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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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상 너머로 아름다움과 영광이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해도 그것이 진실이었다. (378쪽)

'양진'으로부터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재일조선인 4대의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렀다. 4대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인간은 고통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시작은 가난이었고, '파친코' 사업으로 우뚝 솟아오르자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들을 괴롭혔다. 이제까지 '노아'와 '모자수'를 주축으로 '재일조선인'들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슬픔을 중점적으로 드러냈다면, 2권에서는 일본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들이 등장하면서 인간이 짊어진 고통의 범위는 확대된다. 여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우리 삶의 기본값이 고통이라는 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 읽어나갈수록 인간으로서 고통으로부터 분리된 인생을 획득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인간을 '희생자'라고 부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런 자기 연민으로부터 빠져나와 삶을 묵묵히 견디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선자'와 그녀의 가족들이 알려 주었다. 그리고 시련 너머에 놓인 일상의 찬란함을 볼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스스로 원하지 않았던 고통 안에서도 한없이 순수하고 다정한 '선자'의 가족들이 보여준 삶은 역사적·사회적 맥락과는 관계없이 반짝거리고 사랑스러웠다. 어떤 순간에도 삶은 끝없이 이어지고,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는 아무런 의문 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도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국적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었다. (118쪽)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노아'와 '모자수'를 어지간히 괴롭혔다. 국적에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만큼 인정받고 싶었던 '노아'의 바램과는 달리 '재일조선인'이라는 꼬리표는 '노아'와 '모자수'를 지겹도록 따라다녔고,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도 모자라 사회적인 표본이 되도록 강요했다. 서울에서는 일본인으로, 일본에서는 조선인으로 이리저리 채이는 '노아' 형제의 이야기는 과거에만 속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의 디아스포라도 자신의 뿌리를 정의 내리는 데 있어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다.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문제보다도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고향이라고 느끼는 삶의 터전에서 살아있는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일본에서 살아온 세월에도 불구하고 '노아'와 '모자수'를 비롯한 재일조선인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좋은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파친코' 사업이었지만, 이 사업에 뛰어들면 '더러운 야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일본인 사업자들보다 정직하게 사업을 운영해도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모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재일조선인 파친코 사업자들은 흔들리는 땅 위에서도 벼랑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삶을 비관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경멸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이 살아남고 또 자식들이 자신에 비해 나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억척스럽게 삶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가족을 위하는 마음은 더없이 익숙한 모습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곤두박질쳐서 죽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 아시죠?" (374쪽)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않고 삶을 견뎌내는 일에 집중했던 '선자'와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모든 재일조선인의 노력이 응집된 결과가 '솔로몬'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정신적으로 결핍된 삶을 살았던 이전 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같은 삶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로 인해 '솔로몬'은 경제적으로 좀 더 풍족한 삶을 살았고, 다양한 인종이 혼재되어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 삶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자연스레 일본과 일본인을 너무 많이 미워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났고, 자신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이나 타인의 시선은 잠시 접어둔 채로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전 세대가 인간으로 대접받기를 바라기만 했다면, '솔로몬'은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가 스스로를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며,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솔로몬'의 현재와 미래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4대에 걸친 고난의 역사 끝에 우리는 나아가야 할 지점을 짚어낼 수 있었다.

'선자'를 통해 인생은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차렸다. 인생이라는 '파친코' 게임에서 얻어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는 인생의 끝에서 불현듯 우리에게 찾아오는 깨달음이 분명하다. 고통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으면 삶의 끝에서 우리의 인생 저편에 늘 아름답고 반짝이는 순간들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끝에 마주한 뭉클한 순간 때문에 나는 『파친코』가 아주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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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
하세가와 히로시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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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의 『행복론』, '플라톤'의 『향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등은 읽지 않으면 안 될 훌륭한 고전들로 늘 손꼽혀 왔지만, 일반 독자로서는 다른 신간들을 제쳐두고 그 책들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읽지 않고 지나치려고 하니 기초 공사가 부실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참에 '하세가와 히로시'의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본 책을 읽은 만큼은 아니더라도 표면적으로 내세울 만한 깊이감은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책에 기대하는 바였다.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는 '인간', '사색', '사회', '신앙', 그리고 '아름다움'을 주제로 각 3권의 고전을 소개하고 있다. 제목에는 '철학의 명저'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개중에는 '리어 왕'과 같은 문학도 포함되어 있다.

세상에 널리 퍼진 책은 특정한 입장이나 특정한 사상신조를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널리 크게 모든 입장과 사상신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열려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58쪽)

총 15권의 책에 관한 에세이를 적으면서 저자는 편향된 사고방식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고전을 극도로 찬양하지 않으면서 본래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소회를 술술 적어 내려간 글이기 때문에 고전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독자가 멈칫 거리는 일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쓰여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저자는 세계에 널리 퍼진 고전이 모든 입장과 사상신조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 사태의 진상에 바짝 다가서는 책들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렇게 쓰인 세계적인 고전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만 할까. 그것은 자신을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개인'으로 자각하는 가운데 어떻게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또한 다른 사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배척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비판하며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물론 글로 적힌 것들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보면 온갖 변수들 때문에 제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고전을 통해 확립된 가치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삶의 기준점이 되어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원문을 읽을 자신이 없다면,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 등으로 일부나마 향유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테다.

'하세가와 히로시'가 소개한 책들 가운데 전체 텍스트를 접해보고 싶은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하던 작품들을 지금 당장 읽고 싶어진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루소'나 '도스토옙스키'의 책들을 섭렵하는 날이 오면, 저자인 '하세가와 히로시'가 짚어준 포인트들을 확인해 나가면서 좀 더 쉽게 글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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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 나씽 - 북아일랜드의 살인의 추억
패트릭 라든 키프 지음, 지은현 옮김 / 꾸리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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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 나씽』은 '북아일랜드'의 "분쟁"과 그 주역이었던 급진파 'IRA'의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기반으로 '북아일랜드'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려는 시도다. '브렉시트' 이후로 '북아일랜드'의 내부 갈등은 재점화되었으며, 또한 서로 다른 이상에 갇힌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모습은 우리와 닮아 있기도 하므로 현대의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더없이 크다. 분할된 역사를 가진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고 해도, 목숨을 걸고 역사적 사실에 관해 진술하려는 사람들을 외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미친 삶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평화와 자유, 희망을 되찾는듯했던 '북아일랜드'가 다시 맞닥뜨린 혼란 속에서 과연 이전처럼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동반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면서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그건 단지 '북아일랜드'만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는 '평행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게 다 역겹소. 그것은 나와 같은 사람이… 그 모든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오.(316쪽)


'북아일랜드' 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IRA'에게 '진 맥콘빌'이라는 여성이 납치된다. 평화롭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실종 사건이 『세이 나씽』의 시발점이다. 'IRA'의 상징과도 같았던 '프라이스' 자매가 처음부터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점잖고 평범했던 사람들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휘말려 급기야 'IRA'의 총잡이가 되었고, '피의 일요일'을 겪은 이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전술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잘못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분쟁' 동안 무고한 민간인들이 수도 없이 희생되어야만 했다는 것이 'IRA'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다. ' IRA' 때문에 민간인 사상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폭력적인 수단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늘어나면서 '어떤 순간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라는 말은 거의 사실처럼 보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온 생애를 IRA에 바친 사람의 삶이란 게 그랬다. 휴즈는 트워미가 말년을 보내고 있는 열악한 환경을 보면서 문득 운동에 퇴직연금제도는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285쪽)


'IRA'의 폭력성은 북아일랜드의 민간인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지만, 'IRA' 대원 본인들에게도 그랬다. 당시 대원들은 모두 아주 젊었고, 그야말로 애들이었다.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해봤자 29살에 불과했다. "어리고 날씬하고 비밀스러운 데다 독실하면서도 테러에 헌신(209쪽)" 하는 어린 대원들은 '북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이상에 갇혀 스스로를 극도로 괴롭혔고, 투옥과 단식투쟁은 그들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흉터를 남겼다. 그들은 수시로 자신들이 몸 바쳐 온 과거와 "분쟁"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보곤 했다. 그러고는 자문했다: "'이러려고 우리가 목숨을 바쳤나? 도대체 이게 다 뭐지?(339쪽)'" 물론,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죽음들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태초에 그들이 품었던 조국을 향한 열망의 의미는 퇴색했고, 이상에 갉아먹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종말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한국'이나 '아일랜드'의 종교적·이념적 "분쟁"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따져봐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가 "주장했던 이상에 지나칠 정도로 절실하게 헌신하며 살았다(428쪽)".


관광객들에게는 "분쟁 관광"도 인기를 끌었다. 전투원이었던 택시운전사들은 유명한 전투와 순교자들과 무장괴한들이 그려진 벽화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며 관광객들을 그 몹쓸 세월의 화약고로 안내했다. 그 효과는 "분쟁"을 머나먼 역사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431쪽)


'프라이스' 자매, '브렌든 휴즈' 등 이전 급진파 'IRA' 세대는 막을 내렸다. 아일랜드 국기는 이제 그다음 세대에게 넘겨졌다. 누군가는 'IRA'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폭력적인 과거를 미래 세대가 숙고할 수 있도록 아일랜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분쟁"은 관광산업으로서만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과 북한 사이의 긴장감보다도 'DMZ' 관광이 내외국인의 애정을 받고 있듯이 말이다. "분쟁"이 문화 콘텐츠나 산업 자원으로 자리 잡고, 머나먼 역사로 남게 되는 때에 이르자 '아일랜드'와 '대한민국'을 겹쳐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국가 모두에게 가장 큰 과업은 폭력적인 개입을 배제한 채로도 통일된 국가를 이룩해낼 수 있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그리고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에 거주하면서 한 번도 그 일은 쉬워 보인 적이 없었다. 현 세대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숙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조차 예측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미래 세대에 한 편의 범죄 스릴러 영화 같은 글은 남기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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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진자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69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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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텅 빈 비밀을 줌으로써 그들의 욕망을 일깨웠던 것이었다. 우리의 비밀만큼 속이 텅 빈 비밀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짜라는 것만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던 비밀이었으니까.(349쪽)

(하)권에 이르러서 '카소봉'과 '벨보', 그리고 '디오탈레비'는 좀 우쭐해져 있다. 그들은 "성서가 진실이라면 이것도 진실(122쪽)"이라면서, 스스로가 곧 '진실'임을 선언했다. 지금까지는 <성전 기사단>이나 '알리에'의 뒤를 따라가는 듯한 모양새에 불과했지만, 이제 스스로만의 <계획>을 설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악마 연구가>들의 연구를 훑어보면서 쌓아온 경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꽤 흥분에 취해 있는 모양새지만, 제3자인 독자로서 지켜보기엔 어쩐지 불안하다. 지금의 그들은 바퀴 하나가 빠진 채로 엉거주춤 앞으로 나아가는 수레 같다. 하지만 아무도, 심지어는 그들 본인조차도 일의 진전을 막기 어려워 보인다. 이른바 '지구의 배꼽'을 발견하여 신처럼 군림해 보려는 결심은 그들이 가짜 문서를 주도면밀하게 재조작해 어떤 진실에 이르도록 부추긴다. 때로는 자신들의 잘못을 알아차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를테면 무리 중 한 명인 '디오탈레비'가 죽을 위험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다. 한낱 장난으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카소봉'의 <계획>에는 죄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아'가 지적하듯이 그들의 변덕스러운 세계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 번의 가벼운 농담 때문에 '카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는 자신들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카소봉'의 <계획>을 위해서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지식들이 전환되는 장면들은 무척 흥미롭다. 천문학적, 역사적 지식 등은 『푸코의 진자』 안에서 가뿐하게 재해석된다. 분명 사실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안 될 게 뭐야?'하는 의문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카소봉'에 대한 믿음은 오래 이어진 적이 없다. 곳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가벼운 태도로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소봉'에게 <계획>이 번뜩이는 유희였다면, '벨보'에게는 한층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벨보'는 이전에도 누누이 강조했듯이 자신의 용기를 시험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인적인 신념을 끝까지 고집하지 못하고 물러섰던 경험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계획>에 무서우리만치 집착한다. <계획>은 그가 주동적으로 <누가>, <어떻게>, <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였고, 이것이 실재하기만 한다면 그는 더 이상 패배자나 비겁자로 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훗날에 알 수 있었듯이 그는 자신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임을 받아들이고 물러나야만 했다. 바벨탑을 지어 올리던 인간들이 결국은 신이 되지 못했듯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무지를 인정함으로써 살아남을 자격을 얻게 된다. 항상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우리를 어떤 것에도 미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질문은, <암호를 아십니까?>. 대답, 곧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되는 한마디의 암호는 <아니>. 진정한 암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내가 아불라피아의 파일을 통해서 알게 된 것만큼 배울 수 있게 된다.(350쪽)

그러니까 우리가 이때까지 장광설을 참아온 것은 우리의 무지를 깨닫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질문들을 향해 어쭙잖게 아는 척을 하기보다는 <아니>라고 말할 용기를 가져야만 했다. 세상에 우리의 무지와 나약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가 유한한 생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의 존재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다른 것들>이 존재하기 시작할 것이란 점을 인지하는 일이다. <지혜>는 '거룩한 원리'에 있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리아'의 말처럼 태어나고 또 죽어가는 우리의 육체 안('지상의 왕국')에 있었다. 가까이 있던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우리는 그 먼 걸음을 아주 고되게 걸어온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책으로부터 무언가를 뚫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다른 독자들이 번번이 강조하는 것처럼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역자가 만난 미국인의 대답처럼 "코가 꿰이면 읽다가 그만둘 수가 없는 게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하)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는 아, 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감각을 얻어낼 수 있었고, 지적인 책 읽기의 재미를 좀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책 읽기를 또 하겠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래, 물론이지,라고 대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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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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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꿈속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거야.(342쪽)

작가 '이민진'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유산이 매우 힘겨운 투쟁의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이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반드시 알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의 삶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어떤 '고통'에 관하여 쓰겠다는 작가 '이민진'의 결연한 의지만큼이나 소설 『파친코』는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나보다 이전 세대의 일이고, 주 배경 또한 한국이 아닌 일본이지만, '영자'에서 '선자', 그리고 '노아'와 '모자수'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독자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든다. 그들이 우리와 '고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고향'은 "마법사가 외우는, 혹은 영혼이 응답하는 가장 강력한 주문보다 더 강력한 말이다. 이처럼 우리와 강력하게 엮인 '선자'의 가족들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선제 조건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느닷없는 위기가 번번이 찾아오고, 전쟁과 가난은 '선자'와 그녀의 가족들을 끊임없이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비스킷 부스러기' 같은 하잘것없는 일상을 우리는 권태로움으로 인해 종종 무너뜨리고 싶어 했지만, 그 사람들은 고개를 처박고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사소한 일상을 아주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순진한 아이들은 물론이고, 성실한 노동자들을 떠올리면 전쟁과 제국주의는 교과서적인 이론보다도 훨씬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파친코』에서 놀라웠던 것은 작가 '이민진'이 한 민족의 고통과 서러움을 서술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각각의 심리를 생생하고 상세하게 서술하되, 되도록이면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선자'는 영도에서 거주하던 시절에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선자'의 믿음은 안타까울 만큼 순진무구하고 어리석었다. 애달프게 '한수'를 기다리던 '선자'를 생각하면, '선자'를 '현지처'로 만들려던 '한수'의 계획에 우리는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장 어디에서도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감정만이 오롯이 남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한수'에게 화가 나서 씩씩대고 있는데 여기에 맞장구를 쳐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 발짝 물러나 『파친코』의 세계관 전체를 조망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나는 너무 많은 감정 소모를 하지는 않은 채로 책을 읽어 나가면서 캐릭터 하나하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물론 이해나 용서는 별개의 일이지만 말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11쪽)

과거의 고통에 대하여 작가 '이민진'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선자'와 '경희', '요셉', 그리고 '선자'의 아이들은 자기 연민에 몰두하지 않았다. 즉 역사가 자신들의 삶을 얼마나 뭉개버렸는지를 셈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감정에 침잠하면서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리는 대신에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자신에게 몇 푼이 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불평은 잠시 접어두고, 좀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그들은 주저 없이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한 쪽에서는 추상적인 이념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었지만, '선자'와 가족들에게는 살아남는 일이 급선무였다. 어째서 그들은 조국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일과 거리를 두는지 의문스러울 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죄로 끌려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워진 '이삭'과 교회 사람들을 떠올리면, 일단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게 최우선 과제라는 '요셉'의 말이 옳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잃을 만한 것이 많은 나이가 될수록 이전 세대의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주변의 사상을 내 머릿속에 그대로 옮겨 심고, 필요한 때가 되면 그저 따라서 외치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적진을 파고들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실제적인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때가 오면 이제껏 해오던 상상과는 달리 정말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얌체 같던 어른들의 얼굴을 내가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양가적인 감정이 내가 이전 세대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도록 막아선다.

경희는 선자가 막 오사카에 도착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그때 선자는 너무도 무력해 보였고 혹시 길을 잃기라도 할까 봐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다니게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선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든든한 사람으로 보였다.(214쪽)

소설 『파친코』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도' 밖을 벗어나 본 일이 없는 '선자'는 '오사카'라는 대도시로 와서 '요셉'의 아내인 '경희'를 만났다. 그녀들은 꾸준하고 착실하게 돌봄 노동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시절에는 밖으로 나가 사회에서 일 인분의 몫을 제대로 해냈다. '경희'와 '선자' 이외에 '선자'의 어머니인 '양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하숙을 치면서 남편 '훈'의 빈자리를 거뜬히 메우며 '선자'를 올바르게 키웠다. 『파친코』 속 여성들은 전쟁을 버텨낸 까닭에 강인하고 독립적이었으며, 하나의 팀으로 일하면서 강력한 시너지를 내었다.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또 꿋꿋하게 밀고 나아가는 '경희', '선자', 그리고 '양진' 등의 여성들은 『파친코』의 세계관을 이루는 주축이다. 이제껏 1권만을 읽었을 뿐이고, 나는 그녀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외유내강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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