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어나더커버 특별판)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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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에서 등장한 강이, 소영, 아람을 보면서 내 삶 속에도 존재했을 그들을 떠올렸다. 어른들에게 소위 날라리라고 불렸던 그들은 학교에서 철저히 외부인 취급을 받았고, 함께 놀아서는 안 되는 아이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어린 나의 눈엔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세상에 삐딱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절대로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으므로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에 그들과 무척 어울리고 싶어 하던 기억이 있는데, 나는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그 아이들도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나의 태도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임솔아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 삶을 스쳐간 강이, 소영, 아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외부인 취급을 받는 서로를 향한 유대와 지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실감했다. 게다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꿈을 좇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시하는 소영이나, 부모의 지나친 다정함에 중압감을 느끼는 강이, 길가에 버려진 것들 모두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아람, 세 아이는 나와 닮은 구석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아이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언니로, 또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자주 안타까웠고, 벼랑 끝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 분노가 일었다.

강이, 소영, 아람은 이른바 가출 청소년들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그저 친구를 따라서 집을 떠났다. 머물 곳이 없어 아파트 계단이나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다. 아이들이 바라는 건 "무인 정산기"와 같은 어른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을 반가워하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질문을 하지 않는 어른들. 평소의 아이들은 상대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나 벌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동등하게 대해줄 어른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아낀다고 하는 일이 본인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강이라는 캐릭터가 그랬다. 강이의 엄마는 강이로 인해 "죽음에 내몰린 약자"가 된 것처럼 행동해서, 아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명목상으로는 자식을 위하는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강이를 집 밖으로 내몬다. 강이는 너무도 안정적인 집을 두고, 자꾸만 멀리, 모르는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결국에 아이들이 바라던 건 자아를 성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부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은 아이를 지도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에 관여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와의 싸움을 거듭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이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이가 내뱉었던 말들 중 "병신 같지 않은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무인 모텔의 누구나 같은, 그런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43p)"라는 대목에서 아이들은 그저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 되고자 하며, 아이의 세상에 간섭하는 일은 어른의 지나친 욕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밖으로 나돌기만 하느냐고 아이들을 다그치기 이전에, 아이를 옥죄고 있으면서 모르고 지나쳤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성싶다.


책의 제목만 보았을 때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에서 주요 화자인 강이의 인생을 보니까 내가 이토록 최악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처럼 세상의 끝에서 좀 더 나빠지는 것으로 더 나아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은데, 이해하고 나면 씻어낼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어차피 상황은 나아지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악화시켜서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들에겐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이다. 때로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그들도 대항을 한다. 발버둥을 치지 않으면, 트라우마로부터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 무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또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상황을 완전히 타개할 수 있을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또 다른 악몽과 그 악몽을 벗어나려는 또 다른 기도만이 시작될 것이다". 더 나쁜 상황을 기꺼이 만들어내서 자신들의 메워지지 않을 슬픔을 메꾸면서 살아가는 것. 아아, 그것만이 그들의 최선이었다. 세상의 아주 끝까지 밀려나본 적도 없으면서 슬픔과 절망, 외로움 등의 단어를 서슴없이 꺼내놓는 스스로가 위선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졌다. 살면서 세상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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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지음, 박산호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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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 출판사 sns에서 <사브리나>를 읽고 박찬욱 감독 뺨치는 훌륭한 리뷰를 남겨줄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그를 넘어설 확신이 있었다기보다 책리뷰를 남기기 시작한 지 어언 6개월, 이건 꼭 뽑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 책을 읽기도 전에 박찬욱 감독과 이동진 평론가의 평을 읽고, 전의를 상실했다. 설령 <사브리나>가 허술한 작품이었더라도, 그들의 소개글은 작품의 황금 띠지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단 몇 줄만으로 책을 요약해내고, 특징을 드러내며, 예비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아, 난 이들에 비하면 작품에 먹칠이나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슬픈 예감이 든다. 이렇게 좋은 평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사브리나>라는 작품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이 여타 작품과 달리 맨 뒤에 새겨져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거기서부터 자부심이 느껴졌다. 맨 앞에 작가에 대한 소개를 담거나, 뒤표지에 본문의 문장을 몇 줄 적어 넣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어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감하게 덜어내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독자는 <사브리나>라는 작품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책 <사브리나>는 한 인물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남겨진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슬픔을 떠안게 된다. 이미 삶을 버텨낼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세상은 여러 방식으로 고통을 가하고, 2차 피해를 양산해낸다. 기이하게도, 처음에는 루머생성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싶었는데, 점점 내가 믿는 진실을 의심하게 되었다. 작품 자체에서 범죄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지 않아 의혹은 증폭되다가, 끝내 해결되지 못한 채 마무리를 짓는다. 결국 진실이 명확하게 무엇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작가는 네모난 프레임 안에 캐릭터의 표정과 대사만으로 작품을 이끌어 나가서, 독자가 상황 판단을 위해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적은 편이다. 캐릭터들이 극적인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있고, 증거물도 간략하게만 그려져 있다. 범인이 거론되었으나, 여러 루머나 기사와 겹쳐지면서 나는 사건의 진실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상황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피해자를 특정하고, 그들이 겪는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건 독자로서의 개인적인 편집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루머로 인해 피해자들이 겪는 정신적인 괴로움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크게 와닿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도 수년에 걸쳐 악성 루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잃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의적인 거짓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이 진짜라고 주장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게 많다고 우겼고, 적지 않은 사람이 거기에 동조했다. 교묘하게 그럴듯한 말을 섞어 쓰는 탓이다. 실제로도 우리가 정부나 연예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미미하므로, '음모론'이라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일단 가까이 다가가서 구경이라도 하게 된다. 호기심을 억누르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이렇게 각종 음모론, 루머, 기사들이 퍼져 나가면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대세의 흐름에 편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뒷일은 고려하지 않은 채 누군가를 두 번 죽이는 일에 가담한다.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악성 루머를 생산해내는 이유가 단순히 관심과 애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무척 절망스럽다. 결국 전부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린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타인에게 끼친 피해는 간과할 수 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거짓 정보를 생산해낸 사람들이 스스로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고, 세상이 이에 쉽게 현혹되어 그들의 잘못을 용인해주었다. 물론 찌라시가 돌고, 악성 댓글이 달려서 사람 하나가 목숨을 잃으면, 누구든 소수의 잘못을 묵인한 적이 없노라고 발뺌할 것이다. 최근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잘못인지 지적되기보다 특정 한 사람이 또 다른 단두대에 올랐다. 거기에서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글은 발견하지 못했다.

<사브리나>는 우리가 무감하게 만들어내고, 믿어버리는 거짓에 대한 경고를 보낸다. 또한 방관자로만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하는 때도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악성 댓글을 보고도 지나치는 것으로, 때로는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고 동의하는 것으로, 온라인상에 유포된 동영상을 호기심이라는 이유를 들이밀며 시청한 것으로, 적지 않은 범죄에 가담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사브리나>에서 거론되지 않은 진짜 범죄자는 우리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에 대한 궁금증보다, 자각하지 못한 채 저질렀을 잘못들에 대한 뼈저린 깨달음만이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피해자는 차츰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드문드문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외에 또 다른 수많은 피해자들이 곳곳에서 목격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 남겨진 우리가 거짓을 보지 않은 척 대충 넘어가려는 안일한 생활 태도를 견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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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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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분류된 장혜령 작가의 <진주>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까운 작품이다. 시와 산문이 혼재되어 있어 운율감이 도드라지고, 실제 자료들을 삽입함으로써 사실성과 생생함을 배가되었다.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서술하는 자가 객관적으로 사건을 관찰하는 타자였다가, 작가 자신이 되기도 한다. 이전이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생경하게만 느껴졌을 테다. 그러나 같은 명분 아래에서 벌어진 촛불 혁명의 시간을 통과해왔으므로, 국가의 더 나은 미래를 바라던 윗세대의 마음이 내게도 와닿았다. 물론 내가 겪은 것은 평화적이고 차분한 나날들이었으므로, 아버지들을, 어머니들을 이해한다는 말이 그들의 귀로 가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질 것만 같다. 그래서 스스로 독재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운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젊은 시절을 감각하기 위해 책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그들의 상실감, 무력함, 또 떨쳐낼 수 없는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

 

장혜령 작가의 아버지는 실제로도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써 내려간 글은 이전 역사의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작가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숨겨야 할 것들 투성이였고, 쫓기는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아버지가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아이는 그걸 알 듯하면서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참아내기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므로 억울함마저 느껴졌을 것 같다. 소설 <진주>에서는 대의를 위해 가족의 희생을 요구한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자신의 아버지 한 사람이라기보다 '아버지'라는 단어 하나 안에 그 세대 전체의 남성이 담겨 있다. 아버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밀문서나 편지 등에 적힌 아버지의 존재는 언제든 지워질 수 있었고, 위태로웠다. 장혜령 작가는 민주화를 위해 분투한 투사들을 치켜세우기보다, 담담하게 그들이 가졌을 슬픔과 불안을 묘사한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전부인 동지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마침내 목표를 달성하고, 개인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기쁨이 아닌, 또 다른 힘겨운 싸움이었다. 공동의 목표가 사라졌고, 그에 대해 함께 가지고 있던 열정은 분해되었다. 이전처럼 불의를 참지 못하고, 권력에 맞서려는 그들에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다들 싸움에서 지쳤고, 웬만한 트러블은 적당히 눈 감은 채 평화롭게 세상을 유지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응당 세상을 주도해야 할 패기 있는 엘리트들이 밖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정의를 위한 긴긴 싸움을 주도하던 이들은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잊어야만 한다는 말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이전처럼 떠돌이가 되었다. 2020년에 이른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그들을 잊었으나, 장혜령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더 늦기 전에/이미 늦었다 해도/ 모든 것이 사라져, 다시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아버지들이 자신의 야망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들의 희생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논하면서 역시 어머니들의 역할을 배제하기란 어렵다. 그녀들은 꿈을 좇는 남편을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세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왜 꼭 그게 자신의 남편이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드는 때도 있었을 것이다.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온몸을 내던져서 얻을 수 있는 게 결국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라면, 어떻게 남편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어머니들은 끝까지 인내하고, 자신의 아이를 지켜냈으며, 때로는 갖은 이유로 잡혀가는 남편을 위해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고통을 버티는 것으로, 자식들과 어머니들은 아버지들의 미래를 향한 열망에 보탬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에 관하여

 

민주주의는 완전하다,라는 믿음이 강요되던 때에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어야 하고, 전부 평등할 권리가 있다고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조종하지 못해 안달이 나있던 때였다. 하나의 이념에 대한 무비판적인 맹신이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초래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양쪽으로 나뉘었고, 다른 한쪽은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단되었다. 체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공산주의 진영 사람으로 몰려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자들은 모두 사이비로 여기고 징벌 이행을 서슴지 않았던 종교재판을 연상하게 한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불분명한 근거를 대면서 어느 한 쪽이 나쁘다고 선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권력자들의 선동에 기꺼이 휩쓸렸다. 믿음은 종종 권력의 도구가 되었고, 처벌의 이유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각기 다른 형태의 믿음들이 스러져갔다. 겉으로는 사람들이 가진 의견 전부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 세대에서도 뚜렷한 이유 없이 어느 한 쪽이 묵살되고, '사이비' 취급을 받는다.

장혜령 작가는 믿음을 맹목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 "믿음은 어떻게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들을 바꿔놓는 걸까. 믿음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지금 아무렇지 않게 맞는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들이 정말 옳은 일일까. 우리의 확고한 믿음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어느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만을 중시하고, 다른 한쪽을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질 기회를 거부하고, 믿음에 짓눌려 살아가고자 하는가. 상황에 따라 믿고 따라야만 하는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고,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이 각각의 장점을 골라내 더 좋은 대안을 이끌어낼 수 있는 믿음들도 존재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은 한 권력자의 선동에서 비롯되었고, 사람들은 진실을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채 흐름을 따라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이 세상을 어떻게 지옥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지, 우리는 목격해오지 않았던가. 소설 <진주>는 맹목적으로 믿는 행위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강화시켜주었다.

 

나의 부모도 또 다른 아버지들이자 어머니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의를 참고 견디는 방향을 택했다. 학창시절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배울 때마다 운동가들을 깊이 존경했다. 누군가의 용기에 현재의 삶을 빚졌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현실을 회피했던 부모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작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존재다. 당연히 나서야 하는 때에 물러날 선택을 한 부모를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위 권력에 대항하면 견뎌야 할 공포심을 이제는 알고 있다. 게다가 개인의 변화에 대한 열의로 사회를 단번에 전복시킬 확률은 희박하다는 사실도 인지할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세상이 불의에 저항할 누군가를 원할 때, 주저 없이 저항자의 무리에 끼어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길 희망해본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한 구절을 이용해 아버지들, 어머니들, 당시에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어른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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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참선 1~2 세트 - 전2권 참선
테오도르 준 박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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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면, 정말로 다시 살아보고 싶다면 있는 그곳에서 참선을 해라.

개인적으로 종교를 지나치게 믿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목격할 기회가 많았다. 그들은 자신이 따르는 것만을 옳다고 여겼고,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상대를 '사이비 종교'라며 비하하기도 했지만, 난 광적으로 종교에 미쳐있는 그들을 보면서 어느 쪽이 '사이비'에 속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종교도 믿고 있지 않다. 특정 종교를 따르게 되면, 그 신념에 갇혀서 편협한 시각을 갖게 될까 봐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때마다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선택지를 고르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까 <참선>이라는 책을 읽게 된 건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참선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참선은 종교 교리를 무조건 믿고 복종하는 게 아니다"라는 문장에서도 작가가 종교를 강요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존재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도록 '참선'을 가르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을 거라고 예상해서 이 책을 읽기를 꺼리고 있다면 안심해도 좋다. 저자는 불교를 믿으라고 강요하기 위해 책을 써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종교의 양면성을 인정했고, 이를 믿는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종교를 믿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종교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인생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분투한 저자의 노력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내보이는 것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획득하고, '참선'을 따라 해볼 만한 이유를 제공한다. '테오도르 준 박'은 스님이었지만, 한국 불교의 부족한 점들을 꼬집고, 나아져야 할 부분들을 언급했다. 스스로도 불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승이었던 '송담 스님'을 존경했기 때문에 불교계에 몸을 담았던 이유가 크다고 털어놓는다. 즉, 이 책을 쓴 '테오도르 준 박', 즉 '환산 스님'이 강조하는 바는 종교에 있지 않고, '참선'이라는 수행 방식에 있다. 2권의 책 전체에서 엿보이는 '참선'에 대한 열정과 확신은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참선'이라는 소재를 종교의 수행 방식이 아니라,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들 중 하나라고 여겨주면 좋겠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려 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한국에서와 달리 서양에서는 '참선'이 심리 치료, 의식 확장, 인간 잠재력 계발 등에 도움이 된다고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참선>이라는 책에 시작부터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단순한 장점들 때문이 아니었다. 프롤로그에 적힌 작가의 말은 내가 어떠한 편견도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저자가 절에 들어가기 전에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의문들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특히 만약 살면서 운이 좋았다면,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굳이 나여야만 했는지, 나는 왜 나로 태어나야만 했는지 등의 질문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런 의구심에 평생을 시달려 왔으면서도 남들에게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정확한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무엇보다도 깊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오한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아, 드디어 제대로 찾았구나 생각했다. <참선>을 완독하는 것으로 질문에 대한 모든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참선'은 "인내와 노력"을 엄청나게 요구하는 일이고, 장기적인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평생의 의문에 관한 답을 듣지는 못했으나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는 데에는 도움을 얻었다. 작가가 책의 많은 부분을 외로움, 두려움, 불안, 화, 실패, 중독적인 생활 습관과 같은 보편적인 감정이나 현상들을 살피는 데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 에세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이 가진 부정적인 감정의 대부분을 '참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대신 오직 "이뭣고?"에 집중하면서 바람이 지나가게 두면 된다"라고 조언했다. 이 책에 참선을 하는 방법이 소상히 적혀 있기 때문에 나도 여러 번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문득 내가 책을 읽는 동안은 불안에 떨지 않았고, 쓸데없는 분노를 타인에게 쏟아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관성에 이끌려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익숙지 않은 호흡 때문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틈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변하고 있었고, 조금씩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좋은 책을 발견했기 때문도 있지만,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새로운 변화를 갈구하고 있고, 인생이 나아지기를 나처럼 절실하게 원하고 있다면, 그리고 어떤 방식이든 일단 시도해 볼 준비가 되었다면 <참선>을 읽어 봤으면 한다.

<참선>이라는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종교나 신을 강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람들의 불신은 팽배해 있다. 사람들에게 기댈 존재가 필요하므로 종교가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을 믿는 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지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한국에서 일어났던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세상의 변화는 인간에게 달려있음을 주지시킨다. "기적 같은 것은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포기하지 않고, 심신을 혹사시키며 문제를 해결해나간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개개인이 모여 협력할 때 "진정한 성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현실이고,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단언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 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작가의 말이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아 더 나은 미래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결책이 있다는 시각은 스님과 같은 종교인에게서 얻어본 적이 없기에 신선했다. 이외에 과학과 종교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고, 새로웠다.

또한 나는 작가를 통해 처음으로 우리가 살면서 속상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렇게 많은 지식을 습득하면서도, 현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문제에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어릴 적부터 배워온 바가 없었던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감정을 억압하도록 강요받았고, 타인에게 드러내서는 안되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 이토록 "정서적으로 무지한 상태"인 "21세기 도시 수행자"들을 위해 저자는 '참선'이라는 해결 방식을 내세운다. '송담 스님'은 '정신 수련'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보았고, 전 세계은행 총재인 '김용'은 정신 관리, 자기 제어 훈련이 일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 모두 '참선'이 정신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자기 계발'이라는 명목으로 밖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꾸준히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닦달하게 되고, 결국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내면의 근원으로 눈을 돌려 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충만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인 '환산 스님', 즉 '테오도르 준 박'과 그의 스승인 '송담 스님'은 "우리는 한 팀이야. 알지? 가서 잘 싸워봐. 나는 네 편이야."라고 지속적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들이 나를 돕고 싶어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고, 며칠 동안 책에서 배운 '참선'이 조금이나마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수행을 시작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읽는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려고 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 나는 <참선>이 한 번쯤은 다른 독자들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비주류 과학 자료와 이론, 종교적 관습에 관해 개인적으로 끝없이 의구심을 가지고, 연구해 봤다는 걸 언급하면 책을 고르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참선>이라는 책이 단순한 미신이나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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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너를 생각해
후지마루 지음, 김수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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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초반만 해도 작품이 너무 가볍고, 유아적인 방향으로 흐를까 봐 겁이 났다. '마법'이라는 소재 자체에서부터 어릴 때 꼬박꼬박 챙겨 본 만화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탓이다. 일본어로 쓰인 작품들에 관한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작품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데 그들은 독특하고, 때로는 조금 유치한 감성으로 독자와 관객의 근원적인 응어리를 녹이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냉소적으로 읽어내려가다가, 어느새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고 있는 때가 잦다. <가끔 너를 생각해>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순식간에 작품의 세계로 몰두하게 되고, 스토리가 생각지도 못하게 흘러 소중한 교훈과 맞닿으면서 탄성을 자아낸다. 완벽하다고 평할 수는 없을지라도, 분명히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새해에 적당한 마법이 절실한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가끔 너를 생각해>를 통해서 지팡이를 휘두르는 환상적인 마법이 아니라, 진정한, 또 평범한 사람들로서도 실천 가능한 마법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본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타심으로 똘똘 뭉쳐있다. 마녀인 '시즈쿠'가 사용하는 마도구부터 그렇다. 내가 아는 마법사-예를 들어 해리 포터-는 마법이라는 소재에 있어서 주체적이고 주동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시즈쿠는 마도구를 필시 남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소설 내내 시즈쿠는 죽마고우인 '소타'와 마도구를 활용해 사람들을 도와 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냉철하고, 쓸데없는 걸 싫어하는 세대"인 "사토리 세대(일본에서 1980~9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말)"라고 스스로도 여러 번 강조하는 시즈쿠에게 타인을 도우며, 그들의 인생에 휘말리는 건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자신이 이미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며 소중함을 알아차린다. 또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그러면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수한 능력을 지녀야 마법사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할 때 비로소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작가 후지마루는 이런 깨달음을 제공하면서 어느 독자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이끌어나간다. 선천적으로 무언가를 소유해야만 마법사처럼 비범한 생명체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작가 후지마루의 서술 방식은 일본의 '사토리 세대', 한국의 청년의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호소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청년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배경을 지닌 자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배반하는지 목격하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가끔 너를 생각해>는 현재의 젊은 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른 사람을 도와야 비로소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은 시즈쿠가 외로움에 파고들던 모습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 경로에 과감히 뛰어들었을 때에 곳곳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사람들은 협력하고, 타인과의 연대를 시작한다. 외톨이였던 그녀가 자신이 받은 사랑을 인식하면서 세상을 바꿔놓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으로 예언서라는 마도구를 통해 이전 세대의 마녀들이 시즈쿠에게 무한한 신뢰와 응원을 보낸다. 시즈쿠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장면들로 작가는 "사람의 마음에야말로 마법 같은 힘이 있"으며, 그런 마음들이 연결되려는 시도를 보일 때 우리는 더 큰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게다가 누군가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휘말리기를 주저하지 않으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기쁨이나 행복을 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합리적인 것들을 중시하고, 사회로부터 비롯된 상실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타인과 거리두기를 선택한 청년 시즈쿠에게 작가는 "마음은 때때로 마법을 능가"하며, 하나로 연결된 마음을 통해 "사람이 일으키는 기적"은 무궁무진하다고. 그리고 그런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당신에게도 있다,고 전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에 "행복을 나르는 게 마녀의 삶"이고, 우리 모두는 행복을 나를 만한 능력을 가진 마녀다. 그러니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쓰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오늘도 누군가를 돕고, 또 구원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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