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 사랑의 혁명을 꿈꾼 휴머니스트 클래식 클라우드 15
옌스 푀르스터 지음, 장혜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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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거장'을 찾아 떠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15번째 도서는 <에리히 프롬>이다. 이전과 달리 '옌스 푀르스터'라는 외국인 작가가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 11월부터 '인생 여행단'이라는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총 3권의 책을 만났다. 그중에서 이번이 가장 흡족하고,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 도서였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 '존재', '자유' 등의 소재를 다룬 저서를 써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을 쓴 '옌스 푀르스터'의 문체 덕분인 것도 있다. 그는 무언가에 관해 단언하지 않고, 여러 생각들을 제시한 후 자신의 의견은 이렇다,고 얹어 주었다. 그러니까 판단은 철저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 자세는 서문에도 명시되어 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부차적 문제다. 누군가가 수많은 사람에게 중요한 주제를 새로이 고민하게 하여 더 나은 이론이 나올 수 있도록 생각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혹은 "연구는 토론을 선도하기 위해 존재하고 이론은 언젠가 반박당하여 더 나은 이론이 생겨날 수 있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 옳다, 고 제시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프롬'의 의견이나 이번 책 자체에도 여러 의견이 제시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책을 이토록 능동적으로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에리히 프롬'과 '옌스 푀르스터'에게 빨려 들었다. 실제로 무슨 생각까지 했냐 하면, '옌스 푀르스터'에게 현재 느끼고 있는 개인적 고민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감정들을 누군가의 앞에 쏟아내는 일에 서투르지만, 왠지 나를 섣부르게 재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이렇게 모호한 문체가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오히려 스스로 생각을 쥐어짜낼 거리가 생겨서 즐거웠다.

이제 '에리히 프롬'에 대해 집중을 해볼까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자'로, <소유나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의 유명한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각 사회마다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사회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사회가 개인을 병들게 하므로 심리학자들도 이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고발하고 바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개인에게도 적극적으로 사회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개인이 정치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상위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학자였다. 나 또한 개인이 취하는 행동들의 원인이 사회 저변에 위치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불안하고 억압된 사회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범죄자가 되고,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옌스 푀르스터'가 지적한 바처럼, '프롬'이 개인의 어릴 적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사상이 이미 주도하고 있던 때에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프롬'에 대해 놀라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문제이긴 하지만, 가정 환경도 사회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므로 그의 생각은 옳았던 듯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펴내며, '사랑'에 관한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이 "자신을 갈고닦는 훈련"이며, 태생적인 외로움을 극복하고 존재의 핵심을 찾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자신을 적극적으로 깨닫는 일"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적극적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롬'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하는 상대를 해치는 일은 발생할 수가 없다. 자신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해준 상대를 망가뜨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해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프롬'이 내 아버지에게서 보이는 가부장적인 태도가 아니라 상호 존중에서 비롯된 사랑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개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위대한 사상가의 자질인가, 싶기도 했다. 나였다면 무의식에 박힌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주는 영향을 피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과 저자 '옌스 푀르스터'의 고향인 독일은 한국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들도 능률과 성과만을 중시했고, 이것이 '소유'와 '물질주의'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를 경계했으며, 받으려 하기보다는 주는 삶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사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든 저술가답게, "내적 활동(정서적, 지적, 창조적 활동), 자기가 가진 힘의 생산적 소비" "행복의 길이요, 목표"라는 '소유'의 대안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유'에 관한 물음은 익숙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소유'나 '물질'에 관한 생각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확언을 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에리히 프롬'의 말에 동의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딱 잘라 말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빈곤한 현재의 상태로 볼 때, '소유'를 포기하라는 '프롬'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내려놓을 것이 없는데, 이미 빈손을 더 털어내라는 조언은 내 마음을 휘두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소비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와닿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소유', '존재', '자유', '사랑' 등의 주제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들이다. <에리히 프롬>의 저자인 '옌스 푀르스터'는 '프롬'의 인생사와 그가 머무른 장소를 언급할 뿐만이 아니라, 이런 주제들을 표면으로 꺼내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책에 참여할 여지를 제공한다. '에리히 프롬'의 견해에는 공감하는 바가 더 컸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요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옌스 푀르스터'가 언급했듯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생각들을 할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도 <에리히 프롬>과 함께 즐겁게 토론에 참여해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 서포터즈 활동 중에 최고로 꼽고 싶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말년에 머물렀던 스위스의 '무랄토' 지역에 가고 싶어졌다. '프롬'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장소 자체에 크게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쓸데없는 물건들이 유혹하지 않"고, "그저 숨 쉬고 커피 마시고 공기를 즐기"는 일이 전부이며, "내려놓기가 쉬울"듯하다,는 저자의 표현에 나는 언제 갈지도 알 수 없는 다음 여행의 목적지를 '스위스'의 '무랄토'로 설정해두었다.

#내가뽑은명문장

물질주의자면서 바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물질적인 게 아니니까. 행복, 관계, 아름다운 인생 같은 걸 바라니 전부 다 가졌으면서도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거지.

그래, 이것으로 내 인생 전체에 걸쳐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해결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을 물질로 모두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내 부모의 세대들처럼(결국 그들이 옳지 않았음을 우리 세대가 온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물질이 만사형통의 해결책이라고 여기게 된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는 사회 구조에 책임이 있다.

불리한 인격 발달은 교육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사회 현상의 탓도 크다.

어릴 때 무언가를 잘못하면 어른들은 늘 부모의 교육 방식을 지적했다. 나로서도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무진장했다. 어른이 되고서야 부모가 주는 영향력만큼이나 또래 집단과 더 큰 사회가 내 인격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깨달았다. 내 그릇된 행동으로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은 부모가 이른바 내 직속 상관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가 잘못되면 온 동네에 책임이 있다,던 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사격수의 편견 실험은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매우 확실한 사례이다.(210p)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내가 의식적으로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무의식적으로 박힌 사회적인 편견이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예시가 제기되었다. 이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이나 유리천장을 극복해내지 못하리라는 예측만큼이나 나를 무력해지게 만들었다. 이미 내 무의식에 새겨진 사상들은 별 수 없는 것이겠지만, 후대의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시간이 촉박하다. 최근에 한 기후학자가 텔레비전에 나와 말하기를, 20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남자가 2층을 지나며 '아직은 다 괜찮아'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이 남 자는 기후변화를 대하는 우리 인류의 모습이다. 되돌릴 수 있을까?(248p)

아, 이만큼 경각심을 들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던가.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모두 실천이 부족할 뿐이지. 이 문장도 독자들에게 단순한 자극만을 주고, 실천을 이끌어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고,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일에 비유하니까 기후 변화가 더욱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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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기와 거주하기 - 도시를 위한 윤리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임동근 해제 / 김영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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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건축'이라는 학문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던지는 물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건축' 관련 서적이나 영화라면 일단 관심을 가지고 보는 편이다. '건축'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을 선택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에 기대했던 바는 정말 약소했다. 누구든지 '건축'이라는 학문에 다가서기 쉬운 인상을 주고, '도시'라는 소재에 관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처드 세넷'이 써내려간 이 책은 '도시'를 다각도로 조망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학문을 아우른다. 도시와 관련된 여러 이론과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심리, 그리고 현 도시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이르기까지. 저자 '리처드 세넷'이 가진 지식의 방대한 양을 따라 잡으려면, 꽤 애를 써야만 했다. 내가 그를 따라 잡기에는 아직 너무도 어리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곤 했다. 간단하면서도, 또 얕지는 않은 무언가를 기대했던 사람으로서는 좀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책의 흐름에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이번 도서는 '도시계획'이나 '도시'라는 주제에 꾸준히 눈길을 두고 있던 독자들에게 권해야 할 것 같다. 편집 상에서 책의 맨 뒤에 '리뷰'나 '평론'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해제'라는 파트가 삽입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난이도를 짐작해볼 수 있겠다.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실제 몇몇 도시들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인천에 위치한 '송도'가 등장해서 반가웠다. '리처드 세넷'이 '송도'에 대해 지적한 부분들은 주목할 만 했다. 저자는 도시라는 공간이 지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주하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 물러나 버리는 헤겔의 방식이 아니라 환경을 건설하는 상호작용적 열린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도'는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도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처방적 스마트 시티는 이런 마비화의 장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열린 도시'를 지향해야 하며, 그것은 거주자들에게 어느 정도 자율을 배분함으로써, 혹은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도시'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건물만 고려해보더라도 '짓는 자'와 '거주하는 자'의 의견 교환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책을 읽는 동안 '도시'라는 거대한 장소가 내게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의지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믿었지만, 그저 도시계획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 현 도시가 "만든 사람의 의도에 한정되지 않"고, "시간 속에 열"린 채로 개선될 수 있도록 거주자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리처드 세넷'은 일깨우고 있다. 이제껏 도시를 계획하는 사람들의 일이라고만 여겨왔는데, 거주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도시계획가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세월의 흐름, 마지막으로 거주자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이 하나로 모아질 때, 비로소 하나의 도시가 탄생한다. 도시계획가와 도시 거주자들의 상호 존중과 겸손함을 통해서 '도시'가 만들어져야 함을 알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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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정의 -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안경환.김성곤 지음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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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한 해 '법'과 '정의'에 대해 성찰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판결과 정의>(창비 출판), <법의 이유>(arte 출판) 등에 이어 영화나 소설을 통해 '법'과 '정의', 그리고 현 사회를 돌아보려는 <폭력과 정의>(비채 출판)가 등장했다. 믿었던 국가에 배신당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만큼 깨어있는 인식을 가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법'이나 '정의'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고,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법'과 '정의'라는 단어는 접근하기 전부터 다가서기 어렵다는 인식을 준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폭력과 정의>가 출판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메이즈 러너>, <캡틴 아메리카>, <괴물>, <왕자와 거지> 등의 작품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우면서도, 심도 있게 본래 가지고 있던 법이나 정의, 사회에 대한 생각들이 옳은지 파헤친다. 사실 <폭력과 정의>라는 제목만 들으면 어둡고 어려운 책일 거라고 여겨지기 쉬울 듯하다. 또한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이라는 부제목이 붙었으나, 이 책에는 영화를 소재로 삼은 경우가 훨씬 많다. 게다가 책은 법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지 않다. '안경환', '김성곤' 두 작가의 연륜으로 과거부터 이제까지의 사회를 조망하며, 우리가 가진 편견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지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그러니까 책의 표지만을 보고 <폭력과 정의>를 판단할 수는 없다. 표지에 쓰인 문구들보다 훨씬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법의 이면'에서는 법 제도와 변호사라는 직업에 관해 살펴보고 있고, 2부 '정의와 편견'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정의'와 우리가 가진 '편견', '차별'등의 일상적인 폭력에 관해 논의한다. 3부 '사회와 사람'이라는 장은 하나의 단어로 추출하기가 어렵다. 다만 특징이라고 하자면, 남북한 분단 상황에 대해 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평소 가지고 있던 인식의 틀을 깨주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법이라는 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완전한 구원이 되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한다. 때로 "구원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양극단의 싸움이 아닌, 시스템을 벗어나 외부로 나가는 제3의 길에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화 <백설공주>에 담긴 여성에 대한 편견을 지적한 부분이다.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를 통해서 나는 이미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디즈니 동화들이 실은 여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거울의 목소리가 언제나 남자 목소리로 되어 있다는 점"이나 왕자가 난쟁이들에게 했던 대사-"이 여인을 나에게 주면 내 소중한 소유물로 삼겠소"-도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부분은 생소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이전에 왜 꼭 공주들은 왕자가 구해주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냐는 항의는 들어본 적이 있고, 나도 무척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동화를 읽는 당시만 해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지식을 얼마나 무력하게 수용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울의 목소리가 남성이었다는 점과 왕자가 '소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폭력과 정의>를 읽는 내내 해당 부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외에도 <폭력과 정의>에는 여러 장에서 시스템의 틀 안에서 어떠한 이의 제기도 없이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더 나아가 아무리 힘없는 약자라도 나라의 최고 법원으로 하여금 법을 바꾸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진지한 참여와 토론을 통해 법이나 사회의 오류가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폭력과 정의>를 통해서 나는 이전에 관람했던 영화나 읽었던 소설들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지 않고, 경계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장마다 내용이 길지 않으므로,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쉽게 완독이 가능하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는 책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허구적이며, 또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즉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P165

기드온이 피리를 뿜어내듯 분 나팔 소리에 법이, 정의가, 판사의 양심이 그리고 인간 존엄을 표방하는 헌법정신이 장단을 맞추었던 것이다. 여기에 법제도의 위력이 있다. - P134

이 재판 결과는 인권유린과 인간성의 희생 아래 경제성장 일변도로 달음박질해온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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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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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는 1977년과 201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 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어 '김유경'과 '김희진'이 공유한 경험을 각각 다른 시각으로 조망한다. 두 개의 소설로 1977년의 사건은 좀 더 촘촘하게 엮어지고, 독자들에게 더 풍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은희경 작가의 이번 작품에는 공감 가는 문장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단순히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위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자꾸만 곱씹게 되는 묘사들이었다. 1970년대를 살았던 독자라면, 또한 여성이라면 한 번씩은 마주쳤을 법한 캐릭터들과 감정들에 관한 서술은 더없이 훌륭했다. 이래서 다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읽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책을 그리 자주 읽지 않는 독자에게도 이 책만큼은 권할 수 있다. 1977년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던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2010년대에 대학에 다닌 여성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갖가지 매력을 가진 캐릭터들에게서 나는 친숙함을 느꼈다. 특히 주 배경이 되는 기숙사에 대한 묘사 또한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했으며, 공감을 자아내는 요소로 작용했다. 소설 속 화자인 '김유경'이 살고 있던 기숙사에서는 온갖 루머들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퇴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소문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은 기숙사는 "'다름'과 '섞임'의 세계"이고, 이곳에서 "다수에 끼지 않는 것이 열등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극적인 말들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모아놓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불안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테다. 이는 내가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경험해본 바 있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의 표정과 농담으로 던진 말들 속에서 나는 뒤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각종 루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타인에게서 어떤 오해를 받더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에서 1970년대의 사회적 배경을 보여줄 때 정말 뜨악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들이라면 교과서로만 접해왔는데,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 개인들의 경험으로 여기게 되다 보니까, 더욱더 마음에 와닿았다. '김유경'은 늘 회피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하지만 이렇게 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정말로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리 속에 끼어들어 남들과 비슷해 보이는 것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피도 선택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소통에 폐를 끼치는 악이 될 수 있다"라는 소설 속 말도 맞다. 독재자의 지배 아래에서 누군가는 회피하지 않고 맞서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만큼의 민주적인 세상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들이 끝끝내 눈앞에 닥친 시련을 외면하려고만 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수감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던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단지 내가 사회를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김유경'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을 욕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상황이 현재와는 다르지만 그 속에서 여성들이 받던 차별은 시대를 뛰어넘어 분노를 자아냈다. "지성이든 열정이든 최성옥이 가진 것은 죄다 자신의 사유재산으로서 자기를 보필하는 데만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최성옥'의 고시생 남자친구와 팔려가듯 하는 결혼, "여자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말들. 대학교에 둘이 입학할 경우 남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자퇴해야만 했던 여성들. "못 가진 사람과 여자들에게 불리한 세상에서 그 둘 다에 해당되는 처지인 만큼 늘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당부"는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는 불공평한 현실을 되새기게 한다. '여성'이라고 해서 다 같은 여성이 아니듯이 '남성'이라는 단어 아래에 모든 남성들을 보편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남성들이 존재하고, 못 가진 여성들이 어떤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은희경 작가가 이를 다시 꺼내준 것이 고마웠다. 현 여성들은 팔려가듯 결혼하는 일이 적고, 대학교에 가는 일을 남자형제에게 양보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를 세상이 나아졌다고 기뻐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133p, <아메리카나>)"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한다.

<빛의 과거> 속 1977년도에 갓 신입생이었던 이들의 청춘이라는 '빛'은 이젠 과거가 되었다. 서로 다른 곡선을 그리던 인생은 이제 비슷해졌고, 같은 내리막을 향해 걷는 처지가 되었다. 서로 누가 더 나은지 뽐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나는 지금 '빛'으로서 궤도를 그리고 있지만, 끝내는 앞서가던 선배들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니, 나는 이미 그 빛을 잃었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놓쳐버린 빛이 자꾸만 아쉬워서 오늘도 친구들과 "그때가 참 좋았지", "다시 돌아가면 아주 방탕하게 살아야지"와 같은 회한의 한숨을 내쉰다. 이미 내 뒤에 새겨진 '빛의 과거'를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나에게 그날은 그런 것들로 기억된다. 기울고 스러져갈 청춘이 한순간 머물렀던 날카로운 환한 빛으로.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 가까이에서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지만 끝내는 만져보지 못한 빛이었다.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오로지 내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 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판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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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인을 위한 사람 공부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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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이 책은 8월에 구입했다. 다른 책들에 밀리고 밀려 12월이 되도록 읽지를 못하다가 드디어 완독했다. 김영하 작가가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것'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것으로 이 책을 이제까지 질질 끌고 온 데 대한 변명을 대신한다.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감도 점점 부풀었다. 오래 만나지 못한 첫사랑을 향해 온갖 긍정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듯이 나는 장석주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해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키워왔던 것이다. 너무 기대치를 높여놨던 탓이었을까. 아뿔싸, 책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각 장마다 '호모 xxx쿠스'라는 부제목이 붙었다. xxx 안에 서로 다른 단어들이 새겨지고, 그것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식이다. '호모 xxx쿠스'라는 단어를 활용하여 인간이나 그와 연관된 것들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좋았다. 또한 시인이자 평론가답게 굉장히 유려한 문체로 글이 쓰였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크게 이목을 끌지 않으며, 식상한 구석이 있다. 인간이든 사회이든 무언가를 분석하는 책을 출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이제껏 나온 책들과는 (인간의 혹은 사회의) 다른 면을 들춰내야 한다는 점이다. 블로그에 올렸던 <청년 정치는 왜 퇴보하는가>라는 책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른 책들과 다를 것 없이 동어 반복을 펼칠 거라면 왜 독자들이 굳이 이 책을 사서 읽어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 '사피엔스'라는 책이 여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건, 작가 유발 하라리가 내놓은 의견들이 독자들이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유발 하라리'도 의문만 가득 남겨 놓았을 뿐 특출난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책과 텔레비전'이라는 소재를 삼은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아니라 영상 시대에 걸맞게 '유튜브'나 각종 'sns'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야 하지 않을까? 이외에도 "일하는 기계로 사는 삶에 저항하면서 자주 빈둥거려 보라!"거나 "당신의 심신을 갉아먹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멀티태스킹을 당장 그만두라"라는 말들을 할 때 답답함을 느꼈다. 누구나 작가의 말처럼 일을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일정 부분 내려놓고 일하러 나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하는 거지, 사람들이 일에서 손을 떼는 게 우선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일할 필요가 줄어든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일하는 기계로서의 삶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물론 인간 자체에 대해 품고 있는 작가의 다정한 열의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몇몇 구절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3부 '쓰는 인간'은 무척 공감이 되었고,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장석주 작가처럼 또 하나의 '호모 부커스'로서 늘 책을 읽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책이나 도서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다. 저자는 돈이 없던 시절 마치 숲과도 같은 도서관에서 시간 보내기를 즐겼다고 한다. 나도 집 근처에 가까운 도서관이 있어서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해 도서관으로 숨어들곤 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의 교감이 책의 완독을 가능하게 했다. 3부뿐만이 아니라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에는 여러 책이 인용되었다.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때 자연스럽게 책이 얹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인문 에세이'가 아니라 '북 에세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면 '평론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일정 주제들을 놓고, 책들을 그러모아 쓴 글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이 책에는 더 어울리는 듯하다. 실제로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를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는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더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독서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믿는 작가의 책에 대한 애정도 담뿍 담겨있기도 하다.

책을 읽기 전에 문득 이 리뷰를 발견하고는 책 사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심층적인 탐구를 원하는 독자라면 책에서 부족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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