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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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코앞에 둔 야구선수 박준석은 경기에서 여느 때처럼 좋은 기량을 보여줘 승리를 했다. 차를 몰아 집으로 향하던 준석은 자신의 차를 향해 돌진하는 트럭에 받혀 사고가 나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그는 병원에 있다는 걸 깨닫고 몸 상태 먼저 확인했다. 트럭에 받힌 것치고는 몸은 멀쩡했다.
준석은 곧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세상을 떠난 연인 지수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최경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준석의 사고를 자신이 계획한 거라 말했다. 준석이 놀라서 따지기도 전에 경은 MRI 사진을 내밀며 그의 머릿속에 거머리가 있다고 했다. 준석의 뇌에 연결체를 심어 그의 감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때로는 준석을 입맛에 맞게 조종하기까지 하는 노인 "파우스트"가 있다고 말한다. 코웃음을 칠만큼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는 경의 아버지인 선진그룹 최 회장이 파우스트였고, 파우스트 최 회장과 파우스터였던 지수의 죽음에 대한 말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준석은 경과 은밀히 접촉하여 자신의 파우스트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

명동 사채업계의 큰 손 백남선은 친구 동광의 소개로 메피스토에 입성했다. 오로지 돈만 보고 달려오느라 청춘과 사랑은 물론 가족까지 없었던 그녀의 지난 세월에 아쉬운 게 딱 하나 있었다. 젊은 아름다움으로 대학 생활을 누려보고 싶은 마음에 남선은 메피스토에 100억의 가입비를 내고 파우스트가 됐다.
그녀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미술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스물다섯 살의 예쁜 미대생 차은민을 파우스터로 선택한다. 남선은 메피스토의 운영 가이드에 따라 넛지와 백업을 오가며 은민이 전념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생활을 마련해 주었고, 은민의 삶에 접속할수록 그녀를 더욱 우아하고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싶다.
그 덕분에 남선은 메피스토 라운지 쇼에서 메피스토 코리아를 있게 한 이태근의 파우스터 준석을 위협할 정도의 높은 점수를 받는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미국에 본사가 있는 메피스토로, 영혼을 파는 게 아니라 돈으로 앞날이 창창한 청춘을 사들인 노인들은 파우스트로, 아무것도 모른 채 파우스트의 조종을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마리오네트가 된 젊은이들은 파우스터가 됐다. 기술이 발전된 시대답게 파우스터의 뇌 속에 연결체를 심고 안마의자 같은 것에 몸을 맡기면 아픈 데가 없는 싱싱한 젊은 몸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어마어마한 기술과 국가 기밀에 가까운 보안 때문에 부와 권력을 가진 최상위 노인들만 가입할 수 있었다.

야구선수 준석의 시점으로 시작된 소설은 그의 파우스트 태근, 신입 회원 남선, 남선의 파우스터 은민을 오가며 진행됐다. 소설의 초반엔 네 사람이 현재 어느 위치인지 보여줬고, 파우스트 시스템에 관한 설정도 설명해 주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설정 덕분에 초반부터 소설에 몰입할 수 있었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파우스터로 살아온 지 10년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놀람과 동시에 파우스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른다. 처음에 준석은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 믿을 수가 없었지만, 죽은 연인 지수가 언급되자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이 꽤 오랫동안 누군가의 조종의 결과물이었다면 얼마나 큰 충격일까 싶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동안 가깝게 지내온 동료 등 주변 사람들마저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돌아가신 준석의 할머니마저 파우스트가 뻗은 마수의 몇 단계를 거쳐 있었다. 사람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파우스트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막 파우스터가 된 은민은 막막하던 앞길에 믿지 못할 기회가 열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온전히 손에 넣으려고 했다. 꿈이 있고 재능도 있지만 가난이라는 현실 앞에 애써 마음을 다잡던 은민은 이내 행운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전시회를 열 정도로 자신의 행운을 만끽했지만 은민의 뒤에 남선이 존재하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파우스터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파우스터로 살아온 세월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기에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고, 이후 파우스트에 관련된 모든 비밀을 알게 된 후에 행동하는 모습 역시 차이가 있었다. 처음엔 서로를 알지 못했던 준석과 은민이지만 나중엔 상대방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모습을 보였다.

삶을 잠식당한 가여운 청춘들과 달리 파우스트 태근과 남선은 악마처럼 탐욕스러웠다. 명예, 돈 같은 것을 이미 가진 그들이 원하는 건 살아보지 못한 삶, 한 번쯤 꿈꿔본 삶이었다. 그런 꿈을 늙은 제 몸뚱어리 대신 가능성 있는 청춘들에게 접속해 혈기왕성하게 젊음을 누리고 마치 아바타처럼, 성장 게임처럼 제 뜻대로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 늙은 악마들은 파우스터에게 접속하는 시간, 기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을 향한 독점욕이 늘어갔고, 지배력 또한 주체할 수 없었다. 살아있고 존재하는 젊은이들을 제 것인 양 굴며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놀았던 태근과 남선이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이런 인간들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방식은 다르지만 실제로도 있을 같아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 준석과 경을 응원하며 소설을 읽었지만 늙은 악마들의 존재를 알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더 끔찍했던 건 2장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까지 함께 하리라 예상했던 캐릭터들이 무너져 준석이 혼자의 힘으로 싸우고 버텨야 했던 것이었다. 그 누구도 믿어줄 것 같지 않은 미친 상황에 제정신을 차리고 생활하는 게 너무 어려울 것 같았지만, 준석은 이겨야겠다는 승부욕과 복수심으로 꿋꿋하게 버티며 파우스트 태근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을 읽기에 속도가 붙었을 만큼 흥미진진, 스릴 만점이었다. 준석이 이기느냐 태근이 이기느냐가 가장 큰 줄기였고, 태근과 남선의 신경전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에 관한 건 또 다른 재미였다. 그러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은 순간에 어마어마한 비밀로 뒤통수를 그냥 후려쳤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소름이 돋았다. 너무 충격적이라 끔찍했고 동시에 꼴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말엔 스케일이 엄청 커져서 준석과 은민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권선징악으로 끝이 나 다행이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티프로 쓴 소설 <파우스터>는 21세기형 파우스트라고 볼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은 실재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악마라는 존재보다 탐욕스러운 인간이 더 악마 같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기술이 조금 더 발전할 가까운 미래에 진짜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날로 발전하고 인간의 욕심은 언제까지나 끝이 없을 테니 말이다.

소설을 다 읽고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가의 이름과 책 제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팍팍 드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미루지 말고 올해 안에는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내 인생은 내가 컨트롤해왔다. 놈이 어떤 영향을 주었건 난 아무것도 대체하지 않는다. - P136

나는 다시 태어났다가 다시 죽었다.
죽음이야말로 속죄의 시작이다.
영원한 젊음을 탐한 대가로 끝없는 속죄가 시작될 것이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정말 추악하기 그지없구나. - P137.138

파우스터는 자식들이 해줄 수 없는 모든 것을 대체해 준다. 파우스터는 새로 태어난 나다. 내가 되고 싶었던 청년이고 내게 없었으면 하는 것들을 제거한 젊음이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그를 부림에도 거기에 대한 저항이나 반감이 없다. 무엇보다 나 혼자의 것이다. 자식은 아내와 함께 만들고 간섭을 받아야 하지만 파우스터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고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 P244.245

그녀는 나의 아이이자 나의 청춘이자 나의 분신이다. 나는 그녀의 후원자이자 절대자가 되고 싶다. 아니 그녀가 나고 내가 그녀가 되고 싶다. - P299

"유리 수조에 갇혀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유리벽에 머리를 박아댔던 거예요. 주인들은 그 금붕어를 한심하다 여기겠죠? 가만있으면 먹이 잘 주고 물도 갈아줄 텐데…… 쟤는 미친 금붕어라고 생각하겠죠?"
"미친 건 그들입니다."
"그래도 난 어떻게든 수조 밖으로 나갈 거예요." - P42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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