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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25가 터지자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나"는 육군에 들어가고, 친구 박 군은 해병대에 지원한다. 10월에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뒤, 나는 그곳으로 파견을 나가게 된다. 어떤 우연인지 사무실이 있는 곳은 박 군의 아버지가 20년 동안 목사로 재직했던 교회의 맞은편이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박 군은 동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아버지의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됐다고 들었다. 박 군의 아버지는 전쟁이 터지기 얼마 전 행방불명 됐다고 했다.
평양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뒤, 장 대령의 부름을 받은 나는 전쟁이 나기 전, 목사 14명이 실종됐고 그중 12명이 총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장 대령은 나에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신 목사와 한 목사를 찾아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라는 명령을 한다.
소설은 전쟁 중인 상황을 배경으로 종교적 믿음, 진실과 거짓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전쟁이 나기 전, 빨갱이들에게 끌려갔다가 의롭게 죽어 순교자라 칭하는 열두 명의 목사와 신을 버리고 목숨을 구걸했다고 알려진 두 명의 목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이 대위라 칭하는 "나"였고, 그 외에 상사 장 대령, 신 목사와 장 대령을 알고 있는 고 군목, 그리고 아버지가 총살당한 열두 명 중 한 명이었다는 걸 알게 된 박 군이 등장했다. 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섞여있던 셈이었다.
진실이 뭔지 밝히는 과정이라는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 목사가 숨기려고 하는 게 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이 대위에겐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했다. 그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읽으면서 신 목사가 진실을 밝혀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종교가 있는 것 같지 않던 장 대령은 군인답게 전쟁 중인 상황을 이용하고자 진실을 밝히지 않았으면 했고, 신을 믿는 자들 역시 진실을 밝히지 않는 게 최선이라 이야기했다.
동료 목사들이 총살당하던 당시에 모든 것을 직접 지켜본, 그것도 목사라는 사람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뜻 신을 배반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종교와 관련된 사람은 대체로 거짓보다는 진실에 무게를 두고 살아갈 거라 예상되니 말이다.
하지만 전쟁 중인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사람들, 특히 교인들은 신을 향한 믿음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됐다.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열두 명의 목사는 순교자가 되었고 신 목사와 한 목사는 배교자가 되어 살아남았다는 게 진실로 굳어져 버려 많은 사람들의 욕을 먹는 상황이 됐다. 순교한 사람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상황에 진실이 과연 중요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의 판단은 저만큼 밀어두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게 됐다. 마치 순교자가 된 열두 명의 목사가 자신들을 구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신 목사는 진실보다는 교인들이 원하는 거짓을 말하게 되고, 그 이후에는 이 대위와 갈등을 빚게 된다.
거짓을 말하는 목사, 판단은 유보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문제가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게 아닌, 일상적인 상황이었으면 달랐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대위에게 공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믿는 신은 악으로 일으킨 전쟁과 그 후에 오는 가난, 온갖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신은 선한 사람들을 위해 그 무엇을 하는 게 아닌 악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부분을 읽으며 얼마 전에 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 등장한 한 인물이 떠올랐다.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된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던 신을 믿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전쟁도, 인류 멸망도,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떳떳하게 살고 있는 것도 다 신의 뜻이라고 믿고 있는 건가 싶어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목사로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신 목사는 굉장히 안타까웠다.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가 배교자가 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평양을 떠나지 않으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줬던 인물이라 이런 사람이 진정한 종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인들이 나쁜 짓을 하는 걸 뉴스에서 수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신 목사가 더욱 고결해 보였다.
소설은 종교적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신에게 인도하는 신 목사와 종교를 버렸다가 아버지로 인해 마음이 누그러진 박 군의 인생이 있었다. 그리고 훗날을 도모하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장 대령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퇴각 중에 사고를 당했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 대위와 무사히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온 고 군목도 있었다.
신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삶과 죽음이 이어졌다.
짧은 소설인데 종교적 믿음에 관해, 거짓을 진실로 믿게 하는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런지 마음과 머릿속이 복잡해졌었다.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믿음은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겐 진실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걸 믿는 게 더 중요하니 말이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죽은 열두 명을 어째서 모두들 대단한 순교자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죽은 자들은 모두 훌륭했고 성자 같았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무슨 증거가 있나요?" - P126
"우리는 한편으로는 신 목사의 양심의 순결과 그의 존경할 만한 평온을 변호해주어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든 거짓말한다는 행위 자체는 최소한 원칙상 한 인간의 양심에다 불신의 딱지를 붙이는 짓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상반된 작업을 우리가 어떻게 동시에 정당화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야." - P109
"목사님의 신은 목사님이 무슨 고난을 당하건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중략)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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