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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ㅣ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평점 :
오직 죽은 사람에게만 허락된 석상이 살아있는 리디아 아주머니에게 내려졌다. 그건 그녀가 현존하는 전설이란 뜻이었고, 무수한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길리어드가 수립됐을 무렵, 이전 국가에서 가정법원 판사였던 그녀는 저드 사령관과의 면담 자리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살아남는 것뿐이었던 터라 "예"라는 대답을 했고, 그 결과 비달라, 엘리자베스, 헬레네를 포함한 네 명의 창설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가장 먼저 저드와 손을 잡은 비달라 아주머니가 자신들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다는 걸 느낀 리디아 아주머니는 저드의 신임을 얻어 더 큰 권력으로 오랫동안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무언가를 위한 준비를 몰래 해나간다.
아그네스는 아버지 카일 사령관과 어머니 타비사 사이에서 시녀 없이 자연적으로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살았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카일 사령관은 시녀에게 살해당한 손더스 사령관의 미망인 폴라와 재혼을 했다. 폴라가 아기를 낳기 위해 시녀 오브카일을 들인 이후 아그네스의 주변은 혼란스러워졌다.
아그네스가 타비사의 친딸이 아닌 길리어드에서 탈출하려던 시녀에게서 구출한 아기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 말이 진실이라고 밝혀져 자신의 친모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임신한 오브카일이 아기를 낳다가 사망하면서 그 죽음을 마음에 깊이 새겨둔다.
길리어드와 가까운 캐나다에 사는 데이지는 부모 닐, 멜라니가 왠지 이상하다. 부모라고 하기엔 묘하게 서먹한 구석이 있고 평범하기만 한 그녀를 과보호하기 일쑤다. 그리고 어릴 때 사진이 하나도 없는 것도 좀 의아하다.
데이지의 16살 생일 아침, 멜라니는 그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오늘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학교가 끝난 후, 데리러 왔을 멜라니의 차를 찾던 데이지 앞에 멜라니의 친구 에이다가 나타났다. 에이다는 닐과 멜라니가 운영하는 중고의류 가게 앞에서 두 사람이 탄 차가 폭발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늘이 데이지의 16살 생일도 아니고, 닐과 멜라니가 그녀의 부모도 아니라는 말을 꺼냈다.
여자를 아기 낳는 도구로만 취급하던 충격적인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이 34년 만에 출간됐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시녀 이야기> 이후 도망친 오브프레드의 행방이나 길리어드가 무너진 상황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1985년 이후 34년 만에 쓴 후속작이지만, 소설 시점으로는 15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작에서 무시무시한 존재로 표현됐던 리디아 아주머니, 길리어드 내에서 지체 높은 사령관의 딸로 사는 아그네스, 그리고 길리어드와 전혀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던 데이지가 주인공이었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자신이 쓴 기록으로, 아그네스와 데이지는 녹취록을 통한 증언으로 세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소설이 진행됐다.
길리어드는 여전히 쓰레기 같은 전체주의 국가였다. 아내와 시녀의 존재 이유는 변하지 않았고, 수가 적은 사령관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였다. 그건 길리어드 수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저드 사령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손주를 볼 나이에 가까웠을 그는 13살쯤 된 아이들을 조혼시키는 길리어드의 풍습을 아주 뭐 같이 잘 활용했다. 아내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해도 남자에게는 절대로 죄를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저드 사령관은 몇 번이고 어린 아내를 맞이하고 또 맞이했다. 후반으로 가면서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밝혀지는 부분에서 정말이지 화가 치솟았다. 그런가 하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는 남자라는 이유로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아도 고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분노할 부분이었다. 늙은 권력자와 권력자의 개가 살기 좋은 길리어드였다.
유일하게 길리어드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을 지닌 여성은 아주머니들이었다. 아내, 시녀, 하녀들은 아기를 낳을 의무가 있었는데, 아주머니들은 그 의무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길리어드를 위해 일하며 아직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여성의 의무에 대한 교육을 하는 그녀들은 결혼을 하지 않을 신성한 권리를 지녔다. 여성의 인권이 개만도 못 한 길리어드에서 아주머니 계급, 그것도 창설자들 중 최고 권력을 지닌 리디아 아주머니가 엄청난 존재라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이런 그녀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는 초반부터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읽는 동안 헷갈림의 연속이라 리디아 아주머니를 우리 편(?)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닌지 선뜻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확신이 서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저드 사령관도 미친 소아성애자로만 느껴지진 않아서 리디아 아주머니와 독대를 할 때마다 괜히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내내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비달라 아주머니의 존재 또한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시녀 이야기> 말미에 길리어드가 붕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말은 알고 있는 셈이었지만, 어떻게 붕괴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그 붕괴에 리디아 아주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아그네스는 권력자의 딸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데이지는 과연 무슨 관련이 있나 싶었다. 데이지의 증언이 등장했을 때 자신의 삶이 가짜였다고 먼저 밝혔기 때문에 중요한 캐릭터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밝혀진 그 가짜 삶 이면에 있는 진짜 삶은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줬고, 그 충격은 한 번뿐만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알아챌 수 있을 테지만 나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이렇게 엮은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고 말았다. 계속 언급되던 "그 존재"와 전작과의 연관성, 다른 캐릭터와의 관계까지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작 <시녀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아무래도 전작은 결말이 잘 끝나긴 했어도(확인은 불가능했지만) 길리어드 설정에 너무 화딱지가 나서 내내 답답해하며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후속작인 이 소설은 가장 힘없는 존재들이 남성 권력 중심의 전체주의 국가를 무너뜨렸다는 걸 보여줘서 좋았다. 달걀로 바위 치기가 그야말로 성공한 내용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을 제법 읽은 편인데 작가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멋진 글 솜씨와 탁월한 구성에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 읽어야겠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희생해야 한단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희생을 치르고 여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희생해야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세상이 나뉜 거란다." - P118
by. 리디아 아주머니 내 삶은 아주 다를 수도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시야를 넓게 가지기만 했더라도. 일부가 그랬듯, 충분히 이른 시기에 짐을 싸기만 했더라도, 그래서 그 나라를 떠나기만 했더라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바보같이 그 나라가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몸담았던 나라와 같다고 믿고 있었다. - P98.99
by. 아그네스 원래 그렇게 하는 법이라고, 정해진 순리라고, 길리어드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는 법이라고 했어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아주머니들이 동의한 일이었어요. 그렇게 가르쳤어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 P147
by. 데이지 원래는 덕망 있고 신심 깊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데, 광신도라면 살인을 일삼으면서도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고 에이다가 설명해 주었어요. 광신도는 살인이, 아니 어떤 사람들을 죽이는 건 도덕적이라고 믿는다고 말이에요. - P288
"출범 당시 길리어드의 목표는 순수하고 고결했다, 이 점에는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겠지.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빈번히 그러하였듯, 이기적이고 권력에 눈이 먼 자들에 의해 전복되고 더럽혀지고 말았지. 자네들도 틀림없이 그 점을 바로잡기를 원할 걸세."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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