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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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아메리카나> 는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묘사하자면, '이페멜루' 와 '오빈제' 의 어린 사랑과 불가피했던 이별, 이후의 애틋한 재회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전작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디치에 소설에서 사랑이란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녀는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시련들에 더 집중한다.

"말썽꾼, 별종" 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페멜루'에게는 '오빈제'라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네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 너는 무얼하든 네가 하고 싶어서 하지,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따라하지는 않을 사람으로 보였거든." 이렇게 말하던 차분하고, 이성적인 오빈제는 이페멜루가 스스로를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1권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던 건 그들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에서 잦은 파업으로 대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닐 수가 없게되자 이페멜루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더 잘 살아보고자 떠난 미국에서 그녀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당연시 여겨지던 자신의 피부색때문에 끊임없이 차별을 당한다. "미국에 오기 전가지 나한테 문제가 있어야 하는 줄도 몰랐"던 이페멜루는 "이민자의 불안"을 가지고 있고, 고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더니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 되었다.

전에 이화여대에서 들었던 강의에서 작가 아디치에가 자신이 문제로 삼지 않던 자신의 피부색이 미국에 가서는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녀의 경험이 책에 반영된 것 같다. "저는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왔어요. 한 번도 스스로 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흑인이 됐죠." 이페멜루가 언급하는 흑인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비미국인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인 흑인 등 우리가 분류하는 '흑인' 이라는 집단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페멜루가 보기에는 분명히 다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흑인'이라는 주제 안에서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이페멜루가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사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나가 지내도, 지금은 방탄소년단 등의 이유로 조금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을 '아시아인'으로 묶어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비슷한 점이 존재하고, 문화적으로 닮아있지만 우리는 엄연히 다른 사람들이고, 서로를 보기에 우리는 너무도 닮지 않았다. 절대 '아시아인' 이라는 카테고리 하나로 묶어 모든 문제에 대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피부색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게 취급당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외치는 이페멜루에게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개개인이 너무나도 달라서, '한국인'을 어떤 사람으로 정의해야 하는지 어렵다. 그러니 '흑인', '아시아인' 이라는 분류로 각각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버리는 것은 편리하기는 해도,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자루에 담긴 그들은 백인들이 주류로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절대 어울리지 못하고, 계급에서도 최하층을 차지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고, 불편을 감수하는지는 이페멜루가 소설 속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잘 드러난다. "때때로 미국에서는 인종과 계층이 동의어다.", "그가 보기에 내 외모는 그 위풍당당한 저택의 주인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공적 담론에서 '흑인' 이라는 집합 명사는 '가난한 백인'과 곧잘 짝을 이룬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업신여겨지고, "놈들은 벌써부터 애한테 낙인을 찍고 싶어 해."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이유없이 범죄자 취급받으며 살아간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그들은 "투명인간"이고, 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만 한다. 부당한 위치에 서면서도 그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화를 내선 안 된다". 미국인들이 흑인이 인종차별에 대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책에서 '이페멜루'가 제기하던 생각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조금 놀라웠던 것은, 비슷한 불행 속에서 고통받는 흑인들끼리 "미국식 악센트라는 놀라운 업적 때문에" 누구는 존경하고, 자신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으로 미국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만하며 같은 동족을 모른 척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한국인들도 외국에 나가서 살면 제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구 보고 잘못 되었다고 손가락질 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흑인으로서 부당하게 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꼬집으면서, 작가 아디치에는 흑인들이 머리를 관리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릴랙서'라는 것으로 대부분의 흑인이 머리를 곱게 펴다가, 독한 화학성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이페멜루는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연의 머리를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이페멜루가 회사를 그만둘 때 또 다른 흑인인 '마거릿' 양이 "아가씨 머리도 문제였던 것 같긴 하지?" 라고 물을 때, 흑인들이 자신이 가진 예쁜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릴랙서로 꾹꾹 눌러담는 것을 ,당연히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 점이 화가 났다. 아예 문제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갈수록 아랫사람들이 피해를 봐야 한다. 어른들이 '원래 그런 거야' 라고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말해준다면,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어린 애들이 어떻게 나서서 고치려고 할까? 흑인들의 머리 모양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아디치에는 사회가 당연하게 강요하는 것들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하느님이 제게 주신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다는 사실" (난 비록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아디치에가 강연해서도 말했듯, 단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코르셋을 입어야 한다는 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 뿐이지,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증은 없다. 사회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천은 늘 어렵지만)

그토록 그리웠던 고향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들을 나이지리아를 무시하는 걸로 메우는 '귀국인'들의 행동도 흥미로웠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외면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다닌다. 날리우드(나이지리아 영화)를 비판하는 말들을 늘어놓고, 나이지리아가 가진 문제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이페멜루가 이후 이 귀국인 모임 '월드 나이지리안 클럽'에 대해서 남긴 글이 주목할 만 하다. "마치 라고스가 뉴욕처럼 되려고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것처럼 라고스가 뉴욕과 다른 점에 대해 불평" 한다고 그들을 평했다. 나이지리아는 나이지리아 만의 길을 가는 것이고, 절대 뉴욕과 같을 수 없다는 지적이 '헬조선' 이라면서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나로서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글귀를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른 국가들과 같은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 좋아 보이는 국가에 가도 그들이 가진 문제점이 분명히 있고, 그곳의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나라도 나름대로의 길을 일구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나이지리아에 대해 불평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네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이페멜루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니 잘난 척 그만하고 이곳의 삶의 방식이 그냥 그렇다는 것을, 모둠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어쩐지 대한민국이, 서울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최선이라고 살아온 삶을 내가 너무 무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아디치에의 작품인 만큼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규정짓고 의존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불구가 되어 눈에는 절박함을 담은" 여자들에게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보낸다. 소설 속에서 그녀들이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무시하기에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에서 있던 강연회에서 결혼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방식이, 자신이 하는 일들이 다 좋은 남편을 찾기 위한 일로 치부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던 아디치에의 말이 떠올랐다. 메이크업이나 옷으로 자신을 예쁘게 치장하는 것도 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던 아디치에의 당당함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소설 속에서 언급 되었던 것은 여성의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남자들도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둘러입는 갑옷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강요하는 차라던가, 집이라던가.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던간에 우리가 결혼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고, 누군가의 선택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써야 한다니 왠지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부담감에 짓눌려 결혼을 포기하는 90년대생들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이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소설 <아메리카나>를 통해서 어떤 집단에 성급하게 분류되어 차별받거나 무시 받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기대야만 자신의 지위가 나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결혼 이외에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서러움을 겪고 있을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나의 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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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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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다. 독재 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학교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기름 부족 사태가 발발한다. 가난에 다들 허덕이면서 살아가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는 '캄빌리' 와 '자자'는 그런 고통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대신 그들의 가정에는 가부장적이고, 신앙에 대해 지나치게 독실하고,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가 존재한다. 내가 보기에는 응당 벗어나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계속 피해자인 채로 살아나간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고, 아버지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P54)"

이처럼 캄빌리와 자자는 아버지가 세워놓은 목표치에 늘 도달해야만 하고, 주어진 자신들의 '일과표'에 맞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1등이 누구인지 알아낸 아버지 '유진'은 캄빌리에게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p63)" 라고 야단친다. 또한, "하나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 주는 아버지가 없었다.(64p)"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결핍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릴 때 성직자들에게서 받았던 도움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스스로가 결핍 속에서 느껴야만 했던 아픔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전부 자식에게로 또 대물림 된다. 유진이 만들어 낸 가정은 부유한지는 몰라도,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나는 자식들을 폭행하면서, 우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신앙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듯 그의 자식들도 같은 믿음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걸 극복해낸 것처럼 자식들도 우수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가 가진 강박을. 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절대' 어떤 이유에서든지 폭력은 정당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벗어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던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달라진 것은 '은수카'에서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지낸 시간들 덕분이었다. "문화적 자의식이 있는 음악가들(p190)"의 음악을 듣고,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p165)"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대학과 전공에 대해, 자신과는 달리 각자만의 고민을 하는 사촌들이 있는 곳 은수카. 한 번의 방문만으로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극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대학교 캠퍼스 투어를 하고 나오면서 오빠 자자는 사자상 밑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p167)"라는 글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자자는 '존엄성'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된 것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촌들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삶 속의 왜곡된 지점을,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또다른 선택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모가 자자를 오포보의 자자왕-저항자-와 비교한 대목도 흥미롭다. 이후 그는 아버지가 신앙을 강요하는 데에 반항하고, "사생활을 좀 갖고 싶(p236)"다면서, 방 열쇠를 보관하겠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지주일 전에 그 말을 들었던 자자와 그 이후에 자신의 알을 깨부수려는 자자를 통해서, '저항자'라는 말이 자자에게 어떤 깊은 울림을 주었는지, 그리고 고모와 사촌들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송두리째 바꿔 놓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아버지가 너희가 여기 며칠 더 있었으면 한대." 그 때 오빠가 어찌나 활짝 웃던지 이때껏 있는 줄도 몰랐던 오빠의 보조개가 보였다.(185p)"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자의 마음이 여실히 느껴져 마음 아팠던 대목이다. 모르고 살았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지만, 자자가 '다른 선택'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그는 '저항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자의 여동생인 '캄빌리'는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다. 할아버지 '파파은누쿠'와 사촌 '아마카'가 보이는 다정한 모습들을 보며, 어쩌면 자신이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을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p205)" 집에 갇혀서 아버지가 준 일과표만 따르고 살았던 자자와 캄빌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린아이들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부모님의 애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야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캄빌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두고서도, 아버지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그 부당함에 대해서 침묵하는 아이였다.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사촌 '아마카'에게 소리치며 대꾸하자 아마카는 (내가 보기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있구나, 캄빌리.(p211)" 이후 아마카의 캄빌리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변화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캄빌리를 조롱하지도, 비아냥 거리지도 않는다. 나는 아마카가 캄빌리를 비난하던 것은 그저 자신의 사촌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현실과 마주하고 그 알을 깨부숴주기를, 아마카는 바랐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자자와 캄빌리는 소설 내내 엄청 적극적으로 아버지에게 대항하지는 않는다. 영성체를 거부하거나, 죽은 파파은누쿠의 그림을 몰래 보관하는 일. 그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이 한 반항은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나는 비늘판 몇 개가 빠지고 방충망이 찢어진 창문을 쳐다보며 저 작은 구멍을 찢어서 그리로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p233)" 캄빌리가 창문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기특했다. 그래, 그렇게 한걸음씩 벗어나는 거야, 라는 응원을 하면서 소설을 읽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공포라는 감정은 익숙했지만 매번(다른 맛과 색깔을 띠는 것처럼) 전과는 다른 공포를 느꼈다.(241p)" 아, 어째서 1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면서, 불안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단 말인가. 가정폭력을 당하는 어린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즉 소설이 전혀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 슬프다. 슬프다라는 말로는 전혀 채워지지가 않을 만큼.

캄빌리가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한 번 뿐이었던 것 같다. "은수카에 다녀온 이후로 변했고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질,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운명(p256)" 이라고 느끼는 캄빌리는 아버지가 파파은누쿠 그림을 조각내어 찢어버리자 그것들을 감싸 안는다.

"원래 그것은 잃어버린 무언가,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를 상징했다.(p256)"

"파파은누쿠의 몸이 그렇게 작은 조각으로 잘려서 냉장고에 보관되는 것을 상상했다. (257p)"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고, 아픔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캄빌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할아버지 뿐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모, 사촌들과의 추억들, 아마디 신부에 대한 애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웃음들,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다정하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 캄빌리는 조각난 그림을 엎드려 보호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아버지로부터 지켜내고자 했을 것이다.

"결연하네. 바구니에 담긴 달팽이를 몽땅 사서 그 한 마리만 풀어 주고 싶었다.(288p)" 탈출하고자 하는 달팽이를 보면서 연민을 느끼던 캄빌리는, 탈출하는 꿈을 꾸던 그녀와 오빠인 자자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로워진 자자와 캄빌리는 이제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자유의 노래가, 웃음이 되어 나오(356p)"게 만들어준 은수카에 가서 오빠와 함께 지낼 미래를.

소설을 읽는 내내 분통이 터졌다.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지만, 가정폭력이나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느곳에나 있다.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단체에서 나서고 있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캄빌리나 자자처럼 그 상황을 타파할 시도를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그들의 선택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들도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삶에 '은수카' 같은 곳이 나타나주기를, 나로서는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

캄빌리와 자자의 내면 묘사가 세심하게 그려진 점이 제일 흥미로웠다. 아무렇지 않게 당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벗어나고자 마음을 먹을 때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아버지라는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힘들겠지만, 캄빌리와 자자가 이제부터라도 원하던 인생을 조금씩 찾아가게 되면 좋겠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그들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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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1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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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실한 마음>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인생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묘사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느 면에서 이건 맞는 이야기지만, '델핀 드 비강'이 주력하고 있는 바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테오'와 '마티스'라는 두 아이를 작품 속에서 내세웠다. '테오'는 독자들에게 연약한 부모 밑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가 사회의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부모의 이혼이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세밀하게 그려냈다. 아이는 매주 금요일마다 "가교도 안내자도 없이" "서로 교차하는 지대 하나 없는 완전한 두 세계 사이를 오가"야만 했다. 또한 이혼하기 전에 서로를 헐뜯던 부부의 모습을 아이가 온 가족이 모여있던 "유일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테오'의 가정에서는 '이혼'이 문제의 본질인 것은 아니다. 각자의 삶을 추구하면서,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내는 사람들도 존재하니까. '테오'의 엄마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이었고, 사회에서 내쳐진 아빠는 부모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창 민감한 시기의 12살 반짜리 아이를 제대로 케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본인들의 문제만으로도 삶을 버텨내기가 무척 벅찼던 것이다. 특히 감정을 앞세우는 엄마는 '테오'에게 자주 상처를 주었다. 본인이 가진 남편에 대한 증오로 아이 또한 아빠와 보낸 시간을 입에 담지 못하고, 아빠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했다. 이 과정 속에서 '테오'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 경계선으로 나뉜 두 진영에서 침묵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최고의 방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라는 믿음은 아이가 다른 어른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구조 요청을 하지 못하게 막아선다. 역자는 아이가 부모에 대한 '충실한 마음'때문에 선생님에게 힘듦을 고백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테오'가 감정을 숨기며 사는 게 몸에 배어있었던 이유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린아이일 뿐인 '테오'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모든 게 버거울 뿐이다. 아이는 그저 자신을 도와주려는 선생님에게 "우리가 있는 곳이 막다른 길임이 명백하다는 시선,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듯한 눈빛"을 던질 뿐이다. '테오'가 다니는 학교 교장은 '엘렌' 선생님에게 너무 깊숙이 문제를 파고들지 말라, 고 조언했다. 나는 오히려 '학교'라는 더 큰 사회의 공권력이 한 '가정'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파고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정이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없을 때, 사회가 나서서 상황을 조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코올로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테오'와 같은 아이가 생겨나고야 말기 때문이다.

'테오'의 친구인 '마티스'라는 캐릭터를 통해 부모, 특히 엄마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엿볼 수 있기도 했다. "엄마에게는 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특별한 목소리의 음색이 있고, 마티스를 바라보는 엄마만의 시선이 있다". '마티스'는 엄마의 감정에 쉽게 전염되고, 엄마가 우울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자책한다.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티스'에게서 엄마, 혹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에, '테오'가 가진 비극을 독자는 더 강렬하게 실감한다. '마티스'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테오'의 가정은 "춤을 추는 불길"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테오'는 "엄마의 품으로 숨어들고 싶"었고, "낮은 목소리로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었으나 끝끝내 그러지 못했다.

<충실한 마음>이라는 제목과 어울리는 장면들이 '세실'과 '엘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연출된다. 그들은 비슷한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아픔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어릴 때 무력하게 학대를 견뎠던 기억으로 '세실'과 '엘렌'은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어른들이 되었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 그들은 갑작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더 이상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노선을 선택한다. 내면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들을 "안심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목소리는 이제 의견을 내세운다". 이는 '세실'과 '엘렌'이 타인의 지시가 아니라 자아에 충실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읽힌다. '세실'은 남편에게서 벗어나려고 짐을 싸는 것으로, '엘렌'은 자신과 비슷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겪는 '테오'를 보호하러 나서는 것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인다.

12살 반짜리인 '테오'에게 있어 가족과 가정은 너무도 거대한 존재였다. 이를 바꾸기를 원하더라도,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었으며,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충실한 마음>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어린아이들에게 사회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여 적절한 때에 제대로 된 관심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충실한 마음>은 그들의 삶에 사회가 힘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엘렌' 선생님처럼 삶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자세 또한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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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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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책 <산 자들>의 강점은 스토리의 생생함이다. 전직 기자 출신인 '장강명' 작가의 특기가 발휘되어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인터뷰 같았다. 특히 <음악의 가격>이라는 작품에 이르러서는 작가의 현실이 대입됨으로써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 작품이 허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텨내고 있는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던 의도로 읽힌다. <산 자들>은 이토록 생생하게 현 사회의 '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일"을 중시하는 곳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산수의 법칙만이 작용한다. "사람 한 명은 돈으로는 몇 억 원, 차로는 몇 대에 해당(<공장 밖에서>)"하는 것이다. "치수 사업이 중요하냐, 노동자들의 생명이 중요하냐(같은 작품)"와 같은 질문은 소용없다. '능률'과 '효용'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이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질문이다.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단어가 공허하고 기만적인 구호처럼 들"리고, "직장의 의미라든가 업의 본질이라든가 자아실현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말도 마찬가지"라는 구절은 현 사회의 문제점을 꿰뚫는다. 사회 초년생은 '인맥'과 '경력'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마다해서는 안 되고(<카메라 테스트>), 중장년층도 자리보전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기본적 권리와 개인의 가치관은 경시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극한의 경쟁으로 내몰린 이들은 젖어 들어가는 종이배와 닮아 있다. 누군가는 싸우다 지쳐 포기하고 돌아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포기도 사치다. <현수동 빵집 삼국지>라는 작품에서 엿보이듯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협력'이자 '연대'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추구한다. 세상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이 우선순위로 고려된다. 한 쪽에서 누군가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싸우는데, 그 집에 들어오려고 밀려드는 사람은 많아 집값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사람 사는 집>). 현상의 이면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 달린다.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저희도 좀 같이 살면 안 됩니까?(<공장 밖에서>)"하고 묻지만,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살한다. 당장 한 푼이 중요한데, 어떻게 작은 돈이라도 기부하는 일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산 자'와 '죽은 자'는 때로 서로를 향해 덤벼들기도 한다. 괜히 애꿎은 상대를 향해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라는 존재는 '개인'에게 너무도 크고, 범위조차 불분명하다.

이기적인 사람들만을 비판할 수는 없다. 사회가 그들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본성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협받는 동물은 돌변하기 마련이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에 대항해 '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기세등등한 '갑' 앞에서 대역 죄인처럼 행동하고(<대기발령>), 그들이 원하는 게 값싼 노동력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림 당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대외활동의 신>). "애초에 뭔가 괜찮은 걸 노려볼 기회가 저한테 있기나 했습니까"라고 작가는 사회에 묻는다. 또한 "처음부터 컵에 물은 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 컵의 물을 마시느냐, 아니면 그마저도 마시지 못하느냐였습니다."라는 대사로 '을'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리함을 역설한다. 사실 작가는 작품 내내 균형 잡힌 시각을 선보이고 있으며, 어떤 한 쪽을 철저히 옹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을'의 입장에 서있기에, 독자의 편집으로 소설은 '을'들이 사회에 내놓고 싶은 일종의 보고서 역할을 떠안는다.

<산 자들>을 읽으면서 온종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작은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무력함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병에는 역병의 역할이 있"듯이 이미 어떤 질서가 정해져 있고, 내가 그것을 바꿔내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작가는 매 작품마다 일깨워 주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시도해보려는 나에게 어른들은 자주 말하곤 했다. "무수한 불의를 혼자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가 없어... 그것도 힘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제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너한테 점점 많이 생길 거야.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참아줘." 그래, 모든 건 대학이 들어가고 나서야 가능했다. 꿈을 좇는 것도, 사회에 반기를 드는 일도.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그제서야 숨겨져 있던 능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직장, 결혼, 노년 등등.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사회를 바꿔보려는 시도가 좌절되지만, 여론이 형성되기 전까지 견뎌야 하는 아니꼬운 시선들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뒤로 미룬다. 사회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외국으로 도피하는 회피 방법을 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는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 <산 자들>은 내가 가진 것이 이리도 부족함을 알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작가는 매 작품마다 사회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사회가 '합리적인 것'이라고 강요하는 일들이 '을'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왜 늘 '을'이 잘못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지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의문을 제기한다. 마지막 작품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가는 독자들에게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행동 변화를 요구한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함을 질문의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와 있음을, "덤벼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라는 걸 알아챌 수"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든다.

<산 자들>에는 사회와 대항해야 할 이유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 무리는 어느 집단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에게 진 빚이 있다. 아무리 부딪혀도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전지현' 배우가 했던 대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것이 '산 자들'로서 해야만 하는 의무다.

그는 대외 활동을 다시 해야 했다. 그를 반겨주고 인정해 주는 곳에 가야 했다. 설사 그들이 자신을 환영하는 이유가 값싼 노동력 때문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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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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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는 계절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 '박영'의 <이름 없는 사람들>은 겨울의 혹독하고 매서운 추위와 닮아 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제목과 뒤표지의 소개 글로 나는 이미 이 책이 절망의 끝을 보여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름 없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나약하고 순수한 사람들과 빠져나올 수 없는 범죄의 굴레는 영화 <원라인>을 떠올리게 했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몹시 흡사하다. 이미 삶이 재난과도 같기 때문에 타인의 울부짖음은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고, 그릇된 행동을 통해 불우한 처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게다가 두 작품 속의 '김진우(<이름 없는 사람들>)'와 '민재(<원라인>)'는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무모한 싸움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마저 닮아있다. 이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안도하면서도, 세상의 끝에 내몰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빛은 "그들의 실패와 죽음을 연료로" 만들어졌으나, '도시'의 이면에 '이름 없는 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이 부서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박영' 작가의 <이름 없는 사람들>은 도시의 어두운 면을 덮어 버리려는 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또한 저자는 극도의 경쟁으로 사람들을 내모는 현 사회를 비판한다. 화자인 '김진우'가 처한 상황은 '투견'들의 인생에 종종 빗대어진다. 싸우지 않으면 먹히고야 말기 때문에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는 '투견'들에게서 '김진우'가 가진 쓸쓸함이 드러난다. 투견들 중에서도 각별히 친했던 '하얀 개'가 '김진우'에게서 따스함을 느끼고 나서,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는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작품 속에서 '하얀 개'는 '김진우'라는 사람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진우'도 사채업자인 '재'가 종용하는 싸움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을 절실히 바랬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투견'처럼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김진우'에게 희망은 'T타워'와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T타워' 광고판에서 밝고 따뜻한 세상에서 영원히 순수한 상태로 살아갈 아이들의 모습은 '김진우'가 유일하게 쫓는 빛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허울 좋은 명분"일뿐이며, '자유'는 끝끝내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영상 매체'는 종종 허구의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구적인 유토피아는 무지하고 나약한 영혼들의 믿음에 의해 유지된다. 그들은 빚이 '0'이 되리라는 '갑'의 회유에 넘어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T타워'라는 유토피아가 있었다면, 디스토피아로 'B구역'이 등장한다. 이전의 화재로 크게 불타버린 그곳에 사람들은 '식인귀'가 산다고 말하며, 접근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재'에게 빚을 지고, 삶의 끝에 선 이들에게는 'B구역'보다 '도시'가 더 "지옥"같은 장소였다. 작가는 'B구역'을 통해 우리가 가진 헛된 공포심을 지적하며, 도시의 숨겨진 불완전한 면을 까발린다.

외적으로 볼 때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재'에게 휘둘리는 '김진우'를 보며 '돈'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돈'이 종이에 불과하고, 사람들의 신념에 의해서 유지되는 가상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사람들>에서 '돈'은 막강한 권력의 도구가 되고, 절대적인 복종의 이유가 된다. 돈 때문에 주어지는 범죄의 굴레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 보려고 애쓰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김진우'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으나, 그는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을'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채업자인 '재'는 절박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교묘히 이용할 줄 아는 '갑'이었다. "재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피를 빨아먹으며 중심가를 향해 거대한 세력을 키워나갔"고, "자신만의 빛나는 타워를 세울 준비를" 했다. 그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있는 자들만을 노린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김진우'는 세상의 끝에까지 가야 했고, 그곳에서 비로소 또 다른 시작을 발견한다. 한 쪽에서만 보면 '재'라는 캐릭터만 나쁜 것처럼 비치지만, 그 또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고 있던 자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시나 사람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사회를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 절대적인 악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닫는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듯

흔들리던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이 소설에 시간을 내주신 모든 분들의 귓가에도

그 소리가 가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박영' 작가의 마지막 말에 괜스레 숙연해진다. <이름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잘못을 비난하기 위해 쓰였다기 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종을 울리고 있을 사람들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고, 안정적으로 머물 자리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 도시는 그들의 슬픔을 통해 빛나고 있기에, 그들의 삶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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