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생각은 상당히 상식적이다. ‘나‘가 본래적 현존재가 되고 ‘타자(공동 현존재)‘ 또한 본래성을 획득한 세계는 조화로운 곳이 된다는 말이므로..
감정이입을 통한 타자의 이해를 ‘존재론적 제국주의‘라고 일갈하는 레비나스의 생각은 신선하다 못해 섬뜩하다. 그것은 절망적인 죽음과 맞닥뜨린 자만이 길어올릴 수 있는 생각 같다.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이 길어올릴 수 있는 생명수 아니었을까?
타자가 이해할 수 없고, 죽이고 싶은 존재라고 느낄 때, 그 타자의 이해 불가능한 타자성이야말로 형이상학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게 하는 하나의 부름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게 묻는다. 정말 타인은 또다른 신성을 내재한 신인가? 내가 내 안에 신성을 느끼듯 타자에게서도 신성한 신성을 느낄 수 있는가? 우상화하지 않고 타인을 신적 존재로 여기고 귀기울일 수 있는가? 질투와 증오와 경쟁의식을 넘어서? 참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말로 하긴 쉽지만 그런 인식을 의식하지 않고 할 수 있게 된다면, 참 좋겠다. 그게 행복의 요체일 테니.
결론적으로 하이데거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① 비본래적인현존재들 사이의 관계, ② 본래적인 현존재와 비본래적인 현존재사이의 관계, ③ 본래적인 현존재들 사이의 관계
로 구분하고 있다. 이중③의 경우를 가장 바람직한 관계로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본래성)를 찾아가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나"(인간 현존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나"인 타자(공동 현존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비판은 하이데거에 대한 오해나 부정확한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P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경우에도 우리는 타자를 "나"와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즉 타자는 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타자를 이해하고 있는 서구 철학을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며, 여기에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을 포함시킨다. 후설이나 하이데거 모두 타자를 주체와동일한 자로 여김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 P93
그러나 타자가 나와 다르다는 점이 타자를 죽여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타자 역시고귀하고 소중한 그 자신의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자를 경쟁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의 타자성을 인정할 때, 타자는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하며 나는 타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레비나스는 물질적 욕구와 달리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적 욕망을 통해 "나"는 "나" 안에 갇혀 있던 자신의 존재로부터 타자를 향해 떠날 수있는 것이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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