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유럽의 도시 - 4가지 키워드로 읽는 유럽의 36개 도시
이주희 지음 / 믹스커피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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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 작가가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쓴 책이다. 책 제목에 들어간 '사랑한'이라는 동사에 걸맞게 해당 도시에 관한 설명에서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도시를 좋아한 게 아니라 그 도시에 관해 관심을 기울인 덕분에 알지 못했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과거의 역사로 인해 뮌헨과 베를린에 관한 설명은 인상에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독일 국민들이 나치즘에 선동됐을 당시에 소피 숄이라는 평범한 대학생은 히틀러의 거짓과 야만을 폭로하는 '백장미단'의 유일한 여성 단원이었다. 이 백장미단이 나치즘의 만행을 고발하는 전단을 뮌헨대학교 복도와 강의실에서 뿌리다가 체포됐는데, 잔인한 고문과 취조를 당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이 사건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2021년에 100살이 된 한 남성이 강제수용소에서 일하며 집단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는 글을 남겼다. 나치 전범을 추적해 과거의 죗값을 치르게 하는 데에 일말의 주저함이 없는 독일은 가깝지만 먼 다른 나라와 크게 비교가 되는 점이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지하에는 텅 빈 책장으로 존재하는 지하 도서관이 있다. 1933년 선동의 달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더러운 정신들을 모조리 태워라!'라는 외침으로 인해 군중이 책 더미에 횃불을 던졌다고 한다. 카를 마르크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유대인 학자와 작가들의 책은 물론 나치를 비판한 책까지 분서 목록에 올랐다고 한다. 국민을 선동하기 위한 나치즘으로 인해 수많은 작가들은 탄압을 당했고, 그로 인해 많은 작가들이 독일을 떠나 망명했다. 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베를린 심장부인 베벨 광장 한복판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지하 도서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우고 싶은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독일은 알면 알수록 진정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야경이 아름답다는 부다페스트를 설명하던 부분이 기억에 남은 건 '글루미 선데이'에 관한 언급 때문이었다. 레조 세레스의 곡 '글루미 선데이'는 동명의 영화로 익숙했기에 기억에 남았다. 곡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 건 물론이고 작곡가 본인 또한 자신의 음악을 들으며 생을 마감했다니 더욱 애처롭다.

덴마크 코펜하겐은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더 많은 도시라고 한다. 자동차에는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차도가 자전거 도로보다 좁고, 주차 공간 또한 적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주차 요금도 비싸단다. 지구를 위한 친환경 정책을 실천하는 도시이고, 정책을 잘 따르는 시민들 또한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책을 통해 여행한 기분이다. 역사, 문화, 환경 문제까지 두루 다루며 깊이 있게 도시를 들여다보게 됐다. 책으로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 직접 그 나라, 그 도시를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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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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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의 밤 방송국 작가 은하는 암으로 인해 휴직을 했다가 회사에 복직했다. 회사 내부 사정으로 인해 아나운서인 오태만이 예능국으로 발령되어 함께 일하게 됐는데, 그가 낸 아이디어가 국장에게 채택되어 프로그램으로 만들게 된다.
데이, 이브닝, 나이트 예술 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한 한가을은 휴학을 하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곳에서 안미진과 친해져 나중엔 각자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다 한가을은 좋아하는 경은 선배의 초대로 미진과 함께 스튜디오 파티에 참석한다.
월계동(月溪洞) 옥주
옥주는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예후이를 만났다. 술을 마시느라 기숙사에 들어갈 시간을 놓친 그녀를 예후이는 친절하게 도와줬다. 이후 옥주는 그녀에게 중국어 강습을 부탁하면서 가까워졌고, 유학 온 여러 나라의 학생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면서 함께 어울린다.

하바나 눈사람 클럽
진희는 9살 크리스마스이브에 주찬성을 처음 만났다. 축사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아빠는 다니지도 않는 교회에 진희를 맡긴 것이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가까워져 교제하는 사이가 됐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미용실을 운영하는 진희는 단골손님의 소개로 주찬성이라는 남자를 소개받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가 떠오른다.
첫눈으로
술을 좋아하는 국장은 팬데믹으로 인해 회식을 할 수 없게 되자, 방송국 직원들을 모아 비대면 회식을 한다. 회식이라 일 얘기가 당연히 언급되어 이전에 촬영했었던 '맛집 알파고'가 화두로 떠올랐다. 소봄은 지민 피디와 함께 부산으로 촬영을 갔을 때 맛집 알파고와 지민 피디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세미는 20년 가까이 살았던 개 설기를 얼마 전에 떠나보내고 깊은 우울증에 잠겨있다. 세미의 친구이자 현재는 음주 운전으로 자숙 중인 아이돌 양요가 다른 사람의 개를 만져보라는 조언을 한다. 그래서 세미는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중 카카오톡의 프로필이 강아지 사진인 사람에게 연락을 한다.
크리스마스에는
지민은 12년 전 대학 시절에 사귀었던 현우가 '맛집 알파고'라는 걸 알게 됐다. 국장은 그를 섭외해 촬영을 하라는데 연락을 하기가 영 껄끄럽다. 그럼에도 지민은 현우에게 연락을 했고, 막내작가 소봄, 촬영 담당 재형과 함께 부산으로 가 촬영을 시작한다.




각각의 주인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던 연작 소설인 <크리스마스 타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하바나 눈사람 클럽>이었다.
목사의 아들로 늘 올곧고 바르게, 그러면서 억압되어 살았던 주찬성이 진희를 만나게 되면서 묘한 해방감을 느낀 듯했다. 물론 소설은 오로지 진희의 입장에서 진행되긴 했지만, 주찬성의 반응을 보면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잘 만나다 성인이 되기 전에 헤어지고 이제는 연락이 끊겼는데, 진희가 이름이 같은 그를 소개받게 되면서 과거 회상과 현재가 함께 진행됐다.
이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 건 크리스마스 기적과 같은 결말 때문이었다. 어릴 때의 풋풋한 인연이었지만 헤어지고 난 후에 돌고 돌아 마주치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리움이 포근한 현실로 이어진 게 참 좋았다. 헤어졌지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재회도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키우던 개 설기를 떠나보낸 뒤 슬픔에 잠긴 세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반려견의 죽음으로 지난 인연을 되돌아보고 있는 관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사회인이 된 지 오래된 세미라 당연히 몇 번의 이직이 있었는데, 개를 만져보며 설기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준비를 하려는 그녀가 과거의 직장 상사들과 재회하면서 이전에는 차마 알지 못했던 그들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학생 때 과외를 해주던 선생님과도 만나면서 이 사람은 여전하구나 싶어 마음이 따뜻해지게 만들기도 했다.

연작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어떤 이야기에서는 언급만 되거나 조연으로 등장한 인물이 다른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그들이 몰랐을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지는 게 인생과 같다고 느껴진다.

크리스마스는 한참 지났고, 올해 크리스마스가 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타일처럼 이어붙인 각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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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단어씩 더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의 어느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처음 만났던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이었다. 그때는 해명할 수 없었지만 늘 녹진하게 달라붙어 있던 어떤 감정들을 처음으로 공유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서글픔, 애석함, 손 내밀어보고 싶던 충동들을. <하바나 눈사람 클럽> - P157

그러니까 눈 내리는 희귀한 부산의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했던 일들은 겨우 그런 사실에 대해 알게 되는 것 아닌가. 모두가 모두의 행복을 비는 박애주의의 날이 있다는 것. <크리스마스에는>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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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디맨
프리다 맥파든 지음, 조경실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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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6년 전.
다정하고 성실한 이웃이자 아빠, 남편인 애런 니어링이 집에서 체포됐다. 그의 집 지하 작업실에 25살의 맨디 요한슨의 시체를 비롯해 실종됐다고 알려진 여성 십여 명의 잘린 손이 상자에서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지난 20여 년간 FBI의 수사망을 피해 간 애런 니어링에게 '핸디맨'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는 사형을 면하기 위해 범행을 인정해 경계가 삼엄한 교도소에 종신형으로 수감됐다. 그의 아내 린다는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 전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자살했다.
그리고 당시 11살이었던 그의 딸 노라 니어링은 외할머니에게 보내졌고, 핸디맨과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기에 노라 데이비스로 이름을 바꾸고 살았다.



현재.
외과 의사인 노라는 자주 가는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중 대학 시절에 잠깐 만났었던 브래디 미첼과 재회한다. 당시 컴퓨터 관련 전공이었던 브래디는 지금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다. 노라는 그와의 연애가 좋았었다는 기억이 남아있긴 하지만, 왜 3개월 만에 헤어지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걸 아직도 꺼려 하는 탓이리라 여겼다. 브래디와 다시 만나게 된 노라는 여전히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노라는 자신의 환자였던 젊은 여성이 실종되었다가 두 손이 잘린 채 시체로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여성은 푸른 눈과 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아버지가 죽인 여성들이 모두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분명히 교도소에 있었기에 노라는 혼란에 빠지는데, 또다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제는 경찰이 그녀를 찾아온다.



처음엔 노라에게 100% 공감과 지지를 보내며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살인마라는 걸 숨기고 살았던 아버지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났고, 어린 노라는 할머니 손에 맡겨지게 됐으니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성을 바꾼 덕분에 이제는 그녀가 핸디맨의 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언제 어떻게 탄로 날지 몰라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걸 두려워했다. 브래디와 연인이었을 때에도 그 관계는 3개월 만에 끝나버렸고, 졸업하고 의사가 된 지금까지도 깊이 사귄 남자가 없었다. 남자는 물론이고 대학 때에 알고 지낸 동업자 필립 선배에게조차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질 않았다. 그로 인해 노라의 삶은 늘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노라는 끔찍한 범죄자의 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 11살밖에 되지 않았던 노라는 항상 잠겨있던 지하실에서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나 이제는 그 누구도 노라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현재에 아버지와 똑같은 수법으로 범죄가 일어나면서 그녀는 불안해져만 갔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다는 건 확실했기에 더욱 주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좋은 인연이었기에 재회한 뒤에 여러 사건이 있었어도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던 브래디가 가장 의심스럽긴 했다. 노라에게 일어난 여러 사건에 브래디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할 정황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노라에게 수술을 받은 환자는 바에서 마주쳤다가 퇴짜를 맞고선 그녀의 차를 미행했기에 의심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난 것으로 보여 그는 제2의 핸디맨이 아니라는 사실이 일찍 가려졌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라 본인에게 향하게 됐다. 현재 시점에서 노라는 수술을 할 때 배를 가르는 행위에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종종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과거에는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와 몰래 숲에 가서 게임이라는 명목으로 불순한 의도가 담긴 행동을 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화자이자 주인공인 노라 역시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에서 자꾸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노라는 물론이고 그녀의 곁에 주요 인물로 그려지고 있던 캐릭터들 모두 의심하던 와중에 노라는 그토록 숨겼던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했다. 정말 애를 쓰며 숨겨왔던 정체가 탄로 나면 노라의 삶은 완전히 망가질 수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진 노라는 불안 증세로 점점 힘겨워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경찰은 그녀를 의심했고 말이다.

그러다 마침내 범인이 밝혀졌을 때 큰 충격을 줬다. 여태껏 범인을 두 사람 중 한 사람, 그게 아니면 당연히 노라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의 인물이 범인으로 드러나 놀라움을 안겼다. 범인을 단정 지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내 편협함 때문이었다. 꼭 그 특정한 사람들만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닌데 말이다.
그러면서 범인에 관한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이 밝혀져 애처로움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 참 가여웠기도 하지만, 범죄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예상할 수도 있는 반전이겠지만,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놀라웠고 덕분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스릴러 소설을 읽을 땐 모든 걸 열린 관점으로 봐야 할 것 같다.


​​​​​​​

내가 치료한 환자가 그런 식으로 죽은 채 발견되다니…. 물론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두 명씩이나? 그걸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형사도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 P137

당신은 실수한 거야.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내가 누구 딸인지 정도는 미리 알았어야지.
아버지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음침한 복도나 길거리, 아니 그 어디에서라도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그리고 옛말에도 있듯이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 P72

그래, 내 아버지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딸이고, 우리에겐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게 나 역시 아버지 같은 살인마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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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스노볼 1~2 (양장) - 전2권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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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이상으로 평균 기온이 영하 40도쯤 되는 세상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발전소에서 일을 하며 살아간다. 거대한 쳇바퀴에 들어가 발로 구르거나 팔로 돌리는 일을 해야만 미약하게나마 각 가정에서 전기와 온수 등을 사용할 수 있다.
워낙 활동하기 어려운 날씨가 일상인 사람들에게 유일한 즐거움을 주는 건 '스노볼'이라는 곳에서 만들어낸 드라마다. 매년 스노볼 바깥세상에서 액터 오디션을 열어 재능 있는 사람들을 안락한 스노볼 안으로 데리고 가 각자의 드라마를 만들어 스노볼 바깥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한다. 각본 없는 리얼리티 드라마에 출연해 인기를 얻는 액터는 추운 바깥과 달리 스노볼 안에서 따뜻하고 부유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 24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촬영하는 것을 견디면 말이다.

스노볼 바깥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16살 전초밤은 액터보다는 디렉터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필름 스쿨에 지원하지만 번번이 떨어져 어김없이 발전소에 출근을 한다.
그러다 스노볼 액터 출신으로 사람을 9명이나 죽이고 쫓겨난 조미류를 도와준 날, 스노볼에서 가장 유명한 디렉터인 차설이 초밤을 찾아온다. 초밤과 매우 닮은, 스노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액터인 고해리의 드라마를 담당하고 있는 디렉터였다. 차설은 초밤에게 고해리가 자살을 했으니 초밤이 대역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년 동안 해리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낸다면 초밤의 가족은 지금보다는 훨씬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 테고, 초밤이 나중에 필름 스쿨에 입학하는 걸 도울 수 있다고 제안했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믿기지 않는 제안에 초밤은 짧은 갈등을 끝내고 차설 디렉터를 따라 스노볼로 향한다.



뉴스에서 종종 보도되기도 하는 기후 위기 현상을 소설에서는 배경으로 설정했다. 기후에 큰 변화가 생겨 사계절 내내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세상으로 말이다. 그로 인해 생존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직업 없이 발전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발전소의 쳇바퀴를 24시간 교대로 쉴 새 없이 돌려댔다. 그런 초반 설정을 읽으며 아직 16살밖에 되지 않은 초밤이 현실보다 이르게 학교를 졸업하고 쳇바퀴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아 긴 머리카락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은 추위 때문에 언제나 튼 상태였다. 또한 옷이라는 건 예쁜 게 아니라 따뜻함이 우선이라는 것도 씁쓸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초밤은 쌍둥이 오빠 온기와 치매 할머니, 엄마와 함께 밝고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조미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정도로 따뜻한 성정을 지녔다.

그렇게 바깥세상에서 여느 또래 아이들과 별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아가던 초밤의 인생이 달라진 건 차설 디렉터가 찾아오면서부터였다. 이전에도 초밤은 스노볼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액터인 고해리와 닮았다는 표현이 등장했었는데, 스스로도 닮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건지 초밤은 자신과 같은 날에 태어나 인기를 끄는 해리가 나오는 드라마를 빠짐없이 챙겨 볼 정도로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해리가 자살을 하는 바람에 대타를 세우기 위해 차설은 초밤을 어떻게 찾아낸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스노볼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바깥세상에서 사랑받는 소녀의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 대타를 세운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초밤 역시 그 부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자신 또한 해리를 사랑했고 만난 적이 없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긴 했어도 어떤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차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다. 제안을 받고 스노볼로 향해 가던 여정의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걸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어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후 소설은 초밤이 스노볼 내에서 적응하는 과정부터 시작되었다. 3대가 유명 액터인 고해리와 엄마 고상히, 할머니 고매령은 해리의 죽음을 알면서도 초밤을 해리의 대타로 세우는 걸 받아들여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어갔다. 그런가 하면 스노볼의 시스템을 만든 '이본' 그룹의 차기 후계자 이본회와 만난 뒤에는 해리가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물론 해리를 연기하는 초밤은 그 사실을 몰랐다가 조금 지나서야 알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초밤이 스노볼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에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는데, 1권에서는 고해리의 정체에 관한 어마어마한 진실이 밝혀져 굉장한 충격을 줬다. 이 진실은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많이 접했던 설정이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개에 온전히 몰입하는 바람에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것이라 놀랍기만 했다. 그렇게 고해리에 관한 비밀이 밝혀지고 잘 마무리되어 1권이 끝난 후에 2권에서는 초반부터 긴장하게 만들었다. 초밤이 이제는 훨씬 거대해서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존재와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후반으로 가면서 양파를 까듯 겹겹이 진실이 밝혀져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과연 초밤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소설은 영어덜트 장르라 주인공 초밤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세계의 평화까지 얻어냈다. 용기 있고 정의로운 초밤으로 인해 거의 모든 사람의 행복을 얻게 된 셈이었다. 씩씩하고 긍정적이며 착한 초밤이 주인공이라 정말 좋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너무 재미있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에게 상상하는 재미를 안긴 소설이었다. 뒤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초밤과 여러 친구들이 과연 어떻게 될지 계속 궁금해서 책장이 너무나 잘 넘어갔다. 읽는 동안 이렇게 몰입해서 소설 속 세계에 빠진 건 정말 오랜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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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는 한 명의 사람이 아닌, 하나의 허상에 불과했다. 1권 - P368

​"너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내가 짜 놓은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려고도, 너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려고도 하지 말고, 그저 가만히.
(……중략)
명심하렴. 네가 이 시스템에 위협이 되는 순간, 네 곁에 있는 사람의 목이 죄다 날아간다는 걸. 그게 내 핏줄이든 네 가족이든." 2권 - P132.133

내일의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상을 흉내 낼 필요도, 나의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일의 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또 다음 날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슴 뛰게 했다. 1권 - P426

"꼭 행복할 필요는 없어요, 항상 행복할 수도 없고요. 다만 혼자가 되진 말아 주세요. 힘들면 왜 힘든지, 즐거우면 뭐가 즐거운지, 당신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해 주세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누군가 당신에게 요구한 삶이 아니라, 그저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아 주세요." 2권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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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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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기.
인간들이 벌인 전쟁으로 환경은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한참 지났다. 많은 인간이 죽었고, 지구는 황폐화되어 푸르름이 사라졌다. 세상엔 먼 곳에 존재하는 바다와 주변을 온통 둘러싼 사막뿐이다.

오래전, 고고를 구해준 랑이의 심장이 아침에 멈췄다. 아침에 여느 날과 다르게 고고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랑이가 그를 낳아준 조를 따라간 것이었다. 매일 물을 가져다주는 랑이의 친구 지카가 랑이를 보고선 장례 준비를 대신해 주었다. 그렇게 지카와 고고는 랑이를 땅에 묻었다.
지카는 홀로 남은 고고에게 함께 바다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고고는 랑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과거로 가는 땅으로 향했다.



까마득히 머나먼 미래에, 만들어진 지 천 년은 족히 넘은 로봇 고고가 주인인 랑을 떠나보낸 뒤 세상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주변엔 온통 모래뿐인 사막을 여행하면서 고고는 여러 존재를 마주했다. 함께 떠나자고 했던 랑이의 친구 지카,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 버진, 그리고 모래에 묻힌 시체가 있었고, 자신을 만든 주인을 찾아 돌아다니는 로봇 알아이아이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외계 행성에서 온 살리를 만나 마침내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로봇 고고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가 원래 만들어진 목적은 살인 기계였지만, 이제는 전쟁이 끝난 시대였고 그를 구해준 랑이를 지키는 걸로 존재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랑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고는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고고가 인간이었다면 그건 상실을 느끼고 슬퍼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고고는 스스로가 로봇이라 감정 따윈 가질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고고를 완전한 로봇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로봇임에 분명했다. 랑이 살아있을 때 가고 싶어 했다던 과거로 가는 땅으로 가던 것부터, 녹음이나 녹화된 파일을 재생하는 행동은 기억을 되새기는 인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랑을 추억하며 함께 했던 일들, 대화 등을 떠올리던 고고의 모든 부분들이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고고에게 랑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 아이가 떠난 후에 지금 얼마나 슬픈지 절실하게 와닿았다.

그렇게 자신에겐 없을 거라 여기는 감정을 안고 과거로 가는 땅을 향해 가면서 여러 존재를 만난 고고는 조금씩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자신과 같은 로봇인 알아이아이가 그를 만든 카일을 만나려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돌아다니는 것과 알아이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내준 고고의 행동은 그들이 사람의 탈을 쓴 짐승보다 훨씬 나은 존재라는 걸 느끼게 했다.
오로지 자신을 만든 존재,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를 위해 엔진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처음엔 곁에 있는 사람을 흉내 낸 감정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어느새 그들은 사람과 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랑이에게 향해 가는 길을 기쁘게 걸어간 고고의 마지막 모습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 길이 머리로는 비극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재회의 희망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출간된 천선란 작가의 소설은 짧았지만 역시나 좋았다. 뭉클한 이야기가 깊이 남을 듯하다.

‘마음은 중요해.‘
랑의 말에 나는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고, 랑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목적이야. 네 목적에 가장 빨리 닿으려고 애쓰는 게 마음이야.‘ - P44

"너도 감정이 있다는 말처럼 들려. 너는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느껴져.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 P132

"덕분에 머리카락을 묶어주고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었다. 그림자놀이를 하고 손톱만 한 돌 다섯 개를 하나씩 던졌다가 줍는 놀이도 했지. 자라지 않는 내 손으로 해마다 얼마큼 키가 자랐는지 잴 수도 있었다. 손가락이 없었다면 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중략)
아니, 나는…… 머리를 묶어줄 수 있어 감사했다." -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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