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읽어주는 남자 케이스릴러
라혜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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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 오는 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 차가 멈췄을 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내게 괜찮냐고 물으며, 위험하니 얼른 내리라고 소리쳤다. 조수석에서 내린 나는 뒷좌석에 놔둔 중요한 물건을 꺼내려다 다시금 사고를 당해 시야가 차단됐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나를 하윤이라 부르며 다정하게 걱정했지만, 나는 그 남자도, 나 자신도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오로지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던 그 순간들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정한 그 남자는 천재후라는 사람이었고, 나 송하윤의 약혼자라고 했다. 병원이 아닌 재후의 할아버지가 가진 섬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데 신경을 쓰는 와중에 나는 자꾸만 다정한 재후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하윤이라고 불린,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차 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급하게 도망치던 차는 이내 사고가 났고, 운전자인 남자와 함께 차를 빠져나오려다 하윤은 다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잘생긴 남자 천재후는 하윤을 다정하게 부르며 걱정했지만, 그녀는 약혼자라고 하던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차 사고가 났을 때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고, 운전을 하던 남자가 재후가 아니라는 것만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렇게 소설은 기억을 잃은 하윤을 중심으로 약혼자인 천재후와 주치의 남우성 박사가 주변 인물로 등장했다. 고립된 섬 안의 별장이라는 공간적 배경으로 인해 왠지 모를 궁지에 몰린 하윤은 재후는 물론이고 남 박사 또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정에 대한 초반 설명이 지난 후에 소설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다정하지만 의심스러운 재후와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던 남 박사에 이어 재후의 회사 직원이라고 하는 남자가 새롭게 등장했다. 그 남자는 하윤을 딱딱하게 대하면서도 어떤 낌새를 내비쳤기 때문에 의심에 대한 불씨가 조금씩 타오르게 됐다.
재후에게 부탁해 인터넷을 사용한 하윤은 고속도로에서의 사고를 검색했지만, 이후 다시 검색했을 땐 기사가 감쪽같이 사라진 걸 보고서 불안해졌다. 그래서 재후가 서울에 잠시 다니러 갔을 때 그의 차를 훔쳐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송하윤이라는 이름으로도, 그녀의 지문으로도 신원을 밝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절망했다.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다. 내가 누군지 기억을 잃었고, 그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약혼자라는 존재는 100% 신뢰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재후를 떠날 수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윤 스스로도 자신이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재후가 다른 그룹의 딸과 약혼했다는 기사를 회사 직원인 최 비서가 보여주면서 사건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2부부터는 하윤의 진짜 실체에 대해 최 비서가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앞서 등장한 의심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하윤이 진짜가 아니라는 건 당연히 예상했었다. 재후가 IT 기업의 손자라는 점 또한 그 과정에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었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3부에 접어들고, 결말에 다다랐을 때 다시금 판을 뒤집으며 놀라운 실체를 드러냈다. 파고들면 단서라고 할 수도 있는 장면이 등장했지만, 그 단서를 결말의 실체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건 어려움이 있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로 인해 소설에 대한 나의 감흥은 시들어갔고, 결말은 제대로 끝을 맺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로맨스 스릴러라고 하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로맨스가 짙지 않았고, 스릴러스러운 느낌도 부족했던 소설이다. 거기다 어울리지 않는 열린 결말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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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다잡았던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인간의 몸속에 마음이란 기관은 없다는데, 존재하지도 않는 내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것처럼. - P360.361

재후가 지금껏 내게 보여주고 알려준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다. 아름답게 직조해낸 거짓 세계다.
그 씨줄과 날줄을 내가 그에게 가져다주었을까. 아니면 내가 가져온 거짓의 씨줄과 그에게 있던 욕망의 날줄이 만나 이 가짜 세상을 만들어낸 걸까.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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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 / 모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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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밤에 빈 건물 1층에서 여자 시신이 발견되었다. 노숙인처럼 보이던 여자는 추운 날씨에도 외투를 입고 있지 않았는데, 성폭행 시도가 있었는지 옷이 흐트러져 있었고 머리에는 무언가로 맞은 흔적이 있었다. 다도코로 가쿠토 신입 형사와 괴짜로 유명하지만 출중한 능력을 자랑하는 미쓰야 슈헤이 형사가 사건을 맡았다.

이틀 뒤 두 형사는 히가시야마 리사의 집을 찾았다. 리사의 남편 요시하루는 지난 8월에 집 근처 공원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는데,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 중 여자 노숙인의 지문이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리사를 찾은 것이었다. 리사는 형사들이 내민 노숙인의 사진을 보고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 잠겨 있던 그녀에게 더는 캐물을 게 없어서 두 형사는 집을 나섰다.
그런데 미쓰야가 리사의 집 창문에 놓여 있던 꽃꽂이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가쿠토는 뭐가 이상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 꽃꽂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미쓰야는 리사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라는 특별한 날 밤에 여자 노숙인의 시신이 발견된 건 소설일 뿐인데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겨울에 외투도 없이, 옷매무새도 흐트러져 있었다고 하니 더욱 씁쓸할 따름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가진 게 더 없을 노숙인이라고 생각하면 그 죽음은 서글프기만 했다.
이후 신원이 밝혀진 노숙인 마쓰나미 이쿠코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형사들의 목적이었지만, 소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물론 처음엔 그 목적으로 움직이긴 했으나 몇 달 전에 일어난 히가시야마 요시하루 살인 현장에 남겨진 이쿠코의 지문으로 인해 관계를 밝히는 게 우선이 됐다. 그 후 두 건의 살인사건 뒤에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게 드러나면서 소설의 초점은 살인보다는 삶의 행복에 관해 조명했다.

이쿠코는 아이 없이 남편과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형편이 어렵긴 했어도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삶이라는 게 늘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듯 부부에게도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이 찾아왔다. 이쿠코가 갱년기장애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게 시작이었고, 이후 사기를 당한 건 큰 타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 월급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절망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그 절망 한가운데에 이쿠코를 떨어뜨린 건 남편이 세상을 떠난 사건이었다.
이쿠코의 사정이 밝혀지며 어찌나 괴롭고 답답했는지 몰랐다. 착하게 살던 부부에게 신의 자비란 없는 듯 자꾸 벼랑으로만 내몰아서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의지할 데 없는 이쿠코가 결국 혼자 남게 됐을 땐 왜 모든 걸 버리고 길거리를 떠도는 선택을 하게 됐는지 이해가 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쿠코가 남편의 죽음 이후 바로 노숙인이 된 건 아니었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후드 소년을 만나게 됐고, 그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 머물게 하고 밥을 먹이는 등의 사건이 꺼져가던 인생의 불씨를 되살렸다. 이후 이쿠코는 소년에게 집 열쇠를 건네주며 오고 싶을 때 와서 쉬고 가라고 하기까지 했다.

리사의 시점 또한 등장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면서 이쿠코와는 다른 충격을 안겼다. 외적으로 리사는 나이가 10살가량 많은 남편 요시하루, 고등학생 딸 루미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SNS에 행복하다는 걸 과시하며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녀의 실제 인생은 SNS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요시하루는 리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며 현관에 CCTV까지 설치했는데, 그건 요시하루의 의처증이 아니라 리사가 대학 시절 잠깐 만나던 남자와 재회해 불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 딸 루미나는 사춘기 반항이라도 하는 건지 리사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살고 있으면서 SNS에는 행복한 척 글을 올렸고, 요시하루가 죽은 뒤에는 동네에서는 남편을 잃은 슬픈 아내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SNS에서는 다른 계정을 만들어 애인과의 행복한 일상을 남겼으니 리사가 한심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데 왜 그러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여기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면서 두 사람의 인생을 어지럽히게 만들어 인간의 운명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거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쿠코의 남편은 교통사고인 듯 보이지만 실은 지주막하출혈로 사망했다. 이 교통사고의 운전자 이자와 유스케와 아내 나루미, 이쿠코의 시신을 발견한 다카하시 교타와 동생 다쿠미, 리사의 딸 루미나가 이들과 얽히면서 왜 두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 건지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살해되어 세상을 떠난 건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비극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일깨웠다.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하고 풍요로울 수 있었다. 이쿠코가 세상을 떠날 때 그녀 곁에 아무도 없었지만, 늦지 않게 찾아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해 주고 비참하지 않도록 수습하려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로 인해 이쿠코의 죽음은 슬프긴 했어도 삶은 충만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리사와 나루미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견주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일깨웠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허한 행복보다 낯선 이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위로하는 다정함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저 평범한 스릴러 소설인 줄 알았는데 살인사건을 소재로 삶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신선함을 느꼈다. 답답하고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 덕분에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느껴져서 좋았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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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떠올리며 언제까지고 울기만 한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이 아닌 죽음을 보는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죽었다는 사실보다 살아 있었을 때 일을 봐줬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죽었다는 사실에 눈이 가버리는 경우죠. 그 사람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걸 모르면 남은 사람들은 죽음에서 결코 눈을 떼지 못할 겁니다." - P51

왜 내가 아닐까. 이쿠코는 그렇게 생각하다, 아니, 하고 정정했다.
왜 저기 있는 게 남편과 내가 아닐까.
우리와 저 사람들은 뭐가 달랐을까. 어떻게 했어야 우리가 저곳에 갈 수 있었을까. - P126.127

리사에게 중요한 건 타인의 눈에 자신이 행복해 보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동경의 대상이고 싶다. 리사처럼 되고 싶어, 리사는 좋겠다, 그렇게 여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늘 행복에 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 - P137

"모두가 마쓰나미 씨를 좋아했습니다. 그녀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군요. 노숙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마쓰나미 씨를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그녀도 주변 사람을 소중히 여겼던 겁니다. 그런 그녀의 인생을 불쌍하다는 한마디로 결론지어도 되는 겁니까? 물론 슬프고 불합리한 최후였습니다. 그런 죽음이 있어도 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그녀의 인생이 풍요로웠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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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추는 찻집 - 휴고와 조각난 영혼들
TJ 클룬 지음, 이은선 옮김 / 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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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업자들과 로펌을 설립한 변호사 월리스 프라이스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일한 지 오래된 동료가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관심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회사에 피해를 입히면 해고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월리스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전처 네이오미와 이혼한 이후로는 가까운 가족도 없었다.

그런 그가 다음 주에 있을 일을 준비하기 위해 일요일에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관상동맥이 막혀 사망했다. 월리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월리스가 상황을 인지하게 된 건 자신의 장례식에서였다. 텅 빈 장례식장에는 전처 네이오미와 동업자 세 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 한 명이 그 자리를 지켰다.
월리스가 옆에서 잔소리를 해대도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던 장례식이 끝나고 난 뒤 그 자리에 있던 낯선 여자가 월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유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에게 그녀, 메이는 사신이라고 하며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며 해야 할 일이 많고 이루고 싶은 일 또한 많은 사람이라면 죽는 걸 억울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더군다나 나이가 젊다면 그 억울함은 배가된다. 소설의 주인공 월리스 프라이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능력 있는 변호사로 맡은 사건 대부분을 승소하는 그는 고작 40살이라는 나이에 급사했다. 그것도 휴일인 일요일에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가 홀로 죽은 것이었다.
쓸쓸하고 억울한 죽음을 미처 헤아릴 새도 없이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그 장례식 역시 한산해서 월리스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깨닫게 했다. 정작 월리스는 조문객 숫자보다 자신의 죽음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의 반응에 더 상처를 받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깝다 여긴 이들의 반응으로 혼란에 빠진 월리스에게 사신 메이가 다가와 그를 데리고 카론의 나루터로 향했다. 메이는 망자를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는 사공을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농담을 한 것이었지만, 이제 막 죽은 월리스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혼란과 당황의 연속인 월리스는 구조적으로 멀쩡해 보이지 않는 4층짜리 찻집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자신을 사공이라고 소개한 노인을 만나게 됐다. 재미있게도 그 노인 넬슨은 알고 보니 사공 휴고의 할아버지이자 망자였는데 저세상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살아가고 있었고, 곁에는 휴고가 키우던 개 아폴로 또한 남아 있었다. 마침내 고대하던 사공 휴고를 마주하게 된 월리스는 따스하고도 편안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삶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월리스는 찻집을 뛰쳐나가 살아 있는 자들의 마을로 넘어가려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하기도 했다. 죽은 게 못마땅해도, 저세상을 위한 경계인 찻집 역시 껄끄러워도 월리스는 그곳에서 지난 삶을 반추하고 또 다른 시작을 마주해야 했다.

죽은 뒤 찻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월리스는 장난스러운 노인 넬슨에게 망자로서 살아가야 할 지혜를 배우기 시작했고, 휴고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보였다. 또한 낮에 운영되는 찻집을 자주 찾는 슬픔에 젖은 여인 낸시와 유령 영상을 촬영하는 자칭 영매 데스데모나도 알게 된다. 그리고 카론의 나루터를 벗어났다가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존재도 만나게 된다.
냉정하고 자기밖에 모르던 월리스는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진정한 인간이 되어갔다. 세상을 떠난 뒤에 인간다움을 가지게 됐다는 게 뭔가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어쨌든 월리스는 그렇게 조금씩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밉상이었던 월리스가 점점 마음에 들어갔고, 나중엔 그가 세상을 떠난 게 안타까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메이와 휴고 둘 다 껄끄러워하는 관리자라는 이를 만나게 되면서 일주일의 유예를 얻게 됐다. 그 사이에 월리스는 마음에 걸렸던 일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이며 진정으로 괜찮은 존재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고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졌다. 세상을 떠난 뒤에 좋은 사람이 되어 가족과 친구가 생긴다는 게 너무 슬펐지만, 결말로 인해 훈훈하고 기분 좋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죽는다는 건 삶의 끝이라 더 이상 긍정적인 그 무엇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 소설이 그런 생각을 바꿔주었다. 죽음은 비극적인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가능성일 수 있다는 게 마음에 와닿았다.
살아 있는 사람과 망자들이 함께 생활하며 다음을 준비하는 찻집 카론의 나루터가 참 따뜻하고 유쾌한 곳이라 좋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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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최종 마침표가 아니야, 월리스. 한 시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침표지." - P183

"이제는 그 모든 게 떨어져 나가고 자네만 남았지. 뒤늦은 깨달음은 강렬하다네. 우리는 우리 눈앞에 놓인 것들의 진가를 알아차리기는커녕 그걸 전혀 보지 못할 때도 있지. 돌이켜보고 나서야 처음에 놓쳤던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 P191.192

어쩌면 그는 의미 있는 사람일지 몰랐다. 거창하게 세상 전반이나 많은 사람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여기 카론의 나루터에서 휴고와 메이와 아폴로와 넬슨에게라면, 어쩌면 그는 의미 있는 사람일지 몰랐다. 월리스가 뜻밖의 상황에서 깨달은 교훈이었다. 무엇이 좋든, 나쁘든, 아름답든, 추하든 사는 동안 최대한 누리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수수께끼의 정답이었고, 가장 중요했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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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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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1999년 '나'는 대학에서 지민을 만나 사귀게 됐다. 지민은 돌아가신 엄마가 쓴 출간 금지된 소설을 찾으려 했는데, 마침 나의 외삼촌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기에 도움을 요청한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섬에 강연을 하러 간 소설가 정현은 마중 나온 김선생과 함께 섬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서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는 손유미를 마주한다. 정현은 그녀가 30년 전 대학 시절에 알던 '은정'이라는 걸 기억한다.

진주의 결말
범죄심리학과 교수인 '나'는 최근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는 시사 프로그램 촬영을 끝냈다. 유진주는 치매 아버지를 돌보다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현재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나'는 여행 프로그램 진행자로 참여해 몽골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아내 정미가 세상을 떠난 이후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를 붙잡고만 있던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그녀의 상실을 마주하게 된다.

엄마 없는 아이들
백신을 맞으러 병원을 찾은 명준은 얼마 후 백혜진에게서 메일을 한 통 받게 된다. 혜진은 명준이 병원에 있을 때 자신도 그곳에 있었다고 하며 운을 뗐다. 명준은 대학 시절 그녀를 만나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연극부가 아닌데도 주연급을 맡아야 했던 그녀와 엄마라는 주제로 서로 이해와 공감했던 때였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나'는 6년 전 우연히 만나 메일 주소를 주고받았던 희진에게서 오랜만에 메일을 하나 받았다. 희진은 일본의 한국문화원의 초청으로 공연을 하게 됐는데, 협회의 회장이 유명하지 않은 인디 가수인 자신을 콕 집어 초대해달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희진은 회장 후쿠다 준과의 만남으로 나와 그녀가 함께 일본 여행을 갔던 2004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랑의 단상 2014
지훈은 은행 관련 문서를 넣어두는 서랍에서 오래전 한정판으로 출시된 커피 캡슐을 발견한다. 그 캡슐은 이미 헤어진 리나가 선물한 것이었는데, 지훈은 그녀의 기억이 떠올라 지금도 이 커피를 마실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출판사에 다니는 '나'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할아버지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한 혼잣말이 심해졌다는 걸 엄마에게서 듣게 된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라는 세례명에 관해 여러 번 이야기했다는데, 그로 인해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녹취한 게 떠올랐다.




여덟 편의 단편소설 중 단연 인상적이었던 건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였다. 엄마가 남긴 출간 금지 소설 '재와 먼지'를 읽고 싶어 하던 지민을 위해 준이 외삼촌에게 부탁하는 시점과 20여 년 후 준이 우연히 '재와 먼지'를 발견하게 되는 현재의 시점을 오가고 있었다.
이 소설이 특이했던 건 '재와 먼지'라는 소설에 관한 것인데, 이 소설은 동반자살을 한 연인이 인생을 세 번 살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처럼 시간의 흐름대로 살아가다가 함께 자살을 한 남녀는 그때부터 시간을 거꾸로 살게 된다. 자살을 하기 전에서 한창 사랑을 할 때,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할 때, 처음 알게 됐을 때를 살아가는데, 이들은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돌아간 두 남녀는 다시 인생을 살아간다. 첫 번째의 삶과 거꾸로 되돌아갔던 두 번째의 삶을 기억하며 말이다.
이 소설이 인상적이었던 건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었다. 이 시선이 보통의 것과는 달라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설득력이 있어서 소설의 의미를 되새겼다.

다른 이야기들 중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도 여운을 남겼다. 희진이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에게 보낸 메일에는 일본에 공연을 하러 갔는데, 자신을 꼭 초대해달라고 부탁한 진흥회의 회장 후쿠다 준을 만나 그 이유를 듣게 됐다고 했다. 연인이었던 나와 일본에 여행을 갔을 때 들른 카페에서 들은 곡과 방명록에 남긴 글이 당시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던 후쿠다 준에게 살아갈 용기를 줬다는 것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HJ라는 이니셜 외에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받았다는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때로는 낯선 이에게서 받는 위로가 절망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는 것 같다.

편차가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이야기들 덕분에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타인을 향한 시선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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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 P29

과거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미래의 아름다움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름다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러니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아름다움이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 P108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 P181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진주의 결말>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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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병동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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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시마자키 유키는 임신이 됐다는 걸 알았다. 엄마에게는 물론이고 집에도 말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돈을 모아 수술을 받으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2년 뒤, 히데마루의 아버지가 돌아왔다. 왼손을 못 쓰게 된 아버지는 일을 찾지 않고 어떻게든 상이군인 연금을 받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결국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는 나날이 늘어간다.
정신박약에 농인인 쇼하치는 누나가 결혼해 게이고를 낳자 조카를 끔찍하게 예뻐한다. 게이고 역시 외삼촌인 쇼하치를 잘 따른다. 게이고가 학교에 들어간 나이가 됐을 때, 두 사람은 집안 어른들에게 비밀로 하고 물놀이를 하러 가지만 안타깝게도 게이고에게 사고가 생긴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지 30년이 다 된 주 씨는 병원 사람들과 마치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병원에 보내놓고 찾아오지 않는 진짜 가족보다 매일 만나며 함께 식사를 하고 여가시간을 보내는 이들이야말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주 씨는 친하게 지내는 히데마루, 쇼하치, 게이고, 그리고 외래진료를 다니는 시마자키 양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기도 한다.
이후 병원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주 씨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폐쇄병동'이라고 하면 당연히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선입견이라는 게 있어서 지금은 많이 완화됐다고는 해도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고, 더군다나 폐쇄병동은 정신적인 문제가 커서 강제적으로 격리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정신병원을 무대로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았다. 주 씨를 제외한 주요 인물들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먼저 보여주며 그들의 선입견을 배제시키도록 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앞서 등장한 그들의 이야기는 이해와 공감을 하게 만들었다.

이후 소설은 정신병원을 무대로 주 씨를 화자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그들이 보여주는 일상은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정해진 루틴을 따르고, 식사를 하고, 병원 내에서 각자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환자는 병원을 청소하는 일을 했고, 글씨를 잘 쓰는 히데마루는 먹을 갈아 정성껏 글을 썼다. 쇼하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병원의 사진사 역할을 자처했으며, 외래 환자인 시마자키는 도예실을 드나들었고, 주 씨는 병원 부장에게서 매년 봄에 있는 발표회 때에 쓸 연극 대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너무나 평범하게만 보이는 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과연 정신적인 문제가 있긴 한 걸까 의심하기도 했는데, 이후 그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어느 정도 밝혀졌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었고 개인의 문제도 있었는데,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 한편으로 가족도 보여주며 누가 정신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건지 의아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 씨의 여동생 부부는 자기들 잇속만 챙기려고 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주 씨의 정신병을 들먹이며 병원에 호소를 하고 있어서 황당하게 했다. 그나마 새로 바뀐 주치의가 좋은 사람이라 주 씨의 일은 잘 해결될 수 있었다.

소설이 진행되는 와중에 큰 사건 하나가 일어났고, 그 사건에서 비롯된 결말이 뭉클해지게 만들었다. 세상에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듯,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라고 해도 다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정신병을 빙자한 시게무네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라 누군가의 손에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으로 인해 정신병원이라는 장소의 이미지가 안 좋아지기도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 사건이 어떻게 끝을 맺는지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주 씨와 시마자키, 쇼하치, 게이고가 그랬듯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설은 40년 경력의 실제 정신과 의사가 쓴 것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외면받거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의사의 시선으로 써낸 글이라 그런지 따뜻함이 묻어났다. 마지막엔 눈물이 핑 돌았을 만큼 그들을 환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고 있어서 뭉클해졌다.



​​​​​​​

환자는 이미 어떤 인간도 될 수 없었다.
(……중략)
병원에 들어온 순간, 환자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는 이전의 직업도, 인품도, 취향도 일체 따지지 않았다. 해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주 씨는 자기들이 해골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환자이면서 환자 외의 것도 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싶었다. - P166.167

병원은 최후의 안식처가 아니야. 오랜 여행에 지친 새들이 쉬어가는 숲일 뿐이라네. 병원에서 죽는 새가 되면 안 돼.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날아올라 자기 둥지로 돌아가길 바라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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