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
니나 리케 지음, 장윤경 옮김 / 팩토리나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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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주치의로 일하고 있는 50대 여성 엘린은 멀쩡한 집을 놔두고 진료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초라한 상황에 처한 이유는 옛 연인 비에른과 바람을 피운 것을 남편 악셀에게 들켰기 때문이고, 해명하기도 지친 그녀가 남편에게 집의 지분 전부를 넘겨버린 탓이었다.

사실 엘린이 바람을 피운 게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반평생 넘게 함께 살아오는 동안 악셀은 자신이 일하는 병원과 스키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집안일까지 온전히 엘린의 몫이었고, 최소한 뭐라도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다음번에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여기에 엘린은 번아웃이 와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녀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아프다고 골골대면서 정작 눈에 보이는 원인을 무시하곤 했다. 어쩌다 엘린이 다소 강하게 말하면 마치 그녀가 인종차별주의자라도 되는 듯 끔찍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엘린은 일과 가정에서 모두 벗어나 조금은 마음의 환기를 느끼고 싶어 비에른을 만난 건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관계마저도 버겁기만 하다.



소설에서 엘린이 처음 등장했을 때 조금 이상하게 보이긴 했다. 진료실에서 혼잣말을 하는 듯했던 그녀는 토레라고 이름 붙인 해골 모형과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인데 이래도 되나,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환자들부터 엘린을 힘들게 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긴 했다. 치질환자는 화장실에 갔다가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병원에 왔고, 고도비만의 환자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건지 진료만 받으려고 했다. 우울증이라는 선생은 왜 우울한 건지 말도 하지 않으면서 소견서만 써 달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자신의 증상에 대해 찾아보고선 전문가인 의사를 앞에 두고 진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스쳐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던 걸 보면 의사라는 직업도 참 고된 일인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린이 바람을 피워도 된다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남편 악셀의 행동을 보면 또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서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샤워 후에 욕실 바닥 물기를 제거해 달라고 해도 몇십 년 동안 들어먹지 않았던 악셀의 이런 사소한 행동을 보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 전체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차라리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게 더 편했을 터였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엘린은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권태를 느끼게 됐고, 이제는 알코올중독 위험에 이르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SNS를 살펴보던 중에 옛 남자친구 비에른이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SNS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는 뭔가를 누르는 바람에 비에른에게 알람이 갔고, 이후로는 불륜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비에른과의 관계로 악셀과의 부부생활을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고 말았다. 비에른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었고 그러겠다고 여러 번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결국 끝을 낼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엘린을 더욱 지치게 했다.

50대라는 나이를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것에 권태기가 올 만한 나이인 것 같기도 하다. 사회적으로는 조금 애매한 나이인데 늙었다는 걸 몸으로 체감하고, 자식들은 성인이 되어 출가하거나 손주가 생기기도 한다. 함께 사는 반려는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살고 있으니 뭔가 환기시킬 게 필요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 모호함을 엘린을 통해 보여주면서 이제는 모든 걸 다 손에서 놓고 싶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갔지만, 다행히도 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좀 장황하긴 했지만 무난하게 읽기에 나쁘지 않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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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갈망과 동경 속에서만 살아. 만약 손 닿을 거리에 있으면 바라기를 멈추지. 이건 중력 같은 물리법칙이랑 다르지 않아. 아주 간단명료하다구. 손에 넣은 뭔가를 다시 바라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공식 커플이 돼서 계속 같이 산다면 우리 사이도 필연적으로 식어버린다는 거야." - P235

나는 단 하나만을 원했다. 모든 것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기를. 무언가 깜박이고 반짝이는 것을 내가 발견했으니까. 그것이 모두를 밝게 비추며 금빛으로 물들였으니까. - 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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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법정
조광희 지음 / 솔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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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 미래의 한국.
AI를 위한 언어 개발을 하고 있는 EAU 언어연구원의 한시로 박사는 '안드로카인드'에서 제작한 AI에 관심이 생긴다. 그 회사가 유독 시로의 관심을 끈 이유는 주인, 소유주의 DNA를 복제해 똑같은 외형과 지능을 가진 AI를 제작하기 때문이었다.
시로는 여자친구인 미나와 AI 구입에 대해 상의하지만, 그녀는 왠지 시큰둥하다. 그러나 시로는 결심이 굳혀졌기에 안드로카인드를 방문해 자신과 닮은 AI를 주문해 받게 된다. '한시로 X'라는 명칭이 붙은 AI를 집에 데리고 온 시로는 그를 '아오'라고 부르며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아오와의 생활에 익숙해진 시로는 인간과 흡사한 외형과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괴리로 인해 그에게 불법적으로 의식생성기를 이식한다. 이식을 한 후에 아오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오는 자신을 시로라고 착각해 그를 죽이게 된다.



소설의 배경은 까마득한 미래인 2100년대였다. 인공지능 로봇이 실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던 그 시대에는 집에도 로봇들을 하나씩 구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AI는 비서나 집사 정도의 일을 하고 있었고, 사회 곳곳에도 사람 대신 AI가 전문적인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냥 봐서는 진짜 사람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과 닮은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떤 AI들은 주인에 의해 의식생성기를 이식받은 후에 AI와 동물 등의 자유를 외치며 '포스트휴먼 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을 위해 움직이며 저항을 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한시로가 자신의 DNA를 복제한 AI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AI가 실생활에 아무리 익숙해진 미래라고 할지라도 나와 닮은 AI는 뭔가 꺼려지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탄생이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AI라는 점으로 인해 일말의 거부감이 느껴졌다.
시로는 자신과 닮은 AI와 함께 생활하는 데 익숙해졌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한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아오에게 한 뒤에 오류가 나자 의식생성기를 그에게 이식했다. 포스트휴먼 해방전선으로 인해 AI에게 의식생성기를 이식하는 게 불법이었지만 시로는 개의치 않았다. 이후 의식이 생겨 자아에 대한 의문과 탐구에 골몰하게 된 아오는 어떤 사건 이후로 시로를 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시로라고 착각해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었다.
아오의 살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소설 초반에 등장한 호윤표 변호사가 그의 변호를 맡게 됐다. 그 후로는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지워진 아오의 데이터를 증거로 제출하면서 다소 혐오스럽기도 한 비밀이 드러나 놀라움을 안겼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만이 존귀한 세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22세기 정도 되는 배경으로 인해 소유주의 의도에 따라 제작된 AI도 생명의 가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AI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의식생성기를 이식받게 된 경우 역시 참작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동물 또한 생명의 가치가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지금도 동물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미래엔 그 주제가 보편화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발전된 미래이니만큼 AI 또한 폭넓은 의미에서 생명의 가치를 논할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결말에서 희망적이던 그런 가치들이 단번에 무너지는 걸 보며 이기적인 건 역시 인간이구나 하는 씁쓸함을 남겼다.

짧은 소설이지만 여러 쟁점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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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죽인 건가?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둘인 건가?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그렇다면 나는 누구지?‘ - P112

"어떤 때에는 자신이 세상을 둥둥 떠다니는 거품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내가 아닌지가 모호해집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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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2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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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속에서 드론 조종사였던 군인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 카이라는 아빠가 1251명의 적을 죽이고 괴로워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성인이 된 후에 카이라는 사람이 조종하는 드론이 아닌 알고리즘을 이용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드론 조종사의 죄책감을 덜어주고자 한다.
신들은 목줄을 차지 않을 것이다 매디는 돌아가신 아빠의 노트북을 사용하던 중 이모티콘 같은 그림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누군가와 채팅을 하게 된다. 처음엔 장난으로 치부했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 아이들이 잠잠해진 뒤에 이상함을 느낀 매디는 엄마에게 그 채팅을 보여줬고, 엄마는 아빠가 죽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 연락한다. 왁스먼 박사는 아빠가 죽기 전에 뇌를 스캔해 의식을 업로드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우수리 불곰
40년 전, 어마어마하게 큰 곰에게 습격을 당해 부모를 잃고, 자신의 한쪽 팔까지 잃은 나카마쓰 박사는 복수를 위해 곰을 쫓는다. 만주족 길잡이 소년 이린과 동료들을 데리고 떠난 그는 뒤쫓던 러시아 탐험대가 습격을 받아 모두 사망했고, 복수의 대상인 곰 역시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곰이 남긴 후손에게라도 복수를 하기 위해 나카마쓰는 동료들이 다치는 것도 외면하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1비트짜리 오류
타일러는 리디아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천사를 만났었다고 주장했는데, 타일러는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그런 말을 하는 리디아에게 푹 빠져버리고 만다. 그러다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났다. 조수석에 앉은 리디아는 천사를 다시 만난 듯 이름을 부르다 세상을 떠났고, 목숨을 구한 타일러는 그날 이후 천사를 만났다는 리디아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 짐은 영원히 그대 어깨 위에
뉴욕의 대형 회계 법인의 인턴으로 합격한 제인은 남자친구 프레디를 따라 루라 행성으로 향한다. 외계 행성에서의 경험이 회계사 자격증을 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루라 행성의 인류 정착촌에서 지내게 된 두 사람은 외계 고고학을 창시한 클로비스 박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 제인은 '루라 사가'에 관한 가설을 제시한다.
「장거리 화물 비행선」
'나'는 잡지에 실을 기사를 쓰기 위해 아이크의 태양광 화물 비행선에 탑승하게 된다. 비행선이 곧 집이었던 아이크는 아내 예링과 번갈아가며 운전을 맡으며 이 거대한 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카산드라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예측하는 능력이 생겼다. 처음엔 그저 무시했지만 본 장면이 그대로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된 후에 잘생긴 외계 슈퍼 히어로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데, 그는 나의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결국 나는 홀로 그런 범죄자들을 미리 처단하기 시작한다.
신들은 순순히 죽지 않을 것이다
매디는 어느새 컴퓨터 속 인격체인 아빠와 대화하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자신과 같은 디지털 인격체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고자 떠나지만, 아빠와 친구가 패배해 사라져버렸고 현실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걸 보게 된다.
북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쳐들어오자, 명의 만력제는 이여송을 보필할 사람으로 담원사를 보낸다. 그는 수많은 명의 군대를 조용히 이동시키고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한다.

풀을 묶어서라도, 반지를 물어 와서라도
1645년. 만주족이 양주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주가 점령당하자 참새는 기생인 초록 꾀꼬리와 함께 도망쳐 숨어 지낸다. 그러다 초록 꾀꼬리는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을 막고자 미인계를 써서 만주족 장군을 구슬린다.
신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
아빠가 떠난 뒤, 클라우드에는 자신이 매디의 동생이라고 하는 아이가 나타났다. 매디는 동생을 미스트라고 부르며 함께 어울리는 한편, 미스트가 디지털 세상 속에서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애를 쓴다.




지난번에 읽은 켄 리우의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 수록된 단편 연작 '싱귤래리티 3부작'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포스트 휴먼 3부작'이 이 책에 포함돼 있었다.
디지털화된, 클라우드 속의 새로운 인류는 인간이었지만, 인간이 창조한 신과 같은 존재였다. 매디와 아빠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보여줬고, 그들 중에서도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나쁜 디지털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형태는 변해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게 했다. 이후 정의의 편에 섰던 아빠 일행이 사라지고 매디의 디지털 동생 미스트가 존재를 드러내면서 인간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게 쉬운 건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몸에 한정되어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 디지털 세상 속에서 무한히 살아가는 인간. 지금보다 더 먼 미래에는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전제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인상적인 단편은 <카산드라>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를 모티브로, 슈퍼맨의 외형을 연상하게 하는 슈퍼 히어로 '쇼맨'을 등장시켰다. 범죄를 저지를 예정인 예비 범죄자와 현재에는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이를 두고 벌이는 딜레마가 인상적이었다. 필립 K. 딕의 단편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연상하게 했다. 이런 딜레마의 마찰로 인해 카산드라가 악당이 되어가는 과정에 수긍하게 만들었다.
또한 역사와 관련된 단편 이야기들도 눈길을 끌었다. 거대한 곰에게 복수를 하려는 <우수리 불곰>은 마지막에 반전이 드러나면서 큰 충격을 안겼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북두>가 있었고, 중국을 배경으로 한 <풀을 묶어서라도, 반지를 물어 와서라도>가 있었다.

늘 그렇듯 단편집이라 편차는 있었지만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도 많았다. 읽다가 안 맞아서 그만둔 <종이 동물원>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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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린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전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을 해낼 만큼 변하지는 않았는지도 몰라. 이제는 기술 덕분에 거의 신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는데도 말이야.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씨앗은 절망으로도, 위안으로도 피어날 수 있어. 우리가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서." <신들은 순순히 죽지 않을 것이다> - P266

"땅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를 구하는 것보단." 나는 그자에게 애타게 설명한다. "폭파범이 비행기에 타기 전에 미리 죽이는 게 더 낫잖아요."
(……중략)
"하지만 넌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생각하잖아. 너 자신에게는 남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자는 그렇게 나를 딜레마에 몰아넣는다. 만약 내가 미래를 바꿔 놓는다면, 내 예지는 틀린 것이 된다. 만약 바꾸지 못한다면, 나는 그 미래를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한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카산드라> - P2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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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4 - 임진왜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4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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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관련된 영화가 개봉한 이 시점에, 이 책의 시리즈 중 마침 임진왜란에 관한 내용을 읽을 차례라는 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님의 활약상을 자세하게 알게 되는 건 좋지만, 불가피한 선조 얘기를 또다시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굉장한 딜레마지만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일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내놓는다. 황윤길은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한 반면, 김성일은 황윤길의 의견에 반박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두려울 게 없다고 보고한다. 서인과 동인이라는 당파 싸움으로 인한 상반된 의견일 수 있으나 여기에 김성일과 같은 동인인 허성은 황윤길의 의견을 따랐다는 부분으로 인해 당파 싸움과는 관련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다수결보다 믿고 싶은 걸 믿으며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다. 한 국가의 수장이라는 자가 그릇된 판단을 한 것에서부터 글러먹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듬해 왜가 쳐들어왔을 때 선조가 얼마나 빨리 몽진을 떠났는지를 보면 정말 한결같은 인물이라는 걸 보여줬다. 지금만큼 도로가 잘 정비된 시기가 아니었고 교통수단 또한 말이나 가마 외엔 없었을 때인데, 이렇게 빨리 도망친 걸 보면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게 정말이지 임금이 될 인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확실히 굳어진다.

위기의 상황에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임금으로 인해 조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힘을 합쳐 들고일어나는 민족이었기에 백성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고일어나 어떻게든 우리의 땅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구국의 영웅이신 이순신 장군님은 탁월한 혜안으로 왜군을 물리치는 데 이바지하셨다. 이순신 장군님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는 봐도 봐도 경이롭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미 아는데도 매번 들어도 전혀 질리지 않는 신화 같다. 정말이지 이순신 장군님이 안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아찔하다.

이렇게 위대한 이순신 장군님을 천거하신 분이 류성룡 님이시다. 선조가 도망치느라 바빴을 때 좌의정 겸 병조판서, 영의정 겸 훈련도감 도제조, 4도 도체찰사 등 온갖 직책을 겸직하시며 임진왜란의 승패 여부를 짊어지셨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싸우신 분들도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임금 대신 모든 걸 책임 지신 류성룡 님의 업적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류성룡 님은 빌어먹을 선조에 의해 내쳐지시고 말았다. 선조가 한결같은 업적을 쌓은 게 정말 대단하다. 이후엔 광해군까지 바람 앞의 등불이었으니 조선의 앞날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200년 만에 일어난 큰 전쟁이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지만 판단력이 전혀 없는 임금으로 인해 7년 동안이나 백성들은 핍박받아야만 했다. 다행히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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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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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 재교육 수용소에 수감된 '나'는 수용 소장에게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써서 제출한다.
사이공이 함락될 무렵, 모시는 장군과 그의 가족, 고등학교 때부터 만과 함께 피를 나눈 형제인 친구 본과 그의 아내와 아들 등을 비롯한 남베트남 장교들과 함께 그곳을 탈출한다. 미군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하지만 탈출 수송기를 타려고 이동하던 중에 본의 아내와 아들이 사살되고 말았다. 가지 않으려는 본을 억지로 끌고,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싣고 그들은 괌을 거쳐 미국 본토로 수송되었다.

나는 남베트남의 대위로 오랫동안 살았지만, 사실은 공산주의에 심취한 만에 의해 북베트남의 스파이로 남베트남에 심어진 스파이였다. 또한 CIA의 공작원 클로드에게 발탁되어 정보 요원으로 일하고 있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한 남자가 수용소에 수감되어 이중첩자 생활을 했던 과거에 대한 자백은 시작부터 어떤 회한이 담겨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장을 위시한 누군가의 이념에 부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자백은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 한편으로, 때때로 먼 과거로 기억이 닿기도 했고 중간중간 미국 유학 생활 시점이 등장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은 CIA의 스파이면서 북베트남 측이 남베트남에 심어 놓은 스파이이기도 했다. 이 상황만으로 충분히 정체성이 흐려질 수 있었던 주인공은 태생부터 남달랐기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인 신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그 시대의 혼혈이 흔히 받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잡종 새끼'라고 지칭하던 혐오스러운 단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그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베트남을 탈출한 이후에 비밀 부대 후원을 위해 다시 미국을 떠나려고 할 때,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장군에게서도 그 말을 들어야만 했다.
혼혈이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주인공은 미국 유학 생활 중에도 비슷한 취급을 당했다. 아시아인치고는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은 듣는 입장에서 칭찬이 아니라 모욕이었다.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미국 문화에 흠뻑 빠져들어 어떨 땐 미국인보다 더 잘 아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주인공을 이방인 취급을 했다.
태생에서부터 이중적인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던 주인공의 딜레마가 그의 인생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확립되지 않은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온 그도 평범한 인간이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만, 본과 의형제나 다름없었는데, 중요한 사실은 만과 주인공이 북베트남 쪽 사람이었던 반면 본은 남베트남의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본은 그 사실을 몰랐고,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다. 주인공에게는 이념보다 두 친구와의 우정이 더 중요했다. 이중 스파이로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미국으로 탈출해 함께 생활하고 있는 본을 챙겼다. 그리고 그건 만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게 이들의 우정과 관계를 감히 단정 지을 수 없게 했다.
또한 주인공에게도 마음이 가는 여성들이 있기도 했다. 미국을 탈출한 후 대학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게 됐는데, 어떤 교수의 비서인 일본계 미국인 미즈 모리와 연애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장군의 딸인 라나에게는 마음을 빼앗겼는데, 자신의 불안한 현실로 인해 결혼은 꿈도 못 꾸던 그가 그녀와는 결혼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미즈 모리와는 대학 시절에 인연이 있던 소니로 인해, 그리고 라나와는 장군과 부인의 발언으로 인해 끝나고 말았다.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 관계가 그의 태생과 이념으로 인해 끝을 맺었다는 건 주인공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언제까지고 흔들리게 될 거라는 걸 의미하는 듯했다.

이후 주인공은 장군이 주도한 비밀 부대의 후원을 위해 미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거쳐 베트남으로 가던 중에 공격을 받고 수용소에 오게 됐다.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갔는데, 내게는 부정적인 의미로 남아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하나의 무언가가 아닌 이중적인 두 자아로 남아버린 주인공이 고문에 의해 그렇게 된 것 같아 안쓰러움이 남았다.

이 소설은 박찬욱 감독님이 HBO에서 방영될 드라마로 연출한 작품이라 관심이 갔었다. 그래서 궁금해서 읽게 된 책인데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소설이 굉장히 안 읽혀서 일주일을 넘게 붙잡고 있었다. 읽다가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다 읽어서 다행이다.
읽느라 힘들었던 소설을 드라마로 어떻게 표현했을지, 그 부분이 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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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이때 그것을 벗어 버릴 기회가 온 겁니다. 그것도 안전하게요. 나는 본능적으로 이런 바보짓을 했던 겁니다.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닌 어떤 느낌 때문에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만 하면 나를 이해하고 어쩌면 사랑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나뿐일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가면을 벗었는데 다른 사람이 사랑이 아닌, 경악과 혐오와 분노의 감정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스스로 폭로한 자신의 본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가면만큼이나 불쾌하거나 아니면 훨씬 더 혐오스럽다면 어떻게 될까요? - P475

이곳에서는 외래종 잡초들 때문에 우리나라 자생식물의 무성한 잎이 대부분 말라 죽어 버리지. 외래종 식물과 자생 식물군의 혼합은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야. 어쩌면 자네가 이미 경험으로 배웠다시피 말이야. - P115

이보게, 대위. 자네는 훌륭한 젊은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러니까 자네가 혹시 깨닫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지만, 자네는 ‘잡종 새끼‘야. - P502

나는 여전히 성인 남자 안에 있는 그 아이와 그 아이 안에 있는 성인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껏 늘 분열되어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내 잘못은 일부분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비록 내가 두 개의 삶을 살며 두 마음을 가진 남자가 되기로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언제나 어떤 식으로 나를 ‘잡종 새끼‘라고 불렀는지를 감안할 때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중략)
학대받은 우리 세대가 출생하기 이전부터 분열되어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도 결코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저 언제나 내 두 측면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윽박지를 뿐인 출산 이후의 세상으로 인도되며 날 때부터 분열이 되었다. - P6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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