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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평점 :
✍️ 기억에 남는 문장
"나는 기쁘게 무덤으로 들어갈 거야.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600만 명의 유대인이 묻혀 있기 때문이지."
아이히만, 그는 진정 시대가 평범한 사람을 악마로 둔갑시킨 것일까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종전 후 신분을 숨기고 아르헨티나로 도주한다. 이 곳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예명으로 살다가 덜미가 잡히고, 예루살렘으로 납치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악마같은 행적과 달리 재판장에서 한없이 초라해보이는 모습. 거기에 자신은 그저 복종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는 일관된 그의 말과 행동을 본 한나 아렌트는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악의 평범성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무사고'. 그러니깐 끔찍한 '악행'도 '악의'가 아닌 '무능'의 결과고, 유대인 학살을 주도적으로 실천한 아이히만 조차 그저 나치에 복종하고 도덕적 가치 판단 없이 순응한 인물이라는 해석이다.
이 책의 저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한나 아렌트가 지나치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으며 적어도 아이히만에게는 '악의 평범성'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을 증명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문헌들을 모으고 유실된 녹취까지 복원하며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무려 인용에 대한 주만 100페이지가 넘는다.)
아이히만은 얼마 전 읽은 <불통, 독단, 야망> 이라는 책에서 '초단절형 인간'이라 정의한 인간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야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교활함을 가지고 있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으며, 나르시즘에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지고 있다.
교활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으로 나치 정권에서 빠르게 인정받고 종전 이후엔 신분을 감추고 도주하는데까지 성공했으나, 명성에 집착하는 나르시즘 때문에 결국 꼬리가 밟히고 만다.
유명한 사선 인터뷰에서 아이히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십자가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대다수의 나치 당원들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로 '생각하기의 무능' 상태에서 악행에 가담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이란 결론에 도달했다면, '악의 평범성'을 창안한건 아렌트가 아닌 아이히만일수도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할 수 있었던 '비범한 악인'이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 밑으로 들어가버린 아이히만, 그리고 독일 정부를 다시 악의 영역 안으로 되돌려 진정한 반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학자의 집념이 빛나는 책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균형을 위해 이 책도 읽어 보고 싶다.
*출판사 글항아리로부터 도서만 제공 받아 솔직하게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