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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 High Class Book 10
존 스타이벡 지음, 김유순 옮김 / 육문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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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대도시의 네온사인이 휘양 찬란한 불빛의 향연을 이루고, 포드사가 찍어놓은 일체적인 자동차가 거리를 해매이고 있을 때, 1930년대 - 철저한 천민자본 논리에 의한 사회적 모순이 미국과 유렵을 중심으로 폭발하였다. 그 여파로 인해 민중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해고 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작업장을 찾아 방황하게 되었다. 소작농민들은 한 평생 자신의 두 손으로 지어놓은 땅을 잃게 되었다. 소외된 수많은 민중들에게는 처절한 삶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살아가고자 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욕구가 숨쉬고 있었다. 작가는 조드가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증명했던 것이다. 조드가의 비참한 생활. - 트랙터에 의해 집이 허물어지고, 포도와 오렌지를 찾아 떠난 일락(一樂) 길에서의 조부모의 죽음, 작은 삶의 안정을 위해 행할 수밖에 없었던 파업, 살인이라는 현장 속에 묻히고 묻어야 했던 케이시와 탐조드, 이주 노동자의 생활로 인해 무너져간 삶.

하지만 분명했던 것은 그들에겐 인간으로서의 희망만은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다. 천민 자본에 대한 분노가 충만했지만, 고난 속에서도 가족에 대해 나아가 이웃에 대한 연민과 정은 언제나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작품 전반에 걸쳐 조드가(그중에서도 어머니)의 불굴한 의지로 끊임없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의 샤론의 장미(로자샨)가 기아와 피로에 지쳐 아사상태에 있는 무명(無名)의 50대 사나이에게 자기 가슴을 풀어 젖을 빨리며 신비로운 웃음을 띠는 장면은 천민자본과 인간애(人間愛) 사이에 존재하는 아이러니컬한 미소를 짓게 하였다.

그런 미소를 담고 책장을 덮은 뒤, 얼마 전 이주노동자 문화제에 다녀왔다. 조드가처럼 켈리포니아 드리밍을 꿈꾸며, 코리안 드림을 바랬던 한국 사회 속에 존재하는 40만 이주 노동자들의 작은 문화제였던 것이다. 성수동/안산/안양 이주노동자 100여명과 소수의 학형들이 모여 그 자리를 함께 지켰다. 천진한 미소를 담으며 서툰 한국어로 노래하고 춤추고 소리쳤던 그들. 우리는 조금 더 본질적인 인간다운 삶을 바라며 들리지 않는 메아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마음속 구석진 곳까지 담겨진 생각은 ‘같다’였다. 이주노동자 역시 우리와 같았다. 단지 소위 선진국에서 오지 않은 다름만 존재할 뿐이었다.

인간으로서 담을 수 있는 작은 바람. 한국 사회 속에 보이지 않는 가장 낮은 지위를 선택한 그들은 탐조드의 집안사람들처럼 인간미가 넘쳤고, 모르는 무명의 사람까지도 배려했으며, 작은 미소를 담고 있었다. 1930년대를 살아갔던 미주의 조드가,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이주 노동자.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차이는 무엇일까? 천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약자로서 언제나 소외되었었고, 수탈과 억압 속에서도 희망을 담고 꿈꾸며 살아가는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없다.’ 그들 역시 인간으로서의 애정을 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분노의 포도와 한국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이주노동자와 함께 함으로서 느꼈다. 인간의 존재는 같다. 다만 인간이기에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의 바람과 인간다움은 그 사회와 그곳을 이루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연대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결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이고 나만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결국 나에게 남겨진 것은 세상 속에 홀로 버려진 이기적인 나와 그들뿐이다. ‘치열’하고 ‘환장’할 청춘 이야기는 우리가 이타적인 세상을 바라고 느낄 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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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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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스무살의 새벽 무렵이면...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전해준 이야기에 잠 못 든 적이 참 많았다. 한 구절의 문장을 읽을 적마다 전해오는 (그만의) 문체의 마력을 통해 우리는 독특한 향기를 담고 살아가는 그이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 역시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좀머 씨의 이야기를 소년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좀머 씨의 마지막 말은 나의 마음을 스미듯 스쳐지나 갔다. 그의 애원석인 목소리가 가슴을 울렸고, 머리를 강타한 기분이었다.

‘왜 세상을 향해 그는 도망치듯 쉼 없이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그는 잠시의 휴식조차 신음석인 울음을 들려주어야만 했을까?’

좀머 씨의 특이한 삶의 모습을 추측해 보는 것은 쉽다. 보통 사람들처럼 마음 닿는 대로 생각 하면 된다. 하지만 좀머 씨가 걸어야만 하는 이유를... 좀머 씨가 그렇게 힘겨워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아무도 알 수는 없다. 나 역시 그의 삶을 소년의 눈을 통해 들여다봄으로써 잠시 느끼고 생각해 볼 뿐이다. 하지만 좀머 씨를 만남에 있어 그의 애잔한 슬픔에 대해서만큼은 진실로써 느끼고 싶었다.

우선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소년을 살렸다. 소년은 좋아하던 여자 아이에게 바람맞고, 피아노 선생님에게 오해를 사고, 가족들은 자신을 몰라주었기 때문에 30m의 고목나무 위에서 죽음이라는 의미를 통해 자유를 되찾고자 자살하려 했다. 하지만 좀머 씨가 나무아래에서 조심스레 행동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절망이 만들어 내는 애절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지팡이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부족한 행동에 대한 후회와 삶의 희망에 대한 불씨를 타 올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좀머 씨의 기이한 행동들이 일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올 쯤, 그는 10월의 호수를 향해 몸을 맡겼다. 소년은 좀머 씨의 모습을 보고 당혹스러워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렇게 아저씨의 모습이 사라지고 밀짚모자만이 동그마니 물위에 떠올라서야 소년은 좀머 씨의 죽음을 느꼈다. 소년은 아저씨의 죽음 앞에 다가온 무성한 소문 사이, 모든 사실을 함구해 버렸다.

‘소년은 왜 좀머 씨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의 마지막까지 전해오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란 말에 대한 좀머 씨와 소년 사이의 약속이 아니었을까... 좀머 씨의 세상을 향한 처음이자 마지막 간청에 대해 소년만이 약속을 지킨 것이 아닐까...

좀머 씨를 평가함에 있어 어떤 이는 세상이 전하는 치열함을 담지 못한 낙오자라 말할지 모른다. 혹은 그를 평가함에 세상을 향해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유를 찾고자한 진정한 순결자라 말할지 모른다. 좀머 씨의 삶에 대해 감히 무어라 말할 순 없다. 다만 그가 부족한 스물 하나의 내게 전해준 무언(無言)의 삶에 대한 도전을 담으라는 말. 그것이 세상을 향한 도전이냐... 자신의 본질에 대한 도전이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좀머 씨는 분명 우리에게 순수함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 귀결점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나타났지만, 우리는 그가 살고자 한 욕망. 갈망하고 쫓았던 그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좀머 씨와 우리의 약속이며... 좀머 씨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마지막 이야기. - 절망과 고통이 나의 생애를 엄습해 올지라도 세상과 나를 향한 삶의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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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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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짧지만은 않은 스물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오며, 그 시간 속에 종교에 대한 나름의 고민과 애정을 가졌던 사춘기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운다. - 절대 신에 대한 부족한 생각의 깊이로 인해 가장 가까웠던 벗과 언쟁을 벌였었고, 그로인해 종교와 그 친구를 잠시 피해 있었던 시간 - 그러했기에 종교는 나에게 가장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도, 주위 분들과는 언급해서는 안 될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선 말을 더욱 삼갔다. 그런 와중 <사람의 아들>을 손에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주위의 이야기처럼 책장이 쉽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괜스레 장을 더할 적마다 난해한 신들의 나열로 인해 더 큰 산들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조동팔이 독약을 먹고 죽는 마지막 장면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책을 읽었다는 느낌보다는 난해한 영화 한편을 보았다는 느낌이었다.

나아가 비기독교인 이라는 편견 때문일까... ‘천상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 다가온 예수 보다는 ‘지상의 구원’을 우선시 하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좀더 진한 애정의 깊이가 느껴졌다. 이는 초월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한 예수의 구제와는 달리,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다가선 아하스 페르츠의 민중에 대한 구원과 신을 향한 고뇌 앞에,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이 솟아난 듯싶다.

감히 다룰 수 없었던 신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신을 창조하기까지의 이야기.

70년대 대한민국을 살아간 민요섭과 조동팔이 만들어 놓은 합일된 신을 바라보며, 결국 그들을 (자의든 타의든) 죽음으로 이르게 한 신이란 존재에 대해 뜻 모를 쓸쓸한 미소가 배임은 무슨 까닭일까. 쿠아란타리아서 위대한 지혜와 선을 동시에 지닌 신. 양면성을 지닌 신이란 존재 앞에 끊임없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심이 무얼 뜻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바보 같은 이 생각은 무엇일까.

민요섭은 자신이 그려놓은 메아리 없는 신의 존재에 회한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로 돌아가고자 했다. 나아가 조동팔의 귀의 역시 바랬으나, 그의 행동주의적인 모습을 뒤로 하고 결국 떠나버린다. 왜 그토록 부정하고 변혁하려 했던 기독교로 돌아간 것일까? 자신의 모든 것 바쳐 만들어 놓은 신이란 존재에 대해 포기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조동팔은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 먼저 있는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지 않는 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 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는 신,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이 우리들의 신이라 했다. 즉, 신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손에 부치었다 했다. 우리끼리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서 용서된다고 했다.

‘신은 누구인가? 신은 무엇인가?’

사춘기 시절 짧게나마 고민했던 신에 대한 모습과 신이란 이름을 함부로 내뱉기엔 이 사회가 너무도 경직되어 있음을 깨닫고 함구해버린 지난 이야기. 그로인해 애써 무시했던 신에 대한 이야기. 나는 다시금 새벽 차창 너머, 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아본다. 그리고 그가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가 그를 믿고자 하면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숨쉬고 있음을 느껴본다. 나아가 신이란 존재에 대해 우리가 설령 못 느낀다 할지라도 조동팔의 마지막 말처럼 언제나 고독한 신성으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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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김성동 지음 / 깊은강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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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햇살이 다가오는 도서관 구석진 자리, 조심스레 잠들어있던 <만다라>를 손에 집었다. 내 나이만큼이나 손때 짙게 배인 깨알 같은 글씨 너머로 강인한 생명력이 다가옴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율의 파장을 이어가기 위한 만다라의 길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아쉬운 미소를 던져야만 했다.

‘왜 법운은 피안(彼岸)으로 가는 차표를 찢어야만 했을까,..’
‘고통과 번뇌만이 존재하는 세속의 시간으로 다시금 달려가야만 했을까...’

사회의 ‘틀’속에 익숙해져버린 나의 사고는 그의 파계승적인 행동에 안타까움 가득한 여운만을 담아 볼 뿐이다.

법운과 지산이 만나기 전, 그들은 분명 부처에로의 귀의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나름의 구도적인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한 방법상의 차이로 인해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달랐다. 하지만 도덕적 가치의 잣대를 벗어던지고 법운과 지산을 바라본다면, 내면에 잠들어 있는 ‘병 속의 새’를 꺼내려 한 법운과 극단적인 타락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에 존재하는 부처에 가장 가까운 순수성을 지닌 체 다가 설수 있다고 본 지산은 분명 수단으로서의 차이만 존재할 뿐, 목표의 동질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지산은 분명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부딪히고 있었다. 사회의 ‘틀’은 구도자에게 가시적인 참선과 수행만을 강요했다. 그러했기에 그이들의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진 이야기는 철저하게 숨겨질 수 있었다. 지산은 사회의 부조리함에 화가 난 것이고, 순수성을 상실해 버린 구도자의 모습에 분노 한 것이다. 그러했기에 사회의 규정된 시각(틀)에 반하는 파계승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나아가 법운은 지산을 동경했기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법운 역시 부조리한 사회의 ‘틀’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써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를 탐닉하는 파계승적인 행동을 보인 것이다. 결국, 법운은 지산의 죽음과 그를 견성함으로써 ‘병속의 새’를 느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에 감추었던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었으며, 자기 자신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늙은 매춘부와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번뇌와 고독은 하나의 가치 있는 대상물로써 삶의 밑바닥부터 존재한다. 지산에게는 철저하게 절망과 고뇌, 허무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했기에 지산에게는 아픔과 고독이 하나의 구도이며 열반을 향한 길인 것이다. 존재하는 고뇌에 대한 또 다른 참선과 고뇌는 불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지산이 궁극적인 삶의 본질을 찾고자 보인 파계승적인 행위는 분명 사회의 ‘틀’이라는 가치뿐만 아니라 부처 역시 허락지 않은 산물이다. 독선과 타락의 시각을 벗고 마음을 비울 때 부처가 조심스레 그 마음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했기에 우연히 주말 대형 서점을 통해 접하게 된 신(新)개정판에서의 ‘만다라’는 법운을 세속에 귀화시키지 않고, 피안(彼岸)으로 길을 떠나게 한 것 아닐까... 지산의 독설적인 사회에 대한 질타를 줄임으로써, 구도자의 모습을 좀더 본질적으로 살펴본 것이 아닐까...

가방 구석진 곳 오래된 ‘만다라’를 넣고, 겨우내 잠들어 있던 북한산 노적사를 지난 주 찾아갔다. 소시 적부터 어머니 손 고이잡고 다녔던 길임에도 사찰을 오를 적 느끼는 마음은, 이 길을 처음 걸었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봄의 향기 가득한 사찰길이 변하지 않듯이……. 스물 하나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치열함 가득한 청춘을 아끼다 보면 우리도 구도자로서의 본질적인 모습에 다가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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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Classics in Love (푸른나무) 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영하 옮김 / 푸른나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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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잊을 수도 없는 사랑이다.’ -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을 애도하며...

초여름이 다가서는 비 오는 거리를 지나오다,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오래전 애상어린 기억 속에 읽어 내려간, 베르테르의 슬픈 사랑의 전율을... 종로의 어느 무명(無名) 카페 차창 사이 담긴 작은 문구 사이로 조심스레 전해 옴을 느꼈다. 그렇게 베르테르의 애잔한 사랑을 다시금 펼쳐보았다.

죽을 만큼 사랑에 슬퍼하고, 미쳐버릴 정도로 한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을 위해 내 모든 터럭까지 다 바쳐 사랑이라는 이름을 담을 수 있는 열정. 베르테르의 진실된 사랑 앞에, 부족한 스물한 살의 그이가 추구해온 사랑이라는 이름을 과연 담아 볼 수나 있는 것일까? 베르테르의 애잔하고 숭고한 사랑 앞에 경건한 애도의 마음을 담아 부족한 이야기를 써내려 본다.

베르테르는 로테와 진정한 사랑을 만들기 위해,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아를 부정해 나갔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사랑하는 로테의 모든 것을 담아간 것이다. 베르테르는 로테와 하나 될 모든 것을 추구 하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그녀의 마음이 내 모든 공백의 구석 된 곳까지 닿기를 바랬다. 나를 버리며 그녀를 담아가고, 하나로 거듭날 수 있는 모습. 이것이 베르테르가 추구했던 사랑이라는 이름이다. 하지만 로테는 베르테르의 비워진 마음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영할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의 모든 것에 자신을 동질화 시킬 순 없었다. 알베르트를 위한 사랑의 마음 역시 한 켠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결국 로테의 사랑은 항시 두 사람의 중간에 서 있었던 것이다. 베르테르를 향한 정신적으로 성숙된 진실된 사랑을 추구했을지라도, 그 마음만큼은 결코 베르테르 같은 열정적이고, 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롭게 하나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베르테르가 로테를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의 하나 될 수 없는 잘못된 만남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랑이라는 이름조차 안정적으로 담아가는 로테의 남편, 알베르트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사랑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불나방 같은 삶의 방향을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과연 어느 누가 옳은 사랑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스스로에게 내던지 이 질문에 대해 감히 대답할 수가 없다. 진실된 사랑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열정적이고 순결한 그의 마음을 존경한다. 한사람을 위해 죽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그의 격정을 사랑하고, 사랑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승화시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그의 용기 앞에 찬란한 영광의 빛을 드리우고 싶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격정적인 사랑을 존경했지만, 사랑 앞에 나의 모든 가치가 부서져야 했던 그의 용기가 두려웠다. 어쩌면 필자 역시 사랑을 추구함에 있어 다른 가치적인 요소를 들이대는 어쩔 수 없는 범인(凡人)인가 보다. 알베르트가 중시했던 사랑에 대한 합리적인 이성을 감정만큼 중시했으며, 격정적인 사랑을 논함에 있어서도 언제나 상대가 떠나거나/ 떠나기를 바란다면 조심스레 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별에 대한 가슴시린 며칠을 보낸 후 다시금의 바쁜 일상에 몸을 맡긴 뒤, 원래의 본질적인 내안의 나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것이 내가 행했던 사랑에 대한 기억이었다.

베르테르의 이룰 수 없는 사랑. 나아가 잊을 수 없기에 천국에서 이루고자한 그의 의지.

봄비의 향연이 가득한 종로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숙연해 지고 죄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어떤 이는 베르테르의 무모하고 불같은 사랑을 비난하고 힐책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격정적인 열정만큼은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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