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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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우리 쌍둥이들한테도 그렇게 알려 줄 수는 있다는 거지? 니모부터 꽃 한 송이까지 자연에도 공생이 넘쳐 난다고. 그게 막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얘기해 주면서 같이 더 많이 찾아봐. 그럼 피부로도 느껴질지 모르잖아."(152쪽)

동생과 엄마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질러 걸으면, 나는 언제나 뒤처져서 그들을 빤히 바라보는 쪽이었다. 그런 나에게서 사람들은 줄곧 '쓸쓸함'이나 '외로움'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도리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 나를 훨씬 편하게 만들었다. 예민한 성격으로 인해 상대의 변화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했던 탓이다. 그랬기 때문에 소설의 화자인 '경진'에게 몰입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재미를 찾기보다는 빨리 끝내고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는 일에 급급했고, 상대가 주저할 때는 굳이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없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때도 있고, 괜히 상처를 입게 되는 일도 잦았으므로, 대화를 향한 나의 오래된 적대는 옳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눈다는 것, 특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이 한 사람을, 때로는 나 자신을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내게 이야기를 할듯 말듯 망설이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툭 터놓고 말하고 나면 편안해질 수 있었을 누군가의 절박함을 망쳐놓지는 않았을까. 또 대화를 통해 사람들 속에 섞여드는 즐거움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후회가 두서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경진'은 간만의 휴가에 질릴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진'을 향해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한다. 이전의 '경진'은 상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청자'의 입장보다는 '선생님'으로서의 자아가 더 강해 보였다. 상대의 언어는 그녀가 교정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해미' 또한 '경진'에게 가로막혀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한 채로 모습을 감춘다. 사실 '해미'에게 있어서 '경진'은 선생님이나 어른이기 이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그런 사람마저 자신에게 이야기할 틈을 주지 않으니 '해미'로서는 어지간히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경진'에게 내밀한 사정을 털어놓는 기묘한 상황은 때로 '해미'의 복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해미'와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대화가 소설의 끝까지 '경진'을 놓아주지 않는다. '경진'은 '해미'와의 일로 대화에 대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까 대화의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며, 평소처럼 흘려보낸 이야기가 누군가와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해미'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두려움은 증폭되고 '경진'의 머릿속에는 이제 두 번 다시 '해미'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진'은 서로 다른 '해미'의 이야기들로 자연스레 빨려 들어간다. 기이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경진'에게 갑작스레 다가와 각각의 은밀한 사정들을 털어놓고 말았던 것은 '해미'와의 일에 대한 후회가 그녀를 대화에 긍정적으로 호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진'이 지금처럼 대화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엄마의 질문도 한몫했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77쪽)"라는 엄마의 반복적인 물음은 '경진'을 지치게 했고, '경진'은 자연스레 대화로부터 멀어졌다. 처음에는 '엄마'뿐이었겠지만, 차츰 그 범위가 늘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엄마'와의 대화로 인한 상처는 또 한 번의 대화로 치유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엄마의 이야기는 오해를 해소하고, 더 나아가 '경진'이 활발한 대화를 통해 다시 세상으로 녹아들도록 부추긴다. '경진'과 엄마의 이야기는 경청을 기반으로 한 대화가 가진 위안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대화 행위가 주는 숱한 상처들을 뛰어넘을 만큼의 희망참을 작가 '은모든'은 이야기하고 있다.


햇살이 드리운 거리를 느긋하게 걷고

얼굴을 마주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작가의 말')

책을 덮은 지금에도 '해미'의 울먹거리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단지 몇 마디를 나눠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아이가 드디어 그런 상대를 발견했을 때에 느껴지던 어떤 안도가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경진'과 그녀의 친구 '웅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 우리는 짧은 시간의 대화가 우리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는 사소한 행복과 위로를 너무 오랫동안 등한시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이 듣고 또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다짐은 금세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처럼 아주 뒤늦게서야 응당했어야만 하는 일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내일 하루 정도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그 사람의 하루가 좀 더 충만해지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배신감에 휩싸여 있을 어떤 이름에게.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사람이 다 다르니까요. 결혼이든 아이든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확고하게 그 반대인 사람도 있는 거라니까요 엄마. 세상에 저나 은주 같은 사람도 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요.-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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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실격 쏜살 문고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이은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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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샬럿 퍼킨스 길먼'의 글쓰기는 번번이 나를 놀라게 했다. 표제작인 「엄마 실격」 이외에도 일련의 단편들 속에서 그녀는 작가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기존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길먼'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강조한 것처럼 경제적 기반이 충분하고 때로는 전문직의 여성으로서 살아가며, 가십거리를 몰고 다니는 한편으로 놀라운 상상력으로 여성들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녀들이 자신의 남편과 더 나아가 세상에 하는 복수는 더없이 짜릿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 독자들의 시샘까지 유발한다. '길먼'의 작품이 출간된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부 여성들은 여전히 냄새나고 '누런 벽지'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길먼'의 작품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여성들의 연대'를 이끌어 내는 대목들이었다. 종종 여성의 적은 여성으로 간주되어 왔을 정도로 여성들은 같은 여성에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길먼'의 작품에서는 전혀 다르다. 뻔히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방치한 사람들, 즉 남성들에게 잘잘못을 따진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고 성장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다운 삶을 꾸려나가게 된다. 「벌들처럼」에서 우리는 연대의 힘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다. "경제적 기반은 매우 다양할지라도, 몇백 명의 여성들이 함께 뭉치면 어디서든 결집된 노동력으로 부를 낳을 수 있고, 공동육아로 질서와 안락과 행복을 얻고, 인류의 삶을 개선할 수 있을 터였다.(139쪽)"





· 「예상치 못한 일」

놀라운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성의 지위나 활동 영역을 당대의 편견과 다르게 한 곳으로 고정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여성도 분명히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일깨우고 있으며, 여성들끼리의 연대를 넘어서서 여성들과 남성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내가 '길먼'의 시대에 살았다면 이 작품에서 살아갈 동기를 부여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멸종된 천사」

숱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일방적인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슬퍼할 겨를이 없는 여성들을 '천사'에 비유한 작품이다. 여성들이 억압받는 과정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멸종된'이라는 수식어구로 표현하고 싶었을까. 무지와 복종만을 강요받는 여성들의 처지를 여성 밖의 시선에서 서술하려고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 「누런 벽지」

사회적 위치가 고정된 채로 갑갑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과 그녀들을 향한 외부의 시선을 묘사하고자 한 작품이다. 단순한 벽지가 아니라 누렇게 바래고 냄새나는 곳에 갇힌 여성들의 목소리를 세상은 들어주려 하지 않고, 치료되어야 할 증세를 앓고 있는 것처럼 취급한다.

· 「비즐리 부인의 증서」

작품 속에서 '마리아'라는 여성은 남편인 '비즐리' 씨가 완고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간다. 단 한 번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세계로부터 그녀를 구출하는 것은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전문직 여성인 '로런스 양'이다. 작품을 통해 여성에게 있어 충분한 경제적 기반과 전문직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로런스 양'과 '마리아'의 연대로 여성 간 협력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 「반전」

대부분의 경우 한 사건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많은 책임을 추궁당한다. 하지만 '마로너' 부인은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오래된 편견과 달리 순수하고 순종적인 '게르타'보다도 의도적으로 상황을 방치한 자신의 남편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이 작품 속에서도 여성 간 연대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연대는 오로지 여성들의 확고한 결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 「발상의 전환」

육아와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구원자는 또 다른 여성일 수 있다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세대 간 화합까지 일어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 「영문학과 학과장」

작가 '길먼'의 글에서 여성들은 순종적이지만은 않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독립적으로 상황을 타개해 나간다. 위기를 기회로 순식간에 전환시키는 '빌 부인'의 센스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글이다.

· 「벌들처럼」

서로 다른 지적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여성들의 연대를 격려하는 글들이 앞에도 있었지만, 여기에 이르러서 완전히 그 가능성이 폭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오래된 이야기」

이번 단편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주축이 된다. 한 사람의 무지와 욕심으로 인해 일련의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는 연민과 애정이 살아남았다. '길먼'은 여성들에게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중시하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어떤 강력한 힘을 포착해낸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 실격」

표제작인 「엄마 실격」은 모성에 덧대어진 사람들의 환상을 까발리려는 작품이다. 여성들은 전부 엄마가 되기를 강요받고, 또 자신의 아이만을 위해 살아가기를 종용 받는다.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평가받는 한 여성에 대한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무엇을 모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다. 이는 화가이자 작가였던 '나혜석'의 「모 된 감상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빠를 선택하는 일‘이라뇨! 아이들을 낳기 위한 아빠에 대해 생각하는 게 젊은 여성이 꼼꼼하게 해야 할 적절한 일이라니!-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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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인종에 관한 문제는 단 한 번도 끊이질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간다. 도서 『니클의 소년들』은 인권의 측면에서 과거의 폭력적인 기억들이 지금도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예감을 주는 작품이다. 흑인 소년 ‘엘우드‘는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독자들이 ‘부트 힐‘과 같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소년들의 시신들, 그러니까 부정당한 진실들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우리는 타국의 사람에게 놀라운 몰입도를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엘우드‘와 ‘니클의 소년들‘의 이야기는 몇몇 사람들의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엘우드‘가 ‘마르코니‘ 씨에 대한 모욕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듯이 우리는 ‘니클‘의 이야기를 마치 우리의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니클의 소년들』은 동양인으로서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리가 세상에 분노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어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부모를 매개체로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잘못된 세상에 대항해야만 한다. ‘엘우드‘나 작가 ‘조지 오웰‘의 믿음처럼 ‘인류애‘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다.

흑인 차별의 집약체, ‘니클‘

흑인의 인권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던 때 ‘엘우드‘에게 급작스러운 시련이 닥친다. 그는 믿기 어려운 이유로 감화원인 ‘니클‘에 배정된다. ‘니클‘은 흑인 노예 해방 운동 이후에도 흑인들이 노예처럼 살아가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집약해 놓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규칙과 규율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점도 시대 상황과 닮아 있다. 외부에서 보는 모습과 다르게 ‘니클‘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가르는 기준이나 아이들의 상벌체계 등이 불명확한 시스템상에서 운영된다. 교내에서 아이들은 심지어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식사가 부실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은 갖은 폭력에 노출되어 사회로 나간 이후에도 ‘니클‘이라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니클‘의 아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인종차별과 가난에 시달려 왔다. ‘니클‘의 아이들 중에서 ‘엘우드‘는 상황이 좀 나은 편이었다. 주전부리를 싸 들고 면회를 와 주는 할머니 ‘헤리엇‘이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생계를 꾸리는 일에도 벅찬 시간에 흑인 인권 보장을 위한 시위에 참여한 경험도 있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 현실(137쪽)˝을 알지 못했던 ‘엘우드‘는 집요하게 ‘니클‘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시도했다. 친구인 ‘터너‘는 ‘엘우드‘가 곁눈 가리개를 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니클‘로 밀어 넣고 방치하는 모든 어른들의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법이 바뀐다고 해도 과거를 답습하려는 사람들이 대를 통해 이어지는 이상 가난과 차별은 아이들을 놓아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터너‘ 등의 소년들은 장애물을 가로지르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가며 나름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엘우드‘처럼 무식하다 싶을 만큼 우직하게 장애물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결국엔 돌파구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가 왔다

‘엘우드‘가 존경하던 ‘킹 목사‘는 흑인 시위 참가자들이 끝내는 ˝오랫동안 억압당한 끝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멍해져서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침대로 여기고 잠드는 법을 터득한 검둥이(196쪽)˝로 변해버린다고 말했다. ‘엘우드‘는 ‘킹 목사‘를 무척 존경했으므로 망가진 상태에서 벗어나 ‘니클‘을 없애고자 한다. 하지만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한 명의 개인이 붕괴시킨다는 것은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탈출이 아니라 졸업을 해서 ‘니클‘을 나가더라도 ‘니클‘의 아이들은 ˝경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불구가 되어 절룩거리며, 정상이 되는 방법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209쪽)˝ 더군다나 하나의 ‘니클‘이 붕괴된다 해도 또 다른 ‘니클‘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있었다. ˝백인의 아들들이,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기억하는 한(240쪽)˝ ‘니클‘과 같은 감방들은 ˝품행 교정이 필요한 버릇없는 녀석들이 나타나기를.(240쪽)˝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 ‘니클‘, 또는 ‘리치먼드 호텔‘이 있었다는 사실은 희미해져 간다. 차별과 폭력의 땅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니클‘과 ‘리치먼드 호텔‘은 과거의 이름으로 몇몇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기억 전부가 소멸되기 전에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가 왔다, 고 ‘니클의 소년들‘은 말하고 있다.

미소를 지으며 너를 속여 텅 빈 것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네게서 너의 자존감을 뺏어가는 사람도 있다. 너는 자신이 누군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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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성 직업인의 경험을 귀담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직장에 몸담고 있는 여성을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부모 세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여성에게 있어서 출산과 육아로 인한 퇴직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회고록은 여성 직업인에 대한 우리의 절박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녀는 종군기자로서 숱한 위험에 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그녀는 사진을 찍는 자신의 일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폭로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에 집요한 열정을 쏟는 사람 중에서도 ‘린지 아다리오‘는 경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분쟁지역에서 극도의 공포와 공황상태를 겪고 난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을 보였고, 더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어 그 지역들이 가진 부조리와 인권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자 했다. 자신을 몰아세워 가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로 인해 우리는 여성으로서, 또 여성 직업인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내가 애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 했던 모든 일들을 그리워했다. 심지어 이전에는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이를테면 자유라든가. (95쪽)

분쟁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수 주간 집을 떠나있는 경험은 ‘린지 아다리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종군기자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숱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직업이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동료들의 비보를 접하면서 ‘린지 아다리오‘는 현재의 평화로운 삶을 소중히 하게 된다. 물론 그런 삶이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의 생활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꽤나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지구 한 쪽에서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토록 사치스러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직업과 사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된 직업과 일상 사이의 고리는 ‘린지 아다리오‘가 잠시도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면서 사진을 찍도록 부추겼다. ‘폴‘이나 아들 ‘루카스‘ 등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시간들, 급작스럽게 불어닥치는 죽음들, 그리고 직업과 일상 사이의 불균형 등으로 그녀는 직업인으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지만, 절대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열정을 갖고 있는 일을 통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알맞은 때에 알맞은 장소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린지 아다리오‘가 자신의 젊음을 온통 쏟아부었던 사진 찍기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변화들을 이끌어낼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남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전쟁의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 본인을 넘어서서 그녀의 삶을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미래 세대의 열정이 존속될 것이므로 우리는 사소한 변화들을 꾸준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보다 더 안전하고 쉬운 형태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선택이고, 일상에서 최전선에 서 있는 수많은 다른 여성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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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길에 난데없이 두 명의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나타난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일까. 작품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들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해 사고를 하기보다는 뒤죽박죽 섞인 말들을 내뱉음으로써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페이지는 휙휙 넘어가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초점이 없으므로 독자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사이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번번이 이어지는 망각 속에서 제대로 된 결말도 없이 줄기차게 반복되는 대화의 진행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다.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이 난사되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도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작가 자신이 그와 같은 대답을 한 이상 관객들 사이에 물음은 끊이지 않았고, 그 해답 역시 물음만큼이나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164쪽)˝

그런 그들에게도 딱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존재한다. 책의 제목처럼 그들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1막과 2막의 이틀 밤 동안 ‘고도‘를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전갈을 전하는 한 소년만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찾아올 뿐이다. 우리가 본 건 두 번의 헛걸음뿐이지만, 사실 이 기다림이 언제부터 진행되어 왔는지 알 수 없다. ‘고도‘가 누구인지 또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극이 진행되는 내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혹시라도 ‘고도‘가 올까 봐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맹목적으로 간절하게 기다리는 ‘고도‘란 누구일까. 아니,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 또한 우리는 영영 얻을 수 없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가 구원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에스트라공‘의 대사처럼 그들은 모래밭 한가운데서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 묻혀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거지 같은 인생을 살았다. 척박한 삶이 어디에서 기인했고 어떻게 해야만 또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없는 가운데서 ‘고도‘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희망을 저버리면 나무에다 목을 매는 길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고도에 대한 정의는 구원을 갈망하는 관객 각자에게 맡겨진 셈이다.(164쪽)˝

이 시대의 청년들은 이전보다 더 질이 낮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후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상황이 조금도 진전되지 않으니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가 닥치면서 청년 세대뿐만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고도‘를 기다리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고도‘를 기다리게 만들면서도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포조‘를 통해 ˝우리 시대가 나쁘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라고 해서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말이오.(51쪽)˝라고 전한다. ‘고도‘는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누군가이자 무엇이었고, ‘고도‘가 나타나는 완벽한 현재를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도래하지 않을 ‘고도‘를 기다려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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