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 김솔 짧은 소설
김솔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놀라웠던 건 작품 내내 이어지는 번역투의 서술 방식이다. 분명 외국어로 적힌 원문을 한국어로 고심해서 내뱉은 것만 같은 말투가 흥미로웠다. 말투뿐 아니라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대륙을 넘나든다.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안에 축적된 경험과 그만의 내공을 느끼며 나는 주말 동안 쉼 없이 책장을 넘겼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담아둔 것이 넘쳐나는 사람들만의 인상이 있는 듯하다. 나는 김솔 작가에게서 앞으로도 쏟아낼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건 하나의 '인상'에 지나지 않지만.

완독을 한 이후의 느낌을 묻는다면, 그저 혼란스럽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등장인물이 겪는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각 소설이 끝나는 방식, 마무리하는 문장까지도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을 발견하고서는 새삼 이 책에 담긴 '혼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세상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끝없는 혼돈을 감내하겠다는 문장과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릴 땐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있으면서도, 그 단어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현재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면서도, '혼란스럽다'라는 단어가 주는 기이한 느낌에 휘말려 곧잘 내가 애초에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잊어버리고야 만다.

김솔 작가가 이 책에 적어내려간 글들은 짧은 농담의 모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자리에서 들을 때만 해도, '저게 무슨 소리지.' 싶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되새기게 되는,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농담들. 그래서 어쩐지 꿈이나 신기루 같은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그가 분명히 무언가를 내 마음에 남겼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마치 '혼란'이라는 단어가 그랬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은 알고 있다 다카노 시리즈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은 알고 있다>를 읽으면서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떤 특정 영화를 떠올렸던 것은 아닌데, 일본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 요시다 슈이치의 문장과 겹쳐져 눈앞에 그려졌다. 이름을 댈 수 없는 한 일본 배우가 웃음을 터뜨리고, 벽을 기어오른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영화가 하나의 글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일까. 하지만 역시 이름만큼은 모르겠다. 전형적인 일본 영상물의 냄새를 풍기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고전적이어서 도저히 완독하지 못할 작품은 아니다. 꽤 흥미롭고 생생한 묘사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세계관이 이어져 있는 다른 작품도 읽어볼 계획을 세우고 있을 정도이다.

이 작품은 실제 아동학대 사건에서 구상이 시작되었고, 작품 속에서도 아동학대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동학대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듯이 '다카노'의 삶을 통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는 그 아이들을 동정하기보다 밖으로 꺼내놓고 스스로 일을 하며 나름의 개체로 살아가는 방향으로 글을 썼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으려 했던 작가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온전한 자유를 부여받지 못하고, 상급자의 지시가 없으면 쉽게 길을 잃는다. 아이들을 구원한다는 번듯한 명목 아래에서 또 다른 착취가 버젓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어른들에게서 완전하게 분리되지 못하고 뚜렷한 소신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흔한 특징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것은 차차 이후에 이어지는 작품들에서 아이들의 향방을 지켜본 후 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되었든 그들이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에게 행복할 자유를 줄 수 있기를, 원하는 곳에 원하는 크기의 별을 멋대로 그리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본래 땅 위를 떠도는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던 것이 선 하나로 분명하게 쪼개지고, 맹목적으로 땅을 지켜내기 위해 치고받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유로이 방황하던 시절이 없던 것처럼 선 밖의 온갖 것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민족'을 시발점으로 삼아 자행된 폭력을 떠올려 보면 공통된 조상의 존재가 무색해진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 간 이동이 증폭되었다. 유학이나 이민, 여행 등의 이유로 그리고 최근의 세계적 질병으로 국가 간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지구촌'이 닳고 닳은 사회학적 용어가 아니라 체감 가능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 번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늘 떠도는 인류가 되어간다.

하지만 '떠돎'이 '자유'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의 뿌리가 견고하게 박혀있는 땅의 존재 덕분이다. 타국에서 서럽고 외로워도 이는 하나의 잎에 불과하고, 뿌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저 너머로 귀환한 후에 모든 것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은 떠도는 이들을 지탱해 준다. 뿌리까지 통째로 뽑혀져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이들은 경계의 구분과 정착을 더욱 반길 테다. 물론, 나의 뿌리가 심어진 땅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완전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증과 여권이 주는 강한 확신은 나의 무한한 떠돎과 귀환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고려인'을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들은 한국의 책임을 요구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린 나는 그들의 상황에 몰입해서 저 사람들 빨리 도와줘,라고 외쳤던 것 같다. 그때 한 어른이 내게 고려인은 한국인이 아니니까 국가에서 나설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국가의 개념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나는 알 수 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떠도는 땅>에 등장한 인물들도 대부분이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인식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러시아인이 되어야 하고, '조선'이라는 땅과의 시간적·물리적 거리에서 비롯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한국 모두에 얇은 뿌리를 걸쳐 놓은 그들을 우리는 외면해야 옳을까. 2개 이상의 국가에 뿌리를 둔 이들에 관한 고민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을 코로나 사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본국에 데려온 정부의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왜 모든 것을 한국이 부담을 지는지 의아해했다. 국제결혼과 외국인 유입 등의 이유로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중요한 길목 위에 서 있다.

내가 <떠도는 땅>을 읽으며 자주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건 '고려인'이 결국엔 같은 핏줄을 공유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그러나 '국가'라는 딱지를 떼고 보아도, 분노는 그칠 줄을 모른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군림하면서 소수 민족의 권리를 앗아간 권력자들의 행태가 분명히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핏줄에 대한 본능적인 보호 욕구보다 '인권'에 관한 개인적인 관심이 소설을 읽는 나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저 생존과 자유를 위해 자신의 출생지를 이탈한 사람들에게 존중과 보호가 주어지길 바란다. '국가'라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개념을 변명으로 삼기보다 '인권'을 중요시하고, '지구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준비생들과 지망생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 해낼 사람들이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다(작가의 말 중에서)."

꼭 암만 봐도 험해 보이는 길만을 골라 걷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타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지만, 그놈의 밥을 빌어먹지 못해 갖은 고생을 한다.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서야 겨우 시작이라도 할 수 있는 예술인으로서의 삶은 고달프지만, 또 그만큼 매력적이어서 거기에 투신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서 있다. 그리고 나도 늘 가시밭길 위를 헤매고 싶어 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서 일 인분을 해내지 못해 우울감을 느끼면서도, 예술에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려는 이들의 버둥거림과 벗어날 수 없는 우울의 그림자는 내가 겪어본 일이기도 했으니 나는 이 책을 허구로만 생각하지 못했다. 내 과거를 제3자의 시선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또 때로는 견디지 못하고 울고 웃으면서 읽어냈다. 예술이라는 꿈을 놓지 못한 이가 아니더라도, <GV 빌런 고태경>은 부단히도 기회를 찾아 헤매는 청춘을 위한 작품이기도 하다. 공무원과 유튜버를 권유하는 어머니와 도무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꿈에 대한 집착은 내 삶과의 접점이다. 나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소설을 참 적절한 때에 마주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불신하면서도 차마 놓지 못했던 꿈을 실현시킬 단 하나의 찬스를 만나게 될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을 선사해 준 각별한 작품이다.

"어떻게 버티느냐고 물었지. 진정으로 응원해 주고 지켜봐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217p)"

예술이든, 이외의 어떤 분야에 도전하고 있든 간에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준비는 고달프다. 적지 않은 경우에 준비라는 것이 음지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인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축축하던 그 시기를 글을 쓰며 버텨냈다. 책을 읽고 짧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누군가 묻기도 했다. 아니,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근근이 삶을 버티게 하는 요소다. 그게 내가 가진 두루뭉술한 꿈이기도 때문인 것도 있지만, 글을 통해 내 존재를 인식해 주는 어떤 이들이 내 삶의 터보 엔진이 되어주고 있다. 그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깊은 울림을 주고, 나의 허접한 글쓰기가 지금까지 이어지도록 도와주었다. 사회에서 나름의 자리를 찾고, 내 몫을 해낼 수 있도록 북돋워 주었다.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좋아하는 일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위치로까지의 도약을 꿈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예된 삶을 간신히 붙들고 있을 모든 준비생들을 떠올려 본다. 꿈꾸던 그 순간을 정말로 맞닥뜨리게 되리라는 허황된 위로는 건넬 수가 없다. 내 스스로도 그 시기를 만났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선택 아마추어'들이 실패를 감내하며, 무언가를 아끼는 우직한 마음과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도 나만큼 '고태경' 씨의 끈질긴 삶에 위안을 얻게 되길 바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은 세상을 샅샅이 뒤져내 최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야한다고 늘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뿌리를 가진 고려인들의 슬픔을 담은 이 작품이 반갑다. 작품을 통해 그들의 비극을 명확히 인지하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