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하는 여자들
대니엘 래저린 지음, 김지현 옮김 / 미디어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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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이 책에 사로잡혔다. '반박'이라는 단어에 담긴 반항기가 작품을 읽도록 부추겼다. 반박과 여자들이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늘 본래의 질서에 반항하는 무리를 존경했다. 마음에 찬 분노와 달리 대열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늘 깨어있고, 반박할 줄 아는 한 명의 여성이자 더 나아가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고자 했다. 책의 제목으로부터 나는 전사와도 같은 여성들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보이는 무미건조한 평범함과 공감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처럼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를 발견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너무 들어 그만두었다. 책을 읽는 데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기도 했다. 무조건 깊이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이 책에서 멀어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으면서 상대가 공격도 하기 전에 이미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친절함에 나는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지고야 말았다. 나는 여성들을 너무 피해자와 반박하는 이의 입장에 고정시켜 놓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반박하는 여자들>을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모든 부담감을 내려놓고 가볍게 책장을 넘기라고 조언하고 싶다. 책장이 무척 술술 넘어가는 재밌는 책인 건 확실하니까.

<반박하는 여자들> 속 작품을 읽다 보면 여성은 비교적 흔하게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상대를 유혹하려는 것으로 해석되고, 그 때문에 비난받는다. 서슴없이 여자의 몸을 만지는 남자들을 생각해보면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은 성적인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이외에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 별다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것처럼 작가는 묘사한다. 또한, 작품 속 여성들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타인이 내린 결정에 휩쓸려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자가 없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들은 그저 타인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 세상에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눈앞에 떠다니는 누군가의 유령을 조용히 떨쳐내는 여자들에게서 나는 씁쓸함을 감각한다. 사진을 찍는 일처럼(<내가 사랑하지 않은 파리의 미국 남자들>)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고,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 텐데. 한편으로는 나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으리란 생각도 든다. 즉, 화장실에 갑자기 쳐들어와 내 목에 키스한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날리기보다 침묵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쪽이었으리란 것이다.

작가 대니엘 래저린의 작품 속에서 여자들은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려고 한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해 애초에 감정에 지나치게 빨려 드는 것을 경계한다. 상실의 상처를 입기 전에 헤어지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수동적이고,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상대와 개선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감정적인 모습을 미리 제지하는 것이다. <반박하는 여자들>의 여자들은 상실의 고통을 두려워하며 처음부터 원하기를 거부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기울인다. 여러 작품에서 이러한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남녀 관계뿐 아니라 숱한 인간관계에서 지쳐 독립되고 외로운 개체가 되려는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감정적인 시련을 덜어낼 수 있으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외로워야 하고, 또다시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니 <반박하는 여자들>에는 관계로 인해 감지되는 비좁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애정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사람들은 바란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내 변덕에 따라 애정과 자유가 적절하게 주어질 수 있을 리는 없다. 각자가 나름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도, 어긋나는 지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국엔 어느 때든 상대의 마음을 소중히 할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이 여성을 옹호하고, 세상에 반박하려는 책일 거라고 예측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사람 간의 관계를 고찰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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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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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온갖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전 작 <작은 것들의 신>이 97년도에 출간되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알기엔 너무 어렸다. 인도에 관한 편견이 작품에 도달하는 일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하는 그곳은 너무 혼란스럽고, 불쾌한 경험으로 가득했다. 가본 적도 없는 장소를 멋대로 규정하고,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무수한 매력을 놓쳐버릴 수 있음을 알만큼 성장했다. 이런 깨달음은 중국에서 잠깐의 교환학생 생활로 얻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인도에 대해 그랬듯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비하했다. 두려움을 안고 내가 진짜 그곳으로 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선입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은 고유의 매력으로 빛났고, 외국인인 나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한국과 달리 타인의 시선에 덜 신경을 써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나는 찰나의 경험을 통해 쓸데없는 편견을 버릴 수 있었고, 오늘 <지복의 성자>가 보여주려는 인도의 불완전한 면을 어떤 과장도 없이 직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룬다티 로이가 보여준 인도는 한국의 과거와 닮아있다. 사람들을 감금시키고, 고문하는 '시라즈 영화관'의 존재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지복의 성자>를 읽는다는 건, 한국이 가진 아픔을 찬찬히 훑어보는 일이다. 더 나아가,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 바쳐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전 세계에 놓인 고립된 자들을 이젠 외면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안줌'은 트랜스젠더다. 그가 가진 '여성'이라는 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끌림과 어떤 열의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숱하게 약자의 위치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계에서도 <이제야 언니에게>, <82년생 김지영>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이 견뎌야만 하는 차별과 폭력을 토로했다. 인도는 한국보다도 더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국가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자살하는 여성 중 약 40%가 인도인이라는 보고까지 있다(주요 원인으로 조혼과 가정폭력이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줌'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분쟁과 내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은 종종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폭력에 가담하도록 요구되는 탓이다. 그들은 이유 없이 잠재적인 혁명가로 분류되어 처단당하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이 처한 우월성을 짚어내면서도, 아룬다티 로이는 여전히 피해자에 속하는 여성의 서사를 다룬다. 가난한 부모에 의해 경제적 도구로 전락하고, 어김없이 가정폭력이 등장한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문장 앞에, 어떤 행위가 삽입되더라도 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무덤 가까이 가는 게, (한국에서는 흔히) 제사를 지내는 게. 여자들은 특별한 근거 없이 여러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한편으로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안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엄마'의 자격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신체적인 문제로 '안줌'은 아이를 가질 수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어 한다. '안줌'의 반대편에 나름의 이유로 생명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립적인 두 집단을 통해 우리는 생명에 대한 간절함이 '엄마'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피가 섞이지 않더라도, 공동체를 이루고 충만한 삶을 영위해나가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이번 소설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특히 카슈미르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과 학살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러 캐릭터와 서사는 인도의 불온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안줌'은 세상의 변두리에 서서 낮은 시선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의 삶을 관찰한다. 또,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라는 캐릭터의 글을 통해 작가의 의도는 정점에 달한다. 인도의 잘잘못을 무자비하게 쏟아내고,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오랜 다툼 속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복의 성자>를 탄생시켰다. 계급 간의 끔찍한 차별과 종교적 이념 차이로 인한 살육은 그러나, 사회적 갈등과 역사적 관점에서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아봐도, 우리는 그저 시험을 위한 역사만을 다뤄왔을 뿐, 모든 죽음을 기억하고, 기리지 못했다. 때로는 무고한 생명의 죽음에도 우선순위를 매기며 살아왔는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저자는 인도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이에게 숙고하고 반성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피해자보다 그가 찍힌 사진의 저작권 싸움을 더 오래도록 기억했다.

TV 카메라와 미디어는 선택적이고, 편집된 보도로 무자비한 전쟁에 가담했다. 억울한 이들의 고립된 슬픔을 외면하고, 대중이 냉소적이 되도록 부추겼다. 올바른 질서 확립을 위해 나서고, 국민의 편에 서야 할 정부와 경찰은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온갖 피해자의 요구와 꿈을 묵살한다. 이처럼 모두가 무관심할 때, 미디어의 기록은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공권력을 고발하고, 대중의 관심을 필요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흥망성쇠에 있어 언론은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

<지복의 성자>는 슬픔으로 시작해 절정으로 치닫다가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배제되고 차별받은 사람들끼리 결합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나간다. 무엇보다도 '미스 우다야 제빈'이라는 미래 세대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외로운 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 인도를 자멸로부터 구해낼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손에서 새로운 씨앗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어쩐지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 끌어안는 진정한 포용의 미학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인도뿐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에도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희망에 차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품위"라는 것을 잊지 않고, 더 큰 '아자디(자유)'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야 하겠다.

▶연관 작품

<남산의 부장들> w.김충식, 폴리티쿠스 출판(주지하다시피 동명의 영화가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 w.수전 손택, 이후 출판

그는 누구를 애도하고 있었을까? 틸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한 세대 전체일지도. - P355

카슈미르는 피부가 흰 사람들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런 뒤바뀜이 끔찍한 비방에 일종의 정당성을 불어 넣었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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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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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푸시킨의 단편소설집 <눈보라>를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마 작년 12월 즈음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sns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푸시킨의 시를 발견했다. "당신을 사랑했소. 진심으로, 절실하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바랄만큼(1829)". 상대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열의가 감지되는 이 시는 책의 맨 앞장에 수록되어 있다. 길이와 관계없이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푸시킨의 연애 시를 읽고 나는 책 <눈보라>를 찾아 헤매었다. 당시에는 책이 출판되기도 전이었고, 이후에는 다른 일들에 묻혀 잊고 지내다가 3월이 되어서야 푸시킨의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시를 통해 예측했던 사랑 이야기를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러시아 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본래 이 작품은 <벨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5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출간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벨킨'이란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으로, 푸시킨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새로운 '산문' 형식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푸시킨은 벨킨이 보낸 원고를 자신이 출판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도전에 관해 가졌던 두려움과는 달리,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적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눈보라>에 담겨있다.

푸시킨의 소설집 <눈보라>는 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의 삶에 관심을 두었던 작가답다. 그는 역참지기나 장의사처럼 지위가 낮고, 세상의 변두리에 위치한 사람들을 소재로 삼는다. 패배감과 열등감에 휩싸인 이들은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삶을 질투하고, 복수하기를 꿈꾸기도 한다. 그들은 단 한 발의 총알로 자아를 부각시키고, 타인의 삶을 종결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 푸시킨은 세상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기꺼이 찬양한다. '농노 아가씨'와 '귀족 아가씨'를 비교하면서, 전자만이 가진 '개성'을 추켜세운다. 이것으로 낮은 자들의 연약함과 부정적인 면모는 상쇄된다.

'운명' 또한 푸시킨의 이번 작품을 읽어내는 키워드다. 소설 <눈보라>와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 젊은 남녀의 사랑은 "협박""슬픈 전조"같은 눈보라가 몰아침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재결합으로 끝맺는 운명적 서사를 그려낸다. 인연과 운명의 영향은 어린 연인들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역참지기>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 집을 떠나간 딸이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존재하는 인연의 끈을 상징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운명의 다리는 푸시킨의 소설 속에서만큼은 견고해 보였다.

푸시킨의 단편소설집 <눈보라>는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짧은 시간 내에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깊고 무거운 소설을 마주하기 전에 피식 웃음이 나는 소설이 필요한 때가 있다면, 이번 작품을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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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호 세대 인문 잡지 한편 1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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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세대'에 관한 글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대부분의 작품이 청년 세대에게만 집중했다. 기성세대와 밀레니엄 세대의 간극을 문제 삼으면서도, 그 원인을 분석하는 글은 드물었다. 이 때문에 기성세대와 밀레니엄 세대 양쪽의 의견을 모두 다루고, '세대'라는 단어 자체를 해체하려는 인문 잡지 '한편'이 반가웠다. 여기에 실린 10편의 글은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들며 세대와 청년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이전과 달리 한국을 넘어서서 베트남과 중국의 청년 문화를 두루 살피려 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게다가 청년을 수동적인 약자의 위치에만 고정시키지 않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의제를 주목한다. 청년 세대의 중심에 '페미니즘'이라는 화두가 있음을 발견하고, '페미니즘 세대'로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박동수, <페미니즘 세대 선언>). 88만 원, 3포 세대 등의 이름으로 항상 무언가를 포기하는 피해자의 위치에 있던 청년들은 비로소 고유의 특질을 획득한다.

청년 세대가 페미니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려는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반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청년들은 세상이 지나치게 여성의 편을 든다고 비난한다. 보통의 경우 이는 공적 결정에 의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생각하는 남성이 반페미니즘을 내세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를 혐오하고, 공격하는 무리 가운데 같은 여성도 적지 않다. 또한 괜히 나섰다가 기존의 권리마저 축소될 상황을 우려하는 여성도 존재한다. 약간의 진보가 여성에게 모든 걸 제공해 주었다고 여기는 젊은 남성과 같은 여성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럽다. 그것이 나와 비슷한 시절을 공유한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슬픔은 극대화된다. 하지만 사람은 본래 자신이 믿는 바를 향해, 개인적인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그들을 혐오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여성 인권 향상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나아가는 이들도 전부 같은 방식으로 저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각각이 존중받고, 때로는 협의를 통해 더 나은 지점을 발견해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청년'이라는 키워드의 부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김선기, <청년팔이의 시대>). '지역주의'를 대신해 '세대'나 '청년'이 정치적 전략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 내의 차이를 묵살하고, '청년'을 강조하다 보면 불평등이 강화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사실 청년을 언급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속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또한, 모든 청년이 약자로서 정치적 혜택의 수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공통의 경험을 토대로 한 세대에서 벗어나 개인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청년 세대가 정치적 이익에 활용되지 않고, 진정으로 도움이 절실한 곳에 손길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 잡지 한편:세대>는 청년 세대의 강점을 짚어내고(고유경, <세대, 기억의 공동체>), 성장을 독려하는 긍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잡지이기도 하다. 동년배뿐 아니라, 윗세대와도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청년 세대의 우울함을 드러내면서도, 저항하기를 멈춘 무력한 청년들에게 영화 <벌새>의 '영지 선생님'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를 자청한다(이나라, <'벌새'와 성장의 딜레마>). 청년들이 기성세대에게 잠식되지 않고 발전하는 방법으로 기후 변화라는 위기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제시된다(정혜선,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 경제 발전을 위한 과거의 혁명으로 야기된 문제를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후대에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막아볼 수는 있다.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환경을 비롯한 다양한 면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할 수 있다. 경쟁의 과열로 지치고 무기력해진 어른이 재생산되는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선순환의 실마리는 상품화에 저항하는 보편 복지를 위한 세대 간 연대에 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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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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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스웨터리치의 <사라진 세계>는 이성과 감성을 균형 있게 조합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2020년이 시작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단언컨대 올해 최고의 소설로 꼽을 수 있다. 567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톰 스웨터리치가 그려낸 세계에 빨려 들었고, 꿈에서마저 소설 속 장면들을 떠올렸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인류 종말을 <사라진 세계>에서 목격한 나는, 공포에 자주 압도되었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섀넌 모스'의 의지에 감탄하며 책을 놓지 못했다. 생생하고 강렬한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결합한 이 작품은 SF 소설 팬들을 넘어서서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독자의 마음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공포'는 <사라진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다.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과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이성을 잃었다. 소설 밖에서 나는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실질적인 위협을 느꼈을 때 침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렇게 감정에 짓눌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면,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서도, 두려움과 공포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일데크루거'는 끔찍한 미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감정에 휘둘려 나약해진 사람들을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정당화하는 일에 쓰는 것이다.

한편으로 공포를 극복해내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수사관 '섀넌 모스'와 '리브라 호'의 '레마크'를 비롯한 몇몇 선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안위를 중요시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음을 감내하려는 그들은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급박한 위기 속에서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는 결정 속에 개인적인 삶에 대한 욕심은 저만치 물러난다. 여기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개인이 당연하게 희생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내가 죽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까. 개인의 욕구와 도의적인 책임이 상충할 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죽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면, 세상을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을 회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작품 속 '섀넌 모스'와 '레마크'가 더욱 빛을 발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섀넌과 레마크를 비롯한 선원들이 했던 희생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 인류가 미래의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시간 여행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래 세계를 탐험하는 대신 그들은 현재를 누릴 기회를 잃었다. 인류의 발전은 소수의 희생을 동력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사라진 세계>에는 시간 여행의 기술이 발달한 세상이 등장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도 부정적인 단면이 존재했다. 미래에 오히려 더 극심해진 빈부 격차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상이 멸망할 때 지구를 탈출하는 우주선에 탑승하는 인원이 전부 '혈연'에 따라 선발된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서러워지기도 했다. 인류 멸망은 내가 자초한 시나리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는 것은 늘 약자라는 사실이 억울하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발달해도, 뒤바뀔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사라진 세계>는 보여준다. 현재에도 풀지 못한 사회적 문제들과 이미 지나버린 과거. 그것들을 떠올리며, 인간으로서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이와 다르게 '섀넌 모스'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인간의 의지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섀넌은 모두가 낙담하고 포기해버렸을 때에도 초심을 되새기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되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코앞에 닥친 종말을 물리치기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짜내는 그녀를 보면서 드라마 <도깨비> 속 대사를 떠올렸다 : '인간의 의지로 뚫지 못하는 문이 없구나(의지였는지, 절박함이었는지, 대사가 명확하게 떠오르지를 않는다)'. 인류의 종말이라는 게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의 최후가 찾아와서 얼마만큼 잔인하게 세상을 뭉개버릴지 알 수 없지만, 섀넌 모스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허구에 불과하고, 곧 끝나버릴지라도,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금을 살아야겠다. 마치 지금 내가 가진 세상이 전부이고, 끝도 없이 영원할 것처럼.

그녀의 일생이란 1997년의 여러 상황이 만들어 내는 한 가지 가능성에 불과했으므로(...) 그녀는 아주 작은 존재 가능성에 기댄, 마치 유령 같은 존재였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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