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67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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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무척 관심을 갖고 있던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짧은 줄거리마저도 흥미로운 작품을 본격적으로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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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신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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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목을 살펴보면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성가시다'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성 사이, 혹은 동성 사이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모녀 관계를 내세웠다. 아, 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지. 모녀 사이의 감정들만큼 복잡하고 불가해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도 없다.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어머니와 딸의 '성가신 사랑'은 엇비슷하게 그려졌다. 일방적인 희생정신으로 어머니는 소리도 없이 자아를 잃어갔고, 그녀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우리는 반항을 하다가 결국엔 꽤 그럴듯하게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엘레나 페란테의 글은 다르다. 어머니 '아말리아'는 자신을 원하던 두 남자의 눈동자들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될 자유를 잃었고, 딸 '델리아'는 어머니 '아말리아' 그 자체가 되려는 강렬하고 왜곡된 열망에 휩싸여 있다. 자신보다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딸이 자신의 꿈을 이뤄주기를 바라는 위(어머니)에서 아래(딸)로의 사랑이 아닌 것이다. 딸인 '델리아'는 어머니 '아말리아'와 동등한 위치에서, 때로는 우위를 점하면서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왜곡된 욕망들의 향연

'델리아'는 자신의 어머니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여 진실을 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델리아'의 이런 잘못된 사랑 방식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내인 '아말리아'를 집착적으로 사랑하고 또 폭행했다. '아말리아'를 경멸하고 질책하면서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둬두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방식은 '델리아'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리적인 폭력의 여부에만 차이가 있을 뿐 '델리아'와 그녀의 아버지는 '아말리아'를 정신적으로 갉아먹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 이외에 '아말리아'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꽤 오랫동안 알고지낸 '카세르타'라는 남성이다. 그는 '아말리아'를 향해 오로지 변태적인 욕망만을 소유하고 있다. '델리아'는 어머니가 네 개의 눈동자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다가 죽어버렸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섯 개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거리다가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아말리아'로서는 성가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사랑'을 근거로 '아말리아'의 무대 앞 관객석에서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아말리아'는 죽던 그 순간에 자신의 "무대 앞 관객석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262쪽)"다. 그녀로서는 죽음으로써 자기 자신이 될 자유를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향한 예행 연습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델리아'의 공포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사랑뿐이었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 '아말리아'의 이야기는 '델리아'의 자아에 내재되고, 끝내 '델리아'는 '아말리아' 자체가 된다.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삶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서야 이해하고 그토록 열망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바로 아말리아였다(286쪽)."는 맨끝 문장에서 처음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을 사는데, '델리아'는 끈질기게 자신의 어머니에게로 되돌아 가는구나 싶어서 놀라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얻게 되는 것들-상대에 대한 완전한 이해-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부모에게서 온 것들을 거부하려고 애써도 마지막엔 그들의 얼굴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뭇내 아쉽고 안타까우면서도, 그들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혹여 절반뿐이라고 해도 완전한 성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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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인종에 관한 문제는 단 한 번도 끊이질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간다. 도서 『니클의 소년들』은 인권의 측면에서 과거의 폭력적인 기억들이 지금도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예감을 주는 작품이다. 흑인 소년 ‘엘우드‘는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독자들이 ‘부트 힐‘과 같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소년들의 시신들, 그러니까 부정당한 진실들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우리는 타국의 사람에게 놀라운 몰입도를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엘우드‘와 ‘니클의 소년들‘의 이야기는 몇몇 사람들의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엘우드‘가 ‘마르코니‘ 씨에 대한 모욕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듯이 우리는 ‘니클‘의 이야기를 마치 우리의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니클의 소년들』은 동양인으로서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리가 세상에 분노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어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부모를 매개체로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잘못된 세상에 대항해야만 한다. ‘엘우드‘나 작가 ‘조지 오웰‘의 믿음처럼 ‘인류애‘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다.

흑인 차별의 집약체, ‘니클‘

흑인의 인권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던 때 ‘엘우드‘에게 급작스러운 시련이 닥친다. 그는 믿기 어려운 이유로 감화원인 ‘니클‘에 배정된다. ‘니클‘은 흑인 노예 해방 운동 이후에도 흑인들이 노예처럼 살아가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집약해 놓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규칙과 규율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점도 시대 상황과 닮아 있다. 외부에서 보는 모습과 다르게 ‘니클‘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가르는 기준이나 아이들의 상벌체계 등이 불명확한 시스템상에서 운영된다. 교내에서 아이들은 심지어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식사가 부실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은 갖은 폭력에 노출되어 사회로 나간 이후에도 ‘니클‘이라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니클‘의 아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인종차별과 가난에 시달려 왔다. ‘니클‘의 아이들 중에서 ‘엘우드‘는 상황이 좀 나은 편이었다. 주전부리를 싸 들고 면회를 와 주는 할머니 ‘헤리엇‘이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생계를 꾸리는 일에도 벅찬 시간에 흑인 인권 보장을 위한 시위에 참여한 경험도 있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 현실(137쪽)˝을 알지 못했던 ‘엘우드‘는 집요하게 ‘니클‘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시도했다. 친구인 ‘터너‘는 ‘엘우드‘가 곁눈 가리개를 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니클‘로 밀어 넣고 방치하는 모든 어른들의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법이 바뀐다고 해도 과거를 답습하려는 사람들이 대를 통해 이어지는 이상 가난과 차별은 아이들을 놓아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터너‘ 등의 소년들은 장애물을 가로지르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가며 나름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엘우드‘처럼 무식하다 싶을 만큼 우직하게 장애물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결국엔 돌파구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가 왔다

‘엘우드‘가 존경하던 ‘킹 목사‘는 흑인 시위 참가자들이 끝내는 ˝오랫동안 억압당한 끝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멍해져서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침대로 여기고 잠드는 법을 터득한 검둥이(196쪽)˝로 변해버린다고 말했다. ‘엘우드‘는 ‘킹 목사‘를 무척 존경했으므로 망가진 상태에서 벗어나 ‘니클‘을 없애고자 한다. 하지만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한 명의 개인이 붕괴시킨다는 것은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탈출이 아니라 졸업을 해서 ‘니클‘을 나가더라도 ‘니클‘의 아이들은 ˝경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불구가 되어 절룩거리며, 정상이 되는 방법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209쪽)˝ 더군다나 하나의 ‘니클‘이 붕괴된다 해도 또 다른 ‘니클‘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있었다. ˝백인의 아들들이,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기억하는 한(240쪽)˝ ‘니클‘과 같은 감방들은 ˝품행 교정이 필요한 버릇없는 녀석들이 나타나기를.(240쪽)˝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 ‘니클‘, 또는 ‘리치먼드 호텔‘이 있었다는 사실은 희미해져 간다. 차별과 폭력의 땅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니클‘과 ‘리치먼드 호텔‘은 과거의 이름으로 몇몇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기억 전부가 소멸되기 전에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가 왔다, 고 ‘니클의 소년들‘은 말하고 있다.

미소를 지으며 너를 속여 텅 빈 것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네게서 너의 자존감을 뺏어가는 사람도 있다. 너는 자신이 누군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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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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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작품들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쓰기 강의라니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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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성 직업인의 경험을 귀담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직장에 몸담고 있는 여성을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부모 세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여성에게 있어서 출산과 육아로 인한 퇴직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회고록은 여성 직업인에 대한 우리의 절박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녀는 종군기자로서 숱한 위험에 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그녀는 사진을 찍는 자신의 일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폭로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에 집요한 열정을 쏟는 사람 중에서도 ‘린지 아다리오‘는 경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분쟁지역에서 극도의 공포와 공황상태를 겪고 난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을 보였고, 더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어 그 지역들이 가진 부조리와 인권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자 했다. 자신을 몰아세워 가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로 인해 우리는 여성으로서, 또 여성 직업인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내가 애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 했던 모든 일들을 그리워했다. 심지어 이전에는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이를테면 자유라든가. (95쪽)

분쟁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수 주간 집을 떠나있는 경험은 ‘린지 아다리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종군기자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숱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직업이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동료들의 비보를 접하면서 ‘린지 아다리오‘는 현재의 평화로운 삶을 소중히 하게 된다. 물론 그런 삶이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의 생활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꽤나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지구 한 쪽에서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토록 사치스러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직업과 사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된 직업과 일상 사이의 고리는 ‘린지 아다리오‘가 잠시도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면서 사진을 찍도록 부추겼다. ‘폴‘이나 아들 ‘루카스‘ 등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시간들, 급작스럽게 불어닥치는 죽음들, 그리고 직업과 일상 사이의 불균형 등으로 그녀는 직업인으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지만, 절대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열정을 갖고 있는 일을 통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알맞은 때에 알맞은 장소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린지 아다리오‘가 자신의 젊음을 온통 쏟아부었던 사진 찍기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변화들을 이끌어낼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남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전쟁의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 본인을 넘어서서 그녀의 삶을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미래 세대의 열정이 존속될 것이므로 우리는 사소한 변화들을 꾸준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보다 더 안전하고 쉬운 형태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선택이고, 일상에서 최전선에 서 있는 수많은 다른 여성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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