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 ‘정상’ 권력을 부수는 글쓰기에 대하여
이라영 지음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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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부당함을 포착하고, 맞서 싸우는 작가 '이라영'의

다시 기억하고, 다시 이야기하는 글쓰기



그놈의 ‘I’ 좀 집어치울 수 없어? 당신이 대체 뭔데?(103쪽)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의 저자 '이라영'은 다양한 작품에서 일상적인 차별과 불공정, 그리고 폭력 등을 다루며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글쓰기를 선보여 왔다. 예리한 시선으로 지금 여기의 '정상성'에 질문을 던지고, 그 민낯을 까발리는 데 힘써온 저자의 독서 에세이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작품의 생산자로서의 여성과 이를 소비하는 독자로서의 여성을 잇는 '북우먼'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저자는 현 지배 질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애니 프루'부터 '옥타비아 버틀러'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서 여성들은 성별이나 인종에 구애받지 않으며, 누군가의 아내나 애인이라는 수식어를 벗어던지고, 오롯이 한 명의 개인으로서 또렷하게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식상하고, 이제 그만했으면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정상적인' 지배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기억하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저자 '이라영'이 더없이 반갑다. 과거를 뒤집어 놓아야만 그 위에 새로 쓰인 이야기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권력 질서 안에서 여성은 종종 피해자가 되었고, 그중 몇몇은 삶의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저자 '이라영'의 에세이는 여성의 소수자성과 피해자로서의 자아에 매몰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생존자의 언어"에 주목한다. 타인의 입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진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생존자의 언어'는 "압제자의 언어(69쪽)"를 부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살아남은 여성들이 전면에 나서 자신들의 고통을 '증언'하기를 바란다. 작가 '콜레트'의 말처럼 "역사를 쓰는 자는 펜을 쥔 자다." 일례로, 작가 '박완서'는 한국전쟁의 참담함을 목격하고 이를 꼭 글로 옮기고자 했고, 이에 성공했다. 그리고 21세기의 나는 작가 '박완서'의 눈으로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마치 내 과거인 것처럼 되새긴다. 그러니까 온갖 수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여성들의 증언이 기록되어 여성들의 삶이 '탈락한 역사'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탈락한 역사를 끄집어내는 일.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341쪽)"


"내게 속하는 것은 그대에게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

덴버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상속받아 엄마의 젖(잉크)으로 죽은 자매의 피를 생각하며 제 이야기를 쓸 것이다. 덴버는 바로 ‘피젖’을 먹고 자란 수많은 살아남은 여성들을 상징한다.(321쪽)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를 통해 우리가 떠올리는 건 '살아남은 여성들'뿐만이 아니다. 저자 '이라영'이 설정한 세대를 뛰어넘는 '자매애'의 범위는 훨씬 넓다. 그보다는 사회에서 소수자성을 띠고 존재하는 사람들 전체를 아우른다. 갖가지 이유로 사회로부터 배제, 차별, 불공정을 겪어온 소수자들에 주목해 온 저자의 날카로운 글쓰기가 쌓이고 쌓여 이 책 한 권에서 폭발적인 위력을 발하고 있다. 글을 통해 우리는 자신만을 유일한 피해자로 상정하고, 또 다른 약자에게 가해자로 군림하는 태도를 반성할 기회를 획득한다. "내게 속하는 것은 그대에게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 왜냐하면 내게 속하는 모든 원자는 그대에게 속하는 / 것이기도 하니까.(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1>)" '월트 휘트먼'의 시 한 구절은 이 책을 관통하는 최적의 문장이다. 필사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의 기억을 기록함으로써 증언하는 일은 '압제자의 언어'를 지워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기록을 통한 증언'은 또 다른 생존자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리는 행위이고, 들불처럼 번져가는 생존자 집단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일'임을 깨닫게 만드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은 저자의 개인적인 서사와 폭넓은 독서력이 집약되어 있는 에세이다. 글을 읽는 동안 나의 편협한 독서력과 낮은 경험치가 뼈저리게 느껴졌고, 못내 아쉬웠다. 저자의 꿈처럼 나 자신도 '북우먼'으로 거듭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책을 매개체로 다양한 사람들을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이고, 진정한 연대의 힘을 보여줄 날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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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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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상상한 미래는 없다

'마이클 셸런버거',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경종을 울리다

2019년 9월 전 세계 3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48퍼센트가 기후 변화로 인해 인류가 멸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카페에서 음료를 사 먹는 일이 잦아지자 사무실에 텀블러 구매 열풍이 불었다. 퇴근할 때쯤 회사 복도에 놓인 쓰레기통에 가득 차오른 플라스틱 컵은 우리를 심란하게 했다. 동료들은 명목적으로는 환경을 위한다는 이유로 너 나 할 것 없이 책상 위에 텀블러를 올려놓았다. 하루라도 텀블러를 놓고 오면 스스로를 무척 자책하곤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읽기 시작했다. '마이클 셸런버거'의 글은 지금까지 우리가 고수하던 방식에 의문을 품게 만들고,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기후 변화에 있어 팔 할은 인간의 탓으로 여겨져 왔고, 꽤 구체적으로 제시된 인류 종말 시나리오에 맞춰 우리는 다급하게 스스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누군가는 환경보호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했고, 또 누군가는 재활용 브랜드의 물품들을 애용하는 것으로 환경보호에 일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모든 방식을 부정하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독자들이 혼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사나 홍보영상 등을 통해서 표면적으로만 상황을 파악한 채로 어떤 일에 몰두하면서 세상이 나아지도록 돕고 있다고 착각하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던가? 사실 기후 변화는 안중에도 없이 정기적인 기부나 텀블러 사용 등으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주된 목적이었던 것은 아닌가?'마이클 셸런버거'는 종말론적 환경주의뿐만 아니라, 우리가 올바르다고 믿었던 방식 전체에 경종을 울린다.


"환경 보호의 탈을 쓴 새로운 식민주의"

경제 성장과 기후 변화 대응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들이 플라스틱 빨대를 안 쓴다는 걸로 쉽게 면죄부를 얻으려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저자 '마이클 셸런버거'에 따르면 '환경 불안증'은 굉장히 모순적인 심리다. 사람들은 기후 변화로 인해 지구의 종말에 가까워졌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기꺼이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 셸런버거가 보기에 이는 "환경 보호의 탈을 쓴 새로운 식민주의"에 가깝다. 환경 보호를 이유로 더 낮은 계층의, 더 취약한 지역의 성장과 발전을 저지하면서 똑같은 방식을 자신의 국가와 개인적인 삶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기후 변화보다 심각한 문제는 낮은 GDP이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려는 노력이 도리어 환경 파괴의 주범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셸런버거는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새삼 놀랍지 않았다고 느꼈던 이유는 계층 간에도 오르지 못할 사다리가 있고, 계층의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환경 문제에 있어 국가 사이에도 이런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환경 에너지로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저개발 국가가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도록 그들을 회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우리는 극도로 개발된 상태이므로 덜 개발된 지역들에 환경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은 꿈을 품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환경 파괴를 이유로 모든 개발이 저지당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들은 개발을 위해 온갖 땅을 개간하고 숲을 파괴하면서 왜 자신의 국가에서는 모든 시도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기후 종말론은 자승자박일 뿐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과 기대를 품고 나아가다


환경 보호는 지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교의 하나로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신재생 에너지는 낮은 효율에도 불구하고, '환경 양치기'들에 의해 지나치게 신성시되어 왔다. '마이클 셸런버거'는 환경 보호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믿음이 도를 넘어섰다고 지적하면서 종말 위에 새로운 땅이 태어나길 바라는 태도를 벗어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무기력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종말론에 붙들려 있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이전과 달리 우리에겐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과 능력 또한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몇몇 주장은 종말론자들에 의해 과장되었고, "기후 변화가 불러올 모든 영향이 자연환경과 인간 사회에 나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고 '마이클 셸런버거'와 몇몇 과학자들은 덧붙인다. 환경 보호는 진정 환경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도리어 소수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환경 문제에 있어 인간의 입지를 줄이고자 했던 노력들과는 달리, '환경 휴머니즘'을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인간 스스로에게 이로운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자연을 보호하는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지금부터의 환경주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혐오하고 불가능한 도전들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모두를 긍정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이기적이지 않은 '환경 휴머니즘'을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비관적인 환경론자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데이터 이외에도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는 우리의 노력도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확실히 환경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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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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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46쪽)"

'무진'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언제나 있지도 않은 고향의 생각이 자꾸 떠오르곤 하였다. '고향'에 대한 알 수 없는 향수와 동경으로 『무진기행』을 읽게 되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작가 '김승옥'은 도리어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가가 그려낸 '서울'은 삶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파멸과 속임수로의 추락으로 비치기도 한다. 서울이 마냥 삶의 희망으로 여겨지고, 이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열차에 몸을 싣던 때가 있었다. 미국의 그것처럼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울 드림'을 품곤 했던 것이다. 이처럼 희망과 열망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서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씨에는 공간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애매모호한 부사 활용으로 듣는 사람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하고, "차나 한 잔"과 같은 "일종의 추파(189쪽)"가 대화 안에 비일비재하다. 서울로 도달하던 때의 정열적인 초심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여지를 남겨두는 화법과 이루어지지 않을 약속을 주고받는 우리의 문화는 불확실한 서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생존방식이고, 그런 무기력함은 어쩐지 서울에 품고 있던 애초의 욕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서울을 향해 손을 뻗으며 구원과 해방을 바랐지만, 정작 거기에 있었던 건 파멸이었고, 갑작스러운 노화였다. 서울의 이면은 「생명연습」에서 '오 선생'이 말한 '윤리의 위기'가 떠오르게 만든다. '오 선생'은 만화를 그리면서 직선을 그리는 경우에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때로 자를 사용하여 그리곤 했다. 그렇게 그려 놓은 직선 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오 선생'은 독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그건 당신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직선이라는 의사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의 선이다. 당신은 우리를 속이려 하는구나라고.(98쪽)" '자'를 발전의 산물로 설정해 놓고 보니 이 문장이 심상찮게 들린다. 우리는 산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착실하게 근대성을 쌓아 올려 지금의 서울을 얻었지만, 역시 우리 고유의 서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실패했고, 능률과 효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숱한 사람들이 도태되도록 부추기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 버리"는 것이 소위 말하는 "자라난다(120쪽)"의 의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서울이 '직선'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좀 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법을 추구할 때 우리가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겼다면 등을 돌리면 될 일이었다. 우리는 그보다도 '염소'가 죽어서도 힘이 세다는 사실을 차츰 받아들이는 데 그쳤다. 처음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것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을지라도, 자본 등의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나면 금세 본래의 자리에 눌러 앉곤 했다. 그러니까 서울에 대해 반대할 명목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무얼로써 이 공간과 시간을 채우겠다는 거냐?(380쪽)" 하는 물음을 그칠 수가 없다.

그것이 서 씨가 간직하고 있는 자기였고 내가 그와 접촉하면 할수록 빨려 들어갈 수 있었던 깊이였던 모양이었다. (144쪽)

서울에 잠식되기 이전의 대안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모색하는 일을 택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은 '생존 본능'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서울은 제 나름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고 소수의 상관이 내린 지시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데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렸다. 이를 벗어나 스스로의 모습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서울 살이에 피로함을 느끼고, 지금은 서울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귀농의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인 '무진'과 언젠간 그곳에 갈 것이란 강렬한 희망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실제로 거기에 가게 될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무진'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삶을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된다. 이에 대해 「무진기행」 속에서 '아내'는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40쪽)"를 언급하고 있다. 거주자가 아닌 여행자로서 거기에 갔기 때문에 자유를 느끼는 것이며, 새로운 여행지에서 느낀 일탈의 기쁨은 세월이 지나면 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잊힐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무진읍'으로 가기 위해 아득바득 이 책을 손에 쥐었지만, 결국엔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41쪽)"는 팻말을 보았을 뿐이다.

'서울'과 '무진'을 오고 가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쩐지 아무도, 어느 곳도 완전히 틀리고 또 옳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것도 자신 있는 생각은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젊은이가 보았다는 두 가지 생활이, 사실 바로 곁에서 함께 있다고 하면 나도 좀 멍청해져 버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느낌뿐이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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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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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화재 속에서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한 아이가 있다. 예고도 없이 불타오른 아파트로부터 아이가 살아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아이는 함께 집에 있던 언니의 놀라운 기지로 11층에서 내던져져 목숨을 구했다. 어렵게 얻은 목숨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구원한 세상을 아주 많이 미워한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댓가로 얻어낸 생명이므로 그녀는 더 나은 인생을 살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자신을 살려준 세상에게 그녀는 끊임없이 미안해야 하고, 또 고마워해야만 한다. 아이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고 현명한 판단으로 어린 동생을 살린 후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 십칠 세 소녀"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을 실천한 사십 대 가장(45쪽)"의 그림자에 짓눌린 삶을 살았다. 아니, 대신 살아남았으므로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 애, "'원래 계속 자는 애'를 처음으로 깨운 수현(69쪽)"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언니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언니는 나를 업고 다녔다고, 나를 끔찍이 아꼈다고, 나는 엄마보다 언니를 더 따랐다고 한다. 언니는 무엇이든 잘했따고 한다. 언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고들 하는데.(30쪽)"

화재가 일어난 이후로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사건은 꼬리표처럼 '유원'에게 달라붙어 있다. '유원'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일을 모두 알고 있고, 어떤 프레임을 씌운 채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건 때로 삶에 있어 그 누구보다도 노력해야 한다는 강압이기도 하고, 혹은 죽은 언니를 대신해서 살아났다는 데 대한 동정어린 시선이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든 '유원'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언니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은 언니를 칭찬하기 급급했지만, '유원'은 시끄러운 세상에 자신만 살려둔 언니가 밉기만 하다. 언니는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불멸하고, '유원'은 무슨 짓을 해도 언니의 존재를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증거품'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가 없다. 자신들에게도 없는 '희망'이나 '기적', '빛' 같은 단어들을 '유원'에게서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유원'은 스스로가 압축되고 있음을 절감한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트라우마였다. 사람들은 세상일을 모든 잘 잊건만, '유원'에게만큼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잣대를 들이민다.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198쪽)"

세상에 대한 미움과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유원'이 한없이 무거워지고 있던 시기에 '수현'이 나타나고, '유원'의 삶은 일변한다. '수현'은 '유원'이 굳게 닫혀 있다고 믿었던 어떤 문들을 자신만의 마스터키로 쉽게 열어젖힌다. '수현'과 함께하는 '유원'의 삶은 좀 더 세상을 향해 열려있고, 가벼우며 편안하다. 그러니까 결국 '유원'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인해 압박받고 있었고, '수현'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자신을 깨워줄 누군가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수현'은 아주 멀리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유원'이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유원'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은밀한 몸짓으로 '유원'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던 대학생 언니처럼 말이다. '유원'이 '대신' 살아있다는 데서 느끼는 괴로움과 언니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털어놓았다면, '유원'을 둘러싼 세계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여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식은 다르더라도, 다들 어렵게 살아난 '유원'을 깊이 애정하고, 지켜주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너 별로 안 무거웠다. 그냥…… 사람 몸은 원래 약하다. 다 잊어버려라.(201쪽)"

세상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는지도 모른다. 살 만하지 않은 세상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건 결국 우리의 자기연민과 일방적인 미움 때문은 아닐까. 여린 영혼을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미련한 감정들로 자신의 무게를 채워나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짓누르던 감정들을 훌훌 떨쳐내고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복잡하게 세상을 이해하기 보다는 가볍게 던지고 또 가볍게 받아치면서 살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무척 너그러워진 기분이다. 높은 곳에 서려면 그래,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지만, 막상 그곳에 가고 나면 내 두려움이 얼마나 별것 아닌 일이었는지를 알게 되니까, 한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곳을 향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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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재 오늘의 젊은 작가 23
황현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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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행복해지길 바랐기에 그런 이름을 지어 줬을까, (36쪽)


운이 좀 따라준다 싶은 날에 주변 사람들이 종종 작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들의 착각과는 전혀 다르게 여기에서 '운수가 좋다'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용되었다. 작가 '황현진'의 '호재'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버지와 관련된 우울한 과거를 가졌고, 부모님에게 버려져 고모와 함께 살면서 가장 먼저 '두려움'을 배웠다. 호리호리한 몸으로도 보호자이기를 자청하던 고모부와 동생을 대신해 '호재'를 돌보아 준 고모 '두이'가 있었지만, '호재'는 좀처럼 어둠을 떼어내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이름과는 영 딴판인 삶을 살아가는 아이에게 어떻게 '호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 이름을 지어주던 순간만큼은 아버지 '두오'가 행복했을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아버지는 '호재'를 밀어내고 이불 속으로 자꾸만 파고든다.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온 세상의 기쁨 속에서 태어났을 것만 같다.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아주 당연하게 행복한 일처럼 간주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 우리 모두에게 유일한 울타리인 것처럼 강요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금까지의 보편타당성에 대해 '호재'는 묻는다: "당연히 행복하겠습니까." '호재'는 바짝 뒤따라오는 텅 빈 어둠을 의식하면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혼란스러운 과거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아버지 '두오'에게 '호재'는 일종의 '알리바이'였다. 아버지는 멀리 사라졌다가 '아버지'로서 '호재' 눈앞으로 되돌아왔다. '두오'는 중요한 순간들에 항상 그 자리에 없었고,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확신은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호재'라는 긴긴 변명을 언제까지나 할 수는 없고, 결국엔 무위로 인해 처벌을 받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오'에 관해 적다 보니 그는 지금 여기 대부분의 사람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습하기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리는 줄곧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한 후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았나. 작가 '황현진'은 "계속 생각하는 것만으로,/ 질문을 놓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때가 있었다.(206쪽)"고 말했다. 작가의 말은 무죄를 입증하고 우리 자신의 도덕성을 보장받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게 만든다. 자꾸만 생각을 멈추고, 질문을 잊어버렸다는 죄책감이 따라온다.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 선제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는 회의가 드는 때가 많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연히 불행한 건지, 당연히 불행한 건지. (69쪽)


아버지라는 그림자에 잠식된 과거는 '호재'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과거를 하나씩 되짚어가며 자신의 불행이 '우연'과 '계획' 중 어느 쪽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아내려 하지만, 답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죽지도 않고 끈덕지게 따라붙는 과거와 함께 나아가는 '호재'는 "계획과 노력이 필요한 미래를 그린 적(60쪽)"이 없다. 소설 안에는 노력이나 계획의 끝에 '호재', 그러니까 좋은 일이 없을 거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되고야 말았는지를 곰곰이 따져볼 때도 있겠지만,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며 '알리바이'를 줄줄 읊는 사람들이 '호재'의 생각을 가로막는다. 모든 잘못은 '호재'로부터 비롯된 것만 같다. 한때는 아버지 '두오'의 행복에 대한 기대가 담긴 이름을 부여받은 '호재'에게 말이다.

자신을 지키기에도 모자라 보이는 몸으로 '호재'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던 고모부는 노력과 계획의 끝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런 그에게 고모 '두이'는 "거봐, 내가 그랬지. 열심히 살지 말자고.(13쪽)"라며 중얼거린다. 내게 영영 오지 않을 '호재'는 거의 확정된 현실이지만, 그래도 오늘을 살고 또 살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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