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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
니나 리케 지음, 장윤경 옮김 / 팩토리나인 / 2021년 10월
평점 :
가정주치의로 일하고 있는 50대 여성 엘린은 멀쩡한 집을 놔두고 진료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초라한 상황에 처한 이유는 옛 연인 비에른과 바람을 피운 것을 남편 악셀에게 들켰기 때문이고, 해명하기도 지친 그녀가 남편에게 집의 지분 전부를 넘겨버린 탓이었다.
사실 엘린이 바람을 피운 게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반평생 넘게 함께 살아오는 동안 악셀은 자신이 일하는 병원과 스키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집안일까지 온전히 엘린의 몫이었고, 최소한 뭐라도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다음번에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여기에 엘린은 번아웃이 와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녀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아프다고 골골대면서 정작 눈에 보이는 원인을 무시하곤 했다. 어쩌다 엘린이 다소 강하게 말하면 마치 그녀가 인종차별주의자라도 되는 듯 끔찍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엘린은 일과 가정에서 모두 벗어나 조금은 마음의 환기를 느끼고 싶어 비에른을 만난 건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관계마저도 버겁기만 하다.
소설에서 엘린이 처음 등장했을 때 조금 이상하게 보이긴 했다. 진료실에서 혼잣말을 하는 듯했던 그녀는 토레라고 이름 붙인 해골 모형과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인데 이래도 되나,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환자들부터 엘린을 힘들게 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긴 했다. 치질환자는 화장실에 갔다가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병원에 왔고, 고도비만의 환자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건지 진료만 받으려고 했다. 우울증이라는 선생은 왜 우울한 건지 말도 하지 않으면서 소견서만 써 달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자신의 증상에 대해 찾아보고선 전문가인 의사를 앞에 두고 진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스쳐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던 걸 보면 의사라는 직업도 참 고된 일인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린이 바람을 피워도 된다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남편 악셀의 행동을 보면 또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서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샤워 후에 욕실 바닥 물기를 제거해 달라고 해도 몇십 년 동안 들어먹지 않았던 악셀의 이런 사소한 행동을 보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 전체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차라리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게 더 편했을 터였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엘린은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권태를 느끼게 됐고, 이제는 알코올중독 위험에 이르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SNS를 살펴보던 중에 옛 남자친구 비에른이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SNS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는 뭔가를 누르는 바람에 비에른에게 알람이 갔고, 이후로는 불륜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비에른과의 관계로 악셀과의 부부생활을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고 말았다. 비에른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었고 그러겠다고 여러 번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결국 끝을 낼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엘린을 더욱 지치게 했다.
50대라는 나이를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것에 권태기가 올 만한 나이인 것 같기도 하다. 사회적으로는 조금 애매한 나이인데 늙었다는 걸 몸으로 체감하고, 자식들은 성인이 되어 출가하거나 손주가 생기기도 한다. 함께 사는 반려는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살고 있으니 뭔가 환기시킬 게 필요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 모호함을 엘린을 통해 보여주면서 이제는 모든 걸 다 손에서 놓고 싶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갔지만, 다행히도 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좀 장황하긴 했지만 무난하게 읽기에 나쁘지 않은 소설이었다.
"욕망은 갈망과 동경 속에서만 살아. 만약 손 닿을 거리에 있으면 바라기를 멈추지. 이건 중력 같은 물리법칙이랑 다르지 않아. 아주 간단명료하다구. 손에 넣은 뭔가를 다시 바라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공식 커플이 돼서 계속 같이 산다면 우리 사이도 필연적으로 식어버린다는 거야." - P235
나는 단 하나만을 원했다. 모든 것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기를. 무언가 깜박이고 반짝이는 것을 내가 발견했으니까. 그것이 모두를 밝게 비추며 금빛으로 물들였으니까. - 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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