, 내가 관상 좀 본다니까. 너 바람 난 거 알면 죽일지도 몰라!-날 죽여?-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만 아는 남자야. 자기 여자 뺏기면 절대 못 견디는 스타일이지. -아이참, 내 말 좀 들어봐. 아직 다 말 안 했잖아.<br>서윤은 제이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보낸 채, 오늘 낮에 벌어진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는 방 안 공기를 살짝 달구며, 포근했던 밤의 정적을 은근히 흔들어 놓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15/pimg_63927625047595306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273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8. 두 세계가 스쳐 지나간 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0789</link><pubDate>Wed, 14 Oct 2026 0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078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난 또 뭐라고.<br>수경은 난간을 짚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십여 년 전 미국으로 떠난 뒤,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사실상 별거 중인 부부였다. 수경의 남자 애인이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소문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br>-근데, 아까 그 남자. 꽤 괜찮지 않았어?-네? 그게 무슨…<br>서윤은 작게 헛기침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수경는 미묘한 표정으로 서윤의 몸을 훑어내렸다. 젊고 단정한 얼굴, 고운 머리칼, 날렵한 몸매. 수경의 시선에는 얄궂은 호기심과, 은근한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br>-꽁지머리 그 남자. 뭔가 느낌이 다르잖아?-아, 전 잘 못 봤어요.<br>수경이 작품 감상을 하다 말고 여기로 온 것은 서윤 때문이 아니었다. 훤칠하고 이국적인 외모, 묘하게 낭만을 풍기는 분위기. 그 낯선 남자를 본 순간, 수경은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이곳까지 따라 나온 듯했다.<br>-그런데, 뭐 도와드릴까요?-아참, 태일이 온다고 했잖아. 근데 벌써 왔나 봐. 어머, 저기 꽁지머리도 있네.<br>수경이 건물 현관에서 주차장 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간 층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 층계를 내려오는 도준과 그를 향해 맞서 올라오는 태일의 모습이 보였다. <br>값비싼 올무를 손에 쥔 채 그녀를 옭아매러 오는 남자와, 순수한 열정으로 그녀 곁을 찾았던 한 남자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겹쳐졌다. 그 장면은 두 세계의 충돌을 상징하는 듯했고, 늘 불행한 패만 골라 들었던 피노키오의 손끝을 떠올리게도 했다. 마치 시간과 선택의 틈 사이에서, 운명의 여신이 잔혹하게 그녀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br>‘도준을 이대로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태일의 치명적인 덫에 나를 내어줄 것인가.’<br>수경은 층계를 올라오는 태일을 보며 리온과의 또 한 번의 은밀한 미술품 거래를 떠올렸고, 서윤은 층계를 내려가는 도준을 바라보며, 자신이 갈망하던 생의 열정이 점점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br>두 남자가 같은 층계 위에서 스치듯 엇갈렸다. 찰나의 눈 맞춤이 오간 그 순간, 무심한 듯 서로를 확인하는 시선 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태일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br>-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예요?<br>그때, 최희숙 관장이 다가와 두 여자가 시선을 모으고 있는 층계를 함께 내려다보았다.<br>-제 동생이에요. 강 실장이 도착했어요. 저기 보이시죠?<br>수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br>-어머, 그러네요. 강태일 실장님이 리온 갤러리를 다시 찾아주시고, 황송할 따름이에요.-약혼녀가 다니는 직장이잖아요.-맞아요. 저희 갤러리의 인재를 뉴욕에서 돌아오자마자 강태일 실장님이 싹 낚아채신 거죠. 호호호... 안 그래요, 서윤 씨?<br>관장이 옆을 돌아보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서윤은 보이지 않았다. ‘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윤은 주저하지 않고, 재빨리 그 안으로 올라탔다. 지난봄, 횡계의 숲길. 그때 갈아타지 못한 운명의 마차에 뛰어오르듯,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딛듯.<br>-어머, 서윤 씨! 어디 가는 거야?<br>수경의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공기 중에 부서졌다.<br>-저기, 잠깐만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요.<br>서윤이 소리치듯 말했다.<br>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가 식수대 쪽으로 걸어가며 서윤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윤은 그 시선에 반응하지 않으려 애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br>‘나도 철부지 피노키오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험의 길을 떠날 수 있을까…’<br>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수경과 관장은 당황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br>-급한 일이라뇨? 무슨 일이죠?-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람.<br>관장은 입을 앙다물며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br>서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멈춤 없이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층 번호가 한 칸씩 내려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손바닥에 전류가 흐르는 듯 짜릿한 긴장감이 스며들었다.<br>태일이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피노키오 전시관 로비에 도착했을 때, 서윤은 이미 지하 1층 비상구를 통해 연기처럼 건물을 빠져나간 뒤였다.<br>-조금만 기다려요. 이번엔 내가 찾아갈게요.<br>서윤은 건물 사이 좁은 골목길을 내달리며, 자신을 격려하듯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처럼, 그 간절한 염원이 그녀의 숨결 속에 녹아들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14/pimg_63927541202016212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7078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7. 누구도 그 경계선 밖에 있지 않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8909</link><pubDate>Tue, 13 Oct 2026 02: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8909</guid><description><![CDATA[<br>글·그림 김미진<br>그녀는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고 갤러리 로비로 나갔다. 식수대를 향해 무심결에 걸음을 옮기려는데 도준의 발걸음이 한 박자 늦게 뒤따랐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묵직한 발소리가 강한 전류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전해졌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도록 흥분되면서도, 한편으론 흡사 검은 갓을 쓴 저승사자와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몹시 두려웠다.<br>-오지 마세요. 다가오지 마요.<br>그녀는 등을 돌린 채 짧고도 강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러나 도준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러운 동작처럼 그녀의 어깨를 스치며 오른팔을 뻗더니, 종이컵을 하나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받기 시작했다.<br>-우리 잠깐 이야기해요.<br>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했다.<br>-얘기요? 무슨 얘기요?-5분이면 돼요.-안 돼요. 여긴 위험해요.<br>그때, 뒤쪽에서 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br>-서윤 씨, 거기서 뭐 해? 잠깐 나 좀 봐봐.<br>깜짝 놀란 그녀는 무심결에 도준을 등지고 반쯤 옆으로 돌아섰다. 종이컵에 물을 따르던 도준의 손끝도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욕망의 삼각 구도에 묶인 듯 서로를 의식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누구도 중심이 아니었고, 누구도 그 경계선 밖에 있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도형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nbsp;  수경은 왜 여기까지 쫓아 나온 걸까. 무슨 이상한 낌새라도 챘다는 건가. 한꺼번에 두 개의 파도가 몰아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에서는 천둥이 치고, 발밑에서는 해일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혼절하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졌다.   &nbsp;  먼 배경처럼, 낙타 한 마리가 뜨거운 사막 위를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현실은 잠시 정지된 듯했고, 그녀의 감각은 그 멈춤의 틈새로 미끄러졌다. 모든 장면이 정적에 잠긴 사이, 아직 단어가 되지 못한 단어들이 소음처럼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nbsp;  그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의미의 파편들이 어느 순간, 예정된 퍼즐처럼 한곳에 맞춰졌다. 그제야 서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nbsp;  태일은 자기 누이를 의도적으로 이곳에 보냈고,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도준이 눈앞에 나타났으며, 이제 태일까지 곧 도착할 참이었다. 운명이라는 잔인한 실험이 그녀를 또 한 번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nbsp;  모든 인간은 과거의 끈에 발목을 잡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늙은 부모의 얼굴, 해맑게 웃던 어린 조카, 그리고 그달 치 월세를 들고 사라진 오빠의 뒷모습이었다. 불만과 욕설이 뒤섞인 올케의 눈물도,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되살아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감정도, 어떤 미련도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br>‘내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나는 약혼자가 있어. 그 이름은 강태일이야. 너는 도준이라는 이름을 버려야만 해.’<br>우리는 모두 인생을 건 도박사들이다. 끝내 손에 쥔 패 한 장을 버리고, 숙명처럼 또 다른 패를 집어 들어야만 하는 존재. <br>극도로 냉담한 그녀의 반응에 도준은 깊이 상처받은 듯했다.<br>-그렇군요. 이번에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요. 실례했습니다.<br>그는 종이컵의 물을 단숨에 마신 뒤, 그것을 구겨 휴지통에 던지고 급히 몸을 돌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요.’ 그의 말이 징 소리처럼 머릿속을 두드렸다.<br>‘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br>서윤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가 사라진 계단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 맴도는 그 한마디가 얼음송곳처럼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br>‘이번에도…오지 말아야 할 곳.’<br>오면 안 되는 장소와, 오지 말았어야 했던 순간들. 그것이 무상한 현실이 감내해야 할 잘못된 만남에 대한 자책인지, 아니면 상처받은 영혼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수경이 다가왔다.<br>-뭐야, 서윤 씨? 아까 그 사람, 아는 사람이야?-…누, 누구요?-여기서 물 마시던 키 큰 남자.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것 같던데?-아니, 그냥 여기 온 관람객이에요. 언제 문 닫느냐고요.<br>서윤은 무의식적으로 코끝을 만졌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는, 그런 순간에 어떤 기분이었을까. 설령 코가 길어진다 해도, 세상에는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피노키오는 알았을까. 진실을 숨기는 사람들의 고통은 대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까.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14/pimg_63927540124876857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890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6. 시간 한가운데 ‘기다리는 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6923</link><pubDate>Mon, 12 Oct 2026 00: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692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전혀 다른 시간의 문이 열리고는 한다. 그녀에게는 지난 3개월의 공백이 그저 허무한 세월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짧았던 만남과 아쉬운 이별, 그리고 세상의 가장자리 어딘가로 사라졌던 그가 잠시 멈춰 있던 시간의 틈새를 헤집고, 다시금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br>횡계에서 태일의 차를 타고 떠나가던 그날, 묵묵히 정면만 응시하던 눈빛 그대로, 그가 시선을 마주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살며시 손을 들어 인사했다.&nbsp;그 손짓과 미소 사이, 숨이 멎을 듯한 전율이 온몸에 퍼졌다.<br>사방에서 지켜보는 눈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버텼다. 그때 그녀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휴대용 스피커에서 잔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의 시선과 관람객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쏠렸다. 진열장 앞에서 여러 국가에서 출간된 피노키오 서적을 살펴보던 관장과 수경도 고개를 들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br>단 한 번의 불필요한 시선도, 한 마디의 추측도 용납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어떤 추문이나 오해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br>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말을 이어가려고 애썼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소음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세상의 언어가 잠시 숨을 멈춘 듯, 오직 내면의 기억과 감각만이 선명했다.<br>3월의 횡계 숲길, 자전거 위에서 느끼던 바람과 햇살, 그의 웃음과 따스한 눈빛, 그리고 목요일 오후, 달콤하게 스며들던 입맞춤까지. 그날의 여운과 닿지 못한 사연들이 만화경처럼 눈앞에 맴돌다 잘게 부서진 파편이 되어 하나씩 가슴속으로 쏟아졌다. 서윤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br>노영미 연구원이 평소와 다른 서윤의 기색을 감지한 듯 재빨리 다가왔다.<br>-선배,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세요. 괜찮으세요?-아냐.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났을 뿐이야.<br>서윤은 도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br>-우리 잠깐 쉴까요? 어때요?<br>최 관장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며 제안했다.<br>-그러는 게 좋겠어요.<br>노영미가 맞장구쳤고, 최 관장이 재판관처럼 큰 목소리로 휴식을 선언했다.<br>-15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겠습니다.<br>관람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교사들의 인솔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뉘어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br>-피노키오 전시관에서 가장 값비싼 작품이 뭔지 보여드릴게요. 이쪽이에요.<br>관장은 환심을 사려는 듯,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있는 진열장으로 수경을 안내했다. 전시장 안은 사람들의 발길과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도준은 뿌리 깊은 고목처럼 거기 우뚝 선 채, 오직 서윤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br>지난봄, 마지막 이별의 순간. 그날도 그는 랜드로버 안에서 태일의 차를 타고 멀어지던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무엇을 택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시간 속 한가운데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기다리는 자’였다.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도 미동조차 하지 않을 듯했다.<br>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귀에 걸고 있던 마이크를 벗어놓고, 옆구리에 찬 휴대용 스피커도 내려놓았다. 아무런 계획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움직였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둣발 사이로 주변의 시선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를 수경의 눈길이 의식되자 내딛는 걸음마다 미묘하게 균형을 잃은 듯한 어색함이 스며들었다. 우두커니 장승처럼 서 있는 도준 앞에 거의 다다른 순간 서윤의 구두코가 우측으로 살짝 방향을 틀었다.<br>-여긴 어쩐 일이세요?<br>스치듯 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br>-보고 싶었소. 아주 많이.<br>도준의 목소리에는 작지만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서윤의 표정이 무심한 듯 싸늘하게 굳었다. 마음속에서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휘몰아쳤지만, 장차 시누이가 될 여자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어떤 감정도, 어떤 표현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거짓의 얼굴은 진실을 가장 정교하게 감춘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14/pimg_63927540034904655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692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5.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시선 하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1981</link><pubDate>Fri, 09 Oct 2026 00: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1981</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피노키오 전시관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자, 수경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br>-아이들이 많이 기다리는 것 같네요. 서윤 씨는 어서 가서 계속 진행해 주세요.<br>관장은 평소와 달리 존대어까지 쓰며 부드럽게 말했다.<br>-네.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br>서윤은 짧게 목례하고 서둘러 아이들 쪽으로 향했다. 장난치는 아이들을 일단 진정시킨 뒤,  고래 뱃속을 형상화한 설치물 앞으로 데려갔다. 바다에 빠진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br>-고래 뱃속에서 피노키오가 살 수 있나요?-그럼요. 바닷물이 못 들어오게, 의자로 막아 둔 거예요. 여기서 잠도 자고, 책도 읽을 수 있어요.<br>아이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의 해설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슬픔에 잠긴 피노키오와 파랑새가 한데 어우러진 상상의 모험이 아이들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작은 키에 두꺼운 안경을 쓴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br>-저…화장실… 저, 진짜 급해요.<br>그 한마디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오고 몇몇 아이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어수선해졌다. <br>-좋아요. 잠깐 쉬었다 가죠. 얼른 다녀오세요.<br>서윤은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화장실이 있는 로비 쪽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노영미 연구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바구니에는 청포도 사탕과 미술관 마크가 찍힌 종이 카드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하나씩 나눠주었다.<br>-이건 ‘모험 카드’예요. 고래 뱃속에서 빠져나온 피노키오처럼, 어린이 여러분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에요. 알았죠?-네!<br>아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윤은 문득, 벼랑 끝에서 아이들의 손을 붙잡은 채 버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멀리서 수경과 관장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쪽으로는 끝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br>‘모험 카드는 나부터 한 장 필요한 게 아닐까?’<br>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독였다. 아이들은 청포도 사탕을 입에 물고, 카드를 주고받으며 조잘조잘 웃음꽃을 피웠다. 서윤은 그 풍경 속에서 이 순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귀중한 위안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하루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이런 평온이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br>아이들의 정제되지 않은 웃음과 반짝이는 눈빛이, 그 순간 무형의 언어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런 따스한 온기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모래알처럼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br>아이들 뒤로 둘러선 관람객들 사이에서 문득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척이 알 수 없는 긴장을 불러왔다. 처음엔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시선 하나가 정확히 그녀의 몸을 스치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깃털처럼 은밀하고도 뜨거운 감각이었다.<br>서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관람객들 사이에 얼핏 떠오른 낯익은 얼굴. 횡계의 기억이 소용돌이치듯 밀려왔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 예상치도 못했던 단 한 사람.<br>도준.<br>심장은 순식간에 리듬을 잃고 요동쳤다. 주변 소음은 먼 바람 속으로 흩날리듯 사라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뜻밖에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두 손끝이 떨렸다.<br>‘그럴 리 없어. 이건 꿈이야.’<br>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그 자리, 그 눈빛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도, 움직임도 사라진 듯했다. 남은 것은 오직 그와 자신, 그리고 정지된 세계 속에 남은 숨결뿐이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14/pimg_63927542127630395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1981</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4. 소프트하고, 해피해피한 그림이면 좋겠어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0004</link><pubDate>Thu, 08 Oct 2026 00: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000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태일의 집안은 리온 갤러리의 VVIP 컬렉터였고, 최 관장과도 오랜 세월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주요 전시마다 통 큰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매년 몇 차례씩 작품을 사들이는 중요한 고객이었다. 그런 집안의 안주인과도 같은 수경의 방문을 맞아 관장이 직접 손님 접대에 나선 건 너무도 당연했다.<br>-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올게요.<br>서윤은 곁에서 행사 진행을 돕고 있던 노영미 연구원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서둘러 수경에게 다가갔다.<br>-안녕하세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아니, 내가 못 올 데를 온 건가?<br>그녀의 웃음은 해맑았지만 그 안에는 뾰족하게 돋친 가시들이 숨겨져 있었다.<br>-아니요. 그럴 리가요.-좀 바빠 보인다.<br>수경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br>-호호, 어린이 단체 관람객들을 맞을 때마다 리온 갤러리가 들썩인답니다.<br>관장이 중간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br>-피노키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아주 특별한 아이콘이죠. 오늘은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br>관장의 말에 수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br>-그렇군요.<br>수경은 평소보다 한층 더 도드라진 존재감을 뽐냈다. 짙은 향수 냄새가 공기 속으로 번지고, 화려한 의상은 조명에 반사되어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농익은 동백꽃처럼 탐스러운 외양 아래 어쩐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br>-나 그림 사러 왔지. 최 관장님, 너무 요란하지 않고, 선물하기 딱 좋은 걸로 몇 개 골라주세요. 소프트하고, 해피해피한 그림이면 좋겠어요. 마티스의 ‘삶의 기쁨’ 같은 느낌? 요즘 사람들, 다들 스트레스 많잖아요. 그러니까… 잔잔하게 힐링 되는 걸로요. <br>수경의 말투에는 백화점 VIP 라운지에 앉아 있는 듯한 안락함이 배어 있었다. 그 편안함을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는 사람 특유의 느긋한 오만마저 느껴졌다. 그녀에게 그림을 산다는 건 명품 옷을 고르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술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와 과시의 증거였다. 그녀의 지갑은 여왕벌의 꿀통처럼 결코 바닥날 줄을 몰랐다.<br>신우 일가 여성 서열 1호인 수경은 욕망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었고, 눈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단숨에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녀 뒤에는 무시할 수 없는 황금 덩어리들이 견고하게 쌓여 있었다. 그 호사스러운 거푸집 안에서 품위와 교양, 겸손 같은 것들은 단지 반짝이는 액세서리에 불과했다.<br>-보여드리고 싶은 꽤 괜찮은 작품들이 몇 점 있어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br>관장은 평소의 권위적인 태도를 내려두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응대했다.<br>-유럽 쪽에서 활동한 작가들 작품 중에 예쁜… 아, ‘예쁘다’는 표현은 좀 그런가요? 호호. 색채도 고상하고, 전체적으로 아주 나이스한 것들이죠. 제가 우리 수경 씨의 높은 안목,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호호호.<br>관장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또 웃었다. 오늘따라 그 웃음이 더욱 어색한 가면처럼 느껴졌다.<br>-참, 조금 있으면 제 동생, 강 실장도 올 겁니다. 오늘 그림은 특별히 강 실장이 부탁한 거거든요.<br>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br>-그림부터 고른 뒤에 다 같이 저녁 어때요? 관장님도 함께하시죠. 강 실장이 오늘 관장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다던데요.<br>수경은 미소를 띤 채 서윤과 관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br>서윤의 심장 깊숙이, 뜨겁고 메마른 모래바람이 일렁였다. ‘이제부터 나도 너처럼 반말을 하겠노라.’ 큰소리를 치며 돌아선 그녀 앞에, 바로 다음 날 자기 누이를 보낸 태일의 행보가 선명하게 겹쳐졌다. 눈에 드러난 부와 권력으로 또 한 번 상황과 심리를 틀어쥐려는, 태일 특유의 교묘한 술책이 아니겠는가. <br>어제 처음으로 그에게 맞섰던 일이 어디까지 파장을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약혼 파기를 먼저 입에 담지 않고, 그 일을 기회 삼아 가장 세련되고 은밀한 방식으로 그녀의 삶에 올무를 다시 씌우려 하고 있었다.<br>그 순간, 전시장의 할로겐 조명이 낯설게 흔들리며, 서늘한 경고가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br>-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손바닥 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명심해.<br>귓가에서 날카롭고 음습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윤은 생의 민낯을 후려치는 그 무언의 메시지를 또렷이 체감할 뿐이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8/pimg_63927014775634237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6000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3. 피노키오 전시관에 온 손님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8302</link><pubDate>Wed, 07 Oct 2026 00: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830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오후 두 시경, 오늘 방문이 예정된 초등학생들이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아현초등학교’라는 표지도 선명한 노란색 스쿨버스가 멈추자, 햇살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이 하나둘 버스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들은 앞다투어 재잘거리며 갤러리 앞마당에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활기를 더했다.<br>버스에서 먼저 내린 선생님 두 명이 아이들의 하차를 돕고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선생은 한 명씩 손을 잡아주며 따뜻하게 맞이했고,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선생은 버스 앞에서 차분하게 질서를 잡았다. 1학년과 2학년으로 구성된 아이들이 갤러리를 향해 흘러가듯 움직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br>-얘들아, 자자! 다들 선생님 보세요!<br>여선생이 손뼉을 가볍게 치며 아이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남선생은 출석부를 펴 들고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올 때마다 손을 번쩍 들고 힘차게 ‘네!’ 하고 대답했다. 서윤은 한 발짝 뒤로 비켜서서 웃음꽃처럼 환한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br>출석 확인이 끝난 후, 아이들은 갤러리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4층 전시관으로 향했다. 일부는 두 대의 엘리베이터에 나눠 탄 뒤 먼저 올라갔고, 나머지는 어미 오리를 졸졸 따르는 작은 오리 떼처럼 줄을 지어 천천히 이동했다.<br>피노키오 전시관 앞에 이르자 환상적인 동화 세계가 한눈에 펼쳐졌다. <br>-와아!<br>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각국에서 모인 인형과 삽화, 입체 형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소형 인형부터 키가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 조각상까지, 크기와 재질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공통된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바로 길쭉한 코를 가진 피노키오라는 점이었다. 제페토 할아버지와 푸른 요정, 귀뚜라미도 군데군데 배치되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상상력을 한층 풍요롭게 자극했다.<br>피노키오 왕국은 어느새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삼삼오오 어울려 전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진열된 작품들 사이를 탐색하거나 장난스럽게 소곤거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자유 시간을 보낸 뒤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이제 서윤이 나설 차례였다. 그녀는 휴대용 마이크의 스위치를 켠 뒤, 전시관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피노키오와 전시물 사이에 얽힌 이야기들을 실타래처럼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br>-옛날 옛적에, 말을 하는 신기한 나무토막이 있었어요. 목수인 제페토 할아버지가 그 나무로 피노키오라는 인형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인형이 갑자기 말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답니다. 믿기 힘든 순간이었죠. 피노키오는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였는데, 거짓말을 하면 금세 들통이 났어요. 왜였을까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점점 길어졌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거짓말을 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거나 얼굴이 화끈거린 적 있나요?-네!-그렇죠!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때 코가 길어졌지만, 여러분의 코는 그대로예요. 대신 심장은 쿵쿵 뛰고, 두 볼은 화끈거리죠. '지금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br>그녀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채를 지닌 각국의 피노키오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며 한동안 아이들과 함께 동화 속 세계에 푹 잠겨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을 이끌고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경숙 씨가 다가와 조심스레 속삭였다.<br>-강수경 씨가 조금 전에 오셨어요. 지금 관장실에 계세요.<br>서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왜 하필 지금, 왜 이 시점에 나타난 걸까. 어젯밤 다래원 앞 골목에서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혹시 태일이 일부러 누이를 이곳에 보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br>바로 그때, 전시관 입구에서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관장과 수경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 수경을 보자,&nbsp;서윤은 잠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7/pimg_639269293626430913.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830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2.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6594</link><pubDate>Tue, 06 Oct 2026 00: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659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방화동 집에서 인사동 리온 갤러리까지, 아무리 서둘러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 도착한 그녀는 재킷을 벗어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직장 상사의 눈총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1분이라도 먼저 도착해야 했다.<br>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서자, 탕비실에서 머그잔을 든 경숙 씨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화사하게 보이는 그녀가 서윤의 후줄근한 몰골을 위아래로 훑으며 빈정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br>-하필 오늘 같은 날 지각이라니요?-응, 집에 좀 일이 있어서.-아까부터 관장님이 찾으셨어요. 빨리 올라가 보세요.-진짜? 알았어.<br>관장이 그녀를 찾은 이유는 분명했다. 어제 명명희 선생 작업실에 다녀온 결과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성과라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관장이 듣고 싶어 할 말만 빠르게 추려낸 뒤 핸드백을 2층 사무실에 내려놓고는 곧장 3층으로 향했다.<br>관장실 안에는 서늘한 공기 속에 진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최희숙 관장은 올리브색 정장 안에 흰색 블라우스를 산뜻하게 받쳐 입고 있었다.<br>뿌리 염색 시기를 살짝 놓친 듯 앞머리 부근에 희끗희끗한 기운이 드러났다. 그녀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br>-오늘 좀 늦었네. 아침잠이 많은 편인가?-아, 아닙니다. 오늘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죄송합니다.-어제는 어땠어? 명명희 선생님은 잘 지내시지?-아직 일본에 계세요.-아직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br>관장의 입가에는 염려보다 실망에 가까운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br>-이제는 관장님이 직접 나서셔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김순자 씨를 설득하시든,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가 명명희 선생님과 대화하시든지요.<br>서윤은 궁색하게 들리지 않도록 관장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며 말을 꺼냈다. 여러 번 되새긴 끝에 어렵사리 내뱉은 말이었다. 관장과 명명희 작가는 오랜 세월 두터운 친분을 이어온 사이였다. 관장실 한쪽 벽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듯 명명희 선생의 젊은 시절 동양화 한 점과 유화 소품 몇 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br>-만약 명명희 선생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때는 정말 상황을 돌이키기 어려울지도 몰라.-예전에 큰 도움을 주신 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맞아. 명명희 선생이 힘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든든하게 서포트했는데. 화가 한 명 제대로 키워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선생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맞아요. 관장님께서 나서시면 명명희 선생 측에서도 모른 척하지 않을 거예요.<br>서윤은 어제 김순자 씨 사무실에서 본 미발표작 ‘사월의 정원’에 대해 한동안 설명을 이어갔다. 명명희 선생의 그림 세계가 변곡점을 지나 더욱 깊고 넓게 확장되었다는 이야기는 최 관장의 눈빛까지 반짝이게 할 만큼 흥미로운 뉴스였다. <br>한국 화단의 대모를 자처하는 그녀에게, 명명희 작가의 마지막 불꽃 같은 하이라이트를 함께 만들어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마음속 욕망을 자극하는 눈부신 매혹일 수밖에 없었다.  <br>-알았어. 김순자 씨에게는 내가 직접 연락해 볼게. 그런데 오늘 피노키오 견학 일정은 어떻게 되지?-오후에 한 팀 있어요. 아현초등학교에서 서른 명 정도 방문할 예정입니다.-좋아. 이번에도 서윤 씨가 사고 없이 잘 진행해 줘.-네. 알겠습니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적절히 섞어 해설해 주면 아이들도 흥미로워할 거예요.<br>리온 갤러리 4층에는 피노키오 특별 전시관이 있다. 네 구역으로 나뉜 이 공간은 피노키오와 관련된 각종 오브제와 그림, 기획 아이템들로 빼곡하다. 큰 조형물과 모형은 바닥 위에 설치 작품처럼 배치되어 있고, 작은 소품은 유리 상자나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관장과 남동생 최승주 실장이 오랜 시간 세계 경매장을 누비며 수집한 것들이다.<br>처음부터 피노키오 테마파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시관답게 연중 내내 어린이 단체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현초등학교 역시 매 학기 꾸준히 학생들을 보내오는 단골이었다.&nbsp;<br>서윤은 오전에 처리할 일들을 정리한 뒤 사무실 데스크에 앉아 아이들에게 들려줄 전시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파일을 하나하나 펼치며 눈으로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 스쳐 갔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피노키오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한 숨결로 피어나기를.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6/pimg_63926860035794551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659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1. 왜 우리는 맨날 이 모양인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4894</link><pubDate>Mon, 05 Oct 2026 02: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489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br>다음 날, 서윤은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의 숙취로 인해 흐릿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어젯밤 인사동 골목에서 태일과 말씨름을 벌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말을 놓겠다고 내둥 큰소리를 쳤지만, 그게 과연 잘한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br>그녀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알람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에 맞춰 둔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댔을 때 잠깐 정신이 들기는 했다. 그런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br>-앗, 지각이다!<br>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얼굴은 푸석했고, 수세미처럼 뒤엉킨 머리에서는 쿰쿰한 머릿기름 냄새마저 났다. 하루 정도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늘 갤러리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 출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nbsp;<br>고무줄로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는 거실로 내려갔다. 속이 메스꺼워서인지 집 안에 퍼진 된장찌개 냄새가 조금 역하게 느껴졌다. <br>아버지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친구 부모님의 발인식에 들르기 위해 새벽같이 나가셨다고 엄마가 말했다. 출근 시간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라도 감고 나갈 채비를 하려면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br>-엄마, 국 없어? 속이 좀 쓰려.-어제도 제이랑 둘이 마신 거야? 여자애들이 무슨 술을 그리 퍼마셔?-어쩌다 그럴 수도 있지.-에고, 내 팔자야. 딸년 술국까지 끓여 바쳐야 한다니…<br>엄마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더니 낡은 동전 지갑을 챙겨 들고 허둥지둥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 나갔다.&nbsp;욕실에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오자 압력밥솥 꼭지가 딸랑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서윤은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레인지 불을 줄였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올케가 조카 선호를 안고 들어왔다. 올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목소리까지 착 가라앉아 매가리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br>-아가씨, 나 속상해서 죽겠어요. 선호 아빠, 또 집 나갔어요.-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어젯밤에 잔소리 좀 했어요. 가장이면 최소한 생활비라도 벌어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인간, 이번 달 월세 내려고 모아둔 돈까지 챙겨서 그냥 튀었어요. 아휴, 이 원수! 당장 이혼할 거야. 이젠 나도 못 참아요.<br>올케는 아이를 소파에 눕히며 울분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br>-어휴, 오빠가 또 왜 그런데요…<br>서윤은 머리에 수건질을 하며 담담히 대꾸했지만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오늘따라 올케의 모습이 유난히 초라하게 보였다.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옷차림, 부스스한 파마머리, 수심으로 가득한 꺼칠한 얼굴이 갑갑한 일상을 대변하는 듯했다.<br>-왜 다른 집 남자들처럼 성실하게 살 생각은 안 하고 순 사기꾼 같은 놈들이랑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미친놈! 허랑방탕한 놈!<br>올케는 급기야 오빠를 향해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선호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아이였는데 올케의 날 선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비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마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br>-아침부터 왜 애를 울리고 난리냐. 저리 비켜라.<br>엄마는 두부와 콩나물이 든 비닐봉지를 올케에게 떠넘기고는 어린 손자를 덥석 품에 안았다.<br>-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야. 어디서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br>엄마는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올케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br>-어머니, 암탉이라니요. 지금이 무슨 19세기도 아니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요, 저희 이제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어요. 무서울 거 하나 없다고요.<br>만만치 않은 기세로 되받아치는 올케의 말에 엄마의 낯빛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br>-지금 이 시어미를 찍어누르겠다는 거냐? 다 시끄럽고, 서윤이는 뭐 하니? 얼른 나갈 준비해야지.-저도 아가씨처럼 밖에 나가서 일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선호는 어쩌고?-뭐, 어머니가 봐주시겠죠. 아범 대신 저라도 나서야 선호 우윳값은 벌지 않겠어요?-내가 언제 너희를 굶기디? 오늘 내 속을 긁기로 작정했구나.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가서 콩나물국이나 끓여라. 난 선호 얼굴 좀 씻길 테니.<br>엄마는 선호를 번쩍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br>-어머니, 저희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야겠어요. 이번 달 월세, 아범이 다 들고 튀었어요. 아셨죠?<br>올케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엄마는 대꾸 없이 욕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바람에 서윤의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곧 욕실 안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쏟아져 나왔는데, 가족 간에 엉겨 붙은 갈등을 어떻게든 덮어보려는 헛된 소음처럼 들렸다.<br>자식이란 끝내 부모가 짊어져야 하는 업보일까. 오빠가 저질러 놓은 무책임한 일들이 이제 늙은 부모의 짐으로 되돌아온 듯싶어 서윤의 마음은 더없이 불편했다.<br>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가볍게 화장을 한 서윤은 빈속을 달래기 위해 식탁에 앉아서 급히 한술 뜨기 시작했다.&nbsp;<br>올케는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같은 레퍼토리를 되풀이했다. 왜 오빠를 도와주지 않느냐는 원망이 그 모든 말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오빠가 허풍쟁이에 노름꾼, 결국 쓸모없는 낙오자라는 말들은 사실 자신을 향해 던져진 돌멩이처럼 가슴에 콕콕 박혔다. 핏줄에 대한 험담은 여전히 불쾌하리만큼 거북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자신이 둘러메어야 할 몫처럼 버겁게만 느껴졌다.<br>‘왜 우리는 맨날 이 모양인가.’<br>서윤은 쓴 담즙처럼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계속 속이 헛헛하고 공허함만 맴돌았다.<br>‘어제 술을 괜히 마셨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br>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br>-언니, 그다음 얘기는 나중에 해요. 이러다 진짜 지각하겠어요.<br>서윤은 올케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위로를 담은 토닥임이라기보다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에 가까웠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5/pimg_63926764233044816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489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0. 자꾸 어떤 남자가 생각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9932</link><pubDate>Fri, 02 Oct 2026 00: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993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하지만 태일이 품고 있는 상자 안에는 훨씬 더 즉물적인 것들이 들어 있었다.&nbsp;그는 결혼 절차를 계속 미루면서도, 틈만 나면 그녀를 호텔 방이라는 밀실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 순간마다 서윤은 마치 팔려 온 여자처럼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다뤄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때론 숨이 막히고 수치스러웠으며,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이런 일과 이런 감정에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br>-성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뭐가 더 중요한 게 있지?<br>언젠가 태일이 한 그 말은 서윤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했다. 그때 그녀는 ‘사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손에 쥐고 있는 그 단어의 무게나 형태를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br>‘사랑’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끔찍한 재앙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만약 행복이라는 감정이 신기루처럼 부풀려진 허상이라면, 사람들은 왜 결혼을 권하고 또 요구하는 걸까. 결혼과 섹스 대신 다른 형태의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br>-사랑의 감정은 다 비슷비슷한 걸까?<br>서윤의 목소리가 작게 허공에 흩어졌다. 제이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br>-갑자기 무슨 소리야?-인류애와 이성 간 사랑은 다를까?-질문의 요지가 뭐야?-아이에 대한 사랑과 강아지에 대한 사랑은? -그건 그냥… 다르게 아픈 거지, 바보.<br>제이가 장난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br>-그래, 나는 바보인가 보다.<br>서윤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nbsp;<br>-무슨 일 있네. 그렇지?<br>제이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nbsp;서윤은 맥없는 표정으로 허공에 걸린 수레바퀴를 올려다보았다.<br>-‘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제목이 이제 이해될 것도 같아. 사랑도 결국 제자리만 맴도는 건 아닐까?<br>그녀가 손가락으로 수레바퀴를 가리켰다.<br>-넌 생각이 너무 복잡해. 힘들면 그냥 수레에서 뛰어내리면 돼.<br>제이가 말했다.<br>-아니. 난 지금, 그 바퀴 밑에 깔린 것 같아.<br>제이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껍데기째 바삭하게 튀긴 새우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br>-얼른 먹어. 뜨거울 때가 제일 맛있어.<br>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들은 말없이 술을 마시고 기름진 안주로 영혼의 허기를 채웠다. 때로 침묵이 가장 깊은 대화가 되기도 하니까.<br>-사실은,<br>두 번째로 주문한 술잔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서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br>-자꾸 어떤 남자가 생각나.<br>제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br>-남자? 어떤 남자?-저번에 횡계 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있어.<br>서윤은 비밀을 흘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br>-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 사람이 떠오르면 마음이 이상해져.<br>제이는 기겁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br>-맙소사! 다른 남자라니? 애가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br>제이가 눈을 부라리며 종주먹이라도 들이댈 기세였지만, 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br>-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br>문득,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 가슴 한편이 여전히 저릿저릿했다. 그날, 그 순간, 그리고 그 말이 가져온 묘한 떨림.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이었고, 끝내 지켜낼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왜 그날의 공기와 속삭임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서윤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의 역류에 목이 타는 듯 레몬 하이볼을 연거푸 꿀꺽꿀꺽 삼켰다.<br>-말해 봐. 누군데? 어떤 남자야?-수레바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 닿을 수 없는 풍경처럼 멀고,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사람.<br>서윤은 단어 하나하나를 어렵게 내뱉고는 자신도 모르게 푸 웃었다. 그 웃음은 슬픔 대신이었고, 그리움에 대한 한숨 소리와 같았다. 횡계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사람. 어쩌면 꿈속에서 꿈을 꾼 것이 아닌지, 문득 궁금해지는 그날의 목요일 오후.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봄날의 숨결처럼, 그렇게 희미해지는 것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2/pimg_63926512752381861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993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9. 두려움 속에 허공을 배회하던 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8215</link><pubDate>Thu, 01 Oct 2026 01: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821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근데 왜 반말했는데? 둘이 싸웠어?<br>서윤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정작 자신도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왜 그동안 눌러둔 말들이 터져 나온 건지, 왜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일의 차에 오르지 않은 일, 호텔에서의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뻔히 이어질 절차를 거부한 일… 이제는 그 남자의 숨소리가 몸에 닿는 것조차 거슬렸다.  <br>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서윤은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가 오히려 깊은 상처를 떠안는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자기 몸에 가해진 폭력조차 발설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아픈 기억은 종종 침묵 속에 묻힌 채, 잊히기만을 기다리며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br>서윤 역시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앞에서도 태일과의 마찰에 담긴 진실을 끝내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기세에 떠밀려 어떤 자리에 이르게 된 경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는 일은 지금의 그녀에게 불가능했다.  <br>여자의 몸은 순결과 욕망 사이, 그 어디쯤을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자신의 욕망이고 무엇이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린 뒤에도, 그때의 기억을 자기 안에서 분리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다가왔다.<br>-왜 싸웠냐니까?<br>제이가 다시 물었다.<br>-오늘 다래원에서 저녁 먹었는데, 그 식당이 구리다는 거야.-다래원이 구리다고? 인사동에서 은근히 분위기 맛집인데.-그치?-근데… 뭐가 싫다는 거야?-글쎄…<br>태일의 일그러진 표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실룩거리는 턱선, 가늘게 떨리는 콧볼, 목소리에 배어 있는 위압적인 기운. 그의 분노는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 같았지만, 그 뒤에는 그녀의 앞날을 죄어 오는 덫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일로 그가 먼저 파혼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난다면 속이 시원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가족들, 특히 연로한 부모를 생각하자 금세 목울대가 뻐근해졌다.<br>-서윤아.<br>제이가 한참 뜸을 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br>-결혼하면 그 집안 식구들하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안 맞는 것도 많을 거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순간도 있을 텐데.<br>제이가 불쑥 문제의 본질을 짚어내자, 서윤은 모른 척 술잔만 홀짝거렸다. 제이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메트로놈의 박자처럼 자의식을 흔들던 그때, 낡고 통속적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br>‘결혼이 꼭 필요한 걸까?’ <br>비록 약혼까지 한 상태였지만, 지금껏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었다. 결혼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면서도,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애는 하나 낳아야지’ 같은 주변의 속삭임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결혼과 육아’는 여전히 비밀 상자처럼 감춰진 미지의 영역이었다. 진실이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곁을 맴도는 시도일지도 몰랐다. 진짜가 아닌 진실은, 어떤 대답으로도 결코 완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br>대학 시절, 어느 교수가 검은 천으로 덮인 상자를 내밀며 그 안에 손을 넣어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 채,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한 명씩 손을 집어넣었다. 서윤도 차례가 되어 동그란 구멍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짧은 순간,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 속에 어두운 허공을 배회하던 손끝. 마침내 차갑고 물컹한 무언가에 닿았던 그 촉감의 기억.  <br>상자 안에 무엇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지금 자신이 맞닥뜨린 삶의 ‘질문’들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삶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자 안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br>반복적으로 주입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상자 위에 검은 천을 덮어씌운 채, 그것이 달콤함의 근원인 양 가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음속에서 번지는 불안과 의문이 상자 안 어둠처럼 그녀의 내면을 잠식해 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1/pimg_63926487251803109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821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8. 수레바퀴 아래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4907</link><pubDate>Wed, 30 Sep 2026 01: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490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홍대 앞 피카소거리는 여느 날처럼 길가를 가득 메운 인파와 차량의 행렬로 어수선했다. 뒤숭숭한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제이와 만나기로 한 선술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둑한 실내에는 젊음과 낭만이 어우러진 소요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br>제이는 홀이 내려다보이는 통로의 한쪽 테이블에 앉아, 반쯤 비운 맥주잔을 곁에 둔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제이가 앉은 자리 위에는 수레바퀴 모양의 인테리어 장식이 매달려 있었는데,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br>-재수 없이 저 수레바퀴가 굴러떨어지는 건 아니겠지?<br>서윤이 다가서며 수레바퀴를 가리켰다.<br>-우리는 이미 수레바퀴 밑에서 살고 있는 거야. 어서 와, 친구.<br>제이가 책을 덮으며 빙그레 웃었다.<br>-이렇게 어두운 데서 책 읽다간 눈 버리잖아.-괜찮아. 어차피 조금씩 낡아가며 사는 게 인간의 운명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br>서윤은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태일 앞에서는 약속이라 둘러댔지만, 그 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발길은 어느새 제이가 있는 홍대로 향하게 되었다.<br>-근데 너무 늦게까지 일하면 힘들지 않아?-영세 출판업자의 영업 비밀이라고 했잖아. 무조건 열심히.-진짜 못 말려.-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온 내가 고맙지?-그래, 고맙다. 아주 눈물 나게.<br>서윤이 장난스레 입술을 삐쭉거렸다. 제이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풀리면서,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도 한결 누그러졌다. 소중한 친구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오늘 밤은 제이와 마주 앉을 조용한 테이블 하나면 충분했다.  &nbsp;  제이의 숏커트 머리는 이전보다 훨씬 짧아 보였다. 원고를 볼 때 흘러내리는 앞머리가 자꾸 신경 쓰여 결국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br>-교정쇄 볼 땐 머리띠 하면 되잖아.-나 머리띠 하면 얼굴형 이상해져. 내가 너처럼 생겼냐?-그만, 알았어. 잘 잘랐어. 더 잘라도 돼.<br>서윤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이는 초저녁에 자장면을 반쯤 먹다 만 터라 속이 출출하던 참이었다. 서윤도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슬슬 허기가 돌았다.<br> -한번 시켜 볼까나?-당근 좋지요.<br>식당 안에서 풍기는 다양한 음식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며 위장 깊숙이 뜨거운 갈망을 불러왔다. 메뉴판을 한참 뒤적이던 두 사람은 모둠꼬치와 시금치 한우나베, 새우튀김을 골랐다. 선술집에 온 손님이 주류 섹션을 그냥 지나치는 건 반칙에 가까웠다. 서윤은 레몬 하이볼을, 제이는 모히또 칵테일을 추가로 주문했다.<br>-잠깐! 너무 많이 시킨 건가? 하나 뺄까?-괜찮아.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잖아.-나 요즘 좀 찐 거 같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딱 좋아.-진짜?-진짜지, 그럼.<br>식욕과 자존심 사이의 이런 실랑이는 여자들끼리 흔히 주고받는 대화 중 하나였다. 그녀들 사이에도 그 유쾌한 말장난이 오랜 습관처럼 이어져 왔다.<br>화제의 맥락은 피트니스 클럽과 다이어트 보조제를 거쳐 어느새 명명희 선생의 평창동 작업실로 흘러갔다. 서윤이 낮에 본 미발표작 ‘4월의 정원’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종업원이 안주와 술을 차례로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br>제이는 술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서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br>-왜 그래? 너 뭐 있지?-그냥 왔다니까. 아무 일 없어.-그 얼굴, 할 말 있는 얼굴이잖아.<br>서윤은 곤란한 듯 입술만 달싹였다.<br>-왜? 어서 이 언니한테 털어놔 봐.-저기… 그러니까, 나 오늘 태일 씨한테 반말했어.<br>제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br>-반말?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했네.-그렇지?-이, 빙신아. 그게 정상이지. 잘했어.-휴!<br>서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br>-그깟 반말에 기분 상했다면, 그런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마.-그럴까?-그딴 놈이랑 어떻게 평생을 살아? 걱정 붙들어 매.<br>제이의 단호한 말투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서윤은 빙긋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30/pimg_63926328599296040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490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이 몰락]77. 여기부터 난 그만 갈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2567</link><pubDate>Tue, 29 Sep 2026 00: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256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진 사람처럼, 더는 감정을 나눌 의지가 없다는 듯 차갑게 굳어 있었다. 태일은 언제나 그녀를 허수아비처럼,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다루었다. 오늘은 그 손끝이 올가미 같았다. 조금씩 목을 조여 숨을 앗아가는, 결국 스스로 끊어내야만 하는 끈이었다.<br>-왜 자꾸 나를 피하는 거야? 너 요즘 이상해.-나, 안 이상해. 네가 이상해.-뭐,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그래, 너! 네가 더 이상하다고!<br>태일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두려우면서도 가슴 깊이 짜릿한 통쾌함이 번졌다. 그동안 쌓여 있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풀려나는 기분이었다.<br>태일에게 대놓고 반말을 한 건, 데이트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열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약혼까지 한 사이가 아닌가. 존댓말과 반말은 세대 차와 위계에서 비롯된 관습적 언어일 뿐,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는 아니었다. <br>그제야 서윤은 비로소 알았다. 오랫동안 당연한 듯 이어져 온, 두 사람 사이의 극심한 언어적 불균형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를 수 없음을. 입가에 번진 짧은 웃음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작은 승리를 선물했다.<br>그녀는 크게 헛기침을 하고 등을 꼿꼿이 세운 뒤, 턱을 바짝 추켜들었다.<br>-나도… 이, 이제부터, 반말할 거야.<br>그러고는 핸드백으로 몸 앞을 가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br>-맙소사! 이제 막 나가자는 거지? 응?<br>태일은 소리쳤다.<br>-넌 너무 예의가 없어. 너… 너한테는 이렇게 하는 게 맞아.-미쳤구나, 진짜.-아니, 안 미쳤어.-야!-나도, 야, 야! 앞으로 갑자기 나타나지 마. 나도 바쁜 사람이야.-내 참… 미치겠네.-그리고 내돈내산이야.-뭐? -내, 돈, 내, 산!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는 뜻이야. 오늘 저녁, 내가 낸 거야. 내 음식 내가 고르는 건데, 왜 네가 멋대로 스테이크를 시켜? 나, 스테이크 안 좋아해. 그것도 몰랐어?-미쳤니? 뭘 잘못 먹은 거야?-맞아, 잘못 먹었지. 바로 그 스테이크! 그걸 먹고 얹혀서 지금 이러는 거잖아.-알았어, 알았다고.-알긴 네가 뭘 알아!-취했네. 진짜 취했어.-와인 한 잔에 취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br>평소와 달리 날것 그대로 쏟아낸 목소리가, 서윤의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를 툭, 밀어냈다. 속에 막혀 있던 게 서늘하게 뚫린 듯한 후련함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태일이라는 남자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더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농담 섞인 희극 한 편을 바라보는 듯한 여유마저 느껴졌다.<br>그녀는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항상 모나지 않은 일상을 견뎌왔다. 싫은 기색도, 불편한 표정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억울함을 억지웃음으로 덮은 삶은 결국 자신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는 것을. 분노를 삼킨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약한 자의 침묵 따위 세상은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br>-여기부터 난 그만 갈게. 참, 앞으로 나한테 볼일 있으면 반드시 전화부터 하고 와. 깜짝 쇼는 곤란해. 알았지?<br>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보인 뒤,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어깨를 곧게 펴고는 안국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태일이 두어 번 소리쳐 불렀지만, 서윤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안,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 소리가 어느새 든든한 방패가 되어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감싸주었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9/pimg_63926240467104052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256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6. 그녀에게 이 밤거리보다 더 위험한 것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0523</link><pubDate>Mon, 28 Sep 2026 00: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052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저는 한 잔 마셔야겠어요.<br> 서윤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자, 태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 뚫어지게 그녀를 노려보았다.&nbsp;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하우스 와인 한 잔과 연어 타르타르를 주문했다. 태일의 껄끄러운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를 힐끔 쏘아봤다.<br> 그는 말없이 몇 가지 메뉴를 훑어보다가, 바게트 위에 토마토와 바질을 얹은 브루스케타와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골랐다.<br>-메인 코스는 조금 있다가 주문할게요.<br>서윤이 메뉴판을 접어 테이블 옆에 내려놓으며 웨이터에게 말했다. 그 말을 가로채듯, 태일이 끼어들었다.<br>-지금 시키지 뭐.<br>그는 리브 아이 스테이크 2인분을 아무렇지 않게 주문해버렸다. 서윤은 원래 레몬즙을 곁들인 생선 요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더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br>-출장 간 일은 잘됐어요?<br>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태일은 늘 그래왔듯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br>-응. 그렇지 뭐.-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잖아요?-응. 그렇게 됐어.-아아, 그렇군요.<br>짐작 가능한 대답들이 이번에도 서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br>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연어 타르타르를 떠서 입에 넣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이어갔지만, 신선해야 할 연어와 아보카도는 비릿하니 물컹했고, 와인은 산뜻함 대신 떫은 산미와 알싸한 뒷맛만을 혀끝에 남겼다.<br>태일의 비아냥거리는 표정은 그마저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게 했다. 기분 나쁜 눈초리가 와인의 향기까지 빼앗아 가는 듯했다. 서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는데, 그 모든 행위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강요된 유치하고 뻔한 연기처럼 느껴졌다.<br>스테이크가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 위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의미 있는 말들이 공허하게 오갔을 뿐, 지루한 정적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만을 드러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메우려 애쓰지 않는 간극만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을 때는 무거운 족쇄를 풀어낸 듯 기이하게 가볍고 낯선 해방감이 따라붙었다.  &nbsp;  라일락 향기 흩날리는 6월의 봄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속에는 그윽한 꽃내음과는 어울리지 않은 먹구름이 응어리져 있었다.&nbsp;<br>두 사람이 골목길을 나란히 걷고 있을 때, 술에 취한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웃고 떠들며 다가왔다. 그중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윤 쪽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태일이 그녀의 팔뚝을 세게 잡아챘다. 그 몸짓은 연인을 보호하려는 다정한 반응이라기보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서툴고 거친 반사 작용에 가까웠다.<br>-아얏!<br>서윤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br>-왜?-아프잖아요.-그러게, 여자가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잖아.-와인 한 잔 마신 게 그렇게 싫었어요?-데려다줄게. 취했잖아.-와인 한 잔에 어떻게 취해요?-어둡고 위험하잖아.-아뇨, 난 멀쩡해요.<br>태일은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서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서윤에게 이 밤거리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밀폐된 공간이나 다름없는 그의 차에 올라타는 일이었다.&nbsp;<br>오늘 밤, 그가 바라는 건 어쩌면 단 하나일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빌미로 호텔 식당으로 유인한 뒤, 값비싼 요리와 와인으로 적당히 생색을 낸 다음,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도 않게 객실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 그 얄팍한 술수가 어긋나자,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br>-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요.-이 밤에?-제이요. 제이는 출판사에서 늦게까지 일하잖아요.-미치겠군. 젠장!<br>태일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구둣발로 땅을 걷어찼다. 발끝에 차인 돌멩이 하나가 또르르 굴러갔다.<br>-내가 오늘 바쁜 일 다 제쳐두고 여기까지 왜 온 건데?-그러게요. 다음부터는 꼭 전화하고 와 주세요. 저도 바쁠 때가 있으니까요.-야, 나서윤. 너 요즘 왜 이렇게 삐딱해? 누구 생긴 거야? 어떤 놈이야?<br>그의 말투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와 모멸,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8/pimg_63926163063976595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052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5.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5698</link><pubDate>Fri, 25 Sep 2026 0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569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잠시 후, 그녀는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태일은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서윤은 방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br>-괜찮아요. 오늘은 조금 걷고 싶어요.<br>이 순간만큼은 그 남자의 승용차에 오르는 일이, 어느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의 차 안에 단둘이 있게 되는 것,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벌어질 상황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혔다. 밀폐된 침묵 속, 끈적거리는 원색적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이제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속에서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br>‘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br>그때, 갤러리 안에서 경숙 씨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윤을 향한 본능적인 호기심, 남의 비밀을 들춰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그녀의 눈빛에 어른거렸다. 직원들의 연애에 남다른 촉을 세우는 그녀에게 이 광경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무엇보다 ‘신우건설’ 일가는 리온 갤러리에서 특별 관리하는 주요 고객군이었다.<br>서윤이 쇼나 조각을 배달한 일을 계기로 그 집안의 후계자와 약혼하게 된 일화는 인사동 거리 안팎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일종의 우화처럼 소비되었다. 리온 직원들 사이에서도 놀라움과 수군거림을 동시에 자아낸 큰 사건이었다. ‘신우건설’ 황태자가 갤러리 앞에 불쑥 나타난 지금, 경숙 씨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br>서윤은 유리창 너머 껄끄러운 시선을 의식하며, 이 불쾌한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태일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br>-오늘은 제가 저녁을 대접할게요.-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데라도 있는 거야?-인사동에도 괜찮은 식당 많아요. 차는 여기 두세요. 관리인 아저씨께 미리 말씀드렸거든요.<br>어차피 갤러리 문이 닫히면 주차장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태일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따랐다.<br>인사동 4길에 자리한 ‘다래원’은 120년 된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다. 대문간 근처에는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고, 뜰 안으로 들어서면 기와지붕을 올린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이 조선시대 대갓집 같은 옛스러운 정취를 자아낸다. 대들보가 드러난 식당 내부는 전통 가옥의 멋을 고스란히 품은 채, 실용과 절제가 어우러져 은은한 품위를 드러내고 있다. <br>두 사람은 대청과 마당 사이에 놓인 격자문 옆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창살 유리문 밖으로는 부드러운 조명을 머금은 정원이 정갈하게 펼쳐졌고, 키 낮은 정원수들과 계절 꽃들이 밤의 공기 속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br>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자 종업원이 정중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스테이크와 생선 요리를 중심으로 한 소박하면서도 조화로운 구성. 수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일 수 있어 입맛이 까다로운 태일도 무난히 만족할 만했다.<br>실내에는 진공관 턴테이블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음색의 바흐 무반주 첼로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태일은 묘하게 경색된 표정으로 메뉴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식당 안에는 빈 테이블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느긋하게 환담을 나누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br>태일은 괜히 다른 테이블들을 힐끔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점점 굳어가는 그의 얼굴은 주변 공기마저 서늘하게 만들었고, 서윤은 그 차가운 시선에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br>-오늘 꼭 이런 데까지 와야 했나?-왜요, 여기가 어때서요?-음악도 시끄럽고, 뭐랄까… 좀 구려.-토속적인 분위기, 안 좋아요? 난 좋은데.-뭐, 크게 나쁘진 않아. 약간 색다르달까.-태일 씨, 제가 대접하려는 자리잖아요. 기분 좋게 드세요.<br>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쪽 입술을 씩 올렸다.<br>-난 이미 더 괜찮은 데 예약해 놨어.<br>서윤은 고요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태일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단순한 불만이나 반감이 아닌,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이 수면 위로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br>-괜찮은 데라면 어디요? 호텔 꼭대기 회원제 식당 같은 데? -오늘 왜 이래. 꽤 날카롭네.-제가요? 글쎄요.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br>서윤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br>-와인? 차 가져온 거 잊었어?-인사동 올 땐 차를 두고 오세요. 그래야 이 근처 맛집도 둘러보죠.-하. 인사동 낭만이라니! 뭐, 결혼 전엔 이런 추억 하나쯤 쌓는 것도 나쁘진 않지.<br>‘결혼.’ 그 두 음절이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가벼운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어느새 커다란 관념의 굴레가 되어 그녀를 죄여오기 시작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6/pimg_63926050907052880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569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4. 오늘은 왜 또 나타난 거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4193</link><pubDate>Thu, 24 Sep 2026 00: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419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인사동 거리는 데이트하는 사람들과 회식을 나온 직장인들의 발길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내리던 비는 서서히 멎었지만, 축축하게 젖은 기운은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nbsp;<br>서윤이 불빛이 환히 새어 나오는 리온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1층 접수대에 앉아 있던 경숙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br>-어머, 왜 돌아오셨어요?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관장님 계시지?-아뇨. 조금 전 장훈 작가님이랑 식사하러 나가셨어요. 최 실장님도 같이요. 오늘은 두 분 다 안 돌아오실 거예요.<br>장훈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로, 뉴욕 지하철 역사 곳곳에 손바닥만 한 타일 그림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전시하며 이름을 알렸다. 팝아트 풍의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뒤섞인 그의 작업은, 삭막하고 지저분한 뉴욕 거리에 에스닉하면서도 모던한 아우라를 불어넣었다. <br>그의 이름이 뉴욕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리온 갤러리는 장훈을 눈여겨보며 꾸준히 접촉해왔다. 당시 한국 출신 미술가가 국제적 인지도를 얻기 쉽지 않았기에, 최 관장은 장훈과 전속 계약을 맺어 국내 전시와 작품 판매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었다.&nbsp;<br>내년 하반기 전시를 앞두고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야 할 그가, 귀국 시기를 무려 일 년이나 앞당겨 서울에 나타난 것이 의아했다.<br>-장훈 작가 본가가 어디더라? -제주도라고 들었어요. 근데 왜요?-갑자기 한국엔 무슨 일로 왔나 싶어서. 잠깐 들른 걸까?-글쎄요. 전시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새 프로젝트라도 있는 건지…<br>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갤러리 운영의 중추라 할 수 있는 2층 사무실에는 남자 직원 한 명과 노영미 연구원이 나란히 앉아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노영미가 손끝으로 안경테를 살짝 들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br>-어, 그새 우리 못 잊어서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아냐, 잠깐 들렀어. 근데 아직 퇴근 안 했어?-자료 파일 하나가 사라졌어요. 일일이 확인 중이에요.-어쩌다 그런 일이?-모르겠어요. 그런데 명명희 작가님 전시 기획은 어떻게 됐어요?-아직 잘 몰라. 김순자 씨도 딱히 별말씀이 없으셨어.-일부러 피하는 걸까요?-글쎄.-일본으로 날아가서 직접 명 선생님을 뵙고 오세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잖아요.-천 냥 빚은 고사하고, 비행기표 값은? 여행 경비는?-아하! 결국 고놈의 화폐가 문제군요.-그만 농담하고, 얼른 퇴근해.-넵. 이것만 끝내고요.<br>올해 초봄 입사했을 무렵만 해도 얼굴 가득 뽀송한 솜털을 지닌 채 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그녀가, 이제는 능숙하게 제 몫을 해내며 여유와 유머까지 갖춘 동료로 자라 있었다. <br>사무실은 평소보다 어둑했다. 나무늘보가 지나갈 듯한 지루한 정적 속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일정한 박자로 공간을 채웠다.<br>후배들만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뜨려니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서윤은 함께 퇴근할 요량으로 서랍 깊숙이 넣어둔 명명희 선생의 전시 자료철을 꺼냈다.&nbsp;<br>페이지마다 정리된 기록을 훑으며 간단한 메모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책상 위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강태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이 배어 있고, 어딘가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그는 사흘 전 외주 사업 건으로 지방 출장을 떠났는데, 예상보다 일을 빨리 마친 모양이었다.<br>-근처 왔다가 혹시나 해서 와 봤어. 얼른 나와. 저녁은 먹어야지.<br>순간, 서윤의 얼굴 위로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횡계에서 돌아온 이후로 태일 앞에서는 미소조차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다.<br>서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밖을 내려다보았다. 태일의 BMW가 건물 앞 주차장에 비상등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보자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요즘 들어 그는 유독 그녀에게 집착하는 기색을 보였다. 예고 없이 인사동으로 찾아오거나, 귀가 시간에 맞춰 확인 전화를 거는 일이 잦아졌다.<br>‘뭐야, 오늘은 왜 또 나타난 거야?’<br>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순간, 마법의 지니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남자가 없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전화를 받은 이상, 건물 앞에 버티고 있는 그를 피해 빠져나갈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br>‘아! 아까 그냥 퇴근할걸!’<br>서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4/pimg_63925806049601791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419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3. 사월의 정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1994</link><pubDate>Wed, 23 Sep 2026 00: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199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명명희 선생은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전쟁 이후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얼굴을 화폭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인물화 세계를 확립했고, 수많은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를 거치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nbsp;<br>‘명명희 인물화展’을 비롯해 국제미술초대전 대상, 한국예술대상, 금관문화훈장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거쳐온 발자취는 곧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명명희 선생의 명성이 높아갈수록 작품은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기 시작했고, 그 위상을 노린 무단 복제와 위작 유통이 암암리에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br>-혹시 선생님 최근작들을 볼 수 있을까요?-아뇨. 작업실은 물론이고, 작품 공개도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가능해요. 괜한 수고를 드린 것 같네요. 계속 전화로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직접 뵙고 설명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어요.-별말씀을요. 제가 먼저 방문하겠다고 부탁드린 거잖아요. 여기까지 오게 되어 오히려 기쁜걸요.-개인전이든 회고전이든 언젠가 다시 준비하게 될 거예요.&nbsp;어머니는 리온 갤러리를 좋아하세요. 상업성도 덜하고, 전시 수준이 품격 있다고요.-고맙습니다. 그래도 뭔가 확실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명 선생님께서 김순자 씨를 많이 의지하시니까요.<br>-최희숙 관장님이 확실한 답을 얻어오라 하신 건가요?<br>김순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br>-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선생님 작품 활동이 궁금해서요. -그렇다면 잠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네?-제 사무실에 어머님의 미공개 작품 몇 점이 있어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거라도 보여드리는 게 도리겠죠.-아, 감사합니다.<br>서윤은 그녀를 따라 1층 한쪽에 마련된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세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두 점은 9년 전 동유럽 스케치 여행에서 그린 풍경과 인물화였고, 정면에 걸린 40호 유화 한 점은 명명희 선생의 기존 화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한, 반추상 계열의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br>일흔을 넘긴 화가의 붓끝은 여전히 힘찼고, 화면에는 노련함과 생생한 상상력이 함께 살아 있었다. 그 그림은 단순한 색채나 형태의 조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적된 이야기와 묵직한 사유가 화면 속에 함께 자리했다.<br>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의 흔적은 보는 이에게 먼 시간의 결을 더듬게 했다. 무거운 색조와 경쾌한 터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섬세한 색의 중첩과 질감은 작가가 화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색채 농도의 부드러운 변화와 곳곳에 드러나는 강렬한 대비는 순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br>그 안에는 자연의 숨결, 인간의 고독, 그리고 생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서사가 녹아 있었다. 노화가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작품 세계와 그 안에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을 떠올리자, 문득 서윤은 자신의 삶이 한없이 가볍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br>왜 하필이면 그 순간, 횡계 숲길에서 헤어진 도준이 떠오른 걸까. 그것은 아픈 진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아닐까. 그즈음의 서윤은 우울한 얼굴로 단조로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끔 태일과 저녁 시간을 함께했지만, 예전처럼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br>마음속에 또 다른 존재를 품게 된다는 건, 하나의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시간과 행동, 언어 습관까지, 도준을 만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 듯했다. 가슴을 저미던 고통은 서서히 희미해졌지만, 일상의 흐름은 무늬 없는 벽지처럼 밋밋해져, 어떤 감정도 쉽게 머물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노화가가 따스한 손길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br>-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br>명명희 작가의 그림 한 점이 봄바람처럼 스며들어 그녀의 마음을 감싸안았다. 미묘하게 흔들리던 숨결이 고요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진정한 예술이란, 이렇게 살아 있는 온기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리라. 서윤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br>-어때요?-정말…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이에요.<br>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br>-볼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보이는 것 같아요.-그런 말 들으니 기쁘네요. 제목은 ‘사월의 정원’이에요. 임시로 붙였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죠?-그렇네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br>서윤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2/pimg_63925718257425734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199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2. 고요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그림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0118</link><pubDate>Tue, 22 Sep 2026 00: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011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명명희 선생은 여전히 건강상의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최희숙 관장은 전시 기획이 예상 밖으로 난항을 겪자, 평소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리온 갤러리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명명희 선생처럼 높은 인지도와 경쟁력을 겸비한 작가의 전시가 절실했다. 그나마 서윤이 김순자와 약속을 잡았다는 소식에, 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듭 당부했다.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라는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br>-최희숙 관장님은 잘 계시죠?-네, 여전하세요. 매일 갤러리에 출근하셔서 모든 일을 직접 챙기시니까요.-그 연세에도 꾸준히 활동하시고, 그런 열정으로 오랫동안 한국 화단을 견인해 오셨잖아요. 참 존경할 만한 어른이세요.-내년 초에는 꼭 명명희 선생님의 초대전을 열고 싶어 하세요. 우리 갤러리만큼 선생님 작품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은 없다면서 강한 의지를 보이셔요.-글쎄요. 우선은 저희 어머님 뜻이 먼저라서요.<br>김순자는 흰 도자기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서윤에게 먼저 건넸다.<br>-다즐링 향이 참 좋네요. 오늘 같은 날엔 특히 더요.-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다즐링에서 나는 홍차라면서요. 어머님이 네팔 여행 중에 사 오신 차가 있어서 한동안 이것만 마신 기억이 있어요.-아, 선생님도 네팔에 다녀오신 적이 있군요. 저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br>서윤은 따끈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비에 젖은 마음결까지 천천히 데워 주었다. 그 향기는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지난봄 횡계의 목요일 오후를 소환했다.<br>–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br>숨어 있던 복병처럼, 내면 깊숙이 눌려 있던 감정의 파편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촉촉이 젖은 검은 눈동자. 초원의 끝에서 한 걸음씩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다즐링의 섬세한 향기를 음미하는 동안, 그녀 앞에는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현실 너머에서 스며든 환영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br>-어머님은 ‘여인의 초상’ 위작 논란 이후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 일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어머니 작품이라며 전시된 그림이 사실은 오래전에 제자가 그린 습작을 본떠 만든 모작이었어요. 그림을 가르치면서 어머니가 직접 몇 군데 손을 봐주셨던 그림이죠. 예전 연희동 작업실에 있던 그걸 누군가 몰래 가져다가, 마치 어머니의 완성작인 것처럼 다시 그려 은밀히 거래한 거예요. 그림을 산 사람이 있으면, 판 사람도 있는 법이죠. 마지막 소장자는 위작 판정으로 그림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았겠죠. 결국 어머니가 늙어서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본다는 누명을 씌운 거예요. 자신의 예술적 진실을 의심받는 화가라니, 그보다 더 잔혹한 상처가 있을까요. 그때부터 어머님은 작품 공개를 멈추셨죠. 벌써 6년 세월이 흘렀네요.<br>김순자의 목소리가 쓸쓸한 파장이 되어 번져갔다. 그 말에 배어든 아픔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br>-리온에서 전시를 열게 되면, 정말 많은 사람이 몰려들 거예요. 명명희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님은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덜 풀리신 거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br>김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서윤은 다시 찻잔을 들어 그리움의 향기를 음미하며, 고요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뜨거운 불씨 하나를 품고 산다는 건, 그만큼의 번뇌와 동거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고통은 영영 아물지 않는 옹이가 되어 의식의 수면 아래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br>-혹시, 또 위작이 발견된 건 아니죠?<br>서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br>-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어느 집 벽 한쪽에, 어머니 그림을 흉내 낸 또 다른 모작이 걸려 있을지도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br>김순자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꺼지지 않은 분노와 어쩔 수 없는 번민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예술이 작품 자체보다 ‘값’으로만 환산되는 오늘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유감을 토로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2/pimg_63925635274170660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011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1. 지도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걷는 듯</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8445</link><pubDate>Mon, 21 Sep 2026 02: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844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6월의 어느 날, 여름 초입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전 근무를 마친 서윤은 한낮의 빗줄기를 헤치며 북한산 기슭에 들어섰다. 차도를 벗어난 숲길 안쪽에는 초록으로 짙게 물든 풍경이 소음을 씻어낸 일상의 여백처럼 펼쳐져 있었다. 엷은 개나리색 트렌치코트에 레인 부츠 차림의 그녀는 큼지막한 암청색 장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br>저택 앞 철문을 지나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자, 작은 아트 갤러리를 닮은 3층 건물이 나타났다. 절제된 선과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건축물은 산속 깊숙이 마련된 누군가의 은밀한 아지트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그곳이 명명희 선생이 오랫동안 은거해 온 거처이자 작업실이었다.<br>서윤이 건물 앞 층계를 올라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불쑥 열리며 선생의 양녀 김순자가 나타났다.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검은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동안 명 선생 안부를 묻는 전화를 주고받고, 인사동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직접 집까지 찾아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br>-어서 오세요.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네요.-오히려 좋았는걸요. 모처럼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즐겼거든요.-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나요?-일러주신 대로 걷다 보니 금방 여기네요.<br>김순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오르는 길목, 표지판의 위치와 주변 건물의 형태, 오래전에 폐쇄된 방범 초소와 버섯 모양의 길쭉한 바위를 지나 서른여섯 걸음쯤 가면, 왼쪽 경사진 찻길 위로 검은 철문이 나타난다는 설명까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치 미리 그려둔 지도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걷는 듯, 서윤은 어느새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의 문턱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br>-자, 들어오세요.-감사합니다.<br>서윤은 우산에 맺힌 빗방울을 탁탁 털어낸 뒤, 문 옆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닫히자 눅눅한 한기가 물러나며, 따스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레인 부츠를 얌전히 벗어 두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br>거실처럼 보이는 넓은 실내는 이상하리만치 비어 있었다.&nbsp;갓 이사를 마친 집처럼 휑했고, 침묵의 결을 따라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홀 중앙에는 소파와 커피 테이블만이 무대 위 소품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고, 집기를 대신할 만한 소품도 거의 없었다.&nbsp;<br>화가의 자취를 연상시키는 물감이나 화구, 이젤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속세를 등진 고승의 선방 같기도 했고, 현대 무용가의 개인 연습실 같기도 했다.<br>-명 선생님은 어디서 작업하시나요?-작업실은 2층에 있어요. 여기는 손님을 맞거나 잠시 쉬는 응접실이고요. -굉장히 깨끗하고 넓어요. 목소리가 울릴 정도네요. -어머니는 주변이 어질러진 걸 아주 싫어하세요.<br>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br>-살다 보면 빈 벽과 빈 자리들이 더 절실할 때가 있잖아요. 여기는 그런 비움을 위한 공간이죠. 자,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네. 이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br>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여기 오는 길에 준비한 다즐링 티와 수제 마카롱 세트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br>-어머, 고마워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br>김순자는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을 받았다.<br>-다즐링이군요.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잠깐만요. 제가 차를 준비해 올게요.<br>곧 복도 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는 검은 옻칠이 곱게 입혀진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는 티팟과 다도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br>차를 우려내는 동안, 서윤은 거실 통유리창 너머 숲 비탈을 바라보았다. 암녹색으로 짙어진 녹음 위로, 희뿌연 빗줄기가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세상과 격리된 듯, 시간조차 다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세계였다. 한 겹의 꿈속 장면 같기도, 오래된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난 순간 같기도 한, 비현실적인 고요가 실내에 감돌았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1/pimg_63925555779121955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844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0. 친구여, 내가 거의 다 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3063</link><pubDate>Fri, 18 Sep 2026 00: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306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nbsp;‘로체 남벽’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상처를 불러왔다. 1989년 가을, 모두의 심장에 새겨진 그날의 기억. 민혁은 그곳에서 추락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br>도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언의 언어로, 그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드러냈다. 민혁을 떠나보낸 슬픔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상실을 넘어서리라 다짐했다. 다시 마주할 그 벽을 향해, 어느 때보다 단단한 결심이 서 있었다.<br>노르부는 에베레스트 길목, 쿰중 마을에서 태어난 셰르파였다. 산과 더불어 성장하며 날씨와 지형, 고소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익혔고, 청소년기에는 라마 사원에서 수행하며&nbsp;심신을 단련했다.  &nbsp;이후 네팔 산악협회에서 정식 훈련을 받고, 수많은 원정대와 함께 히말라야를 누비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nbsp;에베레스트만 해도 열 번을 넘게 오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고산 환경에 적합한 유전적 특성과 반복된 8천 미터급 등반 경험으로, 일반 등반가보다 훨씬 빠르게 고도에 적응하고 극심한 저산소 환경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몸이었다.<br>지금은 파트너와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늘 고산으로 향했다. 산은 여전히 그에게 끝나지 않은 과업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br>-로체 남벽은 악마의 벽이야. 왜 또 거길 오르겠다는 거지?-혼자 해볼 거야.-혼자서? …미쳤군.<br>도준은 고개를 돌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br>-돌았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안 돼, 절대로!<br>노르부는 도준 앞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빼앗듯 자기 앞으로 옮겼다.<br>-노말 루트라면 모르지. 히말라야의 전통적 원정 방식, 셰르파, 쿡, 닥터, 원정대… 함께라면 기적처럼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남벽은, 혼자라면 절대 안 돼.-내년 봄이야. 작년 K2 하산 후 관광성 들어가 등반 허가 받았어.-너희 같은 사람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br>노르부는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br>-왜 자꾸 위험하고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하려는 거야? 히말라야가 무슨 서바이벌 게임장인 줄 알아?-그건 아니지. 그저…-작년 에베레스트 참사, 기억나지? 하산길에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시신들이 눈 속에, 길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지. 아, 왜들 기어이 여기까지 와서 죽는 건데?-노르부, 나도 알아. 객기와 오만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그런데?-나도 눈의 거처에 사는 시바 신이 두렵지. 거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허공의 끝이니까. 그래서 더 정직한 마음으로 그곳에 서려는 거야.-무산소에 혼자라니, 백 퍼센트 자살 행위야.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돈도 안 들고, 고통도 덜해. 그게 훨씬 경제적이지.-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야. 스폰서도 일부러 찾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감당할 거야.-뭐, 후원자도 없어? 등반 자금은 어디서 구할 건데?-그동안 가진 것들, 이것저것 다 팔았어.<br>도준은 노르부 앞에 있던 자신의 술잔을 다시 가져와 맥주를 가득 채웠다. 그때, 주인 여자가 달밧을 담은 식판 두 개를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노르부는 이미 식욕을 잃은 듯,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br>-민혁 때문이지? 그걸 못 잊고 미안해서, 마음에 맺혀서 그러는 거지? 그럼 그만둬. 부질없는 짓이야. -오해 마. 아직 아무도 오르지 못했으니까, 내가 한번 오르려는 거야. 로체가 거기 있으니까, 그게 전부야.<br>도준은 맥주를 들이켜고 손등으로 거품을 닦았다. 알전구를 향해 달려드는 하루살이 떼가 소란스럽게 윙윙거렸다. 뜨거움을 좇는 그들의 본능처럼, 그도 불빛을 향해, 죽음을 향해 겁 없이 돌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br>도준은 어두운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br>‘친구여, 내가 거의 다 왔다. 거기 너무 춥지는 않은가?’<br>하얗게 솟은 히말라야 능선을 배경으로, 민혁의 환한 미소가 바람에 흔들리는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두 번째 도전은 처음과 다를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욱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빛과 어둠, 생과 사가 뒤엉킨 순간에서도, 도준은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피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8/pimg_63925301895865472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306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9. 카트만두의 두 친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1092</link><pubDate>Thu, 17 Sep 2026 00: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109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타멜 거리. 도준은 낯선 이방인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경적과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운 행렬, 향신료 냄새가 뒤엉킨 복잡한 골목 한복판에서 누군가 불현듯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외쳤다.<br>-와, 이게 누구신가?<br>도준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환한 미소를 건네왔다. 훤칠한 키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체격, 웃을 때마다 양쪽 뺨에 깊이 파인 볼우물이 인상적인 노르부였다.<br>-마이 프렌드, 바이!<br>네팔어로 ‘바이’. 형제를 뜻하는 친근한 호칭이었다. 노르부가 도준을 그렇게 부를 때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br>그는 티베트계 셰르파족으로 네팔에서 나고 자란 서른여섯 살의 남자였다.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는 여행사를 직접 운영했는데,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오랜 경력의 고소등반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br>둘은 과거 에베레스트 북서쪽 초오유를 함께 오르며 굳건한 신뢰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당시 노르부는 아홉 명의 셰르파를 이끄는 대장이었고, 등반 루트 결정부터 고정 로프 설치, 피톤 작업까지 진두지휘했다. 정상까지는 무사히 올랐지만, 하산 도중 뜻밖의 눈사태에 휘말렸다. 그때 크게 부상을 입고 쓰러진 노르부를 끝까지 업고 내려온 이가 바로 도준이었다. <br>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목숨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가 자리 잡았다.<br>-내 생명의 은인! 연락도 없이 카트만두엔 언제 온 거야?-오늘 도착했지. 그동안 잘 지냈어?<br>도준이 현지어로 짧게 인사를 건네자, 노르부는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br>-나야 잘 지냈지. 도준, 정말 반갑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스와니가 호텔에 잠깐 다녀오는 길이야. 클라이언트 몇 명이 거기 묵고 있거든. 내일 아침 일찍 포카라행 버스를 타야 해서 전달할 게 좀 있었어.-나는 사흘쯤 파노라마 포인트에 머물다가 루크라로 갈 생각이야. 그런데 저녁은 먹었어?-마침 나도 출출하던 참이야.-그럼 맥주 한잔하면서 같이 먹자. 모처럼 이 동네 로컬 푸드가 당기네.-좋아! 잘됐다.<br>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 따라 걷다가 왼편으로 꺾어 들자 허름한 식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막 아래 듬성듬성 놓인 테이블 위로 낮게 매달린 알전구가 바람에 흔들리며, 낡았지만 묘하게 따스한 정취를 풍겼다. 쌀밥에 렌틸콩 수프와 야채 커리를 곁들인 달밧(Dal Bhat), 그리고 버팔로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모모(Momo)가 이 집의 대표 메뉴였다. <br>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자마자 주인 여자가 마른행주로 테이블을 재빨리 훑듯 닦아주었다. 그들은 네팔 맥주 ‘뚜벅’ 세 병과 달밧 두 개를 주문했다. 주인 여자가 맥주를 먼저 가져다 놓고는 커다란 호박처럼 생긴 오이를 도톰하게 썰어 바구니에 담아 내왔다.<br>노르부는 맥주잔을 가득 채우며 존중과 환대의 뜻을 드러냈다. 그 단순한 손놀림에서 도준은 오래전 눈보라 속에서 맺은 인연을 떠올렸다.<br>-요즘 비즈니스는 어때?-정신없어. 가이드만 여든 명, 포터가 백쉰 명이야.-그 정도면 돈 좀 벌었겠는데?-젠장, 네팔에 돈 쓰러 오는 사람 봤냐? 다들 다른 나라에선 펑펑 쓰고, 여긴 마지막 코스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와선 싸구려만 찾아다닌다니까. 얼마 전엔 일본 애들이 이십 년도 더 된 여행 책자 들고 와서, 왜 이렇게 비싸졌냐고 따지더라. 질렸지, 완전히. 두 손, 팔다리 다 들었어.-힘들겠네. 그래도 얼굴은 훤해 보이는데.<br>도준이 오이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노르부는 픽 웃으며 맥주잔을 다시 채웠다.<br>-루크라는 왜 가는 거야? 이번엔 또 어디로 올라갈 생각이지?-올해는 시등만 할 거야. 추쿵 쪽으로 빠져 로체샬 중턱쯤까지. 그때 컨디션 봐서 임자체도 다녀올지 몰라. 혼자라서 편해.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혼자 정찰 등반을 왔다, 그런 말인가? 진짜 노리는 봉우리는 어디지?-로체 남벽.-뭐라고?<br>노르부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도준을 바라봤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7/pimg_63925202684204385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109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8. 함께 떠날 결심 앞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9059</link><pubDate>Wed, 16 Sep 2026 00: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905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일본으로 떠나기 전, 도준은 오랜만에 사촌 형 집에 머물고 계신 고모부를 찾아뵈었다. 고모부는 환자용 침대에 누운 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전원일기』 재방송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nbsp;<br>퇴원 전보다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건강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nbsp;평생 농사일에 그을린 얼굴은 서울에 온 후로 많이 밝아졌는데, 덕분에 세월의 자국처럼 도드라진 검버섯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br>-서울 물이 좋긴 한가 보다. 그새 시골 땟국물이 쑥 빠진 것 같지 않니?<br>고모부는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낮추며 미소 지었다.&nbsp;목소리엔 여전히 병치레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오래 묵은 삶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br>도준은 어깨에 메고 온 가방에서 서윤이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종합비타민제와 홍삼 캔디를 꺼내놓았다.<br>-이게 웬 거냐?-윗집 살던 아주머니 아시죠? 그분 손녀가 고모부께 드리라며 가져왔어요.-윗집 손녀가? 아이고, 고맙구먼.<br>고모부는 약병을 쥔 손끝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 떨림은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선,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었다. 그 순간 도준은 오래전 윗집 마당에서 목격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br>열세 살의 어느 날, 그는 용천 계곡에서 주운 분홍신 한 짝을 들고 윗집을 찾았었다. 그날, 이해할 수 없는 장면 하나가 그의 삶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말해선 안 될 비밀이라는 감각만이 몸에 먼저 새겨졌을 뿐이었다.<br>전쟁 과부였던 윗집 아줌마는 고모와도 오랜 이웃이었다. 두 사람은 언니와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며 반찬 하나도 나누던 사이였다. 그런 이웃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관계는 소년에게 도무지 믿기 어려운 비밀이었다. <br>그는 차마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발설하지 못했다. 고모가 알게 되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고, 그 은폐된 사건이 결국 비극으로 이어질까 몹시 불안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비밀을 외면한 탓에 하루라도 빨리 기숙학교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br>이제 고모는 세상에 없고, 도준도 더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숨겨온 고모부의 불편한 진실을 한 번쯤 살짝 건드려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불쑥 일었다. 무덤까지 지고 갈 비밀이 아니라면, 고모를 대신해 그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br>-고모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뭔데?-그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거예요.-비밀이라니? 그래서?-옛날에, 윗집 아주머니 젊었을 때, 고모부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그 방에 두 분만 있었죠. 오랫동안.<br>순간 고모부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모부는 충격과 고뇌가 뒤섞인 눈빛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br>-고모도 그걸 알았니?-아셨을까요?-글쎄다.-저는 아무 말 안 했어요. 곧바로 기숙학교로 들어갔잖아요.-왜 숨겼니?-고모가 슬퍼할까 봐서요.-그랬구나. 고맙다.<br>고모부의 ‘고맙다’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비밀을 지키느라 힘들었던 도준의 침묵일까, 자신의 불륜이 고모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일까. 도준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br>-고모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으세요?<br>도준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br>-그분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지. 전의 심방리 뱀골. 거기가 우리 고향이야. 그분은 부잣집 셋째 딸, 나는 그 집안 소작농의 아들이었어. 그분이 시집을 갔고, 전쟁통에 홀몸이 되었지. 내가 횡계로 온 건 그분이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고모를 만난 건 그 이후였지. 두 여자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걸 안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지.<br>고모부가 오래 묻어두었던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한 남자의 노쇠한 목소리에는 사랑과 죄책, 회한과 체념이 얽혀 있었다. 도준은 그것을 단순한 도덕의 잣대로만 가를 수 없음을 직감했다. 평생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온 고모부의 고백은, 그의 삶을 관통한 불가피한 굴레였는지도 모른다.<br>-두 여자 모두를 사랑했나요? 아니면, 고모는 껍데기 사랑만 받은 건가요?-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그분을 보쌈해서 멀리 달아날까 욕심을 낸 적도 있었지. 기차표까지 끊었는데, 네 고모가 마음에 걸려 결국 떠나지 못했어...&nbsp;고모한테는 미안해서 더 잘해줬고, 윗집 그분은 안타까움에 더 많은 걸 베풀려고 했지. 그러면서도 늘 두 여자 모두에게 미안했어.<br>고모를 두고 멀리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니. 도준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고모부는 평생 한 여자를 놓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살아왔다. 윗집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과거에 머물며 그 집을 돌보았다. 도준은 한때 그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고모 몰래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를 원망했고, 오로지&nbsp;고모부만 바라보며 살아온 고모가 안쓰러워 가슴이 저렸다.<br>하지만 지금, 서윤에 대한 갈망 속에서 그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그녀를 향한 벗어날 수 없는 열망이 고모부가 한 여자를 놓지 못한 이유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집안에 얽힌 아픈 사랑의 흔적이 비밀스러운 유산처럼 자신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결국 고모부의 삶을 옭아매고 정의했듯, 언젠가 자신의 삶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규정될 것만 같은 예감.<br>‘나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br>도준은 그 질문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모부와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사촌 형 집을 나서는 그의 머릿속에 ‘사랑인가, 히말라야인가’라는 생각만이 어렴풋이 맴돌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6/pimg_63925184560287562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905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