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야 - 2019년 제15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다이앤 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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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인 '나'는 이란계 남편과 결혼해 캐나다에서 딸 로야를 낳고 화목하게 살고 있다. 남편은 다정하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이었고, 로야는 어디에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가 왔나 싶을 만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다.


가족의 일상은 로야의 수영과 악기 레슨, 그리고 가족 모두 가지고 있는 취미인 음악회 참석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느 날처럼 온 가족이 음악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에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으나 경찰과 구급대가 오고, 가족이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온몸에 통증이 생겨 집안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이 이어진다.

그때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가 걱정할까 봐 끝내 교통사고 소식을 알리지 못했던 나는 당신에게서 늘 듣는 신세 한탄과 푸념을 듣고 이제는 지치고 말았다.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화자의 이야기는 딸 로야와 같은 수영 클럽에 다니는 고등학생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수영 클럽에서는 앞날이 창창한 학생이 갱단의 총기 사건으로 허망하게 죽었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잘 모르는 이의 죽음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화자는 죽음이 멀게 느껴지지 않아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8살인 딸과는 나이대가 다르긴 해도 그 아이 역시 제 부모의 자식이기에 화자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며 슬픔과 불안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기에 화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고 가족을 챙겼으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여가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소설의 도입이 죽음에서 가족으로 초점을 맞췄다가 교통사고와 뒤늦은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이야기로 흘렀기에 무슨 내용으로 흘러갈지 예상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가 과거에 겪은 상실이 드러나면서 이윽고 진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드러났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화자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잃는 상실은 빈번하지는 않아도 여러 번 겪어왔을 만했다. 그녀가 겪은 상실에는 학창 시절의 친구가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죽은 일이 있었고, 가정폭력으로 내내 가족들을 괴롭히는 바람에 화자를 캐나다로 떠나게 한 아버지의 죽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소설 후반에는 남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화자는 죽은 이들에게 각기 다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와 마음의 거리에 따라 다른 게 당연했다. 그 마음의 거리로 인해 화자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각기 달랐다. 그로 인해 화자는 마음의 아픔, 과거의 아픔이 현재 신체의 고통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상실로 인한 감정을 통해 과거와 대면하게 되면서 화자의 진정한 아픔이 드러났다. 누군가의 죽음이 화자의 상처를 다시 헤집게 되기도 했는데, 그건 고인 때문이 아니라 그 죽음을 나누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대체로 엄마였다. 자신이 제일 가엽고 불쌍하고, 딸이나 아들은 혼자가 된 엄마를 챙기지 않는다고 여기며, 가까이 사는 아들 내외보다 머나먼 캐나다에 사는 딸인 화자에게 시차에 상관없이 전화를 하는 그런 엄마 때문이었다. 화자의 엄마가 등장하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정말이지 너무 답답해서 가슴이 꽉꽉 막히는 듯했다. 흉을 보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이 나를 괴롭게 했다.

화자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울타리가 되어줬어야 할 엄마가 이런 사람이라서, 세상을 떠난 아빠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라서 화자 스스로가 만든 울타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울타리 안에서 자랐기에 화자와 남편은 자신들이 만든 울타리를 더욱 따스하고 견고하게 지킬 줄 알았다. 뼈아픈 반면교사가 씁쓸하지만 다행이라 여겨진 건 화자와 남편, 딸 로야는 앞으로도 잘 해나갈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언제까지고 붙잡고 있어야 할 관계는 없었다. 그게 설령 자신을 낳아준 부모라도 말이다. 이어지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보다 자신을 애정으로 붙잡아주는 이들에게 더욱 마음을 기울여야 마땅했다.


이처럼 상냥하게 마음을 쓰는 남편도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아이였다. 모든 아이가 그러하듯 그도 넘어졌고,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넘어지기도 했던 아이였다. 넘어져 생긴 상처가 크면서 희미해지는 것처럼 우리 무의식에 담긴 감정 또한 희미해지면 좋을 테지만, 뚜렷한 선이 생긴 감정은 나이테처럼 흔적을 남긴다. - P175

엄마의 수법과 나의 수법은 애초부터 달라서인지 엄마는 나에게 끊임없는 채무 정산을 요구한다. 정산에 단지 금전만 포함됐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대부분은 한도 끝도 없는 정신적 보상이다. 엄마는 빚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고 난 빚을 갚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다. 한도 끝도 없는, 정산이 불가능한, 내 생명 값이다. - P82.83

엄마를 향한 나의 사랑은 고백하건대 연민이었다. 연민에서 비롯된 사랑에는 사랑해야만 한다는 의무감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따른다. 아빠가 죽자 엄마는 더욱더 가련한 모양새를 했고, 나는 그런 엄마에게 더욱더 신경을 썼다. 그러나 정작 내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엄마는 없었다. 있었지만, 없었다. - P197

남편도 나도 맏이로 태어나 자랐다. 우리는 자신을 없애서 타인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나고 자란 가족 내에서 나와 남편이 쓴 면류관엔 권리는 없고 책임만 존재한다. 서로 그것을 알아서 적어도 우리가 만든 가족 내에선 책임도 권리처럼 영광스럽게 대한다. 영광스러운 그것, 포괄적으로 정의하자면, 사랑이다. - P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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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경비원 - 2021년 퓰리처상 수상 장편소설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지예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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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종결 법안'이 통과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알려진다.


치페와족 의장 토머스 와샤스크는 보석베어링 공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아내와 자식들, 아내의 노모는 물론이고 자신의 늙은 아버지를 돌봤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 종결 법안이 통과되는 걸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석 베어링 공장에서 일하는 퍼트리스는 몇 달 동안 연락이 없는 언니 베라를 찾고자 한다. 영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촌 제럴드가 베라에게 아기가 있는 게 보였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언니를 찾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소설은 나이 든 치페와족 남자 토머스와 젊은 치페와족 여자 퍼트리스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됐다. 의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토머스에게 종결 법안이 성큼 다가왔기에 그 건에 대해 제대로 알리고 마무리 짓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인디언들에 대한 지원이 종결된다면 그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생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퍼트리스는 언니 베라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백인 남자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고, 보석 베어링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중요하긴 했지만 언니와 혹시 모를 아기를 찾는 게 중대한 문제였다.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 가족과의 관계 등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은 토머스와 퍼트리스였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건 같아 보였다. 가족이라는 큰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인디언이라고 말이다.

종결 법안으로 인해 갑작스레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했어도 토머스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가족을 돌보고 밤에는 보석 베어링 공장에서 경비를 서는 일을 언제나처럼 지속하고 있었다. 다만 종종 학창 시절에 죽은 친구의 영혼을 봤고, 인디언들에게 부정적인 의미인 부엉이를 보는 등의 환각을 겪었다. 그러다 종결 법안 통과 반대를 위해 위원회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토머스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반면에 퍼트리스는 초반부터 많은 일을 겪었다. 언니를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미니애폴리스로 간 그녀는 택시 기사를 가장한 불량배에게 이끌려 술집에 끌려 가게 됐다. 그곳에서 자칫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당당한 그녀는 기죽지 않고 원하는 걸 얻어내려고 했다.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지를 발휘한 퍼트리스는 수조에서 공연을 하고서 꽤 많은 돈을 벌었고, 그걸 가지고 몰래 빠져나와 마침 그 도시에 있던 치페와족 권투 선수 우드 마운틴과 베라의 아기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나갔다 돌아온 뒤에 퍼트리스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이전과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두 사람의 노력이 시나브로 그들을 변화하게 만든 듯했다. 더 좋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그들 앞에 닥친 어려움은 주저앉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뜻하는 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주춤하고 꺾일 뻔했을지라도 그들은 다시 일어서서 자신과 가족, 인디언들과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갔다.


소설 <밤의 경비원>은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궁금해져 읽게 됐다.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정부는 때때로 인디언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정부는 늘 인디언을 해결하려 했다. 토머스는 생각했다. 그들을 우리를 제거함으로써 우리를 해결하려 하지. - P109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언뜻 무해해 보이는 건조한 언어로 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의도라는 것이 결국은 지우는 것,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인디언으로서의 토머스, 비문, 로즈, 자녀, 주변 사람들, 곧 우리 모두를 보이지 않게 지우는 것. 마치 여기, 처음부터 우린 이곳에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 P108

퍼트리스는 가족 중에 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덫을 놔서 동물을 잡는 일도 아니고, 사냥도 아니고, 베리를 줍는 일도 아닌, 백인들이 갖는 그런 직업이었다. - P26

제가 스스로 발전했다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제가 읽고 쓰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고 쓸 수 있다고 해서 인디언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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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형에 관한 기록
단야 쿠카프카 지음, 최지운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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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7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형수 안셀 패커는 12시간 후면 형이 집행될 예정이다. 자신의 형이 집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느 사형수와는 다르게 안셀은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여자 교도관인 샤나가 그를 위해 탈출 방법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다.


1973년.

17살 라벤더는 헛간 담요 위에서 첫아이를 낳는 중이었다. 한눈에 반해 함께 살게 된 조니가 출산을 돕고 있었는데, 아직 너무 어린 라벤더는 두려울 따름이었다. 어렵게 아들을 낳고 이름을 안셀이라 지었다. 라벤더는 새롭게 생긴 가족으로 희망을 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조니 할아버지의 외진 농장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조니가 음식을 식품 저장고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라벤더는 자신을 때리고서 미안해하는 조니에게 함께 외출을 하자고 했다. 아기를 안셀에게 맡기고 몇 년 만에 농장에서 벗어난 라벤더는 주유소에 도착했을 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1984년.

사피는 위탁 가정에서 비슷한 또래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조금 특별해진 건 식탁 건너편에서 안셀이 그녀에게 윙크를 한 이후부터였다. 사피는 친하게 지내는 여자아이 크리스틴과 릴라에게 말했지만, 아이들은 집에서 가장 예쁜 애한테 윙크한 걸 착각한 게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사피는 확신했다.

안셀이 자꾸만 신경 쓰였던 사피는 마당을 지나면 나오는 개울에 혼자 있던 그 애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목격한 이후 안셀이 너무나 두려워진다.





소설은 사형 집행을 12시간 앞두고 있는 안셀 패커의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으로서 저질러선 안 되었던 끔찍한 살인을 여러 번 제 손으로 해냈던 입장이라고 할지라도 타자에 의해 생을 마감한다는 건 두려워 마땅해야 할 중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안셀은 죽음을 앞둔 자의 두려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설렘까지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안셀이 유혹한 교도관 샤나 덕분에 이송 중에 탈출을 할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잔혹한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지라도 안셀의 매력은 아직까지 유효했다. 그로 인해 그는 여유를 부릴 수 있던 것이었다.


이후 소설은 여러 여성들의 시점을 등장시켰다. 안셀을 낳은 라벤더, 어릴 때 위탁 가정에서 만난 사피가 성인이 되어 경찰로서 그를 쫓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리고 안셀의 마지막 피해자인 제니의 쌍둥이 자매 헤이즐의 시점 또한 등장시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줬다.

조금 특이했던 건 여성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며 여느 소설처럼 여자들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으나 안셀의 시점은 2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했고, 다른 이가 안셀의 이름을 부를 때 외에는 그의 이름이 작가에 의해 쓰이지는 않았다는 게 독특했다. 처음엔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소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가 됐다. 어머니와 피해자, 전 부인 등 안셀과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깊은 관련이 있던 여러 여성들은 잊히지 않겠지만, 그저 살인자에 지나지 않은 그는 이름 없는 존재로 남아 잊힐 거라는 의미였다.

작가의 그런 의도를 파악하고 나자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욱 깊이 마음에 들어왔다.

라벤더는 남편 조니의 폭력과 감금, 학대로 인해 두 아들을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던 입장이었으나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면서 두 아들이 그저 행복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가여운 어머니였다.

사피는 어렸을 때 겪은 놀라운 사건으로 안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경찰이 된 후에는 어릴 적의 경험으로 인해 안셀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경찰이라는 직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여성을 구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헤이즐은 쌍둥이 자매 제니가 남자친구라고 안셀을 데리고 왔을 때 괜찮은 그의 외형에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한밤중에 우연히 목격한 사건 이후 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세월이 흘러 제니가 안셀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결혼까지 하게 되고, 상황이 변해 이혼을 하면서 헤이즐은 전적으로 제니를 도왔고 구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안셀이 어떤 인간인지 끔찍한 사건으로 알게 되면서는 제니를 위해서 잊지 않으려고 했다.

이름 없는 피해자 여성들과 언론의 관심을 받는 가해자 남성이 아닌, 잊히고도 마땅한 살인자와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작가의 의도가 너무 긍정적이기에 좋았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예정된 끝을 맺은 안셀과는 다르게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 자신만의 삶을 무한히 펼쳐나갔을지도 몰랐던 여자들의 가능성이 슬프지만 다정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감히 가장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걸까. - P334

그녀는 남은 생애 동안 이 이야기를 다시 쓸 것이다. 정리하고, 다듬고, 벽에 던져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제니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까지 몇 년은 걸릴 것이다. 헤이즐이 느끼는 상실감은 거칠었으며 끝이 없었다. 아직 안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너무 큰 충격에 잠겨 헤엄치느라 갈비뼈를 후벼파던 분노도 잊었다. 이건 안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358

미처 살아 보지 못한 무한한 삶, 그 가능성들이 유령처럼 따라다녔다. 사피는 종종 세 번째 임신으로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그 안의 여자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릴라의 모습을 상상했다. 여자아이라면 더 약할 것이지만 또한 잠재력이 더 풍부할 것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릴라가 말하는 것 같았다. 상상해 봐, 여자아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될 수 있는지. - P364.365

그는 주목을 받는다. 언론의 관심을 받고, 이야깃거리가 되며, 관련한 절차는 신중하게 규제되어 있다. 실제 처벌은 달라야 한다고 헤이즐은 생각한다. 외로워야 하며 대단한 건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종신형을 받아 흐르는 시간을 썩혀야 한다. 이름이 오래도록 잊혀야 한다. 심장 마비나 샤워하다 미끄러져 비명횡사하는 것처럼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죽음이야말로 마땅하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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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5 - 광해군에서 인조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5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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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인 임진왜란 편이 마의 구간이었다면, 5권부터는 조선의 쇠락의 초입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역사를 알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의 시리즈는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주저 끝에 5권을 읽기 시작했다.




5권의 초반에 다룬 내용은 광해군 치세 후반의 이야기였다. 성리학이 기반이 되는 조선에서 폐모살제는 반정을 제공할 빌미로 충분했다. 거기다 국제 정세를 읽은 광해군과는 다르게 명에 충성하는 것에만 혈안이 된 사대부들은 임금을 끌어내리고자 했다. 이렇게 초반에는 광해군 말기의 상황에 대한 언급을 하고 지나갔고,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이 추대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말했다.

솔직히 인조에 관한 부분보다 허준과 허균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 더 흥미를 끌었다.
시청률이 어마어마했던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는 허준의 동의보감이 동아시아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믿을만한 한의학 서적이라서 그런 것 같다. 허준과 동의보감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드라마에 관한 얘기였다. 워낙 인기가 많은 드라마였지만 나는 안 봤는데, 드라마에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한다. 허준은 서자 출신이긴 하지만 굉장한 명문가 자제라서 어릴 때부터 풍족한 생활을 했고 교육적으로도 든든한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배신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데, 문학적으로는 한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언급된 여러 내용을 읽어보면 당파 싸움에 희생되었다는 생각도 드는데, 한편으로는 화를 자초한 것 같기도 하다. <홍길동전>처럼 율도국을 꿈꾼 허균은 능지처참을 당해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을 정도라고 하니 참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국제 정세는 전혀 읽지 못하고 정통성에 집착해 자신의 아버지를 추숭하는 일에만 집착하던 인조는 결국 홍타이지에 의해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아는 역사임에도 정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왕이 될 수 없는 서열의 군이 왕위에 올라 한 일이라고는 조선의 쇠락을 앞당기는 일뿐이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했는데, 인조는 끝까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했고 변명을 하기에만 급급했다. 암담한 조선의 지난한 말로의 시작이었다.



아는 역사지만 될 수 있으면 접하고 싶지 않은 부분에 도달했다. 앞으로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할 텐데, 읽을 때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 벌써부터 가슴에 화가 쌓이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긴 하겠지만 마음이 안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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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 - 제3·4회 타임리프 공모전 수상 작품집
해도연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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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연 × 안녕, 아킬레우스 피터는 허가되지 않은 타임루프를 발견하면 루프를 끊고 등록되지 않은 타임루퍼를 회사에 영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출장을 온 피터는 카페의 마스터가 타임루프에 빠진 타임루퍼라는 걸 설명하고 설득한다. 마스터는 사랑하는 여자와 밤을 보내고 그녀가 사망한 이후에 타임루프에 빠지게 됐다고 하며, 피터에게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한다.
자우 × 심계항진 비 오는 5월 12일에 잠에서 깬 미나가와 히로미는 수업이 없지만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돌아와 과제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잠이 들어 13일 오전 1시에 사망했다. 12일에 깨고 13일에 사망하는 수십 번의 하루를 똑같이 살아가던 히로미 앞에 유학생 겨울이가 나타나 막지 못하는 죽음에 슬퍼한다.
이나경 × 사랑손님과 나
중학생 모연은 누님의 사랑에서 하숙을 시작한 남준의 선생이 영 탐탁지 않다. 자신이 먼저 들어와 지내던 방을 반을 갈라 선생에게 내어준 것부터 시작해 누님이 차린 저녁상을 내가는 일도 영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모연은 못마땅한 마음에 선생의 책상을 뒤지다가 수첩 속에 쓰인 날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날짜에 친일을 하는 석정명이 살해되면서 모연은 남준의 선생이 각시탈이라 굳게 믿게 된다.

이나경 × 극히 드문 개들만이
글 쓰는 동아리의 후배 윤이가 '나'에게 게임을 하나 소개해 줬다. 나사 출신이 개발한 '옴니션트'는 가상의 평행우주를 기반으로 한 게임인데, 이 게임으로 종종 글을 쓰기도 한다는 말에 솔깃했다. 게임을 시작한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골든 리트리버를 키우는 집을 관찰하게 된다. 그러다 졸업이며, 취업 등으로 바빠 한동안 접속을 하지 못했다가 오랜만에 들어간 옴니션트 속에서 골든 리트리버의 특정한 하루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정재환 × 네버 체인지
스포츠 도박이 취미인 석원은 복권방의 주인이 가게를 맡길 정도로 매주 빠짐없이 베팅을 하지만 결과가 썩 좋지는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복권방 주인 대신 가게를 보고 있을 때 맨발에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타나 어느 팀에 베팅을 해야 할지 말해준다. 석원은 그녀를 미친 여자로 취급했으나 그날 이후부터 매주 이길 팀을 말해주는 걸 보며 승리의 여신이라 확신한다.
유버들 × 시간 보험사
태준은 파견 업체를 통해 '시간 보험사'라는 곳에 왔다. 운전을 하고 짐을 옮기는 등의 간단한 업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었는데, 박영남 주임을 따라 아무것도 없는 방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자신이 4개월 후의 미래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박 주임을 따라 돌아다니며 하는 일을 보곤 더욱 믿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경희 ×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
천 년을 살며 꼬리 아홉 개를 얻은 하얀 여우는 산에서 목숨을 끊으려는 남자를 구해준다.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어느덧 부부의 연을 맺고 행복하게 살아온 그들 앞에 전란이 발발했다. 여우 아내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은 의병으로 나가 싸우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여우 아내 앞에 검은 여우가 나타나 과거로 시간을 돌려주는 대신 꼬리를 하나 달라고 한다.
위래 × 쿠소게 마니아
1시 24분 45초,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학교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교실에 있던 소년은 몇 번이고 학교를 빠져나가 살아남고자 하지만,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어 죽음을 맞이하고서 다시 추락 시점으로 되돌아온다.
남유하 × 뒤로 가는 사람들
아내를 죽이고서 밖으로 나온 남자는 갑자기 사람들이 뒤로 걷기 시작하는 걸 본다. 심지어 자전거마저 거꾸로 가고 있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싶어 집으로 돌아오자,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내가 멀쩡히 살아남아 남자를 걱정스레 맞아주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이후 남자는 몇 번이고 뒤로 가는 현상, 일명 '리와인드'가 일어나는 걸 겪으며 규칙을 알아내고자 한다.




타임리프,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앤솔러지 작품집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는 굉장히 다양한 장르의 재미를 느끼게 했다. 현대의 이야기가 있던가 하면, 표제작과 같은 시대극이 있었고, 더러는 스릴러 장르의 재미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있었다.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는 <시간 보험사>였다. 주인공 태준은 파견 업체의 알선으로 '시간 보험사'에 일을 하러 갔는데 갑자기 4개월 후의 미래에 와 있었다. 아주 먼 미래가 아니라서 현재와 거의 다를 게 없긴 했으나 문제는 시간 보험사의 박 주임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며 태준에게 망을 보라고 시키거나 뭔가를 찾으라는 일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태준은 도망치고 싶어도 돌아갈 방법을 몰랐고, 경찰에게 신고를 하자니 4개월 전의 과거에서 왔다는 말부터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
이후 태준은 무사히 현재로 돌아왔고 다시는 시간 보험사에 일을 하러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이후 소설은 결말에서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며 소름 돋게 만들었다. 이토록 짧은 소설에서 기승전결, 반전까지 확실해서 확실히 각인시켰다.
<뒤로 가는 사람들> 또한 <시간 보험사>와 같이 스릴러의 재미를 느끼게 했다. 아내를 죽인 남편이 등장해 뒤로 가는 '리와인드'를 겪으며 아내를 죽인 날에서 자꾸만 날짜를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했다. 과거로 향해 가는 남자가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게 했는데, 이 소설 역시 반전을 보여주며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 결말은 조금 씁쓸함을 남겼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변주 <사랑손님과 나>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중학생 모연이 사랑손님을 신출귀몰 애국지사 각시탈로 오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 소설에 타임루프 소재가 어떻게 활용될까 궁금했는데, 역시나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면서 시대적 배경의 안타까움을 더해 여운을 남겼다.

시간 여행이라는 특정 주제로 여러 작가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채롭게 즐겼다.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시간 여행이기에 더욱 흠뻑 빠져 읽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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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매일 그녀와 조금씩 다른 대화를 했고, 그녀의 반응도 매일 조금씩 달랐어. 결국, 매일 다른 사람이었지. 그리고 난 지금까지 수많은 그녀들이 죽어 가게 내버려 뒀고."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무슨 대화를 했든지, 오늘 밤 세상을 떠나는 게 그녀의 운명이에요. 당신은 그저 조금이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던 것뿐이죠." 해도연 <안녕, 아킬레우스> - P29

"시대를 거슬러 옮겨 다닐 수 있다면 여기서 복잡하게 이러실 것 없이 소위 을사년의 오적이라는 자들을 미리 처단하면 될 일 아닙니까? 아예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손을 쓰시면 되잖아요?"
"그랬다간 미래가 바뀌잖나."
"아무렴요. 좋게 바뀌겠지요."
"그걸 장담할 수 있나? 또 다른 역적이 등장해 나라를 팔아치우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느냔 말일세. 어쩌면 백 년이 지나도 해방되지 못할 가능성이 정녕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나경 <사랑손님과 나>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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