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집단심리치료
어빈 얄롬 지음, 이혜성.최윤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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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를 (너무 어려워서 끙끙대며) 열심히 읽다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좋은 책이다. 책 내용이야 당연히 훌륭하고, 글은 지적이면서 멋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대학 교재 전문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서답게, 이 책도 전공자(박사 and/or 교수)가 번역을 맡았는데, 그 번역 솜씨가 정말 형편없다.

 

첫 몇 페이지를 읽다가 슬슬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어 번역문을 읽으면서 이상하다 싶으면 오역일 가능성이 80퍼센트 이상이다. 그래서 원문을 찾아봤다.

 

(p.6) 나는 자네와 나 사이의 이전 관계가 지금의 우리 관계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아네. “Look, Bob,” replied Julius, “I know our previous relationship makes this hard for you, but please don't ask me to do your work.” --> 과거의 우리 관계 때문에 자네가 나를 환자로 대하는 걸 힘들어하는 것은 나도 알겠네만

 

(p.7) 그래서 첫 번째 단계는 조직검사를 하고 병리학자들에게서 표본을 얻는 일일세. So, first step is biopsy and getting a specimen to the pathologist. --> 그러니 우선 생검으로 떼어낸 조직을 병리학자에게 넘기세.

 

(p.7) 이제 곧 일반 외과의사를 불러서 그 장애부위를 검사하도록 하겠네. Soon as we finish I'll call a general surgeon to excise the lesion. --> 상담을 마치는 대로, 외과의를 불러 환부를 떼어내도록 하겠네.

 

(pp.7-8) 나는 이런 경우를 수천 번이나 치료했지. Trust my judgment on this; I've been involved with hundreds of these cases. Okay? --> 수천 번이 아니라 수백 번.

 

(pp.8) 얼떨떨한 기분으로 살았다. For the next week Julius lived in a daze. --> daze의 사전적 의미 2번에 멍하게(얼떨떨하게) 하다가 있지만, 숙어로 사용되는 in a daze는 멍하니.

 

(p.8) 거울을 보면... (중략)... 서로 응시하고 있다. --> 이 문단은 번역서에선 한 문단으로 묶었지만 원서에는 문단 네 개로 나뉘어 있다.

 

(p.8) 입술은 지금 이 절망적인 순간에도 가장자리에 따뜻한 미소를 품고 있다. He looked at his lips. Full, friendly lips. Lips that, even now in his time of despair, were on the edge of a warm grin. --> 따뜻한 미소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미소를 짓기 직전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입술.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문제가 꽤 심각한 편이다. 그러나 결정타는 다음에 온다.

 

(pp.11-12) 그러나 지금, 그 명상하던 여인을 생각하면서 그는 부드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 여인과 자신을 포함한 인간 전체에 대해 연민의 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변덕스럽고 뒤틀린 삶을 살아야 하는 일시적인 존재다. 그 고통을 감내할 심리적인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자기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엾은 희생물들인 것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잔인한 생명의 유한성을 부인하도록 수년, 수세기, 수천 년을 통해서 훈련되어 왔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누가 감히 추구했는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도록 신이 주신 지침서나 종교적인 의식이나 기념식에 대해 인간은 완벽하게 연구해 왔는가?

 

... 엄청난 오역이다.

 

But, now, as he thought about that meditating young woman, he experienced softer feelings--a flood of compassion for her and for all his fellow humans who are victims of that freakish twist of evolution that grants self-awareness but not the requisite psychological equipment to deal with the pain of transient existence. And so throughout the years, the centuries, the millennia, we have relentlessly constructed makeshift denials of finiteness. Would we, would any of us, ever be done with our search for a higher power with whom we can merge and exist forever, for God-given instruction manuals, for some sign of a larger established design, for ritual and ceremony?

 

일단 for his fellow humans가 어떤 존재인지 이어지는 who are 절에서 설명한다. 진화의 얄궂은 비꼬인 전개의 희생자가 되어, 자기인식을 하게 되었으되 필멸의 존재라는 고통을 감당하기에 필수적인 심리적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우리 인간이여!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아니 수백 년이나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은 유한성을 거부하고자 다양한 임시방편을 (일종의 꼼수들을) 쉼없이 만들어냈다. (여기부터가 정말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우리 중 그 누구라도 합일을 이루어 영원히 존재하고자 더 상위의 힘(존재)을 찾아 헤매는 짓을 그만 둔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신이 주신 계명을 찾아 헤매는 짓을 그친 적이 있던가? 더 장대한 신의 설계도의 흔적은 찾아 끝없이 헤매고 다니지 않았던가? 온갖 종류의 의식과 예배는 또 어떻고?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이쯤에서야 나는 결심했다. , 번역서는 안 되겠구나. 시간이 걸려도 원서로 읽어야겠다. 어차피 쇼펜하우어의 저작도 영어판본과 국내 번역본을 나란히 놓고 낑낑대면서 읽던 차였다. 뭐 그보다는 쉽겠지. Yalom의 이 소설을 읽을 때는 가끔 모르는 단어를 찾는 정도의 어려움일테니.

 

그나저나 원문을 읽으면서 탄복했다. 대단한 글솜씨다!

 

그런데 번역문을 보라. 싸구려다. 천박하다. 내용만 오역인 것이 아니라 옮긴 한국어 수준을 보라. 부끄럽다.

 

공부를 잘해서 석박사도 하고, 유학도 가고, 교수도 된다. 나도 박사이고, 그것도 미국 박사이고, 교수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들이 꼭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대충 알아는 먹는데 (공부에 큰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게 전부인 경우가 많다. 한국어??? 공부만 하느라 교양 수준이 얕은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 구사하는 한국어는 그 수준에 맞게 유치하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솜씨는 더욱 엉망이다. 아무 학술논문이나 찾아서 읽어보라. 제대로 한국어를 한국어답게 쓰는 연구자가 얼마나 드문지 금세 알 수 있다. 그러니 책을 번역한다는 작업에서는 이런 문제가 왕창 터져 나오기 마련. 공부에 적절한 수준의 (매우 스탠다드하고 고리타분한 영어만 읽으면 되니까) 그저그런 독해능력에 형편없는 한국어 수준과 글솜씨가 결합을 하니, 그나마 일반인보다 나은 전문지식에서의 능력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 소설의 번역은 정말 눈뜨고 봐주기 어려운 꼴이 난다. 

 

우리나라 심리학과 학생들이 이 책을 부교재로 많이들 사겠지? 내가 산 이 번역본에는 20061쇄 발행 후 2016년까지 5쇄를 발행했다고 적혀 있다. 이 정도면 교재 출판시장에서 대박 수준이다.

 

우리나라 심리학과 전공 학부생들이 불쌍하다.

 

여러분도 그냥 Yalom의 책을 원서로 읽기 바란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그게 낫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라도 원문을 음미하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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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 인간의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에 관한 모든 것
로버트 M. 새폴스키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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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폴스키의 책은 2000년대 초에 처음 접했다. A Primate's Memoir 였다. 웃기면서도 흥미진진했다. 이 학자(작가)에게 반했다. 그 후 20여년이나 흘렀다. Behave가 2017년에 나왔다. 하드커버를 사고 싶었으나 늑장을 부리다 못샀다. 펭귄 트레이드페이퍼백을 샀다. 뿌듯했다. 몇 쪽 읽다 말았다. 


몇 달이 흘렀다. 우연히 Amazon에 하드커버가 아직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또 샀다. 단권 주문에 붙는 배송료가 비싸게 느껴졌다. 다른 책도 왕창 주문했다. 또 몇 쪽 읽다 말았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인가 킨들판이 2.91달러로 나와 있었다. 찾아보니 2020년 5월 6일이란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킨들에 넣고 몇 쪽 읽다 말았다. 


어제 이 책 번역본이 나온 걸 알게 되었다. 번역자가 김명남씨다. 딱 하루 망설이다 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나는 양장본을 사지 않았다. eBook으로 샀다. 조금 덜 창피하다. 


이제 나는 새폴스키의 Behave를 영문판으로 하드커버, 트레이드페이퍼백, 킨들 eBook, 번역본으로 알라딘 eBook을 소장한 멍청이가 되었다. 전혀 뿌듯하지 않다. 책 중독자 경제학 박사가 살짝 덜 합리적인 소비를 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이제 딱 하나만 이루어지면 된다. 김명남씨가 새폴스키의 최신작 Determined를 번역해서 내주면 된다. (김명남씨가 The Song of the Cell: An Exploration of Medicine and the New Human도 번역해 주면 좋겠다.) Determined의 원서를 사지 않고 버틴 보람이 있다. 그 사이 나는 좀 더 합리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행복하다. 이 책이 번역되어 나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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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할로 베리티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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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괜찮네요. 포장은 예쁘지만 보관하기는 좀 더 까다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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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 강의 노트 3/e - 인문학과 실생활에서 배우는 행동경제학, 2023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도서
에릭 앵그너 지음, 이기홍 옮김 / 에이콘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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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 책은 제법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일반독자를 위한 교양서적이다.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로 사용할 만한 책은 찾기 어렵다. 그런데 <행동경제학 강의노트>가 나왔다. 교양과목 강의로 행동경제학을 가르치던 나같은 사람에게는 전공과목으로 행동경제학을 개설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했다. (지방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원서 강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번역서는 정말 쓰레기다. 번역이 너무 형편없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다. 한국의 번역 출판시장에 불만이 많고 그래서 리뷰에다가 그런 불만을 쏟아내곤 했지만, 이 정도면 거의 번역계의 이그노벨상이라도 주어 길이길이 박제해야 할 수준이다.


서문(Preface) 격인 "들어가며"를 보자.


"훌륭한 선생님들께 배웠음에도 프로젝트의 본질과 중요성" --> 프로젝트(project)라는 단어에는 a part of a school or college course that involves careful study of a particular subject over a period of time이란 뜻도 있다. 이제는 외래어가 되어 뭔가 일을 할 때마다 등장하는 프로젝트의 의미가 아니라. 그러니 본문에서 프로젝트는 행동경제학 대학원 강의를 뜻한다.


"내가 학생으로서 갖고 싶은 책이자" --> I wish I had had as a student. 내가 대학원생 시절에 이런 교재로 공부했더라면 할 정도라는 말이다. 이건 그냥 번역자가 한국어를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개념과 이론을 알려주며" --> 이 문장 앞에 원문이 누락되어 있다. While behavioral economics is a research program as opposed to a unified theory


"다양한 상급 과정과 프로그램의 글과 연계해서도 보기 좋다." --> 학부 강의용으로 이 책을 썼지만 석박사 과정에서도 다른 교과서나 논문과 함께 보면 좋을 것이라는 말이다. with books for articles.


"사회, 행동과학, 인문, 사업, 공중보건 등에 걸쳐 선진 학부생들에게도" --> 여기서 사업은 비즈니스를 뜻한다. 선진 학부생들은 advanced undergraduates이다. 웃기는 번역이다.


"진지한 경제학이 위협적일 필요는 없다." --> ㅎㅎㅎ 경제학이 위협적인 것은 얼마간 사실이다.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에게는. 하지만 원문은 intimidating이다. 경제학이 어렵게 느껴질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겁이 나서 경제학 강의를 듣지 않는 학생들이 많으니 하는 말이다.


"이 책은 경제학을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오, 쉣! 경제학을 증명한다니... 우리는 문학을 증명하고, 철학을 증명하나??? 원문은 this book aims to prove it이다. 경제학에 겁을 먹고 회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증명하겠다는 뜻이다.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자료는 점차적으로 더 어려운 방식으로 도입되는데" --> Abstract, formal material is introduced in a progressively more difficult manner, 추상적, 형식적 내용은 차근차근 쉬운 단계부터 어려운 단계로 소개하겠다는 뜻이다.


"가능한 한 근본적인 직관을" --> underlying intuitions, 수많은 예와 연습문제를 풀면서 근저를 관통하는 행동경제학의 직관적인 핵심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각 부는 두 개의 장을 포함한다. 짝수 1장은... 홀수 1장은..." --> 지랄하고 있다. contains two chapters : an even-numbered one... an odd-numbered one..." 각 부(part)의 홀수 장에는... 짝수 장에는...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신고전학파 이론은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 The non-trivial amount of neoclassical theory in this book may warrant explanation. 현대 경제학의 주류는 1940-60년대에 성립한 신고전파 종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 행동경제학은 여기에 도전하는 내용이 꽤 많다. 그러니 행동경제학을 가르치려면 사실 교양서적 수준의 책만 읽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주류경제학의 핵심내용을 알아야 그에 대한 반론과 도전과 변용과 개선을 더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자는 행동경제학 교과서이지만 어쩔 수 없이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스탠다드 이론)을 많이 설명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non-trivial이니까 꽤 많이 경제이론 이야기를 풀어낼 수밖에 없으니 이해해 달라는 뜻이다.


"그들은 종종 표준 이론으로 받아들이다." --> a normative theory 표준이론은 standard theory라고 한다. 여기서는 규범적인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이론을 뜻한다. 사실 이 오역이 들어간 문장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행동경제학자들은 표준 이론을 기술 이론으로 거부하지만 한편 그들은 종종 표준 이론으로 받아들이다." 신고전학파의 표준이론(standard theory)에서 기술적인 (사실이 어떠한가 정확히 서술하는 descriptive) 면이라면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인)이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며, 체계적인 (반복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가설과 이론이 쏟아져 나온다. 경제주체가 이러한 행동과 선택을 하는 것은 저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이러한 상황에서는 저러한 행동과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된다. (합리적 선택이 된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에서는 신고전학파 표준이론의 가정을 상당부분 부정한다. 그러니 기술적인 (서술적인) 측면에서는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 맞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선택과 행동을 해야하지 않은가! 그래서 저자는 규범적 측면에서 행동경제학이 표준이론이 지시하는 규범적 이론을 받아들인다고 말한 것이다.


"외국어에 대한 연구가" --> The study of a foreign language 연구까지야... 외국어 공부를 하면


"행동경제학을 현대 이론화한 공식 기록물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 does not aspire to be a complete record of contemporary theorizing in behavioral economics. 이 책은 교과서니까 행동경제학 분야에서 벌어진 모든 이론화 작업과 그 결과를 일일이 다 백과사전식으로 수록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 책에 제시된 자료는 대개 논란이 없으므로" --> on the whole, uncontroversially part of the canon. 캐논은 전범을 뜻한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행동경제학 교과서인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 이론, 결과는 이미 경제학계에서 (잠정적인) 진리로 받아들인, 그래서 교과서에 포함시켜도 문제가 없을만큼 믿을만한 내용들이라는 뜻이다.


"데이터, 증거 표준, 경험적(실험적) 방법론 및 통계 기법" --> standards of evidence 증거에 대한 기준을 논의하겠다는 뜻이다. 실증(실험) 연구결과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통계적)으로 꼼꼼히 살피겠다는 뜻.


"양식화된 사실" --> stylized facts 거시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예를 들면, 실업률이 높아지면 임금상승률이 (인플레이션률)이 낮아진다. 경기변동을 포함해서 거시경제적 현상에서 되풀이 나타나기에 그 현상을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정형화된 사실들을 뜻한다. 경제학자는 그냥 스타일라이즈드 팩츠라고 부를 정도로 입에 붙은 용어다.


"이런 점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이 책은 미시경제학에 대한 어떤 표준 서론과도 다르지 않다." --> no different from any of the standard introductions to microeconomics, to take one example. 표준적인 <Intro to Microeconomics>로 끊어 읽어야 하는데,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표준 서론이라고 오역했다. 기초인데 이런 걸 틀리다니, 이건 그냥 뭐 성의가 엉망이라는 말 밖에. (혹시 구글 번역기 돌린 뒤에 대충 끼워맞추기를 한 것일 수도.)


"연습(및 정답 키)이 가장 도움되는 요소인 것을 알게 된 후로 더 넓은 범위의 난이도인 연습 문제를 추가했다." --> 이런 걸 한국어라고 부르면....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죽고 싶다. 이런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한국이니라니 정말... Since the exercises (and answer key) turned out to be one of the most appreciated features of the original edition, I have added even more — and of a wider range of difficulty levels.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독자들이 (학생들이) 가장 좋아한 점이 바로 연습문제(와 해답)이었기에, 다양한 난이도의 연습문제를 더 많이 추가했다 라는 뜻이다.


"모든 장은 인용 고전, 리뷰 기사, 고급 교과서들을 제공하는 추가 참고문헌 절로 끝난다." --> every chapter ends with a further reading section, which offers a selection of citation classics, review articles, and advanced textbooks. 엄선한 고전, 리뷰 논문, 그리고 고급 과정 교재들을 엄선하여 '더 읽을거리'를  각 장의 독립적인 절로 실었다.


"나의 희망은... 않기를 바란다." ---> 이건 그냥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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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하겠다. 겨우 <서문>만 검토한 결과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자. 정말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83쪽에 캘리포니아 고속철도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 3.23)

"비평가들에 따르면 당시 브라운은 '향후 의회가 주요 인구 중심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이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계산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 According to critics, the New York Times reported at the time, Brown calculated “that future legislatures would not be able to abandon the project before it reached major population centers". 비평가가 아니다. 정치비평가도 아니고 문학비평가도 아니다. 그냥 비판하는 이들이다. 그 당시 뉴욕타임스가 보도하기를, 비판자들은 주지사 브라운이 계산적으로.....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향후 주의회에서는 외곽지역에서 건설을 시작한 고속철도를 어쩔 수 없이 시내중심가로 연결하는 정치적 결정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도대체 이 번역자는 뭘까? 정말 영어를 잘 하기는 하는걸까? 저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한국어로 옮기면 내용을 제대로 이해는 할 수 있는 것일까?


번역자는 카네기-멜론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피츠버그에서 finance로 박사학위를 딴 뒤, 여러 기업에서 매니저로 일했다고 한다. 훌륭한 경력을 자랑하는 인재인 듯 하다. 하지만 한국어를 못한다.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이 번역을 (아마도 바쁘겠지, 엄청?) 날림으로 하면, 그리고 대학교재 전문 출판사가 아닌 곳에서 검수와 편집을 엉망으로 하면, 이런 책이 나온다.


겁이 나서 도저히 교재로 채택을 할 수가 없다.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저 위의 별 다섯 리뷰는 뭔가?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리뷰를 썼다는데... 리뷰를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이런 식의 마케팅 행태가 도를 넘었다. 거의 피싱(phishing) 수준이다. 출판계가 썩어간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혁신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냥 쓰레기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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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리스키 비즈니스 - 왜 보험시장은 실패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리란 아이나브.에이미 핑켈스타인.레이 피스먼 지음, 김재서 옮김 / 예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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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를 다룬 책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번역! 읽다가 의미가 모호하거나 맥락과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오역이다.


*** 정말 훌륭한 책이다. 아래 내용에 실망해서 구매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


일단 "선택적 시장"이라는 번역이 이상하다. 선택적(selective)이 아니라 선택(selection) 시장이다. 보험시장의 특성인 역선택(adverse selection)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문제가 결국 시장참여자들 사이의 정보 비대칭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자책 26/286 부분을 보자. 

"보험사의 선택의 결과로 고객들을 불쾌하게 만들 보험상품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이건 오역이다. 저자들은 보험사의 선택에만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선택의 문제 때문에 보험사들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원서를 보면, Rather, selection can make insurers twist in contortions to design products with all kinds of unpleasant features—like a waiting period before you can use your new roadside towing plan, seemingly unjust limitations on what insurance pays for, or rigid limits on when you can and can’t make changes to your policy. 보험사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적 시장에서 "선택"이 이런 현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이후 나오는 번역문에서는 원문의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 "seemingly unjust limitations on what insurance pays for"가 사라졌다.


전자책 27/286 부분을 보자.

"다이어트를 위해 프렌치프라이만 먹고 지낼 때"는 읽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어떤 미친 인간이 (한국인이 다이어트라는 단어를 보면 떠올리는 체중감량이라는 의미의) 다이어트를 위해 프렌치프라이를 먹을까? 원문을 보면, subsisting on a diet of French fries라고 되어 있다. (돈이 없어) 프렌치프라이로 연명한다는 뜻이다. 이건 부주의한 번역자와 더불어 실력없는 (또는 성의없는) 출판사 편집자 탓이다.


전자책 28/286 부분을 보자.

"이 웹 사이트에는 종이에서부터 진공청소기나 커피메이커까지 다양한 제품에 대해서 공급자의 리뷰가 올라와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소비자들이 상품을 리뷰하는 것은 봤어도 공급자의 리뷰를 다루는 사이트가 있다니? 아니나 다를까, 원문을 보면, We’ll let the New York Times’ Wirecutter—a provider of consumer product reviews for items ranging from sheets to vacuum cleaners to coffee makers—answer that one. 와이어커터와 소비자 상품 리뷰 제공 사이트라는 말이 버젓이 나와 있다. 웃기지도 않은 오역이다. 


여기에 오역이나 누락 문제를 더 적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페이지마다 문제가 하나씩 튀어나온다. 나는 영어 원서를 잘 읽는다. 하지만 한국인이기에 국문 번역서를 읽는 것이 몇 배는 빠르다. 그래서 번역서를 구입한다. 하지만 번역서를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원서를 찾아보는 일이 되풀이 된다면, 굳이 번역서를 왜 사야 할까.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경제학 박사이자 경제학과 교수다. 경제학을 38년 동안 공부해 왔다. 하지만 경제학(재테크 관련 제외) 분야의 번역서를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 아니 우리나라 번역시장의 암담한 현실에 절망한다. 내가 20대였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라고는 더 많은 번역서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일 뿐, 번역의 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건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학생들에게 좋은 경제학 책이 나오면 적극 권한다. 그런데 오역과 누락이 페이지마다 튀어나오는 책을 어떻게 추천하고 선물할까? 가뜩이나 책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학생들이 (문해력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아예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그냥 읽기를 포기하지 않을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이 전문적인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고 있는가? 아니다.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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