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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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25살의 엘리자베스와 벡은 결혼한 지 겨우 7개월 된 신혼부부였다. 그들은 7살 때부터 서로를 소울메이트로 여기며 오랜 시간 한결같은 사랑으로 곁을 지켜왔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이나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첫 키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겐 특별한 첫 키스를 기념하기 위해 벡과 엘리자베스는 매년 추억의 장소인 할아버지의 호수를 찾았고, 그날 역시 같은 이유로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에게 로맨틱한 기념일이었던 그날 엘리자베스는 누군가에게 납치되었고, 비명을 듣고 아내를 찾으려던 벡은 머리에 야구배트를 맞고 기절했다.
벡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동안 엘리자베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시 유명한 연쇄살인범이었던 킬로이의 낙인이 엘리자베스의 뺨에 찍혀 있었다.

현재.
소아과 의사가 된 벡은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떠난 뒤 벡에겐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없었다. 벡은 견디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와의 첫 키스 기념일을 앞둔 어느 날, 그에게 의문의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분명 자신과 엘리자베스만 알 수 있는 암호로 쓰인 내용의 메일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메일 속 링크를 클릭한 벡은 어느 도시의 CCTV 화면 속에서 살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게 된다. 화면 속 엘리자베스는 벡이 지켜보고 있다고 확신한 듯 그에게 입모양으로만 말을 했다.
그때부터 벡은 엘리자베스의 죽음과 관련된 8년 전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영혼의 단짝이었던 아내를 연쇄살인범에게 잃고 살아가는 남자 벡은 겉으로는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을 뿐 영혼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엘리자베스였기 때문에 그녀의 빈자리는 그 누가 와도 메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 데이트를 해보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의 흔적만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 벡에게 온 메일은 그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줌과 동시에 의문이 꼬리를 물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살아 있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렇다면 왜 8년 동안이나 죽은 사람처럼 지내야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벡은 엘리자베스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뒤늦게 파헤쳤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발생했다. 엘리자베스의 죽음 이후 괴로움으로 인해 연락을 끊었었던 그녀의 친구 레베카를 8년 만에 찾아가 만났었는데, 벡이 다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베카가 총에 맞아 죽었다. 경찰은 물론이고 FBI까지 개입되어 벡을 살인 용의자로 특정한 뒤에 쫓기 시작했다. 레베카를 만나기만 했을 뿐인데 졸지에 살인자가 되어버린 벡은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1인칭 시점으로만 진행됐다면 벡을 의심했을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사람의 시점이 등장해 벡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다는 게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리핀 스코프라는 노인은 자선 사업을 하는 이였는데, 그가 이 모든 걸 꾸미고 있다는 게 금세 밝혀졌다. 물론 그 이유는 한참 지난 후에야 공개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핀은 부유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일을 돕는 전문가들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예삿일이었고, 증거 조작으로 벡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 또한 식은 죽 먹기였다.
소아과 의사일 뿐 선량하게만 살아온 벡이 과연 이런 무서운 사람들을 당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덕분에 벡에게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하겠다고 한 아이의 아빠 타이리스가 큰 도움이 되었다. 마약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선한 자의 편에 선 타이리스 덕분에 벡은 몇 번이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한 벡에게 씌워진 단서의 맹점을 파악한 FBI 요원 칼슨이 있었던 것도 의외였고, 다행이기도 했다.

이렇게 벡에게 살해 누명을 씌우려는 스코프와 도망치는 벡, 그리고 사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호이트까지 등장해 이들의 관계와 비밀들이 밝혀지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을 바로잡는 과정으로 흘렀다. 그런 와중에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고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도할 만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비밀을 밝혀 놀라움을 안기긴 했지만 말이다.

몇 년 만에 읽은 할런 코벤의 소설은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년에 재미있게 읽은 어떤 책이 떠올랐다.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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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엘리자베스는 분명 나이 든 모습이었다. 최소한 8년 정도는. 유령은 머리 스타일을 바꾸지도 않는다. 나는 달빛 아래서 봤던, 등까지 내려오던 아내의 땋은 머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방금 본 그녀는 유행하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 일곱 살 때부터 틈날 때마다 들여다본 아내의 눈.
엘리자베스가 틀림없었다. 아내는 살아 있다. - P69

익명의 이메일, 암호, 경고. 아내가 그토록 깐깐하게 예방책을 마련해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풀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내는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수수께끼 같은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했던 것이다. 아내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 P277

그래서 왜 갑자기 벡이 범인이라는 추측에 의심을 갖게 됐지?
사건이 너무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어서. 모든 증거가 그들의 이론에 딱딱 맞춰 줄을 서고 있어서. 어쩌면 그의 의심이 ‘직감‘만큼이나 신뢰할 수 없는 무언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297

"그럼 우리도 맞서야죠." 나는 애써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목을 벨수록 더 많은 머리가 돋아나는 괴물 얘기 말이야."
"하지만 결국에는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는 법 아닙니까."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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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역사 속 명화 이야기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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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가 16세기, 정확히는 1517년에 로마 교황청의 부패 실태를 고발한 역사적 사건은 훗날 '종교 개혁'으로 불리게 됐다. 그로 인해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프로테스탄트로 양분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종교미술을 성경이 엄격히 금지하는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교회를 장식한 회화와 조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책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술의 변화가 당시 유럽의 상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종교 개혁으로 설명해 줘서 이해하기 편했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회화와 조각의 주제가 당연히 종교적이었다. 성경 속 내용이나 인물, 사건과 관련된 미술이 주를 이뤘고, 그것들을 주문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교회인 가톨릭 측이었다. 하지만 종교 개혁이 일어나 신교가 해석한 우상숭배 금지로 인해 이전에 예술가들이 그리고 만들어놓은 모든 예술품이 파괴된 것이었다.
내가 무교이긴 해도 책으로 읽으며 접한 종교 회화와 조각들을 보며 정말 고결하고 숭고한 느낌을 받아 가슴이 벅찰 때가 있었는데, 그런 예술품을 종교 개혁이라는 명분만으로 파괴했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 달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아무튼, 종교 개혁으로 인해 종교화는 찾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게 당연했다. 그로 인해 예술은 점점 서민층과 가까워졌다.
그걸 가장 먼저 소개한 게 네덜란드의 미술 거래였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 공화국으로 변모했는데, 회화 시장은 기성품의 전시 판매라는 전략을 짰다고 한다. 교회와 왕실의 프레젠테이션 도구로 활용되던 미술품이 시민의 일상생활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새로운 콘셉트의 상품으로 변신했다. 꽃 같은 소재는 종교 미술에서 배경이나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는데, 종교 개혁 이후 주제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회화 양식이 되었다.
시민이 미술품 구입에 활발히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들이 주인공이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결과 네덜란드에서 미술사 최초로 하녀를 화폭에 담는 그림이 등장했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 그래서 유명한 것이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당시 빵집 주인이 페르메이르 집의 3년 치 빵값 대신 받은 게 바로 그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 잘 알려진 그림이 당시엔 외상값 대신으로 거래된 그림이라고 하니 뭔가 재미있으면서도 화가의 형편을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세계 역사상 위대한 천재들이 많고 많지만, 내 기준으로 가장 천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그런 다빈치의 역작 중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벽에 그려진 그림이고,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귀하게 모셔져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이 보러 오는 작품은 <모나리자>이지만,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 <최후의 만찬>이다. 그 이유는 <최후의 만찬>이 성당 벽에 그려진 그림이라 부동산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할 때의 조건 중 하나가 부동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또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손이 느리기로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은 3년으로 비교적 빨리 그린 편이라고 하고, <모나리자>는 15년 동안 그렸다고 한다. <모나리자>를 그린 속도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다빈치가 그린다면 4천 년이 걸릴 거라고 한다. 천재 화가의 새로운 부분을 알게 되어 재미있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들을 후원하게 된 계기와 당시엔 외면받던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이 노련한 미술상으로 인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내용 등 부와 예술에 관련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저 보기만 하고, 화풍이나 작가의 심리가 그림에 미치는 영향과는 다른 관점으로 미술에 대해 보게 된 책이다. 다양한 시선으로 예술품을 보는 것도 식견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하다. 그래서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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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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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호기롭게 외국으로 떠났다가 실패를 하고 돌아온 '나'에게 한 커플이 연락을 해왔다. 정은과 현수 커플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판매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보다 몇 살 연상인 그들의 글을 봐주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게 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과거에 헤어졌던 연경과 꿈꾸던 연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깨닫는다.
내일의 연인들 대학원생 정안에게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던 선애 누나가 전화를 했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됐다고 말하는 선애 누나는 집이 잘 팔리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대신 그 집에서 지내고 관리를 하며 부동산을 통해 온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침 부모님의 눈치가 보이고 학교가 누나의 집에서 가까워 정안은 이사를 강행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안은 여자친구 지원과 종종 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 보니 선애 누나가 왜 이혼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진다.

더 인간적인 말
갑자기 변호사의 연락을 받은 '나'는 당연히 아내 해원이 고용한 이혼 전문 변호사의 연락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변호사가 말하는 내용은 이모 이연자가 나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건데, 이모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이틀 후, 해원과 함께 찾아갔을 때 이모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반겨줬다. 어물쩍 넘어갈 수 없어서 유산 이야기를 꺼내자 이모는 스위스에 가서 죽을 거라고 말했다.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불행하고 불운한 사고가 일어나는 상상을 자주 하는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 이유정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에 그녀의 집을 찾았다. 너무 작은 아기가 신기했는데, 유정이는 나에게 아기를 안아보라며 안겨주려고 했고 나는 왠지 겁이 나서 아기를 안기를 주저했다. 그 짧은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못됐는지 아기를 놓쳤고, 그 작은 아기는 거실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지고 말았다.

기적의 시대
은주와 결혼한 '나'는 옛 연애에 대해 서로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물론 은주나 내가 모든 연애를 이야기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성준 부부와 친하게 지내며 함께 어울리게 됐다. 그러다 연인도 뭐도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연희에 대한 이야기를 성준이 꺼냈다.
서로의 나라에서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동네에서 술을 마시다가 조아현을 알게 됐다. 옆 테이블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던 조아현과 가까워진 후 우리는 종종 만나 여기저기 함께 돌아다녔다.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에 조아현이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 늘어놓고, 심지어는 먹은 음식들과 누구를 만났는지까지 쓴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 나는 조아현의 싸이월드에 종종 들어가 그녀의 글을 읽었고, 그녀와 이유 없이 멀어진 후에는 SNS에 들어가 그녀를 찾았다.

길을 잘 찾는 서울 사람들
'나'는 수진과 함께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방문하며 위로의 선물로 줄 화분을 뒷좌석에 싣고 한남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대를 잡은 수진을 보며 나는 평소와 달랐던 아침에 대해 떠올린다. 말다툼이나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게 아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지 않았던 아침으로 인해 모든 게 짜증이 난다.
두 사람의 세계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언니가 있는 서울로 올라온 이영선은 구로동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막내인 그녀는 종종 공구상가에 가서 물건을 사 오는 잔심부름을 하곤 했는데, 그 가게에서 하남영을 만나게 됐다. 영선이 먼저 남영에게 말을 건넨 일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언니가 남자를 함부로 만나고 다니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음에도 영선은 남영의 아기를 가져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됐다.



정영수 작가의 소설집은 제목에 들어간 '연인들'이라는 단어에서 연상할 수 있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다. 과거에 연인 혹은 인연이었던 사람과의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가 있었고, 현재는 연인 혹은 부부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우리들>과 <두 사람의 세계>였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연애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나'를 찾아온 정은, 현수와 가까워지면서 스스로 정립한 이상적인 연인 관계를 마침내 발견하게 된 이야기였다. 화자는 한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그리고 다시 헤어지게 된 연경을 떠올리며 그녀와의 연애도 이들과 같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소설 말미에 정은과 현수의 관계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며 내게는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는 놀랍게도 그 진실에 관해서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그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라는 테두리로 묶여 있던 커플과 자신이 산산조각 나서 이제는 다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입장이라 기억에 남았다.
<두 사람의 세계>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급하게 결혼하게 된 이야기였는데, 알고 보니 화자가 그들의 아들이었다. 남자의 데이트 폭력으로 진작 헤어졌어야 마땅했지만, 여자는 아기가 생기는 바람에 헤어질 수 없게 됐다. 이후 부부가 된 그들은 서로에게 애정이 없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아들은 그걸 모두 봐왔다. 그러다 아들의 손에 이끌려 법원에 가서 이혼을 결정하는데, 마지막 어머니의 결정이 내게는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남겨졌다. 늘그막에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보다 애정 없는 남자,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남자와 사는 것이 더 나았을까 정말 의문이다. 이 단편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이 왠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연에 관한 이야기 중 큰 놀라움을 안겼던 건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이었다. 불행을 상상하는 남자에게 상상도 해보지 못한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그것도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의 아기에게 말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였다면 정말이지 못 견디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물론 주인공 또한 죄스러운 마음에 사죄를 하고 또 했지만, 친구의 단호함으로 사과도 더는 하지 못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와의 우정은 당연히 끝이 났고, 불행한 상상을 하는 건 여전했는데 그 불행의 끝엔 늘 친구의 아기가 있었다는 게 뭔가 모순적이면서 씁쓸했다. 그 불행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 친구였던 타인의 불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읽기 전과 후의 느낌이 완전히 다른 소설이라 내게는 반전과도 같은 책이었다.

정은과 현수는 내가 언젠가 막연히 나에게도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삶, 진짜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엇보다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그랬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한 독립체로 대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고 그것은 사랑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아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결합으로 보였다. 그건 내가 구체적으로 그려보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았을 완벽한 형태의 관계 같았다. <우리들> - P22

연인이 된다는 것은 두 개의 삶이 하나로 포개진다는 뜻이다. 그러다 결별의 순간이 오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원래의 삶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잃어버리기도 한다. <두 사람의 세계> - P185

그 아이는 이제 내게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불운을 뜻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존재했다. 나는 유정과 내가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우정을 유지해왔던 것과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며 삶의 아이러니를 느끼곤 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우스운 과거 대신 불행을 매개로 이어져 있었고 서로를 떠올리는 것은 어떤 불운을 상기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불운을 떠올리는 일은 서로를 연상시키는 일이 되었다.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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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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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엘리 벨의 가족은 남들이 보기엔 이상하고 특별해 보일 테지만, 엘리에겐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엄마 프랜시스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가정 환경으로 인해 그렇게 되지 못했고 지금은 마약을 한다. 엄마에게 마약을 대줬던 애인 라일 아저씨는 밉지만, 엄마가 마약을 끊게 해준 사람 역시 라일 아저씨이기에 엘리는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6살 때 이후 말을 하지 않고 허공에 글씨를 써서 하고픈 말을 하는 형 오거스트는 엘리에겐 너무나 특별한 사람이다. 또한 가족은 아니지만 엘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베이비시터인 슬림 할아버지는 전설의 탈옥왕이라 불리는 멋진 사람이다.

이렇게 특별하고도 평범하게 살아가던 엘리는 라일 아저씨에게 마약을 대주는 지역 업계의 마약왕 타이터스 브로즈의 마약을 어느 정도 빼돌렸다가 들키는 바람에 상상하지 못했던 길로 접어든다. 라일 아저씨는 타이터스의 수하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됐고, 엄마는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갔다. 거기다 엘리는 타이터스의 충직한 부하 이완 크롤에게 오른손 검지를 잘렸다. 그 후 엘리와 형은 공황장애를 안고 있는 아빠에게 보내져 함께 지내게 된다.

12살 소년 엘리의 가족과 주변엔 독특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마약에 빠진 엄마와 라일 아저씨는 독특하다기보다 짐짓 무책임한 사람이었으나 이내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베이비시터인 슬림 할아버지가 엘리와 오거스트를 돌봐줬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굉장히 특별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가 몇 번이고 탈옥하고 붙잡히기를 반복한 슬림 할아버지는 단순하게 보면 나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슬림 할아버지가 진짜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라는 뉘앙스가 있었기에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보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엘리를 바른길로 이끌어주려고 애를 썼던 슬림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엘리가 엇나가지 않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타이터스로 인해 독특하지만 평온했던 엘리의 일상이 산산이 조각났다. 형을 제외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건 물론이고 미운 구석이 있긴 해도 좋아했던 라일 아저씨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엘리에게 특별했던 오른손 검지가 잘리고 말았으니 최악의 최악만 남은 셈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일어날 일이긴 했다. 마약왕의 마약을 라일 아저씨가 빼돌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실을 밀고한 사람의 정체였다. 처음엔 엘리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베트남계 오스트리아인 대런 당의 엄마 빅 당이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 밝혀진 사실은 치가 떨리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엘리가 복수를 해야 할 대상이 한 명 더 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어렸던 엘리였기에 갑작스레 나타난 누군가의 도움을 받긴 했는데, 그건 전적으로 과거의 친절한 엘리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 소설은 엘리의 성장과 가족과의 재회로 이어지며 복수를 위해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가는 내용도 곁들였다. 고작 12살의 나이에 갖은 경험을 해야 했던 어린 엘리는 18살이 되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겉과 속이 단단한 성인이 되었다. 엘리의 곁을 지키며 믿어주던 오거스트 형이 있었고, 헤어졌던 엄마와 아빠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 만나 마음을 빼앗긴 이후 오랫동안 그 마음을 지키며 바라봤던 케이틀린 스파이스도 엘리를 믿어줬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타이터스와 마주했을 때 엘리는 두려웠지만 꿋꿋하게 뜻을 밀고 나갔다. 그로 인해 엘리와 같은 신세가 될 뻔한 어린 소년의 구원자가 되었고, 정당하게 복수를 성공시켰다. 그 과정이 긴박하게 진행되어 후반엔 깊이 몰입했다.

초반엔 무슨 소설인가 싶어 집중이 잘되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지나고 난 후에는 엘리의 성장과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두께가 있는 책이지만 금세 읽을 수 있었다.

"난 좋은 사람이야." 슬림 할아버지가 말한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 누구나 다 그래, 꼬마야. 우리 안에는 좋은 면도 나쁜 면도 다 조금씩 있거든.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려워.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지." - P223

"그날 병원에서 네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에 대해 물었지, 엘리. 나도 그 생각을 해봤다. 아주 많이. 그저 선택의 문제라고, 그때 말해줬어야 하는데. 네 과거도, 엄마도, 아빠도, 네 출신도 상관없어. 그저 선택일 뿐이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말이다. 그게 다야." - P351

난 좋은 사람이 하는 일을 할 거예요, 슬림 할아버지. 좋은 사람은 무모하고, 용감하고, 본능적인 선택으로 움직이죠. 이게 내 선택이에요, 할아버지. 쉬운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는 거죠. - P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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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11
단요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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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7년, 세상은 온통 물에 잠겨 있다. 지구의 모든 얼음이 녹기 시작해 해수면이 상승했고 마침내 땅을 뒤덮었다. 평평하고 낮은 땅에서 건물이나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여러 산들을 터전 삼아 살기 시작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그렇게 산에서 모여사는 사람들 중 '물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깊은 물에 잠수해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썼었던 여러 물건을 구해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노고산 물꾼인 선율과 남산 물꾼 우찬이 시비가 붙어 내기를 하기로 한다. 각자 어떤 것들을 걸고 보름 동안 물속에서 더 쓸 만한 물건을 건져오기로 한다.
물에 잠긴 어느 건물에 들어간 선율은 멋진 물건을 찾다가 여러 큐브가 쌓인 걸 본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기계 인간이 있었고, 그중 하나를 가지고 물 위로 올라온다. 선율의 잠수 파트너인 지오와 기계 인간을 깨울지 말지 고민을 하다가 내기 생각이 떠올라 일단 깨우게 된다.

그렇게 깨어난 소녀 채수호는 자신이 왜 기계 인간으로 깨어난 건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선율에게서 내기에 대해 듣고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다만 수호는 자신이 잃어버린 몇 년 간의 기억을 찾고 싶다고 하며 내기에 응하는 대신 선율에게 부탁했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세계는 물에 잠기게 됐다. 아파트처럼 높은 곳에 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러면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땅이 물에 잠기면 당연히 전기는 들어오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아파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사람들은 경험으로 깨달은 모양인지 산으로 가서 터를 이뤘다. 땅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곳이라면 적어도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키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터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구역에 따라 나뉘게 됐고, 각자 하는 일들도 있었다.

선율은 또래 남자아이인 지오와 아직 어린아이들, 그리고 삼촌이라 부르는 어른과 함께 노고산에서 살았다. 삼촌은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라 지오에게도 이것저것 알려주었고, 때로는 다른 산에 사는 사람의 부탁을 받고 기계를 고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선율이 기계 인간 수호를 데리고 왔을 땐 다른 산에 가 있었기에 선택은 오로지 두 아이의 몫이 되었다.
기계 인간은 어떤 사람의 기억을 온전히 집어넣어 만든 존재였다. 외형까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서 얼핏 보면 구분하지 못할 만큼 정교했다. 그래서 선율의 선택에 따라 깨어난 수호는 진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수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아팠다는 것과 부모님이 자신을 기계 인간으로라도 만들고 싶어 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데 자신이 기계라는 걸 쉽게 인정하는 수호의 담담함이 내게는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수호를 찾아내서 깨운 선율마저도 그 상황을 안타깝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아파하지 않았기에 기억에서 지워진 과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수호가 잃어버린 기억을 채 찾기도 전에 삼촌과의 과거 인연이 드러났고, 남산으로 간 우찬과 삼촌이 왜 사이가 나쁜지도 밝혀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호가 잃은 기억을 되찾게 되면서 삼촌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아주 먼 미래를 배경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같은 상황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부족함 없던 시절이라고 추억하게 된 과거와 수몰 이후가 더 익숙한 세대의 현재를 기계 인간 수호의 등장으로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고, 그런 상대에게 변명도 하지 않았던 과거를 향해 이해와 위로를 말했다. 그 누구보다 인간다움을 가지고 있던 수호로 인해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앙금이 풀어진 것이었다. 누군가와의 앙금은 물론이고 홀로 좀먹던 응어리까지 풀어지게 했다.
그 과정을 덤덤하지만 올곧은 방향으로 그려내고 있던 소설이었다.

청소년 소설이지만 성인이 읽어도 깊이 와닿는 이야기였다. 세상이 물에 잠겨버렸어도 사람들은 다른 이를 향한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참 좋았다.


닿지 못할 행복은 생생한 만큼 슬픔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그대로 남아 후회가 된다. 살아가다 보면 지나간 순간을 다시 볼 기회가 생기지만 그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과거가 오늘을 옭아매는 것이다. - P159

지오는 끝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마음의 힘일 것이다. 뾰족뾰족한 기억 위에 시간을 덧붙여서, 아픔마저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고통을 지우는 게 아니라, 잊는 게 아니라, 피해 가는 게 아니라, 그저 마주보면서도 고통스럽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다시, 다른 시간의 발판이 된다는 것.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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