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김미진의 오후 3시 (김미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소설가이자 화가 김미진의 오후 3시. 소설과 그림, 삶의 기록이 함께 머무는 공간입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21 Aug 2026 10:00:31 +0900</lastBuildDate><image><title>김미진</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15891677826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김미진</description></image><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50. 숨결보다 가느다란 희망 하나를 붙잡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62967</link><pubDate>Fri, 21 Aug 2026 03: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6296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태일의 시선이 쓰레기 봉지 속을 훑는 동안, 서윤은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처럼, 싸늘한 공포가 목구멍 깊숙이 차올랐다.<br>일부러 박박 구겨놓은 듯한 그 종이가 유독 태일의 눈에 띄었다. 결국 태일의 손끝에서 그 노트 종이가 딸려 나왔다. 그는 구겨진 종이를 펴더니,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br>-이게 뭐야?-네? -누구 번호야? 이건 나서윤의 글씨체가 아닌데.<br>서윤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하얗게 변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바르르 떨렸다.<br>-전, 전시회에 관련된 작가 전화번호예요. 명… 명희 씨, 잘 아시죠?-명명희? 알지. 우리 집에도 그림 몇 점 있잖아. 남미 여행 중 그린 거랑,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전시했던 것도 있지.-맞아요. 이번에 초대전을 기획 중이에요. 혹시 후원하실 생각 있어요?<br>태일은 서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불편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br>-그렇군. 나도 명명희 씨 팬이니 기꺼이 돕지.<br>그는 구겨진 노트 종이를 다시 쓰레기봉투 속에 넣고, 봉투째 손으로 꽉 비틀었다.<br>-리온에 전화했더니 화요일부터 휴가라던데, 왜 나한테는 출근한다고 거짓말한 거야?<br>태일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br>-갤러리 일정이 갑자기 바뀌었어요. 돌아가는 길에 명 선생님을 찾아뵈려고요.-오늘?-아니, 내일 뵈면 되죠. 그래서 휴가를 받은 거예요.-그런데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통화만 됐어도 내가 이렇게 바쁜 와중에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미안해요. 청소하다가 전화선이 빠진 줄도 몰랐어요.<br>서윤은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입안이 메말라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br>태일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더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그녀를 향해 불쑥 손을 뻗어왔다. 어색하게 몸을 사리는 그녀를, 그는 노련한 종마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br>-어쨌든 거짓말 한 벌은 받아야지? 안 그래?<br>그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끈적거리는 숨결을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손끝이 닿는 자리마다 피부는 긴장으로 굳어졌고, 뼛속 깊이 불쾌한 감각이 파고들었다.&nbsp;그 깊고 흐릿한 감정의 틈새로, 도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br>-아… 안 돼요. 턱이 아파서 그래요.<br>상처 난 턱을 손으로 감싸며 한 발 물러선 그녀의 눈빛에는, 태일이 끝내 읽어내지 못한 불신과 원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br>-남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 너 때문에 내가 새벽부터 장거리 운전했잖아. <br>태일은 잠시 주춤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집요하게 굴었다.<br>-침대에 가서 좀 쉬자, 피곤을 풀어야지. 잠깐만이라도.<br>자신을 한낱 피로를 풀기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는 뻔뻔함이, 그의 말투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br>‘미쳤어… 제발, 나한테서 떨어져.’<br>그녀는 다시 뒷걸음질했지만 태일은 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서서히 간격을 좁혀왔다. 그 눈빛엔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광기가 번뜩였다. 한 발, 또 한 발 뒤로 물러설수록 벼랑 끝이 가까워지는 듯했다.&nbsp;한 남자의 폭력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현실이 폐쇄된 어둠 속으로 그녀를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br>‘도망쳐야 해. 이 더러운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해.’<br>이를 악물며 속으로 외쳤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했다. 숨결보다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를 붙잡고, 서윤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br>‘하느님, 제발.’<br>그 순간, 시간마저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세상은 끝없는 정적 속으로 잠겨 들었다. 한없는 어둠 속,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손끝으로 붙든 무언의 기도는 끝내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21/pimg_63922880632455605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6296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9.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메모</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60953</link><pubDate>Thu, 20 Aug 2026 05: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60953</guid><description><![CDATA[<br>글·그림 김미진<br>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현관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도준의 차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숨통을 점점 조여왔다. 서둘러 배낭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돌층계를 단숨에 뛰어 올라온 태일이 초인종을 거세게 눌러댔다. 그녀는 피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br>-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턱은 그게 무슨 꼴이야? 어쩌다 다친 거야?<br>집 안으로 들어선 태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br>-그게… 자전거 타다 넘어졌어요.-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이 얼굴로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설 생각이야? <br>태일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br>-무슨 모임이요?-저녁에 아버지 생신 파티가 있어. 금천 강 씨 집안에선 공식 행사나 다름없는 날이지. 아버지가 당신을 친척들한테 소개하실 거야.<br>태일은 손을 내저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br>-이 얼굴 어쩔 거야. 우리 집안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br>신우건설의 강문태 고문은 권위와 겉치레, 가문과 혈통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자본과 권력은 혈연과 지연, 정략적 관계를 통해 치밀하게 축적되는 것이었고, 기성세대의 위신과 위계질서는 그 어떤 의심도 허용되지 않는 불가침의 체계였다.<br>강문태에게 서윤은 결코 아들의 배필로 적합하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는 그의 눈에 서윤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고, 아들이 그런 평범한 여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 도무지 달갑지 않았다.아들의 간청에 약혼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으나, 그 인연이 결국 오래가지 못할 거라 여기며 결혼식을 계속 미룬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혼식을 치른 지 벌써 일 년하고도 육 개월이 지났건만 서윤을 향한 강문태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의심으로 가득했다. 무심한 듯,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독화살 같은 말들은 서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br>-넌 얼굴에 그늘이 너무 많아. 젊은 애가 왜 그런 표정이니? 누가 죽기라도 한 거야?<br>-여자라면 싹싹하고 사근사근한 맛이라도 있어야지. 너처럼 울상은 곤란해. 없는 복도 달아난다니까.<br>실상 그는 이미 한 재력가의 외동딸을 아들의 배필로 점찍어두었고, 그 결합이 가져올 막대한 이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2년 전, 서윤이 짐바브웨 쇼나 조각상을 성북동 집에 배달하지 않았더라면, 태일은 지금쯤 아버지가 택한 여자와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br>약혼 이후, 강문태 고문은 집안의 각종 행사에서 서윤을 배제하며 그녀를 의미 없는 존재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일에게 직접 그녀를 데려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마침내 정식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러나 오늘 밤 생일 파티에서 강 씨 일문 앞에 서야 한다는 중압감보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서윤의 마음을 훨씬 더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br>지금 당장이라도 저 아래 공터에 도준의 차가 멈춰 서고, 그가 현관문 앞까지 자신을 데리러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두 남자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태일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는 항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예리한 남자였다.<br>서윤의 머릿속에서 압력밥솥 꼭지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치솟았다. 공기 입자의 밀도가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태일은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시에 그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화들짝 놀란 서윤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황급히 돌아서서 테이블 주변을 정리하는 척 몸을 피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목소리는 메마른 톤으로 갈라졌다.<br>-아,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예요? 제 기분도 좀… 생각해 주세요.-뭐야? 이건 좀 섭섭한데.-중요한 행사라니 서둘러야겠네요. 거의 다 준비됐어요. 아, 쓰레기통을 안 비웠네요. 태일 씨가 제 짐을 들고 차에 가서 기다리세요. 금방 나갈게요.-쓰레기 정도는 내가 버려줄 수도 있어. 얼른 마저 준비해.<br>태일이 부엌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어젯밤 서윤이 초록색 노트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도준이 전화번호를 적어 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메모였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20/pimg_63922804920009179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6095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8. 너를 만나기 전 100M</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8914</link><pubDate>Wed, 19 Aug 2026 00: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891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그 즈음 도준은 거의 매일 오대산에서 아침 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녀와 약속이 있던 그날은 멀리 가지 않고 집 뒤 야산에 올라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른 아침 흘린 구슬땀은 몸뿐 아니라 마음속 구석구석까지 씻어내는 듯했고, 근육 깊이 배어든 개운함에 전신이 노곤하면서도 뿌듯한 성취감이 차올랐다. 그는 숲속의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매일 정해둔 운동량을 오늘도 어김없이 지켜낸 셈이었다.<br>체력 훈련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그녀와의 약속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br>-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br>그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br> 산길을 툭툭 밟으며 내려오다 보니, 누가 잡아끌기라도 한 듯 발길은 절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파란 지붕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 깊이 설레는 감정이 커져만 갔다. 그녀에 대한 애틋한 심정, 같은 공간에 함께 있고 싶은 갈망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br>그녀가 아직 잠들어 있을지, 아니면 벌써 일어나 아침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는 기대감으로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하지만 무뢰한이 아니고서야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집 현관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그녀 집이 보이는 오솔길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며 스스로를 달랬다.<br>-조금만 기다리면 돼.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잖아.<br>그는 곧 네팔로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벌써부터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와의 인연이 새롭게 펼쳐지자마자 다시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내년 로체봉 등정을 위한 이번 훈련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이토록 깊은 갈등에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br>-세상일이 엇박자가 날 때도 있는 법이지. 오늘은 그저 오늘 일만 생각하자.<br>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읍내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아침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날 아침 도준은 오로지 그녀 생각에만 사로잡힌 채 얼마 후 고모부 집에 도착했다. <br>대청마루의 괘종시계가 9시 종을 울리기 전, 그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몸을 씻은 후 낚시터에서 쓸 물건들을 하나하나 차 짐칸에 실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준비한 샌드위치, 커피, 생수, 잡다한 낚시용품들. 마지막으로, 그는 방으로 들어가 낡은 상자 안에 오랜 세월 고이 간직해 온 분홍신을 꺼내 왔다.<br>-후… 결국 이런 날이 오게 된 거로군.<br>도준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번졌다.&nbsp;<br>용천 계곡 근처에, 동네 사람들만 드나드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nbsp;오늘 오전, 도준은 서윤을 그곳 낚시터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어린 시절 익사 사고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오래 묻어둔 공포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일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무서운 것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할 생각이었다. 물 공포증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br>약속 시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준은 횡계 읍내 낚시 가게에 들러 민물 전자찌와 밑밥 파우더 세트를 사고 나서, 서윤이 있는 파란 지붕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숲속 비포장도로를 따라 녹슨 철조망과 배수로가 듬성듬성 이어지고, 양계장에서 흘러나온 닭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br>음악이나 들을까, 생각하며 라디오를 켜려던 그때였다. 검은색 BMW 한 대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거칠게 끼어들더니, 도준의 랜드로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전면 유리를 덮치자, 도준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간발의 차였다. 이쪽에서 멈췄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br>-대체 무슨 운전을 저렇게 하는 거야…<br>도준은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br>‘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br>도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앞으로 계속 가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좁은 산길만 이어질 뿐이었다. 길 한쪽에는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게 얽혀 있었고, 그 속에 오래된 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br>‘이곳은 막다른 길입니다. 돌아가시오.’<br>빛바랜 글씨는 거의 다 지워졌지만, 거뭇하게 남은 경고문의 흔적이 음습한 기운을 뿜어내며 상서롭지 않은 부적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br>운전자가 초행길이라 표지판을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듯, 이상하리만치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길 끝에 서윤의 파란 지붕 집이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br>누군가가 일부러 그 집을 찾아온 것이라면, 도대체 그 정체는 누구일까. <br>방금 스쳐 지나간 BMW의 운전자는 신사복 차림의 남자였다.<br>-저는 약혼자가 있어요.<br>서윤이 어제 했던 말이 번갯불처럼 떠올랐다.<br>-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br>서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nbsp;그 검은 차량이 단순히 길을 잘못 든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br>‘설마, 그녀의 약혼자?’<br>그런 의문이 떠오른 순간, 운전대를 쥔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차를 움직일 수 없었다. <br>조수석에 놓인 분홍색 신발 한 짝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전 주인을 잃은 그 신발은,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장막에 가려진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위협과 불확실한 추측들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마음을 쪼아댔다.<br>‘과연 내가 원하는 게 단순히 신발을 돌려주는 것뿐일까?’<br>어쩌면 오늘은 그 신발이 제 임자를 찾아가는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두려운 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그는 아픈 진실을 안고 돌아서야 할지,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채, 혼자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무언가 자신의 등을 밀어내는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이승 저편에 아득하니 솟아 오른 로체 남벽이 떠올랐다. 자아의 한계를 시험하고, 불가능을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곳.<br>‘나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br>짧고도 치명적인 물음이 심장 가장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정답 없는 가설, 확신할 수 없는 명제들.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오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윤은 그에게 끝없는 추측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허공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자일과 같았다.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목덜미 주위를 차갑게 감쌌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운명의 시험대. 얽히고설킨 위태로운 줄에 의지한 채, 더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듯했다.<br>도준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차를 오솔길 옆에 천천히 세웠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마른 낙엽 하나가 차창 귀퉁이에 매달렸다. 파르르. 애잔하게 떨리는 그 나뭇잎을 바라보는 동안, 불길한 상상이 자꾸 떠올랐다.<br>그는 운전대를 꽉 움켜쥔 채 뚫어질 듯 정면을 응시했다.<br>-길을 잘못 들었을 거야. 돌아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br>입속말로 낮게 웅얼거리며 마음을 다독였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9/pimg_63922697578646225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891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7. 유리구슬과 가장 잔혹한 미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6915</link><pubDate>Tue, 18 Aug 2026 02: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691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어젯밤, 도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심장이 타들어 갈 듯 괴로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 그녀는 거의 숨도 쉬지 못했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기 전에 그나마 제정신을 찾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녀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br>-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br>그녀의 말에 순간 고통의 그림자가 일렁이던 그의 눈빛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러나 그는 곧 떠날 사람, 나는 이 현실 속에 남을 사람 아닌가. 이미 정해진 길 위에서 어설픈 유혹과 날것에 가까운 본능에 휘말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깊은 회한과 상처뿐이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br>-그래, 낚시터까지만 가자. 오늘이 지나면 다 지난 얘기가 되는 거지.<br>그녀는 전화 플러그를 다시 꽂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br>한동안 진공청소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안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기다림은 차갑게 식은 커피잔 속 침묵이자, 스스로를 시험하는 고요한 형벌이다. 시간은 황소 걸음처럼 느릿느릿 움직였고, 벽시계의 초침만이 째깍거리며 초조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청소기 선을 정리해 보관함에 넣고, 노트북을 접어 배낭의 짐 정리까지 마친 그녀는 가끔 창밖을 내다보며 그의 차가 집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br>마침내 저 멀리서 묵직한 자동차 소리가 숲속의 아침 정적을 가르며 다가왔다. 벽시계는 거의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낚시터에 들렀다가 곧장 서울로 돌아갈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br>-겨우 5분 먼저 온 거야? 흥, 그렇게까지 딱 맞춰올 일이냐고. <br>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는, 모처럼 소풍을 앞둔 어린 여학생처럼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급하게 헹궈 식기 건조대에 엎은 뒤, 핸드백과 현관 열쇠를 챙겨 들었다. 그 사이 자동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br>-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그만. 그만…<br>손바닥으로 가슴을 다독이듯 툭툭 치며 말했다. <br>가슴속에서 꿈틀대던 설렘을 억누르며 창가로 다가서던 순간, 귓가를 파고든 뜻밖의 엔진음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br>‘뭐지? 그 차가 아니야?’<br>도준의 낡은 랜드로버와는 결이 다른, 매끄럽고 단단한 울림이었다. 순식간에 실내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따스한 온기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br>기다림은 때때로 마지막까지 우리의 마음을 유리구슬처럼 쥐고 흔들다가, 가장 빛나는 순간, 가장 잔혹한 미소로 모든 희망을 짓밟곤 한다. <br>그날 아침, 서윤은 현실이 들이민 느닷없는 형태의 맨얼굴과 마주쳤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던 차는 아침 내내 기다린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가 아니라, 서울에 있어야 할 태일의 최신형 BMW 7시리즈였다.<br>-아악!<br>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에서 현관 열쇠가 툭, 떨어졌다. 온몸에 미세한 떨림이 번지기 시작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불안하게 흔들렸다. 별장 앞 공터에 검은 흉조 한 마리가 내려앉은 듯 살얼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세상의 끝에서 시곗바늘조차 멎은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한 순간이었다.<br>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태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무기력한 권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무심하고도 싸늘한 시선으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쪽 끝이 말려 올라가듯 일그러진 그 입매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과 함께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br>태일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마음 편하게 한 적이 없었다. 차갑고 빈정대는 말투와 고압적인 태도의 저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과장된 호의는 친절이라기보다 오히려 덫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는 자신의 여성성을 조롱하고 무너뜨리려는 음험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br>평소 태일에 대한 경계심을 품고 몸을 사려왔던 서윤에게, 그의 돌연한 출현은 숨이 막힐 듯한 악몽과도 같았다. 잠시라도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챈다면, 그 순간 발밑에서 지옥문이 벌컥 열릴 것임을 그녀는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br>서윤은 거친 숨을 고르며 두려움을 눌러 보려 애썼다. 곧 도준이 데리러 올 시간이었고, 그의 랜드로버가 금세 별장 앞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거대한 벽, 그 중심에는 태일이 서 있었다. <br>왜 그는 이곳에 나타난 걸까. <br>무엇 때문에 갑자기 오게 된 것일까.<br>어젯밤 제이와 나눈 전화 통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태일은 제이에게 서윤의 행방을 물었다고 했다. 그녀가 횡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제이였다. 그가 이 시간에 횡계에 닿으려면 적어도 새벽 7시 이전에는 성북동을 떠났어야 한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은 분명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br>‘나를 데려가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걸까?’<br>삶의 실체는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몰아치곤 한다. 그것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혼란이자, 인생의 거대한 크레바스였다. 그날 금요일 아침, 서윤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한층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8/pimg_63922679793618768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691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이 몰락]46. 나는 상상 속 누군가와 춤을 추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5047</link><pubDate>Mon, 17 Aug 2026 02: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504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아침 여덟 시가 막 지나서야 서윤은 눈을 떴다. 지난밤, 처음 만난 남자의 전화번호 하나를 두고 한참을 실랑이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으니, 그리 오래 잠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햇살이 흘러내리듯 얼굴을 어루만지자, 뒤엉켰던 자책과 갈등이 희미한 신기루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팔과 다리를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br>아아-  &nbsp;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따라 거실로 내려갔다. 맨발로 마룻바닥을 디딜 때마다 미세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솟구치는 즐거움이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스토브 위에 물 주전자를 올리고 라디오를 켰다.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레게풍의 경쾌한 선율이 넘실거리며 집 안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br>그녀는 고양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듯 양팔을 둥글게 벌리며 가벼운 스텝을 밟았다. 햇살 가득한 아침, 새봄의 청량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즉흥적인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빙글빙글 돌아가던 그녀는 어느새 상상 속 누군가와 춤을 추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nbsp;  그 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양가의 허락 아래 약혼식을 올린 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그녀의 삶 속에 스며든 낯선 이였다.<br>신우건설의 후계자, 무엇이든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판단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강태일이라면, 이 순간을 두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냉소 어린 눈빛으로 비웃듯 한쪽 입술을 비틀며, ‘나잇값 좀 하라’는 쓴소리를 던졌으리라. 나잇값과 댄스의 함수관계는 과연 어디까지 무관한 것일까. 이 환히 밝고 유쾌한 순간마저, 유치하고 철없는 치기라며 가볍게 깎아내렸을 것이다.<br>반면, 길 위에서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걷는 남자, 도준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그녀를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마음속으로는 함께 발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들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설렘에 주저 없이 동조해 주지 않았을까.<br>그녀는 불현듯 몸을 돌려 식기 건조대 위에 엎어둔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어제 도준이 커피를 마셨던 바로 그 잔이었다. 그의 입술이 스쳤을 자리에,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짧았던 입맞춤의 감촉이 입술 끝에 되살아나며, 달콤한 부끄러움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br>-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br>도준이 남기고 간 말이 다시금 귓가를 맴돌았다. 오늘이 그와 함께할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가슴 어딘가가 텅 빈 듯 허전해졌다.<br>그녀는 스스로의 변화를 절감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찾아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준은 처음부터 다른 존재였다.&nbsp;<br>그를 향한 이 갈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새로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 이 설레는 마음이 낯설어서 나 자신의 경박함을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시라도 그의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는 간절함을 지울 수 없었다.&nbsp;<br>그녀는 지금 상황을 가벼운 접촉 사고라 여기고 싶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려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고요하고 정돈된 삶의 가치를 지켜내리라, 이번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잘 지나가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br>-잠깐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될 거야.<br>‘바람’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그녀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처럼 떠올랐다.  &nbsp;  멀리 보리암에서 울려 퍼진 웅장한 타종 소리가 아득히 번져왔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씩 음미하며 포크로 달걀물을 젓기 시작했다. 햄을 썰어 넣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아침부터 기름진 냄새는 내키지 않았다. 좀 더 부드럽고 간소하게 먹는 게 위장에도 편할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빈 접시를 싱크대에 옮기려는데, 한 가지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br>‘낚시터에서 보여 줄 게 있다고 했지… 그게 뭘까?’<br>그 남자는 순간의 기분에 휩쓸려, 혹은 궁색한 변명 삼아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혹시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하필 낚시터여야만 하는 거지. 정작 중요한 것은 ‘보여 줄 무엇’이 아니라, 어쩌면 ‘낚시터’라는 장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생각은 자꾸만 얽혀 갈 뿐, 단 하나의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br>-에잇, 청소나 하자.<br>그녀는 마음에 남은 의구심을 털어내고 서둘러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릇을 모아 설거지를 마친 뒤, 행주를 빨아 싱크대 주변과 테이블 위를 닦았다. 청소기를 돌리려던 찰나, 전화 단자에서 뽑아 놓은 전화선이 눈에 들어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7/pimg_63922528517292182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5504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5.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9906</link><pubDate>Fri, 14 Aug 2026 04: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990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흠칫 놀란 도준은 그 자리에 멈춰 서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남녀가 뒤엉킨 듯한 격렬한 숨결과 흐느낌이 한낮의 정적을 흔들었다. 어린 소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몸은 떨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br>도망치듯 뒷걸음질하며 그 집을 벗어난 도준은 울타리 근처의 오래된 느티나무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이 한동안 흐른 뒤, 도준은 고모부가 윗집 아줌마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고야 말았다.<br>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는 고모부의 행동은 어렴풋이 금지된 행위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일하는 시장에서 옆집 옷가게 부부가 칼부림까지 하며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아저씨는 찢어진 메리야스 바람에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냅다 줄행랑을 쳤고, 아줌마는 산발한 머리로 시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서럽게 대성통곡을 했다.<br>엄마는 옆집 가게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걸려 저런 사달이 난 거라고 말했다. 한 번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자는 영원히 남편을 믿지 못하고,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이 도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고모도 그 옷가게 아줌마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br>곧 들통날지도 모를 비밀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도준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사실로 인해 한동안 마음 깊이 괴로워했다. 몰래 주위를 살피던 고모부의 모습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그때 들었던 윗집 아줌마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br>경기도의 어느 기숙학교로 떠나기 전날에도 그랬다. 도준이 방 안에서 짐가방을 꾸리고 있을 때, 고모는 책꽂이 위에 놓아둔 여자아이의 샌들을 보며 누구 거냐고 의아해했다. 고모부의 외도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끝내 입을 다문 것은, 단지 어른들의 세계에 감춰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겁이 났다. 고모는 그의 유일한 친족이자, 부모를 대신한 보호자였다. 그런 고모가 죽을 때까지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채 불행 속에서 살아갈까 봐, 도준은 몹시 두려웠다.<br>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모부는 늘 고모에게 다정했다. 바람난 남자들이 아내에게 더 자상하다는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고모부의 태도는 전혀 가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그는 가정에 책임을 다하는 남편이었고, 고모는 그런 고모부를 믿고 존경했다.<br>-내가 뭔가 잘못 본 걸 거야.<br>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때의 일을 애써 외면했다. 결국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나면서, 그날의 모든 비밀은 분홍신 한 짝과 함께 어둠 속에 묻혔다.<br>요즘 들어, 도준은 한 개인의 인생 끝자락에 남은 ‘그리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우리가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 그리움마저 함께 사라지는 걸까. <br>10여 년 전, 윗집 아줌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모부는 그 집의 울타리를 들락거리며 관리인 노릇을 자처했다.&nbsp;윗집 아줌마에 이어 고모마저 세상을 떠났지만, 고모부는 모두가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며 추억의 자취를 따라 망각의 그림자 속을 거닐었다.<br>윗집 아줌마는 고모부에게 어떤 의미의 사랑이었을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자 피할 수 없는 과보를 겪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무게를 과거에서 현세로, 다시 미래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br>그렇게 과거의 뜨락에서 텅 빈 그림자를 응시하며 외따로 서 있는 고모부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왠지 모르게 애잔하고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고모부의 뒷모습에 드리워진 생의 쓸쓸함을 마주할수록, 그 어떤 비밀도 발설하지 않고 그때 서둘러 고모 집을 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새삼 느껴진다.<br>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고모에 대한 미안함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그러나 늙고 병든 고모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요즘,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나누어왔던 두 사람의 사랑 역시 진실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토록 가슴에 품을 만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내는 인생 또한 그만큼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br>도준은 그 집 손녀딸인 서윤과 자신 사이의 오랜 인연을 곰곰이 되짚었다. 이 분홍신 한 짝에 윗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비밀스러운 사랑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가 막히면서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는 설렘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br>오늘 밤, 도준은 고모부 집 창고에서 오랜 세월 먼지에 덮여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었다. 이제 그 신발을 원래 주인인 서윤에게 건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고모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비밀을, 굳이 서윤에게도 모두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어쩌면 고귀한 보석처럼 드러낼 때보다 속으로 간직할 때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진정한 보석의 가치는 무수한 비밀들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4/pimg_63922279932833957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990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4. 분홍신의 비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7816</link><pubDate>Thu, 13 Aug 2026 04: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781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어린 소녀의 분홍색 샌들은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고 있다. 도준은 지금도 계곡물에 떠밀려 내려왔던 그 신발을 처음 발견했던 때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nbsp;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전 학년이 모두 운동장에 모여 방학식을 치른 후, 학생들은 교실에서 담임선생으로부터 방학책을 나눠 받았다. 선생님은 방학 숙제를 모두 해서 2학기 개학식 날 일기장과 함께 제출하라고 말했다.<br>-개학하면 방학책에 있는 문제로 시험을 볼 거야. 방학 동안 놀지만 말고,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하도록. 모두 알겠나?<br> -네.<br> <br>아이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br> <br>-매일매일 쓰는 일기를 미뤘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쓰면, 날씨를 알 수 없지. 그럼 한꺼번에 쓴 일기는 어떻게 될까? 뽀록날 수밖에 없다.<br> <br>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nbsp;  그날은 잠시나마 학교 울타리에서 해방되는 초등생들의 독립 기념일이기도 했다. 학급 종례가 끝나고 청소 시간까지 마친 아이들은 각자 책상 속을 정리한 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다. 도준도 다른 애들과 함께 교문을 나섰지만, 그 순간 집도 보호자도 없이 홀로 남겨진 듯한 공허함에 빠져들었다. <br>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었다. 아이들에게는 기쁨의 계절이었지만, 도준에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없는 상실의 계절이었다. 고모네 가족이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엄마가 직접 밥상을 차려주던 서울 집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무엇보다 다시는 양친을 볼 수 없다는 슬픔과 비애가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그의 의식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br>여름방학이면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산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수박을 베어 물던 일, 정상 높은 바위 위에서 함께 외치던 ‘야호!’, 약수터를 찾아 거친 풀숲을 헤치며 아버지보다 먼저 길을 내던 순간, 잔소리 속 인자한 웃음소리…. <br>기억은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제 그런 기적 같은 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그는 너무 일찍 깨닫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부모님을 잃은 상실감이 속살 깊이 파고드는 동안, 그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용천 계곡으로 향하고 있었다.<br>여름 숲속에는 초목의 냄새가 짙게 진동했다. 초록으로 물든 오솔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거친 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는 물줄기 아래, 무언가 바위틈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며칠 전 그 소녀가 잃어버린 샌들 한 짝이 분명했다. 에나멜로 코팅된 신발은 햇살 속에서 반들거리며 선명한 분홍빛을 드러냈고, 물속에 처박히지 않은 덕분에 흠집 하나 없이 새것처럼 빛났다. 도준은 그것을 손에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br>‘이걸 돌려줘야 할 텐데.’<br>하지만 더 이상 소녀를 만날 수 없게 된 터라, 결국 그 신발을 윗집 아줌마를 통해 전해주기로 결심했다.  &nbsp;  고모에게 모든 진실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학교를 빼먹고 용천 계곡으로 놀러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크게 꾸중을 듣고, 회초리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영웅담처럼 들릴 것이 뻔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가 더 깊은 추궁과 불신으로 내몰릴 게 분명했다. 고모에게는 오히려 궁색한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었다.<br>기분 또한 그때 일로 싱숭생숭했다. 꼬맹이 여자아이에게 입을 맞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비록 인공호흡을 위한 일이었지만, 소년 도준에게는 그것이 생애 첫 입맞춤이었다. 사람은 생의 어느 순간 처음으로 이성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일까. 누구나 그런 설렘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면, 도준에게는 바로 그때가 첫 순간이었다. <br>그 아이도 그런 묘한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을까. 그래서 일부러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했던 건 아닐까. 그런 발칙한 상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혼자 행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nbsp;  ‘윗집에 가서 신발만 살짝 놓고 돌아오자.’<br>어른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윤에게 큰할머니가 되는 윗집 아줌마는 과부로 혼자 살고 있었다. 단정한 옷맵시와 고운 외모가 인상적인 40대 후반의 여인으로, 고모와도 자주 오가며 음식을 나누는 가까운 이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윗집 아줌마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br>산간 지방의 농사꾼 마을에 사는 다른 아낙들과 달리, 그녀는 곱상한 말투와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세련된 기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고모는 윗집 아줌마가 유복한 가문의 자손이자 대도시에서 여학교까지 마친 신여성이라고 말했다. 22년 전, 그녀의 집은 평범한 시골집이었지만 마당 한쪽에 잘 가꾼 꽃밭이 있었고, 싸리나무 울타리 주변도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nbsp;  13세 도준은 분홍신을 싼 신문 뭉치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저기요, 아주머니 계세요.’ 하고 작게 부른 건 도둑처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댓돌 위에 놓인 큼지막한 검정 고무신이 도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왼쪽 고무신에 찍힌 낫 자국이 왠지 모를 기시감을 자아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3/pimg_63922200709239450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781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3. 그날 밤 전화가 연결되었더라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5806</link><pubDate>Wed, 12 Aug 2026 01: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580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고모와 고모부가 한 시대를 살았던 그 집의 뒷마당에는 외양간을 개조한 작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각종 농기구와 오래된 잡동사니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는 곳이었다.<br>그날 밤, 도준의 그림자가 창고 안 선반 사이에서 한동안 이리저리 움직였다. 구석구석 쌓여 있는 상자와 보따리들을 들출 때마다 손끝에서 먼지가 흩어졌다. 그는 바스러질 듯 삭은 상자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보았다.<br>-분명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br>어둠 속을 오가던 손전등의 노란 불빛이 마침내 선반 구석의 작은 상자 앞에서 멈췄다.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연 도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br>-찾았다. 여기 있었네.<br>상자 안에는 어린이용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오래전 그 여름의 햇살과 바람, 어린 서윤의 발자국을 그대로 담고 있는 신발 한 짝. 도준은 그 작은 샌들을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br>- 고모가 이런 걸 버릴 리 없지.<br>오래전, 용천 계곡에서 마주쳤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떠내려가는 신발을 좇다 물살에 휘말린 작은 몸, 급류 속에서 끌어올린 아이는 젖은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그의 셔츠를 꼭 붙든 손은 유백색 꽃잎처럼 창백했다. 그 차갑고 여린 감촉이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br>-이번엔 내가 구했어.<br> <br>소년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며칠 뒤, 도준은 계곡 아래에서 물살에 떠밀려온 분홍신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이미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도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 집을 나와 기숙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날은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br>도준이 짐을 싸고 있을 때, 고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속옷과 밑반찬을 챙겨 주던 고모의 시선이 책꽂이로 향했다. 거기에는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고모에게 그것은 이 방 안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퍼즐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br> <br>-저거 뭐야? 웬 샌들을 모셔둔 거야?-새 신발이잖아요. 나중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요.-아주 작은데? 누가 주인인데?-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 여기 없다고, 제 물건 막 버리진 마세요.<br>도준은 왠지 시무룩해 보였다.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 속에 불안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nbsp;집을 떠나기 싫어 그런 것이라 생각한 고모는 어린 조카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br>-괜찮아. 금방 방학하면 또 볼 텐데. 우리 준이,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들면 바로 연락하고. 이 고모가 당장 쫓아가서 해결해 줄 테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br>그해 여름, 용천 계곡에서 제짝을 잃어버린 그 분홍신 한 짝은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난 뒤 줄곧 이 창고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수많은 사연과 수수께끼 같은 세월을 지난 끝에, 마침내 오늘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제 분홍색 샌들은 진짜 주인을 향한 길목에 놓여 있었다. 오래전에 묶인 매듭 하나가 스르르 풀리려는 중이었다.<br>이 샌들을 돌려주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어떤 말로 그날 있었던 익사 사고에 관해 설명해야 할지, 우리의 인연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기적 같은 우연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다. <br>그녀가 벌써 약혼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머리 한쪽에서는 그녀와의 인연이 내일까지겠구나 싶으면서도, 세상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br>‘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br>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를 로체 남벽 등정을 앞두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로 기이한 일일 수도 있었다.<br>도준이 신발 상자를 들고 창고에서 나오자, 집 내실 쪽에서 희미하게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br>-누구지?<br>그는 장독대 앞을 지나 대청마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혹시 청소 용역회사 대표인 최윤 선배일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도준이 댓돌 위에서 신발을 벗으며 손을 막 뻗으려는 순간, 벨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묵직한 캔디바 형태의 노키아 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들여다보았다.<br>-어이쿠, 전화했으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안 받으면 또 걸겠지.<br> <br>하지만 벨 소리는 끝내 다시 울리지 않았다. 당시는 방금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도준은 그 전화가 서윤에게서 온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br>다시 생각해 보지만, 그날 밤 전화가 연결되었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 분홍신 한 짝은 단순한 추억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제 분신의 또 다른 한 짝을 향한 인연의 닻줄이자, 먼 여정을 품은 상징적 매개체였다. 하지만 그 신발을 찾느라 창고에서 시간을 지체한 탓에 결국 그녀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분홍신은 어쩌면 두 사람을 두고 벌이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br>도준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손에 들고 있는 신발 상자만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일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는 동안, 깜짝 선물처럼 이 분홍신을 건넬 수 있으리라.<br> <br>-이 신발이 오랫동안 우리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br> <br>그런 낭만적이고도 의미심장한 한마디쯤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물에 대한 두려움은 그날 익사 사고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더는 물에 빠지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때의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br>그렇게 용천 계곡의 개울가에서 시작된 인연은 스물두 해를 넘어 다시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녀와의 두 번째 입맞춤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 아닐까.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라 해도, 그들의 관계는 어떤 현실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분홍신 한 짝은 두 사람의 운명이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작고 소중한 증표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2/pimg_63922096390830097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580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2. 네 번째 벨이 울리려던 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3848</link><pubDate>Tue, 11 Aug 2026 00: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384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아니다. 처음부터 그녀의 신경줄은 온통 그 노트에 쏠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층 테이블 위에 놓인 스프링 노트는 이미 그녀의 의식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기에, 마음은 내내 불편했고, 스스로를 애써 다독이기만 했던 건 아닐까.<br>결국 다시 거실로 내려간 그녀는 그 초록색 노트를 집어 들었다. 종이의 결을 더듬듯 한 장 한 장 넘기던 끝에, 마침내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숫자와 마주했다. 그는 이 집을 나서려다 무슨 마음으로 이 번호를 남긴 걸까. 단순히 필요할 때 돕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은, 차마 언어로는 옮길 수 없었던 은밀한 그 무엇이었을까.<br>부엌 옆에 걸린 전화기가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거운 침묵 속, 지금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br>–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br>‘전화하자.’ <br>그 단어 하나가 강박처럼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온몸에 열기가 솟구쳤다. 그건 비상식적이면서도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근거 없는 망상이 꼬리를 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br>-내가 전화를 걸겠다고? 말도 안 돼.<br>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울렸다. 노트에 적힌 숫자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알 수 없는 기대와 초조함을 느꼈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이 밤중에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필요한 게 있다고 해놓고, 말끝만 흐린 채 전화를 끊을 게 뻔했다. 그리고 나중엔 자신의 바보 같은 말투와 변명을 떠올리며 몸서리칠 테지. 그녀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br>'오늘 하루…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내게 이상한 바이러스라도 침투한 거야?'<br>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들끓었다. 노트를 번쩍 들어 올려 마구 흔들다가, 결국 항복하듯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끌림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본능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에 굴복하는 사람처럼.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숫자 열 개를 천천히 눌러갔다.그 남자가 있는 그곳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기 시작했다.<br>두드드드.<br>전화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울어댔다. 벨이 울릴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곤두섰고, 정수리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꽂히는 듯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심장 속 어딘가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큰 파도가 일렁였고, 숨결마다 공기가 묵직하게 떨렸다. 그 전화벨 소리는 세 번의 심판, 세 번의 운명처럼 거침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br>마침내 네 번째 벨이 울리려던 순간, 참을 수 없는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nbsp;그녀는 저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수화기를 내던졌다.&nbsp;다급히 전화 플러그마저 뽑아버렸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br>-안 돼. 나 진짜 이상해졌어.<br>그녀는 노트를 펼쳐 번호가 적힌 페이지를 와락 뜯어내고, 주저 없이 박박 구겨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란 듯,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에 남은 격렬한 감정의 잔해 속에서 미련과 후회의 잔상이 어른거렸다.<br>쓰레기통 속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그녀를 조롱했다.<br>‘못된 것… 전화 걸고 싶지? 걸어라, 어서.’ <br>그녀는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환청처럼 되풀이되는 그 소리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숨 막히는 본능의 폭주를 억누르며, 결국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1/pimg_63922005997043887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384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1.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2153</link><pubDate>Mon, 10 Aug 2026 02: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215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밤이 깊어가자 별장 주변은 짙은 물감이 뿌려진 푸른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작업에 몰두할 때도, 뜨거운 녹차를 홀짝일 때도 마음 한 가닥은 늘 창밖 어둠에 닿아 있었다.<br> 어수선한 심정으로 욕실 거울 앞에서 이를 닦고 있는데,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설렘이 밀려왔다. 도준의 구릿빛 얼굴과 그 짜릿한 입맞춤이 가슴을 조이듯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제이였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br>-숨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전화 받으려고 뛰어왔어. 근데, 무슨 일이야?<br>서윤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br>-오늘 서울 온다더니, 왜 거기 있는 거야?-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지.<br>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br>-무슨 일? 지붕 공사 대금은 오늘 준다며.-그게 다야. 빨리 말해. 지금 전시 기획안 정리 중이니까.-거기서도 일해? 좀 쉬어라, 쯧쯧.-제발 말해. 무슨 일이냐고.-태일 씨가 너 어디 있냐고 전화했어.-혹시 나 횡계 갔다고 했어? 그러지 말지.-참! 휴가받았다는 말 안 했다고 했지? 근데 그 남자, 좀 이상해. 자기 약혼녀가 서울에 없다는데 왜 나한테 짜증을 내?-그 사람 원래 말투가 그래.-그럼 너는 그 짜증을 매번 받아 주는 거야?-그건 아니야… 미안. 대신 사과할게.-어쨌든, 난 그 남자 밥맛이야. 완전 재수탱이야.<br>제이가 태일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서윤이 그와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부터 툴툴거리며 쓴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녀가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서울로 돌아갈 거라고 하자, 제이는 단호하게 말했다.<br>-무조건 우리 사무실로 와. 불금이잖아. 닭꼬치에 생맥 하나씩은 해야지.-알았어. 가능하면 들를게.<br>전화를 끊고 나자, 공허함이 밀려왔다. 한 주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고, 휴가가 별다른 성과 없이 허무하게 끝나가는 듯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녀는 잠시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파일을 열고 작업을 시작했지만, 정신은 이미 화면 밖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br>깜빡이는 커서는 밤의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불빛처럼 눈을 찔렀고, 숫자와 문장들은 행간 속에서 부유하는 암호처럼 의미를 잃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손을 멈췄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와 화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노트북을 쾅 닫았다.<br>도준.<br>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는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이토록 끌려도 되는 걸까. ‘정신 나갔어.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한순간에 흔들리다니…’ 그러나 생각은 마법의 콩나물처럼 끝없이 자라났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들. 불면증 환자가 잠들기 위해 잠을 내려놓아야 하듯, 강박증 환자가 생각의 루프에서 벗어나려면 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녀도 이 뒤숭숭한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작은 파동이 꿈틀거렸다.<br>도준.<br>손등을 스치던 그의 손길, 귓가에 느껴지던 따뜻한 숨결, 느릿하게 퍼져 가던 낮은 목소리. 모든 순간이 가슴 저릴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얼굴은 흐릿했다. 눈과 코, 입의 생김새를 떠올리려 애쓸수록, 뿌연 목탄화처럼 희미한 윤곽만 남았다.<br>그녀는 이층 침실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의식은 오히려 더욱 명징하게 깨어났다. 흩어진 이미지들이 만화경 속 유리 조각처럼 어지럽게 맴돌았다. 기억과 감각이 뒤엉킨 혼돈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br>-어머, 이게 뭐야? 미친 거야? 나 정말 진심인 거지?<br>무대 위에서 독백을 쏟아내는 배우처럼, 그녀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차분히 누워 있는 일조차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집 안을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층계를 내려가 거실과 손님방을 휙 둘러보고, 화장실 문을 밀어젖힌 뒤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침대 매트리스에 몸을 던지며 허공을 향해 두 발을 마구 차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0/pimg_63921927101028503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4215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40. 내일 낚시하러 가실래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6655</link><pubDate>Fri, 07 Aug 2026 00: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665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그가 다가와 테이블 위의 펜을 집었다.<br>–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br> <br>마땅한 메모지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초록색 스프링 노트를 펼쳐 여백을 내밀었다. 그는 약간 비스듬한 필체로 휴대폰 번호 열 자리를 또박또박 적었다.<br>–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저는 도준입니다.–아... 저는 나서윤이에요.–서윤... <br>그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굴렸다.  &nbsp;  –이름이 참 곱네요. 무슨 뜻인가요? –빛나다, 윤이 나다, 그런 뜻이에요.<br> –그렇군요.<br> <br>그의 눈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br> <br>–당신 이름은 햇살이 비치는 물결 같네요. 고요하면서도 반짝이는.<br> <br>그의 표정에도 잔잔한 빛의 파장이 일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던 이름이었다. 용천 계곡, 젖은 몸으로 바위 위에 누워 있던 어린 소녀.<br>‘서윤아!’<br>그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사람들의 발소리.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자,&nbsp;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애수에 가까운 울림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 공명했다.<br>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서로를 바라보던 영원처럼 짧은 침묵.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스물두 해 전, 계곡물에 빠진 소녀의 폐에 생명을 불어넣던 그날의 입맞춤이 ‘처음’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모든 세월을 지나 도달한 진정한 의미의 첫 키스였다.<br>그녀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순간 당황했지만, 몸을 돌리거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불안과 욕망이 뒤섞인 이마 위로 열이 올라왔고,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br>그의 입맞춤은 달콤하면서도 아릿했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뿌연 열기가 차오르듯 번졌다. 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떨림이 부끄러울 만큼 분명하게 온몸을 감쌌다. 몸은 환희에 젖어 있었고, 마음은 여전히 불확실한 파동 속에 흔들렸다. 시곗바늘이 멈춘 듯,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br>그러나 이내 내면을 스치는 한 줄기 속삭임이 들려왔다. 약혼자, 결혼, 가족의 기대와 책임.  빛바랜 그림자들이 다시 의식을 덮쳤다. 이 키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깊은 곳에서 번지는 불꽃의 정체는 무엇인지. 자유를 향한 갈망과 두려움이 엇갈리며 그녀의 마음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br>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가슴 깊이 그녀를 품으려 했다. 숨결과 숨결이 맞닿은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쳐냈다. 이것이 반사적인 방어 동작이었는지,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nbsp;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br> <br>그녀의 말들이 얼음송곳처럼 하나씩 도준의 가슴에 꽂혔다. 도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고통과 혼란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억지로라도 참아보려 애쓰는 마음 한편에 상실감과 번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br>–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br>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렸더라면, 오빠의 사진을 보고 ‘부군이냐’고 물었을 때 바로 약혼 사실을 털어놓았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스스로를 배반한 불찰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br>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br>–이해합니다. 저는 그냥 당신에게 끌렸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러니 제가 미안합니다. 너무 제 감정에만 솔직했나 봅니다.<br>그 짧은 고백 사이로 공기마저 숨 막히게 떨려왔다. 심장은 불현듯 요동쳤고,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nbsp;<br>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더니, 신중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br>–저기…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낚시하러 가실래요? 반나절이면 충분해요.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정말이에요.<br>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눈빛 어디에도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진심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처럼 번져왔다.<br>내일은 금요일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오전에 낚시터에 잠시 다녀온 뒤 오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아마도 오늘의 해프닝을 핑계 삼아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와 이렇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은 말로 다 담기 어려운 쓸쓸함으로 그녀의 마음을 옥죄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듯한 안타까움이 가슴 한편에 자리했다.<br> <br>평소 같았다면 그녀는 쉽게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며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견딜 수 없이 강렬한 무언가가 휘몰아치는 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선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거나, 끝내 외면하고 돌아서거나. 결국 그 감정의 무게와 책임은 공평하게 각자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br>–좋아요. 낚시터에 갈게요. 오후에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가야 해요.–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br>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기고 말없이 현관문을 닫고 떠났다. 돌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저녁 공기 속으로 희미해졌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어스름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석양을 등진 그의 랜드로버는 붉은 후미등을 밝힌 채 저무는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7/pimg_63921662813815484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665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9. 양면 거울처럼 마주 선 두 얼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4982</link><pubDate>Thu, 06 Aug 2026 01: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498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그것은 일종의 결핍이었다. 하나의 얼굴로 정형화되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내면에 서로 다른 형태로 잠복해 있었다.<br>서윤은 ‘안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정돈된 평온, 반듯한 윤곽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왔다. 기성품처럼 정제된 삶이었고, 오래된 희망만을 반복 재생하는 인공의 낙원에 가까웠다.<br>도준은 달랐다. 그는 경계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삶을 택했다. 원시의 대지와 더불어 충동과 감각에 몸을 맡긴 채 흘러왔다. 방향 없는 나침반처럼, 본능에 기대어 이동해 온 존재였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규범 밖에 놓인 삶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체계와 리듬으로 그 결핍을 감당하고 있었다.<br>한 사람은 이미 설계된 틀 안에서 버텨왔고, 다른 이는 그 틀을 거부한 채 세상 끝을 향해 혼자 떠돌았다. 출발점은 달랐으나, 그 ‘다름’의 이면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닮음’이 숨어 있었다. 양면 거울처럼 마주 선 두 얼굴이 비로소 서로를 인식한 순간이었다. 낯선 것에 대한 끌림은 익숙함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졌다.<br>–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br>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순간 듣기 좋은 멜로디처럼 되살아났다. 그 말에는 절제된 힘과 산을 향한 긴 호흡이 함께 배어 있었다.<br>–칫솔도 반토막, 비누도 반토막, 그렇게 가져가는 정도예요. 고산을 등반하는 동안 눈을 녹여 물을 만들려면 연료가 많이 듭니다. 게다가 고도가 높을수록 비등점도 낮아지죠.&nbsp;그래도 커피는 가끔 마셔요. 미지근한 물에 대충 타 마시기도 하는데, 그 밍밍한 맛이 어떨지는 짐작 가시겠죠.<br>서윤은 그의 목소리와 말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생생한 현실감을 느꼈다. 장비와 눈과 연료와 비등점의 계산.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세월과 몸으로 축적해 온 경험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언어였다.<br>–그렇군요. 조금은 이해될 것도 같아요.<br> <br>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는 배낭을 짊어진 자신이 험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나무들이 숨 쉬듯 흔들리고, 깊은 계곡 사이로 놓인 구름다리가 느릿하게 출렁였다. 그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인 긴장과 불안이 절로 씻겨 나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오래전부터 몸에 밴 자연의 리듬을 완전히 잊지는 못한 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br>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남자였다.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새로운 인류처럼 느껴졌다. 그의 세계는 늘 긴장과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삶은 생과 사의 외줄타기 위에서 치밀한 질서로 구축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영혼은 어떤 색채를 띠고 있을까. 함께할수록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무슨 음식을 즐기는지, 사람을 판단할 때 무엇을 먼저 보는지, 소년 시절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외에도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br>–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여태 결혼할 틈도 없었어요. 아니, 못한 거죠.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 그게 편하기도 하고요.<br> <br>그가 자신의 이성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비친 건 우연이라기보다 계산된 고백처럼 느껴졌다. 아직 미혼인 그는 어떤 여자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했지만, 굳이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쩌면 서윤의 마음을 떠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br>그녀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커피잔을 비우고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긴 침묵을 냉담한 거절로, 철벽같은 방어로 받아들인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벽이 가로놓였다.<br>–그만 가봐야겠군요. 제가 꽤 오래 방해했습니다.<br>그는 정중하게 작별을 고했지만, 그 말끝에는 씁쓸함과 자조적인 기색이 엷게 섞여 있었다.<br>–번거롭게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br> <br>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섭섭했지만, 이제는 그를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었다.<br> <br>–별말씀을요.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해야죠. 안녕히 계십시오.<br> –…조심히 가세요.<br> <br>문 앞에 선 그는 문고리에 손을 얹으려다 말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는 눈빛 속에 말로 다 옮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심장도 그 여운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일렁였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6/pimg_63921575383293875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498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8. 공작 도시, 모두가 무사했지만 벗어난 사람은 없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3033</link><pubDate>Wed, 05 Aug 2026 00: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303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지금껏 서윤은 여러 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그녀 인생에서 처음 감행한 자발적인 탈선이었고, 그 여정을 담은 일기장은 나중에 『파리에서 베네치아까지, 고양이처럼』이라는 책으로 엮어졌다. 제이가 운영하는 해오름 출판사에서 소규모로 출간된 그 여행기는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처음으로 ‘작가’라는 이름을 안겨주었다.<br>뉴욕에서 머문 1년 동안에는 그랜드캐니언, 나이아가라, 뉴올리언스, 키웨스트 같은 명소를 찾아다니며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돌았다. 그러나 그런 여행은 어디까지나 계획된 이동에 불과했고, 그녀의 삶은 여전히 도시 문명과 인공 낙원이 설계한 경로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흘러갔다. 그 바깥으로 발을 디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br>손문기 선생이 ‘공작 도시’라 불렀던 그 익명의 공간. 정돈된 질서와 번영 뒤에는 권태와 감각의 둔화가 숨어 있었다. 그 안에서 서윤은 가족과 직업, 그리고 집이라는 구도를 ‘행복의 조건’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 프레임은 나름의 안정을 보장했고, 모두가 무사했지만, 서윤이 기억하는 한 이곳을 자유 의지로 벗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얼마 있으면 그녀는 부모라는 울타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약혼자 강태일이 마련한 또 다른 가계의 테두리 안으로 옮겨질 참이었다.<br>결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갈 때마다, 서윤의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아프리카 쇼나 조각상 전시를 계기로 데이트가 막 시작되던 무렵만 해도, 강태일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격식을 갖춘 태도와 교양 있는 말투로 자신을 성숙하고 단정한 사람처럼 꾸몄고, 서윤을 배려하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br>그러나 약혼식이 끝난 뒤부터 그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집안의 수준 차이와 경제적 격차가 크다는 이유로 강태일의 누이는 벌써부터 못된 시누이처럼 굴었고, 태일 역시 그녀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기 시작했다.<br>-우린 이제 부부야. 한 몸이나 다름없잖아.<br>그 말은 설득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br>-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약혼까지 했는데. <br>그녀를 향해 함부로 뻗어오는 손길에는 참을 수 없는 추잡함이 묻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육체적 관계와 그 직후에 보여주는 그의 모욕적인 태도는 조금씩 그녀의 자존감을 갉아먹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라, 함부로 다뤄지는 대상으로 밀려나 있다는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nbsp;그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몸 안 어딘가에서 그녀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다.<br>약혼한 지 어느새 일 년하고도 여섯 달이 흘렀다. 그동안 그가 제공한 물질적 혜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늘 무언가를 대가로 치러야 하는, 거래에 가까운 냉정한 방식이 숨어 있었다.<br>그녀는 이제 누군가의 딸에서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로 ‘전이’될 운명이었다. 그 모든 정체성은 선택이 아니라 예정된 수순이었고, 그 마지막에 그녀 자신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지금 보이지 않는 흐름에 떠밀리듯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작은 배처럼, 멈출 수 없다는 사실만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 끝 어딘가에 닿고 나면, 그저 주어진 일상에 길들여져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날개를 접은 채, 안락이라는 이름의 틀 속에서 서서히 자신을 잃어갈 것이다.<br>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경력을 쌓기 위해 기꺼이 많은 희생을 감내해 왔다. 하지만 결혼 이후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정지된 상태로 삶을 지속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nbsp;강태일의 집안은 보수적이었고,&nbsp;새며느리가 바깥일에 몰두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nbsp;화랑의 큐레이터 일이나 장차 대학 강단에서의 미술사 강의,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벌써 숨이 막혀왔다.<br>이런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곳도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얼핏 자랑처럼 비칠까 망설여졌고, 배부른 소리라는 비아냥이 돌아올까 두려웠다. 결국 그녀는 내면의 결핍과 욕망을 감춘 채 입을 닫았고, 그 침묵은 자신을 더욱 고립시켰다.<br>어떤 날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려보면,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연고도 목적도 없는 낯선 도시의 아침 풍경을 떠올렸다. 울창한 숲속을 헤매다 마침내 거대한 폭포 앞에 다다르는 여정도 멋질 것 같았다. 깊은 협곡을 오르내리다 지쳐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잠시 모든 존재로부터 지워지는 순간. 그녀는 한 번쯤, 그런 세계에 가닿고 싶었다.<br>그러나 지금, 결혼을 앞둔 이 시점에서 그런 방랑은 현실에서 밀려난 환상에 불과했다. 머릿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는 자유, 끝내 실행되지 못할 도피의 충동, 그것만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반항처럼 느껴졌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5/pimg_63921486238334296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303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7. 나무도 외로움을 탈까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1159</link><pubDate>Tue, 04 Aug 2026 01: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115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여긴 전망이 좋군요. 그런데 저기… 저 나무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요.<br> 도준이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별장 아래쪽 비탈에는 군데군데 수피가 벗겨지고 잔가지가 축 늘어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br> <br>-대추나무예요. 가을이면 알 굵은 대추를 한 바구니씩 따곤 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저 모양이에요.<br> -병이 든 걸까요?<br> -그럴지도요.<br> <br>저무는 햇살 아래, 오랜 세월을 떠받치다 지친 기둥처럼 고개를 숙인 대추나무가 애잔하게 느껴졌다. 큰할머니가 살았을 때부터 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나무가 이제 한 시절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br> -나무도 외로움을 탈까요?<br>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옮겨졌다.<br> <br>-외로움이요?<br> -그냥… 저 나무도 혼자 집 지키는 게 싫어서 저렇게 된 건가 싶어요. 나무도… 외로울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br> <br>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얼버무렸다.<br> <br>-아…<br> <br>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낯선 게 아니었다. 늘 혼자 길을 걷고, 홀로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그의 삶에서 외로움은 견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몸에 익은 감각에 가까웠다. 그러나 서윤의 목소리에 실린 그 말은 조금 달랐다.&nbsp;나무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어딘가 사람의 것이었다. 설명되지 않은 채 오래 억눌려 있던 무엇인가가 불현듯 새어 나온 듯했다. 도준은 그 말의 의미를 쉽게 흘려들을 수 없었다.<br>-여긴 아버지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저도 머리가 복잡할 때면 여기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못 왔지만요.<br> 도준이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br> <br>-머리가 복잡해요? 왜요?<br> <br>말투는 무심한 듯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열어 보일지 모른다는 기대가 숨어 있었다.<br> <br>-그냥, 뭐… 가끔요. 일을 하다 보면 그렇죠.<br> -그럴 때 저는 강태공처럼 낚시를 합니다. 곧은 바늘을 물 위에 드리워놓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잡념이 사라져요. 낚시는 마음을 다스려주죠.<br> <br>낮고 차분한 목소리에는 낚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배어 있었다.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낚싯줄을 드리운 채 무념무상에 잠긴 한 낚시꾼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nbsp;그의 시선은 어디 먼 곳에 닿아 있는 듯 아득했고, 일상의 굴레로부터 한 발 비켜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낚시’라는 단어 하나가 불러낸 물가의 풍경은 그녀에게 낭만이 아니라, 가늠하기 힘든 막연한 불안을 안겨주었다.<br>-혹시 낚시 좋아하세요?<br>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br>-아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왜요?-물 공포증이 있어요. 왜 그런지, 물에 빠지는 악몽을 자주 꿨거든요.<br>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어둠과 그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는 그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일을 간직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br> <br>-요즘도 그런 악몽을 꾸나요?<br>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nbsp;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br>-제 친구는 높은 계단에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꿔요. 저는 계속 물에 빠지는 꿈이죠. 참 이상한 일이에요.<br>그는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br> <br>-그 꿈에는, 어쩌면 감춰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죠. 때로는 무의식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고요.<br>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br> <br>-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아, 잠깐만요.<br> <br>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불을 끄고 두 개의 머그잔에 물을 부었다.<br> <br>-저는 진한 커피를 좋아해요. 그 독특한 향 때문이죠.<br> -아, 그렇군요.<br> <br>그녀는 코끼리 문양이 그려진 그의 머그잔에 커피를 반 스푼 더 떠 넣었다.<br>-컵이 뜨거우니 조심하세요.<br> -감사합니다.<br> <br>머그잔을 건네려고 하자, 그가 컵 위쪽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그 동작은 마치 그녀의 손을 덥석 잡는 것처럼 느껴졌고, 손끝이 스친 순간 짧고 날 선 감각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녀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br> <br>‘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그 낯뜨거운 욕망이라는 걸까.’<br> <br>귓불이 화끈 달아오르자, 그녀는 시선을 피한 채 몸을 조금 옆으로 틀었다.<br>그는 커피를 후후 불면서도 연거푸 마셨다. 뜨거운 커피도 거뜬히 넘기는 모습에 그녀는 점점 더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가 손목에 찬 크고 두툼한 시계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br> <br>-이건 무슨 시계예요?<br> -아, 이거요? 아보셋 제품이에요. 고도계 시계라고도 하죠.<br> <br>그가 손목시계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여러 숫자와 표시가 얽힌 화면은 꽤 복잡해 보였다. 높은 산에서 기압과 고도를 재기에 좋고, 약 1만 8천 미터까지 측정이 가능하며 하루에 몇 번 스키 리프트를 탔는지도 알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 설명을 듣고도 서윤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br> <br>-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br> -저는 여행하는 사람입니다.<br> <br>그의 목소리가 고요한 실내에 잔물결처럼 번져갔다.<br> <br>-세계 곳곳을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녔죠.<br> <br>그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듯 미소를 띤 채, 극지 탐험과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고산 원정에 얽힌 이야기를 몇 마디 들려주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표정에는 엷은 향수와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br>-제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다면 십 년 이상 걸렸을 겁니다. 두 발로 걸었다면 평생 걸렸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삼 년뿐이었어요. 뜻밖의 기회였죠. 우연히 독일 자동차 회사와 인연이 닿아, 특수 제작된 차량과 비용을 지원받았어요. 여행하며 극한 환경에서 배터리 성능을 시험했고, 그 결과를 연구소에 전했지요.<br>-어머, 정말요? 놀라운 이야기예요.<br> <br>그녀의 눈동자가 신기함과 경이로움으로 반짝였다. 극지의 빙원과 아프리카 오지, 그리고 미지의 땅을 떠돌던 그의 이야기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그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4/pimg_63921416099046097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3115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6.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질문일수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9304</link><pubDate>Mon, 03 Aug 2026 00: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930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별장 앞에 다다른 서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열쇠로 출입문을 연 뒤 문턱을 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벅찬 충족감이 가슴을 휘감았다. 두려움과 낯선 설렘이 뒤섞인, 강렬하고도 불가해한 감각이었다. 집 안으로 다시 김 씨 할아버지의 조카를 들이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강한 호기심과 걷잡을 수 없는 동요가 그녀를 사로잡았다.<br>‘왜 이렇게 떨리지? 고맙다는 의미로 커피를 대접하는 건데.’<br>그래, 그냥 커피 한 잔일 뿐이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스스로를 다그치듯 생각했다.<br>도준은 자전거를 벽에 기대어 놓고 어제 붙인 패치 자리를 다시 꼼꼼히 살폈다. 타이어의 공기압도 충분했고, 찢어진 흔적도 눈에 띄지 않았다.<br> <br>-접착제가 잘 굳었나 보네요. 당분간 자전거 타는 데 문제없겠어요.<br> -잘됐네요. 제가 커피 탈게요. 그런데… 지금 인스턴트커피밖에 없는데 어쩌죠?<br> -커피콩으로 만든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br> <br>그는 말끝을 흐리며 가볍게 웃었다.<br>그녀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도준은 어제보다 한결 느긋한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실내는 화려한 장식 없이도 단정했다.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장식장, 유리 진열대 위에 놓인 여행의 흔적들, 벽면에 걸린 설피와 색바랜 장미 한 송이. 사물들은 말없이 세월의 숨결을 품고 있었다. 소박하고 절제된 가구의 부드러운 선과 따스한 질감은 그곳에 살아온 사람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br>페치카 선반 위에는 액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준은 그중 하나에서 서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활짝 웃고 있었다. 서로의 표정에는 오래된 친밀감이 묻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의식 깊은 곳을 날카롭게 스쳤다. 순간,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br>-여기 이 사진이요. 혹시, 부군 되시나요?<br> <br>도준이 사진을 가리켰다. 서윤은 싱크대 수납장에서 머그잔을 꺼내려다 말고, 놀란 기색으로 급히 다가왔다.<br> <br>-이 사진이요? 어머머, 제 오빠예요.<br> -하하, 그렇군요. 저는 또…<br> <br>도준이 짧게 숨을 내쉬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윤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의 이성 관계를 궁금해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br> <br>‘흠,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가?’<br>부끄러움과 들뜬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다. 약혼자까지 있는 처지에 이런 마음의 일탈은 양심을 건드릴 만큼 위태롭고 도발적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낯설고 신비로운 남자 앞에서 그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 안에서 꿈틀거렸다.<br>주방 앞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을 비롯해 작업 중인 듯한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테이블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노트북 화면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br>-일하시는 중인가 봐요? -아, 네. 갤러리에서 다음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br> 서윤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짧게 설명했다. 도준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근무하는 인사동 리온 갤러리는 도준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nbsp;  -제 선배 중에 소나무에 혼을 담는 사진작가가 계세요. 백두산에서 찍은 소나무 작품을 리온 갤러리에서 전시하신 적이 있어요. -혹시 장무현 선생님 말씀인가요?<br> -네, 맞아요.<br> -어머! 그 전시 준비할 때 저도 거기 있었어요. 도록은 제가 만들었거든요. 근데 그 무렵, 잠깐 뉴욕에 공부하러 가느라 오프닝에는 참석을 못 했죠.<br> -4년 전이었죠?<br> -1993년, 정확히 4년 전이에요.<br> -그때 조금만 늦게 떠나셨다면…<br> -맞아요. 우리가 그 오프닝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네요.<br>서윤은 못내 아쉬운 듯 말했다. 간발의 차이로 어쩌면 삶의 결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강태일을 만나기 훨씬 전이었고, 세상은 아직 밝고 호의적인 얼굴로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일과 얽힌 그녀의 시간들은 짙은 그늘 속에서, 색과 온도를 잃은 사진처럼 퇴색해 버렸다.<br>‘나는 정말 강태일과 결혼할 생각인가?’<br> <br>약혼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스스로의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나이가 들면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게 당연한 일이라 여겼고, 어쩌다 보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상대가 강태일, 그 남자였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가 단지 ‘괜찮은 조건’을 갖췄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너무 쉽게 맡겨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nbsp;  -결혼 전의 여자들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까지 고민하게 돼. 이게 과연 잘한 결정인가? 넌 어떻게 생각해? 결정을 잘한 것 같아?<br>약혼 직후, 친구 제이가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분명한 대답을 찾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몰라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찾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은 평생을 들여도 끝내 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는 애써 외면해 왔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질문 앞에서는 때로 그 무게를 모른 척 돌아서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가장 은밀한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nbsp;  도준은 식탁 겸 책상으로 쓰이는 테이블 앞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서 매끄럽게 이어진 콧날, 그리고 턱선을 따라 흐르는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입체적인 선을 돋보이게 했다. 뜨거운 태양과 자연의 생기를 품은 얼굴이지만, 그 안에는 낯설 만큼 고요한 기류가 스며 있었다. 어디 하나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눈길이 자꾸만 머무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의 이목구비를 더듬고 있는 자신의 불온한 시선을 의식했다. 그렇게 홀린 듯 바라보는 자기 모습이 문득 생경하게 느껴졌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7/pimg_63921719064465584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930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5.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녀를 붙잡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2974</link><pubDate>Fri, 31 Jul 2026 01: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297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 속에서, 서윤은 알 수 없는 설렘에 잠시 발을 떼지 못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도준 역시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깊고 조용한 눈빛이 은밀한 인사처럼 닿아왔다.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기척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고, 숨결마저 가늘어졌다.<br>-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요?<br>도준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서윤은 자전거를 끌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br>-읍내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br>상냥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경계하는 기색이 묻어났다.<br>-저는 벌써 서울로 올라가신 줄 알았어요. 자전거는 잘 굴러가나요?-그럼요.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아, 잠깐만요.<br>도준은 말을 끊고 차로 가더니, 곧 서류봉투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br>-저희 고모부님 집에 있던 건데요, 주소를 보니 여기 것이 맞는 것 같아서요.<br>그가 내민 것은 한 종교 단체에서 보내온 우편물이었다. 봉투 두 개 모두에 어머니의 이름 ‘이경옥’이 또렷이 인쇄돼 있었다.<br>-어휴, 이렇게까지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신세를 지네요.-별말씀을요. 이렇게 하면 얼굴도 다시 보고, 저야 좋죠.-네? 그게 무슨…-하하, 그냥 농담입니다. 남자들은 가끔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잖아요.<br>도준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br>-그렇군요. 아무튼 고마워요.<br>서윤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남자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 눈빛에는 느긋함과 함께 묘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말없이 머뭇대는 사이, 짧지만 선명한 침묵이 흘렀다.  &nbsp;  그는 어제의 땀내 밴 운동복 대신, 검은 면바지에 연청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 자락은 허리 안으로 말끔히 정리돼 있었고,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몸의 윤곽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벼운 바람에 옷 주름이 미묘하게 움직였고, 밝은 빛깔의 셔츠는 구릿빛 피부와 어우러져 그만의 은은한 기품을 자아냈다.<br>-여기까지 왔는데, 어제처럼 그냥 가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죠?<br>도준의 말에 서윤의 표정이 흐려졌다. 우편물까지 일부러 챙겨온 그에게 그냥 가라고 말하는 건 너무 야박한 일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br>-그럼… 커피 한 잔 드시고 가실래요?-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쁘게 마시겠습니다.<br>그가 환하게 웃었다. 서윤은 눈앞이 아찔해졌다.&nbsp;그 미소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끌어당기면서도, 봄날 스쳐 가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난처할 때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는 그녀에게, 지금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잊은 채, 그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br>-자, 그건 제가 들게요.<br>남자의 손이 스치듯 그녀의 손등을 지나 자전거 핸들을 넘겨받았다. 그 짧은 접촉에서 전해진 온기가,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을 남겼다.<br>도준은 자전거를 덥석 들어 오른쪽 어깨에 얹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두어 걸음 앞서서 별장 앞 돌층계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br>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황혼이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 두 사람의 등 뒤로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녀가 웃으며 살짝 뒤를 돌아본 순간, 마지막 남은 햇살 한 조각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그녀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낯설고도 강렬한 감정에 이끌리듯, 그녀는 남자를 따라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nbsp;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7/pimg_63921714149934628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297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4. 지붕에서 물이 새면 하자 보수는 해주시는 거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0653</link><pubDate>Thu, 30 Jul 2026 00: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065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다음 날 점심 무렵, 서윤은 자전거를 타고 횡계 읍내로 나가, 별장 지붕 공사를 맡았던 설비 가게 주인을 만났다. 오십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허리에 넓은 압박 밴드를 두르고 있었다. 엊그제 작업을 나갔다가 허리디스크가 악화되어, 어제는 강릉 큰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물리치료도 받았다는데, 아직은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nbsp;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했으니, 당분간 지붕에서 비가 샐 일은 없을 겁니다.<br>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사 장비와 건축 자재가 무질서하게 쌓인 가게 안은 오래된 고물 창고를 연상시켰다. 가장 안쪽, 전기난로 곁에 앉아 장부를 뒤적이던 나이 든 여자가 자꾸 이쪽을 흘끗거렸다. 눈매에는 어딘가 날 선 기운이 배어 있었고, 그 시선이 스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괜히 감시당하고 있는 것만 같아,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nbsp;  -지붕에서 다시 물이 새면, 하자 보수는 해주시는 거죠?-그럼요. 하지만 제가 공사한 자리가 아닌 곳에서 샌다면, 다시 손을 봐야 할 겁니다.-또 누수 공사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세요?<br>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가 되물었다.<br>-지붕이 오래돼서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점검을 해보는 게 어떨지 아버님과 상의해 보세요.<br>전체 지붕 공사라니. 서윤은 얕은 한숨을 삼켰다. 가게 주인이 내민 견적서에는, 이번에 시공한 부분 공사비보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br>-네, 잘 알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br>그녀는 공사 내역과 부가세가 포함된 영수증을 건네받고 가게 문을 나섰다. 중앙로에는 흙먼지와 기계음이 뒤엉켜, 도로 전체가 거대한 공사판처럼 들끓고 있었다. 자전거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었고, 아득하게 펼쳐진 소도시 풍경이 눈앞에서 뿌옇게 흐려졌다. 잠시 근처 슈퍼에 들러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챙긴 뒤, 그녀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 별장으로 향했다.  &nbsp;  횡계에 온 지도 어느새 사흘째였다. 목요일 오후, 이제 읍내에서 볼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휴가를 즐기는 셈치고, 오늘은 별장에서 하루 더 느긋하게 쉬다가 내일쯤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집에 가는 길에 평창동 명명희 선생 작업실을 먼저 찾아, 양녀 김순자 씨와 전시 계획을 미리 상의하며 조금 더 친분을 다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nbsp;  아주 잠깐, 김 씨 할아버지의 조카라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에게 잠시 흔들렸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어제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일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질까 봐, 오히려 자신이 더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br>다 지난 일이다. 이제 끝난 거야.&nbsp;<br>그녀는 그렇게 단정 지으며, 머릿속을 떠도는 불길한 망상들을 하나씩 밀어냈다. 그 남자 역시, 어쩌다 스친 생의 편린에 불과하다고, 가슴 깊이 새기며 스스로를 다독였다.<br>얼마 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별장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앞마당에 멈춰 서 있는 랜드로버가 멀리서부터 시선을 붙잡았다. 김 씨 할아버지의 조카가 다시 찾아왔다는 생각이 스치자,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가볍게 두근거렸다. 서윤이 탄 자전거를 발견한 도준은 차에서 내려, 그녀가 다가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저물어 가는 석양을 등지고 선 그의 모습은 오래된 조각상처럼 고요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7/pimg_63921717676473396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2065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3. 하나의 거울 안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8266</link><pubDate>Wed, 29 Jul 2026 00: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826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서윤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지붕 공사를 맡긴 설비 가게 주인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어제는 다른 현장 공사로 자리에 없었고, 오늘은 갑작스레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br>아버지는 공사비를 건네기 전에 반드시 가게 주인을 만나, 하자 보수에 관한 설명과 다른 유의 사항들을 꼼꼼히 챙기라고 누누이 당부하였다. 결국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려면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고, 설비 가게를 다시 찾아가려면 아무래도 자전거가 필요할 것 같았다.<br>‘큰할머니의 친한 이웃이었다잖아.’<br>연두색 털모자와 연두색 망토가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겨 있던 털실과 뜨개바늘이 그녀의 마음을 잠시 느슨하게 만들었다.<br>-그럼… 누추하지만, 잠깐 들어오세요.<br>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그를 돌아보았다.<br>-잠깐 실례하겠습니다.<br>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전거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내 공간은 그 안에 누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마련이다. 남자의 큰 키와 넓은 어깨 탓에, 집안은 갑자기 전보다 좁아 보였고 천장도 한결 낮아진 듯 느껴졌다.<br>그녀는 출입문 근처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술과 턱 주변에 붉게 벗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크지 않은 상처였지만, 그 흔적은 마음 어딘가에 생긴 작은 균열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쓸린 살갗은 불에 덴 듯 쓰라렸고, 턱 아래의 욱신거림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행히 입안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br>-좀 어때요? 병원에 가야 할까요?<br>그가 불쑥 거울 속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하나의 거울 안에서 두 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엇갈리듯 급히 한발 옆으로 비켜섰다. <br>-이제 괜찮아요. 흉이 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br>그녀는 무심한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엌 수납장에서 구급함을 꺼내 후시딘 연고를 찾아 들었다. 손을 수돗물에 씻은 다음 면봉에 연고를 묻혀 부어오른 턱에 조심스레 펴 발랐다. 따갑고 쓰라린 느낌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피부 속 깊이 남은 뻐근한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br>‘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잖아.’<br>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속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그 사이 도준은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집 뒤쪽 창고로 가서 타이어 펌프와 펑크 수리 키트를 들고 돌아왔다. 길쭉한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패치 키트가 들어 있었다.<br>-이거면 될까요?-네. 충분합니다.<br>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MTB 자전거는 작고 가벼운 장난감처럼 보였다. 자전거포 주인 못지않은 노련한 솜씨로, 두 개의 레버를 다루며 타이어를 벗기고 납작해진 튜브를 꺼냈다. 바람을 불어 넣은 튜브를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댄 그는, 숨소리를 죽인 채 공기가 새는 소리를 들었다.<br>-아하, 여기네요. 바로 이 구멍이에요. 보이죠?-어디요?  &nbsp;  그녀는 무릎을 굽혀 그의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익숙한 비누 향과 은은한 남자의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가슴이 불현듯 요동쳤다.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br>-이제 본드를 바르고 조금 기다려야 해요.-네?-본드가 꾸덕꾸덕해져야 서로 잘 붙어요.  &nbsp;  도준은 사포로 튜브 표면을 부드럽게 문질러 정리한 뒤, 키트에서 적당한 크기의 패치를 골라냈다. 길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접착제를 능숙하게 펴 바르는 그의 동작은 빠르고도 정확했다. 그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는 동안, 서윤은 자신이 어느새 낯선 리듬 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br>그녀는 숨을 고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몸은 아직 그 판단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9/pimg_63920880445992975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826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2.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6033</link><pubDate>Tue, 28 Jul 2026 00: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6033</guid><description><![CDATA[<br>글·그림 김미진<br>나무들에 둘러싸인 별장 주위엔 늦은 오후의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도준은 마당 오른편, 후박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웠다. 뒷문을 열어 자전거를 꺼내는 동안, 서윤은 숨을 고르며 차에서 내렸다.<br>-고마웠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옮길게요.<br>그녀의 정중한 목소리에는 선을 긋는 듯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br>-아, 그럼 이거 챙기세요.<br>펑크 난 앞바퀴를 그녀에게 건네며, 도준이 싱긋 웃었다.<br>-이건 제가 직접 배달할게요.<br>도준은 자전거를 번쩍 들어 어깨에 척 얹었다.<br>-얼른 앞장서세요.<br>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앞바퀴를 들고 한발 먼저 별장 입구의 계단을 올라갔다.<br>-이 집엔 이제 사람이 안 산다고 고모부에게 들었어요. 가끔 필요할 때만 내려오신다고요.<br>앞서가는 그녀를 향해 도준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br> <br>-부모님 부탁으로 지붕 공사한 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예전에 여기 사시던 분을 저도 잘 알아요.-우리 큰할머니요?<br>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지자, 도준은 멈칫 발을 멈추었다. 그는 서윤보다 머리 하나쯤 더 컸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깊고 조용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서윤의 가슴속 어딘가를 간지럽혔다.<br>-어릴 적에 저도 여기, 고모부 집에서 한동안 살았어요.<br>그가 비밀스러운 사연이라도 털어놓듯, 그녀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시선을 돌렸다.<br>-그… 그렇군요.-그럼요. 그러니 우린 거의 이웃사촌인 셈이죠. 하하하.<br>그가 활짝 웃자,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하얀 치아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서윤도 벙긋 웃으며 다시 돌아서 발을 내디뎠다.   &nbsp;  길게 뻗은 돌층계를 오르는 동안, 그녀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큰할머니와 함께했던 옛 시절을 떠올렸다.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에는 늘 다채로운 색실이 가득했다. 틈틈이 스웨터와 장갑을 떠 친척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를 즐기셨는데, 도준 역시 그 따뜻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br>-우리 고모 친구분이셨잖아요. 그때는 아직 젊으셔서 윗집 아줌마라고 불렀죠. 제게 곶감도 주시고 가래떡도 구워주셨어요. 연두색 털모자도 손수 떠주셨고요.-어머, 저도 어렸을 때 큰할머니가 떠주신 연두색 망토를 입은 적 있어요.-연두색 망토요?-같은 연두색이면 같은 실로 짠 걸지도 모르겠네요. 참, 신기해요.-고모가 담근 겨울 김장을 제가 여기까지 날라다 드리기도 했어요.-어머나, 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오해할 뻔했어요.<br>서윤은 손끝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민망하게 웃었다.<br>-무슨 오해요?<br>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br>-운명이니, 인연이니 그러셨잖아요. 처음 만난 여자한테. -아, 죄송합니다.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근데 정말 그런 걸 믿으세요?-아, 그거요? 하하하.<br>도준이 입을 크게 벌려 호탕하게 웃자,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소년 같은 웃음이 번졌다. 서윤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nbsp;  출입문 앞에 이르러, 서윤은 문 열쇠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잠시 멈춰 섰다. 온화하던 미소는 어느새 지워지고, 냉철한 현실 감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전거만 건네받고 그를 돌려보낼지, 아니면 집 안으로 들여 음료 한 잔이라도 내어놓을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br>큰할머니와 그의 고모부 집안 사이의 오랜 인연을 떠올린다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여전히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별장까지 무사히 오긴 했지만, 정체도 분명치 않은 남자를, 그것도 그녀 혼자만 있는 집안에 발을 들이게 한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됐으니 그만 돌아가 달라 말하기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br>서윤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전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br>-타이어 펑크 패치 있나요? 바람 넣는 펌프도요. -네? 아… 아마 창고에 있을 거예요.<br> -다행이군요. 한번 가져와 보세요. 금방 손봐 드릴게요.  &nbsp;  자전거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그의 태도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nbsp;서윤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말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도준의 눈빛은 여전히 확고했다.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br>-이대로 두고 가면,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아요. 밑에 차도 안 보이던데, 자전거까지 없으면 많이 불편하잖아요.<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8/pimg_63920795719446147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603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1.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3945</link><pubDate>Mon, 27 Jul 2026 0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394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차 안은 차체의 겉모습보다 훨씬 더 낡아, 오래된 유물처럼 빛이 바래져 있었다. 핸들은 손때가 겹겹이 스며든 가죽 위로 번들거렸고, 변속기 너머로는 세월이 남긴 자국이 부드럽게 패여 있었다. 이름 모를 시간이 묻어난 시트는, 옛이야기의 숨결인 듯 묘하게 따스함을 풍겼다. 자동차의 라디오는 침묵했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재즈의 잔향이 번져올 것만 같았다.&nbsp;<br>서윤은 이 차가 오래도록 품어온 정서의 무게를 어렴풋이 감지했다. 어쩌면 이 차는 시간이 머물렀다 간 자리이자, 사라진 기억의 흔적들을 감싸안은 쉼터일지도 몰랐다.<br>-자, 출발합니다.<br>도준이 웃으며 말했다.<br>-네.<br>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숨을 삼켰다. 밀폐된 공간에서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있다는 생각만으로 불안이 스며들었다. 차 안의 정적은 숨소리조차 울리는 듯 어색했고,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탔다는 사실이 자책처럼 가슴을 조여왔다.<br>강태일이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싸늘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경멸 어린 입술 위로 번지는 비웃음. 심지어 침이라도 내뱉을 듯한 그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br>도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운전대를 단단히 쥔 채 숲속 비포장길만 응시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여유롭고 안정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보는 그 모습은 얼마간 서윤을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br>‘나를 의식하지 않는 거야… 근데 내가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인가?’<br>서윤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 유치한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무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서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궁금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br>서윤의 마음이 조금 진정될 무렵, 차가 크게 덜컹거리는 지점을 지나자 오솔길은 점점 좁아졌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보리암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이, 숲 그림자 속에서 한 가닥 흐릿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br>-저기서 좌측으로 가시면 돼요.<br>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그맣게 말했다.<br>-알고 있습니다. 저 위에 있는 파란 지붕 집이죠?<br>도준이 가볍게 웃었다.<br>-네?<br>서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br>-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아, 그렇죠, 참!<br>서윤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br>도준이 핸들을 왼쪽으로 꺾자 엔진이 낮게 웅웅대더니, 랜드로버는 울창한 잡목 숲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른 실개천 같은 고랑을 지날 때는 차체가 더욱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도준이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받쳐 주었다. <br>서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잡이를 붙잡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도준의 손이 다시 운전대로 돌아가자, 낯설고 무방비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며 손끝까지 번졌다. 차 안의 정적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계속 침묵만 지키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했다.<br>-굉장히 오래된 차네요.<br>서윤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놀란 듯 돌아보았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br>-74년형이에요. 곧 폐차될 운명이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굴러가죠.<br>남자의 말투에는 담담함 속에 묘한 자부심이 묻어났다.<br>-대학교 때 이거랑 비슷한 차를 타고 다니던 교수님이 계셨어요.-그 교수님 차도 이렇게 고물이었나 보죠?-아니, 이 차가 고물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br>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br>-그냥 농담한 거예요.-아, 네…<br>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반사되어 속눈썹 아래에 투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br>그 모습을 바라본 순간, 도준의 눈에도 기억의 잔상이 스쳤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 마치 신호를 받은 듯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작은 기척에도 놀라 금세 상처받을 것 같은 예민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촉촉한 눈빛은 작은 몸짓에도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도준은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일부러 꾹 참았다. 성급한 말 한마디로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br>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만난 조그만 여자아이가 이렇게 성숙하게 자라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제 고무부 집 마당에서 홀로 서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끌림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감된 재회처럼, 가슴 한가운데 작은 등불이 켜졌다. 그 짧은 순간, 지난 세월이 한 점으로 응축되며, 오랜 인연의 끈이 불쑥 당겨지는 듯했다.<br>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접점 같았다. 험준한 봉우리와 절벽을 전전하며 살아온 도준의 세계와, 무르고 따스한 그녀의 세계가 초봄의 투명한 바람 속에서 잠시 포개졌다. 도준은 자신과 서윤이 이토록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왔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nbsp;  그는 매 순간 치열한 경험과 도전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왔고, 때로는 벼랑 끝에서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서윤은 그런 극단적인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부서질 듯 가냘프고 깨끗하며 순수한 분위기는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그녀만의 선명한 존재감이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br>흘러간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은 기억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불현듯, 서윤이라는 여인의 내면과 그녀가 지나온 계절들이 궁금했다. 마치 자신이 놓치고 살아온 어떤 빛의 조각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 보는 느낌이었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7/pimg_63920707598358355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1394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30. 그냥이라니요. 이런 것도 인연인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8611</link><pubDate>Fri, 24 Jul 2026 05: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8611</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도준이 조심스럽게 차를 옆으로 붙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br>-자전거에 문제라도 생겼나요?<br>나지막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목소리에 서윤은 움찔했다. 그녀는 자전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옆을 돌아보았다.<br>-아, 안녕하세요.<br>평소와 다르게 입술 끝이 살짝 떨리고,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방금 땅바닥과 씨름이라도 한 듯한 자신의 모습이 민망했고, 이런 쑥스러운 순간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br>‘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br>인적 드문 외딴 숲길에서 생판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마주한 상황은 묘하게 꺼림칙했다. 전날에도 그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있던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그랬다. 울타리 하나 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야외 공간이지만, 이 깊은 숲 한가운데서 낯선 이와 다시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br>그녀는 은연중에 간절히 빌고 있었다.<br>‘어서 가세요.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세요. 제발.’<br>남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br>‘뭐야, 저 눈빛?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br>서윤은 바퀴가 터진 자전거를 억지로 끌며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지쳐 있었지만, 가능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균형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br>남자가 다시 차를 옆으로 붙였다.<br>-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아뇨.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앗!<br>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턱에 난 상처가 소금을 뿌린 듯 화끈거리며 몹시 따가웠다.<br>-잠깐만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요.<br>남자가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br>-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거예요?-괜찮아요.<br>남자의 호의를 밀어내듯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br>-괜찮긴요. 턱에 흙이 잔뜩 묻었어요. 우선 상처부터 좀 씻어내야겠네요.<br>그녀의 눈동자에는 경계하는 빛이 어른거렸다.<br>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로 가서 생수병과 휴대용 티슈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먼저 입안을 헹군 뒤, 그가 따라주는 물을 손바닥에 받아 턱 주변을 닦았다. 찬물이 상처를 스치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br>-많이 쓰라려요?<br>도준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br>-자전거 헬멧은 왜 안 쓰셨어요?<br>그의 목소리는 온화하지만 단호했다.<br>-여기 그런 데잖아요. 혼자 천천히 타는 건데… 굳이 그렇게 눈에 띄고 싶진 않아서요.<br>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거북하게 울렸다. 자기 귀에도 낯설게 들리는 음성에, 순간 입안 어딘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닐지 불안이 치밀었다.<br>-혼자일수록 더 조심하셔야죠. 자전거 사고도 자동차 사고 못지않게 위험하거든요.<br>그는 고개를 저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br>-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아니요. 괜찮아요. 정말로요.<br>서윤은 손을 내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거절의 제스처는 분명했지만, 눈빛에 미세한 망설임이 어렴풋이 비쳤다. 도준은 시선을 옮겨 펑크 난 자전거 바퀴를 가리켰다.<br>-이걸 혼자 끌고 갈 수 있겠어요?-뭐, 그냥…-이런 길에, 혼자서요?-아니, 그러니까…<br>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고, 도와달라 하기엔 자존심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br>-그냥 가라고 하시면,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br>도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차로 향하는 걸음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 발씩 멀어지면서도, 그 뒷모습에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여유가 묻어났다.<br>-잠깐, 저기요!<br>서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쫓아갔다.<br>-도, 도와주는 김에 좀… 끝까지 부탁드릴게요.<br>조금 숨이 찬 말투였지만,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도준은 천천히 돌아섰다. 눈빛은 조금 전보다 깊어져 있었고,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떠올랐다.<br>-흠, 이 정도면 인연이네요. 먼저 자전거부터 실을게요.-네? 어제는 운명이라더니, 오늘은 또 무슨 인연… 이에요?-어제요?-할아버지네 집 마당에서요.<br>도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br>-아, 제가 잠깐 착각했나 봐요.<br>서윤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br>-아니 뭐… 그냥…<br>말끝이 흐려지자, 도준이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br>-그냥이라니요. 이런 것도 인연인데.<br>서로의 눈빛이 잠깐 맞닿았다. 긴장과 웃음, 약간의 부끄러움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봄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숲길을 스치며,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을 흔들어 놓았다.<br>도준은 멋쩍게 웃으며 자전거 앞으로 다가갔다. 앞바퀴를 분리하는 그의 손놀림에는, 도구를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 특유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유아용 자전거라도 되는 양 가뿐히 들어 짐칸에 싣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br>-자, 타세요.<br>서윤은 문득 멈칫했다. 도움을 받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탄다는 건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br>어제 잠시 스쳤던 김 씨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의 불안이 되살아났다. 마음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본능적으로 어깨가 굳어졌다. 숲길 양옆을 살피며 되돌아설 길을 찾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남자, 그리고 고요한 숲만이 고립된 현실 속에 남아 있었다.<br>‘김 씨 할아버지 조카라잖아.’<br>그 순간, 우연히 찾아온 작은 일탈에 그녀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느꼈을까. 아니면 불안하기만 했던 걸까. 그 불안 너머에, 은근히 스며드는 설렘도 있었을까.<br>소리와 기척이 사라진 오후의 숲길에서, 서윤은 그의 부축에 살짝 기대어 차에 올랐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4/pimg_639204662984581917.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8611</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9.중력에서 풀려난 듯 허공에 매달린 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6926</link><pubDate>Thu, 23 Jul 2026 05: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692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서윤이 자전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뉴욕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뉴저지 포트 리의 작은 가게 위층 원룸에서 지내며, 혼잡한 버스 대신 자전거로 맨해튼까지 통학했다. 거의 1년 가까이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허드슨강의 바람을 맞으며 질주했던 그 경험은 몸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제는 횡계의 숲길 정도는 무리 없이 달릴 수 있게 되었다.<br>한동안 2차선 차도를 따라 달리던 서윤은 인가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길 위로 엷은 햇살이 부서졌다. 사람의 발길마저 드문 구불구불한 길 끝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펼쳐져 있었다.<br>서윤은 속도를 줄이고 페달을 수평으로 맞춘 뒤,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자전거가 울퉁불퉁한 지면 위를 내달릴 때마다 짧고 날카로운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앞바퀴는 자갈에 부딪힐 때마다 불규칙하게 튕겼지만, 서윤은 핸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았다. 경사가 가팔라지자 뒤꿈치에 힘을 주어 페달을 깊이 밟으며 속도를 조절했다.<br>-좋아, 이 정도는 문제없어. 근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br>오늘은 손문기 선생님 전시회 오프닝이 있는 날이었다. 손 화실 식구들이 리온 갤러리에 와서 자신을 찾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속상했다.  <br>-괜찮아. 전시회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br>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리며 핸들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길 한가운데 돌덩이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까만 암석의 날선 면이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지만, 앞바퀴가 돌무더기를 스치며 중심을 잃었다. 자전거는 미끄러지듯 흔들렸고, 한순간 휘청거리며 그대로 무너졌다.<br>-앗!<br>짧은 비명이 터진 순간, 그녀의 몸이 자전거와 함께 튕겨 올랐다. 중력에서 풀려난 듯 허공에 매달린 채, 손은 핸들에서 빠져나갔고, 두 발은 페달을 벗어나 공중에서 엇갈렸다. 곧이어 닥칠 충돌을 직감한 가슴이 차가운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자전거와 함께 럭비공처럼 날아가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br>얼굴부터 처박히는 충격과 함께 거친 흙이 입과 콧속 깊숙이 밀려들었고, 흙먼지와 뒤섞인 비명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두 다리는 자전거 바퀴에 꼬여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br>-으, 으으…<br>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얼굴 한쪽에 강펀치를 맞은 듯한 예리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입안에서는 마른 흙이 서걱거렸고, 귀에는 ‘찌잉’ 하는 이명이 울렸다. 머릿속은 쇠망치에 찍힌 듯 멍하고, 시야는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혼자 당한 일이니 그다지 창피할 일은 없었지만, 곧바로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갑자기 싸늘한 예감과 함께 울음이 치밀어 오를 듯했다.<br>-아냐. 괜찮을 거야. 정신 차리자.<br>땅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충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뼈마디 곳곳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욱신거렸고, 손끝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혀끝에 와닿은 흙의 거친 감촉이 메스꺼운 불쾌감을 더했다. 그녀는 힘겹게 엉킨 다리를 풀기 시작했다. 흙먼지를 퉤 뱉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더듬자 오른쪽 뺨 아래가 울퉁불퉁 부어 있었고, 턱 밑은 쓰라렸다. 팔뚝과 무릎에서는 화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고, 피부가 벗겨진 다리 상처에서도 붉은 열기가 느껴졌다. 손바닥에도 둔한 통증이 남아있었으나, 장갑 덕분에 깊은 상처는 피한 듯했다.<br>-많이 안 다쳤어. 부러진 데도 없잖아. <br>서윤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몸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는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앞바퀴가 터진 자전거는 만취한 취객처럼 무겁게 비틀거릴 뿐이었다. 멀쩡하게 잘 달리던 타이어를 찢은 범인은 바로 그 녹슨 못이었다. 오랜 세월 벌겋게 산화한 뾰족한 쇳조각 하나가, 하필 그 순간 누군가가 걸려들기를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br>제 기능을 잃어버린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이 들었다. 가뜩이나 험한 비포장도로에서 질질 끌리며 휘청대는 앞바퀴 때문에 몇 걸음 옮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겨우 비틀비틀 걷고 있던 그때, 갑자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br>-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br>그가 더듬거리며 내뱉었던 그 말을 서윤은 또렷이 기억했다. 처음 본 남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운명’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놀란 새가슴이 되어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하필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마주치다니.<br>-맙소사, 왜 이럴 때 나타난 거야.<br>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눈길을 돌렸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3/pimg_63920381052904620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692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8. 오래된 시간의 틈 사이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5043</link><pubDate>Wed, 22 Jul 2026 0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504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횡계 읍내는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거리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라 읍내를 뿌옇게 뒤덮었다. 그 위로 스며든 초봄 햇살이 풍경 전체를 엷은 장막처럼 감쌌다. 중앙로를 따라 트럭과 롤러가 쉴 새 없이 오가며 땅속까지 울릴 만큼 굉음을 토해냈다.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낮은 건물과 오래된 상가들 사이로 슈퍼마켓과 스키 숍, 공인중개사 사무소, 식당들의 간판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br>이 동네는 겨울 한 철이 성수기였다. 12월 삭풍이 불기 시작하면 용평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로 이 좁은 거리도 제법 북적거렸다. 스키장은 사월까지 문을 열었지만, 그해 삼월은 유난히 따뜻했다. 슬로프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도 일찌감치 뜸해졌다. 도로에는 외지인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사장 트럭들만 먼지를 풀풀 날리며 오갈 뿐이었다.<br>이튿날, 도준은 오대산 등반을 마친 뒤 횡계로 돌아왔다.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몸의 감각을 다듬고 근력 훈련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거의 다 보낸 것이다. 그의 몸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절어 있었고, 어깨에는 쇠뭉치를 올려놓은 듯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다리 근육은 은근히 잡아당기듯 뻐근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먼저 몸에 밴 냄새를 씻어내고 싶었다.<br>중앙로 근처 사우나탕에는 대낮부터 술기운을 씻어내려 온 남자들이 몇 명 눈에 띄었다. 간단히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도준은 젖은 머리를 털며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늘 단골로 다니던 납작식당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소박한 분위기의 함박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간판 아래 황태국밥과 황태 고추장구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인지, 가게 안은 손님 한 명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br>-어서 오세요. 저리로 앉으시죠.<br>부엌에서 나온 주인 남자가 창가 옆 빈자리를 가리켰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고, 좌식 테이블이 놓인 방으로 들어섰다. <br>흰색 모조지를 깔아놓은 밥상 앞에 앉으려던 순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무릎 주변을 마사지하듯 손으로 꾹꾹 누르며, 묵직한 다리를 천천히 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br>이 시큰거리는 관절통은 이미 몸에 밴 익숙한 통증이었다. 겨울마다 빠지지 않고 즐겨 왔던 모굴 스키의 흔적일 터였다. 좁고 울퉁불퉁한 슬로프를 내달리던 짜릿한 쾌감이, 그만큼 무릎 속 관절과 근육을 서서히 갉아낸 것이다.<br>재작년 함께 스키장에 왔던 정형외과 의사 친구가 그의 무릎 통증을 지켜보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br>-야, 신은 공평해. 슬로프 내려오면서 평생 쓸 무릎 다 썼잖아. 재밌게 놀았으면 아픈 것도 감수해야지. 버틸 때까지 버텨. 나중엔 인공 관절 넣어야 할지도 몰라.<br>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도준의 귀에는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부실한 무릎으로, 저 검푸른 마의 벽처럼 솟은 로체 남벽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첫 시도에서 이미 8,200미터까지 올랐으니, 이번엔 정상의 마지막 구간까지 닿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삶이란 결국 모든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형상이지 않은가. 그 끝을 보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도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불길한 생각을 조용히 밀어냈다.주인 남자가 다가와 물컵을 밥상에 내려놓았다.<br>-뭘 드시겠어요?-황태국밥 하나 주세요.-잠시만 기다리세요.<br>그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부엌에서 식당 아줌마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br>-이번 겨울엔 눈이 안 와서 다들 재미 못 봤잖아요.-장사 안돼 큰일에요. 이러다 문 닫는 건 아닌지.-부정적인 생각은 몸에 안 좋아요. 그럴수록 더 힘들어지지 않겠어요?<br>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도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br>‘그래, 부정적인 생각은 정신 건강에도 해롭고말고.’ <br>스키장도, 날씨도, 밥장사도 이들에게는 모두 소중한 삶의 일부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여유. 식당가 골목의 잔잔한 소음과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그는 잠시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았다.  &nbsp;  얼마 후 식당을 나온 그는 차를 골목 어귀에 세워둔 채 큰길가 슈퍼마켓으로 향했다.&nbsp;한 달 가까이 고모부 집에 머무는 동안, 슈퍼 주인과도 어느새 낯이 익었다.&nbsp;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른걸레로 당면 봉지를 하나하나 닦고 있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br>-어이구… 어서 오세요.-안녕하세요. 좀 어떠세요?-젠장, 사방 천지가 먼지투성이라 숨도 못 쉬겠어요.-공사 때문에 힘드시겠어요.-누가 아니라오. 좀 보시구려. 물건들이 죄다 이 모양이니, 이렇게 매일 닦아줘야 한다니까.-횡계가 좋아지면, 스키 손님도 늘고 좋잖아요.-그렇긴 하죠.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것도 있고. 그래야 세상만사 서로 퉁 치면서 살아가지.<br>가게 안은 시골 동네치고는 제법 큰 규모였다. 각종 음료수와 식료품은 물론, 크고 작은 광주리와 둥근 밥상 같은 생활용품까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공사판 먼지 속에서도 주인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매대마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도준은 생수와 캔맥주, 짭짤한 안줏거리 몇 가지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br>-오늘도 산 다녀오는 길이요?-네.-아이고, 부지런도 하시지. 그럼, 또 봅시다.-안녕히 계세요.<br>가게 문을 나서자, 공사판 먼지가 뿌연 연기처럼 퍼지며 시야를 가렸다. 도준은 두어 번 허공을 휘저은 뒤, 눈을 가늘게 뜬 채 맞은편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갔다.<br>그는 웬만한 전화번호는 거의 다 외우는 편이었다.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다 숫자에 집착하는 성격 탓이었다. 머릿속에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습관은 전문 산악인으로서 생사를 가르는 순간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 필요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산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그런 방식을 신체적 반응처럼 익힐 때까지 오래도록 반복해 왔다.<br>도준은 수화기를 집어 들며 청소 용역회사를 운영하는 최윤 선배의 사무실 번호를 떠올렸다. 동전을 넣고 숫자 버튼을 누르자, 곧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br>-어머, 사장님 조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잠깐 나가셨나 봐요.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저는 도준이라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그러시겠어요? 그럼 5분쯤 후에 다시 전화 부탁드릴게요.<br>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자전거를 탄 여자가 나타났다. 노란색 바람막이를 입은 여자는 전화 부스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MTB 자전거가 빠르게 전화 부스를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일렁이는 도로 위로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며,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준은 문을 밀치고 나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br>어제 고모부 집 마당에서 본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장면 위로 22년 전 기억 속 어린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인연의 시곗바늘이, 어느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br>‘또 만나는군, 꼬마 아가씨.’<br>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래된 시간의 틈 사이로, 무엇인가가 다시 깨어나는 순간처럼.<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3/pimg_639204387228124430.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504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7. 허공의 어둠을 더듬던 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3087</link><pubDate>Tue, 21 Jul 2026 01: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308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겁도 없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얕은 물살이 발목을 감싸며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소녀는 잠깐 멈춰 서는가 싶더니, 신발을 붙잡으려는 듯 다시 발을 내디뎠다.<br>-안돼! 위험해!<br>도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소녀는 어느새 물살이 빠른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물이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차올랐고, 소녀는 중심을 잃고 휘청대다가 그대로 물속에 휩쓸렸다.<br>-아악!<br>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계곡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갔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작은 몸짓이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악몽이 불쑥 되살아났다. <br>칠흑 같은 어둠, 도무지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밤. 차 안에 갇힌 채 앞좌석에서 들려오던 부모님의 희미한 신음.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숨 막히는 침묵. 그날, 그는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br>‘내가 구할 거야.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아.’ <br>도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br>-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갈게!<br>사납게 꿈틀거리는 계곡물이 허벅지를 휘감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이미 거센 물살에 휩쓸린 채 몸부림치다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도준은 미친 듯 팔을 휘저으며 급류를 헤집었다.<br>-꼬마야, 어딨니? 대답해! 조금만 버텨!<br>그것은 찰나였으나, 그의 의식 속에는 영원처럼 각인된 한순간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소녀의 몸을 물살은 쉬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거친 물결 속에서 간신히 손끝에 아이의 살결이 스치는 순간, 그는 단숨에 그 여린 몸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br>사건이 났던 그날 밤에는 부모님을 붙잡을 수 없었다. 전복된 차 안, 어둠의 간격은 너무 멀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 생은 이미 저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두 분의 신음은 끝내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생명의 온기를 놓치지 않았다.<br>마침내 얕은 물가에 닿은 그는 소녀를 널찍한 바위 위에 눕혔다. 소녀는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노란 원피스 밖으로 가냘픈 팔다리가 드러났고, 창백한 이마에는 젖은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었다. 작은 얼굴은 눈을 꼭 감은 채 잠든 인형처럼 고요했다. 도준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내려주고,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br>숨소리는 점점 옅어졌고, 호흡은 금방이라도 멎을 듯 위태로웠다.<br>그 순간, 보이스카우트 캠프에서 배운 구조법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지도 교사는 아이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br>“입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른다. 실시!”<br>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br>한 번, 두 번, 세 번.<br>도준은 단호한 손길로 여린 가슴을 꾹꾹 눌렀다. 이어 소녀의 차가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숨을 불어넣었다. 몇 초가 끝이 없는 시간처럼 아득했다. 그러다 문득 소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거친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냈다.<br>-괜찮아. 안심해. 괜찮아.<br>도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br>-기특해. 잘했어. 이제 다 괜찮아.<br>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의 티셔츠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힘에,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어둠 끝에서 처음 만난 따뜻한 체온에 기대듯, 소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도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작고 연약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br>‘이번엔 내가 구했어.’<br>뜨겁게 달궈진 바위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작은 용기가 단지 소녀만을 살려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br>그날 밤, 점점 식어 가던 두 분의 숨결. 어떻게든 붙잡으려 허공을 더듬던 어린 손. 자신을 옭아매던 어둠 속에서, 그는 분명 한 발짝 벗어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오래전부터 목말라하던 어떤 감각처럼 다가왔다. 잃어버린 온기. 끝내 닿지 못했던 손. 내내 갈망해 온 것들이었다.<br>‘내가 아이를 구한 게 아니라, 오늘은 나도 함께 살아난 거야.’<br>그런 생각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br>-서윤아! 서윤아! 어디 있니?<br>도준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br>-네 이름이 서윤이로구나. 만나서 반가웠다.<br>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바위 위에 남겨두고 소나무 그늘 속으로 물러났다. 그의 발자국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솔잎을 흔들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군가 소녀를 안아 들며 외쳤다.<br>-무사해서 다행이야, 서윤아.<br>고모부 내외와 친하게 지내던 윗집 아줌마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도준은 나무 그림자 속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br>-잘 가라, 꼬마 아가씨.<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1/pimg_63920192147660881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308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6. 죽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방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1229</link><pubDate>Mon, 20 Jul 2026 01: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122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1997년 가을, 도준이 남긴 등반일지 한 귀퉁이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nbsp;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횡계에 있는 고모부 댁 마당에서였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 여자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절어 엉망인 차림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선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br>살면서 여자로 인해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굳어졌다. 나는 늘 죽음의 바깥에서 살아온 자였다. 산의 벼랑 끝에서, 눈보라 속에서, 매번 ‘살아남은 이유’를 묻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처음으로 ‘살아 있어도 좋다’는 감정이 스쳤다. 생존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응답처럼.<br>그때 내가 횡계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땠을까. 여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물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인연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져도, 멀리 흩어져 있어도, 결국 다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으니까.<br>조금 전에, 우리의 인연을 설명할 만한 비유 하나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걸어온 모든 길을 실로 묶어 이어 놓는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긴 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 실의 길이를 늘여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조그마한 실타래의 일상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녀의 씨실과 나의 날실이 오래전에 한 번 엇갈린 적이 있었다.<br>내 기억 속의 어린 꼬마 아가씨는 이제 어여쁘고 성숙한 여자로 자라 있었다. 그녀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가 그녀를 구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했다. 그녀를 구했던 순간, 사실은 나 역시 그녀에게 구원받고 있었다는 것을.<br>인생에서 중요한 건 실의 길이나 두께가 아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 긴 여정은 결국 공허와 외로움 속을 떠도는 덧없는 여로일 뿐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죽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nbsp;  스물두 해 전 여름, 열세 살 도준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날, 그의 세계는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어린 그에게 횡계의 고모만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고모는 막내아들처럼 살뜰히 그를 보살피며 따스한 식사와 부드러운 말을 건넸지만, 도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이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가두는 장막이었다. 소년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길 위에 홀로 선 작은 그림자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nbsp;  여름방학이 다가오던 7월의 어느 날, 도준은 학교를 빼먹고 집 근처 용천 계곡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그보다 더 나은 장소는 없었다. 산이었다. 그곳에 가면 아직 아버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올랐던 푸른 능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닦아내며 건네던 시원한 물 한 모금,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끝없는 풍경. 아버지 몸에서 번져 오던 그 냄새와 땀의 열기, 단조롭지만 어딘가 따스했던 그 목소리. 그렇게 눈을 감으면, 손끝에 스며드는 듯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br>-도준, 너는 발이 빠르구나. 아버지를 곧 따라잡겠어.<br>너그러운 미소로 그를 격려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nbsp;그러나 이제 산은 더 이상 따뜻한 위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 한편에 보듬어 두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에 가까웠다. 산자락에 홀로 앉아 아픈 시간의 장면들을 더듬다 보면, 그 고통이 서서히 뻗어 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심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모든 순간을 삼켜버릴 듯했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잔인한 물결에 몸을 내맡겼다.<br>‘그래. 나를 가져가거라.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nbsp;  그해 한여름의 햇살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했다. 나무 그늘조차 뜨거운 기운을 피하지 못하고, 흐릿한 열기로 공기마저 일렁였다. 도준은 녹아내릴 듯한 무력감 속에 스스로를 방치한 채, 개울가 근처 널찍한 바위 위에 무심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의식의 저변을 가볍게 흔들었다.<br>-아, 여기 있다!<br>고개를 돌리자, 개울 건너편에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물가를 따라 가볍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면 가까이 날아오르는 나비를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햇빛에 반사된 개울물은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였고, 소녀는 물비늘 사이를 부유하는 초롱한 그림자 같았다. 도준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에 무기력하게 얹힌 자신의 손등. 아무런 의욕도 없이 축 늘어진 채, 거기 그대로 놓여 있었다.  &nbsp;  그 소녀는 자신과 너무도 먼 세계의 사람이었다. 환한 빛살 아래 자유롭게 뛰노는 저 작은 몸짓은,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보드랍고 따스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어린 날의 바람도, 체온도, 품에 안기던 기억조차 비껴간 삶. 소녀는 그에게 꿈의 풍경 같았다. 아니, 꿈조차 꿔보지 못한 세계의 조각이었다.  &nbsp;  그러나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br>-어, 내 신발!<br>도준은 그 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물가에 벗어놓은 소녀의 분홍신 한 짝이 개울물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nbsp;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1/pimg_63920191949817549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0122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5. 그날, 한 사람이 걸어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6354</link><pubDate>Fri, 17 Jul 2026 02: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635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기억은 수많은 더듬이를 지닌 촉수처럼, 다른 차원과 이어진 은밀한 통로에 닿아 있는 듯하다. 훗날 그녀는 그해 봄날 오후의 풍경을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조금씩 아껴가며 되짚곤 했다.<br>당시엔 지루한 기다림과 이곳이 남의 집이라는 불편함 외에, 특별한 감정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장면도 의식 깊숙이 새겨졌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눈을 감기만 해도 마치 꿈속 장면처럼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nbsp;오래 접어 두었던 담요를 다시 펼치듯, 뽀얀 실밥 사이사이에 스며 있던 적막과 긴장이 손끝에 만져진다.<br>익숙한 냄새를 따라 기억의 문이 열리고, 그 감각은 서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nbsp;김 씨 할아버지가 사는 함석집 뜨락 한편에 서 있던 바싹 마른 감나무 한 그루. 빈집의 정적을 지키며 댓돌 위에 놓여 있던 검정 고무신. 텅 빈 축사 한쪽 흙벽에 걸린 그물 망태기. 반질거리던 낫과 쇠스랑, 그리고 곡괭이들. 깊은 샘에서 물을 퍼 올리던 무쇠 펌프와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안방 문고리에 비뚤게 걸린 자물통.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 오던, 이름 모를 새소리. 그런 것들이 여러 장의 오래된 스틸 사진처럼 하나씩 의식 위로 떠오른다.<br>그 장면들이 이토록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그날 마주친 한 사람 때문이다. 남자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와 낡은 사륜구동 랜드로버에서 내렸다. 잠시 멈춰 선 그는 열린 운전석 문에 오른손을 얹은 채, 오래전 말보루 담배 광고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모습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며 그녀의 머릿결이 흩날렸다. <br>남자는 차 문을 닫고,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역광 속에서 윤곽만 또렷해진 그의 모습은, 현실의 한 장면이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다시 조립되는 이미지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시공간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고, 그가 마침내 대문간을 지나 집 안에 고여 있던 적요를 가르며 가까워졌다. 아주 멀리서부터 걸어와 마침내 그녀 앞에 선 남자. 그가 바로 도준이다.<br>그녀는 주인이 없는 집 마당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먼 경계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뚜벅뚜벅,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는 걸음이었다. 그녀 앞에 멈춰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가슴께로 번져 왔다.<br>‘누군데, 나를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br>남자는 크고 다부진 체형에, 오랫동안 야외 생활을 해온 사람처럼 햇빛에 짙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무심하게 하나로 묶은 꽁지머리가 조금은 특이하게 보였다. 그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지만, 유독 그의 눈빛이 서윤의 마음을 파고드는 듯했다. 오래 쌓인 피로와 깊이 가라앉은 사념들이 겹쳐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친절도, 경계도 아닌,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여백이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여백이 그녀의 심장을 살짝 조여 왔다. 몸은 먼저 반응하듯 어깨가 움츠러졌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교차했다.<br>-저, 어떻게 오셨죠?<br>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김 씨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말했다.<br>-저는 저 위쪽 집에 살고 있어요.-아, 그러시군요.-아무도 안 계시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해요.-아, 괜찮습니다.<br>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는데, 그 안에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여운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번져 오는 그 묘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남자의 목에는 작은 통 모양의 은색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햇빛에 오래 노출된 피부와 세월 속에서 다져진 몸은, 그가 일상에 쉽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남자의 정체가 문득 궁금했다.<br>그는 자신이 김 씨 할아버지의 처조카라고 소개했다. 김 씨 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고 지금은 서울 큰형님 댁에서 요양 중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br>-이젠 많이 나아지셨어요.-어머나, 큰일 날 뻔했네요. 아, 참… 이거.<br>그녀는 손에 든 선물 가방을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바로 건네기엔 난처했고, 다시 들고 돌아가기에도 망설여졌다. 결국 가방을 마루 한쪽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br>-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보내신 거예요. 비타민인데, 전해주시겠어요?-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라고 전하면 될까요?-저는 김순내 할머니 손녀예요.&nbsp;저희 큰할머니와 할아버지 내외분은 오랫동안 각별하게 지내셨어요.-그럼 혹시… 저 위쪽에 있는, 막다른 길 끝 집 말씀하시는 건가요?-네, 거기 파란 지붕 집이요.<br>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스쳤다.<br>-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br>말끝을 흐리는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br>‘운명…?’<br>서윤의 내면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nbsp;<br>처음 만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운명’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낯설었고, 어딘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처럼 불길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nbsp;흥미는 순식간에 씻겨 나가고, 대신 날카로운 경계심이 온몸을 휘감았다.&nbsp;그의 시선과 말투,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 안에 고요히 가라앉은 적막까지, 모든 것이 문득 위험한 징후처럼 느껴졌다.<br>-저,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br>서윤은 한 걸음 물러선 뒤 몸을 돌렸다. 대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심장은 어쩐지 엇박자로 뛰는 듯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 잡아당기는 느낌에, 대문간에 이르러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남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3/pimg_63921313189428556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635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4. 빈집의 툇마루에 앉아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4469</link><pubDate>Thu, 16 Jul 2026 04: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446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봄 햇살이 은은하게 감도는 연청빛 하늘 아래, 텅 빈 시간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서윤은 작은 종이 가방을 손에 들고 별장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아버지가 김 씨 할아버지께 전해 달라며 챙겨주신 종합 비타민과 홍삼 캔디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출입문을 잠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br>‘아무 일 없으셔야 할 텐데…’<br>집 앞 돌층계를 내려선 서윤은 산등성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길 양옆에는 파릇한 새싹과 양치류가 돋아 있었고, 이끼 낀 자갈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 산길은 동네 사람들만 다니는 평범한 길이었지만, 산새들의 지저귐과 발밑을 스치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림이 새봄의 기운을 더욱 싱그럽게 했다.<br>잠시 오르막을 지나 시냇물을 건너 조금 더 내려서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담장에 붙은 대문은 빗장이 채워지지 않은 채, 조금 열려 있었다. 손으로 밀자 삐걱— 낮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며 문이 더 벌어졌다. 서윤은 흰색 종이 가방을 가볍게 매만진 뒤 대문턱을 넘었다.<br>-할아버지, 안에 계세요?  <br>툇마루 앞 댓돌 위에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곳간과 축사를 차례로 살핀 뒤, 내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방 문고리에 걸린 자물통 역시 채워져 있지 않은 걸 보니, 그리 멀리 나가신 것 같지는 않았다.<br>-아직 여기서 지내시나 보네.<br>집안 곳곳에 사람 사는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서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 망설이다가, 결국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br>나뭇결이 허옇게 드러난 툇마루에 앉아 침묵 속에 가라앉은 집안을 둘러보자니, 큰할머니가 머물던 그 낡은 기와집의 포근하고 정겨운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 집안 어딘가에서 장작불이 탁탁 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큰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숨을 고르며 집안을 살피시던 그분의 목소리, ‘서윤아!’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듯 고요한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br>오래전 시간의 창 너머, 뒤뜰 외양간에서는 코뚜레를 단 황소가 나지막이 음매 울고, 자기 집 울타리를 뛰쳐나온 돼지는 앞마당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푸드덕거리며 서까래를 향해 날아오르던 닭들, 부엌 아궁이에 묻어둔 고구마가 서서히 익어가던 구수한 냄새, 펌프질로 길어 올리던 찬물의 맑고 청량한 기운까지—모든 풍경이 큰할머니의 옛집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서윤은 아늑하고 풍성했던 유년의 뜨락을 거닐며,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추억의 온기를 느꼈다.<br>시간은 숨을 죽인 채 더디게 흘렀다. 늦은 오후 햇살이 투명한 적막 속으로 내려앉아, 마당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돗가 근처, 맨흙이 드러난 마른 땅 위에는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마 끝에서 꺾인 해그림자는 장독대를 향해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김 씨 할아버지는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환한 봄볕을 오래 쐰 탓인지,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br>-아무래도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게 낫겠어.<br>손바닥으로 하품을 가리며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신작로와 맞닿은 언덕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차 한 대가, 마침내 대문 밖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서윤은 선물 가방을 챙겨 들고, 잡풀이 드문드문 돋아난 마당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구형 랜드로버가 집 앞 공터에 천천히 멈춰 섰다. 험한 산길과 오프로드를 견뎌온 차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br>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찻길은 여기서 끝이 났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외길이었다. 왜 저 차는 여기까지 온 걸까. 길을 잘못 든 걸까, 아니면 김 씨 할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 걸까. 그녀는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랜드로버를 바라보았지만, 전면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으로 차 안은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br>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얼핏 보기에도 단단하게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그는 잠시 차 문에 손을 얹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눈빛은 마치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br>서윤은 불안과 호기심이 엇갈린 마음으로 남자의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이 외딴 길 끝자락까지 일부러 차를 몰고 왔다면, 그에게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상황 외에, 다른 가능성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혼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왠지 더 움츠러들게 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6/pimg_63919816684871251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446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3. 그건 너의 콤플렉스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2430</link><pubDate>Wed, 15 Jul 2026 02: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2430</guid><description><![CDATA[<br>글·그림 김미진<br>원목으로 만든 별장 출입문에는 묵직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현관 근처 작은 화분 아래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자, 맑은 햇살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집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이 한동안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꾸민 친환경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br>1층은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이어진 개방형 구조였고, 화이트와 블루 톤의 싱크대와 스토브, 나무 수납장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 오른쪽에는 욕실이 있었고, 왼편으로 돌출된 공간은 손님방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전통 가옥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손님방은 푸른 대리석의 차가운 질감과 레이스 커버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한낮 햇살 속에 고요한 정취를 더했다.<br>욕실 옆 계단을 따라 오르면, 아래층과 허리 높이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둔 복층형 오픈 침실이 나타난다. 목재 난간 너머로 거실이 내려다보이는 이 공간은, 정갈하게 놓인 가구 덕분에 포근하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울어진 천장 아래 불투명 채광창으로 은은한 햇살이 스며들어, 침대 위를 부드러운 빛으로 감쌌다. 이곳에서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아침 햇살 속에서 눈을 뜨는 바로 그때이다. 숲속에 내려앉은 고요한 빛은 하루의 시작을 부드럽게 물들이며, 마음 깊은 곳까지 아늑한 기운으로 스며든다. <br>서윤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장과 창틀을 점검했다. 지붕과 벽 어디에도 물이 배어든 자국이나 곰팡이 흔적은 없었다.&nbsp;손님방 옆 보일러실에는 새로 설치한 경동 보일러가 낯설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nbsp;부엌 싱크대 앞으로 돌아와 물을 틀자, 보일러가 조용히 작동했고 곧 온수가 흘러나왔다. 서윤은 실내 온도를 24도로 설정한 뒤, 방화동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br>-아가씨, 오늘 횡계 갔다면서요?<br>전화를 받은 올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살가웠지만, 일부러 과장된 듯한 말투가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br>-이제 막 도착했어요.-물 새는 데는 없죠? 보일러는 어때요?-네… 다 잘된 것 같아요.<br>서윤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 채, 약간 거리를 두었다.<br>올케가 부모님 댁 살림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건, 오빠가 거듭된 사업 실패로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잃은 무렵부터였다. 신용불량자가 된 오빠는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길어졌고, 젖먹이 조카에게는 올케의 손길이 절실했다. 제 앞가림이 급했던 올케는 월셋집을 방화2동 주민센터 근처로 옮긴 뒤, 가사 도우미처럼 시댁을 들락거리며 미안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생활비를 챙겨 갔다. 못난 자식을 둔 양친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흘리며, 부모님 집을 사실상 제 아르바이트 일터처럼 드나드는 형국이었다.<br>전화선 너머로 배경음처럼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올케는 라디오를 켜 둔 채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고, 엄마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집 근처 한의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나가셨다고 했다. 지금 집에는 올케만 남아 있었고, 그녀는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재료를 손질하는 중이었다.<br>-오늘 꼬리곰탕 끓이고 있거든요. 아가씨도 설비 가게 들렀다가 곧장 올라오실 거죠? 저녁 같이 먹어요.-저녁이요? 여기 오는 데만 다섯 시간 걸렸어요.<br>서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br>-누가 아니래요. 피곤하죠?-오늘 하루는 여기서 쉬고 갈까 봐요.-내일 출근은요?-당분간 휴가예요.-아, 다행이네요. 이런 일은 선호 아빠가 나서야 하는데… 휴가 첫날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래요.<br>올케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오빠 때문에 속상하다며 한참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오빠가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나간 뒤 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다는 말에, 서윤은 가슴 한복판에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nbsp;<br>식구들은 그녀의 결혼을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인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신우건설 장남 강태일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무렵, 오빠는 서윤을 불러 앉혀놓고 현실적인 차이에 대해 말했다.<br>-아버지는 퇴직 전에 너를 결혼 시키고 싶어 하셔. 하지만 우리 사정으로는 그쪽 집안 수준에 맞추는 건 불가능해. 그건 너도 잘 알잖아.<br>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집안 분위기가 서서히 서윤을 압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br>-아가씨, 신우건설에 오빠 취직자리 하나 부탁할 수 있을까요?-그래라. 강 서방에게 말이라도 한번 슬쩍 건네보렴.<br>엄마도 딸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거들었다.<br>모처럼 식구들끼리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서윤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신용불량자인 데다 종종 노름판까지 드나드는 친오빠의 취직 건이라니.&nbsp;아무리 결혼을 앞둔 사이라 해도, 집안의 위신까지 걸린 그런 부탁을 서윤은 차마 강태일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 말 없이 모른 척해왔는데, 또다시 오빠가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 하나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괜스레 미안했고,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br>-횡계 읍내까지 다시 나가려면 또 택시를 불러야 하잖아요. 에잇, 그냥 이참에 외제 차 하나 뽑아달라고 하세요. 시댁이 뭐, 으리으리하잖아요. 이미 그 집 며느리나 진배없는데,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고생할 이유 뭐 있어요. 그죠?<br>올케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가족 사이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가끔 의도적으로 무시하곤 했다. 외제 차라니. 이건 서윤의 입장을 너무도 쉽게 넘겨짚은 말이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여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br>올케는 말실수인 척 흘리듯 말을 꺼냈지만, 실은 ‘가족’이라는 방패를 두른 채 서윤의 반응을 떠보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어디까지 서윤의 약혼자 집안에 손을 내밀어도 되는지, 태일이 어느 선까지 이번 혼사를 배려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녀는 그 어색함을 덮으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br>-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요? 어디 편찮으신가?<br>김 씨 할아버지의 늙고 쇠약해진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별장 주변을 돌며 집 상태를 살펴주던 그가 홀로 지내시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다시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br>-제가 내려가서 한번 살펴볼게요.-혼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아유, 우리 아가씨는 어쩜 그렇게 순하고 착해빠졌을까…-지금… 칭찬하는 거예요?-맞아요. 칭찬이죠. 그리고 진심이기도 하고요. 호호호.<br>이번 지붕 공사와 보일러 교체를 맡았던 ‘대동종합설비’는 횡계 읍내에 있었다. 오늘 밤을 이곳에서 보내려면 먹을거리도 좀 마련해야 했다.<br>-택시 부르면 거기까지 들어오는 데도 한참 걸릴 텐데… 참, 자전거 탈 줄 알잖아요. 그죠?<br>올케는 다시 호호 웃더니 집 뒤편 창고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작년에 오빠가 사다 놓은 중고 산악자전거가 있었다. 횡계 로터리까지라면 그걸 타고 금방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br>전화를 끊은 그녀는 우선 짐을 풀고 잠시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텅 빈 고요함을 누리고 싶었다. 한동안 넓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에 닿아 있는지, 혹은 그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쯤 더 이곳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느슨해졌다. 이대로 휴가 기간 내내, 아무런 번뇌와 갈등도 없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br>‘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남들은 휴가를 받으면 외국으로 여행도 가는데…’<br>그녀는 짧은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 속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랩톱을 꺼내 전원을 연결하려던 순간, 집안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거슬렸다. 문이며 창문을 굳게 닫아두었건만, 손바닥 위에는 어느새 뿌연 먼지가 묻어났다. 그녀는 걸레를 빨아 테이블과 선반, 의자 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br>‘그런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br>그녀는 문득 손을 멈추고, 물기 잔뜩 머금은 시커먼 천 조각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쓸고 닦는 일에 매달리는 걸까. 먼지가 쌓였다고 꾸중할 사람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정리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이 깔끔하고 질서정연해야 마음이 놓였다. 옷장 속은 늘 가지런했고, 서랍 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갤러리에서 전시 업무를 맡으면서 이런 성향은 더욱 깊어진 듯했다.<br>‘당분간 정리 박사 노릇은 잊자.’‘그래. 오늘만은 눈감아 주자.’<br>그녀는 물걸레를 툭&nbsp;물통 속으로 던졌다.&nbsp;믹스커피가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뜨겁고 달곰한 맛은 묘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머그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창가에 서서 다시금 밖을 바라보았다.<br>건물 아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넓은 터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대추나무도 이제는 남은 기운마저 다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nbsp;아버지 말로는 김 씨 할아버지가 수시로 들러 마당의 낙엽을 쓸고, 나뭇가지를 다듬어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가는 대추나무를 보자, 혹시 김 씨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더욱 커졌다. <br>우선 김 씨 할아버지 댁부터 살펴볼 생각으로 외출 준비를 하던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닌 단짝, 제이였다.<br>-너희 올케가 너 횡계 갔다고 하더라. 지금 누구랑 있어?-나 혼자 왔어.-강태일이 데려다준 거 아냐?-오늘 나 쉬는 날인 줄 몰라. -왜?-여행 가자고 하잖아. 1박 2일. 그래서 오늘 출근한다고 했어.-같이 하룻밤 지내는 거 아직도 불편하다! 그런데 알아? 그건 너의 콤플렉스야.-무슨 소리야?-집안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을 그렇게 방어하는 거지.-여보세요. 제이 씨, 그건 내 콤플렉스 아니고, 너의 열등감이거든요.-그래서 난 네가 좋아. 남자랑 여행 가지 마. 앞으로도 쭉. 대신 나랑 가자.-너랑? 돌아버리겠네.<br>제이는 요즘 몹시 지쳐 있다며 하소연했다. 4년째 작은 출판사를 운영 중인 그녀는 신간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편집부 직원 하나가 장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운 탓에, 그 일까지 고스란히 떠맡게 되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제이에게 갑작스럽게 인쇄소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br>-조심해서 갔다 와. 밥 잘 챙기고.-너도 잘 지내. 특히 남자 조심하고.-피, 하여튼…<br>서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고는, 문득 생각이 나 평창동에 있는 명명희 선생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 끝에 선생의 양녀 김순자 씨와 연결되었다. 명명희 선생은 동문전 참석차 일본 오사카에 머무는 중이며, 전시 일정과 여행을 함께 소화하느라 다음 주에나 돌아오실 거라고 했다.&nbsp;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 안으로 개인전에 대해 상의하려던 계획은 일단 미뤄야 할 것 같았다.<br>-네,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br>전화선 너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메마른 신호음이 공허한 정적 속에서 길게 울렸다.  &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7/pimg_63921719541380413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9243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2. 횡계 별장에 봄이 오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9885</link><pubDate>Mon, 13 Jul 2026 20: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988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다음 날, 서윤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횡계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읍내 중앙로의 공사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의 별장은 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더 들어간 산기슭에 있었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막다른 길 끝자락의 외딴집이었다.<br>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탄 그녀는 울퉁불퉁한 숲길을 따라 한동안 달린 끝에 별장 앞마당에 이르렀다. 집 뒤편은 곧장 수풀 우거진 산속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고,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도 거기까지였다. 뒷좌석에서 내리기 전, 서윤은 미터기 요금에 웃돈을 조금 얹어 건넸다. 빈 차로 되돌아가야 할 운전사를 향한 작은 배려였다.<br>-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손님이 가자면 어디든 가야죠.<br>차에서 내리려 하자, 택시 기사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br>-여긴 외진 곳이라 택시를 불러도 잘 안 들어올 겁니다. 혹시 필요하면 미리 연락 주세요. 사정되는 대로 제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br>택시에서 내린 서윤은 잠시 숨을 고르며, 비포장도로를 따라 차가 되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공기 속에 부옇게 흩날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앞마당의 고요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br>언덕과 능선을 따라 초봄의 푸른 기운이 스며든 한적한 오후였다. 청바지에 스웨이드 재킷을 걸친 그녀는 어깨에 랩톱이 든 배낭을 메고 있었다. 셔츠 깃을 반듯하게 여민 그녀의 얼굴에는 햇살에 데워진 듯한 혈색이 감돌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크게 기지개를 켜자, 숲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숨 깊은 곳까지 차올랐다. 신선한 공기 덕분인지 서울에서 이어온 긴 여정의 피로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씻긴 듯했다.<br>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하품을 하며, 언덕 위에 자리한 파란 지붕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본래는 낡은 농가였으나,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시간을 두고 개축해 지금과 같은 2층 건물이 되었다. 삼각형 지붕과 테라스를 갖춘 현재의 구조는 아버지가 스위스를 여행하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목조주택에서 영감을 얻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멋을 간직한 이 별장은, 아버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손수 다듬어 온 결과였다.<br>이 집에서 큰할머니는 암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사십 년을 홀로 지내셨다. 큰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하나뿐인 아들은 그 전쟁 통에 설사병을 앓다 목숨을 잃었다. <br>-그때 페니실린 한 방만 맞았어도 나았을 텐데….<br>살아생전 큰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내뱉곤 하던 그 말은, 지금도 서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br>횡계는 돌아가신 큰할아버지의 고향이었고, 전쟁 미망인이 된 그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몸을 기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그 아이마저 잃고 난 뒤,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두듯 스스로 벽을 쌓고 살아왔다. 질병과 전쟁, 가난이 뒤엉켜 있던 시절. 큰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상실의 시간이었다.<br>돌이켜보면 횡계는 서윤에게 전원의 소박한 삶을 처음 가르쳐준 거의 유일한 터전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배려로 큰할머니 곁에 양자처럼 머물게 되었고, 독립한 뒤에도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기억 속에는 유년 시절 횡계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낡고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br>동네 아이들은 서울에서 온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고, 서윤은 그 애들 틈에 섞여 낯선 경험들을 하나씩 익혀갔다. 부뚜막 불구덩이에 넣어둔 감자를 들여다보다 볏짚을 타고 번진 불꽃에 놀라 뒷걸음질 치던 일, 아이들을 따라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던 일, 겨울 어느 날 밭둑에서 쥐불놀이를 하다 동네 어른들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던 일들. 그 모든 기억은 오래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마음속 풍경화로 간직되었다. <br>그러나 초등학교 상급 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업에 쫓겨 횡계를 찾는 일은 차츰 뜸해졌다.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대학 입시 준비에 매달려 있던 그녀는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그 일은 이후로도 미처 갚지 못한 빚처럼 마음 한쪽에 줄곧 남아 있었다.<br>그동안 큰할머니의 옛집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을 다시 찾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장에 머문 건 2년 전 가을, 약혼자 태일이 차로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학술지 마감을 앞두고 한 달 가까이 머무르며 자료를 검토하고 논문을 정리하느라 거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집 밖의 풍경이나 계절의 빛깔이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nbsp;<br>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히 집수리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니, 적어도 일을 보는 동안만큼은 마음을 풀고 편히 머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br>-횡계에 오길 잘한 것 같아.<br>그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처럼 따스한 햇볕 아래 나온 탓인지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며 언덕 위 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 새순이 돋아난 나무들이 집 주변을 감싸며 싱그러운 기운을 더하고 있었다. 최근 공사를 끝낸 별장 지붕은 한결 든든해 보였다.<br>-이제 빗물이 새는 일은 없겠지….<br>서윤은 생수병을 손에 쥔 채 돌층계를 따라 천천히 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4/pimg_63919599021568687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988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21. 아버지의 부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6757</link><pubDate>Sun, 12 Jul 2026 01: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675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서울의 서쪽 끝, 방화동에는 '옥수탕'이라는 오래된 목욕탕이 있다. 옥수탕 골목 안쪽 2층 양옥집에서 서윤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늦은 밤, 목욕탕 간판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골목은 적막했다. 서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거실에서 야구 중계를 작은 소리로 틀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br>-왜 이렇게 늦었어?-갤러리 일이 좀 많았어요.-너무 열심히 살지 마.-아버지도 참…-내가 살아 보니, 인생이 너무 짧더라.-엄마는요?-방에서 주무시지. 너, 이리 좀 와 봐라.<br>아버지는 소파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눈가에는 시름이 더욱 깊어 보였다.&nbsp;누구에게나 한때 뜨거운 청춘과 자유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젊은 날, 아버지는 일본행 밀항선을 타다 붙잡힌 적이 있다고 했다.&nbsp;그러나 결혼 이후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중학교 교사로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단 한 번도 다른 길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nbsp;말년에 이른 아버지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세월의 흰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br>-내일 시간 좀 있니?-왜요?-갤러리 쉬는 날이잖아. 횡계에 좀 다녀올래?<br>강원도 횡계에는 아버지 소유의 작은 별장이 하나 있었다. 식구들이 가끔 내려가 머물던 그 집은 얼마 전부터 지붕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낡은 보일러도 함께 새것으로 교체했다고 했다.<br>-김 씨 할아버지 아니었으면 온 집안이 물바다 되고, 곰팡이 피고 난리가 났을 거야. 고맙게도 설비 업체도 그분이 소개해 줬는데, 어째 연락이 안 되네.-전화를 안 받으세요?-번호가 바뀐 건지, 통 받질 않으셔.<br>김 씨 할아버지는 근처에 혼자 사는 이웃 어르신으로, 틈틈이 별장에 들러 집 주변을 살펴주곤 했다. 젊은 시절, 밀짚모자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은 그는 산골 촌부에게서는 보기 힘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생전에 큰할머니와 그의 부인이 서로 오가며 반찬도 나누고 허물없이 지냈지만,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 씨 할아버지만 옛집에 남아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br>-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닐까요?-글쎄다. 서울에서 큰 아드님이 와서 모셔갔나?-지금 연세에 혼자 지내시는 건 무리잖아요.-그렇지. 때가 되면 자식들 곁이 편하지.-나, 시집가면... 아빠는 어쩌려고.-그런 말 마라. 늙어가는 딸을 언제까지 어깨에 이고 지고 살아야 한단 말이냐?-피이…-아무튼 내일 네가 가서 지붕이랑 보일러가 제대로 됐는지 살펴보고, 공사대금도 치르고 와야겠다.-오빠는 어디 갔어요? -철재? 한참 얼굴도 못 봤어. 또 무슨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지….<br> <br>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괜히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br> <br>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오늘 최 관장이 명명희 화백에 관해 당부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관장은 당장 내일부터 쉬라고 했지만, 휴가는 수요일부터였다. 화요일은 원래 직원들에게 주어진 정식 휴일이었다. 아무래도 짬을 내어 아버지 부탁을 먼저 들어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정도 횡계에 다녀온다고 해서 관장이 부탁한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br> -알았어요. 제가 내일 갔다 올게요.-미안해, 딸. 휴일인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뭘요. 잠깐 바람도 쐬고 좋죠. 봄이잖아요.-그렇지. 벌써 봄이네. 이러다 금세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그러겠지…<br>아버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nbsp;<br>횡계 별장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홀로 살던 집으로, 아버지는 그 집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간직해 왔다.&nbsp;<br>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란 아버지는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의 형수였던 큰할머니 댁으로 보내져,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분의 보살핌 속에서 지냈다. 긴 세월 외롭게 살아온 큰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연민을 품고 있던 아버지는 그 집을 별장처럼 고쳐 지금까지 손수 가꾸어 오셨다.<br>-아버지, 정말로 은퇴 후에 거기 가서 살 거예요?-그럼. 거긴 내 고향 같은 곳이지. 사람들도 연어처럼,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야.<br> -그 집에서 태어나신 건 아니잖아요.<br> -그래도, 난 이제 거기밖에 없어.<br> <br>아버지는 먼 기억의 뒤안길을 더듬듯 잠시 시선을 떨군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br> <br> 고향으로의 회귀.&nbsp;<br>그 말이 품은 서늘한 쓸쓸함이 어쩐지 서윤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br> <br>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며 욕실에서 이를 닦는 동안, 어두운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문득 떠올랐다. 돌아갈 곳을 향해 묵묵히 헤엄치는, 생의 마지막 온기. 그 모습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nbsp;  그날 밤, 어린 시절부터 되풀이되던 익숙하면서도 낯선 악몽이 다시 서윤을 찾아왔다.<br> <br> 사방은 짙은 어둠에 잠긴 물속이었다. 거센 물살과 뒤엉킨 해초가 시야를 가렸고, 귀청을 울리는 물소리만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두 팔을 아무리 휘저어도 붙잡을 것은 없었고, 발끝은 닿을 곳 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녀의 몸은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차갑고 억센 무언가가 발목을 움켜쥐었다. 끌어올리려는 것인지,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힘이었다.<br> <br> 서윤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다. 눈을 뜬 뒤에도 어둠 속 물살과 발목을 감싸던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의 잔물결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심연을 떠도는 외로운 물고기처럼.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3/pimg_63919571793144380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386757</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