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 김솔 짧은 소설
김솔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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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놀라웠던 건 작품 내내 이어지는 번역투의 서술 방식이다. 분명 외국어로 적힌 원문을 한국어로 고심해서 내뱉은 것만 같은 말투가 흥미로웠다. 말투뿐 아니라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대륙을 넘나든다.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안에 축적된 경험과 그만의 내공을 느끼며 나는 주말 동안 쉼 없이 책장을 넘겼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담아둔 것이 넘쳐나는 사람들만의 인상이 있는 듯하다. 나는 김솔 작가에게서 앞으로도 쏟아낼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건 하나의 '인상'에 지나지 않지만.

완독을 한 이후의 느낌을 묻는다면, 그저 혼란스럽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등장인물이 겪는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각 소설이 끝나는 방식, 마무리하는 문장까지도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을 발견하고서는 새삼 이 책에 담긴 '혼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세상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끝없는 혼돈을 감내하겠다는 문장과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릴 땐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있으면서도, 그 단어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현재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면서도, '혼란스럽다'라는 단어가 주는 기이한 느낌에 휘말려 곧잘 내가 애초에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잊어버리고야 만다.

김솔 작가가 이 책에 적어내려간 글들은 짧은 농담의 모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자리에서 들을 때만 해도, '저게 무슨 소리지.' 싶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되새기게 되는,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농담들. 그래서 어쩐지 꿈이나 신기루 같은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그가 분명히 무언가를 내 마음에 남겼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마치 '혼란'이라는 단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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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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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결국 구매하기까지 정말 무수한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작품의 포장지보다 내용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 안에 있는 어떤 단어가, 문장이 지금의 나를 자극해야만 책을 읽는다.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노래만 골라서 듣는 것처럼. 하지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경우 평소와 조금 다른 패턴으로 구매하게 되었다. 백수린 작가는 이 책에 관해 "이 한 권의 소설집 안에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이미 다 들어 있"다고 표현했다. 글을 쓰는 것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꼭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던 때에 나는 이 책의 띠지를 발견했고, 작품의 유명세와 관계없이 단지 백수린 작가의 한 마디 때문에 책을 읽게 되었다. 그래서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상 안에서 흐르는 순간들과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을 포착해 내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 놀라울 것 없는 흔한 일상에서 작가가 포착해 낸 것들의 집합은 놀라울 만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단편 소설을 읽다 보면 매 소설이 끝날 때마다 알 수 없는 당혹감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앤드루 포터의 이 작품집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에서 저 소설로 넘어가면서 때때로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밀접하게 들러붙어 개별적인 작품으로 인식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야기의 중첩으로 인해 지겨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돌려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작가는 누군가의 일상을 담아냄으로써 소설집이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일상성과 보편성을 담아낸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연결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큼은 그랬다. 그리고 나는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우울감이 좋았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울고 싶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이렇게 아득하게 무언가가 그리워지고, 그로 인해 밀려드는 약간의 애틋한 슬픔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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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알고 있다 다카노 시리즈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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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알고 있다>를 읽으면서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떤 특정 영화를 떠올렸던 것은 아닌데, 일본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 요시다 슈이치의 문장과 겹쳐져 눈앞에 그려졌다. 이름을 댈 수 없는 한 일본 배우가 웃음을 터뜨리고, 벽을 기어오른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영화가 하나의 글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일까. 하지만 역시 이름만큼은 모르겠다. 전형적인 일본 영상물의 냄새를 풍기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고전적이어서 도저히 완독하지 못할 작품은 아니다. 꽤 흥미롭고 생생한 묘사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세계관이 이어져 있는 다른 작품도 읽어볼 계획을 세우고 있을 정도이다.

이 작품은 실제 아동학대 사건에서 구상이 시작되었고, 작품 속에서도 아동학대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동학대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듯이 '다카노'의 삶을 통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는 그 아이들을 동정하기보다 밖으로 꺼내놓고 스스로 일을 하며 나름의 개체로 살아가는 방향으로 글을 썼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으려 했던 작가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온전한 자유를 부여받지 못하고, 상급자의 지시가 없으면 쉽게 길을 잃는다. 아이들을 구원한다는 번듯한 명목 아래에서 또 다른 착취가 버젓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어른들에게서 완전하게 분리되지 못하고 뚜렷한 소신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흔한 특징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것은 차차 이후에 이어지는 작품들에서 아이들의 향방을 지켜본 후 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되었든 그들이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에게 행복할 자유를 줄 수 있기를, 원하는 곳에 원하는 크기의 별을 멋대로 그리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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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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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울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은 1980년대에 머물렀다. 탑처럼 쌓아 올려진 억울한 시체들을 보고 울지 않기 위해 입을 앙 다물었다. 중요한 순간에 싸움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해야 할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주저 않지 않으려고, 이 작품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마주하려 애썼다. 울부 짖으며 감성에 호소하기보다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나라'와 맞서고 싶었다. 피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 되도록 현장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던 어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그 거대하고도 모호한 관념과 대립각을 세우려고 했다. '동호'는 '나라'가 무엇이느냐고 물었다. 글쎄,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까. 스무 해를 넘게 그 공간 속에서 존재했는데, 나는 '국가'라는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곳은 나의 존재를 입증해 줄 부모와도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윗세대에게는 하나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소년 '동호'에게 이것이 무어라고 가르쳐주면 좋을까. 상대를 이기기 위해 어떤 부분을 공략하라고 귀띔을 해주어야 할까. '동호'보다도 한참을 어른인데도 내가 그를 구해낼 수 없어서, '나라'에 대한 생각을 곱씹을수록 두려움이 밀려와서 몹시 슬퍼졌다.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는 막강한 상대와의 대적이 쉽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도청'에 남았다. '희생자'로 불리지 않기 위해 쏘지도 못할 총을 들고, 누군가를 지켜내려던 젊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정의, 인권, 민주주의... 그런 추상적인 개념들에 자기 나름의 소신을 덧붙이고 있었을 어린 생명들이 국가에 의해 짓밟혔다. 이게 정녕 내가 지금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진상이던가, 믿을 수 없어 책을 읽는 내내 벌벌 떨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일이 어떻게 거리낌 없이 행해질 수 있었는가. 광주에 새겨진 슬픔은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같은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우리는 광주, 제주도, 관동과 난징, 보스니아, 모든 신대륙의 눈물 자국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간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날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작가 한강의 표현대로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잔인성은 극복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일까. 그것이 내 피 속에 들끓고 있다면, 나는 그곳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어떤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생명에, 내가 사는 세상에 잔혹하게 굴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행동으로 세상의 온갖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의 따스함으로 녹아내린다. 우리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평생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또 다른 봄, 여름, 가을을 살아간다. 하지만 저기에 그날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눈 더미에 파묻힌 내 발이 있다. 그들이 물어온 인권과 자유 덕분으로 내가 온전하게 여기 서있을 수 있다. 세상은 전처럼 어두워지진 않을 것이고, 나는 또 밥을 먹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온전한 잠자리에서 잠이 들 것이다. 수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모나미 볼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절반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등의 추상적인 관념을 위해 떵떵거리며 소리치고, 피를 흘리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내가 순진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내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것은 딸만큼은 자신이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대학에 가보기를 바라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고,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자신을 불태운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며, 대통령의 독단적 행위를 눈 감아 주지 않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이나 칼 이외에 각자만의 도구들로 세상의 부당함과 맞서 싸우는 모든 이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나 또한 나의 죽음을 대신한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은 채로 나름의 무기를 갈고닦으며 나아가고 싶다. 허망하게 죽으리란 사실을 예감하면서도, 더 약자인 사람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그들과 같은 순수한 열의를 가진 어른으로 영영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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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호수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정용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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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나 강이라면 몰라도 '호수'는 듣기만 해도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모든 이의 그림자를 그러안을 만한 포용력이 느껴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앞에 '세계의'라는 수식어구가 붙으니 직접 보지 않아도 그것의 넓이와 깊이가 생생하다. 이만치 거대한 '세계의 호수'는 '세 개의 호수'-무주, 유나, 윤기-가 모여 조성된다. 그들은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개체임에 틀림없지만, '외로움'이라는 공통된 세계를 공유한다. 그들의 외로움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또 누구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있지 않다는 박탈감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쓸쓸하게 흐르던 '세 개의 호수'가 우연한 만남으로 이뤄낸 '세계의 호수'는 오랫동안 한데 섞이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을 주면서도, 질긴 인연으로 엉겨 붙는다. 이 호수가 어디로 흘러 갈지는 소설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또 거리를 두면서도 끝끝내 함께 흘러 제 나름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세 개'와 '세계'가 가진 발음상의 유사함처럼 얼마간 '세 개'였다가 하나의 '세계'가 되기를 반복하지 않을까. 관계의 책임을 상대에게 두면서도 그리움과 불쑥 차오르는 고마움으로 '이별'과 '작별'을 거듭하게 되지 않을까.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세 개'와 '세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보면, 작가의 말처럼 "감출 기억도 없고 쓸 감정도 없고 입에 담을 이름도 없는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란 예정된 세상과의 작별을 앞둔 채로 살아가므로, 이별이든 작별이든 좀체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결국 나와 한 세계를 이루었던 그 사람과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의 '이름'에 끝도 없이 얽매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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