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문학동네 SNS에서 이 작품을 소개한 글을 읽고 완전 홀려버렸다. 안 읽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 날 무작정 도서관으로 뛰어가 빌려왔다. 이런 애틋하고 낭만적인 소설이라니, 안 읽어봤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우주 알‘을 받아들인 한 남자의 이야기로, SF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우주 알‘이라는 소재마저 너무 낭만적이다. 작가의 말에서 장강명 작가는 ‘우주 알‘이라는 개념을 ‘짐 홀트‘의 책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에 나오는 용어를 차용했다고 설명했다. 그 책에서 ˝우주 알은 하나의 우주가 될 수 있는 어떤 작은 입자˝로 등장했다.<그믐>에서는 남자가 우주 알을 받아들이고서,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다시 살게 된다.
과거를 다시 재생할 수 있다니, 적지 않은 사람이 바라는 일일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자신을 괴롭히던 일진 동급생을 죽이고 소년원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를 다시 살 수는 있지만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다. 디테일이 바뀌는 순간, 이야기가 틀어지고, 자신이 만나고자 했던 여자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과거가 있었고, 그걸 반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148p)˝라는 대사를 읊조리는 남자라니,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된다 싶으면서도, 여자와의 최악을 막기 위해 10분이라도 빨리 떠나는 대목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이렇게 책을 붙들고 울게 만드는 사랑 이야기는 <미 비포 유>의 ‘윌 트레이너‘라는 남자 주인공이 남긴 편지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다.

SF요소가 가미된 러브 스토리를 제하자면, 남자가 겪어야했던 ˝학교폭력˝이라는 주제가 존재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스토리의 시간 순서를 이리저리 섞으면서 진실이 무엇인지 혼동이 오게 만들었다. 또한, 학폭 피해자인 남자와 학폭 가해자의 어머니 양쪽을 등장시키고는, 판단을 독자에게 내맡긴다. 피해자였던 주인공 남자가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가해자를 죽이고야 말았는데, 가해자 ‘영훈‘의 어머니는 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남자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자식의 잘못을 믿고 싶지 않을 아주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너무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아들 입장에서만 사건을 재구성하는 그녀에게 맞서고 싶었다. 주인공 남자의 부모 입장에서, 왜 하필 우리 아들을 선택해서 이렇게 피를 말려야만 하느냐, 고 울부짖고 싶었다. 자신의 결말을 미리 예견하고서는 아주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모든 것이 그저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하는 남자가 가엽다는 말로도 모자라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읽기 시작한 소설이 이렇게 먹먹한 마음으로 끝나다니. 책은 굉장히 얇은 편이었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폭발적이다. 앞으로 두고두고 남자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무기력하게 묵묵하게 과거의 아픔을 견디는 남자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단 하나의 사랑때문에 그 과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8년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한국판 ‘미투운동‘이 전개되었다. 남의 나라 일로만 여겨지던 ‘미투운동‘이 한국에서도 시작되었고(아주 당연하게도!), 여태껏 침묵하던 여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당한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던 여성들이 세상을 향해 울부짖던 그 중심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이 있었다. 2016년에 출판되었고, 2018년이 되어서야 주목받은 이 책을 새삼스레 다시 꺼낸 것은 곧 개봉할 영화 <82년생 김지영> 때문이었다. 제작 과정에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던 영화는, 개봉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비판을 받고 있고, 이 영화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면 욕을 들어야만 했다. 개인적으로는 꼭 나와야만 하는 영화가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파급효과를 고려한다면, ‘페미니즘‘ 이나 ‘여성의 권리‘라는 문제가 이전보다 더 주목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6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편마저도 ˝자신들을 반씩 닮은 예쁜 딸을 낳은 아내가, 아무래도 아내 같지가 않˝다고 여기게 된 2015년 가을의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이후에는 과거로 돌아가 ‘김지영‘씨의 전반적인 인생을 서술한다. 책을 읽는 내내 어찌나 억울하던지 자주 울컥하고, 분노로 인해 허공에다 주먹질을 몇 번이나 해댔다. ˝남학생부터 (출석)번호를 매기˝거나,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사실들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다가 책에서 타인(김지영 씨)의 이야기로 접하니까 새삼 너무 억울했다. 왜 이걸 여태껏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았을까. 내가 가져야 할 권리에 무심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 ‘오미숙‘ 씨의 인생에는 더더욱 화가 났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일들만 해도 화가 이렇게 나는데, 그 시절 여성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자신의 적성을 따라 일을 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살았던 걸까.

2015년도의 ‘김지영 씨‘가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자신을 잘 챙겨주던 여자 선배 ‘차승연‘씨와 어머니 ‘오미숙‘씨가 김지영 씨의 몸을 통해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김지영 씨를 변호하고 그녀가 겪어야만 하는 고생들을 토로한다. ˝사돈어른,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릴게요. 그 집만 가족인가요? 저희도 가족이에요.˝ 라는 어머니의 말이나, ˝대현아, 요즘 지영이 많이 힘들거야.(...)잘한다, 고생한다, 고맙다, 자주 말해줘.˝ 라는 ‘차승연‘ 씨의 말은 결국 여성들이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같은 여성의 도움 덕이 크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와 같은 여성이 겪는 문제들을 등한시하지 않고, 함께 분노하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 2000년대에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출석번호 시스템이 남자아이들이 우선인 것은 변함 없었지만,) 여자 회장으로 선출 될 수 있었고, 당연히 대학을 가야하는 시절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이전 시대의 여성들 덕분인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훌륭한 점은 정확한 통계나 기사자료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껍지도 않은 장편소설 책에 ‘객관적 자료‘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여성들이 느끼는 부당함이 단순히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라, 이것은 ‘팩트‘이고, 부정하거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한 수치들이 일깨워주고 있는 듯 했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지나치게 여성들의 편에서 호소한 것 아니냐, 는 의문은 접어둘 수 밖에 없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작고 어렸던 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살던 때와 나의 시대는 분명 달랐지만, 세상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는 데에 무력함을 느꼈다. 20년 가까이 흐른 세월동안 많이 바뀌지 않은 현실을 통감하면서도, 세상 곳곳에 여성들이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여성학자 ‘김고연주‘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기 때문˝이고, 후대의 여성들이 아주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높은 학력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하지 않길 바라며 자신의 몸이 부서져가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벌어 딸들을 교육시킨 어머니들이 존재했듯이, 더 많은 여자 교수들이 탄생하고 높은 관리직에 여성들이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라기에, 지금도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출구를 향해서 달리고, 안될 걸 알면서도 벽을 뚫기 위해 몸을 부딪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가 된 이후로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이번 미션도서로 선택한 책은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한국인들의 '재레드 다이아몬드'교수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교수를 잘 모르더라도, <총 균 쇠>라는 책은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책을 필독서로 꼽고, 어느 도서관이든 꼭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변동>에서 저자도 자신의 책이 한국에서 특히 사랑받고 있다, 고 언급할 정도다. 일명 '유발 하라리' 시리즈가 한국인들이 읽지는 않아도 한 권씩 구비하고 있는 도서이듯, <총 균 쇠>도 그 방대한 양으로 인해 끝까지 읽을 엄두는 내지 못하더라도, 다들 읽어야 한다고 여기는 책이 되었다.

총 574페이지로 이루어진(주석을 제외하고,) <대변동>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개인의 위기를 다루고, 2부에서는 교수가 잘 알고 있는 국가들을 선택해 그 나라들이 과거에 겪었던 위기를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3부에서 전 세계적인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책은 마무리된다. 국가의 위기와 선택적 변화를 주제로 하면서 개인의 위기를 1부에 배치한 것이 인상깊다. 저자는 각 개인들이 자신의 위기를 마주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국가의 위기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개인과 국가는 다르고, 국가는 더 큰 공동체로서 개인에게 적용되는 기준들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1부에서 다루는 개인적 위기들은 사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열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또한 3부에서 다루어지는 글로벌 위기들-핵무기, 대체에너지, 기후변화 등-은 사실 지나치게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들이고, 개인적으로도 많이 접해본 문제들이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 대신 내가 주목했던 것은 2부에서 언급된 국가의 위기들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꽤 깊게 이해하고 있는 국가들-핀란드, 일본, 칠레,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을 선정하여 그 국가들이 겪었던 과거의 위기들과 대처방식, 즉 선택적 변화들을 자세히 다루었다. 여러 책에서 내용들을 그러모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학계의 큰 어른으로서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전달한다는 점이 다른 책들과 다르다.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와 그의 친구들이 '세상이 얼마나 크게 변화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직접 국가의 위기들을 경험한, 혹은 목격한 사람들의 말,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책'이 아니던가!

전반적으로 19세기에서 21세기에 벌어진 타 국가의 위기들 위에 한국의 모습이 겹쳐져서 놀랄 때가 많았다. 개개인의 삶이 엇비슷하듯이, 별개의 국가들이 거쳐온 길도 닮은 구석이 꽤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국경을 길게 맞대고 있어 약간의 자유를 포기할지라도, 국가의 안위를 위해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핀란드의 모습은 반도국가로서 중국과 미국, 일본의 눈치를 보며 아슬아슬한 외교를 펼치는 한국과 별다를게 없었다. 또한, '피노체트'라는 장군이 군사적 독재를 펼치면서 고문과 학살을 일삼았다는 칠레의 스토리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과 닮아 있었다. 심지어 "피노체트의 고문과 학살은 악랄한 짓이었지만 그의 정책이 칠레 경제에 도움을 주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라는 칠레 사람의 말은, 한국에서도 70년대에 국가 경제의 급격한 부흥을 목격한 어른들이 습관처럼 하는 대사이다.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국가가 우리와 이토록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국가들이 위기를 맞고, 선택적 변화를 일으키는 모습을 참고해 자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독일과 다르게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남 탓하기 바쁜 일본을 지적하는 장면도 <대변동>에서 여러번 등장한다. 한국인이 아닌 다른 국가의 국민이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것이 한국인으로서 반가웠다. "일본이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도 거의 없지 않겠는가." 하는 대목은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게 저지른 잘못을 다시 행할지 모른다는 경고로 들려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미래에 큰 위기로 변할지 모른다는 저자의 지적을 쉬이 흘려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책에서 번번이 인정했듯이 이 책은 "소수의 국가를 선택해 이야기식으로 조사한 입문서이다". 표본의 수가 적긴 하지만, 저자가 다룬 이야기의 깊이가 얕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국가의 위기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에 이어 그가 계랑화된 방식으로 연구한 국가의 위기들에 관한 책도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된다. 세상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는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책은 내놓는 모든 책이 필독서가 되야 할 것 같다.

국민 혹은 지도자만이라도 과거의 위기를 돌아보며 이해한다면

현재와 미래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굳게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스릴러는 'A.J.핀'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다. 저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도 당황할 필요 없다. <우먼 인 윈도>는 그녀의 데뷔작이기 때문이다. 소설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단숨에 스타덤에 오를 수 있다니. 그녀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장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우먼 인 윈도>는 정말 단숨에 읽을 수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가 말 그대로 소름 끼치게 한다. 첫번째 반전을 접한 후로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반전이 등장한다. 만약 내가 이 글에서 어느 정도 스포를 한다고 해도, 어디선가 다른 사람의 글을 읽었다고 해도, 그걸로 <우먼 인 윈도>를 다 알았다고 하면 착각이다. 끝까지 읽고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에게 기립박수를 치게 될 것이다. 나는 글을 읽는 것이 굉장히 느린 편인데, 일상에 치이지만 않았다면 아마 하루만에 다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책은 <랑야방>이라는 중국 무협 소설을 제외하고는 아마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무협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던 내게 '아, 이래서 아버지께서 그렇게 책방에다 무협소설을 빌려다 읽으셨구나.'라는 깨우침을 주었던 책이다).

주인공인 '애나 폭스'는 광장공포증을 가진 환자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집 밖으로 정말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그녀는 보통의 나날을 사는 대신, 카메라로 창 밖의 동네 사람들을 관찰한다. 사회생활을 렌즈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정신과 의사라는 설정부터가 흥미롭다.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환자의 치료와 안녕을 증진시킬 것입니다.

나 개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겠습니다."

P218

의사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줄줄 읊는 '애나 폭스'가 건너편 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하고서, 집 밖을 나서는 '공포'보다 타인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녀가 정신병을 가졌다는 데 있다.

"아니, 확신해. 확신할 수 있어. 나는 망상을 늘어놓는 게 아니야."

P355

집 밖으로 전혀 나오지도 않고, 심각한 알콜 중독과 정신병 약 복용은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경찰들은 모든 증거와 증언이 그녀가 조작한 것이며, 망상일 것이라고 여긴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성적인 경찰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왜, 왜, 전혀 믿어주질 않는건데!!!!!!"하며 답답함에 몸부림쳐야 했다. '애나'가 겪은 일을 나도 글 밖에서 함께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먼 인 윈도>, 창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삶을 영위해나가는 여자를 통해 우리에게 진실을 볼 것을 주문한다. 그녀가 정신과 의사로서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할 만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진 정신적인 문제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을 볼 기회를 포기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이런 종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지나치게 믿고 있으며, 진실을 마주할 기회들을 아주 쉽게 포기해버린다는 것을, '애나'가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다.

"이메일 주소도 없다고 했다. 페이스북 계정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P408

SNS계정이 없고, 온라인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치부된다고 지적하는 점이, <우먼 인 윈도>에서 가장 인상깊었다. 집 안에 갇혀있는 정신과 의사는 여러 아이들을 도왔고, 그들이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했지만, 이제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며, 아무도(!)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빛으로 이끌려고 나서지 않는다. 남들은 흔하게 가지고 있는 온라인 계정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건너편 집 아들 '이선'은 아이디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과 연결되질 못한다(뭐, 여러 이유가 존재하지만 스포하지 않기 위해 다른 건 배척하겠다). 하나의 존재가 아무렇지 않게 지워질 수 있다는 것, 또한 그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저자가 소설을 통해 일깨워주는 또다른 점이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수많은 존재들이 눈길을 받지 못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릴러가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 지연된 정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36개의 스포트라이트
이규연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도소 담장을 홀로 걷는다."

 

저자인 이규연 국장은 '탐사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신이 가진 세상이 뒤집히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과, 때로는 진실을 숨기고자 하는 정부와 맞서 싸우며 일해야 하기에, 교도소 담장에서 아슬아슬하게 걷다가 언제 안으로 굴러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항상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규연 국장은 외롭고, 위태로운 '탐사 저널리스트'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으며, 근 30년을 언론인으로 살아왔다. 지난 30년간의 방대한 역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은 30년간 탐사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마주한 사건의 기록이자 치열한 반성이다.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30여 건의 사건과 그만큼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작은 현대사'로 봐도 무방하다. 세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이면을 담으려 노력했다(13p)"라는 프롤로그만 보더라도, 그의 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지난 <따뜻한 냉정>이라는 '박주경' 앵커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도 느낀 바이지만, 언론인들의 글을 읽는 게 흥미로운 것은 여러 시사 이슈가 다뤄지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었던 작품도 사회상을 읽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나는 <이규연의 로스트타임>을 더 인상 깊게 읽었다. 어떤 사건들이 있었다는 걸 일깨워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규연 국장과 여러 기자들, '스포트라이트'팀 등은 집요하게 그것을 파고들었다. '탐사 보도'의 특성상 사건 하나를 표면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심층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밝혀내는 일이 중요한 탓이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언론인 생활을 굉장히 오래 했기에 시간적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사건을 파악하는 일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국정 농단 사건'이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과거의 일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해,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식이다.

가끔은 책을 읽으면서 이 분도 그저 사람들의 공감과 흥미를 이끌어낼 만한 소재를 좇는 기자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다. "앞으로 태풍으로 태풍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금의 날갯짓은 과연 무엇일까(58p)" 같은 대사들은 기자로서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피해자들의 시선에서 글을 읽을 때는 자신의 고통이 가십거리로 치환된다는 것이 가슴 아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기자들이 끝까지 사건을 파내어 이슈로 떠올려 준 덕분에 이목을 끌고, 그 덕분에 사건이 해결되는 때도 있으니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규연의 로스트타임>을 읽으면서 지난 1일에 '몸과 마음의 양식당'에서 진행된 북토크를 떠올렸다. 이규연 국장이 진행하는 강연에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PD, 작가, 기자분들이 참석하셨다. 그날 강연을 들으면서 한국의 '스포트라이트'팀이 보이는 열정과 그들의 노고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책도, 방송도 '이규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 속에 진실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하는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담겼을까. 책에서도 더 많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름이 담겨있다. 그들의 이름에 주목하기 위해 나도 나름의 노력을 했다.

책을 덮은 후 우리가 때로는 분노에 차서 원망할 사람이 필요해 '기레기'라는 이름으로 짓밟는 그 이름들을 떠올려 보았다. 8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 격동의 시기에, 혹은 내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국정 농단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들에 그들이 무슨 명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실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두어야겠다.

<이규연의 로스트타임>을 읽으면서 기자들의 본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을 낱낱이 드러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제보자들을 보며, 나라면 저 상황에서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당연하게 해본다. 검찰의 부정적인 면을 타파하기 위해 나서고 있는 '임정은 검사'의 말은 이런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긴 한데, 함께 행동해주지 않으면 목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적어도 사건이 됐을 때 목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피해자는 혼자 죽어요.(43p)"

 

기자들에게 너희들의 본분을 다하라, 고 질책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내 곁에 놓인 피해자를 두둔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의 밑바닥을 보면서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눈 감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기자들의 의무를 논하는 것도 좋지만, 주변 사람들을 억울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막는 일에 우리가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훗날에 당신은 그때, 그 현장에서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230p)"

이규연 국장이 기자로서, 탐사 저널리스트로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말이다. 이 구절은 비단 기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할 때 그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 모두에게 외치는 말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저자가 파헤친 진실의 구덩이들을 보니, 내가 잊어버린 것도 아예 모르던 사실들도 존재했다. 사건들을 조사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기자와 같은 역할은 내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런 질문을 받았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의 피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무엇보다도 누군가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들을 잊지 말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