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1 - 특별합본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민중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해 내는 황석영 작가의 장길산 특별 합본호, 이번 작품의 인물들은 또 어떤 생명력을 보여주고, 또 그 안에서 저는 어떤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될 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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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정은의 소설 중 『디디의 우산』이 큰 주목을 받던 때였다. 그것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다짐한 지 오래였는데 나는 끝끝내 그 작품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같은 작가의 신작 『연년세세』가 출간되었을 때 이번에야말로, 하고는 책을 사다가 두었다. 재작년 봄 『연년세세』에 수록된 작품 중 「파묘」를 《창작과비평》을 통해 읽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다만 ‘한세진‘의 시각에서 ‘이순일‘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모녀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묘」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는 애정과 증오, 그 어느 쪽으로도 뚜렷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상 안에 상대를 옭아매어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관계에 놓여 있다. 「파묘」에서 『연년세세』로, ‘한세진‘에서 ‘한영진‘을 거쳐 ‘이순일‘, 또 ‘한세진‘과 ‘제이미‘로 이야기가 확장되고 증폭되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명확한 귀결이 아니다. 모녀 관계를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듯이 우리는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그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또 얼마나 쉬운지를 깨달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연년세세』가 ‘엄마‘, 다만 ‘엄마‘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다.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44쪽, 「파묘」

‘엄마‘, 그녀들의 이름은 ‘순자‘였다. 그건 어디에나 있는 이름이었고,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는 곳에서 줄곧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노동을 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그녀들에게도 꿈이란 것이 있다면, 그건 잘 사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가사노동 속에서 하루하루를 잃어버리며 살아온 탓에 잘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지도 못하면서 그녀들은 그런 꿈을 꾸었다. 자신이 겪은 징글징글한 삶을 아이들이 소설 속 이야기로도 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안락함과 그로부터 솟아 나오는 세상을 향한 인내심은 ˝이순일의 노동˝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자식들을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라고 가르치려는 엄마를 딸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어김없이 같은 성별을 지닌 딸에게만 적용되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한세진‘과 ‘한영진‘, 그리고 지금 여기의 딸들은 ‘이순일‘이 건넨 ˝파편˝을 건네받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쓴다. ‘엄마‘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하면서도 끝내 그 파편을 손에 쥐고야 마는 때도 있다. ‘엄마‘라는 사람을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딸‘ 밖에 없으니까, 자신의 모어를 경멸 속에 방치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으니까. 다시 말해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또 ˝사랑하면서˝ 우리는 그녀들의 딸이자 또 한 명의 엄마로서 살아간다. 내 엄마의 삶을 목격하고, 때로는 살기 위해 그에 대한 분노를 망각하면서 다가오는 파도를 맞는다. 도저히 엄마를, 그녀가 준 세상을 용서할 수 없는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들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던 비결을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아프면서도 적확하게 내 삶을 꿰뚫는 이 말을 순순히 인정한 채로 나아간다.

그녀가 어느 이름을 가지고 있든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버겁다.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의 틈에서 그런 목격들은 지치지도 않고 살아나 기억에 남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마와의 관계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의 한숨, 푸념, 사소한 이야기 등 온갖 것들에서 나는 피로를 느낀다. 더 늦기 전에 내 삶을 살아야겠다고 엄마로부터 분리되려는 노력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건 내 이야기가 될 수 없고, 엄마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엄마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내게 들러붙어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나 자신의 모어를 내버려 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모어로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어야 한다. 노동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오면서 정작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를 놓쳐 버린 그들을 대신해 발언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에 휩싸인다. 그 과정 속에서 적절하게 기대하고 실망하면서 다가오는 삶을 묵묵히 걸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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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을 서술하고 있는 소설 『스토너』는 출간 이후 많은 독자에게서 ‘인생 책‘으로 꼽혀 왔다. 혹자는 솔직히 좀 지루한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극명한 차이는 삶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삶은 언제나 동어 반복의 연속이다. 주어로서의 나 자신은 물론이고, 주요 성분인 동사와 목적어까지 전부 어떤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밥을 먹고, 나는 일을 한다. 이토록 권태로운 삶이지만 누군가는 그 속에서 어떤 번뜩이는 순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스토너』가 ‘인생 책‘이 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제쳐놓고, 그렇다면 나는 어땠는가. 무한히 반복되고 침묵하는 일상 속에서 갑작스레 열정이 솟아나는 그의 인생을 사랑했다. 물론 그의 마지막까지 동행했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생겨났겠지만, 나는 죽음 이전에도 그의 삶을 애정 했다. ‘스토너‘에게 그랬듯이 대학은 나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곳이었고, 문학은 언제나 내가 세상을 더 깊고 생생하게 감각하도록 돕는 도구였다.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삶을 인내하며 나아가는 ‘윌리엄 스토너‘의 일대기는 시시하지만 그래서 더 두렵기도 하다. 책을 읽어 나갈수록 그의 권태로운 삶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이 소멸하는 순간 나는 코앞에 죽음을 마주한 사람처럼 마음이 저릿해진다. 기계처럼 일을 하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고, 또 이를 해소할 시간마저 잃어버린 코로나 시대의 독자에게 『스토너』는 ‘인생 책‘이 자 우리의 인생을 대변하는 ‘인생의 책‘이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385쪽

몇몇 순간들을 제외하면 ‘스토너‘는 삶을 살았다기보다는 참을성 있게 견뎌내는 편에 가까웠다. 어떤 것에서도 제대로 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분열된 마음과 함께 살았던 건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과해야 했던 시대적인 배경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들이 스러져 갔고, 불안정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정신 또한 서서히 힘을 잃었다. ‘이디스‘와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동료 교수 ‘로맥스‘의 끈질긴 괴롭힘, 그리고 수많은 파괴와 죽음을 양산해 낸 두 번의 전쟁 속에서도 ‘스토너‘가 삶을 끝내 긍정할 수 있었던 건 ‘문학‘과 ‘케서린 드리스콜‘ 덕분이었다. 그는 ‘문학‘과 ‘케서린‘이라는 돌파구를 통해 삶을 비로소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신경한 결계를 깨부수며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기회가 없었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스토너‘는 자신의 삶에 어떠한 열정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그럭저럭 보통의 삶이 죽음 앞에서 또렷해지고, 그제서야 간절해진다. ‘스토너‘는 죽어가는 찰나의 순간에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스토너‘에게 ‘문학‘이자 ‘케서린‘이었던 무엇을 평생에 걸쳐 기다린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삶을 통과해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 생의 끝에서야 재조명되고 애틋해진다. 기대수명이 칠십몇 세 정도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 삶의 절반도 살지 않았다. 하지만 ‘스토너‘가 내게 ‘기대‘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나는 울컥하고야 만다. 이미 모든 ‘기대‘를 품을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처럼 어쩐지 삶에 조금은 절박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

250쪽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책의 말미에서 ˝우리는 모두 속절없는 0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말은 삶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상에서 이를 알아채는 일은 드물다.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는 듯한 삶에 대한 권태로움은 영영 끝을 모르고 이어질 것만 같다. 오늘 『스토너』를 읽고서야 이런 지겨움도 언젠가는 툭, 소리도 없이 끊어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는 그런 삶에 무엇을 기대했나.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것저것을 쓰다가 결국에는 지우개 자국으로 더러워진 종이만을 남겼다. ‘0‘으로 졸아든 언젠가의 나를 생각하니 무엇을 적어도 부족한 느낌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삶‘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 제대로 시작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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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몽 3 - 춘몽의 결結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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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푹빠져 지내는 한국 소설이라는 점에 마음이 훅 끌렸다. 이토록 세련되고 환상적인 19세기 소설과의 만남이라니 기대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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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몽 2 - 혼탁의 장場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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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푹빠져 지내는 한국 소설이라는 점에 마음이 훅 끌렸다. 이토록 세련되고 환상적인 19세기 소설과의 만남이라니 기대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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