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형에 관한 기록
단야 쿠카프카 지음, 최지운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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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7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형수 안셀 패커는 12시간 후면 형이 집행될 예정이다. 자신의 형이 집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느 사형수와는 다르게 안셀은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여자 교도관인 샤나가 그를 위해 탈출 방법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다.


1973년.

17살 라벤더는 헛간 담요 위에서 첫아이를 낳는 중이었다. 한눈에 반해 함께 살게 된 조니가 출산을 돕고 있었는데, 아직 너무 어린 라벤더는 두려울 따름이었다. 어렵게 아들을 낳고 이름을 안셀이라 지었다. 라벤더는 새롭게 생긴 가족으로 희망을 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조니 할아버지의 외진 농장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조니가 음식을 식품 저장고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라벤더는 자신을 때리고서 미안해하는 조니에게 함께 외출을 하자고 했다. 아기를 안셀에게 맡기고 몇 년 만에 농장에서 벗어난 라벤더는 주유소에 도착했을 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1984년.

사피는 위탁 가정에서 비슷한 또래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조금 특별해진 건 식탁 건너편에서 안셀이 그녀에게 윙크를 한 이후부터였다. 사피는 친하게 지내는 여자아이 크리스틴과 릴라에게 말했지만, 아이들은 집에서 가장 예쁜 애한테 윙크한 걸 착각한 게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사피는 확신했다.

안셀이 자꾸만 신경 쓰였던 사피는 마당을 지나면 나오는 개울에 혼자 있던 그 애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목격한 이후 안셀이 너무나 두려워진다.





소설은 사형 집행을 12시간 앞두고 있는 안셀 패커의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으로서 저질러선 안 되었던 끔찍한 살인을 여러 번 제 손으로 해냈던 입장이라고 할지라도 타자에 의해 생을 마감한다는 건 두려워 마땅해야 할 중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안셀은 죽음을 앞둔 자의 두려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설렘까지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안셀이 유혹한 교도관 샤나 덕분에 이송 중에 탈출을 할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잔혹한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지라도 안셀의 매력은 아직까지 유효했다. 그로 인해 그는 여유를 부릴 수 있던 것이었다.


이후 소설은 여러 여성들의 시점을 등장시켰다. 안셀을 낳은 라벤더, 어릴 때 위탁 가정에서 만난 사피가 성인이 되어 경찰로서 그를 쫓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리고 안셀의 마지막 피해자인 제니의 쌍둥이 자매 헤이즐의 시점 또한 등장시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줬다.

조금 특이했던 건 여성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며 여느 소설처럼 여자들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으나 안셀의 시점은 2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했고, 다른 이가 안셀의 이름을 부를 때 외에는 그의 이름이 작가에 의해 쓰이지는 않았다는 게 독특했다. 처음엔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소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가 됐다. 어머니와 피해자, 전 부인 등 안셀과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깊은 관련이 있던 여러 여성들은 잊히지 않겠지만, 그저 살인자에 지나지 않은 그는 이름 없는 존재로 남아 잊힐 거라는 의미였다.

작가의 그런 의도를 파악하고 나자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욱 깊이 마음에 들어왔다.

라벤더는 남편 조니의 폭력과 감금, 학대로 인해 두 아들을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던 입장이었으나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면서 두 아들이 그저 행복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가여운 어머니였다.

사피는 어렸을 때 겪은 놀라운 사건으로 안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경찰이 된 후에는 어릴 적의 경험으로 인해 안셀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경찰이라는 직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여성을 구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헤이즐은 쌍둥이 자매 제니가 남자친구라고 안셀을 데리고 왔을 때 괜찮은 그의 외형에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한밤중에 우연히 목격한 사건 이후 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세월이 흘러 제니가 안셀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결혼까지 하게 되고, 상황이 변해 이혼을 하면서 헤이즐은 전적으로 제니를 도왔고 구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안셀이 어떤 인간인지 끔찍한 사건으로 알게 되면서는 제니를 위해서 잊지 않으려고 했다.

이름 없는 피해자 여성들과 언론의 관심을 받는 가해자 남성이 아닌, 잊히고도 마땅한 살인자와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작가의 의도가 너무 긍정적이기에 좋았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예정된 끝을 맺은 안셀과는 다르게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 자신만의 삶을 무한히 펼쳐나갔을지도 몰랐던 여자들의 가능성이 슬프지만 다정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감히 가장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걸까. - P334

그녀는 남은 생애 동안 이 이야기를 다시 쓸 것이다. 정리하고, 다듬고, 벽에 던져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제니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까지 몇 년은 걸릴 것이다. 헤이즐이 느끼는 상실감은 거칠었으며 끝이 없었다. 아직 안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너무 큰 충격에 잠겨 헤엄치느라 갈비뼈를 후벼파던 분노도 잊었다. 이건 안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358

미처 살아 보지 못한 무한한 삶, 그 가능성들이 유령처럼 따라다녔다. 사피는 종종 세 번째 임신으로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그 안의 여자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릴라의 모습을 상상했다. 여자아이라면 더 약할 것이지만 또한 잠재력이 더 풍부할 것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릴라가 말하는 것 같았다. 상상해 봐, 여자아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될 수 있는지. - P364.365

그는 주목을 받는다. 언론의 관심을 받고, 이야깃거리가 되며, 관련한 절차는 신중하게 규제되어 있다. 실제 처벌은 달라야 한다고 헤이즐은 생각한다. 외로워야 하며 대단한 건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종신형을 받아 흐르는 시간을 썩혀야 한다. 이름이 오래도록 잊혀야 한다. 심장 마비나 샤워하다 미끄러져 비명횡사하는 것처럼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죽음이야말로 마땅하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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