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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다 지친 나를 위해
서덕 지음 / 넥스트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수록 나는 나와 멀어지고 있었다.
광고회사에 일하던 저자는 스트레스 등으로 공황장애를 앓게 되고, 공황
발작으로 퇴사 후 정신과 상담과 함께 쉼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지난 한 여정을 독자들에게 편안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고작 그런 일로?”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분들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동안 지친 군상들에게, 나다운 사람이
되는 휴식 같은 과정을 제안한다.
쉼은 너를 망가뜨리지 않아. 너를 망가뜨리는 건 너의 불안과 강박과
긴장일 뿐이야.
그냥 쉬면 돼. 부디, 애쓰지마.
나는 더 나은 사람대신 나와 더 친한 사람이 되었다.
오래도록 할 일 없이 쉬며 간신히 할 수 있게 된 말이”그게 나인걸, 어쩌라고”였다.
쉼을 부디 쉼으로 즐겼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어.
호칭에 당신이 가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공황발작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나를 잘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알고 나와 살아가는 과정, 계기는 공황이었다.
성공의 기억은 휘발성이라 쉬이 사라지고 실패의 기억은 진득하게 남는다.
그저 쉼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다.
아프고 보니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만 유달리 아픈 게 아니었다. 다들 괴로움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위안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서슬프기도 했다. 나의 아픔이 다들 겪는 흔하디흔한 것이
되어버리는 게 서글펐다.
누군가의 아픔은 그 누군가에게 있어 가장 큰 아픔이고, 나의 아픔은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아픔임을
나의 길은 인정의 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나를 칭찬해주는 무언가를 계속 따라다녔다.
칭찬이 나를 어떻게 조종하는 지 모른채, 나는 인정과 칭찬에 중독되어갔다.
멋진 나를 보여주는 것을 줄이고, 솔직한 나를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부분만을 강조하다 보면 단 한 면에만 시선이 쏠려서 다른 면을 볼 수 없게 된다.
성향이 극단적으로 치달았을 떄에만 병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나의 몸은 민감한데 나의 정신은 둔감하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포기했다. 감정은 언어 너머의 것이라
생각했다.
감각과 나의 거리를 좁혀본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나’에
대한 판타지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
순수하되 순수하지 않은 ‘나들’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
누구나 자신의 일이 가장 고되고 버겁다.
겉의 괴로움이 씻겨 내려가고 나서야 그 안쪽의 괴로움이 보인다.
선생님과의 대화는 답이 아니었다. 화두다.
성장과정에서 결핍이 키운 욕망. 판타지
과거를 애써 부정하지 않고, 온전한 나의 일부분으로 바라보는 것. 과거를 품고 가되,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
그 트라우마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 녀석과 잘 지내는 방법을 생각한다.
과거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그제서야 나는 시작되었다.
염세주의자는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체념한 사람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다른 이들보다 큰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꿈은 꾸는 사람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염세주의자다.
절망과 함께 희망도 함께 품는 것이다. 한쪽에 쏠려 있던 감정의 지도를
넓혀가며 균형을 찾아간다.
‘어떻게 살아야 먹고 살수 있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나 스스로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내 마음은 중요해.
세상에 망친 인생은 없다.
목정없이 쉰다.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않지만 덜 아픈 사람이 되어간다.
걸으며 서서히 속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감각으로 생각을 씻어내고, 현재로 과거를 씻어낸다고. 걷기는 마음의 샤워라 할 만하다.
혼자서 떠나야만 나는 비로소 풍경을 본다.
바람을 쐬다. ‘기분 전환을 위해 바깥이나 딴 곳을 거닐거나 다니다.’
눈물을 참는 행위는 성숙한 것이 아니다. 성숙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나약한 부분을 감추는 것일 뿐이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 감정의 구조신호. 나의 감정선이 보이고 나의 약한 부분들을 깨닫는다.
눈물의 원인을 찾아 하나하나 짚어간다. 그 것이 성장이라 믿는다.
‘위하여’는 무서운 말이다. 쉼마저도 오염시켜버린다. 결국 쉼은 일의 연장이 되어버린다.
쉼의 본질은 나를 위함이다.
나를 위한 시간을 반드시 만들어 주자.
하고 싶다.
계획이란 녀석이 개입되면서 ‘하고 싶다’가 ‘해야 한다’가 되어버렸다.
작은 일이나마 성취감을 느끼고, 그 느낌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행동이
필요하다.
완벽주의자
완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 보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부끄러워하고 타박하기에 완벽주의자.
완벽하지 못한 나를 보이기가 부끄러웠다.
부족한 나의 모습이 보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에 나는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계획을 내려놓고, 완벽을 내려놓고,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즐거움을 찾아간다.
백수의 시간은 여유의 농도가 다르다. 시간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무료함은 감각의 스위치다.
무료함은 행동의 스위치다.
내가 좋아하는 내 안의 내가 무료함이라는 감정을 통해 밖으로 튀어나온다.
유의미한 나를 위해 무의미한 시간들을 흘려보낸다.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무료하니까 세상이 재밌는 것투성이였다.
무료함은 작은 즐거움을 크게 느낄 수 있도록 섬세함을 키워준다. 허무하면
하무한 대로 무료하면 무료한 대로 시간을 보낸다. 무료함이 나를 살게한다.
롤모델
참조하여 따라가기 위한 방향점이라기 보다는, 그저 위안을 얻기 위한
도구였다. 정말 닮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각을 아끼고 채워 넣는 그 태도. 그녀를 흉내 내어 나의
감각을 찾아본다. 나의 길을 찾아본다.
취향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감각을 내가 찾아내었다는 증표이다. 내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행위의 반복 끝에 알아낸, 내 안의 지형의 일부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해지는 감각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욕망의 형태를 이해하는 것. 내 욕망을 키워가는 것. 그만큼 인생은 풍부해지고, 그만큼 인생은 살만 해진다.
외로움이 반대말은 없다.
외로움을 회피할 방법을 100가지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외로움과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역시 필요하다.
무엇이든 넘칠 만큼 넉넉한 것이 있을 때 사람이 착하고 여유로워진다고 말할 법하다.
넉넉한 시간이 가져다주는 너그러움을 나의 기본으로 만들어가는 시간. 나는
충분히 백수의 시간을 즐겼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성과가 아닌 과정을 생각한다. 완벽한 무언가가 아닌, 미완성이되 조금씩 나아가는 나를 생각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자리에 오르며
자신도 모르던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통제감을 부정적인 형태로 쭉 강화시킨다면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통제감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누리되, 아주 조심히 나를 위한 형태로만
사용할 수 있게.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자 하는 방식의 천박함이
문제.
드러내기 위한 취향, 취향으로 자신을 포장하려 하는 그 안쓰러움. 속물 근성. 지적 허영.
나의 무게 중심은 나여야 하니까
남을 평가하지 않고, 남에게 평가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내 욕망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 아니면서도 참
어려운 일이다.
내 안에 수 많은 내가 있다.
개중에는 좋은 놈도 있고 나쁜 놈도 있고 이상한 놈도 있다.
내가 원하는 나를 더 잘 드러내고 싶다.
어떤 감정을 쓰지 않다 보면 그 감정은 점점 말라간다.
감정을 쓰다 보면 그 감정이 점점 고양된다.
사람과 함께 지내는 시간 자체가 피곤하기 때문이다.
정신체력을 키우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해보지만, 그게 안 된다면 무리하지
말자고. 그래야 나를 지키고, 남과 있는 그 시간을 밀도
있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나의 선을 알아간다.
근본부터 착한 사람이라면 무한하게 착할지 모르겠으나, 나의 착함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에게 책하다 보니, 나는 나의 욕망을 모르게 되었다. 오랜 시간 단련된 착함은 나의 욕망을 숨겨버렸다.
남에게 착하다 보니, 많이 비겁해졌다. 착함은 나의 우유부단을 숨긴다.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을 때 타인에게 결정을 떠넘겨서 심적인 책임도 떠 넘긴다.
착해서 괴로운 부분을 덜어내고, 나에게도 착한 사람이고 싶다. 매사에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대체로 착한 사람이 되고, 그만큼 나에게 착해지려 한다.
착한 어른이 되는 것은 두 번째다. 내가 되는 것이 첫 번째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의미를 뭉뚱그린다.
사랑이라는 말 언저리에 있으면서도 저마다 오롯이 다른 감정이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는
정의는 무의미하다 ‘이것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상대의 부끄러운 바닥까지 공유할 수 있는 관계
미안하다는 말은 아주 유용한 단어다. 과한 것이 문제다.
고맙다는 말은 ‘네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미안하다는 말에는 ‘내가 너에게 폐를 끼쳤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는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남에게 호의를 받거나 도움을 구하는 상황을 어색해한다.
나는 호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만 생각하는 낮은 자존감이 문제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 민폐를 주고받고, 호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 그들에게 작은 부탁을 하고 “고맙다’라고 말해본다. 당신의
호의를 통해 다소나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즐겨본다.
관계 개선을 위해 화를 낸다. 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의 상처를 상대에게
알려줌으로써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간다. 서로가 서로를 더 존중할 수 있도록 화를 낸다.
더 잘 화를 내기위해 노력한다.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은 현재의 불만과 괴로움에서 출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감정만이 남는다.
‘힘내’라는 말보다 ‘힘내’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힘을 얻는다.
욕망이 권리가 되길 바란다.
나는 일할 때만 회사원이고 싶고, 그 외의 순간에는 나이고 싶다.
지금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생각하지 않는 것. 지금을 견뎌야 하는
순간으로 만들지 않는 것. 지금 이 순간, 내에게 최선을
다해 좋은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보여주고, 좋은 걸 느리게
하는 것. 나는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어찌될지 모르는
나의 미래가 현재를 착취하지 않도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재를 갉아먹지 않도록 지금 나는 나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나는 의식적으로 쉰다.
모두들, 잘 쉬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잘 무의미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잘 쉰다.
이 리뷰는 문화충전200%의 서평이벤트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