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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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 소설을 잘 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역사 문학이 있지만 관심을 가진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역사를 나름 상세하게 아는 편이라 결론을 아는 상태에서 읽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또한 문학에 녹여 낸 역사적 사건을 소설 플롯에 어색하게 결합된 것을 느낄 때면 책을 읽는 재미도 크게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주로 드라마를 통해 역사 소설을 간접 경험할 뿐, 직접 책을 읽은 경험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기존에 내가 가졌던 선입견과 정 반대의 관점에서 흥미를 느끼게 했다. 첫째, 결말이 불분명한 백성의 삶을 배경으로 쓰였다. 우리가 다 아는 위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 주변의 인물이나 대화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아, 역사보다는 그냥 '문학'을 읽는 느낌을 들게 한다. 둘째, 조선을 배경으로 한 글이지만 조선 초, 아직 고려의 문화가 살아있던 시절을 배경으로 당시 분위기를 이야기 구조 속에 잘 녹여내어 읽는데 큰 어색함이 없었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먼저 출판한 한국 역사 소설

마지막으로 - 이 책을 쓴 작가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살았던 이유로 출판 역시 미국에서 먼저 되었다는 사실이 책을 읽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한국계 외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캐나다에서 자랐고 문학을 전공했으며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온 작가의 필력에 강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 중 하나인 고려 말 '이곡'의 편지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떠올린 작가의 상상력도 새로웠다. 아니, 어쩌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을 만큼 끝없이 반복된 우리의 역사였고, 그 역사의 공통점으로 글을 쓰게 됐다는 것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작가는 과연 어떻게 그 애매한 감정을 풀어내는지..


책은 조선 초, 열세 명의 소녀가 사라진 사건을 중심으로 열아홉 소녀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쫓는 내용이다. 지금이야 전 세계가 사랑하고 온 국민이 매년 휴양을 떠나는 제주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제주는 변방이었고 수탈되거나 수탈해야 할 대상이었다. 공간 배경을 제주로 선택한 작가의 선택 역시 매우 탁월하다. 이 글의 억압 구조와 그 속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내려는 주인공의 애씀, 그 주변의 묘한 긴장감을 지속시키는데 제주만큼 적절한 곳도 조선팔도에는 없을 것이다.

미스터리 같은 느낌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수사 일지를 통해 한 소녀가 파헤치는 수사 심리극 같은 느낌은 '드라마'나 '영화'로 연출될 때 어떤 느낌이 들지 매우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이야기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다. 배경은 물론, 그 배경 속 주인공의 심리 묘사도 탁월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묘사가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쓰인 우리 말이었다면 어떻게 표현됐을까? 영어로 적힌 글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정도의 묘사가 나왔다는 것은 사뭇 놀랍다. 서술이 아주 아름답거나 탁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번역 과정에서 글을 여러 번 다시 읽게 만들기도 했고, 어색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글의 분위기를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연으로 독자를 이끄는 묘한 힘까지 느껴진다.

반복되는 우리 역사의 몇 가지 사건이 얽힌 채, 그 사건을 파헤치는 여성 주인공의 조선 시대 수사 극이라는 점 만으로도 충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닐까. 물론, 추리소설이나 수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순간 누가 대충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러나 끝까지 읽지 않으면 그 인과 관계의 구성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쫀쫀한 긴장감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재밌고, 그 재미 뒤에 깔린 역사적 배경은 긴 여운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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