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김미진의 오후 3시 (김미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소설가이자 화가 김미진의 오후 3시. 소설과 그림, 삶의 기록이 함께 머무는 공간입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07 Oct 2026 12:24:17 +0900</lastBuildDate><image><title>김미진</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15891677826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김미진</description></image><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3. 피노키오 전시관에 온 손님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8302</link><pubDate>Wed, 07 Oct 2026 00: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830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오후 두 시경, 오늘 방문이 예정된 초등학생들이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아현초등학교’라는 표지도 선명한 노란색 스쿨버스가 멈추자, 햇살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이 하나둘 버스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들은 앞다투어 재잘거리며 갤러리 앞마당에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활기를 더했다.<br>버스에서 먼저 내린 선생님 두 명이 아이들의 하차를 돕고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선생은 한 명씩 손을 잡아주며 따뜻하게 맞이했고,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선생은 버스 앞에서 차분하게 질서를 잡았다. 1학년과 2학년으로 구성된 아이들이 갤러리를 향해 흘러가듯 움직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br>-얘들아, 자자! 다들 선생님 보세요!<br>여선생이 손뼉을 가볍게 치며 아이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남선생은 출석부를 펴 들고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올 때마다 손을 번쩍 들고 힘차게 ‘네!’ 하고 대답했다. 서윤은 한 발짝 뒤로 비켜서서 웃음꽃처럼 환한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br>출석 확인이 끝난 후, 아이들은 갤러리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4층 전시관으로 향했다. 일부는 두 대의 엘리베이터에 나눠 탄 뒤 먼저 올라갔고, 나머지는 어미 오리를 졸졸 따르는 작은 오리 떼처럼 줄을 지어 천천히 이동했다.<br>피노키오 전시관 앞에 이르자 환상적인 동화 세계가 한눈에 펼쳐졌다. <br>-와아!<br>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각국에서 모인 인형과 삽화, 입체 형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소형 인형부터 키가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 조각상까지, 크기와 재질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공통된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바로 길쭉한 코를 가진 피노키오라는 점이었다. 제페토 할아버지와 푸른 요정, 귀뚜라미도 군데군데 배치되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상상력을 한층 풍요롭게 자극했다.<br>피노키오 왕국은 어느새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삼삼오오 어울려 전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진열된 작품들 사이를 탐색하거나 장난스럽게 소곤거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자유 시간을 보낸 뒤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이제 서윤이 나설 차례였다. 그녀는 휴대용 마이크의 스위치를 켠 뒤, 전시관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피노키오와 전시물 사이에 얽힌 이야기들을 실타래처럼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br>-옛날 옛적에, 말을 하는 신기한 나무토막이 있었어요. 목수인 제페토 할아버지가 그 나무로 피노키오라는 인형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인형이 갑자기 말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답니다. 믿기 힘든 순간이었죠. 피노키오는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였는데, 거짓말을 하면 금세 들통이 났어요. 왜였을까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점점 길어졌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거짓말을 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거나 얼굴이 화끈거린 적 있나요?-네!-그렇죠!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때 코가 길어졌지만, 여러분의 코는 그대로예요. 대신 심장은 쿵쿵 뛰고, 두 볼은 화끈거리죠. '지금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br>그녀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채를 지닌 각국의 피노키오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며 한동안 아이들과 함께 동화 속 세계에 푹 잠겨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을 이끌고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경숙 씨가 다가와 조심스레 속삭였다.<br>-강수경 씨가 조금 전에 오셨어요. 지금 관장실에 계세요.<br>서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왜 하필 지금, 왜 이 시점에 나타난 걸까. 어젯밤 다래원 앞 골목에서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혹시 태일이 일부러 누이를 이곳에 보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br>바로 그때, 전시관 입구에서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관장과 수경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 수경을 보자,&nbsp;서윤은 잠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7/pimg_639269293626430913.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830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2.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6594</link><pubDate>Tue, 06 Oct 2026 00: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659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방화동 집에서 인사동 리온 갤러리까지, 아무리 서둘러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 도착한 그녀는 재킷을 벗어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직장 상사의 눈총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1분이라도 먼저 도착해야 했다.<br>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서자, 탕비실에서 머그잔을 든 경숙 씨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화사하게 보이는 그녀가 서윤의 후줄근한 몰골을 위아래로 훑으며 빈정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br>-하필 오늘 같은 날 지각이라니요?-응, 집에 좀 일이 있어서.-아까부터 관장님이 찾으셨어요. 빨리 올라가 보세요.-진짜? 알았어.<br>관장이 그녀를 찾은 이유는 분명했다. 어제 명명희 선생 작업실에 다녀온 결과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성과라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관장이 듣고 싶어 할 말만 빠르게 추려낸 뒤 핸드백을 2층 사무실에 내려놓고는 곧장 3층으로 향했다.<br>관장실 안에는 서늘한 공기 속에 진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최희숙 관장은 올리브색 정장 안에 흰색 블라우스를 산뜻하게 받쳐 입고 있었다.<br>뿌리 염색 시기를 살짝 놓친 듯 앞머리 부근에 희끗희끗한 기운이 드러났다. 그녀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br>-오늘 좀 늦었네. 아침잠이 많은 편인가?-아, 아닙니다. 오늘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죄송합니다.-어제는 어땠어? 명명희 선생님은 잘 지내시지?-아직 일본에 계세요.-아직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br>관장의 입가에는 염려보다 실망에 가까운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br>-이제는 관장님이 직접 나서셔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김순자 씨를 설득하시든,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가 명명희 선생님과 대화하시든지요.<br>서윤은 궁색하게 들리지 않도록 관장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며 말을 꺼냈다. 여러 번 되새긴 끝에 어렵사리 내뱉은 말이었다. 관장과 명명희 작가는 오랜 세월 두터운 친분을 이어온 사이였다. 관장실 한쪽 벽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듯 명명희 선생의 젊은 시절 동양화 한 점과 유화 소품 몇 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br>-만약 명명희 선생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때는 정말 상황을 돌이키기 어려울지도 몰라.-예전에 큰 도움을 주신 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맞아. 명명희 선생이 힘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든든하게 서포트했는데. 화가 한 명 제대로 키워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선생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맞아요. 관장님께서 나서시면 명명희 선생 측에서도 모른 척하지 않을 거예요.<br>서윤은 어제 김순자 씨 사무실에서 본 미발표작 ‘사월의 정원’에 대해 한동안 설명을 이어갔다. 명명희 선생의 그림 세계가 변곡점을 지나 더욱 깊고 넓게 확장되었다는 이야기는 최 관장의 눈빛까지 반짝이게 할 만큼 흥미로운 뉴스였다. <br>한국 화단의 대모를 자처하는 그녀에게, 명명희 작가의 마지막 불꽃 같은 하이라이트를 함께 만들어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마음속 욕망을 자극하는 눈부신 매혹일 수밖에 없었다.  <br>-알았어. 김순자 씨에게는 내가 직접 연락해 볼게. 그런데 오늘 피노키오 견학 일정은 어떻게 되지?-오후에 한 팀 있어요. 아현초등학교에서 서른 명 정도 방문할 예정입니다.-좋아. 이번에도 서윤 씨가 사고 없이 잘 진행해 줘.-네. 알겠습니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적절히 섞어 해설해 주면 아이들도 흥미로워할 거예요.<br>리온 갤러리 4층에는 피노키오 특별 전시관이 있다. 네 구역으로 나뉜 이 공간은 피노키오와 관련된 각종 오브제와 그림, 기획 아이템들로 빼곡하다. 큰 조형물과 모형은 바닥 위에 설치 작품처럼 배치되어 있고, 작은 소품은 유리 상자나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관장과 남동생 최승주 실장이 오랜 시간 세계 경매장을 누비며 수집한 것들이다.<br>처음부터 피노키오 테마파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시관답게 연중 내내 어린이 단체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현초등학교 역시 매 학기 꾸준히 학생들을 보내오는 단골이었다.&nbsp;<br>서윤은 오전에 처리할 일들을 정리한 뒤 사무실 데스크에 앉아 아이들에게 들려줄 전시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파일을 하나하나 펼치며 눈으로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 스쳐 갔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피노키오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한 숨결로 피어나기를.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6/pimg_63926860035794551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659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1. 왜 우리는 맨날 이 모양인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4894</link><pubDate>Mon, 05 Oct 2026 02: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489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br>다음 날, 서윤은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의 숙취로 인해 흐릿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어젯밤 인사동 골목에서 태일과 말씨름을 벌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말을 놓겠다고 내둥 큰소리를 쳤지만, 그게 과연 잘한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br>그녀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알람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에 맞춰 둔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댔을 때 잠깐 정신이 들기는 했다. 그런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br>-앗, 지각이다!<br>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얼굴은 푸석했고, 수세미처럼 뒤엉킨 머리에서는 쿰쿰한 머릿기름 냄새마저 났다. 하루 정도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늘 갤러리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 출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nbsp;<br>고무줄로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는 거실로 내려갔다. 속이 메스꺼워서인지 집 안에 퍼진 된장찌개 냄새가 조금 역하게 느껴졌다. <br>아버지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친구 부모님의 발인식에 들르기 위해 새벽같이 나가셨다고 엄마가 말했다. 출근 시간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라도 감고 나갈 채비를 하려면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br>-엄마, 국 없어? 속이 좀 쓰려.-어제도 제이랑 둘이 마신 거야? 여자애들이 무슨 술을 그리 퍼마셔?-어쩌다 그럴 수도 있지.-에고, 내 팔자야. 딸년 술국까지 끓여 바쳐야 한다니…<br>엄마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더니 낡은 동전 지갑을 챙겨 들고 허둥지둥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 나갔다.&nbsp;욕실에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오자 압력밥솥 꼭지가 딸랑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서윤은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레인지 불을 줄였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올케가 조카 선호를 안고 들어왔다. 올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목소리까지 착 가라앉아 매가리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br>-아가씨, 나 속상해서 죽겠어요. 선호 아빠, 또 집 나갔어요.-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어젯밤에 잔소리 좀 했어요. 가장이면 최소한 생활비라도 벌어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인간, 이번 달 월세 내려고 모아둔 돈까지 챙겨서 그냥 튀었어요. 아휴, 이 원수! 당장 이혼할 거야. 이젠 나도 못 참아요.<br>올케는 아이를 소파에 눕히며 울분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br>-어휴, 오빠가 또 왜 그런데요…<br>서윤은 머리에 수건질을 하며 담담히 대꾸했지만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오늘따라 올케의 모습이 유난히 초라하게 보였다.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옷차림, 부스스한 파마머리, 수심으로 가득한 꺼칠한 얼굴이 갑갑한 일상을 대변하는 듯했다.<br>-왜 다른 집 남자들처럼 성실하게 살 생각은 안 하고 순 사기꾼 같은 놈들이랑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미친놈! 허랑방탕한 놈!<br>올케는 급기야 오빠를 향해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선호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아이였는데 올케의 날 선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비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마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br>-아침부터 왜 애를 울리고 난리냐. 저리 비켜라.<br>엄마는 두부와 콩나물이 든 비닐봉지를 올케에게 떠넘기고는 어린 손자를 덥석 품에 안았다.<br>-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야. 어디서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br>엄마는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올케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br>-어머니, 암탉이라니요. 지금이 무슨 19세기도 아니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요, 저희 이제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어요. 무서울 거 하나 없다고요.<br>만만치 않은 기세로 되받아치는 올케의 말에 엄마의 낯빛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br>-지금 이 시어미를 찍어누르겠다는 거냐? 다 시끄럽고, 서윤이는 뭐 하니? 얼른 나갈 준비해야지.-저도 아가씨처럼 밖에 나가서 일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선호는 어쩌고?-뭐, 어머니가 봐주시겠죠. 아범 대신 저라도 나서야 선호 우윳값은 벌지 않겠어요?-내가 언제 너희를 굶기디? 오늘 내 속을 긁기로 작정했구나.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가서 콩나물국이나 끓여라. 난 선호 얼굴 좀 씻길 테니.<br>엄마는 선호를 번쩍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br>-어머니, 저희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야겠어요. 이번 달 월세, 아범이 다 들고 튀었어요. 아셨죠?<br>올케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엄마는 대꾸 없이 욕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바람에 서윤의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곧 욕실 안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쏟아져 나왔는데, 가족 간에 엉겨 붙은 갈등을 어떻게든 덮어보려는 헛된 소음처럼 들렸다.<br>자식이란 끝내 부모가 짊어져야 하는 업보일까. 오빠가 저질러 놓은 무책임한 일들이 이제 늙은 부모의 짐으로 되돌아온 듯싶어 서윤의 마음은 더없이 불편했다.<br>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가볍게 화장을 한 서윤은 빈속을 달래기 위해 식탁에 앉아서 급히 한술 뜨기 시작했다.&nbsp;<br>올케는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같은 레퍼토리를 되풀이했다. 왜 오빠를 도와주지 않느냐는 원망이 그 모든 말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오빠가 허풍쟁이에 노름꾼, 결국 쓸모없는 낙오자라는 말들은 사실 자신을 향해 던져진 돌멩이처럼 가슴에 콕콕 박혔다. 핏줄에 대한 험담은 여전히 불쾌하리만큼 거북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자신이 둘러메어야 할 몫처럼 버겁게만 느껴졌다.<br>‘왜 우리는 맨날 이 모양인가.’<br>서윤은 쓴 담즙처럼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계속 속이 헛헛하고 공허함만 맴돌았다.<br>‘어제 술을 괜히 마셨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br>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br>-언니, 그다음 얘기는 나중에 해요. 이러다 진짜 지각하겠어요.<br>서윤은 올케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위로를 담은 토닥임이라기보다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에 가까웠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5/pimg_63926764233044816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5489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80. 자꾸 어떤 남자가 생각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9932</link><pubDate>Fri, 02 Oct 2026 00: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993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하지만 태일이 품고 있는 상자 안에는 훨씬 더 즉물적인 것들이 들어 있었다.&nbsp;그는 결혼 절차를 계속 미루면서도, 틈만 나면 그녀를 호텔 방이라는 밀실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 순간마다 서윤은 마치 팔려 온 여자처럼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다뤄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때론 숨이 막히고 수치스러웠으며,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이런 일과 이런 감정에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br>-성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뭐가 더 중요한 게 있지?<br>언젠가 태일이 한 그 말은 서윤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했다. 그때 그녀는 ‘사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손에 쥐고 있는 그 단어의 무게나 형태를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br>‘사랑’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끔찍한 재앙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만약 행복이라는 감정이 신기루처럼 부풀려진 허상이라면, 사람들은 왜 결혼을 권하고 또 요구하는 걸까. 결혼과 섹스 대신 다른 형태의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br>-사랑의 감정은 다 비슷비슷한 걸까?<br>서윤의 목소리가 작게 허공에 흩어졌다. 제이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br>-갑자기 무슨 소리야?-인류애와 이성 간 사랑은 다를까?-질문의 요지가 뭐야?-아이에 대한 사랑과 강아지에 대한 사랑은? -그건 그냥… 다르게 아픈 거지, 바보.<br>제이가 장난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br>-그래, 나는 바보인가 보다.<br>서윤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nbsp;<br>-무슨 일 있네. 그렇지?<br>제이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nbsp;서윤은 맥없는 표정으로 허공에 걸린 수레바퀴를 올려다보았다.<br>-‘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제목이 이제 이해될 것도 같아. 사랑도 결국 제자리만 맴도는 건 아닐까?<br>그녀가 손가락으로 수레바퀴를 가리켰다.<br>-넌 생각이 너무 복잡해. 힘들면 그냥 수레에서 뛰어내리면 돼.<br>제이가 말했다.<br>-아니. 난 지금, 그 바퀴 밑에 깔린 것 같아.<br>제이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껍데기째 바삭하게 튀긴 새우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br>-얼른 먹어. 뜨거울 때가 제일 맛있어.<br>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들은 말없이 술을 마시고 기름진 안주로 영혼의 허기를 채웠다. 때로 침묵이 가장 깊은 대화가 되기도 하니까.<br>-사실은,<br>두 번째로 주문한 술잔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서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br>-자꾸 어떤 남자가 생각나.<br>제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br>-남자? 어떤 남자?-저번에 횡계 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있어.<br>서윤은 비밀을 흘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br>-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 사람이 떠오르면 마음이 이상해져.<br>제이는 기겁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br>-맙소사! 다른 남자라니? 애가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br>제이가 눈을 부라리며 종주먹이라도 들이댈 기세였지만, 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br>-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br>문득,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 가슴 한편이 여전히 저릿저릿했다. 그날, 그 순간, 그리고 그 말이 가져온 묘한 떨림.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이었고, 끝내 지켜낼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왜 그날의 공기와 속삭임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서윤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의 역류에 목이 타는 듯 레몬 하이볼을 연거푸 꿀꺽꿀꺽 삼켰다.<br>-말해 봐. 누군데? 어떤 남자야?-수레바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 닿을 수 없는 풍경처럼 멀고,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사람.<br>서윤은 단어 하나하나를 어렵게 내뱉고는 자신도 모르게 푸 웃었다. 그 웃음은 슬픔 대신이었고, 그리움에 대한 한숨 소리와 같았다. 횡계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사람. 어쩌면 꿈속에서 꿈을 꾼 것이 아닌지, 문득 궁금해지는 그날의 목요일 오후.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봄날의 숨결처럼, 그렇게 희미해지는 것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2/pimg_63926512752381861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993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9. 두려움 속에 허공을 배회하던 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8215</link><pubDate>Thu, 01 Oct 2026 01: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821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근데 왜 반말했는데? 둘이 싸웠어?<br>서윤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정작 자신도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왜 그동안 눌러둔 말들이 터져 나온 건지, 왜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일의 차에 오르지 않은 일, 호텔에서의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뻔히 이어질 절차를 거부한 일… 이제는 그 남자의 숨소리가 몸에 닿는 것조차 거슬렸다.  <br>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서윤은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가 오히려 깊은 상처를 떠안는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자기 몸에 가해진 폭력조차 발설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아픈 기억은 종종 침묵 속에 묻힌 채, 잊히기만을 기다리며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br>서윤 역시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앞에서도 태일과의 마찰에 담긴 진실을 끝내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기세에 떠밀려 어떤 자리에 이르게 된 경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는 일은 지금의 그녀에게 불가능했다.  <br>여자의 몸은 순결과 욕망 사이, 그 어디쯤을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자신의 욕망이고 무엇이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린 뒤에도, 그때의 기억을 자기 안에서 분리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다가왔다.<br>-왜 싸웠냐니까?<br>제이가 다시 물었다.<br>-오늘 다래원에서 저녁 먹었는데, 그 식당이 구리다는 거야.-다래원이 구리다고? 인사동에서 은근히 분위기 맛집인데.-그치?-근데… 뭐가 싫다는 거야?-글쎄…<br>태일의 일그러진 표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실룩거리는 턱선, 가늘게 떨리는 콧볼, 목소리에 배어 있는 위압적인 기운. 그의 분노는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 같았지만, 그 뒤에는 그녀의 앞날을 죄어 오는 덫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일로 그가 먼저 파혼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난다면 속이 시원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가족들, 특히 연로한 부모를 생각하자 금세 목울대가 뻐근해졌다.<br>-서윤아.<br>제이가 한참 뜸을 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br>-결혼하면 그 집안 식구들하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안 맞는 것도 많을 거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순간도 있을 텐데.<br>제이가 불쑥 문제의 본질을 짚어내자, 서윤은 모른 척 술잔만 홀짝거렸다. 제이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메트로놈의 박자처럼 자의식을 흔들던 그때, 낡고 통속적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br>‘결혼이 꼭 필요한 걸까?’ <br>비록 약혼까지 한 상태였지만, 지금껏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었다. 결혼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면서도,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애는 하나 낳아야지’ 같은 주변의 속삭임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결혼과 육아’는 여전히 비밀 상자처럼 감춰진 미지의 영역이었다. 진실이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곁을 맴도는 시도일지도 몰랐다. 진짜가 아닌 진실은, 어떤 대답으로도 결코 완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br>대학 시절, 어느 교수가 검은 천으로 덮인 상자를 내밀며 그 안에 손을 넣어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 채,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한 명씩 손을 집어넣었다. 서윤도 차례가 되어 동그란 구멍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짧은 순간,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 속에 어두운 허공을 배회하던 손끝. 마침내 차갑고 물컹한 무언가에 닿았던 그 촉감의 기억.  <br>상자 안에 무엇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지금 자신이 맞닥뜨린 삶의 ‘질문’들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삶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자 안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br>반복적으로 주입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상자 위에 검은 천을 덮어씌운 채, 그것이 달콤함의 근원인 양 가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음속에서 번지는 불안과 의문이 상자 안 어둠처럼 그녀의 내면을 잠식해 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1/pimg_63926487251803109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821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8. 수레바퀴 아래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4907</link><pubDate>Wed, 30 Sep 2026 01: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490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홍대 앞 피카소거리는 여느 날처럼 길가를 가득 메운 인파와 차량의 행렬로 어수선했다. 뒤숭숭한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제이와 만나기로 한 선술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둑한 실내에는 젊음과 낭만이 어우러진 소요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br>제이는 홀이 내려다보이는 통로의 한쪽 테이블에 앉아, 반쯤 비운 맥주잔을 곁에 둔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제이가 앉은 자리 위에는 수레바퀴 모양의 인테리어 장식이 매달려 있었는데,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br>-재수 없이 저 수레바퀴가 굴러떨어지는 건 아니겠지?<br>서윤이 다가서며 수레바퀴를 가리켰다.<br>-우리는 이미 수레바퀴 밑에서 살고 있는 거야. 어서 와, 친구.<br>제이가 책을 덮으며 빙그레 웃었다.<br>-이렇게 어두운 데서 책 읽다간 눈 버리잖아.-괜찮아. 어차피 조금씩 낡아가며 사는 게 인간의 운명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br>서윤은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태일 앞에서는 약속이라 둘러댔지만, 그 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발길은 어느새 제이가 있는 홍대로 향하게 되었다.<br>-근데 너무 늦게까지 일하면 힘들지 않아?-영세 출판업자의 영업 비밀이라고 했잖아. 무조건 열심히.-진짜 못 말려.-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온 내가 고맙지?-그래, 고맙다. 아주 눈물 나게.<br>서윤이 장난스레 입술을 삐쭉거렸다. 제이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풀리면서,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도 한결 누그러졌다. 소중한 친구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오늘 밤은 제이와 마주 앉을 조용한 테이블 하나면 충분했다.  &nbsp;  제이의 숏커트 머리는 이전보다 훨씬 짧아 보였다. 원고를 볼 때 흘러내리는 앞머리가 자꾸 신경 쓰여 결국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br>-교정쇄 볼 땐 머리띠 하면 되잖아.-나 머리띠 하면 얼굴형 이상해져. 내가 너처럼 생겼냐?-그만, 알았어. 잘 잘랐어. 더 잘라도 돼.<br>서윤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이는 초저녁에 자장면을 반쯤 먹다 만 터라 속이 출출하던 참이었다. 서윤도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슬슬 허기가 돌았다.<br> -한번 시켜 볼까나?-당근 좋지요.<br>식당 안에서 풍기는 다양한 음식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며 위장 깊숙이 뜨거운 갈망을 불러왔다. 메뉴판을 한참 뒤적이던 두 사람은 모둠꼬치와 시금치 한우나베, 새우튀김을 골랐다. 선술집에 온 손님이 주류 섹션을 그냥 지나치는 건 반칙에 가까웠다. 서윤은 레몬 하이볼을, 제이는 모히또 칵테일을 추가로 주문했다.<br>-잠깐! 너무 많이 시킨 건가? 하나 뺄까?-괜찮아.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잖아.-나 요즘 좀 찐 거 같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딱 좋아.-진짜?-진짜지, 그럼.<br>식욕과 자존심 사이의 이런 실랑이는 여자들끼리 흔히 주고받는 대화 중 하나였다. 그녀들 사이에도 그 유쾌한 말장난이 오랜 습관처럼 이어져 왔다.<br>화제의 맥락은 피트니스 클럽과 다이어트 보조제를 거쳐 어느새 명명희 선생의 평창동 작업실로 흘러갔다. 서윤이 낮에 본 미발표작 ‘4월의 정원’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종업원이 안주와 술을 차례로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br>제이는 술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서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br>-왜 그래? 너 뭐 있지?-그냥 왔다니까. 아무 일 없어.-그 얼굴, 할 말 있는 얼굴이잖아.<br>서윤은 곤란한 듯 입술만 달싹였다.<br>-왜? 어서 이 언니한테 털어놔 봐.-저기… 그러니까, 나 오늘 태일 씨한테 반말했어.<br>제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br>-반말?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했네.-그렇지?-이, 빙신아. 그게 정상이지. 잘했어.-휴!<br>서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br>-그깟 반말에 기분 상했다면, 그런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마.-그럴까?-그딴 놈이랑 어떻게 평생을 살아? 걱정 붙들어 매.<br>제이의 단호한 말투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서윤은 빙긋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30/pimg_63926328599296040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490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이 몰락]77. 여기부터 난 그만 갈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2567</link><pubDate>Tue, 29 Sep 2026 00: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2567</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진 사람처럼, 더는 감정을 나눌 의지가 없다는 듯 차갑게 굳어 있었다. 태일은 언제나 그녀를 허수아비처럼,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다루었다. 오늘은 그 손끝이 올가미 같았다. 조금씩 목을 조여 숨을 앗아가는, 결국 스스로 끊어내야만 하는 끈이었다.<br>-왜 자꾸 나를 피하는 거야? 너 요즘 이상해.-나, 안 이상해. 네가 이상해.-뭐,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그래, 너! 네가 더 이상하다고!<br>태일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두려우면서도 가슴 깊이 짜릿한 통쾌함이 번졌다. 그동안 쌓여 있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풀려나는 기분이었다.<br>태일에게 대놓고 반말을 한 건, 데이트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열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약혼까지 한 사이가 아닌가. 존댓말과 반말은 세대 차와 위계에서 비롯된 관습적 언어일 뿐,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는 아니었다. <br>그제야 서윤은 비로소 알았다. 오랫동안 당연한 듯 이어져 온, 두 사람 사이의 극심한 언어적 불균형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를 수 없음을. 입가에 번진 짧은 웃음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작은 승리를 선물했다.<br>그녀는 크게 헛기침을 하고 등을 꼿꼿이 세운 뒤, 턱을 바짝 추켜들었다.<br>-나도… 이, 이제부터, 반말할 거야.<br>그러고는 핸드백으로 몸 앞을 가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br>-맙소사! 이제 막 나가자는 거지? 응?<br>태일은 소리쳤다.<br>-넌 너무 예의가 없어. 너… 너한테는 이렇게 하는 게 맞아.-미쳤구나, 진짜.-아니, 안 미쳤어.-야!-나도, 야, 야! 앞으로 갑자기 나타나지 마. 나도 바쁜 사람이야.-내 참… 미치겠네.-그리고 내돈내산이야.-뭐? -내. 돈. 내. 산! 내 돈 주고 내가 산다는 뜻이야. 오늘 저녁, 내가 낸 거야. 내 음식 내가 고르는 건데, 왜 네가 멋대로 스테이크를 시켜? 나, 스테이크 안 좋아해. 그것도 몰랐어?-미쳤니? 뭘 잘못 먹은 거야?-맞아, 잘못 먹었지. 바로 그 스테이크! 그걸 먹고 얹혀서 지금 이러는 거잖아.-알았어, 알았다고.-알긴 네가 뭘 알아!-취했네. 진짜 취했어.-와인 한 잔에 취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br>평소와 달리 날것 그대로 쏟아낸 목소리가, 서윤의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를 툭, 밀어냈다. 속에 막혀 있던 게 서늘하게 뚫린 듯한 후련함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태일이라는 남자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더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농담 섞인 희극 한 편을 바라보는 듯한 여유마저 느껴졌다.<br>그녀는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항상 모나지 않은 일상을 견뎌왔다. 싫은 기색도, 불편한 표정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억울함을 억지웃음으로 덮은 삶은 결국 자신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는 것을. 분노를 삼킨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약한 자의 침묵 따위 세상은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br>-여기부터 난 그만 갈게. 참, 앞으로 나한테 볼일 있으면 반드시 전화부터 하고 와. 깜짝 쇼는 곤란해. 알았지?<br>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보인 뒤,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어깨를 곧게 펴고는 안국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태일이 두어 번 소리쳐 불렀지만, 서윤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안,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 소리가 어느새 든든한 방패가 되어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감싸주었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9/pimg_63926240467104052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2567</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6. 그녀에게 이 밤거리보다 더 위험한 것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0523</link><pubDate>Mon, 28 Sep 2026 00: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052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저는 한 잔 마셔야겠어요.<br> 서윤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자, 태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 뚫어지게 그녀를 노려보았다.&nbsp;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하우스 와인 한 잔과 연어 타르타르를 주문했다. 태일의 껄끄러운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를 힐끔 쏘아봤다.<br> 그는 말없이 몇 가지 메뉴를 훑어보다가, 바게트 위에 토마토와 바질을 얹은 브루스케타와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골랐다.<br>-메인 코스는 조금 있다가 주문할게요.<br>서윤이 메뉴판을 접어 테이블 옆에 내려놓으며 웨이터에게 말했다. 그 말을 가로채듯, 태일이 끼어들었다.<br>-지금 시키지 뭐.<br>그는 리브 아이 스테이크 2인분을 아무렇지 않게 주문해버렸다. 서윤은 원래 레몬즙을 곁들인 생선 요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더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br>-출장 간 일은 잘됐어요?<br>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태일은 늘 그래왔듯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br>-응. 그렇지 뭐.-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잖아요?-응. 그렇게 됐어.-아아, 그렇군요.<br>짐작 가능한 대답들이 이번에도 서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br>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연어 타르타르를 떠서 입에 넣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이어갔지만, 신선해야 할 연어와 아보카도는 비릿하니 물컹했고, 와인은 산뜻함 대신 떫은 산미와 알싸한 뒷맛만을 혀끝에 남겼다.<br>태일의 비아냥거리는 표정은 그마저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게 했다. 기분 나쁜 눈초리가 와인의 향기까지 빼앗아 가는 듯했다. 서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는데, 그 모든 행위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강요된 유치하고 뻔한 연기처럼 느껴졌다.<br>스테이크가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 위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의미 있는 말들이 공허하게 오갔을 뿐, 지루한 정적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만을 드러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메우려 애쓰지 않는 간극만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을 때는 무거운 족쇄를 풀어낸 듯 기이하게 가볍고 낯선 해방감이 따라붙었다.  &nbsp;  라일락 향기 흩날리는 6월의 봄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속에는 그윽한 꽃내음과는 어울리지 않은 먹구름이 응어리져 있었다.&nbsp;<br>두 사람이 골목길을 나란히 걷고 있을 때, 술에 취한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웃고 떠들며 다가왔다. 그중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윤 쪽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태일이 그녀의 팔뚝을 세게 잡아챘다. 그 몸짓은 연인을 보호하려는 다정한 반응이라기보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서툴고 거친 반사 작용에 가까웠다.<br>-아얏!<br>서윤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br>-왜?-아프잖아요.-그러게, 여자가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잖아.-와인 한 잔 마신 게 그렇게 싫었어요?-데려다줄게. 취했잖아.-와인 한 잔에 어떻게 취해요?-어둡고 위험하잖아.-아뇨, 난 멀쩡해요.<br>태일은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서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서윤에게 이 밤거리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밀폐된 공간이나 다름없는 그의 차에 올라타는 일이었다.&nbsp;<br>오늘 밤, 그가 바라는 건 어쩌면 단 하나일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빌미로 호텔 식당으로 유인한 뒤, 값비싼 요리와 와인으로 적당히 생색을 낸 다음,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도 않게 객실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 그 얄팍한 술수가 어긋나자,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br>-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요.-이 밤에?-제이요. 제이는 출판사에서 늦게까지 일하잖아요.-미치겠군. 젠장!<br>태일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구둣발로 땅을 걷어찼다. 발끝에 차인 돌멩이 하나가 또르르 굴러갔다.<br>-내가 오늘 바쁜 일 다 제쳐두고 여기까지 왜 온 건데?-그러게요. 다음부터는 꼭 전화하고 와 주세요. 저도 바쁠 때가 있으니까요.-야, 나서윤. 너 요즘 왜 이렇게 삐딱해? 누구 생긴 거야? 어떤 놈이야?<br>그의 말투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와 모멸,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8/pimg_63926163063976595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4052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5.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5698</link><pubDate>Fri, 25 Sep 2026 0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569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잠시 후, 그녀는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태일은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서윤은 방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br>-괜찮아요. 오늘은 조금 걷고 싶어요.<br>이 순간만큼은 그 남자의 승용차에 오르는 일이, 어느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의 차 안에 단둘이 있게 되는 것,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벌어질 상황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혔다. 밀폐된 침묵 속, 끈적거리는 원색적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이제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속에서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br>‘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br>그때, 갤러리 안에서 경숙 씨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윤을 향한 본능적인 호기심, 남의 비밀을 들춰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그녀의 눈빛에 어른거렸다. 직원들의 연애에 남다른 촉을 세우는 그녀에게 이 광경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무엇보다 ‘신우건설’ 일가는 리온 갤러리에서 특별 관리하는 주요 고객군이었다.<br>서윤이 쇼나 조각을 배달한 일을 계기로 그 집안의 후계자와 약혼하게 된 일화는 인사동 거리 안팎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일종의 우화처럼 소비되었다. 리온 직원들 사이에서도 놀라움과 수군거림을 동시에 자아낸 큰 사건이었다. ‘신우건설’ 황태자가 갤러리 앞에 불쑥 나타난 지금, 경숙 씨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br>서윤은 유리창 너머 껄끄러운 시선을 의식하며, 이 불쾌한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태일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br>-오늘은 제가 저녁을 대접할게요.-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데라도 있는 거야?-인사동에도 괜찮은 식당 많아요. 차는 여기 두세요. 관리인 아저씨께 미리 말씀드렸거든요.<br>어차피 갤러리 문이 닫히면 주차장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태일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따랐다.<br>인사동 4길에 자리한 ‘다래원’은 120년 된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다. 대문간 근처에는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고, 뜰 안으로 들어서면 기와지붕을 올린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이 조선시대 대갓집 같은 옛스러운 정취를 자아낸다. 대들보가 드러난 식당 내부는 전통 가옥의 멋을 고스란히 품은 채, 실용과 절제가 어우러져 은은한 품위를 드러내고 있다. <br>두 사람은 대청과 마당 사이에 놓인 격자문 옆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창살 유리문 밖으로는 부드러운 조명을 머금은 정원이 정갈하게 펼쳐졌고, 키 낮은 정원수들과 계절 꽃들이 밤의 공기 속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br>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자 종업원이 정중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스테이크와 생선 요리를 중심으로 한 소박하면서도 조화로운 구성. 수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일 수 있어 입맛이 까다로운 태일도 무난히 만족할 만했다.<br>실내에는 진공관 턴테이블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음색의 바흐 무반주 첼로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태일은 묘하게 경색된 표정으로 메뉴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식당 안에는 빈 테이블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느긋하게 환담을 나누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br>태일은 괜히 다른 테이블들을 힐끔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점점 굳어가는 그의 얼굴은 주변 공기마저 서늘하게 만들었고, 서윤은 그 차가운 시선에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br>-오늘 꼭 이런 데까지 와야 했나?-왜요, 여기가 어때서요?-음악도 시끄럽고, 뭐랄까… 좀 구려.-토속적인 분위기, 안 좋아요? 난 좋은데.-뭐, 크게 나쁘진 않아. 약간 색다르달까.-태일 씨, 제가 대접하려는 자리잖아요. 기분 좋게 드세요.<br>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쪽 입술을 씩 올렸다.<br>-난 이미 더 괜찮은 데 예약해 놨어.<br>서윤은 고요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태일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단순한 불만이나 반감이 아닌,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이 수면 위로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br>-괜찮은 데라면 어디요? 호텔 꼭대기 회원제 식당 같은 데? -오늘 왜 이래. 꽤 날카롭네.-제가요? 글쎄요.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br>서윤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br>-와인? 차 가져온 거 잊었어?-인사동 올 땐 차를 두고 오세요. 그래야 이 근처 맛집도 둘러보죠.-하. 인사동 낭만이라니! 뭐, 결혼 전엔 이런 추억 하나쯤 쌓는 것도 나쁘진 않지.<br>‘결혼.’ 그 두 음절이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가벼운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어느새 커다란 관념의 굴레가 되어 그녀를 죄여오기 시작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6/pimg_63926050907052880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569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4. 오늘은 왜 또 나타난 거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4193</link><pubDate>Thu, 24 Sep 2026 00: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419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인사동 거리는 데이트하는 사람들과 회식을 나온 직장인들의 발길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내리던 비는 서서히 멎었지만, 축축하게 젖은 기운은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nbsp;<br>서윤이 불빛이 환히 새어 나오는 리온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1층 접수대에 앉아 있던 경숙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br>-어머, 왜 돌아오셨어요?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관장님 계시지?-아뇨. 조금 전 장훈 작가님이랑 식사하러 나가셨어요. 최 실장님도 같이요. 오늘은 두 분 다 안 돌아오실 거예요.<br>장훈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로, 뉴욕 지하철 역사 곳곳에 손바닥만 한 타일 그림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전시하며 이름을 알렸다. 팝아트 풍의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뒤섞인 그의 작업은, 삭막하고 지저분한 뉴욕 거리에 에스닉하면서도 모던한 아우라를 불어넣었다. <br>그의 이름이 뉴욕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리온 갤러리는 장훈을 눈여겨보며 꾸준히 접촉해왔다. 당시 한국 출신 미술가가 국제적 인지도를 얻기 쉽지 않았기에, 최 관장은 장훈과 전속 계약을 맺어 국내 전시와 작품 판매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었다.&nbsp;<br>내년 하반기 전시를 앞두고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야 할 그가, 귀국 시기를 무려 일 년이나 앞당겨 서울에 나타난 것이 의아했다.<br>-장훈 작가 본가가 어디더라? -제주도라고 들었어요. 근데 왜요?-갑자기 한국엔 무슨 일로 왔나 싶어서. 잠깐 들른 걸까?-글쎄요. 전시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새 프로젝트라도 있는 건지…<br>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갤러리 운영의 중추라 할 수 있는 2층 사무실에는 남자 직원 한 명과 노영미 연구원이 나란히 앉아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노영미가 손끝으로 안경테를 살짝 들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br>-어, 그새 우리 못 잊어서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아냐, 잠깐 들렀어. 근데 아직 퇴근 안 했어?-자료 파일 하나가 사라졌어요. 일일이 확인 중이에요.-어쩌다 그런 일이?-모르겠어요. 그런데 명명희 작가님 전시 기획은 어떻게 됐어요?-아직 잘 몰라. 김순자 씨도 딱히 별말씀이 없으셨어.-일부러 피하는 걸까요?-글쎄.-일본으로 날아가서 직접 명 선생님을 뵙고 오세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잖아요.-천 냥 빚은 고사하고, 비행기표 값은? 여행 경비는?-아하! 결국 고놈의 화폐가 문제군요.-그만 농담하고, 얼른 퇴근해.-넵. 이것만 끝내고요.<br>올해 초봄 입사했을 무렵만 해도 얼굴 가득 뽀송한 솜털을 지닌 채 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그녀가, 이제는 능숙하게 제 몫을 해내며 여유와 유머까지 갖춘 동료로 자라 있었다. <br>사무실은 평소보다 어둑했다. 나무늘보가 지나갈 듯한 지루한 정적 속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일정한 박자로 공간을 채웠다.<br>후배들만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뜨려니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서윤은 함께 퇴근할 요량으로 서랍 깊숙이 넣어둔 명명희 선생의 전시 자료철을 꺼냈다.&nbsp;<br>페이지마다 정리된 기록을 훑으며 간단한 메모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책상 위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강태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이 배어 있고, 어딘가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그는 사흘 전 외주 사업 건으로 지방 출장을 떠났는데, 예상보다 일을 빨리 마친 모양이었다.<br>-근처 왔다가 혹시나 해서 와 봤어. 얼른 나와. 저녁은 먹어야지.<br>순간, 서윤의 얼굴 위로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횡계에서 돌아온 이후로 태일 앞에서는 미소조차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다.<br>서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밖을 내려다보았다. 태일의 BMW가 건물 앞 주차장에 비상등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보자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요즘 들어 그는 유독 그녀에게 집착하는 기색을 보였다. 예고 없이 인사동으로 찾아오거나, 귀가 시간에 맞춰 확인 전화를 거는 일이 잦아졌다.<br>‘뭐야, 오늘은 왜 또 나타난 거야?’<br>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순간, 마법의 지니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남자가 없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전화를 받은 이상, 건물 앞에 버티고 있는 그를 피해 빠져나갈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br>‘아! 아까 그냥 퇴근할걸!’<br>서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4/pimg_63925806049601791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419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3. 4월의 정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1994</link><pubDate>Wed, 23 Sep 2026 00: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199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명명희 선생은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전쟁 이후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얼굴을 화폭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인물화 세계를 확립했고, 수많은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를 거치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nbsp;<br>‘명명희 인물화展’을 비롯해 국제미술초대전 대상, 한국예술대상, 금관문화훈장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거쳐온 발자취는 곧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명명희 선생의 명성이 높아갈수록 작품은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기 시작했고, 그 위상을 노린 무단 복제와 위작 유통이 암암리에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br>-혹시 선생님 최근작들을 볼 수 있을까요?-아뇨. 작업실은 물론이고, 작품 공개도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가능해요. 괜한 수고를 드린 것 같네요. 계속 전화로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직접 뵙고 설명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어요.-별말씀을요. 제가 먼저 방문하겠다고 부탁드린 거잖아요. 여기까지 오게 되어 오히려 기쁜걸요.-개인전이든 회고전이든 언젠가 다시 준비하게 될 거예요.&nbsp;어머니는 리온 갤러리를 좋아하세요. 상업성도 덜하고, 전시 수준이 품격 있다고요.-고맙습니다. 그래도 뭔가 확실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명 선생님께서 김순자 씨를 많이 의지하시니까요.<br>-최희숙 관장님이 확실한 답을 얻어오라 하신 건가요?<br>김순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br>-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선생님 작품 활동이 궁금해서요. -그렇다면 잠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네?-제 사무실에 어머님의 미공개 작품 몇 점이 있어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거라도 보여드리는 게 도리겠죠.-아, 감사합니다.<br>서윤은 그녀를 따라 1층 한쪽에 마련된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세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두 점은 9년 전 동유럽 스케치 여행에서 그린 풍경과 인물화였고, 정면에 걸린 40호 유화 한 점은 명명희 선생의 기존 화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한, 반추상 계열의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br>일흔을 넘긴 화가의 붓끝은 여전히 힘찼고, 화면에는 노련함과 생생한 상상력이 함께 살아 있었다. 그 그림은 단순한 색채나 형태의 조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적된 이야기와 묵직한 사유가 화면 속에 함께 자리했다.<br>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의 흔적은 보는 이에게 먼 시간의 결을 더듬게 했다. 무거운 색조와 경쾌한 터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섬세한 색의 중첩과 질감은 작가가 화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색채 농도의 부드러운 변화와 곳곳에 드러나는 강렬한 대비는 순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br>그 안에는 자연의 숨결, 인간의 고독, 그리고 생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서사가 녹아 있었다. 노화가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작품 세계와 그 안에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을 떠올리자, 문득 서윤은 자신의 삶이 한없이 가볍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br>왜 하필이면 그 순간, 횡계 숲길에서 헤어진 도준이 떠오른 걸까. 그것은 아픈 진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아닐까. 그즈음의 서윤은 우울한 얼굴로 단조로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끔 태일과 저녁 시간을 함께했지만, 예전처럼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br>마음속에 또 다른 존재를 품게 된다는 건, 하나의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시간과 행동, 언어 습관까지, 도준을 만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 듯했다. 가슴을 저미던 고통은 서서히 희미해졌지만, 일상의 흐름은 무늬 없는 벽지처럼 밋밋해져, 어떤 감정도 쉽게 머물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노화가가 따스한 손길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br>-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br>명명희 작가의 그림 한 점이 봄바람처럼 스며들어 그녀의 마음을 감싸안았다. 미묘하게 흔들리던 숨결이 고요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진정한 예술이란, 이렇게 살아 있는 온기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리라. 서윤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br>-어때요?-정말…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이에요.<br>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br>-볼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보이는 것 같아요.-그런 말 들으니 기쁘네요. 제목은 ‘4월의 정원’이에요. 임시로 붙였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죠?-그렇네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br>서윤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2/pimg_63925718257425734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199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2. 고요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그림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0118</link><pubDate>Tue, 22 Sep 2026 00: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011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명명희 선생은 여전히 건강상의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최희숙 관장은 전시 기획이 예상 밖으로 난항을 겪자, 평소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리온 갤러리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명명희 선생처럼 높은 인지도와 경쟁력을 겸비한 작가의 전시가 절실했다. 그나마 서윤이 김순자와 약속을 잡았다는 소식에, 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듭 당부했다.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라는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br>-최희숙 관장님은 잘 계시죠?-네, 여전하세요. 매일 갤러리에 출근하셔서 모든 일을 직접 챙기시니까요.-그 연세에도 꾸준히 활동하시고, 그런 열정으로 오랫동안 한국 화단을 견인해 오셨잖아요. 참 존경할 만한 어른이세요.-내년 초에는 꼭 명명희 선생님의 초대전을 열고 싶어 하세요. 우리 갤러리만큼 선생님 작품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은 없다면서 강한 의지를 보이셔요.-글쎄요. 우선은 저희 어머님 뜻이 먼저라서요.<br>김순자는 흰 도자기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서윤에게 먼저 건넸다.<br>-다즐링 향이 참 좋네요. 오늘 같은 날엔 특히 더요.-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다즐링에서 나는 홍차라면서요. 어머님이 네팔 여행 중에 사 오신 차가 있어서 한동안 이것만 마신 기억이 있어요.-아, 선생님도 네팔에 다녀오신 적이 있군요. 저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br>서윤은 따끈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비에 젖은 마음결까지 천천히 데워 주었다. 그 향기는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지난봄 횡계의 목요일 오후를 소환했다.<br>–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br>숨어 있던 복병처럼, 내면 깊숙이 눌려 있던 감정의 파편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촉촉이 젖은 검은 눈동자. 초원의 끝에서 한 걸음씩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다즐링의 섬세한 향기를 음미하는 동안, 그녀 앞에는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현실 너머에서 스며든 환영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br>-어머님은 ‘여인의 초상’ 위작 논란 이후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 일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어머니 작품이라며 전시된 그림이 사실은 오래전에 제자가 그린 습작을 본떠 만든 모작이었어요. 그림을 가르치면서 어머니가 직접 몇 군데 손을 봐주셨던 그림이죠. 예전 연희동 작업실에 있던 그걸 누군가 몰래 가져다가, 마치 어머니의 완성작인 것처럼 다시 그려 은밀히 거래한 거예요. 그림을 산 사람이 있으면, 판 사람도 있는 법이죠. 마지막 소장자는 위작 판정으로 그림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았겠죠. 결국 어머니가 늙어서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본다는 누명을 씌운 거예요. 자신의 예술적 진실을 의심받는 화가라니, 그보다 더 잔혹한 상처가 있을까요. 그때부터 어머님은 작품 공개를 멈추셨죠. 벌써 6년 세월이 흘렀네요.<br>김순자의 목소리가 쓸쓸한 파장이 되어 번져갔다. 그 말에 배어든 아픔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br>-리온에서 전시를 열게 되면, 정말 많은 사람이 몰려들 거예요. 명명희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님은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덜 풀리신 거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br>김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서윤은 다시 찻잔을 들어 그리움의 향기를 음미하며, 고요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뜨거운 불씨 하나를 품고 산다는 건, 그만큼의 번뇌와 동거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고통은 영영 아물지 않는 옹이가 되어 의식의 수면 아래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br>-혹시, 또 위작이 발견된 건 아니죠?<br>서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br>-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어느 집 벽 한쪽에, 어머니 그림을 흉내 낸 또 다른 모작이 걸려 있을지도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br>김순자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꺼지지 않은 분노와 어쩔 수 없는 번민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예술이 작품 자체보다 ‘값’으로만 환산되는 오늘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유감을 토로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2/pimg_63925635274170660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3011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1. 지도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걷는 듯</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8445</link><pubDate>Mon, 21 Sep 2026 02: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844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6월의 어느 날, 여름 초입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전 근무를 마친 서윤은 한낮의 빗줄기를 헤치며 북한산 기슭에 들어섰다. 차도를 벗어난 숲길 안쪽에는 초록으로 짙게 물든 풍경이 소음을 씻어낸 일상의 여백처럼 펼쳐져 있었다. 엷은 개나리색 트렌치코트에 레인 부츠 차림의 그녀는 큼지막한 암청색 장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br>저택 앞 철문을 지나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자, 작은 아트 갤러리를 닮은 3층 건물이 나타났다. 절제된 선과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건축물은 산속 깊숙이 마련된 누군가의 은밀한 아지트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그곳이 명명희 선생이 오랫동안 은거해 온 거처이자 작업실이었다.<br>서윤이 건물 앞 층계를 올라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불쑥 열리며 선생의 양녀 김순자가 나타났다.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검은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동안 명 선생 안부를 묻는 전화를 주고받고, 인사동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직접 집까지 찾아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br>-어서 오세요.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네요.-오히려 좋았는걸요. 모처럼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즐겼거든요.-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나요?-일러주신 대로 걷다 보니 금방 여기네요.<br>김순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오르는 길목, 표지판의 위치와 주변 건물의 형태, 오래전에 폐쇄된 방범 초소와 버섯 모양의 길쭉한 바위를 지나 서른여섯 걸음쯤 가면, 왼쪽 경사진 찻길 위로 검은 철문이 나타난다는 설명까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치 미리 그려둔 지도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걷는 듯, 서윤은 어느새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의 문턱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br>-자, 들어오세요.-감사합니다.<br>서윤은 우산에 맺힌 빗방울을 탁탁 털어낸 뒤, 문 옆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닫히자 눅눅한 한기가 물러나며, 따스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레인 부츠를 얌전히 벗어 두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br>거실처럼 보이는 넓은 실내는 이상하리만치 비어 있었다.&nbsp;갓 이사를 마친 집처럼 휑했고, 침묵의 결을 따라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홀 중앙에는 소파와 커피 테이블만이 무대 위 소품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고, 집기를 대신할 만한 소품도 거의 없었다.&nbsp;<br>화가의 자취를 연상시키는 물감이나 화구, 이젤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속세를 등진 고승의 선방 같기도 했고, 현대 무용가의 개인 연습실 같기도 했다.<br>-명 선생님은 어디서 작업하시나요?-작업실은 2층에 있어요. 여기는 손님을 맞거나 잠시 쉬는 응접실이고요. -굉장히 깨끗하고 넓어요. 목소리가 울릴 정도네요. -어머니는 주변이 어질러진 걸 아주 싫어하세요.<br>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br>-살다 보면 빈 벽과 빈 자리들이 더 절실할 때가 있잖아요. 여기는 그런 비움을 위한 공간이죠. 자,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네. 이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br>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여기 오는 길에 준비한 다즐링 티와 수제 마카롱 세트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br>-어머, 고마워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br>김순자는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을 받았다.<br>-다즐링이군요.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잠깐만요. 제가 차를 준비해 올게요.<br>곧 복도 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는 검은 옻칠이 곱게 입혀진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는 티팟과 다도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br>차를 우려내는 동안, 서윤은 거실 통유리창 너머 숲 비탈을 바라보았다. 암녹색으로 짙어진 녹음 위로, 희뿌연 빗줄기가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세상과 격리된 듯, 시간조차 다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세계였다. 한 겹의 꿈속 장면 같기도, 오래된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난 순간 같기도 한, 비현실적인 고요가 실내에 감돌았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1/pimg_63925555779121955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844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70. 친구여, 내가 거의 다 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3063</link><pubDate>Fri, 18 Sep 2026 00: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3063</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nbsp;‘로체 남벽’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상처를 불러왔다. 1989년 가을, 모두의 심장에 새겨진 그날의 기억. 민혁은 그곳에서 추락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br>도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언의 언어로, 그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드러냈다. 민혁을 떠나보낸 슬픔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상실을 넘어서리라 다짐했다. 다시 마주할 그 벽을 향해, 어느 때보다 단단한 결심이 서 있었다.<br>노르부는 에베레스트 길목, 쿰중 마을에서 태어난 셰르파였다. 산과 더불어 성장하며 날씨와 지형, 고소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익혔고, 청소년기에는 라마 사원에서 수행하며&nbsp;심신을 단련했다.  &nbsp;이후 네팔 산악협회에서 정식 훈련을 받고, 수많은 원정대와 함께 히말라야를 누비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nbsp;에베레스트만 해도 열 번을 넘게 오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고산 환경에 적합한 유전적 특성과 반복된 8천 미터급 등반 경험으로, 일반 등반가보다 훨씬 빠르게 고도에 적응하고 극심한 저산소 환경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몸이었다.<br>지금은 파트너와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늘 고산으로 향했다. 산은 여전히 그에게 끝나지 않은 과업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br>-로체 남벽은 악마의 벽이야. 왜 또 거길 오르겠다는 거지?-혼자 해볼 거야.-혼자서? …미쳤군.<br>도준은 고개를 돌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br>-돌았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안 돼, 절대로!<br>노르부는 도준 앞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빼앗듯 자기 앞으로 옮겼다.<br>-노말 루트라면 모르지. 히말라야의 전통적 원정 방식, 셰르파, 쿡, 닥터, 원정대… 함께라면 기적처럼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남벽은, 혼자라면 절대 안 돼.-내년 봄이야. 작년 K2 하산 후 관광성 들어가 등반 허가 받았어.-너희 같은 사람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br>노르부는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br>-왜 자꾸 위험하고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하려는 거야? 히말라야가 무슨 서바이벌 게임장인 줄 알아?-그건 아니지. 그저…-작년 에베레스트 참사, 기억나지? 하산길에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시신들이 눈 속에, 길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지. 아, 왜들 기어이 여기까지 와서 죽는 건데?-노르부, 나도 알아. 객기와 오만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그런데?-나도 눈의 거처에 사는 시바 신이 두렵지. 거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허공의 끝이니까. 그래서 더 정직한 마음으로 그곳에 서려는 거야.-무산소에 혼자라니, 백 퍼센트 자살 행위야.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돈도 안 들고, 고통도 덜해. 그게 훨씬 경제적이지.-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야. 스폰서도 일부러 찾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감당할 거야.-뭐, 후원자도 없어? 등반 자금은 어디서 구할 건데?-그동안 가진 것들, 이것저것 다 팔았어.<br>도준은 노르부 앞에 있던 자신의 술잔을 다시 가져와 맥주를 가득 채웠다. 그때, 주인 여자가 달밧을 담은 식판 두 개를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노르부는 이미 식욕을 잃은 듯,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br>-민혁 때문이지? 그걸 못 잊고 미안해서, 마음에 맺혀서 그러는 거지? 그럼 그만둬. 부질없는 짓이야. -오해 마. 아직 아무도 오르지 못했으니까, 내가 한번 오르려는 거야. 로체가 거기 있으니까, 그게 전부야.<br>도준은 맥주를 들이켜고 손등으로 거품을 닦았다. 알전구를 향해 달려드는 하루살이 떼가 소란스럽게 윙윙거렸다. 뜨거움을 좇는 그들의 본능처럼, 그도 불빛을 향해, 죽음을 향해 겁 없이 돌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br>도준은 어두운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br>‘친구여, 내가 거의 다 왔다. 거기 너무 춥지는 않은가?’<br>하얗게 솟은 히말라야 능선을 배경으로, 민혁의 환한 미소가 바람에 흔들리는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두 번째 도전은 처음과 다를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욱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빛과 어둠, 생과 사가 뒤엉킨 순간에서도, 도준은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피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8/pimg_639253018958654727.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306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9. 카트만두의 두 친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1092</link><pubDate>Thu, 17 Sep 2026 00: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109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타멜 거리. 도준은 낯선 이방인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경적과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운 행렬, 향신료 냄새가 뒤엉킨 복잡한 골목 한복판에서 누군가 불현듯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외쳤다.<br>-와, 이게 누구신가?<br>도준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환한 미소를 건네왔다. 훤칠한 키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체격, 웃을 때마다 양쪽 뺨에 깊이 파인 볼우물이 인상적인 노르부였다.<br>-마이 프렌드, 바이!<br>네팔어로 ‘바이’. 형제를 뜻하는 친근한 호칭이었다. 노르부가 도준을 그렇게 부를 때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br>그는 티베트계 셰르파족으로 네팔에서 나고 자란 서른여섯 살의 남자였다.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는 여행사를 직접 운영했는데,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오랜 경력의 고소등반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br>둘은 과거 에베레스트 북서쪽 초오유를 함께 오르며 굳건한 신뢰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당시 노르부는 아홉 명의 셰르파를 이끄는 대장이었고, 등반 루트 결정부터 고정 로프 설치, 피톤 작업까지 진두지휘했다. 정상까지는 무사히 올랐지만, 하산 도중 뜻밖의 눈사태에 휘말렸다. 그때 크게 부상을 입고 쓰러진 노르부를 끝까지 업고 내려온 이가 바로 도준이었다. <br>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목숨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가 자리 잡았다.<br>-내 생명의 은인! 연락도 없이 카트만두엔 언제 온 거야?-오늘 도착했지. 그동안 잘 지냈어?<br>도준이 현지어로 짧게 인사를 건네자, 노르부는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br>-나야 잘 지냈지. 도준, 정말 반갑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스와니가 호텔에 잠깐 다녀오는 길이야. 클라이언트 몇 명이 거기 묵고 있거든. 내일 아침 일찍 포카라행 버스를 타야 해서 전달할 게 좀 있었어.-나는 사흘쯤 파노라마 포인트에 머물다가 루크라로 갈 생각이야. 그런데 저녁은 먹었어?-마침 나도 출출하던 참이야.-그럼 맥주 한잔하면서 같이 먹자. 모처럼 이 동네 로컬 푸드가 당기네.-좋아! 잘됐다.<br>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 따라 걷다가 왼편으로 꺾어 들자 허름한 식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막 아래 듬성듬성 놓인 테이블 위로 낮게 매달린 알전구가 바람에 흔들리며, 낡았지만 묘하게 따스한 정취를 풍겼다. 쌀밥에 렌틸콩 수프와 야채 커리를 곁들인 달밧(Dal Bhat), 그리고 버팔로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모모(Momo)가 이 집의 대표 메뉴였다. <br>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자마자 주인 여자가 마른행주로 테이블을 재빨리 훑듯 닦아주었다. 그들은 네팔 맥주 ‘뚜벅’ 세 병과 달밧 두 개를 주문했다. 주인 여자가 맥주를 먼저 가져다 놓고는 커다란 호박처럼 생긴 오이를 도톰하게 썰어 바구니에 담아 내왔다.<br>노르부는 맥주잔을 가득 채우며 존중과 환대의 뜻을 드러냈다. 그 단순한 손놀림에서 도준은 오래전 눈보라 속에서 맺은 인연을 떠올렸다.<br>-요즘 비즈니스는 어때?-정신없어. 가이드만 여든 명, 포터가 백쉰 명이야.-그 정도면 돈 좀 벌었겠는데?-젠장, 네팔에 돈 쓰러 오는 사람 봤냐? 다들 다른 나라에선 펑펑 쓰고, 여긴 마지막 코스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와선 싸구려만 찾아다닌다니까. 얼마 전엔 일본 애들이 이십 년도 더 된 여행 책자 들고 와서, 왜 이렇게 비싸졌냐고 따지더라. 질렸지, 완전히. 두 손, 팔다리 다 들었어.-힘들겠네. 그래도 얼굴은 훤해 보이는데.<br>도준이 오이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노르부는 픽 웃으며 맥주잔을 다시 채웠다.<br>-루크라는 왜 가는 거야? 이번엔 또 어디로 올라갈 생각이지?-올해는 시등만 할 거야. 추쿵 쪽으로 빠져 로체샬 중턱쯤까지. 그때 컨디션 봐서 임자체도 다녀올지 몰라. 혼자라서 편해.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혼자 정찰 등반을 왔다, 그런 말인가? 진짜 노리는 봉우리는 어디지?-로체 남벽.-뭐라고?<br>노르부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도준을 바라봤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7/pimg_639252026842043853.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2109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8. 함께 떠날 결심 앞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9059</link><pubDate>Wed, 16 Sep 2026 00: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905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일본으로 떠나기 전, 도준은 오랜만에 사촌 형 집에 머물고 계신 고모부를 찾아뵈었다. 고모부는 환자용 침대에 누운 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전원일기』 재방송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nbsp;<br>퇴원 전보다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건강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nbsp;평생 농사일에 그을린 얼굴은 서울에 온 후로 많이 밝아졌는데, 덕분에 세월의 자국처럼 도드라진 검버섯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br>-서울 물이 좋긴 한가 보다. 그새 시골 땟국물이 쑥 빠진 것 같지 않니?<br>고모부는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낮추며 미소 지었다.&nbsp;목소리엔 여전히 병치레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오래 묵은 삶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br>도준은 어깨에 메고 온 가방에서 서윤이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종합비타민제와 홍삼 캔디를 꺼내놓았다.<br>-이게 웬 거냐?-윗집 살던 아주머니 아시죠? 그분 손녀가 고모부께 드리라며 가져왔어요.-윗집 손녀가? 아이고, 고맙구먼.<br>고모부는 약병을 쥔 손끝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 떨림은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선,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었다. 그 순간 도준은 오래전 윗집 마당에서 목격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br>열세 살의 어느 날, 그는 용천 계곡에서 주운 분홍신 한 짝을 들고 윗집을 찾았었다. 그날, 이해할 수 없는 장면 하나가 그의 삶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말해선 안 될 비밀이라는 감각만이 몸에 먼저 새겨졌을 뿐이었다.<br>전쟁 과부였던 윗집 아줌마는 고모와도 오랜 이웃이었다. 두 사람은 언니와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며 반찬 하나도 나누던 사이였다. 그런 이웃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관계는 소년에게 도무지 믿기 어려운 비밀이었다. <br>그는 차마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발설하지 못했다. 고모가 알게 되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고, 그 은폐된 사건이 결국 비극으로 이어질까 몹시 불안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비밀을 외면한 탓에 하루라도 빨리 기숙학교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br>이제 고모는 세상에 없고, 도준도 더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숨겨온 고모부의 불편한 진실을 한 번쯤 살짝 건드려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불쑥 일었다. 무덤까지 지고 갈 비밀이 아니라면, 고모를 대신해 그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br>-고모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뭔데?-그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거예요.-비밀이라니? 그래서?-옛날에, 윗집 아주머니 젊었을 때, 고모부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그 방에 두 분만 있었죠. 오랫동안.<br>순간 고모부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모부는 충격과 고뇌가 뒤섞인 눈빛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br>-고모도 그걸 알았니?-아셨을까요?-글쎄다.-저는 아무 말 안 했어요. 곧바로 기숙학교로 들어갔잖아요.-왜 숨겼니?-고모가 슬퍼할까 봐서요.-그랬구나. 고맙다.<br>고모부의 ‘고맙다’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비밀을 지키느라 힘들었던 도준의 침묵일까, 자신의 불륜이 고모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일까. 도준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br>-고모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으세요?<br>도준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br>-그분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지. 전의 심방리 뱀골. 거기가 우리 고향이야. 그분은 부잣집 셋째 딸, 나는 그 집안 소작농의 아들이었어. 그분이 시집을 갔고, 전쟁통에 홀몸이 되었지. 내가 횡계로 온 건 그분이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고모를 만난 건 그 이후였지. 두 여자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걸 안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지.<br>고모부가 오래 묻어두었던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한 남자의 노쇠한 목소리에는 사랑과 죄책, 회한과 체념이 얽혀 있었다. 도준은 그것을 단순한 도덕의 잣대로만 가를 수 없음을 직감했다. 평생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온 고모부의 고백은, 그의 삶을 관통한 불가피한 굴레였는지도 모른다.<br>-두 여자 모두를 사랑했나요? 아니면, 고모는 껍데기 사랑만 받은 건가요?-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그분을 보쌈해서 멀리 달아날까 욕심을 낸 적도 있었지. 기차표까지 끊었는데, 네 고모가 마음에 걸려 결국 떠나지 못했어...&nbsp;고모한테는 미안해서 더 잘해줬고, 윗집 그분은 안타까움에 더 많은 걸 베풀려고 했지. 그러면서도 늘 두 여자 모두에게 미안했어.<br>고모를 두고 멀리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니. 도준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고모부는 평생 한 여자를 놓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살아왔다. 윗집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과거에 머물며 그 집을 돌보았다. 도준은 한때 그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고모 몰래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를 원망했고, 오로지&nbsp;고모부만 바라보며 살아온 고모가 안쓰러워 가슴이 저렸다.<br>하지만 지금, 서윤에 대한 갈망 속에서 그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그녀를 향한 벗어날 수 없는 열망이 고모부가 한 여자를 놓지 못한 이유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집안에 얽힌 아픈 사랑의 흔적이 비밀스러운 유산처럼 자신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결국 고모부의 삶을 옭아매고 정의했듯, 언젠가 자신의 삶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규정될 것만 같은 예감.<br>‘나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br>도준은 그 질문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모부와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사촌 형 집을 나서는 그의 머릿속에 ‘사랑인가, 히말라야인가’라는 생각만이 어렴풋이 맴돌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6/pimg_63925184560287562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905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7. 이대로 서울을 떠난다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6988</link><pubDate>Tue, 15 Sep 2026 00: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6988</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하루하루 체념이 깊어지고, 휴대폰을 확인하는 횟수도 줄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모래내 철공소에서 특별히 주문한 등산 장비를 챙겨 나오던 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낯선 번호가 액정에 떠올랐다. 일순간 혹시 그녀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전화를 건 이는 모 TV 방송국의 정 피디였다.<br>정 피디는 일본 북알프스 등정을 다룬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며, 도준에게 카메라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방송 촬영 기술에 능숙하면서, 거친 지형에서도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번 외주 제작 프로젝트에 꼭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br>고산 환경에서의 촬영은 단순한 카메라 기술을 넘어, 강인한 신체 조건과 산악 지형에 대한 이해까지 요구하는 일이었다. 도준은 늘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올랐다. 숫자와 기계에 밝았던 그는, 점차 방송 장비까지 습관처럼 다루며 자연스레 촬영 전문가가 되었다. <br>니콘 F3, 캐논 New F-1 같은 기계식 SLR 카메라는 배터리 의존도가 낮아 저온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했고, 광각부터 망원까지 다양한 렌즈군, 코닥 Ektachrome와 후지 Velvia 슬라이드 필름, 가볍고 견고한 삼각대, 카메라와 렌즈를 보호할 케이스와 여타 액세서리까지, 모든 장비를 짊어지고 산에 오르는 일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싸움이자, 완벽한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었다.<br>도준은 그런 극한 조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익숙했다. 전문 산악인으로 쌓은 인연 덕에 방송 작업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고, 인디 필름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촬영 감독상을 받은 경력도 있었다. <br>국내 산을 배경으로 한 프로그램은 제작이 활발하고 인력 충원도 수월했지만, 해외 촬영은 절차가 복잡하고 예산 부담이 커 아무나 시도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이번 기회가 프리랜서인 도준에게까지 돌아온 것은, 외주 제작이라는 특수한 여건 덕분이었다. <br>그럼에도 그는 선뜻 응답하지 못했다. 머릿속 어딘가를 여전히 서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서울을 떠나면 그녀와의 거리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은 불안, 그것이 그의 결정을 더디게 만들었다. <br>-도준 씨, 혹시 다른 일정 있으세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건가요?-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뭐라고 답을 드리긴 조금…-김 부장님이 꼭 모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도준 씨 아니면 안 된다고요.<br>정 피디의 상사인 김홍식 부장은 산악 프로그램에 특화된 베테랑 프로듀서였다.&nbsp;도준도 김 부장의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여한 터라, 그에게 빚진 마음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김 부장은 산악 촬영의 까다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험난한 환경에서도 제 몫을 해내는 사람으로 도준을 신뢰하고 있었다.<br>-이번에 김홍식 부장님도 함께 가시나요?-아뇨, 정년 퇴임을 앞두고 뉴욕으로 휴가를 떠나셨어요.-그렇군요.-그래도 일본 현지 사정에 밝은 도준 씨가 함께하면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꼭 부탁드리라고 하셨어요.<br>그 말에 도준은 문득 김 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철저하고 노련한 모습, 여러 산악 프로그램에서 함께했던 순간들이 선명했다. 그가 하필 이 시점에 자신을 추천했다는 점이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br>-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영광이네요.<br>일본 북알프스는 도준에게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긴 방황 끝에 처음 마주한 그 광활한 풍경은 부모를 잃고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소년에게 산악인의 꿈과 생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곳은 추억이 아니라,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된 출발점이었다.<br>‘어쩌면…’<br>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br>촬영 카메라를 메고 바삐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녀를 잊진 못해도 갑갑한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년 네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확보라는 이유도 있었다. <br>‘낯선 환경과 새로운 일은 삶의 갈림길에서 돌파구가 되곤 하지. 그녀와의 인연도, 어쩌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도 몰라.’<br>막연한 바람이었지만, 그 기대는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을 부추겼다.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일본 북알프스 산맥이 또다시 자신의 삶을 이끌 것만 같았다.<br>-알겠습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br>그는 정 피디의 제안을 정중히 받아들이고 전화를 끊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5/pimg_639250272802757229.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6988</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6. 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4855</link><pubDate>Mon, 14 Sep 2026 02: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485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한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타멜 중앙로에 전깃불이 돌아오자, 외국인 거리 특유의 활기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곗바늘과 정지된 여백의 순간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의 흐름으로 이어졌다.&nbsp;<br>낡은 릭샤를 끌던 운전사가 천천히 멀어지고, 옷 가게와 기념품 가게, 타로 점집 앞에도 불빛이 번지며 거리 전체가 다시금 살아 숨 쉬었다.<br>삼거리 반스 책방 앞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군밤을 팔고 있었다. 도준은 환한 불빛에 이끌리듯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매장 안에는 여행객들이 두고 간 중고 서적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장식장 위에 정갈하게 놓인 그림엽서와 기념품들도 네팔 전통의 색감과 문양으로 이방인의 시선을 끌었다.&nbsp;<br>도준은 작년도 판 ‘론리 플래닛’ 가이드북을 잠시 넘겨본 뒤, 지도들이 꽂혀 있는 섹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다양한 지역의 지도를 살펴보다가, 마침내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지도를 뽑아 들었다.<br>잠시 후, 다시 거리로 나온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의 고즈넉한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분주히 오가고, 식당에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함께 샤데이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Smooth Operator’가 흘러나왔다. 옷가게에 걸린 전등 불빛은 진열대 위 기념 셔츠와 손뜨개 모자, 두꺼운 스웨터들을 은은히 비추었다. 흘러넘치듯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원색들이 밤 풍경 속에 생기를 더했다. <br>기념품 가게 앞을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br>-What time is it?<br>그는 무심코 왼손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차고 있던 아보셋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느닷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br>-신기하게 생겼네요. 이건 무슨 시계예요?<br>횡계 별장, 목요일 오후.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던 장면이 아직 선명한 필름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nbsp;  그녀가 다른 남자의 차에 몸을 싣고 사라진 후로, 도준은 삶의 중심을 잃고 무기력한 시간 속을 맴돌았다. 매일같이 오대산 자락을 달리던 일상의 리듬도 흐트러졌다. 그녀가 없는 횡계는 아무도 없는 숲의 적막처럼, 이제 어떤 의미도 건네지 못했다. 결국 일주일 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충동적으로 서울 방향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br>‘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자.’<br>사랑이라는 열병에 잠식된 영혼은 텅 빈 갈증에 쫓기듯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그녀가 일하는 인사동 거리를 서성였다. 그림자만이라도 스칠까 하여 리온 갤러리 주변을 배회하는 일만이 그의 결핍을 붙들어두는 유일한 위안이었다.<br>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으나, 운 좋게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두어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철없던 시절의 무모한 격정은 이미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횡계 숲길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줄곧 마음을 옥죄었다.<br>-당신 누구야?<br>낯선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이명처럼 귓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약혼자였다 해도 하루 전 자신이 적어준 번호가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의문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누군가의 보호와 강력한 견제 안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br>앞날이 예정된 사람 앞에 무턱대고 나서는 일은 결국 불필요한 혼란만 초래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확실성과 자신감의 결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로체 남벽이라는 치명적인 도전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한, 그 어떤 약속이나 책임도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다 해도, 언젠가 자신이 비겁하게 그 손을 놓아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4/pimg_639249486040039149.jpe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1485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5.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질투인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8595</link><pubDate>Fri, 11 Sep 2026 01: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859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네팔은 바닷길이 없는 지형 탓에 오래도록 연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그 고단한 일상 속에서 잦은 정전은 이미 흔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nbsp;<br>여느 날처럼, 타멜 거리가 갑자기 암흑에 잠기자 상점가 곳곳에서 가스등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빛들이 어둠을 타고 번져가며, 거리는 차츰 밤의 몽환적인 숨결을 되찾았다. 어두운 골목을 가르는 빛의 물결에는, 어디선가 되살아난 듯한 낯선 노스탤지어가 피어올랐다.<br>뚜벅뚜벅, 어둠이 내려앉은 포석 위로 도준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돌이 울퉁불퉁하게 깔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무언가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듯한 공허가 깊어졌다.<br>골목 끝 담배 가게 앞에 이르러 그는 걸음을 멈추고, 짙어가는 밤하늘을 막막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무심결에 흘러나온 한숨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br>‘이 지독한 우울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가?’<br>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다시금 강박처럼 떠올랐다. 그녀가 탄 자전거는 앞으로만 곧장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나에게는 한순간의 망설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깊은 회한에 몸서리쳤다. 철이 든 후로 자신이 이토록 어리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br>죽음의 경계에 익숙해진 서른다섯의 사내가, 울음을 삼키는 아이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로운 여자와의 만남이나 격렬한 연애 감정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녀와의 이야기도, 잃어버린 분홍신을 되돌려주는 그 순간까지라고 믿었다. 그때가 되면 오랜 숙제를 끝내고,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br>하지만 그 인연의 끝자락에서 그는 아직도 그녀의 분홍신을 한 줌 쓰라린 꿈처럼 품고 있었다. 수시로 가슴을 짓누르는 멜랑콜리한 감각은, 도대체 언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일까. 왜 그녀라는 흔적 하나를 이토록 지워내지 못하는 걸까.<br>그녀를 낚시터로 데려가기로 했던 그날, 도준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검은색 BMW를 보고, ‘혹시 그녀의 약혼자일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는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한동안 긴장된 시선으로 차창 너머를 응시하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그녀에게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숨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br>-여보세요.<br>낮게 뱉은 한마디가 가볍게 떨렸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br>-당신 누구야?<br>도준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목구멍 언저리까지 어떤 말이 치밀어 올랐다가 이내 스러졌다. 무례한 말투의 이 남자가 그녀의 약혼자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br>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신이 던진 단 하나의 질문 같았다. 너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너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감히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br>-이 번호가 왜 여기 있어? 당신 누구야?<br>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거칠게 다그쳐왔다. 휴대폰은 손안에서 납덩이처럼 무거워졌고, 도준은 자괴감에 잠긴 채 끝내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br>검은색 BMW가 막다른 길 끝에서 다시 돌아 나온 건 십여 분쯤 지나서였다. 멀리서도 그녀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불길한 상상이 이 순간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 안의 침묵 속에 고립된 채, 그 어떤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는 처지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br>나는 누구인가.<br>그녀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가.<br>대답 없는 메아리, 응답받지 못한 질문이 심장을 짓눌렀다. <br>스물두 해 만에 기적처럼 다시 찾아온 인연이, 수많은 갈등과 망설임을 남긴 채 이번에도 그의 곁을 천천히 지나치고 있었다. 다시 그녀를 영영 잃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br>용천 계곡, 세찬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소녀,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소년의 인공 호흡. 그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오래된 진실 하나로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약혼자보다 앞선 인연이었다고, 처음 사랑이고 첫 키스였다고 말하는 건 제정신 아닌 사내의 헛된 고백일 뿐이었다.<br>그녀는 그가 없는 미래를 향해 곧장 달려 나갔고, 그는 여전히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여기 홀로 서 있었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헤어진 그때부터 거의 매 순간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었고, 신열처럼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몹쓸 역병과도 같았다.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질투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은 채 오직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만 각인된 그녀의 얼굴이 끊임없이 눈앞을 맴돌았다.<br>야박하게도 그녀에게는 끝끝내 전화 한 통 없었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이미 완벽하게 다른 세계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녀가 무슨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겠는가. 번듯한 약혼자와 축복된 결혼식, 안온한 가정의 울타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nbsp;<br>이제는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조차 한 겹 베일에 싸인 듯 점점 흐려졌다. 얼굴 모습과 목소리, 수줍은 미소조차 아득한 장막 너머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그는 타이르듯 자신에게 말했다. 따뜻하고 안전한 삶이, 결국 그녀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고.&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1/pimg_63924687816802423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859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4. 이 바닥에선 황소고집으로 꽤 이름난 친구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6312</link><pubDate>Thu, 10 Sep 2026 00: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6312</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파노라마 포인트’ 정원에서는 소박하지만 활기 넘치는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한국에서 온 원정대와 방송사 관계자, 신문사 기자, 세르파들이 길쭉한 나무 테이블에 빽빽이 둘러앉아 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br>그들의 웃음소리와 왁자한 대화가 밤공기를 데웠다. 허공에 매달린 노란 전구는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며 천막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바비큐 그릴에서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자욱이 퍼져나갔다.<br>도준이 문형근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들뜬 분위기는 한순간 숨을 고르듯 가라앉았고, 몇몇은 도준의 얼굴을 확인하며 긴장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틈에서 작달막한 키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사내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마나슬루 원정대의 대장이자, 이름만으로도 회자되는 인물, 김봉산이었다.  &nbsp;  도준보다 열 살 위인 그는 8천 미터급 14좌 가운데 10개를 완등하며, 한국 산악계의 전면에 나선 지 오래였다. 그 놀라운 성과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TV 프로그램과 광고 모델 활동을 통해 더욱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br>하지만 도준에게 고산등반의 본질은 단순히 정상에 오른 ‘횟수’가 아니라, 어떤 루트를 택했는지, 어떤 태도로 산에 접근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 점에서 김봉산은 늘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고, 본인 또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br>어느새 마흔 중반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생의 전부를 건 도전이기보다, 명예와 생계를 위해 반복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을 업으로 삼아 왔던 그는, 등반이 더 이상 특별한 선택이 아닌, 그저 오래 해온 ‘직업’이 되어버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br>그런 점에서 도준은 김봉산과 전혀 결을 달리했다. 체질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고, 지금껏 완등한 8개의 봉우리 중 5개는 웬만한 고수들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난이도가 극도로 높은 루트들이었다.<br>기록으로 따지자면 김봉산이 앞서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도준이 단연코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방향도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이 오늘 이 정원에서 마주한 것이다.<br>-아, 준이 아냐. 여기서 또 보네.<br>김봉산이 술잔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br>-여전하시네요. 이번엔 마나슬루에 오르신다고요?-괜히 또 가보는 거지, 뭐. 벌써 두 번째야. 근데 넌 또 뭘로 우릴 놀래킬 작정이야?-놀래키다뇨. 별말씀을요.-내가 실없는 말 하는 줄 알아? 허허. 자, 소개 좀 하지. 다들 이름은 아실 거야. 도준이야. 이 바닥에선 황소고집으로 꽤 이름난 친구지.<br>그는 연거푸 손짓하며 사람들을 돌아봤다.<br>-이쪽은 방송 촬영하러 같이 온 최연걸 피디.-지면을 통해서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작년에 K2 등정하셨죠?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br>피디가 정중히 명함을 내밀었다. 도준은 예의상 한 번 들여다본 뒤, 곧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br>-이쪽은 카메라맨 김상일 씨, 오늘 바비큐 파티의 물주인 윤종일 기자, 우리 팀 막내 이종학 군… 어, 한 명 더 있었는데 어디 갔지?-자, 자, 이제 좀 마십시다. 배고파 죽갔구만.<br>문형근이 너스레를 떨며 먼저 자리를 잡았다. 도준도 빈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 가볍게 허기를 채운 뒤, 적당한 순간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br>그때 남자 요리사가 잘 구워낸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커다란 은쟁반에 담아 왔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안줏거리와 생 미구엘 병맥주, 쿠쿠리 럼, 좁쌀을 발효시켜 만든 네팔의 전통주 '똥바(Thomba)', 그리고 누군가 인심 좋게 꺼내놓은 발렌타인 17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br>김봉산이 발렌타인을 들어 올리며 잔을 권했다.<br>-준아, 좀 마셔라. 방금 막 서울에서 온 길이지?-예.-우린 도착한 지 일주일 넘었어. 마저 준비하려면 사나흘 더 있어야 할 것 같고.<br>도준은 묵묵히 잔을 털어 넣고, 김봉산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낯선 얼굴이 하나 늘어난 탓인지, 술자리의 공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그는 방송국 피디와 몇 마디 주고받고 나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았다. 가벼운 농담과 허세가 뒤섞인 분위기보다는, 혼자 밤길을 걷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br>-난 잠깐 볼 사람이 있어서요. 나중에 봐요.<br>문형근이 좀 더 있으라며 그의 옷깃을 잡았지만, 그는 끝내 그 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6/pimg_63925990630853634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6312</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3. 네팔 시계는 멈춰 있는 거 몰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4099</link><pubDate>Wed, 09 Sep 2026 00: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4099</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이다. 북쪽에는 에베레스트를 포함해 해발 8000미터가 넘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장대한 벽처럼 이어지고, 남쪽의 테라이 지역에는 정글과 늪지대, 초원이 어우러진 국립공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br>도준이 일본과 방콕을 거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한 건 4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여행자들의 거리인 타멜에 도착했을 무렵 도시는 이미 해거름 녘의 어둑한 그림자가 골목마다 짙게 깔려 있었다. <br>오래된 건물 지붕 위에도 푸르스름한 밤의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중앙로에 이르자 식당과 상점들이 빽빽이 늘어선 거리는 환한 불빛과 인파로 묘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낡은 차량이 뒤엉킨 사이로 자전거와 릭샤가 아슬아슬하게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nbsp;  도준은 곧장 타멜 중심지 인근의 ‘파노라마 포인트’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한국인 등산가 문형근이 운영하는 이곳은 네팔을 찾는 한국 산악인들과 여행객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nbsp;<br>그는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채 택시 운전사를 뒤따라 로비로 들어섰다. 라운지에서 신문을 읽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두 팔을 벌리더니 크게 소리쳤다.<br>-어이구, 이게 누구야. 도준이 아냐. 이, 녀석!<br>도준이 배낭을 벗기도 전에 문형근이 달려와 얼싸안았다.<br>-형, 잠깐만, 이것 좀 내려놓고요.<br>도준은 배낭을 벗어 한쪽 벽에 기대 놓았다. <br>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도준의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다시 만난 듯 몹시 반가운 표정이었다.<br>-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실 때가 됐을 텐데, 어째 이 귀신이 안 나타나나 했지.-그래서 이렇게 왔잖습니까. 그동안 잘 계셨수?-그럼. 나야 일 년 열두 달, 만고땡이지. 허허. <br>택시 운전사가 카운터 앞에 짐꾸러미들을 내려놓고 뚱한 얼굴로 기다렸다. 도준은 350루피를 건넸다. 택시비와 팁을 포함한 액수였다.<br>-통관하는 데 별문제 없었지?-네, 그럭저럭요. 빈방 있어요?-자식, 아무려면 너 하나 재울 방 없겠냐. 정 없으면 마누라 쫓아내고, 나랑 자면 되지 뭐.-형수님이라면 몰라도, 문 선배는 절대 노 땡큐입니다.-애가 갑자기 부끄러움을 타네. 얌마, 팔십육 년 마칼루에서 한 달간 동거한 걸 벌써 잊었어?-그 코 고는 소리… 와, 진짜! 그때 생각만 해도 아직 제 머리가 어질어질해요.-얘가 서울에만 가면 성격 개차반 돼서 돌아온단 말이야. 인간이 언제 되려나? 아무튼 앉아.<br>문형근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도준은 배낭에서 디스 담배 한 보루를 꺼내 건넸다.<br>-그래, 나는 담배나 피우다 뒈져라, 그 얘기냐? 자식, 고맙다.-외국 나오면 한국 담배가 그립잖아요. 여긴 어때요?-늘 똑같지. 네팔 시계는 멈춰 있는 거 몰라? 그게 매력이지. 그래서 내가 여기 붙어 사는 거고.<br>그때 식당 쪽에서 누런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nbsp;‘파노라마 포인트’를 관리하는 세르파 체링이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br>-도준 형, 안녕하세요. 오늘 비행기로 들어오신 거예요? <br>오랫동안 한국 원정대 곁에서 일을 해온 그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했다.<br>-응. 체링, 그동안 잘 있었니?-그럼요. 잘 있었죠. 저 두 달 전에 결혼했어요.-그래? 총각 신세를 면한 거야? 어쩐지 얼굴빛이 훤해졌네.-제 와이프도 여기서 일해요. 한국 요리 잘해요. 미역국, 닭도리탕.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체링은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그래. 기대하고 있을게.<br>문형근이 도준의 짐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br>-체링, 이것들 이층으로 옮겨. 이백칠 호 비었을 거야.-알았어요. 도준 형, 나중에 또 얘기해요.<br>체링은 카운터에서 열쇠를 꺼낸 후 큰 배낭부터 번쩍 짊어지고는 작은 것들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정원으로 향하는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br>객실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목조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준이 묵을 방으로 가려면 바깥쪽에 설치된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열린 문 너머로 등산복 차림의 남자들이 술자리를 벌이며 둘러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br>-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서울에서 신문사 기자들이랑 방송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바탕 소란 피우는 중이야. 팔일오 특집 찍으려고 마나슬루에 올라간대. 김봉산 대장이 이끄는 팀이지. 야, 너는 진짜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났나 보다. 마침 새끼 돼지 한 마리 잡았거든. 자, 우리도 나가서 한잔해야지.-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안 낄게요.-얌마, 이제는 사람들하고도 좀 어울릴 줄 알아야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이는 법이야. 같은 동네 사람들인데, 인사는 해야지.<br>도준은 평소에 남들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9/pimg_639245106090599340.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4099</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2.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누군가의 모습처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1806</link><pubDate>Tue, 08 Sep 2026 00: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180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  &nbsp;  -무슨 일은 아니고요. 저번에 횡계 슈퍼에 갔는데 지갑을 두고 와서 돈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그 조카분이 지나가시다가 대신 계산해 주셨어요.<br>서윤은 미리 준비해 온 말을 차분히 꺼내놓았다.<br>-액수가 꽤 되는 모양이요,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걸 보면.-삼만 원쯤이요.-에이, 그 정도면 그냥 넘어가도 되지. 이웃끼리야 뭐, 도울 수도 있는 거고.-그래도 빌린 건 갚아야죠.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서요.-준이? 준이는 지금 서울에 없는데. 얼마 전엔 또 외국 나간다고 하더니… -외국이요?-어디라 했더라, 가물가물하네.-언, 언제쯤 돌아오실까요?-그걸 어찌 아나. 원체 떠도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혹시 조카분 전화번호는 모르시나요? 휴대폰이 있는 것 같던데요.-휴대폰? 나야 모르지. 몇 해 연락 없다가도, 서울 오면 꼭 인사하러 들르긴 한다오. 다음에 만나면, 윗집 최 여사 손녀가 다녀갔다고 꼭 전해주리다.<br>잠시 숨을 고른 할아버지가 천천히 질문을 덧붙였다.<br>-근데 아가씨 성함이…?-나서윤입니다.-나서윤… 그 이름, 참 곱소. 최순내 여사가 살아 계셨더라면, 아가씨를 참 귀여워하셨을 텐데.-고맙습니다.-내 고향도 충청도 전의요. 최순내 여사와 나는 같은 마을 사람이었지.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오. 그분 손녀이니, 내 이리 반갑지 않겠소.<br>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잔 파문을 그리며 일렁였다. 뜻밖에 거론된 외딴 지명 하나가, 아득한 풍경처럼 마음속에 번져왔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이 어떻게 이 산골까지 흘러와 긴 세월 이웃으로 지냈는지,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 인연이 어쩌다 횡계까지 이어졌는지를 묻자, 그는 한참 말없이 있다가, ‘전쟁통에 별일 다 있었지.’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br>-최 여사 손녀를 여기서 보다니… 내가 손 좀 잡아 봐도 되겠소? 너무 좋아서 그냥…<br>김 씨 할아버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그 손을 조용히 감쌌다. 그의 손은 종잇장처럼 가늘고 부드러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면서도 축축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도준과의 인연이 김 씨 할아버지와 큰할머니, 그 오래전 두 사람까지 거슬러 닿아 있다고 생각하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을 지긋이 누르는 것 같았다. <br>-내 저세상 가면, 최 여사께 꼭 전하리다. 당신 손녀가… 다녀갔다고.<br>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이별이 찾아오는 법. 그녀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작별을 마음에 새긴 채 느린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누군가의 모습처럼,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허전함이 발끝에 걸렸다.<br>이 세상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도준을 떠올렸다.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날 수 없는 걸까. 횡계 숲길에서 마지막으로 엇갈린 채 멀어져간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막다른 골목. 잊히지 않는 추억의 뒤안길에는 공허한 상실감이 어른거렸다. 기억의 어두운 심연 속에서 나뭇잎 한 장이 바람결에 또르르 굴러갔다. 이제 그에 대한 아쉬움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할 시간일지도 몰랐다.  &nbsp;  병실 문을 막 나서던 서윤은 바로 앞 복도에서 중년 여인과 마주쳤다. 보호자로 보이는 그녀는 매점에서 막 돌아온 듯, 간병 용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br>-누구세요? 아버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아, 네. 횡계에서 할아버지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아, 횡계 분이시군요.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시다니,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빨리 회복되셨으면 좋겠어요.<br>서윤은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여인은 따뜻한 눈길을 건넸다.<br>-그냥 가시면 섭섭하죠. 제가 왔으니, 잠깐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전 이 집 큰며느리예요.<br>혹시 이분이라면 도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br>-고맙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약이 있어서요… 안녕히 계세요.<br>쓸쓸한 감정의 잔향을 뒤로한 채 천천히 병원 층계를 내려오는 동안, 우울한 표정으로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까지 출발을 망설이며 내 전화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전화번호를 쓰레기통에 버렸던 그날의 실책이 몹시 원망스러웠다.&nbsp;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 어리석고 가혹했던 처사가 가슴 한복판을 저미듯 아프게 다가왔다.  &nbsp;  병원 1층 현관문 앞,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삶이라는 미로 안에서 누구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따라 빙빙 맴도는 움직임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nbsp;  링거 거치대에 의지해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환자들, 급한 걸음으로 분주하게 드나드는 방문객들, 능숙한 손끝으로 의료 장비를 다루며 이동하는 병원 직원들, 휠체어를 밀고 조심스레 지나가는 간병인들, 그리고 보조대를 짚고 작은 발걸음을 떼는 노인들.  &nbsp;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에 기적처럼 맺었던 인연조차 이토록 쉽게 엇갈려 버릴 수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도준도, 한때 스쳐 간 허무한 그림자처럼, 영영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라진 걸까. 오직 함께였기에 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행복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꿈이 되어 이제 멀어져 버렸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8/pimg_63924422880545779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50180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1. 준이요? 도준이가 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9353</link><pubDate>Mon, 07 Sep 2026 00: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9353</guid><description><![CDATA[<br>글·그림 김미진<br>강남성심병원 입구에는 주차 대기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병원 건물들 사이로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방문객들, 바삐 움직이는 주차 요원들이 뒤섞여 혼잡을 더했다.<br>서윤은 오전 근무만 마친 뒤 반차를 내고 이곳을 찾았다.&nbsp;김 씨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마음 한편이 설렜지만, 금기의 선을 넘고 있다는 자각에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며 주변의 시선까지 의식되었다. 여기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현실적인 어려움과 스스로 쌓아 올린 심리적 장벽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했다. 김 씨 할아버지를 통해 도준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어딘가 너무 순진한 환상처럼 느껴졌다.<br>도준의 고모부라면 조카의 연락처쯤은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에게 도준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부탁할 만한 뚜렷한 명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큰할머니 사후에 일부러 자청해서 별장 관리를 맡은 분이긴 했지만, 그것과 도준의 개인 정보는 별개의 사안이었다. 괜한 일로 불쑥 전화를 건다는 건 무모해 보였고, 자칫 불필요한 오해와 의심을 살 가능성도 컸다.<br>그럼에도, 김 씨 할아버지를 거치지 않고는 도준과 닿을 길이 없었다. 며칠을 망설이다 횡계 주민센터를 통해 관리인 아들의 번호를 어렵사리 얻어냈다. 도준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이, 끝내 이성적 판단을 눌러버린 것이다. 몇 차례 전화를 걸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 큰아들 김계주와 연결됐다. 다행히 그는 십여 년 전까지 윗집에 혼자 살던 큰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br>-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신 겁니까?<br>아들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서윤은 침착한 어조로, 이미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던 말을 꺼냈다.<br>-얼마 전에 횡계에 갔다가, 할아버지께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건강은 좀 어떠신지 궁금해서요. 저희 부모님께서 안부 전화를 드리라고 하셔서요. 그동안 저희 빈집 관리로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아아, 그렇군요. 이렇게 염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br>아들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서윤은 김 씨 할아버지와 직접 통화하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아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마 전 낙상 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서윤은 병원과 입원실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오늘 작은 화분 하나를 손에 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제 김 씨 할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도준 이야기를 꺼낼지가 남은 숙제였다.<br>그녀는 곧장 병원 정문과 가장 가까운 본관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3층 입원실에는 네 병상 가운데 두 곳에만 환자가 누워 있었다. 그곳은 무심한 기계의 숨결과 인간의 연약함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냉랭한 기운 속에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맴돌고,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벽에 길고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윤은 두 침대의 이름표를 살핀 뒤, 창가 쪽 노인에게 다가갔다.<br>‘김재구, 77세.’<br>김 씨 할아버지는 그녀가 기억하던 예전 모습과 너무 달랐다. 뙤약볕 아래 거칠어진 촌부의 얼굴에는 세월의 깊은 골이 새겨져 있었고, 왼손등에는 가늘고 투명한 링거 튜브가 생명줄처럼 매달려 있었다. 고된 농사일도 단번에 척척 해치우던 손은 이제 앙상하니 쪼글쪼글해졌고, 푸르스름하게 멍든 바늘자국만 가득했다. 주변 어디에도 간병인이나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서윤은 화분을 든 채,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침대 발치에 어정쩡히 서 있었다.<br>그때 고요하던 실내 공기를 휘저으며 간호사가 의료용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큰 목소리로 김 씨 할아버지 이름을 부르더니, 혈압과 혈당을 재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달싹거렸다. <br>간호사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태도로 생년월일을 불러주며, 정보가 정확한지 재차 확인했다. 할아버지는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맞아요.’ 하고 대답했다. 간호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렇지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링거 챔버를 톡톡 쳐 약물 흐름을 확인한 뒤, 혈압과 혈당 수치를 재고 병원 차트에 기록했다. 서윤을 가족으로 생각했는지, 간호사는 현재 환자 상태를 자세히 설명했다.<br>-혈압은 괜찮지만 오늘 아침부터 당수치가 좀 높으세요. 담당 선생님께 제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저녁부터는 식단도 약간 조정될 수 있을지 몰라요.-고맙습니다.<br>예기치 않게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 서윤은 보조 테이블에 화분을 내려놓고, 고개까지 숙여 간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모든 절차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간호사가 가고 나자,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서윤을 바라보았다.<br>-근데… 누구신지?<br>서윤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윗집 큰할머니의 손녀라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br>-진짜요? 정말 김순내 여사의 손녀라구요?-네, 맞아요. 어려서 할머니 댁에 여러 번 놀러 갔었어요. 그때 할아버지를 뵌 적도 있고, 감도 따 주셨고요.-맞아, 기억이 나는구먼. 어이쿠, 이렇게 훌쩍 컸구려.-뭘요. 어느새 늙어 가는걸요.-무슨 소리. 아직도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아가씨가. 허허.<br>웃음 속에 스며든 미묘한 떨림, 신기하다는 듯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엔 애틋한 기운마저 감돌았다.<br>-김순내 여사 손녀라서 그런지 어째 그쪽이 내겐 남 같지 않아요. 접때 우리 집에 비타민 선물도 가져왔다면서요? 내 조카가 들고 와서, 잘 받았소.-별거 아닌걸요. 저희 부모님께서 할아버지 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고맙다고 전해주시오.-그런데 그 조카분 말인데요.-준이요? 도준이가 왜?<br>할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7/pimg_63924344940445737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9353</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60. 다시 연락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2944</link><pubDate>Fri, 04 Sep 2026 00: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2944</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내가 왜 이런 말을 한 거야.’<br>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차라리 울어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해질까. 하지만 눈물 대신 가슴 속 허무만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는 그제야 별 뜻 없이 맞장구친 말이 서윤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고, 이번에는 큰 목소리로 오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br>-야, 이놈아. 사업한다고 그렇게 설치더니 내 퇴직금까지 절반이나 말아먹고, 이제 와서 어디에 또 숟가락을 얹겠다는 거냐?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아, 좀… 그래서 서로 돕고 살자는 얘기잖아요!<br>오빠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자, 안방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br>-아니, 이 밤중에 왜들 이래? 그리고 철재, 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나서 또 집안을 시끄럽게 만드는 거야? 응?<br>엄마는 눈을 부라리며 오빠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nbsp;  -아, 죄송해요! 근데 엄마 손은 왜 이렇게 매운 거야?<br>오빠는 과장스레 아픈 시늉을 하다가, 흠, 흠, 짧게 헛기침을 하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nbsp;  -참, 아버지는 내년에 정년 퇴임하면 정말로 횡계에 가서 사실 생각이세요?<br>2층 층계로 향하던 서윤은 ‘횡계’라는 말에 더는 발을 떼지 못했다. 공중전화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가던 자신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차마 꺼내지도 못했고, 끝내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던 말들. 그 순간의 침묵이 되살아나듯, 목이 뜨겁게 메었다.<br>-나한테 횡계는 고향 같은 곳이야.-그렇죠. 고향이나 진배없죠. 큰할머니 산소도 거기 있잖아요.<br>오빠가 공손히 두 손으로 아버지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br>-문제는 네 엄마야. 엄마는 서울 생활이 좋단다.<br>아버지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슬쩍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서윤은 한 손으로 벽을 더듬듯 짚으며, 등을 대고 천천히 앉았다.&nbsp;제이 앞에서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던 그 이름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떨궜다.<br>-당신이 가면, 나는 뭐 별 수 있나… 근데, 나이 들어서 횡계에 가서 뭘 하려고요? 여긴 병원도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고, 교회 친구들도 다 여기 있는데…<br>엄마는 겉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는 듯 말했지만, 불편한 시골 생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참에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가 횡계로 가더라도 자신은 서울에 남을 수 있다는 뜻을 에둘러 밝혀두려는 눈치였다.<br>그때 올케가 서윤에게 따뜻한 인삼차 한 잔을 가져다주고는 옆에 앉았다.<br>-집에는 사람이 살아야지요. 별장도 계속 비워두면 안 좋아요. 그냥 방치하느니, 이참에 아예 팔아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김 씨 할아버지도 안 계시는데, 지난번처럼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해요?-그동안 김 씨 할아버지께 신세를 너무 많이 진 것 같아요. 거의 공짜로 관리 다 해주셨잖아요.-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 건강은 어떠시니? 연락은 해 봤어?<br>아버지가 잔을 내려놓으며 서윤을 바라보았다.<br>-수술 받으시고 지금은 서울 큰아들 댁에 계신다는데, 제가 연락처를 알 방도가 있어야죠.<br>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br>-그 집 큰아들 전화번호를 어디 적어뒀을 텐데… 생각이 나질 않네.<br>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br>-그 동네에 비상 연락망 같은 게 있다고 들었어요. 이장님께 전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br>올케의 말에 서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br>그건 마을의 독거노인들을 위한 비상 연락망이었지만, 서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김 씨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알게 된다면, 어쩌면 그걸 통해 도준과 다시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하지만 간절한 희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꾸물거렸다.<br>‘그에게 전화를 걸자.’<br>실제로 전화를 걸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이며 스스로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와 통화가 되는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빠는 여전히 태일과의 결혼 날짜를 잡으라며 재촉했지만, 서윤의 머릿속은 온통 도준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로 들끓었다. <br>‘다시 연락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br>그 생각만으로도 열에 들뜬 듯 가슴이 떨렸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4/pimg_63924098680026275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2944</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59. 제자리만 맴도는 무언극처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0686</link><pubDate>Thu, 03 Sep 2026 03: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0686</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10분 거리였다. 하루의 끝자락에, 인적 드문 어두운 길을 지나 초등학교 앞 차도를 건넌 뒤, 옥수탕 골목길로 접어들었다.&nbsp;<br>연립주택과 단독 주택이 늘어선 골목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하나가 조는 듯 서 있었다. 어느 집 담장 아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뒤적이다가 그녀의 발소리에 놀라&nbsp;급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br>열쇠로 대문을 열고 집 마당에 들어서자, 거실의 흐린 유리창 너머로 올케가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nbsp;평소 같으면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인데, 오늘따라 집 안에는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았다.<br>서윤이 거실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술에 얼큰히 취해 있었고, 오빠는 벌겋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무언가 열변을 토해내는 중이었다.<br>오빠가 부모님 집에 다시 나타난 건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사라진 뒤,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새 얼굴은 꺼칠하니 겉늙은 듯 보였고,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큼 두 볼은 홀쭉했다.<br>-아가씨, 이제 오세요? 저녁은요?<br>올케가 두툼하게 부친 녹두전 한 접시를 밥상에 올려놓으며 짧게 눈길을 던졌다. 평온한 말투와 달리, 축 처진 어깨에는 온종일 가사 일에 시달린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br>-벌써 먹었겠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br>오빠는 손바닥으로 술잔을 굴리며, 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계하듯 탐색하는 태도에서 특유의 허세가 느껴졌다.&nbsp;실내에는 기름내와 꽁치구이 냄새가 가득했지만, 그런 온기만으로는 가족 사이의 냉랭함을 덜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br>-어머니는 안방에 계세요. 오늘도 하루 종일 선호랑 씨름하시느라 많이 고단하신가 봐요.<br>올케가 담담하게 말했다. 선호는 두 살배기, 오빠의 아들이었다.<br>-왜 이렇게 늦었어? 내일 출근할 사람이 이렇게 늦게 다니면 어떻게 해. 데이트하다가 온 거야?<br>오빠는 무심한 척했으나, 속내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의 힐끔거리는 눈빛에는 신우건설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담겨 있었다. 혼맥이라는 가느다란 연줄에 매달려 그 집안에서 흘러나올 작은 콩고물이라도 바라는 절박한 심정. 그렇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내 핏줄 앞에서 차마 불편한 내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부모님에게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녀에게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오빠가 아닌가.<br>-아니. 오늘은 대학 동창들 좀 만났어. 오빠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br>서윤은 애써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br>-나야 바쁘게 잘 지냈지. 지방에서 사업하는 친구 일도 좀 도와주고.<br>오빠의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이 번졌고, 올케는 그런 오빠를 매섭게 노려보았다.<br>-당신 없는 동안 아가씨가 대신 횡계 다녀왔어요. 그런 일은 남자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쳇! 집안일에 남자 여자 일이 따로 있나?<br>오빠는 더는 말대꾸를 이어가지 않은 채 술잔을 기울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굳어진 입매에는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br>‘횡계’<br>그 지명이 다시금 서윤의 머릿속에서 둥근 파문을 일으키더니, 곧이어 몇 개의 장면이 작은 스틸사진처럼 연달아 떠올랐다. 랜드로버가 멈춰 선 숲길. 김 씨 할아버지네 집 마당.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 별장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초록색 스프링 노트와 코끼리 머그잔.&nbsp;그 모든 순간의 끝에서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br>-접착제가 잘 굳었나 보네요. 당분간 자전거 타는 데 문제없겠어요.<br>서윤은 가늘게 숨을 삼킨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br>거실 한쪽에 켜진 TV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이 낮춰져 있고, 재방송 중인 축구 경기가 무심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중의 함성도 해설자의 목소리도 사라진 화면은 거실의 침묵과 섞여 한층 쓸쓸하게 느껴졌다. 텔레비전 속 무음의 스포츠 중계는 마치 수많은 사람이 무대 위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제자리만 맴도는 무언극을 떠올리게 했다. 서윤은 문득 그 장면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목격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br>-강태일 실장이랑은 요즘 어때? 잘 지내는 거지?<br>그녀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다 오빠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br>-뭐, 그냥…-그냥은 아니지. 너희 약혼한 지도 꽤 됐잖아.-왜 그래 또?-결혼식 날짜는 언제쯤 잡을 건데? 사람 마음은 갈대 같은 거야. 특히 남자는 더 그래. 태일이한테 눈독 들이는 여자들도 꽤 많을걸.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여기저기서 쿡쿡 찔러댈 거야. 그러니 너 조심해.<br>서윤은 오빠를 흘겨보았다. 만날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속셈이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었다. <br>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층 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br>-막말로, 빨리 시집가서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면 좋잖아. 나도 잘사는 동생 덕 좀 보고 살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뭐… 서로 돕고 사는 게 좋긴 하지.<br>아버지까지 거들고 나서자, 서윤은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br>-식구들 도와주려 나더러 빨리 결혼하라는 거야? 내가 무슨 심청이야?<br>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서윤도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귓가에 울린 그 낯선 어조는 단순한 반박이 아니라, 오래 눌러 왔던 원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처럼 들렸다.&nbsp;실내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서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3/pimg_63924011942690278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90686</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58.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8190</link><pubDate>Wed, 02 Sep 2026 01: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8190</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전철역에서 나오자,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 남자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대방과의 대화가 즐거운 듯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마법의 환영처럼 공중전화 부스 속 남자의 모습 위로 도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br>–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간 더 고모부 집에서 지낼 건데, 그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고모부를 대신해 제가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br>도준이 초록색 노트 위에 적어 준 10자리 숫자는 결국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날의 대화와 그 목소리는 여전히 서윤의 마음 깊이 남아 있었다.<br>-우리 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 <br> 다시 횡계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당장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싸워왔는지 모른다. 거리 위를 지나는 시외버스만 보아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을 붙들어 둔 건 현실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이었다.&nbsp;<br>자신에게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처신할 수 없다는 자각.<br>인간 사회는 관계와 책무로 서로를 얽매어 왔다. 서로를 구속하는 일이 구원이라 믿도록 만들고, 감정의 충동보다 일상의 성실함이 우선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미 잘 디자인된 미래의 청사진을 감히 구겨버릴 만큼 어리석거나 용감하지 않았다. 염치를 모르거나, 배은망덕한 여자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배운 대로 늘 성심성의껏 살아왔다.<br>그녀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무언가 중대한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선택 또한 예정된 궤도 안에 갇힌 건 아닐까.<br>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집어 들든, 어떤 운명을 받아들이든, 정해진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 앞에서 그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다를 미로의 끝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과는 같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스쳐갔다. 여기 이대로 멈춰 서는 것, 그것만이 상처를 남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br>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슴에 단단한 빗장을 질렀다. 그러나 때론 감정의 사슬이 살짝 느슨해지는 것만 같았다.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가슴속에 눌러 두었던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외면해 왔던 그리움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맹세가 한순간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br>정수리를 뜨겁게 내리쬐는 유혹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횡계로 가자! 그와 낚시도 하고, 쾌락의 꿀을 빠는 벌처럼 달콤한 추억들을 맘껏 쌓아 올리자. 인생은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일회성의 무심한 꿈과 같고, 지나간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찬란했으나 허망한 순간들에 불과하다. 미래의 내 삶을 함부로 깨뜨려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이고, 내 선택을 납작하게 짓눌러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뿐이 아닌가. <br>젊은 남자는 전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불이 꺼진 텅 빈 전화부스는 어두운 거리에 홀로 떠 있는 난파선처럼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주머니 속 동전 두 개를 꺼내 조심스럽게 투입구에 넣었다. <br>신호음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기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메신저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었다. 횡계 별장에서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번호는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졌지만, 그날의 다정했던 온기를 되살리듯 0부터 9까지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갔다.<br>첫 번째 벨이 울리고, 곧 차갑고 무심한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br>-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br>신호음이 반복될수록, 그녀는 얼어붙은 겨울 새벽의 그림자처럼 고립된 자신을 느꼈다. 부스 안을 맴돌던 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녀는 고요한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2/pimg_63923908364287786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819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57. 열린 틈 사이로 얼핏 스치던 또 다른 세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5595</link><pubDate>Tue, 01 Sep 2026 02: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5595</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홍대 밤거리는 빛의 향연을 쏟아내고 있었다. 수많은 상점과 포장마차, 길거리 가판대 사이로 밤의 풍경이 소란스러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교차로를 지난 후 피카소거리 아래쪽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오밀조밀한 가게와 식당들이 차례로 나타났다.<br>가스등이 켜진 핫도그 가게와 액세서리 숍, 모자 전문점을 지나 미술용품을 파는 호미 화방 근처에 다다르자, 컨트리 스타일로 꾸며진 퓨전 식당이 눈길을 끌었다. 가게 앞에서 ‘오늘의 특별 메뉴’를 칠판에 적고 있던 여자 종업원이 환한 미소로 반기며 칸막이가 있는 테이블로 그녀들을 안내했다.<br>-아, 배고파 죽겠네!<br>제이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은 뒤, 해물 샤브샤브 2인분과 생맥주 2.5리터를 주문했다. 맥주가 너무 많지 않나 싶었지만 서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교정쇄와 씨름한 제이에게, 이 정도 도파민 충전은 필요했다.<br>잠시 후, 종업원이 무쇠 냄비를 들고 와 테이블 중앙에 놓인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맑은 육수가 보글보글 끓기를 기다리며, 제이는 능숙하게 맥주잔 두 개를 가득 채웠다.<br>-이걸로 나 좀 쉬게 해줘. 아니면 네 책임이니까.<br>말끝에 얹힌 장난기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온기를 퍼뜨렸다.<br>-덕분에!-건배!<br>두 개의 맥주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하얀 거품이 잔 위로 넘실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br>종업원이 쌈 채소와 고기를 담은 음식 카트를 밀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빈 접시와 여러 양념 소스를 놓아주었다. 그녀들은 뜨거운 육수에 살짝 담갔다 건져 낸 느타리버섯부터 먹기 시작했다.<br>-요즘 일이 고됐던 모양이야. 얼굴색이 안 좋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아니, 괜찮아. 한강에서 자전거 좀 타느라 얼굴이 그을렸어.-태일 씨가 잔소리 안 해? 그 남자 스타일은 너 얼굴 타는 거 안 좋아할 텐데.-내 얼굴이야. 내 얼굴 내가 태우는데, 뭐가 어때서?-어머, 둘이 싸웠나? 오늘 좀 예민한걸.-내가? 예민해? 왜?<br>그 순간, 한 남자의 목소리가 기억의 배경음처럼 귓가를 스쳤다.<br>-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 반나절이면 충분해요.<br>흡.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전혀 다른 빛깔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일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가슴이 무거웠다. 숨소리조차 끔찍하게 느껴지는 그와는 달리, 도준이 잠시 머물다 간 마음의 빈터에는 미련만이 감돌았다.<br>도준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서윤은 그와 함께한 순간들이 꿈처럼 흐릿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와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가슴 한쪽이 저릿저릿해졌다.<br>제이가 자기 맥주잔으로 서윤의 잔을 툭 건드렸다.<br>-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응? 아냐.<br>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br>-그래도 부럽다. 누구는 약혼자도 있고, 곧 결혼해서 천사 같은 아이도 낳을 거잖아.-나는 울 엄마한테 천사였을까?-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집에 가서 물어봐.-부러우면 너도 결혼해. 너는 왜 이렇게 혼자인데?-나 남자들한테 관심 없는 거 알잖아. 나는 너를 사랑하잖니.<br>제이의 입술에 어른거린 씁쓸한 미소에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사연이 응어리져 있었다. 제이가 처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내비친 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날 밤, 서윤은 제이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새벽녘, 낯선 손길이 숨을 죽이며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br>처음에는 그저 조금 기묘한 꿈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살갗을 스치는 감촉이 너무 또렷해, 얇은 막 너머의 깊은 곳까지 전율처럼 번져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입술이 그녀의 입에 닿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손길의 주인이 제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자신이 깨어 있다는 사실조차 내색할 수 없었다.<br>사지가 묶인 듯, 호흡마저 가늘어졌다. 그것은 사춘기 소녀의 의식 너머를 떠돌던 그 무엇. 두려움도 연민도 아닌, 아직 언어도 표정도 갖추지 못한 은밀한 떨림이었다. <br>세월이 흐른 지금, 서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보다 섬세하게 이해했다. 동성 간의 사랑과 우정이 얽혀 빚어낸,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그 밤의 소극적인 사랑은 이제껏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못한 채, 둘만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br>서윤은 제이의 애틋한 심정을 오랫동안 가까이 느껴왔지만, 끝까지 모른 척했다. 그 마음을 우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받아들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제이 곁에는 가까운 인척 하나조차 없었다. 서윤은 늘 생각했다. 자신이 없으면 제이는 무중력 속에서 표류하는 우주선처럼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서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고, 제이 또한 한결같이 그녀 곁을 지켜왔다.<br>-서윤아, 아까 보여준 그 모네 미술 동화책 말인데, 너도 그 시리즈 작업에 함께해 볼래?-내가 어떻게? 아냐, 난 자격 미달이야.-자격 미달이라니? 너도 이미 유럽 여행기를 낸 작가잖아. 《파리에서 베네치아까지, 고양이처럼》-제목은 느낌 좋았는데…-백 권쯤 팔렸나? 아니지, 반품된 게 더 많았어. 아직도 창고에 쌓여 있잖아.-미안.-그러니까 이번엔 나 좀 도와줘.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삽화도 직접 그려보는 거야. 유럽 여행기에 실었던 그림처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글과 그림을 이어주면 돼. 너라면 이 시리즈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거야.-말이야 쉽지. 내가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야?-그럼 믿지. 너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도 많이 탔잖아. 그때도 그림 잘 그렸고. 기억나? 미술 대회에서 네가 내 그림 대신 그려준 거.-그럼, 기억나지.-근데 나만 상 받고, 넌 못 받아서… 그땐 정말 미안했어.<br>송정초등학교 3학년 시절, 서윤은 교내 사생대회에서 제이의 그림을 대신 그려준 적이 있었다. 제이는 그 그림으로 우수상을 받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린 서윤은 아무런 상장도 받지 못했다. 그때 서윤은 커다란 나무문과 그 사이로 보이는 또 다른 세계를 그렸다. 양쪽 문은 도화지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고, 중앙에 화면을 가르듯 약간 벌어진 문틈으로 현실 너머의 공간이 아득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 넘기 어려운 기교의 벽 앞에서 그 그림은 손을 댈수록 무너져 내렸고, 끝내 참담한 흔적만 남았다.<br>그 실패가 단지 표현력 부족 때문이었다면, 서양화와 미술사까지 전공한 지금에는 같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비로소 그 그림을 완성해 낼 수 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혹여 나는 아직도 내 능력을 과신하며, 결코 잡을 수 없는 꿈을 좇고 있는 건 아닐까. 현실 저 너머, 실체의 열린 틈 사이로 얼핏 스치던 또 다른 세계가 결국 나조차 가질 수 없는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천천히 파고들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1/pimg_63923827593581742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5595</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56. 갈 곳 없이 떠도는 감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1991</link><pubDate>Mon, 31 Aug 2026 00: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1991</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제이가 운영하는 출판사 해오름은 홍대 피카소거리 근처의 길게 뻗은 골목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주택을 개조한 이 건물은 겉보기엔 소박했지만, 기획 방향에 따라 작은 방과 거실이 저마다 다른 용도로 쓰이곤 했다.<br>벽면을 따라 늘어선 책꽂이에는 신간 도서와 편집 노트, 기획 자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커피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공간 안에 한 겹 따스한 온기처럼 부유했다.&nbsp;<br>편집부는 30대 초반의 젊은 편집자들이 주를 이뤘다. 그들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낮은 목소리로 편집 기획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책에 대한 열정과 미지의 문장에 대한 설렘이 어려 있었다.<br>해오름이 펴내는 책들은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일상에 지혜를 더하는 실용서까지 폭넓게 아울렀다. 제이가 불황 속에서도 이 작은 출판사를 여기까지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초창기부터 ‘선택과 집중’을 유일한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시적인 유행을 좇기보다 한 권의 책이 지닌 시간의 무게와 가능성을 두고 늘 고민해 왔다. 벽에 걸린 오래된 액자 속 글귀 한 줄이 출판사의 신념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br>‘책으로 세상을 바꾸다.’<br>그날 저녁, 서윤은 여덟 시가 다 되어 홍대 앞에 도착했다. 피카소거리 주변은 젊은 청춘과 다양한 예술가들의 아지트답게 떠들썩한 인파로 축제 같은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br>색색의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거리마다 젊은 웃음과 음악이 넘실거렸다. 노점의 풍경과 음식 냄새가 뒤섞여 온통 생생한 활기를 뿜어냈다. 길 한가운데 가만히 멈춰 선 서윤은,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여러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걸 느꼈다. 낯선 도시에 홀로 떨어진 듯,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br>사람과 차량으로 들끓는 도로를 벗어나 고요한 주택가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고, 밤의 한기가 어깨를 스쳐 갔다.<br>인적 드문 골목길에는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묵묵히 늘어서 있었고, 어둑한 적막 속에 그녀의 구두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마침내 서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낡은 간판이 희미하게 빛나는 해오름 출판사 앞이었다. 건물 입구의 작은 창으로 불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br>-오늘도 야근하고 있는 거야? 내 이럴 줄 알았지.<br>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출입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조용한 숨결처럼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사무실, 제이는 작은 스탠드 조명 아래 홀로 앉아 책상 위 교정지를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얼굴에는 짙은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은 단정했고&nbsp;자세도 꼿꼿하니 흐트러짐이 없었다.<br>-서윤아? 이렇게 늦게 웬일이야?<br>제이가 고개를 들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에는 신간 작업에 대한 깊은 몰입이 묻어났다. 손에 들린 교정지에는 여기저기 빨간 글씨로 표시된 대목들이 빼곡했고, 짚어낸 단어와 문장마다 편집자의 지혜와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br>-근처에 왔다가 혹시나 해서 들러봤어. 그런데 왜 또 너 혼자야?-직원들에게는 퇴근 시간이 있지만, 사장은 퇴근 시간이 따로 없지.<br>제이는 웃음기를 섞어 말했지만, 그 속에 스스로를 다독이는 묘한 고집이 스며 있었다.<br>-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괜찮아. 그런데 잠깐… 왜 이렇게 지쳐 보여?<br>그녀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더니, 서윤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br>-일은 무슨…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br>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지만, 사실은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퇴근길을 배회하다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물며 애써 말을 삼켰다. 괜스레 제이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갈 곳 없이 떠도는 이 감정을, 그녀 자신조차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br>-마침 잘 왔어. 저녁 아직 안 먹었지?-응, 배고파.-근처에 새로 생긴 집이 있어. 밥도 먹고, 기분도 풀 겸 같이 가자.<br>제이는 퇴근 준비를 하다 말고, 옆 책상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br>-참, 이것 좀 봐. 이번에 막 나온 책이야.<br>그녀가 건넨 책은 모네의 수련 그림이 표지를 장식한 어린이용 미술 동화책이었다. 페이지마다 모네 특유의 자유로운 붓질과 따스한 색감이 살아 있었고, 글자 크기부터 그림 구성까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세심하게 꾸며져 있었다.<br>-모네의 삶과 작품을 동화 형식으로 풀어낸 거야.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지.<br>제이는 책장을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책을 향한 긍지와 깊은 애정이 배어 있었다.<br>-이 책을 시작으로 화가들에 관한 시리즈를 만들어볼 생각이야.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미술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br>서윤은 표지를 넘겨 발행일과 저자 이름을 확인하고는, 페이지를 몇 장 천천히 훑어보았다. 내용도 술술 잘 읽혔고, 이야기 사이사이에 배치된 삽화도 산뜻하게 어울렸다. 무엇보다 모네의 작품 사진까지 함께 편집되어 있어, 글과 그림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한층 풍요롭게 다가왔다.<br>-좋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겠어.<br>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끄떡이며 짧게 자른 머리 위에 검은 비니를 깊숙이 눌러썼다. 어깨에 둘러멘 가죽가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무거워 보였다.<br>-뭐야? 또 집에까지 일거리 들고 가는 거야?-우리 같은 영세 출판업자는 심신을 몽땅 바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그게 바로 내 비밀 영업 전략이야.<br>-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걱정 마. 난 아직 뽀빠이처럼 튼튼하거든.-그래서 결국 일중독자가 되셨다?<br>서윤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br>-뭐든 중독될 거라도 있어야지. 아니면 내 인생, 너무 가엾고 심심하잖아.<br>제이의 농담 섞인 말 한마디가, 오늘따라 서윤의 가슴 한쪽을 저릿하게 파고들었다.<br>서윤이 제이를 처음 만난 건 송정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제이는 늦둥이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나이 많은 어머니와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오빠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양친에 이어 오빠마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았다. 제이에게 서윤은 단순한 친구로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랜 시간 서로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두 사람은 어느덧 친자매 이상의 유대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다.<br>-그래도 아프면 안 돼. 네가 아프면, 내가 정말 슬플 거야.<br>서윤은 그날 밤 유독 작고 여려 보이는 제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br>-알았어, 알았어. 근데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숨 막히니까 좀 떨어져, 응?<br>제이가 눈을 흘기며 잽싸게 서윤을 밀쳐냈다. 그녀들의 티격태격하는 말소리와 장난스러운 몸짓이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실내의 불을 모두 끄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나란히 걸어 나갔다. 봄밤의 정적 속에서 그녀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31/pimg_639237326286339122.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81991</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55.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76370</link><pubDate>Fri, 28 Aug 2026 00: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76370</guid><description><![CDATA[글·그림 김미진<br>갤러리 안에는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손문기 선생 회고전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이제 남은 과제는 모든 작품을 다시 포장해 각 소장처로 반송하는 일이었다. 작품의 소유자는 개인 컬렉터부터 화랑, 미술관까지 다양했다. 일일이 연락하여 반환 절차와 배송 일정을 조율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br>서윤이 그동안 밀린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던 신입 직원이 도움을 요청해 왔다. 다가올 초대전 기획안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서윤은 잠시 그녀가 내민 기획안을 바라보다가,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신입은 금세 요지를 파악하는 것 같았다. 서윤은 선배로서 마음이 든든했다.<br>창고에서 동료와 함께 작품 포장 작업에 매달리던 서윤은, 뒤늦게 출근한 최희숙 관장으로부터 전화 호출을 받았다. 잠깐 화장실에 들러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서둘러 3층 관장실로 향했다. 최 관장은 책상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두툼한 서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주위에는 평소보다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갤러리 운영이나 전시 기획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br>관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서윤을 쳐다보았다.<br>-어서 와. 그쪽으로 좀 앉지. <br>그러면서 책상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br>-괜찮습니다. 얼른 내려가 봐야 해서요. -그래?-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내년 전시 일정 때문이지. 상반기에는 반드시 명 선생 초대전을 성사시켜야 해.-아, 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br>서윤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br>최근 들어 최 관장은 명명희 작가 초대전에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여왔다. 그렇게까지 명명희라는 이름 석 자에 매달리는 이유는, 리온 갤러리의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고 악화된 재정 상황을 타개할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br>리온 갤러리는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90년대 초반 화랑가에 닥친 침체는 리온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88올림픽 무렵 도산대로에 문을 연 2호점은 한때 화랑가의 활황을 등에 업고 빠르게 성장했으나, 결국 불황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그 여파는 인사동 1호점 운영에까지 악영향을 미쳤고, 머지않아 새 주인을 맞게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br>미술품 경매 시장까지 확산되는 변화 속에서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불안이 서윤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녀가 대학 강단의 경력을 쌓으려는 이유도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br>관장은 명명희 선생 초대전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서윤은 초대전 일정을 당장 확정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명 선생이 병환 중이어서, 현재로선 전시 기획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양녀 김순자 역시 이에 대해서 아직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명 선생이 한동안 소설 『설국』의 주요 무대인 니가타현 온천지에서 요양할 예정이라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이다. 명 선생의 일본 체류가 단순한 건강상의 이유인지, 다른 사정이 개입된 것인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br>-그럼, 언제쯤 정확한 일정을 잡을 수 있다는 거야?<br>최 관장은 한층 강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br>-글쎄요, 지금은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일단 전시 스케줄부터 정해야 해. 우선순위는 그게 먼저야. 그때 일주일이나 휴가도 줬잖아. 그동안 뭘 했다는 거지?-초대전 방향을 다시 정리해 봤습니다. 작가님 상태가 변수라서, 몇 가지 경우를 나눠가며 검토하고 있었습니다.-검토만 하다 시간 다 가는 거 아냐? 일정은 숫자로 나와야지.-작가님 병세가 어떤지 잘 몰라서… 순자 씨 쪽에서도 아직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고 있고요.-답답하군. 직접 김순자부터 만나 확인하는 게 좋겠어. 이번에 새로 발표할 작품이 몇 점인지도 알아봐야 하고.-네. 작품 수랑 기존 작품 중 출품 가능한 것까지 정리해보겠습니다.<br>서윤이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꾸벅 숙이자, 관장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덧붙였다.<br>-뭐든 변동 상황이 생기면 바로바로 보고해. 알았지?-네, 그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br>관람객 하나 없는 늦은 오후였다. 관장실을 나와 3층 갤러리 홀을 가로지르던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텅 빈 마룻바닥 위에서 적막하게 울렸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횡계 별장의 목요일 오후가 눈앞에 되살아났다. 도준이 출입문을 나서려다 불현듯 돌아섰다.<br>-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br>그의 눈빛,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이미 지나왔다는 자각에 현기증이 이는 듯 층계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28/pimg_639234731639389988.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76370</link></image></item><item><author>김미진</author><category>《달의 몰락》글·그림 김미진</category><title>[달의 몰락]54. 검은 쓰레기 봉지 속 오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74264</link><pubDate>Thu, 27 Aug 2026 0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74264</guid><description><![CDATA[<br>글·그림 김미진<br>샤넬 백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호의를 가장한 훈육이었고, 자존을 길들이기 위해 계산된 값비싼 미끼였다.&nbsp;수경의 눈빛은 서윤의 여리고 예민한 내면을 단번에 꿰뚫을 듯이 차가웠다.<br>-그래, 앞으로는 이런 데 익숙해져야 해. 알지? 우리 식구들과 함께하는 삶은 이런 게 기본이니까.<br>그 말은 서윤의 가슴 한가운데 미세한 균열을 남겼다. 입술을 한 번 달싹였지만, 민망한 낯빛으로 끝내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그 비싼 샤넬 백을 받자니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거절하자니 자존심만 내세운 허세로 비칠까 두려웠다.<br>수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블랙 플래티넘 신용카드를 꺼내 매장 직원에게 건넸다.  <br>-이걸로 한꺼번에 계산해 주세요. <br>이 세상에는 할부 인생과 일시불 인생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직원은 눈이 잠시 커졌다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았다. 태일은 지난주부터 해외 출장 중이었다. 자기 약혼녀가 장래 시누이 앞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가 지금 곁에 있다고 해도, 이 난감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br>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린 피해 의식마저 낱낱이 드러낼 것 같은 갤러리아백화점의 거울 속 세상. 서윤은 자신이 그 안에서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현란하게 반짝이는 조명들은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그녀의 존재를 비추었다. 감추고 싶었던 감정의 응어리들까지, 표본실 안의 개구리처럼 낯설고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nbsp;  수경과 헤어진 뒤, 서윤은 서둘러 인사동으로 돌아왔다. 작은 종소리와 함께 리온 갤러리의 출입문이 열렸다. 서윤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전시장 실내에는 뉴에이지 풍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관람객은 많지 않았으나, 허공을 가르는 낮은 목소리와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가 늦은 오후의 고요를 가만히 흔들었다.<br>그녀의 손에는 뭔가 묵직한 것이 든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탓에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1층 카운터에는 보조 큐레이터 경숙 씨뿐이었다. 경숙 씨는 서윤이 들고 있는 봉지를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br>-그거 뭐예요? 혹시 쇼핑하러 갔다 온 거예요?-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br>서윤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태일의 누이가 선물이라며 건넨 샤넬 백은 종이가방마저 지나치게 크고 화려했다. 한낮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그 흰색 로고를 자꾸 힐끔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br>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 겉포장을 벗기고 본품만 챙겨 올까도 잠시 망설였지만, 혹시라도 돌려줘야 할 일이 생길까 봐 끝내 손을 대지 못했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결정적인 치부라도 되는 양, 편의점에서 산 검은 쓰레기 봉지에 넣어 여기까지 들고 왔다. 그 샤넬 클래식은 태일 누이의 말들을 끝까지 견뎌낸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버릴 수도 없고, 손에 들고 있자니 더욱 꺼림칙했다.<br>-뭔데요? 어디 좀 보여줘요.-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제 코는 못 속여요. 냄새가 난다니까.<br>경숙 씨는 자기도 한번 보자며 계속 졸라댔다. 서윤이 끝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그녀는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br>-요즘 세일하는 데 많던데… 나도 선배처럼 몰래 쇼핑이나 하러 갈까나?-쇼핑은 주말에 하면 되지. 그럼, 수고해.<br>서윤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2층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네 명의 연구원이 함께 쓰는 공간은 오늘따라 유난히 어수선했다. 도둑질한 장물이라도 감추듯 사물함에 샤넬 백을 밀어 넣고 돌아선 순간,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며 도준의 얼굴이 아스라이 떠올랐다.<br>한 달이 지났는데도 횡계 숲길에 멈춰 서 있던 랜드로버와 운전대를 움켜쥔 그의 얼굴은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nbsp;도준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죄책감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그를 외딴 숲에 홀로 남겨두고 온 기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br>우연인 듯 마주친 인연은 고작 나흘 만에 찰나의 불꽃이 되어 사그라졌다.&nbsp;미처 서로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이별이 먼저 찾아왔다.&nbsp;그날, 도준이 태일보다 먼저 별장 앞에 도착했다면 어땠을까.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도준의 랜드로버에 올라타고, 태일이 모는 BMW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nbsp;아직 가보지 못한 길. 인생의 또 다른 갈래가 어쩌면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br>백일몽 같은 상상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동료 직원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직원은 장난스레, 아무도 그녀가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관장은 아직 갤러리에 나오지 않았고, 최 실장은 미팅 때문에 출타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 일로 불편한 말이 오갈 거라는 예감이, 그녀의 마음에 가벼운 그늘을 드리웠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27/pimg_63923408619263649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31589167/1747426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