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캐나다에서 일하던 칼 오프가르가 15년 만에 돌아왔다. 유일한 가족인 형 로위가 남아 지키고 있는 산 위의 농장에, 그것도 아내 섀넌을 데리고 말이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두 형제지만 그들은 마치 어제 만난 듯 반가워하며 서로를 마주했고, 로위는 새롭게 가족이 된 섀넌도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쇠락한 마을 곳곳에 호텔 사업에 투자하라는 전단지가 붙었다. 로위가 맡아서 하고 있는 주유소에 경찰 쿠르트 올센이 찾아와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후 칼에게 물어본 결과 가족이 4대째 소유하고 있는 산꼭대기 황무지에 스파 호텔을 짓겠다는 당찬 포부를 듣게 된다.

칼이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기 전에 그들은 여느 가족처럼 부모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모든 가족이 그러하듯 그들에게도 비밀은 있었고, 가족이라는 왕국이 깨지는 게 두려워 그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로위는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소설은 현재 형 로위가 있는 집에 아내 섀넌과 함께 돌아온 칼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과거 그들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회상하는 과거가 간간이 삽입되었다. 소설 전체가 로위의 시점으로 진행됐기에 그의 말이나 행동이 전적으로 진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소설이 흐르면서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게 진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작은 마을에서 의문스러운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는데, 그 사건에는 로위와 동생 칼이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들 부모가 탄 차가 산비탈을 내려오다 절벽에 떨어진 사건이 있었고, 이후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 부모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닌 살인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시그문 올센 경찰이 실종되었다. 그것도 두 형제를 한 명씩 만난 이후에 말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쿠르트가 오프가르 부부 사건과 아버지 사건을 연관 지어 오프가르 형제를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10대 시절부터 오프가르 형제는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졌기에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뚜렷하게 다르게 대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쁘장한 외모를 가졌던 칼은 10대가 되었을 때 잘생긴 청년이 되어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그와 어울리는 걸 좋아했을 만큼 리더십도 있었지만 때로는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동생을 구하러 나타난 로위로 인해 두 형제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조용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로위는 동생을 보호할 때에는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로위는 칼보다 왜소한 몸집을 가졌지만 그 누구도 로위와 싸워서 이길 수 없었다.
이들의 이런 관계로 인해 초반엔 조금 오해하기도 했던 건 사실이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칼과 관련된 어떤 일이 언급되었기에 당연히 로위가 관련됐을 거라 생각했지만, 추후 밝혀진 비밀은 너무 끔찍해서 몸서리치게 만들었고 로위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로위가 칼의 여자친구에게 관심을 두는 장면이나 중고차 판매원의 아내 리타와 불륜을 저지르는 걸 보며 그에게도 뭔가 뒤틀린 구석이 있다는 생각에 좀처럼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수십 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칼이 마을 사람들에게 투자를 받아 산정 호텔을 짓기로 하면서 마을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로위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감정이 생겨 마을을 떠나 다른 지역에 머무르는 선택을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보상을 받고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누린다. 그러나 그는 이 감정의 끝이 비극으로 치달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영원한 건 없다는 듯 말이다.
어떻게 보면 오프가르 형제의 아버지가 초반에 강조한 것처럼 가족이란 서로가 서로를 믿고 지켜야 하는 견고한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로위에게 칼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로 인해 서로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지금 현재까지도 그 왕국이 유지되어 오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형제 사이에 틈이 생겨 새로 생길지도 모를 가족을 위해 로위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 선택을 보며 내내 냉혈한으로만 보이던 로위가 처음으로 인간미 있다 느껴졌는데, 결말에 이르렀을 때 선택의 결과가 달라졌다는 걸 보고서 행동에 옮긴 그가 왠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위에게 가족은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닌 그를 옭아매는 올가미와도 같다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의 소설은 '해리 홀레 시리즈'만 읽었다. 스탠드얼론은 처음인데 역시 요 네스뵈답게 분량이 굉장했다. 746페이지를 꽉꽉 채운 이야기는 소설 속 추위처럼 서늘하고도 조용했지만 알 수 없는 진실로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완전히 뒤틀려버린 계획으로 인해 앞으로 잘 될 거라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왠지 모를 비극처럼 느껴졌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만 괴롭히는 줄 알았는데 단독 작품의 주인공까지 비극으로 만들어버린 걸 보면 역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렇게라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다.
그래도 소설은 재미있었다. 역시 요 네스뵈다.


​​​​​​​

"우린 가족이다. 우리가 믿을 건 가족뿐이야.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이야. 정말로 중요한 때가 오면 양초 한 자루 값어치도 안 된다. 그때는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뭉쳐야 해, 로위.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알았지?" - P13

나는 그렇게 수치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집에서. 거울 속에서. 그래서 알아보았다. 그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었다. 저지른 죄가 너무나 추악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다시 그 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서. 거울은 내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맹세하지만, 그 일은 몇 번이고 자꾸만 일어난다. 죄를 저지를 때도 수치스럽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이렇게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수치스럽다. 하기 싫은 일을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면 적어도 순수한 악의를 품은 자신의 천성을 탓할 수도 있을 텐데. - P134

"형이랑 나, 우리 둘뿐이야." 이건 칼이 옛날에 하던 말이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전부 사막의 신기루야. 하지만 형이랑 나는 하나야. 우리는 형제니까. 사막의 두 형제. 한 명이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사라져." - P6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장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30대의 나, 정인수는 늘 추위와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한여름에는 무덥기로 유명한 옥탑방에서 3년째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름에도 너무 추워서 에어컨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밤에는 늘 귀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들의 수런거림으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옥탑에서 골목길을 내려다보다가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차에 일부러 부딪치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 모습을 보자 10대 시절에 알던 A가 떠올랐다. 이후 그 소년 이호가 두 번째로 자해공갈을 하는 걸 가까이서 목격했을 때 끼어들었어 중재를 했고, 이호를 집으로 데리고 와 씻게 하고 밥을 먹였다.

10대 시절, 인수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고 공부도 그리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집에서 인수는 아버지에게 구박이나 받으면서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하는 아들이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도록 때리는 걸 힘으로 말린 이후 먼 기숙학교에 보내지게 됐다. 짐을 챙겨 떠나는 중에 잠깐 휴게소에 들렀을 때 인수는 무작정 도망을 쳐서 아무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가진 돈이 별로 없던 인수는 PC방을 전전하다가 성연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료급식소에서 동갑내기 경우와도 안면을 텄고, 그가 쌍둥이 중학생들과 생활하는 빈 건물에서 지낸다.



소설은 성인이 되어 혼자 지내고 있는 인수가 17살 가출 청소년 이호를 만나 함께 지내는 내용인 현재와 17살 때 가출해 성연, 경우 그리고 다른 가출팸과 '우리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아가는 과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었다. 인수가 과거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이호의 자해공갈을 목격한 뒤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부터였다. 과거 시점에서 A가 등장한 건 한참 뒤였는데, 가출했던 시절에 만난 A가 이호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과거가 연상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인수는 이호를 집에 데리고 온 뒤에 귀신들의 수런거림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고, 그로 인해 이호가 집에 조금 더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그게 이호를 도망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과거의 인수는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아이였다. 그런 인수를 아버지는 못마땅해했는데, 어머니를 때리던 걸 말리다 아버지가 다치는 바람에 기숙학교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그게 싫어서 도망친 게 가출로 이어졌다. 처음엔 가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자신을 찾지 않자 인수는 그대로 바깥에서의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곳,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슬픈 건 없었다. 더욱이 인수가 고작 17살이었을 때였으니 그 상처가 깊게 새겨진 건 당연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수는 또래 가출 청소년인 성연과 경우를 차례로 만나게 됐다. 성연은 낯선 인수에게 친밀하게 다가와서 가까워졌는데, 이후 함께 지내다 보니 그가 다소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성연 덕분에 잠을 자고 배도 곯지 않을 수 있었기에 인수는 마음에 거리끼는 걸 외면했다. 경우는 성연과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 가출 청소년을 일반화하지 않았다. 경우는 여느 가출 청소년과 달리 자기 몸과 옷, 머무는 곳의 청결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또한 예의 바른 성격이라 어른들이 그를 대할 때 호감을 보였고, 성연이처럼 도둑질 같은 나쁜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성연과 경우 사이에 존재하는 인수는 이 두 사람의 괴리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인수가 평범한 17살 아이들과는 다르게 바깥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우가 옳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지만, 처한 현실에서는 성연처럼 살아야 한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인수는 때로는 경우처럼 착실히 식당 설거지 알바를 하면서도 잠깐 자리가 비워진 카운터의 돈을 탐내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옳고 그름을 바로잡아줄 어른이 있었다면 인수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더 확실한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이야기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가출 청소년들이 처한 위태로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답답한 마음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조건만남 따위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시급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현재의 이호, 과거의 A가 그랬듯 자해공갈로 몸을 다쳐가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몸으로 번 돈으로 하루를 나고 다시 배를 곯는 생활이 지속되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들에겐 저마다 가출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었기에 차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 집의 가출팸은 어른들의 개입으로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가 있었던 반면 인수는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분에 그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마음속에 짐이 하나 더해졌다. 그 짐으로 인해 인수는 여름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목소리들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현재에 도달했을 때 인수는 그때의 속죄를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과거의 경우가 그랬듯, 그 이름처럼 경우 있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미약하게나마 온기를 전했다. 그 온기는 이호에게 도달해 인수가 지나온 과거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거란 희망을 남겼다.

10대 가출 청소년이 처한 현실이 너무 적나라해서 읽는 내내 춥고 답답했으며 끔찍한 감정만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아이들이었기에 미래가 암담했지만, 경우가 있었기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결말을 향해 가면서는 그저 안쓰럽고 참담하기만 했지만 말이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세상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온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

아이들의 불안에 불을 지핀 것은 나지만 그런 나조차 아이들을 경멸했다. 우리는 증오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억울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 P190.191

경우는 안전한 공간에서 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며 지냈다. 경우와 지낼수록 나는 궁금했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를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스스로 터득했다기에 그 태도는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경우 같은 존재는 왜인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 P101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후회를 곱씹는 일에만 성실히 복무했다.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삶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소심한 방식으로 사과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건 경우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방식일 테지. - P2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거미
티에리 종케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인 리샤르 라파르그는 한적한 곳에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늘 바쁜 그는 가정부 리즈와 운전사 로제만 뒀을 뿐이고, 저택 2층에는 바깥에서 문을 3중으로 잠글 수 있는 방 안에 이브라는 여자가 지내고 있다. 방안에 갇힌 이브는 리샤르가 병원에 출근한 뒤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쳤고, 퇴근한 그가 돌아왔을 땐 나체로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보이지만 리샤르는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
때때로 리샤르의 기분이 정말 안 좋은 날에는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 이브를 데리고 가 여자를 사려는 남자들을 불렀는데, 이브가 변태 같은 남자들에서 당하고 있을 때 리샤르는 한쪽만 보이는 거울 너머로 이브의 괴로움을 보며 즐거워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뱅상 모로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에 웬 차가 자신을 쫓아온다는 걸 느낀다. 오토바이의 방향을 급하게 바꾸어도 차는 여전히 뱅상을 쫓아왔기에 그는 안간힘을 써서 도망을 치려고 한다. 오토바이에 내려서 숲으로 도망을 쳤지만 차에서 내린 남자가 계속해서 쫓아왔고, 결국 그는 붙잡혀 기절하고 만다.
뱅상이 눈을 떴을 때 스포트라이트 불빛만 비추는 어두운 지하실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손발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숲에서 자신을 쫓아온 남자, 나중에 뱅상이 '미갈(독거미)'이라고 부르게 된 그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처음엔 그런 상황에 모멸감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미갈에게 애원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미갈은 뱅상에게 물과 음식을 줬고, 나중엔 더 좋은 음식과 와인, 책 등을 가져다준다.

알렉스 바르니는 아는 사람의 농장에 숨어 있다. 은행을 털려고 하다가 경관 한 명을 총으로 쏴 죽이는 바람에 전국에 수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은행에서 턴 돈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이 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신은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그러다 알렉스는 TV 의학 프로그램에서 성형외과 전문의가 나와 얼굴을 감쪽같이 고칠 수 있다는 방송을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소설은 세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됐다. 성적으로 희롱당하는 이브를 지켜보며 희열을 느끼는 성형외과 의사 리샤르, 은행 강도를 저질러 숨어있는 알렉스, 그리고 2인칭으로 '너'라고 지칭하며 다른 폰트로 부각한 뱅상의 이야기였다. 세 사람에 관한 연관성은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짧은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단서로 남겨진 것들을 조합하면 금세 파악할 수 있는 반전에 다다라 놀라움을 안겼다.

단순히 초반에 드러난 상황만 봤을 때에는 이브는 가엽고 안타까운 여자였고, 리샤르는 죽어 마땅한 변태로만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 이면에 숨겨진 비밀은 이브보다 리샤르에게 마음을 더 기울이게 만들었다. 각기 다른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밝혀진 비밀로 인해 리샤르의 행동이 어떻게 보면 조금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의 입장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게 당연할 테니 그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리샤르의 행동에 미약한 저항밖에 할 수 없었던 이브 역시 무력해진 이유가 있었다. 이브의 삶을 리샤르가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브는 모든 것을 온전히 리샤르에게 맡겨야 했다. 비록 그가 시키는 일이 성 도착증을 가진 남자들에게 당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리샤르는 복수를 위해 이브에게 이 끔찍한 일을 저질러 끝나지 않을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브의 고통을 지켜보는 게 괴로웠을지라도 리샤르는 비비안을 생각하면 그 모든 걸 눈에 담고 괴로움에서 기쁨을 느껴야 마땅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리샤르는 이브의 괴로움을 보는 감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괴로움에서 비롯된 희열이 리샤르에게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남긴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리샤르를 향한 이브의 행동 또한 스톡홀름증후군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이 관계를 명확하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복수가 단번에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4년이 넘도록 이어져 왔기 때문에 리샤르와 이브 두 사람의 감정을 바꾸어놓았던 걸로 보였다. 두 사람이 필수불가결한 관계로 보였던 것은 리샤르는 증오하기 위해 이브가 필요했고, 이브는 완전히 바뀌어버린 인생 때문에 리샤르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상대방을 오로지 증오하는 게 아닌 애증이라고 할 수 있을 어떤 감정을 갖게 됐다. 인간의 감정이란 한 가지로만 단정 지을 수 없어 완전하지 않은 듯하다.
어떻게 보면 알렉스의 존재로 인해 리샤르와 이브가 서로에게 진실된 감정을 보이게 된 것인데, 알렉스는 단순 멍청한 범죄자라 그 끝은 당연하게만 보였다. 물론 알렉스만 욕할 게 아니라 리샤르와 이브 모두 정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소설 <독거미>는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내가 사는 피부>로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큰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영화였기 때문이다. 큰 모티브가 너무 강한 스포일러이고, 또 충격적인 내용이라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반전을 알고 소설을 읽게 된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짧은 소설 안에 등장한 두 사람의 복잡한 감정에 몰입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이야기는 흡인력 있었고, 반전 또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와는 다른 엔딩이 의아한 한편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했다.


​​​​​​​

네 신세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나 다름없었어. 거미의 발에 잡혀 결국 먹이가 되겠지만, 거미는 벌레의 약을 올려서 맛을 더 돋우려고 벌레를 그냥 거미줄에 두었던 것이지. 이제 여유가 생기자 거미는 벌레에게 다가온 거야. 너는 거미의 털북숭이 다리를, 커다란 전구 같은 잔인한 눈을, 고기로 불룩해서 출렁출렁하는 부드러운 배를, 독이 든 턱을, 네 생명을 쪽쪽 빨 검은 내장을 상상했지. - P54.55

때로 아파트 사이에 놓인 이중 거울에서 리샤르는 이브의 눈에 고인 눈물을, 괴로움을 이기려고 뒤틀리는 표정을 보았다. 그런 순간이면 리샤르는 이브의 고통을 즐겼다. 그것만이 리샤르에게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다.52

"제발 부탁입니다! 여기로 와보세요! 사람을 잘못 보셨어요! 저는 뱅상 모로입니다! 실수하셨어요! 뱅상 모로예요! 뱅상 모로!"
그러다가 숲에서 본 플래시 불빛이 문득 떠올랐지. 네 얼굴을 비추던 노란 불빛. 그리고 무표정한 남자의 목소리도 떠올랐지.
"그래, 너야."
맞아. 너였어. - P40

리샤르 자신의 소유물인 이브. 리샤르 자신이 그 운명을 창조한 이브. 리샤르 자신이 그 삶을 빚은 이브. 그런 이브가 고통을 당하자 리샤르는 혐오와 동정에 사로잡혔다. - P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 지음, 박미경 옮김 / 베리북 / 2023년 5월
평점 :
절판



남편 데이빗과 이혼을 앞두고 있는 모니크는 입사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잡지사에서 말단 기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쓰고 싶은 기사를 쓸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모니크는 현재 일도, 사랑도 바닥을 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이런 상황에 79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화제가 되는 배우 에블린 휴고가 모니크를 콕 집어 단독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모니크는 유명하다는 것만 알지 에블린의 영화를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입장이라 왜 자신에게 인터뷰를 맡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 잡지사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

그렇게 에블린을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찾아간 모니크는 에블린의 드레스 자선 경매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 그녀가 그 어디에도 밝힌 적 없는 일곱 명의 남편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50년대 할리우드의 아이콘이었던 에블린 휴고는 현재 79살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이슈가 되는 배우였다. 41살이던 딸 코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유방암 연구 기금을 모으고자 드레스를 경매에 내놓겠다고 알려지자 너도나도 그녀를 인터뷰하고자 했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외모와 섹시한 매력으로 남녀노소 모두를 사로잡은 에블린은 천생 배우였기에 오스카를 수상하기도 했다. 배우로서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생활이 큰 이슈가 됐는데, 그녀가 결혼을 일곱 번이나 했었고 20살이나 어린 하원의원과 바람을 피우기도 했었기 때문에 기자들에게는 그녀의 모든 것이 노다지였을 게 당연했다. 자선 경매에 관한 인터뷰 요청은 그저 명분이었을 것이다.
에블린은 은퇴한 지 한참이 지난 배우지만 여전히 세기의 아이콘이었기에 원하는 기자를 불러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잡지사의 말단 기자 모니크였다. 모니크는 아버지가 오래전에 영화 촬영장에서 사진 기사로 일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에블린과의 접점이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에블린의 사진을 찍었는지도 잘 몰랐고, 유명한 배우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엄마는 전했다. 그래서 모니크는 에블린이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말단 기자인 자신을 지목한 거라 여겼다.

하지만 에블린의 집에 찾아가 그녀를 마주한 모니크는 자선 경매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거기에 에블린은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서 경매에 부쳐 가장 비싼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판권을 판매하라고까지 했다.
어디에도 속 시원하게 밝힌 적 없는 세기의 아이콘의 사생활이라면 어마어마한 금액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모니크는 에블린이 왜 자신에게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의아함에도 모니크는 이 인터뷰로 인해 많은 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잡지사에는 비밀로 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쿠바 출신 이민자 부부의 딸이었다. 11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에블린은 줄곧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18살이 됐을 때 첫 결혼을 하고 할리우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인 외모를 통해 돈을 벌고자 했다. 바로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 단역과 조연을 맡긴 했지만 스타라고 불리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그녀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돈 아들러와 두 번째 결혼을 강행했다. 에블린과 돈 두 사람에게 윈윈할 결혼이었지만,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돈이 에블린을 때리기 시작하면서 결혼생활은 뒤틀리고 있었다.
이후 에블린은 돈과 이혼하고 여러 사람과의 염문설을 뿌려댔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계약 결혼 등을 이어나갔다. 에블린이 그렇게까지 하게 된 이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에블린이 사랑한 사람의 존재는 지금 시대엔 충격이 아니지만, 그녀가 한창 활동을 할 때에는 물어뜯기다 못해 생매장을 당할 정도의 큰 파문이 일어날 사건이었다. 그래서 에블린은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여러 번의 결혼을 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싶어 너무 안타까웠다. 심지어 지키려고 한 노력이 사랑하는 이를 지쳐버리게 했기에 에블린과 그녀의 사랑 모두 가여웠다.

어디에도 밝힌 적 없는 에블린의 회고는 현재라는 끝을 향해 나아갔고, 마침내 그녀가 왜 모니크를 원했는지 밝힘으로써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이 부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모니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모니크가 받은 충격, 거기에 고통까지 더해져 그녀가 에블린에게 더 큰 상처를 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니크는 그동안 에블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에 푹 빠졌기에, 그리고 그녀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에 용서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지키는 건 너무 어려웠던 에블린 휴고의 이야기가 몰입감 있게 펼쳐졌다. 처음에 이 책의 제목만 봤을 땐 배우의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로만 봤는데, 그 이면에는 빛나는 스타의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은 넷플릭스에서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시 재미있는 소설이라 영화화되는 건가 보다. 남자와 여자를 모두 홀렸던 에블린을 누가 맡게 될지 기대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진실을… 가리느라 급급했어. 이제 와서 해체작업을 하려니 쉽지 않네. 그동안 진실을 가리는 걸 너무 잘해 왔거든. 아직은 진실을 어떻게 말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경험이 별로 없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은 방식과 너무 달라서 말이야. 하지만 기어이 해낼 거야." - P57.58

자신의 출신 성분을 기꺼이 부정하고 자신의 몸을 상품화하며 선량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고 말해줄 생각이었어. 남들의 이목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고 자신의 본 모습 대신 남들이 선망하는 거짓된 모습으로 살다가 결국엔 자신이 누구로 시작했는지 혹은 애초에 왜 그렇게 시작했는지도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해줄 생각이었어. - P464.465

에블린 휴고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어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전해. 에블린 휴고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잊어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전해.
에블린 휴고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하면 더 좋아. 그녀는 내가 그들을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야.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창조한 인물에 불과해. 내가 아주 오랫동안 사랑이 뭔지 잘 몰랐다고 전해. 하지만 이젠 잘 알기에 그들의 사랑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전해. - P5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릿 트레인 - 영화 원작소설 무비 에디션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무라 유이치는 백화점 옥상에서 자신의 아들 와타루를 밀어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 중학생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신칸센에 올라탔다. 소음기를 장착한 22구경을 종이봉투에 담아 그 중학생, 일명 왕자를 찾아 헤매던 기무라는 마침내 소년과 마주한다. 하지만 왕자가 들이민 전기 충격기로 인해 기무라는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손발이 묶여 있었다.
중학생인 오우지 사토시, 일명 왕자는 똑똑한 두뇌와 순진무구한 외모를 이용해 모든 사람들을 조종하는 걸 즐긴다. 학교 아이들부터 시작해 선생님까지 왕자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직이게 만들었고, 지금은 신칸센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 알코올 중독자 아저씨 기무라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 기무라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면 병원에 있는 아들이 위험하다고 명백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쌍둥이 킬러라고 불리지만 진짜 쌍둥이는 아닌 밀감과 레몬은 미네기시의 의뢰를 받아 납치된 미네기시 도련님을 구출하고, 몸값이 담긴 트렁크도 가지고 신칸센에 올라탔다. 평화롭게 좌석에 앉아 가고 있던 중에 밀감은 트렁크가 보이지 않아 레몬에게 물으니, 열차 내 짐 보관소에 뒀다는 대답이 돌아와 찾으러 나섰다. 그럴 리 없을 거라 여겼지만 트렁크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고, 레몬 또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미네기시 도련님이 죽어 있었다.

무당벌레라는 닉네임을 가진 나나오는 마리아에게서 신칸센에 올라 트렁크를 가지고 내리라는 임무를 하달 받았다. 누군가를 처리하는 킬러라는 직업과는 달리 너무나 쉽고 간단한 업무인데도 나나오는 벌써부터 두려움에 휩싸인다. 왜냐하면 그는 불행의 여신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재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모리오카까지 가는 신칸센 열차는 너무나 평범하게만 보였다. 여느 열차가 그러하듯 평범한 사람들이 역마다 타고 내렸고, 열차에서 일하는 승무원들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표면상으로만 그랬던 것이었다.
신칸센에 탄 사람들 중 평범함을 가장한 킬러가 여럿 있었다. 쌍둥이 킬러라고 불리는 레몬과 밀감이 있었고, 불운의 아이콘인 나나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는 청부 살인을 했었지만 지금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기무라도 그 신칸센에 타고 있었다. 주요 등장인물 중 가장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은 왕자라고 불리는 중학생 소년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 왕자 녀석의 정신 상태가 제일 문제였다. 사이코패스 같은 왕자 때문에 여러 사달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과일 듀오는 업계에서 무서운 사람이라고 소문난 미네기시의 납치된 외아들을 구출하고, 몸값으로 지불한 돈이 담긴 트렁크까지 회수해 오라는 업무를 맡았다. 두 사람은 워낙 일을 잘해서 임무를 처리하고 신칸센에 성공적으로 올라탔지만, 트렁크를 잃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미네기시 도련님까지 갑자기 죽어버려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미네기시가 알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트렁크를 찾아 헤매는 한편으로, 도련님을 죽인 범인을 만들어내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울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누명을 쓰게 된 이가 있었으니 불운의 아이콘인 나나오였다. 나나오는 트렁크를 훔쳐 신칸센에서 내리면 되는 간단한 업무를 해내지 못하는 바람에 과일들의 표적이 되었다. 자신이 업계에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을 거라 예상했지만, 불행히도 과일들은 나나오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렁크를 둘러싸고 벌어진 불미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나나오와 과일 듀오는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내 그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위해 손을 맞잡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애를 썼다.

나나오와 과일 킬러들과는 다르게 기무라는 오로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신칸센에 올라탔지만,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왕자에게 시작부터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왕자의 나이가 어려서 기무라가 얕잡아 본 것일 터였다. 그리고 왕자는 자신이 똑똑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순진무구해 보이는 외모를 활용할 줄 알았기에 기무라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이 사이코패스 왕자와 기무라가 아들과 관련된 사건으로만 얽힌 게 아니었다는 걸 과거 회상을 통해 밝혀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사건이 있었기에 운명처럼 엮이게 된 것처럼 보였다. 운명이기보다는 악연이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시점이 등장할 때마다 왕자가 얼마나 싫었는지 모른다. 고작 14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해 다 아는 척하며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기무라는 물론이고, 나중에 마주하게 된 나나오와 밀감, 레몬, 그리고 기무라의 부모까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겉으로는 순진한 중학생인 척했다. 가증스럽고 교활해서 너무 싫었다. 이 녀석 때문에 킬러들의 상황이 나쁜 쪽으로만 향해 갔기 때문에 더 밉기도 했다.

신칸센에 올라탄 킬러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촘촘하게 짜여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하고 경계했고, 때로는 총구가 겨눠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주요 인물들 외에 깜짝 등장한 킬러들이 상황을 나쁜 쪽으로, 혹은 좋은 쪽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킬러들 중 누가 무사히 신칸센에서 내릴 것인지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밉상 캐릭터인 왕자의 끝은 어떨까 궁금하게 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제대로 된 끝을 맺었다는 걸 보여주며 소설은 나름의 통쾌함을 안겼다. 그리고 불운의 아이콘이었던 나나오는 사소한 불행으로 둘러싸인 대신 큰 행운을 거머쥐고 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각양각색 여러 킬러 캐릭터들의 특징이 도드라져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또한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이름들이 나중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비밀이 밝혀지는 걸 보며 잘 짜인 이야기라는 생각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교통기관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예를 들어 전방 선로 위에 누군가를, 어떤 사람의 인생을 툭 던져 놓으면, 너무나 쉽게 흔적도 없이 분쇄되겠지. - P53.54

"그건 그렇고, 어쩌지. 이대로 모리오카까지 가서 미네기시한테 ‘아드님을 구출해냈지만 신칸센 안에서 죽어버렸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잖아."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몸값이 들어 있던 트렁크까지 도둑맞았습니다, 하고 말이지." - P67

"밀감 일행이 너한테 트렁크를 다시 가로챘다는 뜻인가?"
"그들의 트렁크를 내가 가로챘어. 그런 나한테서 그들이 다시 트렁크를 되찾아갔다. 아마도 그렇게 된 거 아닐까. 또 다른 제삼자가 얽히는 복잡한 상황은 딱 질색인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대체로 그대로 이뤄지잖아." - P238

"중요한 건 너희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 있느냐는 거야. 자기 의사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았는가. 무엇을 할 속셈이었는가. 우리와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 P4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