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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새 이야기 진아는 빈티지 옷 가게에서 여는 영화 상영회에 갔다가 천희를 만났다. 그 이후로 천희와 가까워진 진아는 그에 대해 알아가며 좋아하는 마음을 홀로 키워나갔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을 때 천희는 여자친구가 있는 일본에 가서 옷 가게를 낼 거라고 하며, 진아에게 파를 심은 화분을 이별 선물로 건넸다. 평소에도 묘한 느낌이 있는 천희 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슬퍼하는 진아를 향해 파가 말을 했다.
나주에 대하여 단이는 입사 전부터 나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주가 자신의 연인인 규희의 전 여자친구라는 걸 알게 된 이후 그녀의 SNS를 염탐해왔기 때문이다. 나주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단이는 회사에서는 그런 것들을 모른 척하며 그녀를 대했다. 처음엔 호기심에 시작했던 나주에 대한 관심은 어느새 다른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시에 단이는 나주에게 규희에 관해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꿈과 요리 대학 시절에는 그리 가깝지 않았던, 오히려 서로를 피해 다녔던 수언과 솔지는 사회인이 되어서야 친구가 됐다. 요리를 좋아하는 솔지는 수언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맛있는 걸 먹기도 하는 등 우정을 쌓아나갔다. 그러다 수언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침내 하게 됐을 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던 앙금이 폭발하고 말았다.
근육의 모양 재인은 해보지 못한 것들을 했을 때 자신에게 무언가가 남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별도, 파혼도 그래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이번엔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재인을 가르치는 필라테스 강사 은영은 대기업에 다니다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직업을 바꿨다.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붙이는 일은 이제 그만하려고 했는데, 은영은 여전히 사람을 향해 관심을 기울인다.
척출기 영은은 귀에 중이염이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본 결과 진주종이라는 병으로 밝혀져 수술을 앞두고 있다. 그러던 중 영은은 대학 친구를 통해 주현을 알게 됐다. 수술로 인해 준비하던 시험도 그만두고, 일도 하지 못하게 된 영은에게 주현은 마음의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영은이 그에게 고백을 하면서 주현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았지만, 두 사람에겐 각자의 아픔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다.
정체기 포럼에서 만난 은주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여자친구의 전 여자친구가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하는 문자를 얼떨결에 본 이후 그게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유진은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마음이 쓰인다.
쉬운 마음 송화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회사에서는 밝히지 않았다. 어릴 때 몇 번 충동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이후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회사 후배 현정에게 눈길을 빼앗긴다. 회사에서 누군가와 몰래 사귀었다가 헤어진 현정은 아무리 봐도 이성애자였기에 송화는 자신의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다잡았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현정이 부쩍 자신을 따르며 친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침묵의 사자 어느 날부턴가 지영에게 사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자는 그녀의 아프고 추운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따뜻하게 보듬어주었다. 그러자 지영은 이혼 후에 영국으로 떠난 지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이혼 후 떠나고 싶어 하는 지은의 마음보다 자신을 여기에 두고 혼자 멀리 가는 원망이 더 짙었다. 자신에게 왜 사자가 찾아왔는지 깨닫게 된 지영은 그래서 그때의 지은을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면서 지영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에 대해 직접 대면하려고 행동에 옮겼다.
김화진 작가의 소설집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생긴 감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기도 했던 이야기들이다.
8편의 단편들 중에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근육의 모양>과 표제작인 <나주에 대하여>였다.
<근육의 모양>에는 재인과 은영이라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필라테스 강사와 회원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접점이나 대화는 오로지 필라테스 강의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서로 상반된 두 사람이 상대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재인은 남들이 보기에 부정적인 것들도 경험이라 플러스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별이나 절교, 심지어는 파혼까지도 말이다. 재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런 단편적인 면을 봤을 때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건강하다고 느껴졌다. 은영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다니는 와중에 상사로 인해 너무나 감정 소모가 심해 그만두고 필라테스 강사가 된 사람이었다. 은영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재인에 비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깊지 않아서 타인에게 조금은 휘둘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누군가에게 조금은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필라테스 강사와 회원으로 만나면서 필라테스를 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표정이나 행동 등을 통해 조금씩 마음이 기울어져 갔다. 낯선 타인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도 뭔가 인간적인 끌림을 느낀다는 게 조금은 공감이 되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주에 대하여>는 초반에 느낀 감정과 중반 이후에 무언가가 밝혀진 이후에 느낀 감정이 사뭇 달라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남겼다. SNS로 염탐하던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인 나주가 회사에 들어오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긴 했다. 아무리 남자친구가 한 말이 있다고 해도 그건 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 것 같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달라진 건 중반 이후 비밀이라고 할만한 게 밝혀지면서 단이를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단이에게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날에 관해 나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테니 조금은 심술궂은 마음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예의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려줘야 한다는 마음도 존재했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넌지시 건넨 말은 나주가 알아채기에 충분했나 보다. 이후로 나주가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묘했던 건 나주를 향한 단이의 감정이었다. 분명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였을 뿐인데, 단이에겐 나주가 어느새 가까워지고 싶은 회사 동료 내지는 그 이상인 친구까지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복잡해서 스스로조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단이를 이해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새 이야기>와 <침묵의 사자>는 뭔가 판타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이야기였다. <척출기>는 나름 놀라운 비밀이 밝혀졌는데, 그 끝을 생각하면 아픔이라는 게 누군가와의 관계를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버리는 거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쉬운 마음>은 뭔가 귀여운 구석이 있는 이야기였다.
짧은 이야기들이 담긴 단편집은 내가 좋아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마음을 기울이며 읽었다.
나는 무시할 수가 없어. 편한 대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아. 그 사람은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자기 모양을 바꿀 때마다 내 마음의 모양도 바뀌어. 따라서 싫었다 좋았다 하게 돼. 그게 너무 힘들어. 다른 사람이 내 모양을 바꾸는 걸 더 보고 있을 힘이 이제 나에게는 없어. <근육의 모양> - P132.133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재인은 속으로 ‘해본 것‘ 리스트에서 유독 도드라진 단어들을 읊었다. 독립, 절교, 파혼, 끊어진 관계들의 기록을. 그리고 생각했다. 그 리스트는 흉터가 아니라 근육이야. 누가 날 해쳐서 남은 흔적이 아니라 내가 사용해서 남은 흔적이야. <근육의 모양> - P150
너는 너만 그렇게 현명하고, 그래서 남이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도 알고 있고, 그걸 나만 모른다고 생각하지. 나만 너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네가 아무리 가까이 와도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더 깊이 너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사이란 건 그 선을 조정해가며 우리 둘이 만들어가는 걸 텐데 너는 이미 선이 있고 항상 단호하고 나는 선이 있던 적이 없으니까. <나주에 대하여> - P64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서, 가끔 너무 무섭지 않니? <척출기>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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