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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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는 감정 과잉과 열망이 엉킨 소란한 시기다. 많은 젊은이에게 슬픔은 죽음과 맞닿은 듯한 슬픔이며, 걱정과 불안이 고약하게 활개를 치는 시기이다. 고래떼 같은 격정이 몰려오거나 침대를 휘감고 사라지는 파도 앞에서 젊은이들은 슬픔의 먹이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p180)"

박연준 시인의 <소란>은 내가 지나고 있는 청춘의 시기와 꼭 닮아있다. 온갖 감정들에 격하게 반응하느라 소란스러우면서도, 또 가장 나다운 시기로 '밑알'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란>을 읽으면서 집 옥상에 올라가 앉아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흥얼거리면서). 6년 정도 살면서 한 번도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옥상을 작년에 이르러서야 올라가 보았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던 풍경과 적당한 햇살을 나는 늘 잊지 못한다.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주던 그 순간을 <소란>은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이 책은 봄바람처럼 가벼워서 좋았다. 또, 너무 가볍지만은 않아서 여러 생각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마음 한구석에 일어나는 조그마한 소란이 어쩐지 싫지만은 않다. 읽으면서 아주 여러 번 누구에게 이 책을 건네 기분 좋은 소란을 일으키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나의 소란을 닮아 있으면서도, 타인의 그것마저 품으려는 작품을 어느 누구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부터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거겠죠.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었고,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찢어 없앴고,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즐거웠습니다(p33)"

나름대로의 소란스러운 시기를 지나 지금은 어느 정도 침착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다. 미리 두려워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여전히 미리 걱정하며 무척 시끌벅적하게 하루하루를 쌓아간다.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라는 꼭지에 실린 시인의 말처럼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내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하던 때도 있었다. 왜 감정적인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지, 나 자신을 억누르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젠 지나치게 애를 쓰던 단계를 넘어섰다. 또다시 일어난 소란을 웃으며 넘길 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삶 속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소란스럽게 감각할 필요성도 발견해 냈다. 타인의 시선에서 여전히 어리고, 부족하기만 한 시절을 지나고 있지만, 나는 내가 가진 소란을 긍정한다. 언젠가는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내가 다시 한번 되돌아오고 싶을 '이십 대'라는 '소란'을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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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락 UNLOCK - 내 안의 가능성을 깨우는 6가지 법칙
조 볼러 지음, 이경식 옮김 / 다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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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도전이 거듭되는 동안 나는 자주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했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내 수준을 깨닫고 지레 겁먹어 그만둔 경우가 허다했다. 상대의 긍정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 채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나의 시도를 큰 문제로 여기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직장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한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스스로와의 싸움을 시작할 필요성을 발견했다. 나는 비난에서 개선할 여지를 찾아내고, 시련을 기회로 볼 줄 아는 시각을 획득하기 위해 <언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에 담긴 다른 위축된 자아들과 그들의 극복 경험을 마주하면서 의지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되찾았다'라는 동사를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보다 순간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락>을 읽고서야 비로소 온갖 수단을 동원해 지금의 위기와 진짜 싸워볼 힘을 낼 수 있었다. 기꺼이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협력할 준비가 이제는 되었다. 책 한 권으로 삶을 뒤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언제 겪어도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의 저자인 조 볼러는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신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아이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부모와 교사, 그리고 개인이라는 두 방향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할 만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오랜 연구와 실제 인터뷰를 통해 검증된 이 방법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기적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인정하고, 여러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언락' 기술은 한국 학생에게도 어려운 도전 과제인 '수학' 과목을 통해 설명된다. 미국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수학이나 과학 등의 과목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처럼 여겨졌고, 평소의 삶에서 활용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보통 사람들에게서 등한시되어 왔다. 저자는 수학을 비롯한 어떤 분야에서도 자신에게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실수하며 나아갈 것을 권유한다. 개인적으로 수포자 중 한 명으로서 머리를 싸맨다고 어려운 난이도의 수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만, 내가 만약 어릴 때부터 조 볼러의 방식대로 차분하게 문제를 다각도로 해결해 나갈 기회를 제공받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의 격려에 고무된 나는 수포자가 된 나의 삶이 안타까웠고, 실제로 수학 문제집을 구매할 고민까지 어느새 하고 있었다. <언락>을 읽다 보면 이렇게 지금까지 포기해 버린 시간이 아까워지고, 다시 한번 배움에 대한 의욕이 솟아오른다.


<언락>에 등장하는 예시들 중 학습 수준에 따라 반을 나누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을 차단한다는 부분이 놀라웠고,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의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분반 수업이 시작되었고, 경쟁심이 심했던 나는 해당 교육 시스템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수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분명 옳은 면이 있다. 이 또한 발전주의 국가에서 효율을 중시한 결과다. 선택과 집중의 방식을 통해 아이들을 관리해 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업의 평준화가 성적 향상을 위한 동기부여에 실패할 가능성은 없는지 우려스럽다.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교육 방식이 한국에 통할지도 좀 의문이다. 물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지만, 즉각적으로 많은 양의 결과물을 생산해 내기 어려우므로, 부모가 교사의 방식을 인내심 있게 지켜볼지가 미지수다. <언락>에서는 개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으나, 사회적인 인식과 거대한 교육 시스템 자체가 불변한다면, 개인적인 노력이 물거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회 전체가 조 볼러의 방식에 따른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행동해 나가는 데 동의한다면, 분명 한국 사회에 유의미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부작용이 넘쳐나던 성과주의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성장 마인드셋'을 강조하는 <언락>은 현대인의 필독서로 자리 잡아야만 한다.

만약 이것(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잘못된 믿음이고, 실은 누구나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얼마든지 전문 분야를 바꿀 수 있고, 새로운 방향으로 역량을 개발할 수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고 이를 평생 이어갈 수 있다면? 매일 뇌가 성장할 수 있다면?- P8

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대신 자기에게 도움이 될 생각을 찾아 나섰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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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하는 여자들
대니엘 래저린 지음, 김지현 옮김 / 미디어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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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이 책에 사로잡혔다. '반박'이라는 단어에 담긴 반항기가 작품을 읽도록 부추겼다. 반박과 여자들이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늘 본래의 질서에 반항하는 무리를 존경했다. 마음에 찬 분노와 달리 대열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늘 깨어있고, 반박할 줄 아는 한 명의 여성이자 더 나아가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고자 했다. 책의 제목으로부터 나는 전사와도 같은 여성들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보이는 무미건조한 평범함과 공감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처럼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를 발견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너무 들어 그만두었다. 책을 읽는 데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기도 했다. 무조건 깊이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이 책에서 멀어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으면서 상대가 공격도 하기 전에 이미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친절함에 나는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지고야 말았다. 나는 여성들을 너무 피해자와 반박하는 이의 입장에 고정시켜 놓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반박하는 여자들>을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모든 부담감을 내려놓고 가볍게 책장을 넘기라고 조언하고 싶다. 책장이 무척 술술 넘어가는 재밌는 책인 건 확실하니까.

<반박하는 여자들> 속 작품을 읽다 보면 여성은 비교적 흔하게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상대를 유혹하려는 것으로 해석되고, 그 때문에 비난받는다. 서슴없이 여자의 몸을 만지는 남자들을 생각해보면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은 성적인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이외에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 별다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것처럼 작가는 묘사한다. 또한, 작품 속 여성들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타인이 내린 결정에 휩쓸려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자가 없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들은 그저 타인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 세상에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눈앞에 떠다니는 누군가의 유령을 조용히 떨쳐내는 여자들에게서 나는 씁쓸함을 감각한다. 사진을 찍는 일처럼(<내가 사랑하지 않은 파리의 미국 남자들>)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고,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 텐데. 한편으로는 나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으리란 생각도 든다. 즉, 화장실에 갑자기 쳐들어와 내 목에 키스한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날리기보다 침묵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쪽이었으리란 것이다.

작가 대니엘 래저린의 작품 속에서 여자들은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려고 한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해 애초에 감정에 지나치게 빨려 드는 것을 경계한다. 상실의 상처를 입기 전에 헤어지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수동적이고,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상대와 개선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감정적인 모습을 미리 제지하는 것이다. <반박하는 여자들>의 여자들은 상실의 고통을 두려워하며 처음부터 원하기를 거부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기울인다. 여러 작품에서 이러한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남녀 관계뿐 아니라 숱한 인간관계에서 지쳐 독립되고 외로운 개체가 되려는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감정적인 시련을 덜어낼 수 있으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외로워야 하고, 또다시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니 <반박하는 여자들>에는 관계로 인해 감지되는 비좁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애정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사람들은 바란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내 변덕에 따라 애정과 자유가 적절하게 주어질 수 있을 리는 없다. 각자가 나름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도, 어긋나는 지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국엔 어느 때든 상대의 마음을 소중히 할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이 여성을 옹호하고, 세상에 반박하려는 책일 거라고 예측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사람 간의 관계를 고찰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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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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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스웨터리치의 <사라진 세계>는 이성과 감성을 균형 있게 조합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2020년이 시작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단언컨대 올해 최고의 소설로 꼽을 수 있다. 567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톰 스웨터리치가 그려낸 세계에 빨려 들었고, 꿈에서마저 소설 속 장면들을 떠올렸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인류 종말을 <사라진 세계>에서 목격한 나는, 공포에 자주 압도되었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섀넌 모스'의 의지에 감탄하며 책을 놓지 못했다. 생생하고 강렬한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결합한 이 작품은 SF 소설 팬들을 넘어서서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독자의 마음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공포'는 <사라진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다.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과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이성을 잃었다. 소설 밖에서 나는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실질적인 위협을 느꼈을 때 침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렇게 감정에 짓눌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면,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서도, 두려움과 공포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일데크루거'는 끔찍한 미래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감정에 휘둘려 나약해진 사람들을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정당화하는 일에 쓰는 것이다.

한편으로 공포를 극복해내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수사관 '섀넌 모스'와 '리브라 호'의 '레마크'를 비롯한 몇몇 선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안위를 중요시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음을 감내하려는 그들은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급박한 위기 속에서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는 결정 속에 개인적인 삶에 대한 욕심은 저만치 물러난다. 여기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개인이 당연하게 희생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내가 죽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까. 개인의 욕구와 도의적인 책임이 상충할 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죽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면, 세상을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을 회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작품 속 '섀넌 모스'와 '레마크'가 더욱 빛을 발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섀넌과 레마크를 비롯한 선원들이 했던 희생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 인류가 미래의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시간 여행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래 세계를 탐험하는 대신 그들은 현재를 누릴 기회를 잃었다. 인류의 발전은 소수의 희생을 동력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사라진 세계>에는 시간 여행의 기술이 발달한 세상이 등장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도 부정적인 단면이 존재했다. 미래에 오히려 더 극심해진 빈부 격차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상이 멸망할 때 지구를 탈출하는 우주선에 탑승하는 인원이 전부 '혈연'에 따라 선발된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서러워지기도 했다. 인류 멸망은 내가 자초한 시나리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는 것은 늘 약자라는 사실이 억울하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발달해도, 뒤바뀔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사라진 세계>는 보여준다. 현재에도 풀지 못한 사회적 문제들과 이미 지나버린 과거. 그것들을 떠올리며, 인간으로서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이와 다르게 '섀넌 모스'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인간의 의지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섀넌은 모두가 낙담하고 포기해버렸을 때에도 초심을 되새기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되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코앞에 닥친 종말을 물리치기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짜내는 그녀를 보면서 드라마 <도깨비> 속 대사를 떠올렸다 : '인간의 의지로 뚫지 못하는 문이 없구나(의지였는지, 절박함이었는지, 대사가 명확하게 떠오르지를 않는다)'. 인류의 종말이라는 게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의 최후가 찾아와서 얼마만큼 잔인하게 세상을 뭉개버릴지 알 수 없지만, 섀넌 모스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허구에 불과하고, 곧 끝나버릴지라도,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금을 살아야겠다. 마치 지금 내가 가진 세상이 전부이고, 끝도 없이 영원할 것처럼.

그녀의 일생이란 1997년의 여러 상황이 만들어 내는 한 가지 가능성에 불과했으므로(...) 그녀는 아주 작은 존재 가능성에 기댄, 마치 유령 같은 존재였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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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수리 집수리 - 집을 수리하고 삶을 수리하는 건축가 김재관의 집과 사람 이야기
김재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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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고치며, 마음도 고칩니다>에서 정재은 작가가 누군가에게 부탁해 지은 집에서 살아가는 입장이었다면, 그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 있을 테다. 딱 그 상황에 맞는 집 수리업자의 책이 마침 내게 있었다. 영화 <집 이야기>를 관람한 후 영화사에서 선물 받은 책이다. 세 작품 전부 집이라는 공간에 사람과 삶의 이야기가 새겨진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존재했다. 영화 <집 이야기>에서 집을 수리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영화 리뷰 이벤트에 굳이 해당 책이 선물로 주어졌을까. 그러다 문득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 "낡음을 증명함으로써 아파트와의 교환 수단이 되면서 집 수리라는 말도 함께 사라져갔다". 영화 <집 이야기>에는 아버지가 머무는 아주 오래된 집이 나온다. 가족들이 모두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오래도록 한자리에 있는 아버지는 집 그 자체다. 낡음을 유지하는 사람과 낡음을 새것과 교환하지 않으려는 사람(책 <수리수리 집 수리>의 김재관 건축가)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익숙함을 애정 하는 그들이 좋았다.

어릴 적에 살던 동네가 빈틈없이 새 아파트와 교환되었다. 같은 동네에 오래 살았던 나도 알지 못하는 길들이 이쪽저쪽 생겼다. 밤중에 불이 빼곡히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비행 준비를 마친 우주선을 보는 것만 같다. 낮은 벽돌 담장으로 가득하던 동네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고, 내 동네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엇비슷한 주택에 살면서 고만고만하던 친구들도 온데간데없다. 변해버린 동네를 바라보며 내뱉던 짧은 탄식은 어느 날 큰 충격으로 확장되었다. 건물이 세워지기 전 비어있는 땅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또 하나의 추억이 저버리는구나, 나는 이제 되짚으며 돌아올 곳이 없구나, 하면서 바라보던 순간의 상실감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 그래서 과거를 함부로 내다 버리지 않는 두 작품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책 <수리수리 집수리>를 읽는 건 내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도배공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셨다. 이 책에서 김재관 건축가가 집을 수리하면서 만난 인부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도배공에 대한 것도 딱 한 번 초반에 등장한다. 여러 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갑고 아버지가 일하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집을 이사할 때마다 벽지에 풀을 바르는 아버지는 여러 번 보았지만, 일터에 간 기억은 거의 없다. 심부름으로 찾아가도, 주변을 맴돌면서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과묵한 편이어서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책을 읽으며 아버지가 일하고, 또 다른 업자와 협력하는 모습을 얼추 그려볼 수 있었다. 영화나 책을 통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헤아리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김재관 건축가의 묘사처럼 인부들은 대개의 경우 배움이 짧다. 또 경력이 오래된 탓에 실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컨트롤하기가 어렵다. 일만 잘하면, 현장에서 이런 단점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한 우물만 판 덕에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고, 현장의 다른 업무도 조금씩은 할 줄 안다. 우리 아버지도 집의 간단한 수리나 보수 일은 직접 해결하셨다. 그래서 어릴 때는 집에 문제가 터졌을 때, 친구들이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아저씨'를 부른다고 해서 당황한 적도 있다. 갑작스러운 고장도 상관없고, 적지 않은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를 나는 나이가 좀 들어서야 알아차렸다.

<수리수리 집수리>를 통해 집은 사람의 역사가 담긴다는 말을 절감했다. '사람'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김재관 건축가와 같은 집 수리업자와 인부들, 근처 주민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집에 머무르고, 매만지면서, 혹은 공간을 두고 싸움을 벌이면서 각자만의 역사를 기록해 두었다. 나는 지금 사는 이곳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집이 가진 과거와 또 전혀 다른 모습의 미래를 즐겁게 상상해본다.

 

집수리에서 기존의 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새로운 쓸모‘를 찾는 실용적 행위이며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문법적 해결이기도 하다. 단순히 미학적 필요에 따라 낡은 것과 새것의 물성을 대비시키려는 건축적 수법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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