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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
구마 겐고 지음, 이정환 옮김 / 나무생각 / 2023년 1월
평점 :
건축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 사람이 머무는 곳 이상의, 영감을 주는 상징물을 만드는 건축가들이 사라지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 토지와 지대를 바라보는 사업가들의 시선이 변하고, 도시화율이 높아짐에 따라 괜찮은 땅만 보이면 아파트 등의 대형 주거 공간을 만들려는 시대 분위기도 '건축'의 몰락에 한몫하고 있다.
건축은 설계도와 콘크리트만 있다고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환경, 공간에 머무르게 될 사람들의 특성, 건축가의 신념과 철학이 녹아들어 탄생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기술적으로도 현대 과학기술의 정점에 위치한 건축공학은 이렇듯 인류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남을 가치를 담고 상징성을 새겨 정성스레 쌓아올린 건축물은 수 천 년을 살아간다. 오늘날 수많은 인파를 동원하는 관광지는 천년 전의 문화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마추픽추, 조금 더 근대로 올라오면 20세기 초반 뉴욕에 지어진 스카이라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인류의 최선을 빗어 만든 '탑'은 후대에 중대한 의미를 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편일률적인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혼이 남긴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유명 건축가가 멋들어진 설계도를 그려내는 것뿐만 아니라 집을 짓는 사람이라면 모두, 길거리에서 건축물을 유심히 보는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하나 현재 인류의 유산과도 같은 건축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과 고집으로 장인 정신을 발휘한다. 몇 대에 걸쳐 300년 넘게 가업을 물려받고 있는 라멘집이 흔하듯 건축에도 혼을 불어넣는 명장들이 많다. 안도 다다오와 구마 겐고가 대표적이다. 그중 구마 겐고가 직접 자신의 건축 철학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평범과는 다르게, 삐뚤빼뚤, 빈틈을 보이며, 죽은 집이 아닌 살아있는 집을 만드는 건축가 '구마 겐고'의 이야기이다.
하이얀 마당이 딸린 주택을 죽은 집이라 평하는 저자는 일상 속에서 영감을 얻었다. 올곧게 뻗은 대나무를 하늘로 올려 박물관을 장식하고, 일본인은 빈틈이 없어 재미없다는 말에 틈을 잔뜩 만들어 한결 여유를 마련했다. 선과 선을 이어 도면을 그리는 것뿐이면 누군들 건축을 하지 못하랴. 3류와 1류, 1류에서 다시 명장이 되는 그 간극에는 깊은 '사유'가 숨어 있다. 가족이든 스승이든 우연찮게 내뱉은 그 말 한마디를 깊이 생각하고 벽돌 한 장 한 장에 녹여냈기에 구마 겐고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2개의 동네에서만 거의 살아갔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꽤나 성장할 때까지 있었던 조용하고 평온한 곳, 한평생을 그곳에서만 살았다면, 그리고 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경계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내 북적이고 번잡한 곳을 경험했기에 겐고는 두 곳을 모두 경험한 셈이 되었다. 강과 바다를 모두 알아야 각각의 장단점을 알 수 있다. '경계인'은 자신이 만들 공간이 지녀야 할 특성을 고민하는 데에 큰 영감을 준 저자의 특성이었다.
책은 짤막한 생각과 주제가 끝없이 이어지는 구조로 구성되었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그 자체가 지니는 의미와 건축에 쓰이는 재료, 그리고 그곳을 지탱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겐고는 인문학의 결정판인 건축을 통해 사람이 발을 붙이고 대화를 나누고, 싸우고, 웃고, 생을 마감하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정리한다. 사람이라는 주제로 하나 둘 모이는 저자의 생각은 책의 마무리쯤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생각을 기울이게 만드는 건축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도심에 살다 보면 쭉쭉 뻗은 아파트만 보일 뿐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건축'을 접할 수 없다. 자신이 머무는, 머물고픈 공간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이처럼 깊은 생각을 요하는 건축은 공간을 통해 즐거운 상상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미래가 생겨나는 것이다. 구마 겐고가 전하는 건축의 철학과 함께 이 시대에 진정한 건축 정신이 다시 깨어나기를 기원한다.
* 본 리뷰는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