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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평점 :
공장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30대의 나, 정인수는 늘 추위와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한여름에는 무덥기로 유명한 옥탑방에서 3년째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름에도 너무 추워서 에어컨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밤에는 늘 귀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들의 수런거림으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옥탑에서 골목길을 내려다보다가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차에 일부러 부딪치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 모습을 보자 10대 시절에 알던 A가 떠올랐다. 이후 그 소년 이호가 두 번째로 자해공갈을 하는 걸 가까이서 목격했을 때 끼어들었어 중재를 했고, 이호를 집으로 데리고 와 씻게 하고 밥을 먹였다.
10대 시절, 인수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고 공부도 그리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집에서 인수는 아버지에게 구박이나 받으면서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하는 아들이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도록 때리는 걸 힘으로 말린 이후 먼 기숙학교에 보내지게 됐다. 짐을 챙겨 떠나는 중에 잠깐 휴게소에 들렀을 때 인수는 무작정 도망을 쳐서 아무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가진 돈이 별로 없던 인수는 PC방을 전전하다가 성연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료급식소에서 동갑내기 경우와도 안면을 텄고, 그가 쌍둥이 중학생들과 생활하는 빈 건물에서 지낸다.
소설은 성인이 되어 혼자 지내고 있는 인수가 17살 가출 청소년 이호를 만나 함께 지내는 내용인 현재와 17살 때 가출해 성연, 경우 그리고 다른 가출팸과 '우리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아가는 과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었다. 인수가 과거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이호의 자해공갈을 목격한 뒤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부터였다. 과거 시점에서 A가 등장한 건 한참 뒤였는데, 가출했던 시절에 만난 A가 이호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과거가 연상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인수는 이호를 집에 데리고 온 뒤에 귀신들의 수런거림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고, 그로 인해 이호가 집에 조금 더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그게 이호를 도망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과거의 인수는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아이였다. 그런 인수를 아버지는 못마땅해했는데, 어머니를 때리던 걸 말리다 아버지가 다치는 바람에 기숙학교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그게 싫어서 도망친 게 가출로 이어졌다. 처음엔 가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자신을 찾지 않자 인수는 그대로 바깥에서의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곳,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슬픈 건 없었다. 더욱이 인수가 고작 17살이었을 때였으니 그 상처가 깊게 새겨진 건 당연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수는 또래 가출 청소년인 성연과 경우를 차례로 만나게 됐다. 성연은 낯선 인수에게 친밀하게 다가와서 가까워졌는데, 이후 함께 지내다 보니 그가 다소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성연 덕분에 잠을 자고 배도 곯지 않을 수 있었기에 인수는 마음에 거리끼는 걸 외면했다. 경우는 성연과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 가출 청소년을 일반화하지 않았다. 경우는 여느 가출 청소년과 달리 자기 몸과 옷, 머무는 곳의 청결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또한 예의 바른 성격이라 어른들이 그를 대할 때 호감을 보였고, 성연이처럼 도둑질 같은 나쁜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성연과 경우 사이에 존재하는 인수는 이 두 사람의 괴리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인수가 평범한 17살 아이들과는 다르게 바깥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우가 옳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지만, 처한 현실에서는 성연처럼 살아야 한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인수는 때로는 경우처럼 착실히 식당 설거지 알바를 하면서도 잠깐 자리가 비워진 카운터의 돈을 탐내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옳고 그름을 바로잡아줄 어른이 있었다면 인수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더 확실한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이야기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가출 청소년들이 처한 위태로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답답한 마음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조건만남 따위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시급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현재의 이호, 과거의 A가 그랬듯 자해공갈로 몸을 다쳐가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몸으로 번 돈으로 하루를 나고 다시 배를 곯는 생활이 지속되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들에겐 저마다 가출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었기에 차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 집의 가출팸은 어른들의 개입으로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가 있었던 반면 인수는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분에 그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마음속에 짐이 하나 더해졌다. 그 짐으로 인해 인수는 여름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목소리들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현재에 도달했을 때 인수는 그때의 속죄를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과거의 경우가 그랬듯, 그 이름처럼 경우 있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미약하게나마 온기를 전했다. 그 온기는 이호에게 도달해 인수가 지나온 과거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거란 희망을 남겼다.
10대 가출 청소년이 처한 현실이 너무 적나라해서 읽는 내내 춥고 답답했으며 끔찍한 감정만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아이들이었기에 미래가 암담했지만, 경우가 있었기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결말을 향해 가면서는 그저 안쓰럽고 참담하기만 했지만 말이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세상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온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불안에 불을 지핀 것은 나지만 그런 나조차 아이들을 경멸했다. 우리는 증오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억울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 P190.191
경우는 안전한 공간에서 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며 지냈다. 경우와 지낼수록 나는 궁금했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를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스스로 터득했다기에 그 태도는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경우 같은 존재는 왜인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 P101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후회를 곱씹는 일에만 성실히 복무했다.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삶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소심한 방식으로 사과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건 경우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방식일 테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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