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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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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 것이 1995년, 대학교 2학년 - 실은 휴학중 - 때였더군요. 그 때 굉장히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도 있고, 덕택에 다음 해에 라틴어 수업을 들었던 기억도 있으며, 학점은 D가 나왔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다시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생각을 이번 주에 드디어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중세 시대에 통달(?)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인 AD 1327년을 전후로 하여 벌어졌던 속권과 교권의 대립이라든지, 여러 수도사들의 대립과 그 가운데서 벌어졌던 많은 이단 논쟁들을 거의 8백여 쪽에 걸친 이야기 속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여내는지, 저자의 이야기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교권의 영향력이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르네상스로 연결되는 시대입니다. 자연스러운 변화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들을 저질렀는지가 드러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마녀사냥을 통하여 헤게모니를 잃지 않으려는 시도들이 벌어지고, 그것이 첨예하게 대결한 이후에는 죽음의 흔적만 짙게 남아있는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헤게모니를 잃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장서관이라는 건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정해진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 지식을 탐하고 갈구하나, 허락된 지식 이외에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수도원의 수도사들. 앎의 독점, 앎의 대상을 결정하는 권력. 그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14세기 연간에 처한 상황이었으며, 그런 배수의 진을 치고 로마 카톨릭은 속권과의 대립에 마녀사냥이라는 칼춤을 휘두릅니다. 


이단심판관이야말로 헤게모니를 처절하게 휘둘러대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바스커빌 - 셜록 홈즈의 바로 그 - 의 윌리엄 수도사는 그런 이단심판관이었으며, 이 책에 나오는 베르나르 기라는 인물이야말로 이야기 속에서 이단심판관의 면모를 가득 드러냅니다. 빛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야 할 진실의 형체 앞에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어둠의 혼돈을 펼쳐, 드러난 진실의 편린 저편의 어둠을 마음껏 왜곡하고 비틀고 꾸며대어 마침내 거짓된 허상으로 심판하는. 이 책에서 드러나는 중세의 끝자락의 무자비한 희생은 바로 앎의 특권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지만. 


그렇기에 진리를 쥐고 흔드는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헤게모니를 처절하게 지켜내는지를 보여주는 논쟁이 '웃음'에 대한 논쟁이며, 수도사들의 죽음을 통해 형체화됩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흐름 - 수도사들의 죽음과 이 죽음을 파헤쳐가는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 수련사 - 은 범인을 찾아나가는 추리소설의 흐름을 띄고 있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등장인물간의 논쟁이나 대화들이 하나같이 저자가 가진 중세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저자가 가진 다양한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라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이 책은, 중세의 끝자락에, 르네상스로 접어들기 이전의, 마치 여명이 다가오기 전 칠흙같이 어두운 바로 그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지식을 탐하는 사람들의 허위와 탐욕을 명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참 읽을만한 책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가 가진 이야깃꾼으로써의 면모도 익히 느낄 수 있게 하기도 하구요. 



얼마 전에 작가가 세상을 떠났지요.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좋은 책을 많이 많이 내어주셨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여담이지만,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인 이인화 씨의 책, [영원한 제국]이 바로 이 [장미의 이름] 표절 의혹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기본적인 뼈대가 바로 [장미의 이름]과 굉장히 유사하다는데 그 이유가 있는데요. 표절 여부를 떠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는 책에, 한 때 잘 모르고 반했던 기억이 씁쓸하게 다가오네요.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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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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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SF 라이프가 일천한 저에게, 코니 윌리스라는 이름은 낮선 이름이었습니다. 다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후에 계속 같은 판형, 같은 느낌을 주는 디자인만 낮설지 않았다고 해야겠습니다. 그저 책을 구매한 것은, 저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명성, 네뷸러 상이니 휴고상이니를 잔뜩 수상한 작가의 작품 선집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보여서 읽은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죠.


처음에는 첫 두 작품을 읽었습니다. <리알토에서>는 양자역학을 이야기 속에 녹여 놓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이상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으며, <나일강의 죽음>은 약간은 구식의 문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중력있게 읽기 어려웠습니다. 


지난 겨울에 이 두 편을 읽은 후에 그냥 덮어 두었는데, 하도 이런 식으로 덮어둔 책이 많다보니 정리를 좀 해야겠다 싶어서, 읽다가만 책들을 바지런을 떨면서 읽던 도중에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리알토에서>는, 마침 얼마 전에 [퀀텀 스토리]를 절반 가까이 읽게 된터라, 조금은 더 가깝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양자역학의 세미나 장소로 어울리지 않는 헐리우드에서, 양자역학의 신비를 머리로 배우려는 물리학자인 루스 베링거 박사가, 헐리우드의 매력을 마음껏 경험시켜주길 원하는 데이비드를 통해, 마침내 양자역학이 가진 불확정성을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기에 뚜껑 속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진리를 통찰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읽었지만, 실은 아직도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그런 이야기.


<나일강의 죽음>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듯 하지만, 막상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을 읽은지 너무 오래된 탓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람난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난 '나'의 이야기로, 하필이면 남편의 상대방도 함께 여행을 떠난 탓에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던 찰나에, 자신의 삶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과 함께 모든 것이 뒤틀리고 헝클어진 몽환의 여행을 계속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마침내 투탕카멘의 무덤에까지 이르는 이야기로, 마찬가지로 너무 뒤틀린 나머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도통 알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위 두 이야기에 비해,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명확합니다. 작가는 조금씩 보여주기를 하면서 독자를 작중 인물에게 조금씩 밀착시킵니다. 독자는 조금씩 주어지는 작중 인물의 처지에 대한 힌트를 통하여, 이들의 삶이 처음에 보았던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작중 인물들의 처지에 깊이 몰입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다룬 세기말적 느낌의 많은 영화나 소설들이 이미 있어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새로운 느낌은 좀 덜하지만 - 물론 소설은 1983년 작으로,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도 오래된 축에 들어가지만 - 이야기의 핵심에 접근하는 방식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치, 그림의 한 구석에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만을 일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조금씩 시야를 넓혀가면서, 실은 이 아이가 불타고 있는 저택에 갇혀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이며, 그 웃음은 죽음을 앞둔 광기의 웃음인 것을, 그림의 전부를 보게 되면서야 비로소 깨닫는 그런 느낌의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짧은 이야기인데, 이야기의 진행 방식도 워낙에 명확하고, 내용도 워낙에 분명한데, 30년도 더 지난 작품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에의 힘이 느껴지는 그런 단편이었습니다.


<화재감시원>은, 마찬가지로 1983년 작으로, 영국의 세인트폴 대성당을 나치의 공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1940년으로 시간 여행을 - 역사 수업 실습을 - 떠나는 한 역사학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통속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역사 인식을 작중 주인공을 통해서 담아내기 위하여 이야기의 플롯을 촘촘하기 진행해가는 작가의 매력이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작중 인물간의 갈등이 조금 설게 표현되는 듯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단편이라는 지면 상의 제약 때문이라고 이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역사적 사실 뒤에 숨겨진 많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을 조망하고자 하는 작가의 바램이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부 소행>이야말로, 가장 몰입하여 보았던 시리즈입니다. 가장 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위하여, 작가는 1925년의 그 유명한,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하는가 진화론을 가르쳐야 하는가로 공방을 벌였던 테네시 주 재판과, 당시에 실존하면서 창조론과 싸웠던 과학적 회의주의자 멩켄의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는 현재의 과학적 회의주의자로 살고 있는 롭에게 딱 붙여놓지요. 이야기 마지막에서 나오는 롭의 대사는, 과연 과학적 회의주의자다운 말인지, 혹은 어디가도 환영받기 어려운 과학적 회의주의자에게 찾아온 작고 짜릿한 변화를 의미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둘 중 어느 것이어도 이 이야기는 만족스러운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젯 밤, 늦은 시간까지 꽤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며, 아마도 코니 윌리스 선집의 두 번째 권도 구매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나쁘지 않았는데, 솔직히 다른 분들에게는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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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더스 키퍼스 - 찾은 자가 갖는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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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장르소설이라고 불리우는 글이 가지는 전형성을 생각해 본다면, 흔히 장르소설이라고 하는 글을 쓰는 작가의 어려움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의 전개, 결말, 그 후. 그러다보니 이제 소설 장르의 이쪽 편과 저쪽 편에 있는 글들이 조금씩 그 경계를 허물고 섞여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위 순수소설이라고 하는 글들은 장르의 문법을, 혹은 문체를 따라가고, 장르소설이라고 하는 글들은 이야기의 흘러가는 모양새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웅크리고 있는 사유의 너비와 깊이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는. 그래서, 한 2~30년 전만해도, 김영하 같은 작가가 흔치 않았으며, 어슐리 르 귄 같은 작가가 특히 주목받아왔는데, 요즘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과 기름인줄 알았는데, 조금씩 서로의 좋은 점을 나눠가지는 모습.


그런데, 이 책, [파인더스 키퍼스]는 그런 장르의 전형성이라는 한계를 제대로 돌파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느낌을 진하게 갖게 됩니다. 어중간하다고나 할까.


인상깊은 장면이 있다면, 주인공인 피트 소버스의 영어(문학) 선생님인 하워드 리커 선생님이 펼치는 문학론, 또다른 주인공인 모리스 벨러미의 어머니인 애니타 벨러미가 언급하는 작중 베스트셀러인 [러너] 3부작에 대한 간략평, 그리고 작중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로스스타인의 [러너] 3부작과 미출간 작품인 [러너]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2부작에 대한 작중 주인공들의 내용 언급과 간략평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짧고, 정말 간단합니다. 조금 더 길었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에 한 사람인 스티븐 킹이 가지고 있는 '소설론'을 주인공들의 입을 빌어 보여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작가인 스티븐 킹이 그의 다른 소설들에서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을 수도 있고, 그것을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일 수도 - 스티븐 킹의 책을 즐겨 읽지는 않는 편이니까요 - 있겠지만, 이 책에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주인공들의 매력 - 혹은 마력 - 과 내러티브의 힘으로만 이야기는 흘러가려고 하지만... (전작인 [미스터 메르세데스]로부터 이어진) 주인공들의 매력은 전작을 읽지 않았다면 - 저는 읽지 않았습니다 - 매력들의 조각을 얼기설기 이어붙여 그 빈 여백을 최대한의 호의로 덧칠하여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며, 전작과 상관없는 주인공들로부터의 매력이라면 나이들어서도 변함없는 치기어림과 나이어린 사려깊음에 대해서 충분히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경우에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러티브야말로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인데, 어쩔 수 없겠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과, 예측을 피해보고자 노력했겠지만 지나친 해피앤딩과 지나친 새드앤딩 사이에서 줄타기를 심하게 하느라고 어려움에 빠진 듯 한 그 후의 이야기마저도 마음을 울리는 구석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 장르의 전형성이 작가를 잡아먹는 모양새가 되어가는 듯 합니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역량을 쏟아부어 신선한 내러티브를 창조하려고 노력한 듯 보이나, 저라는 독자를 납득시키는데에는 실패한 듯 합니다. 막장에 막장을 얹음으로써 드라마의 문법에 신기원을 마련해가고 있는 드라마 작가들과는 차별화되었다는 것에서 만족해야할까요? 전작을 읽지 않았지만, 이 작품 [파인더스 키퍼스]에서 엿본 전작이 더 나아보인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고 전작을 읽고 싶지는 않네요. 다 알아버려서.


다만 이후 작품을 염두에 둔 것인지, 전작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취향과는 맞지 않아서, 저는 이후 작품을 읽지는 않을 듯 합니다. 



아쉽네요. 은둔한 천재 작가. 문학을 좋아하고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할나위없이 좋은 시작이었는데...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몰입도가 떨어지고, 결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책장을 듬성듬성 넘기는 그런 느낌, 아쉬웠습니다. 바로 이전에 읽었던 책인 하인라인의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은 결말에 다가설수록, 글자 하나하나를 더 집중해서 읽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스티븐 킹의 소설과는 그닥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1/22/63]도 중간에 흠뻑 빠져들었다가, 마지막에서 탁, 놔 버리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스티븐 킹의 이야기의 매력을 잘 모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그래서, 요즘 한창 출간 전 서평 이벤트가 많은데, 쉽사리 응모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일전에 응모하여 읽었던 [셜록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도, 독후의 느낌이 별로여서, 독후감상문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기억이 있네요. 이 책, [파인더스 키퍼스]에 대한 서평 이벤트도, 그래서 응모를 못했고, 덕택에 제 값 치루고 책을 읽은 후에, 얽매임 없는 독후감상문을 두드려 보네요.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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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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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부터 읽기 시작해서, 실은 빨리 읽어버리고, 알라딘에 돌려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저께 책을 잡고 읽기 시작하는데, 처음 부분에 클리퍼드 러셀(이하, 킵)이 오스카를 만날 때까지 시원시원스레 진행되는 이야기의 흐름 덕택에 조금씩 조금씩 몰입감이 고조되다가, 피위 레이스펠트 - 와 벌레머리 종족 - 가 사건에 끼어들고 나서부터는 집중력이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아마도 킵이 피위와 겪는 일련의 사건과, '엄마벌레'와의 에피소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덕택에, 백 몇 십 쪽에서 읽기를 멈추고는, 마저 읽어서 알라딘으로 치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늘 다시 책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341쪽에 도달해서야, 이 책이 읽고 치워버릴 정도의 책은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344쪽부터, 이 책은 비로소 읽을만한 것이 되었습니다. 꽤나.


("그들의 행성을 너와 내가 인지하고 있는 시공간 밖으로 90도 돌린다는 의미란다.") -340쪽 

("착한 킵, 넌 판결을 이해하지 못한 거야. 그들은 자기네 별을 가져가지 못한단다.") -341쪽

저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별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 우리가 사는 공간이 2차원의 - 평면의 - 공간이라면, 우리의 공간을 90도로 돌리면, 더 이상 우리의 공간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행성을 이 공간 바깥으로 쫓아내는데, 만약에 항성 - 별 - 을 가지고 가지 못한다면, 그 행성은 생명의 원천을 잃어버리게 되겠지요. 그리고 인류는 자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전 우주적인 형벌의 대상이 되어야할지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인류의 역사는 악덕을 끊임없이 쌓아올린 그런 일련의 과정을 살아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떤 학자는 우리 인류가 본성에 선한 천사를 하나 정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단 일백년 안에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절멸하려는 시도를 거의 성공시킨,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벌어지는 소규모/대규모의 폭력과 린치의 역사가, 과연 인류의 번영이 전 우주적으로 보자면 축복이 될지 슬픔이 될지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한 사람의 선의가 모이고 모여서 인류가 선함을 향하여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엄마생물'의 말대로, 인류는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서 행동(289쪽)'할 수 있는 존재이니까. 우리의 선한 본성이 모였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그런 종족이 바로 인류이기도 하지요.


SF의 미덕이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 듯 싶습니다. 객관자연 하여 주관을 구축함으로써 얻는 묘한 설득력. 한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장이이다'라고 외쳤을 때, 그 진실성에 대한 탐구보다는, 순환 논리의 오류부터 지적할 수 밖에 없는 셈이기에, SF의 쓸모와 매력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류가 인류의 악덕을 고발하는 모순 대신, 온 우주인의 입을 빌려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되는 우리 인류의 슬픈 모습. (특히 이 책이 쓰여질 당시에 무기에 무기를 쌓아올리며 무력에의 억지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던 그 모습) 그 덕택에, 온 우주인으로부터 지적당하는 인류의 악덕에 대해서는 묘한 공감과 슬픈 되새김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야기의 마지막은, 다시 처음의 유쾌함으로 돌아옵니다. 킵이 자신의 인생을 조금 더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어서 기쁘지만, 결국 킵은 '꼼꼼하게 준비했을 때만 따라오는(384쪽)' '행운'을 만난 셈이니, (좋은 의미의) 인과응보를 경험했다고 봐야겠지요. 


하인라인의 다른 작품인 [여름으로 가는 문]보다는 그 몰입감이나 재미가 떨어지지만, 그리고 이야기의 중간 부분을 읽을 때에는, 이야기가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구닥다리라는 생각을 내내 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그랬던가요. '끝이 좋으면 모든게 좋다'고. 이 책도 끝이 좋아서, 제게는 무언가를 두드리지 않으면 안될 여운을 주어서,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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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알라딘으로 되돌려주지는 않을 듯 합니다. 가지고 있다가, 생각날 때 끝부분만 다시 읽어도 좋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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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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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렀다가 대학원 수업 가는 길에, 오고가며 편하게 읽으려고 집어들었는데, 정말 편하게 읽히더군요. 


기본적인 이야기 얼개는 영화 [13 몽키즈] 같은 영화와 비슷합니다. 꼭 뫼비우스의 띠 같지요. 혹은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동감]과의 접점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은 에피소드 식이지만, 독자는 다 알고 있습니다. 어느 지점에서 연결고리가 있겠구나, 라고. 


다행히(?) 이 책은 추리소설 류는 아닙니다.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가 가진 추리소설과의 접점 때문에, 책의 띠지에의 소개도 그렇게 '추리'라는 단어를 넣은 듯 하지만, 이 소설의 본류는 추리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십 줄에 접어서면서 살아낸 나날에 대한 추억을 되짚어보는 일들에 특히나 예민을 떠는, 저같은 이들이 읽으면 참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줄거리는 아닌데, 이야기가 이야기이다보니, 끊임없이 옛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새 독자인 저의 옛날과 자꾸 맞닥뜨려집니다. 그리고, 항상 기억은 왜곡되고 미화되는지라, 항상 저의 옛날이 아름답지만은 않았을텐데, 이런 책이 자꾸 지난 삶을 아름답게 덧칠합니다. 그게 싫지는 않네요. 이런 류의 책이 그래서 많은 이들의 - 저의 - 호감어린 평가를 받게 되는가 봅니다. 


한편, 뭔가 어리숙한 세 사람의 환상 체험 같은 이야기가 주는 묘한 울림도 있습니다. 불치하문이라 하였는데, 이 세 사람의 인생에 대한 즉시적인 대답은, 결국 이 세 사람에게 새로운 울림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사실 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자꾸 누군가에게 묻고, 자신이 이미 가진 답에는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답은, 나미야 잡화점의 주인인 나미야 유지와 같이 진중하게 구할 수 있기도 하지만, 뭔가 서툴러보이는 삼인조의 즉시적인 결론 속에도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 속에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 대한, 우리에 대한, 모두에 대한, 옳다는 확신.


약간은 안타까운 이야기 하나. 다른 사람을 꿈꾸게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채 흘러가버린 인생에 대한 뒤늦은 찬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삶의 아름다운 국면만을 모아둔 책은 아니라는 점에서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그런 편안함은 덜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마지막은 그저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는 경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듯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좋은 이야기의 틀을 가지고 이런 결말이라니. 꼭 인기 드라마의, 모두를 무난하게 만족시키기 위한 결말 정도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혹은 이러한 이야기의 플롯이 가진, 결국 직소 퍼즐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울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결말인 듯 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모두의 말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나미야 잡화점 어르신처럼, 결국 누군가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 주는 엄숙한 의미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깃속 그 모습들이, 결국 독자 모두를 무난하게 만족시켜주는 해피 엔딩을 이끌어 냅니다. 뭐, 이야기의 짜임새나 진행 방향에 대한 마이너한 방향으로의 불만 정도는 접어둘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쁘지 않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면, 만족인게죠.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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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인 2017-08-1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도 나미야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도 ‘나미야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페이스북에 ‘나미야 잡화점을 현실로‘라고 검색하니 실제로 누군가가 익명 편지 상담을 운영하고 있더라구요.
namiya114@daum.net 여기로 편지를 받고 있고, 광주광역시 동구 궁동 52-2, 3층 나미야할아버지 로 손편지를 보내면 손편지 답장도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아마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저같은 생각을 한번쯤 해보셨을 거라 생각돼 이곳에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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