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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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고헤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중화소바집을 운영하며 세 자녀를 키워냈다. 아내 란코도 시집을 온 후부터 가게에서 함께 일하며 소박한 일상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2년 전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고헤는 가게 문을 다시 열지 못했다. 란코의 빈자리가 컸다기보다 아내를 잃은 후에 그 무엇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독서를 좋아하는 고헤가 한 번도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을 펼쳤을 때 30여 년 전에 란코 앞으로 온 엽서를 발견하게 된다. 고사카 마사오라는 대학생이 란코 앞으로 보낸 것이었지만 그녀는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며 잘못 보냈다는 엽서를 애써 써서 보냈었다.


등대가 그려진 엽서를 들여다보던 고헤는 문득 직접 등대를 보고 싶어져 등대 순례를 떠나게 된다. 이후 고헤는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한편으로 란코와 그녀에게 엽서를 보냈던 대학생의 이야기를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몇십 년 동안 함께 산 아내를 하루아침에 잃은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병이나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게 아니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가게 준비를 하러 간 아내가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는 걸 발견한 고헤의 입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을 터였다. 가게 일 때문에 아내를 괜히 고생시킨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을지 몰랐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란코가 떠난 이후 고헤는 중화소바집을 열지 못했다. 그리 넓은 가게는 아니라서 어떻게든 혼자 꾸려나갈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오래전 아내에게 온 낯선 이의 엽서를 발견한 이후 문득 등대 순례를 떠나게 된다. 차를 빌려 가까운 등대를 보고 온 고헤는 조금이나마 살아갈 힘을 얻은 듯했다.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등대가 마치 인생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컴컴한 늦은 밤에도,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날에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며 배들을 향해 빛을 비추는 등대야말로 삶의 지표와도 같았다.

고헤가 내내 등대만 보러 다닌 건 아니었다. 잠깐씩 등대를 보러 다녀왔고, 돌아온 집에서 자식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과도 시간을 보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간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건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간짱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다고 또다른 친구 도시오가 말해주었다. 나중엔 간짱의 그 아들인 다키가와 신노스케와 함께 고헤는 등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함께 사는 큰딸은 물론이고 왠지 어렵게 느껴지는 둘째 아들, 대학에 다니는 막내아들과 각각 시간을 보내며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엄마에 대한 이야기, 자식들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나중엔 세상을 떠난 란코에게 엽서를 보내왔던 대학생 고사카 마사오를 만나기도 했다.


소설은 그렇게 특별한 사건 없이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흘러갔다. 보통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은 일상의 담백함이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해서 즐겁게 읽었다. 마치 고헤의 중화소바처럼 담백해서 특별한 느낌은 없는데 맛있어서 계속 찾게 되는 음식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마음이 포근해지는 게 참 좋았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이 숱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아들, 몇 안 되는 친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는 멀리서만 봐왔는지도 모른다. 삼각형도 육각형도 멀리서 보면 전부 원으로 보인다. 아니, 너무 가까워서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 P206

하늘색과 바다색과 안개 속에서 등대는 스스로의 빛깔을 지우고 숨죽인 듯 보이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혀 항로를 비춘다. 숱한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저것은 조부다. 저것은 조모다. 저것은 아버지다. 저것은 어머니다. 저것은 란코다. 저것은 나다.
저것은,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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